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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칩거 끝내고 다시 풍수 연구 나선 최창조 前서울대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칩거 끝내고 다시 풍수 연구 나선 최창조 前서울대 교수

    “올해는 ‘호랑이 똥침’을 꼭 줘야 합니다.” 한 풍수의 대가가 간절하게 내뱉는 말이다. 웅비하는 한반도를 소망하는 마음이 담겼다. 그렇다면 ‘똥침’의 위치는 어디일까? 원래 ‘풍수가’는 지관(地官) 또는 지사(地師)라고 하며 하늘과 땅의 이치를 통달한 사람을 뜻한다. 따라서 예부터 나라의 도읍을 정하는 일이나 집안 가족의 묏자리와 집터를 정할 때 유명한 풍수가의 자문을 자연스럽게 여겼다. 오늘날에도 변함이 없다. 정치 또는 사업에 야망을 둔 사람들은 풍수이론에 근거해 조상의 묏자리를 옮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관계인사들 또한 진급을 앞두고 이사를 하는 경우도 종종 있다. 수맥이 밑으로 흐르는 곳에 거처하면 온갖 병이 생긴다는 이론이 만만치 않게 제기되기 때문이다. 아울러 명산이나 좋은 묘터, 명당으로 소문난 터는 여전히 높은 값에 거래된다. 이처럼 풍수는 첨단문명이 발달한 오늘날에도 우리 일상과 상당히 밀접해 있다. 삶이란 논리보다는 이해와 느낌으로 살아간다는 이치에서다. 최창조(56) 전 서울대교수. 풍수학자이면서 우리나라의 풍수대가로 잘 알려져 있다.‘한국의 풍수지리’ 등 관련 단행본만 10여권 냈다. 행정수도 이전 논란때 ‘천도불가론 아홉가지 이유’를 발표, 주목을 받았다.1992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시절 “풍수도 학문이라고 가르치냐.”라는 비아냥이 나오자 타고난 결백성으로 그냥 문을 박차고 홀가분하게 나와버렸다. 이후 칩거하다시피 지내다 얼마전 ‘풍수잡설’‘닭이 봉황되다’라는 책을 발간하는 등 풍수연구에 다시 나섰다. 한 단계 더 득도한 스님처럼. 설날 직전, 서울 신도림역 인근에 위치한 최씨 자택(아파트)을 찾았다. 근황도 궁금했고 또 풍수학적으로 우리나라는 올해 어떤 형국인지 묻고 싶어서였다. 최씨는 아파트단지 입구까지 마중나와 해맑은 소년처럼 환하게 웃으며 반긴다. “선생님, 언제 이사 오셨죠?” “봉천동에서 살다 온 지 꼭 2년 됐습니다. 처음에는 경기도 과천을 생각했으나 가격을 맞추다 보니 여길 선택했지요.” “그렇다면 풍수 고수가 정한 자리여서 당연히 명당이겠네요?” “명당은 마음속에 있지요. 수맥만 아니라면, 사랑해주면 자연 명당이 됩니다. 조용하고 아주 살기 좋아요.” 바로 옆에 대형 할인점 공사 현장이 눈에 들어온다. 최씨는 “저것 덕분에 아파트값이 올라가 주민들이 좋아하니 아마 명당자리인 것 같아요.”라고 하면서 빙그레 웃는다. “아파트에도 풍수가 있나요?” “묘터나 집터잡기에는 (풍수가)일상사가 됐지요. 상식선을 벗어나지 않으면 됩니다. 수맥을 제외한 사랑과 믿음이 가는 곳이면 되지요.” 또한 남향이면서 햇볕이 들고 주위에 산이 있으면 아파트로서는 좋은 곳이라고 했다. 아울러 모든 풍수가 현장 위주여야 하듯 집을 살 때에도 직접 발품을 팔아 주위를 꼼꼼하게 돌아보는 것도 중요하다고 귀띔해 준다. “풍수지리학적으로 올해 우리나라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리 국토는 호랑이가 잔뜩 웅크리고만 있어요. 이놈을 깨워야 합니다. 똥침을 주어 깜짝 놀라게 해야지요. 그래야 웅비합니다.” “똥침의 위치는 어딘가요?” “영일만쪽이지요. 그 일대에서 남쪽까지는 풍수학적으로 금계포란(金鷄包卵)형입니다.” “알을 품은 금닭인가요?“ “예, 맞습니다. 그 아래로 바다건너 제주도가 바로 금란(金卵), 즉 금닭의 알이지요.” 최씨의 이론을 해석하면 그동안 영남일대에 여러 인물들이 나왔지만 이치에 맞는 똥침을 제대로 주지 못해 아직까지 웅크린 형국이라는 것. 따라서 올해 한반도가 새로운 도약을 하기 위해서는 매우 중요한 시점이라는 설명이다. 또한 제주도는 비록 똥침과는 거리가 멀지만 ‘금닭의 알’로서 가치가 무궁무진하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최씨는 “제주도는 정말 살기좋은 자연의 혜택을 받았지요. 특별자치도가 되면 타도 사람들은 아마 입도료를 내야 할 걸요.”하면서 웃는다. 화제를 돌렸다. 정재계 인사들과 흥미로운 일화에 대해 슬쩍 물었다. 정계쪽에는 별로 관심없지만 일부 재계 인사와 인연을 맺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한다. 다음은 최씨가 들려주는 고 최종현 SK그룹 회장과의 일화. 92년 여름 최씨가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직후였다. 최 회장 측근에서 한번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최씨는 ‘산소 자리나 봐달라는 것이겠지.’ 하면서 거절했다. 며칠 후 손길승 SK그룹 경영기획실장실 사장과 김수길 부사장이 서울 봉천동 집으로 불쑥 찾아왔다. 자연스럽게 술자리가 이루어졌다. 최씨가 술 몇잔을 들고 나서 “최 회장이 왜 나를 보려고 하느냐.”고 물었다. 손 사장은 “우리는 사업하는 사람으로 물건을 파는 입장이다. 알다시피 우리나라 사람은 키도 작고 영어도 잘 못한다. 때문에 우리의 우수한 것을 돕겠다는 게 최 회장의 뜻이다.”고 대답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최씨가 “그렇다면 명분을 주시오.”라고 했다. 손 사장은 이에 “좋은 생각이 있다. 한달에 한번 사장단 회의가 있으니 그때 강연을 하면 되지 않겠소.”라며 거듭 제안했다. 결국 최씨는 얼마후 SK그룹 사장단 회의장에서 ‘풍수일반론’을 강의했고 최 회장과 자연스럽게 만나게 됐다. 이 자리에서 최 회장은 “나는 풍수를 안 믿는다. 하지만 그냥 순수하게 돕고 싶다.”는 말로 최씨를 설득했다. 그래서 한달 300만원을 받기로 하고 1년 동안 연구계획서에 도장을 찍었다. 이후 충북 보은 등 지방에 칩거허면서 풍수관련 연구를 하게 된다. 김대중 대통령 시절, 청와대와도 인연이 있다. 하루는 청와대 고위 관계자가 불러 청와대에 들어갔다. 관계자는 북악산 요새와 청와대 경내의 오래된 정자를 치워도 되느냐고 물었다. 최씨는 “풍수적으로 아무런 문제가 없다. 다만 문화적 가치는 중요하지 않겠느냐.”고 대답했다. 이어 침식된 산, 양쪽으로 노출된 암반, 파인 계곡 등의 지세(地勢)를 보아 청와대는 원래 사람이 살던 땅은 아니었다고 귀띔했다. 이로부터 얼마후 경내의 일본식 건물이 철거되고 요새화 작업으로 파인 곳곳을 깨끗이 메웠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최씨는 또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집터와 관련된 소문에 휘말리기도 했다. 서울대 교수직을 그만둔 직후였다. 대통령 관저가 북악산의 기맥을 압박하고 있어 좋지 않다는 주장을 해온 최씨가 “전두환 전 대통령의 자택은 풍수학상 좋지만 노 대통령의 자택은 그렇지 않다.”고 말해 괘씸죄로 서울대 교수직에서 잘렸다는 것. 이에 대해 최씨는 “그런 얘기를 한 기억이 없는데 일본인 노자키 미쓰히코(오사카시립대 교수)가 쓴 ‘한국의 풍수사들’(94년 출간)이란 책에서 우연히 접해 알게 됐을 뿐”이라고 했다. 최씨는 평소 북악산이 주산(主山)이 아니기 때문에 독불장군형이라고 주장해 왔다. 좌로 인왕산, 우로 둔덕이 둘러치고 전방으로만 확 트여 있어 혼자 있는 시간이 많은 대통령으로서는 자연스럽게 독선과 자만감이 생겨난다는 것이다. 아울러 2004년 행정수도 이전과 관련, 풍수학적으로 불가한 여덟가지 이유를 내놓는 등 중대 사안 때마다 이래저래 자의반 타의반 엮여져 왔다. 서울 출생인 그가 풍수와 인연을 맺은 것은 경기고 재학 시절. 우연히 망우리 공동묘지에 찾아가면서였다. 시인도 있고 독립투사도 있으며 정치범으로 사형당한 사람의 무덤이 있는 그곳에 가면 왠지 평등을 느꼈고 평정심을 얻었다. 이때 한 중년 사내를 만나 풍수를 배우면서 최면처럼 빠져들었다. 그래서 서울대 지리학과에 진학했고 교수시절에도 항상 현장 위주의 풍수학을 강조해 왔다. 요즘 건강을 다시 찾은 덕분에 관악산 등 주변 산을 찾아 땅과의 대화를 나누는 재미를 만끽한다. “이제는 땅을 보면 사람처럼 여겨집니다. 전에는 경험과 이론을 동원해 땅을 해석하려 했지만 지금은 만나는 순간 어떤 느낌을 갖지요. 땅을 사랑하려면 정을 주어야 합니다.” 주말매거진WE팀장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50년 서울 출생 ▲68년 경기고 졸업 ▲73년 서울대 지리학과 졸업, 동대학 석사(91년) ▲77년 경북대 지리학 강사 ▲79년 전남대 지리교육과 강사, 국토개발연구원 주임연구원 ▲81∼88년 전북대 지리교육과 교수 ▲88∼91년 서울대 지리학과 교수 ▲92년 환경운동연합 지도위원, 삼성생명 자문위원 ▲주요 저서 풍수에 대한 지리학적 해석(78년), 한국의 풍수사상(84년), 풍수사상에서 본 통일한반도의 수도입지선정(89년), 터잡기의 예술(92년), 한국의 풍수지리(93년), 땅의 눈물 땅의 희망(2000년), 풍수잡설(2005년) 등 15권.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 감정적인 흑백 사고의 위험성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4) 감정적인 흑백 사고의 위험성

    지난주에 우리는 세상사가 의지적 선과 악으로 그렇게 확연하게 양분되는 것이 아님을 보았다. 그러면서 그런 세상사 앞에서 무슨 생각을 가져야 할 것인지를 음미했다. 오늘은 흑백적 사고와 감정적 단세포의 위험성을 들여다보자. 인간세상의 온갖 양상을 하나의 복잡한 이야기로서 잘 묘사한 것이 소설 ‘삼국지’가 아닌가 한다. 유비, 관우, 장비, 제갈량, 조조 등 기라성 같은 역사의 실제 인물들이 등장한다. 유비는 그 어진 덕성으로, 관우는 불굴의 의리정신으로, 장비는 천하용장으로, 제갈량은 천하제일의 작전 귀재로, 그리고 조조는 지모의 전략가로 다가온다. 이런 가치 때문에 그들은 모두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게 된다. 그런데 이들이 지닌 그 가치의 장점들이 그들을 실패하게 한 단점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즉 유비의 어진 덕성이 오히려 어리석은 판단을 하게 하는 장본인이 되고, 관우의 의리정신이 그로 하여금 일을 그르치게 하는 편협성을 낳게 하고, 장비의 무쌍한 용기가 난폭함으로 변해 그로 하여금 비명횡사케 하고, 제갈량의 명석한 두뇌 역량이 그의 건강을 상하게 하고 자기보다 못한 다른 이들에게 일을 분담하는 마음을 빼앗아 버리게 하여 실패의 원인을 만들고, 조조의 재빠른 머리회전이 그로 하여금 자승자박에 빠지게 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물론 소설 ‘삼국지’의 원저자인 나관중(羅貫中)은 이런 이면의 사실을 밝히지 않고, 독자가 행간에서 그런 가치들의 이면을 읽도록 하였다. 지난주에도 우리는 모든 가치가 그 이면에 반(反)가치의 찌꺼기를 동시에 함의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가치와 반가치가 서로 별개의 다른 것으로 분리되어 있지 않고,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이중성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인식이다. 즉 우리를 성공시키는 복스러운 요인이 동시에 우리를 실패케 하는 재앙으로 늘 작용할 수 있으므로, 지혜있는 사람들과 국민은 복(福)과 화(禍)의 양면을 다 고려하여 세상일을 감정적으로, 단세포적인 택일의 심정으로 처리하지 않는다. 감정적인 택일의 기분은 화끈하게 흑백으로 세상을 양분하여 이것은 전적으로 옳고 좋은 것이고, 저것은 전적으로 그르고 나쁜 것이라고 단정짓는 마음의 태도를 말한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이다.‘화여! 복이 의지하고 있는 바이고, 복이여! 화가 엎드리고 있는 바이다.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정사(正邪)가 없다. 바른 것이 바르지 않은 것이 되고, 선이 다시 재앙이 된다.’ 노자의 이 말은 세상의 일을 일정한 고정적 가치로서 교조적으로 봐서는 안되고, 선명하지 않은 중도의 미덕으로 상황을 다 아우르는 것이 중요함을 언명한 것이겠다. 이것은 모든 상관성을 거두절미하고 절대적인 외곬의 가치로서 어떤 것을 단세포적으로 읽어서는 안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저것과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고, 저것은 이것과 무관하게 절대적으로 나쁜 것으로 주관적 감정을 실어서 판단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저것이 아무리 나쁜 것이라 하여도 이것이 없었는데 저것이 혼자 생길 수 없으므로 세상사는 다 서로 얽혀 있다. 사람들의 생각이 단세포적일수록 선동가의 흑백적 사고가 설친다. 선동가의 흑백적 사고는 곧 독재적 사고방식과 다르지 않다. 교조적인 흑백적 사고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철학과 문학예술은 숨을 거두고 만다. 그렇게 세상이 단순하면, 세상은 바보들의 행진곡으로 요란하게 된다. 바보들이 일희일비하면, 세상은 한꺼번에 이리 쏠리고 저리 밀린다. 흑백적 사고는 감정적으로 선악을 심판한다. 감정적인 선악관이 선명할수록, 그는 대중을 쉽게 쥐고 흔든다. 왜냐하면 대중은 깊이 생각하지 않으려 하기 때문이다. 독일의 현대철학자인 하이데거가 세상 사람들을 지배하는 정서가 ‘남 따라 장에 가는’ 성질로서의 대중성(Offentlichkeit)이라고 말한 것을 유념해야 하겠다. 노자를 다시 말한다. 감정적인 흑백적 사고에 쉽게 휘둘리지 않는 길을 노자는 화광동진(和光同塵)이라 했다. 그것은 빛만을 좋아하고 먼지는 더럽다고 버리는 택일이 아니라, 빛과 먼지와 다 함께 친화하고 동거하는 사고방식을 말한다. 내 생각이나 세상사를 택일적 선명성으로 갈라놓아 이원적 적대감정으로 채색해서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내 생각이나 세상사가 다 이중적이어서 화광동진하고 있다는 사실을 저 구절이 일깨운다. 내 생각이나 세상사에 다 (선/악)과 (흑/백)이 뒤엉켜 있다. 우리나라에 자기가 100% 선과 백의 화신인 것처럼 생각하는 지도급의 사람들이 더러 있는 것 같다. 이런 이들은 불가피하게 사회적인 위선을 짓는다. 흑백적 사고는 마음과 세상의 이중적 사실을 간과하기에 위선을 부른다. 노자는 정의라는 이름아래 위선적으로 심판하는 흑백논리를 피하기 위하여 습명(襲明)이라는 생활태도를 제시한다. 습명은 너무 밝은 것을 약간 감추기 위하여 옷으로 시신을 염하듯이 싸는 것을 일컫는다. 밝기와 어둠의 중간에서 세상을 흑백으로 나누지 말라는 것이다. 자기가 이중적이라는 사람이 훨씬 덜 위선적이고 덜 투쟁적이며, 세상을 위하여 모두에게 이익을 줄 수 있는 좋은 경영자가 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자기가 습명처럼 이중성의 중간에 서있기에 선과 백의 화신보다 덜 독선적일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불선과 흑의 위험성이 자기자신과 사람들에게 있음을 알기에 조심하고 또 조심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식한 감정적 생각으로 복합적인 세상을 쉽게 흑백으로 판단하는 교조적 마음보다 오히려 나의 단순소박한 가치관이 세상에 반가치의 괴로움을 주지 않았는지 세상을 전체로서 보살피려는 사람을 지도자로 삼아야 하겠다. 노자가 잘 봤듯이,‘생각이 방정하면 남을 자르게 되고, 청렴하면 남에게 상처를 입히게 되며, 강직하면 방자해지고, 영광스러우면 휘황찬란해진다.’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애송하는 시가 윤동주의 ‘서시’라고 한다. 대단히 아름답고 조촐한 시다.‘죽는날 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잎새에 스치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 했다.(…)’ ‘맹자’의 ‘진심상’에 나오는 군자의 세가지 즐거움 중에서 두 번째의 즐거움으로 ‘우러러 하늘에 부끄럼이 없고, 굽어 사람에 부끄럽지 않음’이라고 한 말이 연상된다. 그토록 일말의 부끄럼도 없는 마음은 지순한 사람의 극치를 상징한다. 지극하도록 순결한 마음이므로 잎새에 스치는 바람에 잎새가 다칠까 괴로워한다. 해맑게 흐르는 계곡의 투명한 물이 떨어지는 낙엽에 오염될까봐 마음 졸이는 사춘기의 순수성을 맛본다. 평균적으로 한국인이 저 시를 그렇게 좋아한다는 것은 한국인이 깨끗한 심성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보여준다. 본디 물이 맑은 나라의 마음이라고 할까. 그러나 저 순수성의 가치도 반가치의 배설물을 토해낸다. 이것이 세상의 엄연한 사실이다. 그 순수의 배설물은 이른바 어떤 혼융을 싫어하고 잡동사니를 배척한다는 점이다. 순수성은 섞임과 혼융을 불순하다고 여겨, 순수를 고집하면서 편협성을 초래한다는 것이다. 순수성의 가치는 편협성의 반가치를 필연적으로 동반한다. 순수의 가치를 지키려는 의지가 맹렬한 경우에 그 가치 수호는 쉽게 배타적인 독선으로 나아가면서 타자에 대한 혐오감을 노출하게 된다. 율곡이 금강산에서 불교와 접종한 것은 유교의 순수성을 더럽히는 참을 수 없는 이단적 행위로 간주된다. 그래서 율곡은 스스로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을 참회하는 글과 생각을 여러 번 나타냈다. 살아남기 위한 방편인듯 싶다. 조선 인조 때에 유학자였던 장유(張維)가 ‘계곡만필’에서 중국에는 유학이외에 불학과 단학(도가)이 있고, 유학도 정주학과 육왕학이 다 공존하는데, 조선에는 오로지 주자학만 있어서 무식한 자나 유식한 자나 오로지 입으로 주자만을 봉독하는 편협한 풍토를 개탄한 적이 있었다. 순수성의 반가치가 흑백적 사고로 이어지는 것 같다. 주자학이 편협하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주자학은 다양하게 불교의 심학과 노장의 자연학을 다 아우르면서 유교의 문화를 철학적으로 한 단계 끌어올린 풍요한 사상이다. 다만 그 주자학을 편협하게 공부한 조선조의 전통적 문화풍토와 그 습기(習氣)가 문제였다. 세상을 흑백적 감정으로만 읽는 사람들은 세상을 본의 아니게 내편과 네편으로 갈라 놓는다. 그런 편가르기는 다 순수와 불순의 대결구도에서 생긴다. 어떻게 올바른 순수가 더러운 불순과 섞일 수 있는가? 이런 흑백적 사고가 우리를 편협하게 만든다. 세상의 모든 사실은 서로 얽히고 설켜 있는 복합적 전체의 구조인데, 단순한 감정적 흑백심리는 세상을 그 전체에서 이익되게 하는 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 우리는 감정상의 흑백심리보다 전체를 이익되게 하는 지혜를 터득하도록 애써야 한다. 맹자가 말한 ‘하늘과 사람에 대해서 부끄럼이 없는’ 마음은 진토(塵土)의 세상을 살아가는 구체적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겠다. 인간이 살아가는 조건은 하늘의 빛과 땅의 흙먼지가 서로 공존하는 중간지대다. 그래서 노자가 ‘화광동진’이나 ‘습명’이라고 부른 것은 인간이 행복하게 살기 위한 조건을 말함이겠다. 습명은 자기 속에 있는 밝음만 보지 말고 어둠을 보면서 어둠의 반가치가 재앙을 피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말이겠다. 세상의 균이 소탕되지 않는다. 건강한 사람은 무균자가 아니고 보균자다. 보균자는 병원체를 몸에 늘 지니고 있다. 몸을 늘 보살피는 자가 건강한 사람이다. 우리도 우리의 역사에서 누가 추상적으로 더 순수했던가 하는 기준보다, 누가 우리 모두를 편가르지 않고 구체적으로 더 잘 보살피려고 했던가를 우리의 영웅으로 섬기는 법을 배워야 하겠다. 우리는 우리 모두가 복을 짓는 지혜를 배워야 한다. 하늘이 우리에게 주려는 복도 차버리는 어리석음을 범한다면, 이것이 천추(千秋)의 한(恨)이 아니겠는가!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선과 악을 넘어서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3)선과 악을 넘어서

    선이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악이 같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악은 선에 의하여 청소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내가 악을 미워하면서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에 나의 선행의 결심은 이미 악을 동반하게 된다. 악을 미워하면서 악과 대결하는 그 선행의 마음에 이미 독선의 악은 소리없이 스며들어 있다. 지난 주에 우리는 이기주의와 도덕주의를 넘어가는 제3의 길이 무엇일 수 있는가를 모색하여 보았다. 흔히 상식적으로 이기주의는 나쁘고, 도덕주의는 좋다는 흑백논리에 사람들은 빠져 있다. 그런 흑백논리가 당연한 것으로 교육받았고 그렇게 사람들은 믿어 왔다. 그러나 그 일도 그렇게 단순치 않음을 우리가 보았다. 세상일이 그렇게 단세포적으로 간단하게 판명나면, 왜 철학적인 사색이 필요하겠는가? 이번의 주제도 상식적으로 많은 사람들의 생각에 충격을 던질 수 있으리라 믿는다. 왜냐하면 선은 좋은 것이고 악은 나쁜 것인데, 악의 극복은 쉽게 이해되나 선의 극복은 말이 안 되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무엇이 선이고 악인가? 선악에 관한 윤리학적 정의가 다양하지만, 선악은 사람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과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사랑스럽고, 싫어하는 사람은 밉다. 이것이 일반적 사람들의 심리상태다. 그래서 이런 심리적 호오(好惡)가 너무 주관적이어서 도덕적 선악과 같은 반열에 올려질 수 없다고 도덕주의자들은 말한다. 도덕적 선악은 개인의 주관적 심리에 좌우되어서는 안되고 공동체생활을 좋게 유지하기 위한 보편적 규범이 되어야 한다고 역설한다. 옳은 말이다. 문제는 그렇게 간단히 정리되지 않기에 우리가 지금 여기서 성찰해보려는 것이다. 도덕적 선악이 아무리 공동체를 위한 가치론적 판단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의 심리적 호오판단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동안 선을 좋아하고 악을 미워하도록 교육받아왔고, 또한 선을 위한 악의 박멸과 추방에 박수치도록 도덕교육의 이름으로 훈련 받아왔기 때문이다. 소박한 전래동화일수록 선악이 분명히 구분되어 더 이상 생각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는 철학적 성찰이 필요하지 않다. 선과 악은 별개의 적대적인 것으로, 마음 바깥에서 서로 대립되어 있다고 사람들은 보통 생각한다. 선의 이면이 악이라는 것을 사람들은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선과 악은 서로 완전히 다른 종자인 것처럼 간주한다는 것이다. 연속극과 낭만적 소설들은 대개 사랑의 낭만적 아름다움만을 과대 포장하여 사랑의 달콤함을 노래하거나 기껏 사랑을 눈물의 씨앗 정도로 표상한다. 그러나 사랑의 이면에 늘 그 독기가 서려 있어서 사랑의 이름으로 질투와 증오가 화산처럼 폭발한다. 낭만주의적 소설은 다 거짓말이라고 프랑스의 현대 철학자인 르네 지라르는 말했다. 동양에서 도덕사상의 종가는 아무래도 공자의 유교다. 공자의 사상은 여러 다양한 측면을 함의하고 있어서 단순히 도덕주의적이라고 못박기는 어렵다. 그러나 성인 공자는 좋은 공동체사회의 유지를 위하여 선악의 도덕에 남달리 관심을 보였다.‘논어’에 나오는 공자의 가르침 한 토막이다. 공자가 제자 자로에게 배우지 않으면 폐단이 되는 여섯가지를 말한다. 인(仁)을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어리석음(愚)이고, 알기(知)를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잘난 척하기(蕩)고, 신(信)을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해치게(賊) 되고, 곧음(直)을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남을 숨막히게 함(絞)이고, 용기를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은 난폭해짐(亂)이고, 굳세기(剛)를 좋아하면서 배우지 않으면 그 폐단이 광기(狂)다. 공자의 이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 첫째로 모든 도덕적 가치가 좋은 면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폐단을 필연적으로 함의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폐단이 없는 도덕적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둘째로 그런 폐단이 있으나 이성적 도덕공부에 의하여 폐단의 극복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우리의 이 글은 첫째 주장에 동의하나 둘째 주장에 대하여 동의하기를 유보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까지의 도덕교육이 그렇게 강조해왔던 의식 측면에서 당위적으로 배운 도덕가치가 자기의 무의식의 이해관계를 건드리는 측면에 도전을 받으면, 순식간 도덕적 가치는 흔적 없이 날아가고 오직 무의식적 이해관계에 집착하는 행동을 통상적으로 인간이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인간의 이성적 가치가 무의식의 본능적 이해관계 앞에서 얼마나 허약하게 무너지는지 잘 보아왔다. 평소에 진선진미한 도덕가치를 설교하던 사람이 세속적 출세에 지장을 주는 사람에 대하여 본능적 악감을 심한 욕설로 표시하는 경우를 나는 몇 번 보았다. 공자가 말한 바와 같이 폐단으로서의 악은 선으로서의 가치 이면에 운명적으로 깃들어 있는 선의 배설물과 같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선이 있는 곳에 필연적으로 악이 같이 공존한다는 것이다. 악은 선에 의하여 청소되지도 않고 사라지지도 않는다. 내가 악을 미워하면서 완전히 뿌리뽑겠다고 결심하는 그 순간에 나의 선행의 결심은 이미 악을 동반하게 된다. 악을 미워하면서 악과 대결하는 그 선행의 마음에 이미 독선의 악은 소리없이 스며들어 있다. 선량한 지킬 박사가 밤이면 괴물인 하이드로 변하는 스티븐슨의 소설은 선악이 별개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야누스의 얼굴처럼 이중적이라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 아닌가? 그렇다고 선악이 동일하다고 궤변을 농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선악이 다르지만, 동전의 양면처럼 같이 동거한다는 것이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오는 구절을 우리가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선인(善人)은 불선인(不善人)의 스승(師)이고, 불선인은 선인의 자산(資)이다.” 선인이 불선인을 가르치는 스승이라는 말은 쉽게 납득이 되지만, 불선인이 선인의 자산이라는 말은 생경해서 소화가 잘 안된다. 거기에 두 가지의 뜻이 숨어 있다고 생각된다. 첫째로 선인은 불선인을 역설적인 반면교사로 봐서 자신의 입지를 더욱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저렇게 생각하고 행동해서는 안 되겠다는 선인의 마음은 불선인이 선인을 더욱 선인으로 키우는 자산이 된다는 뜻이겠다. 둘째로 불선인은 선인의 이면이므로 불선인의 마음이 선인의 마음으로 방향전환을 하면, 그 불선인은 다시 선인으로 되돌아선다는 뜻으로 읽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이 말은 선인도 순간적 마음의 착각으로 불선인으로 미끄러질 위험을 늘 지니고 있다는 것과 같다. 지난 주의 글에서 본능의 이기적(利己的) 성향은 본성의 자리적(自利的) 성향과 같은 무의식에 자리잡고 있고, 서로 다르나 유사한 면도 지니고 있다고 말한 것을 기억하기 바란다. 무의식의 성향이 이렇게 가기도 하고, 저렇게 가기도 한다는 것이겠다. 인간은 자연적으로 이익을 좋아한다. 그러므로 이익은 선악의 구분 이전의 것이다. 그런데 인간이 바깥에 있는 이익을 남들과 싸워 내가 취득해서 소유하려는 본능은 불선인의 배타적인 방향으로 흐르지만, 내가 내 속에서 내가 좋아하는 마음의 기호(嗜好)를 꽃피워 그 열매를 남들에게 나누어주려는 이타행은 선인의 것이다. 그러므로 자리이타의 선인과 이기배타의 불선인은 종이 한 장의 차이로 동거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어떻게 이기배타적 불선인이 자리이타적 선인으로 방향전환을 이룩할 수 있을까? 노자는 여기서 마음의 고요를 들고 있다. 마음의 고요는 무심한 마음이다. 노자는 이것을 허심이라고 말했다. 내가 하루종일 공부에 몰입하면, 나는 선악과 손익계산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 그냥 공부가 좋아서 거기에 몰입할 뿐이다. 마음은 한없이 고요하고 어떤 성취감에 젖게 된다. 그 때에 나는 무선무악(無善無惡)의 심경에 있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노래 부르기와 그림 그리기에 열중한 예술인, 어떤 손재주로 무엇을 공작하는 장인, 회사경영에 열중하면서 돈벌이에 몰입해 있는 기업인, 무엇을 열심히 제자들에게 가르치는 선생님, 어떤 운동에 심혈을 기울이는 스포츠맨, 집안 살림을 잘 꾸려 나가는 일에 열중하는 가정주부들…. 호오의 갈등과 선악의 판단과 손익계산을 넘어선 허심의 상태에서 저런 본성의 자발적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때의 마음은 악과 대결하면서 악을 씻어내기 위하여 싸우는 도덕적 결의와 다르다. 그 마음은 선악을 넘어서 있다. 그런 허심한 마음은 선인과 불선인을 다 나누기 이전의 마음이다. 노자가 불선인을 악인이라 부르지 않는 까닭을 잘 음미해 봐야 하겠다. 악은 선과 대결적 양상을 짓고 있으나, 불선인은 선인의 그림자, 선인의 배설물로 본다. 배설물을 인간은 더러워하나, 그것도 다른 생물에게 음식물이 된다. 약과 독은 다르다고 사람들은 단순히 생각하나, 독은 약과 다른 데에 있지 않고 약의 이면일 뿐이다. 그러면 저 무심한 무선무악의 심정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그것은 선악 이전의 마음이다. 유교의 경전인 ‘대학’에서 저 경지를 지선(至善)이라 읊었다. 지선은 절대적 선이라는 뜻이겠다. 불선의 악을 스스로 분비하는 의지적 선이 아니라, 선악을 넘어서 무선무악의 무심에서 인간의 본성이 자연스럽게 깨어난 그런 상태를 가리키는 것이겠다. 이런 상태를 불교에서 불성(佛性)이라 하고, 그리스도교에서 신성(神性)이라 부른다. 우리 모두의 마음 속에는 불성으로서 또는 신성으로서 지선이 숨어 있다. 호오와 선악과 시비와 애증으로 마음이 흥분되어 꺼둘리지 않으면, 이 지선이 나타난다. 우리의 마음이 불안하고 사회생활이 괴로운 까닭은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이기고 승리하는 소유자의 자리에 앉기를 탐욕하기 때문이다. 선을 소유하려고 탐욕하면, 그것도 나와 남을 괴롭힌다. 우리의 모든 교육과 정신문화는 마음의 고요를 되찾아 지선이 하고싶은 것을 원대로 하도록 도와주는 데 있겠다. 마음의 고요는 그냥 마음이 잠자듯이 멍청한 상태가 아니라, 어떤 일에 마음이 열심히 몰입했을 때에 생긴다. 그 때에 지선이 우리를 부처로, 하느님의 아이들로 만든다. 그 지선만이 우리를 복락케 하고 우리를 개벽시킬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책꽂이]

    |실용| ●전략가의 리더십(엄광용 지음, 나무의꿈 펴냄) 중국 춘추시대 책사들의 지략을 현실에 접목시킨 리더십 지도서. 천하경영의 기본은 인간경영임을 강조한다.1만원. ●14가지 원리만 알면 너무나 간단한 회계공부(이시이 가즈히토 등 지음, 양영철 옮김, 거름 펴냄) 소설의 형식을 빌려 회계의 핵심 원리 14가지를 설명. 수익비용대응의 회계원칙, 감가상각, 비용배분, 충당금, 원가 계산, 자본의 원천별 분류 등의 개념을 풀이한다.1만원. ●경영의 심리학(에리크 알베르 등 지음, 이세진 옮김, 아라크네 펴냄) 심리학적 도구를 활용해 조직문화를 향상시키고 성과를 이끌어내는 방법을 설명. 기업의 효율성 극대화주의를 비판하며 직원과 기업이 함께 성장하고 보람을 느끼는 풍요로운 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1만 2000원. ●시사 IT용어 따라잡기(김학진 지음, 아이뉴스24 펴냄) 휴대인터넷(와이브로), 모바일주소(WINC), 문자서비스(SMS) 등 IT용어 200여개를 골라 풀이했다. 부록으로 게임용어와 인터넷에서 널리 쓰이는 은어 등도 소개한다.1만 5000원.|초등·청소년|●철학자는 왜 거꾸로 생각할까?(요술피리 글, 노현정 그림, 올벼 펴냄)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토마스 아퀴나스, 데카르트, 스피노자, 헤겔, 사르트르 등 인류사를 빛낸 철학자 11명의 사유세계를 귀띔한다. 주인공들의 철학세계를 짧게 압축했지만, 이야기체로 묘사해 이해하기가 한결 더 수월하다. 초등생.1만 9000원.●호기심, 달나라에 착륙하다(고래발자국 지음, 이루다 그림, 디딤돌 펴냄) 고요의 바다(달)에는 물이 있을까, 달의 모양은 왜 변할까, 모두가 잠든 밤사이 달은 어떻게 움직일까…. 과학시간에 초등생들이 머리를 긁적일 만한 달에 관한 모든 궁금증들을 이야기체의 설명, 그림, 사진 등을 곁들여 풀어준다. 초등생. 각권 7000원.●내 마음의 수호천사(신현수 글, 김영장 그림, 푸른나무 펴냄) 평범하지만 화목했던 가정에서 자라난 초등 6학년 은별이. 위암 말기 진단을 받은 엄마를 갑자기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과 마지막 사연들, 아픔을 딛고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까지의 이야기가 눈물샘을 건드린다. 가족의 참의미가 책장을 덮을 즈음 차분히 지면위로 도드라진다. 초등생.7800원.|유아·아동|●지구는 돕니다(안느 브루이야르 글·그림, 곽노경 옮김, 미래M&B 펴냄) 찬바람에 끽끽 우는 나무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 철따라 바뀌는 풍경…. 지구의 모든 것들이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메시지를 웅변하는 철학적 감성이 돋보이는 그림책.5세 이상.9000원.
  •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 욕망과 세상보기의 혁명

    [김형효 교수의 테마가 있는 철학산책] (1) 욕망과 세상보기의 혁명

    모든 것들은 자연세계에서 서로 관계를 지으려는 욕망으로 가득 차 있는 것 같다. 물리학적으로 모든 것들은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서로 잡아당기고 있다. 생물학적으로 모든 존재자(있는 것)들은 상생하거나 상극한다. 일방통행은 없고 다 쌍방적인 관계로 만물의 존재방식이 이루어지고 있다. 상생과 상극이 서로 별개의 것으로 다른 것이 아니라, 한 개의 사실이 이중적으로 작용한다. 예컨대 내륙으로 이동하는 활어 탱크에 넣어둔 물고기들은 이동 도중에 지쳐 거의 다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에 그 물고기들을 잡아먹는 천적을 넣어두면 한두 마리가 잡아먹히지만, 나머지 물고기들은 싱싱하게 활어로서 살아 있다고 한다. 상생적 삶과 상극적 죽음이 서로 별개의 다른 사실들이 아니고, 동전의 양면처럼 한 사실의 이중성인 셈이다. 자연계에서 생물만 그렇지 않고 무생물도 역시 이중성의 법칙으로 상호관계를 맺는 것 같다. 예컨대 물과 불은 서로 상극적인데, 그 물과 불이 상호 보완하면서 지구상의 모든 생명의 에너지원이 된다. 죽음이 빈자리를 만들어 주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이 태어날 빈 여지가 없어진다. 죽음은 새 생명의 탄생을 도와 준다. 산정에 솟은 거대한 암벽도 주위의 지질을 안정시켜 주는 역할을 한단다. 이처럼 자연의 일체는 다 상생과 상극의 작용을 동시적으로 수행한다. 자연의 존재 방식은 상생과 상극의 상관관계의 얽힘이다. 이런 얽힘을 우리는 자연의 존재론적 욕망이라 부른다. 왜냐하면 그 욕망은 사회생활을 하는 인간처럼 무엇을 소유하기 위한 탐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욕망은 상생의 아름다움과 상극의 처절함을 동시에 함유하고 있다. 우리는 자연을 소박한 낭만주의적 심정으로 너무 아름답게만 표상하는데, 자연은 아름다움의 이면에 처절한 죽음의 장송곡을 연주하고 있다. 자연이 죽음을 연출하지만, 그 죽음은 자연의 새 삶을 가능케 하는 자기 정화작용을 포함한다. 인간이 가한 외적 사고사(事故死)가 아닌 경우에, 자연은 죽은 시체의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다. 자연은 스스로 정화한다. 이것이 곧 자연의 완전 교환방식을 암시한다 하겠다. 상생과 상극의 얽힘 관계도 자연의 완전교환의 존재방식의 다른 이름이겠다. 생명은 다 죽기 싫어하지만, 죽어서도 그 시체를 타자에게 준다. 노자(老子)는 이런 자연의 교환적 존재방식을 일컬어 여러 가지의 비유로 표현했다.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열거하면, 요(·오고 감), 혼이위일(混而爲一·뒤섞여 하나로 존재함), 승승(繩繩·새끼 꼬이듯이 이어짐), 만물병작(萬物竝作·만물은 자타가 함께 지음) 등등이라 하겠다. 그런데 인간은 이런 자연생활에서 떨어져 나오면서 사회생활을 하게 되었다. 사회생활이 인간의 생존방식인데, 존재론적인 욕망방식에서 소유론적 욕망방식으로 미끄러져 온 과정이 인류 생존방식의 과정이다. 사회생활도 인간들의 상관관계의 얽힘이므로 욕망이 그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다. 그러나 인간들의 사회적 욕망은 소유론적 욕망으로 점철돼 있기에, 여기서 모든 인간사의 드라마가 생긴다. 시장이 인간사회 욕망의 교환을 상징하는데, 시장의 교환은 자기의 이익을 더 많이 남기기 위한 교환이므로 불완전한 교환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시장은 자연의 존재론적 교환과 다른 소유론적 교환의 탁월한 양식이다. 사회주의적 도덕론자들은 이 시장의 소유론적 교환법칙들을 이기심의 타락 현상으로 규탄하나, 그것은 단순한 도덕적 판단의 소관이 아니고 더 근원적으로 인간 욕망의 운명과 직결된다. 잠깐 인류학적으로 이 운명을 생각해 보자. 바로 20세기 프랑스의 구조주의 사상가인 인류학자 클로드 레비스트로스의 이론이다. 교환은 인간집단의 생존방식이다. 이 교환의 생존방식을 인류는 아득한 옛날 토템 제도로 시행했다는 것이다. 토템은 원시인들의 유치한 종교신앙 형태가 아니라, 종족집단간의 차이를 표시해 서로 물물교환의 거래를 이루기 위한 방편이다. 자연의 만물이 서로 다르기에 상생과 상극의 교환을 이루듯이, 인간집단도 서로 차이를 띠어야 교환의 거래가 이루어진다. 그래서 곰 토템은 곰을 잡지 않고 호랑이를 잡고, 호랑이 토템은 호랑이를 보호하고 그 대신 곰을 잡는다. 이것이 상호교환의 제도다. 이 토템 제도는 노자가 갈파한 완전한 상호교환 제도로서의 요()나 만물병작(萬物竝作)의 의미와 상통한다 하겠다. 그런데 이런 완전교환 방식의 토템 제도가 어느 날 불현듯 불완전한 교환방식인 카스트로 미끄러졌다는 것이다. 카스트 제도는 우열의 비교가 집단 사이에 등장하게 됐음을 말한다. 그래서 우수 집단이 열등 집단을 지배하고 불평등한 거래관계가 형성되면서, 집단이기심이 생기게 됐다는 것이다. 토템의 존재론적 교환양식이 카스트의 소유론적 교환양식으로 방향을 틀게 되었다. 이것이 인류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 운명을 알려주는 신화가 구약의 창세기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를 먹은 원죄에 비유된다 하겠다. 금단의 열매를 먹었기에 인류는 원죄를 지었고, 그 대가로 선악과 호오(好惡)를 분별하는 지능을 얻게 됐다는 것이다. 이런 원죄의 신화가 불교에서도 등장하고 있다. 인간이 아득한 옛날에 모든 것이 하나로 서로 회통되던 이 세상을 문득 지능으로 분별하는 무명(無明)이 생기면서 이 세상을 하나로 보는 마음이 조각조각나게 됐다는 것이다. 기독교와 불교는 서로 같은 내용을 약간 다르게 표현했을 뿐이다. 소유론적 욕망의 등장은 인간의 마음에 선악과 호오의 구별을 느끼는 마음의 등장과 궤적을 같이한다. 선악과 호오의 개념들은 여기서 서로 같은 차원이다. 싫고 좋은 것을 구별하는 마음과 개인적 또는 집단적 이기심이 함께 등장한다. 이 이기심이 사회생활에서 남들에 대해 비교우위를 쟁취하려 한다. 역사에서 주인과 노예의 계급이 생겼고, 그 계급 싸움이 인류사에서 희비극의 드라마를 잉태시켰다. 이것이 마르크스가 본 통찰력이다. 동시에 그 이기심의 드라마가 인류문명의 과학기술적 진보와 경제성장을 촉진하게 된 원동력이라는 것이다.18세기 독일의 대철학자 칸트는 이 이기심의 드라마인 소유론적 욕망을 인류사에 있어서 불의 발견과 유사하다고 간주했다. 위에서 언급된, 금단의 열매를 먹은 사건이나 또는 인간의 마음에 홀연히 호오의 분별력을 갖게 된 사건이나 다 인간이 지능을 소유하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이 지능이 문제다. 이것이 인간의 문명을 있게 한 원동력이고, 또 이것이 인간 세상을 추악하게 한 원흉인 셈이다. 칸트는 전자를 보아 지능을 찬양했고, 마르크스는 후자를 보아 지능의 이기심을 저주했다. 지능이 생물적 본능을 대신해 등장하게 된 이유는 이렇다. 동식물은 본능적으로 생존의 방식을 펼쳐 나간다. 그러나 인간은 이런 본능이 극히 미약해 본능만으로 생존을 유지할 수 없다. 이것이 인간의 역사적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에게는 모자라는 본능을 대신하는 지능의 개발이 필수적이었다. 이 지능이 과학기술을 불러온다. 과학기술은 소유론적 욕망의 표현이다. 그런데 동식물의 본능은 존재론적 상생과 상극 이외의 것을 모르지만, 인간의 지능은 이기심에 근거한 소유욕을 아울러 진행시켰다. 이 지능이 인류사의 모든 것을 설명해 준다. 인류사는 개인적, 종족적 이기심의 소유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투쟁이나 다름없다. 그래서 사람들은 노자의 토템적 자연의 존재론적 욕망이 마치 역사 현실의 실제와는 맞지 않는 것처럼 간주해 도피적이고 둔세적인 사상이라고 오해했다. 그러나 앞으로 계속되는 전개에서 우리는 노자의 도(道)가 그런 현실도피의 철학이 아님을 보게 될 것이다. 아무튼 마르크스나 도덕적 이상주의자들은 이 이기심의 해악을 알고 있기에 이 이기심을 뿌리 뽑기 위한 도덕-정치적 투쟁을 벌였다. 정신문화적으로 인류사를 개관해 보면, 인류사는 경제기술적인 소유적 편리와 사회도덕적인 반(反)이기적 정의의 투쟁처럼 보인다. 인류사의 진리는 편리와 정의의 두 가지 상반된 요소로 시소게임을 한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사회도덕적 반이기적 정의의 진리는 반소유론적이기에 자연적 토템의 교환거래와 유사한 것처럼 보인다. 토템적 교환은 마르크스가 본 원시공산사회의 유형과 유사하다. 그러나 지능의 등장으로 그 사회는 이미 상실한 낙원과 같다. 마르크시즘과 도덕이상주의자들의 착각은 크게 봐서 두 가지다. 하나는 이기심을 능위적(능동적·인위적)으로 노력하면 뿌리째 뽑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저들은 이기심의 상징인 사유재산제도를 억압하거나 철폐해 이기심이 인간사회에 등록되지 않게끔 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거짓이다. 성욕으로 종교적 수행에 방해를 받은 이가 그의 성욕을 나타내는 성기를 절단한다고 성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성욕의 소유욕은 더 깊은 무의식의 차원이기에 도덕의식적 각오와 그 수준에서 해결이 안 된다. 둘째로 그들은 반이기적 정의론을 주장하여, 이것이 반소유론적 존재론의 토템적 교환을 역사상에 부활시킨다고 주장했다. 역시 이것도 거짓이다. 그들의 반이기적 정의론도 역시 다른 형태의 소유론적 욕망의 주장이다. 왜냐하면 소유론적 욕망은 경제기술적 물질적 소유욕 이외에 정신적 형이상학적 지배욕도 포함되기 때문이다. 어떤 반이기적 도덕의 캐너피(canopy)로 사회를 포장하겠다는 의지도 역시 사회를 도덕적으로 장악하겠다는 소유론의 결의와 다르지 않다. 거기에는 토템에서와 같은 자연적 교환의 자유도 이미 사라진다. 그래서 사회도덕주의는 시장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경제적 기제(機制)마저도 파괴한다. 말하자면 인류가 경험한 두 가지의 큰 혁명인 산업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은 다 소유론적 혁명의 세상보기나 다름없다. 그래도 저 혁명들은 인류에게 두 가지의 학습을 가져다 주었다. 하나는 경제기술적으로 편리한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과 또 하나는 이기심의 독성을 알려 주었다는 점이다. 이제 인류는 제3의 혁명을 모색해야 할 그런 시절 인연에 이르렀다. 그것은 편리와 정의가 상충하지 않는 존재론적 혁명의 길이다. 존재론적 혁명의 길은 소유론적 이전의 혁명과 아주 다르다. 그것은 세상이 아니고, 세상을 보는 마음을 혁명하는 일이다. 계속 우리는 이런 길을 걸어갈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철학)
  • [씨줄날줄] 사자성어 홍수/육철수 논설위원

    백과사전에 실린 한자는 8만 5000개라고 한다. 여기서 명사·동사 가리지 않고 달랑 네 글자만 뽑아서 사자성어(四字成語)를 만들면 경우의 수는 얼마나 될까. 놀라지 말라. 한 글자가 1개에서 4개까지 겹치기로 출연할 수 있다면, 자그마치 8만 5000의 4제곱이다. 실로 무궁무진하다. 그래서 사자성어는 누구나 만들 수 있고, 어떤 뜻이든 담아낼 수 있다. 그렇다고 사자성어가 모두 말이 되거나, 의미있고 깊이가 있는 것은 아닐 터이다. 누가 어떤 글자를 무슨 뜻으로 골라 만들었으며, 표현의 적합성에 따라 그 맛과 느낌은 천차만별이다. 또 사자성어의 묘미는 현상이나 소망을 네 글자에 얼마나 압축적이고 어울리게 담았느냐에 달려 있다. 촌철살인의 지혜가 번뜩이지 않는다면 아무리 그럴듯한 사자성어도 빛을 잃게 마련이다. 요즘 우리 사회에는 사자성어가 유난히 난무한다. 그 가운데 정계·경제계·학계에서 쏟아내는 사자성어는 하도 많아 주워섬기기조차 힘들다. 현상을 한마디로 꿰뚫을 수 없다는 것은 아마도 힘겹고 어지러운 세태 탓이 크다 하겠다. 지난 연말, 교수들은 2005년의 사자성어로 주역에서 골라낸 상화하택(上火下澤)을 선정했다. 그 반대의 뜻인 상택하화나, 택중유화(澤中有火:화합하는 가운데 변화와 혁신)는 새끼치기일 뿐이다. 교수들은 또 올해의 소망으로 약팽소선(若烹小鮮: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을 꼽았다. 노자의 치대국(治大國) 약팽소선에서 따온 것인데,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놔두는 게 최상의 정치라는 뜻이다. 사자성어가 여기서 그쳤으면 참 좋았을걸 그랬다. 실천은 안 하면서 말만 번지르르한 정치권이 아니나 다를까 입이 근질근질했던지 너도나도 사자성어랍시고 들이댄다. 여당 의장은 눌언민행(訥言敏行:말은 느려도 행동은 민첩하게)을, 대통령 비서실장은 천지교태(天地交泰:하늘과 땅의 화합)를 내놨다. 경제계도 숙아유쟁(熟芽遺爭:싹은 틔웠으되 쟁점은 남았다)과 운니지차(雲泥之差:구름과 진흙처럼 차이가 큼)를 들먹였으니 정치권과는 난형난제다. 유식함을 국가(기업)경영에 쏟아야지 말 만드는데 신경써서야 원…. 나라가 시끄럽고 경제가 어려워 유구무언이어야 할 사람들이 이렇듯 앞장서서 중구난방이니, 할 말 많은 국민은 올해도 은인자중 외에 달리 도리가 없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교수들이 선정한 2006 사자성어 若烹小鮮

    교수들이 2006 병술년 우리 사회의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로 ‘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작은 생선을 삶는 것과 같다.’는 뜻의 ‘약팽소선(若烹小鮮)’을 선정했다. 교수신문은 대학교수 195명을 대상으로 지난달 8∼14일 설문조사를 통해 올해 한국 정치·사회·경제 분야의 소망을 담은 사자성어를 조사한 결과 32.8%가 ‘약팽소선’을 꼽았다고 2일 밝혔다. 노자(老子) 60장에 나오는 이 사자성어는 본문 중 ‘치대국약팽소선(治大國若烹小鮮)’의 준말로 가만히 두면서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정치란 뜻으로 풀이된다. 교수들은 2006년 한국 사회는 지난해 9월 6자 회담의 성사에도 북한 인권과 위조지폐 문제 등 남북관계와 한·미관계에서 그 어느 때보다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또 과거사 문제와 상하계층의 반목에 있어 조화를 찾는 데도 ‘약팽소선’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연합뉴스
  • 儒林(510)-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2)

    儒林(510)-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2)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2) 검은 비늘에 금빛목걸이를 목에 두른 용이 동해바다로부터 불쑥 날아와 방 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꾼 신사임당은 이로 인해 율곡의 아명을 ‘현룡(見龍)’이라 하였었다.‘이현룡’이 ‘이이’로 이름이 바뀐 것은 율곡의 나이 11살 때. 그 무렵 율곡의 아버지 이원수는 중병에 걸려 목숨이 촌각을 다투고 있었는데, 율곡은 조상을 모신 사당에 들어가 아버지대신 자신이 죽도록 해달라고 비는 한편 자신의 팔뚝을 찔러 거기서 나오는 피를 신음하는 아버지 입 속에 흘려 넣었던 것이다. 간신히 기운을 되찾은 이원수는 그 무렵 낮잠을 자다가 꿈속에서 백발노인을 만난다. 그 노인은 이원수를 향해 ‘당신의 아이는 분명히 이 나라의 큰 유학자가 될 것이요. 그러니 이(珥)라고 바꾸시오.’하고 말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이원수가 ‘이 아이는 용을 보고 낳은 아이입니다. 그래서 현룡이라 했는데 이름을 바꾸라니요.’하고 묻자 백발노인은 이렇게 말을 하였다고 한다. “이(珥)란 귀걸이를 뜻하는데 매우 귀한 것을 말한다오. 그러므로 꼭 이로 바꿔야 하오.” 이로 인해 율곡의 이름은 이현룡에서 이이로 바뀌게 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율곡은 새벽닭 울음소리를 들으며 어렸을 때 아버지와 어머니로부터 전해들은 내용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으며 중얼거렸다. “아버지의 꿈속에 나타난 백발노인은 어쩌면 노자의 현신이 아니었을까.” 공자가 예에 대해 배우기 위해서 수만리의 여행을 떠나 주나라로 노자를 찾아갔듯이 이번에는 노자의 현신인 내가 학문의 길을 밝히기 위해서 해동공자인 퇴계선생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인류가 낳은 대성인이자 대사상가였던 공자와 노자의 만남이 세기적인 대사건이라면 철인이자 우리나라가 낳은 대사상가인 퇴계와 율곡의 만남 역시 우리나라 역사상 최고의 대사건인 것이다. 비록 2박3일의 짧은 만남이었으나 율곡은 퇴계로부터 받은 지대한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이 술회하고 있을 정도였다. “…내가 학문의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을 때 사나운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하여 가시밭길의 거친 들에 있다가 방향을 고쳐서 옛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 모든 것은 실로 퇴계선생의 계발(啓發)에 힘입은 것이다.” 눈을 뜨는 데는 영겁의 세월이 걸릴지는 모르지만 보는 것은 찰나에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율곡이 퇴계를 만난 것이 평생 동안에 있어 2박3일의 짧은 찰나였지만 그 한순간에 자신의 고백처럼 ‘가시밭길의 거친 들에서 방향을 고쳐서 옛길로 돌아오게 되었으니’ 율곡을 육신적으로 낳은 사람은 그의 아버지인 이원수라 할지라도 율곡을 정신적으로 거듭나게 한 사람은 참스승인 이퇴계,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다음날 아침 날이 밝자마자 율곡은 서둘러 안동을 향해 출발한다. 그 길은 율곡에게 있어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는 최상의 선택이었으며, 사나운 말처럼 이리 뛰고 저리 뛰어 방황하던 질풍노도의 계절에서 발견한 유일의 구명대(救命帶)이자 캄캄한 어둠을 밝히는 등대불이었던 것이다.
  • 儒林(509)-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1)

    儒林(509)-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1)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31) 일어나 앉은 율곡의 머릿속으로 문득 노자를 만나기 위해서 여행을 떠났던 공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천하의 성인 공자도 예에 대해서 묻기 위해 노자를 만나러 그 먼 주나라까지 여행을 떠나지 않았던가. 사마천은 사기에서 그 장면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남궁경숙과 함께 주나라로 간 공자는 노자를 만나 예에 대해서 물었다.” 일찍이 ‘열 집이 있는 고을이라면 반드시 충성과 신의에 있어서는 나와 같은 사람이 있겠지만 배우기에 있어서는 나만큼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라고 자신을 평가하였던 공자. 그러므로 지성이었던 공자도 예에 대해 가르침을 얻기 위해 수만리의 여정을 거쳐 주나라의 낙읍으로 간다. 공자는 마침내 노자를 만나게 되자 마차에서 내려 노나라로부터 가져온 기러기 두 마리를 선물로 바쳐 올리고는 ‘예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고 사마천이 기록하였던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따라서 스스로 쓴 ‘자경문’에서 ‘성인(공자)을 본보기로 삼아서 조금이라도 성인에 미치지 못하면 나의 일은 끝난 것은 아니다.’라고 뜻을 세웠던 율곡으로서는 예에 대해 가르침을 얻기 위해 수만리의 여정을 불사한 공자를 본받는 것도 지극히 마땅한 일인 것이다. 더구나 퇴계는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리던 당대 최고의 철인(哲人). 나 역시 공자의 말처럼 ‘배우기에 있어서 나만큼 좋아하는 사람이 없을 정도’인 호학지인(好學之人)인 것이다. 물론 공자는 노자로부터 냉대를 받는다. 예를 묻는 공자에게 노자는 다만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이를테면 훌륭한 장사꾼은 물건을 깊숙이 감추고 있어 얼핏 보면 점포가 빈 것처럼 보이듯 군자는 많은 덕을 지니고 있으나 외모는 마치 바보처럼 보이는 것일세. 그러니 제발 그대도 예를 빙자한 그 교만과 그리고 뭣도 없으면서 잘난체하는 말과 헛된 집념을 버리란 말일세.” 이처럼 노자로부터 수모를 당하고 빈손으로 돌아온 공자. 그러나 공자는 노자로부터 정말 아무런 배움도 얻지 못하였던 것일까. 아니다. 율곡은 머리를 흔들며 생각하였다. 날이 벌써 밝아 어둑새벽이 되었는지 먼 인가로부터 홰를 치며 울어대는 닭의 울음소리가 까마득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공자는 노자로부터 수욕(受辱)을 당하였으나 오히려 이로 인해 자신의 학문을 정립할 수 있었으니,‘공자가 주나라를 떠나 노나라로 돌아오자 제자들이 점차로 많아지기 시작하였다.’는 사기의 기록이 그 증거인 것이다. 더구나. 율곡은 빙그레 웃으며 생각하였다. 나의 이름은 이이(李珥). 사마천은 노자의 신분을 ‘노자의 성은 이(李)씨고, 이름은 이(耳)다’라고 밝히고 있지 않은가. 율곡의 이름은 ‘귀걸이(珥)’를 뜻하고 노자의 이름은 ‘귀(耳)’를 뜻해 의미는 서로 다르더라도 음은 같아 두 사람은 시공을 초월한 동명이인이 아닐 것인가.
  • 儒林(504)-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26)

    儒林(504)-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26)

    제5부 格物致知 제1장 疾風怒濤 (26) 논어의 ‘선진편’에 나오는 공자와 제자들의 긴 대화는 공자가 모든 제자들의 의견을 듣고 부족한 점을 일깨워준 것으로 널리 알려진 일화 중의 하나다. 자로의 대답에 공자가 빙그레 웃었던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예로써 하는데, 자로의 말은 겸양할 줄 모르므로 웃었다.’고 평가받고 있거니와 염유와 공서화도 모두 지나치게 정치적인 관심만을 가진 게 아닐까 걱정되어 청정한 마음을 지니라는 의미에서 증석의 말에 동조하였던 것이다. 또한 공자가 증석의 말에 ‘나도 점의 편에 들겠다.’고 찬동하면서도 ‘깊은 탄식’(然歎)을 동시에 했다는 것은 ‘공자 자신의 이상은 세상을 바로잡는 일이지만 어지러운 세상에서 지나치게 정치에 집착했다가는 그 사람도 어지러움에 물들기 쉽다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율곡이 ‘홀로 있을 때를 삼간 후(謹獨)라야 기수에서 목욕하고 시를 읊으면서 돌아온다는 의미를 알 수 있을 것이다.’고 자경문에 썼던 것은 공자의 그런 마음, 즉 ‘어지러운 세상에 참여하고 있지만 그 어지러움에 물들지 아니한다.’는 무염(無染)사상을 드러내 보인 것이었다. 무염. ‘어지러운 현실에 몸을 담고 있으면서도 물들지 아니한다.’는 무염사상은 유교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불교적이다. 무염에 관한 율곡의 일화는 율곡이 절친한 친구였던 성혼과 함께 송강 정철(鄭澈)의 생일잔치에 참석했을 당시의 장면에서도 엿보이고 있다. 두 사람이 함께 잔치마당에 들어서고 보니 분단장한 기생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자신에게 엄격하였던 성혼이 정철에게 ‘저 기생들은 오늘 우리들의 모임에는 어울리지 않으니 돌려보내는 게 어떨까하네.’하고 말하자 옆에 있던 율곡이 웃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였던 데서 드러나고 있다. “물들어도 검어지지 않으니 이것도 하나의 도리라네.” 율곡의 이러한 대답은 불교의 ‘화광동진(和光同塵)’에서 인용한 말로 원래는 ‘빛을 부드럽게 해서 속세의 티끌에 같이 한다는 뜻’이나 부처가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서 자신의 본색을 숨기고 인간계에 나타난다는 용어인 것이다. 노자에서도 보이는 이 말의 뜻은 즉 ‘진흙에 더럽혀지지 않는 연꽃’처럼 세상이 진흙처럼 어지럽다고 해서 청정하게 피어나는 연꽃처럼 물들지 아니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율곡의 자경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다. “제5조 독서(讀書) 새벽에 일어나서는 아침나절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밥을 먹은 뒤에는 낮에 해야 할 일을 생각하고, 잠자리에 들었을 때에는 내일 해야 할 일을 생각해야 한다. 일이 없으면 그냥 가지만, 일이 있으면 반드시 생각을 하여, 합당하게 처리할 방도를 찾아야 하고, 그런 뒤에 글을 읽는다. 글을 읽는 까닭은 옳고 그름을 분간해서 일을 할 때에 적용하기 위한 것이다. 만약에 일을 살피지 아니하고, 오뚝이 앉아서 글만 읽는다면, 그것은 쓸모없는 학문을 하는 것이 된다.”
  • [책꽂이]

    ●역사가 기억을 말하다(전진성 지음, 휴머니스트 펴냄) 1980년대 이래 국제 역사학계의 주요한 흐름이자 방법론으로 결국 역사학의 전환을 이끌어낸 신문화사 연구로 이어져오고 있는 ‘기억문화’의 이론과 실제를 소개한다.2만 3000원.●우리말에 대한 예의(이진원 지음, 서해문집 펴냄)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저지르는 우리말의 오용과 오류의 사례들을 바로잡고, 잘못된 말글살이에 대한 따끔한 비판과 함께 이를 어떻게 바로잡을 수 있을지 방안들을 제시한다.1만 1900원.●철학, 역사를 만나다(안광복 지음, 웅진지식하우스 펴냄) 플라톤의 이상 국가와 ‘제자백가의 시대’로 불리던 춘추전국시대부터 프랑스 혁명과 마르크스 시대를 거쳐 비트겐슈타인의 ‘그림이론’에 이르기까지,2000여년에 걸친 철학의 주요 장면을 세계사와 함께 읽어나간다.9800원.●소리의 자본주의(요시미 야 지음, 송태욱 옮김, 이매진 펴냄)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축음기, 전화, 라디오로 대표되는 음향미디어가 사회적으로 형성되고 수용되는 과정을 다양한 집단, 계급, 젠더 사이의 다툼 속에서 살펴본다 . 1만 8000원.●우리는 지금 빙하기에 살고 있다(더그 맥두걸 지음, 조혜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 45억년에 달하는 지구역사에서 빙하기가 언제, 몇번이나 뒤덮었고, 지구의 생명과 세상을 어떻게 창조하고 멸종시켰는지, 빙하기는 인류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살펴본다.1만 7000원.●대교약졸-마치 서툰 것처럼 보이는 중국문화(박석 지음, 들녘 펴냄)‘‘도덕경’에 나오는 ‘큰 솜씨는 마치 서툰 것처럼 보인다.’는 뜻의 대교약졸의 관점에서 상고시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 문화사를 살펴보고, 현대 자본주의 문제점을 찾아 제시한다.2만 1000원.●인디고 서원, 내 청춘의 오아시스(아람샘과 인디고 아이들 지음, 궁리 펴냄) 16년간 부산에서 독서토론 교실인 ‘아람샘 소행성 612호’를 운영하면서 아이들의 문화공간인 ‘인디고 아이들’과 ‘인디고 서점’을 운영해온 허아람씨와 아이들의 책 읽기 이야기를 담았다.1만 8000원.●전복적 스피노자(안토니오 네그리 지음, 이기웅 옮김, 그린비 펴냄) 과거 ‘범신론’에만 주목했던 스피노자 연구에서 벗어나 그의 인식론·존재론·정치철학 모두에 주목하는 ‘스피노자 르네상스’ 관점에서 스피노자 철학이 갖는 정치적 의미를 현재의 문제로 끌어들인다.1만 4900원.●성경과 코란(오아힘 그닐카 지음, 오희천 옮김, 중심 펴냄) 모두 구약성서에 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상반되는 입장을 취하게 되었는지 그 역사적 배경을 설명하고, 기독교와 이슬람 문화의 유사성과 차이를 보여줌으로써 서로 객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1만 5000원.
  • 사랑이 활짝피는 방학동 방아골

    서울 도봉구 ‘안방학동’에 자리한 방아골사회복지관이 다양한 이벤트와 프로그램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안방학동이란 도봉산 바로 아래에 위치한 마을을 가리킨다. 방아골사회복지관은 ‘2005년 겨울, 대한민국이 따뜻해집니다-한 포기만 더’라는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집에서 김장을 할 때 몇포기씩 더 해서 결손가정이나 홀로사는 어르신, 경제사정이 안좋은 주민들을 도와주는 캠페인이다. 작더라도 많은 사람들이 거들면 큰 힘이 된다는 뜻에서다. 점포와 결연해 저금통을 설치하고 이웃을 돕는 ‘이웃사랑 가게’사업 또한 이채롭다. 현재 음식점 55곳과 제과점 11곳, 편의점 9곳 등 모두 100여개 업소가 참여 중이다. 6개 소모임도 각별하다.5개 모임은 인터넷 다음에 카페를 만들었다. 먼저 환경 공동체를 만들어가자는 뜻으로 ‘생명지기’라는 이름을 붙인 볼런토피아 운동(cafe.daum.net//bangahgol)을 보자. 어린이와 청소년 등을 대상으로 현장 환경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최근 대구 경북대 학생들이 복지관을 찾아오는 등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알려졌다. 장애우들을 위한 두레비전학교 ‘함께걸음’(cafe.daum.net//durevision)도 본받을 만하다. 토요일마다 장애인과 대학생 자원봉사들이 짝꿍이 돼 서로를 알아가는 프로그램이다. 복지관의 자랑거리라고 입을 모은다. 저소득 결식 아동들의 생활향상을 위한 나이트케어 프로그램인 반딧불이 교실 ‘반디21’(cafe.daum.net/BANDIfriends)과 지역사회 공동발전을 모색하는 ‘벗’(cafe.daum.net/friendstudy), 어린이 보호체계를 만들어가자는 ‘아이사랑’(cafe.daum.net/iedullove)도 있다. 이 곳에서 일하는 사회복지사들이 보다 나은 활동을 위해 서로 의견을 주고받는 마당으로 마련한 ‘꿈지락’은 이름부터 재미있다.‘늘 꿈을 꾸자, 지혜로워야 한다, 즐겁게(樂) 살자’는 뜻이 숨었다. 지난 21일엔 올 11차 모임을 명동 미지센터에서 갖고 책 ‘노자 이야기’에 대한 평가로 마음을 가다듬었다. 한 사회복지사는 “무엇보다 수익의 3%를 적립해 내놓기로 한 주꾸미 업소 등 주민들의 활발한 참여로 보람이 더욱 커졌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儒林(476)-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2)

    儒林(476)-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2)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52) 맹자와 더불어 또 하나의 날개였던 순자. 그러나 이처럼 순자는 유가에 있어서 뛰어난 대사상가였으나 이단자로 불린 것은 두 가지의 오해 때문이었다. 그것은 순자의 제자로 일컬어지는 이사와 한비자가 법가를 부르짖음으로써 엄격한 형명주의(刑名主義)를 통치술로 제창한 장본인이라는 오해와, 맹자의 ‘성선지설’에 대항하여 ‘인간의 본성은 태어날 때부터 악하다.’는 ‘성악지설’을 주장함으로써 마치 악마의 화신으로까지 느껴지는 선입견 때문이었던 것이다. 순자는 BC238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순자가 죽은 지 불과 10여년 후인 BC221년. 마침내 진나라의 황제가 천하통일을 함으로써 춘추전국시대는 종말을 고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대. 주왕실이 낙양으로 천거한 기원전 770년대부터 시작된 춘추전국시대는 시황제가 천하통일을 완수함으로써 550여년 만에 그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순자는 총 189종의 사상적 자유시장이 열렸던 ‘제자백가’ 중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탄생된 사상가였으며, 통일전야(前夜)에 살았던 유자(遺子)였다. 공자와 노자로부터 시작된 백가쟁명의 치열한 경주는 마침내 순자라는 마지막 유복자에 의해서 천하통일의 골인지점에 도착하여 테이프를 끊게 되는 것이다. 순자는 550년에 걸친 대역전 경주의 마지막 릴레이 주자였던 것이다. 곽말약(郭沫若). 20세기 중국이 낳은 뛰어난 시인이자 사학자였던 그는 ‘순자적비판(荀子的批判)’에서 다음과 같이 순자를 평하고 있다. “순자는 제자백가 가운데 최후를 장식한 위대한 스승이다. 그는 유가를 집대성하였을 뿐 아니라 제자백가를 집대성했다고 말할 수 있다.…그러나 공정하게 말하면 순자는 사실상 잡가(雜家)의 시조로서 제자백가의 학설을 총망라하였다. 선진의 제자백가 가운데 그의 비판을 받지 않은 이는 거의 없다.… 이러한 점은 진실로 순자가 제자백가에 대해서 초월적인 태도를 보였음을 드러내지만 우리는 그의 학설과 사상에서 제자백가의 영향을 분명히 발견할 수 있다. 다만 어떤 경우에는 정면에서의 수용과 발전이고, 어떤 경우에는 이면에서의 공격과 대립이며, 때로는 종합적인 통일과 변화라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순자가 맹자의 성선지설에 ‘공격과 대립’ 양상을 보여 성악지설을 주장하였던 것은 곽말약의 말처럼 제자백가를 집대성하기 위해서였으며, 이로써 ‘인간의 본성은 악함으로 성인의 예의법도에 의해 변화시켜야 한다.’는 ‘화성기위(化性起僞)’의 신학설이 나온 것이다. 맹자가 ‘성선지설’을 주장하였다면 순자는 ‘성악지설’을 주장하였고, 맹자가 그 ‘성선지설’을 지켜내는 방법으로 ‘인간사회의 타락은 인간의 욕심과 두려움 때문이며 그러므로 참된 용기를 함양하여 이를 없앨 수 있다.’는 ‘호연지기(浩然之氣)’를 주장하였다면 순자는 ‘성인은 본성을 변화시켜 인위를 일으킴으로써 나쁜 악을 교정할 수 있다.’는 ‘화성기위’를 주장하였던 것이다.
  • 儒林(469)-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5)

    儒林(469)-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5)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45) 이사(李斯). 그는 진나라의 재상으로 시황제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였던 일등공신이었다. 그는 천하를 통일한 후에는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였고, 시황제가 죽은 후 환관 조고(趙高)와 공모하여 막내아들 호해(胡亥)를 황제로 옹립하는 한편 태자 부소(扶蘇)를 자살케 한 간신이었다. 통일 국가 진나라의 15년의 짧은 수명은 전적으로 승상 이사에 대한 책임으로 중국의 역사는 이사를 절대적 악인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그 자신이 순자로부터 유학을 배웠으면서도 유학자들을 구덩이에 산 채로 매장한 분서갱유 사건은 이사를 ‘용서받지 못할 사람(the Untouchable)’의 불가촉 악인으로 규정하고 그의 스승인 순자마저 이단아로 몰기에 충분한 구실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사는 순자로부터 학문을 배웠으나 그 자신은 유가보다는 법가(法家)에 가까웠다. 법가(法家:Legalism). 중국 고대철학의 한 학파로서 전국시대에 노예들의 끊임없는 폭동과 신흥봉건지주계급의 발흥으로 인하여 기존의 유가적 예치(禮治)가 점점 붕괴되어 효력을 상실하자 엄격한 법으로써 나라를 다스리자는 법치사상이 등장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법가였던 것이다. 아이로니컬한 것은 법가를 부르짖은 한비자(韓非子)와 인간의 모든 활동은 통치자와 국가권력을 강화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한다고 강조함으로써 오직 국가의 강력한 통제와 황제에 대한 절대복종을 통해서만 사회적 화합을 이룰 수 있으니, 엄격하게 상벌을 내리는 법률체계로서 통일제국 진나라를 다스려야 한다는 철혈(鐵血)정책을 쓴 이사 모두 순자의 제자라는 점이었다. 그러나 한비자나 가혹하게 이 정책을 실행함으로써 진나라를 15년 만에 멸망시켜 영원히 중국에서 법가 철학을 불신 받게 한 악역의 대명사, 이사라는 제자가 순자에게서 나온 것은 결코 돌연변이는 아니었다. 오히려 청출어람(靑出於藍)이었다. 우선 순자는 공자, 맹자로 이어지는 전통적인 유가에서 하늘이 사람들의 도덕적인 권위의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음을 부정하였다.‘하늘은 사람 위에서 자연과 함께 이 세상 모든 것을 지배하는 섭리’라고 생각하는 것은 노자와 장자도 다르지 않아 이들 도가 역시 사람은 자연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일반적으로 중국 사람들은 자연과 사람을 지배하는 것은 하늘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순자는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분리시켰다. 자연에는 자연의 법칙이 있고, 사람에게는 사람의 법칙이 있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순자는 하늘에는 자각과 뜻이 있어 착하고 악함에 따라 사람들에게 복을 내리기도 하고, 화를 내리기도 한다는 기존의 하늘에 대한 신앙을 전적으로 부정하였다. 순자는 그래서 다음과 같이 말을 하고 있다. “하늘은 만물을 생성하게는 하지만 만물을 분별하지는 못하며, 땅은 사람들을 그 위에 살아가게는 하지만 사람들을 다스리지는 못한다.” 이는 스승 공자의 가르침과는 정반대의 사상이었다.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정성이란 하늘의 도요, 정성되게 사는 것은 사람의 도이다.’라고 말함으로써 하늘이야말로 이 우주만물의 지배자이며, 올바른 도의 근원으로서 사람들의 도덕적 행위의 원천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 日 도요타車 내년 생산량 세계1위…품질관리·무역마찰 극복이 과제

    |도쿄 이춘규특파원|도요타자동차가 내년 자동차 생산대수 920만대를 돌파, 미국 제너럴모터스(GM)를 제치고 세계 1위로 올라설 전망이다. 연간 생산대수 920만대에는 도요타자동차의 830만대 이외에 다이하쓰공업과 히노자동차 등 그룹 내 다른 회사에서 생산하는 자동차도 포함된다. 도요타자동차는 시가총액과 순익(1조엔)에 이어 생산 규모까지 세계 1위로 올라섬으로써 자동차업계 ‘3관왕’을 차지하게 된다고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6일 보도했다. 도요타가 이처럼 GM의 부진이라는 반사이익으로 세계 1위라는 목표를 4년 정도 앞당겨 달성할 가능성이 높아졌지만 품질 관리와 미국과의 무역마찰 등 풀어야 할 숙제도 적지 않다고 신문은 지적했다. 하지만 생산규모의 확대에 비례해 고민도 커지고 있다. 우선 품질관리다. 얼마전 127만대의 리콜을 발표했을 정도로 생산규모가 갑자기 커지면서 세계 각지의 생산공장에서 동시에 높은 품질을 유지하는 것이 어려워졌다. 도요타가 무엇보다 우려하는 것은 미국과의 무역마찰 가능성이다. 세계최대의 자동차업체인 GM은 주력인 대형차의 판매부진으로 올 3분기에만 16억 3300만달러의 적자를 기록했다. taein@seoul.co.kr
  • 儒林(450)-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6)

    儒林(450)-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6)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6) 그런 의미에서 맹자가 공자의 적자였다면 양자 역시 노자의 적자였다. 양자 역시 백가쟁명시대에 있어 노자의 ‘무위사상’을 통해 난세를 구원하려던 치열한 선각자였던 것이다. 열자의 ‘설부편(說符篇)’에는 이러한 양자의 사상가로서의 고뇌가 적나라하게 드러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어느 날 양자가 사는 이웃집의 양 한 마리가 달아났다. 그래서 그 이웃 사람은 자기 집 사람들을 다 동원하여 양을 찾으러 나서도록 한 후 양주에게도 찾아와 사람을 보내달라고 도움을 청하였다. 그러자 양주는 이렇게 물었다. “허허, 양 한 마리를 찾는데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필요하단 말이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웃 사람이 대답하였다. “양이 갈림길이 많은 길 쪽으로 달아났기 때문입니다.” 이 말을 들은 양자는 갑자기 근심스러운 표정을 짓더니 하루종일 말도 하지 않고 웃지도 않았다. 이때 제자 맹손양(孟孫陽)이 여쭈었다. “선생님, 양 한 마리는 그렇게 중요한 물건이 아닙니다. 또 선생님 소유의 양을 잃어버린 것도 아닌데 어찌 말도 않으시고 웃지도 않으십니까.” 하지만 양자는 여전히 가만히 있을 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맹손양은 자신의 선배인 심도자(心都子)를 찾아가 앞서 있었던 일을 말하자 역시 궁금해진 심도자는 맹손양과 함께 다시 양자를 찾아와 다음과 같이 이야기를 하며 자문을 하였다. “선생님, 옛날에 삼형제가 제나라와 노나라에 유학 가서 같은 스승을 모시고 유가의 도를 배우고 돌아왔습니다. 아들들이 돌아오자 그 아버지는 ‘너희들이 배운 것이 무엇이냐.’하고 물었습니다. 그때 삼형제는 ‘인의에 대해서 배웠습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 말을 들은 아버지가 다시 물었습니다.‘그러면 도대체 무엇이 인의인가.’ 아버지의 질문에 큰아들은 ‘자기 몸을 아끼고 명예를 뒤로 돌리는 것’이라고 대답했고, 둘째아들은 ‘자기 몸을 죽여서 명예를 이루는 것’이라고 했으며, 셋째아들은 ‘자기의 몸과 명예를 다 보전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이처럼 세 사람의 대답은 각각 다르지만 모두 한 유가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옳고, 누가 그른 것입니까.” 제자 심도자의 질문을 받은 양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옛날 바닷가에 사는 어떤 어부가 자맥질을 잘해서 많은 이익을 얻었다. 즉 바다 속으로 들어가 자맥질을 하여서 온갖 고기와 보물을 얻어 큰부자가 되었던 것이다. 그러자 그에게 자맥질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어 떼를 이루었다. 하지만 그 사람 중 태반이 자맥질을 배우다가 물에 빠져 죽었다. 그러면 내가 묻겠다.” 양자는 심도자에게 물었다. “그 사람들은 도대체 무엇을 배우기 위해서 그 어부를 찾아간 것이냐. 물에 빠져 죽는 것을 배우기 위함이었더냐. 아니면 자맥질하는 법을 배워 바다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보물을 꺼내기 위함이었더냐.” 스승의 질문에 심도자가 대답하였다. “그야 물론 자맥질을 배워 바다 속에 들어 있는 온갖 보물을 꺼내기 위함이었겠지요.”
  • 儒林(449)-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5)

    儒林(449)-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5)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5) 양자 철학의 핵심인 ‘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는 사상은 결국 노자의 무위(無爲)사상을 첨예화(尖銳化)시킨 것이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야말로 실로 못하는 일 없이 다하고 있음(無爲無不爲)’의 노자적 무위사상에 양자는 비록 터럭 한 올이라도 뽑지 않고 철저하게 무위함을 더 첨가하였던 것이다. 일찍이 노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일부러 문에서 나가지 않더라도 천하의 일을 알 수 있으며, 창으로 엿보지 않아도 천도(天道)를 짐작할 수 있다. 도리어 멀리 나가면 나갈수록 아는 것은 더욱 적어지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성인은 가지 않고 알며 보지 않고도 차별을 이해하며 하지 않고도 이룬다.” 노자의 계승자였던 양주의 눈으로 보면 ‘만인을 평등하게 이롭게 하고 만인을 평등하게 사랑하여야 한다.’는 묵자의 ‘겸애’는 일부러 문밖에 나가고 창을 통해 세상을 엿보려는 어리석은 행동일 뿐 아니라 유위(有爲)의 극치였던 것이다. 부처도 노자가 말하였던 무위와 비슷한 설법을 보적경(寶積經)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마음이란 무엇입니까.’하고 묻는 제자 가섭(迦葉)에게 설법한 그 유명한 내용은 ‘애욕에 물들고 분노에 떨고 어리석음으로 아득하게 되는 것은 어떠한 마음인가. 과거인가 미래인가, 현재인가. 과거의 마음이라면 그것은 이미 사라져버린 것이다. 미래의 마음이라면 아직 오지 않은 것이고, 현재의 마음이라면 머무는 일도 없다.’라는 금강석과 같은 진리의 서두로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 부처는 무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을 잇는다. “…이와 같이 남김없이 관찰해 봐도 마음의 정체는 알 수 없다. 즉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얻을 수 없는 그것은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고, 현재에도 없다. 과거나 미래나 현재에 없는 것은 삼제를 초월해 있다. 삼제를 초월한 것은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니다. 유도 아니고 무도 아닌 것은 생기는 일이 없다. 생기는 일이 없는 것에는 자성(自性)이 없다. 자성이 없는 것에는 일어나는 일이 없다.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은 사라지는 일이 없다. 사라지는 일이 없는 것에는 지나가버리는 일이 없다. 지나가버리지 않는다면 거기에는 가는 일도 없고 오는 일도 없다. 죽는 일도 없고 태어나는 일도 없다. 가고오고 죽고 나는 일이 없는 곳에는 어떠한 인과(因果)의 생성도 없다. 인과의 생성이 없는 것에는 변화와 작위(作爲)가 없는 무위(無爲)다. 그것은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이다.” 함축적인 결론을 내린다면 부처는 무위보다는 무아(無我)를 더 강조하였고, 노자는 무위를 더 강조하였다. 따라서 부처는 천연(天然)의 청정한 마음을 진리의 궁극으로 보았고, 노자는 자연 그 자체를 무위의 골수로 보았던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무위야말로 모든 성인들이 지니고 있는 타고난 본성’이라는 부처의 말은 노자에게 정확히 해당되는 공통분모였던 것이다. 이처럼 불교와 도교의 유사점은 결국 중국민족이 도교를 통해 불교를 이해하는 ‘격의불교(格義佛敎)’라는 독특한 사상을 낳았으며, 중국민족의 가장 체질적으로 맞는 화려한 선종(禪宗)을 꽃피우게 하였는데, 양자의 첨예화된 극단주의는 노자의 무위사상이 꽃피운 도교에 있어서의 뛰어난 선풍(禪風)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儒林(44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4)

    儒林(448)-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4)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4) 이는 묵자의 겸애설과 극단적인 반대사상이었다. 묵자가 ‘모든 사람을 이롭게 해주고 모든 사람들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곧 ‘겸애’를 부르짖자 ‘양자’는 ‘남을 위해서는 터럭 하나도 뽑을 수는 없다.’고 부르짖음으로써 극단적인 개인주의를 천명하였다. 묵자는 극단적인 ‘이타주의자’였으나 양자는 극단적인 ‘이기주의자’였다. 묵자가 또한 집단주의자였다면 양자는 개인주의자였고, 묵자가 엄격한 율법주의자였다면 양자는 쾌락주의자이기도 하였다. 맹자의 제2의 천적 양주. 그에 대한 기록은 그 어디에도 또렷이 남아 있지 않다. 여기저기 드문드문 남아 있는 기록들을 종합해보면 양자는 묵자와 거의 동시대에 태어나 동시대에 죽었던 것처럼 보인다. 묵자가 BC479년 무렵 태어나 BC381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고, 양자 역시 430년에 태어나 360년경에 죽은 것으로 추정되어 정확치는 않지만 사람은 거의 동시대인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위(衛)나라 사람으로 양생(揚生), 혹은 양자거(揚子居)라고도 불렸다. 그는 중국의 사상사에서 철저한 개인주의자이자 쾌락주의자라는 비난을 받아왔으나 이는 맹자를 비롯한 후대의 집중적인 ‘반대 받는 표적’이었기 때문이었다. 양주는 오히려 노자가 주창한 자연주의 옹호자로서 도가철학에 있어 가장 중요한 사상가라고 말할 수 있다. ‘삶을 대하는 유일한 방식은 인위적으로 방해하거나 바꾸려 하지 말고 삶을 있는 그대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즐겁게 사는 것이 바로 자연스럽게 사는 것이며, 이는 남이 아닌 자신에게 달려 있다고 말하였다. 지나친 집착과 탐닉은 지나친 자기 억제와 마찬가지로 자연을 거스르는 것이고, 남을 돕든 사랑하든 남의 일에 끼어드는 것은 무의미한 일로 따라서 ‘터럭 한 올을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반드시 하지 않아야 한다.’는 ‘위아설(爲我說)’을 제창하였던 것이다. ‘여씨춘추’는 따라서 양주를 ‘자기를 귀하게 여기는 사람’이라고 평가하고 있고, 한비자(韓非子)는 양자를 다음과 같이 표현하고 있다. “…위험한 성에는 들어가지 않았고, 군대에는 머무르지 않았고, 천하에는 큰 이익을 위해 자기 정강이의 털 한 올과도 바꾸지 않았다.…그는 물(物)을 가볍게 여기고, 삶을 중히 여기는 경물중생의 선비다.” 경물중생(輕物重生). 물질을 가볍게 여기고 생을 중요히 여기는 자연주의자 양주. 이러한 양주의 모습을 ‘회남자(淮南子)’는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생명을 온전하게 하여 그 진수를 보존하며 한갓 물질 때문에 누를 끼치지 않게 하는데, 이것이 양자가 수립한 학설이다.” 이러한 양자의 태도는 열자의 ‘양주편’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내용을 통해 설명될 수 있다. “털 한 올은 피부보다 작고, 피부는 사지 하나보다 작다. 그러나 많은 털을 모으면 피부만큼 중요하고, 많은 피부를 합하면 사지만큼 중요하다. 털 한 올도 본래 몸의 만분의 일의 하나인데, 이를 어찌 가볍게 여길 것인가.” 그리고 양주는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옛사람은 털 한 올을 뽑아 천하를 이롭게 할 수 있다 해도 결코 하지 않았고, 온 천하를 맡긴다 해도 받지 않았다. 모든 사람들이 털 한 올을 뽑지 않고, 또 사람마다 천하를 이롭게 하려 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천하는 안정될 것이다.”
  • 儒林(447)-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3)

    儒林(447)-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3)

    제4부 百花齊放 제2장 性善說(23) 묵가에 있어서 하늘은 인격신으로 임금이나 제후보다 더 엄위하고 그 뜻에 따르지 않는데 따라서 상과 벌을 내리는 두려운 존재이며 따라서 하늘은 공경히 받들며 정성껏 제사지내야만 하는 신앙의 대상이었으므로 백성들은 묵자에게 모두 열광적이었다.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에 묵자의 사상은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한 후 불온사상(不穩思想)으로 낙인 찍혀 강제적으로 소멸되고 그 후 다시는 중국에서 되살아나지 못하였는데, 맹자가 살았을 당시에는 어쨌든 맹자의 한탄처럼 묵적의 이론이 온 천하에 가득차 있었던 것이다. 더욱이 묵자는 근로(勤勞)하고, 절용(節用)한 생활을 스스로 실천하였었다. 자신이 말한 사상을 스스로 실행에 옮겼던 묵자의 실천주의자적 태도는 사마천이 ‘태사공 자서(太史公自序)’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을 정도였다. “그가 사는 집의 높이는 석자였고, 세 계단의 흙섬돌에다 지붕을 이은 풀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고, 굽은 서까래도 가지런히 자르지 않았다. 흙으로 만든 밥그릇, 국그릇에 거친 곡식의 밥과 명아주와 콩잎국을 먹었다. 여름에는 칡으로 만든 베옷과 겨울에는 사슴가죽으로 만든 옷을 입었다. 장사를 지냄에 있어서는 세치 두께의 오동나무로 관을 만들었고 곡도 간략히 하였다.” 이로 인해 ‘여씨춘추’에 기록된 대로 공자와 묵자를 따르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제자들도 더욱 늘어나 온 천하에 가득차게 되었으며, 온 천하는 묵가와 유가로 양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묵자는 맹자에게 있어 제1의 주적(主敵)이었다. 맹자가 제자 공도자에게 답변하였던 것처럼 ‘묵적의 도가 없어지지 않으면 공자의 도가 드러나지 않으니 어쩔 수 없이 백성들을 속여 인의를 막아버리는 요사스러운 학설, 즉 묵자의 사설(邪說)’과 싸우지 않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뿐인가. 맹자가 싸울 적은 묵자뿐이 아니었다. 제2의 적도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양주, 즉 양자였다. 묵자의 사상뿐 아니라 양주의 학설도 온 천하에 가득 차서 ‘천하의 언론은 양주에게 돌아가지 않으면 묵자에게 돌아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맹자는 ‘요사스러운 양주와 묵적의 사설을 바로잡고 치우친 행동을 막고 방자한 말을 몰아내 돌아가신 성인들의 도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이 천적(天敵)들과 사생결단의 전투를 벌이지 않으면 안 되었던 것이다. 제2의 천적 양주. 공교롭게도 묵자가 유가에서 파생되었다면 양주, 즉 양자는 노가에서 파생되었다. 그러므로 묵자가 유가의 모순을 예리하게 파헤치고 극대화시켰다면 양자는 노자의 사상을 더욱 심화시키고 극대화시켰다. 따라서 묵자와 양자는 심각한 양극단의 대립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양자는 우선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해야 한다.’는 묵자의 ‘겸애론’을 실현 불가능한 공리공론(空理空論)으로 보고 이를 맹렬하게 비판하고 있었다. 양자는 실현될 수 없는 ‘겸애론’은 혹세무민의 미혹에 지나지 않는다고 냉소하고 있었다. 양자는 오히려 ‘털 하나를 뽑아 천하가 이롭게 된다 하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는다.(拔一毛而利 天下不爲)’라고 부르짖음으로써 극단적인 이기주의를 부르짖었다.
  • 출판계가 만들어 가는 사회코드

    ‘인간 심리’와 ‘옛것’, 그리고 ‘숫자’. 요즘 출판계가 선호하는 키워드 세 가지다. 극심한 출판 불황 속에서도 제법 팔리는 책들을 보면 이 세 가지 키워드중 하나를 주제로 삼고 있다. ‘심리’가 유행하는 것은 결국 현대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반영한다.‘열 길 물 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란 속담이 요즘처럼 가깝게 다가오는 때가 있을까? 일자리를 얻기 위해, 승진하기 위해, 사랑하는 사람을 얻기 위해, 반항하는 자녀의 속내를 알기 위해 변덕스러운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심리’를 파헤치는 것은 중요해졌다. ‘평생성적, 초등학교 4학년에 결정된다’처럼 책 제목에 숫자를 끼워넣는 것도 이같은 불안 심리의 연장이다. 도덕 선생님 같은 두루뭉수리한 훈계는 싫다. 족집게 강사처럼 하나라도 실제에 도움이 되는 것을 원한다. 신년 하례때 일부 정치인들이나 휘갈려 쓰며 한껏 폼을 잡던 ‘고전’의 문구가 일반에 되살아난 것도 주목할 만한 일. 시인과 촌장의 가시나무가 조성모에 의해 리메이크되어 각광 받았듯, 수천 년, 수백 년 전 선조들이 현대의 각색자에 의해 새롭게 태어나 사람들의 지적 욕구를 자극한다. 옛것도 리메이크하면 새것. 현대인들은 옛것을 통해 오늘을 해석하고, 내일을 내다본다. 베스트셀러는 이같은 사회코드를 들여다보는 프리즘이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1) 심리를 공략하라 심리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애인이, 상사가, 동료·후배가, 자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사회가 갈수록 복잡다단해지다 보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사람들은 타인의 심리 읽기에 열중한다. 이같은 ‘심리 읽기 욕망’을 겨냥한 책들이 바로 요즘 쏟아져 나오는 ‘…심리학’류 책들이다. 남녀가 서로를 유혹하는 데 키포인트는 뭘까?능력도, 자상함도, 잘생김도 아니다. 인간의 유혹은 단지 감각의 산물이다. 약물을 써 동공을 확대시킨 여자들에게 남자들은 한결같이 열광한다. 나이트클럽의 고막이 터질 듯한 음악은 뇌의 호르몬 작용에 관여해 ‘작업’의 성사를 쉽게 한다. 이 모두 추측이 아니라 실험이 증명한 사실임을 파트릭 르무안의 ‘유혹의 심리학’(북폴리오)은 말해 준다. 1964년 미국 뉴욕의 한 동네. 새벽에 20대 여성이 집 앞에서 피살됐다. 그녀는 ‘도와 달라.’고 고함쳤고,38명의 이웃이 창문으로 현장을 보았지만 누구도 도와주거나 신고하지 않았다. 로렌 슬레이터가 쓴 ‘스키너의 심리상자 열기’(에코의 서재)에선 이 사례에서 책임의식에 대한 현대인의 심리를 본다. 개인의 책임의식은 그들이 소속한 집단의 크기에 반비례한다는 것. 실험에 따르면 오히려 목격자가 한 명밖에 없었다면 피해자가 도움받을 확률이 85%였다. 기업 경영자나 간부들이 어떻게 조직을 이끌어가야 할지 시사해 주는 대목이다. 소비를 지배하는 것도 심리다. 불황인데도 명품이 잘 팔리는 현상엔 ‘실패확률이 낮다.’란 소비자의 안전심리가 깔려 있다. 쇼핑몰에 ‘마지막 한정품’이란 푯말이 자주 붙는 것도 ‘지금 아니면 살 수 없다.’란 불안감을 부추기기 위한 것. 시식코너에 6가지의 햄을 늘어 놓은 날이 24종류의 햄을 늘어 놓은 날보다 매출이 높았다는 실험은 선택의 홍수시대에 지나친 선택을 부담스러워하는 소비자 심리를 잘 보여준다. 니혼게이자이신문 기자들이 펴낸 ‘마음을 유혹하는 경제의 심리학’(밀리언하우스)은 이처럼 수많은 경제이론 속에 숨겨져 있는 경제의 참모습을 ‘심리’라는 프리즘을 통해 살펴본다. (2) 숫자는 확실하다 지난 연말 출판되어 지금까지 베스트셀러 상위에 랭크되어 있는 책이 있다. 번역서 ‘살아 있는 동안 꼭 해야 할 49가지’(탄줘잉 편저, 위즈덤하우스). 무한경쟁의 시대에 작은 실천으로 큰 행복감을 얻는 행위들을 소개한 책이다. 내용과 함께 궁금한 것 한 가지. 왜 49가지일까?. 이에 대해 출판사측은 ‘나이 쉰이 되기 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한다.‘아 그래, 힘 떨어지기 전에, 쉰이 넘기 전 이 정도는 해야 하지 않을까?’라는 심리를 겨냥한 것. 불교에서 ‘사십구재’ 등 죽음의 의미가 있는 것도 작용했다. 원서엔 99가지로 되어 있던 것을 출판사에서 49가지만 추려냈다. 한데 이 책만이 아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보면 ‘평생 성적, 초등학교 4학년에 결정된다’(예담)‘상위 1%로 가는 10분 공부법’(파라북스)‘2010 대한민국 트렌드’(한국경제신문)‘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영진.COM) 등등. 왜 사람들은 이렇게 ‘숫자’를 좋아하는 걸까? ‘평생성적∼’를 펴낸 예담의 김태영 사장은 “궁금증과 위기의식을 유발하고, 구체적 정보를 주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고 밝혔다.‘그럼 5학년 때부터는 이미 늦어 공부 다했다는 얘기냐?’는 거부감이 들지 않을까? 처음엔 그냥 ‘평생성적, 초등학교때 결정된다’로 했다가 너무 두루뭉수리하고, 힘이 없어 보여 ‘4학년’이란 숫자를 도입했단다. 어쨌든 ‘봐라 4학년이 중요하지 않느냐.’라고 위기감을 준 것이 마케팅에서 주효해 35만부나 팔려 나갔다.‘일곱살부터 하버드를 준비하라’(북센스),‘여자의 모든 인생은 20대에 결정된다’(랜덤하우스 중앙) 등도 이같은 의도가 깔려 있다. 이같은 숫자 마케팅은 특히 미래담론에서 그 힘을 발휘한다.‘2010 대한민국 트렌드’‘10년후 한국’‘10년후 세계’‘2020 미래한국’ 등등.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시대에 미래를 예측한다는 것 자체가 난센스일 수 있다. 하지만 그럴수록 사람들의 미래에 대한 궁금증은 높아만 간다. 이런 책들은 구체적 시간, 구체적 내용을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의 마음을 잡은 책들이다. (3) 옛것은 ‘오래된 미래’ 홀대받아온 고전, 고리타분하다고 배척받아온 옛 사람들이 부흥기를 맞았다. 서점에 가면 동양고전이 세련된 장정으로 옷을 갈아 입고 유혹의 눈짓을 보낸다. 잊고 지냈던 옛 선조들이 수백년을 뛰어넘어 나와 정신 똑바로 차리라고 호통을 친다. 요즘 독자들의 시선을 받는 고전은 ‘옛날이란 시대’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생생히 살아있다. 아니 현실을 넘어 미래를 이야기한다. 신영복 성공회대 교수가 동양 고전을 재해석해 풀어낸 책 ‘강의’(돌베개)는 5만부나 팔렸다. 고전책으론 엄청난 기록. 한국의 대표적 진보 학자인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패권 질서로 위기에 처한 세계문명의 대안을 동양고전에서 찾는다. 내 나라, 내 가족, 나 자신의 이익만이 판치는 현대에서 이웃과 공생하는 관계론의 시각으로 공자와 맹자, 노자, 장자를 해석한다. ‘옛 공부의 즐거움’(웅진지식하우스)을 쓴 이상국은 고전과 옛 사람들을 ‘놀이의 장’에 끌어 들인다. 노자의 ‘도덕경’을 놓고 김춘수와 유치환, 박경리를 불러내 작품 이야기를 펼친다. 글과 실용의 일치를 주장하고 실천했던 연암 박지원과 다산 박지원을 불러내 공리공론만 일삼고 있는 선학들을 꾸짖기도 한다. 정민의 ‘미쳐야 미친다’(푸른역사), 이덕무의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에 나오는 18세기 조선의 학자들은 현대 한국의 지식인 사회가 거울로 삼아야 할 선학들이다. 이덕무씨는 “다산과 연암 등 열린 지식인층이 주류로 편입되지 못하면서 조선 지식인 사회는 성리학 중심이라는 폐쇄회로에 갇혔다.”고 분석한다. 또 오늘날 한국의 지식인 사회도 상아탑의 폐쇄적 권위와 전문분야 지식에 대한 독점적 자세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지적한다. 임창용기자 sdragon@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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