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편 역사소설 추사 낸 한승원
일상 속의 우리 전통문화가 인지와 욕구에 의해 양육된 정신과 문명의 결정체라면 추사 김정희는 여기에 자양분을 제공하는 유장한 젖줄이다. 그는 사상적으로는 실학을 낳은 북학의 실천가였고, 문화적으로는 시·서화를 넘나든 대가였으며, 정치적으로는 세도정치에 온몸으로 맞선 신념의 선비였다. 그러나 이런 평가조차 기실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듯 손끝을 붙잡고 그를 희롱하는 일인지 모른다. 윤곽을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커서 마치 태허(太虛)와 같은 추사의 전모와 실체를 지금껏 누구도 명쾌하게 복원해내지 못한 까닭이다.
●관찰자 입장에서 예인의 삶 실체적 묘사
그런 추사의 불꽃 같은 삶이 문학으로 되살아났다. 문단의 중진인 소설가 한승원(68)의 근간 ‘추사’(열림원·전2권)가 그것. 작가는 추사에 매달려 산 세월을 이렇게 술회한다.‘잠자리에 들면서도, 산책을 하면서도, 여행을 하면서도 추사 생각을 했다. 추사의 귀로 들으면서, 추사의 머리로 사유했다. 그러다가 추사가 된 꿈을 꿨다.’ 이렇게 복원해낸 장편소설이다.
글밭으로 들어가 보자.‘그래, 나 이 겨울 한파 속에서 그대들의 온정이 있어 이렇게 살아가고 있다. 뜨거운 감회를 주체할 수 없어 하늘을 향해 얼굴을 쳐들고 심호흡을 했다. 이상적에게 무엇으로 보은할까.
시방 나의 형편으로는 난을 쳐주거나 그림을 그려 보은하는 수밖에 없다.(중략)줄기가 없지만, 칼 같은 잎사귀와, 봉이나 코끼리의 눈 같은 꽃으로 기품을 드러내는 난이 도학자 풍이라면, 줄기가 튼실하고 헌걸찬 소나무는 유학자 풍이다.’
이런 사유가 마침내 엄혹한 시한의 추위에 갇힌 그를 불꽃처럼 일렁이게 했을 것이고, 붓을 들어 독야청청한 노송으로 거침없이 화폭을 채워나갔으리라.
‘설 전후의 고추 맛보다 더 매운 찬바람이 몰아치자, 모든 짐승과 새들은 모습을 감추고, 푸나무들은 죽은 듯 말라 적막하건만 건장한 소나무만 푸른 가지를 뻗은 채 우뚝 서서 제 몸을 지탱하기 힘들어하는 늙은 소나무 한 그루를 부축하고 있다. 그 부축으로 말미암아 늙은 소나무는 간신히 푸른 잎사귀 몇 개를 내밀고 있다. 그 두 나무 옆에 집 한 채가 있는데, 그 집은 마음을 하얗게 비운 유마거사처럼 사는 한 외로운 사람의 집이다.’
우리가 아는 ‘세한도(歲寒圖)’는 이렇게 그려졌다. 더 엄밀하게는 이 묘사가 추사의 그것이 아니라 한승원이 복원한 ‘세한도초(歲寒圖抄)’일 터이지만 시대와 불화했으면서도 이를 불행이라 여기지 않은, 한 꿋꿋한 예인의 삶을 관찰자 시점에서 이렇듯 실체적으로 그려낼 수 있다는 게 새삼 반가운 한승원의 저력이다.
●“역사가 어떻게 반복되는지 체험했으면…”
작가는 소설 추사의 집필이 운명적이었다고 말한다. 토굴에서 기거하던 그가 한낮 선잠 속에서 추사를 만나 일상의 담론을 주고받으며, 왜 내게 그렇게 집착하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답한다.“추사와 그의 시대를 읽다 보면, 아주 슬프고 절망적인 현실과 광기어린 삶을 만나게 됩니다. 청나라로부터 근대문명을 받아들여 개혁하려는 북학파 추사를, 지긋지긋하게 탄핵해 죽이려는 세력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오늘날 이 땅의 어떤 거대한 보수집단하고 같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저는 ‘추사와 그 이야기’를 통해 그 반복되는 슬픈 일을 나 스스로 각성하고, 경계하고 싶었습니다.”
문단 안팎에서는 벌써부터 이 소설이 어쭙잖은 무료의 소산과는 격이 다르다는 평가를 내놓는다. 추사라는, 너무나 크고 넓어 어디서부터 모사(模寫)의 붓질을 해야 될지 아득하기만 한 주제에 이렇듯 치열하게 매몰되기가 결코 쉽지 않다는 상찬이기도 하다.
작가는 소설 추사를 통해 누구나 한번쯤은 도대체 역사가 어떻게 되풀이되는지를, 그리고 그 역사의 반복이 왜 무서운지를 체험하라고 채근한다. 이 지점에서 한승원은 작가 이전에 험난한 세상을 치열하게 산 원로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전2권 각9500원.
심재억기자 jeshim@seou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