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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대의 「이적굿판」 거부(사설)

    『범청학련이 또다시 아크로폴리스 광장에서 대표성없는 북한학생의 메시지를 읽는 일을 용납할 수 없다.』 「서울대 총학생회」가 이른바 「조국통일범민족청년학생연합(범청학련)」이 제안한 「반미 투쟁선포식 서울대개최안」을 거부하면서 한 말이다.자유와 지성의 광장인 서울대 아크로폴리스에서 반지성적 굿판이 벌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명백한 뜻으로 받아들여진다. 우리는 「서울대총학」의 이런 거부가 매우 타당한 것이라고 본다.특히 그것은 「범청학련」에 대해 『현실성없는 남북한 민족과 해외동포 3자연대를 통한 통일방안을 고집하고 있고 한반도의 분단상황에 대한 객관적 인식이 결여돼 있다』고 지적한 논리는 온당하다. 지식인의 사명은 기본적으로 역사와 시대를 바르게 읽는 능력을 지니는데서부터 출발한다.우리의 분단상황을 해소하기 위해서는 우선 그 상황인식이 냉철해야 한다.그러나 북한의 「남조선혁명노선」에 근거를 둔 연방제통일방안과 그것을 위한 「반미투쟁」의 구호를 내세우며 학원의 혼란을 집요하게 조성해온「범청학련」의 행태는 한반도의 현대사에 대한 바른 인식도 아니고 따라서 올바른 대응일 수도 없다.통일을 위해 선행되어야 할 분단상황의 해소방안이 이렇게 지식인다운 이성적 판단이 결여된 것을 아크로폴리스광장에 받아들이지 않겠다는 서울대학생들의 의지는 그들의 자존심이라고 할 수 있다. 「범청학련」은 지난해 8월 한총련을 배후에서 조종하며 연세대 사태를 일으키게 한 세력으로 검찰에 의해 이적단체로 지목되어 있다.한총련의 「연세대 사태」가 얼마나 몰지성적이고 상처만 남긴 행사였는지는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다. 「통일운동」의 거짓보자기에 싸인 「범청학련」의 불온한 기도에 더이상 기만당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한 「서울대총학」의 태도는 최근에 학원가에 일고 있는 일련의 움직임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대학가에 이는 이성의 회복에 신뢰를 보낸다.
  • 대학가에 지성의 축제를(사설)

    요즈음 대학가에서 일고 있는 신선한 바람을 희망을 가지고 지켜본다.특수 이념에,그것도 역사의 제단에 파산선고를 올린 이념에 경도되어 투쟁일변도로 지새우던 운동권에서 탈피하려는 움직임이 대견하고 고맙다. 현실적으로 그런 것들이 끼치는 영향력과 변수 요인을 생각해서 그런것만은 아니다.지금은 새로운 세기를 1천일도 남겨놓지 않은 순간이다.지금 우리에게 당면한 일은 지성적 역량의 배양이다.특히 식민상태를 벗어나 민족전쟁을 치르고 분단상태에서 가난을 극복해오는 동안 온갖 시련을 이기고 선진 진영의 나라에 참가할 수 있는 지점에 이른 우리의 앞날은,지성만이 해답을 줄수 있는 시대로 들어서고 있는 것이다. 그 중심세력이 될 주인공은 바로 지금의 대학생들이다.그들이 낡을대로 낡은 이념 노선에 박힌 말뚝에 묶여 폭력투쟁으로 인생을 소모하는 일은 국력을 후퇴시키는 일이다. 대학가에는 지성의 축제가 충만해야 한다.그 자유롭고 창의적인 기운을 체질로 흡수하여 내일을 위한 불꽃의 심지가 박혀야 한다.그런 고귀하고 무한한 가능성의 자원을 용도폐기된 이념을 지키기 위해 편협하고 폐쇄적인 일부 운동권 집단에 내준채 속수무책인 것은 너무 큰 과오다. 대학가에서는 어떤 이름의 폭력시위도 정당화될수 없다.상반된 이론과 지식 감성까지도 젊음의 감수성으로 여과하고 공존하는 것이 대학인의 특권이고 능력이다.서로를 허락하고 서로를 길들여 가장 지혜로운 결과를 탐색하는 아름다운 세계가 지성의 세계다.폭력은 그것을 가로막는 원시적 행동이다. 지금 학원에서 성장하는 젊은이들의 지적 원동력과 잠재력만이 우리가 기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자원이다.그러므로 대학가에 폭력투쟁의 광기가 가라앉고 지성의 축제가 풍기는 역동적인 기운이 가득해지는 일은 우리의 희망의 단서다.이 단서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도 거듭 대학가에 지성의 축제를 기대한다.
  • 대전·충남 12개대 한총련 탈퇴/총학생회 공동회견

    ◎“폭력시위·정치투쟁 시대상황에 역행”/강원대도 “동맹휴업 불참” 대학 시위를 주도해 온 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한총련)을 탈퇴하는 대학들이 잇따르고 있다.또 한총련 주도 행사에 불참하는 대학들도 늘고 있다. 이는 지난해 연세대 사태이후 한총련의 과격 폭력시위를 대다수 학생들이 외면하고 있는데다 최근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으로 주체사상의 허구성이 드러나 운동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 대학가에 번지고 있기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목원대와 배재대 등 대전·충남지역 12개 대학 총학생회는 26일 한총련 탈퇴를 선언했다.이들 대학 총학생회는 이날 목원대 스톡스홀 세미나실에서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한총련은 폭력시위와 정치투쟁 일변도의 노선으로 변화하는 시대상황과 학생들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했다』며 『한총련을 탈퇴,대다수 학생들의 의견을 반영해 건전한 비판을 통한 연구 및 면학분위기 조성에 힘쓰겠다』고 밝혔다. 이들은 또 앞으로 한총련 회비 납부를 중단하는 한편 빠른 시일내에 대전·충남지역 총학생회 연합회를 구성,지역사회 발전에 기여키로 했다. 이날 한총련 탈퇴한 대학은 목원대 배재대 중부대 우송산업대 침례신학대 대전실업전문대 대전전문대 대전보건전문대 중경공업전문대 충남전문대 을지의과대 한국방송통신대 대전·충남지회 등이다. 이에 앞서 25일 부산외국어대 총학생회가,14일에는 경남대와 경상대 등 경남지역 7개 대학 총학생회가 같은 이유로 한총련을 각각 탈퇴했었다. 한편 강원대 총학생회는 이날 한보비리와 김현철씨 국정개입 의혹 등과 관련 한총련이 28∼29일 전국적으로 주도키로 한 동맹휴업에 불참하겠다고 밝혔다.
  • 서울 등 6대도시 버스노조/“내일부터 파업” 결의

    전국자동차 노동조합연맹(위원장 강성천)산하 6대도시 버스노조는 24일 파업 찬반투표를 실시,25일까지 임금협상이 타결되지 않으면 예정대로 26일 상오 4시부터 무기한 전면파업에 돌입키로 했다고 밝혔다. 서울버스지부는 이날 87개 사업장에서 조합원 1만8천362명 중 1만6천61명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한 파업찬반 투표에서 94.2%인 1만5천133명의 찬성으로 파업을 결의했다. 부산(94.7%)·대전(94.7%)·인천(94.4%)지부에서도 파업찬성으로 결정이 났다.이날부터 25일 상오 6시까지 투표를 실시하는 대구·광주지부도 파업 찬성이 확실시되고 있다.대구 등 일부 지부는 파업에 대비,이미 준법투쟁에 들어간 상태다. 연맹측은 기본급 15.7% 인상과 상여금 50% 인상을 요구하고 있다.사용자측은 요금인상 없는 임금인상은 불가능하다는 입장이다. 한편 서울시는 버스노조가 파업에 돌입하면 상오 7시부터 9시까지인 지하철의 혼잡시간대 운행을 상오 11시30분까지로 2시간30분 늘리기로 하는 등 비상수송대책을 마련했다.이와 함께 21개 노선에 전세버스를 투입하고 개인택시 부제를 해제키로 했다.
  • 대학가 “탈운동권 ”러시/“바뀐 세상”… 정치투쟁 일변 외면

    ◎한총련 탈퇴 도미노 현상… 황장엽 망명 기폭제/복지·취업 등 관심 변화… 153곳중 비운동권 62곳 대학가에 변화의 바람이 거세다. 예년 같으면 하루가 멀다 하고 시위가 이어졌을 지금이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완전 딴판이다. 대학측은 물론 상당수 대학생들도 정치투쟁 일변도의 학생운동에 아예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학생복지와 건전한 대학문화 창달이 주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을 뿐이다. 이는 곧 대학시위를 주도해 온 「한국대학 총학생회 연합(한총련)」의 뚜렷한 퇴조 현상과 통한다. 반대로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을 둔 대학들은 이미 한총련 탈퇴를 결행했거나 결별을 준비하고 있다. 변화의 원인은 1차적으로 한총련에 대한 학생들의 「염증」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작년 연대사건 염증 절정 한총련은 학생들의 일반적인 정서와는 무관하게 정치투쟁으로만 치달았고,투쟁 양상은 지난해 8월 연세대 불법점거 시위로 정점에 이르렀다. 특히 한총련의 주축세력으로 「주체사상파(주사파)」인 NL(민족해방)계열의 주장은 주체사상 완성자인 황장엽 북한 노동당 비서의 망명으로 「공허한 메아리」로 치부되고 있다. 그럼에도 한총련은 어떠한 체질변화도 꾀하지 않았다.당연히 일반학생들과의 거리감이 갈수록 멀어지는 결과를 낳았다. 둘째,이제는 대학이 명실상부한 상아탑으로 발돋움해야 한다는 학생들의 「인식전환」도 대학가 변화의 주요 동인이다. 장학금 확충을 비롯한 교육여건 개선과 면학분위기 조성,학생복지 확대,건전한 대학문화 창달 등이 대다수 학생들의 주요 관심사가 되고 있다.이같은 현안을 공약으로 내건 비운동권후보들이 지난 해 말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약진」한 것도 이 때문이다. 세째,신세대 사고방식을 가진 학생들이 주류를 이루는 대학가의 전반적인 분위기도 『왜 최루탄과 돌멩이가 난무해야 하는가』라는 인식을 확산시키고 있다. 사실 한총련의 퇴조현상은 지난해 말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상당 부분 예견된 것이다. 전국 153개 대학 중에서 NL계열은 고작 70개대를 장악하는데 그쳤다.반면 62개대에서는 비운동권 총학생회장이 선출됐다.전년의 50개대보다 12개대가 늘어난 것이다. 나머지는 같은 운동권이지만 노선이 다른 PD(민중민주)계열과 「21세기진보연합」이 각각 14개대와 7개대를 차지했다. 비운동권의 「약진」은 앞서 언급한 이유들에 힘입은 것으로 풀이된다. 대학가 변화를 주도하는 세력도 바로 이들이다.일반학생들의 유·무언의 지원이 이들에게는 큰 힘이다. 20여곳의 대학 총학생회가 한총련 탈퇴를 선언했거나 결별을 목전에 두고 있고 나머지 대학들에도 「이탈 도미노현상」이 잇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인간띠로 행사 원천봉쇄 일반학생들을 인간띠로 묶어 한총련 행사를 원천봉쇄한 대학도 있는가 하면 회비납부를 거부하거나 한총련과는 별도의 협의체를 구성한 대학들도 있다.연세대 등에서 전개하는 「대학가 정화운동」도 같은 맥락이다. 심지어 몇몇 대학에서는 한총련의 주도권을 쥐기 위해 한총련 의장의 직선제를 요구하기도 한다. 이같은 외우에 직면한 한총련은 내환에도 시달리고 있다. 같은 운동권인 PD계와 21세기진보연합이 NL계 퇴조의 틈새를 비집고 한총련의장에 욕심을 내고 있기 때문이다.이처럼 내분에 휩싸여 한총련 지도부를 공식 추인하는 대의원대회도 열지 못하고 있다.당초 지난 14일 개최키로 했다가 다음달 4일로 연기했다. 한총련의 투쟁일변도에 가장 강하게 반기를 든 곳이 경남지역 대학들이다.경남대를 비롯,경상대·창원전문대·진주전문대·창신전문대·진주간호전문대·남해전문대 등 7개대 총학생회는 지난 14일 건전하고 순수한 학생운동을 기치로 내걸고 한총련 탈퇴와 함께 「경남지역 총학생회 협의회」를 출범시켰다.전국에서 처음으로 한총련과 노선을 달리하는 협의체를 구성한 것이다.경총협 한삼협의장(30·경상대 총학생회장)은 출범식에서 『학생운동이 90년대 들어 변화하는 사회 상황을 따라가지 못해 연세대 사태와 같은 학생운동의 침체와 위기를 가져와 국민들의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하고 있는데다 대다수 학생들로부터도 외면당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한총련 탈퇴 ▲건전한 대학문화 창달 ▲건전한 사회활동에 적극 참여 등을 다짐했다. 경총협은 건전한 학생운동을 이끌어나가기 위해학생복지 향상과 교육여건 개선,취업률 제고,대학간 상호교류 확대,환경운동 캠페인 등을 주요 사업으로 명문화했다. ○경남대 등 별도조직 출범 지난 12일 「광주·전남지역 총학생회 연합(남총련)」이 호남대에서 열려던 「고 표정두열사 정신계승대회」는 호남대 총학생회(회장 김성훈·26·경영 4년)의 제지로 무산됐다.호남대 총학생회는 다수 학생들의 참여 속에 「학교 지키기 위한 인간 띠잇기」로 행사 개최를 막았다.남총련은 한총련 산하 지역조직 가운데 가장 과격한 행태를 보여왔다는 점에서 이번 「사건」은 세간의 관심을 끌었다. 호남대 총학생회는 『앞으로 면학분위기를 저해하는 어떠한 집회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뜻을 같이 하는 광주·전남지역의 다른 대학 총학생회와의 연대도 모색중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대구의 대구대·경산대·경일대 등 3개대는 아예 한총련 회비 납부 중단을 선언했다. 이들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지난 12일 기자회견을 통해 『학생운동이 국민들에게 불안감을 주고 위법행위를 자행한다면 국민들의 공감을 얻을 수는 없을 것』이라면서 『한총련의 개혁이 이뤄질 때까지 한총련과 대구·경북총학생회 연합(대경총련)회비를 납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대구지역 각 대학 총학생회는 학생회비의 1%를 한총련에,3%는 대경총련에 분담금으로 내고 있다. 이들은 ▲계급투쟁 및 통일우선 논리가 아닌 학생운동의 새로운 방향 제시 ▲한총련의장 직선 및 예·결산 공개 ▲투쟁 위주의 학생운동 노선 지양 ▲상명하달식의 한총련 운동지침 일소 ▲교육환경 개선과 지역사회 정서순화 주력 등 5대 개혁과제를 제시했다. 이에 앞서 연세대 총학생회는 한총련이 이념투쟁 노선을 버리지 않으면 탈퇴하겠다고 선언,이런 움직임을 선도했었다. ○교육여건 등 주력점 변화 이밖에 강릉대·배재대·인하대 등도 비운동권 총학생회를 중심으로 한총련 주도의 정치투쟁보다는 학생복지와 교육여건 개선에 힘을 쏟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총학생회가 학생들의 일상 생활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은 바람직스런 방향』이라고 말하고 『앞으로 이같은 움직임에 탄력이 붙을 것』으로 전망했다.대학이 정치투쟁장소로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느 때보다 엄정한 학사관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점차 왜소해지는 한총련이 위기 국면 탈출을 위해 과격한 행동에 나설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그러나 일반 학생들의 외면 정도도 이에 반비례해 더욱 심해질 전망이어서 한총련은 이래저래 향후 진로에 대해 깊은 고민에 빠질수밖에 없을것 같다.
  • 경남지역 5개대 한총련 탈퇴

    ◎건전한 비판 노선 지향 새 협의회 발족 경남지역 5개 대학이 한총련의 노선에 반대,탈퇴를 선언했다. 경남도내 경상대·경남대·진주전문대·남해전문대·창신전문대 총학생회장단은 13일 한총련의 감상적인 통일 투쟁을 비판하며 한총련 탈퇴와 함께 「경남지역 총학생회 협의회」(경총협·의장 한삼협·29·경상대 총학생회장)를 발족시킨다고 밝혔다.이들 5개대 총학생회장들은 이날 경남대에 모여 이같이 결의하고 14일 기자회견을 통해 밝힐 것으로 알려졌다. 경총협은 한총련의 통일 투쟁과 좌경 이미지를 극복키로 하고 운동노선을 △학내비리 척결 △강의수준 향상과 면학분위기 조성 △건전한 비판을 통한 사회참여 △학생복지 및 권익 향상 등으로 새로운 학생운동 노선을 정립할 것이라고 밝혔다.경총협은 또 앞으로 비한총련계열의 대학 총학생회와의 연대로 새 차원의 학생운동을 전개해 나가기로 했다.
  • 학생회가 막은 남총련집회(사설)

    광주 호남대총학생회가 「학교를 지키기 위한 인간띠 잇기」로 남총련(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의 집회와 시위를 봉쇄한 것은 새학기를 맞은 대학가의 신선한 충격이 아닐수 없다.남총련은 12일 호남대교정에서 87년 분신자살한 이 대학 학생 표정두씨의 10주기추모「10만학도 결의대회」를 가지려 했으나 『면학분위기를 해치는 어떤 집회도 허용하지 않겠다』는 비운동권총학생회의 강력한 반대로 무산됐다. 우리는 이런 일이 광주지역에서 일어난 사실에 주목하고자 한다.광주는 지금까지 이념투쟁을 내세운 한총련 폭력시위의 메카로 인식되어 왔고 남총련은 한총련산하 지역조직중 가장 과격한 행태를 보여왔기 때문이다.그동안 광주에서도 지역기관장·대학총장들이 시위자제를 촉구한 바 있고 대학당국이 남총련집회를 거부한 일은 있지만 총학생회가 스스로 이를 막아낸 것은 처음이라고 한다.우리는 「학교를 지키기 위한」 호남대총학생회의 용기있는 행동에 박수를 보내면서 전국의 대학가로 확산되기를 기대한다.그리고 광주·전남지역의 각 대학 총학생회는 이를 계기로 자기 고장의 이미지개선을 위해 노력해주기 바란다. 요즘 대학가에는 오도된 학생운동을 바로잡기 위한 움직임이 서서히 번지고 있다.연세대총학생회는 한총련이 이념투쟁노선을 버리지 않는 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으며 대구대·경산대·경일대 등 대구·경북지역 3개 대학 총학생회회장은 한총련회비를 내지 않겠다고 결의했다.이와 함께 건전한 대학문화의 정립과 면학풍토조성을 위한 새로운 학생운동이 움트고 있다.연세대·고려대·홍익대·이화여대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학가 정화운동」이 그것이다.이 운동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가』를 학생 스스로 자각한 몸짓이란 점에서 중요한 뜻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한다.한총련지도부는 이 새로운 물결을 직시해야한다.우리는 이 물결이 대학가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힘차게 뻗어가기를 기대한다.
  • 호남대 학생회/남총련 교내행사 저지/“정치투쟁장화 불용”

    ◎경북 3개대선 한총련 개혁 촉구 광주 호남대 총학생회가 면학분위기 조성을 위해 남총련의 집회를 제지하고 대구대 등 경북지역 3개 대학 총학생회장이 한총련의 개혁을 요구하고 나서는 등 새학기 들어 학생운동권에 새로운 양상이 전개되고 있다. 호남대 총학생회(회장 김성훈·26·경영4)는 12일 하오 2시 광주시 광산구 서봉동 광산캠퍼스 도서관앞에서 광주·전남총학생회연합(남총련)이 주최하는 「고 표정두열사 정신계승대회」를 반대하며 「학교지키기 위한 인간띠잇기 운동」을 전개,이 행사를 무산시켰다. 총학생회는 이날 낮 12시부터 학생 200여명을 동원,집회장소인 도서관앞 150m를 「인간띠잇기」로 운동권학생들의 출입을 막았다.또 총학생회는 이날 호소문를 통해 『순수한 추모제는 막지 않겠으나 학교를 정치투쟁의 장으로 방치할 수 없다』며 『면학분위기를 저해하는 어떠한 집회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대구대·경산대·경일대 등 경북지역 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한총련의 운동노선에 반발,개혁과제를 제시하고 나섰다. 이들3개 대학 총학생회장들은 이날 하오 3시 대구 그랜드호텔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총련에 5가지 개혁과제를 제시한 뒤 이 개혁과제가 수렴될 때까지 한시적으로 한총련 회비와 대경총련(대구·경북지역대학총연합)회비를 납부하기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 복수노조 허용(산업현장 어떻게 달라지나:상)

    ◎노조 선명 경쟁땐 경제회복 찬물/무노조 사업장 파고들어 갈등부를 소지/한국노총­민노총 주도권다툼 자제해야 국회가 10일 노동관계법 개정안을 여야 합의로 처리함에 따라 노동관계법은 제정된 지 44년만에 완전 새 옷으로 갈아입게 됐다.새 노동법 시행으로 달라지게 될 노사관계를 주요 쟁점별로 짚어본다.〈편집자 주〉 노동관계법 재개정으로 산업계에 미칠 최대 변화를 꼽는다면 상급단체의 복수노조 즉시 허용이 될 것 같다. 지난해 12월26일 여당이 단독으로 강행처리한 노동법 개정안에는 정부안 가운데 「상급단체 복수노조 즉시 허용,단위사업장 5년 유예」 조항이 「상급단체 3년 유예,단위사업장 5년 유예」로 수정됐으나.여야는 이를 정부 원안으로 되돌려 놓았다.따라서 노동법 파동 이후 총파업 사태를 사실상 주도한 민주노총과 민주노총 산하 9개 산별연맹은 재개정법안이 발효되는 이번 주말부터 합법단체로 바뀌게 된다. 민주노총의 합법화는 지난 50년 동안 한국노총 독점체제가 복수의 경쟁체제로 바뀐다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민주노총의 합법화는 한국노총과의 영토 확장경쟁 즉,선명성 경쟁을 예고한다.이미 노조가 결성된 사업장은 물론 노조가 없는 사업장까지 「무차별」 침투경쟁이 시작된다는 뜻이다. 노동법 개정 논의 이후 한국노총과 재계가 내심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에 민감하게 반응한 것도 이 때문이다. 현재 외형적으로 비교하면 한국노총은 소속 노조 5천875개 조합원 1백20만명,민주노총은 소속 노조 950개 조합원 50만명으로 한국노총이 절대 우위에 있다.그러나 총파업 투쟁에서 증명됐듯이 현대그룹 노동조합 총연맹(현총련)을 비롯,한국통신,지하철노조 등 대형 제조업과 공공부문의 사업장이 모두 민주노총에 소속된 반면 한국노총은 영세 사업장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사업장의 경쟁력 뿐 아니라 노조의 「전투력」에서도 민주노총이 절대적인 우위에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상급단체의 복수노조 시대가 개막되면 민주노총의 영토는 급격히 확장되는 반면 한국노총은 위축되리라는 전망이 나오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은 이같은 우려를 의식한 듯 최소 3년간은 급격한 노동운동을 자제하겠다고 밝히고 있으나 실행에 옮겨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민주노총 관계자들이 공언하듯이,지금까지 「적대세력」으로 분류해온 삼성그룹·포철·선경그룹·서울방송 등에 대한 「우호적인 노조 심기」 공세가 가속화될 것으로 예상된다.노동법 개정으로 제3자 개입의 합법성을 확보함에 따라 노조 결성은 물론 노사분규에까지 개입할 수 있는 길이 열렸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민주노총이 마냥 독주하지는 못하리라는 견해도 만만치 않다.상급단체의 복수노조 허용은 「이질적인」 노동운동가들의 집합체인 민주노총도 투쟁노선에 따라 핵분열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오고 있다.제3의 노총은 물론 산별연맹 단위에서도 분열이 이루어질수 있다는 뜻이다. 결국 노동계가 상급단체 복수노조 허용이라는 법취지와 국민감정,경제적 어려움 등에 어느 정도 부응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노사관계 정착이라는 노동법 개정의 성패도 달린 것으로 볼 수 있다.
  • 등 이후 중 노선갈등 없을것/리처드 바움(해외논단)

    등소평사후 중국지도부내의 노선갈등 가능성을 놓고 여러 가능성이 점쳐지고 있다.중국문제의 권위자인 리처드 바움 미국 UCLA대학교수는 아시안 월 스트리트 저널 최근호에 기고한 「실용주의자들의 등장」이라는 글에서 등이후 지도자들이 대부분 개혁지향의 실용주의자들이기 때문에 그들간에 심각한 노선갈등은 없을 것이라고 진단했다.다음은 이 기고문의 요지. 등소평 사망 이후 중국지도부 내에 후계 문제를 놓고 심각한 위기가 발생할 것이라는 예상은 빗나가고 있다.북경은 평상시와 다름없다.홍콩에서는 여러해 동안 등의 건강악화에 관한 가벼운 소문만 나도 곤두박질쳤던 항셍주식지수는 등이 사망하자 300포인트(2.3%)나 올랐다.그밖의 아시아지역에서도 정치지도자들이나 보통시민들은 한결같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다. ○권력이양 순조롭게 진행 일부인사들은 등소평이 병상에 너무 오래 있어서 그의 사망에 대한 충격을 줄였다고 주장한다.등이 좀더 일찍 93년이나 94년에 사망했더라면 중국은 강력한 중국지도자들이 사망했을 때와 마찬가지로정파간 권력투쟁이라는 도식에 빠져들었을 것이라는 뜻이다.등이 연장된 삶을 살아감으로써 그가 선택한 후계자 강택민은 그의 권력기반을 확장하고 공고히 할 귀중한 시간을 벌었다.혁명적 영웅주의와 개인적 카리스마가 없는 무색의 테크노크래트인 강은 등의 오랜 투병생활이 제공한 여분의 시간을 이용,공산당 내의 추종자들을 길러내고 그의 공적인 이미지를 유능하고 곧은 지도자로 고양하고 가장 중요한 문제인 중국군 주류와 일련의 밀접한 연계를 진행시키는 작업을 해낼수 있었다는 설명이다. 등사후의 권력 이양이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는 것은 근본적인 이념갈등이나 현 지도자들간에 깊은 개인적 원한이 없다는 것을 반증한다.76년 모택동사후 중국 전역이 화해할 수 없는 두 적대적인 진영으로 양극화되었을때와 달리 오늘날의 제3세대 중국 정치지도자들은 근본적으로 개혁을 지지하는 실용주의자들이다.경제적으로 지속적인 시장경제화와 외부세계에 대한 개방의 최적 범위와 속도에 대한 지도자들간의 주요한 의견 차이는 끝났다.정치적으로도 중도우파와 중도좌파에 이르는 의견의 차이만 보이고 있을 뿐이다.아무도 진정한 모택동주의자가 아니고 아무도 진정한 민주주의자도 아니다.그들의 내적인 차이는 기본적으로 정도의 차이일 뿐이다. 북경에 여전히 불안과 불안정의 요소가 있다는 것은 분명하다.1989년 천안문 사태 직후 등소평의 개인적 권위가 중국을 결속시켜 89∼91년사이에 대부분의 다른 공산주의 체제에서 발생한 운명을 피할 수 있게 했다.시간이 지나고 지속적 경제발전 덕분에 천안문사태의 고통스런 상처에서 국민들의 관심을 분산시키게 했다.등은 마지막 순간까지 천안문사태에 대한 판결을 뒤집으려고 하지 않았다.천안문사태를 해결키 위해 군사력을 사용하라는 명령을 개인적으로 내렸기에 등은 그의 위신 손상을 감내해야 했다.등이 사망함에 따라 그 당시 결정을 번복하라는 압력이 표출될 것 같다.이것은 다음 차례로 등사후 지도력의 통일성과 지속성을 시험할 것 같다.강택민이 89년 유혈사태에 대해 개인적인 책임이 없지만 이붕 총리는 그렇지 않다.이붕은 당시 계엄령을 열렬히 이행한 장본인이다.제15차 중국공산당대회는 68세의 이붕이 정치국원으로 남아있느냐 또는 현역에서 은퇴해 다른 자리로 가느냐를 결정해야만 한다.만약 후자의 일이 발생한다면 우리는 화해의 징후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그런 화해의 한 징후는 89년 강경파의 희생양이 된 조자양의 복권 결정이 될 것이다. 강택민은 당내에 불만을 가진 보수파들의 도전을 물리치기 위해 공산당중앙위 의장직의 부활을 시도할지 모른다.강이 그 직위를 부활해 자신이 취임하려 한다는 보도가 나와 있다.이런 일이 실제로 일어난다면 그것은 집단지도체제를 해치고 지도력 통합과 단결이라는 공적인 주장을 배신하는 것이다. ○이붕·조자양 진로 변수로 마지막으로 등의 사망은 북경정치의 미묘한 민·관 균형을 바꿀수도 있다.인민해방군 장성들로부터의 개인적 지지를 구축하려는 시도로 강은 때때로 그의 정책 우선순위를 장성들의 입맛에 맞게 수정했다.특히 95∼96년 대만과의 양안간 위기때 강경노선을 받아들이도록 압력을 받았을때 그랬다.등이 사라진 지금 비토그룹으로서 역할을 하는 인민해방군은 자기들의 정책 우선순위와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해 더욱 대담해질수도 있다.만약 중국이 대만통일 문제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천명한다면 이는 군사적 영향력이 증가한 한 증거로 볼 수 있을 것이다.지도력의 안정과 정책의 계속성 등 지금까지의 징후는 길조이다.공산주의 나라치고 순조로운 권력이양을 이룬 예가 드물다는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성급한 낙관과 자만심은 금물이다.만약 중국이 순조로운 권력이양에 성공한다면 이는 「제2의 중국혁명」이라는 대과업을 이끌어온 등이 이룩한 최고의 업적이 될 것이다.〈미 UCLA 교수/정리=유상덕 기자〉
  • 교석 “강택민 중심 영도” 강조/전인대 상무위원장

    ◎이붕 “한반도 안정 중시” 중국의 전국인민대표대회(전인대) 8기5차회의가 1일부터 북경의 인민대회당에서 강택민 주석 등 최고지도부 등 2천800명의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이날 개막사에서 대회 의장격인 교석 전인대 상무위원장은 등소평노선의 계승·유지와 강택민을 핵심으로한 공산당 중앙의 영도를 강조했다. 이날 이붕 총리는 정부업무 외교부문보고를 통해 중국은 한반도 안정을 중시하며 한반도 국면안정을 위해 일관되게 노력해 왔다고 밝혔다.중국은 서방국가들과의 관계발전 및 개선을 희망하며 그간의 곡절에도 불구,미국·일본과의 관계발전을 희망한다고 밝혔다.그러나 이총리는 중국은 공정한 세계 정치경제의 신질서를 추구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제분야보고를 통해 이총리는 긴축화폐정책 등 거시조정정책의 유지와 8%내의 경제성장률 달성등 성장보다는 안정위주의 정책 운영 방침을 보고했다.이총리는 대외개방 및 해외투자유치정책 등도 변함없이 유지된다고 밝혔다. 홍콩·대만과 관련,귀속이후에도 홍콩의 고도자치와 현행 사회경제제도 및 생활방식의 보장을 약속했으며 대만에 대한 직접 교류허용 및 「분열활동」중지가 촉구됐다.국내적으로 사회주의적인 민주제도의 확대와 법치제도의 완비,인민대표대회의 정부기관 감독강화 등 민주적 정치개혁도 확대될것임도 밝혔다. 이와함께 반부패투쟁 심화와 국유기업개혁확대 등을 본격화할 것임도 밝혔다.한편 2일 발표된 진금화 국가계획위원장과 유중려 재정부부장은 업무보고를 통해 올 중국의 전체예산안은 8천9백68억위안이라고 밝혔다.
  • 등 이후 절대지도자 없을것(해외사설)

    20세기 중국과 세계에 큰 업적을 남긴 중국의 최고 지도자 등소평이 사망했다.등은 모든 공직에서 은퇴했었기 때문에 그의 죽음이 곧바로 중국의 대변화로 이어지지는 않을 것이다.그러나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는 중대한 관심을 갖고 그의 죽음이 중국에 미치는 영향을 주시하고 있다. 등이 추진했던 개혁·개방노선은 앞으로 어떻게 될 것인가.등이 지원했던 강택민체제는 흔들리지 않을 것인가.더욱이 21세기 중국은 어떤 나라가 될 것인가.등의 죽음은 이러한 중대한 문제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등은 문화혁명으로 피폐해진 경제를 발전시켜 중국을 세계 여러나라가 투자하고 싶어하는 매력있는 나라로 만들었다.그는 또 「일국 양체제」라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홍콩의 반환을 실현시켰다.「개혁·개방」과 「일국 양체제」는 등의 철저한 현실주의로 부터 나온 것이다. 그러한 등없는 중국은 앞으로 어디로 갈 것인가.그것이 세계적인 관심사다.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볼때 중국이 다시 옛 사회주의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중국인들의 사고방식은완전히 바뀌었다. 강택민을 중심으로한 후계체제도 당분간 지금까지와 같은 집단지도체제로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당장은 권력투쟁의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하지만 개혁·개방정책을 둘러싸고 지도층내의 미묘한 갈등이 있어 권력투쟁으로 비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일당독재아래의 집단지도체제라는 것은 개인독재로 이행되는 과도기라는 사실은 역사가 증언하고 있다.그러나 모택동이나 등과 같은 카리스마적 지도자는 나타날 것 같지 않다.중국사회도 정보화시대를 맞아 가치관이 다원화되고 있다.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 여러가지 소유와 경제의 형태가 나타난다.또 민주화가 진행되면 경제의 실태와 정치형태와의 괴리가 나타나 일당독재로는 한계가 있다. 중국에는 또 그동안 등의 권위에 묻혔던 여러가지 모순이 분출할지도 모른다.등의 죽음으로 정치적 일원화,경제적 다원화라는 「중국적 사회주의」도 큰 시련에 직면해 있다.그러나 중국은 그러한 어려움을 극복하고 경제적 발전과 함께 민주화를 착실히 진척시켜야 할 것이다.
  • 경남지역 5개대학 한총련 노선에 반기/분담금 납부 중단·탈퇴검토

    경상대·경남대·창원전문대·진주간호보건전문대·진주전문대 등 경남지역 5개 대학 학생회가 한총련 노선에 반대,「건전총학생회연합」(가칭)을 결성했다. 5개대 총학생회장은 지난 19일 하오 경상대 총학생회 사무실에서 모임을 갖고 ▲한총련의 감상적 통일투쟁과 좌경이미지 극복 ▲강의수준 향상과 면학분위기 조성 ▲학생복지 및 권익향상 ▲건전한 비판을 통한 사회 참여 등 새로운 학생운동노선을 정립키로 했다.또 그동안 한총련에 납부해왔던 대학별 분담금 납부를 전면 중단하는 한편 한총련 탈퇴를 검토키로 했다.
  • 등소평 사망­중 정부의 치적 평가

    ◎대륙 통일·중국적 사회주의 이론 확립/「모 절대무오류」 비판… 실사구시사상 체계화/일국양제 제시… 홍콩주권반환 결정적 기여 【북경 연합】 중국당국은 당·전국인민대표대회(전대회)·전국인민정치협상회의(정협) 등이 공동으로 발표한 등소평 사망발표에 관한 서한에서 등소평의 일대기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등소평 동지는 초기 중국공산당 당원으로 1차 국·공내전기간중 처음으로 북서 중국에서 혁명군의 정치공작임무를 맡았다. 등은 이어 국민당과의 무장투쟁을 결정한 1927년8월9일의 무한긴급회의에 참석한 후 홍군의 제7군과 제8군을 조직,무장봉기에 본격돌입했다. ○모택동과 대장정 참가 그는 이후 중앙혁명기지에서 당시의 좌파로부터 모택동노선을 지지했다는 이유로 직위해제됐으나 홍군 총정치부에 복직한 후 장정에 참가했다.등은 장정기간중 중국공산당사에 중대한 전환점을 맞은 존의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항일투쟁에서 주로 북중국에서 홍군의 여러 요직을 거친후 당 제7차 전국대표대회(7전대회)에서 중앙위원에 선출됐다.중·일전쟁기간중 그는 야전군의 정치위원 등을 맡으면서 전투를 내부지역에서 외부로 전환하는 모택동의 전략적 결정을 혁명적으로 수행했다. 그는 이어 총전선위원회의 서기겸 당 동부지부 제1서기로 양자강 도강작전 등에서 승리,남경·상해 등 남중국의 여러 지역을 해방시켜 국민당정권을 붕괴시키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고 이어 남서중국으로 진출,티베트 등을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방,중국대륙통일과 새 중국건설에 주도적 역할을 했다.등소평은 대륙통일이후 공산당 중앙위 남서지부 제1서기를 맡아 이 지역의 정치권력·사회개혁과 경제회복을 주도했다. ○56년 당총서기에 선출 곧 이어 북경의 중앙지도부에 진출한 그는 1954년 당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1년후인 1955년 중앙위 정치국원으로 승진했다. 그는 1956년 8전대회에서 당헌 개정보고를 하고 공산당의 통치능력을 강화하는 작업을 선도했다. 8중전회 1차회의에서 당 정치국 상임위원 겸 중앙위 총서기에 선출된 등소평은 모택동과 함께 중국 집단지도체제의 핵심멤버대열에 합류했다. 등소평은 10여년동안 당 총서기로 재직하면서 서기처를 관장,▲사회주의체제 확립과 사회주의건설 ▲중국실정에 맞는 사회주의자의 길을 증명하고 ▲경험을 종합,정책을 조정하고 난관을 극복하는데 탁월한 업적을 남겼다. 그는 이어 소련 공산당과의 협상을 위해 수차례 대표단을 이끌고 모스크바를 방문,중국 공산당의 자주원칙을 확고히 지키면서 당과 당관계에서 일체의 불공평에 반대했다. ○문혁중 실각·73년 복권 문화혁명기간중 그는 부당하게 비판을 받아 모든 공직에서 축출되는 박해를 받았다. 지난 73년 복권된 등은 2년후인 75년 당 중앙위 부주석,국무원 부총리,중앙군사위 부주석,인민해방군 총참모장을 겸직,당·정·군의 일상업무를 관장했다. 등소평은 당시 중국이 처한 어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정력적인 조정노력을 기울이면서 4인방과 투쟁을 벌였다. 등의 이같은 조정노력과 투쟁은 당간부와 일반인민의 열망을 반영하는 것으로 당의 올바른 지도력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등의 노력은 전국적으로 지지를 받아 단기간에 성공적인 결과를 낳았다.그는 다시 부당하게 모든 공직을 박탈당하는 수난을 당했으나 당내에 광범위한 지지기반을 굳혀 4인방을 타도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등소평은 4인방을 타도하고 문화혁명이 끝난 후 당원과 인민의 긴박한 요구에 따라 모든 공직을 다시 맡았다.당시 중국은 문화혁명의 후유증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졌고 이같은 대재앙을 극복하기 위해 엄청난 노력이 요구됐고 역사적인 경험과 교훈의 집대성이 필요했다.중국은 국제정세의 진전에 따라 사회주의 발전전략을 재검토하고 미래발전전략의 새로운 청사진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등소평은 당과 인민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았다.그는 무엇보다도 당 사상과 노선을 바른 궤도위에 올려놓음으로써 키를 제대로 잡았다. ○4인방 타도계기 마련 그는 실사구시가 모택동사상의 핵심이라고 강조하면서 『모택동이 내린 결정은 무엇이든지 옳고 모가 시달한 지침은 반드시 고수한다』는 이른바 2개의 절대무오류이론에 반대했다.등은 진리를 판단하는 기준에 대한 토론을 지지하고 마음을 해방시키고 실사구시의 사상과 정치노선을 재확인했다.잘못된 사상과 정치노선의 수정은 11기 3중전회의 지도적인 지침이 됐다. 이 회의는 새로운 중국건국이후 중대한 역사적 전환점을 이루면서 개혁·개방과 사회주의 현대화건설의 새시대 도래를 가져왔다. 등소평이 제2기 중앙집단지도체제의 핵심이 된 것은 바로 이 회의이후였다. 이 새로운 시대에 등소평동지는 다른 집단지도부 멤버와 함께 당과 국가의 장래와 운명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두가지 역사적인 기여를 했다. 그 하나는 중국건국이후 모든 역사적 경험을 종합,당을 이끌면서 문화혁명의 과오를 시정하고 모택동사상을 과학적으로 이해,체계화시킨 점이다. 둘째는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건설이론을 제시,발전시킨 점이다.사회주의 초기단계에 「1개 중심,2개 기본축」이란 노선을 당의 방침으로 공식화하고 경제·정치·외교·교육·고학기술·문화·군사·통일문제·당건설 등 전반적인 분야에 대한 당의 원칙과 정책을 확정,개혁과 개방을 통해 사회주의 현대화발전의 성공을 위한 새로운 방안을 발전시켰다. 등소평은 통일을 위해 일국양제 이론을 제시,영국과의 협상을 통해 오는 7월 홍콩주권을 반환받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대만과의 통일문제도 이 원칙에 따라 결국 해결돼 완전한 조국통일이 완성될 것이다. 중국적 특색을 가진 사회주의이론은 국제정세변화를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분석한데서 비롯됐고 이는 미국과 일본·옛소련과의 관계를 개선하고 인접국 및 제3세계와의 우호관계를 발전시켜 중국이 현대화에 주력할 수 있는 국제적인 여건을 조성했다. ○종신제 반대·공직 은퇴 등소평은 또 13전대회에서 은퇴를 선언하고 종신제폐지를 주창함으로써 중국의 집단지도체제를 제2세대에서 3세대로 세대교체의 길을 열었다. 등은 생애 마지막 공식활동으로 지난 92년 심천을 포함한 남부지방을 방문,남순강화를 통해 당의 새로운 기본노선을 총정리했다.
  • 등소평 사망­중 이끌 5인의 실력자

    중국을 현대화한 카리스마적 지도자 등소평이 사망함에 따라 등없는 중국의 미래에 세계적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강택민 국가주석을 비롯한 중국지도자들은 등과 같은 지도력과 카리스마적 권위가 없기 때문에 잠정적으로 강을 중심으로한 집단지도체제가 유지되며 권력투쟁의 양상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등이후의 정치역학 구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할 실력자들을 알아본다. ◎강택민/개방정책 지휘한 등의 적자/상해·기술관료 출신… 추진·포용력 돋보여/대중적 카리스마 부족… 군부기반도 취약 「강철 미소」.북경외교가에서 강택민을 평하는 말이다.부드럽고 여유있게 보이는 이면에 치밀하고 끈질긴 추진력을 평하는 말이다.각 부문을 통괄하고 무리없이 이끄는 포용력은 등소평도 크게 평가했다고 한다.문제를 파악하고 역할을 분담하는 지도력도 그의 장점으로 꼽힌다.현재와 같은 중국의 집단지도체제에선 강과 같은 적격이 없다는 평가를 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다른 지도자들의 입지를 크게 훼손하지 않으면서 점진적으로 지도력을 강화해 나가고있는 것이 그의 스타일이다. 강은 명문대(상해 교동대)를 졸업한 전형적인 기술관료(테크노크래트)다.지난 95년 한국방문때 삼성전자 등을 둘러볼때 전문지식과 식견으로 주위를 놀라게 할 정도다.그러나 특유의 인화력과 포용력으로 조정과 막후 교섭등 정치력이 돋보인다는 평이다.지난 89년 천안문사건으로 전국이 혼란에 빠졌을때 상해서기로서 유혈사태를 피하면서도 시위대를 적절히 제압하는 「성과」를 거두어 등소평의 점수를 얻었다.그는 강소성의 비교적 넉넉한 학자집안의 자제다.그가 영어·러시아어 등 외국어에 능통하고 서예와 그림,중국전통악기 및 피아노 다루기 등에도 조예가 깊은 것은 그같은 집안의 영향으로 보고 있다. 이붕에 비길수 없지만 그의 양아버지인 숙부가 공산당원간부로서 이선념·장애평·진의 등 신4군 수뇌들과 긴밀한 관계에 있었다.이같은 출신배경도 그의 능력과 함께 출세의 밑천이 됐다.인민해방군의 거목인 이선념은 생전 그를 적극 지원했었다.강택민은 상해시 당위원회 부서기·서기·시장 등을 거치면서 중앙의 인정을 받았다.상해가 권력의 기반일뿐 아니라 출세의 발판이고 그의 고향도 넓게 범상해권에 속하는 강소성이다.상해의 식품공장과 비누공장에서 기술자로 사회에 첫발을 내디딘뒤 기계공업부와 전자공업부 부장 등으로 기술관료로서도 엘리트코스를 거쳤다. 그의 뒤에는 상해파벌의 대부격인 왕도극이 후견인 역할을 해왔다.오방국·황국·서광적 등이 다 그와 정치적 운명을 같이하는 소위 「상해방」이다.그는 증경홍 당중앙판공실 주임을 정치국으로 끌어올리려는 등 계속 상해출신의 진용을 강화하고 있다.94년 14기4중던회 때 상해시장 황국과 당시 당서기 오방국을 정치국원으로 진입시키는 등 주위를 두텁게 하고 있다.등소평에 의해 뽑혀 올려왔지만 지난 8년동안의 최고지도자로서의 입지 강화해 모택동에 의해 선택된 화국봉처럼 쉽사리 뽑혀나갈것 같지는 않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이다. 그러나 국가지도자로서 카리스마나 구체적인 치적이 없고 취약한 군부의 지지기반 등이 그의 아픈 곳이다. ◎이붕/보수파 대변 태자당의 리더/거미줄처럼 깔려있는 관료인맥이 강점/천안문사태 강경진압 지휘… 대중반감 커 이붕 국무원총리는 지난 8년여동안 강택민 총서기 겸 국가주석과 쌍벽을 이루며 중국을 이끌어 오고 있다.이미 79년 국무원 전력공업부 부부장으로 중앙에 진출한뒤 국무원 부총리(83년),중앙위원 겸 정치국위원 등을 거친 기술관료로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중앙위원이나 정치국원도 강택민보다 먼저 올랐다.제3세대 기술관료들의 본산인 소련유학파의 수장격으로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관료인맥의 대부격이다. 87년이후 10년 가까운 총리직을 통해 각 지방에 자신의 인맥을 상당히 확보해왔다.정부를 통괄하는 국무원 판공실주임 라간 등도 그의 수하다.최근 그는 지난 95년 북경시의 진희동·왕보삼사건 등으로 곤경에 몰리는 등 강택민의 상해파에게 밀리는 듯 위축된 모습이다.그러나 그의 경력과 배경은 앞으로 전개될 권력투쟁에서 강점으로 꼽힌다. 그는 중국 공산혁명 제1세대의 적자로 비유되는 소위 로열패밀리의 성원이다.아버니 이석훈은 장개석 국민당군에게 처형된 「혁명열사」고 어머니 조군도도 열렬한 핵심당원이었다.그의 외가는 혁명1세대의 핵심성원이다.고아가 된 그는 혁명1세대들에게 「우리들의 아이」로 키워졌고 특히 주은래와 등영초의 양자로 성장했다.진운은 사망했지만 당원로 팽진·등력군 등은 그의 배경이 되고 있다.또 중국 정·관·군의 주류로 건재한 로열패밀리출신의 「태자당」들의 구심점이란게 무엇보다 그의 강점이다.이같은 배경은 그의 생각과 행동을 보수적인 성향을 갖게 한다. 이붕은 그러나 지난 89년 천안문사건때의 강경진압 주도자라는 부담을 지게하고 있다.진압의 총지휘자인 등소평이 사라진 마당에 천안문의 부담은 더할 것만은 분명하다.이붕은 연임제한규정에 묶여 오는 98년초 총리직에서 내려와야 한다.아직 그에게 마땅한 자리는 없는 듯하다.강택민·오방국·황국 등을 주축으로한 상해파가 계속 북진을 거듭하고 있지만 그의 입지가 비관적인 것은 아니다.시장개방정책과 국유기업개혁 등 경제체제개혁이 심화돼 부작용이 높아질수록 그의 발언권도 높아질 것으로 보인다.중국의 방대한 관료체계와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상층부 인사들과의 인적관계,총리 등 당·정 지도자로서의 엘리트코스 등은 그가 1인자는 될 수 없어도 영원한 2인자,견제세력으로의 위치를 지키게 할 것으로 보인다. ◎교석/온건·합리… 서열3위 중도파/개혁·보수파 조정역… 전면 나서진 않을듯 올해 74세의 교석은 당 공식서열 3위로 국회의장격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을 맡고 있다.절강성 출신으로 대학시절(상해 동제대) 상해학생운동의 총지도자였다.당조직부와 정법부문에서 오래 근무해왔다.공안부 및 검찰·감찰업무를 총괄하는 정법위원회 서기 임건신,부정부패처벌 등을 총괄하는 기술검사위원회 서기 위건항 등이 모두 그의 직계로 꼽힌다. 천안문사건 당시 강경진압에 기권의사를 표시하는 등 온건하고 합리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전인대 상무위원장직을 맡은 이후 전기운부위원장의 지지 아래 전인대의 정부에 대한 감독·비판역할을 강화하고 있다.또 법률정비 및 법치제도 완비추세 속에 각종 법률제정 등을 주도하며 보이지 않게 중국사회변화를 주도하고 있다.강택민 서기의 선배격이며 당조직 부부장 때는 현재 중국지도부의 거의 대부분을 발탁,관장했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발이 넓다.빠른 판단력에 기분과 의사를 드러내 보이지 않는 성격은 그의 입지를 더욱 강화하고 있다.결정적인 순간 그의 동의는 더욱 무게를 갖는다.그러나 개인적으로 최고지도자의 자리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 그의 주위사람의 이야기다.사실상 실권을 행사하겠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란 것이다.한때 「강락석출(강택민은 떨어지고 교석이 등장한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일반의 인정을 받고 있다.「불편불기,심장불로」로 요약되는 그의 조심성과 균형 있는 처신은 전환기를 맞아 정치적 힘을 배가시킬 것으로 보인다.중앙대의연락부 부장,중앙당교 교장 등 당·정 핵심요직을 두루 거쳐 넓은 인맥도 강점이다.또 최근 해외나들이 등 국회외교를 보여 주목받기도 했다.실질적이고 유연한 사고가 경제개혁·개방에 이어 정치적 개혁의 바람을 주도할지 그의 역할이 주목되고 있다. ◎조자양/개방의 전도사… 대중적 인기/천안문사태로 실각… 세력잃어 재기 의문 소년 홍군병사 출신으로 총서기에 올랐다가 「급진」자유주의적 견해 때문에 권좌에서 추락한 올 79세의 조자양은 개인적인 권력기반보다는 중국 자유주의사조의 부침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그의 입지변화의 귀추가 주목된다.89년 천안문사건 당시 천안문광장에서 학생과 얼굴을 맞대며 설득을 시도하던 그의 실각도 8년여가 되지만 개혁·개방정책의 주도자로서의 그의 명성과 성취는 기존지도자들을 위축되게 한다.경제성장,개혁·개방의 전도사란 말은 늘 그의 성공을 수식하며 따라다니는 말이다. 그만큼 그는 지금도 요주의인물의 하나로 감시받고 있다는 것이 북경외교가의 이야기다.이미 정치의 꿈은 버렸다고 공언하고 있지만 그의 복귀가 현정권 자체에 위협시되고 있는 것이다.그는 성장시절 빈곤에 찌든 사천성에 빈곤추방을 시작해 대성공을 거두었다.「곡식 먹고 싶거든 조자양에게로 가라」는 이야기가 회자될 정도로 그의 경제개혁은 성공을 거두었다.그는 중앙무대에서도 혁명세대와 혁명후 전문기술관료 사이의 가교역할을 하며 입지를 다져왔었다.그는 1932년 13살의 나이에 중국혁명에 참가한 소년병 출신이다.양상곤의 다음세대인 2.5세대로 평가된다.80년대 개혁·보수의 힘겨루기 속에 급진적 정치·경제개혁을 추진하다가 천안문사태로 「동란을 지지하고 당을 분열시켰다」며 정치적 매장을 당해야 했다. 그는 지방의 자율성과 중앙권력의 지방이양을 강조,지금까지도 지방세력의 광범위한 지지를 얻고 있다.특히 80년대 호요방에 의해 형성된 기술관료층이 현집권세력의 중추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그의 복귀를 두려워하는 현정권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그러나 세력기반이 뿔뿔이 흩어져 재기는 의문시된다. ◎양상곤/군부 영향력… 킹 메이커 노려/「천안문」 강경진압 주역… 나이도 너무 많아 양상곤이야 말로 등소평없는 중국에서 당·정·군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원로다.그는 인민해방군의 창설자의 한명이자 중국공산당의 원로며 전임 국가주석겸 권력의 핵인 당 중앙판공실 주임을 20년가까이나 맡았다.실권은 없지만 상당한 영향력을 갖고 있다.즉 중국국내의권력투쟁이나 분쟁이 가열되고 문제해결이 어려워질 경우 그의 발언권과 선택이 상당한 무게를 갖는다는 점에서 그의 향배는 앞으로의 주요 변수로 꼽히고 있다. 올해로 91살이지만 쉬지않는 지방시찰 등으로 정력적인 활동으로 건강을 과시하고 있다.그는 95년 광동성,96년 동북3성을 순회한데 이어 올해초에도 주해와 심천 등을 시찰하고 개혁개방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중국건립 당시 팽덕회가 지휘하던 제3군의 정치위원이었다.양상곤은 지난 93년10월 정치 연소화란 구실로 권좌에서 밀려났다.실은 그와 그의 이복동생 양백빙의 군에 대한 장악력등은 강택민정권의 가장 큰 위협세력이 된다고 판단한 등소평의 기습으로 군의 실세였던 양백빙과 함께 실권에서 밀려나게 된 것이다. 그 역시 이붕처럼 89년 천안문사건때 「손에 피를 묻힌」강경진압자중 대표인물이다.부담을 벗어버리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천안문사건의 강경진압주장과는 달리 그는 비교적 유연한 사고와 실용주의적 노선이 지지자로 평가된다.나이 때문에 권력의 전면에 나설 가능성은 없지만 유사시 「킹메이커」는 될 수 있다는 해석이다.문화혁명때 주자파로 몰려 66년부터 13년동안 소련간첩 혐의를 뒤집어쓴채 감옥생활을 한 쓰라린 과거도 있다.등소평과는 고향도 갖고 깊은 친분을 갖고 있다.〈북경=이석우 특파원〉
  • 150㎝ 단구로 버틴 「개혁세월」 73년/등소평이 걸어온 길

    ◎20세 파리유학때 중 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혁명 1세대”/33년 첫 좌절후 3전4기… 78년 개방기치로 전권장악/사회주의 몰락 국제풍파속 말년엔 체제독려 지방순회 신장 150㎝정도의 땅딸막한 등소평은 외무부터가 오뚝이 같았다.부도옹이라는 그이 별명은 세력다툼의 와중에서 쓰러졌다가도 매번 다시 오뚝 일어섰울 뿐 아니라 마침내는 모택동 사후의 중국을 한손에 틀어쥔 탁월한 정치력에 대한 경탄을 담고 있다. 실용주의노선으로 12억 중국인민을 배고픔에서 해방시키고 최고 지도자이면서도 최고직책을 가져보지 않은채 중국을 15년 넘게 통치해온 등소평.하지만 그 역시 같은 세대의 거의모든 중국지도층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서사시적 삶을 살아왔다. ○맏아들로 본명 등희현 1904년8월22일 사천성 광안현에서 비교적 부유한 불교도 집안의 맏아들로 태어났다.본명은 등희현.광안중학시절 그의 성적은 우수한 편이었고 성격은 온순 참착했다.겉으로는 매우 산박했으나 「마음은 겨자처럼 맵다」는 평을 들을 만큼 결단력에 냉혹성까지 갖추며 자라났다.16세 되던 20년 10월 은등 고학생으로 프랑스에 유학간후 24년에는 주은래·이입삼·조세염 등과 파리에서 주국공산단 유럽지부를 창설함으로써 일찍부터 혁명에 가담했다.이 시절 르노자동차회사의 조립공으로부터 기차화부,식당보이 등 내본 일이 없을 정도로 고생스런 시절을 보냈다.뒷날 어떠한 환경속에서도 오뚝이처럼 일어날 수 있는 힘을 이때 길러졌다고 한다.그는 당면에 따라 26년초 파리를 떠나 모스크바로 향했다.여기서 중국인만을 대상으로 공산주의학습을 시키던 중산대학에 들어가 체계적으로 공산주의이론을 학습하고 군사훈련까지 받은뒤 그해 연말 귀국했다. 귀국후 그는 곧바로 서안의 중산군사학교에 배치돼 이 곳에서 정치처장을 맡으면서부터 본격적인 중국혁명활동에 들어가게 된다. 이듬해인 27년 국공합작이 실패로 돌아간뒤 그는 중국공상당본부에서 일하게 되었고 이때부터 이름을 등소평으로 개명했다.그해 겨울 중공중앙이 상해로 옮겨가자 함게 따라가 당비서장과 비슷한 역할을 맡으면서 최초의 부인 장서원과 결혼한다.하지만이장씨부인은 멀지않아 난산으로 사망하게 된다.등은 28년 당대회에서 당중앙부비서장에 임명되었으며 이듬해부턴 광서지역에 들어가 본격적인 게릴라활동을 벌였다. 31년에 들어서자 주덕이 이끄는 홍군제1군단에서 정치부주임을 맡게 되고 동시에 홍군총정치부부주임을 맡아 활동하던중 두번째 부인 김유영과 결혼한다. 그의 인생에서 최초의 큰 좌절은 33년에 찾아온다.강서성 위원회 서기로 취임하지만 그가 모택동파라는 이유만으로 곧 해임되고 「엄중경고」처분을 받는다.당시까지만해도 모가 전권을 잡지 못하던 시절이다.이것이 그이 첫번째 실각으로 기록되고 있다.설상가상으로 그의 처 김유영으로부터 버림을 받는다.그녀는 당시 중공중앙조직부장이던 이유한과 재혼해서 현재의 경제체제개혁위주임인 이철영을 낳았다. 34년10월 중국공산당은 장개석이 이끄는 국민당의 끈질긴 소탕전에 견디다 못해 대장정에 나섰다.물론 등은 참여했다.이 장정도중 모는 준의회의에서 중공당 최고지도자로 부상하게 되고 당시 홍군기관지 「홍성보」 편집장 자격으로이 회의에 참석했던 은등 당중앙비서장(당사무총장격)이라는 중책을 맡게 돼 모파의 유력한 간부지위에 올랐다. 약 1년간의 대장정이후 계속된 붉은 공산혁명과 항일운동을 거치면서 등은 계속 모의 신임을 쌓아 가다가 38년8월에는 팔로군의 제129사단 정치위원으로 임명돼 사단장인 류백승과 함께 유등대군(제2야전군)의 기반을 닦아간다.그후 45년에는 군부내에서 주덕·팽덕회 다음으로 3번째의 지위를 차지했을 정도로 군부내 기반과 인맥을 형성해나갔다. 그는 이에 앞서 39년9월 세번째이자 마지막 부인인 탁림과 결혼,지금까지 2남3녀를 둔채 반백년도 넘게 해로해왔다. 50년대말 모택동의 대약진운동이 실패로 끝나고 극심한 가뭄등으로 수백만명이 굻어죽는 사태가 발생하자 그는 그 유명한 「검은 고양이 흰 고양이 론」(흑묘백묘론)을 내놓았다.『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사상이야 어떻든)쥐만 잘 잡으면(생산만 많이 하면)좋은 고양이(인민)다』는 의미의 이 주장으로 그는 자본주의 추종자라는 이른바 주자파로 주목받게 된다. 60년대 중반부터문화대혁명 바람이 일기 시작하면서 또다시 그의 주변에도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다.홍위병들로부터 주자파라는 비판을 받아온 그는 류소기 국가주석과 함께 67년8월 모든 공직에서 해임,강서성 신건현에 유배돼 강제노동에 동원되어야 했다.2차 실각이었다. 그로부터 7년뒤인 73년3월 그는 국무원 부총리로 임명됨으로써 화려하게 복권,오뚝이의 면모를 과시했다.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남쪽 언덕이든 북쪽 언덕이든 꼭대기에만 오르면 된다』는 의미의 「남파북파논」을 내놓아 골수 공산주의자들의 인상을 찌푸리게 했다. 결국 76년4월 주은래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난동사건(일명 4·5사건)때 사인방(모택동을 등에 업은 강청 장춘교 왕홍문 요문원등 강경파)으로부터 「난동의 배후조종자」로 몰려 또다시 실각했다.3차 실각이었다.주추모집회에서 은등 추도사를 읽었었다. 이윽고 모사망과 사인방 실각 이듬해인 77년 그는 다시 부활,실각 당시의 모든 직책을 회복했다.이때 그의 재기용여부를 놓고 중앙공작회의는 격렬한 찬반논쟁을 벌였다.그런데등이 스스로의 과오를 시인,이미 당주석과 중앙군사위주석이었던 화국봉의 지위를 인정하는 편지를 씀으로써 부활하게 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때 화는 의등 부활에 반대했었다. ○강경책 내며 위기극복 이렇게 되살아난 등은 78년12월 당11기3차중앙위전체회의에서 향후 20년간에 걸친 「4개(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현대화계획」선포를 주도함으로써 당의 최고 실권자임을 과시했다.이때부터 중국이 야심찬 개혁개방시대로 들어선 것이다.이는 곧 실사구시를 중심으로한 실용주의 「등시대」가 시작된 시점이기도 했다. 그는 이때부터 자신이 최고실권자였음에도 당주석이나 국가주석과 같은 최고 자리에 오르지 않는채 호요방(당)과 조자양(정부)을 앞세워 화에 대한 문책과 강등에 착수,마침내 82년9월 화를 당중앙 위원이외의 일체의 요직에서 제외시킴으로써 권력투쟁에서의 기나긴 「장정」을 매듭지었다. 89년4월 전총서기 호요방 추모집회로 시작된 천안문 민주화시위는 그에게 닥친 마지막 시험이었다.그러나 그는 이 시험문제를 시위대군중에 대한무자비한 발포와 함께 시위대의 추앙을 받던 총서기 조자양을 「폭란의 배후책임자」로 몰아 제거하는 방법으로 풀었다.13년전의 천안문폭동때 자신이 당했던 방법을 이번에는 자신의 심복이었던 조에게 그대로 되풀이한 셈이다.어쨌든 이로써 사회주의체제를 전복시켰을지도 모를 자유화물결을 일단 잠재울 수 있었다. 등은 그동안 자신의 후계자로 호요방과 조자양을 잇따라 내세워 봤지만 「홀로세우기」에 실패했다.그 뒤 가장 적절한 후계자라고 꼽은 인물이 강택민.강은 천안문사태 이후 상해시에서 혼란을 신속히 수습했고 그동안 의등 개혁개방노선을 가장 능숙하게 실천해온 것으로 평가되었다. ○강택민 지목한 뒤 은퇴 강을 후계자로 내세운 그는 89년 11월9일 당중앙위의 허락을 받아 당중앙군사위주석직에서 퇴임함에 따라 공직에서 은퇴,평민으로 돌아왔다.그러나 그가 은퇴한 뒤에도 배후에서 한동안 강체제를 지원하고 후견인역할을 해와서 최근까지도 「최고지도자」또는 「개혁개방의 총설계사」라는 칭호를 들어왔다. 특히 그는 동구공산체제가붕괴된데 이어 소련마저 무너져 중국이 망당망국의 위기의식에 휩싸이자 심천 주해 등 남부 개혁개방지역을 돌며 이른바 남순강화를 통해 개혁개방을 보다 적극화할 것으로 주창함으로써 사회주이체제붕괴의 도미노현상이 중국대륙에 밀어닥치지 못하게 했을뿐 아니라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을 모방한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를 당노선으로 채택케함으로써 중국이 21세기 아시아 태평양시대를 이끌어갈수 있도록 새로운 용기와 힘을 불어넣기까지 했다. 중국경제가 이같은 시장경제체제 도입에 힘입어 연10%가 넘는 경이적인 고도성장을 지속하며 전진을 계속하자 그는 『기회를 잃지 말고 성장을 계속하라』는 말을 남기고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등소평 연보 ▲1904.8.22=사천성 광안현에서 3남매중 맏아들로 출생 ▲1918=중경에서 프랑스유학을 위한 예비학교 입교 ▲1920=프랑스 유학 떠남 ▲1924=파리에서 주은래와 중국공산당 유럽지부 창설 ▲1926=모스크바의 중산대학으로 옮겨 수학한뒤 연말에 귀국 ▲1927=광서성에서 공산당 게릴라 조직.첫부인 장서원과 결혼 ▲1931=홍군제1군단 정치부주임.두번째부인 김유영과 결혼 ▲1933=강서성위서기로 취임직후 모택동파라는 이유로 해임.1차실각 ▲1934∼35=대장정 참가,준의회의에서 당중앙 비서장으로 선임 ▲1938=국공합작으로 홍군이 팔노군으로 개편될때 129사정치위원이 됨 ▲1939=세번째부인 탁림과 결혼 ▲1945=제7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으로 선출 ▲1952.8=국무원 부총리에 임명 ▲1954=당중앙위원회 비서장,국무원 부총리,국방위원회 부주석에 선출 ▲1956=정치국상무위원겸 당총서기 선임 ▲1966=문화대혁염 시기 홍위병으로 부르주아 반동파로 비판받음 ▲1967.7=모든 당·정 직무에서 해임.2차 실각.남창으로 하양 막노동 ▲1973.3=주은래 천거로 국무원 부총리에 복직 ▲1974=당정치국원 승진.유엔총회 특별회의에 중국대표 단장으로 참석 ▲1975.1=당중앙 부주석,정치국 상무위원,국무원 제1부총리,중공군 총참모장 등에 선임 ▲1976.4=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에 의해 배후조종자로 지목,모택동의 제의로 모든 직무에서 물러남.3차실각 ▲1977.7=중공당 10기3중전회에서 당중앙정치국상무위원,당중앙부주석,군총참모자 등으로 복직 ▲1978.12=당11기3중전회에서 당최고영도자 지위 획득,향후 20년간 4개 현대화 추진계획 선포 ▲1979=핑퐁외교로 미국과 국교수립후 공식 방미,개혁·개방정책을 당지도노선으로 정식 출범시킴 ▲1980=경제특구제 시행 결정,호요방·조자양체제 출범토록 지원 ▲1981.6=당중앙군사위우너회 주석으로 권권장악 ▲1987.10=당정치국원,정치국상무위원직 사임 ▲1989.6=천안문사태 유혈진압 지시 ▲1989.11=당중앙군사위 주석자리를 내놓고 정치일선에서 은퇴 ▲1992.1=남부개방지역 순시중 담화(남순강화)로 개혁·개방 가속화와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도입 역설 ▲1992.10=제14차 전국대표대회에서 당원로들을 은퇴시키고 강택민체제 구축토록 지원 ▲1993.8=막내딸 용등,「나의 아버지 등소평」전기 출간 ▲1993.11=「등소평문선 제3집」 발간 ▲1993.12=북경시 순시중 「기회를 잃지말고 계속 성장추진」역설 ▲1997=92세를 일기로 영면
  • 연세대의 한총련 보이콧(사설)

    연세대 총학생회가 한총련의 이념투쟁노선을 비판하면서 이 노선을 포기하지 않을 경우 한총련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한 것은 용기 있는 행동이다.지난해까지만해도 연세대 총학생회가 서울대·고려대 등과 함께 학생운동권을 주도해온 사실을 상기한다면 이같은 한총련 보이콧은 큰 변화가 아닐수 없다.오도된 학생운동을 바로잡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 지난해 연말 비운동권으로 연세대 총학생회장으로 선출된 한동수군은 『우리의 개혁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경우 교내의 모든 한총련행사를 불허하고 일체의 한총련행사에 불참하겠다』고 밝히고 『분담금도 내지 않을 방침』이라고 말했다.연세대 총학생회는 지난해 학생회비의 3.8%에 해당하는 1천2백만원의 공식분담금과 특별분담금 등 2천여만원을 한총련에 냈다. 친북성향의 NL(민족해방)계가 장악하고 있는 한총련지도부는 해마다 전국의 각 대학 총학생회로부터 10억여원으로 추산되는 분담금을 징수해왔으며 이 자금으로 친북성향의 과격·폭력투쟁을 주도하고 지휘해왔다.학생회의 소중한 재원이 체체전복을 노리는 친북·이적단체의 난동을 위한 자금으로 유용된 것은 개탄할 일이다. 만일 전국의 각 대학 총학생회가 일제히 분담금을 내지 않는다면 한총련의 이념투쟁은 불가능하며 그 조직도 와해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그런 의미에서 연세대 총학생회의 분담금납부 거부선언은 선도적 의미가 크다.우리는 연세대 총학생회의 결단이 전국의 대학으로 확산되기를 바란다. 새 학기를 앞둔 요즘 대학가에는 건전한 대학문화의 정립과 면학풍토조성을 위한 새로운 학생운동이 움트고 있다.연세대·고려대·홍익대·이화여대 등에서 나타나고 있는 「대학가 정화운동」이 그것이다.한총련지도부는 이 새로운 물결을 직시해야 한다.우리는 이 물결이 대학가의 큰 흐름으로 자리잡고 힘차게 뻗어가기를 기대한다.
  • 연대 총학생회/한총련 탈퇴 검토

    ◎모든행사 불참 선언… 분담금 지급 거부/서울·고려대도 투쟁노선 개혁 요구… 파급 클듯 연세대 총학생회는 17일 한총련으로부터 탈퇴하는 방안을 검토중이며 올해 한총련에 낼 분담금을 지급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연세대 한동수 총학생회장(26·법학과 4년)은 17일 『앞으로 한총련이 주최하는 모든 행사에 불참하고 연세대내에서 학생회의 이름을 걸고 열리는 한총련 행사를 불허하겠다』며 『이는 한총련에 탈퇴서를 제출하겠다는게 아니라 실질적인 의미의 탈퇴를 뜻한다』고 밝혔다. 또 연세대 총학생회는 지난해 12월 홍익대에서 열린 서총련 산하 서부총련 회의에 참석,한총련이 기존의 투쟁방식과 통일노선·조직구조 등을 개혁하고 예산 내역 공개 등의 요구가 받아 들여질때까지 분담금을 내지 않겠다는 방침을 전했다고 밝혔다. 연세대는 지난해 총학생회비의 3.8%인 1천2백만원과 특별비를 합쳐 2천여만원을 한총련에 냈었다. 서울대와 고려대 총학생회 등도 주사파가 주도하는 한총련의 노선에 반발하며 개혁을 요구하고 있어 내달 신학기 개학과 더불어 대학가 운동권세력의 대대적인 판도변화가 예상된다.
  • 주사파는 원조망명 직시를(사설)

    북한의 주체사상을 집대성하고 그것을 김일성·김정일부자의 유일지도이념으로 이론적 뒷받침을 해온 황장엽의 망명이후 학생운동권이 크게 흔들리고 있다고한다.특히 한총련의 주류인 민족해방(NL)계열의 주사파 조직은 당혹감을 금치 못하고 있으며 조직의 존립기반이 무너지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일부 주사파는 황장엽의 망명이 북한의 주장대로 「납치·조작에 의한 것」으로 강변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일부에서는 『그가 진짜망명했더라도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보다는 김정일과의 권력투쟁에서 밀려난 개인적인 일』이라면서 애써 현실외면의 태도를 보이고 있는 것으로 들린다. 주사파가 황장엽의 망명을 어떤 시각으로 보고 있는가는 그들 자체의 문제지만 우리가 보기에는 가당찮은 궤변이다.북한의 주체사상을 투쟁이념으로 삼아온 그들로서는 「주체사상의 대부」가 「지상의 낙원」을 버리고 망명한 데 대해 당혹감을 떨칠 수 없겠지만 우리는 이번 사태의 본질을 직시할 것을 촉구하고자 한다.황장엽은 망명요청직후 『나는 내가 만든 주체사상이 김일성·김정일부자의 권력세습과 권력유지의 도구로 이용되고 또 그 사상 때문에 수많은 인민이 헐벗고 병들고 굶주리게 된 현실이 너무나 한탄스러워 죄책감을 느껴왔다』고 고백했다.그는 또 자신의 망명결심을 밝힌 서신에서 『남의 청년학생이 북이 사회주의가 아니고 봉건주의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북에 대하여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은 참으로 유감스런 일』이라고 개탄했다.한총련지도부와 주사파는 이 고백과 개탄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가슴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황장엽의 망명으로 학생운동권의 주사파조직이 곧 와해될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단기적으로는 노동법과 한보사태 등 사회적 이슈와 학내문제를 앞세워 그들의 투쟁노선을 이끌어갈 것으로 짐작 된다.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주사파는 설 땅을 잃게 될 것이며 스스로 변화를 모색하지 않는 한 도태되고 말 것임을 명심해야 한다. 우리는 「연세대사태」에서 친북 폭력시위가 얼마나 엄청난 피해를 가져오는가를 똑똑히 목격했다.때문에 대부분의 학생은 주사파를 외면하고있으며 지난해 연말 각 대학의 총학생회장선거에서도 주사파의 퇴조현상이 뚜렷이 나타난 바 있다.이제 철없는 주사파는 기나긴 미몽에서 깨어나야 한다.지금부터라도 낡아빠진 친북통일노선과 과격·폭력투쟁을 쓰레기통에 던져버리고 건전한 학생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그것이 학생의 본분에도 맞는 일이다.
  • 야당은 국회소집 지연말라(사설)

    한보사태에 대한 국회차원의 진상규명과 대책을 논의하기 위한 국회소집협상이 또다시 결렬되었다.경제난이 악화되고 민심불안마저 심각한 지경에 정치권은 언제까지 직무유기를 할 것인지 국민의 인내도 한계에 이르고 있다.야당은 의회주의를 포기하고 정권타도투쟁에 나선 것인지,아니면 국회에서 시국수습을 할 것인지 노선에 대한 결단을 내려야 한다. 한달반이상에 걸쳐 국회개회의 조건을 바꾸면서 숨바꼭질을 거듭하고 있는 야당의 자세는 국회를 열 뜻이 없이 의회정치의 판을 깨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마저 불러일으키고 있다.노동법사태 때는 영수회담만을 요구하며 장외투쟁을 벌이다 수용후에는 결렬을 선언하더니 한보사건이 터지자 대통령의 엄정수사지시와 국정조사권발동을 주장하고,여권이 검찰수사와 국정조사병행에 반대해온 관례까지 바꾸면서 받아들이자 국회법에도 어긋나는 특위의 여야동수 구성과 특별검사제,청문회와 생중계를 조건으로 내걸어 국회를 거부했다.여당이 일방적으로 양보를 계속했는데도 이번에는 증인 및 참고인의 사전선정이나 3분의 1을 야당몫으로 보장할 것을 요구하니 이성있는 자세로 볼 수가 없다. 노동법과 한보사태를 여당의 악재로 보고 국회를 늦추어 대학개학과 노동계의 춘투와 연결시켜 장외투쟁으로 정권을 쓰러뜨리자는 것이 아니고 의혹을 규명하고 시국을 수습하자는 것이 진의라면 야당은 더이상 조건을 달지 말고 국회를 열어야 한다.오는 3월로 예정된 노동법시행에 앞서 대안을 제시하고 진지한 협의로 재개정문제를 매듭지어야 야당도 경제회생에 일말의 관심이 있음을 믿게 할 것이다.거기다 국정조사특위구성과 증인참고인채택등의 절차에 소요되는 시간을 계산할 때 임시국회소집을 늦출 여유가 없다.대선을 의식하여 국가적 난국을 정쟁의 호기로만 보고 선동으로 혼란을 조성한다면 야당에 대한 혐오로 정치권의 공멸을 자초할 위험이 크다.야당은 근시안적인 정치공세를 지양하고 위기상황을 타개하는 구국적 자세로 국회개회에 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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