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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행작 vs 신작… 하반기 뮤지컬 시장 판세는 어디로

    흥행작 vs 신작… 하반기 뮤지컬 시장 판세는 어디로

    해마다 전통 있는 공연제작사들의 ‘진검 승부’가 펼쳐지던 연말 뮤지컬 시장이 올해만큼은 달라질 것으로 보인다. 연말에 대형 신작을 쏟아 내던 제작사들은 신작 대신 기존의 흥행작들을 내놓는 반면 연예기획사 등 외부 업계가 새롭게 뮤지컬 시장에 뛰어든다. 공연계의 불황 속에 기존 제작사가 ‘안정’ 노선을 걷는 가운데 신생 제작사의 ‘도전’이 시장의 판도를 바꿀지 시선이 모이고 있다. 실제로 이번 여름 한차례 ‘뮤지컬 대전’을 치른 제작사들은 하반기 숨 고르기에 들어간다. 8월부터 연말까지 공연 예정인 대극장 뮤지컬 중 신작은 ‘신데렐라’(엠뮤지컬컴퍼니), ‘오케피’(샘컴퍼니) 정도다. 9월 라이선스로 초연될 예정이던 프랑스 뮤지컬 ‘1789 바스티유의 연인들’(마스트엔터테인먼트)은 현지 제작사 측의 문제로 취소됐고, 11월 막을 올리려던 대형 창작뮤지컬 ‘마타하리’(EMK뮤지컬컴퍼니)는 완성도를 위해 내년 초로 미뤄졌다. 대신 ‘노트르담 드 파리’ 내한공연, ‘시카고’, ‘베르테르’, ‘레미제라블’ 등 각 제작사의 대표 레퍼토리들이 대극장을 채운다. ‘형제는 용감했다’(PMC프로덕션), ‘스토리 오브 마이 라이프’(오디뮤지컬컴퍼니) 등 중극장 작품들이 3년 만에 돌아오며 지난해 라이선스 초연된 ‘원스’(신시컴퍼니)와 2009년 마지막으로 공연된 ‘로미오 앤 줄리엣’(마스트엔터테인먼트)은 내한공연으로 다시 무대에 오른다. 들여올 만한 해외 신작이 더이상 눈에 띄지 않는 것도 원인이지만 장기화되는 불황 속에 무리한 도전을 하지 않으려는 것으로 풀이된다. 한 공연제작사 관계자는 “세월호와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에도 흥행하는 공연은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서 “투자 유치에도 용이한 인기 레퍼토리들로 불황을 타개하려는 것”이라고 귀띔했다. 반면 연예기획사와 영화제작사 등이 침체된 뮤지컬 시장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뮤지컬계 ‘블루칩’인 JYJ 멤버 김준수가 소속된 씨제스엔터테인먼트는 최근 자회사 씨제스컬쳐를 설립하고 뮤지컬 ‘데스노트’를 제작해 전석 매진을 이어 갔다. SM엔터테인먼트의 자회사 SM C&C는 지난해 첫 제작 작품 ‘싱잉 인 더 레인’에 이어 다음달 자사 소속 아이돌들을 대거 출연시킨 ‘인 더 하이츠’를 국내 초연한다. 뮤지컬배우 옥주현과 김무열을 보유한 프레인글로벌은 뮤지컬헤븐 박용호 대표를 프로듀서로 영입해 본격적인 뮤지컬 제작에 나선다. 첫 작품은 뮤지컬헤븐의 대표작이었던 ‘넥스트 투 노멀’(12월 개막)이다. 신생 제작사들의 이 같은 도전이 뮤지컬 시장에 ‘지각변동’을 가져올 수 있을지에 대해 전문가들은 엇갈린 전망을 내놓고 있다. 이유리 청강문화산업대학 교수는 “새롭게 뛰어드는 연예기획사들은 자금력과 마케팅 노하우, 스타 매니지먼트, 해외 네트워크 등에 강점이 있다”면서 “변화가 필요한 뮤지컬 시장에 전문적이고 새로운 비즈니스 방식을 제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반면 박병성 더뮤지컬 편집장은 “손익분기점이 갈수록 높아지는 상황에서 스타를 앞세워 공연을 올려도 큰 수익을 내기 힘들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들 제작사의 뮤지컬 도전이 순탄한 것만은 아니다. 영화배급사 뉴가 2013년 제작비 50억원을 쏟아부어 내놓은 대형 창작뮤지컬 ‘디셈버’는 낮은 완성도로 혹평을 받았다. 영화사 명필름이 제작해 경기도 파주에 있는 자체 공연장에서 이달 말 초연할 예정이었던 ‘와이키키 브라더스’는 공연장 시설 문제로 개막 3주를 앞두고 취소됐다. 이 교수는 “뮤지컬 제작 과정에서는 전문가들과 협력하며 기존의 제작 방식과 노하우를 존중하는 것이 성공의 전제”라고 강조했다. 김소라 기자 sora@seoul.co.kr
  •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광복 70주년 ‘제2의 경술국치 없다’ 장담할 수 있나 (上)

    [이일우의 밀리터리 talk] 광복 70주년 ‘제2의 경술국치 없다’ 장담할 수 있나 (上)

    - 일본 연이은 군국주의 부활 선언 일본 제국주의의 군홧발 밑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빛을 되찾은 지 올해로 70년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일제의 군홧발이 물러가고 곧이어 공산주의자들의 총칼이 우리 민족을 또 한 번 유린했지만 대한민국은 지난 70여 년 동안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며 세계 10위권 선진국의 문턱까지 달려왔다. 5,000만이 넘는 인구와 3만 달러에 육박하는 1인당 국민소득, 세계 12위의 국방예산 규모와 63만 명에 달하는 상비병력 등 겉으로 드러나는 지표로 바라본 대한민국은 명실 공히 ‘선진국’이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65년간 전쟁이 없었고 눈부신 경제발전이 가져다 준 태평성대 속에서 국민들은 불과 100여 년 전 있었던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치욕과 일제 치하 35년간의 고통을 잊어버린 듯하다. 서양 격언에 '역사는 반복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말이 있다. 현재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그렇다. 100년 전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대한제국이 열강의 총칼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처럼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힘이 있을 때마다 주변국을 침략해왔던 국가였고, 이러한 침략행위가 사죄하고 반성해야 하는 범죄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국가였다. 일본 군국주의라을 붙잡아 놓고 있던 것은 미국과 평화헌법이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라는 맹수가 등장하자 미국은 일본을 붙잡고 있던 줄을 느슨하게 풀기 시작했고, 일본은 평화헌법이라는 족쇄를 아예 끊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패전 70주년인 8월 15일을 전후해 3가지 의미심장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8월 셋째 주에 일본 해상자위대 가노야(鹿屋) 항공기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神風) 공격으로 유명했던 제로센 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 복원 비행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 태평양전쟁의 선봉에 섰던 이 전투기는 우리나라에만 사과를 거부한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 개발했으며, 일본 태평양 침략의 상징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자존심과 같은 항공기이다. -인과관계 외면하고 원폭 '피해자 코스프레'만 8월 하순에는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의 코마키 미나미(小牧南工場) 항공기공장이 있는 나고야 공항에서 5세대 스텔스 전투기 기술실증기 ATD-X(Advanced Technology Demonstrator-X)의 첫 시험비행 일정이 계획되어 있으며, 8월 27일에는 요코하마에 있는 전범기업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石川島播磨重工業) 조선소에서 24DDH로 명명된 항공모함 진수식 일정도 잡혀있다. 일본은 앞서 건조한 항공모함 22DDH의 함명을 독도를 관할구역으로 삼는 행정구역의 옛 지명인 이즈모(いずも)로 삼아 논란을 일으켰는데, 24DDH의 유력한 함명으로 제국해군의 상징과도 같았던 야마토급 전함 3번함시나노(しなの)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함으로 건조된 시나노는 추후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는데, 27일 공개되는 실제 함명이 시나노로 확정될 경우 해상자위대는 과거 제국해군으로의 회귀를 드러내놓고 선언한 격이 된다.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투기와 같은 재래식 군사력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재래식 군비 강화는 물론 핵무기 보유를 위한 수순을 밟아 나가고 있다. 지난 6일, 아베 신조 총리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 희생자 추모식에서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자신들의 태평양 침공과 전쟁범죄, 그리고 옥쇄 전략 때문이었다는 피폭에 앞선 인과관계는 철저히 외면하고 오로지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중했다. 그는 지난 19년간 역대 총리들이 매년 언급해왔던 비핵 3원칙(핵무기의 생산ㆍ보유ㆍ반입 금지)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는 추모식 하루 전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이 참의원 특별위원회에서 “핵무기를 일본으로 들여올 수도 있다”고 발언한 내용과 맞물려 일본의 비핵 3원칙이 사실상 무너졌다는 것을 시사했다.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47톤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생산하고 있다. 명분은 플루토늄 혼합산화물(MOX : Plutonium-uranium mixed oxide)을 연료로 사용하는 플루서멀(Plu-thermal) 방식의 신형 원자로 연료 확보였다. 그러나 일본이 보유한 전체 원전 48기 가운데 플루서멀 방식은 불과 4기에 불과하고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이 방식의 원자로는 추가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어 추가적인 플루토늄 소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일본은 플루토늄 추가 생산을 밀어 붙이고 있다. 심지어 핵탄두 80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640kg 가량을 은닉해 보관하다가 IAEA에 적발되기도 했다. -다음 수순 '핵무장' 준비 착착 일본의 핵무장을 가로막고 있는 마지막 족쇄는 핵확산방지조약(NPT :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이다. 그러나 아베 정부는 국제사회의 동의하에 합법적으로 이 족쇄를 풀 수 있는 방안도 준비해 놓고 있다. 일명 ‘센카쿠 트리거'(Senkaku trigger)와 ‘북한 트리거'(North Korea trigger)가 그것이다. 일본은 최근 중국과 영유권 마찰을 빚고 있는 센카쿠 지역 분쟁에 대비해 오키나와 나하(なはし) 비행장에 전투기와 정찰기 전력을 2배 이상 증강 배치시켰으며, 이 일대를 초계하는 군함의 수도 대폭 늘리면서 중국을 자극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 군함이 일본 정찰기를 사격통제레이더로 조준하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조성되기도 했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보이며 ‘북한 미사일 또는 미사일 파편의 일본 열도 추락 가능성‘을 들고 나와 안보 불안을 조성하는 것도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다. 일본은 지난 2012년 북한이 은하3호 로켓을 발사할 당시 도쿄 시내 한복판의 공원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면서 국민들의 불안 심리를 극대화시켰다. 중국과 북한을 이용한 의도적 긴장 조성을 통해 일본이 노리는 것은 바로 NPT 탈퇴이다. NPT는 제10조에 “각 당사국은 당사국의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당사국의 지상 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결정된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센카쿠에서 일본과 중국 사이에 우발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하거나, 북한의 미사일 추진체가 일본 영토 또는 영해에 떨어지면 일본은 이를 일본에 대한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중국과 북한은 핵무기 보유국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비상사태를 이용해 NPT 탈퇴를 선언하고 즉각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핵무장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막대한 양의 플루토늄이 확보되어 있으며, 핵탄두 제조에 필요한 구면 폭발 기술이나 중성자 제어에 관련한 제반 기술 여건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H-II/III는 물론 M-V 등 언제든지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전용 가능한 대형 로켓도 구비되어 있다. 정부가 핵무장을 선언하면 한 달 이내에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한 핵강국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나 있다는 것이다. -日 군국주의 칼날이 겨눈 대상은... 점차 봉인이 풀려가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칼날이 겨누고 있는 것은 한반도다. 동북아시아 최약체인 대한민국은 부활한 일본 군국주의가 ‘복귀전’ 상대로 유린하기에 가장 만만한 국가 중 하나이며, 일본 입장에서는 고맙게도 영토 문제와 역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도발 명분도 충분하다. 한국 내에서 반미 감정이 격화되고 한미 동맹이 약화되었을 때 미국만 용인해준다면 군사력 과시를 통한 대중국 경고 메시지 전달을 위해 도발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전후 최초로 건조한 항공모함형 호위함인 휴우가(ひゅうが)를 독도를 관할하는 제3호위대군에 배속시키고 여기서 미 해병대의 MV-22B 수직이착륙 수송기를 이용한 강습상륙훈련도 실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은 제3호위대군이 보유하고 있는 7척의 구축함 가운데 6척을 최신형 중대형 구축함으로 교체했으며, 이 가운데는 1만톤급 이지스 구축함 아타고(あたご), 7,000톤급 ‘일본판 이지스함’ 후유즈키(ふゆづき)도 있다. 독도에서 불과 157km 떨어진 오키(隱岐) 제도의 도고(島後)섬에는 일본 자위대가 보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3등급 공항인 오키 공항이 건설되어 있다. 오키 제도 180여개 섬 전체 주민은 1만 5000여 명, 이 제도를 왕래하는 인원은 연간 15만 명에 불과해 공항에 취항 중인 노선은 75인승 여객기 1대 뿐이지만,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자를 부담하면서까지 노선을 유지시키고 지속적으로 비행장 확장 공사를 실시해 왔다. 취항 중인 노선이 없고, 인근 지역에 대한 대규모 관광산업 개발 계획도 없는 곳에 대형 활주로와 주기장을 정부 주도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 비행장이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재 오키 비행장의 활주로와 주기장에 일본 항공자위대의 전투기를 전진 배치할 경우 1개 비행단급 수준인 60대 이상의 전투기 전개가 가능하다. 평시 독도를 관할하는 우리 해군 제1함대는 압도적인 전력 열세 때문에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교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군이 출격하더라도 독도 인근에 전진 기지를 마련해 놓고 공중조기경보통제기와 전자전기의 지원을 받으며 유리한 위치에서 공격하는 항공자위대를 제압하는 것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공격부대의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세팅해 놓은 일본은 최근 한국해군의 증원 함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준비까지 마무리했다. 일본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실전배치되기 시작한 최신형 12식 지대함 미사일 16기 전량을 규슈(九州) 지역의 구마모토(熊本)현 겐군(健軍) 기지의 제5지대함 미사일 연대에 모두 배치하고, 쓰시마섬 남단의 후쿠오카(ふくおかし) 공군기지에 공대함 미사일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F-2A/B 전투기로 무장한 제8전투비행단을 배치했다.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지만, 미사일의 사정거리와 기지 위치를 고려할 때 이들이 노리는 곳은 '대한해협'이다. 유사시 부산과 진해, 그리고 제주해군기지에서 출동해 독도로 향할 우리 해군 증원함대를 대한해협에서 대량의 미사일로 수장시켜 버리겠다는 의도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패권 경쟁이 한창인 시기에 대외정책 기조가 중국쪽으로 일방적으로 쏠리게 된다면 미국은 110년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반도를 포기했던 것처럼 대한민국과의 안보 협력을 포기할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은 시퀘스터 여파에 따른 군비삭감 속에서 주한미군 전력은 지속적으로 감축시키고 있는 반면, 주일미군 전력은 점차 증강시켜 나가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남들이 총칼을 갖추며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릴 때 공자 왈 맹자 왈만 외치며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킬 힘은 기르지 않은 채 내부 정쟁에만 여념이 없었던 조선은 왕과 왕비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국권을 유린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105년 전 상황과 다를 것이 없다. 정치권은 소모적인 정쟁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주변국이 최신예 전투기를 대량으로 구매하든 항공모함을 건조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국방예산을 삭감해 지역구 챙기기 선심성 예산과 포퓰리즘적 복지놀음에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 <하편에 계속>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역세권 소형오피텔 인기 급등…대구 ’두류역 아이작큐브’ 인기몰이

    역세권 소형오피텔 인기 급등…대구 ’두류역 아이작큐브’ 인기몰이

    오피스텔 중에서도 역세권에 위치한 소형오피스텔의 임대수익률이 높은 것으로 조사됐다. 1인가구가 이미 400만 명을 돌파하는 등 해마다 1인가구가 늘고 있어서다. 지난 2011년 이미 1인 가구가 400만 가구를 돌파한 상태다. 특히, 오피스텔의 수요층은 대체적으로 젊은 직장인이나 대학생들이 주를 이루므로 대중교통이용이 편리한 역세권의 소형오피스텔이 많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실제, 역세권 여부에 따라 임대료 차이가 큰 것으로 나타났다. 신도림역과 인접해 있는 ‘신도림1차 푸르지오’ 전용 37㎡형은 보증금 1000만원에 월 90만원 이상의 시세(KB국민은행 부동산시세 기준)를 형성하고 있다. 반면, 비역세권인 ‘금강리빙스텔ll’ 38㎡형은 보증금 1000만원에 60만~65만원 수준으로 임대되고 있다. 역세권 오피스텔 ‘신도림1차 푸르지오’도 전용면적 규모 여부에 따라 희비가 갈렸다. 전용 37형은 5.3% 수준의 임대수익률이 발생했으나 117㎡형은 4.0%수준에 머물렀다. 투자자들에게도 소형오피스텔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소형오피스텔의 경우, 1인 가구가 해마다 증가함에 따라 안정적인 수요가 예측되며 임대 회전율도 빨라 공실 가능성이 적은 것이 특징이다. 또, 소형오피스텔은 적은 자본금으로도 투자한 만큼 투자자들도 풍부해 환금성도 좋다. 이처럼, 소형오피스텔이 강세를 보이는 가운데, 대구에 초역세권 소형오피스텔이 분양을 앞두고 있어 화제다. 이 오피스텔은 동양종합건설이 대구 달서구 두류동에 짓는 ‘두류역 아이작큐브’다. 두류역 아이작큐브는 대구지하철 2호선 두류역 16번 출구 바로 앞에 위치해 두류역을 도보 1분에 이용할 수 있다. 대구 중심부는 물론 성서공단 방면으로도 빠른 접근이 가능하다. 또 이곳에는 19개의 수많은 노선버스들이 통과해 대구 시내 어디든지 편리하게 이동할 수 있다. 두류네거리는 대구의 동서를 관통하는 달구벌대로, 남북축의 서대구로, 두류공원로가 만나는 달서구 최고의 교통 요지이며, 중부내륙고속도로 성서I.C가 가까워 시외로 이동하기도 수월하다. 두류역 아이작큐브 주변에는 대규모 산업단지와 대학교 등이 있어 산단 근로자나 대학생들의 배후수요가 풍부할 전망이다. 성서산업단지1,2,3단지, 성서5차 첨단산업단지, 서대구 산업단지 등으로는 지하철과 대중교통으로 연계가 가능하고 계명대학교, 계명대학교 의료원, 계명문화대학, 가톨릭대학의료원, 대구검찰청 서부지원 등 산단, 학교, 병원, 관공서 등 풍부한 임대 배후수요가 있다. 이 지역은 최근 10년간 이렇다 할 오피스텔의 신규공급이 없던 지역으로 높고 안정적인 임대수익이 예상된다. 두류네거리는 생활편의시설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도보거리에 홈플러스가 있다. 또 대구의 중심상권에 해당하는 서문시장과 죽전역 상권도 가깝다. 최근 젊은층을 중심으로 ‘광코’라 불리면서 형성된 광장코아 건너 상권은 과거 동성로 번화가를 보듯 대구의 명물거리가 되고 있으며, 많은 젊은 자영업 사업주들 역시 인근에 오피스텔이 들어서기를 기대하는 분위기다. 삶의 질 측면에서도 두류네거리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위치다. 대구 도심권 최대 녹지시설인 두류공원이 도보로 5분 거리에 있어 여가활동을 즐기기도 좋다. 또 대구 최대 규모의 놀이공원인 이월드와 202m 높이를 자랑하는 전망대 83타워도 가깝다. 아이작큐브는 이 일대에서 최고높은 26층 초고층으로 설계돼 동, 서, 남, 북 탁트인 전망이 일품이다. 이 오피스텔은 1인가구 및 2~3인 가구의 증가 추세에 맞춰 실속 있는 원룸형 타입과 독립된 거실과 방2개로 구성된 투룸형 타입 총 432실로 구성되어 있다. 모든 가구를 완비한 풀 퍼니처 시스템(Full Furniture System)과 세탁기, 냉장고 등의 빌트인 시스템(Built-in System)을 도입해 생활의 편의성을 높인 점도 돋보인다. 8월 중순 모델하우스 오픈예정이며 모델하우스는 수성교 바로옆에 위치한다.분양 문의: 053-253-6660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이승만-김구 전략 달랐지만 모두 건국의 아버지”

    국민대통합위원회(위원장 한광옥)는 12일 광복 70주년을 맞아 서울 세종문화회관 예인홀에서 ‘통합 가치와 미래 비전’을 주제로 토론회를 개최했다. 13일까지 3부로 나눠 진행될 토론회 가운데 1부 토론회의 주제 발표를 맡은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와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의 주제문을 게재한다. 허동현 교수는 ‘광복,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는 제목의 발표를 통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면서 “외교활동과 무장투쟁의 전략은 서로가 달랐지만 두 사람은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면서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로 자리매김해야 한다”고 말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인가 대한민국 건국인가’를 주제로 발제한 이완범 교수는 “1945년 8월 15일은 일제로부터의 해방이지 완전한 광복, 즉 주권 회복은 아니었다”면서 “따라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1948년 8월 15일을 진정한 광복이자 건국의 날로 봐야 하며, 다만 남북이 갈라진 상태에서의 건국인 만큼 분단 정부의 수립-1948년 대한민국 건국’으로 병기하는 것이 분단 현실과 통일 지향의 의미를 함께 담는 균형적 역사 이해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광복, 대한민국 정부 수립’ 허동현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교수    Ⅰ. 21세기에 다시 보는 광복과 남북분단    1. 도둑처럼 찾아 온 광복    1941년 12월 7일 일요일 아침 6시 하와이 진주만 북방 440㎞ 해상에 숨어든 아카기(赤城) 등 6척의 항공모함에서 183대의 함재기(艦載機)가 날아올랐다. “도-도-도.” 일본어 “도쓰케키(돌격)”의 첫음절을 딴 공격 신호와 함께 일본의 제로전투기와 폭격기 그리고 어뢰를 장전한 뇌격기들은 미태평양함대 주둔지인 하와이 진주만 일대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기선 제압을 노린 일제의 진주만 기습은 잠자는 공룡의 꼬리를 밟아 깨운 자충수였다. 이제 미국은 더 이상 ‘영광스러운 고립’을 내세우며 일본의 침략전쟁을 한 발 빼고 바라만 보는 중립국에 머물 수 없었다. “당신네들은 아직도 산불이 먼 곳의 일이라 생각하는가? 이래도 아직 한국인·만주인·중국인들에게 ‘일제와의 싸움은 우리 일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가?” 10달 전 이승만이 미국 뉴욕에서 간행한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 The Challenge of Today)』에서 미국의 참전을 촉구하며 올린 경종은 현실이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태평양전쟁은 6개월 만에 판세가 뒤집혔다. 1942년 6월 미드웨이 해전 이후 남태평양의 섬들을 차례로 잃어가면서도 일제는 전쟁의 광기를 거두지 않았다. 1945년 3월 10일 새벽 B-29 슈퍼포트리스폭격기 344대가 도쿄의 하늘을 뒤덮었다. 글리세린과 기름을 섞어 만든 소이탄 2400톤이 마치 융단을 짜듯 퍼부어져 도시 전체가 거대한 화장로(火葬爐)였던 그날 10만이 넘는 생령(生靈)들이 잿더미로 사라졌다. 그러나 일제는 ‘본토결전’과 ‘1억 옥쇄(玉碎)’를 외치며 무모한 전쟁을 멈추지 않았다.  7월 17일 미국이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한 다음 날, 베를린 교외에 위치한 포츠담에 연합국의 세 거두인 트루먼, 처칠, 스탈린이 유럽의 전후 처리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자리를 함께 했다. 나치 독일이 항복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회담이 열리지 않았던 이유는 미국이 핵무기라는 새로운 협상카드를 손에 쥘 때까지 시간을 버는 지연외교를 펼쳤기 때문이었다. 핵무기를 확보해 태평양전쟁의 조기 종결에 자신감을 얻은 트루먼은 더 이상 소련의 참전에 목매지 않았다. 원폭에 의한 힘의 우위를 확보한 미국은 동북아 지역의 종전(終戰) 정책을 전면 수정했다. “우리는 오랜 실험 끝에 어떤 무기보다 파괴력이 큰 신무기를 만들었고, 일본이 즉시 항복하지 않으면 사용할 것이다.” 7월 24일 미·영·소 세 나라 수뇌의 공식회담 후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 사용 계획을 통보했다. 26일 미·영·중 세 나라 수뇌들은 ‘일본군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했다. 29일 일본이 최후통첩 격인 무조건 항복을 거부하자 미국은 원폭 투하를 결정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리틀보이(Little Boy)와 팻맨(Fat Man) 두 발의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그날이 오면 그날이 오며는/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이/ 이 목숨이 끊어지기 전에 와 주기만 하량이면/ 나는 밤하늘을 나는 까마귀와 같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 울리 오리다/ 두개골은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사오매 오히려 무슨 한이 남으오리까?” 민족시인 심훈이 1930년 3?1절을 맞아 몸부림치며 고대한 광복의 그 날은 15년 뒤 마치 도둑처럼 우리 곁에 다가왔다. 그러나 광복군이 국내 진입작전을 감행하기 직전 갑작스레 찾아 온 일제 패망이 김구는 안타까웠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된 다음 날인 10일 저녁 일제가 연합군에게 항복할 것이라는 소식을 듣고서도 기뻐할 수 없었다. “나는 이 소식을 들었을 때 희소식이라기보다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갈라지는 느낌이었다.”  8월 15일 정오 히로히토 일본 천왕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의사를 밝히는 방송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함께 이 땅의 사람들에게 최대의 상처와 고통을 준 일제의 식민통치는 36년 만에 종언을 고했다. “아이도 뛰며 만세/ 어른도 뛰며 만세/ 개 짖는 소리/ 닭 우는 소리까지/ 만세 만세/ 산천도 빛이 나고/ 해까지도 새 빛이 난 듯/ 유난히 명랑하다.” 그러나 희망 찬 기대와 달리 김구의 예상대로 일제 패망은 달콤하기보다 쓰디쓴 고통으로 다가왔다. 침략전쟁의 죗값으로 동서로 분단된 독일과 달리 일본이 아닌 우리가 남북으로 분단되고 마는 비극이 벌어졌다.    2. 38선은 누가 그었나?    1945년 8월 14일 미국은 일본군 무장해제를 빌미로 소련에 38도선 분할 점령을 제안했고, 다음날 스탈린은 이를 수락했다. 때문에 미국이 분단을 주도했다는 것이 통설이다. 과연 그럴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한 까닭은 얄타회담에서 스탈린이 참전 가능 시점으로 말한 8월 15일 전에 전쟁을 끝내 아시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막으려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련은 보고만 있지 않았다. 일제의 패망이 가시화되자 동북아지역에서 이권 확보가 무산될지 모른다는 생각에 몸이 단 스탈린은 첫 번째 원폭이 투하된 지 하루 만인 7일 일본에 대한 공격명령에 황급히 서명했다.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폭은 일본이 아닌 소련을 겨눈 것이었다”는 몰로토프 소련 외상의 말마따나, 원폭 투하는 유럽은 물론 동북아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기 위한 미국의 세 과시였다. 두 번째 원폭이 나가사키에 떨어지기 하루 전인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와 함께 소련군은 두만강을 건넌 반면 미군은 1천 Km 남쪽 오키나와에 있었다. 스탈린은 당시 마음만 먹으면 한반도 전역을 장악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그가 궁여지책에 불과한 미국의 제안을 받아들인 이유는 무엇일까?  스탈린에게 38도선이남 한반도 반쪽보다 중요했던 것은 소련의 극동함대가 태평양으로 자유롭게 진출할 수 있는 소야(宗谷, La Perouse)해협을 확보할 수 있는 홋카이도 북부에 대한 통치권이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한 달도 못돼 9월 12일에 열린 전승국 외무상들이 ‘전리품’ 처리를 위해 모였던 런던 외상회의에서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일본 항복에 공헌한 바 없는 소련에게는 그럴 권리가 없다는 것이 미국의 입장이었다. 이에 분격한 스탈린은 9월 20일 북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하라는 지령을 내렸으며, 이듬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패퇴한 중국 공산당군에게 북한을 반격을 위한 후방기지로 제공하였다. 북한이 중국내전의 연장지역으로 전략적 요충이 되자 남북분단은 마침표를 찍었다.  통념과 달리 분단의 주도자는 미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누가 분단을 주도했는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소련이 남한과 홋카이도 반쪽을 교환하려 했던 사실과 미국이 중국이 공산화되자 극동방위선에서 남한을 제외했던 애치슨라인이 명증하듯, 미국과 소련 두 강대국이 벌인 바둑판에서 한반도는 대마를 잡기위해 언제든지 버릴 수 있는 사석(捨石)이었다는 점이 38도선 분할의 아픈 역사를 우리가 곱씹어야 할 이유이다.    3. 남북협상은 이루어질 수 있었나?    이처럼 이승만(10월 16일)과 김구(11월 23일)가 귀국하기 전인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이 북한에 단독정부 수립 지령을 내림으로써 남북의 분단은 이미 결정되고 말았다. 그해 12월 한반도에 대한 4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가 전해지자 김구와 이승만은 임시정부를 모태로 한 반탁운동의 선봉에 함께 나섰다. 반공?반소?반탁 노선을 함께 취한 두 사람은 1946년 6월 이승만이 단독정부 수립을 촉구한 정읍선언을 내면서 갈라섰다. 이후 김구는 단정 반대노선을 걸었으며, 5·10 총선거를 코앞에 둔 1948년 4월 19일 김구는 평양에서 열리는 ‘남북조선 제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連席)회의’에 참석하기 위해38도선을 넘었다. 그러나 이 회의는 그가 김일성에게 보낸 2월 16일자 서한에서 제안했던 ‘통일정부 수립을 위한 남북 정치지도자 간의 정치협상’, 즉 책임 있는 당국자끼리 머리를 맞대고 현안을 논의하는 구수(鳩首)회담과는 거리가 멀었다. 1945년 말 유고슬라비아에서의 우익탄압, 이듬해 6월 폴란드공산당의 국민투표 결과조작, 그리고 1947년 8월 20%밖에 득표하지 못한 공산당이 소련군의 비호 하에 정권을 강탈한 헝가리 사태를 고려해 볼 때, 당시 남북협상은 북한의 통일전선 전술에 이용될 것이 명약관화했다.   “조국은 지금 독립의 길이냐, 예속의 길이냐, 통일의 길이냐, 분열의 길이냐 하는 분수령의 절정에 서있다. 우리의 지표와 진로는 가능·불가능의 문제가 아니라 가위(可爲)·불가위의 당위론인 것이니 올바른 길일진대 사력을 다하여 진군할 뿐일 것이다.” 북행 하루 전날 나온 문화인 108인의 지지성명처럼, 김구는 실패할 줄 알면서도 민족통일의 대의를 위해 북으로 갔을 수 있다. “공산주의나 여하한 주의를 가진 것을 불문하고 외각(外殼)을 벗기면 동일한 피와 언어와 조상과 풍속을 가진 조선민족이다.” 북행 4일 전 연설의 한 대목이 잘 말해주듯이, 그는 남북협상의 성공에 대한 희망을 품고 있었다. “민족은 주의를 초월한다”는 소박한 신념과 임정시절 중국에서 좌우연합전선을 결성한 경험이 그를 이끈 원동력이었다.  그러나 회의가 열리기도 전에 이미 결의문은 ‘채택’되어 있었다. 4월 23일에 나온 결의문은 “연석회의 개최와 관련해서 김일성에게 충고를 제공할 데 대하여”라는 4월 12일자 스탈린의 지령을 토씨까지 그대로 베꼈다. 4월 28일과 29일에 열린 김구·김규식·김일성·김두봉 ‘4김 회담’과 30일에 나온 ‘남북조선 제정당 및 사회단체 공동성명서’도 구속력 없는 휴지조각과 다름없었다. 그의 구상이 성공하려면 김일성과 김두봉에게 자주적 결정권이 있어야 했지만, 당시 북한은 사실상 소련 군정 치하였고 공산진영의 황제였던 스탈린의 지령은 불가침의 성헌(成憲)이었다. 김구와 김규식의 남북협상 노력은 이뤄질 수 없는 꿈이었지만, 김구의 북행으로 북한정권의 정당성을 확보하려한 소련의 정치공작은 성공한 반면 대한민국 건국사는 큰 상처를 입었다.    Ⅱ. 대한민국 건국과 국제적 승인     1. 이승만이 주도한 UN을 통한 대한민국 건국 전략    새로운 사료의 발굴은 통념을 바꾼다. 종래 수정주의 사가(史家)들은 미국이 제국주의적 야욕을 채우기 위해 한국을 분단했고, 이승만은 정권욕에 눈이 멀어 미국의 반공보루 구축을 위한 단독정부 수립에 앞장선 주구(走狗)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즉 대한민국은 정통성이 없으며 분단 고착화의 책임은 미국과 이승만에게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철의 장막에 갇혀 있던 소련의 문서고가 열리고 냉전시기 미국의 극비문서들이 공개되면서 기존 해석은 무너져 내렸다.  1946년 중국에서 국공내전이 터지자 소련은 자국의 안보와 직결된 만주 장악을 위해 북한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소련과 달리 미국에게 있어 남한의 전략적 가치는 미지수였다. 한반도를 중국대륙에 부수된 지역으로 본 미국의 전략가들은 중국 패권의 향배가 가려지지 않은 상태에서 한반도만을 고려한 전략을 세우려 하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내전의 승패가 안개 속에 쌓여 있던 1947년 초까지 미국의 한반도정책은 현상유지에 초점을 맞춘 ‘관망(Wait-and-See)정책’이었다. 그해 3월에 나온 ‘트루먼 닥트린(Truman Doctrine)’은 유럽에서의 소련 팽창을 저지하는 ‘봉쇄(Containment)정책’이었지 한반도는 해당사항이 없었다. 국공내전에서 국민당의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4월, 패터슨(Robert P. Paterson) 육군장관은 미국이 “한반도에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투자를 할 이유가 없다”고 보아 미군 철수를 주장했으며, 합참본부의 전략조사위원회도 한국이 전략적 가치가 없는 것으로 단정했다. ‘마셜 플랜(Marshall Plan)’을 선포한 5월 이후 미국은 모든 재원을 유럽에 퍼부었으며, 반공의 보루로 삼으려 한 일본을 제외한 동아시아 지역에서의 경비를 삭감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지 4개월 뒤인 1947년 9월, 미 국무부는 소련의 동시철병 제의를 받아들여 미군 철수와 한국문제의 유엔 이관을 결정했는데, 이는 미국이 체면을 손상하지 않으면서 한국 문제에서 발을 빼겠다는 신호였다. 당시 미국 수뇌부는 남한이 공산화되어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이렇게 보면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해 남한에 단독정부를 수립한 것은 미국의 전략적 결론 때문이었다고 할 수 도 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한 달 뒤인 1946년 6월 3일 정읍선언에서 미국보다 먼저 남한에 정부를 수립한 후 세계 공론에 호소해 통일정부를 세우자고 제안했으며, 그해 12월 미국 방문 시에는 유엔에 의한 한국문제 해결을 호소한 적이 있었다. 이러한 이승만의 전략은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는 공식입장을 미국이 폐기하고 유엔을 통한 한국문제 해결로 정책을 바꾼 1947년 9월 보다 앞선다. 이렇게 볼 때 이승만은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라 미국의 정책 변화를 궁극적으로 이끌어 낸 주도자였다.  한국문제 해결이 유엔에 이관됨에 따라 1947년 11월 14일 유엔 소총회는 미국이 제출한 유엔 주관 하의 남북한 동시선거 결의안을 채택했다. 이 결의안에 따라 남북한에서 실시될 선거 감시를 목적으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이 입국한 1948년 1월,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이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고 나섬으로써 큰 시련에 봉착했다. “한국문제는 한국 사람들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며 5·10선거의 연기를 요구한 김구와 김규식의 주장은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대표들에게 영향을 주어 유엔의 총선거 결정이 백지화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이승만은 김구와 김규식을 만나 남북 통일선거가 불가능할 경우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동의한다는 합의를 이끌어 냈다. 이러한 그의 노력의 결실로 한위 대표들은 마음을 바꿨으며, 유엔 소총회는 2월 26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 결의안을 다시 채택했다. 마침내 유엔 감시 하에 실시된 5월 10일 총선에서 선출된 198명의 제헌의원이 만든 헌법이 7월 17일에 공포되었으며, 8월 15일에는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취임과 함께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승만이 김구 등의 5·10선거 연기요구를 반대한 이유는 권력욕에 눈멀어서가 아니었다. 1946년 3월 북한은 한 달 전 소련의 지령으로 세워진 임시인민위원회 주도로 소위 “무상몰수·무상배분”의 토지개혁을 실시해 공산화의 물적 토대를 닥아 놓았으며, 1948년 2월 8일에는 조선인민군이 창군되고 이틀 뒤에는 ‘조선임시헌법 초안’이 발표된 상황이었다. 이처럼 북한에서 단독정부 수립준비가 끝나고 중국내전에서 공산당의 승리가 확고해졌으며 미군철군은 이미 결정된 상황이었다.  그러나 건국 이후에도 미국의 정책 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국무부 극동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중요성을 강조하며 철병을 재고 의견을 내 놓았지만, 그 시기를 일시 연기하는 데 그쳤을 뿐이다. 1948년 10월 21자 뉴욕 타임즈가 “서울의 미국 관리들은 대한민국이 이제 완전붕괴 직전에 도달했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고 보도할 정도로 당시 남한의 운명은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다. 이러한 위기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이승만은 미군 철병 연기를 요청하는 한편, 대한민국이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한 외교활동을 펼쳤다.    2. 장면 수석대표가 이끈 건국외교는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나    대한민국 건국이 공식 공표되기 나흘 전인 8월 11일 이승만 대통령이 제헌국회의 외교통 의원이었던 장면(張勉)을 제3차 유엔총회 파견 수석대표로 임명할 만큼 국제적 승인은 시급한 문제였다. 당시 소련 중심의 공산국 블록과 영연방측은 대한민국의 승인을 반대하고 있었으며, 바티칸만이 대한민국을 국가로 승인했을 뿐 미국조차도 승인을 미루고 있었다. 그 뿐만 아니었다. 장면이 이끈 대표단이 넘어야 할 장애는 산 넘어 산이었다. 첫째, 대표단은 초청안이 가결된 12월 7일 이전에는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교섭 상대국 대표들을 공적으로 만나 외교활동을 전개할 수 없었다. 둘째, 제주도에서 일어난 무장봉기와 그 진압을 위해 파견될 예정이었던 여수 주둔 14연대의 반란 등 남로당의 파괴공작으로 인한 불안정한 국내 정국과 국론 분열도 심각했다. 셋째, 대한민국 승인 결의안이 회기 최종기한인 12월 11일의 닷새 전인 12월 6일에야 제1위원회(정치위원회)에서 토의를 시작할 만큼 소련과 그 위성국의 반대가 극심하였다. 넷째, 당시 호주와 인도 등 영연방 국가들은 미소공동위원회 결렬 이후 한국문제는 미·소간의 문제일 뿐이라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으며, 아랍권 국가들도 이스라엘 독립문제로 인해 미국이 지원하는 대한민국 승인을 반기지 않았다.  우리 대표단은 유엔 회원국이 아니었으므로 옵서버 자격으로 일반 방청석에서 회의를 참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3개월이란 짧은 기간에 대표단은 첩첩산중의 장애를 뚫었고, 그 결과 12월 12일 총회 마지막 날 대한민국은 유엔의 승인을 획득하였다. 어떻게 승인을 얻어냈을까? 먼저 대표단의 적절한 구성을 꼽을 수 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제 외교무대에서 무시할 수 없는 영향력을 갖고 있는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낼 수 있었으며, 한국문제에 이견을 보였던 유엔한국위원단의 캐나다나 인도 대표도 반대하지 않을 장면을 수석대표로 임명했다. 제2차 세계대전 기간에 전개된 막후 외교에서 중재자의 역할을 수행함으로서 국제 외교무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 바 있던 교황 비오 12세는 유엔총회에 참석한 한국대표단에 대한 지원을 바티칸의 국무장관 몬트니(Giovanni Battista Montini)대주교와 재불 교황청 대표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 대주교에게 명령하는 등 외교적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장면은 혜화동 본당 신부로 당시 파리에 와 있던 생제(Singer) 신부와 함께 파리 근처 성지 참배여행 도중 우연히 만난 오브라이언(O‘brien) 부주교의 도움으로 호주대표단의 한국문제 담당자 플린스컷트(Jim Plinscott)를 만나 지원을 약속받았다. 이처럼 바티칸의 후원을 이끌어 내려 한 이승만의 전략이 주효해 바티칸은 대한민국 승인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했다.  또한 미국 특히 덜레스(John Foster Dulles)의 전폭적 지원활동도 중요했다. 장면은 후일 그를 “대한민국의 건국과 국제적 승인을 위하여서는 누구보다도 열렬한 동정과 노력을 아끼지 않아 찬연한 공훈을 세움으로써 우리가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거룩한 은인”으로 회고할 정도였다. 그는 유엔 총회 막전막후에서 유엔의 승인을 얻을 수 있도록 외교 전략을 조언하는 한편 거수로 찬반을 표시하게 할 만큼 12월 12일 총회에서 승인 과정을 진두지휘하였다.  한 마디로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에는 냉전체제 하에서 소련의 팽창을 저지하려는 미국과 바티칸의 도움이 크게 작용하였지만, 이 두 지원세력의 협력을 극대화할 수 있었던 견인차는 이승만이 구사한 외교 전략과 장면 등 유엔총회 파견 대표단의 헌신적 노력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장면은 이 문서에 관한 일화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덜레스씨는 조금도 피로해 하지 않고 솔선하여 각국대표를 깨우쳐 협조를 요청하기에 바빴으며 드디어 의장이 표결을 선언하자 몸소 일어나서 ‘한국문제는 중요한 것이므로 거수가결을 하지 말고 각국대표를 호명하여 가부를 하나씩 듣기로 하자’고 주장하여 그대로 되니까 종이를 앞에 펴놓고 각국 대표의 ‘예스’ ‘노’를 일일이 적었으며 48대 6의 다수로 가결이 선포되자 덜레스씨는 그 기록에 사인을 해가지고 와서 그것을 나에게 주며 ‘이것을 한국독립 승인의 기념품으로 드리며 축하합니다’고 하면서 자신도 무척 기뻐하였던 것이다. 나는 그 기록을 지금도 꺼내보고 다시금 그 분에게 깊은 감사를 드리는 바이다.”    3. 유엔의 대한민국 승인을 기억해야 할 이유    한 나라가 국민국가인지 여부는 자국민이 아니라 국제적으로 다른 나라들에 의해 판정된다. 1948년 5월 10일 유엔의 감시 하에 실시된 총선 결과 8월 15일에 건국된 대한민국은 그해 12월 12일 제 3차 유엔총회에서 회원국 58개국 중 48개국의 찬성으로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국제적으로 인정받았다. 따라서 우리는 한 세기 전 서구열강들이 국민국가로 인정하지 않았던 대한제국의 망국(亡國), 임시정부가 펼쳤던 승인외교의 실패, 그리고 광복 후 연합국의 신탁통치 계획에 비춰볼 때, 기적과도 같은 축복이었음을 기억해야만 한다. 또한 대한민국에 대한 국제적 승인과 더불어 유엔한국위원단을 재 파송해 통일국가 건설에 힘쓸 것을 약속한 결의안이 통과된 직후 5?10총선 결과 폐기와 유엔한국위원단 해체를 주장한 소련측 결의안이 48개국의 반대로 부결되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당시 총회에서 표결된 미국측 결의안과 소련측 결의안의 주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국측 결의안은 “1) 유엔은 대한민국의 위상과 권위를 국내외적으로 보장하기 위해서 한국에서 유엔의 후원 하에 행해진 일에 합법성을 보장할 것, 2) 유엔은 가능한 한 조속히 철군을 감시함으로서 신정부로 하여금 전시 군사점령을 종결시킬 수 있도록 위원단을 존속시킬 것, 3) 유엔위원단은 한국민으로 하여금 재통일하고 경제적 혼란과 내란의 위협을 종식시킬 수 있도록 지원할 것” 등 이었으며, 소련측 결의안은 “유엔임시위원단의 폐지, 한국을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재건하는 새로운 수단 마련, 그리고 남한 선거결과의 폐기 등”이었다. 한국독립결의안이 통과된 뒤 표결에 부쳐진 소련측 결의안은 찬반 6대 48, 기권 1표로 부결되었다.   왜냐하면 한반도에 들어선 두 개의 국가가 유엔에서 벌인 인정(認定)투쟁에서 대한민국이 쟁취한 국제적 승인은 1950년 6·25전쟁 때 유엔군 파병의 근거가 되어 북한의 침략에서 대한민국을 지킬 수 있는 토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Ⅲ. 건국의 아버지들이 필요하다    한국 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이승만과 김구에 대한 우리 시민사회의 기억은 긍부(肯否)와 호오(好惡)가 엇갈린다. 광복 후 대한민국의 역사를 서구가 300년 걸려 이룩한 산업화와 민주화를 불과 60년 만에 따라잡은 ‘자랑스러운 역사’로 자긍하는 이들에게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초석을 놓은 이승만은 그 업적을 기려야 마땅한 ‘건국의 아버지’로 다가선다. 그러나 김구는 냉전체제의 본질을 제대로 깨닫지 못해 소련의 기만전술에 말려들고만 ‘시대착오적 정치가’로 비칠 뿐이다. 반면 민족을 단위로 한 통일국가의 완성만이 살길이라 믿는 이들에게 김구는 그 당위성을 일깨우는 상징인물로 우뚝 선지만, 이승만은 ‘분단의 고착화’를 초래한 ‘역사의 죄인’이자 민주주의를 압살한 독재자로 비칠 뿐이다.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의 편차는 우리 시민사회의 정체성에 난 균열과 골이 얼마나 크고 깊은지를 잘 보여준다.  갈가리 찢긴 우리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 줄 묘안은 없을까? 우리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法統)을 계승한다”는 헌법 전문(前文)의 정신을 마땅히 기억해야 한다. 1919년 4월 10일 상해에 세워진 임시정부가 채택한 민주공화국의 국가형태와 삼권분립 정신에 기초한 임시헌법이 오늘 우리가 지키고자하는 정치체제의 시원임을 말이다. 또한 1941년 6월 김구가 이승만을 임정을 대표하는 주미외교위원장 겸 주미 전권대표로 임명했음도 잊어서는 안 된다. 외교활동과 무장투쟁 독립운동 전략은 달랐지만, 두 사람은 그때 나라의 독립을 위해 손을 마주 잡았다. 대한민국 건국사를 임정이 수행한 독립운동의 역사와 연속선상에서 파악할 때, 1919년부터 6년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과 1940년부터 5년간 주석을 맡은 김구 두 분 모두 ‘건국의 아버지들(Founding Fathers)’이라는 자기자리를 찾아갈 수 있을 것이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냐 ‘대한민국 건국이냐’ 이완범 한국학중앙연구원 정치학과 교수    I. 1945년 8월 15일: 해방인가 광복인가?    대한민국 정부에서는 70년 전의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공식 호칭하며 북에서는 ‘조국해방기념일’이라 부른다. 따라서 언뜻 보기에 8·15를 북에서는 해방 남에서는 광복이라고 칭하는 것 같다.  그러나 남북 모두 두 용어를 쓰고 있다. 단 북한에서는 광복이라는 말 앞에 조국이라는 용어를 첨가하여 광복보다는 ‘조국광복’이라는 합성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1945년을 조국광복의 해로 공식 호칭하고 있으며 8월 15일을 ‘조국광복의 날’이라고도 규정한다. 또한 1945년 당시에는 남·북·좌·우 모두 해방이라고 불렀다. 1946년과 1947년 8-15는 좌우 모두 해방1주년, 해방2주년이라고 기념했다.  그러다가 대한민국은 1949년 10월 1일 법률 제53호 “국경일에관한법률” 2조에 ‘광복절 8월 15일’이라고 명기해 광복절을 국경일의 하나로 제정했다. 그런데 이 법안의 ‘신규제정 이유’에는 ‘獨立記念日’로 되어 있어 그 날이 1945년 8월 15일인지 아니면 1948년 8월 15일인지 명확하지 않다. 1949년 9월 ‘국경일 제정에 관한 법률안’이 국회를 통과하는 과정에서 초안에는 8·15가 ‘독립기념일’이라고 적혀있었는데 광복절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고 한다.  정부가 작성해 1949년 6월 2일 국회로 회부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안”에는 독립기념일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1949년 9월 제5회 임시국회의 법제사법위원회(위원장 백관수)에서 ‘광복절’로 수정된 안을 마련했다. 이 안은 9월 22일 본회의에 상정되어 재석 108명에 가 81표 부 4표로 확정되었다. 당시 법제사법위원회는 헌법기념일과 독립기념일을 제헌절과 광복절로 고치자고 주장해 관철시켰으며, 본회의에서 의원들은 독립이냐 광복이냐의 의미를 논하기보다는 日, 節, 날과 같은 어미·자구에 집착했으며 3·1절, 개천절과 같이 ‘절’자를 집어넣어 통일시키면서 제헌절, 광복절이라는 조금 더 간결한 명칭에 손을 들어주었다. 그런데 당시 속기록을 검토했던 김효선 선생은 당시 제헌의원들이 1945년 해방이 아니라 1948년 8·15를 광복절로 간주했었다고 주장했다.  1945년 8·15가 아니라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의 견해는 다음 단락에서 상술하고자 한다.  그런데 문화체육관광부가 운영하는 웹 사이트(www.korea.net)에서는 광복절을 Liberation Day라고 번역했다. 따라서 광복에 해당하는 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번역은 직역인 restoration이 아니라 해방의 번역어인 liberation이다. 그런데 국가보훈처 산하의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에서 주최한 광복60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주제: 세계 식민지 해방운동과 한국독립운동)에서는 광복60년을 the 60th Anniversary of the Restoration of Independence로 번역했다. 이렇듯 정부부처 사이에서도 혼선이 있다.  한편 2005년 네이버영어사전에서는 광복절(光復節)을 ‘Independence Day of Korea’라고 번역하다가, 2015년에는 ‘National Liberation Day’로 바뀌어 있다.  따라서 광복절은 1945년 8월 15일 해방의 날을 지칭한다고 할 수 있으며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기념일은 독립기념일이다(미국과는 달리 우리의 경우 식민지 이전에 독립국이 존재했으므로 독립이라는 표현 보다 광복이 더 타당하다는 의견도 있다).  진보적 학자들은 독립운동이라는 용어보다 ‘민족해방운동’이라는 표현을 선호한다. 이렇듯 해방이 다소 진보적인 어감을 가진 것처럼 간주되기도 한다. 광복은 국권상실 상태로부터의 회복을 의미하여 복고적이며 자강운동적-계몽운동적 지향이 보인다고 진보적 학자들은 비판적으로 인식한다. 진보진영의 한홍구 교수는 빼앗긴 것을 되찾는다는 의미에서 광복이 호소력이 있었지만 좀 복고적인 냄새가 난다는 의미에서 진보적인 사람들은 해방을 선호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두 용어 사용자에 이데올로기적 구분이 명확한 것은 아니다. 따라서 적어도 정치적으로는 두 용어를 혼용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의미 면에서는 차이가 있다. 해방은 “식민 상태 등 압제로부터 풀린다”는 뜻이다. “연합국이 한국을 일제로부터 해방했다”거나 “한국은 1945년 해방되었다”는 용례에서 알 수 있듯이 연합국이 주체가 된 표현이다. 또한 “노예(상태)를 해방”한다는 기분 좋지 않은 어감을 연상시킨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다소 수동적·피동적인 표현이다.  이에 비해 광복은 주체적인 표현이다. 광복의 본 뜻은 빛나게 회복하다, 힘이 줄어들거나 기울어진 것을 이전상태로 되돌린다는 뜻이다. 사전적으로 보면 “빼앗긴(잃었던) 주권(국권; 빛)을 도로 찾는 것”을 의미한다. 빼앗긴 나라를 되찾는 등 주권을 회복하는 것을 광복이라고 하는 것이다. 주역에서 ?은 ‘원래 자리로 오는 것’을 의미하는데 원상태로 완전히 회복하는 것이다. 광복은 ‘빛나는 되돌림’ 혹은 ‘빛을 되돌리는 상태(주권 회복)’를 뜻한다. 그런데 광복은 일제가 우리를 병탄하기 이전의 광명한[밝은] 역사를 회복한다는 과거 지향적이며 복고적[보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 광복은 한마디로 잃었던 나라를 되찾았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장준하가 1956년 『사상계』에 문제제기한 바에 따르면 1945년은 과거로 돌아간 것이 아니라 새로운 출발의 계기였다는 것이다.  광복의 주체는 우리이며, 연합국이 우리를 일제의 지배에서 해방시켰으므로 해방의 주체는 연합국이며 우리는 객체이다. 우리 입장에서 해방은 피동적인 용어이며 광복은 주체적인 뉘앙스를 가진 말이다. 또한 광복은 이전 시기 주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전제하고 있는데 비해 해방은 이전에 주권국가로 존재했었다는 사실을 알 수 없는 용어이다. 복고적이라는 뉘앙스만 없다면 광복이 주체적이면서도 식민지 이전의 독립국가의 존재도 부각시킬 수 있는 말이므로 피동적인 해방보다도 좋은 어감의 용어이다. 그런데 ‘과연 1945년 8·15에 주권을 찾았을까’라는 질문을 한다면 이 날은 단순한 해방절이며, 광복은 1948년 8·15가 더 적절하지 않을까 하는 주장이 가능한데 단락을 나누어 상술하고자 한다.    II.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는 소수설: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 1948년 광복    ‘광복’을 ‘주권(국권) 회복’이라는 사전적 정의에 입각하면 해방보다는 ‘독립’이라는 용어와 그 의미가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전술한 ‘국경일에관한법률’ 제정이유에도 광복절이 독립기념일로 나오므로 광복을 독립과 등치시킬 근거가 있다. 이러한 등치론에 따르면 1945년 8월 15일에는 우리 민족이 일본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을 뿐, 독립을 성취한 것은 아니므로 얄타회담에 임했던 영국의 기본적인 입장은 “한반도를 해방은 시켜줄 수 있지만 독립은 시켜줄 수 없다”는 것이었고, 그러한 주장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해준 것은 얄타회담 이틀째인 1945년 1월 31일자로 올라온 토인비(Arnold J. Toynbee)의 보고서였다. 훗날 위대한 역사학자로 평가받은 그는 당시 옥스퍼드대를 졸업하고 영국 외무부 조사국의 중진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었다. 그는 얄타회담을 위해 준비한 정책보고서 “한국의 독립 능력: 그 역사적 배경(Korea’s Capacity for Independence: Historical Background)”에서 “한국은 독립할 수 없는 나라”라는 입장을 분명히 했고 처칠은 회담장에서 그 보고서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1945년 광복을 해방으로 바꿔 써야 한다는 것이다. 주권을 찾는다는 견지에서 보면 1945년에는 국권(주권)이 미국과 소련에게 있었고, 힐드링 (Hilldring) 미국 국무부차관보는 1947년 3월 한국인들의 참담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이제 일본인들은 떠났다. 그러나 한 통치자가 떠난 자리에 한국인들은 두 통치자들을 가지게 되었다. 설상가상 그들은 ‘두 개의 밀폐된 구획’(two hermetically sealed compartments)으로 국가를 분단시켰다. 많은 한국인들은 일제 치하에서보다 훨씬 못 살게 되었다고 느낀다. 식량 가격은 오르고 양은 줄어든다. 한국인들은 우리 미국인들이 떠나기를 요구하고 자신들이 자신들의 운명을 정하도록 해주기를 바란다.”  당시 한국인들 중 분단의 고통을 감내하고 있었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미국의 정책 담당자조차 이런 고통을 인정했던 것이다. 한국인들 중 일부는 미군정에서의 생활이 일제 식민통치 아래서의 삶만큼 비참하다고 느꼈으며 좌익들은 더 비참하다고 생각했다. 한편 채만식은 1948년 소설 “낙조”를 통해 한반도는 외국 군대 아래서 허울뿐인 독립을 이루었다며 38선 이남을 미국의 보호령으로 간주했다. 박노갑은 1948년 소설 “사십년”에서 미군정은 일본 식민통치의 대체물일 뿐이라고 비판했다. 이런 맥락에서 1945년 해방은 모두가 기뻐만할 일은 아니었으며 단지 지배자의 교체에 불과했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1948년에야 찾았으므로 광복은 1948년 8월 15일이라는 주장이며 이는 현재까지는 소수설이다.  먼저 김효선 선생은 광복의 사전적 정의가 ‘주권회복’이므로 1948년 8·15가 광복절이라고 주장했다. 광복절의 정확한 의미는 일제로부터 해방된 날이 아니라 ‘빼앗긴 주권을 되찾아 국권을 회복한 날’이라는 것이다. 1945년 8·15는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일뿐 통치권이 미군정으로 넘어갔으므로 ‘광복의 날’이 아니며 ‘독립의 날’도 아니라는 주장이다. 반면 1948년 8·15는 ‘광복의 날’이자 ‘국권회복의 날,’ ‘독립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따라서 1945년 8·15에 우리 민족이 주권을 회복했다거나 독립을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또한 2015년 1월 ‘KBS공영노동조합’(기존 노조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수적임)도 김효선 선생의 주장에 의거해 1948년을 광복절의 기산으로 잡아야 한다고 아래와 같이 선언했다.  광복절이 1948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이 아닌 1945년 8월 15일을 기념하는 국경일로 잘못 인식되게 된 것은 전쟁 와중인 1951년 8월 15일에 있었던 제3회 광복절 기념식부터였다. 당시 대통령 이승만은 기념사의 제목을 ‘기념사(제3회 광복절을 맞이하여)’로 명기하여, 『대통령이승만박사담화집』에 나와 있는 1950년 “기념사(제2회광복절을맞이하여)도 같은 맥락에서 부제를 달고 수록되었다.  <국경일에 관한 법률>에 부합하게 대한민국의 독립을 기념하는 국경일로서 광복절을 기념했다. 그런데 당시 신문 중 한 곳[『조선일보』; 인용자]이 이날의 기념식을 ‘광복 6주년 기념식’이라고 잘못 보도하면서 문제가 생겼다. 1949년 제정된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간과한 다른 신문들이 이를 받아쓰고 1945년 8월 15일 즉,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국경일로 오인한 것이다.  전쟁의 혼란 속에 벌어진 신문사들의 광복절에 대한 착각은 이때부터 정부로 전파되었다. 제헌국회에서 결정한 1948년 8월 15일부터 시작되는 광복절 기념일의 횟수를 산정함에 있어서 <국경일에 관한 법률>과 ‘광복’의 사전적 의미인 ‘주권을 되찾은 날’을 외면하고 1945년을 기산년도로 삼았으며, 현 정부에서도 그런 관행이 지속되고 있다.  한편 진보진영의 학자 서중석 교수도 1948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호칭하는 소수설을 견지했다. 그는 1945년 8-15를 해방으로 규정했으며 “1945년 8‘15로 역사상 처음으로 언론‘출판‘집회‘결사 등 기본권을 누릴 수 있게 되고 정치적 자유를 획득했기 때문에 대단히 뜻 깊지만 광복절은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 선포를 기념하는 명칭으로 아주 적절하다”고 주장했다. 이는 2008년에 뜨거웠던 건국절 제정 논쟁(후술함)을 의식해 1948년 8-15가 건국절이 아니라 광복절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의 일환이었다.  1945년 해방, 1948년 광복(건국)을 구분하여 기념하자는 김효선 선생·KBS공영노동조합의 주장과 서중석 교수의 주장은 그 접점이 모색될 수 있다. 다만 서중석 교수는 1948년 광복이 건국이 아니라고 본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1945년 8-15를 광복절로, 1948년 8-15를 정부수립기념일로 간주한다. 따라서 2005년에 ‘광복60년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발족되었다. 이에 반해 김효선 선생·KBS공영노조와 서중석 교수의 주장에 의하면 올해 2015년을 광복67주년으로 불러야 하는데 관행화된 것을 어떻게 바꿀 수 있을지가 관건이다.  이미 1945년 8·15를 광복절이라고 국가에서 공인했으며 일반인들이 그렇게 알고 있는 마당에서 대중들의 고정관념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다소 문제가 있는 규정이라도 무리하게 바꾸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며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악법도 법’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무시할 수는 없다. 잘못된 관행일지라도 일반 국민들이 그렇게 부른다면 바꾸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이미 통용되고 있는 이름을 인위적으로 바꾸려는 시도는 불필요하고 소모적일 수 있다. 그렇지만 잘못된 통념을 바로잡는 것이 역사가의 책무이기도 하다.  1945년 8·15 직후 미·소양군의 지배로 인해 우리민족이 독립되지는 못했다. 따라서 완전한 해방 송광성 교수는 1945년 8-15는 해방이 날이 아니라 분단의 날이라고 주장했다.  ·완전한 광복(주권회복)은 아니었다. 시인 권환은 1946년 “그대를 어떻게 맞을까”를 통해 다음과 같이 읊었다. “과연 광복은 되었는가? / 오! 남녘땅 동포들아 / 다시 한 번 맞이하자 // 참다운 해방과 자유를 가져오는 / 새 8·15를 정말 8·15를 (...).”  그렇지만 일본 제국주의의 압제로부터 해방되었으므로 불완전한 해방 1981년 미국 뉴저지 주 프린스턴대학교 출판부에서 간행한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의 책 『한국전쟁의 기원』 1권(The Origins of the Korean War, Vol. I, Liberation and the Emergence of Separate Regimes, 1945-1947)의 결론인 12장의 제목은 ‘부정된 해방(liberation denied)’이다. 그는 해방정국에서 해방은 부정되었다고 평가했다. 필자는 해방이 완전히 부정되었다는 커밍스식의 급진적 평가에 대항하여 ‘불완전한 해방’ 정도는 된다는 중도적 해석을 견지하고자 한다. 불완전한 광복은 주어졌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약간의 수식어를 첨가하는 것으로 광복절 지칭의 대립·논쟁을 지양하고자 한다.  즉 1945년 8·15를 ‘부분의 광복절[1기 광복절]’로, 미군정의 지배로부터 독립된 1948년 8·15를 ‘2기 광복절[미완의 광복절]’로 장차 도래할 통일의 날을 ‘완성된 광복절,’ ‘진정한 광복절’로 부르는 것이 어떨까 한다. 2015년 3월 5일 롯데호텔에서 열린 『조선일보』 창간 95주년 기념식의 주제는 ‘민족과 함께한 95주년, 광복에서 통일로’였다. 이 자리에서 “진정한 광복은 통일”이라는 기치가 내걸렸다. 배성규, “1920-민족과 함께한 조선일보 95년 진정한 광복은 통일,” 『조선일보』, 2015년 3월 6일 A1면. 또한 박세일 한반도선진화재단 상임고문은 “한반도 통일만이 우리가 완전한 독립국가이자 선진국가로 가는 길”이라고 했다.1948년 미국으로부터 독립되었지만 아직도 미군이 우리 국방의 중요한 부분을 책임지고 있으므로 완전한 자주독립은 아니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분단되었다고 광복이 되지 않았다는 ‘분단=부정된 광복’이라는 논리는 1945년 일제에서 해방되었던 사실과 1948년 독립된 사실을 지나치게 과소평가한다. 일제에서 미국·소련으로 지배자가 교체된 것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있지만 잠정적으로 외세가 점령했던 미군정기와 소련지배기(소군정기)를 식민지 시대로 보지는 않으므로, 단순한 식민 지배 권력의 교체라고 보는 견해는 당시 주권 결여 상황을 너무 과장한 단순화 논리이다. 북한과 대한민국의 일부 민족해방(NL)파[친북 주체사상파]는 대한민국이 일제 식민지에서 미제의 식민지로 지배자만 교체되어 지금까지 식민지 상태라고 평가하고, 일부 민중민주주의(PD)-제헌의회(CA)파는 일제 식민지에서 미국의 신식민지로 변화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도 역시 독립국가로서의 대한민국 출범을 폄하하는 급진적·극단적인 견해이다. 그렇지만 1949년 6월 미군이 철수한 이후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의 지원으로 나라를 지킬 수 있었고 현재도 북한의 침략을 억제하기 위해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므로 자주독립국가라는 면에서 부족한 점이 없지 않다는 견해가 있다. 1970년대 닉슨 행정부(1971년 3월 27일)와 카터 행정부(1977-1978년)가 단행한 미군감축의 와중에서 박정희 대통령은 자주국방을 강조했다. 이 말은 당시 국방이 미국에 의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따라서 통일된 후 우리 손으로 우리를 지킬 수 있다면 완전한 자주의 실현에 한 걸음 더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완전한 광복은 그 시점에 달성될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작은 나라인 대한민국이 강대국에 의탁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면 미군 철수를 요하고 관철시키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지 의문이다. 국제화시대에 과도한 민족주의적 감정은 민족의 장래에 도움이 안 된다는 주장도 있는 것이다. 자주라는 구호가 매력적이긴 해도 전세계적에서 자국만으로 안보를 책임지는 나라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영국, 독일 같은 선진국에도 미군이 주둔하고 있으며 EU의 국방도 미국의 지원을 받고 있다. 그렇다고 독일 등이 자주국가가 아닌 것은 아니다. 심지어는 러시아, 미국도 동맹국과 협조해 국방을 유지하고 있다. 한미동맹은 핵무기로 무장된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데 뿐만 아니라 북한의 급변사태 혹은 중국의 급부상 등으로 인해 동북아시아의 세력균형이 일시에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안전장치라는 측면도 있다.    III. 1948년 8월 15일을 보는 시각: 건국이냐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이냐?    이명박 대통령은 2008년 8월 15일 ‘광복63주년 대한민국건국60년 중앙경축식’에서 “대한민국 건국 60년은 성공의 역사, 발전의 역사, 기적의 역사였다”고 평가했다. 이는 남한의 정통성을 강조한 것으로 풀이된다. 남쪽만이라도 적화를 막은 성공적 조치로 ‘1948년 나라세우기’를 평가하면서 이를 선택한 이승만 노선에 호의적인 보수진영(그리고 당시 여권)의 평가와도 맞닿아 있다. 반면 진보진영에서는 “남북한이 각각 정부를 수립한 것이 오늘날의 분단으로 이어져 민족의 에너지가 낭비되고 있다”고 평가했는데 분단시대의 개막은 성공시대의 개막이 아니라 실패한 부정적 역사의 시작이며 극복해야 할 것으로 간주했다.  1948년 8월 15일 우리는 임시정부가 아닌 대한민국이라는 정식 국가를 우리나라 남쪽에 정식으로 만들었으며, 이 국가가 우리 민족의 구성원들을 직접 통치한지 벌써 70년 가까이 되었다.  이제 차분히 돌아보며 우리 현대사를 반성할 시점이 도래했던 것이다.  그런데 1948년 8월 15일을 어떻게 평가할 것이냐에 대해서는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 논의가 분분했다. 1948년 8-15를 건국(국가 만들기, state-building)이냐 아니면 (단독)정부수립(단정/분단)으로 보느냐에 따라 좌우가 갈리기도 했다. “대한민국 ‘건국’인가 ‘정부수립’인가: 동북아역사재단 ‘건국 60주년’ 학술대회”에서 김태식 기자는 “‘건국’은 대한민국 자체를 하나의 완전한 인격체로 간주하는 것인 반면, ‘정부수립’은 대한민국 자체를 ‘남한’으로 축소해 불완전한 분단국을 표현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러나 정부수립이라는 표현을 쓰는 사람이 모두 분단이나 단정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며 객관적인 사실을 기술하는 입장에서 그랬다고 할 수도 있다.   오늘날 현대사학계가 건국-대한민국 발전을 중시하는 ‘건국담론’과 해방-분단을 강조하는 비판적인 ‘분단담론’으로 대립적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한쪽에서는 2008년 8-15를 건국60년이라고 기념했는데 비해 다른 한편에서는 분단60년이라며 비판적으로 볼 것을 요구했다. 1948년 후 60년의 역사를 건국과 발전의 영광으로 보아 건국60주년을 기념하는 입장이 있고 이에 대해 ‘통일민족국가’ 건설의 좌절과 그 실현을 위한 투쟁의 과정으로 보아 분단60년을 반성하는 입장이 대립했다. 이것이 2008년을 달구었던 ‘건국절 논쟁’ 등장의 한 부분을 제공했다.  1980년대 이후 한국현대사학계에서는 분단사관과 통일지상주의적 경향이 주류를 이루었으므로 건국의 관점에서 한국현대사를 바라보지 않았으나 2008년을 전후하여 건국사관을 담지한 그룹이 하나의 정치세력으로 등장하여 기존의 연구경향을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대립을 다양한 의견표출이라는 점에서 본다면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다. 대한민국과 같이 다원화된 사회에서 과거 독재치하처럼 어떤 외부적 힘에 의해 역사인식 획일화를 지향한다는 것은 더 큰 문제를 야기할 것이며 과거에는 그것이 무리였음에도 불구하고 가능은 했으나 지금은 가능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대립이 불필요한 오해와 소모적인 논쟁을 야기하거나 지나칠 정도여서 ‘국론분열’이라는 평가를 받게 된다면 역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러한 역사인식의 양극화는 지양될 조짐을 보이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통을 통한 토론은 가능해야 할 것이다. 실제로 지금까지 우리는 건국과 정부수립을 그때그때 병행하여 사용해 왔고, 이를 구분하여 개념 짓는 게 큰 의미가 없다고 보았다. 엄밀한 개념정의가 없었기에 그렇게 된 것이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개념정의부터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 1945년 8월 결성된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가반이 되었던 건국동맹은 당초 그 이름으로 해방동맹, 해방연맹을 생각하다가 1943-1944년간 일제의 패망이 눈앞에 명백히 다가왔고 조선의 해방이 불을 보듯 명확해졌기 때문에 일제패망 시 즉각 건국에 착수해야 한다고 생각해 건국동맹으로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런데 건국준비위원회도 우파보다는 좌파가 주도했으며, 북에서도 ‘건국사상총동원운동’ 등의 예에서 보듯이 김일성의 건국에 대해 찬양하므로 양분법적인 구분에는 문제가 있다. 단지 국가를 부르주아계급이 인민을 착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는 인식(국가는 지배계급의 집행위원회에 지나지 않는다; 맑스주의에 대한 도구주의적 해석)이나 국가는 소멸할 수밖에 없다는 국가소멸론(19세기 중반 엥겔스의 인식) 때문에 좌파는 국가를 그렇게 긍정적으로 보지 않는 편이다. 이런 맥락에 기반하기도 하고 아닌 경우도 있지만 좌파는 대개 1948년 8·15를 건국보다는 정부수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제에 의해 국권을 뺐기기 전에는 엄연히 나라가 있었으므로 2008년 건국60주년을 너무 강조하는 견해는 우리나라 역사가 60년밖에 되지 않았다는 잘못된 인식을 가져올 수 있다는 주장도 있었다. 따라서 건국이라는 용어를 쓸 때 대한민국이라는 수식어를 앞에 명기해 ‘대한민국건국’이라고 정확하게 적어서 다소 평가절하 시키기도 했다. 신국가 건설(새로운 건국)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같은 맥락에서 고려건국, 조선건국도 있을 수 있으며 개천절에 최초 국가가 건국되었다는 주장도 가능하다. 물론 1948년 수립된 것은 왕정이 아닌 공화제 국가이므로 이전 건국과는 다른 획기적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은 1776년에 독립을 선언했으며 그 이전은 신대륙 발견기와 식민지 시대였다. 조지 워싱턴은 국부, 건국의 아버지(founding father)로 추앙받으며 다른 독립 운동가들도 새로운 국가의 건국자(founders of new nation)로 간주된다. 그런데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과연 국부라고 할 수 있을까? 중국의 손문에 비견되는 인물이 한국에 없는 것은 우리의 경우 국망으로 나라를 망쳤으므로 나라를 잃은 어른들 중 국부로 추앙할 만한 인물이 없다는 데에도 있다. 한편 김득중 국사편찬위원회 연구사는 2008년 8월 18일 참여사회연구소와 의제27, 코리아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사의 재인식: 48년 체제와 민주공화국’ 공동 토론회에서 “‘국부’라는 말은 국가를 하나의 가족으로 보는 것인데, 이는 최고 통치자가 국민의 생존 여부까지 결단할 수 있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고, 이승만은 실제로 그렇게 했다”며 “저항 가능성이 있는 대중 전체를 목표 삼아 반공을 신념화하지 않은 사람들을 국민의 범주에서 추방하고 죽였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단군은 어떻게 되나? 고려 이후 단군을 국조로 인식했으며 1948년 9월 법제화했다. 대한민국을 일군 사람으로 이승만을 간주할 수는 있지만 미국의 조지 워싱턴에 비견되는 한국 국가의 최초 정초자로 간주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승만이 나라를 세우려 했을 때 미국은 최고 지도자로서 다른 대안(예를 들면 김규식, 여운형, 서재필)을 고려했었으며 국내에도 좌파는 물론 우파 중에도 김구-김규식을 비롯해 단정이라며 반대했던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 대한민국은 사상의 자유가 보장된 사회로 대한민국 건립과정과 결과에 대해 누구든지 비판할 수 있다. 그 권리를 부정한다면 그게 바로 위헌적 행태라는 이대근 경향신문 논설위원의 지적이 있다. 이승만의 대한민국 건국에 대해 부정적 견해를 내어놓은 것은 개인의 자유라는 것이다. 그는 2014년 12월 19일 헌법재판소의 통합진보당(통진당) 해산 선고와 관련해 “애국가를 부정하거나 태극기를 게양하지 않는 것 역시 표현의 자유에 해당한다”고도 했다.  (물론 이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나라를 세운 이승만이 대단한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조지 워싱턴과 이승만을 동격에 놓는 것은 우리의 ‘반만년’ 역사를 지나치게 협애화하는 것은 아닐까 한다. 건국은 대한민국 건국일뿐이며 전체 한국사의 건국일은 아니다. 게다가 대한민국 건국도 1919년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있고 대한제국과의 연결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 또한 반만년전의 (고)조선건국을 진정한 건국이자 우리 역사의 유일한 건국으로 간주하여야 하며 이후 많은 국가의 수립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왕조나 정부수립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진보진영의 김세균 교수는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정부수립으로 보는 한편, 1948년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평가했다. 대한민국은 대한제국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와는 다른 형식면에서는 합법적인 건국절차를 밟았으므로 건국이라는 주장이다. 그 이전의 정부와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자본주의] 국가유형의 정부가 수립되었다는 것이다.  이렇듯 진보와 보수가 각각 정부수립과 건국의 치밀한 논리로 양극화되어있는 것은 아니므로 토론의 여지는 있다고 할 것이다.    IV. 맺음말: 분단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    1948년 8·15를 광복으로 여기는 소수설을 견지하고 있는 서중석 교수는 2015년 7월 16일 한국프레스센터 기자회견장에서 열린 제8회 몽양학술심포지엄의 종합토론 좌장을 보면서 광복절이라는 명칭은 ‘통일민족주의적 역사인식’인데 비해 건국절 제정론자들이 주장하는 건국절 명칭은 ‘분단국가주의적 역사인식’이라고 평가했다. 그런데 1948년 8·15는 광복이 아니므로 건국도 안 된다면 모를까, 광복(주권회복)은 되는데 건국은 아니라는 인식은 모순이 아닌가 한다. 필자는 1948년 8·15가 광복이라면 건국은 충분히 된다고 생각한다. 주권이 완전히 회복되었다면 건국(독립)이 되는 것은 당연한 것이 아닐까 한다. 분단되었으므로 완전한 건국에 부족한 점이 없지는 않으나 그렇다고 건국(독립, 광복)이 완전히 부정될 수는 있는 것은 아니다. 남북한에 분단국가가 수립되었다고 해도 국가가 수립되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이므로 국가 수립 즉 나라 세우기(건국)가 이루어진 것은 맞다. 다만 당시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선포하지 않고 대한민국 정부수립이라고 한 것은 정부가 수립되는 과정에 남쪽의 우익도 모두 다 참여하지 않는 등 국민 총의에 의한 정부가 되지 못해 완전한 건국이라고 부르기에는 부족한 점이 있다고 생각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그러나 이 정부가 곧 무너질 정도로 불안정하게 수립된 것은 아니었으며 이제 67년이나 경과했으므로 미흡하나마 건국이라고 부르는 것도 그렇게 무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분단[단독 대한민국 정부는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한반도의 유일합법 정부로 승인 받았으므로 단독정부가 아니라는 주장도 있다. 이러한 입장까지도 포괄할 수 있는 길은 단독정부라고 쓰기보다 분단정부라고 쓰는 것이다]정부의 수립: 1948년 대한민국 건국”이라고 병기하면 분단시대의 부족한 점도 인식하면서 통일을 지향하는 미래지향적 역사인식도 포용하고 새 정부 출범의 긍정적인 면도 드러낼 수 있는 종합적[복합적]이고 균형적인 역사이해가 도모되지 않을까 한다. 양립불가능하다고 여기는 분단담론과 건국담론 양론을 지양해 수렴할 수 있을 것이다. 진경호 기자 jade@seoul.co.kr
  • [광복 70주년, 한반도가 다시 위험하다](上) - 일본 군국주의 부활, 손놓은 한국

    [광복 70주년, 한반도가 다시 위험하다](上) - 일본 군국주의 부활, 손놓은 한국

    일본 제국주의의 군홧발 밑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이 빛을 되찾은 지 올해로 70년이 되었다. 1945년 광복의 기쁨도 잠시, 일제의 군홧발이 물러가고 곧이어 공산주의자들의 총칼이 우리 민족을 또 한 번 유린했지만 대한민국은 지난 70여 년 동안 세계 역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울 만큼 빠른 속도로 산업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달성하며 세계 10위권 선진국의 문턱까지 달려왔다. 5,000만이 넘는 인구와 3만 달러에 육박하는 1인당 국민소득, 세계 12위의 국방예산 규모와 63만 명에 달하는 상비병력 등 겉으로 드러나는 지표로 바라본 대한민국은 명실 공히 ‘선진국’이다. 그러나 6.25 전쟁 이후 65년간 전쟁이 없었고 눈부신 경제발전이 가져다 준 태평성대 속에서 국민들은 불과 100여 년 전 있었던 경술국치(庚戌國恥)의 치욕과 일제 치하 35년간의 고통을 잊어버린 듯하다. - 일본 연이은 군국주의 부활 선언 서양 격언에 '역사는 반복된다'(History repeats itself)는 말이 있다. 현재 동북아시아의 정세가 그렇다. 100년 전 사실상 무방비 상태였던 대한제국이 열강의 총칼 앞에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던 것처럼 현재 한반도를 둘러싼 움직임이 녹록지 않아 보인다. 일본 군국주의의 부활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왔던 것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었다. 역사적으로 일본은 힘이 있을 때마다 주변국을 침략해왔던 국가였고, 이러한 침략행위가 사죄하고 반성해야 하는 범죄라는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는 국가였다. 일본 군국주의라을 붙잡아 놓고 있던 것은 미국과 평화헌법이었다. 그러나 최근 중국이라는 맹수가 등장하자 미국은 일본을 붙잡고 있던 줄을 느슨하게 풀기 시작했고, 일본은 평화헌법이라는 족쇄를 아예 끊기 위한 수순을 밟고 있다. 일본은 자신들의 패전 70주년인 8월 15일을 전후해 3가지 의미심장한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8월 셋째 주에 일본 해상자위대 가노야(鹿屋) 항공기지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가미카제'(神風) 공격으로 유명했던 제로센 전투기(零式艦上戰鬪機) 복원 비행 행사가 계획되어 있다. 태평양전쟁의 선봉에 섰던 이 전투기는 우리나라에만 사과를 거부한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이 개발했으며, 일본 태평양 침략의 상징이자 일본 제국주의의 자존심과 같은 항공기이다. -인과관계 외면하고 원폭 '피해자 코스프레'만 8월 하순에는 전범기업 미쓰비시 중공업의 코마키 미나미(小牧南工場) 항공기공장이 있는 나고야 공항에서 5세대 스텔스 전투기 기술실증기 ATD-X(Advanced Technology Demonstrator-X)의 첫 시험비행 일정이 계획되어 있으며, 8월 27일에는 요코하마에 있는 전범기업 이시카와지마하리마중공업(石川島播磨重工業) 조선소에서 24DDH로 명명된 항공모함 진수식 일정도 잡혀있다. 일본은 앞서 건조한 항공모함 22DDH의 함명을 독도를 관할구역으로 삼는 행정구역의 옛 지명인 이즈모(いずも)로 삼아 논란을 일으켰는데, 24DDH의 유력한 함명으로 제국해군의 상징과도 같았던 야마토급 전함 3번함시나노(しなの)를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전함으로 건조된 시나노는 추후 항공모함으로 개조되었는데, 27일 공개되는 실제 함명이 시나노로 확정될 경우 해상자위대는 과거 제국해군으로의 회귀를 드러내놓고 선언한 격이 된다. 항공모함과 스텔스 전투기와 같은 재래식 군사력만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일본은 재래식 군비 강화는 물론 핵무기 보유를 위한 수순을 밟아 나가고 있다. 지난 6일, 아베 신조 총리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피폭 희생자 추모식에서 히로시마 원폭 투하가 자신들의 태평양 침공과 전쟁범죄, 그리고 옥쇄 전략 때문이었다는 피폭에 앞선 인과관계는 철저히 외면하고 오로지 ‘피해자 코스프레’에 열중했다. 그는 지난 19년간 역대 총리들이 매년 언급해왔던 비핵 3원칙(핵무기의 생산ㆍ보유ㆍ반입 금지)에 대한 언급도 하지 않았다. 이는 추모식 하루 전 나카타니 겐 일본 방위상이 참의원 특별위원회에서 “핵무기를 일본으로 들여올 수도 있다”고 발언한 내용과 맞물려 일본의 비핵 3원칙이 사실상 무너졌다는 것을 시사했다. 일본은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47톤 이상 보유하고 있으며, 지금도 계속 생산하고 있다. 명분은 플루토늄 혼합산화물(MOX : Plutonium-uranium mixed oxide)을 연료로 사용하는 플루서멀(Plu-thermal) 방식의 신형 원자로 연료 확보였다. 그러나 일본이 보유한 전체 원전 48기 가운데 플루서멀 방식은 불과 4기에 불과하고 후쿠시마 원전 사태 이후 이 방식의 원자로는 추가 건설 계획이 백지화되어 추가적인 플루토늄 소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일본은 플루토늄 추가 생산을 밀어 붙이고 있다. 심지어 핵탄두 80개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 640kg 가량을 은닉해 보관하다가 IAEA에 적발되기도 했다. -다음 수순 '핵무장' 준비 착착 일본의 핵무장을 가로막고 있는 마지막 족쇄는 핵확산방지조약(NPT :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이다. 그러나 아베 정부는 국제사회의 동의하에 합법적으로 이 족쇄를 풀 수 있는 방안도 준비해 놓고 있다. 일명 ‘센카쿠 트리거'(Senkaku trigger)와 ‘북한 트리거'(North Korea trigger)가 그것이다. 일본은 최근 중국과 영유권 마찰을 빚고 있는 센카쿠 지역 분쟁에 대비해 오키나와 나하(なはし) 비행장에 전투기와 정찰기 전력을 2배 이상 증강 배치시켰으며, 이 일대를 초계하는 군함의 수도 대폭 늘리면서 중국을 자극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중국 군함이 일본 정찰기를 사격통제레이더로 조준하는 일촉즉발의 상황까지 조성되기도 했었다.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실험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을 보이며 ‘북한 미사일 또는 미사일 파편의 일본 열도 추락 가능성‘을 들고 나와 안보 불안을 조성하는 것도 지극히 의도적인 것이다. 일본은 지난 2012년 북한이 은하3호 로켓을 발사할 당시 도쿄 시내 한복판의 공원에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배치하면서 국민들의 불안 심리를 극대화시켰다. 중국과 북한을 이용한 의도적 긴장 조성을 통해 일본이 노리는 것은 바로 NPT 탈퇴이다. NPT는 제10조에 “각 당사국은 당사국의 주권을 행사함에 있어 본 조약상의 문제에 관련되는 비상사태가 당사국의 지상 이익을 위태롭게 하고 있다고 결정된 경우에는 본 조약으로부터 탈퇴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즉, 센카쿠에서 일본과 중국 사이에 우발적인 무력 충돌이 발생하거나, 북한의 미사일 추진체가 일본 영토 또는 영해에 떨어지면 일본은 이를 일본에 대한 침략 행위로 규정하고 비상사태를 선포할 수 있다. 중국과 북한은 핵무기 보유국이므로, 일본은 이러한 비상사태를 이용해 NPT 탈퇴를 선언하고 즉각 핵무기를 보유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진다. 핵무장에 필요한 모든 준비는 이미 오래전에 끝났다. 막대한 양의 플루토늄이 확보되어 있으며, 핵탄두 제조에 필요한 구면 폭발 기술이나 중성자 제어에 관련한 제반 기술 여건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인정받고 있다. H-II/III는 물론 M-V 등 언제든지 대륙간탄도미사일로 전용 가능한 대형 로켓도 구비되어 있다. 정부가 핵무장을 선언하면 한 달 이내에 핵탄두를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보유한 핵강국이 될 수 있는 모든 준비가 끝나 있다는 것이다. -日 군국주의 칼날이 겨눈 대상은... 점차 봉인이 풀려가고 있는 일본 군국주의의 칼날이 겨누고 있는 것은 한반도다. 동북아시아 최약체인 대한민국은 부활한 일본 군국주의가 ‘복귀전’ 상대로 유린하기에 가장 만만한 국가 중 하나이며, 일본 입장에서는 고맙게도 영토 문제와 역사 문제로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 도발 명분도 충분하다. 한국 내에서 반미 감정이 격화되고 한미 동맹이 약화되었을 때 미국만 용인해준다면 군사력 과시를 통한 대중국 경고 메시지 전달을 위해 도발 카드를 꺼내들 수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전후 최초로 건조한 항공모함형 호위함인 휴우가(ひゅうが)를 독도를 관할하는 제3호위대군에 배속시키고 여기서 미 해병대의 MV-22B 수직이착륙 수송기를 이용한 강습상륙훈련도 실시했다. 이뿐만 아니라 일본은 제3호위대군이 보유하고 있는 7척의 구축함 가운데 6척을 최신형 중대형 구축함으로 교체했으며, 이 가운데는 1만톤급 이지스 구축함 아타고(あたご), 7,000톤급 ‘일본판 이지스함’ 후유즈키(ふゆづき)도 있다. 독도에서 불과 157km 떨어진 오키(隱岐) 제도의 도고(島後)섬에는 일본 자위대가 보유하고 있는 거의 모든 항공기가 이착륙할 수 있는 3등급 공항인 오키 공항이 건설되어 있다. 오키 제도 180여개 섬 전체 주민은 1만 5000여 명, 이 제도를 왕래하는 인원은 연간 15만 명에 불과해 공항에 취항 중인 노선은 75인승 여객기 1대 뿐이지만, 일본 정부와 지방자치단체가 적자를 부담하면서까지 노선을 유지시키고 지속적으로 비행장 확장 공사를 실시해 왔다. 취항 중인 노선이 없고, 인근 지역에 대한 대규모 관광산업 개발 계획도 없는 곳에 대형 활주로와 주기장을 정부 주도로 만들었다는 것은 이 비행장이 상업적 목적이 아니라 군사적 목적으로 건설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제로 현재 오키 비행장의 활주로와 주기장에 일본 항공자위대의 전투기를 전진 배치할 경우 1개 비행단급 수준인 60대 이상의 전투기 전개가 가능하다. 평시 독도를 관할하는 우리 해군 제1함대는 압도적인 전력 열세 때문에 해상자위대 제3호위대군을 상대로 제대로 된 교전을 벌이는 것이 불가능하다. 공군이 출격하더라도 독도 인근에 전진 기지를 마련해 놓고 공중조기경보통제기와 전자전기의 지원을 받으며 유리한 위치에서 공격하는 항공자위대를 제압하는 것도 계란으로 바위치기다. 공격부대의 압도적인 전력 우위를 세팅해 놓은 일본은 최근 한국해군의 증원 함대를 궤멸시킬 수 있는 준비까지 마무리했다. 일본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실전배치되기 시작한 최신형 12식 지대함 미사일 16기 전량을 규슈(九州) 지역의 구마모토(熊本)현 겐군(健軍) 기지의 제5지대함 미사일 연대에 모두 배치하고, 쓰시마섬 남단의 후쿠오카(ふくおかし) 공군기지에 공대함 미사일을 전문적으로 운용하는 F-2A/B 전투기로 무장한 제8전투비행단을 배치했다. 중국의 침략을 막기 위한 조치라고 발표했지만, 미사일의 사정거리와 기지 위치를 고려할 때 이들이 노리는 곳은 '대한해협'이다. 유사시 부산과 진해, 그리고 제주해군기지에서 출동해 독도로 향할 우리 해군 증원함대를 대한해협에서 대량의 미사일로 수장시켜 버리겠다는 의도다. 미국과 중국 사이에 패권 경쟁이 한창인 시기에 대외정책 기조가 중국쪽으로 일방적으로 쏠리게 된다면 미국은 110년 전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한반도를 포기했던 것처럼 대한민국과의 안보 협력을 포기할 수도 있다. 실제로 미국은 시퀘스터 여파에 따른 군비삭감 속에서 주한미군 전력은 지속적으로 감축시키고 있는 반면, 주일미군 전력은 점차 증강시켜 나가고 있다. 역사는 반복된다. 남들이 총칼을 갖추며 전쟁 준비에 열을 올릴 때 공자 왈 맹자 왈만 외치며 스스로 문을 걸어 잠그고 스스로를 지킬 힘은 기르지 않은 채 내부 정쟁에만 여념이 없었던 조선은 왕과 왕비가 처참하게 살해당하고 국권을 유린당하는 치욕을 겪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역시 경술국치(庚戌國恥)를 당한 105년 전 상황과 다를 것이 없다. 정치권은 소모적인 정쟁에 열을 올리고 있으며, 주변국이 최신예 전투기를 대량으로 구매하든 항공모함을 건조하든 아랑곳하지 않고 국방예산을 삭감해 지역구 챙기기 선심성 예산과 포퓰리즘적 복지놀음에 예산을 쏟아 붓고 있다. <하편에 계속> 이일우 군사통신원(자주국방네트워크 사무국장)
  • 푸른 숲길로 다시 태어난 옛 경춘선

    푸른 숲길로 다시 태어난 옛 경춘선

    서울시는 노원구 공릉1동과 공릉2동 사이 공덕 제2철도건널목∼육사삼거리 경춘선 폐철길 1.9㎞를 ‘경춘선숲길’로 단장해 개방한다고 11일 밝혔다. 경춘선숲길 사업은 폐선 된 경춘선 중 서울시 구간인 광운대역∼옛 화랑대역∼서울시계 6.3㎞에 숲길을 조성하는 사업이다. 경춘선은 1939년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자본으로 만든 첫 철도다. 당시 철도는 일제가 자원 수탈을 위해 놓은 게 대부분이지만, 경춘선은 국가균형 발전을 목적으로 건설됐다는 점이 다르다. 건설 초기 경춘선은 성동역에서 시작해 고상전·월곡역·성북역(현 광운대역)을 지나 춘천역까지 이어졌다. 1970년에는 출발역이 청량리역으로 바뀌면서 성동역~성북대 구간이 없어졌고 2010년 복선전철화 사업에 들어가 기존 성북역~갈매역 노선도 사라지게 됐다. 이번에 개방된 구간은 1단계 구간으로 넓이는 4만 8170㎡다. 시는 기존 철길과 신호기 등을 보전하면서 산책로와 주민 커뮤니티 공간, 자전거길 등을 만들고 철길을 형상화한 의자 등도 설치했다. 산책로에는 왕벚나무, 감나무, 살구나무, 매화나무 등을 심었다. 또 화랑대로변 철길숲에는 옛 철도변에 있었던 스트로브잣나무 숲을 보전했다. 시는 2016년 9월까지 2단계 구간인 경춘철교∼산업대3길 고가철교 구간을 완공한 뒤 2017년 5월까지 전체 3단계 구간 공사를 마칠 계획이다. 고인석 서울시 도시기반시설본부장은 “경춘선숲길은 원형을 보전하면서 시민 녹지공간으로 새 생명을 불어넣는 도시재생프로젝트 중 하나”라면서 “폐선 구간이 숲길로 탈바꿈하면서 오랜 기간 철도로 단절된 지역이 화합의 장소로 새롭게 태어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글로벌 인사이트] 쿠데타 집권 콤플렉스… ‘넓고 강해진 수에즈’ 앞세워 물타기?

    [글로벌 인사이트] 쿠데타 집권 콤플렉스… ‘넓고 강해진 수에즈’ 앞세워 물타기?

    시나이 반도 서쪽 포트사이드에서 이스마일리아까지,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운하가 지난 6일 재단장 축포를 터뜨렸다. 일부 구간에 쌍둥이 운하를 파 교행이 가능해졌고, 기존 구간에 대한 정비 작업도 이뤄졌다. 1869년 탄생 이후 세계 교역사의 주역으로 국제정치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곤 했던 과거와 미래를 수에즈운하가 직접 말하는 1인칭 시점으로 들어 본다. 오페라 아이다 서곡인 개선행진곡이 흐른 뒤 라팔 전투기 3대가 운하 위로 솟구쳤어. 화물선 두 대가 미끄러지듯 들어서자 사람들은 ‘타흐이야 마스르’(이집트 만세)를 외쳤지. 6000여명에 달하는 외교 사절과 기업인들이 탄성을 질렀지. 카이로에서 180㎞ 떨어져 운하의 남쪽 끝을 여는 도시 이스마일리아의 2015년 8월 6일은 마치 1869년 11월 17일과 같았어. 내가 처음 탄생했던 그날 말이야. 200m 폭에 192㎞ 길이로 지중해와 홍해를, 넓게는 대서양과 인도양을 잇는 운하, 아프리카 대륙을 한 바퀴 돌아 운송하던 배가 나를 만나며 얼마나 운항 거리와 시간을 줄였을지 가늠할 수 있겠어? 나를 건널 수 있는지, 없는지에 따라 ‘수에즈맥스’(12만~16만DWT·재화중량t)란 말로 유조선 크기를 가늠할 정도란 말로 대답을 대신할게. 싱가포르에서 런던을 갈 때 남아프리카공화국 케이프타운을 경유하면 2만 4500㎞인데, 나를 지나는 수에즈 항로를 택하면 1만 5027㎞로 줄거든. 그렇다고 교역로 일색으로 나를 봐주지 말아줘. 역사에 이름을 남겼던 모든 길이 그렇듯 난 교역 뿐 아니라 예술, 문화, 평화를 잇는 역할을 게을리하지 않았거든. 첫 개통을 기념해 1871년 카이로에서 처음 막이 오른 아이다의 선율이 이번에 다시 울려 퍼진 이유는 35㎞ 구간에 건설된 쌍둥이 운하 때문이야. 덕분에 왕복 운항이 가능해졌지. 37㎞ 구간을 폭 317m, 깊이 24m로 늘리는 일도 병행됐어. 동맥경화를 치료했으니까 나는 넓어지고 강해졌어. 지난해 8월에 압둘팟타흐 시시 이집트 대통령이 나를 재단장하겠다고 선언한 지 1년 만에 벌어진 일이야. 이제 하루 평균 통과 선박 수는 49척에서 97척으로, 배 한 척의 통과 시간은 18시간에서 11시간으로, 평균 대기 시간은 8~11시간에서 3시간으로 줄어들 거야. 연간 수에즈운하 통행 수입도 지난해 53억 달러(약 6조 2000억원)에서 2023년 132억 달러(약 15조 3200억원)로 늘어난다고 이집트 정부는 추산했어. 배 한 척이 나를 지나려면 평균 30만 달러(약 3억 5000만원)를 지불해야 하는데, 운항량을 두 배 가까이 늘린 셈이니까. 나와 비슷한 입지 조건을 지닌 중미 파나마운하 통행료도 20만~30만 달러로 연 24억 달러(약 2조 8000억원) 안팎의 수입을 내고 있어. 그렇더라도 나는 위기에 빠졌어. 강력한 라이벌이 등장했기 때문이지. 사실 내가 실어나르는 만큼인 하루 240만 배럴의 원유보다 10만 배럴 많은 양을 운송하는 중동에서 유럽으로의 파이프라인이나 북극해 항로, 항공노선도 많이 발전했고. 때문에 자존심이 꽤 오래 상했었거든. 한국은 특히 이 중 북극해 항로에 관심이 많지. 윤승국 목포대 교육항해사는 부산에서 네덜란드 로테르담으로 북극해 항로를 이용해 가면 항해일수가 24.4일로 나를 통과하는 항로(34.6일)보다 10.2일 감소한다는 계산을 내놓기도 했어. 여건이 되면 나를 가장 위협할 최대 라이벌이야. 이번 공사로 내 경쟁력이 강화되면서 시시 대통령은 한껏 들떠 있어. 시시 대통령은 AFP통신과 같은 언론에 “전 세계에 선물을 주겠다고 약속했고, 기록적인 기간 만에 약속을 지켰다”면서 “번영을 위한 또 다른 심동맥이 생겼고, 수에즈운하가 문명을 연결시킬 것”이라고 공언했어. 사실 나는 태생부터 외교나 국제 자본과 떼놓을 수 없는 관계를 맺어 왔어. 이집트의 프랑스 영사였던 페르디낭 드 레셉스가 1859년 추진하기 시작해 1869년 처음 개통될 때 나를 관장하던 회사는 국제 컨소시엄인 수에즈운하회사였어. 그러다 1956년 가말 압델 나세르 당시 이집트 대통령이 나를 이집트 국유재산화시켰고, 지금은 정부 산하 수에즈운하청이 나를 관리하고 있어. 이번 새 단장에 필요했던 공사비 84억 달러(약 9조 8200억원)의 특별채권도 발매 8일 만에 전 세계 투자자에게 팔렸고. 예전보다 못해도 나는 여전히 세계 물동량의 7.5%를 담당하는 세계적 자산이라고. 물론 시시 대통령에게 나를 새 단장한 일은 또 다른 의미가 있는 듯해. 그는 ‘아랍의 봄’ 시민 혁명 결과 집권한 첫 민선 대통령이었던 무함마드 무르시 정권을 2013년 7월 쿠데타로 쫓아내고 집권한 군부 세력이야. 무르시 전 대통령은 지난 5월 사형선고를 받았어. 아랍권 언론들은 “이집트의 첫 문민 대통령을 쿠데타로 축출시켰다는 정치적 약점을 상쇄시키기 위해 시시 대통령이 경제난 극복, 국정 안정, 외교적 인정 등에 집착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있어. 그런데 이번에 내 개통식에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총리,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등 정상들이 대거 참석했으니 이보다 더 명확한 국제적 정권 승인이 어디 있겠어. 시시 대통령이 각국 정상들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등 물밑에서 많이 노력했다고 들었어. 이렇게 정치적인 일에 연루되는 게 피곤하지 않느냐고. 가끔 신물이 나기도 하지만, 솔직히 이제 익숙해졌어. 사실 인류 역사 중 나처럼 중요한 교역로가 국내외 정치와 연동되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이라고 말한다면, 너무 스스로를 과대평가한 말일까. 나를 건설하는 데 적극 나선 이집트와 프랑스, 이집트에 대한 통제권 상실을 우려해 건설을 주저한 오스만 제국이 애초부터 맞선 사업인 데다 이집트인 수십만명을 강제 노동에 동원해 탄생한 게 나야. 건설할 때 수천명이 영양실조와 전염병으로 목숨을 잃었어. 착공한 뒤 공사비 부족으로 곤란에 처한 이집트 정부가 내 사업권 지분을 영국에 매각, 영국에 내정 간섭 빌미를 주기도 했어. 이집트 나세르 정권이 나를 국유화할 때에도 이를 지지한 구소련과 이를 반대한 영국과 프랑스 간 갈등이 최고조에 이르렀고, 이때 갈등은 결국 이집트와 이스라엘 간 2차 중동전쟁으로 비화됐어. 나는 2차 중동전쟁 때엔 5개월 동안, 1967년 3차 중동전쟁과 1973년 4차 중동전쟁 때에도 폐쇄됐어. 다행히 1975년 6월 이후 내가 폐쇄된 적은 없지만, 지금도 내가 지나는 물길 주변은 테러 위협이 끊이지 않는 곳이야. 정치적인 문제보다 더 큰 걱정은 한동안 넓어지고 강해진 내가 실력 발휘를 할 기회가 찾아오지 않을 수 있다는 관측이야. “이집트 정부의 전망은 지나치게 장밋빛”이란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비관적 전망에 전면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사실 2008년 금융위기 이후 내가 꽤 힘든 시간을 보낸 게 현실이거든. 중동에서 유럽으로 향하던 유조선 통행량이 줄면서 나를 통과하는 전체 선박 수도 2008년 2만 1415대에서 2009년 이후 1만 7000대 선으로 줄어들었어. 게다가 대대적으로 개통식을 하긴 했지만, 이번에 재단장한 부분은 일부잖아. 아까 잠시 언급한 북극해 항로도 계속 내 신경을 긁고 있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틈만 나면 “북극해 항로가 수에즈운하 경쟁 상대가 될 것”이라며 북극해 쪽 안보 우위를 점하려고 노력 중이야. 그런데 북극해 항로가 열리게 된 이유가 북극 빙하가 녹았기 때문이고 빙하가 녹은 이유는 지구온난화로 인한 기후변화 때문이잖아. 그런데 이번에 내가 재단장한 게 주변 생태계를 파괴시키고, 기후변화를 가속화시키는 데 일조했다고 영국 가디언이 지적했어. 146살을 먹었는데도, 세상일은 참 알 수가 없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믿어요!코리아 그랜드 세일

    믿어요!코리아 그랜드 세일

    ‘코리아 그랜드 세일’(Korea Grand Sale)이 오는 14일부터 10월 31일까지 전국 12개 지자체에서 열린다. 원래 한국방문위원회(방문위)가 겨울철 관광 비수기에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시행하던 행사였으나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으로 위축된 국내 관광 시장과 내수 경제 활성화를 위해 ‘구원 투수’로 나섰다. 방문위는 11일 기자회견을 열고 “‘2015 코리아 그랜드 세일’이 항공사, 호텔, 백화점, 면세점, 대형마트, 쇼핑몰, 공연 기획사, 소상공인 업소 등 250여 업체, 3만여업소가 참여해 역대 최대규모로 진행된다”고 밝혔다. 대기업들의 참여가 우선 눈에 띈다. 롯데호텔은 2박 숙박 시 1박을 무료로 제공한다. 55% 할인 이벤트도 병행한다. 특급호텔로서는 전례 없는 할인률이다. 삼성전자도 참여한다. 휴대전화 등 전자제품을 일정액 이상 구매할 경우 푸짐한 선물을 주는 방식으로 진행할 방침이다. 아시아나항공은 선착순 1500명을 대상으로 1+1 프로모션, 제주항공은 전 노선에서 선착순 80% 할인, 코레일은 일부 구간 KTX 자유석 50%할인 등 업체별로 여러 할인 혜택을 제공한다. 에버랜드(자유이용권 50% 할인), 올리브영과 이니스프리(최대 50% 할인), SK텔레콤(LTE 와이파이 모뎀 임대료 면제) 등 테마파크와 미용업체, 통신사 등도 할인 행사에 참여키로 했다. 한류 콘텐츠와 전통·문화예술을 소개하는 다양한 프로모션도 함께 진행한다. 서울 동대문 두타광장에 코리아 그랜드세일 이벤트센터가 설치돼 통역, 관광정보 안내, 음료 등을 제공한다. 10월 초 국경절 등 외국인 집중 방한 시기에는 ‘스페셜 테마위크’를 운영해 다양한 한국 문화를 체험할 수 있도록 유도할 방침이다. 행사를 알리는 오프닝 이벤트는 오는 14일 인천과 김포 등 주요 국제공항에서 열린다. 김종덕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등이 외국인 환대행사에 직접 참여할 예정이다. 코리아그랜드 세일은 외국인 관광객을 위한 대규모 할인 이벤트다. 지난 2011년 매출 121억원으로 시작해 지난해 1404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외형상 10배 이상 성장했다. 한경아 방문위 사무국장은 “어느 때보다 풍성한 혜택으로 일본이나 홍콩으로 향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길을 한국으로 돌리도록 할 것”이라고 밝혔다.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 카운트다운 돌입한 광복 70년?한·일 정상의 막판 수싸움

    광복 70주년을 닷새 앞둔 10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정부가 14일 발표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를 둘러싸고 미묘하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신경전을 펼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일본 정부에 사실상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박 대통령은 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의미있는 계기에 일본 정부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확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출발시키려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으면 한다”고 촉구했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를 향해 전후 50주년의 무라야마 담화와 전후60주년의 고이즈미 담화를 오롯이 계승할 뜻임을 분명히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날 언급은 사실상 아베 담화가 공식 발표되기 전 한국 정상으로서의 마지막 당부라는 점에서 외교적 무게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아베 총리의 담화 내용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 간에, 그리고 일본 정치권 안팎에서 열띤 논란과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이 수용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제시한 것으로도 평가된다. 주목되는 점은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담화에 담길 표현으로 ‘사죄’나 ‘침략’ 등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표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박 대통령은 ‘역대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을 확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물론 박 대통령이 언급한 역대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 즉 1995년 전후 50년을 맞아 발표된 무라야마 총리 담화와 2005년 전후 60년의 고이즈미 총리 담화에는 ‘침략’ ‘사죄’ ‘통절한 반성’ ‘식민지 지배’ 등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의 책임을 묻는 4대 핵심표현이 모두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정부 안팎에선 박 대통령이 사실상 ‘사죄’와 ‘침략’ 등의 표현을 아베 담화 역시 분명히 명시할 것을 주문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박 대통령이 아베 담화가 따로 ‘사죄’나 ‘침략’ 등을 새롭게 명시하지 않더라도, 과거 이들 담화를 올곳이 계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면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 나가는 데 적극 나설 뜻임을 우회적으로 피력한 것이라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맞춰 일본 측 기류도 이날 종전 궤도에서 벗어나 방향을 트는 모습이 감지됐다.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에 ‘침략’ ‘사죄’라는 표현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NHK발로 나온 것이다. NHK는 아베 총리가 이달 14일 각의 결정을 거쳐 발표할 전후 70년 담화의 원안에 ‘침략’ ‘사죄’ ‘통절한 반성’ ‘식민지 지배’라는 단어가 모두 명기됐다고 정치권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NHK의 보도 내용은 그동안 아베 담화에 ‘침략’과 ‘사죄’라는 표현이 담기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던 것과 비교해 상당한 차이가 있다. 9일 아사히 신문 보도만 해도 “아베 담화 초안에 ‘사죄’ 문구는 물론 그와 유사한 문구도 없다”고 못박았다.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을 포함했으나 일본이 전쟁 당시에 행한 행위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었다는 점을 담화가 명확히 판단하지 않았다”는 게 아사히의 보도였다. 그러나 NHK가 일본 언론 가운데서도 비교적 아베 내각의 깊숙한 논의 과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매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날 NHK 보도는 나름 신빙성을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주목할 점은 NHK가 이들 4대 표현이 담길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아베 총리가 이들 표현을 따로 언급하는 게 아니라 과거 역사나 역대 정권의 대응을 거론하는 대목 등에서 이를 사용할 것임을 시사한 점이다. 이를 풀어보면 아베 총리가 직접 한반도 침략 행위 등에 대해 사죄한다고 표현하는 대신 ‘침략’과 ‘사죄’ 등을 감은 과거 역대 총리 담화를 상기시키며 이를 그대로 계승한다는 점을 밝히는 형태로 아베 담화가 발표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하루 이틀 정도 추이를 지켜봐야겠으나 광복 70년과 아베 담화를 둘러싼 양국 정부의 고차방정식은 박 대통령의 수석비서관 회의 발언과 NHK가 전한 아베 정부의 기류 변화에 답이 담긴 듯도 하다. 과거 담화를 빌린 아베 총리의 간접적 침략 인정과 사과, 그리고 비록 사죄와 침략을 직접 명기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과거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힌 아베 담화를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수용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뜻이 한·일 양국의 새로운 출구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진경호 편집국 부국장 jade@seoul.co.kr
  • [프로야구] MLB 특급 vs 가을남자 부활 vs 토종 에이스

    [프로야구] MLB 특급 vs 가을남자 부활 vs 토종 에이스

    ‘가을야구’ 마지노선인 5위를 둘러싼 싸움이 뜨겁다. 10일 현재 KBO리그 5위 한화와 6위 SK의 격차는 불과 반 경기다. 7위 KIA도 한화와의 격차가 1.5경기에 불과하다. 세 팀 모두 한 발만 삐끗하면 올 시즌부터 포스트시즌(PS)에 진출하는 5위 자리에서 밀려날 판이다. 실제로 지난 9일 5위였던 SK가 kt에 4-10으로 덜미를 잡힌 틈을 타 6위였던 한화가 롯데를 2-1로 꺾고 5위를 탈환했다. KIA는 NC를 9-2로 격파하고 추격의 고삐를 조였다. 한화는 새 외국인 투수 로저스의 활약에 기대를 걸고 있다. 로저스는 데뷔전이었던 지난 6일 LG전에서 1실점 완투하는 괴력을 보이며 팀을 연패에서 구해 냈다. 타선에서는 3할 타율에 복귀한 정근우가 리드오프 이용규의 공백을 잘 메워 주고 있다. 한화는 11일부터 16일까지 kt, 넥센, 삼성과 원정 6차전을 치른다. 한화는 kt에 6승5패, 삼성에 7승4패로 앞선다. 넥센에는 4승5패로 밀렸다. ●넥센-삼성, 올 시즌 첫 월요일 경기 SK는 간판타자인 최정과 박정권의 부활에 기대를 건다. 전반기 부진했던 최정은 최근 10경기 타율이 .429, 박정권은 .474에 이를 만큼 좋아졌다. SK는 롯데를 시작으로 LG, 두산과 2연전에 돌입한다. 롯데에 8승4패, LG에 7승4패로 강했지만 두산에는 5승6패로 뒤진다. KIA는 상황이 좋지 않다. 주축 타자 김주찬이 부상으로 이탈한 게 치명적이다. 그는 10일 일본으로 출국, 오는 22일까지 요코하마의 재활원에서 오른쪽 햄스트링 치료를 받는다. 여름에 약해지는 양현종도 불안하다. KIA는 상대 전적 5승6패인 두산, 6승5패인 삼성, 5승4패인 LG와 차례로 맞붙는다. ●박병호 시즌 38호… 테임즈와 3개차 한편 지난 8일 비 때문에 취소돼 시즌 처음으로 월요일 경기가 펼쳐진 10일 넥센이 삼성을 12-3으로 제압했다. 홈런 선두 박병호는 9-0으로 앞서던 8회 초 1사 1루에 삼성의 네 번째 투수 김건한으로부터 좌월 투런포를 가동하며 시즌 38호를 기록, 에릭 테임즈(NC)와의 격차를 3개로 벌렸다. 넥센의 왼손 투수 금민철(29)이 좌타자가 많은 삼성 타선에 표적 등판해 5와 3분의2이닝 동안 3안타 3볼넷만 내주고 6개의 삼진을 빼앗으며 무실점 호투, 시즌 첫 승과 함께 팀의 3연패(원정 5연패)를 끊어 냈다. 강신 기자 xin@seoul.co.kr
  • 소형주택 갈증을 풀어주는 위례 신도시 오피스텔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

    소형주택 갈증을 풀어주는 위례 신도시 오피스텔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

    위례신도시는 강남의 풍부한 생활인프라를 함께 누릴 수 있고 출퇴근도 용이해 전국에서 가장 분양열기가 뜨거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게 때문에 투자가치가 높아 당첨과 즉시 높은 웃돈이 형성되면서 투기수요까지 덤벼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위례신도시 아파트들은 대부분이 중대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형 비중(전용 60㎡이하)이 거의 없어 이를 원하는 수요자들에게는 청약기회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높은 분양가와 필요 이상의 공간이 부담스러워 청약을 망설이고 있기 때문. 위례신도시에서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K대표는 “위례신도시에서 공급되는 아파트들은 주변시세보다 분양가가 저렴하고 개발호재도 풍부해 청약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대부분 중대형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서민들의 진입이 결코 쉽지 않다”고 전했다. 실제로, 부동산 전문 리서치 업체인 리얼투데이가 지난 3년간 위례신도시에서 분양한 아파트들을 조사해본 결과, 전용면적 60㎡이하 소형아파트는 전체비중의 18%만을 차지했다. 또, 60~85㎡이하 중소형은 24%였으며 85㎡초과는 58%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이처럼 위례신도시에 소형아파트 공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아파트형 오피스텔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기존에 ‘우남역 퍼스트시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투룸 위주의 ‘아파트형 오피스텔’로 공급될 예정이어서 정식 오픈을 하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대우건설이 시공을 결정하면서 ‘푸르지오 시티‘ 브랜드를 가지게 된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아시아신탁이 시행하고 대우건설이 시공하는 우남역세권 오피스텔이다. ‘우남역 퍼스트시티’라는 이름으로 준비하던 단계부터 소형아파트 대체에 대한 기대감으로 실수요자는 물론 투자자들까지 일찌감치 관심을 보이던 상품이다. 아직 정식 오픈을 하지 않았지만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어 정식 오픈 이후에는 더욱 많은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총434실이 공급될 예정이며 전용면적 19~74㎡까지 다양하게 계획하고 있다. 이 오피스텔은 2~3인의 소규모 가족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투룸 위주의 구성에 쓰리룸과 원룸도 함께 공급될 예정이다. 투룸의 비중이 76.7%(333실)를 차지하며 쓰리룸은 19.8%(86실)로 구성했다. 원룸의 비중(15실)은 3.5%로 최소화하여 신혼부부나 유아 자녀로 둔 가정이 생활하기에 적합하도록 공간을 설계했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지하철 8호선 우남역과 도보 5분거리에 불과하며 위례선(트램) 우남역은 단지 바로 뒷편에 위치하게 된다. 향후 교통여건이 크게 개선될 예정으로 더욱 풍부한 임대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 두 노선이 모두 개통되면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우남역세권 맨 앞자리 더블역세권 오피스텔로써 위례 남부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전망이다. 주변에 복합공공청사와 국방문화연구센터, 바이오벤처단지 등도 함께 들어설 예정으로 위례신도시 오피스텔 중 가장 많은 배후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지하2~지하6층까지 주차장으로 구성되며 지하1층부터 지상4층까지 근린생활시설 및 판매시설 등으로 꾸며진다. 오피스텔은 지상 5층부터 19층까지 마련되므로 위례신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을 조망권으로 확보할 수 있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기존 송파 푸르지오를 시작으로 우남역 푸르지오까지 트램라인을 타고 이어지는 브랜드타운 내에 위치하고 있어 향후 높은 프리미엄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 또, 이 오피스텔은 푸르지오타운 내에서도 우남역과 가장 가까운 초역세권 오피스텔로써 브랜드 프리미엄과 함께 역세권 프리미엄도 기대해 볼 만 하다. 기존 위례신도시 아파트가 소형면적 공급이 부족했던 만큼, 소형아파트를 대체할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많은 인기를 누릴 전망이다. 더구나 ‘위례 우남역 푸르지오’의 청약돌풍에 이어 공급되는 소형 주거상품이기 때문에 소형면적 분양을 고대하던 실수요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시티’는 8월 견본주택을 개관하고 본격적인 분양에 돌입할 계획이다. 분양문의: 1800-0889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카운트다운 돌입한 광복 70년...한일정상의 수싸움

    카운트다운 돌입한 광복 70년...한일정상의 수싸움

    광복 70주년을 닷새 앞둔 10일 한국과 일본 두 나라 정부가 14일 발표될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전후 70년 담화’를 둘러싸고 미묘하면서도 긴장감이 감도는 신경전을 펼쳤다. 박근혜 대통령은 이날 오전 청와대에서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일본 정부에 사실상 마지막 메시지를 전달했다. 박 대통령은 회의 모두발언을 통해 “의미있는 계기에 일본 정부가 역대 내각의 역사 인식을 확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함으로써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과의 관계를 새롭게 출발시키려는 성숙한 자세를 보여줬으면 한다”고 촉구했다. 아베 신조 일본 정부를 향해 전후 50주년의 무라야마 담화와 전후60주년의 고이즈미 담화를 오롯이 계승할 뜻임을 분명히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의 이날 언급은 사실상 아베 담화가 공식 발표되기 전 한국 정상으로서의 마지막 당부라는 점에서 외교적 무게가 사뭇 다르게 다가온다. 특히 아베 총리의 담화 내용을 둘러싸고 한·일 양국 간에, 그리고 일본 정치권 안팎에서 열띤 논란과 공방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이라는 점에서 박 대통령의 발언은 한국이 수용할 수 있는 마지노선을 제시한 것으로도 평가된다. 주목되는 점은 박 대통령이 아베 총리의 담화에 담길 표현으로 ‘사죄’나 ‘침략’ 등 최근 논란이 되고 있는 표현을 직접 언급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 박 대통령은 ‘역대 일본 정부의 역사 인식을 확실하게 계승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물론 박 대통령이 언급한 역대 일본 정부의 역사인식, 즉 1995년 전후 50년을 맞아 발표된 무라야마 총리 담화와 2005년 전후 60년의 고이즈미 총리 담화에는 ‘침략’ ‘사죄’ ‘통절한 반성’ ‘식민지 지배’ 등 과거사와 관련해 일본의 책임을 묻는 4대 핵심표현이 모두 담겨 있다. 이를 두고 정부 안팎에선 박 대통령이 사실상 ‘사죄’와 ‘침략’ 등의 표현을 아베 담화 역시 분명히 명시할 것을 주문한 것이라는 분석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선 박 대통령이 아베 담화가 따로 ‘사죄’나 ‘침략’ 등을 새롭게 명시하지 않더라도, 과거 이들 담화를 올곳이 계승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다면 광복 70주년을 계기로 한·일 관계를 정상화해 나가는 데 적극 나설 뜻임을 우회적으로 피력한 것이라는 시각도 제기되고 있다. 이에 맞춰 일본 측 기류도 이날 종전 궤도에서 벗어나 방향을 트는 모습이 감지됐다. 아베 총리가 전후 70년 담화에 ‘침략’ ‘사죄’라는 표현을 반영할 수도 있다는 전망이 NHK발로 나온 것이다. NHK는 아베 총리가 이달 14일 각의 결정을 거쳐 발표할 전후 70년 담화의 원안에 ‘침략’ ‘사죄’ ‘통절한 반성’ ‘식민지 지배’라는 단어가 모두 명기됐다고 정치권 관계자를 인용해 보도했다. NHK의 보도 내용은 그동안 아베 담화에 ‘침략’과 ‘사죄’라는 표현이 담기지 않을 것으로 알려졌던 것과 비교해 상당한 차이가 있다. 9일 아사히 신문 보도만 해도 “아베 담화 초안에 ‘사죄’ 문구는 물론 그와 유사한 문구도 없다”고 못박았다. “과거 전쟁에 대한 ‘반성’을 포함했으나 일본이 전쟁 당시에 행한 행위가 ‘식민지 지배와 침략’이었다는 점을 담화가 명확히 판단하지 않았다”는 게 아사히의 보도였다. 그러나 NHK가 일본 언론 가운데서도 비교적 아베 내각의 깊숙한 논의 과정을 소상하게 파악하고 있는 매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날 NHK 보도는 나름 신빙성을 갖춘 것으로 여겨진다. 다만 주목할 점은 NHK가 이들 4대 표현이 담길 가능성을 언급하면서도 아베 총리가 이들 표현을 따로 언급하는 게 아니라 과거 역사나 역대 정권의 대응을 거론하는 대목 등에서 이를 사용할 것임을 시사한 점이다. 이를 풀어보면 아베 총리가 직접 한반도 침략 행위 등에 대해 사죄한다고 표현하는 대신 ‘침략’과 ‘사죄’ 등을 감은 과거 역대 총리 담화를 상기시키며 이를 그대로 계승한다는 점을 밝히는 형태로 아베 담화가 발표될 가능성을 열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하루 이틀 정도 추이를 지켜봐야겠으나 광복 70년과 아베 담화를 둘러싼 양국 정부의 고차방정식은 박 대통령의 수석비서관 회의 발언과 NHK가 전한 아베 정부의 기류 변화에 답이 담긴 듯도 하다. 과거 담화를 빌린 아베 총리의 간접적 침략 인정과 사과, 그리고 비록 사죄와 침략을 직접 명기하지는 않았다 해도 이를 오롯이 담고 있는 과거 담화를 계승하겠다는 뜻을 밝힌 아베 담화를 미래지향적 관점에서 수용하겠다는 박 대통령의 뜻이 한·일 양국의 새로운 출구를 마련할지 주목된다. 진경호 편집국 부국장 jade@seoul.co.kr
  • “나 혼자 산다” 1인 가구 배려한 풀 퍼니시드 인기

    “나 혼자 산다” 1인 가구 배려한 풀 퍼니시드 인기

    몸만 들어가서 살면 되는 풀 퍼니시드 시스템(Full Furnished System)을 갖춘 소형 오피스텔의 인기가 높아지고 있다. 1인 가구의 증가로 본격적인 싱글슈머라 불리는 이들이 수익형부동산의 새로운 수요층으로 급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 2010년 말 기준 국내 1인 가구는 414만명으로 총 인구의 23.9%를 차지했으며, 2012년에는 그 비중이 25%를 넘어서 4인 가구를 앞질렀고, 오는 2020년에는 588만명으로 늘어 29.6%에 달하고 2030년에는 709만명에 달할 전망이다. 이미 세 가구 중 한 가구는 혼자 사는 집이 된 셈이다. 이와 같이 1인 가구 급증에 따라 부동산 시장에서도 1인 가구가 주목 된다. 1인 가구가 꾸준히 증가하면서 싱글슈머에게 특화된, 싱글족을 배려한 풀 퍼니시드 시스템의 수익형부동산이 각광 받고 있는 것. 풀 퍼니시드 시스템은 생활에 필요한 모든 용품을 갖춰 생활의 편의성을 높일 수 있기 때문에 학생과 젊은 직장인 등의 1인 거주자에게 높은 인기를 얻고 있다. 업계 관계자는 "1인 가구가 급증하면서 1인 주택시장 역시 이들의 주거편의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발전하고 있다”며 “특히 1인 가구에게 가장 적합한 주거형태로 꼽히는 오피스텔은 풀 퍼니시드 시스템의 주거용 오피스텔이 소비자들에게 큰 인기를 끌고 있다”고 말했다. ▶ ‘수유역 프리미어엠’, 풀 퍼니시드 시스템 도입하여 입주민들의 주거 편의 극대화 전망 강북구 오피스텔은 10년 이상 노후화 된 단지가 대부분이다. 이에 풀 퍼니시드 시스템이 도입된 신규 단지에 수요자들의 이목이 집중되고 있다. 8월 분양예정인 ‘수유역 프리미어엠’은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48-8번지 일대에 위치하며, 지하 3층~지상 15층, 전용 15~23㎡ 도시형 생활주택 110실과 전용 22~34㎡ 오피스텔 36실 등 총 146실로 조성된다. 전 실 모두 소형 평형으로 구성돼 임대 선호도가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수유역 프리미어엠’은 입주민의 생활에 불편함이 없도록 풀 퍼니시드 시스템을 도입할 예정이다. 다용도 신발장, 붙박이장, 수납공간을 최대로 한 빌트인 가구를 설치하여 공간활용을 높였다. 또한 드럼세탁기를 비롯해 콤비냉장고, 2구 전기레인지쿡탑, 천정형 에어컨 등 빌트인 가전도 설치돼 입주민의 생활 편의성이 뛰어나다. 특히 ‘수유역 프리미엄엠’이 들어서는 사업지 일대는 수유역을 중심으로 관공서, 병원, 대형마트 등이 위치한 편리한 생활 인프라가 갖춰져 있다. 단지 인근에 성신여대 제2캠퍼스 이전으로 풍부한 임대수요를 기대할 수 있다. 또한 미아 뉴타운, 길음 뉴타운 등 인근의 개발 계획으로 강북을 대표하는 주거 타운으로 부각될 전망이다. 수유역 일대는 1일 유동인구 9만여 명으로 명동역, 혜화역 보다 많다. 또한 수유역 메인거리에 위치하여 다양한 상업시설을 누릴 수 있고 약 50여 개의 버스노선이 지나가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수유역 프리미어엠’은 수유역 도보 5분 거리에 위치해 최고의 입지를 자랑한다. 또한 우이~신설 경전철이 내년 개통예정으로 향후 강북지역 지역발전 및 투자수요가 증가 예상된다. 이 밖에 동부간선도로, 내부순환도로, 북부간선도로 등을 이용하여 강남 및 주요도시로 진입 용이하다. 인근에 성신여대, 덕성여대, 강북구청, 강북경찰서 등이 위치하여 풍부한 임대수요를 자랑한다. 또한 대한병원, 이마트, 롯데마트 등이 위치해 편리한 주민생활여건을 갖췄다. 윤영주 분양소장은 “수유역 일대 오피스텔은 10년 이상 오래된 단지가 대부분으로 기입주민들이 가구 구입 등 부대비용이 많이 드는 불편한 사항이 많다고 들었다”며 “이에 빌트인 가전과 가구가 설치된 오피스텔이 희소성이 높고 생활 편의성이 좋아 수요자들에게 인기를 끌 것”이라고 말했다. 견본주택은 서울시 강북구 수유동 48-1 제네스타워 4층에 위치하며, 입주 예정일은 2016년 11월이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한류 퍼지는 쿠바… 30시간 거리도 좁혀졌으면”

    “한류 퍼지는 쿠바… 30시간 거리도 좁혀졌으면”

    “쿠바에서 한국에 오기 위해 30시간 이상을 하늘에서 보냈어요. 제 마음속 한국은 고향처럼 가까운 곳인데, 아직 쿠바와 한국은 멀리 있네요. 어서 그 30시간의 거리가 좁혀지길 소망합니다.” 지난 3월부터 충남 천안 남서울대 국제문화교류원 한국어학당에서 6개월간의 한국어 연수과정을 밟고 있는 국내 1호 쿠바인 유학생 카레림 로레나(25·여)와 베르무데스 마리스베예(19·여). 6일 남서울대에서 만난 두 사람은 “쿠바 젊은이들에게 한국은 매력적이고 너무나 가깝게 느껴지는 나라”라고 입을 모았다. 로레나와 마리스베예가 한국을 알게 된 계기는 서로 다르다. 한국계 쿠바인인 로레나는 일제 강점기 때 쿠바에 이주한 ‘애니깽 1세대’로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조달한 독립운동가 고(故) 임천택씨의 증손녀다. 로레나는 “집에서 김치를 담가 먹는 등 어릴 때부터 한국 문화에 익숙했다”며 “지난 6월 현충일에 국립대전현충원에 모셔진 할아버지 묘소를 참배했을 때 자랑스럽고 벅찬 감동을 느꼈다”고 말했다. 마리스베예는 자신을 ‘한드(한국드라마) 마니아’라고 소개한다. 쿠바에 있을 때부터 한국 드라마와 프로그램에 푹 빠져 한국을 사랑하게 됐다는 설명이다. 마리스베예는 “쿠바에는 한류 문화가 굉장히 전파된 상황”이라며 “쿠바의 TV마다 매일 한국 드라마가 방송되고, 개당 25페소(약 3100원) 정도인 DVD도 불티나게 거리에서 팔릴 정도로 인기가 높다”고 말했다. 그는 “쿠바에서 한국어 배우기가 크게 유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직접 한국에 와 한국어를 배우고 있는 두 사람은 한국인과 쿠바인 사이에 마음의 벽은 허물어진 것 같다고 느낌을 전했다. 하지만 물리적 벽은 높다. 1959년 쿠바 혁명 이후 한국과 쿠바는 국교가 단절된 상황이다. 반세기 넘게 비행기 직항 노선이 없고, 쿠바 국민들의 한국 관광도 제한되고 있다. 전 세계에 몇 남지 않은 사회주의 국가 쿠바와 한국이 함께 걷는 미래를 그려볼 수 있을까. 둘은 자신이 넘쳐 보였다. “모든 사회엔 장단점이 있어요. 두 나라는 많이 다르지만 그렇기에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거예요. 한국과 쿠바가 각자의 매력을 나눌 기회가 있으리라 믿어요.” 로레나와 마리스베예는 “하루빨리 두 나라가 자유롭게 교류를 해서 한국과의 인연을 미래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글 사진 김희리 기자 hitit@seoul.co.kr
  • 더 빨라지는 서울 출퇴근, 마석 첫 브랜드 아파트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

    더 빨라지는 서울 출퇴근, 마석 첫 브랜드 아파트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

    ▶ 수도권 일대, 제2외곽순환도로 개통예정으로 교통망 개선 기대 효과 커 ▶ 남양주 마석 일대 M버스, G버스 노선 및 마석역 이용 쉬워 교통망 우수 ▶ 제2외곽순환도로 개통 대표 수혜단지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 8월 분양예정 제2외곽순환도로 건설이 계속되면서 도로 주변 아파트 단지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특히제2외곽순환도로는 수도권 여러 곳을 연결하면서 통행 시간을 크게 앞당겨 인근 주민들의 생활에도 변화를 줄 것으로 보인다. 제2외곽순환도로는 경기도 화성시 봉담읍을 기점으로 송산, 인천, 파주, 화도, 남양평, 동탄을 거쳐 다시 봉담읍으로 순환하는 고속도로로 총 길이는 263.4km이다. 봉담~동탄 구간은 2009년 10월 개통하였으며, 양평~남양평 구간은 2012년 12월, 안산~송산 구간은 2013년 3월 개통하였다. 2020년 전 구간 개통예정으로 목표로 공사가 진행중에 있다. 특히, 제2외곽순환도로 화도IC가 개통예정인 남양주시 일대에는 8월 대우건설이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를 분양할 예정으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 서울 및 수도권 특급 교통망 자랑하는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 8월 분양예정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는 2020년 개통예정인 제2외곽순환도로의 대표적 수혜단지로 꼽힌다. 제2외곽순환도로 화도IC가 단지 가까이에 있어 이용이 쉬울 전망이다. 제2외곽순환도로는 구리-포천, 서울-문산 고속도로와 함께 격자형 도로망이 형성되어 서울 및 수도권 접근성이 크게 좋아진다. 경춘선 마석역 이용이 쉬워 편리하게 서울 출퇴근이 가능하며, 잠실과 신사사거리까지 운행하는 광역버스와 급행버스 이용도 쉬워 서울 접근성이 좋은 단지이다. 여기에 서울-춘천 고속도로, 경춘북로(46번), 경춘로, 수석-호평간 고속도로 이용도 편리하여 서울 및 수도권, 춘천으로의 광역도로가 잘 발달되어 있다. ◆ 마석, 평내, 호평에 찾아오는 첫 브랜드 아파트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 관심 집중 남양주시 화도읍 마석우리 519-4에 지어질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는 전용면적 59, 84㎡ 총 620가구 규모이다.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의 가장 큰 장점은 우수한 교육환경과 편리한 생활편의시설 이용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단지에서 500m 거리에 송라초, 송라중학교가 위치하고 있으며, 학원가도 도보로 약 10분 거리에 있다. 남양주에서 명문학교로 꼽히는 심석고등학교와 마석고등학교도 가깝다. 이 밖에도 롯데마트, 롯데시네마, 도서관, 관공서, 공원 등이 가까워 풍부한 생활편의시설 이용도 쉽다. 전세대 실수요자들의 선호도가 높은 전용면적 85㎡이하 중소형으로 구성하였으며, 전세대 남향 위주의 단지 배치로 일조량과 통풍이 우수한 것도 장점이다. 보육시설, 골프연습장, 휘트니스클럽, 스터디룸 등 다양한 커뮤니티 시설도 계획되어 있다. 분양관계자에 따르면 “남양주 마석, 평내, 호평 지역에 처음 공급되는 ‘푸르지오’ 아파트라는 점에서 실수요자들의 관심이 높다”며 “제2외곽순환도로를 비롯한 잘 갖추어진 광역교통망이 기대감을 더욱 높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남양주 마석 푸르지오’의 견본주택은 남양주시 평내동 151-4(평내호평역 인근)에 조성될 예정이다. 문의 : 1899-6705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마감 임박! 초역세권 갖춘 중소형 대단지 ‘판암역 삼정그린코아’

    마감 임박! 초역세권 갖춘 중소형 대단지 ‘판암역 삼정그린코아’

    판암동 지역에 약 20여년만에 공급된 대규모 단지 ‘판암역 삼정그린코아’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계약률 80%를 넘어 완판을 앞두는 등 분양도 순조롭게 진행중이다. 지난 5월 문을 연 ‘판암역 삼정그린코아’ 견본주택에는 오픈 직후 사흘간에만 3만여 명의 방문객이 몰렸었다. 이후 충청권 부동산 시장서 많은 관심을 받았고, 3개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어 눈길을 끈다. 특히 최근 대전 지역의 아파트 분양이 잇따라 성공하면서, 1단지에 비해 관심이 덜했던 2단지도 실수요자와 투자자들의 꾸준한 문의와 계약이 이어지고 있는 상황이다. 단지는 판암역 역세권에 도보 3~4분 거리에 위치한 판암역 4번 출구 바로 앞에 있어 교통편의 이용이 편리하다. 대전 지역서 출퇴근하는 직장인들의 수요가 많다. 시세가 안정적이며 환금성도 뛰어나다. 또한 역세권 프리미엄이나 향후 시세 차익도 기대할 수 있어 실수요자는 물론 투자자에게도 인기가 높다. 특히 대전은 지하철 노선이 많지 않아 역세권 아파트가 희소한 만큼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판암역 삼정그린코아’는 도시개발사업으로 조성되는 민간택지다. 근처 세종이나 대전 서구와는 달리 전매제한이 없어 투자 상품으로서의 가치가 있다는 점도 인기요인 중의 하나로 손꼽힌다. 청약에 제한이 있던 대전 금산, 옥천으로의 접근성도 높기 때문에 대전 외곽 지역에서의 수요가 높다. 단지 바로 앞에는 축구장 1.6배 규모(11,261㎡)의 초대형 근린공원이 자리하여 휴식과 여가를 즐길 수 있으며, 탁트인 공원조망도 누릴 수 있다. 또한 단지 옆 500m 거리에는 10레인의 50m풀, 다이빙풀, 유아풀까지 갖춘 수영장과 요가, 헬스, 에어로빅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용운국제수영장이 위치하여 체력단련과 문화생활을 영위할 수 있다. 판암역 삼정그린코아 2단지는 지하3층~지상 21층 4개동 320세대 규모로 전용면적 별로는 △59A㎡ 129세대 △69A㎡ 32세대 △69B㎡ 57세대 △72㎡ 64세대 △76㎡ 38세대로 공급중이다. 일부 잔여 세대를 선착순 동․호수 지정 분양중이므로 좋은 입지를 선택하려면 서둘러야 할것으로 보인다. 인근 부동산 관계자들은 “대전 판암지구는 몇 년 후가 더욱 기대되는 입지”라며 “올해 내 집 마련을 원하는 실수요자들은 물론 저금리시대 투자처로서도 좋은 기회이니만큼 선택을 서둘러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견본주택은 동구 판암동 310-9번지, 판암역 앞 현장 내에 위치하며 입주는 2018년 7월 예정이다. 분양문의 042)622-3030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실종 말레이기 잔해 판명…풀리지 않은 7가지 의문

    실종 말레이기 잔해 판명…풀리지 않은 7가지 의문

    지난해 3월 말레이시아 항공기 MH370의 실종 이후 거의 17개월이 지났다. 얼마 전 프랑스령 레위니옹 섬에서 발견된 비행기 잔해가 MH370의 부품인 것으로 최종 판명돼 앞으로 많은 단서를 제공해 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아직 실종사건을 둘러싼 몇몇 의문은 풀리지 않고 있다. 영국 일간 미러는 5일 MH370 실종에 관련된 7가지 대표적 의문들을 소개했다. 1. 추락 지점은 어디인가? 통신이 두절된 뒤 5시간 동안 실종 항공기는 지속적으로 인공위성에 위치 정보를 전송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 정보를 역추적해 확인 가능한 항공기의 마지막 위치는 인도양 남부 해상. 그러나 이 지점이 추락위치인지는 알 수 없는 상황이다. 마지막 포착지점 인근을 수색해 이 위치에 추락했는지 여부를 확인하기도 쉽지 않다. 인근 바다의 수심이 7km에 달해 수색에 어려움이 있을 뿐만 아니라 잔해가 해류에 의해 먼 거리까지 운반됐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2. 블랙박스는 과연 찾을 수 있을까? 추락에 관련된 핵심 정보를 제공할 가장 중요한 부품은 단연 블랙박스다. 30cm 정도의 크기에 모든 종류의 충격을 견딜 수 있도록 설계된 블랙박스 안에는 비행 관련 기록이 전부 저장된다. 따라서 블랙박스가 미스터리 해결의 실질적 열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문제는 이 블랙박스의 위치를 알려주는 자체 신호 발생기의 배터리가 단 30일만 유지된다는 점이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블랙박스의 위치 추적이 지난해지는 원인이다. 일례로 2009년 6월 실종된 에어프랑스 447 의 경우, 첫 잔해를 발견하고 나서 블랙박스를 찾기까지는 무려 2년이 소모됐다. 3. 어째서 추락 직전 연락을 시도한 승객이 아무도 없었는가. 실종 비행기는 지정된 항로로부터 벗어나 무려 7시간을 항행했다. 이 시간동안 문제를 깨달은 승객이 몇 명이라도 있었다면 외부에 연락을 취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지인들에게 전화나 문자를 보낸 승객은 아무도 없었다. 일부 전문가들은 비행기가 1만 피트(약 3km) 이상 고도로 비행할 경우 일반 전화연결이 전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다른 전문가들은 해당 비행기가 일정 시간동안 5000 피트 고도에서 비행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4. 승객들은 위험을 감지하지 못했나? 어쩌면 승객들이 문제 상황을 아예 인지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일부에서는 기장 혹은 부기장이 이번 추락을 능동적으로 주도했으며, 본인만 산소마스크를 쓴 채 항공기 기압을 고의로 낮춰 탑승자들을 기절시켰을 수 있다는 극단적 추측까지 내놓고 있다. 보다 단순한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항로이탈과 추락이 새벽시간에 이루어졌다면 승객들은 수면을 취하고 있었을 것이며 승객 앞에 설치된 비행위치 확인 화면도 꺼져있었을 확률이 높다. 5. 어째서 외부인들도 항로 이탈을 알아채지 못했는가? 만약 승객과 승무원들이 기절했거나 잠들어 상황을 알 수 없었다고 해도 왜 비행기가 지상 레이더에조차 포착되지 않았는가 하는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항공기는 말레이시아 서부를 경유해 남부노선(중국 남부, 미얀마, 방글라데시, 인디아, 파키스탄, 이란, 터키를 연결하는 노선)을 따라 인도양 한 가운데를 향해 수천㎞ 진출했다. 그렇다면 항공기는 말레이시아 남부 공해상에서 감지됐어야만 한다. 6. 기장 혹은 부기장이 추락을 유도했는가 말레이시아 정부가 내놓은 결론 중 하나는 항로 변경이 ‘의도적 행동’ 이었다는 점이다. MH370은 최소 두 번 항로를 변경했다. 처음에는 말레이시아로 되돌아가는 서쪽으로 진로를 틀었었고 두 번째에는 북서쪽으로 항로를 변경해 상용기 항로로 접어들었다. 나지브 라자크 말레이시아 총리는 지난 해 3월 15일 발표를 통해 말레이시아로 돌아오던 항공기는 말레이시아 반도에 도착한 시점에 통신을 중단했으며, 이후 북서쪽으로 향했다고 발표했다. 그는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은 항공기 내의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취한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전문가들은 모든 통신이 두절됐다는 점과 상당히 먼 거리를 비행했다는 점을 들어 항공기 조종에 능한 인물이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두 가지 추정이 모두 사실이라면 항공기 실종에는 기장 혹은 부기장이 관여했을 확률이 높다. 7. 하이재킹은 아니었을까? 항로이탈에 조종사들이 연루된 것이 사실이라고 해도, 어쩌면 이는 그들의 의도에 반하는 것이었을 수도 있다. 일부 전문가들은 인질 살해 협박, 혹은 조종사들에 대한 직접적 위협에 의해 항로이탈이 강제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항공사고조사관들 또한 테러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방승언 기자 earny@seoul.co.kr
  • [두바퀴 ‘안전사회’] 오락가락 정책

    [두바퀴 ‘안전사회’] 오락가락 정책

    이명박(MB) 정부 때인 2011년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별관 3층 사무실 벽에 자전거 한 대가 걸렸다. 그 당시 범(汎)국가적 자전거 정책을 총괄했던 행정안전부(현 행정자치부) 자전거정책과다. 행안부 실·국장들 사이에서는 ‘자전거 예찬론’이 쏟아졌다. “팔당댐까지 자전거를 타고 다녀왔다”, “운동을 시작해 보려고 자전거를 샀다” 등의 경험담이 이어졌다. 자전거 마니아로 소문난 맹형규 당시 장관과 함께 장거리를 달렸다는 ‘초보 운전’ 간부의 방에서는 근육통에 붙이는 파스 냄새가 진동했을 정도다. 이는 모두 이명박 정부 때 역점을 두어 추진한 ‘4대강 자전거길’ 조성 사업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권이 바뀌고 2년 6개월이 지난 현재는 그 많던 자전거 예찬론자들이 어디로 갔을까 싶을 정도로 자전거는 정책의 우선순위에서 제외돼 있다. 자전거 인구의 안전을 위협하는 요인 중 하나가 정권에 따라 출렁거리는 조변석개(朝變夕改)식 자전거 정책이다. 이명박 정부 때 지방자치단체가 경쟁적으로 조성했던 자전거길은 지자체의 애물단지로 전락했다. 졸속·부실 사업으로 자전거 이용자의 안전을 위협하는 자전거 도로가 급격히 늘었지만 중앙정부와 지방자치단체는 서로 예산 탓만 하며 방치하고 있다. 행자부가 지난해 12월까지 전국 지자체에서 취합한 자료에 따르면 현재까지 전국에 조성된 자전거길은 9374개 노선, 총연장 1만 9717㎞에 이른다. 정부는 1995년부터 자전거 정책 전담 부서를 두고 자전거 도로 조성을 추진했지만 지자체별 소규모 사업에 그쳤다. 그러다 이명박 정부에서 ‘국가 자전거 도로사업’을 중점적으로 추진하면서 자전거 도로가 대폭 늘었다. 올해 ‘자전거 인구 1200만명’ 시대가 된 것도 상당 부분 이때 정책의 영향이다. 이명박 정부의 자전거 정책은 ‘자전거의 생활화, 서울에서 부산까지 자전거 시대’로 요약된다. 이 전 대통령의 대선 핵심 공약이었던 ‘4대강 대운하 사업’이 각종 반발에 부딪혀 ‘4대강 정비사업’으로 변경되면서 자전거 도로 조성 사업에도 속도가 붙었다. 국토해양부(현 국토교통부)가 4대강을 따라 국가 자전거 도로의 골격을 조성하고, 행안부가 4대강 사이 내륙 분절 구간을 잇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자전거 도로 조성에 드는 비용은 중앙정부와 지자체가 분담했다. 정부는 국비 지원으로 지자체의 호응을 이끌어 내고, 지자체장은 국비 지원을 받아 재임 중 지역사회 개발이라는 성과를 낼 수 있다는 점이 맞물리며 전국에 자전거 도로 조성 붐이 일었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더이상 자전거 정책이 정부 중점 정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전거 정책을 총괄했던 자전거정책과의 폐지가 단적인 예다. 자전거정책과는 2014년 세월호 사고 이후 부처가 행정자치부와 인사혁신처, 국민안전처로 쪼개지는 과정에서 간판을 내라고 행자부 ‘주민생활환경과’에 축소 편입됐다. 정책 변화는 당장 예산 축소로 이어졌다. 2010년 524억원이던 행자부의 자전거 도로 구축사업 지원 예산은 지난해 250억원까지 줄어들었다. 올해 배정된 예산은 290억원으로 다소 증가했지만 이는 2019년 완공을 목표로 진행됐던 전국 자전거길 조성 사업을 올해 말로 조기 종료하기로 하면서 증액한 것이다. 이명박 정부는 2019년까지 1조 205억원의 예산을 투입, 전국을 ‘□’ 자 형태로 연결하는 자전거 길을 조성하기로 했지만, 현 정부에서 정책을 변경하면서 자전거길도 전라도와 남해 지역 일부 구간이 끊긴 ‘ㄱ’ 자 형태로 남게 됐다. 국비 지원에 경쟁적으로 자전거길 조성에 뛰어든 지자체는 도로 유지·보수를 놓고 중앙정부만 바라보고 있다. 자전거길 조성 이후 곳곳에서 도로 균열 정비, 안전 분리대 추가 설치 등 보수 공사를 진행해야 하지만 예산이 없다는 게 지자체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교통안전공단이 지난해 작성한 ‘4대강 자전거길 도로 및 교통안전시설 점검 보고서’에 따르면 모두 465건의 안전문제 및 개선 사항이 지적됐다. 자전거길 대부분이 강 주변에 조성돼 여름 홍수 등에 취약하고, 제방 침식이나 붕괴 등이 잦아 자전거 도로에도 균열이 진행되거나 뒤틀리는 현상 등이 주요 문제점으로 꼽혔다. 더 큰 문제는 위험에 노출된 자전거 도로 상당수가 지자체와 중앙정부의 책임 떠넘기기로 방치되고 있다는 것이다. 경북도청 관계자는 “도로 유지·보수는 지자체 예산만으로는 감당하기 어려워 정부 차원의 지원이 필요한데 정부의 자전거 전담 부서 폐지 이후 지자체의 전담 부서도 폐지돼 예산 확보가 더 어려운 상황”이라고 말했다. 행자부 관계자는 “지자체 자전거 도로 정비는 2004년에 지방이양 사무로 결정되면서 법으로도 정부 보조금 지급 제외사업으로 규정됐다”면서 “교부세로 지원하고 싶어도 재원 마련이 어렵고 기재부의 반발도 크다”고 말했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LNG 폐냉열 에너지로… 인천 신항만에 ‘콜드체인’ 물류 허브

    국내 최초로 버려지는 액화천연가스(LNG) 냉열 에너지를 이용해 커피를 비롯한 식료품, 의약품 등 고부가가치 제품을 생산·저장·수출하는 선진국형 비즈니스 모델인 ‘콜드체인’(저온유통시스템) 물류 기지가 2018년 인천 신항만에 문을 연다. 자유무역지역 내 인천 제2 신항만 배후부지에 냉동·냉장특화존인 ‘콜드체인 클러스터’를 조성하고 인접한 인천국제공항의 공항만 복합물류 운송시스템과 연계해 급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동북아 콜드체인 물류 허브로서 메카 자리를 선점하겠다는 구상이다. 중국 내 신선식품 수요가 급증하고 반도체, 디스플레이 액정 등 다양한 제품들의 콜드체인 수요가 늘고 있는 만큼 한국과 중국 간 자유무역협정(FTA) 체결 등을 이용하려는 외국기업들의 투자 유치에도 한층 탄력이 붙을 것으로 전망된다.<서울신문 1월 20일자 11면> 5일 산업통상자원부, 해양수산부, 코트라, 인천항만공사 등에 따르면 정부는 이르면 이달 말 이런 내용을 핵심으로 한 ‘한국 콜드체인 클러스터 비즈니스 모델 구축 방안’에 대해 최종 연구용역 결과를 발표할 예정이다. 정부 관계자는 “2017년까지 인천 제2 신항 배후부지를 완공해 2018년부터 LNG 냉열을 이용한 커피, 의료품, 반도체, 화학약품 등 중계가공무역의 부가가치가 높은 콜드체인 단지를 집적화하려 한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글로벌 외국기업들이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면서 “8월 말쯤 최종 보고회가 끝나는 대로 외국 기업 유치를 위한 해외 홍보활동(IR)에 적극 나설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캐나다 물류업체 B사는 부산에 콜드체인을 만든 뒤 세계 각지 신선과일 등을 부산에 집하시켜 분류, 포장, 라벨링 등 부가가치 작업을 거쳐 중국, 일본 등에 수출하고 있다. 인천항만공사는 한국가스공사의 LNG 인수기지로부터 1㎞ 내외로 근접한 신항만 배후단지에 6100억원을 투자해 4만 9500㎡(약 15만평) 규모의 콜드체인 클러스터를 조성할 계획이다. 고체 상태인 LNG를 기화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162도의 LNG 냉열을 이송시켜 물류센터에서 이용하는 방식이다. 이럴 경우 전기로 기계식 냉동창고를 돌릴 때보다 전기료가 하루 8시간 기준 연간 40억원에서 13억원으로 70%가량 줄 것으로 보인다. 냉동설비 간소화에 따른 유지관리비도 연간 9억원에서 2억 7000만원으로 70%, 초기 투자비도 600억원 이상 절감될 것으로 조사됐다. 인천항만공사 관계자는 “폐냉열을 이용해 창고를 돌리기 때문에 전기료가 거의 안 들어간다”면서 “미주노선 확대에 따른 신선식품, 디스플레이 액정 등에 대한 콜드체인 인프라 설치가 정말 필요하다”고 거듭 강조했다. 부산항, 평택항 등을 동시다발적으로 지원하기보다 인천항과 인천공항에 우선 집중해 단계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방안은 규모의 경제를 실현하기 위한 전략으로 해석된다. 콜드체인 물류기지 확립에 따른 투자 유치 등 파급효과는 상당할 것이란 게 업계의 공통된 견해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KMI)의 연구용역에 따르면 중국의 콜드체인 시장은 지난해 63억 1400만 달러에서 2019년 179억 1000만 달러(약 21조원)로 연평균 23.2%의 성장률을 기록할 것으로 분석됐다. 중국의 육류 소비량은 8000만t으로 우리나라(200만t) 육류 소비량의 40배에 달한다. 싱가포르는 아시아 바이오 물류허브를 통해 생명공학 분야 세계 물류시장을 선점했고, 네덜란드 로테르담은 화훼 작물 수출형 글로벌 물류 시장을 창출했다. 코트라 관계자는 “기존 한·미, 한·유럽연합(EU) FTA 등을 활용해 무관세로 한국에 원자재, 중간재 등을 반입해 완제품으로 가공한 뒤 다시 한·중 FTA를 활용해 무관세로 중국에 수출해 관세 절감을 노리는 외국기업의 투자가 크게 늘어날 것”이라고 강조했다. 산업부, KMI 등에 따르면 세계 콜드체인 시장 규모는 2007년 2069억 달러에서 2017년 3570억 달러(약 242조원)로 73% 늘 것으로 예상된다. 국내 시장 규모는 올해 10조원대다. 지난해 세계 콜드체인 컨테이너 화물은 10%대 성장세를 기록했고 향후 5년간 관련 물류 수요는 22% 이상 급증할 것으로 나타났다. 현재 북미(40%), 유럽(30%) 등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지만 거대 시장 중국이 있는 동북아에서는 이제 시장 형성 초기 단계라 선점이 중요한 상황이다. 세종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용어 클릭] ■콜드체인 물류 시스템 농수축산품을 비롯해 식료품, 의약품 등 온도조절이 필요한 제품을 생산, 저장, 운송, 판매, 소비에 이르는 전 과정에 걸친 철저한 온도관리로 제품의 품질과 안전을 보장하는 저온 유통시스템을 말한다.
  • 초역세권으로 생활 편의성 기대되는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

    초역세권으로 생활 편의성 기대되는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

    위례신도시는 강남의 풍부한 생활인프라를 함께 누릴 수 있고 출퇴근도 용이해 전국에서 가장 분양열기가 뜨거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이렇기 때문에 투자가치가 높아 당첨과 즉시 높은 웃돈이 형성되면서 투기수요까지 덤벼들고 있는 상황이다. 하지만, 위례신도시 아파트들은 대부분이 중대형으로 구성되어 있고, 소형 비중(전용 60㎡이하)이 거의 없어 이를 원하는 수요자들에게는 청약기회가 제공되지 못하고 있다. 높은 분양가와 필요 이상의 공간이 부담스러워 청약을 망설이고 있기 때문. 위례신도시에서 부동산을 운영하고 있는 K대표는 “위례신도시에서 공급되는 아파트들은 주변시세보다 분양가가 저렴하고 개발호재도 풍부해 청약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다”면서도 “하지만 대부분 중대형 위주로 구성되어 있는 만큼 서민들의 진입이 결코 쉽지 않다”고 전했다. 실제로, 부동산 전문 리서치 업체인 리얼투데이가 지난 3년간 위례신도시에서 분양한 아파트들을 조사해본 결과, 전용면적 60㎡이하 소형아파트는 전체비중의 18%만을 차지했다. 또, 60~85㎡이하 중소형은 24%였으며 85㎡초과는 58%로 과반수 이상을 차지했다. 이처럼 위례신도시에 소형아파트 공급이 거의 이뤄지지 않아 이를 대체할 수 있는 아파트형 오피스텔에 대한 관심이 나날이 증가하고 있다. 기존에 ‘우남역 퍼스트시티’라는 이름으로 소개되었던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투룸 위주의 ‘아파트형 오피스텔’로 공급될 예정이어서 정식 오픈을 하기 전부터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최근 대우건설이 시공을 결정하면서 ‘푸르지오 시티‘ 브랜드를 가지게 된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아시아신탁이 시행하고 대우건설이 시공하는 우남역세권 오피스텔이다. ‘우남역 퍼스트시티’라는 이름으로 준비하던 단계부터 소형아파트 대체에 대한 기대감으로 실수요자는 물론 투자자들까지 일찌감치 관심을 보이던 상품이다. 아직 정식 오픈을 하지 않았지만 문의가 끊이지 않고 있어 정식 오픈 이후에는 더욱 많은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예상된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총434실이 공급될 예정이며 전용면적 19~74㎡까지 다양하게 계획하고 있다. 이 오피스텔은 2~3인의 소규모 가족이 함께 거주할 수 있는 투룸 위주의 구성에 쓰리룸과 원룸도 함께 공급될 예정이다. 투룸의 비중이 76.7%(333실)를 차지하며 쓰리룸은 19.8%(86실)로 구성했다. 원룸의 비중(15실)은 3.5%로 최소화하여 신혼부부나 유아 자녀로 둔 가정이 생활하기에 적합하도록 공간을 설계했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지하철 8호선 우남역과 도보 5분거리에 불과하며 위례선(트램) 우남역은 단지 바로 뒷편에 위치하게 된다. 향후 교통여건이 크게 개선될 예정으로 더욱 풍부한 임대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 두 노선이 모두 개통되면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우남역세권 맨 앞자리 더블역세권 오피스텔로써 위례 남부의 랜드마크 역할을 담당하게 될 전망이다. 주변에 복합공공청사와 국방문화연구센터, 바이오벤처단지 등도 함께 들어설 예정으로 위례신도시 오피스텔 중 가장 많은 배후수요를 확보할 수 있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지하2~지하6층까지 주차장으로 구성되며 지하1층부터 지상4층까지 근린생활시설 및 판매시설 등으로 꾸며진다. 오피스텔은 지상 5층부터 19층까지 마련되므로 위례신도시의 아름다운 전경을 조망권으로 확보할 수 있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기존 송파 푸르지오를 시작으로 우남역 푸르지오까지 트램라인을 타고 이어지는 브랜드타운 내에 위치하고 있어 향후 높은 프리미엄까지 기대해 볼 수 있다. 또, 이 오피스텔은 푸르지오타운 내에서도 우남역과 가장 가까운 초역세권 오피스텔로써 브랜드 프리미엄과 함께 역세권 프리미엄도 기대해 볼 만 하다. 기존 위례신도시 아파트가 소형면적 공급이 부족했던 만큼, 소형아파트를 대체할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 시티’는 많은 인기를 누릴 전망이다. 더구나 ‘위례 우남역 푸르지오’의 청약돌풍에 이어 공급되는 소형 주거상품이기 때문에 소형면적 분양을 고대하던 실수요자들에게 반가운 소식이 될 것이다. ‘위례 우남역 퍼스트 푸르지오시티’는 8월 견본주택을 개관하고 본격적인 분양에 돌입할 계획이다. 분양문의: 1800-0889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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