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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무노 무임ㆍ경영참여등 8개항 “쟁의 대상서 제외” 지시/노동부

    노동부는 4일 불법적인 노사분규를 근절하기 위해 불법파업 및 태업과 무노동 무임금 원칙적용 등 노동쟁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8개 사항을 각 지방관서에 시달,처리지침으로 삼도록 했다. 노동부는 이 지침에 해당하는 쟁의발생신고는 접수를 하지 말되 그래도 쟁의에 들어갈 때는 불법쟁의로 간주,쟁의현장에 즉각 공권력을 투입하도록 지시했다. 쟁의대상에서 제외되는 8개 사항은 ▲적법절차를 거치지 않은 불법파업 및 태업 ▲무노동 무임금 적용 ▲노조간부의 전임확대 ▲사용자측의 파업비부담 ▲쟁의중 행위에 대한 민ㆍ형사책임 면제조항의 단체협약 삽입 ▲단체협약 기간동안 새로운 쟁점을 만들어 내는 평화의무 위반 ▲노조의 인사ㆍ경영권 참여 ▲노사협의회의 협의사항인 성과배분문제 등이다. 노동부는 특히 무노동 무임금사항을 지키지 않는 업체에 대해서는 세제ㆍ조세상의 제재를 가하도록 하는 한편 노조측으로부터 「평화의무위반」을 당한 업체에 대해선 민사상 손해배상 또는 단체협약 위반으로 당국에 고발토록 행정지도를 해나갈 방침이다.
  • 작년 무역흑자 10억불/수출 6백23억불,수입은 6백13억불

    ◎상공부,잠정집계 작년의 통관기준 수출은 6백22억9천9백만달러,수입은 6백13억달러로 9억9천9백만달러의 무역수지 흑자를 기록했다. 그러나 이 숫자는 88년의 무역수지 흑자 88억8천6백만달러에 비해 무려 78억8천7백만달러가 줄어든 것이다. 상공부가 3일 잠정집계한 89년도 수출입 통계에 따르면 작년 1년간 전년에 비해 수출은 2.6%가 증가하는데 그쳐 당초 목표 7백억달러는 물론 수정목표 6백80억달러에도 크게 못미쳤으며 수입은 무려 18.3%가 증가,수출증가율을 크게 앞질렀다. 작년도 수출이 이렇게 부진했던 것은 원화절상과 임금인상으로 가격경쟁력이 크게 약화되고 노사분규와 근로자들의 근무자세 해이 등으로 생산성 마저 떨어진데다 효율적인 정책대응이 때를 놓쳤기 때문이다. 작년도 수출을 수출업계의 성장성과 수출경기를 나타내는 원화기준으로 보면 41조8백30억원으로 전년대비 무려 5.3%가 감소했고 전체 경제성장과 직결되는 물량기준으로는 전년대비 5.9%가 줄어 79년 1% 감소이래 처음으로 「감소」를 나타냈고 정부가 지난 61년 수출진흥 정책을 구사하기 시작한 이후 최악의 감소세를 기록해 작년도 수출경기가 얼마나 심각한 정도로 침체를 보였는가를 반영하고 있다. 수입은 수출둔화와 투자부진으로 수출용 원자재와 자본재 수입이 부진했으나 내수신장과 수입개방에 따른 사치성 소비재의 도입이 늘어 일년 내내 높은 증가율을 유지했다. 한편 작년도에 노사분규로 수출에 차질을 준 금액은 13억6천만달러에 달하고 있으며 간접적인 영향까지 합하면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 「4당 구조개편」 정지작업 활발(경오년 신춘정국:상)

    ◎지자제 선거 계기,윤곽 드러날 듯/민정ㆍ평민선 연합공천제 공식 거론/민주ㆍ공화,14대국회 활로모색 주력 정치권기류가 새해 벽두부터 빨라지고 있다. 지자제에서의 연합공천 이야기가 3일 상오 새해들어 처음 열린 민정당과 평민당의 공식회의에서 공통으로 제기됐다. 「5공터널」을 벗어난 새해 4당정국의 기류가 「미래정치」를 향해 얼마나 빠르고 무쌍하게 변화해 갈 것인가를 실감케 해주고 있다. 2년 동안 정치권의 발목을 붙들어 매온 5공청산 문제는 전두환 전대통령의 증언이 남긴 부분적인 미흡에도 불구하고 더이상 정치권의 전진적인 기류형성을 방해하지 못할 것이라는 게 일반적 관측이다. 민정당은 「미흡하지만 종결됐다」는 여론 위에서 새 정국의 창출을 위한 발빠른 행마를 시작했다. 3일 열린 당직자회의에서 연합공천을 구체적으로 거론하고 노태우대통령이 담화를 통해 정치의 새로운 지평을 열자고 호소한 것은 신춘정국의 방향을 알리는 포석에 해당한다. 야권 역시 5공문제에 더이상 연연할 움직임은 보이지 않고 있다. 평민당이 전전대통령의 국회고발을 운위하고 있지만 민주ㆍ공화당의 반응을 고려하면 「광주」를 의식한 1회용 당론에 불과한 것으로 이해된다. 5공청산에서 남은 유일한 과제는 전 전대통령의 거처이전 문제뿐이다. 이 문제 역시 기술적,시기선택의 문제일 뿐 정국의 방향타를 움직일 변수는 못되는 것으로 파악된다. 새해 정국을 일관할 주제는 정계개편이다. 그것이 보수대연합이든,아니면 통합야당대 과반수 여당으로의 개편이든 분명하게도 정가의 관심과 움직임은 정계개편으로 귀결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같이 구체적인 명제설정이 가능한 것은 대체로 세가지 관점에서 이를 뒷받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첫째는 청와대와 민정당이 순수한 노태우시대를 열기 위해서나,정권 재창출을 위해 4당구조의 재편을 희망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민주ㆍ공화 양당이 그 방향과 목적은 여권과 다르다 하더라도 정게개편을 희망하고 있다는 점이며 세번째로 야권 일각에서 일고 있는 야당통합 움직임과 함께 여야간에 정계개편문제가 실제로 막후 절충되고 있다는 점에서 찾을 수 있다. 여권에서 현재의 4당구조는 개편되어야만 할 대상으로서만 인식돼 왔다고 할 수 있다. 합의에 의한 5공청산,「뼈를 깎고 가슴을 도려내는 고통을 감내하면서」(노대통령)까지 청산의 합의를 도출하려 했던 것도 정계개편에서의 이니셔티브를 쥐기위한 전제조치였다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현재의 4당구조가 지속될 경우 결과적으로 「노태우대통령정권」은 과도기적 정권으로 끝날 수도 있다는 게 여권의 시각이다. 정계개편의 최대 장애물이었던 5공 문제가 매듭된 새해 정국에서 여권이 정계개편에 어느 정도 체중을 실을 지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민주ㆍ공화당이 정계개편에 적극적인 동참의사를 갖고 있는 것은 이를 통해서만 14대총선 이후의 생존이 가능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한국적 정치풍토에서 제3,제4당이 새로운 선거에서 입지를 확보할 수 없다는 점은 40년이 넘는 헌정사에서 이설을 찾을 수 없을 만큼 경험으로 축적돼 왔다. 유일하게도 평민당만은 정계개편에 반대한다. 민주ㆍ공화당이 개편에 동참하려는 이유와 반대의 이해관계에서다. 새해 정국의 흐름을 가름할 구체적 정치행사는 지자제선거를 들 수 있다. 지자제는 상부구조만 있던 정치판에 제도로서의 새로운 하부구조를 만들어 내게 된다. 상부구조의 변혁을 가져다주는 혁명이나 쿠데타에 못지 않은 변화를 정치권에 가져다 줄 수밖에 없는 것이고 그 영향력은 정치문화의 성질을 바꿀 만큼 광범위하게 미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지자제실시는 중앙정부와 중앙당의 통제력을 이른바 「풀뿌리민의」로 부분적일진 모르지만 대체하는 효과를 가져다 줄 것이다. 중앙정치 지도자들의 카리스마적 권위는 컬러TV의 등장이 미친 것 이상으로 감소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정당체질과 정당문화의 변혁이 불가피할 것으로 여겨진다. 정국기류로서의 정계개편 움직임과 정치행사로서의 지자제선거는 상호 연관하면서 새해 정국의 방향을 잡아갈 것 같다. 정계개편의 지렛대로 지자제선거가 활용되는가 하면 지자제선거의 결과가 역으로 정계개편의 방향에 영향을 주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5공의 질곡에서 벗어난 노대통령정부가 정치권의기류와는 별도로 펼쳐갈 「새로운 역사쓰기」도 새해 정국을 움직이는 큰 축의 하나로 파악된다. 「5공청산」은 정치권의 변화욕구가 행동화하는 것을 방해하는 족쇄였으면서 동시에 본격 「노태우시대」의 개막을 방해한 장애물로 작용해온 것이 사실이다. 이런 장애물이 걷힌 90년대에 노대통령 정부는 통일ㆍ외교정책은 물론 내치에서도 지난 2년과는 다른 새로운 통치스타일을 선보일 것이 틀림없다. 경제정책과 노사분규,학원대책 등에 노대통령의 고유한 스타일이 선보일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행정과 정치가 대등한 위치에서 1990년의 연사를 채워갈 가능성도 따라서 커지고 있다. 민정 당직개편에서는 민정당이 추진할 정계개편과 노대통령 정부의 강력한 실천의지를 뒷받침하는,2개의 목표를 수행할 새로운 진용이 구성될 것으로 예상된다. 정계개편은 이를 추진하는 세개의 주체 모두 목표가 다르다. 민정당이 정책연합→정치연합을 거쳐 내각제개헌으로 가 결국 보수대연합을 구성한다는 목표인데 반해 민주ㆍ공화당은 통합야당과 보수대연합 사이에서손익을 저울질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평민ㆍ민주당의 소장파,민정당내의 원내외 소외그룹은 통합야당과 과반수 여당으로 정계개편이 이루어지기를 희망하고 있다. 민정당과 손잡아 4당구조 변화없이 정국을 민정ㆍ평민 두축으로 해 움직여 가려는 것은 평민당,특히 김대중총재의 생각이다. 각 주체들이 가진 정계개편의 상이한 목표는 정계개편의 현실화가 농축된 논의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쉽지 않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또한 지나치게 많은 변수로 인해 정계개편의 조감도를 그리기는 대단히 어렵다. 이같은 이유들로 인해 실제 정계개편은 14대총선이 실시되는 92년에나 현실화될 수 있을 것이란 신중론이 우세하다. 올 6월이전에 실시될 지자제선거에서 연합공천이 실시될 것이란 각 정당들의 공언과 전망은 정계개편을 위한 구체적 움직임이면서 동시에 여러 절차중의 시각에 불과하다는 또다른 의미를 갖는다. 일반적인 관측은 연합공천은 올 지자제의회선거에서 선만 보이고 본격화는 내년중에 실시될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시ㆍ도지사 선거에서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정치권은 정계개편의 현실화에 앞서 올 한해 다양한 제휴모델을 시험하고 선보일 전망이다. 그러한 제휴는 정책연합과 지자제 연합공천이 의미하는 정치연합에서 구체화되고 이런 과정에서 각 당간, 각 당내 분파간 이해가 자연스럽게 정계개편의 공통 분모를 만들어 갈 것으로 보인다. 올 한해의 정국흐름을 지난 12ㆍ16의 대통령선거 이전 상황에 못지 않게 빠르게 소용돌이 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그러나 국민들은 어느해보다 편안한 마음으로 긴장없이 정치게임을 즐길 수 있을 것 이란 게 중론이다.
  • 경제에 자신감을 갖자(사설)

    경제를 지나치게 낙관적으로 보거나 지나치게 비관적으로 전망하는 것은 국민경제에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더욱이 80년의 관인성 불황과 같은 위기의식은 더더구나 금물이다. 비록 올해 우리 경제가 저조하더라도 90년대 전체를 통해서는 그렇지 않을 것으로 예측되기 때문에 위기의식은 불식되어야 한다. 중장기적 관점에서 그와 같은 낙관적 전망의 배경은 우리 경제 내부에서 적지않이 발견된다. 올해 우리 경제의 주요한 변수로 보고 있는 노사문제가 올해를 분기점으로 대립관계에서 협력관계로 이행되리라는 관측이 있고 선진국가들의 경험도 그러했다. 일본이 50년대 약5년간의 격심한 대립과 혼돈을 거쳐 협력단계로 이행했다. 우리도 4년째를 맞으면서 노사간에 협력의 필요성이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노사분규와 함께 현재 성장의 제약요인이 되고 있는 각계각층의 다양한 욕구분출 역시 자제되어야 한다는 사회적 합의가 형성되어 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다양한 요구는 민주화 과정에서 야기되었고 그것은 과거의 권위주의나 획일주의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다. 노동집약적 산업사회에서는 그러한 획일성에 의해서도 생산성을 높일 수 있었다. 그러나 앞으로 전개될 첨단산업 사회에서는 개개인의 창의가 절대로 필요하다. 다양한 요구가 적절한 선에서 자제되어 진다면 우리 사회가 다원화사회로 이행되어 지고 그것은 90년대 우리 경제의 과제인 첨단산업화의 전기가 될 수 있다. 이처럼 다양한 요구에는 창의의 전제가 되는 다원화라는 긍정적인 측면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욕구분출을 부정적인 측면으로만 보지 말고 다양화 사회로 가는 구조적 전환기의 현상으로 파악되어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경제발전 과정에서 상당한 수준의 기술이 축적되었고 산업구조적인 측면에서도 지속적인 발전의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일부 기업군은 세계 굴지의 기업과 경쟁이 가능한 수준까지 기술능력을 높여 왔으며 우리의 수출제품이 선진화된 나라의 제품을 뒤쫓아 가고 있다. 우리는 과거 획일주의 사회에서도 그 만큼의 발전을 한 것이다. 만약에 우리 사회가 다양화 사회로 진입한다면 기술축적은배가될 수가 있다. 우리 경제사회는 또 인구 구조면에서도 이미 선진화된 국가보다 유리한 위치에 있다. 선진국들은 전체인구 가운데 15세이상 65세이하의 경제활동인구의 비율이 감소되고 있다. 이른바 노령화 사회로 이행되고 있는 반면에 우리는 현재 경제활동인구 비율이 69% 정도이고 2천년대에는 더 높아질 전망이다. 더구나 우리의 인적 자원은 해마다 고학력화 되고 있다. 첨단산업 사회로 가면 갈수록 고급인력이 필요한 점을 감안할 때 우리는 양질의 인적 자원을 갖고 있다고 하겠다. 기술과 인적 자원 이외에 우리는 80년대 중반이후 자본면에서도 괄목할 만한 축적을 이뤄왔다. 만성적인 국제수지 적자에서 흑자로 돌아섰고 지난해 흑자폭이 대폭적으로 줄기는 했으나 저축률이 투자율을 훨씬 초과하고 있다. 비록 우리 경제에 부정적인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나 부정을 긍정으로 바꿔 놓을 의지와 자세만 있다면 올해 상반기를 전환점으로 경기가 하강을 멈추고 상승국면으로 돌아설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얼마나 경제에 대해 자신감을 갖느냐에 있다.
  • 전 전대통령 특위제출 서면 답변내용

    ◎“「광주」발포 당시엔 보고 못받았다”/미 정부도 「5ㆍ17」 불가피성 이해했다/사북사태ㆍ학원소요가 계엄확대 원인 ▷다음은 전두환 전대통령이 서면으로 특위에 제출한 답변내용이다.◁ 본인이 당시 도청 앞 상황과 관련한 발포 건의를 받은 적이 있느냐 하는 문제는 국회의 청문회에서 증언한 바 있는 이희성계엄사령관,윤흥정 전교사령관 등이 「발포 사실조차도 상황이 진행될 때에는 보고받지 못했다」라는 증언내용에 비추어볼 때 당시 지휘계통에 있지도 않았던 본인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건의를 받을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았다는 사실이 분명해지리라고 생각합니다. 도청 앞에서의 이러한 발포사태는 상황이 종료된 이후 통상적인 정보보고를 통해 본인에게 보고되었던 것으로 기억되며 당시 본인은 즉각 이를 최규하대통령에게 보고하려 했으나 이미 계엄사령부를 통해 보고되었다고 하기에 중단한 바 있습니다. ▷미 정부역할◁ 광주사태를 전후하여 주한 미대사관을 포함한 미국 정부관리들은 한국의 제반상황에 대하여 우리측과는 어느 정도의 인식차이가 있었다고 보며 이러한 차이는 북한의 도발가능성에 대해 제3자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예민해 있는 우리의 현실로 보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최근에 미국무성이 보내온 광주사태에 대한 석명서를 보면 당시의 한국 안보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었던 것처럼 묘사가 되어 있으나 이는 당시 미 정부가 광주사태를 계기로 취한 일련의 군사 외교적 조치들과는 모순된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해 5월22일 미 국무성은 「불안한 사태가 계속되어 폭력사태가 과열된다면 외부세력이 위험한 오판을 할 위험성이 있다」고 북한의 도발책동을 우려하며 「한국사태를 방위조약에 따라 강력히 대응할 것」이라고 북한에 대해 경고한 바 있습니다. 또한 같은날 국무장관 주재로 한국사태에 대한 고위정책조정회의를 열어 항공모함을 위시한 기동함대와 조기경보기를 한국에 파견키로 하는 등 북한의 위협에 대비한 일련의 군사적 조치를 취했으며 당시 미 정부는 북한이 남침해 올 경우 미국은 즉각적으로 대응하겠다는 경고를 제3의 외교경로를 통해 북한측에 통보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또한 5월26일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의 여야 정치인들과 만난 자리에서 글라이스틴대사는 『광주사태가 오래 계속된다면 배고픈 호랑이같은 북한이 이를 이용할 가능성이 없지 않으며 미국은 5ㆍ17조치의 배경과 불가피성에 대해 긍정적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입장을 밝힌 바 있다고 본인은 기억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당시의 미 정부의 입장과 이번의 미 국무성의 석명서에 나타나 있는 입장은 상황 및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기본 입장에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국내의 일각에서는 광주사태가 특별한 의도에 의해 촉발되었다는 주장이 있는 것으로 압니다만,이는 전적으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본인은 말할 것도 없고 어느 누구라도 정권을 위한 치밀한 사전계획을 세웠다면 광주사태와 같은 커다란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오히려 바랐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 불행한 사태의 경위가 어떻게 되었든 그 구체적인 책임소재가 누구에게 귀속되건간에 본인은 당시 정부와 군의요직에 있었던 사람으로서 그 책임의 일부를 통감하지 않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또한 대통령재임기간중에는 『상처는 아물기 전에 건드리면 다시 커져 치유가 어려워진다』라는 단순한 생각으로 이 문제가 남긴 상처를 근원적으로 치유,해결하지 못한 점에 대해 깊은 반성과 자책을 느끼고 있습니다. ▷비상계엄 확대조치◁ 79년 10ㆍ26사태의 충격이란 절대권력의 돌연한 붕괴가 가져온 충격이었습니다. 이 충격에서 깨어나는 80년의 봄이 되면서 우리 사회에는 권력과 권위의 공동현상이 확실히 드러났고 거기에 발호하기 시작한 것이 혼란과 무질서였습니다. 빈발하는 학원소요와 노사분규는 그 일부에 불과했습니다. 4월의 사북사태는 며칠 동안이나마 그 지역에 관한 한 국가기능이 정지된 상태에 도달했고 5월 중순에 학원가두소요는 전국 곳곳에 넘쳐 지역계엄령하인데도 치안 마비상태에 도달하였습니다. 5월13일에서 15일에 걸쳐 절정을 이루었던 서울소요에서는 3일째 되는 15일 서울역에서 시청광장에 이르는 도심에 대학생을 중심으로 10만의 군중이집결되었고 경찰과의 충돌과정에서 당시로서는 예가 드물게 경찰차가 방화 당하고 경찰관 1명이 사망하고 1백13명이 부상을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같은 혼란을 틈타 각종 범죄가 난무한 것은 물론,외국바이어들이 다투어 철수하고 조업에 지장을 일으키는 등 경제생활 전반에도 심각한 타격을 주게되자 국민들의 불안심리는 절정에 달했습니다. 한편 10ㆍ26 이후 적화통일의 결정적 기회를 노리고 있던 북한은 이 시점이 되면서 대규모 기동훈련,전쟁물자 점검,전투태세 강화 등 심상치 않은 동향이 첩보사항으로 파악되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국가 존망지추를 당했던 것입니다. 이같은 상황이 일일이 매스컴에 의해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그나마 일반 국민의 동요를 막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이같은 위기상황에서는 그 당사자가 누구이든,국가는 국가 스스로의 자위조치를 취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같은 국가의 자위조치의 당연한 귀결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였습니다. 아시는 바와 같이 지역비상계엄에서는 국방장관이 계엄업무를 지휘감독하고 전국 비상계엄하에서는 대통령이 직접 지휘감독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전국비상계엄확대의 문제는 특정지역에 소요나 문제가 있다 없다의 기준을 넘어서게 되는 것입니다. 위에서 설명한 위기상황에 처하여 5월15일 신현확총리는 시위사태에 대한 우려와 함께 자제를 촉구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했고 그때에 진행중이던 제2차 석유파동속에서 원유 확보를 위하여 중동을 방문중이던 최규하대통령도 국내 사태의 급보를 받고 일정을 하루 앞당겨 5월16일 귀국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최 대통령 귀국 직후 국무총리 내무 국방장관 계엄사령관 그리고 본인 등이 참석한 시국대책회의에서 총리는 국내상황을 종합적으로 보고하였고 주영복국방장관은 이 자리에서 비상시국에 임한 군의 대책마련을 위해 다음날 전군주요지휘관회의를 개최할 예정이라고 보고한 것으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돌이켜 보면 10ㆍ26 이후 우리 사회의 각부면의 권력과 권위가 퇴화,공동화되는 속에서 군만은 국가기능을 온전히 수행할 수 있는 최후의 보루로서 사회와 국민의 막연하고도 암묵적인 기대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여겨지기도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5월17일 개최된 전문지휘관회의에 참석한 지휘관들은 당시 사태의 심각성과 이에 대한 획기적 대책의 필요성에 의견을 같이하고 이를 위해 전국 비상계엄으로의 확대건의를 결의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당시 사회일각에는 학생소요를 옹호하며 전국 주요도시에서 대규모 군중궐기집회를 준비중인 세력도 있었고 5월16일에는 55개 대학 총학생회장단이 모여 5월22일을 시한으로 계엄의 즉각 해제와 정치일정단축 등의 요구를 내걸고 전면 투쟁태세를 굳히는 등 사태는 더욱 악화될 형세였습니다. 이같은 상황 속에서 전국 비상계엄확대 건의안은 결의되었고 국방장관과 계엄사령관은 이를 신현확총리에게 보고하여 동의를 받고 최 대통령에게 보고하여 재가받았으며 이날 저녁으로 임시국무회의에서 의결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와서 당시 한국의 안보상황에 대해 미국의 인식이 어떻다고 말이 있습니다만 물론 한국의 안보에 대해 한국과 미국이 완전한 인식일치가 있기는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해도 당시 한국의 현존하는 안보위협에 대한 미국측의 인식과 대응의지를 과시하는 일환으로 5월13일과 14일 양일간 한미 합동군사훈련이 실시된 바 있음을 상기하기 바랍니다. 계엄확대를 전후한 5월14일부터 18일에 걸쳐 전국 주요시설과 방송국들에 경계경비를 위해 인근병력이 배치된 것으로 알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국회가 개회중인데도 의원들의 동원이 저지된 것으로 압니다. 유감스러운 일입니다. 5ㆍ17비상계엄확대조치가 12ㆍ12를 주도한 이른바 신 군부세력의 쿠데타였다는 주장이 있습니다만 쿠데타가 국권을 탈취하기 위해 어떤 집단이나 개인이 국가를 치는 거사라 한다면 거기에 합당한 현상이 5ㆍ17시점에 있지 않았다는 사실을 분명히 지적해두고자 합니다. 다만,오늘의 시점에서 5ㆍ17을 본다면 신 군부세력이라고 일컬어지는 무인들이 명확하고도 주관적인 의지는 결한 채로 시대적 상황과 국가의 요청에 밀려 덧없는 정치의 수렁으로 말려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는가 하는 감회가 있습니다. ▷국보위 설치경위◁ 국가보위 비상대책위원회는 전국 비상계엄하에서 대통령의 계엄업무에 대한 지휘감독을 보좌하기 위하여 계엄당국과 행정부간에 긴밀한 업무협조를 가능케 하여 조속하게 사회 안정기반을 구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대통령 직속하에 한시적인 자문보좌기관으로 설치된 것입니다. 80년 4,5월의 상황이 얼마나 위기상황이 되고 있었는지는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한편으로는 혼란과 비례하여 소위 말하는 「정부의 영이 서지 않는」상황이 되어가고 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무렵 눈앞에 전개되고 있는 비상한 상황이 통상적인 방법으로는 극복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뜻있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헤아릴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되어 있었고,당시 「정부의 영」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국민들도 믿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해했던 것입니다. 나라를 벼랑으로까지 몰고 간 위기상황은 전국비상계엄을 불러왔고 전국비상계엄은 무엇보다도 먼저 위기관리와 난국타개를 위해 정부기능을 보완적으로 강화할 수단을 찾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 결과가 국보위설치로써 나타난 것으로 알고있습니다. 행정부의 기능을 계엄적으로 강화하는 매개 역할,이것이 국보위 기능이 아니었나 생각합니다. 만일 군으로 구성된 계엄당국에게만 당시의 문제해결이 맡겨졌다면 국가가 그렇게 단기간에 위기탈출을 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국보위에는 계엄당국과의 매개역을 위해 군의 전문요원들도 차출되었으나 대부분은 행정부 요원ㆍ학자 및 각계 인사들로 구성되었던 것입니다. 상황이 긴박해지면서 나름대로의 비상대책안이 은연중에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거론되고 있었고 이같은 안들은 합수본부였던 보안사의 정보수렴과정에서 취합되고 있었으며 전국계엄으로 확대되는 것과 동시에 본인은 그동안의 정보보고를 상기하여 대책안의 구체적인 검토를 보안사 참모진에게 지시하였습니다. 그리해서 국보위는 설치되었고 그 책임상 본인이 상임위원장직을 맡았던 것입니다.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라는 용어가 누구의 착상인지에 대해서는 기억이 분명치 않습니다. 비상기구의 연구검토초기에는 대통령의 긴급조치권 발동을 전제하여 기구를 설치하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보다 합헌적이고 합법적인 근거를 가져야 제대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결론에 따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는 정부조직법 제5조와 계엄법 제9조 및 제11조 등에 근거를 두고 조직되었으며 그 설치안은 5월27일 최규하대통령께 보고되었습니다. 같은 날 국보위 설치령이 국무회의에 제안되어 의결을 거친 후 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5월31일 발족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발족됨으로써 군은 관련분야인 국방임무와 치안유지에만 전념하게 되었고 계엄업무의 일환으로서 군이 당연히 맡도록 되어 있는 행정ㆍ사법 사무에 대한 기획조정업무는 국보위가 맡게되어 대통령이 전국계엄을 효과적으로 지도감독할 수 있게 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설치의 당위성을 인식시키기 위하여 광주사태가 조작되고 유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시각이 있는 모양입니다만,이같은 역사인식이야말로 날조되고 왜곡된,사실에 입각하지 않은 역사인식이요 본말전도도 유만부동입니다. 어떤 유능한 신이 있어서 광주사태의 전말을 연출할 수 있다는 얘기입니까? 계엄확대에 의한 업무추진 과정에서 필요에 의해 국보위는 설치되었던 것입니다. 국보위가 추진한 과외금지조치나 공직사회정화 등 일련의 충격적인 조치는 오늘날 시각으로 보면 납득이 가지 않을 수도 있겠지만 그 당시로서는 국민들의 갈채를 받았고,그 때의 국가사회가 위기상황을 탈출하고 혼란과 무질서의 늪에서 벗어나는 데는 효과가 있었던 것을 여러분도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러나 국보위가 비상한 상황에서 의욕이 앞선 나머지 때로 무리한 수단을 동원하여 물의를 빚은 점은 아쉽고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1980년 8월 최규하대통령이 하야하게된 진정한 동기가 무엇이냐 라는 질문이 있습니다만 본인으로서는 최 대통령께서 하야하시면서 발표하신 성명의 내용에 비추어 헤아려볼 수 있을 뿐 그 이상의 다른 동기가 있었는지에 관해 저의 주관대로 추측해서 말씀드리기는 어렵다는 점을 양해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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