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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퀘게 박사, 이화여대 명예 의학박사 수여

    노벨평화상 수상자 무퀘게 박사, 이화여대 명예 의학박사 수여

    콩고민주공화국 내전에서 성폭행 피해를 당한 여성들을 도운 공로로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은 드니 무퀘게 박사가 1일 이화여대 명예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산부인과 의사인 무퀘게 박사는 1일 서울 강서구 이화여대 서울병원에서 열린 학위 수락 연설에서 “강간이 더는 전쟁 무기가 될 수 없도록 남성과 여성이 함께 행동하자”고 말했다. 무퀘게 박사는 “여성들은 이미 권리와 자율권을 위해 한 세기가 넘도록 투쟁했다. 이제 남성이 참여할 때”라고 덧붙였다. 그는 “대체로 전쟁은 남성의 결정으로 벌어지지만 피해 대부분은 여성과 어린이에게 돌아간다”며 “남성은 가부장적 태도와 ‘유해한’ 남성성에서 벗어나 상호 존중하는 정신으로 여성들의 편에 서야 한다”고 강조했다.무퀘게 박사는 과거 20년 동안 콩고 내전 과정에서 반군에게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 수천 명을 치료하고 재활하는 일에 힘을 쏟았다. 이화여대는 “무퀘게 박사의 업적이 여성 인권을 지키는 데 기여했다”며 명예박사 학위를 수여한다고 밝혔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소록도 간호사 마리안느·마가렛 노벨평화상 추천 서명 100만명 육박

    전남 고흥군 소록도 간호사 마리안느·마가렛의 노벨평화상 추천 서명이 6월 현재 91만5000여명으로 목표인 100만명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21일 고흥군에 따르면 소록도에서 한센인을 위해 40여년을 봉사한 마리안느와 마가렛의 사랑과 봉사, 나눔 정신을 세계의 표상으로 삼기 위해 노벨평화상 추천을 추진해 왔다. 정계,재계,학계 위원들로 구성된 범국민 추천위원회(위원장 김황식)는 지난 2017년 11월부터 전국적 서명운동을 했으며 6월 현재 91만5000명이 서명했다. 추천위원회는 6월 말 싱가포르에서 예정된 국제간호협의회 학술대회에 참석해 마리안느와 마가렛 두 분의 숭고한 삶과 희생정신을 알리고 전 세계적으로 공감을 형성해 나갈 계획이다. 고흥군은 선양조례를 제정하고 한명 당 매월 ‘1004달러’를 지원하고 있으며, 마리안느와 마가렛 법인과 더불어 공익광고 방송, 영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있다. 이와 함께 사진전 개최와 중앙단위 기관 방문 등 노벨평화상 추천을 위한 서명운동을 지원해 왔다. 한편 노벨평화상 추천은 나이팅게일 탄생 200주년이 되는 2020년에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추천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마리안느와 마가렛은 오스트리아 인스브루크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과 1966년 소록도에 찾아왔다. 이후 한센병 환자와 그 자녀들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는 삶을 실천했다. 그들은 나이가 드는 것이 다른 사람에게 부담을 줄 것을 우려해 지난 2005년 11월 22일 아무도 모르게 편지 한 장만 남기고 오스트리아로 돌아가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 광주 최치봉 기자 cbchoi@seoul.co.kr
  • [뉴스분석]文 “평화를 지켜주는건 핵무기 아닌 대화”

    [뉴스분석]文 “평화를 지켜주는건 핵무기 아닌 대화”

    ‘체재보장’ 카드로 완전한 핵폐기 의지 입증 촉구문재인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닌 대화”라며 “완전한 핵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이 진정으로 노력하면 즉각적으로 응답할 것이며 제재 해제는 물론이고 북한 안전도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문 대통령은 또한 “서로의 체제는 존중되어야 하고 보장받아야 한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첫 번째이며 변할 수 없는 전제”라고 천명했다. 지난 2월 ‘하노이 핵담판’ 결렬 이후 대화테이블에서 물러선 북한에 대해 제재 해제보다 근본적인 체제 보장을 내걸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하노이에서 내놓은 카드보다 진전된 비핵화 조치로 ‘신뢰’를 구축할 것을 요구한 셈이다. 최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김 위원장에게 친서를 받은 사실을 공개하고, 문 대통령이 이달 말 트럼프 대통령의 방한 전 4차 남북 정상회담이 바람직하다고 밝힌 시점에서 북한의 반응에 관심이 쏠린다. 한국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스웨덴을 국빈방문 중인 문 대통령은 이날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를 위한 신뢰’라는 제목의 의회 연설에서 완전한 비핵화와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를 위해 북한과 국제사회가 신뢰라는 ‘프로토콜’을 쌓아가는 과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문 대통령은 “우발적인 충돌과 핵무장에 대한 세계인의 우려는 계속되고 있다”면서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기 위해서는 이 우려를 불식시켜야 한다”고 했다. 이어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때까지 양자 대화와 다자대화를 가리지 않고 국제사회와 대화를 계속해야 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이 합의한 교류협력 사업 이행을 통해 안으로부터의 평화를 만들어 증명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국제사회의 신뢰와 더불어 ▲대화에 대한 신뢰 ▲남과 북 국민 간의 신뢰 또한 필요하다고 밝혔다. ‘대화에 대한 신뢰’에 대해 문 대통령은 “평화는 평화로운 방법으로 실현될 수 있으며 그것이 대화”라며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도 핵무기가 아닌 대화”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으로서도 마찬가지”라면서 “남북 간의 평화를 궁극적으로 지켜주는 것은 군사력이 아닌 대화”라고 했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비판적인 냉전적 사고에 매몰된 정치권을 비롯한 보수진영 일각을 겨냥한 발언으로 해석된다. “신뢰는 상호적이어야 하며 그것이 대화의 전제”라면서 “한국 국민들도 북한과의 대화를 신뢰해야 하고, 대화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더디게 만든다”는 발언도 같은 맥락으로 읽힌다. ‘남북 국민 간의 신뢰’와 관련, 문 대통령은 “대화의 창을 항상 열어두고 소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오해는 줄이고 이해는 넓힐 수 있다”면서 “평범한 평화가 지속적으로 쌓이면 적대는 사라지고 남과 북 국민들 모두 평화를 지지하게 될 것이며 그것이 항구적이고 완전한 평화의 시작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지난해 1~3차 남북정상회담의 결과물인 군사분계선에서 적대행위 중단, 남북 도로·철도 연결, 서해 어민들의 안전한 어로작업을 예로 들었다. 지난 12일 ‘국민을 위한 평화’를 주제로 한 노르웨이 오슬로 포럼에서 국민 개개인의 일상을 바꾸는 평화로의 발상 전환이 필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던 것의 연장선이다. 문 대통령은 이처럼 남북 간 3가지 신뢰를 제안하면서 스웨덴의 비핵화 경험을 거론했다. 2차 대전 이후 1960년대 구소련이 유럽에서 세력을 팽창하면서 중립을 유지해야 하는 절박한 필요성이 있었던 스웨덴은 과학기술 선도국으로서 핵보유국의 기로에 섰다. 찬반양론 속에 여성 외교관 알바 뮈르달(1902~1986) 여사는 핵보유가 득보다 실이 크다는 논리로 조야를 설득했고, 결국 스웨덴은 핵보유를 포기하고 평화국가로 남기로 했다. 문 대통령도 “스웨덴이 어느 국가보다 먼저 핵을 포기할 수 있었던 데는 인류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뢰를 가졌기 때문”이라며 “세계가 궁극적으로 평화를 통한 번영을 선택할 것이라는 신뢰였다”고 평가했다. 청와대 관계자는 “대통령이 정확하게 북한을 향해 핵보다는 신뢰를 갖는 게 훨씬 더 평화와 체제 보장에 도움이 된다는 메시지를 던진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연설한 곳은 옛 하원의사당으로 노벨평화상(1982년)을 받은 뮈르달 여사가 처음으로 전 세계 군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선언한 역사적인 장소다. 고 김대중 대통령도 지난 2000년 12월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이곳에서 한반도 평화 비전을 천명하는 연설을 했다. 이날 연설에는 칼 구스타프 16세 스웨덴 국왕, 스웨덴 의회 의원 및 정부 주요인사, 스톡홀름 주재 외교단 등이 참석했다. 스톡홀름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전문]文 “스웨덴과 가장 큰 공통점 평화의지”

    [전문]文 “스웨덴과 가장 큰 공통점 평화의지”

    문재인 대통령은 14일(현지시간)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완전한 비핵화를 위해 남북 간, 북한과 국제사회 간 ‘신뢰’ 구축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스웨덴을 국빈방문 중인 문 대통령은 이날 스웨덴 의회 연설에서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은 핵무기가 아닌 대화”라며 “완전한 핵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국제사회는 북한이 진정으로 노력하면 즉각적으로 응답할 것이며 제재 해제는 물론이고 북한 안전도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서로의 체제는 존중되어야 하고 보장받아야 한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첫 번째이며 변할 수 없는 전제”라고 천명했다. 다음은 문 대통령의 연설 전문. 존경하는 국왕님, 안드레아스 노를리엔 의장님과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구 모론! (안녕하십니까) 노벨평화상 수상자 알바 뮈르달 여사는 바로 이 자리에서 전 세계 군축을 위해 노력하겠다고, 처음으로 선언했습니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도 노벨평화상 수상 직후 바로 이 자리에서 한반도 평화 비전을 재차 천명했습니다. 그로부터 19년이 흘렀는데, 한반도 평화에 얼마나 진전이 있었는지 되돌아보게 됩니다. 유서 깊은 스웨덴 의사당에서 연설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따뜻하게 반겨주시고 연설의 기회를 주신 스웨덴 국민과 국왕 내외분, 의원님들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스웨덴은 대한민국의 오랜 친구입니다. 한국전쟁 때 야전병원단을 파견해서 2만 5000명의 UN군과 포로를 치료하고, 한국의 국립중앙의료원 설립을 도왔습니다. 민간 의료진들은 전쟁 후에도 부산에 남아 수교도 맺지 않은 나라의 국민을 치료하고 위로했습니다. 스웨덴은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이상적인 나라였습니다. 1968년, 한국이 전쟁의 상처 속에서 민주주의를 꿈꾸던 시절 한국의 시인 신동엽은 스웨덴을 묘사한 시를 썼습니다. 그 시의 일부를 읽어보겠습니다. “스칸디나비아라든가 뭐라구 하는 고장에서는 탄광 퇴근하는 광부들의 작업복 뒷주머니마다엔 기름 묻은 책 하이데거, 럿셀, 헤밍웨이, 장자, 휴가 여행 떠나는 총리는 기차역 대합실 매표구 앞을 뙤약볕 흡쓰며 줄지어 서있을 때, 그걸 본 역장은 기쁘겠소라는 인사 한마디만을 남길 뿐, 평화스러이 자기 사무실 문 열고 들어가더란다. 그 중립국에서는 대통령 이름은 잘 몰라도 새 이름, 꽃 이름, 지휘자 이름, 극작가 이름은 훤하더란다. 자기네 포도밭은 사람 상처 내는 미사일 기지도 탱크 기지도 들어올 수 없는 나라, 황톳빛 노을 물든 석양 대통령이라고 하는 직함을 가진 신사가 자전거 꽁무니에 막걸리 병을 싣고 삼십리 시골길 시인의 집을 놀러가더란다.” 한국인들은 이 시를 읽으며 수준 높은 민주주의와 평화, 복지를 상상했습니다. 지금도 스웨덴은 한국인이 매우 사랑하는 나라입니다. 한국인들은 한반도 평화를 돕는 스웨덴의 역할을 매우 고맙게 여기고 신뢰합니다. 스웨덴은 서울과 평양, 판문점 총 3개의 공식 대표부를 둔 세계에서 유일한 나라입니다. 북한 역시 스웨덴의 중립성과 공정함에 신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지난 70년 동안, 한반도 평화를 위해 변함없는 성의를 보내준 스웨덴 국민과 지도자들께 경의를 표하며, 한국 국민의 뜨거운 우정의 인사를 전합니다.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스웨덴과 대한민국은 유라시아 대륙의 반대편에 위치한, 지리적으로 아주 먼 나라이지만 서로 닮은 점이 많습니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는 반도에 위치하여 역사적으로 많은 전쟁을 치렀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습니다. 스웨덴은 18세기부터 100년간 대기근으로, 한국은 20세기 식민지와 전쟁을 거치며 가난을 극복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시기도 있었습니다.그러나 위대한 국민의 힘으로 어려움을 이겨냈다는 점이 특히 닮았습니다. 근면과 불굴의 의지를 가진 양국 국민은 제조업을 중심으로 가난한 나라를 잘 사는 나라로 일으켰습니다. 잘 교육받은 청년들은 혁신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양국 정부는 이들이 마음껏 도전할 수 있도록 창업과 스타트업을 적극적으로 돕고 있습니다. 문화를 사랑하는 양국 국민이 이룬 예술적 성취 역시 놀랍습니다. 양국의 문화예술은 세계인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세계인은 아바(ABBA)와 방탄소년단(BTS)의 음악을 좋아하고, 스웨덴 작가 린드그렌의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과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한국 작가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읽습니다. 무엇보다 두 나라의 가장 큰 공통점은 평화에 대한 강한 의지입니다. 스웨덴 국민의 훌륭함은 단지 자국의 평화를 지키는데 그치지 않고, 다른 나라의 평화에도 관심을 가졌다는 점입니다. 스웨덴은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인류를 보호하는 국제사회의 평화 수호자가 되었습니다. 고통받는 인류를 향해 기꺼이 손을 내밀어 온 스웨덴의 역사는 한반도의 완전한 평화를 꿈꾸는 대한민국 국민에게 많은 영감을 주고 있습니다. 지난해 4월, 스웨덴의 여름만큼 아름답고 화창한 봄날의 판문점을 세계인들이 주시했습니다. 북한의 김정은 위원장이 사상 최초로 군사분계선을 넘어와 남북의 정상은 10년 만에 다시 얼굴을 마주했습니다. ‘다시는 전쟁으로 인한 불행을 겪지 않겠다’는 국민들의 간절한 열망이 분단의 상징 판문점을 일순간에 평화의 산실로 되돌렸습니다. 어렵사리 만난 남과 북은 진심을 다해 대화했고, 평화와 번영, 공존의 새로운 길을 열기로 약속했습니다. 남북군사합의서를 체결하여 적대행위 중지, 비행금지구역 설정, DMZ 내 감시초소 철수와 공동 유해 발굴 등에 합의했습니다. 그날의 만남으로 드디어 남북 사이에 오솔길이 열렸습니다. 정전협정 후 65년간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던 비무장지대의 숲에 11개의 오솔길이 생겼습니다. 이제 곧 남북 국민들이 오가는 수많은 길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올해는 DMZ ‘평화의 길’이 열려 군인이 아니면 갈 수 없었던 비무장지대를 일반인들도 걸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이런 변화가 평화를 바라는 세계인의 지지와 성원, 국제적 연대 덕분이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특히 한반도 평화를 만들 당사국들이 만나고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준 스웨덴의 역할에 감사드립니다. 우리는 스웨덴 국민의 응원으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희망을 더욱 크게 키울 수 있었습니다. 2000년 남북 정상회담부터 역사적인 1·2차 북미 정상회담까지 스웨덴이 했던 큰 역할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입니다.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스웨덴의 오늘을 만든 힘은 ‘신뢰’라고 생각합니다. 스웨덴 국민은 서로를 신뢰하고 정부와 기업을 신뢰합니다. 1938년 역사적인 쌀트쉐바덴 협약과 같이 노사가 합의를 거쳐 결정을 도출하고, 결정이 내려지면 모두가 받아들이고 실행하는 지혜가 정착되어 있습니다. 스웨덴의 쉰들러라고 불리는 라울 발렌베리와 ‘하얀 버스’로 2차 세계대전 전쟁포로를 구출한 폴케 베나도트의 활약은 개인이 어려움을 겪을 때, 누군가가 나서서 도울 것이라는 믿음을 가져왔습니다. 스웨덴의 국민은 ‘좋은 사회가 되려면 구성원 모두가 기여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구촌의 평화도 같다고 생각합니다. 지구촌의 평화를 위해서도 모든 나라의 기여가 필요합니다. 스웨덴은 개발 기술을 가지고 있었지만 핵무기 보유를 포기했습니다. 새로운 전쟁의 위협에 대한 대처 방안으로 핵으로 무장하기보다 평화적인 군축을 제시하고 실천한 것은 스웨덴다운 선택이었습니다. 스웨덴이 어느 국가보다 먼저 핵을 포기할 수 있었던 데는 인류가 새로운 미래를 만들 수 있다는 신뢰를 가졌기 때문입니다. 세계가 궁극적으로 ‘평화를 통한 번영’을 선택할 것이라는 신뢰였습니다. 핵확산방지 활동, 최고 수준의 공적개발원조(ODA) 등을 통해 스웨덴은 자신의 신뢰를 실천하고 있습니다. 지금 세계는 스웨덴을 따라 서로에 대한 신뢰를 키우고 있습니다. 인류애와 평화에 앞장서고 있는 스웨덴 국민께 경의를 표합니다.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저는 스웨덴의 길을 믿습니다. 한반도 역시 신뢰를 통해 평화를 만들고 평화를 통해 신뢰를 더욱 단단하게 만들어야 합니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남과 북 간에 세 가지 신뢰를 제안합니다. 첫째, 남과 북 국민 간의 신뢰입니다. 평화롭게 잘 살고자 하는 것은 남북이 똑같습니다. 헤어져서 대립했던 70년의 세월을 하루아침에 이어붙일 수 없는 것도 사실입니다. 차이가 크게 느껴질 때도 있고, 답답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남북은 단일 민족 국가로서 반만년에 이르는 공통의 역사가 있습니다. 대화의 창을 항상 열어두고, 소통하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오해는 줄이고, 이해는 넓힐 수 있습니다.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을 통한 대화는 이미 여러 변화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군사분계선에서의 적대행위가 중단되었습니다. 남북의 도로와 철도가 연결되고 있습니다. 접경지역의 등대에 다시 불을 밝혀, 어민들이 안전하게 고기잡이에 나설 수 있게 됐습니다. 작지만 구체적인 평화, 평범한 평화가 이뤄지고 있습니다. 이런 평범한 평화가 지속적으로 쌓이면 적대는 사라지고 남과 북의 국민들 모두 평화를 지지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항구적이고 완전한 평화의 시작이 될 것입니다. 둘째, 대화에 대한 신뢰입니다. 세계는 남과 북이 평화롭게 공존하기를 원합니다. 어떤 나라도 남북 간의 전쟁을 원하지 않습니다. 한반도의 평화가 무너지면 동북아 전체의 평화와 안정이 무너지고 전 세계에 엄청난 재앙이 될 것입니다. 어떤 전쟁도 평화보다는 비싼 비용을 치르게 된다는 것이 역사를 통해 인류가 터득한 지혜입니다. 한반도의 평화를 지지하는 것은 남북은 물론 세계 전체의 이익이 되는 길입니다. 평화는 평화로운 방법으로만 실현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대화입니다. 북한의 평화를 지켜주는 것도 핵무기가 아닌 대화입니다. 이는 한국으로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남북 간의 평화를 궁극적으로 지켜주는 것은 군사력이 아니라 대화입니다. 서로의 체제는 존중되어야 하고 보장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평화를 위한 첫 번째이며 변할 수 없는 전제입니다. 북한이 대화의 길을 걸어간다면, 전 세계 어느 누구도 북한의 체제와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것입니다. 북한은 대화를 통한 문제해결을 신뢰하고, 대화 상대방을 신뢰해야 합니다. 신뢰는 상호적이어야 합니다. 그것이 대화의 전제입니다. 한국 국민들도 북한과의 대화를 신뢰해야 합니다. 대화를 불신하는 사람들이 평화를 더디게 만듭니다. 대화만이 평화에 이르는 길임을 남북한 모두 신뢰해야 할 것입니다. 셋째, 국제사회의 신뢰입니다. 반만년 역사에서 남북은 그 어떤 나라도 침략한 적이 없습니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슬픈 역사를 가졌을 뿐입니다. 그러나 우발적인 충돌과 핵무장에 대한 세계인의 우려는 계속되고 있습니다. 국제사회의 제재를 풀기 위해서는 이 우려를 불식시켜야 합니다. 북한은 완전한 핵 폐기와 평화체제 구축 의지를 국제사회에 실질적으로 보여줘야 합니다. 국제사회의 신뢰를 얻을 때까지 양자 대화와 다자대화를 가리지 않고 국제사회와 대화를 계속해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남북이 합의한 교류협력 사업의 이행을 통해 안으로부터의 평화를 만들어 증명해야 합니다. 국제사회는 북한이 진정으로 노력하면 이에 대해 즉각적으로 응답할 것입니다. 제재 해제는 물론이고 북한의 안전도 국제적으로 보장할 것입니다.한국은 국제사회의 신뢰 회복을 위해 북한과 함께 변함없이 노력할 것입니다. 또한 남북 간의 합의를 통해 한국이 한 약속을 철저히 이행함으로써 한반도 평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신뢰를 더욱 굳건하게 할 것입니다. 남북이 함께 국제사회의 신뢰를 회복하면 더 많은 가능성이 눈앞의 현실이 될 것입니다. 국제사회의 제재에서 벗어나 남북이 경제공동체로 거듭나면 한반도는 동북아 평화를 촉진하고, 아시아가 가진 잠재력을 실현하는 공간이 될 수 있습니다. 남북은 공동으로 번영할 수 있습니다.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와 평화는 세계 핵확산방지와 군축의 굳건한 토대가 되고, 국제적·군사적 분쟁을 해결하는 모범사례로 자리 잡을 것입니다. 남과 북은 한반도의 평화를 넘어서서 세계 평화에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존경하는 국왕님, 안드레아스 노를리엔 의장님과 의원 여러분, 내외 귀빈 여러분, ‘냉전시대의 첫 열전’이었던 한국전쟁으로 남북뿐만 아니라 참전국의 장병들까지 수많은 목숨을 잃었습니다. 전쟁 개시 3년 만에 정전이 성립되었지만, 비극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습니다. 종전이 아닌 정전이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남북은 냉전에 갇혀 70여 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평화와 공존을 위한 노력은 냉전질서에 압도돼 번번이 좌절되었고 한반도의 겨울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전히 평화를 사랑하고 있었습니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의 지독한 추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시작되었고 한반도의 봄은 다가오고 있습니다. 스웨덴 국민시인이자,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트란스트뢰메르의 시는 오늘의 우리를 격려하는 듯합니다. “겨울은 힘들었지만 이제 여름이 오고, 땅은 우리가 똑바로 걷기를 원한다“ 트란스트뢰메르가 노래한 것처럼 한반도에 따뜻한 계절이 오고 있습니다. 우리는 국제사회의 신뢰를 저버리지 않기 위해 언제나 똑바로 한반도 평화를 향해 걸어갈 것입니다. 지난 70년간 함께 해주신 것처럼 스웨덴 국민께서 함께 걸어주실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경청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탁 소 뮈케(감사합니다.) 스톡홀름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이총리 “이희호 여사 꿈꾼 평화통일·국민통합 향해 전진”

    이총리 “이희호 여사 꿈꾼 평화통일·국민통합 향해 전진”

    이낙연 국무총리는 14일 “우리는 이희호 여사님이 꿈꾼 국민의 행복, 평화통일을 향해 쉬지 않고 전진하겠다”며 “영호남 상생을 포함해 국민의 통합을 위해서도 꾸준히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이 여사의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은이 총리는 이날 오전 서울 신촌 창천교회에 거행된 고(故) 이희호 여사의 장례예배와 동작구 국립서울현충원에서 엄수된 추모식에서 두 차례의 조사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이 여사의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은이 총리는 이날 오전 신촌 창천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예배에서 조사를 통해 “이제 우리는 한 시대와 이별하고 있다”며 “한국 현대사의 격랑 한복판에서 가장 강인하게 헤쳐온 여사님을 보내드리려 한다”고 말했다. 이 총리는 “여사님은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보통의 행복에 안주하지 않았다”며 “대학 시절 여성 인권에 눈을 떴고 유학을 마치자마자 여성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고 고인의 생을 기억했다. 이어 “여사님은 아이 둘 가진 홀아버지(고(故) 김대중 전 대통령)와 결혼했고 결혼 열흘 만에 남편은 정보부에 끌려갔다”며 “남편은 바다에 수장될 위험과 사형 선고 등 5차례나 죽음의 고비를 겪었다”고 덧붙였다.이 총리는 “그러나 여사님은 흔들리지 않고 남편이 감옥에 있거나 망명할 때에도 남편에게 편안함을 권하지 않고,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맞게 투쟁하라 독려했다”고 말했다. 이 총리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뤘고 분단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했고, 우리 국민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며 “어떤 외신은 노벨평화상 절반은 부인의 몫이라 논평했다. 정권교체의 절반도 여사님 몫이었다고 저는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여성평등기본법 제정, 여성부 신설 등 여성과 약자를 위해서도 획기적 업적을 만들었다”며 “여사님의 오랜 꿈은 그렇게 남편을 통해 구현됐다”고 말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이총리 “한 시대와 이별…정권교체 절반은 이희호 여사의 몫”

    이낙연 국무총리는 14일 故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고(故) 이희호 여사의 장례예배에서 “고난을 피하지 않고 정면으로 마주하신 여사님의 생애를 기억하며 남은 우리는 평화통일을 기원한 여사님의 유언을 실천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여사의 공동 장례위원장을 맡은이 총리는 이날 오전 신촌 창천교회에서 거행된 장례예배에서 조사를 통해 “이제 우리는 한 시대와 이별하고 있다”며 “한국 현대사의 격랑 한복판에서 가장 강인하게 헤쳐온 여사님을 보내드리려 한다”고 말했다. 이 총리는 “여사님은 유복한 가정에서 나고 자랐지만, 보통의 행복에 안주하지 않았다”며 “대학 시절 여성 인권에 눈을 떴고 유학을 마치자마자 여성 운동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고 고인의 생을 기억했다. 이어 “김대중 전 대통령은 헌정사상 최초의 정권교체를 이뤘고 분단 사상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했고, 우리 국민 최초로 노벨평화상을 받았다”며 “어떤 외신은 노벨평화상 절반은 부인의 몫이라 논평했다. 정권교체의 절반도 여사님 몫이었다고 저는 생각한다”고 덧붙였다. 이 총리는 “김 전 대통령은 여성평등기본법 제정, 여성부 신설 등 여성과 약자를 위해서도 획기적 업적을 만들었다”며 “여사님의 오랜 꿈은 그렇게 남편을 통해 구현됐다”고 말했다. 최광숙 선임기자 bori@seoul.co.kr
  • DJ·YS 사저 ‘역사속으로’

    지난 10일 별세한 김대중(DJ) 전 대통령 부인 이희호 여사가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기념관으로 만들어달라는 유언을 남김에 따라 동교동 사저에는 이제 사람이 살지 않게 됐다. 동교동과 함께 쌍벽을 이뤘던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상도동 사저는 앞서 압류 등 우여곡절을 겪은 뒤 지금은 YS의 손자가 재매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적으로 한국 현대 정치사의 영욕을 품은 동교동 사저와 상도동 사저는 사실상 정치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셈이다. 13일 정치권 등에 따르면 이 여사는 2010년 DJ로부터 동교동 사저를 상속받았다. 588.4㎡(178평) 규모인 동교동 사저는 2층짜리 단독주택으로 1층 195㎡(59평), 2층 208.2㎡(63평) 규모다. 방 8개와 욕실 7개, 거실 3개에 엘리베이터를 갖췄다. 이 여사 유언에 따라 노벨평화상 상금 11억원 중 DJ가 연세대 김대중도서관에 기부한 3억원을 제외하고 이 여사가 상속받은 8억원은 대통령 기념사업 기금으로 사용될 전망이다. YS의 상도동 사저는 2017년 2월 김 전 대통령의 장남 은철씨의 맏아들인 성민씨가 대출까지 받아 소유권을 이전했다. 대지 333.8㎡(101평)에 1층 152㎡(46평), 2층 109㎡(33평), 옥탑 16.5㎡(5평)짜리 주택인 상도동 사저는 YS가 서거하면서 재산을 모두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하면서 사단법인 김영삼민주센터로 소유권이 이전됐다. 그러나 2016년 12월 김영삼민주센터가 기념도서관 건립 과정에서 부채를 떠안아 사저에 압류조치가 내려졌다. 이에 YS 가족이 사저를 지키고자 십시일반으로 자금을 모으고 손자가 7억원을 대출받아 11억원에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제훈 기자 parti98@seoul.co.kr
  • 마지막 꿈도 평화통일이었다

    마지막 꿈도 평화통일이었다

    DJ 유지 이어 남북 화해에 노년 바쳐 北 조문단 파견으로 교착 풀릴지 주목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눈을 감는 순간까지 평화와 통일을 향한 꿈을 놓지 않았다. 지난 10일 97세로 별세한 이 여사는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 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는 유언을 남겼다고 김성재 김대중평화센터 상임이사가 11일 밝혔다. 인권운동과 민주화투쟁에 평생 헌신한 이 여사는 노년을 남편 김 전 대통령이 못다 이룬 남북 화해 협력에 바쳤지만, 생전에 평화 통일은 보지 못하고 떠났다. 이에 따라 평화 통일을 향한 이 여사의 유지는 비핵화 협상이 교착상태인 지금 남은 자들에게 무거운 숙제로 남게 됐다. 이 여사는 2000년 6월 사상 첫 남북 정상회담에 현직 대통령의 부인으로 동행해 교류협력의 기반을 다지는 데 일조했다. 이 여사는 여성분야 간담회에 남측 대표로 참석해 여원구 최고인민회의 부의장 등 북한 여성계 대표들과 여성단체 간 교류협력 강화와 일본군 위안부 문제 공동 대처 등을 논의했다. 이 여사는 김 전 대통령 서거 후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대북 강경 기조하에서도 교류협력의 명맥을 유지하려 애썼다. 남북 관계가 악화일로일 때 두 차례 방북해 사실상 메신저 역할을 하기도 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사망하자 정부는 당국 차원의 조문단을 파견하는 대신 이 여사의 조문을 허용했고, 이 여사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조의를 표했다. 이 여사는 2015년 8월 김 위원장의 초청으로 93세의 노구를 이끌고 다시 방북해 자신이 설립한 인도 단체 ‘사랑의 친구들’ 회원들과 함께 짠 어린이용 털모자와 의약품 등을 전달했다. 다만 남북 관계가 경색된 국면이라 김 위원장과의 면담은 불발됐다. 이 여사는 지난해 세 차례 남북 정상회담이 열리는 등 10여년 만에 본격적인 교류협력이 재개되자 문재인 대통령에게 “노벨평화상 타시라”는 축전을 보내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남북 화해협력의 상징으로 남북 모두로부터 예우를 받았던 이 여사가 영면함에 따라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할지, 파견할 경우 교착된 대화 국면에 생기를 불어넣는 요인으로 작용할지 주목된다. 통일부는 11일 개성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통해 북측에 이 여사의 부음을 전달했다고 밝혔다. 고유환 동국대 교수는 “보수 정부 때 남북 관계가 교착되면 이 여사가 연결고리로서 관계 복원에 역할을 할 정도로 북한은 이 여사를 신뢰했다”며 “북한이 조문단을 파견한다면 이를 계기로 당국 간 직간접적 대화가 이뤄질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이희호, 文엔 “노벨상”, 朴엔 “여성 대통령”, 안철수는…

    이희호, 文엔 “노벨상”, 朴엔 “여성 대통령”, 안철수는…

    10일 별세한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 여사는 우리 정치계에서 존재감을 발휘했던 인물이었다. 유력 정치인은 중요한 시기마다 이휘호 여사를 예방했다. 특히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는 각 당 후보들은 저마다 이 여사를 찾아가 덕담과 지원을 바랐고,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도 이 여사를 청와대로 초청하는 등 예우했다. 이 여사는 정치인들을 만날 때마다 현 시국에 대한 자신의 의견과 바람을 전달했고 따뜻한 위로와 격려도 잊지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은 야당 대표로 2번의 대선을 치르면서 이 여사를 예방했다. 이 여사는 2012년 9월 24일, 자신의 아흔 번째 생일을 맞아 찾아온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에게 “꼭 당선되야 한다. 당선될 것 같다. 정권교체가 정말 중요하다. 민주주의를 잘해내고 서민경제를 이뤄서 많은 사람들이 다 잘 살 수 있는 나라를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다. 이 여사는 지난해 4월 27일 문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남북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끝난 뒤에는 “수고했다. 큰 일을 해내셨다. 노벨평화상을 받으시라”는 내용의 축전을 보냈다.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노벨 평화상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받으면 되고, 우리는 평화만 가져오면 된다”고 말하기도 했다. 박근혜 전 대통령도 2012년 새누리당 대선 후보 자격으로 이 여사를 만났다. 서울 마포구 동교동 김대중도서관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맞은 이 여사는 “우리나라는 여성 대통령이 없었지 않느냐. 여성 지위가 법적으로 많이 향상됐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으니 만일 당선된다면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을 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후 비공개 대화에서 이 여사는 박 전 대통령에게 “대통령이 되신다면 여성 모두가 자랑스럽게 생각할 것”이라며 “우리나라에서 처음이고 우리나라 위상이 높아질 것”이라고 덕담한 것으로 전해졌다.안철수 전 바른미래당 대표는 이 여사 예방 문제로 곤란한 처지에 놓인 적이 있다. 안 전 대표는 지난 2016년 1월 새해를 맞아 이 여사를 20분간 만났다. 안 전 대표는 당시 신당(국민의당) 창당을 추진하는 국회의원 신분이었다. 한 언론사는 안 전 대표 측 관계자의 말을 빌어 이 여사가 “꼭 주축이 돼 정권교체를 하시라. 지난 2012년 대선 때 내가 좋아했는데 (문재인 당시 민주당 후보와) 단일화 과정에서 마지막에 후보를 내려 놓게 돼 안타까웠다”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그러나 이 여사의 아들 김홍걸씨는 보도자료를 내고 “어머님은 안철수 의원 말씀을 듣기만 하고 다른 말씀을 하신 적이 없다. 보도내용에 어이없어 하신다”고 주장했다. 그러자 안 전 대표 측에서 비공개 면담 녹취록을 이 여사 측 동의 없이 한 월간지에 공개해 파문이 일었다. 공개된 녹취에서 이 여사는 “정권교체를 하겠다”는 안 전 대표 발언에 “꼭 그렇게 하세요”라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국민의당 측은 “이 여사에게 큰 결례를 범했다며 공개 사과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동교동 사저, 대통령 기념관으로” 이희호 여사의 유언은

    “동교동 사저, 대통령 기념관으로” 이희호 여사의 유언은

    고(故) 이희호 여사가 지난 10일 별세하기 전에 남긴 유언에서 ”하늘나라에 가서 우리 국민을 위해, 민족의 평화통일을 위해 기도하겠다”고 밝혔다. 이 여사는 생전에 변호사가 입회한 가운데 세 아들의 동의를 받아 이러한 내용의 유언장을 작성했다고 11일 김대중평화센터 김성재 상임이사가 발표문을 통해 공개했다. 이 여사는 또 “동교동 사저를 ‘대통령 사저 기념관’(가칭)으로 사용하도록 하고 노벨평화상 상금은 대통령 기념사업을 위한 기금으로 사용하라”고 유언했다. 이 여사는 “우리 국민들께서 남편 김대중 대통령과 저에게 많은 사랑을 베풀어주신 것에 대해 감사하다”면서 “우리 국민들이 서로 사랑하고 화합해 행복한 삶을 사시기를 바란다”고 기원했다. 이 여사는 유언의 집행에 대한 책임을 김성재 상임이사에게 부여하면서 “김대중 대통령 기념사업과 민주주의와 평화통일을 위한 김대중평화센터 사업을 잘 이어가달라”고 당부했다. 장례집행위원장을 맡은 김 상임이사는 빈소가 마련된 신촌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낭독한 발표문에서 “이 여사님의 장례는 유족, 관련단체들과 의논해 김대중평화센터 주관으로 ‘여성지도자 영부인 이희호 여사 사회장’으로 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그는 “유족들이 모두 임종을 지키면서 성경을 읽어드리고 기도하고 찬송을 부를 때 여사님도 함께 찬송을 부르시며 편히 소천하셨다”고 전했다. 이어 “이 여사님께서는 평생 어려운 사람들, 사회적 약자의 편에서 늘 함께 하시고,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서 남과 북의 평화를 위한 일을 계속 하시다가 소천하셨다”고 강조했다.이 여사는 지난 3월 20일 입원해 83일간 병원에 있었다고 김 상임이사는 전했다. 그는 “노환을 조금 회복해 사저로 돌아갈 것을 기대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노환이 아닌 다른 질병 때문에 돌아가신 것은 아니다”고 부연했다. 북한 측의 조문단 파견 여부에 대해서는 “아직 연락받은 바 없다”고 밝혔다. 한편 이 여사의 장례를 주관할 장례위원회에는 더불어민주당 이해찬·자유한국당 황교안·바른미래당 손학규·민주평화당 정동영·정의당 이정미 대표 등 5당 대표가 고문으로 참여한다. 김 상임이사는 “5당 대표가 모두 장례위원회에 참여하는 것으로 확정됐다”고 말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대통령비서실장이었던 박지원 의원은 이와 관련해 국회에서 열린 ‘6·15 남북정상회담 19주년 좌담회’에서 “제가 어제 5당 사무총장들에게 연락을 드려서 5당 대표들은 장례위원회 고문으로, 의원들은 장례위원으로 모시겠다고 했고 각 당에서도 응해왔다”고 전했다. 박 의원은 “황교안 대표는 ‘담당할 일이 무엇인가. 적극 협력하겠다’고 말씀하셨다”면서 “민주당, 평화당, 정의당은 대표와 의원이 전부 참여하겠다는 의사를 보였다. 한국당과 바른미래당 의원들의 참여 여부는 확인 중”이라고 덧붙였다. 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이희호 여사 별세] 민주화 투쟁·한반도 평화 개척… 여성 정치 확대에 ‘큰 획’

    [이희호 여사 별세] 민주화 투쟁·한반도 평화 개척… 여성 정치 확대에 ‘큰 획’

    美유학파 엘리트女, 반대 딛고 DJ와 결혼 “꾸준히 용감하게 싸워나가달라” 편지 등 DJ 민주화 투쟁 고비마다 버팀목 역할 석방투쟁·옥중 뒷바라지·가장 역할까지 ‘여가부 전신’ 여성특별위 등 출범에 앞장 퇴임 후엔 더 나은 한반도 평화위해 매진고 이희호 여사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영부인 이전에 여성인권 운동과 민주화 투쟁의 큰 별이었다. 이 여사는 일제강점과 해방, 독재와 민주화, 한반도 전쟁과 평화 시대의 개척자였고, DJ의 영원한 동행자이자 동역자였다. 이 여사는 1922년 9월 의사 부친과 한의사 모친 사이에 6남 2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부친 이용기씨는 세브란스의전을 나온 국내 의사면허 4호로 전북 남원과 경기 포천의 도립병원장을 지냈다. 모친 이순이씨도 한의사집 가정의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모태신앙으로 태어난 이 여사는 가톨릭 신자인 DJ와 종교적 화합을 이루는 데도 기여했다. 이 여사는 서울 동교동 자택 근처의 창천교회를, DJ는 동교동 성당을 다녔다. 이 여사는 이화여고를 거쳐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입학했으나 1944년 일제의 교육긴급조치로 학교가 문을 닫아 졸업하지 못했다. 해방 후 1946년 서울대에에서 학업을 이어갔다. 영문학 전공이지만 2학년 때 교육학과로 옮겼다. 졸업 후 미국으로 건너가 스칼렛 대학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다. 1962년 5월 마흔이던 이 여사, 서른여덟이던 DJ가 종로구 체부동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두 아들이 딸린 빈털터리 실업자 김대중과 미국 유학까지 하고 돌아온 여성계 엘리트 이희호의 결혼에 반대가 만만치 않았다. 당시 이 여사가 몸담았던 YWCA 선후배들이 반대 ‘공작’을 펼치기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여정은 2009년 DJ가 서거할 때까지 47년간 이어졌다. 이 여사는 남편 DJ의 민주주의 투쟁에 가장 든든한 동지였다. DJ가 목숨을 건 민주화 투쟁에서 주춤거리거나 물러서지 않도록 단단히 매어낸 것도 이 여사다. 1971년 대선 때는 직접 연단에 올라 “여러분, 제 남편이 대통령이 되어서 만약 독재를 하면 제가 앞장서서 타도하겠습니다”라는 연설을 하기도 했다. 1972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이 10월 유신 쿠데타를 일으키자 일본에 갔던 DJ는 사실상의 망명 생활을 했다. 이 여사는 서슬 퍼런 감시망을 피해 DJ에게 편지를 썼는데 “현재로서는 당신만이 한국을 대표해서 말할 수 있으니 더 강한 투쟁을 하시라”고 적었다. 1973년 5월에는 “꾸준히, 용감하게 싸워나가 달라”는 편지를 썼고, 3개월 뒤 도쿄납치사건이 일어났다. DJ가 지칠 때마다 그를 일으켜 세운 것은 이 여사였다. DJ도 훗날 아내에 관한 글에서 “우스갯소리로 나는 늘 아내에게 버림받을까봐. 나 자신의 정치적 지조를 바꿀 수 없었다고 말하곤 한다”는 글을 썼다. 1977년 ‘3·1 구국선언문’ 사건으로 DJ가 구속되자 이 여사는 석방투쟁으로 1년을 보냈다. 또다시 구속된 남편을 대신해 가장으로서의 책무에 시달렸다. 당시 이 여사는 몸무게 43㎏까지 야위었다. 이 여사는 남편에 대한 그리움으로 밥을 먹다 말고 수저를 손에 쥔 채 울었다고 한다.이 여사는 DJ가 옥중에 있을 동안 매일 편지를 썼다. 아들의 안부 등 일상을 전하는 것뿐 아니라 철학적·신학적 논쟁거리, 남편에 대한 격려 등을 담았다. 면회를 갈 때마다 남편이 청한 책 외에 자신이 직접 고른 책도 한 두 권씩 꼭 전했다. 이 여사가 이때 쓴 편지는 1998년 ‘내일을 위한 기도’라는 책으로 출판됐다.1987년, 1992년 DJ가 대선에서 잇달아 패하자 이 여사도 상심했다. 하지만 1997년 4수를 결심했을 때 이 여사가 앞장섰다. 1997년 12월 18일 남편이 당선됐다. 이 여사는 훗날 “당선이 확정된 직후에 청와대 경호팀이 우리에게 왔다. 오랜 세월 정보기관의 미행과 감시만 받다가 갑자기 경호를 받게 되니 어색하고 낯설었다”고 했다. 시대를 이끈 여성인권·사회 운동가였던 이 여사가 퍼스트레이디가 되자 많은 것이 달라졌다. 현재 여성가족부의 씨앗이 된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가 출범했고 대통령이 장관들에게 임명장을 수여할 때 부부가 동반하는 문화가 처음으로 탄생했다. 1999년 발족한 한국여성재단을 탄생시킬 때도 퍼스트레이디가 재단을 만드는 것이 적절한지 정치적 후유증은 없는지 등을 세심히 살핀 후 명예추진위원장을 맡았다. 2002년 5월 셋째 아들 홍걸이 알선수재 혐의로 구속됐고 한 달 뒤 둘째 홍업이 기업체로부터 돈을 받은 혐의로 구속됐다. 이 여사는 감옥에 있는 아들들에게 “잘못을 회개하라”는 편지를 썼는데 항상 “내 잘못을 회개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2003년 2월 퇴임을 앞둔 내외는 청와대에서 민주당, 자민련 인사들고 고별 만찬을 했다. 당시 참석자들에 따르면 이 여사는 “나라와 민족을 위해 최선을 다한 남편”이라며 “남편이지만 저도 찬사를 보내고 싶다”고 인사를 했다고 한다. 그 무렵 대북송금사건이 터졌고 2월 14일에는 DJ가 ‘국민에게 드리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퇴임 후 동교동 자택으로 돌아온 이 여사는 DJ와 함께 더 나은 민주주의, 더 나은 한반도 평화를 위해 매진했다. 2009년 5월 노무현 전 대통령의 갑작스런 서거에 아이처럼 울음을 터뜨렸던 DJ가 석달 뒤 8월 서거했다. 이 여사는 DJ 장례식 후 2015년까지 매주 두 번씩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을 찾았다. 비가 와도 눈이 와도 매주 화요일에는 가족, 동지들과 묘역을 찾았고 매주 금요일에는 혼자 남편의 무덤을 찾아 기도했다. 이 여사는 보수 정부 시절 두 차례 북한을 방문, 햇볕정책의 맥을 잇고자 했다. 2011년 12월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사망했을 당시 이 여사는 6·15 공동선언의 주역이었던 김 위원장 조문을 위해 방북을 신청했다. 육로로 방북한 이 여사는 당시 장례위원장을 맡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에게 조의를 표했고, 김 위원장은 “멀리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고 했다. 당시 정부는 당국 차원 조문단을 파견하지 않았고, 이 여사 일행과 고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 유족인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일행에만 북측 조문에 대한 답례 차원에서 조문을 허용했다. 북측은 2000년 1차 남북 정상회담 때 이 여사가 머물렀던 백화원초대소 101호를 내어주며 극진하게 예우했다. 막 북한의 새 지도자가 된 김 위원장이 처음으로 만난 남측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당시 방북의 의미와 상징성은 매우 컸다. 이 여사는 3년 7개월 뒤인 2015년 김 위원장의 초청으로 다시 북한을 방문했다. 남북관계가 경색된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직접 친서를 보내 이 여사를 평양으로 초청하 이뤄진 방북이어서 더욱 주목을 받았다. 북한 어린이들을 돕기 위해 당시 93세의 노구를 이끌고 서해 직항로를 통해 평양을 찾았다. 하지만 3박 4일의 일정 동안 끝내 김 위원장을 만나지는 못했다. 이 여사도 방북 4개월 후인 2015년 12월 김 전 대통령의 노벨평화상 수상 15주년 기념식에서 ”15년 전처럼 남과 북이 왕래하고 대화하는 시대로 돌아갈 것을 호소한다“며 꽉 막힌 남북관계에 아쉬움을 토로하기도 했다. 앞서 이 여사는 남편의 정치 인생에서 어느 때보다도 극적인 순간이었을 평양 6·15 남북정상회담도 바로 곁에서 지켜봤다. 당시 이 여사가 평양에서 과거 이화여고 재학 당시 수학선생님이었던 김지한씨와 ‘60년만의 해후’를 한 것도 화제가 됐다. 김대중평화센터 이사장으로 생을 마감한 이 여사는 생전 인터뷰에서 “여성운동가, 민주화 운동가로 기억되고 싶다”는 말을 남겼다. 손지은 기자 sson@seoul.co.kr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G20 前 국제무대에 새 평화 비전… 김정은에 대화 복귀 명분 기대

    G20 前 국제무대에 새 평화 비전… 김정은에 대화 복귀 명분 기대

    미·중·일 정상과 이달말 회동 앞둬 촉각 4차 남북정상회담 추동 가능성도 높여베를린 선언 맥 잇는 평화선언 나올 듯 핀란드 “트럼프·김정은 회담 주선 용의”문재인 대통령이 9일 6박 8일 일정으로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북유럽 3국 국빈방문에 나섰다. 비핵화 협상의 당사자인 미국과의 정상회담이 이달 말 일본 오사카에서 열리는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직후 예정된 가운데 문 대통령이 내놓을 한반도 평화프로세스에 대한 메시지에 관심이 쏠린다. 가장 눈길을 끄는 일정은 노르웨이 오슬로포럼에서 한반도 평화를 주제로 진행되는 기조연설이다. 오슬로는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2000년 12월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곳이고, 문 대통령의 노르웨이 방문 시점은 1차 북미 정상회담 1주년(12일)을 즈음한 11∼13일이다. 문 대통령의 새로운 평화정책 비전이 이 연설에 담길 것이란 전망이 나오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일각에서는 2017년 7월 문 대통령이 독일 쾨르버 재단 초청 연설에서 내놓은 ‘베를린 선언’의 맥을 잇는 ‘오슬로 선언’이 될 것이라는 예상도 나온다. 당시만 해도 북한의 미사일 발사 등 무력도발이 이어지고 한반도 위기론이 팽배했던 터라 ‘대화’, ‘평화’를 언급할 상황이 아니었다. 하지만 문 대통령은 2000년 김 전 대통령처럼 베를린에서의 담대한 구상으로 변곡점을 만들어냈다. 지난 2월 말 ‘하노이 핵 담판’ 결렬 이후 북미 대화는 물론 남북 대화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는 상황이지만 이번에도 돌파구가 마련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가 나오는 까닭이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방한을 비롯해 G20을 계기로 중국 일본 등 주요국과의 정상회담 가능성이 거론되는 만큼 문 대통령의 이번 메시지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대화테이블로 돌아오는 ‘명분’은 물론 제4차 남북정상회담을 이른 시일 내에 추동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도 나온다.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지난 7일 ‘한미 정상회담 전 남북 정상회담이 가능한가’라는 물음에 “조심성 있게 낙관적인한 좋은 결과가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대답했다. 다만 이 발언이 한미 정상회담 이전 남북 정상회담 가능성을 긍정하는 시그널로 해석되자 청와대는 진화에 나섰다. 또 다른 고위 관계자는 “‘조심스럽게 낙관적’이라는 말은 전반적 상황에 대한 총론적 답변일 뿐 6월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답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한편 핀란드의 사울리 니니스퇴 대통령은 6일(현지시간) 연합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북핵 문제 해결에 기여할 수 있는 요청이 있다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초청해 3차 북미 정상회담을 주선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김규환 선임기자 khkim@seoul.co.kr
  • #톈안먼 학살 #6·4 #18만개 촛불… 30년 전 진실을 기억하다

    #톈안먼 학살 #6·4 #18만개 촛불… 30년 전 진실을 기억하다

    홍콩 학생 동맹휴업 등 18만명 촛불시위 독일선 노벨상 받은 류사오보 흉상 건립 대만 AIT, 페북에 ‘톈안먼 학살’ 해시태그 中, 톈안먼 광장서 사진 찍어도 검문 대상 인근 지하철역 폐쇄… 극심한 감시·통제중국 공산당이 30년 전 벌어진 민주화 운동인 톈안먼 사태를 ‘1980년대 말 정치 풍파’로 치부하며 역사에서 지우려 시도하는 가운데 홍콩, 대만, 미국 워싱턴 등에서 30년 전의 아픔을 기억하는 이들이 뭉쳤다. 1989년 6월 4일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던 청년들을 탱크로 짓밟은 톈안먼 사태 30주년을 맞은 4일 홍콩에서는 시위를 이끌었던 지도부 등이 어렵사리 모여 새로운 개혁의 불씨를 지폈다. 당시 중국 베이징대 학생을 중심으로 시위를 주도했던 이들은 주로 미국과 홍콩, 대만으로 망명했고 이들이 중심이 돼 진실이 잊히지 않고 30년 전의 아픔이 새로운 희망으로 승화하기를 기원했다. 독일에서는 톈안먼 사태 지도부로 노벨평화상을 받은 고(故) 류사오보의 흉상이 건립돼 기념식이 열렸다. 홍콩 빅토리아 공원에는 약 18만명 인파가 모여 촛불을 들었다. 이날 촛불시위 참가자 숫자는 2014년 ‘우산혁명’이라 불리는 홍콩 민주화 시위 참여자를 넘어서는 사상 최대 규모다. 동맹휴업을 하고 모인 홍콩 학생들은 톈안먼 사태 희생자에 대한 정의를 되찾고 중국 공산당 일당 독재의 종식을 요구했다. 홍콩에서는 톈안먼 시위 다음해인 1990년부터 ‘홍콩시민지원애국민주운동연합회’(지련회) 주도로 매년 시위 희생자들을 기리는 촛불집회가 열리고 있다. 특히 홍콩 정부가 추진하는 범죄인 인도 법안이 홍콩의 자유를 옥죌 수 있다는 반감이 촛불시위 참가자 숫자를 늘렸다. 대만에서도 수십 개의 시민단체가 연대한 추모 집회가 열렸다. 대만 주재 미대사관의 역할을 하는 미국재대만협회(AIT)는 지난 3일 중국에서 금지된 사이트인 페이스북에 ‘톈안먼 학살’이라는 해시태그를 사용했다. 차이잉원 대만 총통이 전날 중국의 민주화를 촉구한 데 이어 라이칭더 전 행정원장은 중국이 아직도 지난날의 잘못을 반성하고 있지 않다고 비판했다. 라이 원장은 웨이펑허 중국 국방부장이 지난 2일 싱가포르 아시아안보회의(샹그릴라 대화)에서 “톈안먼 시위는 진압할 필요가 있던 정치적 소요사태”였다고 발언한 데 대해 분개했다. 그러나 6·4 사태 현장이었던 베이징은 어느 때보다도 극심한 감시와 통제 속에 톈안먼 광장에 머물러 사진을 찍거나 질문을 하는 행위조차 공안의 검문 대상이 됐다. 지하철도 톈안먼 서역은 승객이 아예 내릴 수 없도록 폐쇄됐다. 중국 외교부 정례브리핑에서는 톈안먼 사태와 맨몸으로 탱크에 맞서 6·4 사태를 세계에 알린 일명 ‘탱크맨’에 대한 질문이 쏟아졌다. 하지만 겅솽 외교부 대변인은 “1980년대 말 발생한 정치 풍파에 대해 중국 정부는 이미 분명한 결론을 내렸다”면서 “신중국 성립 70년 만에 이룬 엄청난 성취는 우리가 선택한 발전 경로가 완전히 옳았음을 증명한다”고 일축했다. 외교부는 대변인 발언을 포함한 톈안먼 사태에 대한 모든 언급을 삭제한 뒤 기자회견문을 공개했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최장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에모리대 종신교수 됐다

    ‘최장수 미국 대통령’ 지미 카터, 에모리대 종신교수 됐다

    생존한 전직 미국 대통령 가운데 최고령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94세 나이에 미 조지아주 애틀랜타의 명문 사립대학인 에모리대 종신교수로 임용됐다고 3일(현지시간) CNN 등이 보도했다. 에모리대 이사회는 지난 37년간 이 대학에서 석좌교수를 지낸 카터 전 대통령을 종신교수로 선임했다고 이날 밝혔다. 에모리대는 웹사이트에 올린 성명을 통해 “그는 전직 미 대통령과 노벨상 수상자로는 처음 이 대학의 종신교수가 됐다”고 설명했다. 56세이던 1981년 재선에 실패한 뒤 이듬해부터 고향인 조지아에 머물며 에모리대에서 강의해온 카터 전 대통령은 민간외교와 사회운동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인 공로로 2002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그는 부인 로잘린 여사와 함께 학교 측과 손잡고 애틀랜타에 세계 평화, 보건, 인권 문제 등을 연구하는 ‘카터 센터’를 설립하고 중요한 사회 활동에 활발히 참여해왔다. 대학 측에 따르면 카터 전 대통령은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정도 강단에 오르게 된다. 수업하는 과목은 종교학부터 공중보건학, 정치학과 역사학까지 다양하다. 요청이 있을 경우 다른 교수의 수업에 들어가서 특강을 할 수도 있다. 카터 전 대통령은 현재 신입생들과 소통할 수 있는 연례 타운홀 미팅을 열고 있다. 클레어 스터크 에모리대 총장은 이날 웹사이트 영상에서 카터 전 대통령에 대해 “거의 40년에 걸쳐 교수이자 지식인으로서 사회에 참여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에모리대에 부족함 없이 보여 준 인물”이라고 칭송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지난 3월 미 역사상 최장수 전직 대통령으로 등극했다. 카터 전 대통령보다 4개월 정도 먼저 태어난 41대 미 대통령 조지 H W 부시(아버지 부시)는 지난해 11월 세상을 떠났다. 지난달에는 낙상으로 엉덩이뼈 골절 수술을 받고 입원했으나 사흘 만에 퇴원하며 건강 상태가 양호한 것으로 알려졌다. 최훈진 기자 choigiza@seoul.co.kr
  • 문 대통령, 내달 북유럽 3국 방문…‘오슬로 선언’ 나오나

    문 대통령, 내달 북유럽 3국 방문…‘오슬로 선언’ 나오나

    문재인 대통령이 다음달 9일부터 16일까지 6박 8일 일정으로 핀란드, 노르웨이, 스웨덴 등 유럽 3개국을 국빈 방문한다. 한국 대통령의 노르웨이, 스웨덴 국빈 방문은 이번이 처음이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29일 문 대통령의 순방 일정을 발표하면서 “우리 정부의 역점 과제인 혁신성장, 평화, 포용국가 실현 행보의 일환”이라고 설명했다. 우선 문 대통령은 9일부터 11일까지 핀란드를 방문해 사울리 니니스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양국 관계 증진방안과 혁신성장 분야 선도국인 핀란드와의 스타트업 교류 활성화 등에 대해 논의한다. 이어 11일부터 13일까지 노르웨이를 방문, 하랄 5세 국왕이 주관하는 공식 환영식과 오·만찬 행사에 참석한다. 문 대통령은 에르나 솔베르그 총리와 회담을 갖고 수교 60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 증진방안과 한반도 비핵화 및 항구적 평화정착 협력, 수소를 포함한 친환경 경제 구현, 북극·조선·해양 분야 협력 증진방안 등을 협의할 예정이다. 문 대통령은 13일부터 15일까지 마지막 순방국인 스웨덴을 방문, 칼 구스타프 16세 국왕이 주관하는 공식 환영식과 오·만찬 행사에 참석한다. 이어 스테판 뢰벤 총리와 회담을 하고 수교 60주년을 맞은 양국 관계 증진방안과 과학기술·혁신산업 분야에서의 협력방안 등에 대해 협의한다. 또 협력적 노사관계의 산실인 스웨덴의 경험과 포용 국가 건설을 위한 한국 정부의 비전도 공유한다. 고민정 청와대 대변인은 “북유럽 3국은 우리 정부가 역점을 두고 추진 중인 혁신·포용성장 정책의 중요한 협력파트너 국가”라며 “이번 방문으로 방문국 정상들과 우호·신뢰 관계를 구축하고, 5G 등 4차 산업혁명 시대 대응 및 북극·친환경 분야 등에서 상생 협력의 기반을 마련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고 대변인은 “또 국제평화와 안정을 위해 남다른 기여를 해 온 이들 국가와 한반도 비핵화를 통한 항구적인 평화정착 방안에 대한 공감대를 재확인하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정치권에서는 이번 북유럽 순방 중 문 대통령이 ‘노벨평화상의 도시’ 오슬로를 무대로 한반도 평화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밝힐 것이라는 관측도 나온다. 남북 대치국면이었던 2017년 7월 문 대통령은 쾨르버 재단 초청연설에서 이른바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문 대통령은 “여건이 갖춰지고 한반도 긴장과 대치 국면을 전환할 계기가 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 만날 용의가 있다”고 언급하는 등 과감한 대북 정책을 언급했다. 문 대통령의 연설 내용은 1∼3차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실제로 현실화됐다. 정현용 기자 junghy77@seoul.co.kr
  • 카타르월드컵 32개국 본선 출전 그대로

    카타르월드컵 32개국 본선 출전 그대로

    경기장 2개 더 필요… 증설 등 어려워국제축구연맹(FIFA)이 2022년 카타르월드컵 본선을 원안대로 32개국으로 치른다. FIFA는 22일 “FIFA 평의회 권고에 따라 2022년 카타르월드컵 참가국을 48개로 늘리는 방안을 검토했지만 포괄적으로 따져본 결과 불가능하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밝혔다. FIFA는 이어 “특정 요구 사항들을 완화해 참가국을 확대하는 가능성도 따져봤다”면서 “이를 위해 현재 대회 준비와 주변 나라에 미칠 영향 등을 고려해야 하는데, 마감 시한인 6월 안에 이를 모두 검토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고 덧붙이면서 “이에 따라 카타르월드컵은 32개국 체제로 치러질 것”이라고 밝혔다. 당초 FIFA는 2026년 월드컵부터 본선 출전국을 32개국에서 48개국으로 확대하기로 결정한 상태였다. 그러다 지난해 FIFA 의사결정기구인 평의회가 참가국 확대를 4년 앞당길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후 잔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의 주도 아래 적극 추진돼 지난 3월 평의회는 카타르월드컵의 48개국 포맷이 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놨고, FIFA는 오는 6월 총회에서 이를 최종 결정할 예정이었다. FIFA가 참가국 확대를 앞당기려는 가장 큰 목적은 일단 ‘돈’ 때문이고 인판티노 회장의 노벨상 야심도 한몫한 것으로 분석된다. AP통신은 카타르월드컵 출전국을 48개국으로 확대하면 최대 4억 달러(약 4700억원)의 수익을 더 낼 것으로 전망했다. 다만 본선 16개 경기를 더 치르려면 경기장 2개가 더 필요하지만, 카타르는 이를 당장 수용하기는 힘든 상황이다. 아랍에미리트(UAE)나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인접국 경기장을 사용하면 되지만, 현재 카타르와는 외교를 단절한 상태다. 영국 BBC는 “인판티노 회장은 노벨평화상 수상을 염두에 두고 카타르 인접국에서 월드컵 경기를 치르는 방식으로 이 지역의 외교적 긴장을 완화하려고 했지만, 결국 무산됐다”고 꼬집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씨줄날줄] 부시의 노무현 초상화 선물/임창용 논설위원

    [씨줄날줄] 부시의 노무현 초상화 선물/임창용 논설위원

    미국에서 퇴임 후 가장 성공적인 삶을 일군 전직 대통령으로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자주 꼽힌다. 대통령직에 있을 때는 성과가 빈약하다는 비판을 받은 반면에 퇴임 뒤의 활동은 그야말로 눈부시기 때문이다. 인권 활동가로서 세계를 누비며 활동해 온 그는 1994년엔 일촉즉발의 한반도 핵위기 때 김일성 주석을 만나 사태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카터 전 대통령 같은 경우는 드물다. 다른 전직 대통령들도 가끔 인권·봉사 활동에 나서기도 하지만 대개 강연이나 집필 활동으로 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더 많다. 특히 빌 클린턴 전 대통령 부부는 백악관을 떠난 뒤 강연과 출판, 상담 활동으로 수억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들에 앞서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퇴임 후 일본의 소니 회사에 가서 한 번 연설하는 데 200만 달러를 받는 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와 관련해 전직 대통령들이 재임 시의 경험을 상업화해 돈벌이에 나서고 있다는 눈총을 받기도 한다. 그런 점에서 오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10주기 추도식에 참석하는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전 대통령은 좀 특이한 사례에 속한다. 그는 10년 전 퇴임한 뒤 화가로 활발하게 작품 활동을 하고 있다. 그는 2014년 ‘아트 오브 리더십’(Art of Leadership)이란 타이틀로 세계 각국 정상을 묘사한 초상화 전시회를 열었고, 3년 뒤에도 같은 주제로 두 번째 전시회를 개최했다. 전시엔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토니 블레어 전 영국 총리, 달라이 라마 등 주요 강대국부터 약소국까지 그가 재임 때 만난 각국 지도자들의 초상화가 망라됐다. 두 번째 전시회는 입장료만 350달러에 달했다고 한다. 아프가니스탄·이라크전 참전 용사 초상화를 담아 2017년 출판한 작품집 ‘용기의 초상화’는 워싱턴포스트 선정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했다. 초상화가 부시로 눈부신 성공을 거둔 것이다. 노 전 대통령 추도식에 참석하는 부시 전 대통령이 자신이 직접 그린 노 전 대통령의 초상화를 권양숙 여사에게 선물할 것이라고 한다. 추도식에 참석하기에 앞서 사진을 제공받아 초상화를 준비한 것으로 알려졌다. 부시 전 대통령은 2010년 출간된 자서전에서 한미 자유무역협정 체결과 이라크 민주주의를 위한 한국군 파병 결정에 대해 노 전 대통령의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최근 부시 전 대통령 추도식 참석과 관련해 “두 분은 현직에 있을 때 다툼이 많았는데 정도 많이 들어서 참석하는 것”이라며 반겼다. 부시 전 대통령이 초상화에서 노 전 대통령을 어떤 모습으로 형상화했을지 궁금하다. sdragon@seoul.co.kr
  • 시진핑 절친 미국 대사, 금단구역 티베트 방문한다

    시진핑 절친 미국 대사, 금단구역 티베트 방문한다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절친으로 알려진 테리 브랜스테드 주중 미국대사가 미 대사로는 2013년 이후 처음으로 19~25일 티베트 지역 출장을 떠났다. 자유아시아방송은 19일 브랜스테드 대사가 이날 티베트로 출발해 티베트 자치구와 칭하이성 등을 방문할 것이라고 미 국무부가 발표했다고 전했다. 미 관리의 티베트 방문은 지난해 12월 미 의회가 외국인의 티베트 접근제한 정책에 책임을 지는 중국 관리들에 대한 비자를 거부하도록 한 법안을 통과시킨 이후 처음이다. 미 정부는 의회의 법안 승인으로 올해 안에 관련 인물에 대한 비자 발급 금지 작업을 개시해야 한다. 미 법안이 주목하고 있는 대상은 현재 신장자치구 당서기를 맡고 있는 천취안궈 전 티베트자치구 당서기로, 그는 신장의 이슬람교 소수민족 인권 탄압 의혹을 받고 있다. 미 의회에서는 천 당서기에 대한 제재 요청이 높아 중앙 정부 요직으로 발탁되는 자리였던 티베트 당서기직이 제재 대상으로 전락했다. 미 국무부 대변인은 “브랜스테드 대사의 이번 방문은 종교의 자유 및 티베트 문화와 언어에 대한 금지 조치에 대한 우려를 현지 지도자에 전달하는 기회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은 미 의회에서 비자 발급 금지 법안이 통과되자 미국이 티베트 문제에 개입하는 것은 내정 간섭이라며 해당 법안에 대해 “단호히 반대한다”고 밝혔다. 중국은 제도적으로 미국의 외교관, 기자, 여행객 등의 티베트 지역 방문을 막고 있으며 이는 미국인뿐 아니라 다른 외국인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티베트는 중국 내에서도 외교관이 방문 시 중국 정부의 허가를 얻어야 하는 유일한 지역이기도 하다. 2018년 중국 당국은 미 관리 9명 가운데 5명의 티베트 지역의 외교적 방문을 불허했으며 브랜스테드 대사의 방문도 지난해는 허가받지 못했다. 브랜스테드 대사의 티베트 방문은 2013년 버락 오바마 전 미 대통령 때 중국 대사였던 게로 로크 이후 처음이다. 브랜스테드 대사는 시 주석과 오래된 친구 사이로 1985년 허베이성 농업 대표단이 자매도시인 아이오와를 방문했을 때 시 주석을 처음 만났다. 그는 미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시 주석은 미국을 생각하면 1985년 아이오와에서 만났던 멋진 이들을 떠올린다고 말한다”며 “농업 대표단에 있던 젊은 친구가 나중에 중국 지도자가 되리라고 누가 상상하겠나”라고 털어놓기도 했다. 당시 아이오와 주지사였던 브랜스테드 대사는 중국 측 대표단의 일원이었던 시 주석을 만났는데 처음부터 좋은 인상을 받아 온 정성을 기울여 대접했다고 말했다. 브랜스테드 대사는 시 주석과 34년 지기라는 특별한 관계가 가져다주는 가장 큰 성과는 ‘접근성’이라고 고백했다. 핵심 위치에 있는 중국 지도자들과 만나 미국의 관심 사항에 대해 직접적이고 솔직하게 전달하는 게 중미 관계에 영향을 끼칠 것이라고 강조했다. 브랜스테드 대사는 재작년 7월 시 주석에게 신임장을 제출한 이후 북중 접경지역을 여러 번 방문해 중국의 대북 제재 이행 여부를 살폈다. 하지만 미 대사 혼자의 힘만으로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중국에 대한 인식을 바꿔 중미 무역전쟁 기조를 되돌리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브랜스테드 대사가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중국 인권운동가 류사오보에게 치료 기회를 줘야 한다는 의견을 제기했지만 결국 무시당해 류가 사망한 것은 개인적 친분의 한계를 보여주는 예로 제시된다. 베이징 윤창수 특파원 geo@seoul.co.kr
  • 94세 카터 前대통령 엉덩이뼈 골절 “칠면조 사냥 못해 아쉽다”

    94세 카터 前대통령 엉덩이뼈 골절 “칠면조 사냥 못해 아쉽다”

    만 94세로 생존하는 전직 미국 대통령 중 최고령인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야생 칠면조 사냥을 준비하러 가던 중 넘어져 엉덩이뼈 골절 수술을 받았다고 CNN이 13일(현지시간) 전했다. 카터센터는 이날 성명을 통해 “카터 전 대통령이 조지아주 아메리커스에 있는 피비 섬터 메디컬센터에서 부러진 엉덩이뼈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을 마치고 편안하게 회복 중에 있다”라고 밝혔다. 카터센터는 “수술은 성공적이었고 부인 로잘린 여사가 함께했다”고 전했다. 카터 전 대통령은 이날 아침 자택에서 사냥을 준비하던 도중 넘어졌으나 어떻게 다쳤는지는 구체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조지아주에서 종종 야생 칠면조 사냥에 나서곤 했다. 애틀랜타저널컨슈티튜션은 지난달 카터 전 대통령이 친구인 타일러 조단과 함께 사냥터에서 큰 칠면조를 포획한 사진을 올렸다. 카터센터는 “카터 전 대통령의 가장 큰 걱정거리는 칠면조 사냥 시즌이 끝나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전했다. 1924년 조지아주 플레인스에서 태어난 카터 전 대통령은 해군 장교와 조지아주 상원의원, 주지사를 거쳐 39대 미 대통령을 지냈고 1981년 백악관을 떠난 뒤 다시 고향인 조지아로 돌아갔다. 카터 전 대통령은 퇴임 이후에도 민간외교와 사회운동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 2002년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그는 지난해 타계한 조지 HW 부시 전 대통령을 넘어 미국 역사상 최장수 대통령 기록을 세웠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트위터에 글을 올려 빠른 회복을 기원한 뒤 “지난달 대화를 나눴을 때 매우 기분이 좋아 보였다. 카터 전 대통령은 괜찮을 것”이라고 말했다. 하종훈 기자 artg@seoul.co.kr
  • 성 노예,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성 노예,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마지막이어야 한다

    더 라스트 걸/나디아 무라드, 제나 크라제스키 지음/공경희 옮김/389쪽/1만 7800원두 손을 맞잡고 정면을 응시하는 책 표지 속 여성. 이슬람 수니파 극단주의 조직 ‘이슬람 국가’(IS)에 끌려가 성 노예가 됐다가 극적으로 탈출한 뒤 여성 인권 운동가로 활동 중인 나디아 무라드다. IS의 참상을 알리고 인권 운동에 힘쓴 공로로 그는 지난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 전 세계 38개국에 번역된 그의 생생한 증언록 ‘더 라스트 걸’이 최근 한국어판으로 나왔다. 책 뒤표지에 “나는 사람이 아니었다. IS 성 노예였다”고 적힌 것처럼 무라드가 IS에 당한 강간과 폭행, 그리고 목숨을 건 두 번의 탈출 과정을 담았다. 이라크 소수 민족 ‘야지디’ 출신인 무라드는 이라크와 시리아 접경 지역 마을 ‘코초’에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코초 사람들은 가난하지만 야지디의 신 ‘타우시 멜렉’을 믿으며 공동체를 이루며 산다. 2014년 8월 IS가 마을을 포위하면서 무라드를 비롯한 코초 마을 사람들의 일상은 산산이 부서진다. IS는 야지디를 이교도 취급하고 “개종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무라드의 오빠 6명과 어머니는 살해당하고, 당시 21살이었던 무라드는 다른 여성들과 함께 IS에 끌려간다. 이라크 모술 지역 IS 고위 인사에게 팔린 무라드는 성 노예 취급당한다. 잦은 구타, 잔인한 성폭행이 잇따른다. 첫 탈출 시도가 실패했을 때에는 여러 명의 경비병에게 정신을 잃을 정도로 윤간당하기도 했다. 경비소로 팔려간 뒤 느슨한 감시를 틈타 탈출한 그는 한 수니파 아랍 가족의 도움으로 지옥을 가까스로 벗어난다. 책은 야지디 민족을 파멸시킨 IS의 잔학함을 무라드의 담담한 목소리로 담아낸다. 다만 이야기가 어떻게 전개될지 짐작하고 보더라도 책장을 넘기기 어려울 정도다. “여자 포로와 노예는 재산에 불과해 사거나 팔거나 선물하는 게 가능하다. 성교에 적당하면 사춘기 이전 여자 노예와도 성교가 가능하다”는 내용의 소책자까지 배부하면서 인간 사냥을 다닌 IS의 행동이 실로 충격적이다.2015년 프랑스 파리에서 일어난 IS 테러로 전 세계가 충격에 빠졌을 당시 야지디 민족 수천명이 집단 학살당하고 성 노예로 팔린 일은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이라크 내 테러가 사실상 일상이나 다름없었던 데다가, 많은 이들이 그저 지켜만 봤기 때문이다. 책에는 IS에서 성 노예 여성을 빼오면서 금전을 챙긴 사람들, 야지디 부족 여성이 끌려가지만 이를 방관한 수니파 아랍인의 모습도 생생하게 그린다. 무라드는 이들에 관해 “수천명의 여성이 성 노예로 팔리고 몸이 부서지도록 강간당하는 것을 인간으로서 방관하며 지켜볼 수 있느냐”고 탄식한다. 그러면서 목숨 걸고 탈출을 도와준 수니파 아랍인 덕분에 자신이 살 수 있었음을 감사한다. 잔혹한 범죄에 우리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에 따라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책은 시리아 내전으로 말미암은 혼란 속에서 급성장한 IS와 사담 후세인 이후 중동의 화약고가 된 이라크의 상황도 담았다. IS가 갑자기 세력을 키운 괴물처럼 보이지만, 내막을 살펴보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2003년 이라크전 이후 수니파인 사담 후세인의 몰락과 함께 시아파의 득세, 쿠르드족 세력 확장 등 이라크 정치 상황도 함께 살펴야 한다. 책은 야지디 민족이 이사이에서 어떻게 희생양이 됐는지 짚어낸다. 무라드는 탈출 이후 자신의 고통을 2015년 유엔을 통해 전 세계에 알린 뒤 여성 인권 운동가로 활동 중이다. 그는 자신의 과거에 관해 “이야기할 때마다 매번 기억이 되살아난다”면서도 “내가 이런 사연을 가진 ‘마지막 소녀’가 되길 바란다”고 했다. 과거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1990년대 르완다 내전에서의 성폭력, 최근 미얀마 소수 민족인 로힝야족 여성 강간 문제에 이르기까지, 무라드와 같은 이들의 용기 있는 고백이 불의에 맞서는 최고의 무기였다. 무라드가 지난해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소감에서 밝혔던 것처럼 우리는 이런 문제 해결 방법도 사실 알고 있다. “정의와 가해자 처벌만이 존엄성을 되살리는 유일한 상이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김기중 기자 gj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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