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위기는 발전위한 진통/문용린 서울대 교수·교육심리학(시론)
역사와 문화의 변화현상을 이해하고 설명하는 틀의 하나로서 유기체설이라는게 있다.유명한 역사학자인 아놀드 토인비도 이런 유기체설을 주장하는 사람중의 하나라고 볼 수 있는데,그의 논지는 아주 간단하다.문화나 역사 즉,한 국가나 사회의 생성·지속·유지·발전,그리고 멸망은 동물이나 식물 등의 유기체적 생명현상과 비슷한 경로를 겪으면서 변화한다는 것이다.
이런 시각에서 보면 역사와 문화에 부딪쳐오는 여러 종류의 위기는 생성·발전,그리고 멸망의 어느 단계에 해당되는 위기인가에 따라서 본질적 성격이 달라진다.따라서 위기에 대한 대응방식도 이러한 근원적 성격에 따라 차별성 있게 제시되어야 한다.
북한이 현재 겪고 있는 위기는 생성과 발전단계에서의 위기가 아니다.그들이 처한 위기는 그들이 유지시켜온 역사와 문화의 성격 자체로부터 발생하는 위기이기 때문에 종말을 재촉하는 위기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현재 우리가 겪고 있는 위기는 어떤 종류의 것인가.단군이래 최대의 불황이란 말도 나오고,사회의 온갖 분야가 썩고 냄새나는 총체적 위기란 말도 나온다.얼마나 불황이고,얼마나 썩고 부패했는가도 물론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이런 난국과 위기가 역사발전의 어느 단계에 해당되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성장을 위한 불가피한 진통으로서의 위기인가,아니면 멸망단계에서 종말을 재촉하는 위기인가 하는 위기의 본질적 성격이 중요한 것이다.
○북한 위기와는 상황달라
발달적 위기(developmental crisis)란 말이 있다.발달심리학자들이 인간 발달경로를 설명할 때 쓰는 개념으로서 성장을 위한 고통과 위기를 의미한다.예컨대 사춘기의 정신적 고통과 방황의 위기는 어린이에서 청년으로 건너뛰기 위한 불가피한 징검돌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겪고 있는 정치·경제·사회·문화적 위기는 발달적 위기라고 볼 수 있다.이른바 성장을 위한 진통으로서의 위기라고 규정지을 수 있다.
어떤 점에서 그런가.발달적 위기라고 규정할 수 있는 근거는 두가지 점에서 제시될 수 있다.
첫째로,발달적 위기는 유기체의 성장과 발달에서 그렇듯이,발달상의 일정시점에서 발생하는 예측가능한위기라는 것이다.소득 1만달러시기에 나타날 것으로 예측되는 사회적 문제가 있다.이를테면 도적덕 기강의 해이가 그렇고 천민적 소비행태가 그렇다.이런 현상은 서유럽 선진국이 그 시기에 겪은 일이고 일본과 멕시코,그리고 일부 남미국가가 불과 얼마 전에까지 겪던 문제였다.
소득 1만달러시대는 「여유돈」이 생기기 시작하는 때이며,이 돈을 도덕적으로 관리할 능력이 아직 생기지 않은 도덕적 통제력의 원점에 해당되는 시기이기 때문에 천민적 소비행태는 불가피하다.우리는 현재 이 시점을 통과하는 중에 있고,여유돈의 도덕적 통제력은 이제부터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다.이런 통제력은 시간과 더불어 증가하고 원숙해진다.바로 재작년에 소득 1만달러시대에 접어들었고,우린 벌써 과소비에 대한 경각심을 꽤 키워내고 있다.외국에선 벌써 우리의 과소비 자제운동을 겁내고 있지 않은가.
○기존체제 완성위한 노력
둘째로,발달적 위기는 유기체의 성장과 적응과정에서 보듯이 기존체제에의 근원적(radical) 대항과 파괴가 아니라 기존체제의 완성과 보완을 위한 비판과 반성의 자정노력이라는 것이다.노동법파동과 한보사태,그리고 이른바 「소산문제」는 민주주의와 법질서를 원칙으로 하는 국가운영을 보다 완성되고 완벽하게 하자는 국민적 염원의 일환으로 표출되는 위기이지,우리의 헌법에 나타난 자유민주주의와 법정신의 한계와 국가체제의 잘못에서 파생되는 근원적 위기가 아니다.이런 점에서 발달적 위기는 위기극복의 잠재력을 충분히 가지고 맞게 되는 위기다.
정말로 암담해 보이던 노동법문제가 국회의 타협안으로 해결된 것과 노동계의 성숙한 자세 움직임 등은 현재 우리가 처한 위기가 발달적 위기인 것임을 가리키는 명백한 징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