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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7선언 2년,한반도의 오늘(사설)

    지난 88년 서울올림픽 두달전에 발표된 7·7특별선언은 당시의 국내외 정세와 오늘의 상황을 연계시켜 볼 때 실로 획기적 조치였다고 평가될 수 있다. 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이란 이름 그대로 7·7선언은 전후 동서 냉전구조속에서 대결적 상황을 지속해 왔던 남북한관계를 화해와 공존의 관계로 바꾸기 위한 민족 에너지의 응결이자 능동적인 통일노력의 표출이었다. 또 7·7선언은 대동구권 외교를 중심으로 한 북방정책의 획기적 전환을 꾀했다는 측면에서도 시의를 얻었던 것이다. 2년이 지난 오늘 7·7선언에 담긴 정책의지는 여러 면에서 구현되고 있다. 올 상반기 집중적으로 펼쳐진 동구국가들과의 수교가 그것이었다. 특히 한소 정상회담은 7·7선언 정신에 입각한 전환기적인 우리 통일외교 정책의 효과를 일단 극점으로 끌어올린 쾌거였다. 특별선언당시 국내외 정세는 매우 유동적이었다. 우리로서는 사상 초유의 올림픽 개최를 준비중이었고 소련의 페레스트로이카 정책에 따른 동구권 변화도 미처 표면에 나타나지 않을 때였다. 그러나서방세계는 소련및 동구권이 민주화 개혁과 국제협력의 방향으로 나갈 확고한 결의가 있음을 확인하고 그들을 지원했다. 그것이 유럽의 안정과 세계평화,구체적으로는 국제적 화해와 군축실현에 유익할 것으로 판단했기 때문이다. 우리로서는 올림픽 준비에 모든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한 국제적인 변화추세와 우리의 노력은 공산권으로 하여금 더욱 흔쾌하게 자신감을 갖고 서울올림픽에 참가토록 만들었다. 결과적으로 서울올림픽이 표방한 탈이데올로기적 화해의 정신은 동구권국가들의 민주화혁명을 가속적으로 촉진시킨 요인의 하나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런 점에서 7·7특별선언은 국내외적으로 적잖은 파급효과와 가시적인 실적을 가져왔다. 그 가운데 하나가 한반도 문제해결을 위한 능동적인 대북한자세의 정립이었다 할 수 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민족적 자존심의 고양이랄 수 있고 화해정신의 구축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한 국민적 자신감과 자긍심은 올림픽을 전후하여 더욱 높아져 통일에 대한 기대와 열망으로 확산되었다. 뿐만아니라 우리의 통일정책 추진에 있어 새로운 인식과 발상의 전환을 해야한다는 국민적인 자각을 불러 일으키게 됐다. 문제는 언제나 북한이었다. 대내적으로 7·7선언은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앞당기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북간의 단절과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화해와 협력의 시대를 열어야 한다는 인식에서 출발한 조치였다. 그러나 북한은 그때나 지금이나 문을 열지 않았다. 폐쇄와 고립정책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북한측은 마침 어제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북측지역을 오는 8월15일부터 개방한다고 발표했다. 우리는 북측의 그러한 조치가 남북대화와 교류를 성공시키기 위한 개방노력의 일환이라면 바람직하게 생각한다. 그 속에 감춰진 다른 속셈은 없어야 할 것이다. 화해와 신뢰야 말로 7·7선언의 참뜻이기 때문이다.
  • 콜,상호불가침 선언 제의/나토정상회담/부시도 서구 미 핵 철수제안

    【런던 로이터 UPI 연합】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회원국 지도자들은 5일 동구민주화와 바르샤바조약기구의 해체 움직임에 대응,새로운 유럽구조마련과 나토의 위상 재정립,그리고 독일통일문제를 다루기 위한 이틀간의 중요한 정상회담에 들어갔다. 만프레드 뵈르너 나토사무총장은 이날 회의 개막연설에서 『냉전은 이제 역사의 뒷장으로 넘어갔다』고 말하고 나토는 이제 대결의 장에서 협력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고 선언했다. 헬무트 콜 서독총리는 『우리는 바르샤바조약기구와의 공동협정을 통해 상대방측을 더이상 적으로 간주하지 않으며 유럽전지역에서의 무력 불사용을 선언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히면서 나토회원국들이 바르샤바조약기구와의 공동협정에서 상호불가침 약속을 공식선언할 것을 촉구했다. 【런던 UPI 로이터 연합】 조지 부시 미국대통령은 5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회원국 정상들에게 핵무기를 「최후의 호소무기」로 한다는 등 동서 화해무드 확대를 위한 나토의 제반구조개편계획을 제의했다. 부시대통령은 또 향후 나토정상회담에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을 비롯한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지도자들을 초청하자고 제의했다. 나토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는 서독 및 영국관리들은 지난주 이미 서한을 통해 각 회원국 정상들에게 전달된 이같은 부시대통령의 제의가 6일 발표예정인 나토 정상회담 최종 성명서의 기본 틀이 될 것이라고 밝혔다. 부시대통령은 동서 냉전이 종식됨에 따라 나토도 변화를 모색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이에 따른 유럽배치 미핵폭탄의 철수를 제안하는 한편 나토 군사정책의 변화에 찬성의 뜻을 표시했다.
  • 통일정책ㆍ군축전략 세미나 중계

    민자당과 평민당은 5일 각각 63빌딩과 프레스센터에서 「6ㆍ29 3주년기념 대토론회」 「통일및 북방정책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가졌다. 민자당토론회는 「민주화와 정치발전의 향후과제」 「북방정책과 통일전망」 「경제안정과 국민복지」 등 3개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평민당토론회는 통일및 북방정책이란 단일 주제로 전개되었다. 이날 두 토론회 내용중 정부측의 통일정책 논리를 정리한 민자당토론회의 이홍구 대통령정치담당특보와 군축에 관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한 평민당토론회의 지만원씨(군사전략가)의 주제발표 내용을 각각 발췌,소개한다. ◎북방정책과 통일 민자/새로운 민족공동체 꾸미는 작업/대결서 협력관계로 전환이 관건 ◇북방정책과 통일전망(이홍구 대통령정치담당특보)=국내외에서 역사적 전환기를 맞은 6공화국이 이를 통일로 향한 획기적 새 발상과 정책수립의 계기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통일은 과연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추진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원초적 문제에 대해 다음 세측면에서 새로운 발상이 전개되었다. 첫째,통일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의 창조라는 것이 뚜렷하게 인식되었다. 통일은 새로운 민족사회를 만드는 창조적 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그러한 통일의 미래상은 정치위주로 특히 국가체제위주로 논의되기 보다는 민족의 전통과 꿈과 삶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민족공동체의 창조를 중심으로 기획되는 것이 규범적 측면에서나 실현가능성이란 측면에서 다함께 바람직하다. 셋째,민족공동체 형성을 통한 통일의 달성은 여러 단계를 거친 긴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둔 무한한 인내력과 치밀한 계획을 필요로 한다. 위와같은 새로운 발상에 입각해 대화ㆍ교류ㆍ협력을 통한 남북 관계개선의 돌파구를 마련코자 7ㆍ7선언이 나왔으며 공동체 형성을 위한 종합적인 청사진으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남북당사자간 협의와 병행해 이에 걸맞는 주변환경의 조성과 지역적 평화구조의 모색을 위해 유엔에서의 6개국 협의체안 제시가 있었다. 북한이 냉전시대의 고정화된 입장,전체주의 체제가 지닌절대적 경직성으로부터 다소나마 탈피해 대결관계를 협력관계로 전환시키는 노력에 동참토록 유도하기 위해 우리는 3면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7ㆍ7선언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등 획기적 정책추진,우방 및 국제사회로 하여금 북한에 개방압력,북한의 동맹국들로 하여금 변화의 불가피성을 북한에 설득토록 하는 3면 전략이다. 이러한 3면으로부터의 개방화 압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남북간에는 작은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대화가 전개될 것이며 다음달로 예정된 총리회담이 그 첫번째 예이다. 남북대화나 교섭의 초점은 의제선정에 있지않고 대화의 형식이나 틀에 있다. 남은 문제는 북한이 우리 정부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화를 나눌 것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북군축의 요체 평민/주한미군 전쟁억지력 설득을/정상회담서 정치결단 내려야 ◇남북한군축의 요체(지만원 전국방연구원책임연구위원)=군축은 안보전쟁시대에서 경제전쟁시대로 돌입하는 세계적인 변화 추세이다. 남북한간에각종 교류가 활발해지고 군사적 위협이 축소된다는 것은 평화적 통일을 위한 지름길이며 전제조건이다. 전 공산권의 정치ㆍ사회적 변화와 경제개발의 물결이 우리 북방외교정책과 이익을 같이하고 있으며 한소관계의 진전으로 북한의 체제고수 노력은 북의 고립화를 더욱 심화시켜갈 것이다. 주한미군이 대북전쟁 억제력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사아에서의 세력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에 납득시키는 것은 군축협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주한미군은 남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고 있으며 주한미군의 철수는 일본의 핵개발과 재무장을 촉진시킬 것이라는 점을 북한에 납득시켜 주한미군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야 한다. 군축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군축은 화해ㆍ개방ㆍ교류의 정치적ㆍ경제적 접근과 병행 실시되어야 하고 공세적 방어전략과 선방어 전략이 포기되어야 한다.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은 북한을 군축협상에 끌어들이는 데 가장 좋은 무기다. 주한미군이 전쟁억제력을 제공하고 있는 사이 남한은 과감히 감군을 실현,북한에 신뢰성을 보여줄수 있다. 군축의 추진전략으로는 일단 남북 정상회담에서 군축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내린 뒤 남북 공동위원회를 개최,기본원칙 등에 대한 실무접근을 봐야 한다. 각종 교류외에 휴전선 일대에서 물물교환 10일장,각종 연예행사,미술전 등의 민간활동을 증진해야 한다. 군축을 위해 비생산적인 FX사업포기선언등으로 남한이 솔선해 신뢰구축을 선도해야 한다. 각 정당의 범정당적인 연구기구를 설치하고 군과 정부는 최우수 인력을 선발,대북제안 내용과 대내작업에 대한 정책을 연구해야 한다. 북한에게 감축규모와 감축후의 인력ㆍ장비 등의 처리문제 등을 제안해야 한다.
  • “나토 군사전략 수정”확인의 대좌/런던 정상회담 의미와 전망

    ◎동구 변혁ㆍ통독 따른 새질서 모색/미ㆍ유럽안보 전면 재편의 분수령 런던에서 열리고 있는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 정상회담은 냉전시대 이후를 대비한 나토의 위상변화를 논의한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번 회담은 특히 나토의 구조개편과 함께 새 유럽안보체제 창출을 위한 하나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나토체제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는 것이며 소련등에 아직도 불확실성이 잠재해 있기 때문에 결국 큰 성과없이 끝날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나토는 지난 49년 소련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창설된 이후 가장 중요한 전환점에 와 있다. 소련의 위협이 현저하게 감소되고 동유럽의 민주화로 새로운 유럽안보질서의 정립이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나토정상들은 따라서 급격한 정세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나토의 기본전략을 전면 재검토할 것으로 보인다. 나토는 특히 현재 진행중인 소련공산당대회에서 고르바초프의 입지를 강화해 주기 위한 전략으로 서방 안보체제가 소련에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점을 강조하고 나토의구조가 시대의 변화에 따라 바뀌고 있음을 보여줄 것으로 전망된다. 이와 관련,나토와 바르샤바조약기구간의 상호 불가침선언제안이 이번 회담에서 채택될 것으로 보인다. 불가침선언은 그러나 두 기구간에 일괄적으로 이루어질지 각국별로 개별적인 형식을 취할지는 아직 미지수다. 나토정상들은 또 40년전 아이젠하워대통령때부터 계속 유지돼온 나토의 기본 군사전략을 재검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소련의 재래식 공격을 나토의 동부국경에서 격퇴시킨다는 「전진방위」전략과 바르샤바조약기구의 재래식 공격에 대해 핵무기를 선제사용한다는 「신축반응」전략을 재검토한다는 것이다. 부시미대통령은 이미 핵무기는 「최후수단」이어야 한다고 선언하고 유럽배치 핵포탄의 철수를 제의,나토군사전략의 변화를 시사한 바 있다. 영국은 그러나 나토 핵전략의 변경을 반대하고 있다. 나토 정상들은 통일독일의 나토가입에 대한 소련의 동의를 얻기 위해서도 소련에 대한 양보와 함께 나토 군사전략의 변화를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서구안보를 군사적 개념에서탈피시키고 다원화된 국제정세에 보다 효과적인 경제적 정치적 장치에 의존하게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나토의 정치적 장래에 대해서는 회원국들간에 이견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나토의 정치적 역할의 확대를 강조하고 있으나 서독과 프랑스는 이같은 구상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프랑스는 특히 나토의 정치적 역할의 확대에는 충분한 협의가 있어야 한다며 냉담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프랑스와 서독은 유럽안보협력회의(CSCE)의 안보ㆍ정치적 역할 강화를 주장하고 있다. 소련도 CSCE의 역할 증대를 적극 지지하고 있다. 전유럽기구인 CSCE가 새로운 유럽안보체제의 기본틀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나토회원국들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유럽의 안보는 나토가 중심이 되어야 하고 CSCE는 유럽의 인권신장이나 인종분규의 해결을 위한 중재역할에 중점을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미국은 이번 정상회담을 통해 유럽에서의 지도력을 시험받게 될 것이다. 미국은 가장 강력한 나토회원국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유럽에서의 미국역할이 점차 축소될 가능성 또한 배제할 수 없는 상황이다. 동유럽의 변혁과 독일통일이라는 격변기에 열리는 이번 정상회담은 나토의 기본전략의 변화와 함께 미국의 지도력이 시험받는 무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 정부,총리회담 준비 어떻게 하나

    ◎남북 고위접촉 정상회담 중간단계 설정/쌍방 총리 「교차 정상 면담」 추진/군비통제위 조속 가동,군축에 능동 대처/통일전까지 「한시적 유엔가입」 제안 고려 8월25일 이전에 우리측 강영훈총리와 북한측 연형묵정무원총리간의 남북 총리회담이 서울에서 개최될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국무총리실ㆍ경제기획원ㆍ외무부ㆍ통일원 및 안기부 등 정부내 관계부처는 4일부터 곧바로 대응책 마련작업에 착수했다. 본회담 의제가 「정치ㆍ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는 문제와 다각적인 교류ㆍ협력을 실시하는 문제」라는 포괄적 단일의제로 남북 쌍방간에 합의된 만큼 북한측이 제기할 것으로 예상되는 제반현안을 폭넓게 점검할 필요성을 정부는 느끼고 있다. 정부는 이를 위해 남북관계 및 북방조정위원회(위원장 강영훈총리)와 남북 교류협력추진협의회위원장 홍성철통일원장관)를 보다 활성화시켜 관계부처간 충분한 의견교환을 통해 다각적인 대응전략을 세울 방침이다. 정부는 또 국무총리를 위원장으로 하는 군비통제조정위원회를 빠른 시일내에 본격 가동,남북간의 중요한 현안인 군축문제에 능동적으로 대처해 나가기로 했다. 국무총리실 산하에 설치되는 군비통제조정위원회는 국무총리,안기부장,부총리,외무ㆍ국방ㆍ통일원ㆍ공보처장관 등으로 구성될 것으로 알려졌는데 현재 정황으로 미루어 볼때 이 위원회의 구성시기는 임시국회가 끝나는 7월 중순경으로 예상된다. 정부는 특히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남북 고위급회담(총리회담)이 개최될 경우 우리측 총리의 김일성주석 면담과 북한측 총리의 노태우대통령 면담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질 것으로 판단,남북 고위급회담을 남북 정상회담 개최의 중간단계로 설정하고 이에 따른 다각적인 대응방안을 구체화시킬 계획이다. 결국 정부는 남북 쌍방간 합의정신을 밑거름으로 본회담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얻어내기 위해 논의 가능한 모든 현안을 상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우선 본 회담에서 토의될 의제는 포괄적으로 단일화 돼있기 때문에 남북한 신뢰구축을 포함한 실질적인 군축문제,남북 불가침협정체결문제,인적ㆍ물적 교류활성화문제 등이 폭넓게 거론되고 있다. 더욱이 북한측이 3일의 제7차 남북 고위급예비회담에서 새롭게 제기한 유엔가입문제도 본회담에서 집중 거론될 것으로 관측된다. 유엔가입문제와 관련,우리측은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을 추진하되 만약 북한측이 계속 이에 불응할 경우 우리만의 단독가입방침을 밀어붙이겠다는 전략을 짜놓고 있다. 우리측의 이같은 유엔가입방침은 국제사회로부터 많은 지지를 얻고 있는 게 저간의 현실이다. 반면 북한측은 60년대 이래 남북통일 이전에 어떠한 형태의 남북한 유엔가입을 반대한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으나 지난 5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 회의석상에서의 김일성 시정연설을 통해 「단일의석 유엔공동가입」을 제안한 바 있다. 그러나 북한측의 이같은 제안은 다분히 우리측의 유엔가입을 저지하려는 의도를 품고 있는 것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따라서 북한측은 이 문제를 본회담 초반부터 줄기차게 들고 나올 것이 뻔하고 우리측도 이 문제에 관해 쉽게 수용할 뜻을 갖고 있지 않아 본회담의 성과를 낙관할 수만은 없다는 게 대체적인 분석이다.이 문제를 본회담에서 우선 토의하자는 북한측 입장에 대해 본회담 의제의 테두리안에서 토의할 수는 있으나 단일의석 공동가입은 현실적인 측면에서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정부가 고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엔가입 주무부처인 외무부는 일단 이 문제와 관련,▲남북관계의 현실이나 국제사회에서의 관행 ▲회원국 자격에 관한 유엔헌장규정 등을 이유로 북한측 제안을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입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모처럼 마련된 남북 화해분위기를 이어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정부로서는 본회담에서 우리측 입장을 지나치게 강조하지 않고 북한측 입장을 대체적으로 듣는 자세를 취할 것으로 예측된다. 이와함께 정부는 연내 유엔가입서 제출이라는 당초의 내부방침을 일단 보류하고 이를 북한측에 전달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정부는 통일이 될 때까지 과도기적인 조치로 남북한간 한시적인 유엔가입을 북한측에 제의,이 방안이 한반도 긴장완화 평화정착을 위해 필요충분조건이라는 점을 설득시킬 것으로 분석된다. 본회담에서는 군축문제도 상당한 비중으로 취급될 것 같다. 북측이 본회담 의제표기 순서와 관련,「선 정치군사적 대결상태 해소포기」에 지나칠 정도의 집착성을 보인 데서도 이같은 사실을 잘 읽을 수 있다. 정부는 정치군사문제와 교류협력문제가 비슷한 비중으로 다뤄지기를 희망하고 있으나 이같은 정황에 비추어 어쩔 수 없이 군축문제가 커다라 논쟁거리가 될 것이라는 점에는 수긍하는 태도를 보이고 있다. 정부는 이에따라 우리측 군축안 마련에 급피치를 올릴 것으로 예상되며 이는 군비통제조정위원회의 본격활동과 깊은 함수관계를 맺을 것 같다. 특히 북측이 지난 5월31일 내놓은 군축안이 종전과는 달리 우리측 입장과 비슷한 부문이 어느정도 포함돼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어 본회담에서 쌍방이 성실한 자세로 임한다면 유럽에서와 같이 군비통제 및 감축도 실현될 수 있으리란 것이 일반적인 분석이다. 군축문제와 관련,실질적인 진전이 가시화될 경우 정부는 팀스피리트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격년제 실시 및 대폭적인 규모감축,나아가 주한미군의 대규모 감축 등도 제시하겠다는 입장도 갖고 있는 듯하다. 정부는 교류협력문제에 대해서도 남북간 인적ㆍ물적 교류의 활성화가 남북간 냉전구조를 청산하는 지렛대 역할을 할 것이라는 점을 충분히 설명,남북간의 점진적인 교류협력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 더불어 정부는 적십자회담 및 경제회담의 조속한 재개와 제2차 고향방문단의 교환방문도 촉구할 것으로 예상된다.
  • 남북문제 해결의 길 보인다(사설)

    우리는 지금 세계속의 한민족이 어디쯤 서 있는가 깊이 헤아려서 정확한 답을 찾아내야 할 계제에 이르렀다. 안팎의 세상이 이토록 변하는데 아직도 우리는 긴장하며 대립하고 갈등속의 분단을 계속하고 있다. 이제 더 이상 그래서는 안된다. 특히 전후 냉전체제 종언의 거대한 상징이라고도 할 동서독의 통합과 통일역정은 그러한 우리들의 문제제기에 원칙적이고 객관적인 당위성을 제공해 준다. 한반도의 남북한은 이 단계에서 무언가 이뤄내야 한다. 무엇보다도 전쟁적 대립과 긴장을 해소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최소한의 정지작업은 시작돼야 한다. 남북한 총리가 오는 8월 어느날 서울에서 회담하고 양쪽의 정치적 군사적 현안을 토의하는 일은 바로 남북한간 긴장을 완화하고 평화를 정착시키는 정지작업의 첫걸음에 해당된다. 그것이 실현된다면 아마도 지난 3일의 남북 고위급회담 제7차 예비회담은 남북한 문제해결의 획기적인 계기였다고 역사에 기록될 것이다. 우리가 바로 어제 이 자리에서 지적한 바 있지만 분단민족의 재통합,특히 남북 문제해결에관한한 민족적인 대도와 용기,그리고 상호희생과 양보없이는 이뤄질 수 없다. 전후 독일의 분단은 엄격히 말해 팽창주의적 야망에 대한 대가였다. 그런데 그들 민족은 최소한도 서로 전쟁은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 외세로부터의 해방과 동시에 체제와 이념으로 갈라져 양극의 길을 걸었으며 드디어는 동족상잔의 전쟁을 거쳐 분단이 고착됐다. 남북한 분단해소와 재통합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연유하는 것이다. 그럴수록 갈라진 민족과 분단된 국토는 합쳐야 한다. 이런 점에서 통일문제는 단순한 민족적 열망의 구현이거나 남북한 두 체제의 파워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민족의 내일을 건 창조행위라고 해도 절대 틀리지 않는다. 중단된지 5개월만에 열린 이번 7차 예비회담에서 우리측은 회담진전의 최대 장애요인이었던 북한측의 「정치군사문제 우선토의」 주장을 거의 모두 받아들였다. 우리측으로서는 회담전부터 이미 본격적인 군축논의와 불가침협정 체결을 제의했던 만큼 그 과정에서 양쪽의 어려움은 없었으리라고 본다. 물론 여기에도 양쪽의 성실성과 신뢰가 전제돼야 한다. 3일의 예비회담에서 부분적으로 논의 합의된 내용이 양쪽의 이해와 신뢰로 연결된다면 앞으로의 총리급 서울회담·평양회담은 성사될 것으로 보는 것이다. 남북문제 접근에 있어 이제 더 이상 지난 잘못의 원인을 캐며 서로 잘했다고 나설 것이 아니다. 오늘부터라도 한가지 작은 일부터 또 가능하고 쉬운 일부터 차분하고 꾸준히 해나가면 된다. 올해들어 정부는 『남쪽이 먼저 북쪽 주장을 수용하고 변화함으로써 북쪽이 변할 수 있다』는 일컬어 동반변화개념을 강조한 바 있다. 고위급본회담의 성사가능성은 여기에 연유함을 알아야 한다. 남북양쪽은 지금부터 새롭게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대화와 교류에 임해야 할 줄 안다. 서로가 적대하는 당사자가 아니라 공존하는 동반자이며 통일돼야 할 단일민족임을 인식한다면 새삼 평화와 통일의 본론을 얘기할 필요는 없다. 실질적인 성과를 위한 각론으로 나가야 하는 것이다.
  • 사실상의 통일 독일 탄생(사설)

    독일의 통일이 마침내 확고한 눈앞의 현실로 달성되어 가고있다. 동독의 경제를 서독경제에 흡수시키는 동ㆍ서독 「통화ㆍ경제ㆍ사회통합 국가조약」이 1일 정식 발효되었으며 동시에 지난 40여년 동안이나 동ㆍ서 독일과 베를린을 분단시켜온 국경이 완전소멸되었다. 독일인들은 이제 단일경제권에서 같은 화폐를 사용하며 동ㆍ서독을 마음대로 내왕하는 통일국민의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의 통일인 것이다. 그것이 통일이 아니면 무엇이 통일이겠는가. 이제 남은 것은 12월 초순으로 예상되는 동ㆍ서독 동시자유총선의 실시와 그 결과에 따라 통일정부를 구성하는 정치통일의 형식절차 뿐이다. 양독 정치지도자들은 금년내에 완전통일을 달성할 결심이며 그것을 막을 장애요인은 돌발사건이 발생하지 않는 이상 없는 것 같다. 통일 후의 군사적 지위와 관련,통일 독일의 나토잔류에 대한 소련의 거부도 그렇게 완강해 보이지는 않는다. 미ㆍ영ㆍ불ㆍ소 전승 4대국에 분할점령당했던 패전 독일이 49년 동ㆍ서독으로 분단 독립한 이후 40여년 만에 이루어지는 독일의 통일이다. 작년 11월9일 세계를 놀라게한 베를린장벽 붕괴 7개월 만에 달성되는 게르만민족 40년 비원의 통일인 것이다. 베를린장벽의 붕괴때만 해도 독일의 통일이 이처럼 빨리 이루어져 가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모든 예상은 빗나가 버리고 독일의 통일은 어느새 우리 눈앞의 현실로 굳어져 버린 것이다. 여러가지 여건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같은 미소냉전의 희생물로 민주ㆍ공산 대립의 분단국인 우리의 입장에선 그러한 독일의 조기통일 달성을 환영하고 성원을 보내면서 동시에 그 과정을 특별히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독일통일에 대한 우리의 감회가 부러움만으로 끝날 수는 없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 한반도에서도 그대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기 때문이다. 독일은 2차세계대전을 일으키고 패전한 나라다. 통일이 된다면 한반도가 먼저일 것이라고들 했다. 그러나 분단의 원인을 제공한 냉전의 얼음이 녹아내리기 시작하자 통일은 독일쪽에 먼저 오고 있으며 한반도는 오히려 더 얼어붙고만 있는 통탄할 사태가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한반도는 동족상잔의 전쟁이 있었고 아시아와 유럽은 문화전통이 다르고 소련의 영향력에도 차이가 있으며 또 개혁중단의 중국이 있다는 등등이 한반도의 통일분위기 조성을 늦게 만드는 이유들로 지적되고 있다. 그러나 이제 와서 생각해보면 통일에의 의지와 준비면에서 우리가 서독의 경우보다 부족했던 것이 가장 큰 이유가 아닌가 하는 반성을 떨칠 수 없다. 6ㆍ25를 비롯,북한에 의해 야기된 것이 대부분이지만 남북한은 그동안 대결에만 몰두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동서독은 대결과 갈등속에서도 모든 일에 있어 통일에 대비해 왔음이 최근에 와서 계속 입증되고 있다. 서독 헌법은 제정될 때 이미 통일을 상정한 23조가 마련되었고 통일의 조건인 국민적 동질성 유지를 위한 인적ㆍ물적 교루가 꾸준히 이루어져 왔다. TVㆍ라디오방송은 있는 그대로 상호시청되었고 어느 쪽도 정치목적에 이용하지 않았다. 서독의 동방외교는 우리의 북방외교보다 20년이 앞선다. 72년에 이미 동ㆍ서독 기본조약이 체결되고 다음해 유엔 동시가입이 이루어졌다. 돈으로 통일을 샀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통일에 결정적 수단이 되고 있는 서독의 경제력축적도 따지고 보면 통일에 대비한 것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들은 기회가 왔을때 모든 것을 다 동원한 총체적 노력을 경주하면서 세계는 물론 그들 자신도 놀라는 급속한 통일을 이루어내고 있는 것이다. 동독까지 통일이라는 민족적 대의를 위한 자기부정의 희생을 감수하고 있다. 우리는 이 독일의 통일에서 많은 것을 보고 배우며 깨달아야 할 것이다. 초조해하거나 서두를 필요는 없다. 통독의 교훈을 거울삼아 꾸준히 노력하면서 반드시,그리고 멀지않은 장래에 오게 될 것이 틀림없는 기회에 대비해야 할 것이다.
  • 통일기대에 부푼 베를린 현장을 가다(이제 독일은 「하나」:1)

    ◎「냉전의 벽」넘어 게르만이 새로 난다/경제ㆍ사회 통합따라 동독 “국가해체”가속/「정치통합」남았지만 「분단아픔」역사속에/「거대국가」출현에 이웃나라선 경계의 눈초리 동서독이 7월1일부터 발효되는 경제ㆍ사회통합을 시작으로 「새로운 유럽 평화질서의 창조」로 의미되는 독일 재통일의 장도에 들어섰다. 타의에 의해 갈라섰던 동서독의 이같은 하나됨은 전후 반세기 가까이 지속돼온 동서 냉전체제의 종언을 알리는 첫 신호이자 동구개혁의 값진 열매라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는 자못 크다. 본지는 김진천 파리특파원을 독일에 급파,현재의 뜨거운 통일에의 열정과 그들에게서 배워야할 교훈을 발굴하는 긴급시리즈를 마련했다.〈편집자〉 「통일」,거의 반세기에 걸친 독일 민족의 염원이 드디어 실현된다. 1990년 7월1일­ 남의 뜻에 의해 나뉘어지고 등돌려 살아오던 동서독 국민들은 이날을 기해 양독간의 경제ㆍ사회통합 협정이 발효됨으로써 실질적으로 다시 하나가 되는 것이다. 민족분단의 비극 45년만에 처음 느끼는 감격이며 베를린 장벽을 쓰러뜨리고 공산정권을 몰아낸지 7개월만에 이룩해낸 쾌거다. 완전통일까지는 아직 정치통합이라는 절차가 남아있긴 하지만 하나로 묶인 양쪽 시민들의 경제ㆍ사회생활에 있어 나머지 순서는 그리 대수로울게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통일에의 마지막 수순인 정치통합이 올해안에 실현될 것이 거의 틀림없는 상황이지만 오히려 그때 보다는 양독간에 통일을 위한 공식적인 첫 조치가 취해지는 이날 7월1일을 「통일의 날」로 하자는 성급한 주장이 진한 호소력을 갖는다. 이날부터 시행되는 경제통합은 동독의 경제주권 상실을 가장 큰 특징으로 한다. 동독화폐의 가치와 효력이 소멸되고 서독의 마르크화가 단일통화로써 유통되게 된다. 또한 동독에서도 개인의 소유권이 인정되고 자유경쟁ㆍ자유물가 제도가 실시되며 노동ㆍ자본ㆍ상품 및 용역의 수급에 있어서도 완전한 자유가 보장된다. 특히 이와 같은 통합원칙에 맞지 않거나 사회주의국가 및 사회기반을 형성해 온 동독의 헌법조항들이 사문화된다. 통화통합에 따른 발권은행은 서독의 중앙은행인 분데스방크이며 이 은행은 앞으로 동서독 전체의 통화공급과 여신수준을 총괄한다. 사회통합은 노동3권의 보장,사회복지제도 등 서독이 시행하고 있는 각종 제도를 동독에서도 함께 실시토록 했다. 이번 조치를 동독쪽에서 보면 국가해체작업의 착수를 의미한다. 국가기능의 유지를 보장하고 있는 헌법이 부분적으로 효력을 상실하게 되며 또한 경제주권이 서독에 이양됨과 아울러 각종 사회제도가 서독과 합쳐진 사실을 고려한다면 이 분야에서 국가로서의 동독은 이미 없어진 것이나 다름없다. 국가가 사라지는 마당에 종전에 이나라를 지배하던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더이상 발붙이지 못하게됐음은 너무나 당연한 귀결이다. 이러 저러한 이유로 여러차례 민족이 갈라졌고 주변 나라들에 의해 통일을 방해받아온 독일민족으로서는 이번 조치가 45년만의 분단해소 착수라는 단순한 감격과 흥분의 차원을 넘는 역사적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금세기안에는 불가능한 것만으로 그리고 1년전까지만 해도 아무도 예측하지 못했던 동서독의 통일논의가 촉발된 것은 바로사회주의 경제의 몰락과 공산독재정권 압제에서 벗어나려는 지난해 11월의 동독 국민들의 시위였음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동서독의 경제ㆍ사회통합 실현은 독일의 재통일이라는 측면외에 동서의 냉전체제가 실질적으로 끝났음을 알리는 첫 신호음이며 동구개혁의 값진 열매로 치부되고 있다. 전후 냉전시대를 상징해온 베를린 장벽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동독측은 이번 경제ㆍ사회통합조치의 실현에 맞추어 이달들어 지난 61년 베를린장벽 설치로 단절됐던 동서독간의 모든 도로망의 복원작업을 펴왔으며 오는 2일까지는 양독 연결도로를 막고 있는 장애물들이 모두 제거된다. 동서독의 경제통합은 바로 「경제대국 독일」의 출현을 의미한다. 게르만민족에 의한 피침의 쓰라린 과거의 경험을 안고 있는 이웃나라들은 통독에 따라 다시금 독일민족의 세력 확대 가능성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 독일의 비대는 자칫 유럽의 세력균형을 흔들 수 있는 요소가 될 것으로 보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가 유럽통합을 주축으로 한 EC(구주공동체)의 기능 강화를서두르는 것도,폴란드가 국경보장을 요구하고 있는 속셈도,소련이 통독의 나토 잔류를 반대하는 이유도 모두 거대 독일에 대한 두려움의 다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이제 동서독 국민들은 이날부터 실질적인 통일을 경험하며 「한나라」로의 완전통일을 향해 다시 남은 걸음을 재촉할 것이다. 그러나 경제ㆍ사회통합 자체가 안고 있는 문제점도 한두가지가 아니며 양쪽의 지도자나 국민들이 겪게 될 어려움도 만만치가 않다. 이러한 장애요인들을 여하히 극복하느냐가 마지막 남은 통일작업의 수순을 결정하는 가늠자가 될 것이다.〈베를린=김진천특파원〉 □동서독 주요일지 ▲45. 5. 8 나치독일 항복. 미ㆍ소ㆍ영ㆍ불 독일분할통치 ▲48. 4. 소,서베를린 봉쇄 ▲49. 5.23 서독 정부수립 ▲49.10. 7 동독 정부수립 ▲55. 5. 서독,나토가입. 동독,바기구 가입 ▲61. 8.13 동독,베를린장벽 구축 ▲72. 양독,외교관계수립 ▲87. 호네커 동독공산당서기장 첫 서독방문 ▲89. 1. 8 동독인들 대량탈출 시작 ▲89.11. 9 베를린장벽 붕괴. 동독국경 개방선언 ▲90. 2. 6 동독,비공산연립정부출범 ▲90. 2.13 동서독 통화단일화추진합의 ▲90. 3.18 동독총선. 기민당승리 집권 ▲90. 4.23 서독,화폐 1대1교환 동의 ▲90. 5.18 양독,경제ㆍ사회통합협정조인 ▲90. 6.17 동독 국가해체작업 시작 ▲90. 7. 1 동서독 경제ㆍ사회통합 실현
  • 다가오는 북한정권의 붕괴/하버드대 연구원 미지 기고

    ◎경제력등 남한과 격차 갈수록 벌어져/평양의 막판도발 대비,미는 안보공약 준수를 미국 기업경영연구소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인스티튜트의 연구원이자 하버드대학 인구문제 연구센터의 객원 연구원인 니콜라스 애버스타트는 26일 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지에 기고한 「다가오는 북한의 붕괴」라는 장문의 글에서 『한반도는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냉전이 청산되고 있는 현재 아직도 팽팽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한반도의 남북한간 경쟁은 오랫동안 호각의 대립을 벌여온 동서독의 경쟁이 현재 그 막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조만간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애버스타트는 이 글에서 현재 북한은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 현저하게 뒤떨어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같은 남북한간 격차 때문에 한국과 북한의 경쟁은 곧 끝날 수밖에 없으며 한반도의 통일은 이제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애버스타트가 기고한 글의 요지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반도에선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 1백50만명에 달하는 남북한의 병력이 비무장지대를 경계로 대치하고 있으며 상호간의 대화는 전무한 실정이다. 북쪽에는 스탈린식 강권통치의 공산정권이 형성되고 김일성 일인체제가 확립됐으며 남쪽에는 4만여명의 미군병력과 미확인 핵무기가 북한의 기습도발을 억제하고 있다. 이같은 한반도의 냉전구도 속에서 북한은 현재 여러 분야에서 한국에 크게 뒤지고 있다. 60년대초까지만 해도 경제분야에서 한국을 압도했던 북한은 지금 그 생활수준이 한국에 비해 형편없이 뒤져있다. 남북의 심한 생활수준 격차는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크게 대조를 이뤄 평양의 어린이들은 불결한 위생과 비누 등의 부족으로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반면 서울의 어린이들은 고지방음식을 많이 섭취,여드름으로 고생하고 있다. 남북한 생활수준의 격차는 시골에 가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한국의 경우 시골의 크고 작은 언덕에는 풀과 초목이 자라 아름다운 경관을 보이고 있으나 북한의 경우엔 땔감과 사료용으로 모든 언덕의 풀과나무가 베어져 보기 흉한 몰골을 하고 있다. 남과 북은 또한 경제운영방식에서도 크게 대조를 보여 북한의 경제는 정치적 열정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반해 한국의 경제는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고 있어 앞으로 그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북한의 자원은 고갈돼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병역임무에 종사하지 못하고 건설현장이나 노동현장에 동원되고 있다. 또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에 대한 군중시위의 광란적 열광도 이제는 그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며 그의 아들 김정일의 장래 또한 불투명하다. 외교분야에서도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 크게 뒤지기 시작했고 끝내는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회담으로 승부가 지어졌다. 또 지난 40년동안 북한을 지지해주던 중국과 소련은 현재 한국과의 교역규모 확대를 바라고 있어 북한을 소외시키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의 경쟁은 이제 북한의 붕괴로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이 시점에서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 위해 몇가지를 제안하면 우선 미국은 북한에 불안정과 격동이 밀어닥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미­북한간의 학자교류,여행확대 등을 통해 북한이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또 한국으로 하여금 대북한정책 일부를 수정,이제까지 한국이 금지해온 북한방송청취 및 우편물,친지 상호방문을 일방적으로 허용하도록 권유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이제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미 정책입안자들도 이에 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 「아시아에서의 미의 역할」 그레그대사 관훈클럽 연설

    ◎“한반도 평화통일이 미 정책의 목표”/「공산남침」막아 한ㆍ일 경제성장 부축/45년간의 협력이 아태발전 디딤돌/때로는 성공,때로는 실패했지만 값진 민주체제 유지 도널드 P 그레그 주한미대사는 27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한국ㆍ베트남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이라는 연설을 했다. 다음은 그레그대사의 연설 요지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미국은 과연 한국에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흔히 듣는다. 40년전 미국인들도 「한국은 과연 미국에 무엇인가」라고 자문했었다. 우리는 냉전에서 가장 위급한 시점에서 그 물음에 결단성있게 응답했다. 자유정부제도를 수립하는 한국민의 권리보전을 돕는 것이 한미양국,나아가 세계인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지 못한채 회의를 품고 있다. 「베트남」이 미국에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수많은 글들이 발표됐으나 아직도 해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 해답을 미국의 자기민족중심적인 시각이 아니라 아시아의 배경에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때 시작된 사건들의 흐름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찾고자 한다. 동남아에서 미국이 수행해 온 역할을 더불어 검토함으로써 한국인들은 미국의 이상과 희망이 끝까지 추구하는 바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인과 미국의 정책을 이해하고 한미양국관계를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2차대전후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맨 먼저 그 에너지와 주의를 일본으로 돌렸다. 미국의 복구계획과 그들의 비범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일본는 예상을 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침을 했다. 미국은 즉각 대응했다. 한반도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세가지 일을 이룩해 놓았다. 첫째 자유남한을 보전한 일이다. 한국은 꾸준히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인상적인 경제성장의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로 일본의 계속적인 재건이 보장됐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산업은 활력을 얻었다. 한반도가 공산주의 지배하에 통일됐다면 일본의 발전에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일성지배하에 통일된 한반도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완전무장을 갖추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은 북한의 공산주의를 밖으로 뻗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전 공동으로 치른 희생들이 오해받거나 왕왕 고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돼왔다. 하지만 이제 한국정부가 북한과뜻있는 대화를 갖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오해의 공허성이 노출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미국정책의 목표이며 이것이 이뤄진다면 40년동안의 노력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2차대전후 동남아시아도 폭력사태로 고통받아 왔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키 위해 항쟁했었으며 65년에는 공산당의 쿠데타로 거의 넘어갈 뻔했다. 필리핀에는 1946년 「후크」단의 반란이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산반도들이 10년이나 소란을 피웠다. 베트남에서는 식민통치를 재확립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이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끝났으나 월맹측의 끈덕진 통일열망이 불안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었다. 1965년 최초의 미군부대가 베트남에 투입됐을때 동남아시아는다루기 힘들고 장래성 없는 지역이었다. 또한 중국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 주도의 세계 혁명을 공공연하게 촉구한 임표가 강력한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미국의 건설적인 정책의 결과로 아세안국가들은 결속되고 자신감 넘치는 호황지역이 됐으며 75년 베트남 패망,78년 공산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등을 다룰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 베트남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3개 주요한 개입 즉 일본의 부흥,한국의 수호,베트남에서의 공산주의 팽창 저지등을 아시아인들은 충분히 이용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를 슬퍼하고 있지만 아시아인들은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1945년 이래 태평양 지역에서 아시아인들과 미국의 상호노력은 때로는 성공을 때로는 실패를 기록했지만 아시아인들의 집단적인 노력덕택으로 동남아는 앞날이 밝고 생기있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 평가와 과제(「6·29」 3년:상)

    ◎「국민통합 길」 여는 제2도전 바람직/통일열망 수렴·갈등해소가 숙제/“발상의 대전환”… 민주화 기틀 마련 6·29선언의 정신은 이제 국민통합과 민족통일의 차원에서 새롭게 재구현되어야 한다. 29일로 노태우대통령의 6·29선언 3주년을 맞게 되는 시점에서 그 선언내용의 실천정도를 평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정신을 국민적인 그리고 민족적인 과제에 어떻게 구현시켜 나가느냐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기 때문이다. 6·29정신은 한마디로 발상과 인식의 코페르니쿠스적인 대전환에서 출발하여 과감한 해법을 도출,문제에 정면 승부를 거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우선 6·29선언이후 3년의 평가는 혁명적인 선언으로 민주화의 기틀을 어느 정도 단계에 올려 놓았다고 할 수 있다. 선언 8개항가운데 대통령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이양,공명정대한 선거를 위한 대통령선거법 개정,김대중씨 사면·복권및 시국사범 석방 등 3개항은 이미 완결되었으며 국민의 기본권 신장,언론자유의 창달 등도 상당한 진전을 보였다. 다만 ▲건전한 정당의 활동보장과대화와 타협의 정치풍토 조성 ▲사회 각부문의 자치·자율 최대보장 즉 지방자치제 문제와 각종 법률개폐문제 ▲사회정화조치 등은 부분적으로는 진행중에 있거나 다소 미흡한 상태이다. 6·29선언→정권의 정통성 시비 종식→민주화의 돌파구→치안부재,욕구분출 등 전환기적 상황→5공청산,3당통합→총체적 난국→5·7시국특별담화,특명사정활동 등으로 이어져 온 지난 3년은 전체적으로 보아 선언 8개항의 이행에 부단한 노력을 기울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집권중반기에서 통치력발휘에 가속력을 더해가고 있는 노대통령으로서는 과거지향적으로 선언내용의 도식적인 실천독려에 머물 것이 아니라 그 정신을 새로운 도전에 대응하는 과감한 의지로 승화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 새로운 도전은 국민통합과 민족통일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6공정부가 출범때부터 내건 민주·번영·통일이라는 3대 목표에 비추어 보면 국민통합과 민족통일을 반드시 새로운 도전이라고 보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 정치적 민주화와는 달리 계층간 지역간 세대간 갈등의 해소가 별로 진전되지 않고 있으며 일부계층의 과소비,호화사치풍조의 만연은 국민통합을 새로운 과제로 부각시키고 있다. 또 세계적인 냉전체제의 종식,화해기류의 풍미,한반도주변 강대국의 통일장애요소로서의 기능희박 등 정세변화는 민족통일을 먼 얘기가 아닌 당장 풀어나가야 할 과제로 만들어 놓고 있다. 국민통합에 따른 현실적인 정책수단은 크게 보아 경제정의의 실현,지역균형 발전,복지확충,산업평화 정착 등을 들 수 있다. 이를 더욱 구체화시키면 부동산 투기를 통한 불로소득 근절,토지공개념 확대실시,중산층이하 세금부담 경감 등의 세제개혁,농어촌 개발,근로자·서민주택 확충,의료보장 강화,국민연금제도 추진,근로자의 생산의욕 고취를 위한 각종 유인제도 확대 등이다. 6·29정신을 국민통합 측면에서 다시 구현시키기 위해서는 이와같은 현실적인 정책수단을 지속적으로 강력하게 구사해야 한다. 그러나 3년전 6·29선언이 국민 모두의 마음을 하나로 엮었듯이 계층간의 위화감이 없어지고 전국민이 일체감을 가지게 되는 것은 가진자·권력자의 도덕성 회복,자기혁신이 행동으로 입증될 때일 것이다. 따라서 국민통합을 위한 6·29정신의 구현은 가진 자가 덜가진 자에게 마음으로부터 혜택을 베풀고 호화 사치를 자제하며 공직자는 자기관리를 엄격히 하는 데서 이뤄질 수 있는 것이다. 집권중반기에 들어선 노대통령에게는 이러한 측면에서 국민통합을 위한 일대 캠페인이 필요할 것 같다. 민족통일문제와 관련한 6·29정신의 발현은 이미 북방정책에서 상당한 성과를 나타낸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노대통령이 집요하게 크렘린의 문을 두드려 성사시킨 한소 정상회담은 기존의 외교발상에서 1백80도 전환한 「신사고」의 결과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동안 통일문제에 대해서도 「북한을 더이상 적으로 보지 않는다」는 7·7선언과 포괄적인 통일의 기본원칙및 그 과정을 담은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천명함으로써 적극적인 대응자세를 견지해왔다. 그러나 북한이 아직도 폐쇄노선을 버리지 않고 있는 점을 감안,서독이 동독에 대해 과감한 경제원조를 해주었던 것처럼 우리가 북한을 민족성원의 진정한 동반자로서 도와줄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하는 것이 필요할 것이다. 만약 노대통령이 남북 정상회담 테이블에 북한의 최고 당국자를 끌어낸다면 통일문제에 대한 6·29정신의 구현은 완성될 것이다. 6·29선언의 정신은 노대통령의 국정집행에 있어 일관되게 관통되어야 한다. 이 정신이 발상의 대전환이면서 동시에 국민의 뜻을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이라고 할 때 지금 국민들이 정부에 대해 무엇을 바라는지를 정확하게 파악,가려운 데를 확실하게 긁어주는 것이 중요하다. 최근 강력하게 시행하고 있는 공직사회의 기강확립은 가진 자,힘있는 자의 도덕성 회복에 크게 기여할 것으로 보이며 국민통합에도 매우 긍정적으로 작용할 것으로 전망된다. 6·29정신이 국민통합과 민족통일문제에 적극적으로 발휘된다면 6·29선언은 또다른 역사의 평가를 받게될 것이다.〈이경형기자〉
  • 미,6ㆍ25 계기로 초강대국 부상/WP지,「한국전 40년」재조명

    ◎국방비 지출 3배ㆍ병력수 6배 늘어나/외교정책 반공으로 선회… 냉전 본격화 미국에서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으로 불려진다. 승리의 영광도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아 오래전에 이미 미국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은 미국의 정치ㆍ군사ㆍ세계전략 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고 24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전 발발 40주년 특집 기사에서 회고했다. 다음은 EJ 다이오네 기자가 쓴 이 기사의 요약이다. 한국전은 2차대전 처럼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았지만 월남전 처럼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았다. 초기를 제외하면 한국전은 특별히 인기있는 전쟁도 아니었고,또 월남전처럼 극심한 국론 분열도 야기 하지 않았다. 결말도 나지 않고 인식도 잘못된 한국전은 그후 미국이 50년대의 번영을 구가하며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뻗어 나가자 재빨리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이 돼버렸다. 한국전은 미국을 크게 바꿔 놓았다. 미국의 정치,대통령권한에 대한 이해,군의 지위,그리고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 등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은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고,또한 월남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깔아 놓았다. 어느 면에서 이 잊혀진 전쟁은 미국 전사상 가장 긴 파장의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중도 좌파 정책연구소의 리처드 바네트는 『장차 한국전은 월남전보다 더 중요하게 회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역사가들 사이에서 토대를 넓혀 가고 있다. 몇가지 수치만 보더라도 한국전은 미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군사비 지출은 49년의 1백40억달러에서 53년엔 4백40억달러로 늘어났다. 한국전이 터진 50년 6월 미국은 59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이 휴전된 53년에 이 숫자는 3백60만명이 되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한침공은 당시 트루먼 정부가 사상 최대의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명백한 군사적 위협의 실존」증거를 제공했다. 역사학자이며 50년대에 출간된 「미국 전성시대」의 저자인 윌리엄 오닐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2차대전 후 조지케넌이 제창한 대소 봉쇄정책의 골간 수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을 공산주의자 수중에 넘겨 주었다는 비난 속에 대소 자세를 경화하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의 스탈린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한국전에 신속히 대응했다. 트루먼은 유엔의 한국 파병 결의를 내세워 전쟁 선포에 관한 의회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냉전의 중요한 선례가 된 이같은 처사는 월남전 기간중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전은 또 미 공화당에서 고립주의 세력을 약화시켜 공화당 보수파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고립주의에서 반공으로 바꾸게 했으며,이러한 변화속에 상원의원 매카시의 공산주의 탄압 입장을 강화시켰다. 역사학자 존 패트릭(캘리포니아대)은 매카시즘을 『전쟁의 성취도가 결여된데 따른 심리적ㆍ정치적 좌절의 소산』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냈을때 전쟁을 종결했다면 미국은 신속한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을것이다. 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때까지 한국전에서 미국인 남녀 3만3천6백29명이 죽었고 10만3천명이 부상했다. 한국전 종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휴전이라는 모호한 결론을 성립시킨후 『우리는 하나의 전장에서 휴전을 이뤘을 뿐 세계 평화는 정착시키지 못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한국전이 후에 월남전까지 이어진 긴 냉전의 시작에 불과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 한민족 재결합의 돌파구 어디에(정담)

    ◎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6ㆍ25아픔」극복해야 「통일의 문」열린다/극우ㆍ극좌의 극단적 논리 지양할때/상호 실체 인정,「시각」의 재조정 시급/체제화합의 「예멘식 통일안」이 적절/경제교류ㆍ사회단체 접촉 확대가 선결돼야 해방과 함께 조국이 두동강 난지 45년. 6ㆍ25전쟁이란 동족상잔이 발발한지도 40년. 강산이 네번 바뀌고 일제가 이땅을 침탈했었던 36년 보다도 더 긴 세월. 이 세월동안 우리민족은 남북으로 갈라져 전혀 다른 체제와 이데올로기 속에서 살아오면서 숱한 시련을 겪어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분단의 비극도 전쟁의 상흔도 치유하지 못한채 가슴아픈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늘날 우리는 동서냉전의 틀이 깨지면서 동서독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고 남북예멘이 통일의 기틀을 마련하는 놀라운 변혁을 지켜보고 있다. 바로 이 시점에서 6ㆍ25전쟁이 우리민족에게 던져준 진정한 교훈은 무엇이며 분단과 전쟁의 비극을 딛고 통일을 앞당길 방법은 과연 없는 것일까. 6ㆍ25전쟁 40돌을 맞아 사회전반에 걸쳐 폭넓은 관심을 보여주고 있는 고영복교수(서울대)와 북한의 사회변화를 예의 주시해온 도흥렬교수(충북대)그리고 분단의 현실에 고뇌하면서 그 현실을 다각적인 시각에서 작품화하고 있는 작가 김원일씨의 좌담을 통해 통일로 가는 바르고 곧은 길이 어디에 있으며 이길을 어떻게 걸어야 할 것인가를 알아본다. □참석자 고영복(서울대교수) 도흥렬(충북대교수) 김원일(작가) ▲김원일=6ㆍ25전쟁이 우리민족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가를 짚어보기 위해서는 해방후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를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남과 북이 외세에 의해 갈라지기는 했으나 이질화는 심각하지 않았습니다. 가령 김구선생은 북의 김두봉정도의 인물을 만나 대화하면 38선도 허물수 있다고 생각할 정도였으며 남과 북사이 사람들의 왕래도,편지의 교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6ㆍ25전쟁으로 남북의 분단은 고착화됐고 극우와 극좌라는 이데올로기 사이에도 넘을 수 없는 장벽이 가로 놓이게 됐습니다. ▲고영복=해방후 6ㆍ25까지 만해도 민족적 동질성은 유지돼 왔고 남과 북 각각의 영역에는획일화 되지 않은 여러 정치세력들이 다양한 주장을 전개할 수 있었으며 통일의 가능성도 높았습니다. 그러나 6ㆍ25전쟁은 지리적 이동과 이데올로기의 양극화를 초래하는 계기가 됐고 이 결과 기존의 민족적 동질성을 파괴하는 형태의 극한적 체제대립을 낳고 말았습니다. ▲도흥렬=보다 중요한 것은 6ㆍ25전쟁으로 인해 남과 북한간의 평화공존의 길이 더 멀어지고 어렵게 됐다는 점입니다. 그동안 6ㆍ25전쟁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 그 실체는 뒷전으로 밀어둔채 추상적이고 이데올로기적인 측면의 논쟁만이 판을 친 느낌이 없지 않았고 남북 모두가 이를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해 왔습니다. 가령 북한은 김일성체제를 유지하고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이를 이용해 왔으며 이에 따라 반제ㆍ반미ㆍ증오ㆍ우상화 문화가 형성됐습니다. 또한 한국사회에서는 반공문화가 생겨났으며 반공이데올로기가 정권유지의 수단으로 작용한 것도 사실입니다. 더욱이 북한은 「전쟁은 수단을 달리하는 정치의 연장」이라는 레닌의 전쟁론에 입각,6ㆍ25전쟁은 해방 후 남한정권이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던 친일파숙청,토지개혁 등의 과제를 해소해 남한을 해방시키기 위한 정의의 전쟁,통일전쟁이었다고까지 주장하고 있습니다. ▲김원일=최근 6ㆍ25전쟁의 의미와 성격에 대해 많은 주장이 나오고 있는데 이는 6ㆍ25전쟁이 기존의 반공논리나 북한의 주장등과 같은 단순한 의미로써 해석할 수 없는 복잡한 성격의 전쟁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고영복=6ㆍ25전쟁이 일어난지 40년의 세월이 흐르고 그동안 세대교체도 이루어졌으나 아직도 결론없는 논쟁만이 계속되고 있는데 이는 남과 북이 아직도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최근 해외동포들사이에서 제기되고 있는 것과 같은 제3자적 시각이 민족적 입장에서 정립되어야 할 것입니다. 다행히도 최근 우리사회의 경우 국력의 축적으로 정치적인 자율성이 확보되면서 기존의 획일화된 반공논리를 비판하는 주장이 나오고 있고 재소동포들사이에서도 북한지배세력의 논리를 반박하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어 멀지않아 6ㆍ25의 실체에 접근하는 민족적 입장의 해석이 확립되리라 기대합니다. 이럴 때만이 6ㆍ25의 상처를 극복하고 민족의 통일을 이룩하는 길도 열릴 것입니다. ▲도흥렬=최근 우리 대학생들의 이념동향을 조사한 한 통계자료에 따르면 북한이 내세우고 있는 「6ㆍ25전쟁은 분단극복의 의지가 표출된 전쟁」으로 보는 수가 점점 적어지는 반면 「반공이데올로기를 분단이념」으로 보는 비율도 높아지는등 최근 우리사회에는 이념의 다원화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또한 젊은세대들의 통일후 체제에 대한 시각도 매우 다양하게 표출되고 있습니다. 따라서 개방된 논의를 통해 어느 일방의 주장이 아닌 민족공동체의식을 바탕으로 한 통일상의 정립이 시급하다고 생각됩니다. ▲김원일=그러면 6ㆍ25전쟁이 오늘의 시점에서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일까요. ▲도흥렬=북한은 통일의 수단으로 전쟁을 선택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전쟁은 오히려 통일을 어렵게 했으며 분단을 더욱 심화시키고 말았습니다. 따라서 전쟁으로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발상은 단호히 거부되어야 합니다. 남과 북의 문제는 대화와 교류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과정을 통해서 해결되어야 하며 6ㆍ25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이 더 이상 정치적으로 이용되어서도,또 재발해서도 안됩니다. ▲고영복=서로에게 전쟁의 책임을 전가하는 단계는 지났습니다. 전쟁을 일으킨 당사자가 누구이고 책임을 어떻게 져야 하는 문제는 역사적 자료로서 규명해야 할 가치는 있으나 이 문제에만 매달리는 것은 통일을 방해할 뿐입니다. 6ㆍ25를 일으켰고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해 왔던 책임있는 세대는 서서히 사라지는 과정에 있으며 다음세대가 어떻게 앞날을 여는가가 과제로 남아 있습니다. 우리 사회의 경우 피해의식과 전쟁에 대한 공포심이 적지 않았으나 최근 국제정세의 변화와 내적인 성숙으로 전쟁의 재발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어가고 있습니다. 역사란 반복되어서는 안된다는 점에서 6ㆍ25전쟁의 비극을 통일의 초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김원일=우리는 오늘 이 시점까지 극우와 극좌라는 이데올로기에 억눌려 살아왔으나 이제는 이와 같은 극단적 논리는 지양돼야 합니다. 전쟁이나 테러와 같은 수단으로 자신의 주장을 상대에게 강요하려하고 또 강요할 수 있다는 이데올로기의 해악에서 벗어날 때가 됐습니다. 남과 북은 50∼60년대의 냉전시대를 거쳐 72년 7ㆍ4공동성명을 발표하기에 이르렀고 우리의 경우 광주민주화운동,6월 항쟁을 겪으면서 통일논의가 활발히 진행되고 있습니다. ▲도흥렬=7ㆍ4공동성명은 통일과 남북관계 개선에 역사적인 의미가 컸던 사건이었습니다. 북한은 「자주ㆍ평화ㆍ민족대단결」이라는 이 성명의 3대원칙에 바탕한 통일방안을 내놓으며 이를 일관되게 활용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통일방안에 있어서 뚜렷한 지침은 있었으나 일관성있게 논리를 구축하는 작업을 해오지 않았다고 봅니다. ▲고영복=7ㆍ4공동성명은 6ㆍ25전쟁으로 빚어진 남북의 갈등을 평화적으로 해결해 보려한 시도로서 비록 형식적이고 잠정적인 합의 도출에 그쳤으나 그 의의가 크다고 봅니다. 남과 북이 7ㆍ4공동성명에 합의했다는 것은 서로의 실체를 인정,대화와 평화의 방법으로 통일을 하겠다는 선언의 의미가 있습니다. 또한 80년대 들어서 우리 정부가 북한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에 대응,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마련해 접합점을 찾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는 점에서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는 듯 합니다. ▲김원일=국민적 합의와 같은 기반조성이 없었다는 점에서 7ㆍ4공동성명은 선언적 의미를 넘지 못했는데 이점이 아쉽습니다. 이 성명 발표 이후 북에서는 김일성우상화 작업이 더욱 가속화됐고 남에서는 유신체제가 들어서는등 체제를 보다 강화하는 길로 나아가지 않았습니까. 문단에서의 경우 70년대까지만 해도 분단문학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드물었으나 80년대 들어 활발한 작업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또한 통일논의가 젊은 세대들 사이에 확산되고 다시 국민적 관심사로 떠오르자 정부에서도 새로운 통일방안을 내놓은등 남북간의 대화의 물꼬를 트기 위해 많은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통일로 나아가기 위해 우리가 이시점에서 해야할 일은 무엇일까요. ▲고영복=동서독의 통일이 가시화되면서 최근 서독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한 합병식 통일방안이 한반도 통일의 한본보기로 대두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남북한의 통일에 있어서는 독일식 방안이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2차 대전 후 강대국에 의해 강제분할된 서독과 동독은 그동안 이데올로기의 장벽은 있었으나 이를 뛰어넘을 수 있는 전통적 민족의식과 동질성 확보를 위한 민족적 공감대를 계속 유지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전통적 동질성이 40년의 분단기간을 통해 극도로 파괴됐으며 극심한 체제경쟁으로 이데올로기가 민족적 동질성 보다 우위를 점하게 됐습니다. 때문에 동질성 회복이 힘든 이 시점에 있어서는 예멘식 통일방안과 같은 것이 오히려 현실적이라고 봅니다. 남북이 대등한 위치에서 점진적으로 접근,하나의 체제로 화합하는 것이 우리 현실에 맞는 통일방안이라고 생각합니다. ▲도흥렬=6ㆍ25전쟁은 통일로 가는 길에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 되고 있습니다. 6ㆍ25란 비극적 체험을 통해 남북에는 상호불신의 골이 깊어졌고 경쟁체제를 강화했습니다. 따라서 우리의 통일방안은 이러한 현실적 여건을 고려한 독자적인 방안이어야 합니다. 우리는 독자적통일방안의 전제 조건으로는 다음의 3가지 선결과제가 해결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남북간에 사실에 기초하고 현실에 바탕을 둔 시각의 재조정이 이뤄져야 합니다. 이념과 체제유지를 위한 고식적인 틀에서 탈피,있는 그대로의 상호 체제를 인정해야 합니다. 둘째 6ㆍ25로 인한 이질화 극복을 위해 남과 북은 각기 통일지향적 사회체제로 개혁되어야 합니다. 특히 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즉 한민족 한겨레라는 의식을 통해 민족공감대를 확보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통일은 긴 여정속에서 이뤄지는 것인 만큼 남북은 상호접근을 위한 제안ㆍ조치 등을 일관성 있게 계속 추진해야 합니다. 비공식 민간교류의 확대는 통일을 위한 분위기 조성에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됩니다. ▲김원일=민족동질성의 회복이란 말은 쉽지만 현실적으로는 어려움이 많습니다. 독일은 강제분할을 겪으면서도 상호방문을 허용하고 이데올로기보다는 동질성확보를 우선으로 삼아 통일분위기를 조성해 왔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상황이 다릅니다. 남에는 6ㆍ25의 원한세대가 적지 않으며북에는 김일성의 세대가 아직도 권력을 장악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고영복=남과 북은 서로가 자신들이 원하는 방향으로 바뀌기를 바라고 있는데 이같은 정치적인 대립으로는 통일이 어렵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현 체제상황에서는 비정치적인 경제ㆍ사회단체의 상호접촉을 이룩하는 것이 선결과제입니다. 또한 각각의 통일방안을 고집하는 것보다 서로의 방안을 폭넓게 수용하는 보다 유연한 자세가 필요합니다. ▲김원일=민간교류를 수행함에 있어서도 섣불리 체제의 우월성을 강조,자존심을 건드리는 것은 금물입니다. ▲고영복=김정일의 권력세습이후 북한내부에 나타날 변화가 우리측에 유리하게 작용할 수도 있으나 이같은 변화가 통일여건을 성숙시킬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속단입니다. 따라서 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남북공동의 장을 단계적으로 마련해 나가야 합니다. ▲도흥렬=역사의 흐름은 분명히 있으며 동구변혁의 물결이 한반도에도 미쳐 북한에도 변화가 오리라고 낙관하고 있습니다. 단지 언제 그리고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가 관심사 입니다. 북한이 언제 또 어떻게 변화하건 우리부터 성숙한 민주사회를 이룩해 긍정적인 모범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통일은 어려운 목표이지만 서로가 꾸준히 노력하면 언젠가는 반드시 이루어진다는 굳건한 신념이 필요합니다.
  • 재미작가 김은국씨의 「민족사적 6ㆍ25론」

    ◎한민족,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삶의 길」로/“살상ㆍ폐허ㆍ굶주림” 고정관념 벗어날때/개개인의 체험 역사적 맥락서 조망해야/반억압 선택은 바로 「인간해방의 길」/이제야 변혁하는 동구를 보니 큰 대가 치렀지만 값진 경험/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6ㆍ25니 8ㆍ15니 그러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뜻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이 거창하고 모호한 말을 즐겨쓰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문을 토대로 한 우리의 언어의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에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세상의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특이한 태도가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겉잡을 수 없는 허황한 상투용어로 한마디하고 넘어가 버리는 버릇이 있다. 8ㆍ15가 오면 언제나 「과거 36년간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로 시작하고 끝나고 6ㆍ25가 오면 으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조국분단의 쓰라림」 등으로 끝난다. 상투용어란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먹어 오다보니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번쯤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상투용어를 빌려 쓰지 말고 자기의 말로써 인생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써 볼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6ㆍ25를 모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6ㆍ25를 모르는 세대」가 이렇고 저렇고 할때 풍기는 뜻은­그런 표현을 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그 세대가 좀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세대가 한심한건 말건 그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그러면 그 표현이 내포하는 즉 「6ㆍ25를 아는 세대」는 과연 6ㆍ25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인생과 역사의 결합 누가 시작한 진담­농담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물론 6ㆍ25를 모르는)에게 6ㆍ25때 얼마다 먹을 것도 없고 고생했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들이 「그럼 왜 라면이라도끓여먹지 않았냐」하더라고… 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것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6ㆍ25를 아는 세대」가 6ㆍ25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피란만 다녔다는 식으로 「고생」했다고 말을 시작하면 어린애들은 역시 그런 식으로 반문을 할 것이 뻔하다. 고생했다,굶었다,헐벗었었다,많이 죽었다,도시는 폐허가 됐었다,가족이 흐트러졌다­물론 6ㆍ25의 경험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간다. 6ㆍ25라는 것이 빚어낸 현상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6ㆍ25를 참으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다. 경험이란 것은 왜 그 경험이 있게 되고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그 경험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동체가 쓰는 상투용어로,또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개인이 쓰는 역시 상투용어로만은 6ㆍ25와 같은 어마어마한 민족공동체적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ㆍ25를 체험한 세대에게나 6ㆍ25를 모르는 세대에게나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관,그 역사관과 개인을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인생관­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가치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는 6ㆍ25는 「선택」의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에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인 한가지 한가지의 「작은 선택」들이고 또하나는 커다란 역사적인,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커다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인 철학적인 「선택」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온 것이다. 우선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이고 하다 좀더 철이 들고 배우고 사색하게 되면서 그 개인과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인생관과 역사관의 결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8ㆍ15를 이북땅에서 맞았다. 그 덕분에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3년여를 북한식 공산주의체제 밑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은 선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게 중요한몇개만을 들어보겠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의 특이한 「작은 역사」를 무시하고 말살시키려는 주의와 사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산당 권력체제가 주장하고 실행한 소위 계급투쟁으로 「소지주 계급」의 낙인이 찍힌 우리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의 우리의 재산이란 한때 가난했던 조부모님이 일하고 저축하여 쌓았던 것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본인들과 후손의­노력해온 그들의 구체적인 「작은 역사」는 「계급투쟁」이라는 추상적인 커다란 주의ㆍ사상으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그 경험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주의ㆍ사상ㆍ정치체제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갖게 했다. 또한 그러한 소위 「계급투쟁」의 발단,심리적 원시점은 인간의 가장 천한 본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는 원시적인 본능을 부추겨서 『잘산다』 『못산다』의 개념과 정의를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에만 두는 가엾은 인생의 가치관을 보았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추한 인간의 본능을 『그럴듯한』 정치이념과 주의로 장식하여 인간의 증오심을 정의감으로 가장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어떠한 사상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목사이셨던 외조부께서 일본통치하에서도 억압을 당하시고 북한공산체제 밑에서도 억압을 당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외조부님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의 반항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이면서도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이념ㆍ주의사상은 반대해야 한다는 「선택」을 하였다. ○한국은 운좋은 나라 그렇게 하여 내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전 남한으로 넘어 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ㆍ25가 왔을 때 그 전쟁은 나에게는 혹독하게 말한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나」를 없애버리려는 권력에는 방항ㆍ대항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한민국이 더 좋아서 더 귀중해서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는 감상을 품고 전쟁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우선 「나」라는 하나의 인간의 「자신」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것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개성,특이한 작은 역사,개인의 존엄성­이러한 것들이 보존되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신념과 행동의 선택에서 이윽고 자유에의 「선택」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생관 가치관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훗날에 「나」라는 하나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사관을 찾았을 때 6ㆍ25를 비롯한 지난날의 경험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해방」으로의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의 공포와 횡포로부터의해방,질병으로부터의 해방,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무식으로부터의 해방,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잔인으로부터의 해방­끝없이 많은 인간해방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의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인간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 그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해방의 과정은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여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해야 한다. 개개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여러 작은 「선택」을 해온 나로서는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ㆍ25란 나에게는 하나하나의 개인이 나름대로의 해방을 찾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인생관과 역사관을 얻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흔히 진담­농담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할수 있는 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6ㆍ25는 대한민국에도 역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싫건 좋건 이끌린 삶 강대국간의 냉전이니,국제정세의 배경이니,국토의 분단이니­「동족상잔의 비극」이니­그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6ㆍ25라는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한국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으로 한국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자유주주의체제 쪽으로,공산주의의 국가통제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 쪽으로,그 당시에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이끌려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간에 개개인의 역사가 존중되고 개개인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는,앞서 말한 인간해방의 역사관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고의적으로 그러한 역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이 운이 좋은 나라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6ㆍ25를 전후한 국제정세와 6ㆍ25라는 처참한 경험을 겪고 살아남은 한국은 어쩌다 싫건 좋건 그러한 길을 선택하게 됐고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상 한국은 어쩔 수 없이라도 한걸음 한걸음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 끼여 따라가게 돼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커다란 인간역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라는 공동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상과 결과를 빚어내는 버릇이 있다. 6ㆍ25라는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회가 자진해서 이룬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을 한국사회에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선택이 나 자신의 선택과 어울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흡족하게 느낀다. 그러기에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는 6ㆍ25를 겪었기 때문에,또 6ㆍ25를 계기로 하여 전세기적인 인간가치관과 인간통치관에서 탈피하여 전진적인 인간해방의 역사적 흐름에 함께 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다랗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독을 비롯하여 폴란드ㆍ헝가리ㆍ체코ㆍ루마니아 심지어는 불가리아 등­동구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생각만 해보면 된다. 그들의 역사야말로 인간해방의 역사이다. 40여년간의 공산주의 독재체제 밑에서 억압당해 왔던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이루어준 역사의 흐름이 파도를 친 것이다. 불평ㆍ불만이 많고 걸핏하면 「한」이 어쩌고 하는 우리는 동구의 그들에 비하면­나아가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과도 비하면­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6ㆍ25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해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서 그들보다 훨씬 앞서 있게 된 것이다. 동구의 그들 뿐인가. 소련의 사정을 살펴보며 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 국민들의 자유독립에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그루지야의,아르메니아의,아제르바이잔의 모든 개인들의 자유독립으로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2차대전이후의 세계역사를 소위 냉전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냉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억압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자유시장경제 제도를 선택한 진영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이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조롱하는 것들에서부터의 인간해방을 이루어왔다고 본다. 그것을 인정 안하다면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동구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인간가치관의 대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2차대전후부터의 이른바 냉전은 결국은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고 인간의 가치관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개방」을 위주로 하는 이념과 절대적인 정치권력 체제속에서의 「인간통치」에 전념하는 이념과의 대결이 아니었던가. 6ㆍ25에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감상을 품고 있지 않았었다고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내게는 단순히 부족간의 영토싸움이라든가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아래에서의 권력다툼이라든가 그러한 전세기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었기에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2차대전때 이미 시작되고 그 후에 냉전으로 계속된 이념의 대결이 터져나온 전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틀렸건 옳건간에 사람은 각자각자 나름대로의 작은 역사를 창조하고 자유와 개방을 이루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풀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가치관과 이념과 역사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6ㆍ25의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용어로 그 경험을 「설명」해 버리려는 것을 싫어한다. 그 전쟁이 그것뿐이었다면 그야말로 전세기적인 관념으로 그 전쟁의 경험을 소화하려는 것이 된다. 그 보다는 「나는」 「우리는」 그러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선택」을 하였노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은국 □32년 함남 함흥출생.□황해도 황주,중국 만주에서 성장. □48년 평양 제2중(평양고보)재학중 월남. □5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중퇴(6ㆍ25발발로). □51∼54년 육군장교복무. □55년 도미,미들버리대(정치학 및 역사철학전공),존스 홉킨스대(영문학 전공),아이오와대 대학원,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64년 6ㆍ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순교자」를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논문 대신 발표,세계적 명성얻음.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영혼」 등 발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시라쿠스대,캘리포니아 주립대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역임. □현 매사추세츠 소재 「트랜스 리트 에이전시」 (국제저작권대행회사)대표.
  • 한반도에도 신데탕트 바람 분다/미ㆍ유럽서 본 「한국통일의 전망」

    ◎미국의 시각/동구변혁이 분단해소의 촉매로/평양 폐쇄주의가 장애물… 자유왕래 실현돼야 일찍이 공산주의의 멸망을 예고했던 미국의 석학 즈비그뉴 브레진스키교수는 『유럽문제가 해결되면 국제적 관심이 한반도에 쏠려 한반도 통일 논의가 가속화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는 또 한반도 통일은 공산주의에 대한 민주체제의 승리 방식으로 이뤄질 것이라고 예견했다. 카터 미행정부에서 국가안보담당 보좌관을 역임한 브레진스키의 이같은 낙관론은 지난봄 동북아 문제협의회에 참석한 한국 의원단과 가진 간담회에서 피력된 것이다. 브레진스키는 『2차대전후 인위적으로 분단된 한­월­독 가운데 월남과 독일은 어느 한 체제가 다른 체제를 이겨서 분단문제를 해결했다』고 상기시키며 『남북한 통일문제가 한 체제에 대한 다른 체제의 승리 방식으로 수렴될 것인지,아니면 타협형이나 제3의 방식으로 수렴될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지만 앞으로 북한 공산체제는 살아 남기가 어렵기 때문에 결과는 뻔하다』면서 한반도에서 독일식 통일의 재현 가능성을 강력히 예견했다. 북한을 압도하는 남한의 경제력과 인구도 이같은 예견의 바탕에 깔려있을 것이 분명하다. 미국의 남북한문제 전문가 가운데 소련의 개혁과 동구공산주의의 몰락이 앞으로 북한을 변화시키고 궁극적으로 한반도 통일을 촉진시키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한반도 통일을 현실적인 문제로 인식하는 사람도 아직은 없는 것 같다. 통일의 당사자인 남북한간에 기초적인 교류도 이뤄지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통일문제를 운위 한다는 것이 시기상조로 여겨지고 있기 때문이다. 브레진스키의 견해도 한반도 통일의 긴박성을 역설했다기 보다 세계적 변화의 맥락에서 통일 여건이 호전 됐음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칼럼니스트 스티븐 로젠펠드는 『2차대전후 해방된 한반도를 통일국가로 건설하는데 실패했던 미국과 소련은 이제 냉전 종식과 더불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새로운 역할을 수행해야 할 때』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독일과 동구의 산 경험을 토대로 한반도 통일과 사회주의 국가의 자유시장 경제체제로의 전환 방안에 관한 미소의 공동 연구가 지금은 가능하다』고 주장하고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이 일을 바로 추진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강조했다. 한반도 통일문제에 대한 미국정부의 정책은 무엇인가. 국무부의 리처드 솔로몬 동아태담당 차관보는 이렇게 설명한다. 『미국은 한반도 통일을 환영한다. 우리는 남북한 대화가 통일달성의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독일 통일을 촉진시킨 최근 사태들은 한반도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떤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분단된 지역의 대표들과 분단 정부의 관계관들이 긍정적인 대화를 할 경우 평화적이고 자발적인 기반 위에서 통일의 기초가 마련된다는 교훈을 우리는 독일에서 터득했다. 한국에서도 그와 같은 사태 발전이 있기를 우리는 고대하고 있다』 솔로몬의 답변이 시사하듯이 한반도에는 아직까지 통일의 기초가 마련되지 않았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시각이다. 한반도가 통일 되려면 우선 남북한 사이에 긴장이 완화되고 자유 왕래가 실현되어야 한다고 미국은 말하고 있다. 또한 신뢰구축 조치가 이룩되면 북한이 통일의 최대 장애요인이라고 주장하는 주한미군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추가 감군을 고려할 수 있다는 것이 미국 정부의 입장이다. 그런데 이런 기본문제들을 논의할 남북대화조차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판국에 어떻게 먼 통일의 시기와 방법을 예측할 수 있겠느냐고 미정부 관계자들은 반문한다. 최근 뉴욕 타임스지는 『지난해 독일 통일의 돌파구를 열었던 신뢰구축 조치가 한반도엔 아직 존재하지 않고 있다』며 남북한의 극적인 통일 가능성을 배제했다. 타임스는 그 이유를 『남한과의 서신 교환 및 전화통화를 봉쇄하고 무역도 거의 하지 않는 북한의 폐쇄주의』에 돌렸다. 저명한 아시아통인 로버트 스칼라피노교수는 통일문제 접근과 관련한 남북한 정부간의 대립,즉 남쪽은 경제 및 문화 접촉의 증진을 통한 신뢰 분위기 조성을 선호하는 반면 북쪽은 처음부터 광범위한 정치 군사 협정을 요구하고 있는 이견의 해소를 선결해야 할 큰 과제의 하나로 지적했다. 한반도 통일의 전제 조건으로 인식되고 있는 북한의 변화가능성에 대해 미국의 전문가들은한결같이 낙관론을 펴고 있다. 특히 78고령인 김일성의 사망은 북한의 변화를 가속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라고 이들은 입을 모아 강조한다. 미국무부의 북한문제 전문가 존 메릴은 『북한이 사회주의 세계에 충격을 준 민중소요를 피하려면 주민들의 생활수준을 향상 시키기 위한 노력을 증대시켜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문제는 북한이 모방할만한 경제개혁의 모델이 사회주의 세계에는 없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통일의 관건인 북한의 변화는 이처럼 돌파구 없는 경제문제에 의해 촉발될지도 모른다. ◎유럽의 시각/「신뢰의 장」 넓힐 유연한 자세 필요/독일과는 달리 한반도문제는 예측못할 난제 한반도문제를 보는 유럽의 시각은 대체로 두가지로 분류된다. 그 첫번째는 최근의 국제정세가 한반도문제해결에 어느때 보다 성숙한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는 분석을 토대로 한 긍정론이다. 이 견해는 대세의 흐름에 힘입어 한반도문제도 이미 해결의 실마리가 풀리기 시작했으며 통일이라는 좋은 열매를 기대해 봄직도 하다고 사뭇 희망적인 전망에 인색치 않다. 그러나 또다른 쪽에서는 한반도문제는 여전히 앞을 내다 보기 힘든 난제중의 하나로 판단하고 있는 신중론이 만만치 않다. 이들은 남북한의 분단해소문제는 동서독의 그것과는 기초부터 다를 뿐만 아니라 분단상황이나 북한정권의 특수성 등으로 미루어 섣부른 판단은 금물이라고 쐐기를 박는다. 동서진영간의 해빙의 물결이 도도히 흐르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오직 한반도만이 예외지역으로 남아 있다는 것은 너무도 부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 유럽사람들의 인식이다. 파리대학의 기 소르망교수는 『한반도의 분단이 얄타체제의 산물인 점을 고려한다면 이념의 장벽이 허물어지고 얄타체제가 붕괴되어 가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당연히 한반도의 분단해소를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전제,한반도를 둘러싼 최근의 국제정세변화는 분단해소작업의 착수를 위한 좋은 분위기를 제공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유럽의 전문가들은 절차만 남겨놓고 있는 소련의 한국승인,중국과 한국과의 관계개선노력,미국과 북한과의 접근 움직임등은 동북아평화정착에 필수조건들이며 이러한 조건들이 하나 하나씩 충족되어 가고 있는 현재의 상황이야말로 한반도통일작업의 시작단계로 보아야 마땅하다는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폴란드 국제문제연구소의 레세크 스즈크박사는 한국정부가 기울이고 있는 대북한 대화노력을 높이 평가하면서 「아주 가까운 시기」에 그러한 노력의 성과가 구체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할 것이라고 예고하기도 했다. 이같은 견해들은 한반도통일문제와 관련한 외적요인 또는 주변환경변화추이를 토대로 한 분석들이다.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최근 북한의 자세가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움직여 가고 있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즉 지난달의 미군유골 인도,미국에 대한 비난 중단,대서방접근 노력강화 등은 전례없는 온건노선의 표방으로 받아들여진다(프랑스ㆍ르몽드지)는 것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움직임은 그들의 2대동맹국인 소련과 중국이 한국과 관계개선방향으로 나아감으로써 참아내기 힘든 국제고립화 현상이 초래되고 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또한 역대 어느 정권보다훨씬 차원 높은 대외정책으로 국제사회에서 이미지가 한껏 고양되어 있는 한국으로부터의 외교적 도전에 대처해야만 하는 북한은 어쩔수 없이 온건노선을 택할 수밖에 없고 개방을 준비해 나가야 할 입장에 처해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동ㆍ서독과는 달리 직접 전쟁을 치른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좌ㆍ우익의 극심한 대립의 상처를 안고 있는 한반도의 분단해소문제는 상호불신의 제거작업에서부터 착수되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영국 리즈대학의 에이든 포스터카터교수도 북한에 있어서 「변혁」이나 「개방」이라는 단어는 그들의 이른바 「주체사상」자체를 부정하는 것으로 정권유지의 틀을 뿌리째 흔들 수 있는 급격한 변화는 기대하기가 힘들 것으로 내다봤다. 말하자면 변혁과 개방을 전제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려는 시도에는 북한이 쉽사리 응하지 않을 것이라는 진단이다. 공산주의 또는 스탈리니즘의 패퇴,이데올로기의 가치전환으로 표현되고 있는 동구의 변혁과 같은 이념적 전환이 북한에서도 가능한가에 대해서는 강한 의문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유럽의 관계전문가들은 북한의 이같은 자세와 입장을 고려해 가면서 모처럼 성숙되고 있는 국제정치질서의 호기를 놓치지 말고 적절한 대응책을 세워나갈 때 한반도 문제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데 의견을 같이 하고 있다. 이에 곁들여 한국은 동구나 소련ㆍ중국과 국교를 트고 나면 북한도 어쩔 수 없이 문을 열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단순논리에서 벗어나 민족문제해결을 위해서는 상호신뢰와 양보의 정신을 바탕으로 한 적극적이며 유연한 자세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실천적으로 보여주어야 할 것이라는 충고가 뒤따르고 있다.
  • “소­북한 군사동맹 재검토를”/모스크바 정치주간지 촉구논문 게재

    ◎평양의 대대적 인권침해 비판/“대한수교는 극동긴장 완화 효과” 【도쿄 연합】 소련 정치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야(신시대)는 23일 발매될 최신호에 북한에서는 『광범위한 인권침해가 행해지고 있어 현재의 소련과는 아무런 공통점도 없다』고 비판,북한과의 동맹관계를 재검토하도록 촉구하는 논문을 게재한다고 일본지지(시사)통신이 22일 모스크바발로 보도했다. 지지통신에 따르면 노보에 브레미야 편집원 레오니드 물레틴이 서명한 이 논문은 『한국과의 국교수립은 극동의 긴장구조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지적하면서 대한 국교수립을 제창하고 북한과의 동맹관계를 고집하는 소련 외무부의 자세도 비판하고 있다. 논문은 또 6·25때는 소련공군의 조종사가 참전,전사자가 나왔고 스탈린의 전후정책이 한반도 분단에 큰 역할을 했다는 점을 인정하는등 소련의 대한반도정책에 대해 지금까지 볼 수 없었던 혁명적인 논조를 담고 있다. 논문은 국제사면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북한에는 그라스노스티(공개성)가 전혀 없으며 다수의 강제수용소가 있어 정치범등 약 10만명이상이 수용돼 있다』고 소개하고 『우리는 이 자료를 믿는다』고 말했다. 논문은 이어 북한 실정을 있는 그대로 기사화했던 타스통신 평양주재 특파원이 최근 추방당했다고 밝히고 이 잡지 편집부에는 북한이 『루마니아의 교훈을 배우려하지 않고 있다』는 독자투고가 다수 배달되고 있다고 전했다. 논문은 또 북한과의 동맹관계가 거꾸로 극동의 냉전구조 유지에 기여하고 있다고 지적,군사동맹관계를 재검토하라고 촉구했다.
  • 분단 45년… 북한의 생활상 어떻게 이질화됐나

    ◎다른 길로 달린 「남과 북」… “한핏줄의 이방인”/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한핏줄의 남북한은 하나의 역사,하나의 언어,그리고 공통된 생활관습 등을 지켜왔다. 그러나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분단의 길로 들어선 남과 북은 6ㆍ25전쟁이라는 민족최대의 비극을 겪으면서 분단이 고착화됐고 이 결과 전쟁후 40년이 지난 오늘까지 삶의 모든면에서 이질화가 심화되어 왔다. 최근 동서독이 통독의 길로 나아가는등 세계의 냉전구조가 타파되면서 세계유일의 분단국이 되고만 한반도에도 냉전의 장벽을 허물어 뜨릴 수 있는 변혁의 물결이 밀려들고 있다. 분단 45년,전쟁발발 40년이 지난 오늘 제각기 달려온 남과 북의 삶의 모습이 어떻게 변화됐고 이질화됐는가를 살펴봄으로써 언젠가는 맞이할 통일에 대비해 서로가 극복해야 할 과제로 삼고자 한다. ◎문화ㆍ예술/인간개조의 도구화… 순수예술 명맥 끊겨 지난해 우리는 두개의 서로 다른 경험을 했다. 그 하나는 비록 결렬되고 말았지만 북경아시안게임 출전을 위한 남북단일팀 구성논의에서 「아리랑」을 단가로 하자는데 양측이 비교적 손쉽게 합의,문화적 민족정서의 공유가능성을 확인한 일이다. 또 하나는 남북이산가족의 재회를 무산시킨 이른바 북한의 혁명가극 「꽃파는 처녀」와 「피바다」 공연여부를 둘러싼 논쟁에서 실감했던 남과 북의 현저한 문화ㆍ예술관의 차이다. 이렇듯 남과 북의 문화ㆍ예술은 공감대를 같이하는 한 뿌리에서 출발했으나 분단이후 45년간 서로다른 이념과 사회체제 속에서 이질화의 과정을 밟아옴으로써 오늘의 남과 북사이에는 엄청난 높이의 문화적 장벽이 가로놓이게 됐다. 한국의 문화정책이 이어령 문화부장관의 구상처럼 『후기산업사회로의 급격한 전환에 따른 세대간ㆍ계층간ㆍ지역간ㆍ성별간의 이질화와 갈등현상을 문화의 힘으로 치유』하는데 놓여져 있다면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주체사상과 3대혁명에 입각한 공산주의적 정치사회화의 수단적 목적만을 강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북한의 문화예술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기초하에 체제보위 및 최고통치자에 대한 우상화 및 공산주의적 인간개조를 위한철저한 도구로 기능함으로써 전통적 순수예술의 성격은 물론 대중예술과도 거리가 먼 주체예술ㆍ혁명예술ㆍ이데올로기예술로 변모돼 있다. 가령 북한가요 45년사에서 3대명곡으로 꼽히고 있는 「조선의 별」,「김일성장군의 노래」「동지애의 노래」 등이나 최고의 명작으로 꼽히는 시작 「묘향산의 가을날에」,80년대 최고의 미술작품이라는 「강선의 저녁노을」 등은 모두가 김일성과 관련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북한의 문화ㆍ예술의 성격을 대변해 주고 있다. ▲사상성이 좋고 ▲가사가 좋으며 ▲선율이 부드럽고 지루하지 않다는 점에서 불후의 「혁명송가」라는 「조선의 별」은 김일성이 항일빨치산 투쟁을 할때 그의 추종자들이 김일성을 흠모해 지었다는 노래이며,「동지애의 노래」는 김일성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촉구한 노래이다. 「강선의 저녁노을」은 남포시 강선제강소를 소재로 김일성을 찬양한 조선화이며 주체예술의 상징인 5대혁명가극의 하나인 「피바다」는 항일혁명투쟁을 주제로 김일성의 주체사상을 앞세운 목적극이다. 특히 6ㆍ25전쟁 전까지 순수예술과 목적예술간의 대립속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하지 못한채 주로 소련에 의존해왔던 북한의 문화ㆍ예술은 전쟁중 전쟁의식을 고취하는 내용의 전쟁영웅 형상화에 몰두,목적예술적 경향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후 전후복구와 「주체」의 슬로건 등장등 상황적 요청에 따라 문예정책은 사회주의 건설에 역점을 두는 새로운 전형을 형상화하는 한편 소련식 문화활동에서 탈피,김일성체제를 뒷받침하는 혁명전통확립과 주민들에 대한 공산주의 교양을 주제로 한 창작활동으로 방향을 전환했다. 또한 자연만을 노래하거나 예술지상주의 태도는 반혁명적이고 형식주의적인 문화예술이라는 인식하에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와 ▲당성ㆍ계급성ㆍ인민성의 구현이 모든 창작활동중에서 반드시 지켜야할 원칙으로 대두됐다. 현재 북한에서는 이러한 문화예술의 원칙과 과제의 이행을 지원하기 위해 작가 미술가 영화인 연극인 무용가 사진가 등 모든 예술인들을 망라한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란 조직이 결성돼 있으며 당은 이 조직을 통해 각 분야 종사자들에게 창작 및 공연활동계획서의 제출을 강요,▲혁명전통(30%) ▲전쟁(30%) ▲사회주의건설(20%) ▲조국통일(20%) 등 4개 주제별로 창작활동을 하도록 하고 있다.◎의식구조/어휘마다 정치색… 전투ㆍ파괴적 성격 강조 『서울말은 남존여비사상과 썩어빠진 부르주아적 생활이 지배하는 말로서 오늘 남조선방송에서는 여자들이 남자에게 아양을 떠는데 쓰이는 코맹맹이 소리를 그대로 쓰고 있으며,그것마저 고유한 우리말은 얼마 없고 영어 일본말 한자어가 반절이나 섞인 잡탕말이다. 우리는 혁명의 수도이며 요람지인 평양말을 기준으로 해야한다. 오늘 평양말은 서울말보다 비할 바 없이 우월하다』 김일성이 1969년 평양말을 「문화어」로 삼은 이유를 설명한 교시의 내용으로 북한의 언어정책을 잘 보여준다. 김일성은 또 「표준말」이란 용어 대신 「문화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표준어라고 하면 마치도 서울말을 표준하는 것으로 그릇되게 이해될 수 있으므로 그대로 쓸 필요가 없다. 「문화어」란 말도 그리 좋은 것은 못되지만그래도 그렇게 고쳐쓰는 것이 낫다』 특히 북한은 「언어를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의 힘있는 무기」로 보는 언어관을 토대로 일찍부터 용의주도하고 치밀한 언어정책을 펴옴으로써 분단 45년이 지난 현재 남북한간에 벌어지고 있는 언어의 이질화는 단순한 언어 자체의 문제에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남북한간의 사고와 행동양식 및 의식구조의 이질화에까지 파급되고 있다. 실제 북한에서는 언어를 씩씩하고 힘있는 무기로 다듬는다는 명분하에 『미제의 각을 뜨자』『돌탕을 쳐 죽이자』는 등의 살벌하고 소름끼치는 말들이 공공연히 사용되고 있다. 언어가 인간의 사고와 성격에 미치는 영향이 적지않음을 감안할때,북한의 이같은 극단적인 언어관과 언어정책은 결과적으로 이러한 언어를 쓸 수 밖에 없는 북한주민자신을 공격적이고 전투적이며 파괴적인 성격으로 만드는 잠재요인이 된다는 점에서 남북한간의 언어이질화에서 빚어지는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이다. 북한의 언어정책은 1949년에 단행된 한자폐지와 이에 따른 한글전용정책에서 시작된다. 문맹퇴치와 인민대중의 조속한 사상교육을 목표로 추진된 한자폐지는 결과적으로 한글전용화로 이어졌고 이결과 북한의 각급학교 교과서 문예작품 신문 및 대중매체에서 한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었다. 다만 한자교육은 통일후 남한문헌을 읽기 위해 또한 고전연구를 위해 하나의 외국어처럼 전공과목으로서만 남게됐다. 한글전용에 이어 가로쓰기도 시행되었으나 한자어의 어원을 가진 낱말을 한글로만 표기,잘못 사용하는 경우가 속출하면서 「말다듬기운동」이 새로 일어났다. 이에 따라 1954년 일제하 조선어학회에서 제정한 「한글맞춤법 통일안」을 수정한 「조선어철자법」이 생겨났고 1966년에는 「조선말규범집」과 함께 「문화어」라는 새로운 개념의 어휘까지 등장했다. 문화어의 등장은 남북한간 언어이질화의 본격적인 시발점이 되고 말았는데 그 성격은 서울말을 배격하고 평양말을 토대로 다듬은 그들의 공용어를 표준어로 삼는 데 있다. 한편 한자폐지와 한글전용,말다듬기운동의 결과 새로운 사전의 편찬이 불가피하게 됐는데 1968년 나온 「현대 조선말사전」의 경우 18만어휘가 수록됐던 「조선말사전」(61년)에 비해 어휘가 5만으로 크게 줄었다. 그 이유는 한자가 하나도 없고 옛말 사투리 고유명사 및 이른바 「퇴폐적 사상표현」등을 완전히 제외했기 때문. 또 어휘마다 정치성이 담겨져 있어 김일성의 인용구는 굵은 활자에 별표까지 달아놓았다. 현재 남북한의 언어는 발음의 차이,리듬의 차이,억양의 차이 등과 같은 음성학적인 차이를 비롯해 어휘ㆍ문법ㆍ의미ㆍ문체 및 맞춤범 등 언어전반에 걸쳐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데 가장 심각한 차이는 어휘부문에서 나타난다. 예를들면 산책길→유보도 채소→남새 화장실→위생실 고기잡이→추어전 개고기→단고기 도시락→곽밥 레코드→소리판 대중가요→군중가요 투피스→동강옷 커튼→창문보 그룹→그루빠 소년단→삐오네르 주제→쩨마 등이다. ◎경제생활/「남농북공」무너져 GNP 남한의 12%/생필품 부족… 암시장 쌀값 배급의 18배 8ㆍ15해방 당시 남북한의 산업배치는 「남농북공」으로 일컬을 만큼 지역적 보완관계가 가능한 상태였다. 그러나 뜻하지 않은 남북분단으로 이같은 보완관계는 무너졌으며 설상가상으로 6ㆍ25가 남과 북 모두의 각종 산업시설을 파괴,경제활동의 토대조차 송두리째 무너뜨리고 말았다. 이후 남과 북은 40여년간 천연자원 및 산업구조의 불균형이라는 악조건속에서 통합적 발전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분리적인 발전을 계속해왔다.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로 굳어진 한국과 북한은 각기 다른 경제질서를 형성ㆍ유지하면서 치열한 체제경쟁을 벌여왔고 이 결과 88년을 기준으로 국민총생산액(GNP)의 차이는 한국이 북한에 비해 8배나 앞서는 비교우위로 나타났다. 한국은 62년 제1차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착수한 이래 고도의 경제성장을 거듭,개발도상국에서 일약 중진국의 일원으로 도약했다. 1960년 1백달러 미만이었던 1인당 국민소득은 89년말 현재 5천달러에 육박해 있다. 반면 6ㆍ25로 인해 공업생산 수준이 1949년에 비해 3분의 2 수준으로 떨어진 상태에서 출발했던 북한경제는 전후복구 3개년계획(1954∼56년)과 뒤이은 5개년계획(1957∼61년)에서는 이례적으로 높은 성장을 기록했으나 그후 침체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70년대전까지만 해도 한국에 비해 부분적인 비교우위내지는 형평을 유지해 왔으나 이후부터는 전분야에서 큰 격차를 보이고 있다. 체제가 다른 북한의 국민총생산액등 각종 경제지표의 개념은 우리와 크게 다를 수 있지만 국토통일원이 북한의 각종 선전자료를 검토ㆍ분석해 추정한 수치는 다음과 같다. 국민총생산액은 88년을 기준으로 2백6억달러로 우리의 1천6백92억달러에 비해 8분의 1 수준이며 1인당 GNP는 9백80달러(한국 4천40달러),자동차 생산능력은 연간 2만대(한국 1백70만대),TV보유율은 10%(한국 1백%),전화는 7%(한국 67%),냉장고는 6.5%(한국 79%) 등이다. 한편 북한주민의 의ㆍ식ㆍ주는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소비하는」 평등한 방식에 의해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직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지급되는 임금과 그 임금에 따른 불균형한 소비형태로 이뤄지고 있다. 임금은 당간부 및 고위직 군인의 급료가 상대적으로 높으며 사무직보다는 기술직이 높다. 또 경노동 보다중노동이,중노동 가운데도 위해노동종사자들이 더 많은 임금을 받으며 85년부터는 「사회주의적 노동보수제」가 도입돼 동일직종이라도 숙련도나 생산성 등 노동의 질에 따라 급수를 달리하는 「차등임금제」가 실시되고 있다. 북한은 이같은 화폐소득의 차이를 완화하기 위해 보건ㆍ교육분야를 국가예산으로 충당하는 한편 대중소비물자의 가격을 낮게 책정하고 사치품의 가격을 높게 매기고 있다. 이에 따라 쌀ㆍ채소ㆍ옷감ㆍ비누ㆍ치약 등 생필품의 경우 아주 싼값으로 공급되는데 가족수와 연령,직업에 따라 품목과 수량,종류가 정해진 구입카드에 의해 국영상점에서 구입한다. 그러나 최근 몇년간 「먹는 문제」의 해결이 최우선 과제이듯이 국가에서 싼 값으로 공급하는 생필품의 배급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하기 때문에 일반주민들은 부족분을 구하기 위해 1㎏당 8전에 불과한 쌀을 「장마당」이라고 부르는 암시장에서 이 가격의 18배가 넘는 1㎏당 15원에 구입하려해도 어려운 실정이다. 주택은 협동적 소유로 행정당국에 의해 직업과 직급에 따라 차등적으로배분되며 그 보급율은 70% 안팎. 북한은 주택건축률이 경제발전을 대변하는 전시적 기능이 크고 남북한 사회비교의 중요한 징표가 된다는 점에서 70년대 이후 평양ㆍ남포ㆍ원산ㆍ함흥 등 대도시를 중심으로 현대식 고층아파트를 신축하는 한편 농촌의 문화주택을 2층 3가구용,3층 5가구용으로 다양화하고 문화적으로 보이도록 하는 등 주거양식에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또한 북한은 지난 40년간 중공업위주의 경제정책을 펼친 결과 주민들의 소비생활이 크게 압박을 받아 불만의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는 판단에 따라 지난해를 「경공업의 해」로 지정하는 등 최근 경공업발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생활풍습/“봉건잔재 없앤다” 관혼상제도 통제ㆍ규격화 북한은 우리민족의 전통적 예의범절에 대해 『봉건지배계급이 착취하는데 편리하게 만들어 놓은 규칙』이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우리민족 고유의 예절이나 유교적 도덕관은 북한의 사회주의체제와 당의 이익에 맞도록 변형되어 있다. 또 관혼상제를 포함한 전통적인 민속과 세시풍속 등도사회주의적 내용으로 변질됐다. 북한에서의 결혼은 『철저히 동지적이고 혁명적인 관계에 의해 이뤄지며 일생을 동지로서 당과 수령께 충성할 수 있는 정신적 풍모가 조건이 된다』고 정의되고 있다. 따라서 결혼연령도 노동과 생산력을 높이기 위해 남자 29세 여자 26세로 제한해 놓고 있으나 불만이 많아 80년대 이후에는 조혼추세가 묵인되고 있다. 배우자선택은 중매(60%)와 연애(40%)가 병행되고 있으나 최근 북한의 남녀대학생들은 서로 손을 잡기도하고 데이트를 즐기는 등 연애결혼 풍조가 확산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일반 노동자계층의 남녀가 만나는 채널은 연애보다는 부모 친척 등을 통한 중매가 지배적이다. 신랑감으로는 직업에 관계없이 평양거주총각이 최고의 배우자로 꼽히고 있으며 길흉을 가리는 결혼의 택일 풍습은 사라져 대개 일요일이나 공휴일에 치러진다. 회갑이나 생일,돌잔치는 50년대에는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이유와 식량절약이라는 명분으로 일체 금지되었으나 60년대 후반기부터 묵인되고 있다. 그러나 「60청춘 90회갑」이라는 구호아래 공식적인 회갑잔치는 거의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고위간부의 경우에만 김일성이 하사하는 일정한 규격의 회갑상을 받는다. 장지는 지정된 공동묘지만을 쓰도록 돼있다. 상복은 따로 만들어 입는 것이 없고 머리에 건을 쓰고 팔에는 검은 천을 두른다. 장례식과 매장은 도시의 경우 녹화사업소,편의협동조합 등이 맡아서 처리해 주며 직계존속이 사망했을 경우 상주에게는 3일간의 공식휴가와 장례보조금 10원,쌀 1말이 배급된다. 제사도 다른 풍습과 같이 6ㆍ25전까지는 별다른 통제를 받지 않았으나 휴전후부터 단속대상이 되었었다. 그러나 60년대 후반기부터 추석에 성묘하는 것과 직계존속에 대한 탈상까지의 제사는 묵인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60년대 중반까지 「봉건잔재를 뿌리 뽑아야 한다」는 김일성 교시에 따라 추석등 고유의 세시풍속을 공식명절에서 제외하고 김일성의 생일,김정일 생일,북한정권 창건일,노동당 창건일,사회주의 헌법제정일 등을 「사회주의 명절」로 지정,공휴일로 해왔으나 지난 88년부터 추석 음력설 단오 한식 등을명절로 부활시켰다. 또한 70년대까지만 해도 인민복,검은 통치마 차림이었던 주민들의 옷차림이 두드러지게 바뀌기 시작해 80년대 중반이후부터는 남자는 양복이나 잠바,여자는 양장이나 짧은 치마차림이 보편화됐으며 머리모양이 다양해지고 화장을 한 여자들도 눈에 띄기 시작했다. 그러나 올해초부터 시행될 것으로 보이던 주민들의 부분적 여행자유화 조치가 전면 보류됨으로써 일반 주민들의 북한내 여행 및 휴가가 거의 이뤄지지 않고 있으며 이에 따라 금강산ㆍ묘향산 등 유명관광지의 이용자는 주로 외국인 관광객이며 주민들의 경우 공장ㆍ직장별 단체관광 정도일 뿐 가족단위의 여행은 거의 없다. 따라서 북한주민들의 주요한 오락수단은 TV와 라디오이다. 또 최근 바둑협회가 새로 결성되고 실내 골프장이 생기는 등 부분적인 변화가 있으나 대중이용은 상상조차 할 수 없으며 주민들이 가장 많이 즐기는 놀이는 주패놀이로 불리는 서양식 카드놀이와 장기이다. 가정생활은 지난 80년 『셋은 양심이 없습니다. 둘은 많습니다. 하나가 좋습니다』라는 김정일의 지시이후 가족계획이 보편화되기 시작해 점차 대가족에서 핵가족 형태로 옮아가고 있다. 남녀평등권에 관한 법령이 제정되는 등 남녀평등이 제도적으로 보장돼 있으나 실제로는 가부장적 사회가 유지되고 있으며 여자들이 가정경제의 주도권을 쥐고 있다. 남편들이 봉급을 타서 여자들에게 넘겨 주기는 우리와 마찬가지다. ◎언론ㆍ교육/비판기능은 무시… 선전ㆍ선동의 매체로 활용 최근 북한은 소련언론들의 잇따른 대북한 비난보도에 대응,소련의 평양주재 기자들에 대한 취재봉쇄조치를 취한데 이어 타스통신기자 1명을 추방함으로써 내외의 관심을 끌었었다. 특히 북한은 『우리 혁명을 지지하는 기사를 쓰라,그러면 당신들의 요청이 충족될 것』이라고 주장한데 반해 소련언론들은 북한언론들의 보도태도와 관련,「목적지향성」보도에만 집착할뿐 진실을 숨기고 있다고 비난해 같은 사회주의 국가이면서도 북한과 소련의 언론관이 상이하다는 사실을 일깨워줬다. 현재 북한에서 발행되는 신문은 노동당기관지인 「로동신문」과 정무원기관지인 「민주조선」을 비롯해 도단위 일간지 등 모두 30여종. 방송은 TV의 경우 「조선중앙TV」(평양TV)「만수대TV」「개성TV」 등 3개가 있고 라디오는 「조선중앙방송」「평양방송」「구국의 소리방송」「평양인민 FM방송」 등이 있다. 북한에 있어 언론이란 「김일성의 교시와 당의 정책을 해설ㆍ선전하며 그것을 철저히 비호ㆍ관철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가일층 강화하여 인민들을 수령의 두리에 튼튼히 묶어세우는데 복무해야 한다」는 정치사전(73년도판)의 규정처럼 정치선전도구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다. 또한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기사가 아닌 모범적이고 감동적인 이야기로써 사람들을 교양해야 한다는 김일성의 교시(1960년 11월)에 따라 우리의 사회면 기사에 해당되는 범죄나 비행ㆍ사고 등의 기사는 신문ㆍ방송 등 언론매체에 일체 실리지 않는다. 우리의 언론들이 사회의 비리ㆍ부조리 등을 파헤침으로써 비판적인 기능을 하고 있는데 반해 북한은 긍정적ㆍ모범적인 기사를 통해 사회를 계도하겠다는 언론관을 고집하고 있다. 또 북한의 언론은 자본주의언론이 중시하는 속보성보다는 매스미디어의 이념적 이용,즉 당의 정책적 선전에 중점을 두고 있다. 특히 「정론성」과 「당성」이 강조되고 있는데 정론성이란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도하는 것이 아니라 선전ㆍ선동ㆍ조직ㆍ교육ㆍ동원에 필요한 요소들을 가미하여 「사실」을 각색하는 것을 말한다. 한편 북한의 방송은 정무원직속 조선중앙방송위원회의 지도아래 운영되고 있는데 이 기구는 조직ㆍ편제상 정무원에 속해 있지만 당중앙위 선전선동부의 지시와 통제를 받고 있어 사실상 2원화 되어 있다. 북한의 새 학기는 우리와 달리 9월에 시작된다. 북한은 지난 75년부터 유치원 1년,인민학교 4년,고등중학교 6년과정으로 된 「11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국민학교에 해당하는 인민학교의 취학연령은 만6세. 그러나 만4세부터 시작되는 2년과정의 유치원교육중 「높은반」부터 의무교육기간에 포함되므로 실질적인 의무교육은 만5세부터 시작되는 셈이다. 11년제 의무교육기간에는 수업료는 물론 면제이며 교과서ㆍ교복ㆍ학용품이 무상 또는 일부 부담으로 지급된다. 16세부터 시작되는 고등교육단계로는 2∼3년 과정의 고등전문학교와 교원대학(3년),종합ㆍ단과ㆍ사범ㆍ공장대학(4∼6년) 등이 있다. 현재 북한에는 인민학교 5천여개,고등중학교 4천2백여개,전문학교 5백여개,대학 2백70여개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북한은 80년중반부터 낙후된 과학기술을 진흥하기 위해 각 시도별로 「제1고등중학교」를 세우는 한편 기술계 대학의 수를 크게 늘리고 있다. 학생들은 또 「한가지 이상의 기술과 기능을 소유해야 한다」는 당의 방침에 따라 예능 또는 실업 등의 실기과목을 배우고 있으며 소년단이나 사로청 등의 조직에 의무적으로 가입,단체활동을 한다. 특히 의무노동이 중시돼 인민학교는 연간 2∼4주,고등중학교는 4∼8주,대학교는 12주정도씩 생산현장노동에 참여한다. 한편 북한은 마르크스­레닌주의와 이것을 주체적,창조적으로 적용했다는 「주체사상」을 교육이념으로 삼고있다. 또 계급투쟁을 위해서는 「공산주의적 인간」이,경제발전을 위해서는 「생산기술적 인간」이,전쟁승리를 위해서는 「체력이 튼튼한 인간」이 바람직하다는 「이상주의적인 인간상」때문에 정치사상교양 및 과학기술교육,그리고 국방체육이 북한교육내용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 「내각제 공방」 치열할듯/내일부터 대정부질문… 여야의 전략

    ◎지자제ㆍ보안법 등도 만만찮은 쟁점/“탈냉전 시대” 정치 질서ㆍ가치관 재정립 강조 여/“총체적 난국은 여권의 무능때문” 집중 성토 야 6월 임시국회의 대정부 질문이 25일부터 시작됨에 따라 그동안 소강상태를 보였던 정치권이 활성화 될 것으로 예상된다. 13대 후반기 국회의 첫 장을 여는 이번 임시국회에서의 여야 공방은 주요 현안및 쟁점에 대한 여야간의 시각노출 차원을 넘어 향후 정국운용과 대권구도를 보다 직접적으로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관심을 모으고 있다. 여권은 본격적인 「건축작업」에 앞서 3당통합 당시 그렸던 정치설계도의 일부를 정치권과 국민에게 제시,그 파장을 가늠하는 장으로서 이번 국회를 활용하려하고 있다. 반면 야권은 3당통합이래 파상적으로 취해온 공세의 고삐를 바싹 당겨 지자제선거법ㆍ국군조직법 등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을 내각제개헌반대 공격과 한데 묶어 처리함으로써 여권에 타격을 가한다는 입장이다. 우선 정치분야에서 여야의 난타전이 예상되는 쟁점은 내각제 개헌과 지자제선거법ㆍ국가보안법 등개혁입법과 광주보상법,이상옥의원및 이문옥감사관의 구속문제,공직자비리 등을 꼽을 수 있다. 여권은 이중 야권의 전면적인 도발이 예상되는 내각제 개헌문제에 대해 국민의 다양한 욕구를 수렴하고 지역ㆍ계층ㆍ세대간의 갈등을 해소하는 한편 남북통일에 대비한 미래 정치체제로써 내각제의 필요성을 조심스럽게 개진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함께 야권이 주장하고 있는 이원집정부제나 장기집권음모가 허구에 찬 정치공세란 점도 여론에 호소할 것으로 전망된다. 여권의 이같은 문제제기에 대해 야권은 내각제 개헌문제와 관련,여권내 계파간의 이견과 내각제개헌이 아직 여당의 당론으로 확정되지 않아 적극적으로 대응에 나설 수 없는 약점등을 비집고 들어가 「3당통합→내각제개헌→장기집권음모」라는 직선적인 도식외에 국군조직법개정,지자제실시연기 등 나머지 주요 현안도 모두 내각제개헌에 연결시켜 초반부터 물고 늘어지자는 전략을 세우고 있다. 특히 여권내부에서 한때 논란이 됐던 이원집정부제를 장기집권 음모로 몰아세워 「국민의 의사에 반한」 3당통합이 여권의 주장과는 달리 불순한 저의를 숨기고 있었다고 매도할 것으로 보인다. 또한 현재의 총체적 난국이 여권의 무능과 지도력부재 등에 기인하는 것으로 진단,야권의 상대적 우월성을 유도하는 한편 이상옥의원 구속사건을 우회적으로 이문옥감사관구속사건과 연계시켜 공권력의 부당한 행사쪽으로 여론을 몰고갈 것으로 예상된다. 여권은 그러나 한소 정상회담이후 냉전구조의 와해등 국제정세변화에 따른 국내질서및 가치관의 재정립 필요성을 강조하고 이같은 역사적인 변혁속에서도 구습을 답습하고 있는 야권의 정치행태에 비난의 초점을 맞출 것으로 관측된다. 경제분야의 경우 여야는 현상을 진단하는 시각과 처방은 다를지라도 일단 부동산투기ㆍ물가ㆍ국제수지 적자 등 주요 현안에 대해 강도높게 정부측을 성토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권은 현재의 경제위기 상황이 근원적으로 4당체제때의 정치불안에서 기인된 것으로 분석,3당통합의 당위성을 강조하면서 최근의 경기및 국제수지 회복세를 보다 가시화ㆍ가속화할 수 있는 정부의 대응책 강구에 질문의 비중을 두는 반면 야권은 재벌의 과다 비업무용 부동산 소유를 비롯,정부가 추진중인 경제정책의 허구성을 폭로하는데 치중할 것이다. 야권은 특히 물가ㆍ부동산투기,전월세값폭등,농수산물 수입개방등을 집중적으로 성토하고 김상조 전경북지사의 구속사건등 고위공직자의 비리사건을 추궁,여론의 흐름이 여권에 불리하도록 유도해 나갈 것으로 보여진다. 통일ㆍ외교ㆍ안보분야에서는 한소 정상회담등 최근의 북방정책의 가시적인 성과에 초점을 맞춰 여권은 정부의 보다 적극적인 대응책을 촉구하며 목소리를 높일 것으로 보인다. 이에반해 야권은 민족문제와 관련된 주요 외교정책의 초당적인 협력이라는 원칙론의 개진과 함께 정부가 추진중인 국군조직법 개정안이 군사력의 집중을 통한 장기집권 시나리오의 일환이라고 비난을 퍼부을 것으로 관측된다. 사회문화분야에서는 여권이 산업평화정착을 위한 공권력의 엄정한 집행과 공직사회의 기강확립을 비롯,민연방송추진을 주요내용으로 한 방송제도개편의 필요성을 정부측에 촉구,정부의 논리를 국민에게 직접 전파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야권은 3당통합이래 정부의 공권력 과잉집행 사례를 적시하는 한편 방송제도 개편을 통해 공영방송체제를 와해시킴으로써 정부가 방송을 장악하려는 「음모」라고 몰아붙일 것으로 전망된다. 결국 이번 임시국회에서의 대정부 질문에서도 국내외 상황의 변화에 상관없이 여야는 과거와 마찬가지로 현안에 대한 현격한 시각차를 노출하고 당리당략에 따른 목청만 높일 것이라는 게 지배적인 관측이다. 그럼에도 이번 임시국회는 각종 현안의 정치권 수렴이라는 일반론 외에 지금까지 수면아래에서 단발성으로 공방을 거급하던 내각제 개헌문제가 국회차원에서 공개적으로 논란이 됨에 따라 차기의 정국구도가 보다 가시화 된다는 점에서 각별한 의미를 가지게 된다고 하겠다.
  • 「주한미군철수」 팽팽한 찬반공방/미 캐토연구소 「한미동맹」 세미나

    ◎경제력 북보다 우위… 자위능력 보유 철군론/군사균형 감안,2천년까진 어려워 반대론/“군사력 감축을 남북관계의 지렛대로 이용 바람직” 미국의 민간정책연구단체인 캐토연구소가 한국전 발발 40주년에 즈음하여 21일 워싱턴에서 한미 양국의 학자 및 관계자 1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한미 동맹관계­변화의 시기」라는 주제로 가진 세미나에서 캐토연구소측의 주제발표자인 테드 카펜더(대외정책연구부장)와 둑 반도우(수석연구원) 등은 주한미군의 전면철수와 한미 상호방위조약의 일방적인 폐기를 주장,열띤 찬반논쟁을 촉발시켰다. 카펜더와 반도우는 『미국의 위험부담을 정당화시킬 만큼 한국은 미국에게 경제적 전략적으로 중요한 존재가 아니다』 『한국은 스스로를 지킬 수 있는 경제적 군사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며 전면철군과 방위조약 폐기를 제기했다. 셀리그 헤리슨(카네기국제평화재단 수석연구원)은 『주한미군이 남한에선 민주화를 방해하고 북한에선 군부중심의 강경파를 강화시키는 요인』이라고 주장하면서 『군사전략상으로도 이제미국은 소련을 겨냥한 군대를 한국에 둘 필요가 없다』고 부연했다. 서대숙교수(하와이대)는 『미국과 북한의 적대관계는 바꿔야한다』고 말하고 『미국이 한국에서 군대를 철수함으로써 한반도 긴장완화에 기여하고 남북한에 공평한 정책을 채택해야할 최선의 시점은 바로 지금』이라고 강조했다. 이에대해 윌리엄 테일러(국제전략문제연구센터부소장)는 『한반도의 군사균형이 언젠가는 한국우위로 바뀌겠지만 문제는 그같은 분수령이 2000년 이전엔 올것 같지 않다는 데 있다』고 진단하고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의 군사력 조정에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임스 그레거(버클리대교수)도 『현재 동아시아를 지배하고 있는 위험한 환경을 미국이 적절히 평가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성급한 철군론에 제동을 걸었다. 김창수(한국국방문제연구소 연구원)는 『한반도평화정착과 통일촉진을 위해선 남북한군축이 집선무』라고 강조하면서도 『주한미군감축의 규모와 시기설정은 마지막 단계에 생각할 수 있는 문제』라고 철군 신중론을 폈다. 오찬 연사로 초빙된 티모시 워드상원의원(민주ㆍ콜로라도주)은 『90년대에 한반도에서 긍정적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한미 양국은 주한미군감축을 지렛대로 삼아 남북관계 개선정책을 공동개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제의했다. 한편 데릴 플렁크(헤리티지재단객원연구원)는 한소 수교시기에 대해 『소련이 북한의 영공ㆍ영해를 이용하는 군사적 고려를 중시하고 있는 만큼 몇년이 걸릴지도 모른다』고 분석하고 『북한이 서울과의 긴장완화에 의욕을 보이는 시기가 도래해야만 한소수교가 가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주요논문 요지다. ◇둑 반도우=미국은 의미가 퇴색해 가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폐기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철수를 개시해야 한다. 한국은 경제력ㆍ인구 등 거의 모든 면에서 북한을 크게 앞서고 있으며 군사력 면에서도 한국의 우위도달은 시간문제다. 소련및 동구와의 관계개선,중국과의 접근 등으로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더욱 확립돼 가고 있는데 비해 북한의 고립화는 더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의 젊은 세대간에는 반미감정이 확산되고 있으며 한미간의 무역마찰은 친미적 성향의 기업인들과 중산층마저도 미국에 불만을 갖게끔 만들고 있다. 기존의 한미관계는 균형을 잃고 있으며 따라서 한미 군사동맹관계도 더이상 존재이유가 없다. 미국의 자동개입이 보장돼 있는 한 한국은 방위책임의 확대를 원치 않는 것이 당연하다. 한국방위는 한국인 스스로가 떠맡아야 한다. 북한은 이제 위협적 존재가 아니다. 한국이 미군을 필요로 하던 과거의 상황은 변화됐으며 이제 한반도의 분쟁은 완전히 한국화 돼야 한다. ◇테드 카펜더=한국의 안보는 흔히 미국의 안보이해관계에 대단히 「결정적」인 것으로 얘기되어 왔다. 그러나 이는 묵은 냉전식 사고의 산물이다. 미국에 대한 안보공약의 비용과 위험부담을 정당화시킬 만큼 한국은 경제적으로 전략적으로 미국에게 중요하지가 않다. 한국이 미국의 중요한 무역상대국이라지만 최악의 경우 전체교역이 갑자기 끊어진다해도 미국의 거대한 5조달러 경제에는 결정적인 타격을 주지 못하며 한국을 중요한 전략적 자신의 하나로 간주케 한 전진배치의 냉전 독트린개념도 중요성을 크게 잃었다. 이런 상황에서 한반도의 군사충돌은 남북한간의 지역분쟁이지 세계적인 전략에 영향을 주는 분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받아들여져서도 안된다. 따라서 부시행정부는 주변적 이해관계를 결정적인 것으로 혼동해서는 안되며 주한미군은 모두 철수시키고 한국이 원하든 원치않든,남북한간에 긴장이 있든 없든 한미 상호방위조약을 동결시키는 결정을 내려야 한다. ◇윌리엄 테일러=공산주의의 황혼,그리고 고르바초프의 새 사고에 영향받아 한반도가 군사력 삭감의 인기있는 한 표적이 되고 있으나 이는 기본적으로 방향이 잘못된 것이다. 한국군은 지난 40년 전보다는 훨씬 강해졌지만 북한은 사실상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 비해 여전히 군사적 우위를 누리고 있다. 한반도의 군사균형이 언젠가는 한국우위로 바뀌겠지만 문제는 그같은 분수령이 2000년 이전에는 올 것 같지는 않다는 데 있다. 그 사이에 북한은 그들 맹방의 도움없이도 한국에 대해 기습공격을 감행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갖추고 있다는 것이 거의 모든 정보기관들의 분석평가다. 따라서 미국은 이 지역 군사력조정에 극도의 신중을 기해야 하며 주한미군의 감축이 꼭 불가피할 경우 한국정부와 협의,북한 및 소련측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군사력 감축을 보장받는 선에서 감축이 이뤄지도록 해야한다. 억지력을 멀리서 유지하려는 전략조정은 북한의 오판을 불러올 뿐이다. ◇제임스 그리거=소련은 태평양지역에 관한한 그들의 공격력을 전혀 감소시키지 않고 있다. 그들은 이지역 군사력을 종전 그대로 유지하고 있을 뿐 아니라 태평양함대를 증강시키고 있다. 최소한 단기적으로 볼 때 동북아에 있어서 소련군사력은 미국과 지역국가들의 이익에 대한 잠재적 위협으로 남을 것이다. 아울러 북한도 장차 모스크바정권의 장래가 어떻게 변하든 지속적인 군사력 증강및 독자적 행동으로 한반도의 불안정상태를 증가시키고 있을 뿐 아니라 소련의 해공군에 대해 기항권을 제공함으로써 동남아에 대한 우려까지 초래하고 있다. 가까운 장래에 어떤 상황이 발생하든 그리고 설사 워싱턴이 국제관계에 과격한 변화를 감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서태평양지역에서 미군에 대한 대폭 감축이 있을 경우 재단의 위험성은 순식간에 커질 수 있다.
  • 외언내언

    「베를린의 추억」이란 TV영화를 본 기억이 난다. 베를린장벽이 생기던 시절의 이야기다. 어느날 갑자기 하나의 도시가 둘로 갈라지고 일체의 왕래가 막혀버린다. 길이 차단되고 지하철ㆍ전철이 끊기며 건물이 동강나는가하면 사는 곳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가족과 친척,그리고 애인까지도 갈라서야 하는 비극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영화다. ◆이 영화에서 동베를린 탈출을 위해 지하땅굴을 파는 장면을 보고 북한의 휴전선 땅굴을 생각한 일이 있지만 동독도 서독침투를 위해 땅굴을 8개나 팠다는 폭로를 보면서 공산주의자들의 발상은 어쩌면 그렇게 비슷한지 감탄할 뿐이다. 동독공산당은 그 모든 것이 헛수고인 것을 인정하고 손을 들었지만 북한공산당은 여전히 미련을 못 버리니 비슷한 것은 나쁜면 뿐인가 보다. ◆독일과 함께 베를린이 분단된 것이 49년이고 동서냉전의 상징이 된 베를린장벽이 세워진 것은 61년 8월13일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29년째가 되는 지금 그 독일과 베를린을 하나로 만들기 위한 작업이 급피치를 올리고 있다. 오는 7월2일엔 사실상의 통일을 의미하는 동서독 통화ㆍ경제ㆍ사회동맹이 실시되며 베를린도 하나였던 옛날로 돌아간다. ◆동서 베를린 시당국은 인구 4백만의 베를린을 통일독일의 수도로 만들자고 맹세하는가 하면 과거 파리를 능가하는 유럽 경제ㆍ문화의 중심지였던 그 화려했던 베를린을 부활시키자는 다짐이 요란하다. 지난 13일부터 시작된 약 1백60㎞의 베를린 장벽철거를 위한 최종작업이 7월2일을 목표로 맹렬히 전개되고 있다. 유명한 검문소도 23일이면 완전 철거되어 미국내의 박물관으로 사라져갈 참이다. ◆장벽철거만큼이나 서둘러지고 있는 것은 교통망의 복구통일작업. 약 40여개의 도로를 연결시키고 「유령의 정거장」으로 불리던 콘크리트 차단의 동베를린의 지하철역 5개를 서베를린의 지하철과 연결시키는 작업도 한창이다. 「철마는 달리고 싶다」는 팻말이 제거되고 우리의 경의선ㆍ경원선 등이 연결될 그날은 언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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