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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미 연합훈련] ‘北 도발땐 응징’ 의지 분명히… ‘중국 달래기’ 과제로

    [한미 연합훈련] ‘北 도발땐 응징’ 의지 분명히… ‘중국 달래기’ 과제로

    천안함 사태에 대한 무력시위 성격을 띤 사상 최대 규모의 한·미 연합훈련 ‘불굴의 의지’가 28일 끝났다. 미국 7함대 소속 항공모함 조지 워싱턴호를 비롯해 이지스 구축함, 핵잠수함, F-22(랩터) 전투기를 비롯한 한국형 구축함과 독도함, F-15K 등 양국의 최정예 전력이 참가한 가운데 실시돼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다. 이번 훈련은 북한의 추가도발 억제를 위한 ‘경고’의 메시지는 충분히 전달했지만 천안함 사태에 대한 ‘응징’의 메시지는 제대로 전달하지 못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분석이다. 김희상 한국안보문제연구소 이사장은 “이번 한·미 연합훈련은 그 자체로 매우 의미가 있었다.”면서 “북한에 한·미 군사동맹의 견고함을 알려 추가도발시 우리가 응징할 수 있는 위력의 정도를 알려준 경고효과가 있었다.”고 말했다. 김 이사장은 그러나 “천안함을 공격한 북한에 무력시위를 통해 ‘응징’이란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는 부족했다.”면서 “북한이 도발한 지역, 북한의 코앞인 서해에서 했다면 ‘응징’의 효과가 있었을 것”이라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백승주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센터장도 “북한에 추가 도발 시 군사적으로 굴복시키겠다는 메시지를 강하게 전달했다는 의미가 있다.”면서 “한·미 양국의 군사적 결의를 보여준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말했다. 윤덕민 외교안보연구원 교수도 “북한이 영해내에 있는 천안함을 공격하고 군사적 도발에 따른 대응이 없을 것이란 판단을 했었을 것”이라면서 “한·미가 강력한 억제력을 보여줌으로서 북한에 강한 압박을 가했을 것으로 생각된다.”고 거들었다 이번 훈련의 실시로 한국과 미국, 북한과 중국의 대립구도를 다시 확인했다는 점에서 신(新) 냉전시대를 준비해야 한다는 시각도 있다. 김 이사장은 “중국은 해역 변경으로 체면을 세운 셈”이라면서 “훈련 해역의 이동은 결과적으로 서해에 대한 중국의 배타적 영향력을 키워준 것”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특히 “한국과 미국의 동맹이 강화된 만큼 북한과 중국의 동맹이 강화됐지만 중국의 입장에서 한국에 좋지 않은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한·중 경제 관계에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끼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백 센터장도 “중국이 한·미 연합훈련에 대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고 북한이 보복성전을 말하는 것 자체가 우리에겐 득(得)이 된 것”이라면서 “북한이 도발할 경우 한·미 동맹이 강화되고 그들을 더욱 압박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번 훈련은 성공적”이라고 말했다. 그는 “중국의 반발을 비롯한 일본, 러시아의 입장은 그동안 잊고 지내던 동북아 상황을 일깨워 준 것일 뿐”이라면서 “이해관계에 따른 전략적 지형이 나타난 것으로 훈련의 부작용으로 볼 수 없다.”고 강조했다. 윤 교수는 “중국에도 미국과 한국의 동맹이 단지 한반도 방위용이 아니란 메시지를 전달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합동참모본부 김경식 작전참모부장은 “사상 최대 한·미 연합훈련 ‘불굴의 의지’를 통해 유사시(북한의 추가도발시) 즉각 대응할 수 있는 능력을 향상시켰으며 우리 작전해역에서 한·미 연합작전의 전투력을 한단계 격상시킨 계기가 됐다.”면서 “연합훈련으로 얻은 성과가 많다.”고 자평했다. 오이석기자 hot@seoul.co.kr
  • 조지 워싱턴 ‘위스키 과세’부터 조지 부시 ‘이라크 침공’까지 美대통령 18명의 치명적 오판 20

    조지 워싱턴 ‘위스키 과세’부터 조지 부시 ‘이라크 침공’까지 美대통령 18명의 치명적 오판 20

    대통령제 아래 대통령은 고독하다. 정책 수립 및 정치적 의사 결정의 최고 정점에 있음은 물론, 정치적·역사적 책임의 최대치를 홀로 감당해야 한다. 이론적으로야 입법부, 사법부, 행정부의 삼권 분립을 통한 견제와 감시가 이뤄져야 하겠지만 현실에서는 조금 많이 다르다. 물론 결코 바람직한 일은 아니다. 다만 책임과 비난, 그리고 명예와 영광까지 모두 대통령으로 몰리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가, 민주주의와 대통령 역할의 상관 관계는 어떠해야 하나 등의 논의는 잠시 접어 두자. 대통령은 당대의 제도 속에서 자신에게 집중된 권력을 삶과 철학, 시대정신, 혹은 정치적 세력 관계 등에 비춰 최대한 누렸고 활용했다. 남은 것은 냉철하고 엄정한 평가다. ‘대통령의 오판’(토머스 J 크라우프웰·윌리엄 펠프스 지음, 채은진 옮김, 말글빛냄 펴냄)은 미국 역대 18명의 대통령을 골라 의사 결정 과정을 자세히 들여다보며 결과적으로 최악의 선택이 된 사례들을 둘러본다. 또한 이런 잘못된 정책들이 미국의 역사는 물론, 미국이 ‘세계의 경찰 국가’를 자임해 온 만큼 세계의 역사를 어떻게 바꿔 놓았는지도 함께 살펴보고 있다.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의 ‘위스키 과세’부터 시작해 43대 대통령 조지 W 부시의 이라크 침공에 이르기까지 대통령 18명이 시행한 20개 정책을 보고 있다. 자칫 결과론적 판단의 오류를 겪을 가능성도 있다. 당시에는 선의를 갖고 최선이라며 선택했지만 훗날 다른 평가가 나올 가능성은 언제나 열려 있다. 워싱턴은 미국 독립전쟁을 마친 뒤 정부가 부담하게 된 막대한 부채 청산의 필요성에 직면했다. 그 재원 마련을 위해 위스키에 세금을 매겼다. 펜실베이니아 시골마을에서부터 시작해 각 주정부 서민들의 폭동을 불러일으켰고, 이는 무려 3년이나 지속됐다. 결국 주 정부주의자들의 득세와 연방주의자들의 몰락을 야기했다. 그 뒤를 이은 토머스 제퍼슨은 영국과 프랑스 전쟁 와중에 자국 선원들이 억류되는 상황이 잇따르자 아예 ‘출항금지법’을 제정했다. 그 결과 3만명의 선원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농민, 제조업자, 선박 소유주, 상인들까지 제퍼슨을 일제히 반대하고 나섰다. 국민들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한다는 자신의 선의만 믿고 의회건, 국민이건 제대로 된 소통을 추진하지 않은 탓이었다. 대공황 중 대통령직을 수행했던 허버트 후버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용사를 포함한 ‘노병 퇴역군대(보너스 군대)’ 등 2000여명이 보너스 지급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자 더글러스 맥아더를 지휘관으로 하는 정규군대를 파견해 진압했다. 어린이 2명을 포함해 4명이 죽었고 1000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이들을 공산주의자, 체제 전복자로 몰았던 후버와 맥아더는 ‘파시스트’라는 비판에 오랫동안 시달려야 했다. 모든 사건과 정책을 관통하는 공통점이 느껴진다. 그것은 바로 대통령이 정책을 세우거나 혹은 선택을 하는 과정에서, 이 정책으로 인한 수혜자와 피해자가 누구인지, 그로 인해 감내해야 할 것이 무엇이고, 장기적으로 이득이 될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국민들과 명확히 공유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 자체가 분명한 교훈이다. 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가 계획했던 쿠바 피그스만 침공 계획을 미적지근하게 수행하며 피델 카스트로 쿠바정권 전복을 꾀했던 존 F 케네디는 오히려 미국에 대한 쿠바의 미사일 공격을 자초하고 돌이킬 수 없는 적대 관계를 고착시킨 결과를 지켜봐야 했다. 크메르루주 공산당을 분쇄한다는 명분으로 중립국이었던 캄보디아에 폭격을 가한 리처드 닉슨, 아무런 증거도 없이 대량살상무기를 찾겠다며 이라크를 침공한 조지 W 부시 등은 세계 냉전을 이끌고 숱한 생명을 살상한 미국의 존재를 드러내준 부끄러운 대통령으로 꼽히고 있다. 저자들은 “우리는 칭찬 혹은 비판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당시 그들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그들이 처해 있던 상황을 재검토해 보며 그들이 그렇게 행동한 동기가 무엇이었는지 이해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나라도 4대강 사업 등 국가적 논란이 일고 있는 현안들이 제법 있다. 대통령이 짐짓 장엄하게 내뱉는 “평가는 역사에 맡기겠다.”는 말이 훗날 진짜 신랄한 평가로 되돌아올 수 있음을 책은 분명하게 말해준다. 대통령은 물론, 대통령의 의사결정에 영향을 미치는 주변인사들까지, 휴가 떠나는 짐가방에 한 권씩 넣어갈 것을 권한다. 2만 9000원.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 첩보전 중심 동쪽으로

    최근 미국과 러시아 간의 스파이 맞교환이 전 세계 이목을 집중시켰지만, 양국은 더 이상 첩보전의 중심이 아니다. 21세기 ‘간첩 게임’은 중동 등 수천마일 동쪽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AP통신이 15일 보도했다. 알 카에다 이중 스파이가 미 중앙정보국(CIA) 요원을 살해하고 이란의 핵 과학자들이 사라지거나 의문의 죽음을 맞고 있다. 미국의 첩보 활동 역시 냉전 종식과 함께 이란, 북한, 시리아, 알 카에다등을 향하고 있다. 비밀 정보 수집은 기존 강대국들의 전유물이 아니다. 새롭게 떠오르고 있는 중국은 좀더 정교한 사이버 기술을 이용해 강국들을 감시하고 있다. CIA 간부출신인 미 육군참모총장 특별보좌관 마크 세이지먼은 “중국은 그 어느 때보다 활발히 우리들의 정보를 캐내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와 비교하면 지난 9일 미국에서 추방된 러시아 스파이 10명이 갖고 있었던 기술은 과거 니키타 후루시초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도청을 당하지 않기 위해 신발로 책상을 치던 것만큼이나 구시대 유물인 것이다. 전 세계 스파이들의 활동 중심지는 여전히 오스트리아 빈이다. 냉전 시대와는 달라졌지만, 아직도 이곳에서 각 국가의 스파이들의 정보 거래가 이뤄진다. 또 이들은 각국 대사관이나 국제원자력기구(IAEA) 본부에 침투, 정보를 빼내고 있다. IAEA의 경우 첩보 활동의 대상이기도 하지만, 반대로 IAEA가 첩보전에서 얻은 정보를 이용하기도 한다. 이란의 핵 개발 의혹도 이란에서 밀반출한 노트북 컴퓨터에 담겨 있던 정보들에서 비롯됐다. 또 다른 첩보전의 무대는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이다. 미국은 인력과 첨단 기술을 이용해 탈레반과 알 카에다 반군을 공격하고 있다. 반면 반군은 스파이들을 잠입시켜 미군의 ‘허’를 찌르고 있다. 지난해 12월 아프간 내 CIA 지부에서 요르단 의사 출신인 알 카에다 이중 첩자가 자살 폭탄 테러를 자행, CIA 요원 7명과 요르단 정보장교가 사망한 바 있다. 이처럼 스파이 활동은 과거와 다름 없이, 정보를 교환하는 데서 그치지 않는다. 암살된 이란의 핵 과학자 마수드 알리 모하마디의 경우처럼 스파이들에 의한 것으로 추정되는 납치와 살해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1년 전 사우디아라비아에서 사라졌다가 최근 모습을 드러낸 이란의 핵과학자 샤흐람 아미리의 경우 ‘자진 망명’과 납치 주장이 엇갈리고 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서울 G20 정상회의 2010] 경제협의체 변천사

    [서울 G20 정상회의 2010] 경제협의체 변천사

    주요 국가들의 경제 협의체가 처음 탄생한 것은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약 30년이 지난 1974년이었다. 제1차 오일쇼크가 터지면서 선진국들이 거시경제 정책에서 서로 협력할 필요성이 생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미국, 일본, 영국, 프랑스, 독일 등 5개 나라로 G5(Group of 5)가 구성됐고 이듬해인 1975년 이탈리아가 참여하면서 G6가 됐다. 1976년에는 유럽과의 세력 균형을 위해 북미의 캐나다가 추가되면서 G7이 완성됐다. G7은 경제 분야뿐 아니라 냉전시대 소련과 중국 등 사회주의 진영에 맞서기 위한 자본주2의 대국들의 정치·외교 협의체적 성격도 강했다. 매년 정상회의와 재무장관 회의를 열어 다양한 현안들을 조율했다. 1997년에는 경제가 아닌 정치 분야 이슈에만 러시아가 참여하는 G8 체제가 구축됐다. 하지만 그해 말 한국 등 아시아 신흥 경제권에 외환위기가 일어나면서 선진국과 신흥국 간 국제적 협력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따라 1999년 한국을 포함한 20개 주요 국가 재무장관 및 중앙은행 총재 회의가 출범했다. 이 자리에서는 금융위기 예방 및 해결 방안과 세계화 및 고령화 문제 등이 주로 논의됐다. 그러던 중 2008년 9월 리먼브러더스 사태에 따른 글로벌 금융위기가 시작되면서 선진국과 신흥국의 긴밀한 정책공조 필요성이 한층 커졌다. 이는 그해 11월 G20 정상회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G20 정상회의는 처음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한시적 협의기구의 성격이 강했지만 지난해 9월 제3차 피츠버그 정상회의 이후 세계경제 문제를 다루는 최상위 포럼으로 격상됐다. 김태균기자 windsea@seoul.co.kr
  • 美 “스파이 교환 승자는 우리”

    미국과 러시아의 스파이 맞교환 승자는 누구? 오스트리아 빈에서 9일(현지시간) 전격적으로 이뤄진 냉전 이후 최대 규모의 스파이 맞교환에 대해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진영에서 자신들이 ‘승자’라는 자평을 쏟아내고 있다. 반면 러시아는 말을 아끼고 있다. 양적으로 따지면 승자는 러시아다. 미국이 넘겨준 러시아 스파이는 10명이고, 러시아가 넘겨준 서방측 정보요원은 4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질적인 문제’로 들어가면 사정이 달라진다. 서방 진영이 넘겨받는 스파이는 수가 적은 대신 훨씬 더 비중 있는 인사들이라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이날 정보기관 전문가들의 발언을 인용해 맞교환의 승자는 미국과 영국이라고 규정했다. 이번에 러시아가 석방한 스파이 중에는 유럽에서 활동 중인 러시아 스파이들의 신원을 영국 정보기관에 넘겨준 러시아 육군 대령 세르게이 스크리팔, 핵잠수함 기술 등 군사기밀을 미국으로 빼돌린 이고르 수티아긴 등이 포함돼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부통령도 이날 제이 레노가 진행하는 NBC방송 ‘투나이트쇼’에 나가 “우리가 돌려받은 4명은 대단한 사람들이고, 추방한 10명은 오래 활동했지만 별 성과를 올리지 못한 사람들”이라고 주장했다. 10일자 가디언은 이번 교환이 전례를 찾아볼 수 없이 신속하게 이뤄진 것은 미·러 양측의 이 같은 ‘대치’가 냉전 때와 달리 아무런 이득이 없다는 공감대를 이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AP통신은 이번 스파이 맞교환에서 “분명한 승자는 없다.”고 평가했다. 통신은 양측이 냉전 이후 최대 스파이 맞교환 작업을 효율적으로 마무리한 것은 협력의 길을 찾을 수 있다는 메시지라고 밝혔다. 러시아 정부는 스파이 교환 이후 이렇다 할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다. 러시아 3대 뉴스 통신 등 주요 언론들도 지난 2주 동안 첩보영화와도 같은 이야기를 다루지 않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사실상 이번 사건에 대해 보도통제를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 미국 정부는 10명의 러시아 스파이들을 체포하기 2주 전에 이미 스파이 교환을 고려하기 시작했다고 BBC가 전했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사설] 천안함 제재와 6자회담 재개 따로 다루길

    유엔 안보리의 천안함 관련 의장성명 이후 한반도 정세는 변곡점을 맞고 있다. 북한의 6자회담 카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긴장이 고조될 수도 있고, 대화가 시작될 수도 있다. ‘포스트 천안함’ 국면으로 가는 갈림길이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은 그제 “6자회담을 통해 평화협정 체결과 비핵화를 실현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 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앞서 신선호 유엔 주재 북한대사도 똑같은 얘기를 읊조린 바 있다. 이른바 북한의 ‘천안함 출구전략’이다. 답답하고 다급한 쪽은 북한이라고 본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 악화설 속에 9월로 예정된 김정은의 후계승계에 차질이 빚어질까 봐 속이 타는 것이다. 아사자가 속출하는 식량난도 위협 요인이다. 한국과 미국의 서해 상 대규모 합동훈련 예고에 따른 중국의 안보불안감도 북한의 국면 전환을 재촉했다. 유엔 안보리가 ‘공격 주체’를 명시하지 않는 조건으로 의장성명을 채택하기로 합의한 이면에는 북한의 6자회담 복귀를 전제로 한 미국과 중국의 ‘빅딜’이 있었다는 분석이다. 의장성명 10조에서 내세운 ‘적절한 통로’와 ‘평화적 수단’은 6자회담을 지목하고 있다는 것이다. 북한 문제 전문가들도 북한이 밑질 것 없는 6자회담 카드 제시를 통해 천안함의 출구를 찾고 있다고 보는 데 이견이 없다. 전문가들은 북한에 또 다른 도발의 빌미를 주거나 한국·미국·일본과 북한·중국·러시아 간 ‘신냉전 체제’가 구축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선 천안함 해결, 후 6자회담 재개’를 견지해 온 우리 정부로서는 난감할 수 있다. 국민이 기대하는 시원한 제재나 책임자 처벌을 도출하지 못한 상황에서 섣불리 중국이 주도권을 쥔 6자 회담장으로 간다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다. 또 6자회담이 재개되면 중단된 지 2년째를 맞는 금강산 관광과 식량 및 경제지원 재개가 거론되면서 천안함은 실종될 수 있다. 우리의 생각도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한의 6자회담 복귀와 회담재개가 한반도의 긴장지수를 낮추는 방안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유일한 해법이라고는 보지 않는다. 중국의 무조건적인 ‘북한 감싸기’를 이번에 확인한 이상 중국 주도의 6자회담을 통한 비핵화와 평화협정 체결은 말잔치로 끝날 가능성이 크다. 차라리 천안함과 6자회담을 ‘투 트랙’으로 따로 다루는 것도 방법이다.
  • [열린세상] 국론분열 이대로 좋은가/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열린세상] 국론분열 이대로 좋은가/이성무 한국역사문화연구원장

    나라에 일이 있으면 국론이 양분되는 게 보통의 일일 것이다. 일리 있는 주장도 있겠지만 공론이 아닌 사론일 경우도 있다. 이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공론인 경우에는 지도자가 앞장서 조율을 해야겠지만 개인적인 이해관계나 당리당략에 의한 주장이라면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얼마 전 우리는 60년째 6·25전쟁을 맞이했다. 필자는 민족상잔의 비극 6·25전쟁을 직접 체험한 사람이다. 그때 한국은 세계에서 여섯 번째로 가난한 나라였다. 그런데 그 이후 60년 만에 세계 15위의 경제대국을 이룩해 놓은 것이다. 골드먼 삭스의 예측에 의하면 2025년에는 미국, 일본에 이어 한국이 GDP 기준 세계 3위, 2050년에는 미국 다음으로 세계 2위의 경제대국이 된다고 한다. 경이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국민도 일치단결해 노력했겠지만 이를 지도한 지도자들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부터 지금 대통령까지 온전하게 대접받는 사람이 없다. 비단 대통령뿐이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각 분야 발전에 기여한 사람이 많을 것이다. 설혹 이들에게 약간의 결함이 있더라도 좋은 점을 부각시켜 자손들이 이를 벤치마킹할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래야만 자손들이 미래의 비전을 제대로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이 국가발전과 민족문화 창달에 기여하는 길일 것이다. 서양 여러 나라엔 가는 곳마다 위인들의 동상이 즐비하다. 그들에게도 따져 보면 장점도 있고 약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표상으로 이들을 위인으로 키우고 있다. 그네들이 흠이 있는 것을 몰라서일까? 아닐 것이다. 그보다는 역사를 만들어 가자는 것이다. 조작하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그러면 우리는 왜 위인 만들기에 그토록 인색한가? 마음이 각박해서일까? 다른 나라에 비해 우리의 근·현대사는 극심한 격동기를 거쳐 왔기 때문이다. 그렇다 보니 이념이 자주 바뀌고 가치기준이 자주 변화한 것이다. 일제의 식민지를 겪다 보니 친일파 논쟁이 있게 되었다. 제국주의의 침략을 경험하다 보니 전통문화와 외래문화의 거친 충돌이 있게 되었다. 냉전을 거치다 보니 반공과 통일이 헛갈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각각 다른 기준으로 재단하다 보니 이 사람이 찬성하면 저 사람이 반대하고, 이 사람이 올려 세우려 하면 저 사람이 헐뜯는 형국이다. 이것은 사안마다 다른 것이 아니라 사회풍조로 굳어 가고 있다. 이러고도 국가가 잘될 리 없다. 의견을 조율해야 한다. 의견을 조율하려면 토론을 해야 한다. 토론을 하려면 상대방의 논지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파악해야 한다. 그런 다음에 절장보단(絶長補短)해 공동분모를 찾아내야 한다. 이른바 구동존이(求同存異) 화이부동(和而不同)이다. 공론에 의해 합의한 부분은 법률로 제정하고, 법률로 제정된 것은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준수해야 한다. 의견이 다른 것은 그대로 남겨두고 더 심도 있게 논의하는 게 필요하다. 그래도 안 되면 다수결로 결판을 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엄연한 민주주의의 원칙이 아닌가. 그런데도 지금 우리는 일마다 대립이요, 정책마다 반대 일변도다. 일찍이 고속도로를 놓을 때도 그랬고, 인천공항을 건설할 때도 상황은 별반 다르지 않았었다. 요즈음 세종시도 그렇고, 4대강 정비사업도 마찬가지다. 고속도로와 인천공항을 반대하던 사람은 지금 어디로 갔는가? 지금 그것을 만들지 않았으면 어떻게 되었을까를 생각하면 끔찍할 따름이다. 세종시도 그렇고, 4대강 사업도 그럴 것이다. 내일의 입지를 생각하면서 말을 하고 행동을 해야 한다. 각자가 주장하는 것에는 일리가 있는 부분도 있다. 애국심에서 말할 수도 있다. 그렇지 않고 개인의 이익이나 당리당략으로 무턱대고 반대한다면 역사의 심판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주장에 일리가 있더라도 국론이 분열되면 되는 일이 없으니 누군가가 이를 조율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지도자의 몫이다. 지도자의 리더십으로 양쪽의 의견을 절장보단해 합의점을 찾아야만 국가나 사회가 발전할 수 있는 것이다.
  • [씨줄날줄] 스파이 교환/이춘규 논설위원

    1962년 2월10일 독일 베를린과 포츠담을 잇는 그리니커 다리 동·서쪽 끝에 각각 한 사람이 섰다. 이들은 다리를 건너가 자국 인수팀에게 갔다. 미국과 소련의 첫 스파이 교환. 미국은 뉴욕에서 고정간첩 활동을 하다 검거한 소련 국가보안위원회(KGB) 대령 루돌프 아벨을 풀어줬다. 상대는 소련 영공에서 스파이 활동을 하다 미사일을 맞고 추락한 미 중앙정보국(CIA)의 U-2기 조종사 프랜시스 게리 파워스였다. 이런 스파이 교환은 양국의 복잡한 계산이 맞아떨어질 때 가능하다. 69년에는 영국 스파이 제럴드 브룩과 소련 스파이 피터 크루거 등의 교환이 이뤄졌다. 81년에는 동독 비밀경찰 권터 기욤과 서방 스파이의 교환이 이뤄졌다. 85년에는 동구권에 수감됐던 미국 스파이들과 폴란드 스파이 마리안 자차르스키가, 86년에는 러시아 반체제 인사 샤린스키를 포함한 3명의 서방 스파이와 KGB 스파이 코처 부부가 교환됐다. 냉전체제가 붕괴된 뒤에는 전형적인 스파이 교환보다는 외교관 맞추방으로 대체됐다. 스파이는 국가나 단체의 비밀정보를 대립관계에 있는 다른 국가 또는 단체가 이용할 수 있도록 주는 사람으로 간첩이라고 한다. 스파이는 인류 역사와 함께한다. 모세를 이은 유대 지도자 여호수아가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들어가기에 앞서 여리고에 2명의 첩자를 파견했다는 구약성서 내용도 있다. 김춘추의 목숨을 건 고구려 첩보전과 백제 왕실에 미녀 스파이를 침투시킨 신라의 교란전이 없었다면 삼국통일은 어찌 됐을지 모른다. 9일 미국과 러시아 간 스파이 교환이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뤄졌다. 미국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 등 러시아 스파이 10명과 러시아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미국 스파이 4명이다. 스파이 스캔들이 장기화될 경우 양국이 입을 외교적, 경제적 피해를 감안해 적절한 타협점을 찾은 것. 냉전 종식 이후 최대 규모의 스파이 교환이다. 교환장소로 왜 빈이 등장할까. 19세기 말부터 오스트리아 빈은 세계 정보유통의 중심이었다. 빈은 동서유럽의 중간지대다. 1차대전을 전후한 유럽의 혼란기 때는 망명객과 난민들이 빈으로 쏟아져 들어와 정보를 교환했다. 2차대전 후 냉전체제 아래서의 빈은 중립국 수도였기 때문에 동·서독이 대치하던 독일 베를린과 함께 유럽대륙의 양대 스파이 중심지였다. 냉전이 종식된 현재도 빈에는 2000~3000명의 스파이들이 산업, 기술, 외교안보 분야에서 암약 중인 것으로 추정된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美-러 냉전이후 첫 스파이 맞교환

    美-러 냉전이후 첫 스파이 맞교환

    미국과 러시아가 8일(현지시간) 각각 자국에 수감 중인 스파이 ‘맞교환’에 합의, 최근 불거진 미국 내 러시아 스파이 사건을 11일 만에 속전속결로 매듭지었다. 과거 동서로 분단돼 있던 독일 베를린에서 스파이를 교환하는 대신 스파이들을 유죄 판결한 뒤 사면을 통해 해외로 추방한 형식을 빌렸다. 맞교환은 중립국인 오스트리아 빈에서 이뤄졌다고 미국 법무부가 밝혔다. 양국 언론들은 미국 전세기와 러시아 정부 비행기가 9일 빈 국제공항의 활주로 외곽 구역에서 잠시 머무는 동안 스파이가 맞교환됐다고 보도했다. 러시아 비행기는 이날 오후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미국 전세기는 영국에 착륙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최종 행선지는 분명치 않다. 미국과 러시아는 ‘미녀 스파이’ 안나 채프먼 등 미국에서 활동하다 지난달 27일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 전원과 러시아에서 미국과 영국 등 서방 정보기관을 위해 암약한 혐의로 감옥에 있는 러시아인 4명을 각각 풀어 주기로 합의했다. 이 같은 대규모 스파이 맞교환은 20여년 전 베를린 장벽 붕괴, 동서냉전이 종결된 이후 처음이다. 풀려나는 러시아인 4명은 핵잠수함 기술 등 군사기밀을 미국으로 빼돌린 혐의로 15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던 이고르 수티아긴 박사, 영국을 위한 첩보활동으로 13년 형을 받은 세르게이 스크리팔, 알렉산데르 자포로즈스키, 제나디 바실렌코 등이다. 4명 가운데 3명은 러시아 군인과 정보기관원이다. 미·러 양국은 신속한 합의 이행을 위해 폴리바게닝(유죄인정조건 형량 감경)과 대통령 사면 형식을 취했다. 실무는 미국 중앙정보국(CIA)과 러시아 해외정보국(SVR)이 맡았다. 미국 뉴욕 법원은 이날 ‘러시아 정보원으로 활동한 죄’로 기소된 스파이 10명이 스스로 혐의를 시인하자 체포된 이후 구금된 날짜만큼만 형을 선고한 뒤 즉각적인 추방 및 재입국 금지를 명령했다. 러시아 정부도 이날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이 자국민 수감자 4명을 사면했다고 발표했다. 마크 토너 미 국무부 부대변인은 “국가안보와 인도주의 차원에서 신속하고 포괄적인 해법을 찾기 위한 결정이 이뤄졌다.”면서 “러시아 스파이 10명을 장기 구금해서 얻을 수 있는 중차대한 국가안보상 이익이 없다.”고 밝혔다. 합의에 대해서는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 주요 현안들에서의 협력을 위해 성사시킨 정치적 거래라는 평가가 주를 이루고 있다. 서방 언론들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역점을 두고 있는 대(對) 러시아 관계 재설정, 핵무기 감축, 이란 핵프로그램 저지 등과 관련해 러시아의 도움이 필요한 미국과 세계무역기구(WTO) 가입 때 미국의 지지를 얻으려는 러시아가 타협점을 찾은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버락 오바마 행정부가 대러시아 외교에서 유약하다는 공화당 측 비난을 야기할 수 있고, 법적 안정성을 해쳐가며 나쁜 전례를 남김으로써 앞으로 미국에서 불법적으로 활동하는 외국 스파이 문제를 처리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는 부정적인 관측도 없지 않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美, ‘안나 채프먼’ 비롯 러시아 스파이와 협의 성사

    美, ‘안나 채프먼’ 비롯 러시아 스파이와 협의 성사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의 스파이 사건과 관련해서 스파이 맞교환에 합의했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는 8일(현지시각) 미국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 전원과 러시아에서 서방 정보기관과 접촉한 혐의로 구금돼 있던 4명을 각각 풀어주기로 했다. 미국 법원에 따르면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은 범죄사실을 인정했고 대신 형을 감경받는 ‘플리 바게닝’에 동의했다. 이에 미국은 이들 전원에 대한 즉각적인 추방을 명령했다고 알려졌다.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85년에 스파이를 맞교환한 전례가 있으나 이번 맞교환은 냉전시대 이후 최대 규모다. 한편 안나 패프먼은 체포된 러시아 정보요원 10명 가운데 톱모델 못지 않은 미모로 언론의 관심을 뜨겁게 받은 바 있다. 사진 = ‘뉴욕포스트’ 동영상 화면 캡처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
  • 美, ‘안나 채프먼’ 비롯 러시아 스파이와 협의 성사

    美, ‘안나 채프먼’ 비롯 러시아 스파이와 협의 성사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의 스파이 사건과 관련해서 스파이 맞교환에 합의했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는 8일(현지시각) 미국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 전원과 러시아에서 서방 정보기관과 접촉한 혐의로 구금돼 있던 4명을 각각 풀어주기로 했다. 미국 법원에 따르면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은 범죄사실을 인정했고 대신 형을 감경받는 ‘플리 바게닝’에 동의했다. 이에 미국은 이들 전원에 대한 즉각적인 추방을 명령했다고 알려졌다.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85년에 스파이를 맞교환한 전례가 있으나 이번 맞교환은 냉전시대 이후 최대 규모다. 한편 안나 패프먼은 체포된 러시아 정보요원 10명 가운데 톱모델 못지 않은 미모로 언론의 관심을 뜨겁게 받은 바 있다. 사진 = ‘뉴욕포스트’ 동영상 화면 캡처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
  • 美, ‘안나 채프먼’ 비롯 러시아 스파이와 협의 성사

    미국과 러시아가 양국 간의 스파이 사건과 관련해서 스파이 맞교환에 합의했다. 외신에 따르면 미국과 러시아는 8일(현지시각) 미국에서 활동하다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 전원과 러시아에서 서방 정보기관과 접촉한 혐의로 구금돼 있던 4명을 각각 풀어주기로 했다. 미국 법원에 따르면 체포된 러시아 스파이 10명은 범죄사실을 인정했고 대신 형을 감경받는 ‘플리 바게닝’에 동의했다. 이에 미국은 이들 전원에 대한 즉각적인 추방을 명령했다고 알려졌다. 미국과 러시아는 냉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던 1985년에 스파이를 맞교환한 전례가 있으나 이번 맞교환은 냉전시대 이후 최대 규모다. 한편 안나 패프먼은 체포된 러시아 정보요원 10명 가운데 톱모델 못지 않은 미모로 언론의 관심을 뜨겁게 받은 바 있다. 사진 = ‘뉴욕포스트’ 동영상 화면 캡처 서울신문NTN 이효정 인턴기자 hyojung@seoulntn.com
  • “전세계를 인류애로 묶는 데 유엔이 앞장서길”

    “전세계를 인류애로 묶는 데 유엔이 앞장서길”

    “저는 일생 동안 유엔의 위대한 변화를 목격해 왔습니다. 유엔은 전 세계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하는 역할을 맡았고, 기아에 허덕이는 수백만명의 사람들에게 인도주의적 지원을 제공했습니다. 유엔은 앞으로도 세계적 위협에 대응하는 선봉장이 돼야 합니다.” ●“나는 유엔의 위대한 변화 목격한 사람” 6일(현지시간) 미국 뉴욕의 유엔본부 연단에는 31세의 젊은 엘리자베스 2세 영국 여왕이 아닌 84세의 온화한 여왕이 서 있었다. 젊은 군주가 찾았던 53년전 유엔은 50여개국만이 참여했던 국제기구였지만 이젠 전 세계를 아우르는 거대 조직으로 변모했다. 영국 특유의 억양이 묻어나는 한마디 한마디에는 패기와 열정 대신 부드러움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메시지는 명료하면서도 단호했다. 미국을 방문 중인 영국여왕이 영연방 16개국의 대표로서 192개 유엔 회원국 대표들이 참석한 총회에서 연설하기는 53년 만이다. 7분 동안 이뤄진 연설에서 여왕은 “1957년 내가 처음 이곳을 방문했을 때는 고작 3개의 조직만이 해외에 있었다.”면서 “그러나 지금은 12만명이 넘는 구성원이 26개 조직에서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고 유엔의 변화된 위상을 평가했다. 이어 “고결한 포부에서 시작된 유엔은 이제 전 세계인의 이익을 실제로 추구할 수 있는 위상을 갖췄고, 이 자체만으로도 위대한 업적”이라고 강조했다. ●“테러리즘·기후변화에 대응” 당부 여왕은 유엔이 진정한 국제연합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서는 새로운 역할을 만들어 나가야 한다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유엔은 국가간 분쟁을 줄이고, 모든 이들에게 인간애를 전파해야 한다.”면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전 세계인들에 대해 항상 깊이 고민하고 행동해 달라.”고 당부했다. 특히 이번 세기에 유엔이 집중해서 풀어야 할 과제로는 테러리즘과 기후변화에 대한 대응을 꼽았다. ●반 총장 “이 시대의 진정한 닻” 반기문 사무총장은 환영연설에서 “이 시대의 진정한 닻이며 우아함과 지조, 존엄의 상징”이라고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을 소개했다. 반 사무총장은 “53년 전 이 자리에서 여왕은 ‘평화와 정의, 번영을 위해 유엔이 얼마나 헌신하느냐에 따라 세계의 미래가 정해질 것’이라고 강조했다.”면서 “여왕의 정신은 냉전시대의 위험이 지구온난화 위험으로 바뀌고, 비틀스와 텔레비전이 베컴과 트위터로 변해온 오늘날까지 시대를 뛰어넘어 힘을 발휘하고 있다.”고 존경의 뜻을 표시했다. 연설을 마친 여왕은 남편 필립공과 함께 2001년 9·11테러로 사라진 맨해튼의 세계무역센터 자리 ‘그라운드 제로’를 방문, 영국인 희생자 추모공원 개장식에 참석했다. 박건형기자 kitsch@seoul.co.kr
  • [한·일 100년 대기획] 기로에 선 일본의 미래-야마구치 지로 일본정치학회 이사장

    [한·일 100년 대기획] 기로에 선 일본의 미래-야마구치 지로 일본정치학회 이사장

    1980년대 ‘일본의 시대’를 거쳐 세계 제2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한 일본은 1990년대 이후 거의 20년 동안 거품경제의 그늘에 갇혀 있다. 그동안 몰라보게 커진 중국 세력에 밀려 정치와 경제 대국의 지위마저 빼앗길 위기에 몰린 일본은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 있다. 실제로 정치와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서 이런 현상들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해 8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일본 정치를 좌지우지하던 자민당의 독주시대가 끝나고 민주당 정권이 들어섰다. 경제도 거품이 걷히고 플러스 성장의 여명이 비치고 있지만 임금삭감과 소비침체 현상이 여전하다. 중산층이 무너져 양극화가 심해지고 있기도 하다. 세기적인 전환기에 놓여 있는 일본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일본 정치학회 이사장을 맡고 있는 야마구치 지로 홋카이도대 교수를 통해 일본의 정치와 경제, 사회의 미래를 조망해 본다. 야마구치 교수는 민주당의 정책자문단으로 민주당의 주요 정책을 만드는 데 깊이 관여하고 있다. 인터뷰는 2일 도쿄 신바시의 도쿄다이치 호텔에서 이뤄졌다. →참의원 선거를 앞두고 있다. 이번 선거가 일본의 미래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간 나오토 총리가 취임한 뒤 민주당 정책이 크게 바뀌었다. 야당 때는 민주당이 내세운 공약이 많이 불완전했다. 하지만 민주당이 정권을 잡은 지난 9개월간 예산 편성 때 무엇이 불충분했는지 알게 됐다. 여당이 된 뒤 정책수준이 많이 높아졌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뒤 단행한 세제개혁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달라진 모습은 일본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다. →선거에서 소비세 인상이 최대 쟁점이 될 전망이다. 그러나 간 총리가 소비세 10% 인상을 발표한 뒤 내각과 민주당 지지율이 하락하고 있다.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선거를 치르면서 소비세 인상에 대한 논쟁을 많이 벌일 것이고, 야당으로부터 공격도 수없이 받을 것으로 본다. 하지만 소비세 인상은 간 총리가 선제공격을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내각과 민주당에 대한 지지율보다 국민을 위해 각오한 것이다. 선거에서 악재가 될지 모르겠지만 일본의 미래를 위한 진지한 자세다. →민주당은 화려한 매니페스토(정책공약)를 제시했다. 하지만 후텐마기지 이전 문제, 아동수당 지급을 위한 재원 부족 등의 문제로 하토야마 유키오 정권이 예상보다 빨리 물러나게 됐다. 민주당이 너무 이상에 치우친 정치를 실현하려는 것은 아닌가. -매니페스토가 이상적이라는 비난을 받고 있다. 하토야마 전 총리의 개인적인 성격으로 인해 정책목표를 실현하는 데 실패했다. 처음 정권을 잡아 시행착오로 겪은 것이다. 간 총리의 태도는 현실적인 것으로 느껴진다. →야마구치 교수는 민주당의 ‘생활제일’ 슬로건을 제창한 것으로 알고 있다. 일본에 생활제일 정치가 실현될 수 있다고 보나. -정치가 뜬 구름 잡기 식이 아닌 현실적인 생활제일을 실현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재원이 부족하기 때문에 어려울 것으로 생각된다. 야당 때는 충분하다고 생각했지만 세제개혁을 통해 재원을 확보하고 조세를 높이는 시도를 하고 있다. 그러나 여권 내에서 이것을 리드할 사람이 많지 않다. 재무성도 호의적으로 생각하고 있지 않다. 결국 지출에 대한 의료나 연금, 간호 등 사회보장에 대한 정책을 펴나가야 하는데 간 총리가 어떻게 헤쳐 나갈지 볼 것이다. →일본이 동북아 정세를 어떻게 풀어야 하나. 천안함 사건 이후 동북아가 ‘신냉전시대’로 가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동북아에 긴장감이 높아지고 있다. 민주당이 외교·안보 분야에서는 자민당과 다른 길을 가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되기는 힘들 것으로 보인다. 현재로선 한·미·일의 공조가 현실적이다. →향후 미·일 관계를 어떻게 설정해야 하나. 하토야마 정권은 결국 미국과의 관계 설정을 못해 물러난 것이 아닌가. -장기적인 테마다. 안보문제는 축소할 필요가 있다. 이 문제는 20년 정도 걸려야 해결된다고 생각해야 한다. 미국과의 문제는 당장 바꾸기는 힘들고 안될 것이다. 민주당은 외교 면에서 과거사 문제에 대해서는 좋게 평가를 받을 수 있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이 점이 자민당과 다르다. 일·미 변화는 당분간 어렵고 민주당은 야당이었기 때문에 외교 문제에 대한 충분한 노하우도, 인재도 없어 하토야마 정권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 평화헌법을 개정하자는 움직임도 있다. 전쟁 포기를 명시한 헌법 9조가 핵심이다. -가까운 시일내 개헌은 있을 수 없다. 국민투표법이 시행됐지만 헌법을 바꾸려면 중의원, 참의원 의석 3분의2 이상이 찬성해야 한다. 보수 신당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하는데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민주당 내에서도 대부분의 의원들이 이 부분에 관심이 없다. 경제, 사회 등 국내 문제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헌법 개정에 대한 관심을 둘 여력이 없다. →일본은 ‘잃어버린 10년’을 지나 ‘잃어버린 20년’이라는 얘기를 들을 정도로 장기 불황에 빠져 있다. 일본이 거품경제를 극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을 것인가. -2003년부터 2006년까지 경기회복의 기운이 있었다. 거품경제가 사라지는 시기로 기대를 모았다. 수출산업이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결국 국내총생산(GDP)이 하락하고, 노동법 완화 등을 통한 기업들의 이익에 문제가 생겼다. 그렇다고 GDP를 올려야 하고, 경제성장에 매진하는 게 꼭 필요한 것인지 회의가 든다. 고이즈미 정권 때 GDP는 올라갔지만 임금을 줄이고, 지방자치금을 삭감해 지금과 같은 문제가 발생했다. →도요타 리콜 사태를 어떻게 보는가. 도요타 사태는 단순히 자동차 업체의 부품 결함 문제가 아니라 일본의 ‘모노쓰쿠리’(제조) 정신이 붕괴하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원가절감 등의 이유로 기술부문을 해외로 이전하는 과정에서 국내 현장에서 숙련된 노동자들이 갖고 있던 고품질을 유지하지 못해 문제가 생긴 것으로 본다. 대학교도 종신고용보다 비상근 교수들이 많아졌다. 이런 고용 문제가 도요타뿐만 아니라 여러 분야에서 발생하고 있다. →일본은 양극화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1억 총중류’(總中流)가 깨지고 ‘워킹푸어’(Working Poor·근로 빈곤층)가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도 있다. -분배 방법을 바꾸어야 한다. 노동법이 완화됐지만 일본 노동자의 3분의1이 정사원이 아니다. 충분한 임금을 주어야 하는데 민간기업이 반대하기 때문에 상당히 어렵다. 노동자가 주 40시간 일하고 최저 임금을 받을 경우 생활보호 대상자보다 적은 돈을 받는다. 노동자가 인간답게 살 수 있도록 주택·의료·고용·노후문제를 생각해야 한다. 특히 주택을 적절한 가격으로 공급할 수 있도록 하는 게 당장 정부가 해야 할 일이다. 예를 들어 13~14만엔의 최저 임금을 받는 부부가 맞벌이를 해서 아이들을 대학까지 보내려면 너무 힘들다. 일본에선 교육비가 너무 비싸다. 특히 젊은 부부의 경우 자녀를 보육원에 맡겨야 하는데 보육원 시설이 너무 열악하고 숫자도 너무 적다. →일본의 저출산, 고령화가 심화되고 있는데. -당장 뾰족한 묘안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젊은이들이 결혼도 하지 않고, 아이를 낳지 않겠다는 것은 심각한 문제다. 20~30년 전만 해도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만 하면 안정권에 들어갔다고 생각했다. 젊은이들을 정부가 지원해 줘야 한다. 그런데 해당 재원을 노인층으로부터 끌어내야 하는 탓에 상당히 어렵다. 60~70대들은 일본의 고도 성장기에서 일을 한 사람들로 연금과 퇴직금을 비교적 풍부하게(평균 매달 20~30만엔 수령) 받고 있다. 상속세를 크게 늘리고, 금융자산에도 과세를 해서 그러한 재원으로 젊은이들을 지원하는 게 빠른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에서는 올해 한·일 강제병합 100년을 맞아 과거사에 대한 일본의 전향적인 발표가 있기를 기대하고 있다. -총리의 담화 등이 가능하다고 본다. 간 총리는 외교에 대해 잘 몰라 이 분야에 대해서는 센고쿠 요시토 관방장관에게 많이 의지한다. 센고쿠 장관은 동아시아 교류에 진력해 왔기 때문에 무엇이든 준비할 것으로 알고 있고, 한국 입장에서는 기대를 해도 좋다고 본다. →차기 100년을 향해 일본이 한국에 할 수 있는 일은. -일본 지도자가 불행했던 과거사에 대한 사죄를 한 다음에 21세기를 위한 동아시아시대를 만들어 나가는 게 가장 바람직하다. 중학교 1학년부터는 주 1시간만이라도 한국어를 가르쳐야 한다. 그래야만 양국이 더 가깝게 될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다. 지방 참정권은 우파의 반대가 너무 커 민주당이 적극적으로 해결하기엔 엄청난 정치적인 부담을 안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해결될 것으로 본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러 스파이 파문 일파만파

    러 스파이 파문 일파만파

    “붉은 머리, 푸른 눈동자의 미모의 사업가, 그녀는 러시아 스파이였다.” 언론인과 컨설턴트 등 미 연방수사국(FBI)이 체포한 러시아 정보요원들의 신상 관련 전모가 솔솔 새어 나오면서 파문이 더욱 확산되고 있다. 당사국인 미·러 외교당국은 최근 두 나라 정상이 심혈을 기울여온 관계 ‘재설정’ 분위기에 미치는 악영향을 최소화하려 부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아랑곳없이 냉전 첩보물을 뺨치는 러시아 정보요원들의 활동과 그들의 면면에 쏠린 관심은 커져만 간다. FBI가 기소한 러시아 정보요원 가운데 28세 러시아 여성 사업가 안나 채프먼은 군계일학. 29일(현지시간) abc 방송에 따르면 그녀는 상류층 전용 클럽을 드나들며 사교계 거물로 활동했다. 값비싼 옷에 명품으로 치장한 그녀는 통 큰 씀씀이와 넓은 교제관계로 “억만장자 아니면 창녀”라는 입방아에 오르곤 했다. 그녀의 자산은 200만달러(약 24억원)로 알려졌다. 백악관과 재무부 자문위원을 역임한 경제학자 누리엘 루비니 뉴욕대 교수도 그녀의 페이스북 친구였을 정도다. 하지만 루비니 교수는 “파티에서 한두 번 본 적은 있지만 개인적으로 만난 일은 없다.”고 일축했다. 금융업체 부사장까지 지낸 신시아 머피는 뉴욕 유명 벤처 투자자였다. 힐러리 클린턴 국무장관과 민주당의 주요 정치자금 조성책 앨런 패트리코프의 계좌를 관리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연봉 13만 5000달러(약 1억 6450만원)를 받는 등 부족함 없는 생활을 했다. 뉴욕에서 20년간 언론인으로 활동해온 페루 국적 칼럼니스트 비키 펠리즈(55)도 있다. 그는 러시아 관계자에게서 돈을 받는 장면을 포착당했다. 하버드와 매사추세츠공대(MIT) 등 대학 근처에 컨설팅사를 운영하면서 과학기술 발전 방향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 정보요원도 체포됐다. 러시아 외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러시아 국민이 미국에서 체포됐다는 사실을 확인하면서도 “미국이 최근 우호가 증진되는 양국 관계의 긍정적인 측면을 감안해 이번 사건에 대한 적절한 분별력을 보여줄 것으로 믿는다.”고 압박을 가했다. 이에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정보요원 체포는 법 집행 문제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이날 기자들에게 두 차례에 걸쳐 관련 질문을 받았지만 두 번 모두 코멘트를 거절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주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러시아 대통령을 백악관에서 접견하기 전에 이 사건에 대해 보고 받았지만 정상회담에선 이 문제를 거론하지 않았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美·러 아직도 스파이전쟁중

    미국과 러시아의 스파이 전쟁은 냉전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진행되고 있었다. 미국 법무부는 28일(현지시간) 러시아 정보요원 10명을 기소했다고 밝혔다. AP통신은 29일 미 연방수사국(FBI)이 러시아 대외첩보부(SVR) 소속 비밀요원들을 몇 년 동안 추적한 끝에 체포했다고 전했다. 이들은 뉴욕, 워싱턴, 보스턴 시외에 거주하는 평범한 직업을 가진 부부들로 위장하고 있었다. 기소장에 따르면 이들은 정책입안자 모임에 침투하고 미국의 정치 상황과 안보전략은 물론 백악관과 정치인에 관한 각종 소문, 고위관리 신상 정보 등 다양한 분야의 정보 수집에 동원돼 왔다고 AP가 전했다. 이들은 평범한 생활을 하면서 정보를 수집해 왔기 때문에 추적이 쉽지 않았다. FBI 요원들은 혐의자들의 집에 도청장치를 설치하고, 비디오 카메라로 행동을 추적했으며 이메일과 전화통화를 감시했다. 러시아 스파이들은 암호화된 무선전보나 폐지된 사이트를 이용했다. 또 특정 주파수에서만 암호를 받을 수 있는 무선장치나 비디오 및 오디오 파일에, 특별한 소프트웨어 프로그램을 통해서만 볼 수 있는 스테가노그래피까지 활용했다. FBI는 혐의자들이 유엔 주재 러시아대표부 직원을 포함한 러시아 관리들로부터 빈번히 돈가방과 돈 뭉치를 전달받는 모습들도 확보했다고 밝혔다. 한 혐의자는 공원 벤치에서 현금이 든 쇼핑백을 건네받기도 했고 다른 혐의자들은 다른 스파이가 땅속에 묻어놓은 돈다발 봉지를 파내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이에 대해 SVR 대변인은 공식적인 입장을 표명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미 당국이 이 문제에 대해 설명하기를 바란다.”며 반발했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국적도 특정체제도 세대도 정치도 탈피… ‘열린 애국주의’ 새지평 열다

    국적도 특정체제도 세대도 정치도 탈피… ‘열린 애국주의’ 새지평 열다

    “억눌려 있던 성역과 금기의 틀이 무너졌다.”(2002년 한·일 월드컵) “광장의 자발성과 쾌락의 상호주의가 넓어졌다.”(2010년 남아공 월드컵)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은 2010 남아공 월드컵 16강전에서 승전보를 멈췄다. 하지만 보름간의 축제는 이미 전국을 뒤흔들었다. 각계 전문가들은 이번 월드컵이 남긴 의미를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되짚었다. 2002년과 2010년의 월드컵이 모두 ‘16강 진출’의 성과를 거뒀고 우리 사회에 적지않은 변화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한·일 월드컵은 자발성과 역동성을 던져줬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경제위기가 불러온 상실감을 잊게 했다. 또 냉전세대의 ‘관제문화’ 대신에 대중 주도의 자율적인 문화가 넘쳐났고, 이는 그 해 대선의 에너지로 작용했다. 물론 ‘집단적 애국주의’라는 논란도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당시로선 새로운 경험이었다. 이에 견줘 남아공 월드컵은 2002년의 새로움을 이어가면서도 한층 진한 흔적을 남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집단적 애국주의가 ‘자유주의·개인주의적 애국주의’로 이동했다. 국적을 뛰어넘어 즐거움을 나누려는 젊은 선수들과 젊은 응원단이 서로 소통하며 동질성을 공유했다. 문화평론가인 이택광 경희대 교수는 “‘대~한민국’처럼 국가명을 응원구호로 외치는 경우는 드물다. 2002년 거리응원에서 처음 불려진 국가의 이미지가 2010년에는 더욱 밝아졌다.”고 평가했다. 8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국민들의 마음에 ‘대한민국’이 내재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분석이다. 2002년이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의 존재를 확인하는 계기였다면 2010년은 이를 뛰어넘어 세계가 대한민국을 주목한다는 것을 깨닫게 됐다는 설명이다. 이는 월드컵의 즐거움을 공유하는 태도도 변화시켰다. 새벽 거리응원을 마치고 쓰레기를 줍는다거나 일상으로 차분히 복귀하는 모습이 이런 변화를 상징한다. 김윤철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 연구원은 “외국처럼 국수주의와 결합된 홀리건적 문화로 흐르지 않고 우리는 일상과 조화를 이룬 축제로 만들었다.”고 말했다. 우리는 상대팀이 이겨도 야유와 비난을 퍼붓지 않았다. 비록 16강전에서 승리는 멈췄지만 아쉬움과 원망보다 “보름 동안 즐거움을 줘서 고맙다.”고 화답하는 성숙함을 보였다. 북한팀의 ‘정대세 신드롬’에서 볼 수 있듯 애국주의는 더 이상 이념과 체제에 대한 지지가 아니었다. 이 교수는 “국가에 대한 자신감이 강해지는 만큼 상대편 국가를 더욱 인정하게 됐다.”면서 “이는 내가 즐기는 만큼 너도 즐길 수 있다는 ‘쾌락의 평등주의’를 심화시켰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와 김 연구원은 이를 두고 ‘열린 애국주의’ 혹은 ‘한국식 애국주의’라고 통칭했다. 이같은 변화는 ‘세계화’의 영향과 무관치 않다. 박지성·이청용·이영표 등 해외파 선수가 많아지면서 탈국적 애국주의가 태동했다. 중산층들의 해외 이주가 늘면서 개방에 대한 인식도 커졌다. 응원을 주도한 계층의 변화도 이런 흐름의 요인으로 작용했다. 386세대(2002년)에서 10~20대(2010년)로 응원 주체가 변했다. ‘차미네이터’ ‘잔디남’ ‘동방예의지 슛’ 등의 신조어는 스마트폰 세대의 축제 코드를 대변했다. 김호기 연세대 교수는 “2002년에 비해 젊은 세대의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인 특징이 공동체주의와 결합돼 탈정치적인 현상이 심화됐다.”고 바라봤다. 구혜영·신진호기자 koohy@seoul.co.kr
  • [2010 한국전쟁 60주년 화해의 원년] 7월 좌익 10월 우익 학살… 1950년엔 모두 희생자였다

    [2010 한국전쟁 60주년 화해의 원년] 7월 좌익 10월 우익 학살… 1950년엔 모두 희생자였다

    전남 영암군 군서면 구림마을 주민 정석재(61)씨는 23일 나지막한 동구림리 야산을 가리키며 좌·우익, 가해자·피해자 구별 없이 한국전쟁 희생자 262명의 원혼을 위로할 ‘용서와 화해의 위령비’(위령벽)를 세울 터라고 말했다. 그는 ‘군서면 위령비 건립추진위원회’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 위령비를 건립할 5000여㎡ 공터 아래쪽에는 ‘지와목 방화 사건’ 때 좌익에 의해 희생된 민간인 28명을 기리는 순절비(1976년 제막)가 이미 자리하고 있었다. 돌계단을 내려가면 서기 405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스카 문화를 꽃피운 백제인 왕인 박사의 유적지가 바로 건너다 보였다. 이곳이 한국전쟁 때 민간인 학살이 반복된 참극의 현장이다. 구림마을을 휩쓸고 간 ‘전쟁의 상흔’은 한반도 그 어느 지역과 다르지 않다. 이웃끼리 죽고 죽이는 야만적인 보복 학살이 이어졌다. 마을은 불신과 공포로 뒤덮였다. 1950년 7월 영암경찰은 후퇴하면서 국민보도연맹원 20~30명을 월출산 자락의 도갑산 골짜기 등에서 처형했다. 그러다 인민군이 점령하자 좌익 유가족들은 과거 경찰·경찰지서에 자주 드나들거나 협조한 사람들을 색출해 살해했다. 10월 초에는 좌익 세력이 잇따라 방화사건을 일으켰다. 특히 7일에는 우익 인사와 기독교인 28명을 자와목에 있는 주막에 가두고 불을 지르기도 했다. 그로부터 열흘이 지난 17일 오전 6시 경찰 공비토벌부대가 ‘구림 첫 포위사건’을 저질렀다. 3개 소대가 ‘좌익의 근거지’라며 부녀자, 아이까지 무차별 살해한 것. 대나무 숲이나 마루 밑에 숨었던 사람들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했다. 그러나 인민군에 부역하거나 협조했던 사람들은 이미 마을을 떠나고 없었다. 이런 참극이 되풀이돼 불과 반년 만에 민간인 262명이 학살됐다. 그러나 다른 지역과 달리 구림마을은 ‘전쟁의 상처’를 용서와 화해로 치유하고 있다. 2006년 11월17일부터 ‘과거사를 용서와 화해로 이루고자 한다.’는 명분으로 가해자·피해자 구별 없이 희생자의 위패를 함께 놓고 합동위령제를 올렸다. ‘용서와 화해’로 가는 첫발은 험난했다. 적극적으로 좌익·우익 활동을 한 사람들까지 ‘희생자’에 포함시켜야 하느냐는 논란이 거셌다. 친정에 왔다가, 피란 왔다가 억울하게 희생된 사람들과 그들은 다르지 않으냐는 문제제기였다. 주민들은 마을 역사를 담은 ‘호남명촌 구림’을 공동집필하며 의견을 모아 갔다. “냉전체제 속에서 약소 민족이 겪은 불행한 전쟁이다. 그래서 역사 앞에서 모두가 희생자다.”는 결론을 내렸다. 구림마을 주민들은 2006년부터 이 같은 화해와 용서의 다짐을 새길 위령비 건립을 추진하고 있다. 높이 4m, 길이 7m의 위령비는 무덤을 뚝 자른 모양으로 제작될 예정이다. 여기에 월출산을 밑그림으로 그려 넣고, 골짜기마다 희생당한 262명의 이름을 새겨 넣는다는 구상이다. 올해 위령제(11월17일) 전까지 착공하기로 했지만 만만찮은 건립비 마련이 걸림돌이다. 주민은 성금 2000만원을 모았지만, 영암군이 약속한 8000만원이 아직까지 지원되지 않고 있다. 정 사무국장은 “정부의 관심이 부족해 예산 확보가 어려운 형편”이라고 말했다. 530년간 대를 이어 구림마을에서 살아온 현삼식(62)씨는 “위령비 건립은 비극적인 역사를 다시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약속”이라면서 “이스라엘의 ‘통곡의 벽’처럼 생생한 역사교육의 현장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2005년 좌·우 희생자 374명을 아우르는 유족회를 결성한 전남 나주시 다도면 주민들은 희생자를 기리는 위령비를 건립해 다음 달 제막식을 갖는다. 나주시가 3000만원을 지원해 성사됐다. 화해를 상징하며 ‘맞잡은 두 손’을 위령비 재단에 그려 넣었다. 다도면 주민 374명이 1948년 11월부터 1951년 5월까지 좌익 세력과 군·경에 학살당한 상처를 덧내지 않고 기록으로 남겼다. 영암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北통제’붕괴… 외부개방 시작 인적교류 확대 南北 모두 이익

    [오늘 한국전쟁 60주년] ‘北통제’붕괴… 외부개방 시작 인적교류 확대 南北 모두 이익

    미국의 저명한 한반도 냉전사 전문가인 캐슬린 웨더스비 존스홉킨스 국제대학원 교수는 “북한에서는 이미 김일성체제로부터의 이반현상이 진행되고 있다.”면서 “한국 등은 북한 지도층이 국제적으로 고립되지 않도록 이들에게 외부세계와의 접촉 기회를 늘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한국에서 열리는 한국전쟁 60주년 기념 학술대회 참석차 워싱턴을 출발하기 직전인 지난 22일 전화인터뷰를 가졌다. →한국전쟁 발발 60주년이 한반도와 동북아 안보에 갖는 의미는. -남북한간 갈등은 1945년 해방과 함께 시작됐다. 서로 다른 정치적 비전을 놓고 경쟁해 왔다. 65년이 지난 지금 북한의 공산주의는 경제적으로 실패했고, 한국의 자본주의는 경제적으로 대성공했다. 더 복잡한 문제는 남북한간 어느 정권이 국가적 정통성을 인정받느냐인데, 이는 다른 나라들과의 관계가 매우 중요하다. 결국 남북한 문제는 공동의 비전을 갖고 주변국들과 이 문제를 어떻게 다뤄나갈 것인지 결정될 때까지 해결되기 어렵다고 본다. 남북한은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으로 시작해 사람들의 왕래를 늘리고 국경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천안함 사태를 계기로 한·미·일과 북·중·러의 신냉전체제가 구축된 것 아니냐는 주장이 있는데. -신냉전의 시작은 아니다. 중국이 북한을 어느 정도 지지하지만 1950년처럼 전적으로 지지하는 상황은 아니다. 중국은 북한 정권의 붕괴에 따른 급작스러운 혼란과 국경의 붕괴를 우려하고 있다. →북한의 변화 가능성은. -2008년 6월 북한을 다녀왔다. 북한에서는 많은 변화들이 일어나고 있었다. 점진적이지만 김일성 구(舊)체제로부터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고 본다. 아래로부터의 변화 압력을 받고 있다. 얼마 전 시장에 대한 규제를 모두 해제한 것은 매우 중요하다. 북한 주민들은 정권에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게 되고 점점 자율적으로 변하게 된다. 북한 지도부의 경우 김정일 생전에는 큰 변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김정일 사후에는 군부나 김정일 측근·가족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로 전환하든, 3남인 김정은이 후계를 잇든 간에 현재와는 매우 다를 것이다. 중국·베트남처럼 공산주의 정권을 유지하면서 변화가 가능할지 지켜봐야 한다. →김일성체제로부터의 변화라는 건 무엇을 뜻하나. -우선 경제체제의 근간을 이뤄온 국가배급제도가 거의 붕괴된 상태다. 또 체제 유지를 위해 필요한 정보 통제 역시 많이 약화됐다. 북한의 지도부 중 외국 여행을 하거나 외국에서 공부하는 사람들의 수가 늘고 있다. 이미 외부 세계에 개방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는데, 한번 시작되면 멈추기 어려운 것이 개방이다. →한국 정부의 역할은. -독일과 영국 등 여러 나라들이 북한 학생들을 초청하고 30~50대 농업·에너지분야 종사자들에 대한 단기 해외연수 기회를 확대하고 있다. 천안함 사건이 이런 상황을 어렵게 만들었지만 미국과 한국은 북한에 인적교류 기회를 계속 제공해야 한다. 양국이 관대하기 때문이 아니라 북한의 변화가 모두에게 이득이 되기 때문이다. 워싱턴 김균미특파원 kmkim@seoul.co.kr
  •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實錄, 한국전쟁] (5) 또 다른 주역-맥아더·트루먼의 갈등

    미국 트루먼 대통령과 맥아더 장군은 한국전쟁의 또 다른 주역이다. 전쟁을 도발한 공산진영의 스탈린·마오쩌둥·김일성과 맞선 자유진영의 대표주자였다. 한 사람은 미국의 대통령으로, 또 한 사람은 5성 장군 계급장을 달고 한국전쟁을 맞이했다. 끝까지 함께 가지 못했다. 정책결정자 트루먼은 휴전협정이 진행 중이던 1952년 아이젠하워 대통령에게 지휘봉을 넘겼다. 맥아더의 최후는 참담했다. 연합군이 중국군에 쫓겨 38선 이남으로 후퇴한 1951년 4월11일 트루먼으로부터 연합군 사령관직 등 모든 직위에 대한 해임통보를 받았다. 상원청문회장에 선 ‘전설적 장군’은 문민통제에 대한 불복종과 오판은 물론 거짓말까지 줄줄이 드러나 고개를 숙여야 했다. 미 의회는 전쟁영웅에 대한 예우를 참작, 청문회 공식 보고서를 내지 않았다. ●도쿄에 머문 맥아더 전세 파악못해 루스벨트라는 걸출한 대통령의 그늘에서 인기 없는 상원의원과 부통령직을 지낸 트루먼의 진가가 드러난 것은 한국전쟁이었다. 그는 후세 역사가들로부터 스탈린과 함께 냉전의 양대 축으로 평가받았다. 전쟁 발발 사흘 만에 이뤄진 트루먼 대통령의 확신에 찬 해군 및 공군 출동명령과 엿새 만의 지상군 참전결정이 없었다면 낙동강전선 사수와 인천상륙작전의 역공, 서울수복과 압록강 국경까지의 북진은 역사책에 기록되지 못했을 것이다. 트루먼은 재임 때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다. 정치적 앙숙인 맥아더를 사장시킨 인기 없는 대통령으로 매도당했다. 한국 땅에서 미국의 젊은이 3만 3000여명을 전사시키고도 전쟁에서 무승부를 기록한 대통령이었다. 맥아더 해임 당시 트루먼은 패배자였지만, 후일 승리자로 기록됐다.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대통령의 군사자문기구인 합동참모본부가 만장일치로 승인한 ‘군사적 결정’이란 점이 작용했다. 맥아더 원수의 인천상륙작전은 트루먼의 참전결정과 함께 한국전쟁의 양대 분수령이었다. 보급라인이 길어진 인민군의 허리를 끊고, 9월28일 서울을 수복해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맥아더는 상륙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전쟁역사상 육군의 공급선을 차단하면 열에 아홉은 무너지기 마련”이라고 큰소리쳤다. 사실이었다. 맥아더 일대기에는 “그의 인생에서 군인으로서 천재성을 인정받은 날은 1950년 9월15일 하루였다.”고 적혀 있다. 성공확률 5000분의1의 거대한 도박에 성공한 것이다. 성공확률은 맥아더 자신의 언급이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가 편찬한 ‘한국전쟁’에 따르면 맥아더는 “이 작전이 도박이라면 후에 1달러로 변해 나오게 되는 5센트를 항아리에 던져 넣는 것”이라고 말했다. 맥아더가 남한사람들에게 영웅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또 하나의 요소는 한반도를 민주국가로 통일시키겠다는 자신감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이승만 정부의 북진통일을 지지하는 유일한 미국 장군이었다. 이승만 정부로부터 ‘수호자’로 숭배를 받았다. 한국의 통일이 바람직하다고 천명한 1950년 10월의 유엔결의가 맥아더의 호승심(好勝心)을 부추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워싱턴의 행정부 및 군 수뇌부는 중국과 옛 소련의 의도를 확신하지 못했고, 군사적 충돌을 우려했다. 한국전쟁이 세계 제3차대전으로 확전되지 않도록 제한된 목표를 위하여, 제한된 수단으로 전쟁을 수행하려 했다. 맥아더의 거침없는 북진이 못마땅했지만, 상륙작전 성공 이후 ‘전쟁의 신’으로 격상된 맥아더의 권위에 감히 도전하지 못했을 뿐이었다. 맥아더는 중국정부의 개입 경고를 무시했다. 이를 뒷받침하는 정보도 엄포라며 한 귀로 흘렸다. 오히려 원폭투하 발언과 압록강 교량 폭격으로 가뜩이나 민감해진 중국 지도부를 자극했다. 오만에 빠진 맥아더의 결정적 오판이었다. ●1951년 전시중 해임통보 받아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제10장 맥아더의 해임’ 편을 보면 미국 대통령과 내각, 국가안전보장회의의 군사정책에 관련된 정책수립 및 자문기구를 맡는 합참과 맥아더의 관계가 속속들이 드러나 있다. 이 책은 “합참요원은 예외 없이 맥아더 장군보다 후임이었다. 합참의장 브래들리 원수는 육사 12년 선배인 맥아더 준장 아래서 소령으로 근무했다. 콜린스 육참총장과 셔먼 해군참모총장은 맥아더가 육사교장이었을 때 초급장교였다. 반덴버그 공군참모총장은 사관생도에 불과했다.”고 기술했다. 또 “군사조직이 이러한 인적관계로 구성됨에 따라 그 영향이 의사전달과정에서 명백히 드러났다. 맥아더 장군이 보낸 서신에서는 합참에 대한 암시적인 훈계 또는 아랫사람을 대하는 듯한 태도가 발견됐다. 역으로 합참은 맥아더 장군에게 결정적인 방법으로 명령하는 경우가 드물었고, 그들이 기안한 지침서는 선임자에게 실례나 되지 않을까 하는 계산에서 공손한 말로 표현됐다.”고 적었다. 맥아더는 긍정적인 요소와 부정적인 요소를 동시에 보유하고 있었다. 한국전쟁 발발 1보를 보고받은 트루먼과 맥아더의 반응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도쿄의 극동사령부에서 이 소식을 들은 맥아더는 무관심하면서도 초연했다. 함께 있던 덜레스 국무부 고문이 걱정하자 맥아더는 “단순한 정찰병력이며 등 뒤에 한 손을 묶은 채로도 처리할 수 있다.”고 신경 쓰지 않았다. 26일에도 천하태평이었다. 오히려 덜레스가 “무초 미 대사가 서울을 탈출했다.”는 급보를 전하자 그때야 알아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적어도 1945년부터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맥아더에게 한국은 관심 밖의 나라였던 것으로 보인다. 남한주둔 미군사령관 하지 중장의 거듭되는 보고를 무시했으며, “남한문제는 알아서 잘 처리하라.”는 지시가 전부였다. 맥아더의 보좌관 바워즈의 회고에 따르면 맥아더는 한반도 문제에 개입을 꺼렸으며, 한국문제는 국무부 소관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는 것이다.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 맥아더는 한국전쟁을 지휘하는 동안 한국에서 하룻밤도 보내지 않았다. 전용기를 타고 전황을 살펴보러 잠시 들렀다가 곧바로 도쿄로 돌아가곤 했다. 인천상륙작전 때나 북진공격 때도 마찬가지였다. 압록강까지 거침없이 북진하면서 “중공군의 개입은 절대 없을 것”이라는 장담과 달리 중국군의 개입으로 연합군이 뒤로 밀리자 워싱턴의 합동참모본부 대표들은 맥아더가 한국의 전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총사령관이 자리를 지키지 않는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맥아더가 파면된 이후 자리를 이어받은 리지웨이 장군은 종전 후 40년이 흐르고 나서 “우리가 어떤 환경에서 싸워야 했는지 도쿄의 사령부가 알지 못했다는 점이 나로서는 납득하기 힘들었으며 그런 상황을 만든 총사령관을 용서할 수도 없었다.”고 꼬집었다. 트루먼의 대처는 단호하고 빨랐다. 미국은 결코 ‘한반도 내전’에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던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판단을 비웃듯 신속하게 참전을 결정했다. 1950년 6월30일 새벽 5시 지상군의 투입을 승인했다. 유엔 안보리도 한국에서의 무력사용을 의결했다. 데이비드 핼버스탬은 ‘콜디스트 윈터’에서 “1950년 6월25일자로 트루먼과 맥아더의 삶이 함께 엮였다. 대통령은 장군을 통제하지 못해 위엄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고, 장군은 대통령직을 존중하지 않음으로써 위상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라고 분석했다. 또 “트루먼은 우연히 대통령이 되었지만, 맥아더는 철저하게 만들어진 인물이었다.”고 썼다. 더글러스 맥아더 원수는 미국독립전쟁의 영웅이었던 아서 맥아더 장군의 아들이었다. 웨스트포인트 4년 동안 역대 최고 학점을 기록했고 미군 역사상 모든 최연소기록을 갈아치웠다. 1918년 처음 별을 단 이래 최연소 사단장, 웨스트포인트 교장, 육군 참모장, 소장, 대장, 원수에 올랐다. 1944년도 대통령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는 떼어 놓은 당상으로 보였다. 트루먼은 결단력이 뛰어난 인물이었고, 직선적이고 꾸밈이 없었다. 함정을 파거나, 말을 돌리지 않고 자신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성격의 소유자로 알려졌다. 현직에 있을 때보다 저격당한 지 90년이 지난 뒤에야 훌륭한 대통령으로 추앙받은 링컨을 거울로 여겼다. 트루먼은 사적인 자리에서 “문제는 그가 극동지역의 황제가 되고 싶어 했다는 거야. 자기가 일개 육군장교라는 것, 그리고 자신의 상관은 바로 미국 대통령이라는 사실을 망각한 게 잘못이지.”라고 맥아더에 대한 적대감을 드러냈다. ‘인생은 쇼, 세상은 무대’라고 생각하는 맥아더가 보기에 트루먼은 자신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을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경쟁자였다. 워싱턴에 있는 반대세력의 수장이었다. 대학도 나오지 못했고, 군 경력은 주 방위군 대위 계급장이 전부인 ‘미주리 촌놈’에 불과했다. 자신을 파면한 트루먼을 탄핵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봤다. 그가 도쿄를 떠날 때 25만명의 일본인이 성조기를 흔들며 울었고, 뉴욕에 도착해 행진을 벌였을 때 700만명의 인파가 열광하면서 장군의 귀향을 슬퍼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한국전쟁의 순교자로 여겼다. 맥아더 해임은 ‘남북전쟁 이후 처음으로 미국에 헌정위기를 불러왔다.’고 기술될 정도로 혼란상을 가져왔다. 상원청문회가 열렸다. 그러나 ‘대통령이 되기를 원했던’ 장군의 진면목은 매일 3000만명이 지켜보는 TV중계 앞에서 발가벗겨졌다. 일흔 살 대원수의 진실은 미리 준비한 연설과 달리 사흘 내내 계속된 청문회에서 바닥을 드러냈다. 사람들은 등을 돌렸다. 그는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은 처음이자 마지막 장군이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대면했던 10월17일 웨이크섬 회담에서 맥아더 장군은 통수권자인 대통령에게 경례하지 않았다는 사실이 나중에 드러났다. 두 번씩이나 본국소환에 불응하는 기록을 세운 전무후무한 장군이기도 했다. ●군사작전 실행후 추후 보고 합참은 맥아더에게 결정타를 먹였다. 4월8일 전원회의에서 참모들은 ‘예외 없이 맥아더 해임’에 찬성했다. 미국 합참이 펴낸 ‘한국전쟁’에서 공식적으로 열거한 맥아더 해임의 주요 이유는 타이완 문제에 대한 대통령과의 불화였다. 맥아더는 중립을 추구하는 트루먼 정부의 타이완 정책을 따르지 않았다. 중국의 개입에 대한 오판도 비판의 대상이었다. 맥아더는 인천상륙작전 뒤 38선 돌파와 압록강까지 북진, 압록강 교량 폭격 같은 중요한 군사작전을 실행 후 추후 보고형식으로 승인받았다. 이 밖에 대외정책에 대해 공개 언급하지 말라는 대통령 훈령을 여섯 번이나 위반했다. 맥아더가 3월24일 중국본토로의 확전을 언급하자 트루먼은 “대통령으로서 그리고 군통수권자로서의 나의 명령에 대한 공개적인 도전이었다. 맥아더 장군은 나에게 선택의 여지를 남겨놓지 않았다. 더는 그의 불복종을 참을 수가 없었다.”면서 해임을 결심했다고 미국 합참 보고서는 기록하고 있다. 노주석 논설위원 joo@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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