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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데스크시각] 활기찬 노년을 위해/유상덕 생활레저부장

    내가 아는 60대의 K씨는 매일 아침 5시30분쯤이면 어김없이 일어나 동네 체육회관에서 단전호흡으로 하루를 시작한다.오랫동안 꾸준히 해 온 운동 덕분에 젊은이 못지않은 건강과 의욕을 가진 그의 하루하루는 활기가 넘친다. 요즘에는 동네 복지회관에서 배운 컴퓨터 실력으로 자식이나 손자들과 이메일을 주고받는다.얼마전에는 미국에 있는 손자와 화상채팅을 해 주변을 놀라게 하기도 했다.그는 친구들과 서울 인사동 찻집에서 만나기 1∼2시간 전에 화랑가를 둘러본다.특히 볼 만한 기획전시회가 열리면 빠짐없이 들른다.서점에 들러 미술관련 책도 꾸준히 구입해 읽는다.여행을 좋아해 아내와 함께 가까운 야외로 나가는 것도 생활의 일부가 됐다.사찰이나 한적한 강가를 찾고 역사에도 남다른 관심을 갖고 있어 집에서는 항상 손에 중국,한국의 역사책이 들려있다.요즘에는 K씨처럼 정정하게 살아가는 노익장들도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우리는 이미 ‘고령화 사회’에 진입했다.65세 이상 노인 인구가 현재 전체 인구의 8% 수준이지만 2019년에는 14%로 ‘고령 사회’,2026년에는 20%로 ‘초고령 사회’로 들어선다는 것이 정부 추계다. 한국은 지금 고령화 대책에 대한 기로에 서 있다.해마다 늘어나는 65세 이상의 노인들을 위한 정책을 어떻게 세워 실천하느냐에 노인 대책의 성패가 달려 있다. 65세 이상 노인들의 수입은 대체로 국민연금공단이 지급하는 공적인 연금,보험 회사 등에서 주는 사적인 연금,개인 저축에서 나오는 이자 수입,파트 타임 노동에 대한 대가 등일 것이다.여기서 운이 더 좋은 사람은 거의 늙어 죽을 때까지 평생 직장을 갖거나 임대료 수입 등을 받는 사람들일 것이다.어쨌든 노인이 국가로부터 받을 수 있는 혜택은 별로 없으므로 노후자금은 개인적으로 미리미리 준비해야 한다. 활력있는 노년을 보내려면 무엇보다 마음가짐이 젊어야 한다.불교에서는 본질적으로 나이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윤회 사상을 갖고 있는 불교에서는 한 생(生)만을 기준으로 ‘젊었다’‘늙었다’‘몇 살이다’라고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10세 소년이 전생(前生)의 나이까지 합쳐 60세 노인보다 더 나이가 많을 수도 있다는 것이 스님들의 말씀이다.마음이 젊은 노인이 게으르고 무기력한 20,30대보다 훨씬 더 생기있게 인생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20세기 심리학에서 최대의 발견은 우리들 잠재의식(潛在意識)을 찾아낸 것이다.”라고 말한다.아마 잠재의식이란 우리들 마음의 무한한 힘과 가능성을 말하는 것으로 여겨진다.나이가 젊었든 늙었든 우리들의 잠재능력을 믿고 힘있게 사는 사람이 젊은 사람이 아닐까. 규칙적인 운동 또한 빼놓을 수가 없다.노년을 건강하게 살겠다고 나이 들어 운동하면 늦다.빠를수록 좋다. “노후에는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꽤 있을 것이다.물론 노년에는 돈이 큰 힘이 될 것이다.그러나 그보다 더 중요하거나 무시할 수 없는 것들도 많다.독일의 자기 경영(Self Management) 전문 컨설턴트인 마르코 폰 뮌히하우젠은 돈이 많으면 행복도 따라오는 것이라는 생각은 편견이라고 지적한다.사람과 사람 사이의 정(情),시간,건강,만족 등은 돈으로 살 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유상덕 생활레저부장˝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흙길 예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다.둘레가 4㎞쯤 되는,기다랗게 활처럼 휜 자연호수다.교통량이 많은 지방도로가 교차하는 각(角)안에 위치해 있는데도 내려앉아 있어서 그런지 통과하는 차량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삼각형의 나머지 한 변은 아파트단지이다.그래서 그 호수는 마치 그 아파트 주민만을 위해서 숨어있는,또는 누워있는 미녀처럼 보인다.지척에 그런 호수가 있는데도 이리로 이사 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지냈다.거기를 산책로로 정하고 거의 매일 다닌 지는 몇 년 안 된다.그 누군가가 세심하게 가꾸고 있는 듯 꽃피는 나무들과 야생초를 적절하게 배치해 한겨울 빼고는 꽃이 그치지 않는다.그 누군가는 아마도 지방 자치 단체일 것이다.한강변의 기막히게 수려한 곳마다 음식점 아니면 러브호텔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지방 관청을 욕하다가도 거기만 가면 욕하던 입으로 칭찬을 하게 된다.욕보다는 칭찬이 더 기분 좋은 건 듣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 숨어있는 호수의 또 하나의 미덕은 둘레가 흙길과 농지로 돼 있다는 데 있다.동네가 한적하고 골목이 많은 시골이라 동네 한바퀴 도는 것도 충분한 운동이 되는데도 차가 많이 다니는 지방도로를 건너는 불편을 무릅쓰고까지 그리로 가는 것은 순전히 흙길 때문이다.시골동네라는 건 말뿐 골목까지 포장돼있다.늙은 관절은 흙길과 시멘트 길을 민감하게 구별한다.똑같은 십리길이라도 시멘트 길과 흙길은 걷고 난 느낌이 완연히 다르다.긴장하지도 방심하지도 않고 나무처럼 꼿꼿하게 땅과 직각을 이루며 흙길을 걸으면서 흙이 뿜어 올린 온갖 아름다운 것들,나무,꽃나무,들풀,물풀,주위에 있는 비닐하우스나 주말농장에서 풍겨오는 채소와 거름냄새를 맡는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처음으로 직립해서 두발로 땅을 박차던 태초의 인간의 기쁨과 자존이 이러했을까.아침마다 산에 오르던 걸 걷기로 바꾼 것도 직립의 기쁨 때문인 것 같다. 나이 때문이겠지만 오르막길에선 자주 숨을 몰아쉬게 되고 지팡이를 필요로 하거나 엉금엉금 길 때도 있는 게 싫다.긴장을 해야 한다는 것,아무리 얕은 산도 정상이 있어서 거기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매일 하기에는 좀 부담스럽다.그것 또한 나이 탓이겠지만. 흙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느끼기만 하면 된다.요샌 한창 땅기운이 왕성할 때다.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산천초목을 통해 지상으로 분출하고 있다.흙길을 걷고 있으면 나무만큼은 아니라도 풀만큼도 못하더라도 그 생명력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그 힘이 비록 나에게 이르러 잎이나 꽃이 되어 피어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 풍진 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어찌 미소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땅기운과의 이런 편안한 친화감에 힘입어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된다.이렇게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동안만 살게 하소서,라고.하나 이렇게 엄청난 욕심이 어찌 기도가 되겠는가,응석이지. 실은 우리 집 마당도 흙으로 돼있다.좁지만 나무도 있고 잔디도 있고 해마다 저절로 돋아나는 야생초가 자라는 땅,일년초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맨땅이 조각보처럼 나누어져 있다.이 작은 마당이 한겨울 빼고는 매일 매일 나에게 일을 시킨다.주로 나는 땅위를 엎드려 기어 다니면서 일을 한다.한여름에도 아마 적어도 한 두 시간은 매일매일 땅을 기어 다닐 것이다.땅은 내가 심거나 씨 뿌리는 것한테만 생명력을 주는 게 아니다.바람에 날아 온 온갖 잡풀의 씨앗,제가 품고 있던 미세한 실뿌리까지도 살려내려 든다.아마 내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내 땅은 그 잡것들 세상이 될 것이다.잔디밭에서 잔디보다 먼저 푸릇푸릇해지는 것도 그런 잡풀들이다.내가 땅위를 기면서 하는 노동은 제가 잉태한 것은 어떡하든지 생산하고자 하는 땅의 욕망과 내가 원하는 것만 키우고 즐기고 싶어 하는 나의 욕망과의 투쟁이다.이상한 일이다.내가 땅위에 직립했을 때 가장 땅과 친하고 기어 다닐 때 가장 땅과 적대적이라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흙길 예찬

    집에서 멀지 않은 곳에 호수가 있다.둘레가 4㎞쯤 되는,기다랗게 활처럼 휜 자연호수다.교통량이 많은 지방도로가 교차하는 각(角)안에 위치해 있는데도 내려앉아 있어서 그런지 통과하는 차량 안에서 잘 보이지 않는다.삼각형의 나머지 한 변은 아파트단지이다.그래서 그 호수는 마치 그 아파트 주민만을 위해서 숨어있는,또는 누워있는 미녀처럼 보인다.지척에 그런 호수가 있는데도 이리로 이사 온 지 몇 년이 지나도록 모르고 지냈다.거기를 산책로로 정하고 거의 매일 다닌 지는 몇 년 안 된다.그 누군가가 세심하게 가꾸고 있는 듯 꽃피는 나무들과 야생초를 적절하게 배치해 한겨울 빼고는 꽃이 그치지 않는다.그 누군가는 아마도 지방 자치 단체일 것이다.한강변의 기막히게 수려한 곳마다 음식점 아니면 러브호텔이 차지하고 있는 걸 볼 때마다 입에 거품을 물고 지방 관청을 욕하다가도 거기만 가면 욕하던 입으로 칭찬을 하게 된다.욕보다는 칭찬이 더 기분 좋은 건 듣는 쪽이나 하는 쪽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다. 이 숨어있는 호수의 또 하나의 미덕은 둘레가 흙길과 농지로 돼 있다는 데 있다.동네가 한적하고 골목이 많은 시골이라 동네 한바퀴 도는 것도 충분한 운동이 되는데도 차가 많이 다니는 지방도로를 건너는 불편을 무릅쓰고까지 그리로 가는 것은 순전히 흙길 때문이다.시골동네라는 건 말뿐 골목까지 포장돼있다.늙은 관절은 흙길과 시멘트 길을 민감하게 구별한다.똑같은 십리길이라도 시멘트 길과 흙길은 걷고 난 느낌이 완연히 다르다.긴장하지도 방심하지도 않고 나무처럼 꼿꼿하게 땅과 직각을 이루며 흙길을 걸으면서 흙이 뿜어 올린 온갖 아름다운 것들,나무,꽃나무,들풀,물풀,주위에 있는 비닐하우스나 주말농장에서 풍겨오는 채소와 거름냄새를 맡는 기쁨을 무엇에 비할까.처음으로 직립해서 두발로 땅을 박차던 태초의 인간의 기쁨과 자존이 이러했을까.아침마다 산에 오르던 걸 걷기로 바꾼 것도 직립의 기쁨 때문인 것 같다. 나이 때문이겠지만 오르막길에선 자주 숨을 몰아쉬게 되고 지팡이를 필요로 하거나 엉금엉금 길 때도 있는 게 싫다.긴장을 해야 한다는 것,아무리 얕은 산도 정상이 있어서 거기까지 도달해야 비로소 성취감을 맛볼 수 있다는 것도 매일 하기에는 좀 부담스럽다.그것 또한 나이 탓이겠지만. 흙길을 걷고 있으면 아무 생각도 할 필요가 없다.느끼기만 하면 된다.요샌 한창 땅기운이 왕성할 때다.걷잡을 수 없는 힘으로 산천초목을 통해 지상으로 분출하고 있다.흙길을 걷고 있으면 나무만큼은 아니라도 풀만큼도 못하더라도 그 생명력의 미소한 부분이나마 나에게도 미치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된다.그 힘이 비록 나에게 이르러 잎이나 꽃이 되어 피어나지는 못한다 할지라도 이 풍진 세상을 참고 견딜 수 있는 힘이 된다면 어찌 미소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땅기운과의 이런 편안한 친화감에 힘입어 나도 모르게 기도를 하게 된다.이렇게 당당하게 걸을 수 있는 기쁨을 누리는 동안만 살게 하소서,라고.하나 이렇게 엄청난 욕심이 어찌 기도가 되겠는가,응석이지. 실은 우리 집 마당도 흙으로 돼있다.좁지만 나무도 있고 잔디도 있고 해마다 저절로 돋아나는 야생초가 자라는 땅,일년초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맨땅이 조각보처럼 나누어져 있다.이 작은 마당이 한겨울 빼고는 매일 매일 나에게 일을 시킨다.주로 나는 땅위를 엎드려 기어 다니면서 일을 한다.한여름에도 아마 적어도 한 두 시간은 매일매일 땅을 기어 다닐 것이다.땅은 내가 심거나 씨 뿌리는 것한테만 생명력을 주는 게 아니다.바람에 날아 온 온갖 잡풀의 씨앗,제가 품고 있던 미세한 실뿌리까지도 살려내려 든다.아마 내가 잠시만 한눈을 팔아도 내 땅은 그 잡것들 세상이 될 것이다.잔디밭에서 잔디보다 먼저 푸릇푸릇해지는 것도 그런 잡풀들이다.내가 땅위를 기면서 하는 노동은 제가 잉태한 것은 어떡하든지 생산하고자 하는 땅의 욕망과 내가 원하는 것만 키우고 즐기고 싶어 하는 나의 욕망과의 투쟁이다.이상한 일이다.내가 땅위에 직립했을 때 가장 땅과 친하고 기어 다닐 때 가장 땅과 적대적이라는 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 [서울탱고] 동물원의 ‘혜화동’

    명절이면 실향민들은 임진각에서 망향제를 올린다.못 견디게 가고픈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이런 식으로나마 달랜다.하지만 이들보다 사정이 더 딱한 사람들도 있다.아예 고향이 사라져 망향 대상조차 없어진 불쌍한 도시인들이 그들이다.이들은 집값이나 교육여건에 따라 유목민들처럼 도시 여기저기를 떠돈다.재개발 물결로 유년시절의 놀이터는 온데간데 없다.고향이란 단어가 등장하면 ‘심정적인 고아’가 된다. 그러나 간혹 이들이 고향의 흔적을 느낄 때도 있다.놀이터에서 구슬치기와 딱지 따먹기를 함께 하며 뒹굴던 친구들을 만나면 그렇다.뿔뿔이 흩어져 제각각 살다가 오랜만에 가까스로 연락이 닿았을 때다.모처럼 깊은 얘기를 털어놓고 지난 시절을 추억한다.그러다 누군가가 유학을 간다며 한마디 툭 던지면 회자정리(會者定離)란 사자성어가 그렇게 얄미울 수 없다.‘언젠가 돌아오는 날 활짝 웃으며 만나자 하네.내일이면 아주 멀리 간다고’ ●초등학교 동창들의 어렴풋한 기억 ‘투잡스’의 전형인 동물원(www.ezoo.or.kr)은 정신과 의사 김창기씨를 비롯,5명이 멤버다.평소에는 서로 다른 본업에 열중하다 틈을 내서 음반을 한 장씩 낸다.‘주경야음’(晝耕夜音)하는 이들은 1987년 ‘거리에서’로 첫선을 보인 뒤 9집까지 낸 장수그룹이다.고(故) 김광석씨도 동물원 출신이다. “87년인가,친구 하나가 갑자기 유학을 떠난다고 하더군요.가장 순수했을 때가 초등학교 시절이라 그때의 감정을 섞어 아쉬운 마음을 노래로 표현했죠.” ‘혜화동’을 직접 쓰고 부른 김창기씨는 혜화초등학교를 졸업했다.아버지 직장을 따라 호주로 떠나기 전인 초등학교 6학년까지 혜화동에서 살았다.눈이 내리면 혜화동 언덕에서 썰매를 타거나 형제들과 함께 언덕 위에서 퇴근하는 엄마를 기다리곤 했다. “그때 함께 놀던 친구들은 인터넷 덕분에 40줄 가까이 돼서야 만났어요.세월 탓인지 다들 많이 변했더라고요.치맛바람을 타고 공부깨나 하던 애들은 별볼일 없어지고,오히려 가난했던 친구들은 근사하게 바뀌고….” 그는 혜화동에서 나온 뒤 연극이나 술 마시려고 동숭동에는 가봤지만 웬일인지 혜화동 쪽으로는 발길이 닿지 않았다.지하철4호선 혜화역 덕에 일반인들은 동숭동까지 포함,혜화동의 범위를 실제보다 넓게 보지만 그의 눈에는 어린 시절의 혜화동이 동숭동과는 구별된다. “초등학교 졸업하고 한참 세월이 흐른 뒤에 다시 찾으면 크게 느껴졌던 운동장이 별로라는 걸 알게 되잖아요.변한 혜화동을 찾으면 마음의 고향이 깨질 것 같아서요….” ●세 빛깔 어우러진 혜화동 지하철4호선 덕분에 동숭동 일부를 포함해서 생각되는 혜화동에는 세 가지가 엉켜있다.성직자와 수사들의 궤적이 그대로 남아 있는 가톨릭대 성심교정과 1958년 근대 교회건물을 처음 드러낸 혜화동성당.이제는 의대만 남았지만 방송통신대에 일부 존재하는 서울대 문리대의 발자국.런던의 웨스트 엔드처럼 연극을 골라 즐길 수 있는 소극장들의 천국도 문화동네 혜화동을 상징한다.굳이 파리의 몽마르트르를 떠올리지 않더라도 혜화동로터리에서 이화동사거리에 이르는 1.1㎞의 대학로는 젊은이들의 해방구다.주말에는 차량통행을 막아 ‘차 없는 거리’에서 젊은이들의 공연이 넘쳐난다.마로니에공원 한 가운데는 1929년 4월5일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제대 당시 심은 마로니에나무가 서있다.1975년 서울대가 관악캠퍼스로 옮겨가기 전까지 경성제대 터는 상아탑의 낭만이 서려 있었다. 이태수 서울대 인문대학장은 “60년대 문리대생이 음악을 들으며 토론하던 ‘학림다방’과 중국음식점 ‘진아춘’을 모르면 간첩”이라면서 “진아춘의 주인이 지금은 교수나 장관이 된 학생들이 음식값 대신 맡긴 시계를 전시했다는 얘기도 있다.”고 전했다. 대학로에는 소극장 50여곳과 카페 500여곳이 밀집돼 있다.낭만적 분위기보다는 다소 상업적인 모습을 갖춘 지 오래다.서점 자리를 단란주점이 꿰차는 등 지성인의 거리라는 의미는 많이 퇴색했다.하지만 마로니에공원과 동숭아트센터 앞에선 지금도 주말마다 각종 공연과 뮤지컬,마임,코미디 등이 펼쳐져 맥을 이어가고 있다. 연극배우 박시윤(30)씨는 “80년대 젊은이들의 풍류마당과 막걸리 문화로 상징되던 대학로에 90년대에는 폭주족의 굉음과 힙합댄스 열풍이 불기도 했다.”면서 “이제 대학로는 여러 문화가 뒤엉킨 서울의 대표적인 문화 공간”이라고 말했다. 대학로 뒤편 산등성이로 올라가면 젊은 신학도들의 요람인 가톨릭대와 혜화동성당이 눈에 들어온다.성스럽고 차분한 분위기라 도시의 번잡스러움을 잠시 잊고 산책하기에 일품이다.중세 수도사들의 옷을 입은 젊은 수사들도 더러 눈에 띈다.김수환 추기경은 여기서 ‘혜화동 할아버지’로 불린다.민속자료로 지정된 김상협 전 국무총리의 고택과 하비에르 국제학교도 자리하고 있다. 이유종기자 bell@˝
  • 싸게싸게 귀족처럼 놀자

    매스티지(Masstige),‘대중’을 의미하는 매스(mass)와 ‘명품’을 뜻하는 프레스티지(prestige)의 조어다. 미국 경제지 ‘하버드 비즈니스 리뷰’는 소득 수준이 높아진 중산층들이 값이 비교적 저렴하면서 명품과 같은 만족을 느낄 수 있는 소비 스타일을 매스티지로 표현했다. 명품에 대한 관심이 남다른 우리나라에서도 대중제품(mass product)과 명품(prestige product)의 중간 형태인 매스티지 제품및 브랜드가 많이 등장했고,이제는 매스티지 개념이 서비스에도 도입됐다. 요즘 찜질방,DVD방,카페,노래방 등은 저렴한 가격에 일반 시설과는 비교할 수 없는 최첨단 기능,분위기,서비스를 자랑하며 매스티지 트렌드를 따르고 있다. 김민국(23·학생)씨는 “이런 곳을 찾으면 고급스러운 분위기와 서비스로 ‘대접’받는 느낌이 좋다.가격도 여럿이 가면 전혀 부담되지 않는다.”며 매스티지 서비스를 찾는 이유를 설명했다. 홍익대 앞을 즐겨 찾는다는 김수연(28·회사원)씨는 “홍대 앞은 온통 앤티크 가구로 치장된 노래방이나 공주가 된 듯한 느낌을 주는 인테리어의 카페가 많다.”며 “귀족이 된 듯,약간의 사치를 느끼는 것도 즐겁다.”고 어깨를 으쓱댄다.물론 비용이 생각보다 적게 드는 것도 기쁘다. 매스티지 서비스 광팬들이 추천하는 저렴하면서도 분위기·서비스 끝내주는 장소,한번쯤은 경험해도 좋을,경험해볼 만한 ‘이곳’을 공개한다. ● 공주카페 공주의 침대를 장식하는,청순한 하얀 캐노피(커튼 장식)가 드리워진 푹신한 의자에 앉아 있으면 난 어느새 평화로운 나라의 공주가 돼 있다. 번잡한 신촌 거리에서 이화여대쪽으로 올라가는 길목 오른편에 있는 ‘공주의 향기나는 카페’.단정한 복장으로 손님을 공손하게 맞는 종업원들의 안내로 실내에 들어서면 아기자기한 분위기에 녹아 마음이 편안해진다.벽,천장,소파,테이블 등 하얀색 바탕과 소품에 은은한 백열등이 비춰져 포근하고 아늑한 베이지톤 분위기를 연출한다.‘공주’라는 컨셉트에 맞게 곳곳에는 화려한 장식의 화장대,향기로운 꽃장식 등이 놓여 있다. 8개 테이블 중 커튼이 있는 5개 테이블은 경쟁이 치열하다.커튼 안에서 가끔은 낯뜨거운 연출을 하는 연인들이 있어 고영미 사장은 가급적이면 커튼을 젖혀놓도록 한다.하지만 손님이 원하면 어쩔 수 없다고. 허브티와 홍차는 깊은 맛을 음미할 수 있도록 차의 온기를 유지시키는 워머(warmer)와 함께 서빙된다.커피,차,병맥주 등 대부분의 메뉴가 4500∼6000원.아이스크림과 바삭한 과자는 공짜. 우아한 분위기가 필요하다면,은밀한 데이트를 원한다면 들러야 할 곳이다.(02)312-9952. 이밖에 공주 카페의 원조이자 공주가 쓰는 침실 같은 카페로 더 잘 알려진 홍익대 앞 ‘프린세스’(02-335-6703),커피가 특히 맛있는 세련된 유럽풍 카페 청담동 ‘74’(02-542-7412),분위기가 좋아 방송이나 CF 촬영장소로 유명한 대학로 ‘가비아노 피우’(02-765-9662)도 좋다. ● 노블레스 노래방 독특한 클럽,유명한 카페 등이 즐비한 홍익대 앞에서도 ‘수 노래방’의 인지도는 독보적이다.초기 모습인 ‘빼어날 수’는 좁고 담배연기가 찌든 일반적인 노래방에 대한 인식을 완전히 깨고 ‘노래방도 이렇게 쾌적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심었다. 이후 신을 벗고 들어가는 따뜻한 온돌방에 방석 깔고 앉아 노래를 부르게한 ‘럭셔리 수’를 만들더니 최근에는 최고급 노래방 ‘노블레스 수’까지 소개했다. 노블레스 수의 한 시간 이용료는 오후 6시 이전엔 1만∼1만 3000원,이후에는 2만∼2만 5000원으로 일반 노래방보다 3000∼5000원 정도 비쌀 뿐이다. 분위기는 호텔급.들어서면 “최고로 모시겠습니다.”라는 직원들의 우렁찬 목소리에 처음 놀라고,전체적으로 흐르는 앤틱 분위기에 두번 놀란다.노래방이기보다는 강남의 고급 룸살롱에 가까울 정도.삼성 파브 벽걸이 TV,독일제 제나이져사의 무선마이크,다이나코드 스피커와 우퍼로 빵빵한 시설을 자랑한다.화장실? 물론 훌륭하다.비데가 설치된 변기,마룻바닥,종이 휴지 대신 깨끗하게 세탁한 개인 손수건을 비치해놓은 쾌적한 화장실은 한번 들어가면 나오기 싫을 정도다.대기실에 있는 아이스크림과 각 방에 놓여진 과자는 서비스.(02)322-3111. 이밖에 노블레스 수에서 얼마 멀지 않은 곳에 강력한 라이벌이 들어섰다.3개층이 각기 다른 테마로 꾸며진 노래방 ‘질러존’은 SBS ‘최수종쇼’의 자아도취 노래방 촬영장소로 유명하다.(02)338-3531. ● 궁전같은 모텔 ‘값 비싼 특급호텔 저리 가라.우리는 호텔급 모텔로 간다!’ 혼자 조용히 쉬고 싶을 때,시험기간이나 생일 등 특별한 날,우리 끼리만의 공간을 갖고 싶을 때 ‘잘 나가는’ 모텔로 달려가 보자.왠지 음침하고 쾨쾨한 냄새가 날 것 같다는 선입관을 버리고. 요즘 ‘뜨고 있는’ 서울 서초동 남부터미널 건너편 ‘캐슬론호텔’은 호텔급 모텔이다.캐슬론의 문을 열고 들어서니 로비에 잔잔하게 흐르는 재즈,은은한 향기,분위기 있는 인테리어가 어우러져 고급카페에 온 착각에 빠진다. 정장을 입은 직원이 숙박계를 내밀며 다양한 회원혜택을 설명한다.아니 웬 모텔에 회원마일리지카드? 도대체 여기의 정체가 뭐야.9층 방에 들어선 순간,“우와∼.”하는 탄성이 절로 나온다.캐노피를 예쁘게 드리운 커다란 침대,깔끔하게 정리된 침구류,고급주택에서나 볼 수 있는 원목마루,깜찍하고 예쁜 소파…. 48인치TV,공기청정기,커피메이커,PC,산소발생기,기타 등등 모든 것이 놀랍다.천연에센스를 재료로 한 수제비누(원래 모텔에는 노란 다이얼비누가 기본이다.),고급 보디샴푸·클렌징 폼과 클렌징 로션 등 고객들을 위한 세심한 배려가 곳곳에서 느껴진다. 역삼동에 사는 김주용씨는 “일반 모텔보다 돈 조금 더 내고 VIP대접을 받으며 편하게 쉴 수 있어 자주 찾는다.”며 월풀욕조에 누워서 TV를 시청하고,인터넷·DVD 등도 볼 수 있는 우리들의 ‘원스톱 문화공간’이라고 강조한다. “여기 누워 있으면 영화 속의 주인공이 된 듯한 기분이 들어요.집보다 편하고 예쁘잖아요.친한 친구의 생일날에도 여기를 찾아 케이크와 와인을 먹고 실컷 수다를 떨면 피로가 확 풀리죠.” 영미(28)씨의 말이다. 5시간 정도 사용하는데 3만∼4만원선.숙박은 보통 밤 10시 이후부터 다음날 오전까지로 7만원선이다.전화로 미리 예약을 하는 게 좋다.(02)3471-0321. 이밖에 다음카페 ‘모텔투어’ 회원들의 추천 장소는 인테리어가 독특하고 고급스러운 ‘베리6’(02-508-3002),스페인·일본 등 이국적 인테리어로 유명한 ‘상봉테마’(02-439-6233),한옥의 전통미를 살린 ‘썬비’(02-730-3451),테라스·노천탕이 유명한 ‘조아텔’(031-236-7112),최강의 오디오·비디오 시스템을 자랑하는 ‘시네마’(016-249-3326) 등. ● 빵빵한 DVD방 비디오방 대신 DVD방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고급스러운 인테리어로 기존 비디오방이 갖고 있는 칙칙한 분위기를 벗어버렸기 때문.하지만 사람들은 무엇보다 수준 높은 화질과 음질을 즐기기 위해 DVD방을 찾는다.분위기 그리고 영상·소리 두 마리의 토끼를 다 잡고 싶다면 대학로 대명거리에 있는 ‘dts DVD 영화관’을 찾아보자.드라마 ‘나는 달린다’의 촬영지로 더욱 유명해졌지만 그 전부터 이미 좋은 시설로 알려진 곳이다.방 규모는 소극장,음향은 대극장 수준으로 영화를 즐길 수 있다.6개 채널 방식의 dts 시설에 방마다 흡입판이 설치돼 있다.음향에 따라 진동하는 의자 역시 갖추고 있다.이곳을 자주 찾는다는 김민우(28·회사원)씨는 “여기에 오면 화면·사운드가 좋아 영화에 집중이 잘 된다.”며 적극 추천했다.대표 조태연씨는 “비디오방이나 DVD방에 익숙하지 않은 외국인들도 영화를 보기 위해 많이 찾는다.”고 설명했다.몇몇 인기 영화만을 즐길 수 있는 대다수의 DVD방과 달리 다양한 영화를 감상할 수 있는 것도 이곳의 장점.약 1000여 개의 타이틀을 갖추고 있다.이용 요금은 2명 기준 1만 2000원.(02)765-1116.이밖에 서울대 입구역 3번 출구 근처 ‘시네 캠퍼스’(02-886-5957),성남의 ‘DVD 천국’(031-754-1329)역시 영화 감상의 최적의 시설을 갖춘 소문난 DVD방이다 ● 럭셔리 찜질방 목욕탕의 시대는 끝난 것인가.동네목욕탕이나 사우나보다 입장료가 두배인 최첨단,최고급 찜질방이 성업이다.찜질방은 단순히 때를 밀거나 땀을 내는 것을 넘어 ‘복합문화공간’으로 자리 매김하고 있다.가족 나들이,연인 데이트,각종 친목모임 등….찜질방을 찾는 목적도 다양하다. 거대한 테마파크를 연상시키는 찜질방은 보통 3000∼5000평 규모로 한번 돌아보는 데도 20분은 족히 걸린다.고궁을 테마로 한 인테리어,산으로 이어지는 산책로,계곡 같은 대규모 해수탕 등 자랑거리도 각각이다. 요즘 TV에도 자주 나오는 서울 용산구 ‘이태원랜드’는 발렛파킹(주차대행 서비스)을 해준다.소형차라도! 남대문처럼 만들어진 거대한 입구부터 생활한복을 입은 직원들과 전통 한옥 인테리어가 잘 어울려 왠지 ‘이리 오너라.’ 외쳐야 할 듯하다. 보통 찜질방에는 현금이 있어야 음료수를 먹을 수 있지만 여기서는 열쇠에 달린 바코드로 모든 편의시설을 사용하고 나갈 때 정산을 하면 된다. 1층은 미용실,2층은 남녀 사우나,3층은 노래방·헬스클럽·네일아트·마사지숍, 5층은 DVD영화관·PC방 등이 있다.만화책은 권당 500원,보드게임은 3000원 정도에 빌릴 수 있다.과연 종합놀이공간이다. 각종 모임과 가족을 위한 방(13개)은 4층.미리 예약을 하는 편이 좋고 빌리는데 보통 2만원선이다. 마포에서 온 박성준씨는 “동네 찜질방보다는 비싸지만 부인과 영화,식사,게임을 해결하는 값을 생각하면 비싼 것도 아니다.”고 이야기한다. 박진주씨는 “이렇게 깨끗하고 쾌적한 곳에서 쉴 수 있다는 것이 행복하죠.좋은 찜질방을 찾아다니며 일주일동안 받은 스트레스를 땀과 함께 날려보내고 친구들과 수다 떨며 에너지를 충전해요.”라며 웃는다. 가족과 나들이 삼아 왔다는 박찬규씨는 “아이들이 게임하고 영화보고 노는 중에 저는 혼자서 쉴 수 있고,가족들에게는 가장 역할도 할 수 있어 일거양득”이라고 말했다. 단 음식물 반입은 안되고,입장 후 12시간이 지나면 시간당 2000원을 더 받는다는 게 애써 찾은 흠이랄까.(02)749-5115. 이밖에 다음카페 ‘사조사(사우나를 좋아하는 사람들)’ 회원들은 ‘서울레저’(02-909-6270),‘센트럴 스파’(02-6282-3400),‘영진테마파크’(031-332-3100) 등을 추천한다. ● 웰빙 삼겹살 ‘돼지고기 냄새와 연기는 가라.우리는 상쾌한∼ 삽겹살 집으로 간다.’ 직장인들이 퇴근 후 가장 많이 찾는 삽겹살.그런데 보통 테이블 위에 끈적끈적한 돼지기름,자욱한 연기,구수한(?) 냄새가 우리를 망설이게 한다.이제는 조금 더 쓰고 품격 있는 삼겹살집으로 가보자. 카페를 연상시키는 아늑한 인테리어,3마력의 무소음 환풍기,숯을 흡착시켜 기름이 흐르지 않는 특수 불판,고객들의 옷장,숲에 온 것 같이 미송나무로 치장된 가게.하드웨어가 말끔히 변했다. 소프트웨어는 어떤가.오겹살은 기본이고 대추 삼겹살,솔잎 삼겹살,된장박이 삼겹살,마늘 삼겹살 등 퓨전 삼겹살이 눈에 띈다. 서울 지하철 2호선 신대방역 근처에 위치한 ‘돈씨네’는 나무 인테리어와 웰빙 삼겹살로 유명하다. 여자친구와 함께 온 유석원씨는 “처음에는 간판만 보고 스파게티 집인 줄 알았어요.냄새나고 지저분해 삼겹살 집을 잘 가지 않았는데 깔끔한 실내와 맛에 반해 요즘은 주 데이트 코스가 됐죠.”라고 이야기한다. 가족과 함께 찾은 신성철씨는 “1인분에 2000원 정도 비싸지만 가족끼리는 항상 이 집을 찾는다.”면서 “특히 대추삼겹살은 맛이 달달해 아이들이 좋아한다.”고 이야기한다. 이밖에 추천할 만한 고급 삼겹살 집은 일산 주엽동 ‘불판’(031-924-3651),서울 종로 ‘신씨화로’(02-725-5314) 등이다. 글 한준규 최여경 나길회기자 hihi@ 사진 최해국기자 seaworld@ ˝
  • 만취경찰 총질 ‘공포의 아침’

    현직 경찰관이 권총으로 동네 선배를 살해하고 선배 부인에게 중상을 입혀 충격을 주고 있다. 30일 오전 7시10분쯤 전북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 D비디오 대여점에서 김제경찰서 금용초소장 이모(38·김제시 금산면) 경사가 주인 고모(44)씨와 고씨의 부인 이모(41)씨의 가슴 등에 실탄 5발을 쏴 고씨가 그 자리에서 숨졌다.고씨의 부인도 왼쪽 폐 부분을 관통하는 중상을 입었으나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고씨의 둘째딸(16·고 1)은 “이 경사가 오전 7시쯤 찾아와 아침식사를 준비하던 엄마에게 아빠를 찾았고,엄마가 ‘아직 자고 있으니 나중에 오라.’고 하자 갑자기 엄마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권총을 쐈다.”고 말했다. 고씨 가족들에 따르면 이 경사는 먼저 고씨의 부인에게 실탄 1발을 쏜 뒤 머뭇거리다 총소리에 놀라 잠을 깨 밖으로 나오던 고씨에게 2발의 실탄을 왼쪽 어깨와 가슴 부위에 발사했다.나머지 2발은 빗나가 대여점 냉장고에 1발이 박히고,1발은 안방 문을 뚫고 들어가 벽에 박혔다. 고씨의 세 자녀는 연이어 총소리가 나자 방안에서 이불을 덮고 숨어 있다가 이 경사가 밖으로 나가자 곧바로 옆 동네 할아버지 집으로 피신했다. 이 경사는 범행 직후 자신의 승용차를 타고 5㎞가량 떨어진 금산사 주차장으로 도주,1시간20분가량 배회하다가 오전 8시30분쯤 동료에게 전화를 걸어 자수의사를 밝혔다. 경찰은 이 경사를 금산사 주차장에서 검거,권총과 실탄 3발,공포탄 2발 등을 회수한 뒤 전북지방경찰청 강력계로 연행해 자세한 범행동기 등을 조사하고 있다. 그러나 경찰은 이 경사를 검거하는 과정에서 소주 2병을 마시게 하고 수갑을 채우지 않아 다른 용의자와 비교해 형평성을 잃었다는 지적을 받고 있다.경찰에 따르면 이 경사는 이날 오전 6시50분쯤 근무처인 금용초소에 출근,함께 근무하는 조모(42) 경사와 교대한 뒤 자신의 권총과 실탄 8발,공포탄 2발을 가지고 고씨의 집으로 찾아가 범행을 저질렀다. 경찰은 이 경사는 전날 오후 7시30분쯤 평소 친하게 지내던 고씨를 찾아가 술을 마시던 중 고씨가 “경찰관이 왜 술을 먹고 행패를 부리느냐.경찰관 자격이 없다.그만두게 해주겠다.”고 말하자 다툼을 벌이다 고씨가 이 경사를 112에 신고한 것에 앙심을 품고 이날 아침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보고 있다. 김제경찰서 금산지구대는 사고 전날 8시 20분과 40분 두차례나 출동해 숨진 고씨와 만취한 상태에서 말다툼을 벌이던 이 경사를 귀가조치한 것으로 확인됐다. 경찰은 이 사건의 책임을 물어 김제경찰서 김정섭 서장과 장정두 경비과장을 직위해제하고,후임에 박달근 무주서장을 임명했다. 경찰은 또 이날 오전 이 경사가 술이 덜 깬 상태에서 근무교대를 한 점과 초소내의 총기관리 현황 등에 대해서도 감찰조사를 벌이고 있다. 전주 임송학기자 shlim@seoul.co.kr˝
  • 부전자전 연예인 패밀리

    한 직장에서 부자(父子)·모녀(母女)등 가족이 함께 부대끼면서 일하게 된다면?그것만큼 신경쓰이고 눈치 보이는 일도 없을 것이다.경험 많은 가족의 도움을 받아 남보다 빨리 높은 곳으로 치고 올라갈 수 있지 않으냐고?물론 그럴 수도 있다.하지만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시는 말씀.주위의 달갑지 않은 시선속에 행동이 자유롭지 못하고 오히려 난처한 상황에 빠지는 등 불편한 점이 한두가지가 아니다. ●안방극장 누비는 ‘패밀리 연기자’ 톡톡 튀는 끼와 재주로 브라운관을 주름잡는 연기자들도 기본적으로는 방송국을 일터로 삼기에 이같은 딜레마에 빠지는 것은 당연지사.현재 방송에서 활동중인 ‘패밀리 연기자’는 대략 30명 안팎.통상 나이를 기준으로 ‘원조 2세’와 ‘차세대 2세’로 나뉜다.이예춘의 아들 이덕화,황해·백설희의 아들 전영록,최무룡의 아들 최민수,독고성의 아들 독고영재,허장강의 아들 허준호,박노식의 아들 박준규,조광의 아들 조형기,신성일·엄앵란의 아들 강석현,서영춘의 아들 서동균 등이 ‘원조’격이다.반면 ‘차세대’격은 주호성의 딸 장나라,김무생의 아들 김주혁,연규진의 아들 연정훈,추송웅의 딸 추상미,김용림·남일우의 아들 남성진,김을동의 아들 송일국,전무송의 딸 전현아,임동진의 딸 임유진·임예원,손창호의 딸 손화령 등이다. 하지만 이들 ‘패밀리 연기자’의 유형은 극과 극으로 구분된다.먼저 부모가 수십년간의 연기 노하우를 족집게 과외하듯 그대로 전수하며 물심양면으로 뒷바라지해 하루아침에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상당수의 2세 연기자가 여기에 속한다.반면 힘들고 고된 연기자의 길로 들어서길 반대하는 부모의 무관심과 냉대에 맞서 고군분투하며 꿋꿋이 연기자의 길을 가는 2세들도 많다. ●무관심·반대 형 SBS공채 8기로 최근 영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에 출연해 주가를 올리고 있는 김주혁과,드라마 ‘백설공주’에서 첫 주연을 맡아 열연하고 있는 연정훈이 대표적인 케이스. 김주혁은 아버지 김무생의 반대를 무릅쓰고 동국대 연극영화과에 진학한 뒤 지금까지도 아버지의 그늘을 피해 연기활동을 하고 있다.그는 “당시 아버지의 눈밖에 난 이후 지금까지 연기와 관련해 한번도 (무엇을)부탁해본 적 없다.”고 말한다. 아버지 연규진의 반대로 연기자의 꿈을 접으려던 연정훈은 아버지 몰래 친구와 연기학원에 다니다 지금의 자리에까지 왔다.그도 “지금은 저를 이해하시지만,연기 지도는 물론 방송 모니터조차 해주시지 않고 있다.”고 털어놨다. KBS 어린이 드라마 ‘울라불라 블루짱’에서 애견 미용사 조경순역으로 등장하는 고(故)손창호씨의 딸 손화령은 집안의 반대에 부딪혀 미용학원에 다니며 자격증까지 따는 등 방황하다 뒤늦게 연기자로 데뷔했다. ●밀착 뒷바라지 형 장나라는 아버지의 물심양면 뒷바라지에 힘입어 스타가 된 경우.그녀의 아버지인 배우 주호성은 초등학교 5학년때부터 딸 장나라를 연극에 출연시키며 연기공부를 시켰다.그는 “내가 가진 유산인 연기 노하우를 딸에게 물려주고 싶었다.”고 말한다.지금도 딸의 팬클럽 관리는 물론 드라마·CF 등 섭외부터 스케줄 관리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을 매니지먼트하고 있다.모든 행사와 인터뷰,심지어 개인 약속 장소에까지 일일이 쫓아가는 등 ‘극성’을 부려 주위로부터 ‘지나친 부정(父情)’이라는 눈총을 받을 정도. 영화 ‘꽃섬’,MBC 드라마 ‘죄와 벌’ 등에서 안정감 있는 연기를 펼쳐 주목받은 임유진과,SBS 드라마 ‘파도’에 출연했던 임예원 자매도 중견탤런트인 아버지 임동진의 조련하에 연기자로 성장한 케이스.딸의 연기 모습을 녹화해 대사에서부터 표정까지 일일이 연기 지도를 해주는 것은 기본.어머니 권미희씨와 함께 24시간 스케줄 관리를 해주고 있다. MBC ‘대장금’에서 중종역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임호도 아버지의 후광을 얻고 대성한 경우에 속한다.지난 94년 KBS 15기로 데뷔했지만 그동안 뚜렷한 활동을 보이지 못했다.하지만 사극 작가인 아버지 임충이 SBS ‘장희빈’ 대본을 쓰게 된 것을 계기로 ‘숙종’역으로 출연,비로소 얼굴을 알리게 됐다. 이영표기자 tomcat@ ■ 누구누구 아들 누구 아버지 우리를 두번 죽이는 거야 김무생(61)·김주혁(31)은 스크린을 주름잡는 대표적인 부자(父子)배우.그런데 이상한 일이다.그동안 수많은 언론매체들이 군침(?)을 흘렸을 텐데도 두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은 지금껏 노출된 적이 없으니. 그럴 수밖에.‘누구누구의 아버지’,‘누구누구의 아들’이란 수식어에 두사람 모두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인다는 게 홍보관계자들의 귀띔이다. 부자가 모처럼 주연한 영화는 최근 공교롭게도 개봉일이 일주일 차이로 겹쳤다.김주혁이 실질적으로 첫 주연을 따낸 로맨틱 코미디 ‘어디선가 누군가에 무슨 일이 생기면 틀림없이 나타난다 홍반장’이 지난 12일,김무생을 위시한 중년배우들이 무더기 출연한 코미디 ‘고독이 몸부림칠 때’가 그로부터 1주일 뒤인 19일 각각 개봉했다.‘고독이‘의 티저포스터에 공개된 김무생의 젊은시절 모습은 지금의 김주혁과 판박이.밀려드는 인터뷰 요청을 눈물을 삼키며(?) 거절해야 했던 제작사 마술피리의 한 홍보담당자는 “김무생씨가 평소 인터뷰 자체를 싫어하는데다 특히 아들과 같이 하는 인터뷰는 무조건 사절이라고 진작에 쐐기를 박았다.”고 말했다. 김주혁이 밝히는 ‘아버지 김무생’은 어떨까.“가뜩이나 무뚝뚝한 아버지는 촬영기간에 오랜만에 집에서 만나도 딱 두마디밖에는 하시는 법이 없어요.‘왔냐?’‘밥 먹었냐?’ 연기 얘기는 할 일이 없는 거죠,뭘.” 김주혁은 ‘…홍반장’에서 온동네 일에 감초처럼 관여하는 무공해 총각,김무생은 ‘고독이‘에서 서울에서 내려온 이혼녀에게 음흉스레 접근하는 홀아비 역을 각각 맡았다. 황수정기자 sjh@˝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4)이걸이 저걸이 갓걸이(上)

    류계춘(柳繼春,1830∼1862).그는 우리나라 최초의 운동권 노래이자 혁명가(革命歌) 노랫말을 순 한글로 짓고 곡을 붙여 널리 퍼뜨렸으며,농사꾼이 사는 동네라면 함경도에서 제주도까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코흘리개 아이들은 사금파리 뾰족뾰족 박힌 골목길을 내달으면서 불렀고,그보다 조금 더 큰 조무래기들은 마을 타작마당이나 마을 앞 빈 논바닥에서 뛰놀며 이 노래를 신나게 불렀다. 희미한 등잔불이 가물거리는 사랑방에서 새끼줄을 꼬는 머슴들이나,긴긴 겨울밤 무명실 잣는 물레질로 길쌈하는 아낙들도 이 노래를 흥얼거렸다. 노래를 부를수록 마음 속에 시퍼렇게 응어리진 일들이 새삼스레 아파오기도 하고,끝 소절에 잔뜩 힘을 넣어 큰소리로 부르면 그 혹독하고 두려운 것들이 조금은 가벼워지는 것도 같았다. 한번 입에 올린 뒤엔 좀체로 떠나지 않는 이 노래를 두고 사람들은 이상한 노래라거나 귀신이 든 노래라고도 했다.이 노래를 만든 류계춘은 요즘 시대에 태어났더라면 수백만장의 음반 판매 기록을 세우면서 일약 인기 작곡가에다 돈방석에 올라 앉는 스타가 되었을 것이다. ●1862년 민란주도 ‘참수형’ … 족보에서도 삭제돼 한국 농민의 역사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인물을 꼽아보라 한다면 나는 단연코 그의 이름을 말하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또한 한국 농민사에서 가장 슬픈 이름을 물어도 그를 불러 보인다.그는 경상도 진주사람이었다. “이 걸이 저 걸이 갓 걸이 진주(晋州) 망건(網巾) 또 망건 짝발이 휘양건(揮項巾) 도래 줌치 장두(狀頭) 칼 머구밭에 덕서리 칠팔 월에 무서리 동지 섣달 대서리.” ‘이걸이 저걸이 갓걸이’ 또는 ‘언가(諺歌)’라고 부르는 이 노래를 류계춘이 지었다고 단정지은 것은 그가 계획하고 주도한,1862년 ‘진주농민항쟁(일명 임술 진주민란)’에 관한 당시 조선 정부 수사 기록을 통해서였다. 이 노래의 특징은 노랫말이 지닌 고도의 은유와 상징에 있다.이 노랫말 속에는 진주농민항쟁의 원인과 역사가 밀도 높게 응축되어 있다. 빼어난 노랫말 속에는 풍부한 시적 감성과 치열한 시대정신이 깃들어 있는데,이 노래의 두 박자 리듬에서 우러나는 근원적인 힘과 조화를 이루면서 역동적인 행진곡으로서의 맛까지 곁들이고 있다. 지난 5일 경칩날 류계춘 선생의 묘소가 있는 경남 진주시 수곡면 원당리를 찾아 갔다.선생의 증손자인 류일렬(柳一烈)씨가 동행해주었다. 마을 노인들에게 선생의 묘소를 묻자 대뜸 “아,그 풋심 떼던 묏등”이라고 대답한다.1950년대 후반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농촌 사람들은 해마다 여름철만 되면 ‘풋심’이라는 병을 앓곤 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높은 열이 나는 특징을 지닌 병으로서 3일열 또는 4일열 등으로 구분하는데, 심하면 빈혈이 생기고 황달을 일으키기도 하는 무서운 병이었다. 학질(말라리아)이라고 부르는 이 질병을 농촌 사람들은 흔히 풋심이라 했다. 뚜렷한 처방약이 없어서 한 번 걸리면 한달 이상은 예사로 고생하는 무서운 질병이었다.사흘이나 나흘 간격으로 재발하기 때문에 몇 차례 재발한 고열로 고생한 사람들은 귀신이 든 것이라고 여기면서 푸닥거리를 하는 등 안타까운 시달림을 겪었다. 그때 누군가의 입에서 섬뜩한 처방전이 흘러나왔다.어떤 잘못으로 인하여 형장에서 참수된 자의 무덤을 찾아내어 마지막 치유 방법을 시도해보라는 것이었다.즉, 풋심을 앓는 환자가 캄캄한 한밤중을 이용하여 참수된 자가 묻혀 있는 무덤으로 가는 것이다.이때 등불을 켜서는 안된다. 무덤의 왼쪽이나 오른쪽 어떤 쪽이든 한쪽에 가서 시체가 누워 있는 방향과는 반대방향으로 세 번 구르는 것이다. 그때 환자는 ‘내 풋심 떼어가거라!’를 세 번 외치면서 거꾸로 구른 뒤 곧바로 집으로 돌아오는데,아무리 무서워도 뒤돌아보면 안된다.만약 뒤를 돌아보면 떨어졌던 풋심이 되붙어서 다시는 안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다.과연 효험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으스스한 그 처방전이 이 마을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이렇듯 류계춘 선생의 삶은 그의 주검이 매장된 묘소와 함께 이 지역 농민들의 삶 속에 녹아들어 매우 독특한 정서로 자리잡고 있었다. 선생은 진주농민들을 선동하여 민란을 주도한 책임으로 다른 아홉명의 동지들과 함께 참수형에 처해졌다. ●80년대 ‘진주농민항쟁’ 으로 정정… 명예회복 선생의 증손자 류일렬씨는 진주 변두리에서 작은 꽃집을 경영하며 산다고 했다.일렬씨 아버지가 생존해 계시던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의 집안 사람들은 반역자의 후손으로 찍혀서 세상 한가운데 드러난채 살 수 없었다고 한다.그래도 일렬씨 아버지는 류계춘 선생의 뜨겁고 적극적이었던 삶을 죄인으로 몰아붙인 조선후기 양반들의 태도가 더 나빴다는 신념을 꺾지 않았었다. 열린 세상이 오면 류계춘의 삶이 옳았다는 평가를 받게 되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그 희망이 실현되는 날을 기다리면서 자식들에게 비겁한 삶을 살지 않도록 가르쳤다고 한다. 1980년대 중반 진주민란이라는 말이 진주농민항쟁으로 바뀌게 되는 날이 왔다. 민란을 주도한 반역자 류계춘을 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로 고쳐 부르자는 민주화의 추세로 마침내 문화류씨(文化柳氏) 좌상공파(左相公派)의 족보에 류계춘 선생의 이름이 오르면서 업적을 기리는 기록이 새롭게 추가되기도 했다. 류일렬씨는 증조부 산소를 참배하기 위해 신발을 벗고 무덤 앞에 섰다.그의 표정이 흔들렸다.그 흔한 비석 하나 세워져 있지 않은 초라한 무덤을 누가 저 격렬했던 진주농민항쟁을 이끈 농민혁명가의 무덤으로 보겠는가 하는 생각 때문이 아니었다. 작은 돌 하나도 깎아 세우지 못할 만큼 일렬씨 집안이 어려운 것은 결코 아니었다.비석을 만들어 세우자는 말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그때마다 일렬씨 아버지의 태도는 강직했다.그 따위 돌 하나 깎아 세워달라고 죽음을 마다하지 않았던 할아버지가 아니셨다는 것이었다. 조선왕조의 잔혹한 농민 탄압,가련한 농민의 살점과 피를 짓밟고 올라서서 누린 양반관료들의 교만과 위선으로 꽉찬 모순을 온몸으로 질타하면서 농민도 인간임을 절규하다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선생이 과연 후손들에게 뭘 바라시겠느냐고 되물었다.빛나는 비석에다 화려한 문장으로 죽은 시대의 허위의식을 장황하게 늘어놓고,단청 입힌 사당이며 으리으리한 기념관을 세워 살아남은 자들의 비겁과 죄악을 은폐시키려 하기보다는,역사 앞에서 한점 부끄럼 없는 당당한 삶을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을 보시고 싶어하지 않겠느냐고 했단다.일렬씨는 그런 아버지의 태도가 옳다고 믿고 있었다. ●흔한 비석 하나 없는 쓸쓸한 혁명가의 무덤 그날 류계춘 선생 묘소 앞에서 그가 잠시 괴로운 표정을 지은 것은 묘소 가까이까지 밀고 들어오는 가진자들의 별장이 언젠가는 선생의 무덤을 딛고 올라설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이었다.어쩌면 그렇게 될지도 모른다.그것도 아주 짧은 시간 뒤에.일렬씨는 이 시대 농촌,농업,농민의 삶이 시장논리와 자본의 논리에 밀린 채 무시되어 짓밟히는 것과 류계춘 선생 동지들의 농민항쟁 정신이 왜곡,무시되는 점이 닮아보인다며 한숨지었다. 류계춘 선생과 혁명동지들을 진주형장에서 참수하여 그 목을 진주 남강 건너는 나루터와 장터에 높이 매달아 놓고 지나가는 사람들로 하여금 국가에 반역하면 누구든 저렇게 되고만다는 것을 보여준 그 국가는 과연 누구를 위한 국가였던가? 그리고 지금 이 시대 농민과 농업의 위기,농촌문화의 황폐화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또 다시 진주농민항쟁같은 역사의 몸부림이 필요한 것일까?
  • 가구 전문 디자이너 강신우씨 “내이름 건 세계적 브랜드 만드는게 꿈”

    우리나라에서 이름있는 디자이너들을 떠올려 보자.패션 디자이너하면 앙드레김 이영희 홍미화 이상봉,인테리어 디자이너하면 리모델링 프로그램으로 유명해진 양진석 김원철 이창하 등을 쉽게 생각해낼 것이다.그럼 가구 디자이너는 어떨까.가구 디자이너를 대보라 하면 대뜸 이렇게들 말할 것이다. “가구만 따로 디자인하는 사람도 있어?그냥 인테리어하는 사람이 가구까지 만드는 거 아냐?” 천만에! 알바 알토,에로 아르니오,필립 스탁,카림 라시드 등은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가구 디자이너들이다.국내에도 잘 알려져 이들의 제품을 사려고,주거공간 건축에 섭외하려고 안달난 사람들도 있다. ●나이 마흔에 오른 이탈리아 유학길 하루 24시간 책상,의자,식탁,옷장,침대 등 단 일분도 가구와 떨어져서 살 수 없는 데도,우리에게 가구 디자이너란 생소하다.집이나 사무실에 세련된 디자인의 가구가 놓여 있는 것만큼 즐거운 일이 없는데도 말이다. 10여년 동안 가구업체에서 실무경험을 쌓고도 마흔을 바라보는 나이에 이탈리아 유학을 훌쩍 떠난,‘한국의 첫 가구디자인 국제대회 수상자’‘한국의 첫 유명 가구학교 졸업자’의 타이틀을 달고 고집스레 가구 디자이너의 길을 걷는 강신우(姜信雨·41)씨에게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모두들 말렸다.홍익대 목공예과와 산업대학원을 졸업하고 가구회사,대학강단에서 지칠 줄 모르게 활동을 하던 그가 돌연 더 공부를 하겠다고 유학을 결심했을 때는. “제아무리 한 분야에서 도가 텄다고 해도 유학을 다녀오지 않으면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게 현실이었어요.어쩌면 자격지심일 수도 있지만….모두들 만류했지만 단 한명,저보다 똑똑한 아내만이 절 격려했습니다.” 이탈리아의 5년제 가구학교인 리소네 국립가구학교에 지원했다.그동안의 경력을 인정받아 5학년에 입학 허가를 받았다.유학기간은 2년.가족을 데리고 유학 가기에는 어정쩡한 기간이었다. “2살,5살이던 아이들이 2년 동안 외국생활을 접하면 우리나라에도 적응하기 어려울 거라면서,아내는 우석·동석 두 아이와 남겠다고 하더군요.” 그렇게 신우씨는 2002년 이탈리아로 떠났다. 어렵사리 떠난 유학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국립가구학교에 아시아계는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였고,한국인은 신우씨가 유일했다.말 한마디 통하지 않았고,학생들은 자신을 ‘유령’보듯 했다. “꿀먹은 벙어리였죠.향수병도 얼마나 크게 앓았던지….많이 접하고 느끼기 위해 쉬지 않고 돌아다녔고,결국 우물안 개구리가 큰 세상을 경험하게 됐습니다.” ●한국인 디자이너,빛을 발하다 동기들에게 꿔다놓은 보릿자루 같은 존재였던 그가 유학생활 반년 만에 실력을 인정받을 기회를 얻었다. “어느날 교수가 대뜸 제게 학생들을 가르치라 하더군요.저도 학생인데 말이죠.실력이야 어찌됐든 디자인 강국도 아닌 한국의 학생한테 배워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도 있었죠.” 특히 학생들은 한국에 대해 중국과 함께 ‘디자인을 훔쳐가는 나라’ 정도로 알고 있었기에 더욱 놀라운 일이었다.그는 그의 독창성과 랜더링(색 입히는 작업) 능력을 인정한 교수를 위해,또 한국의 이미지 제고를 위해 마음껏 실력을 발휘했다. 그의 능력이 대외에도 알려졌던 것일까.그는 2002년 이탈리아 리소네시 축제의 포스터 디자인과 환경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참여했다. 이듬해에는 이탈리아 가구 관련회사들이 공동주관하는 국제공모전에서 세계 각국 500여명 중 유망 디자이너 30명에 선정됐고,‘제16회 이탈리아 영&디자인 2003’을 수상했다.한국인으로선 처음 가진 영예였다. ●창의력을 키워주는 교단에 서고파 지난해말 한국인으로서 처음으로 국립가구학교를 졸업하고 귀국한 그는 지금 눈코뜰새 없이 바쁘다.3월부터 건국대 디자인대학원,협성대 조형대학원,경원대학교,계원예술대학 등 4개 대학에 출강하기 때문이다.강의를 하는 한 학기 동안 그는 학생들에게 창의력과 상상력을 가르쳐주고 싶단다.유학중에 느낀 것이다. “이탈리아 가구산업도 영국산 가구들을 수입 판매하는 수준이었죠.19세기 후반부터 가구학교를 세우고 학생들의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주면서 지금의 가구 디자인 선진국으로 성장한 것입니다.” 그는 이 대목에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점을 지적했다.이탈리아에선 가구의 디자인,재질,색상 등을 디자인한 학생이 끝까지 책임지고 제작하도록 한다.무궁무진한 디자인을 시도하면서 실수를 거듭하고 결국엔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완벽한 제품이 나온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어떨까.그는 “학생들에게 디자인의 이론을 먼저 주입하고 학생들이 선보인 작품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꼬집어 디자인을 지도자의 취향에 맞추는 경우가 대부분”이라면서 “점점 창의력을 발휘할 기회가 줄어드는 것이다.”라고 설명했다. 디자인 전공자들이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데도 문제는 계속된다.가구업체에서 디자이너의 독창적인 작품보다 팔릴 만한 외국 유명한 가구 디자인을 베끼도록 종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는 “가능하다면 국가차원에서 가구전문학교를 설립해 전문가를 육성해야 한다.”며 “젊고 유능한 디자이너들을 후원하고 국제가구전에 도전하면서 한국의 인지도를 높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름을 건 가구 디자인을 꿈꾼다 “할아버지가 대목수셨어요.그 시절에는 대목수가 동네 건물을 다 짓고 소목장은 가구같은 작은 것들을 만드는 역할이였죠.온 집안의 가구까지 직접 만드신 할아버지를 보고 상상력을 십분 발휘하는 가구 디자이너를 꿈꾸었나봐요.” 그도 집에 있는 가구를 대부분 직접 만들어낸다.이리중학교 시절부터 그림에 손을 댄 그는 지금도 가방에는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며 디자인을 구상한다.그의 자기개발은 마침표를 모른다. “조만간 ‘현대가구디자인(2000)’에 이은 디자인 실용서를 내고,개인전도 열 생각입니다.장기계획이요? 이름을 건 가구 브랜드를 만드는 겁니다.유학시절에는 이탈리아에서 한국 디자이너의 존재를 알렸지만,이제는 세계를 겨냥해야죠.” 최여경기자 kid@seoul.co.kr˝
  • 네번째 소설집 ‘누가‘ 펴낸 윤대녕

    지난해 4월 창작에 전념하러 제주로 내려간 윤대녕이 네 번째 소설집 ‘누가 걸어간다’(문학동네)를 들고 서울에 들렀다. 5년 만에 낸 작품집은 지난해 쓴 4편 등 6편의 작품을 모은 것인데 “중·단편을 정기적으로 쓰는 게 문학적 긴장과 감각을 유지하는 데 좋았다.”고 말했다.제주 생활에서 나온 여유와 성찰 덕분인 것으로 보인다. “(제주로 내려간 것은)문학적 환경을 바꾸려는 시도였는데 냉정해지고 객관적이 되면서 집중력과 문학적 내구력이 늘고 글에 대한 허영심도 가셨다.”고 스스로 진단했다.번잡한 도심을 벗어나 자기 속으로 더 들어간 덕분에 작가의 창작 열기는 더 그윽해지고 치열해진 듯 “매년 중·단편 3∼4편을 쓰고 한 사람이 죽어가는 과정을 통해 우주·시간에 대한 아름다운 생명의 고독감을 다룰,쓸 만한 장편도 쓸 계획”이라고 들려준다. 작가는 90년 ‘문학사상’신인상으로 등단한 뒤 ‘옛날 영화를 보러 갔다’‘달의 지평선’‘미란’‘눈의 여행자’ 등 장편과 ‘은어 낚시 통신’‘남쪽 계단을 보라’ 등 중·단편을 가로질러 왔는데 그 차이를 물었더니 “단편이 문학하는 느낌을 더 주지만 힘은 더 든다.200∼300장 분량이 제일 편하다.”고 고백했다. 이번 작품집에는 ‘걷는 이야기’가 자주 등장한다.‘흑백 텔레비전 꺼짐’의 일도와 정원은 서울 도심의 새천년 맞이행사장 주위를,‘찔레꽃 기념관’의 주인공 소설가와 같은 오피스텔에 사는 여자 방송작가는 남산의 찔레꽃을 보러 무작정 비 오는 심야의 도심을 걸어간다.‘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의 남자는 아예 무작정 걷는다.작가는 그 ‘걸음 속 대화와 묘사’로 인물들의 내면과 삶의 흔적을 비춘다.그들은 대개 자기 정체성을 잃고 현실에서 표류하는데 아버지와의 관계에서 자아를 잃어버린 하원(‘흑백 텔레비전‘),출생과 관련해 심한 열등감을 갖고 있는 독신녀나 현실에서 탈출구가 봉쇄된 탈영병(표제작),문학적 가치가 무시되는 현실에서 방황하는 예술가(‘찔레꽃 기념관’) 등의 모습으로 투영된다.해설을 쓴 평론가 이남호(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는 “정체성의 위기를 우리 시대의 가장 중요한 문제로 제기하면서,그 현상과 원인을 정치적·문화적·사회적·존재론적으로 다양하게 탐구한다.”라고 분석한다. 이런 작품세계는 ‘무더운 밤의 사라짐’‘낯선 이와 거리에서 서로 고함’에서도 잘 나타난다.‘올빼미와의 대화’는 자신의 또 다른 모습인 듯한 사나이와 대화를 시도하면서 자아를 찾으려고 모색한다.이에 대해 작가는 “유독 걷는 것을 좋아한다.”며 “삶의 경계를 걸으면서 자아이면서 타자,그림자이면서 내 자신의 모습을 담았다.”고 설명한다. 이번 작품들은 이전에 보이던 과감한 생략이 많이 줄어 눈길을 끈다.‘시적(詩的)’이라는 평까지 듣던 그의 세계에 설명이 늘어났다.작가는 그에 대해 “아마 불교적 취향 때문에 가능하면 설명을 줄이고 공간과 여백을 키워서 그런 평을 들었는데 내심 달갑지 않았다.”면서 “그 점을 의식한 것은 아니지만 차츰 달라진다.생활 얘기도 늘리고 서사구조도 취하고 싶다.”고 털어놓았다. 그러면서도 “자기 나이를 관통하는 달라진 찰나의 느낌을 표현하는 게 중요하다.”며 “늘 ‘지금이 적기’라고 생각하면서 나이에 걸맞은 소설을 쓸 계획”이라고 의욕을 비친다. 글 이종수기자 vielee@˝
  • [종하랑 선영이의 배낭메고 60개국](8) 중국 베이징

    한달 보름간 무더운 동남아시아 여행을 마치고 아직 혹독한 추위가 남아 있는 중국으로 날아왔다.방콕에서 티베트로 바로 갈 계획이었지만 아무래도 한창 발전의 중심에 있는 베이징(北京)에는 꼭 가봐야 할 것 같아서 계획을 수정했다.하지만 막상와서 보니 영어가 한마디도 통하지 않고 교통수단이며,숙소며,외국 배낭 여행자들을 위한 여행시스템이 전무하다시피하다. 중국에는 요즘 대학가를 중심으로 영어 열풍이 불고 있다지만 아직도 거리에서 만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단 한 마디도 할 줄 모른다.헬로나 생큐,심지어 OK도 안 통한다.국제 언어인 보디 랭기지도 별 효력이 없다.길을 물으면 차렷 자세로 손가락이나 고개로 방향도 가리키지 않은 채 쉬지 않고 중국어로 얘기한다.잘 모르겠다고 영어와 몸짓으로 다시 물어봐도 또다시 중국어만 돌아올 뿐이다.중국말 멈추는 데에만 30초가량 걸릴 정도니 애초 영어로 조금이라도 의사소통을 할 생각은 안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중국에서 중국어 말고 의사소통이 되는 것은 중·고등학교 때 배운 한문실력을 총동원해서 나누는 필담뿐이다.동남아에서 영어 때문에 스트레스를 호소하던 남편이 중국에서만큼은 당당하고 자신있게 대화를 나눈다.옛날에 한자깨나 써 보았는지 자기 없으면 길이나 찾을 수 있겠느냐며 큰소리다. 중국에는 간판이나 유명 외국상품 이름에서도 외래어나 영어 알파벳을 찾아보기 어렵다.모든 상표나 단어가 다 한자화되어 뜻글자로 옮겨지고 그 글자를 중국말로 발음하기 때문에 KFC나 베스킨라빈스 같은 외국 브랜드도 중국에서는 그렇게 발음하면 전혀 알아듣지 못한다.KFC는 ‘컨더지’라고 하고 간판에는 켄터키 할아버지 옆에 ‘肯德基’라고 쓰여 있다. 또 하나 재미있는 것은 사람들의 모습이다.세계의 대도시는 대부분 강을 끼고 있는데 베이징에는 강이 없다.그만큼 옛날부터 물이 부족하고 귀한 곳이다.그런 연유에서인지 정말로 잘 안씻는 사람들이 많아 보인다.말쑥한 양복 겉옷을 걸친 사람도 ‘머리를 적어도 며칠은 안 감았다.’는 표시가 확 날 정도이다. 내가 묵는 숙소 지하에는 머리안마를 해주는 곳이 있다.의자에 앉은 채로 샴푸와 물을 조금씩 묻혀가며 물을 한방울도 흘리지 않고 머리를 기가 막히게 감겨주는데,이 역시 물이 귀한 환경에서 생겨난 기술인 듯싶다. 안마 얘기가 나와서 얘기지만,베이징에 온 뒤로 거의 하루 걸러 안마를 받았다.안마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이곳은 안마가 거의 생활화되어 있다.종류도 다양해서 전신마사지,얼굴마사지,발마사지,등,허리,손,귀,목 등으로 다양하고 값도 저렴하다.한 동네 안에 종류별로 여러 개의 가게가 있는데 매일 사람들이 기다릴 정도로 늘 붐빈다.이곳 마사지는 혈을 짚어주는 마사지라서 처음 받고 나면 온몸이 조금 뻐근하지만 한번 받기 시작하면 계속해서 찾게 된다고 한다. 그리고 중국인들의 생활속에 깊이 들어있는 문화 중 하나가 바로 공원문화이다. 아침저녁으로 크고 작은 공원에 동네사람들이 모여 사교댄스,에어로빅,태극권을 각각의 음악에 맞춰 연마하고 따라하는데,특히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한 동네 사람들이 수십명씩 줄을 맞추어 태극권을 연마하는 모습은 단순히 건강을 유지하는 차원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 맨손으로 하는 종류와 장검을 들고 하는 것,그리고 부채를 들고 하는 종류가 있는데 가끔 멋있는 무술 동작을 보면 여기가 소림사인지 동네 공원인지 구분이 안 갈 정도이다.중국에서는 스님들이 비질하는 것만 보아도 무술하는 것 같다고 하더니 그 말이 맞긴 맞는 것 같다. 앞으로 15년 안에 세계 3대 강국이 된다고 하는 중국,그 중에서도 아시아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며 빠르게 발전하고 있는 수도 베이징.무한한 잠재력을 품고 있는 이 나라의 10년후,20년 후가 궁금해진다. ■ 조선족 신여성 린원위씨 주중 한국기업 ‘IT-SANHA’에서 경리(우리나라의 과장급)로 일하고 있는 조선족 신여성 린원위(林文玉·38)씨를 만난 날은 마침 ‘부녀절’(3월8일)이었다.중국에는 직업을 갖고 일하는 여성이 워낙 많아 사회적으로 이날을 크게 기념한다.직장여성들이 회사에서는 사장이나 남자 동료들에게 선물도 받고 집에서도 이날만큼은 특별대접을 받는다고 한다. 중국에는 일하는 여성이 많다는데,육아는 어떻게 하나요. -아기를 보통 생후 4개월 때부터 학교나 일하는 회사에서 운영하는 탁아소에 맡기고,집안일도 남편과 나눠하기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여성의 95% 이상이 결혼 후에도 계속 일을 하기 때문에 모든 사회 시스템이 여자들에게 편리하게 되어 있죠.학교 교육도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모두 엄마 아빠 출퇴근 시간에 맞춰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4시30분까지 해요.점심도 급식으로 대부분 학교에서 해결해주고,기숙사 시설도 초등학교부터 잘 갖추어져 있어서 주중에는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이들도 많아요. 중국사람들은 자녀를 한 명만 갖는데. -현재 자녀가 두 명 이상이면 벌금을 무는 산아제한 정책이 있는데 다음달부터는 베이징에서 ‘한자녀 갖기 정책’이 완화된다고 해요.조선족처럼 소수민족은 두명까지 허용되었는데 그것도 결혼신고하면 한 명 낳을 수 있는 허가증을 발급받고,첫째 아이가 만 4살이 된 후에 둘째를 가질 수 있는 허가증을 다시 받아야 하지요.그런데 요즘 도시에서는 워낙 자녀를 한 명만 두다 보니 아이들이 귀하게 자라서 버릇이 없는 것 같아요. 베이징에서 소수민족으로 직장생활하는 것이 어떤지. -소수민족이라고 해서 중국내에서 사회생활하는데 차별받거나 특별히 어려운 건 없어요.하지만 중국회사보다 한국기업에서 일하는 것이 보수도 더 많고,전공과 언어면에서 능력을 두배로 발휘할 수 있어서 선호자지요.˝
  • [눈에 띄네~ 이 얼굴]고독이 몸부림칠 때’ 양택조

    감초 중의 감초.‘대한민국 대표 중년배우’들이 줄줄이 나온다는 것만으로 진작 화제가 된 ‘고독이 몸부림칠 때’에서 양택조(65)는 딱 그런 존재다.주현·송재호·선우용녀·박영규·진희경….숱한 드라마들에서 ‘감초’역할을 해온 얼굴들이란 점에서 출연배우들은 태생적(?) 공통분모를 나눈다.그런데 양택조는 그들 사이에서도 또 ‘튄다’. 그의 역할은 홀아비들이 득시글거리는 시골동네에서 유일하게 ‘짝’을 이루고 사는 구멍가게 주인 찬경.아내(이주실)와,혹은 친구인 중달(주현)·진봉(김무생) 등과 나누는 대사들 덕분에 관객들의 배꼽이 요동칠 것 같다.챙겨주는 부인이 있어선지 어수선한 차림새의 동네 노인들과는 ‘때깔’부터 다르다.깔끔한 멜빵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 그는 마치 옆사람한테 농담하듯 천연덕스레 코믹펀치를 날린다. “니 미쳤나? 니 빤스를 왜 내한테 와서 찾노? 내가 입었을까봐!” 부러질 듯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로,잃어버린 팬티를 찾는 부인에게 역정을 내는 장면에서는 박장대소하고 말 것이다.1300원 아끼겠다고 무더운 여름날 버스 꽁무니를 따라뛰는 장면도 웃음이 절로 난다. 만나면 싸우는 앙숙친구 중달과 진봉 사이를 오가는 ‘윤활유’같은 캐릭터로,극중 비중이 주연급이다.스크린에서 모처럼 비중있는 역할을 맡아서인지 시사회장에서도 그는 어느 배우보다 들뜬 표정이었다.“후회되는 장면이 많다.”고 아쉬워한 주현과는 대조적으로 “내가 찍은 영화가 이렇게 아름다울 줄 몰랐다.”며 특유의 입심으로 현장분위기를 ‘업’시켰다. 황수정기자 sjh@˝
  • 대구 실버들의 거리 ‘진골목’

    “실버 골목을 아십니까?” 대구 도심의 약전골목을 아는 사람들은 많다.그러나 약전골목 바로 옆으로 난 ‘진골목’을 아는 사람들은 흔치 않다. 대구시 중구 포정동 중앙로 농협 중앙지점에서 약전골목 입구에 이르는 400m가 진골목이다.대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배어 있어 진골목은 향수에 젖은 노인들이 즐겨 찾는 실버 골목이다. ●부자들의 동네,진골목 진골목은 ‘ㄱ’(기역)을 ‘ㅈ’(지읒)으로 잘못 발음하는 경상도 사투리의 특성 때문에 생겨난 말이다.‘긴 골목’이란 뜻이다. 80여년 전 진골목 일대는 대구의 부자였던 달성 서씨들이 모여 사는 최고급 주택가였다.그러나 당시 영남의 대표적인 부자였던 서병국(徐炳國)이 사망하면서 진골목은 퇴락을 시작했다. 1946년 6월 대구에 호열자(콜레라)가 발생한다.그런데 첫 희생자가 당대의 부호였던 서씨여서 아직도 두고두고 인구에 회자된다.지금은 화교협회 건물로 쓰이는 서씨의 저택은 1000평이 넘는데,그 당시에 개인 풀이 있었고 보일러로 난방을 했을 정도였다고 한다.서양식 건물 양식에 중국식 적벽돌을 사용해 지은 저택은 80여년이 된 건물이지만 아직 원형을 간직하고 있다. 진골목의 정소아과 건물은 대구 최초의 2층 양옥집.1931년 지어진 이 건물은 서병국의 방계형제인 서병직의 소유였으나 1947년 정필수(84) 원장이 인수,지금까지 소아과 병원으로 사용하고 있다.대구가 낳은 천재 석재 서병오(石齋 徐丙五·1862∼1935)도 진골목에서 태어났다.진골목에 살던 만석꾼 서상민의 아들로 태어난 석재는 시인으로,서예가로,화가로, 그리고 가야금과 바둑,의학에도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식민지시대를 풍미하며 살다 갔다.흥선대원군이 석재의 천재성에 반해 당시 17세였던 석재를 운현궁으로 초대,함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일화가 전한다.시인 이육사가 한때 석재의 한약방에서 약배달을 하며 시서화를 배우기도 했다. ●실버들의 사랑방,미도다방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진골목에는 이른 아침부터 향수에 젖은 노인들이 하나둘 찾아든다.1981년 문을 연 미도다방은 하루 400∼500명의 노인들이 찾는 대구 실버들의 본거지.60∼70대 노인들은 젊은 축에 속할 정도로 80대 이상 고령자들이 수두룩하다.남산동 권입섭(101) 할아버지도 일주일에 서너차례 다방을 찾아 노익장을 과시한다. 노인들의 호주머니를 생각해서 차 한잔에 1500원,약차 2000원만 내면 과자도 주고 포도주도 한 잔씩 서비스한다.설에는 양말,보름에는 귀밝이술,동지에는 단팥죽,복날에는 수박을 돌리고 매년 5월8일에는 돼지 서너마리를 잡아 경로잔치를 열기도 한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퇴임 후 경남 합천 고향가는 길에 두 번이나 이곳 다방을 찾았다.지역 국회의원이나 자치단체장들이 수시로 찾아와 노인들에게 인사를 한다. 요즘 미도다방을 찾는 노인들의 표정은 그리 밝지 않다.경기 침체로 노인들도 호주머니가 얇아진 데다 조기 정년과 사업실패 등 자식들을 걱정하는 한숨소리가 다방을 가득 메운다. 주인 정인숙(52)씨는 “IMF 외환위기 전에는 하루 1000여명의 노인들이 찾아왔다.”면서 “요즘은 얇아진 호주머니 탓인지 오후 5시만 되면 일찌감치 집으로 돌아가는 분들이 많다.”며 안타까워했다.정씨는 용돈이 궁한 노인들에게 공짜로 차를 대접하거나 돈을 빌려주고 단골 노인들이 세상을 뜨면 직접 문상가는 의리를 지키고 있다. 실버들의 입맛에 맞는 진골목식당도 진골목을 지키는 터줏대감.진골목식당 건물은 한때 코오롱 창업주 이원만씨가 거주했고 육개장·호박전·묵채·보리떡·콩나물밥 등이 별미다. 대구거리문화연대 권상우 사무국장은 “대구의 근대사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진골목을 훼손하지 않고 문화유산으로 보존하는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구 황경근기자 kkhwang@˝
  • 트레이닝복 세련되게 연출하기

    ‘추리닝’,입기 편한 만큼 발음도 편하게 했던 추리닝 하면 떠오른다.개나리 같은 노란색 상하의에 검정색 옆선이 들어간 이소룡식 체육복이나 80년대 동네 태권도장에서 볼 수 있었던 남색 바탕에 빨간색 라인이 한줄 들어간(반드시 왼쪽 가슴에는 태권동자의 주먹이 있어야 한다) 운동복.운동에 대한 관심이 커져가면서 추리닝은 ‘트레이닝복’이라는 제 발음을 찾고 어느새 하나의 패션인 ‘스포츠룩’으로 뿌리내렸다.지난해처럼 트레이닝복 패션이 거리를 활보한다고,패션 리더라면 맵시 있는 트레이닝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는다.‘스포티즘’은 이미 생활 속에 자리잡았기 때문이다.이제 나만의 멋을 표현할 수 있는 틈새를 노려야 하는데…. 웰빙이 삶의 목적이 되고,웰빙의 방법인 스포츠가 각광받자 스포츠 브랜드뿐만 아니라 여성 영캐주얼,유니섹스 캐주얼 브랜드들도 다양한 스포츠룩을 선보였다.해외 유명 디자이너들은 스타를 위한 스포츠웨어를 비롯해 섹시한 스타일,귀여운 스타일 등 스포츠웨어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했다. ●피트니스 웨어를 일상복으로 스포츠룩의 장점은 다양한 소재,화려한 디자인 등으로 진화하면서 입는 장소와 코디 아이템에 따라 놀라운 변신이 가능하다는 점.다양한 실험을 시도하는 젊은층 입맛에도 딱 맞아 떨어질 뿐 아니라 감각있는 40·50대가 도전하는 데도 무리가 없다. 라피도 김회정 디자인실장은 “최근에는 요가 헬스 풋볼 복싱 발레 등을 모티브로 한 스타일이 등장했다.”며 “디테일(세부장식)과 기능성을 결합한 피트니스 웨어를 일상복으로도 활용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여성용 부츠컷 스타일 강세 올해 트레이닝복은 옆선을 어깨-손목,등,가슴,목 등에 다양한 형태로 활용했다.브랜드 로고나 와펜(문장)을 응용한 그래픽으로 기존 트레이닝복의 단조로움을 해소시켰다. 소재는 지난해 열풍이었던 벨로어와 함께 타올지,면,새틴(반짝이는 소재) 등 다양해졌다.색상도 옐로,오렌지,핑크,그린 등 한층 밝아졌다. 바지는 남자의 경우 주머니 같은 디테일 활용도가 높은 실용적인 스타일이 새롭게 선을 보이고 있으며 여자는 일자형보다는 엉덩이에서 무릎까지 달라붙고 무릎 밑으로 퍼지는 부츠컷 스타일이 강세다. 주목할 것은 상의는 허리부분이 아져 살짝 노출되고,하의는 타이트해 몸매가 많이 드러나게 디자인된 것이 많다는 점.평범한 트레이닝복을 섹시코드로 풀어냈다. ●청바지·청재킷과 코디하면 실패 안해 유행하는 스타일을 알았으니 이제 남은 과제는 내 몸에 적용하는 것이다.어떻게? 멋지게,폼나게,제대로! 휠라코리아 김미연 디자인실장은 “아무리 예쁜 트레이닝복도 코디에 따라 섹시미를 강조한 패션이 될 수도 있고,학교 체육복 스타일이 될 수도 있다.”며 몇 가지 원칙을 강조했다. 김 실장은 “트레이닝복을 위아래 한벌로 입지 말고,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소재와 섞어 입는 ‘믹스 앤드 매치’를 시도하는 것이 좋다.”며 “스포츠룩 초보자라면 청바지,청재킷 등의 진 제품과 코디하면 실패는 없다.”고 조언했다. ●벨트등 액세서리 이용하면 더 좋아 바지의 밑위 길이(허리∼가랑이)가 짧은 바지에 트레이닝 재킷을 걸치거나,하늘하늘한 시폰 블라우스에 날렵한 트레이닝 바지를 입는 것도 추천 코디.여자는 한 치수 작은 것을 선택해 가슴이나 배꼽이 보이도록 입고,반대로 남자는 한 치수 큰 것으로 골라 헐렁하게 입으면 섹시미를 더할 수 있다.또 트레이닝복과 함께 핸드백,하이힐,머플러,화려한 벨트 등의 액세서리를 함께 이용하면 세련돼 보인다. 트레이닝복의 줄무늬는 움직임을 더욱 역동적으로 할 뿐만 아니라 팔,다리를 길어 보이게 하므로 다리가 짧거나 상체가 뚱뚱한 사람은 줄무늬를 이용해 날씬한 효과를 주는 것도 김 실장이 제안하는 코디다. 최여경기자 kid@˝
  • [고양시 풍동 재개발주민 하소연] 분양가 낮춰 입주 도와달라

    ‘낮은 소리’는 사회의 그늘진 곳의 목소리를 담고 있습니다.다수의 큰 목소리에 가려,외면되고 있는 소외층의 목소리를 드러내 보이려는 것입니다.방치할 경우 사회의 대형 갈등요인으로 번질 수 있는 사안을 미리 공론화함으로써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것입니다.관심있는 분들의 많은 제보를 기다립니다.서울신문 편집국 사회교육부(02)2000-9173,www.seoul.co.kr 또는 www.kdaily.com으로 연락 주십시오. 경기 고양시 풍동지구 재개발 사업을 둘러싼 원주민과 대한주택공사·건설교통부 사이의 갈등이 날로 깊어지고 있다.주민은 보상금만으로는 아파트에 입주할 수 없으니 분양가를 낮춰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만,주공과 건교부는 풍동 주민에게만 특혜를 줄 수는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국민고충처리위원회가 중재에 나섰지만 여전히 뚜렷한 해결의 실마리는 보이지 않고 있다. ●“내 집 내놔!” 지난 12일 서울 강남구 논현동 대한주택공사 서울지역본부 앞.버스를 타고 모여 든 풍동지구 주민 40여명이 격렬한 항의집회를 벌였다.이들은 북과 징을 치고,준비해 온 콜라병·생수병·막걸리병 안에 돌을 넣어 두드리면서 “내놔라 내 집,내놔라 내 땅”이라고 외쳤다.오전 11시부터 시작된 집회는 오후 4시까지 이어졌다.점심은 미리 준비해온 반찬에 즉석에서 어묵으로 국을 끓여 나눠 먹었다. 집회에 참가한 풍동지구 주민 이모(50)씨는 “시위를 한 지 100일이 다 돼가는데 주공측은 꿈쩍도 하지 않고 있다.”면서 “분양가는 요즘 시세이고,보상가는 지난 99년 기준이라니 말이 되느냐.”고 목소리를 높였다.주민 김모(57)씨는 “78년 풍동으로 이사한 뒤 슈퍼마켓을 하며 20여년 동안 살았는데 집이 헐려 다른 곳에 가게를 얻으려 해도 보상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면서 “낙후된 집을 싼 가격에 새 것으로 분양해주는 줄로만 알았다.”고 말했다.그는 “재개발에 동의해준 것이 후회스럽기만 하다.”고 눈시울을 붉혔다. ●분양권 전매 금지로 타격받아 15일 찾아간 풍동지구 현장은 이미 철거작업이 대부분 완료돼 휑한 모습이었다.극빈층의 세입자를 보호한다는 이유로 전국철거민연합에서 10m 높이의 철탑을 쌓고 3,4명이 항의 농성을 벌이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풍동 일산농협 건물 2층에 마련된 ‘풍동 원주민 특별공급아파트 분양가 인하 대책위원회’ 사무실은 주민 발길이 거의 끊어졌다.대부분 인근 동네에 월세를 얻어 살고 있고 집회를 하러 갈 때만 모이고 있다.이들은 주민의 사정이 절박해진 것은 정부의 아파트 분양권 전매금지 조치에 주요한 원인이 있다고 분석했다.풍동지역 공인중개사 김근용(34)씨는 “지난해 10·29 부동산 대책에서 아파트 분양권 매매를 전면 금지하면서 주민이 분양권을 팔 수도 없고,보상금으로 아파트에 입주하기에는 부족한 처지가 됐다.”고 설명했다.대책위 총무 조선자(63·여)씨는 “결과적으로 능력이 있는 무주택자를 위해 집이 있는 서민이 집을 내놓은 꼴이 됐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이에 풍동 280여 가구 주민은 지난해 11월 대책위를 결성하고 청와대와 주공,건교부 등에 탄원서를 보냈다.같은 달 27일 분양가가 공개되면서 주민의 항의는 더욱 거세졌다.지난 1월부터 30여 차례에 걸쳐 주공 서울 지부 앞에서 항의집회를 계속하고 있다. 풍동지구가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99년 7월.주공이 고양시 풍동·식사동 일대 83만7765㎡(약 25만3000평)를 택지개발예정지구로 지정한데 이어 2000년 10월 경기도가 개발계획을 승인한 이후 본격적인 재개발 사업이 진행되고 있다.2006년말 완공 예정이다. ●고충위 중재에도 해결책 안보여 풍동 주민의 요구는 생활기본시설 비용 등을 뺀 특별가격에 아파트를 분양,원래 살던 곳에서 계속 살게 해달라는 것이다.차선책으로는 무이자 또는 장기 저리로 주택을 공급해줄 것을 희망하고 있다. 민원 내용을 검토한 고충위는 지난달 23일 주공은 이주대상자에게 생활기본시설이용 등을 공제한 가격 이하로 주택을 특별 공급하고,건교부는 이같은 내용이 명확하도록 제도를 개선하라고 권고했다.주민 손을 들어준 것이다. ‘공익사업을 위한 토지 등의 취득 및 보상에 관한 법률’(토지보상법) 78조에서는 주택건설 사업시행자가 이주대상자에게 ‘택지’를 조성,공급하는 경우 도로·급수 등 생활기본시설 비용을 부담토록 규정돼 있다.그러나 ‘주택’을 공급하는 경우에는 시설비용을 사업자가 부담해야 한다는 명시 규정은 없다. 이에 대해 고충위는 토지보상법의 제정 취지에 맞게 해석하면 택지는 물론 주택도 시설 비용을 제외한 가격으로 원주민에게 공급해야 하고,이미 이같은 취지의 대법원 판례가 있다고 밝혔다.고충위 관계자는 “토지보상법은 이주 대상자에게 원래의 생활 상태를 원상 회복시키면서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해주기 위해 마련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고충위의 결정은 권고일 뿐 명령은 아니기 때문에 강제력이 없다.건교부와 주공은 이에 대한 2차 의견을 고충위에 제출해야 하지만 아직까지 뚜렷한 대안을 내놓지 않고 있다.주민은 주공과 건교부가 고충위의 권고안을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 감사원에 주공·건교부를 상대로 감사를 청구하기로 해 당분간 갈등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장택동기자 taecks@˝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1)한국의 찻그릇 문화-서영기의 ‘마애불꽃병’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1)한국의 찻그릇 문화-서영기의 ‘마애불꽃병’

    차살림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일보다 이 행위를 통하여 느끼려는 생명성과 정신적 양식과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역사성과 심성이 포함된 문화와 풍속이 담겨 있어야 차살림이 된다는 뜻이다.그래서 차문화는 차를 통해 시대마다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체온과 사상,풍습이 모두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우리나라 차문화에서 꽃과 꽃병은 찻그릇들이 그러하듯 역사성,예술성과 함께 종교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꽃은 생명의 잉태,태어남,성장과 노쇠,죽음으로 이어지는 순환과 영속의 비밀을 침묵으로 말하는 상징물이다.이때 꽃병은 꽃의 거처이며,대지이며,시간이며 공간이다.존재의 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최근 ‘마애불꽃병’이라는 매우 독특한 도예작품을 발표하여 디자인과 역사성이 매우 잘 결합된 새로운 도자문화의 방향을 제시한 서영기(경기대 디자인 공예학부 도자전공·44)교수의 장작가마를 찾아갔다.그의 집이자 작업장인 죽연요(竹淵窯)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 44번지의 산중턱에 있었는데,그가 손수 지은 통나무와 황토를 이용한 집은 아늑했다. 문 : 선생께서는 요즈음 흙과 불로써 한국인의 오랜 생활신앙의 모태였던 산과 바위를 도예 작업으로 형상화하는 특이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마애불이 새겨진 산의 바위 절벽을 꽃병으로 형상화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투실하면서도 정감어린 형태와 따스한 색감을 지닌 화강암의 암석미(岩石美)를 도자예술로 재해석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이런 작업을 하게 된 동기가 있었겠지요? ●화강암의 암석미 도예로 재해석 徐 : 제가 살고 있는 이 동네는 44년 전에 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저의 선대들도 이곳이 고향입니다.단양은 단양팔경으로도 유명하지요.특히 사인암(舍人岩)을 비롯하여 하선암(下仙岩),중선 상선암,도담삼봉(嶋潭三峰) 등은 모두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관들이지요.이처럼 단양은 기암괴석들이 빼어난 풍광을 이루고 있습니다.그래서 어릴 적부터 그런 바위산,절벽들을 보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의 심성에도 단양의 풍광들이 배어들었지 않나 싶습니다. 특별하게 마애불을 의식하여 시도하지는 않았어요.이른바 전통 장작가마를 이용하여 도자기 작업을 하다 보니 전통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전통을 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힘의 본질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요. 시대마다 특징이 있지 않습니까? 그 특징이 변화인데 도예작가는 그 시대의 특징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야 하고,그것은 작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새롭다는 것이 변화 아니겠어요? 그 변화 가운데 저는 마애불과 기암 절벽이 지닌 민간 신앙,이를테면 높은 산이나 깎아지른 절벽 아래서 촛불을 켜놓고 향을 피우면서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거나 치성을 드리는 모습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아주 흔한 풍경이거든요.그래서 흙으로 그 형상들을 빚어보았지요.바위 질감이 느껴지는 천연 유약을 선택하여 입히고 가마 안에 넣었지요. 뜻밖에 괜찮은 느낌의 작품들이 탄생되더군요.그때부터 서산마애불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곳의 마애불들을 시간나는 대로 찾아다니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차츰 이쪽 작업을 많이 하게 된 것뿐입니다. ●시대의 특징을 창작의 원천 삼아야 문 : 작품들 중에는 흡사 관세음보살도에서 볼 수 있는 감로수병(甘露水甁) 모양을 닮은 꽃병이 기암절벽을 업고 있는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있더군요.실제로 관음신앙에 어떤 관심을 갖고 계신가요? 徐 : 그렇습니다. 문 : ‘마애불꽃병’ 연작들을 보고 있다 보면 선생께서는 흙에 관한 나름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실제로 도자기 작업에서 흙의 비중은 절대적이기도 하지요. 흙을 도자기의 근본 재료로 삼는 문제 외에 흙이 지닌 다양한 성질과 자원으로서의 가치 등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徐 : 도자기에서 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지요.첫째는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측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제한된 특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흙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다양한 조형과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하여는 주로 점토질이 풍부한 흙을 쓰지요.부드럽고 유연성이 있으면서 찰기가 좋은 것들이지요. 제한된 특수 목적에 사용되는 흙은 보통 지역에 따라 내화도(耐火度) 정도에 맞는 그릇을 만들 때 제기되는 문제지요.예를 들면 찻사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알갱이가 굵고 내화도가 높은 소백산맥 이남 남해안 지방의 흙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흙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특성이 강화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흙을 조합하여 작가마다의 개성있는 흙으로 바꾸어내어 사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훌륭한 도예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흙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그런데 우리나라는 지난 세기 일제 때 일본인들이 좋은 흙 대부분을 일본으로 실어간 뒤로 사실상 질 좋은 흙이 고갈된 상태라고 말합니다.틀린 주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일제때 좋은 흙 대부분 약탈 당해 문 : 선생께서 도예에 입문하게 된 무슨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徐 : 계기라기보다는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제가 태어나 자란 이곳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좋은 백토(白土) 산지여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요(官窯)가 있었고,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요(民窯)가 번창했던 도자기 골이지요.지금도 유명한 도자기 생산단지가 들어서 있지 않습니까. 저의 숙부님께서 사기장이었지요.그러다 보니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그릇 만드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저는 어릴 적부터 흙을 주무르며 도자기 문화에 흠뻑 젖어서 자랐지요.20세 전후하여 숙부님한테서 본격적으로 도자기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되었고,5년 동안의 수습을 마치고 독립했지만 실패만 맛보았지요.어리석다고 느꼈어요.다시 배우기 위해 김응한 선생의 제자가 되었지요.13년 동안 열심히 배웠습니다.그러니까 꼬박 20년 동안을 전통 도자기 배우는 데 보낸 셈입니다.그런 후에야 비로소 저 나름의 독자적인 작업을 시작하여 ‘죽연요’라는 이름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문 : 흙을 알아보기,흙을 반죽하여 꼬막밀기와 꼬막뜨기,물레질,유약개발,불때기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것 없는 전 과정을 꼼꼼하게 배우고 다져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 20년이라 하셨는데,전통 가마에서 불의 중요성은 특히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요즘 차인들이 다양한 색깔의 변화를 중시하는 경향이거든요.디지털 시대의 문화와 찻그릇의 색깔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徐 : 다양한 색채를 입힌 그릇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일본이나 서구 사회에서는 색채의 다양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도안을 하고 색깔마다 개별적인 작업을 하지요.한국의 전통가마는 불의 성질을 이용하여 자연적인 색채의 조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도자예술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요변(窯變)이라 하지요.가마 안에서 산소량의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로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환원불,중성불,산화불 등으로 분류하는데,이것은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합니다.다만 오랜 경험이 가장 중요하며 다소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만.저의 경우 10여년 정도 불을 지피다보니 저절로 터득되더군요. 예를 들면 가마의 첫째 칸은 환원불로서는 가장 성공률이 높은데 바닥에 숯불이 많이 쌓이기 때문이지요.아무튼 색깔은 유약도 중요하지만 불의 상태가 더욱 중요하고,이 중요성은 오랜 경험과 치밀한 분석이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불의 성질 이용해 색채의 조화 만들어 문 : 전통의 문제와 함께 요즘 크게 논의되는 것이 모방과 복제에 따른 부작용인 것 같은데,이 점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徐 : 도자기에서 전통이란 작가의 피속에 흐르는 정신이겠지요.전통 그 자체가 그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를 몸에 지닌 작가가 그만의 생각으로 다양하게 작품을 만드는 것이지요.좋은 전통은 곧 품격 높은 다양성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것이겠지요. 전통 문화를 흔히 틀속에 가두어 놓고 획일화한 것으로 보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모방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 작업입니다.배우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지요.하지만 작가가 된 뒤에도 모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복제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죽음일 따름입니다. 문 : 찻사발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지요. 徐 : 절제된 아름다움이 함축된 형태와 어딘지 모르게 좀 모자라고 비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찻사발을 만들고 싶습니다.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21)한국의 찻그릇 문화-서영기의 ‘마애불꽃병’

    차살림은 단순히 차를 마시는 일보다 이 행위를 통하여 느끼려는 생명성과 정신적 양식과 내용이 들어 있는 것이다.역사성과 심성이 포함된 문화와 풍속이 담겨 있어야 차살림이 된다는 뜻이다.그래서 차문화는 차를 통해 시대마다 그 속에 살았던 사람들의 체온과 사상,풍습이 모두 포함된 것이라 할 수 있다.우리나라 차문화에서 꽃과 꽃병은 찻그릇들이 그러하듯 역사성,예술성과 함께 종교적인 의미도 지니고 있다.꽃은 생명의 잉태,태어남,성장과 노쇠,죽음으로 이어지는 순환과 영속의 비밀을 침묵으로 말하는 상징물이다.이때 꽃병은 꽃의 거처이며,대지이며,시간이며 공간이다.존재의 집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최근 ‘마애불꽃병’이라는 매우 독특한 도예작품을 발표하여 디자인과 역사성이 매우 잘 결합된 새로운 도자문화의 방향을 제시한 서영기(경기대 디자인 공예학부 도자전공·44)교수의 장작가마를 찾아갔다.그의 집이자 작업장인 죽연요(竹淵窯)는 충북 단양군 대강면 방곡리 44번지의 산중턱에 있었는데,그가 손수 지은 통나무와 황토를 이용한 집은 아늑했다. 문 : 선생께서는 요즈음 흙과 불로써 한국인의 오랜 생활신앙의 모태였던 산과 바위를 도예 작업으로 형상화하는 특이한 시도를 하고 있는데,마애불이 새겨진 산의 바위 절벽을 꽃병으로 형상화한 것을 들 수 있습니다.투실하면서도 정감어린 형태와 따스한 색감을 지닌 화강암의 암석미(岩石美)를 도자예술로 재해석하는 매우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평가하고 싶습니다.이런 작업을 하게 된 동기가 있었겠지요? ●화강암의 암석미 도예로 재해석 徐 : 제가 살고 있는 이 동네는 44년 전에 저가 태어난 곳이기도 합니다.저의 선대들도 이곳이 고향입니다.단양은 단양팔경으로도 유명하지요.특히 사인암(舍人岩)을 비롯하여 하선암(下仙岩),중선 상선암,도담삼봉(嶋潭三峰) 등은 모두 기암 절벽으로 이루어져 있는 장관들이지요.이처럼 단양은 기암괴석들이 빼어난 풍광을 이루고 있습니다.그래서 어릴 적부터 그런 바위산,절벽들을 보고 자라다 보니 자연스럽게 저의 심성에도 단양의 풍광들이 배어들었지 않나 싶습니다. 특별하게 마애불을 의식하여 시도하지는 않았어요.이른바 전통 장작가마를 이용하여 도자기 작업을 하다 보니 전통이란 것의 의미를 생각할 수밖에 없지요.전통을 저는 끊임없이 변화하는 힘의 본질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변하지 않는 것은 없지요. 시대마다 특징이 있지 않습니까? 그 특징이 변화인데 도예작가는 그 시대의 특징을 창작의 원천으로 삼아야 하고,그것은 작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새롭다는 것이 변화 아니겠어요? 그 변화 가운데 저는 마애불과 기암 절벽이 지닌 민간 신앙,이를테면 높은 산이나 깎아지른 절벽 아래서 촛불을 켜놓고 향을 피우면서 사람들이 기도를 올리거나 치성을 드리는 모습이 문득 떠오르더군요. 아주 흔한 풍경이거든요.그래서 흙으로 그 형상들을 빚어보았지요.바위 질감이 느껴지는 천연 유약을 선택하여 입히고 가마 안에 넣었지요. 뜻밖에 괜찮은 느낌의 작품들이 탄생되더군요.그때부터 서산마애불을 비롯하여 전국 여러곳의 마애불들을 시간나는 대로 찾아다니기도 했지요.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차츰 이쪽 작업을 많이 하게 된 것뿐입니다. ●시대의 특징을 창작의 원천 삼아야 문 : 작품들 중에는 흡사 관세음보살도에서 볼 수 있는 감로수병(甘露水甁) 모양을 닮은 꽃병이 기암절벽을 업고 있는 듯한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도 있더군요.실제로 관음신앙에 어떤 관심을 갖고 계신가요? 徐 : 그렇습니다. 문 : ‘마애불꽃병’ 연작들을 보고 있다 보면 선생께서는 흙에 관한 나름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지는데,실제로 도자기 작업에서 흙의 비중은 절대적이기도 하지요. 흙을 도자기의 근본 재료로 삼는 문제 외에 흙이 지닌 다양한 성질과 자원으로서의 가치 등에 대한 선생의 견해는 어떤 것입니까? 徐 : 도자기에서 흙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겠지요.첫째는 표현의 자유를 추구하는 측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제한된 특수 목적을 위해서 사용되는 흙으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다양한 조형과 주제의식을 표현하기 위하여는 주로 점토질이 풍부한 흙을 쓰지요.부드럽고 유연성이 있으면서 찰기가 좋은 것들이지요. 제한된 특수 목적에 사용되는 흙은 보통 지역에 따라 내화도(耐火度) 정도에 맞는 그릇을 만들 때 제기되는 문제지요.예를 들면 찻사발을 만드는 데 사용되는,알갱이가 굵고 내화도가 높은 소백산맥 이남 남해안 지방의 흙이 여기에 해당된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일반적인 경우 흙의 성질을 잘 파악하여 특성이 강화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흙을 조합하여 작가마다의 개성있는 흙으로 바꾸어내어 사용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물론 훌륭한 도예작가는 그만의 독특한 흙을 반드시 갖고 있어야만 합니다.그런데 우리나라는 지난 세기 일제 때 일본인들이 좋은 흙 대부분을 일본으로 실어간 뒤로 사실상 질 좋은 흙이 고갈된 상태라고 말합니다.틀린 주장이 아니라고 봅니다. ●일제때 좋은 흙 대부분 약탈 당해 문 : 선생께서 도예에 입문하게 된 무슨 특별한 계기라도 있었습니까? 徐 : 계기라기보다는 환경이라고 말할 수 있겠군요.제가 태어나 자란 이곳은 조선시대를 통하여 좋은 백토(白土) 산지여서 국가에서 운영하는 관요(官窯)가 있었고,조선 후기에 이르러서는 민요(民窯)가 번창했던 도자기 골이지요.지금도 유명한 도자기 생산단지가 들어서 있지 않습니까. 저의 숙부님께서 사기장이었지요.그러다 보니 온 집안 사람들이 모두 그릇 만드는 일과 관련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지요.저는 어릴 적부터 흙을 주무르며 도자기 문화에 흠뻑 젖어서 자랐지요.20세 전후하여 숙부님한테서 본격적으로 도자기 만드는 일을 배우게 되었고,5년 동안의 수습을 마치고 독립했지만 실패만 맛보았지요.어리석다고 느꼈어요.다시 배우기 위해 김응한 선생의 제자가 되었지요.13년 동안 열심히 배웠습니다.그러니까 꼬박 20년 동안을 전통 도자기 배우는 데 보낸 셈입니다.그런 후에야 비로소 저 나름의 독자적인 작업을 시작하여 ‘죽연요’라는 이름을 내걸게 되었습니다. 문 : 흙을 알아보기,흙을 반죽하여 꼬막밀기와 꼬막뜨기,물레질,유약개발,불때기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것 없는 전 과정을 꼼꼼하게 배우고 다져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데 걸린 시간이 20년이라 하셨는데,전통 가마에서 불의 중요성은 특히 중요하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요즘 차인들이 다양한 색깔의 변화를 중시하는 경향이거든요.디지털 시대의 문화와 찻그릇의 색깔 관계라고도 말할 수 있겠지요. 徐 : 다양한 색채를 입힌 그릇을 선호하는 것은 분명합니다.일본이나 서구 사회에서는 색채의 다양성을 해결하기 위하여 인위적인 도안을 하고 색깔마다 개별적인 작업을 하지요.한국의 전통가마는 불의 성질을 이용하여 자연적인 색채의 조화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도자예술의 완성도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흔히 요변(窯變)이라 하지요.가마 안에서 산소량의 정도에 따라 여러 가지 색깔로 변화하는 것을 말합니다.환원불,중성불,산화불 등으로 분류하는데,이것은 기술적으로 얼마든지 조절이 가능합니다.다만 오랜 경험이 가장 중요하며 다소 시간이 걸리는 문제가 있기는 합니다만.저의 경우 10여년 정도 불을 지피다보니 저절로 터득되더군요. 예를 들면 가마의 첫째 칸은 환원불로서는 가장 성공률이 높은데 바닥에 숯불이 많이 쌓이기 때문이지요.아무튼 색깔은 유약도 중요하지만 불의 상태가 더욱 중요하고,이 중요성은 오랜 경험과 치밀한 분석이 있어야만 발전할 수 있다고 봅니다. ●불의 성질 이용해 색채의 조화 만들어 문 : 전통의 문제와 함께 요즘 크게 논의되는 것이 모방과 복제에 따른 부작용인 것 같은데,이 점은 어떻게 보시는지요. 徐 : 도자기에서 전통이란 작가의 피속에 흐르는 정신이겠지요.전통 그 자체가 그릇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피를 몸에 지닌 작가가 그만의 생각으로 다양하게 작품을 만드는 것이지요.좋은 전통은 곧 품격 높은 다양성을 더욱 활성화시키는 것이겠지요. 전통 문화를 흔히 틀속에 가두어 놓고 획일화한 것으로 보려는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모방은 예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초 작업입니다.배우는 과정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하지요.하지만 작가가 된 뒤에도 모방에서 벗어나지 못하고,복제하는 것은 작가 자신의 죽음일 따름입니다. 문 : 찻사발에 대한 선생의 생각을 말씀해 주시지요. 徐 : 절제된 아름다움이 함축된 형태와 어딘지 모르게 좀 모자라고 비어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찻사발을 만들고 싶습니다.˝
  • 파릇한 봄내음 ‘파래’

    바다의 푸른 기운을 머금은 파래.아싹거리며 씹히는 맛과 청량감도 일품인 해조류이지요.김을 해태(海苔)로 부른 것처럼 파래를 청태(靑苔)로 불렀다지요.김과 같은 대우를 받았지요.반면 유럽에선 파래를 더 쳐준답니다.김은 먹지 않지만 파래는 즐겨 먹거든요.또 파래는 위와 십이지장의 궤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 물질이 들어있고,담배의 니코틴을 중화하는 데 탁월하다지요.건강을 지키는 데 도움이 된다는 파래,더욱 맛있어 보이죠? ■파릇파릇 봄내음 몸에도 왔다래 부산 가덕도와 경남 진해 사이의 바다.바다엔 하얀색 스티로폼이 두줄로 쭉쭉 늘어서 끝이 안 보인다.어민들의 텃밭인 파래 양식장의 부표다. “파래로 찌짐(부침개)을 부쳐 먹으면 얼마나 맛있는데요.파래로 못해 먹는 게 없어요.”0.8t급의 FRP(특수 강화 플라스틱) 배인 지원호에서 파래를 뜯는 장채원(64·부산 강서구 천가동),박정남(60)씨 부부의 설명이다.“가덕도 파래는 특유의 향과 담백하면서도 단맛이 최곱니다.”남편 장씨는 파래 자랑을 늘어놨다. 인근에서 파래 발에 붙은 잡초격인 짙은 갈색의 ‘고르메’를 떼어내던 나경호 선장 오영호(41)씨는 “요샌 청둥오리떼가 파래를 뜯어먹어서 물에 가라앉혀두고 있지요.”라고 말했다. 막 건져올린 파래의 물기를 꼭 짜 입안에 넣어보니 미끌거리듯 보드라웠다.천천히 씹어보자 아짝아짝 씹히는 맛이 좋았다.향긋한 향이 느껴지면서 깨끗한 바다 냄새가 나는 듯했다.입안에 달라붙지도 않고 단맛이 약간 나며 개운해졌다.바닷물이 덜 빠진 탓에 물론 짰다.김춘생(67)할머니는 “파래를 깨끗이 씻어 꼭 짜면 소금기가 잘 빠진다.”고 말했다. 가덕도 파래는 자연산이다.갯가의 바위에 붙은 돌파래는 요즘 더 이상 작업하지 않는다.깨끗이 다듬고 손질해도 파래 속에 작은 돌맹이가 끼어있기 때문이다.대신 바다 가운데의 파래 발에서 딴다. 가덕도 파래는 발에 포자를 인공적으로 붙이지 않는다.바다에 떠다니던 포자를 채집하는 방식이다.폭 1m에 길이 70∼90m가량의 그물발에 저절로 붙게 한다.그래서 가격도 잘 받는 편이다.매일 낮 12시 경남 진해시 용원동 의창수협에서 경매한다.35㎏들이 한상자에 요즘 4만원선이다.가격이 잘 나갈 땐 8만원대였다. 15년째 파래 작업을 한다는 선창호 선장 김두현(52)씨는 “가덕도 파래는 비단처럼 보드랍고,검은 빛이 날 정도로 푸르다.”며 “광택이 있어야 좋은 파래”라고 설명했다.파래는 물살이 세지 않으면서도 잘 흘러야 잘 산다.깨끗한 민물도 들어와야 한다.이런 곳으로 가덕도와 진해만 사이가 적격이란 게 어민들의 주장이다. 가덕도에선 파래로 요리하는 것이 많다.기본적으로 무를 채썰어 파래와 같이 무치는 파래 무침,조개와 굴 등의 해물과 파래를 넣어 지져내는 파래 부침개,파래를 간장과 물엿에 재운 파래 짠지,파래를 깎두기처럼 담그는 파래 김치,된장국에 넣는 파래 된장국 등이다.파래(300g)에 달래(100g),배 반개를 섞어 무쳐내도 좋다.양념장으로 진간장과 멸치 액젓을 1큰술씩,다진 파·다진 마늘·참기름·깨소금을 1작은술씩 넣어 손으로 조물조물 섞으면 된다. 박초로 세종호텔 이탈리안식당 피렌체 조리장은 “파래는 유럽에서도 ‘바다에서 나는 양상추’라 하여 즐겨 먹었다.”며 파래 샐러드를 추천했다. “우리 동네에선 속병을 앓고 있는 사람이 없어요.다 파래를 먹고 건강한 거지.”30여년째 파래를 한다는 윤유환(50)씨의 파래 예찬이다. 이런 자랑에 근거가 전혀 없는 것만은 아니다.파래에는 비타민U라는 항궤양성 물질이 많이 함유돼 있다는 사실이 최근 밝혀졌기 때문이다.위장약으로 쓰이는 비타민U는 궤양을 예방하고 위를 튼튼하게 하는 작용이 있다. 이두석 국립수산과학원 수산연구관은 “파래의 메틸티오닌 성분은 김에 들어있는 성분과는 달리,담배의 니코틴 성분을 해독시킨다.”고 말했다.아무리해도 담배를 끊지 못하는 사람들의 밥상에 파래 반찬을 자주 올리는 것이 건강에는 좋은 방법이다. 경남 진해시 용원동 의창수협 주변의 식당가에선 요즘 파래가 밑반찬으로 빠지지 않는다. 남해안에서 나는 새우인 오도리 전문점인 용궁횟집(055-552-0454)은 어떤 음식을 주문해도 밑반찬으로 파래 무침이 맛깔스럽게 나온다.안주인 박정임씨는 경매인을 통해 파래를 매일 조금씩 갖고 온단다.연해산 생선 회 전문점인 김해횟집(055-552-2123)도 괜찮다.아귀와 복 수육 전문점인 먹거리식당(055-552-2672)은 졸복이 아주 괜찮다.1인분(1만 2000원)에 손가락 2개 굵기의 졸복 여남은 마리가 들어가 아주 시원하다.파래와 톳나물 등의 해산물이 밑반찬으로 나와 입맛을 돋운다. ■ 도움말 의창수협(055-552-3093) 글 용원(진해) 이기철기자 chuli@ 사진 오정식기자 oosing@ 사진 용원 왕상관기자 skwang@ ●톳 무침 재료 톳(말린 것 100g) 200g,두부 ¼모,다진 마늘 ½큰술,다진 파·깨소금·참기름 1큰술씩,맛소금 1작은술 만드는 법 (1) 톳은 신선한 것을 선택하여 깨끗이 씻어 준비한다.말린 톳은 물에 담가 20분간 불리면 된다.(2) 끓는 물에 (1)의 톳을 잠깐 넣었다가 냉수에 헹궈 물기를 뺀 다음 줄기에서부터 훑어준다.(3) 두부는 끓는물에 넣고 삶아 건져 면보에 싸서 물기를 꼭 짠 다음 체에 내려 보슬보슬하게 한다.(4) 그릇에 톳과 두부를 담고 마늘·파·깨소금·맛소금·참기름을 넣어 무친다. ●파래 해물전 재료 파래(또는 톳) 100g,작은 새우(또는 조갯살,홍합,굴) 100g,홍고추·풋고추 1개씩,실파 30g,식용유 적당량,반죽(밀가루 1컵,달걀 1개,녹말 2큰술,물 ¾컵,소금 ½작은술),초간장(간장 3큰술,식초 1큰술,설탕 ½작은술) 만드는 법 (1) 파래는 물에 20분간 담가 불려 씻은 후 건져 줄기에서 훑어준다.(2) 작은 새우는 껍질을 벗긴 다음 등쪽의 내장을 제거하고 굵게 썰어 놓는다.(3) 홍고추·풋고추는 길이로 반을 갈라 씨를 털어 짧은 채를 썰고 실파는 송송 썰어 놓는다.(4) 넓은 그릇에 달걀·물·소금을 넣어 푼 다음 밀가루와 녹말을 넣고 반죽하여 파래·새우·고추·파를 섞어 놓는다.(5) 팬에 식용유를 두르고 뜨거워지면 (4)를 1큰술씩 떠 놓아 둥글 넓적하게 부쳐 낸다. ●파래 별미밥 재료 불린 쌀 3컵,물(육수) 3컵,파래 120g,조개 20개,청주 1큰술,간장 1큰술,양념 간장(간장 3큰술,고춧가루·다진 마늘·깨소금·참기름 1작은술씩,다진 파·청주 1큰술씩) 만드는 법 (1) 쌀은 불려 체에 밭쳐 물기를 뺀다.(2) 파래는 깨끗이 씻어 물기를 꼭 짜 대강 썰어 놓는다.(3) 조개는 신선한 것으로 준비하여 씻어 엷은 소금물에 담가 해감을 시킨 다음 물 4컵과 함께 냄비에 담아 끓여 조개가 벌어지면 건지고 면보에 밭쳐 밥물로 사용한다.(4) 냄비에 쌀·조개 국물·조개·청주·간장을 넣고 끓여 뜸이 들 무렵에 썰어 놓은 파래를 섞어 뜸들여 밥을 짓는다.(5) 양념간장을 만들어 밥을 비벼 먹으면 별미다. ●김 강정 재료 김 10장,대추 2개,실백(또는 잣) ½큰술,강정 양념(국간장·다진 마늘·참기름·통깨·분말 육수·겨자 1작은술씩,물엿 1큰술) 만드는 법 (1) 김은 티를 골라내고 구워 비닐봉지에 담아 비벼 곱게 부수어 놓는다.아주 곱게 부수어야 잘 만들어진다.(2) 냄비에 강정 양념 재료를 담아 불 위에 얹었다가 따끈해지면 불을 끄고 김을 넣어 가볍게 섞는다.(3) 대추는 돌려 깎기하여 돌돌 말아 얇게 썰어 놓는다.잣은 길이로 반을 갈라 놓는다.(4) 도마 위에 은박지를 깔고 (2)의 김강정을 펴서 0.5㎝ 두께로 밀어 2㎝ 네모로 썬다.그 위에 (3)의 대추와 잣을 놓아 예쁘게 담아낸다. ●파래 샐러드 재료 파래 20g,양파·오렌지·노랑 피망·빨강 피망⅓개씩,토마토 2쪽,적채 5g,양상추 10g양념키위 2개,링 파인애플 2조각,마요네즈 3큰술,식초·레몬 주스 1큰술씩,다진 마늘 1작은술,소금·후춧가루·설탕 약간씩 만드는 법 (1) 파래는 설탕과 식초를 섞은 물에 10분간 담가 두었다가 꼭 짜 물을 제거한다.(2) 야채 재료를 적당한 크기로 썰어 준비해 둔다.(3) 과일을 갈아서 마요네즈 및 모든 양념 재료와 함께 골고루 섞어 드레싱을 준비한다.(4) 원형 틀에 야채를 예쁘게 색깔 순서대로 올리고 사이사이 (1)의 파래를 넣어준다.(5) 접시에 담아 틀을 살짝 빼고 오렌지 껍질을 고명으로 얹어 모양을 낸 다음 그 위에 과일 드레싱을 솔솔 뿌리면 끝. 안승춘 한국식생활개발연구회장은 68년 조리업계에 뛰어들어 36년 동안 음식을 개발하고 연구했다.한·양·중·일식을 두루 통달해 ‘생활요리의 대가’로 불린다.한국조리직업전문학교(02-833-1623) 이사장도 겸하고 있다. 사진 이종원기자 jongwon@˝
  • [눈에 띄네~ 이 얼굴] ‘어깨동무’ 조미령

    12일 개봉하는 조폭코미디 ‘어깨동무’(제작 CK픽쳐스)에는 여배우가 단 한명 나온다.‘한탕’을 꿈꾸는 어설픈 조폭두목 김태식(유동근)의 애인 황미숙 역의 조미령(31).그의 캐릭터를 감잡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세상의 쓴맛 단맛을 다 본듯,적당히 천박하고 적당히 푼수인 비디오가게 주인이다. 하지만 그런 그가 빠진 ‘어깨동무’는 ‘앙꼬’없는 찐빵이다.웃음이 터질 만큼 촌스럽게 화려한 옷차림은,뒷골목 건달들로 채워지는 칙칙한 화면에 악센트를 찍어준다.왁자하게 분위기를 띄우는 코믹연기는 또 어떤지.비오는 날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제멋에 겨워 사는 여자.시비를 거는 동네아줌마의 머리채를 휘어잡고 고래고래 악다구니를 한다.“한 주먹도 안 되는 것들이 개기고 지랄이야!” 이 정도면 약과다.일편단심 순정을 바쳐온 남자 태식의 아버지(김무생)와 처음 만난 식사자리에서는 소주잔이 채워지는 족족 (정수리에다 빈잔을 탈탈 털면서)‘원샷’이다.아무쪼록 손자를 많이 낳아달라는 예비 시아버지에게 콧소리 섞어 하는 말,“제가 원래 임신이 잘 돼요∼.” 서울예술대 연극과를 졸업한 그는 MBC 24기 공채탤런트 출신.요즘 데뷔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누리는 셈이다.TV드라마 ‘미망’‘숙희’‘별은 내 가슴에’ 등에서 무색무취한 조연으로 묻혀지내다 이미지 변신에 성공한 것은 코믹연기가 돋보인 SBS 일일시트콤 ‘대박가족’.최근 인기리에 종영된 TV드라마 ‘천생연분’도 대표작이다.세살 아래의 남자와 당당히 재혼하는 TV홈쇼핑 PD가 되어 물오른 연기력을 과시했다. 황수정기자 sj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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