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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6·25 전쟁 61주년] “남편 납북 61년… 전화벨 울리면 그이 왔을까 가슴 떨려”

    “그날 몸을 던져서라도 나도 함께 데려가라고 매달렸어야 하는 건데…. 내무서 앞에 끌려나온 남편 모습을 보니 정신이 핑 돌면서 가슴이 울렁거려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어.” 24일 서울 청량리동에서 만난 김항태(83) 할머니는 말문을 열자마자 흐느꼈다. 주름이 조글조글한 손으로 가슴팍을 연신 내리쳤다. 가슴속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은 듯 보였다. “그때 내가 임신 1개월째라는 걸 나중에 알았지. 남편은 우리 딸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렇게 갔으니…. 딸은 남편과 나를 이어주는 유일한 생명줄이야.” 결혼 1년 5개월 만에 스물두 살의 새댁은 남편을 북으로 떠나보냈다. 할머니의 남편 김재봉(91) 할아버지는 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9월 말 강화군 교동도의 신혼집에서 인민군과 마을 좌익 청년들에게 잡혀 북한 황해도로 끌려갔다. 그렇게 남편을 보내고 전쟁통에 홀로 낳은 딸이 올해로 환갑이 됐다. 4년 전부터 할머니를 괴롭히는 고관절 디스크의 고통은 가슴을 까맣게 태운 그리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직도 그냥 끊어지는 전화가 오면 남편이 나를 찾아 전화한 게 아닐까 싶어. 그런 전화가 올 때면 가슴이 떨려.” 북녘 어딘가에 살아 있다면 올해로 아흔 살이 넘었을 남편을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할머니는 아직 체념하지 않았다. ●서울 수복 직후 남편과 생이별 할머니는 남편과 헤어진 날짜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했다. 당시 충격으로 날짜 감각을 잊은 채 멍하니 보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신 할머니는 국군이 서울을 되찾은 지 며칠 뒤라고 기억했다(1950년 9월 28일 국군과 유엔군은 서울을 수복했다). 유엔군의 인천 상륙 작전이 성공하고 서울도 되찾아 조만간 전쟁이 끝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북으로 간 남편은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쾅, 쾅쾅’ 그날 새벽녘 귓전을 울리는 굉음에 놀라 잠에서 깼다. ‘북한군이 다시 내려온 건 아닐까….’ 정신을 차려 보니 포탄 떨어지는 소리가 아니었다. 누군가 집 대문을 거세게 두드리고 있었다. 미처 몸을 숨길 새도 없이 거센 발길질에 대문이 부서졌다. 십수명의 정체 모를 청년들이 들이닥치자 무서움에 온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그들은 내무서에서 나온 사람들이라고 했다. ‘반동 세력이니 내무서로 함께 가야겠다.’면서 다짜고짜 남편의 팔을 붙들었다.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남편의 가슴팍에 내무서원은 기다란 총부리를 들이댔다. 남편은 그렇게 내무서로 끌려갔다. 한바탕 소란을 치르고 정신을 차려 보니 희뿌옇게 동이 터 오고 있었다. 이튿날 정신을 차리고 내무서 앞으로 달려갔다. 남편은 포승줄에 두 손이 꽁꽁 묶인 채 다른 마을 청년들과 함께 매여 있었다. (손가락으로 방안 끝에서 끝을 가리키며) “그때 남편이랑 같이 붙들려 간 사람들이 여기서부터 저기까지는 될 거야. 두 줄로 섰으니 한 스무명 정도…. 맘에 안 드는 사람들은 죄 끌고 간 거지.” 내무서원들은 남편과 청년들을 교동도 항구로 데려갔다. 할머니는 울먹이며 남편의 뒤를 따라갔지만 함께 배에 오를 수는 없었다.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내렸지만 그 순간이 진짜로 마지막이 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지 못했다. 남편이 탄 배는 건너편 황해도 연백군이 바라다보이는 교동도 항구를 떠났다. 배를 타고 30분도 채 안 걸리는 가까운 거리를 건너가는 남편의 뒷모습,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김 할머니가 남편으로부터 받은 마지막 소식은 남편이 끌려간 지 이틀 만에 보낸 작은 쪽지 한 장이었다. 함께 끌려간 사람들 가운데 면 서기와 이웃 청년 2명이 풀려 나오면서 전해준 것이었다. 손바닥 반만 한 작은 종이엔 ‘내 걱정하지 마세요. 배 타고 건너와 잘 있습니다. 당신의 남편 김재봉’이라고 쓰여 있었다. 단정하게 또박또박 적힌 이 세 문장이 60년이 넘도록 김 할머니 가슴에 박혀 있다. 조심스레 쪽지를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작은 종이 쪼가리, 귀퉁이가 다 닳도록 만지고 보면서 35년을 간직했는데, 80년대 중반에 이사하다 모두 태워버렸어. 그때는 ‘어차피 돌아올 수도 없는 남편인데 갖고 있은들 뭐하나’ 이런 심정이었지.” ●쪽지 35년 간직하다가 불 태워 할머니가 여전히 잊지 못하는 남편 김 할아버지는 서울농고를 졸업하고 교동도 금융조합(현재의 농협) 서기로 입사한, 똑똑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그는 친구들과 사랑방에 둘러앉아 시국 토론도 하는 열혈 청년이었다. 전쟁 전에는 뜻 맞는 마을 청년들과 청년단을 조직하기도 했다. 이념 대립이 팽팽하던 전쟁 직전, 남편은 좌익 세력의 표적이 됐다. 공산당이 득세한 교동도에서 김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당원 가입도 거부했다. 할머니는 “전쟁이 터지자마자 동네 빨갱이들이 명부를 들고 다니면서 이름을 쓰고 지장을 찍으라고 했는데 그게 공산당 가입 명부였다.”면서 “교동도에는 빨갱이들이 많았는데, 그게 다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들이 공산당에 넘어갔던 탓”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의 자상함은 한도 없었다. “이 양반은 이렇게 내 가슴을 아프게 하려고 그랬는지 그렇게도 별났다. ‘김치도 맛있다, 빨래도 잘 넌다’ 하면서 항상 칭찬해줬다. 무거운 것도 하나 못 들게 했다. (주먹 쥔 손으로 다른 쪽 손바닥을 탕탕 내리치면서) 그런 말을 바로 엊그제 한 것 같고, 아직도 생생한데….” 할머니는 또다시 한참을 울었다. 남편이 북으로 간 뒤에도 김 할머니는 교동도를 떠나지 못했다. 언젠가 돌아올 거라는 믿음 때문이었다. 농사일로는 커 가는 딸과 생활하기가 벅찼다. 아버지 얼굴을 모르는 딸에게 공부를 시켜야겠다고 결심했다. 딸이 10살이 되던 1961년 서울로 왔다. 외삼촌이 살고 있던 답십리에 방을 구했다. 다른 환경에서도 남편 생각을 지울 수는 없었다. 딸을 학교에 보내고 집안이 조용해지면 방바닥에 주저앉아 통곡했다. “남편과 함께 자식 기르는 재미로 살 줄 알았는데 하루아침에 벼락을 맞았으니…. 죽어야 잊지 그전엔 못 잊어.” 80년대 중반 남북 이산가족 상봉이 시작되자 남편 소식을 들을 수 있다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납북자는 대상이 아니었다. 북한에서 납북자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북에서 저렇게 뻗대니 어떻게 햐. 절대 용서가 안 돼.” 할머니는 남편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현실에 가슴을 저몄다. 인고의 세월은 끝이 없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후 이산가족 방문 상봉이 합의되자 김 할머니는 다시 가슴이 뛰었다. 불편한 다리로 이북5도청에 마련된 이산가족 민원 창구를 찾았다. “교동도 지도를 가져가 여기서부터 저기로 내 남편이 끌려갔다고 그렇게 설명을 했는데…. 내 절절한 심정을 이해나 해줄는지. 못 만나게 할 거면 살아 있는지 말이라도 해줘야 할 거 아냐.” ●北서 납북자 인정 안 해줘 분통 “몇 년 전에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 남편을 꼭 찾아주겠다며 걱정 말라는 서신도 보내왔는데 결국 허사였어. 내 남편은 납치돼 간 건데 정부에서 책임지고 찾아줘야 해.” 할머니의 목소리에서 결기가 느껴졌다. “60년 동안 남편이 딱 한 번 내 꿈에 나온 적이 있어. 교동도 안방 아랫목에 앉아 내 이름을 부르기에 화들짝 놀라 깼는데 꿈이지 뭐야. 꿈인 걸 안 순간 어찌나 눈물이 나는지….(할머니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 뒤로 꿈에도 한 번 안 나오니 야속한 사람이지. 내 마음에는 그 사람의 사랑이 불에 넣어도 안 탈 거 같고 물에 넣어도 안 떠내려갈 거 같고 그래.” 남편에 대한 그리움이 새삼 가슴을 후비는 탓이리라. 김 할머니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혔다. 윤샘이나기자 sam@seoul.co.kr
  • [문화마당] 귀농인과 귀예인/공선옥 소설가

    [문화마당] 귀농인과 귀예인/공선옥 소설가

    어린 시절 동네에 들어온 곡마단이 잊히지 않는다. 서커스단, 혹은 쇼단이라고도 했다. 이수일과 심순애 같은 음악극도 하고, 마술·줄타기·차력 같은 서커스도 하는 종합예술가들이 이따금 마을 공터에 나타나곤 하였다. 그들은 종이 메가폰으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시는 주민 여러분 오늘밤…”을 외치며 조무래기들을 뒤에 달고 골목을 누볐다. 물론 그들은 문화와 예술뿐 아니라 약도 팔았다. 정말 약인지 어쩐지는 알지 못해도 사람들은 그들이 들려준 노래, 그들이 보여준 굿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만병통치약’을 하나씩 사게 마련이었다. 사람들은 명절 뒤끝이나 국경일을 즈음하여 ‘콩쿠르 대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나뭇가지와 꽃 같은 것으로 무대를 그럴싸하게 꾸미고 마을에 있는 악기란 악기는 총동원하여 팡파르를 울리고 사람들은 노래면 노래, 춤이면 춤, 재담이면 재담 같은 것으로 각자 가지고 있는 끼를 발산하였고 부상으로 나누어 주는 플라스틱 바가지, 양은솥 따위를 입을 함지박만하게 벌린 채 받아 가곤 하였다. 아무리 작은 고을이어도 읍내에는 극장이 두어 개는 있게 마련이었다. 시골사람들은 장에 간 길에 극장에도 들러 당대의 영상문화를 즐겼다. 까막눈 우리 엄마도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마부’를 알았다. 그리고 그것을 추억했다. 그것을 보던 날의 행복을 반추했다. 그 모든 풍경은, 그 모든 추억은 농촌이 ‘잘살기’ 이전 시절의 풍경이고 추억이다. ‘잘살아 보세!’라는 구호 아래, 농촌에 소위 ‘소득증대사업’의 일환으로 비닐하우스가 생기고 축사가 생기고 공장이 지어지는 동안, 그래서 농촌에 돈이 많아지고 텔레비전을 사고 차를 사는 동안 ‘문화와 예술과 약’을 팔던 그 종합예술가들은 더 이상 시골에 오지 않게 되었다. 잘살아야 하니까 소득증대 사업을 벌였고, 그 덕분에 텔레비전을 살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로는 더 이상 마을에서 콩쿠르대회는 열리지 않았다. 어쩌다 연다 해도 예전처럼 재미나지가 않게 되었다. 콩쿠르대회에 나온 사람들이 예전처럼 자신만의 재주를 자신만의 기량으로 펼쳐 보이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도 모르게 텔레비전에 나오는 연예인들 흉내를 내기 때문이었다. 읍내의 극장들도 사라졌다. 잘살아 보자고 지붕 개량도 하고, 마을길도 넓히고, 신작로도 아스팔트로 바꾸고, 새집도 짓고, 농기구가 아닌 농기계를 들여서 일이 편해졌는데도 사람들은 농촌을 떠나서는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남은 사람들은 잘살아 보려고 하면 할수록 빚이 늘어났다. 이름하여 ‘농가부채’는 이제, 그 자체로 고유명사가 되었다. 농사를 지으면 지을수록 빚이 늘어나는 그 기묘한 조화 속에 사람들의 가슴이 짓눌리는데, 혹시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주민 여러분’을 누가 외친다 한들 문화와 예술을 제대로 즐길 마음의 여유가 없게 되어 있는 것이다. 빚을 갚으려면 일을 해야 하니 시간은 없고 몸은 피곤해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오락’을 ‘유일한 문화’로 여기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모든 군 단위에 문화원이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 문화원들이 과연 제 역할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 농촌사람들이 언제까지나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일방적 영상을 바라보는 것을 유일한 오락거리, 유일한 문화생활로 여기며 살아야 하는가. 이제 농사를 지으려고 하는 ‘귀농인’뿐 아니라, 문화예술인들이야말로 ‘귀예인’이 되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기 바란다. 그리고 각 지역의 문화원에서 그 ‘귀예인’들을 적극 지원해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하길 바란다. 그래서 그 예술을, 그 예술인을 만나고 싶으면 도시 사람들이 예술인이 살고 있거나 그 예술이 펼쳐지고 있는 시골로 찾아가는 세상이 오길 바란다. 문화와 예술 한번 즐기려면 도시로 가야 하는 이런 ‘문화’, 이젠 정말 신물이 난다. 어느 지방자치단체이든, ‘문화와 예술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진 단체장이 나서서 문화와 예술로 ‘소득증대사업’ 한번 해보기를 권한다.
  •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 (10)동물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 (10)동물들이 자살을 선택하는 이유

    인간이 자살을 하는 것은 고도로 발달된 대뇌 때문이다. 엄청난 자극에 의해 질서가 무너지면 사람은 비정상적인 행동을 택하게 된다. 동물들은 어떨까. 사람과 달리 대뇌가 발달하지 못했기 때문에 정신적 충격으로 인한 자살은 드물 것이다. 하지만 자살의 의미를 ‘스스로를 죽이는 행위’로 규정하면 그들도 자살을 한다고 볼 수 있는 증거들이 얼마든지 있다. 우선 고래의 자살, ‘스트랜딩’을 들 수 있다. 고래 떼가 해안가로 밀려와 돌아가지 못하고 죽는 현상이다. 지난해 호주의 해안가에 범고래들이 대규모로 올라와 죽는 일이 발생했다. 세계 곳곳에서 간간이 벌어지는 현상인데 예전처럼 고래 사냥이 유행할 때라면 이게 웬 떡이냐 하며 칼을 들고 달려들었겠지만 대부분의 고래가 멸종 위기에 놓인 요즘, 이는 재앙에 가까운 일이다. 나도 해안가에 밀려온 돌고래 두 마리를 구해준 적이 있다. 갯벌에 올라와 있었는데 피부에 상처만 조금 입은 상태였다. 돌고래처럼 삶에 충실하고 낭만적인 동물이 일부러 얕은 곳으로 밀려온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자살과 진배 없는 일이다. 북극의 레밍(나그네쥐)도 동물 자살 이야기가 나올 때 대표적으로 거론되는 동물이다. 레밍은 먹이 환경이 좋아 개체 수가 급격히 늘면 새로운 터전을 찾아 이동에 나선다. 거의 맹목적으로 선두를 따라간다. 그러다 보니 선두가 방향을 바다나 호수로 잡아 안내하면 그대로 빠져 죽는다. 내가 직접 겪은 다람쥐원숭이 사건은 자살이라고밖에는 할 수 없는 극적인 것이었다. 처음으로 새끼를 낳은 다람쥐원숭이가 있었다. 그런데 새끼는 태어난 지 1주일 만에 죽어 버렸다. 보통 자그마한 원숭이들은 새끼를 등에 업고 다닌다. 그러나 새끼가 죽은 날엔 이상하게도 어미가 품에 안고 있었다. 젖을 주나 하고 봤더니 새끼는 이미 죽어서 축 늘어진 상태였다. 그럴 경우 보통은 어미를 쫓아서 새끼를 포기하게 만든다. 그날도 긴 장대를 이용해 어미로부터 새끼를 떼어낸 후 통상적인 부검을 거치고 바로 묻어 주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 어미는 먹이와 일상 활동을 일절 거부했다. 끝내 한자리에서 그대로 못 박혀 죽고 말았다. 이 어미의 죽음에 대해 달리 쓸 말이 없어 진료부에 그냥 ‘자살’로 기록했다. 동물들은 죽음이 가까이 옴을 알고 무리를 벗어나 스스로 잡아먹히거나 코끼리 같은 경우는 무덤 자리(흔히 알려진 집단 무덤은 아니다)를 찾아가기도 한다. 얼마 전 새로 들어온 표범이 있었다. 마치 돼지처럼 사육되던 걸 구해온 건데도 낯선 환경 때문인지 보름 동안 먹는 것을 거부했다. 그러나 죽기 일보 직전 음식을 먹으며 ‘삶’을 선택했다. 이런 걸 보면 동물들이 죽음을 스스로 선택할 정도의 능력을 갖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뭍으로 올라온 고래를 정성껏 구해 바다로 돌려보내는 것이 잘한 일인지, 아니면 그들이 선택한 죽음을 방해하는 것인지는 그들만이 정확히 알 것이다. 최종욱 광주우치동물원 수의사 lovnat@hanmail.net ............................................................................................................. 서울신문은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의 열띤 호응 속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우치동물원의 최종욱 수의사와 서울신문 유영규 기자가 함께 꾸미는 지면입니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동물들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은밀한 비밀 등 다채롭고 흥미있는 이야기들이 매주 1차례씩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지금까지 연재됐던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른들의 동물원] (1) ‘크누트’의 돌연사 왜 어미곰은 새끼를 포기했을까? [어른들의 동물원] (2) 외로운 ‘블랙스완’ 대량학살의 슬픈 역사 간직한 그들. [어른들의 동물원] (3) 동물들의 사랑 몸짓(상) 고슴도치들은 어떻게 교미를 할까? [어른들의 동물원] (4) 동물들의 사랑 몸짓(하) 수컷뱀 성기 2개로 5시간 짝짓기 [어른들의 동물원] (5) 동물의 심리학 개장수 나타나면 동네 개들 조용해지는 이유 [어른들의 동물원] (6) ‘고리롱’ 박제논란(상) 숨진 로랜드고릴라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른들의 동물원] (7) 우리나라 최초 코끼리 600년전 일본에서 실려와 비운의 삶 [어른들의 동물원] (8) ‘고리롱’ 박제논란(하) 서울동물원, 독자의견 따라 박제 않기로 [어른들의 동물원] (9) 잘못 알려진 진실들 백조는 물속에서도 발짓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동물원] (10) 동물들도 자살을 하나? 1주일 만에 새끼 잃은 어미원숭이의 선택 [어른들의 동물원] (11) 술 취한 원숭이들 먹던 과일 씹다 두면 발효돼 자연의 밀주로 [어른들의 동물원] (12) 더위 절대강자 낙타의 비밀 무릎 같은 발목이 하이힐 역할 [어른들의 동물원] (13) 원숭이와 눈 마주치지 마라 동물원 사팔뜨기 안경의 비밀 [어른들의 동물원] (14) 불법포획 돌고래의 고백 사자도 공작도 과거를 숨기는지 몰라요
  • 광주 4개區 경계조정 확정

    광주시의 숙원사업인 자치구간 경계조정이 10여년 만에 사실상 확정됐다. 전국 처음이다. 21일 광주시에 따르면 행정안전부는 최근 시가 자체 마련해 신청한 4개 자치구간 경계조정안에 대해 이날 입법예고한 데 이어 경계변경에 관한 대통령령 제정 절차를 밟기로 확정했다. 행안부는 이어 새달 중 국무회의 의결과 대통령 재가를 거쳐 오는 10월 1일부터 이를 본격적으로 시행할 방침이다. 행안부는 앞서 지난 5월 현장실사와 주민의견 청취를 마치고 자치단체와 지방의회 의견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뒤 이같이 결정했다. 그동안 대전·부산 등 다른 지자체도 구(區) 간 경계조정을 수차례 시도해 무산된 터라 이번 광주의 경계조정 성공은 전국 첫 사례로 꼽힌다. 이에 따라 광주 북구 두암3동·풍향동·중흥1동·우산동 일부(인구 5068명)가 동구로 편입된다. 또 동구 산수1·2동(700여명)은 북구로, 남구 방림동(620명) 일부는 동구로 각각 조정된다. 북구 동림동·운암1동 일부(1만 7000여명)는 서구로 편입된다. 인구 이동과는 관계없이 북구와 서구 등 2개구에 걸쳐 있는 무등경기장은 북구로, 남구·서구에 걸쳐 있는 송원학원은 남구로 각각 편입조정했다. 광주시도 해당 자치구에 대한 지적공부, 주민등록 변경 등 후속작업에 속도를 내고 있다. 시 관계자는 “이번 경계조정은 대로(큰길)를 기준 삼아 주민들의 생활 불편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이뤄졌다.”고 말했다. 북구 풍향동에서 동구로 편입될 예정인 주민 이모(62)씨는 “인구를 끌어들이려는 동구가 최근 한 달간 동네 골목길 방역소독을 3~4차례나 실시하는 등 이전보다 행정 서비스가 많이 좋아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광주 최치봉기자 cbchoi@seoul.co.kr
  • 인생역마차(人生驛馬車)=시동생과 차린 아내의 제2 가정(家庭)

    혼인신고를 못했던 것이 실수라면 실수였다. 군에서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동생이 아내를 차지하고 가장 행세를 하고 있지 않은가··· 옥신각신 하던 끝에「아내를 빼앗긴 사나이」는 제2의 여인과 새 출발을 했다.  그로부터 2년. 전 아내가 다시 나타나『당신의 아들이니 도맡아 양육하라』며 아이들을 떠맡으라는 성화.  -제 이름은 김성환(金性煥·가명·30)이라고 합니다. 동대문 밖에서 조그만 시계방을 차려 그럭저럭 먹고 사는 처지입니다. 2년만에 겨우 가게를 차려 이젠 조금 형편이 펴이게 된 것입니다.  제 아내는 이금옥(李錦玉·가명·26)이라고 하며 딸 하나를 두었읍(습)니다. 아직 말다툼 한번 해본 일 없이 금실좋게 살고 있습니다.  지난 봄이었읍(습)지요. 3월인가 4월인가 잘 생각이 안납니다만 제 가게에 어떤 여자가 나타났읍(습)니다. 바로 제 첫번째 아내이자 지금은 동생의 아내가 된 장미자(張美子·가명·29)였읍(습)니다. 이 여자를 대하는 제 마음이 편할 수 없었읍(습)니다. 부끄럽고 창피해서 얼굴도 못들 일입니다만 이젠 할 수 없이 털어놓고 여러 선생님들의 의견을 묻고 싶습니다. 어쨌든 할 말이 있다고 해서 근처 다방으로 갔읍(습)니다. 이 날 이 여자와 제가 나눈 대화는 대충 다음과 같습니다.  『x식이 하고 x숙이는 당신 자식이 아녜요? 제 아버지를 찾는 눈치니까 맡아 기르세요』  말이야 그럴싸 하고 온순했읍(습)니다만 순간 목구멍으로 치미는 뜨거운 것을 참을 수가 없었읍(습)니다. 간신히 눌러 참으며 말했읍(습)니다.  『2년 전 나보고 뭐라고 했소? 모두 맡아 기른다고 떵떵거리지 않았나 그 말이요. 이제 와서 귀찮으니 나보고 데려다 기르란 말이요?』  『그 애들은 누가 뭐래도 당신 자식이 아녜요? 그 땐 그 때고 지금은 지금이지요』  1시간 가까이 옥신각신하다가 결론없이 헤어지고 말았읍(습)니다. 이런 기묘한 얘기의 근원은 2년전으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2년전 저는 군에서 제대했읍(습)니다. 호적의 출생신고가 늦게 되어서 2년이나 늦어 군복무를 마쳤읍(습)니다.  집에 돌아와 저는 엄청난 현실에 부딪쳐 심장이 멎는 듯 했읍(습)니다.  동생 광식(光植·가명·27)이가 내 아내와 동거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제가 휴가를 나온지 1년만 이었읍(습)니다.  1년 동안에 동생은 아내를 범하고 제가 맡겼던 가게며 아이들까지 모두 자기의 것으로 해 버렸읍(습)니다. 아내는 동생의 방에서 잤읍(습)니다. 이 기막힌 현실을 그러나 저는 뒤엎을 용기가 없었읍(습)니다. 언제나 동생은 어려서부터 제 것을 빼앗아 살아온 녀석이었읍(습)니다. 동생의 악착같은 정복욕 앞에 저는 언제나 손을 들고 말았으니까요. 만약 아내라도 울며 용서를 빌었다면 동생을 타일렀을 지도 모릅니다. 아내마저 끝내 동생 편이 되었던 것이죠. 게다가 동생은 혼인신고까지 해 버렸다고 했읍(습)니다. 저는 자식 둘을 낳도록 아내와의 혼인신고를 해 두지 않았지요. 이제 그들은 법적으로도 완전한 부부가 되어 있었읍(습)니다. 어떻게 손을 써 볼 도리가 없었지요.  아이들이라도 제가 맡아 기르겠다고 했읍(습)니다만 아내가 거절을 했습니다.  저는 동생과 아내의 얼굴에 침을 뱉고 집을 뛰쳐나왔읍(습)니다. 세상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나같은 바보가 세상에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고개를 저었읍(습)니다. 있을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러나 바로 제 앞에서 사건은 일어나고 있었읍(습)니다. 미친듯 술을 퍼 먹으며 통곡했읍(습)니다. 취해서 다시 집으로 돌아가 닥치는대로 살림을 부수었읍(습)니다. 동네가 떠나가라고 악을 쓰며 이 불륜과 사련의 남녀를 규탄했읍(습)니다. 그러나 허무했읍(습)니다. 뼈에 사무치는 배신감과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었읍(습)니다.  집을 나오며『깨끗이 모든 걸 단념한다. 앞으로 다시는 내 눈 앞에 나타나지 말라』고 그들에게 선언했읍(습)니다. 동생이며 아내며 자식이며 나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존재들이었읍(습)니다. 지하에 계실 부모님들에게 부끄럽고 죄송해서 몸둘 바를 몰랐읍(습)니다. 그 뒤부터 저는 막노동을 해 가며 죽어라고 일을 했습니다. 밤새워 코피를 쏟으며 빈혈로 쓰러져도 그 엄청난 악몽을 잊기 위해서는 일 밖에 할 것이 없었습니다.  1년만에 1백만원을 모았습니다. 전에 하던 시계수리업을 하기로 했습니다. 착실하게 일을 해서 가게는 번창했읍(습)지요.  저를 착하게 본 이웃가게 아주머니가 중매를 들어 지금의 아내와 드디어 새살림을 꾸미게 (꾸리게) 되었읍(습)니다. 차츰 과거의 상처도 잊고 사는 재미가 막 나려 하는데 저 악마같은 여자가 또다시 나타났읍(습)니다. 동생도 나빴지만 여자가 틈을 보여주지 않았다면 어찌 이런 사건이 일어났겠읍(습)니까. 그 여자가 우리 집안을 몽땅 말아먹고 말 악마입니다. 동생이 아직도 그걸 깨우치지 못하고 있읍(습)니다. 우리 평화로운 가정이 또다시 태풍에 휘말리게 됩니다. 정말 어떻게 했으면 좋을까요?  <植>    [이런 경우엔]  결혼을 하고 자녀를 둘씩 둘 때까지 혼인신고를 아니한 것은 귀하의 불찰입니다. 2년 전에 자기가 기르겠다고 호언하면서 자식이라도 돌려 달라는 귀하의 부정(父情)을 짓밟은 전처에 대한 귀하의 극심한 반감과 아이들을 데려옴으로 해서 새로운 아내와의 사이에 있을 지도 모르는 불화 때문에 몹시 고민하고 있는 것 같읍(습)니다.  그러나 귀하가 당해 온 쓰라인 과거를 현재의 처가 잘 알고 따라서 귀하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으리라는 전제하에서 귀하는 귀하의 핏줄을 이어받은 가엾은 자식들을 하루 속히 그들로부터 찾아오셔야 되리라 믿습니다.  그래야만 자식들의 장래 양육이나 교육이 제대로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자식들이 전처와 동생간의 호적에 신고가 되어 있으면 관할 법원에 호적정정 신청을 하여 그애들이 그들간의 친생자가 아님을 확인시킨 다음 귀하의 호적에 다시 신고하면 됩니다. <이재운(李在運) 변호사> [선데이서울 73년 7월15일 제6권 28호 통권 제248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이슈 인물] 두살때 40야드· 아홉살때 홀인원… ‘골프신동’ 출신

    ‘두 살 때 드라이버로 40야드를 날린 골프 신동’, ‘아홉 살 때 첫 홀인원 기록’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공식 홈페이지가 ‘골프 천재’ 로리 매킬로이(22·북아일랜드)를 소개한 내용의 일부다. 그는 일찌감치 될성부른 떡잎이었다. 매킬로이는 1989년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외곽의 작은 마을 홀리우드의 공공주택에서 아버지 게리와 어머니 로지 사이에 태어났다. 골프장 클럽하우스의 바텐더였던 아버지는 꽤 실력 있는 아마추어 골퍼였다. 집에서 불과 180여m 거리에 골프장이 위치해 있어 어릴 때부터 골프와 친숙한 환경이 주어졌다. 21개월 때 처음으로 플라스틱으로 만든 골프채를 선물받았다. 곧 공 치는 재미에 빠졌다. 4살 때 부엌 문을 열어놓고 세탁기의 구멍에 칩샷을 구사하는 등 어릴 때부터 골프에 뛰어난 재능을 자랑했다. 아들의 비범함을 간파한 부모는 골프장 레슨프로 보조에게 데려가 골프레슨을 받게 했다. 아들의 레슨비를 벌기 위해 부업까지 하는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같은 동네 사람들이 “게리는 아들 로리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했을 것”이라고 회상할 정도다. 부모의 헌신과 본인의 노력에 따른 결실은 빠르게 나타났다. 매킬로이는 15세 때인 2004년 주니어 라이더컵에서 유럽팀의 우승을 이끄는 등 화려한 아마추어 시절을 보냈다. 골프에 전념하고자 16세 때 학업도 접은 그는 2007년 2월 단 한 주 동안이었지만 세계 아마추어 1위에 오르기도 했다. 이듬해 프로로 전향했고, 2009년 2월 유럽프로골프투어 두바이 데저트 클래식에서 최연소 우승 기록을 세워 프로에서도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타이거 우즈의 멘토’로 유명한 마크 오메라(미국)는 “볼을 때리는 기술이 19세 시절의 우즈보다 낫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그해 유럽골프투어에서 361만 유로(약 56억원)를 벌어들이면서 상금 랭킹 2위에 올랐다. 기세를 올리던 매킬로이는 그해 7월 브리티시오픈에 출전해 1라운드에서 9언더파 63타를 적어내 4대 메이저대회 최소타 타이기록을 세웠다. 이 대회와 PGA챔피언십에서 3위에 올라 메이저대회에서도 통하는 스타로 도약했다. 172㎝, 73㎏의 아담한 체구이지만 몸과 클럽이 하나가 된 듯 완벽한 스윙을 구사해 샷 거리가 312야드에 달한다. 김민희기자 haru@seoul.co.kr
  • [지적도 대수술 시급] ‘디지털 땅주소 구축’ 시범지구 가보니…

    [지적도 대수술 시급] ‘디지털 땅주소 구축’ 시범지구 가보니…

    “아니 당신 집이 우리 땅을 60㎝나 넘어왔잖아요. 돌려주세요.” “뭐요, 우린 몰라요. 벌써 몇 십 년을 그렇게 살았는데 이제 와서 담을 옮기라니. 그렇게는 못해요.” 100년 전에 만들어진 땅의 경계, 지적도를 쓰는 우리나라에서 끊이지 않고 벌어지는 싸움이다. 1910년대 일제가 만든 지적도를 기반으로 몇 번 고치긴 했지만, 대대적인 지적 재조사를 하지 않아 생긴 문제이다. ●“빼앗긴 내 재산 빨리 찾았으면” 2010년 말 서울 화곡동 355필지에 대한 전면적인 디지털 지적구축 사업이 마무리됐다. 결과는 충격적이다. 물론 불부합지가 많은 곳을 시범적으로 측량했지만 355필지 중 단 한 곳도 디지털 측량을 한 것과 맞는 곳이 없었다. 김보연(42·화곡동)씨는 “옆집에 내 땅을 33㎡ 이상을 빼앗겼다.”면서 “구청이고 국토해양부고 쫓아다니며 민원을 제기했지만 다 소용이 없다.”며 분통을 터뜨렸다. 김씨는 “친하게 지내던 이웃들과 얼굴만 붉히고 아직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면서 “빨리 전국의 지적도를 다시 그려서 빼앗긴 내 재산을 찾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20개지구 디지털 지적구축 시범사업 완료 대한지적공사는 2008~2010년 전국 20곳, 9590필지에 대한 디지털 지적구축 시범사업을 완료했다. 시범사업 대상은 지방자치단체가 추천한 부정확한 지역을 골랐다. 시범사업을 실시한 20개 지구 9590필지가 모두 ‘불부합지’였다. 디지털 측량 결과와 지적도가 한 곳도 맞지 않았다는 의미다. 이 때문에 조사 대상 필지의 지적도상 경계를 다시 조정해야만 했다. 김영욱 대한지적공사 차장은 “설마 했는데 측량 결과를 놓고 우리도 깜짝 놀랐다.”면서 “시범사업은 단적으로 우리 지적도의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차장은 “어차피 첨단 방식으로 땅의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면 빨리 시작하는 것이 국가의 미래와 국민의 재산권 보호를 위해서 좋다.”고 말했다. 20개 시범지구 중 경기 양평군, 울산 남구, 충북 진천군 등 6곳은 주민들의 합의로 새로운 경계를 확정했다. 나머지 서울 강서구 등 14개 지구는 지적도상의 경계와 측량한 결과를 놓고 조율을 하고 있다. 민충기(44·경기 양평)씨는 “우리 동네는 지적공사의 도움으로 거의 100% 지적 경계를 바꿨다.”면서 “이제 이웃끼리 땅을 두고 싸움하는 일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양평 양근지구의 경우는 이웃끼리 담장 등을 허물진 않았다. 하지만 서로 자신의 땅을 확인한 후 재건축이나 매매를 할 때 상대방의 땅을 돌려주기로 한 것이다. 하지만 측량결과에 따른 경계조정이 난항을 겪는 곳도 많다. 서울 강서구의 경우 지적 불부합지 355필지 중 10%인 35필지만이 경계 조정을 마쳤다. 특히 다세대나 다가구 등이 많은 지역이 더욱 어려움을 겪고 있다. ●“위원회에 법적 구속력 부여해야” 서울 강서구는 디지털지적 경계정비 시범추진위원회를 두고 경계조정을 하고 있다. 하지만 이해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는 경우가 많아 자율 조정이 힘들다. 이병열(강서구청 부동산정보과장) 위원장은 “위원회가 자체가 법적인 구속력이 없고 이해 당사자 간의 합의로 이뤄져야 하기 때문에 조정 능력이 거의 없다.”면서 “분쟁의 소지를 줄이고 원만한 합의를 이끌어 내려면 위원회에 법적인 지위와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준규기자 hihi@seoul.co.kr
  • 생활 행정정보 미리 공개

    동네 수돗물 수질현황이나 식품위생업소 등록실태 등 국민생활과 밀접한 행정정보는 해당 기관이 미리 공개해야 한다. 행정안전부는 14일 행정정보 사전공개 대상을 구체적으로 정하는 내용의 정보공개법 시행령 개정안을 15일부터 입법예고한다고 밝혔다. 입법예고안에 따르면 식품·위생·환경 안전성 조사결과 등 국민 생명·신체·재산보호에 관한 정보, 의료·교통·조세·건축·상하수도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정보, 대규모 국책사업 정보 등은 기관이 먼저 자진해 공개해야 한다. 현재 정보공개 대상은 ‘국민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는 정책 정보’, ‘대규모 예산 사업’ 등 광범위하게 규정돼 있어 기관마다 다르게 해석하는 경우가 태반이다. 또 청구 후 10일을 기다려야 하는 등 신속하게 정보를 구하기도 어렵다. 이런 이유로 1998년 도입 첫 해 2만 4000건이었던 정보공개 청구 건수는 지난해 28만 9000건으로 폭증했지만 부실투성이 제도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 행안부는 사전 정보공개가 잘 운영되도록 국민으로 구성된 정보공개 모니터단을 부처별로 구성해 평가토록 했다. 그러나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의 전진한 사무국장은 “개정안이 실효를 거두려면 정보공개 대상인 기관명을 밝히는 게 관건”이라고 지적했다. 예컨대 식품위생법 위반업소나 규정위반 제약업체, 불법 하청 공사업체에 대한 정보공개를 청구해도 정부 기관이 이를 극히 꺼린다는 것이다. 실제로 지난해 발암물질인 브론산염이 과다검출된 생수업체들이 적발됐는데도 환경부가 업체명 공개를 거부하자 참여연대가 소송까지 제기한 끝에 공개 판결을 얻어내기도 했다. 이재연기자 oscal@seoul.co.kr
  •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 (9) 동물에 관한 진실 같은 오해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 (9) 동물에 관한 진실 같은 오해

    몇 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 집권 시절에 ‘혁신’ 관련 강연이 홍수를 이룬 적이 있었다. 당시에 강사들이 자주 예로 든 것이 솔개였다. 솔개는 40년을 산 후 깊은 산속 절벽으로 들어가 부리와 발톱을 모두 바위에 갈아 뽑아 버리는데, 그 고통의 세월을 참고 이기면 다시 새 부리와 발톱이 나 그 후 40년을 더 살게 된다는 내용이었다. 언뜻 감동적이었지만 그게 정말인지 의문이 들었다. 인터넷이고 서적이고 다 뒤져 보았지만 솔개는 그저 40년의 꽤 오랜 수명을 사는 새로만 되어 있었다. 이솝우화 같은, 그저 하나의 현대식 우화일 뿐이었는데 사실처럼 믿고 이야기하는 강사들을 보며 답답해했던 기억이 난다. 요즘 TV광고 중에 백조가 물 위에서 열심히 발을 젓다가 멈추면 물속으로 쑥 빠지는 장면을 보여 주는 것이 있다. 겉으로 편하게 보여도 안으로는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교훈적인 이야기를 할 때 오리나 백조가 물속에서 발 젓는 것을 예로 든다. 그게 정말일까? 오리들은 대부분 물 위에 둥둥 떠 있을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공기가 찬 깃털, 부레와 같은 기낭, 함기골(공기가 들어있는 뼈) 조직 등으로 몸이 저절로 떠 있는 것이다. 교훈의 내용은 좋지만 사례 자체는 사실과 다른 셈이다. 청설모가 다람쥐를 잡아먹는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또 많은 이들은 청설모를 외래종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본 청설모는 거의 나무 위에서 사는 겁쟁이들이고, 주로 나무 열매를 먹고 산다. 청설모가 사는 곳에 다람쥐도 함께 사는 것은 진실이다. 하지만 나무 위와 나무 아래로, 서로 사는 영역이 달라 별다른 충돌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런 오해는 왜 생겨났을까? 자료를 뒤져 보니 1980년대 어느 인기 소설가가 청설모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한 과수 농부의 말을 액면 그대로 소설에 옮긴 게 발단인 듯했다. 청설모는 외래종이 아니다. 오히려 다람쥐보다 더한 우리나라 고유종이다. 청설모의 영문 이름도 ‘코리안 스쿼럴’(한국 다람쥐)이다. 예전에는 털이 붓의 주재료로 쓰이기도 했다. 다람쥐의 진짜 적은 1960~70년대 수출을 위해 한 해에 30만 마리를 포획한 인간들이었다. 요즘엔 여름 철새인 뻐꾸기 소리를 어디서든 들을 수 있다. 뻐꾸기는 탁란(托卵)하는 새로 유명하다. 주로 자기보다 훨씬 작은 멧새 등의 둥지에 자기 알을 낳아 놓고 잘 키우는지 아닌지 주변에서 감시까지 한다. 그런데 유명한 가요 제목으로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가 있다. 새들은 대개 하늘을 지붕 삼고 나무 위를 잠자리 삼아 자유롭게 살다가 새끼를 키울 때쯤 둥지를 애써 만든다. 그런데 왜 하필 탁란을 하는 뻐꾸기를 소재로 삼았을까 싶다. 둥지를 잘 만드는 까치 같은 평범한 새들을 놔두고 말이다. 하지만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노래 제목과 같은 이름의 미국 소설도 있지 않은가. 실제로 미국 뻐꾸기는 많은 수가 자기 둥지를 짓는다고 한다. 글 사진 광주우치동물원 최종욱 수의사 lovnat@hanmail.net ............................................................................................................. 서울신문은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를 독자 여러분의 열띤 호응 속에 연재하고 있습니다. 광주광역시 우치동물원의 최종욱 수의사와 서울신문 유영규 기자가 함께 꾸미는 지면입니다.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동물들의 기쁨과 슬픔, 사랑과 미움, 은밀한 비밀 등 다채롭고 흥미있는 이야기들이 매주 1차례씩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지금까지 연재됐던 [어른들을 위한 동물원 이야기]의 목차는 다음과 같습니다. [어른들의 동물원] (1) ‘크누트’의 돌연사 왜 어미곰은 새끼를 포기했을까? [어른들의 동물원] (2) 외로운 ‘블랙스완’ 대량학살의 슬픈 역사 간직한 그들. [어른들의 동물원] (3) 동물들의 사랑 몸짓(상) 고슴도치들은 어떻게 교미를 할까? [어른들의 동물원] (4) 동물들의 사랑 몸짓(하) 수컷뱀 성기 2개로 5시간 짝짓기 [어른들의 동물원] (5) 동물의 심리학 개장수 나타나면 동네 개들 조용해지는 이유 [어른들의 동물원] (6) ‘고리롱’ 박제논란(상) 숨진 로랜드고릴라를 어떻게 해야 하나 [어른들의 동물원] (7) 우리나라 최초 코끼리 600년전 일본에서 실려와 비운의 삶 [어른들의 동물원] (8) ‘고리롱’ 박제논란(하) 서울동물원, 독자의견 따라 박제 않기로 [어른들의 동물원] (9) 잘못 알려진 진실들 백조는 물속에서도 발짓을 하지 않는다 [어른들의 동물원] (10) 동물들도 자살을 하나? 1주일 만에 새끼 잃은 어미원숭이의 선택 [어른들의 동물원] (11) 술 취한 원숭이들 먹던 과일 씹다 두면 발효돼 자연의 밀주로 [어른들의 동물원] (12) 더위 절대강자 낙타의 비밀 무릎 같은 발목이 하이힐 역할 [어른들의 동물원] (13) 원숭이와 눈 마주치지 마라 동물원 사팔뜨기 안경의 비밀 [어른들의 동물원] (14) 불법포획 돌고래의 고백 사자도 공작도 과거를 숨기는지 몰라요
  • 감기약 슈퍼판매 못해… 與 몽니?

    한나라당이 감기약과 같은 일반의약품(OTC)을 슈퍼마켓에서도 팔 수 있도록 약사법을 개정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거부하고 나섰다. 여당의 이 같은 반응은 내년 총선을 앞두고 응집력이 강한 약사회의 반발을 피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동네 약국은 미장원이나 노인정처럼 선거 때마다 ‘민심 사랑방’ 역할을 해 정치인들이 공을 들이는 곳이다. 감기약이 동네 약국의 매출 중 77%를 차지하고 있어 일반 슈퍼마켓에서 감기약을 팔게 되면 약국 경영이 힘들어지기 때문에 약사들은 적극적으로 정치권에 법 개정 저지를 호소할 수밖에 없다. 더욱이 한나라당 내 친이(친이명박)계 의원들도 “대통령의 한마디에 국민 건강과 직결된 법을 바꿀 수 없다.”고 반발하고 있어 법 개정이 불투명하다. 민주당도 이참에 약사회를 자기 쪽으로 끌어들이려 하기 때문에 법 개정에 협조할 이유가 없다. 한나라당 정책위원회에서 보건·복지 분야를 담당하는 안홍준(정책위 부의장) 의원은 12일 “당과 정부(보건복지부)가 수차례 협의해 심야·공휴일에 당번 약국을 확대하기로 하고, 박카스 등 자양강장제와 훼스탈 등 소화제를 의약외품으로 분류해 약국 외에서 팔 수 있도록 준비하는 등 편의성 제고를 위해 노력했는데, 대통령이 약사법을 바꿔 감기약까지 슈퍼마켓에서 팔라고 한 것은 지나치다.”고 밝혔다. 안 의원은 특히 “대통령이 미국의 예를 들어 국민 불편을 얘기하는데, 우리나라 약국은 미국의 슈퍼마켓보다 접근성이 뛰어나다.”면서 “의사 출신으로서 객관적으로 봐도 감기약이나 진통제는 중추신경계에 영향을 주는 만큼 슈퍼마켓에서 판매하면 안 된다.”고 했다. 한 친이계 의원은 “총선을 앞두고 약사회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사실이지만, 약품 판매권을 확보하려는 대기업 소유 슈퍼마켓 체인의 의도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다른 의원은 “그동안 청와대의 정책 추진에 적극 협조했지만, 이번은 안 될 것 같다.”고 강조했다. 이주영 정책위의장도 “입법권은 국회에 있다.”면서 “국회 상임위에서 여야가 전문가들과 함께 국민 편의성과 약품의 안전성을 고루 고려해 결정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민주당도 법 개정에 부정적이다. 보건복지위원회 민주당 간사인 주승용 의원은 “의약품을 재분류할 필요는 있지만 감기약이나 항생제를 슈퍼마켓에서 팔 수는 없다.”면서 “이는 전문적인 영역으로 대통령이 법 개정을 지시할 사항이 아니다.”라고 밝혔다. 이창구기자 window2@seoul.co.kr
  • [기획]최고경영자=②락희(樂喜)「그룹」구자경(具滋暻)씨

    [기획]최고경영자=②락희(樂喜)「그룹」구자경(具滋暻)씨

     「러키6」3대(代)의 우애(友愛)로 뭉친「러키·그룹」  푼돈 아껴쓰고 큰돈은 아낌없이 쓰라는 선대(先代)의 유훈(遺訓)이어  선대인 구인회(具仁會)씨가 6형제, 2대째인 자경(滋暻·54)씨도 6형제, 자경(滋暻)씨 역시 6남매를 두고 있으니 오늘의 락희(樂喜)「그룹」은「러키·6」3대의「러키·그룹」이라고 할만도 하다.  락희(樂喜)화학·금성(金星)사·반도(半島)상사와 호남(湖南)정유·호남(湖南)전력 등「러키」산하 20개 업체의 1년간 외형 거래액 총액은 9백억원. 하지만「러키」의 진짜 자본은 돈 아닌 우애(友愛)라는 것이 자경(滋暻)씨의 얘기다.  현존하는 우리나라 재벌 중 완전하게 세대교체가 이루어진 재벌이 바로「러키·그룹」이다. 70년 1월 창업주이던 1대 총수 연암(蓮庵) 구인회(具仁會)씨가 작고하자 맏아들인 자경(滋暻)씨가 그 뒤를 이어 2대 회장에 취임함으로써「러키」의 세대교체는 창업 23년만에 이루어졌다. 『아버님이 돌아가시자 맡기는 맡아야 할텐데 그저 아득하기만 하더군요. 빚도 많고 할 일도 많은데 어떻게 요리해야 할 지 정말 몰랐어요』  자경(滋暻)씨는 제2대 회장에 취임한 뒤 1년 동안을『생애 중 가장 바빴고 1년 동안 정신이 없었던 해』라고 회고했다.  이 어려운 고비를 넘기는데 공헌한 것이 바로 구(具)씨 일가의 돈독한 우애(友愛)였다는 얘기다. 형님(仁會)은 돌아가셨지만 남은 5형제가 장조카 자경(滋暻)씨를 도와 뿌리 깊고 가지 많은「러키」를 흔들리지 않게 이끌어온 것.  비록 회장직은 장조카인 자경(滋暻)씨에게 넘어왔지만 자경(滋暻)씨의 다섯 삼촌들은「러키」안에 건재하다. 큰 삼촌인 철회(喆會)씨가「러키」운영위원회 의장으로 집안의 어른 겸 사업상 자경(滋暻)씨의 후광이 되어 주고 있으며 3째인 정회(貞會)씨는 금성(金星)전기, 5째 평회(平會)씨는 호남(湖南)정유, 6째 두회(斗會)씨는 범한(汎韓)화재를 맡고 있으며, 4째 태회(泰會)씨는 정계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 선대때부터 함께 일해 온 허준구(許準九·금성전선 사장)씨 허신구(許愼九·러키화학 사장) 형제와 먼 일가뻘인 하태(河泰·대한유조선 사장)씨, 하종배(河鍾培·국제신보 사장)씨가 있고 경영자로 모셔온 박승찬(朴勝璨·金星 사장) 이보형(李寶衡·汎韓해상화재보험 사장) 윤욱현(尹煜鉉·金星통신 사장)씨가 선대에 이어 계속「러키」의 주춧돌로 일해 오고 있다.  당초 자경(滋暻)씨가「러키」를 이어받을 때 항간에선 다섯 삼촌과 30여명이 넘는 사촌 등 방대한 가계(家系) 때문에 필경은 재산 싸움이 있을 것으로 예상해 왔다. 그러나 이 예상은 3년이 지난 오늘 오히려 선대 때보다 더 굳은 단결력을 보임으로써 예상을 무색하게 만들어 버렸다.  『아버님은 늘 가족간의 화목·우애를 제1로 삼으셨죠. 그 다음이 푼돈은 아껴쓰고 큰돈은 아낌없이 쓰라는 거였죠』  「러키」의 첫 출발은 1947년 부산에「러키」화학공업사를 세우면서부터 시작됐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敵産)에 손을 대 돈을 벌었으나 인회(仁會)씨는 적산에 한번도 손댄 일이 없다는 것이 자랑이다.  「러키」가 본격적으로 자라나기 시작한 것은 6·25동란 중이던 1952년「러키」치약을 생산해 내면서부터 였다. 당시 미제「콜게이트」치약이 판을 치고 있던 국내시장에서「러키」치약은 싼 값으로 동네 구멍가게부터 파고들기 시작, 끝내는「콜게이트」와의 전쟁에서 이기고 말았다.  「러키」의 2번째 큰 싸움은 외래품으로 충당해 오던 합성수지에 손을 댄 것. 여러 차례 합작투자의 유혹이 있었지만 이를 물리치고「홍콩」「마카오」등지서 화상(華商)들을 통해 들여오던 외제 합성수지를 쫓아내는 데 성공했다.  다음이 선풍기·「라디오」등 가전(家電)전기제품.「플래스틱」선풍기의 생산으로 일제 선풍기를 몰아냈고, 4·19 직후「외래품 판매금지법안」통과로 우리나라 각 가정에 금성사(金星社)「라디오」를 보급시키는데 성공했다.  한편 53년에 세워진 반도(半島)상사를 통한 수출입업은 계속되었으며, 62년 세워진 금성(金星)전선이 체신부에 납품된 전기 제품으로 돈을 벌어들이고 여력을 몰아 해외에 진출하게 됐다.  한해 1천5백만달러를 차지하는「러키」수출고의 대부분은 금성(金星)전선의 제품. 통신기의 금형(金型)을 서독에 수출하는가 하면「브류셀」에 있는「나토」본부의 자동전자교환대는 모두 금성사(金星社) 제품. 또「프랑크푸르트」「멕시코」공항에는「러키」제품의 ESK자동전자교환대가 설치되어 있다.  67·68년에 세워진 호남(湖南)정유·호남(湖南)전력에 투자하는가 하면 이를 실어나를 대한유조선·범한(汎韓)해상보험도 인수했고 대한(大韓)전선과 합자로 한국(韓國)제련광업을 인수했다.  한편 부산 국제신보와 부산 MBC-TV·「라디오」도 인수, 문화사업에도 손을 댔다. 창업 23년만에 총 산하업체 20여개의「매머드」기업「러키·그룹」으로 성장한 것이다.  『50년 처음「러키」화학에 제가 평사원으로 입사했을 땐 종업원이 통틀어 60여명이었습니다. 지금은 2만명 가까운 대식구로 늘어났습니다만. 말단 직원과 함께 섞여 치약을 만들고「플래스틱」을 만들었습니다』  지금은「러키」의 총수이지만 자경(滋暻)씨는「러키」입사후 만 12년만인 62년 겨우 전무 자리에 앉은, 지독히도 승진이 늦은 편이었다.  『실무를 알아야 한다는 선친의 뜻이었죠. 회사에선 평사원으로 일하고 가족 사이에 무슨 「트러블」이 생기면 가족대표란 뜻으로 꾸중은 혼자 들으며 자랐읍(습)니다』  자경(滋暻)씨는 경영합리화 과정에 선친과 함께 일해 오던「러키」의 노신(老臣)들을 자르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프다고 했다.  『이제「러키」는 국내시장보다 수출에 눈을 돌릴 겁니다.「플래스틱」제품의 경우 원료인 PVC만 충분하면 수출시장은 얼마든지 열려 있읍(습)니다. 그래서 75년께는 제품 생산만이던「러키」를 원료 생산에도 손대게 할 생각입니다』  자경(滋暻)씨는 또 회장직을 맡으면서부터「러키」총 재산의 40%를 들여 부친의 호를 딴 연암(蓮庵)문화재단을 세웠다.  연암(蓮庵)재단은 매년 서울대·고려대·연세대·부산대 등 4개 대학 공과계통 대학생 1백명에게 등록금 전액을 대어주는 한편 1년 6백만원의 연구비를 국내 과학자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연암(蓮庵)재단은 지난 번 종합감사서 3·1문화재단과 더불어 가장 실적이 우수한 문화재단으로 뽑혔다.  지금까진 한해 4천5백만원의 예산을 써왔으나 올해부턴 7천만원을 쓸 수 있다는 얘기다.  「러키·그룹」은「매머드」기업답게 가족 또한「매머드·그룹」이다. 인회(仁會)씨 6형제 말고도 자경(滋暻)씨대에 벌써 4촌간이 30여명. 3대째 자녀들까지 합치면 1백여명이 넘는다. 이들「매머드」가족이 한 자리에 모이는 것은 일년에 단 두번뿐. 5월8일 어머니 날과 8월 초순 모든 학교가 여름방학에 들어간때 뿐이다.  어머니 날이면 생존해 계신 자경(滋暻)씨 자당(慈堂)에게 모두 모이며 여름방학 땐 부산 교외 송정리(松汀里)에 있는 여름별장이 모두 모여드는 것.  형제간의 우애 못지않게 효성이 지극한 것도「러키」의 특징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너무 이해타산이 빨라 깊은 맛이 없읍(습)니다. 젊은이에겐 사회 첫발이 가장 중요하고 일단 어느 분야에 투신하면 끈기가 있어야 합니다』  자경(滋暻)씨는「러키」의 젊은 사원들에게 새해부턴 대폭 승진의 기회를 열어주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예전엔「골프」나 낚시, 사냥을 자주 즐겼지만 지금은 워낙 바빠 전혀 못하는 형편. 그 대신 틈이 나면 젊은 사원들과 어울려 김치, 깍두기에 막걸리를 마시는 소박한 재벌 2세다. <昌> <구자경(具滋暻)씨 약력>  ▲1914년 4월24일=경남 진양군(현 진주시) 지수면 승내리 367의 2서 태어남  ▲1944년=진주중학교(5년제) 졸업  ▲1945년=진주사범학교 졸업  ▲1945년=부산공립사범학교 교사  ▲1950년=락희화학공업사 이사  ▲1959년=금성사 이사  ▲1962년=락희화학 전무이사  ▲1963년=부산시교위 위원  ▲1967년=대한상의 특별위원  ▲1968년=금성사 부사장  ▲1970년=락희그룹 제2대 회장,전경련 이사,연암문화재단 이사장,수출유공 동탑산업훈장  ▲1971년=부산문화TV 회장  ▲1972년=한국과학기술재단 이사 [선데이서울 73년 1월14일 제6권 2호 통권 제222호] ●이 기사는 ‘공전의 히트’를 친 연예주간지 ‘선데이서울’에 38년전 실렸던 기사 내용입니다. 당시 사회상을 지금과 비교하면서 보시면 더욱 재미있습니다.
  • [사설] 복지부·의사회·약사회 ‘국민은 없다’

    이명박 대통령이 그제 “도대체 사무관이 하는 것처럼 일을 하느냐.”며 화를 냈다. 진수희 보건복지부 장관이 지난 3일 사실상 철회한 일반 의약품의 슈퍼마켓 판매를 두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낸 것이다. 약품의 판매 다변화는 심야나 공휴일에 국민이 겪는 불편과 고통을 덜어주기 위해 의료서비스산업 선진화 과제의 하나로 내세웠던 핵심 정책이다. 그런데 대한약사회의 힘에 밀려 ‘약국 외 판매’를 또다시 미뤄 원성을 사고 있는 복지부가 이제는 대한의사협회로부터 “장관 사퇴”라는 한층 높은 수위의 반발에 부딪혔다. 의사협회는 긴급기자회견에서 진 장관을 겨냥해 “국민이 아닌 약사회만을 두둔한다.”며 모든 책임을 지고 물러날 것을 촉구했다. 시민단체들도 같은 목소리를 내고 있다. 약사회에 밀리고 의사협회와 시민단체에 혼나는 복지부는 ‘동네북’ 처지다. 자초한 결과인 만큼 하소연할 곳도 없다. 복지부는 국민의 70~80%가 고대했던 사안을 저버렸다. 6만여 회원을 둔 약사회의 눈치를 보다 국민의 실질적인 편익을 팽개친 것이나 마찬가지다. 대통령이 지난해 12월 슈퍼 판매를 가능토록 하라고 한 지시에도, 국민의 요구에도 배치된 꼴이니 복지부는 누굴 위해 일하는 곳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의사협회의 약삭빠른 행태도 비판 받아 마땅하다. 일반의약품 판매 유보를 빌미로 복지부가 추진하는 선택의원제를 포기토록 압력을 행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선택의원제는 동네의원에서 당뇨·고혈압 등 만성질환자를 밀착 관리토록 해 환자 부담을 줄여주는 제도다. 결국 복지부는 약사들의 표를 염두에 둔 정치적 판단을 했고, 약사회와 의사협회는 자신들의 이익에 매몰된 셈이다. 안타깝게도 국민의 편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분명한 사실은 복지부든, 약사회든, 의사협회든 국민의 뜻을 외면할 땐 반드시 대가를 치른다는 점이다.
  •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4) 경남 하동 축지리 문암송

    [고규홍의 나무와 사람이야기] (34) 경남 하동 축지리 문암송

    한 톨의 솔씨가 바람을 타고 섬진강을 따라 지리산 자락으로 올랐다. 수백 년을 살아가야 할 아늑한 보금자리를 찾느라 기력을 다한 솔씨는 햇살 따스하게 내리쬐는 양지 바른 곳에 내려앉았다. 한 줌의 포근한 흙에 묻혀 솔씨는 천년의 영화를 꿈꾸며 평안한 잠에 들었다. 그러나 그가 오랜 망설임 끝에 겨우 찾아내 잠든 곳은 얄궂게도 큰 바위 위에 포슬포슬 얹힌 한 줌의 흙이었다. 이미 1000년을 살아온 바위 위의 한줌 흙만으로 산다는 건, 애당초 견디기 힘든 고통이 뒤따르거나 불가능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어린 솔씨는 애면글면 바위 틈을 파고들어 뿌리를 내렸고 가끔은 강철같이 단단한 바위를 쪼개기도 했다. ●물 한 모금 없는 곳에 터 잡은 나무 씨앗이 뿌리를 내리고 큰 소나무로 자라는 고난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산 아래에는 사람들이 들어왔다. 어린 솔씨처럼 사람들도 황무지 위에 논밭을 일구고 생명을 키우며 풍요로운 농촌을 이뤘다. 경상남도 하동 악양면 축지리 대축마을이다. “그 큰 바위 덩어리 위에서 나무가 어떻게 그리 오래도록 크게 자랐는지. 만날 보는 나무지만 볼 때마다 신기하다니까. 그런 거 보면, 나무가 힘이 좋은 거야. 바위까지 뚫고 자랐으니 말이야.” 마을 입구의 한적한 버스 정류장 앞 점방을 지키는 조분수(77) 노파는 뒷동산 큰 바위 위에 서 있는 한 그루의 소나무를 바위보다 강한 나무라고 이야기한다. 나무를 ‘문암송’이라고 부르고 나무를 떠받치고 있는 바위는 문암, 혹은 문바위라고 부른다. 나무와 바위는 모두 대축마을 사람들에게 경외의 대상이다. 누구는 이 소나무의 나이를 300년이 됐다고 하고, 또 누구는 600년도 넘었다고 한다. 나무의 나이를 정확히 가늠하는 게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무로서 생명을 유지하는 데 꼭 필요한 물 한 모금 스며들지 않는 바위 위는 문암송에게 최악의 조건이다. 문암송의 나이를 비옥한 땅에 터 잡은 여느 소나무들의 크기와 비교해 짐작할 수 없는 이유다. 나무가 자라려면 어쩔 수 없이 바위를 쪼개고 뿌리를 내릴 수밖에 없는데, 바위가 쪼개지면 나무는 보금자리를 잃게 된다. 문암송이 여느 나무들처럼 자랐다면 바위는 산산조각으로 부서져 나무도 생명을 잃었을지 모른다. 하여 문암송은 사람도 바위도 전혀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조금씩 그것도 아주 천천히 자랐다. 그게 애당초 문암송에게 주어진 숙명이었다. ●지리산 선비들 음풍농월 즐기던 곳 “내가 시집온 게 열일곱 살 땐데,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아. 더 자라지도 않고, 부러지거나 시들지도 않고, 그때 그대로야. 외려 나무 밑에 있는 바위가 조금 더 갈라졌지. 그건 알 수 있어.” 조 할머니는 처음 시집왔을 때 보았던 나무를 또렷이 기억할 수 있다고 말한다. 나무도 자람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생명이거늘 어찌 60년 동안 변하지 않았겠는가. 다만 사람들의 눈으로 가늠하기 어려울 만큼 천천히 자란 것이다. 문암송도 봄이면 송홧가루를 날리고 가을에는 솔방울을 맺으면서, 차갑고 견고한 바위 위에서 제 몸을 키웠다. 12m의 키, 줄기 둘레 3m의 훤칠한 소나무가 됐다. 살아남기 위해 나무는 바위를 파고들었지만, 바위가 바스라지지 않도록 조금씩 자라야 했다. 다른 소나무가 한 아름 자라는 동안 이 나무는 고작 한 뼘쯤 자라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또 나무의 보금자리인 바위가 부서지지 않도록 나무는 바깥으로 낸 뿌리로 바위를 감싸 안았다. 가운데에서는 바위를 쪼개고 바깥에서는 더 이상 쪼개지지 않도록 붙들어 안으며 나무는 긴 세월 동안 변증의 생명을 살았다. “우리 마을에는 문암계라는 게 있어. 대축마을하고, 저 아래 소축마을 사람들이 함께 하는 계야. 해마다 7월 백중에 계원들이 문암송 앞에 모여서 잔치를 벌이지. 나무 앞에 정자 있잖아. 그게 문암정이야. 그래서 그 나무도 문암송이라고 불러. 우리는 그냥 ‘문바위 나무’ 라고 부르곤 해.” 문암송이 자리 잡은 곳은 멀리 악양들녘이 한눈에 내다보이는 경관 좋은 자리여서, 옛날에는 문인들이 모여 자주 시회(詩會)를 열곤 했다. 사람이 지은 정자는 필요 없었다. 바위를 뚫고 솟아오른 신비로운 나무 한 그루가 드리우는 상큼한 그늘이면 너끈했다. 문암송이 드리우는 그늘은 곧 하늘이 지은 정자였다. 천연의 소나무 정자에는 오랫동안 지리산 자락에 흩어져 사는 문인 선비들이 모여들어 호연지기를 익히며 음풍농월의 흥취를 즐겼다. 맑은 바람 밝은 달을 노래하기에 나무 그늘만큼 알맞춤한 자리가 또 어디 있겠는가. ●고통·풍요 조화 이룬 생명의 변증법 “문암송 곁에 있는 한 그루 나무 또 봤수? 그건 서어나문데, 기가 막히게 그 나무도 바위에 뿌리를 내렸잖아. 큰 바위는 아니지만, 쪼개고 감싸면서 자라 오르는 건 똑같아. 우리 동네 나무들이 죄다 힘이 좋다는 이야기지 뭐. 허허.” 나무가 바위 위에서도 잘 자랄 수 있을 만큼 건강하고 활기찬 마을이라는 게 조 할머니의 자랑이다. 한평생 농촌 마을에서 잔뼈가 굵은 조 할머니의 건강한 웃음에는 간단없이 부닥쳐 온 농촌 살림의 모든 고통을 감내한 관록이 배어 있다. 이곳 사람들이 조 할머니처럼 건강하고 평화롭게 살 수 있는 건 어쩌면 사람보다 먼저 바위를 뚫고 생명을 키운 한 그루의 소나무가 있는 탓인지도 모른다. 살림살이가 어려울 때마다 사람들은 마을 뒷동산에 서 있는 문암송의 고통과 강인한 생명력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격려했던 것이다. 바위를 뚫고 솟아오른 문암송! 그는 지금 이 순간에도 거친 바위 표면에 생살이 찢기는 아픔을 삼키며 바위 틈을 조금씩 벌리면서 뿌리를 밀어 넣는다. 뿌리가 파고들수록 차츰 벌어지는 바위를 꽁꽁 붙들어 안아야 하는 바깥쪽 뿌리의 아픔은 더 커지기만 한다. 애처로운 운명의 문암송이 펼쳐 보이는 생명의 변증법이다. 글 사진 하동 고규홍 나무칼럼니스트 gohkh@solsup.com >>가는 길 경남 하동군 악양면 축지리 산83-1. 하동에 가려면, 섬진강을 따라 이어지는 아름다운 국도 17호선을 타고 가는 맛이 일품이지만, 최근 개통한 순천~완주 간 고속국도를 이용하면 빠르게 갈 수 있다. 속도를 얻을 것인가, 풍경을 즐길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리라. 어느 길을 선택하든 하동 축지리에 가려면 구례를 거쳐야 한다. 구례에서 하동 방면으로 20여㎞를 가면 악양면에 이른다. 악양면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1.5㎞를 더 가면 대축마을 버스정류장이 나오는데 여기에서 오른쪽으로 난 마을 길을 따라 800m쯤 산으로 올라가면 마을 끝에서 문암송을 볼 수 있다.
  • 전통시장 흥행카드 ‘우림보부상단’

    전통시장 흥행카드 ‘우림보부상단’

    “동네 시장이 활성화된다면 무더운 날씨에 땀범벅이 되고 밤새 연습하더라도 너무 행복한 것이지요.” 중랑구 우림보부상단 단원 김종곤(60·김가네두부 대표)씨가 아파트단지 공연을 위해 소(牛) 탈을 쓰고 맹훈련하며 6일 이같이 말했다. 보부상단을 이끄는 행수, 보부상, 풍물단 등 모두 13명으로 구성된 우림보부상단은 지난달 28일부터 인근 아파트단지를 순회 공연하며 전통시장 살리기에 나섰다. 10월까지 5차례 공연을 펼칠 예정이다. 지난달부터 상인들은 시장을 살리고 말겠다는 단 하나의 목표를 염두에 두고 매주 6시간씩 짬을 내 맹연습을 해 왔다. 갈수록 삭막해지는 사회 분위기 속에 지역 공동체를 살려 사람 냄새가 나는 고장으로 가꾸자는 뜻도 담겼다. 10여년 전부터 우림시장 주변에 대형마트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자 매출이 50%나 감소하면서 상점들이 절반 가까이 문을 닫는 혹독한 시련을 곁에서 느꼈기 때문에 간절함이 더 묻어났다. 단골고객 확보를 위해 힘쓰다 과로로 쓰러져 입원까지 했던 유의준(55) 상인회장은 “상인대표로 어깨가 무겁다.”며 “사실 지금보다 어려울 때도 해냈는데 다시 한번 해보기로 했다.”고 마음을 다졌다. 우림보부상단은 건영아파트에서 첫발을 뗐다. 우선 칭찬신문고를 마련해 공연 전 무대 앞에 설치된 대형 북을 크게 두드리는 것으로 출발을 알린다. 그러는 가운데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에서 겪었던 이웃의 따뜻한 미담을 전해주는 코너를 마련해 호응을 얻었다. 한평 예술단(우림시장 전문예술단) 등 전문 예술인들도 가요, 만담, 재즈, 마술, 시낭송 등 다채로운 무대공연을 펼쳐 흥을 돋웠다. 무엇보다 김, 두부, 한우, 돼지고기 등 우림시장 상품 시식코너를 통해 고품질 상품을 알리고 전통시장 상품권도 할인 판매했다. 상품권을 구매한 주민에겐 10%의 할인혜택을 준다. 특히 주민들이 쌀을 한줌씩 모아 주면 떡을 만들어 각 가구에 나눠주는 좀도리운동을 펼쳐 모처럼 잔치 분위기로 돌아갔다. 문병권 구청장은 “대형마트와 기업형 슈퍼마켓(SSM) 진출에 주눅들지 않도록 배려와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이라며 “상인들 얼굴에 웃음꽃이 피는 날이 빨리 오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 사진 강동삼기자 kangtong@seoul.co.kr
  • [지방시대] 새 도로명, 준비 - 조정 더 필요하다/윤의영 협성대 도시행정학 교수

    [지방시대] 새 도로명, 준비 - 조정 더 필요하다/윤의영 협성대 도시행정학 교수

    새 도로명 주소의 전면 시행이 2년 연기됐다. 도로 명칭에 대한 불만과 혼란이 곳곳에서 발생한 데 따른 불가피한 조치다. 필자가 근무하는 대학 앞 도로의 경우를 보면, 대학 정문과 담을 끼고 돌아가는 도로에 ‘최루백로’라는 새 이름이 붙여졌다. 옛날 대학가 최루탄을 떠올리는 사람이 있을 법도 하다. 그런데, 이삼십년 대학에 근무한 사람조차 그 정확한 뜻도, 이름의 유래도 모른다. 알고 보니 옛날 그 지역에 살았다던 효자의 이름이라고 한다. 새 주소 사업이 시작된 1997년 이후 막대한 예산과 인력을 투입했지만, 막상 시행을 앞두고 불거진 문제들을 보면 아쉬운 점이 한 둘이 아니다. 몇 가지 문제에 대한 시급하고 효과적인 조치와 함께 도로 명칭 조정 등 준비도 더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우선, 새 주소 최종 확정시기를 연장하는 방안을 제안한다. 지난해 10월 새 주소가 예비 고지된 이후 명칭 변경에 대한 이의신청을 거쳐 올해 6월 말까지 새 주소가 최종 확정된다. 그러나 이의신청 기간도 짧고, 국민들 사이에 오해도 많다. 도로명 주소 전면 시행이 2년 연기된 것은 기존 지번과 새 도로명 주소를 병행 사용하는 기간이 연장된 것인데, 많은 사람들은 도로명 주소를 법정 주소로 사용하는 시기가 2년 연기되고 그 기간 동안에는 명칭 이의신청을 통해 변경할 수 있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다. 심지어는 국민 불만이 지속되면 기존 방식대로 되돌아갈 수도 있지 않을까 하고 막연히 생각하는 분위기도 있다. 정부가 이런 상황을 정확히 파악해 합리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새 주소 최종 확정 이후에도 논란이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다음으로, 명칭 변경에 대한 이의신청 요건을 완화하거나 절차를 간소화해야 할 것이다. 현재는 새 도로명 주소 거주민의 5분의1 이상 동의를 얻은 이의신청 서명부를 관할 지자체에 제출한 후 새주소위원회의 심사를 거치도록 되어 있다. 아파트 단지나 지역주민 의견을 취합하기 쉬운 경우는 몰라도, 그렇지 않은 경우는 상당수 거주민의 동의를 받는 것이 어디 만만한 일인가? 바꾸고 싶으면 주민 5분의1 이상 변경동의서를 받아오고 그러지 못하면 그냥 사용하라는 것인데, 이건 다분히 행정편의주의적인 발상이다. 또한 새 주소 명칭을 조정할 때는 그 초점을 ‘식별력’에 맞추어야 할 것이다. 새 주소 명칭 부여 사유의 상당수가 필자의 대학 주변 사례와 같이 옛 지명이나 인명을 이용하고 있는데, 이는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한 터라 새 주소 사업의 목적에 부합하지 않는다. 찾기 쉬운 이름, 예를 들면 대학이나 이름이 알려진 산업체나 시설물이 있는 주변 도로는 그 명칭을 따서 ‘OO대학로’, ‘OO전자로’, ‘시청로’ 등으로 하면 식별하기가 매우 용이할 것이다. 끝으로, 새 주소 체계에 따르다 보니 같은 동네나 아파트 단지 내에서도 이웃 간에 번지수가 달라지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주소 식별력이 오히려 떨어지는 것이다. 도로명과 일련번호 원칙에 충실한 결과인데, 이 문제는 현실에 맞게 반드시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15년 준비했는데, 문제를 안고 무리하게 추진하느니 기왕 늦은 바에 조금 더 준비하고 조정하는 편이 더 낫지 않을까. 국민들은 새 주소가 그리 시급하지 않다.
  • 의사협회 파업카드 꺼내나

    보건복지부가 추진 중인 ‘선택의원제’에 반발한 대한의사협회가 파업 등의 강경책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파장이 예상된다. 복지부가 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와 관련, 사실상 약사회의 손을 들어주면서 정부와 이익단체의 갈등이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고 있다. 대한의사협회는 7일 서울 태평로 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선택의원제와 관련한 ‘중대 발표’를 할 것으로 5일 알려졌다. 임원들에게 함구령이 내려져 구체적인 내용은 공개되지 않았지만, 의협은 지난 3일 복지부의 약국 외 판매 대책 발표 직후부터 가진 마라톤 회의에서 파업 또는 파업에 준하는 단체행동 추진을 심도 있게 논의한 것으로 전해졌다. 의협 관계자는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해 구체적인 내용은 7일이 돼야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면서 “(정부가) 깜짝 놀랄 만한 대응책이 될 수도 있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선택의원제는 환자가 가까운 특정 동네 의원을 지정해 이용할 경우 본인 부담금을 10%가량 깎아주는 제도로, 대형 의료기관으로 집중되는 환자를 의원급 의료기관으로 돌리겠다는 취지로 마련됐다. 하지만 당사자인 의협은 이 제도 도입을 강력히 반대하고 있다. 신규 개원에 악영향을 미치고, 가정의학과나 내과 등 일부 과에만 이익이 돌아가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이 뚜렷해질 것이라는 우려 때문이다. 복지부는 “전체가 아닌 일부만 참여해도 정책을 추진할 수 있다.”고 강행 의지를 밝혔지만, 의협은 “개원의에게 불이익만 돌아가는 정책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논의 중단을 선언한 상태다. 최근 복지부가 의약품의 약국 외 판매 대신 의약품 재분류를 추진하겠다며 약사회 손을 들어줘 갈등은 더욱 심화됐다. 지난 3일 복지부 브리핑에서 손건익 보건의료정책실장이 “현행법 체계 내에서 특수 장소 확대는 약사법상 의약품의 공급을 약사가 해줘야 한다. 약사의 공급이 없으면 방법이 없다.”고 밝히면서 불에 기름을 부은 꼴이 됐다. 이에 대해 의협 측은 당장 “국민 편의를 등지고 약사회의 손을 들어주면서 영상 장비 수가를 인하하고 선택의원제를 도입하는 등 의사들만 핍박하는 것은 상식에 어긋난 것이 아니냐.”고 강력히 반발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굿모닝 닥터] 2~3㎏ 결석 어떻게

    지난 4월의 일이다. 40대 부부가 병원을 찾았다. 한눈에 건강해 보였는데, 얼마 전 뜬금없이 고열과 함께 아내의 옆구리가 아프기 시작하더란다. 하루 이틀 쉬면 낫겠거니 싶어 약국에서 해열제를 사먹었는 데도 열과 통증이 더 심해지더란다. 참다 못해 가까운 동네 병원에서 초음파검사를 했더니 신장에 주먹만한 돌이 있더라는 것이었다. 환자는 그동안 아무런 증상도 없었다며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요로결석은 대부분 작은 결석이 신장에서 요관을 타고 내려가면서 요관의 점막을 자극, 급성 통증을 유발한다. 요로 결석은 당연히 통증을 일으킬 거라고 생각하지만 결석이 신장에 있을 때는 거의 통증이 없다. 따라서 요로결석이 있어도 무증상일 수 있고, 감염으로 열이 나면서 발견되는 경우도 많다. 간단한 CT와 X레이로 환자 상태를 살펴본 필자는 깜짝 놀랐다. 한쪽도 아니고 양쪽 신장에 어린이 주먹만한 결석이 박혀 있었다. “이걸 몸안에 담고 어떻게….” 싶을 만큼 큰 거대결석이었다. 아마 이 결석으로 환자 체중이 2~3㎏은 불었을 것이다. 물론 작은 결석은 자연스레 소변에 얹혀 빠져 나오기도 하지만 이처럼 큰 결석은 신장 기능 저하나 감염 등이 우려돼 반드시 제거를 해야 한다. 결석이 워낙 큰 탓에 체외충격파로는 어려울 것 같아 수술을 결정했다. 수술이라고 예전처럼 신장을 절개하는 대수술은 아니다. 내시경을 이용하면 흉터를 최소화하면서 안전하게 결석을 제거할 수 있다. 이 환자의 경우 내시경을 옆구리를 통해 신장에 접근시켜 결석을 제거하려 했으나 너무 커 2차례나 결석제거술을 시행했다. 아직도 기억이 새롭다. 돌이 너무 커 아침 일찍 시작한 수술을 늦은 오후에야 끝냈다. 환자는 꼬박꼬박 건강검진을 받았다지만 신장 검사는 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형래 강동경희대병원 비뇨기과 교수
  • [깔깔깔]

    ●정비사와 의사의 차이 자동차 정비사가 엔진을 정비하고 있는데, 마침 그 동네에서 살고 있는 외과의사가 들렀다. 정비사가 그를 알아보고 인사를 했다. “의사선생님 이거 보세요, 제가 지금 엔진을 해부하고 수리하고 나면 새것이 됩니다. 의사선생님께서 하시는 일과 비슷한 일이지요. 그런데 왜 제 봉급은 의사 선생님보다 훨씬 적은지 이해할 수 없어요.” 그러자 의사가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엔진이 작동하고 있을 때 수리해 보세요.” ●난센스 퀴즈 남이 먹어야 맛있는 것은? 골탕. 내것인데 남이 쓰는 것은? 이름. 못 팔고도 돈 번 사람은? 철물점 주인. 가만히 있는데 잘 돈다고 하는 것은? 머리.
  • ‘내가 장도영이오’… 5·16 그날의 육참총장은 눈빛으로 말했다

    ‘내가 장도영이오’… 5·16 그날의 육참총장은 눈빛으로 말했다

    31일 아침(현지시간) 미국 플로리다 올랜도 공항에서 서북쪽으로 40여분 떨어진 소도시 윈더미어에 들어서자 쾌적하고 고급스러운 주택가가 펼쳐졌다. 택시 기사는 “이 지역에서 가장 부유한 동네”라면서 “프로골퍼 타이거 우즈, 프로농구(NBA) 선수 샤킬 오닐 등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스타들이 사는 곳”이라고 했다. 영화배우 존 트래볼타도 한때 이곳에 살았다고 한다. 집값이 적게는 수백만 달러, 많게는 수천만 달러를 호가할 것이라고 했다. 50년 전 이 땅을 뒤흔든 5·16의 주도 세력도, 그렇다고 그들과 맞선 저항 세력도 아니지만 그를 빼놓고는 5·16을 얘기할 수 없는 인물. 전 육군 참모총장 장도영. 그가 그곳에 있었다. 한국 현대사 그 격동의 세월을 뒤로한 채 그는 이역만리 미국 동남부의 어느 한적한 동네에서 생의 마지막 페이지를 써 가고 있었다. 그는 비록 ‘얼굴마담’ 격이기는 했으나 한때 ‘혁명세력’에 의해 내각 수반으로까지 추대됐었다. 잠시나마 대한민국 권력의 정점에 머물렀던 인물이 이국 땅에서 말년을 보낸 경우는 이승만 초대 대통령 말고 예를 찾기가 어렵다. 장씨는 1962년 미국에 건너온 뒤 10년 전인 2001년 조용히 회고록을 낸 것 말고는 한국과의 연락을 거의 끊다시피 하며 지냈다. 김종필 전 자민련 총재마저 얼마 전 한 언론 인터뷰에서 “죽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으니 미국 어딘가에 살고 있을 것”이라고 했을 만큼 그는 철저히 우리의 기억에서 지워졌던 인물이다. 타이거 우즈의 저택에서 5㎞ 정도 떨어진 동네에 자리한 장씨의 집은 고급 골프장 건너편의 단층 저택이었다. 초인종을 누르자 부인 백형숙씨가 문을 열어 줬다. 그녀는 남편 장씨가 3년 전부터 파킨슨병을 앓아 의사소통이 힘들 것이라고 말했다. ●치매·마비 증세… 거동 힘들어 장씨는 파킨슨병을 진단받기 전에 세 차례 가벼운 뇌출혈이 있었는데 그것을 모르고 지나친 데다 크게 한번 넘어지면서 큰 병을 얻었다는 것이다. 남편이 사실상 치매 증상을 앓고 있다고 백씨는 말했다. 몸 이곳저곳이 마비되면서 장씨는 휠체어가 없으면 거동을 할 수 없는 처지다. 화장실을 가는 것도, 목욕하는 것도 간병인과 부인의 도움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식탁에서 수저를 드는 정도만 겨우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상태라고 백씨는 말했다. 장씨는 거실에 있었다. 창문 틈으로 들어온 바람에조차 날아갈 것처럼 야윈 노인의 모습이었다. 두툼한 얼굴에 건장한 체격의 39세 육군 참모총장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나마 그 옛날 부리부리했던 눈매가 아직 살아 있어 ‘내가 장도영이오.’라고 외치는 듯했다. “서울신문 특파원입니다.”라고 인사를 건넨 뒤 “올해가 5·16 50주년인데 소감이 어떠십니까.”라고 물었다. 눈으로 기자의 인사를 받은 장씨가 입을 열었다. 가녀린 목소리. 들릴 듯 말 듯했다. “다 넘어갔어. 어쩔 수가 없었어.” 온전히 답변할까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지켜보던 부인 백씨가 눈빛을 반짝이며 거들었다. “다 넘어갔대. 어쩔 수가 없었대.” 투병 중에 어렵게 말문을 연 남편이 ‘대견한 듯’ 입에는 환한 웃음을 머금었다. “박정희·김종필씨를 기억하십니까.”라고 묻자 장씨는 “그럼, 기억하지….”라고 답했다. “그분들한테 서운한 감정은 없으세요.”라고 물었다. 장씨는 “음…. 그렇지 않아요. 서운한 건 없어요.”라고 했다. 50년 세월은 그렇게 감정의 때마저 지워버린 듯했다. 뒤로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졌다. 그러나 더는 말이 없었다. 멍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한 채 다시 기억의 저편을 더듬기 시작했다. 백씨는 “남편이 전에는 사람들 앞에서 하도 말을 많이 해서 내가 그만하라고 말릴 정도였는데 지금은 저렇게 말을 못한다.”고 했다. 3년 전 병을 얻기 전까지만 해도 부부는 같이 교회에 다니고 골프도 즐겼지만 지금은 돌아갈 수 없는 추억이 되고 말았다. 하지만 장씨는 부인이 카메라를 가리키면서 웃어 보라고 하자 살짝 미소를 지었다. 악수할 때 어렵게나마 손을 내밀기도 했다. 마비 증상이 극도로 심각한 정도는 아닌 것 같았다. 장씨는 마비·치매 증상 말고 다른 질병은 없기 때문에 병원에 갈 일은 많지 않고 대신 부인이 타 온 약으로 투병 중이다. 백씨는 “(남편이) 병을 얻은 뒤로 잠자는 시간이 아주 많아졌다. 아기처럼 많이 잔다.”고 했다. 백씨는 남편이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김종필씨 등에 대해 가족 앞에서도 울분을 토로하거나 비난한 적은 없다고 했다. 장씨가 “외국에 나와서 자기 나라를 욕하면 누워서 침뱉기”라며 일절 험담은 안 했다는 것이다. 백씨는 “우리가 박정희씨 욕을 안 하니까 생활비를 보태 줘서 그런가 보다는 얘기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면서 “하지만 우리는 그쪽으로부터 땡전 한 푼 받은 적이 없다.”고 했다. 정착 초기엔 친정의 도움을 받았고, 백씨가 도서관 사서로 일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고 했다. 백씨의 친정은 당시 장안의 유명 병원이었던 ‘백내과’였다. 그녀는 “미시간에 살 때 정보요원 같은 사람들이 항시 우리를 감시했고, 우리와 알고 지내는 교민 중에서도 감시 요원이 있었던 것 같다.”고 했다. ●7년간 자녀들과 생이별 백씨는 “우리 부부가 미시간 주에 정착하게 된 것은 당시 (박정희) 정권이 지정해준 것”이라고 했다. 군사정부가 처음엔 장씨를 하버드대로 보내려 했으나 거기서 자칫 똑똑한 한인 학생들을 부추겨 반정부 활동을 할 것을 우려했고, 나중엔 캘리포니아주립대(UCLA)로 보내려 했으나 그쪽에도 흥사단 등 교민들이 많이 산다는 이유로 교민이 거의 없는 미시간으로 보냈다는 것이다. 장씨 부부는 미국으로 사실상 쫓겨난 뒤 자녀들과 7년간 생이별하고 지냈다. 일단 미국에 정착하는 일이 급했기 때문에 친정어머니가 아이들을 맡아 키웠다. 나중에 모두 미국으로 데려온 4남 1녀의 자녀 중 둘이 하버드대를 졸업하는 등 말썽 피운 자식이 하나도 없이 잘 자라준 게 고맙다고 백씨는 말했다. 그중 장씨가 전처와의 사이에서 얻은 장남은 풍산금속 회장 딸과 결혼, 10년 정도 살았다고 백씨는 말했다. 그런데 백씨에 따르면 묘하게도 풍산금속 회장의 아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둘째딸 근영씨와 결혼생활을 했었다. 장씨와 박정희 가문의 인연이 자식 대에서 불쑥 얽힌 셈이다. 백씨는 원래 5·16 당일이 딸 생일이라 점심에 육군본부 장성 부인들을 초청해 식사할 계획이었는데, 새벽에 정변이 일어나 놀랐다고 했다. 백씨는 “5·16 이전에 남편이 집에서 쿠데타 조짐이 보인다는 얘기를 한 적은 없다.”고 했다. 두 시간가량의 인터뷰를 마친 뒤 백씨는 “오늘은 남편 이발하는 날”이라면서 외출에 나섰다. 자식들이 사 줬다는 승용차 조수석에 남편을 태우고 뒷자리에는 미국인 여성 간병인을 태운 뒤 백씨가 직접 운전대를 잡았다. 물끄러미 쳐다만 보는 장씨에게 차창 너머로 답례 없는 작별 인사를 건넸다. 글 사진 동영상 윈더미어(플로리다) 김상연특파원 carlos@seoul.co.kr
  • 첫 전작 장편소설 ‘낯익은 세상’ 낸 황석영

    첫 전작 장편소설 ‘낯익은 세상’ 낸 황석영

    최근 2년간 그만큼 구설(口舌)에 오른 작가도 없다. 2009년 5월 이명박 대통령과 함께 중앙아시아에 동행하면서 현 정부를 ‘중도 실용’으로 언급한 게 발단이었다. 1989년 방북과 망명생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7년간 옥살이를 했던 그였기에 논란이 뒤따랐다. 지난해 발표한 장편소설 ‘강남몽’은 표절 시비에 휘말렸다. 1962년 서울 경복고 재학 시절 ‘입석부근’으로 문단에 나왔으니 햇수로 올해 등단 50년을 맞은 소설가 황석영(68) 얘기다. 지난해 9월부터 황석영은 미얀마·베트남·라오스와 국경을 맞댄 중국 윈난성 리장(麗江)에 칩거했다. “시간의 흐름이 멈춘 듯한 곳을 찾아 달라.”는 그의 부탁에 강태형 문학동네(출판사) 사장이 수소문 끝에 찾은 곳이다. 해발 2400m에 있는 소수민족 나시족의 고대 도시에서 구상과 집필을 한 황석영은 제주도로 옮겨 소설을 마무리 지었다. 연재 방식이 아닌 생애 첫 전작 장편 ‘낯익은 세상’이다. 소설은 1980년대 초 ‘꽃섬’(난지도의 옛 이름)으로 흘러들어온 ‘딱부리’의 눈에 비친 자본주의 문명의 이면과 쓰레기장 빈민의 삶, 폐허에서 싹트는 희망을 말한다. 리장의 한 호텔에서 1일 취재진과 만난 황석영은 “내 나이 대에 걸맞은 ‘만년문학’을 시작해야 한다는 의욕에 불타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의 ‘구설’들과 관련, “지난 2~3년간 정말 욕을 많이 먹었다.”면서 특유의 입담을 늘어놓았다. 이제는 짐을 내려놓은 듯 편해 보였다. →‘낯익은 세상’은 어떻게 구상하게 됐나. -내 작품 중 ‘한씨연대기’ ‘삼포 가는 길’ ‘장길산’ 등을 전반기라고 한다면, 방북과 망명, 옥살이 이후 10년여 동안 쓴 작품은 후반기 문학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바리데기’ ‘개밥바라기별’ ‘강남몽’으로 이어지면서 매너리즘에 빠진 건 아닐까란 본능적인 위기감이 들었다. 변신하지 않으면 글을 쓰지 못할 것 같다는 초조함도 있었다. 이 무렵 술자리에서 전에 추구했던 세계나 가치관, 현실에 밀착한 소설이 아니라 훨씬 더 보편적인 것을 그리고 싶다는 얘기를 문인들과 나눴다. 당시 누군가가 쓰레기장에 가면 지난 세월을 보낸 욕망의 존재들이 나올 것 같다고 했다. 농담처럼 카프카가 난지도를 쓴다면 어떻게 했을까라는 얘기를 하다가 시대나 인물을 추상화해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배경이 난지도인데. -상황을 빌려 왔지만 세계 어느 도시에나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이다. 생산과 소비를 극대화한 인간 욕망에 대한 반성을 상징적으로 드러낸 곳이다. 자본주의 사회의 모순이 집약된 공간이기도 하다. →소설 마지막에 ‘땜통’(주인공 ‘딱부리’의 동생으로 도깨비들과도 소통하는 신비로운 존재)이 죽는데. -처음에는 안 죽었는데 출판사 쪽에서 땜통은 저 세상(정령들의 세계)이 어울리니 보내자고 하더라. 예전에는 발끈했을 텐데 요즘에는 편집자의 생각을 존중하는 아량이 생겼다(웃음). →등단 50년이다. 감회가 남다를 텐데. -얼마 전 마흔 살 먹은 아들과 술 한잔하는데 ‘더는 사나운 형님 말고, 할아버지가 되라.’고 하더라. 후배들도 ‘잘난 척 그만하고, 술자리에서 혼자 말하지 말고, 당신만 옳다 하지 말라.’고 하더라. (나처럼) 어릴 때부터 칭찬받은 이들의 약점은 남을 배려하지 못한다는 거다. 후배 문인들과 얘기하다가 내 또래의 ‘만년 문학’ 얘기가 나왔다. 치매에 걸린 노파가 딸을 몰라보면서도 어린 딸의 사진을 보여 주면 알아보는 것과 비슷하다는 얘기다. 현재에서 가까운 기억들은 지워 버리고 자기가 남겨야 할 기억을 간추리고 재정리하듯 만년 문학은 출발점으로 돌아가 관계를 정리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번 작품이 좋다. 여태 썼던 작품과 달리 가야 할 길이 보이니까 다행스럽다. →다음 작품은. -정확히 따지면 내년이 ‘입석부근’으로 등단한 지 50년이다. 처음에는 평론가 몇 명과 대담집을 낼까 했는데 좀 섭섭할 것 같아서 소설을 쓰기로 했다. 제목도 정했다. ‘이야기꾼’이다. 황석영의 아바타 같은 인물을 만들어서 19세기 조선을 배경으로 온갖 풍랑을 겪는 이야기꾼의 얘기를 쓸 생각이다. →표절 시비 이후 공식적으로 입장을 밝힐 기회가 없었는데. -한국 문단에서 실제 자료를 다루면서 출처를 밝히는 전례가 없었다. 시대물이나 역사소설에서 창작품이 아닌 자료들은 다 활용을 하지 않나. 팩트(사실)를 소설로 전환시키는 것은 작가적인 권리다. 하지만 결국에는 내가 놓치고 실수한 거다. 그래도 ‘강남몽’은 후대에 자본주의 근대화 과정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기억될 만한 작품이라고 본다. →2009년 대통령과 중앙아시아에 갔을 때도 말이 많았다. -나는 남북관계에 한이 맺힌 사람이다. 현 정부의 구성이나 콘텐츠가 내가 살아온 세월과는 많이 다르다. 하지만 남북관계 변화에 기여하고 싶은 생각은 분명하고 여전하다. 다만 공통된 문화적 배경을 지닌 지역 차원에서 풀자는 것이다. 그게 알타이 문화경제연대라는 건데 노무현 정부 때부터 나온 얘기다. 다음 정권이 오면 다시 시도해 볼까 하는 생각도 있지만, 주변에서는 소설만 열심히 쓰라고 한다(웃음). 글 사진 리장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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