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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스로 한계 만들면 진다 야구도 인생도 그렇다”

    “스스로 한계 만들면 진다 야구도 인생도 그렇다”

    지난 시즌 프로야구 최고 인기 유행어는 단연 ‘마리한화’였다. 최근 6년간 다섯 차례나 꼴찌를 기록했던 ‘동네북’ 한화가 2014년 11월 ‘야신’(야구의 신) 김성근(74)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뒤 지더라도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며 상대를 괴롭히는 ‘쉽지 않은 팀’으로 다시 태어났기 때문이다. 매 경기 숨 막히는 총력전을 펼친 한화는 지난해 전반기에만 27번의 역전 드라마를 썼다. 눈을 뗄 수 없는 한화 경기에 팬들은 마리화나처럼 중독성이 강하다는 뜻의 ‘마리한화’라는 별명을 붙였고, 한화는 전년 대비 38.3%나 증가한 65만 7385명의 관중을 불러모으며 2015년 최고의 인기 구단으로 떠올랐다. 한화 열풍의 중심에는 김 감독이 있었다. 승리가 간절했던 한화 팬들은 인터넷 청원, 본사 앞 1인 시위까지 벌이며 적극적으로 김 감독을 원했다. 그의 한화행이 결정된 이후 야구팬들의 관심은 줄곧 ‘김 감독이 만들어낸 SK 신화를 한화에서도 이룰 수 있을 것인가’에 쏠렸다. ‘김성근 효과’는 바로 나타났다. 3년 연속 최하위에 머물렀던 한화는 지난해 포스트시즌 진출 마지노선인 5위 안팎에서 치열한 순위 다툼을 벌이는 등 달라진 전력을 과시했다. 올 시즌 한화는 자유계약선수(FA) 자격을 얻은 핵심 선수들을 영입하며 우승 후보로까지 거론되고 있다. 김성근의 한화는 한국 프로야구의 또 다른 신화로 남을 수 있을까. 스프링캠프 막바지 치열한 담금질을 하고 있는 김성근 감독을 지난 26일 일본 오키나와현 아야세 고친다 구장에서 만났다. ●‘마리한화’ 이끌어 낸 악바리 야구 대장 따뜻한 오키나와에 때아닌 한파가 찾아왔다. 비바람이 강하게 불었고, 아침저녁 날씨는 마치 한국의 겨울 같았다. 김 감독도 감기를 피해 가지 못했다. 말을 하기 힘들 정도로 목 상태가 좋지 않았지만 김 감독은 평소처럼 고친다 구장에 가장 먼저 나와 제일 늦게 숙소로 들어갔다. “아까 지역 매체와 인터뷰를 했는데, 지금 이 상태로는 한화 우승 못한다고 했습니다. (기사가 나가면) 대전에서 난리가 날 거예요. 하지만 현실입니다. 더 뜨거운 경쟁이 필요해요.” 올해 한국 나이로 일흔다섯 살, 일반 회사원이라면 은퇴 시기가 훨씬 지났지만 김 감독의 열정은 여전했다. 2007년 중위권 팀이었던 SK를 맡아 팀을 네 번 한국시리즈에 올려 놓고, 세 차례 우승컵을 안겨주며 ‘우승 청부사’로 불렸던 그다. 비주류 출신에 매번 구단(현실)과 부딪치면서도 자신의 소신을 잃지 않는 김 감독의 모습에는 야구계뿐만이 아니라 진정한 리더에 목마른 한국 사회가 뜨겁게 반응했다. 명실공히 대한민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스포츠 감독 자리에 있는 그가 무엇 때문에 계속 도전을 하는지 궁금했다. “물러날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요? 저는 나이를 의식해본 적이 없습니다. 나이를 잊어버려야 해요. 우리나라에서는 나이가 들면 점잖게 있으라 하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 안 해요. 나이 속에서 헤매면 아무것도 못합니다.” 그가 야구를 계속 하는 이유도 “불러주는 곳이 있어서”다. 그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이 필요한 곳이 있다는 것”이라며 “70대이지만 20대, 30대 젊은 친구들과 경쟁한다고 생각하고 일한다”고 말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는 그의 ‘경쟁자’인 2030세대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어른’ 중 한 명이다. 강연을 하면 50~60대 기업 임원진부터 20대 대학생까지 그의 철학을 듣기 위해 몰려온다. 포기를 모르는 ‘김성근 야구’에서 희망을 보기 때문이다. “야구도 인생도 어디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아무도 모르는 겁니다. 스스로 한계를 만들면 져요.” 개인의 의지보다는 오히려 사회가 개인에게 한계를 지어주는 시대 아니냐고 되물었더니 “그렇기 때문에 더 포기하면 안 된다”고 답했다. “힘든 세상이죠. 그런데 실패했다고 포기해버리면 구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내 앞가림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겁니다. 혹여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면 상대는 나를 절대 쉽게 보지 못해요. 그런 과정이 가치가 있는 것인데 이상하게 한국 사회는 그 과정을 보지 않아요. 요즘 젊은이들이 쉽게 좌절을 하는 것도 결과만 중요시하는 사회 속에서 자랐기 때문에 자신에게 찾아오는 위기가 시행착오의 과정일 뿐이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이 아닐까요.” 한때 그는 “우승 못하는 감독”으로 불렸다. 1996년 쌍방울 감독으로 부임해 최약체였던 팀을 정규리그 2위까지 끌어올리는 기적을 연출했지만 감독 커리어에 우승 기록이 없다는 이유로 “하위권 팀을 중상위권으로 올려놓는 것은 잘하지만 큰 경기는 약하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가 ‘야신’으로 인정을 받은 것은 공교롭게도 SK 감독 시절 첫 우승을 하고 난 뒤였다. 그의 나이 66살이었다. ●“‘무에서 유 창조한 감독’ 기억되고 싶어” “마라톤 경기를 한다고 칩시다. 늘 2,3등 했던 선수가 1등 하는 것과 100등 했던 선수가 3등 하는 것 중 무엇이 더 가치가 있을까요? 물론 승부의 세계에서 1등을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하지만 우리 사회는 ‘어떤 1등’인지, ‘어떤 3등’인지에 대해 관심을 갖지 않아요.” 그는 “사람이 걸어온 길을 평가하지 않는 사회일수록 포기하는 사람이 많을 수밖에 없다”며 “젊은 사람들이 쉽게 물러서지 않았으면 좋겠다. 진심은 반드시 통한다”고 강조했다. 야구 인생 60년을 향해 가는 그에게 야구란 어떤 존재일까. “야구는 제게 물입니다. 물은 평소에 잔잔하다가도 어느 순간 사람을 집어삼킬 만큼 무서운 존재죠. 동시에 물이 없으면 모든 생물이 살아갈 수 없지 않습니까.” 그는 “평생 야구를 했지만 아직도 야구를 잘 모르겠다”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아직까지 은퇴 이후를 생각해본 적이 한번도 없습니다. 오래 살아야죠. 저를 불러줄 때까지 야구를 할 겁니다. 안 불러줄지도 모르겠지만(웃음)…” 그는 “우승 잘하는 감독도 좋지만 먼 훗날 사람들에게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 무에서 유를 창조했던 야구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 3년 정도는 한화를 맡으면서 (예전)SK 같은 팀으로 만들어 보고 싶다”며 다시 필드로 나갔다. 글 사진 오키나와 심현희 기자 macduck@seoul.co.kr
  •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36] 닭서리의 건강학

    [심재억 기자의 헬스토리 36] 닭서리의 건강학

    지금이야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에 절도 혐의로 잡혀가겠지만, 옛날에 닭서리는 겨울을 나는 일종의 ‘동과의례(冬過儀禮)’였습니다. 비록 지금처럼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생활공동체로서의 이해와 결속이 단단했고, 인심이 순후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요. 또 지금처럼 기업형으로 닭을 기르는 양계가 아니라 일용할 고기를 얻고, 달걀을 얻기 위해 집집마다 닭을 길렀던 까닭에 거기에서 얻는 이득도 과외의 소득이라 여겼습니다. 지금이야 시장이나 마트에 가면 지천에 널린 게 달걀이지만 예전에는 달걀이 제법 근사한 선물로 취급되던 시절도 있었습니다. 집마당에서 암수탉이 어우러져 낳는 유정란은 요즘의 그것보다 크고 맛도 좋았는데, 이걸 열 개씩 모아 지푸라기로 엮은 것을 한 줄로 쳤습니다. 그걸 장터에 가져가 돈을 바꾸기도 했고, 만만한 곳에는 선사품으로 전하기도 한 것이지요.  달걀로 소통했던 사회 달걀이 무슨 선물이 되느냐고 여길 사람도 있겠지만, 제조업이 낙후해 물산이랄 것도 없었던 60∼70년대에는 달걀 한 줄이면 탄원서를 대신 작성해 준 읍내 행정서사나 면서기에게는 뇌물이라는 부담을 주지 않으면서도 뭔가 대가를 치렀다는 생각이 드는 답례품이었고, 부잡한 아이들 학교로 불러모아 가르치시는 고마운 선생님에게 드리는 스승의 날 선물도 달걀 한 줄이었습니다. ‘달걀 두 줄이면 쌀이 한 말’이라는 당시의 통념이 이걸 입증합니다. 그 뿐이 아닙니다. 딸아이 혼례 후 시댁으로 보내는 신부의 이바지에도 석작에 차곡차곡 쌓아 넣은 달걀과 닭을 통째로 곱게 삶은 닭이 빠지지 않았는데, 석작에 들어가는 달걀이 좋이 쉰 개는 되었던 터라 혹여 깨어질까봐 집검불을 치대 부드럽게 만들어서 달걀을 하나 하나 싸 넣던 이웃 어르신의 자상한 모습이 선하게 떠오릅니다. 이미 세상에 안 계신 분이지만.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필자가 살던 마을에서 학교까지는 비포장 신작로를 따라 10리 길이었습니다. 6년 동안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이 길을 밟아 학교를 다녔는데, 시골 국민학교 전교생이 물경 1000명을 헤아렸고, 우리 마을에도 1∼6학년 학생이 어림잡아 40∼50명은 되었을 것입니다. 날 좋을 때면 끼리끼리 까불면서 오가는 길이 그다지 멀지 않았는데, 비가 오거나 눈이 내리면 그 길을 오가기가 정말 곤욕이었습니다. 황당한 얘기지만, 그 때는 우산 가진 사람이 많지 않았거든요. 비가 내리면 학교를 마친 아이들이 학교 앞 우체국이며 방앗간 추녀 밑에서 우두망찰하며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는데, 쾌재를 부를 횡재는 마침 지나가는 버스가 그 많은 아이들을 태워주는 일이었습니다. 하루에 고작 예닐곱 번 오가는 시골 버스 기사의 선심이 어린 아이들의 동심에 온기가 된 것이지요. 운전 기사는 마을 앞에 차를 세워 애들을 모두 내려주었는데, 그 때는 한바탕 소란이 입니다. 애들이 저마다 “감사합니다”를 연발하며 내리니까요. 마을 사람들은 얼굴에 마마 자국이 있는 그 기사를 참 좋아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이장이 하루는 동네 사람들 뜻을 모아 마을앞 정류장에서 그 기사가 모는 버스를 기다렸습니다. 고마운 마음을 표하기 위해서였는데, 그 때 이장이 건넨 것도 달걀 한 줄이었습니다. 그 시절의 달걀은 요즘과 확실히 달랐고, 그런 달걀을 생산하는 것이 닭이었으니, 그게 ‘한 마리’라고 찍어서 쉽게 주문해 먹은 요즘의 치킨과는 다를 수밖에 없지 않았겠습니까. 생산성을 처음 가르쳐 준 닭 그리고 달걀 다른 가축과 달리 닭은 키우고 번식시키는 일이 어렵지 않았습니다. 달걀을 열댓개 모았다가 알 낳는 둥지에 깔아놓으면 암탉이 알아서 그걸 품어 병아리가 깨곤 했지요. 이른 봄에 그렇게 알을 깔아두면 날이 풀리는 봄날 쯤 마당을 노란 병아리들이 누비고 다녔는데, ‘나리 나리 개나리 입에 따다 물고요 병아리떼 종종종 봄나들이 갑니다’하는 동요만 불러봐도 그런 풍경이 떠오르지 않습니까. 그런 닭을 키우고, 달걀을 모으는 일은 애들 몫이었습니다. 아침에 닭장 문을 열어 닭들을 풀어놓고, 때맞춰 모이를 주고, 해거름에 다시 닭장으로 불러들이는 일이야 시골 애들은 누구나 하는 일이었지요. 한낮에 암탉이 닭장에서 홰를 치고 나서면 달걀을 낳았다는 것도 애들이 다 아는 일입니다. 막 낳은 달걀을 거머쥐면 느껴지던 따뜻한 온기도 참 좋았습니다. 그렇게 달걀을 모으고, 모은 달걀이 다시 돈이 되고, 인사치레가 되고, 병아리가 되는 이 기막힌 생산성의 선순환과 상생의 가치를 시골 아이들은 걸음마를 떼면서부터 체득하게 됩니다. 그들에게 닭은 단순한 먹거리 이상의 존재였다는 뜻입니다. 지나칠 수 없는 사실은, 그런 닭이 또한 훌륭한 육류 공급원이 되었다는 점입니다. 아시다시피 닭고기는 쇠고기, 돼지고기 등 이른바 ‘붉은 살코기’와는 다른 ‘흰 살코기’, 즉 육류 중에서는 효용 대비 부작용이 가장 적은 고기로 꼽힙니다. 단백질의 경우 일반적으로 닭고기(가슴살)에는 23.0g이, 쇠고기 우둔살에는 22.3g, 쇠고기 안심에는 21.0g, 돼지고기 안심에는 14.1g이 함유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지방은 닭고기 1.2g, 쇠고기 우둔 4.6g, 안심 7.1g, 돼지고기 13.2g 정도입니다. 얼른 봐도 닭고기가 사람에게 유용한 단백질 함량은 가장 많고, 지방 함량은 가장 적은 양질의 육류임을 알 수 있습니다. 이 정도면 왜 싼 닭이 비싼 쇠고기, 돼지고기보다 훨씬 만족도가 높은 지를 이해하셨을 것입니다.  고기 맛을 잊어버린 사람들의 ‘동과의례’ 그 닭이 ‘서리’라는 ‘동과의례’의 중심이었던 이유도 금방 납득이 되지 않습니까. 봄부터 가을까지 애, 어른 없이 농삿일에 내몰리느라 힘들게 지내고 맞는 겨울은 ‘농한기’였습니다. 농촌에서는 제법 한가한 철이라는 뜻이지요. 겨울 농한기가 되면 치르는 관행적인 습속이 있습니다. 눈 덮인 산골짜기를 훑는 토끼몰이나 마을 사람들이 추렴해 돼지를 잡는 일이 그런 일인데, 여기에 닭서리가 빠지지 않습니다. 돼지는 심심파적으로 삼기엔 너무 크고, 토끼몰이야 재수가 좋아야 한 마리 잡히는 것이니 그 중 확실한 것이 닭서리일 밖에요. 그렇다고 산적질 하듯 아무 집이나 난입하는 것은 아닙니다. 네오 내오 없이 다 삼이웃인데 낯뜨거운 짓을 할 수는 없지요. 서리 대상을 꼽을 때 가장 맞춤한 방법은 또래 동무를 꼬드겨 그 집 닭을 서리하는 것입니다. 여기에도 까닭이 있습니다. 유순한 농경민족에게 가장 무서운 것은 떼지어 출몰하는 화적과 외침에 의한 전쟁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낮은 토담을 높여 성벽을 쌓는 건 정서에 부합하지 않고, 누군가가 밤새워 불침번을 설 수도 없으니 집집마다 똥개를 키워 밤낮 없이 집을 지키는 파수로 삼았습니다. 아시겠지만, 그 똥개가 볼품은 없어도 주인 섬기는 충성심 하나만은 대단합니다. 밤중에 이웃에 마실 한번 가려 해도 왈왈대는 똥개 때문에 주인이 몇 번씩 달래야 진정을 하기도 했으니까요. 그러니 개 무서운 줄 모르고 닭서리하겠다고 대들었다가는 십중팔구 낭패를 겪을 수밖에 없는 노릇이지요. 그러나 그 집 아들이 서리꾼이라면 얘기가 달라집니다. 제 주인이 한 걸음 먼저 들어가 똥개를 달래고, 그 틈에 한 놈이 닭장 속으로 기어들어가 닭 한 마리 낚아채 나오기란 식은 죽 먹기지요. 그렇다고 물색없이 덤벙거리다가는 산통 깨기 쉽습니다. 닭이 의외로 겁이 많아 조심해야 합니다. 한겨울 찬 손으로 거머쥐려다가 닭이 놀라 푸드덕거리기라도 하면 큰일입니다. 그러니 미리 겨드랑이에 손을 넣어 따뜻하게 덥혀둬야 합니다. 닭을 거머쥘 때도 마치 그림자처럼 다가가 양손으로 목덜미와 날개죽지를 잽싸게 싸잡아 횃대에서 들어내립니다. 이 순간에 버벅대다간 다른 닭들이 놀라 순식간에 야단법석이 벌어지기 때문이지요. 날개죽지와 목덜미를 한 손에 거머쥐면 끝입니다. 손에 들린 닭이야 발버등을 쳐봐야 소리가 날 일도 없고, 목덜미가 잡혀 옴짝달싹 못하니까요. 남은 일은 미리 점 찍어둔 골짜기로 줄행랑을 놓는 일입니다.  잡식의 운명 ‘육탐’ 이제 호궤할 일만 남았습니다. 사람들 이목이 미치지 않는 골짜기로 들어가 꽝꽝 언 소나무 가지를 툭툭 꺾어모아 불을 지핀 뒤 불땀이 달아오를 때 잉걸불 속에 닭을 묻어두고 히히낙락 기다리기만 하면 됩니다. 닭털이 불길에 오그라붙어서 불길 속에 그렇게 던져둬도 살이 타는 법이 없습니다. 속살이 먹을만 하게 익었겠다 싶을 때 꺼내 부지깽이로 툭툭 터럭만 털어내면 먹음직스럽게 익은 뽀얀 속살이 이내 드러나니까요. 남들 눈길 피해 서리 하는 떠꺼머리들이 손 날랜 숙수가 아니니 솜씨 부릴 일도 없습니다. 죽죽 찢어낸 살집을 깨소금에 찍어 나눠 먹은 뒤 입 씻고 돌아서면 그만입니다. 다음 날, 친구 집에서는 한바탕 소란이 일 것은 불 보듯 뻔합니다. “밤에 족제비가 들었는지 살오른 씨암탉이 종적도 없다”면서 어른들이 입맛을 다시면 친구 녀석은 “족제비 그걸 가만 둬서는 안 되겠다”고 넉살 좋게 맞장구를 쳤을 것입니다. 잘 사네, 못 사네 해도 농투산이들이 겪는 가장 심각한 건강상의 문제는 육류 섭취량이 절대 부족하다는 점이었습니다. 뼈 빠지게 일을 하지만 힘의 원천인 지방과 단백질을 충분히 섭취하지 못해 살집이 쪼르그라들 수 밖에 없고, 그러니 그럴 나이가 아닌 데도 주름이 자글자글 겉늙어보였습니다. 농사 짓고 산다고 맛있는 걸 분별 못할 리는 없습니다. 그들도 쇠고기, 돼지고기가 먹고 싶지만, 읍내 푸줏간까지 나가 통 크게 쌈지를 열 엄두가 안 나니 그냥 고봉밥에 김치로 주린 배를 채우고 맙니다. 그런 사람들이 겨울 농한기에 동네 사랑에 모여 노닥거리다가 입 맞춰서 닭 한 마리 서리하는 일은 흔했고, 설령 닭을 잃어버렸다 해도 그걸 크게 문제 삼지도 않았습니다. 그렇게 살 오른 암탉 한마리 해치우고 나면 얼굴에 기름이 오릅니다. 아침까지도 뱃골이 든든한 게 ‘이래서 고기, 고기 하는구나’하는 생각도 듭니다. 요즘이야 조석으로 고기 먹는 게 일상이라 ‘못 먹어서 얼굴에 버짐 필’ 일도 없고, ‘고기 맛 본게 언제인지 기억도 안 나 소증 걸린 지 오래’라는 푸념을 뱉을 일도 없지만, 예전에는 항용 하는 말이 ‘이밥에 고기’였습니다. 쌀밥에 고기 한번 실컷 먹는 게 또한 일상의 바람이기도 해서 명절 앞두고 부침개 지져낸다고 번철에 올린 돼지기름 닳아서 풍기는 냄새만 맡아도 회가 동하곤 했습니다.  섭생의 균형을 위한 원초적 일탈 ‘닭서리’ 그 시절엔 고기를 통해 얻는 모든 영양소가 결핍 상태이니 누구라도 고기에 ‘껄떡신’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지금이야 육류 섭취를 제한하라는 둥, 동물성 지방을 줄여야 한다는 둥 그 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말들을 하지만, 너무 잘 먹어서 문제가 된 ‘식탁 혁명’이 완성된 것도 실은 20∼30년 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명색 잡식의 운명을 타고난 인간이 줄창 곡류와 채소류만 먹다가 가끔 고기를 탐한다고 이상할 것은 없는 일입니다. 가장 좋은 섭생은 음식을 균형 있게 먹는 것입니다. 좋다고 줄창 고기만 먹을 일도 아니고, 싫다고 아예 채소류를 외면하고 살 일도 아닙니다. 이 균형이 깨어지면 당장이야 표가 나지 않겠지만 언젠가는 고장이 생길 수밖에 없는 게 사람의 몸이지요. 요즘 흔히 듣는 ‘잘 먹고 잘 살아서 생긴 병’이 꽤나 됩니다. 비만이 그렇고, 고혈압과 고지혈증이 그렇고, 당뇨도 많은 경우 췌장 혹사가 원인입니다. 이런 질환에 노출된 사람들 중에 상당수는 바로 그 섭생 균형이 깨져 있음은 보지 않아도 아는 일입니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먹고 싶은 것’을 먹지만, 여기에 ‘먹어줘야 하는 것’을 더해야 건강한 식생활이 완성된다고 할 수 있지요. 이제는 추억으로 남아있는 닭서리도 살펴보면 ‘균형 있는 섭생’을 향한 원초적인 욕구의 발현이었고, 거기에서 비롯된 우리 식의 일탈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 욕구가 사회적 관점에서 권장할 미덕은 아닐지라도 관용의 틀 안에서 ‘그럴 수도 있는 일’로 통용되었고, 그런 섭생의 균형 추구가 우리의 유전자에 각인돼 ‘끈질긴 생명력’으로 지금까지 남아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jeshim@seoul.co.kr
  • “서로 돕는 ‘도시 난민’ 이야기… 새로운 가족 유대 실험”

    “서로 돕는 ‘도시 난민’ 이야기… 새로운 가족 유대 실험”

    ‘피에로들의 집’서 공동체 연대 다뤄… 세월호·장자연 사건 등 현실과 중첩 타인 향한 감각 잃은 잔혹한 세태 비판 “기성세대 기득권 놓고 젊은이 보살펴야” 서울 성북동에 ‘아몬드나무 하우스’가 있다. 각자의 재난에 휩쓸려 표류하는 ‘도시 난민’들이 산다. 실패한 극작가이자 연극 배우인 김명우, 윤간을 당한 뒤 자살한 연인에 대한 기억에 잠식된 휴학생 윤태,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어머니의 죽음을 겪은 고등학생 정민, 비루한 과거 때문에 이혼한 사진작가 박윤정 등이다. 노년 여성 마마는 이들을 아몬드나무 하우스로 불러들여 먹이고 재운다. 1층에는 반 고흐가 동생 테오의 아들 탄생을 축복하며 그린 ‘꽃 핀 아몬드 나무’가 걸려 있는 곳. 비극의 인물들을 품은 곳에 걸린 그림치곤 참으로 아름답고 희망적이다. 소설가 윤대녕(54)의 새 장편소설 ‘피에로들의 집’(문학동네)의 단면이다. ‘호랑이는 왜 바다로 갔나’ 이후 11년 만에 낸 장편소설에서 작가는 오래 붙잡고 있던 소재 ‘도시 난민’에 파고들었다. 혈연·지연·학연으로도, 결혼이란 계약관계로도 묶이지 않은 이들의 연대란 가능한 것일까. “요즘은 혼자 사는 노인도 많고, 젊은이들도 결혼하고 싶어도 못하고 애를 낳고 싶어도 낳기 힘든 시대잖아요. 타인과의 유대를 통해 공동체가 가능한지 이야기로 가족 실험을 해보고 싶었어요. 앞으로도 가족제도가 존속되긴 힘들 것 같거든요. 이후 각자가 삶을 어떻게 꾸려나갈 수 있을까, 써볼 가치가 있겠다 싶었죠.” 난민이 된 젊은이들을 거두는 게 마마라면 이들을 하나씩 살피는 건 명우다. 아무 상관없는 타인을 보듬는 이들의 모습에는 작가의 소망이 깃든 듯하다. 기성 세대로서 젊은 세대에 느끼는 부채 의식이 작용한 것이냐는 질문에 작가는 고개를 끄덕였다. “(부채 의식이) 물론 있죠. 생물학적 나이가 그렇고 작가로서의 자의식으로도 기성세대란 인식이 40대 말에서 50대로 건너는 와중에 생긴 것 같아요. 경제적으로는 이룬 게 없지만 나도 모르게 작가로서의 명함을 손에 쥐고 기득권을 갖고 있지 않나. 그럼 지금 내가 해야 하고 할 일은 뭔가. 내가 뭔가를 갖고 있다면, 다음 세대에 그걸 돌려줘야 그들이 살아갈 수 있고 세계의 공동체가 연속성을 갖고 굴러갈 수 있다는 깨달음이 들었죠.” 작품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은 세월호 사건, 장자연 사건 등 우리를 분노하고 절망하게 했던 실제 사건들과 중첩된다. 작가는 욕망에 잔뜩 충혈된 기성 세대와 타인에 대한 감각을 잃은 잔혹한 세태를 아프게 짚어낸다. “세월호 사건 등을 보며 ‘기성세대가 삶의 환경이나 사회 시스템을 잘못 만들어 놔서 생기는 일들이 많구나’ 느꼈어요. 어려운 시대를 관통해 살아왔기 때문에 그렇게 얻은 힘을 안 놓으려 하죠. 때문에 젊은이들이 자기 몫을 갖기 힘든 현상이 누적되고 세대 갈등이 커져요. 기성 세대는 기득권을 놓고 보살핌의 단계로 나아가야죠.” 어렵게 털어낸 장편이지만 그는 홀가분하기보다 착잡한 마음이 앞선다. “요즘은 휴대전화로 사유하고 정보를 얻는 디지털이 종교화되는 시대죠. 디지털이 하나의 세계고 주님이고 종교인데 ‘내가 책을 내는 게 독자들에게 얼마나 의미가 있을까’ 싶어서요. 사회적 사건을 맞닥뜨리면 ‘문학 자체가 효용성이 있을까’란 의문도 들고요. 이번이 23번째 책인데 문학에 대한 요구나 환호도 확실히 과거와 달라졌음을 실감해요.” 그래서 1990년 등단 이후 성실하게 써온 그도 ‘계속 쓸 수 있을까’하는 딜레마에 자꾸 빠진다. 하지만 결론은 정해져 있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무력감을 느끼죠. 하지만 써야죠. 그래야 세상과 소통할 수 있고 독자들과 질문을 공유하고 답을 구하는 역할을 할 수 있으니까요.”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주말 하이라이트]

    ■가화만사성(MBC 토요일 밤 8시 45분) 차이나타운 최대 중식당인 ‘가화만사성’을 운영하는 한 대가족의 바람 잘 날 없는 이야기를 그린 50부작 드라마. 자수성가한 중식당 ‘가화만사성’의 주인 봉삼봉(김영철)은 목소리 큰 독불장군이고, 아내 배숙녀(원미경)는 순종적인 인물이다. 드라마는 한겨울 손이 부르트도록 철가방을 나르던 꼬마 삼봉이 번듯한 중식당을 열게 된 영광의 순간, 자식들의 연이은 이혼소동이라는 날벼락을 잇달아 맞는 데서 시작된다. 자기 주장만 내세웠던 봉삼봉이 가족 이야기에 귀 기울이게 되고, 참는 게 능사인 줄 알았던 배숙녀가 자기 목소리를 내며, 속앓이만 했던 해령(김소연)이 스스로를 잃지 않아야 상대를 사랑할 수 있다는 걸 깨닫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아이가 다섯(KBS2 토요일 오후 7시 55분) 상태와 미정은 베이커리 소동을 함께 겪은 이후 가까워진다. 연태는 태민에 대한 오랜 짝사랑을 끝내려 고백을 준비하지만 진주와 태민이 함께 있는 상황을 목격하며 당황하게 된다. 한편 오미숙은 상태를 집으로 불러들여 재혼을 생각하라고 다그치지만 상태는 쉽게 마음을 열지 못한다. ■동네의 영웅(OCN 일요일 밤 11시) 철부지 형의 사고 때문에 갑작스럽게 돈이 필요해진 찬규는 박선후로부터 달콤한 유혹을 받고 정의와 현실 사이에서 갈등한다. 한편 박선후를 궁지에 몰아넣기 위한 계획이 탄로 난 태호는 완전히 버림받고, 윤상민은 3년 전 마카오 사건을 은폐하기 위해 킬러들과 전열을 가다듬는다.
  • [당신의 책]

    [당신의 책]

    꽃은 많을수록 좋다(김중미 지음, 창비 펴냄) 인천 만석동 빈민지역인 괭이부리말에서 30년째 공부방 ‘기찻길옆작은학교’를 운영하며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쓴 저자가 그 세월을 에세이로 엮었다. 저자는 스물넷의 나이에 동네에 들어가 공부방을 차리고 정착했다. 10여년 뒤 동네 아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 ‘괭이부리말 아이들’을 썼고, 소설은 베스트셀러가 됐다. 저자는 더욱 피폐해진 가난한 내 이웃들에 대한 변호 의식을 담담히 소개한다. 돈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임을 일찌감치 깨우친 아이들을 아프게 이야기하며 교육 현실을 고민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상황을 개선할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를 비판한다. 384쪽. 1만 4500원. 사람을 사랑한 시대의 예술, 조선 후기 초상화(이태호 지음, 마로니에북스 펴냄) 조선 시대는 초상화의 르네상스기였다. 이 시기에는 한국 미술사 사상 가장 많은 초상화가 그려졌고, 예술성 높은 명작들이 쏟아졌다. 왕의 얼굴을 기록한 어진부터 공신과 문인의 영정에 이르기까지 선조들은 시대의 얼굴을 손으로 기록했고, 초상화를 통해 인물들의 정신을 발현했다. 저자는 “터럭 하나라도 닮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다”라는 인식 아래 치밀하게 그려진 조선 시대 후기의 초상화들을 통해 당대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시대상과 초상화의 변화, 한국적 리얼리즘을 전하고 있다. 424쪽. 2만 3000원. 덩샤오핑 제국 30년(롼밍 지음, 이용빈 옮김, 한울아카데미 펴냄) 중국 근대화의 아버지 덩샤오핑(鄧小平)의 이면을 다뤘다. 미국, 대만 등에서 중국 민주화 운동을 벌이는 저자는 덩샤오핑이 중국 개혁의 선구자로 평가받지만, 반대로 민주와 자유를 두려워한 독재자였다고 말한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은 단지 경제 영역에만 한정됐을 뿐, 정치를 비롯한 다른 영역에서는 철저하게 보수파였다는 것이다. 저자는 “오늘날의 중국을 알기 위해서는 마오쩌둥(毛澤東)과 덩샤오핑을 제대로 인식해야 하는데, 그중에서 특히 덩샤오핑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현재의 중국은 여전히 100% ‘덩샤오핑 제국’이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한다. 480쪽. 4만 5000원. 예술 판독기(반이정 지음, 미메시스 펴냄) 미술 평론가인 저자가 문화계뿐 아니라 다양한 사회·정치적 소재와 주제를 문화의 범주로 끌어들여 예술을 비평하고 있다. 이 점이 이 책의 매력이자 차별점이다. 책 제목은 무언가를 예술로 만드는 조건의 기록이라는 뜻이다. 저자는 예술 정의의 불가능성에 ‘힘입어’ 판독 대상을 예술보다 언론보도, 영화, 광고, 상품 등에서 찾았고 이들로부터 예술됨을 읽으려 했다고 적었다. 예술이 어려운 이유는 예술과 현실을 구분 지어 사유하려는 집단 체면 때문이라고 지적하는 저자는 서구에서 고안한 미적 유행을 흉내내어 자국에서 독점적 명성을 얻은 사례 등 예술 권력도 비판적으로 조명한다. 360쪽. 2만 2000원. 몇번을 지더라도 나는 녹슬지 않아(가와타 후미코 지음, 안해룡·김해경 옮김, 바다출판사 펴냄) 일본군 위안부를 비롯한 재일 1세대 할머니 29인의 삶을 담은 기록이다. 일본 언론인으로 빈곤과 성노예제 문제에 천착해 온 저자는 말도 통하지 않는 낯선 땅 일본으로 건너가 어린 노동자로, 아내로, 어머니로, 여성으로, 식민지의 설움과 전쟁의 참혹성을 겹겹으로 견뎌낸 이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전쟁과 식민지의 참상은 한 줄의 사건으로 접하지만 이 책은 남성들이 말하지 않은 역사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는 문제의식과 특히 일본인이야말로 반드시 알아야 할 역사로 이들의 삶을 기억하자고 되뇌고 있다. 344쪽. 1만 5000원.
  • 투잡 없인 못 살아… 동네 책방 ‘슬픈 귀환’

    투잡 없인 못 살아… 동네 책방 ‘슬픈 귀환’

    연간 1인당 독서량은↓ ‘9.1권’ “서울서 책만으로 수익 2~3곳뿐… 책값 거품 빼고 할인 금지해야” “커피와 책이 잘 어울리니까 다른 분이 운영하는 카페 내부에 동거 형태로 서점을 열었는데, 생각처럼 시너지 효과가 나지 않는 것 같네요.” 서울 용산구 해방촌에서 문학서점 ‘고요서사’를 운영하는 차경희(32·여) 사장은 25일 “최근 2년간 해방촌에만 5곳의 책방이 새로 문을 열었을 만큼 동네서점이 늘었다”며 “하지만 잘된다고 할 수 있는 곳은 많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40㎡(약 12평) 남짓한 서점은 한산했다. 문학책을 중심으로 500권 정도를 보유하고 있는데, 평일이라 그런지 저녁 퇴근 시간에 들른 손님은 채 열 명이 되지 않았다. 서울의 홍대입구, 이태원, 대학로 등 20~30대가 자주 찾는 명소에 동네서점들이 속속 귀환하고 있다. 디자인, 문학, 사진 등 특화된 분야의 책을 파는 소규모 형태들이다. 젊고 신선한 분위기가 장점이다. 주말이면 젊은이들의 데이트 코스가 된다. 반기는 사람들은 많지만 매출은 부진하다. 반짝 하고 부활 조짐을 보이던 동네서점이 다시 퇴조의 길을 걸을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구글맵을 이용해 ‘동네서점 지도’를 만든 남창우(43)씨는 “최근 2년간 서울에 동네서점이 50곳 가까이 늘었지만 지난해 4곳이 문을 닫는 등 어려운 곳이 늘고 있다”며 한숨을 쉬었다. 남씨는 조만간 폐점이 급증할 가능성을 걱정하고 있다. 2년 전 동네서점 창업 바람이 불면서 문을 연 서점들이 많았는데 통상 2년인 부동산 계약 기간 만료가 앞으로 집중적으로 도래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동네서점이 늘어난 계기는 뭐니 뭐니 해도 2014년 말 시행된 ‘도서정가제’다. 온·오프라인 서점의 할인폭을 최대 15%로 제한하자 온라인의 ‘반값 할인’이 사라졌고, 상대적으로 동네서점에 가격 경쟁력이 생겼다. 가게 보증금, 인테리어 비용, 책값 정도의 소자본으로 창업이 가능한 점도 동네서점이 증가한 이유다. 하지만 책 읽는 독자들의 감소세는 멈추지 않았다. 우리나라 1인당 연간 독서량은 2007년 12.1권에서 지난해 9.1권으로 4분의1이 감소했다. 지난해 서점을 연 A씨는 “하루에 한 권도 팔지 못하는 날이 많다”며 “서울 시내 동네서점 중 책으로 수익을 내는 곳은 2~3곳에 불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동네서점 주인들은 카페를 겸하거나 번역 등 ‘투잡’을 하면서 근근이 버틴다. 동작구 상도동에서 대륙서점을 운영하는 박일우(40)씨는 “인건비는 고사하고 월세만 내도 다행”이라며 “같이 서점을 운영하던 아내는 다른 일을 찾고 있다”고 전했다. 동네서점 주인 B씨는 “1년간 운영해 보니 적자만 쌓여서 따로 책 번역 일을 하고 있다”며 “서점을 차린 건지 작업실을 차린 건지 헷갈릴 때도 있다”고 말했다. 온라인 서점의 마진율은 35~40%에 이르지만 소규모 서점은 25% 정도에 불과하다. 또 도서정가제의 최대 할인폭은 15%이지만 할인카드 등을 이용하면 30%까지 할인율이 껑충 뛴다. 동네서점의 경쟁력은 그만큼 낮아진다. 일부 동네서점 주인들은 책값에서 거품을 빼고 아예 할인이 불가능하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서울 강동·종로·은평구, 경기 포천시, 경남 창원시, 경북 경산시, 대전시 등 여러 지방자치단체들이 동네서점 살리기에 앞장서고 있다. 강동구 관계자는 “동네서점은 누구에게나 열린 사랑방이자 사라져 가는 활자 문화를 지키는 문화 공간”이라며 “올해는 동네서점에서 지난해보다 1억원 많은 3억원어치의 책을 구매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정신건강 종합대책] 배 아파 간 동네 병원서 정신건강 검사 받을 수 있다

    [정신건강 종합대책] 배 아파 간 동네 병원서 정신건강 검사 받을 수 있다

    초기 치료 놓쳐 중증·만성돼야 병원行 한국의 자살 원인 1위가 정신질환 산부인과·소아과, 산전·후 우울증 검사외래 본인부담률 30~60%→20% 하향 정부가 25일 발표한 ‘정신건강 종합대책’(2016~2020)은 병원 문턱을 낮춰 우울증 환자들이 중증으로 악화되기 전 병원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정신질환자에 대한 불합리한 편견과 차별을 개선하는 데 초점을 뒀다. 우선 원인을 알 수 없는 복통이나 수면곤란으로 동네 내과의원을 방문한 사람도 의사의 판단에 따라 정신건강 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우울증은 신체 증상으로도 나타난다. 2017년에는 전국 224개 정신건강증진센터에 정신과 의사인 ‘마음건강 주치의’가 배치돼 일차적인 상담 서비스를 제공한다. 초기 우울증 환자를 발견하고, 주변 시선이 두려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진료를 받길 꺼리는 우울증 환자들을 조기에 진단하기 위해서다.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선 임산부를 대상으로 산전·후 우울증 여부를 검사한다. 고위험군에는 아이돌봄서비스와 일시 보육을 우선 제공하고, 고운맘 카드 사용처를 확대하기로 했다. 약만 처방받지 않는다면 이 단계에선 정신질환자를 뜻하는 ‘상병코드 F’가 따라붙지 않는다. 검진 결과 정신과적 문제가 있다면 정신건강의학과와 연계해 전문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했다. 지금까지는 정신건강 문제가 발생해도 초기 치료 시기를 놓쳐 중증·만성이 되어서야 병원을 방문하고, 심지어 극단적 선택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2014년 경찰 분석에 따르면 우리나라 자살 원인 1위는 정신질환(28.7%)이다. 병원비도 싸진다. 정신질환 증상이 나타났을 때 집중 치료를 할 수 있도록 정신건강의학과 외래치료 시 본인부담률을 현재 30~60%에서 20%로 낮추고, 병원이 약물 처방보다 심층적 상담 치료에 더 집중하도록 건강보험 상담 수가(의료행위의 대가)를 현실화한다. 또 비용이 부담되는 비급여 정신요법과 매일 약을 복용하지 않아도 약효가 일정 기간 지속하는 약물에 건강보험 적용을 확대할 계획이다. 기초생활보장 수급권자인 의료급여 환자도 양질의 치료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의료급여 수가를 개선한다. 건강보험과 달리 의료급여 환자는 국가가 지원하는 한도 내에서 치료를 받아야 한다. 진료비·약제비 각 2770원으로 하루에 쓸 수 있는 금액이 한정돼 있어 좋은 의료 서비스가 있어도 받지 못한다. 건강보험 의료 서비스 수가는 계속 오르는데, 의료급여 정신질환 정액 수가는 8년째 그대로다. 김혜선 복지부 기초의료과장은 “진료비 수가를 올리는 등 구조를 정비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액 수가의 총규모를 늘리는 방안도 검토하고 있다. 만성 정신질환자가 회복 후 병원을 나와 사회에 빨리 복귀할 수 있도록 사회복귀시설도 단계적으로 확충한다. 사회복귀시설은 전국에 317곳이며 이마저 52.1%(165곳)는 서울 등 수도권에 몰려 있다. 정신요양시설은 지난해 국고보조금 사업으로 전환됐지만, 사회복귀시설은 여전히 지방자치단체가 보조하고 있어 열악하다. 차전경 복지부 정신건강정책과장은 “지자체 평가와 국비사업 지자체 공모 시 사회복귀시설을 확충하고 잘 운영하는 지자체에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방식으로 확충을 유도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사회복귀시설 설치를 꺼리는 ‘님비현상’이 여전한 상황에서 지자체에 인센티브를 주는 것만으로는 실효를 거두기 어렵다는 지적도 적잖다. 세종 이현정 기자 hjlee@seoul.co.kr 그래픽 김예원 기자 yean811@seoul.co.kr
  • [단독] 인분 교수 뺨치는 ‘악마 동기생’

    [단독] 인분 교수 뺨치는 ‘악마 동기생’

    대학 같은 과 1살 어린 가해자 고급 외제차 타며 부유함 과시 “내가 맡을 회사에 취업시켜 줄게” 경제 형편 안 좋은 피해자에 접근 1년간 가혹행위 전치 8주 부상 폭행에 ‘학습’돼 저항 못 한 듯 “지난 1년은 매일매일이 지옥이었습니다. 지금도 문득 ‘그놈의 방에서 또 맞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잠도 잘 안 와요. 하지만 뒷배 든든하고 돈 많은 그 친구가 저뿐 아니라 우리 집 식구들에게까지 해코지를 할까 봐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한 지방 사립대 재학생이 같은 학교 동기생에게 “취업을 시켜 주겠다”는 구실을 붙여 1년여에 걸쳐 상습적으로 폭행 및 감금, 협박 등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교 과제나 집 청소를 대신 시키는 등 사실상 ‘노예’처럼 동기생을 부렸고, 이 과정에서 성적 학대까지 있었다고 수사 당국은 전했다. 수사당국 관계자는 “폭력의 형태와 강도가 지난해 제자를 수년간 폭행하고 노예처럼 부린 것으로 드러나 구속됐던 ‘인분 교수’ 사건에 못지않게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의정부지검은 지난 19일 대학생 A(24)씨를 강제추행치상, 상습특수상해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의정부지검과 남양주경찰서에 따르면 A씨는 2015년 1월부터 지난 1월까지 1년간 같은 대학 동기생 B(25)씨를 수십 차례에 걸쳐 감금하고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A씨의 학대와 구타 후유증으로 비뇨, 피부, 정형, 안과 등에 걸쳐 전치 8주의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A씨와 B씨는 2014년 초 B씨가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면서 같은 과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다. A씨는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등 부유한 집의 자제로 알려져 있었다. 반면 B씨의 가정은 차상위계층으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A씨는 B씨에게 “나한테 잘하면 나중에 내가 운영할 회사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B씨의 부모까지 만나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뒤 B씨와 함께 동업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A씨는 B씨를 만나고 1년 정도 지난 뒤부터 자신의 자취방에서 수시로 B씨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뺨을 때렸다. A씨의 폭행은 갈수록 수위가 높아졌다. 거의 매일같이 B씨를 엎드리게 한 뒤 허벅지나 엉덩이 등을 유리병으로 내리쳤다. “금속제 옷걸이 8개를 편 뒤 꽈배기처럼 엮어 만든 쇠뭉치로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고 B씨는 경찰에서 진술했다. B씨에 대해 “평소에도 얼굴이 붓고 멍이 들어 있는 등 멀쩡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동네 주민들의 증언도 나왔다. 성적 학대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B씨는 경찰에서 “A씨는 자신이 온라인 게임을 할 때 나에게 옆에 서서 지켜보도록 했고, 내가 졸 때마다 쇠뭉치로 성기를 수십 차례 가격했다”, “껌 10여개를 한꺼번에 씹게 한 뒤 입에 소금과 후추, 참기름 등을 들이부었다”고 진술했다. 또 매일 A씨의 자취방을 청소하게 하고 밤에는 A씨 대신 게임 레벨을 올리도록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마다 자신을 깨울 것을 명령하고 군대와 비슷하게 새벽 1시에 취침 점호 보고까지 시켰다. 폭행과 가혹행위는 자취방뿐 아니라 A씨가 부업차 운영하는 회사와 부모님 집 등에서도 계속됐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A씨의 가혹행위를 눈치채지 못했다. A씨는 주변에 “B씨를 내가 돌봐 주고 있다. B씨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라”며 B씨를 주변과 격리시켰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B씨에게 경제력을 과시하는 것뿐 아니라 최근 취업난에 고민이 많은 B씨의 심리 상태를 이용해 폭행을 계속하면서도 B씨가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밝혔다. A씨의 범행은 지난달 초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학교 수업 시간에 B씨의 상태를 이상하게 여긴 교수가 B씨에게 병원 진료를 받게 했고 병원 관계자는 B씨의 부모에게 “오랫동안 폭행당한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자 A씨는 B씨에게 그동안의 문자 내용을 지우라고 시키는 등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결국 B씨는 지난 1월 A씨를 의정부지검에 고소하면서 1년간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A씨 측은 “폭행이나 가혹행위는 B씨가 원해서 이뤄졌다”며 “A씨의 무죄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B씨가 A씨를 ‘취업난의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한 상황에서 A씨의 폭행에 ‘학습’되다 보니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 같다”며 “인분 교수 사태와 마찬가지로 청년 취업난의 세태 속에서 발생한 비극”이라고 밝혔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이영희 성균관대 교수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이영희 성균관대 교수

    깡촌 소작농의 아들 누나의 희생으로 진학 철도원으로 살다가 다시 주경야독육사에 붙고도 결핵으로 불합격그래도 내 결론은 도전박운상 선생님 덕에 물리학에 눈떠4년 만에 석·박사 탄소나노튜브 실험과 응용 연구나는 콧수염 학자 애벌레처럼 살 거야 “제가 원래 털이 빨리 자라는 편이에요. 철도원 생활을 하다가 스물두 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오랜만에서 해서 그런가, 너무 재미가 있는 거예요. 공부에만 정신이 팔리니까 다른 일들은 다 귀찮아지더군요. 하루이틀 안 깎은 게 60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콧수염의 역사를 묻자 이영희(61) 교수는 “사람들이 전공인 탄소나노튜브보다 이 털들을 더 궁금해하니 큰일”이라며 껄껄 웃었다. 경기 수원에 있는 연구실(성균관대 자연과학캠퍼스 물리학과)로 그를 만나러 간 지난 15일은 전국에 매서운 한파가 몰아친 날이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리구조연구단 단장을 겸하고 있는 이 교수는 7명의 교수, 30명의 박사후연구원 및 연구교수, 80명의 석·박사 과정 학생 등 120명에 이르는 대식구와 분주한 하루를 보낸다. “학생들 논문 지도 때문에 요즘 정신이 없다”며 약속 시간에 30분 늦은 데 대해 양해를 구했다. -1974년 2월의 어느 날 아침. 그날도 오늘처럼 추웠다. 기차를 타고 출근하며 메마른 창밖을 내다보는데 문득 ‘10년 뒤에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국립철도고를 졸업하고 철도청에 들어간 지 한 달 정도 됐을 때였다. 인천 부평에서 누나 집에 얹혀살며 매일 근무지인 서울역으로 통근을 했다. 갑작스럽게 든 생각처럼 결론도 갑작스럽게 났다. ‘그래, 다시 공부를 하는 거야. 공부를 하다 보면 새로운 길이 열리겠지.’ 그때 고민만 하고 끝났다면 지금쯤 난 한적한 시골역의 역장이 돼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 물론 그렇게 산 것도 나쁘지는 않았을 것 같다. -중학교 때까지 전북 김제의 깡촌에서 자랐다. 논이 동네 주변을 빙 둘러싸고 있는 전형적인 농촌 마을이었다. 누가 “이 동네에서 가장 못사는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 누구라도 우리 집을 가리켰을 것이다. 부모님은 다른 사람의 땅을 빌려 농사를 짓는 소작농이었다. 좀 더 정확히는 머슴에 가까웠지만. 그런 부모님을 보면서 초등학생 때 가진 꿈은 말을 타고 돌아다녀야 할 정도로 큰 농장을 갖는 것이었다. 가난하다는 이유로 아버지가 어린 사람에게까지 무시당하는 게 너무 싫었다. 그래서 초등학교 때는 동네 형들하고도 주먹질을 할 정도로 괄괄한 ‘이씨네 말썽꾸러기’로 통했다. -원래 집안 사정이 안 좋기는 했지만 애들이 공부도 제대로 못 할 만큼 어려워진 것은 ‘딸깍발이’ 할아버지 탓이 컸다. 일제가 쳐들어와 양반들이 몰락하자 “왜놈들 세상에선 아무것도 안 한다”며 평생 돈벌이라곤 하지 않으셨다. 집 안에 먹을 게 다 떨어져 자식들이 굶고 있는데도 할아버지는 소신만 지키셨던 것 같다. 평생 힘들게 사신 아버지와 어머니를 생각하면 할아버지에 대한 원망은 지금도 여전하다. 어려서 “할아버지 때문에 우리 집은 이게 뭐냐”고 대들다가 아버지나 삼촌들한테 맞은 적도 여러 차례 있었다. -가난한 집에 먹는 입은 많다고, 나는 3남 2녀 중 장남이었다. 바로 위 누나를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나고 미안한 마음이 크다. 누나는 집안 사정 때문에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못했다.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내가 이만큼이나마 된 것도 그렇지만 여동생과 남동생이 초등학교 교사와 공무원을 하고 있는 것도 누나의 희생을 바탕으로 가능했다. -부모님은 “우리 장남 영희는 중학교까지는 나와야지”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다. 뒤집어 보면 중학교 졸업도 쉽지 않은 일이어서 그랬는지 모른다. 남의 집 머슴일을 하면서 틈틈이 중학교 등록금을 모아 놓으셨는데, 어느 날 그 돈을 한꺼번에 잃어버리는 일이 벌어졌다. 중학교에 못 가게 될 상황이 된 거였다. 그때 이웃집 할머니께서 “사내놈이 중학교까지는 나와야 하지 않겠나”라며 여기저기 수소문해 장학금을 받을 수 있도록 다리를 놓아 주셨다. 그게 나에겐 약이 됐다. 중학교 들어가서 정말 미친 듯이 공부만 했다. 한 초등학교 친구가 “영희가 미쳤다”고 말하고 다닐 정도였다. 꿈은 없었다. 그냥 공부를 잘하는 걸로 만족이었다. -대학교까지는 아니더라도 고등학교는 마치고 싶었다. 집안 사정을 생각하면 인문계는 언감생심이었다. 그러다 나라에서 세운 철도고에 들어가면 학비 대주고, 나중에 취업까지 시켜 준다는 얘기를 들었다. 딱 내 학교였다. 그렇게 철도고에 들어갔는데 철도원으로 인생의 방향이 정해지다 보니 별달리 꿈이란 게 생길 턱이 없었다. 머리건 몸이건 좀 더 써 보고 싶은데, 내 몸의 혈액과 호르몬들은 나에게 한계 상황까지 가 보라고 다그치는데 현실은 그저 ‘등교-수업-하교’가 전부였다. 그러다 유도를 시작했다. 먹고 자는 시간과 수업받는 시간을 빼고는 그것만 했다. 다른 생각은 없었다. 어떻게 하면 상대방을 멋지게 업어치고 메칠 수 있을까, 관심은 그것뿐이었다. -1974년 1월 5일 토요일에 졸업식을 하고 7일 월요일 서울역으로 첫 출근을 했다. 통신전자과 출신인 나에게는 통신기지국과 열차 간 송수신기에 문제가 없는지를 점검하고 열차 자동 정지장치를 수리하는 일이 부여됐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달을 지내고 난 어느 날 아침, 불현듯 미래에 대한 고민이 들었던 것이다. -주경야독(晝耕夜讀)이 시작됐다. 딱히 어떤 대학, 어떤 학과를 가겠다는 생각 같은 건 없었다. 공부가 하고 싶었다. 배움에 대한 갈증에 공부를 벌컥벌컥 마시고 싶었다고나 할까. 실업계 학교를 나왔으니 당연히 대학 입시 기초가 약했다. 서울 종로2가에 있는 종로YMCA에서 대학입시반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난 책 읽고 글 쓰는 걸 좋아하는 국문학과가 어울릴까? 수학 문제를 풀 때가 제일 신나는데, 그리로 가 볼까?’ -물리학을 공부하기로 한 것은 학원에서 ‘분석물리’ 과목을 가르치던 박운상 선생님 덕이다. 입시 학원이었음에도 문제 풀이 요령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간단한 실험도구를 갖고 물리를 알기 쉽게 설명하는 모습을 보면서 “물리학도 문학만큼이나 세상을 아름답게 표현해 내는구나.” 거창하게 말하면 내 인생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맞는 순간이었다고나 할까. -1975년 초 기관차 수리 공장이 있는 수색역으로 발령났다. 24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곳이라 공부하기엔 좋았지만 그러다 보니 체력은 바닥나고 업무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아 대입 공부를 시작한 지 1년 만에 결핵이라는, 당시로서는 꽤 중한 병을 얻었다. “고등학교 졸업해 번듯한 직장까지 얻었으면서 몸까지 상해 가면서 대학을 가려고 하느냐.” 아버지는 나를 꾸짖다가 “다 내가 못나서 널 제때 공부를 못 시켜 준 탓”이라며 통곡을 하셨다. -‘먹여 주고, 입혀 주고, 재워 주고, 공짜로 공부시켜 주는 곳.’ 내가 가야 할 대학의 최우선 조건이었다. 육군사관학교에 지원했다. 필기·실기시험에 모두 합격했지만 결핵 때문에 신체검사에서 떨어졌다. 그때의 상실감은 아주 컸다. 회사에 2개월 휴직계를 냈다. 머리까지 박박 밀고 고향집에서 2주 동안 한 발짝도 나오지 않았다. 나중에 들은 얘기지만 부모님께서는 ‘얘가 죽으려고 하는 것 아닌가’ 걱정하셨단다. 방 안에 틀어박혀셔 ‘과연 나는 뭘 해야 할까’ 고민을 했다. 결론은 ‘일단 시작한 것, 원 없이 한번 도전해 보자’는 것이었다. -2개월 휴직 기간이 끝나니 김제에서 가까운 익산역으로 근무지가 바뀌었다. 직장 생활과 대학 생활을 병행할 수 있는 곳을 찾았다. 전북대 물리학과였다. 입학 성적이 좋아 장학금을 받고 76학번으로 입학했다. 함께 일하는 직장 선배가 눈감아줘 근무 시간에 전공 수업을 들으러 학교에 갔다. 그러기를 1년. 공부도 어려웠지만 무엇보다 회사에 못 할 짓이란 생각이 들었다. 사표를 냈다. -죽어라고 공부만 했다. 장학금 받기 위해서도 필사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이뤄진 공부가 쌓이자 내 평생의 업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학원 진학을 결심했다. 지도교수님께서 미국 켄트대를 추천해 주셨다. 입학 지원서를 냈는데 놀랍게도 전액 장학금을 주겠다고 했다. 1982년 8월 졸업이 예정돼 있었는데 가을 입학을 하라는 통보를 받아 7월 미국으로 건너갔다. 유학 후 첫 학기를 끝낸 1월 갑자기 온몸이 아파 왔다. 이러다 죽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웬걸. 학교 보건소 의사는 타이레놀 한 알을 주더니 “푹 자라”고 했다. 다음날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유학에서 비롯된 극심한 스트레스였다. -좋아하는 공부를 장학금 받고 해서 그랬을까. 석·박사 과정을 4년 만에 초고속으로 마쳤다. 박사 학위를 받게 됐다고 모교인 전북대 교수님께 말씀드렸더니 “마침 우리 학교에 교수 자리가 하나 났으니 지원하라”고 하셨다. 덜컥 합격했는데 그게 1986년 여름이었다. 7월 켄트대 학위수여식을 한 달 앞두고 모교에 돌아왔다. 고등학교 때부터 박사 때까지 희한하게 다음 단계로 진행하는 과정이 순조로웠는데 외려 그것 때문에 나는 졸업식에 참석해 본 적이 없다. 그 흔한 학위 모자를 쓰고 찍은 사진이 없다. 아들내미와 딸내미가 아빠 학력 위조한 거 아니냐고 말한 적도 있었다. -반도체 물리학이 전공이었지만 다양한 분야에 항상 눈과 귀를 열어 놓고 있었다. 1991년 탄소나노튜브가 세상에 처음 소개됐다. 논문들을 읽다 보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세계를 본 듯한 충격을 받았다. 무엇보다 기초연구이면서도 실험과 응용연구가 가능했다. 대단한 매력이었다. 물리학은 다른 학문과 달리 이론과 실험 두 분야를 동시에 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렇지만 내게는 공고 출신이라는 남다른 이력이 있었다. 직장에서 열차 무전기를 고쳤던 경험 등 현장에도 익숙하다. 그래서 이론물리학을 전공했지만 실험과 응용연구에 두려움이 없었다. -일반 사람들에게 내 연구 분야는 아주 생소하다. 이름부터가 그렇지 않은가. 탄소는 뭐고, 나노는 뭐고, 거기에 튜브는 뭐란 말인가. 탄소나노튜브 연구가 잘 이뤄지면 요즘 많은 사람이 관심 갖는 전기자동차의 상용화를 앞당길 수 있다는 정도로 설명하면 이해가 쉬울까. 탄소나노튜브를 응용하면 고성능 에너지 저장장치를 만들 수 있고 이를 통해 전기차의 생명인 배터리 성능을 획기적으로 개선할 수 있다. 전자 소재로 응용될 경우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빠른 초고속 컴퓨터를 만들 수도 있다. 응용 분야가 무궁무진하기 때문에 각국의 연구자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눈에 불을 켜고 책과 논문을 파고 실험을 하는 것이다. 탄소나노튜브의 기초이론을 보강하고 응용연구로 연결시키는 과정은 앞으로도 지난할 것이다. 그게 바로 내가 후배들과 함께 가야 할 길이다. -과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이 가지 않은 길을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 보니 자주 막다른 길에 부딪힌다. 그럴 때마다 나 자신은 물론 연구원들에게도 나는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이란 책에 나온 구절을 인용한다. ‘애벌레가 화려한 나비로 거듭날 수 있는 것은 중간에 포기하고 싶어질 정도의 시련에도 불구하고 성공을 의심하지 않고 끝까지 도전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생 최종 목표’를 묻는데 나는 그런 것이 없다. “내 최종 목표는 이거다”라고 정해 버리면 그것을 성취하고 난 다음에는 무슨 재미로 삶을 살겠나. 나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내 인생 최종 목표를 향해 이제 제대로 한 걸음 뗄 수 있는 준비가 됐다는 생각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유용하 기자 edmondy@seoul.co.kr 【이영희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우리나라보다 해외 학계에서 더 유명하다. 기초과학연구원(IBS) 나노물리구조연구단장을 함께 맡고 있는 그는 전 세계 대학 연구실과 산업 현장에 ‘탄소나노튜브’ 열풍을 일으킨 한국의 대표 물리학자 중 한 명이다. 차세대 신소재로 각광받는 단층 탄소나노튜브의 대량 합성과 성장 메커니즘 규명이 그의 성과다. 대부분의 물리학자들은 ‘이론’과 ‘실험’ 가운데 하나를 골라 자기 주력 분야를 정한다. 그러나 이 교수는 탄소나노튜브 이론뿐 아니라 수소 저장, 투명전극, 복합체 연구 등 산업화 기술도 함께 개발해 이론과 실제를 겸비한 학자로 평가받는다. 그래서 누가 “기초과학은 투자 대비 성과가 적다”, “기초과학은 돈이 안 된다” 같은 말을 하면 질색을 한다. ‘기초과학을 통해 우리나라의 국가 경쟁력을 높인다’는 게 그가 제자들에게 항상 강조하는 말이다. ▲1955년 전북 김제 출생 ▲1987년 전북대 물리학과 교수 ▲1989년 미국 에임스국립연구소 방문연구원 ▲1993년 IBM 취리히연구소 방문연구원 ▲2001년 성균관대 물리학과 교수 ▲2006년 한국물리학회 학술상 수상 ▲2006년 국가석학 선정 ▲2014년 수당상 기초과학분야 수상. 【탄소나노튜브 Carbon nanotube】 탄소 6개로 이뤄진 육각형 모양이 서로 연결돼 가늘고 긴 대롱 모양을 이루고 있는 신소재. 1991년 일본 이지마 스미오 박사가 처음 발견한 이 물질은 튜브의 지름이 머리카락 굵기의 10만분의1에 불과한 나노(10억분의1)급 크기여서 탄소나노튜브로 불린다. 탄소나노튜브는 구리보다 전기 전도율이나 열 전달률이 우수하고 강도도 강철보다 100배 높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반도체, 배터리, 초강력 섬유, 생체 센서 등으로 다양하게 활용될 것으로 기대된다. “제가 원래 털이 빨리 자라는 편이에요. 철도원 생활을 하다가 스물두 살에 대학에 들어갔는데 공부를 오랜만에서 해서 그런가, 너무 재미가 있는 거예요. 공부에만 정신이 팔리니까 다른 일들은 다 귀찮아지더군요. 하루이틀 안 깎은 게 60이 넘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는 거죠.”
  • [단독] 인분 교수 뺨치는 ‘악마 동기생’

    대학 같은 과 1살 어린 동기생이 고급 외제 승용차 몰고 다니며 “내 회사에 취업시켜 줄게” 빌미 피해자에 성적 학대 등 가혹행위 2년간 폭행… 전치 8주 부상 폭행에 ‘학습’돼 저항 못한 듯  “지난 1년은 매일매일이 지옥이었습니다. 지금도 문득 ‘그놈의 방에서 또 맞는 게 아닌가’라는 생각에 잠도 잘 안 와요. 하지만 뒷배 든든하고 돈 많은 그 친구가 저뿐 아니라 우리 집 식구들에게까지 해코지를 할까 봐 참을 수밖에 없었어요….” 한 지방 사립대 재학생이 같은 학교 동기생에게 “취업을 시켜 주겠다”는 구실을 붙여 1년여에 걸쳐 상습적으로 폭행 및 감금, 협박 등을 한 사실이 드러났다. 학교 과제나 집 청소를 대신 시키는 등 사실상 ‘노예’처럼 동기생을 부렸고, 이 과정에서 성적 학대까지 있었다고 수사당국은 전했다. 경찰 관계자는 “폭력의 형태와 강도가 제자를 수년간 폭행하고 노예처럼 부린 것으로 드러나 구속됐던 지난해 ‘인분 교수’ 사건에 못지않게 충격적”이라고 말했다.  의정부지검은 지난 19일 대학생 A(24)씨를 강제추행치상, 상습특수상해 등의 혐의로 구속했다. 의정부지검과 남양주경찰서에 따르면 A씨는 2015년 1월부터 올 1월까지 1년 간 같은 대학 동기생 B(25)씨를 수십 차례에 걸쳐 감금하고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B씨는 A씨의 학대와 구타 후유증으로 비뇨, 피부, 정형, 안과 등에 걸쳐 전치 8주의 부상을 입고 치료를 받았지만 여전히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A씨와 B씨는 2014년 초 B씨가 군대를 마치고 대학에 복학하면서 같은 과 동기생으로 처음 만났다. A씨는 고급 외제차를 끌고 다니는 등 부유한 집의 자제로 알려져 있었다. 반면 B씨의 가정은 차상위계층으로 형편이 좋지 않았다. A씨는 B씨에게 “나한테 잘하면 나중에 내가 운영할 회사에 취업시켜 주겠다”고 말했다. B씨의 부모까지 만나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은 뒤 B씨와 함께 동업을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대가는 무자비한 폭력이었다. A씨는 B씨를 만난 지 1년 정도 지나고 난 뒤부터 자신의 자취방에서 수시로 B씨에게 주먹을 휘두르고 발길질을 하고 뺨을 때렸다. A씨의 폭행은 갈수록 수위가 높아졌다. 거의 매일같이 B씨를 엎드리게 한 뒤 허벅지나 엉덩이 등을 유리병으로 내리쳤다. “금속제 옷걸이 8개를 편 뒤 꽈배기처럼 엮어 만든 쇠뭉치로 피가 날 정도로 머리를 때리기도 했다”고 B씨는 경찰에서 진술했다. B씨에 대해 “평소에도 얼굴이 붓고 멍이 들어 있는 등 멀쩡한 적이 거의 없었다”는 동네 주민들의 증언도 나왔다. 성적 학대도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B씨는 경찰에서 “A씨는 자신이 온라인 게임을 할 때 나에게 옆에 서서 지켜보도록 했고, 내가 졸 때마다 쇠뭉치로 성기를 수십 차례 가격했다”, “껌 10여개를 한꺼번에 씹게 한 뒤 입에 소금과 후추, 참기름 등을 들이부었다”고 진술했다. 또 매일 A씨의 자취방을 청소하게 하고, 밤에는 A씨 대신 게임 레벨을 올리도록 지시한 것으로 조사됐다. 매일 아침 정해진 시간마다 자신을 깨울 것을 명령하고 군대와 비슷하게 새벽 1시에 취침 점호 보고까지 시켰다. 폭행과 가혹행위는 자취방뿐 아니라 자신이 부업차 운영하는 회사와 부모님 집 등에서도 계속됐다. 하지만 주변에서는 A씨의 가혹행위를 눈치채지 못했다. A씨는 주변에 “B씨를 내가 돌봐 주고 있다. B씨에게 연락할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전화하라”며 B씨를 주변과 격리시켰다. 경찰 관계자는 “A씨가 B씨에게 경제력을 과시하는 것뿐 아니라 최근 취업난에 고민이 많은 B씨의 심리 상태를 이용해 폭행을 계속하면서도 B씨가 신고를 하지 못하도록 막았다”고 밝혔다. A씨의 범행은 지난달 초 수면 위로 드러났다. 학교 수업 시간에 B씨의 상태를 이상하게 여긴 교수가 B씨에게 병원 진료를 받게 했고, 병원 관계자는 B씨의 부모에게 “오랫동안 폭행당한 흔적이 보인다”고 말했다. 그러자 A씨는 B씨에게 그동안의 문자 내용을 지우라고 시키는 등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 결국 B씨는 지난 1월 A씨를 의정부지검에 고소하면서 1년간의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A씨 측은 “폭행이나 가혹행위는 B씨가 원해서 이뤄졌다”며 “A씨의 무죄 여부는 법정에서 가려질 것”이라고 말했다. 공정식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B씨가 A씨를 ‘취업난의 현실에서 자신을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한 상황에서 A씨의 폭행에 ‘학습’되다 보니 저항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 것 같다”며 “인분 교수 사태와 마찬가지로 청년 취업난의 세태 속에서 발생한 비극”이라고 밝혔다. 송수연 기자 songsy@seoul.co.kr
  • 허리 망가진 우즈… 복귀·은퇴 갈림길

    허리 망가진 우즈… 복귀·은퇴 갈림길

    ESPN “훈련 재개할 상태인지도 몰라”, SNS엔 “부상 악화”… 괴소문만 무성 자택 인근 혼다 클래식 출전 신청 안 해 “타이거는 골프를 위한 로봇이다. 그의 몸을 해부하면 볼트와 너트가 나올 것 같다.” 2008년 2월 액센추어 매치플레이 챔피언십 결승에서 타이거 우즈에게 참패한 스튜어트 싱크(미국)가 한 말이다. 대회 사상 최다인 8홀 차로 진 싱크에게 우즈는 피도 눈물도 없는 로봇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 ‘로봇’은 지금 한 군데 성한 데가 없이 녹슬고 망가져 폐기냐, 재생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지난 20일 스포츠 전문매체 ESPN은 “지난해 10월 허리 수술을 받은 우즈가 언제 필드에 돌아올지 기약이 없다”고 보도했다. ‘몇 주 전과 비교해 우즈의 재활 상태에 대해 달라진 소식을 듣지 못했다’는 우즈의 에이전트 마크 스타인버그의 말을 전한 ESPN은 “우즈의 복귀 시점뿐 아니라 지금 그가 훈련을 재개할 수 있는 상태인지도 알 수 없다”고 덧붙였다. 23일에는 허리 수술을 받은 우즈가 자동차에 앉지도 못하고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부상이 악화됐다는 글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계정을 통해 퍼졌다. 그러자 스타인버그는 즉각 보도자료를 내고 “이 같은 내용은 말도 안 되는 거짓”이라며 “거짓을 진짜처럼 꾸미는 사람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고 발끈했다. 우즈는 지난해 9월 두 번째 허리수술을 받고 선수 활동을 중단했다. 그 뒤 12월 자신이 주최한 히어로 월드챌린지 대회에서는 “재활 기간이 길어져 언제 복귀할지 모르겠다”고 말해 은퇴설이 나돌기도 했다. 2014년 3월 허리 부상으로 첫 수술대에 올랐던 우즈는 지난해 9월 또 한번 허리 수술을 받았고, 약 한 달 뒤인 10월에도 같은 부위 수술을 받았다. 우즈의 부상과 복귀 여부를 놓고 괴소문만 무성한 가운데 그는 26일 개막하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혼다클래식에도 출전 신청을 하지 않았다. 우즈가 마지막으로 대회에 출전한 것은 지난해 8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윈덤 챔피언십이다. 플로리다주 팜비치 가든스에 위치한 PGA 내셔널 챔피언코스는 우즈의 자택에서 멀지 않은 ‘옆 동네’다. 그러나 우즈는 2년 연속 이 대회에 나서지 못하게 됐다. 사실 우즈는 혼다클래식과 별 인연을 맺지 못했다. 세계랭킹 62위까지 떨어지는 등 부진의 늪에 빠지기 시작한 1년 전에 우즈는 “최고 수준에서 경쟁할 수 있을 때 대회에 출전하겠다. 준비됐다는 느낌이 들면 다시 돌아오겠다”고 투어 대회 잠정 중단을 결정한 뒤 이 대회 불참을 선언했다. 2014년 대회에서는 2라운드 컷 탈락을 가까스로 모면한 뒤 마지막 날 경기 도중 “허리가 좋지 않다”며 기권하기도 했다. 타이거의 복귀를 애타게 기다리는 또 한 사람은 캐디 조 라카바다. 그는 최근 ESPN닷컴과의 인터뷰에서 “긴 휴식기로 당장 수입은 없지만 다른 골퍼의 임시(파트타임) 캐디 제안을 뿌리쳤다”면서 “다른 사람이 아닌 타이거와 일하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말로 정중히 거절했다”고 밝혔다. 라카바는 첫해인 2012년 3승, 이듬해 5승 등 우즈와 호흡을 맞추면서 모두 8차례 우승을 합작했다. 최병규 전문기자 cbk91065@seoul.co.kr
  • 입양아 소재 창작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 연출 ‘박칼린’

    입양아 소재 창작 뮤지컬 ‘에어포트 베이비’ 연출 ‘박칼린’

    “원작이 있거나 해외 작곡·작사 곡과 대본을 들여와 한국에서 연출한 작품은 진짜 창작이 아니에요. ‘프랑켄슈타인’ 같은 뮤지컬을 진정한 의미의 창작이라고 할 순 없죠. 순수 창작은 ‘없는 이야기’를 만들고 거기에 맞게 음악도 만드는 거예요.” ●새달 6일까지 서울 대학로에서 공연 국내 뮤지컬 음악감독 1호 박칼린(49)이 순수 창작 뮤지컬을 들고 나왔다. 입양아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23일 서울 종로구 대학로 아트원씨어터1관 무대에 오른 ‘에어포트 베이비’(Airport Baby)다. “입양아 이야기라고 하면 다들 ‘신파’로 치부하는데 이 작품은 그렇지 않아요. 사랑, 가족, 뿌리, 고향이 무엇인지를 컨트리 음악, 블루스 등 다양한 장르의 음악과 재치 있고 유머러스한 말로 따뜻하게 풀어냈어요.” 극은 두 살 때 미국 유대인 집안에 입양된 ‘조씨 코헨’이 생모를 찾기 위해 한국을 방문하면서 시작된다. 조씨 코헨은 나이가 들수록 짙어지는 뿌리에 대한 궁금증으로 대학을 졸업하던 해 난생 처음으로 한국을 찾는다. 우연히 들른 이태원의 게이 바 딜리댈리에서 게이 할아버지 ‘딜리아’를 만난다. 딜리아와 딜리댈리 식구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생모의 흔적을 찾게 된다. “모든 캐릭터들이 색다르고 신선하게 느껴질 거예요. 입양아, 게이 캐릭터는 더더욱 그럴 거예요. 게이는 일반적으로 희화화돼 화장도 진하고 몸짓도 과하고 코믹스럽게 나오고, 입양아는 비극의 갑옷을 입은 듯 우울하고 슬프게 나오잖아요. 이 작품에선 그런 천편일률적인 캐릭터를 탈피했어요. 한마디로 자연스러워요. 과장되지도 않고 억지스럽지도 않아요. 조씨 코헨, 딜리아는 실존 인물을 토대로 만들어 그들에게 미안하지 않기 위해 더 자연스럽게 연출하려고 노력했어요.” ●전수양 작가 ·장희선 작곡가의 힘 작가 전수양과 작곡가 장희선이 5년여에 걸쳐 완성했다. 박칼린은 전수양과 스승과 제자로 만나 15년간 동고동락했고, 장희선과도 10년 넘게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 “두 사람은 가족과 같아요. 둘이 이 작품을 시작했을 때부터 함께했어요. 대본은 제가 대본만 믿고 가면 될 정도로 완벽하고, 음악도 빈틈없이 만들어졌어요.” 그러면서 작품 전반에 녹아 있는 재치와 유머를 눈여겨봐 달라고 했다. “한국을 찾은 조씨 코헨이 전라도 목포에 가서 어느 집 문을 막 두드려요. 동네 사람이 나와 전라도 사투리로 조용히 하라며 온갖 말을 쏟아내요. 사투리를 알 리 없는 조씨 코헨의 첫말이 뭔 줄 아세요. ‘한국 사람입니까’예요. 이처럼 이 작품은 비극적인 상황을 재치 있게 다룬 게 특징이에요.” ●“연출 땐 연출만, 배우 땐 연기만 생각” 박칼린은 1995년 뮤지컬 ‘명성황후’ 음악감독으로 뮤지컬계에 첫발을 내딛었다. 여러 작품의 음악감독을 했고 2008년 뮤지컬 ‘라스트 파이브 이어스’를 계기로 연출로도 발을 넓혔다. 그는 ‘에어포트 베이비’ 연출을 맡은 기간 배우로도 활동한다. 내달 13일까지 공연되는 뮤지컬 ‘넥스트 투 노멀’에서 정신분열증을 앓는 여주인공 다이애나 역을 열연한다. “배우와 연출을 함께하며 얻는 시너지 효과는 분명 있어요. 배우로서 연출가가 뭔가 지적하거나 주문하면 ‘나라도 저런 얘기를 했을 거 같아’ 하며 빨리 알아채요. 하지만 맡은 역할을 철저히 분리하는 게 중요해요. 연출 땐 연출만, 배우 땐 배우만 생각해요. 요리사가 요리도 하고 메뉴판도 짜고 손님도 맞으면 아무것도 안 되듯 분리를 못하면 죽도 밥도 안 돼요.” 다음달 6일까지, 4만~5만원. (02)577-1987. 김승훈 기자 hunnam@seoul.co.kr
  •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폭우·강풍 가능성 적어 자가용은 두고 오세요

    들불축제 날 비가 온다면? 폭우가 장시간 쏟아지지 않는 한 들불축제는 열린다. 제주지방기상청의 3월 첫 주 제주 지역 기상예보는 ‘강수량은 평년(19.5㎜)과 비슷하거나 적음’이다. 제주시는 올해 들불축제 기간에 비가 오더라도 축제에 지장을 줄 만큼 폭우는 쏟아지지 않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제주의 변화무쌍한 기상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다. 제주시가 매일 하늘만 쳐다보며 노심초사하는 까닭이다. ‘바람의 섬’ 제주의 바람도 변수다. 수년 전에는 강풍으로 인해 불놀이 한번 못 해 보고 야심 차게 준비한 축제를 취소해야만 했다. 들불축제는 그동안 정월대보름을 전후해 개최해 왔지만 이 무렵 제주에는 시도 때도 없이 거센 바람이 불어 대기 일쑤다. 고심 끝에 2013년부터 바람이 좀 잦아드는 경칩을 맞는 날의 주말로 축제 시기를 변경했다. 축제 날까지 새별오름 지키기(?)도 필사적이다. 축제가 미처 열리기도 전에 새별오름에 불이라도 나 시커멓게 타 버리면 낭패이기 때문이다. 축제 한 달 전부터 공무원들이 새별오름 주변에서 24시간 철벽 화재 감시 활동을 펼친다. 소방 당국도 오름에 불을 놓은 후 혹시나 바람을 타고 불이 주변으로 삽시간에 번질까 봐 곳곳에 방화선을 구축해 놓고 있다. 200여명의 진화인력과 소방차량 20여대, 소방헬기도 대기한다. 행사장에는 60t 분량의 저수조도 설치했다. 관람객들이 몰리는 전국의 유명 축제가 다 그렇듯이 들불축제도 차를 몰고 갔다가는 엄청난 교통난을 각오해야 한다. 축제 기간 연인원 30만여명이 새별오름을 찾는다. 특히 오름을 불태우는 다음달 5일 새별오름으로 가는 평화로는 차량들이 넘쳐날 것으로 보인다. 오름이 타는 장관을 즐긴 후 돌아올 때 자가 운전자는 엄청난 교통체증을 각오해야 한다. 들불축제를 여유롭게 즐기려면 대중교통과 제주시가 마련한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된다. 제주시 지역은 탑동 제1공영주차장과 종합경기장 광장, 한라대 정문 등 3곳에서, 서귀포시 지역은 서귀포시 2청사와 천제연 입구에서 새별오름까지 셔틀버스를 운행한다. 운행 시간은 제주들불축제 홈페이지(www.buriburi.go.kr)에서 확인할 수 있다. 축제 무료 셔틀버스는 올해 복병을 만났다. 선거관리위원회가 4월 총선을 앞두고 자치단체 축제 무료 셔틀버스 운행이 기부행위에 해당한다며 제동을 걸었다. 이에 따라 올해 제주들불축제 셔틀버스는 유료로 전환한다. 시는 구체적인 이용요금은 정하지 않고 1000원 등 이용객들이 자발적으로 얼마간의 요금을 내는 방식을 선택했다. 셔틀버스 수익금은 불우이웃돕기 기금 등으로 사용할 예정이다. 김병립 제주시장은 “새별오름 인근 도로변에 임시 정류소를 설치, 평화로를 경유하는 버스를 통해서도 축제장을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다”며 “오름 불놓기 후에 록 공연 행사를 마련해 관람객 차량의 시간차 분산을 유도하면서 교통체증을 해소시켜 나가겠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禍 날리는 火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禍 날리는 火

    옛 목축문화, 액운 태워 없애기 행사로 횃불 1000여개·달집 43개 거대한 불쇼 30만여명 찾아 복 기원하고 소원 빌어 저녁노을 지고 달빛 흐를 때/작은 불꽃으로 내 마음을 날려 봐/저 들판 사이로 가며/내 마음의 창을 열고/두 팔을 벌려서 돌면/야 불이 춤춘다/불놀이야.(홍서범의 ‘불놀이야’ 중에서) 겨울의 끝자락, 봄의 길목 제주에서 화끈한 불놀이가 벌어진다. 마치 화산이 폭발하듯 오름(기생화산) 하나를 시뻘겋게 물들이는 제주들불축제가 다음달 3일부터 6일까지 제주시 애월읍 새별오름에서 열린다. 들불축제는 축제의 섬 제주가 자랑하는 대표 겨울축제. 불놀이를 즐기며 올 한 해 혹시 닥칠지 모를 모든 액을 태워 없애고 모두 복을 받자는 게 들불축제의 모토다. 들불축제는 제주의 옛 목축문화를 현대적 감각에 맞게 발전시킨 문화관광축제다. 제주는 예부터 소와 말이 중요한 노동 수단으로 집집마다 가축을 길러 왔다. 농한기가 되면 가축을 중산간 야초지에 방목했다. 양질의 목초를 먹이기 위해 늦겨울에서 경칩에 이르는 기간에 방목지마다 불을 놓아(방애) 새 풀이 돋아나도록 했다. 방애를 하게 되면 해묵은 풀이 없어지고 해충을 구제하는 효과가 있어 양축농가에서는 이 일을 반복했다. 중산간 일대는 마치 큰 산불이라도 난 것처럼 곳곳에서 거대한 불꽃이 장관이었다. 들불축제의 하이라이트는 5일 새별오름 불놓기 행사다. 새별오름 동쪽 경사면을 따라 불을 놓아 오름 전체가 불타오르는 듯한 장관을 연출한다. 새별오름은 고려 시대 최영 장군이 몽골의 잔존 세력인 목호(牧胡)를 토벌한 전적지로 유서 깊은 곳이다. 남쪽 봉우리를 정점으로 작은 봉우리들이 북서 방향으로 타원을 그리며 옹글게 솟아 있는 말굽형 화구를 갖고 있다. 높이 119m, 둘레 2713m에 면적은 52만 2216㎡로 제주의 크고 작은 360여개 오름 가운데 중간 크기다. 새별오름은 ‘샛별과 같이 빛난다’는 의미다. 올해는 오름 불놓기의 더 큰 감동을 위해 지름 8m 크기의 초대형 지구형 달집을 설치했다. 또 새별오름 곳곳에 43개의 크고 작은 달집을 달아 거대하고 장엄한 불놀이를 보여 줄 예정이다. 4일부터 6일까지 행사장에서 1000여개의 횃불을 준비, 관람객들이 횃불 대행진에 참여할 수 있다. ‘소원을 빌어 봐’ 이벤트도 다양하다. 5일 오름 불놓기 날 새별오름 관람객들은 소원지를 직접 달집에 매달고 오름 불놓기를 통해 소원 성취를 기원할 수 있다. 새별오름 외에 서울 63스퀘어 전망대 스카이아트 들불축제 소원의 벽과 아쿠아플라넷 여수·제주, 들불축제 소원의 벽, 제주 곳곳에 설치된 들불 희망트리,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전달된 소원지를 한데 모은 소망 기원 달집태우기 행사도 열린다. 올해 제주들불축제는 ‘희망’을 주제로 축제 첫날인 3일은 희망이 샘솟는 날, 둘째 날은 희망이 영그는 날, 셋째 날은 희망이 번지는 날, 마지막날인 6일은 희망을 나누는 날 등 날짜별 테마가 있는 마당을 구성해 모두 68개의 갖가지 프로그램을 펼친다. 축제 기간 부대 행사도 다양하다. 새별오름이 활활 불타는 장면을 담아내는 사진 콘테스트에는 매년 전국의 사진가들이 몰려든다. 제주 역사·신화관도 운영, 제주 섬의 신비로움을 전해 준다. 돌하르방 만들기, 새별오름 향초 만들기, 세계 나라별 소원 기원 체험, 전통 아궁이 체험, 들불 발광다이오드(LED) 쥐불놀이 체험, 제주 전통 음식 체험, 승마 체험, 들불 연날리기, 들불 스마트폰 사진 전시회, 제주 전통 민속놀이 체험 행사가 축제 기간 내내 벌어진다. 특히 외국인 관광객 불편 해소를 위해 일반적인 축제장에서 선보이던 지역 향토 음식 메뉴에서 탈피, 외국인을 위한 전용 카페도 운영한다. 새별오름에 기존에 새겨 놨던 대보름 캐릭터 대신 전 세계 상용 기호인 하트(♡)를 새겨 지구촌에 제주의 따뜻한 사랑을 전한다. 들불축제는 연인원 30만여명의 관람객이 찾는다. 미국과 중국, 일본 등 제주시 외국 자매도시 공연단도 찾아와 공연을 펼친다. 제주들불축제는 지난해와 올해 2년 연속 문화체육관광부 지정 우수 축제로 선정됐다. 축제 전문 매거진 ‘참살이’가 주관하는 전국의 가 볼 만한 관광축제 분야에서 2012년부터 3년 연속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김병립 제주시장은 “제주에서 새봄의 기운을 만끽하며 올 한 해 궂은 액을 태워 버리고 모두가 복을 받아 가져가시길 바란다”면서 “버스 등 대중교통이나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축제장을 한결 편하게 오고가실 수 있다”고 말했다. 제주 황경근 기자 kkhwang@seoul.co.kr
  • 동네빵집 ‘中企 업종’ 3년 연장

    제과점업에 대한 중소기업 적합업종 지정이 3년간 연장된다. 지난 3년간 그랬듯 2019년 2월까지 파리바게뜨(SPC)와 뚜레쥬르(CJ푸드빌) 가맹점이 동네빵집 500m 이내에 신규 점포를 내지 못한다는 뜻이다. 단 3000가구 이상이 새로 건설되는 신도시와 철도나 큰 도로로 기존 상권과 분리되는 신상권 지구는 출점 금지 규제의 예외 지역이 됐다. 또 중기 적합업종 품목 지정은 한 차례만 연장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3년 뒤 제과점업은 중기 적합업종에서 해제된다. 동반성장위원회는 23일 서울 여의도에서 39차 동반위 회의를 열어 이달 말 중기 적합업종 권고기한이 끝나는 7개 품목의 재지정을 가결했다. 제과점업을 비롯해 플라스틱 봉투, 중고자동차 판매업, 자전거 소매업, 자동판매기 운영업, 화초 및 식물 소매업, 서적·잡지류 소매업 등이 중기 적합업종으로 재지정됐다. 함께 심의 대상에 들었던 가정용 가스연료 소매업은 동반위가 대기업의 중소기업 사업영역 침해를 주기적으로 확인한 뒤 문제가 발생하면 적합업종으로 재논의하는 ‘시장감시’ 대상으로 분류됐다. 안충영 동반성장위원장은 “재지정된 품목의 산업 발전에 힘쓰고 합의 기간이 끝나는 3년 뒤를 위해 대·중소업계 간 상생협약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제과점업 재지정 과정에서 대기업과 중소기업이 빵 소비 촉진에 함께 힘쓰기로 합의한 데 이어 오는 4월 4~10일 프랜차이즈 빵집과 동네빵집이 함께 할인행사를 벌이는 ‘빵사빵사 블랙 프라이데이’를 열기로 한 것이 상생 모델의 사례로 꼽혔다. 한편 소모성 물품구매대행(MRO) 분야 상생협약은 이날 무산됐다. 대부분의 MRO 대기업이 상생협약 체결에 동의하고 있지만 업계 1위인 LG서브원은 “중소·중견업체의 선택권이 훼손된다”며 협약을 거부 중이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저장 강박증 노인들 ‘쓰레기집’ 늘어… 악취에 민원 끓는데…

    저장 강박증 노인들 ‘쓰레기집’ 늘어… 악취에 민원 끓는데…

    화재위험·오염 등 이웃 피해에도 집주인 거부하면 못 치워 ‘골치’ “아파트 복도에서 악취가 얼마나 나는지, 지나다니질 못해요. 구청에선 집 주인의 동의 없이는 청소를 할 수가 없다고만 하니 참….” 서울 노원구의 한 아파트에서 지난해 9월부터 불쾌한 냄새가 진동을 하기 시작했다. 주민들은 혼자 사는 70대 여성이 집 안팎에 쌓아 둔 물건들 때문인 것을 확인하고 주민센터에 민원을 제기했다. 당시 집 안에는 페트병, 종이박스, 폐비닐 등 쓰레기로 가득 차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였다. 문밖 복도도 사정은 비슷해서 벌레가 나오고, 심한 악취가 났다. 집주인의 가족들이 달려와 복도에 있던 물건을 정리하고 일부 쓰레기를 치웠지만 아파트 복도에는 퀴퀴한 냄새가 여전하다. 노원구청 관계자는 23일 “일부 쓰레기를 치운 다음 대청소 등 주거환경 개선 서비스를 제안했지만 해당 주민이 거절해 지금까지 설득하고 있다”고 말했다. 정신질환의 일종인 ‘저장 강박장애’로 인해 이른바 ‘쓰레기집’이 늘어나고 있다. 이로 인한 오염과 악취 등으로 주민의 고통과 불편이 커지고 있지만, 마땅한 해결책이 없어 곳곳에서 골머리를 앓고 있다. 저장 강박장애는 사용 여부에 관계없이 어떤 물건이든지 버리지 못하고 저장해 두는 강박장애의 일종으로, 공중위생 저해, 화재 위험, 악취 등 이웃에게 피해를 입히기도 한다. 황재욱 순천향대서울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저장 강박장애는 다른 강박장애와 다르게 노인 환자가 특히 많다”고 설명했다. 노원구청 관계자는 “2013년부터 발굴한 저장 강박장애 34명 가운데 80% 정도가 노인들이었다”고 말했다. 지방자치단체가 동네사람들의 제보로 주거지 방문을 통한 실태조사를 해도 집 주인이 주거환경 개선 서비스를 거절하면 아무런 조치를 취할 수 없다. 실제로 주거환경 개선 서비스는 짧게는 1개월, 길게는 1년 이상의 설득 끝에 이뤄진다. 지난달 21일 서울 양천구청은 저장 강박장애를 앓고 있는 60대 여성이 사는 5평짜리 지하 단칸방에서 1.5t에 달하는 쓰레기를 치웠다. 당시 집 안에는 종이박스 등 생활 쓰레기를 비롯해 먹다 남긴 밥 등 음식물쓰레기가 그득했다. 양천구청 관계자는 “‘언젠가는 쓸 물건’이라며 청소를 두려워했던 할머니를 1개월 넘게 설득했고, 지난달 청소와 도배까지 마무리했다”고 전했다. 지난해 9월 서울 성동구청은 4평짜리 단칸방에서 2t의 쓰레기를 치웠고, 2014년 10월 서울 서대문구청은 10평 반지하방에서 3t의 쓰레기를 치웠다. 서울 서초구청도 건물 주변에 쓰레기를 쌓아 둔 70대 할머니의 사례를 찾아내 지난해 7월 종이박스 등 2.5t에 달하는 생활쓰레기를 청소했다. 전문가들은 지자체가 법이나 조례 등으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사회병리학적인 관점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이상열 원광대병원 정신의학과 교수는 “독거노인이나 소외계층은 소유욕, 불안감 등으로 인해 저장 강박장애를 앓게 되는 경우가 많다”며 “단순한 정신질환으로만 볼 게 아니라 환자가 처한 사회적 환경을 고려해야 치료가 가능하다”고 말했다. 송다영 인천대 사회복지학과 교수는 “지역사회 내 다양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사례를 찾아내고 당사자를 설득해야 한다”며 “제도로 청소 등을 강제하려는 시도는 재산권 등과 충돌할 수 있고, 당사자의 반발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에 복지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길섶에서] 무지렁이/서동철 논설위원

    세상 물정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을 무지렁이라고 하는데 남의 얘기가 아니다. 아파트 현관문에 번호키를 달아놓은 직후, 비밀번호가 가물가물해 이러저리 누르고 있으니 뒤에서 기다리던 위층의 젊은 아기 엄마가 “제가 한번 해볼게요” 하고는 나선다. 문은 금방 열렸고 엄마와 아들은 빙긋 웃으며 가볍게 목례를 한다. 꼼짝없이 번호키 하나 제대로 쓸 줄 모르는 중년의 무지렁이로 비친 것이다. 실제로 번호키 앞에서 우왕좌왕하고 있었으니 무지렁이가 아닌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그것도 할 줄 모르느냐?”고 들이대지 않은 배려는 고마운 것이었다. 며칠 전에는 치과에서도 그랬다. 젊은 간호조무사는 다짜고짜 “아버님!” 하고 부르더니만 “스케일링 처음 하시는 거지요?”한다. 속으로는 “이 나이에 스케일링 처음 하겠느냐?” 하고 외쳤지만 참았다. ‘아버님’도 그렇다. 누군가의 아버지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동네 아저씨를 부르는 용도다. 아줌마들이 왜 ‘아줌마’라고 부르면 불편해하는지도 알 것 같았다. 작은 반성도 있었다. ‘그래, 내가 잘났다고 떠들어 봐야 소용 있나. 그대들의 눈에 보이는 모습이 내 참모습이지’ 하는 것이었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情에 취하고 추억에 취했던 인사동 거리

    [김동률 교수의 1980’s 청춘의 재발견] 情에 취하고 추억에 취했던 인사동 거리

    헌책방 ‘통문관’엔 천명이 한 자씩 쓴 천자문…화장실이 급해 들렀다가 붓 잡고 휘이 탁자 서너개·촛불 뿐인 허름한 술집은 주머니 얇은 청춘·문인들 마음의 고향 한옥 뜰앞에 핀 과꽃에 비라도 내리면 저항의 불덩이 품은 가슴도 촉촉해졌네 “한 글자만 써 주고 가시게.” 붓 한 자루를 건네주며 글자 한 자 써주기를 부탁해 왔다. 그는 통문관(通文官) 주인 고 이겸로(1909~2006)옹이었다. 나는 그가 제시한 글자 중 귀할 귀(貴) 한 자를 진땀 흘려 쓰고 빠져나왔다. 1980년대 초 화장실이 급해 들렀던 인사동 고서점에서 일어난 일이다. 당시 이옹은 자신의 손자를 위해 천인천자문을 제작하고 있었다. 집안에 아이가 태어나면 할아버지나 아버지가 천 명의 지인들에게 일일이 찾아가 한 글자씩 받아 만든 책이다. 그러다 보니 글자마다 필체가 다르다. 이렇게 천 명의 정성으로 완성된 천자문은 첫돌 때 선물로 전해진다. 후손을 사랑하는 지극한 마음이 담겨져 있다.문제는 나에게 있었다. 나는 내공이 경지에 이른 이옹의 기대에 부응하는 그런 쟁쟁한 인사가 전혀 아니었다. “단지 쉬가 급해 들어왔노라”며 서너 차례 거절하는 나의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던 이옹은 끝끝내 손에 붓을 쥐여 주었다. 쉬 한번 하러 갔다가 졸지에 선생의 손자를 위한 천자문 한 글자를 메우게 된 것이다. 그 천자문을 받은 손자가 지금의 통문관 주인이 아닐까 짐작해 본다. 나는 그 당시 통문관을 단순한 헌책방으로 알았다. 고 이겸로 선생이 일제 강점기인 1934년 문을 연 이래 고서 관련 문화유산 발굴의 중심에 있다는 거룩한 명성은 먼 훗날 알았다. 80년대 서울 인사동은 그런 거리였다. 조악한 기념품 가게와 호떡 장사가 판치고 있는 지금과는 많이도 달랐다. 백만 년 전 그 시절 나는 황당한 꿈이나 꾸는 몽상가였다. 나는 당시 군대를 다녀와 놀고 있었다. 스몰이라 불리는 검은 물을 들인 미제 군복 바지를 입고 복학 일까지 허구한 날 주색잡기로 시간을 죽이고 있는 신세. 신촌과 종로통을 오가며 술 마시는 것이 전부였다. 과외로 주머니가 얼마간 채워지면 여자를 만나 영화로 시간을 보냈다. 밤이 오면 신촌이나 이태원의 히피들이 모이는 바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노래를 듣는 데카당한 시절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허해지면 인사동에 들렀다. 그 시절 인사동은 고풍스러웠다. 요샛말로는 빈티지나는 동네였다. 신촌은 술집만 즐비해 무언가 허전했고 명동은 시골 출신인 내가 나다니기에는 부담스러웠다. 그러나 인사동은 묵향이 넘치던, 스물 몇 살의 청년이 보기에도 뭔가 있어 보였다. 거리 분위기가 유가풍에서 자란 고향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얄팍한 주머니 사정에도 부담 없는 동네였던 것이다. 그중 승동교회 안쪽 골목에 있던 티롤은 나의 단골 술집. 서너 개의 탁자가 전부이고 탁자마다 작은 촛불이 켜져 있던 소박한 술집이었다. 티롤이 모차르트가 사랑했던 오스트리아의 지방 이름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먼 훗날이고 무식하게도 그 시절 난 그저 티눈의 사촌쯤으로 생각했다. 80년대는 험악했다. 폭력과 야만이 넘치던 시대이자 어둠의 시대였다. 단언컨대 최루가스가 공기의 일부가 아니라 전부였던 시대였다.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에 불덩이를 서너 개씩 달고 다녔으며 감내하기 어려운 순간순간을 술로 버텼다. 그 중심에 티롤, 시인학교, 평화 만들기, 소설 같은 술집과 선천, 사천, 토방 등 밥집, 절 음식집 산촌, 천상병 시인의 부인이 꾸려 가던 귀천 등등이 있었다. 술집은 초라했고 밥집은 대개 네모꼴의 낡은 한옥이었다. 남루한 한옥에서 밥을 먹다가 뜰앞 과꽃에 비라도 내리면 마음까지 촉촉해지곤 했다. 꽃이 피면 꽃밭에서 아주 살았다던 고향의 꽃이 아니던가. 술집 밥집만 아니다. 당시 인사동에는 학고재 등 수많은 고미술 가게와 화랑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게는 술집과 밥집만 기억에 남아 있다. 그 시절 술꾼들이란 대개 종로 관철동 ‘낭만’ 같은 술집에서 입가심으로 생고구마 조각을 곁들여 1차로 맥주 한잔 걸치고 인사동으로 옮겨 밤늦도록 술잔을 주고받았다. 사실 한국 사회의 모든 모임은 술과 엮여 있다. 같은 학교 졸업자들이 모여서 술 먹는 모임이 동문회이고 산에 올랐다가 하산 후 술 먹는 모임이 산악회다. 새벽에 모여 공을 찬 뒤 해장술 한잔 걸치는 것이 조기 축구회이고 고향 사람끼리 모여 술 먹는 모임이 향우회가 아니던가. 초상집에서도 술을 같이 마셔야 성이 풀리는 사회가 한국사회다. 많고 많은 술집 중 카페 ‘평화 만들기’도 떠오른다. 이십대 초반부터 직장생활을 시작하던 이십대 후반까지 단골로 다녔다. 사실 인사동에 꽤 멋진 술집이 많았는데 유독 이 집만 유명했었다. 아마 일간지 기자들이 많이 출입하는 데서 연유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문학 하는 사람들이 뒤풀이 단골로 가는 곳인데, 나의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작업 중인 여자 친구에게 뭔가 있어 보이게 하기엔 딱인 술집이기 때문이다. 창가 말석에 앉아 저명 시인들이 떠드는 소리를 들었다. 웃음소리가 끊이지 않아 문인들, 예술가들은 원래 낙천적인가 생각되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시인 고 기형도(1960~1989)가 있었다. 인간관계는 전혀 없었고 가끔 단골 술집에서 낯이 익어 눈인사만 나눌 정도였다. 80년대 후반 이미 그는 이름을 날리던 문화부 기자였다. 알려진 대로 그는 노래를 무척 잘 불렀다. ‘평화 만들기’의 계단을 오를 때 맑고 고운 노래가 들리면 그가 와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결 고운 테너의 목소리로 ‘왓 이즈 어 유스, 임페추어스 파이어’(What is a youth, Impetuous fire)를 부르면 술집 안은 순간 고요해진다. 영화 리어나도 디캐프리오의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그 옛날 긴 생머리의 올리비아 허시의 ‘로미오와 줄리엣’이다. 인사동 인근 안국동 로터리의 전설적인 술집도 추억해야 한다. 카페 ‘브람스’다. 75년 문을 연 신촌 미네르바, 동숭동 학림과 나란히 30년 넘게 로터리 귀퉁이 이층에 자리하고 있다. 이 집은 내가 서울에 온 갓 스물부터 지금까지 잊혀질 만하면 들르는 카페다. 바닥과 벽이 모두 나무로 치장되어 있다. 걸을 때마다 삐걱대는 소리가 유년 시절 초등학교 목재교실 같은 느낌이다. 주말에도 손님은 많지 않다. 도대체 어떻게 꾸려가는지 나와 같이 늙어가는 여주인에게 노하우라도 한 수 배우고 싶다. 살고 있는 곳이 멀고 또 지금 일하는 공장이 신촌이라 그저 1년에 한두 번 찾을까 말까 하는 카페다. 어쩌다가 지나는 길, 긴 구레나룻의 브람스 얼굴 간판이 차창 너머로 눈에 띄면 문득 미안한 마음이 든다. 언젠가 들렀다가 “꼭 1년 만에 오셨네요”라며 아는 체하는 여주인의 인사말에 만감이 교차했다. 그 집에 가게 되면 베냐미노 질리의 노래를 청해 듣는다. 조르주 비제의 조개잡이 중에 나오는 ‘귀에 익은 그대 음성’(1925년 레코딩)이다. 모노로 듣는 질리의 음성은 애절하다 못해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질 것 같다. 당장 한번 들어 보시라. 언제 들어도 심쿵이다. 우리들의 이십대는 이처럼 수많은 거리의 술집과 함께 갔다. 인사동 골목은 그 시절 내 인생의 ‘아타락시아’였다. 지금의 중년들이 그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으며 취해 돌아다녔던 추억의 거리다. 인사동은 아주 오래된 거리였고 그때 우리는 너무 젊었으며 세상은 그 무엇도 만만한 게 없었다. 그리고 우리들의 잔치는 오래전에 끝났다. 서강대 MOT 대학원 교수(언론학·매체경영) yule21@empas.com
  • [김남경의 예술마을 기행] 수원 행궁동 예술마을

    [김남경의 예술마을 기행] 수원 행궁동 예술마을

    동네 곳곳 붙어 있던 임대 딱지, 개성 있는 카페·게스트하우스 들어서자 사라져… 빈집점거프로젝트·예술문화제로 약 5년 만에 활기 경기 수원 행궁동은 주소록에서 찾을 수 있는 동네가 아니다. 수원 화성 안에 존재하는 12개의 법정동을 함께 부르는 이름이다. 조선시대 정조가 머물렀던 행궁이 속한 남창동을 비롯해 장안, 신풍, 매향, 지동, 남수, 북수 등 12개 동을 아우른다. 불과 220년 전 수원이 건립될 때부터 최근 십수년 전까지 행궁동은 수원에서 가장 번화한 곳이었다. 지금은 ‘예술마을’이라는 표현이 자연스럽게 따라붙는다. 10여년 전 급격히 쇠락해 가던 이곳에 사람들이 다시 모여들고 살아갈 수 있는 생기를 불어넣은 것이 예술이기 때문이다. 인구 1만 2000여명이 살고 있는 행궁동에 지난 6~7년간 드나든 예술가만 해도 수백 명에 이를 정도여서 재생을 위한 예술마을 1호로도 꼽힌다. 수원 화성이 세계문화유산에 선정된 것은 1997년이지만 이와는 별개로 행궁동은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수원시 외곽에 삼성, SK 등 대기업 공장들이 들어서며 대단위 신주거지가 형성되고, 수원역 중심으로 유흥가들이 이전하면서부터였다. 행궁 부근의 상가는 나날이 비어 갔고 마을 주민들도 하나둘 떠나 빈집만 늘어 갔다. 정치인들은 한옥마을 조성 등 공허한 공약만 내세웠을 뿐 뭐 하나 분명하게 진행되는 것은 없었다. 빈 상가에 내걸린 ‘임대’ 딱지만 거리를 공허하게 메웠다. 그러던 이곳에 예술가들이 들어와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무슨 연고가 있어서 들어온 것은 아니었다. 예술가들이 기대한 것은 한 가지. 좋은 조건에 오래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을 갖는 것이었다. 썰렁해져 가는 동네를 바라보던 주민들도 적극적으로 나섰다. 빈 공간이 많았으니 작업 공간을 제공하는 것엔 문제가 없었다. 주민들이 예술가들에게 내건 조건 또한 마을과 함께하는 것뿐이었다. 2009년 행궁동역사문화마을만들기 프로젝트로 손을 잡은 주민과 예술가들은 지속적으로 이 동네에 문화 예술 콘텐츠를 입혔다. 예술가들은 마을 노인들에게 예술과 연계한 소일거리와 놀이를 제공했고 썰렁해진 간판과 골목을 예술적 영감으로 채웠다. 비어 있는 상가나 집에 작품들을 걸어 두고 전시를 하는 빈집점거프로젝트 등 다양한 행사도 열었다. 최초의 서양화가로 알려진 나혜석의 생가터가 행궁 부근에 있다는 것을 알고는 이를 중심으로 예술문화제를 만들기도 했다. 매년 4월 열리는 축제 때면 예술가와 주민, 여행자들이 함께 어우러져 행궁동을 들썩이게 만든다. 주민과 예술가가 움직이니 관에서도 지원에 나섰다. 이런 움직임과 활기에 힘입어 이제 원래 주민들이 다시 돌아오고 있다. 이들은 행궁동에서 이전과는 또 다른 문화를 만들고 있다. 자신만의 개성과 문화 콘텐츠를 입힌 카페, 호텔, 게스트하우스, 갤러리, 공방 등이 골목 사이사이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쇠락하던 도시가 약 5년여 만에 다시 활기를 찾기 시작한 것이다. 행궁동 예술마을의 중심은 커뮤니티 아트센터다. 원래 시립미술관 부근에 있던 레지던시인데, 현재는 공방거리로 이전했다. 커뮤니티 아트센터에는 입주 작가들의 작품들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과 오픈 스튜디오 아트 숍, 카페 등이 들어서 있다. 레지던시가 자리 잡은 공방거리도 각종 공방과 작은 갤러리, 맛집 등이 가득하다. ‘임대 종이’ 나부끼던 곳에서 180도 변신했다. 자잘한 볼거리와 체험거리를 더하니 주말이면 많은 이들이 붐빈다. 장안동 벽화마을 안쪽에 위치한 대안공간 눈은 지역 작가와 주민의 개인전 등 재밌는 전시가 많이 열리는 곳이다. 여행자들도 벽돌 그리기 행사 등을 통해 벽화마을 프로젝트에 참여할 수 있다. 카페도 겸하고 있어 쉬어 가기 좋다. 골목길이 발달한 장안동과 신풍동은 2013년 ‘자동차 없이 한 달 살기’ 프로젝트가 진행되면서 생태교통마을로도 눈길을 끌었던 곳이다. 오래된 주택 사이로 구불구불 펼쳐진 골목마다 아이들이 달려가고 꽃잎이 나부낀다. 길은 걷기 좋게 포장돼 있다. 정조시대 만들어진 도로와는 벽돌색으로 구분해 의미를 더했다. 잘 모르는 골목이라고 겁먹지 않아도 좋다. 조금 나갔다 싶으면 나오는 수원 화성의 성곽과 팔달산의 서장대가 제 위치를 알려 준다. 골목 안에서 바라보는 성곽과 행궁은 색다르다. 군데군데 벽화들이 골목길 여행을 지루하지 않게 도와준다. 벽화도 지루하다 싶으면 아기자기한 공방과 카페, 갤러리들이 나온다. 장안문 부근에 들어선 수원시전통식생활체험관은 전통 식생활 관련 전시와 강연, 체험 등으로 새롭게 주목받는 공간이다. 지역 작가들이 참여한 식생활 관련 전시회 등도 열려 눈길을 끈다. 다양한 과정의 음식 강좌 등에 참여할 수 있다. 마을 끝의 화서문은 호젓하게 수원 성곽과 주변 풍경을 즐기기에 좋은 곳이다. 팔달문이나 장안문에 비해 비교적 한적한 화서문은 오랜 시간 동네 놀이터이자 경로당 역할을 해 온 곳이다. 원래 모습 그대로 남은 성문이어서 보물로 지정돼 있지만, 닫힌 문화재가 아니라 여전히 사람들이 드나들며 만져 볼 수 있어 의미를 더한다. 글 사진 여행작가 enkaykim@naver.com ■여행수첩(지역번호 031) →가는 길:여행의 재미를 가장 잘 느끼려면 서울역이나 용산역 등에서 기차를 타고 수원에 가기를 추천한다. 30여분이면 수원역에 도착하겠지만 여행 분위기에 흠뻑 빠지기에 충분하다. 차가 없어야 행궁동의 골목을 훨씬 여유 있게 돌아볼 수 있다. 행궁동 레지던시 전시관람은 화~토요일 오후 1시~6시. 전통식생활체험관 247-3762, 대안공간 눈 244-4519. →함께 가볼 곳:화성과 행궁의 역사는 수원화성박물관에 가면 좀 더 상세히 알 수 있다. 수원 화성의 설계도이자 세계기록유산인 ‘화성성역의궤’, ‘정조의 비밀편지’, 영화 사도로 다시 주목받은 사도세자의 영서(令書) 등을 볼 수 있다. 화성 광장 옆에 지난해 문을 연 수원시립미술관은 명칭으로 논란이 일어 더욱 주목받았다. 세계문화유산 지구 안에 놓인 현대식 외형이 의문을 주기도 하지만 다양한 전시가 눈길을 끈다. →맛집:행궁동에서 갈비보다 유명한 것이 통닭이다. 통닭 골목이 형성돼 있을 정도다. 튀김옷을 입히지 않고 담백하게 튀겨 내는 매향통닭(255-3584), 반대로 튀김옷을 입혀 고소함을 더한 진미통닭(255-3401) 등이 유명하다.
  • ‘큰딸 암매장’ 엄마 살인죄 보류…사망 전 15일간 하루 한 끼 먹여

    5년 전 어머니 박모(42)씨에게 맞아 숨진 뒤 야산에 암매장된 김모(당시 7세)양은 당시 여러 가족이 함께 살던 아파트의 베란다에 자주 감금됐고, 죽기 전 15일 동안 하루 한 끼만 먹는 등 심각한 학대를 받은 것으로 최종적으로 밝혀졌다. 경남 고성경찰서는 이 사건과 관련된 어머니 박씨와 아파트 주인 이모(45·여)씨, 친구 백모씨 등 3명을 상해치사와 사체유기, 아동복지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하고, 이씨의 언니(50)와 유모씨 등 2명을 불구속 입건한다고 19일 밝혔다. 이어 박씨 등에 대한 살인죄 적용 여부는 보강수사 이후 판단하겠다고 밝혔다. 경찰은 2009년 1월 당시 5살과 2살 된 딸을 데리고 가출해 이씨 집에 들어가 살던 박씨가 이씨로부터 “애를 때리려면 제대로 때려라. 동네 시끄럽게 하지 말고 입을 틀어막아서라도 교육시켜라”라는 등의 말을 듣고 큰딸을 심하게 폭행해 숨지게 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집주인 이씨는 당시 박씨에게 “애가 ‘다 죽여버린다’고 했는데 애를 살인자로 키울 것이냐. 교육을 제대로 시키지도 못하고”라고 다그치며 폭행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났다. 박씨는 이 말을 듣고 2011년 10월 26일 아침에 큰딸을 포장용 테이프로 의자에 묶어놓고 소리를 내지 못하도록 입을 막은 뒤 회초리로 30여 분간 때리다 묶어놓은 상태로 그대로 두고 출근해 큰딸은 이날 오후 5시시쯤 숨진 채 발견됐다. 집주인 이씨는 아파트에 함께 살던 백씨의 어머니 유모(69)씨를 시켜 박씨의 큰딸과 작은딸, 백씨 아들 등 3명을 베란다에 자주 감금해놓고 지내게 했으며 박씨 큰딸에게는 숨지기 전 15일 동안 밥을 하루 한 끼만 주도록 했다. 박씨는 가출하기 전에 이씨의 휴대전화 대리점 사업에 투자를 시작해 10억여 원을 투자했으나 사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고성 강원식 기자 kws@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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