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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다른 공간이 빚은 다른 언어들] 북촌에서… 삶의 소소한 만족을 보다

    [다른 공간이 빚은 다른 언어들] 북촌에서… 삶의 소소한 만족을 보다

    특정한 공간은 시인과 시인의 언어에 어떤 자취를 남길까. 그 흔적을 더듬어볼 수 있는 시집이 최근 나란히 나왔다. 신달자(73) 시인은 두 해 전 이사한 서울 북촌의 한옥집에서 ‘생의 출발점과 종착지’를 실감했다고 시집 ‘북촌’(민음사)에서 토로한다. 재독 시인 허수경(52)은 시집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역에서’(문학과지성사)로 이국의 땅에서 모국어로 새긴 시간의 지층을 쓰다듬는다. ‘봉숭아 씨’만 하고 ‘구절초 한 잎’만 한 방에 몸을 누인다. 시인은 그제서야 ‘나직한 귀향’을 실감한다. 두 해 전, 열 평짜리 한옥으로 터전을 옮기며 북촌의 풍경을 이룬 신달자 시인의 얘기다. 서울 종로구 북촌로 8길 26. 시인의 한옥 대문에는 명함 한 장만 한 당호가 붙어 있다. 공일당(空日堂). 원로 시인 김남조는 “혼자 사는 여자 집에 공(空) 자는 좀…”이라며 저어했지만 신달자 시인은 주저하지 않았다. 비우면 채워질 것이라는 믿음 때문이다. ‘다 비우면 새롭게 쌓이는 법/공이 만(滿)이 되는 것이라/혼자건 둘이건 비우건 쌓이건/다 같은 것이라/그 순간 시간이 출렁 섰다가 가네’(공일당) 북촌에서 보낸 시간은 그 믿음을 촘촘히 채워 준다. 곳곳을 걸을 때마다 “사랑의 또 다른 무늬”가 새겨지고 “열 평만 내 것인 줄 알았는데/북촌이 다 내 것”(내 동네 북촌)이라는 자족이 흐른다. 이번 시집의 출발선은 시인이 북촌으로 이사한 첫날 밤 그어졌다. 새 노트에 ‘북촌’이라는 글자를 새긴 게 시작이었다. 시인은 “익숙함이 내 마음을 가리기 전에, 감동이 있고 놀라움이 있을 때 쓰자고 다짐했다”고 했다. 그 조급함과 부지런함이 밀고 나간 70편의 시들이 이번 시집을 이뤘다. ‘주소 하나 다는 데 큰 벽이 필요 없다/지팡이 하나 세우는 데 큰 뜰이 필요 없다/마음 하나 세우는 데야 큰 방이 왜 필요한가/언 밥 한 그릇 녹이는 사이/쌀 한 톨만 한 하루가 지나간다’(서늘함) 옹색한 방이 불편할 법도 하다. 하지만 그는 외려 그곳에서 삶의 소소한 잔무늬가 주는 위안과 가치를 깨닫는다. ‘여기가 내 생의 중심인 것 같은/이곳이 내 혼의 종착지인 것 같은/아니/내 생의 출발 지점같이’(가회동 성당 1) 느껴지는 이유다. 노년의 시인 안에 열세 살 속마음이 고향집 툇마루를 밟던 발바닥처럼 꼼지락거리는 까닭이기도 하다. ‘애걔걔/강아지 혓바닥만 한 툇마루를 봤나/내 귀만 한 툇마루에 햇살 비치면/발바닥이 저릿하네/강을 천 개나 건넜는데/내 몸에/어린 발바닥 꼼지락거림이 아직 남았는가’(툇마루) 늘 ‘기쁨의 계단을 오른’ 것은 아니다. 시인은 “북촌에 사는 동안 내내 아팠다”고 토로한다. “지병의 통증이 내 의욕을 뿌리째 흔들었지만 북촌에 대한 의욕으로 통증을 견디어 내기도 했다”는 그는 “북촌 사랑에 대한 작은 미소 하나쯤으로 생각하고 이 시집을 내는 용기를 냈다”고 했다. 정서린 기자 rin@seoul.co.kr
  •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주택과 아파트 사이, 모여 사는 즐거움 마당에 널렸네

    [건축가 황두진의 무지개떡 건축을 찾아서] 주택과 아파트 사이, 모여 사는 즐거움 마당에 널렸네

    근대건축의 거장들은 공동주거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미스 반데어로에는 이미 1922년 슈투트가르트의 바이센호프 전시에서 철골 아파트를 선보였다. 미국으로 건너간 이후 1951년에 860-880 레이크 쇼어 드라이브 아파트먼트를 시카고에 완성했다. 또 다른 거장 르코르뷔지에의 위니테 다비타시옹이 1959년 프랑스 마르세유에서 그 뒤를 이었다. 이보다 훨씬 앞선 안토니오 가우디의 카사 밀라(1912)는 파격적인 조형으로 유명하지만 알고 보면 무려 40여 가구가 거주하는 유럽형 상가 아파트다. 시기와 지역, 스타일은 완전히 다르지만 네 건물 모두 세계 건축계의 명작이다. 한국 공동주거의 연보에는 건축가의 이름이 잘 보이지 않는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이름난 건축가의 작업 중에 공동주거, 특히 아파트가 별로 없다. 안병의의 힐탑 아파트(1968), 조성룡의 아시아 선수촌 아파트(1986), 우규승·황일인의 올림픽 선수기자촌 아파트(1988) 등 손꼽을 정도다. 물론 그 리스트의 제일 앞에는 다수의 건축가가 참여했던 마포 아파트(1964), 그리고 이 연재에서 다뤘던 김수근과 그 후예들의 세운상가(1967)가 있다. 공동주거는 건축계에서 그리 인기 있는 분야가 아니다. 작업 조건이 좋지 않고 무엇보다 건축가의 의지를 구현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자존심이 강한 소위 작가형 건축가들에게는 그리 달갑지 않은 주제다. 그러나 공동주거는 사회적으로 매우 중요한 건축 유형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한 나라의 대표적인 건축가들이 관심을 갖고 노력할 필요와 명분이 충분히 있다. 이렇게 보면 한국의 상황은 이례적이다. #단지형 아파트·주상복합 열풍 전 건축 이례적인 상황에는 꼭 예외적인 인물이 있다. 아파트, 특히 그중에서도 상가 아파트를 설계한 건축가로서 그 존재가 알려진 경우는 매우 드물다. 그런데 그 희귀한 사례의 하나가 2016년에 작고한 김석철이다. 예술의전당,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을 설계한 바로 그 건축가다. 국가적 프로젝트를 많이 했고 거대담론을 담은 각종 저서를 다수 출판했다. 그런 김석철의 작품 연보에 상가 아파트가 두 개나 들어가 있다. 그 하나가 대구 명륜로의 한양 가든 테라스고 또 다른 하나는 서울 강동구 성내동의 올림픽 파크타워(현 삼성 파크타워 아파트)다. 각각 사용승인일이 1982년 12월 30일과 1995년 8월 28일이다. 상가 아파트의 연보에서 이 시기는 독특한 의미를 갖는다. 1960년대 말에서 1970년대에 불었던 상가 아파트 열풍과,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에 들어 시작된 주상복합 열풍 사이에 절묘하게 끼어 있기 때문이다. 즉 김석철은 상가 아파트가 한물가고 단지형 아파트가 이미 대세를 이루던, 그리고 본격적인 주상복합의 열풍은 불어오기 전에 이 두 개의 건물을 설계한 것이다. 이것은 우연일까? 이 두 건물에 대한 그의 글이 마침 남아 있다. 좀 길지만 음미해볼 면이 있다고 생각해 인용한다. ‘이제 단독주택에 살기는 어렵게 되었다. 땅도 부족하고, 유지관리도 힘들고, 좋은 주변여건을 갖기도 어렵다. 집이라면 단독주택만 한 것이 없지만 집합주택은 단독주택이 못 가진 많은 장점도 있다. 집합주택의 긍정적인 면과 단독주택의 좋은 점을 합한 새로운 주거의 모델을 추구해야 한다. 이웃이 있고, 마을이 있으면서 집집마다의 독자성과 가변성이 확보되는 그런 공동주택을 모색할 때가 되었다. 모여 사는 즐거움과 편안함과 안전을 가지면서 단독주택이 지닌 특유의 세계를 하나의 주거 속에 시도해 본 것이 성내동의 올림픽 파크타워다. (중략) 올림픽 파크타워는 열아홉 세대의 조그만 세계를 최초의 철골구조 속에 하늘 위의 대지라는 이름으로 이루어 본 것이다. 예술의 전당 국제현상 직전 대구 시내 한가운데에 시도하였던 각 집이 자신의 마당을 갖는 열아홉 세대의 마을인 가든 테라스 이후 십이 년 만에 다시 시도해 본 이웃과 마을이 있는 단독주택 같은 집합주택이다.’ (출처 : 건축도시정책정보센터 아우름) #시대착오인가, 작가정신인가 그런데 김석철이 당시 기준으로는 유행이 한참 지난 상가 아파트를 설계한 상황은 여전히 궁금증의 대상이다. 건축가 본인이 사망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아직 그에 대한 연구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것 같지 않은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하나. 직접 가서 보는 것이다. 답은 항상 현장에 있다. 그래서 오직 이 건물 하나를 보겠다는 목적으로 대구에 내려갔다. 무더위가 유난했던 2016년 여름에서도 가장 더웠다고 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동대구역에서 택시를 타고 가면서 내 눈을 의심했다. 사방에 오래된 상가 아파트들이 보였다. 특히 동대구역 바로 옆에는 ‘동대구 맨션’이 있었다. 아주 반듯한 중정형 상가 아파트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1979년 5월에 사용 승인을 받았다. 연대가 비교적 늦은 셈이다. 이것 말고도 눈에 띄는 건물들이 많았다. 대구는 상가 아파트 연구에 중요한 도시라는 것을 알게 됐다. 김석철의 가든 테라스는 대구 중구 명륜로에 있다. 동대구역에서 3.6㎞ 정도 떨어져 있다. 가로명이 명륜로인 것을 보면 근처에 향교가 있을 것이고 (실제로 있다) 그렇다면 아주 오래된 동네다. 상가 아파트가 도심 유형이라는 것은 서울이나 대구나 마찬가지라는 것을 보여주는 사례다. 실물로 접한 건물은 사진에서 보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관리 상태도 비교적 양호해 보였다. 다만 지하와 지상 1층에 자리잡은 상가는 별로 활기가 없었다. 지하로 내려가는 엄청나게 넓은 에스컬레이터는 운행하지 않은 지 오래된 듯 했다. 그리고 그 가라앉은 분위기는 명륜로의 인접 구간도 그리 다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지만 이 일대에 곧 재건축이 진행될 것이라고 했다. 안타깝지만 김석철의 가든 테라스도 그 대상이었다. (이 글이 그 마지막 기록이 아니기를 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륜로는 인상적이었다. 아니 그 정도가 아니라 ‘바로 이거다’ 하고 탄성을 자아내게 했다. 약 280m에 달하는 한 블록의 거리 양쪽이 일부만 제외하고 모두 상가 아파트였던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길 북쪽의 가든 테라스를 위시해 송정맨숀, 대봉맨션 A, B동(1973)이, 길 남쪽에는 대구맨션 A, B, C동(1972)이 포진해 이 일대를 무지개떡 가로로 만들고 있었다. 분당 정자동이나 판교 일부를 제외하고는 아직까지 한국 어디서도 이런 가로를 본 적이 없다. 게다가 이 건물들은 모두 연대가 상당히 높다. 서울하고 비교해도 결코 늦지 않다. 즉 가든 테라스가 들어서기 이전에도 이곳은 상가 아파트 지역이었다. 그러니 김석철과 그의 의뢰인은 지역의 특성을 그대로 인정한 것이다. 당시 그의 나이 30대 후반이었다. #19가구로 건축해 작가성 여지 남겨 가든 테라스는 지하 1층, 지상 8층의 건물이다. 지하 1층에서 지상 2층까지의 저층부는 상가와 사무실이고 그 위는 주거다. 일부 주거에 상당히 널찍한 옥상 마당이 있어서 가든 테라스라는 이름이 붙은 듯하다. 실체와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 주차장은 건물 뒤쪽 옥외에 있다. 전체 19가구가 있으니 공동주거로서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개별 가구의 면적이 200㎡를 훌쩍 넘을 정도로 넓고 상가의 비중이 높기 때문에 전체적으로는 상당한 존재감이 있다. 이 ‘19가구’라는 것은 공동주거에서는 상당히 의미심장한 숫자다. 20세대가 넘어가면 당시 주택건설촉진법상 사업계획 승인대상으로 각종 규제가 심해지기 때문에 바로 그 아래 숫자를 택한 것이다. 이미 1977년에 주택건설촉진법, 1979년에 주차장법이 제정되면서 그 이전의 상가 아파트와는 완연히 다른 방식의 설계가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부를 안 들어가 볼 수 없다. 제일 좋은 방법은 주민을 만나 말을 붙여 보는 것이지만 유난히 더운 날이라 그런지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다. 결국 안면에 철판을 깔고 경비실 문을 열었다. 두 분이 계셨다. 이럴 때는 그냥 솔직한 것이 최고다. 학창 시절에 이 건물에 대해 알게 되었고, 실물을 보려고 서울에서 왔으며, 설계하신 분이 안타깝게도 얼마 전에 돌아가셨다고 하니 두 분 모두 표정이 풀렸다. 게다가 그중 한 분이 마침 주민이었다. 결과적으로 건물 안팎을 잘 볼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2018년으로 임박한 재건축 이야기, 엘리베이터가 2층에서부터 시작해서 불편하다는 이야기, 살아보니 고층 주상복합보다는 이런 식의 상가 아파트가 최고라는 이야기 등등이 나왔다. 마침 3층에 비어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올라가 보니 꽤 여유 있는 마당이 있었다. 비어 있는 탓에 가꾸지 않아서 그렇지 입지와 환경 면에서 매우 양호한 상황이었다. 단 내부 평면은 그다지 특이한 점이 없었다. 외부 복도가 유난히 넓고 쾌적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전용면적 비율에 집착하는 요즘 같으면 생각도 하지 못할 일이다. 이 건물 이후에 김석철은 예술의전당으로 일약 세간에 이름을 얻게 되고 그만의 독특한 행보를 이어나가게 된다. 그러다 무려 12년이나 지난 후에 올림픽 파크타워를 설계했다. 가든 테라스가 비교적 옆으로 긴 유형이라면 올림픽 파크 타워는 13층으로 엄연한 수직 유형이었다. 역시 주택건설촉진법의 규제를 피하기 위해 불과 19가구만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이런 유형은 점차 ‘나 홀로 아파트’라는 비난을 받게 되었다. 결국 공동주거 시장은 대규모 단지형 아파트가 아니면 상업지역에 고밀도로 지어지는 고층 주상복합으로 양분되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1960년대 후반, 70년 초중반을 관통했던 거리형 상가 아파트의 유형은 완전히 사라지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무렵, 김수근 이후 또 다른 시대의 풍운아라 할 만한 김석철이 자신만의 해법으로 두 개의 공동주거 프로젝트를 세상에 선보인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시대착오라고 할 것인가, 아니면 독창성에 기반한 작가정신이라고 할 것인가? 50년대 후반의 상가 주택에서 60~70년대의 상가 아파트, 현재의 주상복합에 이르는 한국의 도시복합건축의 계보에서 이것은 여전히 심각한 질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요즘의 한국 건축가들은 공동주거를 매우 진지하게 접근하고 있으며 그 결과물들이 하나씩 등장하고 있다. 일부에 불과하지만 상가 아파트도 서서히 복권의 길을 가고 있는 듯 보인다. 강남보금자리 주택 4단지(2015)를 설계한 이민아(협동원)가 전자의 경우라면 2016년에 영등포 양남시장을 시장과 아파트가 결합한 형태로 재건축하는 현상공모에서 당선된 코어 건축은 후자에 속한다. 어느 방향이건 공동 주거가 좀더 다양하고 깊이 있게 발전되는 것은 사회를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이다. 김석철의 독자적 행보가 헛되지 않은 셈이다.
  • 을지로 뒷골목 담벼락 화려한 그림옷 ‘대변신’

    지난 9일 오전 10시, 주말의 텅 빈 서울 을지로 골목이 일순간 왁자지껄해졌다. 한 무리의 젊은 예술가들과 24명의 아이들이 저마다 손에 붓과 페인트를 들고 한데 모였다. 을지로 4가역 1번 출구 근처 뒷골목, 한 사람이 겨우 지나갈 정도로 좁고 후미진 뒷골목에 금속 공장, 공구 상가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이들은 칙칙하고 어두운 이곳을 알록달록한 그림으로 대변신시키기 시작했다. 담벼락과 가게·공장 셔터가 파이프·철근 패턴이 화려한 그림들로 산뜻하게 옷을 갈아입었다. 이날 일명 ‘셔터 아트’ 프로젝트의 주인공은 을지로 청년예술가팀인 ‘새 작업실’ 김선우씨와 ‘R3028’ 팀원들. 서울시 아동상담센터에 다니는 저소득층 어린이들도 이날 체험학습차 함께했다. 동네 상인 박모(45)씨는 “칙칙했던 골목길이 한결 밝아졌다”며 흡족해했다. 실력을 뽐낸 예술가들은 중구가 을지로 산림동의 빈 점포들을 임대해 창작공간으로 제공하는 ‘을지로 디자인/예술프로젝트’ 소속이다. 김선우씨는 앞서 청구초등학교 주변 골목길 벽화사업 때도 실력을 선보이기도 했다. 미술 교육대학원 전공자 8명이 뭉친 ‘R3028’은 주민 대상 감상교육 등 체험미술 사업을 펴고 있다. 최창식 중구청장은 “청년예술가들의 왕성한 창작활동으로 근대 산업역사의 중심지인 을지로가 다시 주목받는다”며 “이 일대에 문화예술을 덧입혀 도심 재창조를 일궈내겠다”고 말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수원 행궁동 벽화마을 문화시설 지정 갈등

    수원 행궁동 벽화마을 문화시설 지정 갈등

    경기 수원 행궁동 벽화마을이 문화시설로 지정하는 문제를 놓고 논쟁이 뜨겁다. 수원시는 “역사·문화적 가치가 높아 문화시설로 지정해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하지만 일부 주민들은 “사유재산권만 침해당할 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며 벽화를 훼손하는 등 반발하고 있다. 10일 수원시에 따르면 행궁동 벽화마을은 관의 지원이나 도움 없이 주민과 작가·시민단체들이 손잡고 일군 문화공간이다. 2010년 한 시민단체가 이웃과 공감하는 예술프로젝트의 하나로 주민 동의를 얻어 역사성과 주민의 삶을 담아 꾸미면서 벽화골목이 탄생했다. 동네 벽과 대문을 비롯해 전신주, 쓰레기통 등 각종 시설이 작품으로 변신했다. 그동안 벽화마을 만들기 프로젝트에 참여한 국내외 작가는 무려 500명에 달한다. 2011년 대한민국공간문화대상 대통령상을 받는 등 성공사례로 꼽혔다. 전국 곳곳에서 관광객들이 찾아오면서 수원의 관광명소가 됐다. 그러던 곳에서 얼마 전부터 관·민, 민·민 간 갈등이 나오기 시작했다. 발단은 수원시의 문화시설 지정 움직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주민들이 그림을 훼손하면서부터다. 지난 5일 행궁동 주민센터에 벽화에 페인트가 칠해졌다는 신고가 접수됐다. 시가 파악한 결과 이곳에 전시된 희소가치가 있는 작품 50점 중 라켈 셈브리(브라질) 작가의 ‘금보여인숙 물고기’, ‘처음아침 길’ 등 15점가량이 훼손됐다. 주민들은 벽화를 아예 없애겠다는 생각이다. 한 건물주는 “시가 얼마 전 우리 마을을 벽화마을 문화시설로 지정하겠다고 했는데 관광객들에게는 좋을지 몰라도 주민들에게는 사유재산권 침해 행위”라며 “이에 반대하는 뜻에서 벽화에 페인트를 덧칠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주민은 “문화시설로 지정되면, 낙후된 구도심인데 앞으로도 개발하지 못할 것 아니냐”고 전했다. 개발업자들이 빌라를 지으면 돈을 벌 수 있다고 주민들을 부추겨 이런 일이 발생했다는 주장도 제기된다. 이곳은 화성 성곽 안에 있어 각종 문화재 보호정책으로 묶여 낙후지역으로 불린다. 그러나 문화시설 지정을 찬성하는 주민들은 “그동안 보존돼왔던 골목을 살려내려면 문화시설로 지정하는 방법밖엔 없다”며 “일부 주민들이 건축 업자 농간에 휘둘린 것 같아 안타깝다”고 말했다. 벽화를 그린 시민단체 관계자는 “시가 문화시설 지정을 주민에게 제대로 설명하지 않고 추진하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 같다”며 “시가 보존 가치가 있는 건물은 보상해 수용하는 방안 등 여러 가지 선택사항을 놓고 협상해줬으면 좋겠다”고 밝혔다. 시는 지난달 30일 행궁동 일원 1600여㎡를 문화시설로 지정하는 안을 공고하고, 오는 15일까지 주민 의견을 들을 계획이다. 수원시 화성사업소 관계자는 “행궁동 골목길은 옛 정취가 보존돼 문화적 가치가 높아 문화시설로 지정해 보존하는 계획을 세웠다”며 “주민의견 청취가 끝나면 도시계획위원회에 상정하고 결정사항을 고시하는 과정에서 주민 입장을 고려하겠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문화시설로 결정되면 감정평가해 보상할 방침”이라고 덧붙였다. 김병철 기자 kbchul@seoul.co.kr
  • 아이 없는 놀이터 눈높이 맞게 고쳐 좋은 ‘내 놀이터’로

    아이 없는 놀이터 눈높이 맞게 고쳐 좋은 ‘내 놀이터’로

    놀이터를 지켜라/제충만 지음/푸른숲/368쪽/2만 2000원 서울 중랑구의 세화놀이터는 몇 해 전 안전검사에 불합격해 놀이기구가 다 철거됐다. 그 후 빈 땅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 아이들이라곤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 동네에 아이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놀이터를 잃은 아이들은 위험한 길에서 놀다가 차에 부딪히기도 하고 골목에서 놀다가 시끄럽다고 어른들에게 혼이 나기 일쑤여서 집에서 혼자 놀거나 형제들과 치고받고, 게임을 하다가 학원으로 가는 게 일상이 됐다. ‘놀이터를 지켜라’의 저자는 “2년째 미끄럼틀을 못 탔다”는 여자아이의 얼굴을 떠올리며 “아이들에게 안전한 놀이터를 돌려주겠다”고 결심한다. 놀 시간, 놀 친구, 놀 공간이 부족한 우리 아이들이 친구와 함께 실컷 놀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 주자는 의미를 담은, 비정부기구 세이브더칠드런의 프로젝트명과 같은 제목을 단 책은 놀이터 복원 및 개선 프로젝트의 여정을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정리했다. 세이브더칠드런코리아에 근무하는 저자는 우연한 기회에 ‘왜 요즘 아이들은 놀 기회가 생겨도 놀지 못할까’라는 궁금증을 갖게 됐다. 이 궁금증을 해소하기 위해 스터디그룹을 만들고 세미나를 찾아다니고 해외 연구 결과와 국제기구의 다양한 통계 자료를 살피며 대한민국 아동의 현실을 분석했다. 그러던 중 6만여개에 달하는 놀이터에 주목하게 됐고 상당수가 버려지고 방치돼 있음을 알게 된다. 저자는 586일간 건축가, 공무원, 교사, 벤처기업 파트너, 동네 주민들을 만나고 아이들과 머리를 맞대 가며 놀이터 개선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마치 이웃의 얘기를 전하는 것처럼 놀이터 한 곳을 통해 아이들이 얼마나 밝아졌는지, 동네 분위기가 얼마나 달라졌는지, 완고하기만 했던 주민들에게 어떤 변화가 나타났는지를 솔직하고 상세하게 전한다. 입장, 가치관, 교육관이 다양한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각자의 경험과 입장, 현실적인 문제와 조건들을 반영해 가며 서로 타협하면서 놀이터를 아이들 중심으로 고치고 다듬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공동체성을 회복해 가는 과정을 가감 없이 소개하고 있다. 저자는 “놀이터에 대한 진지한 고민 없이 새로움만 추구한 결과 오늘날 많은 놀이터가 제작비는 비싼데 고장이 나도 고칠 수 없는, 너무 안전해서 재미를 전혀 느낄 수 없는, 기구에 부딪히느라 뛸 수 없는, 결과적으로 어른들 보기에만 좋은 놀이터가 되어 버렸다”고 지적한다. 그러면서 “좋은 기구가 많아야 좋은 놀이터가 아니라 동네 아이들에게 ‘내 놀이터’로 인식돼야 ‘좋은 놀이터’”라고 강조한다. 함혜리 선임기자 lotus@seoul.co.kr
  • 코리아드라마어워즈, 대상은 ‘가화만사성’ 김소연...김래원·박신양 제쳐

    코리아드라마어워즈, 대상은 ‘가화만사성’ 김소연...김래원·박신양 제쳐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대상은 김소연에게 돌아갔다. 7일 오후 경남 진주시 경남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에서는 MBC 드라마 ‘가화만사성’에서 열연을 펼친 김소연이 대상을 받았다. 김소연은 SBS ‘닥터스’ 김래원, KBS2 ‘동네변호사 조들호’ 박신양을 제치고 대상을 받은 만큼 감격스러운 듯 눈물을 쏟았다. 김소연은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 대상을 받은 것이 믿기지 않는다. 내 인생에 이런 날이 또 있겠나 싶어서 염치 없지만 받겠다”며 소감을 전했다. 이어 “더운 날씨에 고생하신 제작진 분들과 배우 분들이 생각난다. 그들 덕분에 영광스러운 상을 받는 것 같다. 소속사 식구들, 팬, 가족들에게 영광을 돌리고 싶다”고 덧붙였다. 한편, 코리아 드라마 어워즈는 지난 1년간 방송된 지상파 3사, 케이블채널, 종합편성채널, 웹을 통합해 시상하는 국내 드라마 시상식이다. 임효진 인턴기자 3a5a7a6a@seoul.co.kr
  • [ICT, 농부가 되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휴가지에서도 농사… 습도 조절까지 척척”

    [ICT, 농부가 되다] “스마트폰만 있으면 휴가지에서도 농사… 습도 조절까지 척척”

    지난달 20일 찾은 전남 화순군 도곡면의 파프리카 농장은 네덜란드 첨단 유리온실의 축소판 같았다. 보통 네덜란드 온실 한 개의 규모가 10㏊(약 3만평)에 이르는 데 비해 이 농장 온실의 크기는 1.3㏊(약 4000평)지만, 6m 높이의 유리벽이 농장을 둘러싸고 있고 온실 앞 컨테이너 건물 안에 첨단 환경제어시설이 구비돼 있는 모습은 네덜란드 스마트팜 못지않았다. 축구장 두 개를 합친 넓이였지만 일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온실 앞 컨테이너 안에 첨단 환경제어시설 온실 앞에 마련된 사무실에 들어가야 사람을 구경할 수 있었다. 캐주얼한 옷차림의 농장주 정흥기(37) 대표가 큰 모니터 두 대를 들여다보며 적정 온도와 습도, 영양분 공급량 등을 설정하고 있었다. 농장 운영이 정보통신기술(ICT)과 접목된 까닭이다. 한낮에 온실 온도가 치솟으면 지붕 위 차양이 드리워지고 분무기에서 안개 같은 작은 물방울이 뿌려지면서 온도를 떨어트린다. 또한 유리지붕이 개방돼 온실 내 온도를 유지하고 환기를 시키는데 비가 올 경우 자동으로 지붕이 폐쇄된다. 영양분이 섞인 물(양액)은 온실 내 온습도와 계절 및 시간대에 따라 다르게 설정된 양과 농도로 파프리카 뿌리에 공급된다. 정 대표는 농장에 설치된 컴퓨터뿐만 아니라 스마트폰 애플리케이션을 이용해 온실 환경을 제어했으며,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온실 내외부에 설치된 폐쇄회로(CC)TV 화면을 보며 농장 상황을 확인했다. 정 대표는 “일반 비닐하우스를 운영하신 아버지께서는 여름철에 비가 올까 봐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옆 동네도 가지 못 하셨다”며 “하지만 나는 인터넷만 연결되면 언제 어디서든지 농장을 관리할 수 있기에 1주일간 아이들을 데리고 멀리 휴가를 떠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컴퓨터 등으로 온실 환경·농장 상황 확인 이 농장은 정 대표를 포함해 6명이 관리하고 있었다. 이 농장에서는 파프리카 순을 치고 작물을 수확하는 데만 주로 사람의 손이 필요하다. 따라서 이들만으로도 1년 중 9개월간 쉼 없이 돌아가는 농장을 관리할 수 있다는 것이 정 대표의 설명이다. 나머지 3개월은 파종하고 줄기를 길러내기 위해 수확을 잠시 멈춘다. 귀농 이전에는 회사에 다녔다는 정 대표는 2014년 농업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노하우 없이 귀향해 파프리카 재배에 나섰다. 농사 초보였던 그는 자동화 설비를 적극 활용하고 농사 노하우를 부지런히 익혀 적용하면서 초기부터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농사 첫해인 2014년 초부터 다음해 초까지 1년간 파프리카를 평당 70㎏ 수확했는데 이는 한국 평균 수확량인 평당 약 50㎏보다 높은 수준이다. 정 대표는 “재배 환경을 효과적으로 제어하고 비교적 넓은 재배 지역을 적은 노동력으로 관리해 어느 정도 수익을 거둔 것 같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정 대표는 네덜란드의 스마트팜과 비교했을 때 아직 갈 길이 멀다고 강조했다. 정 대표는 온실을 설립할 때 네덜란드 업체 프리바의 스마트팜 설비를 도입했지만 이 설비를 제대로 다루는 데 2년이 걸렸다고 고백했다. 프리바 등 네덜란드 업체의 설비는 복잡한 만큼 값을 정교하게 조정할 수 있어 온실 환경을 재배에 최적인 상태에 정확히 맞출 수 있지만 한국 업체의 설비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 정 대표의 평가다. 그는 한 달에 두 번 농장을 방문해 설비 이용 방법과 농장 운영 노하우를 가르쳐 주는 사설 컨설팅 업체를 고용해 도움을 받고 있다. ●‘정교한’ 네덜란드 설비 다루는 데만 ‘2년’ 농사 노하우와 데이터가 충분히 축적되지 않은 점도 정 대표가 어려움을 겪는 요인 중 하나다. 한국은 특히 스마트팜 도입의 역사가 짧기 때문에 기존에 농사를 오랜 기간 지었던 사람이더라도 스마트팜 운영에 미숙할 수밖에 없다. 현재 ICT가 접목된 자동화 설비는 사람이 설정한 값대로 재배 환경을 유지하는 역할만 한다. 축적된 노하우와 데이터를 통해 재배에 최적인 값을 찾아내는 것은 사람의 몫이다. 이에 정 대표는 자신의 온실에서 온습도, 영양분 공급량 등 재배 환경에 따라 파프리카의 생장 속도가 어떻게 달라지는지 데이터를 모으고 있으나 데이터 수집 장비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고 말했다. ●“데이터 수집 역부족… 정부의 투자 절실” 투자비가 너무 많이 들어 스마트팜 설비를 더 도입하지 못하는 것도 정 대표의 고민거리다. 정 대표는 최근 파프리카가 심어져 있는 라인을 따라 자동으로 움직이는 적외선 카메라를 설치하고 싶어한다. 이 카메라로 24시간 원격으로 작물의 생장 정도, 병충해 감염 여부 등을 파악할 수 있다. 정 대표는 지난해 파프리카를 고사시키는 토마토반점위조바이러스(TSWV)가 온실 내부에 전염되는 것을 조기에 발견하지 못해 전년 대비 수확량이 57%로 급감하는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정 대표는 “온실 초기 투자금 40억원 중 82%를 설비를 담보로 대출받고 나머지는 자부담한 상황에서 추가 설비를 들이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정 대표는 소규모 영농이 절대 다수인 우리나라 현실에서 스마트팜을 확산시키기 위해서는 농가가 이러한 스마트팜 운영의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정부가 도와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정부가 농사를 지을 의지와 자질이 있는 젊은 사람을 엄선해서 그들에게 확실히 투자한다면 스마트팜 보급이 빨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재정이 열악한 농촌 지역의 지방자치단체 대신 중앙정부가 더 적극적으로 지원에 나설 것을 주문했다. 그는 스마트팜의 운영비를 낮출 수 있는 지열발전소를 건설하는 데 중앙정부가 전체 비용의 일부를 지원해 주는 대신 지자체가 나머지를 댈 것을 요구하고 있지만 지자체는 그 돈조차 지불할 여력이 없어 건설 프로젝트가 무산되기 일쑤라고 지적했다. 화순 박기석 기자 kisukpark@seoul.co.kr
  • 고래의 꿈 위로의 숨 고향의 쉼

    고래의 꿈 위로의 숨 고향의 쉼

    고래는 잠들지 않는다고 한다. 왼쪽 뇌가 잠들더라도 오른쪽 뇌는 깨어 있다는 것이다. 그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유는 하나다. 살기 위해, 숨을 쉬기 위해서다. 몸뚱아리는 물고기지만 숨은 물 밖에 나와 쉬어야 한다. DNA에 새겨진 포유류의 기억이 여태 선명한 게다. 그러니 이런 가정도 성립하지 않을까. 고래는 늘 꿈을 꾼다고. 실제 고래는 움직이면서 잠을 잘 수 있고 물 밖으로 솟구칠 때도 꿈을 꾼다고 한다. 파란 바다 저 끝에서 고래와 만나는 건 그래서 매우 독특한 경험이 된다. ‘고래의 고향’ 울산 장생포를 찾은 건 순전히 그 때문이었다. 탐사선에 올라 고래를 만나 보겠다는 것. 애초 현실성 따위는 없었다. 그저 돌고래나 만나면 다행일 터다. 그래도 꿈을 꿀 수는 있잖은가. 바다 위로 솟구치는 큰 고래와 만나는 꿈 말이다. ●포경산업 전진기지가 고래관광특구로 울산 남구는 ‘고래관광특구’다. 자타가 인정하는 ‘고래의 도시’다. 남구에서도 고래의 본고장을 꼽으라면 단연 장생포다. 한때 우리나라 포경산업의 전진기지였던 곳. 포경산업은 여느 어업과 달리 고래 해체장 등 상당한 규모의 배후 기지가 필요하다. 그 역할을 했던 곳이 장생포다. 먼저 고래박물관부터 들른다. 1986년 국제포경위원회(IWC)의 상업 포경 금지 이후 사라져 가던 국내 포경 관련 자료와 유물들을 수집해 전시하는 공간이다. 귀신고래 등 우리 근해에 서식하는 고래들에 대한 정보도 확인할 수 있다. 건물 밖에는 ‘제6진양호’가 전시돼 있다. 장생포를 거점으로 고래를 잡던 실제 포경선이다. 포경금지법 발효 뒤 방치됐다가 원래 모습대로 복원됐다. 관람객 누구나 배에 올라 포경 과정을 체험할 수 있다. 박물관 맞은편의 고래생태체험관은 다양한 바다생물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이다. 돌고래 쇼도 열린다. 무엇보다 건물 초입에 세워진 한 외국인 동상이 이채롭다. 주인공은 영화 ‘인디애나 존스’의 실제 모델로 알려진 미국의 동물학자이자 탐험가 로이 채프먼 앤드루스다. 1912년 장생포를 방문한 그는 1년간 머물며 귀신고래를 연구한 뒤 1914년 당시 ‘악마 고래’라 불리던 귀신고래를 ‘한국계 귀신고래’(Korean Gray Whale)라고 처음 이름 붙였다. 하지만 귀신고래는 1970년대 이후 ‘귀신같이’ 사라졌다. 동해를 휩쓸었던 유럽 열강과 일제의 남획 탓이다. 물론 일제강점기 이후 포경업에 나섰던 우리 역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 이후 귀신고래가 새끼를 낳기 위해 이동하는 경로였던 울산과 경북, 강원 일대의 해면을 천연기념물 제126호로 지정해 보호하고, 현상금까지 내걸어 귀신고래를 찾았지만 아쉽게도 여태 녀석을 봤다는 이는 없다. ●550t 탐사선 타고 3시간여의 고래 탐사 이제 하이라이트. 고래 탐사 시간이다. “고래를 못 볼 수도 있습니다. 그저 시원한 바닷바람 쐬고 돌아온다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탐사에 나설 ‘고래바다여행선’에 오르기까지 수차례 들었던 말이다. 그만큼 고래 보기가 쉽지 않다는 뜻일 터다. 보통은 6~8월에 자주 볼 수 있다고 알려졌다. 한데 이는 주된 관찰 대상이 돌고래류일 경우에 유효한 전제다. 대형 고래들이 좇는 먹잇감은 낮은 수온에서 더 잘 나올 수도 있다. 올해는 8월의 돌고래 관찰률이 어느 해보다 떨어졌다. ‘역대급’ 더위 탓에 수온이 올라 먹잇감이 줄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수온이 떨어지는 10월 언저리엔 큰 고래를 볼 가능성이 높아지지 않을까. 한국계 귀신고래의 경우 5~6월 캄차카반도 오호츠크해까지 올라갔다가 10월쯤 먹이 활동과 출산을 위해 남하한다던데, 회유 길목에서 운 좋게 녀석과 조우할 수도 있지 않을까. 사실 고래가 처한 안팎의 현실을 짚어 보면 이는 몽상에 가까운 바람이다. 그래도 꿈은 꿈이다. 고래바다여행선 항로는 모두 세 코스다. 그 가운데 고래 탐사에 초점을 맞춘 건 1, 3항로다. 이번 여정에선 제 1항로를 따라간다. 울산 북동쪽 바다를 훑는 코스다. ●대형 고래와의 조우는 ‘하늘의 별따기’ 사실 대형 고래는 세 시간 안팎의 탐사로는 발견하기 쉽지 않다. 대형 고래들은 대부분 한 번 잠수하면 두어 시간 가까이 바닷속에 머물 수 있다. 게다가 돌고래류와 달리 선박을 피하는 특성도 대형 고래 관찰을 어렵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니 고래 탐사에 나선다는 건 사실상 돌고래를 보러 간다는 말과 같고, 돌고래 무리와 만나는 것조차 행운일 경우가 많다. 장생포항을 나선 배가 파란 바다를 미끄러지듯 달린다. 550t 급 크루즈선을 개조한 배다. 덩치가 큰 덕에 어지간한 파도쯤은 뭉개고 지나간다. 당연히 뱃멀미도 덜하다. 한 시간 정도 달렸을까. 잉크빛 바다 위로 날치 한 마리가 날아간다. 뒤를 이어 게 한 마리가 파도를 타고 두둥실 떠간다. 이게 꿈일까. 얼핏 만화의 한 장면 같기도 하다. 얼마쯤 지나자 이번엔 날치 십여 마리가 배를 피해 날아간다. 우수수 빗물 떨어지는 소리를 내며 나는 모습이 여간 이채롭지 않다. 해양 영화에서나 봤을 법한 몽환적인 풍경이다. ●참돌고래떼 화려한 군무에 탄성이 절로~ 선상 공연도 끝나고 모두가 슬슬 지쳐 갈 때쯤 요란스레 선내 방송이 울려 퍼졌다. 선원들이 손짓하는 곳에 참돌고래 무리가 있었다. 무려 1시간 41분 항해 끝에 마주한 행운이다. 참돌고래 무리는 포기하지 않고 기다렸던 관광객들을 위해 어느 수족관에서도 볼 수 없는 군무를 선사했다. 여기서 솟고, 저기서 잠수하고, 한바탕 쇼가 펼쳐졌다. 수면 위로 허리까지 솟구친 채 ‘문 워크’ 자세를 ‘시전’하는 녀석도 눈에 띄었다. 회항 때문에 녀석들과 함께한 시간은 채 20분이 못 됐지만 야생의 생명들이 벌이는 유희는 그 어떤 공연보다 경이로웠다. 장생포항 주변에 둘러볼 곳이 많다. 고래문화마을이 대표적이다. 고래조각정원 등 고래와 관련된 다양한 볼거리들을 모아 놓은 테마 마을이다. 특히 장생포 옛마을이 인상적이다. 포경산업이 절정에 달했던 1960, 70년대 장생포의 동네 풍경을 실물 그대로 복원했다. 고래 해체장 등 작업 공간과 선장, 선원들의 집, 그들이 즐겨 다녔던 선술집 등 향수를 자극하는 건물들로 가득하다. ●박물관·문화마을 등 옛 정취 고스란히 ‘장생포국민학교’(초등학교)를 복원한 건물은 꼭 찾는 게 좋겠다. 옛 장생포의 사진 등 볼거리가 꽤 많다. 가수 윤수일이 이 학교 졸업생이다. 교실 하나가 그의 사진과 신인 가수 시절의 앨범 등 옛 기념물로 꽉 찼다. 학창 시절 찍은 그의 사진은 대부분 주먹을 불끈 쥔 모습이다. 혈기방장한 객기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보냈지 싶은 장면이다. 그도 고래잡이를 꿈꾸며 자랐을까. 장생포 앞바다에 뜬 죽도를 생각하며 ‘환상의 섬’(1985)이란 노래도 지었다던데 고향에 대한 향수가 각별했나 보다. 하지만 어른이 돼 다시 찾은 고향에 그가 꿈꿨던 장생포는 없었다. 당시 상실감은 노래 ‘환상의 섬’에 고스란히 담겼다. “세월이 흐른 뒤 다시 찾은 그 섬엔 문명이 할퀴고 간 초라한 그 모습”이라고. 옛 마을 위는 고래조각공원이다. 혹등고래, 귀신고래 등의 실물 조형물을 조성해 뒀다. ‘인증샷’ 찍기 딱 좋다. 고래박물관에서 고래문화마을로 향하는 골목길 입구엔 ‘장생포 마을 이야기길’이 있다. 장생포 사람들의 삶을 벽화로 엿볼 수 있는 곳이다. 좁은 골목 약 560m 구간에 다양한 벽화를 그렸다. 울산의 명소 한 곳만 덧붙이자. 태화강 십리대숲길이다. 지난 7월 말 박근혜 대통령이 휴가차 방문해 화제가 됐던 곳이다. 울산 도심을 가로지르는 태화강을 따라 십리(약 4.3㎞)에 걸쳐 대나무숲이 이어진다. 이름이야 다소 심드렁하게 느껴지지만 규모나 풍경의 깊이는 예사롭지 않다. 산책로를 걸으며 피톤치드로 샤워를 할 수도 있고, 죽림욕장에 누워 쉴 수도 있다. 글 사진 울산 손원천 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 지역번호 052 →가는 길:고래 탐사는 4월부터 11월까지 이어진다. 탐사는 3시간 정도 소요된다. 출발은 장생포항이다. 요금은 어른 2만원, 12세 이하 어린이 1만원이다. 홈페이지(www.whalecity.kr/whale) 참조. 226-1900~2. 고래바다여행선을 타고도 고래 탐사에 실패했을 경우 고래박물관 입장료가 할인된다. →맛집:미식가들에게 울산은 ‘12가지 맛’이 난다는 고래고기 맛 기행지다. 장생포항 주변에만 고래고기 식당이 20여곳에 이른다. 값은 만만치 않다. 대부분 업소에서 수육을 5만원부터 판다. 처음 고래고기를 맛보는 이들은 다소 비릿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장생포 고래빵(269-7543)은 울산의 ‘명물’ 반열에 오른 고래빵을 파는 집이다. 재료가 떨어지면 일찍 문을 닫는다. 고래이야기길 초입에 있다.
  • 1억 7000만원 보험 사기 친 배달 알바 85명

    치킨집 등에서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알게 된 동네 선후배 사이인 20대들이 고의 교통사고 보험 사기를 벌이다 경찰에 붙잡혔다. 서울 구로경찰서는 사기 혐의 등으로 주범 구모(20)씨를 구속하고 범행에 가담한 85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5일 밝혔다. 구씨 등은 2011년 1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서울 마포·은평구 일대에서 고의로 교통사고를 낸 뒤 보험사로부터 59회에 거쳐 총 1억 7000만원의 보험금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구씨 등은 유흥가에서 음주운전으로 의심되는 차량을 물색한 뒤 오토바이나 승용차를 타고 고의로 급정지를 해 추돌하게 하거나 피해 차량 뒤에서 경적을 울려 급히 출발하면 옆 차선으로 끼어들어 급정지해 사고를 내는 수법 등으로 보험금을 타냈다. 홍인기 기자 ikik@seoul.co.kr
  • [新전원일기] 세종실록 속 ‘곡성 울금’ 참맛 알린 38세 농사꾼… 수억 매출 ‘곡성 희망가’

    [新전원일기] 세종실록 속 ‘곡성 울금’ 참맛 알린 38세 농사꾼… 수억 매출 ‘곡성 희망가’

    #왕실 공납품으로도 알려진 곡성의 ‘울금’ 영화에서 익히 보았던 도로를 따라 달린다. 울창한 숲이 좌우로 펼쳐져 있고 저 멀리로 품 넓은 섬진강이 보인다. 굽이가 많아 다소 위험하게 느껴지는 것만이 영화의 서늘함을 떠오르게 할 뿐 눈도 마음도 밝아지는 기분이다. 에어컨을 끄고 창문을 내린다. 서울에서는 마음만 가을이었는데, 이곳에서는 곳곳이 가을이다. 사람보다는 자연이 계절을 더 충실히 살아낸다. 당연한데 자주 잊는다. 자주 잊어서, 사람이 많은 도시에는 계절이 더디 오고 빨리 가버리는 것 같다. 도시를 놓고 자연으로 간 사람에게는 계절도 정직하게 오고 갈까. 이런저런 생각에 골몰하고 있자니 어느새 곡성이다. 2012년 귀농한 노병철(38)씨의 첫인상은 젊고 활기찬 최고경영자(CEO) 그대로였다. 흰 셔츠와 검은색 바지를 맵시 있게 차려입은 그와 어정쩡하게 인사를 나눴다. 순간 커다란 밀짚모자를 눌러 쓰고 허름한 작업복을 걸친 사람들에게만 눈길을 준 게 무색해졌다. 이 또한 선입견이었으리라. 그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울금뿐만이 아니라 그가 그런 복장을 하고 나타난 것이 쉽게 이해되었다. 울금은 기원전부터 기록되어 있을 만큼 연원이 오래된 작물이다. 생강과의 식물로 중국 남부와 인도, 일본의 오키나와를 비롯한 동남아시아 지역에서 자생하거나 재배되며 우리나라의 중남부 지역에서도 재배된다. 맛은 맵고 쓰며 찬 성질을 지녔는데, 혈행을 활성화시키고 위산 분비를 조절한다. 간 기능 향상, 생리통과 생리불순 완화, 담낭과 결석 치료, 항염과 항암, 노화 예방에도 좋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항암과 관련해서는 전 세계적으로 5000여개의 논문이 쏟아질 정도로 관심이 높다. 뿐만 아니라 울금은 염료와 식품 착색제로도 손색이 없다. ‘세종실록’에 따르면 곡성과 순천, 구례에서 생산된 울금은 왕실에 공납할 정도로 상품 가치가 높았다. 하지만 현재 우리나라에서 울금 생산량이 가장 많은 곳은 진도로, 재배 면적도 곡성의 5배가 넘는다. 당연히 그 명성도 진도 울금이 가장 높다. 노 대표는 예부터 내려오는 곡성 울금의 명성을 되찾기 위해 고심했고, 자연농법을 이용해 진도 울금과의 차별화를 시도했다. 그리고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해 곡성 울금의 기반을 다져 나갔다. 연원도 오래고, 왕실에 공납할 정도의 특산물이었다고 하는데 아무래도 ‘울금’이라는 이름이 생소하다면 카레의 원료인 강황을 떠올려도 좋을 것이다. 강황은 뿌리줄기에 달리는데 비해 울금은 덩이뿌리에 달리는 게 다를 뿐으로, 카레의 노란색이 울금의 주성분인 ‘커큐민’ 때문이다. #우연이 운명을 만들기까지 노 대표는 귀농인 중에서도 젊은 축에 속한다. 하지만 처음부터 귀농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다. 2009년 당시 정보통신을 전공하고 고시 공부를 하던 그에게 어머니의 교통사고 소식이 전해졌다. 그는 서둘러 귀향해 척추 부상으로 거동이 불편한 어머니의 간호를 떠맡았다. 시험 날짜가 코앞으로 다가와 마음이 조급했지만 병상에 누워서도 농사를 걱정하는 어머니를 보고 있자니 농사를 외면하기도 어려웠다. 어머니가 완쾌된다 해도 울금 농사를 짓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결국 그는 고시 공부를 포기하고 귀농을 결심했고,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울금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울금 농사는 무엇보다 토질이 중요하다. 물이 잘 빠지는 마사질 황토흙이 생육에 최적의 환경을 제공하는데, 토질만 맞으면 키가 2m까지 자랄 정도로 생장이 빠르다. 노 대표는 울금의 키가 커야 알도 실해진다고 말한다. 물론 무조건 크다고 해서 좋은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울금의 키가 크고 줄기가 튼실해야 풍작을 기대할 수 있다. 울금의 키가 한 뼘씩 자랄 때마다 그의 행복감도 한 뼘씩 커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울금에는 특유의 향 때문인지 해충이 꼬이지 않는다. 당연히 살충제를 사용할 필요가 없고 그런 만큼 농사를 짓기가 수월하다. 그런 울금을 가리켜 그는 ‘착한 애’라고 표현한다. 착한 애라서 무엇보다 좋은 점은 소비자가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것이라 말하는 그의 얼굴에 착한 미소가 번진다. 울금은 연작이 가능하다. 그러나 2회 이상 연작을 할 경우 울금 성분이 떨어지고 수확량이 감소한다. 뿌리 작물이라 지력이 무엇보다 중요한 때문이다. 그는 지력 회복을 위해 땅을 옮겨 다니며 농사를 짓는다. 농사를 하면서도 유목 생활을 피할 수 없는 셈이다. 옮겨 다니며 농사를 지으려면 땅이 많이 필요할 텐데 그에 필요한 비용은 어떻게 감당하는지 궁금해졌다. “정부에서 좋은 조건으로 지원을 해주기 때문에 땅을 구매하거나 임대할 때 큰 부담은 없는 편이에요. 처음에는 멋모르고 무조건 땅을 구매했는데 이제는 임대를 주로 합니다. 그 편이 더 수월하고 경제적으로도 비용 부담이 주니까요.” 땅을 관리하는 일도 중요하다. 그는 한 번 수확을 끝낸 땅에는 콩이나 옥수수를 심어 지력을 회복할 시간을 준다. 발효 퇴비와 자체 개발한 친환경 영양제로 거름을 주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만으로도 울금 농사에 적합한 토양을 만드는 데 무리가 없다. 정작 농사를 짓는 것보다 어려운 것은 저장이다. 울금은 9~10월에 꽃을 피우고 알을 맺는다. 수확은 11월에 하는데 열대작물이라 겨울나기가 쉽지 않다. 아무 생각 없이 저장고에 보관했다가 모두 상해 낭패를 본 적도 있다. 시행착오 끝에 생각해낸 것이 토굴 저장이다. 토굴 자체가 갖고 있는 지열로 일정한 온도를 유지할 수 있는 데다 수분이 휘발되지 않아 울금 보관에는 최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큰 키와 넓은 잎으로 빼곡한 울금밭을 보고 있자니 거인 나라에 불시착한 난쟁이가 된 듯하다. ‘나’라는 존재가 하릴없이 느껴지면서 자연이라는, 신비로 가득 찬 세계에 불현듯 경외감이 드는 것이다. 살아내기 위해 치러야 하는 치열한 경쟁과 희생들이 사실은 불필요한 아등바등함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흔한 비유로 성냥갑같이 비좁은 공간에서 어깨를 부딪치며 살아가는 일이 결국 우리에게 남길 것은 무엇인가. 여러 가지 생각들이 꽉 들어찬 머리 위로 한 줄기 바람이 불어왔다. 울금잎이 서서히 움직이며 스스슥, 느린 소리를 냈다. #가공에 성공해 울금 대중화에 이르기까지 “어려서부터 농사짓는 걸 보고 자라서 농사가 아주 낯설지는 않았어요. 그래도 작정하고 뛰어드니 어려운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더군요. 젊은 나이에 시작한 것이니만큼 포부도 크게 가졌는데, 젊은 패기로만 감당하기에는 현실적으로 문제가 많았어요. 일손이 달려서 파종기나 수확기에는 멀리까지 가서 인력을 구해 와야 했고, 기계를 사용해야 하니 자본도 필요했어요. 무엇보다 판매가 쉽지 않은 게 문제였어요.” 노 대표는 유통 경로와 더불어 울금의 소비층을 확대할 방법에 대해 고심했다. 마케팅도 문제였지만 무엇보다 울금의 쓴맛이 대중화를 어렵게 했다. 쓴맛을 줄이고 울금의 효능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기능성을 높여야 했다. 그는 울금을 발효시키면 커큐민의 흡수율이 높아지고 쓴맛도 완화시킬 수 있으리라 생각해 제품 개발에 몰두했다. 그리고 흑마늘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시행착오가 많았어요. 옥수수 전분이나 감자 전분 등을 함께 넣었다가 산폐가 발생하기도 했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상한 액체가 돼버리기도 했어요. 이것저것 시도하고 실패한 끝에 결국 성공했을 때는 눈물이 다 나더라구요.” 울금과 설탕, 파파야 효소를 적정 비율로 섞어 발효 기계에 넣고 60도 고온에서 한 달간 숙성시키면 흑울금을 얻을 수 있다. 흑울금은 울금의 쓰고 매운 맛과 특유의 향을 완화시켜 먹기에 좋을뿐더러 가공하기 전보다 영양 성분도 더 풍부하다. 흑울금으로 특허를 내고 본격적인 가공에 돌입했다. 가공한 농산물은 부가가치가 매우 높아진다. 울금 역시 가공품 가격이 생물 가격의 10배를 웃돌 정도다. 가공품은 저장도 수월하므로 생물을 판매하는 것보다 훨씬 유리한 셈이다. 그는 현재 1만평 정도의 토지에서 60t가량의 울금을 수확한다. 귀농한 2012년 당시만 해도 매출액이 제로에 가까웠으나 2015년에는 2억 5000만원의 매출을 기록할 정도로 급성장세에 있다. 그러나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고 앞으로도 품목 개발에 주력할 계획이다. 지난해 6월 ‘뿌리 깊은 약초’라는 브랜드를 만들고, ‘블로치 유한회사’를 법인화한 것은 그가 지닌 포부의 신호탄이라 할 수 있다. 농부와 CEO, 1인 2역을 소화하고 있는 그의 흰 셔츠 위로 햇살이 넘실거린다. 그리고 괴기스럽고 비밀로 가득 찬 곡성이 아닌, 희망과 생기로 넘치는 곡성에 그 어느 때보다 명랑한 가을이 당도했다. 여름이 시작될 무렵 한 편의 영화가 문화예술계를 달궜다. “절대 현혹되지 마라”는 타이틀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무엇에 현혹이라도 된 듯 영화 곳곳에 숨어 있는 ‘메타포’(은유)의 퍼즐을 맞추느라 골몰했다. 영화적 기법이나 스토리 전개 방식에 대한 새로움을 상찬하는가 하면 한국 사회에 만연한 음모론에 대입시켜 영화를 해석하기도 했다. 영화 ‘곡성’에 이렇듯 활기찬 해석들이 가해진 것은 현실의 시공간을 배경으로 했으되 현실을 넘어서거나 현실에는 없는, 합리적인 설명이나 논증이 불가능한 ‘진실’을 다루려 했기 때문일 것이다. 영화 전반을 지배하던 낯설고 음산한 공포감도 한몫했겠고 말이다. 마을을 덮친 연쇄적인 죽음과 공포감을 배가시킨 이면에는 ‘곡성’의 자연 풍광이 자리하고 있었으리라 짐작한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자연의 색조가 너무 아름다워 곡성의 비극이 더 선연하고 생생하게 느껴졌다. 나무로 우거진 습지며, 굽이진 도로 저편으로 끝없이 펼쳐지는 산의 굴곡이며, 섬진강의 푸른 물줄기며, 하다못해 쓰러진 지붕과 낡은 기둥과 흙먼지로 가득한 폐가마저 눈길을 사로잡았다. 현실에는 없을 것 같은, 그래서 더 가보고 싶은, 내 눈과 발로 곳곳을 확인하고 싶다는 열망이 영화를 보는 내내 차올랐다. 그 마음이 희미해지는 동안 가을이 시작되었고 ‘울금’이라는 낯선 식물에 대해 전해 들었다. 그리고 우연인지 운명인지, 울금 재배지 중 한곳이 ‘곡성’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 글쓴이 소설가 진연주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방’(房)으로 등단. 2015년 ㈜문학동네에서 장편소설 ‘코케인’ 출간.
  • 61만원 vs 13만원…서울 자치구 ‘제각각 출산 장려금’

    서울 내 25개 자치구가 지급하는 출산장려금이 천차만별인 것으로 나타났다. 1인당 출산장려금을 가장 많이 지급한 중랑구와 가장 적게 지급한 마포구가 약 4.5배나 차이가 났다. 국회 안전행정위원회 소속 백재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4일 서울시로부터 제출받은 ‘자치구 출산장려금 지원 현황’에 따르면, 2011년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강남구는 99.5억원, 서초구 72.3억원, 중랑구 49.4억원, 송파구 48.4억원, 양천구 38.5억원의 출산장려금을 지급했다. 반면 강서구는 가장 적은 3.6억원을 출산장려금으로 지출했고, 그 뒤를 중구 9.3억원, 종로구 13.2억원, 동작구 13.2억원, 광진구 13.3억원 순으로 이었다. ‘부자 동네’인 강남·서초구가 출생별 지원액이 많은 덕분으로 풀이됐다. 하지만 1인당 출산장려금 지원액은 중랑구가 61만원으로 가장 많았다. 이어 종로구 59만원, 강남구 53만원, 금천구 46만원, 양천구 45만원 순으로 나타났다. 가장 적은 액수인 13만원을 지급한 마포구는 1위 중랑구와는 약 4.5배 차이가 났다. 총액 기준으로는 꼴찌권인 종로구도 2위에 올랐다. 한편 노원구 15만원, 서대문구 16만원, 동작구 17만원 순으로 액수가 적었다. 백 의원은 “자치구마다 출산장려금 지원액이 상이한 것은 출산율 차이도 있지만 무엇보다 지원 기준이 되는 거주 기간, 지원 금액이 다르기 때문”이라며 “지자체 예산 상황을 반영해야겠지만 서울시민이라면 어느 정도 일관된 기준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재연 기자 oscal@seoul.co.kr
  •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쭉~ 늘어나는 임실치즈… 체험하는 재미도 쭉~ 늘어나요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쭉~ 늘어나는 임실치즈… 체험하는 재미도 쭉~ 늘어나요

    “치즈의 고장 전북 임실에서 ‘대한민국 원조 치즈’의 맛과 멋을 즐겨보세요.” 대한민국에서 처음으로 치즈를 생산한 전북 임실군에서 ‘임실N치즈축제’가 개최된다. 오감만족 체험형 축제인 임실N치즈축제는 6일부터 9일까지 성수면 치즈테마파크와 치즈마을 일원에서 열린다. 임실치즈의 역사는 50여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8년 전북 임실에 벨기에 출신 ‘파란 눈의 사제’ 가 선교사로 부임했다. 디디에 세스테벤스(85). 한글 이름도 지었다. 지정환 신부다. 그는 가난한 산촌 주민들을 위해 낙농업을 일으키기로 마음먹었다. 산이 많고 농경지가 적은 임실은 낙농 최적지라고 판단했다. 그는 산양 두 마리로 축산을 시작했다. 산양유를 생산했지만, 판매가 신통치 않았다. 지 신부는 남은 산양유를 이용해 치즈를 만들었다. 1967년 처음 생산한 치즈는 맛과 냄새가 생소하고 제조기술도 떨어져 실패를 거듭했다. 그러나 지 신부는 실망하지 않았다. 지 신부는 프랑스로 건너가 치즈 제조 기술을 배워왔다. 1968년 국내 최초로 카망베르 치즈를 생산했다. 1970년에는 3개월 이상 보관 가능한 체다치즈를 만들어 조선호텔에 납품했다. 1976년부터 서울 명동 피자가게의 요청으로 모차렐라 치즈를 생산하며 국내 치즈 시장을 개척했다. 임실 치즈가 좋은 이유는 목장형 유가공 제품이기 때문이다. 목장형 유가공 제품은 새벽에 농가들이 직접 짠 가장 신선한 원유를 가공해 유제품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는 대기업에서 원유를 수집해 대량 생산하는 공장형 제품과 차별화했다. 임실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천혜의 생태환경을 유지하고 있어 건강한 청정 원유를 생산하고, 이것이 임실 치즈 품질을 결정한다. 또한 색소, 향료, 방부제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친환경제품이다. 치즈연구소에서 품질관리를 철저히 하고 제조기술을 향상시켜 수입품이나 대기업 제품에 뒤지지 않는 뛰어난 맛과 품질을 자랑한다. 임실N치즈축제는 지역의 명물인 치즈와 전통문화가 어우러지고, 체험, 휴식, 교육, 경관, 산업, 관광 등을 한자리에서 할 수 있는 6차 산업의 대표 모델을 제시해 의미가 있다. 올 치츠축제에서는 보고, 먹고, 체험할 수 있는 6개 분야 63개 프로그램이 마련됐다. 아름다운 임실의 자연과 함께 다채로운 문화콘텐츠를 즐길 수 있다. 치즈를 이용한 행사는 물론 흥겨운 농악공연, 다양한 공예체험, 각종 경연대회가 풍성하게 펼쳐진다. 치즈테마파크에는 형형색색의 국화 3만 그루를 전시해 축제를 찾는 관광객들에게 편안한 휴식과 최고의 힐링 공간을 제공한다. 치즈테마파크의 랜드마크인 치즈캐슬은 유럽의 성을 재현한 모습이다. 1층 250석 규모의 치즈전문식당 ‘프로마쥬 레스토랑’에서는 임실 치즈를 듬뿍 넣은 피자와 파스타 등 각종 치즈요리를 맛볼 수 있다. 2층 홍보관에서는 임실치즈의 탄생부터 대표 브랜드 성장 과정을 한눈에 살펴볼 수 있다. 언덕 위에 우뚝 선 치즈모형의 전망대에서 오르면 테마파크와 치즈마을의 아름답고 평화로운 경관이 발아래 펼쳐진다. 전망대 주변 포토존은 가족과 연인들의 추억 만들기 장소로 최고 인기다. 푸른 잔디밭 위에서 펼쳐지는 썰매타기도 어린이들에게 빼놓을 수 없는 프로그램이다. 임실N치즈축제는 관광객들이 참여하는 프로그램이 인기다. 1967년 지정환 신부가 국내 최초로 치즈를 생산한 것을 기념해 ‘1967! 토피어리 긴 피자만들기’, ‘1967! 치즈 떡볶이 나눔행사’가 열린다. 치즈고추장으로 만든 주먹밥으로 한우 모형을 완성하는 ‘임실N치즈&한우 모자이크’, 치즈를 쭉쭉 늘려보는 놀이 ‘가족대항 쭉쭉 늘~려, 내 치즈’ 프로그램이 마련돼 있다. 관광객들이 피자 재료를 직접 토핑한 후 화덕에 굽는 ‘와일드 화덕체험’도 잊을 수 없는 맛과 추억을 안겨준다. 임실N치즈축제 홍보대사인 최현석 셰프가 참여하는 ‘스타셰프 챌린지’는 9일 치즈캐슬 앞 분수광장에서 열린다. 다양한 레시피로 푸드트럭 치즈요리를 선보인다. 축제장을 방문하는 관광객의 입맛을 사로잡기 위해 임실군 읍·면 생활개선회원들이 발굴한 향토음식 12종과 부메뉴 39종도 향토음식관에서 맛볼 수 있다. 고품질 임실 한우도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다. 치즈축제에서는 각종 문화행사도 무대에 오른다. 지역주민 참여 공연인 뮤지컬 동자바위 전설, 필봉농악 중뱅이골 공연, 35사단 군악대 퍼레이드가 열린다. 경연 행사인 복면가왕! 전국청소년뮤직페스티벌, 임실N치즈 UCC공모전, 치즈경매 이벤트도 진행된다. 전국의 치즈 매니아와 공예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치즈조각 공연대회, 전국 어린이 창작동요제도 관람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다. 치즈가든파티, 나만의 피자 만들기, 크림치즈체험, 벨기에 먹거리 체험, 향교문화체험, 병영문화체험, 두부 만들기, 대형 캐릭터 연날리기, 낙농체험 등 참여행사와 즐길거리도 풍성하다. 임실치즈테마파크는 국내에서 유일하게 치즈를 테마로 한 체험형 관광지다. 치즈의 모든 것을 살펴보고 만들고 맛볼 수 있는 복합관광 명소다. 치즈테마파크는 2011년 임실군 성수면 도인리 일대에 조성됐다. 14만 8000㎡(축구장 20개)의 드넓은 부지에 스위스풍의 아름다운 건축물들을 건립했다. 이곳에는 치즈체험장, 치즈과학연구소, 유가공공장, 홍보관, 판매장 등을 집적화해 치즈 종합특구 기능을 하고 있다. 치즈 생산, 연구개발, 체험학습, 판매, 축제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을 테마파크에서 하고 있다. 스위스 아펜젤 마을 풍경을 재현한 이곳은 전북도 1시군 1대표 관광지로 선정돼 임실군 관광의 거점 역할을 하고 있다. 올 한 해 유료 관람객이 임실군 인구(3만명)의 5배인 15만 명을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치즈마을’은 한국 치즈의 원조 임실치즈의 뿌리를 가진 마을이다. 느티나무가 많아 느티마을로 불리다가 마을 총회에서 치즈마을로 개칭했다. 80농가 155명의 주민들이 합심하여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운 치즈마을’을 가꾸고 있다. 임실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낙원상가…쇠락과 번성 사이를 흐르는 선율

    [윤기자의 콕 찍어주는 그곳] 낙원상가…쇠락과 번성 사이를 흐르는 선율

    “그렇게 하고 싶어하던 음악하고 사니까 행복하냐구… 진짜루 궁금해서 그래… 행복하냐…?” 영화 '와이키키 브라더스'에 나오는 대사다. 밤무대와 카바레를 전전하는 4인조 밴드의 삶을 보여주는 감독의 메시지는 역설적으로 우울하다. 한때 그들도 '음악'을 통해 세상을 품을 수 있는 '낙원(樂園)'을 꿈꾸었을 것이다. 종로구 낙원동에서. 정확한 주소는 서울특별시 종로구 낙원동 284-6번지 낙원악기상가이지만 그냥 ‘탑골공원’ 옆쯤으로 퉁쳐도 얼추 누구든 찾아가기 쉬운 자리에 있다. 이곳에서 우리는 ‘월남참전전우회’ 새겨진 붉은 색 등산조끼차림의 군복입은 늙은 섹스폰 연주자가 힘겹게 내뱉는 ‘사랑밖에 난 몰라’를 들을 수도 있다. 혹은 폭염 속에서도 검은 가죽 재킷으로 온 몸을 감싼, 열정의 홍대 인디 록 밴드들의 달뜬 미소도 만날 수 있다. 세대(世代)는 음악을 통해, 악기를 통해 낙원동에서 이어진다.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의 악기상점, 낙원악기상가이다. ●조선후기 여흥문화가 있던 자리 그대로 애당초 이곳에는 '악사'(樂士)들이 모여들 수 밖에 없었다. 지리적으로 낙원동, 인사동, 익선동은 조선시대부터 온갖 기방(妓房)들이 들어서 있던 곳이니 거문고나 가야금 둘러멘 가객(歌客)들이 늘상 북적대던 곳이었다. 더구나 조선의 법궁(法宮·임금이 거주하는 곳)이었던 창덕궁, 운현궁 주변에 머물던 한량이나 다름없던 고관대작(高官大爵)들과 그들의 망나니같은 막내 아들 한 명 쯤이, 분명 피맛골 배나무집 뒷방 사는 기생 치맛폭에서 아비 얼굴에 똥칠했다는 일화쯤이야 그리 놀라운 일도 아닌 동네였다. 또한 조선 팔도 온갖 뇌물과 진상품을 들고 궁궐 앞 서성이던, 현감(縣監)자리 하나 추렴하려는, 마음 삐뚜름한 지방 부호(富戶)들의 대기 장소이기도 하였다. 조선의 밤은 이곳에서 열리고 닫혔다. 사실 낙원상가가 우리나라 최초의 주상복합건물로 많이 알려져 있는데, 그렇지는 않다. 실제 낙원상가는 1968년에 올려졌고, 이보다 앞서 바로 옆동네 세운전자상가가 1967년에 만들어진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였다. 이 세운상가에는 당시의 부자들이나 고위공무원들이 거주하였고, 낙원상가는 기존의 낙원동에 있던 낙원시장의 대체부지로 만들어진 공간이었다. 바로 이렇기 때문에 세운상가와는 달리 낙원상가는 실용적 목적에 기반을 둔 건축물이어서 격벽(隔璧)이 많지 않아 쇼핑객들의 동선이 사통팔달(四通八達) 다 뚫려 편한 느낌이다. 처음부터 이곳에 악기점들이 들어선 것은 아니었다. 원래 낙원상가는 양품점, 즉 의류상가가 주류를 이루었다. 그러나 원래 1960년대부터 피맛골, 종로2가 주변에 당시 음악다방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또한 이 시기에는 미8군에서 활동하던 밴드들의 영향으로 젊은 층의 악기 수요가 일어나던 시기였다. 이에 종묘 주변과 종로2가, 3가에 풍금이나 피아노, 기타 등을 판매하는 점포들이 들어서기 시작하였다. 한국대중음악의 1세대이자, 기타문화를 불러일으킨 ‘트윈폴리오’가 데뷔한 ‘세시봉’도 원래 이곳 종로2가에도 있다가 인근 서린동으로 옮겨 간 당대 최고의 음악다방이었다. 그러다 1979년 서울시의 탑골공원 정비사업의 일환으로 종로 2가와 종묘주변에 몰려있던 악기점들이 대거 낙원상가 안으로 이주하게 된다. 진정한 낙원악기상가의 시작이다. ●낙원악기상가의 전성기와 암흑기를 거쳐 문화거리로 1982년 1월 6일 자정, 야간 통행금지가 해제되면서 낙원악기상가는 최고의 전성기를 누린다. 아시안게임, 올림픽과 더불어 밤문화시설(?)들이 폭발적으로 늘어남으로써 전국 각지에 라이브 밴드 수요가 빗발치게 된다. 바로 이 인력 및 악기 수요를 다 맞추어내는 공간이 낙원악기상가였다. 낙원상가 관계자의 말을 빌리면, 1980년대 후반에는 건반 연주자가, 드럼 연주법을 점포 주인에게 반나절 배워 봉고 타고 동두천으로 성남으로 다녔다고 한다. 한 달 후 뭉칫돈 들고 헐레벌레 뛰어와 맘에 넣어둔 야마하(YAMAHA) 건반을 사들고 가는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낙원상가는 악기판매점이었고, 단기속성 음악학원이었고, 유흥업소와 연주자들을 이어주는 직업소개소였으며, 급전 돌리는 전당포였다. 꿈만 같던 시절이었다. 1997년 IMF의 직격탄은 낙원상가가 다 맞았다. 말 그대로 신기하게도 한 사람도 보이지 않을 정도였으니, 육이오 피난 시절에도 사람은 보였다는데 갑자기 모든 시간이 끊긴 듯 하였다. 수천 만원짜리 그랜드 피아노가 고작 수 백만원에 몸을 낮추어 팔아도 이를 싣고 갈 트럭을 못 구할 정도였으니 눈물 한 번 단단히 흘린 시절이었다. 다행히도 2000년대 들어서 교회 CCM 찬양 밴드의 지속적인 등장, 각종 대학교의 실용음악학과의 개설, 그리고 클럽문화로 인한 인디밴드의 결성 등으로 낙원악기상가는 비록 예전만 못할지라도 다시금 부활의 문턱에 들어서고 있다. 현재 서울시는 창덕궁 앞 재생계획을 발표하여 2018년까지 200억원 사업비를 들여 낙원상가주변을 궁중문화와 대중음악 중심인 근현대 문화지대로 재편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또한 상가 옥상에 공원과 상설무대를 만들어 명실상부한 한국 음악의 중심지로 낙원악기상가의 모습을 바꿀 예정이다. <낙원악기상가에 대한 여행 10문답> -아래 질문은 실제 독자들이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을 바탕으로 만든 10문답입니다. 1.꼭 가봐야 할 정도로 중요한 여행지야? -일반인에게는 ‘꼭’이라는 부사는 빼도 된다. 하지만, 음악에 관심이 있거나, 관련 업종에 있는 사람들이라면 우리나라 최고의 방문지가 될 것은 분명하다. 2. 교통편은 어때? -탑골공원 뒤에 있다. 5호선 종로3가역 5번 출구가 가장 가깝다. 3. 인근 편의시설, 주차장 등의 시설환경은 괜찮은가? -왠만하면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을 추천한다. 자동차로 이동할 경우 없던 종교라도 하나 믿고 들어가는 것이 낫다. 출, 퇴근 시간이나 주말의 경우 무조건 대중교통을 이용하길 바란다. 4. 주변에 맛집은 있나? -낙원상가 주변는 예로부터 낙원떡집 거리를 비롯한 진정한 먹거리의 천국이다. 특히 종로 5가쪽으로 펼쳐지는 포장마차촌은 종로 뒷골목의 운치를 제대로 느끼게 해준다. 5. 직원이나 주변 상인들은 친절한가? - 친절하다. 다른 곳보다는 악기나 음악을 다루는 분들이어서 기본적으로 상냥한 편이다. 참고로, 이곳 매장 직원들 앞에서 연주 실력 뽐내지는 말기를. 유명 그룹 프로 연주자들도 한 수 가르침을 받고 가는 고수(高手)들이 모여 있다고 보면 된다. 6. 운영시간은? - 평일, 토요일 9시~20시/ 토요일 일부매장 오픈/ 일요일이나 공휴일은 쉬는 가게가 많음. 7. 이 곳에서 가장 감탄하는 점은 어떤 것? -악기의 가격과 종류들. 전 세계 희귀한 악기들도 많이 볼 수 있다. 8. 홈페이지 주소와 도움되는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은? -전화 (02)743-6131/ 팩스(02)743-7070/ 홈페이지 www.enakwon.com 9. 주변에 더 볼거리는? -낙원떡집 거리. 운현궁, 종묘, 인사동 거리 외 종로 구석구석. 10. 총평 및 당부사항 - 원악기상가는 관광지가 아닌 건강한 생계의 공간이다. 단지, 이곳을 여행지로만 방문한다면 약간은 부담스러울 수도 있다. 그럼에도 우리나라 악기산업의 메카라는 사실 하나는 기억하고 방문하자. 글·사진 윤경민 여행전문 프리랜서 기자 vieniame2017@gmail.com
  • 동네 타짜·흡연 학생 해결한 112사랑방

    동네 타짜·흡연 학생 해결한 112사랑방

    신고 꺼리는 사건들 ‘접수 창구’ 경찰들, 몇 달간 순찰 돌며 해결 주민들 “큰 범죄 예방 효과도” “중학생 열댓 명이 골목에 모여 담배 피우고 뽀뽀하다가 어른들이 뭐라고 하면 되레 성을 내서 얼마나 무서웠는데요. ‘112사랑방’을 운영한 뒤에는 학생들이 덜 모이더라고요. 이제 거의 자취를 감췄죠.” 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서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이모(74·여)씨는 휘경파출소에서 112사랑방 제도를 시작한 지 7개월 만에 동네가 몰라보게 안전해졌다고 말했다. 휘경파출소는 지난 2월 18일 주민들이 자주 모이고 주인이 동네 사정을 잘 아는 가게를 선정해 사랑방으로 지정했다. 주민들의 건의 사항과 민원을 더 자세히 듣고 해결하겠다는 취지였다. 현재 슈퍼마켓, 세탁소, 금은방 등 총 7개의 사랑방이 운영되고 있다. 주민들은 경찰에 신고하기 껄끄러운 문제를 사랑방에 털어놓았다. 골칫덩이였던 중학생들의 ‘아지트’도 그중 하나였다. 몇 년 전부터 근처 중학생들이 학교가 끝나면 하나둘 이 골목에 모여들더니 어느샌가 아지트가 돼 버렸다. 학생들은 한데 모여 담배를 피우고 남녀가 섞여 낯뜨거운 스킨십을 했다. 훈계를 하면 오히려 “우리 엄마·아빠도 아니면서 무슨 상관이냐”며 대들거나 잠깐 도망가는 척하다가 다시 모이곤 했다. 김모(70)씨는 학생들을 혼냈다가 보복을 당했다. 학생들이 가게 입구 앞에 쓰레기를 잔뜩 쌓아 둔 것이다. 사랑방을 통해 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은 이후 매일 한 번씩 이 골목에 가서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학교와 학부모에게도 이 사실을 알렸다. 문영호(56) 휘경파출소장은 “처음에는 반항하는 학생들도 있었다”면서 “몇 달 동안 매일 찾아가서 어르고 달래면서 학생들과 신뢰를 쌓았다. 두세 달이 지나자 아이들이 골목에 나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동네 타짜’들의 상습도박 문제도 해결했다. 휘경동 주민 김모(56)씨 등 8명은 수년 동안 동네 포장마차에 모여 화투를 쳤다. 이들은 고성을 내거나 시비를 벌여 주민들의 불만을 샀다. 하지만 주민들은 해코지를 당할까 겁이 나 경찰에 신고하지 못했다. 경찰은 사랑방에서 이 이야기를 전해 듣고 출동해 김씨 등을 도박 혐의로 즉결심판에 넘겼다. 이 외에도 주민들이 밤에 다니기 불안해하는 휘경2재정비촉진구역 심야 순찰 강화, 층간소음 문제 해결, 취객 에스코트 등 생활밀착형 서비스를 제공해 주민의 호응을 얻었다. 휘경동에서 30년 넘게 산 이정운(66)씨는 “층간소음 때문에 살인도 나고, 취객을 상대로 몹쓸 짓도 벌어지는 게 요즘 세상인데 112사랑방이 동네에서 일어나는 사소한 문제를 해결해 큰 범죄를 예방하는 효과가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글 사진 강신 기자 xin@seoul.co.kr
  • 반포·잠원도 재건축 ‘후끈’

    반포·잠원도 재건축 ‘후끈’

    “원래 강남쪽 사람들은 개포동보다는 반포·잠원을 선호하죠. 가격이 개포 재건축과 비슷하게 나와서 그런지 관심이 더 많은 것 같아요.”(서초구 잠원동 A부동산) 서울 강남구 개포동에서 시작된 강남 재건축 바람이 서초구 반포·잠원까지 이어지고 있다. 지난 8월 분양한 ‘디 에이치 아너힐즈’(개포3단지 재건축)는 평균 100.6대1이라는 높은 청약률을 보였다. 하반기 강남권에서는 아파트 재건축으로 6355가구가 공급된다. 서초구 1423가구, 강동구가 4932가구다. 이 중 일반 분양 물량은 각각 283가구와 2010가구다. ●“진짜 강남으로”… 개포동보다 인기 지난달 23일 대림산업은 서초구 반포동에서 ‘아크로 리버뷰’ 모델하우스를 열고 분양을 진행하고 있다. 신반포5차를 재건축하는 이 단지는 총 595가구 중 41가구가 일반 분양이다. 최근 주택도시보증공사(HUG)로부터 3.3㎡당 평균 4200만원 이하로 분양 보증을 받았다. 일반 분양 물량 중 가장 높은 10층의 1가구는 한강 조망이 가능해 분양가가 3.3㎡당 4500만원이 넘는다. 청약은 이달 5일이다. 잠원동에서 삼성물산이 신반포 18·24차를 재건축하는 ‘래미안 신반포 리오센트’도 이달 중 분양한다. 분양 물량 475가구 중 일반 분양은 146가구다. 이 단지는 신반포5차, 16차와 나란히 한강변에 있다. 부동산 업계에서는 반포와 잠원 재건축 아파트를 이전에 분양한 개포동 재건축 아파트보다 높게 평가한다. 반포·잠원이 한강변에 위치해 있고, 광화문과 강남 업무지구 양쪽으로 이동하기 편하면서 학군도 우수하다는 이유에서다. 단지 인근에는 반원초, 신동초·중, 경원중, 세화고, 현대고 등 소위 8학군에 속하는 학교들이 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반포의 한 공인중개사는 “반포와 잠원은 대형 평형이 적지 않아 전통적인 강남지역에서도 전통적인 부촌으로 불리는 곳”이라면서 “강남에 살다 결혼을 하면서 여의도나 용산으로 떠났던 40대들의 문의가 많다”고 말했다. 아이들이 크면서 교육 여건이 좋고 예전에 자신들이 살던 동네로 다시 오고 싶어 하는 부유층이 많다고 덧붙였다. 대림산업 관계자는 “반포와 잠원 일대 아파트들은 개발 당시부터 중앙부처 고위 공무원과 법조인, 기업 임원 등이 많이 살던 곳으로 이제 30~40대가 된 그 자녀들이 관심이 많다”고 전했다. 최근 정부가 강남 재건축 아파트 분양가 규제에 들어간 것도 인기를 끄는 이유 중 하나다. 한 부동산 관계자는 “4200만원 안팎의 분양가가 싸다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지만 이제 입주하는 새 아파트의 가격이 3.3㎡당 5000만원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메리트가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가 강남 재건축 아파트 분양가를 잡겠다고 나서면서 청약 당첨이 로또가 되고 있는 점도 인기 요인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분양권을 되팔아 차익을 실현하려는 투자 목적이라면 신중해야 한다. 박원갑 KB국민은행 부동산수석전문위원은 “중도금 1회분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투자가 가능할 것”이라면서 “정부가 분양권 불법 거래 단속에 강한 의지를 밝히고 있는 만큼 단기투자는 어려울 수 있다”고 말했다. ●초과이익환수제 부활 전 사업 서둘러 2개 단지가 분양에 들어가는 사이 다른 재건축 단지들도 속도를 내고 있다. 2018년 재건축 초과이익환수제 부활을 앞두고 있어서다. 초과이익환수제는 재건축으로 얻는 이익이 조합원 1인당 평균 3000만원을 넘으면 이를 제외한 초과 금액을 이익 규모에 따라 최대 50%까지 부담금 형태로 정부가 환수하는 제도다. 투기가 기승을 부리던 2006년 도입돼 2012년까지 부과됐다가 2013년 정부가 부동산 경기를 살리겠다며 유예 결정을 내렸다. 현재는 2017년 말까지 집행이 한시적으로 유예된 상태다. 건설사 관계자는 “올해 들어 가격이 급등한 강남 재건축 아파트들은 (초과이익환수제가 시행되면) 수익성이 악화되기 때문에 최근 들어 사업 진행을 서두르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로 지난 8월 29일 신반포6차(센트럴자이)가 관리처분인가를 받은 데 이어 이틀 뒤인 8월 31일에는 신반포 19차 재건축 조합이 조합설립인가를 받아냈다. 신반포7차 재건축 조합은 사업 속도를 올리기 위해 신반포 22차와 통합 재건축을 추진하려던 계획 대신 따로 재건축을 추진하기로 했다. 반포주공1단지, 잠원동 한신4지구 등 조합설립인가 이상 단계에 진입한 사업지들도 최대한 속도를 내고 있다. 김동현 기자 moses@seoul.co.kr
  • 한해 40억개 우편물 배달하고 ‘포스트 페이’로 경조금 보내고

    한해 40억개 우편물 배달하고 ‘포스트 페이’로 경조금 보내고

    실시간으로 연락을 주고받는 인터넷 메신저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일상인 시대다. 상대방에게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관계가 소원해지기 십상이다. 어디든지 최소 하루 이상 걸리는 편지가 우리 곁에서 멀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우푯값이 얼마인지, 동네 우체통은 어디에 있는지를 아는 게 신기할 정도다. ‘우체국은 곧 망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나올 법도 하지만, 그럼에도 우정사업본부는 연간 40억개의 우편물을 도서 지역까지 배달하는 보편적 서비스부터 알뜰폰 사업, 핀테크 서비스인 ‘포스트 페이’까지 다양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예금과 보험 등 금융사업에 힘입어 매년 3000억~4000억원의 영업이익을 올리고 있기도 하다. 아날로그와 디지털, 보편과 변화가 공존하는 우체국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우표는 크게 보통우표와 기념우표로 나뉜다. 보통우표는 우편요금의 납부를 주목적으로 하는 우표로 우체국에서 상시적으로 판매하는 우표를 뜻한다. 기념우표는 국내 중요 행사나 사건, 인물 등이 들어가며 발매 기간이 정해져 있다. 현재 보통우표의 가격은 25g짜리 통상우편 기준으로 300원이다. 보통우표의 발행량은 2006년 2억 500만여장에 달했으나 지난해는 6000만여장으로 뚝 떨어졌다. 약 10년 만에 4분의1이 된 셈이다. 이렇게 수치로만 보면 우표 발행량은 급격히 감소하고 있지만, 일종의 ‘문화’로서 기능은 여전하다. ‘우취’, ‘까세’ 등 우표 수집 용어들은 아직 건재하다. ‘우취’란 우표를 수집하는 취미를 줄인 말로 우표 수집가는 우취인이라고 부른다. ‘까세’란 우편봉투에 그려진 도안을 의미한다. 보통 기념우표 발행에 맞춰 해당 우표와 디자인을 맞춘 그림이 들어가 있는 봉투가 만들어진다. ●우표 속 정치·경제·문화·역사 등 담겨 우표 속에 정치, 경제, 문화, 역사 등이 담겨 있다 보니 우표는 시대의 기록을 담고 과거와 현재를 잇는 소통의 매개체가 된다. 미국의 32대 대통령이었던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우표에서 얻은 지식이 학교에서 배운 것보다 많다”고 말하기도 했다. 우표의 크기는 통상 가로, 세로 2~4㎝이지만 담을 수 있는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우표 때문에 전쟁이 벌어지기도 하고 인쇄상 오류로 탄생한 우표가 희귀 우표가 되기도 한다. 세계 최초의 우표는 1840년 5월 6일 영국 여왕 즉위식 때 빅토리아 여왕의 초상을 넣어 발행한 흑색의 1페니 우표(페니 블랙)다. 그로부터 이틀 후 청색의 2펜스 우표가 발행됐다. 우리나라 최초 우표는 ‘페니 블랙’보다 44년 늦은 1884년 11월 첫선을 보였다. 신진 개혁파 정치인이던 홍영식이 중심이 돼 우정총국을 설치하고 업무를 시작하면서 ‘문위우표’를 발행했다. 문위란 이름은 당시 화폐 단위가 ‘문’(文)이어서 나중에 붙여졌다. 원래 5문, 10문, 25문, 50문, 100문짜리 등 모두 다섯 종을 일본 대장성 인쇄국에 의뢰해 인쇄했지만 우정총국 업무 개시일까지 5문 우표와 10문 우표 두 종만 도착했다. 결국 나머지는 갑신정변으로 우정총국이 폐쇄된 후에 도착되는 바람에 사용되지 못했다. 우표에 얽힌 사연들도 다양하다. 세계 희귀 우표로 꼽히는 ‘뒤집힌 제니’ 우표도 그중 하나다. 1918년 미국 최초로 발행된 항공우표로 원래 우편용 비행기인 ‘커티스 제니’의 모습을 담으려고 했는데 제작 과정의 실수로 파란색 부분이 뒤집힌 채 인쇄됐다. 당시 이 우푯값은 24센트였지만 현재 100만 달러(약 11억 450만원)를 호가하고 있다. 우표는 정치적 공방을 넘어서 국가 간 전쟁을 일으키기도 한다. 1933년 파라과이와 볼리비아 간의 ‘그란 차코 전쟁’은 ‘우표전쟁’이라고 불린다. 당시 두 나라는 서로 차코 지방을 자신의 영토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파라과이가 차코 지방을 그린 우표를 내자 볼리비아도 뒤질세라 우표를 발행했다. 우표에서 유발된 양국의 싸움은 전쟁으로까지 번졌다. 우표 디자인은 시대를 따라 큰 변화를 겪었다. 정부 수립 때부터 1960년대까지는 인쇄 기술이 떨어져 단색 분판을 통해 도안이 됐다. 1970~1994년에는 60년대 후반 도입된 컬러 인쇄기계의 힘으로 다양한 색상이 재현됐다. 당시 우표는 핸드 드로잉에 의존해 아날로그적인 멋을 가지고 있었다. 1995년부터 2000년까지는 컴퓨터그래픽의 다양한 기법을 적용하면서 이미지를 합성·변형하거나 특수 시각효과를 넣은 디자인이 대다수였다. 2000년 이후의 우표는 핸드 드로잉이 주는 감성적 장점과 다양한 컴퓨터그래픽 특수효과의 장점을 합친 ‘디지로그’ 디자인을 선보이고 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색깔이 바뀌는 시변각 우표, 향기우표, 야광 우표, 스티커 우표 등 이목을 끄는 우표들도 나온다. ●우체국 예금 1905년·보험 1929년부터 시작 일반인이 아는 것보다 꽤 오래전부터 우체국은 예금과 보험 업무를 해 왔다. 우편 업무의 시초가 1884년이었다면 예금과 보험 업무는 각각 1905년과 1929년에 시작됐다. 1977년 농협에 예금·보험 업무를 넘겼다가 경영 손실을 보전하기 위해 1983년 다시 가져왔다. 전국 3500여개 우체국의 절반이 넘는 약 55%가 도시가 아닌 시골에 위치해 우체국예금과 보험을 통해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수익성이 낮아 민간 금융기관에서 서비스 제공을 기피하는 농어촌이나 도서 지역 주민들을 위해 현금 입출금, 생명보험, 공과금 수납, 해외송금 등 보편적 금융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우정사업본부의 가장 큰 업무는 여전히 우편 서비스지만, 일감이 되는 물동량 감소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우정사업본부의 물동량은 일반우편물, 등기, 소포·택배, 국제우편 등을 합쳐 2002년 55억 3677만개으로 최고점을 찍었다. 이후 2006년 48억 4185만개, 2014년 42억 8434만개, 지난해 40억 2051만개으로 가파른 감소세를 타고 있다. 2011년부터는 예금·보험을 제외한 우편사업은 적자를 나타내고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전국에 거미줄처럼 퍼져 있는 우체국의 물류망, 금융망, 전산망 등을 활용해 다양한 사업을 벌이고 있다. 2013년에 시작한 알뜰폰 수탁 판매와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 농어촌 지역 특산물의 판로를 개척하기 위한 우체국 쇼핑 사업도 활발하다. 우체국망과 온라인 쇼핑을 통해 김, 멸치, 과일, 한과 등 479개 품목 9200여종의 농수산물을 판매해 지난해 1931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우체국의 새로운 시도는 계속되고 있다. 올 3월부터 핀테크 서비스인 ‘포스트 페이’를 출범시켰다. 포스트 페이는 우체국의 특화 서비스인 경조금 배달 서비스를 핀테크와 접목한 간편송금·간편결제 서비스로 휴대전화 번호만으로도 경조사비를 보낼 수 있다. 우정사업본부는 현재 미래창조과학부에 소속된 정부 기관으로 고위공무원 가급(1급 상당)이 본부장을 맡고 있다. 우정사업본부 관계자는 “알뜰폰 사업이나 포스트 페이처럼 국가 시책에 부합하면서 우수한 중소기업도 도울 수 있는 사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며 “드론을 이용한 택배 서비스와 같은 새로운 시도들을 적극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한길 큰길 그가 말하다]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나가 서울신문이랑 인연이 아주 깊지라. 대학교 1학년 때 문무대를 들어갔는데 서울신문에서 파란 눈 외국인 학생이 입소했다고 나를 대문짝만 허게 써줘붑디다. 그래서 나가 지금도 서울신문을 상당히 좋아허요.” 190㎝ 장신에 정말로 솥뚜껑만 한 손. 쩌렁쩌렁한 목소리에 실린 전라도 사투리가 위에서 아래로 내리꽂히는 듯하다. 지난 9일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실에서 만난 인요한(57)은 대뜸 벽에 걸린 붓글씨를 가리키며 “무슨 뜻인지 아느냐”고 물었다. ‘地不如順天’(지불여순천). “기름지고 풍성한 땅은 순천만 한 곳이 없다”며 흥선대원군이 썼던 표현이다. 전라도 출신이라는 사실에 그렇게 자부심을 느끼고, 그렇게 소리높여 말하기로는 그만한 사람이 없을 성싶었다. 그는 기자를 만나서도 첫마디를 예의 “전라도 순천 촌놈 인요한입니다”로 시작했다. -“거짓으로 신고한 게 탄로 나면 나는 어떻게 될까. 그냥 추방당하는 걸로 끝날까, 혹시 남조선 첩자로 몰려 정치범 수용소 같은 데 끌려가는 건 아닐까.” 1997년 1월 21일 중국 선양을 떠나 북한으로 들어가는 기차 안. 창밖으로 보이는 하얗고 차가운 풍경처럼 내 마음도 스산하기 그지없었다. 남한에서 의사로 일한다고 하면 못 들어오게 할까 봐 선양 주재 북한대표부에 ‘미국 거주자’라고 허위 신고를 해 겨우 방북 허가를 받은 터였다. 한참을 달려 북·중 국경인 압록강에 다다르자 강둑에서 북한 아이들 네댓 명이 드럼통에 불을 지펴 놓고 앉아 까르륵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얼굴의 시커먼 검댕도 지우지 못하는 어린아이들의 해맑은 웃음. 갑자기 왈칵 눈물이 솟았다. 순천에서 천둥벌거숭이로 지냈던 나의 어린 시절이 떠올랐기 때문이기도 했고, 북한에도 남한과 똑같이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데서 솟구친 가슴 벅찬 느꺼움 때문이기도 했다. -우리 집안은 1959년 전북 전주에서 내가 태어나자마자 순천으로 터를 옮겼다. 내 이름이 한국어로 인요한, 영어로 존 린턴인데 사람들은 내 영어 이름 ‘존’을 따서 ‘짠이’라고 불렀다. 어린 시절 매곡동 일대를 내 집 마당처럼 휘젓고 다녔는데, ‘매곡동 짠이’라고 하면 모르는 동네 사람이 거의 없었다. 생김새가 다른 서양 아이여서도 그랬지만, 워낙 동네 구석구석을 망아지처럼 훑고 다녔기 때문이다. -나는 스코틀랜드 장로교 가문의 후손임을 자랑스럽게 여기지만, 더욱 분명한 내 정체성은 전라도 사람이라는 데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순천 촌놈입니다”라고 하면 사람들을 웃겨 보려고 일종의 개그를 하는 걸로 생각하는 이도 없지 않지만, 그건 나의 진정성을 전혀 모르는 탓이다. -둘째 형 스티븐 린턴(인세반)은 진외조부의 이름에서 딴 북한지원단체 유진벨재단의 이사장을 맡고 있다. 김일성 주석을 세 차례나 만났으며 대북 의료 지원에 앞장서 왔다. 셋째 형 제임스 린턴(인야곱)은 건축가로서 다양한 형태로 북한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 형제가 이렇게 북한 지원 활동을 하는 데는 아버지의 영향이 컸는데, 아버지가 이 땅에서 했던 활동을 보고 자연스럽게 그 일을 우리의 숙명으로 인식하게 됐다. -우리 집안과 한국과의 인연은 동학농민혁명 이듬해인 189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미국 남장로교회 선교사 유진 벨이 27세의 젊은 나이에 조선으로 파송됐는데, 이분이 나의 외증조할아버지다. 그는 조지아 공과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좋은 직장에 첫 출근을 하러 기차를 타고 가다가 ‘이것은 나의 길이 아니다’라는 생각에 선교에 뛰어들었다. 벨 할아버지는 광주와 목포 지역을 중심으로 교회와 학교를 짓고 병원을 열었다. 그의 사위 윌리엄 린턴은 선교와 의료를 넘어 항일운동에도 뛰어들었다. 3·1만세운동에 참여하고, 국제사회에 조선 독립에 대한 지지를 호소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추방되기도 했다. 그분의 아들이자 나의 아버지인 휴 린턴도 부친의 뜻을 좇아 평생을 전라도 농촌과 도서지역에서 선교 활동을 하며 당시 심각했던 결핵 퇴치 운동으로 많은 생명을 구했다. -부모님의 가장 큰 고민은 우리들의 교육 문제였다. 형들은 순천에서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한국말보다 영어를 더 못했다. 아버지가 장로교 안식년을 맞아 미국에 들어가 형들이 잠시 미국 학교에 다니게 됐는데, 그때 초등학교 3학년이던 형의 담임선생이 어머니를 불러 “이 댁 아이들의 영어 수준이 유치원생만도 못하다”고 한 데 충격을 받고서 한국에 돌아와 막내인 나는 학교에 보내지 않고 동료 선교사의 부인에게 일대일 개인지도를 받도록 했다. 그래서 나는 미국의 통신학교 교재를 이용해 영어, 수학, 사회 등을 배웠다. -열세 살 때인 1972년 9월 나는 커다란 가방 두 개를 들고 뜨거운 늦여름 햇빛을 받으며 대전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대전외국인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처음으로 고향을 떠난 것이다. 대전외국인학교는 당시 대전대(지금의 한남대) 뒤편에 있었다. 학교생활은 지겹기 짝이 없었다. 대전외국인학교는 아주 엄격하고 보수적인 기독교 학교였다. 아마 사관학교 생도들보다도 지켜야 할 규칙이 더 많았던 것 같다. -‘매곡동 짠이’ 시절만 해도 ‘크면 엿장수가 돼야지’ 하고 생각했었다. ‘맛있는 엿을 마음껏 먹을 수 있고 가위질로 박자를 맞추는 저 직업은 얼마나 멋진가.’ 염소를 매어 두려고 박아 놓은 꼬챙이들을 뽑아서 엿장수에게 몽땅 가져다주고 엄청난 양의 엿을 얻었다가 혼찌검이 난 적도 있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뀐 건 열 살 무렵이었다. 염소가 개에게 물려서 치료하는 과정을 고개를 받치고 지켜보는데, 당시 아버지 친구이자 내가 존경하던 장로 선생님께서 “불쌍하지? 염소도 이런데 돈도 없고 아픈 사람들은 얼마나 불행하겠니”라고 말씀하셨다. 그제야 비로소 의사라는 직업에 대해 생각을 해 보게 됐다. 좀 더 나이를 먹고는 어머니 로이스 린턴(인애자)의 결핵 퇴치 사업을 곁에서 지켜보며 마음을 완전히 굳혔다. 내 목표는 연세대 의과대학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조국인 미국을 경험하지 않고서는 반쪽짜리밖에 되지 않는다”며 미국 대학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나는 노스캐롤라이나대학에 진학했지만, 생활이 영 편치 않았다. 어서 빨리 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일단 한번 지내 보기로 아버지와 약속했던 1년간의 미국 생활이 끝나고 나는 미련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한국어를 체계적으로 배우기 위해 1979년 연세대 한국어학당에 등록했는데, 6개 레벨의 수업 중 나에게 맞는 단계를 찾을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글쓰기는 형편없는데 말은 너무도 유창하게 하니 어느 수준에 맞춰야 할지를 정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1980년 연세대 의예과에 정원외 입학을 했다. 한국 나이로 스물두 살. 동기들보다 두어 살이 많았다. 나의 대학 입학은 한국의 신군부 독재와 함께 시작됐다. 대한민국은 기나긴 박정희 시대가 끝났지만, 새로운 독재의 터널 속으로 들어가려 하고 있었다. 몇 달 전 10·26이 터졌을 때 한국이 민주화를 이룰 것이라는 나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그해 5월 친구와 함께 남해에 놀러 가는 중이었다. 버스가 광주 근처에 도착했는데, 갑자기 한 청년이 차에 올라탔다. 청년은 “여러분,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선량한 사람들이, 아주 많은 사람이, 계엄군에게 죽었습니다. 이럴 수는 없는 겁니다. 여러분!” 그의 말은 두서가 없었지만 간절했다. 정든 고향 순천의 거리 역시 흉흉했다. ‘대체 무슨 일이 터진 거지?’ 조선대와 전남대에 다니던 친구들이 끔찍한 얘기를 들려줬다. 믿을 수가 없었다. 나는 내 눈으로 사실을 확인하고 싶어 광주에 갔다. 만약 검문에 걸리면 나는 주한 미국대사관 직원이고, 한국인 친구는 나의 통역이라고 말하기로 했다. 광주는 도시 전체가 거대한 장례식장 같았다. 파괴된 도시, 분노로 일그러진 시민들의 얼굴. ‘왜? 그리고 대체 누가 이런 짓을 했나?’ 전남도청 앞 상무관에는 60구 정도의 시신이 안치돼 있었고 시신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수천 명 모여 있었다. 한 아주머니는 확성기를 들고 “왜 내 아들이 국군의 총에 죽어야 했나요”라며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었다. 한 외신기자가 나를 보고는 통역을 요청했고 나는 흔쾌히 응했다. 이를 본 워싱턴포스트, 뉴욕타임스 등 각국 기자들이 줄줄이 내게 통역을 부탁했다. 시민군 대표는 기자회견에서 “북으로 향해야 할 총부리가 남으로 향해 우리의 가족과 선량한 시민을 죽였다”며 분노했다. 나는 그들의 말을 영어로 옮겼다. 또 외신기자들의 질문을 한국어로 전했다. 그 일 때문에 나는 신군부로부터 ‘권고추방’ 명령을 받았지만, 당시 문무대 입소를 자원하면서 간신히 추방을 면했다. -“요한아…빨리 순천으로 내려와야겠다…아버지께서…돌아가셨다.” 1984년 4월 어느 날 오후 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당시 나는 연세대 의대 본과 2학년이었다. ‘아버지가 위독하신 것도 아니고 돌아가셨다니.’ 아버지는 당시 짓고 있던 농촌 교회 건축에 쓰일 자재를 싣고 차를 몰고 오시는 길에 관광버스와 정면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관광버스 기사는 음주운전 상태였다. 사람들이 아버지를 부축해 병원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아버지는 의식을 되찾았다. 아버지는 계속 물을 찾았고 고통을 호소하며 진통제 주사를 놔 달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나 의사는 큰 병원에 가야 한다고 했고 광주기독병원으로 가기 위해 택시를 불렀다. 지금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일이지만 당시 순천은 물론이고 서울의 몇 군데 큰 병원을 빼면 앰뷸런스가 없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울화통이 터졌다. 응급환자를 대하는 의료체계가 이렇게 엉성하다니.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8년이 흐른 1992년 나와 가족은 3200여만원을 밑천 삼아 ‘한국형 앰뷸런스’ 개발에 착수했다. 15인승 승합차를 광주에서 주문해 순천으로 옮겼다. 순천기독결핵재활원 앞에 차를 세워 놓고 목수와 용접공, 자동차 정비공을 불러 개조에 들어갔다. 환자를 눕힐 공간과 환자 머리맡에 의사가 앉을 수 있는 자리를 만들었다. 침대 밑과 천장에 응급장비를 설치할 수 있도록 했다. 일이 착착 진행돼 1주일 만에 개조된 앰뷸런스를 완성했다. 처음으로 한국형 앰뷸런스가 만들어진 것이었다. 병원보다는 소방서가 인명을 구조하는 데 우선이라는 판단에 소방서에 줬다. 올바로 활용하는 방법도 미국 텍사스에서 응급구조 일을 하고 있던 외삼촌에게 도움을 청해 가르쳤다. 순천소방서의 앰뷸런스는 활동 첫해 1000회의 출동 건수를 기록했고, 이 중 62건은 앰뷸런스가 없었더라면 사망했을 사람을 구조한 출동이었다. 나는 내가 우리나라 응급의료체계의 기틀을 다지는 일에 미력이나마 보탬이 됐다는 데 큰 자부심을 갖고 있다. -1997년 1월의 첫 방북은 우연한 계기로 이뤄졌다. 1996년 어머니는 40년 의료봉사의 공을 인정받아 삼성문화재단이 주는 ‘호암상’을 수상했다. 어머니는 상금 5000만원의 용도를 ‘북한에 앰뷸런스 기증’으로 지정했다. 한국에서 직접 북한을 지원할 방법이 없어 선교단체인 유진벨재단의 이름으로 기증하기로 했고, 그 실무 작업을 위해 들어갔던 것이다. 얼마 후 유진벨재단에 북한 보건성의 통지문이 날아들었다. 결핵 퇴치 사업에 나서 달라는 요청이었다. 북한에서도 이미 1970년대 결핵 환자가 거의 자취를 감췄지만 1995~1996년 잇따른 홍수 피해와 1997년 가뭄으로 다시 결핵이 확산돼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결핵환자요양소를 방문해 환자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의약품을 분배하고, 검진차 사용 방법을 일일이 알려 주고 다녔다. -나는 4년 전 한국인으로 특별귀화를 했다. 어머니가 미국 국적을 포기하지 못하게 해서 ‘미국인’으로 살아왔지만, 2012년 정부에서 다른 나라 국적에 더해 ‘한국인’ 국적도 추가로 취득할 수 있도록 특별귀화제도를 만들었다. 지금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온돌방 문화’의 부활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온돌방에서 어른들께 지식을 배웠고, 도덕을 배웠고, 소통을 배웠다. 남과 북, 동과 서, 진보와 보수. 지금 한국은 너무 찢어져 있다. 어린 시절 순천에서 가족들, 동네 할머니, 할아버지와 함께했던 온돌방 아랫목이 너무도 그립다. 김태균 경제정책부장 windsea@seoul.co.kr 윤수경 기자 yoon@seoul.co.kr ■인요한 세브란스 국제진료센터 소장 구한말 우리나라에 들어온 미국 선교사의 후손으로, 연세대 의과대학을 나와 현재 세브란스병원에서 국제진료센터 소장을 맡고 있다. 1997년부터 29차례에 걸쳐 방북, 결핵으로 고통받는 북한 사람들을 돌봤으며 1980년대 ‘한국형 응급차’를 개발하고 보급시켜 당시 낙후된 국내 응급구조 시스템의 선진화에 크게 기여했다. 우리나라 의술의 국제화를 통해 ‘의료 한류’의 주역으로 자리매김했다. 이런 공로들을 인정받아 지난해 6월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에 임명됐다. 1895년 한국에 파송돼 광주 수피아여학교·숭일학교, 목포 정명학교·영흥학교, 광주기독병원 등을 설립한 호남 기독교의 아버지 유진 벨(한국명 배유지) 선교사가 그의 진외증조부(친할머니의 아버지)다. 스물두 살 나이에 한국에 와 48년 동안 의료와 교육 선교 활동을 벌인 윌리엄 린턴(인돈) 선교사가 할아버지, 군산에서 태어나 전남 지역을 중심으로 600개가 넘는 교회를 개척한 휴 린턴(인휴) 선교사가 아버지다. ▲1959년 전북 전주 출생 ▲대전외국인학교, 연세대 의학과, 고려대 의학 석·박사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국제진료센터 소장, 재단법인 순천기독결핵재활원 이사, 한국국제협력단(KOICA) 자문위원·전문위원, 제4대 한국국제보건의료재단 총재 ▲2005년 국민훈장 목련장, 2014년 홍조근정훈장
  •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양양송이 향 맡고 보물도 찾고” “횡성한우 맛 보고 섬강도 걷고”

    [우리동네 흥겨운 축제] “양양송이 향 맡고 보물도 찾고” “횡성한우 맛 보고 섬강도 걷고”

    성큼 다가온 가을, 강원도에서는 대한민국 명풍 먹거리 축제인 ‘양양송이축제’와 ‘횡성한우축제’가 펼쳐진다. 30일 개막, 각각 10월 3일과 4일 막을 내린다. 싼값에 명품 먹거리를 맛보고, 체험하고, 즐길 수 있는 축제다. 자연산 송이는 동의보감에서 ‘맛이 향미롭고, 소나무 정기가 있어 버섯 가운데 으뜸이다’고 평했다. 양양송이축제장을 찾으면 설악산자락에서 자생하는 송이를 직접 캐고 맛볼 수 있다. 보물찾기, 설악산 트레킹, 숲속의집·목재문화 체험은 덤이다. 횡성 섬강변에서 펼쳐지는 횡성한우축제장에서는 한우의 진품 맛을 만끽할 수 있다. 최고의 마블링을 자랑하는 횡성한우는 아이스크림처럼 입 안에서 녹는 느낌이 들 만큼 육즙이 풍부하고 부드럽다. 축제장에는 소 밭갈이 체험, 외양간 체험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선보인다. 부정청탁 및 금품 등 수수의 금지에 관한 법률(김영란법)이 시작돼 소포장 등으로 소비자들에게 더 가깝게 다가가는 양양송이와 횡성한우의 변신도 엿볼 수 있다. 청명한 가을 정취를 만끽하고 국내 최고 먹거리도 즐길 수 있는 양양송이·횡성한우 축제장을 찾아 떠나보자. ●햇살·바람… 자연이 키운 양양송이 8~9월 서늘한 동해안 해무를 먹고 자란 자연산 양양송이가 제철을 맞았다. 올해는 풍년이어서 1등품 값이 35만 9100원에 지난 17일 낙찰됐다. 8년 만에 최저가였다. 양양송이는 설악산 자락의 화강암 토질과 금강송 숲 속에서 자라 영양소와 효소를 많이 머금어 황금송이로 불린다. 다른 지역보다 1∼2㎝ 정도 크고, 수분 함량도 적어 향과 식감이 뛰어나다 해서 붙여졌다. 양양송이는 알코올과 옥텐성분 등이 많아 향기도 짙다. ‘설악산을 둘러보고 양양에서 송이 맛을 본 뒤 가을을 얘기하라’는 말이 생겨날 만큼 양양송이 평가는 으뜸이다. 송이는 비타민 D가 풍부하며 고단백, 저칼로리 식품으로 콜레스테롤을 줄이고 성인병에 효과가 있다. 변비 개선 등 장 건강과 다이어트에도 좋다. 또 송이에는 암세포를 공격하는 글루칸 성분이 들어 있다. 이런 양양송이를 테마로 남대천 둔치와 양양지역 일대에서 축제가 펼쳐진다. 주제는 ‘송이 애(愛) 반하고, 향기에 취하 고(GO)’이다. 올해로 20회째를 맞는다. 양양송이 품질을 보증하기 위해 행사장 송이판매업체에 대한 실명제를 강화했다. ●송이 자라나는 모습 재현한 체험장 축제의 꽃은 체험행사다. 메인 체험프로그램은 송이보물찾기체험이다. 송이산과 비슷한 환경의 산에 체험장을 조성해 양양송이가 실제 나오는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고 체험객들이 소나무숲을 헤치며 양양송이를 찾는 프로그램이다. 직접 찾은 송이를 한 꼭지씩 가져갈 수 있다. 체험비는 2만원이다. 체험 기간 체험장에서는 양양송이를 찾은 체험객들의 환호로 떠들썩하다. 강원도 대표 버섯 생산지답게 표고버섯 체험 행사도 개최한다. 표고버섯 생산농가로 이동해 원목에 있는 싱싱한 표고버섯을 직접 따서 1㎏를 가져갈 수 있다. 체험비는 1만원이다. 축제장에서 열리는 프로그램 10가지를 체험한 뒤 스탬프를 받으면 송이 에코백을 증정하는 ‘양양송이축제 스탬프 랠리’도 운영된다. ●양양전통 5일장·토속음식점 함께 즐겨 송이축제장은 남대천 둔치지만 양양 전 지역이 축제장이다. 산에서는 송이채취체험과 표고버섯 따기 체험이 열리고, 축제행사장 송이직거래 장터에서는 양양송이와 다른 지역 송이, 표고버섯 등 각종 버섯과 낙산배 등 지역특산물을 맛보고 살 수 있다. 특히 올해는 축제장에 지역 음식점들을 입점시켜 양양의 토속음식의 맛과 멋을 함께 제공한다. 축제장과 연결된 양양전통 5일장(4일, 9일)장과 토요시장에서는 풍성한 과일과 곡식시장이 펼쳐져 가을 향기를 듬뿍 맡을 수 있다. 전통시장에서는 송이를 비롯해 능이, 표고, 목이, 영지, 까치, 싸리, 밤, 노루궁댕이, 개금버섯 등 수많은 버섯들이 선보인다. 단풍과 함께 걷는 산, 추억의 바다여행도 빼놓을 수 없다. 설악산 대청봉에서부터 피기 시작한 단풍은 오색의 흘림골, 주전골로 이어져 구룡령 옛길, 구탄봉 길에서 가볍게 트래킹해도 좋다. 오산리선사유적박물관과 곤충생태관을 들려도 좋다. 김진하 양양군수는 “양양읍내 46㏊에 이르는 산림휴양림에는 숲속의 집, 목재문화체험장, 백두대간 생태교육장 등 조용히 자연을 느끼고 즐길 수 있는 복합 산림 휴양 체험공간이 있다”면서 “설악산 자락에서 펼쳐지는 양양송이축제에 초대한다”고 말했다. ●145m 길이의 초대형 한우 셀프식당 횡성한우축제에 가면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초대형 한우 셀프식당과 10m 높이의 한우리 조형물, ‘머슴 돌 들기’ 이벤트를 만날 수 있다. 축제장 중앙에 있는 145m 길이의 초대형 셀프식당은 압권이다. 1000여명이 동시에 입장할 수 있는 세계 최대 규모 셀프식당에서 육즙이 풍부하고 감칠맛 최고인 진짜 횡성한우를 즉석에서 구워 먹는 맛은 일품이다. 지난해 큰 인기를 끌었던 머슴 돌 들기 대회는 정해진 시간에 무거운 돌을 들고 얼마나 더 많이 이동할 수 있는지 힘을 겨루는 대회다. 최고기록은 횡성군 기네스로 보존해 색다른 재미를 더한다. 특히 올해는 추억의 고고장과 한우 퍼레이드, 스탬프 투어, 어린이 놀이터 등이 새로 만들어졌다. 추억의 고고장은 남녀노소 모두가 한우 가면을 쓰고 옛 음악에 맞춰 고고 댄스를 추는 가면무도회다. 가을밤에 펼쳐지는 신나는 가면무도회가 7080 세대에겐 아련한 추억을, 젊은 세대에겐 색다른 즐거움을 선사한다. ●섬강변 ‘족욕장’ 등 힐링 프로그램도 또 횡성한우축제에서만 볼 수 있는 ‘제1회 한우 퍼레이드’가 횡성읍 시가지에서 열린다. 민족사관고등학교 학생들의 대취타 연주에 맞춰 지역 중·고생들과 기관·단체, 지역 주민들이 한데 어울려 2㎞ 구간을 걸으며 거리 퍼포먼스를 펼친다. 스탬프 투어에 참가하면 선물이 와르르 쏟아진다. 행사장 곳곳에 설치된 스탬프를 찍으면 하루 세 번 메인 무대에서 진행되는 추첨에서 특산품을 받는 행운을 가져갈 수 있다. 어린이들을 위한 즐길거리도 많이 늘렸다. 350m에 이르는 한우체험 구역에 18종의 다양한 민속놀이를 즐길 수 있는 전통놀이터를 조성하고 여기에 현대적 놀이기구까지 추가 배치해 어린이들을 유혹한다. 가을 정취를 만끽하며 심신이 쉬어갈 수 있는 힐링 프로그램도 풍부하다. 축제장을 오가느라 고단해진 발은 돌다리 부근 10m 구간에 조성된 섬강변 ‘족욕장’에서 편히 쉴 수 있다. 또 축제장 곳곳에 설치된 쉼터 부스에서는 추억의 오락실 게임을 즐기며 피로도 풀고 섬강변의 아름다운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 ●LED 장미 숲·빛 터널 ‘밤의 볼거리’ 축제의 밤은 낮보다 아름답다. 섬강을 가로지른 섶다리와 섬강변 풀숲에 발광다이오드(LED) 조명을 활용한 장미 숲, 빛 터널 등이 아름답고 화려한 밤을 연출한다. 개막 공연, 군민 노래자랑, 청소년 교향악단 등 밤마다 펼쳐지는 다양한 문화예술 공연이 축제의 밤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남녀노소 모두가 즐길 수 있는 한우테마목장에서는 소 밭갈이체험, 외양간 체험 등을 통해 우리의 농경문화를 경험할 수 있다. 어린이를 위한 건초 놀이터, 40여 마리의 동물을 만날 수 있는 동물농장도 신나는 놀거리를 제공한다. 한규호 횡성군수는 “한우품평회장에서는 암소경진대회, 고급육 품평회, 최우수 암소 알아맞히기 대회 등이 진행되며, 50여 마리의 송아지와 암소를 대상으로 한 한우경매시장도 색다른 볼거리를 예고한다”면서 “소 코뚜레를 직접 만들어보는 이색 체험 등을 통해 추억의 가을여행을 만들기 바란다”고 말했다. 양양·횡성 조한종 기자 bell21@seoul.co.kr
  • [이호준 시간여행] 전통 혼례식이 열리던 날

    [이호준 시간여행] 전통 혼례식이 열리던 날

    마을은 잔치가 열리기 며칠 전부터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전통 농경사회에서 혼인은 온 동네의 잔치였다. 혼례 하루 전날에는 아낙들이 혼삿집에 모여 전을 부치고 떡을 하느라 시끌벅적했다. 아이들은 엄마를 찾는다는 핑계를 앞세워 이곳저곳을 누비고 다녔다. 엄마들은 눈짓으로 타박을 하면서도 전 한 장을 얼른 집어 아이 호주머니에 찔러주고는 했다. 밑이 찢어지게 가난하지 않은 다음에야 혼삿집은 돼지 한 마리쯤 준비하기 마련이었다. 마당에는 돼지를 잡기 위해 남정네들이 모였다. 힘깨나 쓰는 사내가 도끼를 잡고 어르다가 한순간 두개골 깊숙이 박아 넣었다. 아이들은 긴장감에 침을 꼴깍꼴깍 삼키며 한쪽에 서 있었다. 어른들이 쫓아내지만 물러서는 척하다가 다시 모여들었다. 혹시 얻어먹을지 모르는 몇 점의 고기와 돼지 오줌보를 기다리는 것이었다. 오줌보에 바람을 넣으면 멋진 축구공이 됐다. 혼례식은 신부 집에서 치러졌다. 즉 신랑이 신부를 데리러 가는 것이었다. 혼삿날에는 날이 밝기도 전에 동네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바닥에는 멍석과 돗자리를 깔고 위에는 차일을 쳐서 꾸민 혼례청에는 설레는 눈들이 가득 반짝거렸다. 신랑이 혼례청에 들어서면 식이 시작됐다. 동네 어른이 주례가 돼 식을 이끌었다. 맨 먼저 신랑이 기러기를 드리는 의식인 전안례를 한다. 다음으로 신랑 신부가 맞절을 하는 교배례. 두 사람이 백년해로를 서약하는 절차다. 이어 신랑 신부가 표주박을 둘로 나눈 잔으로 술을 마시는 합근례, 하객에게 감사의 절을 하는 보은보배, 주례의 덕담 등으로 식이 진행됐다. 식이 끝나면 잔치가 시작됐다. 마당에 깔린 멍석 위로 가득 놓인 교자상에 둘러앉아 음식과 술을 나눴다. 흥에 겨워 노랫가락을 쏟아내는 이도 생기고 한쪽에서는 윷놀이 판도 벌어졌다. 저녁 어스름에는 신부를 짝사랑하던 동네 청년 하나가 굴뚝 모퉁이에 숨어서 끄윽~ 끄윽~ 울음을 삼키기도 했다. 잔치는 밤이 이슥하도록 계속됐다. 마당에 화톳불이 놓아지고 등이 걸렸다. 잔치는 후속 행사로 이어졌다. 청년들은 자기 동네 색시를 데려간다고 신랑을 매달아 놓고 발바닥을 때리고, 장모는 내 사위 살살 다뤄 달라며 연신 술상을 들이고…. 그렇게 어려운 과정 끝에 놓여난 신랑 신부가 신방에 든 뒤에도 시련은 남아 있었다. 신방에 불이 꺼지면 고양이걸음으로 몰려들어 창호지에 구멍을 내는 아낙들의 장난기 가득한 눈… 그렇게 혼삿날의 밤은 깊어 갔다. 1960~70년대까지만 해도 흔히 볼 수 있었던 전통 혼례식 장면이다. 이제 어디에 가도 그런 풍경을 만나기 어렵다. 시골에 결혼할 젊은이도 없으니 기대 자체가 무리다. 굳이 전통 혼례식을 보고 싶다면 민속촌이나 서울 남산 한옥마을에 가는 수밖에 없다. 요즘의 결혼식을 지켜보면 마치 붕어빵 틀에서 신랑 신부를 찍어 내는 것 같다. 속도는 또 얼마나 빠른지, 정신없이 식을 치르고 나면 결혼 당사자들조차 기억에 남는 게 별로 없다. 하객은 축의금 봉투나 전해 주고 밥 한 끼 먹으면 그만이다. 전통 혼례는 그 의미 자체가 달랐다. 한 가족의 탄생이 단지 당사자들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세상에 공표하는 절차였다. 공동체의 새 구성원이 됐다는 선언이었다. 인스턴트 음식을 먹듯 쉽게 만나 결혼하고 쉽게 헤어지는 요즘의 풍토가 급격하게 바뀐 결혼식 문화로부터 시작됐다고 하면 억지일까? 시인·여행작가
  •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일제에 유린당한 한서린 남산 기슭… 애국지사 동상 ‘혼’ 달래는 호국의 길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일제에 유린당한 한서린 남산 기슭… 애국지사 동상 ‘혼’ 달래는 호국의 길

    서울미래유산은 정치역사, 산업노동, 시민생활, 도시관리, 문화예술 등 5개 분과로 나뉜다. 정치역사분과 세부 선정 기준에 따르면 당시 흔적이 모두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는 경우 미래유산 선정보다는 표지석, 지도 표시 정도로 기념한다. 동상, 탑, 기념물의 경우 인물에 대한 평가보다는 예술적 가치만을 고려한다. 분묘의 경우 가옥에 비해 보존 중요도가 낮고 인물 평가에 따른 논쟁을 우려해 미래유산 선정에서 제외한다. 다음번엔 산업노동분과 세부 선정 기준을 알아본다. 서울시는 미래유산을 시민들과 공유하기 위해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을 서울신문·문화지평과 공동 주관으로 매주 토요일 진행한다. 서울미래유산 역사탐방 홈페이지(futureheritage.seoul.co.kr)에서 답사 코스 확인과 참가 신청을 할 수 있다. 다음 답사는 경희궁에서 모여 돈의문터, 경교장, 충정아파트, 아현동 가구거리, 성우이용원 등을 돌아본다. “제가 문화재청 문화지킴이 활동도 하고 순찰을 하면서 이 지역 문화재도 수시로 관리하고 있습니다.” 서울미래유산 탐방답사 8회차 모이는 장소가 지하철 3호선 동국대입구역 6번 출구 장충파출소 앞이었다. 플래카드를 걸고 있자니 한 경찰관이 다가와 말을 건넨다. 플래카드 거는 위치가 잘못돼서 지적하러 나온 줄 알았더니 괜찮으니 계속하란다. 경찰관은 자신을 서울 중부경찰서 소속 위시환 경위라고 소개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화재 사랑은 물론 김성섭 중부경찰서장의 ‘우리 동네 바로 알기’ 시책까지 알려 준다. 거기다가 중부경찰서가 펴낸 ‘서중경(서울 중부경찰서)의 역사산책’이란 책자까지 한 권 건넨다. 책자는 지역 문화재와 동네마다 감춰진 이야깃거리를 140쪽 분량으로 소개한다. 김성섭 서장은 발간사에서 “동네 역사를 알아야 지역 실정에 맞는 맞춤형 치안 시책을 펼 수 있다고 생각해 책을 썼다”고 밝혔다. 치안에 인문학을 결합시킨 이런 발상이야말로 요즈음 말하는 융합인 셈이다. 1회차 정동 답사를 이끈 이필용(47) 서울미래유산해설사가 두 달 만에 기가폰을 목에 걸었다. 일제가 뽑아 버렸던 ‘장충단비’ 을미사변·갑신정변 때 희생된 영령 기려 이 해설사는 서울시사회적경제지원센터 마을기업팀 매니저로 일하면서 짬을 내 한양도성 길라잡이 활동 등을 하는 베테랑 문화해설사다. 이 해설사가 일행을 처음 멈춰 세운 곳은 1900년(광무 4년)에 세워진 장충단비(서울시유형문화재 제1호) 앞이다. 장충파출소에서 불과 30여m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비는 명성황후 시해 사건인 을미사변을 비롯해 갑신정변, 임오군란 때 희생된 영령을 기리기 위해 세워졌다. 을미사변 때인 1895년(고종 32년)에는 궁내부 대신 이경직과 시위대장 홍계훈 등 많은 병사들이 일본군에 의해 희생됐다. 고종은 이곳에 사전(祠殿) 1동과 부속건물 2채를 세워 장충단을 꾸몄다. 대한제국시절 봄, 가을 두 차례 지내던 제사를 일본의 통감부가 설치된 뒤 1908년 중단됐다. 1910년에는 장충단을 폐사하고 비석도 뽑아 버렸다. 항일 감정을 자극하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조선총독부는 1919년부터 벚꽃을 잔뜩 심고 1920년대 후반에는 장충단공원을 조성했다. 뽑힌 장충단비는 1945년 해방과 함께 현 신라호텔 자리에 세워졌고 1969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다. 건물은 한국전쟁 때 소실됐다. 신라호텔 자리에는 일본의 조선총독부가 1909년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된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해 1932년 그의 이름을 딴 사찰 박문사를 들여놓았다. 이 해설사는 “일제가 박문사를 지으면서 경복궁 석재와 목재를 뜯어 왔고 경희궁 정문 흥화문을 가져와 정문으로 사용했다”면서 “심지어 상하이 사변 때 죽은 일본군 육탄 3용사 동상을 세워 대륙침략 정신교육 전진 기지로 삼았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육탄 3용사는 아사히신문이 2007년 6월 13일 당시 보도가 엉터리였다고 오보를 인정한 바 있다. 이 해설사는 “박문사를 지은 일본 다이세이(大成) 건설이 후일 신라호텔까지 지었다”며 “이 역사적 연결성은 무엇을 의미하는지 깊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천덕꾸러기가 돼 버린 ‘수표교’ 청계천 공사로 옮긴 뒤 돌아가지 못 해 장충단에 박문사를 짓듯 일제는 원구단을 허물고 철도호텔(현 웨스턴조선호텔)을 짓고 창경궁을 동물원인 창경원으로, 경희궁(경덕궁) 자리에 경성중학교를 세우는 식으로 우리 문화재를 짓밟았다. 장충단비 지근 거리에 수표교(서울시유형문화재 제18호)가 보인다. 이 해설사는 일행을 다리 아래로 안내했다. 대부분 다리 밑을 처음 구경한다고 웅성거렸다. 다리 상판을 이고 있는 교각에는 경진지평(庚辰地平) 각자(刻字)가 있다. 1760년에 글자를 새겨 넣고 네 단계로 수위를 관리했다. 수표교는 원래 청계천에 있었는데 복개공사 때문에 1958년 옮겨졌다가 1965년 현 자리에 놓여졌다. 엉뚱한 곳에서 천덕꾸러기처럼 서 있는 수표교가 언제쯤 청계천으로 되돌아갈지 궁금해지는 대목이다. 장충단에는 유난히 동상이 많다. 이준 열사, 유관순 열사, 외솔 최현배 선생 등 모두 일제에 항거한 이들이다. 중구는 장충단비~한국유림 독립운동 파리장서비~수표교~이준 열사 동상~이한응 선생비~최현배 선생 기념비~유관순 열사 동상~3·1독립운동 기념탑~국립극장~김용환 지사 동상~자유센터로 이어지는 길을 ‘호국의 길’로 이름 지었다. 일제에 의해 철저히 유린당한 남산 기슭에 이들을 모셔 혼이라도 달래려 한 게 아닐까 추측한다. 조선 인조 때 만들어진 ‘국궁도장’활 쏘며 심신 수련하는 생활체육인 모여 남산 자락을 오르기 시작하다 보니 석호정 활터 표지석이 나타났다. 조선 인조 때인 1630년쯤에 만들어진 국궁도장이다. 1970년 서울시와 서울정도600년고증위원회의 배려로 표지석 자리보다 위로 올라가 남산순환도로 옆에 자리잡았다. 이날도 활을 쏘며 심신을 수련하는 생활체육인들이 여럿 나와서 국궁을 즐기고 있었다. 사대(射臺) 앞에는 습사무언(習射無言)이란 글이 보인다. 활을 쏠 때 말하지 말라는 궁도구계훈 중 하나다. 가로글씨지만 우에서 좌로 읽어야 한다. 표적까지는 145m, 쏘아 올린 살이 멀어지며 순식간에 육안에서 사라진다. 답사단은 남산순환로를 통해 서울 미래유산인 국립극장을 들른 뒤 자유센터, 반얀트리 서울 호텔을 지나 한양도성길을 제법 걸었다. 반얀트리는 과거 타워호텔이란 이름을 가진 자유센터 부속 숙박동이었다. 자유센터는 1962년에 열린 아시아반공연맹 임시총회의 회의장이었고 타워호텔이 숙박시설이었던 것이다. 이날 답사에 참여한 김수경(48) 소요재 대표는 “22살 때 타워호텔에서 호텔리어가 되기 위해 인턴십을 했던 추억이 있다”며 “불의의 교통사고로 꿈을 접고 고향인 부산으로 귀향해 직조를 배웠다”고 말했다. 그는 현재 직물공예와 자투리 천을 이용한 업사이클링 예술공예를 전문으로 하는 공방을 창신동에 두고 있다. 국립극장 내려오면 미래유산 ‘군락’ 테니스장·야구장·체육관·족발골목 등 이 해설사는 “이 두 건물 모두 근대 건축계 거장 김수근씨가 설계한 것”이라며 “김수근씨는 파괴된 한양도성에서 나온 성석을 기초석이나 옹벽으로 사용하는 저급한 역사 인식을 보여 줬다”고 신랄하게 비판했다. 이 해설사는 서울KYC의 한양도성 목멱구간 해설사로도 활동하고 있기 때문에 이 지역 도성 파괴를 늘 안타까워했다. 호국의 넋이 충만한 남산 기슭을 둘러보고 다시 원점으로 내려오는 장충단로에서 장충테니스장, 장충리틀야구장, 길 건너 장충체육관과 장충동 족발골목 등 서울미래유산 ‘군락’을 만났다. 인근에 있는 남산 1호 터널도 서울미래유산이다. 서울 요새화 계획에 따라 교통 기능보다는 방공호 목적으로 건립됐다. 이 터널로 인해 강남 개발이 가속화되는 등 건축사와 정치사적인 측면에서 보존 가치가 있다. 장충테니스장은 장호테니스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1971년 지어진 우리나라 테니스 역사의 요람이다. 장충체육관은 우리 건축설계와 기술로 지어진 최초의 돔형 체육관이다. 남매와 함께 온 김연진 경기관광공사 과장은 “이런 프로그램이 서울에서만 이뤄지는데 도보길 역사탐방을 경기도에 접목해 보고 싶다는 생각에서 나오게 됐다”고 말했다. 김수경 대표는 “이 프로그램은 ‘참된 미래유산’인 우리 아이들에게 선물로 전해 줄 보물지도를 그리는 일”이라며 “단순한 추억 찾기가 아니라 우리가 알고 지켜야 할 가치들을 들려주고 함께 보물지도를 그릴 때 서울미래유산 가치가 더 커질 것”이라고 말했다. 예전부터 이 지역 답사를 마치면 늘 태극당 제과점 쪽 먹자골목에 있는 ‘닭한마리 돼지한근’이란 곳을 들른다. 이날도 답사단 여럿이 푸짐한 김치찌개로 허기를 채웠다. 아쉽게도 70년 전통의 태극당은 아직 서울미래유산이 아니다. 글 사진 유성호 ‘문화지평’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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