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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보통신 사업의 경쟁력강화(사설)

    정부가 내년까지 시내전화를 제외한 모든 정보·통신사업의 허가신청을 전면 개방키로 한 것은 통신시장의 개방을 앞두고 국내 사업자의 경쟁력을 강화하기 위한 것으로 평가된다.그러면서도 국가기간 통신망 운영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한국통신을 우리나라 정보·통신의 대표사업자로 발전시키기로한 점은 특기할 만 하다. 정보통신부의 경쟁력강화방안은 세계무역기구(WTO)협상결과에 따라 오는 98년까지 국내통신시장개방이 불가피한 점을 감안,한 두해라도 빨리 국내사업자가 통신시장에 진입하여 경쟁력을 배양하도록 하기위한 것이다.정부가 올해 데이콤에 대해 시외전화사업을 허가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다.이로써 한국통신 독점의 통신사업이 경쟁체제로 돌입하게 됐고 이는 통신사업에 일대혁신을 의미한다. 그러나 정부는 정보·통신사업의 자율경쟁체제 도입에 앞서 몇가지 유의해야 할 점이 있다.그 하나는 정부가 한국통신 전체 주식의 49%를 소유하는 것은 국가기간통신망의 안정성 확보를 위해 절대로 필요하지만 한편으로는 정부투자기관의 속성에서 오는 경쟁력 면의 취약점을 어떻게 보강하느냐이다.또 하나는 시내전화를 언제까지 한국통신 독점체제로 끌고 가느냐다.그리고 다른 하나는 정보·통신사업의 전면 경쟁체제 도입에 따른 재벌기업 등의 통신사업참여로 인한 시민들의 재벌공룡화 우려를 어떻게 불식하느냐다. 따라서 정부는 한국통신의 자체내 경쟁력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시내전화·시외전화·국제전화·위성통신·정보통신 등 사업부문별로 회계를 분리,독립채산제로 운용하는 방안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기 바란다.또 시내전화는 상당기간 동안 한국통신이 취급하는 것이 옳다.왜냐면 민간사업자는 수익성이 낮은 농촌지역 시내전화는 외면하고 도시지역 시내전화만을 운영할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재벌의 통신사업 지배를 막기 위해서는 신규참여의 경우 특정재벌 소유주와 특수관계인이 주식을 일정한도 이상 소유할 수 없도록 하거나 몇몇 업체가 컨소시엄을 형성하도록 하는 등 합리적인 대책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
  • 통신사업 전면 경쟁체제로/내년까지

    ◎시내전화는 제외/한통주 51% 매각… 민영화/모든 통신요금 98년까지 자율화/정부 발표 정부는 통신산업의 경쟁력 강화를 위해 내년까지 시내전화를 제외한 모든 통신산업의 허가신청을 개방,국내 통신시장에 전면 경쟁체제를 도입키로 했다. 또 한국통신의 경쟁력을 높여 국내의 주도적 통신사업자로 육성한다는 방침아래 한국통신에 대한 정부지분을 내년까지 49% 이하로 조정,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적용대상에서 제외하기로 했다. 이와함께 늦어도 98년까지는 모든 통신요금을 점차적으로 자율화,통신사업자간의 공정한 경쟁여건을 조성해 나갈 계획이다. 경상현정보통신부장관은 4일 이같은 내용을 골자로 하는 「통신사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기본정책방향」을 발표하고 이달중 관련기관 협의와 공청회등을 거쳐 다음달 초에 최종안을 확정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날 발표된 기본정책방향에 따르면 국내 통신시장의 경쟁력 확대를 위해 우선 올안에 국제전화·개인휴대통신(PCS)·무선데이터·무선호출·전용회선·주파수공용통신 등의 사업분야에 신규사업자를 추가로 선정할 계획이다. 또 97년에는 정부의 사전공고 없이 통신사업 허가신청을 할 수 있도록 현행 전기통신사업법을 개정,시내전화를 제외한 모든 통신사업의 허가신청을 전면 개방하고 98년부터 대외시장개방을 본격화해 나가기로 했다. 이에따라 내년부터 시외전화·위성통신서비스,저궤도위성통신(LEO)·양방향 무선호출등의 사업에 참여를 희망할 경우 정부의 사전심사를 받지 않고 자유신청만으로도 가능하게 된다. 정부는 또 한국통신의 민영화계획과 관련,주식을 49%까지만 매각한다는 당초의 방침을 바꿔 내년까지 51%이상을 매각,한국통신을 정부투자기관관리기본법 적용대상에서 제외시켜 예산·인사등 경영상의 자율성을 부여할 방침이다.
  • 크로아 평화유지단 단장/유엔,한국 민병석씨 임명/사무차장보 겸임

    【유엔본부=이건영 특파원】 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 유엔사무총장은 3일 유엔 크로아티아 평화유지단(UNCRO)단장에 한국의 민병석 전 주체코대사를 임명했다. 민UNCRO단장은 유엔사무차장보를 겸임하는데 한국인으로서는 유엔사무국에 진출한 최고위인사이다. 민단장은 오는 17일 현지에 부임할 예정이다. 민단장은 UNCRO현황등 현지 사정을 파악하기 위해 지난달 20일부터 23일까지 크로아티아를 방문했었다. 민단장은 UNCRO의 임무수행을 위한 외교적·정치적 협상을 전개하고 UNCRO 군사요원 및 민간요원에 대한 업무조정역할등 전반적 업무를 수행하게 된다. 지난 91년 6월 유고연방에서 분리독립한 크로아티아에서는 현재 정부군과 세르비아계 민병대간의 내전이 계속되고 있으며 유엔은 크로아티아를 포함,보스니아­헤르체고비아,마케도니아등 옛유고 연방에서 분리독립한 3개국에 각각 평화유지군을 파견하고 있다.이들 3개 평화유지군에 대한 총괄지휘는 일본인인 야스시 아카시 유엔사무총장특별대표(유엔사무차장)가 맡고있다. 유엔은 크로아티아에 지난 5월말 현재 평화유지군 1만4천8백25명을 포함,군사옵서버·민간경찰요원등 모두 1만5천8백39명을 파견하고 있다.
  • 떠오르는 휴전론(6·25내막/모스크바 새 증언:19)

    ◎“전세 불리”… 김일성,중·소 극비 방문/북경 이어 모스크바서도 “휴전유익” 의견 일치/소,대미협상 우위 노력 중 비행사단 투입 요구 전황이 크게 불리해지는 가운데 모택동은 전선이남으로 불시공격을 가해 적에게 타격을 가한 뒤 신속히 북으로 후퇴하는 식의 게릴라전법을 써보자고 스탈린에게 제의했다.그러나 스탈린은 이 전법이 한두번은 써먹을 수 있으나 위험부담이 커 그 이상은 곤란하다고 답했다.『영·미군은 금방 이 작전을 눈치챌 것이고 그렇게 되면 북으로 후퇴하기 전 큰 손실을 입게 될 우려가 있다』는 이유에서였다.스탈린은 한번에 전세를 역전시킬 수 있는 결정적인 총공세를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이다.스탈린이 51년 5월29일자로 모택동에게 보낸 이 전문내용은 다음과 같다(전문번호 N3282.소련군총참모부 제8총국.대통령문서소 보관). ○“대규모 작전 필요” 이런 전술은 공격작전완료 뒤 주력군이 안전하게 철수하도록 후방방어를 훌륭하게 해줄 전력을 갖추었을 때 가능함.그러나 본인이 아는 한 인민군은 그런 전력을 갖추지못했음.영·미군은 북진하면서 차근차근히 새로운 방어선을 확고히 구축할 것임.이 방어선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 것이며 이 또한 바람직한 일이 아님.모동지가 중국공산당이 장개석군대를 상대로 이 전술을 구사했음을 참고로 든 데 대해서도 동의할 수 없음.영·미군은 장개석군대 같은 오합지졸군대가 아님을 명심하기 바람.그들은 모동지가 임의대로 자기들의 병력을 하나하나 궤멸시키도록 절대로 내버려두지 않을 것임.만약 평양이 다시 적의 수중에 떨어진다면 이는 조선인민군의 사기저하뿐 아니라 상대적으로 적의 사기를 크게 올려주는 결과를 초래할 것임.적에게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작전을 준비해야 할 것임. 6월에 접어들며 전황이 점차 더 인민군에 불리해지고 있는 가운데 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의 전문을 보냈다.6월4일자로 팽덕회가 모앞으로 보내온 전황보고서였다.특기할 것은 이 보고서에서 팽이 전력의 열세가 점차 뚜렷해져 정면대결의 승산이 희박하다고 보고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힌 점이다(전문번호 N20406). 적은 다량의 포·탱크·항공기를 동원해 공세를 계속하고 있음.반면 아군은 이에 맞설 확고한 방어망을 구축하지 못했음.7월말까지 소총·대전차포·대공무기를 추가공급받으면 적극적으로 게릴라투쟁을 전개하겠음.적이 병력을 대규모로 증가시키지 않고 아군이 예측치 못한 작전미스를 범하지 않는다면 전선을 평양이남에서 저지할 수 있음.…중략… 적이 대규모의 병력·항공기·탱크·막강한 포를 보유한데다 사기까지 드높아 현상황에서 적을 차례로 격파하기는 쉽지 않음.따라서 적의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전개해 전력을 흐트러뜨릴 필요가 있음.적이 전진할 때까지 당분간 기다렸다가 전진하면 후방에 게릴라부대를 투입시키겠음. 그러나 바로 같은 날 팽덕회는 전병력에게 총퇴각명령을 하달했다.이 명령문은 『전선이 너무 확대됐다.수송수단이 부족해 식량·탄약보급조차 힘들다.병력은 지쳤고 이제 남으로 더 진격하는 것은 너무 힘들다.바로 이런 이유로 우리는 제5차 공격작전의 제2단계를 예정보다 앞당겨 종결짓고 병력을 제5차 작전의 제1단계를 시작한 지점으로 철수시키기로 결정했다.그곳에서 1개월 반 내지 2개월동안 병력을 재정비,강화한 다음 새로운 전투에 대비,훈련을 쌓도록 하겠다』는 비장한 어투를 담고 있다. ○휴전추진 모에 맡겨 팽덕회로부터 이 퇴각명령문을 보고받은 모택동은 이의 사본을 같은 날 즉각 스탈린에게 보고했다(대통령문서소.전문번호 N20412.모택동이 스탈린앞으로 보낸 전문). 명령문은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이 휴식기간에 중국의용군사령부는 다음 사항을 이행한다.…중략… (2)우리군 내부에 심각히 만연된 우익풍조를 일소함.…중략… (4)항공기·대전차예비병력·대공포부대를 전선에 투입시킬 준비를 갖춤.(5)적의 후방에 게릴라부대 투입,전선을 확장해 적의 전력을 분산시킴.그렇게 해서 향후 아군 주력군이 작전을 펼치는 데 용이하게 함.아군병력은 6∼7일간 진격하고 나면 식량·탄약이 부족해지고 병력은 지치기 시작했음.반대로 적은 미리 대규모 기계화병력을 준비해 아군의 공격작전시 진격과 퇴로를 모두 중도에서 차단했음.우리는 이런 점을 미리 고려치 못했음.도보로 걷는 아군은 차량으로 이동하는 적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음. 이런 이유 때문에 공세작전 수행시에도 1차·2차·3차의 방어선을 만들어야 했음.새로 전선에 투입되는 병력은 훌륭한 장비를 갖춘 적을 상대로 싸운 경험이 없었음.특히 방어전경험은 전무했음.하급지휘관들의 질이 특히 형편없었음.기술적으로 잘 무장된 적을 상대로 용기 하나만으로 맞서 싸울 수는 없음.용기와 합리적인 리더십이 함께 갖추어져야 함.모택동 동지는 소규모전투에서 적을 패배시킴으로써 적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나아가 대규모패배를 안겨주는 방식이 바람직하다고 주문했음.지금같이 모험적인 공세를 계속하는 적을 상대로 해서는 이같은 전술이 가장 바람직한 것임. 이 명령문은 게릴라식 소규모전투를 통해 적을 괴롭히자는 전술변화를 담고 있기는 하지만 사실상 총퇴각결정이었다.이후 중·조선연합군은 적극적 방어전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같은 상황악화로 인해 중공·인민군은 마침내 탈출구를 모색하기에 이른다.휴전문제가 북조선·중국 양측에서 제기되기 시작한 것이다.스탈린도 이를 무시할 다른 방도가 없었다.물론 휴전협상을 모색하면서도 동시에 전력을 강화하고 한치라도 땅을 더 차지하기 위한 소규모전투를 계속 수행해나갔다.아울러 이들이 내건 휴전협상조건도 매우 비현실적이고 적극적인 협상의지를 담고 있지 않은 것이었다. 스탈린은 또한 자신이 직접 휴전협상에 나서기를 거부하고 이를 모택동에게 맡겼다.아울러 전쟁이 파장기미를 보이며 스탈린과 모택동 두 사람 사이에는 소련의 군사적 지원과 군사고문단 추가파견문제를 놓고 줄다리기가 벌어졌다.모택동은 끊임없이 새로운 원조요청을 내놓았고 스탈린은 갖은 이유를 달아 이 요구를 들어주지 않으려고 했다.팽덕회의 철수명령이 떨어진 바로 이튿날인 51년 6월5일모택동은 스탈린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띄웠다(대통령문서소 보관.전문번호 N20448.소련군총참모부 제2총국). ○“최소 8개사 보내라” 필리포프 동지께.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재정문제,바로 우리국경에서 군사작전을 벌이는 문제,적이 바로 우리 영토 후방에서 상륙작전을 벌이는 등 여러 심각한 문제를 겪었음.조만간 고강 동지를 모스크바로 파견해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동지의 지시사항을 듣고자 함.현재 김일성 동지가 북경에 와 있음.김일성동지도 고강 동지와 함께 스탈린 동지를 찾아가 이 문제들을 의논하고 싶어함. 이 전문에 이어 김일성은 고강과 함께 모스크바를 방문했다.전쟁중 고위지도자의 동정과 관계되는 일은 모두가 극비였지만 특히 이 당시 김일성이 북경을 방문해 모택동을 만났고 이어서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을 만난 사실은 지금까지 한번도 공개된 적이 없는 극비사항이다. 김일성·고강의 방문을 받은 뒤 스탈린은 모택동 앞으로 전문을 보내 방문결과를 통보해주었다(51년 6월13일.스탈린이 모택동에게 보낸 전문.전문번호 N3557). 오늘 본인은 모택동 동무가 보낸 대표단과 조선대표단(김일성과 고강)을 만났음.이 자리에서 3가지 문제가 제기됐음.첫째 휴전문제.현상황에서 휴전은 유익하다는 데 의견일치를 보았음.둘째군사고문단문제.군사고문단이 그렇게 필요하다면 보내주겠음.셋째 60개 사단에 필요한 무기공급문제.우리는 이에 반대하지 않음.대표단들이 귀국즉시 동지께 보고할 것이기 때문에 상세한 사항은 이 전문에서 언급치 않겠음. 이와 함께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중국 비행사단 16개중에서 최소 8개 비행사단을 신속히 전선에 투입해줄 것을 요청했다.조만간 시작될 휴전협상에 앞선 일전에 대비하기 위한 전력강화의 일환이었다. ◎새로 발혀진 사실/김,51년 6월초 모·스탈린과 연쇄 대좌/휴전협상 문제 북·중·소 협의사실 판명 우리는 스탈린과 모택동의 전술적 이견이 단순치 않았다는 점을 이번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모택동은 장개석군대와의 내전때와 같은 게릴라전술을 주장하였으나 스탈린은 영미군은 장개석 군대가 아니라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는 대규모의 전면적인 작전』을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이것은 ⑴전쟁의 결정 ⑵중국군의 참전문제 ⑶전세 역전 후의 북한정부의 구제여부 ⑷참전중국군에 대한 지원문제등한국전쟁과 관련한 결정적인 문제에 있어서 자주 이견을 보여온 스탈린과 모택동이 휴전회담의 개시를 놓고 다시 한번 의견의 차이를 보였음을 의미한다. 자국의 병력으로 싸우기 때문에 모택동은 제한적인 전쟁을 하려했던데 반해 배면에 숨어서 중국군과 북한군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고 있는 스탈린은 대규모의 전쟁까지 계산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번 회의 내용에서 밝혀진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은 전쟁중 김일성의 북경과 모스크바 방문사실이다.전쟁중 김일성이 북경과 모스크바를 방문하여 모택동과 스탈린을 만났다는 사실은 지금까지 전혀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역사적 사실이다. 특히 그것이 휴전협상의 개시를 앞둔 시점이었다는 점에서 전쟁중의 휴전협상의 개시가 이들 공산3국의 깊숙한 논의와 합의하에 이루어진 것이라는 점을 보여준다.전쟁을 결정할 때와는 달리 김일성은 이번에는 모택동을 먼저 방문하고 그다음에 스탈린을 방문하는 순서를 밟았다.아마도 스탈린의 결정을 수용하여 그대로 전쟁을 수행하기보다는 직접 참전하여 공동으로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모택동의 견해를 먼저 들어 둘의 의견합치를 본 뒤에 이를 갖고 스탈린의 의견을 묻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많은 학자들은 북한의 전쟁 결정과 진행이 중국 및 소련과의 긴밀한 협의하에 이루어지고 있는 사실을 들어 전쟁중 언젠가 김일성이 모택동과 스탈린을 방문하지 않았을까 추론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동안 이를 증명할 자료는 물론 이러한 사실조차 한번도 증명되거나 공개된 적이 없었다.따라서 이번에 공개된 사실은 앞으로 한국전쟁을 연구하는데 있어 매우 중대한 기여를 할 것이 틀림없다 하겠다.
  • 사라예보 TV센터에/포탄떨어져 42명사상

    【사라예보 로이터 AP 연합】 보스니아 수도 사라예보의 TV센터와 인근 주택가가 28일 포격을 받아 최소한 4명이 죽고 38명이 부상했다. 보스니아내전을 취재중인 외국언론사들이 입주해 있는 사라예보의 TV센터에 이날 상오 로켓 1발과 박격포탄 1발이 떨어져 경비원 1명이 죽고 미 CNN방송의 데이비드 올브라이턴,AP­TV뉴스 카메라기자와 WTN 직원등 외국기자를 포함한 38명이 부상했다. 또 TV센터 인근 주택가도 이날 비슷한 포격을 받고 3명이 사망하고 아파트 1동의 몇개 층이 파괴됐다.
  • 스리랑카 내전 격화/정부­반군 1백40명 사망

    【콜롬보 로이터 AFP 연합】 스리랑카 타밀족 반군이 28일 정부군 진지를 기습공격,지난 4월 휴전을 깬뒤 가장 치열한 교전을 벌여 양측에서 최소한 1백40여명이 사망했다고 스리랑카의 한 고위장교가 밝혔다. 스리랑카 육군 대변인 사라 무나싱게 준장은 해상에서 침투한 1천여 반군이 이날 새벽 북부 자프나반도 서쪽 만다이티부섬의 정부군 기지들을 습격해 정부군과 반군측에서 각각 75명과 50여명이 사망했다고 말했다. 무나싱게준장은 이밖에 정부군 33명이 부상했고 20여명이 실종됐다고 전하면서 정부군은 현재 만다이티부섬을 거의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 출범 반세기 유엔의 과제/이건영 뉴욕특파원(오늘의 눈)

    26일은 유엔헌장서명 50주년이 되는 날이다. 50년전인 45년 이날 미국과 옛소련을 비롯한 세계 51개국 대표들은 미 샌프란시스코에서 전날 채택한 유엔헌장에 서명했다.유엔의 정식발족은 서명국의 과반수이상이 비준서를 기탁한 같은 해 10월24일(유엔의 날)이었지만 「유엔호」는 실질적으로 이날 출발한 것이다. 지금 샌프란시스코에서는 각종 50주년 행사가 지난 24일부터 열리고 있다.그러나 행사에 관계하는 사람들이나 참가자들은 마냥 축제분위기에만 젖어 있지 못할 형편이다.유엔의 장래문제때문이다.부트로스 부트로스 갈리유엔사무총장이 직접 주재하는 세미나의 주제가 「유엔의 개혁」이라는 것은 유엔이 처한 현재의 상황이 얼마나 절박한 것인가를 보여주고 있다. 출범이후 한때 이데올로기 갈등의 「피해자」였던 유엔이 냉전종식이후 평화의 사도로 적지 않은 역할을 해온 것 또한 사실이다.물론 최근 보스니아내전개입같은 공과가 엇갈리는 활동도 없는 것은 아니나 적극적 평화유지자로서의 역할은 부인하기 힘들다. 유엔은 이제 반세기를 살아온 시점에서 자신을 뒤돌아보고 약진의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위기를 기회로 적극 활용해야 한다.갈리사무총장이 「유엔의 개혁」을 50주년의 주된 이슈로 삼고나온 것도 이때문일 것이다.그러기 위해서는 강대국중심의 기구운영방식부터 개선돼야 할 것이다.안보리의 개편논의는 몇년전부터 있어왔으나 결판은 다음 세기에나 가야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 재정확보면에서는 회원국들의 분담금도 분담금이지만 유엔기구의 「군살」을 시급히 제거해야 한다.2천6백여명의 직원을 거느린 조직의 예산낭비요소는 없는지 재점검해봐야 한다.금고가 비어 직원들 월급을 못주지 않을까 걱정만해서는 안될 일이다.재정타개책도 작지만 내부에서 먼저 찾아야 한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유엔이 정치논리의 장이 돼서는 안된다는 명제를 유엔 스스로 강하게 인식하는 것이다.정치가 인권이나 환경,개발보다 앞서지 않도록 1백85개 회원국들 모두도 유엔헌장의 참뜻을 새겨야 할 하루다.세계평화질서의 감시자는 영원히 존재해야 한다.유엔안보리회의장에 걸려있는 「불사조」벽화와 함께.
  • 발신전용 휴대전화 시티 폰/내년초 상용화 전망 밝다

    ◎여의도 시범서비스 4개월… 반응 좋아/단말기 15만원선에 통화료 저렴/삐삐 함께 쓰면 결점 보완… 기지국증설이 과제 보행자중심의 발신전용 휴대전화인 「시티폰」 시범서비스가 이용자로부터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 내년초 상용화 전망이 밝아지고 있다. 한국통신이 지난 3월 서울 여의도지역에 기지국을 설치하고 시범서비스를 실시해온 「시티폰」에 대한 이용도 조사결과 시범가입자 1백명 가운데 80%이상이 매우 만족스러운 반응을 보인 것으로 밝혀졌다. 시범서비스 초기에는 인식부족으로 이용량이 다소 저조하던 시티폰은 지난달의 경우 총가입자 1천명이 11만건의 시험통화를 함으로써 1명당 하루평균 6건의 통화량을 기록했다. 시티폰은 기존의 일반휴대폰처럼 발·착신통화가 함께 되지 않는 발신전용으로 기지국 반경 2백m내에서만 통화가 가능한 개인휴대통신이다. 그러나 시내전역에 기지국을 세우고 무선호출기와 함께 사용할 경우 무선호출을 받고난 뒤 시티폰으로 얼마든지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경제적인 통신수단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단말기가격이 15만원선으로 일반휴대폰에 비해 훨씬 저렴하며 통화료도 일반전화요금과 비슷한 수준이어서 고가의 휴대폰을 이용하기에 부담을 느끼는 계층에 적합한 통신수단이 될 것으로 점쳐지고 있다. 또 단말기가 1백70g 안팎의 소형으로 휴대가 쉬울 뿐 아니라 디지털방식을 채택하고 있어 통화품질이 우수하다는 것도 장점으로 꼽힌다. 우승술 한국통신 사업개발단장은 『현재는 기지국이 여의도지역에만 설치되어 있어 타지역에서는 이용할 수 없는 것이 아쉽다』면서 『시범가입자의 불편을 해소하기 위해 서비스지역을 곧 서울시내 도로변으로 확대하는 한편 가입자도 1만명선으로 늘릴 계획』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이용자의 반응이 좋은데다 외국산 제품보다 더 가벼운 1백60g짜리 단말기와 기지국장비의 국산화가 이미 끝난 상태여서 내년초 상용서비스의 가능성은 매우 높다』고 덧붙였다.
  • 북핵/동아시아 주요 불안요인/중 핵실험·러 극동군도 지역안보 위협

    ◎일 국방백서 북한핵은 일본을 포함한 동아시아의 『주요 불안요인』이며 일본은 이에대해 신중한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 19일 공개된 일본의 연례 국방백서가 분석했다. 일본 지지(시사)통신이 입수한 이백서는 또 전세계에서 지역분쟁이 증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안전을 보장할 방안이 없다고 지적했다. 이 백서는 최근 중국의 핵실험에 대해 중국이 핵무기 현대화와 다양화에 주력하고 있다고 경고하면서 러시아의 극동군사력 역시 아시아안보에 위협이 된다고 지적했다. 이 백서는 보스니아와 기타 지역의 내전이 장기화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유엔평화유지군의 활동이 모두 성공적이지는 못하다고 평가했다.
  • 전쟁초기의 작전 양상(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9)

    ◎스탈린이 사실상 남침작전 총지휘/침략개시일 승인·김일성에 일일이 작전지시/“미 군사개입 공개항의 하라” 평양에 비밀전문 6월22일에는 평양주재 소련대사관앞으로 암호전문의 해독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이후 일체의 암호전문 해독을 금지한다는 모스크바의 지시가 하달됐다.그뒤 평양대사관과 본부 외무부간 전문교신은 연말까지 중단됐다.대신 크렘린은 전시통신을 전담하는 소련군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대사관과의 교신을 계속했다.이 교신내용은 대통령문서소에 보관돼 있다. 전쟁개시와 함께 스탈린은 사실상 작전의 총지휘권을 행사했다.작전개시일을 승인했고 김일성의 작전명령에 일일이 간섭했다.중국·북한군 사령부에 작전지시를 일일이 내려보내기도 했다.그러나 전쟁초기 이러한 일사불란한 협력관계는 미국의 개입으로 전세가 뒤바뀌며 조금씩 흐트러지기 시작했다. 50년 7월1일 스탈린은 소련군 총참모부 제8국을 통해 평양의 소련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보냈다.(전문번호 N34681sh). ○“계속 진격해야” 독려 『① 귀하는북조선군당국이 갖고 있는 계획에 관해 아무런 보고도 하지 않았다.그들은 전진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전진을 일단 멈추기로 결정했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는 두말할 것없이 계속 진격해야한다.남조선 해방이 앞당겨질수록 개입(미국의 개입을 지칭)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② 미군기들이 북조선 영토를 공습하는데 대해 북조선 지도자들의 반응을 보고하라.이 공습으로 겁을 먹고 있는가 아니면 자신감을 유지하고 있는가. ③ 북조선 지도자들이 미군의 공습과 군사개입에 대해 공개항의할 의사는 없는가.우리가 생각하기에 공개항의를 해야한다. ④ 북조선이 탄약과 기타 군수품들을 공급해달라고 한 요청에 대해 7월10일까지 이를 완전히 충족시켜 줄 것이라고 김일성에게 알릴 것』 이튿날인 7월2일 슈티코프대사는 스탈린앞으로 다음과 같이 북한지도부의 분위기를 전했다.『6월28일 서울을 함락함으로써 북조선지도부의 사기는 매우 높음.그러나 미군기의 공습이 잦아지고 라디오방송을 이용한 미국의 북조선에 대한 악선전이 가열되면서 북조선지도부의 분위기가 다소 악화되고 있음』 일부 지역에서는 최종 승리에 대한 의문이 제기됐고 일부 「해방지역」에서는 사태를 관망하려는 움직임이 주민들 사이에 일고 있다고 이 전문은 보고했다.슈티코프대사는 김일성,박헌영이 미군개입으로 야기된 어려움을 인식하고 필요한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밝혔다.김일성은 위기타개를 위해 보병부대,탱크,해군부대의 추가창설 계획을 밝히고 군사총동원령을 발동시킬 계획이라며 슈티코프의 의견을 물었다. 이와함께 김두봉,홍명희는 인민군만으로는 미군과 맞서 싸우기 힘들다며 조심스레 소련의 입장을 타진했다.슈티코프대사는 이같은 입장타진은 김일성의 개인비서 한사람이 소련대사관을 찾아와 전달했다고 전문에서 밝혔다. 7월4일 슈티코프소련대사는 역시 총참모부 8참모부를 통해 스탈린앞으로 7월3일 김일성,박헌영과의 면담결과를 보고했다(전문번호 N405840). 『김일성은 군사작전이 너무 느리게 진행된다고 불평했음.특히 중부전선에서 너무 느리다고 했음.도하작전은 민족보위상이 현장에서 직접지휘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전수행이 제대로 안됐다고 지적.김일성은 자기가 일을 제대로 못하고 있다고 자탄했음.김일성은 전선과 해방지구 모두 사정이 심각하다고 강조.그는 미군 상륙부대가 북조선의 항구나 공정낙하산부대를 이용해 북조선군 후방에 침투할 위험이 있다는 점을 강조.김은 이같은 가능성에 대비키 위해 많은 양의 추가 무기지원을 요청.2개 사단,12개 해병대대,해양경찰대 수개부대를 무장시킬 양의 무기임.김은 북조선지역의 철도역들이 미군공습의 표적이 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 무기들을 만주를 경유,안동­신의주­평양으로 신속히 보내줄 것을 요청.김은 북조선이 예비연대와 탱크여단 2개의 창설을 시작했다며 무기와 탱크가 필요하다고 했음.김일성은 한 보좌관에게 이같은 어려운 상황에서 작전통제 능률을 높일 방안을 물었음.김은 앞으로 미군을 상대로 싸워야한다며 북조선군의 지휘능력을 강화시킬 필요성이 있다고 강조.그는 총참모부를 전투병력에 보다 가까이 옮겨가기 위해 작전통제와 지휘조직을 도와줄 소련 군사고문관 1명의 파견을 요청했음』 슈티코프대사는 평양주재 소련군사고문단장인 바실리예프장군과 공동으로 다음사항을 김일성에게 건의한 것으로 이 전문은 밝히고 있다.『① 총사령관 참모총장 군사위원회 총참모장으로 구성되는 군사평의회가 이끄는 2개의 군사그룹을 창설할 것.각 군사그룹은 휘하에 4∼6개의 하급부대를 둘 것.② 전선사령관 총참모장 전선군사평의회가 이끄는 전선사령부를 창설할 것.이 전선사령부는 총참모부 책임하에 구성.③ 민족보위성은 이미 소규모이기 때문에 그대로 존속시킬 것.민보성은 전투병력에(식량,연료,탄약등)모든 필요한 보급품을 공급하는 외에 예비병력,신병 훈련,공화국 북부에 상륙방어부대를 창설하는 임무를 맡는다.④ 김일성을 인민군최고사령관으로 임명한다』 ○무기 대량지원 요청 김일성은 슈티코프대사의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두사람은 군병력 조직개편이 전선의 작전에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다는 원칙에도 합의했다. 슈티코프대사는 마지막으로 『병력편성 분야의 소련군사고문관 2명을 파견해줄 것(1명은 편성사령관 고문관,1명은 포병사령관 고문관).소련군사고문단장 바실리예프장군과 전선사령부에 파견된 소련군장교들이 서울로 함께 이동하는 것을 허가해 줄 것을 요망함』이라는 것으로 이 전문을 끝냈다. 8월28일 스탈린은 슈티코프대사를 통해 김일성에게 격려의 뜻을 담은 전문을 전달했다.그러나 이 전문의 진짜의도는 김일성에게 새로운 작전지시를 내리는 것이었다(전문번호 N75021,소련군총참모부 제8참모부). 『①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중앙위는 김일성동지와 그의 동료들이 남조선인민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위대한 투쟁을 벌이는데 찬사를 보낸다.김일성동지는 눈부신 성공을 거두고 있다.소련공산당 중앙위는 조만간 침략자들이 치욕속에 조선반도에서 쫓겨날 것임을 의심치 않는다. ② 김일성동지는 외세개입자들과 맞서 싸우는 이 전쟁에서 항상 성공을 거두지 못한다고 당황해선 안된다.일부에서 진격이 지연되고 국지적인 패배를 겪는다고 낙담해선 안된다.이런 전쟁에선 누구도 계속 승리만 거둘수는 없다.러시아 내전 때는 더 심했고 독일과의 전쟁 때도 마찬가지였다.조선인민들이 거둔 성공은 바로 이들이 세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사람들이 됐고 제국주의의 멍에를 벗으려는 아시아 해방운동의 기치아래 들게됐다는 사실 그 자체에 있다. 지금부터 모든 피착취 인민의 군대들은 조선인민들로부터 미국과 기타 제국주의자들에게 결정적 타격을 가해야한다는 사실을 배울 것이다.김일성동지는 조선이 이제 혼자가 아니라 동맹국들이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된다.동맹국들이 당신을 도와 전쟁을 계속할 것이다.1919년 영·불·미 외세와의 전쟁당시 러시아는 지금 조선동지들보다 훨씬 더 어려운 처지에 있었다. ○소 군사고문 파견 전문 ③ 김일성동지에게 공군력을 산개시키지 말고 전선에 집중시킬 것을 충고한다.전선에서 공격은 반드시 적진에 결정적인 공습을 가하는 것과 함께 시작돼야한다.인민군 전투기들은 적기로부터 인민군을 방호할 수 있는 전투력을 보유해야 한다.필요시 우리가 폭격기,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 8월29일 슈티코프대사로부터 이 편지를 전달받은 김일성은 크게 감동,이튿날 노동당중앙위 정치국회의를 소집해 스탈린에게 보내는 공식답장을 채택했다.『우리의 경애하는 교사이신 스탈린동지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는 구절로 이어지는 이 답장은 스탈린에 대한 최대의 존경과 감사의 표현으로 가득차 있다. ◎새로 밝혀진 사실/김일성 “전진속도 느리다” 자책/서울 제한점령설 허구 입증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뒤의 상황을 다룬 이번 9회에는 새로운 사실들이 많이 들어있다.가장 중요한 사실은 스탈린이 전쟁의 결정과정보다 전쟁의 전개과정에 훨씬 더 깊숙이 개입,『남조선해방이 앞당겨질수록 미국의 개입 가능성이 줄어들 것』이라고 지적하는등 사실상 초전부터 스탈린과 김일성의 공동의 전쟁이었음이 이번 문서에서 확인된 것이다. 두번째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중요한 결정을 할 때 김일성과 북한지도부는 항상 소련의 의사를 문의하고 소련은 그에 상세히 답변하는가 하면,어떤 것은 문의에 앞서 미리 지시하는등 이번 자료를 통해서 우리는 비로소 1950년 11월 공군이 개입하기 이전부터 소련이 이 전쟁에얼마나 깊숙이 개입하였는지 확인하게 된다. 세번째는 김일성은 초기에 전진속도가 너무 느린것에 대해 심각하게 불만,자책하고 있음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이는 김일성이 서울까지만 점령하려했다는 제한전쟁설이 사실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이다. 네번째는 김일성이 이미 전쟁 초기부터 미군의 상륙부대나 공정부대가 북한후방으로 침투할 위험이 높다고 인식,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음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다섯번째는 스탈린·김일성과 같은 고위수준에서의 전쟁수행방식의 공동결정 뿐만 아니라 현지전쟁수행에서도 소련과 북한은 긴밀하게 협의,공동수행을 하고 있었다는 점이 최초로 확인되었다. 끝으로 미군의 참전으로 북한이 곤경에 처했을때 스탈린은 오히려 『폭격기와 전투기를 추가로 보내줄 수 있다』고까지 말하면서 고무하고 있다는 점이 이번 자료를 통해서 밝혀졌다.
  • 미­러 보스니아 파병 놓고 대립/옐친 “미군 도움 안된다” 반대

    ◎영선 「전술전투단」 구성… 독 파병시사/“유엔군석방 국적통핵 세계와 협상”­영 외무 【런던·모스크바·본·콜로라도스프링스·사라예보 외신 종합】 미군의 보스니아 파견을 들러싸고 미국과 러시아가 대립하고 있는 가운데 독일도 1일 군대를 파견할 움직임을 보이고 있으며 보스니아에 주둔중인 영국군은 전술전투단구성에 착수,본격적인 전투준비테세에 돌입하고 있다. 빌 클린턴 미 대통령은 31일 미 콜로라도주 콜로라도스프링스의 공군사관학교 연설에서 『곤경에 처한 유엔평화유지군 지원을 위해 미 지상군을 보스니아에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다.이에 대해 보리스 옐친 러시아대통령은 『미군의 파병은 사태해결에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 보스니아문제를 둘러싼 양국간의 대립이 심화되고 있다. 미국의 이러한 군대파견움직임에 이어 클라우스 킨켈 독일 외무장관도 1일 『유엔병력 재배치를 지원하기 위해 보스니아에 군대를 파견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독일이 보스니아에 지상군을 보낼 경우 2차대전후 처음으로전투지역에 군대를 파견하는 것이 된다. 【사라예보·런던·파리 AP·AFP 로이터 연합】 보스니아 내 세르비아계는 1일 또다시 유엔 민정관리 1명을 인질로 잡고 평화유지군 병사들에게 총격을 가하는 등 서방권에 대한 도전을 강화하고 있으나 인질 석방문제를 싸고 국제적십자위원회(ICRC)가 양측을 오가며 직·간접 접촉을 가졌다. 더글러스 허드 영국 외무장관은 이날 영국기자들과의 회견에서 ICRC가 유엔을 대리해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와 『직·간접 접촉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클린턴 파병 발언 왜 나왔나/세계 위협용… 결행 미지수/대보스니아 정책 전환 시도… 러 반발 무마 과제 클린턴 미대통령이 31일 보스니아전쟁 개입 가능성을 발표,민족분쟁에 따른 영토확장 전쟁으로 3년여를 끌어온 보스니아내전은 새 국면에 접어들 조짐을 보이고 있다. 미국은 그동안 「보스니아내전 불개입」이라는 깃발을 내걸고 침묵을 지켜왔다.그러나 클린턴 대통령은 최근 보스니아 사태가 어느 때보다 심각하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이같은 정책 전환을 시도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프랑스,영국을 주축으로 한 유엔 평화유지군이 세르비아계에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을 외면하면 이들 우방들과 군사·외교적 문제가 발생할 가능성이 있으며,유엔평화유지군을 인간방패로 삼아 나토와 유엔에 일격을 가하고 있는 세르비아계를 그대로 방치한다는 것은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의 체면을 크게 깎아내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클린턴의 발표는 평화유지군이 철수하기 전이라도 전략상 필요하다면 미지상군을 투입하겠다는 쪽으로 파병 조건을 완화함으로써 세르비아계에 위협을 줘 행동을 제약시키는 동시에 보스니아 사태를 해결하려는 국제사회의 노력에 힘을 실어주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을 것같다. 그러나 미지상군이 실제로 보스니아로 파병되기 위해서는 먼저 많은 국내외의 난관을 넘어야 한다.무엇보다 공화당이 우세한 미 의회와 제2의 베트남전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여론을 어떻게 극복하느냐는 것이 큰 문제다. 오는 96년 대선을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는 클린턴으로서는 단시일내에 끝날 것으로기대하기 어려운 보스니아전쟁에서 명분없이 많은 희생자를 낼 수 있는 파병을 선뜻 단행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클린턴의 외교정책이 안고 있는 또 하나의 딜레마인 셈이다. 클린턴의 발언이 있은 후 공화당은 예상했던 대로 일제히 클린턴에 대한 비난에 나섰다.공화당원들은 클린턴의 가장 취약한 점,즉 외교정책의 실패를 또 한번 보게 됐다며 비꼬았다.96년 대선의 공화당 후보에 나설 보브 돌 상원 원내총무는 『클린턴의 보스니아 전쟁 개입 정책은 의회와 협의없이 이루어 진 것』이라며 『클린턴 행정부가 이 문제로 의회의 승인을 얻기는 매우 힘들다』고 말했다. 또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도 『미국의 지상군 투입은 사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것』이라고 경고했다.옐친은 보스니아사태 해결을 위한 어떤 나라의 무력사용도 반대한다며 그 이유에 대해 『인질들이 워낙 넓게 산재해 있어 몇백명의 군병력이 투입된다고 해서 이들의 소재를 파악하기는 힘들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뜻밖 저항에 대응책 고심/유엔 세계 응징 놓고 “냉가슴”

    ◎공격땐 피해·타협땐 체면손상… 강공 미지수 세르비아계를 응징하느냐,아니면 굴복하느냐.보스니아에 2만4천여명의 평화유지군을 주둔시키고 있는 유엔이 어려운 선택을 놓고 기로에서 고심하고 있다. 안전지대를 공격하고 무기를 탈취해간 세르비아계에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유엔이 나토공군기를 동원해 두차례공습하자 세르비아계는 그에 대한 보복으로 유엔군 3백여명을 인질로 삼고 살해위협을 서슴지 않으면서 무력시위 수위도 높였다.현지 유엔군은 경무기로만 무장돼 있고 지원부서요원이 대부분이어서 자위능력도 부족한 상황이다. 이제 공은 다시 유엔에 넘어왔으나 국가마다 이해관계가 엇갈려 여기저기서 회의만 할뿐 선뜻 대응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보스니아는 이라크같은 사막지대가 아니라 게릴라전을 가능케 하는 산악지역이어서 세르비아계를 완전히 제압하려면 한두차례의 작전으로 끝나지 않는다. 응징하자니 인질도 신경쓰이는 데다가 끝없는 내전에 휘말려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하고,굴욕적으로 타협하자니 체면이 말이 아니기 때문에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다. 주요국의 입장차이만 봐도 보스니아내전이 얼마나 뜨거운 감자인지 알 수 있다.미국과 독일은 여기서 물러섬으로써 유엔의 무기력한 모습을 확인시켜 줄 수는 없기 때문에 강력히 대응해야 한다는 강경한 태도를 보인다. 그러나 이 국가들은 보스니아에 자국병사를 보내지 않았고 앞으로도 주둔시킬 계획이 없다.캘빈 미첼 백악관대변인은 클린턴대통령의 외교정책팀이 보스니아주둔 유엔군 증강을 선호하며 미군파견에는 반대하는 기존정책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유엔의 제재조치를 당하고 있어 더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식으로 막가는 세르비아계에게 외교협상을 통한 말은 더이상 효과가 없기 때문에 『보스니아에 대한 무기금수를 해제하고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습을 강화하는 것만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하리스 실라지치 보스니아총리는 촉구했다. 반면 4천여명이란 최대병력을 파견해 놓고 있고 이미 40명 가까운 희생자를 냈으며 현재 인질중에서도 절반을 차지하는 프랑스나 유사한 여건의 캐나다 등은 대책없는공습에 반대한다.알랭 쥐페 프랑스총리는 『군사적인 해결책이 없기 때문에 외교협상을 추진해야 한다』고 말했다.역시 유엔군을 파견해 놓은데다가 전통적으로 같은 슬라브민족인 세르비아계에 우호적인 러시아도 무력사용에 반대한다. 이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각국이 회의를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러시아 외무·국방장관이 세르비아계 설득차 보스니아로 떠났다.미국,영국,프랑스의 항공모함이 보스니아연안인 아드리아해쪽으로 이동중이고 나토전투기 70여대가 이탈리아 북부기지에서 출격대기중이며 미국과 영국 등의 특수부대원들이 이탈리아에서 인질구출작전을 준비중이다.양동작전을 구사하는 셈이다.
  • 스리랑카 내전격화/정부·반군 53명 사망

    【콜롬보 AFP 로이터 연합】 찬드리카 쿠마라퉁가 스리랑카대통령은 29일 정부군과 타밀족 반군과의 전투에서 양측에서 최소한 53명이 숨지는 사태가 발생하자 반군에 대한 반격을 맹세해 사태가 악화일로에 있다. 쿠마라퉁가 대통령은 정부가 지금까지 반군세력인 타밀엘람해방호랑이(LTTE)에 대해 전면전을 유보해 왔으나 이제부터 방어적이며 제한된 활동에서 벗어나 전면전을 검토할 때라며 전면전을 시작하면 다른 일에서와 마찬가지로 효과적으로 그리고 신중하게 추진될 것이라고 밝혔다.
  • 보스니아외무 헬기 피격 사망/비하치 시찰 귀로에 세계 로켓포 맞아

    【사라예보 로이터 AFP 연합】 이르판 류비얀키치(43) 보스니아 외무장관이 탑승한 헬리콥터가 28일 보스니아 동서부 비하치 자치주 부근 상공에서 격추되는 바람에 류비얀키치 장관이 사망했다고 친보스니아 정부계 통신사인 ONASA가 보도했다. ONASA 통신은 류비얀키치 장관이 이날 상오6시30분(현지시간)헬리콥터를 타고 비하치 부근 상공을 지나던중 탑승헬기가 로켓포에 피격,격추되는 바람에 사망했다고 전했다. 류비얀키치 장관은 나흘간에 걸친 비하치 지역 시찰을 마치고 사라예보로 되돌아오던 중이었다.비하치 지역은 보스니아 정부군이 통제하고 있으나 주변 지역은 세르비아계에 포위된 상태다. 자그레브 주재 보스니아 대사관도 류비얀키치 외무장관의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 지난 94년 6월부터 보스니아 외무장관을 맡아온 류비얀키치 장관은 보스니아 내전발생이래 교전 상대방의 포격또는 총격으로 숨진 두번째로 고위급 관리다. 앞서 지난 93년 하키야 투라이리치 부총리가 보스니아 세르비아계의 총격을 받고 숨진바 있다.
  • “삼성 공중파방송 진출” 보도(정부시책 이렇습니다)

    ◎정부차원서 검토한적 없다 □AFKN이나 KBS­2TV를 민영화할 경우 삼성이 이를 사들여 공중파방송에 진출할 것이라는 일부 언론보도가 사실인가=삼성물산은 지난달 26일 경영설명회에서 『여건이 주어진다면 공중파방송에 진출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그러나 정부 차원에서는 이에 대해 검토하거나 구상한 사실이 전혀 없다.오는 9월을 전후해 환수될 예정인 AFKN채널을 군통신용으로 활용한다는 방침은 변함이 없다.또 KBS­2TV의 민영화는 논평할 가치조차 없다.기업이 공중파방송 진출을 전략으로 구상하는 것은 임의이지만 이를 대외적으로 공표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삼성물산측에 강력한 항의를 전달했다. ◎법인 채권이자 원천징수 세율/20% 고수… 개인은 15%로 인하 □내년부터 법인의 채권이자 소득에 대한 원천징수 세율을 현재 20%에서 15%로 인하하는가=지난 해 세법을 개정할 때 96년 1월부터 금융소득에 대한 종합과세를 실시하기로 함에 따라 기준금액 4천만원 이하에 대한 분리과세의 종결세율을 15%로 인하하기로 했으며,개인의 채권이자 원천징수 세율도 15%를 적용하기로 했었다.그러나 현 20%인 법인의 채권이자 원천징수 세율은 인하하지 않기로 했었다.우리의 과세체계가 소득세율과 법인세율을 달리하는 등 서로 다른 과세방법을 택하고 있기 때문에 원천징수 세율이 반드시 일치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취한 조치였다.따라서 당분간은 20%인 법인의 채권이자 소득세율을 그대로 유지하고,올해 정기국회에 법인세법 개정안을 제출할 계획도 없다. ◎현재의 경기활황은 내용 건실/별도 안정대책 마련계획 없어 □현재 경기가 너무 과열돼 정부가 경기안정대책을 마련한다는데 사실인가=정부는 현재의 경기가 종합적인 안정대책을 동원해야 할 정도의 상황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따라서 최근의 엔고를 호기로 활용하기 위한 경쟁력 강화,중소기업 지원 확대,인력수급 원활화 등 기존의 부문별 대책 이외에 별도의 대책을 마련할 계획은 없다.전반적으로 경기가 좋고 내용도 비교적 건실하기 때문에 획일적인 경기진정 대책은 필요하지 않으며,다만 중화학과수출기업이 호황을 주도하고 경공업과 내수 중소기업,서비스업 등은 부진을 보이는 등 경기가 너무 편중되는 양극화 현상을 개선하는 데 정책의 초점을 두고 있다.분야별 대책으로 이미 시행하고 있는 중소기업 지원 9대 시책 이외에 미분양 아파트 해소 방안,중소기업 하도급대금 지급 원활화 방안,상업어음할인활성화 방안,신규 인력공급 확대 방안 등을 검토하고 있다. ◎한국통신 독점 시내전화사업/“데이콤 진출” 보도는 사실 무근 □현재 한국통신이 독점하고 있는 시내전화사업에 데이콤이 진출한다는 일부 언론보도가 사실인가=전혀 사실이 아니며 그럴 계획도 없다.지난 2월 데이콤이 CATV 현장중계 서비스를 위해 한국전력의 자가통신 잉여설비를 임차키로 합의한 것이 시내전화사업에 진출하기 위한 것으로 잘못 알려진 것 같다.
  • 세계,유엔군 251명 억류/교량·레이더기지 등 방패로

    ◎러 “인질석방”세계 설득잡업/유엔,오늘 긴급안보리 소집 【사라예보·팔레·브뤼셀 로이터 AP AFP 연합】 보스니아 세르비아계는 연이틀 계속된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의 공습에 맞서 27일 비무장 유엔감시요원과 평화유지군 병사들의 억류를 확대,수백명의 유엔군을 인간방패로 삼음으로써 보스니아 내전은 세르비아계와 전세계와의 대결이라는 새로운 양상으로 전개되고 있다. 사태가 악화되자 나토는 이날 긴급회의를 개최,보스니아 주둔 유엔평화유지군의 계속 주둔을 지지한다고 밝히고 이들의 안전과 작전수행 능력을 제고하기 위한 추가조치를 검토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나토는 또 『세르비아계의 불법적 행동을 엄중히 규탄한다』고 말하고 유엔군 인질들을 즉각 석방할 것,안전지대에 대한 공격을 중단 할것,사라예보주변에 배치된 모든 중무기를 철수시키라는 최후통첩을 준수할 것을 촉구했다. 나토 이와함께 『나토는 유엔이 이같은 목적을 위한 추가 행동을 요청해올 경우,이에 응할 준비가 돼있다』고 강조,보스니아 사태의 악화를 막겠다는단호한 의지를 천명했다. 유엔은 인질억류사태와 관련,프랑스의 요청으로 긴급안보리회의를 27일(현지시각)중 개최할 예정이며 미국은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 항공모함 시어도스 루스벨트호를 인근 아드리아해로 파견했다. 현재 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는 최소한 2백16명의 유엔보호군(UNPROFOR) 병사및 35명의 군사 업저버를 포함,모두 2백51명을 억류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자그레브 주재 유엔 대변인이 밝혔다. 크리스토퍼 거니스 대변인은 사라예보 주변의 유엔 중무기 보관소들에서 모두 1백32명이 세르비아계에 강제로 끌려갔거나 내부에 억류돼 있으며 다수의 유엔관측소에도 84명이 이들에게 붙잡혀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고 말했다. 알렉산드르 이반코 유엔 보호군 대변인은 『유엔군 감시요원들이 전신주와 교량,레이다 기지등에 결박돼 있는 섬뜩한 사진들이 전세계에 소개돼 세르비아계에 대한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말하고 세르비아계 지도자들은 이들의 안전에 책임을 져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한편 러시아는 세르비아계에 이들의 석방을 위한 설득노력을 펴고 있으며 국제적십자사(ICRC)측은 세르비아계와 접촉,학대행위를 자제할 것을 촉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인테르팍스 통신은 세르게이 필라토프 대통령 대변인의 말을 인용,보리스 옐친러시아 대통령과 안드레이 코지레프 외무장관이 인질들의 석방을 위해 세르비아계지도자들을 설득중이라고 이날 보도했다. 또 이타르 타스통신은 코지레프 외무장관과 파벨 그라체프 국방장관이 27일 보스니아의 교전과 관계 있는 현지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 현지로 급히 출발했다고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총리의 말을 인용,보도했다.
  • 대만보유 중국 고미술품/4백여점 70년만에 “햇빛”

    ◎황제 부의가 남긴 70만점중 일부/뉴욕 등 미 전역 13개월 순회 전시 지금부터 70년 전 중국의 마지막 황제 박의가 자금성에서 강제로 쫓겨난 뒤 그가 남겨놓은 70여만점의 진귀한 고대 중국의 예술품들을 바탕으로 중국 국립왕궁박물관이 창립됐다.그러나 중국 고대예술의 정수라고 할 수 있는 이들 작품들은 그 가치에 비해 아직까지 대접을 받지 못한 편이었다. 우선 일본군의 진격을 피해 이들 작품들은 1만9천5백57개의 박스에 포장돼 상해와 남경·장사·청도·중경 등 1만2천㎞에 이르는 피난길에 올라야 했다.국·공내전의 전란을 피하기 위해 1949년 대만으로 옮겨진 뒤에야 이들 작품들은 유랑길에서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대만으로 옮겨진 뒤에도 이들 작품들은 오랜 세월 빛을 보지 못했다.중국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설 것을 우려한 대만 당국이 이들을 전시하는데 주저해 이제까지 일반에 공개됐던 것은 전체의 1%에도 못미치며 대부분의 예술품들이 와이슈앙시 인근의 창고 등지에 사장된채 오랜 세월을 보내야 했다.이 예술품들 가운데4백여점이 박물관 창립 7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뉴욕·워싱턴·시카고·샌프란시스코 등 미국 전역을 도는 13개월에 걸친 순회전시에 나선다.70년만에야 겨우 무덤에서 부활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 순회전시에 대한 비판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비판론자들은 대만 정부가 미국과의 정치적 관계개선을 위해 그 값을 헤아릴 수 없는 귀중한 예술품들을 놓고 모험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한다.하지만 대만은 미국무부으로부터 이들 예술품들의 소유권이 도전받지 않을 것이란 보장을 받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왕궁박물관의 친샤오이 관장은 중국의 예술은 서방에 비해 결코 떨어지지 않다고 말하면서도 그에 대한 결론은 관람객들에게 맡길 것이라고 웃으면서 말한다. 전문가들은 이들 예술품들이 중국에 남아 있었다면 대부분이 파손됐을 것이라며 이들이 대만으로 오게된 것은 큰 다행이라고 말하고 있다.그러나 이들 예술품들이 언제까지나 대만의 소유로 남을 수 있을지는 확실치 않다. 친 관장은 중국의 박물관들은 현재로선 이들 예술품들을 보존할 기술도 부족하며 이들을 안전하게 지킬 보안도 허술하다고 말하면서도 중국의 기술수준이 향상되면 대만과 중국이 1년씩 이들 예술품들을 교대로 전시하는 것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그러나 앞으로 대만과 중국과의 관계가 개선되면 이들 예술품들이 또다시 멀고먼 유랑길에 다시 올라야할 날이 올 것이라는 전망이 벌써부터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 1948년 남북연석회의(새로쓰는 한국현대사:20)

    ◎김구 도착전 개최… 북서 분위기 일방적 주도/명목뿐인 대표 내세워 각본대로 인공수립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용운(조사부 〃)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남북연석회의)」는 19 48년 4월 19일 하오6시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막을 올렸다.김구는 개막식에 참석하기 위해 이날 아침 평양으로 떠날 예정이었으나 군중의 저지에 부딪쳤다.그의 거처인 경교장 뜰에 새벽부터 몰려든 학생·청년들은 김구에게 『북행은 김일성에게 이용당하는 것일 뿐』이라며 맹렬히 반대했다. 김구는 몸소 베란다에 모습을 드러냈다.『독립운동으로 내 나이 칠십여년(72살)이 되었다.마지막 독립운동을 허락해 달라.이대로 가면 조선은 분단될 것이고 서로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절절하게 호소했다.그러나 군중은 끝까지 김구의 평양행을 만류했다.그는 어쩔 수 없이 뒷담을 넘어 북행길에 나섰다. ○김규식은 참석 망설여 김구의 북행에는 아들 김신과 비서 선우진이 동행했다.김구 일행은 자동차편으로 개성,여현(지금의 판문점)을 거쳐 밤늦게 평양에 닿았다.한편 김규식은 이틀 늦은 21일 서울을 떠나 다음 날 새벽 평양에서 합류했다. 김구와 김규식이 북행을 결심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이들이 민족통일을 이루고,또 민족상잔을 피하기 위해 어렵게 평양행을 결심했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이다.하지만 일부에서는 다른 요소들이 작용했다는 시각의 분석이 나오고 있다. 김구의 경우 당시 정치적 입지가 매우 좁았다는 것이다.당시 그가 북행을 결심할 무렵 한국문제는 유엔 결의에 의해 「남한에서의 단독선거,단독정부 수립」쪽으로 굳어져 있었다.이는 이승만의 의도이기도 했다.이에따라 이승만은 그 세력을 급속히 넓혀간 반면 경쟁관계에 있던 김구는 궁지에 몰리는 판이었다.결국 김구는 남북협상을 하나의 정치적 돌파구로 여겨 모험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다. 이에 비해 김규식은 끝까지 연석회의 참석을 망설인 것으로 전해진다.그는 나름대로 남북협상의 한계를 예상했지만 자신이 그동안 주도해 온 남쪽에서의 좌우합작이라는 명분의연장선상에서 부득이 평양행을 결심한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김구가 도착하기 몇시간 전인 19일 하오6시에 남북연석회의는 시작됐다.개회사에 이어 김일성이 「북조선 정치정세 보고」를 하고 잇따라 박헌영·백남운·허 헌이 등단해 연설하는등 회의는 북쪽의 일방적인 주도 분위기로 이어졌다.마지막 날인 4월 23일 연석회의는 「조선 정치정세에 대한 결정서」「(미·소)양군 철퇴 요청서」「전조선 동포에게 격함」등 여러가지 결정서·성명서가 채택됐다. 이 회의에서는 남북의 56개 정당·사회단체 대표 6백95명이 참가했다고 공식 발표됐다.남쪽에서 참가한 단체는 41개,주요인사는 김구·조소앙·엄항섭·조완구(이상 한독당),김규식·여운형·원세훈(이상 민족자주연맹),그리고 홍명희 민주독립당 당수등 50여명으로 파악됐다. 연석회의에 이어 26∼30일에는 「전조선 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남북 지도자협의회)」가 열렸다.이 때 비로소 김구·김규식은 북쪽의 김일성·김두봉과 합동으로,또는 개별적으로 여러차례 회합을 가졌다.이 네명이 실질적으로 합의한 사항은 30일 공동성명서 형태로 발표됐다.4개 항의 내용은 ⓛ외국군대를 즉시 동시에 철거 ②외국군대 철거이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음을 확인 ③조선인 각계각층을 대표하는 민주주의 임시정부 수립 ④남조선 단독선거 반대 등이다.특히 각 정당은 성명서 말미에 「남조선 단독선거의 결과와 이 선거로 수립하려는 단독정부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며,지지하지 않겠다」고 결의했다. ○해주서 2차모임 갖자 남한 대표들은 북에 잔류를 희망한 홍명희 등 70명을 남겨두고 5월 4일 귀경했다.남북연석회의는 대단한 성과나 거둔 듯이 보였다.김구·김규식은 5월 6일 공동 기자회견을 갖고 「단선 반대」입장을 재천명했다.5월 8일에는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주도로 총파업이 단행됐고 각급 학교가 동맹휴학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의사에 상관없이 총선거는 무난히 치러졌다.「총선 거부」로 공식적인 정치의 장에서 밀려난 남한의 남북협상파들은 급격히 몰락한다.「5·10 선거」가 실시된 뒤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북협상파 정치인이나 정당들은 「단독선거를 인정하지 않는다」는 성명을 다시금 발표하지만 이미 메아리없는 공허한 울림이 되고 말았다. 한편 평양에서는 5월 25∼26일 「남북조선노동당 정치위원회 연합회의」가 열렸다.여기서 총선저지가 실패했음을 자인하고 제2차 「전조선 제정당 사회단체 지도자 협의회」 소집을 결정한다.6월 11일 북한측은 남쪽의 남북협상파 인사,정당에게 6월 23일 해주에서 제2차 회의를 갖자고 전격 제의했다. 그러나 김구·김규식 등 초청을 받은 인사들은 선뜻 제의를 받아들이지 못했다.첫째 그동안 남한정국이 변해 공개적으로 해주에 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만약 비공식으로 참여한 사실이 드러나면 이제는 남한 당국의 법률 제재를 받을 수 밖에 없게 돼 있었다.결국 김구·김규식은 불참을 통고했으며 북조선노동당은 이를 아랑곳하지 않고 6월 29일부터 7월 5일까지 제2차 대회를 평양에서 강행했다.이 회의는 남한에서의 선거 결과에 관계없이 일방적으로 통일정부로서의 인민공화국 수립을 결정하기에 이른다. ○남로당 지하선거 실시이 해주회의에서는 김구·김규식을 이용해 「5·10선거」를 방해하려 한 북한의 의도는 명확하게 드러났다.자신들의 참여없이 이처럼 엄청난 결정을 내린데 대해 김구·김규식을 비롯한 남쪽의 남북협상파 정치인들은 심한 배신감에 몸을 떨었다.하지만 이미 「쏘아버린 화살」꼴이 됐다. 이후 남북협상의 흐름은 철저히 북한측 의도대로 잡혀갔다.명목상 「통일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기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가 8월 21일 해주에서 열렸다.이 자리에는 남로당이 지하선거에서 선출된 이른바 「남한 대표」1천여명이 나왔다.거의가 남쪽에 근거를 둔 공산주의자들이었고 일부 정당인사가 구색용으로 들어있었다.이들은 북한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울 때 남한 주민을 대표하는 것으로 선전한 것은 물론이다. 남북협상의 기운은 이로써 실질적인 막을 내렸다.남북협상의 전과정을 돌아보면 남쪽의 정치인들이 북한측에 철저히 농락당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다.김일성의 김구·김규식 초청­연석회의 개최­5·10선거 반대 결의­제2차 대회의인민공화국 수립 결정­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북한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수립등의 계획된 수순을 밟아나갔던 것이다.이 모든 과정이 진행되는 동안 남쪽의 남북협상파들은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기회는 한번도 얻어내지 못했다.모든 것은 북한쪽의 뜻대로 진행됐을 뿐이었다. ◎UNTCOK 보고서/김규식 등 남대표 불러 융숭한 대접/“남에 전기공급”약속후 1주뒤 끊어 북한은 1948년 4월 19∼25일까지 열린 평양 남북연석회의를 정치적 선전기회로 철저하게 활용했다.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입수한 당시 주한미군사령부의 「평양 연락장교 보고서」(1948년 4월 16일)등의 여러 자료는 이를 구체적으로 입증했다. 이 보고서는 남한의 방문자들에게 감명을 주려고 북한 당국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고 밝혔다.평양시내의 도로를 보수하고 연일 시민들을 동원,청소를 하는 한편 길가의 건물에 페인트를 발랐다고 보고했는데 당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의 평양방송 청취기록도 이를 뒷받침했다.UNTCOK 평양방송 청취기록은 「남한 대표들이국영공장 근로자들의 열성과 한 마을의 생활상을 보고 감명을 받았다」는 내용을 적었다.여기에는 「국영공장 휴게실에서 노동자의 피아노 반주에 놀랐다」는 대목도 나온다. 이어 UNTCOK 기록을 보면 연석회의 일정이 끝난 4월 25일에는 40만명이 모인 평양시민 군중대회에 참가한 뒤에 메이데이 기념 인민군 열병·분열행사도 참관한 것으로 되어있다.어떻든 남한 대표들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4월 30일에는 대동강 쑥섬에서 낚시·보트놀이와 함께 어죽잔치를 즐긴 이들은 조만식의 남한 동행을 제의만 하고 적극 매달리지는 않았다.이 물놀이는 하오4시까지 계속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의 통상적인 시찰여행과 대접은 김구와 김규식에게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는 것이 UNTCOK의 당시 분석이다.그래서 김규식은 김일성의 4월 25일 저녁초대 연설에서 「남쪽은 망하는 집안 같고 여기는 새로 잘 되는 집안 같다」고 북한을 극찬했다.김규식은 또 「우리 민족은 누구를 막론하고 소련의 제의를 불가하다고 말할 사람이 없을 것이다」는 식으로 미·소 양군 즉각철수안을 지지하고 나섰다.이같은 미·소 양군 즉시 철수론은 지극히 비극적이었다는 사실은 1950년 6월 25일의 한국전쟁이 증명하고 있다. 한편 돌아온 김구와 김규식은 5월 6일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는데,그 안에는 북한이 남한에 계속 전력을 공급키로 약속했다는 내용도 들어있다.그러나 주한미군사령부 「정보개요」(1948년 5월)에 따르면 북한은 평양방송을 통해 그날 저녁 전력공급을 중단하겠다고 위협했으며 14일 실제 전력이 끊겼다.
  • 인간방패(외언내언)

    발칸에 다시 불이 붙고 있다.보스니아내 세르비아계의 무기고에 대한 나토(NATO)의 공습이 이틀째 계속되자 세르비아계는 이곳 평화유지를 위해 들어가 있는 유엔 감시요원 13명을 붙잡아 나토의 공습대상지역에 인간방패로 묶어두고 있다.공습에 대한 보복이다.이들 인간방패중 희생자가 생겼는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세르비아계는 이에 그치지 않고 사라예보 외곽의 9개 유엔무기고를 방어하고 있던 유엔 평화유지군 67명을 무장해제시킨뒤 다음 공습예상지역에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보도되고 있다.『이에는 이로』의 끝없는 보복이 계속되고 있다. 보스니아 내전은 벌써 37개월째.전체인구의 44%를 차지하는 보스니아계와 인구의 33%인 세르비아계,소수민족인 크로아티아계 간의 얽히고 설킨 종족분쟁이다.「인종청소」로 불릴만큼 처절한 이 민족분쟁에서 희생된 사람의수가 자그만치 20여만명.난민이 3백여만명에 이르고 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유엔은 92년 평화유지군을 투입했다.평화유지군은 투입됐으나 내전의 양상이 워낙 복잡한데다 미국과러시아등 각국의 이해관계가 서로 달라 평화유지에 별무효과.이번 나토군의 폭격은 지난 4개월동안의 휴전기간동안 세르비아계가 유엔평화유지군으로부터 탈취한 중무기를 25일까지 반납하라는 유엔의 최후통첩을 무시했기 때문. 러시아의 체첸사태도,지난 4월세계를경악케했던 르완다의 난민수용소 후투족난민학살사건도,1백50여만명의 희생자를 낸 수단내전,89년 이래 15만명이 죽어간 라이베리아 사태,2백50만명이사망한 비아프라 사태,에티오피아의 30년내전,모두가 종족분쟁이다. 종족이나 민족단위로 국가를 세분화하면 이런 핏줄 싸움은 없어지는 것일까.전문가들은 그렇게 되면 세계에는 최소한 1천여개의 민족국가가 탄생하리라고 예상한다.그래도 문제는 또 남는다.쪼갤 땅과 방법이 없는 것이다.종족보존이란 인간의 원초적 본능이 문제다.
  • 중국의 남침지원(6·25내막/모스크바 새증언:6)

    ◎모택동 “2개 조선인 사단 파병”약속/모­김일성 친서받고 탄약·식량지원 승낙/장교 200명 훈련… 전투력 증강 주문/“장기전은 불리”… 일 개입 대비 당부 김일로부터 김일성의 친서를 전달받은 모택동은 먼저 조선인 사단의 전출문제에 대해 이렇게 답했다.『3개 사단중 2개는 현재 목단과 장춘에 주둔하고 있고 1개는 공격작전에 참가중이다.따라서 앞의 2개 사단은 언제든지 조선정부에 돌려줄 수 있다.하지만 나머지 1개는 전투가 끝나야 하기 때문에 1개월 전에는 곤란하다』며 흔쾌히 전출을 승낙했다.이와함께 모는 이 조선사단들이 정규군이 아니라서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전투력이 약하다면서 이들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훈련된 장교를 배속시켜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중국군 보낼수도 김일은 또한 조선인 사단이 일본군 무기로 무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중국이 탄약을 대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모택동은 『중국에서도 그런 탄약을 생산한다.얼마든지 주겠다』고 답했다.남침문제에 대해 언급하며 모택동은『군사작전은 언제든지 시작할 수 있게 됐다.김일성은 이 점을 감안해 신중하게 준비를 갖추고 있으라』고 주문했다.모택동은 이와함께 일본의 개입에 우려를 표시했다.『전쟁은 신속히 끝날 수도 있고 장기전이 될 수도 있다.장기전은 귀측에 불리하다.왜냐하면 그럴 경우 일본이 전쟁에 개입해 남조선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물론 걱정할 필요는 없다.지근에 소련이 있고 만주에는 우리가 있다.필요하면 귀측을 위해 중국군을 보낼 수 있다.우리는 모두 검다.미국 사람에게는 구별도 잘 안된다』 모택동은 이렇게 적극적인 지원의사를 밝히는 한편 가까운 시일내에 남침은 곤란하다는 입장을 덧붙였다.그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했다.『국제정세가 좋지 않다.중국공산당은 장개석군과 싸우기에 바빠서 북조선에 충분한 지원을 해줄 수 없다.그러니 국민당을 완전히 몰아내고 중국이 공산당 기치아래 통일될 때까지 남침을 기다려달라』 ○“개전 보류”요구 이와함께 모택동은 김일성의 북경방문에 관해 상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고 물었다.모는 또한 인도네시아·미얀마·말레이시아·인도차이나 등지의 공산당 동지들로부터 아시아제국 코민포름를 만들자는 제의를 받았다고 김일에게 말했다.하지만 아직 코민포름 출범은 시기상조라고 모는 말했다.중국내전이 진행중이고 조선에 긴장상황이 계속되고 있으며 코민포름 창설이 자칫 군사동맹체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기 때문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5월 17일 모택동은 소련대표단에게 김일의 중국방문에 대해 브리핑했다.당시 북경주재 소련대표부의 코발료프대사는 5월 18일 스탈린앞으로 모의 브리핑내용을 보고했다.다음은 코발료프가 보고한 모택동의 발언내용.『북조선에 장교와 무기지원을 약속했음.만주에 1백50만명의 조선인이 살고 있는데 이들로 2개 사단(사단병력은 1만명)이 구성돼 있다.이중 1개 사단은 전투경험이 있음.만주에서 국민당과 적극적인 전투를 벌였음.이들 2개사단은 북조선의 요청만 있으면 즉각 투입가능함.북조선이 투입요청을 하지 않더라도 이들을 훈련시키고 모든 보급품을 계속 제공하겠음.이외에도 우리는 장교 2백명을 훈련시키고 있음.1개월이내에 이들은 조선에 보낼 예정임.만약 남북조선간 전쟁이 일어날 경우 우리는 앞서 언급한 조선인 사단에 대한 식량·무기지원은 물론 모든 필요한 지원을 아끼지 않을 것임. 북조선동지들은 조만간 미군이 남조선에서 철수할 것으로 믿고 있음.하지만 대신 일본군이 들어올까봐 두려워하고 있음.일본군의 도움을 얻어 남조선이 북침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임.남조선이 침공해올 경우 대응공격을 하되 남조선군에 일본군이 들어있는지 없는지 주의깊게 살피라고 했음.만약 일본군이 들어있고 적의 전투력이 우세할 경우 영토일부를 내주더라도 귀측의 전투력을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했음.그래야 상황이 좋아질 때 적을 격퇴시킬 수 있기 때문임. 우리는 또한 이런 후퇴시에 대비해 당·군·인민들을 이념적으로 교육시킬 것을 북조선측에 권고했음.그런 후퇴가 민주조선의 완전한 패배가 아니라 일시 전략적인 후퇴라는 점을 주지시키라고 했음.설사 미군이 철수하고 일본군이 대신 들어오지 않았다 하더라도 조선동지들이 너무 서둘러 남침을 시작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했음.왜냐하면 맥아더장군이 신속하게 일본군 병력과 무기를 남조선에 들여보낼 수 있기 때문임.반면 우리는 주력병력 대부분이 양자강 너머에 가있기 때문에 즉각적인 지원을 북조선에 해줄 수 없음. 따라서 남침은 1950년초,국제상황이 호전되기를 기다려서 시작하는 게 좋다는 생각임.그 때는 일본군이 침공해와도 중국군 엘리트부대를 보내 일군을 격퇴시킬 수 있음』 ○소련과 긴밀협조 이같이 말한 뒤 모택동은 『이 모든 조치는 모스크바와 협의하에 취해 나가겠다』고 코발료프 대사에게 약속했다. 스탈린이 김일성에게 남침불가를 통보한 직후인 49년 4월,5월.모택동과 김일성 두사람 사이에는 이미 남침시 병력지원에 대한 깊숙한 논의가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50년 4월 김일성의 모스크바방문에서 스탈린이 남침을 승인한 점을 상기한다면 모­김 두사람간 남침에 대한 교감은 이보다 무려 1년이나 앞서는 것이다. 전쟁의 해인 50년 1월 1일.날이 밝자마자 스탈린은 평양주재 소련대사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 1통을 보냈다.『임표가 모택동앞으로 다음과 같은전문을 보냈다.중국인민해방군 안에 1만6천명의 조선인 병력이 있는데 순수 조선인 부대도 있다.순수 조선인부대는 4개 대대,27개 중대,9개 소대임.중국군내에 3개의 조선인 지휘부가 있으며 그중 2명은 사단장급이고 5명은 여단장,대대장급 87명이다.중대장 5백78명,소대장1천4백명,분대장 1천9백명이다. 중국군이 중국남부로 이동했을 때 조선인 병력사이에서 조국으로 돌려보내달라며 소요가 있었다고 함.임표는 내전이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모든 조선인 병력을 1개 사단 혹은 4∼5개 여단으로 묶어서 모두 조선으로 돌려보내고 싶다는 희망을 피력했다.임표의 건의에 대한 김일성의 입장을 들어볼 것』 그러나 김일성은 평양주재 중국무역대표부를 통해 보낸 중국정부의 서신을 통해 이 사실을 먼저 알고 1월 9일 슈티코프 대사를 불렀다.다음은 슈티코프 대사가 1월 11일 스탈린 앞으로 보낸 보고전문.『김일성은 중국정부가 내전이 끝나가고 있어 중국군내 조선군 부대를 해산시키고 북조선이 원하면 모두 돌려보내겠다는 뜻을 알려왔다고 했음.김일성은 이들을 모두 받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했음.김일성은 ⑴이들로 1개 지상군 사단,2개 지상군 연대,그리고 1개 모터사이클 연대,기계화 여단을 만들 계획이라고 함.⑵김일성은 이 조선인 병력을 50년 4월까지 중국영토에 두고 싶다고 했음.북조선에 이들을 배치하는 데 문제가 있기 때문이라고 함』 ○회담의제 “통일”로 중국군내 조선인 부대를 놓고 북한·중국간 활발한 논의가 진행되는 가운데 김일성은 50년 4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그런데 김일성은 모스크바를 방문하기 전에 모택동에게도 면담신청을 해놓았다.김일성이 모스크바에 머물고 있던 4월 10일 이그나티예프 평양주재 소련대사대리는 다음과 같은 전문을 크렘린으로 보냈다.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에 관한 건이었다.『북경주재 이주연 북한대사가 3월말 모택동을 만났음.이주연대사의 요청으로 이루어진 이 면담에서 김일성과 모택동의 회담문제가 협의됐음.모택동은 회담개최를 받아들이고 회담시기를 금년 4월말이나 5월초로 제의했음.모택동은 회담의제를 조선통일로 못박았음.그리고 김일성이 통일에 관해 구체적인 계획을 갖고 있다면 비밀방문으로 하고 그렇지 않으면 공식방문으로 하라고 말했음.이주연대사는 회담시기나 회담의제에 대해서는 김일성이 현재 병치료중이라는 핑계로 구체적인 답을 피했음.(편집자 주:스탈린의 요청에 따라 김일성은 중국지도자들에게도 모스크바방문을 비밀로 했음)』 김일성이 모스크바방문을 마치고 평양으로 돌아간 뒤인 5월 3일 스탈린은 모택동에게 김과의 회담사실을 통보했다.『조선동지들이 최근 우리를 방문했음.회담결과에 대해서는 조만간 알려주겠음』북경주재 소련대사를 통해 보낸 짤막한 전문통지문이었다.그리고 나서 10일이나 지난 5월 14일 스탈린은 회담결과를 모택동에게 통보했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김일성은 남침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스탈린과 모택동을 교묘하게 이용했다.그의 능란한 처세술을 읽게하는 대목이기도 하다.그는 두 사람간의 코뮤니케이션을 가능한한 차단시켜 때로는 서로 경쟁시키고 때로는 협력시키며 자신의 의도를 관철시켜나간 것이다.반대로 스탈린­모택동 두사람의 이러한관계는 전쟁의 이니셔티브를 김일성으로부터 뺏어가는 결과를 만들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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