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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가노프“러 내전 가능성”/옐친 통제력 상실…결선투표 취소 우려

    【모스크바 로이터 AFP 연합】 겐나디 주가노프 러시아 공산당당수는 20일 최근 크렘린궁의 잇따른 음모와 인사개편에 이어 러시아가 점차 내전속으로 빠져들어갈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했다. 지난 16일 실시된 1차 대선투표에서 옐친(35%)보다 3%포인트 뒤져 2위를 차지한 주가노프 당수는 이날 공산주의자들의 연합체인 민족애국동맹 명의로 발표된 성명에서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통제력을 상실하고 있다면서 오는 3일로 예정된 결선투표가 취소될 위험이 있다고 말했다. 이 성명은 『(주가노프가 이끄는) 민족애국동맹은 러시아가 지금 위기에 처해 있음을 선언한다.점차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는 노쇠한 옐친을 둘러싼 내부알력이 내란으로 확대돼 비극적 결말을 야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 최 전 대통령 법정 출두 “초읽기”/오늘 공판서 증인채택 결정

    ◎“「12·12」 규명 열쇠” 검찰·변호인 모두 원해/최씨 자발적 출두·강제구인 여부 등 관심 12·12 사건의 증인은 누가 될까. 초미의 관심사인 최규하 전대통령의 법정 출두가 초읽기에 들어갔다.증언 내용도 주목의 대상이지만 생존한 전직 대통령 3명 모두가 한 법정에 선다는 점에서 관심을 끈다. 20일 열리는 12·12사건 15차 공판에선 증거조사를 거쳐 관련 증인들을 재판부가 채택한다. 검찰은 이 사건의 증인신청자로 A·B·C 3가지 방안을 마련해 놓았다. 공판에서 드러난 쟁점의 진실을 가리고 변호인의 증거 동의여부를 봐가며 신축적으로 대응한다는 전략이다. 수사기록 13만7천여쪽에 등장한 인물은 무려 5백명을 훨씬 웃돈다. 검찰은 A단계 증인으로 50여명을 압축해 놓았다.변호인측이 사건의 본질과 상관 없이 시시콜콜한 진술에까지 매달릴 경우에 대비한 것이다. B단계는 20여명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것으로,가능성이 가장 높다. C단계는 신속한 재판진행과 쟁점을 가리는데 꼭 필요한 10명 정도를 증인으로 신청하는 방안이다. 어느단계든 증언이 꼭 필요한 사람은 10명선이다.최 전대통령과 당시의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장태완 수경사령관,노재현 국방부장관,윤성민 육군참모차장,권정달 보안사정보처장,하소곤 육본 작전참모부장,김진기 육본 헌병감,신현확 전 국무총리,이건영 3군사령관 등이다. 핵심쟁점인 정총장 연행에 대한 대통령 재가의 합법성,지휘체계 유지,병력출동 상황을 규명하기 위한 것이다. 변호인측은 검찰의 허를 찌를 증인을 천천히 신청한다는 생각이다. 최 전대통령은 12·12 쿠데타 뿐만 아니라 5·17 내란사건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마스터키」이다. 당연히 최 전대통령의 증인채택은 불가피한 실정이다.검찰과 변호인측 모두 증인으로 원하기 때문이다.재판부도 증인신청을 받아들인다는 자세다. 증인채택시 최전대통령의 법정출두 역시 관심거리다.재판부의 출두요구에 순순히 응할지,아니면 구인 형식으로 나올지는 미지수다. 출두하더라도 묵비권을 행사할 가능성도 있다.최전대통령이 예의 소신을 견지할지 주목된다.검찰이 조사하러 방문했을때는 『전직대통령은 항룡(천상의 최고까지 올라간 용)으로 말을 하지 않는게 원칙』이라며 진술을 거부했었다. 최 전대통령의 증언이 대세를 가름하는 고비가 될 것은 분명하다.〈박선화 기자〉
  • 보안사 3인방 “물귀신 작전”

    ◎“당시 상황 낱낱히 진술” 권정달씨에 배신감/언론통폐합·시국수습방안 마련 등 떠넘겨 옛전우·동지가 적으로 갈라섰다. 허삼수·허화평·이학봉피고인 등 이른바 「보안사3인방」은 80년 당시 정보처장이던 권정달국회의원 「죽이기」에 나섰다.17일 열린 5·17 내란사건 14차공판에서 이들은 한결같이 당시 권정달 정보처장에게 책임을 떠넘겼다. 자신들의 혐의를 부인하다 나온 진술이다.그러나 권의원에 대한 배신감이 더 배어 있는 듯했다.쿠데타동지가 검찰 신문과정에서 당시상황을 낱낱이 진술하고 자기만 빠져나간 데 대한 「물귀신작전」인 셈이다. 당시 보안사 인사처장이던 허삼수피고인은 『언론대책반인 K공작계획과 이상재 준위를 언론대책반장으로 임명한 사실을 모른다』고 부인했다.80년 10월의 언론인강제해직도 업무상 연관이 없어 당시에는 몰랐다고 주장했다. 대공처장이던 이학봉피고인도 『80년3월 권처장이 이준위에게 공작입안과 실시를 지시했다』며 『권처장이 이준위에게 보도검열지원업무와 언론계 중진에 대한 시국관 파악의2대지침을 내린 것으로 안다』고 진술했다. 이들은 신군부의 집권시나리오인 이른바 「시국수습방안」도 권정보처장이 만든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당시 보안사령관 비서실장이던 허화평피고인은 수습방안을 육사 1기 선배인 권정보처장이 자신과 상의한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특히 비서실내의 대기실에서 관련참모들이 논의했다고 하는 건 보안상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약도를 내보이기도 했다. 그는 또 국보위의 전문위원선정은 전적으로 권정보처장과 정보1과장이던 한용원 소령이 주도했으며,한과장이 조순·손제석 서울대교수와 접촉했다고 주장했다. 언론통폐합은 권처장과 허문도씨가 책임자이고,민정당 창당은 권처장과 이종찬 중정 사무국장이 주도했다고 진술했다. 이들은 권씨 외에 강창성 전 보안사령관의 계열인 한씨와 백동림씨가 검찰조사에서 자신들에게 불리한 진술을 했다는 점을 내비추기도 했다. 권의원의 반격이 주목된다.〈박선화 기자〉
  • 허화평 피고의 소신과 독설

    ◎“5·6공에 충성한 검찰 단죄권한 없다”/“5·18특별법 제정 배후에 운동권 움모 숨어” 허화평피고인이 17일 공판에서도 예의 소신 발언으로 눈길을 끌었다.이른바 극우보수 논리의 연장선으로 볼 수도 있다.지나친 독설이 두드러졌다. 허피고인은 5·17 계엄확대 조치는 최규하 대통령이 시국수습을 위해 내린 정치적 결단이라고 주장했다.당시 재야정치인들과 일부 학생들이 최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며,물리적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쓰러뜨린다는 과격한 투쟁전략과 전술을 구사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다.특히 투쟁세력들은 기존 세력을 제거하고 「빠리꼬뮨」과 같은 민중정권을 세우려 했다고 덧붙였다. 그는 또 『5·17조치는 일부 정치인들의 무책임한 무한 대권경쟁이 결정적인 원인이었다』며 김영삼대통령과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김종필 자민련 총재 등 「3김씨」를 간접 비난했다. 역설적으로 민주화세력이 분열되고 과격한 민중전술을 동원하는 바람에 5공 정권이 탄생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검찰이 12·12사건을 6공 때는 무혐의 처리하고 94년에는 불기소 처분했다가 이번에 기소한 데 대해 수긍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허피고인은 『내란·반란죄로 기소된 사람들이 주축이 된 5·6공하에서 헌신적으로 봉사해 온 검찰 수뇌부들에게는 피고인들을 단죄할 수 있는 도덕적 권위가 부여돼 있다고 볼 수 없다』고 말했다.또 민정계가 주축이 된 민자당과 그 당명만을 바꾼 신한국당은 도덕적 기반을 상실하고 있다고 주장했다.90년 2월9일의 민자당 창당선언문의 「갈등과 반목을 해소한다」는 대목을 예로 들기도 했다. 5·18특별법 제정의 배후에는 운동권 세력의 음모가 숨어있다고 주장했다.요소요소에 진출한 운동권이 민주·진보세력 등으로 위장,보수우익 세력을 반민주·반통일·외세의존주의자로 매도,타격을 가함으로써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려 한다는 논리다. 그는 『지난번 총선때 옥중당선된 것은 지역구민이 나의 정당성을 정치적으로 승인한 것』이라며 『현역의원을 구속해 정당활동을 봉쇄하는 것은 국민주권주의에 반한다』고 말했다.〈박선화 기자〉
  • 정총장이 최대통령 조사 지시”/검찰,「12·12」당시 전말 공개

    ◎“김재규가 범인” 알고도 아무런 조치없어/군검찰·전씨 총리공관서 진술서 받아 지난 79년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의 내란방조 의혹에 따라 착수된 최규하 대통령 권한대행에 대한 조사와 관련,15일 검찰이 당시 조사를 지시한 주체와 조사 착수경위 등 사건의 전말을 공개했다. 지금까지 전두환 당시 합수본부장 등 신군부측이 12·12 「거사」에 앞서 최전대통령을 압박하기 위해 조사를 감행했다는 설이 지배적이었다. 최 전대통령에 대한 조사는 김재규가 범인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김재규에게 『10월27일 새벽 4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된다』는 사실을 직접 알려주는 등 최고 통수권자로서의 책임을 저버린 점을 문제삼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최전대통령은 그러나 사건발생 17년여가 지나도록 이에 대해 입을 열지 않고 있다. 검찰에 따르면 조사는 79년 12월3일 밤 11시부터 다음날 새벽 1시까지 2시간여동안 이뤄졌다.당시 수사기록에는 조사날짜가 12월1일로 돼 있으나 이는 날짜가 소급돼서 기재된것이다.실제는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의 내란사건에 대한 첫 공판을 하루 앞두고 전격적으로 실시됐다. 조사는 정승화 당시 육군참모총장의 지시에 따라 이뤄졌다.정총장은 12월3일 하오 7시쯤 김재규의 공소장을 검토한 뒤 군검찰에 『최대통령이 시해사건에 대해 김계원 비서실장으로부터 보고받은 것으로 공소장에 기록돼 있다』며 『국민들이 오해를 하지 않도록 최대통령에게 양해를 구하고 진술서를 받아라』고 지시했다. 이에 따라 당시 전창렬 육본 검찰부장(중령)은 합수부에 수사협조를 요청,전합수본부장과 함께 서울 삼청동 총리공관을 방문해 2시간여동안 최대통령을 조사했다.이 진술서는 앞뒤쪽의 표지를 빼면 3쪽의 간략한 분량이다. 『각하께서 위독하십니다.거지철과 김재규가 언쟁끝에 총격전을 하다가 그만…』,『방안을 보니 거지철이 쓰러져 있었고 그 위에 각하가 쓰러져 계셨습니다』는 내용을 김계원으로부터 보고받았다는 진술이었다. 한편 전두환 전 대통령은 최근 공판에서 『정총장이 나를 직접 불러 「최대통령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을 규명하라」는 지시를 했다』고 진술,조사착수 경위에 대해서는 엇갈린 주장을 폈다.〈박은호 기자〉
  • 조선대 10대 총장 김기삼 교수 선출

    【광주=최치봉 기자】 조선대 총장선출 특별위원회는 11일 제 10대 총장선출을 위한 결선투표를 실시,김기삼 교수(59·정치외교학과)가 총 유효투표수 5백61표 가운데 과반수인 3백20표(57%)를 얻어 2백41표(43%)를 얻은 김홍명 교수(정치외교학과)를 누르고 당선이 확정됐다고 밝혔다. 김 총장당선자는 조선대 법정대학을 졸업하고 조선대 교수협의회 의장과 사회과학대학 학장을 역임했으며 지난 80년 5·18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7년8개월간 해직되기도 했다.
  • 이순자씨,전씨 공판 첫 방청/12차공판 이모저모

    12·12 및 5·18사건에 대한 12차 공판이 열린 10일 서울지법 주변은 마침 「6·10 항쟁」 기념일과 겹쳐서 그런지 평소보다는 사람들이 많은 편이었으나 썰렁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이날 공판에는 처음으로 전두환피고인의 부인 이순자씨가 방청석에 나와 안팎의 시선이 집중.베이지색 바지 정장 차림에 금테 안경을 쓴 이씨는 공판 시작 15분전인 상오 9시45분쯤 장남 재국씨와 함께 417호 대법정 입구에 모습을 드러낸 뒤 법정 안으로 직행.이씨는 방청석에 앉아 아들과 귀엣말을 나누기도 했으나 주위의 시선에 관심을 나타내지 않은 채 재판정을 정면으로 응시. ○…이씨는 상오 10시 개정에 맞춰 김영일 재판장이 전피고인의 입정을 호명했으나 20여초가 지나도 피고인이 입정하지 않자 자리에서 목을 길게 빼고 피고인들이 입정하는 문에 시선을 고정. 잠시 뒤 전피고인이 입정하자 이씨는 담담한 표정으로 전피고인에게 눈길을 주었으며 전씨도 잠시 방청석 쪽을 바라보다 피고인석에 착석. 이씨는 상오 공판이 끝난 뒤 경호원들의 경호 속에 법정을 떠나며 기자들의 질문에는 묵묵부답. ○…법정 주변은 궂은 날씨에 아랑곳없이 예상보다 많은 사람들이 방청권을 얻으러 나와 눈길. 공판이 장기화되면서 이 날도 일반인들의 모습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으나 5·18 관련단체 및 재야 운동권 관계자들은 평소보다 10여명 많은 30여명이나 눈에 띄었다. ○…전피고인에 대한 이양우 변호사의 변호인 반대신문이 50여분간 진행된 상오 10시50분쯤 김재판장이 이변호사의 목소리 크기를 문제삼아 신문이 잠시 중단되는 해프닝을 연출. 김재판장은 이변호사가 웅변조로 계속 강변하자 『목소리를 좀 낮춰달라』며 2차례 요청했고 이변호사는 이에 대해 『목소리가 본래 크다』고 대답한 뒤 목소리를 낮춰 방청석에서 폭소가 터지기도. ○…이변호사는 80년 당시 국보위의 활동을 현 대통령 자문보좌기구인 세계화추진위원회(세추위)와 비교하는 등 궤변을 구사. 그는 『검찰의 주장대로 전피고인이 국보위 상임위원장으로서 공무원 숙정 등 월권행위를 했다면 현 정권내의 세추위가 법조개혁을 추진한 것과 도대체 무슨 차이가 있느냐』며 당시 전피고인의 행위를 정당화하려고 시도하다 재판부의 제지를 받기도. ○…전피고인은 『언론인 해직 등 언론계 정화계획의 구체적인 내용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면서도 당시 해직된 언론인들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언급,「사후약방문」격이라는 비난을 사기도. 그는 애써 착잡한 목소리로 『당시에는 몰랐으나 88년 청문회때 피해사실을 비로소 알게 됐다』며 『뒤늦게나마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겠다』고 후회. ○…이변호사는 하오 속개된 공판에서 『보안사 권정달 정보처장이 시국 수습방안의 작성을 주도한 것으로 밝혀졌음에도 불구,왜 검찰이 그를 내란혐의로 기소하지 않았느냐』고 항변. 권씨는 「정상참작」 등의 이유로 12·12사건은 기소유예,5·17사건에 대해서는 무혐의 처리됐었다. 한편 검찰은 변호인이 이름을 거명하지는 않았으나 「이 사건의 수사 및 공소제기의 책임자」가 「국보위에 참여한 이유」에 대해 해명을 요구하자 『점잖치 못한 처사』라며 몹시 못마땅해 했다.〈박상렬·조현석·박현진 기자〉
  • 「12·12­5·18」12차 공판

    ◎전씨­“「노 대통령 당선」으로 5·18 용인 나를 처벌하려면 국민투표해야” 전두환 피고인은 최규하 전 대통령의 하야의사를 지난 80년8월1일 최대통령으로부터 처음 들은뒤 대통령직 승계제의를 받았으며 같은 달 4∼5일쯤 두번째 회동에서 제의를 수락했다고 밝혔다.〈관련기사 18·19면〉 지난 80년5월31일 국보위설치는 자신이 건의하자 최규하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결단을 내려 이뤄진 것이라고 강변했다. 집권시나리오로 불리는 「시국수습방안」은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 독자적으로 구상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전피고인은 10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12·12 및 5·18사건의 12차공판에서 이같이 진술했다. 전피고인은 또 『현정부는 국보위의 설치와 운영을 내란행위로 기소하면서도 당시 업무를 추진한 인사를 청와대와 검찰,헌법재판소 등 요직에 임명하는 인사를 했다』며 『이는 현정부와 검찰이 내란행위로 기소한데 대한 스스로의 모순이며 과거청산이라는 이 사건 기소의 명분에 대해 가치관의 혼란을 보이는 것』이라고 말했다. 또 『5공이 국민투표에 의해 승인되고 노피고인이 직선제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된 것은 12·12 및 5·18사건에 대해 국민이 이를 용인하는 주권적 의사표시로 봐야한다』며 『따라서 자신을 처벌하려면 국민투표로 가부를 물어 국민의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 뉘우침 없이 “정치 보복” 들먹/전씨,현정부 강도 높게 비판

    ◎“신한국당의 모체는 5공때 민정당” 강변/국보위 참여 많은 인사들 지금도 활동중 전두환피고인이 현 정부를 강도 높게 비판하고 나섰다. 단순히 법정에 섰다는 불만의 표출 수준을 넘어,현정권에 대한 도전 의사로까지 비쳐진다. 10일 변호인의 반대신문 과정에서 전피고인이 터뜨린 「감정」은 예닐곱 가지로 나타났다. 먼저 현정부의 가장 큰 업적으로 평가받는 개혁작업을 자신이 집권한 80년 9월초에 시도한 국정의 쇄신 및 개혁작업에 빗댔다.새로운 대통령이 취임하면 국정방향에 따라 당연히 하는 게 개혁작업이며 그것이 정치현실이라고 주장했다.『그때처럼 현 정부도 출범초기 재산축적에 의혹이 있는 국회의원을 사퇴시키고,숙정작업을 통해 수많은 공무원을 사퇴케 하는 등의 개혁작업을 했다』고 지적했다. 집권여당인 신한국당은 자신이 창당한 민정당이 모체라고 주장했다.지난 90년 1월 당시 민정당·통일민주당·신민주공화당이 구국의 영단으로 합당해 민자당이 됐기 때문에 이를 이어받은 신한국당의 산실이 민정당이란 논리다. 민정당은지난 80년 10월16일 대통령이던 전피고인이 보안사의 권정달 정보처장을 전역시킨 뒤 처음 창당을 지시,이듬해 1월15일 창당됐었다. 전피고인은 국보위의 합법성과 관련,당시 참여한 인사들이 현 정부에서도 활동 중인 사실을 들어 이를 부정하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라고 비난했다.대표적으로 정경식 헌재재판관,최환 서울지검장,신한국당의 한승수·한리헌의원 등을 거론했다. 특히 12·12 및 5·18사건의 수사와 공소제기의 책임자(최환 검사장을 지칭)는 국보위 내무분과위원으로 참여,많은 업무를 추진했으나 이를 현재 국헌문란행위라고 기소한 만큼 자신이 참여한 행위가 어떠한 이유로 정당한지 마땅히 해명해야 한다고 직격탄을 쏘았다. 국민투표를 통해 탄생한 5공의 정통성과 연계,자신을 처벌하려면 국민투표로 처벌의 가부를 물어 그 결정에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5공을 용인한 국민의 의사에 의해 선출된 대통령이 전직 대통령을 처벌하는 것은 국민이 그 대통령에게 위임한 권한의 범위를 넘는 것이라며 현 정권을 간접 비판했다. 전씨는현정부의 「과거 역사의 청산」 「역사 바로 세우기」작업에 대해 『전 시대에 대한 정치보복 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전씨의 이러한 주장은 5·17 내란사건의 혐의에 대한 「물타기」 작전으로 풀이된다.〈박선화 기자〉
  • 전씨 지나친 안보논리에 눈살/「5·17」 첫 반대신문 이모저모

    ◎“당시 북한남침 막았기에 이런 재판도 열린것”/허화평씨,국회선서 할수있게 구속정지 간청 5·17 비상계엄 확대조치에 관한 첫 반대신문이 열린 3일의 11차 공판에서 전두환피고인은 시종일관 「안보논리」로 5·17조치의 정당성을 역설했다.12·12사건 반대신문은 이 날 상오 공판에서 모두 끝났다. ○…전피고인은 5·17사건 첫 반대신문에서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이건영 3군사령관 등 정승화계열의 장성들이 합수부의 조사과정에서 『정총장의 연행배경을 오해하고 12·12때 병력을 동원했다』고 진술해 관용을 베풀었다고 주장. 전피고인은 또 검찰측이 사용하는 「신군부」라는 용어는 지난 88년 5공 청산문제가 대두되면서 정치권이 만들어 낸 신조어라며 『신군부 세력이 12·12사건 이후에 군주도권을 장악한 뒤 내란을 주도했다』는 검찰의 주장은 논리적으로 잘못됐다고 지적. ○…이양우 변호사는 극심한 학원소요 등으로 80년 5월의 시국상황은 「무정부 상태」로 치달았다고 설명하면서 『당시 정국과 사회가 안정돼 있었다』는 검찰측의 주장을반박. ○…전피고인은 80년 5월의 시국수습 방안의 정당성을 역설하면서 안보논리를 지나치게 강조,오버 페이스 했다는 지적이 일기도. 전피고인은 『당시 북괴의 남침을 막았기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재판을 받을 수 있는 좋은 나라를 만들었다』고 말해,자신이 법정에 선 것과 자신의 과거 업적을 연결시키는 논리적인 비약도 전개. ○…피고인 중 유일하게 15대 총선에서 당선된 허화평피고인은 『오는 5일 국회개원식에서 선서를 할 수 있도록 2∼3일만이라도 풀어달라』고 재판부에 구속집행 정지를 간청. 허피고인의 변호인인 김재철 변호사도 『수십만의 지역주민들에 의해 선량으로 뽑혔는데 실제로 의정활동을 못하더라도 선서만큼은 하게 해 달라』고 거듭 요청. ○…장세동피고인은 반대신문에서 당시 직속상관이던 장태완 수경사령관과 정총장을 원색적인 용어로 싸잡아 비난. 장수경사령관의 경복궁 포격지시와 관련,『반란행위 이상의 정신이상 상태에서 명령을 내렸다』고 인신공격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으며 정총장에 대해서는 「무책임한 기회주의자」,『총장의 직분에 걸맞지 않은 추한 모습을 보였다』고 극언. 장피고인은 특히 정총장을 겨냥해 『12·12사건의 원인제공자이며 검찰의 이중잣대와 헌재의 이중판결,5·18특별법의 소급입법 등 나라의 어리석은 꼴을 있게 만든 장본인』이라고 모든 책임을 전가하며 맹공. 그러나 자신이 5공 청산과정과 신민당 창당방해 사건 등으로 세번 구속된 사실과 관련해서는 『무슨 설명이 필요하겠느냐.결과적으로 역사의 발전과정으로 생각한다』고 변명. ○…이양우 변호사는 『5·17사건과 관련해 전피고인에 대한 신문항목은 8백∼9백여개』라며 4백여 항목이었던 12·12사건보다 곱절이 넘는다고 소개. ○…12·12 및 5·18사건 재판에 대한 관심이 공판횟수가 늘어날 수록 현격히 줄어드는 추세. 이날 상오 방청권을 배포한 서울지법 정문에는 5·18관련 재야단체 관계자 20여명만이 눈에 띄는 등 썰렁한 분위기.〈박은호·김성수·김상연 기자〉
  • “「5·17」최대통령 독자적 결단 국헌문란 내란행위아니다”/전씨

    ◎「12·12­5·18」 사건 11차공판 전두환 피고인은 지난 80년 5월17일 상오 10시 최규하대통령에게 보안사의 「시국수습 6개 방안」을 건의,최대통령이 비상계엄의 전국확대는 승인했으나 국회해산은 보류토록 지시했다고 주장했다. 5·17은 당시 시국상황을 인식한 최대통령이 독자적 결단에 따라 행한 정당한 국가행위라며 검찰이 주장한 국헌문란의 내란행위가 아니라고 반박했다.〈관련기사 20·21면〉 전피고인은 3일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부장판사) 심리로 열린 12·12 및 5·18사건 11차 공판에서 이같이 진술했다. 전피고인은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권정달피고인에게 시국수습 방안을 마련하라고 지시한 사실은 시인했으나,5·17 계엄확대는 당일 상오 최대통령에게 보고해 승인을 얻었으며 국무회의에서 통과될 때까지 혼자 알고 있었다고 밝혔다. 당일 낮 지휘관회의의 의결을 거쳐 저녁 신현확 총리와 주영복 국방부장관,이희성 참모총장이 최대통령에게 건의,승인을 얻은뒤 국무회의의 의결을 거쳐 시행됐다고 덧붙였다. 국보위 설치와 관련,79년 5월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비상계엄시 행정과 사법업무를 함께 처리할 수 있는 비상기구의 설치를 이미 내락받았으며,5·17 이후 이에 따라 국보위를 설치했다고 주장했다. 전피고인은 『79년 12월13일 육참총장에 이희성 대장이 임명된 것은 평소 깐깐한 성품을 아는 최대통령이 13일 새벽 정승화 총장의 연행을 재가하며 노재현 국방장관에게 지시해 이뤄졌다』며 자신의 인사개입설을 부인했다. 이 날 재판에서는 12·12 사건과 관련,최세창·허화평·장세동·허삼수·신윤희·박종규피고인 등 6명에 대한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있었으나,이들 모두는 검찰의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재판부는 오는 10일 상오 10시 5·17사건에 대한 12차 공판을 열기로 했다. 이어 13일에는 12·12사건에 관련된 13명의 피고인에 대한 증거조사를 진행하겠다고 밝혔다.〈박선화 기자〉
  • DJ 80년2월 복권 전씨가 건의/정부 일부 관계자 반대속 관철

    ◎「5·18」 사태후 「내란죄」로 구속시켜 전두환 피고인이 지난 80년 2월 당시 최규하 대통령에게 정치활동이 금지돼 있던 김대중씨(현 국민회의 총재)를 복권시키자고 강력히 건의한 사연은 무엇일까. 80년 2월29일 민주화 조치의 일환으로 시국사범에 대한 복권조치를 앞두고 정부의 일부 관계자들은 DJ의 복권은 안된다는 견해를 폈다고 한다. 하지만 전씨는 민주화의 의지를 보여주려면 DJ를 꼭 복권시켜야 한다고 건의,관철시켰고 이른 바 「서울의 봄」이 왔다는 것이다. 전씨는 당시 정치상황을 서울의 봄이라고 말하게 된 것은 박정희대통령 체제하의 정치규제가 풀려간다는 뜻이지,정치·사회상황이 안정을 찾았다는 의미는 아니라고 주장했다. 전씨는 복권 조치 전에 DJ의 행보에 관심을 갖고 DJ를 직접 만나려 했다고 밝혔다. 시국안정과 정치발전에 협조해 줄 것을 부탁하기 위해서였다는 설명이다. 전씨의 지시에 따라 권정달 당시 보안사 정보처장이 면담을 주선했고 면담 일자가 결정됐다. 하지만 당시 관심의 대상이던 「3김씨」 가운데 DJ만을 만나면 정치적으로 오해를 살 수 있다는 문제점이 제기되자 전씨는 권 정보처장과 이학봉 수사국장을 대신 보내 만나도록 했다. DJ를 만난 권처장과 이국장은 정부의 복권조치 배경을 설명하고 시국안정에 협조해 달라는 전씨의 뜻을 전했다.서약서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나면서 DJ는 내란죄로 구속됐다. 이후 DJ의 구명을 전씨에게 건의하고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생명을 구해낸 사람은 신군부의 2인자였던 노태우씨였다. 피고인측의 주장대로라면 80년 정치적 격변기에서 DJ는 전·노씨에 의해 생사의 기로를 오간 셈이다.〈박상렬 기자〉
  • 전씨 구속기간 연장/서울지법 별건 영장 발부… 최장 6개월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대통령의 비자금 사건과 12·12 및 5·18사건을 심리 중인 서울지법 형사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는 29일 1심 구속시한이 다음 달 2일로 다가온 전두환피고인에 대해 직권으로 별건구속영장을 발부,구속기간을 최장 6개월 연장했다. 전피고인은 지난 해 12월3일 군형법의 반란수괴 혐의로 구속됐으나 이 날 뇌물수수 및 내란혐의 등이 추가로 적용돼 구속기간이 연장됐다. 재판부는 『전피고인이 풀려나면 증거인멸의 우려가 있으므로 재판부 직권으로 구속기간을 연장한다』고 밝혔다. 현행 형사소송법은 검찰이 구속된 피의자에 대해 다른 혐의를 추가해 기소하면 재판부가 직권으로 구속영장을 발부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재판부는 지난 9일 노태우·이현우피고인에 대해서도 별건 영장을 발부했었다. 한편 재판부는 허화평피고인이 지난 18일 냈던 보석신청에 대해 『이유 없다』고 기각했다.〈박은호 기자〉
  • 허화평 피고인 보석신청 기각

    서울지법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는 29일 12·12 및 5·18 사건과 관련,내란 중요임무종사 혐의로 구속기소된 허화평피고인이 낸 보석신청을 『이유 없다』며 기각했다.〈박상렬 기자〉
  • “정총장 내란방조 4가지 혐의”/합수부「연행 재가서」내용 밝혀져

    ◎「시해 현장」 대기·총성파악 미흡 등 적시/「유신비판론」 등 관련 주변향도 담아 12·12 당시 합수부가 작성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에 대한 재가문서의 실체가 27일 10차 공판에서 밝혀졌다. 당시 합수부 수사국장이던 이학봉 피고인은 이날 변호인 반대신문에서 자신이 이를 작성했다고 시인했다. 이피고인은 지난 79년 12월6일 전두환 합수본부장으로부터 재가문서를 만들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앞서 10월28일과 11월8일,이피고인은 전본부장에게 정총장의 내란방조 혐의에 대한 수사내용을 보고했다.『정총장의 구속수사가 불가피하다』는 건의도 곁들였다. 문서는 12월11일 작성했다.형식은 A4 용지 크기에 「정총장 연행의 필요성에 관한 보고서」라는 제목을 붙였다.밑에는 「합동수사본부」라고 적고,표지 오른쪽 상단에 대통령의 결재란을 만들었다.보고서는 12∼13쪽 분량으로 글씨를 크게 써 보고시간이 15분 정도 걸리도록 했다. 목차는 ▲정총장의 내란방조 혐의점 ▲군 내부의 동향 ▲김재규사건 공판 관련 동향 ▲합수부의 의견 순이었다. 내란방조의 주요 내용은 정총장의 박정희대통령 시해현장 대기,총성파악 미흡,불법 병력동원,김재규 구속수사시 미온적 행동 등이다. 정총장의 유신비판 발언과 3김씨 비토론에 대한 군부내 동향,외신이 본 군부내 쿠데타 동조세력 가능성,세간의 정총장 의혹에 대한 반향도 담았다. 결론적으로 정총장을 연행해 조사하겠다는 의견을 붙였다. 12일 하오 6시30분 전본부장이 이를 최대통령에게 보고했다.전본부장이 내용을 하나 하나 설명하면 최대통령이 보고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갔다고 이피고인은 진술했다.〈박선화 기자〉
  • 「사전모의」 규명 치열한 공방/「12·12사건」 사실심리 결산

    ◎검찰­신군부측의 군사반란 입증에 주력/변호인­“우발적 충돌”… 구체증거는 제시못해 27일의 10차 공판으로 12·12 사건 주요 피고인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이 끝났다.다른 피고인들에 대한 신문도 다음 공판으로 끝난다. 검찰의 보충신문과 증인신문이 남았지만 사건의 전모와 양측의 해석은 거의 모습을 마무리 셈이다. 이 날까지 12·12 문제로만 모두 6차례의 공판이 열렸다.피고인들의 군사반란과 내란 혐의를 증명하는 중요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검찰과 변호인단의 대결도 치열했다. 쟁점은 사전 모의 여부,이른바 「경복궁 모임」의 성격,정승화 육군참모총장의 연행 목적과 합법성 여부,최규하대통령 재가의 적법성,병력동원의 경위 등이었다. 검찰은 12·12 사건은 10·26 이후 군부내 입지에 위협을 느낀 전두환 보안사령관 등 하나회 중심의 소장 군부세력이 정승화 육군참모총장측을 무력으로 제압하고 군 주도권을 장악한 군사반란이라는 점을 입증하는 데 주력했다.이 과정에서 당시 우국일 보안사 참모장 등의 증언,「5공 전사」등 방증자료 등을 통해 새로운 사실을 제시하며 피고인들을 궁지로 몰았다. 변호인단은 사실자료 제시보다는 정황증거로 맞섰다. 12·12 사건은 10·26 당시 김재규에게 동조한 혐의가 뚜렷한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조사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우발적 충돌이라고 주장했다.또 정총장측 장성들이 먼저 병력을 동원했기 때문에 「반란」을 제압하는 차원에서 병력을 동원했다고 강변했다. 쟁점 자체를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에 정총장의 연루 여부,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의 병력동원의 적법성 등 2∼3가지로 단순화하려고 애썼다.12·12가 사전각본에 따라 일어났다는 공소 사실을 부인하기 위해서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제시하지 못했다. 검찰과 변호인단의 공방을 종합하면 앞으로 증인신문 등에서 이변이 발생하지 않는 한 검찰의 논거가 훨씬 설득력을 갖고 있다는 게 중론이다. 12·12 사건에 대한 변호인단의 논거로 미루어,앞으로 5·17,5·18 사건에 대한 변호인 반대신문의 방향과 수위도 어느 정도 윤곽이 잡히고 있다. 12·12 사건에서 정총장의 혐의와 육본측의 대응을 집중 공략했듯이 5·17 사건에서는 대학생 시위와 정치권 및 재야의 움직임이 혼란한 상황을 만들어냈다고 강변할 전망이다.5·18사건에서는 사태의 책임을 일부 시민들의 「과격한」행동으로 미룰 것으로 보인다.〈박상렬 기자〉
  • 변호인 “진행 협조”… 재판부에 유화 제스처/공판 이모저모

    ◎전씨 “12·12상황 다시 벌어져도 정 총장 연행”/노씨 “87년 대선때 「12·12」 국민심판 받았다” 12·12 및 5·18사건의 공판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주중에 열린 제9차 공판은 예상과 달리 순조롭게 변호인의 반대신문이 진행됐다. ○…지난 20일 8차 공판에서 야간재판을 거부,퇴장하는 등 재판부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했던 변호인단은 이 날 『원만한 진행에 협조하겠다』며 재판부에 유화 제스처. 이양우 변호사는 신문에 앞서 『변론권의 적절한 행사와 피고인의 인권옹호 측면을 감안해 가급적 주 1회 공판을 지켜주시고 야간신문을 자제해 달라』고 공손하게 말한 뒤 허리를 굽혀 인사하는 등 한결 부드러워졌다. ○…변호인측의 한 관계자는 『어제 재판부와 만나 재판진행 방식에 대한 서로의 오해를 충분히 풀었다』며 『재판이 물 흐르듯 잘 진행될 것』이라고 언급. 특히 이 변호사는 상오 재판에서 1백23문항을 신문,8차공판 상오에 진행된 53문항보다 두배 이상의 속도를 냈다. ○…평소 「칼같은」 재판진행을 자랑하는 김영일 재판장은 피고인들의 입정 때 순서를 바꾸어 호명하는 등 두어차례 실수.박종규 피고인의 입정을 명하면서 박준병 피고인이라고 잘못 부른데 이어 입정순서가 4번째인 황영시피고인의 이름을 맨 나중에 호명. 김부장판사는 피고인 대기실에 황피고인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한 법정경위가 이를 알려주자 멋적은 웃음을 띠며 황피고인의 입정을 지시. ○…변호인단은 김재규의 내란사건에 정승화 육참총장이 연루됐음을 주장하면서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을 고대 로마의 「시저 암살사건」에 비유.시해 직후 군부에서는 김재규를,시저를 암살한 부르터스에 비유하며 천하의 패륜아·반역자로 지칭했다고. ○…변호인측은 공판에 앞서 8차 공판당시 배포했던 전두환 피고인의 반대신문 내용의 문구를 일부 고친 수정본을 배포.그러나 기존의 문항수(4백28문항)보다 15문항이나 늘어나자 일각에서는 『또 다른 재판지연책』이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하기도. 수정본은 내용의 추가나 변경은 전혀 없이 기존의 신문을 2∼3문항으로 쪼개거나 여러 신문사항을 묶어 다시 되묻는형식으로 고쳐진 정도다. ○…신군부측이 기술한 「5공전사」가 검찰의 수사 참고자료로 이용돼 피고인들의 발목을 잡은 것처럼 변호인단은 장태완 당시 수경사령관의 「12·12쿠데타와 나」라는 자서전을 인용해 장 수경사령관 등이 반란군이었음을 주장. 이변호사는 당시 윤성민 육참차장이 30경비단에 대한 공격명령을 제지하자 『나보고 가만히 앉아있으란 말이냐.이제 당신들(윤차장 등 육본측 장성)마음대로 하라』는 등의 문구를 들며 이러한 행위는 명백한 하극상이며 위법한 것이라고 주장.전피고인도 『자서전을 읽어보았다』고 진술. ○…전피고인은 변호인의 신문에 구체적인 설명을 곁들이거나 군사적인 지식을 활용해 상황을 설명하는 등 적극적인 변론.특히 장 수경사령관의 『총장공관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을 사살하라』는 공격명령과 관련,이 지역에는 국방·외무장관과 합참의장·육참총장·해병대 사령관의 공관이 있어 무조건 사살하라는 명령은 위법한 조치라고 주장. ○…노태우피고인은 하오 5시를 넘어 시작된 반대신문에서 12·12 당시9사단 29연대가 전방을 이탈했지만 1개 예비연대가 후방으로 빠지더라도 방위에는 아무 문제가 없다고 주장.그는 『결과적으로도 휴전선 경비에 아무런 이상이 없었고 1개 연대병력이 이탈했다고 해서 북한이 남침할 정도로 국방태세가 취약하지는 않다』며 12·12당시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 ○…전피고인은 『12·12와 같은 상황이 다시 벌어지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변호인의 질문을 받고 『정승화 육참총장을 연행하겠다는 소신에는 변함이 없다』고 대답.그러나 『다만 12·12사건 과정에서 불행을 당한 분들에 대해서는 가슴아프게 생각한다』고 부연. ○…노피고인은 반대신문 말미에 『지난 87년 대선때 12·12사건이 선거이슈로 다뤄져 국민의 심판을 받고 대통령에 당선됐었다』며 『그런데도 다시 이 자리에서 같은 문제가 거론되니 참으로 이해할 수 없다』고 항변. 노피고인은 12·12사건 당시 30경비단을 떠나 부대로 복귀하는 최세창 여단장 등과 헤어질때 『(육본측에)잡혀죽을 지도 모르니 사별하는 심정이었다』고 했던 검찰 직접신문때의 진술은 착각으로 잘못 답변한 것이라고 정정. ○…김부장판사는 지난 8차공판때 야간재판을 열어 변호인단이 퇴정하는 등 파행을 빚은 것과 관련,『앞으로 저녁식사후의 야간재판은 열지 않을 것』이라면서도 『주2회 공판이 적절하다고 판단할때는 열 수 있다』고 설명. 이는 변호인 반대신문 분량이 많거나 신문을 느리게 진행돼 재판의 효율성이 침해될때는 언제든지 2회공판을 강행하겠다는 경고성발언이라는 평.
  • 「12·12」 「5·18」 8차공판­변호인·검찰 재판기일 다툼

    ◎재판 “지연”­“속결” 싸고 신경전/전씨 신문항목 검찰의 1.5배 준비­변호인측/“변호인측 장기전땐 미공개사실 발표”­검찰측 20일 열린 12·12 및 5·18 사건의 8차 공판에서 변호인단은 재판을 장기화하려는 뜻을 분명히 했다.첫 야간 공판을 거부하고 일부 변호인이 퇴정했다. 자연 검찰과 변호인단의 대결 양상도 더욱 치열해질 전망이다.재판부도 변호인단의 야간재판 거부에 처음으로 주 2회 재판을 하겠다고 나섰다. 변호인단은 이 날 전두환 피고인에 대해 4백28개의 반대신문 문항을 준비했다.검찰의 직접신문 2백80 문항보다 1.5배나 된다.노태우 피고인을 제외한 다른 피고인에 대한 신문서는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17쪽에 이르는 공소사실 재석명 요구서를 25분동안 낭독했다.재판부에 대해서는 반대신문을 최대한 보장하라고 강경하게 요구했다. 변호인단의 1차 목표는 구속기간을 연장할 수 없는 8명의 피고인의 구속만기일까지 재판을 끌겠다는 것 같다.반대신문을 최대한 늘림으로써 하고 싶은 말을 다하겠다는 의도도 있다. 전·노 피고인의 비자금 사건을 빼고 12·12 및 5·18 사건으로 구속된 피고인은 모두 12명이다.이들 가운데 단일사건으로 기소돼,별건 영장으로 구속기간 연장이 불가능한 피고인은 유학성·황영시·이학봉·박준병·최세창·장세동피고인 등 6명이다. 유·황·이피고인은 7월19일,박·최·장 피고인은 8월21일이 구속만기일이다. 변호인들은 이 날도 12·12 당시 정승화 육군참모총장 연행의 당위성,군 지휘체계의 붕괴와 정총장측 장성들의 「불법적」인 군대 동원을 부각시키려 애썼다.5·17 내란에 대해서는 「불안정한 시국을 수습하기 위한 합법적 조치」,5·18은 「폭동 진압과정에서의 우발적 충돌」이라는 일관된 주장을 폈다. 반면 검찰은 구속기간 연장이 불가능한 피고인 6명이 풀려나기 전에 1차 공판을 마치려고 애쓴다. 이미 재판부에 주 2회 재판과 심야 재판의 상례화를 요청해 놓았다.쓸데없는 꼬투리를 잡히지 않으려고 석명요구 및 증거보강 등 변호인단의 웬만한 요구는 거의 다 들어주고 있다. 변호인단이 지구전으로 나가면 미공개 사실을 추가로밝히는 등 파상공세를 펴,재판을 오래 끌면 결코 유리하지 않다는 것을 보여줄 생각이다. 재판부는 감정표현을 자제하려는 기색이 역력하다.변호인단의 신문지연 움직임을 별로 제지하지 않았다.그러나 공정한 재판의 보장이라는 원칙 때문이지,신속한 재판이라는 당초 방침을 포기한 것은 아니라는 게 중론이다. 변호인단의 반대신문이 길어지면 공판시간을 늦추고,그래도 미흡하면 수시로 주 2회 재판도 강행할 방침이다. 이 날도 하오 9시10분쯤 야간공판을 변호인단이 거부하자 주 2회 재판을 하겠다고 발표했다.공판기일 중간중간에 증거조사를 진행하고 증인신문도 가급적 빨리 끝마치겠다는 계획이다. 재판부나 검찰 모두 법리논쟁은 가급적 피한다는 입장이다.그럴 경우 재판만 늦어진다고 보기 때문이다. 재판부는 변호인 반대신문이 아무리 길어지더라도 4∼5차례 공판이면 끝날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박상렬 기자〉
  • 전씨 “김재규 「혁명계획」 자백”/「12·12」 「5·18」공판

    ◎시해현장 정 총장 부른것도 계획적/변호인단 「야간재판 거부」 퇴정… 재판 중단 12·12 및 5·18 사건의 8차 공판이 20일 하오 상오 10시 서울지법 417호 대법정에서 형사 합의30부(재판장 김영일 부장판사) 심리로 열려 전두환 전 대통령에 대한 변호인단의 첫 반대 신문이 진행됐다. 공판은 3차례의 휴정을 거쳐 하오 8시40분 속개됐으나 전상석·석진강 변호사 등 변호인단이 밤 늦게까지 강행하는 것은 실체적 진실을 밝히는데 도움을 주지 못한다는 이유 등으로 신문을 거부하고 퇴정,하오 9시10분쯤 중단됐다. 재판부는 변호인단이 공판을 거부하자 앞으로 1주일에 2차례 공판을 열기로 결정했다.이에 따라 9차 공판은 오는 23일 상오 10시에 열린다. 전피고인은 『당시 정승화 육참총장의 연행은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에 연루됐다는 혐의가 있어 취해진 합법적인 조치였다』며 군사반란과 관련한 공소사실을 부인했다. 또 정총장은 계엄확대 회의에서도 김재규를 구명하기 위해 『박대통령의 서거는 불행이 아니며,체제가 잘못됐던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밝혔다. 김재규가 정총장을 시해현장에 참여시켰던 것은 3단계 혁명계획 가운데 첫 단계라고 자백했다고 진술했다. 신군부의 병력 출동에 대해서도 『장태완 수경사령관 등 정총장 계열의 육본 장성들이 대통령의 재가도 받지 않고 무장병력을 동원해 청와대를 포위하는 등 먼저 반란행위를 주도했기 때문』이라며 『장수경 사령관과 김진기 헌병감은 12·12 직후 수경사 병력을 동원해 최대통령을 총리공관에서 수경사로 납치하려는 음모를 꾸몄으나 무산됐다』고 주장했다. 이와 함께 『정총장은 박대통령 시해사건 수사 과정에서 최대통령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군 검찰에 지시,당시 검찰관이 본인을 찾아와 정사령관의 지시를 전하고 협조를 요청했다』며 최대통령에 대한 조사가 합수부와는 무관하게 육본에 의해 이뤄졌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반대신문에 앞서 「공소장변경요구와 재석명 요구서」를 통해 『내란죄 구성요건으로서 폭동은 비상계엄확대 선포로 종료된 것으로 봐야 한다』며 『검찰이 내란의 종료시점을 비상계엄이 해제될 때까지로연장한 것은 법리를 오해한 것』이라고 주장했다.〈황진선 기자〉
  • 전씨 공개 「10·26」 비화

    ◎3단계 혁명계획­정 총장주도하 계엄선포… 후일 김씨 집권/김재규 3김비토­부정부패·사상에 문제·역량부족 내세워/정 총장 정치행위­최 총리 “대통령 추대” 막후서 결정적 역할 전두환 피고인은 20일 공판에서 79년 10·26 이후 12·12까지의 몇 가지 비화를 공개했다.상당 부분은 자기 변호를 위한 주장이라는 지적도 많다. 전피고인의 주장을 간추린다. ▲김재규의 3단계 혁명계획=김재규는 합수부의 이학봉 수사책임자에게 3단계 혁명계획을 자백했고 이씨는 11월8일 전씨에게 보고했다.김재규가 집권하기 위한 내란계획이었다. 1단계는 박정희 대통령을 시해하는 현장 부근에 정승화 총장을 대기시켜 시해사건의 관련자로 만들어 정총장이 김재규의 내란행위에 가담하도록 몰고 가는 것이다. 2단계는 정총장으로 하여금 군 주도하에 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주요 국가시설을 장악케 하는 과정이다.3단계는 국가기관을 장악한 뒤 혁명위원회를 구성해 위원장에 정총장을 앉힌 뒤 자신이 집권한다는 내용이다. 이런 집권계획은 김재규의 말대로『김계원 청와대 비서실장의 배신』으로 체포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김재규의 「3김」 비토(거부)론=김재규는 11월17일 군검찰 조사에서 3김에 대한 비토 발언을 했다.박대통령 시해후 자신이 집권하려는 배경 논리였다. 정국혼란을 수습할 수 있는 지도자로서 김종필씨는 부정부패에 관련돼 부적합하고,김대중씨는 사상적인 하자가 있어서 곤란하며,김영삼씨는 역량을 높이 평가할 수 없어서 적임자가 아니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9일 뒤인 11월27일 정총장도 언론사 사장단과 편집국장·보도국장과의 오찬에서 같은 발언을 했다고 전씨는 주장했다. 만일 이런 사람들이 대통령이 된다면 군은 쿠데타를 일으켜서라도 막을 것이라는 내용이다.이 발언으로 예산을 심의하던 국회가 공전되기도 했다. ▲정승화 총장의 정치행위=정총장은 최규하 과도정부 체제를 수립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역할을 했다.노재현 국방장관과 함께 최총리를 대통령으로 추대하고 김종필씨의 대통령 출마를 저지하는 등 막후에서 정치를 조정했다. 정총장은 그의 자서전 「12·12사건 정승화는 말한다」에서도 이를 시인했다.정총장은 『지난 79년 11월초 노장관이 「국무위원들은 최총리가 다음 대통령으로 가장 무난한 인물」이라는 결론을 내리고 이를 내게 물어왔다』고 밝혔다.정총장은 이에 동의,군은 내가 이해시키겠다고 약속했다. 노장관과 정총장은 최총리를 과도정부의 대통령으로 추대하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과도정부는 1년 전후 길어도 2년을 넘어서는 안 된다는 데 합의했다. 정총장은 또 대통령후보 등록마감일을 앞둔 11월15일 김종필씨가 공화당후보로 나서는 게 바람직하지 않다며 길전식 사무총장과 장경순 정책위의장에게 전화를 걸어 국무위원들의 최총리 추대의사를 전달했다.공화당은 이 날 의원총회에서 김씨를 대통령후보로 옹립할 것을 가결했으나 김씨는 입후보를 포기했다. ▲대통령의 재가는 행정절차=전피고인은 정총장 연행을 사후에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재가를 받았으며,이는 행정절차라고 주장했다. 군의 수사·정보기관은 주요 장성의 형사사건을 처리하는데 있어 대통령에게 관례상 보고한다.행정적인 보고이지 반드시 필요한 법적절차는 아니다. 군법회의법이나 예규상 수사관이 혐의자를 연행·수사할 때 미리 군통수 체계에 의한 상급자의 사전 승인을 받아야 한다는 규정은 없다.검사가 장·차관·국회의원 등 주요인사를 구속할 때 검찰총장에게 보고하는 것과 같은 행정절차이다. 보안사는 과거 박임항 내란사건과 윤필용 장군 사건처럼 주요 사건의 경우,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하고 재가를 받은 뒤 국방부장관에게 구두로 사후 보고하는 게 관례이다.〈박선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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