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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문열 “‘촛불장난’ 오래하면 델 것” 논란

    이문열 “‘촛불장난’ 오래하면 델 것” 논란

    “너무 촛불 장난을 오래 하는 것 같은데….” 소설가 이문열씨가 17일 평화방송 라디오 시사프로그램 ‘열린 세상.오늘!이석우입니다’에 출연,미국산 쇠고기 수입반대 촛불집회를 ‘촛불 장난’에 비유하며 “불장난도 오래 하면 결국 델 것”이라고 비판해 논란이 예상된다. 이씨는 “예전부터 의병은 국가가 외적의 침입에 직면했을 때 뿐만 아니라 내란에 처해 있을 때도 일어나는 것”이라며 “이제 촛불시위에 대항하는 반작용(의병운동)이 일어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쇠고기 파동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하다.”며 “‘쇠고기 반대’를 외치던 사람들이 느닷없이 ‘공영방송 사수’라며 이상한 말을 하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고 주장했다. 이어 “그들(촛불집회 참여자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더라도 쇠고기만으로 끝나지 않을 것이라 짐작했다.”며 “정부가 무엇을 하더라도,설사 재협상을 한다 하더라도 여전히 다른 이슈로 넘어갈 것”이라고 예상했다. 이씨는 “촛불집회의 배후에는 자발성과 순수성을 충분히 위장할 수 있을만큼 분산된 세력이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뒤 “이는 조직적인 배후세력은 아닐 것”이라고 덧붙였다. 최근 네티즌들 사이에서 진행되고 있는 ‘조중동 광고주 압력 운동’에 대해 “네티즌들의 범죄 행위이고 집단 난동”이라고 규정한 그는 “우리사회에서는 이상하게 네티즌이 정부 위에 있는 무소불위의 권력이 돼 버렸다.”며 “합법적인 정부가 아직 시행도 하지 않은 정책을 전부 꺼내 가지고 반대하겠다며 촛불시위로 연결하는 것은 집단 난동”이라고 강하게 비난했다. 10%대로 추락한 이명박 대통령의 지지율과 관련,이씨는 “이상한 형태의 여론조사는 믿지 않는다.”며 “적어도 10% 이상 오차가 나는 것같다.”고 여론조사 결과를 부정했다. 심지어 “이 대통령의 성급함·부주의함에도 원인이 있겠지만 그 외에 사회적 여론조작도 충분히 많이 개입돼 있다.”고 주장하며 여론조사 조작설을 제기했다. 그는 또 “느닷없이 공영방송 사수 라면서 정부의 공영방송 장악 음모라고 주장하는데 음모란 말을 어디에 쓰는지도 모르고….”라며 “정부 대변인 역할을 할 수도 있는 공영방송에 대한 정부의 인사권은 당연한 것”이라고 정부가 추진하는 공영방송 경영진 교체를 옹호했다. 한편 보수세력의 분열과 혼란의 원인에 대해 이씨는 “받지 말아야 할 유산까지 보수의 이름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진단하며 “범보수가 합치면 헌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는데도 쩔쩔매고 정신 못 차리는 것을 보면 절망감이 든다.”고 한탄했다. 인터넷서울신문 맹수열기자 guns@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71) 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병자호란 다시 읽기] (71) 높아지는 명분론,어정쩡한 방어대책

    몽골 버일러들을 이끌고 왔던 용골대 일행이 도주하고, 청과 관계를 끊겠다는 인조의 유시문마저 용골대 일행에게 빼앗긴 뒤 조선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나덕헌과 이확이 홍타이지에게 배례(拜禮)를 거부하여 청을 자극했다는 소식까지 날아들면서 전쟁에 대한 공포심은 더욱 커졌다. 빨리 방어 대책을 마련해야 했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정묘 이후 우여곡절 속에서도 이어져온 ‘10년의 평화’에 익숙했던 조정이었다. 급작스럽게 내놓은 방어 대책의 실효성을 둘러싸고 또 다른 논란이 빚어졌다. ●“나덕헌과 이확의 목을 쳐라” 홍타이지의 즉위식장에서 나덕헌과 이확이 보였던 행동은 어쨌든 대단한 것이었다. 나만갑(羅萬甲)의 ‘병자록(丙子錄)’에 따르면, 나덕헌 등이 무릎을 꿇지 않고 버티자 격분한 청나라 관원들은 두 사람을 마구 구타했다. 그럼에도 두 사람이 머리 숙이기를 끝내 거부하자 식장에 있던 한인(漢人) 신료들 가운데는 부끄러워 눈물을 보이는 자까지 있었다고 한다. 물론 ‘청실록’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나덕헌과 이확의 행동이 안팎으로 충격을 주었음은 분명해 보인다. 하지만 나덕헌과 이확은 심양을 떠나 서울로 향할 때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오랑캐‘ 홍타이지의 즉위식장에서 목숨을 걸고 고개를 숙이지 않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과연 조선 조정의 신료들이 자신들이 보였던 ‘기상’과 ‘절개’를 곧이곧대로 믿어 줄지 의문이었다. 그들은 더욱이 홍타이지에게서 받은 국서까지 휴대하고 있었다. 이미 언급했듯이 홍타이지의 국서는 조선을 맹렬히 비난하고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협박, 조롱하는 내용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런 국서를 그대로 가져갈 경우, 조정의 명분론자들로부터 어떤 비판이 날아올지는 불 보듯 뻔한 일이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결국 귀국 길에 만주 통원보(通遠堡)란 곳에 이르러 홍타이지가 준 국서를 버리고 말았다. 그것을 보자기에 싸서 머물던 숙소에 몰래 던져 놓고, 대신 내용을 등사하여 조정에 올렸다. 이들이 의주에 도착하자 당장 평안감사 홍명구(洪命耉)가 상소했다. 그는 홍타이지의 국서 내용을 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듯하여 통곡을 금할 수 없다고 했다. 그는 나덕헌 등이, 참람하고 말도 되지 않는 오랑캐의 서신을 받은 즉시 던져 버렸어야 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빨리 나덕헌과 이확의 목을 베어 그것을 홍타이지에게 보여 주라고 촉구했다. 추상(秋霜) 같은 일갈(一喝)이었다. ●명분론이 높아지고,決戰論이 대두하다 홍명구의 상소를 통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의 내용이 알려지자 조정은 다시 들끓었다. 비변사 신료들도 나덕헌과 이확이 자결하지 않은 것을 문제삼았다. 그들이 통원보에 이르러서야 국서를 몰래 버리는 바람에 홍타이지에게 ‘조선 사신이 국서를 기꺼이 받아갔다.’는 인상을 주고 말았다고 통박했다. 조정의 분위기를 보면 두 사람은 이제 자결해야만 할 것 같았다. 나덕헌과 이확을 성토하는 조정 신료들의 명분론은 극에 이르렀다.‘개돼지만도 못한 오랑캐의 국서를 받고서도 멀쩡하게 가지고 돌아온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덕헌과 이확은 결국 평안도 변방으로 유배되었다. 비변사는 통원보의 청나라 관리에게 나덕헌 등의 명의로 서신을 보내자고 주장했다. 나덕헌 등이 홍타이지가 보낸 국서를 중도에서 뜯어 보고 버리고 왔다는 사실을 알려 주자는 것이었다. 대사성(大司成) 이식(李植)이 붓을 들었다. 이식이 쓴 국서의 내용은 대략 이러했다.‘우리들은 귀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졸지에 갖은 곤욕을 다 당했다. 우리가 귀국하려 할 때 굳게 봉함된 국서를 받았다. 우리는 전례에 따라 뜯어 보려 했지만, 용골대와 마부대가 방해하여 그럴 수 없었다. 결국 한참 말을 달려 중도에 이르러 뜯어 보니 서면(書面)의 칭호와 말미에 찍힌 인문(印文)이 과거와는 크게 달랐다. 또 우리나라를 ‘이국(爾國)’ 운운하며 공경하기는커녕 노예처럼 여기고 있었다. 조선의 신하된 도리 상 차마 볼 수 없어 통원보에 이르러 숙소의 잡물 속에 던져 놓고 왔다. 원컨대 그 것을 가져다가 홍타이지 한에게 전해 주기 바란다.’요컨대 조선은 이식이 쓴 국서를 통해 홍타이지가 칭제건원(稱帝建元)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강조했던 셈이다. ‘황제’ 홍타이지와 ‘제국’ 청을 인정할 수 없다고 거듭 못을 박은 이상 이제 전쟁을 준비해야 했다. 이미 용골대 일행이 도주했던 직후부터 청의 침략에 대비한 대책들은 쏟아지고 있었다. 그 가운데 가장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사람은 단연 부제학 정온(鄭蘊)이었다. 그는 용골대 등이 도주한 직후 올린 상소에서, 원수(元帥)를 선발해 보내고 빨리 압록강을 방어할 대책을 강구하라고 촉구했다. 또 인조에게 개성까지 나아가 신료들을 독려하고 군율(軍律)을 밝혀야 한다고 강조했다. 압록강을 방어하고 개성으로 진주(進駐)하라? 여차하면 조정을 강화도로 옮기는 것만 생각하고 있던 다른 신료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주장이었다. 정온은 그러면서 인조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렸다. 진정으로 적과 싸워 나라를 지키겠다는 의지가 있다면 반정공신들이 거느린 정예병들을 원수에게 배속시키라고 요구했다. 그는 온 나라의 정예병과 무사가 전부 반정공신들 휘하에 배속되어, 평소에는 그들의 농장(農莊)을 관리하다가 유사시에는 호위(扈衛)를 핑계로 편안함을 취하려 한다고 비난했다. 정묘호란 당시에도 멀쩡한 정예병들이 적과 싸움은 포기한 채 강화도에 머물면서 ‘내란이 있을까 걱정스럽다.’는 말만 되뇌었다고 직격탄을 날렸다. 사헌부 관원들도 정온과 비슷한 견해를 내놓았다. 정예병이란 정예병은 모두 반정공신 휘하 군관들에게 사병(私兵)처럼 편제되어 있는 것을 뜯어 고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정쩡한 인조의 태도 정온과 사헌부 신료들의 주장은 정곡을 찌른 것이었다. 그들은 국가가 위기에 처해 있음에도, 훈신(勳臣)들이 ‘호위’를 핑계로 정예병을 사병처럼 틀어 쥐고 있는 현실을 비판했다. 실제 당시 평안병사 유림(柳琳)이 금군(禁軍) 가운데 10명을 데려가 군관으로 삼으려 했는데 호위청(扈衛廳)에서 거부하여 문제가 되었다. 사간원 신료들은 “변방 방어가 충실하면 서울이 편안해지고 서울이 편안하면 굳이 호위하는 무사가 많을 필요가 없다.”며 호위청 군관 가운데 500∼600인을 뽑아 변방으로 내려 보내라고 촉구했다. 하지만 인조는 이 같은 주장에 대해 마뜩찮다는 반응을 보였다. 자신을 호위하는데 중요한 훈련도감이나 어영청 병력을 덜어 내자는 주장에 대해 알레르기 반응을 보였다.‘개성으로 전진하고 정예병을 과감하게 내어 주라.’는 정온의 요청에 대해 “그대의 차자(箚子) 내용이 지나치게 염려하는 것 같다.”고 답변했다. 또 사간원 신료들의 주장에 대해서도 “연소한 대간들이 사체도 모르면서 군사와 군량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당시가 엄청난 위기 상황이며 대책이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고 있었지만 구체적인 각론으로 들어가면 인조는 여전히 안이했다. 강화도로 들어가, 수많은 정예병들을 시켜 자신의 주변을 호위하기만 하면 문제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일까? 병자호란 직전 인조는 분명 대책을 강구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1636년 4월25일, 스스로를 통렬히 비판하는 하교를 내렸다.‘내가 용렬하여 시비(是非)를 분별하지 못했고, 게으른 데다 남에게 지지 않으려는 고집 때문에 나라를 제대로 다스리지 못했다.’고 자책했다. 그러면서 이제 노력하겠으니 모든 신료들도 난국을 타개하는 데 동참하라고 촉구했다. 눈물겨운 호소였다. 하지만 근본 대책은 나오지 않았다. 인조는 병자호란 직전 ‘오랑캐와 일전을 불사하자.’는 명분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었지만, 실제로 ‘일전을 불사하기 위해’ 근본적인 대책을 제시했던 정온 같은 신하들의 목소리에는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인조의 책임은 컸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광주민주화운동 인문학적 성찰 연구서 ‘5·18 그리고 역사’ 출간

    광주민주화운동 인문학적 성찰 연구서 ‘5·18 그리고 역사’ 출간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최초의 폭넓은 인문학적 성찰이 이뤄졌다. 사회과학적 방법론을 위주로 5·18을 분석해온 기존의 접근 방식을 훌쩍 뛰어 넘은 것이다. 최근 출간된 ‘5·18 그리고 역사’(최영태 등 지음, 길 펴냄)는 역사학, 정치학, 문학, 미술사, 철학 분야로까지 시각을 넓혀 5·18을 총체적으로 해석하고 조망했다.5·18의 사상사적 측면까지 파고들어간 의미있는 성과다. 작업의 첫 싹은 2005년 봄 전남대 5·18연구소 소장이던 최영태 사학과 교수가 ‘5·18항쟁과 민주·인권’이란 강의를 개설하면서 트기 시작했다. 강의를 원하는 학생들이 늘어나자 학교는 이듬해부터 2개 강좌로 교육과정을 확대했고, 전남대의 문제의식에 공감한 광주·호남지역 대학들(2005년 2학기 조선대,2006년 광주대,2008년 호남대 등)이 속속 강의를 열어 뒤를 따랐다. 이번에 나온 책은 각 대학 교수들이 1년 동안 토의해 만든 초고를 다시 1년간 실제 수업에 적용한 뒤 재차 토론을 거쳐 가다듬은 내용들이다. 최 교수는 “기존의 5·18 연구서들이 연구자의 전공에 따라 관점의 쏠림 현상을 보였는데 여러 전공자들이 공동연구자로 참여하면서 폭넓은 시각으로 5·18을 바라볼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고 평가했다. 필진들은 조만간 5·18 피해자까지 참여시킨 연속 세미나를 개최해 연구결과를 객관화하는 작업을 진행할 계획이다. 가장 관심을 끄는 부분은 5·18을 철학적으로 풀어낸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그들의 나라에서 우리 모두의 나라로’란 논문으로 책의 부제이기도 하다. 그리스도신학대학 교수 재임용 탈락 문제로 6년간 ‘거리의 철학자’로 지내다 2005년 전남대로 부임한 김 교수는 오랜 기간 5·18에 관한 자신만의 철학적 독해를 시도해왔다. 김 교수가 2006년 5·18연구소의 학술계간지 ‘민주주의와 인권’에 발표한 ‘응답으로서의 역사’는 5·18과 관련해 공식적으로 활자화된 첫 번째 철학적 고찰이다. 그는 이번 논문에서도 5·18을 단일 사건이 아닌, 한국 역사에서 면면히 관찰되는 ‘씨알(민중)과 국가기구간의 전쟁’이자 ‘서로주체성의 만남’으로 파악하는 독특한 사유를 선보인다. ■ 5·18 철학적 해석 김상봉 교수 다음은 김상봉 교수와의 인터뷰 내용. ▶그간 5·18에 관한 철학적 접근이 부재했던 이유는. -사회과학적 방법으로 5·18을 연구한 학자들은 주로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으로 항쟁을 바라봤다. 주변부 자본주의의 모순이 어떻게 광주에서 폭발됐는가가 관심 연구대상이었다. 이때 기본전제는 5·18이 침해당한 권리를 찾기 위한 싸움이란 시각이다. 문제는 그것만으론 5·18이 다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서양 사회과학 이론으로 파악할 때 전례 없는 국가폭력 양상을 보인 5·18은 해석 불가다. 서양의 계몽적 해방과 한국의 자기해방의 역사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서로주체성’ 개념은 그래서 도입한 것인가. -‘서로주체성’ 개념을 처음 쓴 건 1998년 출간된 첫 책 ‘자기의식과 존재사유’에서였지만, 광주를 서로주체성으로 파악하기 시작한 건 지난해 나온 ‘서로주체성의 이념’이란 책에서부터다. 참된 의미에서 공동의 주체성은 내가 홀로 정립하는 주체성이 아니라 나와 네가 함께 정립하는 주체성이다.5·18은 온전한 공동체의 전범이다.5·18은 서구 이론에서 말하듯 빼앗긴 권리를 찾는 투쟁에 그치지 않고 참된 만남을 구현하려는 서로주체성의 운동이다.5·18은 고통을 함께 나누고, 같이 먹고, 같이 싸우는 이상적 정치공동체의 원형질이라 할 수 있다. ▶5·18을 한국 역사에서 면면히 이어지는 ‘씨알과 국가기구간의 끊이지 않는 전쟁’으로 파악한 것도 독창적이다. -5·18로 발생한 씨알과 국가기구의 충돌은 일회적 사건이 아니라 한국 근현대사를 관통하는 근본적 사건이다. 최근 200년 동안 한국은 본질적으로 내란 또는 내전 상태에 있었다. 정조가 사망한 1800년 이후 이 땅의 모든 국가기구는 씨알의 나라가 아니라 씨알을 잠재적인 적으로 삼은 기구였다. 홍경래의 난에서부터 동학농민전쟁,3·1운동, 광주학생운동, 제주 4·3사건 등도 이 같은 대립구도의 역사적 사례다. ▶김 교수 시각대로라면 제2, 제3의 5·18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5·18처럼 야만적이진 못하겠지만 방식은 다양하게 변주될 것이다. 충돌이 현실화될 때 국가기구가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양상은 달라질 것이다. 본질적으로 한국의 국가기구가 국민 전체를 위한 서로주체성의 현실태가 아니므로 양자간의 전쟁이 근절되긴 힘들 것이다. ▶전쟁의 연쇄고리를 끊어낼 방법은 뭐라고 보나. -국가기구를 모든 시민이 참여하는 자유와 주체성의 현실태로 만들 수 있느냐가 문제다. 관건은 시민정치의 복원이다. 정치가 실종되고 경제만 남은 현 상황은 매우 위험하고 불길한 징후다. 경제만이 최고의 가치로 여겨질 때 국가 권력은 언제든 폭력적으로 돌변할 수 있고, 사회적 약자는 더욱 더 벼랑 끝으로 내몰릴 것이다. ▶앞으로 5·18을 주제로 한 철학적 사유를 어떻게 발전시킬 계획인가. -서로주체성 이념 위에 한국 항쟁사의 토대를 놓으려고 한다. 서양의 항쟁사와 무엇이 다른가를 보여줌으로써 우리 항쟁사의 독특성을 규명할 것이다. 올해 준비중인 논문 가운데 ‘계시로서의 역사’란 게 있다. 5·18을 일종의 종교적 계시로 파악한다. 지금까지 계시는 신적인 것과 인간을 초월한 것으로만 여겨졌고, 예수와 부처를 통해 개인의 완성이라는 소승적 구원에 머물렀다. 반면 5·18의 독보성은 공동체의 완성을 통해 개인이 완전해진다는 데 있다. 항쟁지도부 대변인으로 활동하다 사망한 윤상원이 대표적이다. 윤상원은 5·18을 통해 신화가 됐다. 인류가 지향할 것은 개인적 완성이 아니라 공동체적 완성이고,5·18을 통해 그 가능성이 제시됐다는 얘기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서울광장] 열심히 일하겠다는데 왜? /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열심히 일하겠다는데 왜? /육철수 논설위원

    정권교체 이후로 왠지 머리가 좀 지끈거린다. 참여정부 땐 변호사 출신 달변 대통령 때문에 그랬다. 대통령의 생각을 따라잡아 글 하나 쓸 요량으로 걸핏하면 팔자에 없는 법전을 뒤적여야 했으니까. 새 정부가 들어서니 또 다른 골칫거리가 생겼다. 영어몰입교육이 그 하나다. 그간의 논란은 차치하고, 일부 학교에서는 새 정부와 코드를 맞추려는 건지, 입학식을 영어로 진행하는 장면에선 역겨움이 치밀어 올랐다. 한편으론 은근히 조바심도 났다. 해서, 이 참에 영어공부나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며칠 전엔 퇴근해서 TV영어강좌를 두어 시간 틀어놓았다. 내 속내를 알 리 없는 아내는 “웬일이야. 영어공부를 다 하고….”라며 핀잔 비슷한 말을 던진다. 머리가 굳었는지 강좌도 신통찮아 사나흘 듣다가 접어버렸다. 대통령이 입만 열면 “변화, 변화”하니까 이 또한 스트레스다. 아내도 모를 정도로 변하고 날마다 바뀌어야 한단다. 우물쭈물하다가는 시대에 뒤떨어질까 겁난다. 그러잖아도 쳇바퀴도는 듯한 일상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담배를 끊고 술도 줄여야겠다는 강박감에 시달리는데, 몇번을 다짐해도 하루아침에 변신이 어디 그리 쉬운가. 국무회의를 앞당기고 밤늦도록 일하겠다는 대통령의 방침도 부담스럽다. 게으름을 피우려 해도, 내가 노는 시간에 나랏일을 맡은 이들은 분주하게 움직인다고 생각하면 낙오의 불안감이 엄습한다. 사실 국정에 참여한 사람들과 나는 상관도 없고, 처지도 한참 다르다. 그런데 저들의 변화바람에 휩쓸려 공연히 마음고생한 꼴이니 쓴웃음이 피식 터져나온다. 정부의 분위기에 따라 국민 노릇하기도 때론 이렇게 고달프다. 그래서 하는 소린데, 능력을 인정받아 이명박호(號)에 올라탄 인사들은 매사에 베스트 오브 베스트(Best of Best)다워야 하고, 변혁을 주도한다는 긍지를 가져도 좋을 것이다. 요즘 일을 열심히, 많이 하겠다는 정부에 대해 여기저기서 수군거린다.4시간 자며 일에 파묻힌 대통령을 걱정하고, 비전제시와 창의를 위해선 머리를 쓰라고 조언한다. 노 홀리데이(No Holiday), 얼리 버드(Early Bird:일찍 일어나는 새) 증후군이란 말이 나오고, 과로정부라고도 한다. 공무원들은 별 보고 출퇴근하는 게 죽을 맛이란다. 어느 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이 오리면, 나는 부지런한 물밑 오리발”이라고 했다. 그러나 청와대 바깥에선 대통령의 부지런함으로 미루어 오리의 몸통도 요란하고 다리도 요동칠까 우려한다. 아니면, 물밑 다리는 가만히 있는데 몸통만 바쁠까봐 걱정하고 있다. 과욕·과속하면 시야가 좁아지는 법이다. 하지만 걱정도 팔자이듯, 세간의 노파심은 기우라는 생각이 든다. 새 정부 인사들의 의욕이 펄펄 넘친들, 아무려면 휴식도 거르고 죽자사자 일에만 몰두할 리는 없을 것이어서다. 그들이 보통 영리한 사람들인가. 염려 안 해줘도 알아서들 대처할 것이다. 대통령은 평생 남보다 2배인 하루 16시간씩 일해 온 양반이다. 그게 천성인 걸 어찌하나. 안온했던 공직자들은 그런 대통령 밑에서 발이 부르트도록 더 뛰어야 한다. 국정의 하루는 25시간이라 여기고 숨은 1시간을 찾아내란 얘기다. 국민에겐 일 욕심 많은 ‘큰머슴’을 가진 게 복(福)이지 근심거리는 아닐 것이다. 대통령으로 뽑아 권력을 쥐어준 것은 잘 부려먹기 위해서다. 멀쩡한 그릇만 깨지 않는다면 일하겠다는 사람들을 말릴 이유가 없다.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죽음의 상인’ 바우트 잡혔다

    ‘죽음의 상인’ 바우트 잡혔다

    ‘죽음의 상인’으로 불리며 무기 밀거래로 한해 수백만달러에 이르는 돈을 주물러온 러시아 출신 무기 밀매업자 빅토르 바우트(41)가 영화 속 장면처럼 극적으로 붙잡혔다. 영화 ‘로드 오브 워(Lord of War)’의 실제 주인공으로 알려진 그는 미 마약단속국(DEA)의 1년여에 걸친 함정수사 끝에 태국 방콕의 한 호텔에서 7일 체포됐다. 이날 AFP와 CNN에 따르면 바우트는 콜롬비아 무장혁명군(FARC)과 무기계약을 맺으려던 참이었다. 바우트가 지난달 말 태국으로 잠입했다는 첩보를 입수한 DEA 요원들은 FARC 반군으로 가장, 그의 측근을 감쪽같이 속인 뒤 이날 그를 체포하는 개가를 올렸다. 러시아 일간 러시아투데이는 바우트가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을 경우 최소한 징역 15년형에 처해질 것이라고 보도했다. 미국은 좌익반군인 FARC에 무기를 공급하려 한 혐의로 그를 기소하는 한편 태국에 신병인도를 요청할 방침이다. 타지키스탄 태생인 바우트는 러시아 국가안보위원회(KGB) 소속 장교로 앙골라에서 근무하면서 무기·석유 밀매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미국과 중동, 아프리카, 동유럽에서 화물운송회사 운영을 가장해 아랍에미리트(UAE)를 거점으로 암약해 왔다. 자신이 소유한 에어세스, 그리고 센트라프리칸 항공기를 통해 아프가니스탄과 앙골라, 콩고민주공화국, 라이베리아, 이라크 등에 무기를 실어 날랐다.1991년부터 2002년까지 이어진 내란으로 5만여명이 숨진 시에라리온의 반군에게 무기를 공급했다는 혐의도 받고 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병자호란 다시 읽기] (60) 반란자와 귀순자들Ⅰ

    후금이 명을 압박하면서 조선과 후금의 관계 또한 살얼음판을 걷고 있던 1633년 무렵, 세 나라의 관계를 뿌리째 흔드는 사건이 일어났다. 반란을 일으켜 등주(登州) 지역을 장악하고 있던 명나라 장수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 등이 후금으로 귀순해 버린 것이다. 공유덕 등은 후금으로 가면서 185척의 선박과 수만의 병력을 대동했다. 뿐만 아니라 배 위에는 홍이포(紅夷砲)까지 싣고 있었다. 후금은 그토록 열망했던 함선과 수군을 보유하게 되었다. 후금은 이제 바다까지 장악할 기회를 잡은 것이다. ●후금은 바다까지 장악할 기회 잡아 공유덕과 경중명 등이 반란을 일으켜 후금으로 귀순하게 된 사연은 모문룡의 가도 시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반란을 주도했던 공유덕과 경중명, 이구성(李九成) 등은 모문룡의 부하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요동 출신으로, 누르하치가 요동을 장악하게 되자 가도로 들어가 모문룡에게 몸을 맡겼다. 모문룡은 이들을 우대하여 자신의 양자로 삼았다. 이들은 성을 모씨(毛氏)로 바꾸고 이름도 고쳤다. 공유덕은 모영시(毛永詩)로, 경중명은 모유걸(毛有傑)로, 이구성은 모유공(毛有功)이 되었다. 공유덕과 이구성은 활 쏘고 말 타는 데는 뛰어났지만 일자무식(一字無識)의 인물들이었다. 경중명은 자신의 이름을 겨우 쓸 수 있는 정도였다. 모문룡은 공유덕과 이구성에게는 군사들을 관리하게 하고, 경중명에게는 재물과 군기(軍器)를 관리하도록 했다. 모문룡 휘하에서 그런 대로 안온한 시절을 보내던 이들의 처지는 모문룡이 원숭환에게 죽음을 당한 이후 크게 바뀌었다. 원숭환은 모문룡을 제거한 뒤, 자신의 측근들을 가도로 보내 동강진(東江鎭)에 대한 대대적인 정비 작업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모문룡 측근들에 대한 숙청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모문룡과 부자관계를 맺은 데다 안팎의 살림을 책임지고 있었던 공유덕과 경중명 등의 입지는 당장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졸지에 오갈 데 없는 처지가 된 이들을 받아들여 준 사람은 등래순무 손원화(孫元化)였다. 평소 요동 출신 장졸들의 능력을 높이 평가했던 손원화는 공유덕과 경중명을 데려다가 유격(遊擊)으로 임명했다.1631년 8월, 후금군이 대릉하성(大凌河城)을 포위하자 조대수(祖大壽) 등은 손원화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등래(登萊) 지역의 수군을 이끌고 후금군의 배후를 견제해 달라는 주문도 곁들였다. 손원화는 공유덕 등에게 병력 1000여명을 주어 해로를 이용하여 대릉하 쪽으로 달려가게 했다. 하지만 공유덕 등은 손원화를 기만했다. 그들은 역풍이 분다는 핑계로 배를 띄우지 않고 육로로 영원(寧遠)까지 이동할 계획을 세웠다.1631년 11월 공유덕 일행은 오랜 행군 끝에 직예(直隸)의 오교현(吳橋縣)이라는 곳에 이르렀다. 피로와 굶주림에 지친 병사들은 먹을 것을 찾았지만 오교현의 시장은 이미 철시한 상태라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다. 자연히 병사들 가운데서 민폐를 끼치는 자들이 나타났다. 공유덕은 민원(民怨)을 야기한 병사들을 처벌했지만 병사들의 불만도 덩달아 높아졌다. 급기야 지역의 식량 창고를 약탈하고 현지의 관원을 살해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이구성은 병사들의 불만과 원성이 높아졌음을 핑계로 반란을 꾀하기로 결심한다. 그러면서 공유덕에게도 자신과 행동을 함께하라고 협박했다. 공유덕이 동참하면서 영원을 향해 가던 ‘구원군’은 ‘반란군’으로 돌변했다. 공유덕과 이구성 그리고 진계공(陳繼功) 등은 병력을 돌려 산동(山東) 주변의 여러 고을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 과정에서 공유덕 등을 따르는 병력은 수천 명으로 불어났고, 산동의 임읍(臨邑)·능상(陵商)·하청(河靑) 등 여러 고을이 반란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후금군이 대릉하를 공격했던 것의 여파가 엉뚱한 곳으로 미쳤던 것이다.1632년 1월 승승장구하던 공유덕의 반란군은 등주성 공략에 나섰다. 당시 경중명은 이미 성으로 들어가 있었다. 그는 성안에서 요동 출신의 두승공(杜承功) 등과 함께 사람들을 불러모아 공유덕 등의 공격에 내응했다. 안팎이 호응하는 상황에서 성의 함락은 ‘시간 문제’였다. 이윽고 1월13일 등주성이 함락되었다. 성안에 있던 요동 출신 병사 3000명은 고스란히 공유덕 등의 수중에 떨어졌다. ●홍이포 등 엄청난 수량의 무기도 넘어가 등주성이 반란군에게 떨어진 여파는 심각했다. 등주는 전략 요충이었다. 육로로는 북경, 산해관 등지와 연결되고 수로를 통해 천진(天津)과 요동, 가도 등지로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였다. 이미 산해관 동쪽이 후금군의 영향력 아래 들어가 있는 현실에서 등주는 수군을 이용하여 후금의 배후를 칠 수 있는 거점이기도 했다. 공유덕이 등주를 장악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당장 여순구(旅順口) 참장 진유시(陳有時)와 광록도(廣鹿島) 부장 모승록(毛承祿) 등이 병력을 이끌고 등주로 와서 반란군에 합류했다. 모승록 또한 원래 가도에 있다가 모문룡이 죽은 뒤 광록도로 탈출했던 인물이었다. 등주 함락은 다른 측면에서도 명에게는 커다란 타격이었다. 등주성 관할의 육군과 수군이 공유덕에게 넘어간 것은 물론 명이 자랑하는 다양한 화기(火器)도 반란군의 차지가 되었다. 당시 등주성의 무기고에는 엄청난 수량의 화기들이 비축되어 있었다. 그 가운데는 홍이포(紅夷砲)도 있었다. 일찍이 등래순무를 지냈던 도낭선(陶朗先), 손원화 등이 애써 제작하여 비축해 놓은 것이었다. 등주 함락 직후 내주(萊州)도 떨어졌다. 산동의 거진(巨鎭) 두 곳이 모두 반란군에게 넘어갔다는 소식에 놀란 명 조정은 토벌군을 동원하려 하는 한편, 공유덕 등에게 면사패(免死牌)를 보내 귀순을 종용했다. 하지만 공유덕 등은 ‘이미 내주를 함락시킨 이상 북경까지 진군하겠다.’고 하면서 기세를 올렸다. 한편에서는 후금군의 공격을 막아내야 할 입장에서 내란까지 진압해야 했던 명 조정의 처지에서는 대규모의 진압군을 동원하는 것이 여의치 않았다. 이 같은 배경에서 공유덕 등의 등주 장악은 8개월 이상 이어졌다. 반란군의 군세(軍勢)가 커지면서 등주성의 제장(諸將)들은 공유덕을 왕으로 추대하려 했다. 공유덕은 고사하다가 결국 스스로 도원수(都元帥)를 칭했다. 이구성이 부원수가 되어 병력을 지휘했다. 북경의 지척에 있는 산동이 소용돌이에 휩싸이자 명 조정은 고기잠(高起潛), 조대필(祖大弼) 등에게 대군을 주어 진압에 나섰다. 공유덕 등은 힘써 싸웠으나 중과부적이었다. 당시 명 조정이 동원한 진압군은 7만명에 이르는 대병력이었다. 성 전체가 포위된 상황에서 공유덕과 이구성은 포위망을 뚫기 위해 여러 차례 돌격전을 감행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이구성은 돌격전 과정에서 죽고 말았다. 1632년 9월 수차례의 실패 끝에 공유덕은 포위를 뚫고 바다로 나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어느 곳으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퇴로가 막힌 상황에서 공유덕 등은 여순(旅順) 쪽으로 방향을 잡았지만 여의치 않았다. 여순구에서 명 총병(總兵) 황룡(黃龍)에게 차단 당한 데다, 영원 등지에서도 명군이 추격해 오자 공유덕 등은 광록도, 장산도(長山島) 등지의 연해 지역을 전전했다. ●조선 또다시 고래싸움에 휘말릴 위기에 당시 후금은 공유덕 등이 일으킨 반란의 경과를 예의주시하고 있었다. 홍타이지는 공유덕 등이 해상에서 방황하고 있다는 보고를 받은 뒤 책사 범문정(范文程)을 그에게 보냈다. 범문정은 홍타이지가 조대수에게 투항을 종용할 당시에도 활약했던 인물이었다. 공유덕 등은 범문정을 만난 뒤 후금으로 귀순하기로 결심을 굳혔다. 명 조정에는 비상이 걸렸다.‘오랑캐’에게 수군과 홍이포가 통째로 넘어갈 판이었기 때문이다. 명 조정은 수군을 동원하여 도주로를 차단하려 하는 한편 조선에도 ‘급전(急電)’을 날렸다. 홍타이지는 홍타이지대로 병력을 진강(鎭江) 지역으로 보내 공유덕을 맞이할 준비를 했다. 바야흐로 조선은 또다시 ‘고래 싸움’에 휘말릴 위기 속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1) 산청 성심원 유의배 신부

    [김성호 전문기자의 한국서 길찾는 이방인] (11) 산청 성심원 유의배 신부

    경남 산청의 나환자 마을 성심원(산청군 산청읍 내리 100). 한센병을 앓는 170여명이 함께 살며 요양도 하고 치료도 받는 환우촌이다.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소속된 3명의 신부와 7명의 수사(修士)를 중심으로 직원 60여명이 환우들을 돌보는 이곳엔 ‘환자’가 없다.‘가족’이 있을 뿐이다. 비록 병증이 심해 마비된 손발이 뒤틀리고 앞을 볼 수 없어도 모두가 한 식구들. 이 성심원의 중심에, 밤낮 없이 아픈 이들의 곁을 지키며 마음과 몸을 챙겨 주는 푸른 눈의 외국인이 있다. 한국서 32년째 살며 병자성사에 몸바쳐 온 스페인 바스크 지방 게르니카 출신의 유의배(62·본명 루이스 마리아 우리베·수도명 알로이시) 신부이다. 지난 정월 대보름날 저녁. 환자 곁을 지키다 수도복 차림으로 기자 앞에 불쑥 나타난 푸른 눈의 신부는 첫 대면임에도 보름달만큼이나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짧은 흰 머리와 길게 자란 하얀 턱수염, 그리고 검은색 수도복에 하얗게 번지는 웃음. 그 누구라도 의지할 수 있을 것 같은, 편한 웃음이었다. 병자, 그것도 가장 대하기 힘들다는 한센병 환자들을 한결같이 내몸같이 살피는 유의배 신부는 일찍부터 병자성사에 뜻을 두었다고 한다. 신학대 재학시절 간호사로 일할 만큼, 그의 길은 아픈 이들을 향해 정해졌던 것 같다. 사제서품을 받고 스페인 나환자병원서 처음 피정을 한 것이 계기가 되어 평생을 나환자들과 살고 있는 유의배 신부. 그는 영락없는 한국인이다. ● 신학대 재학시절 간호사 경험 ‘큰 도움´ 스페인 바스크지방의 작은 도시 게르니카.1937년 스페인 내란 중 파시스트 프랑코를 지원하는 독일의 무차별 폭격과 학살의 참상을 상징적으로 담은 피카소의 그림으로 잘 알려진 비극의 땅, 게르니카에서 유 신부는 태어나 자랐다. “게르니카 폭격현장에 있었던 어머니로부터 전쟁 이야기를 자주 들었어요.5∼6살 무렵이었지요. 라디오를 통해 전해지는 한국전쟁이 신기할밖에요. 전쟁이란 어머니를 통해 듣는 과거사로만 알았는데 실제로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으니….” 집안에 프란치스꼬 수도회 소속 수사들이 많아 어릴적부터 수사가 될 생각을 자연스럽게 가졌던 그는 16살 때 프란치스꼬 수도회에 입회, 종신서원을 했고 바스크 지방 아란사수 신학대학을 졸업하면서 사제서품을 받았다. 어릴 적 관심 많았던 한국은 변함없이 가고 싶은 나라. 신학대학 시절에도 한국에 파견된 선배 사제들의 편지와 소식이 실린 잡지들을 꼬박꼬박 구해 보았다고 한다. “신학대 재학시절 간호사 경험을 살려 사제서품을 받자마자 아픈 이들과 살아갈 요량으로 한국을 지원했는데 받아들여지지 않았어요. 한국의 군사독재 체제가 경험 없는 초년 사제에겐 위험하다는 이유였지요.” 첫 발령은 파라과이 가와수로 났지만 발령 대기 중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수도원 본당 사역이 더 급하다는 관구의 뜻을 따라 볼리비아에서 2년간을 사역해야 했다. “볼리비아로 떠나기 전 마드리드 북쪽의 트릴료병원서 나환자들과 보름간 피정을 함께했는데 그때 만난 나환자들에게서 평생 가야 할 신앙의 길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볼리비아 사역을 마친 뒤 한국어를 배우기 위한 전 단계로 아일랜드와 런던에서 1년여 동안 영어공부를 했다고 하니 한국을 향한 집념이 어렵지 않게 읽힌다. 그런데 성심원에서 나환자들과 함께 산 것은 한국에 와서도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한국에 입국해 정동 프란치스꼬 수도원서 한국어를 배우던 무렵 한센병 환자들이 사는 성심원 이야기를 처음 듣고는 ‘바로 이곳이다.’라는 생각에 뛸 듯이 기뻤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 10여년 전부터 임종환자의 염도 직접 도맡아 정동 수도원에서 시작해 진주 칠암동 양로원 사역, 주문진 본당 보좌, 제주 공동체에서의 기도생활 등 5년여를 보낸 끝에 성심원에 온 것이 1980년 5월. 지금은 번듯한 요양원이며 수용 시설을 갖추고 있지만 당시 처음 맞닥뜨린 나환자촌은 세상의 박대와 눈초리를 피해 숨어든 환자들이 허름한 집에서 가정을 이루거나 외롭게 살아가는 ‘버려진 땅’에 다름 아니었다. “막상 환자들과 생활하려니 그들을 도울 일이 변변치 않았어요. 세상에서 버림받아 의지할 곳 없는 사람들에게 내가 해줄 일이란 그저 ‘더 이상 버림받지 않는다.’는 위안을 주는 정도였지요.” 처음엔 그냥 이유 없이 피하려고만 들던 환자들도 격의 없는 푸른 눈의 이방인에게 차츰 마음을 열기 시작했다. 밤낮 아픈 환자들의 수발을 들며 마지막 가는 길까지 함께 배웅하는 외국인 신부가 친구나 가족보다 더 살가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지금은 대부분 화장을 하지만 매장풍습이 계속됐던 나환자촌에서 장지까지 상여를 따라가며 함께 우는 사제가 단지 신앙에 매몰된 ‘하느님의 종’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지금도 ‘혹시 잘못될지도 모르는’ 중환자의 곁은 어김없이 유 신부가 지킨다.10여년 전부터는 임종 환자의 염(殮)도 직접 한다. 임종 환자의 손발을 거두고 시신을 씻어 수의를 입혀 입관하는 일까지 도맡는다. “이곳에서 앓다가 사망한 환자들의 시신을 거두던 촌로들이 세상을 떠나면서 염을 할 사람이 없어졌어요. 어쩔 수 없이 용기를 내어 어깨너머로 보아두었던 대로 죽은 이의 마지막을 수습하기 시작한 게 일상이 되었네요.” 따져보면 유 신부도 정상인의 몸은 아니다. 지난 1993년 상태가 악화된 환자를 인근 병원에 입원시키고 돌아오는 길에 당한 교통사고로 왼쪽 어깨부터 손가락까지 심하게 다쳐 이식수술을 해야 했다. 1998년 성심원 영내에서 경운기에 치여 넘어지는 후유증으로 목 디스크를 심하게 앓고 있다. 요즘은 오른팔의 마비증세가 갈수록 심해지고 손가락 감각도 거의 없어져 뜨거운 것을 만져도 느낄 수 없을 정도라고 한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었던 두 번의 사고가 오히려 환우들의 입장을 더 깊숙이 알게 된 계기였던 것 같아요. 나중에 알았지만 사고를 당해 입원해 있던 기간 내내 환우들이 성당에 모여 저를 위해 기도했다고 합니다. 그들을 위해 제대로 한 것이 없는데….” 아픈 이들을 대할 때마다 그리스도의 만남과 구원의 믿음을 거듭 확인한다는 유의배 신부. 그는 어쩔 수 없는 프란치스꼬 수도회 수사이다. 하지만 “머리카락이 다 빠지고 손발이 다 문드러진 나환자일지라도 자식들에겐 환자가 아닌 그냥 어머니요, 아버지”라는 말은 왜 그가 평생을 나환자들과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메시지로 다가온다. 2002년엔 아산사회복지재단에서 수여하는 사회봉사상을 받았고 지난 2006년엔 동년배의 환자가 주선해 조촐한 회갑연도 열었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노 신부가 느닷없이 “식구들을 소개하겠다.”며 기자의 손을 잡아 환우들 앞으로 이끈다. 불쑥 나타난 신부의 모습에 반가움의 표정이 번진다. “신부님 안녕하세요.”“아이구 오늘은 더 예뻐졌네요.” 여기저기서 쏟아지는 인사에 일일이 다가가 껴안으며 얼굴을 부빈다. 비틀린 두 손으로 하트 모양을 힘겹게 만들어 보이는 할머니의 손을 맞잡던 유 신부가 말한다.“보는 눈에 따라 흉한 몰골의 환자가 될 수도 있고 허물없는 가족이 될 수도 있는 것이지요. 제가 살아가는 이유입니다.” 산청 글 사진 김성호 문화전문기자 kimus@seoul.co.kr ■ 유의배 신부는 ●1946년 스페인 바스크지방 게르니카 출생 ●1962년 프란치스꼬 수도회 입회 ●1969년 종신서원 ●1970년 바스크지방 아란사수 신학대학 졸업, 사제서품 ●1973∼1974년 볼리비아 코파카바나 수도원 본당 사역 ●1976년 한국 입국 ●1980년 성심원서 수도생활 시작 ●2002년 아산사회복지재단 사회봉사상 수상 ●현재 성심원서 수도생활 및 병자성사
  • [李당선인 전격 방문조사]큰짐 던 특검…“예정된 수순”

    정호영 특별검사팀이 17일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서울시내 모처에서 방문 조사한 것은 수사 결과 발표를 위한 마무리 수순 밟기로 분석된다. 특검팀이 이 당선인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수사하는 만큼 어떤 형태로든 이 당선인을 조사하지 않고는 수사를 마무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번 특검의 핵심인 이 당선인 조사가 이뤄짐으로써 정 특검팀은 사실상 오는 22일 조사결과 발표만 남겨 놓았다. ●큰 짐 던 특검… 무혐의 처분 될 듯 이날 단시간의 방문 조사에서 특검팀이 지난해 검찰 수사를 뒤집을 만한 새로운 사실을 밝혀냈는지는 의문이다. 이미 이 당선인의 ‘무혐의’ 발표가 예측된 상황에서 특검팀이 예정된 수순을 절차적으로 밟아나간 것이 아니냐는 분석이 맥락을 같이한다. 특검 주변에서는 그동안 “파견 검사와 수사관이 상당수 포진된 이명박 특검팀이 자신들의 ‘인사권자’가 될 이 당선인을 상대로 짧은 수사기간에 강하게 몰아붙일 수 있겠느냐.”며 사실상 통과의례 성격에 그칠 것이라는 전망이 나돌았다. 특검팀이 이날 ▲BBK 주가조작 및 횡령 ▲도곡동 땅 및 ㈜다스 실소유 의혹 ▲상암 디지털미디어센터(DMC) 특혜분양 의혹 ▲광운대 동영상 ▲BBK 명함 등 광범위한 의혹을 3시간 만에 조사했다는 것은 또 다른 ‘부실 수사’ 논란을 부를 수도 있다. 특검팀은 이 당선인에게 미리 질의서를 건네지도 않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김학근 특검보는 이날 밤 브리핑에서 “검찰이 서면 조사한 부분을 중복해 묻지 않아 3시간 만에 조사가 가능했다.”면서 “광운대 동영상 등 검찰 수사결과 발표 이후에 불거진 의혹을 집중 조사했다.”고 설명했다. ●부실수사 논란 피하려 ‘절충´ 이 당선인 조사 여부와 시기, 방법을 고심하던 특검팀은 수사 결과 발표(22일)를 닷새 남기고 당선인 조사를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판단, 전격적으로 방문 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특검팀이 이장춘 전 싱가포르 대사가 공개한 ‘BBK 명함’이나 “BBK를 직접 설립했다.”고 발언한 ‘광운대 동영상’ 등 국민적 의혹을 풀기 위해서는 이 당선인 재조사가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정 특검은 그동안 “국민이나 언론이 (검찰 수사발표 이후)남은 의혹이라고 생각하는 모든 사안을 훑어서 실체를 밝힐 방침”이라고 공언했다. 특검팀은 이 당선인을 조사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특검 사무실로 소환 조사할지, 서면 조사할지,‘제3의 장소’에서 방문 조사할지 등 조사 방법과 시기를 두고 고심을 거듭했다. 일반적인 사건이라면 소환 조사가 원칙이다. 하지만 헌법에 따라 내란이나 외환의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형사상 소추(訴追)를 받지 않는 대통령이 될 이 당선인을 취임(25일)을 며칠 앞두고 특검에 소환 조사하는 것은 부담이 너무 컸을 것이라는 분석이다. 그렇다고 지난해 검찰 수사 때처럼 이 당선인을 서면으로만 조사하면 “예산만 낭비했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결국 특검팀은 소환 조사와 서면 조사의 절충안인 방문 조사를 선택했다. 방문 조사는 조사 대상자가 병환을 앓고 있는 등 조사실에 직접 나가기 어려울 때 이뤄지지만, 이 당선인은 경호나 예우 문제를 이유로 내세운 것으로 보인다. 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李당선인 방문조사 검토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을 둘러싼 각종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정호영 특별검사팀은 이 당선인을 방문 조사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정호영 특별검사는 15일 “당선인을 제3의 장소로 불러 조사하는 방법도 있지 않으냐.”라는 질문에 “현재 조사 방안을 연구 중”이라고 답했다. 서면 조사와 소환 조사의 절충안인 방문 조사까지 검토하고 있다는 뜻이다. 또 다른 특검 관계자는 “자금 추적을 마치고 내부 회의를 통해 당선인 조사 여부와 조사 방법을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22∼23일 수사 발표까지 일주일밖에 남지 않은 상황이라 조만간 최종 결정을 내릴 것으로 보인다. 특검팀이 방문 조사를 검토하는 것은 현실적인 이유에서다. 지난해 12월 검찰이 수사결과 발표 직전 당시 한나라당 대선 후보였던 이 당선인을 두 차례 서면 조사하고 ‘무혐의’처분을 내리자 형식적 조사로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 여론이 일었다. 특검팀이 이 당선인을 또 다시 서면으로만 조사한다면 “특검팀 가동으로 예산만 낭비했다.”는 여론의 역풍을 맞을 수 있다. 그렇다고 헌법에 따라 내란이나 외환의 죄를 저지르지 않으면 형사상 소추(訴追))를 받지 않는 대통령이 될 이 당선인을 특검팀이 취임식을 며칠 앞두고 특검팀 사무실로 소환, 조사하기도 부담스러운 일이다.정은주기자 ejung@seoul.co.kr
  • 검은대륙 또 분쟁 피바람

    검은대륙 또 분쟁 피바람

    아프리카에 다시 분쟁의 바람이 불고 있다. 케냐가 종족 분쟁으로 신음하고 있는 가운데 차드도 반군이 수도 대부분을 장악해 정권 붕괴 위기에 놓였다. 이에 따라 미국과 프랑스 등 각국은 일제히 자국민 소개에 나섰다. 뿌리깊은 가난, 외세, 군벌, 석유 이권 문제 등이 겹쳐 있는 차드 사태는 아프리카 분쟁의 전형을 보여준다. 수단 국경지대에서 이동한 반군은 지난 1일(이하 현지시간)은자메나로 진격해 하루 만인 2일 수도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이드리스 데비 대통령은 대통령궁에 고립된 상태라고 AFP통신이 반군 소식통의 말을 인용해 3일 보도했다. 아바카르 톨리미 반군 대변인은 “우리는 데비 대통령이 대통령궁 안에 있는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가 떠나기를 원한다면 그렇게 해주겠다.”면서 “일부 저항이 있지만 우리는 이 상황을 통제하고 있다.”고 말했다. 독일 소식통도 목격자의 말을 인용해 반군이 대통령궁을 장악했다고 전했다. 하지만 아마드 알람 미 차드 외무장관은 AFP인터뷰에서 “대통령은 안전하며 정부군이 여전히 은자메나를 장악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프랑스군 정보 관계자에 따르면 반군의 규모는 대략 2000여명으로 기관총과 자동소총, 로켓포로 중무장했다. 이들은 토요일 아침 은자메나에 진입할 때까지 별다른 저항을 받지 않았으며, 일부 시민들은 반군의 등장을 환영했다고 외신들은 전했다. 프랑스와 미국 정부는 사태 확산을 우려해 자국민 대피령을 내렸다. 미 당국은 차드를 떠나고 싶은 미국인은 즉각 대사관과 접촉하라고 당부했으며, 프랑스는 은자메나 시내의 3곳을 피난민 집결 장소로 지정하는 한편 자국민 보호를 위해 150명의 병력을 추가 파견했다. 사우디 외무부는 이날 성명을 통해 교전 중 대사관 직원의 부인과 딸 등 2명이 숨졌다고 발표했다. 차드 반군을 이끄는 지도자 중에는 마하마트 누리 전 국방장관 등 데비 대통령 휘하에서 일했던 고위 관료들이 많다. 이들은 데비 대통령의 장기 독재와 부정부패에 불만을 품고 반군에 합류했다. 군인 출신인 데비 대통령은 1990년 은자메나를 장악한 뒤 민정 이양 절차를 거쳐 대통령에 올라 지금까지 권력을 누리고 있다. 특히 2006년에는 3선을 위해 헌법을 개정하기까지 했다. 반군은 이에 반발해 당시 은자메나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차드의 내전은 뿌리가 깊다.1960년 프랑스에서 독립한 뒤 정권 장악을 위한 끊임없는 내분에 시달리고 있다. 최근 유전이 발견되면서 이권을 노린 내란까지 더해졌다. 특히 이웃 수단과의 얽히고설킨 관계는 사태를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다르푸르 난민이 차드로 흘러들면서 국경에서의 분쟁이 빈발해지자 수단 정부는 차드의 반군을 지원하고, 차드 정부는 이에 맞서 수단의 반군을 지원하는 악순환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서울광장] ‘이명박 특검법’ 국민 눈높이가 해법이다/황진선 수석부국장

    [서울광장] ‘이명박 특검법’ 국민 눈높이가 해법이다/황진선 수석부국장

    정치권의 뜨거운 감자인 ‘이명박 후보 특검법’을 어찌할 것인가. 대통합민주신당 등 반 이명박 제 정파의 일각에선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에 대한 특검을 강행해야 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그 소신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 대통령제 국가에서 취임 후 6개월은 새 대통령이 소신껏 국정의 새로운 틀을 세울 수 있도록 국회와 언론이 허니문 기간으로 인정하고 있다는 점은 차치하자. 검찰 간부들은 특검을 하더라도 BBK 사건의 수사 결론은 99% 뒤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자신한다. 검찰은 이 당선자를 기소하려면 “무죄가 아니다.”라는 주장으로는 안 되고 유죄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증거가 없다고 설명한다. 돈의 흐름을 샅샅이 추적해 보았지만 BBK에 이 당선자의 돈이 흘러들어갔거나,BBK에 190억원을 투자한 ㈜다스가 이 당선자의 소유였다는 물증은 없다고 단언한다.BBK 수사에 검사 12명, 수사관 41명이 참여한 만큼 수사 결과를 왜곡·조작했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이명박 특검법이 BBK뿐 아니라 도곡동 땅 매각 대금과 다스의 지분 등 재산누락 의혹, 상암동 DMC 특혜분양 의혹 등 이 당선자를 둘러싼 모든 의문을 수사 대상으로 망라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대한변협은 사건이 아니라 인물에 대한 특검이라는 점, 특검법의 참고인 동행명령제는 영장주의에 반한다는 점, 특검법을 촉발한 김경준의 메모가 거짓으로 드러난 점 등을 들어 위헌 소지가 크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법조계에선 노무현 대통령이 특검법에 서명을 하더라도, 이 당선자 쪽에서 헌법 위반이라고 주장하며 헌법소원과 함께 효력정지가처분신청을 제기해 특검을 중단시킬 수 있다고 얘기한다. 물론 가능성은 낮지만 특검을 통해 BBK 사건 또는 다른 사건에서 이 당선자가 유죄라는 증거를 찾아내 기소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당선자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재판을 진행할 수 있는지에 대해선 고개를 가로젓는 법조인들이 많다. 우리 헌법은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 소추를 받지 않도록 규정하고 있다. 특검을 해야 한다는 주장에는 이 당선자의 비리, 특히 BBK 사건을 제대로 터뜨리기만 하면 내년 4월9일 총선에서 자기 정파 후보들이 더 많이 국회의원에 당선될 수 있다는 판단이 깔려있다고 한다. 그러나 설혹 이 당선자의 범죄 혐의를 찾아내 기소한다 하더라도 역풍을 맞을 수 있다. 반 이명박 정파들은 한나라당 등이 2004년 3월12일 노 대통령에 대한 탁핵 소추안을 가결했다가 온 국민의 분노를 샀던 것을 상기해야 한다. 한나라당은 탄핵 한달여 만에 실시된 17대 4·15 총선에서 박근혜 대표를 앞세워 민의를 거스른 탄핵 가결을 사과하며 개헌 저지선을 확보하게 해달라고 읍소하는 처지가 됐다. 반면 열린우리당은 탄핵 후폭풍 덕분에 총선전보다 103석이 늘어난 152석을 얻었다. 이명박 특검법은 재고해야 마땅하다고 본다. 소모적인 정치 논쟁과 국력 낭비를 줄이려면 노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급조된 특검법을 국회에서 재의토록 하는 것이 바람직스러워 보인다. 이 당선자도 BBK를 설립했다고 말한 부분과 BBK 명함을 돌린 것 등에 대해 국민들에게 솔직하게 털어놓고 이해를 구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여야 모두 국민의 눈높이에 맞춰 해법과 새 진로를 찾아야 한다. 황진선 수석부국장 jshwang@seoul.co.kr
  • [이명박 시대-그는 누구인가] 이명박 그는 누구

    [이명박 시대-그는 누구인가] 이명박 그는 누구

    ■ 정치 입문~청와대 입성 ‘정치인 이명박’이 걸어온 길은 ‘기업인 이명박’과 달랐다. 현대그룹에서 ‘샐러리맨의 신화’를 창조하며 달려온 출세가도가 아니었다. 좌절을 맛보기도 했고, 그래서 다시 도전하기도 했다. 정치무대를 떠나 전공인 건설이 아닌 금융분야에서 제2의 신화를 꿈꾸다 여의치 않아 접고는 수도 서울의 수장으로 도약기를 거쳐 최고 권좌에 오르게 됐다. ●현대와의 결별… 정치 입문 그는 ‘왕 회장’으로 불리는 정주영 현대그룹 명예회장이 통일국민당을 창당해 대선에 출마하려는 것을 만류하면서 현대그룹과 결별하게 된다. 이후 왕 회장의 상대 진영인 김영삼(YS) 진영으로 합류, 지난 1992년 14대 총선 때 전국구(비례대표)로 국회에 등원한다. 하지만 쉽지 않았다.1995년 지방선거 때 신한국당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뛰어들었다. 하지만 YS가 밀던 정원식 전 국무총리에게 패하고 만다. 첫번째 정치적 시련이었다. 그 이듬해 15대 총선을 준비하며 ‘정치 1번지’ 서울 종로구에 출마한다. 여당의 중진 이종찬 국민회의 후보와 노무현 민주당 후보를 물리치고 당선되는 기염을 토했다.98년 이 당선자는 다시 서울시장 후보 경선에 도전하기 위해 국회의원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총선 때 적발된 선거법 위반으로 벌금 700만원을 선고받아 피선거권까지 박탈당했다. 당시 비용 초과 지출을 폭로했던 김유찬 당시 비서를 해외로 도피시켰다는 혐의까지 유죄로 인정되면서 “이명박의 정치 인생은 끝났다.”는 말을 들어야 했다. ●서울시장으로 화려한 재기 이후 2년간 미국에서 ‘정치 방학’을 보내며 와신상담하다가 2000년 귀국해 정치 재개에 나섰다.2002년 서울시장 선거에 다시 도전했다. 한나라당에서 5선의 중진 홍사덕 의원과 서울시장 후보를 놓고 경쟁해 후보 자리를 거머쥐게 됐다. 본선에서는 여당인 민주당의 김민석 후보를 꺾으면서 세번째 서울시장 도전만에 입성에 성공했다. 그는 서울시장 선거 때 내건 청계천 복원과 시내 5개 간선도로에 버스전용중앙차로제 도입을 내걸었다. 막상 당선되자 실현 가능성이 떨어진다고 주변에선 적잖이 만류했다. 하지만 특유의 뚝심으로 4년 만에 해결했다.‘제2의 신화’는 ‘청계천 신화’로 이어지면서 대선 주자로서 주목받게 된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지독한 경선 2006년 6월 서울시장에서 물러난 이 당선자는 다시 여의도 정치로 들어온다. 하지만 여의도 정치는 그가 살아온 세상과 달랐다. 한나라당의 벽은 높고 높았다. 당시 박근혜 전 대표는 지방선거를 승리로 이끌며 당내에서 철옹성을 세우고 있었다. 여론조사에서도 박 전 대표가 이 당선자보다 높게 나오던 시절이었다. 그는 높기만 하던 당심을 허물기 위해 민심을 공략했다.‘한반도 대운하’ 등의 공약과 성공한 경제 지도자의 이미지를 심으며 높은 지지를 얻게 된다. 그 해 추석 전후로 북한의 핵 실험 후 지지율 40%를 돌파,‘이명박 대세론’을 형성하기에 이른다. 경선룰 등을 둘러싸고 박 전 대표측과 사사건건 갈등하며 극한의 대치에 이르기도 했다. 고비마다 특유의 승부수로 돌파해 나갔다. 이상득 부의장의 동생 평이다.“내가 명박이보다 공부도 잘했고, 운동도 잘했다. 나도 대기업(코오롱) 최고경영자(CEO)까지 해봤다. 하지만 명박이에게는 나에게 없는 게 하나 있다.”며 “위기 상황에서 담대하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내가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이다. 명박이는 그걸 가지고 있다.” 그는 땅 투기 의혹과 ‘도곡동 땅’ 차명 의혹,‘BBK 주가조작 의혹’ 등 ‘지독한 경선’을 거쳐 지난 8월 20일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에 올랐다. 박 전 대표와 불과 2452표차(1.5%)밖에 나지 않는 신승이었다. 그나마 현장 투표에서 500여표 뒤진 것을 여론조사에서 뒤집었다. ●더 지독한 본선…‘BBK 공세’와 김경준의 귀국 경선 후유증은 적지 않았다. 주요 당직을 놓고 친박(친 박근혜)과 친이(친 이명박)의 갈등은 계속됐다. 박 전 대표가 ‘오만의 극치’라고 직격탄을 쏜 최측근 이재오 최고위원은 물러나야 했다. 여권의 ‘BBK 주가조작’ 공세도 거셌다. 자녀들의 ‘위장 전입’과 위장취업으로 한때 이 당선자는 궁지에 몰리기도 했다. 그러던 중 이회창 한나라당 전 총재가 이 당선자와 박근혜 전 대표와의 틈새를 파고들며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다. 이회창 후보는 “불안한 후보로는 정권교체가 어렵다.”며 박 전 대표에게 집요하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이 당선자도 박 전 대표에게 끊임없는 ‘러브콜’을 보내며 “도와달라.”고 SOS를 보냈고 박 전 대표는 “당원으로서의 의무를 다하겠다.”고 이 당선자의 손을 들어줬다. 검찰의 BBK 수사도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이 당선자의 측근들이 검찰에 불려나가 수사를 받았고 본인도 서면조사를 받았다. 급기야 대선을 한달 앞두고 ‘BBK 의혹’의 당사자인 김경준씨가 범죄인 인도 송환에 따라 한국으로 송환됐다. 대선판은 요동쳤다. 검찰수사 결과 ‘BBK 주가조작’에 이 당선자는 “혐의가 없다.”고 결론을 내렸지만 여론은 냉정했다. 검찰의 무혐의 발표에도 불구하고 상당수의 국민들이 BBK와 이 당선자가 연관돼 있다는 의혹을 해소하지 못하고 여론이 출렁거렸다. 이 당선자는 다시 한번 승부수를 띄운다. 부부가 살 집 한채 빼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겠다고 밝혔다. 이 당선자는 “오랜 기업인 생활을 끝내고 공인으로 나섰던 10여년 전부터 재산을 자식들에게 물려주지 않겠다고 작정했다.”며 “재산 환원은 가난한 살림에 고생하면서도 아들을 바르게 키워 주신 어머니와의 약속이자 국민 여러분과의 약속”이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여론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여당은 소위 ‘이명박 특검’을 내세워 압박 강도를 최고조로 높였다. 여야는 물리적 충돌을 불사하며 극한 대치를 이뤘다. 대선을 불과 사흘 앞두고 밤 11시30분에 대선후보 TV합동토론회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긴급 기자회견을 열어 전격적으로 특검을 수용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고비와 시련마다 과감한 승부수로 87년 민주화 이후 최초의 과반 득표로 17대 대통령에 당선됐다.19일은 공교롭게도 이 당선자의 생일이자, 결혼기념일이기도 하다. 그는 이날 대통령 당선으로 세번째 축하 케이크를 받게 됐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유년기~현대건설 회장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는 사상 처음 기업인 출신 대통령이라는 의미를 가진다. 이 당선자는 만 35세인 1977년 현대건설 사장에 올라 ‘샐러리맨의 신화’로 불리며 ‘월급쟁이’들의 우상으로 통했다. 기업인으로 숱한 화제를 뿌렸던 그는 92년 정계입문 후 시련을 딛고 마침내 최고 지도자의 자리에 올랐다. 기업생활 27년, 정계입문 15년 만의 일이다. 그는 정치권에 발을 들여 놓은 후 선거법 위반으로 국회의원직 상실 등으로 정치생명이 끝나는 듯했지만 서울시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하며 마침내 청와대에 입성하게 됐다. ●가난과 싸웠던 소년 시절 소년 이명박을 키운 건 가난과 어머니였다. 목장 목부로 일하던 이충우씨의 4남 3녀 중 다섯째로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났다. 다른 형제들의 이름은 상(相)자 돌림이지만 본인만 ‘명박’인 이유는 “어머니가 보름달이 치마폭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시고는 ‘밝을 명(明), 넓을 박(博)’자를 넣어 지었다.”고 설명했다. 족보에는 ‘상정’(相定)으로 이름이 올라 있다고 한다. 소년 이명박은 가족들과 함께 1945년 11월 귀국선에 오른다. 하지만 배는 쓰시마섬 앞바다에서 가라앉고 말았다. 가족들은 구조됐지만 살림살이와 짐은 모두 수장되고 말았다. 말 그대로 맨몸뚱이만 귀국했다. 고향에 대한 첫 기억은 포항 시장통의 가난이었다. 자서전 <신화는 없다>에서 “가난이 굴 껍데기처럼 우리 대가족에 들러 붙었다.”고 말했다. 끼니 거르기를 밥 먹듯이 했다. 학교 다니기도 쉽지 않았다. 중학교 때 영양실조로 쓰러져 넉 달간 일어나지 못한 적도 있었다. 학교에서 등록금을 가져오라고 쫓겨나기 일쑤였다. 어린 이명박은 철들기도 전에 어머니와 함께 시장에 좌판을 벌였다. 김밥, 풀빵, 엿, 아이스크림, 뻥튀기 장사 등 닥치는 대로 생활비를 벌었다. 어머니는 엄격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가난했지만 자식들을 당당히 키웠다. 자식들에게 “정직하다면 당당하게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한다. 새벽 4시면 가족들은 어머니의 새벽기도와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심부름으로 이웃집 일을 하러 가더라도 어머니는 어린 이명박에게 “물 한모금이라도 얻어 먹으면 안 된다. 음식을 준다고 받아 와도 안 된다.”고 단단히 일렀다. 가난은 그의 몸을 엉망으로 만들었다. 군의관은 “이런 몸은 군대에서도 안 받아 준다.”고 병역 면제 처분을 내렸다. 병명은 기관지 확장증이었다. 어머니는 다시 집에 돌아온 막내아들을 부둥켜 안으며 “내 자식이 이렇게 될 때까지 내가 팽개치고 있었구나.”하고 눈물을 쏟았다. 그렇게 엄하신 어머니가 처음으로 보인 눈물이었다. 이명박은 그 때를 기억할 때마다 눈물로 말을 잇지 못한다고 한다. ●대학 시절 6·3사태로 옥고 그에게 대학 진학은 언감생심이었다. 집에서는 막내아들의 고교 진학도 말렸다. 집안의 기둥 작은형(이상득 국회부의장)의 학비를 대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학비는 한푼도 받지 않겠다고 어머니에게 약속하고 동지상고 야간부에 수석 합격했다. 졸업할 때까지 장학금을 받았고 1등을 놓치지 않았다. 가족들은 상득이형 뒷바라지를 위해 서울 이태원으로 이사갔다. 이 당선자는 이태원 재래시장 환경미화원으로 돈을 벌며 살림에 보탰다. 하지만 학업의 꿈을 버리지는 않았다. 그는 “돈이 없어 중퇴하더라도 고졸보다는 대학 중퇴가 낫지 않겠나.”하고 생각했다. 청계천 헌책방에서 수험서를 사서 입시를 준비, 고려대 상대에 붙었다. 합격 소식을 들은 이태원 시장 상인들이 새벽에 쓰레기 넝마주이 일을 맡겨준 덕에 학비를 벌 수 있었다. 그러나 단과대 학생회장이던 64년 한일 국교정상화에 반대하며 6·3시위를 주도한 혐의로 6개월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른다. 죄목은 내란선동죄였다. 어머니는 그가 구속됐을 때도 “소신을 가지고 당당하게 살아라.”고 가르쳤다. 출소 후 한달 여 만에 인생의 스승이었던 어머니가 돌아가시는 슬픔을 겪는다. 그는 “돈 벌면 어머니에게 새옷 한벌 사드리고 싶었는데 못했다.”고 말하곤 한다. ●현대그룹 입사… 초고속 승진 거듭 청년 이명박은 여느 운동권 출신과 달리 정치권이 아닌 기업을 택한다. 운동권 출신의 취직은 쉽지 않았다. 중앙정보부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것이 발목을 잡았다. 박정희 당시 대통령에게 “나라가 열심히 사는 젊은이 앞길을 가로막아서는 안 된다.”고 편지를 썼다. 결국 박 대통령의 배려로 그는 당시 중소기업이던 현대건설에 입사했다. 타고난 부지런함으로 ‘왕 회장’으로 불리는 오너 정주영 회장의 눈에 띄었다. 초고속 승진을 거듭해 29세에 이사,35세에 사장에 오르며 ‘샐러리맨의 신화’를 써내려 간다. 그는 종업원 96명의 현대건설을 16만명의 세계적인 기업으로 일군 중심에 자신이 있었다고 말한다. 현대그룹 시절을 떠올리며 “나는 오너가 정해 주는 목표치를 항상 초과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나는 오너와 경쟁했다.”고 당시를 떠올린다. 기업인 시절 ‘왕 회장’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는 에피소드도 많다. 태국 고속도로 건설공사에서 각목과 칼을 든 폭도들에 맞서 금고를 지킨 ‘태국 금고 사건’은 그 중 하나다. 현대건설 과장 시절 경부고속도로 공사가 한창이던 때였다. 불도저가 자주 고장을 일으켰다. 기술자들이 텃새를 부려 공사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이명박 과장은 밤새도록 불도저를 해체하고 다시 조립하면서 구조를 익혀 나중에는 불도저를 직접 몰기도 했다. 젊은 나이에 최고경영자(CEO)에 오르다 보니 오해도 많이 받았다. 이웃들은 현대건설 사장과 살고 있는 부인 김윤옥씨를 가리켜 “세컨드(둘째부인)아니냐.”고 뒷말을 주고받기도 했다. 현대건설 사장 시절 사업상 건설부 장관실을 방문했을 때다. 약속 시간이 지나도 이 당선자를 장관실로 안내하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한 이 당선자가 따지자, 장관 비서는 “사장 비서를 어떻게 장관실로 모시냐. 빨리 사장 데려 오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현대그룹에 27년 동안 몸담으면서 주요 계열사 10개사의 사장 및 회장을 역임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초·중·고 학적부 열어보니 궁핍했던 시절이지만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의 초·중·고교 성적은 좋았다. 초등학교 1학년 때 행동발달사항에 “그림을 좋아한다.”라는 평이 인상적이다.2학년 때는 담임교사로부터 “경솔하다.”는 평도 들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결석이 없었지만 4학년에서 6학년까지는 몸이 아파 결석하는 일이 잦았다.4학년 때 16일,5학년 때 5일,6학년 때 32일을 병으로 결석했다. 이 당선자측은 “가난으로 인한 영양실조 탓으로 누워 지내는 경우가 많았다.”고 설명했다. 중학교 때도 질병으로 인한 결석이 많았다.1학년 때는 결석이 74일에 이른다. 담임 교사로부터 “명랑하고 온순하다.”는 평을 받았다. 동지상고 시절에는 지금처럼 석차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전교 1등을 놓쳐본 적이 거의 없다고 한다. 이 당선자는 성적이 가장 안 좋았을 때가 3등이었다고 기억한다. 그는 장래 희망으로 ‘관리’(官吏)를 썼고, 이 당선자의 부모도 ‘본인과 동일’이라고 기재했다.‘취미 또는 특기’란은 영어로 적었다. 영어에 관심이 많았다고 한다. 중학교 시절 특기는 ‘체육(탁구)’이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이명박 특검법 통과] 李 당선되어도 소환할까

    [이명박 특검법 통과] 李 당선되어도 소환할까

    2008년 2월 초 어느 날. 서울 광화문에 있는 이명박 대통령 당선자 인수위 사무실로 한 통의 전화가 걸려 온다.‘BBK사건과 관련해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할 것이 있으니 이 당선자와 제3의 장소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 달라.’는 내용이다. 전화를 건 쪽은 ‘이명박 특검’의 고위인사다.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가 19일 대통령에 당선될 경우 현실화하게 될 사상 첫 ‘대통령 당선자 특검수사’ 가상 시나리오의 한 대목이다. ●서면조사든 소환이든 부담 17일 ‘이명박 특검법’이 국회 본회의를 통과함에 따라 이명박 후보가 어떤 조사를 받게 될 것인지 관심이 모아진다. 그가 이틀 뒤 대선에서 승리한다면 단순 참고인이 아닌,‘대통령 당선인’이 수사를 받는 초유의 일이 빚어지는 까닭이다. 이 후보측은 직접 소환조사될 일은 거의 없다고 점친다.“검찰이 수사를 제대로 다 했기 때문에 굳이 직접 소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설령 이런 일이 생긴다 해도 그때 가서 정하면 된다는 느긋한 분위기다. 더 수사해봤자 새 의혹이 나올 게 없다는 자신감의 방증이다. 그럼에도 특검이 전격 소환조치를 취할 수도 있다. 검찰 수사결과가 국민들에게 불신받은 것을 염두에 두고 의외로 강도높은 조사를 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다만 이럴 경우에도 일반 참고인에게 하듯 ‘○일 △시까지 특검 사무실 □호로 나오라.’는 식으로 하기는 어렵다. 꼭 직접 조사해야 한다면 사전 연락을 취해 제3의 장소에서 만날 가능성이 높다. 형식적으로나마 ‘소환장’을 발부하는 일도 어려울 것 같다. 역시 가장 현실적으로 꼽히는 것은 ‘서면조사’다. 이미 검찰 수사 때도 이 후보는 2∼3차례 서면조사를 받았다. 이때도 먼저 특검 고위 인사가 전화 연락 등을 취해 서면조사서를 보내겠다고 사전에 통보한 뒤 팩스 등을 통해 질문서를 보내는 형식을 취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하다. 이 후보측 관계자는 검찰 수사 때의 서면조사를 회고하며 “질문이 꽤 독하고 꼼꼼했고, 양도 많았다. 곤혹스러운 것도 있었다.”고 혀를 내둘렀다. 직접 소환되지 않더라도 ‘매서운’ 서면질의서가 이 후보를 괴롭힐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서면조사든 직접 소환이든 당선자 신분의 이 후보에겐 유쾌한 그림이 될 리 없다. 특검 수사 종료시한은 내년 2월24일, 즉 대통령 취임일 바로 전날이 될 가능성이 높다. 당선에서 취임까지는 사실 집권 청사진을 그리고 조각(組閣) 등 큼직큼직하게 처리해야 할 일이 많은데 직·간접적으로 수사 대상에 오르내리는 일 자체만으로 피로감이 누적될 우려가 크다. ●무혐의땐 4월 총선 압승 가능 수사결과 ‘무혐의’가 나오면 이 후보는 큰 힘을 받을 것 같다.4월 총선에서 압도적 지지를 받고 집권 초기에 강한 드라이브를 걸 수 있다. 만약 정반대로 범여권이 주장한 내용이 하나라도 사실로 드러날 경우 집중포화를 맞는 최악의 시나리오가 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물론 그래도 이미 수사 종료시한을 넘기면 ‘당선자’ 신분이 아닌 이미 ‘대통령’이 된 시점이기 때문에 “대통령은 내란 또는 외환의 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재직중 형사상의 소추를 받지 아니한다.”는 헌법 제84조에 따라 일하는 데는 아무런 제약을 받지 않는다. 다만 국민들로부터 ‘정서적 소추’를 받을 수 있다. 정치권의 한 관계자는 “검찰이 유력한 후보의 의혹도 밝혀내지 못했는데 당선자라는 살아있는 권력에 대해 새롭게 밝힐 수는 없다. 특검 할아버지라 해도 그렇게는 못할 것”이라면서도 “다만 자꾸 이슈화되면 힘을 받아야 할 집권 초기에 흠집이 나는 부작용은 충분히 있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만인보’ 24~26권 탈고한 고은

    ‘만인보’ 24~26권 탈고한 고은

    “새삼스럽지는 않아요. 이번에 시집을 냈다는 감회보다 어떻게 완결 작업을 잘 마무리할까 하는 생각부터 먼저 듭니다.” 한국 문학사상 최대의 연작시집인 ‘만인보(萬人譜)’(창비) 24,25,26권을 탈고한 고은(74) 시인은 “나머지 네 권도 이미 초고를 끝낸 상태”라며 “내년 3월쯤 완간하게 될 것”이라고 밝혔다. ●김대중 내란 음모연루 옥중 착상 ‘만인보’에 대한 시인의 착상은 1980년 여름 육군교도소 특별감방 7호실에서 비롯됐다. 당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에 연루돼 영어 생활 중 다양한 인간 군상을 시로 형상화하려는 시도를 하게 됐다는 것. 시인은 “만인보를 단순히 세상을 풍자한 시로 보는 사람들도 있는데, 이는 잘못된 생각”이라며 “시를 통해 수많은 인간상을 형상화하다 보니 예찬도 있고 비판도 있으며, 풍자도 때때로 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번에 펴낸 ‘만인보’ 24∼26권은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에 자취를 남긴 인물들의 삶의 행적을 좇는다.“큰 땅에서 지방관 종사관이 된” 신라의 최치원이 있는가 하면 “20년간 귀양살이 풀려/한강 가/소내 본가로 돌아온” 조선의 다산 정약용,“…백악관 레이건에게/소장(小將)이/한국의 워싱턴이 되겠나이다/사뢰었다”는 대한민국의 전두환까지. 시인은 종횡무진 그들의 삶의 속내에 해학과 비판, 풍자의 칼날을 들이댄다. ●삶의 편린들 해학과 비판, 풍자 시인은 지난 1986년 봄 3500편으로 완결하겠다는 공언과 함께 1∼3권을 처음 세상에 내놓은 것을 시작으로 지난해 21∼23권을 출간한 데 이어 이번에 24∼26권을 펴냈다. 특별히 애착이 가는 작품이 있느냐 질문에 시인은 단호히 “없다.”고 했다.“쓰고 나면 다 잊어버립니다. 늘 잊어버리죠.” 김규환기자 khkim@seoul.co.kr
  • 수사발표 시점,왜 중요한가

    20일 옵셔널벤처스 주가조작 사건 피의자로,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의 도곡동땅·다스 차명보유 의혹 참고인으로 구속수사를 받는 김경준씨와 이 후보측 사이 진실 공방이 뜨겁다. 수사에 속도가 붙고 있지만, 사건이 복잡하고 양측 주장이 첨예하게 맞서 주내 중간수사 결과 발표가 어렵다는 관측도 나온다. 검찰이 대선후보 등록일인 25∼26일을 넘겨 수사 결과를 발표할 수 있다. 이 후보 관련 의혹이 모두 사실무근으로 밝혀지면, 이 후보는 대선일까지 순항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면 검찰이 관련 의혹 가운데 일부에라도 이 후보 연루 의심을 품고 수사를 계속하겠다고 하면, 정국의 혼란상이 이어질 것으로 보인다. 후보가 연루된 혐의의 경중을 따지며 기소 가능성을 점치는 초유의 사태도 예상할 수 있다. 선거법 11조 때문이다. 선거법 11조는 “대선 후보자 등록 뒤부터 개표 종료시까지 장기 7년 이상의 징역이나 금고죄를 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현행범이 아니면 체포 또는 구속되지 아니한다.”고 규정했다. 일단 이 후보가 대선 후보로 정식등록하면, 이 후보 관련 강제수사가 제약을 받게 된다는 얘기다. 주가조작 혐의라든지 탈세 혐의는 모두 장기 7년 이상이라는 전제로부터 자유로운 범죄다. 하지만 대통령 당선자는 내란·외환죄를 제외하고 범죄에 대한 불소추 특권을 갖는다. 후보 등록일을 앞둔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나라당 후보자격 논쟁’이 대선일을 앞두고 ‘대통령 자격 논쟁’으로 이름만 바뀐 채 되풀이될 수도 있다. 범여권 후보 단일화가 불투명하고, 무소속 이회창 후보가 ‘스페어 후보론’을 펴며 이명박 후보의 흠을 부각시키고 있다. 그 결과 각종 여론조사에서 부동층 증가 현상이 발생했다. 후보 등록 이후에도 검찰 변수가 잔존한다면, 대선일 직전까지 이런 혼돈이 이어질 것으로 점쳐진다. 후보 등록일인 25∼26일 이전인 23∼24일을 중간수사결과 발표 적기로 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공식적으로 후보 등록을 하면 선거운동이 본격화된다. 이때 관련 의혹이 남아 있다면 어떤 식으로든 선거에 영향을 끼치지 않겠는가.”라고 되물었다. 검찰이 후보등록일 이전에 이 후보 혐의에 의심을 두는 수사 결과를 발표해도 정치권의 요동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김경준씨 조사를 토대로 한 수사결과 발표에 이명박 후보측이 반격을 펼 겨를도 없이 후보 등록일이 코앞이다. 한나라당의 후보교체 가능성은 낮다는 데 방점이 찍히는 이유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깔깔깔]

    ●현명한 아내 한 부부가 호숫가 휴양지에 휴가를 갔다. 남편이 배를 타고 새벽 낚시를 나갔다 들어와서 낮잠을 자는 동안 부인 혼자 보트를 타고 호수로 나가 책을 읽고 있었다. 마침 순찰을 나온 경찰 보트가 부인이 탄 배에 다가와 검문을 했다. “부인, 여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책을 읽고 있는데요. 잘못된 것이라도 있나요?” “예. 이 지역은 낚시금지 구역이라 벌금을 내셔야겠습니다.” “아니, 여보세요. 낚시를 하지도 않았는데 벌금은 왜 내란 말이에요?” “낚시를 하고 있지는 않더라도, 배에 낚시 도구를 완전히 갖추고 금지 구역 내에 정박하고 있는 것은 벌금에 해당됩니다.” “그래요? 그럼 난 당신을 강간죄로 고발하겠어요.” “부인에게 손도 댄 적이 없는데 강간이라뇨?” “당신도 지금 필요한 물건은 다 갖추고 내 가까이 있잖아요?”
  • 일곡 유인호 선생은

    항상 ‘햇볕 들지 않는 곳’을 주목했던 유인호의 삶의 태도는 그의 전 생애를 관통했다.80년 5월 광주항쟁 발발 이틀 전 ‘지식인 134인 시국선언’을 낭독·주도해 해직됐고, 그해 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다.‘민중경제론’‘한국농업협업화의 연구’등 총 27권의 책을 내며 한국 현대사의 매 길목마다 쓰고, 말하고, 행동했다. 그는 해직(80년 7월∼84년 6월) 시절을 자신의 경제학 이론과 ‘민중 생활상의 요구’를 통합시키는 시간으로 썼다. 작고 1년 전 쓴 책 ‘나의 경제학, 수난과 영광(1991)’에서 유인호는 “(해직으로 학교에 머물 수 없었던 까닭에) 저마다의 아픔이 나아가서는 우리의 아픔으로 받아들여지고, 이것은 곧 한국 전체의 아픔으로 문제를 설정할 수 있었다.”고 회고했다. 유인호는 “사회과학자의 생명은 주어진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분석·비판·개선하는 노력에 있다(‘내 땅이 죽어간다’,1983).”고 주장했고,“생활에서 제기되는 문제에 눈 감은 ‘직업경제학자’의 자기보신술이 위세를 떨친다(‘현대경제학의 위기’,1982).”며 주류경제학을 비판했다. 경제민주화를 꿈꾸며 농어민·소작인·소상품생산자·비토지소유자·실업자 보호장치를 명시한 헌법개정안을 만들어 제시하기도 했다. 80년대 후반 학내민주화 열기 속에서 동료 교수들이 총장후보로 추대했으나, 유인호는 “자신의 안위나 지위 문제로 대학사회에서 ‘밥그릇 투쟁’은 하지 않겠다.”며 사퇴했다.92년 10월 69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문영기자 2moon0@seoul.co.kr
  • [靑 ‘이명박 고소’ 파장] 한나라 “도둑이 매를 든 격”

    [靑 ‘이명박 고소’ 파장] 한나라 “도둑이 매를 든 격”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 후보는 청와대가 자신을 고소하기로 결정한 데 대해 “할 일도 많을 텐데….”라고 말했다고 나경원 대변인이 전했다. 청와대가 이 후보뿐 아니라 안상수 원내대표, 이재오 최고위원, 박계동 전략기획본부장을 모두 고소하겠다고 하자 한나라당은 5일 “야당탄압”이라며 거세게 반발했다. 나 대변인은 논평에서 “현직 대통령이 야당 후보를 고소하는 것은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다. 정말 황당한 일이 생겼다. 도둑이 매를 든 격”이라고 맹비난했다. 그는 이어 “레임덕을 막아 보려는 측은한 몸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고 일갈한 뒤 “한나라당은 결코 좌시하지 않고 국민과 함께 투쟁해 나가겠다.”고 경고했다. 고소를 당하게 된 이재오 최고위원은 “한마디로 정권 연장 세력들이 무너져 가는 권력을 끌어안고 마지막 몸부림을 치고 있는 것으로, 우리는 그런 권력의 횡포에 절대 굴하지도 않고 용납하지도 않을 것”이라면서 “민의를 거스르는 청와대는 결국 국민적 저항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역시 고소 대상인 안상수 원내대표도 “대통령이 국민을 상대로, 야당 정치인과 후보까지 고발한다면 세계적인 코미디감”이라면서 “아니면 아니라고 답변하면 그뿐인데, 그것을 갖고 야당의 국정조사 권한까지 위축시키려고 한다면 국민이 납득할 수 없을 것이다.”라고 했다. 박계동 전략기획본부장도 “역으로 노 대통령을 고소하고 싶은 심정이지만, 내란죄나 외환죄가 아니기 때문에 고소도 못하는 상황”이라면서 “청와대가 이성을 잃었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고 혹평했다. 이어 “정윤재 게이트가 불길같이 커지고, 이명박 후보 죽이기 공작의 초점이 청와대로 집중되는 것을 면하기 위한 술수에 불과하다.”면서 “노 정권의 터무니없는 협박에도 불구하고 한나라당과 국민들의 의지가 더욱 견고해질 것”이라고 자신했다. 전날부터 권력형비리조사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홍준표 의원은 “청와대가 네거티브 공격의 총사령관을 할 모양이다.”라면서 “임기 말에 국정은 마무리하지 않고 ‘이명박 죽이기’를 할 생각인가 보지만 대응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노 대통령이 한나라당을 계속 욕해 왔지만, 한나라당은 청와대를 고소한 적이 없다.”면서 “고소 방침은 엉터리 같은 결정”이라고 꼬집었다. 홍희경기자 saloo@seoul.co.kr
  •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Ⅲ

    [병자호란 다시 읽기](29)이괄(李适)의 난(亂)이 일어나다Ⅲ

    1624년 2월10일 이괄이 서울로 입성한 직후, 도원수 장만은 관군을 이끌고 서울을 향해 달렸다. 장만은 초조했다. 반란군에게 도성을 내주고 국왕으로 하여금 파천 길에 오르게 만든 일차적 책임이 자신에게 있었기 때문이다. 장만은 파주 혜음령(惠陰嶺)에 이르러 부원수 이수일(李守一)과 남이흥, 정충신 등 장수들을 불러모아 작전 회의를 열었다. 장만은 두 가지 계책을 제시했다. 서울로 달려가 결전을 벌이든가, 적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남쪽에서 원군이 오기를 기다려 세력을 키운 뒤 공격하자는 안이었다. 그는 사실 지구전을 생각하고 있었다. ●관군 승기 잡자 관망하던 민심 돌아서 정충신은 지구전에 반대했다. 그는 즉시 서울로 달려가 안현(鞍峴)을 장악하자고 주장했다. 높은 고개를 차지하여 진을 친다면 도성을 내리누르게 될 것이고, 관망하고 있는 도성 백성들도 관군 편으로 붙을 것이라고 했다. 또 반란군이 공격해와도 지형의 이점 때문에 승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장만은 정충신의 계책을 받아들였다. 관군은 안현을 향해 내달렸다. 정충신이 제일 먼저 연서역(延曙驛, 지금의 은평구 역촌동)을 통과하여 안현에 도착했다. 그는 정상으로 달려 올라가 봉수대를 지키는 병사를 생포했다. 정충신은 평상시의 봉화(烽火)를 올리도록 하여 이괄의 진영에서 안현이 탈취된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게 했다. 이윽고 관군의 병력이 속속 안현으로 집결했다. 때마침 동풍이 크게 불어 이괄 진영은 관군이 안현으로 모여드는 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튿날 아침에야 이괄은 관군이 안현을 접수한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러나 그는 느긋했다. 이미 승승장구해온 터라 관군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생겼던 것이다. 이괄은 항왜들을 이끌고 연서역으로 나아가 장만을 생포하려는 계책을 세웠다. 한명련(韓明璉)은 도성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안현을 공격하여 승리를 거둠으로써 민심을 얻어내자고 건의했다. 이괄의 반란군은 부대를 둘로 나눠 안현을 향해 진격했다. 한명련이 항왜 수십 명과 정예 포수를 이끌고 선봉에 서고, 이괄은 중군이 되어 싸움을 독려했다. 아침 6시쯤부터 격전이 벌어졌다. 도성의 백성들은 성이나 높은 곳에 올라가 두 진영의 싸움을 지켜보았다. 전황은 밑에서 위쪽으로 공격하는 반란군에게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 화살과 총탄이 제대로 맞지 않았다. 더욱이 장만 등은 도성을 내준 것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도 분전했다. 오전 11시쯤까지 이어지던 싸움의 중간에 바람의 방향마저 바뀌었다. 반란군 쪽으로 서북풍이 불었다. 관군은 승기를 잡았다. 반란군 진영에서 사상자가 속출했다. 많은 수가 안현을 향해 기어오르다가 벼랑에서 떨어져 죽었다. 한명련도 화살에 맞은 뒤 퇴각했다. 전투 장면을 구경하던 도성 백성들은 반란군이 수세에 몰리자 돈의문(敦義門)과 서소문(西小門)을 닫아 버렸다. 관망하던 민심의 향배가 정해진 것이다. 퇴로가 막힌 반란군은 숭례문 쪽으로 향하거나 마포 서강(西江) 방면으로 도주했다. 여염으로 숨어 들어간 자들도 있었다. ●기익헌 등이 반란군 지휘부 9명 죽여 2월11일 밤 아홉시 무렵, 이괄과 한명련은 패잔병을 이끌고 수구문(水口門)을 통해 서울을 탈출했다. 다음날 새벽 삼전포(三田浦)를 경유하여 광주(廣州)까지 달아났다. 이괄은 광주목사 임회(林檜)를 살해하고 경안교(慶安橋)라는 곳에서 병력을 수습하려 했다. 12일 아침, 정충신 등이 병력을 이끌고 추격해 왔다. 안현에서 패한 이후 반란군은 이미 기세가 꺾였다. 얼마 되지 않는 관군의 공격에 변변하게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무너졌다. 이괄은 고작 60여명 정도의 기병만 거느리고 다시 이천(利川) 쪽으로 달아났다. 이괄을 따라가던 흥안군은 광주 소천(昭川) 쪽으로 도주했다. 관군 또한 지쳐서 추격을 멈추고 있을 때, 이괄의 진영에서 포수 한 사람이 도망쳐 왔다. 그는 반란군 내부에 이괄과 한명련의 목을 베려고 시도하는 자가 있다고 알려 주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리자 자중지란이 일어났던 것이다. 이튿날 새벽 정충신이 관군을 이끌고 이천 묵방리(墨坊里)에 당도했을 때 상황은 이미 종료되었다. 반란군 가운데 기익헌(奇益獻) 등이 이미 이괄과 한명련 등 지휘부 아홉 명을 살해한 상태였다. 한명련의 아들과 조카만 간신히 달아나고 반란군은 궤멸되었다. 흥안군은 자신의 신분을 숨기고 여염으로 숨어들다가 체포되었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어 돈화문 앞에서 살해되었다. 한남원수(漢南元帥) 심기원(沈器遠)과 훈련대장 신경진(申景 )이 ‘흥안군이 선조의 아들이고 인조의 숙부지만 참역(僭逆)에 가담했으니 아무나 죽일 수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죽였던 것이다. 흥안군은 이괄에 의해 추대된 지 불과 4일 만에 몰락하고 말았다. 인조 일행은 안현 전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을 천안에서 들었다. 하지만 13일 새벽, 도주하던 적이 달려들 것을 우려하여 공주로 들어갔다.2월15일, 참수된 이괄의 머리가 공주에 도착했다. 인조와 신료들은 군용(軍容)을 벌여놓고 이괄의 수급(首級)을 받는 의식을 거행했다. 반정을 일으켜 어렵사리 잡은 권력을 1년이 채 못 되어 내놓을 뻔하다가 다시 잡는 순간이었다. ●난의 후유증 인조는 2월18일 공주를 출발하여 22일에 서울로 귀환했다. 난민들이 불을 질러 창경궁이 불탔기 때문에 인조는 경덕궁(慶德宮)으로 들어갔다. 도성은 엉망이었다.“모든 재물이 바닥나서 열흘 먹을 저축도 없는 상황”이라는 보고가 올라왔다. 민심이 흉흉한 것이 무엇보다 심각한 문제였다. 며칠 사이에 궁궐의 주인이 바뀌었다가, 다시 바뀌면서 처참한 살육전이 벌어졌다. 이미 파천하기 직전인 2월7일, 인조 정권은 옥에 갇혀 있던 정치범들을 즉결 처분했다. 광해군때 정승을 지냈던 기자헌(奇自獻)을 비롯하여 역모 가담 혐의를 받았던 37명의 목을 베었다. 이들은 의심은 받았지만, 혐의를 부인하고 있었던 데다 심문도 채 마치지 않은 상태였다. 이원익이 “기자헌은 반역에 가담한 죄상이 없는 데다 폐모론에도 반대했다.”고 애써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정권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심이 반정공신들의 여유를 빼앗아 갔다. 격변의 와중에서 무고하게 목숨을 잃은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안현 싸움에서 패한 이괄군이 도주하기 전에 80여 명을 학살했고, 관군이 서울을 접수하면서 다시 처참한 학살이 빚어졌다. 좌의정 윤방(尹昉)은 인조에게 ‘적에게 붙었던 백성 가운데 자신이 처단한 사람만 200명’이라고 보고했다. 백성들 가운데는 무고한 사람을 살해하여 ‘반란군의 머리’라면서 수급을 가져다 바치는 자들이 있었다. 비록 잠깐이었지만 이괄이 도성을 점령했던 동안 서울의 민심은 인조정권에 몹시 적대적이었다. 백성들은 이괄군을 맞이하고, 창경궁에 불을 지르고, 내탕(內帑)을 훔치고, 반정공신들의 저택을 점거했다. 인조반정 성공 직후 자살한 박승종(朴承宗) 집안의 노비들은, 대가가 서울을 나가자마자 반정공신 김류의 집을 접수했다. 박승종의 며느리는, 역시 공신 가운데 실세였던 이귀의 집에 들이닥쳐 문을 봉해버렸다. 반정 직후 김류가 박승종의 저택을, 이귀가 박승종의 아들 박자흥(朴自興)의 저택을 차지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인조가 환도한 뒤 또 다른 보복이 자행되었다. 서울을 비운 사이에 피해를 당한 관인이나 사대부들은 환도하자마자 의심나는 대상자들을 포도청에 고발했다. 그 때문에 ‘포도청의 감옥이 가득 찼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아예 직접 대상자들의 집으로 쳐들어가 재물을 약탈하는 자들도 있었다. 이괄의 난은 진압되었지만 인조정권은 여러 면에서 한계를 드러냈다. 논공행상을 제대로 하지 못해서 이괄로 하여금 거병하게 만든 것 자체가 심각한 문제였다. 후금의 위협에 노출되어 있는 와중에 내란을 치르면서 조선의 군사적 역량은 심하게 훼손되고 말았다. 인조정권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민심을 수습하고 국방력을 재건해야 하는 어려운 과제에 직면하게 되었다. 한명기 명지대 사학과 교수
  • [대선주자 25시] 이해찬 前총리

    [대선주자 25시] 이해찬 前총리

    이해찬 전 총리의 출사표를 요약하면 도덕성과 국정운영 능력, 미래비전이다. 출마를 선언한 뒤 대중 정치인의 자질 면에서 집중적으로 지적받는 부분이 있다. 대중성 부족이다. 오죽하면 ‘버럭 이해찬’으로 불릴까. 여야를 넘나들며 정책위 의장을 거친 데다 지난 1995년 조순 전 서울시장 후보의 선거대책본부장을 필두로 1997년 새정치국민회의 대선본부 부본부장,2002년 새천년민주당 선대위 기획본부장 등을 거치며 미다스의 손으로 불려왔다. 그러나 대선이 정책으로만 승부할 수 있는 판인가. ●진정한 대중성은 ‘진실’ 지난 4일 부산을 찾은 자리에서 이 전 총리는 사과 이야기를 꺼냈다. 청중을 향해 “사과가 다섯 개 있는데 이중 세 개를 먹으면 몇개가 남을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당연히 두 개라고 답했던 청중들은 이 전 총리의 답변에 자지러질 듯이 웃었다.“아니, 먹는 게 남는 건데 세 개지 왜 두 개냐.”라는 게 아닌가. 앞으로는 웃음을 유도하는 후보가 되겠다고 다짐도 했다. 그러면서도 진정한 대중성은 ‘대중 추수주의’가 아닌 진실성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내용은 왜곡되고 이미지화되면서 형식만 갖추는 게 대중성은 아니다.”고 힘주어 말했다. 진실에 기반한 대중성에 대해서도 명확한 답변이 이어진다. 대중의 이해에 충실하면서 대중의 이익에 봉사하는 것이라고. 개혁파 정치인이면서도 현실주의적인 해법을 중시하는 그의 정치적 컬러가 대변하고 있다. 한 핵심 측근은 “진짜 개혁세력이 힘을 얻으려면 주장에만 그칠 게 아니라 관철시키는 능력을 보여줘야 한다는 게 이 전 총리의 지론”이라고 설명했다.1997년 대선을 앞두고 전교조 합법화를 유보했다가 여당이 과반의석을 넘었을 때 관철시킨 것, 노동법 재개정 당시 국제기준을 준수해 정리해고제를 도입한 것이 대표적이다. ●정체성과 도덕성 그가 이날 총리 낙마의 결정타를 안겨줬던 부산을 찾아 맨 먼저 들른 곳은 민주공원이었다. 부마항쟁이 유신의 마지막을 가져온 역사적인 사건인데 저평가됐다며 아쉬워했다. 기념관에서 ‘타는 목마름으로’를 부를 때 그는 1974년 민청학련 사건과 1980년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투옥됐을 때를 떠올리는 듯했다. 정체성은 범여권 후보의 자격에서 상대 후보와의 차별화나 마찬가지다. 사형선고까지 받으며 삶의 끝을 오갔던 그였다. 손학규 전 경기지사를 향해 “대학만 같지 살아온 이력은 다르다.”고 한 것은 뼛속 깊이 체화된 자신감으로 들렸다. 그는 대선 후보의 자질과 관련, 도덕성을 첫손에 꼽는다. 공개 강연이 있을 때마다 한나라당 이명박 대선경선 후보를 향해 직격탄을 날린다.“자기 땅 고도제한 추진은 청문회감”(13일 울산시당 간담회),“이 전 서울시장은 후보를 사퇴해야 한다.”(11일 경주시당 초청강연)며 비수를 꽂았다.16일 이명박 후보 가족의 주민등록초본 불법발급과 유출사건에 대해 정치공작 의혹을 거론하자 “위장전입과 위장 땅투기 의혹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정면으로 반박했다. 그는 “온갖 비리에 연루된 후보가 대통령이 되겠다고 나선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다. 참으로 용감한 사람”이라며 기자를 향해 고개를 저었다. 그럼에도 지지율이 높은 이유를 묻자 “후보의 자질과 상관없이 수구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들의 집권욕 때문이다. 후보가 정해지면 국민들이 판단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하지만 지난해 3·1절 골프 파문은 두고두고 그의 발목을 잡고 있다. 같은 진영 후보조차 “이 전 총리에게 검증된 건 골프 실력밖에 없다.”고 공격받았다. 그는 “보도와 실체가 달랐다는 게 드러나지 않았냐.”고 항변했다. 그러나 아직 완벽하게 여과되지 않아 보인다. 그가 본선 무대에 오르면 다시 묻기로 했다. ●세 여자의 등과 이해찬의 눈물 ‘이해찬’ 하면 강팍한 이미지를 떠올린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분위기다. 그때마다 “평판에 신경쓰지 않는다. 일로 승부한다.”고 답해왔다. 굳이 사족을 더 붙인다면 “워낙 도덕적으로 결점이 없다 보니 사사로운 것까지 들춰내고 싶은 모양”이라며 대수롭지 않아한다. 그런 그가 한없이 울었던 적이 있다.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으로 안동교도소에 복역 중일 때 어머니와 아내 김정옥 여사, 딸 현주(당시 2살)가 찾아왔다. 그의 서른 살 생일날이었다. 면회를 끝내고 돌아서는 세 여자의 등을 봤던 것이다. 그는 감방에 돌아와 한 시간을 울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딸 현주를 자전거에 태우고 둑 위에서 찍은 사진을 보며 어쩌면 아빠보다 할아버지가 더 따뜻하고 포근한 남자였을지 모른다며 애써 위안도 했으리라. 아내 김정옥 여사와는 대학시절 서울지역 사회학과 학생들의 학술모임에서 만났다. 대쪽 같은 정치인 남편을 둔 죄(?)로 서점과 곰탕집, 온갖 직업을 섭렵케 했다며 평생을 미안해 한다. 그는 전국을 다닐 때 아내와 항상 함께한다. 김 여사가 강단에 서서 남편 이해찬을 말할 때도 있다. 김 여사는 “남편이 스킨십 없다고 하지만 정말 그렇다면 우리 딸이 생겼을 리가 있겠냐.”며 웃어보였다. 딸이 초등학교 3학년 때 가훈을 적어오라는 숙제를 같이 하다가 “주는 대로 그냥 먹자.”라고 결론냈던 남편이었단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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