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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여성 선언] 존경하는 의사선생님께

    참으로 기나긴 분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경기는 잔뜩 침체돼 있는데다 병원파업까지….요즘은 정말 사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지난 10일 파업이 잠시 유보됐지만 23일 의·정 대화 중간평가’를 통해 다시 파업이 재개될 수도 있다면서요? 이제 우리도 그냥 넘어가서는 안된다는 심정으로 존경해 마지 않던 의사선생님들께 이런 항의 편지를 올립니다.지난 9월 국가는 의사선생님들을 상대로 공식 사과를 한것으로 압니다.그렇다면 의사선생님들,당신들의 대국민 공식 사과는언제쯤 이루어질까요? 배움 많으신 선생님들이니 그 정도 예의는 지키시겠죠.저희도 처음엔 선생님들을 믿었습니다.의약분업에 대한 문제 제기를 하셨을 땐배운 분들이 어련하실까 하며 넘어 갔습니다.의사쪽 얘기를 들어보면 그 말이 맞고,약사쪽 얘기에 귀기울이면 그것도 일면 타당했으니 우리는 어리석은 황희 정승이었나 봅니다.사실 짧은 소견이지만 우리는 이렇게 생각했습니다.아무리 완벽한 법제도도 현실화하는 사람들이썩었으면 말짱 도루묵일 터이고,불완전한 법도 서로 조정하며정의를 지키면 웬만큼 보완할 수 있다고 말입니다.그런데 파업은 대책없이계속됐고,대학병원 교수님들까지 그 파업에 가세하셨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말도 했습니다.국가가 의사들의 요구를 경청하지않음으로써 그들의 자존심을 건드렸다고,그래서 의사고 교수고 모두파업에 뛰어들었다고 말입니다.아이고,세상에.그 소리를 듣고 저는제 귀를 의심했습니다.배우신 분들이니 자존심도 높으신가 봅니다.우리 환자들은 의사선생님 앞에서 자존심이란 걸 세워본 적이 없으니이해가 되질 않습디다.의사선생님들 앞에서는 정신과 몸을 무장 해제하고 무조건 몸뚱아리를 내맡겼던 사람들이 우리 환자들입니다.환자는 그렇습니다.의사선생님을 존경하지 않으면 병은 치유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습니다.우리들은 당신들의 명령과 요구와 처방에 맹목적으로 따랐고 당신들의 냉대도 참아냈습니다. 그러나 이번 일로 환자들이 거리로 내쫓기는 걸 보면서 우리는 이글거리는 분노를 느꼈습니다.당신들이 아무리 우리를 내동댕이친다 해도 돈없고 빽없는 우리는 당신들을 거부할 수도,응징할 수도 없습니다.그래서 더 분노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존경하는 의사선생님들.이렇게 찢긴 우리의 자존심은 도대체 어디서 치유받아야 하는 겁니까. 천하디천하게 병원 밖으로 내쫓긴 환자들,그들의 상처난 영혼은 도대체 어디서 위로받아야 하나요. 이제 당신들에 대한 신망과 존경은 땅으로 곤두박질쳐 산산조각이났습니다.아무리 옳은 주장이라도,아무리 강경하다해도 당신들을 믿을 수가 없게 됐습니다.사실 당신들에 대한 실망은 오래 전 격무를핑계로 환자를 냉대하고 무성의하게 대할 때부터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온갖 비리가 병원으로부터 나온다는 사실을 접했을 때도 그랬습니다.무엇보다 사회적인 부조리에 늘 침묵하던 당신들이 이번 일로‘국민의 건강권’이라는 거룩한 명제를 들고 나와 핏대를 올리는 걸 보면서는 혐오스러움까지 느꼈습니다.물론 온갖 압력에도 불구하고끝까지 환자를 돌보는 의사선생님들이 적지 않았다는 사실을 모르는바 아닙니다.눈에 띄지 않게 인술을 행하고 계시는 분들이 있다는 것도 압니다.그 분들에게는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러나 몇가지 과정은 남았습니다.모쪼록 우리들의 신뢰가 회복될수 있도록 파업에 가담한 의사선생님들의 진지한 공식 사과가 있기를 기대합니다.그리고 적절한 피해보상청구소송과 그에 대한 국가와 의료계의 보상이 뒤따라야 할 것입니다.그래서 조금이나마 의사선생님들에 대한 환자들의 신뢰가 회복돼야 할 것입니다.사실 미워하기가얼마나 힘든 일입니까. 박 미 라 페미니즘잡지 if 편집위원
  • [끊이지 않는 지구촌 분쟁](6)유고연방 ‘인종분쟁’

    냉전이 한풀꺾인 1990년대 새롭게 떠오른 갈등은 인종분쟁이었다.그리고 그 양상은 지구촌의 화약고라 불리는 발칸반도에서 가장 극단적으로 드러났다. 전후 50여년간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로 이민족들간의 불화를 다스려온 구유고연방은 소련 붕괴와 함께 유혈 해체의 길로 내동댕이쳐졌다.이 과정에서인류는 인종이 다르다는 이유만으로 자행된 끔찍한 학살극 도미노를 목격해야 했다. 광기의 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리자 국제사회에도 전혀 새로운 대응논리가 출현했다.인권이 침해될때는 주권국가라 할지라도 국제사회의 도덕적 응징에서 자유로울수 없다.즉 인권이 주권에 앞선다는 새 독트린이었다.이는 미국의주도에 따라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가 창설 이래 최초로 주권국가에 공습을 감행하는 근거가 됐다. ◆분쟁의 배경=유고연방은 2차대전 직후 연합국 전후처리의 산물로 탄생했다.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세르비아,몬테네그로,마케도니아 등 인종이 판이한 공화국들을 국가로 묶어내기 위해 독자적 사회주의노선을 표방한 유고 지도자 티토는 코소보·보이보디나 자치주 등을 비롯한각 공화국에 고도의 자치권을 부여했다.그러나 80년 티토의 타계,90년 소련,동독 등의 붕괴로 연대의 끈이 끊어져나가자 공화국마다 독립요구가 거세졌다.유고연방 실질적 패권세력이었던 세르비아인들의 위기감은 극도로 고조됐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현 유고연방 대통령은 이에 편승,잔혹한 학살극을자행했다. ◆보스니아 내전=91년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92년 보스니아 회교집권세력이 각각 독립을 선포함에 따라 이 지역의 소수파로 전락한 세르비아인들은사활을 건 반격에 나섰다.한때 크로아티아의 3분의 1까지 점령했고 보스니아에서는 회교-크로아티아 연합세력에 잔혹한 학살극을 펼치기도 했다.인종청소,강간,약탈 등으로 얼룩진 보스니아 내전은 현대사 최악의 야만적 전쟁으로 기록되고 있다. 결국 국제사회가 개입했다.나토 및 유엔 등 서방의 중재아래 95년 내전 당사자들끼리 ‘데이튼 협정’이 체결돼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독립국 지위와 국경선이 확정됐다. ◆코소보 사태=코소보 독립운동은 89년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수십여년간 지속돼온 코소보의 자치권을 박탈하면서 본격화되기 시작했다.코소보 인구의 90%를 차지하면서도 세르비아에 종속된 위치였던 알바니아인들은 단일민족국가 수립을 선언하고 나왔다.그럴수록 코소보를 자신들의 역사적 성소로 여겨온 세르비아계의 위기감은 높아갔다.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코소보알바니아인들을 살육,추방하는 대규모 ‘인종청소’를 통해 세르비아 국수주의를 자신의 집권연장에 이용했다. ◆미국과 나토의 대응=몇번의 경고에도 불구,학살의 잔학상이 지속되자 미국과 나토는 99년 3월24일 마침내 세르비아에 대공습을 개시한다.나토 50년 역사상 주권국가에 대한 최초의 선제공격으로 기록된 이 78일간의 공습끝에 밀로셰비치는 결국 백기를 들고 유엔 평화유지군 감시하에 알바니아인들의 코소보 귀환을 허용했다. 손정숙기자 jssohn@. *‘발칸의 뇌관’밀로셰비치. 정권을 향한 권모술수와 사정없는 인종청소로 ‘발칸의 뇌관’으로 악명을떨쳤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신유고연방(58)대통령.나토공습 패배이후 최대위기에 봉착했던 그는 최근 유고 의회에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이 통과됨에따라 또한번 특유의 위기돌파력으로 정치생명 연장의 기회를 갖게 됐다. 1942년 세르비아 중부 산업도시 포자레바츠에서 태어난 그의 어린시절은 아버지의 가출,부모의 잇단 자살 등으로 극도로 불우했다.64년 공산당에 입당,사회주의자를 자처하던 그는 80년대 중반부터 ‘대제국 건설’을 표방하는세르비아인들의 국수주의에 편승,민족주의자로 돌변한다. 이후 그는 이민족에 대한 가차없는 차별과 통제정책으로 권력가도를 승승장구한다.코소보 자치권을 빼앗은 89년 세르비아 대통령에 올랐고 보스니아내세르비아 반군을 전폭지원한 92년 재선됐다.그는 90년대 중반이후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청소를 가속화,무수한 인명을 무차별 학살해 야당의 거센반발을 샀다.결국 나토의 공습을 불렀고 본인은 국제사법재판소에 전범으로기소된 상태다. 손정숙기자. *코소보 왜‘피의 聖地’인가. 왜 코소보인가. 한쪽에서는 독립해 나가겠다고,다른쪽에서는 절대 내어줄수 없다고 유혈극을 불사하는 코소보.코소보는 세르비아계와 알바니아계의 대립양상이 극단적으로 표출된 곳이다. 기독교 세르비아 정교도인 슬라브계통의 세르비아와 이슬람권 알바니아계는 공히 이곳을 자신들의 성지(聖地)로 주장하고 있다. 세르비아는 14세기 이곳서 전성기를 구가하며 정교회 유물 및 건축을 꽃피웠다.때문에 ‘중세의 영광이 서린 땅’을 결코 내어줄수 없다는 입장.그러나 코소보는 이후 500여년간 오스만 투르크 손에 넘어갔고 같은 회교도들인알바니아계가 대량 이주,이번에는 도처에 회교사원을 건립했다.이와 함께 전체의 90%에 이르는 인구구성 등을 들어 알바니아계 역시 자신들의 주권을 주장한다. 코소보 알바니아인들의 분리독립 열망은 1918년 코소보가 세르비아 영토로편입되고 46년 구유고연방으로 합병된 이후에도 국제정세가 바뀔때마다 크고작은 유혈극으로 불거져나왔다.결정적으로 89년 밀로셰비치 당시 세르비아대통령이 그간의 자치권마저 박탈함에 따라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현재는 평화유지군이 코소보 자치를 유도하고 있지만 복잡하게 얽힌 민족감정,역사적 배경 때문에 장래를 점치기란 쉽지 않다. 손정숙기자. *유고 연표. ◆1389년 오스만 투르크,세르비아로부터 코소보 강점. ◆1946년 구유고연방 탄생,코소보는 세르비아내 자치주로 이에 편입. ◆1987년 밀로셰비치,세르비아 대통령 취임.민족주의정책의 일환으로 코소보 알바니아계 탄압시작. ◆1989년 밀로셰비치,코소보 자치권 강탈. ◆1991년 슬로베니아,크로아티아,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독립선언.이를 저지하려는 세르비아계와의 사이에 내전. ◆1999년 3월24일 코소보 알바니아계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인종학살 저지를명분으로 미국과 나토 유고공습 시작.6월9일 유고-나토 세르비아군의 코소보 철수 합의문에 서명.국제평화유지군 지휘하에 알바니아계 귀환시작.
  • “윤봉길의사 연행 사진은 가짜”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폭탄을 던진 윤봉길 의사가 의거직후 일본군에 연행돼가는 장면을 보도한 일본신문의 사진은 가짜라는 주장이 다시 제기됐다. 상하이 주재 한국총영사관 강효백(姜孝伯)문화담당 영사는 1일 “거사 다음날짜 현지신문의 보도에 따르면 5월 1일자 ‘오사카아사히(大阪朝日)신문’에 실린,일본군에 끌려가는 인물은 윤의사가 아니라 당시 현장에서 체포된다른 외국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강 영사는 “거사직후 윤의사는 일본군경들로부터 집단구타를 당해 거의 기절한 상태였으므로 모자를 든 채 일본군들과 함께 걸어서 끌려가는 것은 불가능한 상황”이라고 주장했다. ‘상하이 타임스’는 “그(윤의사)는 일본군경들에 구타당하여 때려 눕혀졌다.주먹질,군화,몽둥이가 그의 몸뚱아리 위로 쏟아졌다.그가 입고 있던 회색양복(grey suit)은 갈기갈기 찢겨져 땅에 떨어졌는데 땅바닥에 쓰러진채 아무 기척이 없었다.그의 몸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이상한 모습으로놓여 있었다. …잠시후 차 한 대가 나타났다.그 한국인은 머리와 다리가 집어 들려 짐짝처럼 통채로 차 뒷좌석에 구겨 넣어졌다”고 당시상황을 보도했다.동일자 ‘차이나 프레스’ 역시 “25세의 윤봉길은 땅바닥에 두 번이나내동댕이쳐졌으며 구타당하여 피투성이가 된 채 끌려가다시피 운반되어 일본군사령부로 이송되었다”고 보도했다.이 신문들의 보도내용은 그동안 윤의사가 의거직후 모자를 든 채 걸어서 끌려가는 모습을 보도한 ‘오사카아사히신문’ 등에 게재된 사진의 상황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강 영사는 “일본측이 가짜사진을 게재한 것은 참혹한 모습을 한 윤의사의사진을 게재했을 경우 한국인에게 미칠 영향을 우려한데다 일본군경의 인도적 모습을 선전할 목적이었던 것으로 추측된다”고 말했다. 강 영사는 지난해 4월 상하이 의대 정형외과 전문가팀 등의 ‘골상학적 비교분석’ 결과를 토대로 이 사진의 가짜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정운현기자 jwh59@
  • 중국서 피랍 조명철씨‘악몽의 18시간’

    지난 2일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중국교포 납치단’의 마수에 걸렸다가 18시간만에 극적으로 탈출한 전 김일성대 교수 조명철(趙明哲·40·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연구위원)씨는 당시를 다시 생각하기도 싫은 듯 고개를 흔들었다.20여일이 지났는 데도 손목에는 시뻘건 포승줄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지난달 30일 동료 연구원 정모씨(39)와 함께 경제교류 및 동북아경제협력등에 대한 자료 수집을 위해 중국 베이징에 도착한 조씨는 1일 밤 11시쯤 정씨와 차를 한잔 마시기 위해 방을 나섰다.때마침 저녁식사를 했던 음식점 앞에서 20대 중반의 중국교포 여종업원을 만났다.그녀는 “동포이니 안내해주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밤 11시가 넘어 찻집들은 문을 닫았고,여종업원이 안내한 곳은 오피스텔로 보이는 건물의 2층이었다.사무실인 듯했다.여종업원은 “오빠들이 오니 합석하자”고 말했다.잠시 뒤 삼십대 초·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2명과 이십대 중반의 여자가 나타났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던 중 남자 2명이 조씨와 정씨를 때렸고,순간 정신을잃었다.깨어보니 눈과 입이 테이프로 가려졌고 손과 발도 포승줄로 묶인 상태였다.조씨는 북한의 공작원들이 자신을 납북하려는 것으로 알고 눈 앞이캄캄해졌다.그러나 그들은 돈을 요구했다.일단 북한 공작원이 아니라는 사실에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들은 미화 50만달러를 요구했다.조씨는 살아야겠다는 생각에 한국의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어 “급한 일이 생겼다”며 6억원을 자신의 은행 계좌로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입금이 되지 않자 범인들은 조씨와 정씨의 온몸을 마구 때리고 흉기로 상처를 입히며 위협했다.조씨는 평소 거래하던 S은행 모지점장에게 전화를 걸어 자신의 계좌에 있던 주택 구입자금 2억5,000만원을 범인들이 지정하는 환전상 장모씨의 어머니 계좌에 입금했다. 3일 오후 5시쯤 환전상이 조씨의 여권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자 범인들은 조씨의 왼쪽 가슴에 테이프로 담배값만한 폭탄을 달며 “허튼 짓 하면 죽는다,탈출해도 서울에서 죽는다”고 위협했다. 남녀 범인 2명과 호텔 로비에 도착한 조씨는 옆에 바짝 붙어있던 사내가잠시 떨어진 틈을 타 범인의 이동전화를 땅에 내동댕이치면서 사내에게 일격을 날렸다.이어 도망치는 여자 범인도 잡아 “강도다”라고 중국어로 소리쳤다. 로비에 있던 중국 공안국 직원들은 바로 달려와 범인들을 잡고 조씨의 왼쪽 가슴에 달린 폭탄을 제거했다.온몸에서 땀이 비오듯 쏟아졌다.중국 공안국의 조사 결과 다행히 폭탄으로 위장한 습도계임이 밝혀졌다.정씨도 비슷한시각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다.조씨는 다음날 오전 한국으로 서둘러돌아왔다. 전영우기자 ywchun@
  • [독자의 소리] 학생작품 전시 막은 인사동상인 횡포 씁쓸

    지난 토요일 서울 종로 인사동에 갔다.그런데 갑자기 길 한모퉁이가 시끄러웠다.작품을 전시하러 온 여대생 두명과 인사동 상인 몇 명이 심하게 다투는 것이었다.상인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허가도 받지않고 작품을 전시한다며당장 가라는 것이고,여대생은 누구나 자유롭게 작품을 전시할 권리가 있다며 다투는 것이었다.결국 화가 난 상인이 여대생의 작품을 젖은 땅바닥에 내동댕이 쳤다.실크에 그려진 학생의 작품은 금방 흙탕물로 엉망이 됐다.그 여대생은 전날 밤을 꼬박 세워가며 만든 것이라고 울먹였다.그런데 작품을 내동댕이치냐며 따지는 학생을 향해 상인은 듣기에도 민망한 심한 욕설을 퍼부었다. 인사동에 상인 중심의 그런 규칙이 있었나?문화와 예술의 거리라는 포장 속에는 사리사욕과 이기심이 팽배해있음을 확인했다.개발의 삽질로부터 보호하자는 운동이 일고 있는 인사동에서 이런 폭력이 난무하다니.자유와 존중 속에서 문화와 예술의 꽃이 핀다.문화의 거리가 사리사욕의 장으로 전락한 모습은 추했다. 최지영[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 [흔들리는 민중의 지팡이] (중) 미흡한 개혁

    경찰이 스스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 개혁을 추진하고 있으나 일선 현장에서는 별로 달라진 것이 없다는 지적이 많다.고압적인 수사나 적법한 절차를 거치지 않는 불심검문 등 시민들을 골탕먹이거나 인권침해 시비를 불러일으킬수 있는 관행이 좀체 개선되지 않고 있다.현장을 무시한 탁상행정도 마찬가지다. 서울 망우동에 사는 전모씨(39)는 17일 밤 9시50분쯤 이웃과 다투다가 A경찰서 형사계에 갔다.담당 형사는 경찰서를 처음 찾은 전씨에게 처음부터 반말을 했다.심지어 한자 이름을 잘 모른다며 전씨 부인 앞에서 “고등학교는나왔느냐”“무식쟁이” 등 인격을 모독하는 표현을 했다. 부인 김모씨(44) 역시 남편에게 갈아 입을 옷을 가져다 주면서 반말과 고함을 들어야 했다.김씨는 “경찰서에 온 이상 인간대접 받기를 포기해야 한다”면서 “남편이 혹시 불이익을 받을까봐 꾹 참았다”고 말했다. 자영업을 하는 박모씨(38·서울 관악구 신림동)는 지난 15일 밤 11시쯤 지갑을 잃어버린 것을 모르고 술을 마시다가 술집 주인의 신고로 B경찰서에 잡혀갔다. 형사계 보호실에 갇힌 박씨는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하지만 담당 형사는 “조용히 하지 않는다”고 윽박지르며 박씨를 보호실 바닥에 내동댕이치고는넘어진 박씨의 양다리를 들어 구석으로 밀어붙였다. 경찰청 국감자료에 따르면 전국 12개 지방경찰청은 97년부터 지난 5월까지관할 구역 내에서 마약사범 1,605명을 적발했다.하지만 마약사범들을 수시적성검사 대상자로 관리할 수 있도록 주소지 관할 경찰청에 통보해야 하는데도 통보하지 않았다.마약사범은 수시로 적성검사를 받아 마약중독으로 판명되면 운전면허가 취소된다. 지난 4월 서울 동부경찰서와 충남지방경찰청은 속도 및 전용차선 위반 등 582건의 교통법규 적발 통지서를 보냈다.그러나 민원이 빗발쳐 확인한 결과무인 교통단속 장비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거나 시험가동 기간이었던 것으로 밝혀져 뒤늦게 모두 취소하는 소동을 벌였다. 인권실천시민연대 이덕우(李德雨)변호사는 18일 “경찰에게 권한을 주는 동시에 감시와 통제 체제를 갖추고 책임을 묻기 위해서는 경찰 수사권의 독립과 자치경찰제 도입이 필요하다”면서 “격무와 신체적인 위험에 노출돼 있는 경찰에게 일방적으로 희생만 강요하기보다는 그에 상응하는 대가를 보장해야 한다”고 말했다. 경찰대 경찰학과 표창원(表蒼園)교수도 “기본적으로 경찰은 사회통제 도구가 아닌 봉사기관이라는 철학을 가지고 국민의 신뢰를 쌓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조현석 김재천 장택동기자 hyun68@
  • [대한광장] 총무들꽃 피는 마을

    지난 9일 신촌의 이화삼성교육문화관에서는 조촐하지만 뜻깊은 행사가 열렸다.청소년 가출아동들을 위한 대안학교라고 할수 있는 ‘들꽃피는 마을’ 5주년 기념대회가 열린 것이다. 이 행사가 특별히 우리의 눈길을 끄는 이유가 있다.IMF 위기가 닥치면서 실직자들이 갑자기 불어나 들판에 내몰리는 심각한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그런데 그 이전부터 일부 청소년들의 가출이 심각한 사회문제로 부각되던 터에 IMF로 인한 부모의 실직 및 가정파괴 현상으로 가출 청소년들의 문제는 엎친데 덮친 격으로 부풀어지고 있다.실직자도 그렇지만 가출 청소년들은 우리사회의 구성원이다.아름다워야 할 꽃들이다. 집안의 발코니에서나 화원에서 아름답고 소담스레 정성껏 길러지는 꽃이 있는가 하면 황량한 들판에 내동댕이쳐지는 꽃들도 있다.그래서 화원의 꽃들이 있는가 하면 들판에 피어나는 들꽃도 있다.양쪽 모두 우리 사회의 소담한꽃들이다. 1994년 새벽 경기도 안산에서 봉직하는 삼십대 후반의 김현수목사가 부인과 함께 새벽예배를 드리러 갔다.교회 문은 항상열려 있었다.그날 새벽녘 교회에는 뜻밖의 손님이 있었다.가출 청소년 8명이 잠자리를 청하고 있었던 것이다.이것이 계기가 되어 가출 청소년들을 목사 사택에 불러모아 함께 살림을 차린 것이다.주변에도 이러한 청소년들이 많았다.계속 불러모았다.그리고 새로운 가정을 출범시켰다.‘예수가정’이라 이름했다. 지난 5년동안 이런 예수가정이 8곳으로 불어났고 현재 이 지역에서만 105명의 가정원들이 함께 살아가고 있다.‘온세상이 학교이고,모든 이가 선생님인 들꽃 피는 학교’를 세운 것이다.이들은 중학교 중퇴가 절반이 넘는다.남녀 숫자가 2대 1 정도이다.가출 원인은 부모의 방임과 학대가 절반 이상이고,부모의 재혼과 이혼이 다음으로 많았고,부모중 한쪽 내지 양쪽 모두의 가출로 인한 것이 그 다음이라고 했다.도벽,폭력,약물탐닉,정서불안 등이 가출인들의 특성이란다. 이들에게 인생상담도 해주고,함께 살면서 신앙공동체도 키우고,생활인으로서의 자립기반 마련을 위하여 ‘들꽃화원’을 운영하며 생계를 유지하기도한다.이런 과정을 통해 자아를다시 찾고,예전의 향기로운 꽃모습을 다시 찾아 가정으로 돌아가 가정을 ‘꽃마을’로 다시 만든 숫자가 60여명을 넘는다고 한다.가정의 회복이요,자아의 재확립이요,꽃마을 사회의 재건이다. 도처에서 정상을 되찾자는 소리들로 어수선하다.기본이 바로선 나라,기본이 바로선 가정을 찾자고 뛰어다닌다.사회구성원 전체가 건강하려면,수고하고무거운 짐을 지고 소외와 학대 속에 고통을 당하는 우리의 ‘들꽃’들의 보금자리를 먼저 만들어주어야 한다.내년이면 출발하는 새 천년,새 세기에는사랑스런 들꽃들의 마을이 우후죽순처럼 돋아나도록 우리 사회가 보금자리를 만들어주자. 그러나 남한의 들꽃들에 비해서 북한의 들꽃들은 더더욱 비참하다.지난 8월 중국의 연변지역을 방문하여 북쪽에서 배고파 탈북한 청소년들을 만날 수있었다.부모 모두가 또는 부모 한쪽이 배고파 굶어죽었다는 아이들이 있었다.보조금만 몇푼 있으면 어서 압록강이나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가 고향의 동생들을 먹이고 싶다고 했다.그곳 자원봉사자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중국돈 200위안(우리 돈으로 약 3만5,000원)만 쥐어주면 돌아간단다. 그런데 현금을 쥐고 도강해 다시 국경을 넘으면 반드시 국경지기들에게 매맞고 빼앗기기 때문에 특수방안을 찾아냈다고 한다.비닐봉지에 200원 정도를 뚤뚤 말아 저녁에 입으로 삼켜먹고 밤에 도강한다.아침에 집에 도착하여 용변을 보면서 돈을 꺼내 두세 달을 살다가 돈이 떨어지면 다시 중국땅으로 나온다는 것이다.눈물 없이는 들을 수 없는 한맺힌 사연이다. 남한의 어린 들꽃에게는 들꽃피는 마을이라도 있지만,북쪽의 어린 들꽃들은 마을이 없어 들판을 헤매는 ‘꽃제비’라는 이름이 붙어있다.통일 이전이나 이후나 우리들에게는 불쌍하고 힘없고 ‘왕따’를 당하는 들꽃들을 보살펴야 한다.때를 얻든 못 얻든 이 일은 우리의 몫이다.들꽃들이여,피어나라.아름답게 자라도록 물주고 거름을 주자. 朴 宗 和 기독교장로회 총무
  • 굿모닝 새천년 패러다임을 바꾸자(8회)

    주간 기획 시리즈 ‘굿 모닝 새 천년’은 이번 8회부터 중간 타이틀을 지금까지의 ‘패러다임을 바꾸자’에서 ‘기초부터 다지자’로 바꿔 13회까지 6차례 게재할 예정입니다.앞으로도 ‘이것을 이어 가자’는 등의 다양한 중간타이틀 아래 다가오는 2천년대를 준비하는 특집을 연말까지 이어 가게 됩니다. “지금 한국과 일본의 차이는 100년이라는 것이 내 생각이다.…한국과 일본 사이의 격차를 경제력의 차이만 두고 계산해서는 안된다.한국 사람들이 안으로 정말 인간다운 삶을 누리고 밖으로는 당당히 세계를 주도해 나갈 역량을 갖추기 위해서는 근본적인 도덕과 질서가 바로 잡히지 않으면 안된다” 일본인 이케하라 마모루(池原衛·64)씨는 지난해 12월 펴낸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쓴 한국,한국인 비판’이란 책에서 ‘정말로 맞아 죽을 정도로’신랄하고 적나라하게 무도덕,무질서,탈법이 판을 치는 우리 사회의 부끄러운자화상을 그려냈다. 아파트에서 아래층까지 들리도록 뛰어노는 어린이들,식당이든 지하철이든심지어 비행기 안에서까지 그칠 새 없이 이어지는 휴대폰 소리,난폭운전 등다반사로 벌어지는 우리의 일상이 우리 사회의 후진성을 단적으로 입증한다는 이케하라씨의 주장은 우리 모두를 일깨우는 ‘고언(苦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연세대 김호기 교수(사회학)는 이처럼 “남이 보지 않는다고 길거리에 휴지를 버리고 아파트 가격의 하락이 걱정돼 쓰레기매립장 건립을 무조건 반대하며 금품을 살포하더라도 선거에서 이기면 된다는 의식과 행동이 계속되는 한 우리 사회의 시민의식은 이른바 이기적 천민주의에 머무를 수 밖에 없다”면서 “이러한 민주적 시민의식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중요한 요인은 가족주의”라고 진단했다.세상이 어떻게 되든 ‘나’ 또는 혈연·지연·학연에근거한 ‘우리’만 잘살면 된다는 개인적·집단적 이기주의,배경좋고,출신좋고,연줄좋고,줄서기 잘하고,잘 갖다 바치면 어떤 경쟁에서도 이기는,이른바경쟁규칙의 위반이라는 부조리가 만연하면서 양보와 협동이라는 민주적 시민의식,공동체의식이 내동댕이 쳐졌다는 것이다. ‘더불어 사는 사회’는 사회의 존립요건인 질서 유지를 소중히 여기는 사회다.사회구성원 모두가 타인의 이익과 욕구를 나만의 것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것을 인정하며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겠다는 의지를 실천하는 사회다. 그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의 실마리는 거창한 ‘구호’의 절규에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나부터’ 기초적인 공중도덕을 하나라도 실천하는데서 찾아진다.‘사람다운 사회’는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공동체를 위해 봉사하는‘선인(善人)’의 삶을 살 것을 요구하지는 않는다.일상의 생활에서 이웃이나 타인에게 피해나 불편을 주지 않기 위해 줄서기 등과 같은 최소한의 기초질서를 준수할 것을 요구할 뿐이다.모두가 도에 지나친 욕구나 행동거지를자율적으로 규제하며 혹시라도 불편해 할 이웃을 한번쯤 생각하며 살면 된다. 나아가 사회구성원 모두에게 천민적 이기주의를 포기할 것을 요구하기 위해서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공정경쟁의 규칙 앞에서는어떤 특권도,차별도 인정하지 않는 원칙이 사회 전반에 뿌리내려야 한다.아울러 이른바 사회지도층인사들이 평소에 누리는 위세와 특권에 대한 보답으로 사회에 더 많은 것을 환원하는 ‘귀족의 의무(NOBLESSE OBLIGE)’를 실천함으로써 최소의 수혜자들까지도 살만한 사회가 될 때 진정 인간다운 공동체로 한발 더 다가설 수 있을 것이다. 사회구성원 모두가 공동체적 가치의 중요성을 체득하고 실천하도록 하려면태교에서부터 임종까지 인간교육이 끊임없이 이뤄져야 한다.이 가운데 공동체 의식을 터득케하는 최초의 교육기관인 가정의 중요성은 더없이 강조해도지나치지 않다.자녀들에게 질서와 규칙의 중요성,협동과 봉사의 가치,사랑하고 보살피고 베푸는 삶의 보람을 처음으로 가르치는 어머니의 역할에 새 천년의 미래가 달려 있는 것이다. 김인철기자 ickim@ * [밀레니엄 탐방]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 물신주의와 개발주의 이데올로기가 우리의 공동체적 삶을 파괴,경쟁과 위화감이 심화되고 ‘나홀로 의식’이 팽배해지고 있다.우리 삶의 정신적 토양이황폐해지고 있다. 이에 대해 새시대에 맞는 공동체적 정신문화와 민주공동체 의식을 일궈내는시민단체가 있다. 서울 종로구 연지동 한국기독교연합회관 808호에 자리잡은 신사회공동선운동연합(공선련·상임공동대표 徐英勳)은 생명질서 존중,인간성 회복,공동체윤리 재건,공동선(共同善) 실천 등을 주창한다.지난 94년 10월 박한상 패륜사건,지존파·온보현 사건 등으로 상징되는 인간성 상실위기속에서 창립된뒤 깨끗하고 건강한 도덕사회와 활력있고 정의로운 민주시민사회를 이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오고 있다.현재 회원이 1,000여명에 이르고 있다. 생명질서와 인간 존엄성을 회복해 새사회 공동체 윤리를 만들고 우리 모두가 지켜야 할 공동선을 찾아,실천하기 위해 공선련이 펼치는 활동은 다양하다. 우선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공선련이 가장 중점을 두고 있는 사업은교육이다.지난 4년동안 전국을 돌며 시민윤리 강좌 및 학부모 강좌를 개최했고,시민학교 운영은 물론 200여차례 전국 순회 강연회를 가졌다.이밖에 매년 100여명의 엘리트를 선발,미래사회에 대비해 공동체의식과 건전하고 올바른 윤리관,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리더십을 길러주는 지도자 양성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또 공선련은 ▲공공질서지키기,환경보호,바른 여가선용 등의 새생활 실천▲가족의 공동체 의식을 높이고,이웃과 사회를 향해 열린 가족공동체를 확산시킴으로써 가족 이기주의를 극복 ▲세기말 절망의 벼랑끝에서 다시 시작한다는 땅끝정신 등 공동선 운동이념에 맞는 생활문화사업과 캠페인을 전개하고 있다. 서영훈 상임대표는 “인류의 양심과 지혜가 올바로 발휘되지 못한다면 물질적 혜택은 불행일 뿐”이라면서 “잘못된다면 우리나라가 무너지고,인류사회도 파멸하게 된다”고 경고했다.공선련은 지난해부터 ‘새로운 인간,다시 서는 한국’이란 구호아래 ‘비전 2005’운동에 주력하고 있다.다가오는 2005년 맞이할 광복 60주년을 민족 도약의 새로운 원년으로 삼으려는 뜻.새천년에 맞는 가치 규범을 공동체의 질서에 맞도록 체계있게 세워,우리 사회가 세계화돼 선진사회로 만들기 위한 뜻을 담고 있다. 김영중기자 jeunesse@* [밀레니엄 인터뷰] 두레공동체운동본부 대표 金鎭洪목사 “사방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민족이 각자가 속한 국가에 충실한 국민으로남아 있으되 문화로,경제로,가슴으로 하나가 되자는 것이 한민족공동체입니다” 두레공동체운동본부 대표 김진홍(金鎭洪·58)목사는 가난한 사람을 돕는 것이 교회·성직자의 역할이란 생각에 줄곧 공동체운동에 나서고 있다.‘두레’란 옛 조상들이 쓰던 ‘함께 사는 공동체’란 뜻이다.그는 전통 두레의 정신에다 신앙을 접목시켰다. 김목사는 지난 79년 경기도 화성군 우정면 화산리에서 농업을 주축으로 하는 공동체인 두레마을을 시작했다.초창기에는 실패해 지난 86년 다시 시작하기도 했고,매월 3,000여만원의 적자를 보기도 했지만 지금은 그만큼의 흑자로 돌아섰다.무공해 농산물 생산유통회사인 두레유통,사회복지법인 청십자두레마을,두레선교회,두레연구원,120여명을 해외에 유학시키고 있는 두레장학재단,두레자연고등학교 등도 잇따라 설립했다.두레마을에는 현재 180여명이살고 있다. “10여년전부터 중국과 러시아,북한은 농산물의 원료 생산기지가 되고,한국은 가공과 경영의 중심지가 돼 일본·미국을 유통기지로 만든다는 뜻을 갖고있었습니다” 김목사는 두레마을의 성공을 기반으로 삼아 한민족공동체를 하나하나씩 구체화시켜 가고 있다. 러시아 연해주에 500만평에 이르는 농지를 확보,러시아에 사는 동포인 고려인들과 서울에서 파견된 두레일꾼들이 함께 일하고 있다.중국의 경우 옌볜(延邊)에 150만평의 농지를 확보했다.이곳은 조선족 40여 세대와 두레일꾼 10가정이 함께 개척해가고 있다. 미국에는 서부지역인 베이커스필드에 두레마을 농장이 있고,동부지역인 뉴저지에는 20만평의 농장을 갓 시작했다.캐나다 서부 밴쿠버 인근도 두레마을이 시작되고 있다.일본에는 오사카와 도쿄에 두레모임이 결성돼 있다. 김목사는 “이제 국경은 낮아지고 이념과 체제는 무너져 가고 있는 반면 경제와 문화,창조적인 생각이 중요해지는 시대”라면서 “세계에 흩어진 우리민족들이 하나의 문화권,하나의 경제권으로 결속돼 안으로 민족의 질을 높이고,밖으로 평화세계 건설에 힘쓰자는 뜻”이라고 역설했다. 김영중기자
  • [외언내언]임춘웅/ 토네이도

    미국의 중·서부 지역으로 이민이나 유학을 가는 한국사람들은 맨 먼저 토네이도(Tornado,회오리 바람)라는 낯선 말과 부딪치게 된다.한국에서는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토네이도가 이곳에서는 죽고 사는 일과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이곳 학교와 공공기관에서는 수시로 토네이도 대피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토네이도가 자주 나타나는 봄과 초여름이면 TV나 라디오에서 무시로 토네이도 경보가 발령되고 사람들은 토네이도 예보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 한다.토네이도 경보가 발령되면 차를 타고가던 사람은 차를 버리고 가능한한 멀리뛰어야 하고 시내에서는 모두 다 일손을 놓고 대피소로 달려야 한다. 토네이도가 얼마나 무서운 재앙인지는 지난 3∼4일 오클라호마·캔자스·텍사스주 일대를 휩쓴 파괴력에서도 잘 알 수 있다.사고당일에만 47명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명이 부상했으며 2,000여채의 집이 날아가 버렸다. 격렬한 저기압성 폭풍인 토네이도의 위력은 이 정도에 그치는게 아니다.회오리 바람의 중심에 휩쓸리게 된 승용차가 100여m 상공까지 끌려 올라갔다가 내동댕이쳐진 사례가 있고 대저택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기도 한다. 기록상 미국에서 최악의 토네이도 피해는 1925년에 일어났다. 미주리와일리노이주 일대를 덮친 것으로 사망자만 689명을 기록했다.65년 아이오와와 미시간주 일대에서 발생한 토네이도에는 271명이 목숨을 잃었다. 깔때기 모양으로 피어 오르는 토네이도의 공포가 얼마나 무서운지는 피해경험이 없는 사람은 상상하기 어렵다고 한다.대평원 저쪽에서 토네이도가 나타나면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거꾸로 올라서는 공포심에 휩싸인다.그야말로 모골(毛骨)이 송연해지는 것이다.심약한 사람은 그자리에 주저앉고 만다. 문제는 첨단 과학을 선도하는 미국에서조차 토네이도에 대한 예방책은 물론 발생 요건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데 있다.미국의 과학자들은 이번 토네이도의 경우 환경파괴 현상과 관련이 있는 라니냐의 영향을 받았다고 말한다.환경파괴가 자연재해를 가중시키고 있다는 얘기다. 해마다 우리나라를 덮치는 태풍도 환경파괴의 영향으로 더욱 위험하고 예측불허 상태에 놓여가고 있다.만일에 지구가 멸망하게 된다면 그것은 핵(核)때문이기보다 환경파괴에서 오는 자연재해 때문일 가능성이 매우 크다.
  • 폐기되는 중고서적/柳一相 건국대 신문방송학과 교수(서울광장)

    이 가을을 누가 독서의 계절이라고 말했던가.이 좋은 계절에 마음의 양식이라는 책들의 운명을 보면 너무도 안타까운 느낌이 앞선다.헌 책방이 줄어들면서 1회용 도서가 베스트셀러라는 이름으로 출판문화를 대변하고 있는 것이 요즈음 풍경이고 책 내용과는 무관하게 거의 대부분의 도서가 재활용되지 못한 채 한 번만 읽히고도 용도 폐기되는 게 현실이다. 신간서적들은 대형서점을 중심으로 유통되고 있지만 얼마 안되는 독서인구도 베스트셀러에 몰리다 보니 출판시장은 초토화라고 할 만큼 오늘의 독서문화는 황폐화되어 있다.방송과 영상물에다 인터넷 등 과학기술의 강력한 후원에 힘입은 신종 매체와의 경쟁에서 이제 출판산업은 질식 위기에 처해 있다. 출판시장이 오늘과 같은 위기에 몰린 것은 무엇보다도 시민들의 책에 대한 사랑이 부족했기 때문이다.책이 내포하고 있는 여러 갈래의 문화들과 행간에 숨겨진 심오한 의미들이 내동댕이쳐지는 것은 책의 고귀함에 대한 모독일 것이다.눈을 조금만 바깥으로 돌려보자. ○서점에 중고책 코너 일본 도쿄‘간다진보초’ 거리에는 전문 분야가 분명한 중고서적상이 즐비하고 깨끗이 정리된 서가를 지키는 중년신사는 선비의 기풍으로 특정 분야를 꿰뚫고 있어 존경심마저 들게 한다.일본에서는 이처럼 신간서적과 중고서적이 따로 떨어져서 유통되는 것이 특징이다. 세계 최대 규모의 대형서점 가운데 하나라는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P서점은 하나의 서점이라기보다 장르가 다른 전문서점들의 연합체 같은 곳이지만 어디서나 신구서적이 혼합 판매되고 있다.재활용되는 중고책값은 신간의 60∼70%지만 희귀본은 발행가와 상관없이 매우 높은 값이다.이미 사용된(used) 서적의 구입창구도 마련되어 있다. 우리나라 도서 유통의 어려움은 도서시장 구조가 일제 잔재를 답습한 행정규제장치를 계속 운용하는 데서도 찾아지겠다.신간서적의 유통은 문화관광부가 문화적·산업적 관심을 기울여주지만 중고서적은 고물로 보고 경찰서가 중고서적상을 고물상으로 분류하여 행정관리를 하고 있는 법제도가 책의 바람직한 재활용구조 형성을 막는 요인이 되지 않을까. 도서재활용은 누구에게도 어려운 IMF 구제금융시대에 자칫 메마르기 쉬운 서민독자들의 문화정서를 촉촉히 적셔주고 경제적으로도 절약의 미풍을 계승시킬 수 있어 권장할 만한 일이다. ○재활용 가로막는 법제도 서울 종로·광화문의 대형서점만을 찾을 것이 아니라 깔끔한 신간서적과 손때 묻은 중고서적이 함께 매매되고 교환될 수 있는 동네 서점들이 있다면 독서문화가 오히려 진흥되지 않을까.서점에 커피자판기와 티테이블도 갖추어 차 한 잔을 여유있게 즐길 수 있는 종합문화공간으로서의 서점 모습을 그려본다. 그러나 예상되는 부작용에는 미리 확실하게 대비해야 한다.예컨대 신구서적의 혼합 유통을 틈타 출판사들이 저작자의 정열과 정신의 결정체인 책의 판권을 침해하거나 복사점들이 마구잡이로 서적복사를 하여 저자의 인격권과 지적 재산권을 훔치는 일은 막아야 한다.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이 거침없이 헤엄칠 수 있는 마음의 바다로 책방의 모습이 정립되기를 바라면서 신구도서 혼합형 서점이 자리잡게 되는 날을 고대해본다.
  • 그해 8월15일/潘永煥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실장(기고)

    ◎“탄피 만든다” 숟가락까지 압수/우리말 썼다며 툭하면 체벌/주린배로 모내기 노력봉사/열살 소년에도 광복은 자유 그해,1945년 8월15일은 유난히도 더웠다.샛강에서 미역을 감으며 실컷 놀다가 집에 돌아온 것은 해가 설핏하게 기운 때쯤,어른들의 흥분된 목소리에서 ‘우리나라가 해방이 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해방이라니…’ 해방의 참뜻을 이해하기에는 열살이란 나이는 너무 어렸다. 그러나 국민학교 3학년 철부지의 눈에도 일본인은 미움의 대상이었다.공출을 많이 하지 않는다고 들이닥쳐 헛간을 뒤지고 북데기 쌓아놓은 곳을 대나무칼로 찔러대던 자들.탄피를 만들어야 한다며 제사때면 사용하던 놋그릇·놋대야·촛대와 숟가락까지도 거두어 간 자들이 아닌가. 2학년때부터 노력봉사로 황국신민(皇國臣民)의 의무를 다해야 한다며 이곳 저곳 끌고 다니면서 모내기 일을 강제했던 그들이 아닌가.허리는 끊어져라 아픈데 못줄은 순식간에 넘어오고 뒤돌아보는 논둑은 아득히 멀기만 하여 주먹밥 하나로 때운 뱃속은 쪼르륵 소리가 나곤했다. 선배들 틈에 끼어 부지런히 모를 심지만 아차하는 순간,내 할당구역에 빈곳이 생기고 만다.허둥지둥하는 내 앞에 ‘텀벙’ 소리를 내며 흙덩이가 떨어진 것은 바로 그때였다.얼굴 가득히 흙탕물을 뒤집어 쓴 채 고개를 들어보니 우리반 담임선생인 ‘나리타’란 여선생님이 화려한 양산을 받쳐들고 논둑에 서 있었다.빨리 심으라는 경고였다. 모심기 말고도 30리나 떨어진 산에 가서 송진 붙은 관솔을 따오던 일,몸에 호박씨 두개를 주고 가을에 늙은 호박 두 덩이씩 가져오게 한 일,노는 시간에 우리말을 썼다 해서 벌을 세우던 일,조선인은 위생관념이 없고 더럽다고 조회때마다 되풀이하던 일인 교장 ‘시라이시’… 쌓였던 악감정이 열살짜리 소년을 집 밖으로 뛰쳐나가게 했다.이웃에 서도(西島)라 불리던 일본인 지주가 살고 있었다.으리으리한 정원에 커다란 기왓집을 요철로 된 함석 울타리가 마치 국경처럼 위세있게 둘러싸고 있었다.그 울타리에다 빨간색 연필로 이렇게 써 갈겼다. ‘다이닛퐁 데이코쿠 와루이 야쓰’. ‘대일본제국 나쁜 자식’이란 일본말이다.대일본제국은 일본을 통칭하던 말이었다.나는 일본의 공립국민학교에 입학하여 일본말로 공부를 했다.강도 높은 군국주의 교육도 결국 평범한 한 조선 소년을 일본 소년으로 바꿔놓을 수 없었던 것이다. 흥분의 열기가 마을에서 수증기처럼 번져나가고 있을 때,나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로 달려갔다.뚜렷한 목적을 지닌 것은 아니고 뭔가 희한하고 신나는 일이 있을 것 같은 기대감 때문이었다. 학교 뒤편 우물가에는 교무실 중앙벽면 감실에 신주처럼 모셔져 있던 석고상이 산산조각이 난 채 흩어져 있었다.박살이 난 일본의 군신(軍神) 야마모토 이소로쿠 해군대장의 흉상,누가 내동댕이쳤는지 모르지만 우리도 덩달아 하얀 석고 조각을 밟아 뭉갰다. 해방과 함께 내 이름을 되찾았다.요네다 아오마쓰(米田靑末)라는 이름 때문에 내게는 늘 ‘연예대장’이란 불명예의 별명이 따라다녔다.그 별명이 얼마나 듣기 싫었는지.해방이 내게 가져다 준 실질적 선물인 셈이었다. 이렇게 말과 글과 함께 빼앗겼던 이름을 되찾은지도 어언 53년,우리는 과연 일본에 빼앗겼던 것을 모두 되찾은 것인지 다시 생각하게 된다.
  • 빗나간 오렌지족/李世基 논설위원(外言內言)

    머리는 짧게 깎아 올려세우거나 컬러 블리치를 넣고 옷은 베르사체나 겐조를 입는다. 재규어나 무스탕을 타고 오늘은 어디가서 놀까만을 열심히 생각한다. 3,4년 전까지만 해도 비디오케에서 일본가수 니카야마 미호나 구도 시즈카의 노래를 따라 부르다가 밤이되면 로바다야키, 나이트클럽에 드나들었으나 나이트클럽은 고3때 졸업. 이제는 룸살롱이나 호텔 멤버십바, 게이바가 더 재미있다고 말한다. 하루에 쓰는 유흥비는 100만원에서 200만원. 매사에 고민도 없고 사려도 깊지 않다. 외모와 돈이 인생의 전부이며 어떤 차를 가졌느냐, 무엇을 입었느냐만이 인생의 척도다. 이런 부유층 아들들이 술집에서 돈이 떨어지자 유흥비 마련을 위해 강도짓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돈이란 흔해빠진 것이어서 없으면 남의 돈을 훔칠 수도 있고 빌릴 수도 있지 뭐가 잘못이냐는 식이다. 지난 93년, 이런 얼빠진 족속들이 히로뽕 투약 사건으로 검찰에 적발됐을때 그들의 졸부(猝富) 부모들이 짙은 화장에다 요란한 옷차림으로 나타나서 ‘내돈 멋대로 쓴다’고 큰소리치는바람에 수사관들이 입을 다물지 못한 적이 있다. 오죽하면 매스컴들이 ‘벌레먹은 오렌지족’ ‘지구를 떠나라’고 했겠는가. 일정한 직업도 없고 학업에도 뜻이 없으며 향락 퇴폐풍조로 사회에 위화감을 조성하는 이들은 바로 암적(癌的)인 존재일 수밖에 없다. 또 용돈이나 주면 부모노릇을 다하는 것으로 아는 부모가 과소비와 향락을 부추기는 주범인 셈이다. 물질적 풍요를 바탕으로 탈선행동과 무분별한 환락을 일삼는 이들을 건강한 내 아이들이 보고 배울까봐 겁난다. 철이 없다고 하기엔 스무살이 다된 나이다. 더구나 요즘은 많은 사람들이 일터를 잃고 거리를 방황하는 시기다. 심심풀이 아르바이트에 심심풀이 강도짓이라니 그들이 정말 이 나라의 젊은이들인가 묻고 싶다. 열심히 살고자 하는 신선한 노동에 찬물을 끼얹는 이런 범죄자들은 일고의 여지 없이 따끔하게 다스려야 한다. 그런 아이들을 거리에 내동댕이치듯 내놓는 부모도 용서받아선 안된다. 죄의식도 없고 부끄러움도 모르며 내일도 희망도 꿈도 없는 바보라면 정말 ‘지구를 떠나라’고말하고 싶다.
  • 하버드대 명예교수 갤브레이스 일지 기고문 요지(해외논단)

    ◎20세기의 빛과 그림자 세계적인 석학인 존 K.갈브레이스 하버드대 명예교수는 일본 니혼케이자이신문 12일자에 실린 기고문 ‘20세기는 무엇이었는가­발전과 파괴,시대를 획하다’를 통해 20세기를 돌아볼 때 빛과 그림자가 교차한 시대라고 회고하면서 다음 세기 인류가 추구해야 할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다음은 갈브레이스 교수 글의 요약. 20세기는 빛과 그림자가 교차한 세기였다.식민지 지배가 끝나고 세계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위대한 성과가 있었다.다른 한편 세계대전이 두 번 일어나고 핵무기가 개발됐다.또 세계적인 부의 편재가 일어나 풍요한 지역과 가난한 지역으로 나뉘었다.선진국에서 조차 빈곤은 남아 있다.우리는 이러한 정과 부의 유산을 안은채 21세기를 향하게 될 것이다. ○두차례의 대전과 대공황 이 100년 동안이 위대한 성과를 가져다준 시대라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그러나 나는 성과보다도 비극쪽에서 강한 인상을 받는다.우선 두 차례의 대전이 있었고 대공황이 있었다.인류는 옛날부터 전쟁을 경험해 왔지만 금세기의 세계대전만큼 비극적인,고통으로 가득찬 전쟁은 없었다. 권력과 광기를 짝지은 정치적 리더십이 대전을 가져왔다.많은 역사가들은 대전의 배경으로 경제적·정치적인 이유를 찾아내려 해왔지만 나는 정치적(그리고 군사적) 리더십의 잘못이 더 중대하다고 생각한다.그러나 금세기는 전쟁이 전부는 아니다.후반 50년동안은 베트남에 있어서의 미국,아프가니스탄에서의 소련이라는 일탈을 제외하곤 비교적 평화로왔다.군사주의자는 냉전으로 만족할 수 밖에 없었다. ○식민지배 종언·경제 도약 금세기의 다른 측면을 보자.두가지 위대한 성과가 있었다.하나는 식민지 지배의 종언이다.타인을 통치하는 것을 자신들의 신성한 권리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어졌다.놀랍게도 식민지주의의 종언은 제2차대전이 끝난뒤 수년안에 일어났다.사람들은 스스로에 의해 통치돼야 한다.이는 절대적인 권리는 아니다.대단히 무능하고 부패했으며 잔인한 정부라면,예를 들어 유엔이 주권을 회수해야 할 것이다.하지만 자결의 기본 원칙은 변하지 않는다. 또 하나의 성과는 경제적인측면이었다.20세기에 들어서면 앞서 소수의 특권이었던 것을 다수가 손에 넣게 됐다.이는 1900년에 살아 있었던 누구 한 사람도 상상할 수 없었던 양과 질의 재화와 서비스이다. 이 변화야말로 금세기 가장 영향력있는 경제학자 존 케인즈가 30년대의 저작에서 언급한 것이다.그는 경제문제는 해결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부의 집중·절대빈곤 여전 20세기는 끝나가고 있지만 3가지의 커다란 경제적 사회적인 문제가 미해결인 채 남아 있다.이것이 금세기의 부의 유산이다. 첫째는 윤택한 나라에서도 호황과 불황이라는 고통의 연속이 있다. 둘째는 윤택한 나라들 특히 미국에 있어서도 행복이 공평하게 나누어 주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극히 한줌의 초부유층이 부당하게 커다란 비율로 소득과 생산을 장악하고 있다.게다가 이 비율은 확대돼 가고 있다. 세째로는 금세기를 통해서 드리워져 온 암운은 가난한 나라들 즉 제3세계라든가 ‘남’이든가 또는 발전도상국이라는 낙관적인 단어로 불리우는 나라의 문제이다.아프리카와 아시아의 나라는 일반적으로 식민지 지배로부터 해방되면서 용서없이 가혹한 빈곤 속으로 내동댕이쳐졌다.일부 국가 특히 아시아의 나라는 새로운 환경하에서 경제발전에 힘쓸수 있었다.하지만 다른 많은 나라들 특히 아프리카 여러 나라는 불가능했다. 이러한 케이스가 꽤 많았으며 이는 현재도 변치 않고 있다.20세기의 세계는 부유한 자와 가난한 자로 나뉘었다.어느 나라라도 능력 있고 효율적인 정부가 탄생하면 상황은 변하겠지만 현재 그러한 전망은 보이지 않는다. 이것이 20세기다.인류가 위대한 상과를 올린 세기였다.이 점은 칭찬할 만하다.하지만 수많은 전쟁을 일으키고 지구 규모로 생명을 위협하는 핵무기를 개발한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빈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점,풍요한 나라에서조차 빈곤이 있으며 가난한 나라에서는 빈곤이 엄연한 사실이라는 점도 지금 다시 한번 생각해 보자.〈정리=강석진 도쿄 특파원〉
  • 조선후기 조영우의 ‘노승헐각’(한국인의 얼굴:112)

    ◎지친 노승이 노송뿌리에 풀석/마른 얼굴·광대뼈 탁발승 묘사 조선시대 후기의 화가 관아재 조영우(1686∼1759)은 인물화를 잘 그리기로 정평이 나 있다.숙종과 영조때에 활약한 선비화가다.겸재 정선.현재 심사정과 함께 조선후기의 선비화가 삼재로 꼽혔다.그의 인물화 솜씨는 뛰어나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을 그리는 일에 추천될 정도였다고 한다.그 스스로도 “산수는 정선이 한수 위이나,인물은 내가 낫다”고 했다는 것이다. 그가 그린 인물화 가운데 ‘노승헐각’은 빼어난 작품이다.비단천에 먹물로 그린 이 그림은 간송미술관이 소장했다.늙은 스님이 땅위로 솟아 난 노송 뿌리에 털썩 주저앉았다.화제에는 아픈 다리를 쉰다는 뜻이 들어있다.노구를 이끌고 암자로 오르는 산길을 접어 들었던 스님은 마냥 지쳤다.동냥한 곡식이 서너줌 들었을지도 모를 걸망을 내동댕이 친 것을 보면 어지간히 지친 모양이다.앉기는 했어도 숨이 하도 가빠 헐떡거리고 있다.얼굴은 아주 깡말랐다.그래서 광대뼈가 불쑥 튀어 나왔다.이빨도 다 빠져 입이 합죽한 노승은 그야말로 기진맥진한 표정이다.오죽 지쳤으면 동냥 걸망을 벗어 던졌을까.탁발승으로 살아온 온갖 풍상을 얼굴에 가득한 주름으로 새겼다.걸망 하나를 달랑 걸머메고 구름따라 바람따라 떠 돈 늙은 운수납자다.간밤을 잔 절을 나와 또 다른 암자를 찾아 다니기를 몇 수십년을 하는 사이 어느덧 늙어버린 것이다.노승은 앉고 나서도 몸을 온통 지팡이에 내맡겼다.그래서 굽은 등이 더 굽었는데,목에 걸어놓은 굵은 알 염주조차 무거워 보인다.고개를 들어 먼 허공을 바라보는 눈매에도 기운이 없다.그래도 눈꼬리가 처진 노승의 눈에는 무슨 생각이 분명히 어렸다.그것은 우주만물이 한 모양으로 머물지 않는다는 제행무상의 마음일 것이다.큰 소나무 장송 앞에서 덧없이 흘러간 풍상의 세월을 곱씹고 있는 노승은 이제 초조할 것이 없다는 눈치다. 수염은 서너가닥,고행으로 살아온 노승의 삶 만큼이나 빈약했다.광대뼈에 가린 귀 역시 실하지 않다.대나무 살을 엮어서 만든 모자를 썼다.가진 것이라고는 몸에 걸친 회흑색 먹물옷과 염주,지팡이와 걸망이 있을 뿐이다.도를 닦는데 마음을 기울인 이판이란 말로 자신을 내세울만한 스님도 아니다.그렇다고 절의 살림을 맡았던 사판은 더욱 아니다.어디 한군데 집착하지도 않았거니와 무소유로 살아온 터라 지금 탈속의 경지에 들었다.〈황규호 기자〉
  • 수호전 저자 시내암의 흥화(중국문학의 고향을 찾아:11)

    ◎시씨 집성촌 시가교장에 유채화 만발/뒤집은 팽이모양의 시내암 모역 성지단장 한창/생명걸고 저술한 수호전은 발분저서의 사표로 나처럼 평생 주먹 한번 써보지 못한 샌님에게는 차라리 무송같은 주먹이 부러울 때가 있다.그래선지 「수호전」그 파란만장의 송강취의를 좋아했고,시내암(1296∼1370)이 살고 그의 유택이 된 강소성 흥화현 신타향 시가교장은 관심을 끌던 곳이다.그럼에도 거기 가는 길은 몹시 불편해서 엄두를 내지 못했다.상해에선 어림 잡아 400㎞쯤이지만 꼬불 꼬불 지방 도로를 몇번인가 갈아타면서 거푸 물어야 겨우 찾을수 있었다.북으로 양자강을 건너 남통과 동대를 거쳐 대풍현 백구진에 이르면 시가교장의 문턱에 닿은 셈이다. 「수호전」의 저자와 저자의 고향과 무덤,그리고 저작 연대에 대한 쟁론은 분분했다.그것은 「수호전」이 비록 북송 말년에서 원말명초에 이르기까지 250여년동안,평화나 희곡의 형식으로 민간에 전래됐던 양산박일대의 관핍민반의 설화를 소설화함으로써 결코 온전한 창작은 아니지만 그를 두고 농민폭동설을비롯 송강투항설·시정 서민의 반란설·충간설·영웅설·악한설등 다양한 시각으로 접근하고 있다. 마찬가지로 그의 고향을 두고도 소주·항주·흥화·양주·회안·백구 등의 이설이 있지만 그 어느 것도 틀리다고 할 수는 없다.그의 고향이 소주나 항주·흥화라는 설이 구구하지만 소주는 그의 고향이요 출생지라면 항주는 벼슬하던 곳이다.흥화와 백구는 그가 성장하면서 「수호지」를 완성했던 곳이면서 그가 묻힌 곳이다.다만 현재의 행정구역으로 흥화현 신타향 시가교장으로 불린다.흥화는 옛날 양주에 속했던 군현의 하나요,회안은 시내암이 죽은 곳,그러니까 그 어느쪽에도 인연이 있고 족적이 닿았다. 「수호전」의 저자를 두고도 말이 없지 않았다.「삼국지」의 저자인 나관중과의 공저설이나 나관중의 편집설,심지어 나관중의 저작설이 있지만 시내암의 단독 저작설은 신중국 건국이래 1958년과 1978년,시씨들의 집성촌인 시가교장 근교에서 출토되거나 발견된 시내암의 잔비를 비롯 시씨 종가의 지권기록·시씨 종친들의 묘갈명·시씨 족보·시씨 선영에서 출토된 부장품에 대한 다각적인 연구 결과,시가교장의 시씨 선영에 시내암의 무덤이 있고,그 저자 또한 시내암이 틀림없다는 결론을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필자가 근 10시간을 털털이 버스에 시달리다가 백구진 작은 읍내에 내렸을때 몹시 낯 설었다.심지어 으스스한 느낌이었다.글쎄 양산박의 건달로 뵈는 시커먼 청년 서너사람이 일시에 몰려 와서 나를 에워쌌다.내가 그물에 걸린 물고기로 보였던 것이다.그들은 저마다 오토바이를 몰고 와서 호객을 하는 것이다.여기서는 오토바이가 택시나 삼륜차를 대신하는 모양이다.시가교장까지 왕복하기로 차삯을 인민폐 35원으로 흥정했다. 백구진에서 시내암 무덤까지 약 10㎞는 밀밭을 뚫고 가는 흙길이다.마침 유채화가 한창이다.길옆으로 누런 유채꽃,유채꽃 너머 짓푸르게 키가 훌쭉한 전나무,그 전나무가 휘휘 흔들리는 그림자밖으로 끝없이 아득한 밀밭이 너울거리고 있다.그 세가지 원색은 일망무진의 평행선을 긋고,나는 그 시커먼 녀석이 호마처럼 쿨렁거리는 꽁무니에 붙어 요동을 치고 있다.그 녀석 궁둥이에 깔린 비닐 끈을 꾹참고 눈을 질끈 감았는데 이따금 짝눈으로 뵈는 풍경은 취할만 했었다.그렇게 꼬박 반시간을 달렸다.대영이란 마을에서 우회전,한참 달리다보니 시가교장이라 했다.풍요로운 농가 40,50채가 넘었다.물어보니 지금도 죄다 시가 들만 산다고 했다. 연당이 있고 둥그렇게 시내가 맴을 그리면서 훤칠한 형국을 만들었는데 그중앙에는 시내암의 무덤,그 왼편에는 사당,사당앞에 정각,다시 오른편에는 자료실,자료실뒤로는 칙칙하게 나무들을 심었다.시내암 봉분은 엊그제 묻은듯 밋밋한 흙더미,팽이를 거꾸로 세운듯 했다.그 봉분앞에 우뚝 세운 묘표,「대문학가시내암선생지묘」. 이는 일찍이 1942년과 1957년,흥화현 현청에서 문화유적지로 지정되었던 것을 최근의 발굴과 고증을 거쳐 드디어 그 성역화를 결정,묘역의 확대와 미화에 피치를 올리고 있는데 올 7월에 준공 예정이라고 한다. 좌우를 둘러 보아도 물론 청룡백호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오직 기름진 평야일 뿐이다.거기다 사통팔달의 물줄기들,농토의 관개용이다.그런데 여기서시내암은 630여년전,흉중의 분개를 안고 문을 걸어 잠근채 「수호전」을 완성했던 것이다.물론 그 분개는 그의 짧은 관로와 원군의 무도한 압박때문이었다.벼슬은 내동댕이 치고 원군을 피해 여기 궁벽한 흥화까지 피란했던 것이다.더구나 주원장의 간곡한 청마저 물리친채 오직 「수호전」 완성에 성명을 건 것은 「발분저서」의 사표가 아닐수 없다.여기서 영웅의 무기는 붓이요 또 그것이 불후하다는 것을 재확인하게 된다. 필자는 다시 밀밭길을 달려서 백구진으로 건너가는 나루터에서 오토바이를 내렸다.나루터를 건너면 행정구역으로 대풍현 백구진.하지만 백구진은 옛날 흥화현에 예속되었다. 나루터를 건너 다시 다리를 건너면,두둥실 두채의 건물,그 왼쪽 이층은 「백구문화원」,그 오른쪽에 「시내암기념관」.시내암의 하얀 입상이 서있는,시내암 연구를 위한 자료전시실이다.주로 신중국 건국이래 이 지역에서 발굴된 자료와 연구실적을 통해 흥화의 시가교장이 시내암의 유택이요 「수호전」의 산실임을 입증하고 있다. 이러한 전시물을 참관하는 동안왠지 씁쓸한 생각이 스쳤다.역사적인 인물의 이름이나 뼈다귀를 서로 팔아먹고 있다는 생각이다.흥화현청이 시내암의 묘로 관광수입을 올린다면 백구진은 시내암의 기념관으로 한몫을 보고 있다.이런 일은 「개혁개방」중인 중국 어디서고 보이는 일이다.
  • 달라진 혼인풍속(압록강 2천리:6)

    ◎사라진 전안례… 기러기 대신 통닭이…/신부는 치마·저고리에 서양식 너울 쓰고/교배례 생략 중국식 본떠 깍지걸이 건배/혼수감으로 가전제품은 필수… 사회문제로 장백조선족자치현 용강향 이도강촌에 머무르는 동안에 재수가 좋아서 결혼식을 만났다.신랑은 조선족기숙제소학교 이헌(46)교장의 아들 남일(24)군이고 신부는 이성숙(23)양이었는데,둘 다 소학교 교원이었다.말하자면 부부교원이 될 이들의 결혼식은 상오11시쯤 신랑과 신부가 승용차를 타고 신접살림을 차릴 집에 도착하는 것으로 시작되었다. ○후덕한 인심은 그대로 이들의 신접살림집은 그냥 빌린 것이다.이도강촌에서는 셋집이란 말이 통하지 않는다.돈을 내놓지 않고 살 집이니까 「빌려든 집」이 적절한 표현인지도 모른다.신랑 신부에게 집을 내준 집주인의 이야기 속에는 이도강촌 고산지대 마을의 후덕한 인심이 그대로 배어났다.도시생활이랍시고 연길에서 살아온 나 자신이 후덕한 인심 앞에 사뭇 왜소해질 뿐이었다. 『돈을 어찌 받겠습니께.아들 장가가면 들일라고 지은 집이라 지금은 어짜피 비울 집인데….사람 들어서 집 보아주면 좋지비.너 좋고 나 좋고인데 돈을 받는다는 게 말이나 되우.신랑 신부,이 집에서 돈 많이 모아 나가면 되지비.나 아무 생각 없수다』 이러한 인심 한 복판에서 베풀어지는 혼례인지라 산골마을이 온통 박신댔다.차에서 내린 신랑 신부가 쌍 희자를 거꾸로 오려 붙인 대문께로 다가서자 폭죽소리가 갑자기 진동했다.기다란 장대끝에 매달린 폭죽이 연신 터졌다.매캐한 화약연기가 사방을 덮고 폭죽 부스러기가 능지처참을 당한 꼴로 땅바닥에 너부러져 나뒹굴었다.폭죽소리에 액귀가 놀라 도망가는 대신 행복이 쌍을 지어 들어오라는 중국식 혼례풍습이 어느 사이 조선족사회를 비집고 들어온 것이다. 옛날엔 색시가 첫날 신에 흙을 묻히면 안된다고 해서 마당에 깔아놓은 멍석이나 짚을 밟고 지나갔다.그런데 지금은 신랑이 신부를 번쩍 안아들고 들어갔다.첫날 대낮부터 신랑품에 드는 행복을 만끽한다고나 할까.신랑은 양복을 입고 신부는 치마저고리차림을 했다.그러나 뒤집어쓴 너울에는 서양식 레이스가 달렸다.그리고 색동옷을 입은 동남동녀가 꽃바구니를 들고 꽃보라를 날리면서 신랑 신부를 인도해왔다.동서양 혼합절충식의 혼례였다. 신부가 신랑집 대반의 안내에 따라 방으로 들어가 사뿐히 자리를 잡았다.신부의 너울 뒤로 한쌍의 원앙을 수놓은 벽보가 보였다.원앙은 중국 한족들이 사랑의 상징으로 여기는 새다.오늘날 조선족 젊은이들이 쌍기러기를 원앙으로 착각하는 것처럼 이 혼례집에서도 원앙새가 기러기자리를 빼앗아버렸다.그러니 전통혼례에 반드시 들어가야 할 전안상은 물론 전안례도 생략되었다. 조선족 전통혼례식의 전안례는 고구려시대부터 유래되었다고 한다. ○기러기는 사랑의 상징 신랑이 신부를 맞을 때 흰 색깔의 산 기러기 한 마리를 품에 안고 가서 전안례를 치른 뒤 날려보냈다.그러다 번거로운 산 기러기 대신 나무기러기(목안)로 바뀌었다는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나무기러기마저 사라졌다.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다.전안례 발상지이자 고구려 강역이었던 압록강유역 조선족사회 혼례에서 나무기러기도 보이지 않고 있는 사실이….압록강유역에는 감동적으로 유전되는 전안례 전설이 있다.그 옛날 패수(압록강)벌에 살던 총각 길랑과 처녀 미월이 사랑을 맺었다.그들은 우연히 다리가 부러진 기러기를 구해다 키웠다.길랑이 과거를 보러가던 날 미월은 아리랑산까지 배웅하고 이별의 아리랑을 불렀다.길랑이 떠나고 해가 바뀐 어느 단옷날 그네 뛰는 미월의 미색에 반한 마을의 원 김호가 첩을 삼기 위해 납치했다. 미월이 말을 듣지 않자 옥에 가두었다.미월은 눈물어린 사연을 적은 쪽지를 자신이 보살피던 기러기 다리에 매달아 날려보냈다.길랑은 기러기편에 보낸 쪽지를 받았다.암행어사가 된 길랑은 귀로를 재촉하여 처형 직전의 미월을 구하고 김호를 처단해버렸다.「길림성 민간문학전집」 장백조선족 자치현편에 나오는 이 전설은 「아리랑」과 「춘향전」을 기묘하게 합성한 느낌을 준다.어떻든 기러기는 사랑과 믿음,화목과 정절을 의미하는 날짐승이라 할 수 있다. 전안례가 사라진 이도강촌 혼례상 위에는 부리에 고추를 문 삶은 통닭 한마리가 올라 있었다.웃음이 절로 났는데,삶은통닭은 소래기에 잔뜩 담아 놓은 팥속에 다리를 묻고 서 있는 포즈를 취했다.마을 총각 둘이서 상을 맞들어 움직여놓자 대반으로 앉은 아주머니가 포도주를 따라 상 위로 세번을 돌려 신부를 주었다.신부는 세 모금으로 꺾어 포도주를 마셨다.이어 신랑은 풍덩하게 생긴 주례격의 아주머니가 따라 준 술잔을 비웠다. ○바가지 엎어지면 아들 그리고 나서 주례격의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바가지에서 과자를 꺼내 한 입을 물고 바가지를 내동댕이쳤다.바가지가 엎어졌다.그것을 바라본 하객들이 좋아라 하면서 손뼉을 쳤다.바가지가 엎어졌기 때문에 아들을 본다는 것이었다.아들이건 딸이건 조선족이 또 한번 생명의 씨앗을 뿌릴 수 있게되었다는 사실이 대견스러웠다.어느 틈에 신랑이 신부 곁으로 바싹 다가갔다. 신랑 신부는 오른 손에 술잔을 받아들었다.그리고 깍지걸이로 키스라도 하듯 얼굴을 맞대고 술을 마셨다.교배례를 대신한 모양이다.그럭저럭 혼례절차가 끝났다.대반을 맡은 아주머니가 신부집에 보낼 상을 챙기기 시작했다.아주머니는 우선 고추를 문닭목을 비틀어 빼고 나서 종이에 둘둘 말아 신부 치마폭에 싸주었다.신랑도 신부집에서 닭모가지를 얻어오는 것은 마찬가지다.혼속이 자꾸만 변질되고 있는 것이다.전안례나 교배례 같은 전통의식이 사라진 대신 신부 혼수가 자꾸 늘어나 딸가진 부모들의 걱정도 크다. 이날부터 신혼살림을 차릴 방에는 신부가 해가지고 온 혼수가 그들먹했다.윗방에 놓인 옷장과 이불장에는 신부 친정에서 마련한 이불이며 옷가지가 가득한 것은 물론 텔레비전과 전축·전기밥솥이 한쪽에 따로 자리를 차지했다.그래서 늘그막 남정네들 사이에 『장가 한번 더 갈걸…』하는 우스갯소리까지 생겨났다.
  • “비상탈출구 막혔다” 사자의 증언

    ◎「삼풍」 희생자 위치로 본 당시사황/계단이 상품쌓여 입구 못찾고 뒤엉켜/대부분 비상구쪽으로 손뻗은채 숨져 최후의 3분이 삶과 죽음을 갈랐다.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의 인명구조 및 사체발굴작업이 본격화되면서 사고직전 붕괴위험을 눈치챈 백화점직원과 고객이 사고직전 3분여동안 필사적인 탈출을 시도한 흔적이 여기저기에 드러나고 있다. 발굴된 대부분의 사체는 중앙통로를 중심으로 무너진 A동과 B동의 지하 1·2·3층 엘리베이터와 비상구부분에 몰려 있어 사고당시의 처참한 상황을 짐작케 하고 있다. 수습된 사체는 하나같이 손을 비상구와 엘리베이터쪽으로 향해 있었고 눈을 부릅뜬 상태였다. 비극의 전주곡은 사고 3분전인 29일 하오5시47분쯤부터 시작됐다.A동 지하 1·2층 의류매장과 식품점·잡화점을 찾은 손님들은 갑자기 바닥이 울렁하며 기둥이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악,악』 사방에서 여직원들과 30∼40대주부들의 외마디 비명이 터져나왔다.비극을 예감한 것일까.이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30여m 떨어진 비상구와 엘리베이터쪽으로 내달았다. 사고 2분전,천장과 벽에 금이 갈라지면서 이들의 발걸음은 빨라졌다. 『비상구가 어느 쪽이죠』 당황해서일까 사방을 둘러봐도 비상구계단이 보이지 않았다.대신 원색의 화려한 옷더미와 물건을 담은 박스가 수북이 쌓여 앞을 다투는 직원과 고객들을 가로막고 있었다. 서로 부딪치고 넘어지면서,밀고 밀리면서 지하매장과 비상구주위는 아수라장이 됐다.탈출로를 알리는 단 한차례의 안내방송도 없었다. 엄마손을 「잃어버린」 아기는 유모차를 붙잡은 채 자지러질 듯 엄마를 찾고 찾았다.주인을 잃고 여기저기 흩어진 장바구니에서는 찬거리와 주방용품·초콜릿이 나뒹굴었고 아기의 인형은 어른들의 발걸음에 처참히 짓밟혔다. 에어컨이 가동되지 않아 유난히 더웠던 지하매장은 살려는 안타까움이 뒤엉킨 아비규환의 현장이었다. 비슷한 시각 지하 3층 사원식당에서 간식을 하던 3백여명의 여직원도 젓가락을 내동댕이치고 비상구쪽으로 몰렸다.『언니 먼저 가』 떼밀려가는 선배사원의 등에 대고 외친 마지막 말이었다. B동 지하 3층 주차장에도 낌새를 눈치챈 주부운전자가 한꺼번에 몰려들어 떨리는 손으로 차에 시동을 걸고 있었다. 사고 1분전 지하 1층 매장.마치 구름다리를 탄 듯 흔들림이 더욱 심해졌다.가까스로 엘리베이터단추를 눌렀으나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손바닥으로 마구 두드려댔으나 마찬가지였다. 앞서 올라간 엘리베이터에서 단말마의 비명이 쏟아져내렸다.전기가 끊어진 엘리베이터에서 흘러나오는 절규였다. 30초전,『이젠 끝인가』 『그래도 설마』 『아가야』 『엄마』 『…』 20초전,어디선가 사람들의 고함소리가 들려왔다.『A동이 무너진다』 『오,하느님』 「콰르르 쾅쾅」 그리곤 정적만이 감돌았다. 구조대원들은 5일 사체의 부패냄새가 가장 심한 중앙통로쪽 A·B동의 엘리베이터와 비상구계단을 1주일째 집중수색하고 있다.이날 하오 B동 지하 2층 엘리베이터부근에서 20대여자의 시신을 수습하고 지상으로 올라온 한 소방구조대원은 「저승」의 상황이 믿기지 않는 듯 눈물부터 훔쳤다.
  • 항일투사들의 유택(두만강 7백리:7)

    ◎나철·김교헌·서일 선생 묘 새 단장/강양안 마을마다 혁명열사비 우뚝 솟아/한·중수교후 관심 높아져… 모국이장 한창 연길시 사수에서 북쪽 골짜기로 20리가량 올라가노라면 금불동이라는 마을이 있다.이 마을이 등지고 있는 산기슭을 따라 올라가면 자그마한 소나무숲이 나오는데 그안에 유달리 깨끗이 가꾼 묘소 하나를 만나게 된다. 이 묘지속에 누워 있는 사람의 이름을 모른다.누구도 그가 어디서 태어났으며 어디서 왔으며 부모가 누구인지도 알길이 없다.다만 숨을 거둘 당시 19살이라는 것과 조선족 항일독립군 젊은 전사라는 사실만을 알고 있을 뿐이다. 마을에서 연세가 높은 이상헌(79)노인은 그 무명의 젊은 전사가 꽃다운 나이에 죽어간 정황을 소상히 기억했다. 『꼭 쉰 일곱해전 일입네다.뒷산에서 드문이 총소리가 들려오더니만 일본놈들과 자위단들이 어린애 같이 앳된 새파란 청년을 끌고 마을로 들어왔디요.그 놈들은 마을 사람들을 불러내다 보는 앞에서 청년을 신문합데다.이름을 물으니까 「항일독립군」이라고만 기래요.그 날 왜놈 장교의 군도에 목이 잘려 죽고 말았디요.하도 기막히고 딱해서 유체를 마을 사람들이 묻어주었댔습네다』 ○무명열사 묘지는 쓸쓸 두만강 양안 마을마다 양지 바른 언덕위에는 혁명열사비가 세워졌지만 산 언덕 공동묘지에 임자 없이 쓸쓸히 있는 독립투사들의 묘지는 풍우의 시달림에 자취를 잃었거나 훼손되어 가고 있다.용정시 삼합진 안미대골로 얼마간 들어 가다가 화선 누비골에 있는 묘지앞에는 돌비석 하나가 쓸쓸히 서 있었다고 한다.비석에는 김병덕 지묘라고 씌어있었다.부근 마을 사람들은 독립군 대장의 묘라고 했다.똑같은 항일투사의 묘지이다.하지만 계급투쟁 세월에 그 누군들 감히 돌볼 수가 있었으랴.몇해전 김병덕의 묘지는 파엎어졌고 대리석 비석도 도난을 당했다.오소리가 묘지에 굴을 뚫고 보금자리를 꾸민 것을 발견한 부근의 사람이 묘를 헤치고 오소리를 잡아냈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 항일열사들의 시신은 일찍 북한으로 이장되었다.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한때 친선을 다졌던 터이라 이장이 쉬워 1950년대말에서 60년대 사이에 시신이라도 두만강을 건넜다.이에 비해 한국에 가까운 연고를 둔 항일열사들은 상대적으로 대접이 소홀했다.특히 문화대혁명 당시 항일유적이나 열사들의 묘소가 큰 수모를 겪었다.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광복 50주년을 맞는 오늘날은 사정이 달라져 항일열사들에게 관심을 쏟고 있다. 그 넋이라도 살아서 가장 슬퍼하다가 다시 기뻐했을 열사가 있다면 나철,김교헌,서일 선생일 것이다.한국 대종교의 3종사로,또 항일독립운동가로 추앙받는 이들의 묘소는 화룡시 삼도구 청호촌에 있다.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정부가 항일역사유적지로 지정한데다 한국의 대종교가 묘역을 정화했기 때문에 제법 볼품이 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청산리전투를 총지휘 이 묘역은 문화혁명 당시 홍위병 패거리와 추종자들에 의해 쑥대밭이 되는 수난을 겪었다.비석을 모두 내동댕이 쳐서 청호촌 마을 사람들이 가져다 댓돌로 쓸 정도였다.문화혁명이 가시고 뜻있는 사람들이 묘비석을 찾아내 세웠지만 김교헌선생의 묘비는 끝내 못찾았다.그래서 몇해전에 묘비를 새로 만들어 세웠다.대종교는 독립군조직 서로군정서를 만드는데 주역을 담당했고 서안선생은 그 총재로 1920년 청산리전투를 승리로 이끈 지도자였다. 지금은 일본인들까지 유골을 찾으려 두만강변의 연변땅을 방문하고 있다.물론 침략자로 두만강을 건넜다가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얼마전에 한 일본 여인이 용정시 백금향으로 와서 자기의 오빠 묘를 찾았다.묘지 자리를 상세히 그린 지도까지 들고 온 일본 여인을 마을 노인들이 안내했다.묘가 있었다는 장소는 본래 일본 삼림경찰의 묘역이었다.1940년 홍기하 전투에서 겨우 살아남은 일본경찰은 둘 뿐이었다는데 목숨을 살려 평정대 마을까지 이르렀다가 그중 하나가 병으로 죽어 그곳에 묘를 썼던 것이다.그런데 봉분이 사라져서 어방으로 묘자리가 짐작은 가도 딱 짚을 수는 없었다. 독립군 김덕형의사는 웅진,나진 등 두만강 연안의 조선을 다니며 군자금을 모았던 사람이다.1921년 경술년 토벌 때 어느날 저녁 군자금을 가지고 두만강을 건너 북흥에 있는 집으로 들어 왔다가 일본군 토벌대의 포위에 걸려희생되었다.그가 죽은 후 식구들은 군자금을 독립군에 전달할 수 없었다.많은 액수의 군자금은 그 집의 생활을 윤택하게 만들었다.김덕형의 아들 두 형제는 시름없이 공부를 하였다.광복이 나고 1947년 토지개혁을 하게 되자 생활이 유족했던 그 일가는 청산을 당해 러시아제 금장표 재봉틀마저 빼앗겼다.다른 사람의 소유가 되었던 재봉틀은 얼마전에 고장이 나서 고철로 팔아버렸다.그집 큰 아들은 북한에 들어가 죽고 작은 아들 김성록은 지금 한국에 산다.6·26전쟁 때 인민군에게 포로로 잡혀 북한에 온 김성록은 중국의용군으로 참전했던 북흥의 조선족 친구가 만난 일도 있다.그는 한국군 대좌(대령)군함(계급장)을 달고있었다는 것이다. 한국정부 보훈처에서는 연변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안화춘 선생의 도움으로 중국내 애국선열들의 묘소를 이장하고 있다.안화춘 선생은 갖은 노고를 아끼지 않고 이 땅을 메주 밟듯 하고 다닌다.이번 두만강 답사길에서 연변 도처에서 희생된 선열들의 자취를 잡을 수 있었다.조창렬노인이 들려준 경신년 대토벌 당시 상황도 그 한토막이다. ○선열들 발자취 곳곳에 부암동에서 독립군 한창준과 이씨가 체포되어 불에 타 죽었댔습니다.시체를 감장하려니 누가 누구인지 가릴 수가 없었디요.일제 놈들은 의병대장 최덕균과 남상윤(남풍수로 불림)선생도 모진 고문을 했다고 기래요.눈에다가 고춧물을 부어 넣고 신문을 했으니끼리 죽을 수 밖에….』 선열들의 비장한 최후는 눈물 없이는 들을수 없었고 일제와 주구들의 만행은 의분을 불러 일으켰다. 우리가 흔히 북간도라고 부르는 독립운동의 무대 연변은 이렇듯 많은 항일투쟁의 사연을 안고 있다.나는 옛 용정 대성중학교(현재 용정시 제2중학교)앞에 세워진 윤동주 시비에 새겨진 시 한구절을 머리에 떠올려 보았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무수한 선열들처럼 죽는 그 순간까지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시련이 아닐 수 없다.
  • 제모습 찾은 군(민주화에서 세계화로:8)

    ◎숙소 당번병 없애 장군도 직접 침상정리/사병들 점호시간을 편지쓰기 등에 활용/“곁눈질 않고 국가보위 충실” 군기 확립/일선부대 위주로 조직 대개편… 전투력 극대화 2군사령부 18평짜리 장군숙소에서 생활하고 있는 A장군은 매일 상오 7시 부대내 식당에서 아침식사를 사먹고 있다.특별한 일정이 없는한 점심과 저녁식사도 마찬가지다.또 숙소의 당번병과 운전병 대기제도를 없애버려 침상정리도 자신이 직접하고 외출 때는 수송대 내무반에 있는 운전병을 불러 차량을 이용하고 있다. 지난 93년 2월 새정부 출범이후 몰라보게 바뀐 장군들의 생활풍속도 가운데 한 장면이다. 과거에는 장군숙소마다 운전병과 당번병등 사병 2∼3명이 항상 대기,음식을 조리하여 아침·저녁상을 차리고 청소와 심부름등 잡무를 맡아 했었다.운전병은 24시간 대기했고 수도권 부대 장군들의 경우 「사모님 차」를 모는 별도 운전병이 배치되기도 했었다. 그러나 새정부 들어 이같은 장군의 개인적 잡무를 담당하던 사병들이 본연의 자리로 돌아간 것이다. 군이 달라진 모습은 장군등 고급간부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사병들이 생활하는 내무반에도 합리화의 새바람이 불고 있다. 육군 부대들의 내무반에서는 과거 개념의 일석점호가 모습을 감추고 있다.종전 일석점호시간은 사병들의 총기관리·청소상태·머리길이와 복장상태등의 불량한 점을 지적,육체적 고통을 주는 얼차려의 시간이었다.그러나 요즘은 월요일 저녁은 「부모님께 효도편지 쓰는 시간」,화요일은 각자 고향자랑을 하는날,수요일은 노래자랑시간으로 탈바꿈했다.때문에 고함과 발길질이 난무하고 관물대가 내동댕이 쳐지던 긴장속의 일석점호는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추억담 거리가 돼버렸다. 경기도 오산에 위치한 한 공군부대 내무반에선 올들어 일과시간후 사병들이 서로 영어로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게됐다.이웃 미군부대의 장교를 강사로 모셔 일주일에 2∼3차례 영어회화시간을 갖고 있는 것이다. 내무반의 분위기가 이처럼 달라진 것은 사병들을 무조건 지시·복종의 관계로만 보던 장교들의 시각이 달라진데 따른 것이다. 서부전선 모 사단 포병대대에서는 지난해말 연례적인 전부대 월동준비시범을 갖지 않았다.부대별로 하사관·병사들에게 월동준비에 대한 아이디어를 묻는 것으로 시범을 대신했다. 이 부대 C소령은 『각종 행사때 사병들의 아이디어를 공모한 결과 기발하고도 참신한 것이 많아 실제 부대운영에 적용한 결과 큰 도움이 됐다』면서 『간부들의 머리만으로 기획하는 것은 한계가 있어 사병들의 지혜를 모으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같은 병영풍토의 변화는 지난 2년간 추진된 「군 제모습 찾기 운동」이 뿌리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증거들이다.이 운동은 새정부 출범과 함께 추진된 군개혁작업의 한줄기이다. 군은 지난 2년여동안 각종 불합리한 제도를 개선하고 비리를 뿌리뽑기 위해 스스로 수술대위에 올랐다. 국방부와 합참 차원에서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등의 해체,기무사 축소개편,율곡사업 감사,군사보호시설 축소등 굵직한 개혁조치가 단행됐다. 각군이나 군단·사단 차원에서도 나름대로 병영생활바꾸기등 개혁운동이 전개됐다. 육군 2군사령관 박세환대장은 예하 전부대를 대상으로 「일 더하기 운동」을 전개,장성부터 말단 사병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개인적으로 보다 관심을 갖고 할 일 10가지씩을 정하도록 해 좋은 성과를 거뒀다. 박 사령관은 ▲아침 일찍 일어나기 ▲전문서적 더 읽기 ▲부하를 더 사랑하기 ▲훈련장 더 많이 나가보기 등을 정해 실천하고 있으며 사단장 여단장 가운데선 ▲아침조깅 하기 ▲현장지도 많이 하기 ▲흉 허물 없이 지내기 ▲내가 부대주인이라는 생각 갖기등을 선정한 사람들이 많았다. 소대장들에게는 ▲하루 사병 1명씩 면담하기 ▲하루 1시간씩 영어공부하기 ▲돈 아껴쓰고 10만원씩 적금하기 등이,분대장들에겐 ▲후임자를 동생처럼 보살피기 ▲욕설이나 폭언 않기 등을 권장했다. 또 사병들에게는 ▲훈련중 잡담안하기 ▲상호 욕설않기 ▲근무교대시간 잘 지키기등을 실천토록 한 결과 부대분위기가 훨씬 건전하고 부드러워졌다고 했다. 군은 이같은 자체개혁작업을 통해 병영생활을 합리적으로 변모시키고 군에 대한 사회일각의 차가운 시선을 바꿔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연천 예비군사격장 포탄사고,소대장 탈영사건,현역장교의 은행강도사건등 국민을 경악시키는 사건사고가 끊이지 않아 군개혁 성과에 찬물을 끼얹기도 했다. 군은 이 사건들이 급격한 사회적 가치관의 변화,특히 고생을 모르는 젊은 세대가 군이라는 규율이 엄격한 조직에 잘 적응하지 못해 발생하는 것으로 판단,올들어 「철저한 훈련을 통한 엄정한 군기확립」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 육사졸업생인 하기용중위 은행강도사건에 충격을 받은 육사출신 장교중 일부는 명예를 실추시키는 이같은 사건이 재발하지 않도록 대책을 강구하자는데 의견을 모은 것으로 전해졌다.이들은 조만간 동기회를 열어 자체 정화위원을 선출,문제점이 있는 동기생에게 경고장을 보내는 등의 방식으로 육사출신장교의 명예를 지켜나갈 계획이다. 한편 군은 지난 2년간 급속한 개혁과정에서 손상된 군의 안정성을 회복하기 위해 올들어 「안정속의 개혁」으로 방향을 선회,단결에 신경을 쓰고 있다.이를 위해 최근 사령부를 축소하고 일선을 확대·보강하는 방향으로 확정된 군조직개편방안을 착실히 추진하고 「과학군」으로서 전투력을 최대한 강화할 것을 다짐하고 있다.또한 곁눈질하지 않고 국가와 국민을 보위하는 본연의 임무를 다하는 것만이 문민시대 군의 나아갈 길이라는 것이 이양호국방장관을 비롯한 군수뇌부의 신앙이었다.
  • 창간날 남다른 감회의 이춘재 양양지국장

    ◎「새소식 전령」 서울신문 사랑 34년/방안 가득 신문철… “훌륭한 당고”/출가한 자식도 애독자… 우리집은 「서울가족」/배달소년에 장학금지급 등 선행에도 앞장 초겨울 달이 시커먼 바다에 떨어지는 새벽,그는 집을 나선다. 방금 불어온 해풍에 그의 겨드랑이에서 진한 잉크 냄새가 발산된다. 신문 냄새다.서울신문이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겨드랑이에 두터운 신문뭉치를 끼고 있다.마치 사랑하는 여인의 팔장을 끼듯이…. 강원도 양양군 남문1리 이춘재씨(70). 생애의 반인 34년을 그렇게 살아왔다.서울신문과 호흡을 같이 하며 함께 달려온 격동의 세월이었다. 창간 49주년을 맞는 그의 감회는 그래서 남다르다. 그의 방은 작은 서울신문 서고다.34년간의 서울신문이 월별로 묶여져 보관돼 있다. 비록 소금기를 머금은 바닷바람에 절어 빛은 바랬지만 역사의 숨소리를 생생히 담고 있다. 『서울신문 역사가 곧 우리 집의 역사입니다.저는 서울신문의 전령사지요』.그는 이렇게 말하며 출가한 자식들은 물론 친척들이 모두 서울신문 애독자라고 자랑한다. 서울신문과 이씨의 인연은 지난 61년 3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스터미널에서 우연히 버려진 신문뭉치를 보게 됐다.배달소년이 배달을 제대로 하지 않고 내동댕이친 것이었다. 제호는 서울신문.그는 한장을 들고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 안에서 자세히 일독을 했다. 차분하면서도 중심이 있는 양질의 신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 언론에 대한 관심도 있던 터였다.57년 강원도 속초방송국 개국요원으로 일한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씨는 다음날 양양지국으로 달려갔다.지국 경영은 엉망이었다.그는 선뜻 10만환을 지불했다.쌀 20가마 값이었다.그리고 양양지국을 넘겨 받았다. 그날 이후 새벽 3시면 어김없이 일어나 양양지역에 새 소식을 전하고 있다. 그의 곁에는 늘 부인 김영숙씨(57)가 있다.배달소년들 또한 새벽을 함께 달리는 벗들이다.그래서 그는 항상 청년의 마음으로 산다. 이씨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 가면 으레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전해준다. 신문지국장이라면 새로운 얘기를 알고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지론이요 자존심이다.마을 사람들은 그래서 이씨를 「춘풍」이라 부른다.그를 만나면 봄바람처럼 신선한 소식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러나 그의 자존심을 유지시켜 주는 비밀은 바로 서울신문이다. 서울신문때문에 얻은 덕망과 부는 사회에 돌려준다는 것이 그의 소박한 생활 철학이다. 그는 노인회 등에는 30여부를 무료로 배달한다.배달소년들 가운데 중·고교생에게는 등록금을 지급하고 있다.지금까지 34명이 장학금으로 고등학교와 대학을 졸업했다. 경찰관·교사·은행원 등 어엿한 사회인이 되어 찾아오는 이들을 볼때마다 그는 서울신문 가족으로서의 보람과 긍지를 한껏 느낀다. 이같은 선행으로 대통령표창 등 30여차례의 표창을 받기도 했다. 열성이 대단하고 주민들 사이에 신망이 두텁다보니 신문 구독자가 늘어나는 것은 당연했다. 양양군 8천여 가구중 10%인 8백가구가 서울신문을 보고 있다.이 가운데 10여가구는 3대를 이어 내려오는 독자다.10∼20년간 정기구독하는 고정독자도 많다. 『서울신문이 상업주의에 쏠리지 않고 군형있는 신문을 만들다보니 고정독자들을 꾸준히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게 서울신문 덕이라고 말하는 이씨의 모습은 겸손하기만 하다. 서울신문과 함께 하는 동안 4면이던 지면은 7차례나 늘어나 24∼32면이 됐다.월 구독료는 2백환에서 24회 올라 5천원이 됐다. 『서울신문이 날로 좋아진다는 얘기를 들을 때마다 저도 모르게 우쭐해집니다.서울신문이 세계 속에 우뚝 서는 날까지 저의 작은 힘을 보탤 각오입니다』. 영원한 서울신문맨 이춘재씨.이렇게 말을 맺는 그의 얼굴 위로 아침 햇살이 찬란히 떠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서울신문의 도약을 기원하는 희망찬 동해의 일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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