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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소금의 격동기 : 쓰러진 사람과 뜬 사람 소금이 넘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소금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그러나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소금 1석에 쌀 1석이 맞교환되던 때가 있었다. 소금을 구하기가 어렵고 비싸다 보니 소금에 울고 소금에 웃는 자들이 생겨났다. 특히 구한말은 소금 시장을 둘러싸고 극한 변동이 있었던 시기였다. 개항 이후 일본의 소금과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 밀려왔고, 일제는 우리나라 소금을 재원으로 하여 식민지 경영 자금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러한 염업사의 격동기는 온몸으로 저항하다 쓰러진 사람과 시류에 편승하여 뜬 사람을 갈라놓았다. 삶의 선택이 자유로운 만큼 역사의 평가가 냉혹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알았을까. ●이토 통감 마차 가로막은 꼿꼿한 소금장수 김두원 1907년 10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원산항에 사는 김두원씨가 일인에게 소금값을 찾으려고 여러 해를 호소하더니 일전에 경시청에 잡히어 갇혔다더라.” 소금값을 받으려는 김두원을 경시청에서 잡아 가둔 까닭은 무엇인가? 김두원은 비록 항일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일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었다. 좀처럼 변하지 않고 단단한 육각형의 결정체인 소금처럼 그는 일관되고 굽힘 없이 일제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 저항 방식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핵심 인물을 찾아서 호통을 치는 일이었다. 구속되기 불과 3개월 전인 7월 10일에도 그는 오른손에는 직소(직접 호소한다)라고 쓴 종이를, 왼손에는 편지를 들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마차 앞을 막았다. 일곱 번이나 시도를 하였지만, 한국통치를 위한 일제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와의 직접 대화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환갑을 몇 해 앞둔 노인을 이렇게 꼿꼿한 집념의 사나이로 만든 자는 일본인 사기꾼이었다. 때는 8년 전인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소금을 대규모로 매매하는 거상이었다. 함경도에도 영흥·문천과 같이 소금 생산지가 있었지만, 원산의 거상들은 경상도를 넘나들었다. 강원도와 영남 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소금 생산지는 경상도의 김해와 울산이었다. 김두원은 이곳에서 소금을 사서 원산에서 파는 방식으로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당대의 소금 시장에서는 파는 자나 사는 자 모두가 신뢰를 기반으로 하였다. 믿음이 한 번 깨진 사람은 다시 상대하지 않았으니 소금 매매는 정말 짜디 짠 상거래였던 것이다. 이런 신뢰의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는 개항 이후였다. 개항 이후로 일제의 전오염(우리나라의 자염처럼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 부산과 원산 등 개항지로 유입되었고, 일본인 상인들도 조선의 소금 시장에 직접 나섰다. 속칭 포대가리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일본인 상인들은 간수가 많은 일본의 저질 소금을 조선의 가마니에 담은 뒤에 조선 소금이라 속여 팔았다. 이런 일본인들을 믿은 것은 김두원의 큰 실수였다. 1899년 5월에도 김두원은 동해안과 낙동강을 오가면서 소금을 매입하여 한 포구에 모아두었다. 이렇게 모은 소금이 자그마치 1088석이었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약 5100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무라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 형제가 객줏집에 머문 김두원에게 다가섰다. 고기 절이는 데 소금이 급하게 필요하여 소금값을 후하게 줄 테니 자신들의 배에 소금을 싣고 울릉도까지 가자고 속였다. 보름간의 항해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자 기무라 형제는 김두원에게 소금 짐은 다음 날 하역하고 뭍에 내려 푹 쉬라고 하였다. 순진했던 김두원이 깊은 잠에 든 사이에 사기꾼 형제는 배를 띄워 유유히 동해를 건너 시무라 현으로 사라졌다. 희대의 ‘소금 먹튀’ 사건에 김두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조선의 외부대신에게 청원해 보았지만 이미 쇠멸해 가는 조선 정부는 자국민의 피해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후 김두원은 직접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기꾼들이 이미 징역을 살고 있고, 소금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 된다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분기탱천한 김두원은 1903년 일본 공사인 하야시를 직접 찾아가서 소금값을 내놓으라고 고성을 질렀다.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놀란 하야시는 그만 종로의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렇게 김두원은 일본 공사뿐만 아니라 조선 통감, 일본 총리, 중의원을 상대로 청원하고 투쟁하였지만, 일제는 소금값을 지불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휼금 얼마를 주겠다며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김두원에게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구휼금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는 경시청 총감에게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 선박이 홍주군 바윗돌에 부딪혀 파손된 것을 그 바윗돌이 조선에 있다 하여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배상금 3000원을 받아가고, 공주군에 있던 일본인이 조선의 군인과 시비하다 구타를 당하였다고 치료비로 5000원을 받아간 즉, 전례와 같이 나의 소금값도 일본 정부에서 물어내는 일이 당연하다.” 참으로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장 20여년에 걸친 배상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그가 정당히 받아야 할 소금값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소금이 물에 녹듯이’ 사라져 갔을 것으로 보인다. ●탁지부 대신 고영희, 소금세 높여 염민에 큰 고통 1907년 10월 김두원이 영문도 모른 채 경시청에 잡혀간 이유는 일본 황태자의 조선 방문 때문이었다. 일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김두원이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고 ‘소금값 배상하라.’고 외칠 것이라 여겼다. 김두원이 일제에 의하여 불법 구금된 동안, 일본 황태자를 극진히 모시고 환영행사를 주관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탁지부 대신 고영희이다. 1849년생인 고영희와 김두원은 서로 나이도 엇비슷했으나 황태자 방문 앞에서 전혀 다른, 반대편의 삶에 서 있었다. 차가운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던 김두원에게 그해 10월은 지옥과 같은 반면, 황태자 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제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授章)까지 받은 고영희에게는 천국과 같았다. 1867년 역과에 합격한 고영희는 일제의 부상으로 호기를 맞았다. 1876년 김기수 수신사 일행으로서 일본어 통역을 맡아 일본을 시찰한 이후로 그는 순탄한 등용의 길을 걸었다. 1885년 연천 현감에서 사직하면서 잠시 가시밭을 만나는 듯하였으나 1895년 주일공사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관대작의 지위를 한껏 누렸다. 특히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 관리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07년 5월에 출범된 이완용 내각에서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것도 그간 쌓아온 탁지부 스펙 때문이었다. 탁지부 대신인 고영희의 주요 임무는 일제가 식민지 재정을 수립하기 위하여 파견한 고문들을 충실히 돕는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의 소금을 가지고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1907년 9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4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친일파 4대신이 당시 한적한 어촌인 인천 주안리에 행차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행사를 주관한 자는 탁지부의 고영희와 탁지부 소속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였다. 1907년 우리나라의 인천 주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천일염 시험장이 건설되었다. 수천년간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해 왔던 조선에서 바람과 햇볕으로 결정되는 천일염업의 등장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천일염 시험장을 건설한 내막에는 ‘불편한 진실’이 깔렸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재원이었다. 일제는 자국에서 담배, 소금 등의 전매제도를 통해서 침략전쟁의 군비를 마련했고, 식민지 타이완에서도 아편, 소금 등을 전매시켜서 재원을 확보했다. 그런데 이렇게 상품을 전매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일제에 늘 위협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동아시아를 휘젓고 다니는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었다. 중국산 천일염에 대항하는 방법은 천혜의 갯벌이 깔린 조선의 서해안에서 직접 천일염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었다. 염화나트륨 함유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공업과 무기산업의 원료가 되었으므로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제에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이때 고영희와 메가타 다네타로는 서로 합심하여 주안에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장을 건설함으로써 일제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다. 또 하나, 고영희는 일제의 의도대로 충실히 소금세를 걷어줌으로써 재원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는 소금세가 궁내부에 귀속되어 왕실의 금고로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의 금고를 빼앗기 위해서 먼저 왕실의 금고에 들어가는 소금세를 국가의 금고로 들어가게 했다. 소금세를 많이 매기기 위하여 탁지부를 시켜 염세 규정도 치밀하고 까다롭게 바꾸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영희의 취임은 일제에는 희소식이었지만 소금 생산자인 염민들에게 큰 악재였다. 소금세가 갑자기 늘어나자 여기저기서 백성의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순사들이 염민들을 잡아들이자 대규모 시위가 뒤따랐고, 이내 일본 군인들의 총칼 진압이 시작되었다. 일제와 탁지부의 강압적 소금세 징수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다. ●매국노 고영희 후손, 친일재산 환수 반환소송 나서 고영희는 일제에 수많은 재원을 넘겨 준 덕에 한평생 영화를 누렸다. 탁지부 대신으로서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에 앞장선 그는 이후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매년 1600원의 연금을 받기도 했다.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일제가 준 자작 작위는 장남인 고희경에게 세습되었다. 고영희 집안이 대를 이어서 호의호식할 때 소금장수 김두원은 여전히 소금값을 받지 못하고 허망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뜬금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영희의 증손자가 국가의 친일재산 환수에 반발하여 반환소송을 냈다는 것이다. 반환 소송이라면 억울하게 1088석의 소금을 일인에게 강탈당한 김두원의 후손들이 일본 법정에 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자는 떠들고, 당당한 자는 조용하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란 말인가. 유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 재야 단일화 훈수 백가쟁명

    재야의 단일화 훈수가 본격화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 간의 단일화 시기를 놓고 ‘대선 후보 등록일(11월 25~26일) 이전’ 시점을 기준으로 접점이 모색되는 가운데 권력구조 개편 등 큰 틀의 단일화 구상도 백가쟁명으로 쏟아지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23일 CBS라디오에서 “이원집정부제 등 대통령의 권력 분산을 매개로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단일화하는 과정이 정치 개혁이고 정치 개혁을 하는 과정이 단일화가 돼 국민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며 “정치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통령의 권력 분산으로, 이원집정부제 같은 얘기는 이미 나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조합한 이원집정부제식 단일화 구상은 문재인·안철수의 연합정부론을 의미하며, 이는 두 후보에게 권력 분산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을 주문한 것으로 풀이된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나누는 책임총리제’라는 문 후보의 주장과도 맥이 닿아 있다. 황씨는 “대통령 후보 등록일을 넘기면 볼썽사납다. 최소한 11월 중순까지는 단일화가 돼야 한다.”며 “(양측 간) 물밑 교감이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범재야 원로 모임인 ‘희망2013, 승리 2012’는 이번 주중 단일화를 촉구하는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문 후보와 안 후보 진영 간의 신당 창당 등 정계개편 시나리오도 제기되고 있다. 앞서 박관용, 이한동, 김원기, 정대철 등 여야 원로 17명은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4년 중임의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꾸자며 대선 후보들에게 개헌 추진을 공식 요청한 바 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서울광장]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구본영 논설실장

    [서울광장]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구본영 논설실장

    문재인·안철수 두 대선후보가 가장 닮고 싶은 지도자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꼽고 있다. 반면 그의 친척뻘인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우리에겐 비호감의 인물이다. 재임 시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에 필리핀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한반도 병탄을 모른 척한 탓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민의 대통령 평가에선 늘 상위권이다. 사우스다코타 주 러시모어 산에 ‘국부’ 격인 초대 워싱턴과 3대 제퍼슨, 그리고 노예해방을 이끈 16대 링컨과 함께 ‘큰바위 얼굴’로 새겨져 있지 않은가. 테디가 애칭인 그의 캐릭터는 퍽 이중적이었다. 호승심이 넘쳐 맹수 사냥광이었지만, 어린 곰을 쏘는 걸 거부한 여린 면모로 곰 인형 ‘테디 베어’의 주인공이 됐다. 러·일 전쟁 중재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팽창주의 노선을 걸었다. 군사강국을 표방했지만, 가능한 한 실제로 무력을 쓰진 않았다. 외려 대화와 협상을 선호했다. “먼 길을 가려면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를 들어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즐겨 인용하면서. 그의 외교술이 소위 ‘큰 몽둥이 정책’(Big Stick Policy)으로 불린 이유다. 대선을 두 달도 채 남겨놓지 않은 지금. 한반도 주변 해역엔 격랑이 일고 있다. 북한 어선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벌써 몇 차례나 들락거렸다. 더욱이 어선마다 북한 해군이 승선해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며칠 전엔 우리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서 불법조업하던 중국 어부 중 한명이 해경에 흉기를 들고 저항하다가 고무탄에 맞아 사망했다. 독도와 센가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한·일, 중·일 갈등도 진행형이다. 그런데도 올 대선판에서 외교안보정책은 비인기상품이다. 과문한 탓인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와 같은 귀에 솔깃한 공약은 차고 넘치지만,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가 구체적 안보 공약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세 후보가 이구동성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전향적으로 나서겠다고 다짐하는 정도다. 그러나 어젠다(남북관계 개선)만 있고 이를 실현시킬 로드맵은 안 보이는 상황이다. 설마 경제 지원만 계속하면 어느 순간 북한이 폭압적 세습체제를 스스로 포기할 걸로 진짜 믿는 후보가 있을까? 동서고금의 경험칙으로 보아 헛된 꿈일 뿐이다. 어디 영국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 일변도 정책이 나치 독일의 발톱을 무디게 했던가. 오히려 독일의 공습을 받은 런던의 방공호에서 자신들의 오판을 자탄해야 했다. 중국 역사상 경제·문화 대국이었던 송(宋)을 보라. 요·금·원 등 변방국들을 상대로 돈으로 평화를 사려다 온갖 굴욕만 당하다 패망하지 않았는가. 멀리 볼 것도 없다. 퍼주기 논란이 일 정도로 북한에 강렬한 햇볕을 쪼였던 김대중 정부 때도 두 차례나 서해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 군함이 NLL을 침범하면서다. 노무현 정부와는 경협 이행 비용이 최대 100조원이 넘는다는 10·4선언을 체결하고도 북측은 NLL은 유엔이 제멋대로 그은 경계선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정작 유엔이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던, 정전협정 체결 당시엔 끽소리도 하지 않더니 말이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남북공동어로수역을 만들기 위해 NLL을 포기해야 한다고? 혹여 어느 후보라도 경제적 반대급부만 제공하면 북한 세습정권이 순한 양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유권자가 아닌,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평화통일로 가는 먼 길을 안전하게 걸으려면 남북 교류와 협력이 튼튼한 안보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필자는 독일 통일 직후인 1990년대 초반 동서독 지역을 현지 취재했다. 당시 동독과의 교류와 경협 확대에 기반한, 서독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만이 통독의 견인차라는 견해가 그릇된 상식임을 깨달았다. 동방정책은 경제뿐 아니라 복지수준과 국방력에서도 압도적인 대 동독 우위를 추구한 아데나워 총리의 서방정책 기반 위에서만 주효했음을 실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kby7@seoul.co.kr
  • ‘야쿠자와 친분’ 日법무상 사임

    과거 폭력배와의 교제, 외국인으로부터 불법 정치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퇴진 압력에 몰렸던 다나카 게이슈(74) 일본 법무상이 23일 사임했다. 다나카 법무상은 중국계 회사경영자로부터 2006∼2009년 모두 42만엔(약 580만원)의 정치 헌금을 받았으며, 30여년 전 폭력단 간부와 친분을 맺은 사실이 주간지 폭로로 드러났다. 그는 이 같은 추문이 공개되면서 야권은 물론 정권 내에서의 사임 압력이 커지자 지난 19일 각의에 출석하지 않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22일 퇴원했다. 다나카 법무상은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3차 개각을 통해 지난 1일 취임했으며, 3주 만에 물러났다. 노다 내각에서 자질 시비에 따른 각료 사임은 지난해 9월 하치로 요시오 경제산업상 이후 두 번째다. 다나카 법무상의 사임으로 인사검증에 실패한 노다 총리의 리더십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한 노다 내각의 붕괴가 앞당겨질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지지율 18%로 뚝… 日노다 내각 ‘흔들’

    지지율 18%로 뚝… 日노다 내각 ‘흔들’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정권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져 붕괴 위기에 몰렸다. 22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20∼21일 실시한 전국 전화 여론조사에서 노다 내각의 지지율은 18%에 그쳤다. 개각 직후인 지난 1∼2일 조사 때의 23%에 비해 5% 포인트 하락했다. 출범 직후인 지난해 9월 53%를 기록했던 지지율은 이후 지속적으로 추락, 결국 10%대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노다 총리도 2007년 9월 후쿠다 야스오 총리부터 줄곧 반복돼 온 ‘정치적 리더십 위기→지지율 10%대 추락→수개월 내 퇴진’ 수순을 밟을지 주목된다. 일본에서 내각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다는 것은 정권이 위기 수역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후쿠다 내각은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진 뒤 4개월 만에 총사퇴했고, 아소 다로 내각은 지지율이 10%가 된 뒤 8개월 후,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진 지 6일 후, 간 나오토 내각은 약 2개월 후 총사퇴했다. 10%대의 지지율로 추락한 것은 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재선에 승리한 노다 총리가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노다 총리가 지난 8월 야권과 ‘가까운 시일 내 총선’에 합의하고도 정권 연명에 급급해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실망감 등이 지지율 하락을 부채질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다 총리는 민주당의 지지율이 바닥인 상황에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경우 참패가 불가피하다는 점 때문에 연내 해산을 꺼리며 시간끌기에 몰두하고 있다. 자민당과 공명당 등 야권은 노다 총리가 연내 중의원 해산 약속을 하지 않을 경우 오는 29일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올해 예산에 필수적인 특별공채법안(적자국채 발행법안) 등의 심의에 응하지 않겠다며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마에하라 세이지 국가전략상 등을 중심으로 정권 내부에서도 연내 총선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은 22일 정례 브리핑에서 “마에하라 국가전략상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해 중의원 해산 시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레바논 내전 재현 우려 총리 “테러 배후, 알아사드”

    레바논 정보 당국 수장을 숨지게 한 차량 폭탄 테러로 종파 갈등이 가열되면서 레바논 내전(1975~1990년)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총리와 야권 모두 이번 테러의 배후로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목하면서 양국 간 긴장도 고조될 태세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베이루트 아슈라피예에서 발생한 차량 폭탄테러 사망자 8명 가운데 1명인 알하산 경찰보안기구(ISF) 장군의 장례식이 21일 베이루트 ‘순교자 광장’에서 열렸다. 레바논 야권은 이날을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겨냥한 ‘분노의 날’로 정하고 자국과 시리아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레바논 북부 도시 트리폴리 출신인 알하산 장군은 레바논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소수 수니파 출신 고위직 가운데 한 명으로, 그의 죽음은 시리아의 알라위파(시아파 분파) 정권을 지원하는 헤즈볼라 등 자국 내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시위대는 이날 알하산 장군의 사망과 관련해 미카티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수백 명이 총리실 진입을 시도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보안군이 최루가스를 발사해 시위자 2명이 쓰러졌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번 테러의 배후로 시리아가 지목되는 이유는 알하산이 지난 8월 시리아 세력의 레바논 내 테러 계획을 적발했기 때문이다. 수사 과정에서 그는 지난달 시리아 출신 알리 맘루크 준장과 미셸 사마하 레바논 전 정보장관 등 알아사드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사들을 체포·기소했다. 그는 2005년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에 시리아와 헤즈볼라가 연루됐을 가능성도 조사해 왔다. 레바논 야권 지도자이자 하리리 전 총리의 아들인 사드는 전날 TV 성명을 통해 시리아 배후설을 주장하며 미카티 총리와 알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촉구했다. 같은 날 긴급 내각회의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연 미카티 총리도 알하산 암살은 그가 2개월 전 시리아의 테러 음모를 밝혀낸 것과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야권의 사퇴 요구에 대해서는 “합의된 정권을 이루기 위해 물러나고 싶지만 사태 해결을 위해 남아 달라는 미셸 술레이만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며 잔류 의사를 밝혔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김정일 비밀금고 北 38호실 폐쇄”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밀자금을 관리해온 조직인 노동당 38호실과 마약과 무기, 천연자원 거래 등을 통해 외화벌이를 주도해온 조직인 노동당 39호실을 최근 없앴다고 교도통신이 18일 북한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통신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최근 내각에 권한을 집중시키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이 같이 조치했다고 전했다. 내각의 역할을 강화해 경제를 살리고 주민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아베, 두달만에 또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인 자민당의 아베 신조 총재가 17일 도조 히데키 등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차기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 아베 총재가 총리가 되면 한·일, 중·일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아베 총재는 이날 저녁 야스쿠니신사의 추계대제(10월 17∼20일)에 맞춰 신사를 찾았다. 그는 참배 후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영령에 대해 자민당 총재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밝히기 위해 참배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차기 총선거를 앞두고 지지기반인 보수층에 어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는 일본 종전기념일인 지난 8월 15일에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아베 총재는 2006∼2007년 총리 재임 중에는 전임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참배 문제로 중·일 관계가 악화한 것을 의식해 야스쿠니신사를 찾지 않았다. 다만 춘계대제 때 ‘내각 총리대신’ 명의로 ‘마사카키’라는 신사용 공물을 바쳤다. 그는 고이즈미 내각의 관방장관이던 2006년 춘계대제 직전 참배한 적이 있다. 그는 차기 총리가 된 이후에도 참배할 것이냐는 질문에 “중·일, 한·일관계가 이런 상태인 만큼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지난 9일 자민당 전국 간사장 회의에서 “지난 총리 임기 중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못한 것이 통한으로 남는다.”고 밝혀 총리 취임 시 참배를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10월 유신 40년] “박정희, 3選개헌만 했더라면… 유신 때문에 독재자 된거요”

    [10월 유신 40년] “박정희, 3選개헌만 했더라면… 유신 때문에 독재자 된거요”

    17일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10·17 비상조치’,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한 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일부 헌법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그해 12월 27일에는 유신헌법(제4공화국 헌법)이 공포돼 유신 체제는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10·26 사태로 사망할 때까지 7년 동안 유지됐다. 서울신문은 유신 40년에 즈음해 원로 헌법학자인 김철수 명지대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 유신 헌법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고 유신 체제가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 유신 헌법의 내용 등을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만 했더라도, 5·16 군사쿠데타만 일으켰더라도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을 텐데, 10월유신 때문에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철수(79) 명지대 석좌교수 겸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3공화국 때는 언론계나 교수들이 상당히 바른 말을 많이 했고, 독재를 할 수 없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0월유신 전후로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겸직하고 있던 김 교수는 자신도 이런저런 비판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수기관’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채택한 유신헌법에 대해 김 교수는 “소위 권력의 인격화라는 명목으로 대통령의 독재가 행해졌고, 긴급조치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이 많이 제약됐다.”고 평가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지위를 대폭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1을 추천할 수 있고 국회해산권을 갖고 있다. 긴급조치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으며, 제2·3공화국 헌법에서 천부인권설에 기초해 강화했던 기본권 규정에 법률 유보조항을 뒀다. 대통령은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임기를 연장했다. 대신 국회의 권한은 축소·조정하고 국회 회기도 단축했다. 제2공화국의 헌법재판소를 없애고 명목상의 헌법위원회제도를 도입했다. 김 교수는 10월유신 헌법을 제정한 뒤 국민투표에 회부하기 전 헌법학 교수와 정치학 교수들이 총동원돼 선전전에 활용될 때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중립’을 지켰다. 1973년 1월에 대학 교재로 유신헌법이 포함된 ‘헌법학 개론’을 냈다가 초판을 몽땅 몰수당하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1주일 동안 수정할 것을 협박당했다. 이후 낸 수정 재판과 3판도 몰수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문제의 ‘헌법학 개론’은 중앙정보부의 꼼꼼한 검열을 거쳐 수정 4판에서야 세상에 내보낼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박 대통령이 ‘헌법에 대해 개정 청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기 전이라 크게 비판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핍박을 받았다.”면서 “그때 삭제했던 내용을 이번에 출간한 ‘헌법과 정치’(진원사 펴냄)에 모두 복원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 교수는 정부가 최고의 주권 기관이라고 자랑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해 행정부의 ‘협찬기관’ ‘박수기관’이라고 썼고, 이런 정부 조직은 독재국가들인 타이완의 ‘국민대회’와 스페인의 ‘국민회의’,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대의회’와 같다고 평가했다(496쪽). 또 제4공화국의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독재 체제인 타이완, 그리스 등과 비슷한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하고, 유신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에 독재적 요소가 많다고 서술했다(316쪽). ●체제 비판엔 “北과 내통” 협박 김 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 교수가 ‘현대판 군주제’라고 현 체제를 비판한 내용을 북한에서 논평하고 있다.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고 ‘지랄’을 해대더라.”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했다. 그 뒤로도 김 교수는 이런 원색적인 표현을 여러 차례 썼는데, 가장 왕성하게 학문적으로 집필 활동을 해야 할 시기인 40대에 침묵을 강요당한 것에 대한 울분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김 교수의 이런 심사는 신간 ‘헌법과 정치’ 머리말에도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긴급조치, 국민 기본권 제약 김 교수는 “뒤늦게 유신시대의 위헌적 행위에 대해 비판하려고 하니, 편안하게 죽지도 못한 대통령을 너무 욕되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못 했다.”면서 “또한 유신 때는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몰수됐던 책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초를 치고 있느냐고 비판받을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유신헌법 제53조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 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가 필요 있다고 판단될 때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라는 긴급조치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비판했다(673~679쪽). 김 교수는 “독일에서 공부하다 5·16 직전에 귀국했는데, 거의 매일 쿠데타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서울에 널리 퍼졌고, 정부청사 관료들은 쿠데타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던 만큼 5·16은 불가피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박통이 3선 개헌만 하고, 5·16만 했더라면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을 것인데 유신 때문에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5·16 군사혁명정부 시절은 1년 동안 헌법이 부재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혁명위원회가 만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서 ‘제2공화국의 헌법을 계승한다.’고 공표했지만 내각제도 없애고, 국민의 기본권을 완전히 억압했으니 군사독재를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박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하려고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부 대신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만들어 공고한 뒤 국민투표에 부쳐 93% 찬성으로 통과시킨 것은 초헌법적인 불법행위”라고 비판했다. 문제의 ‘헌법학 개론’에 정부가 홍보한 대로 93%의 국민 지지로 통과됐다고 서술한 것에 대해서도 중앙정보부는 “야유하는 것이냐?”고 트집을 잡았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통해 우리나라를 부흥시키고 통일시킨다는 명분은 있었겠지만, 핵 연구소를 대전에 만드는 등 미국 정부와 갈등하고, 부마학생운동 등에 대해 폭력적으로 대응하자 김재규가 헌법 개정 준비를 했던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김신조·실미도’에 정권 위기감 김 교수는 “당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특별보좌관이 대학 동기(서울대 법대)인데, 자꾸 만나자고 한 뒤 헌법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헌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면서 “12·12 이후 가담했던 사람들이 모두 처형돼서 그 기록과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김재규는 박 대통령을 저격한 일에 대해 재판 과정에서 ‘유신의 심장을 쏘면서 유신시대를 없애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10·26 이후 우리가 잘했더라면 민주화가 더 빨리 오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정상적인 정신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도 했다. 김 교수는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으로 암살 위기를 겪고, 이에 보복하겠다고 만든 북파 공작원들이 문제가 된 1971년 실미도 사건도 터지고 해서 정권 차원에서 위기감이 극대화됐을 것이다. 북한 김일성과의 대립 관계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생각들이 10월유신에 많이 반영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학문적으로 ‘입헌정치’란 헌법이라는 국가계약의 문서로 정치를 규율하겠다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헌법은 정치를 규제하지 못하고, 정치가 헌법을 유린하고 새로 제정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며 한국적 비극을 낳고 있다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제헌헌법과 제6공화국 헌법을 제외하고 유신헌법을 포함해 많은 헌법 개정안이 국민의 기본권 보장 규범으로 기능하지 않고 집권자의 지배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헌법에 위배되는 국가변란죄나 국헌문란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지 않은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유신헌법은 유신헌법 안에서는 합헌이지만, 입헌주의 정신을 감안하면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국회가 아닌 대통령이 만든 긴급조치에 의해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강조했다. ●20살 박근혜가 유신 알았겠나 10월유신에 대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진정한 사과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그 무렵 20살밖에 안 된 박근혜 후보가 유신헌법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느냐.”면서 그의 몫이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했다. 이어 그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유신에 대한 평가나 나의 인터뷰가 누군가를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김철수 석좌교수] 1933년 7월 10일생으로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1998년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한 뒤 탐라대 총장을 거쳐 현재 명지대 석좌교수로 있다. 한국헌법연구소 소장, 한국헌법학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주요저서는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위하여’ ‘헌법개설’ 등 23권.
  • 리비아 새 총리에 제이단

    리비아 새 총리에 제이단

    리비아 신임 총리에 망명 외교관 출신의 인권변호사 알리 제이단(63)이 선출됐다. 14일(현지시간) BBC 등에 따르면 제이단은 이날 리비아 제헌의회 의원 20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93표를 얻어 경쟁 후보인 무함마드 알하라리를 제치고 당선됐다. 무소속 의원인 제이단은 리비아 최대 정당인 국민연합의 지지에 힘입어 이슬람주의 정의건설당(JCP) 후보인 알하라리를 8표 차로 앞섰다. 제이단은 인도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1980년 망명해 이듬해 해외 반체제 인사들이 설립한 ‘리비아 구원을 위한 국민전선’에 가입했으며,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과도정부 총리를 지낸 마무드 지브릴과 함께 카다피 정권에 맞서 싸운 시민군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지난 8월 제헌의회 의장직에 도전했으나 무함마드 알메가리프에게 28표 차로 패했다. 제이단 신임 총리의 첫 임무는 2주 내에 내각을 구성하는 것이다. 앞서 리비아 의회는 지난 7일 무스타파 아부 샤구르 전 총리가 제출한 내각 구성안에 대해 모든 정파와 부족을 대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총리를 해임한 만큼 의회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통합 내각을 꾸리는 것이 급선무다. 또한 무장단체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 치안을 회복하는 일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국가경영, 보좌그룹도 눈길 줘야/정윤기 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옴부즈맨 칼럼] 국가경영, 보좌그룹도 눈길 줘야/정윤기 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인 히트를 치자 지인이 말하기를 이제 세계가 한국은 잘 몰라도 강남은 알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을 미국에서 체류한 필자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인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한국을 알고 있으며, 지식인 그룹으로 갈수록 한국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미국의 고위공무원교육원에 파견교수로 가게 된 것도 한국을 알고 싶어하는 그들의 초청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커져 있다.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에 근접해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중 유일하게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한류를 통해 그 이름도 낯설지 않다. 지난 10여년간 추진해 온 전자정부 사업 덕분에 유엔에서 2회 연속 전자정부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행정시스템은 선진국 수준이다. 전체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으니 나라를 선진국처럼 운영하는 일만 남은 게 아닌가 싶다.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주요 대선 후보자들에 대한 기사가 연일 눈길을 끌고 있다. 대통령 선출은 나라와 국민 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20여년의 공무원 경험으로 보건대, 국무총리나 장·차관 등 대통령이 임명할 핵심 공직자와 정부기관의 고위 공무원들도 대통령 못지않게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은 그 규모, 사회의 다양성,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비중 등 어느 모로 보나 주요 공직자들의 보좌 없이 대통령 혼자서 이끌어 가기엔 너무 벅찰 만큼 커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유럽 국가에서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 즉 장관을 미리 내정해 명단을 발표하는 것이 관행이다. 미국에서는 부통령 후보를 미리 지명해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과 함께 선출한다. 대통령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함께 지고 갈 일꾼들의 면면까지 본 뒤 투표하도록 하려는 취지다. 당연히 대통령 후보 한 명만 바라보는 것보다 바람직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어느 대선 후보자의 유력 측근이 그림자 내각을 구상하는 듯한 언급을 한 바도 있다. 이런 시점에서 서울신문이 주요 대선 후보자의 측근 시리즈를 연재한 것은 향후 몇 년간 나라를 이끌고 나갈 예비 공직자의 면면과 그들의 철학을 미리 가늠하게 하는 시의적절한 기사였다. 대선 후보자의 측근 외에 대선 후보자가 사람 쓰는 방법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당선된 이후의 정부 전체의 운영 방향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했다. 그뿐 아니라 서울신문이 연재하고 있는 정부기관의 간부공무원 시리즈 ‘공직열전’까지 곁들여 읽어 보면 앞으로의 정부 운영에 대한 예측은 그 흥미를 더해간다. 그러나 아쉬움도 많다. 광고와 그래픽을 제외한 반 쪽 정도의 기사에 많은 측근을 언급하다 보니 피상적인 소개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직열전’에 실린 간부공무원들의 소개도 한 줄 정도다. 정치나 공직에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듣고도 그 사람의 인품과 능력, 과거 업적을 알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정부나 민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사람은 그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만, 대선 후보자와 인간관계가 가깝다는 정도로 소개된 측근은 짐작하기도 어렵다. 지면을 더 배정해서 개인별로 심층적인 소개가 있었으면 유권자의 판단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요즘 기업 인사에도 출신대와 같은 배경보다 담당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에 초점을 두는 추세다. 역량평가센터를 설치해 임원 승진 전에 온종일에 걸쳐 철저하게 적격성을 평가하는 기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공무원들도 국장으로 승진할 때에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하루 종일 역량평가를 받는다. 고위 관리자의 선발에 기업과 정부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는데,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 리비아 총리 25일만에 해임… ‘10인 위기내각’ 구성 무산

    리비아 제헌의회가 무스타파 아부 샤구르 총리를 25일 만에 해임하면서 리비아 정세가 다시 요동치고 있다. 지난달 14일 벵가지 미국 영사관 피습 사건 이후 치안 불안이 계속되는 가운데 총리까지 물러나면서 리비아 정국 혼란이 가중될 전망이다. 리비아 제헌의회는 7일(현지시간) 샤구르 총리가 제출한 10인의 ‘위기 내각’ 인사안을 부결하고 그를 해임했다고 AP·AFP통신 등이 전했다. 현지 국영TV에 따르면 200명 정원의 리비아 의회는 이날 샤구르 총리의 내각 구성안을 반대 125표, 찬성 44표, 기권 17표로 부결하고 샤구르 총리를 해임했다. 공학도 출신으로 리비아 과도정부 부총리를 지낸 샤구르 총리는 지난달 12일 리비아 의회가 진행한 총리 선출 투표에서 96표를 획득해, 과도정부 총리를 지낸 마흐무드 지브릴을 2표 차로 누르고 극적으로 당선됐다. 리비아 의회는 샤구르 총리가 제출한 내각 구성안이 부결되면 그를 해임하고 3~4주 안에 새 총리를 뽑기로 사전에 결정한 상태여서 조만간 신임 총리 인선 논의에 착수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 근본주의자들은 물론, 자유주의 성향 인물들도 받아들인 ‘절충안’으로 샤구르 총리를 선출했던 만큼 후속 인선이 쉽지는 않을 전망이다. 샤구르 총리는 내각 구성안을 제출하면서 리비아의 안보 위기 상황을 고려해 “모든 지역적 고려를 거부하고” 위기 내각을 구성했다고 밝혔다. 앞서 의회는 지난 4일 샤구르 총리가 1차로 제출한 내각 구성안을 “리비아의 모든 정파·부족을 대표하지 않았다.”며 거부한 바 있다. 김미경기자 chaplin7@seoul.co.kr
  • “日, 위안부 부정하면 국가신용 잃을 수도”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주도한 고노 요헤이 전 관방장관이 일본이 위안부 문제를 부정할 경우 국가 신용이 훼손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고노 전 관방장관은 8일 요미우리신문에 게재된 연재물 ‘시대의 증언자’ 편집자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1993년에 발표한 ‘고노 담화’와 관련, “자료상의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전후 반세기가 지난 지금도 고통을 겪고 있는 여성(위안부)의 존재와 전쟁 중의 비극까지 없었다는 주장에 슬픔을 느낀다.”며 “(일본 정부가 위안부의 존재를 부정하면) 아시아뿐 아니라 미국과 유럽으로부터 일본의 인권의식이 의심받아 국가의 신용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그는 자신의 전임자인 가토 고이치 관방장관이 1992년 7월 위안부 문제 조사 결과를 발표하고 사과했으나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문서로 확인되지 않았으며 이에 자신이 경찰과 방위성, 외무성, 문부성, 후생노동성 등 각 부처에 다시 조사를 의뢰했다고 말했다. 고노 전 장관은 결국 위안부 16명을 대상으로 한 직접 청취 조사를 통해 “일본군이 위협해 여성을 연행하거나 공장에서 일하게 된다고 속였고 이 여성들이 때로는 하루 20명 이상의 병사를 상대했으며 일본군이 패주할 때 버려졌다는 증언이 있었다.”고 밝혔다. 고노 전 장관은 이런 일들이 일본군에 거역할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졌기 때문에 종합적으로 ‘강제성’을 인정해야만 하는 내용이라고 판단했다며 당시 위안부의 증언을 읽은 미야자와 기이치 총리는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이어 고노 담화는 한국과 일본뿐 아니라 미국의 국립공문서관 등의 자료를 신중하게 검토해 당시 미야자와 내각의 책임으로 결정한 ‘내각의 의지’라고 규정했다. 그는 “고노 담화를 각의에서 결정한 것은 아니지만 이후 모든 자민당 정권과 민주당 정권이 답습해 왔다.”고 강조했다. 고노 전 관방장관은 1993년 8월 4일 담화에서 “(일본군) 위안소는 당시 군 당국의 요청에 의해 설치됐고 위안소의 설치, 관리 및 위안부 이송에는 구일본군이 직간접적으로 관여했다. 감언, 강압 등에 의해 본인의 의사에 반하여 모집된 사례가 많았다.”고 강제성을 인정하고 사죄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선택! 역사를 갈랐다] (29)박영효 vs 유길준(하)

    1895년 봄 동아시아의 국제정세는 요동치고 있었다.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후 시모노세키 조약을 통해 막대한 배상금과 랴오둥 반도, 타이완 등을 확보하였다. 그러나 곧 이어 러시아, 독일, 프랑스 삼국의 간섭에 굴복하여 랴오둥 반도를 반환하였다. 이러한 사태의 진전은 러시아가 동아시아 문제에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 하겠다는 것과 일본이 아직 그에 맞설 만한 힘을 갖지는 못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노출했다. 이러한 정세의 변화는 조선의 왕실과 개혁관료들이 힘을 합하여 일본의 간섭을 배제한 근대개혁도 가능한 상황이 왔음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이 택한 방법은 왕실을 무력화시키거나 일본에 지나치게 의존하는 것이었다. 그 결과 왕실의 반격으로 박영효와 유길준은 권력에서 쫓겨나 오랜 일본 망명생활을 했다. 박영효는 삼국간섭 이후의 정세변화를 이용하여 일본 측의 반대에도 김홍집을 총리대신에서 몰아냈다. 그리고 박정양, 이완용과 같은 친미근왕적 관료들과 함께 박정양-박영효 연립내각을 출범시켰다. 한편, 일본이 강요했던 차관교섭에 대해서도 반대의사를 분명히 밝히고 있었다. 이때 박영효는 왕실과의 긴밀한 관계를 바탕으로 개혁을 주도할 기회를 잡게 된 것이다. 당시 그는 조선협회를 조직하여 개화세력의 정치조직화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박영효, 왕실 무력화 계획 드러나 ‘몰락’ 그러나 여기서 그는 과욕을 부리다가 결국 무너지고 말았다. 1895년 6월 말 박영효는 당시 궁궐을 지키던 시위대를 자신이 장악하고 있었던 훈련대로 교체하려는 시도를 감행했다. 왕실마저도 자신의 통제 하에 두려고 했던 것이다. 고종은 이를 단호하게 거부하였으나 박영효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모종의 과격한 조치’를 취하려 하였다. 그 내용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한 무력으로 왕실을 제압하고 왕비를 폐비시키는 정도는 되었을 것이라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사전에 일본인 장사의 편지가 유길준에게 입수되어 고종에게 보고되었고, 7월 6일 궁정회의를 통해 박영효의 체포가 결정되었다. 결국, 박영효는 일본 공사관의 협조를 얻어 다시 일본으로 망명하였고 하늘을 찌르던 그의 권력은 8개월 만에 좌절되고 만다. 이후 왕실은 본격적으로 왕권 회복을 시도하였다. 근왕세력들을 내각에 포함하는 한편, 유길준을 의주부 관찰사로 좌천시켰다. 왕실 측근 홍계훈을 훈련대 연대장에 임명한 것도 일본의 지휘를 받는 훈련대를 장악하려는 시도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보호국화 정책을 포기하는 대신 무력을 이용한 권력의 재탈환을 위해 외교 경험이 전무했던 군 출신의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파견했다. 그가 중심이 되어 일본군과 민간인이 주도하고 조선의 훈련대가 협력하여 왕비를 시해하고 김홍집-유길준 세력이 정권을 장악한 것이 바로 을미사변이었다. 유길준이 여기에 직접 개입했다는 흔적은 찾기 어렵지만, 그는 왕비를 폐서인시키는 일에 앞장서고 있었다. 그리고 일본이 이 사건과 관계가 없다고 정당화시켜 주는 데에도 참여하였다. 특히 그는 왕비를 ‘세계 역사상 가장 나쁜 여자’라고 하면서 시해를 정당화하는 편지를 미국의 모스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이런 점에서 그는 왕비 시해사건의 방조자로서 공범이나 다름없었다. ●유길준, 단발령 반대 의병운동 부딪쳐 ‘추락’ 이후 유길준은 내부대신으로서 김홍집 총리대신과 버금가는 권력을 누리며 개혁을 주도하여 이 시기를 김홍집-유길준 내각으로 부르기도 한다. 그는 불과 1년 만에 주사에서 대신으로 파격적인 승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주도했던 단발령의 시행은 결국 갑오개혁은 물론 그 자신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단발령에 반대하여 각지에서 의병이 일어나자 유길준은 한성을 수비하고 있던 병력을 지방으로 출동시켜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 상황을 이용하여 1896년 2월 아관파천이 일어난 것이었다. 유길준은 체포의 위기에서 겨우 벗어나 일본으로 망명길을 떠났다. 결국, 박영효를 왕실에 고발하여 몰락시킨 유길준은 왕실에 의해 자신도 역시 몰락하고 말았다.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일본 망명 시절에도 계속해서 정변을 일으키려는 시도를 하였다. 당시 일본 측 정보문서에 의하면 두 사람은 각각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이들은 고베에서 회동을 한 적이 있었으나 망명 기간 내내 별개로 활동하였다. 박영효는 독립협회 활동을 이용하여 권력을 되찾으려 시도하였다. 그는 핵심 측근세력을 귀국시켜 만민공동회를 과격화하고 이를 통해 조성된 정치적 위기를 틈타 정권을 장악하려 시도하였으나 일본정부의 제지로 실패하였다. 이때 독립협회 내의 추종세력들이 중추원에서 투표를 통해 대신으로 임명할 만한 인물을 추천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런데 그 가운데 박영효가 포함돼 있었고 이는 그동안 참고 있었던 고종의 위기의식을 자극했다. 고종은 결국 군대를 동원하여 만민공동회를 해산시키고 말았다. 한편, 유길준은 박영효와 별개로 일본 육사에 유학했던 장교들을 통해 정권을 장악하려는 혁명일심회 사건을 주도하였다가 1902년에 발각되었다. 이로써 그는 일본의 외딴섬에서 유배생활을 4년 정도 경험해야 했다. 고종은 망명자들을 소환하기 위해 여러 차례 교섭을 벌였으나 일본은 고종의 요구에 응하는 척하면서 이들을 이용해 고종이 추진하는 자주적 개혁에 제동을 걸었다. 두 사람은 모두 대한제국이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이후에도 바로 돌아오지 못하다가 1907년 고종의 강제퇴위를 전후하여 일본의 주선으로 귀국하였다. 박영효는 고종의 강제퇴위 이전에 1907년 6월 비밀리에 귀국하였는데 이토 히로부미가 그의 특별사면을 주선하여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 대신으로 복귀했다. 하지만, 그는 이완용을 암살하려 했다는 이유로 제주도 유배생활을 하기도 했다. 강제병합 후 박영효는 후작 작위를 받고 조선귀족회 회장이 되었으며 일제의 지배 아래서 대표적 친일파로 활동하다가 1937년 79세로 생을 마쳤다. 한편, 유길준은 고종이 강제로 퇴위된 이후인 1907년 8월 순종의 특사령에 따라 귀국한다. 그는 귀국 후 일본이 보호조약을 맺은 진의는 평화에 있고, 대한제국이 자초한 일이라고 못 박았다. 그리고 통감정치는 한국외교의 대변이며 내정의 지도라고 옹호하였다. 또한, 헤이그 특사사건은 경거망동이었고 의병운동은 시국을 오해한 오합지졸이라 비난하였다. 그는 철저히 일본의 통감정치에 협력하였다. 유길준은 다시 관직에 나가지 않고 계몽활동에 주력하면서 친일적 활동을 계속하였다. 한성부민회를 조직하여 일본 통감의 부임 환영행사에 학생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물의를 일으키기도 했다. 또한, 안중근에 의해 이토 히로부미가 사살되자 이완용 등과 함께 중국까지 가서 조문하였고, 이토의 국장에 참석하기 위해 도쿄까지 찾아갔다. 하지만, 그는 대한제국이 강제병합을 당한 후 주어진 작위를 반납하였다. 그가 지향한 것은 일본의 지도로 자강을 이룩하는 것이었지 식민지배까지 원한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그는 1914년 59세로 세상을 떠났는데 그나마 부끄러움을 알았던 그의 처신은 오늘날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리지 않는 결과로 나타났다. ●朴 끝까지 친일·兪 식민지배 반대 박영효와 유길준 두 사람은 당대에 가장 깊이 있는 문명개화론을 바탕으로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개화파들이었다. 하지만, 그들이 막상 현실개혁을 주도했던 시기는 각각 1년 내외에 불과했고 나머지 세월은 대부분 망명과 유배생활로 보내야만 했다. 그나마 권력의 핵심에 서게 된 것도 일본의 절대적 후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일본을 모델로 근대국가를 수립하려고 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왕권과 대립하게 된다. 그 이유는 명목상의 군주였던 일본의 천황과 달리 조선의 국왕은 국가권력의 실체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왕권을 조선 근대화의 걸림돌로 생각하여 끊임없이 무력화시키려 하였고 전복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의 힘에 의존하여 왕권을 제약한다는 것은 곧 일본의 침략이 확대됨을 의미했다. 따라서 그들의 개혁시도는 친일매국으로 치부되었고 몰락을 초래했던 것이다. 당시 대한제국이 자주적 근대국가를 수립하여 국권을 유지한다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따라서 왕권과 개혁관료들이 일치단결하여 외압에 맞서면서 근대개혁을 추진하였다 해도 성공 가능성이 높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박영효와 유길준은 서로 끊임없이 반목하면서도 공통으로 왕권과 대립하고, 일본에 의존한 근대개혁을 선택하였다. 그 결과는 대한제국의 개혁사업 실패와 보호국화 그리고 식민지로 전락하는 역사를 가져왔다. 근대지상주의가 민족의식과 유리되었을 때 국가는 물론 개인들에게 어떤 비극이 나타나는지를 박영효와 유길준의 삶이 잘 보여주고 있다. 주진오(상명대 역사콘텐츠학과 교수) 서울신문·푸른역사 아카데미 공동기획
  • 日, 신임 주중 대사에 총리측근 고위직 내정

    일본이 얼마 전 갑자기 세상을 떠난 주중 일본 대사의 후임에 기테라 마사토(59) 내각관방 외교 담당 부장관보(차관급)를 기용할 방침이라고 5일 NHK 등 현지 언론들이 보도했다. 일본 정부가 지난달 11일 내각관방 외교 담당에 취임한 기테라 부장관보를 중국 대사로 보내기로 한 것은 고위직 총리 측근 인사를 통해 센카쿠 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 국유화 조치 이후 악화된 중·일 관계를 개선하려는 의도라고 언론들은 분석했다. 내각관방의 외교 담당 부장관보는 총리 측근에 있는 외교 담당 공무원 중 최고위직이다. 기테라 부장관보는 1991∼1993년 외무성 중국과에서 일한 것 외에는 중국 관련 업무 경험은 적은 편으로 외무성 국제협력국장, 관방장 등을 거쳤다. 앞서 일본 정부는 지난 9월 11일 니와 우이치로 현 중국 대사의 후임으로 니시미야 신이치 경제 담당 외무심의관을 발령냈지만, 그가 닷새 만에 신병으로 사망한 뒤 후임자 인선에 진통을 겪어 왔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親中 다나카 발탁… 中과 협상카드 활용

    노다 요시히코 일본 총리가 1일 개각을 단행했다. 지난해 9월 출범한 노다 정권의 개각은 지난 1월과 6월에 이어 이번이 세 번째다. 장관이 이처럼 자주 바뀐 것은 노다 정권의 기반이 그만큼 약하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새롭게 출범한 노다 4기 내각은 첫 각의에서 “우리나라의 주권과 영토, 영해를 수호하는 책무를 국제법에 의거해 다하며 국제사회의 ‘법의 지배’ 강화에 공헌하기로 했다.”며 영토 수호를 국정 운영 기본 방침의 하나로 설정했다. 독도 문제와 관련해 한국에 국제사법재판소(ICJ) 제소에 응하도록 압박하는 한편 중국에 대해서도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와 남중국해 영유권 분쟁 등에서 국제법을 준수하도록 촉구하겠다는 의도를 깔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8명의 각료 중 10명이 바뀐 이번 개각에서는 문부과학상에 임명된 다나카 마키코(68) 전 외무상이 가장 눈에 띈다. 1972년 중국과의 국교정상화를 주도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장녀다. 중의원 6선 의원인 다나카는 부친이 총리였을 당시 병약한 모친 대신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맡아 유명세가 따랐다.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외무상에 오른 다나카는 개혁을 추진하다 외무 관료들과 대립하는 한편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정면 비판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다 8개월 만에 경질됐다.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오자와 이치로 전 민주당 대표의 손에 이끌려 민주당에 발을 들였다. 남편인 다나카 나오키 중의원 의원은 지난해 1월부터 6월까지 5개월간 방위상을 지냈다. 일본 언론들은 노다 총리가 중국 지도부와의 친분이 깊은 다나카 의원을 문부과학상에 기용, 앞으로 중국과의 협상 카드로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고 관측했다. 오카다 가쓰야(59) 부총리와 겐바 고이치로(48) 외무상, 후지무라 오사무(62) 관방장관, 모리모토 사토시(71) 방위상 등 내각의 핵심은 유임됐다. 한국, 중국과의 영토 갈등으로 어수선한 정부 분위기를 추스르기 위해 외교·안보 분야는 현행 틀을 유지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중의원 선거 대비 차원으로도 읽힌다. 당내에서는 불만이 분출했다. ‘논공행상’과 탈당 유력자들을 배려한 개각이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현재 민주당 소속 중의원은 244명으로 과반(239석)을 겨우 넘고 있다. 6명만 탈당하면 중의원 과반이 무너져 정권이 붕괴할 수 있는 아슬아슬한 상황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고노담화 폐기·신사 참배 공언… 日 정치의 ‘역주행’

    26일 일본 제1야당인 자민당의 총재로 우익 정치인인 아베 신조(58) 전 총리가 선출됨에 따라 한·일 관계에 먹구름이 드리울 전망이다. 2007년 9월 갑작스럽게 사퇴한 아베 전 총리는 차기 총선에서 자민당이 다수당이 되면서 또다시 총리 자리에 오를 가능성이 크다. 아베 신임 총리는 총리 재직 시절인 2006년 9월부터 2007년 9월까지 독도 등 영토 문제에 관해 강경론을 주도해 온 인물이다. 일본군 위안부 동원의 강제성을 인정한 고노 담화를 폐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5년 전 총리 재임 중에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 신사에 참배하지 않은 것을 두고 ‘통한’이라고 떠드는 인물이다. 또한 그는 인접 국가들과의 선린 우호보다 미국과의 동맹을 중시하며 탈(脫)원전에 반대하고 있다. 그는 저서 ‘아름다운 국가’에서도 가치 동맹국으로 한국은 제외하고 호주와 인도 등을 포함시켰다. 우익 성향의 아베가 제1야당의 총재가 됨으로써 일본 정치와 국정의 우경화 흐름이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특히 그는 차기 총선에서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과 연대하겠다는 뜻을 밝힌 바 있어 ‘아베-하시모토’의 우익 연대가 출범할 가능성도 적지 않다. 아베 내각이 들어서면 한국에서 내년에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더라도 경색된 한·일 관계는 쉽게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 일본 정부가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타협카드를 제시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다른 사안을 논의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교도통신은 “아베 총재가 다시 정권을 잡으면 보수색을 전면에 내걸어 (중국·한국과) 마찰이 격렬해질 수 있다.”며 “잘못 대응하면 동아시아에서 일본이 고립될 수도 있다.”고 보도하는 등 우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오는 상황이다. 하지만 아베가 총리에 오르면 현재의 주장과는 다른 행보를 걸을 것이라는 전망도 조심스럽게 나온다. 센카쿠열도 분쟁으로 중국과 극심한 갈등을 벌이는 상황에서 한국과도 대립각을 세우면 동아시아에서 외교적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아내인 아베 아키에가 고(故) 박용하의 열렬한 팬일 정도로 한류 팬이어서 한국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점이 변수로 꼽힌다. 이번 선거는 ‘민의’에 반하는 결과라는 평가도 듣고 있다. 아베는 1차 투표에서 141표(국회의원 54표, 당원·서포터 87표)를 얻어 이시바 시게루(55) 전 정조회장의 199표(국회의원 34표, 당원·서포터 165표)에 뒤졌다. 하지만 국회의원만 참여한 결선투표에서는 108표를 획득해 89표에 그친 이시바를 눌렀다. 당내에서 가장 많은 45명의 의원을 거느린 마치무라파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이다. 민의를 대변하는 당원·서포터의 선택은 무시된 셈이다. 실제로 아베가 당선되자 자민당 아키타현 본부 간부 4명이 “민의가 반영되지 않았다.”며 당직에서 물러나겠다고 밝히는 등 일부 지역에서 반발이 일 조짐을 보이고 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아베는 누구

    일본 아베 신조(58) 신임 자민당 총재는 정치명문가의 자손이다.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와 종조부인 사토 에이사쿠가 모두 총리를 지냈고, 아베 신타로 전 외무상이 아버지이다. 세이케이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후 미국 남캘리포니아대에서 역시 정치학을 공부했다. 1993년 하원인 중의원 의원에 선출됐으며,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관방 부장관, 자민당 간사장 등 출세 코스를 밟은 정치 엘리트다. 관방 부장관 시절인 2002년 북·일 정상회담을 전후해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에 강경한 태도를 취한 것을 계기로 보수층들에게서 높은 인기를 끌었다. 2006년 9월 20일 고이즈미 총재의 임기 만료로 치러진 경선에서 아소 다로, 다니가키 사다카즈를 큰 표차로 꺾고 자민당 총재로 선출됐다. 자민당 총재로 선출된 지 6일 뒤에 총리에 취임해 2차 세계대전 패전 후 최연소 총리(당시 52세)인 데다 1945년 이후 태어난 첫 총리라는 점에서 기대를 모았다. 하지만 이듬해 7월 29일 참의원 선거에서 야당에 참패한 데다 같은 날 미국 하원이 일본군 위안부 비난 결의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는 등 궁지에 몰리자 취임 꼭 1년 만인 9월 26일에 조기 퇴진했다. 지난 1987년 모리나가 제과 사장의 큰딸인 아키에와 결혼했다. 아키에는 2006년 11월 문예춘추에 기고한 수기에서 자신이 불임이라는 사실을 언론에 공개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사설] 北, 경제개혁 조치로 민생고부터 해결하라

    북한은 어제 평양에서 최고인민회의를 열었다. 당초 획기적 경제개혁 관련 조치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를 모았지만 아쉽게도 이렇다 할 언급이 없었다. 대신 40년 만에 의무교육기간을 1년 더 연장하는 내용의 법령을 발표했다. 이로써 북한은 학교 전 교육 1년, 소학교 5년, 초급중학교 3년, 고급중학교 3년의 12년제로 우리 교육제도와 비슷한 학제를 운영하게 됐다. 사실 북한이 12년제 무상교육을 한다지만 학교 인프라나 교육서비스의 질 등을 감안하면 허울만 그럴듯할 뿐이다. 사유재산을 인정하지 않는 공산당 체제에서 명목상의 무상교육은 당연한 것이고, 그 교육기간이 1년 더 연장됐다고 해서 의미를 부여하기도 어렵다. 얼마 전의 집중호우와 태풍 등으로 굶주리는 북한 주민의 고통이 최근 극에 달한 것을 감안하면 최고인민회의가 북한 인민들의 시급한 민생과제 해결에 더 방점을 뒀어야 했다. 그동안 김정은 체제가 공식 출범한 지 불과 두 달 만에 6·28조치로 대표되는 경제개혁안이 나왔기 때문에 어제 회의에서 그 후속조치가 뒤따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던 게 사실이다. 북한은 6·28조치로 군이 관장하던 경제사업의 내각 이전, 농민의 생산물 30% 소유 등 시장경제 요소를 시범적으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더구나 그간 각종 외신을 통해 농민들이 수확량의 최대 50%를 시장에서 자유롭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는데 그 수준 정도의 경제 개혁안들이 마련됐어야 했다고 본다. 김정은은 지난 4월 “인민이 다시 허리띠를 조이지 않게 하는 것이 당의 방침”이라고 외쳤는데 그러기 위해서도 경제개혁은 반드시 추진되어야 한다. 물론 북한이 새로운 경제개혁 조치를 결정했다 하더라도 2002년 7·1 경제관리개선 조치나 2009년 화폐 개혁 때처럼 공식 발표보다는 사후에 소문을 통해서 알려질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우리는 김정은 세습정권의 안정적인 유지를 위해서도 경제개혁 조치는 불가피하다고 본다. 김정은이 아버지 김정일이 못다한 경제분야에서의 실적을 내려면 중국식 개혁·개방 이외에는 다른 선택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굶주리는 인민들을 먹여살릴 유일한 길이기도 하다.
  • ‘맹탕’ 北 최고인민회의 왜 열었나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6차 회의가 25일 평양 만수대의사당에서 열렸지만 당초 관심을 모았던 경제 개혁 관련 조치는 나오지 않았다. 조선중앙통신은 이번 회의 안건이 ‘전반적 12년제 의무교육을 실시함에 대하여’와 ‘조직 문제’라고 밝혔지만 농지 개혁 등의 경제 문제는 언급하지 않았다. 통일부 관계자는 “이번에는 경제 관련 조치가 나올 것으로 예상했지만 (북한의) 여건이 성숙되지 못한 것을 의미한다.”면서 “경제 관련 조치를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발표할 필요는 없으며 앞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정령을 통해 할 수도 있어 상황을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날 회의에서 북한은 의무교육 기간을 1년 늘려 12년제 교육제도를 채택함으로써 학교 전 교육 1년→소학교 5년→초급중학교 3년→고급중학교 3년의 학제를 갖추게 됐다. 북한은 이번 조치가 “김정일 동지의 숭고한 조국관, 미래관이 집약돼 있는 중대한 조치”라며 사실상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의 첫 작품임을 강조했다. 또 홍인범 평안남도 당 책임비서와 전용남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위원장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에 선임하고 최고인민회의 예산위원장을 최희정 당 과학교육부장에서 곽범기 내각 부총리로 교체했다. 경제 개선 문제가 이번 발표에서 빠진 데 대해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이 내부적으로 이를 논의했으나 공개하지 않았을 가능성과 내부의 혼란 등을 의식해 개혁을 조용히 진행하려는 의도로 분석하고 있다. 고유환 동국대 북한학과 교수는 “학제 개편만을 위해 최고인민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해할 수 없으며 내부적으로 다른 논의가 있었을 것”이라면서 “2002년에 7·1 조치를 시행했을 때도 법제화 여부나 내부 문건을 공개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고 교수는 “우선 경제 조치를 시행하되 추후 성과를 본 다음 법제화할 수도 있다.”고 덧붙였다. 류길재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도 “개혁·개방설의 확산과 북한 내부의 주민 동요 등에 따른 부담이 문제가 됐을 수 있다.”고 말했다. 반면 장용석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선임연구원은 “40년 만에 이뤄지는 북한의 의무교육 기간 연장은 그 자체로서 중요한 논의”라고 말했다. 한편 이명박 대통령은 26일 오전 청와대에서 외교안보장관회의를 소집한다. 회의에서는 최근 한·중·일 3국 간 영토를 둘러싼 외교 갈등을 비롯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결과, 북한 어선의 서해 북방한계선(NLL) 침범 등 대선을 앞둔 시점에서 ‘북한 변수’에 대한 논의가 집중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김성수·하종훈기자 sskim@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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