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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다, 정국 주도 ‘승부수’… 민주당 탈당 도미노 조짐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16일 중의원 해산, 다음 달 16일 총선거’라는 정치 일정을 제시함으로써 일본 정국이 선거 국면으로 급선회하고 있다. 일본이 중의원 총선거를 치르는 것은 2009년 8월 30일 이후 약 3년 3개월 만이다. 노다 총리는 14일 국회에서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와 당수 토론을 갖고 “내년 정기국회에서 현재 480명인 중의원 의원 정수 감축과 세비 삭감을 약속하면 16일 (중의원을) 해산해도 괜찮다.”고 말했다. 중의원 해산은 총리의 전권 사항이다. 아베 총재는 당 집행부와 협의한 뒤 “중의원 의원 정수 축소와 선거제도 개혁을 약속한다.”고 화답했다. 노다 총리는 하시모토 도루 오사카 시장이 이끄는 ‘일본유신회’와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 지사의 ‘태양당’ 등이 세력을 확대하기 이전에 중의원 해산을 결행해 정국을 주도하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민주당은 정권 지지율이 10%대로 바닥인 상황에서 총선을 실시할 경우 참패가 예상된다는 이유를 들어 노다 총리의 조기 중의원 해산에 강력하게 반발하고 있다. 의원들의 대거 탈당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오자와 사키히토 전 환경상은 이날 민주당을 탈당해 일본유신회에 입당할 뜻을 밝혔다. 다음 달 16일 총선을 치르면 현재 각종 여론조사에서 20% 후반대의 지지율을 기록 중인 자민당이 최다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단독으로 과반수 의석(241석)을 차지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이럴 경우 ‘일본유신회’와 ‘태양당’ 등 우익 정당 세력과 연립 내각을 구성할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보수 성향인 요미우리신문의 이달 초 여론조사에서는 자민당을 찍겠다는 이가 25%로 가장 많았고, 일본유신회 지지자(12%)가 민주당 지지자(10%)보다 많았다. 이시하라 전 지사의 태양당을 찍겠다는 이들은 9%, 민나노당을 지지한 응답자는 3%였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조선학교도 무상 교육” 日 문부과학상 방침에 우익 “폭주 여걸” 비난

    일본 정치권에서 노다 요시히코 총리와 아베 신조 자민당 총재 못지않게 언론에 자주 오르내리는 여걸이 있다. 바로 다나카 가쿠에이 전 총리의 장녀인 다나카 마키코(68)다. 6선 중의원 의원인 다나카는 부친이 총리로 재직할 당시 병약한 모친을 대신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했으며, 자민당에서 중의원으로 정치생활을 시작했다. 2001년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외무상에 오른 다나카는 취임 일성으로 “외무성은 복마전”이라고 선언한 뒤 인사와 정책 추진 과정에서 사사건건 관료들과 충돌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를 정면 비판하는 등 거침없는 행보를 보이다 보수 우익의 눈 밖에 나 1년도 안 돼 경질되는 운명을 맞았다. 2002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2003년 중의원 선거에서 무소속으로 당선된 뒤 오자와 이치로 전 민주당 대표에 이끌려 민주당에 발을 들여놨다. 민주당에서도 남편인 다나카 나오키 중의원 의원을 지난해 1월부터 6월 초까지 방위상에 앉혔으며, 자신도 지난 1일 노다 내각 개편 때 문부과학상으로 입각하는 저력을 보였다. 하지만 보수 우익 언론의 ‘다나카 흔들기’ 공세도 만만치 않다. 최근 다나카는 대학설치위원회 심의를 통과해 학생모집 준비에 들어간 아키타공립미술대 등 3개 대학을 인가할 수는 없다고 밝혔다가 보수 언론을 비롯해 해당 대학과 지방자치단체, 야당의 강력한 반대에 부딪혀 방침을 철회하고 사과했다. 요미우리신문은 지난 11일 다나카 문부과학상이 조선학교의 고교 수업료 무상화의 실현에 의욕을 보이고 있다고 비판했다. 일본 정부는 2010년 4월부터 학생 한 명당 연간 12만∼24만엔(약 164만~328만원)의 취학지원금(수업료와 같은 금액)을 학교에 지원하는 고교 무상화를 시행했지만 북한 김정일, 김정은 부자 우상화 교육을 하고 있는 조선학교만 제외했다. 일본 사회가 우경화로 치닫고 있는 가운데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북한 관련 언급을 회피하는 상황에서 다나카가 조선학교 무상화를 들고 나온 것이다. 최근 신당을 추진하는 이시하라 신타로 전 도쿄도지사를 ‘폭주 노인’이라고 비난한 다나카는 언론으로부터 ‘폭주 여걸’로 내몰리고 있는 셈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기고] “日, 위안부 문제 해결로 인권 존중을”/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기고] “日, 위안부 문제 해결로 인권 존중을”/도시환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유엔인권이사회의 심의보고서가 지난 2일 일본에 전달됐다. 이 보고서는 지난달 31일 제네바에서 개최된 유엔인권이사회의 국가별 정례인권검토 회의에서 일본의 인권상황에 대한 권고를 담은 것이다. 유엔인권이사회는 지난 2008년 6월 일본군 위안부 문제와 관련하여 첫번째 심의보고서를 채택한 바 있다. 당시 일본 정부는 각국의 권고와 질의에 맞서 자국에 가장 유리한 논거로 고노 담화를 통한 사과, 아시아여성기금을 통한 보상, 조약을 통한 법적 문제의 해결 등을 제시하며 위안부 문제가 완료되었음을 주장했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비판을 받고 있다. 첫째, 고노 담화는 위안부에 대한 일본군의 관여와 강제연행을 인정했지만, 2007년 아베 내각은 일본정부의 공식적인 승인을 받지 못한 것으로 폄하해 정치적 수사에 불과한 것으로 퇴행시켰다. 둘째, 아시아여성기금의 경우 대표적인 반인도적 국제범죄에 대한 국가책임의 회피수단에 불과한 것으로, 이미 1998년 유엔특별조사관인 맥두걸 보고서는 적절한 국제적 대표자로 구성된 새로운 행정기금의 설치를 주장했다. 셋째, 조약을 통한 법적 문제의 해결과 관련해 일본이 주장하는 1951년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한국의 당사국 지위를 배제했을 뿐만 아니라, 1965년 한·일청구권협정 역시 불법적인 식민지배와 그에 따른 책임문제를 전혀 다루지 않았다. 일본 정부의 주장은 궁여지책에 불과할 뿐이다. 이에 따라 일본을 비판하는 국가가 2008년의 5개국에서 올해 7개국으로 늘었다. 일본은 고령의 피해자들을 외면한 채 시간만 지연시킨다는 비난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게 됐다. 한국과 북한, 중국, 네덜란드, 코스타리카, 동티모르, 벨라루스 등 국가의 대표들은 이번 이사회에서 일본 정부가 법적 책임 인식, 피해자가 수용할 수 있는 사과와 배상, 피해자의 명예회복, 미래세대 교육을 위한 일본 교과서 기술, 국제사회와 인권조약기구의 권고 이행 등의 조치를 이행하라고 촉구했다. 그런데 현 노다 내각의 보수 회귀 조짐에 더해 더욱 우려스러운 것은 일본이 과거의 ‘사죄’마저도 부정하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집권 당시 고노 담화를 부정했던 일본 제1 야당의 아베 총재가 조만간 재집권하게 되면 역사교과서 검정기준으로 이웃국가를 배려한다는 근린제국조항을 포함한 미야자와 담화, 전후 50년을 맞아 식민지 지배와 침략에 대해 총체적인 사죄와 반성의 뜻을 표명한 무라야마 담화까지 모두 부정하겠다는 정책을 공언하고 있다. 일본 정부와 아베 총재는 제2차 세계대전 종전 40주년을 맞아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커 전 독일 대통령이 표명한 독일인의 자기 몰입에 대한 경구를 되새겨볼 필요가 있다. “과거에 눈감는 자는 현재에 대해서도 눈멀게 된다. 비인간성을 기억하려 하지 않는 자는 새로운 감염 위험에 놓이기도 쉽다.” 오늘날 유엔인권이사회 등 국제사회가 한목소리로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고 있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류 보편적 가치로서의 인간의 존엄성’이 보호받아야 한다는 의미이다. 일본 정부는 위안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인류의 보편적 정의와 양심으로 화답하기를 다시 한번 진심으로 촉구한다.
  • [미주통신] 당선 홈피까지 다 만들었는데…롬니 충격

    [미주통신] 당선 홈피까지 다 만들었는데…롬니 충격

    지난 11월 6일 시행된 미국 대통령선거에서 낙선한 미트 롬니 공화당 후보가 상상 이상의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고 9일(이하 현지시각) 미 언론들이 보도했다. 미 CBS 방송 등에 의하면 롬니는 오하이오주에서 패배하기 시작하면서 당선의 가능성이 거의 없어질 때까지도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내 패배가 기정사실로 되자 그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축하 전화를 걸었고 옆에 있던 롬니의 부인 앤은 끝내 울음을 터뜨렸다고 방송은 전했다. 그의 측근들은 “누구도 이렇게 패배할 줄은 몰랐다. 마치 한방(sucker punch)을 얻어맞은 느낌이었다.”고 말하면서 “롬니 역시 완전히 충격에 빠졌었다.”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했다. 한편, 이러한 당시의 분위기를 반영하듯 롬니 진영은 당선에 대비해 취임 연설문과 향후 예비 내각 및 정책 등에 관한 내용을 담은 홈페이지를 준비했던 것으로 알려져 화제에 오르고 있다. ‘대통령-당선(President-Elect)’이라는 제목으로 시작되는 이 사이트는 한때 잠시 일반에게 공개되었다가 롬니가 낙선하자 폐쇄되었으나, 이를 캡처한 정치 관련 사이트에 다시 등장하면서 시민의 입방아에 오르내리고 있다. 이 사이트를 기획한 회사의 제이슨 테린 대표는 “그것은 그냥 작은 하나의 프로젝트였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들은 롬니가 취임 첫날 이른바 ‘오바마케어’로 대표되는 오바마 정책을 철회시키는 명령을 발동한다는 등 많은 내용을 담고 있었다고 전했다. 다니엘 김 미국 통신원 danielkim.ok@gmail.com
  • 朴 “국회의원 후보선출 경선 법제화”

    朴 “국회의원 후보선출 경선 법제화”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와 안대희 정치쇄신특별위원장이 6일 오전 발표 전까지 수위를 놓고 밀고 당겼던 ‘박근혜표 정치 쇄신안’은 국민의 눈높이와 실천 가능성을 절충한 방안으로 볼 수 있다. 국민 눈높이와 ‘안철수 현상’을 고려하면 더 강력한 개혁안을 내놓아야 하지만 실천을 담보하자니 ‘깜짝 카드’를 제시할 수 없는 현실적 한계가 있었다는 얘기다. 그렇다 보니 내용 파괴력에서는 약하고 오히려 시간을 끌다가 정치 개혁 주도권을 야권에 빼앗긴 ‘타이밍 실기’만 더 도드라진다는 지적이 나온다. 특히 야권 단일화의 ‘맞불 카드’로 만지작거렸던 개헌론도 ‘집권 후 4년 중임제 논의’라는 원칙만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이재오 의원은 “분권 없는 4년 중임제는 임기 연장이며 장기 집권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박 후보는 이날 오전 서울 여의도 당사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정치가 실망스럽다고 해도 정치를 없앨 수 없다.”면서 “(정치 쇄신은) 정치를 복원하고 정치가 역할을 잘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며 안철수 무소속 대선 후보와의 차별을 시도했다. 박 후보는 정치 쇄신의 큰 줄기로 정당 개혁과 국회 개혁, 민주적 국정 운영, 깨끗한 정부를 꼽았다. 정당 개혁은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 후보의 ‘낡은 정치’ 공격에 대한 반론 성격이 엿보인다. 박 후보는 국회의원(지역구) 후보를 여야가 동시에 국민 참여 경선으로 선출하는 방안을 법제화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야권의 ‘늑장 후보’ 선출을 원천적으로 차단하기 위해 대선 후보는 선거일로부터 4개월 전, 국회의원 후보는 2개월 전까지 확정하는 내용을 담았다. 기득권 내려놓기에 대한 국민적 요구도 일정 부분 수용했다. 기초자치단체장과 기초의원의 정당 공천 폐지, 국회의원의 면책특권 제한과 불체포 특권 폐지를 추진하기로 했다. 그러나 정치쇄신특위가 지난달 25일 제안한 것으로 알려진 중앙당의 권한 축소와 검찰, 국세청 등 권력기관의 특권 폐지에 관한 내용 등이 쇄신안에 빠져 기득권 내려놓기에 대한 개혁 의지가 다소 약한 것 아니냐는 지적이 나온다. 정치권의 핫이슈로 떠오른 개헌에 대해 박 후보는 “대통령 선거용의 정략적 접근이나 내용과 결론을 미리 정해놓은 시한부 추진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자 친이(친이명박)계 비주류인 이 의원은 이날 트위터에 쓴 글에서 “정당과 국회, 선거, 검찰, 경제 등의 개혁은 현행 헌법으로는 불가하다. 현행 헌법은 5년 단임제만 빼면 유신헌법의 아류”라고 주장했다. 그는 “대통령에게 집중된 권력을 내려놓는 권력 구조의 변화가 시대의 흐름”이라면서 “(박 후보와 내가) 갈수록 생각의 차이가 많아진다.”고도 했다. 김종인 국민행복추진위원장도 JTBC에 출연해 “1987년 이후 25년이 지났는데 근본적으로 내각제로 간다거나 하면 모를까 대통령제에서 단임제를 4년 중임제로 가자는 것 자체는 별로 큰 의미가 없다고 본다.”고 주장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seoul.co.kr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2002년 실무협상 이후 ·鄭 담판…2012년 文·安 직접 나서 협상 개시

    야권 단일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 간 ‘룰의 전쟁’이 시작됐다. 양측은 2002년 16대 대선 당시 노무현 민주당 대선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의 극적인 단일화로 ‘이회창 대세론’을 꺾었던 때를 상기하며 방식과 시기에 따른 유불리를 계산하고 있다. 2012년 대선 야권 후보 단일화 협상은 2002년 당시와 시작부터 다르다. 2002년에는 양 진영의 대리인들이 먼저 협상을 시작한 뒤 후보들이 최종적으로 회동하고 합의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례적으로 후보들이 전격적으로 협상을 개시하고 실무 협상이 뒤따르는 형태다. 문 후보 캠프 관계자는 “실무 기구가 만들어지더라도 결국 규칙을 최종 결정하는 것은 후보들의 결단에 달려 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2002년에는 TV토론 뒤 100%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 후보에 비해 지지율이 뒤처져 있었음에도 유리한 당내 경선 방식을 포기하고 전격적으로 여론조사 방식을 수용한 결과였다. 하지만 2012년에는 상황도 다르고 따질 것도 더 많다. 우선 야권 단일화를 새누리당 박근혜 후보를 이길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기정사실화하고 후보 등록일(11월 25~26일)까지 단일화를 마쳐야 한다는 공감대가 있다. 협상이 지지부진해 등록일이 가까워질수록 손쉬운 여론조사 방식으로 귀결될 가능성이 높다. 문 후보 측은 여론조사 방식도 수용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국민 경선 방식이 어떤 형식으로든지 포함돼야 한다는 의지도 강하다. 후보 간 담판 방식이 마지막으로 거론된다. 1997년 15대 대선의 김대중·김종필(DJP) 연합 방식이다. 당시에는 내각제를 고리로 한 두 세력 간 지분 나누기 성격이 강했다. 이번에도 책임총리제를 바탕으로 한 권력분점을 고리로 전격적인 담판이 성사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황비웅기자 stylist@seoul.co.kr
  • 조선 명현 21인이 대한민국 내각을 다스린다면…

    대통령 선거가 얼마 남지 않았다. 누구를 뽑아야 할까. 아마 아직도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있는 유권자가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대통령이 돼야 할까. 정권이 바뀔 때, 아니 대통령 선거가 있을 때마다 부르짖는 것이 ‘개혁’이다. 부패와 무능을 개혁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 의지를 주창한다. 그런데 어떤가. 어느새 대한민국에서는 예의와 도덕이 사라지고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남을 배려하는 대신 나만 잘 살면 된다는 인식이 팽배해졌다. 고위층으로 갈수록 문제가 더욱 심각해진다. 정권이 바뀌어도 정경유착, 전관예우, 낙하산 인사의 병폐는 계속되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잘못을 인지하면서도 고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신간 ‘세종, 대한민국 대통령이 되다’(신봉승 지음, 청아출판사 펴냄)는 오늘날 우리나라 지도자의 덕목으로 부패와 무능을 개혁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고자 하는 의지가 가장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전문적인 지식보다는 역사 인식을 몸에 간직하고 인문 지식을 두루 갖춘 지도자, 사람을 사람답게 쓸 지식인이 절실하다고 설파한다. 실무는 전문가들이 하면 된다. 하지만 전문가를 올바르게 다스리는 것은 양식과 인성을 두루 갖춘 지식인이어야 하고 이런 지식인들이 대통령과 장관, 공무원으로 일해야 나라가 제대로 굴러간다고 강조한다. 하여 저자는 지금 이 시점에서 조선 왕조의 명현들은 무엇을 익히고 어떻게 생활하고 정치를 했는지 알아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지금 대통령, 장관, 고위 공직자들에게 소중한 가르침이 될 것이며 국민의 정치 인식 향상에도 큰 도움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조선왕조와 대한민국 정부를 비교하는 대목이 흥미롭다. 조선왕조가 519년의 장구한 세월 동안 왕권을 유지하면서 27명의 임금이 왕좌를 오르내렸고 그 임금을 보좌한 고위 공직자는 600~700명으로 추산된다. 이 중에는 명현의 이름을 만세에 남긴 사람도 있고 사리사욕만 일삼았던 간신도배들도 있다. 저자는 이들 중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맡아서 다스려야 할 대통령과 각급 장관들을 뽑았다. 선정 기준은 민족의 큰 유산인 ‘조선왕조실록’에 기초를 두었다. 식견과 표준을 갖춘 조선 명현 21명을 대한민국 내각으로 불러들인다. 행정부의 수장으로는 조선 최고의 성군 세종, 국무총리로는 선조-광해군-인조 시기의 명신 오리 이원익, 특임장관으로는 백사 이항복을 임명했다. 이 외에도 퇴계 이황(기획재정부 장관), 면암 최익현(법무부 장관), 중봉 조헌(국방부 장관), 율곡 이이(행정안전부 장관), 연암 박지원(문화체육관광부 장관), 다산 정약용(지식경제부 장관), 담헌 홍대용(국토해양부 장관), 정암 조광조(검찰총장) 등 우리에게 익숙한 지식인들이 등장한다. 저자가 꿈꾸는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 지식인이 솔선수범, 실천궁행하여 다스리는 이상적인 조직이다. 1만 6000원. 김문 선임기자 km@seoul.co.kr
  • 佛각료 38명 성평등교육 불려간다

    佛각료 38명 성평등교육 불려간다

    프랑스 장관들이 줄지어 성평등 교육에 불려 가고 있다. 나라를 구한 여전사 잔다르크, 여성 사상가 시몬 드 보부아르 등 ‘페미니스트 아이콘’들을 배출한 프랑스. 지난 5월 사상 처음으로 남녀 동수의 ‘성평등 내각’을 꾸린 프랑스에서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佛총리 45분 강의 ‘필참’ 엄명 이달 초 스테판 르폴 농업장관의 망언(?)이 장관 성평등 교육의 빌미를 제공했다. 르폴 장관은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와의 인터뷰에서 여성들은 전문적인 일에 적합한 두뇌를 지니지 못했다는 취지의 발언을 해 공분을 샀다. 정확한 코멘트는 “우리 업무는 매우 전문적이지만 최대한 많은 여성들을 승진시키려 한다.”였다. 이에 장마르크 에로 총리가 결단을 내렸다. 성평등부에 각료들을 대상으로 한 성차별 방지 교육을 마련하라고 특단의 지시를 내린 것이다. ‘성평등 감수성 기르기’라는 이름으로 회당 45분간 진행되는 이 연속 강좌는 이미 ‘만원’이다. 38명의 장관 모두가 등록을 했거나 등록 절차를 밟고 있다고 AP통신이 30일(현지시간) 보도했다. 미셸 사팽 노동장관, 크리스티안 토비라 법무장관 등 10여명의 장관들은 벌써 교육을 받았다. 이 강의에서 장관들은 정치적인 의사소통 과정에서 성차별적 고정관념을 피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성 불평등을 가려내는 훈련을 받게 된다. 프랑스 내 성불평등 실태를 보여주는 통계 등을 동원해 성에 대한 관념이 유년기 때부터 어떻게 고착화하는지도 보여준다. 강의 기획자인 카롤린 드 하스는 프랑스 방송에 등장하는 정치인 80%가 남성이라는 사실을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경계하지 않으면 불평등은 생겨나게 돼 있다. ‘프랑스가 양성평등을 이뤘다’는 ‘착각’을 깨고 싶다.”고 말했다. 장관들에 대한 성평등 교육은 고위직 남성들이 여성 동료·부하직원을 무시하거나 추근대는 관행과 더불어 프랑스 정계에서 일상적으로 이뤄져온 성차별적 언행을 뿌리 뽑으려는 노력으로 평가받고 있다. 실제 지난 7월에는 세실 뒤플로 주택장관이 꽃무늬 드레스를 입고 업무보고에 참석하자 남성 의원들이 휘파람을 불며 환호를 보내 언론의 눈총을 받았다. 지난해 갖가지 성추문으로 낙마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는 여성들을 성희롱 대상으로 전락시켰다는 비난에 휩싸였다. 결국 지난 8월 새 성희롱방지법 제정으로까지 이어졌다. 프랑스 시민들은 정부의 용단을 반기고 있다. 파리 시민 니콜레트 코스트(33)는 “자랑스럽진 않지만 이런 교육이 이뤄진다는 건 바람직한 일”이라고 말했다. ●“분단국에서 여성리더십은 시기상조” 발언 논란 프랑스의 이번 조치는 지도층 인사들의 성차별·성희롱 언행이 위험 수위에 이른 국내에도 시사하는 바가 크다. 실제 지난 6월 이재오 새누리당 의원이 “분단국가에서 여성 리더십은 시기상조”라고 말해 여론의 도마에 오르기도 했다. 이수경 한국여성정책연구원 평등문화정책센터장은 “프랑스의 예는 정치 지도자의 결단으로 성평등 개념에 대한 인식을 끌어올릴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 말했다. 이 센터장은 “국내 일부 의원들도 성희롱, 성차별 발언으로 물의를 빚는 등 올바른 성평등 개념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면서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여성가족부 산하 양성평등교육진흥원에서 국회의원 등을 교육대상에 포함시키려 하고 있지만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말했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이춘규 선임기자의 대선 풍향계] 한쪽 후보의 극적 양보 기대감 속 “이제나 저제나” 국민 단일화 피로감 “역사 죄인 되지 마라” 87년 교훈

    문재인 민주통합당 대선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의 야권후보 단일화 성사는 정권교체라는 측면에서 당연시되는 분위기가 있다. 단일화를 전제로 시기와 방법이 구체적으로 나돌고 있는 이유다. 그런데 누구로 단일화가 되더라도 최소 한 자릿수에서 최대 30%까지 지지표가 이탈할 수 있다는 여론조사가 나오는 등 단일화 만능론을 무색하게 하거나 단일화 무산 가능성도 본격 제기되고 있다. 단일화 무산론은 새누리당에서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박근혜 새누리당 후보와 문·안 후보의 빅3 대결론이 대표적이다. 범야권에서는 여전히 단일화가 당연시되고 있지만 “단일화 무산 가능성이 절반을 넘는다.”는 분석은 물론 70% 이상이라는 주장까지 나온다. 단일화가 난제 중의 난제임을 말해 준다. 역사적으로도 단일화는 난제였다. 1987년 대통령선거 때는 야권의 김영삼·김대중 후보가 재야의 거센 단일화 압박에도 불구하고 ‘3자 필승론’이 나오면서 무산됐다. 그 결과 노태우 민주정의당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됐다. 1997년 대선 때는 김대중 국민회의 후보와 김종필 자유민주연합 총재가 담판을 통해 단일화에 성공, 김대중 후보가 당선됐다. 내각제 개헌을 매개로 했지만 끝내 내각제는 무산됐다. 이인제 국민신당 후보가 여권표를 잠식했지만 불과 39만표 차이였다. 2002년 대선 때는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가 여론조사를 통해 단일화를 성사시켰다. 선거 전날 정 후보가 단일화 파기 선언을 해버렸지만 진보진영의 표 결집 현상으로 노 후보가 간신히 이겼다. 2007년에는 정동영 대통합민주신당 후보와 문국현 창조한국당 후보가 막판까지 티격태격하다 단일화가 무산됐다. 이명박 한나라당 후보가 초강세여서 단일화를 해도 승리 가능성이 적다는 판단이 작용했다는 평이다. 돌이켜보면 지지율이나 세력 차이가 크게 날 때 단일화는 성공했다. 1997년 대선이 대표적인 예다. 지지율이나 세가 팽팽하거나 단일화 효용이 없을 때는 실패했다. 1987년과 2007년의 경우다. 지지율이 팽팽했지만 세력 차이가 확연했던 2002년에는 단일화에 성공한 듯했지만 최종적으로 결렬됐다. 단일화가 어렵다는 방증이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문·안 후보의 단일화 여건은 좋지 않아 보인다. 문·안 후보의 지지율은 팽팽하다. 세력 차이도 크지 않아 보인다. 200명 가깝게 팽창한 안 후보 캠프도 정당 수준으로 커졌다. 후보가 자진해서 양보하려 해도 어려운 구조가 돼 버렸다. 1987년 당시 재야세력은 “역사의 죄인이 되지 말라.”며 양 김씨를 압박했지만 단일화에 실패했다. 상대를 주저앉히려 하기보다는 절박성을 갖고 단일화에 임하라는 목소리가 높아지는 배경이다. 올해도 25년 전처럼 재야를 중심으로 외부 압박이 고조되고 있다. 국민들의 단일화 피로감이 높아지는 등 상황도 점차 엄혹해지고 있다. 한 후보의 극적인 양보를 기대하는 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두 후보 진영이 단일화 문제를 냉정하게 되짚어봐야 할 때 같다. taein@seoul.co.kr
  •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선택! 역사를 갈랐다] (32) 개항초 희비 가른 ‘소금’

    ●소금의 격동기 : 쓰러진 사람과 뜬 사람 소금이 넘치는 시대에 사는 우리는 소금의 중요성을 잘 모른다. 그러나 60여년 전만 하더라도 소금 1석에 쌀 1석이 맞교환되던 때가 있었다. 소금을 구하기가 어렵고 비싸다 보니 소금에 울고 소금에 웃는 자들이 생겨났다. 특히 구한말은 소금 시장을 둘러싸고 극한 변동이 있었던 시기였다. 개항 이후 일본의 소금과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 밀려왔고, 일제는 우리나라 소금을 재원으로 하여 식민지 경영 자금을 확보하려 하였다. 이러한 염업사의 격동기는 온몸으로 저항하다 쓰러진 사람과 시류에 편승하여 뜬 사람을 갈라놓았다. 삶의 선택이 자유로운 만큼 역사의 평가가 냉혹하다는 사실을 그들은 과연 알았을까. ●이토 통감 마차 가로막은 꼿꼿한 소금장수 김두원 1907년 10월 15일자 ‘대한매일신보’는 다음과 같은 기사를 싣고 있다. “원산항에 사는 김두원씨가 일인에게 소금값을 찾으려고 여러 해를 호소하더니 일전에 경시청에 잡히어 갇혔다더라.” 소금값을 받으려는 김두원을 경시청에서 잡아 가둔 까닭은 무엇인가? 김두원은 비록 항일운동가는 아니었지만, 일제의 블랙리스트에 오른 인물이었다. 좀처럼 변하지 않고 단단한 육각형의 결정체인 소금처럼 그는 일관되고 굽힘 없이 일제에 저항했기 때문이다. 그 저항 방식은 조선을 집어삼키려는 핵심 인물을 찾아서 호통을 치는 일이었다. 구속되기 불과 3개월 전인 7월 10일에도 그는 오른손에는 직소(직접 호소한다)라고 쓴 종이를, 왼손에는 편지를 들고 초대 통감인 이토 히로부미의 마차 앞을 막았다. 일곱 번이나 시도를 하였지만, 한국통치를 위한 일제의 우두머리 이토 히로부미와의 직접 대화는 번번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다. 환갑을 몇 해 앞둔 노인을 이렇게 꼿꼿한 집념의 사나이로 만든 자는 일본인 사기꾼이었다. 때는 8년 전인 1899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함경남도 원산에서 소금을 대규모로 매매하는 거상이었다. 함경도에도 영흥·문천과 같이 소금 생산지가 있었지만, 원산의 거상들은 경상도를 넘나들었다. 강원도와 영남 일대를 통틀어 최고의 소금 생산지는 경상도의 김해와 울산이었다. 김두원은 이곳에서 소금을 사서 원산에서 파는 방식으로 엄청난 차익을 남겼다. 당대의 소금 시장에서는 파는 자나 사는 자 모두가 신뢰를 기반으로 하였다. 믿음이 한 번 깨진 사람은 다시 상대하지 않았으니 소금 매매는 정말 짜디 짠 상거래였던 것이다. 이런 신뢰의 공동체에 금이 가기 시작한 때는 개항 이후였다. 개항 이후로 일제의 전오염(우리나라의 자염처럼 끓여서 만드는 소금)이 부산과 원산 등 개항지로 유입되었고, 일본인 상인들도 조선의 소금 시장에 직접 나섰다. 속칭 포대가리가 생긴 것도 이때였다. 일본인 상인들은 간수가 많은 일본의 저질 소금을 조선의 가마니에 담은 뒤에 조선 소금이라 속여 팔았다. 이런 일본인들을 믿은 것은 김두원의 큰 실수였다. 1899년 5월에도 김두원은 동해안과 낙동강을 오가면서 소금을 매입하여 한 포구에 모아두었다. 이렇게 모은 소금이 자그마치 1088석이었다. 당시 시세로 따지면 약 5100원이 넘는 어마어마한 가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기무라라는 성을 가진 일본인 형제가 객줏집에 머문 김두원에게 다가섰다. 고기 절이는 데 소금이 급하게 필요하여 소금값을 후하게 줄 테니 자신들의 배에 소금을 싣고 울릉도까지 가자고 속였다. 보름간의 항해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하자 기무라 형제는 김두원에게 소금 짐은 다음 날 하역하고 뭍에 내려 푹 쉬라고 하였다. 순진했던 김두원이 깊은 잠에 든 사이에 사기꾼 형제는 배를 띄워 유유히 동해를 건너 시무라 현으로 사라졌다. 희대의 ‘소금 먹튀’ 사건에 김두원은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분통이 터져 참을 수 없었던 그는 조선의 외부대신에게 청원해 보았지만 이미 쇠멸해 가는 조선 정부는 자국민의 피해 보상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후 김두원은 직접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다. 하지만, 일본 정부는 사기꾼들이 이미 징역을 살고 있고, 소금값을 물어낼 형편이 못 된다는, 어이없는 답변을 내놓았다. 분기탱천한 김두원은 1903년 일본 공사인 하야시를 직접 찾아가서 소금값을 내놓으라고 고성을 질렀다. 인력거를 타고 가다가 놀란 하야시는 그만 종로의 땅바닥에 처박히고 말았다. 이렇게 김두원은 일본 공사뿐만 아니라 조선 통감, 일본 총리, 중의원을 상대로 청원하고 투쟁하였지만, 일제는 소금값을 지불해주는 것이 아니라 구휼금 얼마를 주겠다며 그를 회유하려 하였다. 김두원에게 불쌍한 사람을 돕는다는 구휼금은 가당치도 않은 것이었다. 그는 경시청 총감에게 유명한 말을 남기고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 선박이 홍주군 바윗돌에 부딪혀 파손된 것을 그 바윗돌이 조선에 있다 하여 우리나라 정부로부터 배상금 3000원을 받아가고, 공주군에 있던 일본인이 조선의 군인과 시비하다 구타를 당하였다고 치료비로 5000원을 받아간 즉, 전례와 같이 나의 소금값도 일본 정부에서 물어내는 일이 당연하다.” 참으로 논리정연하고, 당당한 말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장장 20여년에 걸친 배상 투쟁에도 불구하고, 그가 일본 정부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없다. 그가 정당히 받아야 할 소금값은 식민지의 역사 속에서 ‘소금이 물에 녹듯이’ 사라져 갔을 것으로 보인다. ●탁지부 대신 고영희, 소금세 높여 염민에 큰 고통 1907년 10월 김두원이 영문도 모른 채 경시청에 잡혀간 이유는 일본 황태자의 조선 방문 때문이었다. 일제는 언제나 그랬듯이 김두원이 황태자의 앞을 가로막고 ‘소금값 배상하라.’고 외칠 것이라 여겼다. 김두원이 일제에 의하여 불법 구금된 동안, 일본 황태자를 극진히 모시고 환영행사를 주관한 자가 있었으니 바로 탁지부 대신 고영희이다. 1849년생인 고영희와 김두원은 서로 나이도 엇비슷했으나 황태자 방문 앞에서 전혀 다른, 반대편의 삶에 서 있었다. 차가운 유치장에서 지내야 했던 김두원에게 그해 10월은 지옥과 같은 반면, 황태자 방문 행사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일제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旭日大授章)까지 받은 고영희에게는 천국과 같았다. 1867년 역과에 합격한 고영희는 일제의 부상으로 호기를 맞았다. 1876년 김기수 수신사 일행으로서 일본어 통역을 맡아 일본을 시찰한 이후로 그는 순탄한 등용의 길을 걸었다. 1885년 연천 현감에서 사직하면서 잠시 가시밭을 만나는 듯하였으나 1895년 주일공사로 화려하게 복귀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고관대작의 지위를 한껏 누렸다. 특히 국가의 재정을 담당하는 탁지부 관리로서 승승장구하였다. 1907년 5월에 출범된 이완용 내각에서 국가 재정을 총괄하는 탁지부 대신에 임명된 것도 그간 쌓아온 탁지부 스펙 때문이었다. 탁지부 대신인 고영희의 주요 임무는 일제가 식민지 재정을 수립하기 위하여 파견한 고문들을 충실히 돕는 일이었다. 그중 하나가 조선의 소금을 가지고 식민지 경영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일이었다. 1907년 9월 22일자 ‘대한매일신보’를 보면 다음과 같은 기사가 있다. “명일에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대신 송병준, 내부대신 임선준, 탁지대신 고영희 4대신이 인천 주안리에 나가서 소금 굽는 마당을 시찰한다더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졌던 친일파 4대신이 당시 한적한 어촌인 인천 주안리에 행차하는 것은 무슨 이유일까? 이 행사를 주관한 자는 탁지부의 고영희와 탁지부 소속의 재정고문이었던 메가타 다네타로였다. 1907년 우리나라의 인천 주안에는 역사상 처음으로 천일염 시험장이 건설되었다. 수천년간 바닷물을 끓여서 소금을 생산해 왔던 조선에서 바람과 햇볕으로 결정되는 천일염업의 등장은 획기적 사건이었다. 그런데 천일염 시험장을 건설한 내막에는 ‘불편한 진실’이 깔렸었다. 일제가 조선에서 식민지 건설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 재원이었다. 일제는 자국에서 담배, 소금 등의 전매제도를 통해서 침략전쟁의 군비를 마련했고, 식민지 타이완에서도 아편, 소금 등을 전매시켜서 재원을 확보했다. 그런데 이렇게 상품을 전매하여 톡톡히 재미를 본 일제에 늘 위협적인 존재가 있었으니 바로 동아시아를 휘젓고 다니는 청나라의 값싼 천일염이었다. 중국산 천일염에 대항하는 방법은 천혜의 갯벌이 깔린 조선의 서해안에서 직접 천일염을 생산하는 길밖에 없었다. 염화나트륨 함유량이 높은 천일염은 화학공업과 무기산업의 원료가 되었으므로 군사대국을 지향하는 일제에는 반드시 필요한 재료였다. 이때 고영희와 메가타 다네타로는 서로 합심하여 주안에 최초의 천일염전 시험장을 건설함으로써 일제의 고민을 해결해 준 것이다. 또 하나, 고영희는 일제의 의도대로 충실히 소금세를 걷어줌으로써 재원 확보에 도움을 주었다. 일제는 소금세가 궁내부에 귀속되어 왕실의 금고로 들어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조선의 금고를 빼앗기 위해서 먼저 왕실의 금고에 들어가는 소금세를 국가의 금고로 들어가게 했다. 소금세를 많이 매기기 위하여 탁지부를 시켜 염세 규정도 치밀하고 까다롭게 바꾸어 놓았다. 이런 상황에서 고영희의 취임은 일제에는 희소식이었지만 소금 생산자인 염민들에게 큰 악재였다. 소금세가 갑자기 늘어나자 여기저기서 백성의 시위가 일어났다. 일본 순사들이 염민들을 잡아들이자 대규모 시위가 뒤따랐고, 이내 일본 군인들의 총칼 진압이 시작되었다. 일제와 탁지부의 강압적 소금세 징수로 인하여 결국 수많은 백성들이 죽음을 당했다. ●매국노 고영희 후손, 친일재산 환수 반환소송 나서 고영희는 일제에 수많은 재원을 넘겨 준 덕에 한평생 영화를 누렸다. 탁지부 대신으로서 한일합병조약의 체결에 앞장선 그는 이후 중추원의 고문이 되어 매년 1600원의 연금을 받기도 했다. 1916년 고영희가 사망하자 일제가 준 자작 작위는 장남인 고희경에게 세습되었다. 고영희 집안이 대를 이어서 호의호식할 때 소금장수 김두원은 여전히 소금값을 받지 못하고 허망한 세월을 보내야 했다. 그런데 100여년의 세월이 흐른 지난해 뜬금없는 소식이 들려왔다. 고영희의 증손자가 국가의 친일재산 환수에 반발하여 반환소송을 냈다는 것이다. 반환 소송이라면 억울하게 1088석의 소금을 일인에게 강탈당한 김두원의 후손들이 일본 법정에 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역사 앞에 부끄러운 자는 떠들고, 당당한 자는 조용하니 세상은 정말 요지경이란 말인가. 유승훈(부산박물관 학예연구사)
  • [서울광장]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구본영 논설실장

    [서울광장]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구본영 논설실장

    문재인·안철수 두 대선후보가 가장 닮고 싶은 지도자로 미국의 32대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스벨트를 꼽고 있다. 반면 그의 친척뻘인 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우리에겐 비호감의 인물이다. 재임 시의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일본에 필리핀을 건드리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한반도 병탄을 모른 척한 탓이다. 하지만 그는 미국민의 대통령 평가에선 늘 상위권이다. 사우스다코타 주 러시모어 산에 ‘국부’ 격인 초대 워싱턴과 3대 제퍼슨, 그리고 노예해방을 이끈 16대 링컨과 함께 ‘큰바위 얼굴’로 새겨져 있지 않은가. 테디가 애칭인 그의 캐릭터는 퍽 이중적이었다. 호승심이 넘쳐 맹수 사냥광이었지만, 어린 곰을 쏘는 걸 거부한 여린 면모로 곰 인형 ‘테디 베어’의 주인공이 됐다. 러·일 전쟁 중재로 노벨평화상을 받았지만, 팽창주의 노선을 걸었다. 군사강국을 표방했지만, 가능한 한 실제로 무력을 쓰진 않았다. 외려 대화와 협상을 선호했다. “먼 길을 가려면 부드러운 말(言)과 큰 몽둥이를 들어라.”는 아프리카 속담을 즐겨 인용하면서. 그의 외교술이 소위 ‘큰 몽둥이 정책’(Big Stick Policy)으로 불린 이유다. 대선을 두 달도 채 남겨놓지 않은 지금. 한반도 주변 해역엔 격랑이 일고 있다. 북한 어선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벌써 몇 차례나 들락거렸다. 더욱이 어선마다 북한 해군이 승선해 있다는 얘기도 들린다. 며칠 전엔 우리 배타적경제수역(EEZ) 안에서 불법조업하던 중국 어부 중 한명이 해경에 흉기를 들고 저항하다가 고무탄에 맞아 사망했다. 독도와 센가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한·일, 중·일 갈등도 진행형이다. 그런데도 올 대선판에서 외교안보정책은 비인기상품이다. 과문한 탓인가. 경제민주화와 복지 확대와 같은 귀에 솔깃한 공약은 차고 넘치지만, 박근혜·문재인·안철수 세 후보가 구체적 안보 공약을 입에 올리는 것을 본 적이 없다. 기껏해야 세 후보가 이구동성으로 남북관계 개선에 전향적으로 나서겠다고 다짐하는 정도다. 그러나 어젠다(남북관계 개선)만 있고 이를 실현시킬 로드맵은 안 보이는 상황이다. 설마 경제 지원만 계속하면 어느 순간 북한이 폭압적 세습체제를 스스로 포기할 걸로 진짜 믿는 후보가 있을까? 동서고금의 경험칙으로 보아 헛된 꿈일 뿐이다. 어디 영국 체임벌린 내각의 유화 일변도 정책이 나치 독일의 발톱을 무디게 했던가. 오히려 독일의 공습을 받은 런던의 방공호에서 자신들의 오판을 자탄해야 했다. 중국 역사상 경제·문화 대국이었던 송(宋)을 보라. 요·금·원 등 변방국들을 상대로 돈으로 평화를 사려다 온갖 굴욕만 당하다 패망하지 않았는가. 멀리 볼 것도 없다. 퍼주기 논란이 일 정도로 북한에 강렬한 햇볕을 쪼였던 김대중 정부 때도 두 차례나 서해 교전이 벌어졌다. 북한 군함이 NLL을 침범하면서다. 노무현 정부와는 경협 이행 비용이 최대 100조원이 넘는다는 10·4선언을 체결하고도 북측은 NLL은 유엔이 제멋대로 그은 경계선이라 인정할 수 없다고 강변했다. 정작 유엔이 제해권을 완전 장악하고 있던, 정전협정 체결 당시엔 끽소리도 하지 않더니 말이다. 이런 사정을 뻔히 알면서도 남북공동어로수역을 만들기 위해 NLL을 포기해야 한다고? 혹여 어느 후보라도 경제적 반대급부만 제공하면 북한 세습정권이 순한 양으로 바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유권자가 아닌, 스스로를 속이는 짓이다. 평화통일로 가는 먼 길을 안전하게 걸으려면 남북 교류와 협력이 튼튼한 안보로 뒷받침되어야만 한다. 필자는 독일 통일 직후인 1990년대 초반 동서독 지역을 현지 취재했다. 당시 동독과의 교류와 경협 확대에 기반한, 서독 브란트 총리의 동방정책만이 통독의 견인차라는 견해가 그릇된 상식임을 깨달았다. 동방정책은 경제뿐 아니라 복지수준과 국방력에서도 압도적인 대 동독 우위를 추구한 아데나워 총리의 서방정책 기반 위에서만 주효했음을 실감했던 기억이 새롭다. kby7@seoul.co.kr
  • ‘야쿠자와 친분’ 日법무상 사임

    과거 폭력배와의 교제, 외국인으로부터 불법 정치 헌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나 퇴진 압력에 몰렸던 다나카 게이슈(74) 일본 법무상이 23일 사임했다. 다나카 법무상은 중국계 회사경영자로부터 2006∼2009년 모두 42만엔(약 580만원)의 정치 헌금을 받았으며, 30여년 전 폭력단 간부와 친분을 맺은 사실이 주간지 폭로로 드러났다. 그는 이 같은 추문이 공개되면서 야권은 물론 정권 내에서의 사임 압력이 커지자 지난 19일 각의에 출석하지 않고 병원에 입원했다가 22일 퇴원했다. 다나카 법무상은 노다 요시히코 총리의 3차 개각을 통해 지난 1일 취임했으며, 3주 만에 물러났다. 노다 내각에서 자질 시비에 따른 각료 사임은 지난해 9월 하치로 요시오 경제산업상 이후 두 번째다. 다나카 법무상의 사임으로 인사검증에 실패한 노다 총리의 리더십은 큰 타격을 받게 됐다. 지지율이 10%대로 추락한 노다 내각의 붕괴가 앞당겨질 악재로 작용할 전망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재야 단일화 훈수 백가쟁명

    재야의 단일화 훈수가 본격화되고 있다. 문재인 민주통합당 후보와 안철수 무소속 후보 간의 단일화 시기를 놓고 ‘대선 후보 등록일(11월 25~26일) 이전’ 시점을 기준으로 접점이 모색되는 가운데 권력구조 개편 등 큰 틀의 단일화 구상도 백가쟁명으로 쏟아지고 있다. 소설가 황석영씨는 23일 CBS라디오에서 “이원집정부제 등 대통령의 권력 분산을 매개로 단일화를 이뤄야 한다.”고 제기했다. 그는 “단일화하는 과정이 정치 개혁이고 정치 개혁을 하는 과정이 단일화가 돼 국민들에게 감동을 줘야 한다.”며 “정치 개혁에서 가장 중요한 내용은 대통령의 권력 분산으로, 이원집정부제 같은 얘기는 이미 나와 있다.”고 말했다. 대통령제와 내각제를 조합한 이원집정부제식 단일화 구상은 문재인·안철수의 연합정부론을 의미하며, 이는 두 후보에게 권력 분산을 실현할 수 있는 정치 개혁을 주문한 것으로 풀이된다. ‘헌법에 따라 대통령의 권한을 나누는 책임총리제’라는 문 후보의 주장과도 맥이 닿아 있다. 황씨는 “대통령 후보 등록일을 넘기면 볼썽사납다. 최소한 11월 중순까지는 단일화가 돼야 한다.”며 “(양측 간) 물밑 교감이 있다고 본다.”고 밝혔다. 이와 관련, 범재야 원로 모임인 ‘희망2013, 승리 2012’는 이번 주중 단일화를 촉구하는 입장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정치권 일각에서는 문 후보와 안 후보 진영 간의 신당 창당 등 정계개편 시나리오도 제기되고 있다. 앞서 박관용, 이한동, 김원기, 정대철 등 여야 원로 17명은 현재의 제왕적 대통령제를 4년 중임의 분권형 대통령제로 바꾸자며 대선 후보들에게 개헌 추진을 공식 요청한 바 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지지율 18%로 뚝… 日노다 내각 ‘흔들’

    지지율 18%로 뚝… 日노다 내각 ‘흔들’

    일본의 노다 요시히코 정권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져 붕괴 위기에 몰렸다. 22일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20∼21일 실시한 전국 전화 여론조사에서 노다 내각의 지지율은 18%에 그쳤다. 개각 직후인 지난 1∼2일 조사 때의 23%에 비해 5% 포인트 하락했다. 출범 직후인 지난해 9월 53%를 기록했던 지지율은 이후 지속적으로 추락, 결국 10%대를 기록했다. 이에 따라 노다 총리도 2007년 9월 후쿠다 야스오 총리부터 줄곧 반복돼 온 ‘정치적 리더십 위기→지지율 10%대 추락→수개월 내 퇴진’ 수순을 밟을지 주목된다. 일본에서 내각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졌다는 것은 정권이 위기 수역에 진입했음을 의미한다. 후쿠다 내각은 지지율이 20% 아래로 떨어진 뒤 4개월 만에 총사퇴했고, 아소 다로 내각은 지지율이 10%가 된 뒤 8개월 후,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은 지지율이 20% 밑으로 떨어진 지 6일 후, 간 나오토 내각은 약 2개월 후 총사퇴했다. 10%대의 지지율로 추락한 것은 민주당 대표 경선에서 재선에 승리한 노다 총리가 대대적인 개각을 단행했지만 국민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방증이다. 노다 총리가 지난 8월 야권과 ‘가까운 시일 내 총선’에 합의하고도 정권 연명에 급급해 이를 실천하지 않고 있는 데 대한 실망감 등이 지지율 하락을 부채질한 것으로 풀이된다. 노다 총리는 민주당의 지지율이 바닥인 상황에서 중의원을 해산하고 총선을 실시할 경우 참패가 불가피하다는 점 때문에 연내 해산을 꺼리며 시간끌기에 몰두하고 있다. 자민당과 공명당 등 야권은 노다 총리가 연내 중의원 해산 약속을 하지 않을 경우 오는 29일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올해 예산에 필수적인 특별공채법안(적자국채 발행법안) 등의 심의에 응하지 않겠다며 맞서고 있다. 이 때문에 마에하라 세이지 국가전략상 등을 중심으로 정권 내부에서도 연내 총선을 수용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 있지만 후지무라 오사무 관방장관은 22일 정례 브리핑에서 “마에하라 국가전략상의 개인적인 생각일 뿐”이라고 일축해 중의원 해산 시기는 여전히 오리무중인 상태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레바논 내전 재현 우려 총리 “테러 배후, 알아사드”

    레바논 정보 당국 수장을 숨지게 한 차량 폭탄 테러로 종파 갈등이 가열되면서 레바논 내전(1975~1990년)의 악몽이 되살아나고 있다. 나지브 미카티 레바논 총리와 야권 모두 이번 테러의 배후로 시리아의 바샤르 알아사드 정권을 지목하면서 양국 간 긴장도 고조될 태세다. 지난 19일(현지시간) 베이루트 아슈라피예에서 발생한 차량 폭탄테러 사망자 8명 가운데 1명인 알하산 경찰보안기구(ISF) 장군의 장례식이 21일 베이루트 ‘순교자 광장’에서 열렸다. 레바논 야권은 이날을 알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겨냥한 ‘분노의 날’로 정하고 자국과 시리아 정권의 퇴진을 요구하는 대규모 시위를 열었다. 레바논 북부 도시 트리폴리 출신인 알하산 장군은 레바논 인구의 30%를 차지하는 소수 수니파 출신 고위직 가운데 한 명으로, 그의 죽음은 시리아의 알라위파(시아파 분파) 정권을 지원하는 헤즈볼라 등 자국 내 시아파에 대한 수니파들의 분노를 촉발했다. 시위대는 이날 알하산 장군의 사망과 관련해 미카티 총리의 사임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과정에서 수백 명이 총리실 진입을 시도했고, 이를 저지하기 위해 보안군이 최루가스를 발사해 시위자 2명이 쓰러졌다고 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이번 테러의 배후로 시리아가 지목되는 이유는 알하산이 지난 8월 시리아 세력의 레바논 내 테러 계획을 적발했기 때문이다. 수사 과정에서 그는 지난달 시리아 출신 알리 맘루크 준장과 미셸 사마하 레바논 전 정보장관 등 알아사드 대통령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사들을 체포·기소했다. 그는 2005년 라피크 하리리 전 레바논 총리 암살 사건에 시리아와 헤즈볼라가 연루됐을 가능성도 조사해 왔다. 레바논 야권 지도자이자 하리리 전 총리의 아들인 사드는 전날 TV 성명을 통해 시리아 배후설을 주장하며 미카티 총리와 알아사드 정권의 퇴진을 촉구했다. 같은 날 긴급 내각회의를 마치고 기자회견을 연 미카티 총리도 알하산 암살은 그가 2개월 전 시리아의 테러 음모를 밝혀낸 것과 관련돼 있다는 의혹을 제기했다. 야권의 사퇴 요구에 대해서는 “합의된 정권을 이루기 위해 물러나고 싶지만 사태 해결을 위해 남아 달라는 미셸 술레이만 대통령의 요청을 받아들였다.”며 잔류 의사를 밝혔다. 정서린기자 rin@seoul.co.kr
  • “김정일 비밀금고 北 38호실 폐쇄”

    북한이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비밀자금을 관리해온 조직인 노동당 38호실과 마약과 무기, 천연자원 거래 등을 통해 외화벌이를 주도해온 조직인 노동당 39호실을 최근 없앴다고 교도통신이 18일 북한 문제에 정통한 소식통을 인용해 보도했다. 통신은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이 최근 내각에 권한을 집중시키는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이 같이 조치했다고 전했다. 내각의 역할을 강화해 경제를 살리고 주민의 생활수준을 개선하기 위한 조치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아베, 두달만에 또 야스쿠니 신사 참배

    일본의 대표적인 우익 정치인인 자민당의 아베 신조 총재가 17일 도조 히데키 등 제2차 세계대전 A급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차기 중의원(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승리할 가능성이 높아 아베 총재가 총리가 되면 한·일, 중·일 관계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전망이다. 아베 총재는 이날 저녁 야스쿠니신사의 추계대제(10월 17∼20일)에 맞춰 신사를 찾았다. 그는 참배 후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영령에 대해 자민당 총재로서 존경하는 마음을 밝히기 위해 참배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는 차기 총선거를 앞두고 지지기반인 보수층에 어필하려는 의도로 보인다. 그는 일본 종전기념일인 지난 8월 15일에도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했다. 아베 총재는 2006∼2007년 총리 재임 중에는 전임자인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의 참배 문제로 중·일 관계가 악화한 것을 의식해 야스쿠니신사를 찾지 않았다. 다만 춘계대제 때 ‘내각 총리대신’ 명의로 ‘마사카키’라는 신사용 공물을 바쳤다. 그는 고이즈미 내각의 관방장관이던 2006년 춘계대제 직전 참배한 적이 있다. 그는 차기 총리가 된 이후에도 참배할 것이냐는 질문에 “중·일, 한·일관계가 이런 상태인 만큼 말씀드리지 않는 편이 낫겠다.”고 답변을 피했다. 그러나 지난 9일 자민당 전국 간사장 회의에서 “지난 총리 임기 중에 야스쿠니신사를 참배하지 못한 것이 통한으로 남는다.”고 밝혀 총리 취임 시 참배를 할 수 있음을 시사했다. 도쿄 이종락특파원 jrlee@seoul.co.kr
  • [10월 유신 40년] “박정희, 3選개헌만 했더라면… 유신 때문에 독재자 된거요”

    [10월 유신 40년] “박정희, 3選개헌만 했더라면… 유신 때문에 독재자 된거요”

    17일은 고(故) 박정희 전 대통령이 장기집권을 위한 ‘10·17 비상조치’,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한 지 40년이 되는 날이다. 박정희 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저녁 7시를 기해 전국에 비상계엄령을 선포하고 국회를 해산했으며 일부 헌법조항의 효력을 정지시켰다. 그해 12월 27일에는 유신헌법(제4공화국 헌법)이 공포돼 유신 체제는 박 전 대통령이 1979년 10·26 사태로 사망할 때까지 7년 동안 유지됐다. 서울신문은 유신 40년에 즈음해 원로 헌법학자인 김철수 명지대 석좌교수 겸 서울대 명예교수로부터 유신 헌법에 대한 평가를 들어보고 유신 체제가 정치·경제·사회에 미친 영향, 유신 헌법의 내용 등을 짚어보는 기획을 마련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3선 개헌만 했더라도, 5·16 군사쿠데타만 일으켰더라도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을 텐데, 10월유신 때문에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 김철수(79) 명지대 석좌교수 겸 서울대 법대 명예교수는 16일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가진 서울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제3공화국 때는 언론계나 교수들이 상당히 바른 말을 많이 했고, 독재를 할 수 없었다.”면서 이렇게 말했다. 10월유신 전후로 중앙일보 논설위원을 겸직하고 있던 김 교수는 자신도 이런저런 비판을 많이 했다고 회상했다. ●통일주체국민회의는 ‘박수기관’ 1972년 11월 21일 국민투표로 채택한 유신헌법에 대해 김 교수는 “소위 권력의 인격화라는 명목으로 대통령의 독재가 행해졌고, 긴급조치에 의해 국민의 기본권이 많이 제약됐다.”고 평가했다. 유신헌법은 대통령의 지위를 대폭 강화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통령은 국회의원의 3분의1을 추천할 수 있고 국회해산권을 갖고 있다. 긴급조치권으로 국민의 기본권을 침해했으며, 제2·3공화국 헌법에서 천부인권설에 기초해 강화했던 기본권 규정에 법률 유보조항을 뒀다. 대통령은 간접선거로 선출하고 임기를 연장했다. 대신 국회의 권한은 축소·조정하고 국회 회기도 단축했다. 제2공화국의 헌법재판소를 없애고 명목상의 헌법위원회제도를 도입했다. 김 교수는 10월유신 헌법을 제정한 뒤 국민투표에 회부하기 전 헌법학 교수와 정치학 교수들이 총동원돼 선전전에 활용될 때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중립’을 지켰다. 1973년 1월에 대학 교재로 유신헌법이 포함된 ‘헌법학 개론’을 냈다가 초판을 몽땅 몰수당하고,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1주일 동안 수정할 것을 협박당했다. 이후 낸 수정 재판과 3판도 몰수당하는 등 고초를 겪었다. 문제의 ‘헌법학 개론’은 중앙정보부의 꼼꼼한 검열을 거쳐 수정 4판에서야 세상에 내보낼 수 있었다. 김 교수는 “박 대통령이 ‘헌법에 대해 개정 청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긴급조치를 발동하기 전이라 크게 비판하지도 않았는데 그렇게 핍박을 받았다.”면서 “그때 삭제했던 내용을 이번에 출간한 ‘헌법과 정치’(진원사 펴냄)에 모두 복원했다.”고 밝혔다. 당시 김 교수는 정부가 최고의 주권 기관이라고 자랑하던 통일주체국민회의에 대해 행정부의 ‘협찬기관’ ‘박수기관’이라고 썼고, 이런 정부 조직은 독재국가들인 타이완의 ‘국민대회’와 스페인의 ‘국민회의’, 아프가니스탄의 ‘국민대의회’와 같다고 평가했다(496쪽). 또 제4공화국의 대통령제에 대해서는 독재 체제인 타이완, 그리스 등과 비슷한 ‘현대판 군주제’라고 비판하고, 유신헌법이 규정하고 있는 대통령의 지위와 권한에 독재적 요소가 많다고 서술했다(316쪽). ●체제 비판엔 “北과 내통” 협박 김 교수는 “당시 중앙정보부는 ‘김 교수가 ‘현대판 군주제’라고 현 체제를 비판한 내용을 북한에서 논평하고 있다. 북한과 내통한 것 아니냐’고 ‘지랄’을 해대더라.”라고 원색적으로 표현했다. 그 뒤로도 김 교수는 이런 원색적인 표현을 여러 차례 썼는데, 가장 왕성하게 학문적으로 집필 활동을 해야 할 시기인 40대에 침묵을 강요당한 것에 대한 울분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올라온 것처럼 보였다. 김 교수의 이런 심사는 신간 ‘헌법과 정치’ 머리말에도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긴급조치, 국민 기본권 제약 김 교수는 “뒤늦게 유신시대의 위헌적 행위에 대해 비판하려고 하니, 편안하게 죽지도 못한 대통령을 너무 욕되게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 못 했다.”면서 “또한 유신 때는 왜 아무 말도 못 하고 가만히 있다가 지금에 와서 몰수됐던 책의 내용을 공개하면서 초를 치고 있느냐고 비판받을까 걱정된다.”고 덧붙였다. 그래도 유신헌법 제53조의 ‘국가의 안전보장 또는 공공의 안녕 질서가 중대한 위협을 받거나 받을 우려가 있어 신속한 조치가 필요 있다고 판단될 때는 내정·외교·국방·경제·재정·사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필요한 긴급조치를 할 수 있다.’라는 긴급조치법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비판했다(673~679쪽). 김 교수는 “독일에서 공부하다 5·16 직전에 귀국했는데, 거의 매일 쿠데타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서울에 널리 퍼졌고, 정부청사 관료들은 쿠데타를 기다리며 자리를 비우기 일쑤였던 만큼 5·16은 불가피했다는 평가를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박통이 3선 개헌만 하고, 5·16만 했더라면 위대한 대통령으로 평가받았을 것인데 유신 때문에 독재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말했다. 그는 5·16 군사혁명정부 시절은 1년 동안 헌법이 부재한 상황이었는데, 당시 혁명위원회가 만든 ‘국가재건비상조치법’에서 ‘제2공화국의 헌법을 계승한다.’고 공표했지만 내각제도 없애고, 국민의 기본권을 완전히 억압했으니 군사독재를 했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는 “이어 박 대통령이 10월 유신을 하려고 국회를 해산하고, 입법부 대신 비상국무회의에서 유신헌법을 만들어 공고한 뒤 국민투표에 부쳐 93% 찬성으로 통과시킨 것은 초헌법적인 불법행위”라고 비판했다. 문제의 ‘헌법학 개론’에 정부가 홍보한 대로 93%의 국민 지지로 통과됐다고 서술한 것에 대해서도 중앙정보부는 “야유하는 것이냐?”고 트집을 잡았다고 회상했다. 김 교수는 “박정희 대통령은 유신헌법을 통해 우리나라를 부흥시키고 통일시킨다는 명분은 있었겠지만, 핵 연구소를 대전에 만드는 등 미국 정부와 갈등하고, 부마학생운동 등에 대해 폭력적으로 대응하자 김재규가 헌법 개정 준비를 했던 것 아니겠느냐.”고 덧붙였다. ●‘김신조·실미도’에 정권 위기감 김 교수는 “당시 김재규의 중앙정보부 특별보좌관이 대학 동기(서울대 법대)인데, 자꾸 만나자고 한 뒤 헌법 이야기를 많이 했었기 때문에 헌법 개정안을 준비하고 있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면서 “12·12 이후 가담했던 사람들이 모두 처형돼서 그 기록과 흔적이 모두 사라진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김재규는 박 대통령을 저격한 일에 대해 재판 과정에서 ‘유신의 심장을 쏘면서 유신시대를 없애겠다’는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10·26 이후 우리가 잘했더라면 민주화가 더 빨리 오지 않았겠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고 말했다. 그는 박 전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이 정상적인 정신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는 말도 했다. 김 교수는 “1968년 1월 김신조 사건으로 암살 위기를 겪고, 이에 보복하겠다고 만든 북파 공작원들이 문제가 된 1971년 실미도 사건도 터지고 해서 정권 차원에서 위기감이 극대화됐을 것이다. 북한 김일성과의 대립 관계에서 승리하고 권력을 유지하려는 생각들이 10월유신에 많이 반영됐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학문적으로 ‘입헌정치’란 헌법이라는 국가계약의 문서로 정치를 규율하겠다는 것인데 대한민국의 헌법은 정치를 규제하지 못하고, 정치가 헌법을 유린하고 새로 제정하는 악순환을 거듭하며 한국적 비극을 낳고 있다고 김 교수는 평가했다. 제헌헌법과 제6공화국 헌법을 제외하고 유신헌법을 포함해 많은 헌법 개정안이 국민의 기본권 보장 규범으로 기능하지 않고 집권자의 지배 도구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헌법에 위배되는 국가변란죄나 국헌문란죄를 엄격하게 처벌하지 않은 관행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 “유신헌법은 유신헌법 안에서는 합헌이지만, 입헌주의 정신을 감안하면 유신헌법은 국민의 기본권을 국회가 아닌 대통령이 만든 긴급조치에 의해 침해하기 때문에 위헌”이라고 강조했다. ●20살 박근혜가 유신 알았겠나 10월유신에 대한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 후보의 진정한 사과가 필요하냐는 질문에 김 교수는 “그 무렵 20살밖에 안 된 박근혜 후보가 유신헌법에 대해 무엇을 알았겠느냐.”면서 그의 몫이 아니라는 식으로 답변했다. 이어 그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있는데, 유신에 대한 평가나 나의 인터뷰가 누군가를 겨냥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문소영기자 symun@seoul.co.kr [김철수 석좌교수] 1933년 7월 10일생으로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한 뒤 모교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72~1998년 서울대 법대 교수로 재직한 뒤 탐라대 총장을 거쳐 현재 명지대 석좌교수로 있다. 한국헌법연구소 소장, 한국헌법학회 고문 등을 역임했다. 주요저서는 ‘헌법이 지배하는 사회를 위하여’ ‘헌법개설’ 등 23권.
  • 리비아 새 총리에 제이단

    리비아 새 총리에 제이단

    리비아 신임 총리에 망명 외교관 출신의 인권변호사 알리 제이단(63)이 선출됐다. 14일(현지시간) BBC 등에 따르면 제이단은 이날 리비아 제헌의회 의원 200명이 참여한 투표에서 93표를 얻어 경쟁 후보인 무함마드 알하라리를 제치고 당선됐다. 무소속 의원인 제이단은 리비아 최대 정당인 국민연합의 지지에 힘입어 이슬람주의 정의건설당(JCP) 후보인 알하라리를 8표 차로 앞섰다. 제이단은 인도 주재 대사관에서 근무하던 1980년 망명해 이듬해 해외 반체제 인사들이 설립한 ‘리비아 구원을 위한 국민전선’에 가입했으며, 이후 스위스 제네바에서 인권변호사로 활동했다. 그는 과도정부 총리를 지낸 마무드 지브릴과 함께 카다피 정권에 맞서 싸운 시민군에 대한 국제사회의 지지를 이끌어 내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지난 8월 제헌의회 의장직에 도전했으나 무함마드 알메가리프에게 28표 차로 패했다. 제이단 신임 총리의 첫 임무는 2주 내에 내각을 구성하는 것이다. 앞서 리비아 의회는 지난 7일 무스타파 아부 샤구르 전 총리가 제출한 내각 구성안에 대해 모든 정파와 부족을 대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부하고, 총리를 해임한 만큼 의회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통합 내각을 꾸리는 것이 급선무다. 또한 무장단체들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해 치안을 회복하는 일도 시급히 풀어야 할 과제로 꼽힌다.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옴부즈맨 칼럼] 국가경영, 보좌그룹도 눈길 줘야/정윤기 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옴부즈맨 칼럼] 국가경영, 보좌그룹도 눈길 줘야/정윤기 행정안전부 정보기반정책관

    싸이의 강남스타일이 세계적인 히트를 치자 지인이 말하기를 이제 세계가 한국은 잘 몰라도 강남은 알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최근 몇 년을 미국에서 체류한 필자는 그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미국인은 우리의 생각 이상으로 한국을 알고 있으며, 지식인 그룹으로 갈수록 한국을 더 많이 알고 있었다. 미국의 고위공무원교육원에 파견교수로 가게 된 것도 한국을 알고 싶어하는 그들의 초청이 먼저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커져 있다. 경제규모는 세계 10위권에 근접해 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신생국 중 유일하게 근대화와 민주화를 동시에 이룬 나라로 인정받고 있다. 한류를 통해 그 이름도 낯설지 않다. 지난 10여년간 추진해 온 전자정부 사업 덕분에 유엔에서 2회 연속 전자정부 세계 1위를 차지했다. 한국의 행정시스템은 선진국 수준이다. 전체적으로는 선진국 수준이라고 믿어도 될 것 같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 중의 하나로 출발했지만 이제는 선진국의 문턱에 와 있으니 나라를 선진국처럼 운영하는 일만 남은 게 아닌가 싶다. 대통령 선거일이 다가오면서 주요 대선 후보자들에 대한 기사가 연일 눈길을 끌고 있다. 대통령 선출은 나라와 국민 전체의 운명을 결정지을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20여년의 공무원 경험으로 보건대, 국무총리나 장·차관 등 대통령이 임명할 핵심 공직자와 정부기관의 고위 공무원들도 대통령 못지않게 막중한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은 그 규모, 사회의 다양성, 국제사회에서의 역할 비중 등 어느 모로 보나 주요 공직자들의 보좌 없이 대통령 혼자서 이끌어 가기엔 너무 벅찰 만큼 커져 버린 것이다. 그래서 유럽 국가에서는 ‘그림자 내각’(shadow cabinet), 즉 장관을 미리 내정해 명단을 발표하는 것이 관행이다. 미국에서는 부통령 후보를 미리 지명해 대통령 선거에서 대통령과 함께 선출한다. 대통령만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라의 운명을 함께 지고 갈 일꾼들의 면면까지 본 뒤 투표하도록 하려는 취지다. 당연히 대통령 후보 한 명만 바라보는 것보다 바람직하다. 그래서인지 최근 어느 대선 후보자의 유력 측근이 그림자 내각을 구상하는 듯한 언급을 한 바도 있다. 이런 시점에서 서울신문이 주요 대선 후보자의 측근 시리즈를 연재한 것은 향후 몇 년간 나라를 이끌고 나갈 예비 공직자의 면면과 그들의 철학을 미리 가늠하게 하는 시의적절한 기사였다. 대선 후보자의 측근 외에 대선 후보자가 사람 쓰는 방법까지 입체적으로 분석했기 때문에 당선된 이후의 정부 전체의 운영 방향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게 했다. 그뿐 아니라 서울신문이 연재하고 있는 정부기관의 간부공무원 시리즈 ‘공직열전’까지 곁들여 읽어 보면 앞으로의 정부 운영에 대한 예측은 그 흥미를 더해간다. 그러나 아쉬움도 많다. 광고와 그래픽을 제외한 반 쪽 정도의 기사에 많은 측근을 언급하다 보니 피상적인 소개에 그치고 있기 때문이다. ‘공직열전’에 실린 간부공무원들의 소개도 한 줄 정도다. 정치나 공직에 연관을 맺고 있는 사람이라면 이름만 듣고도 그 사람의 인품과 능력, 과거 업적을 알 수 있겠지만 대다수의 독자들은 그러하지 못하다. 정부나 민간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았던 사람은 그나마 짐작이라도 할 수 있지만, 대선 후보자와 인간관계가 가깝다는 정도로 소개된 측근은 짐작하기도 어렵다. 지면을 더 배정해서 개인별로 심층적인 소개가 있었으면 유권자의 판단에 도움이 되었을 것 같다. 요즘 기업 인사에도 출신대와 같은 배경보다 담당 직무를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에 초점을 두는 추세다. 역량평가센터를 설치해 임원 승진 전에 온종일에 걸쳐 철저하게 적격성을 평가하는 기업들도 생겨나고 있다. 공무원들도 국장으로 승진할 때에는 기진맥진할 정도로 하루 종일 역량평가를 받는다. 고위 관리자의 선발에 기업과 정부가 이토록 심혈을 기울이는데, 나라를 경영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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