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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기림씨 부인 김원자씨

    납북시인 김기림씨의 부인 김원자 여사가 3일 상오 2시 서울 신촌세브란스병원에서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79세. 김 여사는 50년 남편이 납북된 뒤 줄곧 남편의 해금과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해 왔다. 유가족으로는 장남 세환씨(전 리더스다이제스트사업국장) 등 2남2녀. 발인 5일 상오 9시 연락처 362­6690.
  • 6·25때 송신소 지키다 납북/아들이 국가에 9조 손배소(조약돌)

    ○…6·25 당시 한국방송공사(KBS)의 전신인 서울중앙방송국송신과장이었던 김도현씨(당시 38세)의 맏아들 김 모씨(49·전북 장흥군 장흥읍)가 『부친이 서울을 사수하라는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방송국에 남아 있다가 북한 인민군에 의해 납북돼 아직까지 생사를 확인할 수 없다』며 국가를 상대로 9조99억원의 손해배상 및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소송을 서울고법에 냈다. 김씨는 소장에게 『50년 당시 중앙방송국 송신과장으로 재직하던 부친이 전쟁이 나자 서울을 사수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에 따라 직원들을 부산으로 모두 피신시킨 뒤 혼자 남아 연희송신소를 사수하다 북한 인민군에 의해 간첩 혐의 등을 받고 납북됐다』고 주장했다. 김씨가 이날 우편으로 접수한 소장은 소가가 거의 10조원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금액인 데다 김씨가 소장에 첨부해야 할 인지대금이 4백50여 억 원이나 돼 정상적인 소송절차는 밟지 못할 것으로 법원관계자들은 전망.
  • “납북어선 조사중”/북적,한적에 통보

    북한 적십자사의 이성호 위원장대리는 20일 대한적십자사 김상협 총재앞으로 보내온 전화통지문에서 지난 5일 북한측 경비정에 의해 피랍된 「남해어006호)의 선체 및 선원 송환요청과 관련,『이 배는 지금 해당기관의 조사를 받고 있다』며 『남측 선원의 신원을 확인하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인적사항을 빠른 시일안에 알려주기 바란다』고 밝혔다. 이위원장대리는 그러나 『이 배가 남측의 주장대로 중국선적의 것이라면 배의 송환문제는 남측의 소관 밖의 사항』이라고 주장했다.
  • 선원 2명 탄 어선 또 납북/서해 백령도 근해서

    서해에서 조업중이던 우리 어선 1척이 지난 5일에 이어 9일 또다시 북한 경비정에 의해 강제납북됐다. 9일 수산청은 이날 상오 서해 백령도 서북방 해상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충남 서산수협 소속 제2승영호(10t급)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납치됐다고 발표했다. 납북된 제2승영호에는 우리 선원 2명이 타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올해들어 우리 어선이 납치되기는 지난 5일 서해에서 강제납북된 한두수산 소속 남해006호에 이어 두번째이다.
  • 18명 탄 어선 납북/5일 서해서/남포로 끌려간듯

    【인천연합】 서울 마포구 마포동 한국수산소속 1백60t급 저인망어선 남해 006호가 지난 5일 서해상에서 조업중 납북된 것으로 7일 알려졌다. 수산관계 당국자는 지난해 6월 부산항을 출항,그동안 서해상에서 조기와 홍어잡이를 해오던 남해 006호가 북한 경비정에 의해 나포된 것 같다고 밝혔다. 그러나 이 관계자는 정확한 나포지점과 시간은 확인되지 않고 있으며 남해 006호는 북한의 남포항으로 예인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남해 006호에는 선장과 기관장 등 한국인 간부선원 5명과 중국인 선원 13명 등 모두 18명이 승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 본지 창간기념일에 초대된 조성수화백의 “자화상”

    ◎“「애환 45년」 딛고 서울신문처럼 거듭 났죠”/“45년 11월22일생” 동갑내기의 「인생역정」/부산 피난시절의 역경 패기로 극복/「총 2백만부 성장」,오늘의 나와 비슷/“정상의 신문답게 사회 발전의 밑거름 되길” 조국이 광복되던 해인 45년 11월22일에 창간된 서울신문은 1만6천4백36일 동안 지령 14169호라는 굵직한 나이테를 새기면서 영향력 있는 장년신문으로 성장했다. 급변하고 소용돌이치던 지난 45년동안 서울신문은 갖은 풍상과 기복속에서 영광과 좌절,시련과 희망을 독자들과 함께 나누어왔다. 서울신문과 같은해 같은달 같은날에 태어난 사람은 현재 전국에 6백27명(남자 3백57명,여자 2백70명). 그들도 서울신문과 똑같은 역사의 궤적속에서 혼란과 전쟁,가난의 아픔을 이겨내고 이제 우리사회의 성실하고 믿음직한 장년층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인 화가 조성수씨(45·서울 강동구 명일2동 240의4·소화미술학원장)는 21일 서울신문을 찾아 온갖 어려움을 딛고 최신시설과 영향력을 자랑하며 국내 정상에 우뚝선 서울신문의 성장에 흐뭇해했다. 서울신문이 해방을 계기로 새로 창간되었듯이 만주의 장춘에서 태어난 조씨는 이듬해인 46년 초 만주 철도회사에 근무하던 아버지 조석창씨(75)가 귀국하게 되어 서울에서 자라게 됐다. 조씨가 미처 철이 들기도 전인 6살일때 6·25가 일어나 조씨의 누나와 여동생 및 남동생 등 일가족 6명은 피란길에 올라 부산으로 갔다. 아직 서울생활에서 제대로 터전을 닦지 못한 조씨 가족들이 전쟁때문에 피란길에 올라 온갖 곤욕을 치른 것처럼 창간한지 5년이 채 못된 서울신문도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서울신문 직원들은 당시 북괴군의 포성이 코앞에서 울리고 있는데도 전쟁발발 3일째인 28일 새벽2시30분까지 무려 12차례나 호외를 발행하다 미처 몸을 피하지 못해 사회부장 이종석씨 등 7명이 납북되었고 유일한 한국의 종군기자였던 한규호씨가 인민군에 납치되어 살해됐다. 또한 인쇄시설 등이 2차례나 파괴·해체당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피란살이 속에서 모진 고생을 겪었듯이 조씨 일가족은 처음 영도 남항동의 등대 근처 바닷가에서천막을 치고 굶주림과 추위에 떨며 지내야 했고 조씨의 아버지는 가족들을 이끌고 초량동과 부평동 등으로 옮겨 다니며 날품팔이와 행상을 하며 힘겹게 연명했다. 그러나 서울신문 사원들은 이같은 어려움 속에서도 51년 4월3일 서울에 상경,중공군의 전쟁 개입으로 다시 전선이 밀리기까지 6일부터 24일까지 19일동안 아직도 한국언론사에 전설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는 진중신문을 발행하기도 했다. 조씨는 피란지인 부산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하고 60년 다시 서울로 상경했으나 조그만 무역업을 하던 아버지의 사업실패로 61년까지 2년동안 온 식구가 굶기를 밥먹듯 하는 가난에 시달렸다. 서울신문도 60년 4·19 학생의거의 와중에서 윤전기와 사옥이 불탄 뒤 극심한 재정난으로 4월26일부터 7월25일까지 휴간할 수 밖에 없었고 계속되는 후유증으로 이듬해 5·16 군사혁명이 일어나기 1주일전부터 12월19일까지 장기간 휴간하기도 했다. 이런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서울신문은 60년 7월27일 조·석간제를 실시하고 67년 3월13일부터는 활자를 새로 교체하며 전면적인 지면개혁을 단행했으며 68년 11월22일부터는 모든 지면을 한글전용으로 제작했다. 또 창간 25주년을 맞던 70년에는 최신고속 자동윤전기 2대를 도입하여 종전의 시간당 5만부 인쇄에서 12만부를 인쇄할 수 있는 최신 시설로 끌어 올렸다. 서울신문이 이처럼 혼신의 힘을 다해 사세확장에 땀흘릴 무렵 조씨는 그동안의 실의를 떨치고 중동고교에 수석으로 입학,장학금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으로 탈바꿈했다. 서강대 경영학과에 진학한 조씨는 전공보다는 어릴 때 부터의 꿈이었던 미술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해 80년 초 미국 뉴욕으로 건너가 5년동안 본격적인 미술공부를 했다. 서울신문은 그 사이 발전을 거듭하여 80년 12월2일부터 조간신문으로 바뀌고 85년 1월에는 숙원이었던 지상 22층의 새 사옥을 마련,한국언론사상 최초의 컴퓨터로 신문을 발행하는 시스템(CTS)을 갖추었고 같은해 6월22일에는 자매지인 스포츠서울을 창간,더욱 사세를 떨치게 됐다. 서울신문이 제2의 도약을 하던 해인 85년 조씨는 미술공부를 마치고 귀국,명일동에 미술학원을 열고 본격적인 화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했으며 2년6개월 뒤에는 같은 동네에서 4층 건물을 짓고 새로 이사하여 학원운영과 창작활동을 하며 딸 셋과 부인 등 5가족이 행복하게 살고 있다. 조씨는 『서울신문의 발자취와 나 자신의 행로가 닮은 것이 신기하기만 하다』면서 『앞으로 더욱 발전하여 우리 사회를 밝고 살기좋게 만들어가는 횃불이 돼달라』고 기원했다.
  • 5분만에 끝난 「북한영화」/성종수 사회부기자(현장)

    ◎학생ㆍ경찰사이 갈등만 깊게… 18일 하오2시10분쯤 연세대 대강당에서는 학생 3백여명이 지켜보는 가운데 북한영화 「탈출기」가 막 상영되기 시작했다. 지난10일 경찰의 제지로 상영이 중단됐으나 필름을 압수당하지 않아 이날 또다시 상영을 시도한 것이다. 1920년대 만주 간도지방의 시골풍경이 화면에 조용히 깔리면서 영화가 시작된지 5분쯤 뒤였다. 경찰병력이 다연발최루탄차를 앞세우고 학교안으로 들어갔다. 학생회관앞에는 학생들이 경찰의 진입을 막기위해 설치해 두었던 기름통이 터져 불이 붙으면서 길바닥을 삽시간에 새까맣게 그을려 놓았다. 영화를 관람하던 학생들은 경찰진입을 예상했다는 듯 미리 준비한 화염병을 두손에 쥐어들고 강당밖으로 뛰쳐나와 경찰에 마구 던져댔다. 학교는 이내 아수라장이 돼버렸다. 『남북총리회담과 남북축구경기가 열리는 등 남북한간의 화해분위기가 높아지고 있고 뉴욕에서 남북영화제까지 열린 시점에서 경찰의 지나친 대응은 오히려 학원소요를 부채질하는 것이다』는 것이 총학생회 간부의 주장이었다. 화염병도 최루탄도 모두 증오스럽기만 하다는 한 여학생은 『지난 3월부터 통일원이 북한자료전시관에서 시민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영화를 학생들이 보지 못하도록 이렇게 많은 병력을 학교에 투입하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의아해했다. 이같은 학생들의 주장에 대해 경찰측은 『이 영화는 공산주의가 인민을 위한 사상임을 강조하고 소작인과 지주의 갈등을 부추기는 등 북한을 바로알기보다는 북한체제를 선전하는 내용』이라면서 『예술성을 내세우고는 있지만 기본바탕에는 폭력혁명ㆍ투쟁을 유도하고 있어 감수성이 예민한 대학생들이 보기에는 적절치 않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이같은 설명은 그동안 웬만한 시위때에도 학교안 진입은 자제해왔던 경찰이 이번 연ㆍ고대에서의 두차례에 걸친 북한영화상영에 대해서는 1천여명 이상의 경찰력을 동원,기를 쓰며 막은 이유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것같았다. 1920년대 일제식민지시대의 수탈을 피해 간도지방으로 이주한 주인공 성렬이 일제와 지주들에게 수난받다 사회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탈출기」의 내용이고 「소금」은 20년대 간도지방으로 유랑한 어느 사회주의 일가의 항일투쟁을 그린 것이다. 두 작품은 모두 납북된 신상옥감독이 북에서 만든 작품들이다.
  • 납북 독립유공자 사망일 확인요청/광복회,정부에 건의

    광복회(회장 이강훈)는 27일 광복후 북한에 있던 조만식선생과 6ㆍ25당시 납북된 조소앙선생 등 35명의 재북독립유공자에 대한 사망일자와 묘소소재지 등을 북한적십자사를 통해 확인해줄 것을 국토통일원과 대한적십자사에 건의했다.
  • 사회주의 계열 임정요원 포함 독립유공 613명 서훈

    ◎윤동주ㆍ최동오ㆍ장일환ㆍ정일형씨 등 대상/광복 45돌 맞아 국가보훈처는 광복 45주년을 맞아 오는 15일 그동안 거증자료가 없어 독립유공자로 서훈되지 못했던 윤동주ㆍ최동오ㆍ장일환ㆍ정일형씨 등 저명인사를 포함한 총 6백13명을 서훈키로 했다고 11일 밝혔다. 이들에게는 오는 15일 충남 천원군 독립기념관에서 열리는 광복절 경축행사에서 포상하게 된다. 이상연보훈처장은 『이번 서훈대상자들은 거증자료를 새로 발굴했거나 중국ㆍ소련 등 공산권국가에서 입수한 새로운 자료를 심사해 결정했다』고 밝히고 『그동안 독립운동의 공적은 있으나 사회주의ㆍ공산주의 활동으로 독립유공자 선정에서 제외됐던 유공자들도 대거 포함됐다』고 말했다. 이 처장은 또 『국가보훈처는 제6공화국 헌법전문의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이어받는다는 헌법정신에 따라 민족동질성 회복을 위한 노력의 하나로 남북이 공유할 수 있는 선열들의 공적을 지난 89년부터 인정하게 됐다』고 밝히고 『뒤늦게나마 조국의 광복을 위해 헌신ㆍ희생한 독립유공자들을 예우하게 됨으로써 민족의 동질성과 국가의 정통성을 굳건히 하고 국민적 자긍을 높이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이들 가운데 6ㆍ25이후 북한으로 납북되어 사망한 최동오씨와 장일환씨는 북한에서도 국가유공자로 선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주요 훈장수여자는 다음과 같다. ◇건국훈장독립장=△고 최동오(임정국무위원) △고 윤동주(시인) ◇건국훈장애국장=△고 정일형 △정찬진(85ㆍ독립운동가) △이병훈(77ㆍ〃) ◇건국훈장애족장=△오윤진(81ㆍ독립운동가) △김국환(73ㆍ〃) △고종근(67ㆍ〃) △박상유(67ㆍ〃) △정현규(66ㆍ〃) △최을규(62ㆍ〃) △최해수(65ㆍ〃)
  • 임정수립 71주년 기념식/광복후 처음 정부주관 행사

    ◎문창범선생등 18명에 훈장 추서 대한민국임시정부수립 제71주년 기념식이 13일 상오 10시 서울 세종문화회관대강당에서 재경광복회원,3부요인,정당대표,전직주요인사,각계대표등 2천5백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국가보훈처 주관으로 열렸다. 올해 처음으로 정부행사로 열리는 이날 기념식에서 상해임시정부 교통부총장을 지낸 문창범선생에게 건국훈장대통령장,정인보선생등 납북인사 5명을 포함한 17명에게 건국훈장 국민장이 각각 추서됐다. 이날 훈장이 추서된 독립 유공자는 그동안 공적자료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분단국가로서의 제약때문에 포상을 받지 못하다가 민족동질성회복,국민대화합,민족정기고양을 목적으로 하는 첫번째 임정수립 기념행사에서 그 유족들이 포상을 받게 된 것이다. 강영훈국무총리는 이날 기념사를 통해 『3·1독립운동의 결정체로서 71년전 오늘 탄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일제가 패퇴하는 날까지 나라잃은 겨레의 유일한 정통정부로서 민족독립운동의 구심점이었다』고 지적하고 『임시정부는 민족사상 처음으로 주권재민의 민주공화정을 선언함으로써 우리나라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기틀을 확립했다』고 말했다. □건국훈장 포상자 공적 ▲문창범(1870∼1934,건국훈장 대통령장)=1908년 만주 노령에서 광동학교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 1917년 전로한족중앙총회 회장피선. 1919년 대한국민회의 회장으로 선출,해삼위에서 3·1독립만세운동 주도. 같은해 상해 임시정부 교통부총장피선. ▲정인보(1885∼납북,건국훈장 국민장)=1910년 상해에서 신규식·박은식·신채호등과 동제사조직,조국광복운동. 1919년 귀국,연희전문대 교수로 재직중 1926년 「6·10만세운동」과 중앙고보학생들의 「5인독서회」등 학생운동 지원. ▲김의한(1900∼납북,〃)=1919년 국내에서 비밀결사 대동단에 가입,중국으로 망명. 1928년 한국청년동맹 재정위원으로 활동. 1932년 임정 항주로 이전시 김구등과 강소성 가흥으로 피신,임정활동참가. ▲오영선(1896∼1939,〃)=1919년 상해임정 임시의정원 의원. 1931년11월까지 임정국무원비서장·국무원·법무총장·군무부장·외무부장역임. ▲이관식(1883∼1972,〃)=1907년 육군부위로 근무중 군대가 해산되자 유인식·김동등과 경북안동에 협동학교를 설립,구국계몽활동. ▲김일곤(1912∼1943,〃)=1938년 조선의용대 입대후 각지에서 항일전에 참전. 1943년 중국 호북성에서 일본군 탱크 2대를 파괴하는등 활약하다 순국. ▲김상덕(1891∼납북,〃)=1919년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회원과 2·8독립선언후 체포돼 7개월의 금고형받음. 1920년 중국으로 망명,28년 정의부 신민부 참의부 통합추진. 42년 임시의정원의원·임정선전위원으로 활동. ▲이광민(1900∼1945,〃)=1915년 만주 신흥학교수료. 1924년 전만통일회주비회 발기회에 군정서 대표로 활동. ▲이병화(1906∼1952,〃)=1921년 통의부에 가입,의주군 청성진 경찰주재소 습격,순사살해. ▲이종건(1887∼1958,〃)=1923년 재만독립운동단체의 재통일을위해 10개단체를 통합,정의부를 조직,중앙행정위원 선전위원장으로 활동하다 일경에 체포,징역 7년. ▲최이붕(1897∼1973,〃)=1919년 간도에서 철혈광복단 청년단조직, 조선은행자금 15만원탈취해 무기구입,북로군정서에제공. ▲윤 해(1888∼미상,〃)=1915년 만주에서 간민회조직,활동. 1918년 전로한족회중앙총회창립,부회장으로 활동. ▲명제세(1885∼납북,〃)=1919년 이동령 주도로 상해서 불변단조직시 총무로 활동. 박은식 등과 함께 제2독립선언문 발표. ▲장철호(1892∼1945,〃)=1928년 국민부중대장. 1919년 조선혁명군 소대장으로 일군과 항전. ▲김형빈(1894∼1943,〃)=1919년 독립단에 입단,친일파 김하룡처단,군자금모집활동. ▲박건웅(1906∼납북,〃)=1932년 조선의열단대표로 한국대일전선 통일동맹결성,조선인군관학교에서 혁명투사양성. ▲장도빈(1888∼1963,〃)=1908년 대한매일신보 주필로 취임,애국 계몽운동 전개. ▲조지영(1916∼1950,〃)=1937년 중국군에 배속돼 대일전에 참전. 1942년 임정군무부 비서·군사과장 역임.
  • 1,111명 3ㆍ1절 가석방/법무부 발표

    ◎장기복역 좌익수 22명 포함/시국ㆍ공안사범 대상서 제외/보안법위반 재일교포 서승씨 풀려나 법무부는 3ㆍ1절에 즈음하여 재일교포 간첩사건으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복역중인 서승씨(45ㆍ대전교도소수감중) 등 장기좌익수 22명을 포함,일반형사범ㆍ소년원생 등 모두 1천1백11명을 오는28일 가석방 또는 가퇴원시킨다고 26일 발표했다. 법무부의 관계자는 『종전에는 형기의 90%이상을 복역한 좌익수 가운데 행형성적이 1ㆍ2급인 모범수만을 대상으로 가석방기준을 삼았으나 이번에는 형기의 75%이상을 복역하고 행형성적이 3급인자까지로 완화,확대했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풀려나는 서씨는 서울대에 유학중이던 지난71년 국가보안법과 반공위반혐의로 구속기소돼 73년3월 무기징역의 확정판결을 받았으며,88년12월 징역 20년으로 감형돼 지금까지 16년11개월을 복역해 왔다. 서씨는 지난71년 4월19일 수사기관의 조사를 받던중 조사실에 있던 경유난로의 연료연결호스를 뽑아 온몸에 경유를 끼얹고 난로를 껴안은 채 얼굴을 난로속으로 들이밀어 자살을 기도,얼굴과 온몸에 심한 화상을 입은 것으로 전해졌다. 북한은 이에대해 『고문에 못이겨 자살하려했다』고 선전하고 있으나 서씨는 변호인 접견시 『배신당했다는 절망감에 자살하려 했다』고 말했었다. 법무부의 한 관계자는 서씨의 가석방에 대해 『서씨가 국법을 준수하고 성실히 살아가겠다는 서약서를 제출한데다 재일교포로 장기간 복역한 점 등을 감안해 인도적 차원에서 석방하기로 했다』고 설명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서씨 등 22명의 장기좌익수 이외에 재야ㆍ노동ㆍ학원사건으로 구속된 시국ㆍ공안사범들은 현재 재판에 계류중이거나 가석방 대상자가 없어 이번 가석방대상에서 제외됐다』고 밝혔다. 석방될 장기좌익수는 다음과 같다. ◇대구교도소 ▲차풍길(46ㆍ징10ㆍ재일교포 간첩사건) ▲김연삼(54ㆍ무기ㆍ남파간첩사건) ▲김성규(49ㆍ징10ㆍ재일북괴공작원포섭간첩) ▲유종인(51ㆍ무기ㆍ 〃 ) ▲권환성(54ㆍ징15ㆍ 〃 ) ▲이성국(35ㆍ징10ㆍ납북어부간첩) ▲김상원(30ㆍ징10ㆍ재일교포간첩사건) ▲이학돌(63ㆍ무기ㆍ남파간첩사건) ▲이기상(62ㆍ무기ㆍ 〃 ) ▲안승억(54ㆍ징12ㆍ남파간첩사건) ◇대전교도소 ▲서승(45ㆍ무기ㆍ재일교포간첩) ▲차만석(74ㆍ무기ㆍ남파간첩) ▲이대식(51ㆍ무기ㆍ재일북괴공작원포섭간첩) △광주교도소 ▲이태(31ㆍ징12ㆍ월북기도) ▲윤계동(66ㆍ징10ㆍ남파간첩사건) ◇전주교도소 ▲정정학(43ㆍ무기ㆍ월북기도) ▲김연건(53ㆍ무기ㆍ남파간첩사건) ▲김용이(47ㆍ징7ㆍ납북어부간첩) ▲이준태(46ㆍ무기ㆍ재일교포간첩사건) ▲유낙진(61ㆍ무기ㆍ남파간첩사건) ▲강철순(56ㆍ무기ㆍ재일교포간첩사건) ◇안동교도소 ▲김장길(47ㆍ징10ㆍ재일북괴공작원포섭간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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