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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설] ‘인권사각지대’에도 햇빛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가 1974년 ‘인혁당 사건’ 관련 공식 기록 일부를 최근 국방부에서 입수했다고 밝히자,국민들의 관심이 ‘진상규명위’에 쏠리고 있다.30년가까이 베일에 가려져 왔던 이 사건의 진상이 드러날 것으로 기대하기 때문이다.어찌 이 사건뿐이겠는가.1967년 ‘동백림 간첩단 사건’관련자와 유족들이 독재정권이 조작한 공안사건이라며 억울함을 호소하고 있지만,국가 차원에서 반응이 없다.현 정부 출범 뒤 ‘광주민주화운동 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이 이뤄지고 있으며 민주화운동보상심의위가 가동하고 있고,국가인권위원회까지 발족하기에 이르렀다.그러나 아직도 많은 국민들이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게 현실이다. 1953년 정전협정 체결 이후 지금까지 납북자는 어부 3,692명을 비롯해서 1969년 피랍된 대한항공 승무원과 승객 51명,군경 22명 등 모두 3,790명에 이른다.그동안 납북자 가족들은 1989년까지는 국가공무원임용시험에도 응시할 수없었고 각군 사관학교에도 지원할 수가 없었다.정기적으로 정보기관에 불려가 조사를 받는가 하면 거주 지역을 벗어날 때는 당국에 신고를 해야 했고,재산이 늘어나면 ‘북한공작금’이 아닌가 조사를 받아야만 했다. 1988년 전두환 신군부의 정권장악 과정에서 벌어졌던 삼청교육대 피해자들도 그렇다.피해자들은 4만명에서 6만명에 이른다는데,노태우 정권이 1988년 보상을 약속했지만아직도 지켜지지 않은 상태다.엄혹한 군사독재 정권 시절운동권 학생들을 강제 징집해서 프락치활동을 강요한 ‘녹화사업’피해자들은 또 어떤가.야만적인 강요에 항거하다가 수많은 학생들이 의문사했지만,진상규명위의 노력에도불구하고 군 당국이 협조하지 않아 명예회복마저 어려운처지다. 납북자 가족들에 대한 차별은 물론, 정통성 없는 정권이조작한 간첩사건이나 삼청교육대와 녹화사업 등은 ‘국가가 국민에 가한 테러’가 아닐 수 없다.뒤늦게나마 국가가이들 피해자들에 대한 명예회복과 보상에 나서야 한다.‘인권의 사각지대’에 있는 피해자들에게도 인권의 햇빛이고루 비칠 때 비로소 현 정부가 추진해온 인권 옹호 노력이 제대로빛을 발할 수 있다.
  • ‘수지김 살해’윤씨 납북미수 성명 발표

    수지김 피살사건을 수사 중인 서울지검 외사부(부장 朴永烈)는 18일 관련자들을 기소하면서 최종 수사결과를 발표하기로 했다고 16일 밝혔다. 이에 앞서 검찰은 87년 사건 은폐·조작과 관련,당시 외무부 아주국장 권모씨를 15일 소환,“최광수(崔侊洙)당시외무장관이 싱가포르 주재 이장춘(李長春)대사에게 납북미수사건이 분명하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토록 지시했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권씨는 “윤태식(尹泰植·구속기소)씨가 87년 1월8,9일태국 방콕과 서울에서 기자회견을 갖자 다음날 싱가포르주재 북한대사관이 ‘자진월북사건을 왜곡했다’고 강력반발했다”면서 “최 장관이 이 대사에게 이에 대한 반박성명을 발표토록 지시했다”고 주장했다.이 대사는 윤씨사건 발생 직후 윤씨의 자진월북 시도 가능성을 본국에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홍환기자 stinger@
  • “수지 김 사건 은폐·조작 검찰도 알았다”

    지난 87년 수지 김 피살사건과 관련,김씨를 살해한 혐의로 구속기소된 김씨의 남편 윤태식(尹泰植·43) 피고인에 대한 2차 공판에서 윤 피고인이 당시 귀국 후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았을 때 조사실로 찾아온 검사 2명에게도 사건의 진상을 자백했다고 주장해 파문이 예상된다. 서울지법 형사합의23부(부장 金庸憲) 심리로 열린 14일 공판에서 윤 피고인은 변호인 신문을 통해 “”87년 1월부터 4월까지 안기부에서 조사를 받으면서 납치 미수 사건이 아니라고 털어놓은 뒤 안기부 수사관이 '검찰과 협의해야 하는데 그 쪽에서 누가 올테니 솔직히 얘기하라'고 했다””면서 “”누군가 조사실로 찾아와 사건의 진상을 다시 설명해 줬는데 나중에 안기부 수사관에게서 그 사람이 검사라는 말을 들었다””고 말했다. 윤 피고인은 이후 “검사들이 ‘(안기부 직원들에게)과실치사에 불과하니 나라를 위해 침묵하라’고 말했다는 이야기를 안기부 직원들로부터 들었다”며 “안기부 직원들도 ‘진실을 밝히면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해 지금까지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윤 피고인은 이후 자신의 의도와 관계없이 ‘납북 납치사건’으로 결론이 나버렸으며 최근까지도 국정원 등의 감시를 받는 상황이어서 진실을 밝힐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윤 피고인은 당시 자신에게 사실 관계를 확인했던 사람이 검사라는 것만 기억할 뿐 정확한 신분이나 인상착의에 대해서는 진술하지 못했다. 윤 피고인은 “당시 안기부에서 검찰과 사건 처리에 대해 협의해야 한다고 했다”며 “94년까지 안기부 직원이 나를 감시하고 동향보고를 했으며 호출하면 서울시내 모 호텔로 불려가기도 하고 최근 구속직전까지 국정원 직원과 전화 통화를 했다”고 진술했다. 윤 피고인은 또 “87년 당시 격렬하게 싸우던 중 김씨가 중심을 잃고 벽이나 모서리 같은 곳에 머리를 박고 쓰러져 숨졌다”며 “두려운 마음에 베갯잇을 덮어 씌우고 여행용 가방끈으로 목을 졸랐을 뿐”이라며 살인 혐의를 부인했다. 이에 대해 서울지검 박영렬 외사부장은 “”안기부 파견 검사에게 사실을 털어 놓았다는 윤씨 진술이 있어 당시의 안기부 수사관을 조사했으나 '극비사항을 외부 인사에게 알려 줬겠느냐'고 부인했다””면서 “”윤씨에게도 파견 검사들의 사진을 보여 줬으나 기억을 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서울지검의 고위관계자도 “”법무부에 확인해 당시 파견 검사들을 상대로 조사했으나 윤씨 조사에 입회한 사실은 드러나지 않았다””고 밝혔다. 다음 공판은 내년 1월4일. 이동미기자 eyes@
  • 장세동씨 “윤씨 살인극 보고 받아”

    ‘수지김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외사부(부장朴永烈)는 12일 지난 87년 1월초 수지김 남편 윤태식(尹泰植·구속기소)가 납북미수 사건을 꾸민 사실을 안기부측이 알면서도 태국 방콕과 김포공항 등에서 기자회견을 강행한 사실을 확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 관계자는 이날 “싱가포르 현지 대사관측이 당시 윤씨의 미심쩍은 행동을 본부와 안기부측에 모두 보고했었다”면서 “현지에 내려온 안기부 간부가 윤씨의 기자회견을주선하면서 부분적으로 왜곡한 사실도 드러났다”고 밝혔다. 검찰은 이날 당시 안기부장이던 장세동(張世東·65)씨와해외담당 국장 정모씨를 재소환,대질심문 등 보강 조사를벌였다. 장 전 부장은 사건 은폐 등과 관련,“부인을 살해했다는윤씨의 자백 등을 보고받았지만 얼마후 부장직을 떠나 발표하지 못했다”고 진술한 것으로 알려졌다. 조태성기자 cho1904@
  • 윤씨 방콕 기자회견 주선…前 안기부국장 소재 추적

    ‘수지김 피살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외사부(부장 朴永烈)는 3일 국가정보원이 제출한 윤태식(尹泰植·구속)씨의 수사자료 분석이 마무리됨에 따라 당시 윤씨를 수사한 안기부 직원들을 소환,조사하기로 했다. 검찰은 우선 지난 87년 납북 도중 탈출했다는 윤씨의 주장을 그대로 받아들여 태국 방콕에서 기자회견을 주선한 것으로 알려진 당시 안기부 해외부국장 장모씨를 조사키로 하고소재를 파악하고 있다.검찰은 장씨를 상대로 수지김 사건의진상을 알고 있었는지와 기자회견을 주선한 과정 등을 수사할 방침이다. 검찰 관계자는 “당시 싱가포르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기자회견이 윤씨의 주장을 믿지 않았던 한국 대사의 반대로 무산돼 방콕에서 열렸다”면서 “장씨는 당시 윤씨가 스스로 월북하려했고 수지김을 살해한 사실을 알았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사설] ‘수지김 사건’ 의혹 덩어리

    ‘수지김 사건'에 대한 의혹이 갈수록 증폭되고 있다.1987년 1월,단순 살인 사건을 납북 미수사건으로 둔갑시켰던 당시 안기부 후신인 현 국정원이 지난해 2월에는 이 사건을 재수사하는 경찰청 외사과에 수사 중단 압력을 가했다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국정원과 경찰에 따르면 경찰청 외사과는 한국·홍콩 형사사법 공조협정이 발효된 지난해 1월수지 김 사건에 대한 재수사에 착수,홍콩 경찰의 수사기록을 넘겨 받고 국정원에 당시 수사자료를 넘겨 줄 것을 요청 했으나 국정원은 오히려 현재 대공수사중인 사건이라며 경찰에 자료를 넘겨줄 것을 요구해 수사가중단됐다고 한다.이같은사실은 국정원이 자체감사를 벌여 확인하고 이 감사 결과를검찰에 넘겨 수사를 의뢰했다. ‘수지김'의 남편 윤태식씨가 안기부에서 쓴 자술서에는 돈문제 등으로 아내와 말다툼을 벌이다 둔기로 아내의 머리를때려 실신 시킨 뒤 목졸라 살해하고 이를 감추기 위해 아내와 북한 공작원 일당에 의해 납북됐다가 탈출했다고 거짓말하게 된 경위가 자세히 기록돼 있다.말하자면이 자술서는사건 당시 안기부는 이미 윤씨가 아내를 살해한 범인임을 알고 이를 묵인했으며 오히려 그를 납북에서 탈출한 영웅으로등장시켰음을 확인해주는 자료인 셈이다. 일이 이쯤 되면 사건은 윤씨라는 한 개인의 살인 및 납북미수 자작극차원을 넘어선다.이는 당시 안기부가 남자를 여자로 바꾸는 것 빼고는 불가능이 없을 정도로 무소불위의 권력기관이었다는 사실과 수지 김 사건은 우연히 드러난 숱한 음모와 조작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여론을 뒷받침해준 셈이다. 더구나 국정원이 자체 감사를 벌여 확인했듯이 최근까지도이 사건의 재수사를 중단시키려는 작용이 있었고 검찰에 넘겨준 윤씨 자술서에는 조사관 이름,날짜 등이 빠지는 등 은폐를 기도했다고 보여지는 부분이 있다.만약 이런 일이 사건의 조작에 관여했던 인물이 아직도 건재하면서 벌인 것이라면 이를 예사로 보아 넘길 일이 아니다. 검찰은 윤씨의 공소 유지도 중요하지만 14년 전,사건 조작에 관여한 조사관과지휘계통을 모두 밝혀야 한다.시효와 상관없다고 본다.국정원의 수사의뢰가 아니라도 국민을 우롱한 사건 가담자의 명단을 밝히는 것이 검찰의 책무다.이번 사건의 경위,배경,가담 인물의 역할을 샅샅이 밝히면 지금도 일부에서 의혹을 제기하는 KAL기 폭파사건 등의 또 다른 단서가 포착될지도 모른다. 정직한 역사를 기술하기 위해서라도 이번 사건의 의혹은 철저히 밝혀야 한다.
  • 국정원도 ‘수지 김’ 은폐했나

    국가정보원이 지난해 경찰의 ‘수지김 피살 사건’ 수사를중단시킨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안기부뿐만 아니라 후신인국정원도 사건의 실체를 은폐해온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국정원 대공수사국은 지난해 1월말 경찰이 수사에 착수,김씨의 남편 윤태식(尹泰植·43·구속기소)씨를 두 차례 소환조사한 직후인 2월15일 “손을 떼라”고 요청한 것으로 드러났다. 안기부와 국정원이 사건의 실체를 덮어두려한 이유는 사건발생 당시의 상황 때문이다.87년 사건 발생 당시 안기부는‘북한공작원 수지김에 의한 남편 납북미수사건’이라고 대대적으로 발표했다.때문에 대공사건이 ‘단순 살인사건’으로 드러난다면 대공 수사기관의 도덕성에 큰 흠집을 남기게된다. 이런 이유로 당시 안기부도 윤씨가 살해했다는 진술서까지받아놓고도 사실을 은폐했다.윤씨가 안기부 조사에서 직접작성한 190장 분량의 자술서에는 범행 당시의 정황이 상세히 적혀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윤씨는 또 최근 검찰 조사에서범행 직후 태국 방콕과 서울에서 가진 기자회견을 전후해 당시 안기부가 자신의 범행임을 알고 있었다는 취지의 진술을한 것으로 전해졌다. 안기부의 후신인 국정원이 지난해 수사를 중단시킨 사실이확인된다면 국가정보기관이 ‘수지김 사건 파일’을 계속 관리하면서 실체를 은폐해온 셈이 된다. 의도적인 은폐 사실이 확인된다면 안기부와 국정원은 처음부터 단순 살인사건을 민간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고 15년동안 숨겨온 책임을 면할 수 없게 됐다. 은폐를 주도한 고위간부와 실무자들의 사법처리 가능성도배제할 수 없다.특히 지난해 경찰 수사를 중단시키는데 관여한 국정원 직원들에게는 직권남용죄와 범인은닉죄도 적용할수 있다는 분석이다. 박홍환기자 stinger@
  • “이산상봉 장애 관계법 개정을”

    대한적십자사는 23일 오후 ‘국제인도법상 난민과 이산가족의 보호’를 주제로 국제법학회와 함께 적십자사 강당에서제20회 국제인도법 세미나를 개최했다.이병웅(李柄雄) 대한적십자사 총재특보의 주제발표(남북이산가족문제의 현실과과제)를 요약 정리한다.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이 지난해 합의한 6·15 남북공동선언의 핵심 가운데 하나는 8·15 이산가족 교환방문과 이산가족문제 해결이다.이산가족문제는 단순히 흩어진 가족들의 만남을 주선하는 차원을 넘어 복지국가를 지향하고 있는 국가적 차원에서 해결해 주어야 하는 일이다. 현재 남측의 이산가족은 1세대만 모두 123만여명이며 그중60세 이상인 사람도 70여만명에 이른다.6·15공동선언 이후남북은 그동안 3차례의 방문단 교환과 4차 방문단 교환을 위한 생사확인 과정에서 9,000여명의 생사를 확인했다.방문단교환 외에도 남북적십자사간에는 지난 1∼2월 두 차례의 생사주소확인을 실시해 2,200명의 이산가족에 대한 추가확인이 이루어졌다. 이산 1세대가 점차 고령화되어 사망하고 있음을 고려할 때,모든 이산가족에 대한 생사확인을 조속히 실시하고 생사가확인된 이산가족들을 위한 면회소 설치가 절실히 요구된다. 남북은 이산가족 희망자 전원에 대해 상봉사업을 추진해야하며 효과적인 추진방안으로 다음 몇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사업의 순서는 생사확인,서신거래 그리고 상봉절차로이어지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방안이 될 것이다.둘째,생사확인된 이산가족이 만날 수 있는 면회소가 조기에 설치 운영되어야 한다.셋째,면회소가 운영되더라도 우리 고유의 민속절과 같은 시기에는 방문단이 교환되어 고향을 방문하고 성묘를 할 수 있도록 하여야 한다.넷째,제3국을 통하여 생사가확인된 사람에 한해서는 통제하지 말고 서신거래 등이 자유로이 행해지도록 적극 지원하여야 한다.다섯째,남북간 우편협정 등이 조기에 합의 실행되어 서신거래가 되도록 하여야한다.여섯째,납북자와 국군포로도 이산가족 범위 내에서 해결하는 것이 효과적일 것이다.일곱째,이산가족 상봉에 장애가 되는 관계법 등이 일부 개정되어야 한다.여덟째,김정일국방위원장의 조기 답방이 실현되어 경의선 연결지점과 금강산 육로 개통으로 면회소가 설치,운영되어야 한다. 이산가족 문제를 해결하는데는 몇가지 법적인 문제점을 안고 있다.우선 양측은 국가보안법이나 형법을 통해 상대를 불법집단으로 간주하고 있으므로 이산가족이라 하더라도 상봉시 불법집단 사람들과 접촉하는 문제가 제기된다.이런 법률들이 존재하는 한 남북 이산가족 모두 서신왕래나 상봉에 있어서 극도의 신경을 쓰지 않을 수 없으며 더욱이 재결합을시도한다는 것은 신상에 매우 염려되는 바 크다고 할 것이다.따라서 남북은 이런 문제들을 과감히 뛰어넘는 합의를 이뤄내고 이를 위한 특별법 제정 등 제도적 조치를 반드시 취해야 한다.북의 재산에 대한 남측의 소유권은 소멸조치하고,중혼가정문제는 특례조항을 두며,북의 가족에게 재산증여조항등을 마련하는 등 현실에 맞게 관련법률도 정비할 필요가 있다. 이병웅 대한적십자사 총재특보
  • 추적보도로 14년만에 재수사 끌어낸 이정훈기자

    지난 87년 1월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른바 ‘수지 김사건’이 최근 검찰의 재수사로 사건발생 14년만에 진실이밝혀졌다.당시 안기부는 ‘홍콩 여간첩 수지 김’(본명 김옥분)이 남편 윤모씨를 납북하려다 미수에 그쳤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지난 13일 검찰은 “수지 김은 북한 공작원이 아니며,남편에 의해 피살된 것으로 드러났다”면서 남편 윤씨를 살인혐의로 구속기소했다. 한편 검찰이 이 사건을 재수사하게 된 데는 6년전부터 이사건을 끈질기게 추적해온 한 기자의 노력 덕분이라고 할 수 있다. 주인공은 이정훈(39·사진)‘신동아’ 기자.당시 주간조선기자로 있던 그는 사건발생 8년 뒤인 95년 이 사건에 의혹을 품고 관계자들을 취재한 끝에 김씨가 간첩이 아니라는 심증을 굳혔다.“간첩이라면 흔히 난수표,노동당가,권총 등이 집에서 나오는 것이 보통인데 그런 것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거든요.” 그러나 그가 근무했던 주간조선,시사저널 등에서는 이를 기사화하지 않았다.그는 “이미 상당히 시간이 지난 사건이어서 데스크들이 이해가 부족했던데다 소송에 휘말릴 것을 우려했던 것 같다”고 말한다.결국 그는 주간동아로 옮긴 이후인 지난해 1월 사건발생 13년만에 처음으로 그간의 취재내용을 보도했다.이 내용은 다시 SBS ‘그것이 알고싶다’팀이별도 취재를 거쳐 한달 뒤인 2월 12일 ‘누가 수지 킴을 죽였나’로 방영하면서 비로소 여론의 주목을 받게 됐다. 이 기자는 “기사를 써놓고도 보도를 하지못하자 수지 김의사진을 볼 때마다 미안한 생각이 들었다.김씨의 명예가 뒤늦게나마 회복돼 다행”이라고 말했다. 정운현기자
  • [사설] 진실 은폐 ‘수지 김’ 뿐인가

    1987년 1월 ‘여간첩 수지 김’(본명 김옥분) 사건은 남편 윤태식씨가 아내를 살해한 후 벌인 자작극이었다는 검찰의 발표는 충격적이다.서울지검 외사부는 “성격차이 등으로 말다툼 끝에 부인 김씨를 살해한 후 시체를 유기한남편 윤태식씨를 구속기소했다고 밝혔다.검찰은 특히 윤씨가 범행후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을 통해 월북하려다실패하자 ‘납북 미수사건’의 자작극을 꾸며낸 사실이 드러남에 따라 당시 사건을 조사했던 안기부(현 국정원)에관련자료를 요청하는 등 사건 은폐의혹에 대해서도 진상조사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이 사건의 핵심 의문은 피의자 윤씨가 죽은 아내를 간첩으로 몰면서 벌인 ‘납북미수’자작극이 어떻게 가능했는가이다.따라서 당시 사건을 조사하고 윤씨의 기자회견까지주선한 안기부가 자작극 사실을 몰랐다면 말이 안되고, 알았다면 방조 내지 은폐한 셈인데 국가의 안위를 담당한 기관이 무엇 때문에 개인의 범죄를 은폐해 주면서까지 납북미수 사건을 방조했는지 의문은 꼬리를 문다. 당시 윤씨는 기자회견에서 “아내와북한 대사대리 이창용으로부터 ‘서울에서 사업을 하며 문익환 목사와 유성환의원에게 정치자금을 제공했다.그런데 검찰이 이 두 사람을 구속했으며 신상옥·최은희는 남조선에서 살해됐다’는내용의 기자회견을 하라고 강요 받았다”고 밝혔다. 보통사람의 추리력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이같은 조작이 누구의작품인지는 대강 짐작이 간다. 만약 당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등으로 어려워진 정국을 호도하고자 안기부가 이사건을 이용했다면 남북 문제를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삼은냉전세력의 전형적인 북풍사례로 보아 무방하다. 우리는 이같은 사례가 ‘수지 김’사건뿐이 아니라고 본다.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는 무수한 의문사 사건이 그예다. 이번 사건의 전모를 밝힘으로써 정황과 심증뿐인 많은 의문사 해결의 실마리가 되기를 기대한다.진실규명은피해자 가족의 상처를 씻어주기 위해서도 꼭 필요하다.
  • ‘수지 김’ 살해범은 남편

    지난 87년 발표된 ‘북한 여간첩 수지 김(본명 金玉分·당시 34세) 남편 납북미수 사건’은 남편이 아내를 살해한 뒤 꾸민 자작극이었음이 밝혀졌다. 서울지검 외사부(부장 朴永烈)는 13일 당시 사체로 발견된 김씨가 남편인 윤태식(尹泰植·43)씨에 의해 살해당한것으로 결론짓고 윤씨를 이날 살인 등의 혐의로 전격 구속기소했다.살인죄의 공소시효는 15년으로 내년 1월2일이 만기다. 윤씨는 지난 87년 1월3일 새벽 홍콩의 아파트 침실에서김씨와 다투다 둔기로 김씨를 때려 실신시킨 뒤 여행용 가방을 묶는 끈으로 목졸라 살해하고 사체를 침대 매트리스밑에 숨겨 유기한 혐의를 받고 있다. 검찰은 윤씨가 김씨와의 성격차와 돈 문제 등으로 말다툼을 하다 김씨를 살해한 뒤 범행을 감추기 위해 사체를 유기하고 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을 거쳐 자진 월북하려다 실패하자 ‘납북미수 자작극’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고 밝혔다. 윤씨는 아내를 숨지게한 사실은 자백했지만 “아내와 말다툼을 하면서 폭행하던 중 갑자기 실신하자 죽은 것 같아 순간적으로 겁이 나서 목을 조르게 됐다”고 폭행치사 혐의만 부분적으로 시인하고 살인 혐의를 부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이에 따라 앞으로 살인죄 적용을 둘러싸고검찰과 변호인 사이에 치열한 법정공방이 예상된다. 검찰은 당시 윤씨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내용이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안기부의 초기 수사 과정에서의사건 축소,은폐 의혹이 제기됨에 따라 국가정보원에 당시수사자료를 요청했다. 윤씨는 당시 기자회견을 통해 “아내가 사건 발생 당시홍콩에서 조총련계로 보이는 일본인 2명에 의해 납치된 뒤 나도 북한대사관에 납치됐다 겨우 빠져나왔다”고 주장했었다.안기부 등 공안당국도 윤씨를 상대로 3개월 가량 조사한 뒤 “김씨는 조총련의 포섭을 받은 북한 공작원”이라고 발표한 바 있다. 검찰은 지난해 3월 김씨 가족의 고소로 수사에 착수,홍콩 경찰의 수사 자료를 넘겨받아 사건 발생 14년 10개월여만에 윤씨를 법정에 세우게 됐다.신태영(申泰暎) 서울지검 1차장검사는 “김씨의 사체 피부에 점상 출혈 흔적이 있고,혀를 깨문 상태로 죽어있는 점 등은 김씨가 살아 있을 때살해당한 증거”라면서 “윤씨가 사체를 은닉한 후 침대커버를 새것으로 바꾸는 등 뒷정리를 완벽히 해 사체발견이 늦어졌다”고 밝혔다. 박홍환 조태성기자 stinger@
  • ‘수지 김’ 사건 전말/ 윤씨 월북실패 뒤 “”납북될 뻔””

    검찰이 13일 공소시효 만료를 한달 남짓 남겨두고 수지김의 남편 윤태식씨를 살인 등의 혐의로 구속기소함에 따라 영원히 파묻힐 뻔한 이 사건의 진상이 법정에서 가려지게 됐다. ◆사건 전말=지난해 3월 숨진 김씨의 오빠가 윤씨를 검찰에 고소했다.검찰은 홍콩 경찰에서 A4 용지 800쪽 분량의수사자료를 넘겨받아 정밀 검토했다.결론은 윤씨가 김씨를 살해한 뒤 자진월북을 시도하다 ‘납북미수 자작극’을벌였다는 것.윤씨도 다투다 보니 아내가 죽은 사실을 알았으며,납북될 뻔했다는 것은 나의 ‘자작극’이라고 시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윤씨가 김씨를 살해한 것은 87년 1월3일 0시20분.홍콩에서의 사업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유흥업소 종업원으로 일하며 현지 사정에 밝은 김씨를 소개받아 86년 10월 결혼했다.그러나 두사람은 결혼 후 여러가지 문제로 자주 다퉜다.1월2일 저녁에도 윤씨 부부는 심하게 부부싸움을 했고 다음날 새벽 윤씨가 김씨를 목졸라 살해했다. 윤씨는 시체가 발견되지 않도록 침대 밑에 숨긴 뒤 곧바로 싱가포르로 도주,북한대사관을찾아가 자진 월북을 시도했다.그러나 사정이 여의치 않자 미국대사관을 거쳐 한국대사관으로 찾아가 “북한측이 납치하려고 했으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도망쳤다”며 신변보호를 요청했다.윤씨는 이후 태국 방콕을 거쳐 1월9일 서울에 도착,같은 내용의 기자회견을 했다.이때까지만 해도 이 사건은 북한 공작원 아내에 의한 남편 납북 미수사건으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같은 해 1월26일 김씨의 시체가 발견되자 사건이틀어지기 시작했다.홍콩 경찰은 치밀한 수사 끝에 윤씨를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다.그러나 윤씨는 이미 한국으로온 상태.홍콩 경찰의 협조 요청이 있었으나 국내 수사당국은 무슨 이유에선지 ‘묵묵부답’이었다.그렇게 14년이 흘렀다. ◆윤씨의 당시 주장=윤씨는 당시 “1월2일 조총련계라고밝힌 괴한 2명이 아파트에 침입,아내에게 ‘빌려간 4,000만원을 갚으라’고 협박했다”면서 “그들이 담배 심부름을 시켜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아내와 함께 사라졌다”고 말했다.다음날 ‘부인을 찾아가려면 싱가포르로 오라’는 연락을 받았고 5일싱가포르 주재 북한대사관에 도착했다는 것이다.윤씨는 또 “북한 대사관에서 자신을 ‘북한대사 대리’라고 소개한 리창용을 만나 ‘스위스를 경유해북한으로의 정치적 망명을 선언해야 부인과 만날 수 있다’는 협박을 받았으나 출국 준비를 위해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감금돼 있던 호텔을 벗어나 싱가포르 주재 한국대사관으로 탈출했다”고 주장했다. 김씨의 시체가 발견된 뒤에도 윤씨는 “아내가 돈 문제로 조총련계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윤씨는 누구=중학교 1년 중퇴가 정식 학력의 전부인 윤씨는 당시 3사관학교 출신의 예비역 대위로 행세하면서 비디오 유통업체인 S통상의 해외사업본부장 자격으로 86년 7월 홍콩에 입국한 것으로 알려졌다.이후 김씨를 만나 86년 10월 결혼했으며 87년 이 사건으로 귀국한 뒤에는 방송인 등 10여명의 신분증을 위조,신용카드를 만들어 쓰다 96년 공문서위조죄로 2년 6개월동안 복역한 뒤 출소하기도 했다.윤씨는 지난 98년 유망 벤처기업을 설립,현재에 이르고 있다. 박홍환 조태성기자 stinger@. ■안기부 정말 '자작극' 몰랐나. 당시 안기부는 수지 김의 남편인 윤태식씨가 김씨를 살해했는지 정말 몰랐을까.아니면 알고도 시대 상황 때문에 이를 묵살했을까. 윤씨는 지난 87년 1월8일 태국 방콕에서 피랍됐다고 주장하는 기자회견을 한 뒤 다음날 서울에 도착,곧바로 안기부 남산 분실에 연행돼 4월초까지 관련 내용을 집중 추궁당한 것으로 알려졌다.궁금한 대목은 같은 해 1월26일 홍콩에서 수지 김의 시체가 발견되고,현지 수사 당국이 윤씨를 유력한 살인 용의자로 지목했음에도 국내에서는 왜 윤씨의 살인 혐의에 대해 조사를 끝까지 진행하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검찰도 이 부분을 의아하게 여기고 윤씨를 구속한 직후안기부 후신인 국가정보원측에 당시 윤씨를 조사한 자료가 있으면 보내달라고 요청했다.윤씨는 검찰 조사에서 ‘안기부에서 피랍 관련 조사를 받았고,시체가 발견된 이후에는 살인 혐의에 대해서도 추궁당했다’고 진술했다고 검찰은 밝혔다.그러나 검찰은 윤씨의 구체적인 진술 내용에 대해서는 확인해 주지 않고 있다.이때문에 일각에서는 윤씨가 안기부 조사 과정에서 살인 부분에 대해 진술을 한 것이 아니냐는 추정도 나오고 있다. 당시 안기부가 조사 과정에서 윤씨의 범행 내용을 확인하고도 윤씨를 수사기관에 넘기지 않았다면 관련자들에 대해 범인 은닉 등의 혐의가 적용될 수 있다.그러나 공소시효가 이미 지나 처벌할 수는 없다. 안기부가 윤씨의 범행 내용을 확인하고도 묵살했다면 당시의 시대 상황과 무관치 않을 것으로 해석된다.‘살벌했던’ 5공 치하였던 당시는 86년 신민당 유성환(兪成煥) 의원의 ‘국시발언 파동’,‘건국대 사태’ 등 잇따라 발생한 공안사건으로 시국이 어수선했다.87년 1월14일에는 ‘서울대생 박종철(朴鍾哲)군 고문치사 사건’이 발생,당국이 위기에 몰리던 때였다. 따라서 설혹 윤씨의 범행 사실을 안기부 등 공안 당국이알았다 해도 1월초 대대적으로 발표한 ‘북괴의 납치미수사건’을 ‘단순 살인사건’으로 수정하기에는 엄청난 부담이었을 것이라는 해석도 나오고 있다. 박홍환기자. ■수지 김 사건 일지. ◆87년 1월3일 윤씨,수지김 살해한 뒤 싱가포르로 도주. ◆87년 1월5일 북한·미국대사관은 윤씨 신병을 한국대사관으로 인도. ◆87년 1월8일 윤씨,방콕에서 ‘납치미수사건’ 기자회견한 뒤 귀국. ◆87년 1월26일 수지김,윤씨 아파트 방에서 피살된 채 발견. ◆00년 3월 9일 수지김 가족,윤씨를 서울지검에 고소. ◆01년 1월22일 검찰,홍콩경찰로부터 당시 수사자료 일부입수. ◆01년 6월 검찰,윤씨를 출국금지. ◆01년 10월8일 홍콩측으로부터 수사기록 800쪽 입수. ◆01년 10월24일 윤씨 긴급체포. ◆01년 10월26일 윤씨 살인 등 혐의로 구속. ◆01년 11월13일 검찰,윤씨를 법원에 기소.
  • 희비 교차된 상봉자 최종명단

    제4차 남북 이산가족 상봉 명단이 확정,교환된 9일 남북의상봉 후보자들은 감격의 상봉을 앞둔 기쁨과 탈락의 아쉬움이 교차했다.남북에서 각각 100씩으로 구성된 방문단은 16일 서울과 평양을 교환 방문,그리던 가족들과 해후의 기쁨을나눈다. [평양 방문단 면면] 전날 북측 가족의 생존이 확인된 103명가운데 3명이 탈락했다.북측 가족의 생존이 확인된 인사 가운데 탈락자는 최고령 후보자였던 이재긍씨(93)와 노용운씨(78·강북구 미아동),박재례씨(63·여·경기도 안양시)이다. 이씨는 북의 아내가 재혼을 이유로 상봉을 거절했다. 노씨는 당초 방문단에 포함됐으나 9일 오전 북측 여동생 노일순씨의 병세악화로 상봉할 수 없다는 연락이 와 막판 탈락했다.노씨는 기자와의 통화에서 “은실이를 만날 기쁨에 한숨도 못잤는데 위독하다니 너무나 안타깝다”고 탄식했다.박씨는 북의 큰오빠 승남씨(75)가 서울방문단 후보에 포함된것으로 확인되자 8일 방북을 포기했으나 9일 승남씨도 최종명단에 제외돼 남매 상봉이 아예 무산됐다. 반면 노씨의 방북이 돌연 취소되면서 유일한 탈락자였던 이성춘씨가 방북의 행운을 잡았다. 당초 방문단 후보에 포함된 국군포로 및 납북자 10명의 가족들은 북측이 전원 ‘확인불가능’이라고 통보,방북이 무위에 그쳤다.다만 67년 납북된 최원모씨(82)의 아내 김애란씨(78)에 대해 북측은 동생 김씨의 덕실(66)·보또씨(순실·58)가 생존해 있다고 통보해 와 남편과도 상봉할지 주목된다. [북측 서울방문단 면면] 김민하(金珉河) 민주평통 수석부의장의 형 성하(成河·74)씨가 방문단에 포함돼 지난 3차때 탈락의 아쉬움을 씻고 50여년만에 감격의 상봉을 앞두게 됐다. 또 조선화로 유명한 공훈예술가 황영준(81)화백도 최종 명단에 포함돼 두 딸 혜숙(54·대전)·명숙씨(53·청주)를 만나게 됐다.반면 배재인(65) 평양제1고등중학교장은 3차 상봉에 이어 또다시 탈락,아쉬움을 남겼다. 진경호기자 jade@
  • 남북 장관급회담 전망/ 북 전력지원 다시 요청 진통 예상

    지난해 12월 4차 회담에 이어 9개월 만에 재개된 제5차남북장관급회담에서 북측은 남북간 논의될 수 있는 거의모든 현안을 의제로 내놓아 회담결과가 주목된다.경의선철도·도로 복원과 임진강 수해방지 문제 등 그동안 논의됐거나 합의된 사안은 물론 상선 영해통과 문제까지 11개항을 제시했다.이는 북측이 일단 남북대화 및 협력에 적극나서겠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 북측의 적극적 태도는 16일 1차 전체회의에서 김령성 북측 대표단장의 기조발언에서도 잘 나타난다.과거 회담의경우 우리와 달리 20분을 넘지 않았으나 김 단장은 이를훨씬 넘겨 우리측 홍순영(洪淳瑛·통일부장관)수석대표보다 길게 발언했다.통일부 고위당국자는 “북측이 이번 회담에 상당히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음을 뜻한다”고 풀이했다. 우리 정부는 일단 이같은 북측의 적극성을 반기고 있다. 그러나 난관이 곳곳에 산재해 있어 절충에 상당한 진통이예상된다.우선 그동안 논란이 됐던 현안들이 북측의 의제에 포함돼 있다.전력지원과 비전향장기수 송환문제가 대표적이다.지난4차 회담때 50만㎾의 전력지원을 요청했던 북측은 이번 회담에서도 또다시 이를 제기하고 나섰다. 우리 정부는 전력지원에 앞서 북측 전력사정에 대한 실태조사부터 벌여야 한다는 입장이어서 절충에 어려움이 따를것으로 보인다.비전향 장기수 송환문제도 국군포로 및 납북어민 송환문제 등과 맞물려 있어 쉽게 타결될 사안이 아니다. 또 금강산 관광대책에 있어서도 북측은 사업 주체를 현대아산 대신 자금력 있는 다른 기업을 요구할 방침인 것으로알려져 진통이 예상된다.우리측이 제시한 이산가족 상설면회소 설치도 북측의 난색으로 어려움을 겪을 전망이다. 반면 경의선 철도·도로 복원이나 임진강 수해방지대책,상선 영해통과 문제 등은 양측 모두가 적극적이어서 원만한합의가 점쳐진다. 향후 남북관계와 관련해 주목되는 대목은 이 의제들 외에김 북측 단장의 기조발언이다.김 단장은 “외세와 보수세력의 책동으로 북남 당국대화가 중단됐다.반통일세력의 방해책동을 짓부수고 6·15공동선언을 지지하는 광범한 대중의 힘에 의해 모든 사업을 밀고 가야한다”고 주장했다.8·15 평양 통일대축전 파문에 따른 남한내 보수세력의 반발을 정면으로 비난한 것이다. 남북간 대화 및 교류협력에 적극 나서되 남측 보수세력의반발에 대해서도 능동적으로 대응하겠다는 뜻을 담은 것으로 풀이된다.자칫 남한내 보혁간 갈등의 빌미를 제공할 가능성이 우려되는 대목이다. 진경호기자 jade@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 비사(秘史)’ 연재를 마치고

    지난 8월 10일부터 지난 10일까지 매주 두차례씩 10회에 걸쳐 연재했던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 비사(秘史)’는 근대 한국문단을 주름잡은 문인들의 내밀한 사연을 구체적인자료를 통해 소개했다는 점에서 문단과 학계의 주목을 끌었다.이번 연재에서 제대로 소개하지 못한 부분이나 뒷얘기를‘후기’로 보충한다. 문인들의 편지란 영혼의 비원처럼 은밀한 ‘성역’이다.이금기의 화원에 무단 침입하여 ‘가택수색’을 하는 기분으로 까뒤집어 본 것이 이번 연재의 실상이었는데,엿보는 행위는 꼭 좋은 장면만이 아니라 오히려 숨기려는 것일수록 입맛을 돋구는지라,혹 본의 아니게 이 글로 마음 상한 관련자는 없었는지 염려스럽다.이 ‘금단의 정원’으로 들어가기를 망설이다가 굳이 한번 검토해 보자고 결심하게 된 배경에는 문학인에게는 작품의 해석과 평가에 필요한 어떤 자료도 그것은이미 개인의 소유가 아니라,사회와 민족의 정신적인 공유재산이란 점 때문이었다. 아쉬움이 없는 것도 아니다.신문연재이기 때문에 문학사적으로 작품과 관련지어 꼼꼼히따져보기 보다는 문단사적인비화를 중심으로 쓸 수 밖에 없었던 점이 그 중의 하나다.자료마다 충분한 소개와 해설을 하려면 더 많은 지면을 요하겠지만 이 정도면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하는데 지장은 없을 것 같다. 다만 8.15 이전 자료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6.25를 전후한시점까지만 다뤘고 그 뒤의 것은 아예 생략해 버린 게 송구스럽다.여기에도 많은 소중한 자료들이 포함되어 있다.일제식민지 시대의 편지 중에서는 ‘조선방공협회(防共協會)’원고용지에다 자신의 주소지를 ‘조선사상국방협회’ 스탬프로 밝힌 일본인 시인 노리다케 미쓰오(則武三雄)의 편지만언급하지 않았다. 6.25를 겪으면서 파인 김동환·신원혜·최정희 셋이 당면했던 현실적인 장벽은 상상 이상의 고난이었고,그건 우리민족모두의 고통이기도 했다.파인은 명백한 납북자가 되었고,그에 매달렸던 두 여인은 당장 가족을 책임져야 할 입장이었다.셋 다 북한 출신인지라 남한은 오히려 타향이었다.카프 제2차사건 때 함께 구속되어 재판 받던 기억과,중국집에서 탕수육만 두 그릇 시켜“훌러덩 훌러덩 혀를 굴려가며” 잘도먹던 백철과는 1.4후퇴 때 최정희와 동거중이란 풍문도 날정도로 가까웠는데,이유인즉 같은 북도 출신에다 백철의 부인이 최와 숙명여고 동창인 탓도 있었다. 자상한 안부와 문운을 비는 박종화의 예절 바른 편지,일본문우들과의 교유관계가 얽혀있는 김광균의 글,보낸 책을 받은 인사말에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채색한 유치환의 솜씨도볼만하다. 조지훈은 연회 초대에 처남 취직부탁까지 하는 글을 보냈고,김광주는 경향신문에 연재소설 청탁서를 편지 형식으로 썼다.송지영의 글은 그 뛰어난 붓글씨 자체가 예술이며,미국으로 이민 간 뒤 삶의 모습을 볼 수 있는 박남수의 편지도 시선을 끈다.겉으론 별로 가까울 것 같지 않았던 박봉우의 편지는 오히려 많은 사연을 상상케 만든다.195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 조숙했던 화제의 시인이 최정희에게 정신적인 안식처를 찾았던 사실이 편지를 통해 고스란히 밝혀진다. 박화성,손소희 등 여류문인들의 정감어린 편지도 재미있지만 가장 내밀한 사연을 담은 건 이영도의글이다.최정희 자신이 이영도의 수필집 ‘춘근집(春芹集)’(1958)을 받은 감사의 편지를 보내기도 했는데,이를 계기로 이영도는 최정희에게 6통의 글을 보낸 것으로 미뤄 봐 꽤나 가까웠던 것 같다. 이밖에도 이헌구.오영수.설창수.마해송.한흑구.방기환.이윤수 제씨의 글과,이봉구가 문학청년에게 보낸 편지도 제각기사연과 내력을 지니고 있다.세월이 지난 오늘날 그걸 읽는이에게는 재미있는 추억담이지만 이 글들이 씌어졌을 현장은 얼마나 팍팍한 삶의 고뇌들이 스며 있었던가를 밝혀내는 작업은 문학사가들의 몫일 것이다. ▲임헌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편지로 본 1940년대 문단秘史] (1)김동환 가족사

    한 여인이,생신을 보름 남짓 앞둔 91세의 한 여인이 1993년 3월 18일 세상을 떠났다.‘백구 신원혜지묘(白鷗 申元惠之墓)’라는 묘비명만으로는 이 여인의 죽음이 한국 문학사와 무슨 관련이 있는지 아리송할 것이다.그러나 그녀의 이름위에 있는 ‘파인 김동환(巴人 金東煥)’이란 각자(刻字)를 보노라면 ‘아,파인의 본처가 그때까지 생존했더란 말인가’라는 자못 회고조의 감탄사가 나올 법하다.1903년 원산에서 태어난 신원혜가 서울 정신여고를 졸업,블라디보스토크,간도,원산 등에서 중학교 교사로 있다가,서사시 ‘국경의밤’으로 이미 명성을 얻은 두 살 연상의 시인 김동환과 결혼한 건 1926년 3월 14일이었다. 가난한 시인의 아내이자 독실한 기독교 신자로 3남 1녀를얻은 그녀는 1942년 작가 최정희(崔貞熙)와 남편의 관계가알려지자 시인의 “우유부단한 처신을 안타깝게 지켜”보다가 기어이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셨고 그 극심한 어머니의 분노를 이겨내지 못한 아버지는 끝내 여관으로 잠시의 거처를 정하였다”고 셋째 아들 김영식(金英植·68)은 회상한다.“그 후 어머니는 교회 일과 모교인 정신여고 동창회 봉사활동에 전념하면서 아픈 상처를 홀로 달래고” 지냈는데,나중 동네 아낙들에게 “아무리 남편이 속을 썩이더라도 집에서 나가 달라는 말을 해서는 안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김영식,‘아버지 파인 김동환-그의 생애와 문학’). 조혼이 아닌 어엿한 신여성과 연애를 거쳐 사랑이 그득한결혼을 했던 파인의 예기치 못했던 탈선이 문단에서는 가십이었으나 그의 고향을 비롯한 애독자들로부터는 마침 휘몰아친 친일문학과 함께 따가운 매도의 대상이었다.어쩌면 이 두가지 탈선은 오히려 동시에 수행되면서 인간과 민족의존재론적 본질을 벗어나 원죄의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게 해준 도피처 역할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파인의 친인척과 고향 사람들로부터 동정과 애정을 받은 것은 정작 남편이 버린 여인 신원혜였다.아니,파인 조차도 그녀를 버릴 수 있었을까. 서울이 인민군에 점령당한 직후인 1950년 7월 초 파인은 홀연히 귀가했다.피신 차 이뤄진 이산가족 상봉은 비록 짧았으나 단란했는데,이내 최정희의 자수 권유를 받고 나간(7.23) 뒤 그대로 납북,생사도 모르게 분단시대의 아픔을 고스란히 앓은 게 이 일가족이었다.가족이랬자 두 아들은 일찍세상을 떠나버려,셋째 영식과 딸 영주(英珠·63)뿐이었다. 영식은 서울 경복고를 거쳐 고려대 국문과를 졸업한 뒤 대통령 비서실,주불 한국대사관 등에서 근무하다 정년을 맞았고,영주는 정신여고와 이화여대 국문과를 나와 시인으로 등단,캐나다 밴쿠버에 살고 있다. 이 한많은 여인이 죽음을 앞두고 마련해 둔 유품 속에는파인의 사진과 애증이 교차하는 몇몇 증빙 서류들,그리고자신이 묻힐 묘소와 묘비명이 포함되어 있었다.살아서 쫓아냈던 지아비를 죽어서야 한 문패 안으로 맞은 것이다.보따리 속에 파인이 보낸 편지도 한 묶음 있었다.파인은 맨몸으로 집을 나갔으니 여러 유품들은 저절로 신원혜가 간직했을 터여서 여간 소중한 자료가 아니리라는 기대에 부푼다.신원혜는 파인에게 보냈던 기라성같은 문인들의 편지를 그 격변의 역사를 헤치면서 고이 간직해 왔었다.신혼초 서울의정동,다동을 거쳐 종로구 돈의동 74번지로 호적을 옮긴 뒤,적선동(1927.5),인사동(1930.7),견지동(1933.12),필운동(1935.10),옥인동(1936.11),통인동(1938.1),효자동(1940.2)을전전하다가 1941년 6월 12일 적선동 183번지의 목조 기와집으로 이사,거기서 해방을 맞았다. 만주로부터 돌아온 피난민의 딱한 사정 때문에 방세도 안받고 그대로 살게 했던 이창규씨가 어느날 정전(停電)이 되자 성냥불을 켜들고 초를 찾다가 넘어져 석유난로에 점화,순식간에 집이 불타 버렸다.바로 1946년 12월 12일 오후 7시쯤,파인의 유품이,그리고 그가 ‘낭자 신원혜’에게 보냈던 달콤한 연애편지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순간이다.일가는창성동 자교(紫橋)교회 목사 사저에서 신세를 지다가 청운동(1948.5∼1953.2)으로 옮겨 6·25와 1·4후퇴를 겪으면서도 행여나 남편이 돌아오려나 싶어 몇 년간 이사도 하지 않았다.이제 파인과 신원혜는 갔고,사랑의 편지도 불타버렸다.그러나 1947년부터 납북당했을 때까지의 격랑을 헤치며 파인이 한 지아비와 육친의 정으로 아내 신원혜와 자녀에게보냈던 32통의 편지는 문단 비사의 차원을 넘어 가난했던글쟁이의 인생론적인 비애를 느끼게 한다. 중학생 아들(영식)과 초등생 딸(영주)을 아내에게 맡긴 빈털터리 시인 김동환은 이 무렵 최정희로부터 지원(1942년생),채원(1946년생) 두 딸을 가진,허리가 휘청거리는 아버지였다.최정희와의 보금자리였던 덕소에서 8·15를 맞은 파인의 심경은 실로 착잡했을 것이다.그의 뇌리에는 선비적 지조의 상징인 매월당 김시습의 18대 후손으로서 민족운동에투신했던 화려한 투쟁 경력들-민요 전설시의 거봉,카프(조선프롤레타리아 예술가동맹)중앙위원,침략주의에 항거했던민완 기자,잡지 ‘삼천리(三千里)’의 폭발적인 성공과 민족의식이 강한 각종 출판물 간행,신간회 집행위원 등등이스쳤을 것이다.이런 경력 때문에 오히려 더 부정적으로 보였던 친일행위의 오점들은 그로 하여금 발빠른 자성과 회오의 눈물을 흘리게 했다.“진흙 속에 빼앗긴 두 발 겨우 뽑고/오래 가뒀던 옛 날개 와락 펴 멀리 쳐다보니”(‘돌아온 날개’),“새나라 백성들은 이래서는 안된다/우리는소생하지 않으면 안된다”(‘소생’)는 참회와 함께 “올해엔콩팥을 맘대로 심어/천리객은 몰라도 십리의 벗 맞아들여/소찬에 약주라도 싫도록 대접할꺼나”(‘起耕’)라는 은인자중의 자세를 보여줬다.반민특위 때 그가 자수(1949.2.28)할 수 있었던 심리적인 배경도 여기서 비롯한 것이다. 그가 이승만 정권이나 한민당 추종이 아닌,조선민주당 대변인격으로 정당활동에 몸담았던 것(1946.2)은 나름대로의민족관을 지녔기 때문으로 풀이된다.혼란 속에서 숙원이었던 잡지 ‘삼천리’ 복간에 온 정력을 쏟았는데,민족 독립노선이나,문인으로 발 빠르게 자아비판한 채만식을 부각시킨 걸로 봐서 다분히 참회적인 자세를 취했다.을지로5가 여관에서 업무를 시작한 파인은 틈틈이 아내와 아들에게 자신의 처지를 납득시키려고 난필의 쪽지를 보냈다.우편 배달이 아닌 사환이나 인편을 통해 직배시킨 경우가 많았던 시절이라 겉봉에는 ‘영식 모(英植 母)’ 혹은 아예 ‘영식 전(展)’이라 쓰고는 원고지나 적당한 백지에 절박한 용건만적어 보냈다.서른 두 통의 편지중 가장 빈도수가 많은 내용은 잡지 일로 인쇄소에 붙어 있어야 한다든가,당장 돈이없으니 우선 얼마만 보내고 며칠 뒤 더 보내겠다는 등등이다.신원혜의 이성적인 결벽과는 달리 어린 남매들이 아버지에게 귀가와 생활비를 독촉하는 전화를 했던 데 대한 회답으로 보인다. 이 역마살의 시인을 신원혜와 함께 묻고 딸 영주는 “기다리면 다시 올 사람인가/시를 만드시던/파인,내 아버지//하늘 밑을 파고/그를 묻었다.//그가 다니던 길도/함께 넣었다.//눈물도 못 내고/기어 가/나도 묻힌다.//아 아,내 아버지 파인”(‘아름다운 작별’)이라고 마음을 추스렸다.이렇게 담담해질 수 있는 시인으로서의 김영주와는 달리,아버지로부터 버림 받았던 딸로서의 김영주는 무척 신랄했다.“친일행동과 여자 문제로 부끄러운 아버지 책을 써서 알리는 것은 정말 내가 부끄러워요”라며,“아버지는 실패한 인간입니다.자신만 실패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이세상에서 천국의 모형을 이루어 살라고 주신 한 가정의 책임을 저버리므로 해서,어머니와 우리 자녀는 가장아픈 불행을 체험했으며,어머니의 고통과 수치와 배반에 대한 증오와 세상이 보내는 그 부끄러운 수근거림을 어떻게 감당하셨는지 놀라울 뿐입니다”(김영식,위와 같은 책)라고 통매했다. 그러나 파인의 애틋한 조각편지들은 실패한 인간의 자료로서가 아니라 역사의 멍에를 헤어날 길 없었던 인정미 넘치는 나약한 한 서정시인이 치러야만 했던 가정과 사랑과 역사의 틈바구니에서 갈기갈기 찢어진 상처일 것이다. “몸 무고히 학교에 잘 다니느냐.마음에 어느 날 잊은 적이 없었다”거나,“추위가 심하니,남대문 야미(暗)시장에 가서,영식이나 영주의 외투 한 벌 사서,한 아이라도 입히오”,“한방의 침술 운운하지만 큰 아이들 때(장남 영사는 16세로 1942년에,차남 영창은 17세로 1947년에 사망)에 보아도도무지 믿을 사람들이 못 되니 더 보이지 말고,내가 정초에 영식이를 데리고 전문 신의(新醫)들에게 보여 충분히 치료할 터이니,아이에게 겁나는 말을 일체 말고,내가 가기를 기다려 주오”라는 등등의 구절에 이르면 이 시인이 얼마나가슴으로 울었던가를 알법도 할 것이다.“내일 산소에 가는 일은 중지하고,5월 단오에나 가기로 하오”란 구절은 바로 두 아들이 묻혔던 미아리 공동묘지로,거길 가면 “아버지는 아이들에게 ‘묘소에 절하라’고 말한 후 묵념을 했고,어머니는 쌍봉 무덤 앞에 엎드려 흐트러진 모습으로” 울부짖었다고 김영식은 회고한다.살뜰한 지아비와 부정(父情)이 넘치는 글이기에 오히려 다른 서간문에 못지 않게 돋보이는 이 글들을 쓴 주인공이 어째서 가정을 버릴 수 있었을까. 임 헌 영 문학평론가·중앙대 겸임교수
  • 파인아들 김영식씨 공개 작고문인 서한의 의미

    *학국문학사 빈공간 메워줄 귀중한 자료””. 한국문학사는 흔히 ‘겨울언덕에 홀로 서 있는 나목(裸木)’으로 비유된다.작가들에 대한 작품론은 풍성한 편이지만,작가들이 활동한 시대와 작가들의 개인적 여건 등을 알 수있는 연구는 미흡하기 때문이다.이는 서류 등 자료를 소홀히 하는 경향에다,사생활에 관한 자료를 노출하기 꺼려 하는 풍토 탓이다. 최근 김영식씨가 공개한 문인 48명의 사신(私信) 214통은 한국문학사의 이같은 ‘빈 공간’을 메워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서 학계와 문단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다.그동안 더러 문인들의 육필서한이 공개되기는 했지만 수량이 적었다.아울러 특정문인에 한정된 것이어서 한국문단사 연구에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반면 김영식씨가 내놓은 서한들은 수량도 방대하거니와 일제하 민족진영과 친일성향의 작가는 물론 해방후 월북작가 등 각 분야를 망라하고 있어 가치가 매우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편지는 193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중반까지 오고간 것이 대부분이다. 김영식씨는 이달말 파인(巴人) 김동환 시인의탄생 100주년에 맞춰 기념행사를 갖기 위해 8년여전부터 각종 자료를모아왔다.이 편지는 자신이 소장해오던 것과 최정희 여사에서 태어난 이복형제들이 갖고 있던 것들이다. 김영식씨는 “문인들의 편지 속에서 선친과 관련된 ‘흔적’을 발견하고 반가움과 함께 복잡미묘한 감정이 들었다”면서 “가치있는 자료는 수요자,특히 연구자에게 자유롭게활용될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 편지를 공개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또 “이 편지들은 첫 공개되는 것이고 일부를 제외하고는 모두 문단교류기의 편린들로 당대의 문예사조,동호인관계,특정 문인의 개성,송수신자간의 내밀한 사연까지 고루 다루고 있다”면서 “이번에 밝힌 편지 말고도 60여통이더 있으나,관련자들 가운데 여럿이 생존해 있어 추후 공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에 공개된 문인들의 사신은파인 김동환 시인이 부인 신원혜에게 보낸 32통을 제외하면,나머지 182통은 모두 문학사적 가치가 큰 ‘사료’들이다. 이 편지의 수신자는 주로 소설가 최정희 여사인데,이는 그가 당시 파인 김동환 시인이 운영하던 삼천리사의 기자로근무하면서 문인들에게 원고청탁 등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파인 김동환 시인의 편지가 적은 것은 1946년 12월 당시 파인 가족이 서울 종로구 적선동 183번지(현 정부세종로청사자리)에 살고 있을 때 집에 불이 나 각종 자료 등이 모두없어졌기 때문이다. 문학평론가 임헌영씨는 이 편지들에 대해 “우리 근대문학사 한 세기를 담아낸 기록”이라면서 “문인 몇 사람의 사신 차원을 넘어 문화재적 가치를 갖는 사료”라고 평가했다.임헌영씨는 또 “외국의 경우 문인들의 개인 전집에 작품은 물론 그가 주고받은 사신도 전부 수록하고 있다”면서“문인 인물연구는 물론 그동안 숨겨진 우리 문단사의 상당부분을 되살릴 수 있을 만한 자료”라고 말했다. 임헌영씨는 이 편지들은 ▲일제 때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KAPF)-비(非)카프계열 문인들의 교류 파악 ▲남북한의 주요 문인 망라 ▲파인에서부터 학생시인 박봉우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연령층 포함 ▲최정희-모윤숙-노천명 등 당시 여류문인의 인간적 관계와 사생활 이해 ▲김남천의 문학비평 소개 ▲김사량의 편지를 통한 재일조선인 문단의 활동상 파악 ▲문단과 거의 교류가 없었던 것으로 알려진 이육사의 문단 교류 등의 사실을 처음 또는 재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밝혔다. 임헌영씨는 대한매일에 이 편지를 토대로 한 시리즈를 연재하기 위해 지난 한달여동안 기존 문단사와 비사 등을 확인하고 김영식씨로부터 가족사 등에 대해 청취했다. 정운현기자 jwh59@. ■파인 김동환·최정희는. 파인 김동환(1901∼1950년 납북후 사망 추정).그는 ‘국경의 밤’으로 우리 문학사에 굵은 획을 그은 작가이다.장편서사시와 민요시 창작을 주도했다.1925년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카프)에 가담하는 등 한때 계급문학에 관심을보였으나 주된 정조는 민족정신이었다.고전에 몰두해 가사문학 등 전통문학과의 접목을 시도하면서 민요시를 왕성하게 발표했으며,1929년에는 종합 대중잡지 ‘삼천리’를 창간하기도 했다. 그러나 치열한 현실 의식의 부족으로 30년대 말부터 친일문학의 늪에 빠져들었고,1941년8월 친일단체를 망라한 ‘임전대책협의회’의 발족에 앞장서기도 했다.1931년쯤 ‘삼천리’에 입사한 최정희와의 ‘관계’가 1942년에 알려져화제가 된 뒤 43년부터 동거에 들어갔다. 소설가 최정희는 1931년 ‘정당한 스파이’로 작품 활동을 시작한 뒤 주로 일제하 지식인 여성의 고통을 다룬 작품을 발표했다.‘인간문제’로 유명한 당대의 여류소설가 강경애가 민족의 수난과 정면대결을 시도한 작가였다면 최정희는 여성의 문제에 일찍 눈을 뜬 작가였다.‘지맥’‘인맥’‘천맥’ 등의 대표작에서 신여성의 진보적 의식이 당대의경제적 사회적 관습에 어떻게 짓눌리는가를 주로 다뤘다. 이종수기자 vielee@. ■편지 주인공들. 파인 김동환 시인과 최정희 여사가 보관해오던 편지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우리 근대문학사에 뚜렷한 발자국을 남긴‘거목’들이다. 이들 중에는 국권상실기에 문학을 통해 일제에 대해 저항의식을 표출하던 사람도,친일성향을 띠었던 사람들도 있다. 또한 광복 후 북한에서 활동한 사람들도 제법 많다.이는 우리 역사의굴곡을 여실히 보여준다.이들은 편지에서 생활의 애환을 털어놓거나,문학과 역사의 관계에 대해 고민하는모습을 보여주는 등 문인의 각종 고뇌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 우선 편지에서 눈에 띄는 대목은 국내에 비교적 자료가 적은 월북시인 및 작가들의 것이 적지 않다는 점이다.이들에대한 문학적 연구는 지난 90년대초 월북문인 해금조치로 조금씩 이뤄지고 있으나 사료가 적은 탓에,학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 편지를 남긴 월북 시인 및 작가는 박태원·한설야·이태준·김남천·이현욱·안회남·박찬모·이용악·김사량 등이다.박태원은 말년에 중풍으로 전신불수,실명상태에서 ‘갑오농민전쟁’을 탈고해 ‘한국의 밀턴’으로 불린다.한설야는 북한에서 교육문화상·최고인민회의 부위원장을,김남천·이태준은 각각 문학가 단체에서 요직을 지냈다.또 이현욱은 임화의 두번째 부인으로,지하련이라는 필명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편지를 남긴 사람들 가운데는 친일성향의 작품이나 글을 남겼거나,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인사들도 적지 않다.김동환을 비롯해 백철·이헌구·정인택·박종화·유진오·정비석·노천명·모윤숙 등이 그들이다.박종화는 학병권유 글을 썼고,노천명은 일제의 태평양전쟁을 미화하는 시를 썼다. 다른 여러 인사들도 친일성향의 글을 몇 편씩 남겼다.그러나 ‘민족시인’ 이육사의 엽서 1통도 보여 눈길을 끈다. 최근까지 활동했던 소설가 김동리(95년 작고)와 황순원(2000년 작고)의 편지도 포함돼 있다.또 말년까지 고향인 경남 진주에서 언론인으로 활약한 설창수 시인의 편지도 있다. 그는 일본 유학시절의 항일운동 공로로 지난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특히 편지를 주고받은 사람이 최정희인지라 같은 여성인 모윤숙(22통),노천명(21통)등과 나눈 편지가 많다.이들 3명은 당시 문단에서 ‘쌈바가라스’(‘삼총사’의 일본식 표현)로 불릴 만큼 정이 도타웠다.편지에는 이들의 사생활과 개인적 친분관계가 숨김없이 드러나 자못 흥미를 끈다. 정운현기자
  • 대한항공 원동헌 승무원 민간항공 최장근속 기록

    “항공여행 에티켓이 갈수록 뒷걸음질치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26일 국내 민간항공 사상 처음으로 30년 근속 기록을 세운 대한항공 현장지도실장 겸 수석사무장 원동헌(元東憲·54) 이사는 이같은 말로 오랜 항공서비스 소감을 대신했다. 원씨는 이날로 2만6,600시간의 비행을 기록했다.1,108일 8시간으로 3년13일 동안 하늘에서 살아온 셈이다. 지난 69년 창사와 함께 민항시대를 연 대한항공에서는 같은해 12월 서울발 강릉행 여객기가 납북된 직후 기내 치안유지를 위한 남성 보안승무원을 채용했으나 승객서비스 요원 공채는 원씨가 입사한 71년이 처음이다.동기생 가운데여성 34명은 물론,남자동료 11명도 모두 회사를 떠났다. 그는 퇴직을 2년 앞둔 요즘에도 남성 승무원 600여명 등후배 4,200여명을 진두지휘하며 1주일에 3∼4일 정도 비행기에 탑승,서비스 현장을 지키고 있다. 현재 국내 항공업계에서 현역 기내 근무자중 30년 이상 근속자는 대한항공 기관사 2명이 있으며 조종사는 현장을 떠나 임원으로 활동할 뿐이다. 지난 2월 공채 2기 아래인이택금(李澤錦·53·여)씨와 함께 이사로 승진,승무원으로서는 처음으로 임원에 오른 원씨는 “해외로 오갈 때 장시간 비행 뒤에 피곤하다고 해서 곧바로 잠들지 말고 잠깐 눈을 붙이거나 현지시간에 맞춰 활동하는 것이 시차적응에 도움이 된다”고 충고했다. “80년대초 중동에 진출했던 한 근로자가 가정불화를 비관,출국 여객기 안에서 면도칼로 자살을 기도해 응급조치를하느라 진땀을 쏟았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는 원씨는 “서비스현장 최일선에서 고객을 받드는 임무를 제대로 수행하려고 건강에 각별한 신경을 쓰고 있다”고 소개했다.그는 “공항 이용자들이 터미널이나 기내에서 주위의 시선은아랑곳 않고 떠드는 등 남을 배려하는 마음가짐이 흐려져가는 세태가 걱정”이라고 덧붙였다. 송한수기자 onekor@
  • 호국영령 추모행사 이모저모

    한국전쟁 발발 51주년을 맞은 25일 기념행사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는 추모행렬이 줄을 이었다. 국민들은 특히 ‘6·15 남북 공동선언’의 조속한 이행과통일의 의지를 다졌다. 대한민국재향군인회(회장 이상훈)는 이날 오전 8시30분 참전용사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국립묘지에서 나라를 지키다 산화한 호국영령의 넋을 기렸다. ‘6·25사변 납북자가족회(회장 이미일)’는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공원에서 임진각까지 ‘전쟁체험 납북길 따라 걷기대회’를 갖고 이산(離散)의 아픔을 함께 했다. 행사에 참가한 전쟁 세대 500여명은 납북자의 조속한 송환을 촉구하는 결의문을 낭독한 뒤 서울 은평구 구파발까지 8.2㎞를 행진했다. 이들은 구파발에서 버스 8대에 나눠타고 임진각 1㎞ 앞에도착,점심식사로 주먹밥을 나눠 먹으며 납북된 가족·전우들의 고통을 체험한 뒤 임진각까지 걸어가 북녘 하늘을 향해 ‘우리의 소원은 통일’을 합창했다. 한국자유총연맹 서울시지회(회장 안두훈)는 서울 명동 한빛은행 앞에서 개떡,보리주먹밥,강냉이죽 등 ‘6·25 전쟁터 음식전’ 행사를 가졌다.이날 국립현충원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는 참전자 및 유가족 1만여명과 시민 1,000여명이 찾았다. 지난 51년 철도공무원으로 일하다 참전했던 유기남(柳基南·75·경기도 의정부시 신곡동)씨는 “민족이 다시 하나로뭉치는 통일의 물꼬를 터야 한다”면서 “철저한 안보의식으로 제2의 6·25를 막으려는 노력이 앞서야만 이뤄질 수있다”고 강조했다. 전후 세대인 오상돈(吳相敦·40·전남 목포시 하당동)씨는 “아버지께서 52년 참전했다가 포탄 부상으로 인한 후유증과 전쟁통에 실종된 동생 때문에 아직도 고통을 겪고 있다”면서 “아버지 생전에 보훈 대상자로 선정돼 명예 회복이 이뤄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
  • 6·15 1주년/ 통계로 본 남북교류

    지난 1년간 남북한은 과거 어느 때보다 활발한 인적·물적교류를 했다. 특히 교역 등 경제분야와 이산가족 분야에서뚜렷한 성과를 거두었다.그러나 올들어 경기 둔화세와 함께부시 미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남북교류는 소강상태를 보이고 있다. ■인적 왕래= 남북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경협 등 대북지원과사회문화교류가 크게 늘었다. 지난해 모두 7,280명이 방북했다.99년에는 5,599명이었다.올들어 4월말까지 1,798명이방북했는데 이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21.6% 늘어난 수치다.지난해 남한을 방문한 북측 인사는 706명으로 99년 62명에 비해 10배 이상 늘었다.문화예술공연단의 방문이 다수를 차지했다. ■금강산 관광= 지난해 21만3,009명이 금강산에 올랐다.99년엔 14만8,074명이 다녀왔다.98년 11월 관광 개시 이후 지난4월말까지 모두 40만 1,760명이 금강산을 관광한 것으로 집계됐다. ■이산가족= 지난해 8월15일 600명의 이산가족들이 서울과평양을 방문한 것을 시작으로,3차례에 걸쳐 3,630명이 헤어진 가족들을 만났다.방문단 교환과 2차례 생사ㆍ주소확인작업을 통해 1만213명이 가족의 생사를 확인했다. 올 3월에는 서신교환도 이뤄져 600명이 휴전선 너머 가족들에게 안부를 전했다.일부 납북자와 국군포로도 상봉의 기쁨을 누렸다.또 비전향장기수 63명이 지난해 9월 북한으로갔다. ■탈북 주민 입국= 지난해 312명으로 급증했다.99년 148명에비해 2배이상 늘었다.올들어 4월말 현재 135명이 입국했다. ■교역 규모= 지난해 교역 규모는 4억2,525만달러로 97년 3억달러 규모에서 증가세를 이어갔다.남북교역 업체 및 품목도 꾸준히 늘어 89년 30개 교역업체에서 지난해 652개업체로 증가했다.지난 4월말 현재 교역업체는 193개,교역품목은342개이다. ■대북지원= 2차 남북 장관급회담에서 대북식량지원이 합의돼 쌀 30만t,옥수수 20만t이 차관 형식으로,옥수수 10만t은국제기구 지원 형식으로 북한에 전달됐다.비료의 경우 지난해에는 30만t,올해에는 20만t 지원됐다. ■사회문화 교류= 지난해 협력사업 9건을 승인했다.98년과 99년엔 각각 7건이었다.지난해 남북교류협력기금으로 1,534억여원이 지출됐다.경의선철도연결 지원사업에 85억여원이쓰였고, 대북비료 30만t 지원에 942억여원이 들었다. 1·2차 남북이산가족 교환방문 경비로 22억여원이 쓰였다. 또 평양교예단 서울공연에 6억3,700만원,평양소년학생예술단 서울공연에 3억1,900만원이 사용됐다. 김상연기자 carlo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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