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납북
    2026-02-04
    검색기록 지우기
  • 역전
    2026-02-04
    검색기록 지우기
  • 포로
    2026-02-04
    검색기록 지우기
  • 질병
    2026-02-04
    검색기록 지우기
  • 소지
    2026-02-04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1,671
  • 대학생 평화 현장 체험에 새터민 여대생 둘, 16세 여중생도

    대학생 평화 현장 체험에 새터민 여대생 둘, 16세 여중생도

    대학 매체 기자들을 비롯한 대학생들이 전쟁과 분단을 상징하는 곳을 찾아 하나되는 미래를 꿈꿨다. 11개 대학 19명의 대학생과 16세 여중생 한 명이 1999년 제정된 통일교육지원법에 따라 이듬해 설립된 통일교육협의회(상임 의장 송광석)가 지난 11일과 12일 1박2일의 일정으로 진행한 ‘제1회 전국 대학생 기자단 평화현장 취재 및 통일 기사 경진대회’에 참여해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이 행사는 통일부 통일교육원과 서울신문 평화연구소가 후원한다. 특히 이번 행사에는 새터민 대학생 둘과 부득불 참여하겠다고 간청한 여중생 한 명이 함께 해 눈길을 끌었다. 첫날 오두산 통일전망대를 찾아 2㎞ 밖에 떨어지지 않은 북한 땅을 조망하며 분단의 아픔을 실감한 대학생들은 임진각에 지난해 문을 연 국립6·25전쟁납북자기념관에 들러 납북자들과 가족들의 아픔을 간접적으로나마 체험했다. 이어 통일대교를 넘어 민간인 통제선 안의 캠프 그리브스 유스호스텔을 찾아 묵었다. 캠프 그리브스는 1953년 정전 무렵에 처음 만들어져 50여년 미군 2사단 506 보병대대 등이 주둔하다 1997년 절반 병력은 이라크로 떠나고, 절반은 본국으로 철수해 버려졌다가 2007년 8월 한국정부에 반환된 곳이다. 2014년 경기 파주시에 넘겨져 유스호스텔로 누구나 묵을 수 있는 곳이 됐으며 특히 드라마 ‘태양의 후예’ 촬영지로 낯익은 곳이다. 판문점까지 9㎞만 가면 판문점이고 원래 일정은 판문점과 도라전망대, 제3땅굴 등도 둘러보는 것이었지만 아프리카돼지열병 예방 차원에서 제외됐다. 특히 캠프 그리브스는 1987년 8월 판문점 도끼 만행으로 유명한데 그 발단이 됐던 미루나무가 이곳 캠프 주변에도 아주 많았다. 일행을 안내한 정훈장교는 미루나무가 성장 속도가 빠르고 키가 크고 잎이 커 공중 정찰 등으로부터 시설을 안전하게 보호할 수 있어서 많이 심었다고 설명했다. 대학생들은 황성기 서울신문 평화연구소 소장의 특강 ‘통일을 위한 언론과 우리의 역할’을 듣고 이윤기 한림성심대 겸임교수 겸 사단법인 평화한국 사무총장의 직업 적성 등에 관한 심리학 강의를 들었다. 밤에는 6~7명씩 팀을 나눠 2~3시간 평화연구소 소속 기자 3명으로부터 기사 작성 교육과 함께 취재현장의 경험담을 함께 했다.이튿날에는 2시간에 걸쳐 캠프 그리브스 탄약고와 막사 등에 설치된 작가들의 작품과 정전협정 협상 과정을 감독하던 중립국 감독위원회에 참여했던 폴란드와 체코 막사 등을 둘러봤다. 특히 폴란드군이 쓰던 막사에는 김일성 전 주석이 간청해 북녘의 전쟁고아 1500명이 1951년부터 1959년까지 폴란드로 건너가 지내다 북한 형편이 나아지자 다시 모두 돌아간 사실과 함께 다양한 사진들이 전시돼 눈길을 끌었다. 지난해 추상미 감독이 다큐멘터리 ‘폴란드로 간 아이들’로 제작해 개봉했다.대학생 기자들은 이번에 체험하고 느낀 것들을 기사로 작성해 27일까지 통일교육협의회에 제출하면 평화연구소가 심사해 다음달 13일 서울신문사 6층 회의실에서 시상식을 개최해 시상한다. 대상 격인 통일부 장관상 한 편에 상금 30만원 등이 주어지며 소속 대학에도 같은 액수의 상금이 주어지는 점이 색다르다. 소속 대학의 매체에 게재되거나 방송되면 가산점이 주어진다. 서민규 통일교육협의회 사무총장은 “젊은이들의 평화와 통일 의지를 북돋기 위해 참가자들을 통일 기자로 위촉하고, 지속적으로 통일에 관한 기사를 쓰도록 하는 방안을 고민하겠다”고 밝혔다. 2014년 남쪽에 온 새터민 이보람(가명 22·숙명여대 1학년) 씨는 “오두산이나 임진각이나 여러 차례 와봤는데 캠프 그리브스는 처음이다. 올 때마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현직 기자들로부터 기사를 어떻게 작성하고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강의를 듣고 생각하게 된 것이 가장 좋았고 기억에 남을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는 남과 북의 갈등을 줄이는 일을 해보고 싶다며 사회심리학과 법학을 복수 전공하고 있다고 밝혔다. 김예린(16·인천 관교여중 3학년) 양은 “지난해 우연히 통일에 대한 강의를 들으며 통일에 대한 관심이 생겼다. 북한과 통일을 조금 더 직접 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아 신청했다”며 “현재 장래희망을 기자로 마음먹고 있는데 좋은 경험이 됐다”고 말했다. 글·사진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오구라 전 대사 “대화하지 않는 것이 대화의 한 방법이어선 곤란”

    세미나 제목이나 참석자 면면을 보면 걱정스러운 대목이 없지 않았다. 지난 25일 서울 종로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한반도평화만들기 주최 한일공동세미나의 제목은 ‘갈등을 넘어 공생을 위한 한일관계를 향하여’였다. 홍석현 한반도평화만들기 이사장의 영향력 덕분에 참석자 면면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를 시작으로 공로명·유명환·한승주·윤병세 전 외교부 장관, 최상용·신각수 전 주일 대사, 나가미네 야스마사 주한 일본 대사와 오구라 가즈오 전 주한 일본 대사, 이원덕 국민대·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소에야 요시히데 게이오대·기미야 다다시 도쿄대·후카가와 유키코 와세다대교수, 오코노기 마사오 게이오대 명예교수, 김진명 소설가,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 이상수 전 노동부 장관, 김종민 전 문화관광부 장관, 이부영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 김형기 전 통일부 차관, 김성곤 전 국회 사무총장 등이 얼굴을 비쳤다. 기자는 제1 섹션만 경청했는데 걱정했던 것보다 균형되고 정돈된 주장과 논리를 내세웠다. 가장 인상 깊었던 발언은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가 토론 과정에 전한 오구라 전 대사의 조언이었다. “아무 대화도 하지 않는 것이 대화의 한 방법이라고 믿어선 안된다”는 것이었다. 홍 이사장을 비롯해 거의 모든 주제 발표자와 토론 패널들이 두 나라 지도자들의 통 큰 타협과 결단을 촉구했다. 또 내년 3월로 예상되는 한국 사법부의 일본 기업 채무를 현금화하는 노력을 중단하겠다는 외교적 신호를 일본에 빨리 보낼 필요가 있다고 제안했다. 홍 이사장은 문재인 대통령이 더 이상 일본 정부나 기업의 양보를 요구하지 않고 우리 정부가 결단해 문제를 단숨에 해결하겠다고 정치적으로 선언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제안했다. 그는 “한일 관계가 잘 풀리면 일본이 한반도 비핵평화 과정에 참여할 수 있다”며 “아베 총리의 숙원인 북·일 수교와 납북자 문제도 타결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 교수는 “한국 측이 한국 기업의 배상 여지를 열었는데도 (일본이 이를 받아들이지 않아) 대화 진전을 막고 있다”며 “양국 정부가 상황 악화를 막기 위해 추가 대응을 삼가고 청와대와 총리관저를 중심으로 다각도로 정치적인 소통을 늘려야 한다”고 짚었다. 오코노기 명예교수는 “만일 한국 법원이 (일본 법원 판결처럼) 인도적 관점에서 당사자 간에 해결할 것을 주문했다면 일본도 역할을 다했을 것”이라며 “지금이라도 한국이 국내적인 조치로 (강제징용 배상 문제를) 해결하는 게 양국 간 협상의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기미야 교수는 “현금화 조치가 이뤄져 일본 기업에 피해가 발생하면 일본은 지금처럼 한국에 대한 수출관리를 실무적인 차원이 아닌 정치적으로 운용할 가능성이 높고 이는 한·일 경제전쟁으로 치닫게 된다”며 “적어도 해결에 대한 로드맵이 마련될 때까진 현금화 조치가 미뤄져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원덕 교수도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해 두 나라가 협의해 강제집행 프로세스를 중지하는 잠정 조치 방안을 내놔야 한다”며 “이후 한국 측이 (노무현 정부 때인) 2005년처럼 민관위원회를 조직해 해결책을 논의하면 일본도 경제보복 조치를 철회할 명분을 얻고 우리 청와대나 정부도 부담을 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이홍구 전 국무총리는 “초강대국들이 이 문제를 해결할 원칙이나 외교력을 상실한 상황”이라고 우려하면서 “양측이 시간을 놓치지 말고 곧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며 “(11월 22일 종료 기한인) 지소미아 문제 등을 생각할 때 10월에는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고 주문했다. 최상용 전 대사는 특별강연을 통해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조건 없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을 만나겠다고 두 차례나 얘기했고, 우리 정부도 일찌감치 공식적으로 지지 입장을 밝혔다”며 “일·북 국교정상화를 통해 한반도 평화 조성에 기여할 수 있고, 부수적으로 한·일 간 역사 문제도 보완할 수 있다”고 말했다. 1세션 사회를 맡은 한승주 아산정책연구원 이사장은 “두 나라 모두 마룻바닥을 페인트 칠하며 구석으로 내몰리는 형국”이라며 안타까움을 토로했다. 기미야 교수는 “1965년 청구권 협정에 대한 태도가 근본 문제이며 일본은 두 나라 관계 정상화가 협정으로 모두 일단락됐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진정한 정상화가 되려면 시간이 오래 걸린다는 점을 깨달아야 하고, 한국은 일본 정부나 국민들이 외교적으로는 일단락됐다고 인식한다는 것을 알고 매우 신중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 또 많은 참석자들이 1998년 김대중-오부치 합의같은 것을 주문했는데 다다시 교수는 “당시 한국 정부가 김대중-김종필 연합정권이란 점을 감안해야 한다. 견고한 지지층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지적한 것도 눈여겨 볼 만했다. 임병선 평화연구소 사무국장 bsnim@seoul.co.kr
  • 日교수 “아베 ‘한국 상대 안하기’ 정책, 평화국가 종언” 비판

    日교수 “아베 ‘한국 상대 안하기’ 정책, 평화국가 종언” 비판

    “아베, 北 납치 교섭 안 받아들여지고 한·미 대화 계속 이어지자 궁리 몰려”아베, 남북정상·북미정상 회담에 이중 충격“日, 중·러·남북 vs 미·일·대만 대항 구상”일본의 경제보복 조치와 한국 정부의 ‘한·일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지소미아) 종료 결정 등으로 한·일관계가 악화 일로를 걷는 가운데 일본 도쿄대 와다 하루키 명예교수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의 ‘한국 상대 안하기’ 전략에 대해 “평화국가 일본의 종언”이라며 일침을 가했다. 서울대 일본연구소는 26일 오후 서울 중구 은행회관 국제회의실에서 ‘한일관계: 반일과 혐한을 넘어서’를 주제로 제1회 관정일본연구 학술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와다 교수는 아베 총리가 지난해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회담이 잇따라 열린 데 대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당시 아베 총리와 상의 없이 문 대통령의 북한과의 정상회담에 응했기 때문이라고 교수는 전했다. 당시 북한은 동북아 국가들 가운데 유일하게 일본만 제외하고 한국, 미국, 러시아, 중국 정상과 정상회담을 열어 ‘재팬 패싱’(Japan passing) 논란이 일었다. 기조 강연자로 나선 와다 일본 도쿄대 명예교수는 “2018년 남북 정상회담과 이어진 북미 정상회담은 아베 신조 일본 총리에게 이중의 충격을 주었다”면서 “문 대통령이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만남을 중개했고, 트럼프는 아베와 상의 없이 정상회담을 하겠다고 즉답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이어 “이러한 문 대통령의 행동은 납북 일본인 문제로 계속해서 북한에 압력을 가해온 아베 총리의 태도와 대립하는 것이었다”면서 “북측이 납치 문제 교섭을 받아들이지 않고, 한·미와는 계속 대화를 이어가자 아베 총리는 전례 없이 궁지에 몰리게 됐다”고 분석했다. 와다 교수는 “최근 일본 전문가들과 정부 관계자들 입에서는 한국을 적대시하고 한국과 관계를 끊을 것을 각오하자는 논의가 나온다”면서 “동북아의 결합을 버리고 중국·러시아·남북한이라는 대륙 블록에 대항해 미국·일본·대만의 해양 블록으로 결속하겠다는 의미로, 이러한 아베 총리의 ‘한국 상대 안하기’ 정책은 평화국가 일본의 종언”이라고 진단했다. 일본의 대표적 진보 지식인으로 꼽히는 와다 교수는 일본 정부가 한국을 백색국가(화이트리스트·수출 간소화 대상국)에서 제외한다는 방침을 발표하기 직전인 지난달 25일 일본의 양심적 지식인 등 사회지도층 78명과 함께 ‘한국이 적인가’라는 성명을 내 큰 반향을 일으킨 인물로 알려져 있다.강주리 기자 jurik@seoul.co.kr
  • 광복절 경축사에 납북시인 김기림 등장한 까닭은?

    광복절 경축사에 납북시인 김기림 등장한 까닭은?

    “용광로에 불을 켜라 새나라의 심장에/철선을 뽑고 철근을 늘리고 철판을 펴자/시멘트와 철과 희망 위에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새나라 세워가자” 15일 문재인 대통령의 제74주년 광복절 경축사의 핵심키워드인 ‘아무도 흔들 수 없는 나라’는 극일과 자강 의지를 함축적으로 담은 구절로, 모더니즘 시인 김기림(1908년 출생, 1958년 사망 추정)이 해방 직후인 발표한 시 ‘새나라 訟(송)’에서 발췌한 것이다. 경축사의 얼개를 매만지는 단계에서 문 대통령은 ‘광복 직후 문학 작품 등에서 경제건설의 의지를 담은 희망적 메시지를 찾아보라’고 당부했고, 눈이 밝은 참모진에 의해 김기림의 시가 소환된 셈이다. 김기림은 한국 근현대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구인회’ 동인으로 활동하며 이상·정지용 등과 함께 ‘모더니즘의 기수’로 이름을 알렸고, 후기에는 현실 참여문학에 몰두했다. 평론가로서 모더니즘을 비롯한 서양 문학사조를 소개하고 지평을 넓히는 데도 앞장섰다. 모더니즘의 기수였지만, 중반기 이후에는 사회 참여적 견해를 강하게 드러냈다.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 의식도 보인다. 광복 후 좌파 계열인 ‘조선문학가동맹’에서 주도적 활동을 하면서도 월북 대신 서울에서 대학 강의를 계속했지만, 6·25 전쟁때 납북된 이후 정확한 소식이 끊겼다. 때문에 1988년 해금 전까지 김기림과 그의 작품은 언급되지 않았다. 김기림은 1936년부터 3년간 일본 센다이의 도호쿠 대학에서 유학했다. 이런 인연으로 한일관계가 빠른 속도로 냉각되던 지난해 11월 ‘김대중·오부치 선언’ 20주년을 맞아 한국과 일본의 학자·시민 등의 정성이 모여 도호쿠 대학내 기념비가 세워졌다. 기념비는 식민지 시대 극복의 염원을 담은 김기림의 대표시 ‘바다와 나비(아무도 그에게 수심을 일러 준 일이 없기에 흰 나비는 도무지 바다가 무섭지 않다/청(靑) 무우밭인가 해서 내려갔다가는 어린 날개가 물결에 절어서 공주처럼 지쳐서 돌아온다/삼월달 바다가 꽃이 피지 않아서 서글픈 나비 허리에 새파란 초생달이 시리다)’를 구현했다. 경축사 도입부에는 소설가이자 시인이며 독립운동가인 심훈(1901~1936)의 ‘그날이 오면’ 중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이라도 추고/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그날을 갈망하며/모든 것을 바쳤던 선열들의 뜨거운 정신은/이 순간에도 국민들의 가슴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대목도 인용됐다. 이 시는 광복을 염원하는 작품 중 문 대통령이 가장 좋아하는 시라고 한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김현종 “일본과 군사정보 공유 맞는지 포함해 종합 대응”

    김현종 “일본과 군사정보 공유 맞는지 포함해 종합 대응”

    김현종 청와대 국가안보실 2차장이 2일 일본의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백색국가) 배제 조치와 관련해 “정부는 우리에 대한 신뢰 결여와 안보상의 문제를 제기하는 나라와 과연 민감한 군사 정보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를 포함해 종합적인 대응조치를 취하겠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제 보복에 대한 상응조치의 하나로 한국 정부가 한일 군사 정보보호협정(지소미아, GSOMIA)의 연장 거부를 검토할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될 수 있다. 김 차장은 이날 브리핑을 열고 “지난 수십 년간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가치를 공유했던 우리를 안보상의 이유를 핑계로 동 리스트에서 배제한 것은 우리에 대한 공개적인 모욕”이라며 이같이 강조했다. 청와대가 직접 지소미아 연장 거부에 대해서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다만 지소미아 연장 거부 가능성에 대해선 청와대 관계자는 “아직 결정된 것은 없고 여러가지 차원에서 신중하게 검토할 것”이라고 했다. 김 차장은 그동안 한국 정부의 여러 노력에도 일본 정부가 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김 차장은 지난 7월 우리측의 요청으로 한국 정부 고위 인사 2명이 각각 일본을 방문해 일측 고위 인사를 만났다고 밝혔다. 그는 “당시 우리 측은 강제 징용 문제에 대한 우리 입장을 제안하는데 왜 8개월이나 걸려야 했는지에 대해 소상히 설명하고 일측이 요구하는 제안을 포함해 모든 사안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논의할 의향이 있다는 입장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8개월 동안 정부는 강제 징용 피해자들의 변호사와 접촉하며 피해자들의 입장을 알아보는 데 집중했다. 김 차장은 또 “미국도 일시적으로 추가적인 상황 악화 조치를 동결하고 일정기간 한일 양측이 외교적 합의 도출을 위해 노력할 것을 제안하는 소위 현상 동결합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며 “우리는 이런 방안에 긍정적 입장을 가지고 협의에 노력했지만 일본은 즉각 거부 입장을 밝혔다”고 했다. 이와 함께 김 차장은 일본이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 도움을 주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우리는 남북 정상회담 등 계기에 납북 일본인 문제는 물론 북일 수교와 관련한 일측 입장을 북측에 전달하는 등 일본을 적극 성원했다”며 “그러나 일본은 우리의 평화 프로세스 구축 과정에서 도움보다는 장애를 조성했다”고 했다. 그는 ▲평창동계올림픽 당시 한미연합훈련연기 반대 ▲한국 거주 일본 국민의 전시대피 연습 주장 ▲초계기 사건 등을 그 예로 들었다. 김 차장은 이번을 계기로 ‘가마우지 경제체제’로부터 탈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가마우지 경제체제란 완성품의 수출이 증가할수록 일본으로부터의 핵심소재와 부품 수입이 증가해 일본의 수익이 늘어나는 산업 구조를 지칭한다. 그는 “기술과 기업이 국가발전의 기본 원리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며 “핵심 소재·부품·장비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내 환경 규제와?逾?규제와 관련한 문제점들을 해결하고, R&D 투자도 대폭 확대해 나가야 한다”고 했다. 서유미 기자 seoym@seoul.co.kr
  • 국가 폭력에 의한 ‘간첩죄’… 58년 만에 무죄 판결 “기쁘지만 억울”

    국가 폭력에 의한 ‘간첩죄’… 58년 만에 무죄 판결 “기쁘지만 억울”

    1961년 5·16 군사정변 직후 아버지는 간첩 누명을 쓰고 사형 위기에까지 몰렸다가 2년간 옥살이 끝에 풀려났다. 아버지가 끌려가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국민학교 1학년 막내딸의 꿈은 이때부터 ‘아버지의 억울함을 풀어 드리는 것’이 됐다. 오랜 세월이 걸렸다. 군사정권이 물러나도 ‘빨갱이’의 굴레는 무거웠다. 여전히 국가를 믿을 수 없었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한을 품고 세상을 뜬 지 30년이 넘어서야 재심을 청구할 수 있었고 지난 5월 16일, 58년 만에 무죄 선고가 내려졌다. 그렇게 막내딸의 힘으로 명예를 되찾은 아버지는 해방 후 서울대 법대 학장을 지내고 한글로 된 최초의 민법학서를 남긴 진승록 교수다. 지난 23일 서울 서초동 자택에서 만난 막내딸 진미경(64) 한국외대 초빙교수는 인터뷰 2시간 내내 눈물을 흘렸다. 재심 준비 과정이나 앞으로의 계획은 힘주어 말했지만, 과거를 돌이킬 때마다 눈물을 쏟았다. 그는 “재심에서 무죄를 받고 나니 아버지의 인생이 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했다. -뒤늦게 재심을 청구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아버지가 국민학교 1학년 어느 날 새벽에 끌려가던 모습이 생생히 기억나요. 3학년이 돼서야 집으로 돌아오셨죠. 중학교 1학년 때였는데 아버지가 잠들지 못한 채 홀로 탄식하는 걸 우연히 들었어요. ‘억울하다. 원통하다’ 그러시더라고요. 그 말씀을 들으면서 ‘내가 아버지 한을 풀어 드려야겠다’고 거듭 다짐했지요.” “어느 날 신문을 보는데 간첩 누명을 썼던 죽산 조봉암 선생님이 무죄 판결(2011년)을 받아서 따님이 인터뷰한 기사가 나오더라고요. 그때 따님 나이가 여든이 넘었어요. ‘저렇게 연세가 많은 분도 하는데 나는 이게 뭔가´라는 자책감이 들었죠. 2014년 서울대 법대에서 6·25전쟁 관련 세미나를 열었는데, 아버지 이야기를 해 달라는 요청이 왔어요. 거기서 아버지의 서울대 법대 제자들을 만났는데, 그분들이 ‘서울대 법대 학장이 빨갱이라는 게 말이 되냐. 재심을 청구하라´고 적극 권유했어요. 그분들 이야기를 듣고 용기를 내게 됐어요.” 진승록 교수는 6·25전쟁 당시 서울대 법대 학장으로 교정을 지키다 납북됐고, 넉 달 만에 탈출해 고시위원장 등을 지냈지만 1961년 5·16 직후 간첩으로 몰려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듬해 항소심에서 간첩방조죄만 인정돼 징역 10년으로 감형, 1963년 가석방됐지만 1985년 80세로 작고할 때까지 누명을 벗지 못했다. 진미경 교수는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국가를 믿지 않았다. 2005년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졌을 때도 그런 이유로 아버지 사건을 신청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가 국가 폭력에 의해 억울하게 희생당했는데 국가가 다시 심사해서 밝혀 준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국가가 진실을 밝혀 줄 리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재심 과정에서 어떤 점이 힘들었나요. “판결문 이외에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어요. 진실화해위원회에서 일했던 김윤경 조사팀장이 자료를 찾는 방법을 알려줘서 도움이 많이 됐어요. 판결문 외에 재소자 인명부를 챙겼죠. 수사기록을 국가정보원이나 군에 요청했는데 처음에는 수사한 적 없다고 답하더라고요. 아는 국회의원을 통해 정보공개를 요청했더니 그제서야 수사는 했지만 기록이 없다고 말을 바꿨어요. 증언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강원 원주, 전남 순천, 부산 등 안 가 본 곳이 없어요. 너무 오래전 일이라 대부분 돌아가셨거나 살아 있어도 증언을 거부했어요.” 서울고법 형사2부의 재심 판결문에는 “이 사건에 대해 육군고등검찰부, 국가정보원, 국가기록원 등에 기록 송부와 보존 여부 확인을 요청한 결과 그 어디에도 수사기록이나 재판기록이 보존돼 있지 않았다”고 명시돼 있다. 진 교수는 아버지에게 사형을 구형한 군검사를 어렵게 만났지만, 아버지를 모른다고 부인했다. 그는 나중에야 ‘진 학장의 딸이 나를 찾아올 줄 몰랐다. 상부의 지시대로 할 수밖에 없었다’고 털어놨다. 결국 재심 재판부는 “피고인이 불법구금 상태에서 수사를 받았음을 인정할 수 있고, 수사 과정에서 가혹행위를 당했다고 볼 개연성이 있다”며 “불법구금과 가혹행위 등으로 임의성 없는 진술을 한 후 임의성 없는 심리 상태가 법정에서도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며 무죄를 선고했다.-재심 준비 5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은 기분은 어땠나요. “선고 전부터 법정에 앉아서 남편이랑 계속 울었어요. ‘간첩´이란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요즘 사람들은 모를 거예요. 정말 가슴이 터질 것 같더라고요. 재판장인 차문호 부장판사가 ‘너무 늦게 무죄를 드려서 미안하다. 지금이라도 무죄를 받게 돼서 다행´이라고 말했어요. 처음엔 얼마나 기뻤는지 몰라요. 드디어 아버지 한을 풀어드렸구나. 아버지의 법대 제자들이 축하연도 열어 주셨어요. 그런데 시간이 갈수록 더 슬프고 억울한 느낌이 들어요. ‘돌아가신 아버지가 살아서 무죄 판결을 봤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살아 돌아오시지도 못하고, 아버지의 억울한 삶은 되돌릴 수가 없구나´ 이런 생각만 커지네요.” 진승록 교수는 1905년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 일본 와세다대 법학부를 졸업하고 보성전문학교(고려대) 교수와 서울대 법대 학장 등을 지냈다. 1947년 ‘민법총칙’을 시작으로 민법총론, 물권법, 담보물권, 채권총론, 채권각론 등 6권의 저서를 남겼다. 1952~1955년 지낸 고시위원장은 당시 정부 서열 4위로, 진 교수는 기술고시를 도입했다. -간첩죄에 휘말린 뒤 아버지는 어떻게 지냈나요. “엄마가 먼저 집에 왔는데, 또렷이 기억나요. 언니와 함께 학교 앞에서 떡볶이를 사 먹고 있었는데 입주 도우미 언니가 달려와서 ‘엄마가 오셨다´고 말했어요. 많이 남은 떡볶이를 그냥 내려놓고 놀라서 뛰어갔어요. 이듬해 여름에 아버지가 오셨어요. 풍채 좋던 아버지가 굉장히 수척해지셨어요. 고문 때문에 수저도 들어 올리지 못하셨어요. 벽에 금을 단계별로 그어 놓고 조금씩 올리면서 나름의 재활운동을 하셨지요.” “학자로서 활동은 전혀 못하셨어요. 한동안은 몸이 안 좋아서 그랬고, 박정희 사후 전두환 군부가 이어지니까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죠. 형사들이 툭하면 찾아왔어요. 잡혀갈 수도 있다는 두려움에 늘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요. 글조차 쓰지 못하셨죠. 유머가 많은 분이셨는데 성격도 변했고요. 1978년에 사면을 받고 변호사 등록을 하려고 했는데 법무부가 안 내줬어요. 변호사 등록 업무가 대한변호사협회로 이관된 1983년에야 변호사 재등록이 됐어요. 제대로 활동도 못하고 2년 후 돌아가셨죠.” -앞으로의 계획은 무엇인가요. “아버지 제자들은 저보고 효녀라고 하지만, 스스로 자랑스럽다는 생각은 안 들어요. 아버지 간첩 누명 때문에 1980년에 미국으로 유학을 가려는데 외무부에서 여권을 안 내줬어요. 아버지 제자들이 신원보증을 서서 어렵사리 유학을 떠났죠. 저도 그런 일을 겪으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 비슷한 게 있었던 것 같아요. 너무 죄송하죠. 아버지가 사면받고 변호사 등록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셨을 때도 도와드리지 못했어요.” “아버지의 업적을 재평가하는 작업을 하고 싶어요. 학술 세미나도 하고요. 아버지 고향인 강릉 옥계면의 이름을 따서 기념사업을 계획 중이에요. 아버지의 민법이론과 고시위원장 당시 하신 일을 재조명할 거예요. 저는 아버지 때문에 정치학 교수가 됐어요. 어렸을 때부터 ‘국가란, 정치란,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라는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다시는 이념 갈등으로 인해, 국가폭력으로 인해 희생되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습니다.” 이민영 기자 min@seoul.co.kr
  • 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며…

    박열 의사 부인 가네코 후미코를 기리며…

    영화 통해 재조명… 작년 건국훈장 서훈박열의사기념사업회(이사장 박인원)는 23일 경북 문경시 마성면 오천리 박열의사기념관에서 제93주기 가네코 후미코(1903~1926) 추도식을 열었다. 가네코는 식민지 조선의 항일투사 박열 의사의 동지이자 아내다. 행사는 추도사, 헌화, 분향에 이어 한일 간 연구 성과를 공유하는 공동 워크숍, 헌시 낭송, 문경시립합창단 합창 순으로 진행됐다. 추도식에서는 가네코의 외가가 있던 야마나시 가네코후미코연구회 사토 노부코 회장이 건국훈장 애국장을 박열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한국 정부는 사망 92년 만인 지난해 가네코에게 일본인으로는 처음으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서훈했다. 2017년 개봉한 영화 ‘박열’은 가네코의 업적을 재조명했다. 가네코는 1903년 일본 가나가와현 요코하마 출신으로, 1922년 도쿄에서 박열 의사를 만나 결혼한 뒤 재일조선인 아나키즘(무정부주의) 항일 운동에 투신했다. 이후 일제의 탄압정책을 비판하는 한편 박열 의사를 도와 일왕 부자를 폭살하고자 폭탄을 반입하다가 체포돼 옥살이하던 중 1926년 7월 우쓰노미야 형무소에서 24세의 나이에 의문사했다. 그는 남편 박열의 고향인 문경시 문경읍 팔영리에 묻혔으나 2003년 문경 마성면에 박열의사기념공원이 조성되면서 이장됐다. 하지만 6·25전쟁 발발 3일 만에 강제 납북돼 1974년 북한에서 생을 마감한 박열 의사는 평양 애국열사릉에 묻혀 있다. 기념관은 2003년부터 일본의 가네코후미코연구회와 함께 홀수 해 7월 23일에는 국내에서, 짝수 해에는 일본 야마나시에서 추도식을 열고 있다. 문경 김상화 기자 shkim@seoul.co.kr
  • [법서라] 고작 6일 누린 ‘납북어부 재심’ 무죄 기쁨…‘과거사 원칙’ 저버린 검찰

    [법서라] 고작 6일 누린 ‘납북어부 재심’ 무죄 기쁨…‘과거사 원칙’ 저버린 검찰

    [편집자주] 전국 최대 법원과 최대 검찰이 몰려 있는 서울 서초동에는 판사, 검사, 변호사뿐만 아니라 그들을 취재하는 기자들도 있습니다. 일반 국민의 눈으로 보는 법조계는 이상한 일이 참 많습니다. 법조의 뒷이야기와 속이야기를 풀어드리는 ‘법조기자의 서리풀 라이프’, 약칭 ‘법서라’를 토요일에 선보입니다. 오는 25일 취임하는 윤석열 신임 검찰총장에게 ‘공개서한’을 보내겠다는 한 어부가 있습니다. 이 어부는 박정희 정권 당시 간첩 누명을 뒤집어 쓴 채 50년을 살아오다 최근 재심심판을 통해 겨우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이에 불복한 검찰이 항소를 제기하면서 지난한 재판을 다시 이어가야 합니다. 어부는 “검찰이 스스로 정한 원칙과 약속은 지켜달라”면서 새로이 검찰조직을 이끌어갈 신임 검찰총장에게 전할 말이 있다고 합니다.“실질적으로 불법구금·가혹행위가 인정될 수 있는 경우 법원의 재심개시결정을 존중하여 즉시항고를 제기하지 않고, 재심 무죄 선고시 일률적인 상소를 지양하고, 유죄 인정 증거를 발견하지 못하면 상소를 제기하지 않는다.”- 2019년 6월 27일 대검찰청 ‘과거사 사건 관련 후속조치’ 中 위 문장은 ‘과거사 재심 사건에 대해선 새로운 증거가 있지 않은 한 상소하지 않겠다’라고 요약할 수 있겠습니다. 지난달 27일 전국 검찰청을 지휘하는 대검은 어두운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의미로 ‘과거사 재심사건 업무 매뉴얼’을 마련했습니다. 과거 검찰이 일부 과거사 사건에서 인권보장의 책무를 다하지 못했다며 문무일 현 검찰총장이 직접 사과한 데 따른 변화입니다. 검사는 재판에서 피고인의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만, 과거사 사건은 고문에 의해 만들어진 허위 진술이 많기 때문에 검찰도 적극적으로 ‘무죄 가능성’도 찾아내겠다는 취지죠. 군사 독재정권 시절 억울하게 간첩으로 몰렸던 이들에게 필요한 조치입니다. 그런데 과거사를 반성하겠다고 외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시점, 벌써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옵니다. 간첩 누명은 쓴 6명 가운데 이미 5명이 세상을 떠난 ‘제5공진호 납북 어부’ 재심 이야기입니다.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에서 검찰은 즉각 항소했습니다. 유일한 생존자는 “말뿐인 원칙과 약속이었느냐”고 절망했습니다. ■납북된 18살 막내 선원…불법감금·고문으로 ‘간첩’ 누명 1968년 5월, ‘제5공진호’ 막내 선원 남정길씨는 조업 도중 동료 5명과 함께 북한에 납치됐다가 5개월 만에 풀려나 고국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나 남씨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군사 독재정권의 ‘간첩몰이’였습니다. 정보과 형사들은 남씨 일행을 한달 동안 영장 없이 불법적으로 감금하고, 고문과 가혹행위를 가해 ‘납북 피해자’에서 ‘간첩’으로 바꿔버렸습니다. 당시 남씨의 나이는 고작 18살.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기소된 이들은 1969년 징역 1~3년 실형을 선고받았습니다. 당시 검찰 공소장엔 “피고인들이 1968년 5월 24일 12시경 제5호 공진호에 승선해 경기도 연평도 근해 해상에서 어로작업 중, 선장인 김창록이 북괴 지배 하에 있는 지역인 안골에 들어가야만 고기를 많이 잡을 수 있으니 안골에 들어가서 어로작업을 할 것을 제의하자, 피고인들은 모두 이에 찬동했다”면서 “반국가 단체인 북괴의 지배 하에 있는 지역으로 탈출했다”고 명시됐습니다. (남씨 일행은 군사기밀 누설 관련 혐의로도 기소됐지만, 당시 법원은 ‘북괴 구성원들에게 강요된 행위’라며 이 부분에 국한해선 무죄를 선고했습니다) 유죄 판결의 핵심 근거는 수사기관과 법정에서의 자백이었습니다. 경찰 조사에서 스스로 고기잡이를 위해 북한 영해에 들어간 사실을 인정했고, 법정에서도 유사하게 진술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수사기관이 받아낸 진술은 고문에 의한 자백이었고, 고문 경찰은 법정까지 나타나 어부들을 지켜보며 심리적으로 압박했습니다. 그 속에서 경찰, 검찰, 법원, 누구도 사건의 실체를 들여다보려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남씨 일행은 평생을 반공법을 위반한 간첩으로 살아가야 했습니다.■50년 만에 무죄 판결 “고문, 가혹행위에 의한 진술은 증거능력 없다” 그렇게 50년을 억울함 속에서 살아온 남씨는 원곡 법률사무소를 만나 이미 세상을 떠난 납북 어부 5명의 유가족과 함께 지난해 7월에야 재심을 청구했습니다. 법원은 지난 3월 재심개시 결정을 내렸고, 4개월 만인 지난 11일 전주지법 군산지원 형사1부는 전원 무죄 판결을 내렸습니다. 재심 재판부는 “장기간 불법구금과 광범위하게 이뤄진 가혹행위, 협박, 회유 등으로 인해 피고인들이 경찰 진술뿐만 아니라 검찰 및 법정에서의 진술까지도 임의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뤄졌다고 추단되거나, 적어도 그 임의성에 강한 의심이 든다”고 밝혔습니다. (‘임의성이 없는 진술’이란 허위진술을 강요할 위험성이 있는 상태에서 이뤄진 진술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고문에 의한 허위진술이라는 점이 인정되기 때문에 1968년 경찰 조사나 법정에서 나왔던 진술 역시 증거능력이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의미죠. 구체적으로 재판부는 ▲피고인들이 납북됐다가 1968년 10월 인청항으로 귀환한 뒤 11월 군산경찰서로 이동해 구속영장이 발부될 때까지 구금된 상태에서 조사받은 사실 ▲군산경찰서 소속 수사관 등이 무허가 여관에서 자백을 강요하면서 구타, 물고문, 잠 안 재우기 등으로 강압적인 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피고인들이 공소사실을 자백하는 내요의 진술서 등을 작성한 사실 ▲검찰 조사와 공판기일(법정)에서도 고문 경찰관이 배석해 위협적인 분위기를 조성한 사실 등을 기록에 의해 인정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50년 만에 이뤄낸 명예회복이었지만, 남씨의 동료들은 이미 세상을 떠난 지 오래였습니다. 가장 모진 고문을 당했던 기관장 박남주씨는 징역을 마치고 2년도 지나지 않아 사망했습니다. 남씨 본인도 고문 후유증으로 뇌출혈이 생겨 말이 어눌하고 거동이 불편한 상태입니다. 그럼에도 무죄 결과를 받아든 남씨는 “50년의 세월 동안 누구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었는데 이제 우리도 떳떳하게 살 수 있게 됐다”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눈물을 흘리며 기뻐했습니다. 이제 겨우 1심이 끝났지만, 대검이 불과 한 달 전에 ‘과거사 원칙’을 발표했기 때문에 남씨 측은 사실상 재판이 끝났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검찰의 행보를 남씨 측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법원의 무죄 판결에 불복한 것입니다.■검찰의 항소 “재판부가 법리 오인…법정에서 진술은 유효” 1968년 남씨 일행을 재판에 넘겨 유죄를 이끌어내고, 51년이 흘러선 이번 재심 공소유지를 맡은 전주지검 군산지청은 지난 17일 ‘납북어부 사건’ 재심 무죄 판결에 대해 항소했습니다. 6일 만입니다. 앞서 설명 드린 ‘임의성’, 즉 강요에 의한 진술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에 대해 재판부가 법리적으로 오인을 했다는 취지입니다. 군산지청의 설명을 자세히 들어보겠습니다. “대검에서 규정한 ‘과거사 원칙’의 방향과 취지도 검토했습니다. 하지만 수사기관에서 고문과 가혹행위가 있었다해도 법정에서 고문받은 건 아니잖아요? 일부는 혐의를 부인했지만, 일부는 인정했습니다. 자유로운 환경에서 진술했다고 판단되기에 증거능력이 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비록 재판부가 그 부분에 증거능력이 없다며 무죄를 선고했지만, 검찰 입장에선 유사한 국가보안법 사건에서도 유죄로 인정된 사례가 있기 때문에 이대로 포기하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결국 경찰 단계에선 고문을 받았더라도, 재판 단계에서까지 고문을 받은 것은 아니지 않냐는 취지입니다. 실제로 검찰은 재심심판에서도 이 같은 주장을 이어갔습니다. 서울신문이 확보한 검찰 변론재개 의견서에 따르면 검찰은 ‘피고인 등이 그 공판 과정에서, 수사기관에서 받은 가혹행위 등으로 인한 심리적 억압상태 때문에 자유롭게 진술하기 어렵다는 등의 주장을 했다거나 그런 의심을 할 만한 사정을 찾아보긴 어렵다’며 혐의를 자백한 당시 법정 진술의 증거능력이 인정돼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검찰은 그 근거로 1969년 당시 공판 조서를 제시했습니다. 조서를 살펴보면 남씨 일행은 고기잡이를 위해 북한 해역으로 넘어간 사실이 있느냐는 판사의 물음에 대부분 ‘맞다’는 취지로 대답한 내용이 나옵니다.재판장 : 연평도에서 고기잡이가 여의치 않아 선장인 김창록의 제의로 군사분계선 넘어 황해도 구월골에 고기잡이를 간 사실이 있는가요남정길 : 예 그런 사실이 있었습니다재판장 : 군사분계선을 넘어가면 북괴에 납치된다는 사실을 몰랐던가요남정길 : 그런 위험성은 인식하였읍니다만 고기를 못 잡으면 보수를 못 받게 되니까 설마 붙잡히지는 않을 터이지 하는 요행수를 믿고 고기 잡을 목적으로 선장의 지시에 따라 그곳에 넘어가서 조업을 한 것입니다검찰은 남씨 일행이 법정에서 경찰의 고문을 폭로하기도 했다며, 이는 강요받아 진술하는 상황이 아님을 방증한다고도 주장했습니다.재판장 : 군산에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었다는 말도 했다는데 어떤가요피고인1 : 그런 말은 전혀 한 일이 없는데 군산경찰서 정보과에서 너무 심한 고문을 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거짓 진술했습니다재판장 : 군산비행장의 비행기 대수가 500대쯤 금년에 들어왔다는 말을 했든가요피고인2 : 이북에서는 그런 말을 묻지 아니하여 말한 사실이 없는데, 군산경찰서에서 조사받을 때 배 안에서 그런 말이 있었는데 왜 말한 일이 없다고 하느냐면서 고문을 하기에 할 수 없이 그런 말을 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변호인의 반격 “고문 29일 만에 열린 재판, 자유로운 환경이었다고요?” 남씨의 변호를 맡은 원곡 법률사무소 최정규 변호사는 서울신문과의 통화에서 “검찰의 입장이 충격적”이라고 탄식부터 내뱉었습니다. 고문을 당하고서 겨우 29일이 지나 공판이 열렸는데, 그들이 고문당하지 않은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고문으로 사람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는데, 국가가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무자비하게 짓밟았는데, 법정에서 제대로 된 진술이 가능했을까요? 물론 법정에서 고문을 당하진 않았겠죠. 또 누군가는 혐의를 인정하고, 누군가는 용기를 내 고문 사실을 밝혔겠죠. 그렇다고 이미 짓밟힌 상태에서 한 법정 진술을 꼬투리 잡으며 ‘너네 그때 자백했으니까 지금도 유죄야’라고 말하는 건 너무 잔인하지 않나요?” ‘피고인들이 법정에서 고문 사실을 폭로했기 때문에 억압된 환경이 아니다’라는 검찰 주장에 대해서도 남씨 측은 적극적으로 반박했습니다. “검사가 일부 부인 취지, 고문 폭로라고 언급한 진술들은 현재 재심심판절차에서의 유무죄 판단대상으로 삼는 공소사실과 관한 군사기밀누설과 관련된 진술에 불과할 뿐만 아니라 공소사실 자체를 부인한 것이 아닙니다. 고문 관련 진술을 하면서도 수사기관이 작성한 수사서류의 진정성립과 진술의 임의성은 다투지도 않는 등 강한 의심이 듭니다. 심리적 억압상태 때문에 자유롭게 진술할 수 없다는 사정은 명백합니다.” 결과적으로 법원은 무죄 판결을 통해 어부들의 손을 들어줬습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 “검사가 제출한 의견서의 내용만으론 임의성에 대한 의문점을 없애는 검사의 적극적인 입증이 있다고 보기 어렵다”고 기재하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검찰은 상급법원이 자신들의 주장을 다시 판단해달라고 요청한 것입니다. ■“어부라서 무시하는 건가요” 항소와 상고, 즉 상소제도는 형사소송법 체계의 기본입니다. 검사가 항소를 제기하는 행위 자체가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과거사 사건만큼은 다르게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 법조계의 공통된 시각입니다. 이미 수십 년 고통과 억울함 속에서 살아왔던 이들에게 또 다른 고통을 안겨주지 않고, 적극적으로 구제해줘야 한다는 것입니다. 최 변호사는 “일반 사건이라면 이해한다. 검사도 법률가인데, 당연히 자기 주장이 있고 고집이 있으니 법률 판단을 더 받아보고 싶겠다”면서도 “그런데 과거사 사건에 대해 대검이 매뉴얼까지 만든 것은 ‘무조건 대법원까지 가야한다’는 강박관념을 버리자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이어 “국가도 할 말은 있겠지만, 국가 피해를 당한 사람들이니까 적어도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지 않은 한 ‘우리가 물어뜯진 말자’는 취지 아니었냐”고 덧붙였습니다.남씨의 건강상태는 매우 좋지 않다고 합니다. 무죄 판결을 받아들고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까지 말했지만, 검찰 항소로 인해 끝이 보이지 않는 재판에 다시 뛰어들어야 합니다. 항소 소식을 듣고 “유학생 사건은 자체적으로 조사까지 해주면서, 우리 사건은 고작 어부라서 무시하는 거냐”고도 말했다고 합니다. 동료들을 떠내보내고서 외로움도, 허망함도 큰 탓이었을 겁니다. 오는 25일 윤석열 검찰총장이 새로 취임합니다. 윤 신임 총장은 인사청문회를 앞두고 국회 서면질의 답변서를 통해 “국가권력에 의한 고문, 전쟁범죄 등 반인권적인 범죄에 대하여 공소시효의 예외를 인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밝히기도 했습니다. 제5공진호 납북 어부 사건의 유일한 생존자를 비롯한 국가권력의 피해자들은 그의 행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나상현 기자 greentea@seoul.co.kr
  • 납북선원들 50년만에 재심서 무죄

    1960년대 납북됐다가 풀려나 반공법 위반 등의 혐의로 억울한 옥살이를 한 선원들이 50년 만에 무죄를 선고받았다. 전주지법 군산지원 제1형사부는 반공법과 수산업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제5공진호 선원 6명에 대한 재심에서 무죄를 선고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들은 1968년 5월 24일 연평도 근해에서 어로작업을 하다 북한 경비정에 나포돼 5개월간 억류됐다. 같은 해 10월 말 귀환한 이들은 군사분계선을 월선한 혐의로 연행됐고, 경찰에서 불법 구금된 채 구타와 물고문, 잠 안 재우기 등 가혹행위를 당했다. 선원들은 재판에 넘겨져 1969년 징역 1∼3년의 실형이 확정됐다. 재판부는 “유죄 증거들이 수사단계에서 불법 구금과 고문 등 가혹행위로 만들어져 증거능력이 없거나 신빙성이 없다”고 무죄 이유를 설명했다. 전주 임송학 기자 shlim@seoul.co.kr
  • 하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50여년 전 걸작들이 쏟아졌다

    하녀…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 50여년 전 걸작들이 쏟아졌다

    1960년대는 한국영화의 중흥기로 명명된다. 아직 텔레비전이 대중화하지 않은 시기, 영화는 대중문화 영역에서 가장 사랑받는 매체였고 한국의 할리우드라 불린 서울의 충무로3가 일대는 제작자와 지방흥행업자, 감독과 각 분야의 스태프 그리고 스타와 스타를 꿈꾸는 젊은이들로 활기가 넘쳤다.‘르네상스’라는 이름에 걸맞게 1960년대는 무려 1500편이 넘는 한국영화가 만들어졌다. 1962년 113편이었던 제작편수는 1965년 189편을 기록했고 1968년부터는 한 해에 무려 200편이 넘는 영화가 제작됐다. 이러한 양적 성장을 뒷받침한 것은 다양하게 시도된 장르였다. 멜로드라마, 코미디, 스릴러액션 등 대중적 장르영화부터 한국식 작가주의 영화라고 할 문예영화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의 영화들이 만들어져 한국영화의 황금기를 화려하게 장식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국가 주도의 영화기업화 정책이 가동되고 있었던 것도 놓치지 않아야 한다. 이번 연재는 1960년대 전반기의 한국영화계를 살펴본 후 1960년대 초부터 두각을 나타낸 한국영화사의 거장 신상옥, 유현목 그리고 김기영의 작품 세계를 소개하기로 한다. ●4·19와 5·16 사이 제작된 ‘오발탄’ 등 시대 반영 1960년 4·19 혁명과 1961년 5·16 군사정변 그리고 1년 7개월간의 군정에 이은 1963년 12월 제3공화국의 출범까지, 영화계 역시 한국 근대사의 정치적 격변기와 연동될 수밖에 없었다. 먼저 4·19와 5·16 사이,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영화계는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누릴 수 있었다. 1960년 8월 영화윤리전국위원회가 만들어져 영화검열 업무가 민간으로 이관된 것이 결정적이다. 위원장 이청기, 부위원장 이진섭, 전문위원 허백년, 최일수 등의 이름에서 당대 문화계 지식인들이 대거 참가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한국영화사상 처음으로 설립된 민간 자율 심의기구는 5·16 군사쿠데타와 함께 해체되고 만다. 그간 한국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작품들이 등장한 것도 이 시기의 주목할 지점이다. 대표적으로 ‘오발탄’(유현목), ‘마부’(강대진),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신상옥), ‘삼등과장’(이봉래), ‘현해탄은 알고 있다’(김기영) 등 한국영화사의 걸작으로 평가받는 작품들이 1961년의 관객들과 만났다. 이 영화들은 기존의 한국영화를 넘어서는 현실 비판적 주제와 대담한 표현으로 관객들의 눈길을 사로잡는 한편 전통과 근대적 가치가 경합하는 양상을 포착하며 깊은 공감을 끌어냈다. 특히 ‘오발탄’은 5·16 이후 상영 중지 등 정치적 고초를 톡톡히 겪었다. 당시 심의 서류에 따르면 영화 전반의 어두운 분위기 즉 “예술적인 견지에서는 우수하나 5·16 이전의 사회악과 국민들의 비참한 생활상을 그대로 노출”한 것이 문제가 됐다. ●급격한 근대화에 기반한 성장… 내면은 부실 군사정권은 강력한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추진했고 영화계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1961년 9월 군소 영화제작사 72개사를 16개사로 통합한 데 이어 1962년 1월 20일 최초의 영화법이 제정·공포됐다. 1963년 3월 영화법 1차 개정은 영화산업의 기업화를 정부가 주도하는 제도적 근거가 됐다. 목표는 안정적인 제작 시스템 구축이었지만 실질적인 체질 개선이 힘들다 보니 정부 주도의 인위적인 정책이 대신했다. 대표적인 것이 영화사 등록 요건의 강화이다. ‘35밀리 이상 촬영기, 조명기, 건평 200평 이상의 견고한 시설로 된 스튜디오, 녹음기, 전속의 영화감독·배우 및 기술자’를 구비해야 영화업자로 등록할 수 있었고 연간 15편 이상의 제작 실적을 유지하지 못할 경우 등록을 취소당할 수 있었다. 이에 1963년 6월 21일 한국의 영화사는 순식간에 극동, 한양, 한국영화, 신필름의 4개사로 정리되고 만다. 국책에 의한 영화기업화는 여러 부작용을 낳았다. 등록된 영화사들은 등록 유지를 위해 형식적으로만 조건을 채우기 일쑤였고 개인 프로덕션의 자율적인 창작 활동은 원천적으로 봉쇄됐다. 사실 영화법에 의해 등록된 영화사가 서류상 올린 감독, 배우, 기술진은 대부분 허위였고 연간 15편 이상의 극영화 제작 실적은 등록제작사의 자체 제작보다는 군소 프로덕션의 ‘대명제작’으로 채우는 것이 현실이었다. 즉 등록이 힘든 영화사가 등록된 제작사와 계약해 그 회사의 이름으로 영화를 만드는 것이 당시 한국영화계의 가장 일반적인 제작 방식이었다. 급기야 영화인협회가 중심이 된 영화법폐기촉진위원회가 1964년 3월 영화법 폐기를 건의하며 나섰고 결국 1966년 8월 영화법 2차 개정 때 가장 현실성이 없었던 녹음시설 및 감독, 배우, 기술자 전속제에 관한 규정만 삭제된다. 이처럼 1960년대 한국영화의 전성기는 국가 주도의 근대화에 기반하고 있었다. 한국영화계 역시 급격히 확대된 외양에 비해 그 내면은 부실한 상황을 연출하며 이른바 한국식 근대화의 특징적 모습들을 공유하고 있었다. 특히 흑백 시네마스코프(와이드스크린)나 후시녹음 등 기술적인 부분을 들 수 있을 것이다. 당시 서구영화의 일반적인 기준인 컬러 시네마스코프 화면은 1960년대 후반에야 정착할 수 있었고 영화 속 인물들의 목소리는 실제 촬영 현장의 배우가 아닌 녹음실 성우들의 후시녹음으로 대체됐다. 하지만 이는 당시 한국의 경제 상황에 맞게, 영화계가 가장 합리적인 제작 방식을 모색한 것으로도 평가할 수 있다. 이제 1960년대 초에 두각을 나타낸 한국영화사의 특별한 감독 세 명을 살펴볼 차례다. 이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상업성과 예술성 어느 쪽도 놓치지 않는 대중적 작가주의를 실천하며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주도하게 된다. 바로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1961)의 신상옥, ‘오발탄’(1961)의 유현목 그리고 ‘하녀’(1960)를 연출한 김기영이다. 이들은 한국영화사의 걸작들로 평가받는 작품들을 내놓으며 1960년대 르네상스의 폭과 깊이를 두루 만족시키고 있었다.●영화산업의 ‘최전선’에 섰던 감독 신상옥 신상옥(1926~2006)은 영화사 신필름의 대표이자 감독으로 1960년대 한국영화계를 주도한 인물이다.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나 외국문물을 받아들이는 것에 거부감이 없었던 그는 나운규와 찰리 채플린을 영화적 스승으로 꼽을 정도로 어릴 적부터 영화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고 한다.그가 직접 가르침을 받은 감독은 최인규다. 해방 직후 ‘자유만세’(1946)를 보고 감명을 받은 그는 ‘죄없는 죄인’(1947) 등 최인규의 이후 작품에 참가해 영화를 배운다. 감독 데뷔는 6·25전쟁 시기 피란 도시 대구에서 완성한 ‘악야’(1952)였다. 피란지 작가의 암울한 일상을 그린 ‘악야’는 현재 필름이 남아 있지 않지만 이탈리안 네오리얼리즘과 장르 영화의 화법을 결합해 전후 사회의 공기를 포착한 그의 1950년대 대표작 ‘지옥화’(1958)를 통해 어느 정도 짐작해 볼 수 있다. 홍성기의 ‘춘향전’과 경쟁한 ‘성춘향’(1961)이 흥행에 성공하면서 신상옥의 ‘신필름’은 1960년대 한국영화계의 중심으로 당당히 진입했다. 사실 주식회사 신필름은 당시 정권이 제시한 영화기업화 정책에 가장 부합하는 영화사였다. 덕분에 감독 신상옥도 영화제작자로서의 기반을 다짐과 동시에 영화작가로서 이름을 찾는 데 열중할 수 있었다. 1975년 ‘장미와 들개’ 검열 사건으로 정권과 사이가 멀어졌고 신필름 역시 영화사 등록이 취소됐다. 1978년 그의 페르소나이자 부인이었던 최은희가 북한으로 납치됐고 이어 신상옥도 납북됐는데, 그들의 동지적 관계는 1983년 이후 북한 신필름 촬영소에서도 계속됐다. 둘은 ‘소금’(1985) 등 7편의 작품을 함께하다 1986년 베를린 국제영화제 참석을 기회로 미국으로 망명했다. 할리우드에서 신(Sheen) 프로덕션을 설립해 ‘닌자 키드’ 시리즈를 흥행시키기도 했던 신상옥은 ‘겨울이야기’(2004)를 유작으로 남겼다.●충무로 시스템 속 ‘작가주의’ 감독 유현목 유현목(1925~2009)은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예술영화의 지분을 가장 많이 확보하고 있던 감독이다. 특히 ‘김약국의 딸들’(박경리 원작·1963), ‘카인의 후예’(황순원 원작·1968) 등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그의 문예영화는 이 시기 한국영화의 예술성을 책임지고 있었다. 그는 황해도 봉산군 사리원 태생으로, 동국대 국문과 2학년 때 영화예술연구회를 조직해 ‘해풍’(1948·45분)을 연출했고 ‘최후의 유혹’(1953·정창화)의 시나리오를 쓰기도 했다. 이후 이규환 감독의 ‘춘향전’(1955) 조감독을 거치는 등 현장 경험을 충분히 쌓은 후 ‘교차로’(1956)로 데뷔했다. 평생의 동반자인 서양화가 박근자와 결혼한 때는 1958년이다. 1950년대 후반 유현목은 ‘그대와 영원히’(1958) 등 그만의 미장센이 뚜렷한 멜로드라마를 선보였고 13개월에 걸쳐 제작한 ‘오발탄’을 공개하며 독보적인 작가주의 감독으로 등극한다. 6·25전쟁 이후 한국의 빈곤한 현실과 정신적 불안을 영상화한 한국영화사의 걸작이다. 그는 1980년대 초반까지 ‘순교자’(1965), ‘막차로 온 손님들’(1967), ‘분례기’(1971), ‘장마’(1979), ‘사람의 아들’(1980) 등의 문예영화를 통해 예술영화 감독으로서 위치를 확고히 했다. 뿐만 아니라 ‘아낌없이 주련다’(1962) 등의 흥행용 멜로드라마, ‘공처가삼대’(1967) 같은 세련된 코미디, ‘수학여행’(1969) 같은 아동드라마로 장르 불문하고 뛰어난 연출력을 입증했다. 또한 그는 충무로 영화계에서는 드물게 극장 개봉을 위한 실험영화 ‘춘몽’(1965)을 연출해 음화제조 혐의로 벌금형을 받기도 했다. 1970년 ‘한국소형영화동호회’, 1978년 독일문화원을 중심으로 한 ‘동서영화연구회’를 이끌며 실험영화 제작과 영화 연구를 병행하던 그는 1976년부터 1990년까지 동국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한국영화사에서 가장 독창적인 감독 김기영 김기영(1919~1998)은 1960년대 한국영화에서 독특한 영역을 개척한 인물이다. 본인이 설립한 영화사에서 가장 경제적인 방식으로 영화를 만들면서 그만의 미학과 주제 의식을 놓치지 않았고 이 영화들은 대중 관객과의 소통에도 성공했다. 평양고보 시절 문학, 미술, 음악 등 예술 전 분야에 두각을 나타냈던 그는 1940년 졸업 후 일본 교토로 건너가 독학으로 연극과 영화를 공부하는 ‘문화방랑객’으로 살았다. 해방 후 경성대 의학부에 진학해 이후 서울대 최초의 통합 연극반을 이끌었고, 이때 동창이자 연극반원이었던 김유봉과 결혼했다. 6·25전쟁이 발발하자 피란지 부산의 미공보원(USIS)에 소속돼 ‘리버티 뉴스’를 만들었고 1955년 ‘주검의 상자’를 연출하며 상업영화 감독으로 데뷔했다. 두 번째 작품 ‘양산도’(1955)로 김기영 영화 세계의 원형을 제시한 후 ‘초설’(1958)과 ‘십대의 반항’(1959)에서 네오리얼리즘의 영향을 드러냈다. 김기영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영화 세계를 알린 것은 1960년에 발표한 ‘하녀’에서다. 스릴러 장르로 대중성을 취하는 동시에 당시 한국영화의 절대적 가치라 할 리얼리즘 양식을 과감히 거부한 작품이다. 김기영 영화의 진수인 ‘하녀’ 속 인물 구도는 ‘화녀’(1971)와 ‘화녀’(1982)로 변주됐고 또 다른 결인 ‘충녀’(1972)는 ‘육식동물’(1984)로 변형되면서 당대 사회의 불안한 공기를 담아냈다. 인간의 본능과 욕망을 심연까지 파헤치는 그로테스크한 세계관, 영화 속 공간으로 계급 구조를 묘사하는 뛰어난 연출력 등 봉준호 같은 후배 감독들이 그를 칭송하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1997년 제2회 부산국제영화제 회고전을 계기로 젊은 관객들에 의해 재발견된 김기영은 1998년 ‘하녀’ 시리즈의 90년대식 변주인 ‘악녀’의 연출을 앞두고 평생의 지지자 김유봉과 함께 불의의 사고로 사망했다.정종화 한국영상자료원 선임연구원
  • 여명 서울시의원, ‘6·25전쟁 납북피해자 지원에 관한 조례안’ 발의

    여명 서울시의회 의원(자유한국당·비례)은 6·25 납북피해자의 의료비 지원,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위한 시책마련 및 지원사업 추진 등을 담고 있는 「서울특별시 6·25전쟁 납북피해자 지원에 관한 조례안」을 전국최초로 대표발의(2019. 6. 25) 했다. 2017년 국무총리소속 ‘6·25전쟁납북진상규명위원회’에서 전시 납북피해자를 최종 심의한 결과 전국에서는 4788명, 서울시에는 1554명의 전시 납북피해자가 결정됐다. 그러나 현행 6·25 납북피해자법에는 피해자들에 대한 실질적 지원근거가 미비한 실정이었다. 이번 조례안은 본인의 상관 없이 북한에 의해 강제로 납북돼 북한에 억류 또는 거주하게 된 ‘전시납북자’와 납북자의 배우자, 직계 존속·비속 및 형제자매인 ‘전시납북자가족’을 지원하기 위해 ▲납북피해자의 생활안정과 복지향상을 위한 시책 마련을 위한 시장의 책무를 규정하고, ▲납북피해자에 대한 효율적인 지원을 위해 납북피해자의 거주지 여건과 생활여건 등에 관한 실태를 조사하며, ▲납북과 관련한 피해로 인해 치료가 필요한 납북피해자에 대해 의료비를 지원할 수 있도록 하고, ▲시장이 납북피해자의 생활 안정과 복지향상을 위해 지원 사업을 추진하고, ▲전시납북자의 명예를 회복하기 위해 추모 등 기념사업을 추진할 수 있도록 하는 등의 내용을 담고 있다. 여 의원은 “60년이 지나도록 전시 납북자 가족들은 가장이 납북되는 것을 목격했음에도 지원근거가 없어 납북피해를 인정받지 못했다” 면서, “2010년에서야 법률이 제정됐지만 법률제정 10년이 넘도록 지원근거가 없어 납북피해자 가족들은 일체의 지원을 받을 수 없는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고 제정 이유를 밝혔다. 여 의원은 지난 1년여 동안 전시 납북자 피해자 가족을 만나 간담회를 가졌으며, 통일부와 지속적인 논의를 통해 서울시 지원 근거를 마련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6·25전쟁납북인사가족협의회’에 따르면, 최근 몇 년까지도 납북자의 배우자들이 생존해 계셨으나 현재 그 가족과 직계가족의 수가 점점 줄고 있는 안타까운 상황이다. 여 의원은 “이번 조례 제정에 대해 통일부도 많은 관심을 자기고 있는 만큼, 앞으로 통일부와 서울시의회 소관 상임위원회인 행정자치위원회, 그리고 여러 전문가들의 의견을 듣는 자리를 마련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납북 피해자와 그 가족분들은 나라가 지키지 못한 역사의 조난자들이다. 농대 출신 공무원, 법조인, 기술자, 의사 등 당시 엘리트 계층의 가장들이 납북 당했으나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었다. 남·북간 화해와 용서를 강조하는 정권이 들어선 만큼 여야를 초월한 공감대가 형성돼 더 늦기 전에 납북피해가족들의 마음을 어루만질 수 있는 최소한의 지원들이 이루어지는 근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했다. 「서울특별시 6·25전쟁 납북피해자 지원에 관한 조례안」은 오는 8월 제288회 임시회에서 행정자치위원회를 거쳐 본회의에 상정될 예정이다. 온라인뉴스부 iseoul@seoul.co.kr
  • KAL기 납북 피해자 아들, 유엔에 ‘아버지 억류’ 조사 진정

    KAL기 납북 피해자 아들, 유엔에 ‘아버지 억류’ 조사 진정

    1969년 대한항공(KAL) 여객기 납북 사건 이후 북한에 남게 된 탑승자의 아들이 유엔에 억류자 문제 해결을 요청했다. 대북인권단체 전환기정의워킹그룹은 20일 KAL기 피랍자 황원씨의 아들 황인철씨를 대리해 유엔 자의적구금실무그룹(WGAD)에 황원씨의 납북을 ‘자의적 구금’으로 판정해달라는 내용의 진정서를 제출했다고 밝혔다. KAL기 납북 사건은 1969년 12월 11일 김포에서 출발해 강릉으로 가던 대한항공 여객기가 이륙 10분 만에 간첩에 장악돼 북한으로 납치된 사건이다. 북한은 국제 사회의 비난이 거세지자 1970년 2월 14일 승객과 승무원 50명 중 39명을 송환했다. 그러나 당시 MBC PD로 일하던 황원씨를 비롯한 11명은 돌려보내지 않았다. 황인철씨는 진정서에서 황원씨가 사리원 근처에서 가택연금 상태인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신체의 자유가 박탈돼 자의적 구금에 해당한다고 지적했다.황인철씨는 유엔이 북한에 있는 황원씨와 한국에 있는 가족 간 자유로운 연락을 허용하도록 촉구하고, 독립적인 제3자를 통해 황원씨의 자유의지를 확인할 것을 요청했다. 북한은 황원씨를 포함한 11명이 자유 의지로 북한에 남았다고 주장한 바 있다. 실무그룹은 자유의 박탈을 정당화할 법적 근거가 없거나 세계인권선언 등에서 보장하는 자유나 권리를 행사한 것이 구금의 원인이 된 사례 등을 ‘자의적 구금’으로 판정, 해당국에 석방이나 조사 등을 권고할 수 있다. 신진호 기자 sayho@seoul.co.kr
  • 아버지의 간첩 오명 58년 만에 벗겨낸 막내딸의 눈물

    아버지의 간첩 오명 58년 만에 벗겨낸 막내딸의 눈물

    5·16 때 간첩 몰린 고 진승록 서울대 법대학장 재심 무죄변호사 재등록 2년 만인 1985년 명예회복 못한 채 작고정치학 교수된 막내딸이 2015년부터 재심 절차 밟아와“이 사건 피고인이 간첩 활동 또는 이를 방조하는 행위를 했다고 볼 증거는 대단히 부족하고, 심지어 거의 없다고 판단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죄가 선고됐으므로 판결이 잘못됐다고 결론을 지었습니다. 원심 판결 중 유죄였던 부분을 파기하고 피고인에게 무죄를 선고합니다.” 16일 오후 서울고법 형사2부(부장 차문호)가 한 재심 사건에 대해 판결을 선고하자 정장 차림의 여성이 방청석에서 일어나 “감사합니다”고 말하며 참고 있던 울음을 터뜨렸다. 고인이 된 부친을 대신해 2015년부터 재심 과정을 진행한 진미경(64) 한국외대 초빙교수였다. 재판장은 “고생 많았어요 그동안, 잘 돌아가셔요”라고 따뜻한 인삿말을 건넸다. 재심 사건 피고인인 진승록 전 서울대 법과대학장은 해방 전 보성전문학교 교수, 해방 후 고려대 교수와 1952년 고시위원회 위원장을 거칠 만큼 널리 알려진 법학자였다. 그러나 5·16 군사정변이 발발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새벽, 진 전 학장은 불현듯 자택에 들이닥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불법 연행됐다. 진 전 학장은 1950년 6·25 전쟁 당시 납북됐다가 가까스로 살아 돌아왔는데, 군사정권은 이를 이유로 진 전 학장이 북한 측에 간첩으로 포섭됐다는 혐의를 씌웠다. 남으로 돌아와서는 다른 간첩을 만나 ‘남북 협상에 대한 학생들의 동향을 보니 반은 찬성하고 반은 반대한다’는 식의 정보를 알려준 뒤 금괴를 받았다는 혐의도 더해졌다. 1961년 1심 군법회의는 진 전 학장의 간첩죄와 간첩방조죄를 모두 유죄로 인정해 사형을 선고했다. 이후 군법회의의 2심과 대법원에서의 상고심을 거쳐 간첩죄는 무죄가 되고 간첩방조죄만 유죄로 인정된 진 전 학장에게는 징역 10년이 확정됐다. 이후 2개월이 채 되지 않아 진 전 학장은 형집행정지로 풀려났다. 빨리 풀려난 점에 대해 진 교수의 남편 이수철(67) 용인대 명예교수는 “군사정권이 사건을 조작한 걸 스스로 인정했던 것 아니겠느냐”고 지적했다.이날 재심 사건을 맡은 재판부는 “피고인의 (생전) 진술을 봤을 때 적법한 영장에 의해 구속 수사를 받은 게 아니라 불법적으로 감금된 상태에서 협박성 조사를 받은 것으로 판단된다”면서 “편안한 분위기에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던 상황이 아니었던 것으로 판단돼 피고인의 진술을 기재한 모든 조서는 증거능력을 배척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앞서 지난달 열린 결심 공판에서 검사도 진 전 학장에 대해 “무죄를 선고해달라”고 재판부에 요청했다. 진 전 학장은 풀려난 지 15년이 되던 1978년 사면을 받았고 1983년엔 변호사로 재등록 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은 1985년 1월, 진 전 학장은 만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진 교수는 “연행되기 전까지 아버지는 ‘민법총론’, ‘물권법’ 등 6권의 책을 저술했는데, 석방된 후에는 글을 하나도 못 썼다”면서 “풀려난 뒤에도 정기적으로 형사가 자택을 방문해서 정신적으로 많이 위축되셨고, 사회적으로도 간첩으로 알려져 사회 활동에 제약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막내인 내가 아버지를 기쁘게 해드리는 일은 공부를 잘 하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교수까지 됐다. 정치학을 전공한 이유도 아버지가 억울하게 잡혀가는 걸 봤기 때문이다”는 진 교수도 부친의 전과 기록 때문에 여러 어려움을 겪었다고 털어놨다. 진 교수는 “박사과정 유학을 가려는데 당시 외무부에서 여권이 안 나왔다. 신원조회에서 아버지의 전과가 걸렸기 때문”이라면서 “고위공직자 2명의 신원보증을 받아와야 여권을 내주겠다고 했고, 다행히 아버지의 서울법대 제자 2명이 보증을 서 줘서 겨우 유학을 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교수가 된 후 정부에서 고위직 제안도 받았지만 아버지 전과가 노출될까봐 대학에만 조용히 남기로 했다. 다른 죄도 아니고 간첩죄니까…”라고 말하던 진 교수는 다시 눈물을 흘렸다. 진 교수는 “아버지가 5·16 때문에 누명을 쓰고 고초를 당하셨는데 오늘이 마침 이날(5월 16일)이라 감회가 깊다”면서 “살아 생전에 잠 못 이루시고 ‘억울하다, 원통하다’고 하셨는데 이제 오명을 벗으셨으니 부디 천국에서 안식을 누리시길 바란다”고 말했다. 유영재 기자 young@seoul.co.kr
  • 1960~1970년대 ‘간첩 조작사건’ 관련자 훈장 취소한다

    1960~1970년대 ‘간첩 조작사건’ 관련자 훈장 취소한다

    사형·징역형… 대법 재심서 무죄 판결 “관련 부처 공적심사·당사자 소명 거쳐”‘울릉도 간첩단 사건’과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 등 1960~1970년대 이뤄진 간첩 조작사건 관련자들에게 수여됐던 훈장 8점이 취소된다. 행정안전부는 7일 정부세종청사에서 열린 국무회의에서 이 같은 내용이 담긴 ‘부적절한 서훈 취소안’이 심의·의결됐다고 밝혔다. 대통령 재가를 거쳐 서훈 취소가 최종 확정된다. 1974년 중앙정보부는 울릉도에서 간첩활동을 하거나 도왔다는 이유로 47명을 검거했다. 이는 울릉도 간첩단 사건으로 불린다. 47명 가운데 32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이 가운데 3명이 사형됐고 나머지는 징역 1년~무기징역형을 받았다. 그러나 2015년 이 사건에 연루돼 옥고를 치른 박인조씨 등이 대법원 재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았다. 정부는 울릉도 간첩단 검거 공적으로 훈장을 받은 안모씨 등 3명의 훈장을 취소하기로 했다. 1979년 강원 삼척경찰서 이모 총경은 북한을 찬양하고 군사기밀을 알아내려 했다는 혐의로 일가족 12명을 기소했다. 이 중 2명은 사형에 처해졌다. 삼척 고정간첩단 사건이다. 1979년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이모 총경 등 2명에게 훈장을 줬다. 그러나 2016년 대법원은 이들 12명이 모두 무죄라고 확정했다. 여기에 1965년 서해에서 납북됐다가 돌아온 어민 정영씨를 간첩으로 몬 ‘정영 사건’과 1969년 고문으로 조작한 ‘임종영 간첩사건’ 등 관련자들에게 내려진 포상도 박탈된다. 이번 서훈 취소는 지난해 7월에 이어 두 번째로 이뤄졌다. 지난해에는 ‘5·18 광주 민주화운동 진압’, ‘부산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등 13개 사건 관련자와 단체에 수여됐던 훈장 56점이 취소됐다. 이번에 추가로 취소된 훈장은 지난해 국정감사에서 홍익표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취소를 요구한 간첩 조작사건 관련자 6명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 위원회’의 재심 권고로 무죄 판결이 난 사건 관련자 2명에게 내려진 것이다. 행안부는 판결문과 국무회의 회의록 등 공적 근거자료를 바탕으로 국가정보원과 경찰청 등 관련 부처와 공적심사위원회도 열고 당사자 소명 절차도 거쳤다고 설명했다. 세종 오경진 기자 oh3@seoul.co.kr
  • 文 “남과 북은 생명공동체… 평화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위한 것”

    文 “남과 북은 생명공동체… 평화란 평범한 사람들의 삶 위한 것”

    “남북문제 이념·정치로 악용되면 안돼 한국 국민들 이제 스스로 운명 개척 新한반도체제 구축할 원동력 될 것”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도 않고’ 獨 문호 괴테의 경구 인용해 끝맺어 ‘교착’ 북미대화 긴 호흡으로 중재 의지문재인 대통령은 6일 “남북의 문제는 이념과 정치로 악용돼서는 안 되며 평범한 국민의 생명과 생존의 문제로 확장해야 한다. 남과 북은 함께 살아야 할 ‘생명공동체’”라며 “항구적 평화란 정치적이고 외교적 평화를 넘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을 위한 평화”라고 강조했다. 또 “‘신한반도 체제’는 수동적 냉전질서에서 능동적 평화질서로의 전환을 의미하며 일제 강점과 냉전으로 미래를 결정하지 못했던 한국 국민은 이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하고자 한다”면서 “평범한 사람들이 운명의 주인이 되는 일”이라고 말했다. ●남북문제 관련 ‘생명공동체’ 첫 언급 문 대통령은 취임 2주년(10일)을 앞두고 독일 유력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이네 자이퉁(FAZ)에 기고한 ‘평범함의 위대함: 새로운 세계질서를 생각하며’란 글에서 이렇게 밝힌 뒤 “한국 국민은 평범한 사람들의 자발적 행동이 세상을 바꾸는 가장 큰 힘이라는 것을 보여줬고, 이 힘은 마지막 남은 냉전체계를 무너뜨리고 신한반도 체제를 만들어가는 원동력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중요한 것은 평범한 한 사람이 자기 의지와 무관하게 불행에 빠지는 일을 막는 일”이라고 했다. 문 대통령이 남북 문제와 관련해 ‘생명공동체’를 언급한 것은 처음이다. 생명공동체란 막연한 개념이 아니다. 예컨대 수도권 2500여만명의 상수원 역할을 하는 북한강은 금강산 부근에서 발원하고, 아프리카돼지열병이나 미세먼지 앞에 철조망은 의미가 없듯 남과 북은 촘촘히 연결돼 있다. 결국 이 땅의 평범한 이들이 온전한 삶을 영위하려면 돌이킬 수 없는 평화를 구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과거 납북 어부들, 접경지역 주민들, 자기검열에 시달린 예술인처럼 냉전·분단 속에서 한 개인이 삶을 제대로 살 수 없는 일이 비일비재했고, 북쪽도 다르지 않을 것”이라면서 “평화가 막연하고 무관하게 느껴지지만, 결국 이 땅의 평범한 이들을 위한 것이란 의미”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은 3·1운동과 임시정부를 기점으로 식민지와 분단을 넘어 민주주의와 경제발전을 향해 전진해온 근대사를 거론하며 “그 역사의 물결을 만든 이는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했다. 이어 “분단 역사에는 평범한 사람들의 눈물과 피가 얼룩져 있다”면서 “분단은 기득권을 지키는 방법으로, 정치적 반대자를 매장하는 방법으로, 특권과 반칙을 허용하는 방법으로 이용됐다”고 지적했다. 분단 이후 고착화된 모순을 바꿔보고자 하는 열망이 2016~2017년 ‘촛불’로 이어졌고 “촛불혁명의 영웅은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의 집단적 힘이었다”고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한반도의 봄’의 씨앗을 뿌린 2017년 7월 독일 쾨르버재단 초청 연설에 대해 “겨울을 뚫고 봄의 새싹이 올라오려면 한반도 비핵화와 항구적 평화라는 큰 꿈을 이야기해야 했다. 국민들과 함께 이룰 수 있는 큰 꿈이어야 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북한 핵·미사일 실험이 이어지고 ‘4월 위기설’ 등 전쟁의 먹구름이 드리웠던 터라 문 대통령 연설에 대해 과도하게 낙관적이란 비판이 적지 않았던 점을 언급한 것이다. 이어 “냉전구도는 아직 한반도에서만은 그대로”라면서 “지난해 판문점선언과 평양선언으로 항구적 평화 정착의 첫 번째 단추를 채웠지만, 북미 대화가 완전한 비핵화와 북미 수교를 이뤄내고 정전협정이 평화협정으로 완전히 대체된다면 비로소 냉전체제는 무너지고 한반도에 새로운 평화체제가 들어설 것”이라고 말했다. ●“완전한 비핵화 땐 한반도 새 평화체제로” 문 대통령은 “평화의 방법으로 세계를 조금씩 변화시킬 수 있게 될 것”이라며 독일의 문호 괴테의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쉬지도 않고’란 경구를 인용해 기고를 끝맺었다. ‘하노이 핵담판’ 결렬 이후 북미·남북 대화가 교착상황에 빠졌지만, 조금은 긴 호흡으로 정교한 중재를 하겠다는 의지로도 해석된다. 1만 6200여자에 이르는 방대한 기고는 10일 FAZ에 요약문이 실리며, FAZ 출판부가 5월 말 출간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주제로 한 기고문집에 전문이 실린다. FAZ는 약 5년에 한 차례씩 전 세계 주요 정상 등의 기고를 모아 책으로 낸다. 앞서 김영삼 전 대통령(1998)과 김대중 전 대통령(2000), 노무현 전 대통령(2007), 이명박 전 대통령(2013)이 기고했다. 임일영 기자 argus@seoul.co.kr
  •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임정, 온전한 조국 독립 꿈꿨는데… 통일이 진정한 광복 완성”

    이런 삶을 살아온 이가 있다. 중국 상하이 임시정부(이하 임정) 청사 옆에서 도산 안창호(1878~1938) 등의 축하를 받으며 태어났다. 상하이~항저우~난징~창사~광저우~류저우~치장~충칭으로 이어지는 중국 대륙을 임정과 함께 풍찬노숙하며 횡단했다. 한국인임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김(金)씨 대신 진(陳)씨로 성을 바꿔 학교를 다녔고, 백범 김구(1876~1949)와 김치에 거친 밥을 겸상했다. 석오 이동녕(1869~1940)과 성재 이시영(1869~1953)을 할아버지라 부르며 졸졸 따라다니던 소년이었다. 1930년대 중국 영화 황제 미남배우 김염(1910~1983)이 드나든 집에서 자란 이 소년은 훙커우공원 폭탄의거의 윤봉길(1908~1932)이 “내 아들과 동갑”이라고 사탕 사주며 예뻐했다. 엄마 손잡고 약산 김원봉(1898~1958)의 부인이자 여성 독립운동가인 박차정(1910~1944)이 폐병으로 세상을 뜨기 전 병문안 다니곤 했다.이 소년은 열아홉 되던 해 광복을 맞았다. 올해로 91세인 김자동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회장의 이야기다.만주군 장교에서 일제 패망 직후 광복군으로 신분을 바꾼 박정희(1917~1979)와 거의 같은 시기 미군 수송선을 타고 임정 식솔과 함께 상하이에서 부산으로 왔다. 귀국 뒤 이승만(1875~1965)에게 세배를 갔고, 결혼식 주례는 해공 신익희(1894~1956)가 섰다. 의용군으로 끌려가다 겨우 도망쳤더니 아버지는 전날 납북돼 영원한 이별을 하고 말았다. 조선일보 수습 1기 기자로 일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에 대한 역사적 오보를 바로잡는가 하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한 뒤 훗날 무죄로 판결난 조용수(1930~1961)와 함께 민족일보 창간멤버로서 진보언론의 꿈을 키우기도 했다. 그의 삶 곳곳에는 현대사 교과서에 등장하는 숱한 인물들이 출몰한다. ●모스크바 3상회의 역사적 오보 바로잡아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역사의 한복판에서 부침을 함께한 김 회장. 대한제국 법무대신 등을 지내다 가솔을 이끌고 임정으로 망명한 뒤 독립운동에 나섰던 동농 김가진(1846~1922)이 그의 할아버지고, 건국훈장 독립장을 받은 김의한(1900~1964)과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은 정정화(1900~1991)가 그의 아버지, 어머니다. 2019년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감회는 누구와 비교할 바 아니다. 지난 12일 오후 서울 종로구 임시정부기념사업회 사무실에서 김 회장을 만났다. 2017년 12월 문재인 대통령 부부와 함께 충칭 임정 청사를 방문해 당시의 삶과 활동을 설명할 정도로 기력이 좋았지만, 지금은 거동이 좀더 불편해졌고, 청력도 많이 약해졌다. 그래도 여전히 기억은 또렷했고, 또박또박 짚어내는 임정의 가치와 정신은 청춘처럼 빛났다. -올해 임정 수립 100주년을 맞은 소회 먼저 말씀해 주십시오. “임정은 조국의 독립을 꿈꿨습니다. 하지만 지금 같은 반쪽짜리 독립은 아니었습니다. 분단은 진짜 독립이 아닙니다. 분단이 있는 한 광복은 미완성입니다. 1946년 제가 귀국할 때만 해도 분단이 이렇게 오래가리라 전혀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70년 동안 분단이 고착됐으니 짧은 시간 내에 통일은 어려울 듯합니다. 일단 남북의 평화로운 공존이 필요하고, 자유롭게 교류하고 협력하는 모습 자체가 통일의 과정이지요.” -젊은 사람들은 물론 많은 사람이 임정 100주년의 의미나 혹은 독립운동 자체에 대해 별 감흥이 없는 듯합니다. 그런 반응을 접하면 어떤 느낌이 드시나요. “감흥이 없는 게 당연하지요. 그렇다고 젊은 세대를 탓할 것은 아닙니다. 국가와 정치가 하기에 달려 있는 부분이고 그만큼 잘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대한민국은 헌법에서 밝히고 있듯 임정의 법통을 이어 왔습니다. 광복 이후 그 부분을 좀더 정확히 밝히고 임시정부의 목표와 강령을 실천했다면 그렇지 않았겠죠. 정치를 통한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교육을 통해 이를 후세와 공유해야 합니다.” -최근 정부가 임정 수립일인 4월 11일을 임시공휴일로 지정하려다 사실상 백지화하기로 한 것도 이런 흐름과 무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아쉽습니다. 한때 건국절 등 논란이 일기도 했던 만큼 필요한 것은 사실입니다만, 대통령 마음대로 하지 못하는 시대인 만큼 어쩔 수 없죠. 교육기관 등을 통해 항일투쟁의 역사, 친일 인사들의 행적, 일제의 침략 역사 등을 정확히 배울 수 있게 하고 임정의 가치를 잘 공유하면 됩니다.” ●남북관계 복원 난관… 곧 좋은 소식 있을 것 기대 -통일이 광복의 완성이라고 말씀하셨는데 최근 북미 정상회담 흐름 등 한반도 분위기가 나쁘지는 않지만 지난달 베트남 회담에서 확인됐듯 여전히 뿌리 깊은 북미 상호 불신을 드러낸 부분 또한 있습니다. 일본과의 관계도 악화일로고요. “일단 남과 북이 서로를 통일의 주체로 인정해야 합니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유소년 시절 서구에서 유학하는 등 서구문화의 영향이 분명히 있을 것이며, 그로 인해 안목 또한 좁지 않으리라 생각합니다. 지난 10년 동안 완전히 망쳐 놓은 남북 관계를 복원하는 작업인 만큼 난관이 있더라도 곧 좋은 소식이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미국 트럼프 대통령이야 우리의 통일에 관심이 없겠지만, 자신의 명망을 높이는 일이거나 미국에도 이익이 되는 일이니 북미 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평화를 외면하지 않을 것입니다. 또 일본이야 기대할 부분이 별로 없고, 당분간 집권당도 안 바뀔 것 같고…. 훼방하지 않도록만 우리가 잘 관리해야죠. 내 생전에 통일까지는 아니라도 평화적으로 공존하는 남북의 모습은 꼭 봤으면 좋겠습니다.” 김 회장은 임정의 정신과 교훈을 얘기하며 평화와 통일을 여러 차례 강조했다. 실제 임정은 공화주의를 지향한 좌우합작 정부였다. 좌익, 우익, 아나키스트, 유림까지 모두 모인 용광로 같은 곳이었다. 우익 인사인 백범이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며 평양을 찾은 것도 이 같은 배경에서다. 임정의 정신이 통일 지향으로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다음달 11일 열리는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식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 선포식’도 치러질 예정인데 이 기념관 건립은 어떤 의미를 갖게 될까요. “독립운동 관련 단체들이 한자리에 모이고, 그 선양사업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현재는 아무개 선생, 아무개 선생 등 개별 후손 중심으로 기념사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그러다 보니 후대로 넘어갈수록 먹고살기 바쁘고 관심도 시들해져 흐지부지될 수밖에 없습니다. 기념관이 만들어지면 국가가 체계적으로 독립운동 관련 자료도 한데 모으고 개별 독립운동가들의 뜻과 업적을 기릴 수 있으리라 기대합니다. 2021년 완공 예정인데, 늠름히 서 있는 모습을 꼭 보고 싶어요.” -꼭 그러셔야죠. 그런데 조심스럽습니다만, 말씀하신 임정의 진정한 독립 정신을 독립운동가 후손들이 제대로 이어 가지 못한 채 과거 독재정권과 타협하는 일도 제법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을 탓할 수만은 없어요. 시대가 그랬고, 교육이 그랬으니까요. 또 후손들이라고 아버지, 어머니와 똑같을 수는 없는 법이니까요. 물론 타협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광복회를 만들어서 독립운동가와 그 후손들을 권력 주변으로 많이 포섭했습니다. 유공자 서훈도 원칙과 기준 없이 남발하다시피 했고요.” 실제 김 회장의 조부(동농 김가진)는 항일 비밀조직인 조선민족대동단을 결성해 활동했고 망명 뒤 임정 고문, 북로군정서 고문을 맡았으며, 그의 장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장으로 치러졌다. 하지만 아직 독립유공자 서훈을 받지 못하고 있다. 이 밖에 약산 김원봉 또한 독립유공 서훈이 없다. 반면 이승만 전 대통령의 비서 출신인 임병직 전 외무부 장관은 가장 높은 서훈인 대한민국장을 받아 원칙과 기준에 대한 의문을 낳게 했다. 지난 13일 국가보훈처가 독립유공자 포상 보류자 2만 4737명에 대해 재심사를 하겠다고 밝힌 만큼 투명하면서도 체계적인 서훈이 내려질 것인지 기대를 모으고 있긴 하지만 말이다. ●임정 건국강령 21세기 복지국가정책 닮은 꼴 임정이 1941년 발표한 건국강령은 21세기 복지국가들이 표방하는 정책과 다를 바 없다. 1948년 제헌의 내용적 기초가 됐으며 2019년 현재도 여전히 유효한 실천적 과제를 담고 있다. 의료비 면제, 학비 면제, 최저임금제, 노동자 대표 경영관리 참여권 보장, 실업보험, 사형제 폐지, 노동자와 이익을 나누는 이익균점제, 몰수 재산 무산자 이익 위한 국영기관 이전 등을 주 내용으로 삼았다. 김 회장과의 얘기가 깊어질수록 100년 전 임시정부가 꿈꾼 나라를 우리가 잘 만들어 가고 있는지 스스로 돌아보게 된다. youngtan@seoul.co.kr
  • 납북 비난하던 일본, 미국인 자녀 400명 납치 방조

    납북 비난하던 일본, 미국인 자녀 400명 납치 방조

    납북 일본인 문제와 관련해 북한을 강력히 비난해온 일본이 미국인과 결혼해 낳은 자식을 불법으로 빼돌린 자국인 문제는 모른 척 한다는 지적이 제기됐다. 뿐만 아니라 일본 당국이 배우자 동의 없는 자국인의 ‘자녀 납치’를 돕고 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방식으로 1994년부터 25년간 약 400명의 미국 아이가 일본으로 유괴됐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22일 ASIA TIMES(아시아 타임즈 코리아) 보도에 따르면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타아나에 거주하는 미국인 랜디 콜린스는 지난 2008년 6월, 당시 5살이었던 아들을 ‘유괴’당했다. ‘납치범’은 전 부인 나카타 레이코였다. 콜린스와 나카타는 이혼했고, 캘리포니아주 법원은 아들이 미국에 머물러야 한다고 판결했다. 이에 나카타는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달아났다. 수소문 끝에 2015년에야 아들의 행방을 알게 된 콜린스는 일본으로 향했지만 일본 정부의 방해로 아들을 찾을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콜린스는 “일본 당국은 나카타에게 내가 입국한 사실을 알렸고, 그는 아들을 데리고 계속 피했다. 내가 출국하려 할 때에는 경찰이 이유도 없이 공항에 억류했다”고 말했다.미국 경찰은 나카타에게 체포 영장을 발부했고, 그는 현재 ‘부모 유괴’ 혐의로 미 연방수사국(FBI) 수배 명단에 올라있다. 인터폴(국제형사경찰기구)도 적색수배령을 내린 상태다. 콜린스는 “아들을 만나 아빠 노릇을 해주고 싶을 뿐인데 일본 정부는 기본적인 부모의 권리를 무시하고 불법적인 자녀 유괴를 계속 묵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2014년 열린 미국 상원 청문회는 일본을 국제 ‘부모 유괴’ 사건에 가장 비협조적인 나라로 지목했다. 일본은 1983년 발효된 ‘국제 유괴사건 민사 협약’도 제대로 지키지 않고 있다. 콜린스는 “1994년 이후 약 400명의 미국 아이들이 일본에 유괴됐다”고 주장했다.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일본인 납치 문제가 해결되기 전까지 북한에 경제적 지원을 하지 않을 것”이라며 북일 관계 정상화의 전제 조건으로 납북자 문제 해결을 강조해왔다. 아베 총리는 오는 27~28일 베트남 하노이에서 열리는 2차 북미정상회담을 앞두고 지난 20일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전화 통화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일본인 납치 문제 해결을 요청해달라는 의사를 전달했다. 아베 총리는 앞서 지난해 6월 1차 북미정상회담 때에도 사전에 트럼프 대통령에게 북한에 납치 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요청했으며,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에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에게 이를 전했다.콜린스는 아베 총리의 논리대로라면 “일본이 자녀 유괴 문제를 해결할 때까지 미국은 일본에게 경제적·군사적 지원을 해줘선 안 된다”며 “북한은 40년 전에 납치한 일본인 17명 중 5명을 돌려보냈지만 일본은 유괴된 아이들 중 단 한 명도 돌려주지 않았다”고 꼬집었다. 일본 정부가 국제이혼한 자국인의 자녀 납치를 돕고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지난 2011년 일본 자녀납치 문제 해결을 위해 결성된 국제비영리단체 BACH(Bring Abducted Children Home·유괴된 아이들을 데려오자)의 제프리 모어하우스 이사는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일본 외무성과 일본변호사협회가 주최한 공개 세미나 녹취자료를 입수했다. 모어하우스 이사는 “일본 정부는 세미나에서 외국인과 결혼해 재외 거주하는 자국민에게 ‘국제 유괴사건 민사 협약’을 지키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려주며 국제 협약을 노골적으로 무시했다”고 주장했다.모어하우스 이사 역시 일본인 전 배우자에게 자녀를 유괴당했다. 그는 2007년 5월 미국 워싱턴주 법원으로부터 6살 짜리 아들에 대한 단독 양육권을 인정받았다. 면접교섭권이 있던 모어하우스 이사의 전 부인은 2010년 6월 아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출국했다. 법원은 전 부인과 아들이 워싱턴 주를 떠나지 못하도록 여권발급과 여행을 규제했지만, 전 부인은 포틀랜드 주재 일본 총영사관에서 불법으로 여권을 발급받아 미국을 떠났다. 모어하우스 이사는 “자녀 납치는 아이를 건강하게 키워 야하는 부모가 해선 안 될 아동학대”라고 말했다. 모어하우스 이사는 아들을 돌려받기 위해 일본에서 소송을 진행하고 있다. 최근 법원에서 만난 아들은 어느덧 13살 소년이 돼 있었다. 그는 “아들이 ‘아버지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을 받자 눈물을 흘리며 ‘밤에 가끔 아빠 꿈을 꾼다’고 대답했다”며 마음 아파했다. 오달란 기자 dallan@seoul.co.kr
  •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첫 번째 일”…손현주, 김상덕 재조명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첫 번째 일”…손현주, 김상덕 재조명

    배우 손현주가 친일파 청산을 위해 만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김상덕’의 기록자로 나선다.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은 대한민국의 독립과 해방, 민주주의 발전을 위해 헌신한 100인의 인물을, 이 시대 대표 샐럽 100인이 ‘기록자’를 통해 새롭게 조명하는 3분 캠페인 다큐 프로그램이다. 해방 후, 일제강점기 친일파를 청산해야 한다는 국민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에 제헌국회는 친일파를 처벌할 특별법 제정에 착수해 ‘반민족 행위특별조사위원회’(이하 반민특위)를 설치하고, 독립운동가 ‘김상덕’을 위원회의 위원장으로 역임하여 친일 잔재 청산에 앞장섰다. 이후, 김상덕 위원장은 반민특위의 활동에 불만을 품은 친일 경찰들로부터 암살 위협을 받았음에도 굳건하게 친일파 청산을 이어갔다. 그러나 친일파 처단에 소극적이었던 이승만 정권 아래 친일파들의 방해공작으로 반민특위는 1949년 8월, 무력하게 해산되고 말았다. 조국 독립을 위해 헌신하고 친일파 청산에 주력했던 독립운동가 김상덕 위원장은 6·25전쟁 중 북한에 의해 납북되었고, 유족들은 연좌제로 힘들게 살았다. 배우 손현주는 “기록자 100인에 포함되어 영광”이라며 “역사를 바로잡는 것이 역사를 기억하는 첫 번째 일”이라며 ‘기억·록’에 참가 소감을 밝혔다. 한편,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수 수립 100주년을 맞아 방영 중인 MBC 특별기획 ‘1919-2019 기억·록’은 캠페인과 다큐를 접목시킨 포맷으로 매주 화, 수, 목요일 밤 9시 55분에 정규 방송된다. 이외 시간에는 수시 방송한다. 문성호 기자 sungho@seoul.co.kr
  •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하자… 임정, 마침내 日에 선전포고

    4부. 광복의 여명 : 충칭 시기 ② 일본의 패망1910년 한반도를 차지한 일본은 1931년 중국 만주를, 1937년 중국 대륙을 침략하며 제국주의 팽창 야욕을 여과 없이 드러냈다. 필리핀과 말레이시아, 싱가포르까지 점령한 뒤 “독일과 중동에서 만나겠다”며 버마(현 미얀마)·인도 전선까지 세력을 확대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마지막 정착지인 중국 충칭에서 당·정·군 체제를 갖춘 뒤 ‘전쟁 괴물’이 된 일본의 패망을 기다렸다. 해방은 우리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찍 찾아왔다.●임정, 1945년 2월 28일 독일에도 선전포고 1937년 7월 일본이 중일전쟁을 일으키자 영국과 미국은 자신들이 선점한 중국 내 이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했다. 일본에 석유 수출을 금지했다. 이후 일본은 제조업 가동에 어려움을 겪었다. 결국 1941년 12월 미국의 해군기지인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 공격했다. 미국과의 협상을 통해 석유금수 조치를 풀어 보겠다는 의도였다. 하지만 당시 두 나라 간 군사력 차이를 감안할 때 진주만 공습은 무모한 결정이었다. 미국은 즉각 일본과의 전면전을 선언하며 ‘태평양전쟁’(1941~1945)에 나섰다. 이 전쟁은 임정이 바라던 일이기도 했다. 광복군을 양성해 뒀다가 일본이 중국, 미국과의 전쟁에 나서면 이들을 도와 독립을 쟁취하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임정은 일제가 진주만을 공격한 직후 주석 김구(1876~1949)와 외무부장 조소앙(1887~1958) 명의로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일선전성명서’를 발표했다. “우리가 3000만 한인과 정부를 대표해 중국과 영국, 미국 등 여러 나라와 함께 일본과의 전쟁을 선포한 것은 일본을 격패시키고 동아시아를 재건하는 가장 유효한 수단이기에 민주진영의 최후 승리를 미리 축하한다.” 임정은 독일에 대해서도 선전포고했다. 1945년 4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연합국 회의가 열릴 예정이었는데, 이 회의에 참가하려면 3월 1일 이전에 독일에 선전포고를 해야 해 하루 전인 2월 28일 발표했다.●中 통제받은 광복군, 9개 조항 행동준승 논란 1940년 9월 태어난 광복군은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하지만 중국이 지원하던 또 다른 한인 부대였던 조선의용대 대원 상당수가 1941년 3~5월 본진을 이탈해 화베이 지역으로 떠나자 국민당 정부는 당황했다. 같은 해 11월 중국은 광복군에 대한 지원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한국광복군 행동준승’이라는 9개 조항을 전달했다. 중국 중앙군 참모총장의 명령과 통제를 받아 광복군이 움직일 수 있도록 한 게 핵심이었다. 독립운동사 전문가인 이현희(1937~2010) 전 성신여대 사학과 명예교수는 “이 준승은 광복군이 사실상 중국의 고용군이 된다는 것으로 매우 굴욕적인 군사협정이었다. 중국이 임정을 어떤 존재로 여겼는지 의심스럽게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하지만 중국 입장에서는 자국 영토에서 활동하는 외국 군대를 통제하려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이며, 당시 한인 독립운동 세력이 중국으로부터 충분히 신뢰를 얻을 만한 모습을 보여 주지 못했기에 어느 정도 간섭이 불가피했다는 반론도 있다. 임정은 중국의 준승 명령에 분개해 청사를 중국에서 미국으로 옮기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이승만(1875~1965)과 협의하기도 했다. 결국 중국은 우리 측의 지속적인 요구로 1944년 8월 광복군 통제권을 임시정부에 돌려줬다.●광복군, 한지성·문응국 등 임팔전투 투입 일본은 1942년 1월 영국의 식민지 버마를 침공했다. 인도에 주둔해 있는 영국군이 즉각 대응에 나섰는데, 이를 버마 전투(1942~1945)라고 한다. 영국군은 영어와 일본어를 완벽하게 구사할 수 있는 인재가 필요했다. 광복군은 영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인면전구공작대’를 꾸렸다. 인도와 버마 전선에서 활동하는 공작부대라는 뜻이다. 이들은 1943년 8월 영국군 총사령부가 있던 인도 캘커타에 도착했다. 한지성(1913~?)과 문응국(1921~1996) 등 9명이었다. 공작대는 영국군에게서 심리전 교육 등을 받고 1944년 초 임팔전선에 투입됐다. 임팔은 인도와 버마의 접경지역으로 열대밀림 산악 지대다. 광복군은 1945년 7월 일본군이 버마에서 완전히 패해 철수할 때까지 1년 넘게 영국군을 도왔다. 1945년 9월 이들은 충칭의 광복군 총사령부로 무사히 복귀했다. 한지성의 증언이다. “우리 공작대는 언제고 전투할 수 있도록 무장한 뒤 적(일본군)과 가장 가까운 진지에서 일본어로 방송을 했다. 선전문을 제작해 살포하고 일본군 문건을 번역하며 포로를 심문했다.”광복군은 미군과 함께 한반도 진공 작전도 추진했다. 미 중앙정보국(CIA)의 전신인 전략사무국(OSS·1942~1945)과 함께 한반도와 일본 본토에서 지하공작에 나서는 것이었다. OSS 특수훈련을 받은 광복군 대원을 국내에 잠입시켜 여러 활동에 나서기로 했는데, 이를 ‘독수리 작전’이라고 불렀다. 1945년 4월 OSS 요인들이 충칭의 임정 청사로 찾아와 작전 내용을 상세히 설명했고 김구는 이를 승인했다. 영화 ‘군함도’(2017)에서 독립운동 인사를 구출하고자 일본 나가사키현 하시마섬(군함도)에 잠입한 박무영(송중기 분)이 광복군 소속 OSS 요원이다.OSS는 같은 해 5월부터 광복군 내 엘리트들을 차출해 군사훈련을 시켰다. 대표적인 이들이 훗날 고려대 총장을 지낸 김준엽(1920~ 2011)과 사회운동가로 활약한 장준하(1918~1975)다. 이들은 일본군 학도병으로 끌려갔다가 탈영해 광복군에 합류했다. 김준엽은 1987년 개헌 당시 대한민국이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했다는 조문을 삽입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장준하는 박정희(1917~1979)의 독재에 반대하다가 1975년 의문사했다. ●승전국 지위 확보·강대국 간섭없이 독립 목표 임정은 미군의 지시로 국내에 진격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하지만 8월이 되자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갔다. 히로시마(6일)와 나가사키(9일)에 원자폭탄이 떨어졌다. 8일에는 소련이 선전포고를 하며 만주국을 점령했다. 당시 일본 측 기록을 보면 일본군은 나가사키 원폭 투하보다 소련 참전에 더 큰 충격을 받았다. 주변의 모든 나라가 적이 됐다는 사실을 깨달은 일본은 15일 무조건 항복을 선언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도 결국 무산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년’ 취재에 동행한 이원규(72) 작가는 “당시 임정은 한반도에 잠입해 2차 세계대전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면 강대국의 간섭 없이 한반도 독립을 얻어낼 수 있을 것으로 봤다”며 “일본이 일주일만 늦게 항복해 광복군이 한반도에 참전했다면 대한민국의 역사가 달라졌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 본다”고 말했다. 일부 학계에서는 광복군이 미군과 공동 작전에 참가했더라도 그 수가 워낙 적어 승전국 지위를 확보하기는 어려웠을 것으로 본다. 그래도 임정이 자신의 역량을 총동원해 일본과의 전쟁에 나섰다는 사실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외세에만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노력했다. 광복군의 국내 진공 작전을 무의미하다고 평가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패망이 다가오던 1944년. 임정은 좀더 정교하고 구체적으로 새 나라의 밑그림을 그려야 했다. 1943년 ‘카이로선언’(미·영·중이 일본 문제 논의)으로 조선 독립을 보장받은 시기였기에 이를 반영해 헌법을 개정했다. 주석(대통령) 중심제를 기본으로 하되 의원내각제를 가미해 절충적 정부를 구성했다. 교육과 직장, 노약자 부양을 요구할 권리를 보장하고 파업권도 명시했다. 사회민주주의 형태의 국가다. 이는 1941년 임정이 조선민족혁명당과의 합작을 앞두고 좌우를 아우르기 위해 내놓은 ‘건국강령’의 영향이 컸다. 건국강령을 지은 이가 ‘사민주의자’ 조소앙(1887~1958)이다.●조소앙의 삼균주의, 건국 이념 기초로 작용 일본 메이지대에서 법학을 전공한 그는 1919년 3·1운동 뒤 중국으로 망명해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했다. 1919년 스위스 루체른에서 열린 만국사회당대회에 한국 대표로 참석해 임정을 정식 국가로 승인해 줄 것을 호소했다. 1930년 한국독립당을 창당했다. 한독당은 1940년 5월 우파 통합정당의 이름으로 계승돼 임정의 여당이 됐다. 그는 개인과 개인, 민족과 민족, 국가와 국가가 모두 균등해지려면 정치와 경제, 교육의 세 가지 조건이 동등해야 한다고 믿었다. 이것이 삼균주의인데, 훗날 건국강령의 이론적 기반이 됐다.●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한국전쟁 때 납북 해방 뒤 김구와 함께 한독당을 이끌었고, 1948년 12월 우리나라 최초의 좌파 정당인 사회당을 창당했다. 1950년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해 전국 최고득표율로 당선됐지만 6·25전쟁 때 납북됐다. 만약 임정의 ‘1944년 헌법’대로 해방 정부가 꾸려졌다면 지금쯤 우리는 독일이나 스웨덴을 모델로 한 사민주의 국가에 살고 있을 것이다. 조석곤 상지대 경제학과 교수는 “1948년 제헌헌법은 건국강령의 경제조항을 계승하고 있다. 그것은 장기간에 걸쳐 이룬 사회적 합의의 산물”이라고 설명했다. 충칭 류지영 기자 superryu@seoul.co.kr
  • [월요 정책마당] 인천에서 시작하는 평화통일의 광장/한영숙 인천통일+센터장

    [월요 정책마당] 인천에서 시작하는 평화통일의 광장/한영숙 인천통일+센터장

    최근 제2차 북·미 정상회담 보도를 비롯해 남북관계와 관련한 뉴스가 우리의 일상이 되고 있다.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우리 국민이나 지방자치단체의 남북관계 및 통일 분야에 대한 관심과 수요 또한 증가하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대북·통일정책의 지속성을 확보하기 위해 ‘통일 공감대 확산’을 국정과제의 하나로 선정하였다. 그 세부과제로서 남북관계 및 통일정책에 대한 민-관, 중앙-지방을 연결하는 종합 통일센터의 설치를 추진하고 있다. 현재 통일이슈와 관련하여 지방에 산재한 기구들은 많다. 이러한 지역별로 산재한 기존 통일 관련 인프라를 통합하여 정책고객에게 종합적인 원스톱 서비스(One Stop Service)를 제공하게 되면 어떨까? 통일+센터는 이러한 상상력에서 출발하였다. 그러한 의미에서 지역통일센터를 통일+센터로 명명하였다. 플러스의 의미는 기존 통일 인프라를 통합하여 지역주민들의 참여로 새로운 사회적 가치와 풀뿌리 남북관계를 창출해 나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정부는 그 첫 사업으로 2018년 자치단체 공모를 거쳐 인천광역시에 ‘인천통일+센터’를 설치하였다. 인천광역시는 육상의 비무장지대(DMZ)와 비교되는 서해상 남북 접경지역으로 서해 5도와 강화도, 우리에게 교동시장으로 잘 알려진 교동도를 두고 있다. 또한, 2018년 말 기준 북한이탈주민 거주인원이 2807명으로 경기와 서울에 이어 세 번째로 많은 광역지자체이기도 하다. 이러한 지리적, 환경적 여건을 갖추고 있는 인천광역시에 지난해 9월 10일 시범적으로 통일+센터가 설치된 것이다. 인천통일+센터는 북한이탈주민들의 지역사회 정착을 지원하는 하나센터와 인천대가 운영하는 통일교육센터를 한곳에 모아 공간적인 통합성을 기하였다. 지자체인 인천광역시와도 평화 통일의 공감대 확산을 위한 각종 행사와 참여 프로그램들도 기획하고 있다. 또한 인천지역에서 남북 교류협력과 이산가족·납북자 문제 등과 같은 통일업무의 1차 민원창구로서 지역 거점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지난 1월 21일에는 인천광역시교육청(교육감 도성훈)과 ‘인천지역 평화통일 공감사업 상호 협력을 위한 업무협약(MOU)’을 체결한 바 있다. 이번 협약을 계기로 양 기관에서는 한반도 통일 미래 세대인 청소년들과 교사들을 대상으로 교육·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게 된다. 교육내용은 서해상 남북 접경지역인 인천지역의 특성을 반영하여 견학과 체험이 중심이 될 것이다. 특히 자유학년제로 선택의 기회가 넓어진 청소년들에게 평화와 공존의 가치를 내재화하고, 동북아 시대를 대비하는 인재로 육성하는 데 중점을 두고 진행될 것이다. 아울러 효과적인 평화통일교육 프로그램 발굴과 강사진 역량 강화를 위한 워크숍 등도 진행해 나가고자 한다. 인천광역시 송도에 위치한 인천통일+센터는 대강의실·중강의실과 2개의 세미나실, 자료실과 영상미디어실을 보유한 열린 공간으로 운영하고 있다. 인근 대학생들의 동아리 모임이나 주민들의 소모임 활동 등의 장소로도 이용이 가능하다. 앞으로 통일+센터가 초중고 학생들에게는 ‘통일 상상놀이터’가 되고, 인천시민들에게는 ‘통일 사랑방’으로서 통일 한반도의 미래에 대한 논의의 장으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더불어 전국 최초의 시범센터로 설치된 인천통일+센터가 단순한 공간 통합을 넘어 시민이 직접 통일정책에 참여하는 광장으로서 자리 매김하고, 센터의 성공적인 운영과 경험이 각 지역사회에서 평화통일에 대한 공감을 확산하는 원동력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해 나갈 것이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