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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24시간내 서울 함락”/귀순 이철수 대위 회견

    ◎김정일­“한밤기습,새벽에 점령 확인토록”/북,미그29 등 전투·폭격기 전진배치 북한은 개전 24시간 안에 서울을,7일만에 남한을 완전 점령하는 3단계 남한점령계획을 수립,전쟁연습을 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또 지난해 10월 2백70여대의 항공기를 황남 태탄,황북 인산 및 강원 통천 등 전방기지에 전진배치하고 조종사의 가족까지 모두 이주시킨데 이어 최신예 미그 29기 1개 대대를 평북 순천에서 평남 온천기지로 전진배치할 계획인 것으로 드러났다. 미그 19기를 몰고 23일 귀순한 북한 공군 이철수대위(30)는 28일 상오 서울 중구 태평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이같이 밝혔다. 이대위는 『북한군은 개성∼문산∼서울을 주 타격방향으로 설정,개전후 1단계로 24시간 안에 서울∼한강선을 점령하고 2단계로 대전을 정복하며 3단계로 부산까지 점령한다는 전략을 수립,전쟁연습을 실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대위에 따르면 김정일은 지난 94년 4월 인민무력부 작전요원들에게 『북한 인민들이 자고 있는 사이에 공격을 개시,순식간에 남조선을 점령해 아침에 깬 인민들이 남조선 점령상태를 확인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이대위는 『북한은 지난 14일과 16일 2차례 평남 온천군 석다리사격장에서 러시아제 미사일을 개량해 개발한 신형 지대공미사일을 시험발사했으며,이 미사일은 전파방해를 받지 않고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도록 설계된 최신형』이라고 말했다. 이어 『북한은 개전시 한국 공군의 야간공격에 대비,기존 활주로를 보호하기 위해 가짜 활주로를 설치,온천비행장의 경우 지하에도 비행장을 설치,이곳에서 이·착륙훈련을 실시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은 일반주민들의 극심한 식량난에도 불구,군부대에는 식량을 우선적으로 지급하고 있으며 특히 조종사는 평시 8백50g,훈련시 9백50g 등 특별대우를 하고 있다』고 전하고 『지난해 남한쌀이 들어왔다는 소문을 들었으며 남한쌀로 지었다는 밥도 먹어보았다』고 덧붙였다. 이밖에 『김정일은 김일성 사망이후 군에 대한 배려를 눈에 띄게 증대시키고 있으며 올해 7차례 군부대를 직접 방문,자신에 대한 군의 절대충성을 유도하며 전쟁준비를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황성기 기자〉
  • 「북 체제 전환과 남북한 경제통합의 과제」/KDI 보고서

    ◎“통일땐 북 경제자유화·지역개발 촉진해야”/초기엔 정부 주도로 경제통합 혼란 줄여야/협동농장 해체·국영사 사유화·수출산업 육성 바람직/남북 소득차 줄이고 북 잔류자 우대… 급속이주 방지를 한국개발연구원(KDI)의 전홍택연구위원은 15일 「북한의 체제전환과 남북한 경제통합의 주요과제」란 제목의 보고서에서 북한의 경제구조를 감안할 때 체제전환은 부분·점진적 방식보다는 전면·급진적 방식으로 추진돼야 한다고 밝혔다.또 북한지역에 대한 투자를 활성화해 개발을 촉진하고 고용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인구이동 억제책인 동시에 소득격차 완화방안이라고 강조했다.내용을 요약,소개한다. ○체제전환과 경제통합 한반도 통일의 경제정책 과제는 크게 북한사회주의경제의 시장경제로의 체제전환과 소득수준 및 생산성에 현격한 차이가 있는 두 지역의 경제통합이라는 두가지 문제로 나눠볼 수 있다.독일통일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북한이 기본적으로 중앙계획경제 체제를 유지한 가운데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우선 북한경제가 시장경제로체제전환이 이뤄져야 할 것이다.체제전환은 동구의 경험이 말해주듯 매우 힘든 과제다. 경제체제가 기본적으로 같은 시장경제간의 통합이라 하더라도 생산성과 소득수준에 큰 격차가 있는 경우 경제통합에 따른 충격은 상당하다.남북한의 경우 두 경제가 서로 다른 체제하에 있을 뿐 아니라 소득수준의 격차도 크기 때문에 경제통합의 충격은 더 클 수밖에 없다. 독일통일의 예에서 보듯 예상치 못한 가운데 갑자기 통일이 이뤄지는 경우,여러가지 정책오류가 생길 수 있고 그에 따른 경제적 손실은 막대해질 수 있다.따라서 갑자기 통일이 이뤄지는 경우에 대비해 핵심정책과제에 관한 쟁점을 검토,기본적인 정책방향을 사전에 도출해놓는 것은 통일후의 구체적인 대응책 마련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중국과 동구의 비교 체제전환의 방식과 경제적 성과는 주로 체제전환 초기의 정치·경제적 조건에 의해 좌우된다.중국과 동구의 체제전환을 비교하면 먼저 중국의 경우 농업취업인구 비중이 71%나 되고 국영기업부문의 취업비중이 19%에 불과한 저개발농업경제이고 수출입의 GNP 비중이 10%에 불과한 폐쇄경제여서 개혁이 농업과 대외경제부문에서 시작되는 것은 당연한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개혁 당시 거시경제 여건이 안정돼 있어서 점진적인 가격자유화를 추진할 수 있었다.이스라엘 칠레 폴란드 베트남 등 전면적 가격자유화를 일거에 실시한 국가들은 모두 초인플레이션과 심각한 국제수지 적자를 겪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중국에서는 공산정권에 의해 개혁이 추진돼 국영기업 개혁이 사회주의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생산수단의 전면적 사유화 대신 다양한 소유형태의 인정과 경영자율성 제고라는 두 가지 원칙아래 추진됐다. 중국은 개혁후 동구가 경험했던 생산붕괴와 대량실업의 발생없이 비교적 순조롭게 고도성장을 유지하고 있다.산업부문에 대한 투자를 통해 농업부문의 잉여노동력이 산업부문으로 이동해가는 전형적인 후진국의 경제발전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반면 동구의 경우 공산체제의 붕괴에 따라 비공산정권에 의해 체제전환이 추진돼 처음부터 서구식 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의 전환이라는 뚜렷한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체제전환 당시 경제구조는 2차산업 취업비중이 30∼60%,국영기업부문 취업비중이 50∼90%를 차지하는 중공업 중심의 과산업화경제였다.초인플레이션과 외채부담,통화팽창 때문에 거시경제의 불안정이 심각했다.따라서 대부분의 동구국가들은 전면적 가격 및 무역자유화,사유화를 통한 산업구조조정 등 충격적인 방식으로 체제전환을 추진했다. ○북 체제전환의 방향 통일이 이뤄질 경우 북한 체제전환의 기본방향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협동농장의 해체를 통한 가족농 중심의 상업농업체제로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북한은 GDP 및 취업의 구성비면에서 볼 때 산업화에 있어서는 체제전환 초기의 중국과 동구의 사이에 있으나 산업구조면에서 중국보다는 동구에 가깝다.북한의 농업여건은 중국이나 베트남에 비해 훨씬 불리하기 때문에 체제전환 후 농업부문이 성장의 견인차역할을 수행하기는 어렵다.그러나 초기에 농업개혁을 통해 생산성을 제고함으로써 식량 및 외환제약을 완화,경제성장의 토대를 마련하고농민의 도시 및 남한으로의 급격한 이주를 억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둘째 북한경제 재건과 자력성장기반 마련을 위해 수출산업을 육성해야 한다.남한 및 외국인 직접투자유치를 통한 새로운 기업의 설립과 함께 기존 중공업의 구조조정이 필요하다. 셋째 소규모 서비스산업의 자유화는 공급반응이 가장 빨리 나타나는 부문이므로 체제전환 프로그램의 주요과제가 돼야 한다. 넷째 농업 및 서비스산업의 개혁,산업구조조정,외자유치 등 경제자유화의 효과가 경제전체에 파급돼 경제활성화가 이뤄지기 위해서는 가격 및 무역자유화를 추진,자원배분을 효율화하고 경쟁을 촉진할 필요가 있다.가격·무역자유화는 전면적으로 추진돼야 한다. 다섯째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신속한 국영기업의 사유화가 요구되나 국영기업의 사유화가 완료될 때까지는 적어도 수년이상의 긴 시간이 소요되므로 국영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하면서 사유화를 진행시켜야 할 것이다.중국은 물론 폴란드도 사유화가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경영자율성 제고와 경영여건의 시장화로 국영기업의 구조조정을 성공적으로 추진했다. 여섯째 독일을 포함한 동구국가는 대부분 공산정권에 의해 몰수된 재산을 원소유자에게 반환함을 원칙으로 하였기 때문에 부동산 등 재산의 법적소유관계가 불확실해져 사유화 및 투자가 지체됐다.따라서 몰수재산 처리는 반환이 아닌 보상의 원칙에 의해 처리할 수 있도록 지금부터 법적인 문제를 검토해야 한다. 끝으로 국유재산 사유화 방식 결정에 있어서 경제적 효율성과 신속성이 가장 중요한 기준이 돼야겠지만 북한주민과 해당기업 근로자들에 대한 형평성도 감안돼야 한다. ○남북경제통합의 과제 북한경제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된다고 하더라도 남북한간 현격한 소득격차 때문에 경제통합은 매우 힘든 과제다.독일은 동독주민의 서독으로의 대규모 이주우려 때문에 통화통합 시기를 앞당기고 통화통합때 동독화폐를 고평가해 동독에 유리하게 통화전환비율을 결정했다.그 결과 통합직후 동독의 임금수준이 크게 상승했다.게다가 통합후에도 계속해서 급속한 임금인상을 방치 또는 조장해 인구이동을 방지하는 한편 고임금에 기초한 산업구조 고도화를 추진했다. 이에 따라 동독의 임금은 경제통합후 1년반만에 1백50%나 상승한 반면 생산성 증가는 25%에 불과했다.이같이 임금수준이 생산성을 크게 상회함으로써 많은 기업이 도산하고 대량실업이 발생했다. 고임금·고기술전략으로 지칭될 수 있는 동독지역 산업구조조정정책의 핵심은 동독지역 임금이 결국 서독지역 수준으로 상승할 것이기 때문에 고임금을 감당하지 못할 산업은 도태시키고 처음부터 서독의 임금기준에서 유망한 부문에만 투자하는 것이었다.어차피 장기적으로 도태돼야 할 노동집약적 사양산업을 붙잡아두는 것은 오히려 동독경제의 발전을 저해한다는 주장에 근거했다. 그러나 고임금·고기술전략은 원인과 결과를 혼동하는 오류를 범했다.동독지역 임금이 서독수준과 같아지려면 자본장비와 인적자본이 서독수준과 대등해지도록 대대적인 투자가 필요하나 막대한 자본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는 수익성이 있어야 하고,수익성이 있으려면 노동비용이 생산성을 초과해서는 곤란하다. 독일의 경우통화통합때 동독화폐 고평가와 산업구조조정에 있어서 고임금·고기술전략의 오류로 대량실업이 발생했고 실업자에 대한 보험 및 퇴직자에 대한 연금지급 등 소비적 지출을 위해 막대한 재정지출이 요구됐다. 그렇다면 남북한 경제통합의 경우에는 소득수준격차,인구이동,실업,산업구조조정 등의 문제에 대해 어떻게 접근하는 것이 바람직한가. 첫째 남북한간 소득격차 완화는 달성가능한 목표를 정해놓고 추진해야 한다.북한의 소득수준이 남한 소득수준의 40∼60%에 이를때까지는 20년 이상의 장기간이 소요된다.지금까지 대부분의 통일비용에 대한 연구는 10년내에 남북한간 소득격차를 완전히 해소하기 위해 천문학적 숫자의 통일비용이 소요된다고 추정하고 있는데 이는 논리적 모순이다. 둘째 독일의 경험을 보면 동·서독간의 기대임금수준의 격차가 이주의 중요한 결정요인이기는 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독지역에서의 고용기회 여부였다.이것은 북한지역의 개발을 촉진,가능한 한 고용을 확대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인 인구이동 억제책인 동시에 소득격차 완화방안이라는 것을 시사한다.지나친 이주를 억제하기 위해 고용확대와 함께 사유화의 추진과 사회보장제도의 적용때 북한잔류자에게 유리하도록 경제적 동기를 부여,북한거주를 유도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북한의 산업구조조정,경제활성화 및 고용촉진을 위해서는 남한 및 외국으로부터의 투자가 중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임금수준이 생산성 향상 범위내에서 증가하도록 적극적인 임금정책을 추진해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경제통합 초기에는 경제혼란을 방지하고 시장질서의 기초를 마련하기 위해 임금 가격 등의 결정에서부터 공단조성 및 사회간접자본 건설,전문인력 공급 등에 이르기까지 정부의 주도적 역할이 요구된다.독일의 경우 사회주의 실패가 지나친 경제개입에 기인했다는 일반적 인식과 함께 독일 통일 당시 경제침체를 겪고 있었던 서독경제의 문제가 정부역할 비대화에 기인했다는 공감대가 형성돼 있었기 때문에 동독의 경제재건에 있어서 정부개입은 최소화하고 시장에 주로 의존했다.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다른 동구국가도 마찬가지였다. 서독과 달리 한국은 비교적 성공적인 정부 주도의 경제개발 경험을 가지고 있다.또한 갑자기 통일이 이뤄질 경우 예상되는 북한의 경제상황과 경제제도,인프라,경제주체들의 시장경제에 대한 이해 등에 있어서 우리의 경우는 통일 당시의 동독에 비해 불리할 것으로 예상된다. 따라서 지나친 개입에 따른 정부실패는 피해야겠지만 시장경제의 정착을 촉진하고 북한경제를 재건하는데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 조선족간부의 어제·오늘(압록강 2천리:28)

    ◎문혁후 거의 복권… 조선족 자립에 앞장/부빈사업 보조금… 인삼재배 등 부업 장려/경제문화교류협 창립… 요령성­남한중기 교량역도/문혁때 간첩누명 옥고… 민족의식 새로이 한국과 같은 나라는 단일민족국가라서 국가와 민족이 공통의 의미를 갖지만 다민족 국가인 중국에서는 사정이 사뭇 다르다.그래서 요직을 차지한 간부들은 자신의 민족을 염두에 두지 않을수 없다.더구나 소수민족의 간부가 자기민족의 이익을 도외시하면 욕보따리를 등에 지니고 다니기 십상이다. ○의사차출 무료진료 요령성 관전현 전 부현장 김창영(67) 선생은 민족문제를 염두에 둔 좌우명까지 가지고 있다.그는 본래 평안북도 초산태생으로 교원을 지내다가 현 공청단위원회 서기로 있을 무렵 문화대혁명을 맞았다.조선간첩의 누명을 쓰고 억울한 옥살이를 하면서 터득한 것이 민족문제였다.누명을 벗고 나와 지난 70년대말 현 부현장이 된 그는 조선족을 위해 많은 일을 해냈다. 『관전현은 산골이라 지금도 그리 좋은 편이 아니디요.그러니 70년대와 80년대는 오죽했겠습네까.1982년도인가 기래요.영전진 비구촌에 갔더니 조선족 10여호가 사는데 차마 눈뜨고 볼 수가 없었디요.목불인견이란 말이 실감납데다.집이란 거이 비막이 바람걸망도 안되고 옷은 조각보 저리가랄 정도로 남루했디요.병이 나도 약이 있나….물 한모금 제대로 마실 우물 조차 변변하지 않더란 말입네다.소 여물 썰 작두가 없어서 식칼을 썼으니 할말이 없디요』 그는 농촌을 돌아보고 와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는 부빈사업을 직접 틀어쥐었다.현정부 산하의 각 부서와 향과 진간부들에게 지시하여 가난한 집 몇가구씩을 떠맡겼다.그리고 자신은 비구촌을 손수 챙겼다.비구촌을 책임진 그는 위생국장을 불러 의사를 차출,무료진료는 물론 수리국에서 돈을 대어 상수도를 놓았다.은행 대부금을 끌어 농사 이외의 부업을 장려하는 다종경영을 부추기기도 했다. 진강향 녹강촌에도 조선족 10여가구가 살았는데,찢어지게 가난한 것은 매 한가지였다.털면 먼지밖에 나올 것이 없는 가난 뿐이었다.김창영선생은 당시 부현장 직책을 빌려 1만5천원의 보조금을 내려보냈다.그돈으로 인삼을 재배하고 그물을 사 민물고기를 잡았다.마을 강에서 서식하는 이른바 해방고기라는 지조공어를 일본에 전문으로 수출하기 시작했다.비옥한 땅과 수자원을 활용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문화대혁명은 많은 사람으로 하여금 새로운 인생을 준비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사람들은 온갖 고초를 겪으면서 그 격동의 시기가 지나면 어떤 삶을 살아야 할 것인가를 나름대로 구상했다.단동시 통전부에 있다가 1986년 퇴직한 김인형(69) 선생도 그런 사람이다.한때는 잘나가는 당원으로 승승장구하는 촉망되는 인물이었으나 문화대혁명에 된서리를 맞고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단동시에 예배당 건립 그는 경상북도 의성 태생으로 1930년 길림성 반석현으로 이주해온 이후 혁명에 참가했다.1950년에는 지원군에 들어가 요동성 재정청 군비관 주임과 원을 맡았고,이후에는 안동지구 당위원회 감장위원 겸 농업감찰과 과장으로 일했다.이 때에 문화대혁명을 만나 졸지에 조선간첩의 누명을 쓰고 꼬박 10개월간 감옥에 갇혔다 나와서는 오늘의 향에 해당하는 양목공사로 쫓겨가 2년간 노동개조를 당했다. 『문화혁명이 끝나서 통전부 부부장을 맡고 보니 오십고개를 넘었더란 말입네다.팔팔한 나이 덧없이 까먹고 일할 시절이라야 칠팔년밖에 안남았습데다.기래서리 지나간 세월보다 곱배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디요.문화혁명이 끝나고 나서 조선족을 위해 큰 일을 세가지 했다고 자부합네다.그거이 보람이라면 보람이디요』 그가 문화혁명 이후 단동시 통전부에 자리를 잡고 처음 한 일은 조선족의 우파 낙인을 벗겨주는 것이었다.그래서 무장부 부부장 직책 이외에 단동시 당위원회 우파평반사무실 주임 자리 하나를 더 맡았다.우파평반이란 우파의 누명을 벗긴다는 뜻인데,그는 우파로 몰려 농촌으로 쫓겨간 사람들을 다시 도시로 불러들였다. 그가 문화대혁명 이전의 제자리로 돌려놓은 사람들은 꽤 많다.조선족학교의 출중한 교원이었던 이철과 오학중,사정부 민족과에 있던 이화의와 단동시 청년단위원회 소년부장 홍두표가 그들이다.이화의의 경우 민족사업을 했다는 이유로 민족분열주의자로 몰려 옥살이와 노동개조를 당했다.허무한 정치투쟁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던 이들은 다시 단동시로 돌아와 일정한 보상도 받고 옛날의 일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단동시에 예배당을 세우는 데도 공헌했다.단동시로 이름이 바뀌기 이전 단동시내에는 두곳에 예배당이 있었다.역전과 제2중학교 옆에 있던 두 예배당은 문화대혁명 때 건물을 빼앗기고 교인들도 강제 해산되었다.그가 문화대혁명 이후 몸담았던 통전부라는 부서는 통일전선사업부의 준말로 종교및 기타 단체를 관장했기 때문에 이들 예배당을 세워주었다.상급 정부에 건의하여 64만원의 자금을 타내어 예배당을 재건했던 것이다. ○한족에도 우리말 보급 문화대혁명 뒤에 단동시에서 사라진 조선족 고중의 문을 다시 열게 한 사람도 김인형선생이다.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고중이 단동시에 있었으나 문화혁명 때 관전현으로 내몰렸다.이에 따라 단동시와 다른 현에서는 중학교까지는 지방 조선족학교에 보내고 교육의 질이 낮은 산골 관전현 조선족 고중에 아이들을 보내지 않았다.그래서 조선족 아이들이 한족 고중에들어갔다. 그는 관전현으로 옮긴 조선족 고중을 다시 단동으로 유치하기로 결심했다.결국 시 당무위원회 재가를 받아 지난 1982년 국가로부터 60만원의 자금을 받았다.그리고 압록강 기슭에 3층짜리 교사를 지었다.또 각지에서 실력있는 교원들을 초빙하고 교원들의 주택과 가족들의 일자리도 마련해주었다. 중국의 조선족 제1대 간부들은 비록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물러났다 하더라도 민족을 위해 일하는 이들은 많다.요령성 민족사무위원회 정법처 처장 자리에 있을 때 요령성 조선신문 복간과 조선민족과학기술보급회 창립에 공헌한 우철희(65) 선생은 지금 조선족경제문화교류협회 상근 부이사장겸 사무국장을 맡고 있다.이 협회는 요령성내 1백40개 시와 3천여개 기업과 연계를 맺고 한국의 중소기업과 다리를 놓아주었다. 그리고 민간차원에서 발해대학,조선족실험직업학교,심양세종조선어학교 등을 꾸려왔다.심양세종조선어학교에서는 조선어를 모르는 청년과 학생들,외사와 무역부문에서 일하는 한족에게 우리 말과 글을 가르치고 있다.이미 초급반과 고급반을 졸업한 사람이 5백여명에 이른다는 것이다.
  • 극동의 관문 하바로프스크(시베리아 대탐방:68)

    ◎군수산업 민수전환 붐… 시장경제 “몸살”/수송비 등 부담에 합작회사 무역 치중/물가고속 선업 늘어 구소련 체제에 “향수”/평균 월급 110만루블… 게란 10개 5천루블 하바로프스크시는 인구 62만명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이어 극동 제2의 도시다.극동의 관문으로 항공·철도 등 교통요충지이자 극동의 산업중심지다. 그러나 러시아가 시장경제체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겪고 있는 물가앙등과 실업률급증 및 저임금에 관한 한 하바로프스크 주민도 예외는 아니다.오히려 더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 하바로프스크주 경제위원회의 발레리 쇼로코프 부위원장은 『하바로프스크주 기계공업은 기계 및 부품의 70∼80%를 유럽쪽 러시아에서 실어오는데 거리가 멀어 수송비부담이 큰데다가 이곳에 몰려 있는 수많은 군수업체가 민수로 전환하는 과정이 결코 쉽지 않고 실업자가 늘고 있다』고 말한다.예를 들면 석탄값에 비해 수송비가 두배다.공장은 많지만 경쟁력은 떨어지는 실정이다. 92∼93년에는 합작기업이 1백개이상 생겨나 잘 나가는 듯했으나 94년초 관세가 대폭 오른 뒤 외국인투자도 떨어졌단다.합작회사중 다수는 제조는 안중에도 없고 무역에만 치중한다는 것이다. ○항공·철도 교통 요충지 쇼로코프 부위원장은 『군수업체에서 95년부터 50가지 생필품을 만들기 시작했고 2005년까지 경제구조개선계획을 세워놓았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고 불투명한 장래를 걱정한다.수송비를 낮추는 방식으로 극동의 자원을 활용해 경제구조를 조정하려 하지만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극동의 정유소 두곳은 모두 하바로프스크주에 있다.61년 역사의 하바로프스크정유소는 그동안 직원을 많이 줄였지만 아직도 1천3백명에 이른다.서시베리아 튜멘에서 사오는 원유는 t당 90달러(약 7만원)에 수송비 45달러를 더하면 가공이전상태에서 국제가격보다 높다.수출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상태다. 빅토르 레메카 부사장은 『주문이 줄어들어 운영하기가 어렵고 대책을 모색중이지만 사실 대책이 없다』면서 『중앙정부에서 해결해야 하는데 정치에 밀려 경제는 뒷전』이라고 불만을 토로한다.하바로프스크시내에서 유통되는기름중 이 공장에서 대는 것은 45%에 불과하다.나머지는 앙가라스크 등지에서 직접 가공해오거나 수입된 것이다.생산량이 얼마나 줄었느냐는 질문에 『업무상 비밀』이라며 입을 다문다. 정유소 현장을 안내한 1급기사 타마라 셰골례바(여)는 『95년 생산량이 4년전인 91년에 비해 절반으로 줄었다』고 귀띔한다.23년째 이 공장에서 일해왔고 월급은 1백20만루블(약 20만원)이란다.콤소몰스크나 아무레의 정유소도 사정은 비슷하다. 하바로프스크 식료품시장.실내에서는 과일·야채·육류·치즈 등 주로 식료품을 팔고,야외에서는 철물점·잡화상·양말 몇켤레 놓고 파는 상인초년병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상인만 1천여명이다.장보러 나온 시민으로 북적댄다.특히 주말이면 인산인해를 이룬다. ㎏당 감자·양배추 1천루블(약 1백70원),당근 3천루블,오렌지 1만루블,포도 1만1천루블,계란 10개에 5천루블 등이다.러시아인의 월평균 급여가 1백10만루블(약 19만원)인 점을 감안하면 싼 편이 아니다.엔지니어로서 출장가기 전에 늘 시장에 나와 물건을 대량 사간다는올레그 보그단씨(40)는 『92년 가격자유화 이후 물가가 너무 자주,많이 올라 시장보기가 겁난다』고 말한다. ○수송비가 석탄값 2배 시장 실내 야채코너에서 김치·당근 등 야채를 조리해 파는 김춘권씨(여·58)는 월수입에 대해 『그냥 조금 번다』면서 『이제는 열심히 일하는 만큼 잘 살 수 있다』고 말한다.8세때인 48년 함흥에서 하바로프스크로 이주해와 남편(65)및 아들가족과 함께 사는데 크게 여유는 없지만 어려움도 없다고 했다.한인들은 근면성이 높아 평균적으로 러시아인에 비해 못사는 사람이 적다는 말도 했다. 닭고기코너에서 일하는 라리사 콘트라체바양(21)은 ㎏당 1만1천루블씩에 팔고 총판매액의 1.5%를 수당으로 받는다.월평균 20만∼30만루블(약 4만3천원)선이다.『사회주의시절에는 이러지 않았다는데 지금은 먹고 살기가 힘들다』고 말한다. 야외에서 철물을 파는 미하일 시르만씨(61)는 캄차카의 선박수리공장에서 일하다 몇년전 퇴직했다.장사로 월평균 1백50만루블정도 벌고 연금 34만루블을 합하면 넉넉치는 못해도 그런대로 살 만하단다.그는 『전에는 하루 8시간만 일하면 됐지만 이제는 돈을 벌려면 더 일해야 한다』면서 『당장은 어렵지만 이 시기를 넘겨야 시장경제로 넘어갈 수 있다』고 낙관론을 폈다. 하바로프스크 인투리스트호텔 옥상 기관실에 근무하는 보리스 파우토프씨(54)는 24시간 철야근무하고 이틀씩 쉬는데 월 50만루블을 받아 방3개짜리 집세로 22만루블씩 내고 나면 먹고 살기가 빠듯해 주말농장에서 야채 등을 기른다면서 페레스트로이카 이전 시절이 그립다고 했다. 하바로프스크주 청사앞 중앙광장에서 한장에 8천루블씩 받고 사진을 찍어주는 40대남자는 회사에서 해고돼 작년가을부터 이 일을 하는데 월평균수입이 80만루블에 불과해 밑천이라도 있으면 당장이라도 그만두고 싶단다.이름은 밝히면 안좋을 것같다고 했다. ○북한,벌목사업소 진출 체제변화에 대해 이같이 찬반양론이 엇갈리기는 하지만 돌이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현지신문에는 컴퓨터전문가·법률가·은행가 등을 월급 1천3백50만루블(약 2백30만원)에 모신다는 구인광고가 게재된다.서민 생활수준과는 대조를 이룬다. 시장부근 상점진열대에 놓인 카메라렌즈 필터의 가격은 3천루블,그림엽서는 20장에 5백루블(약 85원)이다.컵라면 4천루블,이태리타월 1만루블과 어울리지 않는다.계획경제시절의 관성 때문에 공급은 쉽게 줄어들지 않는 반면 수요는 급속히 줄어들기 때문에 제값을 못받아도 계속 만들어낸다. 하바로프스크 동남쪽 아무르강가에 북한 벌목사업소가 있다는 현지안내인의 말을 듣고 따라 나섰다.최근 벌목공의 남한귀순이 늘어나면서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니 섣불리 접촉할 생각은 포기하는 게 좋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붉은 벽돌로 된 담장으로 둘러싸인 벌목사업소 겸 벌목공 숙소단지였다.「우리식대로 살아가자」는 현수막도 걸려 있었다.벌목공 20여명이 작업을 나가기 위해 사업소 앞에서 분주히 움직이고 있었다.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고 싶었으나 안내인은 괜히 봉변당하지 말라며 끝내 말렸다.하는 수 없이 차에서 내리지 않은 채 빙빙 돌며 사진만 몇장 찍다가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이역만리 극동에서마저 분단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끼는 순간이었다.〈하바로프스크=김주혁·유재임 특파원〉
  • 통일한국의 인구대책/이재근 연구위원(남풍북풍)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남으로 이주하는 북한주민이 최소한 2백만명에 달할 것이며 이에 따른 각종 사회문제가 야기될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한국개발연구원).한 나라의 인구는 영토의 넓이와 함께 국력의 기초가 된다.무조건 많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적어도 강대국에의 진입을 위한 비교우위적인 규모는 유지할 필요가 있다.인구는 또한 국가산업활동의 기본이 된다.인구역학이론에 따르면 한나라가 강대국이 되기 위해서는 적어도 7천만 이상의 인구를 가져야 한다.그렇다면 현재 한국의 인구로는 아무래도 선진국이 될 수 없다는 얘기가 된다. 통일이 되었을 때 우리나라 인구는 얼마나 될까.현재 남한의 인구는 1992년의 연앙인구(매년 7월1일을 기준으로 한 인구)기준 4천3백66만명,북한은 2천2백33만명으로 잡힌다.북한의 통계는 발표되지 않아 추정치이지만 땅덩어리는 남한보다 크면서 인구는 남한의 절반수준이다.전쟁으로 인한 살상이 없이 현재인구로 통일된다고 할 때 「통일한국」의 인구는 약 6천6백만명이 될 것이다.계속 통일을 염두에 두고 계산한다면 1996년에 6천6백20만명,2000년에 7천1백53만명,2010년에 8천만명이 된다.1억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선진국 진입을 위한 7천만명 인구는 넘어서게 된다. 통일한국의 이 인구는 중국 인도 미국 브라질 인도네시아 일본 파키스탄등에 이어 세계적으로 12위 정도의 인구대국이다.또 통일한국의 경우 인구의 변화도 변화지만 인구밀도 측면에는 더 큰 변화가 일어난다.땅은 넓고 인구가 적은 북한과 합치니 현재 전세계 최고수준인 남한의 인구밀도에 그나마 숨통이 트이게 된다. 그래서 8천만 인구가 골고루 분산되어 살기만 한다면 통일한국은 지금보다는 조금 쾌적한 환경이 될 것이다.요즘 추세에 비추어 언젠가 북한주민이 대거 밀려 올 것에 대비한다는 측면에서도 남북한 인구의 이주문제를 중심으로한 「통일한국」의 인구대책 청사진이 필요하다.
  • 통일땐 북 2백만 남 이주/KDI­독 경제연 세미나

    남북한이 통일될 경우 남한으로 이주하는 북한주민은 최소한 2백만명에 달하고 실업 등 각종 사회문제가 야기되지만 경제 전체로 보면 남한의 경제력을 확대시키는 효과를 거둘 것이라는 전망이 나왔다. 한국개발연구원(KDI) 박진부 연구위원은 14일 KDI와 독일경제연구소가 KDI 대회의실에서 공동개최한 국제학술회의에서 「통일이후 이주의 경제적 파급효과」라는 주제발표를 통해 이같이 주장했다. 박부연구위원은 독일통일의 경우 이주민이 균형을 이루는 단계가 될 때까지 동독주민의 약 8%가 서독으로 이주한 것으로 나타났고 이 비율을 북한에 적용하면 약 2백만명이 남쪽으로 내려올 것으로 예상되나 남북한 경제력격차가 동·서독에 비해 크고 남북한간 출퇴근이 쉽지 않다는 점을 고려하면 2백만명은 최소한이라고 말했다. 박위원은 남북한 경제통합으로 인해 북한에서 대량이주해오는 주민은 대부분 미숙련노동자로 예상되고 남한 노동시장은 미숙련노동자에 대한 수요가 많아 이들이 취업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으며,남한의 미숙련노동자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하나 숙련노동자나 교육수준이 높은 계층에게는 오히려 득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 시인 신경림(작가를 찾아:3)

    ◎“시는 약자를 위안하는 노래죠”/뜨내기 몰리는 광산촌서 자라 팔도민요 친숙/민요기행지역 흑룡강성까지 넓힐 생각/같은 일 되풀이 않게 문화계도 과거청산 해야 「돌아다니면서 내가 분명하게 깨달은 것 중의 하나는 사람들은 대체로 마음 편하게 살기를 좋아한다는 점이었다.편하게 대할 수 있는 사람을 좋아하고 편하게 만들어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점이었다」 지난 90년 민요기행시집 「길」후기에다 신경림 시인은 이렇게 적었다. 92년 나온 웅진출판의 신경림 문학앨범에는 인상적인 흑백사진 한장이 실려있다.고향마을을 찾은 신씨가 만면에 반가움의 웃음을 피워올린 채 길에서 마주친 촌로와 인사를 나누는 장면이다.신씨를 모르는 이라면 한손에 장바구니를 꿰어 든 오척단구의 이 사내가 사진의 배경을 이룬 추레한 시골마을의 터줏대감중 한사람이리라고 믿어의심치 않을 것이다. 남한강변 농투성이들의 고달픈 사연을 유장한 가락에 담아온 신씨는 민중의 정서에 가장 가까이 있는 민중시인의 하나로 상찬받아왔다.하지만 이같은 평가는 한장의사진 만큼도 신씨를 알려주지 않는다.주름살 고랑마다 애기보살같은 웃음이 가득 괸 순한 얼굴.사람들이 편하게 해주는 이를 좋아한다는 그의 글이 맞다면 사진속 신씨는 누구라도 곁으로 끌어들일 소탈함과 친근함으로 넘친다. 2월도 거의 이울무렵 신씨가 잘가는 인사동 찻집에서 따끈한 유자차 한잔을 놓고 그와 만났다.동장군의 늦기승으로 바깥바람은 맵싸했지만 신씨가 뿜어내는 친화감 때문에 대화의 자리는 차라리 후끈거렸다.신씨는 고서점을 둘러보러 한주에 두어번씩은 인사동에 나온다고 했다. ○소탈·친근감 넘쳐 『70년대까지만 해도 동대문,청계천 부근에 고서점이 참 많았죠.잘만 뒤지면 값비싼 책들을 휴지값에 구할수 있었어요.내가 하도 서점 돌아다니길 좋아하니까 60년대말 있던 출판사에선 아예 고서점에서 좋은 책 구해오는 일만 전문으로 맡겼지요.서점에서 몇번씩 마주쳐 친해진 이들도 있어요』 큰 노다지광을 낀 농촌마을에서 광산 한귀퉁이를 불하받아 사람을 부리던 아버지 밑에 자란 어린시절,책탐 많은 삼촌과 당숙들 덕에 집엔얼마든지 책이 있었다.이를 넘보며 신씨는 자연스레 문학과 친해졌다고 했다. 『국민학교 때 벌써 이광수며 이태준을 봤으니 조숙했지요.시에 빠진 것은 백석을 통해서구요.하지만 책이 아니더라도 우리 고장엔 항상 얘기며 노랫가락이 넘쳤어요.서울가려면 꼭 거쳐야할 길목이었던 데다 광산이 문을 열면 함경도부터 전라도 남단까지 각곳에서 뜨내기들이 일을 찾아 흘러왔거든요.장날 돼지 잡아놓고 둘러앉은 이들이 한가락씩만 뽑아도 팔도곳곳의 민요를 다 들어볼수 있었던 거지요』 이때 들었던 노래들은 오래도록 귓전에 남아 훗날 그를 민요기행길로 내몰기도 했다.「겨울밤」「파장」「목계장터」「어허 달구」 등 그의 많은 시들이 다 쓰러져가는 농촌 삶의 구접스런 모습을 민요조에 결합시켜 실감을 더한 작품들.「새재」「남한강」「쇠무지벌」 등 장시를 끝까지 끌어가는 힘도 모두 민요가락에서 나왔다. 『먼젓번엔 중국갈 계획까지 세웠다가 딴일로 미뤘죠.흑룡강성 어딘가에 경상도 영천 사람 몇백명이 이주,1백년전 우리 민요를 보존하며 살고 있는 마을이 있답디다.이런데를 찾아 국외로도 민요기행 지역을 넓혀보려 해요』 이처럼 떠돌이로 거침없이 흘러온 그가 지난해엔 「한국문학포럼」에 초대돼 프랑스에 다녀올 기회를 가졌다.이 행사에 대해 시인은 퍽 인상깊더라고 말한다. 『파업이 한창이라 구경은 잘 못 다녔지만 그들이 문학을 사랑하는 이들이라든 말은 빈말이 아닙디다.그 교통지옥의 와중에도 어떻게들 알았는지 행사장마다 독자들이 가득 찼지요.또한 아무리 자그만 서점에 가도 장서가 풍부하고 사람들로 붐비는데 놀랐어요.갈리마르에서 나온 내 불역 시선집 「쓰러진 자의 꿈」도 몇군데선가 꽂혀 있는걸 봤지요.올해가 「문학의 해」라는데 우리도 외국작가를 불러 이같은 행사를 추진해보면 유익할것 같아요』 「문학의 해」를 깎아내리려는 것은 아니지만 성과를 거두려면 문화계에서도 5·6공 청산이 앞서야 한다는 신씨.「문학도 정화돼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는 자신의 시에서처럼 나지막하지만 그래서 더 흔들림이 없다. ○프랑스 여행 인상적 그러나 신씨가 말하는 청산은 근본적으로는 문학외적인 것에 대해서다. 『내 얘기는 구정권에 협력한 문인들을 죄 쓸어버리자는게 아닙니다.좋은 작품은 작가의 행적과는 별도로 평가돼야겠지요.하지만 역사적 과오가 있다면 이는 분명히 알려지고 경계돼야 후일 같은 행적이 되풀이되는 것을 막을수 있어요』 민중문학이 휩쓸던 지난 80년대 신씨의 시를 너무 복고적이라거나 과학적 무장이 덜 됐다고 비판하던 후배들도 있었다.그러나 90년대 들어 그 과격한 문학의 구호들이 한줌 남김없이 사그라졌을 때 밑바닥살이들의 고달픈 심사를 달래주던 신씨의 위안의 노래는 한결같이 읽히고 사랑받았다. 『민중문학이 일도 많이 했지만 말도 안되는 관념론에다 제대로 안된 글도 많이 썼지요.5월만 노래하면 그대로 시가 되는 때가 있었으니까요.일종의 「거품민중의식」이었다고나 할까.하지만 서슬퍼렇던 그때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이들은 얼마나 절박했으면 그랬겠습니까』 ○소설·동화도 쓸 계획 지난 93년 여섯번째 시집 「쓰러진 자의 꿈」을 낸 그는 올가을쯤 일곱번째 시집을 묶고 앞으로 소설과 동화도 한편씩 써야겠다는 계획을 세워뒀다.최근엔 「다산 문학선」을 읽고 대학자로 재미없는 사람인줄만 알았던 다산에게서 타고난 시인기질과 풍류를 발견,흠뻑 매료됐다. 『시가 모든 일을 다할수야 없겠지요그러나 삶이 팍팍하고 가파를 때 시와 노래가 없으면 무슨수로 버티겠어요.아무튼 나는 시라는 것이 약자,뒤처진 자를 위한 위안의 노래여야 한다고 믿어요』 ▷약력◁ ▲1935년 충북 충주군(현 중원군)노은면 연안리에서 태어남 ▲노은국민학교를 거쳐 충주사범학교에 입학했으나 풍금을 못쳐 졸업을 못함.충주고 졸업,동국대 영문과 입학(55년) ▲56년 「문학예술」지에 「낮달」「갈대」「석상」 등 시가 추천돼 등단.이후 농사·막노동·장사·광산일 등으로 떠돌며 10여년간 절필 ▲대학졸업(67년) ▲시집 「농무」(73년)「새재」(79년)「달넘세」(85년)「남한강」(87년)「가난한 사랑노래」(88년)「길」(90년)「쓰러진 자의 꿈」(93년) ▲평론집 「문학과 민중」(77년)「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83년)「우리 시의이해」(86년) 등,산문집 「민요기행」1(85년)2(89년) 등 ▲만해문학상(74년)이산문학상(9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장 및 민족예술인 총연합회 의장 등 지냄 ▲현 민족문학작가회의 고문
  • 북 정치범 20만명 수용/통일원 「인권백서」

    ◎동구붕괴뒤 통제 강화… 배로 늘어/입북자 4백42명 억류 현재 북한내의 각종 정치범수용소에 수용되어 있는 수용인원은 20만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 지난 55년이후 강제납북돼 북한에 억류중인 남한출신 인사도 4백42명이나 되는 것으로 조사됐다. 통일원 산하 민족통일연구원(원장 이병용)의 「북한인권자료정보센터」가 25일 발표한 「북한인권백서」에 따르면 북한내에서 82년 무렵까지 8개 정치범수용소에서 약 10만명이 넘는 인원이 종신강제노역에 시달려왔으나 80년대말 동구권 붕괴이후 내부통제가 강화되면서 수용소와 수용인원이 이처럼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혀졌다. 이 백서는 북한주민 사이에 「특별독재대상구역」 「이주구역」 「종파굴」등으로 불리는 이들 정치범수용소에서 비인간적인 가혹한 대접을 받다가 죽어나가는 인원이 1개 수용소당 매년 수십명에서 수백명에 이른다는 첩보도 수록하고 있다. 수용소의 주요수용대상은 반당·반혁명·종파분자 등 김일성·김정일체제 위해분자를 비롯해 당정책위반자·자유주의성향자·불순북송교포 등이며 특히 최근에는 해외탈출기도자와 해외실정 유포자도 수용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이 백서에 따르면 지난 55년이후 지금까지 강제납북된 것으로 확인된 남한인은 모두 3천7백38명으로 이중 3천2백96명만이 송환되고 아직까지 4백42명이 북한에 억류돼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억류자중에는 동진호 선원 12명을 비롯,어부가 4백7명으로 가장 많으며 해군 I­2정 20명,대한항공 피랍억류자 12명과 지난 78년 노르웨이에서 납치된 고상문씨와 87년 오스트리아에서 납북된 이재환씨,지난해 중국에서 납치된 안승운목사 등이 포함돼 있다. 백서는 이밖에 러시아 북한벌목공의 인권실태에 관해 『경제적 궁핍과 인권침해를 피하기 위해 95년말까지 수백명이 우리 공관에 귀순의사를 타진해 왔다』고 전하고 『한때 1만5천명에 이르던 북한벌목공이 현재는 5천명수준으로 대폭 줄었다』고 덧붙였다.
  • 독일의 가정교육(G7으로 가는 길:12)

    ◎학과성적보다 자녀 재능발굴 더 관심/지나친 간섭 피하고 생각하며 놀도록 유도/사소한 물건도 왜·어떻게 만들었는지 설명 독일에서도 우리나라처럼 아이들이 무조건 부모의 마음에 들게 공부를 잘해야 한다는 집안이 많다.하지만 전통적인 가정에서는 학과공부 보다는 아이들의 재능을 최대한 키워주려고 노력한다.학과 위주의 숙제도 없다.학교에서 돌아오면 아이들이 마음대로 놀면서 생각하도록 내버려 둔다. 독일의 전형적인 중산층 가정으로 프랑크푸르트 인근의 소도시 뫼펠덴 발도르프시에 살고 있는 호른 클라우스씨(37·전기기술공) 부부가 9살(빌헬름 아르놀 초등학교 3학년),6살(제1 시립유치원)된 두 아들에 대한 교육방식은 남다른 면이 엿보인다. ○실내장식 세심한 배려 호른 부인(40)은 『출장이 많은 남편의 몫까지 대신해 아이들 가정교육을 도맡다시피 한다』며 『이 때문에 균형을 잃을 지도 모를 가정교육에 남달리 신경을 쓰고 있다』고 말문을 열었다. 호른씨 집안에 들어서면 우선 실내장식이 이채롭다.먼 조상들이 만든 투박한 검은쟁반과 낡은 컵,대형가위 등이 거실 이곳 저곳에 진열돼 있다.이런 장식에 깊은 뜻이 있었음은 부인의 설명을 듣고서야 알았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사소한 물건이라도 「왜」「어떻게」 만들었는 지를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고 말했다.무심코 지나치면 그저 「별나다」라고 느낄 정도일 뿐이다.그러나 호른 부인은 이같은 도구를 눈에 띄는 곳에 두어 필요한 물건을 만들기 위해 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창의적으로 생각하는 훈련을 쌓고 또 그런 생각을 실용화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를 하고 있다. 그녀는 『때로는 「된다」「안된다」를 분명히 가려 억압도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의 의견과 생각을 존중하고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생활하도록 도와준다』고 말했다. 호른 부인은 이 때문에 부모로서 엄격하지 못하고 너무 무른 것이 아니냐고 우려를 하기도 한다.그러나 부모가 아이들에게 깊이 간섭을 하면 자유로운 생각을 못하게 할 수도 있어 가능한 아이들의 입장에 맡기는 편이라고 말했다. 호른씨의 가정교육에는 지극히 보수적이고 전통적인 면이엿보인다.갖가지 쇼나 만화 프로그램이 나오는 위성방송에는 아예 가입도 하지 않았다.아이들에게 모방심리만 키우고 정서적으로 좋지 않다는 생각에서다. 장난감 하나를 골라도 「파워레인저」(장난감 총)처럼 비교육적이거나 창의적 사고력을 키우는 것이 아니면 절대로 사 주는 일이 없다. ○정서적 안정 중요시 호른씨는 기술학교에서 전자기술을 익히고 지멘스사를 거쳐 현재 헤벤슈트라이트사에서 전기설비공으로 일하고 있다.경력 20년째인 그는 업무상 해외출장이 잦아 취재진이 방문했을 때는 페루에 출장 중이었다. 호른 부인은 실업학교인 레알슐레에서 3년간 직업교육을 받고 은행원 자격을 따 결혼전 은행에서 근무했다. 호른 부인의 조상들은 3백년 전 이탈리아 북부 발덴저 지역에서 종교적인 이유로 이주해 온 이후로 줄곧 이곳에서만 살아왔다. 호른 부인은 자신의 조상에 대한 역사가 이곳 초등학교의 교과서로 사용될 만큼 유명하다고 자랑스럽게 소개했다.그녀는 조상들의 역사를 담은 책은 물론 그들을 소재로 만든 우편엽서 등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아이들과 남편도 부인의 이런 가계에 대해 자부심이 대단하다. 호른 부인은 독일의 전통적 주부로서의 위치를 고수하는 편이다.은행원 자격이 있어 맞벌이를 할 수도 있지만 아이들 교육을 위해 직장을 포기했다.경제적 여건이 허락된다면 굳이 맞벌이 보다는 어머니가 직접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서다.부모 가운데 한 사람이 오랜시간 아이들과 함께 있어야 정신적으로 균형이 잡히고 그런 정서적 안정속에서 마음껏 상상하고 창의력을 기르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입장이다. 호른씨 부부는 아이들과 함께 놀이를 즐겨도 교육적인 면을 먼저 생각한다.「메모리 게임」,「사회화 게임」,「미카도」(이쑤시게 모양의 나무를 쏟아 옆의 것을 건드리지 않고 다른 곳으로 옮기는 놀이)는 이들 가족이 자주 하는 놀이.「메모리 게임」을 통해서는 기억력과 사고력을 길러 준다.「사회화 게임」에서는 이기고 지는 법과 질서를 익히고 「미카도」로는 손을 떨지 않는 침착함을 가르친다고 한다. 아이들이 흙장난이나 레고놀이를 할 때도 『눈에 보이는 것 말고 상상력을 발휘해 물건을 만들어 보라』고 조언을 꼭 해준다. 호른 부인은 아이들에게 자립심을 길러주는 데도 무척 신경을 쓴다.다소 엉뚱한 언동을 해도 자신이 한 것을 충분히 설명할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 피해가 없다면 생각의 자유를 깨지 않기 위해 긍정적으로 받아 주고 칭찬도 아끼지 않는다. ○자녀 선택에 맡겨야 가정교육에서 빈틈이 없어 보이는 호른 부인이지만 아직은 아이들에게 제대로 교육을 시키고 있는 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털어 놓는다.그녀는 『가정교육이란 살다보면 그저 되는 줄 알았다』며 『상황에 따라 아이들을 위해 최대한 배려를 하지만 일관성있는 가정교육 만큼 어려운 것은 없다』고 말했다. 대한항공의 허석도 프랑크푸르트 지사장은 『유교적 성격이 짙은 우리나라 가정교육도 최근에는 창의성 개발을 위해 부모들이 신경을 쓰는 편이나 독일처럼 아이들의 자율이 아닌 부모에 의한 타율이 다른 점』이라며 『가정에서의 창의력 교육이 제대로 되려면 우리도 학교에서 돌아온 아이들을 과외학원 등에보낼 것이 아니라 혼자 생각하고 마음껏 놀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전문가 인터뷰/프랑크푸르트 국제학교 쿠에네 자우어 교감/“아낌없는 칭찬은 자신감 심어줘요” 독일은 괴테 및 베토벤·바하와 같은 세기적인 대문호와 음악가를 비롯해 많은 노벨상 수상자등 각 분야에서 천재적이고 창의적인 인물을 수 없이 배출했다.이들이 있기까지는 개인적으로 천재성을 타고난 측면도 있지만 전통적 가정교육을 통해 창의성과 재능을 조기에 발견하고 키워준 점이 중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독일 중부 오버우르젤시에 있는 프랑크푸르트 국제학교의 쿠에네 자우어 교감을 만나 독일의 교육을 들어본다. ­독일 가정교육의 특색은. ▲독일인은 문화유산에 상당한 애착과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가정교육에 특별한 전형은 없지만 부모가 자녀들을 가르치면서 훌륭한 문화유산이나 인물을 표본으로 삼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선인들의 창조적 측면을 모방하거나 틀에 박힌 교육 보다는 자녀 개인의 인성을 중시하고 감성을 헤아려 교육적 동기를주는 것이 더욱 중요합니다. ­창의력을 키우려면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고 도와주어야 합니까. ▲최근 교육환경이 크게 바뀌고 있습니다.핵가족화와 맞벌이 가정의 증가,급격한 산업화가 그것입니다. 요즘에는 컴퓨터·CD롬 등 전자 장치가 부모 대신 아이를 돌보는 역할을 합니다.초등학교에서는 한 담임선생님이 4년간 같은 학생을 지도합니다.학생들을 폭넓게 지켜볼 수는 있지만 창의력 교육을 기대하기는 어렵죠.그러나 가정에는 부모의 무조건적인 사랑이 있습니다.전인교육을 하기에 그 보다 더 좋은 조건은 없습니다.칭찬을 아끼지 않고 자신감을 갖게 해야만 적성개발및 인성교육이 제대로 됩니다.아이들은 칭찬을 받고 남한테 자랑거리가 많으면 그만큼 원동력이 생기고 창의력도 더불어 길러집니다. ­아이들 스스로는 평소 어떤 훈련을 통해 사고력을 길러야 합니까. ▲한국도 마찬가지 겠습니다만 자원이 없는 나라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원입니다.아이들이 어려서부터 창의적으로 훈련받고 성장해야만 훌륭한 자원이 될 수 있습니다.가장 쉬운가정에서의 학습방법은 블록쌓기나 레고놀이 등을 통해 상상력을 키워가는 것입니다.그룹여행과 단체생활을 통해 팀정신을 기르고 혼자서 사색하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도 중요합니다. ­창의성 교육을 어떻게 실시하고 있습니까. ▲책만들기·음악공연 등 다각적으로 실시합니다.학습시에는 학생들에게 똑 같은 발달을 요구하지 않습니다.발달이 빠르면 빠른대로,느리면 느린대로 받아들입니다.50개국에서 온 1천3백여명이 공부하고 있지만 모두 자기나라의 문화를 소중히 여기도록 교육합니다.아이들이 그림을 그리고 내가 글을 써 만든 독일어 문법책을 교재로 사용해 아이들의 관심과 창의력을 이끌어 내기도 했습니다. 자우어 교감은 캐나다 퀸즈대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지난 63년부터 교단에 섰다.교직생활 중 미국 인터내셔널 사범대에서 교육학 석사학위를 받았고 현재 보스턴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 해외동포 어디에 얼마나(서울신문 50돌 특집)

    ◎그들의 위상은 어떠한가/6대주 142국에 520만명 근면·성실로 기반 확고히/2년새 5.7% 증가… 중국에 최고 194만 거주/미 180만·일 69만·중앙아시아 46만명 생활/최근 취업·유학·투자이민 급증/망국·가난의 한 딛고 현지 빠른 적응/정·관·재·교육계서 활약 숱한 인재 배출/한민족 동질성 유지가 최대의 과제로 구한말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 이주로부터 시작된 한국이민사가 90여년에 이르면서 해외교민수가 5백만명을 넘어서고 있다.중국이나 일본에 비하면 그리 길지않은 역사이지만 한민족 특유의 근면성과 성실성으로 세계 곳곳에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어느 나라에 얼마나 살고 있으며 그들의 현재 위상은 어떤가를 알아본다. ▷교민현황◁ 94년12월31일을 기준으로 외무부가 파악하고 있는 우리의 해외교포는 모두 5백22만8천36명이다. 지역별로는 아시아에 2백72만,미주에 1백96만,유럽에 52만,중동에 9천2백,아프리카에 3천2백명이 분포하고 있다. 국가별로 볼 때는 중국에 1백93만명으로 가장 많다.이어 미국에 1백53만,일본에 71만,러시아를포함한 독립국가연합에 46만명이 거주중이다. 전세계 1백92개국 가운데 우리동포가 살고 있는 나라는 무려 1백42개국이나 된다.중국이나 미국·일본등처럼 역사적인 이유로 우리 민족이 옮겨간 경우도 있다.그러나 우리동포의 분포가 이처럼 넓어진 것은 최근 늘어난 선교이민과 태권도교관의 파견 때문이라는 것이 당국의 설명이다. 2년마다 해외교포의 현황을 파악하는 외무부가 92년12월31일자로 파악한 해외교포는 4백94만3천5백90명이다.해외교포는 지난 2년동안 5.7%가 증가한 것으로 나타난다. 해외교포가 증가한 것은 교포의 2세·3세·4세가 태어났고,해외경제활동의 증가로 우리 기업등의 파견원이 많이 진출하기 때문이다. 해외교포 가운데 95%인 4백70만명은 거주국의 국적을 갖고 있거나 거주국에서의 영주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나머지 5%는 상거래나 취업·유학등으로 체류중이다. ▷중국 교민◁ 중국에 한국인이 건너간 것은 매우 오래 전의 일이다.이미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부터 전쟁포로나 인질·공녀등의 형태로 한국인의 이주가 시작됐다.그러나 중국에 2백만의 교민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말엽,일본의 한반도 침략이 본격화하면서부터다.외무부에 따르면 을사조약이 체결된 이후 한국민의 중국이주가 급격히 증가,1907년에 7만1천명,1910년에 10만9천명,1916년에 20만명,1921년에 30만7천명이 조국을 떠난 것으로 기록돼 있다. ○해방이후 80만명 귀국 1945년 이전까지 약 2백16만명의 한국인이 만주지역에 거주했으며,해방과 더불어 80만명이 귀국하고 나머지가 잔류했다. 현재 우리교민은 중국내 55개 소수민족 가운데 12번째 규모다.전체의 약 97%인 1백87만명이 길림성,흑룡강성,요령성등 동북 3성에 집중 거주하고 있다.특히 길림성내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는 82만명이 밀집해 살고 있다. 중국 교민들은 해방후부터 냉전시대까지 남한과는 별다른 접촉을 가질 수가 없었다.따라서 정부도 이들에 대해 특별한 정책을 세울 수 없었다. 지난 88년부터 우리정부가 사회주의권 교민의 자유로운 모국 방문을 허용함으로써 중국동포와의 교류가 본격화됐다. ○동북 3성에 집단촌 그러나중국교민들의 모국 방문이 늘어나면서 새로운 사회문제가 되기도 했다.교민들이 경제수준이 월등한 모국에서 돈벌이를 하고자 대거 몰려들기 시작하면서 밀입국,불법취업,취업사기,절도·강도등의 사건이 잇따랐다. 정부는 이에 따라 중국교민들에 대한 사증발급 심사를 강화하고,이들이 고국으로 돌아오는 것보다는 현지에서 성장하도록 지원한다는 방침을 세웠다. 중국내에서 교민들은 한인이나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은 교육수준과 경제·생활수준을 유지하고 있다.또 중국 교민들은 스스로를 한국인 혹은 북한인이라고 생각하지 않고 조선족 중국인으로 생각한다. ▷미국 교민◁ 한미우호통상조약에 따라 1903년 한국인 1백21명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으로 떠나면서 미국 이민사가 시작됐다. 이후 1961년 해외이주법이 제정된 이래 지난해까지 모두 62만6천명이 미국으로 이주했다.이 기간 동안의 총 해외이주자 79만2천명 가운데 미국이민 비율이 79%를 차지하고 있다. 재미교민의 상당수는 한국내의 중산층,식자층 출신이며 자녀의 교육문제,경제적 이해관계,혹은 한국사회에서의 불만 때문에 미국에 건너간 사람들이다. ○구한말 하와이로 나가 이들은 다른 민족들에 비해 비교적 짧은 이민 역사에도 불구하고 미국사회 내에서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다.물론 언어장벽과 사고방식의 차이 때문에 아직 미국사회의 주류에 진출하는데는 한계를 보이지만,최근들어 의사·변호사등 전문직 진출자가 늘어나고 있다.캘리포니아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된 김창준씨가 대표적인 한국교민의 성공사례이다. 교민 1.5세와 2세 이후세대는 현지에서 교육,성장해 비교적 빠르게 현지에 동화되어 가고 있다. 또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되면서 교민 사회에 북한과의 교류에 대한 관심이 증대하고 있고,과거 음성적으로 활동해오던 친북인사의 활동도 표면화하고 있다고 외무부 당국자는 밝혔다. ▷일본 교민◁ 일본에 거주하는 교민들은 다른 지역의 교민들과는 근본적으로 성격이 다르다.태평양전쟁 발발후 일제가 전쟁수행을 위해 한반도 남부지방에서 강제적으로 징용해간 사람들이 대부분이다.강제 징용자의 숫자는 19 45년 당시 2백10만명에 달했으나,해방후인 46년 이후 65만명이 잔류하고 있다. 재일교민들은 오사카를 필두로 나고야·고베등지에 밀집해 거주하고 있으며,주로 상업 제조업 서비스업에 종사하고 있다. 일본교민들은 본국에서의 좌·우익 대립을 그대로 답습,민단과 조총련으로 나뉘어 대립하는 비극을 겪기도 했다.그러나 최근에는 남북간의 국력차이가 워낙 커져서,민단과 조총련이 특별히 경쟁하는 양상은 나타나지 않는다. 교민1세들은 우리국적에 대한 애착이 강하고 민족주의적인 성향으로,일본에 귀화하는 것에 대해 큰 거부감을 갖고 있다. 그러나 교민 2세이후부터는 모국과의 연대의식이 희박해지고 있으며,이에 따라 일본에 귀화하는 사람이 늘고있다.지난 50년 이래 일본에 귀화한 한국인은 모두 20만명 정도다.특히 교민 2,3세들은 일본인과의 결혼을 선호해 91년 결혼한 사람 가운데 82.5%가 일본인 배우자를 맞이했다. ▷독립국가연합지역 교민◁ 현재 옛 소련 지역내에는 러시아에 11만명,우즈베키스탄에 22만명,카자흐스탄에 10만명,우크라이나에 9만명등 모두 46만명의 교민이 거주하고 있다.이들은 대부분이 1937년 스탈린에 의해 연해주에서 강제이주된 우리 교민의 2,3세들이다. 각 지역으로 강제 이주된 뒤 이들은 자연적으로 그곳의 문화에 동화되었다.따라서 우리말과 문화적 전통을 많이 잃은 상태고,러시아 극동지역에 거주하는 교민들 말고는 우리말로 대화가 가능한 사람도 적다. 그러나 이들은 국제고려인단체연합회등 31개의 교민단체를 조직,모범적으로 혈연의식을 이어가고 있다.또 이를 바탕으로 각종 문화단체 활동,출판물 발간활동과 함께 대학교수,영농지도자를 다수 배출했다.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각 공화국은 우리교민의 근면성,높은 교육수준과 사회기여도를 평가하고 있다. ○사회기여도 평가 받아 이 지역에 대해서 정부는 물론 민간기업에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우리업체와 현지 교민들간의 고용과 취업지원이 이뤄지도록 노력하고 있다. 러시아의 경우 내각 안에 「민족문제 및 지역정책부」가 설치돼 소수민족과의 화합 및 육성지원 정책을 마련한다고 표방하고있으나 체첸 공화국 사태에서 보듯이 러시아의 범위를 이탈하는 행위는 용납하지 않는다.정부는 이러한 점을 감안,교민들에 대한 직접적인 지원보다는 민족의식과 민족적 일체감을 고양하기 위해 한글교육,전통문화 재생,학술·체육 교류를 중심으로 지원책을 마련해가고 있다. 사할린에 거주하는 4만명의 교민들 가운데 1세들을 본국으로 귀환하는 문제는 한·러·일간의 현안으로 협상이 계속되고 있다. ▷이주추이◁ 우리나라의 최근 해외이주자 추이를 보면,80년 3만3천3백명에서 83년에 2만3천3백명으로 하강세를 보이다,86년 3만7천80명으로 다시 늘었다.이후 다시 감소해 93년에는 1만4천4백명으로 매우 낮은 수치를 나타냈다. 그러나 사업과 취업이주는 지난 10여년동안 꾸준히 증가했다.이는 그동안의 연고초청 이주,즉 막연한 동기의 해외이주보다는 뚜렷한 목적을 가진 이주형태가 늘어나고 있음을 반영한다. 이민간 사람이 다시 돌아오는 역이민도 늘어나고 있다.80년 역이주자수는 1천49명으로 그해 이민자의 2.8%였다.86년에는 역이민자의 비율이 7%를 차지했다가 89년 25%로 급증했으며,91년 40%,92년 50%를 기록한 뒤 93년에는 60.65%를 차지,이민자의 반이상이 되돌아오는 현상을 보였다. 역이주자수가 늘어나는 이유는 우리국민의 소득수준이 향상돼 국내에서도 안정된 생활이 보장되고 있기 때문이라고 외무부는 설명하고 있다.같은 이유로 해외이주자수도 점차 감소하고 있다고 외무부는 밝혔다. 최근 국내외에서 해외교민들을 적극 활용하는 방안의 하나로 해외동포에 대한 이중국적을 허용하자는 의견이 제기되고 있다. 해외교민에게 이중국적을 부여, 국내 왕래를 자유롭게 하고 각종 할동 및 재산권 행사를 보장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견은 교민의 권익을 크게 신장할 수 있는 방안이기는 하지만 여러가지 문제점을 수반한다. 우선 교민들이 국적을 가진 두나라로부터 납세와 병역의 의무를 동시에 부여받게 되고, 범죄가 발생할 경우 자국민 불인도 원칙을 고수, 외교적 마찰이 발생할 가능성이 많다. 또 납세·병역 등 의무를 다하는 국민들과 비교할 때 권리행사와 의무이행의 형평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에 다른 국민들과 위화감이 조성될 우려가 크다.
  • 피납북자들의 비극(새로 쓰는 한국 현대사:42)

    ◎총 8만여명… 김규식·안재홍 등 각계 명사 다수/귀향길 막혀 고난의 세월… 대부분 비참한 최후 유엔군과 공산군이 한국전쟁을 마무리짓기 위해 협상을 벌이는 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던 무리가 있다.그들은 바로 납북인사들이다.전쟁의 와중에 북으로 끌려가 휴전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던 이들이야말로 영원한 에트랑제였다.그래서 더욱더 관심과 동정의 대상이 되고 있는 것이다. ○서울서만 2만여명 한국전쟁 기간중 북한군에 납치당한 사람들은 서울 2만7백38명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8만4천5백32명이나 됐다.이 납북자들은 대부분 북에서의 삶이 제대로 파악되지 않고 있다.남과 북으로부터 모두 소외된채 베일에 싸인 이들이 만난 비극적인 운명은 전쟁 발발 3일째인 1950년 6월28일로 거슬러 올라간다.한강철교 폭파로 미처 피란을 못했던 요인들이 북한 노동당 군사위원회 결정에 따라 우선 포섭대상에 들어갔다. 이 계획은 7월4일 북한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등이 참석한 연석회의에서 최종 결정됐다.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후 피란하지 못한서울과 점령지역의 주요 정치·종교·경제·문화인 등 각계 인사를 찾아내 포섭하려는 것이었다.군사위원회는 이 결정에 따라 남한의 저명인사를 친·반공의 정도에 따라 5개 부류로 분류했다. 북한은 7월4일부터 김응기 이주상 방학세 김창주 김춘삼 등 실무 집행자들로 하여금 이를 추진시켰다.이에따라 서울시 인민위원회(서울시청)와 성남호텔(서울 광교부근)에 납북 대상자 심사장이 설치됐다.국회의원과 정당·사회단체의 저명인사,임정요인에 대한 심사를 거쳐 이들을 북으로 연행해가기 시작했다.이들 중에는 김규식 조소앙 조완구 김붕준 류동열 최동오 윤기섭 오하영 원세훈 엄항섭 등 임정요인이 들어있었다.안재홍 박열 백관수 정인보 이광수 최규동 방응모 등 전현직 국회의원과 정당 사회단체,문단 인사들이 포함됐다.납북 인사들은 대부분 평양을 거쳐 만포로 들어갔다.도중에 정인보와 이광수,최규동,방응모,김붕준,류동열이 미공군의 폭격과 지병으로 숨졌다. 해방정국에서 미국이 장래의 한국 지도자로 꼽았던 김규식은 만포에서 16㎞ 정도가 떨어진 별오동이라는 마을에서 1950년 12월10일 세상을 떠났다.납북인사들과 당시 함께 생활했던 북한 조국통일민주전선 부국장 신경완의 증언에 따르면 김규식의 최후는 너무 비참했다.별오동에는 유엔군에게 쫓겨온 북한의 주요기관이 모두 있었는데,김규식은 지병인 해소와 노환으로 생명이 경각을 다투었다. 그러나 서울을 떠날 때 지니고 간 약이 모두 거덜났다.당시 상황으로 약을 구할 수 없어 해소에 좋다는 토끼똥까지 달여 먹였다는 것이다.주변의 강력한 요구로 별오동에서 8㎞를 더 들어간 군병원에 입원했으나 병세는 점점 더 악화되었다.홍명희를 만나 중국에라도 보내달라고 요청했지만 끝내 실현되지 못했다.그리고 결국 숨을 거두었다.그날 압록강변에는 많은 눈이 내렸다고 한다. 그의 장례식에는 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의 꽃다발이 개인 이름으로 도착했다.추도사를 맡은 조소앙은 날씨가 하도 추워 말을 이어나가지 못할 정도였다.김규식의 시신은 상여에도 오르지 못하고 군 트럭에 실려 장지에 갔다.땅이 얼어붙어 내려놓은 관을 땅에 제대로 묻지못하고 가장을 하다시피 장례절차를 마쳤다.김규식의 파란만장한 생애는 그렇게 한만국경에서 막을 내렸다. ○독자 휴전운동 불발 납북자들의 일관된 관심사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철저하게 정보가 차단됐던 납북자들은 전쟁이 끝나 남한으로 하루빨리 돌아가는 것을 학수고대하면서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1951년부터 시작된 휴전회담은 이들의 환향의지를 더욱 부채질한 것은 물론이다. 1951년 6월23일 소련의 말리크 유엔대사가 휴전과 관련한 토의를 제의한후 시작된 휴전회담은 납북인사들에게 초미의 관심사가 아닐 수 없었다.납북자 대표들은 휴전회담이 답보상태에 빠졌다는 소식을 전해듣고 독자적인 휴전운동에 나설 것을 결의한 적도 있다.북한측 연락장교들의 인솔로 안재홍 조소앙 김약수 원세훈 윤기섭은 51년 1월25일 판문점까지 오기도 했다.그러나 북한의 조종을 받은 이들은 유엔군측 연락장교 키니대령을 만나는 선에서 활동을 끝냈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됐지만 납북자들은 여전히 환향의 길이 막힌채 감금에 가까운 상태로 북에서의 나날을 보내야만 했다.휴전협정 체결 90일만인 19 53년 10월26일 판문점에서 정치회의 예비회담이 열렸으나 회의 초반부터 미국측과 북측이 회담방법 등 정치문제를 놓고 팽팽히 맞섰다.그러나 미·영·소·불 등 4개국이 1954년 4월부터 제네바에서 정치회의를 열어 한반도 문제를 토론하기로 결정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납북자들은 조소앙이 주창한 「중립화 통일론」을 제네바회의에 직접 전달할 수 있도록 주선해줄 것을 북한당국에 건의했다.북한은 납북자들의 의도가 자신들의 통치속셈에 일치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그럼에도 표면적으로 이를 거부하지는 못했다.54년 4월 중순 엄항섭과 권태양 등 납북자 대표는 제네바로 들어가기 위한 입국사증을 받기 위해 소련 외무성의 안내를 받아 모스크바로 떠났다.그러나 소련주재 북한대사는 결국 이들을 제네바 국제회의에 보내지 않았다.스위스 정부가 입국사증을 발급해주지 않는다는 핑계로 이들을 되돌려보냈다.처음부터 북한당국이 납북자들을 제네바 회담에 참가시킬 의도가 추호도 없었다는 사실을 입증시킨 것이다. ○제네바회담 참가 무산 1955년부터 김일성은 평화통일과 평화이미지 선전에 열을 올리기 시작했다.이를 계기로 북한은 납북인사들에게 자신이 내세운 평화통일 방안에 서명할 것을 강요하기 시작하는 등 이들의 정치적 이용을 서둘렀다.그래서 1955년 11월13일 납북요인들의 첫 공동성명으로 알려진 11·13성명을 발표하는데 납북자들이 실제 이용됐다.이 성명에는 납북인사들의 주장은 철저히 배제된채 전쟁 직전까지 북한이 내세운 정치적 허구라 할 수 있는 선전문구만 나열되었을 뿐이었다. 그래서 납북자들은 이후 북한에서의 독립적인 정치활동 보장을 위한 조직체 구성을 시도했다.1956년 7월2일 평양 모란봉극장에서 「재북 평화통일 촉진협의회」 결성대회가 그것이다.각지에서 모인 납북 및 월북 인사 4백여명 등 7백여명이 참석한 이날 대회는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을 최고위원으로 선출하고 합법적 통일정부 구성과 국제적 중립화 선언,남북의 자유로운 내왕 등을 내용으로 하는 7개항의 행동강령을 채택했다. 그러나 이협의회에는 북한의 노동당 등 친공세력이 깊숙이 관여하고 있었다.또 분열이 이미 고질화돼 있었던 만큼 납북자들의 구심체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결국 이 협의회는 1958년 9월9일 지도자인 조소앙이 숨을 거둔후 본래의 취지와는 멀어진채 북측의 대남 위장 정치선전기구로 전락하고 말았다. ◎도쿄대 「납북자 행적」 단행본/“북,납북 인사들 협박… 대남공세 악용”/56년 조국 통일전선 중앙위에 “동원”/“총일 앞장” 조소앙 등 강요된 맹세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일본 도쿄대학 동양학연구소에서 한국전쟁 중 북한으로 끌려간 인사들의 족적을 기록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란 단행본 책자를 입수했다.이 단행본은 1956년 5월24일부터 25일까지 열린 북한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의 주요문헌과 참가자들을 정리한 것이다. 이 책자는 지금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납북 임정요인과 인사들의 행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이들 재북인사들은 1956년 4월23일부터 29일까지 진행된 조선노동당 제3차대회에 참가한 것으로 돼있다.특히 당대회 직후인 같은해 5월24∼25일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원회 확대회의에는 재북평화통일협의회를 준비하고 있던 재북인사들을 대부분 초청한 것으로 밝혀져 이들을 여러 수단으로 회유했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홍명희의 보고와 토론으로 진행된 이날 회의에 남한출신 정치인 조소앙 안재홍 오하영 윤기섭 엄항섭 송호성 김약수,국회의원 출신 노일환 김병회 황윤호 박윤원 이구수 강욱중 최태규 김옥주 배중혁 구덕환 이문원 신성균이 참석했다.이밖에 남한의 각 정당 사회단체 인사들의 명단이 나열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 정치인을 대표해 토론에 나선 송호성 조소앙 안재홍 등의 토론 내용을 소개했다.이들은 분단의 원인과 평화통일의 방책에 대해 토론한후 자신들이 앞장설 것을 맹세했다고 전하고 있다. 어떻든 이 자료는 납북인사들이 철저하게 정치적으로 이용됐음을 보여 주었다.더구나 휴전 이후 정치공세를 강화한 폐쇄사회의 실상을 어느 정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점에서 현대사 자료로도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었다.
  • 한반도 통일여건 진단과 전망/한·러·일·중 4개국의 시각

    광복 50주년을 맞아 지난 50년을 뒤돌아 보고 한국통일의 현단계와 전망을 짚어 보는 국제학술회의가 지난 12∼14일 고려대학교 언론대학원과 프레스센터 공동주최로 서울 호텔신라에서 열렸다.한국을 비롯,미국 러시아 중국 일본의 학자와 언론인들이 참석,「한반도 분단의 역사적 재조명」「한반도 통일여건의 진단과 전망」「세계속의 통일한국 위상」등 3개 주제로 나누어 주제발표와 열띤 토론을 벌였다.이 세미나의 「한반도 통일여건의 진단과 전망」주제 회의에서 발표된 한반도 통일에 대한 미국·러시아·일본·중국의 시각을 요약 소개한다. ◎미국/북한은 계몽적 협상대상/대화로 평화적 해결 희망/톰 레이드 워싱턴포스트 동경지국장 미국인들이 한국 통일에 대해 갖고 있는 견해를 일반 대중과 학자,그리고 관리나 공무원들의 입장으로 구별해 말할 필요성을 느낀다. 우선 일반인들은 대부분 주변에서 흔히 마주치는 부지런하고 검소한 한국인 이민자들을 단지 한국인들로 알 뿐 남한인으로 알고 있지 않다.이것은 한국이 분단국가라는 사실을 모른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즉 이들은 한반도의 분단이 일시적인 상태로 언젠가는 통일될 것으로 믿고 있으며 통일을 미국에 대한 위협으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에 비해 학자들은 대개 통일방식과 통일 후의 형태와 관련해 대개 두 그룹으로 나뉘어 한국을 바라 본다.그럼에도 양측 모두 남한은 국제사회에서 신뢰할 만한 국가이며 합법적인 정권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의견이 일치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대해선 합법적인 정부로 인정하는 측과 무모한 독재국가로 보는 측으로 양분된다.전자의 경우 북한이 통일 후 중요한 역할을 차지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며 후자는 한반도 통일이 독일과 마찬가지로 공산주의 국가가 더 크고 부유한 민주국가로 흡수 통일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한편 정치인이나 공무원들은 대부분 이 민감한 한국통일 문제에 대해 통일은 불가피하며 바람직한 것이라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미국의 관리나 외교관 가운데 한국의 영구분단을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까지 보지 못했다. 한국문제에 대한 논쟁은 대 북한관계에서 시작된다.현재의 클린턴 정부처럼 북한을 이란과 쿠바처럼 계몽적인 협상이나 강·온 정책을 병행해야 할 나라로 보아야 한다는 주장과 적으로 간주하는 주장이 그것이다.이들 관리나 공무원들은 대부분 학자들의 주장을 따르는 편인데 클린턴 정부측의 견해는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해결하자는 측이고 또 북한을 적으로 간주하는 측은 독일처럼 흡수통일을 택해야 한다는 주장에 경도돼 있는 분위기다. ◎러시아/파격적인 경제계획 수립/안정된 국제환경 조성을/세르게이 곤차로프 역사학자 러시와와의 관계에 있어서 남한은 북한보다 빠른 발전상황을 보여왔다.현재 러시아와 남한은 연대관계에서 민감한 문제들을 해결하는 방안을 발견한 것으로 보인다.그 예는 한국전쟁에 대한 소련 문서자료들을 김영삼 대통령에게 제시하는 것과 관련한 신사협정이다. 러시아와 남한간의 관계수립과 발전은 양측 모두에게 이익을 주었지만 기대했던 것이 모두 이루어진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한다. 일반적으로 말해 남북한과 러시아의 관계에 있어서 러시아는 혁명적이고 폭력적이기보다는 현실적이고 평화로운 과정을 택한다.북한과의 정상관계를 유지하고 남한과의 연대를 진척시킴으로써 러시아는 한반도에서의 상황의 안정성과 예측 가능성에 기여할 수 있었다. 러시아는 극동아시아의 다른 주요세력들과는 달리 한반도 통일의 결과에 대해 우려할 것도 잃을 것도 없다.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통일한국이 경제·군사적인 면에서 이 지역에서의 일본의 경제 군사적인 역할에 도전할 수 있다는 우려가 대두되고 있다.또 남북한 경제교류가 빠르게 발전한다면 중국에 행해지는 남한 투자의 몫이 북한쪽으로 기울게 된다.미국에 있어서도 한반도 통일은 남한내 군사주둔의 문제를 해결하는 어려운 과업을 제기하고 그것은 불가피하게 일본과 미국간의 안보 유대의 재평가를 필요로 할 것이다.그러나 러시아는 그 모든 문제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운 형편이다. 한반도 통일의 전개는 무엇보다도 남북간 정치·안보 대화를 비롯한 경제 문화 인도주의적 교환에서부터 남북한과 지역내의 주요국들을관련시키는 파격적인 경제 사회적 계획들을 이행하는 것이 되어야 할 것이다.또한 한반도 주위의 안정적인 국제 환경을 보장하기 위해 북동아시아에서의 다각적인 안보계획을 점진적으로 전개하는 조치가 동시에 진행돼야만 한다. ◎일본/남한 여유자본 많지 않아/통일후 재건비 준비해야/다오카 순지 아사히신문 아에라지 부편집인 일본이 한반도 통일에 관해 갖고 있는 이미지는 대체로 독일 통일에 대한 것과 비슷하며 일본의 안보 이해관점에서 볼 때 그런 형태의 한반도 통일은 3가지의 긍정적 측면이 있다. 우선 일본이 결코 무관심할 수 없는 이웃국가의 전쟁 가능성이 사라진다는 점이다.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 날 경우 일본의 고도로 조직화된 운송 시스템이 상당한 부담과 혼란을 겪게 되고 한·일 합동전쟁 노력을 방해하기 위한 북한 특공대의 공격을 예상해야 하며 일본으로 이주하는 한국민들의 처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뿐만 아니라 일본 정부는 일본내 미군에 상당량의 재정적 지원을 제공해왔다는 측면에서 한반도의 평화로운 통일은 두번째 한국전쟁의 가능성을 제거한다는 점에서 일본인들에겐 훨씬 더 반가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통일을 독일과 비교할 때 통일 후 한국이 더 어려운 측면이 많을 것으로 점쳐진다.우선 통일후 남한인 2명이 북한인 1명을 부양해야 할 정도의 인구비율이 큰 문제점으로 작용할 것이며 남북의 극심한 빈부격차도 어려운 과제가 될 것이 뻔하다.이와 함께 가장 심각한 문제랄 수 있는 것은 남한이 북한을 재건립하는데 이용가능한 여분의 자본을 적게 보유하고 있다는 점이다.이는 통일전 서독이 세계 최대의 차관 대여국이었던데 비해 남한은 현재 1백억달러가 넘는 채무가 있음을 볼 때 심각성을 더해 주며 일본 투자가와 금융가들이 통일 한국이 겪어야만 할 경제적 난관에 대해 가장 우려하게 만드는 부분이다. 만일 한국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는데 실패한다면 수백만의 북한 주민들은 북한의 산업이 남한의 산업과 경쟁할 수 없기 때문에 불평많은 실직자가 될 것이므로 통일직후 북한내에서 신속한 경제발전 프로그램을 시작해야만 할 것이다.또 일본 측에서도 통일후 거대한 양의 원조와 차관을 제공하기는 어려운 형편으로 일본이 얼마나 「과거의 북한」을 돕기 위해 부담을 질 것인가는 두 국가간의 우호적 관계에 달려 있다고 보아야 한다. ◎중국/미 북 핵타결 긍정적 효과/신뢰 쌓아 점진적 교류를/구오시민 인민대 명예교수 중국은 한반도와 가까운 이웃이다.북한과는 국경이 맞닿아 있으며 한국과는 서해를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다.양국 국민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한 긴 역사를 갖고 있다.한때는 파시스트와의 전쟁에서 서로를 지원했다. 한국과 중국은 완전한 외교관계를 수립하였고 지난 3년동안 모든 측면에 있어서 급속한 발전을 이루었다.경제분야에서는 서로 매우 보완적이며 광범위한 협력을 하고 있다.양국 교역량은 지난 92년 50억6천만 달러에서 94년 1백17억2천만 달러로 늘어났다.이제 중국은 한국에 있어 3번째,한국은 중국에게 6번째로 큰 무역 상대국이 되었다.또 한국이 중국에 투자한 액수는 17억 달러,투자종목은 2천개가 넘는다.중국은 한국의 투자를 가장 많이 유치한 국가가 되었다.양국 국민간 교류나,문화·교육·과학·기술 분야의 협력과 교류도 빠르게 늘어 났다. 한반도에서 핵이 사라지고 평화 및 안정을 실현하는 것은 중국의 꾸준한 입장이다.중국은 한반도 국민들과 선린관계 및 우호관계를 오래 갖기를 진심으로 희망한다.중국 인민은 반세기 전의 분단 때문에 한반도 국민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며 그들의 자체 노력으로 통일이 실현되기를 원한다.중국은 양쪽이 참을성있고 진실한 대화와 조언을 통해 끊임없이 노력하여 현존하는 문제를 해소하기를 바란다.또 양쪽이 과거의 증오심을 버리고 서로 신뢰를 향상시킴으로써 스스로 주도권을 갖고 평화통일 이루기를 희망한다. 북한과 미국이 핵문제에 대한 기초적 합의에 서명한 뒤 한반도 상황은 긍정적 방향으로 발전되고 있다.비록 큰 차이가 몇가지 남아 있긴 하지만 모든 관련 당사자들은 협상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세계적인 추세임을 인식하게 되었다.현재 남북 양쪽도 평화통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있으며 주변국들은 한반도에서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싶은 공통 희망을 갖고 있다.한반도 상황은 완화된 상태로 유지될 것이며 점진적 통일은 시대의 추세가 될 것이다.
  • 제헌국회(새로 쓰는 한국현대사:22)

    ◎내각­대통령책임제 공방… 대통령제로 결말/여·순 발란 등 소용돌이속 국가보안법 통과 우리 현대사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가의 호칭이 등장한 것은 19 48년 7월 12일이다.국가의 기본골격인 헌법이 이날자로 제정되면서 대한민국 명칭이 공식적으로 사용되었다.그 헌법은 5·10 선거에 의해 개원한 국회가 제정했는데 초대 국회를 제헌국회라고 부르는 이유도 바로 여기있다. ○과도입법의원 맹활약 제헌국회는 1948년 5월 31일 개원되었다.제헌국회는 물론 민주주의 방식의 첫 대의기구다.미군정 아래서 개원되었던 절반의 대의기구 남조선 과도입법의원을 염두에 두면 사정은 약간 달라질 수 있다.그러나 제헌국회는 과도입법의원의원선거를 통해 민주주의 예행을 거친 국민들이 확실하게 뽑은 1백98명의 선량들이 참여한 국민의 대의기구였다. 남조선 과도입법의원 15명이 국회에 진출,제헌국회개원에 깊숙이 간여했다.그들의 경험이 그만큼 존중되었던 것이다.특히 경기도 광주에서 경선 상대가 없이 무투표 당선된 신익희의 역할이 컸다.그는 미군정과 빈번한 접촉을 하면서 「국회소집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결성하는데 전면에 나섰다.국회법이 제정될 때까지 국회운영에 관한 규칙법안이 이 위원회에 위임되었다. 이 운영위원회의 결정에 따라 제헌국회는 5월 31일 역사적 개원을 맞았다.제1차 본회의는 당시 최고령자였던 임시의장 이승만의 사회로 열렸다.국회의장단 선거에서 1백88표라는 압도적 표수로 이승만을 의장으로 선출했다.부의장에는 신익희(76표)와 김동원(77표)이 선출되었다.이날 서울 시내에는 경축 꽃전차가 거리를 누비는 가운데 하오2시 제헌국회 개원식이 베풀어졌다. 국회에는 헌법 및 정부조직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다.이 위원회는 먼저 헌법학자 유진오등 10명을 전문위원으로 선임했다.유진오 전문위원은 내각책임제 및 양원제,3권분립을 중심으로 한 안을 내놓았다.그리고 법전편찬위원회(위원장 김병노)가 작성한 헌법초안을 비롯,임시정부헌장,과도입법의원 제정의 약헌,구미 각국의 헌법을 참고로 기초에 착수했다. 내각책임제안은 곧 바로 이승만의 노여움을 불러일으켰다.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12일 양원제를 단원제로 하는 등 약간의 수정을 가한 내각책임제 헌법안을 이의없이 채택했다.이승만은 마침내 분노하고 말았다.6월15일 기초위원회에 출석한 그는 내각책임제가 비민주적이라는 이유로 대통령책임제로 번안해줄 것을 요구했다.그러면서 측근을 시켜 국회가 내각책임제를 계속 밀고나가면 정치일선에서 물러나겠다고 은근히 위협해왔다. 그래서 이승만의 주장을 받아들였다.그를 제외시킨 정치문제논의는 무의미할 정도로 당시 정치상황에서 이승만이 차지하는 비중은 막강했던 것이다.유일한 정당이었던 한민당이 먼저 굽히고 들어갔다.이로써 6월22일 제17차 기초위원회에서 내각책임제 헌법안은 대통령책임제헌법안으로 번안하기에 이른다.이어 6월 23일 제17차 국회본회의에 대통령책임제 헌법안이 상정되어 20일간에 걸쳐 17차례의 토론을 벌였다. ○헌법안 20일간 격론 대통령책임제헌법은 1948년 7월 12일 제정한 것으로 되어있다.대한민국 국회의장 이승만 명의의 헌법 전문은 단기 4281년 7월 12일이라고 분명히 적었다.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12일 자정을 약간 넘긴 0시28분에 제3독회를 마쳤다.그렇게 해서 대한민국헌법이 제정되었다.기초과정부터 풍파를 일으킨 제헌국회의 헌법제정은 파란만장한 헌정사의 장래를 예고한 것이기도 했다. 정부조직법은 7월 16일 제31차 본회의에서 제정되었다.17일 공포된 헌법절차에 따라 7월 20일 제37차 본회의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이시영을 부통령으로 선출했다.8월 3일 제37차 본회의는 이범석에 대한 국무총리 임명동의안은 가결시켰다.그리고 이승만의 대통령선출에 따라 신익희가 의장으로 선출되는 동시에 김약수가 부의장이 되었다.이어 8월 5일 제40차 본회의에서 김병로 대법원장 임명 요청을 동의함으로써 정부수립을 위한 기본조치를 매듭지었다. 제헌국회에서 원내 세력판도의 윤곽이 드러난 시기는 의장단 선거를 전후해서다.이승만의 의장피선은 초당적이라는 점에서 논란의 대상이 될 수 없었지만 2명의 국회부의장 선출에서는 그 색깔이 드러났다.신익희와 김동원의 부의장 피선은 원내세력을 국민회와 한민당이 주도했다는사실을 보여주고 있다.이 때부터 각 정파 및 무소속의원들은 지연·인연을 따라 독자적 원내세력을 형성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급진적 이론파였던 성인회를 비롯,동인회,청구회가 연합하여 이른바 소장파 그룹을 만들었다.이 그룹은 한민당·이정회와 정립하면서 많은 물의를 일으켰다.이는 10월 13일 긴급동의로 제출한 미군철수 결의안과 한미간의 여러 협정에 극력 반대하는 것등으로 나타났다.특히 미군철수 결의안은 북한 최고 인민위원회가 미·소 정부에 두 나라 군대 철퇴를 요구하는 서신을 보낸 직후에 나왔기 때문에 더욱 문제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후하여 남한 도처에서 폭동이 일어났다.1948년 10월부터는 국군에 침투했던 남로당 세포조직에 의한 무장반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10월 2일 제주도군 경비1대대의 반란,10월 20일 제40연대의 여수·순천 반란,11월 20일 대구 제60연대 무장반란이 그것이다.엄청난 사상자를 낸 가운데 곧 진압되었지만,그 잔여세력들은 산으로 들어가 유격전을 벌였다.유격전은 북한의 강동정치학원 정치·군사훈련을 받은 요원들에 의해 강화되었다. ○농개법 등 획기적 조치 그래서 국회는 11월 21일 공산주의 활동을 불법화하는 준엄한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다.당시 상황에서 국가 보안법 제정은 불가피한 것이었다.이에 앞서 9월 7일에는 반민족행위처벌법을,1949년 2월 3일에는 농지개혁법을 통과시키는 등 획기적인 조치를 취했다.이들 법률의 내용과 집행을 둘러싸고 상당한 혼란과 대립도 뒤따랐다. 그 가운데서도 정치적으로 가장 큰 충격을 안겨준 것은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이다.국회안에서 소장파 그룹을 형성했던 노일환,김약수,김옥주등 13명의 의원들이 1949년 5월 20일부터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되었다.실로 중대한 사태가 아닐 수 없는 제헌국회의 얼룩이었다. ◎하버드대 소장 「사찰요람」/「국회 남노당 프락치사건」 북노당도 개입/당시 부의장 김약수 「배후 조종자」 분류/전 북노당 고위간부 “남북 합작” 증언 1949년 5월 20일 제헌국회의원 노일환 등을 국가보안법 위반혐의로 구속함에 따라 세상에 알려진 이른바 「국회 남로당 프락치 사건」을 부정적 시각을 가지고 접근한 경우도 없지않다.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이 입수한 새로운 자료들과 증언을 통해 이 사건 배후에는 남조선 노동당(남로당)뿐 아니라 북조선 노동당(북로당)까지 개입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미국 하버드대 옌친연구소에서 입수한 사찰요람에 따르면 당시 국회 부의장으로 프락치사건에 연루되어 구속된 김약수는 「이 사건의 배후 조정자」로 분류했다.이 문서는 그가 1947년 조선공화당을 조직,서기와 선전부장이라는 당직을 맡았던 사실도 들추어냈다.그리고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발굴한 주한미군 정보처(G­2)의 주간정보보고서는 제헌국회 개원초기 이들이 들어가 있던 무소속구락부를 반우파적 집단으로 평가했다. 이어 주간정보보고서는 무소속구락부가 앞으로 좌익성향 구성원들의 집합처가 될 것이라고 예측했다.미 군정의 예측은 어느 정도 적중되어 국회활동을 통해 미군철수 결의안을 긴급동의로 제출하는 등 북한의 주장을 동조하고 나섰다.국회 프락치 사건에연루한 이들은 주로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것으로 조사되어 모두 3차례에 걸쳐 13명이 붙잡혀 들어갔다. 그러나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이 만난 전 북로당 고위간부의 증언에서 북로당도 깊이 개입했다는 새로운 사실을 확인했다.이 증언에 따르면 북로당원 성시백(김삼룡·이주하와 함께 6·25가 일어난 1950년 6월 27일 서울에서 처형되었음)이 관련되었다는 것이다.그러니까 남로당과 북로당의 공작이 횡적으로 들어갔는데 그에게 포섭된 인물은 황윤호(진양출신),김옥주(함양출신),강욱중으로 밝혀졌다. 이들은 한국전쟁 당시 서울을 점령한 인민군에 의해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 50년 「만찬장 사건」(모스크바 새 증언:3)

    ◎김일성 “개전 수일내 서울점령” 호언/“옹진반도 공략을” 소대사에 간청/“스탈린 다시 만나게 해달라” 졸라/「남침승인」 늦어지자 모택동 들먹이기도 이주연 북한대사의 중국파송을 위해 마련된 만찬이 50년 1월 17일 저녁 박헌영외교부장의 관저에서 열렸다.김일성,박헌영,김두봉을 비롯한 북한 고위층인사들과 소련대사,공사,중국대사,무역대표부 인사들이 대거 초대됐다.슈티코프대사는 1월 19일 스탈린에게 보낸 전문을 통해 김일성의 이날 만찬장에서의 행적을 낱낱이 보고했다.(대통령문서보관소) 식사가 끝난 뒤 김일성은 소련대사관의 이그나테프와 펠리센코 두 참사관에게 다가갔다.그리고는 매우 흥분된 목소리로 이제 중국해방이 마무리 단계에 이르렀으니 다음은 남조선동포들을 해방할 차례라고 떠들었다.그리고는 남조선 인민들은 자기를 믿고 따르고 있으며 북조선의 군사원조를 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빨치산만 가지고는 문제를 풀 수 없다.북조선에는 훌륭한 군대가 있다고 주장했다.이렇게 떠들어대던 김일성은 『요즈음 통일문제를 걱정하느라 밤잠을 못잔다.남조선 해방과 조국통일 과업을 더 늦추면 나는 조선인민들의 신임을 잃을 것』이라고 말했다. ○무력통일 늦출 수 없다 그런 뒤 김은 자신의 모스크바방문 때 스탈린이 남침을 먼저 시작하지 말라고 한 사실을 언급하며 『하지만 이승만이 북침공세를 시작하지 않고 따라서 남조선해방통일과업이 자꾸 미뤄지고 있으니 내가 스탈린 동지를 다시 찾아가 남침개시 허락을 받아야겠다』고 말했다.그리고 자신은 공산주의자이고 원칙주의자여서 먼저 전쟁을 시작할 수 없다느니,스탈린 동지의 명령이 자기한테는 법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그의 허락이 필요하다느니 하며 횡설수설했다고 슈티코프 대사는 보고하고 있다. 그리고는 또 만약 스탈린동지를 만날수가 없다면 모택동동지가 모스크바방문을 마치는 대로 그를 찾아가 만나겠다고 말했다.그는 모택동이 중국내전만 끝나면 자기를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했다고 말하기도 했다.모택동을 들먹이며 협박조에 가까운 말을 늘어놓은 것이다.사정이 여기에 이르자 소련대사관의 두 참사관은 그의말을 가로막고 화제를 바꾸어버렸다. 그 다음 상황을 슈티코프대사는 다음과같이 적고있다.『그러자 김일성은 내게 다가왔다.그리고는 이승만 군대에 대한 공격개시문제를 비롯,한반도상황을 논의하도록 스탈린 동지를 만날수 없겠느냐고 물었다.만약 스탈린을 못 만나면 모택동 동지를 만나겠다고 했다.그리고는 왜 옹진반도 공격을 허락하지 않느냐고 내게 따져물었다.인민군은 3일이면 옹진반도점령을 끝내고 수일내 서울까지 밀고갈수 있다고 그는 강조했다.본인은 그에게 스탈린동지를 만나는 것은 문제가 안될 것이라고 답했음.그러나 옹진반도 공격은 안된다고 잘라 말하고는 그를 피해 만찬장을 떠났음』 이날 김일성은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는 『스탈린동지를 만나게 해달라』『나는 자나께나 남조선해방만 생각하고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슈티코프 대사는 보고서 끝머리를 이렇게 마쳤다.『만찬이 끝날 즈음 김일성은 취한 상태였음.그의 모든 대화는 매우 흥분된 상태에서 이루어졌음.본인은 그의 이날 대화의 목적이 자신의 속마음을 내보이고 우리의 입장을 타진해보려는 데 있었다고 생각함』 이 보고서 한통을 통해 우리는 당시 김일성이 얼마나 남침의욕에 가득차 있었는지,그리고 당시 소련지도부의 눈에 비친 그의 위상이 어떠했는지를 한눈에 짐작할수 있다. 여기서 이야기를 49년 여름으로 잠시 거슬러올라가 보자.김일성이 스탈린의 거듭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조기남침을 실행에 옮기기 위해 얼마나 끈질기게 매달렸는지를 보여주는 일화들이 있다.김일성,박헌영 두사람은 여름 휴가를 보내기 위해 본국으로 돌아가는 슈티코프대사를 8월 12일,14일 연이어 만났다.남침 불가피론을 설득키 위한 목적에서였다.다음은 슈티코프대사가 1차면담 뒤 본부에 보낸 보고전문.(대통령문서소.슈티코프대사와 김일성,박헌영의 대화록) 『두사람은 남조선이 조국통일민주전선이 제의한 평화통일방안을 거부했으므로 무력남침 외에 대안이 없다고 강조했음.김일성은 자기가 지금 남침을 개시하지 않으면 조국통일의 기회는 영영 사라진다고 말했음』 그해 6월 25일을 기해 김일성은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결성하고몇차례에 걸쳐 대남 평화공세를 펼쳤다.6월 30일에는 평양에서 남북노동당 연합회의를 열어 남북노동당을 합당,조선노동당으로 발족시키고 김일성을 위원장에,박헌영을 부위원장으로 선출한 바 있다. ○선제공격 필요성 강조 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요청에 대해 그해 3월 모스크바에서 열린 김일성·스탈린 회담에서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뚜렷한 무력우위를 확보치 못했다며 스탈린이 거부했다는 점을 거듭 상기시켰다.김일성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남조선 주둔 미군이 물러난 마당에 38도선 분할규정을 지킬 아무 의미가 없다.스탈린동지가 남조선이 선제공격을 가해올 경우에만 대응공격을 하라고 했지만 남조선은 이제 북침계획을 연기시킨 것 같다.남조선은 2차대전 전 프랑스가 마지노선을 고수하려했던 것처럼 38도선 고수에 총력을 쏟고있다.따라서 스탈린동지가 권유하신 대응공격 기회는 없어졌다』며 선제공격 필요성을 되풀이했다.김일성은 이와함께 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무력우위를 점하고 있음을 강조했다.그러나 슈티코프도 지지않고 두사람의 현실파악이 너무 낙관적이고 이상적이라고 지적하며 제동을 걸었다. 그러자 김일성은 한발 물러나 강원도 삼척지구에 해방지구 건설전략을 제의했고 슈티코프는 『그것까지 막을수는 없지만 신중한 분석과 준비를 거친 뒤 실행에 옮길 것』을 권고했다.하지만 해방지구건설은 애당초 김의 목표가 아니었다.8월 14일 김은 슈티코프를 만나 다시 무력남침 필요성을 역설했고 슈티코프는 계속 불가입장을 되풀이했다.그러자 김이 들고나온 전략이 바로 옹진반도 점령 계획이었다. 이 자리에서 두사람은 두가지 사항에 합의했다.『첫째,북조선에 소련제 무기를 긴급히 추가제공할 필요성이 있다.김일성은 전군에 지급할 2∼3벌의 탄약풀세트 지원을 요청.둘째,김일성은 옹진반도 점령을 목표로한 국지전개시를 제의.옹진반도 점령시 38도선 방어선을 1백20㎞ 단축시키는 효과가 있으며 추가 공세를 위한 교두보 역할을 할수 있다고 김은 강조』 슈티코프는 『모든 작전은 북조선군의 작전능력과 전반적인 정세파악을 확실히 한후에만 실행에 옮길수 있다』는 말을 덧붙였다. 슈티코프대사는 8월27일 이 대화전문을 스탈린 앞으로 보냈다.그러나 슈티코프대사는 이 보고문에 남침계획이 매우 무모하다는 자신의 견해를 덧붙였다.그는 『첫째,현재 한반도에 실제로 2국가가 존재하며 남한은 미국등 여러나라로부터 승인을 받았다.따라서 남침시 미국이 무기·탄약뿐아니라 병력을 직접 파병할 것임.둘째,미국이 소련에 대한 악선전의 기회로 활용할 것임.셋째,북조선군이 남측에 대해 확고한 군사우위 미확보.넷째,남조선은 강한 군·경찰군을 창설했음』등을 남침불가의 이유로 들었다.슈티코프대사는 대안으로 『전략적으로 중요한 옹진반도 점령은 권할만함.그러나 남조선군의 반격능력이 강할지 모르고 그 경우 장기전이 될수있음』이라고 덧붙였다. ○소대사 “계획 무모하다” 슈티코프 대사가 본국휴가를 떠난 뒤 김일성은 대사대리인 툰킨공사를 만나 옹진반도 작전계획을 재차 설명한 것이다.툰킨 공사가 김의 이 요청을 스탈린에게 보고했고 스탈린이 소련 당정치국결정을 통해 전면남침은 물론 옹진반도 작전까지 금지시킨 것은 전편에서 이미 기술한 바있다. 당시 소련 당정치국의 남침불가 결정은 소련외무부,국방부가 북한군전력을 종합적으로 평가 비교해서 내린 결론이었다.대통령문서소에는 9월23일자로 그로미코 외무장관,불가닌 국방장관이 스탈린에게 제출한 이 정치국결정의 초안이 보관돼있다.정치국결정의 내용은 거의 이 초안과 일치한다.다만 스탈린이 결재과정에서 몇군데 흥미있는 손질을 한 대목이 눈에 띈다. 스탈린은 초안말미에 『…북조선은 남측의 무력공격개시시 이를 격퇴하고 북조선정부의 영도아래 조선통일을 이루도록 만반의 태세를 갖추어야한다…』라고 쓴 부분을 만년필로 긋고 『남측이 도발할 경우 북조선은 이를 격퇴할 준비를 갖추고 있다가 상황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고쳐썼다.「무력통일」운운한 문구를 삭제한 것이다.그외에 북한의 무력증강 필요성이 언급된 부분들도 스탈린은 모두 그 표현을 완화하거나 삭제하는 등 끝까지 신중한 입장을 고수하려했다.그러던 차에 앞서 기술한 김일성의 「만찬장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 등 사후의 중국­3가지 시나리오/예브게니 바자노프(해외기고)

    ◎ⓛ현지도부 건재… 시장화정책을 계속/②지역·민족 분열… 전국서 소요 잇달아/③러시아처럼 개혁 부진… 경제력 쇠퇴 중국문제 권위자인 예브게니 바자노프 러시아 외무부산하 외교아카데미 부원장은 4일 서울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등소평사후 중국의 앞날에 대해 3가지 시나리오를 상정했다.첫째는 현지도부가 상황을 확고히 통제하며 시장화정책을 착실히 수행하는 것이고,둘째는 일대혼란이 일어나 전국이 정치·지리·민족별로 갈가리 찢겨져 소위 천하대란이 일어나는 일이며,마지막으로는 지금의 러시아같이 개혁이 지지부진하며 점차 국력이 쇠퇴해지는 것이다.그중 세번째 시나리오가 가장 가능성이 높다.중·러 양국은 미·일등 서방세력에 맞서기 위해 이미 외교·군사적으로 공동전선을 펴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현상은 한반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그는 주장한다.다음은 기고문 내용. 수십년간 실질적으로 룽국을 지배했고 중국의 성공적인 개혁을 설계해온 등소평의 여생이 얼마남지않은 것 같다.그가 죽은 뒤 중국의 장래는 과연 어떻게 될까.나는 그의 죽음이 중국과 전세계에 미칠 영향에 대해 다음과 같은 3가지 시나리오를 가정하고자 한다. ▷첫째 시나리오◁ 큰 정치적 변혁을 겪지 않고 지금의 개혁정치가 계속되는 것이다. 현재의 지도부는 이미 상당기간 권력을 장악해왔고 단합돼 있다.이들은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국가를 안정되고 효율적으로 이끌 능력이 있다.이들은 시장경제개혁을 수행하면서 이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와 상충되지 않게 잘 이끌어왔다. 경제는 점차 늘어나는 외국자본의 진출에 힘입어 성장을 계속할 것이다.비효율적인 국가기업들은 나름대로 실업을 줄이고 사회불안을 줄이는 데 일조하고 다른 사회적불안요인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통제될 것이다. 외교분야에서 중국은 보다 적극적이고 자기주장을 더 하게 될 것이다.경제·안보적인 고려,그리고 대국야망이 합쳐져 아시아·태평양지역의 주도적 위치를 요구하려 할 것이다.상대적으로 입지가 약화된 러시아에게는 국경분쟁에서 보다 강경한 입장을 취할 것이고 러시아극동지역과 시베리아지역엘 중국인 이민을 점점 더 많이 진출시킬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강대화된 중국은 일본이 군사력을 증강하고 이 지역에서 정치적 목소리를 키우는 것을 견제할 것이다.장기적으로는 아·태시장을 놓고 일본과 경쟁을 벌이려할 것이다.미국 역시 중국으로부터 압력을 느끼게 될 것이다.이는 쌍무문제에서 뿐 아니라 남사군도문제,대만문제,태평양의 해군문제등 여러 문제를 놓고 중국은 미국과 대립적인 입장을 취할 수 있다. 북한은 더 이상 시장화되고 실용화된 중국과 이념적 동지가 될수 없다.하지만 중국은 북한의 공산정권이 하루아침에 붕괴하는 것을 결사적으로 막으려 할 것이다.국경지대의 불안정을 원치 않고 또한 북한정권에 대한 영향력을 잃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중국은 남한에 대해서도 경제적 이득,정치적 영향력행사를 위해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이를 위해 중국은 주한미군의 조기철수를 주장할 것이다. 하지만 이 지역에 강력한 새 국가의 출현을 원치 않기 때문에 한반도의 조기통일실현은 보고 싶지 않을 것이다. ▷둘째 시나리오◁ 등소평사후 개혁이 중단되고 일대 혼란이 일어나는 것이다.지도부는 지역·파벌에 따라 갈가리 나누어진다.공산당계급은 신흥자본주의계층과 충돌한다.중원의 국경지대에서는 민족분쟁이 터져나와 안정이 흔들리고 전사회적으로 빈곤계층의 소요가 잇따른다.비효율적인 산업,경작지의 부족,원자재 부족등으로 경제는 심각한 위기에 빠져든다.한마디로 금세기 20∼40년대의 상황이 되풀이 된다. 이 와중에 일부세력이 나타나 러시아에게 개입을 요청한다.또 어떤 세력은 미국의 개입을 요청한다.여기에 덧붙여 일본까지 갖가지 구실을 붙여 개입명분을 찾을 것이다.결국 미·러 중 한 세력이 우세를 차지해 중국은 한동안 이 두 나라중 한쪽의 동맹국이 될것이다.미·러는 중국에서의 대립으로 인해 관계가 악화돼 과거의 적대관계로 되돌아간다.다만 일본의 세력확대를 의식해 직접충돌은 피한다. 한반도에서 중국은 남북한에서 영향력을 상실한다.북한에서는 그 빈자리를 러시아가 채운다.남한은 안보·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미·일에 더 긴밀히 접근하게 된다. ▷셋째 시나리오◁ 단기적으로 가장 가능성이 높은 시나리오다.군사·경제적으로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약세로 빠져든다.반면 미·일은 양면에서 모두 발전을 계속한다.이런 추세는 미·러의 불협화,미·중의 불협화와 맞물려 중·러의 접근을 불러온다.미·러는 유럽정책,옛소연방에 대한 미국정책을 둘러싸고 불화를 빚고 미·중은 인권문제·무역마찰로 관계가 악화된다.이는 실제로 최근 수년간 계속돼온 현상이다.러시아는 자신들이 불공평하다고 느끼는 서방과의 관계에서 입지회복을 위해 중국에 무기를 공급하고 중국의 대내외정책을 기꺼이 지지하고 있다.중국민의 시베리아·극동 이주를 허용하고 있고 국경·군사문제에서도 양보를 계속해 왔다. 중국 역시 러시아에 대해 유화정책을 계속했다.안드레이 코지레프 러외무장관은 현재 러·중관계를 사상최고수준으로 평가하며 이를 자기의 최대업적으로 자랑한다.러·중은 자신들이 미·일에 비해 낙후돼 있다고 느끼는 한 계속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것이다. 한반도에서도 중·러는 유사한 정책을 펴며 협력할 것이다.두 나라는 북한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북한의 대서방 대결정책을 부추길 것이다.러·중은 북한이 외세의 개입 없이 점진적인 개혁을 펴나가는 것을 지지할 것이다.그러는 한편 남한과도 관계개선을 하도록 주문할 것이다.물론 남한에 대해서도 북한에게 유화정책을 펼 것을 권한다.두 나라는 남한과는 경제·정치·군사면에서 협력증진을 계속 원할 것이다.한반도,나아가 아·태지역에서 미국의 주도권행사를 막기위해 두 나라는 남북한이 통일돼 강력한 국가로 탄생하는 것을 지지한다.일보믿 팽창을 견제하기 위해서도 남북한의 통일은 필요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 「조선공산당일지」영역본입수/서울신문/특별취재팀,미공문서 관리국통해

    ◎45년 12월∼46년 5월 주요사안 기록/남한의 기공­북 공조관계 보여줘 서울신문 특별취재팀은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에서 19 45년 12월26일부터 46년 5월14일까지 조선공산당(조공)의 주요사안을 기록한 일지내용을 입수했다.이 문건은 미군정이 19 46년 5월18일 조선공산당 중앙당사에서 압수한 원본을 영역한 것으로 주한 미24군 정보처(G­2) 주간정보문서철에 들어있다. 조공의 고위직 상임위원이 기록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 문건의 명칭은 「공산주의 일기」.남한의 조공과 소련,북한과의 밀접한 공조관계를 보여준다.46년1월6일 일지는 정재달이 무사히 귀환했다고 기록했는데,특별취재반이 NARA에서 입수한 다른 문건을 통해 그가 북한에서 1만원의 자금을 가져온 것도 확인했다.그리고 1월8일에는 이주상(조공 중앙집행위원)이 남한의 신문과 비밀문서를 가지고 입북한 사실을 적고 있다. 이 무렵에는 미군에도 공산주의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도 이 일지가 입증했다.3월2일 공산당원 김이 제플린,노먼,크론스키를 만났다는 대목인데 이들은 모두사병으로 공산주의자로 알려진 인물들.또 조공 간부들은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드나든 기록도 여러번 나온다.당시 남한에서 통용되던 조선은행권을 북한의 소련군이 몰수했다는 사실을 상기하면 서울의 소련영사관을 통해 이들 돈이 공산당 수중에 들어갔을 가능성도 얼마든지 있다. 조공 당원들의 입북과 동시에 평양의 조공 북조선 분국에서도 서울에 수시로 당원을 보냈고(3월11일),인민당의 이강국과 김원봉이 회동(3월25일)한 이야기도 나온다.5월2일 하오6시부터는 문제의 조선정 판사에 4백50명이 모여 「소비에트 쇼」등 소련영화 2편을 관람했다고 기록함으로써 위폐사건의 진원지 정 판사가 조선공산당의 아지트였음을 드러냈다. 5월14일에는 여씨(여운형),박동지(박헌영),허(허헌),김(김원봉),백(백남운),강(강진) 제씨가 모여 성명을 논의한 끝에 찬성했다고 썼다.성명은 아마도 5월8일에 발표한 미소공동위 연기에 관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 46년 남한의 공산당 활동(새로 쓰는 한국현대사:13)

    ◎미소공위 깨지자 9월 파업·10월 폭동 주도/「전평」앞세워 산업마비·사회혼란 획책/정 판사 사건 계기 미군정 좌익소탕 반격/“무모한 좌경 모험주의”북 질책에 박헌영 남노당 결성 □특별취재반 ▲황규호(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조사부 〃) 1946년의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는 불확실한 한반도에 아무런 빛이 되어주지 못했다.특히 북위 38도선 이남에는 더욱 어두운 그림자를 깔아놓았다.그해 5월6일 1차 미소공위가 결렬되자 남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의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북한이 소련의 의도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던 것과는 사뭇 대조를 이루었던 것이다. 찬·반탁의 좌우익 대결구도 속에서 맞은 미소공위의 결렬은 좌익쪽에 더 많은 좌절을 안겨주었다.찬탁을 주장했던 좌익은 미소공위를 통한 정권장악이 수포로 돌아가자 새로운 전술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그래서 조선공산당은 정당방위를 위한 역공세라는 구호를 들고 이른바 신전술을 펴기 시작했다.폭력에 호소한 이 전술은 실제 9월총파업과 10월 폭동 등으로 나타났다. 조선공산당의 신전술을 소련의 지령에 의한 것으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1946년 7월 박헌영이 모스크바를 방문했다는 사실은 이를 어느정도 뒷받침한다.현재 모스크바에 살고있는 박헌영의 친딸 리비안나 박도 최근 한국 언론에 이를 시인한 적이 있기 때문에 그 가능성은 짙다.그해 7월 하순께 조선공산당중앙위원회가 신전술을 발표한 것도 그의 모스크바 방문과 일치하는 대목이 아닌가 한다. 미군정의 공산당에 대한 표면적 탄압은 이보다 일찍 시작되었다.5월16일 공산당 본부 급습과 함께 이루어진 공산주의 비밀문서 압수가 그것이다.특히 19 46년 5월25일에 일어난 조선정 판사 위조지폐사건을 계기로 남한 전역의 좌익본부를 모조리 조사했다.하지장군은 공산당에 대한 모종의 조치를 취하기 위한 착수가 끝나자 「공산당과 그들의 활동을 제재할 때가 되었다」면서 「희생양이 필요하다면 본인이 기꺼이 수락하겠다」는 보고서를 맥아더에게 보냈다(주한미군사령관이 미 태평양사령부에 보낸 전문·1946). 하지의이같은 보고서는 공산주의 활동이 심각한 지경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주한미군인 24군단 정보처(G­2)와 방첩대(CIC),경찰조직을 통해 남한의 공산당과 소련의 연결고리를 확인한 미군정은 간첩활동 증거도 찾아냈다.여기에는 남한의 경찰과 경비대 침투,식량배급 방해,납세거부,군중선동,각종 사회단체 장악등의 지령이 포함되었다.조선공산당 본부와 원주지부,인민당 정치국장 김세용 집에서 찾아낸 문서들은 간첩활동을 입증한 대표적 케이스로 기록된다. 조선공산당이 7월6일 발표한 신전술의 슬로건을 보면 미군정에 대한 전면투쟁 양상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다.「테러는 테러로,피는 피로 갚자」는 기치를 선명하게 든 공산당은 같은 계열의 연합체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전면에 나서는 대중적인 파업투쟁을 계획한다.전평을 조선공산당 세력구축의 발판으로 삼았던 박헌영은 당초 이 파업투쟁을 10월중에 강행한다는 복안을 가지고 있었다.그런데 공산당 지도부는 갑자기 총파업을 9월로 앞당기기로 수정하고 이를 긴급 지령했다. ○경찰발포로사태 악화 그 이유는 미군정 운수부가 적자타개와 노동자 관리의 합리화를 내세워 운수부 종업원의 25% 감원과 월급제를 일급제로 바꾼다는 발표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또 9월6일 좌익계 신문인 「중앙신문」등 3개 신문이 미군정포고령 위반으로 정간되는 것과 함께 조선공산당 지도부원인 이주하가 체포되고 박헌영의 체포령이 내려진데도 그 원인이 있다.그해 10월 박헌영이 해주로 피신했는데도 남한 열성당원들은 그의 지령이 모두 서울에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잘못 알고 있었다. 전국의 경찰이 비상경계에 들어간 상황에서 9월15일 철도 노동자들은 생활개선을 위한 6개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일주일간의 시한부 총파업을 미군정 철도당국에 통고한다.미군정의 성의있는 응답이 없자 23일 7천명의 부산노동자들이 파업에 들어간 것을 시발로 24일에는 남한 각지에서 4만명의 철도노동자들이 연대투쟁을 벌였다.조선공산당의 전평을 주축으로 한 남조선총파업투쟁위 구성과 파업선동은 철도뿐 아니라 전기 체신 출판산업을 마비상태에 빠뜨렸다.이에대한 동정파업은 은행 회사 병원 미군정청까지 파급되었다.미군정은 이에맞서 9월30일 경무총감 장택상의 지휘로 파업 농성중인 경성공장 기관구 통신구에 진입,1천7백명의 철도종사원을 검거함으로써 일단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10월에 접어들면서 노동자들의 파업여파는 또다른 양상을 띠고 10월1일 대구폭동으로 이어졌다.부녀자들을 앞세워 쌀을 요구하는 것으로 시작된 이 사건은 경찰의 발포로 악화되어 경북 일원과 경남 전남등 전국 73개 지역으로 확대되었다.그러나 대중파업 지도의 경험이 없었던 전평은 간부들이 거의 검거되는 바람에 위기에 직면하고 만다.그렇다고 노동자 농민에게 어떤 정치·경제적 혜택을 안겨준 것도 아니었다. 미국 버클리대 교수를 역임한 RA 스칼라피노는 자신의 저서 「한국공산주의 운동사」에서 9월 총파업은 군정을 정치·경제적으로 악화시키려는 공산당의 음모라고 평가한 적이 있다.파업과 태업이 운수와 전기산업을 주 대상으로 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는 그는 9월 총파업은 결국 악화된 남한경제에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 이외에 아무것도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그는 이 저서에서 파업과 폭동등의 일련의 사태는 소련의 새로운 정책이 박헌영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의해 시행되었다는 구체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2개당 6개파벌로 분열 조선공산당은 9월 총파업을 전후로 여운형의 인민당,백남운의 신민당과 합당을 논의한다.좌익 3당의 합당은 9월파업과 무관치 않다는 설도 있다.다시 말하면 박헌영 자신이 헤게모니를 잡은 뒤에 합당추진의 반대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파업을 조기 결행했다는 것이다.3당 합당은 좌익세력이 정치적으로 궁지에 몰렸기 때문인데,동상이몽(의 합당은 내부분열을 일으켰다. 북한 지도부는 또 나름대로 남쪽의 공산당이 9월 총파업을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의 재개와 인민 구국항쟁의 토대」로 삼아줄 것을 채근해왔다.그래서 박헌영은 10월6일 입북한다.당시 북로당은 박헌영을 호되게 비판하면서 「10월 인민항쟁이 무모한 좌경모험주의적 편향」이라고 몰아붙이고 북에서처럼 3당합동 추진을 강력히 요구했다.그러나 남한의 좌익은 조선공산당내 대회파와 인민당내 31인파,신민당내 반간부파 등 반박헌영세력과 조선공산당내 박헌영파,인민당내 47인파,신민당내 중앙파 등 어지럽게 갈려 있을 시기였다.박헌영은 북에 있었지만 결국 그 지지파를 중심으로 11월23·24일 서울 견지동 시천교당에서 북조선노동당을 표방한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로부터 6개월후 여운형과 백남운을 중심으로 근로인민당이 창당되었다.당초 좌익진영의 통합을 위해 추진되었던 3당합동은 2개당과 6개의 파벌로 분열된 셈이었다.좌익세력의 판도가 남조선노동당과 근로인민당의 창당으로 귀결되었다는 사실은 좌익역량 총결집이 실패로 끝난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 혈육의 정/연변은 남북이산가족 “만남의 장소”(두만강 7백리:6)

    ◎거의 조선족이 알선… 70년대부터 재회 급증/한달간 머물며 “못다한 정”나누고 여행도 중국에 사는 조선족들은 허리가 잘려 두 동강이 난 고국 어느쪽의 혈육이든 마음만 먹으면 만날 수 있다.남북의 혈육들이 이념적 갈등 때문에 고국땅에서 서로 만날 수 없는 현실과 대조를 이룬다고나 할까.조선족들의 이런 처지는 남북으로 갈라진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속된 말로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에 조선족들이 끼어들게 마련인 것이다. ○문혁이전엔 엄두 못내 그러나 남북 혈연들의 상봉을 주선하기 시작한지는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문화혁명 이전에는 상봉을 주선하기는 커녕 조선족 자신들조차도 남한에 혈연,특히 이름깨나 난 혈연이 있다는 사실을 감추었다.문화혁명 당시에는 이런 꼬투리만 잡혀도 호된 투쟁을 받았다.남한에 혈연을 둔 것도 죄가되어 실제 곤욕을 치른 조선족들도 많다. 용정시 백금향에 들렀을 때 백금발전소 최몽필 문화잠장으로부터 생소한 이야기를 들었다.지금은 고인이 된 박정희 대통령의 6촌 계수가 살고 있다는 것이었다.발전소에 살면서 좀 떨어진 향 소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의 밥을 지어준다는 그 여인의 이름은 윤순옥(64).막상 만났더니 오랜 고생 탓인지는 몰라도 노쇠한 그늘이 역역했다. 그녀는 24살이 되던 해에 12살이나 더 먹은 박용태(함북 길주군 태생으로 72년 작고)의 후실로 들어왔다.후취 장가를 들 무렵 3살난 아들이 있었다.박용태의 부친은 박관일,박관세,박관선 3형제였는데 그녀의 주장대로라면 박정희 대통령과 5촌이 되는 사람들이다.보학도 배우지 않았거니와 족보도 확인하지도 못한 나로서 그렇다 아니다를 논할 처지는 못 되지만,일단 믿어보기로 했다. ○방송국에 편지 부탁 그녀의 말에 따르면 박용태는 박정희 대통령과 군관학교 정문 앞에서 찍은 사진을 보관하고 있었다.신사복 차림에 중절모를 쓰고 형제분이 찍은 사진이었다.밤이면 이불 속에서 사진을 보이면서 박정희라고 이야기 할 때 그녀는 모골이 송연했다.그때만 해도 적국의 대통령과 인척관계가 된다는 사실만이라도 감옥 밥을 무던히 먹을 죄였던 것이다.벽에 걸어둔사진틀 뒤에 몰래 보관하고 집식구들끼리만 돌려 보곤 했다. 그러다가 문화혁명 시기에 우연히 사진이 치보주임 최홍운씨의 눈에 띄었다.최 주임은 박정희라는 것은 몰랐지만 해방전 박용태의 신사복차림을 보고는 소각해버리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귀띔해 주었다.그러나 박씨는 사진을 농속에 깊숙히 감추어 두었다.만약 당시 최주임이 고자질을 했더라면 박정희와의 관계는 뒤로 제쳐놓고도 투쟁을 받았을 것이다.1972년 박씨가 세상을 뜨자 사진을 불살라버렸다. 한중수교가 이루어 진 후 일가 친척 없이 고독하게 살아온 그녀는 한국 KBS사회교육방송국에 친척을 찾아달라는 부탁의 편지를 냈다.그런데 박정희 대통령과 친척이라고 선을 달아 줄 것을 요구한 편지가 꽤나 된다면서 그녀의 혈육을 찾는 간절한 소원을 이루어 주지는 못했다.사회교육방송국에서 종종 보내온 책자와 편지를 지금도 보배처럼 보관중인 그녀의 마음 속에는 아직도 아쉬움이 많다. 『령감은 고생만 하다 너무 일찍 가셨디요.기런 북새통을 살다보니 박대통령 사진도 못 남겼수다.다가저의 불찰이디요.저는 박씨 가문에 들어온 사람이라 남이라면 남일테지만….자식들한테 혈육도 모르고 지내게 하는 거이 가슴 아픕네다』 그러나 두만강을 사이 두고 한동안 친선을 유지해온 중국과 북한은 사정이 달라 혈육간의 왕래가 비교적 잦았다.용정시 대소과수농장의 방승섭(68)은 여기서 김일성주석으로 호칭하는 그의 처형 아들이었다.다시 말하면 김일성주석의 본처 김정숙의 언니가 바로 방승섭의 모친이다.70년대 초 두 나라 정부에서 교섭하여 방승섭부부,어머니,두 아들과 딸하나를 데려갔다.1986년 대소과수농장의 관치성농장장은 조선을 방문하는 기회에 청진시 칠세대에 사는 방씨 댁을 찾아갔다.고향 사람을 만났다고 후한 접대를 해주었다.방씨 부인은 3년 전에 대소과수농장을 찾아온 적도 있다. 용정시 지신(일제시기 화룡현 다라즈)의 출신이고 항일투쟁에 차가했다가 현재 조선인민군에서 장군이 된 김광협의 친척들은 50년대와 60년대에 북한으로 이주했다.김광협의 7촌 조카 김상호는 1946년 참군하여 조선으로 나간 후 소련 유학을 하고돌아와 조선인민군 공군 부사령이 되었다고 한다.김상호는 어머니와 일가친척을 모두 모셔갔다. 연변에 살던 김광협의 친척들은 소작농으로 가정 살림이 째지게 가난했다.세발의 막대를 휘둘러도 거칠 것 없는 살림인지라 김광협의 동생은 한쪽 눈이 먼 여성을 아내로 맞았다.동생 일가가 평양에 도착하던 날 김광협은 처 유명옥과 함께 역으로 마중을 나왔다.제수를 보는 그의 마음은 참 딱했을 것이다.그런만큼 그는 제수를 끔찍히도 아꼈다고 한다.순 농군으로부터 국가 간부가 된 동생은 처하고 불화했는데 그 일 때문에 형님한테서 모진 꾸지람을 들은 다음부터 가정화목을 지켰다는 것이 용정시 삼합진 북흥촌 노인들의 이야기다. 김광협의 6촌 형님 김병협은 북흥촌 이기희씨의 고모부이다.그 이씨가 회령 사탕공장에 있을때 들었다는 이야기는 김광협 일가의 생활상을 짐작케 한다. 『그러네까 64년도 일입네다.김광협 6촌형의 딸,내게는 고종사촌 되는 누이가 두만강을 건너 평양 갔다 오는 걸음에 우리집에 들렸댔습네다.그 고종4촌 말이 김광협 집 앞대문엔 보초가 다섯이나 서 있더라고 기래요.삼촌을 집에 모신 김광협은 아침 문안을 꼭 드리고 식사도 독상을 대접하더랍데다.김광협은 식구들과 식당칸에서 밥을 먹으면서 요리가 나오면 모처럼 온 조카딸에게 연신 넘겨주었다는 거디요.조카딸도 화룡영화관 해설질을 하던 남편과 함께 나중에 평양으로 불러들였디요』 ○남북 오누이 극적 상봉 그러한 북한과의 일변도 왕래가 변화를 일으켜 딴판을 맞고있다.중국의 조선족은 이념의 벽을 뛰어넘어 남쪽의 혈육과도 정을 통하게 되었다.두만강을 훌쩍 건너는 것보다 비행기나 배를 타고 우회하는 먼거리에 남한이 있을지라도 무척 가까워졌다. 지금으로부터 3,4년 전의 일이다.중국 조선족 한 분은 북과 남에 사촌형제들이 있다.그해 북에 건너가 4촌 여동생한테 남에 사는 형한테서 온 편지를 전했다.편지를 받아쥔 여동생은 흐느껴 울었다.얼마나 그립던 오빠였던가!여동생의 남편은 6·25전쟁 당시 조선인민군이 되어 남으로 밀고 내려갔다. 그분은 얼마있다가 남한의 사촌형님 집으로 갔다.형을 만난 그는 깜짝 놀랐다.형님이 앞을 못보는 장님이 되었던 것이다.6·25전쟁 당시 국군에 있었던 형은 어느 한 전투에서 인민군의 총에 맞아 소경이 되었다는 것이다.어찌 보면 매부의 총에 부상을 입었는지도 모를 일이었다.타의에 의해 혈육간에 살생을 해온 우리 민족처럼 뼈에 사무치는 한을 가진 민족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그분은 여동생과 형님이 중국에서 만나는 것이 어떠냐고 말했다.그러자 형님은 『소경인 내가 볼수도 없는 신세이고 만나면 여동생한테 서러움만 더 줄것이니 친척 동생더러 대신 가서 만나라』고 했다.결국 친 오누이의 만남은 무산되었지만 다른 혈육이 중국에서 뜻깊은 눈물의 상봉을 가졌다.그들은 만 한달간 한 집에 머물면서 한 많은 회포를 풀었다.그래서 두만강가는 이래저래 눈물 마를 날이 없는 모양이다.
  • 본사,「소대표지원… 공산당 지침」 발굴/랭던보고서

    ◎미군정청 입수… 좌익 투쟁정책 수록 ) 서울신문 특별취재반은 19 46년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릴 때 조선공산당이 소련대표단과 동일노선을 걸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자료를 긴급입수 했다.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NARA)이 소장한 이 문서는 미국대외정책(FRUS·1946년)에 들어있는 미군정 정치고문 랭던이 마셜 국무위원에게 보낸 보고서의 첨부물인 노획문서.당시 좌익의 선전및 시위는 소련대표를 지원하기 위해 중앙집중화한 형태로 조직된 공산당에 의해 통제되었다는 사실이 잘 드러나 있다. 이 첨부물들은 미 군정청 대공정보부대 장교들이 46년 5월께 입수한 것이다.조선공산당 부산시와 인천시인민위원회가 같은 해 3월말부터 4월3일까지 미소공동위와 관련,각 지역 지부 당원들에게 지시한 선전및 투쟁정책을 고스란히 담고있다.모스크바 3상회의 결과를 지지한 조선공산당은 이 문건을 통해 반민주적 정당과 조직및 개인이 포함된 친일파 반역자는 철저히 배제돼야 한다는 당 기본노선을 밝혔다.그리고 임시정부 구성 협의대상이 선정되면 미국측이 최우선 해결과제로 내세우는 38선 철폐를 비롯,경제·행정적 문제등은 자연히 해결될 것이라는 소련대표의 주장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인물속성도 소련측과 대동소이하게 박헌영 여운형 허헌 김두봉 김일성 이주하 최무정 김원봉등은 임시정부 협의대상으로 최적격자로 분류해 놓았다.이어 이승만 김구 안재홍 김성수 조완구 조만식 장덕수 조소앙은 배제돼야 할 반동인사,김규식 김병로 홍명희 등은 찬·반탁이 명확지 않은 중도파로 못박았다. 이와 더불어 팸플릿과 영상물 뿐만 아니라 신문·잡지등 간행물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것과 모든 조직과 인민을 총동원,미소공위에 결의문과 청원서·서신등을 보내는 운동전개등 투쟁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서울신문 발굴 「공산당 지령문」을 보고/“추측 입증한 가치있는 사료”/당시의 정황과 일치… 신뢰도 높아/김창순 북한문제연구소 이사장 해방직후 한반도를 둘러싼 미소협상에서 조선공산당이 소련의 입장을 옹호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문서가 발견되기는 처음이다.이러한 상황에서 서울신문사가 미국립공문서보존관리국에서 입수한 조선공산당 지령문은 상당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또 1945년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서도 이 문서는 상당한 신뢰도를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남한 공산당이 반탁에서 찬탁으로 돌아선 것이 46년 1월2일이고 당시 남한 공산당 책임자였던 박헌영은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리기 전인 46년 1월과 4∼5월쯤에 북한을 비밀리에 방문했다.미소공동위원회에 대비한 북한 공산당 그리고 남한 공산당의 역할에 대해 논의한 바가 있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추측이었다. 그리고 이 시기는 소련군 사령부가 조선공산당에 대해 사실상 모든 지휘 감독 권한을 행사한 시점이기도 하다.소련이나 북한의 직접적인 문서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계를 갖고 있기는 하지만 조선공산당이 소련과 일사분란하게 보조를 맞추었다는 사실을 입증하고 있다.특히 해방 당시 수집한 정보보고와 각종 문건들을 정리 분석한 첫 문서라는 점에서도 주목을 끈다.이 문서에서 보여주는 투쟁방법등은 오늘날 북한이 상투적으로 사용하는 선전선동과 맥락을 같이한다.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북한을 다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 미군의 한반도 진주(새로 쓰는 한국현대사:4)

    ◎「소군 남진」에 당황 “38이남 접수” 명령/하지 24군단장에 “군정기구 창설” 임무/남한정보 부족속 오키나와서 「골격」 완성/선발대 B25 2대로 9월6일 김포공항에 전세계가 일본의 태평양전쟁 항복소식에 숨을 죽인 1945년8월15일.그 지루한 대전이 끝나던 여름날,오키나와에 있는 미 제24군단에 한통의 특별지시가 떨어졌다.필리핀 마닐라의 태평양사령부로부터 날아온 특별지시 제14호였다.미국의 한반도점령지가 북위 38도선 남쪽이라는 사실을 처음으로 밝힌 이 문서는 24군단으로 하여금 작전에 필요한 계획을 세우도록 명령했던 것이다. 이날 저녁 오키나와에는 천황의 항복조칙이 발효되었음에도 폭탄을 실은 일본전투기가 날아들었다.또 다른 가미카제(신풍)들은 일본 본토주위를 순항중인 미 제3함대 순양함을 공격했다.그러나 미국은 그까짓 산발적 저항에는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었다.다만 신경을 써야 했던 지역은 오키나와에서 자그마치 1천6백9㎞나 떨어진 한반도였다.전쟁이 끝난 마당에 한반도를 더이상 「힘의 공백지대」로 방치해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련의 남진소식은 미국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소련이 인천을 점령한 데 이어 해군을 서울에 보냈고,8월15일에는 서울정부를 세운다는 보고가 들어온 터였으니까….하지만 소련군의 남진은 많은 부분 과장되었다는 것이 보편적 견해다.소련군은 8월25일이 지나서 38도선을 남쪽으로 약간 비켜선 개성까지 왔었다는 것이다.소수의 소련군이 서울까지 정찰했다는 설이 있기는 하다. 미 제24군단에 북위 38도선 이남을 대상으로 한 점령계획수립명령이 떨어졌을 때 소련군의 한반도작전을 살펴보자.소련군 작전은 극동전선 왼쪽을 맡은 제25군사령관 I·M 치스차코프대장 등이 쓴 회고록의 한 부분 「제25군 전투행로」에 잘 나타난다.이 회고록에 따르면 8월15일에 함북 나진항구와 시내를 완전장악하는 한편 청진항에도 일부병력이 상륙한 것으로 되어 있다.8월12일 새벽 제358해병대대의 상륙으로 시작된 나진전투는 2일동안 끌었다. 이에 앞서 소련군은 8월9일 대일전에 뛰어든 즉시 제10급강하폭격기사단등의 비행부대들이 웅기·나진·청진을 폭격한 바 있다.대일전에 참가했던 해군대장 S·E 자하로프는 뒷날 회고록 「조선해방을 위한 투쟁에서의 태평양함대」를 통해 10일까지 6백16회의 비행기록을 남겼다고 적었다.이 출격에서 일본 수송선 격침 11척,파괴 11척의 전과를 올렸다는 것이다. 이때의 프라우다는 「함정들이 웅기를 향하는 도중 관측자들의 눈에는 붉게 타오르는 하늘이 보였다.우리 비행사들의 폭격을 받아 타고 있는 군사목표물이었다」고 보도했다.어떻든 속도전으로 한반도 북단을 몰아붙인 소련군은 8월16일 웅기에서 열린 환영집회에 참석한 정도였다.한반도북단을 점령한 소련은 프라우다 등을 통해 전쟁영웅과 주민 사이에 얽힌 미담들을 만들어냈다.정치성 공작이 재빨리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제 오키나와로 다시 돌아올 차례가 되었다.미 제24군단이 제10군단으로부터 한국점령임무를 물려받은 것은 한반도 38도선이남 점령계획수립명령이 떨어지기 3일 전인 8월12일.그리고 군단장 J·R 하지중장에게 주한미군(USAFIK)사령관이라는 새로운 지휘권이 8월19일에 부여되었다.또 38도선 남쪽 일본 육·해·공군과 예비군 항복을 접수할 때 태평양사령부를 대신하는 임무도 통보받았다. 그러나 제24군단 참모들이 가지고 있는 한국에 관한 지식은 전무한 상태였다.1945년4월에 간행한 「제니스 75」라고 부른 한국에 대한 육·해군합동정보처의 보고서가 고작이었다.이 자료 역시 점령작전을 위한 전술공격용일 뿐 정치·경제·사회분야를 다룬 정보는 거의 없었다.심지어는 오키나와에서 붙잡힌 일본군 소속 한국인 포로를 통해 정보를 얻어내려 했으나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 한국에 주둔한 일본군의 전력파악도 미진했다.그래서 한국은 자칫 위험하기 짝이 없는 특공대훈련장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한국주둔 일본군 전투력을 가볍게 볼 수 없는 것으로 평가한 기록도 여러군데에 나온다.일본의 통계자료에 의하면 종전당시 남한의 일본군병력은 3백15개의 각급부대에 23만2백58명이 배속된 것으로 집계하고 있다.이는 미 합동전쟁기획위원회(JWPC)가 밝힌 27만명에 비해 3만여명이 모자라는 숫자다. 미국으로서는 시간은 부족하고 정보는 더욱 모자랐다.하지장군은 미군에게 한국군정임무 부여에 따라 추진되었던 이른바 「블랙리스트」계획에 참여했던 10군단 소속의 장교들을 차출해 급히 불러들였다.10군단 행정처(G­1)의 프레스코대령과 에스테즈소령이 그들이다.이들에게 군정조직 완성임무를 주었는데,프레스코대령은 뒤에 미군정청(USIK,MG)의 민정장관이 되었다. 일본의 경우 군정을 실시하지 않고,기존의 일본정부기구를 활용키로 한 태평양사령부는 8월29일 지령을 내렸다.이 지령은 한국에서 항복조건 실행을 위해서라면 일본정부(조선총독부)를 잡아두라는 내용이었다.미군정이 일본관리들을 많이 쓰게 된 빌미가 바로 이 지령이었다는 것이 전사가들의 비판이다.제24군단은 마침내 9월1일 초기 한국정책의 지침이 된 부속서류를「군단 야전명령 제55호」에 포함시켜 발표하기에 이른다. 한국을 통치할 미군정기구는 이보다 앞서 8월29일 한 부대가 어떤 편제에 의해 창설되듯 오키나와에서 골격을 갖추었다.이에 따라 24군단에게는 주한미군의 참모기능이 돌아간 가운데 군단사령부와 본부중대,제10군단 대공포대는 군정임무를 맡게 되었다.그리고 8월29일 연합군 최고사령부는 조선총독부에게 특별명령을 하달한다.9월7일 미군이 한국에 상륙한다는 것과 일본군사령관은 8월31일 하오6시(토쿄시간)에 미 24군단과 무선접촉을 하라는 내용이었다. 한편 24군단은 모든 무선부호를 동원,서울과의 통신을 시도한 끝에 9월1일 서울을 지칭하는 말 『여기는 경성(게이조)』이라는 응답을 받아냈다.24군단은 당시 경성방송국을 통해 한국주둔 일본군 제17지역 사령관 우에츠키(상월양부)와의 교신의 길을 열었던 것이다.우에츠키는 몇 차례의 통화에서 질서를 방해하는 독립운동가들과 급료인상을 요구하는 인천항 노동자들을 미군 상륙의 위협적 존재로 떠올렸다. 그래서 24군단은 두 가지 종류의 전단을 서둘러 준비했다.미군의 한국도착이 임박했으니 질서를 유지하라는 것과 미군이 한국의 정부수립을 위해 진주한다는 내용이었다. 첫번째 전단 15만부는 9월1일 제380폭격단 B­24폭격기가 실어다 부산·서울·인천에 뿌렸다.9월5일에는 두번째 전단이 같은 방법으로 살포되었다.한·소국경을 넘은 8월9일부터 소련군이 북한지역에 전단을 뿌린 사실을 상기하면 초보적 선무공작도 미군이 5주나 뒤졌다. 한국을 향한 8대의 B­25가 9월4일 오키나와를 이륙했다.C·S 해리스준장이 지휘하는 선발대가 탄 이들 비행기 가운데 2대가 이날 하오 김포에 내렸다.나머지 6대는 기상이 나빠 회황했다가 9월6일 김포에 닿았다.그리고 나서 구축함과 항공모함의 호위를 받은 다섯줄 밀집종대의 전함들이 남중국해 파도를 가르기 시작했다.첫 호위함이 인천항에 닻을 내린 것은 소련군의 한반도점령보다 한달이 늦은 9월8일 아침이었다. ◎“한국 문외한… 「군정사령관」 부적” 평가/하지 그는 누구인가/“정글전의 권위자”… 군인으로는 상당한 명성 태평양전쟁 마지막을 오키나와에서 보낸 미 제24군단장 J R 하지중장.그 이후 주한미군 사령관 자격으로 24군단을 이끌고 한국에 왔던 일리노이주 골콘다 출생(1893년6월12일)의 그를 깊이 아는 사람들은 지금 썩 흔치 않을 것이다.그러나 한국현대사 속의 한 인물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태평양전쟁에서 「군인 중의 군인」이라는 명성을 얻었지만,육군사관학교 출신은 아니다.1917년 일리노이대학 재학중 보병예비대 소위로 임관했다.그해 같은 계급으로 육군에 정식편입되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뮤즈 아르곤 전투 등 유럽전선에 참전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육군대학,참모학교,보병학교,화학학교 등을 졸업한 그는 육군내에 몇 안되는 항공전술학교 출신이기도 하다. 제2차대전 중인 1942년11월 과다카날에서 일본군을 격퇴시켰을 때 제25사단 부사단장이었고,보겐빌작전에서는 아메리칸사단을 지휘했다. 그의 능력은 43사단에서 발휘되었다.부대를 전투단위로 조직,전투력을 향상시킨 야전 지휘관의 작전능력을 인정받았던 것이다.특히 솔로몬군도 전투에서 받은 전시공로훈장,훈공장 등은 빛나는 전공의 논공행상이라 할 수 있다. 그는 1944년4월1일자로 24군단에 전입되었다.24군단은 일본이 장악한 태평양상의 여러 섬을 수륙양용으로 공격하기 위해 그 해에 창설한 부대.호전적 부대로 알려진 24군단은 팔리우섬에서 시작하여 필리핀의 레이테 침공에 이르기까지 많은 전투에 참가했다. 미 육군성 전사실 소장의 하지 중장의 기록철을 보면 「자신의 부대에 대한 접근 방법이 독특할 뿐 아니라 간결한 비방록으로 유명하다」고 적었다.그리고 「정글전의 권위자」로 평가해놓았다.그러나 1945년 가을에 작성한 「루스 메시지」의 한 파일은 「아시아문제에 경험이나 지식이 없는 하지를 주한미군 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잘못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비판기록을 남기고 있다. 1963년11월12일 70살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특별취재반 ▲황규호 문화부 부국장급 ▲이용원 〃 기자 ▲김성호 〃 〃 ▲김경운 조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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