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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북한,정치범 수만명 수용소 억류/국제사면위,남ㆍ북한 인권상황보고

    ◎작년 실정 비판한 교수등 40여명 체포/한국선 분규ㆍ대북접촉 등으로 8백여명 구금 런던에 본부를 둔 앰네스티 인터내셔널(국제사면위원회)은 11일 세계 각국의 인권현황에 관한 연례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에 나타난 남북한의 인권현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북한◁ 일부 소식통들은 북한의 정치범이 수천명에 이르고 있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에 관한 인권정보를 얻기란 극도로 어렵기 때문에 이러한 전문을 확인할 길이 없다. 북한당국은 엄격한 검열을 계속하고 있으며 당국이나 뉴스 미디어는 구속이나 정치사건 재판,사형선고 등에 관해서 보도를 제공하는 일이 거의 없다. 비공식적 보고에 따르면 북한도 가입한 바 있는 시민적,정치적 권리에 관한 국제협약상의 집회 및 표현의 자유를 빼앗기 위해 투옥행위가 광범위하게 행해지고 있다. 김일성이나 그의 아들을 비판하는 사람은 장기간 감옥살이를 해야 한다. 지난 88년 정부의 경제정책을 비판하는 대자보를 내붙인 사건과 관련하여 평양 김책공업대학의 교직원과 학생 40여명이 체포된 것으로 보도됐는데 그후 이들이 석방됐는지 여부는 분명치 않다. 지난 88년 본위원회가 북한 방문객들로부터 얻은 정보를 기초로 하여 만든 88년도의 권위있는 보고서에 따르면 87년 4월 현재 수만명이 정치적인 이유로 전국 각지의 강제노동 수용소에 갇혀있었는데 청평회녕 온성 사리원 영변 영양 등에 산재한 이들 강제수용소의 수감자들에 관해서 더 이상 정보를 얻을 수가 없었다. 본위원회의 대표들은 작년 7월 평양에서 열린 「청년학생축전」에 초청을 받긴 했으나 북한당국이 제때에 비자를 내주지 않아 입국하지 못했다. 그 행사의 개막식때 일부 대표들이 본 위원회를 지지하는 깃발을 들고 가다가 보안요원들에게 얻어맞았으며 그들은 그 깃발을 나꿔채갔다. 그러나 북한과 중국에서 인권을 준수할 것을 촉구하는 다른 플래카드들은 무사했다. ▷남한◁ 약 1백명의 양심수를 비롯하여 8백여명이 반정부 활동 때문에 투옥되어 있다. 또한 수천명이상의 인사가 노조활동ㆍ가두데모나 북한에 대해 동정적인 태도를 갖고 접촉하려 했다는 이유로 잠시나마 구금됐었다. 외부와의 연락을 금지한 상태에서 구금이나 고문으로부터 인권을 보호하기 위한 방안들이 지난 수년간 마련되기는 했으나 때때로 무시되었으며 일부 정치인ㆍ수감자들은 고문을 당했다고 호소했다. 정부채널을 벗어난 반정부 인사들의 대북한접촉 기도와 주요 산업에서의 노동쟁의,재야단체의 노태우대통령 사퇴운동 등에 뒤이어 정치적인 체포선풍이 일어났다. 경찰ㆍ검찰ㆍ안기부ㆍ보안사로 구성된 공안합동수사본부가 89년 4월3일 설치되었으며 그해 6월19일 해체될 때까지 3백17명이 정치적 혐의로 체포되었다. 주요 정당들이 지난 88년 국가보안법 개정에 합의했으나 그 법은 아직도 막강한 채로 남아 있으며 군보안기관이나 민간인들로 구성된괸 보안기관이 정치사건 수사에서 행사하는 역할은 감소되지 않고 있다. 비공식보고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8월까지 체포된 사람은 근로자 3백여명,학생 2백70명,교사 60명이며 반정부 정치단체 멤버와 출판인ㆍ예술가,그리고 강제철거를 거부한 행상들도 상당수에 이르고 있다. 북한을 방문했다는 이유로 5명이 국가보안법에 따라 재판을 받았고 이밖에 10여명은 북한과의 직접접촉을 주창,또는 기도했으나 그러한 행위를 고지하지 않은 죄로 입건되었다. 5월중순부터 8월 사이에는 수천명의 교사들이 교원노조설립을 위한 평화적인 집회와 기타 지원행위로 말미암아 체포되었다.
  • 북한 9기 인민회의에 비친 권력구조

    ◎「혁명2세대」부상… 김정일체제 구축/세대교체 가속… 50대이하가 55.8%차지/「세습」기반의 핵심… 정책집행 실무 도맡아 북한을 지배하고 있는 권력층의 55.8%가 50대 이하로 분석돼 김정일후계체제 중심의 점진적인 세대교체가 진행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10일 당국이 지난 5월24일 열린 북한의 제9기 최고인민회의에서 구성된 핵심권력층인 로동당 59명,최고인민회의 56명,정무원 88명 등 총 2백3명중 겸직을 제외한 1백47명을 대상으로 조사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이들 연령은 50대 이하가 전체의 55.8%(50대 79명,40대 3명)로 가장 많았고 다음은 60대 51명(34.6%),70대 11명(7.5%),80대 3명(2.1%) 등의 순으로 나타났다. 연령별 특징을 보면 김일성 오진우(인민무력부장) 박성철(부주석)을 위시한 70대는 권력핵심에 위치,정책 결정분야에서 실권을 행사하고 있으며 허담(외교위원장) 연형묵(총리) 등 주로 테크너크랫 출신인 60대는 정책결정과 행정집행기구의 실질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50대는 김강환(부총참모장) 김용순(당 국제담당비서) 등 친김정일세력이 대부분인 동시 세습체제를 대비한 다음 세대 핵심인물들로 이들의 출신성분이나 경력등은 알려지지 않고 있다. 출신지역이 알려지지 않은 72명을 제외한 75명에 대한 출신지역별 현황을 보면 북한지역출신(평양 7명,평남 6명,평북 11명,함남 15명,함북 17명,황해 2명,개성 1명)이 모두 59명으로 가장 많은 것으로 나타났으며 남한과 인접한 지역출신은 비교적 홀대를 받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다. 남한출신은 양형섭(제주출신ㆍ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의장) 여연구(서울출신ㆍ상설회의 부의장) 등 3명에 불과,그동안 남한출신 인물이 거의 숙청됐거나 심한 차별을 받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으며 이밖에 중국출신 10명,소련출신 3명으로 밝혀졌다. 또 혁명세대별로는 주로 빨치산 출신으로 구성된 65살이상 혁명 1세대가 34명으로 전체의 23.1%를 차지하고 있으며 혁명 2세대(55∼64살) 71명(48.3%) 혁명 3세대(54살이하) 42명(28.6%) 등으로 나타남으로써 혁명 2세대가 거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됐다. 60년대부터 행정계통에 등장하기 시작한 혁명 2세대는 김일성의 절대체제유지 강화 및 김부자 세습체제를 구축하는 주요기반이며 혁명 3세대는 73년 2월 조직된 「3대혁명소조」를 주축으로 한 신진세대로 김정일의 절대적 신임아래 세습체제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한편 해방이후 지금까지 북한을 이끌어 온 최고지배층은 김일성중심의 족벌 인맥,항일 빨치산 세대를 포함해 모두 3백여명에 불과한 것으로 분석돼 공산국가중 가장 세대교체가 폐쇄적이었던 것으로 나타났다.
  • 중국의 심계장 파한/북한반응 타진 일환

    【홍콩 연합】 중국은 한국과의 국교수립에 관해 공식적으로는 부인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장관급인 중국국무원심계서 심계장을 서울에 파견하고 대한항공에 영공통과권을 허용하는 상반된 행동을 취하고 있는 것은 한국과의 외교관계 수립때에 예상할수 있는 북한측의 반응을 타진하기 위한것 같다고 9일 홍콩의 대만계 신문 성도일보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이날 「중공,남한과 외교관계 수립 놓고 장난」이란 제목의 국제정세분석 기사에서 중국과 한국은 다같이 국교수립 문제를 놓고 완전 거부하거나 그렇다고 수락하지도 않은 엉거주춤한 상태에서 밀고 당기고 있는데 이는 모두 북한을 자극하여 반응을 알아보기 위한것 같다고 주장했다.
  • 한반도 군축 이렇게/3국 대표의 시각

    3일간의 회의를 마치고 7일 폐막된 미 스탠퍼드대 주최 한반도군축 학술회의에 대해 3국의 대표들은 『첫 만남이라는데 의의가 있으며 서로의 입장을 타진하고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었다는데서 성과가 컸었다』(한국 정종욱 서울대 국제문제 연구소장),『결과적으로 이번 회의는 유익했다고 생각하며 남측도 또 미국도 모두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 앞으로도 이런 회의를 계속해 서로 이해를 넓혀야 신뢰를 가지고 문제해결에 나설 수 있다고 생각한다』(북한 이형철 평화군축 연구소 연구실장),『이번 회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이번 회의를 계기로 앞으로 진전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모두가 가질 수 있었다고 본다』(존 루이스 미 스탠퍼드대 국제전략군축 연구소장)고 말하고 있다. 회의가 끝난후 가진 3국 대표들의 뉴스 브리핑 내용을 간추려 본다. ◎정종욱 한국대표/“「정치관계 정상화」등 접근방법 달라/북한측 「미군 단계철수」등 종래 입장보다 유연” ­정치 군사적 신뢰구축이 이뤄진후 실제 군축을 실시할 경우 어떤 대상을 우선적으로 감축할 것인지 북한측이 구체적 얘기를 한것이 있는가. ▲구체적 얘기는 없었다. 우리는 공세적 무기의 우선 감축을 얘기했지만 북한은 여기에 대한 언급없이 전체로서의 기본적 틀을 강조했다. ­북한이 제시한 군축의 5가지 기본적 틀을 그 개념상으로만 보면 우리가 받아들이지 못할 이유도 없는것 같은데 다만 그속에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가 들어있고 여기엔 미국이 개입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기 때문에 수락할수 없는 것인지. ▲그런 문제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 보다는 이 5가지 기본틀 안에 정치적관계 정상화를 우선시킨다는 내용이 없기 때문이다. 북한은 정치관계의 정상화를 얘기하면 무조건 분단의 고착화를 들고나와 대화가 엇갈리곤 하는데 우리가 반드시 분단의 고착화를 의미하는 정치관계의 정상화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이번 회의에서 우리가 주장한 내용과 북한의 5월31일 평화안을 비교하면 공통점도 상당히 있는데. ▲신뢰구축의 중요성이 조금 부각되고 군사력 감축에서도 남북한간에 합의가 된후 3단계에 걸쳐 3∼4년내에 무력을 감축키로 한점,검증얘기,미군철수가 남북한간 무력감축과 상응해 단계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점 등이 다소 융통성을 보인 대목이며 이것이 어느정도 의견접근을 보일 수 있었던 점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어떤 구체적 조치보다 군축에의 철학적 접근이 완전히 다르다는 점이다. 북한의 기본적 방침은 역시 주한미군 철수와 핵무기 철거에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이번 회의이후 다시 이같은 회의가 열린다면 그 전망은. ▲이번 회의에서 토론된 내용이 앞으로 북한의 정책결정에 어느정도 반영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회의를 통해 서로 배우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남북한간의 정치관계라 할수 있다. ­이번 회의를 통해 얻은 것이 있다면 무엇을 들수 있는가. ▲북한은 점점 고립되고 있는데,지난 2년간 급변하는 주변정세에 비쳐볼때 이같은 고립자체가 위험한 것이다. 이번 회의에서도 서로 쓰는 용어의 개념에 대한 해석이 서로 달랐고 이의 조정을 위해서도 서로 만나 배울 필요가 있고 북한을 대화로 끌어내야 한다. 또 서로 만나는 과정에서 북한도 우리 입장을 좀더 이해할 수 있고 자신의 입장에 어떤 모순이 있는지 납득할 수 있도록 대화가 이뤄진다는 것이라 할수 있다. ­북한학자들의 태도가 과거에 비해 달라진 것은 없는가. ▲공격적이 아니었고 대화를 하려는 자세를 엿볼수 있었다. ◎이형철 북한대표/“남한서 미 핵 철수해야 핵 개발 중단/「통일합의 없는 신뢰구축」 분단 고착화 의도” ­북한은 불가침선언은 남북한간에,평화협정 체결은 미국과 북한간에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면서 굳이 3자회담을 고집하는 이유가 무엇인가. ▲우리의 기본입장은 3자회담이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남측이 3자회담을 구실로 대화를 거부하므로 하루빨리 대화를 재개할 생각에서 남북이 먼저 회담을 갖자는 것이며 그러다보면 미국문제가 제기돼 결국은 3자회담이 될 것이다. 두 갈래의 쌍무회담제기는 대화교착을 타개하기 위한 돌파구라 할수 있다. ­북한은 군축의 5가지 기본적 틀에 대해 먼저 포괄적인 합의가 이뤄져야 한다고주장하는데,그러면 이같은 합의가 어떤 선에서 이뤄져야 한다고 보는가. 가령 고위 당국자 회담인지 아니면 남북정상회담인지. ▲기본입장은 남북한과 미국의 3자가 만나서 얘기하면 군사 당국자간의 직통전화 개설ㆍ운영 같은 것은 쉽게 이뤄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다음 무력감축이나 전면개방 같은 문제에 대한 협상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군축이라하면 좁은 의미에서의 군비감축과 넓은 의미에서 군비통제와 군비감축을 모두 합친 포괄적 군축의 2가지 의미가 있다. 북한이 얘기하는 군축은 어떤 의미인가. ▲실질적인 군비감축,영어로는 disarmament라 할수 있다. 이번 회의에서 느낀 것은 남측은 정치적 신뢰구축을 강조하고 있는데 남북한의 불신은 분열에서 생기는 것이다. 남북한이 통일로 나간다는 원칙에 합의하지 않고서 어떻게 군사적으로 서로 대결하지 않을 것을 확신할 수 있느냐. 통일에 합의하지 않고 신뢰 구축조치만을 논의하자는 것은 결국 분단을 고착화 시키려는 의도로 밖에 볼 수 없다. ­지난 6월15일 한국의 재야 각계 인사들은한반도군축과 평화통일 선언에서 북한에 대해 독자적인 핵무기 개발을 중지하고 핵안전 협정에 조인하라고 요구했는데. ▲가령 남조선에서 미국이 핵무기를 철수시키라는 요구가 받아들여 진다면 우리도 그런 요구를 못받아 들일 이유가 하나도 없다. 그것이 전제 조건이다. ­그렇다면 그런 전제 조건이 이뤄지지 않으면 핵안전 협정도 체결되지 않는가. ▲현재로선 그것이 조건이다. ◎존 루이스 미 대표/“다음회의 개최 합의… 성급한 기대 금물/한국ㆍ유럽 현실달라 유럽식 모델 적용 의문” ­이번 회의에서 남북한이 서로 자신의 주장을 했는데,접근한 내용이 있었는가. ▲학자적인 입장에서 같은 이슈를 놓고 이야기 한것은 사실이지만 의견이 서로 달랐으며 합의 된 것도 없었다. 학자들은 자신의 의견을 개진할 뿐이며 합의에 이르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나는 이번 회의를 통해 많은 것을 배웠으며 모두가 앞으로 진전을 이룰 기회를 가질수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이같은 회의를 다시 개최하기로 합의를 했다는데. ▲다음에 다시 회의를 하기로 한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언제 다시 기회를 열기로 한것 등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결정된 바 없다. ­한국 대표단은 한반도에서도 유럽식 군축모델을 적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내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나로서는 유럽식 모델이 뭔지도 자세히 모르겠고 유럽에서는 그쪽 나름대로의 현지사정이 있고 한국은 유럽과는 다르기 때문에 유럽모델이 한반도에 그대로 적용되려는지는 모르겠다. 예컨대 나토(북대서양 조약기구)와 바르샤바 조약기구는 서로간에 전쟁을 치른 경험이 없지만 한국에서는 분명히 남북한간에 전쟁을 겪었었다. ­북한은 남북한과 미국간의 3자회담을 주장하고 있는데, 이번 회의는 비록 학술회의라고는 하지만 실질적으로 3자회담의 성격을 띤 것이라고 할수는 없는가. ▲이번 회의는 각국의 학자들이 개인 자격으로 참석한 것이며 이들이 대표의 자격을 띤 것은 결코 아니다. 따라서 이번 회의를 놓고 3자회담 운운하는 것은 있을수 없는 일이다. 실제로 남북한간에 2자회담이 진행되고 있지 않은가. 3자회담문제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고 말할것도 없다. ­이번 회의의 과정과 결과를 보고 군비통제에 있어 남북한이 장단기적으로 보아 협력과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는가. ▲어떤 합의에 도달하기까지는 수많은 과정이 연속적으로 이어져야 한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40년이 되도록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군비통제와 안보등의 어려운 문제가 어느날 갑자기 해결되기는 어려운 일이다.
  • 자유인 김현희 서울신문과 첫 단독인터뷰

    ◎“시장서 쇼핑해도 저를 알아보는 사람 없어요”/김일성 기만 깨닫고 증오감 느껴 자백/남해안 바닷가ㆍ제주도 가보는 게 소원/성경ㆍ이야기국사 등 읽으며 사회적응 노력/통일 앞당겨져 부모ㆍ형제 빨리 만나봤으면… 김현희는 역시 예뻤다. 그녀에 대해서는 두가지 측면에서의 관찰이 가능하다. 하나는 북한의 선발된 특수공작원으로서 1백여명이 넘는 무고한 KAL기 승객과 승무원을 무참하게 살해한 테러리스트였다는 점. 또 하나는 만일 그녀가 이같은 기구한 운명을 타고나지 않았던들 그녀 또한 양가의 맏며느리로서 남편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아내이며 주부로서 일생을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 한 여인이 아닌가 라는 것이다. ○유족들에 용서빌어 따라서 「테러리스트」와 「미녀」를 동시에 만나 『당신은 스스로를 미인이라고 생각하는가』라는 무차별 질문공세를 펴야만 하는 기자의 심정은 착잡했다. 『저는 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한 적이 없습니다. 저는 부족한 점이 많고 평범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너무나도 큰 죄인을 살려준 것은 과분한 은혜입니다. 대한민국과 인민들이 살려주신 의미를 바로 알고 열심히 살아가려고 노력하겠습니다』 김현희는 지금 용서를 빌고 있다. 하나님의 용서를 기구하며 유족들의 용서를 바란다. 그러나 그 용서는 힘든 것임을 그녀 자신이 너무도 잘 안다. 『성서를 읽지 않고 하나님을 모를 때는 왜 나만 이렇게 기구한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기구한 운명을 비관하고 생의 의욕을 잃고 고민하기도 했습니다. 여기와서 하나님을 알고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성서를 읽음으로써 이런 시련속에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있다고 감사하는 마음입니다』 흰 칼라를 받친 보라색 투피스에 머리를 묶은 김현희는 화장기를 거의 느끼지 못할 정도로 분만 가볍게 바른 얼굴이었다. 특별회견이 진행되는 2시간30분 동안 그녀는 때로는 입술을 깨물며,때로는 미소짓는 여유를 보이며 최근의 일과 신앙생활,앞으로의 생활계획과 소망,자신의 의식변화,북한에서의 공작원선발과정 및 훈련내용,김일성체제에 관한 인식,북한의 체제변화예상 등에 관해 또박또박 답변했다. 회견도중 어느 대목에서는 긴장이 되는 듯 심호흡을 하기도 했으며 대담하는 기자를 바라보기도 했으나 대부분은 눈을 약간 아래로 깔고 깜박거렸다. 현재 김현희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사회에의 적응문제이다. 본인의 표현대로 『사면은 됐으나 저지른 죄는 가셔지지 않았으며 유가족의 슬픔도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며,직업선택도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또 그럴 상황도 아니다. 『지금 생활면에서 불충분한 것은 아닙니다. 다만 이북에서 성장했으며 큰 죄를 지은 사람을 인민들이 어떻게 받아주실지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모든면에서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녀에게는 역시 문제가 있었다. 우선 어휘의 문제이다. 김현희의 말씨가 이북 사투리라는 점은 어쩔 수 없다고 치더라도 『인민들이 어떻게 생활하는가를 보기 위해 새벽에 남대문ㆍ동대문시장에 가 본 일이 있다』 『남한 자본주의 사회는 창발성을 발휘하는 사회』,또는 『저도 조선사람이기 때문에 된장국ㆍ김치를 좋아한다』라는 등 때때로 튀어나오는 생경하거나 북한전용의 어휘는 얼마간거부감을 일으켰다. 이날 김현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5번,「조선」이라는 표현을 3번이나 썼다. ○수영장 아직 못가봐 김현희는 아직 지방까지는 돌아보지 못했으나 서울근교는 거의 다 구경했다. 민족역사에 관심이 많아 덕수궁ㆍ창경궁ㆍ비원은 물론,독립기념관ㆍ현충사도 둘러보았다. 그녀가 시장ㆍ백화점 등에 외출할 때 처음에는 『아,김현희가 아닌가』라고 알아볼까봐 겁이 났었으나 특별히 변장은 하지 않았다. 『여기는 남에게 신경쓰는 일이 없는지 물건파는 사람이 한번도 알아본 일이 없었습니다』 현재 상태에서 김현희가 제일 가보고 싶은 곳은 남해안 바닷가와 제주도이다. 『북한사람의 소망은 거의 그렇지만 저 역시 남해안과 제주도에 가보는 것이 꿈입니다. 제주도에 가는 것은 「언니들」과 의논해 본 일이 있으나 아직 실현되지 못했으며,남해안에서는 수영을 하기보다 그곳 경치를 보고싶기 때문입니다』 그녀의 수영실력은 공작원훈련을 통해 2㎞까지 헤엄칠 수 있는 정도지만 남한에서는 아직 수영해 본 일이 없다. 김현희의 사회적응에 있어서 다른 하나의 문제는 의식의 순화이다. 그녀는 아직도 명곡보다는 행진곡을 더 좋아한다. 이날 회견에 앞서 서울신문사의 협조에 의해 동석하게 된 일본도쿄(동경)신문과 아사히(조일)신문 기자들이 강아지 인형들을 선물했을 때 그녀는 『감사합니다』라며 기쁜 표정을 짓기도 했으나 28살이라는 그녀의 나이 때문이었는지 그것은 잠시뿐이었다. 『통일을 저해하는 88올림픽을 반대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일했습니다. 그것은 전투임무였으며 죄의식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중앙당을 위해,통일을 위해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생각했던 그녀의 테러의식이 순화되기 위해서는 더 많은 시간,침상의 베갯머리가 썩도록 눈물을 흘리고 참회해야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녀는 엄청난 결과를 빚은 KAL기 격추범행에 대해 비록 비행기가 떨어지는 현장을 목격했다거나 시체의 참상을 본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그 결과를 충분히 실감하고 있다는 사실은 인정할 수 있었다. 『제가 실제로 격추현장을 본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무고한 동족을 죽이는 잔인한 행위였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부모형제가 잘못될까봐 두려워 자백도 안했으나 진상이라도 바로 알려드려 유족들에게 사죄하고 다시는 지구상에 이같은 일이 없어야 한다고 생각해 자백하게 되었습니다』­그녀는 바레인에서 검거된 후 자살할 생각도 했었다. 또 법정에서 유족들에게 매도당했을 때도 『왜 그때 바레인에서 죽지 못했는가』라며 괴로워하기도 했다. 그러나 바레인에서의 자살생각은 검거에 따른 「공작실패」가 그 원인이었으며 사실상 기회가 없어 실행을 못했던 것 뿐이었고 법정에서의 괴로움은 『사람의 죄는 하나님이 판정해 주신다』고 목사님이 많이 위로해 주어 견딜 수 있었다. 김현희의 하루 일과는 대개 아침 6시30분 기상으로부터 시작된다. 일어나면 성경을 공부하고 청소ㆍ식사준비를 한다. 체조도 거르지 않는다. 8시부터는 식사,9시부터의 오전시간에는 수사기관 또는 다른 곳에서 의뢰하는 북한실태에 관한 원고를 쓴다. 오후에는 사회적응을 위해 역사소설ㆍ간증소설ㆍ교과서 등을 읽는다. 요즘 읽고있는 책은 간증소설과 김동길교수의 「너와나의 사랑을 위하여」이며,시리즈로 된 「이야기 국사」도 본다. 오후에는 지난날을 반성하는 수기를 쓰고 있으며 TV를 보거나 소설을 읽는다. 가끔 외출도 하지만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오늘(6일)아침 읽은 성경구절은 잠언 3장 5ㆍ6절이다. 『너는 마음을 다하여 여호와를 의뢰하고 네 명철을 의지하지 말라. 너는 범사에 그를 인정하라. 그리하면 네 길을 지도하시리라』­ 그녀가 매일 읽고 있는 성경 가운데 제일 좋아하는 구절은 야고보서 제1장 2절로부터 4절까지이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하려 함이라』 ○부모생존 위해 기도 김현희의 신앙생활은 지난해 2월부터 시작되었다. 고민하고 괴로워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수사관들이 성경과 불교서적 등을 갖다주며 읽어보도록 권고했다. 성명말씀은 처음 대해본 것이었는데,잠언중에 좋은 구절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과 모르는 단어가 많던 차에 어떤 사람으로부터 목사님을 소개받게 되고 지정된 장소에서 성경공부를 하게 되었다. 김현희가 이날 회견에서 잠시 입술을 깨물다 대답한 대목은 이런 질문 때문이었다. ­혹시 꿈에 부모형제나 고향산천을 보는 일은 없습니까. 『그거야 뭐,누구나 다 부모형제 그리워하는 것 아닙니까. 지금도 꿈속에서 자주 봅니다. 범행을 자백하기 전에는 부모형제가 큰 영향을 받지 않을까 고민해 왔습니다. 지금은 수용소에서 심한 고통을 받고 있을 것입니다. 저로서는 다만 기도로써 남북통일이 되어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그때까지 살아있기만을 바라는 바입니다』 김일성에 대한 김현희의 인식은 「위대한 수령」으로부터 「가장 증오하는 사람」으로 바뀌어 있다. 『그에 대한 인식은 검거 후 8일만에 자백할 때부터 달라진 것입니다. 자백하게 된 동기는 북한에서 남한에 대해 「미국의 식민지」이며 「군사파쇼정권」이라고 교육받았으나 그것이 아니며 김일성이지금까지 인민을 기만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 때문이었습니다. 자백을 하고 나서는 한때 김정일의 지시를 잘못 실천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혹은 한국의 일면만 보고 그런 것이 아닌가 하고 회의도 했었으나 날이 가면서 증오하게 되었습니다. 또 「미제」는 조선전쟁을 일으켰고 남한을 강점했으며 통일을 방해하는 철천지 원수라고 교육받았고,「일제」도 36년간 조선을 강점하고 학살ㆍ강탈을 일삼은 원수라고 해서 적대감정을 가졌으나 여기서는 생각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세계는 누가 누구를 지배하는 식민지가 아니고 서로 하나가 되어 도와가며 발전해 나가는 것이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18살 때 공작원으로 18살 때 공작원으로 선발됐던 김현희는 「통일을 위해 중앙당에 의해 선택된 사람」이라며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통일을 위해 목숨 걸고 싸워야 한다고 각오했다. 육체적ㆍ정신적으로 많은 단련을 받았다. 그녀를 감상적으로 「미녀」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산이다. 위장된 일본공작원화 훈련을 위해 81년과 82년 1년6개월에 걸쳐 일본인화교육을 받았으며,중국인화 교육도 받은 전문테러리스트였다. 그녀는 「이은혜」라는 일본인 여선생과 생활하면서 언어 뿐만 아니라 일본생활ㆍ풍습ㆍ지리ㆍ역사를 익혔다. 태이프를 통해 야마구치 모모에,가토 도키코,시마쿠라지요코의 노래를 배웠으며 지도를 놓고 신주쿠(신숙)의 이세탄(이세단)백화점은 어떻고,유락조(유락정)는 젊은이들의 영화관이 많다는 것도 배웠다. 따라서 선생 「이은혜」로부터는 거의 일본인처럼 되었다는 평가도 받았다. 신문과 「문예춘추」같은 잡지도 술술 읽게 되었다. 김현희가 「이은혜」를 일본에서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으로 생각하는데에는 근거가 있다. 은혜 자신이 일본 도쿄에서 태어난 일본인이라고 말했고,조총련계 학생들이 까만 치마에 흰저고리를 입은 것을 보고 부러워 어릴 때 그것을 해달라고 어머니에게 졸랐더니 『그것은 조선사람만이 입는 것』이라는 이유로 거절당한 일이 있다는 것을 말해주었다는 것이다. 또 은혜는 「조선사람」의 흉을 많이 보았다. 『조선사람은 밥먹고 물로 울럭울럭하며 입가심을 하지않나,국에 밥을 말아 훌훌 먹는다. 또 크기를 표시하는데도 일본사람들은 동그렇게 표시하는데도 조선사람들은 팔뚝을 내밀고 길이로 나타낸다』고 흉보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일본여인이라고 단정했다. 대학에 다닐 때에는 엄격한 통제로 인해,그뒤 공작원이 되어서부터는 사회와 동떨어진 생활을 해와 이성교제의 기회가 없었다는 김현희는 인터뷰를 마치고 일어서는 기자와 악수했다. 그녀의 손은 부드러웠으나 감춰진 힘이 느껴졌다. 역시 그녀는 웃어서는 안되는 테러집단의 예쁜 인형의 그림자였다.
  • 한국어 통일 국제회의의 의미(사설)

    우리는 단일민족으로 일컬어져 온다. 역사와 문화를 함께 하며 이 땅에 살아 내려온 것이다. 그것을 가장 극명하게 설명해 주는 것이 단일언어이다. 지구상의 어떤 나라들과 같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었으면서 종족이나 민족따라 말을 달리하는 복수언어 국가가 아니다. 함경북도의 사람이 전라남도나 제주도에 가서도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는 것이 우리나라이다. 사람들은 대체로 자기에게 주어져 있는 행복에는 둔감해진다. 우리 겨레가 하나의 언어로써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행복에 대해 둔감한 것도 그것이다. 그러나 이처럼 행복한 나라도 많지는 않다. 한 조사에 의하면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가보고 싶어하는 나라 가운데 으뜸으로 꼽은 것이 스위스였다. 그 스위스만 해도 모어말고 공용어만 4개를 쓴다. 독일어ㆍ프랑스어ㆍ이탈리아어ㆍ레토 로만어가 그것이다. 행정은 말할 것 없고 일상생활이 얼마나 불편할 것인가는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러한 나라와 우리나라의 언어생활을 비교해 볼때 우리의 행복은 금방 느껴질 것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방언이라는 것이 있다. 지역에 따라 억양ㆍ어휘에서 차이를 보이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큰 틀에서 차이를 보이지 않는 그 단일언어를 숱한 역사의 수난속에서 지켜 내려온다. 그 점에서 남북 아메리카나 아프리카 대륙을 비롯한 지구촌의 수많은 종족이 강자의 지배를 받으면서 제 겨레 말을 잃고 강자의 언어를 공용어화하고 있는 현실과는 엄청나게 다르다고 아니할 수 없다. 우리는 그렇게 자랑스러운 겨레인 것이다. 그런 자긍의 역사를 가졌으면서 2차대전후 남과 북으로 갈려 언어의 이질화 현상까지 심화시켜 온 것은 우리의 커다란 불행이다. 그 이질화 현상은 이념ㆍ체제의 차이로 해서 더 심화ㆍ가속화했다고 볼 수도 있다. 얼마전 국어연구소가 남과 북의 대표적 국어사전을 놓고 분석한 바에 의하면 북한이 쓰는 단어 38%가 남한에서는 알아듣기 어려운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남북회담도 통역을 세워야 한다는 우스개가 현실화 할 것인지도 모른다. 오는 12∼15일 중국 연변대학에서 열리는 우리말 통일작업을 위한 국제학술회의는 그래서뜻이 더욱 깊다. 이런 회의는 본디 남이나 북에서 열리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겠으나 그러지 못한 상황에서 한중 등 세계 6개국 언어학자 1백25명이 참가하여 우리말의 통일방안을 모색한다는 것은 내일에의 디딤돌을 놓는다는 것만으로도 의미 부여가 충분하다 할 것이다. 사실,우리말은 한반도의 남과 북만이 이질화해 가는 것은 아니다. 북한의 영향권에 사는 중국ㆍ소련의 우리말이 북한어화 해가는 것과같이 자유우방으로 번져난 남한 영향권의 한국어는 남한어화함으로써 지구촌의 한국어를 양분화해간다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 동유럽 각국이 개방되면서 미영 양국이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 수출에 경쟁을 이루고 있음을 보면서 「양분화 한국어」를 보는 시각도 착잡해지기만 하는 것이다. 세계의 한족어를 통일한다는 것도 중요하지만,이 과정에서 우리 겨레의 잃어버린 어휘찾기운동이 반드시 병행돼야 한다는 것도 제언해 둔다. 모국에서는 잃어버린 말을 외지에 나간 사람들은 고이 간직하면서 써내려 오는 경우도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번 회의에 북한도 참석했으면 한다. 민족동질성의 근본바탕은 동일언어에 있는 것이다.
  • 외언내언

    판문점. 남북한 대치의 상징이자 상호불신의 현장이며 가장 현재적인 경쟁터이다. 양쪽의 입씨름이 그것이고 정전위 회담장 탁자위에 꽂힌 유엔기와 인공기의 높이가 또한 그러하다. ◆지난 53년 회담이 열릴 때마다 양쪽의 기가 경쟁적으로 높아지던 끝에 천장에 닿을 듯하자 이 문제만으로 협상을 벌여 지금의 똑같은 규격과 높이가 됐다. 구릉들 사이로 탁트인 들판,군용막사뿐인 주위의 경관은 한적하고 평화롭기까지 하다. 공동경비구역내 양쪽 군인들은 모두 비무장이다. 보초교대때 병사들은 절도있게 움직이지만 구령이나 복창은 금지돼 있다. ◆남북대화에 관한 한 71년 8월20일 남북 적십자회담을 위한 파견원 접촉이후 그곳에서 진행된 남북회담은 모두 1백60여회나 된다. 적십자접촉,체육ㆍ경제회담,국회회담 예비접촉,고위급 예비회담이다해서 대화의 갈래도 다양하고 빈번했다. 그런데도 무엇하나 제대로 합의 성사된 게 없다. 남북 고향찾기 교환방문도 날짜까지 잡았다가 부질없는 꼬투리에 걸려 무산되고 말았다. ◆그 판문점 공동경비구역내 북측 지역을 오는 8월15일부터 「개방」한다고 북한측이 발표했다. 얼핏보면 남북한 전면개방및 자유왕래를 주장한 김일성 신년사의 후속조치일 듯하다. 그러나 정작 시행될 지는 의문이고 시행됐자 그들 지역이니 검증될 수도 없다. 별다른 의미도 없다. 그것은 그들이 군축을 제의하며 어느만큼 줄였다고 내세우지만 그 사실여부를 검증할 도리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어디까지나 대내외적 선전일 뿐이다. ◆북한측은 그동안 남한측이 휴전선일대에 견고한 콘크리트장벽을 구축했다고 주장해왔다. 없는 것을 있다고 우기고 철거를 주장해대니 거짓이 참말처럼 되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요컨대 그들은 별의미없는 「판문점 개방」과 「콘크리트장벽 철거」를 한데 묶어 본격적인 선전선동에 나선 것이다. 정치 군사문제가 토의되는 고위급회담에서 그들의 개방을 내세워 철거를 주장할 것이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속임수이다. 대화하려면 속임수나 어거지는 버려야 한다.
  • 스탠퍼드대 「한반도 학술회의」지상중계

    ◎“남ㆍ북한「선 신뢰구축ㆍ후 군축논의」바람직” 미스탠퍼드대 국제안보ㆍ군축연구소가 주관하는 「한반도평화와 안보에 관한 학술회의」가 남북한 및 미국학자 2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5일부터 동대학서 열리고 있다. 남북분단 이후 군축문제와 관련,3국관계자가 한 자리에 모여 토론을 벌이는 것은 처음있는 일로서,이번 회의는 커다란 국제적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학술회의에는 한국측에서 정종욱교수(서울대),북한측에서 이형철 평화군축연구소 군축연구실장,미국측에서 존 루이스교수(스탠퍼드대) 등 3국의 주요학자들이 참여하고 있는데,참석자들이 3국의 정책결정에 상당한 영향력을 미치는 인물들이어서 이번 회의의 비중을 더욱 높여주고 있다. 취재는 물론 기자들의 접근마저도 봉쇄된 채 진행되고 있는 회의의 토의내용은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한국측 참석자들은 남북한간에 군축과 관련,상당한 인식차가 있음을 확인했으며,북한측 이형철씨는 한반도의 평화와 안보에 관해 종전보다 적극적이고 솔직한 의견을 개진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군축과 관련해서 이번 회의에 임하는 3국의 입장을 정리해 본다. ◎한국의 입장/교류확대ㆍ군사정보 공개등 투명성 강조 남북한 군축에 대한 우리측 입장은 기본적으로 「선신뢰구축 후군축」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남북한체제가 어느 기간동안은 그대로 존속되는 것을 전제로 한 군비통제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남북한이 모두 현재의 국경선을 인정하고 상대방의 체제를 현실로 받아들여 평화공존하는 정치적 신뢰구축이 우선적으로 이뤄져야 하며,기초적인 신뢰조차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군사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우리측의 기본시각이다. 이러한 인식위에서 우리측은 그동안 군사문제 논의는 유보,일반적 신뢰구축을 위한 인적ㆍ물적 교류의 선행을 강조해 왔다. 그러나 최근들어 정부는 남북한간에 군사문제를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그 내용으로서 군사적 신뢰구축을 제시했다. 또 군사문제를 지칭하는 용어도 「군축」이라는 말보다 포괄적 개념인 「군비통제」라는 말을 씀으로써 군사적 신뢰구축이 선행돼야한다는 기본인식과 군축이라는 말이 일부 국민과 군에 줄 수 있는 거부감을 줄이려는 고려를 보이고 있다. 우리측은 이러한 「군비통제」의 개념아래 첫단계로 불가침협정 또는 기본협정 체결,상호 군사적 신뢰구축조치 등 기초적 여건을 조성하며 2단계로 공격적인 무기의 배치 및 수량제한을 거쳐 파기문제까지 논의한다는 것이다. 우리측이 군사적 신뢰구축의 단계에서 상정하고 있는 기본개념은 「투명성」이다. 즉 양측이 군사정보를 공개함으로써 상대방이 공격의사를 갖고 있는지 여부를 확인하자는 것이다. 우리측은 이를 위해 군사훈련의 상호통보 및 참관,연대 또는 사단급 이상의 배치ㆍ이동에 대한 정보교환 등을 제의해 왔다. 우리측은 이밖에 ▲비무장지대의 실질적 비무장화 ▲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설치 ▲군인사 상호교류 등을 통해 신뢰를 구축해 나가자는 제안을 내놓고 있다. 바꿔 말하면 상호군사정보를 공개하는 「투명성」을 보장하고 군사훈련을 억제하는 군사적 신뢰구축 과정을 거쳐야만 실제로 병력과 무기를 감축,폐기하는 군비축소가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 한국의 기본입장인 것이다. 군축의 시기에 대해서는 우리측의 입장은 유동적이다. 기본적으로 신뢰구축이 선행돼야 한다고 인식하고 있는 만큼 1단계가 얼마만큼 빨리 진척되느냐에 따라 2단계 3단계의 시기도 결정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측의 기본입장은 통일방안에서 기능주의적이고 단계적인 방법을 택하고 있는 것처럼 군축문제에 대해서도 군사적 신뢰구축을 거쳐 실질적인 군비축소로 이행하는 점진적 군비통제론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입장/검증기구 없이 단기간내 병력감축 주장 북한은 분단이후 계속 군축문제를 제기해 왔다. 그러나 북한은 그동안 우리에 비해 월등한 군사력을 갖추고 「남조선해방」논리를 버리지 않아왔기 때문에 우리측은 그것을 「선전공세」로 일축해 왔다. 우리측이 군축의 선결조건으로 군사적 신뢰구축을 강조하는데 반해 북한은 직접적인 군축을 주장하고 있다. 신뢰구축조치의 선행 없이도 곧바로 군비축소에 돌입할 수 있다는 입장인 것이다. 또 북한은 3단계에 걸쳐 최종병력을10만명으로 줄이자는 파격적 제안을 내놓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제안은 실현성이 의문시되고 큰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니다. 무기만 충분히 있으면 병력은 단기간내에 모을 수 있는 것이며 따라서 오늘날 군비축소의 개념은 바로 무기의 폐기,특히 공격용무기의 폐기에 그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설령 남북한이 병력감축에 합의한다 해도 현재로서는 이를 감시하거나 검증할 아무런 제도적 장치도 마련돼 있지 않은 실정이다. 따라서 북한이 내놓고 있는 군축제안은 사전에 이를 검증할 만한 군사적 신뢰구축조치들이 선행되지 않는다면 그 실현가능성은 그리 크지 못하다고 볼 수 있다. 남북관계자들은 그러나 지난 5월31일 북한이 중앙인민위원회ㆍ최고인민회의상설회의ㆍ정무원 연합회의에서 채택한 군축방안에서 북한측의 입장이 다소간 유연해진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측의 제안은 ▲남북신뢰조성 ▲남북무력감축 ▲외국무력의 철수 ▲군축과 그 이후의 평화보장 등 4가지의 내용을 담고있다. 이 제안에서 북한은 군축우선의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도 미군철수및 남북군축의 시기를 못박지 않고 「신뢰조성」이란 표현을 사용하는등 과거보다 한결 진전된 자세를 보였다. 또 미국을 포함한 3자회담 이전이라도 군축문제을 토의해아 하며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고위군사당국자간 직통전화설치 ▲군사연습 상호통보 등 우리측의 제의와 비슷한 내용도 제시됐다. 정부는 그러나 북한측의 조치들이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선결조건으로 내세우지 않고 있으며 회담장이 아닌 방송을 통해 일방적으로 발표한 사실 때문에 아직은 북한측의 진의가 변하지 않고 있다고 보고 있다. 다만 북한의 경제력으로 더이상 남한과 군비경쟁을 계속할 수 없는 현실과 국제무대에서의 고립심화는 북한으로 하여금 군축협상에 임하지 않을 수 없게 하는 요인들이어서 북한이 앞으로는 실질적이고 현실적인 군축에 적극적인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미국의 입장/정상회담ㆍ평화협정 등 거쳐 통일 이룩 한반도의 군축과 평화를 위한 미국의 입장은 제임스 굿비교수가 6일 주제발표를 통해 밝힌 한반도에서의 평화정착을 위한 5단계 방안에서 잘 나타나 있다. 미국의 제네바군축회의 대표를 역임한 굿비교수는 한반도의 안보와 협력을 정치적 조치와 군축방안으로 나눌수 있으며 완전철수와 핵무기 배치금지 조치이후에 통일이 가능할 것이라고 밝혔다. 굿비교수의 논지를 보면 정치적 조치는 상호신뢰 구축을 위한 것으로 고위급 회담개최,상호비방 선전중지,교류확대,불가침과 무력사용 중단선언,평화협정체결 등이 포함된다. 군축방안은 「군사적 작전통제」와 「구조적 군사통제」단계로 상정했다. 먼저 군사적 작전통제에는 특정군사활동에 대한 사전통보ㆍ병력규모 배치ㆍ장비 등에 관한 기초정보자표의 상호교환,위협적인 군사활동의 금지 등 조치가 있어야 한다. 구조적 군사통제에서는 군사작전통제단계보다 다음과 같은 높은 수준의 조치가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포괄적 감축협정을 통해 여러 단계에 걸쳐 남북한 모든 형태의 병력을 현수준보다 훨씬 낮은 수준으로 감축해야 한다. 둘째 포괄적 군사감축 계획의 일환으로 주한미군을 철수해야 한다. 셋째 한반도에서 핵무기 배치를 금지시켜야 한다. 이러한 정치적 조치ㆍ군축방안과 관련,여러문제들을 협의하고 선택하는 과정에서 남북 대표간의 대화채널을 확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실질적인 합의를 위한 틀을 만들기 위한 몇 단계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는 남북한간에 신뢰구축 및 제반법적 조치들이 합의되고 쌍방이 이 과정에서 책임있는 입장을 천명하는 단계이다. 둘째는 남북한과 제3국 사이의 관계를 증진시킬 조치들을 군사작전통제 및 구조적 군사통제와 병행시키는 단계이다. 셋째는 남북한관계의 정상화를 더욱 확대하고 군사작전통제 및 구조적 군사통제에 관한 추가적인 조치를 취하는 단계이다. 넷째는 남북한의 경제통합조치와 정치기관들의 연계,보다 높은 단계의 구조적 군사통제의 제반조치를 실행하는 단계이다. 한반도문제를 해결하는 실행가능한 군축실현의 순서를 총괄,배열하면 다음과 같다. ▲제1단계=남북정상회담 및 정례적인 남북각료회담,서울∼평양간 통신확대,이산가족 방문,군사훈련 참관▲제2단계=남북불가침,군사력 사용반대 선언,특정군사 활동의 사전통보 ▲제3단계=지상군의 첫단계 감축,주한미군감축,군사훈련의 규모와 형태제안 ▲제4단계=평화협정체결,미군철수,핵무기배치금지,검증 ▲제5단계=통일 한편 미국은 자국의 경제회복책의 일환으로 추진되고 있는 예산절감을 위해 한반도의 군비통제를 환영하는 것과 함께 그동안 동북아에서 누려온 주도적인 지위가 상실되는 것을 최소한으로 막기 위해 한반도의 군축문제에 적극 개입할 필요성을 느끼고 있다.
  • 북한의 판문점 일방개방 발표/실효성 의심스런 조치/중국계신문 보도

    【홍콩 연합】 북한이 오는 8월15일을 기해 판문점 공동 경비구역내 북측지역을 개방한다고 발표했으나 이는 동서독이 공동 합의하에 베를린 장벽을 철폐한 것과는 달리 일방적이며 또한 쌍방의 모든 주민들의 남북왕래를 규제하고 있는 현시점에서 실효가 의심스러운 조치라고 7일 중국계 신문 신만보가 논평했다. 이 신문은 이날 「조선의 베를린 장벽 무너질 것인가」라는 제목의 국제시사 논평기사에서 동서독의 베를린장벽 철폐는 쌍방의 합의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실제적으로 서독이 사회주의의 동독을 삼켜버렸는데 반해 남북한은 계속 대립하고 있으며 남한에는 국가보안법으로 남북왕래가 허가를 받아야할 사항이고 북한은 인민들의 해외출국마저도 극히 적은 상황에서 일방적인 개방은 실효가 없다고 밝혔다. 그러나 신만보는 남북한이 오는 8월 서울에서 처음으로 총리회담을 개최키로 한데다가 일방적이기는 하나 판문점내 북측지역을 개방한다고 발표한 것은 남북의 화해분위기에 작용하여 좋은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덧붙였다.
  • 통일정책ㆍ군축전략 세미나 중계

    민자당과 평민당은 5일 각각 63빌딩과 프레스센터에서 「6ㆍ29 3주년기념 대토론회」 「통일및 북방정책의 전망」이라는 주제로 정책토론회를 가졌다. 민자당토론회는 「민주화와 정치발전의 향후과제」 「북방정책과 통일전망」 「경제안정과 국민복지」 등 3개 분과로 나뉘어 진행되었으며 평민당토론회는 통일및 북방정책이란 단일 주제로 전개되었다. 이날 두 토론회 내용중 정부측의 통일정책 논리를 정리한 민자당토론회의 이홍구 대통령정치담당특보와 군축에 관한 구체적 전략을 제시한 평민당토론회의 지만원씨(군사전략가)의 주제발표 내용을 각각 발췌,소개한다. ◎북방정책과 통일 민자/새로운 민족공동체 꾸미는 작업/대결서 협력관계로 전환이 관건 ◇북방정책과 통일전망(이홍구 대통령정치담당특보)=국내외에서 역사적 전환기를 맞은 6공화국이 이를 통일로 향한 획기적 새 발상과 정책수립의 계기로 삼은 것은 당연하다. 「통일은 과연 무엇을 뜻하며 어떻게 추진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원초적 문제에 대해 다음 세측면에서 새로운 발상이 전개되었다. 첫째,통일은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미래의 창조라는 것이 뚜렷하게 인식되었다. 통일은 새로운 민족사회를 만드는 창조적 작업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둘째,그러한 통일의 미래상은 정치위주로 특히 국가체제위주로 논의되기 보다는 민족의 전통과 꿈과 삶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민족공동체의 창조를 중심으로 기획되는 것이 규범적 측면에서나 실현가능성이란 측면에서 다함께 바람직하다. 셋째,민족공동체 형성을 통한 통일의 달성은 여러 단계를 거친 긴 과정일 수밖에 없으며 이는 국민적 합의에 바탕을 둔 무한한 인내력과 치밀한 계획을 필요로 한다. 위와같은 새로운 발상에 입각해 대화ㆍ교류ㆍ협력을 통한 남북 관계개선의 돌파구를 마련코자 7ㆍ7선언이 나왔으며 공동체 형성을 위한 종합적인 청사진으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 발표되기에 이르렀다. 남북당사자간 협의와 병행해 이에 걸맞는 주변환경의 조성과 지역적 평화구조의 모색을 위해 유엔에서의 6개국 협의체안 제시가 있었다. 북한이 냉전시대의 고정화된 입장,전체주의 체제가 지닌절대적 경직성으로부터 다소나마 탈피해 대결관계를 협력관계로 전환시키는 노력에 동참토록 유도하기 위해 우리는 3면으로 압력을 가하고 있다. 그것은 7ㆍ7선언과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등 획기적 정책추진,우방 및 국제사회로 하여금 북한에 개방압력,북한의 동맹국들로 하여금 변화의 불가피성을 북한에 설득토록 하는 3면 전략이다. 이러한 3면으로부터의 개방화 압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아직 큰 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남북간에는 작은 변화의 가능성을 내포한 대화가 전개될 것이며 다음달로 예정된 총리회담이 그 첫번째 예이다. 남북대화나 교섭의 초점은 의제선정에 있지않고 대화의 형식이나 틀에 있다. 남은 문제는 북한이 우리 정부와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대화를 나눌 것인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다. ◎남북군축의 요체 평민/주한미군 전쟁억지력 설득을/정상회담서 정치결단 내려야 ◇남북한군축의 요체(지만원 전국방연구원책임연구위원)=군축은 안보전쟁시대에서 경제전쟁시대로 돌입하는 세계적인 변화 추세이다. 남북한간에각종 교류가 활발해지고 군사적 위협이 축소된다는 것은 평화적 통일을 위한 지름길이며 전제조건이다. 전 공산권의 정치ㆍ사회적 변화와 경제개발의 물결이 우리 북방외교정책과 이익을 같이하고 있으며 한소관계의 진전으로 북한의 체제고수 노력은 북의 고립화를 더욱 심화시켜갈 것이다. 주한미군이 대북전쟁 억제력만 행사하는 것이 아니라 아사아에서의 세력균형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북한에 납득시키는 것은 군축협상에 도움이 될 것이다. 또 주한미군은 남한의 핵개발을 저지하고 있으며 주한미군의 철수는 일본의 핵개발과 재무장을 촉진시킬 것이라는 점을 북한에 납득시켜 주한미군의 존재를 정당화시켜야 한다. 군축을 위한 전제조건으로 군축은 화해ㆍ개방ㆍ교류의 정치적ㆍ경제적 접근과 병행 실시되어야 하고 공세적 방어전략과 선방어 전략이 포기되어야 한다.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은 북한을 군축협상에 끌어들이는 데 가장 좋은 무기다. 주한미군이 전쟁억제력을 제공하고 있는 사이 남한은 과감히 감군을 실현,북한에 신뢰성을 보여줄수 있다. 군축의 추진전략으로는 일단 남북 정상회담에서 군축에 대한 정치적 결단을 내린 뒤 남북 공동위원회를 개최,기본원칙 등에 대한 실무접근을 봐야 한다. 각종 교류외에 휴전선 일대에서 물물교환 10일장,각종 연예행사,미술전 등의 민간활동을 증진해야 한다. 군축을 위해 비생산적인 FX사업포기선언등으로 남한이 솔선해 신뢰구축을 선도해야 한다. 각 정당의 범정당적인 연구기구를 설치하고 군과 정부는 최우수 인력을 선발,대북제안 내용과 대내작업에 대한 정책을 연구해야 한다. 북한에게 감축규모와 감축후의 인력ㆍ장비 등의 처리문제 등을 제안해야 한다.
  • 남북한 항만·공항 개방 추진

    강총리는 답변에서 최근 전대협이 추진중인 통일대행진등 남북 학생교류 움직임과 관련,『학생들의 대북 교류추진 문제는 합당한 절차에 따라 방북승인을 요청해 오면 남북 교류차원에서 전향적 자세로 적극 검토하겠다』고 전제하고 『그러나 남북문제는 상대방이 있는 만큼 일방적 행동은 자제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강총리는 또 『연말까지 치안확립이 안되면 내각이 총사퇴할 각오로 최선을 다하고 있다』며 『경찰중립화법은 곧 국회에 제출하겠다』고 말했다. 정동성체육부장관은 『오는 11월 방한하는 소련 체육부장관과 한소 체육교류 협정을 체결할 예정』이라면서 『오는 9월 북경 아시안게임을 계기로 중국과도 체육교류협정 체결을 추진하는 것을 비롯,쿠바·라오스 등 미수교국과의 체육협정을 추진하겠다』고 답변했다. 김창식교통장관은 남북한 교통망연결방안과 관련,『경의선과 경원선에 대해서는 남한측 구간의 복구계획을 수립해 놓았다』고 말하고 ▲필요시 일정한 지역의 항만과 공항을 개방하는 문제 ▲고속전철운영시 북한을 경유,시베리아철도 등 대륙의 육로와 연계하는 방안도 함께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 민단,조총련과 화합 모색/올 8ㆍ15계기 남ㆍ북한 교차방문등 제의

    ◎지위향상 대일 공동 로비도 추진 【도쿄=강수웅특파원】 재일본 대한민국 거류민단 중앙본부(단장 박병헌)는 일본에 거주하는 67만 한인사회에 있어서의 민단계ㆍ조총련계의 장벽을 해소하기 위해 오는 8ㆍ15광복절을 계기로 ▲조총련중앙과 민단집행부와의 조건없는 대화 ▲인도적 차원에서의 남북한 상호방문추진 ▲스포츠ㆍ문화ㆍ경제면에서의 상호교류 등을 제의키로 했다. 민단중앙본부는 이번 대화제의를 통해 구체적 공동추진사업으로 취업ㆍ공직채용 등 전 재일동포의 이익확보를 위한 대일본정부에 대한 로비활동을 공동으로 펼치는 것은 물론 의료분야 등 첨단과학기술부문에서의 공동연구ㆍ개발추진,노인홈(양로원)건설 등 전시효과적이 아닌 실질사업을 추진할 방침이다. 이와함께 남한출신 조총련계 인사들은 한국을,북한출신 민단계인사들은 북한을 각각 방문할 수 있도록 추진하며 오는 10월 북경아시안게임 때는 5백여명 규모의 공동응원단을 파견하는 문제등도 중점 논의키로 했다.
  • 새 실록 6ㆍ25 김학준:하

    ◎“핵투하도 불사”… 미 으름장에 DMZ설정 동의/“휴전 지체할 수 없다”… 투르먼,맥아더 해임/반공포로 석방으로 한­미 방위조약약 가조인/아이크 대통령 당선ㆍ스탈린 사망후 「정전협상」급진전 ▷제4기◁ 중국군의 남진이 계속되자 맥아더는 과감한 보복조치를 마련했다. 그는 50년 12월30일 본국의 합동참모본부에 대해 ①중국해안의 봉쇄 ②중국본토의 군수산업시설 폭격 ③장개석 군의 파한 ④장개석 군의 중국본토에 대한 견제공격을 건의했다. 그는 미국이 이러한 조치를 취하지 않고 한반도에서 전면철수한다면 중국군의 침공위협은 보다더 중요한 지역에 대해 가중될 것이며 그 결과 보다 많은 전력의 투입이 요청될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합참은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 보존에 주로 유의하면서 막대한 손실을 방지하기 위해 철수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까지 축차적인 방어작전을 수행하라』고 답변할 뿐이었다. 맥아더는 이 답변을 「명백히」 이해하기 어렵다고 주장하면서 『국련군의 전면철수를 피하기 위해 중국에 대해 보복조치를 취하든지,아니면 일본의 방위와 국련군의 전력보존을 위해 한반도를 포기하든지 양자택일해야 한다』고 맞섰다. 이에 대해 트루먼은 51년 1월13일 『공산군의 침략행위가 시정될 때까지 미국은 정치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침략의 결과를 결코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는 입장을 세계에 밝혀야 한다』고 전제한 다음 『최악의 경우 국련군은 제주도와 같은 남한 연안의 섬으로 철수해 전투를 계속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후임에 리지웨이대장 맥아더와 본국정부 사이에 이견이 오가는 사이 국련군은 전세를 수습하고 공세로 돌아섰다. 그리하여 국련군은 51년 3월 초순 이후 전선의 주도권을 장악했고 3월15일 서울을 재탈환했으며 3월30일께까지는 38도선까지 밀고 올라갔다. 이로써 한국전쟁을 국지화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다. 전황이 국련군에게 어느 정도 유리하게 전개되고 무엇보다 전전원상의 회복이 이루어질 것으로 내다보이면서 국련에서는 다시 휴전이 논의되기 시작했다. 한국전쟁에 참가한 서방진영의 국가들도 국련군의 38도선 재북상에 반대하면서 만일 미군이 단독으로라도 재북상하기로 결정한다면 자신들은 한국에서 철수하겠다는 의사마저 나타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트루먼은 중국과의 정치적 협상을 통해 휴전을 성립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리고 3월20일 맥아더에게 그러한 취지의 성명이 가까운 장래에 발표될 예정임을 통고했다. 맥아더는 트루먼의 이 결정을 좌절시키기로 결심하고 3월24일 본국정부와의 아무런 협의없이 중국에 대한 공식성명을 발표했는데 중국대륙에의 전면적 확전으로써 한반도문제를 해결지을 수 있을 것임을 암시함으로써 트루먼이 추구하려는 중국과의 협상을 사실상 어렵게 만들었다. 이 성명에 뒤이어 맥아더는 4월5일 하원 공화당 원내총무 조세프 마틴의원이 자신에게 보낸 3월2일자 편지에 대한 답장을 공개하여 트루먼을 더욱 격분시켰다. 아시아 중시정책을 강조하면서 논평을 요구한 마틴의 서한에 대한 이 답장에서 맥아더는 우선 트루먼의 유럽 중시정책을,그리고 유럽을 중시해야 하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아시아를 경시하는 경향을 비판했다. 결론적으로그는 『우리는 승리하지 않으면 안된다. 승리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했다. 맥아더의 3월24일자 공식성명을 보고 그의 해임을 결심했던 투르먼은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는 4월10일 라디오방송을 통해 맥아더의 해임을 발표하면서 『우리가 한반도에서 추구하고 있는 목표는 제한전에 의한 제3차대전의 방지』라고 선언했다. 맥아더의 후임으로는 8군사령관 리지웨이 대장이 임명됐다. 맥아더의 해임은 미국이 휴전을 향해 움직인다는 명백한 의사의 표시였다. 한편 공산군은 51년 4∼5월 춘계대공세를 폈으나 인명의 큰 손실을 겪었을 뿐이고,이 시점에서 전선은 완전히 교착됐다. 전선이 교착된 51년 5월 중순부터 미국과 국련에서 휴전논의가 활발히 일어났다. 특히 5월17일 에드윈 존슨 미국 상원의원이 국련이 휴전을 이끌도록 촉구하는 결의안을 제출하고 이 제의가 소련의 신문과 방송에 크게 보도된 것을 계기로 휴전논의는 더욱 활기를 띠었다. 예컨대 국련에서 리 사무총장과 캐나다의 레스터 피어슨 외무장관 및 미국의 애치슨 국무장관이 각각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선에서의 휴전안을 제의했다. 소련도 드디어 6월23일 국련대표 말리크의 연설을 통해 휴전에 동의했다. 통일을 염원하던 남­북의 한인들에게는 유감스런 일이었지만 쌍방의 참전국가들의 거의 예외없이 휴전을 바라고 있었다. ▷제5기◁ 이러한 배경에서 미국과 소련이 정전의 원칙에 합의함에 따라 7월8일 개성의 중심지 북방에 있는 지난날 유명했던 유곽에서 국련군쪽과 공산군쪽의 연락장교단에 의한 예비회담이 열렸다. 이어 7월10일 개성에서 본회담이 열렸다. 국련군쪽의 수석대표는 미해군 극동사령관 조이 제독이었다. 리지웨이 총사령관이 직접 뽑았다. 정전회담에서 공산군 대표들이 국련군 대표들을 자극해 국련군 대표들로 하여금 공공연하게 화를 내게 하여 회의장을 뛰쳐나가게 만드는 「충동작전」을 쓰거나 정반대로 몇시간씩 끌면서 지치게 만드는 「권태전술」을 쓸 것이라고 계산한 리지웨이는 따라서 국련군 수석대표는 어떠한 도발적 언동에 대해서도 침착하면서도 강경하게 맞설 수 있는 인물이어야 한다고판단했다. 즉 『6시간정도 앉아 있으면서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오줌누러 갈 생각조차 하지 않는』협상가가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리지웨이에게 조이는 적임이었다. 조이는 제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많은 훈장을 받았고 공산주의자들과 공산주의 이데올로기를 증오하고 있었으며 적을 굴복시키는 가장 좋은 방법은 적을 파괴하는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ㆍ소에 “전면전”통첩 조이 수석대표를 보좌할 대표로 리지웨이는 2차대전의 베테랑들로부터 뽑았다. 유럽전선에서 보병연대를 지휘했었고 이때 미8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호지스 소장,북아프리카에서 공중전을 지휘했었고 이때 미극동군 부사령관으로 있던 크레이기 소장,태평양전쟁에서 구축함전투를 대담하게 지휘해 용맹을 떨쳤었고 이때 미극동해군 참모차장으로 있던 버크제독이 선발됐다. 한국군으로부터는 제1군단장 백선엽소장이 선발됐다. 공산군쪽 수석대표는 남일중장이었다. 남일중장을 보좌하는 북한군대표는 전선사령부 총참모장 이상조 육군소장이었다. 정전회담에서 그는 파리가 얼굴에 앉아도 꼼짝 않고 앉아 「강철같은 자기억제」를 보여주려고 노력한 사람으로 알려졌다. 또 한 사람의 북한군 대표는 북한 육군 제1군단 총참모장 장평산 소장이었다. 중국군에서는 사방 소장과 등화 중장이 대표로 참가했다. 이들 가운데 사방이 사실상의 수석대표였고 남일은 이름이 수석대표였지 실제에 있어서는 사방의 지휘를 받는 것 같다고 국련군 쪽에서는 보았다. 회담도중 그는 동료 대표들과의 상의없이 발언했고 선전적인 문구 같은 것도 사용함이 없이 직설적으로 말했다. 양쪽 대표단들은 신경전을 거쳐 7월26일 다음과 같은 의제에 합의했다. ①전투행위를 정지하는 기본조건 아래 양군 사이에 비무장 지대를 설치하기 위해 군사분계선을 설정하는 문제. ②정전감시기구의 구성과 권한 및 기능을 포함하여 정전을 성립시키기 위한 구체적인 조처들을 결정짓는 문제. ③포로에 관한 결정. ④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에 권고하는 문제. 의제에 대한 합의와 더불어 7월28일 첫번째 의제에 대한 토론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합의가 쉬울 것 같아 버크 제독 같은 이는 본국의 아내에게 『가을이 되어 사과가 익었을 때는 나는 과수원이 있는 이곳에 있지 않을 것』이라고 썼는데 회담은 길어지면서 10월25일부터 회담장소를 판문점으로 옮긴다는 것 정도에 겨우 합의할 수 있었다. 회담이 이렇게 길어지면서 서방 참전국들은 초조해졌다. 이점을 간파한 공산군쪽은 자신들이 유리한 입장에 있다는 자신감에서 국련군쪽 대표들에게 모욕적인 용어마저 썼다. 호지스 소장을 「거북이 알」이라고 불렀고 조이 수석대표에 대해서는 『이름이 누구인지는 모르겠으나 어떻든 수석대표인 사람』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리지웨이는 견디기 어려웠다. 『이처럼 공개적으로 모욕하고 나오는 적에게 양보를 해야 한다는 말인가. 우리에게는 부드러운 비단보다 강한 쇠가 필요하다』라고 본국정부에 호소했다. 이에 미국은 소련에게 『공산군쪽이 협상에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면 미국은 만주의 공산기지를 폭격하고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여 필요하다면 소련과 전면전에 돌입할 것』이라는 「공갈」을 전달했다. 이와 동시에 트루먼은 중국에 대해 핵무기를 쓰는 문제를 검토했다. 미국의 이와 같은 강경한 자세를 보면서 공산군쪽은 한발 물러서 『현재 쌍방의 접촉선을 군사분계선으로 삼는다는 원칙아래 앞으로 체결될 정전협정이 지정하는 시간에 쌍방은 이 분계선으로부터 2㎞씩 철수하여 그 지역을 정전 동안 비무장화 한다』는 국련군쪽 제의를 받아들였다. 이때가 52년 1월27일이었다. 이처럼 군사분계선에 관한 합의가 일단 이루어졌다는 것은 한국전쟁의 전체 흐름속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군사분계선 문제에 매듭이 지어지면서 쌍방은 「외국군대의 철수와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관해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들에 권고하는 문제」를 다뤄 나갔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합의가 쉽게 이뤄졌다. 즉 정전회담 발효 3개월 안에 쌍방에 관련된 나라들의 정부사이에 「고위 정치회담」을 열기로 한 것이다. 정전의 세부사항에 대한 협상에서도 진전이 있었다. 52년 5월2일 양쪽은 스웨덴ㆍ스위스ㆍ폴란드ㆍ체코슬로바키아의 네 나라로써 중립국 감시위원단을 구성하기로 합의한 것이다. 공산군쪽은 소련을 중립국이라고 우기면서 중립국 감시위원단에 포함시키려고 애를 썼으나 끝내 좌절되고 말았다. 나머지 문제는 포로교환의 문제였다. 정전이 성립되면 포로교환은 당연히 쉽게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중요한 문제들이 모두 해결된 이 마당에 이 문제는 빨리 매듭지어져 정전협정이 곧 체결될 것으로 기대됐다. ○2년 1개월만에 매듭 국련군쪽은 우선 「자발적인 송환」의 원칙을 제의했다. 국련군에 포로로 잡힌 공산군에게 돌아갈 것인지 남을 것인지 선택할 권한을 주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공산군쪽은 「자동송환」의 원칙을 내세웠다. 모든 포로들은 포로 개개인의 의사에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되어야 한다는 것으로 공산군쪽은 이 원칙을 관철시켜야 국련군쪽에 잡혀 있는 자신들의 장병들이 서방세계를 선택하지 않고 전원 돌아올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다. 협상이 오래 끌면서 공산군쪽은 국련군쪽이 세균전을 펴고 있다는 선전전을 벌이기도 했다. 한편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는 공산포로들이 포로수용소 사령관 도드 준장을 납치하는 사건을 일이키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국련군쪽은 북폭을 강화하기도 했다. 협상이 지지부진한 가운데 미국에서는 52년 11월 대통령선거가 치러져 「조기정전」을 내세운 공화당의 아이젠하워가 당선됐다. 이로써 53년 1월 공화당 행정부가 출범하게 되었으며,휴전협상에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소련에서는 53년 3월 스탈린이 죽으면서 정전을 향한 발걸음을 빨리 했다. 정전협상의 가능성이 매우 높아지자 이대통령은 통일의 기회가 사라진다는 실망감 속에서 6월19일 국련군에 수용되어 있는 공산포로들 가운데 송환을 거부하는 반공포로 2만5천여명을 극비의 작전을 통해 과감하게 석방했다. 이대통령을 무마하기 위해 미국은 국무부 극동담당 차관보 로버트슨을 대통령 특사로 파한했으며 이대통령이 요구하는 한­미 상호방위조약에 가조인하게 했다. 한­미간의 합의가 성립됨으로써 정전협정의 체결을 위한 길은 완전히 열렸다. 그리하여 7월27일 휴전협정은 판문점의 「평화의 천막」안에서 조인됐다. 2년 1개월 여의 긴 시간동안 5백75회의 공식회의를 갖고 1천8백여만 단어를 소비한 다음에야 매듭지어진 것이다.
  • 외언내언

    김일성이 언제 어떻게 북한땅에 들어왔는지,그리고 해방전 수년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는지에 관해 북한 공식문서는 아직도 밝히지 않고 있다. 그가 대중앞에 나타난 것은 45년 10월14일 소위 김일성장군 환영 평양시 민중대회. 본명 김성주,만 33살의 청년이었다. ◆소련군 장교복장의 그는 주둔소련군 당국의 완전무결한 지원아래 난마처럼 얽혀있던 평양정국을 헤치고 전면에 등장한다. 그가 손쉽게 정권을 창출할 수 있었던 배경은 다음 4가지로 꼽힌다. ①뛰어난 공산주의자들은 모두 서울에 있었다 ②다른 당파들은 분열돼 있었다 ③소련진주군이 그를 한가닥으로 밀었다 ④군과 정보를 장악했다. ◆6ㆍ25동족 전쟁은 김일성이 남한내 무장봉기와 미군개입 가능성을 오판한 스탈린의 승인을 얻어 도발했던 사실은 이제 세계적으로 검증된 진실이다. 정권을 잡은 그는 곧 2개년경제계획을 실시했으나 곧바로 실패했다. 그의 정적들과 주민들의 비난이 들끓었다.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적화통일하겠다는 집념을 가졌던 그는 이 공격과 비난을 외부로 돌려야 했다. 남한에서는 미군이 철수했다. 호기였다.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의 나이가 38살. 치기와 오만과 저돌성으로 형성된 그는 이른바 「남조선해방전쟁」에 있어 서울및 대전지역의 점령작전을 직접 지휘했다고 엊그제 그들 중앙방송은 밝혔다. 김은 서울함락 하루전인 27일 전투보고서를 받고는 「서울을 해방할 데 대한 전투명령」을 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또한번 남침을 시인한 셈이 됐다. ◆그의 나이 지금 78살. 고희를 넘겨도 한참이나 넘겼다. 그 엄청난 민족적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으로서,그는 그러나 지금까지 단 한번도 6ㆍ25도발에 대한 시인과 사과를 한 적이 없다. 그런데 그도 이제 노쇠했다. 지난 4월 그 자신의 생일행사에 참석하고 계단을 내려오는데도 경호원의 부축을 받을 정도였다. 며칠전엔 그의 아들 김정일의 6ㆍ25당시 어린시절 벌거숭이 사진이 소개되기도 했다. 그 두장의 사진이 새삼 민족의 비애를 되새기게 한다.
  • “남북한 교차승인 고려 안해”/한·소수교와 미·북한관계는 별개

    ◎그레그 미대사,관훈토론 참석 도널드 그레그 주한미대사는 27일 한국이 소련·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한다해도 미국은 이를 미­북한관계와 연계시키지 않을 것이며 현단계에서 교차승인은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레그대사는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서 이같이 말하고 미국은 북한과의 대화는 할 수 있지만 『북한을 승인한다고 해서 남북한통일에 어떤 도움이 된다고 판단하지 않기 때문에 북한과의 외교관계 수립을 고려치 않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문제에 대해 많은 것을 협의하고 있으나 큰 이견은 없다고 밝히고 특히 『미국은 소련에 대해 북한이 핵안전협정에 서명하도록 설득해 줄 것을 계속 촉구하고 있으며 소련도 이에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말했다. 한소 정상회담에 대해 그레그 대사는 한국의 독자적인 외교노력의 결실로 나타난 「외교쿠데타」라고 말하고 미국은 통신지원조차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레그대사는 총체적인 국력은 북한에 비해 남한이 우위이지만 미국은 김일성이 합리적 사고를 할 수 없다고 판단하기 때문에 그의 오판을 막기 위해서 신중한 미군철수를 진행시키고 있다고 강조했다. 그레그대사는 『현안이 되고 있는 용산 미군기지 이전비용은 당초 한국측이 전액부담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는 90년대 중반부터 기지이동이 시작될 것으로 예상되나 상황에 따라 바뀔 수도 있을 것이라고 덧붙였다.〈관련기사5면〉
  • 다가오는 북한정권의 붕괴/하버드대 연구원 미지 기고

    ◎경제력등 남한과 격차 갈수록 벌어져/평양의 막판도발 대비,미는 안보공약 준수를 미국 기업경영연구소 아메리칸 엔터프라이즈 인스티튜트의 연구원이자 하버드대학 인구문제 연구센터의 객원 연구원인 니콜라스 애버스타트는 26일 미국 월 스트리트 저널지에 기고한 「다가오는 북한의 붕괴」라는 장문의 글에서 『한반도는 세계 거의 모든 지역에서 냉전이 청산되고 있는 현재 아직도 팽팽한 대립이 지속되고 있는 유일한 지역』이라고 전제하고 『그러나 한반도의 남북한간 경쟁은 오랫동안 호각의 대립을 벌여온 동서독의 경쟁이 현재 그 막을 내리고 있는 것처럼 조만간 종언을 고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애버스타트는 이 글에서 현재 북한은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분야에서 한국에 현저하게 뒤떨어져 있다고 지적하고 이같은 남북한간 격차 때문에 한국과 북한의 경쟁은 곧 끝날 수밖에 없으며 한반도의 통일은 이제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라고 전망했다. 다음은 애버스타트가 기고한 글의 요지이다. 한국 전쟁이 발발한지 4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한반도에선 냉전이 계속되고 있다. 1백50만명에 달하는 남북한의 병력이 비무장지대를 경계로 대치하고 있으며 상호간의 대화는 전무한 실정이다. 북쪽에는 스탈린식 강권통치의 공산정권이 형성되고 김일성 일인체제가 확립됐으며 남쪽에는 4만여명의 미군병력과 미확인 핵무기가 북한의 기습도발을 억제하고 있다. 이같은 한반도의 냉전구도 속에서 북한은 현재 여러 분야에서 한국에 크게 뒤지고 있다. 60년대초까지만 해도 경제분야에서 한국을 압도했던 북한은 지금 그 생활수준이 한국에 비해 형편없이 뒤져있다. 남북의 심한 생활수준 격차는 어린이들의 모습에서 크게 대조를 이뤄 평양의 어린이들은 불결한 위생과 비누 등의 부족으로 피부병으로 고생하고 있는 반면 서울의 어린이들은 고지방음식을 많이 섭취,여드름으로 고생하고 있다. 남북한 생활수준의 격차는 시골에 가면 더욱 극명하게 나타나는데 한국의 경우 시골의 크고 작은 언덕에는 풀과 초목이 자라 아름다운 경관을 보이고 있으나 북한의 경우엔 땔감과 사료용으로 모든 언덕의 풀과나무가 베어져 보기 흉한 몰골을 하고 있다. 남과 북은 또한 경제운영방식에서도 크게 대조를 보여 북한의 경제는 정치적 열정으로 이뤄지고 있는데 반해 한국의 경제는 개개인의 자발적 참여로 이뤄지고 있어 앞으로 그 격차는 더 커질 것이다. 북한의 자원은 고갈돼 군복을 입은 군인들이 병역임무에 종사하지 못하고 건설현장이나 노동현장에 동원되고 있다. 또 북한의 위대한 지도자 김일성에 대한 군중시위의 광란적 열광도 이제는 그 열기가 식어가고 있으며 그의 아들 김정일의 장래 또한 불투명하다. 외교분야에서도 북한은 88 서울올림픽을 계기로 한국에 크게 뒤지기 시작했고 끝내는 샌프란시스코 한소정상회담으로 승부가 지어졌다. 또 지난 40년동안 북한을 지지해주던 중국과 소련은 현재 한국과의 교역규모 확대를 바라고 있어 북한을 소외시키고 있다. 따라서 남북한의 경쟁은 이제 북한의 붕괴로 끝나가고 있기 때문에 미국은 이 시점에서 한반도의 평화적인 통일을 위해 어떤 일을 해야 할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이를 위해 몇가지를 제안하면 우선 미국은 북한에 불안정과 격동이 밀어닥칠 수 있기 때문에 한국에 대한 안보공약을 철저히 지켜야 한다. 그리고 미­북한간의 학자교류,여행확대 등을 통해 북한이 외부세계와 관계를 맺을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국은 또 한국으로 하여금 대북한정책 일부를 수정,이제까지 한국이 금지해온 북한방송청취 및 우편물,친지 상호방문을 일방적으로 허용하도록 권유하는 것도 필요할 것이다. 한반도의 통일은 이제 충분히 예견될 수 있는 일이다. 따라서 미 정책입안자들도 이에 대비하는 자세를 갖춰야 한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 남로당총책 박갑동씨의 「체험적 6ㆍ25론」

    ◎“공산주의로 잘 산다는건 꿈” 뒤늦게 자각/휴전 임박해서 박헌영과 함께 연금생활/후퇴길에 평양보고 “거지공화국” 실망 6ㆍ25 동란당시 38선 이남지역 남로당 지하총책이던 박갑동씨(72)가 27일 한국전쟁기념사업회(회장 이병형)주최로 하얏트호텔에서 열린 6ㆍ25 40주년 국제학술대회에서 6ㆍ25체험담을 발표했다. 박씨의 체험담 요지는 다음과 같다. 50넌 6월 25일은 일요일이어서 나는 남로당 비밀아지트에서 쉬고 있었다. 아지트를 경비하는 사람이 외출후에 돌아와 전쟁이 터져서 피난민들이 미아리고개로 넘어오고 있다고 보고했다. 나는 순간 『김일성 이놈이 죽일놈』이라고 말하고 전신에 힘이 모두 빠져나갔다. 28일 새벽에 북한군이 탱크를 몰고 서울시내에 들어왔다. 나는 서대문 교도소에 갇혀있는 동지들을 구하기위해 나서며 비서에게 지하당원은 소공동 조선정판사빌딩에 모이도록 지시했다. 교도소에 갔다가 정판사빌딩에 가보니 비서 혼자 서있으면서 이승엽이 평양에서 전권을 가지고 서울시청에 와 당의 명령을 듣지않는 박갑동을 총살시키겠다고 화를 내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어이가 없어 이승엽을 만나러 서울시청에 가서 정태식을 만났다. 그는 나를 보자 이가 매우 화를 내고 있어 주위사람들이 말리고 있으니 잠깐동안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 좋겠다고 말해주었다. 나는 이때부터 김일성과 이승엽에게 밉게 보여 지위가 점점 낮아져갔다. 나는 복간된 해방일보 논설위원으로 명맥을 유지해가다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자 북으로 쫓기게 되었다. 유엔군이 북쪽에 가기도 전에 북쪽 사람들이 태극기를 들고 인민위원회를 습격하고 약탈하고 있었다. 10월이 되자 북쪽은 상당히 추웠는데 대부분의 북한사람들이 얇은 여름옷을 입고 이불도 못덮고 생활하고 있었다. 나는 『이놈의 나라가 인민공화국이라고 선전하고 있으나 거지공화국이 아니면 간부공화국』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김일성이 5년동안 사회주의를 건설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사회주의의 실상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평양에 도착해서 소위 인민시장에 가보았다. 국영상점 이외에 협동조합상점과 개인상점도 있었는데 생필품이 부족했다. 고무신점에 가보니 여자고무신이 두 종류 있었는데 하나는 흰색이고 하나는 회색인데 주인이 흰색은 남한제품이라며 품질이 아주 좋다고 말했다. 포목점에 가보니 옥양목은 짜지 못하는지 조악한 광목밖에 없었다. 국영정육점에 가보니 점원이 세수도 하지 않은 얼굴과 손으로 고기를 자르고 있었다. 개인정육점에 가니 20세가량되는 처녀아이가 쇠고기1㎏을 정확히 한번에 잘라주는 것을 보고 국영상점과는 경쟁이 되지 않는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개인상점은 매일 매일 무거운 과세를 함으로써 국영상점을 우대했다. 국영상점 점원은 공무원이기때문에 손님에게 친절할 필요도 없고 많이 판다고 월급이 많아지는 것도 아니니 성의가 전혀없었다. 사회주의 경제는 상품생산과 유통시장이 존재하는 경제가 아니었다. 상품이란 소비자가 소중한 돈을 주고 사고싶은 물품을 사는 상행위가 기본이어야 하는데 공산주의 사회에서는 욕망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최저 최소의 생필품을 국가가 배급을 해주는것이 현실이었다. 휴전이 가까워지자 북한은 남로당계 인사를 출당하는 대대적인 숙청을 해 나는 박헌영과 함께 체포되어 56년 3월까지 감금생활을 했다. 56년 2월 소련공산당 20차대회에서 흐루시초프가 스탈린비판을 한뒤 석방되어 북경을 경유,공산권에서 탈출했다. 57년에 북경에 갔다. 중국은 사회주의도 자유주의도 아닌 대국주의ㆍ제국주의였다. 조선인민을 자기들이 도와서 미제국주의를 타도했다는 자부심으로 전국이 덮여있었다. 유엔군이 중국의 영토를 침범하지 않았으나 국경을 지키기 위해 출병했다는 것이다. 세계강대국이 모두 그런 생각을 한다면 지구상에는 하루도 전쟁이 그칠날이 없겠다는 생각과 함께 약소민족의 서러움과 비애를 느꼈다. 모택동의 소수민족정책이라는 것도 자세히 보면 일본제국주의가 만주국을 통치하는 것과 같은 방식이었다. 소련은 명목적이나마 공화국을 수립해주고 연방으로 묶어 통치하지만 중국은 소수민족의 공화국은 금지하고 직접 통치하고 있었다. 50년대 후반의 중국 공산주의는 정말로 「독점」「독선」「배신」의 연속이었다. 나는 공산주의가고상한 도덕이며 인도주의라고 믿어왔는데 실제로 공산주의가 실천되는 현장을 보니 정치적으로는 중세기 암흑세계이고 경제적으로는 기술이 낙후하여 자본주의 생산성에 도저히 따라 갈 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일본제국주의 식민지하에서 독립을 해서 경제를 급속히 발전시키기위해 공산주의자가 되었는데 공산주의 국가 북한과 중국에 가서 앞날이 없는 공산주의 사회 현장을 목격하게 되었다. 내자신이 부끄러워서 일본에 망명하여 성명을 바꾸고 일개 노동자로 일평생을 살아가려고 했다. 그리하여 나는 일본에 망명하여 오키나와 사람이라고 속이고 고무공장 노동자를 몇해 하면서 숨어서 살아왔다. 당시 오키나와는 미군점령하에 있어 일본경찰이 본적을 조회할 수 없었다. 지금 여러분 앞에 나와있는 것이 정말 부끄럽다. 선조가 남겨주신 유산으로 일본유학까지 해서 당시로서는 조선최고의 인텔리의 한사람이 그 능력을 옳게 발휘하지 못한 것을 뼈저리게 뉘우치는 바이다.
  • 「아시아에서의 미의 역할」 그레그대사 관훈클럽 연설

    ◎“한반도 평화통일이 미 정책의 목표”/「공산남침」막아 한ㆍ일 경제성장 부축/45년간의 협력이 아태발전 디딤돌/때로는 성공,때로는 실패했지만 값진 민주체제 유지 도널드 P 그레그 주한미대사는 27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한국ㆍ베트남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이라는 연설을 했다. 다음은 그레그대사의 연설 요지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미국은 과연 한국에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흔히 듣는다. 40년전 미국인들도 「한국은 과연 미국에 무엇인가」라고 자문했었다. 우리는 냉전에서 가장 위급한 시점에서 그 물음에 결단성있게 응답했다. 자유정부제도를 수립하는 한국민의 권리보전을 돕는 것이 한미양국,나아가 세계인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지 못한채 회의를 품고 있다. 「베트남」이 미국에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수많은 글들이 발표됐으나 아직도 해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 해답을 미국의 자기민족중심적인 시각이 아니라 아시아의 배경에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때 시작된 사건들의 흐름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찾고자 한다. 동남아에서 미국이 수행해 온 역할을 더불어 검토함으로써 한국인들은 미국의 이상과 희망이 끝까지 추구하는 바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인과 미국의 정책을 이해하고 한미양국관계를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2차대전후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맨 먼저 그 에너지와 주의를 일본으로 돌렸다. 미국의 복구계획과 그들의 비범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일본는 예상을 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침을 했다. 미국은 즉각 대응했다. 한반도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세가지 일을 이룩해 놓았다. 첫째 자유남한을 보전한 일이다. 한국은 꾸준히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인상적인 경제성장의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로 일본의 계속적인 재건이 보장됐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산업은 활력을 얻었다. 한반도가 공산주의 지배하에 통일됐다면 일본의 발전에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일성지배하에 통일된 한반도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완전무장을 갖추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은 북한의 공산주의를 밖으로 뻗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전 공동으로 치른 희생들이 오해받거나 왕왕 고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돼왔다. 하지만 이제 한국정부가 북한과뜻있는 대화를 갖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오해의 공허성이 노출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미국정책의 목표이며 이것이 이뤄진다면 40년동안의 노력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2차대전후 동남아시아도 폭력사태로 고통받아 왔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키 위해 항쟁했었으며 65년에는 공산당의 쿠데타로 거의 넘어갈 뻔했다. 필리핀에는 1946년 「후크」단의 반란이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산반도들이 10년이나 소란을 피웠다. 베트남에서는 식민통치를 재확립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이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끝났으나 월맹측의 끈덕진 통일열망이 불안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었다. 1965년 최초의 미군부대가 베트남에 투입됐을때 동남아시아는다루기 힘들고 장래성 없는 지역이었다. 또한 중국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 주도의 세계 혁명을 공공연하게 촉구한 임표가 강력한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미국의 건설적인 정책의 결과로 아세안국가들은 결속되고 자신감 넘치는 호황지역이 됐으며 75년 베트남 패망,78년 공산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등을 다룰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 베트남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3개 주요한 개입 즉 일본의 부흥,한국의 수호,베트남에서의 공산주의 팽창 저지등을 아시아인들은 충분히 이용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를 슬퍼하고 있지만 아시아인들은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1945년 이래 태평양 지역에서 아시아인들과 미국의 상호노력은 때로는 성공을 때로는 실패를 기록했지만 아시아인들의 집단적인 노력덕택으로 동남아는 앞날이 밝고 생기있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 “남북 협력기금 3천억원 조성”(의정중계 25일 본회의)

    ◎문목사 정치적 이유로는 석방 안해/이감사관 사건 국조권 발동 용의는 ◇김용채의원(민자)=한소국교가 정상화될 경우 남북한관계는 어떻게 발전되어갈 것으로 보는가. 노태우대통령이 유엔연설에서 제의한 바 있는 남북한과 미·소·중·일로 동북아시아 평화협의체를 구성하자는 「2+4정책」을 어떻게 실현할 것인가. 남북한관계의 진전과 관련,국가보안법개폐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통일기금 조성을 위한 범국민운동을 전개해야 된다고 보는데 정부의 견해는. 대통령이 5·7특별담화를 통해 약속한 연말까지의 정치·경제·사회안정을 이룩할 방안은,대학에서 주사파니 좌경이니 하는 이념적 사상적 혼돈이 지속되고 있는 이유는,민생치안대책과 경찰구조의 쇄신방안및 경찰의 사기진작 대책은. ◇김원기의원(평민)=3당합당이후 민주개혁은 실종되고 억압적 강권통치가 부활하고 있다. 내각책임제 개헌은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한 특정세력의 영구집권에 근본적 의도가 있기 때문에 그 동기부터가 불순하고 반민주적이라고 본다. 대통령이 결심했고 과거 4당간에 합의했던 지자제에 있어서 정당추천제를 뒤집은 이유는. 총리는 보상금의 지급만으로 광주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보는가. 국가보안법을 존치시키는 것은 북방외교와 남북대화를 추진하는데 장애가 된다. 안기부의 정치개입은 근절돼야 한다. ◇김정길의원(민주)=위기의 진정한 실체는 정부가 위기현상을 해결할 능력도 의지도 없다는 데 있다. 6·29선언에 담긴 대통령직선제 개헌,시국사범 석방,인권보장,언론자율성 보장,지자제 실시,강절도범 소탕 등 8개항중 제대로 지켜진 것이 무엇인가. 위기극복을 위해서는 국정의 신뢰성과 도덕성 회복이 필요하며 이를위해서는 6·29선언을 지키겠다는 제2의 6·29선언을 단행해야 한다. 이문옥 전감사관은 국회에서 국정조사권을 발동해 진상을 규명해야 한다. 청와대 특명사정반을 만든 법적 근거는 무엇인가. 남한에 배치됐다고 하는 핵무기를 철수시키는 데 대한 견해는. ◇강영훈총리=북한은 단기적으로 내부체제의 강화를 겨냥한 강경정책을 고수할 것이나 장기적으로는 개방과 민주화의 국제추세를외면하지 못할 것이다. 정부는 북한의 군사적 모험주의를 사전에 예방하면서 각종 남북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대결상태를 지양하고 교류와 협력을 증진시켜 나가겠다. 한소 정상회담이후 중국은 한소 관계진전에 반발,북한과 보다 긴밀한 관계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나 현대화계획을 지속적으로 추진하려면 우리와의 실질관계를 확대치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노태우대통령의 특별담화를 뒷받침하기 위해 법질서 확립,부동산투기 억제,기업의 투자의욕 고취,물가안정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겠다. 국군조직법 개정은 내각제개헌과 무관하며 더구나 정경유착과도 관련이 없다. 6공출범이래 안기부의 정치개입은 존재하지 않으며 보고받은 적도 없다. 한반도의 핵존재에 대해서는 시인도 부인도 않는 것이 정부의 기본입장이다. 미·소·일·중 등 4대강국이 남북한을 교차 승인하고 남북한이 유엔에 동시가입하더라도 한국이 별도로 북한을 국가로 승인하지 않는 한 국가로 인정될 수 없다. ◇안응모내무장관=경찰인력장비의 지파출소 중심 재배치등 범죄대응능력을 극대화한 결과 최근 강·절도및 폭력등 주요범죄가 감소추세에 있다. 경찰관의 사기진작을 위해 근무여건 개선,근무량 조정,시설보강,일선 활동비및 수사비 현실화,교육을 통한 사명감 고취노력을 계속하겠다. 지자제 실시에 대비,자치법규 3백80여종의 정비를 완료했고 중앙사무중 자치성격이 강한 3백40건을 선정,1백47건을 이미 지방에 이양했고 나머지도 계속 이양해 나가겠다. 시도사무중에서도 3백87건을 시군구에 이양했다. KBS파업과 관련 사전영장이 발부된 2명과 수배된 4명등이 아직 미검거된 상태에서 불법 농성을 주도할 우려가 있어 경찰이 아직 철수치 않고 있다. 이들이 검거되고 불법농성의 우려가 없어지면 즉시 철수하겠다. ◇이종남법무장관=문익환목사등 구속자들은 민주주의의 근원인 법에 의해 처리된 것이며 정치적 이유로 석방을 고려하고 있지 않다. 특명사정반의 법적 근거는 헌법 제66조4항과 정부조직법등이다. ◇홍성철통일원장관=통일기금조성을 위해 3년동안 3천억원을 예상으로 한 남북협력기금법을 이번 회기내에 마련하고 있다.◇김문기의원(민자)=남북간 체제·이념·경제·문화 등 모든 분야에서 이질화현상이 심화돼 왔다. 남북간 이질화된 모든 분야에 대한 대처방안은 무엇인가. 최근의 그린벨트 완화,아파트채권제 확대,호화혼례 규제 등과 관련한 일관성없는 정책은 어떻게 시정할 것인가. 경제와 인사정책의 불균형으로 인한 지역간의 갈등,계층간·세대간 갈등이 만연돼 있다. 농어민·도시영세민·근로자 등 소외계층에 대한 대책은 무엇인가. 또 불로소득을 근원적으로 뿌리뽑아 계층간 갈등을 해소시킬 의지와 방안은 있는가. 이번 국회에서 광주문제에 대한 법적 조치가 완료되면 어떤 후속조치를 계획하고 있는가. 도덕적 타락과 가치관의 상실을 치유하기 위해 범국민적 정신운동을 펼 생각은. ◇이해찬의원(평민)=금년 1월1일부터 5월31일사이에 90년도 예산 일반예비비가운데 안기부가 쓴 돈이 얼마인가. 만약 정부여당이 진정으로 순수내각제를 추진한다면 최소한 안기부의 수사권을 폐지해야 한다고 보며 안기부가 내각과 국회의 통제아래 들어오도록 먼저 법을 고쳐야한다. 서울시는 87년 11월 서울시 예산 환경정화사업비가운데 12억원을 전용해서 「월동기 저소득시민 생계보호」 명목으로 서울시내 17개 구청장들에게 6천만원내지 1억원씩 지급했다. 서울시처럼 지방행정관청이 예산을 마구잡이로 유용·전용하는 이유는 지방의회가 없기 때문이다. 통일원을 대통령직속기구로 개편하는 정부조직법 개정계획을 철회해야 마땅하다. ◇김덕룡의원(민자)=지금의 총체적 난국은 3당합당의 역사성과 의미를 정부가 잘못 헤아린 데서 비롯됐다. 3당통합의 의미를 안정속의 개혁을 추구한다는 뜻으로 이해하지 않고 금융실명제·토지공개념 등의 개혁조치를 유보 또는 후퇴함으로써 난국이 불가피하게 됐다. 총체적 난국의 수습상황은. 시국사건으로 구속된 사람중 풀어줄 수 있는 사람은 시기를 놓치지 말고 풀어주어야 한다. 전교조와 전노협은 실체를 인정하는 기초위에서 대화를 통해 문제를 풀어가야한다. 총리의 견해는. 총리와 내무장관은 공권력의 남용과 인권침해에 대해 그 잘못을 반성하고 물의를 일으킨 경찰관계자들을문책할 용의는. 국가보안법과 안기부법을 시대적 상황에 맞게 개정할 용의는. 또한 남북고향방문단의 실현을 위해 북한예술단의 「꽃파는 처녀」의 서울공연을 자신있게 수용할 용의는 없는가. ◇강총리=내각제 개헌과 관련해서 대통령이 정치지도자의 장래를 언급했다는 보도는 알지만 자세한 내용은 잘알지 못한다. 다만 대통령께서 단임제 대통령으로 충실하겠다는 의도를 표시한 것으로 생각한다. 정부는 금년 1월25일 민생치안 종합대책을 마련해 실시중에 있으며 금년 추경예산에 9백95억원을 반영,부족한 경찰인력과 장비를 보강할 계획이다. 노사분규는 작년 상반기에 비해 22% 수준으로 떨어져 안정추세에 있으며 노사분규중 불법분규도 작년 72%에서 51%로 떨어져 안정추세를 나타내고 있다. 경제문제는 내수부문이 가열현상을 보여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등 어려운 측면도 있다. 올해 하반기는 내수부문의 진정을 유도해 물가를 안정시키고 수출관련 제조업을 활성화시켜 안정기반을 조성하겠다. 그린벨트내 체육시설은 나대지등에 한해 허용했으나 그린벨트 훼손을 심화시킬 가능성에 대한 여론의 지적으로 신중히 재검토하고 있다. ◇안내무=경북지사 비리사건으로 사회적 물의를 빚은 데 대해 내무행정책임자로서 매우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산하 공직자에 대한 지도감독을 철저히해 앞으로는 이같은 일이 재발되지 않도록 하겠다. 정부는 법절차에 따른 국민의 권리주장은 최대한 보호하겠지만 학내 폭력행위와 노사현장의 불법행위가 장기화할 때에는 사전에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아 경찰력을 투입하고 있다. 다만 진압과정에서 일부 무리를 빚은 것을 송구스럽게 생각한다. ◇이법무=검찰은 특명사정반이 공직자비리에 대한 자료를 보내오면 그것을 토대로 조사를 벌이고 있다. 앞으로 공직자 비리,특히 고급공무원 비리는 철저히 단속하겠다. ◇강용식공보처차관=방송구조 개편안에서 방송심의제도를 강화하고자 하는 것은 방송이 공공성·윤리성·책임성을 갖춰 좋은 방송을 보내기 위한 여과장치이지 방송장악을 위한 강압장치가 아니다. 기독교방송은 일반방송이 아니라 특수방송으로 허가를 냈다. 따라서 선교가 주목적인 종교방송의 특성상 선교내용을 담은 방송편성이 반이상을 차지해야 한다는 생각이다.〈우득정·구본영기자〉
  • 미,6ㆍ25 계기로 초강대국 부상/WP지,「한국전 40년」재조명

    ◎국방비 지출 3배ㆍ병력수 6배 늘어나/외교정책 반공으로 선회… 냉전 본격화 미국에서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으로 불려진다. 승리의 영광도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아 오래전에 이미 미국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은 미국의 정치ㆍ군사ㆍ세계전략 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고 24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전 발발 40주년 특집 기사에서 회고했다. 다음은 EJ 다이오네 기자가 쓴 이 기사의 요약이다. 한국전은 2차대전 처럼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았지만 월남전 처럼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았다. 초기를 제외하면 한국전은 특별히 인기있는 전쟁도 아니었고,또 월남전처럼 극심한 국론 분열도 야기 하지 않았다. 결말도 나지 않고 인식도 잘못된 한국전은 그후 미국이 50년대의 번영을 구가하며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뻗어 나가자 재빨리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이 돼버렸다. 한국전은 미국을 크게 바꿔 놓았다. 미국의 정치,대통령권한에 대한 이해,군의 지위,그리고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 등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은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고,또한 월남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깔아 놓았다. 어느 면에서 이 잊혀진 전쟁은 미국 전사상 가장 긴 파장의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중도 좌파 정책연구소의 리처드 바네트는 『장차 한국전은 월남전보다 더 중요하게 회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역사가들 사이에서 토대를 넓혀 가고 있다. 몇가지 수치만 보더라도 한국전은 미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군사비 지출은 49년의 1백40억달러에서 53년엔 4백40억달러로 늘어났다. 한국전이 터진 50년 6월 미국은 59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이 휴전된 53년에 이 숫자는 3백60만명이 되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한침공은 당시 트루먼 정부가 사상 최대의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명백한 군사적 위협의 실존」증거를 제공했다. 역사학자이며 50년대에 출간된 「미국 전성시대」의 저자인 윌리엄 오닐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2차대전 후 조지케넌이 제창한 대소 봉쇄정책의 골간 수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을 공산주의자 수중에 넘겨 주었다는 비난 속에 대소 자세를 경화하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의 스탈린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한국전에 신속히 대응했다. 트루먼은 유엔의 한국 파병 결의를 내세워 전쟁 선포에 관한 의회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냉전의 중요한 선례가 된 이같은 처사는 월남전 기간중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전은 또 미 공화당에서 고립주의 세력을 약화시켜 공화당 보수파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고립주의에서 반공으로 바꾸게 했으며,이러한 변화속에 상원의원 매카시의 공산주의 탄압 입장을 강화시켰다. 역사학자 존 패트릭(캘리포니아대)은 매카시즘을 『전쟁의 성취도가 결여된데 따른 심리적ㆍ정치적 좌절의 소산』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냈을때 전쟁을 종결했다면 미국은 신속한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을것이다. 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때까지 한국전에서 미국인 남녀 3만3천6백29명이 죽었고 10만3천명이 부상했다. 한국전 종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휴전이라는 모호한 결론을 성립시킨후 『우리는 하나의 전장에서 휴전을 이뤘을 뿐 세계 평화는 정착시키지 못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한국전이 후에 월남전까지 이어진 긴 냉전의 시작에 불과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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