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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 자본­북 입지 합작발전 바람직/에너지연 전력교류방안 제시

    ◎여름철 성수기에 북 수전의 전기 끌어올수도 북한에 대한 경수로형 원전지원과 전력공급 방안이 구체화되는 가운데 남북한 전력협력은 남북한 합작으로 북한에 석유·가스·원자력 발전소를 집중 건설해 한반도 전체가 전원 구조에 균형을 이루는 쪽으로 추진돼야 한다는 연구결과가 나왔다. 에너지경제연구원(원장 이회성)은 17일 「남북한 전력협력 방안」이라는 보고서에서 『북한은 전력설비의 노후화 및 설비투자 부족으로 경제활동에 지장을 받고 있고,전원도 석탄과 화력에 의존하고 있다』며 『이 때문에 북한은 발전설비를 현대화하고 석유·가스·원자력 발전으로 전원을 다양화해야 할 처지』라고 지적했다. 이어 『남한은 여름철에 최대 전력수요가 발생하는 반면,북한은 수력발전의 특성상 여름철에 발전량이 풍부하고 입지 선정에도 여유가 있다』며 『남한이 자본을,북한이 입지와 노동력을 제공해 북한에 합작 발전소를 건설,전력을 교류하면 이같은 취약점을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이같은 주장은 경수로 지원을 남북한 전력교류 및 전원입지 해결과 연계하려는 정부의 구상과 일맥 상통하는 것이다. 보고서는 남북한 통합 전에 전력교류가 본격화 될 경우 휴전선 근방에 남북간 전력수급을 조절하고 교류한 전력을 상호 청산할 수 있는 「전력유통회사」를 설립하는 방안도 제시했다.또 『남북한이 통합전원을 목표로 삼는다면 앞으로 북한에 석유·가스·원자력 발전소를 집중적으로 지어야 한다』며 『석탄발전은 북한 석탄의 공동개발과 이용문제와 연계시키고,석유발전은 제품 교류나 합작 정유공장의 건설 및 석유 공동구매와,가스발전은 공동 파이프라인 건설이나 LNG(액화천연가스)의 공동구매 및 인수기지 공동건설과 함께 검토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북한의 발전용량은 91년 기준 9백50만㎾로 남한(2천8백77만㎾)의 3분의 1 정도이며 그 이후 거의 변동이 없다.원자력은 소규모 실험용 원전 뿐 발전실적이 없으며 수력이 전체발전의 53%,화력이 47%이다. 보고서는 『남북이 합작발전소를 건설할 경우 안정적인 전력공급을 어떤 방식으로 보장할 지가 선결돼야 하며,발전기술과 발전방식의차이에서 오는 문제 해결과 이를 위한 발전소 건설 및 송배전 방식에 대한 정보교환도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고 밝혔다.
  • 안재구씨 주체사상 강의/「구국전위」 총책/93년부터 경희대서

    북한의 지령을 받는 남한내 지하조직 「구국전위」총책 안재구씨(61·구속)가 경희대에서 강사로 재직중 주체사상을 강의한 것으로 17일 밝혀졌다. 검찰에 따르면 안씨는 지난 88년 가석방으로 풀려난 후 93년 3월부터 금년 6월 안기부에 의해 검거될 때까지 경희대 총학생회의 추천으로 이 대학 강사로 채용된뒤 경희대 교양과정인 「현대사회와 과학」(3학점)을 3학기동안 가르치면서 북한 주체사상의 이념을 그대로 전달하는 등 주체사상을 강의했다는 것이다. 한편 안씨는 남민전사건으로 전주교도소에 복역중이던 지난 81년 4월 교도소에서 남파간첩 임창하(73)를 만나 북한노동당에 입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 월북자/이용가치 없을땐 “헌신짝”

    ◎저학력·전과자·곧장 산간오지 탄광으로/체제환멸 못이겨 탈출… 자실기도 “방랑” 국제사면위의 폭로로 납북자들이 북한에서 비참한 생활을 하고 있음이 밝혀진 이후 자기발로 걸어들어간 월북자들은 과연 어떤 생활을 하고있을까에 대해서도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월북자들은 표면적으로는 어느 정도 대우를 받고있는 것 같지만 내면적으론 체제선전에 이용 당할대로 이용 당하면서 북한당국의 철저한 감시,통제와 북한체제에 대한 회의에 시달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런 경우는 이용가치가 있고 북한체제에 협조적인 경우이고 그렇지않고 월북자가 저학력자 및 전과자이거나 이용가치가 없을 땐 산간오지의 탄광촌등에 배치되기 일쑤이며 심한 경우 숙청되기도 한다. 또 사소한 불평,불만이라도 털어놓다가 적발되면 그냥 놓아두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은 이용가치가 있는 사람이 월북하게 되면 평양 등지에서 환영집회를 열어주고 직장 및 결혼을 알선하거나 대학 또는 대학원 입학을 주선하는등 처음엔 상당한 대우를 해주고 있다.또그들이 한국에서 가지고 있던 학력,경력,사회적 지위에 따라 이에 상응한 대우를 배려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은 지난 92년에 발행한 화보 「조선」에서 80년대 사병으로 근무하다 월북했다는 6명이 모두 결혼해 잘 살고 있으며 대학생이나 대학원생이라고 선전한 바 있다.또 지난 91년2월 월북한 호텔종업원 지영준도 「장철구대학」에 입학했다고 전하고 있다. 군장교출신의 월북자들은 일단 1계급 승진시켜 인민군에 편입시키고 있다.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북한사회에 대한 막연한 기대감이 환상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으면서 심한 심리적 갈등을 느껴 군생활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이에 따라 일부 월북자들은 북한에서 다시 탈출을 기도하거나 자살하는 경우도 발생하는데 고상문씨와 함께 승호리 수용소에 수감된 이준광(전육군소령) 등이 이 경우에 해당된다. 월북자들에 대해서는 북한 관계당국이 철저하게 「일일동향」을 파악,감시하고 있다.이 작업은 국가안전보위부와 사회안전부 등 정권보위기관을 통해 2중3중으로 수행된다. 80년 월북한 염규환 등 4명이 「남한간첩」으로 몰려 자취를 감춘 것도 불평·불만 등을 늘어놓다 이같은 감시망에 걸린 대표적 사례이다. 한편 북한당국은 저학력자나 전과자 등 이용가치가 별로 없는 인물이 북으로 넘어올 경우 일체의 환영행사없이 곧바로 산간오지의 탄광으로 보내버리는 것이 상례다.89년과 90년 월북한 전과 5범 전권수와 국민학교 중퇴학력의 표병호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된다.
  • 「김일성 사후의 북한」 미 세미나

    ◎북,중국식 개방노선 원하지만 천안문사태같은 불상사 우려 김일성사후의 북한을 주제로 한 세미나가 15일 워싱턴소재 미엔터프라이스연구소(AEI)주최로 열렸다.이번 세미나는 특히 미·북한이 지난주말 제네바 3단계 고위회담을 통해 핵동결등에 관해 합의를 한 직후 열린 세미나로 미CSPAN­TV가 실황중계를 하는 등 상당한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다음은 이날 세미나에서 주제발표를 한 존 메릴 미국무부정보국(INR)정보조사분석관과 댄 오브라이언 미국방부 정보국 북한군사문제담당관의 발표내용을 요약한 것이다. ▷북한의 경제개혁 존 메릴◁ 북한의 식량난이 심각한 것은 사실이나 「하루 뚜끼 먹기운동을 한다」는 식의 파국적 측면으로 이해하는 것은 옳지않다.그들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방법으로 극복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북한은 경제개방을 계속 추진하고 특히 경제특구설치,가공무역활성화,해외건설진출 분야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이는 한국이 예전에 취했던 경제정책을 그대로 따르는 형태이다.한국의 재계가 북한의 경제개방에 큰 관심을 갖고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을 것이며 남한에서는 이미 사양산업에 들어간 섬유나 신발부분 등에서 앞으로 남북한간에 협력이 더욱 활발해질 것으로 본다. 북한이 이제 막 경제개방의 초입에 들어선 것이니만큼 다소 불확실성이 있다해도 적극 지원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은 중국식 개방노선을 따르면서도 천안문사태와 같은 타격을 피하려고 애쓰고 있다. 북한핵문제의 해결에 있어 중요한 요소인 경수로지원은 발전설비외에 북한의 낙후된 송전시설도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북한군부의 역할 댄 오브라이언◁ 북한군부의 영향력은 거의 절대적이며 북한정권의 영속성을 담보해주고 있다.국민총생산의 25%가 국방부분에 투입되고 있는 데서도 나타나듯 군부는 북한의 「국부」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자 산업의 근간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러나 사회주의진영의 붕괴,계속되는 경기침체,김일성사후 야기된 정권의 불안정성,개방이라는 세계적 추세로 더욱 압박을 받고 있다.한국의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은 북한의 군부에 또다른 부담요인이 되고 있다. 북한군부는 정권유지의 견인차이면서도 북한경제성장의 가장 큰 짐이 되고 있다.북한군부도 개방을 외면키 어렵다는 현실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남북관계에 있어 북한이 지금까지 누려온 전력상의 우위가 결코 오래 가지는 못할 것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김정일의 군부장악력은 여러가지 엇갈리는 평가가 있지만 대체적으로 전권을 쥐고 있다는 것이 옳은 분석일 것이다.투쟁 경력상 아버지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그동안의 군인사및 핵문제등 주요한 사안들에 있어 꾸준히 영향력을 행사,군에 대한 장악력을 키워왔다. 북한핵문제를 다루는데 있어 그가 보여준 주도적인 역할은 북한군부에 대해 지도적 위치를 공고히 하는데 기여한 것으로 보인다.오진우나 최광등과 같은 혁명세력들이 확고하게 김정일편에 서 있다.이를 원로세대들에게 일정수준의 역할을 분담하도록 하는 등 앞으로 상당기간동안 공존해가면 점진적으로 영향력을 증대해 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 대북 전력지원/겨울철 300만㎾ 가능

    ◎경수로 지원 연계… 잉여분 송전검토/한전에 실무대책반 설치/1단계 문산∼평산변전소 연결 20만㎾ 정부는 대북 경수로형 원전 지원과 관련,건설기간 중 남한의 전력을 북한에 공급하는 방안을 구체적으로 검토하고 있다.한국형 경수로 지원과 대북 송전 등 실무를 다룰 대책반도 한전에 만들기로 했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16일 『원전건설에 10년 정도 걸리기 때문에 건설기간 중 남한의 잉여전력을 북한에 공급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며 『우리의 전력수급이 빠듯한 여름철에는 어렵지만,북한의 전력이 모자라는 겨울철이나 심야에는 잉여전력의 공급이 가능하다』고 말했다. 정부와 한전은 전력분야의 남북협력이 이뤄질 경우 1단계로 전압이 같고 거리가 가장 가까운 문산변전소와 평산변전소를 연결,20만㎾의 전력을 공급한다는 계획이다.이들 변전소는 거리가 60㎞ 정도이고,전압이 1백54Kv로 같아 송전선로만 이어지면 단기간에 전력공급이 가능하다. 1단계 협력을 거쳐 상호신뢰가 조성되면 양측에서 전압이 가장 높은 변전소인 양주변전소와 평양변전소를 이어 1백40만㎾를 추가로 공급한다는 계획도 세워놓고 있다.양주변전소는 전압이 3백45Kv,평양변전소는 2백20Kv이며 거리는 약 2백㎞이다. 북한의 전력산업은 91년 기준 설비용량이 7백14만㎾로 남한의 4분의1이며,설비가 낡아 출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전의 관계자는 『남한의 경우 겨울철 최대수요는 대략 2천만㎾선』이라며 『적정 예비율 10∼15%를 남겨두고 정기 보수공사에 들어가는 발전소를 감안하더라도 겨울에 약 2백만∼3백만㎾의 공급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한편 정부는 한국형 경수로 지원이 확정됨에 따라 지원문제를 다룰 실무대책반을 한전에 설치키로 했다.대책반은 한전 주도로 원자력연구소(원전설계)와 한국중공업(발전기기),건설업계(토목공사 등)의 실무대표로 구성된다.
  • 거룩한 부정/40대 아버지/물에 빠진 남매등 구하고 익사

    【단양=김동진기자】 15일 하오 2시50분쯤 충북 단양군 영춘면 하리교 아래 남한강 상류에서 이용기씨(41·대전시 동구 대이동)가 물에 빠진 아들 경식군(9·대전 대동국교 2),딸 지연양(11·〃 4)과 정상혁군(9·경기 안산 성포국교 2년)등 어린이 3명을 구한 뒤 3m깊이의 물에 빠져 숨졌다. 친구 김진환씨(41·서울 양천구 신월동 쌍용아파트)는 숨진 이씨가 강가에서 놀던 아들 이군 등이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자 물에 뛰어 들어 어린이 3명을 강가로 밀어낸 뒤 자신은 힘이 다해 빠져 나오지 못했다고 말했다.
  • 「김 대통령 8·15경축사」에 담긴 뜻

    ◎「한민족 공동체」 적극적 통일정책 전환/체제경쟁 종식 판단… 수세서 공세로/「흡수통일 대비」는 주변정세 급변에 대응의지/분단해소 중심이념 “자유·민주” 천명 김영삼대통령의 8·15경축사를 일관하고 있는 흐름은 적극적인 분단해소 노력과 이를 위한 한국국민의 고통분담 요구이다.바꾸어 말하면 「적극적인 통일전략」의 제시이다.이승만정권의 북진통일론이후 일관되게 소극적이고 방어적인 것에 머물렀던 통일전략이 문민정부의 출범과 김일성사망이란 한반도정세의 변화에 맞춰 적극적인 통일전략의 채택으로 전환된 것이다. 김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두가지 소재를 다루고 있다.하나는 정부의 통일방안에 관한 설명이고,또하나는 변화된 한반도정세에 대한 인식과 이에 따른 대북정책의 설명이다. 통일방안에 관해 김대통령은 기존의 3단계 3기조 통일방안에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이란 이름을 새로 붙였다.이 이름도 아주 새삼스러운 것은 아니어서 충격적인 눈길을 끌지는 못했다.화해와 협력의 단계와 남북연합의 단계를 거쳐 1민족 1국가를만든다는 기존의 골격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기 때문이다.3단계 통일방안이 통일의 모습이나 방안을 그리기보다는 과정에 초점이 맞춰졌다는 비판을 감안,이를 보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날 경축사의 의미는 역시 김일성사망에 따른 김대통령의 대북인식변화와 이에 따른 대북정책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김대통령은 분명한 어조로 『남북한 사이의 체제경쟁이 끝났다』고 선언했다.김일성의 사망이 김대통령에게 이같은 선언을 하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나아가 이같은 상황인식의 변화가 대북정책의 일대전환을 이끌어내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김대통령은 경축사에서 북한 인권문제를 적극 거론했다.그는 『북한당국은 인권을 개선하는 과감한 개혁을 시도해야 한다』고 못박았다.인권문제는 북한당국을 자극한다는 이유로 그동안 되도록 피해 온 소재다.그러나 김일성의 사망은 김대통령으로 하여금 스스로 남북한 7천만 민족 전체의 안전과 복리를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과 자신감을 동시에 심어주었고,이것이 북한의 인권상황 개선과 체제개혁을의미하는 개혁 요구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통일구상과 관련해 취임초기 민족을 우위에 두었던 통일정책이 자유민주주의 체제를 강조하고 있는 것도 눈길을 끄는 대목이다.이는 체제경쟁이 끝난데 대한 자신감의 발로이면서 통일에 대한 조건을 하나 더 첨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통일문제 사령탑이 한완상체제에서 이홍구체제로 바뀐 것이 의미하는 보수우경화의 한 흔적이랄 수도 있다. 김대통령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통일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닥쳐올 수도 있다』고 밝혔다.이홍구통일원장관이 『북한이 붕괴되면 흡수통일을 피해갈 수는 없다』는 발언을 하고 여기에 북한의 「조평통」이 반발,남북정상회담을 남한이 깨고 있다는 비난성명을 발표한 직후임에도 김대통령이 흡수통일에 대비해야 한다는 발언을 한 것은 그 의미를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침이 없어 보인다.통일은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현실일 뿐이라는 대통령의 생각이 처음으로 공개화된 것이다. 이런 대북정책의 전환은 결국 통일정책의 대전환,적극적 통일정책의 선택으로 귀결나고 있다.통일방안은 기존의 3단계 통일방안을 유지하고 있지만,이를 수행하는 정책들은 우리의 통일에 대한 의지와 역할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선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대북정책의 전환에도 불구하고 김대통령은 결코 우리가 흡수통일을 바라지 않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우리의 기본원칙은 공존공영의 단계를 거쳐 남북한 전체가 합의하는 통일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그러나 경축사의 행간들에서는 이러한 통일이 되기 위해서는 북한당국의 개혁과 적화노선 포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점이 강조되고 있다. 이러한 전제가 충족되면 우리측은 민족발전 공동계획에 따라 공존공영을 위한 지원을 할 것임을 명시하고 있다.김대통령은 민족발전 공동계획의 하나로 경수로지원을 들었다.수조원의 재원이 필요한 경수로 지원을 명시함으로써 공존공영에 대한 우리의 의지를 확인시킨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의 대북·통일정책은 북한의 변화를 통한 평화적 통일추구를 원칙으로 하되 흡수통일에도 대비하는 2중구도로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 막바지 피서인파 귀경전쟁/연휴 마지막날

    ◎차량 30만대 몰려 고속도 체증 몸살/강릉∼서울 10시간… 평소의 2배 광복절 연휴를 맞아 막바지 피서를 떠났던 차량들이 15일 하오 한꺼번에 서울로 몰려들면서 영동고속도로를 비롯,전국의 고속도로와 국도가 밤늦게까지 극심한 귀경전쟁으로 몸살을 앓았다. 한국도로공사는 주말인 13일 22만2천대 등 13,14일 이틀동안 서울을 빠져 나갔던 40만대의 차량중 30여만대의 차량이 이날 하오늦게 대부분이 귀경대열에 가세,곳에 따라 16일 새벽까지 정체현상이 이어졌다. 이날 가장 심한 교통혼잡을 보인 영동고속도로의 경우 한때 새말에서 여주인터체인지에 이르는 57㎞ 구간에서는 차량들이 아예 움직이지 못하는 상황이 벌어지기도 했다.또 상행선의 현천 교차로부근,남한강교 부근,중부고속도로로 진입하는 남한강교∼호법 인터체인지 구간등 휴게소나 인터체인지 곳곳에서 지체와 서행이 반복됐다. 이때문에 평소 4시간30분 거리인 강릉∼서울,속초∼서울 구간이 9∼10시간씩 걸렸다. 중부고속도로 상행선도 호법 인터체인지에서부터 차량들이 밀리기 시작,경기도 광주∼곤지암,중부 제2터널 부근에서 차량들이 꼬리를 물고 늘어서 거대한 주차장을 방불케 했다. 경부고속도로 상행선 역시 이날 하오 4시이후 대덕 터널∼천원인터체인지 구간등 4∼5군데 구간에서 정체가 일어났다. 호남고속도로도 전반적으로 차량들이 서행운행을 했으며 경부고속도로와 합류하는 회덕 인터체인지부근에서 서대전까지는 차량들이 1시간가량 꼼짝 못한채 서 있기도 했다. 한편 춘천∼서울간 경춘국도를 비롯,양평∼서울간 국도,광릉∼서울간 47번 국도,포천∼의정부간 43번 국도 등도 구간별로 시속 10∼20㎞의 거북이 운행이 계속됐다.
  • 「북인권」등 잠복… 수교까진 먼길/미북관계 전망(북핵타결)

    ◎무기 금수·테러 포기등 조건 충족돼야/미의 대북규제조치 해제절차도 복잡 미국과 북한이 평양과 워싱턴에 외교창구를 개설키로 한 것은 양국의 정치및 경제관계의 완전정상화를 위한 전단계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영문합의문에 언급된 Diplomatic Representation은 외교대표부(Diplomatic Representative)를 의미하는 것인지 혹은 연락사무소(Liaison Office)를 의미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나 양측이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중간단계의 하나로 활용하는 외교창구임은 분명하다. 북한측이 발표한 합의문에는 「외교대표부」로 변역을 하고 있는 반면 주미대사관이 비공식으로 번역한 문안에는 「외교창구」라고만 해 해당국가를 대표하는 기관의 지위를 구체화하지 않았다. 그러나 합의문 후반부에 있는 전문가 회의의 설치필요성을 설명하는 문장에는 「연락사무소 개설을 추진하기 위해」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당연히 연락사무소로 이해해야 한다고 외교소식통은 설명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수교전단계나 미수교관계국간에 설치하는 상대국의 대표기관은 ▲외교대표부 ▲연락사무소 ▲이익대표부(Interest Section)등이 있다. 미국은 과거 중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직전에도 연락사무소를 설치했고 최근 베트남과 관계개선을 꾀하면서도 연락사무소를 설치했다.미국무부는 지난 5월 미북한간의 관계개선도 이같은 전례를 고려할 것임을 이미 밝힌바 있다. 일반적으로 외교대표부는 연락사무소보다 격이 좀 더 높다고 할 수 있고 일종의 공관의 형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으나 실질적인 업무면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미·북한간의 연락사무소 교환설치는 다른 합의사항이 지켜질 경우 설치 그 자체에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으로 관계자들은 보고 있다.다만 상대국 수도에 체류할 인원의 규모,법적 지위부여 문제등은 상호주의에 입각하여 전례에 따라 이뤄질 것으로 예상된다. 문제는 이같은 연락사무소 수준을 넘어 완전한 국교수립을 위해서는 너무나도 많은 과제들을 극복해야 한다는 점이다. 우선 핵문제만 해도 핵개발의 영구동결뿐만 아니라 핵개발의 과거도 확실히 규명돼야 한다. 미국은 대북한 관계정상화의 전제조건으로 핵문제외에도 이미 ▲미사일의 해외수출금지 ▲테러리즘의 포기 ▲남북관계의 진전 ▲대미비방금지 ▲인권의 개선 등 여러가지 주문을 해왔다. 물론 미·북한간에 연락사무소의 설치등이 이뤄지면 그 자체로 이같은 조건들 가운데 상당부분은 자동 해소될 것으로 볼 수 있다.미국이 내거는 조건은 개별적인 조건차원이 아니라 북한이 국제사회의 책임있는 일원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하라는 것일 뿐이다. 그러나 이 가운데서 인권문제만은 쉽게 넘어갈 수가 없을 것이란 관측이 지배적이다.적어도 북한이 그들의 인권실태라도 밝히지 않으면 미행정부가 미의회나 미국민들을 설득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지적이다. 이와함께 완전한 외교관계는 필연적으로 완전한 경제관계를 수반해야 한다.이를 위해서는 미의회가 북한을 「적국 교역금지법」대상에서 제외시켜야하고 동결자산의 해제등 한국전쟁이후 북한에 가해진 각종 규제조치를 풀어야 하는 절차문제도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다. 외교전단계로 연락사무소가 설치된다해도 국교수립으로 가는 길은 험하고 멀다고 할 수 있다. ◎남북관계 전망/「합의」 구체화과정서 양측 「대화」 가능성/단기적으론 대남유화책 쓰지않을듯 미북 3단계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합의가 도출됨에 따라 앞으로 남북관계에도 적지않은 변화가 뒤따를 것으로 전망된다. 결론적으로 말해 이번 제네바회담의 성과는 거시적·장기적 관점에서는 남북관계 개선에 순기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인다.이는 정부당국이나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일치된 전망이다. 그동안 남북관계 개선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요인의 하나였던 핵문제의 해결에 큰 진전이 이뤄졌다는 점이 이같은 예측을 가능케 하는 주된 요인이다.더욱이 북한이 미국과 연내에 상호 연락사무소를 개설키로 하는 등의 합의사항이 순조롭게 지켜진다면 북한의 개방폭이 확대될 것이고,이 경우 북한당국의 대남 강경자세도 완화될 것이라는 추론도 가능하다. 요컨대 북측이 세계사의 큰 흐름인 개방화에 동참함으로써 국제사회와의 상호의존 관계가 심화될 경우 북한당국이 원하든 원하지않든 남북관계에서도 한층 유연한 태도로 나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얘기다. 그렇다고 해서 적어도 단기적으로 북한의 대남 자세가 당장 유화적으로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는 지적이다.미북간 주요한 합의사항의 하나인 한반도비핵화 이행문제를 둘러싼 북한의 이중적인 행태가 드러날 경우 남북관계가 오히려 악화될 공산도 있기 때문이다.민족통일연구원의 길정우 정책연구실장은 『미북 3단계회담의 합의성명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남북대화의 조기 재개 필요성은 느끼지 않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북한은 미북 합의성명이 발표된 13일에도 선전방송을 통해 범민족대회와 관련해 우리측을 극렬하게 비방하는 등 아직 태도변화의 조짐을 보이지 않고 있다.특히 중앙방송을 통해 「전민족대단결 10대강령」관철을 다짐하는 등 우리 정부와 민간을 분리시키는 통일전선전술전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자세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이처럼 대미 관계는 진전시키면서 남북관계는 현상을 고수하려는 북한의 기도는 결국 벽에 부딪힐수 밖에 없다는 관측이 지배적이다.즉 『미국이 궁극적으로 우리의 우방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남북관계를 개선치 않고는 대미관계 진전도 제약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점을 북한도 깨닫게 될 것』(구본태 통일원 정책실장)이라는 해석이다. 이는 북한도 이번 미북 합의성명의 실천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남북대화에 나서게 될 것이라는 전망이기도 하다.즉 북측에 경수로 지원이나 대체에너지원 제공 등 미북간 합의는 한국의 참여를 전제로 하고 있고,이를 실천에 옮기려면 남북간 또는 한국을 포함한 다자간 협상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물론 오는 9월23일 예정된 3단계 2차회담 이전에 열릴 미북 전문가협상 과정에서 북측이 한국형 경수로를 끝내 마다할 경우 남북관계가 뒤틀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북한측이 경수로건설 과정에서 남한측 인력의 북한상주 등으로 인한 체제동요를 우려해 러시아형 경수로를 선호하고 있으나 대체비용의 큰 몫을 부담할 우리측은 민족공동이익 확보차원에서 한국형원자로를 양보할 수 없는 형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경우 북측도 이번 미북 제네바 합의의 과실을 포기해야 하는 만큼 중장기적으로는 입장을 바꿀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따라서 우여곡절은 있다고 하더라도 이번 제네바회담의 합의성명이 구체화되는 과정에서 어떤 형태로든 남북대화의 장은 마련될 것으로 전망된다. ◎대미관계 개선… 김정일 입지 강화/경제난 타개·대일수교의 발판 마련/북한이 얻어낸 것 이번 3단계 미북회담을 통해 북한은 핵무기개발을 포기하는 대가로 많은 것을 얻어냈다.「핵카드」를 최대한 활용해 결과적으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이 얻어낸 최대의 성과는 뭐니뭐니해도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꼽을 수 있다. 북한은 자기들이 제안한 핵문제­대미관계개선이란 일괄타결방식에 의해 이번 협상이 타결됨에 따라 그동안 주적으로 삼아왔던 미국과 관계개선의 물꼬를 텄다.이와함께 경제난 타개·대일관계개선등 여러가지 현안들을 풀어나갈 수 있는 중요한 계기도 아울러 마련했다. 이제 북한은 대미관계개선을 달성한 만큼 일본과의 관계정상화에도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이와함께 유럽등 서방국가들과의 관계개선도 적극적으로 꾀해나갈 것으로 보인다. 미국과의 외교및 경제분야에서의 관계개선이 이뤄질 경우 북한은 경제난 해결에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서방과의 교역증대와 부족한 물자도입으로 심각한 식량난을 어느정도 해소할 수 있게되고 생산활동도 상당히 제고될 것이기 때문이다.특히 2백만㎾의 경수로 건설을 지원받게 되면 북한은 만성적인 전력난해소에도 적지않은 도움을 받게될 것이다. 미국과의 관계개선은 지난달 8일 사망한 김일성이 추구했던 것이었지만 권력을 세습한 김정일의 입지를 강화시켜주는데도 큰 기여를 하리라는 것이 북한문제 전문가들의 지배적인 분석이다.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한 지 한달이 지난 지금까지 공식적인 권력승계절차를 밟지않고 있는데,이번 협상이 의도했던대로 타결됨에 따라 앞으로 자신의 체제구축에 이를 최대한 활용할 것으로 관측된다. 이번 미북회담은 김정일의 대외정책이 어떤 색깔을 띠게될 것인가라는관점에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는데 일단은 개방적이고 유화적인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그러나 북한이 합의사항들을 성실하게 이행할 지의 여부는 앞으로 더 두고봐야할 것 같다.
  • 「남북경제공동위」 재추진 검토/정부

    ◎북­미회담 성과따라… 경협재개 준비 정부는 제3차 북미회담이 긍정적인 성과를 거둠에 따라 그동안 중단된 남북대화도 재개될 것으로 보고 남북경제공동위원회의 개최를 포함,경제협력을 활성화하는 방안을 신중히 검토중이다. 13일 관계당국에 따르면 제네바에서 열린 북미회담이 핵뿐아니라 양국의 관계정상화까지 합의하는 등 예상보다 훨씬 큰 폭으로 진전돼 「선 핵투명성보장」을 요구한 우리정부의 입장이 상당히 수용됐다고 판단,경협재개를 준비하기로 했다.이에 따라 지난 92년11월에 열려다 남한 조선노동당간첩사건이 터져 무산된 남북경제공동위가 다시 열릴 것으로 보고 내부적인 검토에 착수했다. 경제기획원관계자는 『핵문제가 완전 해결돼도 경제문제는 경제공동위가 열려야만 실질적인 토의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라며 『2년전 무산된 1차회의에 대비해 마련했던 구체적인 실천계획중 일부내용을 그동안의 상황변화에 맞춰 손질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경제공동위가 열릴 경우 98%가 홍콩과 일본을 통하는 남북물자교류를 직교역으로바꾸기 위한 청산계정설치와 남북직항로 추가개설 등의 문제가 우선적으로 논의될 전망이다.
  • “핵해결 서막… 낙관도 비관도 금물”/전문가 시각(북핵타결)

    ◎양국의 내부사정 반영… 구체성 결여/김창순 북한연이사장 미국과 북한의 3단계 회담 결과는 북한핵문제와 관련한 험한 국면을 한고비 전환시켰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북한­미국관계나 한반도문제에 있어서 국면전환의 틀이 마련된 셈이다.그런 점에서 긍정평가도 가능하다. 그러나 한반도 평화보장과 핵문제 해결이 완전히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다.합의문을 보면 구체적이지 못하다.앞으로 사태진전을 더 봐야 문제가 해결의 길로 가는지 그렇지 않은지를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연락소 설치 합의만 해도 언제 어떻게가 없는등 구체적이지 못하다.제3차 회담결과에 따른 1라운드가 이제 시작되었다고 보는게 정확할 것이다. 북한이 합의를 뒤엎으리라고 속단하는 것은 아니다.다만 합의가 세부적이지 못해 그것이 그대로 이행될지는 더 지켜보아야 한다는 뜻이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자신의 체제를 굳히기 위해 김일성의 유업을 착실히 이어가려 하고 있다.미국과 북한의 3단계 회담도 김일성이 시작한 것이다.이 회담을 잘 이끄는 것이 김일성의 유지를 잇는 것이 되기에 되도록 회담 결과를 좋게 포장하려 한 인상을 준다.회담결과가 이렇게 나타난 것은 김정일체제를 굳히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는 분석도 가능하다. 미국도 중간선거등을 앞두고 북한과의 회담이 좋게 끝났다는 인상을 미국의 유권자들에게 주려 하고 있다.미국과 북한의 이러한 속사정탓에 합의문이 그럴듯하게 나왔을뿐이지 실제로는 구체적 합의는 아니라고 본다. 남북관계에 있어서도 합의문은 언급하고 있다.합의문 3항에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을 이행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밝히고 있다.그러나 북한은 남한보다는 미국과의 관계에 중점을 두고 있다.남북관계를 미­북관계에 종속시키려는 자세를 보이고 있다.따라서 한반도비핵화선언의 이행을 거론했다 해서 핵문제가 완전 해결됐다고 받아들일 수 없다. ◎경수로 지원과정서 남북교류 촉진/윤덕민 안보연교수 북한이 핵개발 동결 원칙에 합의했고 그 대신 경수로 지원과 미국과의 관계개선이 선물로 주어졌다.하지만 이는 북한의 핵개발 동결 원칙과 미국의 경수로 지원 및 관계개선이 맞물려 진행될 예정이라는 것이지 아직 행동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해 완전한 해결이 아니라 해결을 위한 과정의 시작이다.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낙관도 비관도 금물이다.앞으로 열리는 회담의 추이를 지켜봐야 한다.북한은 지금까지 원칙에는 쉽게 합의해 놓고도 구체적인 부분에서 회담을 결렬시킨 적이 여러 번 있었던 점을 기억해야 한다. 북한은 미국의 경수로 지원과 관계개선의 정도에 따라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단계적으로 취할 것으로 여겨진다.문제는 북한핵의 과거가 포괄적 협상의 틀 안에서 어떻게 다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다.미국은 이번 회담에서 북한핵의 과거를 밝히기 위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을 요구했지만 북한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북한핵의 과거가 이번 합의를 결렬로 몰고가는 요인으로 작용하지는 않을 것이다. 또 걱정되는 점은 미국이 북한핵의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북한의 불안감을 불식시켜 북한 스스로가 문제를 해결하도록 유도하는 포용전략(Engagement Policy)으로선회한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클린턴정부는 지금까지 이런 경향을 보여왔다. 그러나 경수로 지원에 필수적으로 수반되는 인적·물적 교류가 남북관계에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로서는 다행이다.2천Mw의 경수로를 건설하는데 드는 비용 40억달러 가운데 절반 쯤은 우리가 내야 할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재정적으로는 상당한 부담이 될 전망이지만 건설에 소요되는 약 10년동안 남북한 기술자의 왕래와 기자재 공급등을 통해 남북교류는 활발해질 것이다. ◎통일정책의 재점검 필요/이용필 서울대교수 미국과 북한이 제네바 3단계 고위급회담에서 핵개발동결과 양국간 관계개선을 합의한 것은 한반도 핵문제를 해결하는데 큰 전기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또 동북아 지역의 국제정치 안정에도 기여할 것으로 전망된다.이번 회담을 지켜보면서 한반도와 주변 4강간의 국제적인 역학관계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절감했고,우리 정부의 대책마련이 시급하다는 생각이 든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은 남북한과주변 4강 사이의 교차승인을 주장해 왔던 우리 정부의 입장이 발전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남북한간의 상호교류가 활발해지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보인다. 합의내용중에 미·북한간에 무역 및 경제교류의 장벽을 없앤다는 부분이 있는데 이는 심각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한 북한의 용의주도한 의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미국이 북한에 핵동결조건으로 경수로를 지원하기로 했지만 경수로지원에 드는 비용을 실질적으로 부담해야 하는 것은 우리 정부인 만큼 우리의 입장이 분명하게 반영되도록 노력해야 한다.경수로지원과 경협에 있어 우리 정부는 비록 협상 당사자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3자가 돼서도 안된다.그 때문에 우리 정부의 적극적인 대처가 요구된다. 이번 합의내용중에 북한핵의 현재와 미래의 투명성은 보장하고 있지만 핵 과거에 대한 부분은 언급이 없는 것이 걸린다.우리 정부는 미국에 북한 핵과거의 투명성 보장을 강력하게 요구해야 한다. 남북문제는 결국 남북한 당사자들이 해결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싶다.미·북한간의 회담이 결코 양자만으로 해결되는 것으로 비치게 해서는 안된다.그렇기 때문에 미·북한 회담에 있어서도 우리의 목소리가 반영될 수 있도록 외교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우리 정부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적인 노력과 함께 통일정책을 재점검,급변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해야 할 것이다. ◎미,북정권 안정기회 준듯/김유남 단국대교수 미국과 북한이 관계개선을 합의하고 북한이 NPT잔류를 약속한 것은 그동안 예측했던 방향으로 결과가 나타난 것으로 본다.북한의 정권을 일단 안정시키겠다는 차원에서 미국은 북한에 기회를 주었고 북한도 같은 맥락에서 양보를 한 것으로 풀이된다. 미국은 이제 북한까지를 포함한 전반적인 동북아 정책을 강구할 수 있게 됐으며 이 지역에서 역할을 증대시키려 할 것이다.다시 말해 한반도정책의 수립과 집행에 있어 한국만을 갖고 다루는게 아니라 북한을 통해서도 하려 할 것이다. 미국은 그동안 제3자를 통해 북한을 알아왔다.미국은 북한을 좀더 알기 위해 대표부가 안되면 6·25실종병사확인 사무실이라도 설치하려 했었다.북한은 이를 눈치채고 대표부설치를 제안했고 미국이 이를 수용한 것으로 본다.미국은 북한과의 직접적 대화창구가 열렸기 때문에 한반도에서 다른 정책을 추구할 정보수집능력을 향상시키게 되었다. 물론 미국이 한국을 완전히 도외시하지는 못할 것이다.그러나 김정일체제를 안정시킨 다음에 한반도정책을 추구한다는 기본 원칙을 당분간 유지할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외교가 지금과 같아서는 안된다.우리가 좀더 외교역량을 강화해야지 잘못하면 미국과 북한 사이에서 우리의 목소리를 잃어버릴 우려가 있다.북한 정권을 객관적으로 보고 냉철한 외교정책을 수립해야 한다.김정일체제가 곧 망할 것이라는 식의 감정적 사고는 버려야 한다. 미국과 북한의 관계가 개선된다 해서 남북관계에 금방 큰 변화가 있을 것으로는 보지 않는다.남북관계와 미­북관계가 균형적으로 진전되리라고 기대하는 것은 너무 성급한 판단이다.미국과 북한의 관계개선이 남북관계에 악영향을 미치지는 않겠지만 당장 남북관계를 호전시키지도 않을 것이다.남북교류나 경협을 확대하는 것에 대해 북한은 신중한 생각을 갖고 있다.외교와 마찬가지로 남북문제에 접근하는데에도 올바른 정보와 객관적 판단에 근거해 정책을 수립해야 한다.
  • 광복 49돌/해묵은 이념갈등 종식을 모색한다/정담

    ◎“「자유민주」 건국이념 통일로 승화돼야”/미군정·독재정권 친일파 수용이 갈등의 불씨/자유민주=보수·민족주의=진보 「기형적 틀」 형성/남북 이념적인 통합기회 없이 분단/6·25 겪으며 반공·반미로 첨예 대립/탈냉전시대 사상논쟁 재연은 역사의 아이러니 올해로 광복 49주년을 맞았다.그러나 반세기가 지나도록 자유민주주의라는 건국이념을 다시 논할 수 밖에 없는 것이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김일성사후 주사파문제가 예년에 없이 심각하게 부각되고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정부의 정통성마저 부인하며 해묵은 사상논쟁이 재연되고 있다.새로운 남북관계와 통일정책수립을 앞두고 진덕규(이화여대),이택휘(서울교대·한국독립운동사 연구소장),이현희교수(성신여대)가 우리의 건국이념을 재조명해보고 현재에 갖는 의미,구현방법등에 대해 의견을 나눴다. ▲이택휘교수=광복 당시 남북한은 모두 통합된 민족국가를 세우는 것이 최대의 목표였고 국민적 합의도 얻고 있었습니다.그러나 광복과 함께 남한은 미국의 자유민주주의를,북한은 구소련의 사회주의를 수용해 이념적으로 통합될 기회를 갖지 못하고 분단이 고착됐습니다.광복전부터 내재해 있던 이념갈등은 그후 심화됐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현희교수=건국이념의 배경을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내부적으로는 민족광복세력의 왕조체제청산과 미국과 소련등 외세에 의한 영향등을 우선 꼽을 수 있습니다.임시정부가 중심이 됐던 군주제청산은 민주체제로의 자주적인 노력으로 임시헌장에 절대 자주독립과 자유민주주의,나아가 전통사상인 홍익인간과 이화세계,삼균주의정신을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광복후 남북의 이데올로기 갈등으로 건국이념은 올바로 설정되지 못했습니다. ▲진덕규교수=국민적 열망이었던 자주독립정신을 문서에 담은 것이 건국 초기의 헌법입니다.여기에는 의회정치와 개혁적인 경제정책,근대적인 시민사회와 선진문화 도입등을 분야별로 담고 있습니다.그러나 이같은 헌법정신,즉 건국이념은 이데올로기와 남북갈등으로 인해 반공으로 치우치게 됐고 결국 이데올로기의 경화는 삼균주의와 같은 임시정부의 이념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었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항일운동은 여러 갈래로 나눠 진행됐지만 군주정치로 돌아가서는 안된다는 이념적인 틀에는 모두 합의하고 있었죠.그러나 45년이후 남북간에 타율적으로 생겨난 이념갈등은 6·25전쟁으로 이어졌습니다.전쟁을 겪으면서 남한은 자유민주주의의 제1 요소로 반공을 부각시켰고 북한은 반미를 들고 나와 첨예하게 대립합니다.이같은 갈등은 60년대 국제적인 해빙무드와는 상관없이 계속되다 80년대 들면서 서서히 해소됐습니다.45년 당시와 마찬가지로 국제적인 역학변화가 이번에도 남북에 영향을 줘 급기야 남한에 사상논쟁을 재연시켰다는 것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현=광복직후 서구의 특정 이념을 초월해 통합된 민족국가를 수립해야 한다는 데 국민적 합의가 모아졌다는 사실을 살펴봤습니다. 하나의 민족국가를 세우겠다는 국민들의 열망은 그러나 좌우대립으로 멀어져갔고 그 과정에서 남한이 48년 먼저 선거에 의한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사회 일각에는 이같은 남한의 단독정부수립을 분단고착과 연결지어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이 있습니다.북한의 주장처럼 단정의 책임이 전적으로 남한에 있는지,또 단정수립이 정말 불가피했는지 등을 짚어봤으면 합니다. ▲진=단독정부수립을 남한의 이승만정권이 혼자서 주도했다고 보는 것은 정확한 역사인식이 아니라고 봅니다.왜냐하면 북한에는 이미 46년 실질적으로 정부가 세워진 것과 다름없을만큼 조직이 정비돼 있었고 남쪽마저 공산정권으로 만들려는 시도가 진행중이었습니다.그래서 남쪽에서는 북쪽에 대응해 단독정부를 수립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위기감과 절박감이 팽배했습니다. 게다가 미소공동위원회가 실패로 끝나 미국은 결국 유엔에 남북한 정부수립문제를 위임했고 총선이 가능했던 남한에서만 선거가 치러진 겁니다.다시말해 처음부터 단독정부를 수립해 분단을 획책한 것이 아니라 당시 주변상황이 남한 단독정부수립으로 이어지게 한 거지요.때문에 이승만정권이 단정수립으로 분단을 노렸다는 것은 지나치게 자의적인 해석이며 역사에 대한 몰이해·반이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봅니다. ○무정부상태 계속 ▲이현=저 역시 단정수립에 한반도의 분단을 고착시킬 의도가 있었다고 보지 않습니다.45년부터 48년까지 남로당은 대구폭동,여순반란사건,4·3제주사건등 전국적인 교란작전으로 정국을 무정부상태로 만들었습니다.당시 이승만박사는 「선 정부수립 후 통일」이 불가피 하다고 봤고 김구선생이 이끄는 한독당과 접촉을 합니다.한독당은 그러나 남한단독정부수립은 한반도의 영구분단을 가져온다며 반대하며 좌우연립정권 수립을 주장합니다.이박사는 공산세력을 절대로 끌여들여서는 안된다는 단호한 입장이었기 때문에 한독당이 불참한 가운데 불가피하게 단독정부를 수립하게 됩니다. ○단정수립 불가피 ▲이택=단정수립이 과연 불가피했느냐 하는 문제는 현대 정치사의 주요 논쟁의 대상입니다.앞에서도 언급됐지만 북한은 46년에 이미 정부조직을 거의 완료해 놓고 남쪽에도 공산정권수립 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것이 입증된 사실입니다.사료들을 종합해보면 단정수립의 책임은 상당 부분 북한 특히 소련에 있다고 봐야합니다.그러나 남한도책임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이박사와 민족세력등이 보다 적극적으로 미군정을 설득하고 단정수립을 지연시키기 위해 최선의 노력을 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는 점이 아쉽습니다. ▲이현=좌우합작을 시도했지만 역부족이었고 무정부상태에 가까운 치안상태와 내외의 역작용을 고려할 때 단정수립은 불가피했다고 정리를 해도 무리는 없겠군요.그렇다면 화제를 최근의 사상논쟁으로 돌려 그 원인과 자유민주주의를 내세운 건국이념이 현재에 갖는 의미는 어디에 있다고 보십니까. ▲진=건국이념의 현재의 의미를 논하기전에 먼저 현실인식과 당위성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단정이 수립되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 까에 대한 가정은 얼마든지 해볼 수 있습니다.그러나 중요한 것은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현실인식이 선행돼야 한다는 겁니다.대한민국은 선거를 통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부였지만 상해 임정세력들이 제헌의회에 불참하는 등 불완전한 부분도 있습니다.그러나 그후 5·30선거에는 임정세력들도 참여했고 특히 조소앙선생이 최다득표를 얻어 국민적합의가 생겨납니다.강조하고 싶은 것은 6·25전쟁은 자유민주주의의 건국이념을 변하게 했던 사건이 되었습니다.즉 공산주의와의 대결에 초점이 맞춰지면서 건국이념으로 서의 자유민주주의를 반공으로 몰아가는 냉전적 대결성을 가열시키고 말았습니다. ▲이택=그렇습니다.이쯤에서 왜 이념적 갈등 또는 논쟁이 아직까지 정리되지 않고 있는지 그 이유를 정리해볼 필요가 있습니다.가장 큰 이유는 미군정이 군정의 편의를 위해 친일인사를 수용한 겁니다.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면서 막상 항일민족운동을 했던 사람들은 철저하게 배제됐습니다.이런 모순된 상황은 결국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회의를 싹틔웠고 「자유민주주의=보수,민족주의=진보」라는 기형적인 이념적 틀을 만들었습니다. 이념적 왜곡은 7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커졌고 지금에 이릅니다.최근의 사상논쟁의 중요배경 역시 미군정과 그후 독재정권이 친일파를 정리하지 않고 그대로 수용했다는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진=친일파처리문제가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정통성시비를 일으키는 면이 있습니다.대한민국에는 48년부터 50년대 초까지 정부·경찰·학교·법조계등 국가의 중간관료급에 친일파가 다소 남아있었지만 각료의 차관급이상에는 친일파가 비교적 적지않았습니다.그러나 50년대 중반기 이후 중요정책의 결정에 참여했던 고위직에도 친일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이는 당시 이승만정권이 국가의 1차적인 대결세력를 공산주의자들로,이들과 대립하면서 승리하기 위해 힘의 응집이 필요했기 때문에 일어났던 현상으로 여겨집니다. ○김일성 집권수단 ▲이현=최근 주사파 학생들은 남북한의 친일파숙청과정을 비교하면서 남한 정권의 정통성에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된 것입니다.북한이 광복이후 인민위원회의 주요간부급에 친일파 또는 친일한 혐의가 있는 사람을 모두 배제한 것은 사실입니다.그러나 북한은 친일파의 숙청을 그 자체보다는 김일성 반대세력을 제거,정권을 유지하기 위해 이행했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됩니다. ▲이택=친일세력들은 6·25전쟁과 5·16혁명을 거쳐 80년대까지 모든 분야에서 충원됐고 이는 이념의 혼란을 가져온 주요 원인입니다.과거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은 30∼40년씩 방치해둬 어렵게 사는 반면 친일세력은 득세하는 이해할 수 없는 세상이 된 겁니다.진보적 성향의 사람들은 이를 비판했습니다.소위 자유민주주의를 주장하는 사람들과 친일세력이 대부분 일치하자 「이게 아니구나」하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늘어났고 자연히 북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고 봅니다.대안마련이 제대로 안된 상태에서 북쪽의 이념은 그래도 어느정도 정리된 것처럼 비친 것이 우리사회의 이념적 혼란을 가중시키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진=한국전쟁이후 3·15부정선거까지만 돌이켜 보아도 자유민주주의 정치질서와 속성이 얼마나 유린되었는 지를 알 수 있습니다.4·19혁명은 자유민주주의로 되돌아가서 이를 확립해 보려는 열망의 표출입니다.그러나 곧 박정희정권의 조국근대화 기치에 눌려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국민적 열망도 빗나갔지만 6월 항쟁을 계기로 다시 국민과 정부는 대한민국의 건국이념으로의 올바른 자리매김을 시도하게 되었습니다. ○사회적 정의실현 ▲진=먼저 건국이념인 자유민주주의의 본질과 민족국가의 개념을 짚어봐야 합니다.민족국가수립의 적시성과 국민적 욕구와 합의가 확보되어 있었는지도 함께 살펴보아야 합니다.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자유민주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체제에서 말하는 민족주의의 개념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점입니다.원래 민족주의는 계급을 초월한 개념입니다.그러나 사회주이는 이를 전략적·수단적 의미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택=민주주의는 통합된 민족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방법일 수 있습니다.민주주의의 운영원리는 구성원들 사이에 도덕성과 사회적 정의를 과감하게 실현하기 위해 개혁을 지향하는 겁니다.정부가 먼저 주사파등을 수용,보다 과감하게 개혁을 추진해야 합니다. ▲이현=반대세력은 용인하되 자유민주주의에 역행하는 불순한 사상 제거를 전제로 한 건국이념을 정립해야 합니다.광복이전의 공산활동은 항일운동의 방편으로 행해졌기 때문에 8·15이후와는 구분돼야 합니다.따라서 대단합 차원에서 8·15이전에 독립운동의 일환으로 공산활동을 한 사람도 독립운동자로포상하는 방안은 검토해볼 만 하다고 생각합니다.단군의 후손으로 「하나였다」는 주체적인 입장에서 45년 또는 48년이 아닌 임정의 임시헌법이 만들어진 1919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우리의 자유민주주의 경험을 토대로 한 건국이념으로 통일을 지향해야 합니다.
  • 이승만과 김일성 비교론/김학준교수,남북한단정 두주역을 말한다

    ◎끝까지 항일깃발… 사상적 뿌리 민주주의에/이승만/기독교신자서 마지막 스탈린주의자로 종말/김일성 대한민국 건국 46주년을 맞이하면서 우리는 새삼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들 가운데 한 분으로 대한민국의 초대 국회의장과 초대 대통령을 지낸 이승만박사를 생각하게 된다.동시에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면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세우는데 앞장서 북한 공산정권의 초대 내각수상으로 북한 권력구조의 정상에 오른 뒤 무려 46년동안 1인장기집권을 유지하다가 최근에 죽은 김일성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된다. 이승만과 김일성은 똑같은 이북 사람으로 이승만은 황해도에서,김일성은 평안남도에서 각각 태어났다.두 사람은 37년의 시차를 두고 태어났는데 그러나 차이는 연령 하나에 국한되지 않고 많은 부분들에 걸쳐 있다. 이승만은 조선왕조의 황혼기에 태어나 고전적인 한문교육을 받다가 서울에서 배재학당을 다니며 미국 교육을 받았다.이렇게 볼때 그는 미국 교육 또는 서양 교육을 일찍받은 당대의 선진적 소수 지식인들 가운데 한사람이었다.그가 받은 교육의 내용은 서양 민주주의와 기독교에 관한 것이었다.그는 상당히 자극됐으며 그리하여 독립협회 운동과 만민공동회 운동에 참여해 싸우다가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석방된 뒤 그는 기독교 청년운동에 종사하다가 도미하여 조지워싱턴대에서 정치학 학사를,하버드대에서 정치학및 역사학 분야의 석사를,그리고 프린스턴대에서 정치학및 국제법 분야에서의 박사를 각각 받았다.그의 학문적 배경만을 놓고 볼때 당시의 조선사람으로는 단연 정상급의 학자였다고 할 것이다. 이승만은 곧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초대 대통령으로 추대됐다.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 안에서 벌어진 심각한 노선투쟁은,특히 무장투쟁노선을 옹호하는 세력은 외교선전노선을 앞세우는 이승만으로 하여금 미국으로 돌아가게 만들었으며 그리하여 그는 수도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만들고 이 기구를 중심으로 미국 정부와 국제연맹을 상대로 조선의 독립을 호소하는 운동에 매달리게 했다. 그의 독립운동 방식이 무장투쟁 방식의 시각에서 보면 의미가 줄어들 것이다.그러나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는 단 한차례도 일제와 타협한 일이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항일독립의 깃발을 들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김일성은 조선왕조가 무너진 뒤 망국민의 신분으로 태어났다.이승만이 기독교 교육을 받으며 자랐듯 김일성 역시 기독교 집안에서 기독교의 영향을 받으며 자라났다.그러나 이승만이 평생 기독교 신앙을 지켰음에 반해 김일성은 곧 기독교를 버리고 반기독교적 입장에 섰다는 점이 대조된다. 이승만의 교육적 배경과 활동의 무대가 미국이었음에 비해 김일성의 그것들은 만주였다.이승만이 영어를 모국어나 다름없이 썼음에 비해 김일성이 중국어를 모국어처럼 썼다는 대조도 흥미롭다. 김일성의 교육은 그러나 중학교 퇴학으로 끝났다.그는 곧 중국공산당 당원이 됐으며 일본 제국주의에 대해 무장투쟁의 길을 걸었고 그 종착역은 소련극동군의 정보특무 대위였다. 조국이 일제로부터 해방되면서 이승만은 만70세의 노인으로 미국으로부터 서울로 돌아왔다.한편 김일성은 만33세의 청년으로 소련으로부터 평양으로 돌아왔다. 이승만의 사상적 뿌리는 미국식 민주주의였다.그래서 그는 북한을 점령한 소련의 국가 이데올로기,곧 공산주의를 증오하고 소련의 영토적 팽창주의를 경계하면서 소련이 북한을 발판으로 남한까지 공산화시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경각심을 가졌다. 여기서 그는 일찍부터 단정론을 들고 나왔다.되지도 않을 남북통일에 연연하다가는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될 위험성이 크므로.게다가 북한에서는 「소련 점령군의 앞잡이」김일성을 중심으로 소비에트 정권이 창출되고 있으므로 남한에서도 서둘러 정부를 수립해 맞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실제로 김일성은 소련점령군의 북한 소비에트화 전략을 떠받들고 북한에 공산주의 단독정권을 세워나갔다.그는 이 단독적 공산정권이 서고나면 그것을 발판삼아 남한까지 공산화할 계획이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48년8월15일에는 남한에서 대한민국이 세워졌고,같은해 9월9일에는 북한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두 국가는 각각 상대방의 존재를 부인했다.부인할 뿐만아니라 상대방을자신에게 흡수통합시키기위해 무력의 사용도 주저하려고 하지 않았다. 전면적인 선제공격을 가해 온 쪽은 김일성이었다.그는 소련및 중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50년6월25일 남침을 개시함으로써 동족상잔을 촉발시킨 것이다. 이승만은 다행히 미국의,그리고 국제연합의 지원을 받아 대한민국의 붕괴를 막을 수 있었고 한걸음 더 나아가 압록강까지 진격해 북진통일을 기대할 수 있었다.이 시점에서 김일성은 중국의 지원을 받아 북한 공산정권의 궤멸을 막을 수 있었다.여기서 전전 원상의 회복이라는 테두리 안에서의 휴전이 성립됐고 이 휴전체제는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을 치르면서 이승만은 권위주의 체제의 길을 걸었다.부산 정치파동과 3선개헌을 거치면서 민심의 이반을 낳았던 그의 통치는 결국 60년의 3·15부정선거로 귀결됐으며 4·19학생의거에 따른 4월혁명을 만나게 됐다. 대한민국의 조지워싱턴이 될 수 있었던 그는 하야하지 않을 수 없었고,하와이로 망명의 길을 떠나야 했다.5년 뒤 그는 유명을 달리한 채 귀국했다. 김일성은자신의 정신적 스승인 스탈린이 걸었던 길을 그대로 걷고자 했다.그것은 반대파에 대한 무자비한 숙청 그리고 피치자에 대한 억압과 세뇌였다. 이승만이 하야한 뒤 대한민국에서는 정권이 여러차례 바뀌었다.헌정사에는 굴곡이 적지 않았으며 어두웠던 시절들이 때때로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이 쌓아올린 건국의 울타리 안에서 대한민국은 결국 민주주의와 번영의 길에 들어섰다.다행스러운 일이다. 김일성의 북한은 한때 경제적으로 대한민국을 앞선 때가 있었다.그러나 1인 장기집권의 억압체제가 반세기 가깝게 지속되면서 사람들은 활력을 잃게 됐으며 자연히 경제적 침체라는 늪속에 깊숙하게 빠져버렸다. 그리하여 북한 공산체제의 붕괴론마저 나오는 시점에서 김일성은 마침내 죽었다.이승만의 별세 이후 29년만의 일이다. 48년 이후 남쪽에서는 공화정이 여섯차례나 바뀌었고 최고권력자도 일곱사람이나 나왔다.그래서 대한민국은 비록 우여곡절이 있었으나 교체를 통한 국민적 활력이 살아도 나고 지탱도 되어 선진국을 바라볼 수 있는 민주적 신흥공업국가로 커졌다. 그러나 북쪽에서는 최고집권자가 전혀 바뀌지 않은채 지내오다보니 세포가 죽어버려 결과적으로 빈곤의 땅이 됐다.이것은 김일성이 역사적으로 너무 오래 살았음을 의미한다.역사와 민족을 위해 그는 일찍 세상을 떠났거나 권력에서 떠났어야 했다. 이제 미래가 대한민국의 편임이 확실해졌다.민주주의와 시장경제원리라는 시대적 흐름을 탄 대한민국으로서 자신감을 갖되 신중하게 남북의 평화통일을 향해 착실하게 전진할 때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서두를 필요는 없다.김정일체제의 성격과 방향을 날카롭게 주시하면서 우선은 기본적인 교류와 협력의 부문에 돌파구가 열리도록 노력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내년의 8·15는 해방 50주년이면서 분단 50주년이 되는 뜻깊은 역사적 시점이다.남과 북을 통틀어 우리 겨레의 형편이 훨씬 더 개선되기를 바란다.
  • “북 통일전술과 동일” 강경대응/검·경 범민족대회 원천봉쇄 배경

    ◎「대회개최 북측과 협의」 중시/방치땐 친북활동 시도 우려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범추본)」가 당국의 불허방침에도 불구하고 13일부터 제5차 범민족대회를 강행키로 해 주최측과 경찰사이에 무력충돌이 예상되는등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고 있다. 검·경이 민주주의민족통일 전국연합과 조국통일범민족연합 남측본부·한국대학총학생회연합등 재야·학생단체가 망라된 「범추본」의 행사를 원천봉쇄키로 한 것은 이 단체가 겉으로는 민간차원의 통일운동을 부르짖고 있지만 사실상 북측의 통일전략에 따라 움직이고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당국은 기본적으로 범민족대회를 북한이 70년대 평화통일 5대강령중 하나로 제시한 「대민족회의소집」과 같은 맥락으로 보고 있다. 「범추본」의 주장과 행사내용들이 「남한내에 반체제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사회의 혼란과 책동을 선동케 해 현 남한체제의 전복을 꾀한다」는 북한의 통일전선전술과 일맥상통한다는 것이다. 당국은 그 근거로 「범추본」이 지난달 30일 발족한 이후 발행한각종 자료가 이적성을 띠고 있는데다 91년 11월 서울고법에 의해 이미 이적단체로 판시된 범민련 남측본부가 이 단체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는 점등을 들고 있다. 실제로 「범추본」이 작성한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 결성대회 자료집」과 「금동이 초롱이의 통일이야기」,「범민족대회신문」등은 한결같이 북한의 대남노선과 일치하는 연방제통일방안과 국가보안법 철폐등을 주장하고 있다. 당국은 특히 주최측이 「북핵문제 일괄타결·평화협정체결」을 주장하고 이를 촉구하는 범국민서명운동을 벌이는등 북측의 정치노선을 그대로 따르고 있어 북한측과의 직접적인 연계가능성도 전혀 배제하지 않고 있는 실정이다. 이와관련,경찰은 범민련 남측본부측이 지난 2월 「민족대단결의 해를 맞아 제5차 범민족대회등 민족대단결운동을 전개하고 국보법철폐등을 위한 청년학생들의 투쟁을 적극 지지·성원한다」는 범민련 북측본부(의장 백남준)중앙위원회 회의내용을 팩스로 접수하는등 주최측이 북한측과 대회개최 방안을 계속 협의해온 점을 중시하고 있다. 「범추본」은 또 올해 범민족대회의 목표를 ▲통일문제에 대한 외세개입반대 ▲남·북·해외 3자 연대를 통한 민족대단결기운 고양 ▲통일운동의 대중화와 민간통일운동의 조직적 단결의 토대마련 ▲김영삼정권의 외세의존적 국제공조체제 규탄 등으로 규정하고 있으나 경찰은 이러한 목표가 지난 5월 평양에서 발표한 범민련 공동의장단 회의 합의문과 동일한 맥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범추본은 또 일괄타결·평화협정체결 촉구,국가보안법철폐 투쟁,미군기지 반환운동,군비축소운동등 북한의 대남노선과 일치하는 내용을 올해의 주요 사업내용으로 설정하고 있어 사법당국은 체제수호차원에서 대회개최를 방치할 수 없다는 입장이다. 경찰은 이와함께 90년부터 지난해까지 4차례의 범민족대회때마다 5천∼1만여명의 대학생·재야인사들이 화염병 투척과 투석전등 불법 가두시위를 벌인 과거 전력을 들어 이들의 순수성에 의문성을 제기하고 있다. 따라서 경찰은 범민족대회를 원천봉쇄하지 않을 경우 주최측이 일반 시민들에게 북한의 대남전술이 담긴 이적 유인물을 배포하고 전화나 팩스를 통한 북측·해외본부와의 통신교류를 기도하는등 친북활동을 시도할 우려가 크다고 보고 이를 적극 막는다는 방침이다.
  • 문충일씨,“여기가 그리던 조국”/북출신 일가4명 어제 입국

    ◎41년 만주이주후 미얀마·태국 전전/“아버지 찾아라” 모친유언에 한국행 북한출신으로 태국의 마약왕국 쿤사지역을 탈출,최근 한국정착을 희망한 무국적 난민 문충일씨(56) 일가족 4명이 12일 상오 8시55분 대한항공편으로 입국했다. 문씨는 이날 부인 이순선씨(45)와 아들 철군(19),딸 미령양(13)과 함께 환한 모습이었다. 문씨 일가족은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태극기를 꺼내들고 오랜 숙원이던 한국정착의 기쁨에 감격해했다. 문씨는 기자회견을 통해 『조국의 품에 안기니 대륙보다 더 광할하고 편안하다』며 『또한 한국정착이 소원이던 어머니의 유언을 마침내 이루게 기쁘기 그지없다』고 말했다. 평북 용천이 고향인 문씨는 3살때인 41년 부모를 따라 만주로 이주해 중국국적을 취득,평범한 생활을 해 왔다.그러나 부친이 43년 남한으로 떠나는 바람에 홀로 남은 모친을 모시면서 남편이 그리워 한국으로 가고 싶어하는 평소 어머니의 유언이 계기가 돼 한국정착에 꿈을 키워왔다. ­어머니의 유언으로 한국행을 결심했다던데. ▲아버지가 해방전 몽골에서 한국으로 귀국한 뒤부터 어머니는 물론 온 가족이 한국행을 소원해 왔다.어머니는 돌아가시면서 「아버지를 찾아가라」는 말을 남기셨다. ­지금까지 겪었던 역정을 간단히 말해달라. ▲중국은 내가 반백년을 산 곳이다.처와 아이들이 태어난 곳이기도 하다.그곳에서 고향삼아 살려 했으나 중국 공산당이 우리 가족들을 오해했다.60년 친구와함께 한국으로 도주하려다 10여년 감옥생활을 하고 나왔다.그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으로 살기가 나아졌으나 89년 천안문사태이후 외국인과 관계있는 기독교인에 대해 대대적 탄압선풍이 불어 더 중국에 있을 수 없었다.그래서 미얀마를 거쳐 태국의 마약왕 쿤사지역으로 들어가게 됐다. ­신앙은 어떻게 갖게 됐나. ▲개혁개방정책이 시행된뒤 아시아 극동방송 유모목사와 연락이 돼 기독교에귀의했다. ­쿤사에서 탈출하게 된 경위는. ▲쿤사에 관해 한국인에 정보를 흘린다는 오해를 받았다.그래서 방콕으로 탈출,주방콕 한국대사관의 도움으로 7평짜리 방에 온 가족 반년간 은신해 살았다.
  • 남­북적회담 조건없이 열자/강 한적총재 북에 제의

    ◎이산상봉·납북자문제 협의 강영훈 대한적십자사 총재는 12일 이산가족과 납북자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남북적십자사 총재나 부총재가 아무런 조건없이 빠른 시일에 판문점에서 만나자고 북한측에 제의했다. 강총재는 이날 남북적십자회담제의 23돌을 맞아 발표한 대북성명을 통해 『남북고위급회담 합의서를 통해 쌍방 적십자사가 문제를 쉽게 풀어나갈 수 있는 길을 열어놓은 만큼 회담재개를 더 이상 주저하거나 망설여야 할 이유가 없다』면서 중단된 남북적십자회담의 조속한 재개를 강력히 촉구했다. 강총재의 이번 제의는 북측이 우리측의 전화통지문접수를 계속 거부하고있는 상황에서 김일성사망후 북측에 대한 첫 제의라는 점에서 북측의 반응이 주목되고 있다. 강총재는 『지금까지 납북된 우리측 인원은 동진호선원 등 무려 4백명이 넘고 있으며 최근 공개된 국제사면위의 북한 정치범수용소 구금자 명단에도 남한 출신 11명이 포함돼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북한 억류자들의 생사여부와 소재지는 반드시 밝혀져야 하고 하루빨리 가족들의 품에 돌아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상과 같은 과제를 협의해나가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기 위해 쌍방의 총재나 부총재가 아무런 조건없이 회동할 것을 제의한다』면서 『북한측의 조속한 호응을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강총재는 남북적십자사 책임자급 회동이 성사될 경우 납북자들과 북한측이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 비전향장기수를 맞교환하는 방안을 제안할 의향이 있느냐는 질문에 『비전향 장기수들은 대부분 한국전쟁 때 남파돼 지리산에 들어가 살상 파괴를 자행한뒤 구속된 사람들』이라면서 구체적인 답변을 회피했다.
  • 인권문제 풀기 대북 적극공세/적십자회담 제의 배경과 전망

    ◎국제여론 고조시점서 대화압력 가중/북 새체제 혼조로 화답여부 불투명 강영훈 대한적십자사총재가 이번에 남북적십자회담을 제의한 것은 납북자문제와 이산가족문제 해결에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정부의 강력한 의지를 구체화한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지난달 30일 국제사면위가 고상문씨 등 납북인사들이 북한내 정치범수용소에 억류되어 있다는 사실을 폭로한 이후 북한의 인권문제에 대한 정부의 첫 정공법적 대응으로도 볼 수 있다.즉 우리측으로선 북한측이 껄끄러워하는 사안이라도 남북간 인도적 차원의 현안이라면 정면대처할 수밖에 없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이다. 우리측으로선 어차피 납북자문제에 관한한 문제제기를 뒤로 미루더라도 북측의 태도는 크게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그래서 공신력있는 국제기구가 북한에 정치범수용소의 실재를 확인하고 남한 출신 인사 11명이 구금돼 있다는 사실을 폭로해 인권문제제기의 명분이 극대화된 시점을 택해 공세적 대북제의를 했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정부는 한때 남북당국자간 회담을 북측에제의하는 방안도 검토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하지만 북측이 최근 남북연락관 명단통보를 위한 우리측 전화통지문 접수마저 거부하고 있는 점을 감안,일단 민간차원의 협상을 선행한다는 방침을 정했다는 후문이다. 이같은 방침은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후계체제가 공식화되는 등 북한권력 내부가 정돈되려면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과도 무관치 않은 것 같다.말하자면 김의 당총비서 취임 등 북한의 후계권력구도가 안착되기를 기다리기보다는 납북자가족들이 국제적십자사에 탄원서를 보내는 등의 조치로 국제여론이 고조된 시점에서 남북간 직접협상을 제안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남북적십자회담은 지난 71년 8월부터 23년 동안 1백여차례 회담을 했으나 85년 한차례씩 고향방문단을 교환한 후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다.이처럼 별다른 결실을 거두지 못한 근본적인 원인은 북측이 체제붕괴를 두려워해 매우 소극적으로 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측이 남북적십자회담사상 처음으로 총재 또는 부총재급 회동형식의 새로운 협상을 제안한 것도 주목할 만하다.이는 전통문 접수거부 등 최근 노출된 북한의 대남 지휘체계의 혼선을 감안한 조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당장 우리측의 제의에 화답할 공산은 극히 희박하다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이산가족이나 납북자문제 해결에 극히 부정적이었던 북한의 입장이 달라질 기미를 전혀 보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이 북한당국이 최근 고상문·유성근씨 등 국제사면위가 정치범수용소에 감금되어 있다고 발표한 인사들을 대남방송의 「무대」위에 올려 「의거입북」했다고 선전하고 있는 등 더욱 경직된 태도를 보이고 있다.또 납북자문제로 인한 수세를 벗어나기 위해 김인서·함세환등 비전향장기수 송환을 다시 제기,구태의연한 「맞불작전」을 펴고 있는 것도 불길한 조짐이다. 다만 북한도 미·북 3단계회담에서 경수로 지원과 대미관계개선 등의 일정한 성과를 얻어내려면 남북관계를 형식적으로나마 진전시킬 수밖에 없을 것이라는 점에서 일말의 호응 가능성은 남아 있다고 볼 수 있다. ◎강영훈 한적총재 일문일답/“북의 새 체제 맞춰 새 형식 제의”/“미전향자 송환 요구엔 인도차원서 대응” ­이번에 총재 또는 부총재회담이라는 새로운 형식의 제안을 하게된 배경은 무엇이고 성사전망은 어떤가. ▲성사전망은 전적으로 북측에 달려있다.그러나 이번이 과거와 다른 점은 국제사면위가 납북자들이 혹독한 정치범수용소에 있다는 것을 확인해줬다는 것이다.우리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납북자들이 송환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외에도 각국 적십자사에 지원을 요청하고 있다.과거와 또 다른 점은 북한 권력구조가 변하고있다는 점이다.김일성 사망후 김정일체제의 출범으로 북한지도자들이 새 정책노선을 가지고 나올 가능성이 있어 새 형식의 회담을 제의하게 된 것이다. ­납북자송환이란 문제의 시급성을 고려해 북측 대응을 기다리는 한편으로 총재가 직접 국제적십자사를 방문,도움을 요청할 의사는 없는지. ▲지난 1일 고상문씨 가족으로부터 이 문제에 대해 도와달라는 요청을 받았다.이어 2일 국제적십자 총재에게 고씨의 생사여부와 소재를 확인해줄 것과 하루속히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올수 있도록 도와달라는 편지를 발송했다.또 다른 가족들로부터도 탄원서를 받아 이들에 대한 관계서류를 국제적십자사에 보냈다.대한적십자사는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납북인사의 생사여부와 소재지를 확인하고 가족들의 품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노력을 하고있으며 앞으로도 계속 힘쓸 것이다. 국제적십자사엔 필요하다면 언제라도 갈 생각이다. ­북측의 반응이 신통치않을 경우 또다른 제의를 할 용의는 없는가. ▲지난 71년 회담개최를 제의한뒤 오늘까지 우리는 기회있을 때마다 이산가족문제와 납북인사문제에 대해 같은 입장을 표명하면서 이 문제가 해결되기를 북한에 촉구해왔다.앞으로도 이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노력할 것이다. ­북측이 김인서,함세환등 비전향장기수들의 송환을 요구하고 있는데 앞으로 총재 또는 부총재급회담에서 이들과 납북자들을 맞바꿀 것을 고려하고 있는지. ▲인도주의적 차원에서 고려하고 있으나 납북자와 비전향자 문제는 일면 정치적 측면이 있으므로 정부당국과긴밀히 협조를 해야한다.우리는 어디까지나 인명의 존귀함을 생각하고 인도주의적 견지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비전향 장기수 2명은 전쟁때 남파돼 지리산에 들어가 살상 파괴를 자행한뒤 구속된 사람들이다.국내법에 따라 형무소에서 각각 형기를 살다 특사에 의해 풀려나와 여기서 거주하고 있는 것이다.이들을 송환하라는 북한의 주장과 요구는 억지일뿐이다. ◎남북적십자회담 일지 ▲71·8·12 한적,남북적회담 제의 ▲71·9∼72·8 판문점 예비회담 25회 개최 ▲72·8∼73·7 본회담 7회 개최 ▲73·8 북측,모든 남북대화 중단 발표 ▲84·9·29∼10·4 북적 제공 수재물자 인수 ▲85·5∼12 본회담 재개,3회 개최 ▲86·1 북측,팀스피리트 훈련 구실로 회담 중단발표 ▲85·9·20∼9·23 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및 예술공연단 교환(서울·평양) ▲89·9∼90·11 제2차 남북이산가족고향방문및 예술공연단 교환과 제11차 본회담 재개위한 실무대표접촉 8회 개최…결렬 ▲91·4·2 한적,제11차 남북적회담 5월초순 개최 제의 ▲92·5·7 제7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남북이산가족노부모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합의 ▲92·6·5∼8·7 남북이산가족노부모방문단및 예술단 교환 ▲92·8·8 한적 총재,남북이산가족노부모방문단 및 예술단 교환 무조건 이행촉구 ▲92·10·29 한적,제11차 남북적회담 재개촉구,11·3 북적거부 ▲94·5·9 한적,회담재개 촉구 ▲94·8·12 한적,남북적책임자 회담 제의
  • 국내외학자연구로 본 남북단정수립 과정

    ◎“평양 45년말 실질적 공산정권 수립”/「5도인민위」 조직 등 남측보다 3년 더 빨라/“「서울단정」 출발로 분단고착 ” 주장 허구 입증 대한민국 정부는 민족과 국토가 일제의 사슬에서 벗어난지 만 3년째 되는 날인 1948년 8월15일 출범했다.비록 해방된 민족의 염원인 「통일 조국」을 실현하지는 못했지만,대한민국의 수립은 민주사의 정통성을 이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자못 심대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사회 일각에는 「대한민국이 38선 이남에 세워진 단독정부」라는 이유로 그 의의를 평가절하하는 시각이 남아 있는데다 급진세력은 『남한에서 단정이 출범함으로써 분단이 고착됐다』는 주장도 펴고 있다. 분단의 책임을 대한민국의 출범에 떠넘기는 이같은 주장이 어느정도 타당성을 갖는지 학계의 연구성과를 통해 알아본다. 대한민국 정부수립에 관한 역사적 평가를 위해서는 당시 남한지역을 통치하던 미 군정과 정치주도 세력이 통일정부를 이룩할 기회가 충분히 있었는데도 이를 무시하고 단정을 강행했는지 여부를 따져봐야 한다. 신용하·김학준·진덕규교수등 국내 학자와 미국의 스칼라피노(캘리포니아대 명예교수)·이정식씨(펜실베이니아대 교수)등 국내외 학자 대부분이 한반도 남쪽에서의 단독정부 수립이 불가피했음을 인정하고 있다. 이들 학자의 입장은 ▲광복이후의 정국이 남쪽과 북쪽간에 크게 달랐고 ▲남쪽에서는 새로 탄생할 국가의 주도권을 놓고 좌·우의 정파가 극한대립하고 있었던 반면 ▲이북에서는 소련주둔군의 지원아래 공산세력이 「실질적인」정부를 구성하고 있었음을 지적한다.특히 북한지역에서의 공산통치는 현실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당시 남한지역은 미군이 군정을 실시하면서 나름대로의 일정표에 따라 민의를 수렴한 정치단체가 등장하기를 기다리는 실정이었다.그러나 「모스크바 3상회의」의 결정으로 남북을 통괄할 임시정부 수립문제를 논의하는 회의에 참가신청한 정당·단체가 4백25개에 이른 예에서 보듯 당시의 남한 정국은 지리멸렬한 상태였다.이에는 46년 9월의 「9월총파업」,10월의 「대구폭동」등 광복이후 잇따라 발생한 좌익의 준동이 큰 영향을 미쳤다. 이에 반해 이북에서는 45년 8월16일 「함경남도 인민위원회」결성을 시작으로 연내에 황해도·평안남북도·함경남북도등 5개 도의 인민위원회 조직을 완료했다.또 46년 2월에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를 수립하는등 급속히 통치조직을 확립해 나갔다.이 과정에서 소련식 소비에트정권 수립에 반대하는 기독교·지주·지식계층등의 반대파를 일사불란하게 숙청했음은 물론이다. 「한국전쟁의 기원」이란 저서로 유명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마저도 자신의 책에서 『북한에서는 45년 말에 이미 실질적인 정권이 들어섰다』고 인정하는 정도이다.그는 「단정 수립은 한반도 남부를 장악하려는 미국의 의도」에서 비롯됐다고 주장하는 학파의 대표격 학자이다. 따라서 당시 남북 제 정당·사회단체의 논의에 따른 통일정부 수립은 불가능했으며 이에 따라 미국은 한반도 문제의 해결을 유엔에 넘길 수 밖에 없었다는 것이 일반적인 해석이다.유엔총회는 「남북한 전지역에서 자유총선거를 실시해 정부를 구성」할 것을 결의했지만 당초 한반도문제의 유엔상정 자체를 거부했던 소련은 유엔감시단의 입북을 거절함으로써 결국 남한의 단독선거를 가져왔다. 대한민국은 48년 5월10일의 총선거,7월17일의 헌법 공포를 거쳐 8월15일 출범했다. 이에 북한은 기다렸다는듯 8월25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치르고 9월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성립시켰다. 이로써 45년 미·소 양군의 진주로 시작된 영토분단은 48년 체제분단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앞서 ▲47년 2월의 「조선인민군 창설」 ▲48년 4월의 「헌법 채택」등 발빠르게 정부수립을 위한 준비를 다져왔다.막상 정부수립 일자만 한달여 늦었을 뿐 단독정부를 준비하고 이룩한 과정은 남쪽보다 북쪽이 훨씬 빨랐으며 그들이 주장하는 「단정의 분단책임론」이 허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결정적으로 입증하는 대목이다.
  • 정부 “원천봉쇄”­범추본 “강행”/오늘 범민족대회… 긴장 고조

    ◎경찰 대학주변 2만명 배치/쇠막대·화염병 무장 한총련등 집결 당국의 원천봉쇄 경고에도 불구하고 13일부터 15일까지 「범민족대회 추진본부」측이 범민족대회를 강행할 움직임이어서 경찰과 대회참가자들간의 충돌이 예상되고 있다. 경찰은 12일 『범민족대회는 북한의 「대민족회의 소집」과 같은 맥락의 집회로 남한에 있는 반체제 세력의 입지를 강화시키고 평화적인 집회를 앞세워 불법 폭력사태로 발전,사회혼란을 일으키려는 불법집회』로 규정,이 대회를 원천봉쇄하기로 했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는 이날 상오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에서 이와관련,『당국의 불허방침과 관계없이 이 대회를 예정대로 진행하되 남·북한과 해외에서 분산 개최키로 했다』고 밝혔다. 「범추본」은 특히 서울 대회가 원천봉쇄될 경우,3만여명이 13일부터 서울 전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대회를 가질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따라 경찰은 범민족대회가 열릴 것으로 보이는 건국대·한양대·연세대·대학로·뚝섬등을 비롯,서울 시내 주요시설과 역,대학주변에 1백70개 중대 2만여명의 경찰력을 배치,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경찰은 특히 이 대회 참가자들이 대학등 대회 개최장소에서 북한의 인공기게양이나 김일성·김정일의 초상화를 내거는등의 이적행위를 할 경우에는 즉각적으로 진압에 나서키로 했다. 이에반해 대학생과 근로자등은 이미 각 대학에서 출정식을 개최하면서 대회 예정지인 건국대·한양대등에 집결하고 있어 긴장이 고조되고 있다. 경찰은 이들이 화염병 2백여개와 쇠파이프등으로 무장하고 있는 점으로 미뤄 경찰의 봉쇄를 뚫고 건국대로 갈 것에 대비,홍익대 정문과 주변에 전경 1천5백여명을 배치,이들의 교문밖 진출을 막고 있으며 범민족대회가 홍익대에서 열릴 경우에 대비해 타교생들의 출입도 통제하고 있다. ◎“범민련,북팩스 6회 수신”/경찰 경찰청 보안국은 12일 범민족대회 남측추진본부(범추본)에 참여하고 있는 「조국통일 범민족연합(범민련) 남측본부 결성 준비위원회」가 제5차 범민족대회 추진과정에서 범민련 북측본부,해외본부로부터 모두 6차례에걸쳐 팩시밀리 전송문을 받은 것으로 파악됐다고 밝혔다. 경찰은 이적단체로 규정된 범민련 남측본부가 지난 4월13일 북측본부로부터 「8월15일 서울 또는 평양에서 범민족대회를 갖자」는 내용의 팩시밀리 전송문을 받은 것을 비롯해 지난 1월 2회,2월 1회,5월 2회등 6차례 걸쳐 팩시밀리 전송문을 수신했다고 말했다. 한편 경찰은 90년부터 매년 불법으로 열려온 1∼4차 범민족대회와 관련,모두 11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구속됐으며 연인원 3만8천여명이 가두시위를 벌였다고 말했다.
  • 굴절을 거부했던 사회주의자/타계한 김철 전통일사회당 위원장

    ◎71년 대선 출마… 민추협부의장 맡기도 11일 별세한 김철전통일사회당위원장은 「반공」이 국시였던 3공화국 당시 남한에서 사회주의 정당의 명맥을 이어온 「불굴의 사회주의자」였다. 김전위원장은 1925년 함북 경성에서 출생한뒤 청년시절 일본으로 건너가 49년 도쿄대 문학부 역사철학과를 수료했다.이 때부터 당시 일본 사회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사상에 심취하게 됐으며 55년에는 재일한국거류민단 중앙본부 사무총장을 맡아 일본내 한국인들의 생존권과 민권 확보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였다고 한다.김씨는 국내에서 사회주의 운동을 본격화하기 위해 귀국한뒤 71년 통일사회당을 창당,대통령선거에도 출마해 국민들의 관심을 끌기도 했다. 73년에는 당시 브란트서독수상이 이끄는 사회주의인터내셔널(SI)에서 간사를 맡는등 잠시 「전성기」를 구가하는듯 보였다.74년 민주회복국민회의 대표위원등으로 활동을 계속해나갔으나 당시 사회분위기에서 사회주의 정당은 뿌리를 내리기 어려웠으며 긴급조치위반과 국가보안법위반으로 수년간 옥고를 치르기도했다. 김전위원장은 당시 고비가 올 때마다 『정치적 현실여건이 아무리 어렵더라도 민주사회주의운동이 일보라도 전진할 수 있는 여건이 있다면 그것을 위해 노력할 뿐이지,고난 때문에 이탈할 수는 없다』는 신념을 되뇌곤 했다. 80년대에 들어와서는 통일운동의 선봉대격인 민주화추진협의회에 참여,부의장을 맡기도 했으며 사회민주당을 통해 사회주의 활동도 계속해나갔다. 그러나 90년으로 접어들면서 소련붕괴등 세계조류의 변화로 진로를 쉽게 찾지 못한채 3남 누리씨가 살고있는 독일에 머무르다 지병인 고혈압이 악화되자 지난 2월 귀국,조국에서 영면하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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