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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HAPPY KOREA] (13) 충북 단양읍 별곡·도전·상진마을

    [HAPPY KOREA] (13) 충북 단양읍 별곡·도전·상진마을

    충북 단양은 백두대간의 소백산과 남한강이 어우러져 빼어난 자연 경관의 명승지로 알려져 왔다. 화려한 경관 중에서도 더욱 빼어난 곳을 엄선한 ‘단양팔경’이 유명하다. 한반도의 중심지역이어서 삼국시대 때 고구려와 신라가 각축을 벌이기도 했다. 곳곳에 관련된 유적들이 있어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진다. 그런 단양이 교육도시로 거듭 태어나려 한다. 교육인적자원부로부터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된 데 이어 행정자치부로부터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교육형 도시’로 선정된 것이다. 단양군이 만드는 ‘글로벌 에듀빌리지 만들기 계획’을 살펴보았다. ●“떠나는 주민들 대부분 아이교육 때문” ‘살기좋은 지역만들기’사업지역으로 선정된 단양읍 별곡·도전·상진 등 3개 마을은 1985년 충주댐 건설로 삶터가 모두 물에 잠기면서 이주해 온 주민들이 형성한 마을이다. 현재 3709가구 1만 971명이 거주하지만 매년 3.7% 정도씩 인구가 줄고 있다. “떠나는 주민들의 대부분은 아이들 교육 때문이지요. 좋은 학교가 없다 보니 외지로 나가는 것이지요.” 장지흥 신단양지역개발회 회장의 진단이다. 다른 지역은 생계 유지 등을 이유로 고향을 등지는 경우가 많지만 단양은 아이들 교육문제 때문이다. 농·산촌 지역이다 보니 교육 여건이 매우 열악하다. 주로 공교육에 의존하고 있다. 도시에선 학원이나 과외로 부족한 공교육을 보충하지만 이곳엔 사교육기관이 거의 없다. 실제로 단양교육청이 파악한 결과, 지역의 2개읍·6개면 가운데 단양읍과 매포읍에만 26곳의 학원이 있을 뿐 나머지 6개 면에는 사설학원이 전혀 없다. 사교육을 받고 싶어도 없어서 못하는 것이다. ●‘중심학교´서 방과후 교육 마치고 귀가까지 책임 때문에 다른 지역과 달리 군청과 교육청이 힘을 합쳐 ‘교육’활성화에 주력한다. 공교육뿐만 아니라 사교육 영역까지 교육청과 군청이 맡는 셈이다. 이러한 노력은 2005년 평생학습도시로 지정되면서 본격 추진됐다. 아이들 교육은 교육청이 책임을 진다. 반면 군청은 주민들의 교육을 맡는다. 교육청이 효율적인 사업을 하도록 군청에서 예산 지원을 한다. 단양교육청 최대용 장학사는 “지역에 사교육 기관이 많지 않기 때문에 도시 학원 등의 기능을 교육청이 대신해줄 수밖에 없다.”면서 “주민들의 교육도 일부 교육청에서 맡아서 해주고 있다.”고 소개했다. 교육청은 이에 따라 학생들의 수업이 끝나면 ‘방과 후 학교’를 운영해 ‘사교육 사각지대’를 없앤다. 소규모 학교가 많기 때문에 군청과 교육청은 ‘중심학교’개념을 도입했다. 교통이 편리한 곳의 학교에 다른 지역 학생들을 모아 가르친다. 단양초등학교과 단양중학교를 ‘중심학교’로 정했다. 교육청은 관광버스 4대를 임대해 권역별로 돌며 8개 읍·면 학생들을 중심학교까지 태워 온다. 수입이 끝나면 집까지 데려다 준다. 수업은 월∼목요일 오후 5시40분에 시작해 8시 40분 끝난다. 초등학생은 130명, 중학생은 180명이 참여한다. 고등학교는 해당 학교별로 진행한다. 교사들은 주로 현직 교사를 활용하는데 각 학교로부터 유능한 교사를 추천받는다. ‘Pie-룸’(Play in English)이란 영어 강좌도 초등학생들을 대상으로 운영한다. 보조교사로는 학부모들이 참여하고 있다. ●군청서 외국어·컴퓨터 강좌 군청은 주민을 대상으로 평생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지역 발전을 위한 핵심 인재를 양성하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지하 1층, 지상 3층으로 ‘평생학습센터’를 지었다. 이곳에선 다양한 프로그램이 운영된다. 야간엔 외국어 강좌가 열린다. 컴퓨터 등 자격증 취득 과정도 있다. 지역에 대학이 없는 점을 고려해 학점은행제 형식으로 ‘단양관광예술대학’도 운영한다.80점 이상 학점을 취득하면 전문대학 졸업 자격을 인정해 준다. 학위과정 20명 등 110명이 수강한다. 단양군 김영식 평생학습 담당은 “3년 전부터 주민자치대학도 운영하고 있는데, 지식 함양과 시민 의식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며 “교육 투자는 결국 단양의 미래에 대한 투자로 이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단양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에듀토피아 만들기 계획은 단양군과 교육청이 손을 잡고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에듀빌리지 만들기’사업은 지역을 ‘교육메카’로 만든다는 것이 골격이다. 튼튼한 교육 여건을 조성해 주민의 유출을 막고 외지 학생들의 학습체험장으로 제공해 관광수입도 늘리겠다는 것이다. 우선 단양읍 지역에 교육과 관련된 소프트웨어와 하드웨어를 집중할 계획이다. 하지만 ‘교육’의 특성상 단기적으로 가시적인 효과를 내기엔 한계가 있다. 대상지역이 넓은 점도 다른 사업과 차별화하기가 쉽지 않다. 군과 교육청은 우선 단양을 교육특구로 지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 교육특구가 되면 원어민 강사 배치가 쉬워지는 등 교육 여건 개선이 용이하다. 지역의 공교육 기관인 초·중학교는 농촌 특성에 맞게 방과 후 학교 운영을 강화할 계획이다.1농촌 1우수고 육성사업도 병행한다. 장지흥 신단양지역개발회 회장은 “교육청과 군청에서 관심을 가지면서 전에 비해 전반적으로 분위기가 좋아진 것 같다.”면서도 “학생들의 실력에 따라 교육과정을 차등화하는 등 교육프로그램을 좀더 다양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평생학습도 업그레이드 대상이다. 교과 과정을 마을 혁신리더 과정, 관광해설사 과정, 최고경영자(CEO) 과정 등 다양하게 운영한다. 학점은행제도 확대한다. 문맹자를 위한 교육과 정보화 교육도 강화한다. 학교시설을 주민에게 개방한다. 담장 허물기 사업을 추진해 학교를 주민들의 공원으로 제공한다. 아울러 지역의 단양초등학교에 도서관, 외국어마을, 사이버방, 학습관 등을 갖춘 ‘글로벌 에듀체험관’도 조성한다. 대성산 산림욕장 내에 외국어 체험장을 꾸며 학생들의 체험코스로 개방한다. 주거 환경도 개선한다. 외지인들이 편하게 방문할 수 있도록 자전거길, 문화의 거리 등을 조성하는 것이다. 버스터미널을 리모델링해 관광종합타운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추진한다. 관광객들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꾸며 안내에서 차량 대여까지 모두 해결할 수 있도록 한다는 목표다. 단양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드라마 세트장을 중국어 마을로” 김동성 단양군수 “아이들의 교육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인구 감소를 막을 수 없습니다. 주민 교육도 자치 역량을 높이기 위해 매우 중요합니다.” 김동성 단양군수는 살기좋은 지역만들기의 컨셉트를 ‘교육’으로 맞춘 이유를 이같이 설명했다. 해마다 3.7%씩 주민이 줄고 있는데 자녀들의 교육 때문이란다. 김 군수는 교육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 몇 년간 교육 투자를 늘려 왔다고 설명했다. 자녀 교육만이 아니다. 주민을 대상으로 한 교육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해 자녀들의 교육 여건을 개선해야 하고, 아울러 주민들의 자치 역량과 소득을 늘리기 위해 주민의 교육 업그레이드도 중요하다. 그래서 추진된 것이 평생학습도시 지정이다. 김 군수는 살기좋은 지역만들기를 ‘교육형’으로 정한 것도 교육사업을 한 단계 더 끌어올리는 차원이라고 강조했다. 조례로 만들어 올해부터 군청 예산의 5%를 학교 교육에 지원토록 했다고 강조했다. 현재는 초·중·고교만 지원을 하는데 유치원도 지원할 수 있는 방안을 찾고 있다.53억원의 자본금을 가진 단양장학회도 우수한 학생들의 타지역 유출을 막는 좋은 수단이다. 지역의 고교 출신자들이 명문대에 입학하면 장학금 혜택을 주지만, 중학교를 졸업한 뒤 외지의 고등학교 나와 명문대를 가면 혜택을 주지 않는다. 이런 정책을 추진한 뒤 지역에 연고를 둔 학교들의 명문대 진학이 늘고 있다. 김 군수는 ‘중국어 마을’을 만들겠다고 말했다. 드라마 ‘연계소문’ 세트장이 온달기념관 내에 있는데 5000여평의 부지에 만들어진 중국풍의 건물을 잘 활용하면 새로운 교육장이 될 것으로 보고 있다. 그래서 중국어 교육장뿐만 아니라 학생들의 수학여행, 체험학습장 등으로 활용한다는 구상이다. 단양 조덕현기자 hyoun@seoul.co.kr
  • [서울광장] 회장님 주먹이 날린 것들/육철수 논설위원

    [서울광장] 회장님 주먹이 날린 것들/육철수 논설위원

    홍콩재벌 리자청(李嘉誠)은 세계에서 몇 손가락 안에 드는 갑부다. 자선사업과 엄격한 자녀교육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두 아들에게 입버릇처럼 “먼저 인간이 되라.”고 했다. 아버지의 사업을 이으려면 우선 돈의 의미를 제대로 깨달아야 하고, 예의바르고 겸손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아이들이 왕자처럼 행동하고 안하무인이 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돈보다 인간의 도리부터 가르친 덕분에 두 아들은 미국 유학시절 갑부의 아들이란 사실을 드러낸 적이 없다. 그들은 맥도널드에서 아르바이트하고 골프연습장에서 공 줍는 일을 하면서 학비를 보탰다. 리자청이 사업을 번창시키고 자식교육도 성공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던 거다. 남과 비교하는 게 언짢을지 모르나, 지금 벌어지고 있는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보복폭행’ 사건을 지켜보면서 진정한 자식사랑이 뭔지 다시 생각해 본다. 워낙 믿을 수 없고 상상을 뛰어넘는 사건이라, 아직도 영화나 소설을 보는 것 같다. 남한테 손찌검을 당해 피투성이가 돼서 돌아온 아들을 보고 격분하지 않을 아버지는 이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 다음이다. 평범한 아버지라도 이미 저질러진 일에 대해서는 대개 이성적인 해결책을 찾는다. 그런데 김 회장이 대기업을 이끄는 총수로서, 사회지도층으로서 지위를 깡그리 망각하고 이렇듯 비이성적으로 대응한 이유는 뭘까. 김 회장의 성격과 처신에 대해 이러쿵저러쿵 소문이 많으나, 희대의 불미스러운 사건으로 그 일면을 접하게 된 것은 참으로 서글픈 일이다. 어쨌든 김 회장은 감정통제의 실패와 주먹 한 방으로 너무 많은 것을 날려버렸다. 가장 큰 손실은 자식교육의 소중한 기회를 놓친 게 아닌가 싶다. 김 회장은 이런 행동으로 아들에게 뭘 가르치려 했을까. 아들은 용감무쌍한 아버지에게서 뭉클한 사랑을 확인했을까. 속 시원하게 복수해준 아버지를 존경하고 고마워할까. 자신 때문에 아버지는 하루아침에 만신창이가 됐는데도…. 김 회장이 아들에게 돈과 특권과 폭력의 위력을 가르치려 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그렇게 됐다. 김 회장은 자신의 명예도 한평생 회복할 수 없을 만큼 훼손했다. 그에겐 앞으로 유능한 경영자가 아니라 ‘폭력 재벌’이란 무시무시한 꼬리표가 늘 따라다닐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 겨우 글로벌 궤도에 진입하기 시작한 기업 이미지는 엉망이 됐다. 한화그룹 계열사에 몸담고 있는 임직원 2만 5000명에게도 씻을 수 없는 마음의 상처를 남겼다. 그들은 어디 가서 “한화 직원”이란 말도 못 꺼낸다고 한다. 먹고사는 게 더 중요한 그들이기에 “(회장이) 부끄럽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현실이 더욱 갑갑할 것이다. 김 회장의 주먹은 유형의 가치도 적잖이 날렸다. 이 사건이 세간에 알려지기 시작한 지난달 25일 이후 7일(거래일 기준)만에 상장 한화 계열사의 시가총액은 3295억원이나 증발했다. 상당부분은 김 회장 사건의 영향일 것이다. 사건현장이자 한화 직원들이 애용한다는 서울 북창동 상가의 상인들은 이 사건 이후 더욱 썰렁해졌다며 한숨을 푹푹 쉬고 있다는 소식이다. 김 회장은 경찰 조사에서 폭행사실을 극구 부인했다. 그러나 얻어맞은 사람들의 진술과 정황으로 미루어 뭔가 숨기고 있는 게 분명하다. 김 회장은 법 앞에서 비신사적인 모습을 거두고 당당하게 양심을 걸어야 할 것이다. 마지막 남은 양심마저 주먹으로 날려 버릴 수야 없지 않은가.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민주노동당 대선 삼국지

    민주노동당이 ‘대선 삼국지’ 시대를 선언했다. 대선후보 자리를 놓고 진보정당 초유의 3자간 대결구도가 펼쳐진다. 삼두마차는 권영길·노회찬·심상정 의원이다. 오는 9월이면 연말 대선에 나갈 대표선수가 선출된다. 민노당은 이번 대선에서 진보정당 집권의 첫 꿈을 실현하는 데 목표를 두고 있다. 진보 정체성을 분명히 하면서 중도와 선을 긋고 한나라당의 보수성에 정면으로 맞설 채비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과 반 신자유주의, 서민경제라는 화두를 통해 진보적 대안세력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다. 민노당은 권영길 의원이 당의 전신격인 ‘국민승리 21’ 후보로 출마했던 1997년 15대 대선 당시 1.2%(30만여표)를,16대 때는 3.9%(95만여표)를 기록했다. 정체와 도약의 기로에 선 민노당의 선택, 이번 대선의 또다른 관전 포인트다. 막오른 민노당 대선 경쟁은 ‘가능성’과의 전면전 양상을 띠고 있다. 집권 가능성, 진보정당의 독자생존 가능성이 대표적이다. 민노당으로서는 범여권의 실체가 뚜렷하지 않은 상태여서 진보개혁 세력의 대표성을 확보할 수 있는 기회를 맞았다. 하지만 여야가 뒤바뀌면서 ‘심판’과 ‘대안’의 대선전에서 심판 기능이 실종될 우려도 있다. 당 핵심관계자는 “열린우리당과 중도에 대한 허울을 벗겨내야 하는데 고민”이라며 민노당의 이중적 위치를 걱정했다. ●보수 vs 개혁 vs 진보 대결구도 대선정국에 대한 예비주자 3인의 시각에서도 이같은 고민이 보인다. 권영길·심상정 의원은 ‘진보VS보수’의 양자 구도로 설정했다. 반 신자유주의 세력의 대연합을 통해 보수세력과 대결하자는 목표다. 당과 진보진영의 외연확장을 도모하는 리더십이 우선 요구된다. 반면 노회찬 의원은 ‘보수 vs 개혁 vs 진보’라는 3자 대결구도를 점쳤다. 민노당의 독자성과 정체성 강화가 최우선 과제로 부각된다. 세 후보의 정책 차별성은 눈에 띄게 드러나지 않지만 각론에서는 미세한 차이가 느껴진다. 특히 한반도 평화정책이 최대 이슈가 되고 있다. 한반도 정세에 적극 대응한다는 전략 이외에 당내 자주파의 표심을 겨냥한 의중도 깔려있는 것으로 보인다. 권 의원은 ‘연합연방통일공화국’수립을 위한 ‘3단계 남북관계 공동조치’를 제시했다. 통일국가의 상을 보여주고 대북문제에서 경제적 접근을 우선시하는 범여권의 전략을 비판하고 있다. 노 의원이 구상하는 평화체제 구축 방안은 전략적 유연성 문제를 포함한 한·미동맹, 북핵문제, 정전협정의 평화협정으로의 전환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노 의원은 “(한반도 평화는) 북의 남침 가능성에 대한 대비보다 미국의 새로운 전략에 대한 대응에 주력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심 의원은 ‘1국가 2체제 2정부’의 한반도 평화경제공동체를 위한 로드맵을 제시했다. 심 의원측은 “북·미관계보다 이제는 남북이 한반도 평화체제 형성의 주체가 돼야 한다.”며 남한의 군비축소와 북한 지원 등을 선결조치로 들었다. 한편 권 의원은 진보진영내 금기사항인 ‘성장론’을 화두로 진보적 경제성장론을 제시해 눈길을 끌었다. 노 의원은 기존 정책을 정치화하는 행보에 주력하고, 집권하면 100시간 내에 국회에 회부할 입법계획을 발표하겠다고 선언했다. 심 의원은 ‘경제전문가’라는 장점을 살려 ‘세박자 경제론’을 주창하는 한편, 반 한·미 FTA대표주자, 비정규직 이슈 주도력 등으로 돌풍을 자신했다. ●당지지율보다 낮은 후보지지율이 문제 다자구도로 치러지는 첫 대선 경선은 한국 진보정당사의 진전으로 꼽을 수 있다. 하지만 당 지지율보다 낮은 후보 지지율 문제가 고민거리다. 지난달 재보선 직후 국민일보가 ‘여의도리서치’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 민노당 지지율은 11.2%를 기록해 열린우리당을 앞질렀다. 하지만 당 대선 주자들의 지지율은 합해야 1.5∼3.5% 수준이다. 후보의 구심력이 작동될 수 있는 당 체제 전환이 절실해 보인다. 당내 경선이 진성당원에 의해 치러지는 것을 감안할 때 권·노·심 삼각구도의 판세는 각각 ‘5:3:2’라는 것이 당내 관계들의 전언이다. 구혜영기자 koohy@seoul.co.kr
  • 北 “위안부문제 해결 협력”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북한이 워싱턴 지역의 위안부 관련 단체에 위안부 문제 해결을 위한 협력을 제안해 배경이 주목된다. 유엔 주재 북한대표부는 지난달 27일 서옥자 워싱턴 정신대문제대책위원회 회장에게 미 의회에서 위안부 결의안을 채택하기 위한 활동을 지지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팩스로 보냈다. 이 서한은 북한의 ‘조선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 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지난달 18일 워싱턴정신대문제대책위와 ‘바른 역사를 위한 정의연대’라는 기관 앞으로 보낸 것이다. 이 서한은 “우리 민족끼리 힘을 모으고 보조를 함께 해나갈 때 일본의 과거 청산을 실현하기 위한 운동은 더 힘있게 추진될 것”이라며 “우리 민족의 통일사업에도 보탬이 되리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이 서한은 또 “일본이 결의안 채택을 막아보기 위해 갖은 권모술수를 다하고 있다.”면서 이는 국제사회와 피해자들에 대한 노골적인 우롱이며 모독이라고 강력히 비난했다. 북한대표부측은 서 회장에게 팩스를 보내기 전 전화를 걸어 “미 의회에서의 활동을 모두 지켜보고 있다.”며 “계속 수고해 달라.”고 말했다고 서 회장은 전했다. 북한대표부측은 또 몇년전 서 회장을 평양에서 열린 위안부 관련 행사에 참석하도록 초청하기도 했다고 서 회장은 말했다. 당시 북한 당국이 갑자기 한국과 일본측의 대표단 입국을 금지, 서 회장도 참석하지 않기로 결정하자 북측은 “왜 남한편을 드느냐?”고 섭섭함을 표시했다고 한다. 서 회장은 북한의 일본군 위안부 및 강제연행 피해자보상대책위원회가 중국과 일본에서는 나름대로 활발한 운동을 하고 있다고 전했다.dawn@seoul.co.kr
  • [국악인] 평양사람들을 감동시킨 서울출신 서도 명창 김광숙

    [국악인] 평양사람들을 감동시킨 서울출신 서도 명창 김광숙

    글 최종민 철학박사, 국립극장예술진흥회 회장, 동국대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1990년 10월, 평양에서는 남한에서 올라간 국악공연단이 여러 가지 종목을 멋지게 공연했다. 판소리도 하고 사물놀이도 하고 산조도 하고 서도소리도 하고 했다. 그런데 박수를 가장 많이 받은 것은 오복녀와 김광숙이 부른 서도소리였다. 수심가, 엮음수심가, 긴난봉가, 자진난봉가, 사설난봉가, 개타령 등을 불렀는데 개타령을 할 때에는 그 근엄하던 청중들이 모두 폭소를 터뜨리듯 웃어 제켰다.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발달한 그네들의 민요를 오랜만에 남한의 명창들을 통해 들어보았기 때문이리라. 수십 년 잊고 지냈던 자기 고장의 민요를 오랜만에 들었으니 얼마나 감동적이었을까? 더구나 나이 많고 과거 그런 서도소리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은 오랜만에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반가웠을 것이다. 그래서 박수가 한동안 계속되었다고 한다. 지금 북한에는 수심가나 난봉가를 옛날식으로 부르는 그런 노래가 없다. 공산당의 이념에 맞는 노래를 새로 만들어 새로운 창법으로 부르도록 했기 때문에 옛날식은 없어져 버렸다. 그래서 서도 현지에는 서도소리가 없어져 버린 멸종의 단계가 되었는데 다행히 이남에서 보호정책을 폈기 때문에 서도소리가 어느 정도 남아 있으니 다행이라 할 수 있다. 서도소리는 평안도나 황해도에서 발달한 민속노래이고 그곳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자란 사람이어야 잘할 수 있는 노래들이다. 예로부터 “대동강 물을 먹고 자라야 수심가를 제대로 할 수 있다”는 말이 바로 그런 사정을 말하는 것이다. 서도소리의 목은 평안도 사투리의 목과 같은 그런 굵고 깊은 목이어야 하는데 그런 목은 단순한 발성법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사 발음과 관련한 표현의 묘미 역시 평안도 사투리의 표현방법이 그대로 적용되는 것이어서 그 지역의 사투리를 모르면 그 지역의 민요를 부를 수 없다는 말을 해도 지나친 말이 안 될 정도이다. 더구나 평양은 예로부터 풍류가 낭자하던 곳이고 황해도 역시 탈춤과 함께 민속노래가 풍성하게 발달한 지역이다. 이 평안도와 황해도의 민속노래가 서도소리인데 그 서도소리를 지금은 이남에서 전승하고 있다는 말이다. 수심가를 비롯한 서도민요는 김정연과 오복녀를 인간문화재로 지정하여 전승토록 했는데 두 분이 꽤 여러 명의 제자를 양성했다. 그러나 남자들은 모두 생업을 찾아 다른 길로 가버리고 김정연의 제자로는 이춘목이 인간문화재가 되었고 오복녀의 제자로는 김광숙이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이외에도 김정연의 제자 한명순·이문주 등과 오복녀의 제자 유지숙 등이 활동하고 있다. 김광숙은 스승인 오복녀와 함께 평양에 가서 공연을 했고 그 공연이 그렇게 큰 성공을 거두었다. 그 공연 때문에 북한에도 약간의 변화가 있었다고 한다. 북한에서는 서도소리를 완전히 폐기처분한 것처럼 했기 때문에 일제 때 음반까지 출반한 김진명 같은 명창도 시골에서 할일없이 지냈다는데 남한의 서도 명창들이 북한에 온다하니까 그 김진명 씨를 평양으로 불러 올렸었고 다음번 서울공연에 출연시키기도 했었다. 김광숙은 그 김진명 씨에게 떠는 목에 대해 충고를 받기도 했다고 하니 김광숙 씨야말로 평양행에서의 소득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김광숙은 1952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부모가 황해도 출신이어서 월남한 가정이긴 했지만 서울에서 나서 서울에서 자랐으니 서울 출신이라 할 수 있다. 김광숙이 국악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고등학교를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의 전신인 국악예술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1971년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에는 국악예술학교에 성금련, 지영희, 박초월, 김소희, 한영숙, 신쾌동, 김윤덕, 임광식, 박헌봉 교장 등 기라성 같은 국악인들이 교사로 있어서 여러 가지를 열심히 가르쳤기 때문에 많은 것을 잘 배울 수 있었다. 김광숙은 고1 때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의 전수장학생이 되었고 1977년에는 이수자가 되었다. 그 후 1982년부터 전수조교로 있다가 2001년 11월에 예능보유자인 인간문화재가 되었다. 서도소리의 역정으로는 그렇지만 그 동안 많은 공부를 했고 많은 활동을 했다. 197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한때는 한국의 집(코리아 하우스) 공연무대에서 활동하기도 했는데 남도소리의 안행년 등과 함께 활동하면서 민속악에 대한 많은 것을 배웠다. 1982년 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연주단원이 되어 서도민요와 함께 경기민요도 공연하게 되니까 경기민요에 대한 필요를 느껴 김옥심 명창에게 개인지도를 한 3년 받았다. 당대 최고 명창이면서 인간문화재가 되지 못해 한이 많았던 김옥심은 김광숙을 진심으로 사랑하고 열심히 가르쳤다. 그래서 경기소리도 잘 배울 수 있었다. 김광숙은 공부에 대한 욕심이 많은 것 같다. 국립국악원은 좋은 직장이었는데도 1986년 공부를 더 하기 위해 기쁜 마음으로 직장을 사직하고 중앙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로 진학을 하게 된다. 4년 간 열심히 공부하고 그리고 다시 1990년 국립국악원에 자리를 잡고 지금까지 근무하고 있다. 그러면서 대학원도 마치고 지금은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에서 다시 공부를 하고 있다. 김광숙은 1994년부터 1997년까지 가사의 인간문화재 이양교를 사사하여 가사와 시조를 이수하기도 했다. 어떻게 보면 본인이 배울 수 있는 온갖 노래를 가능한 한 열심히 배워보았다. 그러나 그것이 다 본인이 전공하는 서도소리를 더 잘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지금은 확실히 느끼고 있다. 실제 그런 여러 갈래의 성악을 공부한 것이 서도소리 정립에 도움이 되고 있다. 서도소리는 평안도나 황해도 지방뿐만 아니라 서울에서도 인기 있는 소리였다. 과거 평양에 있는 기성권번 출신들이 서울로 진출할 수 있었던 것도 서울 사람들이 서도소리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요리 집에서 공연이 성행하던 일제 때만 해도 처음 경기소리를 한참 들은 다음 뒤에는 서도소리를 듣는 것이 통례여서 서도소리의 수요가 많았었다. 그런 서도소리가 지금은 그 소리를 발달하게 한 서도라는 땅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이북사람들이 옛날처럼 그런 소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이남에서 서도소리를 제대로 가꾼다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다. 우선 목이 잘 되지 않는다. 소리란 목으로 하는 것이고 성음이 제대로 돼야 소리가 되는 것이다. 소리목의 바탕인 사투리목이 없는 서울에서 서도소리를 제대로 가르치기 어렵기 때문에 늘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김광숙만 해도 그 동안 많은 서도 출신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그쪽 사투리를 들어왔었다. 그러나 지금 자라는 세대들은 그런 경험마저 거의 없다. 이들에게 서도소리를 가르치며 본인이 공부한 것을 종합하며 생각하면 세월과 함께 깨달음이 조금씩 축적되는 것을 느낀다. 그 깨달음의 분량이 어쩌면 서도소리를 서도소리답게 하는 관건이 되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김광숙은 계속 공부하고 연구하며 그 깨달음의 도를 많게 하려 애쓰고 있다. 지금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와 중앙대학교, 수원대학교 그리고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 등에 나가 가르치고 또 본인의 전수소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는데 매일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렇게 제자들을 가르친 다음에는 함께 무대에 서서 공연을 하기도 하고 또 서도소리로 극을 만들어 공연하기도 한다. 그 동안 서도창극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하여 <배따라기>나 <황주골 심청>을 공연했는데 상당히 좋은 평을 받았다. 그래서 지금은 <황진이>를 공연하기 위해 준비하고 있다. 김광숙의 이런 노력은 멸종 위기에 있는 서도소리를 적극적으로 전수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통일이 되면 평안도와 황해도에 이 서도소리를 다시 옮겨 심어야 한다. 김광숙이 서도소리의 ‘불씨’를 잘 간직하고 있다가 서도에 다시 옮겨 붙였을 때 서도소리의 불길이 서도 전역에 활활 타오르며 퍼져가게 해야 한다. 그렇게 중요한 역할이 그에게 주어진 임무이기에 그가 잘하고 있는 것을 고맙게 생각하고 더욱 잘해 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월간 <삶과꿈> 2007.03 구독문의:02-319-3791
  •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서동철 전문기자의 비뚜로 보는 문화재](17)송시열 기리는 경기도 여주 대로사

    경기도 여주에는 세종대왕의 무덤인 영릉(英陵)과 효종의 영릉(寧陵)이 나란히 자리하고 있습니다. 세종릉은 언제나 사람들로 북적이지만, 이웃한 효종릉은 차분하기만 하지요. 세종릉과 남한강 건너 신륵사는 뗄 수 없는 관계입니다. 세종의 영릉이 예종 원년(1469년) 지금의 서울 대모산 기슭에서 여주로 옮겨진 뒤 신륵사는 세종의 극락왕생을 비는 원찰이 되었으니까요. 효종의 영릉 또한 여주군청에서 가까운 시내에 있는 대로사(위 사진·大老祠)와 깊은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효종릉이 현종 14년(1673년) 여주로 천장(遷葬)되지 않았다면 대로사도 없었을 것입니다. 대로사는 노론의 영수인 우암 송시열(아래·1607∼1689)의 사당입니다. 정조 9년(1785년) 왕명으로 지어졌지요. 우암은 성인의 반열에 오른 대학자로 추앙받기도 하지만, 당쟁의 참화를 이끈 편벽한 소인이라는 극단적인 평가가 공존하는 인물입니다. 우암이 세상을 떠난 지 100년을 바라보는 시점에 정조가 그의 사당을, 그것도 효종의 영릉을 바라보도록 서향으로 지은 데에는 ‘효종의 죄인’이라는 ‘혐의’를 풀어 주는 것이 필요하다는 정치적 판단이 담겨 있습니다. 효종이 종종 ‘대왕’으로 받들어지는 것은 병자호란 당시 삼전도의 치욕을 씻고자 북벌의 기치를 높이 들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봉림대군 시절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 8년 동안이나 고초를 겪은 효종의 신임을 받아 북벌론의 기수로 지목된 이가 우암입니다. 우암의 북벌론은 그러나 양병보다는 민생의 안정, 무력보다는 군왕으로 덕을 쌓는 것을 우선으로 했다는 점에서 효종의 실천적인 북벌론과 달랐습니다. 그의 존명배청 감정은 한족의 나라는 높이고 오랑캐는 물리친다는 유교경전 ‘춘추(春秋)’의 원리에 따라 관념적으로 형성됐기 때문이라고 하지요. 우암은 1659년의 유명한 기해독대에서 효종이 구체적인 북벌계획을 제시했을 때도 “제왕은 먼저 자신을 닦고 가정을 다스린 뒤에야 법도와 기강을 세웠는데 이것이 북벌의 선결조건”이라는 말뿐이었다고 합니다. 효종은 우암과 독대한 지 불과 두달 만에 급서하는데, 우암은 국상의 예법을 조언합니다. 이때 관이 시신보다 작은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지요. 장지 역시 수원부가 길지라는 지관들의 의견을 물리치고 경기도 구리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건원릉 곁으로 정했지만, 불과 15년 만에 석물에 틈이 생겨 빗물이 스며들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 여주의 세종릉 곁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반대파인 남인들이 이 모두를 우암의 탓으로 돌린 것은 물론입니다. 우암은 사약을 받아 세상을 떠나는 순간까지 효종의 죄인으로 지탄받은 것을 뼈아프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정조는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로 양성된 친위세력을 바탕으로 산림의 정치참여를 억제하는 강경책을 폈지만, 초반기에는 지지세력으로 포섭하고자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을 닦은 노론 중심의 산림(山林)을 중용했습니다. 정조가 대로사를 세운 데 이어 우암의 세 번째 회갑년인 1787년에는 북벌대의론을 칭송하는 비문을 직접 지어 대로사비를 세운 것도 노론을 향한 정치적 제스처라는 뜻입니다. 건축사적으로 대로사는 18세기 익공집의 기준이 될 만큼 부재를 짜올린 수법이 완벽하다고 합니다. 나아가 대로사는 조선 후기 권력투쟁의 큰 흐름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가치에 더욱 주목해야 할 것 같습니다. dcsuh@seoul.co.kr
  • 괴산댐 ‘50세’ 맞았다

    괴산댐 ‘50세’ 맞았다

    국내 순수기술로 건설한 충북 괴산댐이 준공 50주년을 맞았다. 한국수력원자력 괴산수력발전소는 27일 괴산군 칠성면 괴산댐에서 주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식을 가졌다. 이 댐은 길이 171m, 높이 28m의 크기로 한전의 전신인 조선전업에서 1957년 4월28일 완공했다. 1952년 11월 착공했으나 자금난으로 수차례 공사가 중단되다 5년만에 마무리해 운영을 시작했다. 국내 기술진에 의해 처음으로 만들어진 수력발전소로 유명하다. 국내 첫 수력발전소는 1905년 만들어진 북한의 운산수력, 남한의 첫 수력은 1937년 건설된 전남 보성강수력발전소이지만 일본기술로 건설됐다. 1500만㎥의 물을 수용하는 괴산댐은 시간당 2600㎾의 전기를 생산해 괴산군 일대에 공급하고 있다. 괴산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부고] 이우주 전 연세대 총장 별세

    이우주 전 연세대 총장이 지난 25일 오후 신촌 세브란스 병원에서 노환으로 별세했다.89세. 이 전 총장은 충남 공주 태생으로 1941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졸업 후 46년 세브란스의대 약리학 조교수를 시작으로 연세대에 줄곧 재직하며 60년 대학원장,75년 7대 총장을 지냈다. 아산사회복지재단 이사, 대한민국학술원 회원,3·1문화재단 이사, 한국과학기술한림원과 대한민국학술원 회원을 역임했고 3·1문화상, 국민훈장 무궁화장, 학술원 저작상, 동아의료문화상 등을 수상했다. 슬하에 병인(연대 의대 신경과 교수)·병석(연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영진·영순씨 등 2남 2녀가 있다. 빈소는 신촌 세브란스병원 장례식장 1호에 마련됐으며 발인은 28일 오전 9시, 장지는 남한강 공원묘지이다.02)392-0299.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Seoul In] 고구려 유물·유적 사진전 개최

    광진구(구청장 정송학) 다음달 15일까지 구의동 테크노마트 1층 여권민원실 앞에서 ‘고구려 유물·유적 사진전’을 연다. 사진작가 유승률씨가 아차산 구석구석을 다니며 촬영한 작품 20점을 전시했다. 작품에 아차산성 전경을 비롯해 홍련봉 보루, 성터, 고분 유적 등이 등장한다. 전시 시간은 오전 10시∼오후 6시. 아차산은 남한에서 유일하게 고구려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이다. 민원여권과 3424-2971.
  • 의학자 맹광호교수 수필가로

    원로 의학자인 맹광호(64) 가톨릭대 의대 교수가 전문 수필가로 등단했다. 맹 교수는 산문 월간지 ‘에세이플러스’ 5월호에 수필 ‘남한산성’이 당선돼 본격적으로 전문 수필가로 활동하게 됐다. 가톨릭대 의대 학장 등을 역임하고 현재 한국과학저술인협회 회장, 유네스코 국제생명윤리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당선작인 ‘남한산성’은 국가의 중요한 성이었던 남한산성이 역사 교육장으로 남았으면 하는 심정을 적은 글이다.박홍환기자 stinger@seoul.co.kr
  • 北, 남한과 ‘자금 직거래’ 첫 제안

    北, 남한과 ‘자금 직거래’ 첫 제안

    평양에서 열리고 있는 제13차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경협위)에서 북측이 은행 계좌를 통한 남한과의 자금 직거래를 처음으로 제안, 그 의도가 주목된다. 남측 경협위 김중태 대변인은 19일 “북측이 기본발언에서 북측 개성 공단 내에 북측 은행 지점을 설치해 자금 결제를 원활히 할 것을 제의했다.”고 밝혔다. 김 대변인은 “개성공단 내에 은행 문제는 그 전에는 공식적으로 제기된 바 없다.”면서 “북측 은행을 설치하는 문제는 남북간 ‘코레스 계약(은행간 환거래 계약)’이 돼 있지 않아서 검토할 문제점이 많다.”고 했다. 북측은 은행 설치 이유로 ‘자금 결제 원활화’를 언급했지만 실제로는 남측 은행과의 거래를 통해 국제 금융거래 진출을 꾀한 것으로 보인다. 정부 관계자는 “표면적으로는 개성공단 내에서 임금 및 세금 처리 등 실무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라고 볼 수 있지만 남측 은행과 거래를 터 국제 금융망에 진출하겠다는 의도로 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같은 제안이 현실화되기는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이 관계자는 “우리은행이 국제적 신용도 타격을 감안하고 북측 은행과 계약을 맺을 가능성이 없다.”면서 “방코델타아시아(BDA) 자금을 중국 은행이 신용도 타격을 우려해 받아들이지 않은 것과 같은 논리”라고 말했다. 앞서 북측은 제1차 전체회의에 앞서 식량차관제공 합의서·공동보도문(초안)·기조발언문을 보여줄 것을 요구하며 7시간 넘게 테이블에 나오지 않았다. 전체 회의에서도 남측이 기조발언을 통해 2·13합의 이행을 요구하자 회의 도중 나가버리는 등 돌발 행동을 거듭했다. 이 때문에 오전 10시로 예정됐던 전체회의는 7시간40분이 지난 오후 5시40분에 가까스로 열렸지만 불과 40분 만에 끝났다. 김 본부장은 “북측이 우리측 기조발언 뒤 2·13합의를 남북경협에 결부시키는 것은 부당하다고 주장하고 일방적으로 퇴장했다.”고 밝혔다. 남측은 기조발언을 통해 경협 물자의 육로 운송과 5월 중 열차 시험운행을 제안했고, 북측은 열차시험운행 시기를 적시하지는 않았지만 가급적 빨리 하자는 입장인 것으로 전해졌다. 평양공동취재단·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창립 10년 라오스 최대 민간기업 ‘코라오’ 오세영 회장

    창립 10년 라오스 최대 민간기업 ‘코라오’ 오세영 회장

    라오스 최대의 민간기업은 올해 창립 10년이 된 코라오(Kolao)그룹이다. 연 매출 1억 2000만달러인 이 기업의 회장은 한국인 오세영(45)씨다.Kolao는 한국(Korea)과 라오스(Laos)를 합친 이름이다. 재외동포재단에서 주최하는 ‘리딩CEO포럼’ 참석차 한국을 방문한 오 회장은 지난 17일 서울신문과 단독 인터뷰를 가졌다. 오 회장은 원래 대기업 상사맨이었다. 처음에는 베트남에서 사업을 시작했다.91년이었다. 베트남에서 막 자본주의가 꿈틀거리던 때 출장을 갔다가 그대로 눌러앉은 것이다. 당시는 한·베트남 관계가 꽃피기 시작할 때였다. 그러나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했던 베트남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외국인투자신청 허가도 받지 않고 92년에 봉제공장을 만들었다가 1년 뒤 약점을 잡은 합작파트너에게 모든 것을 빼앗겼다. 다시 손댄 게 7∼8년된 중고자동차와 오토바이를 수입해 파는 일이었다. 그러나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다 일을 그르치고 말았다. 오 회장이 재기의 땅으로 삼은 곳이 라오스였다.97년 라오스 땅을 밟았을 때 베트남보다 더 후진국이었고 한국과 더 소원한 국가였다. 남한보다 북한과 더 가까웠던 라오스에서 일본 도요타는 자동차 시장의 77%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때 한국차는 단 두대뿐이었다. 그런 현실에 오 회장은 통역과 달랑 둘이 도전했다. ●91년 베트남 첫 사업 실패후 라오스로 진출 라오스에서는 중고 자동차 판매사업부터 시작했다. 오토바이 제조·판매, 시멘트사업으로 사업 영역을 넓혔다. 현재 직원이 7000명이 넘고 1만 5000명까지 늘릴 계획이다. 중요 사업부문으로 삼고 있는 것의 하나가 바이오디젤 연료인 ‘자트로파’를 재배하는 사업이다. 오 회장의 세가지 사업 원칙은 빚없이, 동업하지 않고, 사회환원을 하는 것이다. 두번째 원칙은 지난달 굿모닝신한증권과 자트로파 재배사업을 함께 하기로 계약을 맺으며 깨고 말았다. 다른 두가지는 지키고 있다. 특히 순이익의 10%가량을 교육사업에 꾸준히 투자하고 있다. 주류 사회에 편입하는 과정에서 기득권의 배척을 이겨내기 위해서는 기여와 봉사뿐이라는 생각에서다. ●투명경영으로 수십차례 세무조사 위기 넘겨 처음부터 투명경영을 고집한 것도 사업체를 키워낸 비결이다. 사업이 커지자 라오스 정부는 2000년부터 2년간 30차례 넘게 세무조사를 나왔다. 하지만 철저한 세금납부, 투명한 회계를 강조한 오회장의 경영방침 때문에 흠을 잡을 수 없었다. 라오스 정부도 투명 경영 기업으로 선정했다. 라오스 정부는 또 코라오를 외국인 투자 모범사례로 삼는다. 오 회장은 후진국에 진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이 겸손이라고 했다. 절대 현지인을 얕보아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후진국에 안주하지 말고 선진국을 다니며 끊임없이 자기개발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래서 오 회장은 서울사무소를 통해 신간 책이나 잡지를 40여권씩 다달이 구해 읽으며 새로운 경영감각을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글 전경하 류재림기자 lark3@seoul.co.kr
  • “우리 시대를 말하고 싶다”

    “역사 장편소설은 이제 그만두고 싶습니다. 당대의 일을 쓰려 합니다.” 역사소설 ‘남한산성’(학고재)을 출간한 김훈(59) 씨는 17일 서울 인사동에서 기자들과 만나 “이제 당대를 다룬 글을 쓰고 싶다.”면서 “27년간 기자로 살았는데도 당대를 말한다는 게 겁이 나 잘 될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당대의 일을 작품의 소재로 삼는 조정래, 황석영씨를 존경합니다. 그러나 저에게는 당대의 모습이 제 속에 정리돼 있지 않은 듯 합니다. 기자로서 다양한 체험이 인문학적 소재가 될 수 있는 건지 아직 자신이 없습니다.” 김씨는 그러나 역사소설 중에서도 흑산도로 유배 간 정약전의 삶 등을 다룬 단편은 펴내고 싶다고 말했다. 김씨의 신작은 1636년 겨울 병자호란 때 청나라의 대군을 피해 인조가 신하들과 함께 남한산성에서 47일 간 머물며 겪었던 일을 다룬 장편이다. 이순신 장군의 인간적 실존의식을 다룬 장편 ‘칼의 노래’, 가야금의 예인인 우륵의 이야기를 쓴 ‘현의 노래’, 이번 신작에 이르기까지 역사소설을 잇따라 발표한 것에 대해 김씨는 “아마 역사에 대한 부채의식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고 말했다.연합뉴스
  • [부동산플러스] 양평에 ‘힐 펠리스 2차’ 건설

    세진건설은 경기도 양평군 강하면 전수리 남한강변에서 전원주택 ‘힐 펠리스 2차’ 21가구를 분양한다.48평형은 단층,69·74·90평형은 복층 형태로 지어진다.48평평은 4억 9000만원,69평형은 10억 5000만∼12억 5000만원,74평형은 7억 3000만원,90평형은 12억 5000만원이다. 분양가의 최고 30%까지 대출된다.1588-0876.
  • 김일성 창작 北연극 南무대에

    고(故) 김일성 주석이 직접 쓴 것으로 알려진 북한 희곡이 다음달 2일부터 시작되는 서울연극제에 초청돼 남한 무대에 처음 올려진다. 화제의 작품은 다음달 17∼19일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5차례 공연될 중국 연변연극단의 ‘딸에게서 온 편지’(김일성 작ㆍ박미선 연출). 김일성이 항일 무장투쟁을 하던 1930년대에 직접 창작했다는 ‘5대 혁명 연극’ 중 하나로 1920년대 한반도 북부 산간 마을 순박한 농민들의 생활상을 풍자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번에 공연될 ‘딸에게서 온 편지’는 1930년 만주에서 처음 공연된 뒤 1987년 ‘북한국립연극단’이 재창작해 꾸준히 공연해온 레퍼토리. 글을 알지 못하는 농민 허달수를 주인공으로 내세워 문맹퇴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간도에 간 딸의 소식을 눈 빠지게 기다리지만 글을 읽지 못해 딸이 보내온 편지를 찢는 등 온갖 소동을 빚다가 결국 배움의 중요성에 눈을 뜨고 야학에 입학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내한하는 연변연극단은 1956년 창단 이래 중국 지린(吉林)성 일대에서 북한의 연극 양식을 이어온 대표적 단체. 따라서 이번 공연은 북한 사회주의 혁명 연극의 방식과 연기, 북한 사투리가 섞인 대사, 무대장치, 음악 등 북한 연극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기회로 기대된다. 한편 최근 연변연극단과 교류하고 있는 서울연극협회 산하 서울평양연극제추진위원회는 ‘5대 혁명 연극’ 전부를 서울에서 공연할 방침이다.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6) 역관 명문 인동 장씨

    [조선후기 신지식인 한양의 中人들] (16) 역관 명문 인동 장씨

    지금까지 확인된 조선시대 잡과(雜科) 합격자는 모두 6122명이다. 이 가운데 역과가 2976명, 의과가 1548명, 음양과가 865명, 율과가 733명 순이었다. 산학(算學)은 정조 즉위년(1756)부터 주학(籌學)이라고 했는데, 잡과에서 제외되었기 때문에 취재(取才)를 통해 1627명 이상 선발했다. 역과가 가장 많은 합격자를 냈는데, 인조가 병자호란 때에 남한산성에서 나와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역관(譯官)의 업무가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조정에서는 사신들의 여비를 공식적으로 지급하지 않고,1인당 인삼 여덟자루(80근)를 중국에 가져다 팔아 쓰게 했다. 돌아올 때에 골동품이나 사치품을 사다가 팔면 몇배의 장사가 되었다. 인삼이 차츰 귀해지자, 인조 때에는 인삼 1근에 은 25냥으로 쳐서 2000냥을 가져다 무역하게 하였다. 사신들은 중국 장사꾼과 만날 수 없어 사신들의 몫까지 역관들이 대신 무역했다. 역관들이 무역을 통해 막대한 재산을 축적하고, 서울의 돈줄은 역관의 손에 달려 있었다.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에서 허생이 돈을 빌린 갑부 변씨도 역관이다. 변씨는 허생을 어영대장 이완에게 추천하여 벼슬을 주려 했다. 역관들은 막대한 재산과 해박한 국제정세를 통해 정권의 핵심에 가까이 다가갔다. 역관의 딸로 왕비에까지 오른 장희빈이 대표적인 예이다. 인동 장씨는 역과 합격자가 22명뿐이라 전체의 1%도 채 안되지만,1등 합격자가 많고 정치적·경제적 수완이 뛰어난 인물들이 나와 역관 명문을 이루었다. ●역관들 중국과의 인삼무역으로 막대한 돈 벌어 원래 양반인 인동 장씨 집안에서는 20대 경인과 응인 대에 이르러 처음 역관이 되었다. 장경인은 1628년 명나라에 진향사(進香使) 역관으로 갔다가 사신이 재촉해 시세에 맞게 팔 수 없게 되자 중국인 앞에서 서장관을 욕해 나중에 심문을 당했다. 경험이 없어 첫 장사에 실패한 것이다. 그의 맏아들 장현(張炫)이 1639년 역과에 1등으로 합격해 사역원에서 중국어를 가르치고,40년 동안 북경에 30여차례나 다녀왔다.‘인동장씨세보’에는 장경인 이하 역관 집안이 빠져 있어, 김양수 교수는 역과방목과 ‘역과팔세보(譯科八世譜)’ 등을 통해 이 집안이 어떻게 역관 집안으로 정착되었는지 조사했다. 다른 역관들도 인삼 무역을 통해 부자가 되었지만, 장현은 색다른 방법을 썼다. 자신의 딸을 효종의 궁녀로 넣어, 왕을 후견인으로 삼은 것이다. ●왕명으로 화포까지 밀수입 효종 4년(1653) 7월에 대사간 홍명하가 자신의 벼슬을 바꿔달라고 아뢰었다. 사신들이 압록강을 건널 때에 화물 50여 바리에 내패(內牌)가 꽂혀 있어 물의를 일으킨데다, 불법무역을 심문당하던 역관 김귀인이 동료들의 이름을 끌어대자 형관이 손을 저어 말렸기 때문. 제대로 조사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물러나겠다는 뜻이었다. 내패(內牌)는 내수사(內需司)의 짐이라는 꼬리표였으니, 역관 장현의 짐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아무도 손댈 수 없었다. 효종은 “풍문이 사실과 다르다.”면서 장현을 감싼 뒤에, 도강 초기에 50바리라는 것을 알았으면 왜 그때 조사하지 않고 지금 와서 시끄럽게 구느냐고 오히려 나무랐다. 이날의 실록 기사에는 장현의 이름이 나타나지 않았지만, 사관은 이 기사 끝에 “성명을 끌어댄 자는 역관 장현인데, 궁인(宮人)의 아버지이다.”라고 붙였다. 대사간이나 효종의 입에서는 장현의 이름이 끝내 나오지 않았지만,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한번의 무역만으로도 엄청난 이익을 남겼는데, 무역량과 그 이익은 해가 가고 직급이 높아질수록 눈덩이처럼 커졌다. 심지어는 화포(火砲)까지 밀수입하다 청나라 관원에게 적발되기까지 했다. 염초(焰硝)나 유황(硫黃), 화포 등의 무기류는 금수품(禁輸品)이다. 선양에서 모욕적인 인질생활을 겪었던 효종은 복수를 다짐하며 북벌책(北伐策)을 강구했으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무기를 사들였다. 현종 7년에도 최선일이 염초와 유황을 밀수하다 적발돼 청나라 사신에게 문책당하고 몇천금의 뇌물을 썼다. 숙종 17년(1691) 6월에는 장현의 밀수건이 문서로 넘어왔다. 몇년 전에 청나라에서 화포 25대를 구해오다가 봉황성장(鳳凰城將)에게 적발된 사실이 자문(咨文)으로 이첩돼와, 조정에서도 할 수 없이 “장현을 2급 강등시키겠다.”고 청나라에 알렸다. 그가 역모를 꾸미지 않았다면, 화포는 당연히 나라에서 쓸 물건이다. 적어도 화포 밀수건은 왕의 묵인하에 저지른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장현의 신임이 그만큼 두터웠고, 그에 따른 경제적 이익도 막대했으리라고 짐작된다. 응인은 경인과 사촌 간으로 선조 16년(1583) 의주에 역학훈도(譯學訓導)로 있었다. 목사와 통군정에 올라 시를 짓는데, 술을 따르고 운을 부르자 술잔이 식기 전에 시를 지을 정도로 문학적 재능이 뛰어났다. 그의 아들 장형(張炯)도 취재를 거쳐 사역원 봉사를 지냈다. 그의 장인 윤성립은 밀양 변씨 역관 집안의 사위였다. 장형의 맏아들 장희식은 효종 8년(1657) 역과에 장원으로 합격해 한학직장(漢學直長)이 되었으며, 작은아들 장희재는 총융사까지 올랐다. 딸이 장희빈이니, 장희빈의 외할머니는 조선 최고의 갑부 역관 변승업의 큰할아버지 딸이었다. 안팎으로 역관 집안들과 혼맥을 이루면서, 인동 장씨도 역관 집안의 핵심이 되었다. 장희빈이 처음 종4품 후궁인 숙원(淑媛)에 봉해지던 숙종 12년(1686) 12월10일 사관은 이렇게 기록했다. ●정치력 발휘, 장희빈을 왕비로 장씨를 책봉하여 숙원으로 삼았다. 전에 역관 장현은 온나라의 큰 부자로 복창군 이정과 복선군 이남의 심복이 되었다가 경신년(1680) 옥사에 형을 받고 멀리 유배되었는데, 장씨는 바로 장현의 종질녀(從姪女)이다. 나인(內人)으로 뽑혀 궁중에 들어왔는데, 얼굴이 아주 아름다웠다. 경신년(1680)에 인경왕후가 승하한 후 비로소 은총을 받았다. 왕실과 가까이 했던 장현은 경신대출척으로 한때 밀려났지만, 바로 그해에 오촌 조카딸 장희빈이 숙종의 눈에 들면서 기사회생하였다. 장현이 딸을 궁녀로 들였던 것처럼, 장형도 역시 딸을 궁녀로 들였다. 인경왕후는 노론 김만기의 딸이니,‘구운몽’의 작가 김만중의 조카딸이기도 하다. 숙종 14년(1688) 10월에 장씨가 아들을 낳자 숙종은 노론의 반대를 무릅쓰고 원자로 정해 종묘사직에 고했으며, 소의(昭儀·정2품) 장씨를 희빈(정1품)에 봉했다. 노론을 견제하려던 종친과 남인들이 장희재 주변에 모여들자, 서인의 영수 송시열이 “원자로 정하는 것이 너무 이르다.”고 상소했다가 남인의 공격을 받고 삭탈관직당했다. 노론의 등쌀을 지겨워했던 숙종이 장희빈에게 마음이 기울면서 남인을 편들어준 것이다. 다음날로 목내선을 좌의정에, 김덕원을 우의정에, 심재를 우의정에 임명하면서 정국을 뒤바꿨다. 이것이 바로 기사환국이다. 장희빈의 아버지 장형은 영의정, 장수는 좌의정, 할아버지 장경인은 우의정에 추증하여, 역관 집안이 정국의 핵심에 들게 되었다. 목내선은 “역관 장현이 청나라 내각의 기밀문서를 얻어온 공로를 표창해 주십사.”고 아뢰었다. 이미 품계가 숭록대부(종1품)까지 올라 더 이상 오를 수 없지만 “600금이나 비용을 쓴 점을 감안하여 그 자손에게라도 수여하자.”고 하자, 왕이 “그 자손에게라도 한 급을 올리라.”고 했다. 장희빈이 왕비로 책봉되자, 오빠 장희재도 포도대장을 거쳐 총융사에 올랐다. 숙종실록 18년 10월24일 기사에 재미있는 이야기가 실렸다. ●서울의 돈줄 좌지우지 왕이 주강(晝講)에 나오자, 무신 장희재가 아뢰었다.“신이 주관하고 있는 총융청은 군수(軍需)가 피폐하므로, 병조판서 민종도와 상의하였습니다. 병조의 은 1만냥을 꿔다가 장차 교련관에게 주고, 사신이 북경에 갈 적에 같이 가서 잘 처리하여 그 이득을 가지고 동(銅)을 무역해다가 주전(鑄錢)하는 재료로 삼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옳게 여겼다. 이때 민종도와 장희재가 서로 안팎이 되어 마구 뇌물 주기를 자기들 하고 싶은 대로 했었다. 숙종이 기사환국을 통해 당쟁으로 약화된 왕권을 회복하려고 하자, 남인들은 그 기회를 이용해 집권하고 서인에게 복수하려 했다. 장희재는 국고를 이용해 역관의 무역방식으로 재산을 불렸다. 후대의 사관은 군수(軍需)를 빙자한 무역의 이익이 결국은 두 사람의 뇌물로 쓰였을 것이라 판단했다. 수출과 수입을 통해서 몇배를 벌어들인 뒤에 그 구리로 동전까지 찍어 풀었으니, 얼마가 남는 장사였는지 계산하기 힘들다. 서울의 돈줄이 역관 집안에서 나왔다는 사실은 ‘허생전’ 뿐만 아니라 이러한 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허경진 연세대 국문과 교수
  • 국내 ‘대표 어장’ 굳힌다

    국내 ‘대표 어장’ 굳힌다

    충주호는 쏘가리와 뱀장어, 대청호는 은어의 국내 ‘대표어장’으로 육성된다. 13일 충북도에 따르면 매년 7만∼8만마리씩 방류하던 쏘가리, 뱀장어, 은어 치어를 올부터 10만마리로 확대하고 10년 뒤에는 각각 150만∼200만마리로 대폭 늘릴 방침이다. 충주호는 매년 수도권에 반입되는 쏘가리 공급량의 60%를 차지하고 있다. 어획량도 지난해 모두 52t이 잡혀 전국 생산량(99t)의 52%에 달했다.2004년도에는 전국 생산량 93t 가운데 53t으로 57%를 차지하는 등 국내 최대의 생산지로 명성을 떨치고 있다. 뱀장어도 지난해 12t이 잡혀 46t이던 전국 생산량의 26%를 차지했다.2004년에는 15t이 잡혀 전국 생산량 37t의 40%를 넘었다. 대청호에서는 국내에서 가장 많은 200t의 은어가 매년 잡히면서 전국 최대 산지로 자리를 확고히 하고 있다. 뱀장어 가격은 1000원 안팎의 치어(10∼15㎝)가 3년 뒤에 1㎏까지 자라면 15만원, 쏘가리는 1000원 정도인 3∼4㎝ 크기의 치어가 3년쯤 자라 1㎏에 이르면 3만∼5만원을 각각 호가할 만큼 상당히 높다. 몸무게가 20∼30㎏ 나가는 수십년 묵은 뱀장어는 값이 정해져 있지 않다. 도는 이들 물고기의 생산량을 더 늘려 어민소득을 높이고 메카로서의 지역 이미지를 드높이겠다는 구상이다. 뱀장어와 은어는 바다와 민물을 오가는 회귀성 어류. 뱀장어는 한강과 남한강을 거쳐 충주호로 들어오다 1985년 충주댐이 만들어지면서 길이 끊겼다. 이 때문에 충북도에서 80년대 말부터 치어를 방류했다. 은어도 당초 대청호에 살지 않았으나 1997년부터 수백만개의 인공수정란 등을 방류하면서 서식하기 시작했다. 도는 연간 5억여원인 치어방류 사업비를 해마다 20∼30%씩 늘려 10년 뒤인 2017년에는 15억원에서 20억원으로 대폭 확대할 계획이다. 충북도 이병배 수산담당은 “매년 4∼5월 충주호에서 전국 쏘가리루어 낚시대회를 열고 있고 대청호도 올해 가을부터 은어축제를 여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면서 “이같은 이벤트를 통해 ‘쏘가리나 은어를 먹으려면 충주호나 대청호로 가야 한다.’는 이미지를 심어줄 계획”이라고 말했다. 청주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한국 전기역사 120년] (상)어제와 오늘

    [한국 전기역사 120년] (상)어제와 오늘

    우리나라에 전기가 들어온 지 올해로 꼭 120년이 됐다.1887년 3월 초 저녁 경복궁 내 건천궁. 작은 불빛 하나가 깜빡깜빡하는가 싶더니 처음 보는 눈부신 조명이 갑자기 주위를 밝혔다. 개화의 바람을 타고 온 문명의 빛은 그 후 국가경제발전의 든든한 버팀목이 됐다. 시련을 딛고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한 우리나라 전력산업의 역사와 과제, 전망 등을 살펴본다. 전기에 대한 고종 황제의 사랑은 각별했다. 고종의 지대한 관심은 1898년 1월 한성전기회사의 설립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 최초의 전력회사인 한성전기는 황실에서 출자한 국영기업 형태로 운영됐다. 오늘날 한국전력의 모태가 됐다. 경복궁에서의 시등(始燈)이 조그마한 자가발전설비로 이뤄진 것이라면 한성전기 설립은 본격적인 전력사업의 시작을 의미한다. 초기의 전력사업은 전차사업으로 나타났다.1899년 5월4일은 전차가 동대문과 흥화문(옛 서울고 자리) 구간을 시험운행한 역사적인 날이다. 한성전기는 이어 전등사업에도 관심을 돌렸다. 최초의 민간전등은 1900년 4월10일 종로네거리 정거장과 매표소 주변 가로등에서 켜졌다. 이날을 기념해 지난 1966년부터 해마다 4월10일을 ‘전기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국가경제의 든든한 버팀목 전력사업은 해방 후 큰 위기를 맞았다. 발전설비의 약 90%가 북한에 있었기 때문이다.6·25전쟁을 거치면서 전력난은 더 심각했다. 공장을 돌리기조차 어려웠다. 민간 가정에서 전깃불은 켠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었다. 당시 남한에는 조선전업 등 전력 3사가 있었으나 만성적인 적자운영으로 전력난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런 상황을 풀기 위해 1961년 7월 한전이 창립됐다. 한전은 1964년 4월 역사적인 ‘무제한 송전’을 실시했다. 해방 후 되풀이됐던 전력난이 해소됐다. 한전은 1965년 12월부터 농어촌전화(電化)사업에 매진,1979년 98%의 전기보급률을 달성했다. 부잣집의 전유물이던 전기가 거의 모든 일반 가정으로까지 보급된 것이다. ‘국내용’이던 전력사업은 1990년대부터 세계 무대로 활동범위를 넓혔다. 한전은 1995년 2월 필리핀 말라야 화력발전소 성능복구 사업을 따냈다. 이듬해에는 필리핀 일리한 복합화력발전소 건설·운영사업 수주에도 성공했다. 전력수출시대를 연 해외사업은 순항 중이다. 중국, 레바논, 미얀마, 리비아, 캄보디아, 우크라이나 등에 진출, 고부가가치를 창출해내고 있다. 남과 북의 전기도 하나로 이었다. 한전은 2004년 12월 북한과 개성공단 전력공급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2005년 3월 개성공단에 전기를 공급했다.1948년 5월 전력교류가 단절된 지 57년 만에 분단의 벽을 넘는 쾌거였다. ●세계 수준으로 성장한 전력산업 이 땅에 전등이 밝혀진 이후 120년간 우리나라의 전력산업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경제성장의 버팀목이었던 한전은 세계가 인정하는 전력회사로 성장했다. 글로벌 종합에너지 그룹으로 비상하려는 노력도 게을리하지 않고 있다. 한전의 전기품질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호당 정전(停電)시간은 2006년 18.8분. 타이완(30분), 미국(122분), 프랑스(51분)보다 휠씬 짧다. 규정전압 유지율은 99.9%, 주파수 유지율은 99.7%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한전은 지난해 포천지가 선정한 500대 기업, 파이낸셜 타임스가 꼽은 500대 기업, 포브스지 2000대 기업에 모두 선정됐다. 미국 에너지 분야 전문기관인 플래트(Platts)는 한전을 전력산업 부문 세계 6위, 아시아·태평양 최고의 전력회사로 선정했다. 이원걸 한전 사장은 “‘글로벌 한전’이 될 수 있도록 첨단 전력기술 개발과 해외전력 시장 진출에 주력하겠다.”고 말했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전기 역사 120년 발자취 -1887:경복궁 내 건천궁에서 시등(始燈)-1899:대중교통의 혁명, 첫 전차시대 개막 -1964:전력 무제한 송전, 한강의 기적 -1978:제3의 불, 원자력발전시대 개막 -1979:농어촌전화(電化)사업 완료 -1995:전력도 수출역군, 필리핀 말라야 발전소 운영 -2005:남과 북의 전기 하나로 잇다. 개성공단 전력공급 개시 자료:한국전력공사
  • ‘홍업 출마’ 반기 든 호남시민단체

    6일 낮 12시쯤 전주 전북대 정문앞이 아수라장이 됐다. 특강을 마치고 나오는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승용차를 30여명의 시위대가 기습적으로 막아서자, 주위의 전경들이 강제로 해산에 나선 것이다.광주·전남지역 시민단체 소속 시위대는 ‘김대중 전 대통령님, 김홍업씨 국회의원 출마를 반대합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전경들의 ‘신속한 조치’로 현장은 금세 정리됐지만, 이날 DJ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 같다. 자신의 정치역정 내내 호남은 누구보다 강력한 ‘서포터스’였기 때문이다. 광주YMCA 김호림 기획조정실장은 “DJ가 호남에서 곤욕을 치른 건 처음일 것”이라고 했다. DJ의 차남 홍업씨가 4·25 전남 무안·신안 보궐선거를 앞두고 민주당 공천을 받았을 때만 해도 당선은 ‘떼어 놓은 당상’으로 여겨졌다. 정치인들은 DJ를 의식, 감히 홍업씨의 처신을 비판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근 ‘뜻있는’ 호남 시민들이 들고일어나면서 간단치 않은 기류가 형성되고 있다. 광주·전남지역 62개 시민사회단체는 지난 5일 ‘김홍업 출마반대 대책위원회(위원장 신대운)’를 구성, 본격적인 낙천·낙선운동에 나섰다. 신대운 위원장은 “부정을 저지른 사람을 민주당이 공천한 것은 호남인의 자존심을 짓밟는 행위”라며 공천 철회와 출마 포기를 촉구했다. 대책위는 곧 서울 동교동 DJ 자택을 방문, 항의서한을 전달할 예정이다. 앞서 4일에는 문병란 전 조선대 교수, 일연 스님 등 지역 원로들이 ‘지역자존지키기 100인 선언’을 통해 “DJ가 권력형 범죄를 저지른 둘째 아들의 출마를 자제시키기는커녕 명예회복을 위해 열심히 뛰라고 했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라고 비난했다. 비판적인 민심은 여론조사에서도 확인된다. 광주 무등일보가 지난달 31일 무안·신안 유권자 500명을 대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홍업씨는 20.0%의 지지율로 무소속 이재현 전 무안군수(24.2%)에 이어 2위에 그쳤다. 하지만 이런 기류가 선거 결과로 이어질지는 불투명하다. 재·보선의 경우 투표율이 낮아 조직표를 앞세운 홍업씨가 유리할 것이란 관측이 많기 때문이다.민주당 관계자는 “홍업씨 지지율이 오르는 추세”라며 “공천 철회는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광주YMCA 김호림 실장은 “역사의 고비마다 민주주의를 앞당기는 정의를 실천해온 호남인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심판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결의를 굽히지 않았다.●“남·북·미·중 4자 정상회담 가능성” 한편 이날 전북대에서 명예 법학박사 학위를 받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특강을 통해 “동북아 안보협력을 위한 장관급 회담이 열려야 하고, 나아가 남한과 북한, 미국, 중국 4자의 정상회담으로 한반도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의 프로세스를 진행시키는 일도 예상할 수 있다.”고 전망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전망’이란 주제의 특강에서 “2007년은 6·15 정상회담에 이은 제2차 해빙의 해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고 말했다.김상연기자 carlos@seoul.co.kr
  • 총각사원 김신조(金新朝) 결혼 반보전(半步前)

    총각사원 김신조(金新朝) 결혼 반보전(半步前)

    지난 4월 14일 귀순자 환영대회에서 주민등록증을 받아 쥔 서울시민 김신조(28)에게 애인이 생겼다. 『올해엔 꼭 장가를 가야겠수다』하던 자신의 다짐을 실천하기 위해서 일까? 섭씨 30도를 오르내리는 삼복더위에도 아랑곳 없이 총각 김씨는 목하 뜨거운 「데이트」에 한창인데…. 김씨의 결혼 반보직전설을 확인하기 위해 그의직장인 삼부(三扶)토건 총무과에 전화를 걸었다. -애인이 생기셨다는데? 『글쎄요…』 -올해엔 꼭 결혼하신다고 했는데? 『가을쯤 식을 올릴까 합니다』 -신부후보의 이름은? 『곧 청첩장 보내드리지요』 그뿐이다. 굳이 신부후보의 이름을 밝히지 않는건 확정 될 때까진 신부쪽 입장을 생각해서 신중해야 되겠다는 소신 때문인듯. 이보다 앞서 약 2주일 전인 지난 7월 중순께 서울 충무(忠武)로에 자리잡고 있는 관상가 S씨의 집에 전라도 사투리의 모녀가 나타났다. 궁합을 보아 달라는 것이었다. 신랑의 이름은 김신조(金新朝). 『하하하…신랑될 사람은 말띠. 또 여자는 닭띠라 이거 천생연분입니다. 아주 좋아요』 이런 대답에 두 모녀는 무척 흐뭇해하며 돌아갔다는 소식이다. 선량한 서울시민이자 총각인 김씨의 마음을 사로잡은 아가씨는 과연 누구일까? 이보다 앞서 김씨가 지난 4월 기자회견서 밝힌(「선데이 서울」4월 19일자 12~13 페이지)신부후보의 조건부터 살펴보자. 『만 25세미만의 대한민국 여성으로 신체건강하고 사상 건전한 아가씨면 OK』란 조건에 『반드시 형제들이 많을것』이란 단서를 덧붙였다. 형제들이 많아야 한다는 조건은 김씨 자신이 남한에 일가친척이나 친지가 없어 외롭기 때문에 처가쪽이라도 형제가 많아야 되겠다는 것이었다. 학력은 여고졸업정도면 충분. 김씨 자신이 현재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으나 흥남(興南)고등기계고업학교를 나온 정도인데 대졸 신부는 너무 과분하다고도 했다. 이런 김씨의 신부조건이 현재 「데이트」중인 최정희(崔貞姬)양(25·가명·서울 영등포구 대방동)에게 꼭 들어맞는 것은 우연이랄까, 천생연분이랄까? 지난 4월 1일 삼부토건에 입사한 김씨는 그 서글서글한 성품 때문에 동료들에게서 호평을 받았고 하루 일과가 끝나면 곧잘 막걸리「파티」에도 어울렸다. 그러던 김씨가 5월에 접어들면서 좀 달라졌다. 퇴근후 동료들이 『생맥주 한잔만』하고 잡아 끌어도 뒷머리를 긁으며 『좀 볼 일이 있어서…』하고 꽁무니를 뺀적이 몇 번 있었다. 그런가 하면 퇴근 무렵 아리따운 음성의 아가씨 전화가 걸려오기도 했다. 김씨를 살짝 빼낸 이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최정희양. 최양은 전남 보성(寶城) 태생, 서울에서 H여고를 졸업한뒤 한동안 고향의 어느 여자중학교 서무과 직원으로 있다가 지난 2월 다시 서울에 올라왔다. 상경이유는 『서울의 여고동창도 만나볼겸 좋은 일자리도 구할겸』-. 그래서 현재 대방동에 전세 13만원 짜리 방 한간을 얻어놓고 자취를 하고 있다. 「만 25세 미만」이란 김씨의 신부후보 조건엔 최양이 올해로 만 25세니까 적격자이고 「신체건강·사상건전」은 H여고 동창들이 보장한다는 소문. 게다가 5남매중의 둘째딸이라 『형제가 많아야 한다』던 단서조건에도 맞아 김씨로선 이상적인 신부후보다. 최양이 김씨를 알게된 건 신문지상을 통해서였다. 김씨가 선량한 서울시민이 되었다는 소식에 김씨에게 격려의 편지를 보낸 많은 아가씨들중에 최양의 편지도 들어 있었다. 그 많은 격려편지속에서 하필이면 최양의 편지가 김씨의 관심을 끌었을까? 최양의 편지가 김씨의 마음을 움직이게한 것이 바로 「인연」이 아니겠냐는 것이 최양의 가까운 친구들의 평이다. 아무튼 최양의 편지에 김씨의 마음이 움직였고 김씨는 최양에게 답장을 냈다. 이렇게 되니 최양은 다시 김씨에게, 김씨는 또 최양에게 답장을 내는 공식적인 「스케줄」이 펼쳐졌다. 그리고는 정석대로 『한번 만나자』는 제의가 어느편에선가 나오고 두사람은 어느 호젓한 다방에서 첫선을 겸한 「데이트」를 했고, 「데이트」가 잦아지는 동안 이에 비례해서 정이 두터워지고…. 워낙 외로운 처지의 김씨였으므로 두사람의 「데이트」는 보다 빨리 「스테디」해질 수 있었다. 마침내 지난 6월말게 김씨는 두차례나 최양의 집을 찾아와 놀다 가기도 했다. 총각인 김씨가 처녀인 최양의 집을 두차례나 방문했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단순한 친구의 영역을 넘어선 것. 이래서 최양은 고향집에 편지로 이런 경위를 알리고 결혼하겠노라는 의사를 밝혔다. 처음 최양의 집 부모들은 반대했다는 소문. 그러나 최양의 뜻이 하도 강경하고 보니 부모로서도 어쩔 수 없어 전권특사로 최양의 어머니가 서울에 파견되었다. 7월초순께 최양의 어머니는 딸 소개로 사윗감인 김씨와 대면했다. 이 첫 대면에서 김씨는 장래의 장모에게 어지간히 점수를 땄던 모양. 그러기에 처음엔 결혼반대파이던 최양의 어머니가 궁합을 보기에 이르렀고 「천생배필」이란 관상가의 괘에 기분이 흡족해 결혼찬성파로 급전환했다고. 현재 최양은 어머니아 함께 고향인 보성에 내려가 있다. 아버지 설득을 위해 모녀합작으로 대공세를 펴고 있다는 소식. 현지의 설득공작이 어느정도인지 모르지만 김씨가 『올가을 청첩장 보내지요』할 정도면 상당히 자신이 선 모양. 이래서 총각 김신조씨의 결혼전략은 「스케줄」대로 착착 진행중. 정어리의 명산지 청진(凊津)에서 태어난 사나이 김신조가 전남 보성산(寶城産)인 아가씨 최양을 아내로 맞게된다면 이 결혼은 장장 3천리를 잇는 뜻깊은 결혼식이 된다. [선데이서울 70년 8월 9일호 제3권 32호 통권 제 9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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