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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홍순영칼럼] 북핵문제와 통일한국

    [홍순영칼럼] 북핵문제와 통일한국

    북한의 핵문제는 이미 긴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공동선언은 1992년 말에 남북정부 간에 합의된 바 있었다. 주한미군의 전술핵무기 전면적인 철수 선언과 맞물려 체결된 이 비핵화공동선언은 한반도 비핵화에 관한 최초의 중대한 약속이었다. 그후 1994년에 북한은 미국과 함께 제네바 기본합의서에 합의한 바 이는 북한의 영변 핵원자로, 핵재처리 공장을 동결하고 궁극적 해체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이때에 핵시설에 대한 제한폭격론, 선제공격론 등의 가상시나리오까지 거론되는 등 심각한 긴장감이 있었다. 이 제네바 합의는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에 관한 시비의 와중에서 2002년에 파기됐다. 북한은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하고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를 다시 선언하였다.2005년 2월에 북한은 핵무기를 소유하고 있다고 공식 선언하였고 그 후 2006년 10월에 핵실험을 실시하였다. 이로써 북한은 핵무기 제조 능력을 세상에 과시하였다. 북한이 소유한 핵무기의 유형과 숫자 그리고 핵무기 재료의 종류와 수량에 관하여는 확실한 판단이 아직 불가능하다. 6자회담에서는 북한의 핵시설과 핵무기의 동결과 해체의 과정, 북한에 대한 안전보장과 경제지원, 북·미관계의 정상화, 한반도 평화체제, 동북아 평화안보체제의 제도화 등을 주요과제로 삼고 있다. 이러한 제반항목은 상호 연계되어 있고 검증 확인 절차가 있기 때문에 해결의 시한을 전망하기 어렵다. 이것을 두고 핵위기 장기화를 우려하는 견해가 아직 강하다. 북한의 핵개발 의지는 언제부터인가. 북한은 이 핵개발에서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 북한의 핵개발 의지가 언제부터인가를 짐작하기는 어려우나 그 의지가 확고히 된 것은 1980년대 탈냉전의 시대, 미·소공존의 시대, 그리고 공산주의 퇴조의 시대였다고 추측이 되고 있다. 소련의 분열, 동구권 국가들의 민주화, 중국의 시장경제 노선, 독일통일 등의 큰 역사적 변혁에 대응하여 북한정권은 주체사상과 군사제일주의를 더욱 강화하여 공산주의 독재체제를 수호한다는 큰 정치노선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힘은 총구에서 나온다는 마오쩌둥의 철학에 따라 경제개발보다는 군사력 강화(선군정치)에서 나라의 안전과 정통성을 구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한 군사제일주의 입장에서 보면 북한의 핵무기 개발은 미국의 가상적 공격에 대한 억지력이요, 북한 주민을 단합시키고 충성하게 하는 권위의 상징이요, 남한과 미국, 그리고 인접국가들에 대한 협박과 흥정의 수단이 되어 있다. 평양정권의 입장에서 보면 핵무기 개발은 성공한 도박일 것이다. 이런 입장에서 북한은 남한을 엄숙한 대화와 협력의 동반자로 존중하지 아니하고 미국을 외교와 군사의 상대국으로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언제까지 이 역사의 흐름, 다시 말하면 자유화, 시장경제, 세계화의 큰 흐름을 막아낼 수 있을 것인가. 언제까지 북한정권이 이웃나라와 관계를 끊고 고립하여 홀로 생존할 수 있는가. 그럴 경우 북한 내부에서 오는 항거와 저항은 어떻게 감당할 수 있을 것인가. 북한 내부의 항거와 저항은 어떤 형태로 올 것인가. 북한 정권은 얼마나 오래 이 비핵화·자유화로의 결단을 지체할 수 있을 것인가. 이것이 우리가 대비하여야 할 비상사태이다. 우리는 그동안에 더욱 모범적인 자유민주주의 국가, 시장경제의 나라로 성장하여야 한다. 대북관계에서는 자유의 가치와 시장경제의 원칙을 전파한다는 큰 원칙을 기본으로 삼아야 한다. 대북지원은 북한주민의 자유와 인권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이것이 통일한국의 기초를 닦는 일이다. 통일한국에의 길은 서울에서 시작한다. 이 원칙과 전략을 세계공동체에 널리 선포하여 지지·지원을 구하여야 한다. 통일한국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있어서 추구할 가치가 있는 것이다. 전 외교부·통일부 장관
  • [외환위기10년 그리고 미래] 해고 좌절딛고 막걸리공장 사장 우뚝

    [외환위기10년 그리고 미래] 해고 좌절딛고 막걸리공장 사장 우뚝

    외환위기 만 10년. 상처는 아직 아물지 않았다. 사장님이 한 순간에 노숙인 신세가 됐고, 평범한 사람들은 직장에서 쫓겨났다. 재기에 성공한 사람도 있지만 상처가 너무 깊어 재기할 기운조차 없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누구는 부지런하고 누구는 게을러서 그렇게 된 게 아니었다. 외환위기를 겪은 두 사람의 인생역정을 통해 양극화 현상을 짚어 봤다. “한국 전통술이 프랑스 와인보다 더 뛰어난 술로 해외에서 인정받는 것이 꿈입니다. 이제 작은 발걸음을 뗐을 뿐이지요. 앞으로도 어려움이 많겠지만 차근 차근 극복해 나갈 겁니다.” 10년 전 외환위기로 직장 생활을 그만 둔 박상기(41)씨는 막걸리 제조업체 ㈜우리술 사장으로 새출발했다. 경기 가평군에 있는 이 업체는 설립 당시 한달에 2000만원씩 적자를 냈으나 지금은 연 매출 25억원에 2억∼3억원의 흑자를 내고 있다. 박씨는 “큰 좌절 끝에 조그만 성공을 거두고 있다.”면서 “외국인들이 어설픈 한국말로 막걸리를 찾을 때 가장 큰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월급쟁이에서 노조 위원장으로 그는 1993년 대학 졸업 후 지금은 없어진 재벌기업 계열사인 D생명에서 평범한 첫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충격은 평범한 영업 직원의 인생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내몰았다. 회사는 고통분담을 강요하며 직원들과 상의도 없이 임금 삭감과 정리해고를 강행했다. 그는 “당시 특별히 회사 상황이 어려운 것도 아니었다.”면서 “급여 체계가 상여금 위주로 돼 있어서 직원들이 받은 타격이 상당했다.”고 말했다. 박씨만 해도 연봉의 40%가 깎였다. 직원들은 노조를 만들었고 박씨는 위원장이 됐다. 노조에 참여한 직원들은 극심한 탄압에 시달렸다. 그는 “회사는 절대 노조가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 집에 전화해 ‘남편이 빨갱이 활동을 하고 있다.’고 협박하는 등 부당노동행위를 밥 먹듯이 했다.”면서 “회사 창고로 나를 납치해 반성문을 강제로 쓰게 한 적도 있었다.”고 말했다. 노조를 무력화시킨 뒤 회사는 “회사를 그만두면 노조를 인정하겠다.”고 회유했고 이미 지칠대로 지친 그는 1999년 말 ‘자의반 타의반’ 회사에 사표를 던졌다. 물론 회사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의 이름은 ‘블랙 리스트’에 올라 동종 업계에선 그를 받아 주지 않았다. 일자리 자체를 찾기도 쉽지 않았다.“가평에서 막걸리공장을 하던 처남이 2000년 말 대리점을 서울에 냈는데 그때부터 2002년까지 제가 그걸 맡아서 하게 됐죠.” ●막걸리공장 사장, 고생문 활짝 봉고차를 타고 동네 가게마다 다니면서 막걸리를 팔았다. 기존 업체들이 선점하고 있는 상황에서 경험도 없는 사람이 거래처를 뚫기가 쉽지 않았지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전 직장 동료들과 학교 동창들의 도움으로 조금씩 거래처를 넓혀 갔다.2003년 10월에는 함께 돈을 모아 ㈜우리술 법인을 만들었고 처남한테서 경영권을 넘겨 받았다. 상황은 녹록지 않았다. 설립 당시 한달에 2000만원 정도씩 적자를 냈다. 자산보다 빚이 더 많았다. 원료를 외상으로 사게 돼 웃돈을 줘야 했고, 원가가 높아지니 가격 경쟁력이 떨어졌다. 그는 “직원들 월급 주기도 힘들었고 빚독촉 전화에 엄청나게 시달릴 정도로 하루하루가 힘들었다. 서울에 있던 전셋집도 처분해야 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여전히 힘들지만 희망을 꿈꾼다 “그럴 때일수록 원칙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품질 향상에 주력하면서 납품업자들을 일일이 찾아 다니며 협조를 구했습니다. 발품을 팔아 대형 할인점에 물품을 납품하게 되고 2005년에는 수출도 시작했습니다. 지난해엔 10만달러어치를 수출했고 올해는 20만달러를 예상하고 있지요.” 박씨는 “외환위기를 극복했다고는 하지만 양극화가 너무 심해졌다.”고 우려했다. 특별취재팀
  • [씨줄날줄] 언어의 통일/구본영 논설위원

    최근 북한의 언어학자가 남북간 언어 이질화의 심각성을 우려해 눈길을 끌었다. 북한 사회과학원 정순기 교수가 “민족어가 북과 남에서 서로 다른 길을 걸어 그 차이가 점점 커지고 있다.”고 지적한 것이다. 북한 잡지 ‘문화어 학습’의 기고문을 통해서였다. 특히 정 교수는 “영어와 한문 숭배사상을 배격해야 한다.”면서 은근히 남측을 비판했다. 그의 주장이 꼭 적확한 지는 따져봐야겠지만, 북측이 우리보다는 외래어·외국어를 덜 쓰는 것은 사실이다. 이를테면 스킨로션을 살결물이라고 하는 등 순우리말을 잘 다듬어 쓰는 사례가 많다.‘전구’(電球)를 듣기 민망한 ‘불알’로 고치는 식의 억지스러운 조어도 많긴 하다. 그렇다면 샹들리에는 ‘떼불알’로 바꿔야 하느냐는 농담이 나올 정도이니. 북한에선 최초인, 금강산 아난티 골프장에서 열린 골프대회인 NH농협오픈을 계기로 낯선 북한 골프 용어들을 접했다. 아이언을 ‘쇠채’, 우드를 ‘나무채’, 드라이버를 ‘제일 긴 나무채’라고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워터해저드를 ‘물방해물’로, 그린을 ‘정착지’라고 한다니 우리에겐 하나같이 생소하다.60여년의 남북 분단을 실감케 한다. 남북간 스포츠나 생활 용어야 달라도 아직은 큰 문제가 안 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산업기술 용어의 이질성은 당장의 ‘발등의 불’이 아닌가 싶다. 얼마전 이희범 한국무역협회 회장도 “남북 간에는 제품 규격을 비롯해 분류 체계, 평가 등에 쓰이는 용어가 달라 긴밀한 산업 협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개성공단에선 남북간 의사소통에 문제가 생기는 사례도 있다고 한다. 남측 기술진이 ‘자동차 타이어’나 ‘합성’이라고 하는 데 반해 북측 노동자는 ‘자동차 다이야’,‘맞닿이’라고 한다니 그럴 것도 같다. 남북 산업기술 용어의 표준화가 시급하다는 얘기다. 김형직사범대학 노어과에 재직하다가 탈북한 김현식(현 조지메이슨대 연구교수) 교수는 “남한말을 못 알아먹어 모멸감과 소외감을 느꼈다.”고 토로한 적이 있다. 남북 경협 현장뿐만 아니라 일상적 접촉에서도 남북 겨레간에 말부터 잘 통해야 통일의 길도 앞당겨질 것이란 생각이 든다.구본영 논설위원 kby7@seoul.co.kr
  • 천리타향 LA에서 붓 든 채…

    천리타향 LA에서 붓 든 채…

    부산 흥사단 사람들이 불시에 필자를 찾아 왔다. 1975년 필자가 국제신문 문화부장으로 있던 시절이다. 오늘 아침 운여 김광업 선생이 미국에서 타계했다는 부음이었다. 1973년에 로스앤젤레스로 이민간 지 3년만이다. 한국 쪽은 부산에 있는 국제신문의 필자에게 제일 먼저 알리라는 것이 유가족 측의 부탁이었다고 했다. 이 분이 한국에, 아니 부산에 살고 계실 때 그다지 짙은 정을 못 느꼈던 터라 다소 망연자실한 순간이었다. 실은 운여 말고는 그의 유족에 대해 평소에 들은 바는 있지만 면식은 없었다. 아들이 의사라는 것과 운여의 생활이 다소 어렵다는 것 등이다. 또 더 이상 아버지를 고국에 두고 미국에서 자식들만 떨어져 살 수 없다는 것이 아들의 간절한 충정임을 들어 알고 있었다. 운여가 어느 날 “이제 더 못 버티겠어”라고 말했다. 왜냐고 물으니 “아들이 미국으로 들어오지 않으면 의절하겠대”라고 말했다. 듣고 보니 정말 난감한 노릇이었다. 운여는 부산이 이미 정든 고향이나 다름없는 곳이었다. 부산을 떠나 일단 서울로 옮겼다가 미국으로 가야 할 운명이었다. 거의 절망 상태에 빠졌다. 거기 가면 글씨며 전각이며 골동 감정하는 재미를 깡그리 잃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강박관념이 그를 번민케 했다. 운여가 부산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동광동 김춘방 시인이 운영하는 벨모르 독서실에서 운여를 보내는 조촐한 모임을 가졌다. 교인인지라 아예 술 같은 건 마련할 필요가 없었다. 김춘방과 필자 등은 지필묵만 준비해 놓는 것으로 전송모임의 준비를 마쳤다. 부산에 거주하고 있을 때 창간 기념 휘호라든지 새로운 연재기획물이라도 마련되면 그 제호쓰기는 10중 8, 9는 운여 몫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이 양반 한 번도 귀찮아하는 내색도 없이 묵묵히 응해주었다. 성품이 워낙 소박한데다 남에게 베푸는 것을 좋아했다. 그는 자신의 서예작품뿐 아니라 전각 작품까지도 남 주기를 좋아했다. 물욕 같은 것은 버린 사람 같았다. 물론 필자도 어느 날 한글체로 된 이름을 새긴 전각 도장을 받은 적이 있다. 운여는 송별자리에 모인 사람들에게 6절지 한 장씩에 전자(篆字) 글씨를 정성스레 써 손에 쥐어줬다. 다음 날 운여는 서울로 떠났다. 필자는 그에 대한 송별 기사를 통해 처음으로 ‘운여체’란 어휘를 쓰면서 부산에서 전각과 서예를 위해 큰 터전을 일군 그의 공로를 기렸다. 1950년대 월남한 이래 정든 부산을 떠나는 그에 대한 필자의 작은 헌사에 지나지 않는다. 운여는 환속한 청남 오제봉을 위해 창선동 대각사의 선방을 빌려 동명서화원을 차리도록 주선했다. 해마다 서화 전람회도 열고 대구와 교류전도 빠짐없이 열면서 한국화와 더불어 서예, 전각으로 청남과 배재식, 조영제 등 그 제자들이 기량을 나타내고 향상시키는데 적잖이 이바지했다. 그는 기독교 장로이면서 불경에도 조예가 깊었다. 오늘에 와서 중진의 경지에 들어선 맷돌 수안 스님 등이 전각을 배우러 드나든 것도 이 무렵이다. 운여는 일찍이 도산 안창호를 흠모하는 사상가로 63년엔 흥사단 부산분회를 창립, 분회장직을 맡아 청년운동에 남다른 열성을 보였다. 그는 또 우리 골동문화재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감식안을 갖고 있었다. 이를 자타가 공인 할 정도였다면 그 감식안의 수준을 알 만하지 않겠는가. 그는 진위를 가려 달라는 청을 받으면 그것이 비록 위작이라 하더라도 “그냥 가지고 계세요”라고 답한다. 상대가 그것을 밖으로 내돌리지 않는 것이 진정한 애호가들을 위해서 좋은 길이란 암시다. 그는 미국 이민 이후에도 부산을 너무 그리워하고 다시 오고 싶어했다. 이민 간 그 해 필자에게 부산 살던 간절한 그리움과 회한을 담은 서신을 보내면서 서신 끝에 ‘나성(羅城)에서 나부 운여(拿父 雲如)’란 서한을 받고 한동안 어리둥절한 적이 있다. 나부란 뜻은 나포된 아버지란 뜻이 아닌가. 그제서야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그토록 가기 싫은 미국 이민을 아들의 강권에 못 이겨 갔으니 나포된 애비가 아니냐는 그런 눈물겨운 뜻이 아로새겨져 있었다. 운여는 미주흥사단의 사무실을 마련하기 위한 자금을 조달하려고 서예전시에 골몰하고 있었다. 밤낮 없이 쓰고 깎고 하다가 밤새 붓을 든 채 책상머리에 엎드려 영원의 잠을 청한 운여! 자기 겸손이 지나쳐 초기 국전 서예부문의 심사위원 위촉마저 사양한 선비. 우리 서예계의 독보적 존재, 고국에 묻히고 싶다던 소원도 이루지 못하고 이국땅에 잠든 운여를 우리는 잊을 수 없다. 그는 1906년 평양에서 태어나 경성의전(현 서울의대)을 나와 평양에서 안과를 개업했다. 광복 후 북한 정부에 차출돼 종합병원에서 종사하다가 1·4후퇴 때 피란 대열에 섞여 대구로 내려 왔다가 수년 뒤 부산으로 옮겼다. 가족들은 수정동 산 언덕배기 판자촌에 기거시켜 놓고 한때 지게꾼 노릇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 뒤에 겨우 자금을 꾸려 창선동에서 ‘광명안과’로 개업하다가 대교동으로 옮겼다. 안과를 개업했으나 서예 쪽에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그의 운필은 딴 사람이 흉내 낼 수 없는 매우 독창적인 것이어서 추사(秋史) 이래 큰 재목으로 평가받아 왔다. 글 김규태 시인, 전 《국제신문》논설주간     월간 <삶과꿈> 2007.09 구독문의:02-319-3791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술 즐기는 간박사 김정룡 한국간연구재단 이사장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술 즐기는 간박사 김정룡 한국간연구재단 이사장

    흔히 간을 ‘침묵의 장기’라고 한다. 간암이나 간경변 등 여러 간질환이 소리없이 조용히 다가오기 때문이다. 그만큼 두려운 질환이다. 올해는 B형 간염바이러스가 발견된 지 꼭 40년째가 된다.1967년 미국의 바루크 블럼버그(82) 필라델피아 명예교수가 처음 발견했으며 이 공로로 1976년 노벨의학상을 수상했다. 최근 일본 고베시(市)에서는 ‘아시아·태평양 소화기병학회 40주년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 자리에서 블럼버그 교수는 “B형 간염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30∼50%는 급성 간염을 겪고 그 중 일부가 만성 간염상태로 넘어간다. 그런 환자들이 나중에 간경변이나 간암에 걸릴 확률이 높아진다.”고 말했다. 오늘날 1년 동안 보고되는 우리나라의 간암 환자 수는 1만여명에 달한다.40∼50대에서는 간암이 국내 암 발생 1,2위인 위·폐암보다 더 많이 발생한다. 간암 환자 중에서 간 절제수술이 가능한 확률은 고작 15% 안팎이며, 수술 후 재발될 확률은 무려 65%에 이른다. ●B형·C형 간염 바이러스 세계최초 분리 1990년 이후 세계 보건기구 통계에 의하면 간암 수술을 받은 환자 중 85%가 B형 또는 C형 간염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경우 1960∼1970년대 전체 국민 10%가 간염 바이러스 감염자일 정도로 ‘간염 후진국’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수직 감염자’였다. 그래서 한때 유전병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간염 백신이 보급되면서 감염자 수가 서서히 줄기 시작했다. 신생아에게 간염 백신이 기본 접종으로 여겨졌다. 결과 현재에는 전체 20세 이하의 남녀 중 간염 바이러스 감염자는 0.5∼2%로 뚝 떨어졌다. 이처럼 백신 발견과 보급은 우리나라 국민건강에 획기적인 공헌을 했다. 여기에서 되짚어볼 대목이 있다.1971년 국내의 한 학자가 B형 간염바이러스를 세계 최초로 혈청에서 분리하고, 그 후 급만성 간염과 간경변증 및 원발성 간암의 퇴치에 가장 효과적인 백신을 개발하는 데 성공했다.‘헤파박스’가 대표적이다. 이로 인해 ‘간염 후진국’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됐다. 뿐만 아니라 1999년에는 C형 간염바이러스를 혈청으로부터 분리하는 데 처음으로 성공해 세계 학계가 주목했다. 김정룡(72) 전 서울대의대 교수가 바로 주인공이다. 그는 지금까지 무려 530여편의 논문을 국내외 권위있는 의학잡지에 발표하고 현역 교수시절 50여명의 의학석사와 40여명의 의학박사를 배출해내 ‘간의학분야의 대부’로 꼽는다. 아울러 국민보건에 크게 이바지한 공로로 ‘대한민국과학상’‘국민훈장 모란장’ 등을 수상했다. 지금은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얼핏 일흔 넘은 나이로 쉴 법도 한데 그렇지 않다.‘한국간연구재단’ 이사장을 맡아 후학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면서 여전히 일반 환자까지 돌보고 있다. 말 그대로 연구와 봉사의 삶을 평생의 ‘업’으로 살고 있는 것.. 지난주 서울 종로구 연건동에 위치한 재단 이사장실(白友軒)에서 김 박사와 마주앉았다. 먼저 근황을 물었더니 “보다시피 이 연구소에 나와 젊은 후학들에게 잔소리 좀 하고, 또 일산백병원에서 일주일에 이틀은 예약된 환자들을 봐주고 있다.”고 했다. 환자는 하루에 대개 100명 정도 진찰하는데 진료예약은 무리하지 않게 3개월 단위로 끊고 있다고 했다. 김 박사는 1970년에서 1999년까지 한창 연구 중일 때도 1년 이상 예약 치료환자 1 만 5390명을 진료했으며 이후 2001년 8월까지 1년 동안 4000여명의 외래 예약환자수를 갖고 있을 정도였다. 그것도 대개 ‘사형선고’를 받은 환자들을 상대로 했다. 때문에 눈이나 얼굴피부만 봐도 간상태가 어느 정도인지 금방 파악될 만큼 득도의 경지에 이르렀다. 불쑥 호기심이 발동했다. 열심히 사진 촬영 중인 사진기자와 함께 간의 상태가 어떠냐고 연달아 물었다.“벌써 (얼굴을)봤어. 아직 괜찮아.”하며 껄껄 웃었다. 눈 흰자위에 약간 황달기가 있거나 거무튀튀한 간성얼굴이 보이면 간경변으로 의심한다는 것.. 술과 간암의 관계는 어떨까.“간암은 주로 B형 간염바이러스에 의해 진전되므로 술과 직접적인 관계는 거의 없다.”고 전제한 뒤,“개인차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양주 반병을 10년 동안 매일 마셨다면 간경변으로 갈 확률이 높아진다.”고 설명했다. 또 “흔히 애주가들은 건강진단 때마다 ‘알코올성 지방간’ 얘기를 많이 듣게 된다.”면서 이럴 경우 약물복용에 주의하고 또 뚱뚱한 사람은 체중조절을 해줘야 한다고 주문했다. 일정기간 간을 쉬게 하면 알코올성 지방간은 거의 없어진다는 것. 특히 간에 좋다는 약이든, 숙취에 좋다는 약이든 되도록 먹지 않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때문에 술을 좋아하는 부모나 동료 선후배들을 생각한답시고 약을 선물하게 되는데 이는 절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라고 했다. ●술과 간암 직접적 관계 없다 그렇다면 ‘최고의 간박사’는 어떤 음주습관을 가지고 있을까.“주말과 휴일에 술 마실 일이 많아 특별한 일이 아닌 경우 월·화·수요일에는 외부 약속을 안 한다.”고 했다. 최소 일주일에 3일은 간을 쉬게 하는 셈이다. 주량은 위스키 반병 정도라고 귀띔했다. 그는 이어 “술은 원래 원숭이가 발견했으나 인간이 이를 훔쳐먹은 데서 시작됐다.”면서 “따지고 보면 술처럼 좋은 약도 없다. 그래서 인류 역사상 망하지 않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반가운 사람끼리 만나 즐겁게 웃으며 마시는 술은 결코 독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나이보다 건강해보인다고 하자 “일을 하는 게 가장 건강을 지켜주는 것”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김 박사는 함경남도 삼수에서 태어났다. 인근의 갑산과 함께 ‘삼수갑산’으로 알려진 곳이다. 어머니가 태몽으로 ‘청룡’을 꾸어 이름을 정룡(丁龍)으로 지었다. 그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화상을 입어 사흘 동안 사경을 헤매는 고비를 맞기도 했다. 정룡의 위로 5남매를 두었으나 모두 병으로 일찍 죽은 터여서 당시 부모의 걱정은 이만저만 아니었다. 또 정룡이 여섯살 때 두 동생이 생겼으나 바로 아래 동생은 네살 때 병이 생겨 약이 없어 죽었고, 또 다른 동생은 홍역을 앓다가 죽었다. 이때까지 여덟 형제가 있었으나 정룡 혼자만 남겨두고 다들 일찍 세상을 떠났다. 정룡은 초등학교 5학년 때 8·15광복을 맞았고,3년 후인 1948년 가족들과 함께 남한으로 내려와 큰고모부가 있던 목포에서 살게 됐다. 목포고를 2회로 졸업한 그는 동생의 죽음과 슬퍼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지울 수가 없어 의사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1959년 3월 서울대 의대를 차석으로 졸업하면서 평소의 꿈이었던 의사의 길을 걷게 됐다. 의사였던 한정애 여사와 결혼, 슬하에 2남1녀를 두었으며 두 아들과 사위가 현재 의사로 활동 중이다. 장인이 1970년 서울대총장을 지낸 고 한심석 의학박사다. 국민 10명 중 1명이 B형간염 바이러스 보유자라는 사실에 간연구를 시작한 그. 후배들에게 평소 “인술(仁術)을 지향하는 의사는 진료, 연구, 교육을 삼위일체로 여기고, 생명존중의 겸허한 자세가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힘이 닿을 때까지 환자를 보고, 자리에 앉아 있을 때까지 연구에 매달리는 일”이라고 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jya@seoul.co.kr ●간질환 이겨내는 생활 십계명 (1) 적어도 1년에 한 번 정도는 정기검사를 받아라. (2) 간을 좋게 하는 특효약이나 음식은 별로 없다. (3) 인내심을 갖고 병 관리에 최선을 다하라. (4) 늘 손을 깨끗이 씻고, 주변 환경을 청결하게 하라. (5) 반드시 간염 예방백신을 맞아라. (6) 술은 마셔도 좋으나 반드시 휴간일을 둬라. (7) 흡연이 직접적인 원인은 아니나 지나친 흡연은 간에 해롭다. (8) 양치질을 안 해도, 기름진 음식 냄새만 맡아도 구역질이 날 때, 과로하지 않았는데 피곤하거나 이유 없이 소화가 안될 때, 소변이 붉게 나올 때는 반드시 검진을 받아라. (9) 피로는 금물. 피곤을 느끼면 휴식을 취하라. 10 의사의 말을 절대적으로 믿고 따라야 한다. ■ 그가 걸어온 길 ▲1935년 함남 삼수 출생. ▲53년 목포고 졸업. ▲59년 서울대 의대 졸업. ▲66년 동대학 대학원 의학박사. ▲67∼70년 하버드대 보스턴시립병원 내과연구원. ▲77∼78년 런던대 왕립병원, 하버드대 메사추세츠병원 내과연수. ▲78∼90년 서울대병원 소화기내과 분과장, 내과과장. ▲85∼2000년 서울의대 간연구소 소장. ▲85년∼현재 한국간연구재단 이사장. ▲87년 한국간연구회 회장. ▲88∼92년 아시아·태평양소화기병학회 회장. ▲2000년∼현재 서울의대간연구소 특별연구원. # 상훈 대한의학협회 학술상(73년), 대한민국 과학상(83년), 동아일보 제정 올해의 인물상(83년), 국민훈장 모란장(84년), 호암상(95년), 관악대상(01년) 등. # 주요 저서 간염은 치료된다,B형간염 백신에 대한 연구, 간박사가 들려주는 간병 이야기 등.
  • [현진오의 野, 야생화다!] ‘들국화’는 꽃일까

    [현진오의 野, 야생화다!] ‘들국화’는 꽃일까

    가을을 대표하는 꽃을 꼽아 보라면 코스모스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전국 어디에서나 길가에 흔하고 꽃도 아름답기 때문에 그렇게 여기는 모양이다. 하지만 코스모스는 멕시코 원산의 한해살이 원예식물로 외국에서 들여와 심는 식물이므로 한반도의 가을꽃을 대표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다. 들국화를 대표적인 가을꽃으로 꼽는 이들도 있다. 하지만 식물도감을 아무리 뒤져보아도 들국화라는 이름을 가진 식물은 찾을 수 없다.‘들판에 피는 국화’라는 뜻으로 보통 그렇게들 부르는 것인데, 국화와 닮은 토종꽃들을 모두 일컬어 들국화라고 부른다. 따라서 들국화는 어떤 한 식물을 일컫는 것이 아니고, 여러 종류의 국화 종류들, 이를테면 산국, 감국, 산구절초, 개쑥부쟁이 같은 것들을 모두 이르는 보통명사인 셈이다. 들국화라고 부르는 식물은 모두 국화과(科)에 속하는데, 국화과의 여러 속(屬) 가운데서도 대개는 구절초속이나 쑥부쟁이속에 속하는 것들이다. 구절초속 들국화로는 산국, 감국, 산구절초, 울릉국화, 한라구절초, 마키노국화, 키큰산국 등이 있다. 쑥부쟁이속에는 쑥부쟁이를 비롯하여 개쑥부쟁이, 갯쑥부쟁이, 눈개쑥부쟁이, 개미취, 좀개미취, 왕갯쑥부쟁이, 해국 등이 포함된다. 국화는 화분이나 꽃밭에 심어 기르는 원예식물이다. 꽃이 아름답고, 향기가 좋으므로 아주 오래전부터 중국에서 들여다 심어 왔다. 하지만 국화는 들국화와는 달리 자연에서 저절로 자라지는 않는다. 오랜 세월에 걸쳐 개량되어 현재의 수많은 국화 종류가 탄생한 것인데, 원종은 구절초속 식물이다. 따라서, 엄밀하게 말하자면 들국화의 범주에는 쑥부쟁이속 식물들은 제외하고 구절초속 식물들만 넣어야 한다. 구절초속 식물의 꽃과 잎에서는 국화와 같은 향기가 나지만 쑥부쟁이속에서는 국화향이 나지 않는다. 국화에 대해 잘못 알고 있는 것 가운데 하나는 줄기 끝에 달린 꽃들의 모임을 꽃 한 송이로 생각하는 것이다.‘한 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소쩍새는 봄부터 그렇게 울었나 보다.’고 노래하지만 한 송이처럼 보이는 국화꽃은 한 송이가 아니라 꽃잎으로 착각하기 쉬운 100여개의 작은 꽃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꽃들의 무리인 것이다. 이름에 ‘국화’가 들어 있는 식물도 많지만 이들은 들국화 종류가 아니다. 쑥을 닮은 잎을 가진 쑥국화, 백두산에 자라는 구름국화, 깊은 산에서 드물게 발견되는 국화방망이 등은 들국화 종류가 아니다. 이밖에도 수레국화, 국화마, 국화바람꽃, 국화수리취, 국화으아리, 국화쥐손이 등에도 ‘국화’라는 이름이 붙었지만 들국화와는 관계가 없다. 들국화를 한국의 대표적인 가을꽃으로 꼽는 이유는 어디서나 흔하게 볼 수 있다는 점도 한몫한다. 들판뿐만 아니라 높은 산꼭대기에도 살며, 강변과 바닷가에도 산다. 백두산 꼭대기의 바위구절초, 한라산 고지대의 눈개쑥부쟁이와 한라구절초, 독도 바닷가의 해국, 동강 들판의 마키노국화, 울릉도 산지의 울릉국화 등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꽃이 들국화다. 들국화는 무리를 지어 자라면서 크고 아름다운 꽃을 피워 사람들 눈에 잘 띄므로 우리들 마음속에 대표적인 가을꽃으로 자리 잡아 왔다. 들국화는 흔한 가을꽃이지만 그 가운데는 멸종위기에 처한 것들도 있다. 울릉국화, 한라구절초, 단양쑥부쟁이, 좀개미취, 마키노국화, 키큰산국 등은 자생지가 몇 곳 안 되고, 자생지의 훼손압력도 높아 사라질 위험이 큰 종류들이다. 남한강 모래흙에 매우 드물게 자라는 특산식물인 단양쑥부쟁이는 환경부가 야생동식물보호법에 의해 멸종위기 야생식물로 지정해 보호하고 있다. 동북아식물연구소장
  • 가을 소풍가자 - 소풍 가기 좋은 곳

    가을 소풍가자 - 소풍 가기 좋은 곳

    제천시 청풍문화재단지 - 무량한 가을바람을 가슴에 안는다 가을바람이 소슬하다. 충북 제천의 청풍문화재단지에서 맞는 그 바람은 말 그대로 맑고 푸른 기운이 가득하다. 옛 청풍부의 관문인 팔영루에 들어서면 한량없는 그 바람과 가을볕을 만난다. 청풍은 남한강 상류에 위치하여 수운이 크게 발달한 곳으로 문물이 번성했고, 역사 문화의 뿌리가 깊은 고장이었다. 하지만 충주댐 건설로 화려했던 옛 명성만 전설처럼 남긴 채 물에 잠기게 되자 1983년부터 3년여에 걸쳐 현재의 위치에 청풍의 오랜 문화유적들을 이전하여 복원했다. 충주호를 굽어보는 산마루에 자리 잡은 청풍문화재단지는 이름만큼이나 시정(詩情) 넘치는 풍경을 간직하고 있다. 이제는 물 속에 잠겨버린 지난날의 영화를 그리워하듯 충주호를 보고 선 한벽루(보물 528호)의 고고함, 단아하고 귀족적인 금병헌의 멋스런 분위기며 무리지어 선 고가들의 정겨운 풍경은 수백 년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한벽루는 고려 충숙왕 4년(1317)에 청풍현이 군으로 승격되자 이를 기념해 관아에서 세운 독특한 양식의 부속 목조 건물로 연회 장소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루에 올라갈 때 계단 역할을 하는 ‘익랑’은 현존하는 건축물 중에서는 전무한 양식으로 보고 있다. 현판 글씨는 우암 송시열의 친필이며, 조선조 영의정을 지낸 하륜의 기문도 유명하나 1972년 수해 때 유실된 것을 2001년 복원했다. 누각에 오르면 넓은 청풍호반이 한 눈에 들어오며 시원한 바람이 대책 없이 가슴으로 달려든다. 이곳 문화재단지에는 보물로 지정된 한벽루와 석조여래입상 외에도 금남루, 팔영루, 응청각, 청풍향교, 고가, 생활유물들을 비롯해 유물전시관에는 300여 점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어 옛 숨결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역사 문화의 산 교육장으로도 훌륭하지만 또한 단지 내에는 자연학습장을 조성하여 여러 종류의 야생화들도 볼 수 있다. 관광지 둘러보듯 후딱 둘러보고 가기에는 아까울 만큼 이곳저곳 오래도록 발길을 잡는 곳이 많다. 드라마 촬영장도 문화재단지와 바로 이웃하고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구경거리다. SBS 기획 드라마 <대망> <장길산> 등을 찍은 촬영장의 세트가 더없이 실감난다. 선착장으로 내려가면 청풍호 유람선을 타고 내륙의 바다로 불리는 충주호를 누벼보는 색다른 즐거움이 기다린다. 설치당시 동양 최고(현재 2위), 세계 2위 높이(162m)로 그 웅장함을 과시했던 수경분수는 제천을 대표하는 관광시설이다. * 가는 요령 중부내륙고속도로 감곡 IC에서 빠져 제천에서 82번 지방도로를 타고 달리면 청풍문화재단지에 이른다. 또는 영동고속도로 - 중앙고속도로 남제천 IC에서 빠져 금성면을 지나 지방도를 타고 달리면 청풍문화재단지이다. * 맛집 <태조 왕건> 촬영장에서 597번 도로를 따라 가면 금수산 무암사 계곡이 나온다. 무암사 계곡 입구에 남근석 표지판을 따라 계곡을 올라가면 금수산송어장횟집(043-652-8833)이 있다. 제천의 향토음식으로 이름날 만큼 소문난 송어회를 맛볼 수 있다. 특히 여러 종류의 야채를 썰어 만든 비빔회가 인기 메뉴. 간단하게 먹고 싶다면 청풍 시내로 가면 붕어찜, 닭도리탕, 민물매운탕, 산채비빔밥 등을 전문으로 하는 음식점들이 있다. 파주시 벽초지수목원 - 아해야 배 띄워라, 저곳에 소풍 가자 연인들의 근사한 데이트 장소로, 가족들의 멋진 소풍 장소로 더없이 잘 어울리는 곳이 있다.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창만리에 있는 벽초지문화수목원. 물(호수)과 숲과 꽃들이 어우러진 드넓은 수목원은 마치 영화 속처럼 아름답고 이국적이다. 지난 2005년 9월 문을 연 벽초지문화수목원은 3만여 평의 부지에 100여종의 교목과 200여종의 관목 700여종의 각종 식물이 아름다운 연못을 중심으로 펼쳐진다. 벽초지라는 이름 또한 ‘푸른(碧) 풀(草)과 연못(池)이 있는 곳’이라는 뜻. 벼루용 돌인 흑오석으로 지어진 입구를 들어서면 크고 잘생긴 소나무가 멋진 조경을 이루며 입장객을 반긴다. 전국 각지에서 수집한 150여 그루의 소나무와 화사한 꽃들이 장관인 테마정원을 시작으로, 양쪽으로 연결된 길을 따라가면 본격적인 모습이 펼쳐진다. 수십 년 된 아름드리나무가 하늘을 가린 주목터널길, 단풍터널길, 버들나무길이 은밀하게 둘러싸고 있는 한가운데 호수 벽초지가 자리하고 있다. 호수에는 수양버들 고목들 사이에 날아갈 듯 자리 잡은 정자 ‘파련정’과 파련정으로 이어지는 통나무 다리 무심교가 가로질러 놓였다. 호수 한가운데까지 연결된 나무 데크는 연꽃 군락지 연화원으로 가는 수련길이다. 여름 한철 연꽃을 피웠던 수련은 이제 그 아름다움을 접으며 연밥을 매달고 있다. 물에서 자라는 부채붓꽃·미나리아재비·동의나물 등이 어우러진 습지원에는 나룻배 한 척이 기우뚱 묶여 있다. 이 모든 것이 한데 어우러져 빚어내는 이국적이면서도 동양적인 모습은 벽초지 수목원의 하이라이트다. 숲속 별장을 지나 잘 다듬어진 돌길을 따라가면 키 작은 음지식물과 소나무·느티나무 등이 싱그럽게 펼쳐진다. 수천 평은 됨직한 잔디광장은 야생화로 둘러싸였고, 연인들에게 사랑받는 주목터널길은 사시사철 그늘을 드리고 있다. 제2주차장 쪽에 자리한 실내온실인 그린하우스에는 80여 종의 허브가 자란다. 한가운데 분수를 중심으로 허브와 관상식물. 석류·밀감 등 유실수들이 에워싸고 있다. 입구 쪽에서는 이곳에서 재배한 허브 화분을 시중보다 싸게 팔고 있다. 수목원 안 유일한 건물인 2층짜리 건물은 지하에 갤러리, 층에는 카페와 기프트 숍, 2층에는 허브를 이용해 다양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이곳에서는 천연 비누 만들기, 허브 토분 만들기, 허브 화장품 만들기 등 체험학습 프로그램도 다양해 아이들과 함께 즐기기에 좋다. * 입장료 대인 6000원, 소인 4000원. (오전9시∼해질녘). * www.bcj.co.kr / 031-957-2004 * 맛집 수목원 내 레스토랑 ‘나무’에서는 각종 허브 요리를 맛볼 수 있다. 특수야채·새싹·식용꽃 등 7∼8 종의 꽃을 밥 위에 얹고 로즈마리·타임·바질 등 허브와 10여 가지 재료로 만든 비빔장을 곁들여낸다. 새송이버섯과 마늘이 주를 이룬 허브스파게티, 칠리소스가 들어간 이탈리안풍의 허브누룽지탕, 허브돈가스 등도 맛볼 수 있다. * 가는 요령 ‘벽초지수목원’을 표시한 도로 이정표가 없어 자칫 길을 헤맬 수도 있다. 자유로를 이용하거나 구파발삼거리에서 통일로를 탄다. 또 의정부쪽에서도 쉽게 갈 수 있다. 자유로를 이용할 경우 문발 인터체인지에서 빠져 파주-광탄 삼거리에서 좌회전한 다음 방축 삼거리에서 우회전해 도마산초등학교를 찾으면 바로 앞이 수목원이다. 또 통일로를 이용해 벽제교차로에서 우회전한 뒤 다시 고양동 삼거리에서 좌회전해서 보광사 방향으로 가면 된다. 고양동 삼거리에서 약 12㎞. 글·사진/ 김혜숙 <여행 칼럼니스트>     월간 <삶과꿈> 2007.09 구독문의:02-319-3791
  •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과거 정보기관 통제사찰 실태

    [국정원 과거사 진실규명] 과거 정보기관 통제사찰 실태

    국가정보원 진실규명위원회가 24일 펴낸 보고서에는 과거 중앙정보부와 후신인 국가안전기획부가 정치·사법·언론 등 각 분야를 광범위하게 사찰, 통제한 흔적이 담겨 있다. ●여야 막론 ‘무차별´ 정치사찰 박정희 정권 때 야당은 물론이고 여당 의원까지 정치 사찰이 이뤄졌다. 특히 초대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를 지낸 ‘김종필(JP) 사찰’이 광범위하다. 3선 개헌 논의 때 JP가 공화당 박종태·김용태 의원을 만나 개헌 반대 의사를 표명하고 개헌이 본격 추진될 경우 자신은 표면에 나서 범국민적인 개헌반대 투쟁을 벌이겠다고 말한 내용이 기록된 문서도 발견됐다.▲전 공화당의장 김종필 동향첩보 통보 ▲김종필 동향 첩보 입수 ▲국회의원 김용태 동향첩보 통보 ▲김용태에 대한 첩보 ▲개헌 논의를 포함한 정계동향이다. ●원하는 판결위해 ‘판사 뒷조사´ 각종 시국사건 때 정보기관은 담당 재판부를 직·간접적으로 압박해 원하는 판결을 유도했다. 1982년 ‘송씨 일가 사건’은 검찰 기소 때부터 대법원 확정판결 때까지 안기부가 모두 개입, 조정했다. “북한 노동당 연락부 부부장 송창섭씨가 남파, 친인척을 간첩으로 만들어 25년간 암약했다.”는 내용의 이 사건은 안기부가 피의자를 불법으로 장기 구금하고 고문으로 진술을 받아낸 뒤 검찰에서도 그대로 말하도록 강요했다. 별다른 물증이 없고, 검찰 조서의 임의성 문제가 제기돼 대법원이 두 차례나 무죄 취지로 파기 환송하자 안기부는 검사와 함께 판사를 찾아가 설득했다. 이 밖에도 국가배상법 위헌 판결 등 정권의 의도와 다른 판결을 내린 판사를 뒷조사했고, 검찰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1983년 대법원 비서실장 뇌물사건을 재조사하도록 해 부장판사 2명과 검사장·지청장을 사임하도록 유도했다. ●기자연행·광고통제로 언론 탄압 정권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는 글을 실은 매체에 압력을 가한 것도 정보기관의 몫이었다. 김지하 시인이 1970년 ‘사상계’ 5월호에 정부 비판적인 성격이 강한 시 ‘오적’을 게재하고, 신민당이 당 기관지인 ‘민주전선’ 6월1일자로 이 시를 다시 싣자 중정이 반공법 위반혐의로 그를 구속하고 사상계의 폐간을 추진했다. 정권에 부담이 되는 기사를 작성한 기자들은 정보기관에 연행돼 조사받은 것도 국정원 보유자료를 통해 공식적으로 첫 확인됐다. 광고를 통제해 언론을 탄압하기도 했다.1973년 주요 광고주 대표를 불러 조선일보에 광고를 실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았다는 점이 국정원 자료로 확인됐고,1974년 동아일보 광고탄압 사건도 중정이 주도했음이 유추된다고 진실위는 밝혔다. ●통제 가능한 노조간부 특별 관리 1961년 대한노총을 해산하고 한국노총을 조직한 장본인이 중정이었다. 중정은 직접 통제가 가능한 구성원으로 한국노총 간부를 육성하고 관리했다. 노총 선거에 직접적인 영향력도 행사했다고 진실위는 판단했다. 중정은 또 김말룡씨 등 비판적 성향의 인물이 간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강압, 회유를 반복하며 공작을 벌였다. “용공지하서클을 결성, 반국가단체를 이롭게 했다.”며 크리스천아카데미 사회교육원 간사 등을 연행한 1979년 크리스천아카데미 사건도 중정이 유신체제를 위협하는 반체제 활동으로 간주, 사건의 실체가 과장됐다고 진실위는 강조했다. ●대학별 담당관 운영해 학원 통제 학생운동 사찰은 물론, 대학정책 입안과 학사행정 업무까지 중정과 안기부가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학원사태로 제적된 학생의 복교, 타 대학 입학을 막고, 소요가 극렬한 학과는 정원을 감축했으며 비판 성향의 교수는 승진을 불허했다. 주요 학원문제가 생길 때마다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개최해 교련교육, 교수 재임용제, 졸업정원제 등 범정부 대책을 마련한 것도 정보기관이 주도했다. 대학별 담당관을 지정, 운영하는 등 광범위한 정보망으로 학원을 통제한 점도 이번 조사로 밝혀졌다. ●간첩사건, 실체보다 확대·과장 우선 조사한 7대 사건에 동백림 사건, 인혁당 재건위 사건, 남한조선노동당 사건 등 3건이나 포함된 것만 봐도 정보기관이 간첩사건에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 외에도 월북한 친인척과 접촉, 간첩교육을 받고 국가기밀을 제공했다며 간첩으로 몬 81년 ‘박동운 사건’이나 납북귀환 어부를 간첩으로 몰아붙인 82년 ‘정영 사건’, 조총련을 찬양하고 국가기밀을 탐지 수집했다는 82년 ‘차풍길 사건’ 등 적잖은 간첩사건들이 실체보다 확대, 과장됐다는 조사 결과를 내놨다. 박지연기자 anne02@seoul.co.kr
  • 4륜 오토바이 ATV 인기

    4륜 오토바이 ATV 인기

    길이 아니면 가지 말라고? 4륜 오토바이 ATV(all-terrain vehicle) 마니아들에겐 천만의 말씀이다. 산과 강, 계곡 등 길이 아니어도 바퀴가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든 거뜬히 헤쳐 나간다. 지프나 일반 산악오토바이가 가지 못하는 험한 곳도 거침없이 오르내린다. 오프로드(off-road)의 새로운 강자,ATV의 인기가 날로 높아지는 이유다. 자연과 맞선다는 짜릿함에 점점 많은 마니아들이 빠져들고 있는 것. 경기도 양평의 ‘X-Life 유명산 ATV체험장’을 찾았다. 영화와 드라마, 뮤직 비디오 등의 단골 촬영지로 많이 알려진 곳이다. 최근 억새꽃이 만개하면서 여느 억새 명산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다. 억새 무성한 길을 따라 원동기의 ‘마력(魔力)’에 푹 빠져 보자. ●오프로드의 새 강자 ‘어떤 곳이든 가리지 않고 달릴 수 있는 전지형(全地形)만능차’ ATV는 1975년 미국에서 농업용으로 개발됐다. 탱크의 조작방법과 비슷한 초창기 모델이 운전하기 어려워 외면받다가 일본의 한 오토바이 제조업체에서 현재와 같은 보급형 모델을 개발하면서 광범위한 용도로 쓰이고 있다.‘탈것’이라기보단 험로를 주파하기 위한 ‘장비’라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는 원동기다. 오프로드를 헤치며 나가는 재미가 쏠쏠해 모험을 즐기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익스트림 레포츠로 주목받고 있다. 속도가 느려 도로에서 탈 수는 없지만, 산길 등에서는 속도감과 엔진의 진동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다. 보기보다 운동량도 많다.20분만 타고 나면 등줄기에 땀이 맺힐 정도. 10여년 전 국내에 첫선을 보인 후 3∼4년 전부터 동호인 숫자가 점차 늘고 있다. 주로 체험장에서 대여하는 ATV를 이용하지만 개인적으로 구입하는 동호인들도 많다. ●“전쟁에 나가는 것 같아요!” 유명산 설매재 정상에 있는 X-Life ATV 체험장에서 한 광고회사 동호회원 10여명과 함께 ATV 체험에 나섰다. 참가자들이 일제히 ATV의 시동을 걸자 우르릉∼하며 웅장한 기계음이 산자락을 타고 퍼져 나갔다. 장난감처럼 보였던 ATV에서 의외로 커다란 굉음이 터져 나오자 회원들 얼굴에 ‘오호, 제법인걸’하는 듯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마치 전쟁터에 나가는 것 같아요!” 장갑차 부대에서 군 생활을 했다는 두진욱(28)씨는 아주 ‘제대로’ 신났다. 연습삼아 체험장 앞 공터를 세 바퀴쯤 돈 회원들이 모래 먼지를 날리며 유명산을 향해 박차고 나갔다. 20분 남짓 구불구불한 나무터널이 이어졌다. 초보자 코스답게 그리 험하지는 않은 편. 간혹 돌무더기 등을 만나기도 했지만,ATV는 의외로 부드럽고 안정되게 헤쳐나갔다. 나무터널을 지나면 억새가 만발한 평원길. 햇살을 받아 은빛으로 빛나는 억새 너머로 유장하게 흘러가는 북한강의 자태가 퍽 인상적이다. 한 가수의 뮤직비디오 촬영 현장을 뒤로하고 ‘Z’자 모양으로 꺾인 급경사와 마주했다. 엄지손가락을 이용해 가속기 레버를 당기는 간단한 동작만으로 ATV는 힘차게 언덕길을 솟구쳐 올랐다. 짜릿하고 통쾌하다. 이것이 원동기의 마력이 아닐지. 험한 급경사를 오르고 나면 영화 ‘왕의 남자’촬영지. 여기가 초보자 코스의 반환점이다.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중첩된 산봉우리들을 배경 삼아 너른 억새밭에 고고하게 서 있던 소나무를 기억할 게다. 영화 초반 두 주인공이 장님 흉내를 내며 얼싸안던 그 소나무다. 영화에서야 멀리 도시 풍경까지 담을 수 없었겠지만, 실제로 보면 양평 등 도시 한가운데를 관통하며 흘러가는 남한강 물줄기와 주변 산자락들이 감동적이라 할 만큼 멋진 풍경을 연출한다. 자, 이쯤에서 환호일발 장전! ●모험심만 있다면 OK ATV를 즐기는 데 별도의 자격증은 필요없다. 조작방법이 간단해 자전거를 탈 줄 아는 사람이라면 금방 익숙해진다. 뭔가 특별한 놀이를 즐기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충분하다. 단, 안전만은 예외. 가이드의 주의사항을 ‘금과옥조’처럼 받들고 따라야 한다. X-Life의 박성진 팀장(36)은 “10분 정도 주행하면 자신감이 생겨 뒷사람을 쳐다보거나, 여성 참가자가 탄 ATV를 추월하려 들고, 심지어 범퍼카처럼 들이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위험한 행동이죠. 돌부리 등을 만나 핸들이 꺾여도 항상 ‘一´자를 유지하고, 언덕길을 오를 때는 상체를 앞으로, 내려갈 때는 엉덩이를 뒤로 빼는 등 기본적인 자세를 잘 지켜야 안전하게 즐길 수 있습니다.”라고 주문했다. 글 사진 양평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양평 유명산 ATV 체험장 # 가는 길 팔당대교→양평방향→아세아 연합 신학 대학교→아신역 좌회전→설매재 자연휴양림→유명산 ATV 체험장.www.x-life.co.kr,011)336-6571,011)796-9901. # 요금 A코스(1시간10분) 3만∼4만원,B코스(30∼40분) 2만∼3만원,C코스(A+B코스,1시간30분) 4만∼5만원,D코스(상급자용. 1시간50분) 6만∼7만원, 영화 촬영지를 도는 왕남코스(1시간40분) 5만∼6만원. # 준비물 장갑이나 헬멧 등 기본적인 안전장구는 모두 체험장에서 제공한다. 흙탕물이 튈 수 있어 여벌 옷을 가져가면 좋다. 맑은 날엔 먼지가 많아 마스크나 고글 등을 착용하면 도움이 된다.
  • [씨줄날줄] 브루스 커밍스/이목희 논설위원

    브루스 커밍스 미국 시카고대 교수가 내놓은 저서 ‘한국전쟁의 기원’은 1981년 당시 놀라움 그 자체였다.38선 획정, 남북분단 고착화, 그리고 한국전쟁 발발 책임이 미국에 있다고 그는 주장했다. 이른바 수정주의적 관점이었다. 내용의 옳고그름을 떠나 미국 학자가 그런 주장을 편 것이 신선했고, 충격이었다. 앞서 커밍스는 한국에서 평화봉사단원으로 활동했다. 우리말을 자유롭게 해독하고, 부인이 한국인이다. 평양을 방문하는 등 북한 이해도 역시 높았다. 무엇보다 1975년 미 행정부가 공개한 한국전쟁 사료들을 정밀분석했다. 한반도 문제를 놓고 소련과 중국, 북한의 책임만 강조하던 전통주의적 시각에 일침을 가할 자격을 갖췄다고 본다. 소련 붕괴 이후 커밍스 이론은 위기를 맞는다. 러시아측에서 흘러나온 사료들은 한국전쟁 책임자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었다. 김영호 성신여대·박명림 연세대 교수 등 한국 학자들은 커밍스 이론을 극복하면서 한국전쟁의 기원을 객관적으로 분석했다. 그로 인해 한국에서 커밍스의 인기가 식었는가. 천만의 말씀이다. 대북 햇볕정책과 한국사회 일각의 반미 감정…. 커밍스는 여전히 진보진영에서 환영받는 인물이다. 커밍스는 30차례 이상 한국을 오가며 강연, 기고 등으로 이름을 날리고 있다. 며칠전 서울에서 열린 국제학술회의에 참석, 남북 정상회담 결과를 높게 평가했다. 미국 노틸러스연구소 기고에서는 ‘(핵협상 과정에서) 김정일이 부시를 이겼다.’고 밝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커밍스가 진정한 지한파(知韓派)가 되려면 더 솔직해져야 한다. 커밍스는 “나는 한국의 북침설을 말한 적이 없는데 독재자들이 말을 만들어서 좌파로 몰았다.”고 항변하고 있다. 그런 식으로 얼버무리지 말고, 과거 자신의 주장 중 역사적 증거에 맞지 않는 부분은 과감히 시정해야 한다. 또 권위주의 시절 남한의 인권을 비난한 만큼 북한의 인권도 비판해야 형평에 맞는다. 객관화 노력이 없으면 그는 워싱턴 정가나 미국 학계에서 계속 돌출부로 남을 뿐이다. 그처럼 남북한을 동시에 아는 학자를 발견하기 힘든 현실에서 커밍스의 분발이 있기를 바란다. 이목희 논설위원 mhlee@seoul.co.kr
  • ‘개성 먼저’ vs ‘해주 함께’

    이달 초 남북 정상이 북한 ‘해주 경제특구’ 조성에 합의한 가운데 개발착수 시점을 놓고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15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개성공단 사업이 안정화된 뒤에 비로소 해주 개발에 나서야 한다는 주장과 해주를 서둘러 개발해야 개성공단을 비롯한 대북경협 사업이 높은 시너지 효과를 낼 것이라는 의견이 맞서고 있다. 개성공단에 입주해 있는 화장품 용기 제조업체 태성하타의 배해동 대표는 15일 “이제 막 걸음마를 뗀 개성공단이 좀더 활성화된 이후, 즉 개성공단 2단계 개발이 끝나는 2∼3년 뒤에 해주를 개발해도 늦지 않다.”면서 “가뜩이나 개성공단에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해주 개발까지 겹치면 인력난이 더욱 심각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런 의견을 갖고 있는 개성공단 입주업체 사이에서는 ‘개성공단 우선 개발’을 촉구하는 건의서를 정부에 제출하자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반면 김기문(중소기업중앙회장) 개성공단 입주기업 대표는 “해주항 등 바다가 있는 곳에 공단이 지어지면 물동량이 크게 늘고 다루는 품목도 훨씬 다양해질 것”이라면서 “해주, 남포, 개성 등을 같이 개발해야 북한에 대한 남한의 경제적 영향력이 커져 개성공단도 더욱 잘될 것”이라고 말했다. 2000명의 북한 근로자를 둔 문창섭 삼덕스타필드(신발 생산업체) 대표는 “국제적인 경쟁력을 갖추려면 개성과 해주를 동시에 개발해 전략적 생산·물류기지로 키워야 한다.”면서 “동시개발만이 두 지역간 100%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길”이라고 했다. 강주리기자 jurik@seoul.co.kr
  • 필화(弼花)사건 뒤엔 무엇이 있었나

    필화(弼花)사건 뒤엔 무엇이 있었나

    「삿뽀로·프레·올림픽」한국대표선수 김영희(金暎熙)양과 북괴의 한필화(韓弼花)선수가 같은 핏줄이라는「뉴스」는 근래에 없었던「쇼킹」한 소식이었다. 이「뉴스」가 터지자 제2의 인물 한필성(韓弼聖)씨가 필화의 오빠라고 나타나 또한번 화제. 꼬리를 문 이 소식을 보도하기 위해 각 신문사가 경쟁한 취재전은 불똥튀는, 그야말로 혈전 그 뒷얘기를 엮어보면-. 선수 친 신문서 사진독점 딴 사(社)선 한여인 내외독점 이번 사건을 맨먼저 보도한 H일보가 한계화(韓桂花)여인의 집으로 취재를 간 것은 5일밤 11시 께. 다른 신문사에서는 생각도 않고있는 사이에 감쪽같이 한여인의 집을 습격(?)한 셈이다. 경쟁하는 상대가 없으니 마음놓고 독점 취재. 김영희양의「앨범」을 비롯, 보도자료가 될만한 사진을 몽땅 독점했다. 6일 아침, C일보에 이 소식이 알려지자 같은 조간지인 C일보는 단 한장의 사진, 기사자료가 될만한 것도 H일보가 독점해간 때문에 얻지못해 바로 초상집. 석간지들도 초비상이 걸렸다. 불똥이 튀는 취재전이 벌어졌다. 저마다 눈에 불을 켜고 한계화여인을 찾아 뛰는 한편 김영희양의 사진을 구하러 동분서주. 김양이 재학 중인 S여중 학적부에 붙은 사진까지 뜯겨 나가는가 하면 김양의 친구들을 찾아서 같이 찍은 사진이라도 얻어보려고 혈안이 되었다.「라디오」와 TV방송국도 함께 가진 J일보는 한여인을 본사에 데려가 다른 신문사기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H일보의 보도를 보자마자 아침 8시에 당산동 한여인 집으로 차를 몰고 가서 남편 김성회(金成會)씨와 함께 한여인을 신문사로 데리고 간것. 다른 신문사 기자들이 한발 늦게 한여인집에 들이닥쳤을때는 아이들만 아침도 굶은채 집을 지키고 있었다. 집안을 아무리 뒤져 봐야 자료가 될만한 것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J일보는 한여인 부부를 독점한채「라디오」·TV「인터뷰」등을 하면서 여유만만하게 타사를 안타깝게 했다. 타사들은 J일보 문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수 밖에. J일보가 한여인 부부를 풀어준 것은 석간2판까지 다나온 하오 3시가 훨씬 지난 시간. 그동안 J일보에서는 일본「삿뽀로」현지에서 보내온 한필화의 사진을 재빨리 현상해서 확인시켰고, 국제전화로 김양과 대화를 나누도록 했다. 혹시나 다른 신문사에 한여인 부부를 빼앗기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에서 점심대접도 밖에서 안하고「사라다」「콜라」등을 사다가 신문사 안에서 식사를 하도록 하기까지…. H일보가 가져갔던 김양의「앨범」을 돌려 준 것은 그날 밤. 다른 신문사에서 보도할수 없게 충분한 시간동안 곱게 보관했다가 돌려준 것이다. 취재전에 휘말리다보니 한여인 식구는 밥도굶어 각 신문사의 취재전 덕분에 제일 피해를 당한 사람은 한여인의 식구들. 밥도 제대로 얻어먹지 못하면서 하루 종일 시달렸고, 아이들도 들락날락하는 기자들에 질려서 종일 굶었다. 집에서 경영하고 있는「진미집」장사 역시 제대로 될리가 없었다. 6일 하룻동안 북새통을 치른 한여인은 그날 밤 기자들의 눈을 피해 동생 한석전(韓錫甸)씨집에 숨어 있었지만 어느틈에 그곳까지 냄새를 맡은 기자들이 들이닥쳐 다시 한번 신문사에 끌려가는 고통을 당해야 했다. 『어디를 어떻게 끌려다녔는지 하나도 모르겠읍니다. 얼떨결에 차를 타고 다녔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서 무슨 말을 했는지 조차 도무지 기억이 없읍니다. 이번 일이 꿈같은 일이기도 하지만 하도 여러 신문사에 왔다 갔다 해서 더욱 꿈같이 여겨집니다』부인 한여인이 일본으로 떠나고 난 다음에야 겨우 좀 정신을 차릴 수 있었다는 김씨의 말. 한편『필화는 내 누이동생이다』하고 두번째로 나타난 한필성씨(38·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129의89)의 경우, 엉뚱하게 보도전에 휘말려 꼬박 이틀밤을 보도진에게 연금(?)당하기도 했다. 6일자 조간 H일보에 한계화여사의 얘기가 나오자 이 사실을 안 필성씨가 같이 월남한 동향친구 조윤식씨(曺崙植·39·서울중구 도동2가18)를 만나『혹시 내 동생이 아니겠느냐?』고 상의. 그러는 동안 6일자 시내 각 석간지들이 이 사실을 다투어 보도하고 일본 현지서 보내온 한필화의 부인성명이 보도되었다. 필성씨 모셔간 호텔서 취재육탄전도 한필화가 밝힌 가족상황과 진남포가 고향이라는 발언에 자신을 얻은 필성씨는 다음날인 7일(일요일) 아침 11시께 친구 조씨와 함께 H일보를 찾아갔다. 그리고는 필화가 자기 동생이라는 점을 증명할 여러가지 기억들을 털어놓았다. H일보측은 한씨의 얘기를 모두 들은 뒤『현재 우리 사장이 IOC위원의 자격으로 현지에 가 있는데 자주 국제전화가 걸려오니 직접 통화하고 사실을 확인해 보자』며 한씨를 상원「호텔」(서울 종로구 익선동소재) 202호실로 모셨다. 이 때가 7일 하오2시께.「호텔」에 든 한씨옆에 기자 한 사람이 경호원처럼 꼭 붙어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소문처럼 빨리 퍼지는 것은 없어 다음날인 8일 상오 11시께『또 하나의 한필화가족이「호텔」에 연금중』이라는 소식이 각 일간지 사회부기자들에게 알려졌다. 급히 상원「호텔」로 달려간 D일보, J일보, C일보등의 취재·사진기자들은 202호실문이 안으로 잠긴 것을 알자 일제히 합세, 육탄공격을 개시. 굳게 잠긴「도어」를 부수는데 성공했다. 「도어」가 부서지면서 열리자 사진기자들은「플래시」세례를 한씨에게 퍼부었다. H일보 기자는 한씨의 두 손을 붙잡고 202호실서 끌어내「호텔」문앞에 대기하고 있던 신문사차에 태운뒤 다시 H일보로 한씨를 모셨다. 한씨가 풀려난 것은 9일 새벽 2시 30분께. 『다음날 깨어나서 H일보를 보니 제 기사는 기껏 1단으로 조그맣게 보도되었더군요. 그렇게 낼 걸 가지고 괜히 사람만 고생시키고…』하며 한씨는 지나친 보도경쟁에 시달린 이틀간을 탓했다. 한필성씨에 대한 H일보의 이러한 과잉보호는 필화에 대한 또 한사람의 연고자가 나타남으로써 애당초의 특종보도가 빛을 잃게 되는것을 염려한 것이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다. [선데이서울 71년 2월 21일호 제4권 7호 통권 제 124호]
  • [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정동영·이명박 후보 비교

    [신당 대선후보 정동영] 정동영·이명박 후보 비교

    한나라당 이명박 후보에 맞서 싸울 대통합민주신당의 ‘대항마’로 정동영 후보가 결정됐다. 범여권 후보단일화가 남아 있지만 정 후보와 이 후보간 대선 레이스가 본격화됐다는 지적이다. 가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둘의 운명은 대학 졸업 후 갈라진다. 정 후보는 졸업 직후 방송국에 입사, 언론인의 길을 걷는다. 이에 반해 이 후보는 현대건설에 입사, 경영자의 길을 택한다. 자기 자리에서 승승장구하던 두 사람은 뉴스데스크 앵커와 현대건설 사장을 마지막으로 각각 15대·14대 국회의원으로 정계에 입문하게 된다. 정 후보는 정치 입문 후 거침없는 출세가도를 걷게 된다. 열린우리당 당의장, 통일부 장관 겸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 등을 거치면서 참여정부의 ‘황태자’로 부상한다. 이 후보 또한 2002년 서울시장에 당선되면서 거물급 정치인으로 성장하는 기반을 닦게 된다. 정 후보가 자신의 정치적 자산으로 ‘개성 공단’을 강조하는 데서 드러나듯 그의 외교·안보 정책의 초점은 ‘북한 끌어안기’다. 핵심공약 중 하나인 ‘대륙평화경제론’은 남북 화해 모드를 바탕으로 경제협력을 통해 남북이 상생하자는 공약이다. 반면 이 후보의 외교·안보 중심에는 미국이 있다. 이 후보는 조건 없는 대북 퍼주기를 거부하고 한·미 안보협력체제를 강화·발전시켜 ‘힘에 바탕을 둔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다. 이 후보는 대북경제협력에 있어서도 일방적 퍼주기가 아닌 ‘경제 줄게, 평화 다오.’식의 시장경제 논리에 입각한 정책을 선호한다. 경제해법도 다르다. 정 후보는 남한의 부족한 토지, 노동력, 자원을 해결하기 위해 북한에 제2, 제3의 개성공단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이 후보는 ‘한반도 대운하’를 건설해 물류비용을 획기적으로 줄이고 부족한 일자리를 창출하겠다는 입장이다. 부동산 문제에 있어서도 정 후보는 종합부동산세 등의 ‘현행 유지’를, 반면 이 후보는 취득세와 등록세를 하나로 통합하고 세율도 낮추는 시장 중심의 방안을 제시, 첨예한 대립을 예고하고 있다. 이미지도 다르다. 정 후보를 생각하면 ‘앵커 정동영’이 떠오른다. 그만큼 수려한 말솜씨와 세련된 외모는 그의 이미지를 대변한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풍운동 등을 통해 쌓은 개혁의 이미지까지 추가돼 지인들로부터 ‘개혁적 신사’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참여정부 실정에 대한 비판을 강화하면서 나온 ‘변절자’ 이미지는 그의 대표적인 부정적 이미지로 자리잡았다. 반면 이 후보는 전형적인 ‘사장님’ 스타일이다. 현장 경험과 실무를 중시하고 측근들에게 질문을 많이 하고 언제나 대안을 요구한다. 청계천 공사에서 나타난 강한 추진력은 그의 독단적 성격을 보여 주기도 했다. 구동회기자 kugija@seoul.co.kr
  • [사설] 노대통령 NLL 발언 신중하지 못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영토선이 아니며 영토선이라고 얘기하는 것은 국민을 오도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정전 이후 NLL을 남북이 침범해선 안 되는 해상 경계선으로 인식하고 나아가 사실상의 영토 개념으로 알고 있던 국민들에게는 당혹스러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이 5개 정당 대표와 원내대표들과의 오찬 간담회에서 꺼낸 것으로 봐서 남한 사회의 ‘NLL 금기’를 깨려는 의도에서 한 발언이었다고 우리는 판단한다.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서해 평화지대를 실현하는 수순으로 NLL문제를 돌파하고자 했을 것이다. 청와대가 “NLL은 실질적 해상 경계선”이라고 해명한 것은 다행이지만 NLL을 무력화하는 듯한 발언은 국민들을 혼란에 빠지게 할 수 있다. NLL은 정전 협정 체결 이후 유엔군이 아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설정한 한계선이다. 수십년을 거치면서 사실상 군사 분계선 역할을 해왔다. 남북기본합의서에도 남북의 불가침 경계선을 “지금까지 쌍방이 관할해온 구역으로 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은 남측의 NLL을 인정하면서도 번번이 재설정을 노린 무력화 시도를 해왔다. 이 과정에서 서해 교전까지 발생했다. 이렇게 지켜온 NLL은 남북간에 새 해상경계선이 설정될 때까지는 유지되어야 하며 대통령이라고 해서 흔들어서는 곤란하다. 김장수 국방장관은 대통령 발언에 대해 “이견이 있다 없다고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NLL을 지키는 군 수장으로서 항명으로 비치지 않도록 조심하는 모습이 안타깝기만 하다. 다음달 남북 국방장관 회담이 열린다.NLL이 주된 의제가 될 것이지만 ‘영토선 발언’으로 우리측 협상력이 떨어지지 않을까 심히 우려된다. 대통령이 어떤 생각을 갖고 있건 성급한 NLL 해금론은 위험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군사적 신뢰가 구축되고 남북이 새로운 해상분계선을 설정할 때까지는 NLL을 지금대로 놔둬야 한다.
  • 멸종위기 노랑만병초 설악산 자생 첫 확인

    멸종위기 노랑만병초 설악산 자생 첫 확인

    백두산의 대표적인 고산식물로 멸종위기 야생동식물 Ⅱ급 식물인 노랑만병초와 홍월귤이 설악산에도 자생하는 사실이 처음 확인됐다. 국립공원관리공단은 1963년 이후 문헌에만 나와 있는 백두산 자생식물인 노랑만병초를 44년 만에 설악산에서 수십 개체가 자생하고 있음을 확인했다고 12일 밝혔다. 노랑만병초는 백두산의 대표적인 고산식물로, 남한에서는 자생하지 않는 생물로 여겨져 왔다. 노랑만병초는 진달래과 식물로 같은 과(科)의 만병초와 비슷하지만 잎 뒷면에 잔털이 없고 키가 1m 정도 자라며 노랑색 꽃을 피우는 특징이 있다. 공단은 멸종위기야생동식물 모니터링을 통해 설악산 해발 1600m 이상 고지대에서 약 50㎡ 면적에 수십 개체가 서식하는 것을 확인했다고 설명했다. 설악산에서 노랑만병초와 홍월귤이 발견된 것은 설악산이 백두대간 자연생태계의 핵심축이며 생물 종 다양성이 매우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라고 공단은 설명했다. 류찬희기자 chani@seoul.co.kr
  • [일요영화] 그녀를 모르면 간첩

    [일요영화] 그녀를 모르면 간첩

    ●그녀를 모르면 간첩(SBS 시네클럽 밤 1시5분) 패스트푸드점에 위장 취업한 미녀 간첩과 어리버리 삼수생의 사랑을 다룬 10대 취향의 코믹 액션물.2004년 제작됐다. 당시 CF스타였던 김정화의 스크린 데뷔작이며, 최근 드라마 ‘커피 프린스’로 새삼 인기를 얻은 공유가 출연했다. 실제 패스트푸드점에서 일하다 ‘얼짱’으로 소문나 연예계에 진출한 남상미도 이 영화로 데뷔했다. 타고난 미모와 지성에 무술 실력까지 겸비한 북한 노동당의 열혈 여성 당원 림계순(김정화). 거액의 공작금을 가지고 사라진 김영광(이광기)을 잡기 위해 비오는 날 임진강을 헤엄쳐 남으로 내려온다. 남한에 내려와 접선한 고정간첩 부부는 그녀의 임무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 불량식품을 팔아 생계를 연명하고 있는 그들은 카드 빚에 쫓겨 가출한 딸 걱정이 태산일 뿐이다. 다른 고정간첩들도 당에 대한 충성심이 예전 같지 않고 평범한 사람들처럼 살아가고 있다. 계순은 이제 자신의 이름 대신 효진이라는 이름으로 학원가 패스트푸드점에 위장 취업해 사라진 영광을 잡기 위한 임무에 돌입한다. 이름만큼 예쁜 효진의 얼굴을 보기 위해 남학생들은 패스트푸드점에 인산인해를 이룬다. 그 가운데 왕년의 1등을 자랑삼아 얘기하나 만성 변비와 우황청심환 과잉 섭취로 삼수생 처지가 된 어리버리 남학생 최고봉(공유)도 있다. 고봉은 한눈에 계순에게 반하고 매일 같이 출근 도장을 찍는다. 그러던 어느날 고봉은 디카로 계순의 얼굴을 찍어 인터넷 ‘얼짱’ 사이트에 올린다.‘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란 제목까지 달고서. “이걸 한방에 보내?아니지. 일단 나의 살인미소를 무기로 놈에게 접근해 사이트를 폐쇄해야겠다. 그녀를 모르면 간첩?도대체 누구더러 간첩이라는 거야. 이러다 내가 먼저 잡히는 거 아니야?”제발 저린 계순이 사진을 끌어 내리기 위해 고봉에게 접근하는데 어쩐지 그에게 자꾸 끌린다. 삼수생, 얼짱, 패스트푸드점 아르바이트생 등 10대들의 문화에 남파 간첩이라는 독특한 소재를 엮어 신선한 재미와 공감을 주는 영화다.100분.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베르네르 페니히 獨 베를린자유대 前교수가 본 남북정상회담

    베르네르 페니히 獨 베를린자유대 前교수가 본 남북정상회담

    |베를린 이종수특파원|“북한의 핵폐기 실천을 요구·진전시키면서 동시에 ‘남북한 평화 선언’과 국제무대에서 북한을 외교적으로 인정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 베르네르 페니히(63) 베를린자유대 전 교수는 9일 북한 핵문제와 2007 남북 정상회담을 평가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이 열렸던 지난 3일은 독일이 통일된 지 10년이 되는 날이었다. ●교류협력 적극적… 과거 동독보다 운신의 폭 넓어 페니히 박사는 “지구촌 어느 나라도 핵무기를 스스로 폐기한 나라는 없다.”며 “북한이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다는 구체적 증거도 없지만 만약 갖고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그 동안 미국에 맞서는 ‘정치적 생명’이었는데 갑자기 한꺼번에 다 포기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무리다.”라고 진단했다. 이어 장기적으로는 “국제원자력기구의 실사를 통해 핵불능 대상과 핵폐기 대상에 대한 구체적 목록과 일정을 결정해야 할 것”이라고 조언했다. ‘10·4 선언’에 대해선 미래를 밝게 채색했다. 그 이유로는 “1972년을 비롯, 이전에 북한이 남한과 접촉할 때는 교류협력에 비협조적이었거나 부정적이었는데 이번에는 적극적으로 응하는 등 태도 변화가 두드러졌다.”고 말했다. 또 “현재의 북한이 통일 직전의 동독보다 더 ‘운신의 폭’이 넓다는 점도 호재”라고 덧붙였다. 그 배경과 관련,“당시 동독은 소련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있었고 서독도 미국·영국·프랑스의 정치적 상황을 주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며 “이에 견주면 남북한은 상대적으로 미국과 중국·러시아에 영향을 덜 받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아울러 국제 정세도 독일 통일 때보다 더 좋다고 덧붙였다. ●민간차원 정기교류 중요… 유엔 포함 5자회담 제안 그는 ‘10·4선언’의 결실을 보기 위해서는 남북한 교류가 가장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런 맥락에서 ‘10·4 선언’에 담긴 ▲서해 공동어로구역 설정 ▲해주항 개방을 주목했다. 이런 구체적 노력을 통해 남북한이 서로 믿을 수 있는 토대가 다져진다는 것이다. 페니히 박사는 독일 통일이 한반도에 주는 시사점에 대해선 “성급하게 통일을 추구하기보다는 통독 과정에서 확인된 기회비용을 줄이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구체적 방법으로 “정례적 정상회담이나 장관급 회담도 중요하지만 연락사무소 개설 등 민간 차원에서 정기적으로 교류가 더 중요하다.”고 설명했다. 정상회담 정례화와 교류 활성화 등의 수순으로 통일을 이룬 독일이지만 통일 비용의 짐과 미완의 정서적 통일이라는 그림자도 여전히 안고 있다는 지적이다. 평화체제 전환과 관련해선 “미국·중국의 참여가 필수적이지만 ‘평화 체제’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한국 전쟁에 참여했고 휴전협정의 주체이던 유엔을 포함해 ‘5자 확대회의’ 형태도 고려할 만하다.”고 제안했다. vielee@seoul.co.kr ●페니히 박사 독일의 대표적인 한반도 전문가. 베를린자유대에서 정치학 박사를 딴 뒤 모교에서 강의하고 중국·동아시아 연구센터 소장을 지내다 2004년 퇴직했다. 평양과 서울을 여러 차례 방문했다.
  • [시론] 남북농업 보완-발전의 기회/김경량 강원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

    [시론] 남북농업 보완-발전의 기회/김경량 강원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

    제2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양측은 민족경제의 균형적인 발전과 공동의 번영을 위해 경제협력사업을 적극 활성화하고, 지속적으로 확대 발전시켜 나가기로 합의했다. 남북 경협은 교류 활성화를 통해 북한 경제의 발전을 지원하면서 개혁과 개방을 유도, 장기적으로는 경제공동체를 구축하는데 목적이 있다. 농업협력은 북한지역의 식량난 해소뿐 아니라 남북간 실질적인 경제협력을 촉진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북한은 그동안 농민시장을 개편하는 등 개혁조치를 통해 많은 변화를 시도했지만 농업의 생산기반과 농촌의 생활여건은 전혀 개선하지 못하고 있다. 북한 농업은 만성적이며 반복되는 식량부족, 생산기반 약화 등 총체적 문제들을 안고 있다. 북한 농업이 자본 부족과 개혁 부진에서 벗어나려면 내부로부터의 능동적인 개혁과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농업투자가 동시에 추진돼야 한다. 하지만 북한의 지도부는 개혁을 자칫 체제붕괴를 초래할지 모르는 ‘모험’으로 인식해, 농업분야의 개발과 개혁에는 여전히 소극적이다. 때문에 외부로부터의 대규모 투자도 막혀 있다. 이번 정상회담은 전면적인 남북 농업협력을 통해 북한과 공존하면서 남북한이 상생할 수 있는 기본틀을 만드는 계기가 될 것이다. 게다가 농업의 생산적 협력이 쌍방향으로 진행될 경우 남한에는 ‘투자의 기회’가, 북한에는 ‘경제회복의 기회’가 될 것이다. 북한의 식량부족 상황이 장기간 계속되면서 대북 농업교류의 필요성은 줄곧 강조되고 있다. 하지만 해마다 정부차원에서 이뤄지는 대규모 식량과 비료 등의 지원은 역설적으로 남북간 농업협력을 통해 북한의 농업을 변화시킬 ‘레버리지 효과’를 감소시켰다. 이런 시점에서 2차 정상회담 이후 농업부문의 협력은 장기적으로 남북한 농업분야의 보완관계를 회복시켜 공동의 농업발전을 꾀할 수 있는 방향으로 추진돼야 한다. 아울러 남북간 농업협력은 새로운 사업보다 일단 2005년 차관급 남북농업협력위원회에서 합의했지만 진전이 없는 사항들을 재추진하는 방향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당시 회담은 ‘북한의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구조적 개선’을 목표로 구체적인 실천사항에 합의했다. 그러나 북한 체제의 부담 때문에 시행되지 못했다. 북한이 시범 협동농장의 운영으로 남한의 기술자와 전문가들이 방문할 경우 자칫 사회주의 농업에 근본적 위협이 될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남북농업협력위 체제는 당국간 협력채널을 만들었고 농업협력의 확대 가능성과 협력방식의 전환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즉 북한의 농업구조를 개선해 북한의 자활능력을 제고한다는 게 새로운 목표이다. 또한 북한 농업의 복구개발과 함께 시범사업의 성격도 포함해 농업협력의 단계적이고 전략적인 추진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남한은 북한 농업이 선진화와 세계화라는 큰 물결에 동참하도록 유도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한 농촌사회의 구심점이며 생산주체인 협동농장의 경영방식을 개편하고 경제관리방식을 시장지향적으로 전환하도록 설득해야 한다. 경기도 시범협력사업인 평양 당곡리 협동농장에서 보듯 단계적인 협력을 통한 북한농업과 농촌지역의 현대화사업은 시사하는 바 크다. 결론적으로 북한이 호응하는 사업부터 선별해 진행하되, 합의사항은 남북이 모두 신뢰를 바탕으로 책임감을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해야 할 것이다. 김경량 강원대 농업생명과학대학장
  • “NLL 평화수역 위해선 北미사일 철수돼야”

    “NLL 평화수역 위해선 北미사일 철수돼야”

    |워싱턴 이도운특파원|“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된 경제협력과 평화 조치들이 현실화되려면 군사적 신뢰조치가 뒷받침돼야 한다.” 군사전문가이며 보수적 시각에서 한반도 문제를 분석해 온 브루스 벡톨 미 해병참모대학 교수는 이같이 말하고 서해 북방한계선(NLL)을 재조정하려면 그 지역에 집중 배치된 북한의 지대함 미사일이 철수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상회담을 군사분야에서 평가한다면. -평화를 뒷받침할 비무장지대(DMZ)와 서해북방한계선(NLL)에서의 남북 군사간 신뢰구축조치(CBM)는 결여돼 있는 것 아닌가 싶다. ▶NLL 신뢰구축 조치들은 무엇을 말하는가. -이것은 DMZ에서의 신뢰구축 조치들 못지않게 중요하다. 북한은 서부 해안에 선번·실크웜 등 지대함 미사일 시스템을 대거 배치해 놨다. 이들은 남한의 해군 함정은 물론 민간 선박도 겨냥하고 있다. 서해가 진정한 평화수역이나 공동어로수역이 되려면 북한은 이런 미사일 시스템들을 NLL에서 철수시켜야 한다. ▶지금까지 북한의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를 든다면. -전혀 없다. 북한군 전력의 70%가 휴전선과 평양 사이에 배치돼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북한의 지대지 미사일 시스템과 장사정포가 서울과 경기 지역을 겨냥하고 있다. 또 425·815·806·108 등 중무장한 철갑 및 기계화 군단도 전진배치돼 있다. 남북간 신뢰가 이뤄지려면 북한은 해당 부대들을 후방으로 철수시켜야 한다. 북한이 만약 그같은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한국의 안보는 여전히 위험한 상황에 놓이게 된다. dawn@seoul.co.kr ●벡톨 교수 미 국방부 국방정보국 동북아담당 분석관을 지냈다. 이에 앞서 미 해병대 암호분석관으로 백령도에서 근무했다. 유니언 인스티튜트에서 국제안보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최근 북한의 선군·주체사상 등을 분석한 ‘붉은 악당:북한의 끊임없는 도전’이란 저서를 냈다.
  • [서울광장] 차린 밥상도 받아야 임자거늘/황성기 논설위원

    [서울광장] 차린 밥상도 받아야 임자거늘/황성기 논설위원

    조지 부시 대통령의 종전 선언 제안, 그리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수용은 남북 정상회담이라는 가교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평화 드라마의 막을 남북한과 미국이 올린 것이다. 남북 정상의 10·4선언 제4항은 이런 3자를 염두에 둔 것이지만 ‘또는 4자’라고 적시함으로써 중국이 낄 자리를 남겼다.3자든 4자든 비핵화 진전에 따른 종전선언 논의는 10월4일을 기점으로 출발했다. 노 대통령은 부시 대통령의 전령에 그치지 않고 남한이 종전 선언 당사자임을 국제사회에 각인시켰다. 임기를 끝내면 차기 대통령이 한반도를 평화로 이끄는 대타협의 주역 자리를 넘겨 받을 것이다. 10·4 이후 한나라당은 ‘남남 갈등’의 축소판이 됐다. 정상회담 결과를 놓고 대선 후보와 당 대표, 원내 대표의 얘기가 제각각이다. 민주 정당이니 다양한 의견이 분출된다고 좋게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정권을 잡겠다는 정당이라면 대북 정책만큼은 확고한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강재섭 대표나 안상수 원내대표는 경제협력을 위장한 일방적 퍼주기이며 차기 대통령이 결제해야 할 부도 어음이라고 만년 야당 같은 흠집내기에 바쁘다.“평화정착과 남북화해를 위한 노력은 긍정적”“차기 정부에서도 남북 정상이 만나야 한다.”며 집권 이후를 내다본 듯한 이명박 후보의 생각과는 사뭇 다르다. 범여권의 부진으로 표류하는 중도·진보표는 이 후보가 끌어당기고, 반북 보수표는 강 대표 등이 붙잡아두는 작전이라면 오히려 관전이 편할 것이다. 그러나 한나라당을 들여다보면 그러한 선거 전략을 처음부터 염두에 둔 것 같지 않다. 이 후보의 부시 대통령 면담 계획이나, 지난 5일 한나라당 의원들과 알렉산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의 간담회만 봐도 그렇다. 부시 면담은 불발로 그쳤다. 버시바우 대사는 10·4선언을 지지하고 나아가 서해평화지대가 북방한계선(NLL)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밝혔다. 남북 정상회담에 뿌릴 미국발 잿가루를 기대했다가 실망하고 낙담한 모습이 안쓰럽다. 손에 쥔 대북 좌표가 없으니 후보 따로 대표 따로 각개약진한 게 지금의 한나라당 ‘남남 갈등’의 실체다. 지난 7월 한나라당이 내놓은 신대북정책은 아직도 공식 당론이 아니다. 정형근 의원이 친북 386과 야합한 ‘배신자’로 몰리면서까지 대북 방향타를 왼쪽으로 꺾었으나 의원 총회를 통과하지 않아 일개 안에 머물고 있다. 이명박 후보는 이미 ‘비핵 개방 3000’정책을 갖고 있다.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5대 패키지 지원을 통해 10년 후 국민소득 3000달러 국가로 도약시킨다는 게 골자다.10·4선언의 해주 특구나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 개보수 합의를 뛰어넘는 북한 내 5대 자유무역지대 설치,400㎞짜리 신 경의고속도로 건설 등을 담고 있다. 비핵화를 전제로 한 것이긴 해도 통 큰 비전임에는 틀림없다. 대선 후보가 출전 채비를 마쳤다면 후보의 노선과 당론쯤은 일치해야 하지만 한나라당 대북 정책은 잡탕처럼 어수선하기만 하다. 비핵화와 종전 선언, 경협 같은 대형 이벤트는 차기 대통령 몫이다.4개월밖에 남지 않은 노 대통령은 상을 차리는 일밖에 없다. 한나라당은 10·4선언이란 차린 상을 걷어찰지, 받을지를 국민들에게 분명히 제시해야 한다. 대선 공약 발표를 이달 말로 늦췄다는데 표 계산에 지지층 눈치보느라 좌고우면하다간 ‘도로 한나라당’이란 소리만 듣고 양다리 걸친다는 의심만 받는다. 그릇을 넓게 키우기는 이 후보 하기에 달렸다. 황성기 논설위원 marry04@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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