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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이너리티 리포트] (10) 110일째 복직투쟁 비정규직

    [마이너리티 리포트] (10) 110일째 복직투쟁 비정규직

    안녕하세요, 제 이름은 함소란. 쉰두살 먹은 해고 노동자이자 스물네살 딸을 둔 엄마랍니다. 비슷한 처지의 엄마들 14명과 올 1월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의 별 다섯개짜리 호텔에서 해고된 뒤 110일째 복직투쟁을 벌이고 있답니다. 하지만 호텔측은 우리를 거들떠보지도 않고 있지요. 저는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에 맞춰 지어진 이 호텔에 그해 8월 하우스키퍼로 입사했습니다. 서류, 면접, 영어책 읽기 등 까다로운 공채시험을 통과한 정규사원이었죠. 호텔이 문을 연 지 한달 만에 들어왔으니 창립 멤버와 다를 바 없었고요. 하우스키퍼는 오전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500여개 객실을 나눠서 청소와 정리정돈을 해야 합니다. 맡은 객실을 모두 청소하려면 정해진 시간보다 두세 시간 더 일하기 일쑤인 데다 손님이 원하는 시간에 맞춰야 해서 점심은 정말 밥먹듯이 걸러야 했죠. 위장병을 앓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어요. 객실 이불과 카펫을 청소하며 나오는 먼지에 기관지염과 알레르기도 달고 살았습니다. 해고된 지 석달 만에 제 몸무게가 10㎏이나 불어난 것을 보면 호텔 일이 힘들긴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하지만 기본급에 상여금 900%, 봉사료와 각종 수당 등을 합치면 14년차이던 2001년 연봉이 2700만원이나 되었죠. 병원을 자주 찾는 여든 된 친정 아버지와 그보다 두살 적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딸을 지방 미술대학으로 유학보냈고 97년엔 수원에 6800만원짜리 24평 아파트도 장만했습니다. 남편과는 88년 헤어졌지요. ●힘든 노동, 그 대가가 비정규직 전환 칼바람이 불어온 건 2001년 12월이었습니다. 갑자기 호텔에 명예퇴직 희망자를 받는다는 공고문이 나붙었습니다. 신청자가 아무도 없자 사측은 하우스키퍼들을 1순위로 정해두고 퇴직을 강요하기 시작했지요. 하우스키퍼를 시작으로 8차까지 단계적으로 구조조정을 할 거라면서 아웃소싱업체를 통해 계속 일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호텔 인사담당자는 노동조합이 뭔지도 모른 채 묵묵히 일만 해온 우리를 호출기로 한명씩 불러 “다른 사람들도 다 명예퇴직서에 서명했다. 결국 못 배겨낼 테니 빨리 결단을 내리라.”고 협박을 하더군요. 청소하는 객실에 찾아와 이것저것 트집을 잡으며 서명하지 않으면 퇴직금도 못 받을 것이라고 위협하는 데에는 당할 길이 없더군요. 결국 같은 해 12월31일부로 하우스키퍼들은 용역회사 소속으로 비정규직이 됐습니다. 우습게도 용역회사는 우리를 비정규직으로 만들기 위해 호텔측이 전직 인사부장을 앞세워 급조한 용역업체였습니다. ●줄어든 수입에 신용불량 일보직전까지 추가 구조조정은 없었습니다. 외려 남아 있는 직원들은 단체협상을 통해 기본급과 상여금 인상 혜택을 받더군요. 반면 우리는 연봉이 1500만원 수준으로 확 줄었습니다. 아줌마들이 모여 있는 하우스키퍼들만 만만하게 보였나 봅니다.50명가량이 모여 2002년 6월 전국여성노동조합에 가입했습니다. 하지만 이때부터 노조원에 대한 각종 불이익이 이어졌습니다. 청결 상태에 대한 사소한 트집은 물론이고 우리와 말이라도 한마디 나눈 비노조원은 따로 불러 호통치기 일쑤였습니다. 결국 하나둘 노조를 떠나 15명만 남게 됐죠. 2004년 재계약 당시 연봉은 또다시 1300만원으로 떨어졌습니다. 줄어든 수입에 살림은 갈수록 어려워져 갔습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친척이 빌려간 돈을 돌려주지 않았고, 저 또한 폐결핵으로 보건소를 다니느라 자주 결근하게 돼 조금씩 빚이 늘어났습니다. 카드 네 개를 돌려막아 봤지만 소용없이 신용불량자 일보 직전까지 갔습니다. 어쩔 수 없이 살던 집을 7500만원에 전세 주고 3000만원짜리 전세로 옮겼습니다.4500만원은 고스란히 빚갚는 데 썼습니다. ●노동부 불법파견 판정에 호텔 ‘콧방귀´ 2004년 5월 노동부에서 사측의 고용 행태에 대해 불법파견이라는 판정을 내려 다음달 5일까지 호텔측이 저희를 직접 고용하라는 지시를 내렸습니다. 하지만 호텔측은 콧방귀만 끼고 있고 검찰은 현재까지 호텔측에 대한 기소 여부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호텔은 지난해 말 용역회사와의 재계약을 거부하면서 우리를 거리로 내몰았습니다. 가만히 있을 순 없습니다.15명 모두 생명력 강한 우리네 엄마들이니까요.‘붉은 엄마들의 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복직과 정규직 전환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나이에 새로운 일을 찾기도 어려운 엄마들이기에 메아리 없는 외침이라도 내지르고 있답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기간제 노동자 ‘사용사유 제한’ 최대쟁점 이달 임시국회에서 처리키로 돼 있는 비정규직 법안의 쟁점은 무엇일까. 비정규직 법안으로 묶어서 불리는 법은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제정안과 ‘파견 근로자 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 등 두개다. 지난 2월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통과했고 21일 법제사법위원회,24일 본회의 처리를 앞두고 있다. 쟁점은 두 가지다. 먼저 기간제 노동자의 사용사유 제한이다. 사용사유 제한은 기업이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데도 비정규직 형태로 고용하는 것을 막자는 취지다. 정부안은 사용사유 제한을 두지 않는 것이다. 그 대신 비정규직 고용계약 기간을 2년으로 제한한 뒤 이를 초과하면 자동으로 ‘무기(無期)계약’으로 전환되도록 했다. 하지만 무기계약 전환이 곧바로 정규직 전환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어서 애매하다. 정부 관계자는 “당장 사용사유를 제한하면 형편이 안되는 중소기업들이 비정규직을 무더기로 해고하는 사태가 생길 것”이라고 말했다. 반면 노동계는 출산과 육아, 질병과 부상, 휴직과 파견 등 10가지로 사유를 한정하자고 주장한다. 정부안대로라면 사측이 2년 계약이 끝나고 계약을 갱신하지 않은 채 다른 비정규직을 고용하는 편법을 쓰더라도 이를 막을 수 없어 비정규직 양산이 계속될 것이란 얘기다. 파견노동자 보호 관련 조치도 쟁점이다. 정부안은 합법적인 파견기간이 끝나거나 불법파견으로 판정되면 사측이 해당 노동자에 대해 고용의무를 지도록 했다. 하지만 노동계는 계약기간이 끝나거나 불법파견으로 판정되면 자동적으로 사측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하게 되는 고용의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솜방망이 처벌이 ‘불법파견’ 조장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불법 파견근로가 ‘조자룡 헌칼 쓰듯’ 쓰이고 있지만 이에 대한 제재는 제대로 이뤄지지 않고 있다. 불법 파견근로에는 위장도급과 불법파견이 있다. 위장도급은 기업에서 노동자를 채용하면서 직접 근로계약을 하지 않고 용역업체를 통해 도급계약을 한 뒤 자기 회사에서 파견 형식으로 일하도록 하는 것이다. 기업은 노동자에 대해 법률적 책임을 질 필요가 없어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고 복리후생도 책임지지 않는다. 불법파견은 기업이 파견근로가 허용되는 26개 이외의 업종에서 파견 노동자를 사용하는 것이다. 문제는 불법 파견근로를 제대로 제재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민주노총 김태현 정책실장은 “불법파견 판정을 받으면 당연히 사측이 노동자를 직접 고용해야 하는데 이행하지 않아도 처벌이 이뤄지지 않는다. 검찰도 기소를 망설이는 데다 기소해도 법원에선 고용의무가 없다는 판결을 내리는 등 불법파견을 조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부측은 개정 법률에서 제재 수준을 높였다고 해명했다. 노동부 비정규직대책팀 김인곤 팀장은 “이제까지는 제재 수위가 약해 불법파견을 제대로 막지 못한 측면이 있었다. 개정안에선 기존의 1년 이하 징역과 1000만원 이하 벌금 규정을 3년 이하 징역과 3000만원 이하 벌금으로 제재 수단을 강화했기 때문에 불법파견 방지가 가능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재훈기자 nomad@seoul.co.kr
  • ‘아들 군보직 청탁의혹’ 새쟁점

    ‘아들 군보직 청탁의혹’ 새쟁점

    17일부터 이틀간 열리는 한명숙 국무총리 후보 지명자에 대한 국회 인사청문회는 여야의 이전투구식 격전장이 될 전망이다. 5·31 지방선거를 앞두고 열리는 이번 청문회가 선거정국의 분위기를 좌우할 ‘분수령’의 성격을 지닌 만큼 여야 모두 물러설 수 없는 한판 대결이 불가피하다. 한나라당은 한 지명자에 대한 공격포인트를 특정하지 않고 ‘사상’과 ‘능력’,‘도덕성’ 등을 전방위적으로 검증하겠다며 칼을 갈고 있다. 열린우리당은 주로 정책 검증에 주안점을 두면서 한나라당의 정치적 공세에는 단호히 대처한다는 전략이다. ●도덕성·자질 현재 군 복무 중인 한 지명자의 아들 박모씨의 보직 문제를 둘러싼 ‘외부 청탁 의혹’ 논란이 새로운 쟁점으로 부상했다. 국회 인사청문위원인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은 16일 육군으로부터 제출받은 자료를 근거로 “박씨는 지난해 2월 입대, 육군 공병학교에서 지뢰설치제거 군사특기(1612) 교육을 받은 뒤 같은 해 4월 제1공병여단 보충병으로 전입했으며, 이틀 뒤 본부대 지휘부 행정병으로 배치됐다.”며 의혹을 제기했다. 주 의원측은 “지휘부 행정병 보직은 지뢰설치제거 군사특기를 가진 병사가 갈 자리가 아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한 지명자측은 “박씨의 입대·배치·보직 등 전 과정에서 어떤 영향력 행사도 시도한 바 없다.”면서 “신병의 부대배치는 컴퓨터로 무작위 배정되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특정인을 특정부대에 배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반박했다. ●사상·이념 한 지명자의 ‘진보적 편향성’ 여부가 주된 검증 포인트가 될 것 같다. 한나라당은 북한인권과 국가보안법 개폐 등 한 지명자의 이념성향을 엿볼 수 있는 ‘민감한 현안’을 집중 점검할 계획이다. 특히 한 지명자가 68년 반공법 위반 혐의로 기소된 사건과,79년 중앙정보부가 용공 사건으로 발표한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가 처벌받은 통혁당 사건 관련 기록을 제출받아 검토를 마쳤다. 특히 79년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 재판에서 한 지명자가 북한 방송을 청취한 사실이 드러난 점도 따진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열린우리당은 “크리스천 아카데미 사건은 과거 중정의 고문에 의한 조작극임이 드러나 민주화운동으로까지 인정된 사건”이라며 차단막을 칠 것으로 알려졌다. ●직무 수행 능력 총리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만한 경륜과 능력을 갖추고 있는지도 검증 포인트다. 한나라당은 한 지명자의 행정 경험이 여성부와 환경부 장관을 재임한 것이 전부여서 국정 전반의 업무를 조정해 낼 능력이 있는지 의심스럽다는 입장이다. 특히 한 지명자가 환경부 장관 시절 서울외곽고속도로 사패산 터널 공사, 경부고속철 천성산 터널 공사를 추진하면서 정책혼선을 빚은 점도 한나라당의 공세 포인트가 될 것으로 보인다. 전광삼기자 hisam@seoul.co.kr
  • 납북자송환 장관급회담 핫이슈로

    485명을 웃도는 납북자와 국군포로 송환문제가 오는 21일 평양에서 열릴 남북장관급 회담에서 핵심 이슈로 부상할 전망이다. 정부의 소식통은 13일 “납북자 문제가 장관급 회담에서 다뤄질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종석 통일부장관이 취임하면서 납북자 문제 해결에 의지를 보여왔던 터에, 피랍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사망) 문제를 해결하려는 일본 정부의 움직임은 회담장에서 이 장관의 목소리를 높이게 만들 것 같다.DNA 조사를 거쳐 피랍 한국인 김영남씨가 요코타의 남편으로 추정된다고 밝혀낸 일본 정부의 집요한 노력에 비해 우리 정부의 납북자 문제 해결노력이 미흡하다는 여론이 조성되고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이미 장관급 회담에서 제안할 납북자 해결방안 마련에 들어간 것으로 알려졌다. 원칙은 독일처럼 비용이 들더라도 납북자를 데려온다는 것이다. 서독은 동독 체제에 저항하다 투옥된 1만 2000여명의 정치범을 인도적 차원에서 데려오기 위해 1963년 동독과 비밀 거래를 시작했다. 정치범 8명을 데려오는 데 동독의 요구대로 32만마르크(약 1억 6000만원)의 현금을 줬으나, 다음부터는 현물제공으로 바뀌었다. 옥수수·커피·카카오·버터 등이 베를린 장벽을 넘어갔으나 나중에는 원유·다이아몬드·구리 등으로 대체됐다. 정치범 한 명 석방에 1977년까지는 평균 4만마르크(약 2000만원)의 비용이 들어갔고,1978년부터 1989년까지는 9만 5000마르크(약 4700만원)로 올라갔다. 정치범 석방에 동독으로 건너간 현물은 모두 34억마르크(약 1조 7000억원)어치다. 통일부가 최근 들어 ‘북한이 필요로 하고 희망하는 경제협력사업’을 조사하고 있는 것도 독일 모델과 무관치 않은 듯하다. 정부가 장관급 회담에서 경협과 납북자 해결을 연계하는 방안을 제시하더라도 북한이 경협이란 미끼를 덥석 물지는 미지수다. 북한은 납북자의 존재 자체를 부인하고 있는 데다, 북한이 생사확인 정도에 합의하더라도, 송환 등의 조치까지 나갈지는 미지수다.박정현기자 jhpark@seoul.co.kr
  • ‘요코다 DNA 발표’ 中선 불쾌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부가 납북 피해자 요코다 메구미의 딸인 김혜경(18)양의 혈액 샘플을 한국측에 전달했다고 밝혔다. 카토리 요시노리(鹿取克章) 외무성 대변인은 12일 기자회견을 열고 “김양의 혈액 샘플을 전날 저녁 도쿄 주재 한국 대사관에 건네줬다.”며 납북자 문제 해결과 관련해 한국과의 협력이 강화되길 희망한다고 말했다. 요코다의 부모도 이르면 다음달 한국을 방문, 요코다의 남편인 김영남씨 친척들을 만날 계획이라고 이날 도쿄의 한 모임에서 밝혔다 일본 정부가 이처럼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은 그동안 6자회담 등에서 외면받아온 납북자 문제를 국제적 이슈로 부각시킨 여세를 몰아 한국과의 공조를 통해 이를 해결하겠다는 의도를 더욱 분명히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지난해 10월 취임한 뒤 대북 강경 노선을 강화해 온 아베 신조 관방장관이 이번 조사를 주도해 온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실제로 조사 결과 발표 후 일본의 여당은 물론, 야당에서도 “북한이 납치 피해자들끼리 결혼시킨 것은 잔인하고도 비인도적인 처사”라는 공분이 조성되고 있다. 현지 언론은 아베 등 대북 강경파가 김계관 북한 외무성 부상을 비롯한 6자회담 대표들이 도쿄에 있을 때 DNA 조사 결과 발표를 감행했다고 보고 있다.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과 한국인이 결혼했다는 드라마틱한 요소를 통해 이슈의 극적인 효과 또한 높였다는 풀이다. 아베 장관은 의도하지 않았다고 손사래를 치면서도 “타이밍이 좋았다. 일본의 강한 의지를 (국제사회에) 전할 수 있게 됐다.”고 흡족해 했다는 후문이다. 우다웨이(武大偉) 중국 외교부 부부장은 12일 이같은 일본 정부의 처사에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북·미간 대좌를 주선하는 도중에 발표가 이뤄져 결국 무산됐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강경파들은 이번 기회에 납치 문제를 한국과 연대, 국제적인 포위망을 구축해 북한을 압박하자고 했지만 의도가 관철될지는 불투명하다. 가장 중요한 한국 정부가 신중하고 국내 대북 여론도 냉정한 탓이다. 아베 장관 등의 행보가 위험해 보였는지 노회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한발 빠져 있었다는 지적도 있다.“외교적으로 무리수”라는 안팎의 역풍이 생길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taein@seoul.co.kr
  • 日 “요코다 남편 납북 김영남인듯”

    日 “요코다 남편 납북 김영남인듯”

    |도쿄 이춘규특파원|일본 정부는 11일 DNA 분석 결과 일본인 납치피해자로 북한에서 자살한 것으로 알려진 요코다 메구미(실종 당시 13세)의 남편은 “1978년 남한에서 납치된 한국인 남성일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다. 한·일 양국에서는 요코다의 남편이 78년 전라북도 선유도에서 해수욕 중에 실종된 김영남(당시 고등학생)씨라는 설이 줄곧 제기돼 왔다. 그러나 한국 내에서는 이 문제가 미묘한 남북관계와 맞물리면서 큰 쟁점으로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 현실이다. 일본 정부가 이같이 발표하면서 북한의 일본인 납치문제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됐다. 일본은 ‘가능성이 높다.’고 발표했지만 김철준을 한국에서 납치된 김영남으로 단정하는 분위기다. 일본은 그동안 북한의 외국인 납치문제가 주로 일본 내에서만 화제였으나, 이날 한국인 납치문제도 사실로 드러났다면서 국제적인 쟁점으로 부각시킨다는 계산인 것 같다. 실제로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는 이날 “한국측에도 일본 이상으로 납치피해자가 있으니까 앞으로 함께 협력해 나가고 싶다.”고 말했다. 일본 정부는 북한이 요코다의 남편으로 소개한 김철준이 남한 출신 납북자라는 의혹이 계속 제기되자 그의 어머니 및 형제의 모발과 혈액을 한국 정부로부터 넘겨받아 김철준·요코다 부부의 딸인 김혜경(18)양의 DNA와 대조하는 작업을 일본 내 두 곳의 의과대학에서 벌여왔다. 일본 정부는 2002년 9월 평양에서 혜경양을 면담하면서 그의 DNA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 시료를 넘겨받아 조사를 벌여왔다. 일본 정부는 요코다의 딸 김혜경양과 부녀관계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파악한 이 남자가 북한이 요코다의 남편이라며 일본 정부 대표단과 만나게 해 준 김철준과 동일인인지에 대한 조사를 계속하기로 했다. 북한은 김철준이 특수기관에 근무한다며 김의 DNA 분석시료 제공을 거부했다. 요코다 메구미는 1977년 일본 니가타현에서 실종됐다.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2002년 북·일 정상회담에서 요코다 납치 사실을 시인했다. 북한은 요코다가 1986년 현지에서 김철준과 결혼해 이듬해 딸 혜경양을 낳았으며 94년 자살했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2004년 12월 화장한 요코다의 유골을 일본에 넘겨줬으나 일본측은 감정 결과 다른 사람의 유골로 드러났다고 발표했다. 북한은 “일본의 감정결과를 믿을 수 없다.”며 제3자에 의한 재감정과 유골반환을 요구했으나 일본 정부의 이번 감정결과가 사실일 경우 납치사건은 새로운 국면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는 앞으로 납치문제에 대해서는 북한에 더욱 공세적으로 나갈 전망이다. 일본은 이날 동북아시아협력대화(NEACD)에 참석 중인 북한 외무성 김계관 부상에게 분석결과를 통보하고 진상규명에 성의를 보이라고 요구했다. 납치피해자 가족회측은 요코다가 생존해 있다고 주장하며, 진상발표와 일본 생환을 요구했다. 일본에서는 정치권을 비롯한 각계의 대북 경제제재 발동 요구도 거세질 것으로 보인다. taein@seoul.co.kr
  • [송두율칼럼] 여성과 정치

    [송두율칼럼] 여성과 정치

    국무총리에 이미 여성이 지명되었고 서울시장선거에도 유력한 후보로 여성이 나섰다. 오래 전부터 야당 당수가 여성이니 이 같은 일이 특별한 사건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여성의 정치참여가 아직도 일상적인 일로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는 한국사회이기에 여러 가지로 관심을 끌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얼마 전 독일에서도 여성총리가 처음으로 탄생, 지금까지 남성명사로만 있었던 총리 칸츨러(Kanzler)에 여성변화어미(語尾)를 붙여 칸츨러린(Kanzlerin)이라는 새 단어를 만들어야만 했다. 정치의 기본코드는 권력의 유무(有無)다. 권력쟁취를 위한 투쟁은 모든 윤리적 규범으로부터 자유스러워야 한다는 마키아벨리즘이 지배하는 곳에 여성이 설 자리가 없다는 것이 일반적인 통념이다. 여성의 아름다움, 부드러움 나아가 모성애적인 따뜻함과 평화스러움이 난폭하고 험한 정치판에 전혀 어울리지 않고 또 버텨낼 수도 없다는 것이다. 남편인 피터 3세를 살해하고 황제의 자리에 올라 터키와의 전쟁에서 승리, 크림반도 북부까지 영토를 확장했던 러시아의 카테리나 대제(大帝), 포클랜드 문제로 아르헨티나와 전쟁까지도 불사했던 영국의 대처 총리, 이웃나라 파키스탄과 무력충돌에 이어 전쟁을 벌였던 인도의 간디 총리처럼 그 같은 통념에 반하는 여걸들도 있지만, 동서양과 고금을 막론하고 여성과 정치는 거리가 멀다는, 아니 멀어야만 한다는 생각의 뿌리는 꽤나 깊다. 이에 대하여 사회주의자들은 무엇보다도 남녀간의 차별 자체를 바로 자신의 구성요소로 삼고 있는 계급사회가 타파되고 사회주의사회가 수립되면 여성과 정치를 보는 그러한 부정적인 생각도 기본적으로 바뀔 것으로 내다보았다. 그러나 도시와 농촌의 격차,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 그리고 종족간의 갈등과 더불어 남녀간의 차별문제도 원만하게 해결하지 못했다는 것을 ‘현실 사회주의’는 보여 주었다.‘현실 사회주의’가 무너지고 나서 보다 더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된 것이 바로 여성들의 처지임을 감안할 때 ‘역사의 종말’을 구가했던 자본주의도 문제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여성문제를 사회적 관계보다 여성존재의 더 깊은 내면으로부터 분석한 ‘여성주의적(feminist)’ 논의들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이런 논의들은 무엇보다도 남근(男根), 폭력, 주체, 동일성의 표상으로서 ‘남성’에 의해서 일방적으로 규정되고 또 배제된 타자(他者)로서의 수동성, 부드러움, 상상력, 연대성, 비(非)동일성인 ‘여성’을 문제 삼았다. 자신의 이마에 자기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는 글이 적혀 있지만 정작 자신은 이를 읽을 수 없게 되어있는 주체 아닌 주체가 바로 ‘여성’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이 같은 모순으로부터 도출된 역설적인 결론, 즉 ‘여성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기확인은 그래서 더욱더 강렬하게 ‘여성’의 자기 긍정을 요구하게 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한 요구로부터 한 걸음 더 나아간 주디스 버틀러(J Butler)의 ‘탈(脫)여성주의적(postfeminist)’ 담론은 ‘여성’을 하나로 묶어보는 시각 자체도 ‘남성’에 의해서 강요된 것으로 보고,‘여성’ 내부에 존재하는 ‘차이’도 문제삼는다. 이러한 시각은 그러나 여성문제의 절박한 현실적 구조를 성의 상징적 표현의 문제로만 보려는 위험을 안고 있다. 이번의 여성정치인의 화려한 등장과 더불어 여성문제를 사회적 맥락에서 보아야 하느냐, 아니면 ‘여성주의적’ 또는 ‘탈여성주의적’ 시각에서 바라보아야 하는지, 여성정치인도 제도화된 남성중심의 정치구조 속에 결국 함몰되고 말 것인지, 많은 여성들이 왜 여성정치인에게 투표하지 않는지, 모성담론에 의거한 보다 더 인간적인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 등 많은 질문이 제기될 것으로 기대된다. 여성정치인의 부상(浮上)을 한국사회의 크고 작은 모순을 직시하는 중요한 계기로 삼아야지 그저 정치계의 또 하나의 흥미로운 이야기로만 보고 지나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벽산그룹 김희철 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벽산그룹 김희철 회장家

    한때 18개 계열사를 거느리면서 30대 재벌그룹으로 명성을 떨쳤지만 외환위기(IMF)와 함께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벽산건설㈜,㈜벽산, 벽산페인트㈜,㈜인희, 동양물산 등 5개만 남은 미니그룹으로 축소된 게 오늘날의 벽산이다. 출자전환된 채권단의 주식을 되사들여 창업주 가문이 명맥을 잇고 있는 것은 불행중 다행이다. 벽산의 주력사는 벽산건설이다. 전체 매출 가운데 60% 이상을 차지할 정도다. 때문에 벽산 사람들은 그룹이라는 표현 대신 건설 전문업체라는 표현을 쓴다.3세 경영체제로 넘어가면서 재도약의 발판을 마련하기 위해 애쓰고 있다. ●GS가문·박정희 대통령 등과 혼맥 형성 고 김인득 창업주의 3남 2녀중 장남 김희철(69) 벽산건설 회장은 경기고 3학년이던 16세 때 미 캘리포니아로 건너가 15년간 유학생활을 했다. 한 달에 2∼3통씩 집으로 편지를 썼는데 아버지인 고 김인득 창업주는 틀린 한자를 교정해 보내주는 등 자식 교육에 애착을 보였다. 김희철 회장도 기대에 부응해 미국 퍼듀대 기계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 경영학 석사·MIT대와 퍼듀대에서 각각 원자력공학 석·박사학위를 땄다. 이어 미주리주 롤라대학에서 조교수를 역임하다 1969년 정부의 해외우수인재 유치 계획에 따라 과학기술처 1급 연구관으로 초빙돼 귀국했다. 김희철 회장은 1965년 김인득 창업주의 3남이자 김 회장의 동생인 김희근(60) 벽산엔지니어링 명예회장과 김 명예회장의 경기고 동창인 허광수(60) 삼양인터내셔널 회장의 제의로 삼양통상 고 허정구 회장의 장녀 허영자(66)씨를 만났다. 허광수씨의 누나인 영자씨는 이대 불문과를 졸업한 뒤 미 노스웨스턴대 불문학과 석사 과정을 밟다 다음해 시카고에서 김 회장과 결혼했다. 김희철 회장은 1971년 건축자재 생산업체였던 ㈜벽산의 전신인 제일스레트 대표이사를 맡으면서 벽산 경영에 참여했고,1982년 그룹 부회장으로 오르면서 사실상 경영을 도맡았다. 하지만 김인득 창업주가 세상을 뜬지 반년도 지나지 않아 IMF 위기를 맞아 선친이 키운 기업을 구조조정해야 하는 불운을 맞기도 했다. 벽산은 3세 경영 체제에 안착했다. 김희철 회장의 장남인 김성식(39) ㈜벽산 대표이사 사장은 ㈜벽산페인트 대표이사도 겸하고 있다. 오하이오주립대 마케팅 학사, 하버드대 경영대학원 석사를 졸업했다. 이후 보스턴 컨설팅에서 일하다 2001년 1월 ㈜벽산 전무로 입사했다. 지금은 부도로 쓰러졌지만 80년대 말 주택사업을 활발히 펼쳤던 ㈜동신 박승훈 회장의 장녀 박성희(36)씨를 학교 선배의 소개로 만나 결혼했다. 김희철 회장의 차남 김찬식(37)씨는 주력사인 ㈜벽산건설에서 경영수업을 받는 중이다. 경영지원실장(전무)으로 내부 살림을 챙기고 있다.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졸업하고 조지타운대에서 MBA를 땄다. 한 살 아래인 장현주(36)씨를 대학(이대 동양학과)시절 소개팅으로 만나 연애 결혼했다. 장씨의 아버지 장경환(74)씨는 포항제철 전무이사, 삼성중공업 사장 등을 거쳐 포항제철(현 포스코) 경영연구소 회장을 지냈다. 장녀 김은식(35)씨는 서울대 음대 기악과를 나온 바이올리니스트. 양해엽(77) 전 재불 한국문화원장의 차남인 첼리스트 양성원(39·연세대 기악과 조교수)씨와 결혼, 음악가 집안을 꾸렸다. 이들의 결혼은 양가 어머니들의 오랜 친분으로 맺어졌다. 김인득 창업주의 차남인 김희용(64) 동양물산 회장은 미 인디애나주립대 출신으로 1987년부터 그룹의 모태이자 농기계전문업체인 동양물산 사장으로 취임,2001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셋째 형인 고 박상희씨의 딸 설자(61)씨와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설자씨는 김종필 전 자유민주연합 총재의 처제이기도 하다. 이로써 벽산가 혼맥은 경제계 뿐 아니라 고위 정치권과 닿는 계기가 됐다. 장남 김희철 회장가와 차남 김희용 회장은 2004년 주식 교환을 통해 사실상 독립경영 체제를 갖췄다. 김희철 회장 집안이 벽산건설과 ㈜벽산 등을, 김희용 회장 집안이 동양물산 지분을 갖는 것으로 구도를 정리했다. 김희용 회장의 장남 김태식(33)씨는 동양물산 이사로 근무하고 있으며, 딸 김소원(28)씨도 동양물산에 몸을 담고 있다. 셋째 아들인 김희근(60) 회장은 지금은 정리된 벽산건설의 해외부문을 담당하는 등 줄곧 건설을 책임지며 벽산건설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미 마이애미대 출신으로 IMF 위기를 맞아 건설에서 손을 뗐고 지금은 계열분리된 벽산엔지니어링 명예회장 직함만 갖고 있다. 벽산건설 부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은행 대출을 받기 위해 재무제표를 조작한 사기 혐의로 검찰에 불구속기소된 상태다. 미 LA에 살고 있지만 결백을 입증하기 위해 귀국해 수사를 받고 있다. 김희근 명예회장측은 당시 대출은 만기연장이 대부분이어서 사기 혐의는 터무니없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고 이윤우 전 그린파크 회장의 4녀인 이소형(58)씨와 결혼했다. 고 김인득 창업주의 장녀인 김숙희(66)씨는 피혁전문 무역업체인 천마를 운영하는 정영현(72) 회장과 중매로 만나 결혼했다. 막내 딸 김연숙(57)씨는 원영종(59) 화인계기주식회사 대표이사와 사이에 치성(28)·치열(26) 두 형제를 두고 있다. ●고 김인득 창업주…소문난 근검절약가 고 김인득 창업주는 경남 함안군 칠서면 무릉리라는 작은 마을에서 4남2녀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농사를 지었지만 계절에 따라 포목상 일을 겸해 형편은 어렵지 않았다. 고향에서 보통학교(칠서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3수 끝에 열 네살이 되던 해에 마산상고에 입학했다. 성적이 좋아 우등생으로 졸업했고, 농구·탁구·축구 선수로 활약하는 등 운동도 잘했다. 남선주산대회에서 1등을 했고 서화전시회에 출품하면 항상 상을 받는 모범생이었다. 첫 직장은 1934년 봄 입사한 마산금융조합. 예금 권유부터 연체 독촉까지 항상 1등이란 팻말이 따라다녔다.‘남과 같이해서는 남 이상 될 수 없다.’는 철학은 이때부터 생겼다. 당시 월급 28원을 받던 그는 10년동안 1만원(현재 1억원)을 벌겠다는 목표를 세워 9년간 8900원을 모았다. 이 돈을 모으기 위해 숙직을 자청, 숙직비를 모았고 출장 갈 때면 새벽에 일어나 목적지까지 걸어가면서 출장비를 아꼈다. 투철한 절약정신만큼 가족 사랑도 깊었다.“1932년 1월11일 양가 부모와 일가친척의 축복 속에서 17세 신랑과 18세 신부는 결혼을 했어요. 신랑이 장남이라 결혼시켜 어린 5남매와 큰 살림을 맡기실 작정을 하신 모양이었어요.17세 신랑은 키도 크고 헌칠했어요. 결혼후 남편은 3년을 학생 신랑으로 지내고 저는 신랑 없는 시집살이를 했어요.” 고 김인득 창업주의 부인 고 윤현의 여사는 김 창업주의 첫 인상을 ‘벽산 김인득 선생 회갑 기념-남보다 앞서는 사람이 되리라’란 책을 통해 이같이 회고했다. 고 김인득 창업주의 동생인 고 김재동씨도 같은 책에서 창업주를 두고 애처가 중의 애처가라고 평했다. 평상시에도 “부인이 무슨 낙이 있겠어. 내가 아내의 종이 돼야지…”라고 말하며 부인에 대한 사랑의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이다. 고 김인득 창업주는 일제 치하였던 만큼 기술자나 사업가가 아니면 한국인은 성공할 수 없다는 판단에 따라 1943년 진주상공회의소로 자리를 옮긴다.1949년 무역업을 하기 위해 상경했는데, 당시 외국 무역이나 한다는 사람들은 으레 호텔에 머물며 식사도 고급으로 하는 등 허세를 부리기 일쑤였지만 김인득 창업주는 삼류여관에 머물며 국밥 외엔 다른 음식을 입에 대지 않았다. 택시는 타지 않았고 걷거나 전차·버스를 이용했다. 모두가 멋쟁이 양복을 빼고 다녔지만 농구화나 군화를 신고 다녔으며 그나마 구두 뒷굽이 빨리 닳는다며 바닥에 말발굽 ‘징’을 박아 신고 다녔다. 호주머니에 쓸데없이 돈을 넣고 다니지 않았으며 필요한 돈만 명함꽂이에 넣어 다닐 만큼 근검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다. ●‘극장의 제왕’서 건자재·건설업으로 비약 부산 동아극장 지배인으로 일하다 6·25가 발발한 1950년 피란갔던 부산에서 오늘날 벽산의 효시인 동양흥산(현 동양물산주식회사)을 창업한다. 외국영화를 수입해 전국 영화관에 공급하는 일과 수입·무역업이 주종이다. 전쟁에 지친 사람들에게 당시 오락시설로는 극장이 전부인 시절이었고 동양물산은 외화의 60%를 수입했다. 중앙극장, 단성사 등 서울 주요 극장을 비롯해 부산 대전 대구 진주 등 전국에 100여개에 달하는 극장 체인을 형성, 극장 재벌로 부상하며 50년대 말 흥행업 왕좌에 올랐다. 산업의 본질은 생산업이라 여긴 김인득 창업주는 60년대 들어 ‘사업보국’을 내걸며 흥행업에서 점차 손을 떼고 제조업쪽으로 방향을 돌린다. 단성사와 반도극장(현 피카디리) 등을 판 돈으로 1962년 9월 한국스레트공업주식회사(현재 ㈜벽산)를 인수한 것은 제2의 도약기를 맞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다. 이 회사는 일제 당시 일본 아사노 스레트의 서울 공장으로 1929년 출범했지만 당시 부실화되어 개점 휴업상태인 회사였다. 인수 직전 9개월까지 실적이 3000만원에 불과했지만 주인이 바뀐 뒤 3개월간 6000만원의 실적을 올렸다. 이어 60∼70년대 새마을운동으로 시작된 전국적인 농어촌개량작업으로 슬레이트 사업은 번창일로를 맞는다. 이후 건자재 생산업체인 오늘날의 ㈜벽산으로 자라났다. 1964년 1월 한국스레트공업주식회사에 건설사업부를 발족하면서 건설업을 본격화했다.1968년 시공능력 33위에서 1971년에는 11위에 오를 정도로 덩치가 커지면서 같은 해 1월 한국건업주식회사로 떨어져 나와 지금의 벽산건설로 성장했다. 그룹의 모태인 동양물산은 고구마 절단기 등 농기계 생산업체인 ‘한국이기공업주식회사’(1964년)와 한국경금속(1968년)을 인수하면서 새 전기를 맞는다. 동양물산은 지금도 경운기 등 농기계와 스푼 등 양식기를 만들면서 과거 명맥을 잇고 있다. 1973년 스레트공업사 내 페인트공장을 신규 착공하면서 시작한 페인트 사업도 그대로 있다.1999년 구조조정과 함께 벽산화학㈜에 합병됐다 2001년 벽산페인트로 거듭났다. 이로써 벽산그룹은 벽산건설,㈜벽산, 벽산페인트, 동양물산,㈜인희 등 5개사를 거느리고 있다. ●IMF때 대대적인 구조조정 그룹명 벽산은 고 김인득 창업주의 아호를 따서 지은 것이다.60년대말부터 회사를 끊임없이 인수·합병하는 등 사세를 키워카며 통일성을 위해 붙인 이름이다. 그러나 유통 금융 방송 지하자원개발 등 전체 18개에 달하던 계열사는 IMF이후 구조조정을 겪으며 현재 5개로 줄었다. 1976년 설립한 건축내외장제 제조사 벽산산업개발㈜은 1998년 그룹 경영합리화 계획에 따라 ㈜인희에 합병됐다.㈜인희는 영화산업에 애착을 가졌던 김인득 창업주가 1952년 중앙극장을 세우면서 설립했던 회사. 영상산업회사로 키우기 위해 비서실내에 신규 영상 사업팀까지 두고 챙겼었지만 지금은 발코니 확장과 일부 건자재만 만들며 ㈜벽산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1985년 벽산쇼핑㈜을 통해 유통업에 진출했지만 1999년 3월 구조조정계획에 따라 매각했고,1989년 인수한 정우개발㈜,㈜동부해양도시가스 등 정우 계열사들 역시 1999년 정리했다.1991년 유신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해 금융업도 본격화했지만 1998년 대출금 마련을 위해 팔았고,㈜한국케이블TV 전남동부방송을 설립해 종합유선방송(SO)사업도 손을 댔지만 1999년 구조조정 과정에서 정리했다. 대부분의 그룹 사옥도 처분했다. 그룹 40주년 출범과 함께 서울역 앞에 지었던 시가 1100억원 연건평 900평 규모의 그룹 사옥인 ‘벽산 125빌딩’을 포함해 퇴계로 ‘인희빌딩’ 등이 모두 넘어갔다. 벽산 125빌딩은 유명한 건축가 김수근씨의 마지막 작픔으로 유명하다. 전주 백화점, 안양 벽산쇼핑, 부산 남포동 복합상가빌딩 등 유통 사업 관련 부동산도 함께 정리했다. ●3대를 잇는 기독교 사랑 고 김인득 창업주의 3남2녀중 막내딸 가족을 제외하면 지금도 매주 일요일 오전 고 김인득 창업주 때부터 다니던 인사동 승동교회에 나가 예배를 들이며 온 가족이 한자리에 모인다. 김인득 창업주가 6·25때부터 승동교회에 나갔고 장남 김희철 회장도 같은 교회 장로를 지낸 바 있다.3세인 김성식 ㈜벽산 대표이사 사장도 술·담배를 일절하지 않고, 매사 성경이 판단의 기준이 될 만큼 신앙이 깊다는 게 주변의 평가다. 벽산의 기독교 사랑은 가족에서 끝나지 않는다. 시무식은 물론 창립기념식 등 모든 공식행사가 예배로 시작되는 ‘기독교문화’ 회사다. 국내 처음으로 직장예배를 도입한 기업으로 창립 초창기인 1956년 서울 종로 단성사에서 첫 직장예배 이후 매주 금요일 아침 8시30분(일부 계열사는 다름)부터 1시간은 본사와 각 공장, 지점, 현장별로 직장예배를 보고 있다. 기독교를 통해 임직원을 통합해 나간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란 평이다. 벽산건설이 1998년 워크아웃에 들어갔을 때에도 노사가 무분규로 일관, 회사 살리기에 힘을 합했던 것도 기독교 문화가 바탕이 됐다는 설명이다. jhj@seoul.co.kr ■ 오뚝이 정신으로 일군 ‘벽산 56년’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한복음 16장33절) 고 김인득 창업주의 장손자인 김성식 사장이 맡고 있는 ㈜벽산은 최근 수년간 이 회사 주식을 사들이며 끊임없이 M&A 위협을 해온 창투사 아이베스트와 ‘적과의 동침’을 선언했다. 지난해 말 아이베스트가 구주 매출을 통해 벽산 주식 100만주를 주당 1만 5000원에에 팔고 나간 뒤 주가가 1만 1000원대까지 빠지면서 아이베스트는 시세 차익을 얻은 반면 개인 투자자들은 손해를 입어 벽산에 대한 개미들의 원성이 높았다. 특히 벽산은 적대적 M&A를 막기 위해 아이베스트 보유 주식에 대해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해달라는 가처분 신청을 법원에 내는 등 양측이 경영권을 둘러싸고 대립해왔다. 이처럼 수년간 벽산을 괴롭혀온 아이베스트가 최근 대주주의 우호 지분을 자청하면서 두 회사간 구원(仇怨)관계가 일단 봉합된 상태다. 벽산그룹은 56년을 헤쳐오면서 고난도 많았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면서 내실을 다져온 기업이다. 1998년 구조조정에 들어갔을 때에도 노사간 분규없이 한마음으로 대처했던 혼연일체는 지금도 업계의 귀감으로 회자된다. 벽산건설의 경우 워크아웃 당시 채권단과 맺은 목표보다 50%가량 많은 244명이 명퇴했다. 자진해 나간 사람이 많다는 얘기다. 남은 직원들은 상여를 전액 반납해 떠나는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대주주도 4대1 감자를 단행하는 등 책임지는 모습을 보였다. 덕택에 2000년 회사가 흑자로 전환됐고 2002년 말 워크아웃에서 졸업했다. 김희철 벽산건설 회장은 풋백옵션을 행사, 출자전환된 채권단 주식을 2004년 되사면서 회사를 되찾았다. 이에 앞선 지난 1992년 7월. 당시 재계 25위이던 벽산건설은 자사가 시공한 신행주대교가 준공 4개월을 앞두고 붕괴하면서 창사 이래 최대 위기를 맞았다. 부실공사가 원인으로 규명되면서 대대적인 이미지 실추와 함께 영업정지, 단자사 여신 동결 등 악재가 뒤따랐지만 불행중 다행으로 인명 사고가 없어 복구공사비 200여억원 등을 전액 부담, 재공사를 맡아 결자해지로 매듭지었다. 여전히 우환은 끊이지 않는다. 벽산건설 임원 2명이 1999년부터 2005년까지 각각 회사돈 수십억원을 빼돌려 부동산 구입과 주식투자 등에 쓴 혐의로 조사를 받는 등 집안 단속 문제가 붉어져 조사 중이다. 벽산건설 관계자는 “주택 사업 이외에 토목공사 등 포트폴리오를 확대하는 데 주력할 계획이다.”면서 “무엇보다 구조조정을 겪으면서 위축됐던 직원들의 사기와 자신감을 회복시키는 게 가장 큰 과제다.”고 말했다. 벽산그룹 5개 계열사의 2005년 기준 총 매출은 1조 2500억원이며, 이중 벽산건설의 매출이 전체의 61%를 차지한다. jhj@seoul.co.kr ■ 벽산을 만든 전문 경영인들 벽산그룹은 올해로 56년을 헤쳐오면서 가장 훌륭한 전문경영인으로 이 회사 부회장을 지낸 정종득(65) 목포 시장을 꼽고 있다. 워크아웃 조기졸업의 일등 공신으로 지목되는 정 사장은 서울대, 산업은행, 쌍용을 거쳐 1983년 벽산건설에 이사로 입사 1994년 사장이 되면서 워크아웃의 시작과 끝을 지키는 등 벽산과 고락을 함께해온 인물. 특유의 인화력과 결단력으로 조직을 이끌며 대주주인 김희철 벽산건설 회장과 호흡을 맞췄다는 평이다.2005년 5월 시장 출마를 위해 부회장으로 위촉된 뒤 당선과 함께 회사를 떠나 지금은 공직자로 일하고 있다. 김재우(62) 아주그룹 부회장은 1997년 2월 워크아웃에 들어가기에 앞서 ㈜벽산 사장에 취임해 3년 만에 경영을 정상화시킨 능력을 인정받아 아주그룹에 스카웃된 인물. 삼성물산 출신으로 2005년까지 ㈜벽산 부회장 등을 지내며 ‘누가 우리회사 망한다고!!’‘거봐!안 망한다고 했지!!’ 등 벽산 구조조정 성공사례들을 책으로 발간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광주고·건국대 출신의 신광웅(63) 신동아건설 사장도 벽산건설 출신이다. 한신공영을 거쳐 지난 1995년부터 2004년 6월까지 벽산에 적을 둔 바 있다. 벽산건설 부사장을 끝으로 회사를 떠났다. 한편 지난 2004년 뇌물수수죄 재판중 또다시 뇌물수수 의혹을 받아 감옥에서 자살했던 고 안상영 전 부산시장도 벽산건설에서 부회장직을 수행한 바 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환그룹-최종환 명예회장家

    올해로 건설 외길 60주년을 맞는 삼환기업은 현재 남아 있는 유일한 1세대 건설기업이다. 대림산업·삼환기업·삼부토건 3개사만 명맥을 잇고 있지만 창업주가 살아 있는 곳은 삼환뿐이다. 대부분의 건설기업은 90년대 말 IMF 외환위기 전후에 부도가 나 좌초됐다. 삼환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갈린다.70∼80년대 국내에서 내로라 하는 빌딩을 지은 주인공이자 중동에 처음 진출해 중동 붐을 일으킨 기업이지만, 최근엔 80년대에 비해 해외 수주액이 급감하는 등 예전보다 인지도가 많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꾸준한 수익성을 유지하며 ‘환갑’의 값진 전통을 이어간다는 데 이견이 없다. 삼환은 올해 창업 60년을 맞아 국내외로 외형을 확장, 건설 명가로서 제2의 도약을 꾀하고 있다. ●창업 60년 맞아 제2의 르네상스 꿈꾸는 삼환 삼환기업은 올해를 제2 해외 르네상스의 원년으로 삼고 있다. 최근 사우디아라비아 제다공항 확장공사 입찰에서 최저가를 써 1순위 우선협상대상자로 선정돼 계약을 협의 중이다. 건축비가 지난해 삼환기업 해외 매출(600억원)의 4배 규모인 2500억원이다. 해외유전 사업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지난해까지 연 100억원대 수익을 올린 마리브 유전 투자에 이어, 지분투자(4.9%)로 참여한 베트남 가스전 개발사업이 올해 하반기부터 수익을 낸다. 이밖에 지분투자(1.6%)를 한 예멘 마리브 LNG 개발사업도 오는 2009년부터 수익을 낼 전망이다. 국내에서는 3조원대 규모의 대우건설 인수전에도 참여, 건설기업 전통 명맥을 잇기 위해 전력을 쏟고 있다. 창립자인 최종환(82) 삼환그룹 명예회장은 1924년 12월29일 최상림씨와 김림자씨의 5남2녀 중 4남으로 서울 종로에서 태어났다. 종로의 종(鍾)자에 돌림자인 환(煥)자를 붙여 지은 이름이다. 양반이 광화문 중심에서 사대문 밖으로 쫓겨나 사는 것을 몰락으로 여기던 시절이었다. 사대부 출신인 그의 집안은 가세가 기울면서 광화문 중심에서 다동으로, 이어 효자동, 종로4·5가 등으로 밀려났고 그는 종로 4가에서 태어났다.‘종환’이란 이름에는 사대문 안은 벗어나지 않았다는 안도의 뜻이 담겨 있다는 회고다. 훗날(1980년) 창덕궁이 내려다 보이는 종로구 운니동에 20층 규모의 삼환사옥을 세운 것을 두고 그가 남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제 점령기에 초등학교(어의보통학교·현 효제초등학교)를 다닌 그는 글재주가 뛰어나 졸업할 때까지 각종 작문 대회에서 1등을 휩쓸었지만 학업에 뜻을 두진 못했다. 열 살이 되던 해에 궁핍한 살림에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일찌감치 생업 전선에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건설업과 인연을 맺은 것은 그의 형들과의 연관이 깊다. 큰 형인 고 명환씨와 둘째 형인 고 영환씨가 졸업 이후 수도·난방공사 자재를 생산·시공하는 스기야마 제작소에 들어갔는 데 회사에서 쓰다 남은 자투리 파이프를 집에 가져와 가공, 다시 납품하는 식으로 돈을 벌면서 1933년 경동기계제작소를 설립했다. 그는 어의보통학교에 이어 2년제 경성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한 뒤 18세가 되던 1940년 형들의 회사인 경동에 합류했다. ●약관의 나이에 창업…미군 공사로 국내 기반 삼환은 설립 이후 60년대 초반까지 줄곧 주한미군에서 수주한 공사에 전념했다.1945년 해방과 함께 미국 공병대에서 크고 작은 공사를 발주했는데 토목·수도·난방 등 업종별로 공사를 따로 주지 않고 한 업체에 모든 공사를 맡기는 식이었다. 그는 경동기계제작소안에 공사부를 설립해 영업부장으로 뛰며 미군 공사를 수주했다. 한발 더 나아가 하청업체에서 벗어나기 위해 스물 한 살이던 1946년 3월15일 오늘의 삼환그룹 효시인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했다. 큰 형과 둘째 형, 그리고 최 명예회장 삼형제가 합심해 만든 회사란 뜻에서 지은 이름이지만 실질적인 소유주나 최고경영자는 최 명예회장이다. 회사 설립후 8개월 동안 이룬 공사실적만 총 26건 130만원이다. 당시 공무원 월급이 1만원인 것을 감안하면 상당한 액수다.1948년 가을 을지로 2가 119번지 53호를 매입해 신사옥도 마련했다. 1949년에 착공한 강원도 영월 등 7개 광산지역의 미국인 광산기술자용 주택공사는 당시 업계의 부러움을 산 초대형 공사였다.1950년 6·25로 공사는 중단됐고 건물은 불에 타버렸지만 이 공사는 훗날 새옹지마격으로 그에게 전쟁 이후 재기의 발판을 마련해주는 계기가 됐다. 서울 수복후 미군 공사 관계자는 그를 반도호텔(현 롯데호텔)로 불러내 큰 궤짝 하나를 내놓았는데 그 속에는 당시 2000만원이 들어 있었다. 불에 타버려 흔적조차 사라진 건물의 공사비를 뒤늦게 받은 것이다. 주식회사로 전환한 것은 전란 이후 1952년 9월의 일이다. 서울 수복후 전후 복구공사에 힙입어 사세를 키워나가던 중 삼환은 당시 주주 10명이 총 주식 2만주를 발행하면서 주식회사가 됐다. 그 중 최 회장이 1만주, 둘째 형 영환씨가 5000주, 큰 형 명환씨가 500주를 가졌다. ●국내 ‘중동 붐’ 조성…횃불신화로 국제 명성 쌓아 1961년 ‘5·16’은 새 전기를 가져왔다. 수의계약으로 이뤄지던 관급공사가 경제개발계획과 함께 신문에 종종 입찰공고가 나는 일이 생겼고 삼환은 국내 주요 공사를 맡는 ‘건설 명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5·16 이후 삼환이 따낸 최초의 관급 공사는 1962년 발주한 서울 광진구 광장동 워커힐 호텔이다. 이어 경부·호남·영동·남해·동해고속도로 등 각종 토목 공사에 참여했고, 국립극장, 삼일빌딩, 조선·프라자·신라 호텔, 지금은 사라진 남산외인아파트, 여의도 전경련 회관, 국립묘지 현충탑, 포항제철(현 포스코) 공장 등을 지으며 주택·오피스빌딩·토목·플랜트 등 각 분야에서 사세를 확장해 나갔다. 삼환은 국내사업에 만족하지 않았다. 해외진출 가능성을 계속 탐색하던 최 명예회장은 1963년 월남 사이공(호찌민)에 지사를 설립하면서 첫 해외 진출을 시도했다. 정국 혼란으로 4개월 만에 철수했지만 이후 1968년 인도네시아 자카르타에 한국 업체 최초로 지사를 설립한 데 이어 1973년 국내 업계 최초로 중동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했다. 삼환은 사우디에서 네번 연거푸 고배를 마신 뒤 다섯번째 카이바∼알울라고속도로(175㎞) 입찰에서 2400만달러 규모의 공사를 따내며 국내 중동 진출 1호 기업이 됐다. 완공 때까지 3년간 자재 공급난, 종교 문제 등 시행 착오로 적자를 면치 못했다. 그러나 이어 사우디 최대 규모인 제다시(市) 전체를 뜯어고치는 미화사업을 맡으면서 행운을 잡았다. 미화공사를 메카순례기간 전까지 끝내기로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횃불을 켜놓고 야간공사를 강행하던 것을 파이잘 국왕이 보고 감동을 받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삼환은 6000만달러 규모의 대형 공사를 수의계약하게 됐고 ‘횃불신화’라는 말을 남기며 국내 건설업체의 중동 진출 붐을 조성하는 등 명성을 널리 알리는 개가를 올렸다. ●해외 프론티어의 꿈…정체된 90년대 80년대 들어서는 해외시장에 더 집중했다.1978년 미수교국이던 예맨에 진출했고 이를 계기로 1984년 북예맨 마리브 유전개발에 참여하면서 원유사업을 시작했다. 이어 요르단, 파푸아 뉴기니아, 알래스카, 방글라데시, 사할린 등 시장을 개척했다. 국내 기술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제 모임에 적극 참여,1982년 아시아 서태평양 건설연합회인 아이포카(IFAWPCA) 5대 회장에 추대됐고 재임시절 세계건설인대회도 제창했다.1990년대 들어서는 회사 일 보다 민간 외교에 시간을 쏟았다.1992년 한·소 경제협력회 2대 회장으로 선임됐고 재차 연임됐다. 러시아의 정치·경제 여건이 성숙되지 않아 성과를 이루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회한으로 남아 있다. 이런 탓에 90년대 들어 삼환의 해외 실적은 급감했다. 건설협회에 따르면 삼환의 해외공사 수주액은 1982년 당시 5억 8834만 8000달러(한화 6000억원)였지만 10년 후인 1992년에는 10분의1 수준인 624만 4000달러에 그쳤다. 국내 건설 업계의 주요 테마인 아파트 실적도 많지 않다.90년대 후반부터 업계가 경쟁적으로 환상을 담은 아파트 브랜드와 광고에 집중하며 수주전에 열을 올릴 때에도 삼환은 아파트 광고를 하지 않았다. 최 명예회장은 오히려 당시 시류에 대해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 없이’를 통해 “안쓰럽다.”는 평을 내놓았을 뿐이다. 한 때 9개에 달하던 계열사는 현재 6개로 정리됐다. 키친아트로 유명한 양식기 제조업체 경동산업(60년)과 코카콜라 등 청량음료 제조업체인 우성식품(69년)은 모두 1990년대 말 정리됐다. 태양관광(관광·77년)은 삼환엔지니어링(기술용역·76년)에 통합돼 삼환기술개발이 됐지만 설계 업무는 거의 하지 않고 관광업도 계열사 직원 출장을 위한 발권 업무 정도만 한다. 이밖에 우성개발(67년), 삼환까뮤(78년), 삼환종합기계(79년), 신민상호신용금고(78년), 회현상사(78년) 등은 명맥을 잇고 있다. 그러나 건설 명가로서의 국내 입지와 안정적인 매출은 줄곧 유지하고 있다. 건설 계열사를 가진 한화그룹의 1000억원대 대한생명 리모델링 공사를 지난해 수주했고,2007년 준공되는 건축비 595억원 규모의 팬택계열 서울 상암동 R&D센터도 짓고 있다. 삼환기업은 2005년 기준 매출 6612억원, 당기순이익 500억원을 기록했다. 올해 종합 수주액은 1조 5000억원 규모다. 삼환그릅 기준 2005년 매출은 1조 1000억원, 당기순익은 650억원이다. ●교사 부인과 1남1녀의 단촐한 가정 1947년 봄. 삼환기업공사의 30대 청년 사장으로 뛰면서 당시 숙명여학교 교사이던 고 채광영 여사와 2년여 열애 끝에 1949년 4월 결혼했다. 최 명예회장은 부인을 만났을 당시 “‘아!이 여자다.’라는 느낌이 퍼뜩 들어 프러포즈를 했다.”고 언론을 통해 회고한 바 있다. 부인 채씨는 그를 홀로 남겨둔 채 1999년 노환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다. 부인과의 사이에 1남1녀를 두고 있다. 가업을 승계한 외아들 최용권(56) 회장은 동갑내기로 고 한정대 전 대한페인트잉크(DPI) 회장의 3녀인 봉주(56)씨와 1974년 결혼해 슬하에 2남2녀를 두고 있다. 경기고를 졸업하고 미 보스턴대를 나온 용권씨는 미 유학중 같은 유학생 신분이던 봉주씨를 만나 결혼했다.1975년 삼환기업 기획조정실장으로 입사해 8년 만인 1982년 32세 나이에 삼환기업 사장에 취임했다. 이어 삼환이 창립 50주년을 맞은 1996년 9월 회장으로 등극,2세 경영 체제를 굳혔다. 선친인 최종환 명예회장은 ‘바늘로 찌를 구멍’은 있어 보였던 데 비해 최용권 회장은 ‘찌를 구멍’조차 없는 사람이란 평이 임원들 사이에서 나온다. 최 명예회장의 손녀이자 최용권 회장의 장녀 영윤(31)씨는 이준용 대림산업 회장의 며느리가 됐다. 이 회장의 3남 해창(35)씨와 1999년 3월 결혼하면서 국내 두 전통 건설기업은 사돈관계를 맺게 된 것. 대림의 창업주인 고 이재준 선대 회장과 최 명예회장은 건설 1세대로 각별한 관계를 유지해온 것으로 알려졌다. 해창씨는 현재 대림산업 계열사인 종합물류회사 대림H&L의 이사로 재직 중이다. 아는 사람 소개로 만나 2년여 교제끝에 결혼했다. 다른 손녀·손자들은 아직 모두 학생이다. 장손주 최제욱(29)씨는 예일대 정치학과를 졸업한 뒤 컬럼비아대에서 MBA 과정을 밟고 있고, 최지연(26)씨는 세계 최고의 미술대학 중 하나로 꼽히는 미국 RSID에서 공부 중이다. 막내 최동욱(22)씨도 콜롬비아대에서 학부 과정을 밟고 있다. ●형제들과의 인연…삼환에 친인척 1명도 남아 있지 않아 삼환은 인척들의 경영 참여 과정에서 불협화음이 없었던 것을 자랑스럽게 내세우지만 친·인척이 맡았던 경동산업과 우성식품은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그리고 지금은 친·인척 중 단 한 명도 삼환에 적을 두는 이가 없다. 맏형 고 최명환씨는 6·25 당시 자신이 설립한 삼환기업의 모체인 경동기계가 잿더미로 변하자 동생 최 회장과 함께 삼환기업공사를 설립한 뒤 주주와 이사로 활동했다. 그의 아들인 동국대 출신의 용근(67)씨는 계열사인 우성식품 이사, 삼환기업 사장 등을 맡다가 1996년 삼환까뮤 사장직을 끝으로 삼환을 떠났다. 둘째 형인 고 최영환씨는 국내 최초 강관회사인 한국강관의 3인 발기인으로 참여하면서 삼환을 떠났는데 한국강관의 부회장까지 맡은 바 있다. 이대 영문과를 졸업한 그의 차녀 계자(64)씨는 18대 과학기술부 장관을 지낸 권숙일씨와 결혼했다. 장남 용재(56)씨는 1993년 삼환의 계열사로 지금은 사라진 키친아트 등 양식기를 제조했던 경동산업의 사장을 맡은 바 있다. 차남 용진(53)씨는 ㈜유창 사장으로 삼환과는 무관한 사업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셋째 형 고 최경환씨는 1958년 삼환의 관계사로 설립된 양식기 제조업체인 경동산업의 대표이사 회장을 지냈다. 이 회사가 정리되기 직전인 1999년까지 재직했다. 그의 아들 최용철(60)씨도 이 회사 대표이사 부회장을 지냈다. 경동산업은 인건비 상승과 경쟁 심화로 자금난을 겪다 94년 법정관리에 들어갔고 2000년 다시 법정관리 퇴출 명령을 받으면서 정리됐다. 그의 장녀 최형인(57)씨는 한양대 인문과학대 연극영화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고 최경환씨의 사위이자 최형인씨의 남편이 삼성의 반도체 신화를 이끌어온 이윤우(60) 삼성전자 기술총괄부회장이다. 막내 동생인 최정환(73)씨는 삼환이 코카콜라 부산·경남지역 판매권을 가진 우성식품을 1969년 창립하면서 이 회사 사장으로 취임했다. 연간 매출 1300억원대로 한 때 부산지역 대표 식품회사로 명성이 높았지만 방만경영과 과다 부채를 이유로 회사 경영이 어려워지면서 최정환씨는 형인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1997년 4월 경질됐다. 이 회사는 1997년 코카콜라 부문을 매각한 뒤 같은해 말 부도처리됐다. 최정환 전 회장은 서울대 상대, 산업은행을 거쳐 1968년 삼환에 입사했다. 이 회사 사장을 지낸 최정환 회장의 장남 최용석(47)씨는 회사가 문을 닫은 뒤 새천년민주당 창당발기인으로 활동하는 등 한 때 정치에 뜻을 두기도 했지만 지금은 정리하고 지성산업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장녀 영혜(45)씨는 건설부 장관, 상공부 장관을 지낸 고 장예준씨의 차남 동욱(48)씨와 결혼했다. jhj@seoul.co.kr ■ 故 정주영 명예회장과 ‘형님-아우’ “아, 이리도 황망히 가셨습니까? 아직도 회장님이 하셔야할 일이 많이 남아있는 데 무얼 그리 급히 가셨습니까? 여든 여섯의 춘추가 적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 경제의 영원한 등불로 언제나 함께하시기를 기도했는데 이리 가시니 이별의 안타까움과 아픔이 너무도 시리게 느껴집니다. 정주영 회장님.” 최종환 명예회장은 2001년 3월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 타계한 직후 당시 서울신문을 통해 이같은 조사를 남긴 바 있다. 두 사람은 생시에 형님-동생으로 서로를 부르며 경쟁보다는 조언을 구하고, 돕고 의지하는 형님과 아우로서의 정이 돈독했다. 그는 건설 1세대 중에서도 특히 고 정 명예회장, 고 이재준 대림산업 명예회장, 그리고 조정구 삼부토건 명예회장을 존경하면서도 가깝게 지낸 인물로 꼽았다. 자서전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없이’에서 고 정 명예회장에 대해 “타고난 능력과 자질 이외에 뛰어난 판단력과 결단력, 저돌적인 돌파력에 감탄한 적이 한두번이 아니었다.”고 평했다. 고 정 명예회장은 전경련 회장으로 재직하면서 최 명예회장에게 부회장을 역임토록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을 최 명예회장에게 처음 소개시켜준 사람도 고 정 명예회장이라고 덧붙였다. 고 조정구 삼부토건 회장에 대해서는 “나는 상대방의 잘못이 보이면 즉석에서 쏘아대는 성격이지만 그 분은 어떤 경우에도 참고 있다가 나중에 조용한 목소리로 상대방이 스스로 깨닫도록 설명해 주는 등 깊은 인내의 미덕을 갖춘 분”이라고 회고했다. 고 조 회장이 건설협회 회장을 맡을 때 최 명예회장은 이사로 그를 도왔다. 최 명예회장은 이들과 함께 황무지나 다름없던 이 땅에서 건설업을 일궈냈다. 그러나 지금은 마지막 남은 건설 1세대로 원로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서울 가회동 자택에서 지내고 있으며, 건강이 예전같지 않다. 수십년간 매일 30분씩 해온 ‘대나무 밟기’를 건강 비결로 소개했던 그였지만 요즘은 하지 않는 것으로 전해진다.1996년 아들에게 모든 경영을 물려주고도 일주일에 최소한 사흘은 회사에 나왔지만 올들어선 일주일에 병원가는 날 하루 정도만 오전에 회사에 들른다. 평상시처럼 직원들과 지하 구내 식당을 찾는 등 검소한 모습은 그대로라는 평이다. ■ ’60년전통’ 삼환을 만든 사람들 삼환이 60년 건설 명가의 전통을 지켜올 수 있었던 데에는 전문경영인들의 공이 컸다는 평이다. 최종환 명예회장이 꼽는 최고의 CEO는 경성공업학교(현 경기공고) 출신의 고 이창호 사장이다. 부사장직으로 순직한 뒤 사장으로 추서됐고, 최 명예회장으로부터 ‘고락을 함께한 벗’으로 불리기도 했다. 최 명예회장은 지난 1977년 회사장으로 치러진 고 이 사장의 영결식 조사에서 “지금 내 오른팔이 떨어져 피가 흐르고 여며드는 것만 같은 아픔이 밀어 닥치는군요. 그러나 당신의 유지를 받들어 나는 기어코 우리 삼환을 세계 속의 삼환으로 만들고야 말겠습니다.”라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다. 격무로 일관하다 신병을 갖게 되어 휴양을 하다가도 중동 현장으로 달려가는 등 투철한 사명감은 지금도 귀감이 되고 있다. 그가 사망한 이듬해에는 ‘회사를 위해 노력한 사원에게는 응분의 보상이 꼭 있어야 한다’는 취지로 연금제도와 사원주택단지조성사업이 시작되기도 했다. 전동진(74) 사장도 삼환에서는 전설로 불리는 CEO중 한 사람이다.1975년 월남이 패망할 당시 월남지사장으로 근무하던 중 하청업자 공사대금 지불 등 잔무 처리를 위해 남아 있다 8개월간 공산 치하에 억류된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된다.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1968년 육군 소령으로 예편한 뒤 삼환기업 중기부 과장으로 입사한 이후 1996년까지 삼환기업·삼환엔지니어링·삼환까뮤 등 계열사 사장을 두루 역임했다. 지금은 삼환의 육영재단인 우성문화재단에서 이사로 재직중이다. 행정고시 출신의 최석원(75) 고문은 내무부 치안본부장, 노동청장, 부산시장, 건설부 차관 등을 역임한 뒤 삼환의 해외사업이 꽃을 피우던 1982년 사장대우 상임고문으로 영입됐다. 지금도 우성문화재단 이사장으로 재직하며 노년까지 삼환과의 인연을 지키고 있다. 주현진기자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노래로 강연 나선 통일운동가 백기완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노래로 강연 나선 통일운동가 백기완씨

    ●전국과학기술노조 첫 테이프… 올 100회 목표 살면서 우리에게 유행가는 무슨 의미로 다가올까. 또 어떤 그림자로 남을까. 주로 사랑과 이별, 기다림과 만남, 아픔을 다룬다. 한 시대를 풍미하다 향수와 추억으로도 남는다. 저마다의 다른 의미도 있겠지. 민족의 비극을 온몸으로 겪은 세대들에겐 특히 각별하다. 한많은 아픔 속에, 멍든 가슴을 때때로 비틀어 쥐어짜며 회한과 통한의 눈물을 펑펑 흘리게 하겠지. 지난 16일 경기도 광주시 오포읍 소재의 한국노동교육원 대강당. 이 시대의 통일운동가로 잘 알려진 백기완(73) 통일문제연구소장이 특유의 검정색 두루마기 차림으로 오랜만에 강단에 섰다. 전국과학기술노조에서 초청한 자리였다. 객석에는 전국에서 온 노조 간부 100여명이 앉아 있었다. 연단 한쪽에 ‘노래에 얽힌 인생 이야기’라는 플래카드가 눈에 들어왔다. 이날은 백 소장이 ‘노래로 연속 강연’ 첫 테이프를 끊는 날이기도 했다. 모처럼 백 소장의 ‘노래에 얽힌 인생’ 강의를 듣기 위해 일반인들도 소문을 듣고 참석, 눈길을 끌었다. 잠시 후 백 소장이 “여러분은 어렸을 적부터 책을 통해 지식을 얻고 의식을 키웠지요.”라고 천천히 말문을 열었다.“여기에 있는 백기완은 그러지 못했어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첫째가 가난, 둘째가 어머니가 들려준 옛날 이야기, 셋째가 우리 민족의 문화, 민중의 문화가 나를 키웠지요.”라고 분위기를 집중시켰다. 이어 문화 가운데서는 노래, 그 중에서도 유행가가 자신을 키우는데 보탬이 됐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고 토로했다. 노래에 얽힌 한많은 인생사는 이렇게 풀어나갔다.‘세세연년’을 먼저 언급했다. “우리나라에는 노래를 잘 부른 가수가 백년설, 고복수, 남인수 이 세 분입니다.‘세세연년’은 1939년도엔가 백년설씨가 불렀지요. 어쨌든 45년 해방 직전인가 그랬어요. 고향(황해도 은율)에서 조막손인 사촌형과 함께 지낸 시절이지요. 조막손은 양손의 열 손가락이 하나도 없는 것을 말합니다.” 큰아버지의 아들, 즉 사촌형이 조막손이 된 까닭을 설명했다. 어린 백기완의 큰아버지는 독립운동으로 12년동안 감옥을 드나들었다. 이 과정에서 큰아버지는 모진 고문을 당했다. 일본 경찰들은 손바닥을 지지고 다리와 갈비뼈를 부러뜨리고 온갖 만행을 저질렀다. 견디다 못한 큰어머니는 어디가서 식모살이라도 해야겠다며 집을 나가버렸다. 추운 겨울날 밤, 사촌형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찾겠다며 마당으로 뛰어나가다 엎어지면서 그만 모닥불더미에 넘어지고 말았다. 한참만에 누군가에 의해 꺼냈을 땐 이미 열손가락이 다 타버린 상태였다. 이후부터 사촌형은 아예 입을 자물쇠처럼 닫아버렸다. 꼭 할 말이 있으면 어디서 들었는지 ‘너 없는 이 세상은 불꺼진 항구다’라는 노래만 불렀다. 백 소장은 잠시 당시를 회상하더니 허공을 바라본다.“여러분 한번 불러볼까요.”라고 했다. 주저없이 “예”라는 대답이 나왔다. 백 소장은 손으로 마이크 옆의 탁자 위를 손바닥으로 타닥타닥 치면서 반주를 한다.“산홍아 너만 가고 나만 혼자 버리기냐/너 없는 이 세상은 눈 오는 벌판이다/달없는 사막이다 불꺼진 항구다.” 노래를 마친 백 소장의 목소리가 이내 울부짖음으로 격해진다.“내가 초등학교 입학 1년전, 일본 경찰이 찾아와 노력봉사에 안나온다고 행패를 부리자 참다못한 조막손 형님은 손가락 없는 주먹으로 일본 경찰을 때려눕혔어요. 물론 도망을 갔지요. 하지만 조막손 형님은 6·25전쟁때 미군의 폭격을 맞아 그만 두다리를 다 잃고 말았습니다. 세상에 이런 망할놈의 비극이 어디 있습니까.”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흐르는 눈물을 두세번 닦는다.“이 노래는 절망속에서 불렀어요. 집나간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 빼앗긴 나라에 대한 그리움으로 말야.”라고 북받치는 감정을 애써 참았다. 유행가는 절망을 딛고 일어서게 하는 그리움의 불꽃이자 저절로 내쉬는 한숨이기도 했다고 부연했다. 하지만 요즘 유행가에는 이런 불꽃도 한숨도 없다며 안타까워했다. ●절망의 개인사·분단 아픔 유행가로 풀어 ‘비내리는 고모령’에 이르러서는 분단의 비극을 뼈아프게 강조했다. 한맺힌 사연은 이러했다. 6·25 당시 백 소장은 17세였다. 바로 윗형(6·25때 전사)에 이어 자신도 피란길에 징집됐다. 그런데 징집자들을 태운 군용차가 갑자기 논길 옆으로 엎어졌다. 그는 부상당한 채 논두렁에 곤두박질쳤다. 한참만에 깨어보니 주변은 온통 칠흑같은 어둠뿐이었다. 사람들은 온데간데 없고 혼자만 처박혀 있었던 것. 너무 겁이 나 ‘사람 살려달라.’고 아무리 외쳐도 메아리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저 발 닿는대로 산비탈을 막 돌아서 나올 무렵이었다. 어디선가 어억어억 울음섞인 노래가 나지막이 들려왔다.“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 가랑잎이 휘날리는 산마루턱을 넘어오던 그 날 밤이 그리웁고나…” 백 소장은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노랫소리가 들리는 집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도착해보니 젊은 농민이 이미 숨을 거둔 피투성이의 아내를 안고 ‘비내리는 고모령’만 처절하게 부르고 있었다. 아내가 미군에게 겁탈당하는 광경을 보고 덤벼들었다가 아내는 총에 맞아 죽고 남편은 부상당한 채 피를 흘리며 아내를 부둥켜안고 있었던 것. 남편은 피를 흘려 죽어가면서도 ‘어머님의 손을 놓고 돌아설 때엔 부엉새도 울었다오 나도 울었소∼’만을 계속 반복하면서 부르다가 피눈물로 쓰러졌다. “여러분 전쟁은 이처럼 죽이고 또 죽이는 일이지요.‘비내리는 고모령’은 바로 우리 민족의 비극을 상징하는 노래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이어 ‘녹슬은 기찻길’을 목놓아 부른다.“휴전선 달빛아래 녹슬은 기찻길, 어이해서 피빛인가 말 좀 하려마. 전해다오. 전해다오. 고향잃은 서러움을. 녹슬은 기찻길아. 어버이 정그리워 우는 이 마음….” 백 소장은 이날 모두 11곡의 노래를 소개할 예정이었으나 7곡밖에 풀어내지 못했다. 이튿날 오후 서울 종로구 명륜동에 있는 통일문제연구소를 찾았다.1층짜리 한옥집 대문에 벽시 ‘새해맞이’가 첫눈에 들어온다. “야, 임마/춥고 배고프지/하지만 제 아무리 눈이 캄캄해도/눈깔 있잖아/그것 하나만큼은/펄펄 살아있어야 하는거여 임마/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는 줄 알가서/마침내 꽝꽝 가로막힌/돌산도 뚫리는 거야 임마/그러시던 우리 아버지의 가래끓는 한말씀/딱 그 한말씀만 쓸어안고 새해를 맞았다.” ●“재기위해 몸부림칠때 민주인사들 외면” 새해 첫날 떡국도 못먹고 굶는 아들에게 아버지가 해주었던 메시지라고 설명했다.10년전부터 매년 신년초에 연구소 대문에 내건다. 백 소장은 연구소가 어려웠던 시절을 얘기하면서 “입도선매식으로 책을 쓰며 재기를 위해 몸부림칠 때 철거민들은 몇백부씩 사주었지만 정작 민주화를 외쳤던 사람들은 단 한권도 안사주더라.”는 섭섭함을 강하게 표시했다. 아울러 고통이 있을 때마다 ‘한발자욱만 더’(벽시)라는 각오를 다지면 걸어왔단다. 백 소장에게 나머지 4곡, 즉 ‘울고넘는 박달재’‘고향설’‘달도 하나 해도 하나’‘사랑만은 않겠어요’의 사연을 풀어달라고 거듭 요청을 했다. 그러자 “몇가지 조건이 있어. 그걸 들어준다면 하지.”라고 전제했다.‘울고넘는박달재’에서는 땅콩팔이 소녀,‘고향설’에서는 전장에서 보내온 형의 편지,‘사랑만은 않겠어요’에서는 옥살이할 때의 사연 등이었다. 얘기하는 도중 자꾸 그때가 생각나는지 중간에 몇번이나 그만두자며 눈가를 훔치기도 했다. “이봐 김 기자, 내게 남은 것은 눈물 두방울이야. 하나는 한숨의 눈물이요, 다른 하나는 아쉬움의 눈물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울면서 노래하고, 강연하고, 이런 노인이 전세계 어디 있겠어. 서울신문 노조에서 초청하겠다는 내용을 기사에 반드시 넣으라고.” 백 소장은 또 “유행가를 결코 찬양하지 않아. 살다보니 들려왔을 뿐이야. 부정부패에 맞서, 민족 반역자 타도를 위해 용감했던 백기완이 노래에 얽힌 한가닥, 우리 문화의 사연을 얘기하려는 것이야.”라고 목소리를 높인다. 아울러 “올해 100회정도 강연할 생각이니 초청을 하려면 통일문제연구소(02-762-0017)로 연락하라고 그래.”하면서 밖으로 쫓아내다시피했다. 주말매거진We팀장 km@seoul.co.kr 사진 광주 이언탁기자 utl@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최근 펴낸 책 ‘부심이의 엄마 생각’에는 이력을 이렇게 적고 있다. ▲황해도 은율 구월산 밑에서 태어남(1933년). ▲초등학교만 다니고 혼자서 공부함 ▲젊은날엔 농민운동, 나무심기운동, 빈민운동을 함(54∼61년) ▲백범사상연구소를 세움(67년) ▲통일문제연구소로 바꿈(84년∼ ) ▲요즘은 통일문제연구소장, 계절마다 내는 책 ‘노나메기’ 발행인 ■ 저서 ‘항일민족론’‘통일이냐 반통일이냐’ 이외 수필집=‘자주고름 입에 물고 옥색치마 휘날리며´,‘나도 한때 사랑을 해본놈 아니요´,‘벼랑을 거머쥔 솔뿌리여´,‘백기완의 통일 이야기´,‘장산곶매이야기´,‘이심이 이야기´,‘우리겨레 위대한 이야기´,‘그들이 대통령되면 누가 백성 노릇할까´, 시집=‘백두산천지´,‘젊은날´, 영화극본=‘대륙´,‘단돈 만원´,‘쾌지나 칭칭 나네´ 등.
  • 18일 대구지하철참사 3주기

    192명이 사망하고 151명이 부상한 대구지하철 화재참사가 18일로 3주기를 맞았다. 추모행사는 사고가 일어났던 중앙로역과 합동분양소가 마련됐던 대구시민회관 두 곳에서 별도로 이날 열린다. 대구지하철참사희생자대책위원회 측과 2·18대구지하철참사유족회 측은 “추모행사에 대한 취지나 의미부여 등 접근 방법이 달라 유족 단체별로 각각 행사를 진행키로 했다.”고 밝혔다. 이에 따라 대구시민회관 광장에서는 희생자대책위가 주최하는 추모 행사가 유족과 각계 인사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리고 중앙로에서는 유족회가 별도의 제단을 마련해 분향과 헌화 등 간소한 추모식을 가진다. 151명의 부상자 가운데 4명이 사고후유증으로 세상을 떴다. 나머지 부상자들도 상당수가 후유증에 시달리고 있다. 신모(58·여·대구시 동구 방촌동)씨의 경우 호흡기 부상과 정신질환으로 병원치료를 받았지만 완치되지 않고 있다. 또 김모(43·여·대구시 서구 평리동)씨는 보상금 수령 문제 등으로 남편과 사이가 나빠져 끝내 이혼했다. 후유증을 앓고 있는 강모씨 등 부상자와 가족 등 17명은 대구시와 대구지하철공사를 상대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으나 패소했다.‘보상금을 받고 합의서를 작성한 뒤 예상할 수 없는 후발손해에 대해서는 배상책임이 없다.’는 이유다. 희생자 가운데 6명은 아직도 신원이 확인되지 않고 있다.대구 한찬규기자 cghan@seoul.co.kr
  • [우리구 최고야! 강서] 프로 뺨치는 ‘구립극단’

    [우리구 최고야! 강서] 프로 뺨치는 ‘구립극단’

    저는 지난 2004년 3월에 창단한‘강서구립극단’에서 현재 2년 동안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전형재입니다. 연극계에 입문한 지는 17년이 됐습니다. 우리 극단 연극은 그동안 항상 전회 매진을 기록했습니다. 전 강서구립극단이 프로 극단과 견주어 뒤지지 않는 극단이라고 생각합니다. ●연극 동아리서 성장… 공연마다 만원 2003년초 우리는 구민 가운데 연극 유경험자와 관심을 가진 사람들 27명으로 출발한 연극동아리였습니다. 그 뒤 연극인 송미숙씨 등 전문 연극인들을 초빙,6개월간 배웠습니다. 그때 저는 외부강사로 강서구립극단에 합류했습니다. 연습할 장소가 없어 발산동 동사무소 등에서 연습을 했습니다. 배우로 거듭나는 힘든 과정이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탈락자도 나왔습니다. 하지만 대부분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진짜 배우가 되고 싶다는 열정들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전문 배우가 아니라는 안이한 생각은 통하지 않았습니다. 지난 2003년 10월11일 마침내 강서구민회관 대공연장에서 ‘동의보감 허준’으로 첫 공연을 했습니다. 당초 걱정과 달리 관객의 반응은 뜨거웠고, 극장의 750석이 모두 차 매진될 정도로 성황을 이뤘습니다. 그때 기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창단 기념작 기립박수 ‘감동´ 우리는 성공 가능성을 확인했고 2004년 3월초 오디션으로 역량있는 배우들을 선발, 강서구립극단을 창단했습니다. 창단 작품으로 ‘내 날씨에 따라 변할 사람 같소?’를 정했습니다. 하지만이 공연을 하기엔 배우들의 부담도 컸습니다. 수준이 높은 정극이었기 때문입니다. 연습할 때 비명이 터져 나오기 했습니다.“나 더 이상은 못해.”, “하실 수 있어요.” 하지만 캐스팅에 들어가자 배우들의 눈빛이 비장했습니다. 혹독한 훈련은 계속됐고 중간에 발목을 다치고 팔이 부러지는 부상도 발생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해냈습니다. 처음 관객이 실망할 수도 있다는 걱정은 사라지고 공연이 끝나자 한동안 기립박수가 이어졌습니다. 이날 감동을 잊을 수 없습니다. 마흔이 넘은 한 주부는 그동안 연극 연습이 지나치다고 남편한테 불평을 많이 들었는데 연극을 본 뒤 남편이 팬이 됐답니다. 요즘 길에서 저를 알아보는 구민이 적지 않습니다. 대학로까지 가지 않고 가까운 곳에서 좋은 연극을 볼 수 있게 해줘 고맙다는 말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매년 2∼3차례 정기공연을 통해 구민들이 연극을 즐길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있습니다. ●게임보다 연극이 좋다는 청소년 있어 ‘밝은 미래´ 올해 초 청소년 연극교실을 개최했습니다. 게임보다 연극이 좋다는 청소년 30여명은 4주 동안 연기 체험을 통해 연극과 친해졌습니다. 처음엔 ‘청소년들이 순수 예술을 좋아할까’하는 걱정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우였습니다. 연극교실에 참여한 청소년 가운데 70% 이상은 이미 우리의 공연을 본 아이들이었고 또 대부분 연극에 관심이 많고 정말 원해서 참여한 의욕이 넘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히려 연습을 할수록 타성에 젖지 않은 자유분방한 연기를 하는 이들을 보면서 연극에 대한 희망과 꿈을 키웠고, 연극교실 운영이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판단했습니다. 앞으로도 겨울방학마다 연극교실을 열어 아이들에게 연극에 대한 꿈과 희망을 심어주려 합니다. 그동안 구민 1만여명이 우리의 공연을 관람했습니다. 우리 강서구립극단은 ‘생활이 여유로운 문화 강서’라는 창단 초기의 취지를 잊지 않을 것입니다.20대부터 50대까지 다양한 연령층으로 구성된 우리 극단이 더 좋은 연극을 위해 매일 구슬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즐겁습니다. 우리는 언젠가 서울시 자치구에서 가장 훌륭한 문화예술단체가 될 것입니다. 전형재 강서구립극단원
  • e세상에 ‘프로튜어’ 뜬다

    e세상에 ‘프로튜어’ 뜬다

    올해 핫 키워드로 등장한 ‘프로튜어’가 인터넷상의 신진세력으로 떠올랐다. 프로튜어(Proteur)는 프로페셔널과 아마추어의 합성어로, 전문가 못지않은 분석력과 관련 지식으로 무장한 ‘온라인 이웃’을 뜻한다. 이들은 네티즌의 입소문을 타고 미니홈피나 블로그상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영화·요리·인테리어 등 이들의 활동영역은 무한대다. LG경제연구원은 지난해 말 ‘2006년 히트상품 예측’이란 보고서를 통해 프로튜어를 독일 관련 문화상품과 함께 10대 아이템 가운데 하나로 꼽았다. 포털업계도 자체적으로 콘텐츠를 생산하는 프로튜어의 활동이 양질의 정보를 찾는 네티즌들을 끌어들인다는 점을 알고 프로튜어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싸이월드 ‘오픈테마’에는 전문 영화평론가 못지않은 영화리뷰로 1700만 회원을 사로잡고 있는 프로튜어 3인방이 있다. 주인공은 민용준(25·학생), 송승범(26·무직), 김정오(28·학생)씨. 이들은 영화와 무관한 직업이지만 영화에 대한 애정과 관심을 전문가다운 진지함과 노련한 글솜씨로 풀어내고 있다. 이들 중 가장 많은 리뷰수를 자랑하는 민씨는 이틀에 한번꼴로 영화를 보고 리뷰를 꼬박꼬박 남기는 열혈 영화 마니아다. 네티즌의 호응도가 높은 민씨의 리뷰는 오픈테마에서의 하루 조회수가 1만건에 이르고 있다. 요리 부문의 걸출한 프로튜어는 김용환(36)씨. 그는 ‘나물이네’(www.namool.com)라는 자신의 홈페이지에 반찬이나 국 등 생활 속 요리를 복잡한 요리도구 없이 쉽고 간단하게 만들어 올리고 있다. 하루 방문객만도 1만여명. 지금까지 총 600만여명이 다녀갈 만큼 스타로 급부상했다. 나물이의 요리비법은 자취생들의 바이블이기도 하다. 요리교육은 한번도 받은 적이 없지만 감각이 돋보이는 요리들은 당장 잡지에 실려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블로그 ‘제나의 작은 행복’(http:////blog.naver.com/ehahan)을 운영하는 제나씨도 네티즌들로부터 사랑받는 인테리어 프로튜어다. 제나(본명 한은하·33)씨는 자신이 즐기는 집안 꾸미기를 네티즌들에게 소개함으로써 프로 주부에서 온라인상의 프로튜어로 거듭났다. 남편이 밖에서 주워온 나무, 남들이 버린 소품 등을 적극 재활용해 단조로운 집안을 화사하게 탈바꿈시키는 생활 속의 아이디어를 공개하는 제나씨의 블로그에는 이미 40만명이 다녀갔다. PR게이트 이선민(27·여)씨는 “프로튜어는 프로처럼 한 단계 위가 아니라 네티즌들과 동일 선상에서 취미생활을 공유하기 때문에 인기를 끄는 것”이라며 “전체 네티즌의 1% 정도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용규기자 ykchoi@seoul.co.kr
  •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광그룹-故 이임용 창업주家

    [2006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태광그룹-故 이임용 창업주家

    태광그룹은 겉의 화려함보다 내실을 추구한다. 재벌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사옥도 초라하기 그지없다. 서울 중구 장충동 옛 동북고등학교 교사(校舍)를 30년여년 동안 그룹 사옥으로 사용하고 있다. 여타 재벌과 달리 초고층 호화 사옥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는다. 재계 서열 30위권이면 서울 광화문 한복판이나 강남에 번듯한 빌딩을 사옥으로 가질 수 있다. 하지만 그룹 관계자는 “6층짜리 학교 건물이지만 아직 쓸 만하다.”고 말한다. 겉보다 속을 중시하는 태광의 사풍이 여실히 읽혀진다. 이같은 경영철학은 국내 재벌 가운데 재무구조가 가장 탄탄한 그룹의 반열에 오르게 했다. 이는 창업주인 고(故) 이임용 회장 때부터 관통하는 ‘내실경영’이 면면히 이어진 결과다. ●대쪽 같은 선대 회장의 결혼과 창업, 그리고 성장 창업주인 고 이 회장은 지난 1921년 경북 영일군에서 중농이었던 부친 이우식씨와 모친 정막랑씨 사이의 3남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이 창업주는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간조(簡井)실업학교를 졸업한다. 그는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 등으로 일본의 정세가 혼란스러워지자 이듬 해인 42년 귀국길에 오른다. 이후 부친의 권유로 당시 22세 청년이던 그는 동네에 사는 이선애씨와 혼례를 올렸다. 신부 이씨는 이 창업주의 부친과 친분이 두터웠던 한동네 유지인 이송산씨의 맏딸이다. 민주당 총재를 지낸 이기택씨와 ‘창업 동지’ 이기화(태광그룹 회장까지 지냄)씨는 이씨의 남동생이다. 이기화씨는 부산고·서울대 화공과를 졸업한 뒤 이 창업주와 오늘의 태광그룹을 일궜다. 이 창업주는 야당 거물이던 이기택씨와 처남매부지간이란 이유로 군사정권 시절 여러차례 세무조사를 받는 등 혹독한 시련을 겪었다. 처남이 유명한 정치인이었던 게 이 창업주에게는 결코 득이 아니었던 셈이다. 그는 “기업은 절대 정치와 연결돼선 안 된다.”며 사업 외에는 한눈을 팔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찍히면 죽던 서슬퍼런 군사정권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정경 분리를 평생의 신조로 삼았기 때문이다. 베테랑 세무조사 요원들을 투입, 몇 날 며칠을 털어도 먼지 하나 나오지 않았다는 것은 한국 기업사에 전례없는 일이다. 이씨와 중매 결혼한 이 창업주는 공직(면사무소) 생활을 하며 단란한 가정을 꾸린다. 그러던 그에게 결정적인 전환점이 찾아왔다. 바로 6·25전쟁이다. 1951년 공직을 접은 이 창업주는 전쟁 이듬해인 1954년 부산 문현동에 모직 공장을 차리고 태광산업사를 설립한다. 이 회사가 바로 태광그룹의 모체다. 이후 1961년 전 삼호그룹 조봉구 회장과 동업을 시작했으나 동업은 오래가지 못했다. 이 창업주는 조 회장과 결별한 뒤 부산 가야동에 새로운 공장을 신설하며 태광산업사를 주식회사로 출범시킨다. 초기 태광은 이 창업주와 이선애씨가 함께 일궈냈다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이선애씨가 부산에서 소규모 직물공장에 손을 댔고 기업이 커지면서 이 창업주는 공무원 생활을 그만두고 기업경영에 합류했다. 이후 태광은 섬유를 기반으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한다. 박정희 정권이 경제 개발과 수출에 강력한 드라이브를 걸면서 아크릴을 생산하던 태광은 눈부신 호황을 누렸다. 당시 아크릴은 양모 대체품으로 수요가 많았고 경쟁업체가 적어 태광의 고속 질주를 견인했다. 이 창업주는 스판덱스·나일론 등으로 품목을 다양화했다. 섬유 호황기인 1970년대까지 내놓은 제품마다 시장의 돌풍을 일으켜 국내 최대의 섬유업체로 성장했다. 태광은 이 시기에 동양합섬, 고려상호신용금고, 흥국생명, 대한화섬, 천일사 등을 잇달아 인수하며 몸집을 불려 나갔다. 화섬·석유화학에 금융이 붙으면서 태광은 본격적인 성장과 함께 그룹의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도약기를 맞은 셈이다. ●휴일에도 은행 이자는 큰다 태광그룹은 은행돈을 거의 안 쓰는 기업으로 유명하다. 타계한 이 창업주의 근검절약과 소탈함은 재계에서도 정평이 나 있다. 타계하기 전까지 이 창업주가 살던 서울 장충동 2층 양옥집은 지금도 부인 이선애(78)씨가 지키고 있다. 이 집에는 30∼40년 된 옛 가구들이 그대로 있다. 회사 관계자는 “현대 정주영 회장에 버금갈 정도로 검소했다.”고 이 창업주를 회고한다. 그는 해외이든 국내이든 출장길에는 새로 지은 고급 호텔을 이용하는 법이 없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수십년 동안 단골로 다닌 낡은 호텔을 고집했다는 것이다. 점심도 설렁탕 한 그릇으로 후다닥 끝낼 정도로 무척 소탈했다. 이 창업주는 “은행돈을 빌리면 토·일요일 등 은행이 쉬는 동안에도 이자는 불어난다.”며 무차입 경영을 추구했다. 돈을 빌려 문어발식으로 확장하지도 않았다. 번 만큼 투자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매출 규모 1조 3000억원인 모기업 태광산업의 부채 비율이 거의 제로인 것도 이같은 경영철학에서 비롯됐다. 절약 경영과 남의 돈을 빌려 쓰지 않고 수익만큼 투자하는 실속경영은 그룹을 더욱 튼튼하고 알차게 만들었다. 인수한 부실기업도 얼마 지나지 않아 건실한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이 창업주는 또 외부에서 전문경영인을 영입하지 않고 공채 출신을 키워 경영진으로 기용했다. 기획력과 업무 추진력을 인정받은 그의 처남 이기화씨는 이 창업주의 사후 태광그룹 회장에까지 올랐다. 또 공채 출신인 류석기·강석명·최운형씨 등이 중용됐다. 그의 이런 원칙적이고 대쪽 같은 성품은 자녀들의 혼사로도 이어진다. ●화려한 혼맥…‘연애결혼은 없다´ 이 창업주는 생전에 모두 6명의 자녀를 뒀다. 그러나 그는 자녀들의 연애결혼을 절대 허용치 않았다. 그는 평소 사대부가의 유교적인 면을 강조해와 전통 관습을 무척 중시했다. 재벌가의 혼사가 연애결혼보다 중매에 무게를 두고 있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3남3녀를 하나같이 중매결혼시켰다는 것은 가풍을 짐작케 한다. 이 창업주는 집안 어른이나 친지들이 지체 있는 가문의 훌륭한 배우자를 찾아내 중매를 넣어 혼사를 성사시키는 방식으로 자녀들의 혼사를 치러왔다. 이처럼 중매 일변도로 자녀 혼사를 치른 것은 중매야말로 좋은 가문의 좋은 배우자를 폭넓게 고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으로 생각했기 때문일 것으로 여겨진다. 때문에 태광그룹 2세들의 혼맥은 서민의 가계에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울 정도로 격이 높고 화려하다. 태광의 사돈가가 사람들은 당시에 내로라 하는 정·관·재계의 유력 인사다. 하지만 이 창업주는 자녀들 혼사로 정·관·재계의 거물들과 사돈이 되었지만 이들을 경영에 끌어들이는 법은 결코 없었다. 지금도 모기업인 태광산업의 사장은 태광 신입사원 출신인 이화동(62)씨다. 이 창업주는 이선애씨와의 사이에 식진(사망)·영진(사망)·호진(44) 3형제와 경훈(52)·재훈(50)·봉훈(48) 세 자매를 뒀다. 이 창업주의 개혼(開婚)인 식진씨의 혼사는 비교적 평범한 집안과 이뤄졌다. 그러나 이후로는 모두 유력 인사와 사돈을 맺는다. 이 창업주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태광산업 영업과장으로 있던 장남 식진씨를 1975년 개인사업을 하던 진재홍씨의 맏딸 임순(54)씨와 결혼시켰다. 식진씨는 태광산업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식진씨의 장인 진씨는 면방업체인 경방에서 일하다 독립했다. 서울대 공대 출신으로 공대 동창회장을 맡기도 했다. 식진씨 부부는 정아·성아·원준 등 1남2녀를 뒀다. 장녀 정아(31)씨는 결혼했다. 연세대 상대를 나온 차남 영진씨는 어머니 이선애씨 친구의 중매로 장상준(전 동국제강 회장)가의 4남2녀 중 막내딸인 옥빈(54)씨와 1976년 결혼했다. 태광산업에 입사한 뒤 계열사인 대우파일, 흥국생명, 고려상호신용금고 등에서 중역으로 활동했다. 이들 사이에는 성준·성은 남매가 있다. 현재 그룹 회장을 맡고 있는 호진씨의 부인 신유나(42)씨는 롯데 신격호 회장의 동생인 신선호(71·일본 산사스식품 회장)씨의 맏딸이다. 호진씨는 대원고·서울대 경제학과(81학번)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건너가 코넬대 경영학석사(MBA), 뉴욕대 경제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슬하에 현준·현나 남매가 있다. 이 창업주의 세 딸은 모두 재원으로 꼽힌다. 그러나 특이한 것은 세자매 모두 이화여대 선후배이라는 점이다. 이는 유교적 관습을 중시하는 이 창업주의 독특한 자녀 교육관이 스며들어 있다고 봐야 한다. 태광의 혼맥은 이대 출신의 세 딸을 출가시키면서 보다 화려하게 뻗어 나간다. 장녀 경훈씨는 진주의 대지주이자 LG그룹의 창업 멤버인 허만정가의 막내 며느리가 됐다. 경훈씨의 남편은 유통전문기업 GS리테일 대표인 허승조(56)씨다. 이들의 결혼은 경훈씨 친척 할머니의 중매로 이루어졌다. 이임용가에서 허만정가로 이어가면 조홍제-송인상-신덕균가와 만난다. 이연두-박치현-김준성-김우중가와도 연결된다. 경훈씨는 남편 허승조씨와의 사이에 지안·민경 자매를 두고 있다. 이 창업주는 차녀 재훈씨를 양택식 전 서울시장의 장남 원용(56)씨와 결혼시켰다. 원용씨는 현재 경희대 의대 교수로 있다. 이 창업주는 재훈씨를 양택식가로 출가시키면서 정·관계 유력인사와 연결된다. 양택식가를 통해 홍진기-노신영-정주영가로 연이 닿는다. 김한수-김복동가로도 이어진다. 특히 이 창업주는 이 결혼을 통해 업계의 라이벌인 한일합섬의 창업주 김한수가와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된다. 재훈씨 부부는 서윤·서정·서인·혁준 등 1남3녀를 두고 있다. 3녀 봉훈씨는 한국베링거인겔하임 한광호가의 외아들 태원(49·한국베링거인겔하임 회장)씨와 결혼했다. 이들 사이에는 동우·상우·정우 3형제가 있다. ●뉴미디어·금융으로 21세기를 준비 태광은 1996년 일대 전환기를 맞는다. 그 해 11월 창업주인 이 전 회장이 75세를 일기로 타계하면서 3남 호진씨가 경영 전면에 부상한다. 호진씨는 이 창업주가 그룹의 후계자로 일찍 점찍어 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1997년 태광산업 사장에 이어 2004년 태광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호진 회장은 섬유가 주력인 태광의 업종에 메스를 댄다. 추진력에 관한 한 부친 못지않은 ‘신형 엔진’ 이 회장은 ‘조용한 기업’ 태광에 거센 변화의 바람을 불어 넣었다. 변화의 추동 세력은 MSO로 표현되는 종합유선방송과 금융 등 두 갈래다. 이 회장은 미래 태광의 신성장 동력이 여기에 있다고 확신한다. 따라서 1조 5000억원 수준으로 알려진 막강한 현금 동원력을 바탕으로 과감한 인수·합병(M&A)에 나서고 있다. 이는 섬유와 화학 중심에서 뉴미디어와 정보기술(IT), 금융기업으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디어 기업으로의 급성장이다. 이 회장은 케이블TV 회사인 ‘태광 티브로드’를 세웠다. 티브로드는 태광, 미래, 통신 등의 앞글자 ‘T’와 브로드 캐스팅, 브로드 밴드의 ‘브로드’를 합성해 지은 이름이다. 티브로드는 지역 케이블TV 20개를 거느리고 있다. 가입자 300만명, 시장 점유율 24∼25%로 명실상부한 국내 1위다. 아직까지는 많은 수익을 내고 있진 못하지만 뉴미디어는 태광의 미래를 밝혀줄 한 축임에 틀림없다. 이 회장이 2003년 이후부터 미디어 부문에 집중 투자하는 이유도 이런 이유에서다. 뉴미디어는 진헌진 티브로드 사장과 이상윤 안양방송 및 수원방송 사장이 이끌고 있다. 진 사장은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이 회장의 대학교 동창이다. 2002년 이 회장이 직접 스카우트했을 정도로 신임을 받고 있다. 금융 쪽도 더욱 살을 붙여야겠다는 게 이 회장의 전략이다. 현재 흥국생명, 고려상호저축은행, 태광투자신탁운용으로는 아무래도 무게가 떨어진다고 보고 있다. 이에 따라 쌍용화재와 예가람상호저축은행, 피데스증권 등의 인수작업을 활발히 벌이고 있다. 태광산업은 지난달 쌍용화재와 신주인수계약을 체결했다. 이로써 태광산업은 쌍용화재 지분의 50% 이상을 확보했다.‘흥국생명+쌍용화재’를 통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고 있다. 이의 근거는 생명보험·손해보험 상품의 교차 판매다. 태광은 쌍용화재 인수 열기가 식기가 무섭게 피데스증권 인수에 나섰다. 피데스증권은 현재 주식거래 업무만 하는 중소형 증권사지만 태광은 이 회사를 인수해 종합 증권사로 변신시킬 계획이다. 예가람상호저축은행은 서울·경남에 기반을 둔 저축은행이다. 이들 기업의 인수작업이 순조롭게 매듭지어지면 태광그룹은 생보, 손보, 증권, 투신운용, 저축은행까지 아우르는 종합금융그룹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금융 쪽은 류석기 흥국생명 부회장과 김성태 흥국생명 사장의 투톱 체제다. 김 사장은 씨티은행 출신으로 LG증권 사장을 지냈다. 태광산업 출신인 오용일 흥국생명 전무도 눈여겨 볼 전문 경영인이다. 이호진호(號)의 태광은 대변신을 꿈꾼다. 현재의 청사진이 조만간 구체화되면 태광그룹은 화섬 석유화학, 금융, 미디어, 레저(태광관광개발), 육영재단(일주학술문화재단, 일주학원)으로 새 틀을 짜게 된다. ykchoi@seoul.co.kr ■ 정도·신의는 기업의 생명 ‘정도’와 ‘신의’.50여년 전 부산의 한 작은 시장에서 출발해 오늘의 태광그룹을 일군 창업주 고 이임용 회장이 금과옥조처럼 여긴 명제다. 이를 지키지 않는 거래처와는 두번 다시 거래를 이어가지 않았을 정도다. 정도와 신의를 기업의 목숨이자 기업의 자격이라고 늘 강조했던 이 전 회장은 한눈 팔지 않고 기업 경영에만 충실했던 기업인이다. 태광은 이 전 회장의 타계 10주년을 맞아 그의 기업·국가관 등을 조명하기 위한 자서전 출간작업을 서두르고 있다. 특히 어록 정리에 신경쓰는 눈치다. 그의 어록에서는 경영관이 그대로 묻어난다. 지난 1973년 단 닷새 만에 흥국생명을 인수한 이 전 회장은 첫 임원회의에서 “보험회사의 재산은 보험가입자의 재산”이라며 “흥국생명의 돈을 태광에서 가져다 쓰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리고 이 약속은 지켜졌다. 이 전 회장은 ‘오래된 만남’을 중시했다. 태광의 주거래 은행은 조흥은행. 양자의 관계는 50년 가까이 이어지고 있다. 오직 하나의 은행만을 고집한 이 전 회장은 1975년 대한화섬 인수 후 많은 임원들이 복수은행 거래를 건의했지만 “새 친구 열 명을 사귀기 위해 헌 친구 한 명을 안 버린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신용은 이임용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자신의 입으로 말한 약속은 반드시 지켰으며 계약서는 단지 둘 사이에서 오고 간 이야기를 정리해 놓은 종이에 불과했다. 타계 몇해 전 신입사원 특강에서 신용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닷새 만에 서는 장에 못가는 사람이 장에 가는 친구에게 무엇 무엇을 사다 달라고 부탁을 한다. 부탁을 받은 사람은 혹 자기 물건 사는 것은 잊어버리더라도 결코 친구의 부탁을 잊어서는 안된다. 만일 그 물건이 제수용품이었다면 남의 집 제사를 망치는 격이 돼 옛날 말로는 사람 같지 않은 꼴이 된다. 그래서 약속은 무서운 것이고 지켜야 하는 것이다.” ykchoi@seoul.co.kr ■ 베일에 싸인 오너一家 재계에서 태광그룹만큼 외부에 노출되는 것을 꺼리는 ‘오너 일가’도 없다. 창업주인 이임용 전 회장은 물론 후계자인 이호진 현 회장 역시 언론에 좀처럼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다. 취재를 위해 이 회장 면담을 요청했으나 ‘불가하다.’는 단호한 한마디였다. 오너 일가가 이처럼 몸을 꽁꽁 숨기는 데에는 격동기를 헤쳐온 태광그룹의 기업사와 유교적 관습이 맞물려 있다. 태광에 있어 정치는 짐이었다. 창업주인 이 전 회장은 야당의 거목인 처남(이기택 전 민주당 총재)을 두면서 박정희·전두환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군사정권으로부터 강도 높은 세무사찰을 받았다. 고속성장을 질주한 태광이었지만 그럴수록 기업경영만큼은 살얼음판을 걷듯이 할 수밖에 없었다. 한눈 팔면 죽는다는 것을 절감한 이 전 회장은 정치는 물론이고 언론에도 자연히 몸을 사릴 수밖에 없었다. 유교적 관습을 중시하는 이 전 회장의 짙은 보수성도 중요한 부분이다. 이는 태광 일가의 여성들에게서 쉽게 발견된다. 태광가(家)의 여성들에게서는 다른 재벌가와 달리 우먼파워를 찾아볼 수 없다. 여성으로서 적합한 문화계나 학술계에는 진출해 있을 법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누구도 외부에 노출되지 않았다. 이 전 회장의 세 딸도 그렇고 며느리도 마찬가지다.3형제 못지않게 똑똑한 것으로 알려진 세 딸 중 남녀공학 대학을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다. 큰딸 경훈과 둘째 재훈, 막내딸 봉훈씨 모두 이화여대를 졸업했다. 이들 모두 다른 대학은 생각지도 못한 게 아닐까. 경훈·봉훈씨는 남편이 재계의 실력자들이지만 외부활동 대신 살림을 하고 있다. 태광가의 며느리들도 전혀 노출돼 있지 않다. 삼성·현대가 등 재벌들의 며느리들이 문화·재계의 저명인사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40대 중반인 이 회장도 전경련 활동조차 하지 않을 정도로 외부 노출을 기피하고 있다. 선친 스타일을 빼닮았다는 얘기까지 나온다. 그래서 ‘은둔의 경영자’라는 칭호를 얻었다. 하지만 이 회장은 현장에 매우 충실한 CEO다. 캐주얼 차림으로 불쑥 현장을 찾아 임직원들을 놀라게 한다. 이 회장은 기업경영 못지않게 예술에 조예가 깊다. 서울 광화문 흥국생명 사옥도 사실상 이 회장 작품이다. 바닥재부터 인테리어, 사무실 소품 등에 이르기까지 이 회장의 손때가 묻지 않은 것이 없다. 회사 관계자는 “CEO가 안됐으면 예술가가 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ykcho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최용규 차장 이기철·강충식·주현진·류길상·김경두·서재희 기자
  • [세이프 코리아] ‘악몽’ 된 설 명절 사례

    [세이프 코리아] ‘악몽’ 된 설 명절 사례

    “다 잊고 싶어요. 오죽하면 이사까지 갔겠어요. 다른 사람들은 이런 고통을 받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광주에 사는 주부 강순임(36·가명)씨에게 설은 더 이상 기쁜 날이 아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은 딸 미영(당시 12살)이는 지난해 설 연휴가 시작되던 2월8일 액화석유가스(LPG) 중독 사고로 곁을 떠났다. 강씨는 딸을 가슴 속에 꼭꼭 묻었다. 악몽의 발단은 식혜였다. 밤 11시부터 식혜를 끓이기 시작했다. 온 가족이 깜박 잠이 들면서 비극은 시작됐다. 약하게 불을 켜 놓은 가스레인지는 불꽃은 사라지고 가스만 조금씩 내뱉고 있었다. 가스는 미닫이문 틈으로 방까지 스며들었다. 침대에는 강씨 부부와 아들, 바닥에는 딸이 잠들어 있었다. 아침 7시, 가스 냄새 진동하는 가운데 심한 두통으로 잠자리에서 일어난 부부는 바닥에서 자고 있던 딸아이를 흔들었다. 그러나 미영이는 미동조차 없었고, 동공도 이미 풀려 있었다. 공기보다 무거운 가스가 침대 밑에서 자고 있던 딸 아이에게는 치명적이었다. 119 구조대가 출동했지만 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강씨 가족의 고통은 현재진행형이다. 남편은 딸을 잃은 충격으로 한동안 일도 제대로 못했다. 강씨는 “사고 직후 동구에서 북구로 집까지 옮겼지만 그날의 고통은 여전히 생생하다.”면서 “다른 사람들은 부주의로 가족을 잃는 일이 더 이상 없었으면 좋겠다.”고 눈시울을 적셨다. 온 가족이 모이는 설은 기쁨 대신 고통이 더해지기 일쑤다. 명절 분위기에 들떠 화재 등 각종 재난에 대한 경계를 소홀히 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명절 때는 평소보다 20% 가까이 각종 재난 사고가 늘어난다. 지난해 2월8일부터 10일까지 3일 동안의 설 연휴 기간에 발생한 화재 등 재난사고는 모두 305건. 하루 평균 102건이 일어난 셈이다. 설 연휴의 대표적인 재난사고는 교통사고. 지난해 2월7일부터 10일까지 4일 동안 1589건의 교통사고가 일어나 50명이 사망하고 3083명이 다쳤다. 즐거운 귀성·귀경길이 자칫 ‘황천길’이 될 수 있고, 가족이 함께 참변을 당할 가능성도 높다. 지난해 2월7일 오후 8시쯤 경북 울진군 삼율리 도로에서 이모(62)씨가 술에 취한 채 오토바이에 아내와 손자, 손녀를 태우고 가다 승합차를 들이받았다. 이 사고로 이씨는 아내와 손자를 한꺼번에 떠나보내야 했다.2월8일 오전 1시 쯤에는 충북 괴산군 동부리에서 승용차 2대가 정면 충돌했다. 이 사고로 탑승자 1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다. 9일 오후 9시쯤에는 전북 완주군 구이면 전주~순창 도로에서 부부를 포함해 3명이 한꺼번에 승용차에 들이받혔다. 빙판길 접촉사고로 견인차를 기다리고 있던 길이었다.30대 초반이던 부부는 그 자리에서 세상을 떴다. 명절 교통사고에는 ‘주마(酒魔)’가 끼어든다. 명절 제사상의 음복(飮福)이 자신과 가족을 파괴하는 독약이 된 셈이다. 경찰청 관계자는 “설 연휴 대부분의 교통사고는 음주운전으로 비롯되곤 한다.”고 아쉬워했다. 화재도 명절을 악몽으로 만드는 대표적인 재난이다. 지난해 2월10일 오전 2시쯤 전북 정읍시 내장동의 한 음식점에서 원인 불명의 화재가 일어났다. 정읍소방서 소방차 12대와 소방관 44명이 출동했지만 외진 곳의 80평짜리 목조 건물은 순식간에 타버렸다. 새벽 시간이라 사상자는 없었지만 가게 주인은 설에 1억 6000여만원어치의 재산손실을 봐야 했다. 연휴 기간 관리의 손길을 받지 못한 공장도 화마의 희생양이 됐다. 지난해 2월10일 오후 9시쯤 경북 칠곡군 중리의 섬유염색공장에서 일어난 불로 원단과 기계, 그리고 공장 1층 400여평을 다 태웠다. 이에 앞서 2월8일 오후 5시 쯤에는 전북 김제시 용지면의 한 돈사에서 전기합선으로 불이 났다. 돼지 500여마리가 죽고, 돈사 270여평이 잿더미로 변했다. 소방방재청 관계자는 “연휴 때면 사람의 손길이 끊기는 상점이나 공장은 쌓인 먼지가 작은 불꽃에도 발화돼 큰 불로 번지곤 한다.”면서 “설 이전 전기, 가스, 보일러 등을 점검해야 화재를 막을 수 있다.”고 당부했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연휴 119신고전화 백태 온갖 사건 사고들이 다 몰려드는 119 신고. 설 연휴 때는 어이 없는 전화가 쏟아져 고생하는 일선 근무자들을 애먹이기도 한다. ●생활민원형 설 연휴에 가장 많이 쏟아진다. 귀성 길 도중, 집의 가스 밸브나 수도꼭지를 잠가달라는 것이다.“음식을 만들다가 급하게 나오는 바람에 가스레인지를 켜 놓고 온 것 같아요. 집에 가서 대신 좀 잠가주면 안될까요.”하는 식이다. 위험이 있다는데 119 대원들이 그냥 지나칠 수는 없는 일이다. 때로는 곡예하듯 집안으로 들어가지만, 절반 이상은 허탕치기 일쑤다. 애써 들어간 집에 가스밸브는 얌전히 잠겨 있다. ●얌체형 고향에 내려가는 사람보다 휴양지로 놀러간 부류에 많다. 대부분 부모님에게는 “급한 일이 있어 이번 설에는 못내려간다.”고 둘러댄 사람들이다. 그러나 휴양지에 있으면서 고향에 전화를 걸었을 때 부모님이 “몸이 좀 안좋다.”고 하면,119에 전화해서는 “고향집에 가서 부모님 상태를 확인해달라.”고 요구한다. 그러나 막상 대원들이 고향 집에 가 보면 아프다던 부모님들은 대부분 멀쩡하다. 자식들이 거짓말을 한 것을 눈치 채고 “관심 좀 가지라.”는 뜻에서 그런 전화를 한 것이다. ●읍소형 사회적 양극화가 극심해지면서 심심찮게 걸려오는 전화내용이다. 신고자는 대부분 취객이다.“사고를 당했다.”고 신고한 뒤 대원들이 달려가보면 멀쩡한 상태다. 이들은 “고향에 좀 데려가 달라.”고 떼를 쓴다. 형편이 어려워 고향 갈 사정은 안 되고, 홧김에 술을 마시니 고향집에 모여있을 일가친척 생각이 간절하다. 이런 사람들은 살살 달래서 집에 곱게 모시는 게 상책이다. ●불륜형 명절 때 심심찮게 벌어진다. 대부분 유부남·미혼녀 커플이 주인공이다. 유부남은 평소 가정에 충실하지 못한 만큼, 명절 때라도 고향에 내려가려고 한다. 미혼녀가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는 것은 만무한 일. 당연히 유부남의 팔을 붙들고 늘어진다. 이렇게 되면 십중팔구 싸움이 일어난다. 평소의 ‘불안정한’ 관계에서 시작되어 말싸움의 수위가 높아지면 폭력 사건이나 자살, 분신 소동 등 별의별 일이 다 벌어진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명절연휴 재난원인과 대책 설 연휴에 사고가 몰리는 것은 아무래도 명절을 맞아 분위기가 들뜨기 때문이다. 경각심이 느슨해지면서 안전사고가 증가한다. 시장이나 상가, 역 등 다중이용시설의 이용객도 늘어난다. 재난이 발생할 위험요인이 높아지는 셈이다. 폭설과 한파 등의 피해도 작지 않다. 소방방재청은 이번 설 연휴에도 특별 경계근무에 들어간다. 중앙·지역재난안전대책본부 상황실을 보강하고, 폭설을 대비해 비상연락체제도 구축한다. 백화점, 재래시장, 터미널, 레저시설 등에 대한 안전관리도 강화한다. 제설대책으로는 제설차, 염화칼슘 살포기 등 장비를 철저히 정비하고 대설·한파로 인한 상습결빙 및 교통두절 예상구간을 특별 관리한다. 교통사고는 대표적인 명절 재난. 도로교통안전관리공단은 겨울철 눈이 내릴 때는 운전자들에게 ▲되도록 큰 길로 다니며 ▲절대감속하고 안전거리를 유지할 것을 권하고 있다. 고속도로나 시가지 중심도로는 제설제를 자주 뿌리기 때문에 결빙되는 일이 드물다. 조금 돌아가더라도 큰 길로 가는 것이 안전하다. 또 빙판에서 급가속, 급브레이크는 금물이다. 귀성 전 차량 점검도 필수다. 타이어 공기압, 오일, 냉각수, 제동장치 등을 살펴야 한다. 스노타이어나 체인도 미리 준비해야 고생하지 않는다. 고향 가는 길은 장시간 운전이 불가피하다. 한두시간에 한번씩은 반드시 쉬고, 차안에서라도 몸을 자주 움직여주는 것이 좋다. 운전을 할 때 의식적으로 몸을 앞으로 당겨 앉고 등과 허리는 바로 세워야 오랜 운전으로 인한 피로도 줄일 수 있다. 특히 명절 교통사고의 대부분이 귀경길에 집중되는 만큼 끝까지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한다. 귀성길, 집을 나서기 전에는 가스 기구 접속부분에 가스가 새는지 비눗물로 점검을 해본다. 가스레인지는 중간밸브를 잠가둔다. 불필요한 전기 플러그나 콘센트는 뽑아둔다. 누전차단기가 정상작동하고 있는지도 확인한다. 그러나 가스보일러는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얼지 않을 만큼 가동이 되도록 해두어야 한다. 집에 돌아왔을 때는 실내에서 가스 냄새가 나는지 확인해야 한다. 이두걸기자 douzirl@seoul.co.kr
  • [14일 TV 하이라이트]

    ●희망풍경(EBS 오후 5시40분) 고등학교 때 야구공에 정통으로 눈을 맞아 시각장애인이 된 김지욱씨. 그는 침술원 원장이지만 본업보다는 동두천 희망지킴이 천사운동본부와 시각장애인협회 일로 더 바쁘다. 장애인에 대한 편견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에 앞장서고,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더불어 사는 세상을 꿈꾸는 김지욱씨를 만나보자.   ●라이프n조이(YTN 오전 8시35분) 전통과 맛, 멋이 정겹게 어우러진 곳 전주의 풍경을 담았다. 조선왕조 문화의 뿌리를 간직한 전주 한옥마을에서는 전통의 다례를 배울 수 있다. 전통 공예품, 전주한지의 색다른 매력에 빠질 수 있는 공예품 전시관을 체험해볼 수 있고, 궁중요리와 전주 한정식을 한 상에서 맛볼 수도 있다.   ●결혼합시다(MBC 오후 7시55분) 석순은 소원대로 차장 승진을 하고, 재호의 축하까지 받으며 마냥 행복해한다. 하지만 석순의 승진을 지켜보는 재원과 나영은 씁쓸하기만 하다. 한편 재원은 우연히 나영의 산부인과 진료증을 보고 나영의 임신 사실을 확신한다. 가족들 역시 재원의 말을 듣고 기뻐하며 나영을 평소와 다르게 대한다.   ●잘먹고 잘사는 법(SBS 오전 9시) ‘건강음식大백과’에서는 식탁 위의 하얀 고기라 불리는 치즈에 관한 모든 것을 알려주고,‘비교체험 여행쇼! 일상탈출’에서는 경기도 이천의 이벤트 온천과 충남 예산의 가족온천을 소개한다. 또 ‘금주의 웰빙뉴스’로는 2006년 신년 프로젝트 1탄으로 ‘다이어트’를 준비해 이와 관련된 비법을 알려준다.   ●파워 인터뷰(KBS1 오후 11시) 최근 정치권에서 급부상하고 있는 한나라당 원희룡 의원과 열린우리당 임종석 의원. 원희룡 의원은 박근혜 대표의 사학법 장외투쟁을 정면 비판하고 나섰고, 임종석 의원은 유시민 입각을 반발하고 있는 386의원의 대표주자이다. 원희룡·임종석 의원으로부터 2006 한국정치의 해법을 들어본다.   ●인생이여 고마워요(KBS2 오후 7시55분) 큰 충격을 받은 연경은 인석에게 화를 내고 다른 병원에서 재차 검사를 받아보지만 같은 진단을 받는다. 연경은 사진전 준비로 들떠있는 남편 윤호에게 차마 발병 사실을 알리지 못하고 혼자 고민을 한다. 연경은 윤호의 사진전을 무사히 끝낸 밤에서야 모든 사실을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천리그룹-이만득·유상덕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천리그룹-이만득·유상덕 회장家

    사업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동업’ 얘기를 꺼내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사업 과정에서 동업자와 합의로 꾸려가기란 득보다 실이 많다고 믿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사업가들은 형제나 친척과도 동업을 꺼리는 편이다. 하지만 동업은 제대로 하면 혼자 때보다 훨씬 많은 경영 성과를 거둘 수 있다. 중견 그룹인 삼천리는 동업 관계로 사세를 확장시킨 대표적 기업이다. 창업 선대(先代)부터 반세기 이상 ‘동업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혈육보다 진한 동업정신 삼천리의 그룹 역사는 1955년 10월1일 고 유성연ㆍ이장균 명예회장이 공동으로 ‘삼천리연탄기업사’를 설립하면서 시작했다. 지금은 도시가스 및 해외자원 개발에 전념하면서 국내 도시가스 1위 업체로 부상한 것은 물론 세계 7위 규모의 유연탄광을 경영하는 세계 굴지의 자원개발회사를 보유한 중견기업으로 성장해 있다. 형제보다 가까웠던 두 선대 회장의 관계를 유상덕(46) ㈜삼탄 회장은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이장균 회장님 댁과 우리 집안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이웃에서 살았고 서로 큰 집, 작은 집이라 부르며 지내 와 서로 남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 우리 집안은 유(劉)가인데 왜 작은아버님의 성은 이(李)가인지 궁금했던 적도 있었다.” ●세 번에 걸친 운명적인 만남 두 창업주는 창업을 하기 전까지 모두 세번의 의미있는 만남을 가졌다. 첫번째는 해방 직후 함흥에서 소련군을 상대로 식료품 장사를 하다가 8인계 멤버로 만났다. 한국전쟁이 일어난 이후 피란 시절에는 각자 경남 거제와 경북 포항에서 생활하다가 조우했다. 세 번째는 1955년 삼천리 창업을 통한 만남이었다. 창업 당시엔 두 가정이 단칸방에서 이불 칸막이만 쳐놓고 동고동락하며 사업을 일궜다. 연탄가루를 가져와 기계틀에 넣고 찍어 말린 뒤 배달도 직접했다. 네 사람이 연탄 수레를 ‘끌고 밀면서’ 삼천리의 그룹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유성연 명예회장은 1917년 함남 삼평면 부흥리에서 아버지 유봉주씨와 어머니 김씨의 2남4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가족은 부친의 사업 실패로 곤궁한 삶을 살아야 했다. 유 명예회장은 어린 시절 서당에서 ‘명심보감´을 공부하고 11세가 되던 해에 4년제 삼평보통학교에 입학했다. 남보다 늦은 학업이었지만 유 명예회장은 보통학교 4년을 우등으로 졸업하고 함흥 시내에 있던 함흥제일보통학교 5학년에 편입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평양사범학교에 관비(官費)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당시 평양사범 입학시험에는 함경도에서 200여명이 응시해 9명만 합격했을 만큼 어려운 관문이었다. 평양사범학교를 졸업한 유 명예회장은 함흥 부근에 있는 삼호보통학교에서 첫 교편 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이곳에서 1년간의 교사생활을 거친 뒤 함흥시내의 영정보통학교로 전근했다. 영정보통학교에서의 교직생활이 3년 지났을 무렵인 1943년 유 명예회장은 일본 유학을 추진했다. 그러나 당시 태평양전쟁이 2년째로 접어들면서 생활이 힘들어져 유학의 꿈을 포기하고 함남 피복조합 사무원으로 취직했다. 이후에도 징용 위협이 다가오자 징용 대상에서 제외됐던 교사직을 다시 선택했다. 1944년 함흥 외곽에 있는 주북공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해방 이후 유 명예회장은 경제활동에 투신해 나라 경제를 위해 큰 일을 하겠다는 포부를 안고 사업전선에 뛰어들었다. 당시 그는 함흥 선덕비행장에 주둔한 소련 공군을 상대로 미군 군수물자, 초콜릿, 통조림, 담배, 술 등 식료품 장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유 명예회장은 한국전쟁 발발로 모든 것을 포기해야 했다. 그는 우여곡절끝에 남한으로 가는 LST함정에 겨우 올라 타 피란민 대열에 합류했다. 거제도 난민수용소에 잠시 수용됐지만 수용소를 빠져 나와 미군을 상대로 토산 기념품을 팔기 시작했다. 이만득(49) 삼천리그룹 회장의 부친인 이장균 명예회장은 1922년 6월27일 함남 함주군 상기천면에서 아버지 이황주씨와 어머니 윤윤옥씨 슬하의 6남매 중 차남으로 태어났다. 조부 때부터 가세가 기울기 시작해 전답을 모두 차압당했다. 이후 몇해동안 움집에서 살아야 할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했다. 이 명예회장은 7∼8세 무렵부터 ‘소년 지게꾼’이 돼 공사장에서 자갈을 짊어져 날라야 했다. 힘든 와중에도 그는 낮에는 지게꾼으로, 밤이 되면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야학에 나가 공부를 했다. 이런 노력들이 결실을 거둬 주북공립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할 수 있었다. 이후 4년간의 학창생활은 이 명예회장이 경험한 유일한 정규 학업이었다. 보통학교를 졸업한 이 명예회장은 유담보통학교에서 촉탁 직원으로 잠시 일하다 21세에 흥남질소비료공장의 사원을 거쳐 토목건설 현장의 서기로 옮겼다. 이후 함남토목회사의 하청업자로 변신해 사업가로서 첫 길을 걷게 된다. 어느 정도의 사업 성공도 이룬다. 소련군이 함흥에 진군하자 시내에서 ‘민흥상회’라는 가게를 열어 이들을 상대로 장사를 했다. 그러다가 소련군이 좋아하는 통조림 제품을 구하려 수소문하던 중에 유 명예회장과의 ‘운명의 만남’을 갖게 됐다. 곧바로 의형제 이상의 관계로 발전한 두 사람은 8인계를 조직해 더욱 가까워졌다. 유 명예회장보다 보름 앞서 흥남에서 국군이 철수하는 배를 타고 포항으로 내려온 이 명예회장은 이곳에서 원산 출신인 김성숙(73) 여사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이 회장 부부는 포항 죽도시장 중심부에 ‘흥성상점’을 열어 시멘트, 밀가루, 설탕, 비료, 무연탄을 취급해 큰 돈을 벌었다. 특히 이 명예회장은 서민들의 연료인 신탄(숯)을 제조해 팔면서 장차 무연탄이 가정연료로 중요하게 쓰일 것이라고 판단해 1953년부터 연탄사업에 손을 댔다. ●연탄사업으로 시작된 동업 이 명예회장은 1955년 서울에 있는 단성사로부터 원탄을 대량 매입하겠다는 제의를 받고 직접 강원도에 가서 560t의 원탄을 구매, 서울로 수송했다. 그러나 장기간의 운반 과정에서 원탄 가격이 하락하면서 단성사가 매입을 거부하자 탄을 저탄장에 쌓아 놓아야만 했다. 이 명예회장은 이때 서울로 올라와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던 유 명예회장을 만나 같이 연탄사업을 하기로 약속을 했다. 이 날은 삼천리그룹의 창립일인 1955년 10월1일로 유 명예회장이 박옥순(78)여사와 결혼한 날이기도 하다. 이후 아예 서울로 본거지를 옮긴 두 사람은 중구 신당동에 터를 잡아 호적에 본적지로 등록했다. 유 회장이 신당동 248-1, 이 회장은 건너편의 신당동 304-211에 안착했다. 이때 5세 위인 유 명예회장은 연탄 제조와 판매를 담당하는 사장을 맡고, 이 명예회장은 원탄 구매와 자금을 담당하는 부사장 형태로 역할 분담을 했다. 그러나 이는 명목상 구분일 뿐 두 사람은 이후 어떤 일을 하든지 상의하고 양보하면서 삼천리의 역사를 일구기 시작했다. ●2세에게 동업 각서 물려줘 이들은 각각 회장실 금고에 동업각서를 보관해 오다 두 집안의 2세도 간직해야 한다는 유언을 남기고 떠났다. 두 창업회장은 5개 조항의 동업서약서를 쓴 뒤 가족보다 끈끈한 관계를 50년째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동업서약서에는 ‘한 사람이 세상을 떠나면 다른 사람이 남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진다.’ ‘투자 비율이 다르더라도 수익은 절반씩 나눈다.’ ‘한 사람이라도 반대하면 중요한 의사결정을 할 수 없다.’는 등 5개 조항이 담겨 있다. 재계 주위에서는 두 집안의 경영 스타일이 다른 점도 동업에 큰 도움이 됐다. 유 선대 회장 부자는 과묵하고 꼼꼼하고 심사숙고하는 성향인데 비해 이 선대 회장 부자는 직설적이고 외향적이며 공격적이어서 서로 보완이 됐다는 것이다.25년 전 코크스(용광로 연료) 사업에 진출할 때 이 명예회장과 유 명예회장은 공개 석상에서 한 시간 넘게 싸우는 등 첨예하게 대립했지만, 이 명예회장이 유 명예회장을 17번 찾아 설득한 끝에 사업을 시작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룹의 명운을 가름할 중요한 고비마다 두 창업자는 격렬한 논쟁을 벌였지만 일단 합의를 이루면 상대방의 뜻에 따랐다. ●선대와 버금가는 2세들의 동업경영 두 집안은 이렇듯 탄탄한 동업경영을 기반으로 두 창업주의 아들인 이만득, 유상덕 공동회장에 이르기까지 2대에 걸쳐 동업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실제로 이들 2세 회장은 선대 회장들과 같이 서울 방배동 한 동네에 살면서 3세 자녀들이 2세 회장에게 삼촌이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지낸다. 1993년 이 명예회장의 둘째 아들인 이만득 회장은 유 명예회장의 외아들 유상덕 회장과 함께 경영 전면에 나섰다. 이 회장이 그룹회장으로 취임하며 경영권을 물려받았지만 한번도 경영권 분쟁이 없었다. 유 회장은 삼천리 모든 계열사의 지분을 이만득 회장과 동일하게 갖고 있지만 삼천리 경영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고 있다. 두 사람은 7개 계열사 지분까지 50대50의 똑같은 비율로 2대에 걸쳐 공동경영을 하며 연간 2조 5000억원대의 매출을 올리고 있다. 이 회장이 그룹의 지주회사격인 ㈜삼천리(도시가스회사)와 삼천리ES(천연가스 냉난방기 판매), 삼천리ENG(도시가스 배관설비)를 맡고 있다. 유 회장은 해외에너지 자원 개발을 하는 ㈜삼탄(유연탄)과 삼천리제약을 책임지고 있다. ●월남민 출신 창업주들, 소박한 혼맥 가꿔 창업주들은 대부분의 친인척을 북한에 두고 내려와 화려한 집안을 꾸리지는 못했다. 이 명예회장은 2남2녀를 두었지만 자식들의 결혼에 대해서는 집안이나 배경보다는 며느리와 사위들의 개인 능력을 최우선으로 봤다. 며느리는 단출한 집안을 꾸릴 수 있는 ‘성품’을 위주로 봤고, 사위들은 ‘능력’을 중심으로 간택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다른 기업들에 비해 요란한 혼맥을 이루지 않았다. 이 명예회장의 큰아들인 이천득씨는 삼천리 부사장으로 있던 1987년 지병으로 유명을 달리했다. 평범한 집안의 유계정(55)씨와 사이에 은백(32)·은아(30)·은미(29)씨 등 2남1녀를 두었다. 이만득 회장은 이 명예회장의 차남으로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1981년 가발 수출을 하는 삼천리의 계열사인 미성상사에 입사, 경영에 참여했다. 형이 작고하자 경영에 본격적으로 참여했다. 이 회장은 1977년 전혜연(50)씨를 배필로 맞아 은희(27)·은남(26)·은선(23) 등 3녀를 낳았다. 전씨의 부친은 예비역 대령 출신으로 같은 이북 출신 실향민이다. 이 회장과 부인 전씨의 결혼 스토리는 부친 이 명예회장의 성격을 그대로 읽을 수 있다. 이 회장은 친구의 소개로 부인을 만나다가 해병대에 자원입대했다. 이 명예회장은 아들이 군 복무중에도 열애 중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두 사람을 불렀다. 이때는 5월5일 부인 전씨의 생일이어서 휴가나온 이 회장이 친구들과 저녁식사를 함께 하고 있었는데 두 사람을 집으로 급히 호출한 것이다. 영문을 모르고 집으로 달려간 두 사람은 이 명예회장이 전씨를 꼼꼼히 뜯어 보더니 “됐다. 결혼해라. 결혼식은 10일 후인 5월15일 오후 5시로 잡자.”고 말해 너무 놀랐다. 두 사람은 귀를 의심했지만 “며느리가 착실하고 몸 건강하기만 하면 됐지, 뭘 바라겠느냐. 혼수는 일절 없이 식을 올리자.”며 두 사람을 독려했다. 혈혈단신 월남한 이 명예회장은 아들을 빨리 결혼시키고 싶은 생각에 혼례를 서둘렀다고 이 회장은 회고한다. 이 회장의 큰 딸 은희씨는 성균관대를 졸업한 뒤 현재 플로리스트(화훼장식가)로 활동하고 있다. 둘째딸 은남씨는 미국 UC어바인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셋째딸 은선씨는 UC버클리에서 경제학을 전공하고 있다. 장녀 이란(51)씨는 이화여대를 졸업한 이후 서울대 자연과학대 통계학과 교수인 조신섭(53)씨와 결혼했다. 조 교수는 서울대 응용 분석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위스콘신 매디슨대에서 통계학 박사학위를 취득한 뒤 1986년부터 서울대에서 교편을 잡고 있다. 2녀인 이단(47)씨는 진주화(52)씨와 혼인했다. 진씨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페퍼딘대에서 MBA를 취득했고,2002년 ㈜삼천리 대표이사를 거쳐 현재 그리니치 투자자문㈜ 회장으로 재직 중이다. 유 명예회장은 박옥순 여사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다. 유 명예회장도 사위들을 고르는 기준으로 이 명예회장과 같이 집안 배경보다는 능력을 중요시했다. 외아들인 유상덕 회장은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후 1989년 삼척탄좌개발㈜ 상무이사로 재직하다 1993년에 ㈜삼탄회장에 올랐다. 고등학생인 용훈(18)·용욱(17) 등 두 아들을 두었다. 장녀인 명옥(55)씨는 이태성(59)씨와 결혼했다. 이씨는 미국의 스티븐스대 기계과를 졸업한 뒤 2001년부터 삼천리USA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명옥씨는 이 사장과 사이에 준영(30)·찬영(28) 등 두 아들이 있다. 차녀인 혜숙(49)씨는 이민엽(53)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혜숙씨는 미성상사를 맡고 있는 남편 이씨와의 슬하에 규빈(25)·규환(21) 등 두 아들을 두고 있다. jrlee@seoul.co.kr■ 이만득 회장의 ‘골프경영론’ 이만득 삼천리그룹 회장은 만능 스포츠맨이다. 매일 오후 헬스클럽에서 1시간동안 땀을 흘리고 주말이면 골프를 치며 경영 전략을 가다듬는다. 핸디캡 5 수준으로 아마추어 골프대회에서 두 차례나 우승컵을 거머쥐기도 했다. 이 회장은 골프에서 기업 경영의 원리를 배울 수 있다며 ‘골프경영론’을 설파하고 있다. 이 회장은 “골프를 치면서 기업 경영에 필요한 많은 영감을 받는다.”면서 “골프와 경영의 가장 큰 공통점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말한다. 또 골프의 고수는 14개의 클럽을 고루 잘 쓸 줄 알아야 하는 것처럼 기업가들도 다양한 경영 요소를 잘 활용해야 한다는 점을 골프를 통해 배웠다고 한다. 그는 “경영자는 인사, 자금, 기획, 홍보 등 다양한 요소를 잘 활용해야 기본적 조건에 맞는 조화로운 경영을 할 수 있고 훌륭한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강조한다. 이어 골프의 코스 전략과 경영의 코디네이션이 ‘닮은 꼴’이라는 점도 지적한다.“골프에서 좋은 성과를 낼 수 있는 코스와, 그렇지 못한 코스의 전략이 다르듯이 경영에서도 각각의 사업 분야마다 특징을 고려해 사업부문을 코디네이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골프 경영론의 핵심이다. 골프 고수들은 아무리 쉬운 코스라도 티샷을 하기전에 머릿속에 자신만의 전략을 수립하고, 특히 어려운 코스는 더 복잡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는 점이다. 이 회장은 “이번 코스에서는 파(PAR·기준 타수)가 힘들겠다고 판단되면 보기(기준 타수보다 1타 더 치는 것)를 위한 전략을 세우게 된다.”면서 “그리고 다음 코스에서는 버디를 잡아야겠다는 전체적인 전략을 짜게 된다.”고 말했다. 경영도 사업분야마다 이익이 많이 날 때와 적게 날 때가 있지만 모든 부분을 고려해 전략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다. 작은 곳에 집착하지 않고 사업 전체를 크게 바라보고 전략 수립과 투자를 감행해야 성공적인 경영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이 회장은 끝으로 “골프공은 같은 자리에 떨어지는 경우가 거의 없어 매번 새로운 위치에서 플레이를 해야 한다.”면서 “기업도 마찬가지로 매년 같은 환경에서 경영을 할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한다.”고 말했다. 경영 환영은 수시로 변하는 만큼 새 변화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한다는 뜻이다. jrlee@seoul.co.kr ■ 전권 받은 전문경영인 ‘삼천리호’ 지휘 고 유성연·이장균 명예회장이 회사 이름을 ‘삼천리´라고 정한 것은 우리나라 제품으로 삼천리반도 전체를 석권하겠다는 야심찬 포부에서 비롯됐다. 함경남도에서 미군들을 상대로 식료품 장사를 해야 했던 창업주들의 ‘한(恨)´이 서려 있는 셈이다. 50년 만에 연탄 회사에서 종합에너지 기업으로 발돋움한 ‘삼천리호´에는 베테랑 CEO들이 승선해 있다. 이만득·유상덕 회장은 일선 CEO들에게 ‘전권´을 위임하는 스타일이다. 이영복(61) ㈜삼천리 사장은 엔지니어링 출신의 CEO로 국내 최대 도시가스기업을 이끌고 있다. 도시가스 업계의 산증인으로 안전을 중요시하는 업계 특성상 꼼꼼하게 일을 살피는 경영스타일을 갖고 있다. 최근 들어 비효율적 경영 개선을 위해 윤리경영을 강화하는 차원에서 윤리경영 선포식을 이끄는 등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다. 부산고와 한양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천리 도시가스사업본부 영업이사를 거쳐 2003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김경이(59) 삼천리ENG 사장은 재무관리 전문가로 관리형 CEO다. 재무 전문가답게 업무 프로세스를 중히 여기며 원리와 원칙에 따른 업무를 진행한다. 대구상고를 졸업한 이후 줄곧 ㈜삼천리에서 경리부문에서 재직하며 경리담당 이사대우, 부사장을 거쳐 2003년에 사장에 취임했다. 강태환(57) ㈜삼탄 사장은 글로벌 에너지기업을 이끄는 경영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해외자원개발 전문기업으로서 연구·개발(R&D) 투자는 물론 인력 개발에도 힘쓰고 있다. 고려대 경영학과를 졸업해 ㈜삼천리 기술투자 상무이사를 거쳐 2001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찬의(51) KIDECO 사장은 인도네시아 파시르 광산을 세계 7대 유연탄광으로 성장시킨 주역이다.2002년부터 사장을 맡아 업무별 소사장제를 도입하는 등 철저한 공정 관리와 치밀한 원가관리를 진두지휘해 왔다. 연세대 응용통계학과를 졸업했고,㈜삼천리 기획실 이사를 역임하는 등 ‘기획통´으로 정평이 나있다. 김용수(53) 삼천리열처리 사장은 무결함 경영을 지론으로 삼고 법적 기준에 따른 프로세스를 강조하고 있다. 경기고와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한 뒤 ㈜삼천리 기계 상무이사, 기술연구소 상무이사를 거쳐 1997년부터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김태성(60) 삼천리제약 사장은 삼성그룹에 입사해 홍콩 샹그릴라호텔 한국 대표를 역임하는 등 ‘외부영입´ 케이스로 삼천리호에 승선했다. 의사 결정과정에서 다양한 정보채널을 활용해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평을 받고 있다. 서울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했고 1994년부터 대표이사 사장을 맡고 있다. 이민엽(53) 미성상사 사장은 직원들에게 업무를 믿고 맡기는 ‘보스형´ CEO다. 경기고와 서울대 경영학과를 졸업한 뒤 시카고대에서 MBA를 취득한 뒤 삼척탄좌 상무이사를 거쳐 1993년부터 대표이사에 재직 중이다. jrlee@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박건승 부장(반장) 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대림산업-이준용 회장家

    대림산업은 지난 1976년 상장 이후 주주들에게 기업 이익을 돌려주고 있다. 건설업체 가운데 오랫동안 빠지지 않고 배당을 한 기업을 찾기란 여간 쉽지 않다.30여년 동안 배당을 거르지 않았다는 것은 부침이 심한 건설업계에서 대림이 오랜 전통을 지켜온 명실상부한 전문 건설업체라는 것을 의미한다. 비슷한 시기에 같은 업종으로 출발했던 현대건설이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늘린 것과 사뭇 다르다. 특히 단순 제조업에는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그래서 그런지 대림산업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보수적인 기업 이미지를 떠올린다. 대림 스스로도 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변화를 거부하는 수구는 아니다. 단지 정통 건설 기업에서 벗어나지 않고 조용하게 기업을 일구겠다는 것이 대림산업의 문화라고 할 수 있다. ●1세대, 정미소에서 건설 명가로 성장 고 이재준(수암) 대림산업 창업주는 경기도 시흥(현재 산본 신도시 일대)에서 부친 이규응 옹과 모친 양남옥 여사의 5남4녀 가운데 차남(넷째)으로 태어났다. 고 이재형 전 국회의장이 이 창업주의 바로 손위 형이며 이재연(74) 아시안스타 회장이 막내 동생이다. 부친은 장남에게는 공부를 시켰지만, 사업 기질이 보였던 차남에게는 장사를 배우라면서 보통학교만 졸업시킨 뒤 자기 밑에 두었다. 수암은 이 때부터 부친이 경영하던 서울 서대문 한일정미소에서 경영수업을 받았다. 이것이 오늘날의 대림을 키우는 원동력이 됐다. 대림의 태동은 1939년 부평에서 목재와 건자재상으로 문을 연 부림(富林)상회에서 출발했다. 초기 부림상회를 이끈 주인공은 3명. 이재준 창업주와 그의 고종 사촌형인 이석구 전 대림산업 사장, 이석구의 매제 원장희로 알려졌다. 사촌지간은 각각 1만 5000원씩 출자했고, 원장희씨는 1만원을 출자했다는 것이다. 이석구는 풍림산업 이필웅 회장의 부친. 결국 대림과 풍림의 뿌리는 부림상회로 같다. 부림상회는 원목을 개발, 사세를 키웠고 광복 이후 군정청으로부터 원목을 값싸게 인수해 교실을 짓는데 들어가는 목재 등을 만들어 팔기도 했다. 이후 사업이 번창해 1947년 건설업에 진출하면서 상호를 대림산업으로 바꾸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부평경찰서 신축 공사 수주는 건설업체로서 첫 걸음을 내딛는 계기였다. 주한미군 공사를 수주하기도 했다. 이즈음부터 우리나라 건설업이 시작됐다고 보면 된다. 당시 국내 건설업계를 대표하는 기업으로는 대림산업·현대건설·삼환기업 등이었다. 49년부터는 건설업이 목재업을 앞질러 주력업종으로 자리잡았다. 한국전쟁 중에는 피란민 수용소를 짓는 등 군 시설 공사를 맡았고, 한국경제 재건기를 거치면서 굵직한 공사를 따냈다.58년 시작된 청계천 복구공사와 청계고가도로 건설, 경부고속도로, 소양강댐건설 등 굵직한 사회간접자본시설 현장마다 대림의 깃발이 나부꼈다. 60년에는 풍림산업을 인수, 자회사 형태로 두었다. 서울 영동·잠실·반포지구 개발과 광진교, 영동대교, 양화교 등 한강 다리 공사에도 대림의 흔적이 많이 남아있다. 지하철 시대를 여는데도 대림은 처음부터 참여했다. 동시에 해외공사 수주를 늘리는 등 사세를 키웠다. 54년에 설립한 서울증권은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99년 구조조정차원에서 소로스에 매각했다. 지금은 지분을 전혀 소유하지 않고 있다. 대림통상은 아예 동생 재우씨에게 떼어줘 형제간 사업 분리를 마무리지었다. 대림요업 역시 98년 매각하면서 지분을 대림통상에 넘겼다. 창업주가 생전 계열 분리를 통해 경영권 분쟁의 씨앗을 남기지 않았다. ●난형난제(難兄難弟)…운경 이재형 대림산업을 말할 때 흔히 고 운경 이재형 전 국회의장을 끌어들인다. 수암 이재준 창업자와 비교하기도 한다. 정계와 재계에서 각각 독특한 개성으로 주목받으며 거목으로 우뚝 섰던 인물이다. 불의에 타협하지 않고 고집스러운 면모,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말을 아끼는 점에서 같았다. 운경은 자유당·공화당 시절 내내 골수 야당을 했다. 그래서 동생이 운영하는 대림은 자주 곤욕을 치렀다. 대림에서 정치자금을 대주지 않나 하는 의심과 함께 야당 정치인에 대한 압박 수단으로 대림은 수시로 세무사찰을 받아야 했다. 민정당 시절에도 운경과 수암, 그리고 이준용(67) 회장은 형과 동생, 백부와 조카라는 혈연 빼고는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았다. 운경이 정치한다고 자금을 요구하지 않았고, 대림 역시 운경에게 베풀거나 받지도 않았다. 서로 철저하게 독립된 길을 걸어온 것이다. ●2세대, 건설업에 유화부문 키워 양대축 형성 수암 이재준은 열아홉 되던 해 수원지역 대지주의 딸인 이경숙과 결혼했다. 이 여사는 그러나 장남 준용(현 대림산업 회장)을 낳은지 4년만에 세상을 떴다. 창업주는 박영복 여사와 재혼, 차남 부용(전 대림산업 부회장·61)을 얻었다. 단출하게 두 아들만 두어 경영권 이양 등에서 큰 불협화음이 없었다. 이 회장은 부친과 달리 정규 교육 혜택을 입고 착실히 경영 수업을 받았다. 경기고,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뒤 미국 덴버대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귀국했다. 귀국 후에도 영남대와 숭실대에서 잠시 강의를 맡는 등 학자풍의 엘리트였다. 그러면서 한경진 여사와 결혼하고 66년부터 대림산업 사무실에 출근했다. 경영 참여와 관련, 이 회장은 “본격적으로 해외 건설시장을 개척할 시기였는데 해외감각과 국제업무에 정통한 사람이 필요했고, 명예 회장의 강력한 요청도 있었다.”고 밝혔다. 이 회장은 국내외 공사를 막론하고 창업주를 도왔다. 유창한 영어는 해외공사 수주는 물론 각종 문제 해결에 큰 도움이 됐다. 국내에서는 내실을 다지는데 주력했다.78년 당시 부사장이었던 그는 건설업계 최초로 업무 전산화 작업을 추진하는 등 경영정보시스템 구축에 앞장섰다. 업계는 이 회장이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가진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79년에는 사장에 오르면서 색깔을 내기 시작한다. 동생 부용씨는 상무로 승진했다. 건설과 양대 축을 이루는 유화부문의 틀도 이때 마련됐다. 창업주가 목재상을 건설업으로 키웠다면, 이 회장은 여기에 유화부문을 더해 건설과 석유화학의 양대 사업을 구축해 안정과 성장을 이룰 수 있는 기틀을 마련했다. 대림산업은 66년 베트남 진출로 국내 최초 해외건설시장을 개척한 이래 중동건설붐의 주도적 역할을 하면서 지금까지 해외건설 맥을 유지하고 있다.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 포항제철 3,4호기 건설공사 등도 대림의 손을 거친 건축물이다. 하지만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대림은 국내외에서 뜻하지 않은 사고로 이미지가 실추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86년 개관 11일을 앞두고 독립기념관에서 화재가 발생, 국민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하지만 87년 8월까지 당초보다 더 완벽한 복구공사로 전화위복의 계기를 삼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했다.88년에는 이란-이라크 전쟁의 피해를 보기도 했다. 이란 캉간가스정제공장 현장에서 이라크 공군기의 무차별 폭격으로 13명이 죽고 19명이 부상을 당했다. 가장 큰 피해자는 대림이었다. 그런데도 대림은 여론의 뭇매를 맞고 속죄양으로 몰리기도 했다. 대림 역사상 최대 위기였다. 대림은 그 뒤 국내 아파트 공사, 관공서 건물, 평화의 댐공사 등 굵직한 일감을 따내면서 덩치를 키웠으나, 사업 다각화 등으로 몸집을 불린 다른 업체와 달리 한 우물만 고집, 업계 순위에서 상대적으로 밀렸다. ●3세대, 건설·유화 오가면서 경영 보폭 확대중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37) 대림산업 부사장은 건설과 유화부문을 오가면서 경영 수업을 쌓고 지난 7월 전무에서 부사장으로 승진했다. 미국 덴버대 경제학과를 나와 부친과 동문을 이룬다. 컬럼비아대 경영학 석사학위를 받고 95년 대림엔지니어링에 입사했다.2000년 건설부문 기획실장으로 자리를 옮긴 뒤 2004년부터 전무를 맡았다. 지난 5월에는 대림산업 지분의 21%를 보유하고 있는 사실상 지주회사인 대림코퍼레이션의 공동 대표이사에도 취임했다. 대림산업은 계열사 12개를 거느린 재계 27위 규모의 대림그룹 모기업이다. 이 부사장은 현재 대림산업 0.47%, 삼호 1.85%, 비상장 종합물류 회사 대림H&L의 주식을 100%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지분 움직임이 없어 본격적인 경영권 승계라기보다 다양한 경험 축적 과정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혼맥 1세대는 평범,2·3세대는 화려 이재준 창업자는 조선 선조대왕 7번째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9대손이다. 가문이 번창했기 때문에 수암의 집안은 늘 북적댔다. 생가가 서울로 향하는 길목이라서 오고 가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다.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500여섬지기 자작농 겸 지주였고 서울에서 큰 정미소를 운영하면서 경영의 덕목을 키워나갔다. 창업주 세대는 대부분 평범한 가정과 연을 맺었다. 큰 누이는 평범한 가정으로 출가했고, 둘째 누이도 작은 사업가에 시집을 갔다. 형님 이재형 전 국회의장 역시 평범한 집안의 류갑경 여사를 아내로 맞았다. 수암도 예외는 아니다. 평범한 가정에서 배필을 맞았다. 아래 동생들도 일반적인 가문과 결혼을 올렸다. 하지만 막내 이재연 아시안스타 회장의 결혼에서는 국내 굴지의 재계와 혼인을 맺는다.LG그룹 구인회 창업주의 차녀 구자혜(68)여사와 결혼하면서 대림과 LG는 사돈의 연을 맺는다. 이를 계기로 이 회장은 줄곧 LG그룹 경영에만 참여하고 있다. 자녀들도 명문가문과 연을 맺었다.LG카드 부회장을 지냈으며 LG그룹 고문으로 활동했다. 이 회장은 장인이 강세원 전 희성금속 사장과, 박동복 전 금호전기 회장과 사돈관계를 맺고 있어 이들과는 한다리 건너 사돈지간이다. 이준용 회장의 형제로 이어진 2세부터는 본격적으로 정·관계, 재계 혼맥이 형성된다. 이 회장은 1965년 연애끝에 이화여대 출신의 한경진 여사와 혼인했다. 장인인 한순성씨는 천안 사업가 집안 출신이었다. 처음에 양가에서 두 사람의 연애결혼을 반대하는 바람에 결혼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차남 이부용 전 대림산업부회장도 경희대 출신의 이선희 여사와 결혼, 재계 인맥을 쌓는다.1970년 집안 어른의 중매로 만났으며 장인이 서울주철회장과 헌정회 이사를 지낸 이종수씨다. 이 회장의 백부인 이재형 전 국회의장은 은행간부 출신인 배상준씨 집안에서 큰 며느리를 맞았다. 이어 큰 딸은 원용덕 전 헌병사령관 아들에게 시집을 보냈다. 작은 사업가와 결혼했던 둘째 고모 고 이임출의 딸은 윤용구 일동제약 회장 아들과 혼인을 맺었다. 숙부 이재연 아시안스타회장은 오세중 세방회장과 추경석 전 건설교통부장관 집안에서 며느리를 얻었다. 3세에 들어서 재계 혼맥은 더욱 두터워진다. 이 회장의 장남인 이해욱 대림산업 부사장은 LG그룹 구자경 명예회장의 외손녀인 김선혜(34) 여사와 결혼했다. 장모가 구자경 회장의 큰 딸 구훤미 여사, 장인은 희성금속 회장을 지낸 고김화중씨다. 이들은 친지의 소개로 만나 연애결혼했다. 이로써 대림산업은 LG가와 두번째 혼맥을 만들었다. 차남 이해승씨의 부인 김경애 여사는 전 미국 미주리대 김현영 박사의 딸이다. 3남 이해창(34)씨의 부인 최영윤(30) 여사는 같은 건설업종인 삼환기업 최용권 회장의 큰딸이다. 초창기 우리나라 토목 건설산업을 일군 두 집안이 사돈을 맺게 된 것이다. 아는 사람이 소개해 연애결혼했다. 결혼 당시 양가 부모들은 청첩장에 결혼 일자만 표시하고 장소, 시간은 넣지 않았다. 친지들에게 두 사람의 결혼 사실만 알리고 식장 참석과 축의금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서였다. 막내딸 윤영(33)씨 남편은 외국계 금융사에 근무하고 있으며 현재 일본에 체류 중이다. 가족은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요일마다 이 회장 집에서 모인다. 이 회장은 손자들이 보고 싶을 땐 아침 일찍 자식들 집을 찾곤 한다. ●전문 경영인, 업계 최장수 베테랑 대림산업㈜ 이용구(59) 사장은 6년 가까이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1년 대림에 입사, 해외·주택 영업 담당 임원, 기획조정실장, 행정본부장, 사우디 사업본부장, 공사본부장 등 주요 보직을 거친 정통 건설맨. 몇 안되는 해외건설 전문가로, 국제감각이 탁월한 국제신사로 알려져 있다.35년간 이 회장과 함께 하면서 임직원들의 맏형 역할을 하는 등 이 회장의 신임이 두텁다. 대림산업의 한 축인 유화사업부문을 이끌고 있는 CEO는 한주희(53) 대표이사 부사장.80년 입사해 관리, 기술기획 및 영업 핵심 업무를 맡았다. 대림 코퍼레이션 기획 담당 임원, 대림 H&L초대 대표이사를 지냈다. 중국 전문가로 바이어 협상에 있어 귀재로 평가받는다. 고려개발㈜ 오풍영(63) 사장은 95년 관리인 사장으로 임명돼 10년 넘게 장수하는 최고경영자.ROTC중앙회 부회장을 역임하는 등 대외활동도 활발하다. 대림산업에 근무하다가 87년 법정관리에 들어간 회사로 옮겨 기획·재무부문을 담당했다. 관리인 취임과 동시에 경영혁신에 드라이브를 거는 등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 당초 2007년까지 계획됐던 법정관리를 9년 앞당겼다. ㈜삼호 신일철(56) 사장은 현장중심 경영자.2001년부터 최고경영자를 맡고 있다.81년 입사하기 전 금융기관과 제조업체에서 근무한 경력으로 기획, 예산, 재경 등을 담당하다가 임원 승진 이후 인사, 자재, 안전 등 전분야에서 경험을 쌓았다. 업계 최상위 수준의 안전경영을 하고 있다. ㈜대림코퍼레이션과 대림 H&L을 동시에 맡고있는 박준형(53) 사장은 76년 대림 석유화학에 입사한 여천 석유화학단지 건설의 역군. 유화 부문 공장장, 구조조정 담당 임원, 석유화학사업부 대표이사를 역임했다. 대림코퍼레이션은 석유화학 주력 무역회사, 대림H&L은 유화 부문 물류 회사. 석유화학 산업 위기를 구조조정을 통해 슬기롭게 극복했다. 대림콩크리트공업㈜ 서봉삼(61) 사장도 장수 CEO.2000년부터 대표이사를 맡고 있다.70년 대림산업 입사 이후 주요 건설 현장을 누볐다. 상·하 구분없이 조직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합리적인 경영을 하는 CEO로 평가받는다. 지시와 통제보다 자율과 협력을 강조한다. 오라관광㈜ 김부경(57) 사장은 국내 최대 관광지인 제주에서 512실 규모의 특급호텔과 국제적 수준인 36홀 규모의 골프장을 운영하는 최고경영자.83년 오라관광에 입사, 국내·외 판촉, 객실 운영 등 회사의 주요 업무를 두루 거쳤다. 제주도 관광업계의 산증인. 제주관광협회 부회장, 제주지역골프협회장으로 활동중이다. 대림 I&S 김영복(46) 사장은 38세에 임원,40세 대표이사 등 대림그룹내 최연소 기록을 두루 갖고 있다. 늘 새로운 발상으로 주위를 놀라게 해 ‘아이디어 뱅크’로 소문났다.81년 대림산업에 입사,4년 6개월간 쿠웨이트 현장에서 전산업무를 담당한 것이 인연이 돼 대림그룹의 디지털 경영을 주도하고 있다. 대림자동차공업㈜ 박노균(57) 사장도 2000년부터 한 자리를 지키고 있다.73년 대림산업에 입사, 사우디아라비아 현장과 대림엔지니어링 재무담당 이사 및 행정본부장을 역임했다. 현장경영을 중시해 수시로 지방 사업장을 둘러본다. 외환위기 이후 이륜차 산업의 극심한 침체로 인한 경영위기를 슬기롭게 이겨냈다. 웹텍 창업투자 이대영(50) 사장은 금융 전문가.79년부터 94년까지 은행, 레이니어은행, 한미은행,JP모건, 한국신용정보에서 근무하고 화동창업투자 대표이사를 지내기도 했다.95년 대림엔지니어링 국제금융 이사로 인연을 맺어 대림산업 구조조정 담당 상무로 있다가 99년부터 웹텍 경영을 책임지고 있다. chani@seoul.co.kr ■ ’닮은꼴’ 창업주 父子 대림산업 창업주 이재준 명예회장과 이준용 회장은 여러 면에서 닮은 기업인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곁눈질하지 않고 한 우물을 파는 고집쟁이라는 점에서 같다.66년 된 회사지만 건설에서 벗어난 적이 한번도 없다. 건설이 제자리를 잡을 즈음해서 확장한 분야라고 해봤자 유화 부문 정도다. 덩치를 키우는 것을 자제한 것도 닮았다.‘돌다리를 두드리고 건너라.’는 말이 있지만 대림은 돌다리를 두드려보고도 건너지 않는 회사다. 하지만 옳다싶으면 금방 정상 궤도에 올려놓을 정도로 강한 추진력을 발휘하는 장점도 지녔다. 청탁을 하지도 않고 받을 줄도 몰랐다. 창업주는 인사 청탁에 있어서는 매우 완곡해 부모님이 살아 돌아와 청탁해도 들어줄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신념이었다.‘빽’이나 동창생을 찾아다니면 아예 사람 취급을 하지 않았다. 고 박정희 대통령 생전에 청와대에서 들어온 인사 청탁을 거절한 일화도 있다. 그는 대통령의 부탁을 감히 거절할 수는 없겠지만, 본인이 경영일선에서 물러서 있을 때면 몰라도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말했다고 한다. 명예회장과 현 회장 모두 쉽게 권력을 이용할 수 있었지만 사업가로서 자기 일에만 매달렸다. 이런 분위기는 지금도 이어져 형제간 독립된 사업을 일구거나 아예 발을 들여놓지 않는다. 친인척이 배제된 전문 경영인 체제로 움직인다. 그래서 친인척들로부터는 ‘남남만도 못한 회사’라는 얘기를 듣기도 한다. 이 회장은 “대림은 대주주라고 무조건 경영에 참여하지 않는다. 본인의 의지와 그에 합당한 능력이 뒤따라야 경영에 참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친인척 경영에 있어서 창업주와 똑같은 모습이다. 이 회장의 동생 부용씨는 대림산업 부회장을 지냈지만 지금은 대림산업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이 전 부회장은 대림통상 지분을 놓고 숙부와 싸움을 벌이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지만 지금은 일선에서 물러났다. chani@seoul.co.kr ■ 李회장 부부 ‘남다른 문화사랑’ 서울 종로구 통의동 경복궁 옆에 위치한 대림미술관. 화려하지 않지만 멋스러운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유난히 직장인들이 많이 찾는다. 대림산업 임직원들은 물론 점심 때는 주변 사무실 직장인과 공무원들이 단골 관람객이다. 대림 관련 업체들은 단체로 다녀간다. 회사 차원에서 직원들에게 문화활동을 적극 장려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림이 문화예술에 각별한 관심을 갖는 것은 이준용 회장 부부가 문화예술에 갖는 관심의 크기와 비례한다. 이 회장은 94년 한국기업메세나협의회가 탄생할 때부터 부회장으로서 활발한 문화예술 활동을 지원하고 있다. 대외 직함을 좀처럼 갖지 않으려는 이 회장이지만 10년넘게 이 단체의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다. 여기에는 문화예술에 각별한 애정을 갖고 있는 한경진 여사의 역할도 크다. 한 여사는 대림미술관을 맡아 대림의 문화공헌 사업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다. 대림미술관은 대림이 120억여원을 출연해 문을 연 사진매체 전문 미술관.93년부터 대전에서 운영해 온 한림미술관이 모태인데 2003년 서울로 옮겨 한 단계 발전시켰다. 이 미술관은 프랑스의 미술관 전문 건축가인 뱅상 코르뉘와 루브르 미술학교의 장 폴 미당 교수가 설계했다. 대지 253평에 지상4층, 연면적 366평 규모다. 대부분의 기업은 미술관 설립 때 한번 출연하는 것으로 끝나지만 대림은 운영에도 적극적이다. 문화에 대한 인식 수준이 낮은 현실에서 미술관이 자립운영을 해나가기에는 아직 어려운 실정이기 때문이다. 대림은 전시가 바뀔 때마다 직원들에게 전시를 관람토록 장려하고 경영전략회의나 송년회 등 사내 각종 모임을 미술관에서 열기도 한다. 예술에 대한 친숙도는 직원들의 창의적 사고를 키워주고 제품의 경쟁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최근 대림이 개발한 아파트 외벽 디자인은 미술저작권 등록을 통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건축조형물들이 건축분야의 저작권에 등록되는데 비해 예술적 가치를 인정받아 미술분야의 저작권을 얻기는 쉽지 않다. 이 외벽디자인이 적용된 역삼 e-편한세상의 경우 외관의 차별화로 주변 다른 아파트들에 비해 가격에서 우위를 보이고 있다. 직원들은 문화적 소양과 미적 안목이 결국 다른 업체와 다른 품질 경쟁력을 가져오고 있는 것이다. chan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안귀옥 가족클리닉 행복만들기] 시어머니만 졸졸… 마마보이 남편

    Q저는 결혼한 지 3년차되는 맞벌이 주부입니다.‘마마보이’인 남편을 견딜 수 없어 가족클리닉의 문을 두드립니다. 남편은 저와 연애를 할 때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결혼식을 올리고 저와 상의도 없이 고시공부를 하기 위해 고시촌에 들어갔습니다. 직장은 그만 두었고요. 그런데 최근 남편은 고시공부를 하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집에 있을 때도 남편은 항상 저녁을 먹고 나면 저를 내버려둔 채 홀시어머니 방에 들어가서 1시간씩 있다가 나오곤 했습니다. 혼인 초부터 지금까지 성관계를 제대로 가진 적도 없습니다. 시어머니는 남편의 속옷은 당신이 빨아야 한다면서 손도 못대게 합니다. -이숙진 A남편과 시어머니의 애착관계가 비정상적으로 형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홀시어머니가 외아들을 양육하였다니 시어머니에게 아들을 단순히 아들로만이 아니라 남편에 대한 감정을 가지고 의지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보통 부모들이 자녀를 양육해 장성한 다음에 출가시키면 몸뿐 아니라 마음까지 떨어져 보낼 수 있는 격리개별화 과정을 거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격리개별화 과정이 제대로 거쳐지지 않으면, 부모는 자녀를 출가시키고도 여전히 자녀들의 인생에 대해 도와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더러 있습니다. 이런 현상은 비단 시어머니와 외아들 사이에서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최근에는 외동딸에 대해 관심이 많은 친정어머니로 인해 장모와 사위 사이에서 갈등이 심해지는 원인이 되기도 합니다. 숙진씨의 남편은 어머니와의 애착관계 때문에 숙진씨와의 부부관계를 피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편이 숙진씨에게 합리적인 이유를 대지도 않고 부부관계를 피하는 것은 한계가 있으니까 고시공부를 빙자해 숙진씨와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닌가 짐작됩니다. 한편에서는 남편도 어머니와 떨어질 명분을 만들기 위해 분가를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현재 숙진씨 입장에서는 남편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나 숙진씨가 결혼생활을 지속적으로 영위할 생각을 하신다면 일단 남편이 현실을 직시할 수 있도록 부부상담을 받아보실 것을 권합니다. 남편이 하는 행동은 종국적으로는 부부갈등을 일으켜 어머니에 대한 효도가 아니라 결국은 불효로 끝을 맺을 수 있다는 것을 인식시키는 게 중요합니다. 숙진씨는 연애결혼을 하셨다니 남편에게는 연애시절에 서로 약속했던 사랑을 되새기고 행복하기 위해 결혼한 것이라는 것을 강조해서 남편이 현실을 알도록 해야겠습니다. 시어머니의 행동에 대해서는 일단 긍정적으로 격려해 드리고, 역시 아들과 행복한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어머니의 마음도 편하게 해드리는 것이라는 점을 설득해야겠습니다. 나아가 어렵더라도 어머니에게도 결혼시킨 자녀를 분리시키는 교육 프로그램에 참여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중요할 것 같습니다. 이때 어머니를 설득하는 방법은 어머니가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는 아들의 행복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인식시켜야 합니다. 숙진씨가 더이상 이런 상황을 견디기 어렵다면 민법 제840조 2항의 재판상 이혼사유인 부당한 대우와 6항 기타 혼인을 계속하기 어려운 사유에 해당하므로 이혼사유가 된다고 판단됩니다. 가족간의 갈등해소 방법을 몰라서 고민하시는 분은 사단법인한국행복가족상담소에서 상담을 통해서도 해결하실 수가 있습니다(032-867-7119/e-happyhome.or.kr) ●가족클리닉의 상담 의뢰는 인터넷 서울신문(www.seoul.co.kr)에서도 받습니다.
  • ‘맞고 사는 아내’ 줄지 않았다

    ‘맞고 사는 아내’ 줄지 않았다

    21세기에도 여성에 대한 가정폭력은 여전했다. 여성 6명 중 1명꼴로 가정내 폭력에 시달리고 있었고 가난한 국가일수록 폭력의 정도가 심한 것으로 조사됐다. BBC는 24일 세계보건기구(WHO) 보고서를 인용, 이같이 전하면서 에티오피아 여성 10명 가운데 7명은 가정에서 배우자의 폭행이나 성적 학대를 겪으며 살아가고 있다고 밝혔다. WHO는 조사대상 15개 지역 가운데 가정폭력이 가장 많은 곳은 에티오피아(농촌지역·71%)였고 페루·탄자니아·방글라데시·태국·사모아 순이었다. 한 나라 안에서도 도시보다는 농촌, 소득이 낮은 곳에서 상대적으로 가정폭력 발생 비율이 높았다. 또 빈곤 지역에서 여성들은 배우자의 폭력을 정당하다고 믿는 경향이 높았다. 에티오피아에선 부인이 부정을 저질렀거나 남편에게 순종하지 않았을 경우 ‘맞아도 싸다.’는 답변이 전체 조사대상의 80%에 육박했다. 또 집안일을 하지 않았을 경우에도 남편의 폭력이 정당하다는 답변이 60%를 넘었다. 연구를 총괄해온 클라우디아 G 모레노는 “폭력이 심각한 수준으로 주먹으로 때리고 목을 조르며 화상을 입히는 사례들이 다반사로 일어나고 있다.”면서 “폭행 피해자의 절반가량이 신체 부상을 호소했다.”고 밝혔다. 또 배우자로부터 폭행 당한 여성들은 우울증, 자살충동 등 정신적 문제를 포함한 육체적 질병을 앓을 가능성이 그렇지 않은 여성보다 2배 이상 높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브라질 47%, 페루 40%, 태국 38%등 피해 여성 가운데 자살을 생각한 응답자가 높았다고 지적했다. 이슬람권에선 부인이 ‘순종’하지 않는다고 살해도 하고 있는 실정이다. 영국 선데이 타임스는 지난 13일 아프간의 여류시인 나디아 안주만(25)이 사랑을 주제로 시집을 발간했다가 ‘집안 망신을 시켰다.’는 이유로 배우자에게 구타당해 숨지는 사태가 발생했다고 보도했다. 한편 첫 성경험이 강제로 이뤄졌다는 답변은 방글라데시(농촌지역·30%)·페루(24%)·에티오피아·탄자니아·사모아 순이었고 일본(0.4%)은 가장 낮아 가정폭력의 순위와 거의 일치했다. WHO의 ‘가정폭력과 여성건강에 대한 다국적 조사 보고서’는 “가정 폭력은 남녀 불평등의 결과”라면서 각국에 가정폭력에 대한 사법적 처벌과 피해 여성들에 대한 구제·지원 정책의 제도화 등을 촉구했다. 보고서는 2000∼2003년까지 일본·태국·브라질·에티오피아·페루 등 10개국 여성 2만 4000명을 면접·조사를 통해 이뤄졌다. 이석우기자 jun88@seoul.co.kr
  • [21일 TV 하이라이트]

    ●튀는지식 팝콘(EBS 오후 8시5분) 정확한 치료 방법이나 뾰족한 예방법이 없어 더욱 난감한 탈모. 첨단 의학기술로도 고칠 수 없다는 탈모의 대처 방법과 탈모를 늦출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한다. 함익병 피부과 전문의가 진단한 충격적인 염경환, 강성범의 탈모진행 상태를 살펴보고 집에서 손쉽게 할 수 있는 탈모 자가진단법도 소개한다.   ●솔로몬의 선택(SBS 오후 8시55분) 영업직원이 영업상 꼭 필요한 휴대전화를 택시에서 분실했는데, 택시 기사가 휴대전화를 주운 뒤 원래 소유주에게 과도한 보상금을 요구할 경우 죄가 되는지를 알아본다. 또 영화 속에서 수감된 아내의 손을 잡기 위해서 교도소 면회실 스피커를 떼어 냈을 경우에 그 남편이 처벌을 받는지도 살펴본다.   ●사이언스+(YTN 오후 8시30분) 우리나라는 세계 게임시장의 큰 흐름 속에서 적지 않은 힘을 발휘하고 있는데, 그 힘의 원동력은 무엇일까? ‘게임 코리아’의 저력을 확인하기 위해, 국내 최초로 열린 국제 게임전시회. 문화관광부와 정보통신부가 2008년 세계 최대게임쇼를 목표로 공식 후원하는 일산 킨텍스 국제전시장을 찾아가 본다.   ●자매바다(MBC 오전 9시) 충희가 부엌에서 설거지를 하는 동안 뒤늦게 잠에서 깬 민자가 나타난다. 식당일을 돕지 않고 다른 일에만 정신 팔려있던 민자를 고깝게 바라보던 충희는 투자한 돈 다 줄 테니 동업을 끝내자고 말하고, 민자는 충희의 말에 당황스러워한다. 때마침 식당에 나타난 한빈은 정희가 없어졌는데 혹시 안 들렀냐고 묻는다.   ●무엇이든 물어보세요(KBS1 오전 10시) 새싹채소는 이제 생소한 먹을거리가 아니다. 대중음식점에서도 입맛이 떨어지는 계절이면 어김없이 샐러드나 비빔밥에 새싹채소가 등장하고 있다. 사 먹거나 음식점에서 먹는 것을 넘어서 이제 집집마다 새싹채소 기르기가 인기다. 새싹채소에는 어떤 종류가 있으며, 어떤 효능을 갖고 있는지 알아본다.   ●이 죽일놈의 사랑(KBS2 오후 9시55분) 은석은 자신을 감싸 안은 채 부상 당한 복구에게 죽지 말라며 애절한 입맞춤을 하고, 복구는 병원으로 실려가 은석이 준 목걸이를 보며 잠시 흔들린다. 본격적인 복수를 결심한 복구는 은석에게 민구의 기억을 일깨우게 하려고 일기장을 통해 알게 된 민구의 서러운 사랑을 재현해 보이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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