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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시아에서의 미의 역할」 그레그대사 관훈클럽 연설

    ◎“한반도 평화통일이 미 정책의 목표”/「공산남침」막아 한ㆍ일 경제성장 부축/45년간의 협력이 아태발전 디딤돌/때로는 성공,때로는 실패했지만 값진 민주체제 유지 도널드 P 그레그 주한미대사는 27일 관훈클럽 초청토론회에서 「한국ㆍ베트남 그리고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역할」이라는 연설을 했다. 다음은 그레그대사의 연설 요지이다. 오늘날 한국에서는 「미국은 과연 한국에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흔히 듣는다. 40년전 미국인들도 「한국은 과연 미국에 무엇인가」라고 자문했었다. 우리는 냉전에서 가장 위급한 시점에서 그 물음에 결단성있게 응답했다. 자유정부제도를 수립하는 한국민의 권리보전을 돕는 것이 한미양국,나아가 세계인의 최선의 이익을 위한 일이라는 것을 결코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미국은 베트남문제에 대해서는 자신을 갖지 못한채 회의를 품고 있다. 「베트남」이 미국에 무엇을 뜻하는지에 대해 수많은 글들이 발표됐으나 아직도 해답은 찾아지지 않았다. 나는 그 해답을 미국의 자기민족중심적인 시각이 아니라 아시아의 배경에서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때 시작된 사건들의 흐름의 일부라는 차원에서 찾고자 한다. 동남아에서 미국이 수행해 온 역할을 더불어 검토함으로써 한국인들은 미국의 이상과 희망이 끝까지 추구하는 바를 폭넓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미국인과 미국의 정책을 이해하고 한미양국관계를 효과적으로 분석할 수 있을 것이다. 2차대전후 미국은 태평양 지역에서 맨 먼저 그 에너지와 주의를 일본으로 돌렸다. 미국의 복구계획과 그들의 비범한 에너지를 바탕으로 일본는 예상을 넘는 성공을 거두었다. 1950년 6월 북한군이 남침을 했다. 미국은 즉각 대응했다. 한반도분쟁에 대한 미국의 개입은 세가지 일을 이룩해 놓았다. 첫째 자유남한을 보전한 일이다. 한국은 꾸준히 참여민주주의를 지향하며 인상적인 경제성장의 성과를 거두었다. 둘째로 일본의 계속적인 재건이 보장됐다. 한국전쟁으로 일본산업은 활력을 얻었다. 한반도가 공산주의 지배하에 통일됐다면 일본의 발전에 심대한 부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김일성지배하에 통일된 한반도는 시일이 경과함에 따라 일본으로 하여금 완전무장을 갖추도록 만들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은 북한의 공산주의를 밖으로 뻗어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40년전 공동으로 치른 희생들이 오해받거나 왕왕 고의적으로 그릇되게 해석돼왔다. 하지만 이제 한국정부가 북한과뜻있는 대화를 갖고자하는 노력을 기울임으로써 오해의 공허성이 노출되고 있다.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이 미국정책의 목표이며 이것이 이뤄진다면 40년동안의 노력이 절정에 이를 것이다. 2차대전후 동남아시아도 폭력사태로 고통받아 왔다. 인도네시아는 1945년 네덜란드로부터 독립키 위해 항쟁했었으며 65년에는 공산당의 쿠데타로 거의 넘어갈 뻔했다. 필리핀에는 1946년 「후크」단의 반란이 있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공산반도들이 10년이나 소란을 피웠다. 베트남에서는 식민통치를 재확립하려는 프랑스의 노력이 1954년 디엔비엔푸에서 끝났으나 월맹측의 끈덕진 통일열망이 불안한 정세를 조성하고 있었다. 1965년 최초의 미군부대가 베트남에 투입됐을때 동남아시아는다루기 힘들고 장래성 없는 지역이었다. 또한 중국은 당시 마르크스주의자 주도의 세계 혁명을 공공연하게 촉구한 임표가 강력한 지도자로 군림하고 있었다 미국의 건설적인 정책의 결과로 아세안국가들은 결속되고 자신감 넘치는 호황지역이 됐으며 75년 베트남 패망,78년 공산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등을 다룰 태세를 갖추었다. 반면 베트남은 세계 최빈국의 하나이다 아시아에서의 미국의 3개 주요한 개입 즉 일본의 부흥,한국의 수호,베트남에서의 공산주의 팽창 저지등을 아시아인들은 충분히 이용했다. 미국은 베트남전 패배를 슬퍼하고 있지만 아시아인들은 이득을 보게 된 것이다. 1945년 이래 태평양 지역에서 아시아인들과 미국의 상호노력은 때로는 성공을 때로는 실패를 기록했지만 아시아인들의 집단적인 노력덕택으로 동남아는 앞날이 밝고 생기있는 지역으로 떠올랐다.
  • “남북군축 3단계 구체방안 연구”(의정중계 26일 본회의)

    ◎용산 미 기지 이전 부담경비 밝혀라 질문/남북 신뢰조성까진 휴전체제 필요 답변 ◇조순승의원(평민)=정부는 7월중 한소수교단을 모스크바에 파견할 예정으로 있으나 소련관계자들은 수교전망을 어둡게 보고 있다. 소련이 유보적 자세를 보이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보며 수교시기는 언제쯤으로 전망하는가. 정부는 한중 수교문제를 협의키 위해 중국에 특사를 파견할 계획이라고 하는데 현재 어느정도 관계진전을 보이고 있는가. 정부가 일방적으로 발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을 국민투표에 부쳐서 우리의 통일방안을 결정할 의사는 없는가. 일본은 우리나라 예산의 4배가 넘는 군사비를 쓰고 있는데 일본의 군사정책에 대한 정부의 대책은. ◇박관용의원(민자)=남북한 대결은 남의 「경직된 안보논리」와 북의 「폐쇄적 주체논리」의 소산이다. 이제 더이상의 소모적인 군비경쟁은 종식되어야 한다. 북의 군축제안의 진실성을 확신할 수 없고 핵무기 개발 등도 고려해야겠으나 소련이 개혁과 군축을 선택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 북의 제안을 평가할 수 있으며 이를 긴장완화의 호기로 이용해야 된다고 보는데 이에 대한 정부의 견해는. 남북한 불가침협정의 수용이나 선후없는 교류협정 및 선 군사문제 해결방안을 수용할 의사는. 북측의 군축제안에 대한 우리측의 대안은 무엇인가. 북을 반국가단체로 규정한 국가보안법의 개정용의는. 통일원의 위상제고와 예산증액 등에 대한 정부의 입장은 무엇인가. ◇정몽준의원(민자)=한소 정상회담등 북방외교의 성공적 전개등 국제정세의 급격한 변화가 국민들의 안보의식을 약화시키거나 혼란상태에 빠뜨릴 위험은 없는가. 공산주의의 허구성을 파헤치고 일부 젊은이의 좌경화 환상을 일깨워 줄 교육계획은 무엇인가. 북한이 핵무기 개발에 전력을 기울이는 상황에서 재래식무기 감축이 실효가 있겠는가. 군축에 대한 정부의 기본입장은 무엇이며 북한이 지난 5월31일 제안한 군축안에 대한 정부의 평가는 무엇인가. 군비통제조정위원회의 구성과 기능은 어떻게 되는가. 용산기지 이전의 소용기간과 우리측부담경비를 밝혀라. ◇강영훈국무총리=북방외교는 국민적인 합의를 바탕으로 공개외교방식을 택한다는 것이 정부의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앞으로도 초당적 접근방식을 취해나가겠다. 한소 수교원칙은 합의됐으나 그 시기는 보류됐다는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동양적인 사고방식에 따라 대의명분을 중요시하는 우리나라는 정식외교 수립에 우선 비중을 두고 있으나 실질적인 접근방식을 취하는 소련은 경제협력문제등에 중점을 두고 있어 다소 입장차이가 있는 것으로 비춰지고 있다. 수교시기문제등은 양국이 외교경로를 통해 협의해 나갈 것이다. 대통령의 지난 방일때 아키히토 일왕과 가이후총리등이 과거 한일문제에 대해 명백히 사과 반성한다는 뜻을 밝힌 만큼 이제 과거사는 일단락 짓고 한일간 선린우호의 새 시대를 열어야 할 것이다. 일왕의 우리나라 방문은 양국 국민들의 환영하는 분위기가 성숙될 때 실현될 것으로 본다. 최근 북한의 군축제안은 현실여건의 변화에 따른 것으로 용어사용등에도 신중을 기한 듯한 모습을 보이고 있으나 대내외 선전에 더큰 비중을 두고 있어 근본적으로는 종래 입장과 큰 차이가 없는 것으로 보인다. 남북 고위회담등이 성사될 경우 적극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군비통제문제등을 다루기 위해 군비통제종합조정기구의 설치를 검토중이다. 주한미군문제는 북한의 남침위협이 현저하게 감소될 경우 한미 양국간에 신축성있게 논의될 것이다. 국가보안법은 상황변화등을 반영,개정할 수 있으나 국가의 안전보장 차원에서 현행골격을 유지해야 할 것이다. ◇최호중외무장관=외교에는 상대방이 있기 때문에 교섭과정에는 불가피하게 비밀로 할 때가 있다. 한소 정상회담도 북한의 존재를 의식,소련측의 비밀요청이 있었으며 소련도 고르바초프대통령 측근 몇명만 정상회담 개최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일본의 배상청구문제는 지난 65년의 청구권협정 조인으로 법적으로는 이미 매듭된 것이다. 김­오히라메모는 외교교섭과정에서 행해진 일로 공개하는 것이 적절치 않다고 본다. 일본의 군사비 증대문제는 기본적으로 주권국이 독자적으로 결정할 문제이나 주변국가들의 과거경험을 고려,전쟁포기를 명시한 일 헌법과 자위권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직ㆍ간접적으로 충고했다. ◇이상훈국방장관=유럽의 군축모델은 개별국가간 협상을 벌여야 하는 아시아 태평양지역에서는 적용할 수 없다. 한반도 문제는 남북한 당사자가 주도하고 주변국가가 지원하는 형태이어야 한다. 한반도의 군축을 위해 3단계의 구체적 추진방안을 연구하고 있다. 2천명의 주한미군 감축은 미 국방성이 사전 검토한 바 없으며 미 의회보고과정에서 급작스레 결정된 것이며 한미간에 충분히 협의되지 못했다. 주한미군 감축은 비전투군 중심으로 최소한 감축예정이며 유사시에 대비한 공동작전문제를 협의중이다. 7천명의 규모만 결정된 감축문제는 오는 11월 한미 안보회의에서 구체적 시행시기와 대비책등이 결정될 것이다. 북한은 22개 여단의 특수군을 보유하고 있으며 우리는 북한의 40% 수준에 있다. 장비도 북한의 우수부대에 비해 열세에 있으며 한국군내 특전부대가 최정예부대다. 군조직 개편은 독자적인 군지휘체제로 자주국방을 이루려는 것으로 남북한 군비통제 가능성에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 ◇홍성철통일원장관=북한의 군축제의는 종래 대남전략과 달라진 게 없다. TV와 라디오의 일방적 개방은 대남 기본전략이 변하지 않는 한 남북관계에 문제가 생길 우려가 있다. 상호개방이 바람직하다. ◇조희철의원(평민)=정부는 대소정책에 자신감과 지식을 충분히 가지고 있는지,그리고 국내 소련관련 연구현황을 밝혀라. 6공화국이후 최근의 샌프란시스코회담까지 북방외교 추진과정에서 사용한 자금내역을 밝혀라. 남북 정상회담의 추진은 어느 단계까지 와 있는가. 민족동질성 회복과 신뢰구축을 위해서는 먼저 문화ㆍ경제분야 및 TVㆍ라디오 등 전파교류의 역할이 크다고 보는데 총리의 견해는. 한반도의 핵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는가. 북한의 핵보유 보도에 대한 정부의 입장과 정부가 파악하고 있는 정보를 밝혀라. ◇박승재의원(민자)=21세기를 대비한 새로운 외교ㆍ안보ㆍ통일의 전략은 무엇인가. 한소수교가 언제 실현되며 수교가 계속 지연될 때 이에 대한 대비책은. 북방정책의 성과나 한소 정상회담의 성과를 통일로 연결시키기 위해서도 대폭적인 대북한 화해조치가 취해져야 한다. 한소 정상회담때 노태우대통령이 고르바초프대통령을 통해 북한측에 어떤 메시지를 보냈는지 밝혀라. 정부는 7ㆍ7선언이후 북한과 미 일간의 관계개선을 위해 측면지원한 내용은. ◇강총리=북한은 남북한 정상회담에 아직까지 부정적 입장이나 국제환경등을 감안할 때 계속 거부키는 어려우리라 예상된다. 남북 정상회담 추진은 평화통일에 접근하고 남북 신뢰조성에 효과적 방법이기 때문에 하는 것이며 이를 국내정치에 이용할 의사는 추호도 없다. 휴전협정체제를 평화협정체제로 대치하는 데는 전적으로 동의한다. 다만 남북간 신뢰조성 및 평화정착이 될 때까지 휴전협정이 필요하다. 남북 정상간 민족공동체헌장이 제정되고 남북연합이 제도화돼 항구적 평화가 정착되도록 꾸준히 노력하겠다. 대외여건 변화와 국민합의를 바탕으로 실천적 대북 화해조치를 꾸준히 전개하겠다. 북한의 자존심을 손상안주는 방향에서 각 분야의 남북 교류협력을 추진하겠다. ◇최외무=한ㆍ소 정상회담때 노태우대통령은 북한의 선동 대남정책과 우리의 통일정책 그리고 북한의 고립을 원치 않는다고 고르바초프대통령에게 설명했다. 고르바초프대통령은 이에 대해 김일성에게 전달할 메시지가 있느냐고 물었으며 노대통령은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에 응할 것 ▲우리는 북한에 군사적 우위를 행사할 의사가 없다는 메시지를 전해줄 것을 요청했다. 중ㆍ소교포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문제는 거주국의 불필요한 오해를 살 우려가 있는데다 교포들이 고국에 대해 과다한 기대를 가질 우려가 있기 때문에 신중하게 대처해야 한다. ◇이국방=북한이 적화통일 노선을 포기하고 성실하게 남북대화에 임하도록 하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북한을 군비통제협상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라도 우리의 전력증강사업을 계속해야 한다고 본다. 서독이 동독보다 3배이상의 우세한 군사력을 보유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가 경제ㆍ군사력 양면에서 우세를 보일 때 북한의 개방을 유도할 수 있다.
  • 미,6ㆍ25 계기로 초강대국 부상/WP지,「한국전 40년」재조명

    ◎국방비 지출 3배ㆍ병력수 6배 늘어나/외교정책 반공으로 선회… 냉전 본격화 미국에서 한국전은 「잊혀진 전쟁」으로 불려진다. 승리의 영광도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아 오래전에 이미 미국인들의 뇌리에서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국전은 미국의 정치ㆍ군사ㆍ세계전략 등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고 24일자 워싱턴 포스트가 한국전 발발 40주년 특집 기사에서 회고했다. 다음은 EJ 다이오네 기자가 쓴 이 기사의 요약이다. 한국전은 2차대전 처럼 승리의 영광을 안겨주지 않았지만 월남전 처럼 패배의 치욕도 남기지 않았다. 초기를 제외하면 한국전은 특별히 인기있는 전쟁도 아니었고,또 월남전처럼 극심한 국론 분열도 야기 하지 않았다. 결말도 나지 않고 인식도 잘못된 한국전은 그후 미국이 50년대의 번영을 구가하며 세계의 초강대국으로 뻗어 나가자 재빨리 대중의 기억 속에서 사라졌다. 그래서 한국전은 미국인들에게 「잊혀진 전쟁」이 돼버렸다. 한국전은 미국을 크게 바꿔 놓았다. 미국의 정치,대통령권한에 대한 이해,군의 지위,그리고 세계에서의 미국의 역할 등에 중요한 변화를 초래했다. 한국전은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위치를 확인해 주었고,또한 월남전으로 이어지는 길을 깔아 놓았다. 어느 면에서 이 잊혀진 전쟁은 미국 전사상 가장 긴 파장의 영향을 미친 전쟁이었다. 중도 좌파 정책연구소의 리처드 바네트는 『장차 한국전은 월남전보다 더 중요하게 회고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견해는 논란의 여지가 많지만,역사가들 사이에서 토대를 넓혀 가고 있다. 몇가지 수치만 보더라도 한국전은 미국에 엄청난 변화를 가져 왔음을 알 수 있다. 미군사비 지출은 49년의 1백40억달러에서 53년엔 4백40억달러로 늘어났다. 한국전이 터진 50년 6월 미국은 59만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이 휴전된 53년에 이 숫자는 3백60만명이 되었다. 북한 공산주의자들의 남한침공은 당시 트루먼 정부가 사상 최대의 군비 증강을 추진하는데 필요한 「명백한 군사적 위협의 실존」증거를 제공했다. 역사학자이며 50년대에 출간된 「미국 전성시대」의 저자인 윌리엄 오닐은 『미국의 한국전 참전은 2차대전 후 조지케넌이 제창한 대소 봉쇄정책의 골간 수정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당시 중국을 공산주의자 수중에 넘겨 주었다는 비난 속에 대소 자세를 경화하고 있던 트루먼 행정부는 북한의 남침 배후에 소련의 스탈린이 도사리고 있는 것으로 확신하고 한국전에 신속히 대응했다. 트루먼은 유엔의 한국 파병 결의를 내세워 전쟁 선포에 관한 의회 승인을 구하지 않았다. 냉전의 중요한 선례가 된 이같은 처사는 월남전 기간중 큰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한국전은 또 미 공화당에서 고립주의 세력을 약화시켜 공화당 보수파의 대외정책의 근간을 고립주의에서 반공으로 바꾸게 했으며,이러한 변화속에 상원의원 매카시의 공산주의 탄압 입장을 강화시켰다. 역사학자 존 패트릭(캘리포니아대)은 매카시즘을 『전쟁의 성취도가 결여된데 따른 심리적ㆍ정치적 좌절의 소산』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맥아더 장군이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켜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몰아냈을때 전쟁을 종결했다면 미국은 신속한 승리를 주장할 수 있었을것이다. 53년 7월27일 휴전협정 체결때까지 한국전에서 미국인 남녀 3만3천6백29명이 죽었고 10만3천명이 부상했다. 한국전 종전 공약으로 대통령에 당선된 아이젠하워가 휴전이라는 모호한 결론을 성립시킨후 『우리는 하나의 전장에서 휴전을 이뤘을 뿐 세계 평화는 정착시키지 못했다』고 선언했을 때 그는 한국전이 후에 월남전까지 이어진 긴 냉전의 시작에 불과했음을 간파하고 있었다.〈워싱턴=김호준특파원〉
  • 전쟁의 발발과 전개(새 실록 6ㆍ25 김학준:중)

    ◎“북한 남침은 소의 적화음모”… 미,1주만에 파병/중국,유엔군 38선 넘자 16개사단 급파/소선 항공ㆍ기갑사단 만주에 전진배치/7월에 대전서 새 한ㆍ미협정… 군지휘권 유엔군에 넘겨(서울신문 6.25 40주 특집) 한국전쟁은 전쟁의 국면의 전개양상에 따라 5개의 기간으로 나누어 살필 수 있다. 제1기는 50년 6월25일부터 50년 9월 중순까지의 시기로,남침을 개시한 북한의 압도적인 군사력으로 대구와 부산 일대를 제외한 남한 전역을 석권했던 시기이다. 제2기는 50년 9월 중순부터 50년 10월 하순까지의 시기로,국제연합군의 인천 상륙작전의 극적인 성공을 계기로 국련군이 반격을 계속해 한ㆍ만 국경으로까지 접근함으로써 북한정권이 붕괴 직전까지 이르렀던 시기이다. 제3기는 50년 10월 하순으로부터 51년 4월 초순까지로,중공군이 개입함으로써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되고 국련군이 다시 후퇴하던 시기이다. 제4기는 51년 4월 초순부터 51년 6월 중순까지로,국련군이 「대량보복」을 통해 전투의 주도권을 다시 장악하여 군사적 균형을 이룬시기이다. 제5기는 51년 6월 중순부터 53년 7월27일까지의 시기로,전쟁과 함께 휴전회담이 진행된 화전양상의 시기이다. 이번의 제2회에서는 제1기부터 제3기까지를 다룬다. ○3일만에 서울점령 ▷제1기◁ 50년 1∼2월 이후 38도선 주변에서 소규모의 군사력 충돌을 계속 일으켜오던 북한은 6월25일 새벽 드디어 전면남침을 개시했다. 북한의 공격은 빨라 6월27일 서울의 외곽인 창동과 미아리에 방어선을 설정한 한국군을 붕괴시켰다. 이에 따라 이 날짜로 육군본부는 수원으로 후퇴했고 정부는 대전으로 천도했다. 6월28일 북한군은 서울을 점령했다. 그런데 북한군은 서울 점령 3일동안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는데,이 3일은 생사의 갈림길에 있던 남한을 살려 준 귀중한 시간이었다. 북한군이 남침 사흘만에 서울을 점령한 여세로 그대로 밀어붙였다면 남한으로서는 최악의 상태를 맞았을지도 모른다. 북한군의 기습에 대한 놀라움 속에서도 트루먼 미국대통령은 즉각적인 응전을 결심했다. 북한의 남침을 소련의 세계적화 시도의 일환으로 보았으며,직접적으로는 미일 군사안보체제에의 대항조치로 인식하여 한반도가 공산화하는 경우 그것이 일본의 국내정치에 미칠 영향을 걱정했기 때문이다. 그는 곧 국제연합 안전보장이사회에 대해 긴급회의의 소집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6월25일 일요일 하오 3시에 열린 안보리에서 미국은 북한이 남한에 대해 「무력공격」을 가했다고 주장하고 그 「무력공격」은 「평화파괴행위」라고 비난한 다음 북한군이 즉각적으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군사력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킬 것을 요청했다. 미국의 제안은 9대0으로 가결됐다. 때마침 소련 대표는 장기결석중이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없었다. 안보리의 결의는 북한의 군사행동을 정지시킴에 있어 아무런 효과를 가져오지 못했다. 그리하여 6월27일 안보리는 『군사공격을 격퇴하고 그 지역의 국제평화와 안전을 회복하는 데 필요한 원조를 대한민국에 제공할 것』을 결의했다. 이와 더불어 트루먼은 도쿄의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대한민국에 대한 해ㆍ공군의 지원을 개시하라고 명령하고,미 제7함대로 하여금 중공군이 대만을 공격하지 못하도록 막으면서 동시에 대만의 장개석정부가 중국 본토를 공격하지 못하도록 조처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6월30일 트루먼은 맥아더 총사령관에게 ①해ㆍ공군뿐만 아니라 지상군을 투입할 권한과 ②군사상 필요한 경우에는 38도선 이북의 군사목표를 공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는 사실을 발표했다. 이튿날 주일 미 제24사단 제21연대 제1대대가 부산에 상륙함으로써 미 지상군의 개입이 시작됐다. 바로 이날 안보리는 국제연합군 사령부를 설치하고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무력원조를 미국의 단일지휘 아래 둔다는 내용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에 따라 노르웨이 출신의 국제연합 사무총장 트리그브리는 국제연합기를 미국에 전달했으며 트루먼은 즉시 미극동군 총사령관 맥아더를 국련군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미국의 단호하고 신속한 결정은 대한민국을 크게 고무시켰다. 비록 남침에 쫓겨 피난길에 들어선 형편이지만 국련군의 반격으로 오히려 통일의 기회를 잡을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6월29일 맥아더가한강전선을 시찰하고 곧바로 수원에 내려왔을 때 이승만 대통령은 모든 협력을 약속했다. 실제로 7월14일 대전에서 맺은 협정을 통해 이대통령은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을 국제연합군 총사령관 맥아더에게 위임했다. 이어 7월19일 이대통령은 『국련군의 작전목표가 전전원상의 회복,즉 38도선에서의 진격정지에 그쳐서는 안되며 북진통일을 완수해야 한다』는 내용의 친서를 트루먼에게 전달했다. 한미간의 이러한 협력속에서도 전세는 계속 불리해 후퇴에 후퇴를 거듭 했다. 그리하여 맥아더는 한때 최악의 경우에는 한국에서 손을 떼고 한국정부를 괌이나 하와이로 후퇴시킨다는 계획마저 세웠다. 이대통령은 분노속에 강경하게 거절했다. 마침 9월5일부터 13일까지 경주와 영천일대의 사활을 건 전투에서 국련군은 북한군 제15사단을 궤멸시켰다. 국련군의 반격이 전개될 수 있는 상황이 비로소 형성된 것이다. ○소대사가 대화 제의 ▷제2기◁ 국련군 반격의 결정적 계기는 확실히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이었다. 9월12일 극비리에 부산을 출발한 2백61척의 대수송선단은 9월15일 인천항에서의 작전개시와 동시에 곧바로 인천시 남부에 상륙했다. 북한군은 2개 사단병력으로 서울방위사령부를 편성했으나 한국군의 해병대가 9월27일에,이어 국련군이 9월28일에 서울을 완전히 수복했다. 이에 따라 9월29일 이대통령은 맥아더와 함께 공로로 서울에 도착하여 서울을 대한민국정부의 관할아래 넘기는 수도 탈환식에 참석했다. 국련군의 성공적인 반격이 확고해지면서 서방진영 및 중립국가들의 일각에서는 전전원상의 회복이라는 조건아래 즉 북한군을 38도선 이북으로 철퇴시키는 조건아래 국제연합군의 진격을 멈추게 하고 이 테두리 안에서 한국전쟁을 해결하려는 움직임이 제기됐다. 8월1일 안보리의 의장이 되는 것을 계기로 삼아 안보리에 복귀한 소련대사 말리크도 남북한 대표를 국제연합에 동시 초청하여 한반도문제를 해결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에 “항복”요구 그러나 미국의 태도는 확고하여 북한정권의 완전한 붕괴,즉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 통일만이 국련군의 목표임을 선언했다. 대한민국 정부도 『38도선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선언하면서 국련군의 북진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을 강조했다. 이때 서방 7개국이 미국의 입장을 지지하는 공동결의안을 제출하여 『필요한 경우에는 무력을 써서라도 국련군의 주도 아래 한반도를 통일시킨다는 태도를 밝혔다. 그러나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해도 좋다는 최종적인 결정은 내려지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10월1일 우선 한국군은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으로 진격했다. 이튿날 맥아더는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서도 좋다는 미국정부의 최종결정을 한국정부에 알리면서 북한정권의 항복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발표했다. 그러나 다시 말하거니와 국련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해도 좋다는 서방의 공동결의안이 아직 국련을 통과한 것은 아니었다. 여기서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막으려는 공산진영 외교적 노력이 시도됐다. ○주은래 “방관 않겠다” 우선 중국 총리겸 외무장관 주은래는 10월2일 깊은 밤에 주중 인도대사 파니카르를 외무부로 불러 『만일 국련군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는 경우 중국은 조선에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그러나 한국군만이 38도선을 넘는 경우 중국은 그러한 조처를 취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파니카르대사는 주의 발언을 본국정부에 즉시 알렸으며,인도정부는 그대로 미국정부에 알렸다. 트루먼은 주의 발언이 국련군 북상안이 통과되는 것을 막기 위해 국련을 협박하려는 「대담한 시도」로 판단하여 그것을 무시했다. 이에 따라 국련은 10월7일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하는 서방쪽의 공동결의안을 통과시켰으며 여기에 근거해 국련군은 7∼8일 드디어 38도선을 넘어 북진하기 시작했다. 이제 중국이 주사위를 던질 차례가 되었다. 10월10일 주은래는 『조선전쟁은 처음부터 중국의 안전에 대한 중대한 위협이었다』고 규정하고 이 전쟁에서 『중국인민은 수수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주의 이 선언은 중국의 모든 유력지들에 보도되었는데 그것은 중국의 참전에 대비하여 중국인민들을 동원하기 위한 조치로 풀이되었다. 이처럼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커지자 이 문제를 협의하기 위해 트루먼은 10월5일 태평양의 웨이크도로 맥아더를 불렀다. 회담에서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이 거의 없다고 대답했다. 이 무렵 국련군의 북진은 계속되고 있었다. 북한군이 곳곳에서 무너지자 김일성은 10월12일 스탈린에게 소련의 지원을 요청하는 친서를 보냈다. 그러나 소련은 미국과의 직접적 대결을 피하려는 자세만 보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김일성은 가을비가 세차게 내리던 10월16일 새벽 2시 소련제 고급승용차 볼가를 타고 평양을 빠져 나가 10월26일 만주와의 접경지대인 평양북도 강계군에 겨우 도착할 수 있었다. 바로 이날 이대통령은 원산시에 그 모습을 나타내 열광적인 원산시민들을 격려했다. 이어 10월30일 평양을 방문하고 『나라와 겨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한 덩어리가 되어 공산당을 몰아내고 남북통일을 완수하자』고 호소했다. ○스탈린,중국에 찬사 ▷제3기◁ 이 무렵 중국의 군사적 개입이 극비리에 시작되고 있었다. 국련군의 38도선 북상을 허용한 서방결의안이 10월7일 국련총회를 통과하자 모택동 중국공산당 주석은 「중국인민지원군」을 조직하라는 명령을 내리면서 팽덕회을 총사령관에 임명했다. 마침 북한으로부터 파병을 요청하는 밀사들이 와 있었으며 그리하여 팽은 10월13일 북한으로 들어가 김일성을 만난 뒤 전투에 참가하여 전황을 살핀다음 그 결과를 모에게 보고했다. 그때로부터 엿새뒤 중국군은 마침내 은밀하게 압록강을 건넜다. 중국이 참전을 최종 결정하던 어느 시점에 스탈린은 『김일성동지는 장래 중국 국경 안에 망명정부를 세울 것』이라고 모에게 알리면서 이처럼 위급한 상태에 빠진 북한정권을 구출하려던 중국이 적어도 6개 사단을 파견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그러나 중국은 일단 행동을 개시한 뒤 16개 사단을 출동시켰다. 중국쪽 설명에 따르면 중국의 이러한 결정을 보고 『처음에는 우리들을 민족주의자가 아닌가 의심했던 스탈린은 눈물을 흘리며 우리들이 가장 좋은 동지임을 인정했다』 중국군의 개입을 전혀 모르는 채 한국군은 10월25일 마침내 압록강변의 초산을 점령했고 미 제24사단은 북한의 임시수도 신의주에 접근하고 있었다. 이제 대한민국에 의한 한반도의 통일은눈앞에 닥쳐온 것 같았다. 그러나 바로 그날에 있었던 한국군과 중국군의 첫 교전은 상황을 완전히 바꾸었다. 맥아더는 11월5일 중국군의 참전을 국련에 보고하면서 「완전히 새로운 전쟁」이 시작됐음을 알렸다. 중국군의 출현으로 말미암아 『한국전쟁은 국련군 총사령관의 권한 범위를 벗어나 국련과 세계 여러 나라들의 정치수뇌급에서 해결책이 제시돼야 할 전쟁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중국 외무부도 11월11일 중국군의 참전을 공개적으로 처음 시인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은 대대적인 공격을 취하면서 계속 남쪽으로 쳐내려 왔다. 이때로부터 약 2개월 동안 미군은 미군의 역사상 가장 장기의 후퇴를 경험하게 되었다. ○영서 종전모색 제의 그 결과 중국군은 12월26일 38도선을 넘고 12월말까지 38도선 이북의 북한 전역을 점령하고 51년 1월4일에는 서울을 점령했다. 이에 따라 국련군은 평양철수(12월4일 완료)와 흥남철수(12월24일 완료) 및 서울철수(1ㆍ4후퇴)를 경험해야 했다. 이 과정에서 만주에 소련의 1개 항공사단이 배치되어 북한군과 중국군의 배후를 지원했고,전투상황의 악화에 대비하여 5개 기갑사단을 북한에 파견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군이 개입하면서 서방세계의 일각에서는 휴전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특히 이미 중국을 승인한 영국은 국련 대표권을 대만에 줄 것이 아니라 중국에 준뒤 중국과 종전을 모색하자고 제의했으며,애틀리 총리는 12월4일 워싱턴에서 트루먼과 회담한 뒤 『두나라는 협상을 통해 종전을 추구한다』는 합의를 끌어냈다. 여기에 발맞춰 아시아ㆍ아랍권 13개국도 한반도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골자로 하는 결의안을 국련에서 통과시켰다. 그러나 미국 안의 반공분위기는 매우 높아 하원과 상원은 각각 51년 1월19일과 1월23일 국련이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국련의 휴전 분위기에 실망하던 한국 정부는 다시한번 무력통일에 대한 기대를 걸게 됐다. 북한은 북한대로 다시 한번 적화통일에 대한 꿈을 키우게 됐다. 중국군의 개입으로 절대절명의 위기에서 구출된 김일성은 12월4일 강계군에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제3차 정기회의를 열고 「미제의 완전한 축출」을 다짐했다. 이와 동시에 무정을 비롯한 주요한 도전자들을 숙청했다.
  • 외언내언

    문희공 신개는 요직을 두루 거친 조선조 초기의 상신이다. 세종때 북방의 침입이 잦은 야인정벌을 주장했던 사람. 「고려사」 수선에도 참여한다. ◆그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외가에서 자랐다. 어느날 외숙이 모든 아이들을 불러 앉혀놓고 야단을 친다. 새로 도배해 놓은 곳에 낙서한 놈이 누구냐면서. 외4촌들은 모두 변명을 하는데 공만은 묵묵부답. 『그러고 보니 네가 했구나』. 외숙은 공을 다그쳤다. 공은 조용히 일어나서 낙서한 곳으로 가 팔을 뻗어 올렸다. 그 낙서에 닿지 않는 게 아닌가. 외숙은 그때 공의 그릇을 짐작했다고 한다. ◆진실이 숨겨지는 것은 아니다. 말을 않고 있다 하여 키도 안닿는 문희공이 낙서를 했을 턱이 없다. 그렇건만 했다는 말이 일부 호사가들에 의해 그럴싸하게 번지기도 했던 「6ㆍ25 북침설」. 그런데 요근래 북한에서 고위직에 있다가 소련으로 망명한 「외4촌들」이 적잖이 내한하여 그 당시의 상황을 증언한다. 그들은 남침 준비ㆍ진행에 가담했던 사람들. 그 「낙서」가 어떻게 해서 이루어진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설명한다. 그때는 「낙서의 정당성」을 믿었던 그 입으로. ◆우리로서는 북침설이네 남침설이네 하는 말 자체에 두드러기가 난다. 논쟁거리도 되지 않는 것을 가지고 논쟁을 하게 되면 북침설이라는 것이 「기습남침」과 격이 같아져 버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허위가 진실과 같은 자리로 됨을 의미하는 것. 그런터에 많은 「외4촌들」이 와서 진실과 허위의 사이를 갈라 놓는다. 성중형외­참된 것은 숨기려 해도 밖으로 나타나는 법. 진실을 털어놓는 「외4촌들」은 시일이 흐른 다음에야 「낙서」의 잘못을 알고 뉘우친다. ◆6ㆍ25 일어난지 어언 40년. 이제 지구촌의 공산부락들에까지 새 바람이 불건만 철벽을 쌓고 변하지 않는건 북녘땅 정권뿐이다. 저들은 오늘도 「미제와 남조선」이 북침기회를 엇본다고 떠들어대고 있고. 북녘땅에 산들바람 불날은 언제일꼬.
  • 한국전쟁 참전으로 중국 경제발전 지연/홍콩 대공보

    【홍콩=우홍제특파원】 6ㆍ25동란은 소련 스탈린의 판단착오에서 비롯된 것이며 그의 지원을 받은 북한에 의해 저질러진 남침행위라고 24일 홍콩의 친중국계 대공보가 보도했다. 이 신문은 「조선전쟁 40주년과 한반도 형세」란 제목의 사설을 통해 이같이 밝히고 북한 김일성은 50년 4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남침계획을 협의하고 돌아오는 길에 모택동에게 밀사를 보내 이 사실을 보고했다고 밝혔다. 이 신문은 중국이 49년 정부 수립이후 한창 국가발전에 힘쓸 때 북한에 지원군을 보냄으로써 개방계획이 큰 차질을 빚게 됐을 뿐 아니라 소련에서 군수물자를 구입하느라 지게 된 빚을 갚기 위해 고통을 겪었다고 밝혔다.
  • 다시는 전쟁을 말하지 말자/6ㆍ25 40주년에(사설)

    한반도를 둘러싸고 새로운 국제기류가 조성되고 있는 가운데 6ㆍ25동족전쟁 발발 40주년을 맞는다. 40년전 그날은 일요일이었고 40년후 오늘은 월요일이다. 같은 민족끼리 벌였던 열전의 포성은 멎어있지만 지금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림자는 사라지지 않고 있다. 40년전 그들은 남쪽에 대고 포탄을 퍼부으면서도 그들의 대남스피커는 평화와 민족과 해방만을 선전했다. 지금 상황이 그때와 크게 다를 바 없다. 동서 양대진영간의 해빙과 군축추세에도 불구하고 분단 45년,전쟁발발 4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남북한간의 불신과 긴장은 이렇듯 끝없이 지속되고 있다. ○왜 전쟁은 일어났는가 진실은 하나다. 결코 둘일 수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사 최대의 비극인 6ㆍ25를 놓고 전통적인 남침설에 대항하는 북침설에 남침유도설까지 나돌면서 진실이 가려지려할 때가 있었다. 따라서 6ㆍ25동족전쟁에 관한 한 누가 왜 전쟁을 일으켰는가,그리고 전쟁의 결과는 어떠했는가,우리는 그것을 문제로 삼아야 한다. 역사는 바로 봐야 한다. 6ㆍ25가 남침이냐 북침이냐는 문제는 이제 논쟁거리조차 될 수 없는 역사의 사실로 확정되었다. 6ㆍ25남침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와 사실들은 결과적으로 그 남침을 부추겼고 무력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소련 내부로부터 걷잡을 수 없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지금 북한에서는 「6ㆍ25」를 전후하여 갖가지 조직적 사업을 통해 주민들에 대한 대한ㆍ대미 선전선동과 적개심 고취가 한창이라고 들린다. 북한 당국자들에게 있어 6ㆍ25는 지금껏 북침 전쟁이다. 그 한국이 지금 자기들의 가장 큰 지원자였던 소련과 관계를 개선하고 정식 수교마저 눈앞에 두고 있다. 소련으로부터는 남침 전쟁도발이래 유일독재체제를 유지해온 김일성의 정체가 폭로되고 있고 남침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들이 제시되고 있다. 그가 전쟁을 통해 확보하고 유지했던 유일체제가 흔들리는 것을 아마 김일성은 두려워하고 있을 것이다. 6ㆍ25전쟁의 비극이 누구에 의해서 비롯됐는가는 전세계가 다 알고 있다. 그 원흉은 김일성이며 북한 공산주의자들은 그 공범자들이다. 부질없는 논쟁은 그만두고 동족전쟁의 책임자는 이제 역사와 민족앞에 사죄해야 한다. ○전쟁의 결과는 무엇인가 생각하면 부모형제가 총부리를 겨눠야 했던 40년전 6ㆍ25의 상흔은 아직도 우리 가슴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3년1개월동안 치러진 그 전쟁은 이 민족 모두를 희생자로 만들었다. 전쟁이래 40여년간 지속돼온 동족간의 첨예한 군사적 대결은 서로의 장벽을 보다 높이 쌓아올렸고 의식의 골마저 깊게 패어져 역사상 경험한 바 없던 동족간의 심각한 이질화 현상마저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전쟁은 참혹했다. 조상이 물려준 한 땅덩어리에서 사생결단으로 총부리를 겨눈끝에 국군과 유엔군의 병력손실만 사망ㆍ실종ㆍ부상 등을 합쳐 1백15만에 달했다. 민간인 피해는 1백만명,전재민 4백만명,전쟁미망인 30만명,전쟁고아 6만명이라는 엄청난 인명피해를 남겼다. 재산피해는 또 어떠했는가. 결코 잊혀질 수 없는 전쟁의 실체들은 전체국민의 30%남짓한 전쟁체험세대들에겐 아직도 여러 모습으로 남아 있다. 휴전선과 판문점,국립묘지의 묘비들이 그것이고 40년만에 이 땅을 다시 찾아 전쟁의참혹성을 증언하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전쟁의 실체인 것이다. 직접적인 전쟁의 상흔이나 실체 이외에 6ㆍ25가 우리에게 남긴 더 큰 상처는 분단의 굴레를 우리민족 가슴속에 깊이 내면화시켰다는 사실이다. 거기에 더하여 전쟁에 대한 위기적 인식을 생활화시켰다는 점이다. 국민의 76%가 북한의 재침가능성을 우려하고 있으며 6ㆍ25에 대한 인식도와 관련하여 국민의 45%가 또다른 6ㆍ25의 재발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굴레를 벗어버리지 않으면 안된다. ○북한,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6ㆍ25전쟁 40년이 지난 뒤에도 그 전쟁의 도발자는 살아있다. 그러나 그 북한의 김일성은 아직껏 단 한번도 전쟁도발의 과오와 책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동족전쟁 그 자체가 그의 한반도 무력적화통일 전략에서 비롯된 민족자해행위였음이 명백한데도 그는 아직도 평화를 원하지 않는다. 그에게 있어 남한은 아직 해방되지 않은 남반부이며 분단상태의 해결수단은 무력이외에 다른것이 아닌 것이다. 즉 정확히 말해 김일성은 아직도 전쟁적 방법으로 한반도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에 대비해야 한다. 세계는 지금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고 있다.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국가들의 자유개방물결은 기존의 국제질서를 송두리째 흔들고 있다. 미소의 화해는 동서양진영의 긴장과 군사적 대립의 상징이었던 나토및 바르샤바조약기구의 근본적인 변질을 가져왔다. 강대국의 팽창주의는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40년전 6ㆍ25 그날에 그들은 조국의 통일,민족의 해방을 외치면서 소련제 탱크,전투기와 막강한 기계화부대를 앞세워 38선을 돌파했다. 40년의 세월이 흐른 오늘에도 그들은 엄청난 병력과 화력의 70%이상을 휴전선 일대에 전진 배치하고 있다. 세상이 이렇게 변하고 그들의 관심이 온통 한반도에 쏠려있는 오늘 북한은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이제는 평화를,그리고 통일을 얘기해야 한다. 40년전 전쟁의 아픔을 잊는 길은 그것뿐이다.
  • “한반도에 전쟁 위험”/주중 북한공사 긴장조성 책임 한미에 전가

    ◎6·25 북침설 또 주장 【내외】 최근 소련의 모스크바방송이 6·25가 북한에 의한 남침이었음을 거듭 보도하고 있는 가운데 북한은 21일 또다시 6·25가 한미측의 「북침전쟁」이었다는 종래 주장을 되풀이했다. 22일 북한의 중앙방송에 의하면 북경주재 북한공사 배영제는 이날 6·25 40주를 맞아 중국 내신기자들과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이 남한에 들어온 첫날부터 『공화국 북반부를 침략하기 위한 전쟁도발 준비를 체계적으로 추진,50년 6월25일 드디어 대규모 무력침공을 감행했다』고 왜곡,주장했다. 배영제는 이어 『지금 조선반도에서는 임의의 시각에 전쟁이 터질 수 있는 극히 위험한 정세가 조성되고 있다』면서 한반도긴장조성의 책임을 한미측에 전가하고 김일성이 지난달 24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1차회의 「시정연설」에서 밝힌 이른바 「조국통일 5개방침」과 지난달 31일 그들이 제의한 4개 군축제안에 호응할 것을 거듭 촉구했다. 북한은 지난 12일에도 관영 「중앙통신」을 통해 6·25가 미국이 한반도를 지배하기 위해 한국군을 내세워 일으킨 「북침전쟁」이었다고 종래 주장을 되풀이한 바 있다.
  • 북한 고위관리 지낸 재소동포의 「6ㆍ25증언」

    ◎“김일성,6ㆍ25새벽 내각 소집… 남침비준 강요”/4월초 군관학교간부 전선에 미리 배치/전쟁 한달전 강동학원서 통치요원 육성/폐쇄적인 북한체제는 「수용소적 사회주의」로 불러야 한때 북한의 권력 핵심에서 활약하다가 소련으로 망명했던 재소교포 18명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조국을 찾아왔다. 이들의 대부분은 6ㆍ25전쟁 전후 북한의 고위직에 있었으나 50년대말부터 60년대초까지 김일성 1인지배체제에 반발,소련으로 망명했던 「역사의 증인」들이다. 대부분이 70을 넘긴 고령인 이들은 22일 MBC시사토론에 참석,북한정권의 성립과 6ㆍ25전쟁의 발발 그리고 김일성 1인통치체제의 구축과정 등을 생생하게 증언했다. 이날 토론에 나온 사람은 강상호(80ㆍ전 북한 내무성차관) 장학봉(71ㆍ전 북한 군관학교부교장) 박병률(82ㆍ전 북한 강동정치학원원장) 송진파(76ㆍ전 북한 문화성국장) 정상진(73ㆍ전 북한 문화성차관)등 5명이다. ­6ㆍ25당시 그리고 소련으로 망명하기전까지 북한에서 어떤 일을 했는가. ▲박병률=47년 12월부터 50년 6월25일까지 남로당원 양성기관이었던 강동정치학원 원장으로 일했다. 당시 훈련시킨 제자는 3천명에 이르는데 지리산 빨치산대장이었던 이현상과 제주도 폭동주역인 김달삼도 포함돼 있다. ▲강상호=김일성과 마찬가지로 해방후 소련에서 북한으로 돌아왔다. 6ㆍ25당시 내무성 차관이었는데 북한의 내무성은 경찰권 탐정권등의 권한을 행사했다. 나는 여러명의 차관중 당정치교양사업ㆍ문화사업을 맡았으며 김일성을 도와 북한정권수립에 참여했다. 당시 내무성장관은 현사법상인 방학세였다. ○「김정권」수립에 참여 ▲정상진=6ㆍ25직전 김일성종합대학에서 러시아문학을 강의했다. 해방전에는 소련에 있었으며 45년 3월에서 8월까지 소련해병대원으로 5개월간 훈련을 받고 소련의 대일전쟁에도 참여했다. ▲장학봉=군관학교부교장으로 군장교양성교육사업을 맡았으며 6ㆍ25전쟁이 일어나자 당시 상좌(우리의 준장)계급장을 달고 전투에 참가했다. 1988년까지 남한의 소식을 거의 듣지 못했는데 포항제철,울산자동차공장 등을 둘러보니,경제ㆍ문화적으로 세계에 내세울 수 있는조국임을 실감,자부심을 느끼게 되었다. ○콘크리트장벽 없어 ▲송진파=북한의 문화성국장,잡지 「새조선」의 주필을 맡았고 망명후에는 소련에서 발행되고 있는 한글신문 「레닌기치」의 주필을 맡았으며 현재는 은퇴했다. ­휴전선도 돌아보았을텐데 콘크리트장벽을 보았는가. ▲정상진=북한에서 선전하는 콘크리트장벽은 만리장성을 연상시키는데 대전차장벽은 있었으나 다른 것은 없었다. 그러나 콘크리트장벽이 있고 없고는 중요하지 않다. 베를린장벽과 같은 물리적 장벽을 무너뜨리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는 「심리적 장벽」이 문제이다. 몇년전만해도 한국에 대해 잘 몰랐으나 고르바초프등장이후 소련언론이 진실을 보도하기 시작해 정세를 바로 알게됐다. ­올해는 6ㆍ25발발 40주년이 된다. 6ㆍ25에 대한 연구도 많고 주장도 엇갈리는데 당시 내각에 참여한 사람으로 진상을 말해 달라. ▲강상호=그때 나는 병으로 평양중앙병원에 입원해있었으며 6월25일은 퇴원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중앙당비서가 그날 새벽전화를 걸어와 퇴원즉시 내각에 참석하라는 연락이 있었다. 내각회의에는 국가보위상인 최용건만 빠지고 전원이 참석했다. 회의에서 김일성은 『지금부터 2∼3시간전 38선 전역에서 남조선괴뢰군이 북침을 해왔다. 나는 최고사령관으로 즉시 반격을 명했다. 전쟁과 평화에 관한 사항은 내각의 비준이 있어야 하니 이를 비준해 달라』고 말했다. 김일성의 이 제안은 토론없이 1백%찬성으로 통과했다. 그리고 나에게는 지금 곧 원산행차에 올라 강원도당회의를 열고 전쟁에 대비한 과업을 수행하라고 지시했다. 이어 서울이 해방됐다는 소식과 함께 3ㆍ8선이 남의 강원도를 책임지라는 지시가 있어 춘천으로 출발했다. 이때 나는 북침이 아닌 남침이라는 생각을 처음 갖게 됐다. 그 이유는 첫째 3ㆍ8선을 넘어 산굽이를 돌면서 국군포대를 관찰해보니 국군의 포와 포탄이 흩어져 있었는데 탄피는 몇개 없었다. 북침을 했다면 숱한 사격의 흔적이,공격의 증거가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둘째 전선지대의 이북 농촌에는 파괴된 집도 없었으며 농민들은 들판에서 김을 매고 부녀자들은 길거리를 오가고 있었는데 국군의 포격이 있었다면 그럴수 있겠는가. 셋째 미국무장관 덜레스가 이승만에게 북침을 명령했다고 하는데 그렇다면 미국이 왜 하나의 사단도 남겨놓지 않고 군대를 철수했으며 딘소장이 포로가 될 정도로 전쟁초반에 패퇴했는가 하는 것이었다. ▲박병률=김일성이 도발한 것이라는 구체적 자료를 갖고 있지 못했지만 감지할 수는 있었다. 남한에서 월북한 사람들이 전쟁발발 1개월전부터 강동학원장인 내게 보내져 집중 훈련을 받았다. 또 전쟁이 발발하기 몇시간전에 서울 함락후 서울시 인민위원회위원장을 맡았던 이승엽이 『자기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면서 강동학원을 떠났다. ○스탈린이 전쟁 묵인 ▲장학봉=당시 군관학교에는 인민군지도자 25명의 그룹반이 있었는데 50년 4월에 이미 이 그룹반이 해산돼 소속원들 모두가 전선으로 배치됐다. 50년 8월까지 북한의 신문 라디오 등 모든 선전기관은 남조선이 북침을 했고,북한이 이에 반격을 가했다는 선전을 거듭했고 나 또한 전선에 나가지않아 이를 그대로 믿었었다. 8월초 전선에 투입됐을 때는 정의의 전쟁에 참가한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싸웠다. 그러나 흐루시초프의 회고록이 나오면서 진실이 밝혀지게 됐다. 이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50년이전에 스탈린에게 수차례 전화를 걸어 남조선해방과 전조선의 자유를 위해 남침을 호소했으나 스탈린은 남조선침입의 대가로 미국이 참전하면 다음은 소련이 이에 대응해야 하는데 준비가 안됐다며 이를 반대했다. 그후 6ㆍ25발발 5∼6일을 앞두고 김일성은 이 문제를 다시 스탈린에게 제기,스탈린은 「좋다 나쁘다」는 의사를 표시하지 않았으며 묵인했다. 이와 관련,흐루시초프는 내가 스탈린의 입장이었더라도 작은 나라가 통일을 하겠다는데 대해 어떠한 승인도 지시도 않았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전쟁이틀후 열린 유엔안보이사회에서 소련대표가 유엔군의 참전결정에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고 퇴장한 것은 내막을 뻔히 아는 스탈린의 고육지책이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정권 수립때의 실정은 어떠했는가. ▲강상호=김일성일파가 만주에서 유격활동중 일본군의 토벌강화로 상황이 어려워지자 중국공산당이 소련측에 이들의 보호를 제의했다. 김일성부대는 소련정찰여단으로 편입돼 아무르강유역의 비밀지역에 있었고 해방후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원산으로 귀국했다. 나는 소련 제25군 정치부 지도원이어서 김일성을 해방전에는 본 적 없었는데 해방후 소련군 상위(대위)로 귀국한 김일성을 본적이 있다. ­이 자리에는 김일성 1인독재체제를 구축하는데 도움을 주신분들이 많은데(일동 웃음) 지금 북한 체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정상진=김일성은 북한에 들어오면서부터 정권에 욕심이 있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개인숭배주의자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1956년 소련 공산당 20차전당대회에서 스탈린격하운동이 벌어졌다. 이 대회에 북한 노동당대표로 참석한 최용건이 돌아와 귀국보고를 했을 때 김일성은 우리 당에는 과거 박헌영이란 개인숭배자가 있었지만 지금은 개인숭배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뒤 연안파 윤공흠 이필규 등이 반김일성 움직임을 보였는데 이들은 곧 숙청됐다. 이후 김일성은 「이단」숙청을 결심,대대적인숙청작업에 나섰고 1인지배체제를 구축했다. 6ㆍ25당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군고위간부ㆍ당간부 등이 모두 숙청당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사람들도 반당분자로 몰렸고 이것이 우리가 소련으로 망명하게 된 이유다. ▲박병률=김일성은 북한체제를 「주체주의적 사회주의」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북한체제를 「수용소적 사회주의」라고 부르고 싶다. ○남측서 통일 주도를 ­북한에 있을때 남로당출신들을 많이 만났을텐데…. ▲정상진=당시 나는 문화성차관 및 문학예술총동맹 부위원장이어서 홍명희 이태준 김남천 임화 최승희 등 많은 남쪽예술인들과 알고 지냈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비참한 운명을 맞았다. 작곡가 김순남선생은 전쟁전 박헌영외상 취임 축하파티에서 피아노를 쳤는데 이것이 죄가 됐다. 김순남선생이 궁지에 몰렸을 때 나를 찾아와서 「이제 어떻게 해야되느냐」라고 탄식하면서 춘향전을 가극으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었고 그 분은 모든 창작활동이 금지된 채 숙청되고 말았다. ­마직막으로 남북통일을 위해 앞으로 어떤 일을 하겠는가. ▲장학봉=화해의 물결은 그 누구도 억제할 수 없다. ▲강상호=오늘날에는 무력으로 누구를 굴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한국이 세계적 여론을 일으켜 북한측에 평화통일의 압력을 가해야 한다. 남북통일을 하루라도 지연시키는 것은 정치지도자들의 죄악이며 우리도 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
  • 본사 6ㆍ25 40주맞아 성인남녀 1천명 의식조사

    ◎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조사방법/현대리서치연구소 최근 6ㆍ25에 대한 다각적인 조명이 활발히 전개되는 가운데 서울신문사는 현대리서치연구소(대표 박종선)와 공동으로 우리 국민들의 6ㆍ25관ㆍ대북관ㆍ통일관 등에 대해 전국 전화여론조사를 실시하였다. 이번 조사는 제주도를 포함한 전국 20세이상 성인남녀 1천명을 상대로 지난 현충일 전후 사흘동안 매일 저녁 6시부터 9시반까지 실시되었다. 이번 조사는 조사대상을 시도별 인구비례로 각 시도에 할당한 다음,해당 시도의 전화국번을 일렬로 나열하고 난수표로 할당된 표본수만큼 전화국번을 추출하였다. 이렇게 추출된 전화국번에 대하여 난수표로 네자리 숫자를 부여하여 그것을 전화번호로 삼았다. 그리고 대상 가구에서는 전국인구 구성특성에 따라 남녀ㆍ연령을 할당하여 최종적인 조사대상자를 선정하였다. 이번 조사의 응답자 구성은 지역별로 서울 2백50명,경기ㆍ인천 1백65명,강원 40명,충청ㆍ대전 1백5명,전라ㆍ광주 1백34명,경상ㆍ부산ㆍ대구 3백6명,제주 10명이다. 성별로는 남자 5백3명,여자 4백97명이며 연령별로는 20대 3백48명,30대 2백39명,40대 1백76명,50세이상 2백37명이다. 이번 조사의 표본추출이 완전 무작위 추출이라고 보면 오차는 신뢰수준 95%에서 ±3.1%이내이다. 이번 조사에서는 6ㆍ25에 대해 조금이라도 경험이나 기억이 남아있을 만45세이상을 6ㆍ25세대,만44세이하를 전후세대라고 규정해 분석개념으로 사용하였다. ◎“한반도서 전쟁가능성 점차 줄고 있다” 66%/“그 상흔 아직도 잊을 수 없어” 61%/전쟁발발 책임은 북한ㆍ소ㆍ미ㆍ일 순/6ㆍ25세대 40%만 “북한은 공동번영의 동반자” 간주… 전후세대는 53%가 긍정적/“김일성후 김정일 권력승계” 57%/“통일정책 더 과감히 추진을” 44% ○가슴속에 응어리로 6ㆍ25가 일어난지 올해로 40년이 지났는데 과연 국민들의 마음속에 어떤 상처가 남아 있을까. 우선 6ㆍ25의 상처나 피해가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느냐는 물음에 대해 응답자의 29.3%가 「많이 남아 있다」는 생각이고 31.9%가 「약간 남아 있다」는 반응을 보여 전체적으로 우리 국민의 6할이상(61.2%)이 현재 6ㆍ25의 상처를 간직하고 사는 것으로 드러났다. 세대별로 보면 6ㆍ25세대는 상처가 남아 있다는 응답이 무려 79.3%(많이 50.3%,약간 29%)인데 비해 전후세대는 53%(많이 19.9%,약간 33.2%)에 머물고 있다. 더구나 6ㆍ25세대는 「상처가 많이 남아 있다」는 반응이 월등히 많아 6ㆍ25세대에게 6ㆍ25는 아직도 대단한 상처로 마음 한구석에 자리잡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전후세대도 6ㆍ25세대보다는 적지만 전체적으로 두사람 중 한 사람이 6ㆍ25의 상처가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느끼는 것으로 나타났다. ○실향민 아픔은 계속 6ㆍ25의 상처나 피해가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응답한 사람들에게 구체적으로 상처나 피해의 내용을 물은 결과 가족이나 친지의 부상이나 사망이 32.3%,실향이나 이산가족이 21.5%,분단고착이 17.9%,나라발전 저해가 16.4%,재산피해 10.3% 등으로 나타났다. 인명피해나 재산피해 등 좀더 직접적인 요인에 대해서는 6ㆍ25세대의 상처가 더 깊으며,분단고착이나 나라발전 저해 등의 간접적인 상처는 전후세대에 약간 더 많다. 반면실향이나 이산가족이라는 반응이 6ㆍ25세대(14.7%)보다 전후세대(26.1%)에 더 많은 점이 주목된다. 직접적인 상처는 시간과 세대가 경과하면 어느정도 줄어들고 있지만,고향을 잃어버리고 혈육이 나뉘어진 아픔은 세대가 바뀌어도 오히려 증폭되는 경향이 엿보인다. 「남북대화」하면 우선 이산가족이 떠오르는 것도 이번 조사에서 나타난 민족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다고 보여진다. ○남침은 엄연한 사실 최근 6ㆍ25 책임론에 대해 여러가지 주장이 제기되고 있으며 일각에서는 북침설까지 운위되는 실정이다. 이번 조사에서 6ㆍ25발발에 책임이 무거운 나라를 두나라 지적하게 한 결과 역시 북한이 56.0%로 가장 많고 다음으로 소련(51.9%) 미국(34.1%) 일본(22.3%) 남한(17.1%) 중국(11.9%)이며 「모르겠다」는 응답도 6.7%이다. 이 결과를 보면 최근의 다양한 전쟁책임론이 다투고 있지만 6ㆍ25는 역시 북한과 소련에 의해 야기된 전쟁이라는 인식이 국민들 사이에 광범위함을 알 수 있다. 또한 미국이라는 지적도 34.1%에 이르러 최근의 대미감정이 부분적으로반영되고 있다고 보여진다. 반면 6ㆍ25에 직접개입한 중국이 전쟁발발에는 가장 책임이 없는 나라로 인식되는 점도 흥미롭다. 세대간에도 인식의 차이가 있어 6ㆍ25세대는 주로 북한과 소련에 책임을 묻고 있는데 비하여 전후세대는 북한ㆍ소련ㆍ미국ㆍ남한 등에 책임이 상대적으로 분산되어 있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특히 전후세대에서는 북한이라는 지적이 상대적으로 낮아지며 반대로 미국ㆍ남한이라는 지적이 높아지고 있어 부분적이나마 젊은 세대의 의식의 단면을 엿볼 수 있다. ○북녘 얼음도 녹을 것 최근에 소련이나 동구의 개방화는 우리의 커다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것은 크게는 공산세계의 변모를 예고하는 일이고 좀더 직접적으로는 대북관계,나아가 통일문제에 직결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번 조사에서 소련이나 동구의 개방화에 대해 북한이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물어본 결과,「개방화로 갈 것」이라는 전망이 53.2%에 달하며 「변화없을 것」이라는 의견이 23.7%이다. 반면,「더욱 폐쇄적으로 갈 것」이라는 생각은 15.8%에 불과하다(「모르겠다」는 7.3%). 이러한 결과는 북한은 변하기 어려운 사회라는 인식이 일각에 남아 있음에도 불구하고,결국은 북한도 개방화의 물결에 합류할 것이라는 전망이 주류를 이루고 있음을 보여준다. 세대별로 보면 북한도 개방화로 나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6ㆍ25세대(47.7%)보다는 전후세대(55.7%)에 더 많다. ○동반자 인식이 우세 현재 우리사회에는 북한에 대한 양면적 시각이 갈등을 겪고 있다. 하나는 공동번영의 동반자라는 인식이고 또 하나는 대립적인 적대세력이라는 인식이다. 과연 일반국민들의 인식은 어떠한지 물어본 결과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이 48.7%이고 적으로 보아야 한다는 의견은 32.5%로 나타났으며 『꼭 어느쪽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도 18.8%였다. 이처럼 북한은 기본적으로 동반자라는 인식이 우세하기는 하지만 여전히 적이라는 인식도 적지않다. 이러한 결과는 북한을 기본적으로 어떻게 대해야 하느냐는 문제가 우리 사회내에서 당분간 더 논란을 벌일 것이라는 점을 시사해 주고 있다. 특히 이러한 인식의 격차는 세대별로 더욱 크다. 6ㆍ25세대는 북한이 적이라는 의견이 47.4%,오히려 동반자라는 인식(40.0%)을 앞서고 있다. 반면 전후세대는 동반자라는 인식(52.6%)이 적이라는 인식(25.8%)을 크게 앞지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꼭 어느 쪽이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이 6ㆍ25세대(12.6%)보다 전후세대(21.6%)에서 많은 점도 흥미롭다. ○「세습체제」수용 자세 한반도 장래에 관한 문제 중에 「김일성 이후」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김일성 이후 문제의 핵심은 김정일이 권력을 이을 것인가 하는 점이다. 이에 대한 우리 국민의 의견을 물어본 결과,김정일이 권력을 이을 것이라는 전망이 56.6%로,권력을 잇지 못할 것이라는 의견(34.5%)을 크게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모르겠다」는 8.9%). 세대별로 보면 권력을 계승하리라는 전망이 6ㆍ25세대에서는 50.0%인데 비해 전후세대에서는 59.6%에 달하고 있다. 한편 권력을 계승한다는 응답자(5백66명)중에서 북한이 앞으로 개방화로 나갈 것이라는 의견이 45.4%인데 비해 권력을 계승하지 못한다는 응답자(3백45명)중에는 개방화 전망이 65.2%이다. 이처럼 우리 국민은 김정일의 권력계승이 북한의 개방화에 약간 부정적인 것으로 보고 있는데,이는 김정일 체제를 김일성 체제의 연장으로 인식하는 일반적 통념에 근거한다고 보여진다. 이번 조사결과는 그러한 부정적 인식에도 불구하고 우리 국민의 거의 6할이 「김일성이후는 김정일 체제」라는 점을 현실적으로 수용하려는 자세를 보인다고 해석된다. ○전쟁 재발성은 희박 6ㆍ25와 그 이후의 격렬한 대립의 시대를 지내온 우리 국민들은 최근 급변하는 내외 정세 속에서 한반도에서 전쟁 가능성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지 물어본 결과 「전쟁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는 의견이 66.0%로,「전쟁 가능성이 점차 커지고 있다」는 반응(17.9%)을 압도하는 것으로 나타났다(「그대로」 6.1%,「모르겠다」 10.0%). 더구나 이러한 의견은 세대간에도 거의 차이가 발견되지 않아 한반도에서 전쟁의 그림자가 걷히고 있다는 인식이 상당히 광범위한 셈이다. 최근 소련과 동구의 개방화로 촉발된 동서 해빙물결이 우리 사회에도 밀려왔고 특히 지난번 한소정상의 만남이 그런 물결을 더욱 가깝게 느끼도록 했다고 보여진다. ○성급한 평화분위기 이처럼 유례가 없는 평화분위기 속에서 우리 국민들은 통일정책의 추진속도를 어떻게 인식하는지 물어본 결과,43.7%가 「지금보다 더 과감하게」라는 의견인 반면,37.4%는 「지금보다 더 신중하게」라는 주문이다(「지금처럼」8.0%,「모르겠다」10.5%). 이러한 결과는 국제적 해빙물결,북한의 개방기대,한반도의 평화분위기 등에 비추어 보면 의외로 신중론이 많다고 볼 수 있다. 세대별로 보면 6ㆍ25세대는 적극론(35.6%)보다는 신중론(41.3%)이 오히려 우세하며 전후세대는 적극론(47.4%)이 신중론(35.7%)을 앞서고 있다. 이처럼 한반도의 전쟁가능성,북한의 개방 가능성 등 현상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에서는 어느 정도 국민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지만 그를 바탕으로 한 정책방향에 대해서는 여론이 양분되어 있다. 이런 양분된 의견이 자유롭게 토론되어 하나의 국민적 대안으로 제시되고 추진되는 일이 무엇보다 긴요한 과제일 것이다. ◎설문 내용ㆍ응답 ▲올해로 벌써 6ㆍ25가 발발한지 40년이 지났습니다. ○○님께서는 어떤 형태이든지간에 6ㆍ25로 인한 상처나 피해가 현재 ○○님 자신에게 남아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①상처나 피해가 많이 남아 있다(29.3%) ②약간 남아 있다(31.9%) ③상처나 피해가 없다(38.8%) ▲○○님께서는 6ㆍ25발발의 가장 커다란 책임을 져야할 나라가 어디라고 생각하십니까? 다음 중에서 책임이 큰 나라를 두나라만 말씀해 주십시오. ①남한(17.1%) ②북한(56.0%) ③미국(34.1%) ④소련(51.9%) ⑤중국(11.9%) ⑥일본(22.3%) ⑦모르겠다(6.7%) ▲○○님께서는 현재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날 가능성이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점차 커지고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①점차 줄어들고 있다(66.0%) ②점차 커지고 있다(17.9%) ③그대로(6.1%) ④모르겠다(10.0%) ▲우리 사회에는 「북한이 적」이라는 주장도 있고 「동반자」라는 주장도 있습니다. ○○님께서는 북한을 우리의 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아니면 동반자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①적으로 보아야 한다(32.5%) ②동반자로 보아야 한다(48.7%) ③꼭 어느 쪽이라고 할 수 없다(18.8%) ▲최근에 소련과 동유럽에서 이른바 개방화 물결이 일고 있는데,○○님께서는 이러한 변화에 대해 앞으로 북한이 어떻게 반응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①더욱 폐쇄적으로 갈 것이다.(15.8%) ②개방화로 갈 것이다(53.2%) ③별다른 변화가 없을 것이다(23.7%) ▲○○님께서는 만약 김일성이 사망하면 김정일이 권력을 물려받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물려받지 못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①물려받을 것이다(56.6%) ②물려받지 못할 것이다(34.5%) ▲○○님께서는 앞으로 우리나라가 통일정책을 어떻게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하십니까? ①지금보다 더 과감하게 추진해야 한다(43.7%) ②지금보다 더 조심스럽게 추진해야 한다(37.4%) ③지금 정도가 알맞다(8.0%) ④모르겠다(10.5%) ◎“6ㆍ25세대­전후세대의 인식차 좁혀야”/조사를 마치고/박종선 현대리서치연 대표 6ㆍ25가 일어난지 거의 한세대가 바뀐점에 비추어 이번 조사는 세대간의 인식차이가 어떠한가에 주목했다. 우선 6ㆍ25로 인한 상처나 피해가 자신에게 남아있는가,6ㆍ25 발발의 책임있는 나라는 어디인가,북한의 본질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통일은 어떻게 추진할 것인가 등에 대해서는 6ㆍ25세대와 전후세대 간의 인식의 차이가 크다. 6ㆍ25세대가 6ㆍ25로부터 파생된 피해의식이나,북한에 대한 적대감을 전후세대보다 강하게 느끼고 있다. 반면 한반도에서 전쟁가능성은 어떠한가,북한이 개방할 것인가,김정일이 권력을 계승할 것인가 등에 대해서는 세대간의 차이가 비교적 작거나 거의 없다. 이러한 결과는 한반도 현실에 대해서는 피해의식이나 적대감에 연연하지 않고 말 그대로 오늘날의 현실에 근거하여 냉정히 인식하려는 경향이 강하다는 점을 나타내 주고 있다. 이런 결과들을 종합해 보면 기성세대는 보수적이고 완고하며 젊은 세대는 진보적이고 유연하다는 식의 단순논리가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 6ㆍ25의 피해의식,북한에 대한 좀더 적대적인 이해 등에서 6ㆍ25세대는 전후세대보다 완고하지만 한반도의 보다 현재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전후세대와 별 차이없이 유연하고 실용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다. 또한 전후세대도 6ㆍ25세대보다는 전향적이고 진취적인 자세가 돋보이지만 일반적 통념보다는 훨씬 절제되고 냉정한 인식을 보이고 있다. 최근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기존의 6ㆍ25관을 새롭게 해석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한 것으로 비쳐지고 있지만 실제 조사결과를 보면 전후세대도 6ㆍ25가 북한과 소련에 의해 도발된 전쟁이라는 인식에는 이의가 없음을 알 수 있다. 또한 통일정책의 추진방식에 있어서도 「지금보다 더 과감하게」라는 의견(43.7%)이 우세한 편이지만 「지금보다 더 신중하게」라는 의견(37.4%)도 결코 적지 않다. 전후세대 역시 6ㆍ25세대와 대립적인 입장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식을 공유하면서 점진적으로 그들 특유의 진취적 가치를 가꾸어 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번 조사를 통해 세대간의 차이와 일치가 공존해 있다는 점이 주목된다. 우리 사회는 세대간의 일치만 존재하는 것보다 훨씬 건강하고 활력있는 사회라고 볼 수 있다. 앞으로 세대간의 토론과 대화를 통해 공감대를 넓혀 나가면서 간격을 좁혀 나갈때 우리사회는 좀더 성숙한 사회로 전진할 것이다. 이번 조사결과가 바로 그런 가능성을 시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 전쟁의 배경과 준비(새 실록 6ㆍ25:상)

    ◎중국 공산화에 고무… 김일성,남침 서둘렀다/동서냉전 한반도 유입이 「비극의 불씨」로/김일성,스탈린 지원 업고 모의 내약받아/애치슨 발언ㆍ미군철수로 「힘의 공백」초래/여순사건등 사회혼란도 평양오판 불러/소,야크기ㆍ탱크 1백대씩 공급… 북선 통치요원 미리 임명(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지금으로부터 꼭 40년전인 50년 6월25일. 그날에 시작되어 53년 7월27일에 휴전된,37개월에 걸쳤던 한민족의 동족상잔을 흔히 한국전쟁이라고 부른다. 결코 되풀이 되어서는 안될 우리 근ㆍ현대사의 가장 큰 비극을 3회에 걸쳐 다시 써보려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다. 제1회에서는 한국전쟁의 배경과 준비를,제2회에서는 한국전쟁의 전개를,그리고 제3회에서는 한국전쟁의 휴전성립과정과 그 유산을 각각 다루기로 한다. □약력 김학준 대통령사회담당보좌역 □1943년생. 인천출신 □서울대 정치학과,동대학원 졸업,미켄트주립대 정치학석사 □미피츠버그대서 「아시아 세력균형에 있어 한국통일」논문으로 정치학박사학위 □서울대 정치학과교수,미국버클리대 동아시아연구소 객원연구원,일본도쿄대 국제관계학과 객원교수 □12대 국회의원(구 민정ㆍ전국구) □「한국전쟁 발발에 있어 중공의 비개입」등 한반도 분단,6ㆍ25동란 등에 관한 주요 논문다수. 한국전쟁이 50년 6월25일에 일어난 것은 사실이나 그 뿌리는 아무리 늦게 잡아도 45년 8월15일 일제로 부터의 해방직후에 나타난 한반도의 분단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분단이 없었다면 전쟁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에 대한 설명이 한반도의 분단에 대한 설명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은 당연하다. 한반도의 분단에서는 우선 열강의 권력정치라는 국제적 요인이 짙게 깔려 있다. 지정학적으로 볼때 동북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을 차지하고 있는 한반도는 대륙세력과 해양세력이 충돌하는 이 지역의 화약고로서 주변 강대국들의 수많은 각축을 불러 일으켰던 곳이다. 한말의 청­일 전쟁과 노­일 전쟁이 그 대표적인 보기들인데 여기서 결코 간과될 수 없는 점은 이러한 전쟁이 있을 때마다 열강은 한반도의 분할을 협상했다는 사실이다. 쉽게 말해 전략적으로 탐나는 한반도의 「독식」을 위해 이전투구격으로 싸우다가 승부가 분명해지지 않으면 「분식」을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두 전쟁 모두에서 일본이 궁극적으로 승리하면서 한반도는 일본의 「독식」아래 들어가고 말았다. ○세계의 열강들 “눈독” 일본이 패망하게 되면서,그리하여 일본이 한반도를 내놓지 않을 수 없게 되면서,열강의 「식욕」은 다시 한번 자극받게 되었다. 소련은 물론이거니와 중화민국도,그리고 당시는 아직 대륙을 차지하지 못한 중국 공산당조차 한반도에 대한 야심을 감추지 않았으며,영국은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일본을 무력화시켜서는 안된다는 취지에서 은연중에 한민족의 완전한 독립에 소극적인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새로운 각축이 예견되는 두려워할 만한 상황에서,이 지역의 새로운 패자로 자리를 굳힌 미국은 미ㆍ소ㆍ영ㆍ중의 연합국이 함반도를 「공동관리」하게 되면 4강의 이해관계가 조정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미국은 한때 4강에 의한 공동점령 및 공동분할을구상하기도 했지만 마침내는 4강이 함께 참여하는 신탁통치로 기울어졌는데,「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 한민족에게 독립을 주겠다는 카이로선언과 포츠담선언은 미국의 그러한 뜻을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적당한 시기와 절차를 거쳐」라는 원칙적 선언을 뒷받침하는 구체적인 청사진과 일정표를 연합국이 마련하지 못한 상태에서 일제의 항복을 접수하게 되었다. 일제의 항복이 예상보다도 훨씬 빨리 닥쳤던 셈인데,문제를 더욱 미묘하게 만든 것은 미군은 한반도에 진공할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소련군은 이미 한반도의 동북부로 진공해 들어오고 있는 숨가쁜 현실이었으니,여기서 미국은 한반도의 절반이라도 건져야겠다는 절박한 판단에서 북위 38도선에서의 분할점령을 제의했고 이 제의를 소련을 비롯한 나머지 연합국들이 받아들임에 따라 비극의 분단이 이뤄진 것이다. 이 처럼 열강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설킨 가운데서 한반도가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할점령됨에 따라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 사이에 벌어지는 국제냉전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게 되었으며,그것은 한국전쟁의 국제적 배경의 틀이되고 만다. 일제의 패망과 더불어 미국은 북위 38도선 이남의 한반도를,그리고 소련은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를 각각 군사적으로 점령하게 되었다. 그러나 여기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우리 겨레 사이에서 벌어진 이념적ㆍ사상적 대결이다. 즉 일제 치하에서 전개된 항일 독립운동을 특징지었던 좌ㆍ우익 투쟁이 해방된 한반도에서 재연된 것이다. 그것은 남한에서는 좌ㆍ우익 투쟁의 형태로,그리고 한반도에서는 남북한 대결의 형태로 나타났다. 이것은 한반도안에서도 냉전이 벌어졌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 「국내냉전」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본 「국제냉전」과 얽히고 설키면서 48년에는 한반도에 2개의 「국가」가 세워지는 데 이바지하게 되고 한걸음 더 나아가 50년에는 한국전쟁이 일어나는 데 이바지하게 된다. 이렇게 볼때 한국전쟁이 준비되는 과정에는 국제적 요인과 국내적 요인이 동시에 복합적으로 개입되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미서 「38선분할」제의 48년 8월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이 세워졌으며,곧이어 9월15일 북한에서는 이른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세워졌다. 이때 국가로서 국제적 공인을 받은 쪽은 대한민국이었다. 제3차 국제연합 총회는 48년 12월 대한민국을 국가로서 승인했으며 이를 계기로 많은 국가들이 대한민국과 외교관계를 수립하기 시작했다. 반면에 북한에 대한 승인은 소련권에 국한됐다. 이러한 국제적 조처들이 끝나면서 미국과 소련은 각각 자신의 군대를 철수시켰다. 한반도에 국제적 힘의 공백이 형성된 상황에서 남한은 북진통일을 부르짖고 북한은 이른바 남조선해방을 외치는 가운데 무력충돌의 위험성은 높아갔다. 이때 남한이 방어적이었음에 반해 북한은 공세적이었다. 우선 남한의 경우 미국의 군사적ㆍ경제적 지원은 많지 않았다. 트루먼 민주당행정부는 북한이 남침할 위험성이 있다는 경고를 무시했으며,그러한 판단에 입각하여 50년 1월에는 애치슨국무장관의 기자회견을 통해 남한이 미국의 극동방위선에서 제외되어 있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입장을 표명했다. 이 애치슨선언이 소련과 북한의 지도자들에게 정확히 어떻게 해석되었는지에 대한 공식자료는 없으나 대체로 그들을 고무시켰을 것으로 풀이되어 왔다. 국내적으로도 어려움이 많았다. 48년 가을에 일어난 여순반란사건은 신생 대한민국의 기반을 심각하게 위협했으며,그것이 비록 진압됐다고 해도 반정부적 분위기가 차차 확산되면서 50년 5월30일에 실시된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남북협상파를 비롯한 반정부적 중도세력이 승리를 거뒀다. 안팎으로 문제들을 안고 있는 남한으로서 북진통일론은 대체로 미국에 대해 군사원조를 늘려달라는 외교협박용이거나 국민적 단합을 꾀하기 위한 상징조작용에 가까웠다. 이 시기의 대한민국정부의 1차적 관심은 오로지 안보에 있었다는 사실,즉 『어떻게 하면 북한으로부터 있을 수 있는 남침을 막아낼 수 있느냐』에 쏠려 있었다는 사실은 북진통일론이 한낱 구호에 지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49년 방소때 구체화 반면에 북한의 경우 소련으로부터의 군사적 지원이 활발했다. 이와 관련하여 주목되는 것이 김일성의 두 차례의 소련 방문이다. 우선 49년 3월의 방문에서 김일성은 「조­소 경제ㆍ문화협력협정」을 얻어냈으며 이것을 계기로 남침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안을 세워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무렵 중국공산당의 대륙제패 가능성은 움직일 수 없는 현실이 되었고 그것은 북한의 지도층을 크게 북돋웠다. 중국공산당이 중국국민당을 대만으로 몰아내듯이 북한이 남한을 석권할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중국국민당이 쫓겨가도 미국이 아무런 구원조처를 취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북한으로 하여금 자신이 남한을 침략해도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을 갖게 한 것으로 보인다. 마침내 49년 10월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됐다. 북한 지도층의 사기는 크게 올라갔다. 이무렵 중화인민공화국은 자신의 인민해방군에 속해 있던 조선인 장교들과 병사들을 대거 북한으로 돌려보내기 시작했으며,이 귀환은 50년에 들어서면서 더욱 활발해졌는데 실전경험을 쌓은 이들이 이미 48년 2월에 발족한 북한 정규군에 편입되면서 북한군의 병력은 상당한 수준으로 향상되었다. 이 시점에 곧 50년 2월에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의 모택동과 더불어 모스크바에서 중ㆍ소 우호동맹조약을 체결했다. 배후의 두 공산대국이 군사동맹을 체결했다는 사실은 북한의 지도층을 다시 한번 고무시켰을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의 2차 소련방문이 이뤄졌다. 그는 비밀리에 스탈린을 찾아가 남침계획을 상세히 보고했다. 하나의 허점이 되어버린 남한은 크게 부풀려진 풍선과 같아서 칼로 한번 찌르기만 하면 그대로 터지고 말 것이라는 점,북한의 입장에 동조하는 남조선로동당(남로당) 잔존세력이 지하와 야산으로부터 호응봉기할 것이라는 점,그리고 미국의 개입이 없을 것이므로 짧은 시일안에 남한 전체를 공산화시킬 수 있다는 점 등등을 역설했다. 스탈린은 이미 귀국한 모택동에게 이 문제를 제기했다. 그렇다고 해서 전쟁계획 전체를 놓고 자세히 상의한 것 같지는 않고 그저 원론적인 수준에서 언급한 것 같다. 당시 30년 가까운 세월에 걸쳤던 내전을 겨우 끝냈기에 국내적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던 모택동으로서 한반도에서의 전쟁계획에 대해 깊이 관여할 수없었다. 그리하여 그는 김일성이 미국이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는 조건아래 「미 제국주의자들」을 몰아내기 위한 「인민해방전쟁」을 일으킨다는 데 반대할 수 없지 않느냐고 대답한 것으로 보인다. 이 무렵 김일성은 모택동에 밀사를 보내 남침계획안을 원론적인 수준에서 알리면서 군사원조 가능한가에 대해 물었다. 모는 군사원조는 어렵다고 대답하면서도 남침계획안에 대해서는 원칙적인 입장에서 동의했다. 스탈린 스스로와 김과 모 사이의 3각대화를 종합한뒤 스탈린은 김의 계획을 지지하게 되었다. 미국과의 직접적인 군사대결은 어떻게 해서든지 피하겠다는 스탈린으로서도 이것만은 승산이 큰 계획이었다. 미국이 일본을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부흥시킴과 아울러 일본을 동북아시아의 강력한 반공기지로 만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같은 전승국인 소련을 배제시킨 채 일본과 평화조약을 맺으려 하는 상황에서 북한이 신속한 군사작전을 통해 미국이 개입하기 이전에 남한을 공산화 해버린다면,그것은 일본 국민들로 하여금 친소ㆍ친공의 길로 굴복하게만들 것이며,그렇게 되면 동아시아에서의 소련의 위신은 크게 올라가고 소련의 정치적ㆍ군사적 발판은 더욱 확실해질 것이었다. ○6월22일 준비 완료 마침 북한주재 소련대사 스티코프도 남침계획을 적극 지지했다. 소련군의 북한점령 3년동안 북한의 사실상의 지배자였고 김일성의 열성적인 후원자로서 북한주재 초대 소련대사가 된뒤 북한을 사실상 「총독」하던 정치장교 출신의 스티코프가 김의 남침계획을 뒷받침하자 스탈린은 50년 봄 남침계획을 최종적으로 승인하면서 북한에 대한 군사지원을 급진전시켰다. 그리하여 49년부터 50년 6월까지 소련이 북한에 공급한 무기는 정찰기 10대,야크전투기 1백대,폭격기 70대,탱크 1백대,중포 상당수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원을 받은 북한은 50년 6월 현재 13만5천명의 지상군을 확보했으며 남한과의 접경지대에 대한 정예부대의 배치를 완료했다. 이때 남한의 병력은 정규군 6만5천명,해안경찰대 4천명,경찰 4만5천명이었고 장비는 불충분했다. 그만큼 남북한의 병력 수준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이러한 상황이었기에 당시 북한 민족보위상(국방상) 최용건은 『비행기ㆍ탱크ㆍ전함과 현대무기로 무장된 인민군은 어떤 전투임무도 효과적으로 완수할 수 있고 조국의 통일과 독립의 적을 분쇄하기 위해 언제나 전투할 태세가 되어 있다』고 호언할 수 있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북한의 구체적인 남침준비는 50년 6월14일부터 22일 사이에 마무리된 것 같다. 이 시기에 북한은 남한에서의 토지개혁과 새로운 법령제정에 대한 준비,그리고 남한의 주요지역의 통치를 담당할 행정요원들의 임명을 완료했다. 민족보위성은 6월15일자로 각 사단에 정찰명령 제1호를,6월22일자로 역시 각 사단에 전투명령 제1호를 내려보냈다.
  • 한국전 40돌 맞아 재조명 미 유에스 뉴스지

    ◎“잊혀진 전쟁”6ㆍ25… 「공산화 도미노」막았다/동ㆍ서 이념대립서 군사충돌로 급선회/「값비싼 희생」은 동구민주화와 연계성/“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한국인 모든 세대에 깊이 자리” 미국의 시사주간 유에스 뉴스 앤드 월드 리포트지는 6ㆍ25 40주년을 맞아 「잊혀진 전쟁」을 재조명하고 이 전쟁이 남긴 유산과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남북대결의 현실을 분석하는 특집기사를 6월25일자 카버스토리로 다뤘다. 장장 14쪽에 이르는 유에스 뉴스지의 특집기사를 요약한다. 지금부터 꼭 40년전 장마비가 내리는 아침에 시작돼 그후 37개월동안 이미 수탈당한 아시아 변방의 반도를 뒤흔든 야만적인 투쟁은 마지막 전쟁(제2차 세계대전)의 후기인 동시에 다음에 일어날 전쟁의 서문이었다. 이것은 갑자기 열전으로 변한 냉전이었고 공산주의 사상 가장 담대한 「국제해방전쟁」이었으며 유엔으로서는 처음이자 아마도 마지막일 「경찰업무」였다. 판문점이라는 무인지대의 황량한 「휴전마을」에서 교착상태로 끝날 때까지 이 전쟁에는 22개국이 참전했고5백만명의 인명이 이로 인해 희생됐으며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정치적ㆍ경제적 소요를 탄생시켰다. 그러나 발발 40년이 지난 지금 한국전쟁은 미국인들의 기억속에 미국의 킬링필드였던 안개낀 산들만큼이나 아물거리는 존재로 남아있다. 폭찹힐이나 하트브레이크 리지에서,또는 장진호에서 퇴각하는 길에 쓰러진 수많은 사람들의 죽음에 값하는 기념비는 어디에 있는가? 베를린 장벽이 유럽 분단의 상징이라면 남북한을 가르는 경계선은 아시아의 베를린 장벽이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 한국의 노태우대통령이 2주전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났을때 이들은 냉전의 가장 뚜렷한 흔적인 한국의 분단상태를 언젠가는 끝낼 수도 있을 해빙작업을 시작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구나 아시아에서 화해의 봄이 무르익고 있는 지금 공산주의 양대 종주국인 중국과 소련은 자신들이 지난 1950년 파괴하려 했고 그후 40년간 무시하고 비난하고 전복시키려 애써 왔던 한국과의 외교재개를 위한 새로운 조치들을 취하고 있다. ▷냉전의 모델◁ 한국전은 유럽일변도였던 미국의 관심을 태평양쪽으로 되돌렸다. 2차 대전후 극동에 대한 미국의 관심은 약화되기 시작했었다. 트루먼행정부는 「중공」과의 타협에 접근하게 된다. 당시 칼럼니스트 월터 리프먼은 『아시아는 서방의 군사적 영향력,경제력 통제 및 사상적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다』고 기술했다. 한국전이 중국과 소련간 불화의 서막이었다는 증거가 현재 나타나고는 있지만 당시 한국전은 획일적 공산주의의 이미지를 강화했으며 미정책입안자로 하여금 이때문에 오랜기간 골머리를 앓게 해왔다. 한국전은 무엇보다도 냉전을 정치ㆍ이념적 성격에서 군사충돌로 변모시켰다. 이는 전후 봉쇄정책의 촉매일뿐 아니라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표현한대로 「군사산업 복합체」를 형성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1951회계연도 미군사예산은 1백40억달러(책정기준)에서 53회계연도에는 5백40억달러로 상승된다. 보다 놀라운 점은 미국의 대외 원조계획의 군사화이다. 1950회계연도의 경우 군사원조가 대외원조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12%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는 60회계연도에 41%로높아졌다. 한국전은 또한 냉전기간을 통해 미국의 외교정책을 괴롭혀온 기본적인 모순을 가져다 주었다. 미국은 한편으로 국내에서 악의에 찬 반공주의에 반대하는 것처럼 행동하면서 한편에서는 공산주의 침략이 이루어지는 세계 어디서고 이를 퇴치한다는 결의를 다짐하도록 만들었다. 50년 9월30일 북한이 남침을 시작한지 3달째가 되는 날 트루먼은 국가안보회의문서 68호에 서명한다. 이 문서는 『소련의 강대국 부상을 막기위해 미국은 희생이 어떠하더라도 국내외에서 민주주의를 수호할 결의를 갖추어야 한다』고 언급한다. ▷미 극우세력의 득세◁ 다른 수준에서 한국전은 핵시대(소련은 전쟁발발 3개월전 첫 핵실험에 성공했음을 발표한다)에서 전쟁이 가열돼서는 안된다는 점을 상기시켜준 전쟁이었다. 이같은 새로운 「제한전」의 개념은 그러나 중국을 핵공격해야 한다는 주장을 펴온 더글러스 맥아더장군에게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51년 3월 맥아더는 중국 로비스트였던 조셉 마틴하원의원에게 보낸 서한에서 트루먼의 제한전 개념을 공개적으로통박한다. 그는 『공산주의가 세계무대 장악을 위해 준동하는 지역이 아시아』임을 상기시키면서 『아시아가 떨어지면 유럽도 공산화를 피할 수 없기 때문에 우리는 이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명령에 순종하는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트르먼은 마침내 맥아더를 해임하나 공산주의 「격퇴」에 관한 논란은 끊이지 않는다. 맥아더가 밀려난데 자극받아 존 맥가시상원의원은 공산주의 동조세력이 트루먼 행정부안에 도사리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 된다. 그로부터 13년후 피그만사건이 있고난후 미국이 아시아에서 또다른 제한전으로 치달을 무렵 배리 골드워터상원의원은 64년 공화당 전당대회에서 『자유방위를 위한 극단주의는 악이 아니다』라고 선언함으로써 맥아더를 상기시켰다. 이같은 우익노선은 마침내 로널드 레이건에 의해 미국의 정책으로 채택된다. ▷잊혀진 전쟁◁ 한국전의 여파가 오래 지속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전에 관한 한 가장 놀라운 것은 거의 잊혀졌다는 사실이다. 한국전에서 전사한 미군 병사수는 5만4천여명으로 한 세대후의 베트남전의 미군희생자 5만8천명에 거의 육박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 미국인들의 한국전에 대한 기억은 뚜렷한 것이 없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으로부터 무조건 항복을 받아낸 사람들에게 북한과 중국을 상대로 싸운 전쟁에서 비겼다는 사실은 결코 달갑지 않는 일이었을 것이 분명하다. 트루먼대통령은 ▲징집연장 ▲세금인상 ▲임금ㆍ물가 통제부과 등을 취했으나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상황에 비교하면 국내의 피해는 극히 미미했다고 하겠다. 또 베트남전이 TV를 통해 대대적으로 소개된 것에 비하면 한국전은 신문에나 조금 보도되는 등 일반인들의 관심밖의 일이다. 한국전이 끝난지 40년이 지난 지금 냉전이 종식되고 있는 현실을 되돌아 보건대 한국의 산하에서 치른 희생과 최근 프라하,바르샤바,부다페스트에서의 민주주의 태동은 분명한 연계성을 갖고 있다. 미국의 봉쇄정책은 성공했으며 미국과 우방국들은 한국에서 공산주의의 침공을 저지하기 위한 값비싼 희생을 치른 것이 분명하다. 최종적인 결과를 볼때 그 희생이 가치 있는 것이었다고 역사는 결론을 내릴 것이 분명하다. ▷계속되는 남북대결◁ 한국전쟁은 총성이 멈춘지 1세대가 지났지만 아직도 남북한 국민들의 생활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국이 경제기적을 거두고 한소 정상회담이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전쟁의 물적ㆍ심리적 유산은 모든 세대와 사회계급에 걸쳐 깊이 자리잡고 있다. 도쿄에서 발행되는 친북한신문의 편집인 손진형씨는 『전쟁은 민족 최대의 비극』이었다고 말한다. 휴전된지 37년이 되도록 남북한은 아직도 기술적으로 전쟁상태이며 1백51마일 휴전선에는 1백만의 병력이 마주 대하고 있다. 한국의 영화관에서는 영화상영전에 간첩과 공산주의자를 113으로 신고하라는 자막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북에서는 김일성이 또다른 전쟁 가능성을 내세워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모든 북한주민은 매년 열리는 한미 합동군사훈련 기간동안 전투비상체제하에 놓인다. 김일성은 『미제국주의자와의 전쟁경험은 금과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경험』이라고 말했다. 남쪽에서는 전쟁이 재벌이라는 신흥기업군이 자랄 수 있는 혼란스럽고 독점적인 시장을 마련해 주었다. 전쟁은 남북을 합쳐 1백50만명의 사망자와 실종자를 낳았으며 수백만명의 인구가 고향을 떠나게 만들었다. 인구의 대량이동은 도시화를 촉진시켰다. 전쟁이 미친 가장 큰 영향은 남북 모두 군인들이 정치권력을 쥐도록 만든 점이다. 남에는 장성출신의 대통령이 3명이나 되고 그중 2명은 쿠데타로 집권했다. 북에서는 전현직 고위 장교들이 김일성의 강력한 지지그룹을 형성하고 있으며 당의 고위직에 앉아 있다. 경희대 나종일대학원장은 『전쟁은 우리가 정치적으로 성숙되지 못했음을 보여줬다. 우리는 우리의 문제들을 군사적인 수단과 독재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라고 지적한다. 아직도 남북 모두에게 분단상황은 마음속에 굳게 자리잡고 있으며 남한은 독일통일방식의 단계적 통일을,북한은 1국2체제 방식을 내놓고 있다. 한국전쟁의 사회적 영향을 연구한 서울대 김경동교수는 『전쟁이 왜,어떻게 발발했는지 분명히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우리는 당시 전쟁을 막을 통제능력이 거의 없었다』라고 진단한다. 전쟁이 한국민들에게 가치 있었다고 한다면 그것은 적어도 남한은 자신들이 1950년에는 갖지 못했던 운명을 스스로 개척할 힘을 갖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 “북의 재침위험성 높다” 76%/6ㆍ25 40주년… 국민여론 조사

    ◎조기통일 가능성엔 59%가 부정적/“2∼3년새 대북관념 좋아졌다” 47%/“우리 체제 우월… 북과 논쟁에 자신” 71% 우리 국민의 북한에 대한 인식은 지난 2∼3년전에 비해 좋아지고 있으며 남한체제의 우월성에 자신감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보처가 6ㆍ25 40주년을 계기로 대륙연구소(이사장 장덕진)에 의뢰,지난달 18일부터 28일까지 제주도를 제외한 전국의 만 20세 이상 남녀 2천3백명을 대상으로 한 개별 면접형식의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조사대상자의 47.3%가 지난 2∼3년동안 북한에 대한 느낌이 좋아졌다고 응답한 반면 나빠졌다는 사람은 3.2%에 불과했다. 북한이 우리의 적이 아니라고 한 의견도 44.6%나 돼 주목을 끌고 있다. 북한사람을 만나 남한체제의 우월성을 자신있게 논쟁할 수 있다는 응답자는 71.5%로 나타났으며 28.2%는 자신이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를 응답자 배경별로 보면 전쟁 비경험세대(58.8%)에 비해 경험세대(76.9%)에서,그리고 경영ㆍ관리ㆍ전문직(84.1%)에서 자신있다는 응답이 상대적으로 많았던 반면 20대 연령층과 학생층에서 자신이 없다는 응답이 많았다(만 20∼24세 38.1%,만 25∼29세 36%,대학생 39.7%). 또 남북한 통일가능성과 관련,응답자의 59.9%는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통일의 가장 큰 장애로는 남북한간의 사상대립(34%),북한의 적화야욕(31.1%),남북한의 이질화(19.7%),국제적 이해대립(12.2%)등을 들었다. 통일의 기반을 다지기 위해서는 사회적 안정(34.3%)이 가장 중요한 과제이며 정치적 민주화(29%)와 경제적 발전(21.9%)도 필수적인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주한미군의 완전 철수때 우리 자체의 현재 방위능력에 대해 41.6%가 믿을 수 없다고 응답한 반면 33.3%가 믿을 수 있다고 응답했다. 주한미군의 철수 시기에 대해서는 ▲빠른 시일내의 철수 15.9% ▲우리의 자주국방능력이 완전해질 때까지 계속 주둔 63.6% ▲통일될 때가지 주둔 20.3%의 반응을 보였다. ▷통일◁ 남북한의 통일 후 체제에 대해서는 자본주의(59%),혼합절충 사회(32%),사회주의(8.3%) 순으로 희망했는데 전쟁경험세대와 나이가 많을수록 자본주의를 선호하고 있으며 교육수준이 높을수록 혼합절충사회에 대한 선호도가 높은 것으로 분석됐다. 특히 가능성에 대해서는 높다가 22%,낮다가 59.9%,모르겠다가 18%로 나타나 남북통일의 가능성은 높지않게 보고 있는 것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통일이 가능하다는 사람일 경우 그 시기에 대해서는 10년이내로 보는 사람이 42.2%로 가장 많았고 20년이내가 23.1%,알 수 없다가 15.8%,20년이후가 10.1%를 차지했다. 통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주변 강대국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보는가에는 필요하다가 62%로 나타났으며 도움이 필요할 경우 바람직한 중재자로는 미국(38.8%),유엔(38%),소련(14.8%)등을 꼽았다. ▷안보◁ 팀스피리트 훈련은 남북대화에 방해가 되기 때문에 중지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33.1%가 찬성한 반면 66%는 반대의사를 표명했다. 또 국가안보를 위해서는 핵무기를 보유해야 한다는 데에는 찬성과 반대가 각각 62.8%와 36.7%를 차지했다. 이와함께 북한의 남침가능성에 대해서는 염려할 필요가 없다는 쪽이 23.4%,그렇지 않다는 쪽이 76.2%로 나타나 북한의 남침가능성을 우려하는 응답자가 훨씬 많았다. 특히 분단상황보다는 자유민주주의를 포기하더라도 통일이 되는 것이 낫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찬성 17.3%,반대 81.7%를 보여 통일지상주의에 대한 경계의 시각이 우세하고 있음을 반영하고 있다. ▷남북관계◁ 남북관계개선을 위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로는 이산가족찾기ㆍ서신왕래 45.7%,남북지도자의 대화 18.7%,문화예술ㆍ스포츠교류 16.2%,경제교류 13.3%를 보였으나 군축ㆍ군사활동 상호감시는 5.8%에 지나지 않았다. 남북한 유엔동시가입에 대해서는 찬성 87.4%,반대 12%였으며 북한이 동시가입을 방해할 경우 남한만이라도 단독가입해야 한다는 의견은 87.9%였다. 또 남북대화가 잘 이뤄지지 않는 책임에 대해서는 52.6%가 북한단독책임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나 남북한 모두에게 있다는 주장도 44.3%나 됐다. 북한에서 민주화운동이 일어날 것으로 보는 견해는 응답자의 51.7%였다. ▷6ㆍ25 인식◁ 6ㆍ25로 인한 분단에 가장 책임이 있는 나라로 북한이 가장 많이 지적됐으며 (44.2%) 소련(26.6%) 미국(17.6%)남한(4.7%) 순으로 나타났다. 한편 대륙연구소측은 이번 조사결과는 95% 신뢰수준이며 추정치의 최대표본오차 허용한계는 ±2.04%라고 밝혔다.
  • 외언내언

    최근들어 부쩍 정말로 낯선 사람들이 서울에 오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사람들이어서 세상의 변화를 실감케 하고 있다. 북한의 전고위관리,6ㆍ25때의 북한군 장교,소련내의 유력 한국계 인사들이 바로 그들이다. ◆이들중에는 남북분단직후의 대남공작총책이 들어 있는가 하면 북한측 정전위대표,한국군과 6ㆍ25때 교전까지 벌인 인민군 고급간부,그런가 하면 소련군 전투조종사까지 끼여 있어 만감이 오고 간다. 재소동포들가운데는 북한에도 여러번 다녀온 사람들이 많아 이들의 방한소감이 무척 기다려진다. 이들 소련거주 전북한의 고위간부들말고도 미국등 다른 나라에 있는 북한군 관계자들의 서울방문도 최근 두드러지고 있다. ◆이들의 방한목적은 대체로 그동안 알려지지 않은 「6ㆍ25」와 남북인사들의 근황및 생활상에 대해 증언하고 국내의 산업현장,전방의 격전지를 돌아보는 일.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것은 북한의 남침사실을 다시 확인해 주고 한국의 발전상에 놀라고 있다는 것. 북한군의 전장교들은 물론 소련의 관계자,헝가리ㆍ체코와 같은 동구권의 당시 외교관들까지 실례를 들어가며 북한의 남침을 증언하고 있다. 그러면서 한결같이 한국의 눈부신 발전에 입을 모으고 있다. ◆이들 가운데서 주영복씨(67ㆍ전인민군공병소좌ㆍ미 로스앤젤레스 거주ㆍ호텔경영)의 경우가 무척 인상적이다. 주씨는 6ㆍ25때 춘천전투에 참전했고 서울의 인민군전선사령부공병부에서 소련군의 공병관련 작전서류의 번역및 통역으로 있다가 포로가 된 뒤 제3국을 택함으로써 뉴스의 초점이 됐던 사람. 최근 6ㆍ25발발 40주년을 맞아 마련된 학술회의 참가차 내한했다. 그는 『소련이 6ㆍ25남침을 주도했다』고 당시의 경험과 자료를 들어가며 밝히고 있다. ◆이처럼 자유스런 왕래가 가능하게 됐는데도 못오는 재소한국인들이 많다고 전해진다. 주로 경제적인 이유때문. 보다 왕래가 폭넓게 이뤄질 때 한소교류도 본격화될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이것을 보면서 오가고 싶어도 오갈 수가 없는 1천만 이산가족들의 그 아픔은 언제나 되어야 해결될지 그날이 기다려진다.
  • 전 북한 반체제 인사·재소 교포 18명 어제 서울에

    강상호 전북한내무성차관 등 북한에서 고위층인사였던 재소교포 18명이 18일 하오4시55분 대한항공 703편으로 우리나라를 찾아왔다. 이들은 모두 북한에서 고위층인사로 지내다 숙청된뒤 소련으로 망명한 반체제 인사들로 8박9일동안 우리나라에 머물면서 철원일대의 격전지와 포항제철 등 주요산업시설을 돌아본뒤 오는 26일 모스크바로 돌아갈 계획이다. 문화방송의 초청으로 온이들 일행은 앞으로 강영훈국무총리 등 정부관계자를 예방하고 「MBC시사토론」 「통일전망대」 등 TV방송에 출연,6·25때의 숨은 비화 등을 공개증언할 예정이다. 이들 가운데는 전 인민군장성 심수철(69),전북한문화성차관 정상건(73),전북한 「새조선」잡지주필이자 전북한문화성국장 송진파(76),전북한내무성소장 박병윤(82)씨 등이 포함돼 있다. 또 현재 타슈켄트 농대교수로 있는 니콜라이(78),전소련모스크바건축대학부총장 김니콜라이(78),타슈켄트문화대학총장 한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57)씨 등 재소한인사회의 유력인사들도 함께왔다. 강전내무성차관은 이날 공항에서 『6·25가 남침이라는 역사적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왔다』면서 『이곳을 찾은 일행대부분은 지난 59년 스탈린격하운동당시 소련으로 정치적 망명을 한 사람들』이라고 밝혔다. 빨치산훈련소였던 전강동학원원장 박병윤씨도 이날 『김일성이 도발한 6·25의 역사적사실 대부분이 북한에서 날조,왜곡되고 있다』면서 『이번 방한기간동안 숨겨진 사실이 많이 폭로,증언될것』이라고 말했다. 이들 대부분은 『한·소 정상회담이 통일의 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라면서 『현재 소련에서는 각종 매스컴에 남한에 관해 자세히 보도되고 있다』고 전했다.
  • 북한의 대화거부(사설)

    북한 체제내부에 조직적이고 광범위한 반김일성세력이 있다고 전해지던 날 평양방송은 남북 정상회담에 응할 의사가 없음을 밝혔다. 북한측은 그동안 우리쪽이 한반도문제를 논의하기 위한 방안으로 여러 차례 제의해온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기존의 몇갈래 대화채널도 빠른 시일내에는 재개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했다. 북한측은 최근 한소 정상회담등 여러 형태에 걸친 우리측의 한반도 문제 해결 노력을 「분단주의적 입장」이라고 했고 유엔정책이 「두개의 조선」을 만들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했다. 지금까지 들어온 북한쪽 주장과 입장을 단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되풀이 비난이요 허구 투성이의 주장이다. 여러가지 정황에 비추어 예측된 일이기는 하나 이같은 북한측 입장과 자세에 대해 우리는 한반도문제의 장래와 관련하여 안타깝고 암담한 심정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우리가 다시 묻건대 남북 정상회담에서 왜 얻어질 것이 없으며 유엔에의 동시 또는 단독가입이 왜 분열상태의 고정화인가. 최근 한소등지에서 터져 나오는 「6ㆍ25남침」 증거가 아니더라도 6ㆍ25동족전쟁은 김일성의 도발에 의한 남침으로 비롯되었음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이다. 그러나 김일성 자신은 4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단 한반도 자신이 전쟁도발자임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아직도 남한을 「해방되지 않은 남반부」라는 인식아래 또다른 전쟁적 해결의 꿈을 버리지 않고 있다. 남북 정상회담을 거부함은 그의 이러한 과거의 죄과와 현재의 야욕을 은폐하려 함이다. 유엔에의 단독 또는 동시가입도 결코 분열주의적 정책은 아니다. 오늘날 통일을 눈앞에 두고 있는 동서독과 남북예멘의 경우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분단 상태의 양 당사자가 유엔에 가입된 상태에서 통일을 이루려 할 때 그것은 밖에서 대결하고 있을 때보다 휠씬 수월할 뿐더러 동시에 국제적인 지원과 인정을 쉽게 얻을 수 있다. 우리는 그 보다 이 거부와 비난속에 담겨진 북한의 폐쇄와 고립의 지속을 더 안타깝게 여긴다. 이와함께 지금 북한에 반김일성세력이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쪽에도 관심을 갖게 된다. 그들 폐쇄및 고립정책의 지속이 체제내의 반대파존재와 함수관계를 이루고 있을지 모른다는 이유에서이다. 오늘의 세계적인 화해와 민주화 변혁속에서 북한 김일성이 그나마 현실감각을 갖고 있다면 그가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과제와 고민은 40여년 독재체제와 이른바 유일주체사상의 유지일 것이다. 아마도 그는 그것이 흔들리고 자신의 입지가 약화되는 것을 가장 두려워 할 것이다. 지금 그는 안팎으로부터 심한 개방압력과 체제 도전을 받고 있다. 이번의 거부적인 자세는 여기서 비롯되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북한의 당과 언론계에 반김일성세력이 조직돼 있음을 폭로한 루마니아 집권당 지도자 브루칸씨는 『조작된 개인숭배와 진정한 대중적 지지를 혼동하지 말라』고 충고했다. 그의 말대로 북한은 공산정치체제가 붕괴하지 않은 유일한 곳이다. 북한 당국자들은 그것을 알고 세계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한반도문제 해결의 실마리도 여기서 풀어야 하는 것이다.
  • 「한국전 기원과 성격」… 「6ㆍ25」 40돌 국제학술회의

    ◎스탈린,49년 3월 김일성 만나 “남침”확정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가 주최하고 통일원이 후원한 한국전쟁 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가 14일 서울 힐튼호텔에서 열렸다. 「한국전쟁과 한반도의 평화 정착」이라는 주제로 열린 이날 회의에서는 한국전쟁의 기원과 미소가 한국전쟁에 미친 영향 등이 집중 토의됐다. 이중에서 한국전쟁은 미소의 갈등으로 빚어진 특수한 내전이면서도 국제전의 양상을 띠었다고 주장하는 존 메릴 미국무성연구관의 논문 「한국전쟁의 기원 대답없는 질문」과 소련이 서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돌리기 위해 북한을 사주 한국전쟁을 도발했다는 윌리엄 스투웨크 미조지아대교수의 논문 「소련과 한국전쟁의 기원」을 소개한다. ◎6ㆍ25의 기원/윌리엄 스투웨크 미 조지아대교수/크렘린,미ㆍ서구 밀착 저지 겨냥/극동에 긴장 조성… 미 경제난 유도 속셈도 한국전쟁은 주모자인 북한과 주요 군사물자 제공자이자 군사고문단 및 병력의 결정적인 공급자였던 소련,그리고 중국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일어났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일반적인 정보다. 그러나 하필 이 시기에 소련이 이같은 모험을 추진할 것을 결정했느냐의 의문이 남는다. 당시 소련은 팽팽한 긴장속에 미국의 핵무기와 잠재된 기동력에 눌려 극도로 취약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다. 소련은 49년 가을 마샬플랜의 시행,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결성,서독정부의 출범,미의회의 대서유럽군사원조결의 등 일련의 사태로 미루어 볼때 미국의 관심이 서유럽에 집중됐다고 판단,미국과 서유럽 동맹국들의 단결을 막아야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당시 국내외 문제의 최종결정권자였던 스탈린은 대외정책에 관한한 공개토론을 허용했다. 49년에서 50년에 걸쳐 프라우다지는 몰로토프,스슬로프와 같은 온건관료층의 견해를 주로 반영했고 이즈베스티야지는 말렌코프,베리야와 같은 강경군국주의자들을 지지했다. 강경파들은 미국경제가 점차 퇴조하고 있으므로 소련이 서유럽에 압력을 가중한다면 미국은 곧 해외원조를 포기하고 서유럽에서 물러날 것으로 믿었다. 반면 온건파들은 서유럽에서의 미국의 영향력 강화와 경제적으로 유리한 여건을 강조,소련의 압력이 오히려 서방국가를 결속시켰으므로 긴장상태를 완화시킬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스탈린은 온건파의 주장을 받아들여 서유럽에서는 평화정책을 쓰는 대신 극동지역으로 관심을 돌려 팽팽한 긴장상태를 유지하기로 결론을 내렸다. 이같은 결정의 배경에는 국제긴장상태 조성을 통해 ▲국내에서 권력을 유지하고 ▲소련주변 위성국들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며 ▲유럽에 대한 미국의 관심을 분산하겠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스탈린은 소련의 정책전환에 따라 미국이 아시아 문제에 휘말리게 되면 미국의 경제적 위기가 촉진되고 상대적으로 중국이 소련에 의존하게 되리라는 계산도 했음직하다. 이에 따라 스탈린은 가장 위험성이 높은 북한의 남침 등 여러조치들을 아시아 지역에서 잇따라 시행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남한으로부터 미국이 멀어져 가고 있다는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모험을 할 수 있었다. 49년 한햇동안 미국은 남한주둔 미군을 모두 철수시켰으며 미 국무장관 딘 애치슨은 50년 1월12일 연설을 통해 미국의 태평양 방위체계에서 남한을 제외시켰음을 공개적으로 밝혔다. 이어 1월 중순에는 미하원에서 남한에 대한 경제원조안이 거부됐다. 스탈린은 이같은 상황이라면 남한이 위기에 처하더라도 미국동맹국들의 집단적인 개입은 없을 것이라고 믿었다. 스탈린과 김일성은 49년 3월 김의 모스크바 방문시 북한의 침공을 논의했을 것이다. 스탈린은 마지막 남아 있던 미군이 철수하게 되니 침공계획을 세우라고 격려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탈린은 북한 김일성과 군사원조 합의안에는 서명했지만 상호안전보장 조약의 체결은 피했다. ◎6ㆍ25의 성격/존 메릴 미 국무성연구관/초강국갈등서 비롯된 「특수내전」/이해 엇갈린 미ㆍ소ㆍ중의 대리전 양상도 지녀 김일성이 살아있는 한 북한은 결코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고 공개적으로 인정할 수 없다. 그렇게 하는 것은 폐쇄체제의 영웅적인 자화상을 훼손하고 평양 당국으로 하여금 1백50만명에 달하는 한국인의 목숨을 앗아간 전쟁을 일으켰다는 죄를 스스로 인정케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김일성에 대한 영웅적인자화상은 아마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갖고 지속해온 것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앞으로 수년동안 평양에서 열리는 반미투쟁월의 경축행사를 계속 지켜보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누가 먼저 전쟁을 일으켰는가에 관해 북한사람들이 형식주의에 의존한다는 것은 그들이 전쟁을 시작했다는 역사적 사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죄책감을 느낀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자신의 입장을 아주 자신있게 변호하지도 않는다. 평양 당국은 전쟁초기의 며칠동안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상세한 설명을 결코 출판물을 통해서 밝히지 않고 있다. 또 한국전쟁에 관한 학술토의에 참가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러나 조선인민공화국에서 발간한 한국전쟁사를 유심히 살펴본 비판적인 독자라면 북한이 먼저 전쟁을 일으켰다는 것을 인정하는 모호한 표현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아무도 평양을 격하하거나 40년전의 엄청난 사건에 대해 그들을 비난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북한 사람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짐에 얽매여서는 안된다. 특히 그들이 남한과의 신뢰를 구축하고 통일이라는 공동목표를 공유하려면 이러한 태도는 더욱 필요하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알 수 있듯이 남한도 나름대로의 짐을 지고 있다는 얘기다. 바로 이 대목에서 시작한 문제,즉 한국전쟁은 침략인가 아니면 민족해방전쟁인가에 대한 해답은 두가지 모두 해당된다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다. 북한 사람들은 그것을 두고 「조전해방전쟁」이라고 부른다. 강제적으로 가로놓여진 경계선이 존재하고 있는 동안 1950년에 국토의 분단을 정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발견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그것을 영구적이라고 받아들이는 사람도 드물었을 것이다. 수단과 기회가 주어졌더라면 이승만대통령도 김일성이 남한으로 쳐 들어왔던 것처럼 북진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전쟁이 국제전인가 아니면 내전인가 하는 문제가 있다. 여기에서도 해답은 양자가 모두 해당된다는 것이다. 한국의 분단은 일본으로 부터의 해방과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에서 비롯된 것이다. 초강대국의 불간섭과 그에 따른 한국에서의 경쟁적인 양체제의창출은 한국내의 좌익과 우익간 투쟁의 국내적인 측면을 강화했다. 이제 소련이 미묘하게 표명하고 있듯이 한국전쟁은 그 이후 미국과 중국의 개입(현재 우리가 조심스럽게 표명되고 있는 것을 듣고 있듯이 소련의 개입도 있었다)에 따라 국제화의 성격도 띤 것으로 볼 수 있다. 오늘날은 냉전의 종식과 함께 두개의 한국이 상호 경쟁하는 국내적 성격이 다시 중요성을 더하고 있다.
  • 중국학자가 밝힌 「중국의 6ㆍ25참전 배경」

    ◎김일성,남침2개월전 북경에 통보/모택동,유엔군 38선 넘자 심한 불안감/중국,미 무력위협 견제위해 참전 선언/소의 공군ㆍ물자지원 조건으로 병력 파견 6ㆍ25발발 40주년을 앞두고 한국전쟁에 대한 재평가작업이 국내외에서 활발히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국내에서는 처음으로 한국전쟁을 중국의 시각에서 조명한 논문이 중국학자에 의해 발표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한국전쟁연구회(회장 김철범)주최로 14일부터 이틀간 서울힐튼호텔에서 열리는 한국전쟁40주년기념 국제학술회의에서 중국국제전략연구소의 적지해연구원이 발표할 「중국의 한국전쟁 참전결정에 대한 재고찰」이란 제목의 논문은 중국의 한국전 참전배경을 새 시각에서 조명하고 있다. 중국의 한국전 참전은 국민당정부를 후원하는 미국으로부터의 무력개입위협을 견제하기 위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중국공산당은 1950년6월20일 5천1백만명에 달하는 인민해방군을 주은래 책임아래 1천4백만명을 감축하는 작업에 들어갔다. 이에 앞서 김일성은 50년4월 모스크바에서 평양으로 귀환도중 밀사를북경에 파견,모택동에게 군사적인 수단으로 조국을 통일키로 했다는 사실을 통보했으나 군사계획과 그밖의 상세한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지도자들은 처음부터 한국전에 개입할 의도는 없었고 김일성의 요청에 따라 인민해방군에 속한 한국계 중국군을 보내는 것만으로 평양을 돕고자 했다. 그러나 모택동은 트루먼이 6월27일 중국본토와 대만사이에 제7함대를 배치하자 미국이 국민당을 구하기 위해 중국내전에 다시 참가하기로 결정할 것으로 믿었다. 이에 따라 7월10일 「미국의 대만 및 한국침략에 대한 중국인민위원회」가 북경에 설치됐고 모택동은 등후아장군으로부터 급속한 남진,보급선 확대,후방의 공백상태등 한국전의 상황을 보고받고 김일성에게 「남진속도를 늦추고 확실한 방어망을 구축하라」는 충고를 했다. 9월초 북동부지역 사령관인 가오강은 한국전 상황을 분석한 보고서에서 북한이 통일할 기회는 이미 지나갔으며 김일성의 군사행동은 처참하게 실패하리라고 확신했다. 이에 모택동은 9월9일 동부군사지구 제10군에게 철도에근접하게 병력을 배치,압록강에 대한 병력보강에 대비할 것을 지시했다. 10월2일 주은래는 당시 인도대사인 파니카를 통해 만약 미군이 북한을 점령한다면 중국은 전쟁에 개입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유엔군이 서울을 탈환한뒤 영국외상 포리스트 버빈은 네루를 통해 유엔군이 만약 38도선을 넘어야 할 경우에는 압록강 40마일 앞에서 멈추겠다고 중국지도자들에게 통보했다. 미국은 인도를 통해 전달한 자신의 약속을 두차례나 어겼으므로 중국지도자들은 미국의 맹서는 사기술이라고 믿게됐다. 1천㎞에 이르는 압록강을 지키기 위해 얼마나 많은 병력이 필요하겠는가. 더구나 언제 적이 침입해 올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중국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도 없었다. 50년 10월1일 김일성은 불리한 전황을 알리면서 인민의용군의 즉각 투입을 요청하는 전문을 모택동에게 보내왔다. 그러나 북동부지역 사령관 가오강과 임표는 이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이들은 중국경제력의 열세와 군사력의 열세,후방의 취약성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그러나 이어 열린 정치국특별확대회의에서 ▲한국은 미국의 세계전략의 취약한 고리이며 ▲전면적인 핵전은 불가능하며 ▲한반도지형은 미군의 기계화부대와 화력운용에 불리하다는 결론에 따라 장기적으로 어느 정도 희생을 치르는 것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게 됐다. 만약 중국이 전쟁을 회피한다는 것은 국민당에 대한 해방전쟁이 몇년 더 지체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10월2일 정치국 특별회의에서 모택동은 소련이 공중지원과 전쟁물자를 원조한다는 조건으로 병력파견을 승인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후 전황이 김일성에게 크게 불리해지자 스탈린은 딜레마에 빠지게 됐으며 이러한 딜레마의 탈출구로서 지상은 중국군이,공중은 소련공군이 기꺼이 맡기로 합의했다. 결국 10월13일 모택동은 김일성이 중국으로 후퇴하기 전에 한반도에 군대를 보내는 것이 낫다고 판단,압록강을 건너 진격키로 결정했다. 소련은 합의대로 50년말 공군 2개사단(2백대전투기)을 파견,압록강철교와 1백㎞에 이르는 의용군 보급로를 엄호했으며 중국군복을 착용한 이들 소련군조종사는 생포되더라도중국계러시아 소수민족이라고 속였다. 한국전에 투입된 2백30여만명의 중국인민의용군은 당시 중국이 보유하고 있던 전야전군의 66%,전포병사단의 60%,전기갑사단의 1백%에 해당하는 수준이었다. 모택동이 중국과 미국의 충돌이 불가피하다고 결론을 내리지 않았거나 모택동이 본토를 석권했을 당시 트루먼이 보다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면 스탈린은 당시 상황으로 봐서 모택동의 결정을 제지했는지도 모른다. 한국전에서 이데올로기는 중요한 역할을 했음에도 지난 30년동안 서구의 역사가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다. 중국공산당과 트루먼행정부가 서로를 좀 더 잘 이해했더라면 중국의 참전이라는 비극은 분명히 피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군비정책」안보전략 차원서 강구/국방부 「통제위」설치 추진의 배경

    ◎군사력 운용등 포괄,범국가적 기구로/상호신뢰 구축할 정책개발에 주안점 이상훈국방부장관이 11일 임시국무회의에서 「군비통제조정위원회」의 설치를 검토하겠다고 밝힌 것은 그동안 국방부ㆍ외무부ㆍ통일원 등 정부 각 부처에서 연구해오던 군비통제문제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다룰 때가 됐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국방부는 지난 89년 1월16일 장성급장교 2명을 포함한 실무자 20여명으로 군비통제실을 구성,운영해오고 있으며 외무부와 통일원ㆍ국방부의 실무자들이 참석하는 「안보실무대책반」을 중심으로 안보여건 변화에 따른 우리의 대처방안을 나름대로 연구해왔으나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거나 정책을 입안한 적은 없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학술대회나 국제회의에서 한반도의 군비통제문제가 보도될 때마다 북한의 선전용 군축제안을 연상,남북한이 병력과 장비를 감축하는 시기가 임박한 것으로 착각하고 있으나 한국이 구상하고 있는 「군비통제」와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군축」은 입장과 단어의 의미가 전혀 다른 것이다. 정부가 구상하고 있는 군비통제(ARMS CONTROL)의 개념은 군사력의 건설ㆍ배치ㆍ운용ㆍ사용을 확인ㆍ제한ㆍ금지ㆍ축소하고 합의사항 위반을 제재함으로써 전쟁위험과 피해를 감소시켜 안보를 유지,증진하는 군사전략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군비축소」(ARMS REDUCTION)는 장비와 병력의 수량적인 감축과 함께 군비제한(ARMSLIMITATION),군사력 건설 수준의 질적ㆍ수량적 제한까지 포함한 개념이며 따라서 상호간에 약속이 지켜질 만한 아무런 사전조치가 없는 북의 제안은 다분히 정치선전이며 평화공세의 하나로 볼 수 있다. 북한은 한소 정상회담 개최사실이 발표된 직후인 지난달 31일 남북한 상호병력규모를 10만명으로 축소하자는 제안을 했다. 그러나 북한측의 10만 군축제안은 지난 88년 11월의 포괄적 평화제안인 ▲주한미군의 핵무기철수 ▲주한미군 병력철수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 ▲군고위당국자간 직통전화 가설 ▲남북고위급 정치군사 회담진행 ▲대규모 군사연습 중지와 90년 5월30일 제안한 한반도 평화안과 비교해 볼때 별 진전이 없는 것이다. 북한이 주장하는 군축안의 핵심은 ▲한반도 비핵지대화 ▲주한미군 철수 ▲비무장지대의 평화지대화등 다분히 선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주한미군의 철수와 핵무기 철거를 남북한 군축회담의 전제로 하고 있어 군축의 당사자도 한국보다는 미국을 먼저 겨냥하고 있어 우리 정부로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점이 있다. 북한은 정규군만도 우리보다 40만이 많은 1백5만을 유지하고 있으며 70%이상을 휴전선에 전진배치하고 있어 전선에서 불과 40km 남쪽에 수도를 두고 있는 정부와 국민은 제2의 남침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다. 더욱이 탱크와 자주포ㆍ방공포로 무장한 비정규군의 병력도 4백만이나 되어 이를 단시일안에 10만명으로 감축하자는 제안은 현재로서는 전혀 실현 가능성이 없는 실정이다. 북한과의 전력지수면에서 70%밖에 되지 않는 약세의 국군은 93년부터 시작될 주한미군의 제2단계 철수에 대비,국군전력의 통합을 꾀해 강한 전투력을 유지하려는 합동군제인 합동참모본부 발족을 서두르고 있다. 정부는 국방부 합참에 군비통제실을 설치한 뒤 팀스피리트90 훈련도 축소하고 한미 안보협의회의(SCM)도 차관급으로 낮추어 격년제로 개최하는등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맞는 신축적인 정책을 펴 오고 있다. 합참의 군비통제실 한 관계자는 『국군은 지난 85년부터 이른바 배달계획이라는 이름하에 군비통제에 관한 연구를 해왔으나 상대가 있는 계획인 만큼 확정된 정책은 없다』고 밝혔다. 따라서 새로 발족될 범정부차원의 「군비통제조정위원회」도 외무부ㆍ통일원ㆍ학자 등이 주체가 된 민간정부기관의 성격으로 본격적인 군축문제를 다룬다기 보다는 한반도 주변여건 변화에 따른 우리의 대응책을 협의하는 정도의 활동을 할 것으로 보인다.
  • 소,6ㆍ25 북침설 또 일축/모스크바방송 보도

    【내외】 북한은 6ㆍ25 기습남침을 위해 소련으로부터 막대한 군사지원을 받았으며 또한 소련과 공동으로 정치ㆍ군사적인 정책을 수립했었다고 10일 모스크바방송이 보도했다. 모스크바방송은 소련 유수의 정치주간지 노보에 브레미아 최근호에 게재된 역사학자 보리스 슬라벤스키의 논문을 또다시 인용,이같은 북한과 소련의 남침준비는 49년 중국에서 미군의 지원을 받은 장개석 군대가 중국 공산당에 패배를 당한 것이 직접적인 동기가 됐던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모스크바방송에 따르면 보리스 슬라벤스키는 「자칫하면 세계의 파국에 밀어 넣을 뻔했던 조선전쟁」제하의 이 논문에서 6ㆍ25동란을 누가 먼저 시작했는냐 하는 문제에 언급,『북침을 면밀히 준비했다는 남조선측이 개전 3일만에 서울을 내놓고 퇴각을 했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운 일』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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