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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일 오전 7시26분 독도에 새해 첫 해

    1일 오전 7시26분 독도에 새해 첫 해

    2012년 임진년 새해 첫날 오전 7시 26분 독도에서 가장 먼저 해돋이를 맞을 수 있다. 27일 한국천문연구원에 따르면 독도에서 7시 26분 떠오른 해는 7시 31분 울산 간절곶과 방어진, 7시 32분 부산 태종대· 해운대, 경북 경주 감포 수중릉, 경북 포항 석병리·호미곶, 7시 35분 경북 울진 망양정, 7시 36분 제주 성산 일출봉에서 관측할 수 있다. 서울 남산에서는 7시 47분 해를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상청은 동해상에 구름대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아 해돋이가 또렷하지 않을 수 있다고 예보했다.
  • 대한민국연극대상에 ‘템페스트’

    한국연극협회는 2011 대한민국연극대상에 목화레퍼토리컴퍼니의 ‘템페스트’를 선정했다고 26일 밝혔다. 이날 오후 아르코예술극장대극장에서 열린 시상식에서 ‘템페스트’는 대상과 함께 남자연기상(정진각), 무대예술상(이승무) 등 3관왕을 차지했다. 셰익스피어의 원작을 오태석 연출이 한국식으로 재구성한 ‘템페스트’는 지난 8월 한국 최초로 에든버러 페스티벌에 초청돼 수상했으며 한국연극평론가협회의 ‘올해의 연극’에도 선정됐다. 작품상은 ‘푸르른 날에’(신시컴퍼니&남산예술센터)와 ‘과학하는 마음-숲의 심연’(제12언어연극스튜디오)이 선정됐다. 연출상은 ‘푸르른 날에’를 연출한 고선웅씨가 받았다. 남자연기상은 정진각과 함께 이남희(우어파우스트)가, 여자연기상은 김정은(유리알눈, 카니발)·우미화(복사꽃 지면 송화 날리고)가 수상의 영예를 안았다. 희곡상은 고연옥(주인이 오셨다)이 차지했고, 특별상은 박정자 한국연극인복지재단 이사장이 받았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9) ‘범신론’ 사상가 스피노자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9) ‘범신론’ 사상가 스피노자

    1677년 네덜란드 헤이그. 판 데르 스픽은 자신의 집에 하숙했던 친구의 책상을 조심스레 포장하기 시작했다. 방금 전 그는 시신도 없는 텅 빈 관(棺)으로 친구의 장례식을 치르고 돌아온 참이었다. 친구의 시신은 교회에 안치되어 있던 중 도난당했다. ‘신을 모독한 불경스러운 자’라는 꼬리표가 시신 역시 편치 못하게 한 게 틀림없었다. 그 친구는 몇 주 전, 자신이 죽으면 책상을 암스테르담의 한 출판사에 보내 달라고 부탁했다. 포장재에는 어떤 것도 적지 말고 세관에 내용물을 신고하지도 말아달라는 당부와 함께. 조심성 많은 친구의 도움 덕에 책상은 무사히 출판사에 도착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에티카’라는 한 권의 책이 출간되었다. 하지만 그 책은 곧 금서로 지정돼 압수되었다. 비록 익명으로 출간되었지만, 사람들은 그 글의 주인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던 것. 그 책의 저자는 ‘베네딕투스 스피노자’였다. 베네딕투스가 불경한 자로 낙인 찍힌 것은 1656년, 그의 나이 겨우 24세가 되던 해였다. 그는 종교재판을 피해 에스파냐에서 포르투갈로, 그리고 다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한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1632년에 태어났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준 이름은 ‘바뤼흐’. 이 말은 히브리어로 ‘축복받은 자’라는 뜻이었다. ●불경한 자에게 저주가 있으리니 당시 신생 공화국이었던 네덜란드는 유대인 상인들을 받아들여 번영을 이루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공화국은 종교와 인종에 관용적이었던 만큼 한계 또한 분명히 규정하고 있었다. 유대인들은 기존의 신앙 이외에 이단적 교리를 만들면 안 된다는 것. 그런데 바뤼흐 스피노자는 이 금지의 선을 넘어버렸다. “낮에도 그에게 저주가 있을 것이고, 밤에도 그에게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앉아 있을 때에도 저주가 있을 것이고, 그가 일어서 있을 때에도 저주가 있을지어다. 그가 밖에 나가도…그가 안에 있어도 저주가 있을지어다. 신은 그를 용서치 않을 것이며…모든 천계의 저주를 통해 그를 전체 이스라엘 부족으로부터 격리시킬 것이다.” 스피노자가 신성모독의 발언들을 하고 다닌다는 소문이 파다해지자, 유대인 공동체는 그의 파문을 결정했다. 하지만 스피노자가 태어난 이후 발생한 14건의 파문 중 이와 같은 분노의 파문서는 없었다. 그것은 공식적인 책이나 가르침을 퍼뜨린 적 없는 청년이 받기에는 너무나 가혹한 저주였다. 대개의 경우 사람들은 파문을 전후해 회개하고 돌아오는 것이 상례였다. 요컨대 파문은 일종의 경고였던 셈. 그러나 스피노자는 ‘회개’하지 않았다. 돈을 주겠다는 회유도, 격리시키겠다는 협박도, 암살 기도의 공포도 그를 움직이지 못했다. 스피노자는 부모님의 침대를 제외한 모든 상속을 거부했고, 유대인의 흔적을 없애려고 라틴어 ‘베네딕투스’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리고 평생토록 이 파문 사건에 대해 어떤 억울한 심정도, 항변도 토로하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그저 이렇게 말했다. “나는 나에게 열려 있는 길로 기쁜 마음으로 들어서련다.” 신성모독죄에도 불구하고, 스피노자는 자신을 그 누구보다 신을 사랑하는 자라 여겼다. 그는 신의 뜻에 따라 살기를 원했다. 신이란 말 그대로 무한하고 절대적이고 완전한 존재다. 그런 존재는 외부의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완전한 자유 속에서 자족적인 삶을 영위할 것이다. 요컨대 신이란 스스로 그러한 존재인 자연 그 자체며, 세상 만물 속에 깃들어 있다. 인간이 성취해야 할 것은 신의 본성에 따라 사는 것, 즉 자유로운 삶이었다. 스피노자에게 자유로운 삶을 일구는 것이야말로 구원이었다. 하지만 기존 교회 속의 신은 복종을 원했다. 스피노자가 보기에 그러한 신은 인간을 자유가 아닌 예속 상태에 두기 위한 상상의 작품이었다. 교회는 응답하고, 심판하고, 처벌하는 신, 즉 인간화된 신을 꾸며냈다. 스피노자에게 공화국이란 종교의 예속과 반대되는 자유를 의미했다. 전제군주와 결탁한 교회의 종교적 핍박을 피해 유대인들이 정착했던 자유의 국가. 바로 이곳 네덜란드가 그러한 공화국이었다. 하지만 그 공화국은 1669년 스피노자의 친구인 쿠르바흐에 대한 종교적 탄압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이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응답이었다. “전제주의 최고의 비결이자 그것을 떠받치는 큰 기둥은 사람들을 계속 기만의 상태에 처해 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억압될 수밖에 없게끔 공포를 조장하고 그것을 종교라는 허울 좋은 이름으로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마치 그것이 구원인 양 오히려 자신들의 예속을 위해서 싸우게 될 것이다.” 전제주의를 이끄는 원리가 공포라면, 공화국의 존립 근거는 무엇보다도 자유에 있었다. 그렇다면 쿠르바흐에 대한 탄압을 공모한 공화국은 스스로 자기의 존재 근거를 무너뜨려버린 셈이었다. 자유에 대한 억압, 그것은 곧 공화국의 종말을 의미했다. 스피노자의 이러한 우려는 2년 후 현실로 드러난다. ●자유인, 그 불온한 자 1672년 프랑스의 침공에 네덜란드는 가까스로 나라를 지켰다. 하지만 전쟁은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죽음과 기근이 만연했다. 이 절망의 틈새를 군주제를 원했던 오란예 집안이 파고들었다. 그들은 위기의 원인을 공화국의 탓으로 돌렸다. 폭도로 변한 군중은 공화국의 지도자인 데 비트 형제를 거리로 끌어내 처참하게 살해하고, 살점은 구워 먹거나 기념품으로 팔았다. 비통함에 빠진 스피노자는 ‘극한의 야만인들’이란 격문을 들고 거리로 나서려 했지만 하숙집 주인이자 친구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완강히 스피노자를 막아 세웠다. 왜 군중은 자신들의 자유를 보장해 주는 공화국을 거부하고 전제주의라는 예속을 향해 달려가는가. 스피노자는 공화국이 무너지는 것을 보며 알았다. 자유는 국가가 ‘보장’한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각자가 자신의 삶에서 자유를 ‘구성’하지 않는 한, 어떤 국가 체제도 소용없다는 사실을. 스피노자는 자신의 생각을 ‘에티카’에 적어내려 간다. ‘에티카’는 수학책을 방불케 하는 공리와 정의, 증명들로 가득하다. 이 건조한 윤리학의 주제는 우리의 감정이다. 스피노자에게 자유인의 열쇠는 감정에 있었다. 감정이란 우리 신체에 일어나는 변용에 대한 표현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감정에 휘둘리며 산다. 요컨대, 우연적인 외적 원인에 끌려다니는 수동적 상태다. 그렇기에 “더 나은 길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더 나쁜 길을 따라”간다. 자유인이 된다는 것은 이 수동적 신체를 능동적이게 만드는 것이었다. 권력은 오로지 수동적 신체를 통해서만 작동할 수 있었다. 그들은 돈과 명예, 신의 이름으로 쾌락과 절망, 희망과 공포를 조장함으로써 우리에게 복종을 이끌어냈다. 지배자들에게 두려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자신들이 작동할 수 없는 능동적 신체를 가진 자유인이었다. ‘에티카’는 단지 자유인이라는 자기 구원을 위해 능동적 신체를 구성하는 길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그 길이야말로 지배자들에게는 불온한 것이었다. ●자유를 생산하는 앎과 삶 스피노자는 1676년 하이델베르크의 교수직 제안을 거절한다. 그에게 대학이란 기존의 법과 종교의 계율 위에서 작동하는 공간일 뿐이었다. 대학은 철학함의 자유를 제한할 뿐 아니라, 자유의 철학을 생산하기에도 부적합한 곳이었다. 대학교수직을 거절한 스피노자는 하숙집 책상 위를 자기의 공부 현장으로 삼았다. 지인들과 주고받는 편지와 만남은 그 자체로 배움의 과정이었다. 그는 대학 강당 대신 헤이그의 하숙집에서 조용히, 하지만 뜨거운 열정으로 자유인의 삶을 만드는 공부를 멈추지 않았다. 스피노자는 말한다. “자신이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동안, 사실은 그것을 하기 싫다고 다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실행되지 않는 것이다.” 그는 국가나 돈, 명예나 신, 그 무언가에 의해 미래에 찾아올 자유를 꿈꾸지 않았다. 미래로 유예된 자유란 존재하지 않으며, 그런 자유란 자신의 게으름에 대한 변명일 뿐이었다. 시신마저 사라진 뒤 스피노자의 이름으로 남은 것은 바지 두 벌, 셔츠 일곱 장, 손수건 다섯 장뿐이었다. 예속에 대한 단호함과 자기 구원의 열정. 그리고 자유인의 소박하지만 정갈했던 삶. 바로 이것이 혁명을 외친 적 없었던 스피노자를 역사상 가장 위험한 철학자의 한 사람으로 남게 했다. 남산 강학원 연구원 신근영
  • 임진년 해맞이 명소, 서울에도 많아요

    임진년 해맞이 명소, 서울에도 많아요

    아쉬운 한 해를 마무리하고 희망찬 새해를 맞이하는 해맞이. 멀리 갈 수 없다면 도심에 가까운 해맞이 명소를 찾아 보는 것은 어떨까. 서울시는 2012년 임진년 해맞이 행사가 개최되는 자치구별 해맞이 명소 17곳을 25일 공개했다. 도심권에서는 남산, 인왕산, 동망봉 등이 송구영신의 명당으로 뽑혔다. 종로구는 동망봉 숭인공원에서 박터뜨리기, 가훈 및 소망 써주기 등을, 또 중구는 남산 팔각정에서 소망풍선 날리기 등 해맞이 분위기를 돋우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있다. ●종로, 숭인공원서 가훈 써주기 등 마련 부도심권에서는 안산, 개운산, 응봉산, 용왕산 등에서 각 자치구가 해맞이 행사를 마련하고 있다. 도심에서 좀 더 벗어나고 싶다면 아차산과 용마산, 북한산, 관악산, 청계산, 대모산, 불암산 등도 좋다. 특히 은평구는 봉산 정상에 새로 ‘봉산해맞이공원’을 꾸미고 새해 첫 해맞이 행사를 연다. 또 마포구 하늘공원 정상, 송파구 올림픽공원 내 망월봉 등은 산은 아니지만 해맞이 명소로 꼽히는 곳이다. 박원순 서울시장은 서울에서 가장 먼저 해를 맞이할 수 있다는 광진구 아차산에서 시민들과 함께 새해를 맞을 예정이다. ●박시장, 아차산서 시민과 해맞이 예정 광진구 해맞이축제는 1월 1일 오전 7시부터 아차산 해맞이광장에서 열린다. 박 시장은 아차산을 시민들과 함께 오른 뒤 새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할 계획이다. 임진년 첫날 일출 예정 시각은 오전 7시 47분 전후. 해맞이행사는 오전 6시부터 장소별로 각각 시작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Weekend inside] 180:1 뚫었다! 난 국가대표 ‘러브米’

    [Weekend inside] 180:1 뚫었다! 난 국가대표 ‘러브米’

    ‘한눈에반한쌀(옥천농협), 왕건이탐낸쌀(나주 남평농협), 철새도래지쌀(군산 제희미곡종합처리장), 상상예찬(김제 공덕농협), 녹차미인보성쌀(보성농협)’ 이름만 봐도 맛과 품질을 짐작할 수 있는 이들 브랜드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명품 쌀로 통한다. 해마다 연말에 열리는 전국 브랜드쌀 평가 대회에서 3년 이상 입상함으로써 경선 무대를 떠나 ‘명예의 전당’에 오른 쌀이다. 농림수산식품부 장관으로부터 품질을 인정받아 ‘러브미’(Love 米)라는 타이틀을 얻었다. 제 고장의 명예를 건 1800여개 브랜드쌀 가운데 지금까지 11개 제품만이 그 영광을 누리고 있다. ●농식품부·소비자단체協, 2003년부터 평가 브랜드쌀이 일반 쌀보다 훨씬 가격이 비싼데도 유명 백화점에서 잘 팔리고 있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농식품부와 한국소비자단체협의회는 2003년부터 매년 고품질 브랜드쌀을 평가해 ‘베스트 12’를 발표한다. 각 자치단체에서 예선을 거쳐 출품한 40개 브랜드를 대상으로 품위, 품종 순도, 식미, 소비자 만족도 등을 3차에 걸쳐 평가한다. 미스코리아 선발을 능가할 만큼 까다롭기로 유명하다. 농산물품질관리원은 평가 과정에서 수분, 싸라기, 다른 품종 혼입률 등 15개 항목을 꼼꼼히 따진다. 한국식품연구원과 소비자단체 패널들은 밥의 관능적 품질, 외관, 맛, 조직감, 윤기, 색, 향, 응집성을 정밀 분석하고 깐깐하게 점수를 매긴다. 벼 계약 재배가 제대로 이루어졌는지, 가공시설은 어느 수준인지 등 현장 평가도 실시된다. 평가받는 시료도 단순히 출품자에게 제출받는 게 아니라 수도권 유통매장에서 4회에 걸쳐 무작위로 구입하기 때문에 연중 품질 관리에도 만전을 기해야 한다. 소비자 패널이 90명이나 돼 섣부른 청탁이나 조작은 통하지도 않는다. 각 시·군에서 고장의 명예를 걸고 덤비는 까닭이다. 올해 대망의 1등 쌀은 690점 만점에 638.5점을 받은 경남 진주 주흥미곡종합처리장(RPC)의 ‘동의보감’이 차지했다. 이어 전북 익산의 탑마루골드라이스, 전남 함평의 나비쌀, 전남 강진의 프리미엄호평, 전남 영암의 달마지쌀골드, 전북 김제의 상상예찬골드와 무농약쌀지평선, 방아찧는날골드 등 11개 브랜드가 뒤를 이었다. 전북산 쌀이 5개로 가장 많았고 전남산 4개, 충북산 2개, 경남산 1개 등이다. 특히 선정된 12개 브랜드쌀 가운데 프리미엄호평, 달마지쌀골드, 상상예찬골드, 황토랑쌀 등 4개 브랜드가 올해 무더기로 3년 수상의 감격을 안고 러브미 명예의 전당으로 직행했다. 이로써 러브미 11개 쌀은 전남이 가장 많은 7개를 차지했고, 전북 3개, 경기 1개 등이다. 호남에 우수 브랜드가 많은 이유는 자치단체와 생산 농가가 고품질 쌀 생산을 위해 ▲소비자가 선호하는 우량 품종 재배 ▲가공시설 현대화 ▲계약 재배 확대 등의 다양한 시책을 추진했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표면적인 이유가 그렇다는 것이고 쌀의 단백질 함유량이 낮을수록 밥맛이 좋기 때문에 자치단체들이 질소질 비료 사용량을 줄이도록 농가 지도를 강화한 숨은 전략이 효과를 본 것으로 알려졌다. ●올 ‘베스트 12’ 호남 브랜드 9개 가장 많아 일찌감치 러브미 반열에 오른 경기 이천의 ‘임금님표이천쌀’은 산업정책연구원이 전국 20~60대 소비자 2000여명을 대상으로 ‘가장 먼저 떠오르는 브랜드’를 묻는 설문조사에서 쌀 부문 1위를 차지했다. 2003년 이후 9년 연속 선정되는 기염을 토했다. 이천 지역은 풍부한 일조량과 강수량으로 최적의 기후 조건을 갖췄으며 농업용수의 무기질 성분 농도가 높고, 물의 수온이 상대적으로 낮아 뿌리의 퇴화를 지연시키는 덕에 양질미 생산의 최적지로 평가받는다. 올해 생산된 이천쌀 120t은 홍콩의 ‘시티슈퍼’에도 납품됐다. 충북 옥천군은 지역에만 13개 브랜드가 난립하면서 대외 경쟁력을 갖추지 못하고 있다고 판단해 지역산 쌀 브랜드를 ‘향수’로 통일하기로 했다. ‘향수’는 옥천 출신인 정지용 시인의 대표 시다. 우선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려 한 노력이 엿보인다. 김정모 전북도 쌀가공산업담당은 “좋은 쌀은 크기가 균일하고 싸라기나 금 간 쌀알이 없으며 색이 맑고 투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편 올해 쌀 생산량은 벼 재배 면적 감소로 421만 7000t에 그쳤다. 생산량은 1988년 605만 3000t을 정점으로 점차 감소하고 있다. 경제발전에 비례해 쌀 소비가 줄고 있기 때문이다. 전주 임송학·수원 김병철 기자 shlim@seoul.co.kr
  • “위기일수록 뭉쳐야 산다”···불황기 산업 현장에 기업간 협업 확산

    “위기일수록 뭉쳐야 산다”···불황기 산업 현장에 기업간 협업 확산

     개별 기업의 강점들을 활용해 기업간의 시너지 효과를 내는 대기업-중소기업간의 협업(協業)사업이 큰 관심을 끌면서 확산 일로를 걷고 있다. 이 제도는 중소기업간은 물론 대기업-중소기업간에도 자원과 비용을 공유함으로써 기업들은 분야별로 경쟁 우위에 설 수 있고 새로운 시장에서도 입지를 신속히 구축할 수 있다. 특히 중소기업은 상대적으로 열악한 경영과 기술 여건을 보완해 선택과 집중을 할 수 있어 활용하기엔 안성맞춤이다.  22일 중소기업청과 대·중소기업협력재단에 따르면 두 기관·단체는 21일 서울 강남구 역삼동 삼정호텔에서 ‘2011 중소기업간 협업발전 포럼’을 가졌다. ‘기업의 혁신 및 경쟁력 강화’를 주제로 한 이 포럼에서는 협업을 중소기업의 새로운 경영 전략으로 소개했다.  행사에서는 동인광학, 에스피텍, 선우씨에스 등 3개 기업이 협업 우수기업으로 선정돼 중소기업청장상을 받았다. 협업 사업을 기반으로 성공한 이들 기업의 성공 사례를 살펴본다.   ## 법인 설립때부터 협업-선박용 크랭크샤프트 세계 시장 진출  선박용 크랭크샤프트 전문업체인 선우씨에스는 2008년 기업간의 협업을 염두에 두고 회사를 설립했다. 강호경 회사 대표는 이 분야에서 쌓은 노하우와 파트너십을 바탕으로 공정 과정을 나누고 이익을 분배하는 사업구조를 구상했다. 크랭크샤프트는 왕복운동을 회전운동으로 바꾸는 선박엔진의 핵심 부품이다.   대형 크랭크샤프트는 절삭과 연삭, 선삭의 과정을 거쳐야 완제품이 나온다. 거대한 크랭크샤프트의 제조 과정과 물류는 중소기업 한 곳이 감당하기 쉽지 않다. 강 대표는 협업으로 이 숙제를 풀었다. 선우씨에스는 크랭크샤프트 절삭가공 공정을, 국제특수연마는 연삭가공 공정을, 서남산기는 선삭가공에 대한 공정을 개발하기로 했다. 공정 과정을 나누어 이익을 분배하는 사업구조다. 참여 기업들은 각자의 전문성을 충분히 살렸고 납기일도 단축할 수 있었다. 수입에 의존하던 시장을 국내산 제품으로 대치하는 성과를 얻었다.  대형 크랭크샤프트 세계 시장은 독일과 일본이 독과점하고 있다. 두 나라의 기업들은 제조와 기술면에서 안정화 단계에 들어선 상태. 국내에서는 현대중공업과 두산엔진, STX엔파코에서 중속엔진용 크랭크샤프트를 생산하고 있으나 대형 중속엔진용 크랭크샤프트 생산은 전무하다. 이 회사는 현재 STX메탈, 두산엔진 등에 크랭크샤프트를 납품하고 있으며 최근 신규 모델인 중속일체형 크랭크샤프트 개발에 성공해 STX메탈에 물량을 보급 중이다.  협업의 성과는 크게 나타났다. 회사의 매출액은 2009년 20억원에서 2010년 75억원으로 껑충 뛰었고 올해는 700억원대의 매출을 기대하고 있다.    ## 협업이 낳은 세계 독점 특허권-세계 방산시장 점령할 것  “전문 기술 하나로서는 세계 시장을 공략할 수 없습니다.” 중소기업간 협업이 기회를 만든다고 강조했다.  동인광학은 천체만원경 개발을 시작으로 개인 총기류에 필요한 도트 사이트(무배율 광학 조준경)를 장착한 제품을 개발하고 생산한다. 도트 사이트는 총의 조준을 도와주는 장비다.  정 대표가 협업을 고민한 것은 신제품인 ‘양안 주시 대구경 도트 사이트’ 개발을 목표로 삼았던 2009년이다. 이 제품은 두 눈을 뜬 채 표적을 보고 조준할 수 있어 최고급의 정밀렌즈 기술이 필요한 까다롭고 어려운 개발 작업이었다.  군수용품이란 특수성도 간과할 수 없었다. 방위산업체는 설계에서부터 납품에 이르기까지 국가별 납품처의 기준을 만족시켜야 한다. 이 과정이 10년까지 걸려 최고의 기술과 함께 노련한 진행 노하우가 필요했다.  해결책은 협업이었다. 동인광학은 10년간 협력 관계를 유지해 왔던 정밀렌즈 전문 기업인 바로전광을 협업 파트너로 선택했다. 바로전광은 대구경 렌즈 분야에선 세계적 수준의 기술을 자랑한다. 두 회사는 2주에 한번씩 심도있는 회의를 가졌다. 제품과 반제품, 제공품에 관한 정보를 공유했다. 협업을 시작한 지 1년만인 2010년 7월 자동 탄도 보정장치가 장착된 ‘대구경 양안 도트 사이트’가 탄생했다. 흔들리는 헬리콥터나 장갑차량에서도 조준하기 쉬운 장비여서 바이어들의 호응은 어느 때보다 높았다.  정 대표는 “매출 급증은 물론이고 설비투자 등에서 2억원의 비용을 절감했고 제조 원가는 2년간 약 3000만원이 절감됐다.”면서 “두 전문 기업이 협업을 하다 보니 불량률도 10% 감소됐다.”고 설명했다. 협업생산 제품을 팔기 시작한 2010년 10월 기준으로 전년 대비 70%, 올해는 11월 현재까지는 약 300%의 매출이 증가됐다. 올해부터 까다롭기로 소문난 미 육군과 사우디아라비아군에도 납품하고 있다.    ## 적과의 동침이 낳은 기적-연구 개발, 마케팅 협업으로 대박  패널특성 평가장비를 제조하는 에스피텍은 규모는 작지만 업계에서 인정받는 강소기업이다. 평판 디스플레이인 FPD(Flat Panel Display)가 잘 만들어졌는지 시험하는 측정 시스템을 만들어 기업에 판다.  의 제품인 측정항목 데이터 시스템은 10년 이상의 노하우를 갖고 있어 시장에서는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박용진 대표에게 고민이 있었다. 우수하다고 자타가 공인하는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왜 10여년간 매출액이 20억~30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까? 박 대표가 찾은 문제는 취약한 조직력과 자금력, 그리고 영업력이었다.  에스피텍은 협업을 택했다. 동종 업계이지만 설비와 기술이 달라 협업이 가능한 두 기업의 도움을 받았다. 에스피텍이 제품 설계와 연구개발을 하면 측정장비 도매업체인 뉴젠텍과 지엔비테크는 마케팅에 나섰다. 뉴젠텍은 대기업을 대상으로, 지엔비테크은 중견기업 및 중소기업 대상으로 마케팅을 펼쳤다. 매주 2~3회 미팅을 갖고 신뢰 구축에도 힘을 기울였다.  협업은 박 대표가 호형호제하던 고희청 뉴젠텍 대표에게 무심코 함께 해보자고 한 말이 씨앗이 됐다. 뉴젠텍은 같은 업종이어서 어찌 보면 경쟁자였다. 하지만 보유한 설비와 기술이 다르다 보니 가끔 협조할 때가 있었다. 뉴젠텍은 영업력, 해외 마케팅 능력이 뛰어났다.  2008년 말부터 두 회사는 본격적으로 협업의 그림을 그렸다. 대·중소기업협력단으로부터 ‘중소기업간 협업사업 지원’도 받았다. 에스피텍은 설계와 개발에만 전념하니 성과가 빨리 나왔다. 에스피텍은 지엔비테크와도 협업 체계를 갖추었다. 수출액은 협업을 본격화 한 2009년 73만 2000달러에서 2011년 현재 103만 8000달러로 얼마 전 100만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다. 내년에는 200만 달러 수출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뉴젠텍도 협업을 하기 전 5억원 수준의 매출에서 협업 후엔 30억 매출로 500% 이상 성장해 두 기업은 협업 시너지 효과를 누리고 있다.  한편 정책 지원에 나선 정부도 사업 현장에서 이같은 성과가 지속적으로 나타나자 협업 수요 발굴과 지원책 마련에 적극 나서고 있다. 내용은 협업 관리자 제도 및 법률자문단 운영, 협업 시장화 지원, 협업 정보시스템의 안정적 관리 운영 및 성과 분석 등이다. 협업사업계획의 안정적 추진을 위해서도 판로 개척, 기술 및 제품 개발, 원자재 구매 등에 소요되는 자금도 융자 지원해 준다. 자세한 내용은 대·중소기업협력재단(www.cobiz.go.kr)에서 알아볼 수 있다.  정기홍기자 hong@seoul.co.kr
  • 김정일의 삶, 통치, 그리고 권력

    김정일의 삶, 통치, 그리고 권력

    17일 사망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정권을 세운 아버지 김일성 전 국가주석의 사망으로 권력을 승계받은 뒤 17년간 봉건시대를 능가하는 절대 군주로 군림했다. 김정일 정권이 공식 출범한 것은 1998년으로 그가 국방위원장에 재추대된 뒤부터지만 실질적으로 북한을 통치한 것은 그가 1974년 후계자로 공식 내정된 이후부터다. 불우했던 유년 북한 당국의 공식 발표에 따르면 김 위원장은 1942년 2월 16일 양강도 백두산의 항일빨치산 밀영(密營)의 귀틀집에서 김일성과 그의 전처인 김정숙의 장남으로 출생했다. 그러나 출생연도와 출생지는 북한의 발표와 다르다는 것이 정설이다. 실제 출생연도는 1941년으로 알려진다. 북한 당국은 김 위원장이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1974년부터 주민들에게 그의 출생연도를 1941년으로 홍보하다가 후계자로 공식 추대된 2년 뒤인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 때부터 1942년으로 선전했다. 출생지에 대해서도 북한은 1980년부터 백두산이라고 선전하면서 대대적인 성역화 작업에 나섰다. 그 이전에는 김일성이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항일투쟁을 했다는 경력 때문에 러시아에서 태어난 것으로 알려졌다. 김 위원장의 아명도 러시아식으로 ‘유라’로 불렸다. 김 위원장은 북한 최고지도자의 장남으로 태어났지만 유년시절은 불행했다. 그는 김일성이 평양으로 입성한 지 2개월여 지난 1945년 11월 생모인 김정숙과 그의 빨치산 동료와 함께 소련 함정을 타고 함경북도 웅기항을 통해 북한에 처음 발을 디뎠다. 그러나 남동생 슈라가 익사한 데 이어 7세에 어머니를 여의고 이듬해 6·25 전쟁으로 중국으로 피란살이를 가야만 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계모 김성애의 손에서 성장한 유년시절은 김 위원장의 모성애 결핍을 낳았고 계모와 이복형제에 대한 반감은 후에 후계자를 둘러싼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이는 과정에서 냉혹함을 보이게 했다. 휴전 이후 김 위원장은 평양으로 돌아와 삼석인민학교와 제4인민학교 등을 거쳐 남산고급중학교를 졸업하고 1960년 김일성종합대학 경제학부 정치경제학과에 입학해 이듬해 7월 노동당에 입당했다. 1964년 6월 대학을 졸업하고 노동당 조직지도부에서 지도자로서의 첫 걸음을 내디뎠다. 후계자 발돋움 김 위원장은 1967년부터 당의 핵심 부서인 조직지도부 과장을 거쳐 1971년 부부장으로 승진했고 1973년 중앙당 문화예술부장을 거쳐 당 조직 및 선동선전담당비서라는 막강한 지위에 올랐다. 그는 김일성의 장남이라는 유리한 신분을 이용해 김일성 정권에 불만을 느끼거나 권위에 도전하는 인물들을 적발해 김일성에게 보고하고 숙청하는 데 앞장섰다. 김일성의 신뢰를 얻은 김 위원장은 생모의 항일빨치산 동료인 원로 간부의 후원을 등에 업고 권력 2인자인 삼촌 김영주 당시 당 조직지도부장, 정치적 힘을 과시하던 계모 김성애, 김일성의 남다른 사랑을 받았던 이복동생 김평일을 물리치고 1973년 후계자 자리인 당 조직 및 선전비서에 올랐다. 이어 다음해 2월 제5기 8차 당 전원회의에서 김 주석의 공식 후계자로 내정됐다. 이 때부터 ‘지도자 동지’ ‘당 중앙’이라고 호칭됐으며 1975년 ‘공화국 영웅’ 칭호를 받았다. 후계자 내정을 앞둔 1972년 12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 제5기 1차회의에서 주석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과 국가기구 개편을 단행했다. 또 주체사상탑과 김일성 동상, 혁명사적지 등 북한 각지에 두 부자와 그 가계를 선전하는 시설물 건설과 외국에서의 주체사상 홍보 등에 막대한 재원을 쏟아 부었다. 김 위원장은 당과 군부 등 국정을 전반적으로 장악하도록 체제를 정비한 뒤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를 통해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 당 중앙군사위원으로 선출되면서 후계자로서의 자리를 굳혔다. 호칭은 ‘친애하는 지도자 동지’로 변경됐다. 이후 1990년 5월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 1991년 12월 최고사령관, 1992년 공화국 원수에 추대된 데 이어 1993년 김일성으로부터 국방위원장직을 공식 승계함으로써 권력 승계에 따른 절차를 모두 마무리했다. 17년 1인 독재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하면서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김 위원장은 3년상을 빌미로 ‘유훈통치’에 전념했다. 당시 북한의 상황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스스로 ‘고난의 행군’이라고 명명한 이 시기에 국가경제와 식량배급제가 붕괴해 수백만명의 아사자가 발생하면서 부정부패가 만연하고 통제기능은 마비된 무정부 상태와 같았다. 김 위원장은 김일성 3주기를 마친 뒤 1997년 9월 추대형식으로 당 총비서에 올랐고 이듬해 10월 제10기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최고 권력기관으로 자리매김한 국방위원회의 수장으로 재추대되면서 김정일 시대가 공식 출범했다. 김정일 시대의 군부통치는 ‘선군정치’로 명명됐고 이는 강력한 통치구호로 자리했다. 1998년 10기 최고인민회의는 사회주의 헌법 개정을 통해 경제난 속에서 변화된 사회상을 반영했으며 세대교체를 통해 젊은 기술관료를 내각에 등용했다. 2002년에는 7·1 경제관리개선조치를 통해 시장을 확대하고 임금과 물가를 현실화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 과정에서 그는 강성대국론·신(新)사고론·실리주의 등 미래를 향한 새로운 비전을 내놓기도 했다. 그의 외교적 행보는 파격적이라고 평가받는다. 1994년 미국과 담판을 통해 북·미 기본합의를 이끌어낸 김 위원장은 1998년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자 금강산 관광사업 등 남북교류를 추진했다. 2000년 6월 13일에는 반세기 만의 남북 정상회담을 열어 6·15 공동선언에 직접 서명했다. 동시에 미국과도 적극적인 관계 개선에 나섰다. 2000년 10월에는 조명록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을 특사로 미국에 파견하고 매들린 올브라이트 당시 미 국무장관과 클린턴 대통령과의 정상회담도 추진했다. 2002년에는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를 평양으로 불러들여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를 시인하고 재발방지를 약속하는 ‘고백외교’를 통해 북·일수교에 이어지는 일본의 경제적 지원을 겨냥하기도 했다. 한동안 소원했던 중국과 러시아에 대한 방문외교를 재개하고 개혁개방을 통해 경제적 성장을 이룬 이들 국가의 노하우를 받아들이려는 노력도 이어갔다. 그러나 북한의 대서방 관계개선 노력은 ‘자위적 억제력을 보유해야만 체제를 보위할 수 있다.’는 선군정치 논리에 묻혀 핵과 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 문제를 풀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2006년 10월에는 핵실험을 통해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지만 국제적으로는 고립을 심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그는 2008년 8월 뇌졸중으로 쓰러진 뒤부터 국정운영에 초조감을 드러냈다. 2009년 1월 셋째 아들인 김정은을 후계자로 내정하고 2010년 9월에는 노동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을 당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에 선임하면서 후계체제 구축에 속도를 냈다. 경제적으로는 2009년 11월 화폐개혁이라는 무리수를 강행해 경제적 어려움을 격화시켰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남북관계가 최악으로 치닫는 동안에도 김 위원장은 지난해 5월과 8월, 지난 5월 등 1년여 동안 세차례나 중국을 방문해 황금평과 나진 특구 건설에 뜻을 모았으며 지난 8월에는 러시아 극동지역을 방문해 남·북·러 3국을 관통하는 가스관 연결사업 등에 합의했다. 허백윤기자 baikyoon@seoul.co.kr
  • [사설] 길거리 흡연 과태료 부과 공론화해 보자

    서울시의회가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지 못하게 하는 내용의 ‘간접흡연 피해방지 조례 일부개정조례안’을 입법예고했다. 보도와 보행자 전용도로, 어린이 통학 버스를 금연장소 지정대상에 추가한 것이다. 해당 장소에서 담배를 피우다가 적발되면 10만원의 과태료를 물게 된다. 시민의 기호품을 정부가 규제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라는 문제 제기가 있을 수 있겠지만, 서울시의 조례안은 일단 검토할 만하다고 본다. 이번 조례안은 지난해 10월 의결된 ‘간접흡연 피해방지 조례’의 적용 대상을 확대, 보완한 것이다. 조례에 따라 지난 3월부터 서울·청계·광화문 광장, 9월부터 남산공원 등 시내 주요공원 20곳이 금연구역으로 지정돼 운영 중이다. 이달부터는 중앙차로 버스정류소 314곳도 금연구역에 포함됐다. 그러나 아직까지 흡연자들의 반발 등 특별한 부작용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시의회 측은 “두 차례의 여론조사에서 시민 80% 이상이 찬성 의견을 보였다.”면서 “흡연권도 중요하지만 간접 흡연의 폐해는 더욱 크기 때문에 이번 조례를 발의했다.”고 밝혔다. 정부는 서울시 조례안의 운용상황을 분석하면서 길거리 흡연 금지 방안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보다 적극적인 금연 정책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 담배가 얼마나 건강에 해로운지는 더 이상 설명이 필요없다. 이 때문에 정부도 지속적인 금연 캠페인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편의점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품목이 담배인 데서 나타나듯 흡연 인구는 크게 줄어들지 않고 있다. 성인 남성의 흡연비율이 줄어드는 반면 여성과 청소년의 흡연율은 더 올라가고 있다는 통계도 있다. 미국의 기업과 병원에서는 생산성이 떨어지고 건강보험 지출 금액이 더 많다는 이유로 아예 흡연자를 채용하지 않는 사례도 있다. 우리도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에 아무런 이로움도 가져오지 않는 담배의 폐해를 줄이는 노력을 계속해 나가야 한다.
  • [김문이 만난사람] ‘마라톤 외교’ 정동창 阿 세이셸 공화국 명예총영사

    [김문이 만난사람] ‘마라톤 외교’ 정동창 阿 세이셸 공화국 명예총영사

    달린다는 것은 ‘생각’이다. 생각하기에 인생이 달라진다. 아름답고 숭고한 땀방울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도 또 달린다. 신영복 교수가 말했다. “달리는 것은 명상이며, 사색이며 육신을 뛰어넘는 비약이며 환희다.”라고. 맞다. 미치도록 달리다 보니 행복해졌고 비약하듯 인생이 확 달라졌다. 달리는 도중에 신영복 교수도 만났고 고(故) 법정스님과도 친해졌다. 산악인 엄홍길, 한복디자이너 김혜순과의 인연도 달리면서 맺어졌다. 하여 자타가 공인하는 ‘달리기 전도사’라고 한다. 그는 만나는 사람마다 “달리면 행복합니다. 건강해져요!”라고 구호처럼 늘 외친다. 정동창(51)씨. 지난 10여년 동안 마라톤 완주만 무려 70회나 했다. 아마추어로서는 보기 드물게 뉴욕, 보스턴, 런던, 베를린, 시카고 등 세계 5대 메이저 마라톤대회에 참여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마라토너들에게는 꿈의 도전이라고 하는 그랜드 슬램을 상상하면서 달렸다. 그렇게 달리다 보니 ‘이것이 진짜 마라톤이다.’ ‘달리면 인생이 달라진다’라는 책도 펴냈다. 정씨의 ‘달리기 인생’ 중 가장 큰 인연은 뭐니뭐니 해도 아프리카의 섬나라 세이셸 공화국이다. 이 나라는 아프리카의 마다가스카르 위쪽 인도양 바다에 위치해 있다. 인구 8만여명(1인당 국민소득 1만 8000달러)에 불과한 이 나라는 영국 BBC 방송이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천국’으로 선정했을 만큼 아름다운 자연을 자랑한다. 영국의 윌리엄 왕자, 미국의 버락 오바마 대통령(대선 전) 등이 즐겨 찾았을 정도로 최근들어 휴양지의 새로운 로망으로 떠올랐다. 그렇다면 정씨는 어떻게 세이셸 공화국과 인연을 맺게 됐을까. 우선 내년 2월 이 나라에서 제5회 세이셸 국제마라톤 대회가 열린다. 2008년 2월 처음 시작한 이 대회는 국민들의 건강, 단합, 해외 관광객 유치, 국가 브랜드 이미지 고양 등의 슬로건을 내걸고 있다. 국제육상연맹이 공식 인정한 대회이기에 천혜의 자연 경관 속에서 달리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해마다 늘고 있다. 내년에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마라토너들도 참여할 예정이다. 세이셸의 많은 사람들이 더운 나라에서의 마라톤대회는 불가능하다고 했는데 한국, 미국, 프랑스, 남아공, 독일, 나이지리아 등 세계 각국에서 참가할 만큼 세이셸 최대의 스포츠 이벤트로 자리 잡았다. 이 대회를 만든 주인공이 바로 정동창 세이셸 명예총영사다. “2004년 초 세이셸 공화국 외교부에서 메일이 한 통 도착했습니다. 명예영사 신청을 받고 있으니 신청서를 제출하라는 것이었습니다. 메일이 잘못 왔나 싶어 신경을 안 썼지요. 그런데 얼마 후 케냐에 주재하는 이석조 대사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얘기를 들어 보니 세이셸 공화국은 우리나라에 외교공관이 따로 없어 케냐 주재 한국대사관에서 관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됐습니다. 이 대사는 제가 평소 잘 알고 지내던 박항률 화백과 친한 사이였지요. 그래서 연락을 받게 됐습니다.” 인연의 끈은 또 있다. 당시 정씨는 마라톤 전문여행사를 운영하면서 해외 마라톤 대회에 나가는 한국 참가자들의 수속을 대신해 주는 일뿐만 아니라 외국 선수들을 우리나라 국제마라톤 대회에 초청하는 일 등을 맡아서 처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2003년 국내에서 열린 국제마라톤대회에 참가한 케냐 선수들을 알게 됐다. 초청된 케냐 선수들은 대회가 끝나고 나서 항공편이 원할하게 연결되지 못해 발이 묶여 있었다. 이때 정씨가 선수들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항공편이 연결될 때까지 3일 동안 숙식을 제공하면서 매일 아침 함께 남산을 달리고 별도의 시간을 내서 서울 관광도 시켜주었다. 본국으로 돌아간 케냐 선수들은 한 모임에서 케냐 외교부 사람들을 만나 한국에서 참으로 고마운 분을 만났다는 사연을 얘기하면서 정씨의 명함을 건넸다. 이런 일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명예영사 추천을 받게 됐던 것. “생각지도 못했던 명예총영사가 된 후 여러 차례 현지에 가서 세이셸 공화국의 외교부 장관과 제임스 미셸 대통령 등을 만나면서 향후 할 일에 대해 심도 있게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이때 제가 마라톤 대회를 열자고 제안했지요. 처음에는 반대를 했습니다. 아시아의 멀고도 생소한 한국에서 온 사람이 마라톤 대회를 열자고 하니 황당한 발상이라고 생각하더군요. 연평균 22도에서 32도를 오르내리는 기온에 마라톤 대회를 진행하기에는 무리라는 부정적인 의견이 많았지요. 하지만 국민 건강과 단합, 외국 관광객 유치를 위해서는 꼭 필요한 스포츠라고 여러 번 설득했습니다. 뉴욕과 런던, 베를린 마라톤 대회에 대한 자료들을 제시하면서 수차례 설명을 했더니 결국 받아들이더군요.” 정씨는 수도 빅토리아 해변을 출발하는 5㎞, 10㎞, 하프마라톤과 42.195㎞ 풀코스 구간을 직접 개발해 국제육상연맹의 인증을 받아냈다. 국제마라톤대회 심판 자격증을 가지고 있는 그가 코스별로 몇 번을 직접 뛰어 보고 답사한 끝에 드디어 2008년 2월 제1회 세이셸마라톤대회가 열렸다. 한국인이 해외에 마라톤을 수출하는 첫 쾌거를 이루어내는 순간이었다. 처음에는 350여명 정도가 참가했으나 해마다 참가자 수가 늘어 지난해에는 내국인 1000여명, 외국인 400명(28개국)에 이를 만큼 세이셸 최대의 이벤트로 발전했다. 내년 2월 대회에는 31개국에서 1200여명이 참가할 예정이다. 그는 “가장 기쁘고 보람을 느끼는 점은 달리는 데 다소 회의적이었던 세이셸 국민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는 것”이라고 회고한다. 수도 빅토리아 시내에 아침, 저녁으로 조깅하는 사람들, 아름다운 해변을 달리는 사람들도 많이 늘었다. 정씨는 여기에 그치지 않았다. 마라톤 대회가 끝나면 문화행사를 열었다. 첫해에는 한국 출신의 세계적인 바이올리니스트 강동석과 첼리스트 양성원, 피아니스트 김영호 교수 등 유명 연주자들을 초청해 세이셸 국민들에게 차원 높은 문화를 느끼도록 했다. 2009년에는 이강소, 박항률, 금누리, 이용수, 김재민, 권기동 화백 등 우리나라 유명작가들의 초대전을 개최했다. 2010년에는 한복패션디자이너 김혜순의 패션쇼를 열어 우리의 아름다운 한복의 멋을 한껏 맛보게 했다. 이 같은 정씨의 노력에 힘입어 2009년 10월 세이셸 공화국 미셸 대통령이 한국을 공식 방문했고 이때 정씨의 숨은 공로를 인정받았다. 외교통상부에서도 정씨를 세이셸 공화국의 유일한 외교연락 창구이자 준외교관 자격으로 인정했다. 정씨는 2009년 6월 한·세이셸 경제기술협력(ETCA) 체결, 2010년 3월 대전광역시와의 자매결연, 2010년 7월 한·세이셸 항공운송협정체결에도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세이셸에 가면 외교부 장관 등 정부 관리들을 자주 만납니다. 그때마다 저를 ‘미스터 마라톤’이라고 부르지요(웃음). 세이셸은 내셔널 지오그래픽이 선정한 세계 최고의 해변 중 1위로 지목될 만큼 빼어난 해변경관을 간직한 나라입니다. 뿐만 아니라 남한 12배의 광활한 영해 자원을 갖고 있습니다. 석유 매장량은 사우디아라비아보다 더 많고 참치는 세계 2위의 어장을 갖고 있습니다. 요즘 참치 전쟁이라고 하는데 세이셸을 잘 활용하면 우리나라에도 많은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정씨가 마라톤과 인연을 맺은 것은 30대 후반. 직장에서 정신없이 일하다 보니 체중이 90㎏을 훌쩍 넘었다. 과중한 업무와 잦은 술자리 등으로 체력이 거의 바닥난 상태라는 진단에 충격을 받았다. 처음에는 뛰는 것이 힘들어 조금씩 걷기 시작했다. 점차 속보로 끌어 올렸고 어느 정도 체력이 붙자 조금씩 뛰기 시작했고 이어 마라톤 풀코스에 도전했다. 이런 과정에서 점차 여유와 긍정적인 사고방식으로 바뀌었다. 요즘도 그는 달린다. 달리면서 그날과 그달에 해야 할 일들을 차분히 정리한다. 더러는 명상을 하면서 자신과 진지한 대화를 한다. 고민이 생길 때면 사무실 밖으로 나가 남산 산책로나 북악스카이웨이 코스를 후련하게 달린다. 그에게 왜 달리느냐고 물었다. “땀 흘린 만큼 돌아오는 정직한 보람과 행복의 참맛이 있기 때문이지요.” 편집위원 km@seoul.co.kr ■정동창은 1961년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 1986년 한국외국어대를 졸업하고 경희대 관광경영학과 석사(1994), 세종대 호텔경영학과 박사과정(2002)을 수료했다. 경원대, 배재대 관광경영학과 겸임교수 및 아주관광 부장(1986~1996)을 역임한 뒤 마라톤 전문여행사 여행춘추(1997~2011) 대표이사를 지냈다. 현재 세이셸 공화국 명예총영사이며 세이셸 관광청, 투자청, 에어세이셸 한국사무소 등의 업무를 맡고 있다. 틈틈이 마라톤 관련 칼럼을 쓰고 있다. 저서로는 ‘호주, 뉴질랜드 100배 즐기기’(2001), ‘이것이 진짜 마라톤이다’(2002, 번역), ‘달리면 인생이 달라진다’(2011) 등이 있다. 특이사항으로 마라톤 풀코스를 70여회 완주했으며 이 가운데 35회 이상을 보스턴, 뉴욕, 런던 등 세계 유명마라톤 대회에 참가했다. 한국외국어대 산악회, 100회 마라톤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마라톤 전도사’ ‘미스터 마라톤’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 “김현중과 서울 데이트를”

    “김현중과 서울 데이트를”

    외국인들이 서울에서 경험하고 싶은 행운으로 ‘가수 김현중과 서울 명소에서 데이트하기’를 첫 손에 꼽았다. 서울시는 지난달 16~30일 서울을 해외에 홍보하기 위해 만든 서울시 유튜브와 페이스북, 중국판 트위터인 시나 웨이보(微博)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시 홍보대사인 김현중이 나오는 홍보영상과 함께 ‘서울에서 경험하고 싶은 행운’을 주제로 댓글 이벤트를 실시한 결과, 이같이 나타났다고 15일 밝혔다. 홍보영상은 2주 만에 조회 5만 8000여명을 기록하는 등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이벤트에는 7400명이 참여했다. 가장 많았던 댓글은 ‘김현중의 가이드를 받으며 서울 명소에서 데이트’였고, 한류 열풍을 반영하듯 ‘생방송 가요프로그램 방청’과 ‘연인과 남산에 자물쇠 걸고 야경을 감상’ 등의 댓글도 많았다. 재미있는 댓글로는 ‘빼빼로데이 같은 서울만의 특별한 이색 문화경험’, ‘동대문에서 커플룩 완성하기’ 등이 있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최고의 기술인 꿈 키우세요”

    산업현장 각 분야에서 실력을 인정받고 있는 기술명장들이 특성화·마이스터고등학교 후배들에게 기능인에 대한 자긍심과 희망을 심어주는 특강에 나섰다. 경남도교육청은 14일 각 분야 유능한 기술명장 7명이 경남의 특성화고교 학생들을 대상으로 기술인의 삶에 대한 꿈과 희망, 자긍심을 키워주고 최고의 기술인이 되기까지의 과정과 노력 등을 들려주는 특강을 한다고 밝혔다. 이날 1·2학년 600명을 대상으로 한 김진숙(한울이미용실) 미용명장의 경남산업고 특강을 시작으로 15일에는 김기하(현대위아) 금속재료 명장이 김해건설공고에서, 20일에는 김광식(현대차) 도장명장과 정규영(명장산업설비) 기계명장이 각각 창녕제일고와 경남자동차고에서 자신들이 명장에 이르게 된 노하우와 인생관을 들려준다. 김 미용명장은 학생들에게 새로운 성장산업인 뷰티산업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갖고 스페셜리스트가 될 것을 당부했다. 김 금속재료 명장은 능력이 졸업장보다 더 중요하고 작은 실천이 큰 성공을 이룰 수 있다는 경험담을 들려줄 예정이다. 김 도장명장과 정 기계명장은 발상의 전환으로 학생들에게 도전정신을 불어넣는 강의를 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 13일에는 해군정비창에 근무하는 설상섭 선박분야 명장과 포스코에 근무하는 박순복 전기강판 분야 명장이 거제공고와 거창 대성일고에서 특강을 했다. 창원 강원식기자 kws@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7) 질풍노도의 아이콘 ‘괴테’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7) 질풍노도의 아이콘 ‘괴테’

    18세기의 끝자락, 독일의 청년들은 자신의 영혼이 세상과 불화한다고 느꼈다. 종교전쟁과 30년전쟁 등 장장 2세기에 걸친 소란 상태를 접고 독일은 간만에 평화를 맞이했지만 청년들은 도리어 미칠 지경이었다. 여전히 구시대의 귀족이 지배하는 강력한 신분제 사회에서 그들은 갈 길을 잃었다. 부모 세대들은 출세를 강요했고, 귀족과 법률가들은 궁정생활에 몰두할 뿐 어떤 비전도 제시하지 못했다. 새로운 삶, 자유와 독립의 길은 어디 있는가. 당시 청년들은 ‘망령을 본 것도 아니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아야 할 것도 아닌데’ 하나같이 햄릿의 독백을 암송했고, 망령에 찬 분위기와 망한 영웅들의 이야기, 비극적 로맨스에 탐닉했다. 말 그대로 ‘질풍노도’의 시대. 괴테가 24세에 발표한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바로 이 거대한 폭풍우의 한가운데 선 청년의 이야기다. ●질풍노도에서 부르는 노래 베르테르는 낯선 고장을 떠돌던 중 로테라는 여인을 사랑하게 된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약혼한 상태. 좌절한 베르테르는 새로운 삶을 시도해 보지만 허례허식으로 가득 찬 사회에 더욱 절망한다. 당시 독일의 청년들은 베르테르를 자신의 대변자로 느꼈다. 마음만이 “모든 행복과 불행의 원천”이라는 베르테르의 목소리는 계몽주의적 이성에 반발하고 자연과 순수한 마음으로의 회귀를 외치던 독일 젊은이들의 목소리였다. 그들은 베르테르와 함께 절망했다. 그들 모두 베르테르와 같은 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이 병은 한편으로는 위선과 가식으로 점철된 구세대가 만든 것이었고, 또 한편으로는 자신의 열정을 쏟아낼 어떤 출로도 만들어 내지 못한 베르테르 자신이 만든 것이었다. 베르테르는 로테에게 모든 열정을 쏟아부었지만, 그녀는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한 베르테르의 열정이 도달한 막다른 골목이었다. 외부와 교감하지 못하는 열정은 결국 내파하여 베르테르를 죽음으로 몰아갔다. 당시의 괴테 역시 그랬다. 그는 아버지로 대표되는 구세대에 대한 반항심으로 넘쳤고, 두 번에 걸쳐 배반당한 사랑에 절망한 상태였다. 그러니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절망에 빠진 자신의 문제를 바라보기 위해 괴테 스스로가 시도한 가상 여행이자 저 자신에게, 아니 길을 잃고 주저앉은 세상 모든 젊은이들에게 보내는 작은 선물, 깊은 공감의 노래다. 베르테르는 자살하지만 괴테는 살아간다. 1776년, 아우구스트 대공의 초청으로 신흥 공국 바이마르의 추밀외교관으로 일하게 된 괴테에게 온갖 업무들이 쏟아졌다. 그는 엄밀한 규칙과 질서가 작동하는 세계에 적응해 질풍노도기의 자기중심적 태도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그러나 1786년, 그는 돌연 10년간 머물렀던 바이마르를 빠져나와 이탈리아로 떠난다. 갇혀 있던 열정이 그를 어린 시절부터 꿈꾸었던 고전의 세계로 이끌었던 것이리라. 괴테는 다짐한다. 나 자신을 기만하지 말자. 부지런히 배우면서 나 자신을 수양시키자. 지중해의 자연은 괴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폐허가 된 폼페이 유적, 팔라디오의 건축물, 미켈란젤로와 라파엘의 그림들은 그를 울렸다. 편협한 시선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기존의 방식대로 사물을 포착하기를 멈추고 사물을 있는 모습 그대로 보는 것이 중요하다. 괴테의 마음에 풀 한 포기, 돌 조각 하나, 무엇보다 무너진 과거의 잔해들이 어떤 ‘전체’로서 새롭게 들어왔다.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위대한 것과 하찮은 것, 자연과 예술이 빚어내는 질서와 조화의 세계. 이탈리아는 괴테에게 새로운 시각과 관점을 선물했다. 약 2년 뒤 바이마르로 돌아온 괴테는 한층 단단해져 있었다. 그는 바이마르 국정에 참여하여 광산사업과 문화 예술 업무에 집중했다. 그러다 천한 신분 출신인 크리스티아네와 동거해 아이를 낳았고, 고전적이면서도 관능적 사랑으로 충만한 ‘로마의 비가’를 발표했다. 사람들은 괴테가 타락했다고 비난했다. 베르테르의 음울함을 벗어 버리고 시대적 습속을 무시한 이 중년의 사내를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괴테는 흔들리지 않고, 그에게 새로운 빛을 보여 주었던 예술 및 자연과학 연구에 힘을 쏟기 시작한다. 이 무렵에 일어난 프랑스 혁명이 독일 청년들을 뒤흔들 때도 정작 괴테는 담담했다. 전체의 조화와 사물의 유기적 변화, 발전을 믿었던 그에게는 오히려 혁명에 수반되는 폭력과 유혈사태가 저주스럽기만 했다. 바스티유의 파괴와 루이 16세 처형에 환호하는 사람들에게 괴테는 당부한다.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라. 1792년, 프랑스 혁명군이 독일을 침공하자 바이마르의 공무원이었던 괴테 역시 출정에 동참해야 했지만, 그는 전장에서도 관찰자로서의 태도를 견지하면서 이렇게 질문한다. 폭력 없는 혁명, 평화로운 변화란 진정 불가능한가. 이런 문제의식은 실러와의 만남으로 심화된다. 실러 역시 혁명을 회의하며 ‘미적 교육’을 통한 인간 성장의 길을 모색하고 있었던 것. 두 사람은 공히 고대에서 그 길을 찾고자 했다. 그들은 1000통이 넘는 편지를 교환했고, ‘크세니엔’을 비롯한 공동작업에 착수한다. 특히 자연 전체의 고려 속에서 개별적인 것을 해명하려는 괴테의 비전에 끌렸던 실러는 그것이 작품으로 형상화될 수 있도록 괴테를 도왔다. 실러가 죽자 괴테가 “내 존재의 절반을 잃었다.”고 했을 만큼 실러는 또 다른 괴테였다. 실러와의 교류 속에서 탄생한 ‘빌헬름 마이스터의 수업시대’(1796)에서 괴테는 인간의 삶이란 결국 ‘수업’이라는 결론에 도달한다. 우리 삶에 무엇이 닥쳐올지는 알 수 없으나, 모든 것들의 상호작용 가운데서 한 송이 꽃이 피어나듯 인간 역시 온갖 사건과 관계들 속에서 성장한다는 것이다. ‘인류’니 ‘자유’니 하는 사명들은 내려놓고 오직 내적 충동에 몸을 맡긴 채 당당히 세상 속으로 향하라. 모든 것은 “오직 모든 사람을 합해서만”, “모든 힘을 통합함으로써만” 성장한다. 주인공 빌헬름이 그의 연극체험과 ‘탑의 결사’라는 공동체와의 만남을 통해 성장했듯이 괴테는 실러와 헤르더, 셰익스피어, 호메로스, 그리고 이탈리아의 무수한 사물, 사람들과의 만남을 통해 성장했다. 중년의 괴테는 그렇게 모든 만남이 그를 성장시키는 위대한 사건일 수 있음을 깨닫는다. ●“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다” 세상은 여전히 소용돌이쳤다. 1806년, 프랑스 황제로 등극한 나폴레옹은 전 유럽을 압박했고, 라인동맹 가입을 거부하는 프로이센을 공격했다. 괴테는 홀로 남아 피난민들과 약탈자들로 혼란한 바이마르를 지켜보았다. 사람들은 그가 나폴레옹의 총애를 받으며 프랑스에 대해 침묵하고 있음을 비난했다. 하지만 “증오심이 없는데 어떻게 무기를 들 수 있겠나.”라며 전체와의 관계 속에서 삶을 바라보았던 괴테는 민족적 편견이 만들어내는 선악 시비에 동요하지 않았다. 조국을 사랑하는 방법은 오히려 그러한 편견들을 제거하는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는 묵묵히 바이마르 예술극장을 꾸렸고 예술과 고전, 자연의 탐구를 멈추지 않았다. 60살이 넘어 출간한 ‘색채론’과 ‘동물의 변형’에는 노년의 괴테가 깨우친 자연의 비밀이 담겨 있다. 그리고 ‘파우스트’. 사람들은 신과 같이 자연을 향유하고자 하였던 파우스트 박사가 인간의 한계에 절망하여 악마 메피스토펠레스의 꼬임에 빠졌다고 말한다. 하지만 파우스트는 악마와 계약하여 “자유로이 자연의 혈관 속을 흐르며 창조적으로 신의 삶을 향유”할 수 있었다. 오류와 시도, 성공과 실패, 선과 악은 약동하는 생명의 에너지가 매순간 만들어 내고 또 무너뜨리는 한 가지 형태일 뿐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이 순간적인 것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지속시키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러한 열망 너머 자연의 힘에 몸을 맡긴 자, 영원히 푸른 소나무로 살리라. 괴테는 오래 살았다. “사랑했고 증오했고 무관심했던 사람들과 왕국들, 수도들”보다도, “젊을 때 씨뿌리고 심은 숲의 나무들”보다도. 그는 그 모든 것들의 삶과 죽음을 지켜보아야 했다. 때로는 아팠고, 분노하고 절망한 날들도 적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깨닫는다. “순간이여, 너는 참으로 아름답구나!” 부패는 생명의 한 과정이며 죽음은 탄생이다. 가장 천한 것, 가장 혼란하고 절망스러운 것 속에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들이 함께 있으니, 이 혼돈 속을 첨벙거리며 계속 가는 것, 그 자체가 우리들의 숙명이며 또한 참된 기쁨이다. 그러니 부디 살아가기를, 천천히, 하지만 멈춤 없이 길을 나서기를. 우리, 세상 모든 베르테르들에게 주는 괴테의 가르침이다. 박수영 남산강학원 연구원
  • 충남, 세종시 인계재산 평가액 토지·건물 등 1103억원 달해

    충남도가 내년 7월 1일 출범하는 세종특별자치시에 인계할 재산의 평가액이 1103억원에 달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1일 도에 따르면 최근 세종시 편입으로 소유권을 넘겨야 할 도유지와 시설을 전수조사한 결과 토지는 3314필지, 건물은 38채였다. 이를 면적으로 환산하면 463만㎡, 금액으로 따지면 1103억원에 이른다. 그러나 지방자치법에는 ‘관할구역이 변경되면 사무와 재산을 인계한다.’고만 규정돼 있어 도가 재산을 넘겨주면서 정부로부터 별도로 받는 것은 없다. 건물은 37채가 공주시 반포면 도남리 일원 충남산림환경연구소에 딸린 시설이고, 나머지 1채는 연기소방서다. 산림환경연구소 내 핵심시설은 산림박물관, 열대온실, 동물마을, 숲속의집(통나무로 만든 숙박시설) 등이다. 인계대상 토지의 대부분은 도로, 밭, 임야, 하천이다. 도는 그러나 산림환경연구소 내 토지(87필지·269만 3000㎡)와 건물(37채)은 지난해 말 국회를 통과한 ‘세종특별자치시설치법’을 근거로 세종시에 넘기지 않는 방안을 추진 중이다. 대전 이천열기자 sky@seoul.co.kr
  • [보고 듣고 즐기세요]

    대중음악 ●델리스파이스 - 슬픔이여 안녕 2011 17일 오후 7시 서울 광장동 악스코리아. 2006년 6집 앨범 이후 5년 7개월 만에 새 앨범 ‘슬픔이여 안녕’으로 가요계에 복귀한 록밴드 델리스파이스가 5년 만에 단독 콘서트를 한다. 7만 7000원. (02)3445-9650. ●옐로우 몬스터즈 ‘라이엇! 2011 파이널’ 17일 오후 7시 서울 서교동 상상마당 라이브홀. 2집 ‘라이엇’(RIOT) 발매 이후 국내 5개 도시 공연 등을 펼친 3인조 록밴드 옐로우 몬스터즈의 서울 앙코르 공연. 4만 4000원. 1544-1555. 클래식 ●파리나무십자가소년합창단 크리스마스 특별초청공연 105년 전통의 프랑스 파리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이 로시니의 ‘고양이 이중창’ 등 클래식 명곡, ‘험한 세상의 다리가 되어’ 등 팝 명곡을 들려준다. 9일부터 23일까지 전국을 돈다. 2만 5000~10만원. (02)523-5391. ●나윤선 프렌치 크리스마스 콘서트 15~16일 오후 8시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이 울프 바케니우스(기타), 시몽 타이유(콘트라베이스), 뱅상 파라니(아코디언)와 함께 무대에 선다. 6만 6000~8만 8000원. (02)548-4480. 전시 ●조은필 ‘블루토피아’전 13일까지 서울 관훈동 미술공간현. 제목 그대로 파란색의 향연이다. 설치, 사진 등 다양한 작업방식임에도 파란색이 갖고 있는 본질에 집중하는 작품들을 선보인다. (02)732-5556. ●김병일&이채일 2인전 17일까지 서울 청담동 표갤러리. 회화적인 조각을 추구하는 김병일과 자동차 프라모델을 리얼하게 묘사하는 이채일 작가의 작품으로 전시장을 채웠다. (02)511-5295. 연극 ●‘겨울’ 9~11일 서울 예장동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 벤치에서 우연히 만난 남자와 여자의 삶이 자신들도 모르게 다른 곳으로 향한다. 대화가 이어지는 동안 무대 다른 쪽에서 마임 공연과 드로잉 퍼포먼스가 펼쳐진다. 2만원. (02)6711-1400. ●‘타이투스 앤드로니커스’ 25일까지 서울 신수동 서강대 메리홀. 로마시대 작가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를 토대로 만든 셰익스피어의 초기작. 극장 안에는 1m 30㎝ 높이의 작은 무대 2개뿐이다. 관객들은 배우를 올려다봐야 하고, 때로는 관객과 배우가 섞이기도 한다. 2만~2만 5000원. (02)6406-8324.
  • 가격거품 뺀 4만원대 다용도 피톤치드 항균기 화제

    가격거품 뺀 4만원대 다용도 피톤치드 항균기 화제

     최근 몇 년 전부터 웰빙 열풍이 불면서 사람들의 건강에 대한 관심이 부쩍 높아졌다. 주말이 되면 많은 사람들이 등산을 하기 위해 산을 찾는데 울창한 숲 속에 들어가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몸과 마음이 가벼워진다. 나무가 내뿜는 ‘피톤치드(phytoncide)’라는 성분 때문이다.  지난 8월 서울시 보건환경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산, 아차산, 북한산, 신정산 등 서울 시민들이 즐겨 찾는 11곳의 산책로와 등산로에서 유명 삼림욕장 수준의 피톤치드가 발생한다고 한다. 국내서도 몇 년 전부터 산림청의 주도로 치유를 위한 숲 공간이 마련되는 중이다. 경기도 양평, 강원도 횡성, 전라남도 장성을 비롯해 전국에 걸쳐 치유의 숲을 조성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겨울철에는 날씨 변화가 잦고 낙상 등 위험요소가 많아 숲을 찾기가 쉽지 않다. 이럴 때는 피톤치드 휘산기로 실내에서 산림욕 효과를 누릴 수 있다.  피톤치드 휘산기는 지난 2009년 가을 신종플루 파동 이후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했다. 피톤치드는 식물이 병원균이나 해충, 곰팡이 등 외부 물질을 이겨내기 위해 분비하는 물질을 말한다. 이는 식물뿐 아니라 사람에게도 이로운 영향을 주는데 스트레스 해소와 장·심폐기능 강화, 아토피나 알레르기성 피부 질환 진정에도 도움을 주는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그간 피톤치드 휘산기는 20만원대 제품이 주종을 이루면서 가격부담이 만만치 않았다. 원액을 희석시켜서 기화시키는 방식인 만큼 유지비도 월3~4만원대로 꽤 부담스러운 편. 그런데 최근에는 가격과 유지비가 저렴하고 기능성도 좋은 휘산기들이 나와 선택의 폭이 넓어졌다.  최근 5만원도 안 되는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는 피톤치드 휘산기가 등장했다. ‘소유 미니 항균기’는 항균 물질을 공기 중으로 휘산하여 유해물질 자체를 살균해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로 바꿔주는 효과가 있다. 특히 항암 식품으로 각광받고 있는 콩 아미노산 및 수용성 천연 식물 추출액 피톤치트 향을 함유해 공기중의 대장균, 포도상구균, 살모넬라균, 녹농균, 곰팡이균, 바이러스균 등을 제거하며 공기를 청정하게 유지시켜 준다.  사용법도 간단하다. 항균액을 넣고 본체의 전원스위치만 누르면 상단 공기흡입구로 공기가 들어오고 측면 향 토출구로 살균된 공기가 배출된다. 쾌쾌한 냄새가 나는 신발장을 비롯해 화장실, 자동차, 옷장, 이불장 등 다양한 곳에서 사용할 수 있다.  깨끗하고 상쾌한 공기를 위한 최선의 선택 ‘소유 미니항균기’는 소비자가격 9만8,000원에 판매중이나, 인터넷 최저가 쇼핑몰 더바샵(http://thebashop.com/shop/goods/goods_view.php?goodsno=92)에서 오픈기념 반값할인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어 4만9천원에 구매할 수 있다. 여기에 식품봉지를 위생적으로 보관할 수 있는 클립세트까지 사은품으로 증정하고 있다.  
  • 올 혁신 아이콘은?… 5일 ‘서울 석세스 어워드’

    올 혁신 아이콘은?… 5일 ‘서울 석세스 어워드’

    서울신문과 서울신문STV는 5일 오후 6시 30분 서울 남산 하얏트호텔 그랜드볼룸에서 정치, 경제, 문화 등 각계 저명 인사 7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2011 서울 석세스 어워드’를 개최한다. 박희태 국회의장이 축사를 할 예정이다. 2011 서울 석세스 어워드는 올해 사회 각 부문에서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성과를 이룩한 기업이나 단체, 개인에게 시상하는 행사다. 국내 최고 권위기관인 한국지방자치학회, 서울대경제연구소, 서울신문이 엄정한 심사를 통해 수상자를 선정했다. 정치인 부문 수상자로는 국회의원 한나라당 이주영 정책위의장, 광역단체장 부문 우근민 제주특별자치도 도지사, 기초단체장 부문에 노현송 서울시 강서구청장이 선정됐다. 이 정책위의장은 대학 등록금 인하 등 집권 여당의 친서민 정책을 주도한 공로로, 우 지사는 제주도가 ‘세계 7대 경관’에 선정되는 데 큰 힘을 보탠 역할을 각각 인정받아 수상자로 뽑혔다. 노 구청장은 현장 중심의 주민 친화적 구정을 이끈 점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경제 부문에서는 삼성증권, 현대자동차, KB국민카드, 한국야쿠르트, 한국가스공사, 남양유업, 그래미가 수상의 영광을 차지했다. 문화 부문에서는 가수 하춘화씨가 대상을, 마이티마우스가 가수상을, 옹알스가 코미디언상을, 쇼콜라와 치치가 신인가수상을 받았다. 하씨는 국내 대중문화 발전에 기여한 점, 옹알스는 세계적인 공연예술 축제인 영국 에든버러페스티벌에서 최고 평점을 받으면서 코미디 한류 바람을 일으킨 점, 마이티마우스는 힙합음악으로 가요계에서 새로운 장르를 펼친 점 등을 인정받았다. 수상한 가수와 그룹들은 이날 행사에 참석한 내빈들을 위한 공연 시간도 갖는다. 김진아기자 jin@seoul.co.kr
  •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6) 역사가 사마천

    [고전 인물로 다시 읽기] (36) 역사가 사마천

    “정말로 만일 이 역사서를 완성하여 이것을 명산에 비장해서 영원히 전하고, 또 이것을 사람들에게 전하여 천하의 대도시에 유포하는 일이 가능하다면, 그때야말로 내가 받았던 치욕은 보상받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아무리 이 몸이 여덟으로 찢긴다 하여도 결코 후회할 일은 없을 것입니다.”(‘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기원전 104년부터 기원전 90년까지 약 14년 동안 집필에 매달려, 130편 52만 6500자에 달하는, 중국 신화시대의 황제 때부터 한나라 무제까지의 약 3000년의 시간을 담아낸 역사서 ‘사기’는 이렇듯 비장하게 탄생했다. 한나라 무제 때의 역사가 사마천은 기원전 91년 친구 임안에게 편지를 보낸 이듬해인 기원전 90년에 역사서 ‘사기’를 완성한다. 놀라운 점은, ‘사기’ 저술이 국가가 명령한 일도 아니요, 여러 사람이 함께한 작업도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사마천은 홀로 이 어마어마한 글자와 이 엄청난 시간의 궤적들과 싸우며 방대한 역사서를 완성했던 것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저술하기 위해 태어났고,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살았다. 그러니 ‘사기’만이 사마천을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다. 사마천은 어찌하여 ‘사기’ 저술에 생애 전부를 걸었던 것인가? 사마천은 기원전 145년 중국 섬서성 한성현의 교외인 용문에서 태어났다. 용문의 유력한 지주였던 아버지 사마담은 ‘사관’의 후손이라는 자부심으로, 사관이라는 가업을 회복하기 위해 살아갔다. 사마담은 사관이 되기 위해 유가, 묵가, 음양가, 명가, 법가 등 당대에 성행하는 제자백가를 모두 섭렵할 정도로 공부에 매진했다. 사마담은 기원전 138년 사마천이 여덟 살 되던 해 마침내 태사령이 된다. 태사령이 된 후 집안 대대로 사관의 직책을 계승하리라는 사명에 불타올라, 장남 사마천을 역사가로 키우기 위한 훈련에 돌입한다. 사마천은 10살 때부터 고대 경전을 암송하고, 열일곱 즈음 대유학자 동중서의 문하생이 되어 ‘춘추’ 등의 역사철학을 배웠고, 20대에는 중국 천하를 주유했다. 사마천은 이렇게 역사가로 키워졌다. ●역사가의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사마천의 나이 36살, 아버지 사마담은 태사령으로서 한나라 최초로 황제가 태산에 제를 올리는 봉선대제를 준비했으며, 아들 사마천은 낭중으로 황제의 지방순시를 호위하는 등 승승장구하며 가문의 영광을 재현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기구한 운명이랄까, 사마담은 이 봉선의식에 참관할 수가 없었다. 결정적 순간에 제외되는 바람에 번민하다 그만 병이 들어 죽을 지경에 이르게 된다. 장안에서 낙양으로 아버지의 임종을 지키러 온 사마천에게 사마담은 유훈을 남긴다. “내가 죽은 뒤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되어, 내가 쓰고 싶어했던 논저를 잊지 말고 이루어 주기 바란다.” 공자의 ‘춘추’와 같은 역사서를 쓰기를 염원했던 아버지 사마담은 이 사명을 아들에게 넘기고 그렇게 허허롭게 떠났다. 아버지의 유훈은 사마천을 예정된 역사가에서 마침내 역사가가 되게 만들었다.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위해 굴욕 인내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3년 뒤 사마천은 마침내 태사령이 된다. 기원전 104년(42세)에 역법서 ‘태초력’을 내놓고 본격적으로 ‘사기’ 저술에 돌입한다. 적어도 47살까지 사마천은 황제를 존숭하고 한나라의 영광을 예찬하며 황금빛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인생은 한치 앞도 내다보기 어렵다는 게 맞는 말일까. 태사령으로 황제에게 신임을 받던 사마천에게 일생일대의 비극적인 사건이 터진다. 기원전 99년 5월 무제는 대대적으로 흉노를 공격했다. 무제는 총애하던 이 부인의 오빠요, 대완(서역의 이족)을 정벌했던 이광리 장군에게 수만 군사를 주어 흉노 공격에 나선다. 그러나 이광리의 군사들은 전멸했고 이광리 혼자만 돌아왔다. 이후 무제는 기도위 이릉에게 보병 5000을 이끌고 흉노를 치게 했다. 이광리의 군사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적은 5000의 보병으로 흉노의 수만 기병을 용감하게 물리쳤으나, 결국 흉노의 군사들에게 포위당한다. 한나라 황실은 이릉이 전사하길 바랐으나 이릉은 흉노에게 투항하고 만다. 화가 난 무제는 사마천에게 의견을 물었다. 사마천은 항복은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진 일이라며 이릉을 두둔했다. 상황이 불운했음을 알았던 사마천은 몸을 사리지 않고 직언을 올렸던 것이다. 무제는 황제 무고의 반역죄로 사마천을 감옥에 유폐시킨다. 1년이 지난 후, 이릉이 흉노에게 병법을 가르친다는 잘못된 보고가 들어와 무제는 또다시 격노하여, 이릉의 일가족은 몰살당하고 사마천은 사형을 선고받는다. 이때 한나라는 국고가 모자라는 상황. 50만전을 내면 사형을 면할 수 있는 법이 생겼다. 그러나 사마천은 가난했고, 사귀던 벗들은 아무도 구해주지 않았으며, 황제의 측근 중 누구도 사마천을 옹호해주는 이가 없었다. 49세의 사마천은 사형을 당하거나 궁형(거세형벌)을 당할 기로에 서게 된다. 이 시대, 궁형을 당하는 것보다는 죽는 게 훨씬 쉽고 떳떳한 일이었다. 그러나 사마천은 떳떳한 죽음보다는 궁형을 당하고 구차하게 목숨을 보존하는 편이 낫다고 판단했다. ‘사기’ 저술이라는 엄숙한 과업을 완수하지 않은 채 죽는 것은 “새털보다 가벼운 죽음”에 불과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사마천은 ‘사기’를 완성해야 “태산보다 무거운 죽음”을 맞이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 때문에 사람들의 손가락질을 감수했고, 굴욕을 참아냈으며,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할 수 있었다. 사마천은 한 글자 한 글자 죽간을 채워 나가며 분노를 풀어냈고, 한 편 한 편의 역사적 사건을 엮어내며 삶의 의미를 확인했다. 사마천은 오직 ‘사기’를 위해 숨을 쉬었고, 오직 ‘사기’ 안에서 생의 의지를 불태웠다. 이제 사마천에게 역사 서술은 수많은 일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절대적인 일이 된 것이다. ●평범한 개인의 삶도 기억하는게 역사가 사마천에게 ‘사기’의 저술은 전투요, 수행이었다. ‘백척간두진일보’(百尺竿頭, 進一步)라는 말이 있듯, 가장 극한의 상황에서 집필해서인지 ‘사기’는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찾아보기 어려우리만치 ‘독보적’이다. 이후 2000여년 동안 이를 뛰어넘는 역사책은 나오지 않았다. 공자는 ‘춘추’를 통해 역사는 정치사의 잘잘못을 가려 후세를 경계하는 일이라고 보았다. 아버지 사마담, 스승 동중서, 사마천 본인도 그렇게 믿었다. 동아시아 역사는 ‘춘추’를 전범으로 삼아 국가사, 혹은 정치사를 포폄했다. 그러나 사마천은 ‘사기’ 저술에서 이 역사관을 뛰어넘는다. 왕조사의 기술도 중요하지만, 남다른 삶의 가치를 보여준 평범한 개인들의 삶도 기억하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라고 보았다. 사마천은 천자의 일을 기록한 ‘본기’, 제후들의 일을 기록한 ‘세가’, 기억할 만한 개인들의 삶을 기록한 ‘열전’이라는 기전체 형식을 창조하면서, 이것도 부족해 ‘본기’ ‘세가’ ‘열전’ 모두에서 사건이 아니라, 사건 속에서 사람들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그 사건에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보여주었다. “암혈에 숨어 사는 은자는 그 행실이 올바르다. 그렇지만 그들이나 그들과 비슷한 사람들의 이름은 한 마디 칭송도 받지 못한 채 연기처럼 허무하게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러니 어찌 슬프지 아니한가? 항간의 평민으로 덕행을 연마하고 명성을 세우고자 하는 사람이 청운지사에 의지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그의 명성을 후세에 전할 수 있겠는가?”(‘백이열전’) 사람들은 저마다의 신념과 가치를 가지고 고군분투하며 한 시대를 살아간다. 역사의 사건은 어떤 한 사람이 만든 게 아니라, 이런 개개인들의 삶이 모여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 인간의 삶들이 다면체인 만큼 역사도 다면체다. 그래서 누군가의 삶이 성공했는지 실패했는지, 전투가 승리했는지 실패했는지, 그 결과가 중요한 게 아니라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냈는지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역사가는 저마다 역사의 주체인 사람들을 기억하여 전하는 자라는 사실도 새롭게 깨달았다. 그래서 사마천의 역사서술은 경계 짓기가 어렵다. 왕조사와 개인사를 넘나들고, 사실과 상상을 넘나들고, 사료와 구전설화를 넘나든다. 역사이면서 인간탐구의 서사요, 과거의 기록이면서 삶의 기술을 전하는 철학이기도 하다. 사마천은 과거를 기록한 게 아니라 역사를 창조했다! 사마천은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사기’를 저술했다. 사마천은 ‘사기’를 집필했던 14년 동안 수많은 과거의 인물들이 살고 죽은 이유를 기록하고 전하면서 그 인물들의 원한을 풀어주었고, 동시에 자신도 해원했다. “같은 종류의 빛은 서로가 비추어 주고, 같은 종류의 물건은 서로가 감응한다.”는 믿음으로 자신의 억울함과 치욕을 알아줄, ‘사기’ 저술의 집념을 알아줄 또 다른 청운지사를 기다렸다. 사마천의 바람은 이루어졌다. ‘사기’와 더불어 지금까지 사마천은 불멸의 존재로서 살아있다. 길진숙 남산강학원Q&? 연구원 ●‘고전 톡톡 다시 읽기’를 연재해온 ‘수유너머 남산’이 보다 강도 높은 질문으로 탐색하고 배워 나가고자 서울 중구 필동에서 새로운 첫발을 내딛습니다. 앞으로 ‘남산강학원 Q&?’라는 이름으로 여러분들과 만나겠습니다.
  •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5)문예 비평가 발터 베냐민

    [고전 인물로 다시읽기] (35)문예 비평가 발터 베냐민

    곁눈질로 무언가를 뒤돌아보는 듯한 천사가 앙상한 날개를 펴고 막 날아오르려 한다. 발터 베냐민은 ‘역사의 개념에 대하여’라는 논문에서 파울 클레의 작품 ‘새로운 천사’(Angelus Novus, 1920년)에 ‘역사의 천사’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피레네 산맥에서 비극적인 자살로 48년 삶을 마감하던 1940년까지 자신의 분신처럼 소중히 간직했다. 그가 보기에, 이 천사의 이미지는 진보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한 채 미래를 향해 질주하던 당시의 시대적 가치에 반기를 드는 것이었다. 그는 역사에서 ‘구원’은 미래가 아닌 과거에 있다고 생각했고, 파탄 난 역사의 잔해에서 긍정적 가치를 끄집어 낼 수 있다고 믿었다. 20세기 초반,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던 당시 독일은 진보와 파국이 교차하는 혼돈의 도가니였다. ‘현대’라는 이름으로 쌓아올린 이 번영의 시대 이면에는 파탄난 전통의 잔해가 쌓여가고 있었다. 이 혼란의 틈바구니 속에서 흔치 않게 기회를 쟁취한 계층이 있으니, 바로 유대인들이다. ●과거의 잔해로부터 구원을 이끌어 내다 베냐민의 가계는 당시에 부상하던 신흥 유대인 부르주아였다. 1892년 독일의 베를린에서 태어난 베냐민은 부르주아 가정의 질식할 것 같은 안락함 속에서 성장한다. 촘촘하게 구획된 실내의 공간 속에서 보낸 자신의 유년기를 베냐민은 ‘감금의 경험’으로 회상한다. 베냐민의 부친은 골동품 거래상으로 큰돈을 벌었다. 그의 집을 가득 채운 고가구와 골동품들, 이 낡은 과거의 잔해들은 베냐민에게 마법 같은 느낌을 불러일으켰다. “가장 일상적인 것 아래에 뚫려 있는 가장 깊은 갱도의 바닥에는 얼마나 무시무시한 골동품 보관소가 놓여 있는 것일까?” 베냐민은 이 폐허의 잔해더미에서 낡은 것과 새로운 것, 전통과 현재에 대해 질문했다. 1905년 튀링겐에 있는 진보적 교육기관 하우빈다 학교에 진학한 베냐민은 당시 청년운동의 지도자였던 구스타프 비네켄을 만난다. 그는 청년문화 부흥을 통해 중세의 공동체적 가치와 정신적 삶을 되살려 내려는 낭만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 영향으로 베냐민은 요새처럼 그의 유년기를 감싸온 부르주아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한다. 이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지만, 청년운동으로 인해 각인된 기성세대와 부르주아 사회에 대한 염증은 베냐민을 전통 유대사상으로 이끌었다. 유대교의 가르침에 따르면, 구원의 천사는 늘 파국의 상황에 섬광처럼 도래한다. 그렇기에 절망적인 상황은 소중한 것이다. “인간은 어떻게 그 절망 속에 도달하게 되었는지를 알 때, 절망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베냐민은 유대 정신이 위기에 처한 유럽 문화에 자양분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하여 유대교의 랍비처럼 직업을 거부하고 공부에 매진하게 되는데, 당시의 대학사회는 유대인에게 교수의 길을 허락할 만큼 개방적이지 않았다. 베냐민의 아버지 역시 무모한 길을 가려는 아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이렇게 시작된 부자 간의 갈등과 함께, 베냐민의 파란 많은 인생도 본격화된다. 대학을 졸업한 베냐민은 프리랜서 작가의 길을 간다. 그는 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의 대변자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겐 지식인에게 열린 실천의 길은 글쓰기뿐이라는 확고한 믿음이 있었다. 신의 창조를 이어받아 사물의 이름을 명명하는 일을 했던 아담의 사역처럼, 작가는 글쓰기를 통해 망각된 사물들에게 목소리를 돌려주는 일을 담당해야 한다는 것. 베냐민은 이런 자신의 작업을 ‘구제비평’이라 명명한다. 고대의 랍비들이 성서의 경구에 기대어 주석을 다는 ‘주석가’였다면, 베냐민의 ‘비평가’는 위기의 상황에 처한 전통을 해석을 통해 ‘구제’하는 자였다. ●비평, 과거의 전통을 구제하는 글쓰기 1920년부터 베냐민은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친다. 괴테, 프루스트의 작품 비평을 비롯해 ‘번역가의 역할’, ‘폭력비판을 위하여’ 그리고 1924년 교수자격 논문인 ‘독일 비애극의 원천’까지, 전반기 그의 사상을 집약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글들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나 스스로를 위해 설정한 목표는 독일 문학 비평의 제일인자가 되는 것이다.” 그에게 비평은 시대를 초월한 문학작품의 교훈을 논하는 게 아니라 그 작품이 지금 여기에서 말해 주는 바를 끄집어내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선 우선 작품이 가진 전통과 권위를 파괴해야 했다. 이를 위해 그가 선택한 작업 방식은 ‘인용구’였다. 이는 언어를 작품의 맥락으로부터 끄집어내 전통과 권위의 베일을 걷어내고, 작품의 내재된 진리가 곧바로 드러나게 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당시에 이런 파격적인 글쓰기가 이해받을 리 만무했다. 인용구로 이루어진 ‘독일 비애극의 원천’은 “단 한 줄도 이해할 수 없다.”는 평을 받았다. 파국이었다. 그러나 이 파국은 구원으로 이어졌다. 이 무렵, 러시아의 혁명적 지식인 아샤 라시스와 사랑에 빠졌고, 마르크시즘 및 공산주의와 접속했으며, 시인 브레히트를 만나게 된다. 그는 브레히트로부터 지식인이 어떻게 현실에 밀착하는지를 배웠다. 그 영향으로 저술된 책이 ‘일방통행로’다. 여기서 그는 비의적인 문체와 문헌학적 연구태도에서 벗어나 팸플릿, 기사 등의 대중 매체에 부합하는 글쓰기를 보여주고 있다. “문학이 중요한 효과를 거둘 수 있는 것은 오직 실천과 글쓰기가 정확히 일치하는 경우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포괄적 지식을 자처하는 까다로운 책보다, 공동체 안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 더 적합한 형식들, 예컨대 전단, 팸플릿, 잡지 기사, 포스터 등과 같은 형식들이 개발되어야 한다. 그와 같은 신속한 언어만이 순간 포착 능력을 보여 준다.” 그러나 새로운 글쓰기를 얻는 대신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물심양면으로 그를 지원해 왔던 유대인 친구 숄렘과의 관계는 소원해졌고, 이혼 소송으로 파산 직전에 이르렀으며, 아샤와의 사랑도, 차일피일 미루던 공산당 가입도 불발로 그쳤다. 나치의 압박이 심해지던 1933년, 그는 결국 파리로 망명길을 떠난다. 그리고 파리의 도서관에 앉아 “전쟁과 경주라도 벌이는 심정으로” ‘아케이드 프로젝트’의 저술에 돌입하기 시작한다. 파국이야말로 구원의 순간이라는 여전한 믿음으로, 그는 이 책의 저술에 모든 것을 걸고 난관을 돌파하고자 했다. ●인용으로 이루어진 역사서 ‘아케이드’ 아케이드는 초기 자본주의를 대표하던 건축물로 당시엔 대형 백화점에 밀려나 쇠퇴일로에 있던 공간이다. 초현실주의자들이 낡은 사물을 몽타주해 작품을 만들 듯이, 베냐민은 19세기가 남긴 이 폐허의 공간을 ‘인용’으로 재구성하려고 한다. 넝마주이가 쓰레기를 모아 새 생명을 불어넣는 작업을 수행하듯이, 그는 일상의 편린들을 수집하는 인용의 작업이 역사에 대한 구원의 계기가 된다고 믿었다. 1940년 가을, 베냐민은 스페인의 국경에서 싸늘한 시체로 발견된다. 사인은 모르핀 과다복용. 그의 묵직한 가방 안에는 온통 인용으로 가득한 유고 ‘아케이드 프로젝트’가 들어 있었다.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소중한 원고. 실패와 중단으로 점철된 그의 인생을 대변하듯 이 책은 미완의 저작으로 남았다. 베냐민은 평생 어떠한 학파에 소속된 적도, 공인된 직함을 가져본 적도 없다. 그의 대표 저작은 거부된 논문이거나 미완의 저작이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파국 속에서도 그는 당당히 ‘아웃사이더’의 삶을 선택했다. 파국과 위기의 상황을 각성의 계기로 벼려냈던 사상가, 발터 베냐민. 실패의 대가(大家)인 그는 우리에게 실패와 중단의 미덕을 가르친다. 그가 곧잘 인용하듯이,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재앙”인지도 모른다. 차라리 파국의 순간은 우리를 사로잡고 있던 꿈으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힘이다. 폭풍과 같은 휩쓸림에 중단을 고할 때 우리는 섬광처럼 드러나는 자신의 본 모습을 대면할 수 있다. 질주하는 기관차의 브레이크를 당기고 역사 속에서 ‘진보의 폭풍’에 떠밀려 가는 구원의 천사를 멈추어 세우기. 그 순간, 삶은 다시 시작된다. 손영달 남산강학원 연구원
  • [성동구 새 ‘명물’ 2제] 응봉산 팔각정 주변 장송

    서울 응봉산 꼭대기에 솔향기를 그윽히 내뿜는 장송(長松)이 새로운 명물로 등장했다. 성동구는 정상에서 은은한 솔향기를 맡으며 한강의 아름다운 물빛을 감상할 수 있도록 팔각정 주변에 소나무 6그루를 심었다고 23일 밝혔다. 응봉산은 서울시와 한국천문연구원에서 ‘별 보기 좋은 명당’으로 선정한 곳이다. 그만큼 주변 경치가 뛰어나다는 소리를 듣는다. 하지만 다소 인공적으로 꾸며졌다는 지적도 적잖게 받는다. 그러다가 소나무를 심으면서 소나무 줄기의 굴곡과 리듬감이 어우러지면서 예스러운 풍광을 연출하고 있다는 게 주민들의 평가다. 구는 주민들이 손쉽게 산책을 즐길 수 있도록 팔각정 진입로 계단을 친환경 목재 계단으로 바꾸고 배수로도 보강했다. 산책로 주변에는 상록수와 꽃나무를 심어 화단을 조성했으며, 휴게소 2곳도 마련했다. 특히 여성 등산객들을 위해 전용 주차장과 비상벨을 설치했다. 구는 친환경 그린도시를 만들기 위해 지난해부터 최근까지 서울숲과 남산을 연결한 총 8.4㎞의 그린 산책로인 ‘서울숲·남산길’을 만들었다. 지난달에는 대현산과 금호산에도 1.1㎞의 산책로를 조성했다. 서울숲·남산길에는 전망 데크와 생태 다리를 만들어 시민들이 지친 발걸음을 멈추고 잠시 쉬어 갈 수 있도록 배려했다. 조현석기자 hyun68@seoul.co.kr
  • [서울플러스] 다자녀가정 남산한옥마을 체험

    동대문구(구청장 유덕열) 26일 다자녀 가정 17곳 80여명을 대상으로 ‘남산한옥 마을 문화체험’ 행사를 실시한다. 수려한 경관에 자리한 전통 한옥에서 선조들의 삶과 생활풍습 등을 살펴봄으로써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높이는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가정복지과 2127-50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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