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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종시·남북접촉 말 아끼는 MB

    세종시·남북접촉 말 아끼는 MB

    동남아 순방을 마치고 25일 밤 귀국한 이명박 대통령이 숨 돌릴 틈도 없이 26일 오전 수석비서관회의를 주재하며 국내 현안을 챙겼다. 이 대통령은 수석비서관들이 소관분야 현안들을 보고하자 질문을 던지며 대책마련을 지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이 순방기간 이슈로 떠오른 세종시와 남북접촉에 대한 보고나 지시는 없었다는 게 청와대의 설명이다. 청와대 박선규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수석비서관회의에서 세종시와 남북정상회담 관련 보고는 전혀 없었다.”며 “이 현안과 관련한 청와대의 원칙과 입장은 기존에 밝힌 그대로”라고 말했다. 실제로 이 대통령은 순방시 세종시와 관련해 한나라당 박근혜 전 대표가 “세종시 백지화는 말이 안 되고, 원안에다 필요하다면 플러스 알파(+α)가 돼야 한다.”고 말한 것을 전해 듣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 대통령은 당분간 침묵을 유지한 채 여론 형성의 추이를 본 후 특정 시점에 자신의 구상을 밝힐 것으로 보인다. 총리실이나 한나라당의 ‘사전작업’을 통해 해결책을 제시하는 수순을 밟을 전망이다. 이 대통령은 당분간 ‘북한 문제’에도 진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급박하게 진행되는 북·미 대화 분위기에서 한·미 공조의 틈을 보여선 안 된다는 점에서 촉각을 세우고 있다. 특히 다음 달로 예정된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의 방한에 앞서 ‘그랜드바겐(Grand Bargain·일괄타결)’의 당위성을 입증할 여건을 조성해야 하는 것도 이 대통령의 숙제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10·26 30주년] 박상범 전 실장의 인터뷰 전문

    “陸여사 서거뒤 일에 몰두… 국산로켓·잠수함에 집념”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같다.”  박정희 전 대통령 서거 30주기인 26일을 사흘 앞둔 박상범 전 대통령 경호실장의 소회였다. 1979년의 ‘10·26’ 당시 경호계장이었던 그는 궁정동 저격 현장의 경호실 관계자 중 유일한 생존자다.  그는 특히 박 전 대통령이 말년에 유신헌법을 개정한 뒤 물러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는 비화를 들려줬다. 즉, “박 대통령이 집권 18년 정도 됐을 때인데 ‘1∼2년 뒤에는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라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는 얘기였다. 경호 실무자로서 피경호대상을 지켜내지 못한 아쉬움을 넘어 그의 표현대로 “경제적으로 세계사에서 드문, 한강의 기적을 이룬” 박 전대통령이 평화적 권력이양까지 일구지 못한 데 대한 아쉬움이 배어있는 듯했다.  “기억하기도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 이야기를 안 꺼낼려고 했다.”며 서울신문의 인터뷰 요청을 완곡하게 사양하던 그였지만, 본지 취재진이 지난 23일 서울 방배동 민주평통장학재단 그의 사무실을 찾자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반겼다. 문민정부 시절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 남북정상회담 준비과정의 뒷얘기에서부터 최근 김정일 국방위원장 답방 가능성에 이르기까지 경호 및 남북관계 전문가로서 견해를 담담하게 피력했다. 합기도 등 각종 무술이 도합 10단이 넘는 무골답지않게 담담한 어조였다.  ●‘10·26’ 30년을 맞는 소회가 남다를텐데.  -(박 대통령이) 서거하신지 30년이 된 요즘에 와서 박 대통령에 대한 역사적 재평가를 하는 학술대회도 열고, 유물·기록전시회도 하고 그러더라. 기억하기 싫은 일들이라서 가능한한 이야기를 꺼내지 않으려고 하는데, 지금 생각해봐도 ‘참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정부가 수립된 이후 한 60년만에 이 만큼 경제·사회·문화적으로 발전하게 된 나라는 세계사에 없다. 소위 한강의 기적은 정확히 이야기 하면 (박 대통령이 집권한 뒤부터) 약 40년만에 된 것으로 봐야할 것 같다. 우리보다 앞서가는 나라들이 이 정도까지 올라오는데 최소한 100~150년 걸렸다. 그런걸 보면 당시 지도자였던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생각을 하게 되고 강력하게 뒷받침 해줬던 국민의 저력이 “참 대단하다.” 라는 생각이 든다. 가끔 해외 나가면 특히 그런 생각을 많이 하고, 한국 위상이 상당히 높아졌다고 느낀다. 서거 30년이 흘렀지만 매년 개인적으로 현충원을 간다. 그분 생각이 가끔 떠오른다.  ●최근 국제학술회의에서 진보쪽에서도 박 전 대통령을 재평가하는 움직임도 있다. 한 교수는 김일성 유일체제인 북한에 비해 상대적이지만 반대 세력을 허용한 박정희의 남한이, 그리고 개방적·국제적 전략을 택한 남한이 폐쇄적 전략을 취한 북한을 압도했다는 평가를 내렸는데.  -당시 그 분을 모시고 신변안전을 책임지고 다녔다. 1970년대부터 시작해서 지금 우리 경제를 이끌어가는 핵심인 조선, 제철, 자동차 등이 짧은기간에 상당한 발전을 했다. 과학분야도…. 요즘 두각을 나타내는 군수산업. 그게 그 당시에 기초가 다져지고 그랬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참 미래를 내다볼 줄 아는 혜안을 가졌던 지도자가 아니였던가 하는 생각을 한다. 가끔 친구들과 부부동반으로 국내를 다니다 보면 관광지 재정비 한 곳을 많이 보는데 대부분 그 때 시작한 것이다. 그 족적을 보면서 당시의 지도자로서 참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유신 때 데모하다가 호주에서 공부한 김형아 호주국립대교수가 박정희 대통령을 재평가를 하게됐다는 말을 했다. 여러 면에서 박 대통령의 캔두이즘(Candoism)이 큰 기반이 됐다 하더라. 박정희 대통령의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캔두이즘이 국민성을 바꿨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그런 신념을 가까이서 감지할 수 있었는지.  -나이가 들수록 그런 생각이 난다. ‘할 수 있다.’, ‘우리도 잘 살 수 있다.’ 라는 신념을 심어준 자체가 중요하다. 그것이 밑거름이 돼 소위 말하는 한강의 기적이 이뤄진 게 아닌가 싶다. 그런 것들이 경제나 문화쪽에서 보인다. 최근 광화문 세종대왕 좌상이 생겼지만, 그 전에 이순신 장군 동상 세워지고…. 여주의 영릉이나 아산의 충무공 사당도 그 때 다 성역화됐다. 처음에 갔을때는 초라했는데 그분이 성역화시키고, 그게 우리 역사에서 계속 남는 거다. 사석에서 말씀하는 걸 보면 우리나라 역사에 대한 해박한 지식 갖고 계셨다.  ●경호를 하시면서 사선(死線)을 수차례 넘나들으셨겠지만, 그 중에서도 ‘10·26’ 현장이 가장 충격적인 기억으로 남아 있을텐데. 1983년의 아웅산사태 때도 아슬아슬했겠지만.  -경호했던 사람으로 거기에 대해 이야기 할 수가 없다. 자칫 변명으로 들릴 수 있고. 다만 그 이후에 후배들에게 나와같은 전철을 밟으면 안된다는 뜻에서 경호 기법이나 기술적 측면에서 엄청난 연구를 통해서 발전시키려고 노력했다. 소위 경호라는 힘이 미칠 수 있는 범위가 있는데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지역을 최소화시키는 게 중요한 것 같다. 그런 측면에서 ‘10·26’도 봐야하지 않나 싶다. 어떤 경우라도 경호는 일단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매사를 접근하고 매사 들어봐야한다. 경호력이 미칠 수 없는 그런 부분을 최소화 시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최악의 상황을 상정해야한다는 건가.  -그렇다. 아웅산 사태도 마찬가지다. 모든 것들이 다 거기에서부터 시작된다.  ●경호관계자 중 ‘10·26’ 현장에서 유일하게 생존한 것은 그 때 중앙정보부(현재 국가정보원) 후배가 평소에 후덕한 모습을 기억하고 일부러 비껴 쏴서 허벅지와 옆구리를 스치게 했다는 말도 있었는데. 확인사살 과정에서 버클에 맞췄다는 얘기도 있었고.  -제 3자를 통해 그런 얘기도 들었지만, 지금 사실을 확인할 수는 없다. 총을 맞고 쓰러져 있었고, 중정 직원들도 다 사형당했으니.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중정 직원들도 참 고생 많이 했다. 대통령 경호원과 한 집안 식구같은 관계를 유지했다. 그 사람들 고생하는거 보고 서로 따듯하게 해서 깊은 우정들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사건이 벌어지는 바람에 사실 정말 안타까웠다. 정말 제가 아끼는 후배들도 있었고 그 중에 저를 참 좋아하는 후배들도 꽤 많았다.  ●정황상으로는 어떤가.  -그 현장이 한 10평 그 정도 밖에 되지않는다. 가운데 직사각형의 막힌 조리대가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벌어졌으니까 확인사살은 실수할 리가 없다.  ●군출신 아닌 첫 문민 경호실장을 지냈는데, 박종규, 차지절, 장세동, 안현태, 이현우씨등 군 출신의 여러 경호실장들의 노후는 불행했거나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개인적 욕심 탓인지, 아니면 권력의 비정한 생리나 속성 때문인지.  -둘다로 본다. 하나는 권력의 속성 탓이다. 당시 여러 사회적 여건이 그 자리에 그분들이 있을 때 여건이 그런쪽으로 갈 수 밖에 없게끔 만들어진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각 개인의 성격에도 (다소) 문제가 있지 않겠나 싶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으로서 그런 행로를 답습하지 않아야겠다는 철학을 정립했을 것 같은데.  -거기서 오랫동안 생활하다보니 많은 상사들을 모시고 이런저런 일을 겪었다. 그럴 때마다 확신은 안서지만 내가 만약에 과장자리. 처장자리에 갔을 때 ‘이러이러한 것은 내가 이렇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은 많이 했다. 어느 직장이나 다 마찬가지이겠지만 우선 권위라는건 꼭 필요하지만 배타된 권위는 안된다. 예컨대 정부 각료들 회의 때 경호실장이 그 자리에 참석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 그 안에 근접 경호를 책임지고 있는 팀장도 있기 때문에 굳이 국가 정책 논의하는 그 자리에 경호실장이 꼭 들어가서 앉을 필요가 있느냐. 교육도 참 중요한것 같다. 2년 있는 동안 교육문제에 신경을 많이 썼다. 어차피 경호도 국제화되기 때문에 많은 국빈들이 오고 우리 대통령도 1년에 몇 번씩 해외를 순방하고 그런 시대가 돼서 이제 어학 문제라든가 이런것을 체계적으로 해서 경호원들의 수준을 높여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1년 코스이지만 해외 유학도 보냈다. 지금은 우리 후배들 보면 아주 상당한 수준에 와있다는 생각이다. 통역 필요없이 업무를 직접 협의할 정도까지 상당한 직원들이 와 있다. 경호실이 예전처럼 권위적이지 않다. 한 때는 날아가던 새도 떨어뜨린다는 조직이란 소리 들었는데 지금은 아니다. 아주 순수한 전문 조직으로 자리를 잡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경호라는 것은 대한민국 대통령을 경호하는것이지 인간 누구를 경호하는것 아니다. 적어도 경호실은 그런 생각을 갖고 전문 조직으로 발전해 나가야 한다고 본다.  ●차지철 경호실장이 월권 등으로 김재규 중앙정보부장과 알력이 생겨 박 대통령 서거라는 불행한 일이 발생했다고 보는 쪽도 있다. 이와 달리 박 대통령이 3선후 유신체제로 가면서 장기집권하는 통에 산업화 이끈 훌륭한 지도자로 남을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불행해졌다는 지적도 있다.  -당시 저는 계장급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정치적이나 정책적인 면 잘 모르지만 다 일리가 있다. 다만 1974년 육영수 여사가 문세광에 의해 저격된 뒤 차지철 실장이 들어왔을때 사회적 환경이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차 실장이) 장관들을 배석시킨 채 국기하강식을 한다든가 하는 월권도 저질렀다는데.  -주말마다··· 그랬다. 굉장히 힘들 때가 있었다.  ●차 실장의 다른 독특한 면은.  -차 실장은 그런 부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금전, 돈 에 대해서 상당히 깨끗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는데 아무것도 남겨놓은 게 없다. 돈에 있어선 깨끗했다.  ●최근 남덕우 전 국무총리가 회고록에서 1978년 경제특보 재임 당시 “유신헌법의 대통령 선출방식은 내가 봐도 엉터리야. 그러고서야 어떻게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있겠어.”라며 개헌후에 물러나겠다는 박 대통령의 육성을 기록했는데 당시 그런 얘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  -사적으로 들었던 기억이 난다. 문제는 그 때가 (박 대통령 집권) 18년 정도 됐을때인데 “1~2년 뒤에는 내가 하야를 해야하지 않겠나.”하는 말을 사석에서 했던 걸로 기억한다.  ●그게 좀 앞당겨 실현됐더라도 ‘10·26’ 같은 불행한 일은 없었을텐데.  -운명론자는 아니지만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이란 게 있는 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의 지시로 유신헌법 개정안 초안 작업을 하던 신직수 법률특보가 10·26 이후 관련자료를 폐기했다고 남 전총리가 구체적으로 증언했던데.  -2년 정도 뒤에 하야하려고 생각하셨던거 아닌가라는 생각이 든다. 박 대통령은 그때 그런 생각을 확실하게 갖고 있었다.  ●문민정부 첫 경호실장 하실 때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과의 정상회담이 1994년 있을뻔 했는데, 그 때 경호 관련 협상에서 어느 정도까지 진도가 나갔었나.  -어느 단계에 가서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냐면 경호 통신 문제에 대해 협의가 다 끝나고 일주일 뒤에 우리 경호 선발팀들이 들어가게 돼 있었을 때였다. 물론 총기 휴대하고. 제일 문제된 게 위성 통신 문제였다. 그것까지도 다 원만하게 잘 협의가 돼서 일주일 뒤에는 최종적으로 선발팀이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김일성 주석이 갑자기 사망하는 바람에 모든 게 중지돼 버렸다.  ●그 때 김일성 사망을 예상하는 꿈을 꿨다는 비화가 있던데.  -당시 윤여준씨가 안전기획부 제 3특보였고, (별세한) 엄익준이 북한 국장이었다. 나중에 통일부 장관 지낸 정세현 청와대 통일비서관으로 있었다. 오찬하는데 저한테 연락이 왔다. 아무래도 경호실에서 인원을 정리해줘야겠다는 연락이었다. 그 자리에서 정리를 다 했다. 경호 쪽에서 인원 줄이고…. 오찬이 끝나고 제가 지나가는 이야기로 ‘아무래도 정상회담 안될거 같다.’라고 말하니 다들 깜짝 놀라더라. 경호실장이 그런 이야기 하니 (무슨) 특별한 정보있는줄 알고…. ‘무슨 이야기냐.’고 하길래 내가 농담처럼 ‘며칠 전 김일성 주석이 사망해서 관에 입관하는 꿈을 꿨다.’고 얘기했다. 당시에 정책비서관이 ‘맞으면 도사로 모시겠다.’고 농담으로 말하더라.  ●김영삼 대통령에겐 보고했나.  -안했다. 지나가는 이야기로 끝났다. 김일성 주석 사망 일주일 전에 꿈을 꿨다. 새벽 3시쯤 깜짝 놀래서 깼다. 집사람을 깨워 ‘이상한 꿈을 꿨다.’고 하니 집사람이 ‘절대 다른 곳에 가서 말하지 말라. 경호실장이 그런 말 하면 북한가기 싫어서 이야기 한다고 오해할 수 있지 않겠느냐.’고 하더라.  ●당시 정상회담이 이뤄졌다면 남북관계 큰 진전 있었을 텐데 김일성주석 답방도 있을 수 있고.  -그렇다. 역사의 아이러니다. 한국의, 한반도의 운명이 아니었나 그런 생각이 든다.  ●꿈으로 나타날 정도면 신경 많이 써서 그런 것 같다. 사상 최초로 북한에 가는 남쪽 정상을 경호 하는 것 때문에 스트레스 상당했을 것 같다.  -처음 이뤄지는 일이고 민감한 일이었다. 여러가지 사건들이 많이 일어났기 때문에 사실 잠이 안왔다. 현장에서 여러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최악의 여건들이 많았는데, 혹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옥쇄할 수 밖에 없다는 각오까지 했었다.  ●요즘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하고 싶어한다는 보도가 잇다르고 있다. 그런데 북측이 김정일 국방위원장 경호문제로 답방에 난색을 표시하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그 사람들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경호상 여러가지 가정도 있는데 그쪽도 똑같은 가정을 놓고 검토를 할 것 아니겠는가. 아차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문제이고 전부 총기를 휴대하고 있으니까 힘들다. 준비하는 과정에서.  ●꼭 물리적인 위해가 아니더라도 김 위원장 쪽에선 남쪽 보수단체에서 계란이라도 던지지 않나 이런 것 신경쓰는 거 아닌가.  -그런것도 있고. 예를 들어 근접 경호하는 사람 중에 약간 정신적으로, 순간적으로 문제가 발생돼 총이라도 뽑고 한다면 그건 큰일이 생기는 거다.  ●영화 쉬리의 한 장면 떠오르는데.  -그럴 경우 전쟁터가 되는 거다. 사실 초청한 쪽에선 그런 의도 없더라도…. 그게 젤 위험하다. 우리도 그렇지만 그쪽에서도 그런 생각 했을 것이다.  ●역대 대통령 몇분 모셨나.  -박정희, 최규하, 전두환, 노태우, 김영삼 대통령 등 다섯분을 모셨다. 김종필 총리 인준이 안되는 바람에 (인수인계가 늦어져) 김대중 대통령 취임 초반 (보훈처장으로) 잠깐 재직하기도 했다.  ●경호하면서 역대 대통령들의 성품을 가까이서 봤을텐데.  -서로 다르지만 공통점은 부지런하다는 점이다. 두번째는 건강하다. 그게 아주 공통되는 거 같고 박정희, 전두환, 김영삼 대통령은 카리스마, 결단력이 있었던 분들 같다. 특히 박정희 대통령 같은 분은 공과가 있겠지만, 30~40년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다. 제 기억으로는.  ●김영삼 대통령도 전두환, 박정희 대통령과 같은 보스형 리더십의 소유자인가.  -그렇죠.  ●노태우 대통령은 좀 다르지않나.  -좀 다르다. 최규하 대통령도 그렇고.  ●어느 정부든 할거 없이 대통령 아들 때문에 속썩인 일이 많은데.. (김영삼 대통령 아들인) 현철씨 관련해서 경호실장 하면서 김 대통령에게 직언하자 언짢아 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그런거 보다도…. 김현철씨 같은 분 보면 예의도 바르고 총명하고 그렇다. 대인관계도 좋고. 그런데 제가 볼 때는 아버님이 두 번씩 대선에 출마할 때 김영삼 대통령과는 부자간의 관계이기도 하지만 정치적 동지이기도 했다. 대선 때 어려움을 겪으면서 참모역할을 하면서. 그런 측면에서 보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기는 한다. 저도 한 2년 현철씨를 접촉했지만 예의바르고 대인관계 좋고 그랬는데, 대통령학에 대한 책도 좀 읽어보고 했지만 집권후 1년, 1년반 지나다 보면 주변에 사람들이 자꾸 모이게 되지않나. 어떤 사람들이 주위에 모이느냐가 대단히 중요하다. 그것이 본의 아니게 본인 생각과는 전혀 관계 없이 그런 문제 야기할 가능성이 있다. 오랫동안 다섯 분 대통령 모시면서 보고 느꼈던 일이고, 김현철씨도 그랬던 듯하다. 그래서 그 당시 대통령께 (박관용 비서실장 등을 포함해) 여러분들이 고언을 드렸던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 아들인) 박지만씨와 관련한 에피소드중 기억나는 것은.  -박지만씨가 몇년 전 결혼해서 축복해 주기도 했지만, 그때는 육사를 다녔다. 아주 어릴 때인 1974년 어머니인 육영수 여사가 서거하신 뒤로 정신적 어려움이 많았고, 그래서 저항적인 그런 쪽으로 한 때 잠깐 바뀌었던것 아닌가하는 생각이 든다. 그러다 보니까 약물도 시작하게 됐고…. 안타깝게 생각하지만, 한편으로 오죽 외롭고 했으면 그랬겠나 하고 이해도 된다. 어린 나이에 부모가 세상을 떠났고, 더군다나 비명에 가시지 않았나. 자연사로 가신것도 아니고…. 다행스러운건 지금 새 보금자리 만들어 잘 살고 있고….  ●육 여사 서거후 지만군을 돌보라고 박 대통령이 특별히 밀명 준건 없나.  -그런 건 없고, 그 당시에 지만군이 주말에 나오면 (청와대에) 안 들어가려고 했던 적이 있다. 외출나와서. 대통령이 찾으니까 차지철 실장이 나를 부르더니 ‘지만이좀 데리고 오라.’고 해서 명동에서 찾아서 데리고 갔던 그런 일도 있고…. 나중에 지만씨가 약물 때문에 보훈병원에서 봉사한 적이 있다. 제가 1997년 초에 보훈처장 할 때였다. 지금은 사업도 잘하고 가정도 이루고 애도 갖고 해서 천만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권부 근처에 있었으니 일부 측근들이 엉뚱한 권력을 행사하는것을 보는 등 온갖 인간 군상들을 목격했을 듯한데.  -그런 것들이 대통령의 자제분들이나 가까운 친척 분들을 망가뜨릴 수도 있고. 역시 사람이 젤 중요하다. 사회생활하면서 어떤 사람을 만나 대화하느냐에 따라 사람이 달라지기도 하니까.  ●지난 대선에 나온 허경영 후보가 공중부양한다는 농담같은 얘기가 나도는 데 무술의 달인으로서 말하자면 원조 공중부양 전문가라는 소문은 사실인가.  -(손을 내저으며) 에이, 지금은 세월이 흐르니 아픈데도 생기고…. 요즘엔 무술 훈련은 안하고 하루에 한시간 반 정도 집에서 열심히 헬스는 하고 있다. 지금 나이에 무슨 헬스 하냐고, 또 얼마나 오래살라고 그러냐고도 하는데 적어도 열심히 운동해서 건강해야 통일되는 것도 보고, 요즘 G20 그러는데 (한국이) G10 되는 건 보고 죽어야 할것 아니냐는 농담도 한다. 열심히 운동한다. 한 시간 헬스가서 운동하면 기분 좋고 정신도 맑아지고 의욕도 생기고 그렇더라.  ●다친 무릎 때문에 고생한다는얘기를 들었다.  -그래서 이제 등산은 하지않는다. 가끔 골프할 때는 보호대 차고 한다.  ●공직 땐 골프 안했는데 입문 1년만에 싱글했다는데.  -1998년 3월 중순까지 보훈처장으로 일했다. 그 직후 집사람과 골프 시작해 6개월 만에 80타 쳤다.  ●경호 전문가지만 민주평통 사무총장, 보훈처장 등 남북관계나 안보전문가로서 식견을 사회에 환원할 복안은.  -후배들에게 그런 이야기 많이 한다. 1996년 평통 총장 막바지에 장학재단을 하나 만들었다. 장학재단 일이 다 봉사다. 수익사업 하는것도 아니고.  ●강의 같은 것도 하나.  -강의를 그만둔게 한 3년 됐다.대전 배재대에서 경제학부 학생들이 인간관계론을 강의해달라 해서 2년, 경기대에 경호문제 및 대테러 문제로 석·박사 과정 학생들 한 2년 지도했는데 무척 힘들더라.  ●10·26 사태의 배경을 설명해 달라.  -신문이나 언론을 통해 수없이 많이 보도 됐다. 합동 수사팀들이 조사결과가 가장 정확할 것이다. 그런 사건을 당했던 사람들은 너무 순식간에 일어났더 일들이니까 기억이 정확하지 않다. 그리고 그 다음에 모르잖아요. 총맞고 깨어나니 병원이었다. (공식)기록이 가장 중요하다. 작년에 어느 매체에서 1974년 문세광 사건 재조명한다고 했다. 한 11년동안 음성전문가 동원해서 준비했다는데, 어떤 결론을 내놓고 그쪽으로 몰아가니까.  ●경호원이 육 여사 돌아가시게 했다는 추측성 보도를 가리키는 건가요.  -그런 뉘앙스로…. 하도 그래서 내가 한 말이 있다. 총알은 절대 거짓말을 안한다. 탄환이 다 있다. 건물 내부에서 일어났던 일이니까 탄환이 없을리 없잖아요. 총알은 각도가 있다. 그렇게 이해시키려 했는데, 자칫잘못하면 왜곡된 일들이 발생할 수 있다. 10.26 사건도 조금 전에 말씀드린대로 합동수사팀의 조사결과가 젤 정확하다. 객관적인 측면에서 합동 수사팀에 검찰도 다 들어가고 했기 때문에 숨길게 없잖아요. 그러니까 운명이다. 운명이 아니고는 벌어질 수가 없다. 물론 원인도 다들 아시잖아요. 차 실장과 김재규씨하고 인간관계도 있고. (유신정권의)권력독점 문제 등도 있고.  ●호사가들은 미국 CIA가 배후조종했다는 설도 제기하는데요.  -(고개를 저으며)원래 그런 사건에 별별 추측이 다 일어나거든요.  ●박정희 대통령의 인간적인 면모는 어땠나요.  -그분도 유년시절부터 어렵게 성장하셨던 분이지만, 굉장히 정이 많은 분이었죠. 외모를 보면 아주 매섭고, 단구에다가 깡마르고, 눈매도 무섭고. 하지만 인정은 많았죠. 예전에 골프를 가끔 나가시면 추울 때나 더울때나 근무자를 꼭 챙기셨다. 아주 서민적이셨던 걸로 기억합니다.. 74년도에 영부인 서거한 뒤에 굉장히 외로워하셨죠. 박근혜씨가 영부인 대행하셨지만 외로움을 타는 것 같았죠. 그러다 보니까 국정에만 몰두해서 74년 이후 쭉 기록을 봐도 알 수 있지만 공단이나 산업단지 조선소 등이 그 때 건설된 거죠. 창원 신도시에서 창원 공단, 풍산에는 풍산금속 등이 하나하나 자리잡기 시작했지요. 70년 초만 해도 우리나라가 철모도 하나 못만들었지요. 철모가 간단한거 같아도 그렇지 않습니다. 총알이 맞아도 튕겨나갈 정도가 돼야하는데 그걸 못만들었으니까. 안면도에는 제 2국방과학연구소가 있었는데 거기서 로켓을 만들었고 타코마라는 회사가 당시 마산에 있었는데 거기서 잠수함 만들기 시작했지요. 허전함을 그런 일로 푸셨던 듯합니다.  ●말년에 박 대통령이 지방시찰 유난히 많이 다녔는가요.  -처음에 말씀드렸지만, 가끔 여행하다 보면 그분의 족적을 볼 수 있다. 지금 관광지인 설악동인가요, 그게 그 당시엔 정말 형편 없었거든요. 그런 걸 그 때 다 정비하는 등 짧게는 30년, 길게는 50년 이상 내다보는 혜안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광양제철소는 본래 아산에 만들려고 결정됐다가 광양으로 바뀌었죠. 그때 모시고 현장에 갔을 때 중국 쪽에서 바람이 부니까 매연이 내륙으로 들어오고 그러니까 전문가들이 건의하고 그래서 현지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그럼 광양으로 하자고 결정했던 억들이 납니다  대담 구본영 편집국 수석부국장·정리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靑 “남북정상회담 추진 이면협상 없을 것”

    │후아힌 이종락특파원│청와대 이동관 홍보수석은 24일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관련, “이면협상이나 이면계약은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수석은 이날 후아힌 메리어트호텔내 프레스센터에서 브리핑을 갖고 “(남북정상회담은) 민족을 위한 진정성이 담보돼야 하며 북핵 문제 해결의 진전에 도움이 돼야 한다.”면서 “그 원칙에 관한 한 이명박 대통령이 취임한 이후 한번도 흔들린 적이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고 밝혔다. 이 수석은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해서는 원칙 없는 만남, 만남을 위한 만남은 하지 않는다는 것이 변함없는 우리 정부의 입장”이라며 “이미 밝힌 것처럼 정치적, 정략적 계산을 깔고 협상을 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부 언론에서 지적하는 것처럼 남북정상회담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지도 않다.”며 “투명한 공개 원칙도 필요한 상황이 오면 지킬 것”이라고 덧붙였다. jrlee@seoul.co.kr
  • 역대 정부 대북 밀사 정보기관장이 해결사

    남북정상회담을 위해서는 보안유지가 필수인데도 ‘비밀 접촉설’이 계속 제기되고 있다. 싱가포르에서 만났다는 설도 있고,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접촉했다는 말도 흘러나온다. 북측의 김양건 노동당 통일전선부장과 남측 고위 인사가 접촉했다는 얘기가 비교적 그럴듯하게 흘러나오는 등 제 3차 정상회담 추진설(說)이 고개를 들고 있다. 청와대는 23일 기존의 강한 부정에서 “확인해 줄 수 없다.”며 한발짝 물러나는 모양새다. 역대 정부의 남북 접촉이나 두 차례 정상회담과 비교하면 ‘군불도 지피기 전’에 접촉만 노출된 셈이다. 이와 관련, 남북정상회담을 원하지 않는 쪽에서 고의로 흘렸다는 말까지 나온다. 그동안 특사 혹은 밀사를 통한 남북 접촉은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김대중, 노무현 정부 등에서 남북관계의 돌파구로 활용됐다. 정치적 파장뿐 아니라 흥행성(?)도 고려되다 보니 보안 유지는 필수였다. 역대 정부마다 주로 정보기관장을 밀사로 가장 많이 활용했던 것도 이런 이유였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2년 이후락 당시 중앙정보부장을 평양에 보내 7·4남북공동성명을 이끌어 냈다. 전두환·노태우 정부 때는 각각 장세동·서동권 당시 국가안전기획부장이 북한을 방문했다. 김대중 정부에서는 박지원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북측 송호경 아·태평화위 부위원장과 비밀 협상을 벌였다. 임동원 당시 국가정보원장도 두 차례 극비리에 방북했지만 협상은 ‘박-송’을 통해 이뤄졌다. 당시 박 전 장관이 나선 이유는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라는 점뿐 아니라 비밀 접촉을 위장할 수 있는 장점도 작용했다. 문화부장관은 남북접촉 창구가 아니기 때문에 북측 인사를 만나는 게 노출될 가능성이 낮다는 것도 배경이 됐다. 노무현 정부 때의 패턴도 비슷하다. 2006년 10월 노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안희정씨가 베이징에서 이호남 북한 참사를 접촉했다. 이듬해 발표된 2차 정상회담은 김만복 당시 국가정보원장이 전권을 위임받아 비밀리에 평양을 방문하면서 성사됐다. 당시 김 원장의 카운터 파트가 김양건 통전부장이었다. 이번 남북간 접촉은 북한이 먼저 신호를 보낸 것으로 감지되고 있다. 지난 20일 중국 베이징에서 평양으로 돌아간 김양건 통전부장의 동선이 남측 언론에 감지된 것도 북측의 의도적 노출이라는 분석도 있다. 안동환기자 ipsofacto@seoul.co.kr
  • [뉴스&분석] 남북정상회담 고위급 본격접촉 관측 내년 선거뒤? G20때 초청?

    │방콕 이종락특파원·서울 안동환기자│3차 남북정상회담 추진과 관련해 확인되지 않은 각종 설(說)들이 나돌고 있다. 청와대는 남북정상회담을 서두르지 않겠다는 입장을 강조하고 있다. ●靑 “다부지게… 서두르지 않겠다” 청와대의 고위 관계자는 23일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했고 노무현 전 대통령도 정상회담을 했으니 (이명박 대통령도) 한다고 하는 것은…”이라고 말했다. 전직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했으니 이 대통령도 의례적인 차원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한다는 것은 별 의미가 없다는 뜻이다. 그는 “만남을 위한 만남이나 정략적·전술적 만남은 하지 않겠다는 것”이라고 부연 설명했다. 급하게 남북정상회담을 할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이 대통령의 지지율이 현재 50%를 넘고 있기 때문에 ‘정치적 이벤트’ 성격으로 남북정상회담을 할 경우 실익이 없다는 얘기로도 들린다. 시간이 지날수록 북쪽이 불리하다는 판단도 작용한 듯하다. 그는 “쇼를 하듯이 이벤트로 남북정상회담을 하지는 않는다.”면서 “시간은 우리편”이라고 말했다. “정상회담을 하면 다부지게, 의미있게 해야 한다.”고 그는 덧붙였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남측에서 남북정상회담에 적극적이었지만 지금은 북측이 적극적이라는 게 다른 점이라는 것이다. 최근 싱가포르를 비롯한 제3국에서 정상회담을 위해 남북 관계자들이 접촉한 것으로 드러났다. 앞으로 본격적인 접촉이 이뤄질 것으로 관측된다. 남북접촉 창구의 격도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현 상황에서 연내에 정상회담이 개최되는 것은 사실상 힘들다. 내년 6월의 지방선거 이후에 이뤄질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남북관계에 정통한 관계자들은 예상하고 있다. ●장소 등 이견… 연내개최 힘들 듯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있었던 남북 실무접촉에서는 남북정상회담 장소를 놓고 이견을 보였다. 남측은 1, 2차 정상회담이 북한에서 열렸기 때문에 3차 정상회담은 한국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입장을 전달했으나 북측은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의 신변안전 문제를 이유로 난색을 표시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따라 판문점 등 중립적인 지역에서 정상회담을 하는 방안도 거론된다. 일각에서는 내년 11월 한국에서 개최되는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때 김 위원장을 옵서버 자격으로 초청하는 것도 아이디어 차원에서 나온다. 김 위원장이 G20에 참석한다면 자연스럽게 미국·일본 등 주요국 정상들을 접촉할 수 있는 기회도 되기 때문이다. 이와 관련,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이날 국회 기획재정위 국정감사에서 ‘김 위원장을 G20 정상회의에 옵서버 자격으로 초청하는 방안을 검토하느냐.’는 민주당 박병석 의원의 질의에 “그 문제(김 위원장 초청)뿐 아니라 많은 부분이 검토 대상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원세훈·이상득·류우익 특사 거론 실무접촉이 아닌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고위급의 창구나 사실상 특사로는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 김덕룡 국민통합특보, 류우익 전 대통령실장 등이 오르내리고 있다. 통일부나 외교통상부의 고위 당국자가 나설 경우 동선(動線)이 노출된다는 점에서 이 대통령이 신임할 수도 있고 비교적 자유로운 신분인 이 의원 등이 거론된다. 남북정상회담을 했던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 시절을 비롯해 그동안 남북 고위급의 접촉 때에는 정보기관장이 주로 창구였다는 점에서 원세훈 국가정보원장이 북측의 창구와 만날 가능성이 더 높다는 관측도 나온다. jrlee@seoul.co.kr
  • [국감 하이라이트] 玄통일 “남북 비밀회동설 아는 바 없다”

    [국감 하이라이트] 玄통일 “남북 비밀회동설 아는 바 없다”

    23일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의 통일부 국정감사에서는 최근 주목 받고 있는 남북 정상회담이 주로 도마에 올랐다. 남북 비밀회동설의 진의와 남북 정상회담의 가능성에 대한 질의가 이어졌다. ●현인택 “북핵 해결이 회담 선결조건”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이 자리에서 “우리 쪽 고위 당국자와 북한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이 싱가포르에서 만났느냐.”는 한나라당 정옥임 의원의 질의에 “아는 바 없다.”고 답했다. “만약 정상회담을 한다면 장소는 어디인가.”라는 질문에도 “가정적 질문에 답변하기 어렵다.”며 비껴갔다. 현 장관은 “가장 중요한 사안은 북핵문제 해결이라는 측면”이라며 남북 정상회담의 선결 조건을 언급했다. 민주당 이미경 의원이 “북핵문제 해결을 위해서라도 정상회담을 할 수 있지 않느냐.”고 묻자 현 장관은 “현재로선 여러가지 단계적으로 남북관계가 진전되는 상황이 있어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라고 답했다. 한나라당 홍정욱 의원이 “핵 문제가 반드시 다뤄지지 않더라도 (정상회담에 대해) 열린 자세를 가질 수 있느냐.”는 질문에는 “핵 문제에 대한 기본적인 의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한나라당 간사인 김충환 의원은 “직접 만나는 것이 상대방의 의중을 알고,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기 때문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일 필요가 있다.”고 주문했다. 민주당 박주선 의원은 “정상회담을 기왕 추진할 것이라면 원샷 타결이 아닌 점진적 개선에 목표를 두고, 전제조건 없이 빨리 개최해 대통령 임기 중에 이뤄지는 게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안병만 교육 “외고 대책 연말까지 마련” 이날 교육과학기술부에 대한 국회 교육과학기술위의 국감에서는 초반부터 ‘외국어고 폐지’ 문제가 논란이 됐다. 안병만 장관은 “입학사정관의 안정성을 확보하고 사교육비를 절감하는 등의 외국어고 관련 대책에 대해 연말까지 개선 방안을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민주당 김영진 의원은 의사진행발언을 통해 “정부가 외국어고의 특성화고 전환 방침을 사실상 정하고, 특정 여당의원을 통해 이 방침을 교육 수요자에게 고지한 것이라는 의혹을 떨칠 수 없다.”고 지적했다. 같은 당 안민석 의원도 “야당이 ‘외국어고 폐지’를 주장했을 때는 수월성 교육을 위해 필요하다고 하더니 이제 와서 바뀐 것은 선거를 앞두고 여론을 호도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이에 한나라당 김선동 의원은 “여당 의원들과 정부와의 교감은 일절 없었다.”고 일축했다. 같은 당 이군현 의원은 “이명박 정부의 교육철학은 자율과 다양성, 경쟁인데 외국어고를 획일적으로 전환, 규제하는 것은 문제가 있고 지방교육자치 정신도 훼손하는 것”이라며 신중한 접근을 당부했다. 김지훈 허백윤기자 kjh@seoul.co.kr
  • 남북 또 정상회담 접촉설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접촉설이 계속 흘러나오고 있다. 정부는 일단 부인하고는 있지만 액면 그대로 믿을 수 없는 분위기도 감지된다. KBS는 22일 “지난주 싱가포르에서 남북 간에 비밀접촉이 있었다.”면서 “이 자리에서 정상회담 문제가 논의됐다.”고 보도했다. 북측에서는 대남정책을 총괄하는 김양건 통일전선부장과 실무책임자인 원동연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 실장이 참석한 것으로 KBS는 보도했다. 북측이 이번 회동을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남측에서는 통일 분야 고위 관계자가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남측은 북한의 핵폐기에 대한 근본적인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정상회담이 경제적 지원을 전제로 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강조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정상회담은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 형식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북측은 김정일 위원장의 경호 문제 등을 들어 난색을 표시해 의견일치에는 이르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런 보도에 대해 청와대의 고위관계자는 “모른다.”면서 “이런 일은 통상 소수만 알 수 있다.”고 말했다. 청와대의 다른 관계자는 “(정상회담을 위해) 김양건 부장을 만난 정부 당국자는 아무도 없다.”고 부인했다. 정부 당국자가 아닌 정치인이나 교수 등은 만났을 수도 있다는 얘기로 들릴 수 있는 말이다. 지난 20일에는 한나라당 이상득 의원이 김양건 부장과 만났다는 보도도 있었다. 이 보도에 대해 이 의원은 즉각 “김 부장 얼굴도 모른다.”고 부인했다. 청와대는 “헛다리를 짚은 보도”라고 일축했다. 그러나 싱가포르 접촉설에 대해서는 정부의 부인 강도가 이상득 의원 접촉설보다는 다소 떨어진다. 일각에선 정부 내 남북관계 전반과 정상회담 등을 위한 태스크포스(TF)가 꾸려져 있다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다. 남북정상회담이 비밀스럽게 추진되는 것이기 때문에 정부의 공식라인에서는 정확히 모를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오다. 비선라인 등 극히 일부만 남북정상회담 추진에 관련돼 있기 때문이다. 최근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접촉설이 나오는 것은 남북관계가 최근 전반적으로 개선되고 있는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 지난 10일 원자바오 중국 총리는 이명박 대통령을 만난 자리에서 “김정일 위원장이 미국뿐 아니라 한국과도 관계개선을 하려고 한다.”는 말을 전했다. 이에 대해 이 대통령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는 북한의 의사를 환영한다.”고 말했다. 원 총리를 연결고리로 남북정상이 간접적으로 대화의지를 보인 셈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서도 한국과 관계개선을 하는 게 바람직하다는 점도 남북정상회담설이 요즘 흘러나오는 이유로 꼽힌다. 정부의 고위 관계자는 “정상회담은 필요하지만 회담을 위한 회담은 의미가 없다.”는 입장이다. 북한이 비핵화를 하겠다는 확실한 의지가 있어야 정상회담이 이뤄질 수 있다는 뜻이다. 남북 모두 정상회담의 필요성은 느끼고 있다는 점에서 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될 가능성은 있지만 북한의 태도가 바뀌지 않는 한 조기에 이뤄지기는 힘들다는 게 대체적인 의견이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오늘의 눈] 적극적 외교와 전략적 외교 혼동 말아야/김균미 워싱턴특파원

    [오늘의 눈] 적극적 외교와 전략적 외교 혼동 말아야/김균미 워싱턴특파원

    청와대를 ‘뒤집어 놓았던’ 미국 국방부 당국자의 ‘남북정상회담 관련 발언’은 18일 미국 백악관의 “오해가 있었다.”는 해명으로 일단락됐다. 일요일 저녁 백악관 공보 담당자가 한국 워싱턴특파원 대표에게 전화를 걸어 해명한 것은 전례가 없다. 그만큼 사안이 중대했다고도 볼 수 있지만 청와대의 해명 요구가 얼마나 강했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남북관계와 북·미관계가 미묘한 시점에 남북정상회담이 물밑에서 추진되고 있는 것 아니냐는 확대해석을 막는 데는 성공했지만 지난달 이명박 대통령의 ‘그랜드 바겐’ 뉴욕 미국외교협회 연설에 이어 이번 일을 처리하는 청와대 등 한국 정부의 대응을 보면 걱정이 앞선다. 한 달새 불거진 2건의 ‘사건’은 공교롭게도 미국의 대외 및 안보정책 핵심부서인 국무부와 국방부의 한국 등 동아시아지역 정책을 총괄하거나, 관계 있는 고위 당국자들과 관련이 있다. 이들의 발언에 대해 미 정부 안팎에서도 ‘부적절했다.’는 지적이 있다고 해도 사건 직후 한국 정부의 대응은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한국 정부는 고위 당국자의 비공개 브리핑이라는 형식을 빌려 2건의 책임이 미국 측에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해명 과정에서 ‘비외교적’ 언사도 걸러지지 않고 쏟아졌다. 비공개 배경 설명 브리핑이라고는 하나 발언내용이 상대국과 당사자 귀에 들어가는 건 시간 문제다. 누구나 자신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지적당하면 기분 상하기 마련이다. 당장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행동하겠지만 9년만에 들어선 미국 민주당 정부와의 인적 네트워크 구축이 시급한 상황에서 일련의 껄끄러운 사건들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할 말은 하고 매달리지 않겠다는 당당하고 적극적인 외교와 전략적인 외교를 혼동해서는 안 된다. 상대의 실수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국가간 관계에서, 더욱이 동맹관계에서는 이를 지적하는 방법도 신중할 필요가 있다. 친한(親韓) 인맥은 하루아침에 구축되는 게 아니다. 김균미 워싱턴특파원 kmkim@seoul.co.kr
  • 靑 “핵폐기 우선” 회담 가능성 제동

    청와대가 18일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방북을 초청했다는 미국측의 발언과 관련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핵을 폐기해야 남북 정상회담이 가능하다는 기존의 입장을 거듭 확인하며 남북정상회담 가능성에 제동을 걸고 나섰다.●北, 여러경로로 관계개선 원해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기자들과 만나 “정보 공유 차원에서 (정상회담 가능성 여부에 대해) 미국 정부 쪽에 전달했는데 미국 내부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며 “이 대통령과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지난 한·중 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이 이뤄지면 남북정상회담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눈 적은 있다.”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이 대통령은 지난 8월 북한이 보낸 (김대중 전 대통령의) 조문사절단과 면담했을때에도 비슷한 뜻을 전했고, 그동안 여러 경로로 남북관계 개선을 원한다는 뜻을 전해왔다.”고 말했다.이와 관련, 청와대 이동관 홍보수석은 “최소한 남북정상회담 문제에 관한 일관된 원칙과 대의에 입각해 대응해 나갈 것이라는 점을 다시 한번 분명히 밝힌다.”며 “정상회담을 포함한 남북대화에 열린 자세로 대응하되, 원칙에 어긋나거나 정략적 계산을 갖고 하는 일은 없다.”고 설명했다. 이는 청와대가 남북대화에 관한 지나친 기대감을 증폭시키기보다는 북한의 태도를 보아가며 신중하게 접근하겠다는 기존의 태도를 재확인한 셈이다.이 대통령은 대북 정책에 대해서는 북측이 먼저 변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북한이 핵 포기를 통한 개방에 나설 때 대북 지원 규모를 높여 간다는 전략 방침을 천명한 상태다.●이른 시일내 만남 어려울 듯정상회담 성사 여부도 이 같은 실용주의 관점에서 가늠해볼 수 있다. 북핵 등 근원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상황에서 이벤트식 정상회담에 응할 이유가 없다는 게 청와대측의 판단이다. 북한은 미국뿐 아니라 우리 정부와의 대화를 시도하지만 아직 핵 문제에서는 자세를 전환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다는 게 청와대의 판단이다. 이에 따라 이른 시일내 이 대통령과 김 위원장의 만남이 성사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게 대체적 전망이다.미 국방부 관계자의 발언을 당국자의 단순한 말실수로 보기는 어려운 측면도 있다. 제프 모렐 국방부 대변인은 이날 브리핑에서 이 당국자의 발언에 문제가 있었는지에 대한 질문에 답변을 회피했다. 이 대통령이 지난 15일 주한 외교관들을 청와대로 초청한 다과회에서 “북한도 이제는 핵을 포기할 때가 됐고 (지금이) 좋은 기회라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해 줄 것을 기대하고 있다.”고 말한 것이 핵포기를 전제로 한 남북정상회담 수용 의사를 밝힌 것으로도 해석된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北, 이대통령 초청”… 靑은 부인

    │워싱턴 김균미특파원·이종락기자│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초청했다고 미국 국방부의 고위 당국자가 밝혔다. 이 당국자는 지난 14일(현지시간) 로버트 게이츠 미 국방장관의 한국, 일본, 슬로바키아 순방에 앞서 설명하는 자리에서 최근 북한이 유화적인 태도를 보인 사례를 들면서 김 위원장의 이 대통령 방북 초청 사실을 언급했다. 이 당국자는 그러나 이 같은 방북 초청이 언제, 어떤 식으로 이뤄졌는지 등 구체적인 내용은 거론하지 않았다. 미 국방부 고위 관계자는 순방계획을 설명하는 자리에서 “북한문제와 관련해 다음 단계에 일어날 일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북한은 최근 들어 갑자기 유화국면(charm phase)에 들어섰다.”면서 “김정일 위원장이 이명박 대통령의 평양 방문을 초청했으며, 원자바오(溫家寶) 중국 총리가 평양에 갔다.”며 김 위원장의 이 대통령 방북 초청 사실을 언급했다.이에 대해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이날 “이 대통령과 원자바오 중국 총리가 지난 한·중정상회담에서 ‘남북관계의 진전이 이뤄지면 남북정상회담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는 이야기를 나눴다.”고 밝히고 “정보공유 차원에서 미 행정부 쪽에 전달했는데 미국 내부 커뮤니케이션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밝혔다.이동관 홍보수석은 “이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 민족의 장래를 위해서라면 언제든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다는 입장을 여러 차례 강조해 왔다.”며 “그러나 만남을 위한 만남은 안 된다. 특히 정치적 전술적 고려를 깔고 진정성이 없이 만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강조해 왔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오는 2012년 4월 이양하기로 예정돼 있는 전시작전통제권과 관련, 원만하게 전환이 이뤄질 것이라고 전망하면서도 “(최종 전환결정은) 2012년의 상황이 어떨지에 기초해 이뤄질 것”이라고 밝혔다. 이 당국자는 “전작권 합의 내용에는 전작권 전환이 이뤄지기 이전에 (한반도의) 정치적 조건에 대한 지속적인 평가와 명백한 결정을 하도록 매우 분명하게 돼 있다.”고 밝혀 전작권 전환시점의 남북관계 등 한반도 정치·안보상황에 따라 시기가 조정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았다.kmkim@seoul.co.kr▶관련기사 6면
  • 현인택 통일 한·미클럽 강연

    현인택 통일 한·미클럽 강연

    현인택 통일부 장관은 16일 “남북대화에서 모든 문제가 논의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거기에는 당연히 핵문제도 포함돼야 한다.”고 말했다. 현 장관은 이날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한·미클럽 세미나에 참석, “(남북대화는) 북핵문제를 포함한 다른 문제를 같이 논의하는 장이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면서 이같이 밝혔다. 현 장관은 “남북관계를 우회하거나 비핵화를 미룰 수 없다.”면서 “(비핵화와 관련) 북한의 근본적이고 과감한 결단을 요구한다.”고 밝혔다. 그는 “북한이 핵 문제를 넘어 대화에 나선다면 한반도 문제를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현 장관은 “최근 북한이 (남북관계에서) 태도가 변하고 있는 것을 주시하고 있다.”면서 “바라는 수준에는 미치지 않지만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강경하게 나왔던) 지난 1년 반 동안의 모습과는 다르다.”고 긍정평가했다. 현 장관은 “그러나 북한은 근본적인 태도 변화를 보이고 있지는 않다.”고 말했다. 그는 ‘북핵 문제 진전을 위한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할 의사가 있느냐.’는 질문에는 “검토한 바 없다.”면서 “남북간 고위급 회담이 어떤 문제 해결을 위한 것이라면 검토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검토하고 있지 않다.”고 말했다. 현 장관은 “지금은 남북관계의 국면 전환기”라면서 “북한이 미국 및 일본과 관계를 정상화하고 경협을 추진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는 북·미 대화와 관련, “6자회담을 대체하는 양자대화가 아니라 6자회담으로 가기 위한 양자 대화로 보고 있다.”고 말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 YS “임진강 참사 용납못해”

    김영삼 전 대통령은 11일 임진강 참사에 대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 일어났다.”면서 “인도적인 입장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이라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은 이날 서울 상도동 자택에서 한나라당 정몽준 대표의 예방을 받고 “내가 재임 시절에도 그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그때는 사람이 죽지 않았다.”면서 “다섯살 먹은 어린아이가 죽었다고 하니 가족 입장에서는 어떻겠느냐.”고 말했다. 그는 또 북한의 의도적인 방류였다는 현인택 통일부 장관의 입장 표명과 관련, “통일부 얘기가 옳다. 북한은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이 판단하기 어려운 일만 해왔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김 전 대통령은 “대(對)북한 관계에서는 여야의 이야기가 같아야 한다.”고 조언했다. 김 전 대통령은 또 재임시절 김일성 주석의 사망으로 남북정상회담이 무산된 것을 언급하며 “그때는 김일성이 남북관계에서 양보하려 했던 때”라면서 “정상회담이 예정대로 진행됐으면 많이 변했을 텐데 정말 아쉽게 됐다.”고 말했다. 김 전 대통령은 정 대표의 취임에 대해 “축하한다. 그러나 잘 해야 한다.”면서 “한나라당은 다수의 국민이 지지하고 있으니까 책임이 중하다.”고 당부했다. 김지훈기자 kjh@seoul.co.kr
  • [서울광장] 남북 정상회담 빠를수록 좋다

    [서울광장] 남북 정상회담 빠를수록 좋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남북정상회담에 사실상 실패했다. 그는 집권 중반기까지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만나는 일을 꺼렸다. 집권 2년차인 2004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정상회담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그해 가을 제주에서 고이즈미 일본 총리와 회담을 가진 뒤 기자회견에서 남북정상회담은 시기상조라고 했다. 북핵문제가 해결돼야 김 위원장을 만날 수 있다고 선을 그었다. 정상회담을 북핵 해결과 연계함으로써 ‘북핵의 덫’에 걸린 것이다. 특검으로 대북 송금을 파헤친 그로서는 김 위원장과의 만남이 썩 내키지 않았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노 전 대통령은 비공식 라인을 통해 북측과 대화를 시도했던 것 같다. 그의 최측근 안희정씨와 대북사업가 권오홍씨의 접촉설 등이 무성했다. 그는 집권 말기에 가서야 비공식 라인으로는 북측 진의를 파악하기 어렵다는 한계를 토로하면서 공식 라인을 활용해 대북 접촉을 해나갈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김만복 국가정보원장-김양건 통일전선부장 라인이 가동됐고, 정상회담이 성사됐다. 2007년 10월4일 노 전 대통령과 김 위원장이 분단 사상 두번째 정상회담을 가졌지만, 너무 늦었다. 임기를 불과 4개월여 남겨 놓았고, 18대 대선전이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레임덕의 정점에서 실질적인 합의와 진전을 기대하기는 불가능했다. 김 위원장의 측근 중의 측근인 김기남 노동당 비서 일행이 지난 주말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했다. 이 대통령은 김 위원장이 산삼이라도 먹어야 하는 게 아니냐면서 김 위원장의 건강을 걱정했다. 이에 김기남 비서는 “(김 위원장의)업무량이 많고, (저희가)보좌를 잘하지 못해서….”라면서 말을 흐렸다고 한다. 청와대는 이 자리에서 정상회담 얘기는 오가지 않았다고 설명한다. 정상회담이 거론되지 않았지만 이 대통령이 김 위원장 건강을 걱정하고, 체제 문제를 언급했다는 사실은 정상회담의 여건을 성숙시키기에 충분할 것이다. 이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에서 우리 정부는 언제, 어떠한 수준에서든 남북 간의 모든 문제에 대해 대화와 협력을 시작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서 이미 정상회담의 문을 열어놓고 있다. 남북이 어제 적십자 회담에서 올 추석 이산가족 상봉 일정과 규모 등에 합의한 것은 남북관계 개선의 신호탄이다. 주변 여건과 맞물려 고위급 회담이나 장관급 회담이 재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북한은 남한과의 관계개선이 급한 듯하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김 위원장의 건강과 후계체제 구축도 중요한 동기가 될 것이다. 후계체제를 흔들지 않겠다는 약속은 정상 만남에서나 가능한 일이고, 한반도 위기관리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본다. 국내에서는 유엔의 제재가 진행 중이고, 북핵 해결도 되지 않은 터에 정상회담은 시기상조라는 목소리도 나온다. 이런 주장은 이 대통령에게 노 전 대통령의 실패를 되풀이하라는 주문과 다름없다. 이 대통령이 광복절 경축사에서 한반도 신평화구상의 시점을 북한이 핵무기 포기를 ‘결심’할 때로 유연하게 설정한 점은 적절하다고 할 것이다. 지금은 대북 특사 파견을 검토해야 할 때다. 김기남 비서 일행이 ‘특사 조문단’의 명칭을 달고 왔기에 답례 형식의 대북 특사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이다. 대북 특사는 정상회담 논의로 이어질 수 있다. 이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은 노 전 대통령의 실패를 되풀이해서는 안 된다. 정상회담은 빠를수록 좋을 것이다. 박정현 논설위원 jhpark@seoul.co.kr
  • 靑 “北, 남북정상회담 제의 없었다”

    청와대는 24일 북한 조문사절단이 전날 이명박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 등에서 ‘남북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메시지를 전달했다는 일부 언론 보도와 관련, “남북정상회담 관련 사항은 일절 거론된 바 없다.”고 공식 부인했다. 청와대는 이날 외교안보수석실 명의의 해명자료에서 “어제 이명박 대통령의 북한 조문단 접견에서는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일반적인 논의가 있었을 뿐”이라면서 남북정상회담 제의를 강력하게 부인했다. 이동관 대변인도 브리핑에서 “분명히 말하지만 어제 접견에서 그와 같은 언급은 없었다.”고 잘라 말한 뒤 “지금 단계에서 남북정상회담을 제안하는 것은 상식에서 벗어난다.”며 “1년 반 동안 그렇게 경색국면이었는데 북측도 갑자기 정상회담을 제의하겠느냐. 우물 가서 숭늉 달라는 격”이라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청와대 고위 관계자는 “청와대 접견에서 남북정상회담과 관련한 이야기는 전혀 나오지 않았다.”며 “다른 경로를 통해 이 같은 뜻을 전했다고 하더라도 이는 정식 제안으로 볼 수 없다.”고 말했다. 청와대 핵심관계자는 22일 김양건 통일전선부장으로부터 “남북간 모든 당면문제를 해결하려면 당국간 대화가 필요하고, 역시 정상간에 만남이 이뤄져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듣고 청와대에 전달한 것으로 알려졌다. 청와대는 이에 대해 북측의 공식제안이라기보다는 타진 수준이라는 입장을 정리하고, 이 대통령이 북측 조문단을 접견할 때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고 밝혔다. 이종락기자 jrlee@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민주화·평화정신 영원히 남을 것”

    여야 정치권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린 23일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화해에 대한 고인의 업적을 기리며 일제히 영면을 기원했다. 한나라당 윤상현 대변인은 이날 논평에서 “우리 국민은 위대한 지도자를 보내야만 하는 마음에 슬픔이 크다. 이제 슬픔을 승화시키는 새로운 시작을 함께해야 한다.”면서 “고인의 민주화와 인권, 화해와 평화를 위한 정신은 영원히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노영민 대변인은 현안 브리핑을 통해 “아쉽고도 아쉽다. 이 이별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고인이 떠나신 지 엿새 동안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확인했다.”면서 “이제 남기신 뜻대로,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겠다. 더 이상 민주주의와 남북관계가 훼손되지 않도록 유지를 받들겠다.”고 말했다. 고인의 핵심 측근인 민주당 박지원 의원은 “고인은 2000년 6·15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분단 반세기 만에 진정한 화해·교류·협력의 시대를 열었지만 현재는 남북대화가 단절됐다.”면서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특사 조문단이 빈소를 방문해 남북대화의 물꼬를 두 번째 다시 열게 됐다.”고 언급했다. 자유선진당 박선영 대변인은 “서거를 계기로 망국적 지역감정이 해소되고 동서와 남북 화합의 계기가 된다면 고인의 공과가 보다 더 가치있게 평가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민주노동당 우위영 대변인은 “고인이 호소한 ‘행동하는 양심’을 가슴에 새기고 민주주의가 회복되고 남북관계가 전진하는 새 희망을 영전에 바치겠다.”며 애도를 표했다. 진보신당 김종철 대변인은 “장례절차는 끝났지만 고인의 뜻인 민주주의 발전과 남북화해는 계속될 것으로 믿는다.”고 말했다. 학계, 종교계, 문화계 및 진보·보수단체들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유지를 받들어 국민통합을 이끌어내는 데 힘을 쏟아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 전 대통령과 함께 옥고를 치르는 등 민주화운동 동지였던 고려대 이문영 명예교수는 “일생 동안 김 전 대통령이 좌우명으로 삼았던 ‘행동하는 양심’을 이해하자.”고 말했다. 그는 “정치권, 시민사회단체, 국민들이 지금 그를 추모하는 마음을 이어가 도덕성과 행동하는 습관을 잊지 않는다면 그의 뜻을 제대로 이어갈 수 있다.”고 덧붙였다. 희망제작소 상임이사인 박원순 변호사는 “김 전 대통령을 보내며 우리는 그가 목숨처럼 여겼던 민주주의와 평화적 남북관계 등을 회복하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면서 “김대중, 노무현 정부가 쌓은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적 통일전략을 초석으로 놓고 현 시대의 의제들을 고민해 미래로 나아가야 한다.”고 말했다. 참여연대는 “국제사회에서도 인정하는 대한민국의 정신적 지주가 떠나가신 것에 비통함을 금치 못하겠다.”면서 “이제 그의 정신을 물려받아 새로운 대한민국을 만들고 통일로 나아가야 한다.”고 밝혔다. 김 전 대통령과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던 보수 성향의 단체들조차 그가 남긴 유산들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바른사회시민회의는 “김 전 대통령은 우리사회의 발전축이었던 민주화를 성숙시킨 지도자”라며 “이 부분은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이견이 있을 수 없다.”고 밝혔다. 이어 “보기 드문 큰 그릇의 지도자였고 IMF 외환위기 등 국가적 절체절명의 위기를 현명하게 극복할 수 있는 지도력을 발휘한 점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고 밝혔다. 자유총연맹 관계자는 “김 전 대통령을 잃은 것은 단순히 한 인물의 죽음이 아닌, 우리사회 한 세대가 끝났다는 것을 의미한다.”면서 “민주화와 남북화해, 경제위기 극복 등에서 그가 해낸 일들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말했다. 이날 오후 1시30분부터는 서울광장에서 김 전 대통령을 떠나보내는 추모문화제가 열렸다. 김 전 대통령의 1987년 대선 연설, 2000년 남북정상회담 후 귀국 기자회견 등 추모영상이 상영된 후 신형원 경희대 교수가 추모곡 ‘당신은 우리입니다’를 부르자 곳곳에서 시민들의 울음이 터져 나왔다. 이어 국악인 오정해씨의 공연과 황지우 시인의 추모시 낭독이 있었다. 추모문화제에 참석한 시민들은 김 전 대통령의 운구행렬이 지나갈 때까지 자리를 지켰다. 주현진 박건형기자 jhj@seoul.co.kr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겁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국장(國葬) 장의위원장인 한승수 국무총리는 23일 오후 국회에서 열린 영결식에서 조사(弔辭)를 낭독했다. 다음은 조사 요지. 우리는 오늘 나라의 큰 정치지도자이신 김대중 전 대통령님과 영원히 이별하는 자리에 함께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쾌차하시기를 간절히 소망했던 우리들은 애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습니다. 대통령님은 평생 민주주의와 인권, 평화와 민족화해를 실현하기 위해 헌신해 오셨습니다. 대통령님의 이러한 발자취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로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대통령님은 헌정사상 처음으로 선거에 의한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 정치발전의 확고한 기틀을 닦으셨습니다. 분단 이후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통해 남북화해와 교류협력의 큰 길을 열고, 2000년에는 노벨평화상을 수상하여 대한민국의 위상을 드높인 일은 우리 모두의 자랑이었습니다. 고인의 일생은 참으로 파란만장한 삶이었습니다. 생전에 당신 스스로를 추운 겨울에도 온갖 풍상을 참고 이겨내는 ‘인동초’에 비유했던 것처럼 투옥과 연금, 사형선고와 망명에 이르기까지 험난했던 삶이었습니다. 민주화의 기적을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대통령님처럼 민주주의에 대한 강인한 신념과 불굴의 용기를 가진 지도자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대통령님이 이루고자 하셨던 민주주의 발전과 평화적 통일 그리고 국민 통합에 대한 열망은 우리의 미래를 열어 가는 길잡이가 될 것입니다. 특히 어려운 이웃과 소외된 계층을 위한 대통령님의 관심과 배려도 오늘의 우리들이 한층 더 받들어야 할 것입니다. 대통령님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우리 사회의 화해와 통합에 크나큰 역할을 하셨습니다. 대통령님은 생전에도 늘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모자라 동서로 갈라지고 계층 간에 대립하고 세대 간에 갈등해서는 우리의 미래는 없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우리는 이러한 대통령님의 유지를 받들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이제야말로 지역과 계층, 이념과 세대의 차이를 떠나 온 국민이 한 마음으로 새로운 통합의 시대를 열어가야 하겠습니다. 이제 대통령님은 생전의 그 무거운 짐 모두 내려놓으시고 편히 영면하시기를 빕니다. 그리고 언제까지나 우리 겨레의 앞길을 밝혀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온 국민과 더불어 삼가 후광(後廣) 김대중 전 대통령님의 명복을 빕니다.
  • [특별기고-김대중 전대통령 영전에 부쳐] ‘대화의 힘’ 믿은 뼛속깊은 휴머니스트

    [특별기고-김대중 전대통령 영전에 부쳐] ‘대화의 힘’ 믿은 뼛속깊은 휴머니스트

    그는 ‘대화의 힘’을 신봉했다. 뼛속깊이 민주주의자였다. 정치의 정도는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 집단을 향해 대화와 설득으로 합의와 타협을 이루는 과정이라 했다. ‘공산국가를 향한 억압과 고립화 정책은 결코 성공할 수 없다. 오로지 개방과 대화만이 성공으로 가는 길이다.’라고 흔들림없이 믿었다. 역사발전은 이를 실증하고 있다. 철의 장막, ‘중공’의 빗장을 열게 한 것은 닉슨이 먼저 찾아가 대화했기 때문이다. 그는 자신을 감옥으로 몰아 넣고 생명을 위협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의 ‘7·7선언’을, 그 대화의 자세를 높이 평가했다. 그래서 그는 납치와 투옥, 감시와 연금 등으로 자신을 모질게 탄압한 박정희 전 대통령과 여러 차례 대화를 시도했다. 그는 독재정권을 결코 무시하지 않았다. 그들과의 ‘적대적 경쟁’이 아니라 ‘형제적 경쟁’을 원했다. 상대방을 파멸시키는 경쟁이 아니라 경쟁자가 함께 성장할 수 있기를 원했다. 늘 일방통행이 아닌 쌍방통행을 갈구했다. 감옥 안에서도 그랬다. 그는 추위를 몹시 타는 체질이었다. 그런데도 머리맡의 물그릇이 얼어 터지는 혹한의 감옥에서도 그는 결코 독재자를 증오하지 않았다. 대신 한달에 한 장만 주어지는 봉함엽서에 깨알 같은 작은 글씨로 가족과 대화를 시도했다. 엽서 주소란까지 촘촘히 메운 사연은 그가 참으로 자잘하고 섬세한 여성적 심성을 가진 남성임을 보여 준다. 이 ‘양성적’인간은 놀랍게도 영하의 감옥에서 오히려 진정한 화해와 용서의 경지에 닿는다. 증오와 복수가 아니라 오래도록 참고 기다리는 사랑의 기술을 터득한다. ‘대화지상주의자’인 그는 1980년대에 택할 수밖에 없었던 ‘장외투쟁’을 싫어했다. 그는 민의의 전당인 국회를 사랑했다. 대의정치가 맺은 국민과 대표자 간의 계약과 신의를 존중하고자 했다. 그래서 재임기간에는 거부권을 한번도 행사하지 않았다. 그의 생각으로는 너무도 부당했지만 국회의 결정을 부정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0년 6·15남북정상회담이 성사된 것 역시 그의 오랜 인내의 결실이다. 그는 북한이 거부하는 조선일보 기자의 방북취재와 김일성 주석이 잠들어 있는 금수산궁전 참배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채 평양으로 향했다. 그는 오히려 평생 동안 자신을 음해하고 괴롭힌 보수신문의 취재허가를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리고 마침내 성공했다. 누구 못지않은 빼어난 논리와 달변을 갖춘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양에 머무는 내내 북한 지도부의 말을 ‘경청’하기만 했다. 그는 극도로 자신의 말을 아꼈다. 대화를 위한 선결조건이었기 때문이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사인여천(事人如天)’을 좌우명처럼 여겼다. 친지들에게 자주 붓글씨로 써주었다. ‘때로 잘못 판단하기도 하고 흑색선전에 현혹되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민 이외에는 믿을 대상이 없었던’ 그는 오로지 국민의 힘에 철저히 의지했다. 1987년 6월 민주항쟁으로 사면복권되었을 때 그는 국민에 대한 그의 무한신뢰를 확인했다. 일생에서 가장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는 ‘가난은 나라가 구제해야 한다.’고 결심했다. 자본주의 정글에서 소외되고 뒤처지는 이들이 최소한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유지하며 살 수 있도록 국가가 보호해야 한다고 믿었다. ‘기초생활보장제’는 간난신고를 거듭했다. 재원도 부족하고 일각에서는 이념공세를 퍼부었다. 그는 굽히지 않았다. 이제 민주공화국 대한민국에서는 굶거나 헐벗는 이들은 없다. 휴머니스트인 지도자의 힘은 그래서 존귀하다. 그는 ‘가난은 나라도 구제못한다.’는 왕조의 수준을 ‘공화국’으로 변환시켰다. 이러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고 군사정권이 조작하고 유포한 거짓들이 아직도 유령처럼 배회하고 있다. 더 기다려야 할까? 만인을 잠시 속일 수 있고, 소수를 오래 속일 수 있지만 만인을 영원히 속이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을 믿자. 한 시대 대중의 소망을 현실에서 구현하는 이를 두고 우리는 영웅이라 부른다. 김대중, 그는 진정 민주주의와 평화를 꿈꾸는 우리들의 캡틴이었다. 실로 너무 멀고도 험한 길을 외롭게 걸어온 당신. 이제 더는 음해와 핍박이 없는 하늘에서 부디 평안을 누리소서. 유시춘 전 국가인권위상임위원
  •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100일간의 ‘메모’… 인생소회 - 현정부 인식 등 꼼꼼히

    [김대중 前대통령 국장] 100일간의 ‘메모’… 인생소회 - 현정부 인식 등 꼼꼼히

    ‘행동하는 양심’은 마지막까지 무엇을 기록하고 싶었을까.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생애 마지막으로 기록한 100일간의 일기 가운데 일부가 21일 공개된다. 김 전 대통령 쪽의 최경환 비서관은 20일 “고인이 입원하기 한 달 전까지 쓴 일기 가운데 일부를 40쪽 분량의 소책자로 만들어 언론에 공개하고 전국 분향소에 보내겠다.”고 밝혔다. 책자의 제목은 ‘김대중의 마지막 일기-인생은 아름답고, 역사는 발전한다’이다. 일기는 지난 1월1일부터 6월4일까지 고인의 하루하루에 대한 소회와 단상을 다이어리에 메모 형식으로 기록한 것이다. 최 비서관은 “일기를 쓰신 날이 100일 정도 된다. 그 가운데 30일치를 소개하겠다.”고 전했다. 일기의 상당부분이 한자로 돼 있어 김 전 대통령 쪽은 이를 한글로 풀기로 했다. ●100일 가운데 30일치 소개 일기에는 지난 인생에 대한 소회와 부인 이희호 여사에 대한 애틋함,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등 저명 인사들과의 만남 등이 담긴 것으로 알려졌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에 대한 심경과 현 정부의 대북정책에 대한 인식도 포함된 것으로 전해졌다. 고인은 생전에 ‘메모광’으로 불릴 정도로 꼼꼼히 기록하는 습관을 가졌던 만큼 한반도 상황과 국내 정치 등 민감한 현안에 대한 심경이 상세히 담겼을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고인에 대한 추모열기에 더해 여권이 역풍을 맞을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최 비서관은 “상당히 중요한 내용이 들어 있다. 책을 열어본 순간 전율을 느꼈다.”고 말했다. ●DJ가 직접 구술한 동영상도 공개 이와 함께 고인이 생전에 자신의 인생역정을 직접 구술한 방대한 분량의 동영상도 공개된다. 고인은 지난 2006∼07년 김대중 도서관이 진행한 구술사(Oral History) 프로젝트에 참여, 41회에 걸쳐 총 46시간 분량의 방대한 영상물을 녹화했다. 동영상에는 하의도에 태어나 성장한 과정과 정치역정을 이기고 집권한 것을 비롯해 IMF 외환위기 극복, 남북정상회담 개최, 한반도 평화교류시대 개막 등의 성과에 대한 자전적 목소리가 담겨진 것으로 알려졌다. 곧 출간될 예정인 고인의 자서전과 미공개 옥중서신도 관심을 끈다. 옥중서신에는 고인이 이 여사와 주고 받은 ‘우유팩 편지’ 사연이 실린 것으로 전해졌다. 사연은 고인이 1976년 3·1 명동 구국선언사건으로 진주교도소에 수감돼 있다가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된 뒤 1년 남짓 감금에 가까운 생활을 하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유신체제를 비판하며 선언문에 서명했다가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구속된 인사들이 77년 석방됐지만, 고인은 마지막 석방기회를 앞둔 그해 12월18일 서울대병원으로 이송돼 강제치료를 받았다. 군사정권은 고인이 입원한 9층 병실 주변에 보초를 세우고 창문까지 막았다. 서신 왕래는 물론 면회도 통제됐다. 고인은 병실에서 우유를 먹고 난 뒤 우유팩을 모아 뒀다가 못으로 글을 써서 유일한 면회객인 이 여사에게 전했다. ●옥중서신중 우유팩 편지 내용도 관심 ‘우유팩 편지’에는 ‘나의 감금생활과 처지를 바깥 사람들에게 알리고 상의하라. 외신에게 알려라.’는 내용이 주로 담겼다. 이 여사는 이를 면회갈 때 가져간 반찬통에 담아 몰래 밖으로 날랐다. 자서전 출간 관계자는 “편지 내용이 희미해 해독이 어려웠지만 엄혹했던 시절에도 민주화에 대한 의지를 꺾지 않았던 고인의 발자취가 느껴졌다.”고 전했다. 김지훈 이재연기자 kjh@seoul.co.kr
  • [김 전대통령 서거] DJ·재계와의 인연은

    김대중 전 대통령은 이전 정권과 달리 재계와 매끄러운 관계는 아니었다. 금융위기 극복이라는 과제를 안고 출범한 국민의 정부는 강력한 재벌개혁을 추진해야 했기 때문이다. 중복된 부분을 분리해 다른 기업으로 넘겨주고, 선택과 집중을 요구하는 이른바 ‘빅딜’을 기업들이 달가워할 리 없었다. 하지만 집권 1년여 만에 외환보유고가 500억달러를 웃돌고,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를 졸업하면서 재계와의 관계도 조금씩 개선됐다. 김대중 전 대통령과 가장 깊은 인연을 맺은 기업은 현대그룹이다. 2000년 6월15일 첫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과정에서 현대그룹의 도움을 받았고, 현대그룹은 이를 통해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건설에 착수하는 등 대북 사업을 활성화할 수 있었다. ●‘정상회담 조력’ 현대와 깊은 인연 현대그룹은 대북사업으로 인한 어려움도 감내해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돼 대북송금 문제가 불거지면서 특검이 도입돼 박지원 의원 등 김대중 대통령의 측근들과 관련 기업인들이 줄줄이 특검 조사와 처벌을 받았다. 이 과정에서 검찰의 조사를 받던 정몽헌 현대그룹 회장이 서울 계동 현대사옥에서 투신하는 아픔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정 전 회장의 자리를 물려받은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이 지난 10일 평양을 방문,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해 금강산 관광 재개, 이산가족 상봉 등 5개 항에 합의하는 등 경색된 남북 관계를 풀 실마리를 제공했다. 김 전 대통령은 결국 대북 문제 해결에 앞장서는 현대그룹의 모습을 보고 생을 마감한 셈이다. 재계에서는 김 전 대통령의 타계와 북측의 조문단 파견이 현대의 대북사업에 보탬이 될 것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김 전 대통령과 현대그룹의 질긴 인연이 계속 이어지는 것이다. ●국민의 정부 5년간 2만개 벤처 탄생 김대중 전 대통령은 11년 전 대통령 취임식에서 “전 세계에서 가장 컴퓨터를 잘 다루는 국가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혹독한 외환위기의 탈출구를 정보기술(IT) 산업과 벤처기업에서 찾았고, 임기 내내 뚝심 있게 IT와 벤처를 육성했다. 그가 뿌린 벤처 씨앗은 지금 우리 산업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랐다. 서승모 벤처기업협회 회장은 “IMF 사태로 경제가 사경을 헤매던 때 깊은 혜안으로 ‘벤처’의 길을 밝힌 김 전 대통령은 우리의 아버지나 다름없다.”며 애통해했다. 국민의 정부는 1998년 ‘벤처특별법’ 4차 개정을 통해 실험실 및 교수의 창업을 가능케 하고 창업 자본금을 2000만원으로 낮췄다. 2000년에는 ‘벤처촉진지구’를 도입해 지방 벤처기업을 육성했다. 무기명 장기채 발행으로 9000억원의 자금을 마련해 창업하는 벤처기업에 3억원씩 지원했다. ●휴맥스·안철수연구소 ‘DJ 키즈’로 IT를 필두로 바이오기술(BT)·나노기술(NT)·환경기술(ET)·문화기술(CT) 등 5개 신기술 산업은 국민의 정부 이후 줄곧 차세대 성장동력으로 자리잡았다. ‘윤태식 게이트’ 등 벤처기업과 정부 사이에서 권력형 비리가 발생하고, 벤처 거품 붕괴에 따라 코스닥 시장이 대폭락하는 우여곡절도 겪었지만 국민의 정부 5년 동안 2만개의 벤처기업이 생겨났다. 지난해 매출 1000억원 이상을 올린 벤처기업이 202개나 될 만큼 우리 경제의 한 축으로 성장했다. 1999년 6월 포털 ‘네이버’를 앞세워 검색 서비스를 시작한 NHN은 지난해 매출 1조 2081억원을 올렸다. 대한민국 온라인게임의 대명사인 ‘리니지’ 서비스를 시작한 엔씨소프트, 전세계 셋톱박스 시장을 호령하는 휴맥스, 인터넷 세계의 보안을 책임지는 안철수연구소 등도 김 전 대통령 집권 때 성장한 대표적인 ‘DJ 키즈’다. 김성곤 이창구 윤설영기자 window2@seoul.co.kr
  • [김 전대통령 서거] 北조문단 파견 의미는

    북한이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 하루 만인 19일 고위급의 인사로 구성된 조문단 파견 의사를 밝혀온 배경이 관심거리다. 고위급 조문단 파견은 남북관계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북측이 조문단 파견 의사를 남측 정부의 공식 창구가 아닌 민간기관인 김대중 평화센터를 선택한 것과 관련, ‘통민봉관(通民封官·민간과는 교류하고 당국간 대화는 하지 않는 것)’의 대남 기조를 드러낸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북한이 고 김 전 대통령 조문단을 조선노동당 비서를 포함한 고위급으로 구성한 이유는 무엇일까. 전문가들은 북한이 6·15 공동선언을 역사적 사건, 통일의 이정표로 보고 있기 때문에 김 위원장과 함께 서명한 김 전 대통령의 서거에 고위급 조문단을 보내 최고의 예우를 갖추려는 것으로 보고 있다. 북한이 남측 대통령의 서거에 조문단을 파견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북측이 조문단 파견 의사를 전해온 아시아·태평양 평화위원회는 통일전선부 산하의 대남 민간교류협력을 관장하는 곳이다. 최근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과 5개항의 합의를 한 곳이다. 아·태평화위는 조문단 파견의사를 남측 정부가 아닌 김대중 정부 시절의 실세였던 임동원 전 통일부 장관에게 알렸다. 현대와 북측의 5개항 교류사업 합의안 도출에 이어 또다시 ‘통민봉관’의 뜻을 내비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임 전 장관은 김 전 대통령의 성과로 손꼽히는 대북 햇볕정책의 입안자이자 집행자였다. 그는 김대중 정부 시절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통일부 장관, 국가정보원장, 청와대 특보를 지냈다. 2006년 5월 ‘6·15 공동선언’을 도출한 제1차 남북정상회담 합의 과정에서 국정원장 신분으로 당시 박지원 문화관광부 장관과 함께 준비 과정을 도맡았다. 2002년과 2003년에는 정식 대북특사 자격으로 평양을 방문, 핵 문제와 남북관계 현안 등을 북측과 논의했다. 북한은 임 전 장관을 조문단 파견 의사를 알리는 창구로 활용한 듯하다. 6·15 선언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도 깔려 있다. 북측은 임 전 장관에게 보낸 조전에서 “방문날짜는 유가족 측과 임동원·박지원 선생의 의향을 따르는 것으로 하겠다.”고 밝혔다. 북측과 관계가 좋았던 임동원 전 장관과 민주당 박지원 의원을 거명, 남측 정부와는 직접 논의하지 않겠다는 뜻을 간접적으로 강조하는 듯하다. 북측이 한·미 합동군사훈련기간에 조문단을 파견키로 한 자체만을 놓고 보면 화해제스처로 볼 수도 있지만 우리당국을 철저히 배제하려는 것은 민간과는 교류할 수 있지만 당국자 간에는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북한 조문단은 순수한 조문의 목적으로 방문할 가능성이 높아 남북 당국자 간 회담이나 북·미 조문단의 접촉 가능성은 낮지만 남북경색 국면을 대화 국면으로 이끄는 분위기 형성에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김정은기자 kimj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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