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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北 “정상회담 체류일정 오늘 통보”

    북한은 2일 전달하기로 했던 남북 정상회담 남한 대표단의 평양 체류일정통보를 하루 연기했다. 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평양에 체류중인 선발대의 손인교(孫仁敎)단장은 이날 밤 서울∼평양간 직통전화를 통해 “북측이 오늘 체류일정을 보내려 했으나 준비가 다소 늦어지고 있다고 양해를 구했다”면서 “내일 오전 9시까지체류일정을 보내줄 것”이라고 밝혔다. 박재규(朴在圭)통일부 장관은 “북측의 결제과정이 지연된 것”이라며 “다른 이견 때문은 아니다”고 설명했다.그러나 정부의 한 당국자는 “남북한이정상회담의 개최 일정 등 체류일정을 놓고 절충을 벌였으나 이견을 좁히지못한 것 같다”고 말했다. 남측은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의 첫 남북정상회담을 도착 당일인 12일 오후에 열자는 의견인 반면 북측은 정상회담 대표단의 평양 도착 다음날인 13일 하루동안 두 차례의 정상회담을 연이어 갖자는안을 내놓은 것으로 알려졌다. 북측이 준비중인 체류일정안에는 회담과 만찬 및 방문지를 시간대별로 제시해 놓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대통령 등 수행원들의 숙소는 백화원초대소,기자단 숙소는 고려호텔로 결정된 것으로 알려졌다. 회담 장소는 확인되지 않았으나 북한의 국회의사당격인 만수대의사당이나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던 인민문화궁전 등이 유력하다. 양영식(梁榮植)통일부차관은 이날 민주평통 주최 ‘민족통합과 통일,국민화합’이란 주제의 토론회에서 “김대통령은 항공기를 이용해 평양에 가며 판문점을 거쳐 육로로 귀환한다”고 말했다.한편 정부는 2일 정상회담 추진위원회(위원장 朴在圭통일부장관)를 열고 수행원 130명,취재기자 50명 등 180명의 명단을 확정했다. 공식수행원으론 박재규 통일·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과 청와대의 황원탁(黃源卓)외교안보·이기호(李起浩)경제·박준영(朴晙瑩)공보수석 등 장차관급 10여명으로 결정됐다. 민간인 중심의 특별수행원 20여명에는 손병두(孫炳斗)전경련 부회장,장치혁(張致赫)고합회장 등 경제인 5,6명이 포함됐다.또 박권상(朴權相)방송협회회장,최학래(崔鶴來)신문협회 회장도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정부는 대표단 인선결과를 김대통령의 재가를 받아 오는 5일 오전 북측에전달하면서 공식 발표하기로 했다. 이석우 김상연기자 swlee@
  • 남북정상회담 D-17/ 공동선언에 뭘 담나

    6월 남북정상회담의 공동선언은 55년 만의 첫 정상간 만남의 성과를 담는다는 점에서 무게를 갖는다. 정부 당국자들은 25일 “원칙적이고 포괄적인 표현이지만 한반도 냉전·대치상태를 벗어나 평화공존과 교류협력을 향해 노력해 나간다는 합의 내용을담게 될 것”이라고 설명한다.공동선언은 반세기 동안 지속돼온 남북간의 대립·대치상태를 청산하고 화해·협력의 새로운 장(場)에 남북이 함께 첫 발을 내딛는 것을 대내외적으로 알린다는 상징성을 갖는다. 정부는 두 정상이 남북기본합의서 등 기존에 남북이 체결한 합의의 실천·이행에 대한 의견을 나누게 될 것이라고 강조하고 있다.공동선언에 그같은내용을 담아내겠다는 입장이다.이번 정상회담의 핵심어는 공존과 교류라는전문가들의 지적도 맥을 같이한다. ‘한반도 비핵화선언’‘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문제에 대한 정상간의 논의내용도 공동선언에 반영하겠다는 것이 정부 입장이다.남북기본합의서(92년체결) 자체가 화해·불가침·교류협력에 대한 합의사항을 담고 있기 때문에이를 실천하기 위한틀을 만들고 공동선언에 이를 담아내겠다는 생각이다. 정상들의 만남에서 구체적인 합의나 논의까지야 어렵겠지만 이번 정상회담이 그동안 먼지가 쌓인 채로 사문화돼 있는 합의서를 행동으로 실천해 나갈수 있는 계기가 되고,공동선언은 그같은 정신을 포괄적이지만 포함하게 될것이란 설명이다. 전문가들은 “정상간에 논의할 의제가 구체화되지 않고 포괄적이기 때문에 오히려 한반도 현안 전체에 대한 논의를 의제에 구애없이진행할 수 있는 상황”이라고 지적한다. 정부의 한 당국자는 “남북한은 민족의 화해·교류·통일의 실현에 대해 원칙적으로 같은 입장”이라며 “상호간에 합의한 수준에서도 공동선언의 채택은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남북한은 7·4남북공동성명의 조국통일 3대원칙과 민족의 화해·단합,교류·협력,평화·통일의 실현을 ‘4·8 정상회담 합의서’와 ‘실무절차 합의서’에 명기해 놓고 있어 최소한 이 수준 이상에서 공동선언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이석우기자 swlee@. *행사장 나올 北측 인사는. 다음달 남북정상회담 기간중 북측에서는 어떤 인물들이 나설까. 남북간 정상회담 자체가 전례가 없는 일이어서 공항 영접,정상회담장 배석,만찬행사 등에 나올 인사들의 윤곽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통일부 등 정부당국과 전문기관 등에서도 남북고위급회담 등 과거의 몇몇 사례를 참고,각종시나리오를 만들어보고 있다. □공항 영접은 6월12일 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평양도착시 순안공항에서영접할 인물로는 우리의 통일부장관에 해당되는 김용순 조평통 부위원장이우선 예상된다.김 부위원장은 대남문제를 총괄하는 조선노동당의 대남담당비서며 아태평화위 위원장직도 맡고 있어 가장 가능성이 높다.외국과의 정상회담이 아니기 때문에 외무상이 나오지는 않을 것 같다.입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 김윤혁 서기장이 나올 수도 있다.격(格)으로만 따지자면,홍성남 총리도무난해 보인다. □정상회담 배석은 양 정상은 확대 정상회담보다는 최소한의 인원만을 배석시킨 단독회담을 가질 공산이 크다.이 경우 북측에서는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최측근으로서 대남 문제의베테랑인 김용순 조평통 부위원장이 배석할 가능성이 높다.우리측에서 박지원(朴智元) 문화부장관이 배석할 경우‘4·8합의서’를 같이 이끌어 낸 송호경 조선 아태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이나올 법도 하다. □만찬행사에는 북측이 일반적인 관례를 따른다고 가정하면 정치 경제 문화등 각계 인사가 망라될 것이다.이 경우 내각과 최고인민회의 등의 대표급 인사는 당연 참석이 예상된다. 이와함께 서울시장격인 양만길 평양인민위원장,서울시의장격인 강현수 평양시 당위원회 책임비서 등이 참석할 가능성도 크다.조선천도교회 류미영 중앙지도위원장 등 종교계 인사와 박관오 김일성종합대 총장 등 학술계 인사도참석이 전망된다. 문화·체육계 인사로는 유명 영화배우 오미란과 세계 최장신 농구선수 이명훈(2m35㎝) 등이 참석할 것으로 보인다.마라톤 영웅 정성옥,가요 ‘휘파람’으로 유명한 국민가수 전혜영 등도 빼놓을 수 없다. 문화·체육계 인사들의 참석은 분위기를 부드럽게 하고 대외적으로 국가 이미지 제고의 효과도 있어 북측도 공을 들일 것으로 보인다.주북한 중국 대사나 러시아 대사 등 외교사절의 초청도 예상된다.세계 각국의 이목도 한꺼번에 집중시킬 수 있을 것이다. 통일부는 그러나 북측이 이처럼 만찬을 대규모로 갖기보다는,양측을 모두합쳐 100명이내로 소규모로 차릴 가능성이 더 많다고 보고 있다.한 당국자는 “김 국방위원장이 자신의 모습을 여러 사람 앞에서 드러내는 성격이 아니기 때문에 만찬에는 몇몇 핵심 인사만 참석할 것 같다”고 내다봤다. 김상연기자 carlos@
  • 서울∼평양 직통전화 31일 재개통

    서울과 평양을 잇는 남북 직통전화가 오는 31일 재개통된다.서울∼평양 직통전화가 연결되기는 9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제8차 남북고위급회담 이후 7년9개월 만이다. 통일부 이관세(李寬世)대변인은 22일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남측 선발대30명이 평양에 들어가는 31일부터 서울∼평양 직통전화가 가동된다”면서“선발대는 이 직통전화로 사전답사 결과를 서울에 보고하고 지원을 요청할 것”이라고 밝혔다. 현재 남북간에는 총 25회선의 직통 회선이 이미 마련돼 있으며,언제든 연결이 가능한 상태다. 이 대변인은 “선발대 단장과 대원은 23일쯤 정상회담추진위를 개최,최종선임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김상연기자 carlos@
  • 만수대의사당, 주요정치행사 단골 개최

    오는 6월 남북한 정상이 만나 한반도 현안 전반을 논의하는 회담장으론 만수대의사당이 될 것으로 보인다.숙소는 외국 귀빈들을 맞는 영빈관격인 백화원초대소,주 연회장은 인민문화궁전이 유력시 되고 있다. □만수대의사당 평양시 중심부에 위치한 국회의사당격인 최고인민회의의 건물.84년 10월 건립됐다.지하 1층,지상 4층의 석조건물로 주요 정치행사와 외국국빈의 영접 등에 쓰인다.지난 98년 9월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 추대도이곳에서 이뤄졌다. 연회장시설도 갖추고 있어 회담직후 이곳에서 연회가 열릴 가능성도 있다. □백화원초대소 평양시 외곽인 대성구역 임흥동의 대동강변에 위치해 있는국빈급 외국손님의 영빈관.김일성주석의 시신이 안치된 금수산기념궁전의 경내에 있어 일반인들의 접근은 불가능하다.통로로 연결된 3개의 건물이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전면에 호수를 바라보고 있다.대리석 복도와 기둥이 웅장함과 호화스러움을 더한다.지난 98년 경협논의를 위해 이곳에 묵고 있던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 명예회장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전격 방문하기도 했다.90∼92년 남북고위급회담때 남측 숙소로 이용된 일도 있다.83년에 건립. □인민문화궁전 74년에 완공된뒤 국제회의 및 정치집회장으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지상 4층의 3개 건물에 3,000석규모의 대회의실과 700석규모의 연회장 등 500개의 다용도 방이 있다.85년 남북적십자회담과 90∼92년 남북고위급회담때 회담장소로 쓰였다.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주 집무실인 노동당 본청사 건물에서 인접한 평양시내 중심부인 천리마거리 부근에 위치해 있다. 이석우기자 swlee@
  • 남북정상회담 D-21/ 北주민 基대통령 沆道 환영행사 펼칠까

    다음달 평양을 방문하는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북한 주민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대규모 인파가 동원되는 조직적인 연도 환영행사가 있을까. 통일부 당국자들은 “이달말 방북하는 선발대가 평양에서 북측과 논의하는과정에서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는 원칙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 현 시점에서 참고할 만한 과거 사례로는 92년 남북고위급회담 정도.당시 북한측은 정원식(鄭元植)총리 등 우리 대표단이 입북할 때와 북한을 떠날 때판문점에서 남·녀 화동(花童)들로 하여금 꽃을 건네주며 환영·환송의 뜻을나타냈다. 그러나 판문점에서 평양까지 가는 길이나 평양 시내에서의 조직적인 연도환영행사는 없었다.대표단과 우연히 마주치는 주민들이 손을 흔드는 정도였다. 이번에도 북한 주민들의 반응은 이 정도 수준에 그칠 수 있다.항공기 편으로 방북하는 김 대통령에게 공항에서 화동들이 꽃을 선물하는 것을 제외하고는 연도환영 등 주민 차원의 다른 환영행사는 갖지 않을 것으로 우선 예상된다.이같은 관측은 북측이 오랜 기간 주민들에게 남측을 ‘타도의 대상’으로교육시켜놓고,하루 아침에 열렬히 환영하라고 지시하기엔 명분이 약하다는분석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하지만 북측이 연도 환영행사를 펼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니다.정부의 한 관계자는 “북한 주민은 당의 지시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고위층의결단만 있으면 연도 환영행사는 어렵지 않게 준비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북한 주민들은 언제 떨어질지 모르는 외빈들에 대한 연도 환영행사 지시에대비,평상시에도 개인별로 서있을 위치와 들고 나올 꽃수술 갯수 등이 미리정해져 있는 것으로 알려진다. 조직적인 연도 환영이 있을 경우 양측 실무진들은 주민들의 행사 도구나 구호 등 세세한 형식까지 미리 협의해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만에 하나 주민들이 인공기를 흔들거나 김일성(金日成)주석을 찬양하는 구호 등 민감한 행동을 할 경우 우리측으로서는 난감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김상연기자 carlos@
  • 남북정상회담 D-24/ 남북 실무절차 합의서 全文

    남과 북은 2000년 4월 8일 합의서에 따라 4월 22일부터 5월 18일까지 판문점에서 5차례의 준비접촉을 가지고 실무절차 문제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1.대표단 구성과 규모. 1) 남측 대표단 수행원은 130명으로 한다. 2) 남측 대표단 취재기자는 50명으로 한다. 2.상봉 및 회담 형식과 횟수.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 사이에 역사적인 상봉이 있게 되며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된다. 상봉과 회담은 최소한 2∼3회 하며 필요에 따라 더 할 수 있다. 3.상봉 및 회담 의제. 상봉 및 회담 의제는 ‘역사적인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민족의 화해와 단합,교류와 협력,평화와 통일을 실현하는 문제’로 한다. 4.체류일정. 1)남측 대표단의 북측 지역 체류기간은 2000년 6월 12일부터 6월 14일까지2박 3일로 하며,필요에 따라 더 연장할 수 있다. 2)북측은 남측 대표단의 구체적인 체류일정을 방문 10일 전에 남측에 통지하며,쌍방이 협의하여 이를 확정한다. 5.선발대 파견. 1)남측은 30명으로 구성된 선발대를 대표단 방문 12일 전에 북측지역에 파견한다. 남측 선발대는 필요에 따라 판문점을 통하여 왕래할 수 있다. 2)남측 선발대의 체류일정과 구체적인 실무절차 문제는 남측 선발대의 북측지역 도착 직후 쌍방이 협의하여 결정한다. 6.왕래절차. 1)남측 대표단의 왕래는 항공로 또는 육로로 하되 항공로로 하는 경우에는남측 비행기로 하며 육로로 하는 경우에는 북측 자동차로 한다. 2)남측 선발대는 북측 자동차를 이용하며 통과지점은 판문점으로 한다. 3)남측은 정상일행의 명단을 방문 7일전에 북측에 넘겨주며 선발대의 경우에는 방문 4일전에 북측에 넘겨준다. 명단에는 성명,성별,직위,소속을 밝히며 사진을 첨부한다. 명단을 넘겨준 후 변동되는 사항은 판문점을 통하여 먼저 전화로 통지하며그 다음에 문서로 전달한다. 7.편의보장. 1)북측은 자기측 지역에 체류하는 남측 인원들의 숙식,교통,통신,의료 등기타 필요한 모든 편의를 제공한다. 2)남측 대표단은 북측 지역에 체류하는 동안 북측의 안내와 질서에 따른다. 3)북측은 남측 대표단의 북측 지역 체류기간 판문점을 통하여 1일 2회의행낭운반을 보장한다. 8.신변안전보장. 1)북측은 자기측 지역을 방문하는 남측 인원들의 신변안전을 보장하는 총리 명의의 신변안전보장각서를 방문 3일전에 판문점을 통하여 남측에 넘겨준다. 2)북측은 남측이 이번 방문의 성격에 맞게 휴대품을 소지하는 조건에서그에 대한 불가침을 원칙적으로 보장한다. 9.수행원,기자의 표지 및 증명서. 1)쌍방은 자기측 수행원들을 표시할 수 있는 표지를 각기 편리한 대로 한다. 2)기자는 기자완장을 착용한다. 3)남측 수행원과 기자는 자기측 총리가 발행한 신분증명서를 휴대한다. 10.상봉 및 회담장 표지 및 시설. 1)상봉 및 회담장과 행사장(숙소 포함)에는 어떠한 표지도 하지 않는다. 2)상봉 및 회담장에는 회담에 필요한 시설외 다른 시설들을 설치하지 않는다. 3)북측은 상봉 및 회담장과 행사장(숙소 포함)에서 남측이 연락업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통신시설을 설치·제공한다. 11.상봉 및 회담 기록. 쌍방은 상봉 및 회담 기록을 속기,녹음,녹화 등 각기 편리한 대로 한다. 12.상봉 및 회담 보도. 1)상봉 및 회담 보도는 각기 편리한대로 하되 필요에 따라 공동보도문을작성·발표할 수 있다. 2)북측은 남측에 실황중계가 가능하도록 필요한 설비와 인원을 최우선적으로 보장하며 텔레비전 영상 송출을 위한 전송로 및 위성중계를 위한 편의를 제공한다. 3)북측은 남측에 실황중계를 위하여 남측 인원이 직접 촬영,제작할 수 있도록 필요한 지원과 편의를 보장한다. 13.기자의 취재활동. 1)북측은 남측 기자들의 체류기간 중 취재활동을 보장한다. 2)쌍방은 보도의 정확성과 공정성을 기하기로 한다. 14.기타 실무절차 문제. 1)남측 대표단은 북측 지역 체류기간 이미 가설된 서울∼평양간 직통전화회선과 함께 예비통신으로 위성통신망을 이용한다. 2)그밖에 제기되는 실무절차 문제는 남북고위급회담 관례에 따른다. 15.합의서 발효. 이 합의서는 쌍방이 서명하고 교환한 날부터 효력을 발생한다. 2000년 5월 18일 남북합의서 이행을 위한 준비접촉 남측대표단 수석대표 대한민국 통일부 차관 양영식 북남합의서 리행을 위한 준비접촉 북측대표단 단장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참사 김령성
  • 남북정상회담/ 합의서 어떤 내용 담을까

    18일 판문점에서의 남북 5차 준비접촉에선 정상회담 실무절차 합의서가 타결될 것으로 보인다.양측은 기자단 수에 대한 이견을 절충한 뒤 준비접촉을마무리한다는 입장이다. 정부 당국자도 17일 “북측이 기자단 수와 선발대 일정에 대해 무리한 주장을 하지 않는다면 타결될 것”이라고 낙관했다. ◆의제/ 7·4남북 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 원칙의 정신을 명기한다.민족의 화해·단합,교류·협력,평화·통일을 위해 협의한다는 포괄적인 표현의 ‘수위’에도 의견을 모았다. 이에따라 두 정상은 적대관계 해소 및 평화정착 등 한반도 현안문제 전반에 대해 제한없는 논의를 진행시켜 나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의제 명기에는 빠졌지만 양측은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답방문제는 정상회담에서논의한다는 데 의견을 같이했다. ◆핵심 합의사항/ 두 정상은 두차례 이상 단독회담을 갖는다. 기록원 1명을 포함,3∼4명이 배석하기로 했다.방북에는 항공과 육로를 모두이용할 수 있도록 명기하고 북측 지역에선 북측 자동차를 이용한다는 데도 의견을같이 했다. 기자를 제외한 대표단 수는 130명.모두 합의서에 명문화된다. ◆기타 명기사항/ 총리 명의의 신변안전보장서 전달,남측 대표단의 편의보장을 위해 남측과의 행낭 운반 보장 및 휴대품에 대한 불가침 보장도 합의서에 포함된다.생중계를 위한 북측의 시설지원 등도 명문화되고 기타 절차 문제들은 남북 고위급회담 등의 관례를 따를 것도 명문화된다. ◆쟁점 및 이견/ 기자단 수와 생방송 여부는 막판까지 합의를 가로막는걸림돌이었다.보도진 숫자에 대해 북측은 40명,남측은 80명을 주장했다. 양측은 50∼60명선으로 절충한 상태로 알려져 있다.생방송에는 북측도 원칙적으로 동의한 상태.그러나 위성 생방송장비인 SNG 반입문제 등 장비문제에걸려 합의가 지연됐다. 남측은 생방송 기자재를 갖고 들어가겠다는 입장인 반면 북측은 북측의 시설·기술진을 이용하라며 실랑이를 벌였다. 실무자의 현장점검을 위한 방북시기와 관련한 줄다리기도 있었다.남측은 최소 한달전에는 경호·의전,통신·보도 등 실무 전문가들을 방북시켜야 한다는 입장이지만 북측은 1주일 남짓한 시간이면 충분하다며 이견을 보였다. 또 남측은 베를린선언의 4대 과제에 대한 논의 명기를 희망했으나 결국 구체적인 표현 대신 포괄적인 명기로 만족해야 했다. 이석우기자 swlee@. *실무 초점… 국가 연주 않기로. 남북정상회담을 위한 실무절차가 세부적으로 진전되고 있다.남북간에 의전절차에 대한 의견이 구체적으로 오가고 있고 나름대로 법적 절차도 매듭지어지고 있다. ◆의전 절차/ 정부는 평양에서 대규모 환영행사는 불필요하다고 보고 있다.‘실무방문’형식으로 불필요한 의전 행사를 축소하고 정상회담 이외의 행사는피하겠다는 것이다. 국기게양,국가 연주도 생략된다.남북간 이념적 갈등을최소화하겠다는 뜻이 담겨있다. “대통령의 일정은 분 단위로 철저하게 짜게 되며 ‘김일성 묘소’,‘단군릉 방문’ 등 북한의 이념적 조형물 방문 행사는 없을 것”이란 게 정부 당국자들의 지적이다.그러나 북한내 고구려 유적지 방문 등 역사 유적지 방문은 검토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허가 절차/ 남북 정상회담을위해 북한을 방문하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도 통일부의 정식 승인절차를 받아야 한다.일반 국민보다 간소하긴 하지만법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반인이 북한을 방문하려면 남북교류협력법 제9조 등에 따라 통일부로부터 방북증명서를 발급받아야 한다.먼저 방북 20일전에 통일부에 방북증명서 발급을 신청한다.본인이 작성한 신원진술서와 사진,북측의 신변안전 보증서 등을 첨부한다. 통일부는 이들 서류를 토대로 관계부처와 협의를 거쳐 방북증명서를 발급한다. 통일부는 그러나 이번 방북이 정상회담이라는 특수성을 띠고 있는 점을 감안,장관 직권으로 특례를 만들어 절차를 간소화할 방침이다.남북교류협력법제20조는 ‘통일부장관은 남북 당국간 합의가 있는 경우 특례를 정할 수 있다’고 명시하고 있다. 통일부는 92년 남북고위급 회담 때와 98년부터 시작된 금강산 관광의 특례조항 중 하나를 참고하기로 했다. 92년 때는 당시 정원식(鄭元植) 총리 이하 대표단 모두가 신청서를 작성했지만,신원진술서 등 나머지 서류는 생략했다.금강산 관광은 신청서 작성마저도 생략하고 관광객의 주소 등 간단한 인적사항만 제출하면 통일부가 승인공문을 내주고 있다. 김상연기자 carlos@. *97년 발표 통일지침 ‘8·4노작’소개. 북한 언론매체들이 최근들어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의 남북관계 개선방안 등 통일관을 계속 강조하고 있다. 통일부 당국자는 17일 “평양방송 등 북한 언론들이 이달초 일주일동안 김국방위원장의 이른바 ‘8·4 노작’의 논문 전체를 소개하고 별도 해설도 곁들였다”고 밝혔다. ‘8·4 노작’은 김 국방위원장이 97년 8월4일 발표한 통일지침.‘위대한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는 제목의 논문으로북한의 대남정책 및 통일방안을 담고 있다. 김 국방위원장은 논문에서 “남북 사이의 관계개선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절박한 요구”라면서 “불신·대결을 신뢰와 화해 관계로 전환해 민족의단합된 힘으로 평화통일을 실현해 나갈 수 있다”고 남북간 화해와 대화를강조했다. 전문가들은 “이번 정상회담은 김일성의 통일 유훈을 실현하려는 김정일의결단으로 이뤄지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라고 말한다.형식은 김일성의 유훈을 받들자는 것이지만 내용은 김정일을 민족통일의 선도적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또 어제까지의 주적(主敵)인 남한의 대통령을 국빈으로 맞을 준비를 하며어리둥절해 할 북한주민들에게 관계개선의 급진전이 북한 정부의 주도 아래이뤄지고 있음을 강조하고 그 과정에서 김정일의 지도력을 부각시키려는 시도란 해석이다. 김 국방위원장은 이 논문에서 통일의 실현방안으로 자주·정치대결의 해소·남한사회의 민주화문제 등 기존의 북한측 주장을 강조했다.통일부의 한 당국자는 “이같은 북측 언론들의 움직임은 최근 ‘조국통일 3대헌장’등 통일노선 선전강화와 맥을 같이한다”고 지적했다. 오는 10월 조선노동당 창건 55주년을 맞는 북한과 최고지도자 김정일이 남북 관계개선의 당위성을 국민들에게 최대한 알리고 설득하면서 국내외적으로북측 통일노선의 정당성을 선전하겠다는 의도가 담겨있다는 풀이다. 이석우기자. *생중계 쟁점 뭔가. 남북정상회담을 안방에서 생중계로 볼 수 있을까. 남북 양측은 아직 방송장비 반입 등 구체적인 내용을 확정하진 않았으나 최소한 몇몇 주요 장면을 생방송한다는 데는 의견일치를 본 것으로 알려지고있다.김대중(金大中) 대통령의 평양도착과 김정일(金正日) 국방위원장과의첫 대면,정상회담 오프닝 장면 등은 역사적인 순간인데다 전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는 점에서 생중계에 이견이 없다는 것. 문제는 생중계의 질(質)이다.남측은 가급적 위성 생중계 장비인 SNG를 가져가야 한다는 입장이다.북측 중계시스템을 이용할 경우 화질이 떨어질 우려가 있기 때문.한 방송 전문가는 “유럽식 PAL방식인 북한의 방송 시스템과 달리 우리는 미국식 NTSC방식이라 시스템 전환과정에서 화질이 나빠질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북측 시스템을 이용할 경우 실제 전송 과정에서 약간의 시차를 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이 경우 약간의 ‘편집’을 통해 북측에 유리한 화면을 내보낼 수도 있다. 92년 남북고위급회담 때 김일성(金日成) 주석만 일방적으로 얘기하고 우리대표단은 “예”,“예”하는 장면만 방송돼 마치 김 주석이 훈계하는 듯한인상을 준 적 있다.94년 카터 전 미 대통령이 김 주석을 만날 때는 카메라각도와 자리 배치에 교묘히 차이를 둬 카터 대통령이 김 주석보다 왜소하게보인 화면이 나간 경우도 있었다. 따라서 우리측은 곧 있을 평양 사전답사에서 카메라 각도는 물론 양 정상을 카메라에 담는 횟수까지 세세하고 공평하게 협의한다는 방침이다.특히 SNG반입이 끝내 거부되고,북측 장비를 이용할 경우 화면 송출 과정에 우리측 전문가를 반드시 입회시키도록 할 계획이다. 김상연기자 carlos@
  • [격동의 남북관계 반세기](3)무산된 金泳三·金日成 회담

    94년 7월9일 낮 12시 서울 삼청동 남북회담사무국.보름 앞으로 다가온 남북정상회담에 대비,통일안보정책조정회의를 주재하던 이홍구(李洪九)통일부총리에게 메모지 한장이 전달됐다.-‘김일성 사망’ 회의장은 일순 놀라움에 술렁거렸다. 분단 반세기만에 성사를 눈앞에 뒀던남북 정상간 만남이 물거품이 되는 순간이었다. 김영삼(金泳三·YS) 당시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여성정책심의위원회’ 위원 15명과 환담을 나누던 중인 12시2분쯤 전날 김일성 주석이 사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얼마나 놀랐던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그것은 그가정상회담을 성사시키기 위해 그동안 적지않은 ‘마음고생’을 했다는 것을나타내기에 충분했다. YS는 민간인 출신 대통령이란 정통성을 무기로 취임 초부터 남북문제에 적극적인 자세로 나온다.93년 2월25일 대통령 취임연설을 통해 ‘민족우선론’을 펴며 김일성과의 회담을 제의했다.그러나 북한이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의사를 밝힌 것을 계기로 핵 문제가 전면에 떠오르면서 그의 대북정책은강경으로 치닫게된다.6월 취임 100일 기자회견에서는 “핵무기를 가진 자와는 악수를 하지 않겠다”는 말까지 서슴지 않았다. 그러던 그가 94년 2월25일 취임 1주년 회견에서는 “핵문제 해결에 도움이된다면 김일성 주석과 만날 용의가 있다”며 갑자기 종전과 다른 입장을 밝힌다.일부에서는 한달전인 1월28일 현 대통령인 김대중(金大中) 당시 아·태평화위원장이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간의 회담이 조건없이 하루빨리이뤄져야 한다”고 촉구한 것에 YS가 자극을 받았다는 얘기도 나왔다. 한동안 북한의 반응은 냉담했다.‘희소식’은 6월 중순 대북특사로 북한을방문,김일성을 만난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왔다.카터는 김일성이 “언제 어디서든 조건없이 김영삼 대통령과 만나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고 전했고,YS는 이를 전격 수락했다.당시 김일성의 회담 제의에 대해 전문가들은 유엔의 대북제재를 무산시키기 위한 의도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후 양측은 6월28일 판문점에서 예비접촉을 갖고 정상회담을 7월25일부터27일까지 평양에서 열기로 합의하는 등 세부일정을 거의 확정지었다.그러나북한은 김일성 사망 사흘뒤인 7월11일 “우리측의 유고로 예정된 북남 최고위급 회담을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회담 무산’을 공식 통보해 왔으며,YS는 “아쉽게 생각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94년의 ‘무산된’ 남북 정상회담은 제3국의 개입이 있긴 했지만 어쨌든 정상간 만나자는 약속을 처음으로 끌어냈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닌다.이때의 경험이 밑바탕이 됐기 때문에 지금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회담이 비교적 쉽게 추진될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김상연기자. * 역대 정상회담 추진사. 남북 정상회담은 분단 이후 남과 북이 수십차례 제의했으나 서로 묵살하거나 지나친 전제조건을 내세워 94년까지는 공염불 상태나 다름없었다. 남북이 이 문제를 처음 공식 거론한 것은 72년 평양에서 열린 남북조절위원회 공동위원장 제2차 회의석상에서였다.이때 양측은 이른 시일내 정상회담이성사될 수 있도록 노력하자는 입장을 공동으로 밝혔다. 처음으로 정상이 직접 이를 제시한 것은 75년8월18일 박정희(朴正熙)대통령의 뉴욕 타임스 회견.박대통령은 “김일성이 군사적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에 의한 통일을 추구한다면 그를 만나 통일에 관한 대화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박대통령은 또 집권말기인 79년1월 연두회견에서 “남북한 당국이 시기, 장소에 상관없이 만나자”고 제안했다. 우리측의 정상회담 제의는 전두환(全斗煥)대통령 시절부터 활발히 벌어졌다.전대통령은 81년 1월12일 국정연설을 통해 ‘남북한 당국 최고책임자 상호방문’을 제의했다.재임시절 동안 전대통령은 그후 거의 매년 국정연설,8·15 경축사 등을 통해 정상회담의 성사를 북측에 촉구했다.이에 북한은 남한에반공정책 포기와 주한 미군철수 등을 역으로 요구하며 피해갔다. 북방외교를 가장 큰 목표로 내건 노태우(盧泰愚)대통령은 전대통령보다 정상회담에 더 열심이었다.노대통령은 88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처음으로 ‘남북정상회담’이라는 용어를 쓰며 김일성과 만날 뜻을 밝혔다.88년 10월 유엔연설에서는 남북정상회담이 열릴 때 의제까지도 자세히 밝혔다.또 91년 12월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되는 과정에서 양측이 막후에서 정상회담을 추진해 성사 일보 직전까지 가기도 했다. 북한 김일성은 신년사를 통해 가끔 정상회담 의사를 비쳤으나 별로 무게가실리지 않았다.90년에는 평양을 방문한 남북고위급회담 우리 대표에게 정상회담 의사를 밝혀 기대를 모았으나 역시 말에 그쳤다. 김상연기자 carlos@. *당시 협상 주역. 94년 남북정상회담 협상을 맡았던 남북한 대표들은 서로 일면식(一面識)도없는 사이였다.그러나 한번의 예비접촉만으로 7월25∼27일의 정상회담 일정을 도출했다. 양측은 통일문제 전문가 3명씩을 협상에 내세웠다.우리측은 당시 이홍구(李洪九)통일부총리·정종욱(鄭鍾旭)청와대외교안보수석·윤여준(尹汝雋)총리특별보좌관이,북측은 김용순 최고인민회의통일정책위원장·안병수 조평통부위원장·백남순 정무원책임참사가 나왔다. 북측 수석대표 김용순과 34년생 동갑내기인 이부총리(현 주미 대사)는 당시북한문제 최고 브레인으로 이론과 실무를 겸비하고 있다는평가를 받았다. 정수석(현 아주대 교수)은 대통령의 의중을 잘 파악하고 있다는 게 장점이었다.윤보좌관(현 한나라당 의원 당선자)은 당시 안기부 3특보로 북한담당이아니었으나 말솜씨와 언론관계 등이 고려돼 특별보좌관이라는 직함으로 협상단의 일원이 됐다.윤보좌관은 예비접촉후 속개된 실무협상 수석대표를 맡았다.특히 지난 3일 간암으로 타계한 엄익준(嚴翼駿) 전 국가정보원 2차장의경우 당시 딸 결혼식에까지 불참하면서 우리측 실무협상 대표로 나서 두 차례 협상만에 실무합의서를 타결짓는 열의를 보였다. 북측 김용순 대표는 대남전략은 물론 미국·일본 등 국제문제에도 정통해김일성의 신임이 두터웠다.그는 현재도 노동당 대남담당 비서겸 당 통일전선부장으로서 대남사업을 총지휘하고 있으며,김정일 앞에서 직언할 수 있는 몇안되는 인물로 꼽힌다. 김상연기자
  • 박재규 통일부장관, 판문점 방문

    박재규(朴在圭) 통일부장관이 31일 판문점을 방문,돌아오지 않는 다리앞에서 군사분계선 표지판을 살펴보고 있다. 이날 방문은 지난해 12월 장관취임후첫 순시 성격을 띠고 있지만 총선후 남북관계에 커다란 돌파구가 열릴 것이란 기대속에서 이뤄져 관심을 끌었다. 박장관은 남북고위급회담이 열렸던 평화의 집 회담장을 둘러보고 당시 자리 배치,회담 진행상황 등에 대한 자세한 설명을 들었다.또 남북회담사무국 관계자가 남북적십자연락관 전화를 통해 북한에 직접 전화를 거는 모습도 지켜봤다.군사정전위 회담장,제3초소 등에선 북측지역을 바라보며 군관계자들로부터 “지난해 9월 북방한계선 무효선언이후 장성급 회담도 중단한 상태지만 북한군의 움직임은 예전과 다름없이 일상적”이란 설명도 들었다. 이날 판문점 방문에는 이우정·박종화 통일고문,강문규 민화협상임의장,송병준 이북도민회 중앙연합회장·홍성호 사무총장,한양수 민통 중앙협의회 의장,나종억 평통위원,이성림 한국예술문화단체 회장 등이 함께 참가했다. 판문점 이석우기자 swlee@
  • [사설] 남북기본합의서 이행과제

    오늘로 남북기본합의서가 채택된 지 8주년이 됐다.남북한이 지난 91년 화해와 불가침,그리고 교류·협력에 관한 기본합의서를 채택한 것은 분단 반세기에 걸친 대결의 역사를 청산하고 민족의 자주적·평화적 통일을 이룩할 수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또 92년기본합의서와 이의 실천을 위한 부속합의서를 발효시킨 것은 분단상황에서누적된 정치적 불신과 군사적 대결을 해소함으로써 교류·협력을 통한 민족공동체를 형성하고 평화적 통일의 대장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민족분단사의 획을 긋는 대사건으로 평가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8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단 한건의 합의내용도 실현하지 못한 채 합의문 체결 사실조차 우리들의 기억속에서 사라져가고 있는 안타까운 실정이다.남북당국자들이 서울과 평양을 오가며 오랜 산고(産苦)끝에체결했던 남북기본합의서가 이행되지 못한 데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다.북한은 동서 냉전체제 붕괴와 소연방 해체,그리고 한·러,한·중수교라는 충격적 사건 등 내우외환에 직면하게됨으로써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에 상당한 부담을 갖게 됐다.이에따라 9차 남북총리회담을 중단했고 핵확산금지조약(NPT)탈퇴에 이어 남북기본합의서를 내팽개치는 불성실한 태도를 취했다. 더욱이 북한은 94년 김일성(金日成)사망의 충격속에서 4년간 유훈통치의 기형적 사태를 맞게 됨으로써 합의서 이행에 대한 내부여건이 취약했던 것이사실이다.이러한 상황에서 남북기본합의서 채택 8주년을 맞음에 따라 남북관계 개선과 대화복원을 통한 기본합의서 이행이 중요한 현실적 과제로 인식되는 것이다.국민의 정부가 남북기본합의서 이행을 대북정책의 기본목표로 삼고 일관된 포용정책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추진해 온 결과,대화분위기가 성숙되고 있는 현재의 상황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북한도 김정일(金正日)체제가 안정궤도에 진입했고 경제적 회복추세를 보이고 있어 남북간 대화전망이 긍정적인 방향으로 예측된다.최근 평양대중가요제 개최를 비롯,문화·체육교류가 활성화되고 있는 점도 남북대화 가능성을뒷받침하는 대목이다.이러한 맥락에서 남북한은 새로운 천년을 맞이하는 내년초에는 남북고위급회담을 성사시켜 기본합의서 이행에 실질적 성과를 이끌어내기를 기대한다.정부도 지속적 대북포용정책을 통해 기본합의서의 전면이행을 위한 꾸준한 노력이 필요하다.정부의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이뤄 남북기본합의서가 명실상부한 민족통일의 대장전이 되기를 바란다.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냉전종식의 ‘평양행 열차’

    90년 10월 나는 평양으로 가는 열차에 몸을 싣고 있었다.평양에서 열리는제2차 남북고위급회담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분단 45년만에 처음으로 국무총리를 비롯한 정부 대표단이 북한을 공식 방문하는 것이었기에 우리가 느끼는 기대와 책임감은 실로 대단한 것이었다.아마 우리 국민들도 같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특히 당시의 국제적 상황은 우리의 이같은 기대를 더욱 고무시키고 있었다. 89년 11월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12월에는 미국과 소련의 정상이 몰타에서 만나 냉전의 종식을 선언했다.그리고 소련과 동유럽 국가들이 경제난 등사회주의 체제의 모순과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개방과 변화의 길로 나서고있었다.이 탈냉전의 흐름이 한반도에도 밀려오고 있었고,우리는 굳게 닫혀있던 북한의 문을 열고 남북 화해와 협력의 첫발을 내딛기 위해 지금 평양으로 달리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 대표들 몇 분도 마찬가지였겠지만 기차를 타고 평양으로 가는 내 마음 한 구석에 설렘이 일고 있었다.월남한지 40년만에 다시 보는 북녘 땅이었다.그리고 나는 지금그 길을 거슬러 고향으로 다시 가고 있는 것이다.창 밖을 내다 보았다.산 꼭대기까지 다락밭으로 개간해서 산들이 모두 민둥산이 돼있는 모습이 나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나는 속으로 ‘무척 어려운가 보구나,이러다가 비가 많이 오면 큰 물난리가 날텐데….이제 북한도 개방과 변화 외에는 다른 길이 없겠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그리고 “이번 남북고위급회담이 성공할 수 있겠다”라는 확신이 생겼다. 그 이후에 나는 세번 더 평양을 다녀왔다.그리고 남북기본합의서와 부속합의서들이 만들어지고 공동위원회가 구성됐다.남북이 화해하고 협력하면서 한반도 냉전을 종식시킬 수 있는 토대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93년 북한의 핵문제가 불거지면서 우리는 지난 몇년동안 그 자리에멈춰설 수밖에 없었다. 지금 우리는 다시 한번 소중한 기회를 맞고 있다.금강산 관광의 길이 열려지난 1년동안 14만명의 우리 국민이 금강산을 다녀왔다.또한 지난해부터 지금까지 8,000여명의 국민들이 북한을 방문하였다.실로 놀라운 변화다.그런가 하면 한반도 냉전종식을위한 한·미·일 세 나라의 포괄적 접근이 시작되고 있다. 이제 우리는 20세기 마지막 냉전종식의 열차를 탔다.또 다시 90년의 평양행열차처럼 미완으로 끝난다면 우리 민족의 21세기는 밝을 수 없다.이번에는반드시 우리 민족 모두가 한마음 한뜻이 돼 남과 북이 서로 오가고 돕고 나누는 평화와 번영의 새 천년을 열어나가야 한다.차창 밖으로 본 헐벗은 북녘땅이 푸른 숲으로 꽉 찰 수 있기를 간절히 기원해 본다. 林東源 통일부장관
  • ‘금강산관광 법적문제와 대응’세미나 주제발표

    금강산관광의 지속적인 추진은 포용정책에 대한 북한의 이해를 넓힐 수 있으며 관광객의 신변안전 등 이견해소를 위해선 남북 당국간 신변안전보장협정과 통행협정의 체결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제시됐다.외국어대 이장희(李長熙) 교수(법학)는 7일 외국어대 국제관에서 ‘금강산관광의 법제도적 문제와 대응방안’이란 주제로 가진 아시아사회과학연구원(이사장 洪承稷 고려대명예교수)의 세미나에서 이같이 주장했다.다음은 이교수의 ‘금강산 관광의 공법적 문제와 대응방안’이란 주제발표의 요지. 북한의 남한 관광객 민영미씨 억류사건으로 지난 6월21일 중단됐던 금강산관광은 지난 8월5일부터 45일만에 재개됐다. 현대그룹과 조선·아세아태평양평화위원회는 중단됐던 관광 재개를 위해 한달간의 협상끝에 ‘관광객 신변안전보장을 위한 합의서’,‘관광시 준수사항에 관한 합의서’등을 마련했다. 정부는 당시 ▲당국간 신변안전보장 체결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과 준수원칙에 입각한 신변안전보장 특별위 구성 등의 원칙을 세우고 관광객 신변안전에 문제가 생기면 남북한 당국자가 참여하는 분쟁조정기구의 설치 등을 요구했다. 현대그룹과 아·태평화위는 이에앞서 지난해 6월 이후 금강산 관광객의 신변안전보장과 관련,‘합의서’‘의정서’‘계약서’와 ‘부속계약서’,‘신변안전보장각서’등을 체결했다.양측은 당국의 승인을 받는 날부터 관련 문서가 효력을 발생한다고 규정했다.남북당국이 내용의 실천을 보장한 것이다. 계약서의 신변안전·무사귀환 보장 및 돌발사고시 긴급구조 등 관련사항은남북기본합의서 제3장 교류협력에 관한 부속합의서에서 합의한 바 있다.이점에서 금강산 관광을 위한 계약서는 남북기본합의서의 ‘교류 협력’을 실천해 옮겼다는 의미를 갖는다. 차이점이 있다면 남북기본합의서의 남북교류·협력공동위원회가 아닌 아·태평화위와 현대측이 합의했다는 점이다.그러나 이 계약서의 효력이 남북당국의 승인을 전제로 했다.그때문에 아·태평화위와 현대측은 남북당국의 추인을 받은 것으로도 볼 수 있다. 양측은 계약서의 해석·이행과 관련한 분쟁은 양측 대표단의 협의를 통해해결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그러나 타결이 되지 않을 경우에 대비해 남북 당국간의 분쟁해결기구가 마련돼야 한다.특히 남북기본합의서에 있는 남북교류협력공동위원회가 대안이다. 현대와 아·태평화위의 일련의 합의서와 관련해 다음 몇가지 사항은 보완돼야 한다고 본다.첫째 ‘신변안전보장을 규정한 부속계약서’ 10조는 남북기본합의서 17조 등에 근거한다.남북한 모두 기본합의서를 법적 실효성 있는문서로 원용하고 있다.‘금강산 합의서’는 지난 92년 합의된 남북기본합의서를 바탕으로 한 관광 세부 합의서로 승화·발전돼야 한다. 둘째 남북한 관광은 공법적 성격이 짙다.즉 남북한 당국의 계약으로 발전시켜 책임성을 확보해야 한다.셋째 분쟁해결 조항은 가장 미흡하다는 지적을받고있다.관광객의 신변문제에 이상이 있을때 남북기본합의서상의 ‘남북한사회교류·협력공동위원회’에 조정을 위임하는 것이 대안이다. 넷째 장기적으로 남북한 관광을 비롯,자유왕래에 따른 형법적 문제 및 처리원칙도 마련돼야 한다.‘남북한 민사사법 공조 및 형사사법공조에 관한 세부합의서’의 채택도 필요하다.남북고위급회담에서 합의된 바 있는 ‘남북법률 실무협의회’가 활용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금강산관광의 지속적인 추진은 북한으로 하여금 포용정책이 정경분리원칙에 따른 흡수통일 배제정책이란 점을 믿게 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李長熙 힌국외대교수·법학 정리 이석우기자 swlee@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1)

    대한매일은 미국 US 아시안뉴스 서비스 주필인 문명자씨의 미공개 회고록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을 단독입수,내용 가운데 일부를 발췌하여 연재합니다.문씨는 지난 73년 ‘김대중납치사건’을 국내에 보도한 이후 신변에 위협을 느껴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이후 30여 년간 미국서 활동해온 현역언론인입니다.그동안 그는 국내에서 접할 수 없는 한국관련 고급정보를 목격하고 기록해 왔으며 이번 회고록은 이같은 내용들을 토대로 한 것 입니다.회고록에는 한국현대사의 ‘미스터리’는 물론 한·미관계의 이면사를 처음 공개한 것도 상당수 포함돼있어 ‘역사적 기록’으로서도 큰 의의가 있을 것입니다. 73년 4월 15일 대만대학에 박사학위를 받으러 간다며 한국을 빠져나온 전중앙정보부장 김형욱(金炯旭)이 며칠후 미국에 나타났다.그것은 영락없는 도망길이었다. 5·16 쿠데타의 주동인물중 하나였던 그는 그후 출세가도를 달렸다.63년 5월 제4대 중앙정보부장으로 취임한 김형욱은 박정희를 위해 별명처럼 ‘곰’같은 충성심을 발휘하는 한편 자기자신을 위해 온갖 부정한 방법을 동원해치부를 했다.이같은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유는 자명했다.수십년간 충성해온 수하들을 하루 아침에 내치고 잡아넣는 박정희의 냉혹성에 대한 공포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가 미국에서 김형욱을 처음 만난 것은 그가 71년 공화당 전국구 의원 신분으로 남미를 방문하고 뉴욕에 들렀을 때였다.그때 나는 MBC 워싱턴특파원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유엔 취재차 뉴욕에 있다가 당시 컬럼비아대학 연수생으로 와 있던 동아일보 기자 이웅희(李雄熙·현 무소속 국회의원)와 함께 김형욱과 뉴욕의 한 한국음식점에서 식사를 했다. 김형욱이 미국으로 도망온 이후 나는 그와 수 차례 만난 적이 있다.73년 11월 내가 미국에 정치망명을 선언한 후 그는 내게 “문 여사,용감한 결심을존경합니다.우리는 뜻을 같이 하는 동지입니다”라며 전화를 걸어오기도 했다.그는 내가 망명을 선언한 후 부쩍 자주 전화를 걸어왔는데 “김대중 납치범 명단을 내가 다 가지고 있는데 때가 되면 가르쳐주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77년 1월 김형욱은박 정권의 미국 의회 부정로비사건 조사를 위해 구성된프레이저위원회에 증인으로 채택되어 있는 상태에서 아들과 함께 유럽여행을한 적이 있다. 그는 뉴욕 케네디공항을 통해 미국으로 돌아왔는데 여기서 낯뜨거운 사건이 발생했다.김형욱이 달러를 밀반입하다가 세관원에게 걸린 것이다.내가 그 사건을 처음 알게 된 것은 한 유태인 친구의 제보 때문이었다. 세관원은 오리걸음(덕 워킹)으로 걸어 들어오는 동양남자가 뭔가 숨긴 것이틀림없다고 확신,김형욱을 멈춰 세웠다.꼭 아편쟁이같이 생겨 마약밀수를 하는 줄 알았다고 한다. “헤이,유,스탑”(여보,좀 멈춰요). “미?”(나요?). “예스,유”(예,당신말이오). 더욱 한심한 일은 세관원이 그를 불러 세워 몸수색을 하려 하자 김형욱은 한국식으로 세관원을 협박했다고 한다.“내 몸을 수색해서 아무것도 안나오면너 그냥 두지 않겠다”.“오케이”.세관원은 보안관에게 명령했다. “데려가 발가벗겨”. 보안관이 김형욱을 방으로 데려가 발가벗겼는데 그는 무려 7만5,000달러의돈뭉치를 다리에 붕대로 둘둘 감고 그 위에 여자 타이즈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79년 10월 7일 김형욱이 프랑스 파리에서 실종된 후 나는 교토통신의 요코가와 워싱턴특파원과 함께 처음으로 뉴저지에 있는 그의 저택을 방문한 일이있다.그의 부인 신영순(申英順·在美)에게 주소를 물어 찾아간 그의 집은 웬만한 미국 부호의 집 못지않게 호화롭게 꾸며져 있었다. 실종 직전 김형욱은 이른바 ‘회고록’ 출판문제로 박 정권과 막판 거래를하고 있었다.박 정권은 김형욱에게 “회고록을 출간하지 않는 대가로 500만달러를 주겠다”고 제의하고 이미 100만∼150만 달러를 먼저 지불했다고 한다.김형욱은 그 나머지 돈을 받으러 파리에 갔다가 결국 실종되고 만 것이다. 김형욱이 어떻게 최후를 맞았는가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설이 있다.우선 중앙정보부가 파리에 온 김형욱을 납치,살해한 후 센강에 버렸다는 설도 있었고,또 산 채로 짐짝처럼 포장해 KAL기에 실어 서울로 데려갔다는 설도 있다. 그 무렵 우리 사무실에 프랑스어로 된 익명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 내용은 김형욱이 KAL기 짐칸에실려갔다는 것이었다. 나는 미국의 한 항공사 화물부에 문의를 해보았다.“사람을 짐짝처럼 싸서운송하는 것이 가능합니까?”.“산소가 부족해 호흡이 곤란하고 온도·습도가 낮아 사람이 짐칸에서 파리∼서울간 15시간을 버틴다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합니다”. 이래저래 취재는 벽에 부딪쳤고 나는 김형욱의 사인규명을 거의 포기했다. 그런데 80년대초 나는 뜻밖의 루트를 통해 김형욱의 사인에 대한 상당히 정확한 정보에 접하게 되었다.발설자는 정일권(丁一權) 전 국무총리였다.그는유럽을 여행하던 중 파리에서 자신이 신뢰하는 모 인사(본인의 요청으로 신분을 밝힐 수 없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잔인하다 잔인하다 했지만 박정희가 이렇게 잔인할 수 있나.잘못했다고비는 김형욱이를 자동차에 실어 그대로 폐차장에 밀어넣어 버렸다네”그의 말에 따르면, 산 채로 서울로 납치해간 김형욱을 차지철이 경복궁에서청와대로 이어지는 지하벙커를 통해 박정희 앞에 대령했는데 김형욱이 박정희에게 “잘못했습니다.죽여주십시오”하고 빌었다는것이다. 정일권의 말대로라면 김형욱은 폐차장 압착기 아래서 최후를 맞았다는 얘기가 된다.정일권의 입장에서 보면 김형욱은 자신을 대통령으로 옹립하려던 ‘이북파 최측근’이었으니 분개할만도 했을 것이다. 나는 이같은 사실을 정일권 본인을 통해 거듭 확인한 바 있다.지난 86년 한국을 방문했을 때 하얏트호텔에서 정일권을 만난 자리에서 나는 이렇게 물어보았다. “김형욱이가 서울로 잡혀와서 비참하게 죽었다는 얘기를 한 적이 있으시다는데 사실인가요?”“예,내가 그런 애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그것은 사실입니다”. 정일권은 말년에 암에 걸려 고생하다가 94년 타계했는데 내가 그를 본 것은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文明子씨 일문일답 ■회고록을 출판하게 된 동기는. 역사를 위한 기록이다.한국사회는 가치의 혼돈시대를 맞고 있다.이대로 한세기만 지나면 한국사회에는 박정희를 미화하는 기록만 남을 것이다. 오랫동안 미국의 권부를 가까이서 취재하면서 나는 국내에서 접하기 힘든사실들을 많이 보고 들었다.우리 후손들의 역사인식에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바람으로 그동안 보고 들은 박정희의 모든 것을 기록했다. ■회고록의 제목은 ‘내가 본 박정희와 김대중’인데 박정희 전대통령에 관한 부분이 70% 정도를 차지하는 있는 것 같은데…. 61년 5·16쿠데타 때부터 시작해 82년 김대중씨가 사형수에서 사면을 받고워싱턴에 왔을 때까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박정희씨는 이미 관 뚜껑에 못을박은 사람이고 김대중씨는 아직 활동하는 현역 정치인이 아닌가. 김대중씨에대한 기록은 또다른 기회를 기다려야 할 것이다. ■문 주필의 박정희 전대통령 비판에 대해 일각에서는 주관적이라는 지적이나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박정희에 대해서 나는 한 언론인으로서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있다.그러나독자들은 나의 책에서 사실만을 보면 된다.1961년 4월이후 현재까지 워싱턴에서 벌어진 한국정치 관련사건들을 사실에 입각해 기록했다.사실에 대한 해석과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문 주필의 회고록에는 특정인들의 실명이 거침없이 거론되고 있는데…내가 실명을 거론한인물들은 한국정치사에서 책임있는 위치에 있었던 사람들이다.그들은 공직에 취임함으로써 이미 역사의 심판대 위에 스스로 올라선것이다. 나는 그들에 대한 역사적 기록을 남겼을 뿐이다.한가지 지적하고 싶은 것은 한국언론의 익명문화다.육하원칙의 가장 첫번째 요소가 ‘누가’이지 않은가.한국의 언론인들은 혈연·지연·학연의 인간관계 속에 깊이 편입돼 있어 실명을 거론하지 못한다. 퇴직후에도 그 인간관계 속에서 살길을 찾아나가야 하므로 ‘익명의 문화’는 극복되지 않는다.내 경우는 다행인지 불행인지 한국사회에서 떨어져 40년을 살아왔기 때문에 거칠 것이 없다. ■그동안 ‘반한인사’ 또는 ‘친북인사’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녔는데 이에대한 본인의 견해는? 유신정권때인 70년대까지는 ‘반한인사’로 불렸는데 80년대말 남북 고위급회담이 본격화된 후 북한취재에 나서면서 ‘친북인사’로 호칭이 바뀌었다. ‘반한인사’,‘친북인사’란 중앙정보부가 만들어낸 용어로 전혀 타당하지않다.굳이 말하자면 ‘반박정희 인사’나 ‘반유신인사’라고해야 옳다.‘친북’도 그렇다.남북은 같은 민족이다.서로가 ‘친북’도 하고 ‘친남’도해야 한다.‘친미’나 ‘친일’,‘친중’과는 성격이 다른 것이다.94년 김일성 주석 사망후 ‘100일설’부터 ‘3년설’까지 북한붕괴론이 대단했다.내가북한에 가보고 와서 북한은 붕괴하지 않는다고 했더니‘친북인사’라고 했다. 한반도 남북에 사는 사람들은 분단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보는 시야도 반쪽짜리일 수밖에 없다.스스로 외눈박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면 두 눈으로 보는 사람이 편파적으로 보이는 것이다. [정운현기자] -文明子씨는 인가 문명자(文明子·70)씨는 38년째 미국 권부의 상징인 백악관을 출입하고 있는 현역 재미교포 언론인이다.73년 11월 당시 보도금지 사항인 ‘김대중납치사건’을 보도한 후 중앙정보부의 체포위협을 피해 미국에 ‘정치망명’을한 전력으로 그동안 국내에선 그의 활동이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80년 중국 덩샤오핑(鄧小平)의 초청으로 미국 여기자단 단장으로 중국을 방문,덩샤오핑을 인터뷰했으며 90년 남북고위급회담 이후방북취재를 시작한이후 92,94년 두차례에 걸쳐 김일성 주석을 인터뷰했다. 30년 대구 출생인 문씨는 숙명여고 졸업후 연세대 영문학과 1학년 재학중 6·25를 맞아 피란지 부산에서 일본으로 유학,메이지대 경제학부·와세다대국제법 대학원을 졸업했다. 61년 조선일보 워싱턴특파원을 시작으로 동아일보,경향신문,MBC 워싱턴특파원을 역임한 그는 73년 미국에 정치망명한 후 미국인 동료기자들과 함께 US아시안뉴스 서비스(통신사)를 설립,국제정치담당 주필로 일하고 있다. 동양통신 초대 워싱턴특파원을 지낸 남편 최동현(崔潼鉉)씨와 사이에 1남 1녀.그의 미국이름 주리 문(Julie Moon)은 ‘대지’의 작가 펄 벅 여사가 지어준 것이다. [정운현기자]
  • [철도 100년] 21세기 청사진

    “화륜거(火輪車) 구르는 소리는 우레와 같아 천지가 진동하고 기관거의 굴뚝 연기는 반공에 솟아오르더라.수레 속에 앉아 영창으로 내다보니 산천초목이 모두 활동하여 닿는 것 같고 나는 새도 미처 따르지 못하더라.” 독립신문(1899년 9월19일자 3면)은 한국철도가 국내 최초로 1899년 9월18일경인선 노량진∼제물포 33.2㎞ 구간의 운행을 위해 노량진역에서 기적을 울리며 떠나던 장면을 이렇게 묘사했다. 한국철도가 18일 창설 100돌을 맞아 지난 한세기동안 축적된 역량을 바탕으로 ‘전국 반나절 생활권 시대’를 열 채비를 하고 있다.오는 2020년이면 주요 간선의 복선화,전철화와 더불어 평균 시속 200㎞의 열차가 투입돼 전국주요 도시를 3시간안에 연결하게 될 전망이다. ■반나절 철도생활권이 열린다 지난 89년 5월 추진방침이 결정된 경부고속철도는 점유용지가 도로의 8분의 1,에너지 소모량은 자동차의 20분의 1 수준으로 다가오는 21세기 육상교통을 선도할 것으로 평가받는다.서울∼동대구 구간은 오는 2004년 4월 개통된다.전 구간이 뚫리는 2010년에는 최고 시속 300㎞로 서울∼부산 412㎞를 2시간40분(현 새마을호 4시간 10분 소요)에 주파하게 된다. 이와 함께 철도청은 21세기 철도망 구축을 위해 우선 1단계로 오는 2002년까지 경부선 수원∼천안,경인선의 복복선화와 호남선 송정리∼목포 구간 복선화,경부선 천안∼조치원과 충북선을 전철화할 예정이다. 2단계(2003∼2007년)에는 경부선과 호남선을 전철화하고 대구선과 경원선,경의선을 복선 전철화하는 등 국가 기간철도망의 대략적인 골격을 완성한다.3단계(2008∼2012년)에는 교통수요 증가에 대비한 고속·대량간선 철도망과남북·동서축의 기간 철도망 확충을 위해 경춘선,장항선,전라선,군산선,동해남부선을 복선 전철화한다.포항∼삼척 노선도 새로 생긴다.마지막 4단계(2013∼2020년)에는 영동선,경북선,태백선,중앙선을 복선 전철화하고 춘천∼속초,김천∼진주,보령∼조치원 노선을 신설한다. 이 때가 되면 서울∼부산 2시간40분,서울∼장항 1시간42분,서울∼목포 2시간58분으로 각각 단축돼 전국이 반나절 생활권에 접어든다. ■통일철도 어떻게 돼 가나 남북의 혈맥처럼 이어지다가 잘린 철길은 경의선(서울∼신의주) 경원선(서울∼원산) 금강산선(철원∼내금강) 등 3개 노선.이들 철길은 82년 1월 정부의 ‘남북 기본관계에 관한 잠정협정’ 제의에 따른대북 시범사업으로 경의선 복구계획이 수립된 뒤 91년 12월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철도연결 합의가 이뤄지는 등 복구를 위한 희망이 움터 왔다. 철도청은 이를 구체화하기 위해 지난 84,85년 경의선 단선구간(문산∼봉동20㎞)가운데 남측구간(문산∼장단 12.0㎞)의 복구를 위한 세부설계를 마치고97년엔 용지매입을 끝냈다. 경원선도 단선구간(신탄리∼평강 31.0㎞)가운데남측 단선구간(신탄리∼월정리 16.2㎞)도 91년 세부설계와 97년 용지매입을완료했다. 정부는 고속철도의 경우도 통일 뒤에는 경의선고속철도(서울∼신의주) 경원고속철도(서울∼원산) 평원고속철도(평양∼원산) 등을 건설,이미 남한에서운행 중인 고속철도와 연계 운행한다는 구상을 갖고 있다. 이처럼 남북철도망이 다시 연결되면 중국횡단철도(TC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통해한반도에서 유럽지역까지 열차를 타고 갈 수 있는 날이 현실화될 전망이다. 박건승기자 ksp@
  • [사설] 白凡 정신 바탕의 대화를

    어렵게 열린 베이징(北京) 남북고위급회담이 시작부터 난항을 겪어 가족상봉을 기대했던 1,000만 이산가족들과 국민을 크게 실망시키고 있다.예정보다 하루늦게 열린 22일의 첫 회담에서 남북 대표단은 기본 입장만 밝혔을뿐 회담의 계속 여부조차 불투명한 상태다. 남북회담의 전망을 어둡게 만든 것은 북한이다.북한측은 당초 이번 회담에서 논의키로 약속했던 이산가족문제는 제쳐두고 엉뚱하게 ‘서해사건’을 들고 나왔다.서해사건이 남측의 도발로 일어났으니 사과와 함께 책임있는 대책을 내놓으라는 요구다.이산가족의 상봉에 필요한 생사와 주소 확인을 위한명단교환과 서신거래 등의 실질적 문제를 논의하자는 우리측의 요구는 아예모른다는 태도였다. 서해사건이 북한의 도발에서 비롯됐다는 사실은 이미 세계가 모두 알고있다.북한 경비정의 북방한계선(NLL)침범으로 시작된 남북 해군의 대치상황이 북한측의 선제공격으로 교전사태로까지 확대됐던 것이 사건의 전말이다.이처럼 명백한 사건인데도 남쪽에 사과를 요구한다는 것은 회담을 깨기위한 의도로 볼 수밖에 없다.북한이 이번 회담의 시작전부터 이유없이 회담시간을 두차례나 연기하고 약속한 비료가 모두 도착하지 않았다며 회담을 일방적으로 하루 연기한데서도 이러한 의도는 짐작됐었다. 우리는 서해 사건에 이은 금강산 주부관광객 억류와 이번 남북 고위급회담에 북한의 계산된 의도가 깔려있다고 본다.받을 것은 모두 받으면서 한반도에 일정한 긴장상태를 유지하여 북한의 협상력을 높이려는 ‘이중(二重)전략’이라는 분석이 가능할 것이다.남한은 배제한채 미국과 상대하려는 전략일수도 있다. 핵개발의혹과 미사일 추가발사 움직임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북한의 의도가 무엇이든,어떤 어려움이 있든 남북대화는 계속돼야 한다.대화를 통해 특히 이산가족문제는 시급히 해결해야 한다.이산가족문제야말로한반도의 평화와 남북 화해·협력의 첫단계이자 남북 모두의 공동 과제이기때문이다.반세기 가까이 계속돼온 문제들이 하루아침에 해결되기를 기대할수는 없다.남북관계 개선에 예기치 않은 난관들이 수없이 많을 것이고 북한의 ‘돌출행동’도 이미 예상되던 일들이다. 올해로 서거 50주기를 맞는 백범 김구(金九)선생은 흉탄에 쓰러지기 한해전인 1948년 4월 19일 남북협상을 위해 38선을 넘었다.온갖 모략과 생명의위험까지 각오한 북행(北行)이었다.민족통일국가 건설을 위해 만난(萬難)을무릅쓴 선생의 정신이 오늘의 남북대화에도 필요함을 강조한다.
  • 국가정보원 1·2차장-기획조정실장 교체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4일 국가정보원 1·2차장과 기획조정실장을 모두교체,해외담당인 1차장에 권진호(權鎭鎬)국제문제조사연구소장,국내담당인 2차장에 엄익준(嚴翼駿)전안기부3차장을 임명했다. 김대통령은 또 기획조정실장에는 최규백(崔奎伯)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을 승진,발령했다고 박준영(朴晙瑩)청와대대변인이 발표했다. 박대변인은 “이번 인사는 전문성과 국정원 조직의 활성화를 위한 것”이라고 배경을 설명했다. 국정원은 다음주초 본부 1,2급과 지부장 등 고위 간부직에 대해서도 대대적인 인사를 단행할 예정이다. ◇최 신임 기획조정실장 약력 ▲광주·57 ▲국립체신학교·건국대 행정대학원졸 ▲국가정보원 대공정책실장양승현기자 yangbak@- 權鎭鎬1차장 프로필 차분한 학자 스타일로 “어떤 경우에도 부하 군기를잡는 일이 없다”는 게 주위의 평.수준급의 영어와 불어 실력을 갖춘 정보통.천용택(千容宅)국정원장과는 육사 후배라는 것 외에는 특별한 인연은 없다. 부인 이화용(李和鎔·57)씨와 2남2녀. ▲충남 금산·58 ▲용산고·육사 19기 ▲32사단장 ▲국군정보사령관 ▲중장 예편(95년) ▲세종연구소 연구원 겸 육사 교환교수- 嚴翼駿2차장 프로필 66년 중앙정보부에 첫발을 내디딘후 대공분야를 섭렵한 정통 정보맨.90년대초 남북고위급회담 상황실장으로 활약,치밀한 판단력을 인정받았다.94년 남북정상회담 예비접촉에 전념하느라 딸 결혼식에 불참한 일화도 있다. 98년초 조직개편 바람에 휘말려 면직됐었다.부인 임미자(林美子·57)씨와 1남1녀.▲전북 전주·56 ▲고려대 정외과 ▲안기부장 제3특보 ▲안기부3차장
  • 남북 北京서 비공개 접촉중

    정부는 북한이 남북 고위급 정치회담의 개최시기로 거론했던 하반기가 한달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남북 당국간 회담 개최원칙을 협의하는 비공개 접촉을중국 베이징(北京)에서 진행중인 것으로 1일 밝혀졌다.통일부는 또 대북비료 지원과 이산가족 문제 논의 등을 위한 남북 당국간 회담 개최에 앞서 북측과 비공개 접촉 목적으로 지난달 31일 남북회담사무국 고위관계자를 베이징으로 급파한 것으로 알려졌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이와 관련,“남북대화 재개를 목표로 하는 이 접촉에대한 북측 반응이 조만간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 당국자는 “과거와 같은 남북고위급회담 형식을 비롯해 비료지원과 이산가족 문제를 함께 논의할 수 있는 장관급이나 차관급 회담,특사교환 예비회담 등 모든 레벨의 당국간 대화가 무방하다는 게 정부의 기본 입장”이라고말했다. 한편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지난달 31일 몽골 방문중 가진 기자간담회에서 “지금까지 논의된 것으로 봐서 남북관계에 좋은 진전이 있을 조짐이 있다”며 “단언할 수는 없지만며칠내에 중요한 진전이 있을 가능성이 있으니기다려달라”고 말했다. 구본영기자 kb
  • 신임 국정원장등 장관급·청와대 수석·차관급 프로필

    ◇ 千容宅 국가정보원장 정책·전략,군사교리 등 국방 전분야에 걸쳐 해박한 식견을 가진,자타가 공인하는 안보통. 93년 중장으로 전역한뒤 비상기획위원장을 거쳐 국민회의 전국구의원으로 15대 국회에 진출했다.국방위원 시절에는 율곡비리 폭로 등으로 이름을 날렸다.지난 대선 과정에서 ‘북풍’을 잠재우는 등 안보분야에서 김대중(金大中)후보의 핵심참모로 활약했다.그 공로로 국민의 정부 초대 국방장관에 발탁됐으나 잠수정 침투,미사일 오발사건 등 한때 어려움도 겪었다. 부인 김아미(金雅美·55)씨와 3녀. ◇ 朴舜用 검찰총장 빠른 판단력과 친화력으로 사시 8회 출신 가운데 일찌감치 ‘총장감’으로꼽혀 왔다.법무부 교정국장 시절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 두 전직대통령 수감 업무를 무난히 처리했고 대검 중수부장때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 비자금 사건을 무리없이 처리해 신임을 얻었다.지난 2월 검사 항명파동때에는 밤늦도록 평검사들과 소주잔을 기울이며 불만을 추슬러 신망을 얻었다.김태정(金泰政) 법무장관과는 총장-중수부장,총장-서울지검장으로 호흡을 맞추면서 ‘환상의 콤비’라는 평을 들었다.취미는 테니스.부인 김혜정(金惠貞·52)씨와 2남. ◇ 安炳禹 중소기업 특별위원회 위원장 경제기획원 예산정책과장과 예산총괄과장,예산심의관을 거치는 등 자타가공인하는 예산전문가.국민의 정부 출범후 초대 예산청장을 맡아 IMF사태 극복을 위한 본예산 편성을 무난히 처리해 능력을 인정받았다. 부하직원들에게 좀처럼 얼굴을 붉히는 일이 없다.부인 유인숙(柳寅淑·49)씨와 1남1녀. ◇ 李起浩 경제수석비서관 깔끔한 외모에 정연한 논리와 빈틈없는 일처리로 사무관 시절부터 윗사람의 신망이 두텁다.지난 김영삼(金泳三)정부에 이어 현 정부에서도 노동장관 자리를 지켜 화제가 됐다.IMF체제 하에서 노사정위원회의 필요성을 김대중(金大中)대통령에게 보고해 관철시키는 등 실업대책과 노사관계를 무난히 이끌었다는 평을 듣고 있다.부인 양인순(梁仁順·47)씨와 1남1녀. ◇ 黃源卓 외교안보수석비서관 육사 18기 대표화랑 출신으로 합리적이고 온화하지만 업무 추진력도 만만치 않다는 평.91년 한국군 장성으로는 처음으로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측 수석대표에 임명됐으나 북한이 인정하지 않아 군정위가 열리지 않는 등 파동을겪기도 했다.12·12 당시 정승화(鄭昇和)육군참모총장의 수석부관을 지냈다는 이유로 5·6공때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기도 했다.부인 음성원(陰聖媛·54)씨와 1남1녀◇ 朴晙瑩 공보수석비서관 언론학박사 학위를 갖고 있는 해직기자 출신의 언론인.지난 80년 5·18 이후 언론검열에 항의해 강제 해직됐으나 87년 민주화바람에 중앙일보에 복직,뉴욕특파원 등을 지냈다. 신사풍으로 부드러우나 논리적인 원칙주의자.뉴욕특파원 시절 박지원(朴智元)문화부장관과 친분을 쌓았다.취미는 속기바둑이며,골프가 싱글수준이다. 부인 최수복씨(崔秀福·49)와 3녀. ◇ 嚴洛鎔 재정경제부차관 신임 엄차관은 행정고시 8회로 30년 경력의 정통 재무관료.금융,관세,경제협력국 업무를 거쳐 국장때 세제실로 옮겼다.2차관보 재직때 경제협력기구(OECD) 가입을 담당했다.성격이 온화하고 차분하며 일처리가 합리적이다.부인홍영신(洪榮信·46)씨와 1남1녀. ▲51·서울 ▲경기고 서울법대 ▲재무부 세제심의관,국세심판소장,2차관보◇ 梁榮植 통일부차관 제주 출신으로 72년 이래 통일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통일전문가. 역대 정권의 통일정책을 비교한 통일정책론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했고,여러권의 저서도 낸 학구파.TV 대담 프로그램에 자주 얼굴을 내미는 등 개방적인 성격이라는 평.부인 권영례(權寧禮·53)씨와 1남1녀.▲58·제주 ▲통일부대변인 ▲통일정책실장 ▲통일연구원장◇ 朴庸玉 국방부차관 75년 하와이대에서 정치학박사를 받은 ‘국제신사형’ 정책전문가.92년 남북고위급회담때 남북군사분과위원장으로서 ‘불가침 부속합의서’와 ‘남북군사공동위원회’를 탄생시켰으며,북한 핵문제가 절정에 달한 94년에는 주미 국방무관으로 대미협상을 주도했다.부인 유승애(劉承愛·52)씨와 3녀. ▲57·평남 평원 ▲경기고 육사21기 ▲국방부 정책기획차장,군비통제관,정책실장 ▲국가안전보장회의 사무차장◇ 金興來 행자부차관 작은 체구임에도 추진력이 강하면서 부하들로부터 사랑받는 행자부의 맏형. 경찰관으로 근무하다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 옛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은 지방행정 전문가다. 박지원(朴智元)문화관광부장관의 진도 군내초등학교 1년 후배.부인 위영자(魏英子·57)씨와 1남2녀. ▲58·전남 진도 ▲목포해양고 단국대법대 행시 10회 ▲목포시장 ▲재정국장 ▲지방행정연수원장 ▲기획관리실장◇ 羅承布 소청심사위원회위원장 행정고시 10회로 전남도 내무국 지방과에서 시작한 정통 내무관료.온화한성품으로 대인관계가 원만하지만 업무에 관한한 치밀하고 추진력이 탁월하다는 평.옛 내무부 주요 부서와 시장,군수 등을 두루 거치면서 폭넓은 행정경험을 쌓아 ‘행정 9단’으로 불린다.▲57·전남 함평 ▲한양대 행정대학원▲전남 여수,목포시장.내무부 공보관,지역경제및 지방재정국장,전남 행정부지사. ◇ 李元雨 교육부차관 온화한 성품으로 강단이 있는 전형적인 외유내강형.법무부 보도직(5급)으로 출발해 77년 문교부 편수과로 옮겼다.서울시 부교육감을 역임해 일선 교단의 사정에 밝다.술자리에도 자주 어울리는 등 소탈한 성격으로 따르는 후배들이 많다.단국대 국악과 교수인 부인 서원숙(徐元淑)씨와 1남1녀. ▲57·충북 청주 ▲서울대 사대 ▲교육부 교육기획정책관 ▲서울시부교육감 ▲청와대 교육비서관◇ 趙健鎬 과학기술부차관 상공부와 재무부,총리실,청와대를 두루 거친 경제관료.일처리가 꼼꼼하지만 성격은 활달하고 솔직하다.대학시절 조정선수로 활약한 경험 때문에 조정협회 이사직도 맡고 있으며 연극,영화 등 문화에도 관심이 많다.재무부 공보관 시절에는 ‘명대변인’으로 꼽혔다.박찬혜(朴贊蕙·49)씨와 2녀. ▲55·경기 김포 ▲서울대 법대 ▲재무부 국제금융국장 ▲청와대 기획조정관◇ 金順珪 문화관광부차관 행시 출신으로 문화 분야에서만 28년 동안 근무해 온 문화부 터줏대감.정책기획력이 뛰어나고 합리적이다.그러나 고집이 세다 할 정도로 소신도 있고뚝심도 있다는 평이다.‘일본이 앞서고 있다’는 영문번역서를 낼 정도로 학구적.취미는 등산이며 자주 실력발휘를 하지 않지만 주량도 상당한 편이다. 노모를 모시고 살며 부인 김혜성씨와 1남2녀.▲52세▲경북 의성▲경기고▲국민대 무역학과▲행시 10회(71년)▲문화부 공보관▲문화부 청소년정책실장
  • 국민의 정부 2기내각 출범-새얼굴 14人 프로필

    ‘제2기 내각은 우리에게 맡겨라’.‘5·24’ 개각으로 김대중(金大中)정부제2기 내각의 진용(陣容)이 갖춰졌다.기존 국무위원 가운데 11명이 바뀌었다.신설된 기획예산처장관도 국무위원에 합류했다.장관급인 중앙인사위원회 위원장과 차관급인 국정홍보처장도 첫선을 보였다.신임 장관들은 저마다 맡은분야에서 전문성과 참신성·개혁성을 인정받아 내각에서의 역할이 주목되고있다.내각에 그대로 남은 6명의 국무위원들과는 신·구(新·舊) 조화를 꾀할 것으로 기대된다.새 내각의 면면을 소개한다. ■康奉均 재정경제 행정고시 6회로 옛 경제기획원에서 관리를 시작한 정통 기획원 출신 관료. 경제정책 기획과 조정에 탁월한 능력으로 초기 새 정부의 경제개혁정책을 청와대에서 뒷받침했다.기획원 핵심요직인 경제기획국장과 차관보를 각각 4년씩 장수하는 등 5차례나 경제개발 5개년계획 수립에 참여했다.예산담당 과장과 국장으로 10년 근무했다.총리실 행정조정실장 재직때는 사회·경제정책을 매끄럽게 조정했다.업무처리에서 적당주의를 인정치 않아 후배들이 어려워하는 편.미국 윌리엄스 칼리지 경제학석사,한양대 경제학박사 학위를 갖고있다.부인 서혜원(徐惠源·53)씨와 1남1녀. ■金泰政 법무 호방한 성격에 의협심이 강하고 뒤끝이 없는 보스형 인물.친화력이 뛰어나지인(知人)이 많고 부하들로부터 신망도 두텁다. 형광펜을 그어가며 보고서를 읽을 정도로 꼼꼼한 일면도 있다는 평. 문민정부 당시인 97년 검찰총장에 오른 뒤,‘DJ비자금 사건’ 수사를 유 보했다. 잔정이 많아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한다. 지난 2월 심재륜고검장 항명파동 당시 일선 검사들로부터 사퇴압력을 받는 등 위기를 맞기도 했으나 특유의 뚝심으로 극복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이며 바둑을 즐긴다.부인 연정희(延貞姬·50)씨와 3녀. ■朴智元 문화관광 청와대대변인을 떠나는 고별사에서 “어디에 있건 대통령을 지근거리에서모신 영광을 잊지 않고 행동하겠다”고 말할 정도로 충성심이 강하다.김대중(金大中)대통령의 정계복귀때는 전국구 의원직을 버리기도 했다. 야당 총재시절부터 지금까지 거의 매일 김대통령과 아침을 함께한 ‘측근중 측근’으로 8년동안 ‘김대통령의 입’으로 활약했다. 오랜 대변인생활로 달인(達人)의 경지에 올랐다는 주위의 평이다.언론계에지인도 많다. 미국에서 사업가로 성공,뉴욕한인회장과 미주한인총연합회장을 지냈다.부인 이선자(李善子·56)씨와 2녀. ■孫 淑 환경 현 정부 출범 이후 입각이나 국회의원 후보로 거론돼온 DJ인맥의 대표적 문화예술인. 지난 2월 연극 ‘어머니’의 주연으로 20년간 출연키로 정동극장과 계약하는 등 100편 가까운 작품에 출연했다.MBC 라디오 ‘여성시대’도 9년째 진행중. 93년 환경운동연합 창립시 지도위원을 맡은 뒤 지난 2월 공동대표로 추대됐다. 다정다감한 성격에 눈물이 많아 별명이 ‘수도꼭지’.‘무엇이 이토록 나를’등 3편의 책도 냈다. 고려대 연극반 선배인 연극배우 겸 탤런트 김성옥(金聲玉·64)씨와 3녀. ■陳 稔 기획예산 업무 장악력과 조정능력이 뛰어난 정통 경제관료.리더십과 정치감각을 겸비했다는 평.누구를 만나도 자기편으로 만드는 인간적 매력이 있으며 논리가정연해 상대방을 설득시키는 능력이 탁월하다.추진력은 있으나 결론을 정해놓고 오락가락한다는 지적도 있다. 박정희(朴正熙) 당시 대통령으로부터 ‘공무원 중에서 저렇게 똑똑한 사람은 처음’이란 말을 들을 정도로 두뇌회전이 빠르다. 단신이나 소주를 좋아하는 소탈한 성격.성신여대 음대학장인 서인정(徐仁貞·52)씨와 한국은행에 근무하는 장남 등 2남이 있다. ■趙成台 국방 세밀한 부분까지 직접 챙기는 꼼꼼한 업무 스타일이다. 정책통답게 영관장교 시절부터 전략기획 및 군사작전 분야에서 탁월한 군사적 식견을 갖췄으며 조직장악력과 업무추진력도 뛰어나다는 평이다. 94년 정책기획관으로 있으면서 3억달러 규모의 한·미 방위비 분담협상을총괄하면서 500만달러를 깎기 위해 협상결렬 위기까지 몰고 간 일화를 남겼다. 외아들은 육사를 거쳐 대위로 복무중이다. 틈날 때마다 독서와 낚시를 즐기며 부인 이영숙(李永淑·53)씨와의 사이에1남1녀. ■鄭德龜 산업자원 재무부 재산세제과장과 증권정책과장,주영 재무관,경제협력국장,국제금융국장 등의 요직을 두루 거친 금융·세제·외환분야 전문가. 부가가치세 도입시 실무를 맡아 정착시켰고 대러 경협차관 협상도 주도했다.특히 97년말 IMF와의 자금지원 협상과 98년초 218억달러의 단기외채 만기연장,40억달러의 외평채 발행에 성공하는 등 환란을 수습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추진력과 판단력,담력이 탁월하다는 평을 듣지만 한편으로는 부하직원들을지나치게 엄하게 대한다는 얘기도 있다.부인 이명덕(李明德·49)씨와 2남. ■李相龍 노동 9급 서기보로 공직을 시작,38년만에 장관까지 오른 입지전적 내무관료.강원도와 내무부에서 잔뼈가 굵었다. 노동부 관련업무를 직접 다룬 적은 없으나 일선 시·도에서 재정·세무업무를 담당했다.대통령비서실과 건설부 차관을 지내면서 실업문제에 나름대로식견을 갖췄다는 평가다.지난해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국민회의에 입당한뒤,자민련 한호선(韓灝善)후보와의 후보단일화 논란 끝에 무소속으로 출마,낙선했다. 업무처리가 꼼꼼하면서도 부하들에게 자상하다는 평이다.부인 윤명규(尹明奎·60)씨와 2남1녀. ■金光雄 중앙인사위 방송을 통해 낯이 익은 행정학 교수.깔끔한 외모에 핵심을 찌르는 말솜씨가 일품이다.두뇌회전도 빠르고 합리적이지만 다소 깐깐한 성격이란 평가도 받는다. 98년 국민의 정부 출범 당시에 정부조직개편심의위원회 실행위원장을 맡아행정조직 축소를 주도했다. 제 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상임위원으로도 활동해 일찌감치 입각 대상자로 꼽혀왔다. 지난해 9월에는 서울대 22대 총장후보로도 거론됐다.취미는 등산이며 술도즐기는 편이다. 부인 유정희(柳貞嬉·57)씨와 1남1녀. ■林東源 통일 통일·외교·안보분야의 ‘3박자’전문가.외교안보연구원장,통일원차관,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거치는 등 이론과 실무를 겸비했다. 90년 1차 남북고위급회담부터 대표를 맡은 이래 일관되게 대북 포용론을 옹호해왔다.지난 95년부터 아태평화재단에 관여하면서 김대중(金大中)대통령과 인연을 맺었다.북한 핵위협 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포괄적 접근’구상을 기획,집행해왔다. 예비역 육군소장으로 5공 출범과 함께 외교관으로 변신했으나 군인체취가없고,부드러운 성품이라는 평. 부인 양창균(梁昌均·60)씨와 3남. ■金德中 교육 개혁적 성향에 추진력이 강하다.현 정부 들어 대통령자문기구인 새교육공동체위원회 위원장을 맡아온데다 김영삼(金泳三)정부때도 교육개혁위원회 부위원장을 역임했다. 아주대 총장으로 재임하면서 학부제와 교수연봉제 등을 과감히 도입,대학개혁의 ‘전도사’라는 별명을 얻었다.그같은 개혁성향이 발탁 배경이라는 후문이다. 대우그룹 김우중(金宇中)회장의 친형으로 서강대 교수(경제학)를 정년퇴직한 뒤,대우그룹 계열사 사장을 맡기도 했다.골프 실력도 수준급이며 부인 박용주(朴容珠·60)씨와 1남2녀. ■車興奉 보건복지 일에 적극적이고 토론문화에 익숙한데다 리더십까지 갖췄다.지난 2월 국민연금관리공단의 총체적 난맥상을 조기 수습,제 궤도를 찾도록 했다. 사회보험의 두 축인 국민연금과 의료보험을 가장 잘 아는 사회복지학계의대표적 개혁론자로 꼽힌다.지난해 지역의보조합과 공무원·교직원의보조합의 통합에 따른 단일보험료 부과체계를 개발했다.박정희(朴正熙)대통령 시절청와대비서실 행정관으로 관가와 첫 인연을 맺었으며,83년 보험제도과장 재직때 의보통합 파동으로 불명예 퇴진하는 아픔도 겪었다.부인 송외숙(宋外淑·50)씨와 1남1녀. ■李建春 건설교통 특유의 친화력과 리더십이 트레이드마크.정통세무관료로서의 전문성 못지않게 부하직원들에게는 손을 잡고 이끌어주는 자상한 선배의 덕성을 갖췄다.외부에도 지인들이 많다.이러한 성격 탓에 ‘정치적’이라는 지적도 받는다. 국세청장에 오른뒤 납세서비스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세무서 조직을 세목중심에서 기능중심으로 재편하는 등 강도높은 세정개혁으로 청와대로부터 높은점수를 받았다. 별명은 호남형의 외모와는 동떨어진 ‘불곰’.지난 80년대 후반 부동산 투기 억제시책을 강력히 밀어붙이면서 얻었다.부인 문영인(文玲仁·56)씨와 2남. ■吳弘根 국정홍보 지난 88년 군을 비판한 칼럼을 썼다가 정보사 요원들에게 테러를 당한 ‘정보사 테러사건’으로 잘 알려진 30년 경력의 언론인.칼럼이나 사설 등으로개혁적인 성향을 뚜렷이 드러내는 논객으로 알려져 있다.시경 출입기자때 신세지기 싫다며 도시락을 싸들고 다닌 일화를 남겼으며 후배들을 잘 챙겼다. 원칙을 지나치게 고집하고 주관이 강해 주위사람들과 가끔 마찰을 빚기도 했다.평소 책을 많이 읽으며 자기관리에 엄격하다.취미는 바둑.부인 송명견(宋明·54)씨와 2남. [알 림]‘제2공화국과 張勉'연재물 26회는 기사 넘쳐 쉽니다.
  • 對北공조 한국주도 당연

    金大中대통령은 24일 “우리는 물론 미국 일본 등 전세계가 가급적 북한과많이 교류,영향력이 확대되도록 해야 한다”며 대북 포용정책의 일관성있는추진방침을 천명했다. 金대통령은 국방부와 통일부의 국정개혁보고회의를 차례로 주재하면서 “미국과 일본이 적극적으로 북한과 접촉,왕래도 하고 국교도 맺기 바란다”고밝혔다. 또 “5월 러시아를 방문,대북 포용정책에 대한 러시아의 지지를 확인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金대통령은 이어 ‘대북 일괄타결방안’을 거듭 강조한 뒤 “북한에 우리의 (일괄타결) 의사가 충분히 전달되었다고 본다”고 말하고 “한반도는 우리땅이므로 대북정책을 우리가 주도하는 것은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金대통령은 康仁德통일부장관에게 “우리가 비료제공을 발표할 때 조건을달지 않았으나 북한과 편지왕래라도 가능했으면 좋겠다”면서 “통일부는 북을 설득하고 타일러서 동족사랑의 입장에서 (남북이산가족 상봉을) 추진하라”고 지시했다. 특히 “남북대화를 구걸하지는 않지만 실무급이든,정부지도급이든,아니면 정상회담이든 여하한 레벨의 대화를 할 용의를 갖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康통일부장관은 “대북지원의 지속 추진과 남북교류협력의 활성화를통해 남북관계 개선 분위기를 조성하면서 금년 하반기 남북대화 돌파구를 마련하겠다”고 올 하반기 남북고위급회담 개최 가능성을 밝혔다. 千容宅국방장관은 컴퓨터를 통한 외부세력 침투 방지를 위해 오는 12월까지 해커부대를 창설하겠다고 보고했다. 千장관은 북한의 경제난과 군사위협과 관련,“북한은 90년 이후 경제기반이급격히 붕괴되면서 체제유지를 위해 미사일 및 화생방무기 위협을 강화하고있다”면서 “주한미군에 화생방전 대비전력 및 항공전력을 증강하고 미사일경보망을 구축하는 등 대비태세를 강화하고 있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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