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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남매일신문 비리 수사

    【광주】 광주지검 특수부(윤치호부장ㆍ이동호검사)는 3일 전남매일신문(사장 안광양ㆍ46)의 비리에 대한 수사에 착수했다. 검찰은 지난 4월과 7월 대통령비서실과 대검찰청에 접수된 진정서를 넘겨받아 내사한 결과 ▲부당광고요구 ▲기자채용이 사례금 착복 ▲전 사원에 대한 일부 임금체불 등의 혐의 사실이 드러났다고 밝혔다. 검찰은 특히 지난해 9월 목포주재기자 김모씨 채용시 5백만원,26개지사 개설시 예치금 명목으로 8백만원씩을 받은 사실과 사원들에게 임금도 수차례 지급하지 않은 사실을 밝혀낸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은 이밖에 ▲사옥이전시 인근 업주로부터 부당보조금 징수 ▲부당해고 부분에 대해서도 수사를 하고 있다.
  • 모국방문 7순 사할린교포 할머니(조약돌)

    ◎50년만에 남동생ㆍ조카와 극적상봉 ○…사할린동포 모국방문단의 일원으로 서울에 온 강한갑씨(76)가 27일 하오2시 마포구청장실에서 50년만에 남동생 강평순씨(74ㆍ강서구 화곡본동 1130의20)와 극적으로 상봉. 강할머니는 지난25일 호적등본을 갖고 마포구청을 방문,딸과 동생을 찾으려 했으나 컴퓨터 조회에 실패,이날 장조카의 주민등록사항을 확인해 장조카 강성옥씨와 전화통화에 성공,동생과의 해후가 이뤄진 것. 그러나 강할머니가 찾고있던 남동생 2,여동생 2명중 큰동생인 강할아버지만 생존,다른 가족은 모두 사망했으며 딸 윤인섭씨(일명 강정자)는 출가한 것으로 밝혀져 현재 호적을 추적중. 강할머니는 40년 여름 유복자로 태어난 딸과 함께 서울 마포에서 살다가 딸이 국민학교에 입학하자 돈을 벌어 자립해 보겠다는 생각으로 『자리잡으면 데리러 오겠다』는 말만 남기고 혈혈단신으로 사할린으로 떠났었다. 강할머니는 그곳에서 재혼,2남3녀를 낳았지만 고향에 두고온 첫딸과 동생들 가족에 대한 그리움에 눈물의 세월을 보내다가 이날 꿈에서도 생각지 못하던 동생을 만나게된 것. 이날 상봉을 주선한 이원택 마포구청장은 강할머니 남매에게 기념품을 전달하고 50년만에 해후를 한 이들과 이산의 아픔을 함께 나누기도.
  • 가수 장현씨

    가수 장현씨(34)가 16일 하오4시 지병인 설암으로 사망했다. 싱어송라이터겸 남매듀엣으로 가요팬들한테 사랑을 받던 장씨는 6개월전 동생 장덕양이 요절한뒤 병이 악화돼 경기 성남시에 있는 성남병원에 입원,치료중이었다. 발인은 18일 상오9시,장지는 장호원대지공원묘지. 연락처 (0342)752­9200.
  • 방북신청 노인의 설레임/오승호 사회부기자(현장)

    ◎“이번만은 꼭”… 마음은 벌써 북녘에 『북한에 있는 노부모와 네자녀를 만날 날만을 손꼽아 기다려왔습니다』 북한방문 신청을 받기 시작한 첫날인 4일 서울 관악구 봉천동 관악구청 4층 대강당. 무더위에 비지땀을 흘리며 관련서류를 넣은 손가방과 부채를 들고 북에 두고온 가족들을 만날 꿈을 안은채 차례를 기다리는 김성탁씨(69ㆍ관악구 봉천동 산133의15)는 희끗희끗한 머리와 주름살이 가득한 얼굴에 눈물을 글썽였다. 김씨가 부모와 어린 4남매를 북에 두고 혼자 남쪽으로 내려온 것은 6ㆍ25다음해인 51년 1ㆍ4후퇴때였다. 이때 김씨는 30세였다. 고향인 평안남도 안주군 운곡면 용천리에서 당시 10살이던 장녀와 7세ㆍ5세ㆍ3세였던 4남매 및 환갑을 넘긴 노부모를 모시고 농사를 지으며 어렵게 살고 있던 김씨는 1ㆍ4후퇴하루 전날 무슨 장사를 해서라도 돈을 벌어보기 위해 혼자 고향을 떠나 평양으로 나섰다. 김씨는 그러나 평양에 도착한 다음날 중공군이 갑자기 물밀듯이 밀어닥치는 바람에 고향에 남아있던 가족들에게 연락할 겨를도 없이 피난민들속에 묻혀 남쪽으로 내려왔다. 하루에 50리씩 20여일을 꼬박 걸어 서울에 도착한 김씨는 영등포역에서 피난민들과 함께 군용열차 지붕위에서 3일간을 보낸뒤 안동이 고향이며 일제때 징용돼 진남포제련소에서 일하는 한 피난민을 따라 안동으로 내려갔다. 안동에 다다른 김씨는 6개월동안 땔나무 등을 해주며 남의 집에 얹혀살다 독립하기 위해 공주등지를 돌아다니며 목공일을 배웠다. 『군용열차 위에서 3일을 머무는 동안 아래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서로 비벼대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김씨는 이같은 이산의 아픔말고도 또다른 비운을 겪었다고 했다. 6ㆍ25사변이 일어나 기전 강제로 평양부근에 있는 인민군내무소(경찰서)에서 3년동안 일했다는 것이 피난내려온 뒤 뒤늦게 밝혀져 공주교도소에서 3년을 복역하는 고초를 겪었던 것이다. 『7ㆍ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됐을 당시에도 당장 통일이 돼 이북에 남아있는 가족들을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감격에 젖어 한동안 잠을 설쳤었다』고 회상한 김씨는 『이번에도 혹시 북한측의 거부로 고향방문의 꿈이 무산되면 또 어떻게 기다리나… 』는 걱정을 하면서도 벌써 마음만은 마냥 북의 고향에 가있는 듯했다.
  • 북한 원로사학자,4남매와 극적상봉/일 「조선학토론회」개막식장 주변

    ◎조총련탈퇴인사 2명,입장 거부되자 항의/“꼭 필요한 사람만 왔다”… 북,「대표단 축소」변명 분단이후 처음으로 갖는 남북한학자들의 본격적인 학술교류라는 점,북한측 대표단 규모의 돌연한 축소,남북이산가족의 상봉실현이라는 점 등에서 국내외의 관심을 끌어온 제3차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는 개막초부터 열띤 분위기를 보였다.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학자 김석형씨(75ㆍ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는 3일 상오 11시30분 개막식이 개최된 오사카(대판) 국제교류센터 대회의장에서 동생 4명등 6명의 가족들을 45년만에 한꺼번에 만나 대회 열기를 고조시켰다. 모두 11남매중 셋째인 김씨는 지난 45년 해방 불과 2∼3개월뒤 경성대학 역사학교수로 재직하다 부인 고학인씨(56년사망ㆍ이전피아노과졸) 및 남매를 데리고 월북했다. 철저한 공산주의자였던 그는 김일성대학에서 트럭을 몰고 「모시려」하자 『나를 대우해주는 곳으로 가겠다』며 가족들과 결별했다. 김씨의 부친 선균씨(46년 작고)는 한국인으로 처음 판사가 됐던 인물이며 변호사를 거쳐 초대 민선 경북지사를 지냈다. 모친도 정신여고 1기생으로,인텔리 가문 출신이었다. 이같은 가정환경속에 공산주의에 몰두했던 김씨는 가족들로부터는 거의 백안시되던 입장이었으며,스스로 월북을 선택했다고 가족들은 말한다. 이날 김씨와 상봉한 가족은 동생 석창(69ㆍ과천교회 장로),여동생 석순(65ㆍ성악가ㆍ뉴욕거주) 석수(61ㆍ숭실대 대학원장 최명관씨 부인) 성은씨(59ㆍ부산거주) 등 4명의 동생과 매부 최명관씨(65),최씨의 딸 선혜씨(40ㆍ전 대학강사) 등 6명이었다. 이들은 이날 상오 개막식이 끝날때쯤 식장으로 찾아와 재회를 이루었다. 식장 앞쪽에 앉아 있던 김씨는 여동생들이 『오빠』라며 달려와 포옹하자 말없이 눈물만 글썽였다. 동생들의 소개를 받고 난 김씨는 『여관은 어디 들었나,전화번호는…』하고 물었으며,동생들이 『한방에서 같이 자고 식사라도 하면서 그동안의 일을 이야기해요』라고 말하자 『그래,전화해서 식사나 하자』라고 대답했다. 한편 이날 개막식장에서는 조총련을 탈퇴한 하수도씨(61)와 김영성씨(67)등 2명이 『왜 초대장을 보내놓고 입장을 거부하는가』라며 격렬하게 항의,주최측 관계자들과 실랑이를 벌이기도 했다. 하씨는 주최측에서 보낸 초대장을 꺼내 보이며 『개막식장에 들어가기 위해 등록을 하려하자 명단에서 이름을 빨간줄로 긋고 입장을 거부했다』고 말하고 『이것은 이 대회가 조총련에서 주관하는 것임을 증명하는 것으로서,입장거부 이유를 설명하라』고 버텼다. 이번 대회에는 역시 북한측 참가규모가 당초 통보됐던 1백50명에서 11명으로 대폭 축소된데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이에 대해 북한측 김철명단장은 2일 하오 6시30분부터 나니와회관에서 개최된 환영리셉션에서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것은 아니며 꼭 필요한 사람만 오게 됐기 때문』이라고 애써 변명하고 『참가신청을 했다가 철회하면 못오는 것 아닌가. 너무 참석인원에 집착하지 말라』며 신경을 곤두세웠다. 리셉션장에서 한국측 대표인 이세기 국방정책연구소장(전통일원장관)과 홍일식 고대교수는 북한의 김철명 단장,김석형씨 등과 만나 건배를 들며 잠시 환담했다. 이소장이 김석형씨에게 『잘오셨습니다. 건강이 좋으시네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김씨는 『네,네』라고만 간단히 대답했고 김철명단장은 보도진의 집중에 『왜들 이렇게 야단스럽지요』라며 짜증스런 반응을 보였다. 홍일식교수가 김단장에게 『너무 오랜만에 만나 이렇습니다. 앞으로 자주 만납시다』라고 말하자 『이번 토론회도 조국통일에 기여하는 것이며 손자ㆍ증손ㆍ고손들을 위한 일』이라고 강조했다. 2번째 대화에서 이세기 전장관이 『우리 서로 싸우지 말고 형제같이 다정히 지내자』고 말하고 『다음번 올때에는 북경으로 돌아오지 말고 판문점을 지나 빠른 길로 오라』며 웃으면서 제의했다.
  • 48년 단신 월북뒤 소망명 청년/전자계측권위자돼 금의환향(조약돌)

    ○…16살의 어린나이에 사회주의이념을 동경,지난48년 혼자 월북했다가 소련으로 망명해 수리학 전자측정분야에서 세계적 권위자가 된 장학수박사(58ㆍ레닌그라드거주)가 27일 하오1시40분 소련 아에로플로트항공편으로 42년만에 그리던 고국땅을 밟았다. 장박사의 이번 방문은 자신의 젊은 시절 한 이념에 대한 맹목적 추종이 얼마나 허망한 것인가를 보여줄 자서전출간을 위해 문학사상사가 초청해 이뤄졌다. 현재 소련에서 「환경보전연구 및 생산합동체」의 화학담당부총장으로 있는 장씨는 공항에서 『환영속에만 간직해오던 조국땅을 다시 찾아 여한이 없다』고 말하고 『나의 인생역정을 남한의 젊은이들에게 꼭 알려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만인의 평등사회」를 좇아 북한을 택했던 장씨는 그곳에서 중학교를 다니다 전국교원대회에 손수만든 무선조정선을 출품하면서 그의 과학적 두뇌가 북한사회에 널리 알려지자 당시 교육부 부부장이던 남일의 추천으로 소련 유학길에 올랐다. 56년 모스크바대학 무선공학부를 졸업하고 북한으로 되돌아 간 장씨는체신성중앙연구소에서 일하다 당시 북한에서 대숙청과정을 지켜보면서 이 체제에 환멸을 느껴 61년 두만강을 헤엄쳐 건너 소련으로 망명했었다. 이날 공항에는 장씨의 큰형이며 독립유공자인 낙수씨(77)부부가 조카 등 10여명이 나와 장씨를 맞았다. 5남4녀의 형제가운데 생존해 있는 세째형 득수씨(67ㆍ의사ㆍ미국거주)와 누나 정자씨(70ㆍ일본거주) 등 4남매와는 지난86년 한 언론사의 도움으로 일본에서 극적으로 상봉하기도 했다.
  • 로즈여사 100회 생일잔치(세계의 사회면)

    ◎“미국의 왕조”케네디가의 산 증인/영광ㆍ슬픔속 가문의 정신적 지주로/미 의회,7월22일을 「감사의 날」선포/“모든 부문서 1등이 되라”열성적인 자녀교육 「미국의 왕조」라고 불리는 케네디가의 산증인인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여사가 영광과 슬픔으로 점철된 한세기를 보내고 22일 가족들의 축하속에 1백회 생일을 맞았다. 한편 미의회는 이날을 「로즈 피츠제럴드 케네디가에 대한 감사의 날」로 선포,3대에 걸쳐 케네디가를 미국의 최고 명문가로 키워낸 로즈여사의 공로를 기렸다. 고케네디 대통령으로부터 「가족들을 응집시키는 아교풀」과 같은 존재로 추앙받았던 로즈여사는 4남5녀 가운데 둘째아들인 존 F 케네디를 대통령으로,셋째 넷째아들인 로버트,에드워드 케네디를 상원의원으로 키워내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운 여장부. 그러나 로즈여사의 삶이 행복으로만 가득찼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그녀는 1944년 첫째 아들인 조2세의 전사,1948년 둘째딸 캐슬린의 비행기 추락사와 1963년 존 F 케네디 대통령과 1968년 대통령 선거유세중 로버트를 암살로 잃는 아픔을 겪었다. 그러나 로즈여사는 슬픔을 가슴으로 삭이며 이를 극복한 초연함과 용기를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극에서 극으로 모든 행ㆍ불행을 겪어왔던 로즈여사는 1890년 보스턴의 정치인인 존 F 피츠제럴드의 6남매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집안 역시 케네디가와 마찬가지로 지난 19세기 중엽 아일랜드를 휩쓴 대기근을 피해 미국으로 건너온 이민가정이었다. 그녀의 부친은 1895∼1901년 하원의원을 역임했으며,1906년에는 보스턴시장을 지내기도 했다. 따라서 허니 피츠라는 애칭을 갖고 있는 로즈여사는 여유있는 환경속에서 자유분방하게 성장할 수 있었으며 가정적인 조용한 성격의 어머니를 대신해 일찍부터 안주인 역할을 맡아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그녀는 명문여대인 웨슬리대 진학을 희망했지만 존 F 피츠제럴드는 그녀를 여동생인 아그네스와 함께 네덜란드의 「성심수녀원」으로 유학시켰다. 로즈여사는 성심수녀원에서의 생활을 통해 침착성과 신앙심을 키울 수 있었으며 이때 체득한 그녀의 독실한 종교관에 입각,그뒤 자신의 딸들을 수녀학교에 진학시키는 열의를 보였다. 로즈여사는 1914년 주영대사를 역임한 백만장자인 조셉 P 케네디와 결혼,케네디가를 세인들의 주목을 받는 가문으로 키워내는데 중요한 몫을 했다. 조셉 케네디부부는 『첫째가 되어야 한다』는 가훈을 바탕으로 자녀들을 강하고 훌륭히 키웠다. 모든 부문에서 2등을 용납치 않은 조셉은 자녀들에게 인습을 무시하고 자신의 규칙대로 살 것을 가르쳤으며 로즈는 경건ㆍ신앙ㆍ엄격함을 가르쳤다. 그녀는 자녀들의 식단ㆍ운동량ㆍ질병을 기록한 신상카드를 늘 지니고 있을 정도로 자녀교육에 남다른 애정을 쏟았을 뿐만 아니라 식사시간에 토론을 자주 갖기도 했다. 평소 뛰어난 정치적 감각의 소유자였던 로즈여사는 존 F 케네디가 46년 하원의원에 출마했을 때 선거운동원으로서 유감없이 실력을 발휘했으며 존 F 케네디가 60년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는 14개 주를 돌면서 무려 46회에 걸쳐 지원연설을 하는 투혼을 보였다. 로즈여사는 평소 『나는 어떤 것에 의해서도 정복되지 않기로 마음 먹었다. 내가 무너지면 다른 가족들에게 엄청난 불행을 줄 것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하곤 했다. 이처럼 정신력 뿐 아니라 10년전까지 수영과 조깅을 즐겼던 강한 체력의 소유자인 로즈여사도 나이는 어쩔 수 없어 요즘은 휠체어에 의지한 채 간호사들의 도움을 받으며 손자들과 보내는 시간을 낙으로 삼으며 지내고 있다. 그녀는 자서전을 통해 『후손들은 역경ㆍ실망ㆍ슬픔을 이겨낼 수 있는 인내력을 가져야 할 것』이라면서 『신은 우리들이 견디지 못하는 십자가를 지우지 않는다』고 기술,케네디가의 정신적 지주로서의 흔들림 없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곽태헌기자〉
  • “고모 찾아달라” 중국교포 호소(조약돌)

    ○…모국을 방문중인 중국 길림성 길림시 제30중학교 수학교사 정학순씨(51ㆍ길림시 독립로 60­4­59호)는 20일 고모 정옥화씨(74)를 찾아달라고 서울신문사에 호소했다. 정씨는 부친 정기순씨(70년 작고)가 지난 45년 고향인 경남 합천군 초계면에서 남의 집 머슴살이를 하다 만주로 이주,5남매를 모두 훌륭히 키우고 세상을 떠나기전 유언을 통해 『한국에 가서 고모를 꼭 찾아보라』고 당부했다고 말했다.
  • “정명훈씨 북서 초청/정부 승인나면 승낙”/가족들 밝혀

    【서울AP연합특약】 정명훈가족은 북한에서 연주를 해달라는 초청을 받았으며 만일 한국정부가 이를 승인한다면 북한으로 가서 공연활동을 할것이라고 정씨의 한 가족이 말했다. 프랑스 바스티유 오페라좌의 지휘자인 정명훈씨와 뉴욕 런던에 있는 그의 남매들은 북한에서 연주해달라는 초청을 받았다고 이 관계자는 밝혔다.
  • 빗길 고속도로 윤화 속출/대구ㆍ천안등 4곳서 충돌… 8명 사망

    【지방종합연합】 14일 하룻동안 전국 각 지방의 빗길에서 모두 4건의 교통사고가 발생,사망 8명ㆍ실종 1명ㆍ부상 6명의 인명피해가 났다. ▲하오2시30분쯤 경남 사천군 곤양면 환덕리앞 남해고속도로에서 영덕화물소속 경북7 아2142호 8t트럭(운전사 김운로ㆍ32)과 경남1 더9166호 르망승용차(운전자 김명호ㆍ27),부산3 나5807호 프린스승용차(운전자 정기수ㆍ45) 등 차량 6대가 충돌했다. 이 사고로 프린스승용차에 타고 있던 정광호씨(56ㆍ경북 경주시 율동 1822)가 그 자리서 숨지고 함께 탔던 정씨의 부인 김윤수씨(55) 등 3명이 중상을 입어 진주시내 고려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고 있다. ▲하오1시5분쯤 경북 영천시 영도동앞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서울기점 3백30.15㎞지점)에서 서울1 러2668호 스텔라승용차(운전자 김유원ㆍ41)와 쌍용동화소속 부산9 바5786호 트레일러(운전사 조화석ㆍ31),대구1 러4486호 콩코드승용차(운전자 안형수ㆍ43) 등 5대의 차량이 연쇄충돌하는 사고가 났다. 이 사고로 스텔라승용차 운전자 김씨와 콩코드승용차 운전사 안씨가그 자리에서 숨졌다. ▲상오11시15분쯤 충남 천원군 성거읍 삼곡리앞 경부고속도로 상행선(서울기점 75.5㎞지점)을 달리던 대영화물소속 경북8 아2204호 11t트럭(운전사 최태만ㆍ35)이 빗길에 미끄러지면서 중앙선을 침범,하행선에서 마주 오던 경기8 라1861호 4.5t복사트럭(운전사 이송우ㆍ29ㆍ천안시 대흥동 156)과 서울8 도8046호 1t봉고트럭(운전사 정철희ㆍ42ㆍ서울 구로구 오류동 205의3) 등 2대의 차량을 잇따라 들어받았다. 이 사고로 복사트럭 운전사 이씨와 함께 타고 있던 20대남자 및 봉고트럭 운전사 정씨 등 3명이 그 자리에서 숨졌다. ▲상오11시5분쯤 경북 경주군 건천읍 신평리 경부고속도로 하행선(서울기점 3백43.5㎞지점)에서 한석상사소속 경기8 러8594호 8t유조차(운전사 장경수ㆍ34)가 앞서 가던 경북2 다6317호 로얄XQ승용차(운전자 정원영ㆍ44)를 들이받아 승용차에 타고 있던 운전자 정씨와 옆좌석의 부인 이순임씨(25ㆍ경주시 성건동 369) 등 2명이 그 자리에서 숨지고 뒷좌석에 타고 있던 딸 헌경양(5) 등 남매는 중상을 입어 영천 성베드로병원에 옮겨져 치료를 받고 있다.
  • 공사장 철근더미 깔려 국교생 남매 숨져

    【부산=김세기기자】 2일 하오8시께 부산시 해운대구 우1동 395의5 ㈜한국건업 벽산빌라아파트 신축공사장 옆 공터에 쌓여놓은 철근더미 위에서 놀던 강복용씨(41ㆍ상업ㆍ우1동 388)의 딸 은식양(10ㆍ해동국교5년)과 아들 은수군(8ㆍ해동국교2년)이 철근더미에 깔려 숨져 있는 것을 강씨가 발견,경찰에 신고했다. 강씨에 따르면 점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던 중 금호주택 공사장 부근 철근더미에서 은식양과 은수군이 노는 것을 보고 1백여m 떨어진 집으로 가다 은식양의 비명소리를 듣고 달려가 보니 남매가 철근더미에 깔려 숨져 있었다는 것이다.
  • 노대통령(정상회담 여로)

    ◎“노대통령­고르비 만남은 엄청난 지진” 퀘일/노­부시,8개월만에 3번째 반가운 악수/교민들 「통일대통령」 피킷들고 대환영 ○…노태우대통령은 6일 상오 10시(한국시간 하오 11시) 정각 이날 아침 함께 조찬을 했던 퀘일 부통령의 안내로 백악관 동쪽집무실에 도착,존 리드 국무부의전장으로부터 영접을 받으며 로비에 대기중이던 미측 배석자들과 악수를 나누며 인사를 교환. 노대통령은 이어 루스벨트룸에서 방명록에 서명한 뒤 부시대통령의 집무실인 오벌 오피스에 들어섰고 이때 자신을 맞기 위해 입구에 서있던 부시대통령과 반갑게 악수,8개월여만에 3번째 만나는 돈독한 우의를 과시. 노대통령과 부시대통령은 오벌 오피스의 소파에 나란히 앉아 내외신 사진기자들에게 두 차례에 걸쳐 포즈를 취해주며 담소. 노대통령과 부시대통령은 기념촬영이 진행되는 동안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한소 정상회담에 관해 환담. 부시대통령은 『샌프란시스코회담은 아주 적절했으며 매우 중요한 것이었다』고 말하고 『오늘 노대통령과의 만남을 고대해 왔다』고 말했다. 이어 부시대통령은 『오늘 이 자리에서 한소회담 내용등을 구체적으로 논의하자』고 제의. 이에 노대통령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바쁘고 열띤 하루를 보냈다고 하더라』고 전하며 『그는 무척 기분이 좋아보이더라』고 고르바초프대통령과의 대좌인상을 피력. ○…노태우대통령은 부시 미대통령과의 한미 정상회담을 갖기 앞서 백악관 서쪽 부통령집무실 2층에서 댄 퀘일 미부통령과 조찬을 함께하며 환담. 퀘일 부통령은 『노대통령께서 백악관 서쪽 집무실을 방문해 주셔서 감사하다』며 『지난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샌프란시스코지역에 지진이 일어나서 만나뵙지 못해 안타까웠다』고 피력. 이어 퀘일부통령이 『샌프란시스코 한소 정상회담에서 고르바초프 소대통령을 만나본 소감이 어떠냐』고 묻자 노대통령은 『대단히 우호적인 분위기속에서 성과있는 회담이었다』고 대답. 조찬에 앞서 퀘일부통령은 접견실에서 노대통령은 반갑게 맞은 후 이어 도보로 조찬장으로 자리를 옮겨 2층 발코니에서 백악관을 내려다 보며건물구조를 설명했고 멀리 보이는 워싱턴 초대대통령기념관과 제퍼슨 대통령기념관을 가리키며 친절하게 설명. 이어 노대통령과 퀘일부통령은 사진기자들에게 포즈를 취해주며 손을 흔들어 인사하기도. 조찬도중 퀘일부통령은 『지난해 노대통령이 미국을 방문했을 때 샌프란시스코에 지진이 일어났는데 올해도 또 지진이 일어났다』며 『노대통령과 고르바초프대통령이 샌프란시스코에서 만난 것 자체가 엄청난 지진이 아니냐』고 노­고르바초프회담을 지진에 비유해 의미를 높이 평가. ○…노대통령과 부시 미대통령은 이날 45분동안 회담할 예정이었으나 이보다 15분 연장된 11시까지 회담했으며 당초 배석을 하지 않기로 했던 퀘일부통령까지 자리를 같이해 한소 정상회담 내용에 대한 미국측의 깊은 관심을 반증. 백악관측은 이날 11시부터 미군기지 이전문제가 현안이 되고 있는 그리스의 콘스탄틴 미초타기스수상과 부시 대통령의 회담일정을 잡아 놓았으나 노대통령과의 회담시간이 연장되는 바람에 이 일정을 11시30분부터로 연기하기도. 노대통령이부시 대통령과 약 1시간동안의 회담을 마치고 나오자 오벌 오피스앞에 기다리고 있던 20여명의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과의 샌프란시스코회담 내용을 집중 질문. 노대통령은 이 자리에서 북한의 개방화와 남북대화재개를 강조하며 『고르바초프대통령도 이를위해 북한에 압력을 넣기로 했느냐』는 질문에 『물론이다』고 만족스런 표정으로 대답. 노대통령은 또 『고르바초프대통령과 만난 결과 한반도긴장완화에 대한 자신을 얻었으냐』는 질문에 『물론 확신한다. 그리고 한반도 평화가 정착되면 주한미군도 조정할 수 있을 것이다』고 주한미군철수문제를 우회적으로 답변. 백악관 출입기자들은 노대통령이 약 5분동안 질문에 대한 즉석답변을 마치고 백악관을 떠나려하자 계속 한소 정상회담과 관련한 질문공세를 벌이는등 큰 관심을 보이기도. ○…노대통령은 이에앞서 5일 하오 5시10분(한국시간 6일 상오 6시10분)부시 미대통령과 한미 정상회담을 위해 워싱턴근교 앤드루스공군기지에 도착,교민 3백여명으로부터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노대통령은 박동진주미대사,리드 백악관의전장 등으로부터 기상영접을 받고 트랩을 내려 앤더슨 미국무부 동아태 부차관보,로해치기지사령관 등 미국측 인사와 이승곤주미공사등 한국측 인사들과 악수. 노대통령은 교포소녀 김민아양(11)으로부터 꽃다발을 받은 뒤 곧바로 교포들이 대기하고 있는 환영대로 가 태극기와 성조기를 흔들며 환영하는 교포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인사. 교포들은 「통일대통령 노태우」 「축 한소 정상회담 성공」 「북방정책성공으로 평화통일 앞당기자」라는 등의 피킷등을 흔들며 노대통령에게 『수고 많이 하셨어요』라고 일제히 환호. 노대통령은 한 교포가 『고르바초프대통령과의 회담성과가 좋아서인지 화색이 작년보다 좋으시다』고 인사를 하자 『세상이 많이 달라졌지요』라고 답례. 노대통령은 남매어린이를 안고나온 교포부부가 대형태극기를 내밀며 사인을 요청하자 매직펜으로 「대통령 노태우ㆍ1990년 6월5일」이라고 친필 서명.
  • 제8회/교정대상 수상… 보람과 영광의 얼굴들

    ◎27년째 봉직… 출소자 결혼식엔 꼭 참석/진익화 52세ㆍ수원교도소 교사/대상 『남달리 뚜렸한 선행을 한 것도 아니고 교정인으로서 평범하게 살아온 제가 이런 큰상을 받게 돼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올해 제8회 교정대상 수상자로 뽑힌 진교사는 짤막하게 수상소감을 대신했다. 63년4월 수원교도소에서 「반징역살이」라는 교도관생활을 시작해 올해로 27년째를 맞은 진교사는 박봉과 열악한 근무환경에도 불구하고 투철한 사명감과 봉사정신으로 교정행정의 산 일꾼으로 일관해왔다. 『앞으로의 교정행정은 재소자들을 격리ㆍ구금하는 것 보다는 이들을 교화ㆍ선도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도록 돕는 방향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소신을 펼치는 진교사의 얼굴엔 지난날에 대한 자부심이 어려있다. 재소자들을 위한 직업ㆍ교화교육을 통해 9백50여명의 각종 기능자격자와 59명의 대입ㆍ고졸합격자를 배출해냈다. 박봉을 쪼개 돕고 출소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취업을 알선하는 일이 진교사의 업무가 된지 오래다. 진교사는 『신참시절인 65년 혼자서 경기도 화성군 간척지조성 새마을사업장에서 6개월동안 재소자 35명과 함께 숙식을 하며 바다막는 일을 아무사고 없이 마치고 온 일이 후배들 사이에 화제로 떠오를 때면 감회가 새롭다』고 활짝 웃었다. 27년의 교도관생활을 통틀어 살인죄로 복역하던 김모씨(50)가 70이 다 된 노모와 어린 두자녀를 남겨두고 빚독촉에 못이겨 부인이 가출한 것을 고민하는 것을 보고 몰래 도와주자 출소후 부인과 함께 찾아와 이마가 땅에 닿도록 감사해 하던 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한다. 『비록 교도관과 재소자 관계지만 그들이 출소한 뒤 검소한 생활을 하는것을 볼때면 교정계에 투신한 보람을 느낀다』면서 『아무리 시간에 쫓겨도 출소자들의 결혼식이나 회갑연에는 빠짐없이 참석하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드러나지 않는 음지에서 사명감이 없이는 견디기 어려운 교정직에 종사하는 진교사는 『교도관에 대한 사회의 몰이해와 냉대,비난을 접할 때 가장 괴롭다』고 밝히고 『다른 행정기관에서 조차 최근까지도 교정기관을 「혐오기관」으로 분류한 것을 접할 때면 참담한 심정까지 든다』고 어려움을 털어놓았다. 그는 교정행정에 대한 사회인식의 변화와 정부차원의 뒷받침을 아쉬워하며 『묵묵히 뒤에서 도와주고 교도관직을 자랑스럽게 여긴 아내와 4남매에게 감사한다』고 했다. ◎불우출소자 피복지원운동 전개/우규식(면려상) 54세ㆍ영등포구치소교사(본상) 60년 6월15일 교정계에 첫발을 내디딘이래 30년동안 재소자들을 선도하고 처우를 향상시키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64년 2월 공주교도소에서 근무할때 불우출소자들을 위해 피복지원운동을 시작,3년이 넘도록 계속하면서 옷가지 1백여점을 모아 출소자들에게 나눠줘 새생활을 돕기도 했다. 73년 영등포구치소 의무과에 재직할때는 폐결핵을 비관해 자살을 기도한 최모씨를 인공호흡으로 회생시킨 뒤 지속적인 상담으로 새 생활을 하도록 돕는 등 사경직전의 재소자 2명의 생명을 구했다. ◎무연고자 가족 찾아주기에 앞장/민도영(성실상) 53세ㆍ춘천교도소 교사(본상) 재소자들이 안정된 수형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정교육과 무연고자 가족찾아주기에심혈을 기울이는 한편 출소후 사회복귀를 돕기 위해 취업알선과 사회생활에 대한 상담으로 27년 2개월동안 정성을 쏟아왔다. 73년2월부터 의지할곳 없는 출소자 17명을 지역사회독지가들의 도움을 받아 일자리를 마련해 주는 등 이들의 자립갱생에 남다른 관심을 보여왔다. 86년4월에는 강원대학교와 협조해 사범대학생 6명을 강사로 초빙,남모씨 등 26명을 고입ㆍ고졸자격 검정고시에 합격시키는 등 재소자들의 학과교육지도에 힘썼다. ◎문맹원생 1백여명에 한글 교육/조기선(창의상) 57세ㆍ대전소년원 보도사(본상) 조선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61년1월 보도직에 임용된 이래 소년원생들이 퇴원한 뒤 다시 비행을 저지르는 것을 막기 위해 기술습득과 문맹원생 한글해독ㆍ취업알선 등에 앞장서 이들이 사회에 뿌리내릴수 있도록 열과성을 다했다. 72년부터 80년 4월까지 문맹원생 1백69명에게 한글을 가르쳐 진로선택의 폭을 넓히고 사회적응을 도왔다. 83년부터는 원생들에게 내실있는 직업교육을 실시해 1천4백20명이 각종 기능자격을 취득하고 지방기능경기대회에 출전,은메달 등 19개의 메달을 따내 소년원에 대한 사회인식을 개선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다. ◎수형자 4백여명 자매결연 주선/김무웅(교화상) 49세ㆍ인천소년교도소 교회관(본상) 의지할 곳 없는 장기수와 문제수형자 4백57명에게 각계인사와의 자매결연을 주선하고 허물없는 신상상담을 통해 갱생의욕을 고취시켰다. 81년 1월부터 교정참여인사들로부터 피아노ㆍ컬러TV 등 2억5백만원어치의 교화기자재 7백54점과 7천여만원어치의 교화용도서 2만8백여권을 기증받아 재소자들의 교정교육과 정서함양에 기여했다. 73년부터 78년까지 광주교도소에 근무할 때에는 좌익수 교화기법을 개발,무기수 허모씨 등 98명을 전향시키는데 공헌했다. ◎신앙통한 교화로 갱생의지 부축/이의정(박애상) 49세ㆍ예장전북노회 목사(특별상) 신학대학을 졸업하고 77년 3월부터 13년이 넘도록 재소자 종교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앙을 통한 재소자교정교화에 헌신적으로 봉사해온 성직자로 법무부장관표장을 2차례 받았다. 77년 종교위원으로 위촉된 이래 52만3천5백여명의 재소자들을 상대로 8백80여차례에 걸쳐 기독교적 교화를 실시했다. 종교위원으로 봉사하면서 알게된 김모씨 등 출소자 15명을 신학교에 진학시켜 이 가운데 11명이 교육을 이수,전주와 남원 등지에서 목회자 활동을 하도록 지원했다. ◎「출소자들의 어머니」… 취업등 알선/정팔기(자애상) 73세ㆍ서울대교구사목회 회원(특별상) 78년8월 인천소년교도소 소년재소자 교화선도사업으로 인연을 맺은 뒤 11년여동안 매달 2차례씩 영등포ㆍ의정부ㆍ홍성교도소 등을 순회하면서 재소자 교화활동을 한 공로로 88년 법무부장관표장과 89년 「카톨릭대상」을 받았다. 재소자들의 심성순화활동 뿐 아니라 의지할 곳 없는 재소자 28명과 자매결연을 맺고 영치금 2백10만원과 1백30만원어치의 생활용품을 지원하는 등 불우재소자들의 수형생활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교도소 포교 자원… 20여년간 헌신/서병진(자비상) 39세ㆍ조계종 삼천사주지(특별상) 재소자교화에 깊은 관심을 갖고 교도소 포교법사를 자원해 20년동안 서울구치소와 수원ㆍ강릉교도소 등에서 재소자교리지도ㆍ신앙상담ㆍ사형수와의 자매결연 등 재소자교화선도에 헌신한 공로로 3차례에 걸쳐 법무부장관표장을 받은 성직자. 79년1월 서울구치소종교위원으로 위촉된 뒤 3백70여차례에 걸친 불교모임을 통해 4만6천여 재소자들에게 자비사상을 고취해 심성을 순화했다. 매주 1차례씩 사형수 3백21명에게 신앙상담을 해 과거의 죄를 참회토록 교화하고 해마다 불경암송대회를 열어 재소자들에게 신앙심을 고취시켰다. ◎재소자전용 직업훈련시설 기증/박광식(공로상) 48세ㆍ성보산업주식회사대표(특별상) 부산교도소 교화위원과 부산진구 갱생보호위원을 겸직하면서 재소자의 직업훈련 및 교화기자개기증 뿐 아니라 86년부터는 자신의 신발제조업체인 성보산업에 재소자들을 출퇴근시켜 기술훈련을 시킨뒤 원하는 경우 출소뒤 취업시키는 등 교화사회정착사업에 헌신해왔다. 성보산업 안에 재소자전용직업훈련 시설을 마련,현재까지 1백97명을 훈련시켜 이들에게 9백80여만원의 생활정착금을 지급하고 이 가운데 취업을 희망하는 60명은 정식직원으로 채용해 재소자들의 출소후 자립에 크게 기여했다. ◎재소자 9백명에 직훈/정해원 50ㆍ안동교도소 교사(장려상) 63년 12월 교정계에 투신한 뒤 27년동안 확고한 신념과 성실한 복무자세로 각종 재소자직업훈련과 출소자취업알선 등 교화선도에 헌신했다. 9백여명의 재소자들을 상대로 가구ㆍ미용기술 등 직업훈련과 영농교육을 실시해 근로정신을 함양하는 한편,출소자 17명의 신원을 보증해 취업을 시키는 등으로 사회복귀를 지원했다. ◎소년수형자 취업알선/양택민 52ㆍ군산교도소 교사(장려상) 농촌지도요원으로 8년동안 일하다 지난 66년 교도관으로 전직한 뒤 불우재소자돕기와 취업알선,독서ㆍ서예활동을 지원해 재소자의 정서함양에 남달리 헌신했다. 86년 소년재소자에 대한 수용관리대책을 마련해 직원들과 1대1로 자매결연을 맺고 취업을 알선,자립의 기반을 마련해주는데 힘썼다. ◎장기수에 생필품 지원/정인옥 51ㆍ광주교도소 교사(장려상) 유도2단의 무술교도관으로 21년동안 근무하면서 재소자교정교화 및 수용질서확립 등 각종교정사고방지에 기여했다. 재소자특별할동의 하나로 서예반과 회화반을 만들어 여가선용 및 심성순화에 힘썼다. 장기수 등 재소자 1백여명에게 영치금과 생필품을 지원,갱생의욕을 고취시켰다. ◎수용환경 개선에 힘써/김병윤 48ㆍ제주교도소 교사(장려상) 제주도 출신으로 제주교도소가 개청될때부터 근무해오면서 기반조성에 공헌하고 민원실환경을 이용자들에게 편리하도록 개선하는데 힘썼다. 불우재소자 58명을 종교인들과 자매결연토록 주선해 생활용품을 지원하고 안정된 수형생활을 할 수있도록 상담했다. 교도소 주변의 환경미화작업에 앞장서 수용환경을 개선했다. ◎21년간 교화위원 활동/노지욱 76ㆍ공주제일감리교 장로(장려상) 고령에도 불구하고 21년동안 교화위원으로 활동하며 재소자의 신앙상담ㆍ종교교화ㆍ출소자취업알선 등 불우재소자를 위해 봉사해왔다. 의지할 곳 없는 출소자들을 집에 데려가 돌보며 일자리를 마련해주고 명절때마다 재소자들을 찾아가 격려해왔다. 교도소 선교회를 만들어 신앙활동을 지도했다. ◎출소자 30명 보호선도/김봉래 61ㆍ순천 교화협의회장(장려상) 73년부터 교화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재소자들을 위한 각종 행사를 마련,소외감을 없애고 불우재소자의 자활의욕을 고취시키는데 힘썼다. 불우출소자들에게 취업은 물론 결혼을 주선해주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마련하는데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갱생보호위원도 겸직하면서 출소자 30여명을 보호선도했다. ◎재소자 검정고시 교육/김태수 71ㆍ김천 교화협의회장(장려상) 소년재소자의 교화교육과 면학기회를 마련해주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국민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재소자들을 위해 중입검정고시제도를 신설,9백38명의 합격자를 배출했고 김천중앙고 부설 방송통신고등학교 과정을 만드는데 앞장섰다. 84년 화랑소년대 권투부를 만들어 재소자의 체육활동을 활성화시켰다. ◎감호자 정신교육 앞장/안의종 49ㆍ청송 진성중학교장(장려상) 81년 청송교정시설의 개청과 함께 교화위원으로 일해오면서 감호자정신교육과 수용생활을 지원하는데 헌신했다. 진성중학교 교사를 검정고시강사로 보내 3백40명을 고입 및 고졸검정고시에 합격시켰다. 장기감호자와 신체장애자 5백여명에게 7백여만원어치의 생활용품을 지원했다.
  • 조총련까지 등돌려 간다(사설)

    얼마전 일본의 한 유수한 일간지에 장명수란 사람의 회견 기사가 실렸다. 「공화국(북조선) 귀국자 문제 대책 협의회사무국 대표」라는 기다란 직함의 인물이었다. 『대단히 곤란한 일을 시작해 버렸습니다』로 그 회견 기사는 시작된다. 직함 그대로 그는 북한으로 간 「재일 조선인」의 실태조사를 하고자 하는 사람이다. 그 자신 재일동포의 북송을 적극 추진했고 그의 부모형제도 이른바 「귀국선」을 탔던 처지이다. 80년에는 「조국 방문단」의 부단장으로서 방북한 바도 있다. 그런 처지의 사람이 어째서 「귀국자 실태 조사」에 나선 것인가. 북송에 관여할 때까지 「지상천국」으로 생각했던 북한이건만 그 후의 사정은 그렇지 못한 곳임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돈을 보내 달라,병고에 시달린다는 소식이 전해지는가 하면 행방불명자 또한 속출했다. 그는 자신이 무엇을 했던가 반성하면서 행방불명자 친척들의 호소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악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0만명 가까운 북송 동포의 처지와 그 일의 선봉에 나섰던 자신의 과오를 아프게깨달은 것이다. 두말 할 것도 없이,북한이 지구상에서 타국땅에 존재하는 가장 강대한 우익으로 쳐오는 것이 일본에 있는 조총련이다. 그들은 조총련을 많이 이용해 왔다. 김부자의 생일이면 강제로 성금을 거둬들이는 대상이 그것이었으며 해외공작을 함에 있어서도 그것이 무대가 되었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일이다. 더구나 그 세력은 막강했다. 양두구육의 감언이설이 먹혀들었을 때까지 그러했다. 하지만 진실이란 언제까지 가려지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벌이는 재일동포 모국방문 사업에 조총련계 동포들이 끼어들면서부터 북의 일방적 메시지가 얼마나 허위에 찬 것인가는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 가운데는 이미 북녘땅에 다녀온 사람들도 있었다. 비교적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셈이다. 그 위에 북이 자랑스럽게 벌인 북송사업은 결과적으로 자충수가 되어 버렸다. 「낙원」아닌 「지옥」임을 스스로 증명하는 결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엊그제 도쿄에서 조총련에 의해 「김일성 타도 재일 조선인 궐기대회」가 열린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니다.그동안의 흐름으로 보아 당연히 있어야 할 움직임이 현실화하였다는 것 뿐이다. 그들은 김일성을 조국통일의 「암적 존재」로 규정했다. 성숙한 정치사회에서 사는 그들은 남과 북의 실체를 공정한 눈으로 볼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그들은 KAL기 폭파사건과 김현희의 증언을 들었고 그에 대한 북의 엉뚱한 반응도 보았으며 한필성­필화 남매 관계의 시말도 엄정한 시선으로 지켜볼 수 있었다. 그러므로 한번 불 댕겨진 그 움직임이 일본전역으로 확산되는 일 또한 자연스럽게 이루어져 나갈 것이다. 노태우대통령의 방일도 그런 움직임의 현실화에 촉매 구실을 했다고 볼 수 있었다. 더구나 노대통령은 교민 리셉션 석상에서 『조총련을 적대의 대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한 형제로 받아들이면서 도와 달라』고 하여 동족으로서의 끈끈한 정의를 환기시킨 바도 있다. 중요한 것은 역시 북한의 자세전환 그것이다. 지구촌의 조류를 직시해야겠건만 그렇지 못하는 그들이 참으로 답답하다. 며칠 전에 열린 최고인민회의도 「체제고수」를 재천명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 북한,한필성씨 방북 거부/「전가족 평양방문」등 3조건 붙여

    북한적십자중앙위원회 이성호위원장대리는 9일 대한적십자사 김상협총재앞으로 전화통지문을 보내 한필성씨의 북한방문과 관련,▲일본 삿포로에서의 남매상봉시 도청한 인권침해 행위에 대해 사죄 및 이의 재발방지 확약 ▲전가족 평양방문 ▲방북일자를 5월21일로 연기하는 3가지 조건을 제시,한씨의 북한방문을 사실상 거부했다. 이 위원장대리는 이 전화통지문에서 『지난번 일본 삿포로에서 있은 한필화남매 상봉때 귀측이 한필성선생의 몸에 도청마이크와 녹음기를 달아 놓았던 처사는 인간의 기본권을 침해하고 유린한 극히 비인도적인 비열한 행위로서 내외의 비난이 컸던만큼 귀측은 이에대해 온 국민앞에 사죄하여야 한다』면서 『다시는 그러한 인권말살 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확약하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귀환보장 안돼/평양에 안갈터”/한필성씨 이에대해 한필성씨는 이날 하오 5시30분 대한적십자사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의 방문초청에 응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한씨는 북한측이 전화통지문에서 자신의 신변안전만을 보장하겠다고 할 뿐서울로 되돌아오는 문제는 북한의 가족들과 상의해야 할 것이라고 밝혀 북한방문을 포기할 수밖에 없게 됐다고 말했다.
  • 베트남에 「따이한 혼혈아」5천∼1만명

    ◎취학ㆍ취업등서 차별… 신원 속이며 생활/그리운 아버지나라 한국행 가장 원해 한국의 베트남 참전으로 혼혈아라는 부담을 안고 주위의 따가운 눈총을 받으며 살고 있는 한국계 2세들이 줄잡아도 5천명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전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씨가 명예회장으로 있는 국제사회복지협의회(회장 정주태)와 관련을 맺고 있는 국제사회복지개발주식회사의 베트남 지사장으로 파견돼 있는 김병하씨(61)는 베트남이나 한국정부가 베트남의 한국계 2세들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를 갖고 있지 않아 분명한 숫자는 헤아릴 수 없으나 대략 5천∼1만여명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64년 9월 비둘기부대를 효시로 베트남이 공산화되기 전인 73년 3월까지 베트남에 파견된 한국군은 약 32만명이었고 여기에 민간기술자ㆍ기능공ㆍ개인사업가 등까지 합치면 베트남 전쟁기간 중 베트남을 다녀온 사람은 약 40만명이상으로 집계되고 있다. 베트남사회에서 「라이따이한」(한국계 혼혈아)이라는 약간 경멸조로 불려지고 있는 한국계 2세들은 대부분 취학이나 취업을 위해 신원을 속이면서 어렵게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신원이 노출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은 과거 한국군이나 민간기술자들이 근무했던 지역에서는 거의 어디서나 발견되며 나이는 대략 15세∼20대초반을 이루고 있다. 호치민시의 경우 과거 한국인 기술자들이 집단으로 일하고 있었던 쭈민가장에는 아직도 많은 「라이따이한」들이 살고 있다. 이곳에서 돼지고기와 닭고기,생선 등을 반찬으로 구워 초라한 밥집을 경영하고 있는 구엔 티 안여인(53)은 라이 따이한들이 베트남 사회에서 크게 불리한 대우를 받고 있지는 않으나 취학과 취업에는 다소 제한을 받고 있다고 말했다. 안 여인은 라이 따이한들은 성적이 좋지 않을 경우 의무교육기간인 9년밖에 학교를 다닐 수 없으며 정부기관이나 정부운영회사에서는 신원이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취업을 거부하는 사례가 더러 있다면서,대부분의 한국인 현지처나 라이 따이한들은 신원노출을 꺼리고 있으며 날품팔이나 재봉일ㆍ자전거 수리ㆍ행상으로 생계를 유지하거나 길거리에서 음식이나 복권등을 팔아 그날 그날을 연명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 67년 H사의 전기수리공으로 베트남에 와 75년까지 있었던 한국인 오모씨(64)의 베트남 현지처가 된 안 여인은 월맹군과 베트콩 게릴라들이 사이공을 함락시킨 75년4월30일 이후 두달간은 보복같은 것이 두려워 벌벌떨며 문밖에도 잘 나가지 못했다고 당시를 회고하고 비록 오씨와의 사이에 「구엔」이란 이름대신 김치양(20),도선군(18ㆍ직업고2),동진군(16ㆍ직업고1) 등 한국이름으로 남매를 두고 있으나 오씨를 이해하기 때문에 재결합 같은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녀는 그러나 오씨가 자주 베트남을 방문,어려운 생계를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어머니를 도와 부엌일을 하고 있는 김치양은 다섯살때 떠난 아버지가 그동안 아프리카국가들을 전전하면서 편지를 보내왔고 지난해 10월에는 호치민시를 직접 찾아 돈까지 주고 갔다면서 언젠가는 그리운 아버지의 나라인 조국 따이한을 방문하고 싶다고 말했다. 현재 라이 따이한들은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하고 있다. 이들의 대부분은 무학이거나 국교와중학교 중퇴생들이다. 대학에 다니고 있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이들의 일부는 또 대도시를 떠나 시골로 생계지를 옮기고 말았다. 이들의 최대희망은 베트남인의 최대희망이 「해외탈출」이듯이 「한국행」이다. 현지처들이나 라이 따이한들은 그러나 너무나 흘러버린 긴 세월의 간격탓인지 남편ㆍ아버지와의 재결합은 거의 포기하고 있다.
  • 「하늘만큼 먼 나라」/임춘웅 국제부장(서울칼럼)

    수년전 「하늘만큼 먼나라」라는 한편의 연극이 장안의 화제가 됐었다. 극단 「산울림」이 대한민국연극제에 내놓았던 이 창작극은 그 예술성 이상의 감동을 남겼다. 연극은 배우의 예술이라고 한다. 그 연극에는 백성희 조명남 전무송 박정자 이주실 등 우리 연극계의 뛰어난 배우들이 열연했고 임영웅씨의 연출솜씨 또한 훌륭했다. 그러나 불과 11명의 배우들이 비좁은 무대에서 엮어내는 연기력만으로 그 큰 감동을 자아낼 수 있을까. 「하늘만큼…」은 그런 연극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늘만큼 큰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달했다. 이 극의 성공은 이산의 비극성이 갖는 극적 진실때문이었다. 분단과 이산은 40년,50년이 지나도 계기만 되면 한동안 잊고 살던 우리앞에 태연히 나타나곤 한다. 그리고는 그 처절한 생채기를 다시 드러내 놓는다. 최근 일본 삿포로에서 만난 한필성남매의 상봉이 그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이 오누이의 오열은 이산의 뿌리가 얼마나 깊은가를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있다. 분단과 이산의 문제는 어찌보면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느낌이었다. 세월이 흐른다고 소멸하거나,더구나 없었던거로 해둘 성질의 것은 더욱 아니다. 이 극에서 황사장의 비극이 바로 그런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조강지처이고 나는 어머니의 외아들이었는데 이제와서 정숙하기만한 어머니가 재혼을 한 여자로,얼토당토 않게 내게는 웬 아버지 다른 형이 있어야 하느냐고 발버둥을 치지만 진실은 진실대로 남는다. 이산은 목이메어 헤어지던 사람들의 문제가 아니라 어느덧 2세,3세들의 문제가 돼 있는 것이다. 이 연극이 공연될 때는 남북의 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이 분단이후 처음으로 각기 「먼 나라」를 상호방문하고 있던 때였다. 그래서 이 극은 더 큰 아픔을 우리에게 안겨 주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사는 일중에 만나고 헤어지는 일보다 중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만나는 마음에 가식이 있으면 이 극에서처럼 만나지 않은 것만 못하다. 한 어머니의 자식들이면서 어머니의 장례식에 한데 어울리지 못하고 두 줄로 나란히 갈라서 있는 그런 모습으로는 재회의 뜻이 없다. 그것은 이산보다 더 큰 비극일지 모른다. 이 극이 공연된 것은 1985년의 일이다. 5년전이다. 5년전과 지금 우리에겐 무엇이 달라졌는가. 그동안 세계는 뿌리째 흔들리고 있었는데 말이다. 베를린장벽이 무너진 것은 벌써 옛날의 얘기가 돼 버렸다. 두달도 채 남지 않은 오는 7월2일까지 동서간에는 경제통합이 이루어지고 통일작업이 내년안에 마무리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지금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지난해 1년동안 대만에서 본토를 다녀온 사람은 무려 37여만명에 이른다. 89년 대만과 중국의 교역량이 37억달러. 작년 천안문사태이후 중국은 대외개방을 억제하면서 다른 외국의 투자를 막으면서도 대만의 대본토 투자에는 아무런 제재를 가하지 않고 있다. 89년 대만의 중국투자액이 10억달러 수준. 지난달 24일 대만의 대기업 포모사는 7백억달러 규모의 석유화학 단지를 본토에 건설키로 했다. 같은날 대만은 본토와 민간대표부 상호교환을 제의했다. 통일이 무엇인가. 사람이 오가고 물자가 유통되면 통일이 아닌가. 대통령이 한사람이고 정부가 하나돼야만 통일 되는게 아니다. 그렇게 보면 통일 안된 나라는 우리 뿐인 셈이다. 1978년 초쯤으로 기억된다. 미국의 명문 스탠퍼드대에서 중국 통일문제에 관한 대토론회가 열렸다. 이 토론회에는 지금은 은퇴했지만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UC버클리대의 스칼라피노교수,당시 미 CIA국장 터너,그밖에 중국계의 미국학자들이 대거 참가한 호화토론회였다. 이 토론회의 주제는 중국통일은 어떻게 이루어질 것인가 하는 것이었는데 스칼라피노 등 미국사람들은 한결같이 「무력통일」 뿐이라고 단정했다. 그러나 중국계의 많은 학자들은 무력이 아닌 방법으로 통일이 가능하다고 반론을 펴고 있었다. 그들의 논거는 중국에는 「중화」라는 문화적 응집력이 있기 때문에 평화적 통일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당시 필자에게는 그들의 주장이 생경하기만 했다. 지나치게 낭만적이란 생각까지 들었다. 그러나 중국의 「중화」는 지금 그 실체를 드러내고 있다. 「우리는 왜 안되는가」라는 얘기를 해보면 「6ㆍ25」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쉽게 결론을 내리고 만다. 정말 그럴까. 중국은 우리보다 더 오랫동안 내전을 겪었고 대만정부는 나라의 반쪽도 안되는 조그만 섬에 쫓겨가 있다. 또 어떤 사람은 김일성이 변하지 않고 있는데 어떻게 우리만 변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과연 그래야 할까. 동독이 조금도 변하지 않고 있던때 서독은 오래전 동독의 문을 두드리고 있다. 분단과 이산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요며칠 사이 『한반도분단의 책임이 있는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통일을 위해 새로운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자성의 소리들이 워싱턴과 모스크바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뒤이어 늦게나마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에 앞서 우리에게 문제는 없는가도 살펴볼 일이다. 우리의 마음은 과연 열려있는가 말이다. 우리의 「하늘만큼…」은 의외로 가까울 수도 있다.
  • 끝내 죽음부른 고부간의 갈등/경관,일가3명 권총살해

    ◎자신도 자살기도… 딸과 함께 중태 【전주=임송학기자】 고부간의 갈등을 비관한 모범경찰관이 권총으로 일가족 집단자살을 기도,부인과 두아들은 숨지고 자신과 딸은 중상을 입었다. 2일 하오9시쯤 전북 부안경찰서 보안과 교통계소속 강현태경장(31)이 부안군 동진면 안성리 자기집에서 가족들에게 38구경 리벌버권총을 난사하고 자신도 자살을 기도,부인 정미숙씨(30)와 맏아들 주범(6) 막내아들 동환군(1)등 3명은 병원으로 옮기던중 숨지고 강경장과 딸 유영양(3)등 2명은 전주예수병원에 입원,치료를 받고 있으나 중태다. 강경장 친척들에 따르면 강경장은 이날 하오5시쯤 여동생 혜란씨(23)로부터 어머니 김삼순씨(56)와 부인 정씨가 심하게 다투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집으로 달려와 부인과 말다툼을 벌이다 이같은 일을 저질렀다는 것이다. 강경장은 3남2녀중 장남으로 지난 77년 부안농고를 졸업하고 82년6월 경찰에 투신했으며 지난해에는 부안청년회의소로부터 모범경찰관 표창을 받기도 했는데 3년전 큰아들 주범군이 자신이 몰던 승용차에 치어 중상을 입고 뇌성마비증세를 보이면서 효자효부로 불리던 부부간에 마찰이 잦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강경장은 사건발생직전 자신의 방에 들어가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지 않고 낳아주시고 길러주신 부모님은혜 다갚지 못하고 못난 불효자는 먼저 하직합니다. 우리5남매는 돈없는 가운데 어렵게 생활하면서도 우애만은 좋게 살아왔는데 한사람의 잘못으로 형제애에 금이 가는 것이 두렵기만 하기에 먼저 간다』는 유서를 남겼다.
  • 외언내언

    한쪽 눈이 먼 호랑이를 할호라고 한다. 그렇잖아도 사나운 짐승이 호랑이인데 할호는 거기서 두어 술쯤 더 뜨는 모양. 한 눈을 잃을 때 고약한 일을 겪어서일까. 아무튼 잔인하고 포악한 사람을 이르면서 할호라고 말한다. ◆폭력배끼리의 싸움은 흔히 있는 일이다. 그런데 엊그제 경북 영천에서는 상대파 폭력배의 손목을 자르는 사건이 있었다. 다른쪽 손에는 공기총을 쏘고. 마피아 조직 영화에서나 볼 수 있었던 끔찍스러운 범행. 그야말로 할호의 짓이다. 텔레비전의 화면에 붕대 감은 그 손목을 꼭 비춰야 했던 것인지 모를 일. 온몸에 소름이 돋아나던 아찔함을 모두가 느꼈을 것 아닌가. ◆범죄는 다발화해 가면서 흉포화해져 가기만 한다. 어째서 심성들이 이리 표독해진 것인지. 며칠전 술주정하는 아버지를 죽인 중1ㆍ중2 두 딸들과 국민학교 4학년 아들의 경우도 그렇다. 야구 방망이로 친데 그치지 않고 과도로 무려 47군데나 찔러 대지 않았던가. 설사 철천지원수라도 그러기가 어려운 잔인성.자기들을 낳아기른 아버지인 것을…. 3남매는 경찰에서 『왜이리 됐는지』하고 울었다고 한다. 참으로 세상이 왜 이리 됐는지. ◆순자가 생각한 대로 사람의 본성은 정말 악한 것일까. 하지만 그의 성악설은 그러기 때문에 사람의 마음에 예를 심어 바로잡아야 한다고 하는 데에 뜻이 있었던 것 그 도덕과 윤리가 물질앞에 빛을 잃으면서 겪게 되는 비인간화의 비극인 것만은 틀림이 없다. 늘어만 가는 암 애꾸호랑이에 수 애꾸호랑이들. 평화롭게 살려는 사슴하며 토끼ㆍ다람쥐… 무리의 사람들은 공포와 불안에 떤다. 이젠 「할호」아닌 「맹호」가 설칠 차례 아닌가 싶은 생각에. ◆일부 가진자들의 도수높아진 파렴치도 따져 생각하자면 범죄의 흉포화와 맥을 함께 하는 것. 예의염치의 사유가 무너지면 나라가 지탱하지 못한다고 「관자」는 말했던 것인데. 두려워지는 세상이다.
  • 고국 고아들에 「눈물의 성금」/재일동포 할머니,1천만원 선뜻

    ◎오흥란씨,혜심원 찾아/청소원등 궂은일하며 평생 모은돈 “어렵게 번돈 값지게 쓰고 싶었다” 육순의 재일교포 할머니가 가정부와 파출부등 온갖 궂은일을 해가며 한평생 푼푼이 모은 1천만원을 고국의 고아원에 내놓았다. 21일 하오 서울 용산구 후암동 혜심원(원장 임혜옥·71)을 찾은 오흥란할머니(68·일본천기시소천정18의1)가 임원장에게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성금을 전하는 순간 임원장은 물론 이를 지켜보던 50여명의 고아들은 오할머니의 그 큰 뜻에 감동,모두가 숙연한 표정을 지었다. 『어릴때부터 낯선 이국땅에서 너무나 외롭고 힘들게 살아왔기 때문에 조국에 있는 외로운 어린이들에게 조그만 정이라도 전달하는 것이 소원이었다』는 오할머니는 이어 일본에서부터 갖고온 꽃사탕을 어린이들에게 손수 나누어 주며 『비록 많은 돈은 아니지만 담겨진 정성만은 크다는 것을 알아주니 더없이 고맙다』고 스스로도 감격했다. 할머니는 지난 23년 경기도 여주군 북남면에서 부유한 농가의 맏딸로 태어났으나 8살때어머니를 여읜 뒤 8번이나 재혼한 아버지밑에서 고아나 다름없이 자랐다. 17살 되던해 이를 보다못한 아버지의 친구가 나서 일본 규슈 오이다켄에 사는 한국 청년에게 시집을 가게 됐다. 할머니는 이곳에서 남의 땅 5마지기를 빌려 농사를 짓는 처지이긴 했지만 남매를 낳고 평생 처음 행복을 느끼며 살았다. 그러나 31살때인 53년 남편이 남매와 함께 실종되면서 다시 혼자몸이 되고 말았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여자 혼자서는 농사를 지을수 없다고 일본인 지주가 땅마저 모두 빼앗아 갔다. 살길이 막연해진 할머니는 할수없이 도시로 나가 남의집 가정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한달 월급 2천엔을 한 푼도 쓰지 않고 악착같이 모았다.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살림살이 사들이는 것도 돈이 아까워 골방에 사과궤짝을 쌓아놓고 옷장 등으로 삼았고 주인집 쓰레기통에서 내버린 헌옷을 주워 기워 입었다. 15년동안 이처럼 가정부 파출부 식당주방청소원 등을 전전하며 고생고생한 끝에 마침내 1천만원이 넘는 돈을 모으기에 이르렀다. 할머니는 이 돈 가운데 1천만원은 고국의 고아들몫으로 떼어내고 나머지 얼마안되는 돈으로 작은 가게를 전세내어 주점을 차렸다. 일본 불량배들이 몰려와 장사를 방해하고 금품을 뜯어가는 바람에 장사가 잘 안돼 문을 닫게 될 판이었으나 은행에 넣어둔 1천만원은 절대로 손대지 않았다. 고생끝에 얻은 고질병인 당뇨와 고혈압으로 사경을 헤맨적이 수십번이었으나 예금통장을 부둥켜 쥐고 참으며 제대로 치료 한번 받지 않았다. 『불우한 고아들에게 이돈을 전달하지 못하고 죽게되면 내가 고생하며 살아온 것이 진짜 물거품이 된다』고 혼잣말을 되뇌며 참았다. 『이제 내손으로 내 정성을 어린이들에게 전했으니 소원을 다 이룬셈』이라는 오할머니는 『앞으로도 고국의 고아들을 계속 돕는 것이 남은 소망』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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