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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필성ㆍ필화씨 남매/스케이팅 함께 관전

    【삿포로(일본)=동계아시안게임특별취재반】 40년만의 극적 상봉으로 이번 대회에서 연일 화제를 모으고 있는 한필성ㆍ필화씨 남매는 상봉 3일째인 10일 마코마나이 옥외링크에 함께 나와 남북한 선수들이 출전한 스케이팅 경기를 관전했다.
  • 북한,한필성 남매상봉 정치선전

    ◎“71년엔 남한측 방해로 못만났다”억지/“단일팀 무산 남 책임” 한필화 발언 강조/중앙방송ㆍ평양방송 동원 【내외】 북한은 10일 이산가족의 아픔을 극명하게 보여준 한필성­한필화 남매의 40년만의 상봉을 전적으로 정치적인 선전에 초점을 맞춰 보도했다. 이날 북한의 중앙및 평양방송은 한필성­한필화 남매가 극적으로 만나는 모습과 이어 기자회견을 가진 것 등에 대해서는 간략하게 소개한채 지난 71년 이들 남매가 만나기 직전에 헤어진 책임을 한국측에 전적으로 전가했다. 북한의 이 방송들은 이와 관련,『71년 6월 삿포로동계올림픽 때에도 한필화의 절절한 호소에 따라 오빠 한필성이 일본으로 달려갔으나 반통일분자들의 방해책동으로 끝내 상봉을 이루지 못하고 말았다』고 비난했다. 북한의 중앙및 평양방송은 또 이들 남매의 상봉이 『남조선 인민들속에서 자주ㆍ민주ㆍ통일의 기운이 비상이 높아가고 있는 환경속에서 비로소 이루어졌다』고 주장하고 이들의 기자회견 가운데서도 한필화가 이산가족의 만남이라는 분위기에 맞지않게 정치적인 답변을 계속한 내용만을 반복해서 보도했다. 북한의 이 방송들은 한필화가 기자회견 석상에서 『제11차 아시아경기대회에 북과 남이 반드시 유일팀으로 나가야 한다고 하면서 유일팀 구성을 방해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실에 유감을 표시했다』 『북과 남으로 흩어진 가족 친척들의 문제는 조국의 통일을 실현하여 모든 혈육들이 서로 만나게 해야한다고 했다』고 보도했다. 평양및 중앙방송은 이들 남매의 상봉모습에 대해서는 『두 남매는 눈물을 뿌리면서 오랫동안 떨어질 줄을 몰랐다』고만 짤막하게 소개했다.
  • 맞벌이 부부 문 잠그고 출근한 새/지하 셋방에 불… 남매 질식사

    ◎어제 서울 망원동서 9일 상오8시50분 서울 마포구 망원동 430 대근연립 가동 101호 윤종덕씨(38ㆍ회사원)집 지하셋방에서 불이나 이방에 세든 권순석씨(30ㆍ회사원)의 맏딸 해영양(5)과 동생 용철군(4)이 연기에 질식돼 숨졌다. 숨진 해영양 남매는 맞벌이를 하고있는 권씨부부가 모두 아침일찍 출근하면서 애들이 밖에 나가 놀다 집을 잃을 것을 우려,방문을 자물쇠로 잠가둔 바람에 밖으로 나오지 못해 변을 당했다. 이집주인 윤씨의 부인 안순옥씨(32)는 『집안을 청소하는 도중 연기냄새가 심해 나와보니 지하셋방의 창문에 불길이 비치고 있었다』고 말했다. 이날 불은 방안에 있던 비닐옷장과 이불 일부를 태우고 10여분만에 안씨 등에 의해 진화됐다. 경찰은 방안의 형광등과 전기배선 등에 이상이 없고 방바닥 구석이 타있는 것으로 미루어 아이들의 불장난으로 불이 난 것으로 보고 정확한 화인을 조사중이다. 권씨부부는 지난해 9월 충남공주에서 이사해와 지하4평짜리 방을 4백만원에 세들어 살며 남편 권씨는 부천 Y레미콘사에서 경비원으로,부인이영숙씨(27)는 파출부로 일해왔다.
  • 모든 이산가족에게 재회를(사설)

    40년만에 남매가 만났다. 나이많은 오라비에게 터울 많이 벌어진 누이동생은 딸처럼 애틋하고 사랑스럽다. 그런 누이동생을,40년이나 세월을 지내고 만나야 한다는 것은 슬프고 한스런 일이다. 동기중의 장남인 큰오라버니는 믿음직한 집안의 기둥이다. 그 기둥이,쑥 뽑힌 듯이 「부재중」이다가 40년만에야 마주한 것은 서러운 기쁨이었을 것이다. 한필성씨와 필화씨 남매의 포옹은 6천만 한민족이 함께하는 포옹이었다. 오빠에게 「왜 이제사 왔느냐」고 통곡하며 외치는 누이동생의 원망은 두고온 피붙이들이 다함께 외치는 소리라고 할 수 있다. 노부모님의 안부를 물으며 불효의 죄로 가슴을 치는 오라버니의 한 또한 망향의 세월 수십년을 휴전선 근처에서 방황해온 천만 이산가족이 함께 삭혀오는 한이다. 그들이 만난 곳은 일본의 삿포로다. 그들은 이곳에서 19년 전에 만났을 수도 있었는데,그때 그들은 끝내 만나지 못했다.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있듯이,사랑스런 막내누이를 만나려고 허위단심 현해탄을 건너갔던 오라버니는 약속된 호텔에서 기다리다가끝내 와주지 못하는 누이동생을 애닯아하며 허탈하게 돌아섰었다. 그때 이야기가 나오자 필화씨는 『과거 이야기는 해서 뭘하겠는가…』고 쓸어덮으며 오늘의 만남만을 대견히 여기자고 했다고 한다. 그말도 옳다. 지나간 일을 들춰서 진하고 애틋한 혈육의 만남에 그림자를 드리울 것은 없다. 너무 단단하게 얼어서 이역의 짧은 햇볕 따위로 잠깐만에 녹일 수는 없었던 그 동한의 계절을 지금 다시 이야기할 것은 없다고 해두자. 마음만 먹으면 일본의 삿포로 정도가 아니라 소련이라도 만주로 불리던 중국이라도,마누라와 자식들을 대동하고 얼마든지 갈 수 있는 자유로움 속에서 사는 오라버니다. 북쪽에 두고온 가족들이 필화씨처럼 일본에 와줄 수 있다면 만나러 가고 싶은 사람은 남쪽에 숱하게 있다. 그렇게 만나서 부모님이랑 조상이며 이웃소식을 들을 수 있기를 날마다 간구하고 있다. 임종 때의 아버지께서 맏아들을 찾으셨다는 이야기와 『통일이 되어 너희들이 만나게 되면 내가 눈뜨고 다시 오마』고 하셨다는 전언은 우리를 목놓아 울고 싶게 한다.소년시절의 맏아들을 홀홀히 떠나 보내놓고 허전한 노년을 기다림 속에 살다가 마침내 눈을 감아야 했던 어버이의 절통한 한은,언젠가 그 자식을 만나게 될 때면 눈을 뜨고야 말겠다고 벼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부모 슬하를 떠나서 갖은 객지설움 겪어가며 성장하여 자식낳고 세대를 거느린,떠나올 때의 아버지 나이보다 더 먹은 초로가 된 아들로서는 가슴이 에어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을 맛보았을 것이다. 그런 오라버니로서는 가녀린 막내누이에게 맡겨진 채 아직 생존하신 노모를 생각하면 걸어서라도 달려가고 싶을 것이다. 그나마 이렇게라도 만난 동기간은 행복한 소수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생사도 모르는 채 답답하고 아득한 기다림의 세월을 보내고 있는가. 이런 많은 동포들을 만나게 해야 한다. 지난 시절 우리를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이 무엇인지는 따지지 않아도 좋다. 죽어도 눈감을 수 없는 이 상처 깊은 「이산」들을 만나게 해야 한다. 아쉬운 대로 「고향방문」만이라도 성사시켜야 한다. 「삿포로의 남매」 해후가 비쳐주는 해빙의 작은기미에 커다란 희망을 걸어본다.
  • 「근로자의 날」 훈장받는 “다림질 아줌마”박옥분씨

    ◎노사 「불신의 주름살」편다/남편 사별뒤 20여년간 봉제공으로 일해/후배­회사 애로 전달 창구,화합의 감초역 20년을 한결같이 다림질만해온 50대 봉제공 아주머니가 훈장을 탄다. 근로자의 날인 10일 평범한 근로자로는 최고의 영예인 동탑산업훈장을 받게된 평안섬유 서울공장 봉제공 박옥분씨(55). 1백50여명의 이 공장 생산직 근로자들은 9일 상오 박씨의 서훈소식이 전해지자 『코뿔소아줌마 만세!』를 외쳐댔다. 「코뿔소아줌마」란 박씨의 억척스런 생활자세는 물론 코뿔소를 상표로 하고 있는 평안섬유의 대표근로자란 뜻을 지닌 자랑스런 별명이다. 박씨는 그만큼 기구하도록 어려운 역경을 헤쳐냈고 거의 모두 딸같은 동료근로자들의 훌륭한 언니로서의 역할을 해온 것이다. 박씨가 이 회사에 발을 들여놓은 것은 지난70년,나이 서른다섯살 때였다. 경기도 강화에서 농부의 딸로 태어난 박씨는 25살때 결혼했으나 남편은 오랜 투병끝에 결혼 5년만에 어린남매와 빚더미만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당장 어린 남매를 키우려니 앞이 캄캄했다. 그렇다고 국민학교 밖에 나오지 못한 박씨에게 마땅한 일자리가 주어질리도 없었다. 할수없이 얼마동안 떠돌이 보따리장사로 연명했다. 그러다보니 어린자식들을 위해 어디든 취직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그래서 취직한 것이 평안섬유의 하루 2백20원짜리 다리미공 자리였다. 쌀 한가마에 6천원하던때라 입에 풀칠하기도 힘들었지만 일정한 직장을 구했다는 것만 해도 기적같은 일이었다. 30도이상의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철이면 1백도가 넘는 다리미의 열기에 온몸이 녹아 들것 같았지만 박씨는 20년이 지난 지금도 다리미에서 프레스로 기계가 바뀐 이 일을 천직이라 여기며 계속하고 있다. 지금 박씨의 일당은 8천3백원. 보너스에 수당까지 다합쳐 40만원이 조금 넘는 액수지만 「2백20원짜리 시절」의 암담함을 생각하면 감사하는 마음이 절로 난다고 했다. 두 남매에게 쏟은 박씨의 정성또한 헛되지 않아 코흘리개였던 아들(30)은 공고를 졸업하고 의정부에서 배터리가게를,딸(28)은 여상을 졸업한 뒤 을지로에서 오프셋인쇄사무소를 하고있다. 『남매에게 대학공부를 시켜주지 못한 것이 가슴에 맺히지만 그애들도 지금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어엿한 사장님』이라며 박씨는 활짝 웃었다. 박씨는 특히 미혼여성근로자가 90%에 가까운 공장에서 딸같기만한 근로자들의 애로사항을 듣고 직접 돌보거나 회사측에 건의해 대책을 마련하는 등 상담역을 자청하고 있다. 근로자들의 이성교제나 결혼문제에서 부터 회사에 대한 불만사항 등에 이르기까지 허심탄회한 의논상대가 된다. 지난80년 회사가 부도로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을때 박씨는 『회사가 살아야 우리가 산다』면서 두달동안 밀린 임금을 받지못해 동요하는 어린근로자들을 달래며 회사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데 한몫을 톡톡히 하기도 했다. 『최근 수년사이 유행병처럼 번졌던 노사분규를 우리회사에서 찾아볼 수 없었던것도 박씨의 숨은 공로』라는 것이 문봉영사장(58)의 말이었다. 그만큼 서로 화합하고 돕는 분위기를 만드는데 앞장섰던 것이다. 이 회사 노조위원장 김옥희씨(49)도 『코뿔소아줌마의 존재는 우리 근로자들에겐 눈에 안보이는 정신적 지주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 한필성ㆍ필화 「남북 오누이」 40년만에 일 삿포로서 극적 상봉

    ◎“오빠!왜 이제 왔어요”… /목메인 남매,오열ㆍ절규도 잊어/생이별의 한은 울음까지 삼켜 【삿포로(일본)=동계아시안게임 특별취재반】 『오빠,왜 이제 왔어요』 『40년만에야…』 헤어지기 40년,생사를 확인한지 19년만에 극적으로 상봉한 남북의 오누이는 오히려 담담했다. 통곡도 오열도 절규도 없었다. 40년 생이별이 서러웠고 남북의 정치적대립으로 상봉직전에서 또 19년을 기다려야했던 안타까움과 그동안 가슴을 저린한이 큰울음까지도 삼켰기 때문이다. 지난50년 6.25의 와중에서 이산가족이 돼버린 한필성(62ㆍ목축업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통패리 166의2) 한필화(48ㆍ북한국가체육위원회 동계경기지도부국장)남매는 지난71년 극적으로 서로의 생사를 확인,상봉직전까지가 세상의 이목을 집중시켰었다. 필성씨는 71년 2월7일 삿포로 동계프레올림픽에 출전한 북한 스피드스케이팅선수중 여동생 필화씨가 포함돼 있는 것을 알고 일본 아사히신문 주선으로 도쿄로 날아가 30분동안 전화로 통화,「목소리만의 상봉」은 이루었으나 남북간의 팽팽한대립의 벽에 막혀 눈물을 뿌리며 귀국해야만 했다. 그로부터 19년만인 8일 하오8시 이국땅 삿포로에서 필성,필화남매는 혈육의 정을 갈라놓은 벽을 마침내 허물고 40년만에 재회했다. 17살 홍안소년이던 필성씨는 어느덧 환갑을 넘은 노인으로,8살의 귀엽기간 했던 막내동생 필화씨도 중년을 넘긴 주부로 세월이 흐른뒤였다. 삿포로 지도세공항 입국장대합실. 첫눈에 서로를 알아본 오누이는 비명처럼 반가움의 한마디를 토해 놓고는 어깨를 들먹이며 얼싸안고 흐느꼈다. 두 오누이의 극적인 만남은 북한선수단 임원으로 지난2일 삿포로에 도착,선수촌 프린스호텔에 묶고있던 필화씨가 남편 임세진씨(김일성대학 체육교수)와 조총련 간부 송암우의 안내를 받아 삿포로에 도착한 한필성­홍애자 내외를 마중나옴으로써 지도세공항 로비에서 이뤄졌다. 한필성씨는 회색싱글 양복차림,홍애자씨는 분홍빛 치마저고리에 꽃다발을 한아름 안고 공항에 나와 플래시세례를 받았으며 1백50명의 내외신기자들 앞에서 큰절을 올리고 돌아서는 순간 회색빛깔의 양장차림에 파머를 한 필화씨가 『오빠』하고 부르며 와락 달려들어 극적인 상봉이 이뤄졌다. ◎“기쁘단 것외엔 할말 없어 이젠 어머니한 푼것 같다” ○한필성ㆍ필화 남매 회견 지도세공항에서의 아쉬운 첫만남을 마친 필성ㆍ필화남매는 이날 하오10시15분쯤 공항에서 동남쪽으로 40㎞ 떨어진 삿포로 프린스호텔에 도착,45분동안 기자회견을 가졌다. ­지금의 소감은. ▲필성=기쁘다는 말밖에 할말이 없다. ▲필화=19년전에 만날 수 있었는데 이제야 만나게 됐다. 하지만 나도 오빠만큼이나 기쁘다. ­사전에 상봉을 위한 연락이 있었는가. ▲필성=없었다. 서울에는 나같은 이산가족이 많다. 남북한의 자유왕래가 이뤄지지 않더라도 생사확인과 서신교환만이라도 했으면 좋겠다. 일이 더 잘풀려 교향방문단교환이 성사되면 제일 먼저가고 싶다. ­앞으로의 일정은. ▲필성=오늘(8일)은 일단 따로 숙소를 정해 각자 휴식을 취하겠다. 하지만 내일부터는 동생이 삿포로를 떠날때까지 숙식을 함께할 예정이다. ­북한을 떠날때 어머니가 무슨 말씀을 하셨나. ▲필화=『이번에는 꼭 오빠를 만나라,네가 지명한 체육인이니 주위의 도움을 청하면 상봉이 성사될 것이다. 오빠를 만나면 큰절을 올리고 숙식을 함께하라. 너만이라도 필성이를 만날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 삿포로상봉 앞둔 한필성­필화 남매 국제전화 8분

    ◎“이번엔 꼭 만나자” 19년만에 눈물의 통화/“내일 만나 귀띔말로 실컷 얘기하자” 필성/“오빠 줄 8순 엄마 사진도 가져왔시요”필화 『필화야,나 오빠 필성이야』 『오빠,진짜 오빠 맞아요』 지난 71년 국제전화를 통해 서로 목소리만을 확인,1천만 이산가족의 심금을 울렸던 한필성씨(62ㆍ목축업ㆍ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동패리)와 필화씨(48)남매가 7일 하오8시 19년만에 다시 서울∼일본간 국제전화를 통해 오누이의 정을 나누었다. 한필성씨는 이날 하오 MBC로 찾아와 일본 삿포로 동계올림픽(3월9∼14일)에 북한측 임원으로 참가,삿포로 프린스호텔에 묵고 있던 동생 필화씨와 8분30초동안 국제전화로 얘기를 나누었다. 한필성씨는 남북분단으로 단신 월남한뒤 20여년만인 지난 71년 동생 필화씨가 삿포로 동계올림픽에 선수로 출전하자 일본으로 날아가 동생을 만나려다 남북분단의 장벽에 막혀 뜻을 이루지 못한채 전화로 그리움을 달랬었다. 8일 상오11시45분 김포공항을 통해 일본 삿포로로 떠날 예정인 한필성씨는 최근 TV에서 동생 필화씨의 인터뷰가 방송됐다는 사실을 알고 출국직전 직접 동생의 목소리를 듣기위해 전화를 걸었다. 통화내용은 다음과 같다. ▲한필성씨=여보세요,서울인데 잘들려요,필화오빠 필성이예요. ­한필화씨=오빠,진짜 오빠 맞아요 ▲나 석선이야,네 오빠야 ­네 한필화입니다. 그런데 오빠 목소리가 달라졌어. ▲낮부터 전화하려 기다리다가 목이 좀 가는 것 같애(웃음),MBC에서 너를 방송했다고해 보려고 왔어,내일 그곳으로 간다.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지만 어머니(최원화ㆍ86)가 아직 살아계셔요,어머니가 꼭 만나고 오라고해서 어머니 사진과 아버지 사진을 갖고왔어요,오빠 모습을 일본 TV에서 봤는데 할아버지같이 늙어 마음 아픕니다. ▲엄마가 지금 86살이구나 내가 엄마 45세일 때 나왔거든,너도 모습이 많이 달라졌더라,71년에 본 얼굴하고 너무 틀려 잘 모르겠더라 ­오빠 정말 내일 오세요 저번에 못만났으니까 우리 둘이 이번엔 꼭 만나자우요 ▲정말 간다. 내일 낮11시45분 비행기타고 나리타를 거쳐 삿포로에 저녁7시에 도착할거야. ­내일 빨리 만나서 구체적으로 얘기하자우요,오빠 나는 남편(임세진ㆍ김일성대 체육학교수)하고 같이 왔어요. ▲알았다. 어머니가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우리 형제 12명을 낳았는데 6명만 살아남고 그중 나를 제일 귀여워했어. 엄마 선물을 갖고 갈께(울음). ­어머니 선물하나도 필요없어요. 남북이 갈라져 있으니까요(울음) ▲그런 소리하지마. ­오빠는 어머니한테 선물 주려면 어머니 죽은 후 속옷이나 가져오시라우요. 오빠 선물 갖고 관에 들어가게(울음). ▲기집애,그런 소리하지마. ­40년만에 만나서 귀띔말도 하고 많이 얘기하자우요. 어머니도 꼭 오빠 만나고 오라고 했어요. 이레 살면 얼마나 사나면서 꼭 만나라고 했어요. ▲전에 못만나 안타까웠다. 이번엔 우리를 못만나게 할수 없어. ­안녕히 계십시요. ▲내일 간다. 한편 이들 남매는 빠르면 8일 하오쯤 40년만의 재회를 이룰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 외언내언

    남과 북으로 나뉘어 생이별 상태에 있는 친남매가 40년만에 이국땅에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는 기대에 넘친 소식이 전해지던 날,휴전선에서는 제4땅굴이 확인되어 충격을 주었다. 어째서 이 땅은 이다지도 기구한 것일까. ◆한필화,한필성씨 남매이야기는 20년 전에 우리를 가슴아프게 한 사연이다. 10대의 청소년이던 오라비가 단신 집을 떠날 때 유년의 모습으로 동구밖에 배웅하던 그 누이동생. 그들은 71년 일본 삿포로에서 열렸던 동계프레올림픽에서 기막힌 만남을 할 뻔했었다. 그러나 얼어붙은 채 동강난 조국은 그들을 자유롭게 해주지 못했다.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서로를 불러본 짧은 전화통화 한번이 고작이었고 약속된 호텔서 기다리던 오라버니 앞에 누이동생은 나타나지 않았다. ◆이번에도 누이동생은 삿포로에 왔다. 옛날처럼 선수가 아니라 팀을 이끄는 임원이 되어 동계 아시안게임에 참가하는 것이다. 이 예상되는 「만남」을 놓고 일본의 상업주의는 진작부터 호들갑을 떨고 있다. 「이산」이 만나는 인정드라마는,당사자들에게는 가슴을 에는비극이지만,일본같은 「관객」에게는 흥미있는 구경거리일 것이다. ◆홍안의 10대 소년이 초로의 주름진 얼굴이 되도록 고향하늘 보이는 땅을 떠나지 못하며 살아온 오라버니 필성씨를 생각하면 그들 남매는 이번에 꼭 만나야 한다. 노모가 아직 생존하셨다면 막내딸이 전해주는 맏아들의 소식은,40년 한 맺힌 모정에 여한풀이를 해줄 것이다. 그러나 이토록 간절한 여망도 지금으로서는 좀 불안하다. ◆미욱하고 시대착오적인 호전성으로,아직도 예다 제다 땅굴을 파는 그들의 속셈이 경칩날 개구리처럼 솟아오르기 때문이다. 부비트랩에 폭사한 군견처럼 우리를 해치고 싶어하는 심사는,동기간의 피처럼 진한 인정도 아랑곳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만남이 실현되는 순간까지 기뻐하기를 자제하는 듯한 필성씨의 「침착」함이 차라리 안쓰럽다.
  • 이산40년…「분단의 벽」을 넘어/“삿포로상봉”기대 부푼 남북오누이

    ◎일본 도착한 한필화씨/71년엔 오빠와 아쉬운 전화통화만/“「19년 맺힌 한」 이번엔 꼭 풀겠어요” 『오빠를 만나고 싶습니다. 이번에는 꼭 만나야 합니다. 내가 일본에 온줄알면 오빠가 반드시 만나러 올 것으로 믿습니다』 오는 9일부터 14일까지 일본 삿포로에서 열리는 제2회 동계아시아 경기대회에 참가할 북한측 선수단임원으로 2일 저녁 나리타(성전)공항에 도착한 한필화씨(48)는 한국에 사는 오빠 필성씨(62)와 만나고 싶다는 기대에 부풀어 있었다. 한씨는 지난 64년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때 여자3천m 스피드 스케이팅 경기에서 은메달을 땄으며 71년 삿포로 동계프레올림픽에도 참가했었다. 프레올림픽 당시 오빠 필성씨는 6.25때 헤어진 막내동생 필화씨를 만나기 위해 현해탄까지 건너갔으나 당시 꽁꽁 얼어붙었던 남북한관계로 뜻을 이루지 못한채 전화통화만으로 가족들의 안부를 물을 수 밖에 없었다. 이제 40대후반의 중년여성으로 다시 일본에 온 필화씨는 이날 분홍색 스커트 차림으로 후배선수들을 인솔하고 있었다. 공항내에서 한씨를알아본 한국여행객들이 『이번에는 오빠와 꼭 만나세요』라고 인사를 건네자 한씨는 『고맙다』고 답례하기도 했다. 그는 『북경에서 중국민항비행기가 5시간이나 연발하는 바람에 선수들이 다소 지쳐있으나 별문제는 없을 것 같다』고 말했다. 한편 35명의 북한선수단을 이끌고 있는 박명철단장은 이날 저녁 도쿄의 한 호텔에서 있은 기자회견에서 이들 남매의 재회가능성을 묻는질문에 『재회의 기쁨을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남매가 재회를 희망한다면 실현을 위해 노력하겠으며,자연스런 형태로 재회가 이뤄지도록 성의를 다하겠다』고 말했다. 필화씨는 현재 북한의 체육위원회관리로 일하고 있으며 남편 임세진씨(김일성대학 체육교수)도 이번에 함께 일본에 왔다. 북한선수단은 중국민항기의 연발로 밤늦게 일본에 도착하는 바람에 도쿄에서 하룻밤을 보낸후 3일 삿포로로 떠났다. ◎오빠 한필성씨 집/동네사람들과 잔치 벌이며 어깨춤/“북에 계신 어머님 안부부터 묻겠다” 『필화의 얼굴이 환한것을 보니 이번에는 꼭 만날 수 있을것같습니다』 한필성씨(62)는 3일하오 젖소 25마리를 키우며 살고있는 경기도 파주군 교하면 동패리의 마을사람들이 자신을 위해 열어준 축하잔치에서 들뜬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실향민인 친구들에 둘러싸여 고향이야기를 나누다 막 배달된 석간신문에서 일본에 도착하는 모습을 찍은 동생의 환한 표정을 본 순간 40년만의 재회를 확신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씨는 지난달 중순『한필화가 동계아시아경기대회에 참석하기위해 일본에 간다』는 소식을 듣고는 단숨에 국토통일원으로 달려가 동생을 만나도 좋다는 허가를 얻었고 곧바로 일본행에 필요한 여권가 비자를 받았다. 『삿포로동계올림픽이 열린 지난71년 동생을 만나기 위해 일본에 갔을때 신문과 TV에 비친 필화의 얼굴에서 어두운 그림자를 보고는 만나지 못할 것만 같다는 예감이 들었으나 지금의 동생 표정을 보면 북한당국도 우리의 만남을 승인한 것이 분명합니다』 1.4후퇴때 월남한 뒤 줄곧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에서 함께 살다 3년전 고향이 가까운 이곳 파주로 옮겨서도 형제처럼지내고 있는 안인숙씨(52)가 마련한 잔치에서 한씨는 『이렇게 즐거운 것은 난생 처음』이라며 어깨춤을 덩실덩실 추었다. 한씨는 『이번에 동생을 만나게되면 먼저 북한에 생존해 계시는 어머님의 안부를 물을 작정』이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어머니 최원화씨(86)의 소식은 지난 87년 필화씨의 남편 임세진씨가 일본TV와의 인텨뷰에서 『장모님이 평안남도 진남포시에 살고 계시다』는 말을 해 이미 알고 있는 터이다. 한씨 못지않게 상기된 기분을 억누르지 못하고 있는 부인 홍애자씨(53)는 엊그제 서울에 나가 고향식구들에게 전해 줄 선물을 샀다. 한번도 뵙지 못한 시어머님에게 드릴 한복과 금가락지,보약 그리고 4명의 시누이와 동서에게 줄 한복을 정성스레 골랐다. 홍씨는 특히 필화씨 몫은 어머니가 딸을 시집보내며 예단을 준비하는 심정으로 마련했다. 아버지가 안계신 집안의 큰오빠와 큰올케로서 남과북의 장벽때문에 필화가 시집갈때 아무것도 해줄 수 없었기 때문이다. 한씨부부는 오는 6일이나 7일쯤 일본으로 떠날 예정이다. 주위에서는 더일찍가라고 성화지만 한씨는 젖소 「벌갱이」가 새끼를 낳는 것을 지켜보고 가기로 했다. 한씨는 지난71년 너무 큰 기대를 가졌다 좌절된 기억이 떠올라 이번에는 겉으로나마 여유를 갖기위해서라고 했다.
  • 경관 컴퓨터 조회 도움/55년만에 3남매 상봉(조약돌)

    ○…55년간 생사를 모른채 헤어져 살던 3남매가 한 경찰관의 도움으로 극적으로 상봉했다. 경기도경 형사과 곽정섭경사(50)는 충북 진천군 덕산면 신천리 화천부락 강순유할머니(70)의 부탁으로 한달여 컴퓨터조회 끝에 대구시 서구 평리3동 1033에 사는 강할머니의 오빠 권달씨(73)와 동생 영달씨(67)를 찾아내 2일 하오3시쯤 곽경사의 집에서 3남매를 만나게 한것. 강씨 3남매는 지난 36년 건어물장사를 하던 아버지가 당시 16살인 강할머니만을 데리고 함경북도 아오지로 이주하여 강할머니가 충청도로 시집을 간뒤 해방과 동란 등 격동의 세월속에 서로 생사를 모른채 살아왔다는 것이다.
  • 시부모와 정통윤리(사설)

    거의 모든 주부들에게 공통되는 감정이 있다. 『좌우지간 시자 들어간 식구는 싫다』는 것. 상당한 교육을 받은 여류가 반쯤 공식자리에서 이런 말도 했다. 『… 시어머니가 금덩어리를 이고 문앞에 온대도,그거 이고 도로 가시라고 하고 싶을 심경이다』라고. 억만금을 준대도 「시」자에는 거부감을 느끼는 며느리. 시부모 모시기 싫다고 아이들까지 데리고 동반자살을 꾀한 충북 제원군의 신모주부도 그런 며느리였던 모양이다. 사대독자인 남편을 보고 분가해 살기를 조르다가 아이들 남매에게까지 농약을 먹이고 자신도 치사량을 음독한 뒤 죽어 버린 그가 「오죽하면 죽을 결심을 했을까」하는 생각을 해보게도 한다. 그러나 이 부인의 경우 그 죽음은 고민끝의 선택이기 보다는 앙심에서의 선택같은 인상을 받는다. 사대나 독자인 집안에 아들을 낳아주었는데도 그 공(?)을 인정하지 않고 시부모랑 사는 사슬에서 풀어주지 않는 남편과 시부모에게 보복하는 심경으로 아이들까지 데리고 떠나려 했던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그 결과 그 부인은 자신이시부모와 견디기 보다 훨씬 불행할 여건을 자신의 자녀에게 안겨주고 말았다. 「효」란 우리가 지닌 아름다운 전통가치이고,전승시키기에 충분한 뜻을 가진 윤리관이다. 그러나 이것을 실천해야 할 주체에게는 부담스럽고 힘든 덕목이다. 힘든 것을 참는 힘이 거의 다 퇴화해 버린 오늘같은 시대에는 도저히 감내하기가 어려운 덕목인 것이다. 효가 아름다운 덕행이지만 실천하기에 쉽지 않으므로 옛날에는 종순하는 도리로 실천의 계율을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도 「고추당추 맵다지만 시집살이 당할소냐」 시어머니 구박에 목매 죽은 며느리의 혼이 화했다는 쑥국새전설따위가 얼마든지 생길만큼 고부간의 갈등은 역사가 깊다. 동서고금의 영원한 갈등의 관계가 바로 이 관계다. 오늘처럼 컬러TV가 벽지 방방곡곡에 보급되고,그 TV가 자고새면 연속극으로 광고로 날씬하고 매끈한 젊은 부부의 행복한 생활만 보여주고,공처가 남편과 화려한 아내의 젊은 부모밑에 토실토실하게 자라난 자녀만을 「세대」의 모델로 보여주는 형편에서 구질구질하고 귀찮은 시부모를모시고 희생하고 있기란 지겨울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나하나로 보면 이런 일은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지만 대다수가 공통으로 지닌 문제이므로 사회도 이런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져야 한다. 특히 농촌의 경우에는 노인모시는 문제가 도시보다 더 빈번하다. 그렇다면 주거양식을 개발하여 어른은 모시되 젊은이들끼리만 누리는 공간도 있는 우리에게 맞는 현대분위기의 집들을 보급한다든지 마을 공동체에서 함께 해결하는 지혜나 방법 등을 사회정책으로 모색해 주는 일도 중요하다. 특히 양로원의 인식이 절망적으로 부정적인 우리 사회를 감안하여 한국인의 심성에 부응하는 「노인의 집」을 연구하고 도시서부터 늘려가는 방법도 시급하다. 이런 일은 사회가 공동의 노력으로 마련해 가야 한다. 무엇보다도 삶의 공동체가 화해하며 살아가는 기능이 우리에게서는 대단히 약하고 미숙하다. 현대적으로 변화된 예의나 도리,질서 등이 연구 모색되어 표본으로 제시될 수 있다면 도움이 될 것이다. 정으로 잘만 다스리면 사랑하는 가족으로 묶여질 관계가 증오와갈등으로 찢기기만 하는 것은 전체의 불행이다.
  • 판자집에 불/3남매 숨져

    8일 상오2시57분쯤 서울 구로구 궁동 212의2 김기옥씨(42ㆍ여)의 판자집에서 불이나 김씨의 큰딸 장미화양(18ㆍ영등포여상 3년)과 아들 정훈군(16ㆍ동양공고 1년),광훈군(13ㆍ우신중 1년) 등 3남매가 질식해 숨졌다. 불은 10평크기의 판자집 내부와 냉장고 등 가재도구를 모두 태우고 2백여만원어치의 재산피해를 낸뒤 10분만에 꺼졌다. 불이 났을때 미화양은 안방에서,정훈ㆍ광훈군은 옆방에서 자고 있었고 김씨는 7일 하오11시40분쯤 동작구 상도1동 인삼찻집에서 파출부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어서 화를 면했다. 경찰은 불이 김씨 집의 전기배선이 낡아 누전으로 일어난 것으로 보고있다.
  • 과로에 숨진 「서민의 지팡이」/박홍기 사회부 기자(현장)

    ◎신정 연휴에도 밤샘 근무하다 쓰러져 『언제나 경찰임을 자랑하며 늘 어렵게 생활하는 사람들을 돕고 살아오던 당신이…』 3일상오 서울 한강성심병원 영안실. 아직 젊디젊은 변명숙씨(34)는 남편 최상원경장(38)의 영정을 끌어안고 흐느끼고 있었다. 『일주일만에 집에 들어와 「내일은 아이들하고 서울대공원에도 가고 맛있는 음식도 사먹자」고 웃던것이 마지막 모습』이라며 더욱 서러워 했다. 서울 영등포경찰서 양평파출소에 근무하던 최경장은 30일밤 야근을 하고는 비번날이자 남들이 모두 신정연휴에 들어간 31일 아침에도 잠시 집에 들렀을 뿐 바로 관내를 돌아보고 파출소에 나가 밤늦게까지 일하다 끝내 과로를 이기지 못하고 순직했다. 그는 78년 경찰에 들어와 주로 양평동같은 재개발지역에서 근무하면서 이웃 노인들을 위해 노인정의 건립을 추진하고 생활보호대상자들을 돕는 등 「서민의 지팡이」역할에 충실해 왔다. 한달 45만원의 박봉으로 4식구를 부양해야 하는 어려운 형편속에서도 지난 가을에는 양평동2가 판자촌 할아버지 6명에게라면1상자씩을 선물하기도 했다. 보증금 3백만원에 한달13만원짜리 반지하 사글세방에서 부인 및 국민학교 2학년짜리 딸과 유치원에 다니는 6살짜리 아들,아직 일자리가 마땅찮은 동생(29)을 거느리고 있는 신세로는 큰 지출이었다. 『월급이 적다고 불평도 했지요. 그러나 그때마다 남편은 「우리보다 더 어려운 사람들도 꿋꿋하게 살아가는데 조금만 참고 지내자」고 달랬지요. 그러면서 「우리 집안식구 모두가 공직에 봉사해온터에 나라고 이깟 가난하나 못이겨서야 되겠느냐」고 했고요』 이미 작고한 아버지는 경남 김해군 대동면사무소에서 정년퇴직했었고 형(45)은 경남 함양경찰서에서 경사로,동생은 영등포교도소에서 교도관으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부인 변씨는 『남편은 TV에 국립묘지만 나오면 「저곳에 묻히면 얼마나 영광이냐,저 곳에 묻히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일해야겠다」고 말하곤 했다』고 전했다. 남들이 다 신정연휴를 즐기고 있을 때 묵묵히 방범일선에서 불평 한마디 없이 봉사하던 한 경찰관은 그렇게 갔다. 그의 빈소앞에서 『아버지는 하늘나라에 갔다』며 철없이 뛰노는 남매의 모습이 조문객들의 가슴을 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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