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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독일서 빚은 한국인형전/재독 닥종이작가 김여희씨 국내전

    ◎작품마다 토속적인 익살·해학 가득 독일에서 한국고유의 종이로 한국인형을 만들면서 독일화단의 인정받는 작가로 뿌리를 내리고 있는 김영희씨(49)가 현대화랑(734­8215)의 올해 첫 초대작가로 19∼29일 전시회를 갖는다. 지난 2∼3년간 만든 닥종이인형을 전시하는 한편,그의 지난 인생 10여년의 사연들을 긴 호흡으로 토해 낸 이야기책 「아이를 잘 만드는 여자」도 출간했다. 닥종이를 찢어내고 뭉치고 색깔을 입혀 토속적인 인간형상으로 빚어낸 김씨의 작품들은 작가의 심장소리와 호흡이 느껴질만큼 강렬한 인상을 준다. 과거 그의 닥종이 인형들이 슬픔과 고통의 표정들로 관객의 마음을 어둡게 한 측면이 있었던데 비해 이번 전시작품들은 고운 눈매와 뽀얀 자태로 또다른 익살스러움을 과시하고 있어 작가의 삶에 행복이 드리워져 있음을 짐작케 한다. 김씨는 지난 69년 홍익대 조소과를 나와 70년초에 결혼,3남매를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렸으나 70년대후반 남편과 사별했다.청상의 슬픔과 한을 닥종이 인형만들기로 달랜 그는 우연한 기회에 독일화단에 알려졌고 이를 계기로 14살 연하의 독일청년을 만나 그의 끈질긴 구애를 받고 다시 결혼했다. 그로부터 10년 후 김씨는 남편 토머스 사이의 자녀둘을 더해 5명의 자녀들과 행복한 독일의 가정을 이끌어 나가며 해마다 세번 이상의 개인전을 갖는 국제적인 작가로 발돋움했다.색색가지 인형들이 서민적인 애환의 표정과 자태들로 어우러지는 그녀의 작업을 두고 한 평론가는 『거기에 담긴 해학들은 쓰라린 고통을 통해 나비처럼 날아오르는 지혜』라고 했다. 『50을 앞두고 이제는 정말 세계적으로 이름있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욕심이 무럭무럭 피어난다』는 그녀는 성격도 대화법도,그리고 필치도 놀라울 정도로 솔직하고 시원하다.
  • 30대 3남매 방송고 졸업/3년 개근… 함께 방송대에(조약돌)

    ○…농사를 짓느라 중학교를 졸업하고 학업을 중단했던 30대의 남매가 방송통신고교를 나란히 졸업했다. 경기도 김포군 올곳면 고양1리 446에 사는 이범각(35)·범학(33)형제와 여동생 화옥씨(32)가 16일 열린 경복고 부설 방송통신고의 졸업식장에서 「남보다 늦었지만 더 값진」고교 졸업장을 손에 쥐었다. 소와 돼지를 키우느라 새벽부터 밤늦게까지 일해야만 하는 고단한 생활 가운데서도 2주일마다 열리는 수업을 위해 3남매가 함께 김포에서 서울까지 3년동안 개근하여 이번에 고교과정을 무사히 끝마치게 된 것이다. 이들은 뒤늦은 공부를 여기에서 끝낼수는 없어 방송통신대학에도 나란히 진학,형제는 농사에 도움을 받을수 있는 농과를,여동생은 법과를 전공하기로 했다.
  • 「밀입북 아들」배신감에 숨져간부정/전대협 성용승군 아버지 성춘경씨

    ◎“내아들이 그럴수가…”좌절감속 고통의 나날/베를린 찾아갔다 허탕친뒤엔 아예 식음전폐 전대협대표로 북한에 파견됐다가 현재 베를린에서 정치적 망명요청을 해놓고 있는 성용승군(23·건국대 행정4)의 아버지 성춘경씨(53·약국경영·대전시 유성구 장대동)가 아들의 행위에 대한 배신감과 애틋한 부정 등으로 생긴 마음의 병으로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해 오다 11일 하오 4시 대전시 중구 목동 선병원에서 끝내 눈을 감았다. 더욱이 성씨의 죽음은 용승군이 2대독자여서 아들의 행위에 대한 성씨의 좌절감과 허탈감이 얼마나 컸겠느냐는 점에서 많은 학부모들의 마음을 아프게 하고 있다. 현재 충남대에 재학중인 딸등 남매를 키워오던 성씨는 지난해 6월24일 아들이 부모에게 한마디 상의도 없이 출국하자 아들에 대한 심한 배신감과 그리움 등으로 웃음을 잃은채 고통의 나날을 보내 왔었다. 가족들에 따르면 성씨는 아들의 입북사실이 밝혀졌을 때 『용승이 같이 공부만 하던 착한 녀석이 그렇게 엄청난 일을 저질렀을리가 없다』며 아들을 설득하기 위해베를린까지 갔었으나 만나보지도 못하고 돌아온 뒤로 자폐증환자처럼 주위 사람들을 피해왔다. 특히 성씨는 베를린을 다녀와서는 약국문을 아예 닫는 일이 많았으며 식음을 전폐하다시피하면서 한밤중에 혼자 일어나 어두운 하늘을 우두커니 쳐다보면서 한숨만 쉬었다는 것이다. 성씨는 평소 건강했으나 아들의 밀이북 이후 당뇨증세를 보이다가 최근에는 간까지 나빠져 2∼3일간 입원치료까지 받은 일이 있었으며 지난 10일 하오 증세가 갑자기 악화돼 이 병원에 입원했다가 하룻만에 세상을 떠났다.
  • 누나는 장물아비·동생은 절도범/2억대 옷 훔쳐 헐값 처분

    서울 방배경찰서는 1일 양요한씨(28·무직·전남 곡산군 곡산읍 학전리 529)와 옥자씨(42·상업·전남 목포시 용남동 940)남매를 특수절도등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양씨는 지난해 12월 29일 상오2시쯤 서울 서초구 방배동 2191 여성의류공장인 라비쌍뜨(주인 정광조·42)에 들어가 여성의류 4백25점 시가 6천9백여만원어치를 훔치는등 지난해 10월 초부터 12월말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2억여원어치의 의류를 훔친 혐의를 받고 있다. 누나 옥자씨는 지난해 12월15일 전남 목포시 용해동 일로시장안에 「뉴벨베그」라는 여성의류 할인매장을 차린 뒤 동생이 훔쳐온 의류를 시중보다 50%나 싼 값으로 팔아왔다는 것이다.
  • 새인물보다 정실에 얽힌 표밭·정치권(이거 달라져야 합니다:11)

    ◎(고쳐야할 정치행태 시리즈)/동향사람이면 능력안가리고 표 몰아줘/돈으로 공선법래·지역부바꾸기 예사로/참신하고 도덕성갖춘 인물에 한표… 정치꾼 물갈이를 최근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대부분의 국민들은 정치발전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소로 「정치인들의 의식개혁」을 꼽고 있다.또 이를 위해서는 기존 정치권의 물갈이가 절대 필요하다고 인식하고 있다. 그러나 선거때만 되면 어김없이 제기되는 「정치권 물갈이」는 항상 설로만 그칠뿐 실제로 단행된 적은 별로 없다. 이는 기존 정치권이 으레 참신성과 도덕성을 제1의 공천기준으로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자기당 의석확보를 위해 현역위주의 당선가능성을 보다 우선시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유권자들도 참신한 인물이 원내에 진출하기를 바라면서도 실상은 자신들의 투표권을 그릇되게 행사하는 결과이다. 다시 말하면 입으로는 인물본위로 투표하겠다고 이야기 하지만 실제로는 학연·지연·혈연등에 얽매여 정실투표를 하고 있는게 실상이다. 그 결과 13대 국회는 역대 국회중 가장 많은 구속자(13명)를 냈다는 오명과 함께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불신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정치권의 물갈이는 1차 책임이 정당에 있다면 2차 책임은 유권자들에게 있으며 그 피해도 결국 정치권과 국민들에게 부메랑 처럼 되돌아오게 된다. 지난 13대총선직전인 88년 4월24일,경북 안동시 안동우체국 2층 우편계사무실에서는 현금 2만원씩이 든 민정당 권중동후보명의의 우편물 돈봉투 4천2백96개가 발견됐었다. 경찰 조사결과 이 돈봉투는 권후보의 선거운동원이 나흘동안 만들어 이날 안동우체국에 우송을 요청한 것이었다. 당시 유권자들은 돈으로 표를 매수하려던 권후보를 낙선시켰음은 물론 채문식민정당대표위원으로부터 대국민사과를 받아냈다. 이는 「때묻은 후보」를 유권자가 표를 통해 솎아내 정치권의 자정을 이루려 했던 대표적인 사례이다. 또 12대총선 선거운동기간중 서울 강남의 한 지역구에서는 민정당의 L의원이 주민들에게 접시를 돌렸으나 이들 주민들은 『도대체 우리를 뭘로 보느냐』며 돌린 접시를 쓰레기통에 내다버리고 투표를통해 심판했다.L의원은 낙선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같은 몇몇 사례는 통상적으로 전개되고 있는 입후보자들의 각종 불법행위에 비한다면 아주 적은 경우에 지나지 않는다. 대부분의 경우 유권자들은 후보자의 인물 됨됨이 보다는 고질적인 병폐인 지연이나 학연 혹은 혈연에 얽매여 자신의 한표를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고 있는게 현실이다. 지난해 연말 서울 Y구에는 『고향을 찾읍시다』라는 포스터가 전신주·담벼락 등에 붙어 있었다.이 포스터는 모정당 국회의원의 선거운동조직이 지연을 선거전략으로 활용하기 위해 짜낸 아이디어였다. 영·호남을 비롯해 각도에서 올라온 사람들이 많은 서울은 뭉치표가 출신도별 유권자분포에 따라 그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동향사람표만 모아도 어느정도 기본표가 확보된다는 계산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자신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거나 국회의원으로서의 결격사유가 있다해도 「고향의리」로 밀어붙이면 그만이라고 믿는다. 13대 총선때 민주당의 광주 모지역조직책 신청자 R씨는 「조직기반자술서」에 ▲광주K대학동창 수천명 ▲수천명의 친족 ▲외족인 K씨집안 ▲처가 P씨문중 ▲수천명의 천주교교우 등을 장황하게 명시했으며 경기도 과천·의왕에 조직책을 신청한 L씨는 『혈연으로 친형제 8남매,친족1천여가구,외족 2백여가구,학연으로 K국교 7만여졸업생등』이라고 지지기반을 근거없이 자랑했다. 이처럼 이번 총선에서도 후보자들은 한결같이 동창회다 친족회다 하는 모임을 선거전략으로 구상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무조건 한표를 얻으려 하고 있다. 유권자들이 연고감정에 앞서 인물위주로 표를 찍는다는 결단을 하지않는한 선거혁명을 통한 물갈이는 요원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이같은 유권자들의 표의 심판에 앞서 진정한 정치권 물갈이가 이루어지기위해선 무엇보다도 먼저 정치권의 「밀실공천」이나 「공천장사」가 없어져야 할것이다. 아버지가 돈 있다고 아들이 국회의원을 하는 경우,아무런 지역연고도 없이 지역감정에 편승해 국회의원이 되는 현상황에서는 물갈이는 공염불에 불과하다. 지난번 영광·함평 보궐선거에서 이모의원은 호남에 아무런 근거없이 출마,김대중총재의 후광아래 손쉽게 당선됐다. 그러나 이의원은 지금 14대에서는 또다시 지역구를 옮겨 서울에서 출마할 예정이다. 국회의원이 진정한 국민의 대의기관이라면 지역에 뿌리를 두고 지역주민을 돌볼수 있는 인사가 선출돼야 할것이다. 이와함께 지난번 13대 공천때 나타난 남원공천파동과 같은 야당의 뿌리깊은 공천장사도 이제는 지양돼야 한다. 남원 지역구를 놓고 C씨와 L의원이 벌인 이전투구식의 싸움도 싸움이지만 국회의원자리를 돈으로 사고파는 행위가 국민들에게 던진 정치불신은 실로 엄청나기 때문이다. 현재 총선을 앞두고 사회 각단체들은 공명선거를 통한 정치개혁을 이루기 위해 「때묻은 후보추방」과 「이런사람은 뽑지말자」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전개하고 있다. 차기총선에서 유권자들은 ▲돈봉투를 돌리는자 ▲불건전한 사생활자 ▲타후보인신공격자 ▲선심공약남발자 ▲비리관련자등은 표로써 심판하고 ▲도덕적인 면에서 깨끗한 자 ▲부정부패의 전력이 없는자 ▲언행이 일치하는 자등은 표로 보상해 명실상부한 정치권 물갈이를 이룩해야 한다고 많은 사람들은 지적하고 있다.
  • 일제만행에 치떨며 살아온 70년

    ◎형 죽음 확인 못하고 “분노의 삶” 마감/상경시위중 사망한 주기성옹 지난 17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에서 반일시위를 벌이다 넘어져 숨진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회 목포지부회원 주기성씨(70·전남 목포시 산정동 1745)는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의지하던 형을 태평양전쟁터에 빼앗긴 뒤로 기구한 삶을 살아왔다. 전남 영광군 군남면 설매리에서 농사를 짓는 집안의 2남1녀중 막내,그것도 유복자로 태어난 주씨는 출생직후 어머니마저 여의면서 4살위인 형 석채,2살위인 누나와 가난했지만 단란한 생활을 꾸려왔었다. 그러나 형 석채씨가 42년에 강제징용을 당해 필리핀 남양군도로 끌려가면서 고아나 다름없는 이들 남매의 삶은 회한의 나날이었다. 그는 해방후 징용에서 돌아온 같은 마을 서모씨(70)로부터 『형이 남양군도에서 44년도에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매년 형이 끌려간 9월9일을 기일로 삼아 제사를 지내면서도 형의 생사를 직접 확인하고자 애써왔다. 주씨는 60년대말 목포로 이사해 목포시 미화원으로 일하다 68년 퇴직한 뒤로는 막노동으로 생계를 유지했다. 유족으로는 부인 이순례씨(60)와 네 아들을 두고 있으며 그중 맏아들 주규현경장(35)은 현재 제주경찰청 901전경대소속 연암함정 소주정장직을 맡고 있다.
  • 김승환씨 서울지방 항공청 관제탑 현장주임(이런 공무원)

    ◎「하늘의 등대지기」/“비좁은 우리 영공… 한치 오차 허용 않죠”/땀쥐는 긴장속 하루 4백대 이착륙 유도/중국·북한 항로 열려 관제공간 넓어졌으면…/88년 소 항공기 기장 서울 내려 “관제 훌륭” 첫마디… 지금도 뿌듯 『활주로 FOD(이물질). DL050 고도 2천유지』 『KE 703. 고도 3천으로』 『오케이. NW 065. 「클리어드 투랜드 원 포 라이트」(오른쪽 활주로에 착륙하라)』 새해의 하늘을 열고 닫는 김포공항 관제탑은 숨차다. 5분 단위로 이루어지는 이착륙의 지휘에서 한치의 오차가 의미하는 결과는 너무 참혹하다. 하늘의 등대지기로 불리는 항공관제사. 겉으로 화려해 보이지만 하는 이들의 하루는 그러나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일촉즉발의 긴장감속에 있다. 김승환씨(41)는 하늘을 지휘하는 관제탑을 또 지휘한다. 관제사가 공무원이라는 사실마저 잘 알려져 있지않을 정도로 아직 낯선 직업중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그는 하늘의 꽃이라는 조종사보다 훨씬 중요한 일을 한다는 긍지와 자부심에 차있다. 약간 마른체구에 빈틈없어 보이는 얼굴은 관제사의 전형을 그리라면 이런 모습이 아닌가 여겨진다. 그의 자부심과 긍지의 요체는 말하자면 이렇다. 조종사의 실수는 비행기 한대의 승객에게만 피해가 오지만 고도지정 등에서 관제사의 실수가 일어날 경우는 두 비행기의 충돌이라는 결과가 빚어질 수 있다. 두개의 활주로를 상황에 따라 이륙활주로,착륙활주로로 그때그때 지정해야 하고 이착륙 순번을 정해야하며 또한 기상악화시에는 착륙을 앞에서 끌고 가듯이 안내해야 한다. 그가 처리하는 하루의 항공기 관제대수는 4백여대를 넘고 있다. 특히 상오10시부터 3시간 동안,하오3시에서 8시까지는 평균 2분에 한대의 비행기가 뜨고 내린다. 눈코 뜰새없다는 표현보다는 화장실을 갈수 없다는데서 그 분주함과 긴장을 체감하기가 더쉬울지 모른다. 충남 청양의 부농집 5남3녀중 일곱째로 태어난 그가 관제사와 인연을 맺은 것은 고등학교 졸업후 공군에서 관제사병으로 근무한데서 시작된다. 74년 지금의 9급에 해당하는 5급을로 관제사 일을 시작했고 지금은 6급으로 승진,아내 김명희씨(38)와 딸 혜영(10) 아들 석훈(8) 남매를 둔것까지가 그의 신상명세다. 『큰 빌딩같은 항공기를 뜨고 내리도록 지시하고 통제하는 매력에 끌려 관제사가 됐지요』 대부분의 관제사들이 그런 이유로 이 직업을 택했지만 그리 편치않은 직업. 그렇다고 보수가 많은 것은 더더욱 아니다. 김포공항의 관제사는 모두 28명에 불과하다. 이틀에 한번씩 돌아오는 16시간의 야간근무를 하고 나면 눈은 부시고 귀는 멍멍해 쓰러질 지경이란다. 연속되는 긴장,지킬 수 없는 식사시간으로 대부분이 위장병에 걸려있다고 보면 틀림없다. 김 주임 역시 위장병으로 술담배를 모두 끊은 처지다. 김포공항 관제사들은 세계 어느나라의 공항 관제사보다 뛰어나다. 뛰어나야만 할수 있고 그건 역으로 근무조건은 최악일 수 밖에 없는 이유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상태여서 항공기가 다닐 수 있는 공간이 극히 제한돼 있습니다. 같은 고도에서 대형 항공기는 최소한 4마일 이상 떨어져야 해요. 그러나 인천앞바다를 거쳐 강화를 돌아오거나 안양상공,철산리위로 오는 두가지 길밖에 없어 언제나 최소한의 거리만을 유지할 수 밖에 없어 긴장도가 높을 수 밖에요. 아니면 그 비행기들을 처리할 방법이 없습니다』 강화로 돌아오는 비행기는 거의 휴전선 직전에서 기수를 오른쪽으로 틀어야해 손에 땀마를 시간이 없다고 한다. 그럼에도 김포공항에서 관제사 실수로 인한 한건의 안전사고도 없었던 것은 그의 자랑이자 그의 동료 모두의 자부심이다. 지난 83년 대한항공 747기가 착륙 잘못으로 승객 20여명이 사망한 참사는 비록 조종사의 실수였지만,김 주임에게는 가장 가슴 아팠던 기억. 70년대 강릉에서 온 경찰용 경비행기가 연료가 부족해 가까운 활주로로 유도됐으나 떨어져 조종사 등 3명이 사망했던 참사도 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그는 지난 88년 처음 서울에 내린 소련항공기 기장이 『공항관제가 엑설런트하다』란 말로 우리관제에 대한 국제적 평가를 내려주었을 때가 무척 기뻤다고 한다. 『판단력이 가장 중요해요. 안전만 생각해 공중선회를 한바퀴 더시키면 수백만원의 연료를 허비하게 됩니다. 안개가 끼었다고 한꺼번에 비행기가 뜨고 내릴때는 개개인의 판단밖에 믿을데가 없어요』 기상변화는 관제사의 제일 난적. 활주로 중앙과 양쪽 끝의 기온,풍속이 큰차이가 날 때도 있을 정도면 속썩는 정도가 이해될만하다. 『새해에 두가지 꿈이 있습니다』 박봉속에 12년 동안 남매를 키우면서 전셋집을 전전하고 있는 아내에게 내집을 마련해 가장의 체면을 좀 세웠으면 하는것이 그 하나,중국과 북한에 항로가 열려 더많은 관제공간을 확보하는 것이 두번째다. 아마도 두가지다 그의 동료 모두의 꿈일 것이다.
  • 브로드웨이 뮤지컬 한국에 온다

    ◎「사운드 오브 뮤직」 25일부터 순회공연 「애니」「웨스트…」 히트시킨 케이트사 제작 뮤지컬의 본고장 미국 뉴욕 브로드웨이의 정통 뮤지컬이 우리나라에 온다. 미국의 게이트 컴퍼니가 공연예술기획사 IMG의 초청으로 내한,25일부터 2월12일까지 서울과 부산·대구 등 전국 5개 도시를 순회공연한다. 연극제작자인 존 호지와 폴 알렌이 공동 프로덕션체제로 운영하는 게이트 컴퍼니는 지난 82년 이후 「애니」「오클라호마」「왕과 나」「웨스트사이드 스토리」「운드오브 뮤직」등의 인기작을 잇따라 무대에 올려 주목을 받아온 프로덕션. 이번 공연작품 「사운드 오브 뮤직」은 지난 60년 8월 뉴욕에서 초연되어 브로드웨이 뮤지컬사상 두번째 최장기 공연기록과 함께 토니상 6개 부문,아카데미 6개 부문을 석권하는 등 많은 기록을 남긴 화제작. 「도레미송」「에델바이스」「식스틴 고잉 온 세븐틴」등 친숙한 노래들로 사랑받아온 이 뮤지컬은 줄리 앤드루스주연으로 영화화되어 전세계에 널리 소개되기도 했다. 이 뮤지컬은 1938년 나치 독일에 의해 강제 합방 당하기 직전까지 오스트리아에 살았던 예비역 해군대령 폰 트라프 일가족의 실제 이야기를 담고 있다. 활달한 성격의 마리아수녀가 가정교사로 들어와 경직된 집안분위기와 규율에 얽매인 7남매들을 따뜻한 사랑으로 감싸며 아름다운 음악의 힘으로 화목을 꾀하고 파계의 아픈 시련을 넘어 대령과 결혼하게 되는 과정이 잔잔한 웃음과 함께 진한 감동을 선사해준다는 평. 이번 공연에서는 현재 오페라와 뮤지컬분야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이고 있는 로버트 아론슨과 루안 아론슨이 각각 주역으로 출연한다.연출은 로버트 에니스 터로프가 맡는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되는 이번 공연은 ▲25일=부산문화회관▲27·28일=대구 시민회관▲30·31일=수원 경기도 문화예술회관▲2월4·5일=장소 미정▲7∼12일=세종문화회관 대강당에서 열린다.
  • 쓰레기속 폐품모아 「이웃돕기」 10년(이사람)

    ◎“작은 봉사로 일구는 큰 행복”/은평구 환경미화원 김화홍씨의 임신년 새 아침/고아원·심장재단등에 매월 송금/치료비 없어 두살때 숨진 딸생각에 선행 결심/가난해도 베푸는 삶 “재벌 부럽잖죠” 거의 모든 사람들이 아직 단잠을 자고 있을 꼭두새벽.그는 거리로 나선다.삐거덕거리는 손수레에 빗자루 하나 들고 골목이며 한길에 어지러이 널려있는 쓰레기들을 치운다.마치 어제의 배설물 같다.날씨마저 좀 풀렸다고는 하나 그래도 곳곳에 꽁꽁 얼음이다.꽤나 지저분하고 고된 일이다. 그 쓰레기더미와 함께 25년을 살아온 서울 은평구청 소속 환경미화원 김화홍씨(51·은평구 응암2동 106).그에겐 그러나 이 일이 결코 고되지 않다.오히려 그 속에서 그 누구에 못지 않은 보람과 긍지를 일궈내며 산다.그것은 새해 첫 새벽을 여는 또하나의 작은 행복이다. 김씨는 자신의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더 어려운 이들을 찾아 돕는 일에 더없이 열성인 사람이다. 『남을 돕는 일에 귀천이 있나요.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에게 정을 베풀다 보면 그 어느 재벌도 부럽지않습니다』 전남 영암군 서호면 출신인 김씨는 지난 66년 친지의 소개로 서대문구청 청소과에 취직해 상경했다.그리곤 불광동 독박골의 단칸 셋방에서 사과상자로 만든 찬장을 유일한 살림살이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부모님이 정해준 같은 고향인 아내와 함께. 청소원이 거지 다음으로 천대받던 시절,『사내로 태어나 할 일이 이것밖에 없는가』하는 회의도 많았지만 가끔씩 찾아드는 이웃들의 따스한 손길과 격려의 말한마디가 고마워 결코 용기를 잃지 않았다. 아직도 그의 월급은 기본급에 갖가지 수당을 합쳐도 50만원을 조금 넘는다. 지난해 가까스로 마련한 14평짜리 집에서 다섯식구가 살아가기에도 벅차다.그러나 이웃들이 버린 음료수병이며 고철등 폐품을 모아 심장병어린이들의 수술비와 오갈데없는 노인·고아들의 양육비를 돕고있다. 그가 이같은 불우이웃돕기에 나선 것은 지난82년.사회정화위원회의 표창을 받아 상금 3만원이 나왔을때 청소과에 모두 성금으로 낸 것이 계기가 됐다. 그리고 2년뒤.가끔씩 사회단체의 이웃돕기 캠페인에 참여해오던 어느날 심장병어린이돕기 TV방송프로를 보게 됐다. 그순간 지난 66년 병이름도 모른채 낳은지 1년남짓만에 죽어간 큰딸 옥련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평짜리 단칸방에서 청소원과 파출부내외로 시름시름 앓기만 하는 딸을 끌어안고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 끝내 약 한번 제대로 먹이지 못하고 저 세상으로 보내야 했던 일이 눈앞을 가렸다.다음날 아침 곧바로 한국심장재단에 찾아가 1만원의 성금을 냈다. 적지만 참으로 귀한 1만원으로 본격화한 그의 이웃돕기는 이제 은평천사원,성덕원,어린이재단의 소년소녀가장돕기창구,충북 음성군 꽃동네등 10여곳에 번지고 있다. 기탁액수도 처음엔 심장재단 말고는 5천원씩이었으나 모두 1만원씩으로 올렸으며 폐품수집이 잘 되거나 명절·연말이 낄때는 2만원씩 보내고 있다.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어느날 술에 취해 길거리에 쓰러져 사경을 헤매던 중년남자를 손수레에 눕히고 비를 피하게 한뒤 가마니로 체온을 데워 살려낸 일도 있다. 그러나 김씨에게도 자신이 안서는 일이 있다. 『84년 국민학교에 다니던 애들이 아버지가 청소원이라는 사실을 알고 울음을 터뜨렸을 땐 당장 직장을 그만두고 싶었다』는 것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자녀들이 아버지의 직업때문에 충격을 받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는 「가난한 사회사업가」인 그의 뜻대로 3남매 가운데 큰딸(24)과 큰아들(20)이 달마다 2천원씩을 후원금으로 내게까지 됐다.그는 『사람들이 멀쩡한 가재도구나 덜먹은 음식물을 마구 버리는 것을 보면 서글픈 생각마저 든다』면서 『돈 많은 사람들이 낭비하지 말고 가난하고 외로운 이웃에게 조금이라도 관심을 기울였으면 한다』고 했다.
  • 넘치는 정간물… 부작용도 “포화상태”/공보처에 알아본 실상

    ◎현재 5천7백13개… 「6·29」이후 2배 이상 늘어/퇴폐 조장·사상활침해등 폐해 심각/정간조치가 최대제재… 법개정 필요 최근 엄청나게 쏟아져 나오는 각종 정기간행물이 경제적 낭비는 물론 사회적인 기능면에서도 부작용이 적지 않다는 지적을 받고 있어 대책이 시급하다. 「6·29선언」이전 2천2백36건에 불과했던 정기간행물 등록건수가 올 9월30일 현재 5천7백13건으로 나타났다. 불과 4년만에 두배가 훨씬 넘는 수의 신문·잡지·각종 간행물들이 마구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를 간별로 분류하면 일간 신문이 87건,통신이 2건,기타 5건이며 주간 1천2백47건,월간 2천90건,격월간 3백88건,계간 6백39건,반년간 1백57건,연간 1백36건 등이다. 지역간행물 현황은 월간·계간등을 모두 합쳐 ▲서울 6백70건 ▲부산 55건 ▲인천 25건 ▲대구 30건 ▲광주 강원 충북 각 7건 ▲대전 12건 ▲경기 65건 ▲전북 10건 ▲전남 6건 ▲경북 20건 ▲경남 44건 ▲제주 4건등이다. 그러나 지난 27일 올 마지막으로 모 일간신문등록등 10월이후에도 많은 간행물이 등록해정기간행물 등록수는 거의 6천건에 육박할것이라는게 공보처의 설명이다. ○…정기간행물의 폭증은 정보의 공유,국민의 알권리 충족이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지만 최근 웅진여성 사태처럼 부정적인 현상도 많이 표출되어 문제가 되고 있다. 최창윤공보처장관은 『1시간에 4페이지 신문을 2만부 발행할 수 있는 시설만 갖추면 무조건 허가해야 되는 현 정기간행물등록법에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고 『그러나 개정할 경우 언론탄압으로 비춰질 가능성이 커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상태』라고 말했다. 실제 정기간행물의 폭발적인 증가는 법에 규정된 시설만을 갖춰 등록만 하면 모두 발행할 수 있는 현 제도에도 그 원인이 있다. 또 한번 등록이 되고나면 간행물을 발행 하든 그렇지 않든 정부로서는 겨우 벌금만을 부과할 수 있을 뿐 정간·폐간등 다른 방법을 취할 수 없는 상태이다. 현재 이름만 걸어놓고 발행하지 않는 간행물 수는 6백여건이다. 대표이사의 이민,경영부실로 인한 도산,형집행 등의 이유로 발행이 중단됐다 해도 직권말소 시킬수 있는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새로 정기간행물을 등록할 경우 이름이 겹쳐 앞에 「신」자나 뒤에 「뉴스」「신문」등을 추가로 붙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정기간행물의 무분별한 등록의 가장 큰 문제점은 당초 발행목적과 달리 상업성의 추구.발행목적에는 「문화창달」「관광문화정착」등 그럴듯한 이유를 내세우고 있지만 실제로는 국민들의 문화정서를 해치는 외설 퇴폐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잡지들이 많다고 공보처 관계자는 설명했다. 비싼 제지원료를 수입해 이같은 퇴폐 향락적인 내용을 담는다는 것은 국민경제를 뒤흔드는 지나친 낭비가 아닐 수 없다는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올들어 발행목적을 위반해 경고처분을 받은 간행물은 주간 98건,월간이상이 52건이다.주의를 받은 간행물은 주간 14건,월간이상이 44건에 달한다. 정부가 할수 있는 가장 큰 제재인 정간조치를 당한 간행물은 월간 「카니발」과 「파라다이스」로 각각 2개월의 정간처분을 받았다. 등록을 해놓고 법정기일인 6개월내에 발행하지 않아 과태료를 문일간신문은 지난90년 「대한고교일보」「경북매일」「보건일보」등 3건,올해는 「문화일보」「영남매일」등 2건이다. 공보처관계자는 『발행목적을 위반해 경고나 주의조치를 받는 간행물수는 매년 늘고 있다』면서 『해당사에 전화·문서 등으로 하는 사소한 경고건수까지 합치면 그 수는 엄청나다』고 밝혔다. ○…웅진여성의 AIDS보도처럼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주는 오보도 문제지만 무분별한 발행으로 개인의 프라이버시나 인격을 침해하는 사례도 흔하다. 또 사이비기자들의 공갈 협박 등도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정부는 피해자가 정정보도를 요청할 경우 법으로 반론권을 인정하고 있지만 이는 많은 시간과 돈이 필요한데다 개인이 언론기관을 상대로 싸운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제약이 많다. 실제 정원식국무총리도 최근 모여성지의 오보로 막대한 개인적 피해를 보았지만 다음호에 정정보도를 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이같은 문제해결을 위해 언론중재위의 활동과 사이비기자에 대한 단속이 보다 강화되어야 한다는 지적도 높다.
  • 상습폭행 아버지/10대 남매가 고소

    서울 노원경찰서는 13일 10대 남매를 상습적으로 때려온 장용선씨(46·무직·전과3범·서울 노원구 중계1동)를 자녀들의 고소에 의해 아동복지법위반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장씨는 지난 9일 자신의 집에서 『시끄럽게 떠든다』며 딸(16·공원)과 아들(14)에게 흉기를 들이대며 주먹으로 마구 때린 것을 비롯,지난 88년부터 지금까지 술에 취한 상태에서 자녀들을 학대해 왔다는 것이다.
  • 외언내언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 시내에는 드니에플강이 흐른다.강을 경계로 서쪽으로 펼쳐지는 구시가는 「러시아의 파리」라고도 불리고 「러시아 도시의 어머니」라고도 불린다.나무가 많고 도시분위기가 푸근하다.도시의 서북쪽에는 완만한 구릉이 있다.블라디미르 언덕이라는 이름의 공원겸 언덕이다.◆블라디미르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드니에플 강위로 배와 배안에 두남자와 한여인이 서서 먼곳을 바라보는 조각상이 보인다.이 조각상은 그들의 건국설화를 형상화한 것이다.용감한 남자동기간 형제와 여자동기간 하나인 3남매가 그곳을 출발하여 각각 길을 떠났다.한 남자동기간은 역경과 어려움을 헤치고 나아가서 나라를 세웠다.그것이 「러시아」다.또 한 동기간도 용감하게 떠나서 역시 나라를 세웠다.그것이 「벨로루스」다.◆남아 있던 여자동기는 그 자리에서 나라를 세웠다.그것이 「우크라이나」다.슬라브민주의 3나라 러시아와 벨로루스와 우크라이나는 그렇게 태어났다고 키예프사람들은 말한다.낙엽이 질 무렵의 가을날씨가 꼭 서울을 연상시키는,조금 흐트러지고 약간 촌스런 순한사람들이 거리를 터벅터벅 걷고 있는 도시다.◆겉으로는 허술하고 반들반들하게 손질해 놓은 흔적이 없는 도시지만 일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엄청난 옛문화가 숨쉬고 있다.소피아사원의 아름다운 건축미와 품위있는 아이콘예술은 그곳이 러시아의 원초임을 의심하지 않게 한다.그 무뚝뚝하고 거칠어보이는 사람들이 어떻게 이토록 문화유산의 보호를 완벽하게 했을까.◆자유를 찾아 모험하기를,생명을 바쳐가며 실천했던 코사크의 후예다운 키예프사람들은 『이 나라 러시아는…』하고 말머리를 여는 버릇이 있는 것같다.슬라브민족의 3나라를 건국한 민족으로서의 긍지때문인 것같다.오늘에 이르러 슬라브 3나라가 『독립국가 공동체』를 만들어 따로 서겠다고 결의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이 나라 러시아…』의 긍지를 보태지도 손상하지도 않겠다는 오랜 뿌리에서 우러난 결의인 것같다.
  • 몽양 맏딸 북서 비참한 최후

    ◎이명영교수가 밝힌 여난구의 「기구한 생」/초대 북경공사 지낸 송성철과 결혼/남편 아오지탄광 유배로 영락/권좌에 오른 차녀 연구,언니최후 의식 “김일성 예찬” 「아시아의 평화와 여성의 역할」서울토론회 참석차 서울에 온 여연구는 알려진대로 최고인민회의부의장으로 북한여성으로서는 최고위직에 있는 「인물」이다.부친은 혁혁한 독립운동가 몽양 여운형선생. 그러나 이런 이런 집안의 형제중에서도 북한의 김일성체제 아래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충격을 주고 있다. 26일 북한문제전문가인 이명영교수(성대)에 따르면 근황이 알려지지 않은 여연구의 언니 여란구(여란구)는 수년전까지 생존이 확인됐었으나 여연구가 25일 하오 몽양묘소를 참배하며 바친 화환에 이름이 빠져있는 것으로 보아 사망한 것이 틀림없다고 분석했다.화환에는 「려연구」「려원구」(여원구)「려붕구」(여붕구)의 3남매 이름만 적혀 있었다.몽양은 본래 4남3녀를 두었는데 이름이 알려지기로는 이들 3남매 이외에 봉구(봉구)홍구(홍구)등이 있었고 「난구」에 대해서는 전해진 바 없었다.그러나 몽양의 장녀인 「난구」는 실상은 대단한 인물의 부인이었었다.이화녀전을 다니다 일본에 유학을 간 「난구」는 제주출신으로 역시 소피아대(상지대)유학을 마친 송성철을 만난다.송은 견결한 국제공산주의자로서 일본공산당 당원이었으며,해방무렵에는 열댓명밖에 안되는 일본공산당 중앙위원 후보의 자리에 까지 오른다.당시 조선인후보로서는 김두용·박은희가 있었으며,정치국에는 김천해가 정치위원 5명중 1인으로서 조선인의 이름을 뽐내고 있었다.일본이 패전하자 점령군 사령부는 일본공산당에 대해 추방령을 내린다.송을 제외한 나머지 3명은 모두 북한으로 갔으나 송만은 서울로 돌아와 박헌영의 남로당에 합류하여 활동했다.이때 몽양의 장녀 「난구」와 만나 결혼하게 된다.이들은 48년 「난구」와 함께 월북했다.여연구의 다른 형제들 보다는 늦게 월북한 셈이다. 송은 부수상겸 외상인 박헌영밑에서 북경대사관 초대 공사를 지냈으며 외교부 아주국장으로도 근무했다.송은 미제스파이로 몰린 박의 숙청과 더불어 몰락한다. 송은 귀국후 고문을 당했으며 60년쯤에는 아오지탄광으로 유배되어 72∼73년쯤 사망했다.여난구도 남편과 함께 비참한 생활을 했음은 물론이다.자식을 두지 못한 이들 부부는 일본 오사카(대판)에 사는 송의 형님 아들중에서 재용을 양자로 맞았다.이 송재용은 현재 일본에서 통일연맹중앙의장의 직함으로 반김일성투쟁에 앞장서고 있는 이광 바로 그 사람이다.이광씨는 지금까지도 자신의 양부의 장인인 몽양을 위해 도쿄(동경)에서 추모제를 지내오고 있으며 여연구로부터 감사의 편지를 받아왔다. 25일 45년만에 선친의 묘소를 찾은 여연구는 한마디 말도 못한채 처음 20분간 무릎을 꿇고 오열했다.반세기만의 「지각참배」를 뉘우치는 그의 울음은 주위사람들의 가슴까지도 처연하게 했다. 그러나 그의 이같은 「인간의 모습」은 이내 김일성예찬론자로 「표변」했다.분향을 마친 그는 15분간 계속된 추도사에서 김일성의 이름을 수도 없이 불러댔다. 북에서 내려온 기자들은 기다렸다는듯이 카메라와 녹음기를 갖다 댔다. 어쩌면 여연구는 북측기자들의 카메라와 녹음기를 의식,김일성의 이름을 거듭거듭 외쳐댔는지 모른다. 김일성의 미움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는 북한.그 「실락원」에서 언니 「난구」와 같이 비참한 최후를 맞지않기 위해 그는 서울에서 김일성찬양의 목소리를 높인게 아닐까. 김일성의 미움을 사 송성철과 함께 불행한 생을 마감한 「난구」는 항상 여연구의 마음을 짓눌러온 멍에였다. 46년만에 찾은 아버지 묘소 앞에서 애끊는 자식의 심정만을 표현할 자유도 없는 곳.그곳이 바로 북한 임을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소외여성의 어머니” 환갑 잊은 봉사 23년/이런 공무원

    ◎남 돕기를 천직으로 박성지씨(서울도봉구청 가정복지과)/67년 남편과 사별후 “개안”… 아동구호사업에 첫발/40세때 대학에… 전문지식 갖추고 윤락녀등 돌봐/새달에 정년퇴임… “불우시설 찾아 여생도 이웃과 함께” 진심으로 몸과 마음을 다바쳐 남을 돕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그렇듯 그녀는 『천직으로 생각하고 하는일이 떠들썩하게 알려지는게 싫다』고 기자와 만나기를 극구 사양했다.『봉급의 절반만큼도 일을 하지 못하는 데다 단지 주어진 일을 할뿐』이라며 『말할것이 없다』는 것이었다.그러나 『남을 돕는 선행이 알려져 더 많은 사람들이 남을 도울수 있게 된다면 그 또한 좋은일이 아니냐』고 그녀의 동료를 내세워 끈질기게 설득한 끝에 썩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말문을 열기 시작했다.그것도 『신문을 읽는 사람들 눈에 잘띄지 않게 손바닥보다 작게 기사를 낸다』는 조건을 걸고. 스스로가 버리고,가정이 버리고,사회가 버린 여성을 거두어 어머니나 언니,또는 친구로서 반평생을 살아온 서울 도봉구청 가정복지과장 박성지씨. 이제는 어엿한 할머니인 예순한살 나이에도 온 얼굴에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은 밝고 따뜻한 웃음이 가득 넘쳤다.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나 지난 30년 한성사범출신인 아버지와 숙명여고를 나온 어머니사이의 6남매 가운데 넷째딸로 전북 군산에서 태어나 비교적 어렵지 않게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 독실한 기독교집안에서 자란 탓인지 남을 돕는 일에는 어릴적부터 적극적 이었다. 그러나 48년 군산 사범학교를 졸업하고 3년동안 국민학교 교사를 지낸뒤 바로 결혼,딸 넷을 둔 평범한 주부로만 17년 남짓을 보냈다. 그러던 끝에 67년 가을 어느날 남편이 마흔살도 채 채우지 못하고 갑작스럽게 숨지고 부터 어쩔수 없이 밥벌이를 위해 사회에 뛰어 들어야 한 것이 새로운 인생의 시작이 됐다. 『딸 넷을 먹여 살리고 교육하기 위해 사회생활을 시작했지만 이왕이면 남을 도울수 있는 일이면 더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친지의 소개로 들어간 곳이 부산에 있는 캐나다 아동구호재단이었다. 이 재단은 우리나라 극빈가정의 아이들과 캐나다 가정을 연결해 돕도록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 68년부터 3년동안 헌신적으로 일하면서 사회사업을 몸으로 싸워 나갔다. 『돈이 있어야 가능한 자선사업과는 달리 돈없는 사람도 할수 있는게 사회사업이라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남을 돕겠다는 봉사정신과 사회자원을 연결시키고 여기에 전문적인 지식까지 보태면 얼마든지 버림받은 이웃을 도울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전문적인 지식을 얻기 위해 그녀는 강남사회복지대학을 수료하고 원주대학 사회사업학과를 다녔다. 살림은 꾸려나가기가 벅찼지만 제2의 인생을 시작한다는 생각에 힘든줄도 몰랐다. 마흔이 다 된 나이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학교를 다녀 대학을 졸업했다. ○“제2 인생 힘든줄 몰라 서울시청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지난 71년. 비록 임시직이지만 부녀청소년과의 상담원으로 일을 시작했다. 주로 윤락여성과 미혼모 걸인여성을 상대하며 이들에게 제 갈길을 찾아주었다. 성공보다는 실패가 많은 일이었다. 73년 10월 어느날이었다.서울역에서 연락이 오기를 『무작정 상경한 소녀가 있으니 데리고 가라』는 것이었다. 『아이를 데려와 사연을 들어보니 공부하고 싶어서 가출해 서울에 올라왔다는 것이었어요. 눈망울이 초롱초롱하고 성실하게 보여 아예 내가 맡아 가르치기로 하고 집으로 데려왔습니다』 그러나 가출한 아이를 데리고 있는것이 꺼림직해 집에 가서 모든것을 털어놓고 말씀드린뒤 다시 서울로 오라고 했다. 시골집에 내려간 소녀는 이틀뒤 밝은 모습으로 나타나 빈농인 부모들이 고맙다고 선물로 보낸 마늘·보리·팥 한움큼씩을 내놓았다. 당시 15살이던 소녀는 그뒤 4년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고등공민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학교를 마치자 충남 청원의 단위농협에 취직,직장생활을 하다가 결혼해 두아이의 어머니로서 행복한 삶을 꾸려나가고 있다. 소녀를 보내고 4년쯤뒤 30대중반의 여자가 12살된 소녀와 갓난아기를 데리고 상담소 문을 두드렸다. 『가출한 남편을 찾아 방방곡곡을 헤맸으나 남편을 찾기는 커녕 결핵에 걸려 더이상 아이들을 키울수가 없게 됐다』고 눈물로 하소연하는 것이었다. ○ 12세 소녀가 이젠 주부 여인은 부녀보호지도소로 갓난아기를 아동상담소로 보내고 12살된 소녀보영이는 여인의 부탁대로 집으로 데리고 왔다. 『보영이는 밝고 구김없이 딸들과 어울리며 잘 자랐지만 공부를 하려고 하지 않았어요.12살이었지만 한글조차 모를 정도였습니다』 사춘기가 되면서 보영이는 이유없이 반항하며 그녀의 가슴을 아프게 했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친딸 이상으로 보살펴주는 정성에 마침내 마음을 잡고 미용기술을 배워나갔다. 그리고 기술학원에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지난해 출가한 보영이에게 박봉을 털어 가재도구등 살림살이를 마련해주었다. 이처럼 그녀가 정성을 갖고 보살펴 어엿하고 건강한 여성으로 다시 나게 한 사람은 1백명이 넘는다. 그러나 『20년동안 만난 사람의 1%에도 못미쳐 항상 안타까운 심정』이라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하는 부녀자들이 많이 있지만 무관심 또는 도와줄 손길의 부족으로 지푸라기조차 잡지못하고 수렁에 빠지곤 한다』고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불우노인 결연 사업도 지난 88년 서울시내 각구청에가정복지과가 새로 생기면서 그녀는 시청에서 도봉구청으로 자리를 옮겼다. 부녀자와 상담만하다 직접 가정복지에 대한 행정을 펴게 된 것이다. 『도봉구에 저소득층이 밀집해 있어 그만큼 할일이 많았다』는 그녀는 지난 4년동안 「죽기 아니면 살기」로 일을 했다. 노인복지에 중점을 두고 노인정을 짓거나 지원하는데 앞장섰고 2백명 남짓의 불우노인을 일반가정과 결연시켜 주었다. 딸들도 모두 출가해 20평남짓 되는 집이 텅빈것같아 지난봄에는 의지할데 없는 노인 2명을 데려와 함께 살고 있다. 다음달 31일 정년퇴직을 앞두고 요즘은 자원봉사할 불우시설을 물색하느라 바쁘다. 『정말 나를 필요로 하고 남은 인생을 모두 바칠수 있는 곳에서 봉사하려고 합니다.벌써부터 여기저기서 도와달라고 하고 있어 「혜택받은 노인」이라는 생각마저 듭니다』 그녀는 참으로 남을 돕는 일의 기쁨을 아는 헌신적인 공무원이었다.
  • “월급 타면 무조건 70% 떼냈죠”

    ◎저축의 날 훈장·표창 받은 「모범사례」/40년간 써온 가계부가 절약생활 길잡이/74년 내집마련… 이젠 3층 건물주인으로/국민훈장 동백장 서남성씨 『눈물과 손때로 얼룩진 가계부가 저에게 끊임없는 절약의 지혜를 불어넣어준 지난 40년동안에 저축생활의 길잡이가 됐습니다』 불우한 어린시절의 궁핍을 딛고 풍요로운 삶을 가꾼 초로의 가정주부 서남성씨(54)는 절약의 비결을 가계부에서 찾았다. 경남 진주중앙시장 입구에 3층짜리 자기건물을 갖고 1층에서 찻집을 직접 경영하는 서씨는 지난 68년 14살의 어린 나이에 부친을 여의고 서점 점원으로 취직해 불구인 모친과 3남매의 가계를 책임져야 하는 소녀가장이었다. 『쥐꼬리만한 월급으로 네식구의 살림을 꾸려가자니 가난의 설움이 복받친 때도 많았습니다』 서씨는 그러나 가난이 사무칠수록 『저축만이 이 가난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아무리 적은 월급이라도 쪼개고 쪼개어 한푼 두푼 저축하면 언젠가는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어린 소년가장에게 가계부를 쓰게 했다. 서점 점원생활을 청산하고 진주도립병원 간호원으로 직장을 옮기고 부터는 월급이 조금 늘었지만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기는 역부족이었다. 『가난에 굴복당할 수는 없다는 일념으로 월급을 받으면 무조건 70%를 떼어서 저축했습니다.나머지 30%로는 생활을 감당하기가 힘들었지만 매일매일 가계부를 쓰는 즐거움으로 위안을 삼았습니다』 서씨는 남편과 함께 찻집을 경영하며 부유한 가정을 가꾼 지금까지도 월소득의 70%를 저축하는 습관을 지속해오고 있다. 이같은 노력이 결실을 맺어 결혼생활 17년만인 지난 74년 꿈에 그리던 방3칸짜리 내집을 마련할 수 있었다. 서씨는 이때부터 자신의 저축생활 경험을 주위의 다른 가정에도 전파하는데 앞장섰다.77년부터 마을 부녀회원들을 설득해 저축서클을 조직,폐품수집과 절미를 통한 저축운동을 전개했다.그 결과로 현재 마을 1천9백가구에 2천9백60구좌의 통장이 개설돼 있으며 4억9천1백여만원의 저축실적을 기록하고 있다. ◎다리 장애 버텨준 통장 30여개/대통령표창 이계섭씨/홍수로 집 잃은후 비장한 저축 실천/완구공장 설립… 종업원에 적금권장 경기도 양평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나 18세때 상경했다. 어릴때 다친 다리때문에 일자리를 번번이 거절당해 장애인에 대한 사회의 편견과 홀대가 미웠다. 그러나 조그만 금형공장에 가까스로 취업,세끼를 라면으로 때우고 밤새워가며 세공기술을 익혔다. 71년 직장생활 13년만에 번 돈으로 이문동에 내집을 마련,결혼생활을 시작했으나 73년 뜻하지 않은 홍수로 보금자리를 송두리째 날렸다. 이후 저축의 필요성을 절감,저축예금과 정기적금통장을 개설한뒤 장난감을 만들어 판돈을 꼬박꼬박 통장에 넣었다. 적금이 끝나면 정기예금으로,정기예금의 이자는 또 다시 적금으로 계속 저축,5년만에 1천만원 목돈을 쥐게됐다. 이돈을 밑천으로,천막집에서 아내와 함께 어린이 장난감을 만든지 11년만인 84년 3층짜리 주택및 조그만 공장을 지을 수 있게됐다. 17년간 한은행과 거래하면서 쌓인 30여개의 적금통장을 소중히 간직해 자녀들에게 물려줘 근검·절약정신을 계승토록하고 있다. 또 종업원 7명에게도 「티끌모아 태산」이란 평범한 진리를 깨우쳐주기 위해 매달월급의 10%를 꼬박꼬박 적금통장에 넣고 나머지를 월급으로 주고있다.
  • 강제통합 인정하나/배상 소멸시효 만료/전남매일 반환소 기각

    서울민사지법 합의15부(재판장 이상경부장판사)는 전남매일신문사주였던 심상우씨(89년사망)유가족이 국가와 전남매일신문을 흡수한 광주일보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청구소송에서 『당시 보안사령부의 강요에 의해 심씨가 통합각서에 서명한 사실은 인정되나 국가배상법과 민법에 규정된 소멸시효가 지났다』고 청구를 기각했다.
  • 탄가스 중독/3남매 절명/부모도 중태

    14일 상오 11시쯤 서울 동작구 상도2동 173의 34 강구광씨(48·회사원)집 지하 셋방에서 김혁곤씨(53·목수)일가족 5명이 연탄가스에 중독돼 아들 종호씨(20·방위병)와 종근군(14·Y중 3년)딸 미자씨(24·간호사)등 3남매가 숨지고 김씨와 부인 조정순씨(47·공원)는 중태다.
  • 90년 소득세 가장 많이 낸/안병균씨(이사람)

    ◎“우리경제 위기 아니라 노력이 부족한 탓”/18세때 맨몸 상경… 이젠 6개 기업의 사장/공사판 막노동등 25년간 안해본 일 없어/화재로 한때 역경… 「성실·근면·검소」 좌우명 삼아 재기/기업의 생명은 투자… 산학협동 대체에너지 개발 주력 몇푼 안되는 노자를 움켜쥐고 무작정 상경한 18세의 소년이 25년뒤인 오늘 국내에서 종합소득세를 가장 많이 낸 대기업가로 부상하는 인생드라마를 엮어냈다. 나산그룹 안병균회장(43).그는 얼마전 국세청이 발표한 90년도 종합소득세 고액납세자 랭킹에서 내로라하는 재벌기업인들을 제치고 수위를 차지,세인의 관심을 한몸에 받는 인사가 됐다. 그가 신고한 소득금액은 47억원이며 세금액수는 23억1천7백만원,89년도분 납세액은 9억6천1백만원으로 당시엔 11위에 랭크됐었다. ○광주서중1년 중퇴 안회장의 고향은 전남 함평군 나산면 나산리로 그룹명칭도 자신이 어렵게 살던 고향의 이름을 그대로 딴 것이다. 10남매 가운데 여섯번째인 그가 고향을 떠나 서울에 온 것은 지난 66년으로 호남지역의 한해가 극심했을 때였다.그이전 안회장은 가난한 집안살림 때문에 전남의 명문교인 광주서중1학년을 중퇴,농사일을 거들고 있었다. 『그땐 이러나 저러나 굶주리기는 마찬가지란 생각이 들었고 서울가면 혹시 먹고 살길이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습니다』 안회장은 당시 2천7백원을 갖고 서울로 향하는 시외버스에 몸을 실었다.당시 차삯은 9백원이었다고 그는 명확히 기억하고 있다. 하루밤을 서울역 건너편 근로자합숙소(현재 힐튼호텔 주차장부근)에서 지낸뒤 다시 동대문 근로자합숙소로 옮긴 그는 곧바로 청계천복개공사에서 막노동하는 것으로 서울생활을 시작했다. 노동판을 돌면서 한푼도 헛되이 쓰지않고 모은 돈으로 68년 상왕십리 배명고등학교 근처에서 구멍가게규모의 중국음식점을 차렸고 얼마후 서울중심가로 진출,국제극장 뒷골목에서 「왕자관」이라 옥호의 자장면집을 경영하면서 삶의 기반을 착실히 다져나갔다. 70년에는 명동으로 옮겨 증권빌딩에 세를 얻어 「내객」이란 중국음식점을 하다가 수지가 안맞아 「해녀」란 옥호의 일식집을 하다가 74년 이빌딩의 큰 화재로 심한 피해를 입고 몸까지 크게 다쳐 두달동안 병원신세를 지기도했다. 퇴원후엔 수중에 남은 돈과 이곳 저곳에서 빌린 자금으로 명동에 「또또와」란 맥주집을,그뒤엔 구화신백화점 뒤에서 「무랑루즈」,다음엔 북창동에서 「초원의 빛」이란 극장식 맥주집을 차려 비교적 큰돈을 모을수 있었다. 86년엔 퇴계로 퍼시픽호텔의 극장식당 「홀리데이 인 서울」을 인수 운영하다 3년뒤 연예인 이주일씨에게 넘기기도 했다. ○고생해도 좌절 안해 어린 나이에 산전수전 다 겪으며 잔뼈가 굵어진 그는 32세때인 80년 『사업다운 사업을 하기 위해서』먹고 마시는 장사외에도 의류제조업에 손을 댄다. 그는 판자집형태의 구멍가게가 즐비했던 종로5가 영세상가부지를 사들여 의류도매센터를 설립하고 각종의류를 공급하는 나산실업을 출범시켰다. 이기업체가 현재 여성의류 조이너스를 생산하는 그룹의 모체이다. ○작년 수출 3백만불 나산실업은 85년부터 자체개발 브랜드인 조이너스제품을 수출하기 시작했으며 지난해 수출액은 3백만달러에 이르고있다. 조이너스개발을 계기로 그의 사업운은 활짝 트이기 시작했고 당시만 해도 텅빈 벌판이다시피 했던 강남구 대치동의 땅을 산것이 개발붐과 함께 값이 크게 오르면서 사업영역도 확장해 나간다. 지난 88년 나산관광개발을 설립,경기도 포천 청계산에 스키·수영·골프장등을 갖춘 종합스포츠타운을 건설중이며 지난해와 올 연초엔 대치동에 지상20층의 샹젤리제오피스빌딩과 10층짜리 본사건물 나산빌딩을 세웠다. ○종업원 8백20여명 이와함께 지난해에 나산인터내셔널·나산산업·나산CLC등 3개사를 설립,모두 6개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을 형성하게 됐다.나산그룹의 총자산은 7백억원,종업원수는 8백20명에 이르고 있다. 나산인터내셔널은 건설회사로 서울종로구 혜화동과 영등포구 대방동에 아파트단지 상가등을 건설키 위해 얼마전 착공했다. 나산산업은 건물관리업을,CLC는 실내스포츠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고생도 숱하게 했고 곤경에 빠진적도 많았지만 좌절은 안했습니다.어려울때마다 새로운 아이디어를 짜내 활로를 찾는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안회장은 또 현재의 국내경제사정이 나쁘고 자신의 사업전망도 밝은 것만은 아니지만 옛날의 고생을 생각해보면 현상황이 결코 위기는 아니라고 강조했다. 『60년대만해도 밥굶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그런데 지금은 경제가 어렵다고는 하지만 그동안의 개발경험이 충분히 축적된 상태아닙니까.때문에 저는 위기아닌 노력부족의 시대로 보고 싶습니다』 안회장은 자신이 이른바 「매스컴을 타게된 것」과 관련해서 신문사 등지에서 인터뷰를 하게끔 된 사실에 자만하지않고 이를 계기로 성실 근면 검소의 평소 좌우명을 충실히 실천하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앞으로 대부분의 이익금을 새상품개발을 위한 기술혁신에 투자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주경야독… 학업 계속 그래서 서울공대공학연구소와 산학협동체제를 갖추고 국제경쟁력있는 대체에너지개발에 온힘을 기울이고 있다고 했다. 『기업이 살아남고 건실하게 영역을 넓혀갈 수 있는 길은 새로운 아이디어와 이를 열매맺게 하는 과감한 기술투자에 있다고 봅니다.비록 투자의 회임기간이 길더라도 내일에의 확신을 갖고 추진할 생각입니다』 그는 또 가난으로 못배운 한을 풀기위해,새로운 사업구상에 도움을 받기 위해 81년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을 졸업한데 이어 89년엔 6개월의 서울공대산업전략과정을 수료했다.모두가 야간코스로 주경야독의 의지를 실현시킨 것이었다.
  • “범죄교습” 폭력비디오/이도운 사회1부기자(현장)

    ◎동생 죽인 국교생 죄의식 못느껴 『아저씨,증거 있어요』 최근 서울 마포경찰서 형사계에서 조사를 받고있는 한 어린이는 이렇게 말했다. 경찰이 조사하고 있는 이 어린이는 지난달 30일 서울 마포구 대흥동에서 일어난 남매 살해방화사건의 범인 아닌 범인(?) 권모군. 올해 겨우 만 10살을 넘긴 국민학교 4학년 어린이다. 권군은 사건 당일 자신의 집에서 1살 어린 여동생과 사소한 말다툼을 벌이다 화가 나자 흉기로 찌르고 이불로 뒤집어 씌운뒤 성냥불을 그어 하나 밖에 없는 여동생을 숨지게 했다. 이 소년은 범행을 저지르고 난뒤 태연히 집을 나와 이웃 시장에서 장사를 하던 부모를 찾아 갔다가 만나지 못하자 거리에서 만난 친구 박모군(11)에게 『집에 불이 났다』면서 함께 범행현장에 돌아갔다. 사건직후 권군은 경찰에서 『동생과 비디오를 보고 있는데 우체부복장을 한 40대 남자가 들어와 동생을 죽이고 불을 질렀다』고 진술했다. 권군의 이같은 말에 따라 경찰에 권군 부모에 대해 원한을 지닌 자의 소행일 것으로 보고 여러차례 조사를 벌였으나 번번이 헛탕이었다. 경찰은 『우체부가 범행했다』 『누나가 시켰다』며 횡설수설하는 권군의 진술이 의심스러워 원점부터 다시 수사를 시작했다. 경찰이 권군을 다시 불러 수사하기를 5차례. 권군은 끝내 5일 상오 경찰에서 『말다툼끝에 동생을 죽이게 됐다』면서 『최근 친구로부터 들은 비디오영화 내용대로 범행을 꾸미면 경찰이 속을것 같아 이같이 거짓 진술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권군은 또 『비디오영화의 주인공들은 무슨 일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라고 말해 이 사건을 맡았던 담당형사들을 아연실색케 했다. 경찰조사결과 권군은 부모가 시장에서 장사를 해 낮에는 주로 동생과 비디오를 보아왔으며 권군이 최근에 본 비디오영화에는 우체부가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고 달아나는 것이 있었다. 이 사건을 맡았던 마포경찰서 진창현 형사반장은 『10살밖에 안된 어린이가 이런 끔찍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동안 여러차례 조사를 받아오면서도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며 죄를 숨겨온 것이 두렵기조차 합니다』라고 말했다.진반장의 말에는 「비디오가 유죄인가」「맞벌이가 유죄인가」라는 의문부호가 담겨있었다.
  • “노랭이” 별명의 기업가 김학우씨(이사람)

    ◎아직도 선반 돌리는 56살 “억척사장”/개미저축 38년… 공장 차려 자수성가/억대 재산 모았어도 신용카드 몰라/“힘든일 싫어하는 풍조 안타까워” 사람이 자기 분수를 지켜 근검·절약하며 살기란 말처럼 그렇게 쉽지 않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의 과정에서 신분과 계층의 구분없이 과소비행태가 만연하고 있는 요즘 세태에선 더욱 그렇다. 서울 동대문구 용두동 238의 24 풍창기계 주인 김학우씨(56).그의 삶은 요즘의 우리들에게 감동을 넘어 사뭇 경외심까지 들게한다. 인쇄기계 제작과 함께 한 인생,「자린고비」「노랭이」「기름쟁이」등등의 수식어들도 그를 전부 설명하기는 어렵다. 밑바닥 직공으로 출발,38년간 손에 기름을 묻혀가며 번 돈을 쓰지않고 꼬박꼬박 저축을 해 조그만 기계공장을 차리게 됐다. 15평정도 허름한 공장에 맏아들을 포함한 종업원 6명이 고작인 조그마한 인쇄기계업체이다. 그러나 덜먹고 덜쓰고 아껴 저축을 한다는 일생동안 몸에 밴 근검 절약으로 통장5개에 예금액만도 수억원인 알짜 사장이다.겉만 번지르르한 채속은 빚 투성이인 빈껍데기 회사와는 다르다. 전주의 가난한 농부의 5남매중 막내로 태어난 김씨의 어린시절은 불우했다. 『우리 세대는 누구나 그랬지만 먹을게 없어 풀뿌리를 캐먹고 짚신조차 제대로 신기가 어려웠으며 학교도 10리이상을 걸어다녀야 했지요』 그나마 국민학교 4학년때 집안형편이 어려워 배움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먹고 살기위해 전북병기창에 취직을 했다.말이 취직이지 국민학교도 제대로 못나온 김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청소나 심부름이 고작이었다.그러나 이곳에서 김씨는 그에게 맡겨진 소총을 청소하거나 기술자들이 박격포수리를 하는 것을 어깨너머로 보면서 평생을 같이하게된 기계와 첫 인연을 맺게됐다. 50년 6·25가 터지자 병기창에서 계속 의용경찰로 근무하며 병역을 대신한뒤 이듬해 서울로 올라왔다.전쟁통이긴 하지만 그래도 서울에서는 뭔가 좀더 나은 기술을 배울 수 있고 좋은 일자리도 구할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에서 였다.무작정 상경인 셈이었다.김씨나이 20살때였다. 그러나 아무 연고나 아는 사람이 없는 서울이라 갈곳이 있을리 없었다.며칠동안 서울역주변을 헤매다 원효로의 한 기계공장에 일자리를 구했다.새벽같이 일어나 공장청소를 하고 하루종일 기술자들의 심부름을 하고 공장문을 닫을때 쯤이면 또다시 청소나 하는 고달픈 생활이었지만 그래도 먹고 재워주고 월말이면 약간의 용돈까지 받았다. 2년여동안 푼돈이지만 한푼도 쓰지않고 꼬박 꼬박 저축을 했다.그리고 비록 어깨 넘어긴했지만 열심히 기술을 배웠다.밤에는 야간중학에도 다녔다. 워낙 성실하고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주인 눈에 들어 3년만에 어엿한 기술자대우를 받게 됐다.생활이 나아지고 일정한 월급도 받게되자 부모의 중매로 결혼을 했다.23살때였다. 가정을 갖게되자 가난을 벗어나기위한 김씨부부의 노력은 더욱 처절했다.한푼이라도 더 벌기위해 부부가 하루종일 일했고 한푼이라도 아끼기위해 어지간한 거리는 걸어서 다녔으며 술·담배는 물론 하루 두끼로 떼우기 일쑤였다.저금통장에 한푼 두푼 쌓여가는 재미로 모든 고생을 잊었다. 『그때는 하루 빨리 내집을 마련하고아이들은 고생시키지않고 잘 교육시키고 싶었으며 조그마한 내공장 한개를 갖고싶은 욕심 뿐 이었습니다』 월급은 몇푼되지않았지만 지독하게 아껴 벌이의 60%이상을 저축하니 결혼 10년만에 마장동 판잣집에서 비록 산동네이긴 했지만 신당동에 자그마한 내집을 마련할 수 있게됐다. 또 2년뒤에는 용두동에 작은 공장을 차릴수 있게됐다.그동안 아이들도 4남매나 갖게됐다. 일벌레인 김씨는 이제 살만큼된 오늘도 직접 선반을 돌리며 종업원들과 또같이 일을 한다. 수억원의 예금이 있으면서도 당좌수표거래는 아예 하지않고 그 흔한 신용카드 한장 갖지않고 있다. 21년동안 인쇄기계만을 제작하며 외길을 걸어온 김씨의 몸에는 장인정신과 절약정신이 철저히 배어있다.스티커를 제작하는 6백여대의 국내인쇄기계가 모두 김씨의 손을 거친 것이다. 『돈만 벌려면 지금이라도 외제기계를 수입해 팔거나 중고기계를 들여와 파는것이 훨씬 쉽습니다.그러나 평생을 바쳐 익힌 기술로 우리기계를 만들어 파는데에 돈보다 더한 보람을 느낍니다』 그래서 지금은 높은 임금과 원가상승으로 수지가 맞지않지만 공장문을 닫지않고 주문이 들어오면 밑지면서도 기계를 만들어주고 있다. 『요즘은 일할 젊은 사람이 없다는 것이 가장 안타깝습니다.우리공장만해도 한때 스무살 안팎의 젊은이들이 18명에 달했으나 요즘은 한명도 없고 30대이상만 몇명있지요』 김씨는 요즘 젊은이들의 힘들고 더럽고 위험한 일을 기피하는 풍조가 결코 월급이 적어서만은 아닌것 같다고 나름대로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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