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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도권 화제의 여성경찰 서장 2人

    ◆김강자 종암경찰서장 “미아리 텍사스촌을 뿌리뽑는 것이 제 임무입니다” 지난 3일 단행된 경찰인사에서 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 발탁된 김강자(金康子·55)총경이 취임 일성으로 내뱉은 포부다. 김서장은 종암서장으로 자리를 옮기기에 앞서 충북 옥천경찰서장으로 재직할 때에는 옥천 일대 ‘티켓다방’을 깨끗이 정리했다.김서장은 1998년 7월옥천서장에 부임하자마자 ‘티켓 다방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다방종업원들의 윤락행위를 뿌리뽑았다.옥천경찰서는 김서장의 이같은 노력에 힘입어 지난해 충북경찰청 관내 민생치안 실적 1위의 영광을 차지했다. 이무영(李茂永)경찰청장은 지난해말 옥천경찰서를 방문했을 때 직원들의 근무기강과 모범적인 치안활동에 감명을 받고 김서장을 발탁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서장은 총경으로 승진한 뒤 1년 6개월만에 종암경찰서장이 됐다.총경이 된지 4년이 지나야 서울시내 경찰서장으로 ‘입성’하는 경찰 인사관례를깬 첫 주인공이 됐다. 김서장에게는 항상 ‘처음’이라는 꼬리표가 붙어다녔다.1970년 12월 여경공채로 경찰에 입문해 김포공항 검색요원으로 첫 발령을 받았던 김서장은 서울경찰청 첫 민원실장,일선경찰서 첫 여성 방범과장,첫 여성 경찰서장 등의기록을 보유하고 있다. 김서장은 5일 취임식을 갖자마자 바로 미아리 텍사스촌 실태 파악에 나설예정이다.태권도 3단으로 추진력이 강해 ‘철의 여인’으로 불리기도 한다. 공무원인 남편과 딸 2명이 있다. [이랑기자 rangrang@]◆김인옥 양평경찰서장 “2,000만 수도권 시민의 상수원인 한강을 지키는 ‘환경 파수꾼’이 되겠습니다” 경남 의령경찰서장에서 한강 상류를 관할하는 경기 양평경찰서장으로 발령받은 김인옥(金仁玉·48)총경은 “양평경찰서장을 맡긴 것은 여성 특유의 섬세함과 꼼꼼함으로 한강을 지키라는 뜻인 것 같다”면서 “새천년 수도권 시민들의 건강을 지켜야 한다는 책임감에 어깨가 무겁다”고 말했다.김서장은서울 종암경찰서장으로 부임하는 김강자(金康子)총경에 이어 지난해 2월 여성으로서는 두번째로 ‘경찰의 꽃’인 총경을 달았다. 1972년 스무살의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김서장은 지리산 공비토벌대장을 지낸 아버지 김호연씨(1989년 작고)의 5남매 중 장녀.김서장은 ‘순경 공채 여성 1호’를 기록하며 선친의 대를 이었다.형사 정보 수사 등의 주요분야를두루 거쳤다.1981년 경위 승진과 함께 경찰청 방범지도계로 자리를 옮겼다. 지난해 2월 의령경찰서장으로 자리를 옮기기까지 18년동안 방범계의 터줏대감임을 자처하며 청소년 범죄 예방에 남다른 열정을 쏟아왔다. 김서장은 의령경찰서장으로 부임할 당시 여성이 일선 경찰서를 지휘할 수있을까 하는 우려도 있었지만 여성의 부드러움과 섬세함으로 주민과 친숙한경찰서를 만드는데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김서장은 “이제 일선경찰서를 운영하는데 익숙해졌다”면서 “양평에서는 ‘환경 서장’으로 거듭나겠다”고 다짐했다. 조현석기자 hyun68@
  • [시·구의원 초대석] 중구의회 尹判烈의원

    중구의회 윤판열(尹判烈·43·신당1동) 의원은 30여년간 행상·노점상을 해온 특이한 경력의 소유자다.12남매의 셋째로 30여년 전 서울생활을 시작하면서 갖은 고생을 다했다는 설명이다.그런 만큼 형편이 어려운 주민들에 대한애정이 각별하다. “중구는 서울의 중심구라고 하지만 달동네가 아직도 존재하는 등 빈부격차가 심합니다.이 때문에 집행부가 저소득층을 위한 정책에 소홀하지 않도록애를 쓰고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역유지들을 설득,소년소녀가장이나 장애인을 돕도록 하는 한편 상가가 문을 열 때면 개점식을 이용해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에게 장학금을전달하는 뜻깊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한다. 의회 안에서는 ‘무결점 소신파’로 통한다.초선이면서도 행정복지위원장을 맡아 지역발전에 보탬이 되는 사안이라면 불도저식으로 밀어붙이되 한치의허점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윤의원은 특히 관행처럼 굳어진 1대1 행정사무감사 시스템을 바꾸는 추진력을 발휘하기도 했다.지난해부터 국회 국정감사처럼 여러 의원들이 참여해 감사를 실시함으로써 내실을 기했다는 평이다. 최근들어서는 지역경제 발전에 관심이 많다.‘먹는 것도 문화’라는 인식을 바탕으로 신당동 떡볶이 골목을 활성화하고 동대문시장을 쇼핑전문특구로지정해 보다 많은 쇼핑객을 유치하는 등 머리를 짜내고 있다. 윤의원은 “남이 한발 뛸때 두발 뛴다는 자세로 의정활동을 하고 있다’면서 “특히 생활이 어려운 서민들에게 의지가 될 수 있는 구의원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김재순기자 fidelis@
  • 대법 ‘황혼이혼’ 첫 불허

    “남편이 가부장적 권위를 앞세워 부인을 핍박하고 이유없이 부인의 불륜을 의심한 것은 인정되지만 혼인 당시의 가치기준과 남녀관계를 종합해볼 때이를 이혼사유로 인정할 수 없다” 70대 할머니가 80세가 넘은 남편을 상대로 낸 황혼이혼 소송에 대해 대법원이 “이혼을 불허한다”는 첫 확정판결을 내렸다.최근 급격히 늘고 있는 황혼이혼으로 인한 가족 해체 현상에 법원이 제동을 건 것으로 해석된다. 중학교 교사 출신인 A할머니(76)는 지난 46년 남편 B씨(84)를 중매로 만나결혼,4남매를 뒀다.그러나 남편은 결혼초부터 경제권을 쥐고 할머니에게는생계를 겨우 유지할 정도의 생활비만 줬고,할머니는 하숙을 하거나 손수레보관소 등을 운영해 어렵게 살림을 꾸려나갔다.남편은 또 할머니의 교사생활도 그만두게 했고 나이가 들면서는 의처증과 치매증세까지 보여 할머니를 괴롭게 했다. 참다못한 할머니는 지난 97년 5,300만원을 들고 큰딸 집으로 가출했다가 남편으로부터 절도혐의로 고소까지 당했다.결국 할머니는 남편이 ‘망상장애’라는 병원소견서를첨부,이혼소송을 냈고 지난해 6월 법원으로부터 “남편은할머니에게 위자료 등으로 7억원을 지급하라”는 판결을 받아냈다. 그러나 남편은 이에 불복,항소했고 2심 재판부는 “남편이 부당대우를 한사실은 인정되지만 혼인당시의 가치기준 등을 감안할 때 이혼사유로 볼 수는 없다”면서 “오히려 할머니는 정신장애 증상을 보이는 남편을 돌볼 의무가 있다”고 판시했다.할머니는 이에 불복,상고했지만 대법원은 8일 “이유없다”며 기각했다. 그러나 여성단체들은 이번 판결에 대해 ‘법원이 가부장적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여성의 행복추구권을 박탈했다’며 반발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상록기자myzodan@
  • ‘육남매’100회 끝으로 17일 마지막 인사

    뼛속까지 칼바람이 몰려온 지난 2일 저녁 경기도 벽제의 ‘육남매’세트장.1960년대 재건운동이 한창이던 시대를 살려낸 좁은 골목길에서 어머니(장미희)를 빙 둘러선 육남매가 탈상한 아버지 옷을 태우는 모습을 지켜본다.지난해2월4일 수목드라마로 출발한 ‘육남매’(이관희 연출)의 마지막 장면이다. ‘육남매’는 17일 저녁 7시30분 방영되는 100회를 끝으로 아쉬운 막을 내린다. 당초 16부작으로 기획된 이 드라마는 장미희씨의 ‘똑 사세요’대사와 아역들의 헌신적인 연기에 힘입어 20부로 늘어났다.그리곤 사라질 운명이었다.때마침 불어닥친 IMF한파로 외주제작을 줄여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당시 이득렬사장은 작가 최성실씨를 직접 불러 “모두가 어려운 이때 희망의 불씨를 틔우는 좋은 드라마 한편은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며 이 극을 회생시켰다.그리고 2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같은 방송사의 ‘전원일기’와 KBS ‘대추나무 사랑 걸렸네’를 제외하고는찾아보기 힘든 장수 드라마.난공불락으로 여겨지던 KBS ‘TV는 사랑을 싣고’를 지난해 4월 시청률에서 눌렀다.이날 제작진은 아버지의 숨결이 서린 낡은 집을 팔아 빚을 청산하고 방 두개 딸린 전세집으로 이사가는 희망의 장면을 담고 있었다. 육남매 가족의 캐릭터는 이PD 자신의 추억과 이 전사장의 책 ‘잃어버린 서울,그리운 내고향’을 참고로 태어났다. 태어난 지 한달이 겨우 넘어 드라마에 출연한 막내 남희 역의 김웅희가 두번의 겨울을 무사히 넘긴 것도 출연진과 제작진의 기쁨이다.사실 웅희는 남자아이.그런데도 머리를 묶은 귀여운 얼굴이 여자아이 뺨친다. 또한 콧물을 간식(?)으로 챙겨먹는 두희(이찬호)는 집에 돌아오면 ‘뭐 먹을 것 없냐’며 솥뚜껑을 열어보던 이PD의 어린 시절 모습을 살려내 시청자의사랑을 받았다. 연기가 무언지도 모르고 NG를 연발하던 말순(송은혜)은 같은 일을 자꾸 하라고 시키자 “아빠하고 PD 중에 누가 더 힘이 세냐”고 아빠에게 물을 정도였다. 한때 이 집의 하숙생으로 출연한 김정현의 6·3세대 대학생 캐릭터를 살려내고자 국민회의 김근태의원 등에게 자문을 구한 일화도 있다. 2년동안 호흡을 맞춰온 덕인지 이날 제작진과 출연진은 큰소리 한번 내지 않고 군더더기 없는 촬영일정을 마무리했다.‘육남매’가 가진 화목한 가정에의 꿈은 이미 이루어지고 있었다. 임병선기자 bsnim@
  • ‘신문만평만화의 바람직한 방향’ 세미나

    “편집국의 간섭 뿐만이 아니라 자기검열로부터도 벗어나야 합니다” “사실을 왜곡하거나 지역감정을 일으키는 만평작가들을 퇴출합시다” 전국 일간지 시사만평만화가들이 지난 19∼20일 대전 유성 홍인호텔에서 모처럼 한자리에 모였다.언론개혁시민연대가 마련한 ‘신문만평만화의 바람직한 방향’이라는 토론회에서 이들은 스스로를 비판하는 등 격의없이 의견을나눴다. 발제에 나선 손상익 한국만화문화연구원장은 “대부분의 만평작가들이 외부 환경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면서 “과중한 업무로부터 벗어나 여유있는 창작활동을 펼쳐야 한다”고 말했다.김종배 ‘미디어오늘’ 편집부장은 “우리 시사만평만화는 단순화를 뛰어넘은 평이함과 무리한 연결,정치집착적과장,빈곤한 표정묘사 등이 문제”라고 지적하면서 “시사만화에 대한 언론계의 깊이있는 대처방안이 검토되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벌어진 토론에서 강원대 전규찬(신방과) 교수는 “시사만평만화가 단시 풍자물로만 전락하는 경향이 있다”면서 “작가로서 균형성을 잃지 않고대안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독자들로부터 외면당할 것”이라고 말했다.세종대 한창완(영상만화학과) 교수는 “대중문화의 다양성을 고려해 신세대적 실험정신을 갖춘 시사만평작가들이 나와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각 지방을 대표해 참석한 시사만평만화가들도 목소리를 높였다.전남매일신문 정광숙 화백은 “호남지역의 화백으로서 정부를 비판하는 것이 쉽지 않다”면서 “특히 지방의 만평작가들은 자기 소신을 굽히지 않도록 개인역량을키워나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매일신문(대구소재) 김경수 화백은 “지역정서를 항상 느껴야 하는 상황에서 중심잡기가 어려울 때가 있다”면서 “만평작가들에 대한 모니터팀과 독자들의 끊임없는 지적이 있어야 한다”라고말했다. 전남일보 오금택 화백은 “언론이 보수적이고 자사이기주의로 흘러가는 상황에서 만평만 바뀐다는 것은 무리”라면서 “언론개혁이 선행되어야 만평의 발전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대한매일 백무현 화백은 “왜곡된 만평과 만평작가에 대해 노동조합,언론단체 등에서 강하게 항의하고 비판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여성민우회 미디어운동본부 권미혁 간사는 “대부분의 시사만평만화에서 여성은 부정적이고 주변적인 인물로 묘사된다”면서 “여성들의 정치참여 등활동적이고 긍정적인 모습들이 실려야 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44)노동시인 박노해

    ‘노동해방문학’지를 통해 꾸준히 시사시와 시평을 발표했던 박노해 시인은 그 복간호(이 잡지는 1989년 12월호까지 나온 뒤 휴간,1990년 6월 복간호를 내면서 종막을 고했다)에서 시인의 얼굴이 아닌 혁명가의 모습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기획좌담,박노해 선배와 9박10일간의 비밀 좌담-남한 선진 노동자와의 대화’란 제목이 붙은 이 글의 ‘전문은 200∼300매의 단행본 2권 분량에 가까운 방대한 원고였으나 본지의 지면 관계상 토론의 전반부 중에서 일부만을요약,발췌’한 형식을 취하고 있다.박노해 시인이 사회를 맡은 이 좌담 참석자는 실록 ‘마침내 전선에 서다’의 필자 김미영을 비롯한 정준하(마창지역 해고 노동자),이장태(현대중공업 노조 대의원),최성호(마창지역 해고 노동자) 등이며,몇몇 옵저버들이 함께했다.이 좌담은 1989년 결성된 남한 사회주의 노동자 동맹(세칭 사노맹 사건)의 단초를 엿볼 수 있는 혁명에의 투지를담아낸 실로 장쾌한 대서사시에 가까운 담론으로 평가받을 만하다. 참석자들은 서로가 자기소개를 하는데,박시인은 “1978년부터 본격적인 노동운동을 시작하여 그 후로 직업적 노동운동을 계속해 오고 있습니다.1985년도에 해고되고 공식 수배되어 졸지에 우리나라 최장기 수배자로서 전위정당결성 투쟁에 주력하고 있습니다”라고 밝혔다.논의는 선진 노동자는 누구인가란 문제부터 그 조직적 발전 전망,노조 활동,전국 노동운동의 분석,사회주의의 위기와 동요,수정,배신에 대한 가차없는 투쟁,노동자 계급 주도의 민중통일전선 등 노동자 주체적 전위 혁명조직의 전모를 담아내고 있다. “첫 시집 ‘노동의 새벽’을 내면서 나는 돌아올 수 없는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이 시집을 발표하면 내 앞에는 수배와 구속,어쩌면 의문사나 사형이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걸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다.…그리고 나는 ‘얼굴 없는 시인’으로 쫓기기 시작했다.…그런 처지에서 무책임하게 아이를 낳아 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하지만 죽음을 예감할수록 나 닮은 아이를 남겨두고 싶은 인간의 본능은 더욱더 강렬히 솟구쳤다.아내도 아이를 원하기는 했지만 봉재 공장 미싱사로잔업 철야에 시달리면서 하루하루 긴장된 현장활동을 해나가자니 도저히 임신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마침내 나는 동원 예비군 훈련장에서 정관수술을 하고 말았다.그건 나를 온전히 세상에 바치겠다는 결단이기도 했다.1980년대를 현장에서 열정으로 살아낸 친구들 중에 그렇게 정관 수술을 한 사람이 많았다”고 그는 고백한다.(‘나 닮은 아이 하나기르지 못하고’)사노맹 사건이 터지면서 박 시인은 ‘얼굴 없는 시인’에서 ‘지명 수배 당하는 혁명가’로 그 실체를 드러냈고,1991년 피체되었다.누구나 당하는 고문 말고 이 교육부의 ‘가방 끈’이 짧은 혁명가는 “지하 밀실의 고문장에서좌우의 이념보다 더 무서운 또 하나의 숨은 흑백 논리 앞에 직면”하게 된다.“‘노동의 새벽’은 누가 써준 거냐?대학도 못 나온 사람이 어떻게 그런시를 쓰고 어려운 이론 글들을 쓸 수 있느냐?”는 추궁 앞에서 시인은 다시노동자 해방의 정당성을 깨닫지 않을 수 있었을까. 여순 사건에 연루되었던 아버지가 소리꾼으로 떠돌다 암으로 타계한 건 시인이 여섯 살 때였다.‘빨갱이 자식’의 업보로 신부와 수녀와 노동자 시인이된 이들 남매를 키웠던 어머니는 “내가 죽어서 네가 산다면 열 번이라도 죽으련만…”이라며 “기도밖에 더 할 게 없구나”고 탄식했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꿈이 있어 정말 신나요”

    ◆난 내가 하고싶은 일을 할거야 아이들은 어떤 꿈을 갖고 있을까.꿈을 이뤄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최근 나온 ‘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할거야’(몽당연필 글,원혜진 그림)는아이들의 꿈을 묻고,꿈을 이루기 위해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를 알려준다. 이 책은 다소 ‘특별한’ 아이 16명의 얘기를 담고 있다.그들은 세계적인기타리스트부터 소설가,액세서리 디자이너,바둑기사,물리학자와 곤충학자,장구잡이 등까지 다양한 꿈을 꾼다.이들은 다른 아이들이 ‘뭘할까’‘꿈은 많지만…’하고 망설일 때 이미 ‘뚜렷한’ 방향을 잡고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박재민군(서울 소의초 5년)은 6살 때부터 전자기타를 치기 시작했다.5년만에 제법 실력이 붙었다.요즘에는 토요일마다 서울 대학로에서 연주한다.그렇다고 집안이 특출난 것도 아니다.오히려 열악한 상황이다.아빠가 시각장애인이고,집안도 가난한 편이다.그러나 재민이는 행복하다.꿈이 있기 때문이다. 컴퓨터 화가 김안식군(서울 금호초 3년)은 컴퓨터 그림그리기 대회 등 수상경력이 많다.그러나 무엇이든 잘 하지는 못한다.코에서 입술까지 벌어진 구순열이어서 음식을 먹거나 말할 때 어려움을 겪는다.더욱이 선천성 심장병으로 무려 13차례에 걸쳐 대수술을 받았다.그러나 자신의 꿈을 펼치면서 건강을 찾고 있다. 이동준군(서울 금산초 4년)은 ‘소매치기방지 안전가방’을 발명한 꼬마발명가이고,고병학군(인천 청학초 5년)은 인터넷 홈페이지 ‘썰렁한 물리학 교실’(http:///sun.interpia.net/∼quark2)을 운영하는 인터넷사업가이다. 민문찬군(서울 아주초 4년)은 방안에서 가재와 누에,나비를 키우는 곤충박사.‘물장군을 기르고,기르는 곤충들이 안 죽었으면’하는 소박한 소원을 갖고 있다. 장구잡이 송승희양(서울 신상도초 6년)은 어린이 사물놀이패 ‘어깨동무’를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이끌어가겠다고 야무지게 말한다.서우연양(서울 서초교 4년)은 알파벳 핸드폰 줄을 비롯해 우산반지,나비 핀,불가사리 핀,구슬 목걸이 등 갖가지 액세서리를 만드는 디자인 전문가이고,황유진양(고양 오마초 6년)은 판타지 소설을 쓴 작가이다.이밖에 아마5단 바둑기사 홍성지군(성남 장안초 6년),미래의 파바로티 이용범군(서울 대길초 6년),태권소녀 지의정양(서울 미동초 4년),야구선수 장두영군(서울 화곡초 4년),MBC 드라마‘육남매’에서 두희 역을 맡은 이찬호군,꼬마시인 신은영양(속초 영랑초 6년),‘고양어린이신문’편집장과 사회부장을 맡고있는 박석준군(고양 장성초 6년)과 이민주양(고양 신일초 6년)의 이야기도 볼 수 있다. 언뜻 보면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이라고 여길 수 있다.그러나 이들은 사실주변에서 흔히 만나는 그런 아이들이다.다만 ‘꿈이 확실하고 포기하지 않는다’는 점만이 다를 뿐이다.이들의 다양한 모습을 보는 것은 아이는 물론 어른들에게도 재미를 안겨줄 것으로 보인다.문공사 6,000원. 허남주기자 yukyung@
  • “아이들 영어공부 엄마하기 나름이죠”

    영어를 공부하는 사람중 ‘10년을 넘게 배워도…’라고 푸념하는 이들이 많다.그래서 요즘 부모들은 조기교육 목록에 영어를 올려둔다. ‘영어’하면 기죽은 엄마를 위한 자신만만한 유아영어란 책을 쓴 서현주씨는 젖을 물린 채 영어와 우리 말을 동시에 사용하면서 두 언어를 한꺼번에 가르친 인물.영어공부는 어릴 때부터 시키는 것이 최고라고 거침없이 주장하는 유별난 엄마이다. 다섯살과 세살 남매를 영어로 키우고있는 서씨의 소문은 이미 PC통신에서널리 퍼져있다.서씨는 만 1세부터 3세까지는 아무런 거부감없이 두 개의 언어를 습득할 수 있는 시기라고 굳게 믿는다. 책에서 서씨는 ‘가르친다’는 말을 쓰지 않는다.재미있는 영어노래 테이프를 활용하고,영어비디오를 보여주면서 함께 ‘영어놀이’를 하라고 권한다. 영어로 끊임없이 아이들에게 말을 거는 것이다.물론 그 단어들은 당연히 중학교 수준의 쉬운 영어다. “엄마들은 자신의 잘못된 발음을 들려주는 것이아이들에게 역효과를 준다고 생각합니다.그러나 엄마는 ‘바담 풍’해도 아이들은‘바람 풍’해요.다른 교재가 있으니까요.처음에는 잘못된 발음으로배워도 아이들은 곧 고칩니다” 돈을 많이 들이지 않는 방법으로 인터넷 어린이 영어공부사이트를 소개한것도 특징.한울림 CD포함 9,000원.인터넷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ippler.pe.kr. 허남주기자
  • [21세기 내고장 역점사업] (42) 공주시

    충남 공주시가 ‘박물관 관광벨트화’를 추진하고 있다.현재 운영중인 박물관만 4개이고,건립계획이 세워진 것도 3개나 되는 등 유난히 많고 다양한 박물관을 관광자원화하겠다는 의욕이 넘치고 있다.특이하고 체험과 배움이 가능한 박물관도 있어 관광자원 가치가 무한하다는 게 공주시의 판단이다. ■박물관들 충남도 산림박물관은 충남도산림환경연구소 안에 지상 2층 지하1층 규모로 97년 1월 개관됐다.전시실은 5단계로 꾸며져 있다.충남 태안군안면도 소나무 숲이 재현돼 있고 백두산의 4계를 담은 사진물과 두견이와 동박새 박제 등이 전시돼 있다.산림의 역사,혜택,파괴,이용 등도 보기 쉽게 소개한다. 중동에 있는 국립공주박물관은 웅진동으로 옮겨져 오는 2002년 새롭게 문을 연다.지상 2층 지하 1층으로 건립될 박물관은 지금보다 전시실이 훨씬 넓어져 3,500점까지 전시가 가능하다.현재 전시중인 1,000점을 포함,금제관식과귀걸이 등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공주도읍 당시의 국보급 백제유물을 모두 선보일 예정이다. ‘화석(化石)화’되지 않은,살아 꿈틀대는 박물관들도 있다.인간문화재 5호인 판소리 명창 박동진(朴東鎭)옹과 민속학의 대가 심우성(沈雨晟)씨는 전공을 살려 자신의 고향에 전수관과 박물관을 지었다.지난해 11월 무릉동과 96년 10월 의당면 청룡리에서 각각 개관한 박동진판소리전수관과 공주민속극박물관에서는 국내·외 탈과 인형,악기 등을 구경할 수 있다.종이공예나 판소리도 배울 수 있어 찾는 이들이 많다. 또 오는 2002년에는 ‘석장리 구석기유적박물관’이 손님을 맞는다.장기면장암리 자연부락인 석장리에 들어서는 박물관 620평에는 세계적으로 드물게구석기 전·중·후기의 유적이 모두 출토된 석장리유물 3,000점이 전시된다. ■주변 관광지 계룡산은 동학사,갑사,신원사와 사랑의 전설이 깃든 남매탑을 감싸고 있다.사곡면 운암리 태화산의 마곡사도 유명하다.금학동에는 동학혁명군이 관군 및 일본군과 최후의 일전을 벌인 ‘우금치전적지’가 있고,금성동에 조선시대 충청지방 천주교인들을 잡아 목을 쳤던 황새바위 천주교도 순교지도 자리해 저항의 역사를 보고 배울 수 있다.반포면 상신리 계룡산 도예촌에서 조선초기 철화분청사기의 재현에 몰입한 도공 17명과 함께 도자기를만들어 보는 예술체험도 짜릿하다.공주를 가로지르며 흐르는 금강변 고수부지에서는 ‘박찬호야구장’이 어린이들에게 꿈을 키워준다. ■박물관의 관광자원화 공주시는 테마별로 박물관관광 코스를 짜고 있다.전통문화를 직접 접하고 배우는 체험관광과 백제역사 중심의 답사관광 등 2개코스다.체험관광은 민속극박물관과 박동진판소리전수관에서 민속극과 판소리를 구경하고 배우는 코스다.매년 같은 기간 두곳에서 관련 행사를 정례화,관광상품성을 높이는 방안이 추진된다.판소리전수관에서 가까운 계룡산도예촌도 체험관광지로서 가치가 커 함께 묶는 방법이 거론되고 있다.답사관광 코스는 국립공주박물관∼석장리 구석기유적박물관∼충남도 산림박물관∼계룡산 민속박물관으로 이어진다.국립공주박물관이 무령왕릉과 공산성이 있는 웅진동으로 옮겨지면서 백제역사의 현장까지 한꺼번에 돌아볼 수 있어 관광상품성을 높여준다. 공주 이천열기자 sky@ *공주시 민속극박물관 박물관이라고 해서 판에 박은 듯한 전시만 하는 것은 아니다.특이한 행사를여는 곳도 있다. 국내에서 유일한 공주민속극박물관은 매년 ‘아시아 1인극제’를 연다.올해로 네번째다.지난달 3일부터 5일까지 열린 제4회 아시아 1인극제에는 5개국에서 12개 작품을 출품,공연했다.일본 다케우노치는 ‘자연’이란 이름으로전통 민속무용극을 공연했고,베트남의 덴혹은 고유의 민속인형극을 선보여박수를 받았다.전위예술가로 유명한 무세중씨는 ‘통일아리랑’이란 작품으로 호응을 얻었다.전통민속극뿐 아니라 현대적이고 매우 전위적인 연극까지보여준다.민속극박물관 개관과 함께 시작된 1인극제는 국·내외 민속극의 진수를 선보여 행사를 구경하러 오는 인파가 수만명에 이른다. 민속극박물관은 지난 97년 박수무당이 지전(紙錢)을 들고 경을 읽는 ‘설위설경전’을,지난해에는 정월 대보름날 경기·충청지방의 지신밟기 때 쓰던‘열두띠탈 놀이’도 선보였다.계룡산산신제 때는 진도 씻김굿과 서울 새남굿 등 온갖 굿거리를 모아 펼치는 등다양한 민속행사를 열고 있다.민속극박물관은 내년 봄 ‘목수연장전’을 열어 대패,줄,망치 등 전통적인 우리네 도구를 보여줄 계획이다.학생과 일반인 30여명을 모아 판소리를 가르치는 박동진판소리전수관과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한지공예와 탈그리기 등을 배울 수도있다. * 全炳庸시장 인터뷰 “관광객들이 직접 참여하고 즐길 수 있는 박물관 단지로 만들겠습니다” 전병용(全炳庸) 공주시장은 호텔과 콘도 등 각종 편의시설을 민자로 유치해머무는 관광지로 가꾸겠다고 밝혔다. ■공주에 박물관이 많이 들어서는 이유는. 백제의 도읍지여서 문화유적지가많다.그런 분위기와 어울리기 때문에 몰리는 게 아닌가 싶다.박동진명창이나 심우성선생은 고풍스러운 고향을 놔두고 굳이 다른 곳을 택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특히 공주는 교육도시다.인구 14만명 가운데 학생이 4만여명으로30%에 가까워 소위 ‘박물관 고객’을 확보하는 데도 이만한 곳이 없다.주변에 계룡산과 금강이 도심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수려한 자연경관에 대전 등대도시가 인접해 있는 이점도박물관 건립을 부추긴다. ■박물관들이 지역문화에 미치는 영향은. 문화관광도시로서 기능을 다져주는 역할을 우선 꼽을 수 있다.백제문화를 축으로 한 지역색깔에 다양성이 배가되고 있다.판소리,민속극,산림박물관 등의 다양성이 공주를 색깔있는 도시로 만든다.학생에게는 산교육장이다.백제역사는 물론 살아있는 우리 전통문화와 자연을 체험하고 배우는 도장이다. ■박물관들을 관광자원화하기 위한 비책은. 체험관광단지화하는 것이다.아무리 다양하고 독특한 박물관이라도 관광객이 흥미를 갖지 못하면 쓸모없는 건축물에 지나지 않는다.민속극박물관과 박동진판소리전수관,계룡산도예촌에관심이 커진 이유도 여기에 있다.체험이 가능하기 때문이다.이들 박물관을하나의 체험관광 코스로 묶어 개발할 계획이다.박물관의 독특한 행사를 일정기간을 정해 한꺼번에 열면 좋은 관광상품이 될 것이다. ■아쉬운 점이 있다면. 관광객들이 가족 단위로 며칠간 편히 쉴수 있는 콘도와 호텔 등 고급 숙박시설이 부족하다.민자를 끌어들여 이들 시설을 건립하기 위해 뛰어다녔지만 경제난으로 쉽지 않았다.이제 경제가 살아나고 있어유치전망이 밝다.관광객들도 늘어나고 있는 만큼 이들 시설을 꼭 유치하겠다. 공주 이천열기자
  • 셰익스피어 ‘튀는 뮤지컬’로 만난다

    세기말의 영향일까.올 한해 연극계에는이상과열로 비춰질 정도로 셰익스피어 바람이 거셌다.‘셰익스피어 재해석’혹은 ‘비틀기’를 내세운 이 작품들가운데는 참신한 시각과 실험성이 제대로 빛을 발한 무대도 여럿 있었으나치기어린 모험심으로 어설프게 막을 내린 작품도 없지 않았다. 올해의 이같은 셰익스피어 열풍을 마무리할 대작 뮤지컬 2편이 11월 나란히무대에 올라 눈길을 끈다.11일 호암아트홀에서 시작하는 서울뮤지컬컴퍼니의 ‘록 햄릿’(조광화 각색·전훈 연출)과 20일 예술의 전당 오페라극장에서막올리는 서울예술단의 ‘태풍’(이윤택 각색·연출).두 작품 모두 원작을재구성한 스토리상의 파격과 독창적이고 특징있는 음악 색깔로 기대를 모은다. ■록햄릿 서울뮤지컬컴퍼니가 2년여의 작업끝에 선보이는 ‘록 햄릿’은 30대 극작가와 연출가의 젊음과 패기가 고스란히 묻어나는 작품이다.원작의 스토리를 따라가는 대신 에피소드 중심으로 극을 구성하고,거기에 젊음의 반항과 광기로 대변되는 록사운드를 입혀 ‘메탈 뮤지컬 오페라’를 표방했다.또 원작과 달리 친남매인 레어티즈와 오필리어의 관계에 근친상간을 암시하는이미지를 덧씌워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켰다.감각적인 색감과 입체적인 장치들로 뮤직비디오같은 분위기의 무대를 꾸민다는 계획이다. 제작진은 “방황하는 젊은이의 모델인 햄릿과 본성에 충실한 사회적 인물 레어티즈를 현대적으로 재조명함으로써 21세기 바람직한 청년상을 보여주고 싶다”고 기획의도를 밝혔다. 가수 신성우 리아가 햄릿과 오필리어역을 맡았으며,두차례 오디션을 통해 김원준 정영주 유원서 송용진등이 캐스팅됐다.12월12일까지.(02)562-2600. ■태풍 ‘햄릿’‘리어왕’등 일련의 셰익스피어 연작으로 국내는 물론 일본에서까지 돌풍을 일으킨 연출가 이윤택이 지난해 뮤지컬 ‘바리’로 새로운가능성을 보여준 서울예술단과 손잡고 만드는 야심작.셰익스피어의 마지막작품인 ‘태풍’은 간신들의 모함으로 섬에 유배된 충신 프로스페로가 마법의 힘으로 알론조왕의 아들과 자신의 딸을 결혼시킴으로써 구세대의 정치적음모로부터 화해와 희망을 싹틔운다는 줄거리이다.이윤택은 “셰익스피어의세계관이 종합적으로 녹아 있는 이 작품을 통해 20세기의 혼돈과 불안을 청산하고 새 세기의 비전을 제시하겠다”고 의욕을 불태웠다. 우리식 총체극에 천착해온 연출가는 이 작품에서도 귀천무·선무 등 전통 안무를 가미하고,범패·정가·태평가 등을 체코 작곡가의 음악과 조화시켜 ‘한국적 대형음악극’을 모색하고 있다. ‘이 시대의 해설자’인 프로스페로 역에 원로배우 신구를 영입하고,남경주이정화 유희성 송용태 등 뮤지컬 전문배우,박일규(안무)신선희(무대미술)최형오(조명)등의 탄탄한 스탭으로 최고의 앙상블을 기대하고 있다.28일까지.(02)523-0986. 이순녀기자 coral@
  • 현대무용가 남정호 …춤추는 삼남매 댄스드라마 공연

    현대무용가 남정호(여·44·한국예술종합학교 무용원교수),마임이스트 남긍호(남·35),프랑스에서 활동하는 무용가 영호(여·33).이 삼남매가 춤과 노래·영상·마임,그리고 연극적 상상력이 어우러진 댄스 드라마 ‘나는 꿈 속에서 춤을 추었네’로 29일부터 팬들을 만난다. ‘나는…’은 지난 97년 남정호 안무로 초연된 작품으로 셰익스피어의 ‘한여름밤의 꿈’을 모티브로 해 현대를 살아가는 도시인의 꿈을 다루었다.모든 관습과 도덕,사회적인 억압 때문에 권태롭고 무기력한 일상을 반복해야만하는 도시인들이 하룻밤새 자유로운 사랑과 혼란의 축제를 겪으면서 현실과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는다는 줄거리. 남정호교수 특유의 유희 개념 아래 자유분방함과 유쾌함을 마음껏 뿜어내 초연 때 호평을 받았다.이번에 문화예술진흥원이 99 우수레퍼토리 공연으로 선정해 다시 무대에 오르게 됐다. 남씨 삼남매 말고도 연출에 박상현,음악감독 마도원,노래 전경옥,타악의 김경수,피아노 김정은,영상 김형수 등 실력파 젊은이들이 스태프로 참여해 더욱 기대를 모은다. 29일 오후8시,30·31일 오후5시 예술의 전당 토월극장.(02)2272-2153. 이용원기자
  • MBC ‘기분좋은 협박’‘사랑해 당신을’ 팬들 방영연장 요구

    드라마 4편의 인기가 천정부지로 치솟아 희색이 만연해야 할 김지일 MBC드라마국장이 때아닌 협박에 시달리고 있다.협박범은 주말드라마 ‘사랑해 당신을’(이진석 PD)의 열성팬들.협박수단은 지난 3월 개설한 MBC인터넷(www.mbc.co.kr)의 ‘김지일국장과의 대화’방.오는 31일 막을 내리는 ‘사당(사랑해 당신을)’방영을 무조건 늘려달라는 것. 여중고생부터 새내기 주부에 이르기까지,떼를 쓰다시피 16부작으로 기획된이 드라마를 늘려달라고 매달린다.“국장님도 지겨울 거예요.이런 소리를 하도 많이 들어서”라는 애교(?)도 곁들인다.“공영방송에서 의견을 묵살하다니…정말 다시는 MBC프로 보지 않겠다”는 협박도 서슴지 않는다.아예 대본을 구해 드라마 전개와 비교한 뒤 “빠지거나 대충 넘어간 내용을 세밀하게보충하면 기존 구성만으로 주 1회 편성하고도 ‘육남매’처럼 6개월은 방영할 수 있다”고 매달리는 이도 있다. 이 모든 소동이 여고생 봉선화(채림)가 대학입학을 포기한 채 수학교사 형준(감우성)과 사랑다툼 끝에 결혼에 골인하는,누구나 체험해 봤고 수많은 여학생이 현재진행형으로 앓고 있을 사제간 사랑이 안겨주는 극적 매력 덕분이다. 물론 합리적인 지적과 비판도 있다.선화와 형준의 연애 부분이라든지 부모님에게 결혼 승락을 받기까지의 갈등을 더 세밀하게 그렸어야 한다는 지적들이다.한 팬은 “이러한 극적 갈등을 너무나 어이없게,쉽게,빨리 끝내버린 느낌을 떨칠 수 없다”며 “진정한 사당은 결혼에 이르는 8회에서 끝났다“고 선언했다. 한 시청자는 “사회적 통념을 깨뜨리는 주제를 과감히 주말극에 차용하고 마치 귀중한 천연자원을 발굴해서 한달만에 낭비해 버린 느낌이 들어”분하다는 이도 있다. 선화를 끔찍하게 흠모해온 영재(차태현)와의 갈등이 ‘억지’에 가깝다는 비판도 나온다.“결혼후 주변인물들의 사건 전개에 집착해 초점을 흐린다”는것이다.그러나 이들의 한결같은 결론은 어쨌거나 방영기간을 늘려달라는 요구다. 이런 괴롭힘을 당하는 김국장은 어떤 심정일까.우선 “저도 참 힘드네요”라고 하소연한다.토요일마다 내보내는 답변을 통해 후속인 ‘남의 속도 모르고’가 한창 제작중이어서 도리가 없다며 양해를 구한다.이어 “지적해준대로이 드라마가 끝까지 상큼한 매력을 잃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임병선기자 bs
  • 조용한 연극 ‘도쿄 노트’ 한국 노크

    화려한 연출이나 사건,배우의 감정 묘사는 철저히 배제된다.오로지 희곡이가진 대사의 힘에만 의존한다.일본 현대 연극의 신경향인 ‘조용한 연극’의 선두주자로 꼽히는 극작가 겸 연출가 히라타 오리자가 자신의 극단 세이넨단과 함께 ‘도쿄 노트’로 한국을 찾아온다. 22∼24일 예술의전당 토월극장에서 선보일 ‘도쿄 노트’는 무대 전환이나특별한 조명없이 배우들의 대화로만 진행되는 히라타 오리자 연극의 대표작. 배우가 관객을 등지고 말을 하거나 동시에 여러 대화가 엇갈리는 등 연극의일반 법칙을 무시하는 일본 현대극의 특징을 엿볼수 있는 무대이다. 대규모 전쟁이 유럽을 휩쓸고 있는 2004년 도쿄를 배경으로 작은 미술관에모인 4명의 남매가 주고받는 일상사에 관한 얘기가 기둥줄거리이다.20여명의 연기자가 출연하고,무대 한가운데 설치된 멀티비전을 통해 한글자막이 나온다. 세이넨단은 83년 히라타 오리자가 창단한 극단으로,구어체와 문어체를 뒤섞은 파격적인 스타일의 작품을 매년 무대에 올려 일본 연극계의 주목을 받고있다.1년간 한국에서 어학을 공부한 경험이 있는 히라타 오리자는 88년 ‘빛의 나라’등 한국에 관한 3부작을 만들었고,93년에는 서울과 부산에서 ‘서울시민’이란 작품을 한국어로 공연하기도 했다.내한기간중 23일 오후 2시에는 워크숍,24일 오후5시에는 심포지엄이 열린다.(02)580-1412이순녀기자
  • 방송3사 가을 프로개편 진단

    ‘김치는 없고 피자뿐인 밥상’18일 개편과 함께 공중파 3사는 식단 재조정을 단행했지만 밥상을 받는 시청자들은 식상할 수밖에 없다.소구력 없는 노년층 등과 전통에 대한 배려는 더욱 사그라들고 ‘식욕’왕성한 N세대 입맛에 아첨하는 메뉴개발만 심화됐기때문이다.드라마에 한정해 볼 때 사극이 그 김치라면 피자로는 시트콤을 꼽지 않을 수 없다. ■박물관행이 멀지 않은 사극 ‘왕과 비’로 1년여 계속돼 온 KBS-1TV 사극독주는 이번 편성은 물론 차후로도 해소될 기미가 없다.MBC가 11월 창사기념으로 40부작 ‘허준’을 방송할 예정이지만 정통 사극은 아니며 2000년에 띄워질 ‘태조 왕건’은 ‘왕과 비’후속이기 때문이다. 70∼80년대 드라마의 백미에 속하던 사극이 이처럼 찬밥신세가 되기까지 시청층 기호변화를 무시할 수만도 없다.현대물의 세배 가까운 제작비,축적된노하우 필요성 등 까다로운 제작여건을 탓할 수도 있다.하지만 역사를 안방극장에 돌이키는 순기능을 분명히 지니고 있으며 향후 치열한 위성전쟁터에서 문화전파의 첨병노릇도 할 수있는 게 사극이라고 매체 관계자들은 말한다. 그럼에도 MBC가 98년 ‘대왕의 길’실패 이후 ‘사극불가론’을 내부적으로정리한 데 이어 ‘왕과 비’마저 비용절감과 시청률 등을 이유로 처첩들 권력다툼 주위를 맴돌고 있어 그렇지 않아도 썰렁한 사극팬들 가슴은 더욱 허하다. ■건재 과시한 시트콤 올들어 드라마와 오락프로에 줄줄이 밀려나는듯 했던시트콤은 강력한 채널선택권자가 된 젊은층 눈치를 살피느라 끄떡없이 버텨냈다.오히려 영토를 넓혔다. SBS는 15일 400회를 기점으로 ‘순풍 산부인과’방송시간을 10분 늘렸으며예상보다 시원치 않았던 SBS ‘점프’,MBC ‘행진’도 대규모 수술까지 단행해가며 끌어안았다.올 여름 시트콤을 일제히 추방했던 KBS도 2TV를 통해 ‘오 해피데이’를 새로 내걸었고 MBC가 ‘육남매’후속으로 12월쯤 선보일 ‘장미병동’(가제) 역시 시트콤 형식이 될 것이 유력하다. 싼값에 손쉽게 시청률을 올릴 수 있다는 점때문에 IMF와 함께 우후죽순 솟아났던 시트콤.한번 중독된 방송사로선 여기저기서 IMF 해동의 기미가 완연해도 끊기 어려운 마력인 것일까. 안방극장에서 부모를 완전히 밀어내고 VIP가 된 10대들이 바깥세상에선 거꾸로 위기의 징후로 읽히는 배경엔 방송사의 손쉽고 자극적인 시청자사냥이 원인이 된 부분이 조금이라도 섞여 있지 않을까. 손정숙기자 jssohn@
  • [대한광장] 환경미화원 이야기

    동네 앞 큰길을 10년 넘게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 있다.어느날 아침 자판기에서 뽑은 커피를 함께 들며 평범한 대화를 나눌 기회가 있었다.“많이 힘드시죠?” “견딜만 합니다” “자제분들은요?” “아들 딸 둘입니다” “장성했겠군요” “그럼요.아들은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했구요.딸은 대학 2학년에 재학중입니다” 제조업에 손댔다가 실패한 이후 살길이 막막하던 그가 고향 선배의 소개로 환경미화원이 되었고,박봉이긴 하지만 일터가 있다는 보람으로 지금껏 일해왔다는 것이다. 환경미화원인 아버지를 둔 두 자녀가 부끄러워하지 않고 이해해주는 것도대견하지만 남매를 대학에 보낼 수 있게 된 것만으로도 삶의 의미를 찾는다고 했다.그러면서 그는 요즘 사람들,특히 청소년들의 공중도덕이 한심스럽다며 길바닥에 씹던 껌이며 담배꽁초 버리는 것은 다반사고,가래침 뱉기,달리는 차창 밖으로 휴지 던져버리기,휴지통이 바로 곁에 있는데 땅바닥에 쓰레기 버리는 일 등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엉망이라는 것이었다. 朴 鍾 淳 충신교회 담임목사 니체가 말했던가.“진정한 애국은 내 집 앞을 쓰는 것이라”고.손에 들고있는 쓰레기를 자기 주머니에 슬며서 넣었다가 쓰레기통을 찾아 버릴줄 아는 사람이라야 민주주의를 논할 수 있다.민주주의란 합의된 질서를 전제로 시행되는 정치행태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질서 하나를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사람이라면 민주적 지도자도 될수 없고 민주주의를 주창할 수도 없다. 다시 환경미화원 얘기.한번은 초등학교 2학년쯤으로 보이는 여자아이가 엄마와 함께 슈퍼마켓에서 물건을 잔뜩 사가지고 나오다가 과자봉지를 뜯어 과자를 먹기 시작했다.그리고 태연스럽게 빈 봉지를 길바닥에 버렸다.마침 청소중이던 미화원은 “얘야,쓰레기는 길바닥에 버리지 말고 쓰레기통에 버리렴”하고 말했더니 곁에 섰던 엄마가 화를 벌컥 내며 “아저씨,남의 아이 간섭 말고 아저씨 일이나 잘 하세요.청소는 청소부 소관 아니에요?”라며 턱을 치켜드는데 기가 막혀 말을 못했다는 것이다. 편견이긴 하지만 그런 부류의 사람들과 그런 정도의 시민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중산층을 형성하고 있다든지 민주주의 견인세력임을 자처한다면 “아직은…”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황제가 어느 날 잔치를 열고 많은 사람들에게 초청장을 보냈다.그리고 가장 마음에 드는 사람을 황제와 황후 사이에 앉게 하고 큰 상을 내리겠노라고했다.사람들은 저마다 황제의 눈에 띄기 위해 온갖 자태를 다 보이며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드디어 황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손을 만지기 시작하더니 가장 손이 거친 환경미화원을 그 자리에 앉히고 큰 상을 베풀었다.이 이야기는 톨스토이의 ‘황제와 청소부’에 나오는 이야기이다.그날 뽑힌 미화원의 기쁨은 형언할 길이 없었을 것이다.그리고 그를 뽑아 상을 내린 황제야말로 현군이 아닐 수 없다. 자기 딸의 잘못을 감싸고 할아버지뻘인 미화원을 몰아세우는 그 엄마의 가정교육 아래서 자라는 그 아이가 장차 뭐가 될지 걱정스럽다.환경미화원의이야기는 계속되었다.“저는 비록 고등학교밖에 못나온 소시민입니다.환경미화원으로 10년 넘게 일해왔습니다.그러나 저는 제 아이들을 그렇게 키우지않았습니다.지금도 제 아들은때로 쓰레기 실은 수레를 뒤에서 밀어주는가하면 빗자루를 들고 길바닥을 함께 쓸곤 합니다.돈 있으면 뭐합니까? 차 굴리면 뭐합니까? 사람이 바로 돼야지요”라며 말끝을 흐리는 것이었다. 부모와 어른의 책임은 자녀와 우리네 아이들에게 바람직한 인생과 올바른가치가 무엇인가를 보여주고 가르쳐주는 것이다.배울 것도 없고 보여줄 것도 없는 부모나 기성세대라면 이미 지도력을 상실한 흘러간 세대일 뿐이다.흔히 우리시대는 영웅이 없다고 한다.따르고 존경할 만한 대상이 없다는 것이다.그래서일까. 요즘 젊은이들의 영웅은 고작 HOT라고 한다.공연도중 멤버 하나가 부상했다고 집단졸도를 하는 아이들,그리고 별나게 따라다닌다는 꾸중에 목숨을 끊는 아이들,저네들에게 누가 어떻게 해맑은 비전을 보여주며 묵직한 가치관을심어주어야 할지 생각할수록 머리가 무겁다.그리고 그날 이른 아침 만났던환경미화원의 이야기가 뇌리를 떠나지 않는다. 박종순 충신교회 담임목사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37)한수산 ‘욕망의 거리’

    197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작가 한수산은 이듬해에 장편 ‘해빙기의 아침’으로 한국일보에 입선,그 4년 뒤인 1977년에는 서커스 인생을 그린장편 ‘부초(浮草)’로 오늘의 작가상을 수상하여 70년대 후반기의 팍팍했던 문학적 갈증을 풀어준 인기작가가 되었다.이 무렵에 성행했던 세칭 호스티스 문학으로부터 전환점을 마련한 ‘부초’는 ‘갈보같은 세상에 청순한여인’의 환상을 불러 일으켜 이 작가를 선풍적인 인기로 몰아넣었다. 인기 절정 속에서 작가 한수산이 제주도로 거처를 옮긴 건 1979년이었다.이역사적인 일대 격변 속에서도 중산층의 감성적인 작품에 대한 수요는 오히려급증하여 그는 중앙일보에다 1980년 5월1일부터 ‘욕망의 거리’란 장편소설을 연재하게 되었다.한수산은 ‘작가의 말’에서 이렇게 작품의 개요와 포부를 밝혔다. “70년대에 30대를 맞은 사람들.그들의 얼마쯤은 남의 나라 땅에서 피를 흘리며 20대의 나이를 살았습니다.또 누구는 뼈마디 굵은 손을 움켜잡고 바다를 건너 일터를 찾아 떠나기도 했습니다.어떤 사람에게는 영광일 수도 있었고 또 누구에게는 오욕이기도 했던 저 10년.그 시대의 날금 위에다 진솔했던 한 세대의 청춘이 가졌던 비극을 씨금으로 얹으려 합니다.”제목처럼 서울은 60년대의 ‘만원’(이호철의 유명한 장편 ‘서울은 만원이다’를 상기)의 시대를 지나 ‘욕망의 거리’로 탈바꿈한 지 오래였다.그 욕망의 추적 장치로 작가는 민세희라는 미모의 여인을 내세웠다.그녀의 이력서는 70년대적 욕망의 상징에 썩 어울릴만하다. 소설의 첫 회는 민세희가 졸부의 아들과 호텔에서 벌이는 정사로 시작된다. 남자는 외국으로 떠나야할 처지여서 이별의 정사를 끝낸 뒤 혼자 빗길을 달리다가 사고로 죽고 만다. 아파트를 제공해 주면서 동거하는 남자를 비롯한 뭇 남성들 속에서 그녀의심장을 파고든 상대는 조태호 영화감독뿐이었다.한때 단역을 맡았던 인연으로 알게된 조태호에 대한 세희의 마음은 세속적인 사랑과 예술적인 소망이겹쳐진 지고의 애정으로 충만해 있었다. 그녀에게는 제대후 복학한 동생 경태와,지방신문사에 다니는 정우가 있다.경태는 입대전 애인의 변심을 보고 용약 매진하는데,대기업을 버리고 군소 무역회사에 들어가 자기능력 개발에 진력하여 외국업무까지 파악한 뒤 독립업체를 만드는 걸 그 목표로 삼는다.형과는 달리 정우는 투옥 당한 은사에게면회를 가는 등 사회문제에 몸을 던져 지방신문 기자가 되는데 결국 자신이투옥 당하고 만다. 이쯤 하면 세 남매가 서로 다른 길을 가면서 70년대의 한국 사회상을 조명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여기서 세희의 역할은 경태가 그토록 추구해 마지않는 경제적인 성공을 거둔 뒤 한국 남성들은 어떻게변모하는가를 미리 보여주는데 있다고 하겠다.세희는 회사일을 두 아들에게맡기고 은퇴하여 일본에서 주로 지내는,상처한 박회장의 후처로 들어앉는다. 세희보다 두 살이나 많은 박회장의 딸 난주가 찾아와 그녀의 비윤리성을 강변하지만 이건 삽화에 지나지 않는다.그녀는 소장수와 백정을 소재로 다뤄일약 인기감독이 된 조태호의 아이를 임신하여 나름대로의 삶을 설계해 나간다. 더 많은 이야기가 있으나 대충 이런 줄거리인 소설이한창 무르익어 갈무렵한수산 필화사건이 터진다.누가 봐도,작품내용이나 작가 자신에게,또는 연재매체에도 전혀 문제가 없을 것 같은 이 소설의 필화 전말은 대체 어디일까. [任軒永 문학평론가]
  • [문명자 회고록] 내가 본 朴正熙와 金大中(2)

    1970년 3월 17일 한강변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하기 전 정인숙(鄭仁淑)은 1년정도 미국에 체류했다.아들까지 낳은 정인숙이 도처를 다니며 청와대를 들먹이는 등 말썽을 일으키자 경호실장 박종규가 정인숙 모자를 미국으로 보낸것이다. 정인숙 모자는 워싱턴 16번가에 있는 ‘우드너’라는 아파트와 같은 호텔에한달 반동안 살다가 뉴욕으로 옮겼다. 당시 뉴욕에는 미국남자와 결혼한 한국여성들의 모임인 ‘한미부인회’라는 모임이 있었다.정인숙의 화류계 친구중에도 한미부인회의 회원이 있어 정인숙도 모임에 한두 번 나왔는데 그때정인숙을 본 기억이 있다.예쁜 얼굴의 젊은 여인이 모자를 쓴 남자아이를 데리고 왔는데 목소리가 용모에 어울리지 않게 남자같은 음색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그녀는 자신을 ‘미세스 박’이라고 소개했다.내가 물었다. “남편은 무슨 일을 합니까?” “재일교포 사업가예요”. 나는 그때 그 남자아이가 누군가를 많이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바로 정일권이었다.정인숙이 죽고난 뒤 ‘워싱턴 포스트’의셀리그해리슨 기자가 나를 찾아왔다.그는 ‘정인숙사건’을 취재중이었다.한국신문에는 어차피 실리지 못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나는 그에게 취재원을 밝히지말 것을 전제로 내가 가진 모든 정보를 제공해 주었다. 며칠후 ‘워싱턴 포스트’ 1,2면에는 ‘한국의 크리스천 킬러 스토리’라는제목으로 셀리그 해리슨이 쓴 기사가 대문짝만하게 실렸다.‘크리스천 킬러’란 미모의 한 영국 고급창녀가 남성편력을 계속하다가 살해당한 사건을 가리킨다. 71년 3월4일 ‘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한미공수기동훈련)’ 취재차 나는이 신문을 들고 서울에 갔다.‘프리덤 볼트 오퍼레이션’은 ‘팀스피리트’의 전신이랄 수 있는 한미합동군사훈련이다.오산공항을 거쳐 숙소인 조선호텔에 도착했을 때 정일권의 비서 김종하(金鍾河·전 신아일보 편집부국장)가나를 찾아왔다. “총리께서 문 기자님이 오신 것을 신문에서 보시고 식사를 같이 하자고 하십니다” 정일권의 특징중 하나는 자신의 주변사람들을 잘 챙기는 것이다.특히 자신이 주미대사 시절 데리고 있던 부하들이워싱턴에서 돌아오면 마지막까지 보살펴 출세길을 열어준 것으로 유명하다.그래서 이들을 속칭 ‘워싱턴클럽’이라고 했다.나야 ‘워싱턴클럽’과 관계가 없었지만 정일권은 61년 주미대사 시절 안면을 익혔다고 해서 내가 한국에 가면 종종 ‘워싱턴클럽’의 식사자리에 나를 부르곤 했다. 이처럼 한국에 가면 정일권으로부터 종종 초대를 받았지만 71년 당시만은나를 만나자는 이유가 정인숙사건 때문이란 것을 직감했다.정일권이 워싱턴포스트 취재원이 나라는 것을 짐작했을 것 같았다.나는 나대로 정일권을 만나 진상을 추궁해볼 작정으로 약속장소로 갔다.잠시후 정일권이 측근 한 사람과 나타났다.그런데 앉자마자 뱉아낸 정일권의 발언이 걸작이었다. “문 기자,나는 정인숙과 딱 한번 같이 잤는데 그 아이가 내 아들일 리가없소.나는 이미 불임수술을 해서 아이를 낳을 수가 없는 몸이오” 아마 요즘 정치인들 같으면 사실이야 어떻든 “나는 정인숙과 관계가 없다”고 딱 잡아뗐을 것이다. “딱 한번밖에 안 잤다”고 변명하는 정일권의 태도를 인간적이라고 해야 할 것인가,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할 것인가. 그가군대시절 “야,야”하고 부르던 박정희에게 “각하”,“각하”하면서 끝까지미움을 사지 않고 그 그늘 밑에서 영화를 누릴 수 있었던 것도 이같은 유들유들한 성격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문제의 ‘워싱턴 포스트’를 들고 그 길로 정일권의 부인을 만나러 갔다.그녀와 나는 정일권이 주미대사 시절부터 친분이 있는 사이였다.지금까지내가 만난 여성들 중에서 가장 전통적인 조선여인상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서슴지 않고 정일권의 부인을 꼽을 것이다.나는 들고 간‘워싱턴 포스트’를 그녀에게 보여주며 물었다. “이 사건 아세요?”.정 총리 부인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내가 이 집에 시집와 아들을 못낳은 죄로 우리집 주인이 어디서든 아들을 낳아 오면 받아들이려고 해요.그래서 우리 주인에게 신문에 난 그 아이가당신 혈육이라면 호적에 올리자고 했는데 우리집 주인이 절대 아니라고 합니다.장기영(張基榮·전 한국일보 사주·작고)씨 하고도 의논했어요.장기영씨가 ‘그분이 공직자라 곤란해서 그렇다면 일단 내 호적에 넣어주겠다’고도했는데 본인이 한사코 아니라고 하니 난들 어쩌겠습니까?” 70년대 후반 정일권의 이 현숙한 부인은 세상을 떴다.얼마후 정일권은 재혼을 해 새로 장가든 부인과의 사이에 3남매를 두었다.“불임수술 했다는 사람이 어떻게 자식을 낳았는가”하고 따져보고 싶었는데 정일권 스스로 제 발이저렸는지 “불임수술을 풀었다”고 변명했다는 얘기를 전해들었다. 정인숙의아들 정성일(鄭成一·32)은 90년 한국을 방문했다. 그는 정일권에게 자기를아들로 인정해달라고 요구했는데 정일권은 비서를 시켜 4,000만원을 전해주고는 “돌아가라”고 했다고 한다.정성일은 정일권을 상대로 친자확인소송까지 했지만 끝내 뜻을 이루지 못했다. 정리 정운현기자 jwh59@
  • [변혁으로서의 문학과 역사](36) 현기영 소설’순이삼촌’

    매타작과 구류로 석방된 현기영은 여전히 서울사대 부속고교 영어교사로 나가며 울분 속에서 제주4.3항쟁과 너무나 닮은 광주항쟁 소식을 듣고 뜻밖의실책을 하고만다.“작취 미성인 상태로 1교시 수업에 들어갔다가 그(현기영)의 입에서 느닷없이 금기의 말이 튀어 나왔던 것이다.‘광주사태를 아는가?’ 보도 금지되어 있던 터라 아이들이 모르고 있거나 알아도 모른 체 할 게뻔했다.그러나 한 아이가,‘일제 때의 광주학생사건 말입니까?’ 하고 어이없는 반문을 해오자 불끈 화가 치밀었다.‘누구 아는 사람 없어? 그 옆 사람,몰라? 그 앞 새끼,몰라? 그 옆 새끼,그 뒷 새끼,그 옆 새끼,그 앞 새끼,몰라? 그래,빌어먹을,나도 모른다!” 이때가 1980년 5월 중순.계엄 아래서도 세월은 흘러 여름이 닥치자 잠잠하던 현기영의 주변에서 뭔가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기 시작했다.관계기관으로부터의 내사가 시작된 것이었다.“출판사에서도,고향에서도 알려올 정도로반 공개적이었다.심지어 직접 집으로 찾아와 ‘새로 동서기로 부임해 인사차 왔노라’라고 엉뚱한 소리를 하고 가기도 했다.스무날 가까이 도마에 오른고기가 되어 칼 맛을 볼 날이 이젠가 저젠가 마음 졸이다 보니 체중이 급격히 떨어져(6kg이나!) 몸이 휘청거릴 정도로 야위어 버렸다.그 20일 동안에얼마나 정신적으로 시달렸던지 막상 그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홀가분했다.”(이상 인용 ‘위기의 사내’). 1980년 8월21일,여름방학이 끝나고 운동장에서 조회를 하고 있는데 안에서누가 부른다는 전갈을 받고 복도로 들어서자 바로 종로서로 연행 당했다.이사건은 한국 필화 문학사에서 한 전환점을 이룬다.이제까지의 필화는 거의첫 심문에서 필자 이외에 다른 세력의 조종에 의하여 씌여진 것이 아닌가를밝히는 데서 시작했는데,현기영의 경우는 시종 단독 조사에다 애초부터 왜그런 글을 썼느냐는 추궁이었다. 단단히 혼 날 걸 각오했던 작가와는 달리 수사관 쪽은 오히려 건수를 채우고자 갖고 왔으나 헛수고라는 분위기였다.4박5일 동안의 밤샘 조사 뒤 작가는 석방됐으나 바로 ‘순이 삼촌’은 판금도서가 되어 전국 도서관과 서점으로부터 회수 당했다. 현기영은 다행히 교직에 그대로 머물렀다가 1987년 사직한 후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문제의 작품 ‘순이 삼촌’은 70년대부터 분단소재 문학에서 성행했던 귀향 회상 형식의 소설이다.주인공 순이삼촌(제주도에서는 촌수 따지기 어려운남녀 어른을 두루 삼촌이라 부르기에 소설 제목은 순이 아주머니의 뜻임)은4·3 때 26세로 과수가 되어 외딸을 출가시킨 뒤 홀몸으로 떠돌던 중 화자인 ‘나’(곧 작가)의 서울 집에 와 일년도 채 못되는 동안 부엌일을 맡아 하다가 신경쇠약으로 두 달 전 귀향해 버렸다.‘나’는 할아버지 제사로 8년만에 귀향하여 일가친척의 안부를 묻던 중 순이삼촌을 거론하자 죽은 날짜도모르게 길가 밭에서 “머리 맡에는 먹다 남은 꿩약 사이나 몇 알갱이 흩어놓고 시체로 발견되었다”고 했다. 그 밭뙈기는 1949년 1월17일,그녀와 어린 남매를 포함한 마을 사람들 상당수가 끌려가 총살 당한 현장이었다.총소리에 혼절해 버린 탓인지 그녀는 살아났으나 행불된 남편 때문에 엔간히도 고초를 겪으며 유복녀를 추스려 기르던 그녀는일생을 피해망상증으로 시달렸던 것으로 이 소설은 촘촘히 묘사하고 있다. 작가 현기영은 애초에 이 작품으로 현실비판 의식의 작품은 끝내고 보다 아름다운 소설을 쓰고자 결심했었으나,필화를 겪으면서 작가 스스로가 피해자란 의식을 갖게되어 이후 보다 적극적으로 4.3항쟁을 비롯한 민주화와 통일에 밀착해 가게 되었다고 말했다.필화가 작가와 문학을 더욱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산 교훈이 바로 ‘순이삼촌’과 작가 현기영인 것 같다. 任軒永 문학평론가
  • [각료 에세이 열린 마음으로] 이상용 노동부장관

    나는 대학에서 경제학을 공부했다. 공직에 들어온 이후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에 오래 있었던 점을 생각해 보면 내가 전공을 경제학으로 선택한 것이 결코 타고난 심성이나 자질과 전혀 무관한 것만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결과론일 뿐,내가 경제학과에 지원한 것은 어떤야망이나 소신에서 비롯된 결정은 아니었다.어쩌면 그것은 가난하고 형제가많았던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것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나는 8남매의 장남이다. 나는 ‘장남’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집에서 아주 각별한 대접을 받았다. 억척스럽고 부지런하셨던 부모님 덕분에 끼니를 거르지는 않았지만,모두들가난했던 시절이었기에 그 끼니라는 것은 초근목피(草根木皮)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나에게 ‘더운 밥’을 챙겨주시려고 무던히 애쓰셨고 아버지 역시 남다른 애정을 장남에게 보여주셨다. 내가 춘천에 유학하여 중·고등학교를 다니고,서울에서 대학을 다닐 수 있었던 것도 장남에 대한 아버지의 특별한 배려였음은물론이다. 그러나 장남이라는 존재적 가치는 언제나 나의 가슴 속을 파고드는 ‘예리한 칼날’이었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으로부터 받는 각별한 대접은 바로 내가 무거운 짐을 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었다.그것은 어느 누가 알려주지 않아도 어느틈엔가 내 스스로가 알게 되는 ‘장남이라는 짐’의 존재였다. 그 짐은 나에게 ‘어찌하면 우리 집안을 일으킬 수 있을까’라는 생각과 어떤 책임감 같은 것을 느끼게 하였던 것 같다.아마도 내가 경제학을 선택한것은 적성에 맞아서일지도 모르지만 가장 큰 이유는 어려운 집안에 보탬이되어야겠다는 마음이 커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하지 않으면 안된다’,‘내가 흔들리면 안된다’는 식의 생각이 언제나 마음 속을 떠나지 않으면서 이상적인 장남의 모습으로서 내 행동거지를 결정지었고,한 번 옳다고 뜻을 세우면 확고히 지켜나가는 심성도내가 장남이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몸에 배게 된 듯하다. 아직도 내가 장남으로서 받는 빛과 그림자는 여전하다. 하지만 이젠 장남이라는 예리한 칼날이 마음속을 그렇게 파고 들지는 않는다.짐은 아직도 존재하고 나의 모습을 결정하지만,이제는 그 짐을 질 줄 아는 법을 배웠기 때문인 것 같다.세월이 흐르면서 말이다. 이상용 노동부장관
  • [義烈 독립투쟁] (6) 윤봉길 의사

    1932년 4월29일 오전 11시30분쯤 상하이(上海) 홍구(虹口)공원(현 노신공원)에서는 일본군이 상하이사변의 승전기념식을 겸해 일본국왕의 생일잔치,이른바 천장절(天長節)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었다.이날 한국의 의혈청년 윤봉길(尹奉吉)이 그 단상에 폭탄을 던져 상하이 침공의 우두머리인 일본군사령관 시라카와(白川義則)대장을 비롯한 10여명의 원흉들을 쓰러뜨렸다. 당시 현장에서 러시아 여행객이 찍은 비디오를 보면,사열대와 함께 엎어지고 쓰러지는 원흉들의 모습은 마치 일본 제국주의와 세계 제국주의가 함께무너지는 장쾌함을 보였다.윤의사가 세계로부터 정의의 삶을 대변한 ‘의사'로 불리고 있는 것는 바로 이 때문이다.당시 세계의 언론들은 상하이를 주목했는데 인도주의를 지향하는 언론일수록 제국주의를 맹타한 윤의사를 높이치켜세웠고 또 한국의 독립운동을 들먹였다.국내외 동포들은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대해 자부심을 갖게 되었다.특히 ‘상하이의거’를 주도한 임시정부와 한인애국단,그리고 한인애국단 단장 백범 김구(金九)를 주목하기 시작했다.임시정부가 한인애국단을 결성해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도 그러한 주목을 끌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왜냐하면 1차대전이 끝난 뒤에는 파리강화회의의 안정기조라고 하는 신제국주의적 질서에 온 세계가 눌려 독립운동도 외면당하고 있었으므로 그 신질서를 깨야 할 필요가 있었다.그 기회를 만들기 위해 한인애국단을 만들고 의열투쟁을 전개했던 것이다. 때마침 뉴욕 월가(街)의 증권파동을 계기로 경제공황이 몰아쳐 왔고,일본제국주의가 만주를 침공하더니 다시 상하이를 침공하여 상하이의 한국 임시정부 인사들은 그것을 파리강화체제를 무너뜨리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임시정부는 한인애국단을 만들면서 일본 군국주의의 대륙침략에 대한 반격작전을 세웠다.이봉창(李奉昌)의사로 하여금 일제의 심장인 도쿄 궁성을,최흥식(崔興植)·유상근(柳相根)의사로 하여금 만주침략의 아성인 관동군사령부를 공격토록 한데 이어 윤의사로 하여금 상하이 침공의 선봉을 꺾어놓는다는 소위 ‘삼면작전’을 세웠다.이같은 작전을 구상한 사람은 백범이었는데윤의사의 ‘상하이 의거’ 성공으로 전세계를 진동시켰다. 윤의사는 원래 농민운동을 통해 고향의 부흥을 꾀하던 진보적 계몽주의자였다.고향인 충남 예산군 덕산면 시량리에서 야학당과 청년회·체육회·부흥원을 조직하였으며 ‘농민독본’도 저술했다.그러나 경제공황까지 덮친 식민지 하에서 농민운동이 성공하기는 어려웠다.윤의사는 마침내 ‘장부출가 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 즉 ‘대장부는 뜻을 세워 한번 집을 나서면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결연한 의지를 불태우며 중국 대륙으로 향했다.그것이 1930년 윤의사가 23세 때의 일이다. 처음 산둥(山東)반도의 칭다오(靑島)에서 세탁부로 일하던 윤의사는 이듬해5월 상하이로 건너갔다. 때마침 상하이에서 상하이사변이 일어나 일본군과중국군이 싸우는 대포소리를 들으며 고향의 어머님께 보낸 편지에서 “민족과 민족이 부닥치는 소리가 꽝꽝합니다”라고 표현했다. 그 꽝꽝하는,민족과민족이 부닥치는 소리를 들으며 윤의사는 의사가 되기 위해 꿈을 키웠다. 청년 윤봉길은 백범 김구를 찾아가 한인애국단에 가입하였다.자신의 생명을불태워 정의를 현양하는 꿈을 실현코자 했다. 윤의사는 ‘성인군자는 살아서영예가 있지만 의사는 죽어서 말한다’는‘꿈’에 한 걸음 더 다가간 것이다. 1932년 4월29일 아침 윤의사는 일본식 도시락과 물통,일본 국기를 들고 홍구공원을 향해 떠났다.도시락과 물통이 바로 폭탄이었다.이 폭탄은 당시 중국군 장교로 상하이 병공창에 근무하던 김홍일(金弘壹·중국명 王雄·전광복회장)이 만든 것이었다. 의거 당일 아침 윤의사는 백범과 살아서는 ‘마지막 식사’를 같이했다.그리고 윤의사는 자신의 시계와 백범의 시계를 바꾸어 찼다.자신의 시계는 6원짜리였고 백범의 것은 2원짜리였다.“선생님,나는 한시간밖에는 시계가 필요치 않습니다”라며.죽음을 앞에 둔 청년이 보여준 태연한 여유를 보면서 백범은 고개를 들지 못했다.그렇게 떠나간 윤의사에게 시계는 아니나 다를까한 시간밖에 필요치 않았다.11시반쯤 홍구공원의 폭음과 함께 그 시계도 멈추고 말았다. 윤의사의 의거로 침체됐던 독립운동이 생기를 찾고 활기를 띠게됐다.또 국내외 동포가 다시 임시정부로 마음을 모으게 됐고 국제적으로도 한국독립을새롭게 인식하게 됐다. 중일전쟁 와중에서 임시정부가 중국대륙 곳곳으로 이동하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이나 1940년 충칭(重慶)에 정착,8·15광복때까지 항전할 수 있었던 것은 윤의사의 의거로 국내외 동포들의 마음을 한 군데로 모으고 중국정부를 비롯한 국제적 지원을 얻어낸 결과라고 할 수 있다.의거후 현장에서 체포된 윤의사는 일본으로 이송돼 그해 12월19일 가네자와(金澤)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일제는 윤의사의 시신을 길거리에 묻어 행인들이 밟고 다니게 했는데 이같은 야만성은 일본제국주의밖에는 없다.해방후 윤의사의 유해는 백범의 지시로 이봉창·백정기(白貞基)의사등과 함께 봉환,효창공원에 안장됐다. [조동걸 국민대 명예교수] *尹의사의 사회개혁 활동 매헌(梅軒) 윤봉길 의사는 초창기 야학·문맹퇴치운동 등에 헌신한 개혁주의 성향의 농촌운동가였다.윤의사가 20세 되던 해인 1927년에 출간한 ‘농민독본(農民讀本)’은 윤의사의 계몽사상을 집약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당초3권으로 구성된 이 책은 제1권은 유실되고 현재 제2·3권만 전해오고 있다. 제2권은 ‘계몽편’으로 편지 쓰는 법,인사법 등 생활교양과 조선지도,백두산 등에 대한 소개 등 일반상식을 가르치고 있는데 현재 8과까지만 보존돼있다. ‘농민의 앞길’이란 제목의 제3권은 농촌개혁 방향과 농민의 당면과제 등을 제시하고 있다.앞부분에는 ‘소리의 갈래’등 한글맞춤법도 소개돼 있다. 총 25과로 구성된 제3권은 현재 7과까지만 보존돼 있다. 제2권이 기초학습자료라면 제3권은 일종의 사상독본이라고 할 수 있다.당시 윤의사로부터 야학지도를 받은 예산군 덕산마을 사람들은 오랫동안 이 ‘농민독본’을 암송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김학준(金學俊)인천대총장은 윤의사 평전에서 “매헌은 한낱 시골의 야학당교사가 아니라 이미 이 무렵부터 사회개혁과 이상국가 건설을 꿈꾼 선각자적 지식인이었다”고 평했다. 정운현기자 jwh59@kdaily·com *윤봉길의사 직계후손들 근황 윤의사는 부인 배용순(裵用順·88년 작고)여사와의 사이에 두 아들을 두었다.윤의사 의거 당시 장남 종(淙)씨는 세살이었고 둘째 담(淡)은 배 여사 뱃속에 있었다.둘째 담은 두살때 영양실조로 일찍 세상을 떴다. 일제때는 일제의 방해로 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장남 종(淙)씨는 해방후 성균관대 경제학과를 졸업,10여년간 농수산부 공무원으로 근무하다 84년간경화로 타계했다. 윤의사의 부인 배여사는 남편없이 외아들을 키우며 어렵게 살다가 88년 82세로 작고했는데 배여사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다.윤의사 의거 50주년인 82년 배여사는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는데 이 해 윤봉길의사기념사업회는 ‘배용순 효부상’을 제정,매년 윤의사 의거일인 4월29일 예산 충의사(忠義祠)에서 시상하고 있다. 현재 윤의사 직계후손 가운데 가장 웃어른은 윤의사 며느리 김옥남(金玉南·67·서울 동작구 상도동 거주)씨.김씨는 딸 여섯에 끝으로 아들 하나를 두어 겨우 윤의사의 대를 이었다.김씨는 “백범 김구 선생의 아들 김신(金信)장군이 교통부장관 재직시절 김포공항에 스낵 가게를 주선해줘 겨우 살림을꾸려왔다”며 “윤의사의 후예 7남매를 모두 반듯하게 키운 것이 큰 보람”이라고 말했다. 윤의사의 유일한 손자 주웅(柱雄·29)씨는 고려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하고현재 현대자동차 남양연구소에 재직중인데 97년에 결혼,아들 하나를 두고 있다.주웅씨 위로 누나 여섯 사람도 모두 출가했다. [정운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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