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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서울에도 집성촌 10여곳 있다

    특별시에 집성촌?서울 양원리등 10여곳 수십 가구씩 오순도순 유영규(42·대구시 남구 대명동)씨는 어려서 자신보다 나이는 적지만 항렬이 높아 아저씨뻘 되는 아이에게 ‘꿀밤’을 먹였다가 집안 어른들로부터 꾸지람을 들은 적이 있다. 이어 눈을 피해 이 아이를 또 혼냈다가 들통이 나는 바람에 더 큰 야단을 맞기도 했다. 유씨로서는 어린 마음에 억울한 일이 줄을 이었다. 시골지역의 집성촌(集姓村)에서 경험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서울특별시에 아직도 ‘아랫집은 사촌 형님, 윗집은 숙부, 옆집은 조카, 앞집은 당숙’ 하는 식으로 친인척끼리 옹기종기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 10여곳 있다는 것만으로도 호기심을 자극한다. 이러한 집성촌들은 그린벨트로 묶이고, 세태의 변화에 밀려 점차 사라지고 있다. 서울 중랑구 망우1동 259 일대에는 서울이라고는 얼른 떠올려지지 않는 ‘양원리’라는 마을이 있다. 이곳에는 동래 정씨들이 38가구나 모여 산다. ●조선 태조가 하사한 땅 이 마을 정수선(71·새마을금고 운영)씨는 “조상님들이 조선시대 태조 이성계가 서울을 도읍으로 정한 1394년보다도 3년 전에 이곳에 터를 잡아 살기 시작했으니 벌써 610년을 넘겼다.”고 말했다. 정씨 말대로 이성계가 고려 말 역성혁명에 성공하자마자 일등공신인 정구(鄭)에게 이 일대의 토지를 하사한 인연으로 지금까지 24대째를 내려오고 있다. 마을 이름도 태조와 뗄 수 없는 인연을 갖고 있다. 태조가 자신이 묻힐 무덤자리를 보러 가는 길에 고개를 넘으면서 모든 근심을 잊었다고 해서 망우(忘憂), 고갯마루에서 쉬다가 마신 우물물의 맛이 너무 좋았다고 해 양원리(養源里)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아무래도 개발제한이 풀리면 집성촌 유지가 어렵지 않겠느냐.”는 물음에 마을사람들이 내놓는 대답은 ‘천만에’였다. ●사라져가는 집성촌 정씨는 “개발제한구역으로 묶이는 바람에 건물을 못 짓고, 땅값이 주변의 10분의1밖에 안되는 등 불이익(?)에 따른 불만도 불만이지만, 무엇보다 건물을 짓지 못하는 불편 때문에 후손들이 고향을 떠나고 있다.”고 허탈해했다. 개발이 늦어져 오래 모여 살아오기도 했지만, 똑같은 이유로 세월에 떠밀려 사라질 위기에 놓인 사실은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수선씨는 또한 “집을 팔고 이사하는 바람에 다른 성씨가 10가구 들어와 집성촌이라는 명맥은 이어가지만 이미 순수혈통 마을에서는 약간 벗어난 게 아니냐.”고 되물었다. 그는 이어 “한 핏줄끼리 옹기종기 모여 산다는 자부심도 있긴 하지만….”이라며 씁쓸해했다. 정씨는 슬하에 7남매를 뒀다. 막내아들 민섭(28)씨를 빼면 모두 서울에 살고 있지만 집성촌에서 나와 사실상 ‘타향 살이’를 하고 있다. 민섭씨 또한 아버지의 마을금고 사업을 도와주려고 머무는 것이니 ‘동거’는 그리 길지 않을 것으로 여기는 눈치다. ●“죄다 믿음이 간다오” 정씨의 집 앞에는 7촌 조카, 그리고 바로 옆에는 6촌 동생이 살고 있어 “이곳이 과연 집성촌이구나.”하는 생각을 갖게 만든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에 따르면 망우동이 서울로 편입되기 전인 경기도 양주군 구리면(九里面)일때는 집성촌이 10개나 있었다. 현재 구리시로 한 단계 뛰어오른 구리면은 망우·상봉·중화·묵·신내·교문·토평·갈매·수택리 등 9개 마을로 이뤄졌는데, 바꿔 말하면 한 마을에 두 가지 성씨의 집성촌이 있었다는 얘기가 된다. 이 마을에서 북부간선도로를 가로질러 자동차로 10분쯤 가면 구릉산 아래로 신내1동 산6 일대에 경주 임(林)씨 30여가구가 모여 사는 능말(큰 능이 있다고 해서 붙은 능마을의 준말)이 나타난다. 임씨 집성촌이 처음으로 들어선 것은 선조 36년인 1603년쯤이라는 기록이 전해진다.400년 남짓한 전통으로 정씨네 집안에는 ‘한끗발’ 뒤지지만 결코 녹록하지 않은 역사를 갖고 있다. 대부분 직장인들인 양원 마을과는 달리 전체의 절반인 15가구가 아직도 이 지역의 특산물인 ‘먹골배’를 생산하는 농업에 종사하고 있다. 종친회 총무 임현만(59)씨는 “하루 온종일 대문을 활짝 열어놓고 살아도 아무런 문제가 없다.”면서 “조상들의 묘를 지키며 오랫동안 ‘모여 사는 정’에 익숙해져 좀처럼 외지로 나가기가 힘들었다.”고 귀띔했다. 함께 사는 임씨의 아들 준성(29)씨도 “아무래도 집안 어르신들과 가까이 지내다 보니 예의범절이 절로 몸에 배는 것 같다.”고 말했다. ●“예의 범절 저절로 배워요” 강동구 강일동 ‘벌말’ 청송 심(沈)씨네는 50여가구가 모여 사는 서울에서 가장 큰 집성촌이다.410여년 전인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 임진왜란 중에 충청도 예산에서 피란온 선조들의 후손이다. 벌말이란 벌판에 마을이 섰다고 할 정도로 너른 땅을 말한다. 같은 뜻을 가진 한자어 지명에는 평촌(坪村)이 있다. 벌말에서는 나이는 어려도 항렬이 높은 이에게 존칭을 써야 한다는 사실을 잊고 함부로 호칭하다가 혼이 나는 일도 적지 않다. 서로 새해인사를 하는 경우 나이는 자녀뻘이지만 항렬이 높은 이에게 머리를 숙여야 한다. 강동구의회 의장을 지낸 25대손 심재풍(69)씨는 “10대 할아버지께서 정착한 이래, 마을 규범 때문에 가끔 다투기도 하지만 성씨가 같아서인지 금방 화목을 되찾는다.”며 마을 자랑을 빼놓지 않았다. 그는 이어 “최근 다른 성씨들이 마을로 들어오고 10촌 이상 촌수가 벌어지면서, 명절이면 친척들이 모두 모여 집집이 옮겨다니며 차례를 지내는 데만 하루 종일 걸리는 옛 풍습이 사라져 아쉽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무슨 사연·어떤 자랑거리 있나 서울 시내엔 10여가구가 모여 작은 집성촌을 이루고 있는 지역이 모두 6곳이 있다. 도봉구 방학4동 ‘원당마을’에는 파평 윤(尹)씨, 강서구 외발산동 ‘광명마을’에는 경주 최(崔)씨, 강동구 강일동 ‘가래여울’(한강으로 흘러드는 두 여울이 갈라져 흐르는 곳이란 뜻)에는 남평 문(文)씨 집안이 있다. 또 창녕 조(曺)씨들이 대대로 일군 서초구 염곡동 ‘염통골’(마을 생김새가 염통 모양)과 경주 김씨의 내곡동 ‘능안마을’에다 아예 성씨를 따 ‘홍씨 마을’이라고 부르는 남양 홍씨 집성촌이 있다. 집성촌 속에는 깊은 역사만큼이나 자랑거리도 수두룩하다. 먼저 도봉구 방학동 원당마을에 있는 서울시의 보물덩어리가 된 830살짜리 은행나무가 손꼽힌다. 서울시 지정 보호수 1호다. 높이가 24m, 둘레는 9.6m나 된다. 관악구 신림동 산112의1에 있는 굴참나무(천연기념물 271호·수령 1010년)와 종로구 삼청동 106 총리공관 등나무(천연기념물 254호·수령 920년)에 이어 ‘수령’이 서울에서 세 번째다. 원당마을 은행나무는 옛날부터 스스로 몸에 불을 질러 나라의 큰 변고를 알리는 등 신통을 지녔다고 전해지고 있다. 예컨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서거하기 직전 이 나무에 까닭을 알 수 없는 화재가 나 소방차가 출동, 진화했다고 한다. 마을사람들은 해마다 2월 중순이면 이곳에 30여명씩 모여 떡과 술을 놓고 나라의 안녕을 비는 ‘행목대신제’(杏木大神祭)를 올리고 있다. 은행나무 옆에는 조선시대 비운의 임금인 연산군(1476∼1506년)의 묘가 있다. 이 무덤이 중종반정 이후 연산군의 유배지였던 강화도에서 옮겨오면서 파평 윤씨들이 뒤따라와 정착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기록으로 찾아볼 수 없어 언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원당마을 윤주현(71)씨는 “정치적으로 억울하게 죽은 연산군의 경우 3족이 멸문지화를 당했고, 연산군이 어머니 폐비 윤비(尹妃)에 대한 효성이 지극해 외척들이 돌봐야 한다고 여겨 이 곳으로 온 게 아니냐는 추측은 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이 곳엔 또 마을과 역사를 함께 해온 ‘원당천’이라는 우물이 있다. 태조가 물맛을 본 뒤 칭찬했다는 망우동 양원마을 우물과 비슷한 사례다. 피란민이 숨어들었을 정도로 외진 곳이어서 자연부락 모습을 비교적 잘 간직하고 있다. 청송 심씨들의 마을에도 흥미 넘치는 일화가 전해 내려온다. 심재익(67)씨는 “옛날 한 백성이 산에서 도적을 만났는데 갑자기 호랑이가 나타나 화를 면했다.”고 운을 뗐다. 그는 이어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바로 앞 바위의 모양이 호랑이와 똑같이 생겨 그 사건 이후에 그 바위가 마을을 지켜주는 산신령이라고 믿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해마다 음력 7월 초하루에서 사흘 사이에 길일(吉日)을 가려 ‘큰말(벌말의 딴 이름으로, 큰 마을이란 뜻) 산신제’를 지낸다. 앞산 꼭대기에 올라 집집마다 추렴한 쌀로 떡과 술을 빚고 소머리를 제단에 올린다. 서울시내에서 행하는 유일한 산신제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수원 지역 첫 대안初校 ‘칠보산 자유학교’

    수원 지역 첫 대안初校 ‘칠보산 자유학교’

    경기도 수원 지역의 첫 대안초등학교인 칠보산 자유학교(freechal.com/suwondaean)가 지난 5일 문을 열었다. 맞벌이를 하는 중산층 부부들이 공동 출자해 만든 이 학교는 교육과 탁아를 함께하는 ‘공동 육아’의 이념에서 출발했다. 집같이 자유스러운 분위기에서 학생들은 자연환경과 이웃들의 삶을 체험하며 세상을 배우고 있다. 아직은 전교생이 12명뿐인 작은 학교이지만 서수원 지역의 작은 교육 공동체를 꿈꾸는 칠보산 자유학교의 수업 현장을 찾았다. ■ 자유롭고 즐겁게 ‘더불어 삶’ 배운다 지난 9일 경기도 수원시 권선구 금곡동 LG빌리지 상가 지역에 터를 잡은 수원 칠보산 자유학교를 찾았다. 상가 건물 2층에 자리한 학교는 겉으로는 평범한 사무실처럼 보였다. 그러나 학교 문을 열고 들어서자 엄마가 기다리고 있는 ‘우리집’ 같다는 느낌이 든다.40여평 규모에 방 3개와 거실, 부엌, 화장실을 갖춘 일반 아파트와 같은 구조였다. 안방은 4·5학년이 공부하는 교실로 ‘형님반’이라고 부른다.2학년 어린이들이 사용하는 중간방은 ‘생각반’이다.1학년 ‘나무반’ 어린이들은 중간방 옆에 있는 작은방을 사용하고 있었다. 각 반 이름은 모두 아이들이 스스로 정했다. 오전 10시부터 시작한 ‘말과 글’ 수업을 마친 어린이들은 점심을 먹으려고 거실로 모였다. 칠보산 자유학교의 거실은 단체 수업과 놀이 활동, 그리고 식사를 하는 공간으로 사용된다. 오늘의 메뉴는 자장밥과 미역국. 식단은 학부모가 직접 짠다. 학부모들이 배식 당번을 정해 매일 한 명씩 학교를 방문해 밥을 짓고 어린이들의 식사 지도를 맡는다. 밑반찬은 각자 집에서 마련해 학교로 가져온다. 점심 식사를 마친 아이들에게는 자유시간이 주어진다. 남자 어린이 7명은 학교 앞 공터로 몰려간다. 학교가 임대한 공터 흙 바닥에서 아이들은 뒹굴듯 축구 삼매경에 빠진다. 여자 어린이 5명은 교실에 남아 지난 ‘살림수업’시간에 배운 콩나물 종이 접기에 여념이 없다. 주먹만한 시루에 종이 콩나물을 가득 접어 넣어야 숙제를 마치는 것이다. 오후 1시30분.‘마을에서 배우기’시간이다. 이 시간에는 풍물패 샘터에서 활동하고 있는 한별님 강사와 함께 전래동요를 배운다. 거실에 모인 어린이들은 한 강사의 장구 장단에 맞춰 강강술래, 문지기놀이, 손치기, 발치기 등 우리 동요를 배운다. 노래를 익힌 어린이들은 한 강사와 함께 학교 앞 공터에 몰려나가 둥글게 원을 만들고 강강술래와 문지기놀이를 즐긴다. 정규 수업이 끝나는 오후 3시30분부터는 청소 시간이다. 각자 교실과 거실을 쓸고 닦은 뒤에는 집에 가도 되고 학교에 남아 책을 읽거나 친구들과 놀다 가도 된다. 오후 4시30분쯤이면 집에서 보내온 과일과 떡 등 푸짐한 간식이 준비되기 때문에 대부분 아이들은 간식을 먹고 오후 5시가 되어서야 집에 돌아간다. 가장 어린이다운 모습으로 공부하고 생활하도록 지도하는 수원 칠보산 자유학교의 재학생들은 한결같이 학교가 좋다고 말한다. 수원의 한 사립초등학교에 다니다 담임 교사의 불공평한 체벌에 마음의 상처를 입은 4학년 송은서(10·가명)어린이는 2학년 때 학교를 그만둔 뒤 집에서 생활하다 올해부터 이 학교에서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송 어린이는 “전 학교에서 선생님이 서류용 집게를 입에 물려 벌을 세우거나 때리는 일이 많아 너무 속상했다.”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할 수 있는 이 학교가 좋다.”며 활짝 웃는다. 수원 상촌초등학교에서 4학년을 마치고 5학년은 칠보산 자유학교에서 시작한 최은솔(11)양은 부모님의 권유로 학교를 옮겼다. 최양은 “전 학교를 그만둘 때는 섭섭하고 걱정도 됐지만 새 학교를 다녀보니 학교가 재미있고 즐거울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수원 칠보산 자유학교의 정규 과목은 3과목뿐이다. 교과서도 없다.7차 교육과정에 근거한 국어 수업인 ‘말과 글’, 수학 과목에 해당하는 ‘수’,4·5학년생들을 위한 ‘외국어’수업이 전부다.‘말과 글’수업은 일반 초등학교의 전형적인 국어 수업과는 다르다. 만들기·그리기·동화책 읽기 등을 통해 우리말과 글을 익히는 종합적인 언어 수업에 가깝다.‘수’시간에는 생활에 꼭 필요한 셈을 공부한다.‘외국어’수업은 고학년을 대상으로 실험적으로 시도해 보는 영어 수업이다. 무리한 목표를 정해 암기식으로 영어를 배우는 것이 아니라 영어동화를 읽거나 노래를 부르면서 외국어를 익힌다. 이 시간에 저학년 학생들은 나들이나 미술활동을 한다. 오전 중에는 정규 수업을 진행하고 오후 수업은 주로 외부 강사를 초청해 다양한 과목을 배운다.‘살림’수업은 의·식·주는 단순히 돈으로 사서 사용하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 생활에 큰 가치를 지닌다는 것을 가르친다. 어린이들은 이 시간에 요리, 바느질, 종이접기 등을 경험한다.‘마을에서 배우기’ 시간에는 외부 강사와 함께 노래를 배우거나 전래 놀이를 즐긴다. 또 마을 시장을 방문해 경제활동에 대해서 공부한다. 매주 금요일 ‘학교 밖 학교’ 시간에는 인근 칠보산에 방문해 자연을 관찰하고 인간과 자연이 더불어 사는 방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칠보산 자유학교는 어린이들이 원하는 그대로 진행된다. 매주 월요일 오후 어린이 회의를 개최해 학교 생활의 규칙을 만든다. 이 시간에는 학생들이 나들이 가면 좋을 곳, 꼭 하고 싶은 운동 경기, 배우고 싶은 노래 등을 발표해 어린이들의 의견을 수업 내용에 반영한다. 때문에 전임 교사 3명은 정규 수업이 끝나면 늘 모여 일주일 단위 수업 계획을 세운다. 이 학교의 또 다른 특징은 재학생들이 모두 예사말을 사용한다는 것. 교사와 학생 사이에 예의는 지키되 격의 없이 지내기 위해서다. 어린이들은 전임 교사들에게도 ‘반짝이’,‘봄날’,‘산’과 같은 별명을 부른다. 칠보산 자유학교 대표 교사인 이한별(27·여)씨는 “아이들이 놀이를 통해 세상을 배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새로운 수업 방법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한다.”면서 “어린이들에게 최대한의 자유를 주고 즐겁게 공부할 수 있도록 유도하는 것이 이 학교의 수업 목표”라고 말했다. 수원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칠보산 학교 어떻게 문 열었나 수원 칠보산 자유학교의 시작은 서수원 지역을 중심으로 형성된 ‘공동육아’ 모임이었다. 공동육아협동조합 ‘사이좋은 어린이 집’이 문을 연 것은 지난 2001년. 권선구 금곡동 LG빌리지에 살고 있는 맞벌이 부부 7∼8쌍이 모여 육아 문제를 함께 고민한 것이 칠보산 자유학교의 첫 출발이다. 아파트 이웃 주민으로 서로 안면이 있는 10가구가 모여 한 가구당 400만원씩 출자해 ‘사이 좋은 어린이 집’을 탄생시켰다. 아파트 단지내 33평 주택을 전세 9000만원에 임대했다. 오전 7시30분부터 오후 7시까지 취학 전 어린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교사도 2명 채용했다. ‘사이 좋은 어린이 집’은 1년 뒤 참여 가구 수가 24가구로 두배 이상 늘었다.2002년에는 LG빌리지 근방의 300여평 규모 단독주택으로 옮겨 텃밭도 가꾸기 시작했다. 현재 ‘사이 좋은 어린이 집’에는 어린이 25명이 지내고 있으며 전담 교사 4명, 조리사 1명이 있다. 같은 시기, 같은 장소에서 취학 어린이를 돌보는 ‘방과 후 어린이 교실’도 운영하게 됐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저학년 어린이 21명이 생활하고 있으며 전담교사도 3명이다. ‘사이 좋은 어린이 집’과 ‘방과 후 어린이 교실’에 참여했던 공동육아협동조합 구성원들은 지난해 4월부터 공동육아의 취지를 살릴 수 있는 대안학교를 세우기 위해 구체적인 논의에 들어갔다. 수원 대평중학교 박정근(47) 교사를 수원 칠보산 자유학교 설립 추진위원장으로 추대하고 1년간 학교 개교를 준비했다. 공동육아의 개념을 이해하고 아이들을 돌볼 수 있는 전담 교사 3명도 선발했다. 수원 지역에서 참여를 희망하는 학부모를 찾기 위해 인터넷을 통한 홍보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공동육아에 참여했던 어린이 7명과 다른 학교에서 전학 온 어린이 5명, 총 12명의 어린이가 이 학교에 재학 중이다. 이중 남매·형제가 함께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가 6명이다. 학부모들은 대학 교수, 의사, 중·고 교사, 대기업 간부, 소설가 등 대부분 중산층이다. 정기적인 학부모 모임도 열어 이들의 관계는 매우 돈독하다. 수원 칠보산 자유학교도 학부모가 한 아이에 400만원, 두 아이는 500만원을 출자해 세운 학교다. 출자금액의 80%는 어린이가 졸업할 때 다시 회수하고 20%는 교육발전을 위해 지속적으로 투자하겠다는 것이 이 조합의 생각이다. 학부모들은 등록금 형태로 한 어린이당 매월 30만원을 내 학교를 운영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 칠보산 자유학교는 물론 학력인정을 받는 학교는 아니다. 중학교에 진학하려면 검정고시를 봐야 한다. 수원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학교설립 주역 박정근선생님 “나의 아이를 누군가에게 맡기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아이를 함께 키우는 것이 공동육아의 철학입니다.” 칠보산 자유학교 설립 추진위원장으로 활동했던 대평중학교 박정근(47) 교사는 “교육을 중심으로 서수원 지역에 더불어 사는 공동체가 형성된 것이 칠보산 자유학교 개교의 의미”라고 설명했다. 여성의 사회 진출이 늘고 육아·탁아에 대한 학부모들의 기대치는 높아졌지만 사회 시스템이 이를 따라가지 못하는 현실에서 육아·탁아·보육·교육의 기능을 모두 담당할 공동체라는 것이다.30대 맞벌이 부부를 중심으로 수원 지역에서 시작된 육아 모임이 우리나라 교육의 작은 이정표를 세울 대안학교를 탄생시킨 셈이다. 박 교사는 “우리의 아이를 함께 키우는 공동육아 모임을 통해 바른 가정, 좋은 부모의 역할에 대해서 고민하고 자연 속에서 더불어 살아가는 자세도 배울 수 있었다.”고 말했다. 우리 아이에게 더 나은 생활환경, 더 깨끗한 먹을거리, 더 좋은 교육을 시키고자 하는 학부모들의 바람은 자연스럽게 친환경 교육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졌다. 박 교사는 환경에 관심이 있는 수원 지역 교사를 중심으로 ‘도토리 교사 모임’도 활성화할 계획이다. 장기적으로 수원 칠보산 학교를 학부모와 학생들의 손으로 직접 먹을거리를 재배하는 친환경 교육환경 학교로 만들겠다는 것이다. 이 학교는 다음달 칠보산과 더 가까운 곳으로 이사할 준비를 하고 있다. 학교 구성원들이 모두 2∼3평의 텃밭을 분양받아 논과 밭을 가꾸기 위해서다. 박 교사는 “교육을 중심으로 모인 공동체가 지속적으로 지역사회와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과 더불어 살아가는 교육 환경을 만들고 공동체 기금을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의 교육을 위해 사용할 것”이라고 말했다. 수원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 加법정 선 기러기아빠

    ‘태평양을 건넌 사랑의 매’ 캐나다 밴쿠버에 부인도 포함해 고교생인 딸과 아들을 유학보낸 한국의 기러기아빠가 16세 아들에게 회초리를 들었다가 법원으로부터 보호관찰 명령을 받는 사건이 발생했다. 캐나다 일간 글로브 앤드 메일은 12일(현지시간) 이 사건을 ‘한국인 아버지의 회초리 교훈’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굴지의 기업 최고 경영자인 이 아버지는 2002년 아내와 남매를 밴쿠버에 보내고 자신은 자주 방문해 자녀들 학업을 점검해왔다. 지난 1월7일 그는 아들이 수업을 빼먹고 늦게 귀가하거나 어머니에게 대든다는 얘기에 회초리를 들어 100대를 때렸다. 아들은 ‘한국으로 데려가겠다.’는 아버지 말을 듣고 용서를 빌어 위기를 모면했으나 아버지가 귀국한 지 닷새만에 다시 수업을 빼먹기 시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같은 달 19일 캐나다로 득달같이 날아와 다시 회초리를 들었다. 무려 3시간 동안 ‘사랑의 매’를 맞은 아들은 걸을 때 마치 노인처럼 걸었고 매사에 풀이 죽어 있어 이를 이상히 여긴 학교에서 경위를 묻게 됐고 아들은 “300대 정도 맞았고 아버지가 200대를 더 때릴 것 같아 두려웠다.”고 털어놓았다. 아들은 처음엔 무릎을 꿇고 있었고 나중에는 ‘푸시업’ 자세를 취하기도 했다고 진술했다. 학교 신고로 경찰에 체포돼 법정에 선 아버지는 “사랑의 매일 뿐이었다.”면서 “한국 가정의 전통적인 교육 방식”이라고 진술했다. 그러나 캐나다에선 자녀 체벌도 불법으로 처벌된다. 검찰은 6개월 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은 자녀교육 등 정상을 참작,2년의 보호관찰을 선고하면서 아동학대 구호기관에 2500달러 기부,‘사랑의 매’를 주제로 현지 교민신문에 기고할 것 등을 명령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은 “어린이를 그렇게 구타한 것은 심각한 사안”이라며 판결에 이의를 제기하는 등 한국인의 교육방식을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 교민은 “아들 교육비로만 연간 2만 7000달러(2700만원)를 송금했던 아버지 입장을 이해할 수 있다.”고 동정론을 폈지만 교민사회도 크게 당황해하고 있다. 현재 남매는 홈스테이 가정에서 학업을 계속 중이지만 이 사건으로 정신적인 충격을 받은 어머니는 남편과 함께 귀국해 치료를 받고 있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임병선기자 bsni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현대家 ①-창업주 故정주영회장 일가

    보는 이마다 다르겠지만 현대를 삼성보다 앞세우는 사람들은 현대의 창업 정신을 강조한다. 현대는 남이 일궈놓은 기업을 인수하기보다는 밑바닥에서부터 하나하나 주춧돌을 올렸다. 건설이 그랬고, 자동차가 그랬으며, 중공업이 그랬다. 창업주인 고(故) 정주영 회장은 이를 평생의 긍지요, 자랑으로 여겼다. 서슬 퍼렇던 군사정권 시절, 국보위(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에 끌려가서도 “사정상 어쩔 수 없었던 인천제철만 제외하고는 어느 하나 내 손으로 말뚝을 박고 길을 닦아 시작하지 않은 공장이 없다.”며 기업 강제 통·폐합에 맞섰을 정도였다. 1947년 5월25일 서울 중구 초동의 허름한 자동차 수리공장 한 귀퉁이에 ‘현대토건사’라는 간판을 내건 지 60여년. 삼성보다 10년 가까이 늦은 출발이었지만 현대는 이내 1위 기업으로 우뚝 섰고,‘경영권 다툼’이 일어났던 2000년까지 그 지위는 차돌만큼이나 단단했다. 이때 현대그룹의 자산규모가 87조여원. 계열사 수만 40개가 넘었다. 비록 그룹이 쪼개지면서 외형상의 규모가 작아지고 재계 서열은 떨어졌지만, 경제 전문가들은 ‘전화위복’이라고 입을 모은다. 자동차(현대차그룹), 유통(현대백화점), 해운·제조(현대그룹), 조선(현대중공업), 금융(현대해상·현대기업금융) 등 각자 전문그룹의 길로 나서면서 경쟁력은 더 강화되고 동반 부실의 위험은 현격히 줄었기 때문이다. 덕분에, 다른 그룹들이 이제서야 계열분리 등으로 홍역을 앓는 동안 현대의 대표주자들은 세계를 상대로 싸우고 있다. 현대산업개발,KCC, 한라, 성우 등 창업주의 형제들이 이끄는 그룹들도 각자 독자영역을 굳혀가고 있다. 언뜻 봐도 느껴질 만큼 현대에 뿌리를 대고 있는 기업들은 유난히 굴뚝업종이 많다. 고용된 인원과 딸린 부품·협력업체가 많다는 얘기다. 국민경제 기여도로 따지면 현대가 여전히 1위라는 말은 그래서 나온다. 또 한 가지, 현대를 얘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있다. 바로 ‘현대정신’이다. 현대에는 일단 해보자며 덤비는 정신, 밀어붙이는 힘이 있다. 때로는 비합리성을 낳기도 하지만 현대맨들은 이를 “맨바닥에서부터 기업을 일군 현대만의 저력”이라고 자부한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는 이를 “진정한 기업가(起業家) 정신”이라고 불렀다. 제각각 ‘마이 웨이’를 걷고 있는 오늘날의 현대가를 묶는 보이지 않는 끈이기도 하다. ●담(淡)한 혼맥… 후한 연애결혼 다른 재벌가에 비해 현대의 혼맥은 의외로 소박하다. 낭만을 즐겼던 고 정 회장이 자식들의 연애에도 너그러웠던 영향이 가장 크다.‘왕 회장’이라는 별칭으로 더 자주 불렸던 그 자신, 강원도 통천의 평범한 고향처녀(변중석)와 결혼해 평생을 함께했다. 슬하에 9남매(8남1녀)를 두고 동생이 일곱(한명은 어려서 사망)이나 됐지만 눈에 띄는 혼사는 손가락을 꼽는다. 직계가족 중에 굳이 꼽자면 다섯째아들 고 몽헌(MH)씨와 여섯째아들 몽준(MJ)씨를 들 수 있다. 몽헌씨는 신한해운 현영원 회장의 딸 정은씨와, 몽준씨는 김동조 전 외무장관의 막내딸 영명씨와 각각 결혼했다. 오랜 세월 재계를 주름잡았던 현대의 위상에 견줘 혼맥이 조촐한 데는 창업주의 성공과정과도 무관치 않다.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나 부두 막노동꾼을 거쳐 대기업 총수에 오른 그는 살아생전 “세상에 공짜란 없다.”며 담(淡)한 마음을 갖자고 입버릇처럼 강조하곤 했다. 권력이나 부(富)를 결코 싫어하지 않았지만 굳이 혼사줄까지 대가며 공짜를 탐할 이유 또한 없었던 것이다. 정략결혼의 흔적이 적은 대신에 유난히 많은 손(孫)과 맞닥뜨리는 게 현대라는 집안이다. 이런 현대가 대(代)를 건너뛰면서 LG, 롯데, 한진, 이건, 비비안 등 내로라하는 그룹들과 사돈을 맺은 점은 흥미롭다. 현대가의 2세들이 ‘몽(夢)’자 돌림이라면 3세들은 딸이 ‘이(伊)’, 아들은 ‘선(宣)’자 돌림을 쓴다.4세는 ‘진’자(딸),‘창’자(아들) 돌림이다. ■ 현대의 핵심축 아들들 ●장남 몽필… 쌍용가와 인연 큰아들 몽필씨는 나이 50도 안돼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국영 적자기업 인천제철을 인수해 정상화에 여념이 없던 1982년 4월 어느날, 울산에서 서울로 올라오던 고속도로에서 그가 탄 승용차가 트레일러를 들이받았다. 이 때가 마흔아홉살. 수도여대 출신의 부인 이양자씨와 두 딸 은희·유희씨는 망연자실했다. 몽필씨가 떠난 지 한달 뒤, 정주영 회장은 동서산업 공장장이던 이영복씨를 사장으로 파격 승진시켰다. 이씨는 몽필씨의 처남, 즉 이양자씨의 친동생. 졸지에 가장을 잃은 장남 가족에 대한 배려였다. 하지만 이양자씨마저 91년 위암으로 눈을 감고 말았다. 큰딸 은희씨는 최근 미국에서 귀국했다. 둘째딸 유희씨는 김석원 쌍용양회 명예회장의 장남 지용씨와 결혼해 두 아들(진석·진하)을 두었다. 지용씨는 현재 용평리조트 상무를 맡고 있다. ●2남 몽구… 글로벌 현대차그룹 리더 몽필씨의 죽음으로 사실상 집안의 장남 역할을 도맡아 한 이는 둘째아들 몽구(MK)씨였다. 유희씨가 결혼할 때 부모 역할을 대신 한 사람도 몽구씨 부부였다. 현대정공(현 현대모비스) 사장 시절,‘갤로퍼 신화’를 만들어낸 그는 기아차마저 인수해 지금의 현대·기아차 그룹을 이끌고 있다.2000년 자동차전문 그룹으로 출범한 지 몇 년도 안돼 그룹을 세계 6위의 반열에 올려놓았다. 출범 당시 10개였던 계열사 수는 28개로 불어났다. 그룹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지난해보다 17% 늘어난 85조원. 세계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미국의 ‘소비자 보고서(컨슈머 리포트)’는 최근 현대차의 뉴쏘나타를 세계에서 가장 결함이 적은 차로 선정했다. 갤로퍼 신화 때부터 MK가 강조해온 ‘품질 경영’의 힘이다. MK는 평범한 집안의 딸 이정화씨와 결혼해 3녀1남을 두었다. 큰딸 성이씨는 저명한 정형외과 의사이자 영훈의료재단을 설립한 고 선호영 박사의 아들 두훈씨와 결혼했다. 둘째딸 명이씨는 정경진 종로학원장의 아들 태영씨와, 셋째딸 윤이씨는 미국 MBA(경영학석사) 출신인 신성재씨와 결혼했다. 둘째사위와 셋째사위는 그룹 계열사인 현대카드·캐피탈 사장, 현대하이스코 사장을 각각 맡고 있다. 막내이자 외아들인 의선씨는 지난 11일 기아차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그룹내 직함은 현대·기아차기획총괄본부 담당 사장으로 기아차의 기획, 재무, 수출, 연구·개발(R&D) 등 핵심 업무를 관장하고 있다. 일찍 결혼해 슬하에 1남 2녀를 두고 있다. 부인은 정도원 강원산업 부회장의 큰딸 지선씨다. ●3남 몽근… 소리없이 유통명가 키워 셋째아들 몽근씨는 일찌감치 유통을 넘겨받아 현대백화점 그룹을 이끌고 있다.‘빅3’(MK·MH·MJ)에 가려 조명은 덜 받았지만, 묵묵히 외길을 걸으면서 소리없이 유통 명가로 키워낸 주인공이다. 현대백화점, 현대H&S(非 백화점 계열), 현대홈쇼핑 등 주력 계열사를 토대로 지난해 5조 500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전문 최고경영자(CEO)들이 소신있게 일을 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만들어 주면서도 거의 매일같이 매장을 둘러봐 조직에 긴장감을 불어넣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바로 위 형 몽구씨와는 고등학교(경복고)-대학교(한양대) 동문인 데다 선굵은 외모까지 비슷하다. 옛 현대그룹에서 고문을 지낸 우호식씨의 딸 경숙씨가 부인이다. 두 아들은 각각 부회장, 기획담당 이사로 경영에 참여하고 있다. 큰아들 지선씨는 고 황산덕 전 법무장관의 손녀인 서림씨와 결혼했다. 둘째아들 교선씨는 자동차부품 전문기업인 대원강업 허재철 부회장의 큰딸 승원씨와 지난해 말 깜짝 결혼식을 올렸다. 교선씨의 결혼식에는 큰아버지인 정몽구 회장을 비롯해 집안 어른들이 대거 참석해 모처럼 우애를 다지기도 했다. 현대가는 한때 딸만 남기고 떠난 몽필씨의 대를 잇기 위해 지선씨를 양자로 입양하는 방안을 의논했었다. 유교식 법도대로라면 바로 아래 동생인 몽구씨의 아들을 입양해야 했으나 의선씨가 외아들인 탓에 지선씨가 선택된 것. 하지만 세간에 알려진 것과 달리 실제 입적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주영 회장의 장례식때 의선씨가 ‘종손’ 자격으로 고인의 영정을 든 것은 이 때문이었다. ●외사위 희영… 천마산스키장 운영, 이건·비비안과 사돈 현대가는 자손이 많은데도 딸은 귀한 편이다. 외동딸 경희씨는 일본 유학까지 다녀온 재원. 그러나 바깥 활동은 없다. 대신 남편(정희영)이 선진종합㈜ 회장이다. 공교롭게 고 정주영 회장의 여동생 희영씨와 이름이 똑같다. 서울대 상대 출신으로 1965년 현대건설 공채로 입사했다. 이명박 서울시장이 입사 동기다. 조선 수주에서 뛰어난 수완을 발휘, 창업주의 눈에 들어 사위가 됐다. 정주영 회장은 딸 경희씨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자 희영씨를 도쿄법인 이사로 발령내 자연스러운 교제를 유도했다고 한다. 이후 희영씨는 조그만 해운회사(선진해운) 하나를 갖고 독립, 장인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천마산 스키장은 오롯이 그가 독립해 만든 회사다. 외아들 재윤씨가 선진종합㈜ 상무다. 두 딸은 각각 이건그룹과 비비안그룹으로 시집갔다. 큰딸 윤미씨의 남편이 이건창호 박승준 상무, 둘째딸 윤선씨의 남편이 비비안 남석우 부회장이다. ●4남 몽우… BNG스틸 통해 부활 넷째아들 몽우씨는 숙명여대를 떠들썩하게 했던 ‘미인’ 이행자씨와 연애결혼했다.40대에 현대알루미늄 회장을 맡은 그는 그러나 심한 우울증을 앓았다. 결국 1990년 4월 45세의 젊은 나이에 서울 시내 한 호텔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남겨진 유족을 돌보는 일도 사실상의 장남 몽구씨의 몫이었다. 조카 셋을 모두 현대차그룹의 계열사인 BNG스틸(전 삼미특수강)에 입사시켰다. 큰조카, 즉 몽우씨의 장남인 일선씨는 경영능력을 인정받아 최근 BNG스틸 대표이사 사장으로 승진했다. 일선씨에 이르러 비로소 현대는 내로라하는 재벌가와 사돈관계를 맺는다. 일선씨의 부인은 구자엽 희성전선 부회장의 딸 은희씨다. 구 부회장은 구태회 LG전선 명예회장의 아들이자 구인회 LG그룹 창업주의 조카이다. 일선씨의 동생 문선씨는 김영무 김&장 법무법인 대표변호사의 딸 선희씨와 결혼했다. ●5남 몽헌… 못다 이룬 꿈, 현 회장이 힘찬 날갯짓 ‘비운의 황태자’ 몽헌씨는 1998년 그룹 공동 회장으로 취임하면서 화려한 비상을 시작했다.1983년 현대전자(현 하이닉스반도체)를 설립해 4년 만에 흑자로 돌려놓으면서 아버지 정주영 회장의 두터운 신임을 끌어냈다.2000년에는 형들을 제치고 그룹 단독 회장에 추대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북 송금’ 사건에 연루돼 검찰 조사를 받던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하고 2003년 8월4일 서울 계동사옥에서 몸을 던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부인 현정은씨가 경영에 뛰어들었다. 급작스러운 남편의 죽음으로 황망히 그룹을 물려받았지만 사업가 집안의 딸답게 배포와 합리적 리더십으로 1년 만에 그룹을 정상궤도에 올려놓았다. 사상 최대 호황을 누리고 있는 현대상선, 올해 첫 흑자를 넘보고 있는 현대아산, 주가 1000시대의 수혜주 현대증권 등을 축으로 재계 10위권 진입(현재 19위)을 눈앞에 두고 있다.2010년까지 매출 20조원을 달성해 10위권에 진입한다는 ‘2010’ 프로젝트를 가동중이다. 현 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이 직접 ‘점지한’ 며느리로도 유명하다. 현 회장이 인터넷 홈페이지에 올린 결혼 뒷얘기는 이렇다.“당시 현대상선 회장이던 아버지(현원영)를 따라 선박 명명식차 울산에 내려갔다가 남편을 처음 만났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명예회장(정주영)께서 나를 선보러 미리 내려오셨었다. 명예회장께서 중매를 서신 셈이다.” 큰딸 지이씨는 현대상선 재정부 대리로 근무 중이다. 아버지를 잃었을 때 고3 수험생이었던 외아들 영선씨는 졸업후 미국 유학을 준비중이다. ●6남 몽준… 세계1위 현대중공업 ‘건조’ 지금은 정치인의 이미지가 더 강하지만 세계 일류 현대중공업의 뒤에는 기업인 몽준씨가 있다. 형제중에 학벌(서울대-미국 MIT 경영대학원)이 가장 좋아 ‘신문대학’(소학교만 졸업한 정주영 회장은 신문을 통해 지식의 대부분을 얻었다며 자신을 신문대학 출신이라고 소개하곤 했다) 출신인 왕 회장이 유난히 예뻐했다는 몽준씨는 31세에 현대중공업 사장으로 전격 발탁되면서 집중 조명을 받았다.1988년 금배지를 처음 달면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를 시도했다. 경영은 CEO에게 맡기고 자신은 대주주로서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만 내리고 있는 것. 지금도 현대중공업의 어떤 직함도 갖고 있지 않다. 공식 직함은 5선의 국회의원이자 축구협회 회장. 아버지의 뒤를 이어 2002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현대중공업의 올해 매출 목표액은 10조원. 웬만한 그룹과 맞먹는다. 부인 김영명씨와는 미국 유학시절에 만나 결혼했다. 큰아들 기선씨는 연세대 경제학과를 나와 올해 학사장교(ROTC)로 임관했다. 이로써 부자(父子)가 ROTC 선후배가 됐다. 두 딸 남이씨와 선이씨는 미국 유학 중이다.‘월드컵 베이비’로 유명한 늦둥이 아들 예선씨는 초등학교 4학년이다. 우리나라가 98년 프랑스 월드컵 예선전을 최종 통과한 것을 기념해 이름을 ‘예선’으로 지었다고 한다. ●7남 몽윤… 현대해상으로 컴백 몽윤씨는 지난해 말 업계 2위의 손해보험회사인 현대해상의 등기이사 겸 이사회 의장으로 돌아왔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지 8년 만의 전격 복귀였다. 방카슈랑스(은행상품과 보험상품의 교차판매) 확대 시행 등 변화하는 금융환경에 맞춰 공격적인 경영 행보를 보이고 있다.1981년 김진형 부국물산 회장의 딸 혜영씨와 연애결혼해 정이양과 경선군을 두었다. ●8남 몽일… 할부금융으로 내실 막내아들인 몽일씨는 미국 조지워싱턴대학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 마친 뒤 현대상사 등에서 근무하다가 2000년 현대기업금융을 차려 독립했다. 기업대출 등을 주로 취급하는 회사다. 권영찬 현대파이낸스 회장의 딸 준희씨와 결혼해 고등학생인 현선(영국 유학중)군과 중학생인 문이양을 두고 있다. ■ 현대의 또 다른 축 형제들 고 정주영 회장의 형제들은 동생이기 이전에 창업 동지요, 사업 동료였다.6·25전쟁 직후 고령교(대구와 거창을 잇는 교량) 복구 공사를 덜컥 떠맡았다가 부도 직전까지 내몰렸을 때, 내남없이 살던 집을 팔아 돈을 내놓은 것도 동생들과 매제였다. 이 때문에 20명이 넘는 대식구가 한 집(돈암동)에 모여 살아야 했지만 누구 한 사람 불평하지 않았다. 지금은 모두 독립해 각자의 그룹을 이끌고 있다. ●옛 영화 꿈꾸는 한라·성우 동아일보 외신부 기자로 활동하던 첫째 동생 인영씨는 1953년 현대건설 전무로 입사하면서 경영에 본격 합류했다.75년 말 중동 진출 때 신중론을 펴 형과 이견을 빚을 때까지 그룹의 초석을 닦았다. 당시 독립해 만든 한라그룹은 한라건설·한라시멘트·한라중공업·만도기계 등을 거느리며 재계 서열 12위로까지 도약했다. 그러나 외환위기 때 자금난이 가중되면서 그룹이 부도나는 시련을 겪었다. 지금은 둘째 아들 몽원씨가 한라건설 회장을 맡아 재기를 꿈꾸고 있다. 큰 아들 몽국씨는 94년 아버지가 동생을 그룹 후계자로 지목하자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 한때 배달학원 이사장을 맡았으나 지금은 개인사업을 하고 있다. 부인 이광희씨는 배달학원 계열인 한라대 총장을 지내기도 했다. 현대시멘트·성우종합건설·성우리조트·현대종합금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는 성우그룹은 둘째 동생 순영씨 일가가 이끌고 있다. 순영씨는 명예회장으로 물러앉고 2세 경영을 정착시켰다. 큰아들 몽선씨가 현대시멘트와 성우종합건설을, 둘째아들 몽석씨가 현대종합금속, 셋째아들 몽훈씨가 성우전자, 넷째아들 몽용씨가 성우오토모티브를 각각 맡고 있다. 몽선씨는 사촌인 정몽윤 현대해상 이사회 의장과 함께 정몽헌 회장의 부검을 임관하기도 했다. ●‘기계박사’가 일군 한국프랜지 자동차부품회사인 한국프랜지공업의 김영주 명예회장은 고 정주영 회장의 유일한 매제다. 정주영 회장은 ‘이 땅에 태어나서’라는 두 번째 자서전에서 “그가 다가가기만 해도 기계가 저절로 고쳐졌다.”며 매제를 ‘기계박사’라고 불렀다.1946년 정주영 회장이 미 군정에서 불하받은 토지에 ‘현대’(현대자동차공업사)라는 상호를 처음 내걸었을 때, 감격적으로 지켜본 이도 영주씨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이로부터 몇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인기직종이던 운전기사 출신의 영주씨는 황해도 홀동광산에서 역시 운수업을 하던 정주영 회장과 뜻이 맞아 사업을 같이 도모했고, 매제까지 됐다. 부인 정희영씨는 2001년 정주영 회장이 노환으로 세상을 떴을 때 “대통령 한번 못해보고…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쩔거나.”하며 가장 서글프게 울었던 동생이다. 장남 윤수씨가 회사를 물려받아 한국프랜지공업 회장으로 있다. 둘째아들 근수씨는 독립해 울산화학·퍼스텍 등의 계열사를 거느린 후성그룹 회장을 맡고 있다. 윤수씨의 장남 용석씨가 프랜지공업 계열사인 서한산업(자동차부품회사) 대표이사 사장이어서 3세 경영체제를 갖춰 가고 있다. 둘째아들 용범씨는 이름을 용태로 바꿨다. ●‘포니 정’ 부자(父子)의 변신 ‘포니 정’이라는 별칭으로 유명한 넷째 동생 세영씨는 외아들 몽규씨와 함께 1999년 3월 현대그룹에서 독립해 건설시장에서 영역을 확실하게 굳혔다. 꼼꼼한 시공과 치밀한 분양으로 현대산업개발을 국내 도급순위 4위 업체로 키워놓았다.‘포니 정’이라는 별명은 1976년 누구나 불가능하다고 여겼던 국산 고유모델 자동차 1호 ‘포니’를 만들어낸 데서 붙여졌다. 이같은 열정과 헌신을 인정받아 87년 형에게서 현대그룹 회장직을 물려받기도 했다. 분가한 뒤로는 현대산업개발 경영에만 매달렸다. 몇 년 전 폐암수술을 받았지만 지난해 희수연을 치렀을 만큼 건강을 되찾았다. 회사 경영은 아들 몽규(회장)씨가 책임지고 있다. 지금의 서울 삼성동 사옥은 몽규씨가 직접 지었다. 지나칠 정도로 꼼꼼하다는 게 주위의 평가다. 현대가 맺은 최고위층 사돈도 세영씨 집안에서 나왔다. 큰딸 숙영씨가 노신영 전 국무총리의 장남 경수(서울대 교수)씨와 결혼한 것. ●“아… 신영아”-교통사고 아닌 병으로 요절 다섯째 동생 신영씨는 고 정주영 회장이 가장 자랑스러워했던 동생이다. 서울대를 나와 동아일보 기자로 있다가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함부르크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과정을 밟던 중 병으로 세상을 떠난 것이 1962년. 처음에 어떤 기자가 교통사고사로 쓰면서 오랜 세월 세상에 잘못 알려졌지만 정확한 사인은 지병이라고 유족은 본지에 밝혔다. 당시 잠자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잠시도 일에서 떠나본 적이 없는 정주영 회장이 일주일을 손놓았을 만큼 가족의 슬픔은 컸다. 서울대 음대 출신의 첼리스트였던 미망인 제수씨(장정자)에게 현대학원(현대고)을 경영토록 했다. 지금도 현대학원 이사장을 맡고 있는 장정자씨는 남북이산가족 상봉때 대한적십자사 부총재로 남한측 방문단장을 맡았었다. 장홍선 전 극동도시가스 회장의 누나다. 신영씨는 1남1녀를 두었다. 아들 몽혁씨는 32살의 젊은 나이에 현대정유(현 현대오일뱅크) 대표이사로 취임해 인천정유(구 한화에너지)를 인수하고 오일뱅크라는 브랜드를 만드는 등 두각을 드러냈다. 그러나 외자유치와 함께 2002년 전문경영인에서 물러나 그 해 건축자재 유통회사 ‘에이치애비뉴앤컴퍼니’를 설립해 돌아왔다. 부인 이문희씨는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은 동원 이홍근 선생의 손녀이다. 사업가이자 문화재 수집가였던 동원 선생은 평생 모은 문화재 4941점을 1980년 국립중앙박물관에 기증했다. 딸 일경씨는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블룸버그대학 회계학과 교수인 남편 임광수씨와 함께 미국에서 살고 있다. ●‘리틀 정주영’이 이끄는 KCC 막내동생인 상영씨는 ‘불에 타지 않는 바닥재’ 등으로 유명한 자재 전문그룹 KCC를 이끌고 있다. 불도저 같은 추진력과 성격 등이 고 정주영 회장을 가장 많이 닮아 ‘리틀 정주영’으로 불린다. 큰형과 나이 차이가 21살이나 나 아버지처럼 따랐다. 장조카 몽구씨와도 2살밖에 차이나지 않는다. 또 다른 조카인 고 정몽헌 회장이 자금난에 몰렸을 때 200억원을 선뜻 내놓았을 만큼 의리도 강하다. 그러나 조카의 죽음 이후 현정은 회장과 경영권 다툼을 벌이면서 다소 빛이 바랬다. 그룹 경영은 두 아들에게 맡긴 상태다. 큰아들 몽진씨가 대표이사 회장, 둘째아들 몽익씨가 대표이사 부사장이다. 셋째아들 몽열씨는 계열사인 금강종합건설 사장을 맡고 있다.KCC는 몽익씨를 통해 롯데·한진그룹과 사돈으로 연결된다. 몽익씨의 부인 은정씨가 신격호 롯데그룹 회장의 외조카(신 회장의 여동생인 정숙씨의 딸)이다. 은정씨의 언니 은영씨는 한진해운 조수호 회장의 부인이다. 몽익씨와 조 회장이 동서지간인 셈이다. ●현대가의 여자들 현대가의 딸이나 며느리들은 ‘소리’가 나지 않는다. 이화여대(정경희-이양자-현정은-김혜영-정유희 등) 출신에 해외유학(김영명-정지선-황서림-허승원 등)까지 다녀온 재원들이 적지 않지만 경영에 참여하거나 대외활동에 나서는 사람이 거의 없다. 하다못해 남편을 따라 공식행사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도 드물다. 유일한 경영자인 현정은씨도 남편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는 ‘전업주부’였다. 오너 일가를 가까이서 들여다본 한 관계자는 “지금도 명절 때면 청운동 집(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오랫동안 살던 집)에 몇 대에 걸친 며느리들이 모두 모여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며 음식을 직접 장만한다.”면서 “옷차림들도 수수하고 인상이 소박해 언뜻 봐서는 재벌가 며느리란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고 전했다. 그러면서도 한결같이 미인들이다. 어떤 이는 그 이유를 ‘유난히 많은 연애결혼’에서 찾는다. ●그룹분리 가속화시킨 ‘경영권 분쟁’ 2000년 ‘형제간 다툼’은 현대가를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핵분열시킨 결정적 계기였다.99년 12월 마지막 날, 고 정몽헌(MH) 회장쪽 인사로 분류되던 박세용 당시 그룹 구조조정본부장이 정몽구(MK) 회장 계열의 현대차 회장으로 전격 발령나면서 시작된 형제간의 경영권 갈등은 그룹 후계자로 MH를 지목한 고 정주영 회장의 육성 테이프가 공개되기까지 석달여에 걸쳐 숨막히게 전개됐다. 효심이 남달랐던 MK는 아버지의 육성이 공개되자 깨끗이 승복하고 자동차 계열사를 이끌고 그룹에서 나왔다. 이 과정에서 아픔도 적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 현대의 지배구조를 선진화시키는 데 일조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오는 21일 왕 회장의 4주기에 모처럼 형제들 모두가 함께 제사를 지낼 예정이다. 이날은 공식적으로 가족화합이 됐음을 안팎에 알리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현대가에 정통한 소식통은 전했다. hyun@seoul.co.kr ■ 정주영 회장의 ‘빈대론’ 창업주인 고 정주영 회장은 ‘해당화가 찬란하고 눈(雪)이 많은’ 강원도 통천군 송전면에서 1915년 6남 2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죽어라고 일해도 콩죽을 면할 길이 없는 농군이 진절머리나게 싫고 지겨워”(첫번째 자서전 ‘시련은 있어도 실패는 없다’에서) 소학교를 졸업한 열네살 무렵부터 줄기차게 가출을 시도했다. 무작정 길을 나서 보기도 하고, 아버지의 소 판 돈을 훔쳐도 봤다. 그러기를 네번째. 열아홉살 마지막 가출에 성공해 인천부두 막노동꾼으로 새 삶을 시작했다. 한 푼이 아까워 몸을 기댔던 곳이 노동자 합숙소. 뼈가 으스러지는 중노동으로 누가 떠메고 가도 모를 만큼 고단했지만 좀체 잠을 잘 수가 없었다. 빈대들의 공격 때문이었다. 궁리 끝에 밥상 위에 올라가 잠을 잤다. 빈대들의 공격이 잠시 뜸해지는 듯싶었다. 하지만 이내 밥상다리를 타고 기어올라와 온 몸을 물어 뜯었다. 다시 머리를 써야 했다. 무릎을 탁 칠 만한 묘안이 떠올랐다. 밥상다리 네 개를 물 담은 양재기 넷에 하나씩 담근 뒤 그 위에 올라가 잔 것이다. 빈대를 밥상다리로 유도해 양재기 물에 익사시키자는 계략이었다. 쾌재를 부른 것도 이틀여. 빈대들은 또다시 물어뜯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떻게 양재기 물을 건넌 것일까. 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불을 켜본 젊은 정주영 회장은 기겁을 하고 말았다. 빈대들이 밥상다리 대신 벽을 타고 천장으로 올라가 사람을 겨냥해 뚝 떨어져 목적 달성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역경에 부딪칠 때마다 정주영 회장은 ‘빈대의 노력’을 떠올렸다.“난관은 극복하라고 있는 것이지, 걸려 넘어지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든지 “빈대만도 못한 놈”이라는 단골 지청구는 모두 여기서 비롯됐다. 아무것도 없는 백사장(울산 염포리) 사진 한 장 달랑 들고 조선소 투자금액을 유치할 때나,20세기 최대 역사(役事)로 꼽히던 중동 주베일 공사 입찰전에 뛰어들 때나, 직원들이 불가능하다고 도리질칠 때면 “이봐, 해봤어?”라고 불호령을 쳤던 것도 빈대의 집요한 노력을 떠올리면서였다. “자본가가 아니라 부유한 노동자일 뿐”이라고 스스로를 정의했던 정주영 회장은 근검과 노력을 평생의 신조로 삼았다. “시간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평등한 자본금” “한강에 기적은 없다. 성실하고 지혜로운 노동이 있을 뿐” “고선지부지설(苦蟬之不知雪;여름철 서늘한 나무 그늘에 앉아 노래만 하다 겨울이 오기 전에 없어지는 매미는 한겨울 펑펑 쏟아지는 눈을 알 수 없다)” ‘아산 정주영 어록’에 실려있는 그의 유명한 말들이다. hyun@seoul.co.kr ■ ‘현대家 대모’ 변중석 여사 열여섯살에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여섯살 연상의 고향총각 정주영에게 시집온 변중석씨는 현대가의 산 증인이다. 올해로 84세. 젊어서 남편이 사준 재봉틀 하나를 자신 소유의 유일한 재산으로 여기며 한결같은 근검과 후덕함으로 ‘현대가의 여자’라는 상징 이미지를 만들어냈다. 고 정주영 회장이 매일 새벽 5시의 ‘밥상머리 교육’을 통해 동생들과 자식들에게 근검을 가르쳤다면, 변씨는 새벽 3시반부터 손아래 동서·며느리들과 아침 준비를 함께 하면서 “언제나 조심스럽게 행동하고 겸손하라.”고 일렀다. 가혹하리만치 자식 교육에 엄격했던 정주영 회장이 아이들을 자가용으로 등교시키는 며느리들을 보고 “젊었을 때 콩나물 버스에 시달려봐야 나중에 자가용을 샀을 때의 기쁨을 안다.”며 역정을 내자 “손주녀석들 키우는 문제에까지 시아버지가 잔소리를 할 거냐.”며 막아준 이도 변씨였다. 칭찬에 인색했던 정주영 회장도 아내를 가리켜 “늘 통바지 차림에 무뚝뚝하지만 60년을 한결같고 변함이 없어 존경한다.”고 자서전에서 고백했을 정도다.“아내를 보며 현명한 내조는 조용한 내조라는 생각을 굳혔다.”고도 했다. 그러나 자식을 먼저 땅에 묻는 참척의 고통과 여자로서의 마음고생을 거치면서 ‘살아있는 보살’도 탈이 났다. 거동이 불편해 10년 가까이 병원(현대아산병원)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상 맏며느리인 이정화씨 등 며느리들이 틈날 때마다 병실을 들여다보고 있다. hyun@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오빠보다 멋있는 해군되겠습니다”

    해군사관학교 출신의 첫 남매 해군 장교가 배출됐다. 11일 해사(59기) 졸업과 동시에 임관한 이현주(사진 왼쪽·23) 소위의 친오빠 이창현(사진 오른쪽·26) 중위는 해사 57기로 현재 고속정 참수리호 부장으로 근무중이다. 이 소위는 해사 생도였던 오빠의 멋진 모습에 매료돼 해군 장교가 되기로 결심하고 고교 때부터 준비해 온 끝에 꿈을 이뤘다. 2년간 사관학교를 같이 다닌 남매에게는 말 못할 어려움도 많았다. 동생은 혹독한 훈련이 힘들어 오빠를 찾아가면 오히려 따끔한 충고를 듣고 눈물을 삼켜야 했다. 사소한 의견도 허심탄회하게 나눌 만큼 친근한 오빠였지만 동생이 강인한 해군 장교가 되도록 공과 사를 엄격하게 구분한 것이다. 이 소위는 “4년 간의 배움을 바탕으로 오빠보다 더 멋있고 훌륭한 장교가 되겠다.”고 말했다. 이번 졸업식에서 영예의 대통령상은 여성 생도에게 돌아갔다. 주인공인 정은숙(23) 소위는 해군 고정익 항공기 조종부문을 지망했으며, 해군 항공전단장이 꿈이다. 1학년 때부터 1,2등을 놓치지 않을 만큼 학업성적이 우수했으며, 조정 대표선수로로 활동했다. 정 소위는 “해상 초계기(P-3C)와 링스(LYNX) 대잠헬기 조종사가 돼 바다와 하늘을 누비는 대양해군의 주역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40여년전 파리 ‘68세대’의 자화상

    저마다 인생에서 전환기가 되는 순간을 맞닥뜨리는 것처럼 인류 공통의 역사에도 그런 시기가 있다.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의 가치관이 전세계적으로 격렬하게 충돌했던 1960년대가 바로 그런 시대였다. 베르나르도 베르톨루치 감독의 ‘몽상가들(The Dreamers·25일 개봉)’은 그 시대를 통과해온 노장 예술가가 동시대인들에게 바치는 헌사이자 절박함을 잃어버린 요즘 젊은 관객들에게 선사하는 희망의 메시지이다. 1968년 봄, 프랑스 파리. 혁명의 기운이 열병처럼 번지기 시작한 그곳에서 미국인 유학생 매튜(마이클 피트)는 쌍둥이 남매 이자벨(에바 그린)과 테오(루이스 가렐)를 만난다.‘영화광’이라는 공통분모를 지닌 이들은 이자벨의 부모가 여행을 간 사이 같은 아파트에서 동거하며 기묘한 삼각관계에 빠진다. 영화는 외부와 단절된 공간에서 스무살 세 청춘남녀가 벌이는 자유분방한 성적 유희를 대담한 시선으로 그려낸다.‘혁명을 생각할 때면 섹스하고 싶은 생각이 든다’는 ‘68혁명’의 슬로건처럼 이들의 과감한 성적 팬터지는 당대 젊은이들의 가치관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동시에 감성이 앞서는 이자벨, 말로는 혁명을 외치면서도 행동으로 표현하지 못하는 테오, 순수함과 냉철한 이성을 함께 지닌 매튜 등 저마다 뚜렷한 개성의 주인공들을 통해 40여년전 유토피아를 꿈꿨던 ‘몽상가들’의 다양한 면모를 환기시킨다. 원작은 길버트 아데어의 소설 ‘성스럽도록 순수한 그들’. 이탈리아 태생이지만 파리에서 청춘을 보낸 베르톨루치 감독은 아찔한 현기증이 일 정도로 혼란스러우면서도 자유와 희망의 기운이 만연했던 당시의 미묘한 공기를 거장다운 솜씨로 스크린에 복원해냈다. 도어즈, 제니스 조플린 등 반항의 상징인 록가수의 음악과 프랑소와 트뤼포, 장 뤽 고다르 같은 누벨바그 감독들에 대한 영상 오마주는 기성 세대에겐 아련한 향수를, 그리고 젊은 세대에게는 질투섞인 동경심을 불러일으킨다. 전신 누드와 파격적인 섹스신이 자주 등장함에도 질퍽하거나 천박하게 느껴지지 않는 건 베르톨루치 감독 특유의 에로티시즘이 갖는 힘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이자벨과 테오는 마침내 집 밖으로 뛰어나와 시위대에 합류한다. 이때 엔딩곡으로 흐르는 에디트 피아프의 샹송 ‘난 후회하지 않아’는 그 시대를 살아낸 모든 68세대들의 자부심에 찬 고백처럼 들린다.18세 관람가. 이순녀기자 coral@seoul.co.kr
  • ‘가슴 설렌 첫 등교’ 恨 풀다

    ‘가슴 설렌 첫 등교’ 恨 풀다

    “아침을 짓다 라디오에서 성인초등학교가 생긴다는 뉴스를 듣는 순간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습니다.” 7일 국내 최초의 초등학력인정 평생교육시설인 서울 대흥동 양원초등학교 입학식에서 김성자(가명·56)씨는 소리없이 울고 있었다. 가족 몰래 등록한 그는 취재진의 카메라를 피해 고개를 숙이고 구석에 앉아 있었다.“남편조차도 제가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는 걸 몰라요. 제 잘못으로 못배운 건 아니지만 늘 죄인처럼 살았죠.” 9남매 중 셋째로 태어난 그는 여자라서, 어린 동생들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로 학교에 갈 수 없었다. 동생들 어깨 너머로 한글은 대충 익혔지만 학교는 ‘꿈’이었다. 맞선 볼 때는 자신도 모르게 ‘중졸’이라는 거짓말을 했고 평생 마음의 짐을 지고 살았다.“절대 늦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꼭 대학까지 갈 겁니다. 오늘 기분 같아선 꿈이었던 소설가도 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날 입학한 280명 모두 못배운 설움, 배움에 대한 열정은 김씨 못지않았다. 최고령 입학자인 박중은(80)씨는 “손자가 ‘삼국지’를 읽는 것을 보면서 ‘이제라도 읽고 쓸 줄 알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용기를 냈다.”고 했다. 김기님(70)씨는 아버지 도장을 훔쳐 입학원서를 쓰려고 했지만 ‘네가 공부하면 우리 식구는 굶어죽는다.’는 아버지 얘기에 학업을 포기했다. 김씨는 “남편이 ‘무식하다.’고 면박을 줄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면서도 “지금은 남편이 가장 든든한 후원자”라고 눈물을 훔쳤다. 황해도에서 1·4후퇴 때 원주로 내려와 줄곧 농사일에 허리 펼 새가 없었다는 정정자(77)씨는 “연필도 잡을 줄 몰랐던 내가 학교라는 곳에 와 있는 것 자체만으로도 행복하다.”면서 “서울대도 갈 수 있다는 각오로 공부할 것”이라고 웃어 보였다. 배움의 열정은 물리적 거리나 시간도 막을 수 없었다. 경북 김천에 사는 박금숙(57)씨는 매일 새벽 5시 기차를 타고 등교를 할 계획이다. 장창순(45)씨는 운영하던 미용실을 정리하고 공부에만 매진할 생각이다. 늦깎이 공부는 당사자들뿐만 아니라 가족에게도 기쁨이었다. 오늘만큼은 회사 일보다 엄마의 새출발이 중요해 입학식에 나왔다는 나순애(63)씨의 딸 김은해(33)씨는 “어려운 집안 형편에 파출부 등 안 해본 일 없이 하시면서까지 자식들은 박사공부를 시켜 주신 자랑스러운 엄마”라고 고마워했다. 김씨는 “예순이 넘은 나이에 공부를 시작하는 엄마와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배움의 행복’을 맘껏 느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③-신세계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③-신세계그룹

    신세계그룹은 삼성그룹에서 계열분리한 기업들 가운데 가장 성공적인 케이스로 꼽힌다. 2004년 재계 서열 21위(자산 기준)로 한솔그룹(고 이병철 삼성 창업주의 장녀 이인희 고문, 재계 36위), 새한그룹(차남 고 이창희 회장, 워크아웃 중),CJ그룹(장손 이재현 회장, 재계 23위)보다 앞섰다. 창업주의 5녀(막내딸)인 이명희(62) 회장은 1997년 계열 분리 때 백화점과 조선호텔만 갖고 나왔다. 그리고 그룹을 국내 최고의 유통 ‘명가’로 키웠다. 삼성에서 떨어져 나온지 불과 7년만에 백화점과 할인점 이마트를 주축으로 한 유통사업 외에 신세계건설, 신세계푸드시스템, 조선호텔, 신세계인터내셔널 등 13개 계열사를 거느린 그룹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자신은 여성 캐피털리스트 1위를 고수하던 올케 홍라희(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부인) 호암미술관장을 제치고 2001년 이후 국내 최고의 여성 부호가 됐다. 이 회장은 삼성가(家)의 전통에서 벗어나지 않는 전형적인 정중동(靜中動) 행보의 오너다. 외부에 나서지는 않지만 소리없이 막후에서 회사의 중심을 잡으면서 방향을 제시하는 스타일이다. ●창업주의 귀여운 막내딸 이명희 회장은 창업주로부터 사랑을 가장 많이 받은 2세다.8남매(3남5녀) 중 막내딸이었으니 충분히 그럴 만했다. 삼성그룹 출신 인사들은 “고 이병철 회장은 늘 이 회장을 데리고 다녔다.”고 회고한다. 고 이병철 회장은 회장직을 물러난 뒤 1년에 네차례 정도 일본 도쿄를 방문했는데, 이때 항상 이인희 고문과 이 회장을 동행토록 했다. 큰언니인 이 고문은 이 회장보다 열네살 많다. 이 회장은 부친이 사무실에서 먹는 과일도 먼저 맛을 보고 부친이 좋아하는 정도의 당도인지 여부를 확인하고 들여보내곤 했다. 그래서 당시 고 이병철 회장 비서실팀 직원들은 사무실옆 간이 주방에서 꼼꼼하게 과일을 챙기는 이 회장을 두고 ‘감독관’이라고 수근댈 정도였다. 이 회장은 1943년생으로 이화여고를 거쳐 이화여대 생활미술학과를 졸업했다.1979년 신세계백화점 영업본부 이사로 경영수업을 시작,80년 신세계백화점 상무로 승진한 뒤 97년 부회장에 올랐다. 무려 17년동안이나 상무직함을 유지했다. 그룹 회장이 된 것은 98년 말이다. 이 회장은 1967년 정재은(66) 명예회장과 중매로 만나 결혼, 아들 정용진(37) 신세계 부사장과 딸 정유경(33) 조선호텔 상무를 뒀다. 용진씨는 삼성 이건희 회장의 외아들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와 동갑내기다. 사촌지간인 두 사람은 경복고 동창으로 서울대에 함께 입학하다 보니 사이가 매우 각별하다. 용진씨는 서울대 서양사학과를 다니다가 유학을 떠나 미국 아이비리그인 브라운대 경제학과를 졸업했다.1995년 미스코리아 출신 인기 탤런트 고현정씨와 결혼했다가 지난해 이혼해 많은 화제를 낳기도 했다. 고씨와의 사이에 아들 해찬(7)군과 딸 해인(5)양을 뒀다. 유경씨는 서울예술고, 이화여대 응용미술학과를 거쳐 미국 로드아일랜드대학교에서 그래픽디자인을 전공했다. 유경씨는 2001년 3월 초등학교 동창인 문성욱(33)씨와 결혼, 장녀 서윤(3)양과 차녀 서진(2)양을 두고 있다.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 석사를 받은 문씨는 SK텔레콤 전략기획실을 거쳐 소프트뱅크 코리아의 자회사인 벤처스코리아에서 투자심사역(차장)을 지낸 뒤 현재는 유학 중이다. 문씨의 부친은 아리랑TV 사업본부장을 지낸 문청씨다. ●부친을 경영스승으로 삼고 있는 오너 재계에서는 ‘신세계가 삼성보다 더 삼성 같다.’는 얘기가 나돈다. 그만큼 기업문화, 경영스타일이 닮았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창업주의 형제들 가운데 누구보다 부친을 닮으려고 애쓰는 이 회장의 숨은 뜻이 담겨 있다. 부친의 선견지명과 직관력이 소개된 한 일간지를 복사해 수첩에 항상 갖고 다니며 경영의 시금석으로 삼을 정도로 이 회장은 부친을 가슴 속에 품고 산다. 신세계백화점 본사 회의실과 자신의 아들 정용진 부사장 방에도 부친의 초상화를 걸어 놓고 부친의 경영철학을 신세계 맨들에게 전파하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오는 8월 문을 여는 신세계백화점 본점 사무실 로비에 부친의 흉상을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아버지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내가 있겠느냐.”는 것이 이 회장의 생각이다. 이 회장은 누구보다 평소 부친의 경영 스타일을 빼닮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우선 ‘疑人勿用 用人勿疑’(믿지 못하면 아예 쓰지를 말고, 일단 사람을 쓰면 의심하지 말라.)는 용인술과 전문 경영인 체제 운영방식이 그렇다. 메모하는 습관과 업무의 중요성을 따져 챙길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확실히 구분짓는 스타일도 비슷하다. 이 회장 스스로도 자신의 경영 스승이 선친임을 신세계 2005년 1월호 사보에서 드러낸 바 있다.“선대 회장께서 가장 힘쓴 것이 인재 육성이었다. 선대 회장께서는 성공한 일을 다시 돌아보지 않았고 늘 새로운 것을 찾으셨다.”면서 자신의 메시지를 부친의 육성에 담아 신세계 맨들에게 전했다. 이 회장이 무엇을 강조할 때 나오는 화법이 바로 “선대 회장은 이렇게 하셨는데….”이다. 이 회장은 실제로 젊은 시절 부친이 제일모직 등 일선 현장을 방문할 때 언니인 이인희 고문과 함께 수행하며 경영수업을 쌓았다. 창업주는 국내외 주요 인사들과 회동 때 “명희야, 들어온나.”해서 늘 이 회장을 합석시켜 보고 배우도록 했다. 신현확 전 총리, 민복기 전 법무부장관 등 당시 국내 정·관계의 실세를 만나 식사를 하거나 골프를 할 때도 항상 ‘명희’를 불렀다. 일본 정·관계의 원로와 회동에도 꼭 자리를 함께 하도록 했다. 그러다보니 이 회장은 부친이 교류하는 각계의 주요 인사들을 다 알 정도였다. ●섬세하면서도 ‘통 큰’스타일 이 회장은 한해에 고작 한두차례 회사를 방문, 업무 보고를 받을 뿐 경영에 일일이 간섭하지는 않는다. 부친과 마찬가지로 결재 서류에 사인을 해 본 적이 없다. 주요 사안이나 인사에 대해서도 사후보고를 받을 정도로 전문경영인을 믿고 맡겨 ‘통 큰’ 경영을 한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인희 고문은 동생의 경영스타일을 두고 “명희는 (전문 경영인에게) 다 맡기는 스타일인데도 회사가 잘된다.”며 부러워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렇다고 해서 이 회장이 완전히 손을 놓고 있는 것은 아니다. 오는 8월 문을 여는 신세계 본점 재개발 사업, 신규 백화점 진출, 명품 브랜드 유치 등에 꾸준히 관심을 갖고 챙기며 ‘방향타’ 역할을 하고 있다. 신세계백화점 서울 강남점을 문 열 때는 매일 그곳으로 출근하는 열성을 보였다. 특히 백화점의 사각지대로 알려졌던 지하 식품매장을 일일이 다니며 꼼꼼하게 챙겼다. 이 덕분에 위층에서 쇼핑을 하다가 식품매장으로 내려 오는 ‘샤워효과’가 아니라 지하 매장을 방문토록 만든 뒤 위층까지 고객을 끌어들이는 ‘분수효과’를 톡톡히 거두도록 했다는 후문이다. 이 회장을 아는 이들은 그가 여성스러운 섬세함과 대담함을 함께 지녔다고 평가한다. 격식을 싫어해 회사 내에 비서실은 물론 개인 비서도 두지 않고 있다.90년대까지 1년에 한차례 서울 한남동 자택으로 임원들을 초청, 식사를 대접하는 자상한 면모를 보이기도 했다. 큰 오빠인 맹희씨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그의 따뜻함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부친으로부터 눈밖에 나서 유랑생활을 하던 맹희씨는 이 책에서 “내가 경제적으로 어려워도 말을 못하고 있으면 늘 지갑을 열고 가지고 있던 돈 전부를 나에게 쥐어준 것도 명희였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명희는 내가 어려운 처지에 있을 때 진심으로 나를 걱정해 주었고 늘 따뜻한 마음씨로 나를 감싸주었다.”는 것이 맹희씨의 설명이다. ●신세계 핵심 축 구학서 사장 신세계는 1999년 구학서 사장이 총사령탑에 앉은 이후 계속 상승곡선을 그려 왔다. 구 사장은 명실상부한 전문경영인으로 이 회장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고 있다.‘전문 경영인은 무한 책임을 지고 일해야 한다.’는 신조를 갖고 있다. 그는 회사 부채율을 230%에서 130%대로 낮췄다. 취임 당시 5만원했던 주가를 5년만에 30만원대로 끌어올려 이 회장을 한국 최고의 여성부호로 만들어 주기도 했다.‘신세계 신화’를 일궈낸 주역이지만 그는 한결같이 겸손한 모습이다. 오히려 신세계를 통해 자신이 성공한 데 대해 감사해한다.“56세에 은퇴하려고 했는데 59세에 사장을 하고 있으니 목표를 초과 달성하지 않았느냐.”며 “자신은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다. 구 사장은 겉으로는 부드러운 스타일이지만 실제로는 승부욕, 추진력, 결단력을 두루 갖췄다. 매일 새벽 5시면 집 근처 우면산을 오르고, 오전 7시30분이면 어김없이 회사에 출근한다. 일주일에 7∼8권의 책을 읽으며 신세계의 미래에 대한 ‘해답’을 찾으려고 고민한다. 구 사장의 취임 당시 신세계의 위상은 롯데, 현대에 밀려 3위로 내려앉은 초라한 신세였다. 그는 그때 불어닥친 국제통화기금(IMF) 경제위기를 적절히 활용했다. 종합금융을 매각하고 카드사업에서 손을 떼는 등 대대적인 ‘메스’를 가한 것이다. 창고형 할인점 코스트코홀세일을 매각하면서 들어온 1억달러로 전국 알짜의 상권부지들을 헐값에 사들여 이마트 부지로 확보했다. 이때 사들인 부지들이 이마트에 국내 최대의 할인점이라는 명성을 가져다 주었다. 산본의 백화점 부지도 이마트로 업종을 변신시키는 등 자산 회전율을 높이며 기업의 수익구조를 끌어 올리려고 부단히 노력했다. 삼성그룹에서 재무통으로 커온 경력이 뒷받침됐다. 이런 신세계의 성장을 구 사장은 전문경영인 체제 덕분으로 돌린다. 스스로 “(이 회장이)너무 많은 권한을 주셔서 오히려 책임이 무겁다.”고 말할 정도로 오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소신껏 일하고 있다. 지난해 9월 1350억원짜리 한국 최대의 매머드 쇼핑몰인 부산 센텀시티 부지 매입 응찰 때도 사후에 이 회장에게 보고할 정도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호랑이 등에 탄 사람’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1972년 삼성에 공채 12기로 입사했다. 재계의 인재사관학교로 불리는 삼성 비서실, 삼성전자, 제일모직, 삼성물산 등을 거쳐 삼천리그룹으로 갔다가 96년 신세계 경영지원실 전무로 발탁됐다. 당시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도 구 사장에게 눈독을 들였다는 후문이다. ●실력파 임원들로 포진 전문경영인 체제의 기업답게 구 사장을 필두로 쟁쟁한 임원들이 포진하고 있다. 석강 백화점 부문 대표는 점장과 영업본부장을 역임한 정통 영업통. 신세계 백화점이 새롭게 문을 여는 점포마다 점장을 맡을 만큼 치밀한 전략과 강한 추진력을 겸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책임질 수 있다고 판단하면 끝까지 밀어붙이는 자신감과 신념의 소유자다. 신세계백화점의 면모를 일신시킨 서울 강남점을 문 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현재 본점 재개발 사업과 죽전 역사 개발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차근차근 진행하며 ‘제2전성기’를 만들어내고 있다. 검소한 생활에 유머감각이 뛰어나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경상 이마트 부문 대표는 백화점과 이마트에서 점장과 지원본부장, 경영지원실장 등 요직을 걸쳤다. 인화를 중시하는 전형적인 덕장형이지만 치밀한 분석력과 경영자로서의 안목을 두루 갖춘 것으로 평가받는다. 백화점 미아점장 시절 처음으로 점장이 광고모델로 등장, 현장을 중시하는 경영스타일을 보여줬다. 영등포점장 시절 다른 임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백화점 지하층을 젊은이들만의 공간으로 꾸민 ‘영웨이브’를 탄생시켰다.‘영웨이브’는 백화점 테마형 매장의 효시로 인정받고 있다. 유원형 경영지원실장(부사장)은 삼성그룹 계열사인 중앙개발 출신. 유통전문 건설업체로 급부상한 신세계건설에서 탁월한 관리 업무로 수익창출에 기여한 점을 인정받아 2000년 신세계로 옮겼다. 철저한 원칙주의자로 섬세한 업무 스타일이 돋보인다. 백화점부문의 팀제 운영 실시 등의 아이디어로 재무 건전성과 인력 효율화에 기여했다. 신세계건설 노태욱 사장은 LG건설 상무 등을 지내다 신세계건설에 합류한 건설 분야 베테랑이다. 건설업계의 투명경영을 선도하기 위해 업계 최초로 ‘공정거래 자율준수 프로그램’을 도입, 지난해 공정거래 자율준수 우수기업으로 공정거래위원장상을 수상했다. 신세계푸드시스템 최병렬 사장은 20년의 서예 경력에 단전호흡의 달인으로 불린다. 또 체력 등 자기관리가 뛰어난 만능스포츠맨이다. 백화점과 이마트 부문에서 풍부한 현장 경험을 쌓았다. 신세계I&C 이상현 사장은 삼성비서실, 삼성카드에서 주로 전략기획 업무를 담당해온 브레인. 삼성카드 재직시절 고객 정보를 데이터베이스화한 CRM(고객관계관리)을 도입했다.‘좋은 생각이 좋은 경영을 만든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조선호텔 이석구 사장은 호텔 부문의 새로운 변화를 주도하고 있다. 호텔을 경영하는 것은 마치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것과 같다는 지론을 갖고 있다. 객실의 디지털화, 객장의 글로벌화를 강조하고 있다. 공항에서 에스코트를 받은 뒤 프런트 앞에서 기다리지 않고 객실에서 곧바로 체크인할 수 있는 ‘익스프레스 체크인’ 서비스를 국내 처음 도입했다. 스타벅스커피코리아 장성규 사장은 1주일에 30개 이상의 매장을 꼭 방문하는 현장 중시 스타일이다. 그의 책상 한편에는 800명 이상의 직원 이름과 나이, 특징 등이 깨알같이 적혀 있다. 아침 출근길에 라디오를 통해 영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는다. 신세계드림익스프레스 송주권 사장은 백화점 물류관리 업무를 담당해 온 현장관리 출신이다. 새로운 수익 아이템들을 꾸준히 개발해 적자사업을 흑자로 돌려놓은 그룹 내 물류 전문가다. bori@seoul.co.kr ■ 경영수업 받는 2세 이명희 회장에 이어 신세계를 이끌 후계자는 장남 정용진(37) 부사장이다. 모친 이 회장과 부친 정재은 명예회장에 이어 3대 주주로 자리를 굳혀 이미 경영권 승계 작업의 토대를 마련해 놓았다. 정 부사장은 미국 유학을 끝내고 1994년 삼성물산 경영지원실에 입사,95년 신세계로 자리를 옮긴 뒤 97년까지 신세계백화점 일본 도쿄사무소에서 근무했다. 이어 신세계백화점 기획조정실 그룹 총괄담당 상무로 진급해 본격적인 경영수업을 받기 시작했다. 현재 삼성의 구조조정본부와 같은 성격의 경영지원실 소속인 그는 월·수·목요일은 신세계 본사로, 화·금요일은 이마트로 번갈아 출근하며 그룹 전반에 대한 공부를 하고 있다. 점장회의 등 각종 회의에 참석, 업무 보고를 받는다. 조용히 듣기만 하고 거의 발언은 하지 않지만 지나가면서 던지는 질문이 날카롭다고 한다. 사원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린다. 소주에 삼겹살도 먹고 이마트 오픈시 지내는 고사에도 참석, 직원들이 건네는 막걸리를 몇잔이고 받아 마신다. 직원들에게도 꼭 두 손으로 술을 따르며 몸을 낮춘다. 특별한 약속이 없으면 지하 구내 식당에서 직원들과 식사도 한다. 식품과 패션분야에 조예가 깊다. 이마트 매장을 둘러 볼 때도 식품의 신선도, 진열방식 등을 꼼꼼히 챙긴다. 즉석 조리상품 코너를 지나치다 “소스가 안 맞는다.”거나 “외국에는 이런 상품도 있는데 한번 도입해 보라.”는 제안도 심심찮게 한다. 특히 초밥 등 신선식품은 꼭 포장지를 뜯어보고 “밥알이 굳었다. 신선도가 좋지 않다.”는 등의 평가를 한다. 명품잡지에 등장하는 모델이 입고 있는 옷들이 어느 제품인지 다 알 정도로 디자인의 흐름을 꿰고 있어 담당자들을 놀라게 한다. 그렇지만 후계자로서 영향력을 발휘하려 들지 않는다.1990년대 후반 벤처 열풍에 인터넷뱅킹사업 등 벤처사업을 무척 하고 싶어 했지만 회사측에서 “유통업체로서 바람직한 사업은 아니다.”고 결론 내리자 조직의 결정을 순순히 따랐다. 당시 재계 2,3세들은 앞다퉈 정보기술(IT) 관련 벤처사업에 뛰어 들면서 천문학적인 돈을 까먹었지만 그는 회사의 결정을 따름으로써 ‘화’를 면했다. 그는 자신이 추진하고 싶은 사업 아이템에 대해서도 강하게 밀어붙이지는 않는다.“검토해 주십시오.”라는 수준에서 경영진들에게 얘기할 따름이다. 그 때문에 “삼성가의 전통을 이어받아 오너로서의 역할을 잘 할 수 있도록 어머니한테 교육을 잘 받았다.”는 얘기를 듣는다. 정 부사장의 여동생 유경(33)씨는 조선호텔 프로젝트 실장(상무)이다. 전공을 살려 그동안 객실 리노베이션과 인테리어 작업에 참여, 호텔의 품격을 한단계 높이는 데 기여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호텔업계에서는 최초로 비주얼 디자이너를 채용토록 하는 등 호텔 소품부터 리노베이션까지 비주얼 디자인업무를 지휘해 왔다. 지난해 초 자신이 리노베이션했던 자연주의풍의 이탈리아 레스토랑과 베이커리를 돌아다니며 손님들의 반응을 물어보기도 한다. 영국 사라 퍼거슨 전 왕세자비의 결혼 때 부케를 맡아 유명해진 꽃집 ‘제인파커’를 아시아 최초로 조선호텔에 들여오고, 신세계백화점에 입점시키며 꽃집의 명품 브랜드 시대를 열기도 했다. 명품에 관심이 많아 국내 처음으로 수입 멀티숍 바람을 일으켰던 신세계인터내셔날의 ‘분더샵’ 도입에도 나선 것으로 알려졌다. 회사 차원에서 구입하는 각종 미술품과 캘린더 제작에도 유경씨의 안목이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사촌지간으로 나이가 비슷한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녀 부진(35·신라호텔 상무)씨와 같은 호텔업계에서 선의의 경쟁을 벌이고 있다. bori@seoul.co.kr ■ 정재은 명예회장은 누구 정재은(66) 신세계 명예회장은 부인 이명희 회장처럼 경영 전면에 나서지 않는다. 다만 이 회장과 달리 1년에 한차례 부장급 이상 간부를 조선호텔에 모아 놓고 세계 경제 흐름, 기업의 사회적 책임, 윤리경영 등에 대해 강연을 한다. 오너 일가의 일원으로 목소리를 내기보다는 삼성 출신 경영인으로서의 경험을 살려 회사에 도움이 되고자 하는 바람에서다. 정 명예회장은 경기고, 서울대 공대를 졸업하고 미국 컬럼비아대학·대학원에서 수학한 엘리트다. 결혼 뒤에는 삼성그룹에서 활발한 경영활동을 펼쳤다.1969년 삼성전자에 입사한 이후 20여년간에 걸쳐 삼성전자부품 부회장, 삼성물산 부회장, 삼성항공 부회장, 삼성종합화학 부회장 등 주요 직책을 두루 거쳤다.97년 신세계가 삼성에서 공식 분리되자 조선호텔 회장을 맡으면서 삼성을 떠났다. 그는 전자공학, 산업공학 등 자신의 전공을 살려 반도체 사업에 뛰어든 장인(삼성 창업주 고 이병철 회장)을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그는 고 이병철 회장의 특명으로 당시 미국 유학 중이던 재일교포 2세 손정의(일본 소프트뱅크 사장)씨를 만나기도 했다. 고 이 회장은 그에게 “손씨가 삼성에 필요한 인물인지 한번 만나봐라.”고 지시했던 것이다. 당시에 그를 만난 정 명예회장은 특별한 점을 느끼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 명예회장은 그 뒤 손 사장의 성공을 보고 선대 회장의 예지력에 감탄해야만 했다. 그렇지만 정 명예회장은 1977년 삼성전자 이사 재직시 미국 HP사와 손잡고 HP사업부를 시작한 데 이어 84년 삼성전자 사장 시절에는 자본금 1000만달러를 들여 삼성HP를 설립, 현재의 삼성전자로 성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삼성은 컴퓨터가 전무했던 시기에 컴퓨터, 의료기기, 계측기기 분야에서 HP와 인연을 맺어 기술력을 확보하고 삼성 제품이 미국에 진출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었다.”고 밝혔다. 기술력이 취약한 삼성이 HP와 같은 기업과 손잡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는 독서를 즐기는 학구적 면모를 보여 주위에서 “대학교수를 했으면 잘 했을 것 ”이라는 말을 곧잘 듣곤 했다. 경제잡지는 물론 일본 경제신문 등도 정기 구독한다. 회사 경영에 도움이 되는 책자는 임원들에게 보내고, 기사는 밑줄까지 쳐 읽어 보길 권한다. 화려한 이력과 배경 때문에 엘리트 분위기를 풍기지만 사람들과 격의없이 사귀는 소탈한 면도 있다. 부친 정상희씨는 3,5대 국회의원과 삼호방직·삼호무역 회장을 지냈다. 정상희씨는 삼성가(家)와 인연을 맺은 뒤 삼성전자 사장, 삼성물산 사장, 삼성생명 사장 등을 삼성그룹 주요 계열사 사장을 역임했다. 정 명예회장(차남)의 맏형인 고 정재덕 전 신세계고문은 경기고, 미국 노스이스트미주리주립대를 졸업하고 경제기획원 경제협력국장, 건설부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국제상사 사장, 연합철강 사장, 하나실업 회장 등을 지냈다. 고려대 출신인 동생 재환(57)씨는 현재 삼성전기 중국동관사업장 법인장 전무로 일하고 있다. bor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①-CJ그룹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삼성家 ①-CJ그룹

    CJ그룹에는 삼성그룹의 모태인 제일제당의 오랜 ‘역사와 전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53년 설탕회사로 출범, 제일모직·삼성전자·삼성생명 등 현재 삼성그룹의 기업적 ‘젖줄’이 된 곳이 바로 CJ(옛 제일제당)다. 또 삼성의 인재를 길러낸 ‘인재사관 학교’ 역할을 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90년대 중반까지 CJ하면 떠오르는 것은 설탕·밀가루 등을 만드는 식품회사 정도였다. 그 이후 점차 생명공학, 홈쇼핑, 엔터테인먼트 등 신세대 사업으로 외연을 확장하면서 식품회사의 틀과 이미지를 완전히 벗어던졌다.1995년 그룹 분리 당시 1조 5000억원이었던 그룹 매출은 지난해 8조원, 영업이익은 97억원에서 5000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자산 기준 재계 서열 23위의 기업으로 도약했다. 끊임없이 모험과 변신을 꿈꾸는 벤처기업처럼 역동적으로 사업을 발굴, 추진해 온 덕분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삼성가(家)의 장손이 우뚝 서있다. ●부친 ‘공백’ 메우는 직계 장손 CJ는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주의 장손인 이재현(46) 회장이 이끌고 있다. 그의 부친은 고 이 회장의 장남인 이맹희(76) 전 제일비료 회장. 부친이 할아버지 눈밖에 나는 바람에 이 회장은 일찌감치 부친을 대신, 집안의 대소사를 챙기며 삼성과 제일제당에서 경영 수업을 쌓았다. 한솔그룹(창업주의 장녀 이인희 고문), 신세계(4녀 이명희 회장), 새한미디어(차남 고 이창희 회장)에 이어 가장 늦게 삼성에서 떨어져 나왔다.1993년 시작된 CJ의 계열 분리 작업은 지난 97년 법적으로 완전히 정리됐다. 이 회장이 36세때의 일이다. 그룹을 혼자 경영하기에는 나이나 경험이 모두 부족했다. 그러다 보니 CJ는 자연히 이 회장과 외삼촌인 손경식(66) 회장이 함께 경영하는 ‘쌍두마차’ 체제로 유지됐다. 손 회장은 대외업무, 이 회장은 내부경영 등으로 역할 분담을 했다는 것이 CJ측의 공식적 설명이지만 이들의 역할을 뚜렷하게 구분짓기 어려웠다는 것이 중론이다. 그만큼 이 회장의 비중이 컸다는 얘기가 된다. 이 회장의 ‘등극’은 삼성가의 3세 경영이 본격화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장남인 이재용 삼성전자 상무, 이인희 한솔그룹 고문의 3남 조동길 한솔그룹 회장 등 사촌들과 함께 삼성가의 3세 경영시대를 여는 주역으로 떠올랐다. 서울 남대문로 본관 사옥에 있는 그의 할아버지 흉상은 그가 삼성가의 직계 장손임을 상징해 주고 있다. ●평범한 혼인, 드러나지 않은 내조 고 이 회장의 장남 맹희씨는 부인 손복남(71)씨와의 사이에서 2남1녀를 뒀다. 자녀 모두 평범한 집안과 혼인해 이렇다 할 화려한 혼맥이 눈에 띄지 않는다. 맹희씨가 코흘리개인 네살 때 이미 “아이들이 자라면 혼인을 시키자.”는 양가 어른의 언약이 인연이 돼 손씨와 결혼했다. 이화여대 교육학과 출신인 손씨는 부친이 경기도 지사와 농림부 양정국장을 지낸 손영기씨다. 손복남씨가 부친을 모시고 병원에 가는 것을 먼 발치에서 지켜보고 난 뒤 맹희씨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한다. 손씨는 삼성가의 맏며느리로서 겉으로는 화려해도 남편이 풍상을 겪자 말 못할 마음의 고통을 삭이며 살아왔다. 서울 장충동 집에서 시부모를 모시며 3남매를 키웠다.CJ가(家)의 명실상부한 ‘안주인’ 역할을 묵묵히 해오고 있는 것이다. 경영에는 일절 관여하지 않았으나 제일제당의 최대주주로 있다가 주식 증여를 통해 경영권을 장남 재현씨에게 넘겼다. 재현씨는 어릴 때 할아버지로부터 각별한 사랑과 함께 엄격한 교육을 받았다. 체격 등 외모, 사고나 행동방식까지 조부와 비슷해 ‘리틀 이병철’이라고도 불린다. 결혼 후 “나가서 신혼살림을 하라.”는 부모님의 얘기에도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며 고집을 피워 2001년 1월 할머니 박두을씨가 별세할 때까지 서울 장충동 집에서 모셨다. 지금도 모친 손여사와 함께 장충동 집에서 산다. 경복고, 고려대 법대 출신인 재현씨는 “누구 덕을 본다는 이야기를 듣기 싫다.”며 1983년 씨티은행에 취직,‘탈 삼성행’을 시도했다. 하지만 조부인 고 이병철 회장이 “재현이에게 왜 남의 집살이를 시키냐.”는 불호령을 내려 결국 85년 삼성의 주력 계열사였던 제일제당 경리부 평사원으로 입사했다. 이후 88년 경리부 차장,89년 기획관리부장으로 승진했다.92년부터 1년 정도 삼성전자 전략기획실 이사대우로 일하기도 했다.93년 제일제당 이사로 친정에 복귀해 97년 부사장,99년 부회장을 거쳐 2002년 회장에 올랐다. 부산 출신으로 이화여대 미대 장식미술학과를 졸업한 부인 김희재(46)씨와는 대학시절 미팅을 통해 결혼, 딸 경후(21)씨와 아들 선호(16)군을 뒀다. 두 자녀는 현재 해외 유학 중이다. 90년대 중반 이 회장은 회식을 끝내고 밤늦게 직원들을 집으로 데려와 2차 술자리를 갖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도 부인 희재씨는 한번도 짜증을 내지 않고 뒷바라지해 직원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또 이 회장과 함께 노인무료급식소 등에서 김장을 하고 노인들의 가정에 도배도 하는 등 사회봉사활동에도 열심이다. 이 회장의 장모인 김만조씨는 ‘김치박사’로 유명하다.CJ의 김치개발에도 참여했다. 영국과 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김씨는 연세대, 서울여대 등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홈쇼핑·영화등 사업다각화… 재계 23위 ‘껑충’ 이 회장의 누나 미경(48)씨는 부친이 유학 중이던 미국에서 동생 재현씨와 함께 태어났다. 어릴 때 ‘미키’라고 불린 것을 계기로 지금도 ‘미키 리’라는 이름으로 해외 활동을 한다. 중학교때 대통령배 영어 웅변대회에서 1등을 하기도 했다. 영어외에 불어, 중국어에도 능통하다. 경기여고, 서울대 가정학과, 미국 하버드대에서 동아시아연구로 석사학위를, 상하이 푸단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았다. 1995년 제일제당 멀티미디어 사업부 이사 시절 스필버그 등이 설립한 세계 최대의 영상소프트회사인 ‘드림웍스’와 제일제당의 합작을 성공시킨 주역이기도 하다. 당시 이건희 회장과 이재현 회장은 직접 미국으로 건너가 스필버그와 협상을 벌일 만큼 드림웍스 설립에 남다른 애착을 보였으나 결국 그는 삼촌 대신 동생 재현씨의 손을 들어주었다는 후문이다. 지난해 말 CJ엔터테인먼트 사업의 글로벌 부문을 맡아 사업의 본격적인 해외진출을 진두지휘하게 됐다. ■ ‘비운의 황태자’ 이맹희씨-삼성 경영서 물러난 뒤 유랑생활 고 이병철 회장의 장남이자 이재현 회장의 부친인 맹희(76)씨는 요즘 몽골에 머물고 있다. 과거 유목민의 후예들이 사는 그 곳이 그에게는 오히려 편안함을 준다고 했다. ‘비운의 황태자’‘양녕대군’은 맹희씨에게 따라 다니는 수식어다. 그는 삼성을 이끌 ‘운명’을 타고 났지만 오히려 바람처럼 떠도는 처지가 그의 ‘운명’이 된 ‘풍운아’다. 동생 이건희 회장으로 후계구도가 정해진 후 그는 형제들은 물론 자신의 가족들과도 떨어져 세속을 등진 채 살아왔다. 그의 ‘유랑생활’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부친이 기업을 일구는 것을 보며 컸다.1938년 삼성의 설립으로 기록되는 삼성상회 간판 아래 부친이 대구에서 국수공장을 운영할 당시 공장 귀퉁이 방안에서 부친이 새우잠을 자며 일하는 것을 보며 자라난 삼성 성장사의 산증인이기도 하다. 경북고 32회 출신으로, 노태우 전 대통령, 고 김윤환 의원, 정호용 전 의원 등 TK출신 정치인들과는 친구사이다. 그는 일본, 미국 유학을 거쳐 안국화재 업무부장을 시작으로 중앙일보, 삼성전자 부사장 등 직함이 무려 17개에 이를 정도로 강도 높은 경영 수업을 받았다. 이 때만 해도 그의 호칭은 삼성의 ‘젊은 부총수’였고, 아무도 그가 삼성의 경영 대권 주자로 낙점될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의 비료공장을 만들려 했던 선친이 ‘사카린 밀수사건’으로 1966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자 그는 실질적으로 그룹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선친의 눈밖에 나면서 그룹 경영에서 완전히 손을 떼야 했다. 그때가 1971년이었다. 그는 회고록 ‘묻어둔 이야기’에서 “자신이 삼성에서 일한 기간은 7년이고, 물러난 것은 기업이 혼란에 빠져서가 아니라 몇마디로 간단하게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사정이 있어서다.”라며 부친의 주장이 사실과 다르다고 했다. 부친이 동생 이건희 회장으로의 대권이양 선언시를 회고할 때는 “아버지와의 사이에 상당한 틈새가 있었지만 언젠가는 나에게 삼성의 대권이 주어질 것이라고 믿고 있었다.”며 당시의 ‘충격’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bori@seoul.co.kr ■ 차세대 사업의 양날개 ‘左-미경, 右-재환’ 차남 재환(44)씨는 배재고, 타이완대 정치학과 출신으로 현재 경영기획실 중국담당 상무로 베이징에서 근무하고 있다. 한때 제일제당 일본지사 부장으로 근무하기도 했다. 재환씨는 일본과 중국쪽 사업에 관심이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7·8·9대 국회의원을 지낸 민기식 전 의원의 딸 재원(38)씨와 결혼, 딸 소혜(15)양과 아들 호준(7)군을 뒀다. 재원씨는 연세대 경영학과를 나왔다. ●“오너보다 CEO로 평가받겠다.” CJ맨들이 보는 이 회장은 ‘꿈과 비전·열정이 큰 사람’으로 요약된다. 회사의 실적을 보고 받으면 “최소한 얼마는 돼야 하는데, 회사가 좀 더 커야 한다.”며 항상 아쉬움을 토로한다. 사원들과의 대화를 ‘정말’ 즐긴다. 좀처럼 격식을 따지지 않는다. 책상에 걸터 앉아 얘기를 하고, 직원들과 남산에 올라 자유토론도 한다. 회사의 경영 방침과 경영 철학을 직접 설파, 공감대를 넓혀나가는 식이다. CJ 관계자는 그런 그의 행보를 두고 “오너라기보다는 유능한 최고경영자(CEO)로 평가받고 싶어한다.”고 말했다. 최태원 SK 회장이 사석에서 “이 회장은 정말 공부를 열심히 한다.”면서 “10년 뒤 살아 남을 사람(오너)은 이 회장밖에 없다.”고 말했다는 얘기도 들린다. 그만큼 오너 2,3세들 중에서 가장 성공적으로 안착한 경영인이란 방증이다. 재벌가의 후손들이면 보통 가는 해외유학 코스도 밟지 않은 ‘토종파’인데도 그의 기업 문화론은 어느 기업보다 앞서간다. 오래된 보수적인 회사로 짧은 시간에 젊고 활기찬 기업으로 변모시킨 것은 바로 ‘이재현 식’ 기업 문화에서 비롯됐다. 국내 최초로 복장 자율화,‘∼님’으로 호칭 통일, 플렉서블 타임제(자율 출퇴근시간), 층마다 비치된 간이 도서관 등은 다 그의 작품이다. CJ의 역사가 순탄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삼성과의 결별을 앞둔 94년 10월 삼성측이 제일제당에 이학수 당시 삼성화재 부사장(현 삼성 구조조정본부장)을 파견, 삼촌 이건희 회장과 조카 이 회장의 신경전은 제일제당이 삼성본관에서 95년 4월 현재의 사옥으로 이사오기까지 6개월간 계속됐다. 제일제당이 보유한 부동산, 삼성생명주식 평가방법을 놓고 양측은 치열한 공방을 벌인 끝에야 제일제당은 ‘독립’을 선언할 수 있었다. 삼성그룹에서 분리될 당시의 제일제당은 삼성의 전자 및 중공업 위주의 우선 투자전략에서 밀려 성장한계를 보인 상황이었다. 식품회사라는 고정된 이미지도 그룹 성장의 걸림돌로 작용했다. 그러나 1995년 독자경영을 시작한 이후 이 회장 주도로 식품 등 기존의 사업을 다지면서 미디어·영상·물류·유선방송·홈쇼핑 사업 등 다각화된 사업으로 포트폴리오를 짰다. 식품·정보통신·화장품, 음료사업 등 매년 수십억에서 수천억원의 적자를 내는 비주력 사업은 과감히 매각했다. 이 가운데 인터넷사업인 드림라인은 이 회장이 주도한 사업 중의 하나였으나 그다지 빛을 보지 못했다. 그렇지만 ‘미련’을 갖지 않고 구조조정을 무난하게 해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현재의 식품, 식품서비스, 바이오, 미디어&엔터테인먼트, 신유통 등 4개 분야를 CJ의 핵심 사업으로 확정했다.“설탕이나 파는 식의 마인드로 살아 남을 수 없다.”면서 이 회장은 당시 직원들의 신발끈을 조였다. ●화려하지는 않지만 내실있는 임원 김주형(58) ㈜CJ 대표이사 사장은 1972년 제일제당에 들어온 이후 최고 경영자자리에까지 오른 입지적인 인물. 곡물구매 전문가로 자기 색깔을 내지 않으며 두루 회사를 아우르는 ‘덕장’형이다. 각양 각색의 사업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자칫 불협화음이 나올 수 있는 갈등 사안들을 절묘하게 중재·조정하는 ‘조율사’로서 탁월한 역할을 해낸다는 평이다. 특유의 친화력과 유연성 덕분이다. 그는 아랫사람에게도 존대하며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경청해 권위의식이라고는 찾아 볼 수 없는 포근한 느낌을 준다. CJ개발 문성기(56)사장은 1974년 제일제당에 입사, 신사업 본부장 등을 거쳐 99년부터 CJ개발 대표를 맡았다. 우리나라 골프장 최초로 미국 LPGA 대회를 유치해 2002년 부터 3년 연속 성공적으로 개최,CJ의 골프장 ‘클럽 나인브릿지’를 세계 100대 회원제 골프장으로 만드는 것은 물론 CJ그룹을 해외에 알린 주역이다. 조용하면서도 강한 리더십이 강점이다. 이태호(57) CJ푸드시스템 대표(부사장)는 1973년 삼성그룹으로 입사, 사료본부장 등을 거쳐 2003년 말부터 CJ푸드시스템을 맡았다. 사료본부장 시절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으로 일찌감치 사업을 확장한 주역이다. 부하직원들로부터 냉철한 판단력과 따뜻한 마음을 가진 리더로 평가받는다. 의사결정이 빠르고 사업의 비전 제시력이 강하다는 평이다. 소탈한 성격으로 격식에 얽매이지 않아 평이 좋다. 박동호(49) CJ엔터테인먼트 대표(부사장)는 ‘비즈니스맨의 모범’으로 불린다. 국내 최초로 멀티플렉스(복합상영관) 극장체인인 CGV를 도입, 업계 1위로 성장시켜 사업역량을 인정 받으면서 한국 영화판을 좌지우지하는 ‘충무로 파워맨’으로 입지를 굳히고 있다. 지난해 게임업체인 플래너스를 전격 인수하는 수완도 발휘했다.‘튀는’ 사람들과 일하는 분야에서 내부를 꼼꼼하게 추스르고 챙기는 관리자의 역할에 꼭 맞는 인물이다. 김진수(54) CJ홈쇼핑 대표(부사장)는 제일제당 마케팅 실장 등을 거쳐 다국적기업 한국 존슨의 사장으로 잠시 외도했다가 친정으로 복귀한 케이스. 마케팅실장때 대상(옛 미원)과의 조미료 전쟁에서 ‘다시다’로 역전을 이뤘고, 식품본부장 시절에는 ‘햇반’ 등 신상품을 시장에 안착시켰다. 중국 홈쇼핑시장에 진출하는 개가를 올리기도 했다. 해외통이자 마케팅 전문가로 평가 받는 그는 분단위로 스케줄을 관리할 정도로 자기관리에 철저하다. 박대용(53) CJ GLS 대표(부사장)는 업계에서 손꼽히는 물류 전문가다.1977년 제일제당에 입사,89년 물류개선팀장으로 발탁된 이후 16년간 물류관련 업무에만 종사해 왔다. 지난 99년 택배사업에 진출,3년만에 매출 1000억원을 돌파하며 CJ GLS를 택배업게 ‘빅 4’에 합류시켰다. 권위보다는 따뜻한 가슴으로 부하직원들을 대하는 ‘온화한 리더십’의 소유자다. 정진구(60) CJ푸드빌 대표(부사장)는 패밀리 레스토랑인 스카이락·빕스·한쿡과 베이커리 뚜레쥬르 등 외식사업을 총괄한다. 아이스크림전문점 배스킨 라빈스,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등이 그의 손을 거쳐 최고 브랜드로 성장했다. 국내 외식 업계의 ‘미다스의 손’으로 불린다. 직관력과 현장 감각이 뛰어나 한국에 진출하려는 외국기업들의 영입대상 1순위로 알려져 있다.2003년 말 CJ그룹에 부사장으로 영입됐다. 김홍창(51) CJ투자증권 대표(부사장)는 1981년 당시 제일제당에 입사, 제일투자증권 상무, 제일선물 대표 등을 거친 대표적인 관리·금융통. 제일선물 대표 당시 업계 8∼9위에 불과했던 회사를 1년여 만에 업계 2위로 끌어올려 놓기도 했다. 이재현 회장의 입사 초기 수년간 경리·관리 부서에서 함께 근무하기도 했다. 직원들과 스스럼 없이 이메일을 주고받는 등 격의없는 성격이며 조직 밀착 경영에 강하다는 평이다. 지난 1월 정기인사에서 전격 발탁된 CJ미디어 강석희 대표(상무)는 자타가 인정하는 제약마케팅의 귀재다. 마케팅에서 보여준 실력이 미디어라는 복합다기한 사업분야에서 어떻게 적용될지 관심사다. bori@seoul.co.kr ■ 손경식 회장은 누구 손경식(66) 회장은 이재현 회장의 외삼촌이면서 CJ그룹을 이끄는 또 다른 한 축이다. 이 회장에게 할아버지 고 이병철 회장이 정신적 지주라면 외삼촌 손 회장은 ‘경영 스승’인 셈이다. 이 회장이 회사 중대 사안을 놓고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누는 상대다. 경기고 2학년때 검정고시로 서울대 법대에 입학할 정도여서 ‘천재’라는 얘기를 들었다. 손 회장은 누나이자 이재현 회장의 모친인 손복남 고문이 삼성가로 시집가면서 삼성과 인연을 맺었다. 1968년 미국 오클라호마주립대 경영학 석사과정을 마치고 공부를 하려던 그를 고 이병철 회장이 비서실로 불러들였던 것. 아무리 가까운 혈연이라도 능력이 없으면 발탁하지 않는 삼성가에서 그는 77년 38세의 나이에 안국화재(현 삼성화재)사장으로 발탁돼 삼성을 이끌 리더로 자리잡았다. 안국화재는 자신의 부친인 손영기 전 경기도지사가 사장을 맡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에게는 1993년 6월 제일제당이 삼성그룹에서 계열 분리되면서 조카 이 회장의 ‘후견인’ 역할이 요구됐다. 당시 경영 수업을 받던 재현씨를 어떻게든지 잘 보호해 제일제당의 ‘주인’으로 ‘옹립’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진 것. 그는 주저하지 않고 삼성전자에서 일하던 조카 재현씨와 함께 제일제당 대표이사 부회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그후 삼성과의 분리과정에서 갈등을 겪는 등 제일제당이 어려움에 처할 때마다 ‘구원 투수’로 활약했다. 96년 5월 “삼성과의 관계를 청산하고 제일제당 그룹으로 새롭게 출발한다.”며 삼성그룹과의 결별을 공식 선언한 것도 그였다. 거대 그룹의 우산 아래서 떨어져 나온 제일제당이 큰 위기를 겪지 않고 오늘의 CJ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손 회장의 역할이 컸다는 것이 안팎의 평가다. 화려한 학맥으로 그는 정·관·재계의 인맥 네트워크가 강하다. 재작년에는 경기고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부인 김교숙(59)씨와의 사이에 1남 1녀를 두고 있다. bori@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김성곤·최광숙차장 안미현·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집에선 남매로 학교선 동기로

    해군사관학교 개교 이후 처음으로 친남매 동기생이 탄생했다. 5주간의 가입교 훈련을 마치고 19일 해군사관학교 제63기로 입교하는 누나 최은영(21·김해여고 졸)·남동생 최원석(19·김해고 졸) 생도가 주인공. 오지 여행가를 꿈꿔오던 은영 생도는 고교 3학년 때 입시 설명을 위해 학교를 찾은 선배 사관생도의 모습에 매료돼 두 해에 걸친 도전 끝에 해사에 입교했다. 은영 생도는 “동생과 같은 길을 걷게 돼 기쁘다.4년간의 생도 생활을 통해 멋진 해군 장교가 되고 싶다.”고 소감을 밝혔다. 동생 최원석 생도는 “연평해전과 서해교전 등을 보면서 해군에 관심을 갖게 됐다.”며 “우리 영해를 지키는 일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12월 해사 합격생 발표 당시 일란성 쌍둥이 형제로 화제가 됐던 김선균(19·포항고)·김창균(19·포항고) 생도도 이들 남매와 함께 이번에 정식 사관생도가 된다. 또 최강용(47·해사 35기) 대령의 아들 원일(18)군을 비롯한 2쌍의 해사 부자 동문과 1쌍의 부녀 동문이 탄생했다. 이들을 포함한 총 147명의 가입교생들은 지난 1월15일부터 5주간 강도높은 훈련을 통해 군인으로서의 기본 소양과 체력, 정신력을 쌓았으며 특히 여생도 15명은 한명의 낙오자도 없이 무사히 훈련을 마쳤다.63기 해사 생도 입교식은 19일 오전 11시 경남 진해 해사 연병장에서 열린다. 조승진기자 redtrain@seoul.co.kr
  • 김태희 남매 ‘스위스 프렌즈’

    스타 남매 김태희와 이완이 17일 올해의 스위스 친선문화대사인 스위스 프렌즈로 선정됐다. 한국과 스위스의 수교 52주년을 기념, 서울시청 앞 스케이트장에서 열린 임명식에서 크리스티앙 하우스비르트 주한 스위스 대사는 “2002 월드컵 때 붉은 물결이 넘쳤던 시청앞 광장에서 임명식을 시민축제처럼 갖게 돼 기쁘다.”고 말했다. 김태희와 이완은 임명패로 빨간색과 흰색의 스노보드를 받았다. 김태희는 “늘 마음 속으로 동경했던 스위스의 친선대사로 동생과 함께 활동하게 돼 꿈만 같다.”고 말했다. 윤창수기자 geo@seoul.co.kr
  • 예순 넘어 고교 졸업…눈물의 졸업식

    예순 넘어 고교 졸업…눈물의 졸업식

    ■ 대학 합격 기쁨 두배 16일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강서구민회관에서 열린 대안학교 성지중·고교 졸업식에서 고등부 이태인(사진 가운데·65) 할머니가 아들과 딸, 며느리 등 가족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함박 웃음을 짓고 있다. 이 할머니는 명지전문대 사회복지학과 합격증까지 받아 기쁨이 두배가 됐다. 하지만 치매로 입원한 95세 시아버지의 수발 때문에 1년 휴학계를 냈다. 이 할머니는 초등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였으나 1999년 성지중에 들어가 단 한 차례의 결석도 하지 않고, 우등상을 받아 학생들의 모범이 됐다. 그동안 딸과 함께 어린이집을 운영하며 학비와 생활비 등을 대온 이 할머니는 “어린이나 노인 등 약자들을 위한 일을 보다 전문적으로 하고 싶어 사회복지학을 선택했다.”고 말했다. ■ 대안학교 성지중·고 눈물의 졸업식 “어머니 생각에 학교 수업만큼은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무사히 졸업하게 돼 무엇보다 기뻐요.” 겨울 찬비가 메마른 대지를 적신 16일 서울 강서구 내발산동 강서구민회관에 마련된 성지중·고교 졸업식장. 꿈에 그리던 중학교 졸업장을 손에 쥔 방상훈(18·서울 양천구 신월5동)·유리(16·여) 남매는 끝내 말꼬리를 흐렸다. 남들에겐 새로울 게 없는 중학교 졸업장이지만 이들 오누이에게는 말로는 다할 수 없는 숨은 사연이 들어 있다. 정규학교가 아니라 평생교육시설인 대안학교를 다녔기 때문이다. 평생교육시설이란 퇴학 등에 의한 정규 중·고교 중도탈락자, 결손가정 자녀, 소년·소녀가장, 소년원 출소자, 어려운 가정형편으로 배움의 기회를 놓쳐버린 장·노년층 등을 위한 교육기관을 말한다. ●막노동 아버지 둔 남매 고교 진학 오빠인 상훈군은 초등학교 1학년 때 부모가 이혼, 초등학교를 11곳, 중학교를 4곳이나 옮겨다니는 등 학업과는 동떨어진 생활을 했다. 막노동을 하는 아버지를 따라 전국 방방곡곡으로 다니다 보니 어쩔 수 없었다. 마음 붙일 곳을 찾지 못하고 방황했다. 여동생도 오빠와 다를 게 없었다. 2003년 오누이는 충남 천안에 살다 어머니를 찾아 무작정 상경했다. 하늘도 무심치 않았는지 이들은 상경후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우연히 어머니와 상봉하는 기적을 맛보았다. 이어 어머니의 수소문으로 나란히 성지학교에 입학했다. 이 때 학교측이 백방으로 학력을 조회해준 덕택에 중 2학년 학력을 인정받아 1년여 만에 졸업장을 쥐게 됐다. 뿐만 아니라 성지학교측은 생계지원금 200만원을 지원하기도 했다. 상훈군은 틈틈이 당구장 등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학비를 보탰다. 남매는 이번에 성지고에 나란히 진학한다. 이들과는 사정이 다르지만 성지고 졸업생 중에는 모녀가 함께 대학진학의 영광을 안아 눈길을 끌었다. 유명선(가명·47·서울 강서구 화곡동)씨와 이영아(가명·24)양이 그 주인공. 유씨는 강원도 태백시에서 광부로 일하는 남편과 남매를 두고 살았으나 딸 민영양이 1997년 교통사고로 중환자가 되면서 강원도에서는 중학교 입학의 길이 막혀 이 곳으로 옮겨왔다. 역시 중학교 졸업이 학력의 전부인 유씨는 민영양이 중학교를 졸업한 뒤에는 아예 고등학교 과정, 그것도 같은 반에 급우로 들어가 공부를 함께 했다. 교사로 있는 아들이 모녀의 학업지도를 하는 등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딸과 같은 반서 만학… 모녀 함께 국립대 합격 모녀가 애쓴 결과는 보람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국립인 강원도 삼척대 영문학과에 나란히 합격했다. 이들을 위해 학교 선생님들은 100만원을 모아 등록금을 보탰다. 유씨는 “지독한 불운 속에서도 착실하게 살아온 가족들 덕분”이라면서 “오는 19일 학교쪽으로 집을 옮겨 못다한 학업을 잇게 돼 다행”이라면서 딸을 가리키며 “인생과 학업의 동지”라고 환하게 웃었다. 성지중·고교 김한태(70) 교장은 “진폐증을 앓던 유씨의 남편도 모녀의 노력에 힙입어 자리를 털고 일어나 다른 일자리를 얻어 힘을 보태고 있다.”고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이어 “대안학교는 어렵게 살거나, 뜻밖의 불운으로 절망의 수렁에 빠지기 쉬운 이웃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글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사진 강성남기자 snk@seoul.co.kr
  • 에버랜드CB 또 선고연기

    서울중앙지법 형사합의25부(부장 이현승)는 14일 특정경제범죄 가중처벌법의 배임 혐의로 불구속 기소된 허태학 전 에버랜드 사장과 박노빈 현 사장에 대한 선고를 연기했다. 지난 2일에 이어 두번째다. 재판부의 변론재개 결정은 “증거가 부족하다면 바로 무죄를 선고하면 되지 무엇 때문에 보완을 요청하겠나.”라는 검찰 관계자의 말처럼 고육지책임을 보여준다. 간접증거와 정황만으로는 유죄를 선고할 수 없고 반대로 증거부족을 이유로 무죄를 선고할 경우 재벌의 편법증여에 면죄부를 줬다는 비판이 예상되기 때문이다. 변칙증여 논란을 불러온 ‘에버랜드 전환사채(CB)재판’은 허 전 사장 등이 1996년 11월 주당 최소 8만 5000원에 거래되던 에버랜드 CB를 발행하고 기존 주주들이 대량실권한 CB 96억원어치를 이사회 결의를 통해 삼성 이건희 회장의 장남 재용씨 남매에게 주당 7700원에 배정, 회사에 970억원의 손실을 끼친 혐의로 기소된 사건이다. 검찰은 지난달 10일 이들에게 징역 5년과 3년을 각각 구형했다. 재판부는 판결문 초안 작성까지 마쳤지만 “기초적인 사실관계와 변호인측이 새로이 제기한 주장 등 법률문제에 대한 검토가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고 밝혔다. 재판부는 검찰에는 CB 발행 배경과 실권 CB 배정 경위,CB의 적정 가격, 특히 한솔제지 및 한국오미아 등과 거래 실례에 대한 입증 보완이 필요하다고 주문했다. 하지만 판결을 미루고 있다는 비판은 피할 수 없게 됐다. 오는 21일자로 법관 인사가 실시돼 재판부가 교체된다. 재판기록을 넘겨받지만 새 재판부는 사건을 재검토할 수밖에 없다. 검찰 관계자도 “새 재판부가 같은 요구를 할지 아니면 다른 요구를 할지 알 수 없다.”고 말했다. 이 재판은 사건이 일어난 때로부터는 10년, 지난 2000년 전국 법대 교수들의 고소로부터는 5년, 검찰의 기소로부터도 1년 3개월이나 끌고 있다. 이는 대법원의 형사공판 송무예규와도 배치된다.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 박근용 간사도 “법원이 인사이동을 앞두고 책임 회피를 하는 것이 아니냐.”고 꼬집었다. 김효섭 박경호기자 newworld@seoul.co.kr
  • [기고] ‘도배’ 봉사하는 검사들/김정석 경주한마음봉사단장

    올겨울 들어 가장 추웠던 지난 2월2일 세계적 관광도시 경북 경주시의 변두리 골목 안쪽 허름한 가옥에서는 기계공구들의 굉음 속에 15명의 남자들이 한파 속에 입김을 토해내며 지붕, 마당, 주방, 방안에서 분주하게 일손을 움직였다. 한해동안 방치한 듯 천장은 비가 새 얼룩져 있었고 달력은 2004년 1월에 멈춰 있다. 엄마 없이 생활하다 아버지까지 가출해, 친척집을 전전하며 사는 고등학생 남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은 한마음 봉사단이 남매를 위해 집수리 활동을 펼치는 현장이다. 봉사자들 가운데 선비풍에 잔잔한 미소를 머금은 한 남자가 썩은 장판을 안고 나온다. 대구지검 경주지청 조동석 지청장이다. 방 한편에서는 30대 초반의 김한중 검사가 도배지에 열심히 풀칠을 하고 있다. 그런데 봉사단원 중 누구도 일을 시키면서 검사님이라 부르지 않는다. 조사장님, 김선생이라 부를 뿐이다. 건축기술자들로 구성된 한마음봉사단에서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정기적으로 무료 집수리 봉사활동을 펼친다. 2004년엔 51일간 45가구를 고쳐주었다. 그 봉사활동에 대구지검 경주지청장과 검사가 참여한 것이다. 올해부터 매월 두차례씩 순번제로 참여하기로 한 경주지청의 첫 봉사활동이다. 경주지청 검사들은 자원봉사자로 참여한 만큼 봉사단 규칙에 따라 무엇이든지 시켜만 달라고 했다. 물론 호칭은 ‘검사님’이 아니다. 점심 또한 지청장이 참석하였다고 달라질 게 없다. 평소대로 작업대를 식탁 삼아 선 채로 양푼 밥에 김치와 찌개 한가지를 먹을 뿐이다. 지청장은 잠바에 도배풀로 범벅이 된 젊은 검사를 쳐다보며 “맛있제.”하며 두공기씩 뚝딱 해치운다. 도배기술자 회원이 도배 보조를 한 검사에게 “검사 사직하고 나따라 도배일 할 생각 없느냐.”고 묻자,“일당이 얼마냐?”고 되묻는데, 옆에 있던 총무가 “솜씨보니 세식구는 먹여 살리겠다.”고 하자 모두 한바탕 크게 웃는다. 영화의 한 장면이 아니다. 집수리 현장에서 벌어진 일이다. 서툰 솜씨지만 최선을 다해 비지땀을 흘리는 그들을 보면서 나는 정말이지 세상도 변했고 검사들도 변했구나 생각해 보았다. 오는 3월3일에도 검사들이 참여하는 일정이 잡혀있다. 그날 참여하는 다른 ‘선생’들의 모습은 또 어떠할는지 마냥 기대가 된다. 아마 검사들에게 호령(?)하는 사람들은 우리 한마음봉사단 식구뿐일 것이다. 경제불황 속에서도 지난 연말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불우이웃돕기 성금은 사상 최고치를 경신하였다. 이것이 대한민국의 국민성이요 저력이다. 진정 국민의 검찰이자 최고 사정기관으로 거듭나고 있는 검찰! 그들은 바로 국민들의 애환을 보듬을 줄 아는 진정한 ‘사장’과 ‘선생’들일 것이리라. 김정석 경주한마음봉사단장
  • [길섶에서] 아버지의 情/육철수 논설위원

    일전에 대학친구들의 모임에 갔다. 중학교 교사로 있는 C가 들려준 아들의 대학 합격기는 잔잔한 감동이었다. 이 친구는 터울이 꽤 나는 남매를 두고 있는데, 어린 딸만 예뻐하고 아들은 밉다고 고3 수험생인데도 거들떠보지도 않았단다. 그의 얘기를 들어보자. “그 놈이 어릴 때는 ‘우리 ○○이’하며 무척 귀여워했는데, 언제부턴가 호칭이 ‘○○이 XX’로 바뀌었어. 미술·바둑학원 같은데 다 보내봤는데 공부하고는 담을 쌓았던 것 같아. 수험생이라는 놈이 TV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보질 않나, 토요일 오후엔 낮잠 자고 밤마다 컴퓨터에 매달리잖아. 먹기는 또 얼마나 먹어대는지…. 미운 짓만 골라서 하는데 환장하겠더구먼. 대화가 될 리 있겠어? 그래도 입시가 다가오면서 대학에 떨어지면 내가 망신당할 일이 은근히 걱정되더라고. 그런데 이 놈이 글쎄, 떡 붙었잖아. 일단 내 체면을 세우고 보니 내 욕심만 차린 게 얼마나 미안하던지. 그래서 다시 ‘우리 ○○이’라고 부르기로 했어.10년만에 사랑을 주기로 마음을 바꾼 거지….” 그들 부자는 대학합격 기념으로 둘이서만 중국여행을 다녀왔다. 여보게 친구, 되찾은 부자지정(父子之情)을 진심으로 축하하네. 듬뿍듬뿍 사랑해 주게! 육철수 논설위원 ycs@seoul.co.kr
  • [2005사대륙 피겨스케이팅선수권] 빙판요정 “강릉으로”

    세계 정상급 기량을 자랑하는 ‘은반의 요정’들이 한국을 찾는다. 국제빙상연맹(ISU)이 주최하는 2005사대륙 피겨스케이팅선수권이 오는 16일부터 5일 동안 강릉에서 열린다. 이번 대회에는 개최국 한국을 포함, 유럽을 제외한 일본 중국 미국 캐나다 등 15개국 100여명의 선수들이 참가한다. 가장 눈에 띄는 요정은 여자 싱글 부문에서 세계 정상급 수준을 자랑하고 있는 일본의 수구리 후미에(25). 세계 랭킹 4위인 수구리는 2003년 12월 미국 콜로라도 스프링스에서 열린 그랑프리 파이널 대회에서 화려한 공중돌기를 선보이며 우승후보 샤샤 코헨(미국)을 제치고 정상에 우뚝 선 바 있다. 페어 부문에서는 러시아의 아성을 무너뜨리고 있는 중국이 단연 돋보인다.2003년 세계선수권 챔피언 쉔수에-자오홍보 조(세계 랭킹 1위)와 디펜딩챔피언 팡칭-퉁지안 조(4위), 세계 주니어 챔피언 출신 장단-장하오 조(5위)가 치열한 집안 다툼을 벌이며 대회 4회 연속 페어 부분 우승컵을 노린다.10위 레나 이노우에-존 볼드윈 조(미국)가 만리장성의 아성에 도전한다. 아이스댄싱에서는 지난해 캐나다대회에서 나란히 1,2위를 차지한 타니스 벨빈-벤자민 아고스토 조(미국·세계 3위)와 마리아 프랑수아 뒤브렐-파트리스 로종 조(캐나다·7위)가 다시 한번 불꽃 대결을 펼친다. 한편 한국에서는 남자 싱글에 이동훈(18), 여자 싱글에 최지은(세화여고) 신예지(광문고) 김채화(이상 17·오사카여고), 아이스댄싱에서 김혜민(20·세종대) 김민우(19·계명대) 남매가 출전, 중위권 진입에 도전한다. 홍지민기자 icarus@seoul.co.kr
  • 한국남매 金·金·金… 골드러시

    ‘동계종목의 대명사’ 스키점프와 쇼트트랙 국제대회에서 한국 선수들이 금빛 낭보를 쏟아냈다. ‘한국 스키점프’의 1인자 최용직(22·한국체대)은 13일 독일 브로테로데에서 벌어진 컨티넨탈컵 스키점프 K-120에서 1·2차 합계 267.9점으로 유럽의 강호들을 따돌리고 한국선수로는 대회 사상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최고권위를 자랑하는 국제스키연맹(FIS) 월드컵시리즈에 이어 2번째로 큰 컨티넨탈컵에서 정상에 등극한 것은 성인 선수가 단 6명에 불과한 한국 스키점프에선 큰 사건. 앞서 지난 2002년 최흥철(25)이 첫 우승을 일궈냈다. 지난달 인스브루크 동계유니버시아드대회에는 휴학자 출전금지 규정에 걸려 출전하지 못했던 최용직은 1차에서 109.5m를 나는 데 그쳐 메달을 확신할 수 없었지만 2차 시기에서 무려 123.5m를 날아 종합점수 260.8점을 기록한 칼레 케이투리(핀란드)를 7.1점차로 따돌렸다. 동반 출전한 김현기(22)와 강칠구(21·이상 한국체대)도 70명 가운데 상위권인 8위,16위에 오르는 등 선전을 펼쳤다. 한편 13일 슬로바키아 스피슈스카노바베스에서 막을 내린 04∼05쇼트트랙월드컵 6차대회에서는 진선유(17·광문고)가 여자 2관왕 및 개인종합 정상에 등극하며 전날 500m에서 남녀 모두 메달사냥에 실패한 한국대표팀의 체면을 살렸다. 진선유는 여자 1000m 결선에서 1분30초71로 동료 여수연(20·중앙대·1분30초81)과 ‘베테랑’ 양양A(중국·1분30초87)를 제치고 1위로 결승선을 통과해 지난 11일 1500m에 이어 2관왕에 올랐고,5차월드컵에 이어 또 한번 개인종합 우승을 차지해 ‘차세대 간판’임을 입증했다. 남자 간판 안현수(한국체대)도 3000m에서 5분15초45로 ‘숙적’ 아폴로 안톤 오노(미국·5분15초46)를 따돌리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하지만 오노도 1000m와 1500m,5000m릴레이에서 금메달을 따내 개인종합 우승을 거머쥐는 등 건재함을 뽐냈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11일 TV 하이라이트]

    ●바람꽃(KBS1 오전 8시5분) 형주는 재규의 정치적 야욕에서 비롯된 정략적 맞선이란 사실을 알면서도 마지못해 맞선을 보고, 사실을 알게 된 인표는 더욱 더 영실을 다그치며 말리는데, 영실은 고아라는 자신의 처지를 새삼 슬퍼한다. 정님을 바래다 주는 길에서 영실과 정님은 서로의 너무 다른 꿈에 대해 얘기한다. ●여자플러스(SBS 오전 11시10분) 설날하면 생각나는 음식 만두. 모양도 다양하고 색깔도 화려하다.‘만두의 변신은 무죄’라는 말이 어울릴 듯한 이색 만두열전. 입도 즐겁고 눈도 즐거운 맛있는 만두세상 속으로 빠져들어 보자. 또 설날이 끝나고 나면 주부들의 골칫거리인 설날 남은 음식을 변신시키는 방법도 알아본다. ●언론과의 대화(YTN 오후 3시15분)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을 맞아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 가족들. 자식과 아내를 외국에 보낸 채 홀로 지내왔던 기러기 아빠들의 회포는 더욱 남달랐을 것이다. 조기유학의 급증으로 기러기 아빠들은 매년 늘어나고 있는 추세. 이런 기러기 아빠들의 현황과 증가요인, 대책 등을 논의한다. ●문화센터(EBS 오전 11시) 설날이 지나고 나면 정월 대보름이 돌아온다. 우리 소리, 우리 가락 마지막 시간에는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 한가위 같은 명절에 부녀자들이 모여 손을 잡고 부르는 강강술래를 배워본다. 여럿이 원무(圓舞)를 추는 전통은 고대 제천의식에 기원을 뒀다고 할 만큼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해후(MBC 오전 9시45분) 선천성 심장이상으로 어렸을 때부터 몸이 약했던 혜성에게는 심장이식만이 살 길이었다. 마땅한 기증자를 찾지 못하고 퇴근하던 혜성의 아버지는 한적한 길에서 사람을 치고 만다. 피를 흘리며 쓰러진 사람을 본 그는 혜성이를 살리기 위해 뺑소니 교통사고로 위장하기로 결심한다. ●인간극장(KBS2 오후 8시30분) 매일 아침 해돋이를 보며 하루를 시작하는 지리산 왕시루봉의 6남매. 지식 위주의 교육보다 올바른 가치관을 심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여긴 아빠는 산골행을 택했고, 아이들에 대한 애정 만큼이나 교육법도 독특하다. 자연과 하나된 천진난만한 지리산 6남매의 겨울 이야기속으로 들어가본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전국노래자랑’ MC 송해

    한도 많고 팔자도 어지간히 드세다.‘굳세어라 금순아’의 주인공처럼 모질게도 살아왔다. 풍각쟁이면 어떻고 딴따라면 어떤가. 늘 구수하고 마음씨 넉넉한 이웃집 아저씨, 다들 ‘젊은 오빠’라고 부른다. 맞다. 이게 행복이요, 큰 부자가 아닌가.‘국민과 함께 딩동댕 25년’, 최고령 현역 방송 MC, 그뿐이랴. 지역갈등, 고부갈등, 남북갈등을 해결하는 전도사로 전국을 쉼없이 누비고 있다. ●현역 최고령 방송 MC ‘국민 MC’ 송해(78). 본명은 송복희(宋福熙)다. 그러나 6·25때 피란 도중 바닷물로 밥을 지어먹어 이름을 ‘바다 해(海)’로 바꿨다. 그는 25년째 KBS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을 이끌어오면서 전국적 인기를 누리고 있다. 방송 스케줄 때문에 일주일에 사흘 이상은 집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한다. 녹화 일정이 없을 땐 한국원로연예인 상록회(서울 종로3가)에서 동료들과 못다한 얘기를 나눈다. 상록회는 원로연예인의 사랑방격으로 12년 전 송씨가 사재를 털어 설립했다. 늙어가는 처지끼리 따뜻한 동료애를 나누자는 취지에서다. 지난주 상록회 인근의 한 카페에서 송씨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러니까 말예요,25년이 후딱 넘어갔어요. 아마 공개방송 사상 처음일 거요.”라는 특유의 구수한 말투로 ‘전국노래자랑 MC 25년’의 소감을 피력했다. 팔순을 앞둔 나이에도 불구하고 방송을 매끄럽게 이끌어가는 저력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했다.“일이 아니고 유람이지. 녹화 전날 현지에 내려가 명소도 찾아보고, 주지스님도 만나 얘기도 나누고, 그게 다 보약이지 뭐.”라며 웃는다. 이어 “전국 구석구석 안 가본 데가 없어. 세월이 지나면서 기존의 작은 시(市)가 광역시에 편입되고, 그러다보면 새로운 행정구역이 자꾸 생겨나요. 무진장(무주·진안·장수)은 무진장 다녔지.”라고 하면서 “춘향제가 열리는 남원에도 가장 많이 갔어요. 이래저래 전국 군단위까지 아마 열두바퀴 정도는 돌았을 거요.”라고 부연했다. 송씨는 방송녹화 하루 전에는 반드시 주변 취재를 꼼꼼히 하는 버릇이 있다. 대상은 주로 시장바닥과 대중목욕탕. 그는 “시장에 가면, 많은 재산이 있거든. 그 고장의 분위기, 유행, 또 알리고 싶어하는 것이 무엇인지, 풍물 얘기를 귀담아듣고 아이디어를 떠올리고, 또 목욕탕에 가면 별의별 얘기가 다 나와. 발가벗고 뒤지는데 아무려면 재미없을라고.”라며 또한번 웃는다. ●예심에 2000여명 몰려 15명만 본선에 뿐만 아니다. 전국노래자랑 예심에는 대개 1500∼2000명이 몰린다. 이중 15명 가량 본선에 오른다. 사법시험 경쟁률과 엇비슷하다. 송씨는 예심부터 이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지켜본다. 또 본선에 오른 사람들과는 일대일로 만나 무대 위에서 무슨 얘기를 주고받을지 미리 상의한다. 송씨는 요즘들어 더욱 젊어진 기분이다. 호칭이 많이 달라졌기 때문. 처음에는 ‘송해 선생님’ ‘송해 아저씨’라고 했다. 그러나 이제는 한결같이 ‘젊은 오빠’나 ‘송해 오빠’로 통한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이렇게 부른다. 소위 ‘만년먹기 오빠’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에피소드도 다양하다.20대 아가씨에서부터 60∼70대 할머니한테 기습 뽀뽀를 당하는 것은 예사. 얼굴에 스타킹을 씌워 뱅뱅 돌리는 사람, 행진시키는 사람 등등. 하지만 송씨는 아무리 짓궂은 상황도 부드럽고 재치있게 받아넘겨야 한다. 눈물겨운 사연도 많다.3대째 대장장이가 출연해 직업에 대한 경시풍조를 타파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 경우, 지역감정을 없애기 위해 경상도 출신 며느리가 전라도 시어미니와 함께 출연해 많은 박수를 받은 일, 앞을 못보는 장애인이 ‘노래가 곧 눈’이라며 관객들을 울린 일 등은 지금도 눈에 선하다고 한다. 문득 궁금해지는 것 하나. 김인영 악단장과의 관계였다. 송씨는 이에 대해 김 단장과는 TBC라디오 시절부터 알고 지내는 친숙한 사이로 녹화가 끝나면 소주를 마시며 뒤풀이를 한다.”고 귀띔했다. 이때 출연자에게 선물받은 특산물이 안주로 등장하는 경우도 있다.(송씨는 지금도 소주 2병 정도는 거뜬히 마신다.) 송씨는 또 노래자랑에 출연했던 사람끼리 만나 결혼하는 커플도 많아지고 있다고 귀띔했다. 아울러 동호회를 만들어 불우이웃을 위한 공연활동도 펼치고 있다고 덧붙였다. ●출연자 최연소 3세·최고령 103세 “25년 전 화면을 보면 트로트풍 등 추억의 노래였지만 요새는 매우 다양해졌어요. 최연소 출연자가 세살, 최고령 출연자가 103세, 연령폭이 무려 한 세기에 달해요.” 송씨는 연백평야가 있는 황해도 재령에서 3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당시 부친은 상업에 종사했다.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51년 1·4후퇴 때 혈혈단신 월남했다. 송씨는 이 대목에서 ‘굳세어라 금순아’는 자신을 위해 만든 노래라며 잠시 회상에 빠진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해주항에서 그는 해군 상륙정(LST)을 탔다. 포성을 뚫고 피란길에 나섰다. 바닷물로 밥을 지어먹으며 가까스로 인천항에 도착했다. 이때 나이 스물넷. 인천항에 내리자마자 곧바로 군에 입대한다. 전쟁을 피해 월남했지만 결국 전쟁 깊숙이 뛰어들게 된 것. 그는 야전부대가 아닌 통신학교에서 훈련을 받은 뒤 통신부대에 배치됐다. 근무지는 대구 육군본부. 여기에서 3년8개월 동안 근무하게 된다. 군 얘기가 나오자 “내가 말예요, 전쟁종식을 가장 먼저 타전한 사람이오. 또스똔똔 하는 모스부호로 말예요.”라고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휴전협정 당시 육본 암호실에서 근무했다. 때문에 휴전협정 사실을 암호화한 뒤 전 육군에 타전했고, 곧 이어 전언통신문을 통해 역사적인 ‘전쟁종식’을 알린 것. 그는 군복무 시절에 1급비밀을 취급하는 통신사(하사)여서 영외거주가 가능했다. 대구 민박집에서 출퇴근할 때 선배의 여동생을 우연히 알게 됐고, 결혼에 이른다. ●55년 창공악극단서 가수로 데뷔 55년 제대를 하자마자 ‘창공악극단’에서 가수로 데뷔했다. 이후 전국 각지를 돌아다녔다. 야간열차를 타고 새벽 4시에 부산역에 도착하면 석달 동안은 집을 비우는 등 유랑극단처럼 떠도는 생활이 계속됐다. “40대초반이었지요. 몸이 몹시 안 좋았어요. 일가친척도 없지, 기둥뿌리 하나 없지, 술이라는 힘으로 달랬던 시절이었어요.3개월 동안 병원에 버려지다시피 지냈지.” 그는 “차마 얘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인데….”라며 잠시 창 밖을 응시한다. 이어 “젊은 마누라도 있고 내가 왜 장애인처럼 지내야 하는가라는 생각이 들자 병원을 뛰쳐나왔지.”라고 회상했다. 당시 송씨는 장충동에 살고 있었다. 집에서 남산 팔각정까지 30분 정도 걸렸다. 하루에도 몇번씩 팔각정까지 산책을 하며 마음을 다져먹고자 했다. 하지만 밀려오는 고독, 절망감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그러던 하루는 산책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내던지고 말았다. 천만다행으로 소나무 가지숲에 걸려 목숨을 구했다. 이후 그는 새삶의 길로 들어선다. 송씨는 요즘들어 생사를 알 수 없는 부모형제의 얼굴을 떠올리는 경우가 부쩍 잦아졌다. 또 대학 2학년때 사고사를 당한 아들의 얼굴도 눈앞에 자주 아른거린단다.(원래 송씨 슬하에는 두딸과 외동아들이 있었다.) 건강비결은 음식을 안 가리고, 아무와도 격의없이 만나 웃는 것이란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송씨는 지나는 행인들과 악수를 나눴다. 사람들은 “아이고, 우리 송해 오빠.”하면서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이 세상에 송해만큼 부자가 있으면 나와보라고 해요. 사람 많이 아는 것이 최고의 부자 아니겠습니까.” km@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27년 황해도 재령 출생 ▲6·25 직전까지 북한 해주예술학교에서 성악공부 ▲51년 1월 월남 ▲55년 육군통신부대 만기제대 ▲55년 ‘창공악극단’가수 데뷔 ▲74년 KBS라디오 DJ ▲76년 MBC라디오 코미디쇼DJ ▲80년 전국노래자랑 MC ▲99년 제6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특별공로상 ▲2001년 제8회 대한민국연예예술상 대상 문화훈장 ▲2002년 MBC 명예의 전당 ▲2003년 제15회 한국방송프로듀서상, 보관문화훈장 ■ 작품 송해 옛노래집,KBS고전유머 극장,KBS코미디 하이웨이
  • 할머니라고? 05학번 새내기요!

    할머니라고? 05학번 새내기요!

    이순(耳順), 고희(古稀)를 넘긴 할머니들이 05학번 새내기 여대생이 됐다. 배우지 못한 서러움을 평생 가슴에 묻고 살다가 인생의 황혼에 이르러서야 꿈을 이룬 것이다. 권태평(72·성공회대 사회과학부), 한소혜(64·숭의여대 가족복지과), 강순례(63·방송대 일문과), 구인숙(62·김포대 관광경영학부), 이화자(62·방송대 일문과)씨 등 10명이 주인공이다. 서울 마포 염리동에 있는 2년제 학력인정학교인 일성여고에서 공부한 이들은 사실 할머니라고 부르기엔 몸도 마음도 너무 젊다. ●아들 학생운동 뒷바라지하다 배움에 눈 떠 권태평씨는 91년 ‘유서대필 사건’의 주인공인 강기훈(40)씨의 어머니다. 권씨는 전북 익산에서 교육자 집안의 셋째딸로 태어났다. 국민학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권씨가 태어나자마자 첩과 두 오빠를 데리고 떠났다. 어머니는 부잣집 침모살이를 하며 권씨를 키웠다. 초등학교는 간신히 졸업했지만 중학교 진학은 꿈도 못 꾸었다. 전교 1,2등을 다투는 우등생이었던 권씨는 초등학교를 졸업하던 날 세상이 떠나갈 듯이 울었다. 권씨는 평범한 주부로 살다가 학생운동을 했던 아들을 뒷바라지하며 배움에 눈을 떴다. 인권운동사랑방 활동을 인정받아 ‘NGO 활동우수자 전형’으로 대학에 합격했다. ●“해외 유학도 도전할 것 ” 수시 2학기 성적우수자 전형으로 숭의여대에 합격한 한소혜씨는 고등학교 졸업장을 갖는 것이 평생의 꿈이었다. 전북 군산에서 태어난 한씨는 군산여고에 다니던 1959년 아버지가 도의원 선거에 출마하면서 학교를 그만두었다. 아버지가 선거에서 지자 집안은 기울기 시작했고 급기야 밀린 월사금을 내라는 독촉에 공부를 포기하고 말았다. 한씨는 “두 아들을 장가보낸 후에야 다시 공부할 수 있었다.”면서 “4년제 대학 편입은 물론 해외 유학까지 도전해보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수시 2학기 성적우수자 전형으로 김포대에 합격한 구인숙씨는 “이제야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살게 됐다.”는 말로 합격 소감을 대신했다. 경남 밀양에서 8남매의 둘째딸로 태어난 구씨는 무안중학교 1학년 때 학교를 그만두었다. 집안 형편도 어려운데 장남인 오빠에게 공부할 기회를 주고 구씨는 동생들 뒷바라지를 해야 한다는 집안 어른들의 말씀 때문이었다. 구씨는 “학교를 그만두던 날 내가 서럽게 우니까 오빠가 돈 벌어서 꼭 양재학원에 보내주겠다며 날 달랬던 기억이 생생하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지하철 안에서 영어단어 외웠죠” 강순례, 이화자씨는 방송대 입학 동기가 된다. 전북 순창에서 초등학교까지만 마친 강씨는 “나이들어 공부를 하니까 선생님이 여러번 강조해서 이야기해줘도 돌아서면 잊어버려서 어려움이 많았다.”면서 “어렵게 공부한 만큼 대학생활도 알차게 하고 싶다.”고 말했다. 매일 경기도 군포에서 마포까지 지하철, 마을버스를 다섯번이나 갈아타며 통학했다는 이씨는 “등·하교 시간도 아까워 지하철 안에서 영어단어를 외웠다.”며 활짝 웃었다. 이효연기자 belle@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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