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아보고 싶은 뉴스가 있다면, 검색
검색
최근검색어
  • 남동생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비관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격려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확장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 거액
    2026-08-07
    검색기록 지우기
저장된 검색어가 없습니다.
검색어 저장 기능이 꺼져 있습니다.
검색어 저장 끄기
전체삭제
2,793
  • [27일 TV 하이라이트]

    ●김동건의 한국 한국인(KBS2 밤 12시45분) 연출가로 데뷔한 국내 대표적인 연기파 배우 김지숙. 데뷔 당시부터 첫 노출 연기로 화제를 모았던 작품 이야기부터 남동생이자 영화감독인 김지운 감독과 개성 넘치는 가족이야기까지 그의 연극배우 인생 30년사를 들어본다. 그녀는 연극 ‘아이시떼르’로 연출가로도 첫 도전장을 냈다는데….   ●세계 세계인(YTN 오전 10시40분) 영국에서는 폭풍우가 몰아치는 시즌을 맞아 새로운 기상 관측 모형으로 더욱 정확한 기상예보가 가능해졌다. 열대성 폭풍은 따뜻하고 습한 공기를 만나면 허리케인으로 돌변할 수 있다. 주민들이 열대성 폭풍에 대처하려면 정확한 예보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 기상청도 새로운 기후모델에 자신감을 피력한다.   ●EBS국제다큐멘터리페스티벌 ‘다큐멘터리 최전선’(EBS 오전 10시20분) 울리케 프란케와 미카엘 뢴켄이 공동 감독한 다큐멘터리 ‘패자와 승자’가 방영된다. 신기술이 등장하고 효율성이 강조되면서 약 400명의 코크스 공장의 중국 노동자들이 해고된다. 세계화 시대에 경제의 이름으로 매겨지는 승자와 패자의 현실과 문제점을 탐구한다.   ●솔로몬의 선택(SBS 오후 8시50분) 결혼식 날 정전이 되는 바람에 결혼식은 엉망이 되고, 축의금까지 도난당했다. 신랑과 신부가 예식장측에 대관료 환불과 도난당한 축의금을 보상하라고 요구하는 것이 가능한지 확인해 본다. 불법전매된 분양권을 모르고 산 사람은 불법 사실이 밝혀진 뒤에도 소유권을 지킬 수 있는지 결과를 알아본다.   ●내 곁에 있어!(MBC 오전 7시50분) 용기는 결국 선희의 방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발길을 돌린다. 용기가 돌아가고 난 뒤 정자가 선희를 찾아간다. 은주와 은호는 정자와 마주치자 집으로 가고 정자는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서로 친근한 것을 보고 역정을 낸다. 지애는 동건을 만나 민회장과 함께 산소를 갔다와 줘서 고맙다고 말한다.   ●시사기획 ‘쌈’(KBS1 오후 11시30분) 한나라당 경선 기간 동안 박근혜 후보가 줄곧 이명박 후보를 공격하면서 선거전을 이끌어간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양측 사이에는 각종 의혹에 대한 공격과 반박 중심의 ‘네거티브 캠페인’이 주로 전개된 것으로 나타났다.‘쌈’이 한림대 언론정보학부 송현주 교수팀에 의뢰한 결과를 공개한다.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5년만에 앨범 낸 이은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15년만에 앨범 낸 이은하

    많은 경우 큰 감동은 보이는 것보다 들리는 것에서 생성된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운드’가 그것이다. 영화의 명장면에도 음악이 잔잔히 깔려야 가슴 찡하고 오랜 세월이 지나도 아련하게 기억에 남는다. 노래도 마찬가지다. 얼굴이 못생겨도 흉내낼 수 없을 만큼 고운 목소리로 심금을 울리면 사람들은 그냥 소리에 취해 ‘뿅’간다. 그래서 가수는 가도 그 소리는 영원히 남는다. 고 김정구 선생의 ‘눈물 젖은 두만강’이나 1965년에 작고한 이난영 선생의 ‘목포의 눈물’이 여전히 애창되는 이유의 한 가닥은 여기에 있지 않을까. ‘멀리 기적이 우네 나를 두고 멀리 간다네, 언젠가는 또 만나겠지 헤어졌다 또 만난다네∼’로 시작되는 ‘밤차’의 가수 이은하(46)씨.1970년대 동료 가수 혜은이씨와 함께 방송무대를 주름잡았던 스타 가수였다. 당시 ‘디스코의 여왕’으로 군림했던 이씨는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봄비’,‘아리송해’,‘돌이키지마’ 등 연이어 히트곡을 내놓으면서 10대 가수상을 10년 가까이 휩쓸 정도였다. 목소리는 흐느끼듯 허스키했고, 특유의 율동은 답답했던 대중들의 가슴을 뻥 뚫어주는 청량제 역할을 했다. ●트로트 아닌 ‘트랜스´ 음악으로 승부 그랬던 그가 1992년 어느날, 그 추억의 목소리만 남긴 채 훌쩍 사라졌다.‘언젠가는 또 만나겠지∼’라는 그의 노랫말처럼. 그로부터 꼭 15년 세월이 지난 최근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이라며 올드팬들 앞에 반갑게 모습을 드러냈다.‘컴백’이라는 새 앨범을 내고 다시 가요무대에 컴백한 것. 그 중 신곡 ‘사랑도 추억만큼 기억될 수 있다면 우린 아마도’라는 긴 제목의 노래가 눈길을 끈다.‘등 뒤로 찬바람이 불면/지난 세월을 되새겨보죠∼/사랑하고 이별연습 하면서/내 인생의 많은 걸 생각해요∼’ 팬들은 ‘왕년의 이은하’와 함께했던 지난날들을 되새길 기회를 갖게 됐다며 벌써부터 잔뜩 기대에 부풀어 있다. 타이틀곡 ‘컴백’을 비롯해 ‘드라마’,‘기억상실’,‘돈 스탑(Don’t Stop)’ 등 12곡의 노래에 재즈 하우스, 트랜스(전자음악의 한 종류), 발라드, 댄스 등 다양한 장르를 버무렸다. 중견가수 이은하의 ‘컴백’은 나름대로 각별한 의미가 있다.50을 바라보는 나이에 새로운 장르에 도전했다는 점도 그렇고 이번 앨범에서 ‘재즈 하우스’를 시도했다는 점도 눈길을 끌 만큼 신선하다. 중견가수들이 ‘안전하게’ 선택하는 트로트 대신 새로운 음악을 꺼낸 것도 새삼 그가 주목을 받는 이유다. 그는 “나이 들어도 새로운 가수, 뭔가 열심히 하는 가수가 되고 싶다.”고 컴백 일성을 내놓았다. 이번 앨범을 위해 3년 동안 비지땀을 흘렸다. 작사·작곡에도 직접 참여했다.3년 전 유럽여행을 갔는데, 그곳에서는 중견가수들이 트랜스·일렉트로닉 음악을 하는 것을 보고 충격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토로했다. 그는 “신나는 리듬에 희로애락이 녹아 있는 게 트랜스의 매력”이라고 설명했다.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의 한 카페에서 이씨를 만났다. 자리에 앉자마자 코를 매만지며 “보형물 뺐더니 약간 내려앉은 것 같다.”며 소녀처럼 말갛게 웃는다. 잘나가던 시절 성형수술로 콧대를 높였는데 최근 가요계에 컴백하면서 그걸 쏙 빼냈더니 오히려 홀가분하다는 것. 또 세살 높여 살았던 자신의 과거를 커밍아웃한 것도 비슷한 심정이라고 덧붙였다. 컴백한 소감에 대해 “개그우먼 이영자가 그러더군요.‘늦둥이 하나 낳은 기분이 어떠냐.’라고요.”라고 전했다. 그동안 가요계 뒷전에서 조용히 살다가 ‘컴백’이라는 앨범(늦둥이)으로 불쑥 나타난 그를 격려하는 말이다. 팬들이 그동안 뭐하면서 지냈는지 궁금해한다는 질문에 “사실 방송무대와는 멀리 있었지만 매년 연말 디너쇼 등으로 틈틈이 가요활동을 해왔다.”고 설명했다. 또 ‘IMF’ 외환위기 때 일본 진출을 시도했으나 준비가 매끄럽지 못해 실패했으며,‘ZZ엔터테인먼트’회사를 차려 제작자의 길을 가려고도 했지만 몇억 빚만 짊어지고는 중도하차했다고 털어놨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다시 제작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버리지 않고 있으며, 열아홉살 남자를 소프트록 가수로 키우고 있다고도 귀띔했다. ●싱글 아닌 싱글… “노래와 결혼했어요” 이씨는 아직 싱글이다. 여의도의 한 아파트에서 혼자 산다. 아무리 싱글이라지만 그 흔한 사랑 얘기 한 토막 얻어들을 게 없을까 싶었다. 슬쩍 ‘러브스토리’도 좀 소개해 달라고 눙을 쳤다.“좋다고 생각한 남자 친구가 있어 자주 만났다.”는 그는 “그렇지만 같이 살기엔 성격이 서로 잘 맞지 않았다.”고 고백했다. 그와 지금은 편한 친구 관계로 가끔 통화를 하면서 지낸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남녀 관계라는 게 원래 감당할 수 없이 뜨겁다가도 식어지면 덤덤해지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굳이 결혼을 안 할 생각은 없지만 지금은 노래와 결혼했다고 생각하니 훨씬 마음이 편하다고 부연했다. 그가 문득 원래의 나이를 되찾기 위해 법원에 소를 제기한 얘기를 꺼냈다. “제가 1961년 3월29일 생입니다.1973년 데뷔하면서 17세 미만은 방송에 출연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가수증도 내주지 않았어요. 그래서 음반회사나 주위 선배들이 그렇게(3살 나이 올리는 호적) 해야 된다고 나서 본의 아니게 나이를 속이게 된 셈이지요.” 고민하던 중 그는 3년 전부터 가족들의 조언을 받아들여 자연스럽게 나이 정정에 대한 법원 소송을 제기하게 됐다. 어릴 때 다니던 서울 홍릉초등학교의 생활기록부, 그리고 77년 졸업했던 서울 동대문구 답십리의 경남여상 학적부 등을 어렵게 찾아내 법원에 ‘내 나이 돌려주세요.’라고 요청했다. 그는 워낙 어린 나이에 음악을 시작했기에 시키는 대로 노래를 부를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혼나지 않기 위해 우울한 블루스를 불렀고,20대 중반쯤에야 록음악을 접하고는 무척 좋아하게 됐다고 했다. 평소부터 ‘밝은 음악’을 하고 싶다는 욕망이 많았다. ●다섯살 데뷔 때부터 ‘허스키 보이스´ 눈길 그는 서울 왕십리 토박이. 아버지는 아코디언 등 악기연주에 탁월해 지방연주 때마다 자주 초청을 받았다. 귀엽고 사랑스러운 어린 딸 은하를 항상 데리고 다녔다. 가수 하춘화처럼 다섯살 때 무대에 처음 서게 된 계기도 아버지 덕분이다. 그러던 중 주위에서 “딴따라 하면 배고프다.”며 딸 이은하를 공부시켜야 한다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계속 딸의 음악적 재능에 관심을 가졌다.‘황포돛대’,‘섬마을 선생’ 등을 기타반주와 함께 부르게 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어버지 손에 이끌려 작곡가 김준규씨를 찾아갔더니 “어쩌면 그렇게 허스키한 목소리를 낼 수 있느냐.”고 반색하면서 선뜻 곡을 만들어주면서 음반 취입을 주선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임마중’(1973년)이었다. “당시 아버지는 왕십리 출신으로 돌아가신 서영춘, 이기동 아저씨 등 코미디언분들과 무척 친했어요. 판이 나오면서 십시일반으로 그분들한테 도움도 받았지요. 방송에 노래가 나오면 그분들이 우리 집에 와서 훌륭한 가수라고 저한테 격려를 많이 해주시기도 했고요.” 그는 남동생을 밑으로 둔 맏이로 태어났다. 아버지(69)와 어머니(73)도 여전히 건강하다. 서울 약수동에 사는 아버지는 자전거로 온동네를 돌아다니며 소일하신다. 생활비는 딸 은하가 매달 거르지 않고 드려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효녀라는 칭송도 자자하단다. “저는 노래와 결혼했어요. 정말이지 늦둥이 ‘컴백’이라는 아이도 순산했고요. 보란 듯이 아름답고 새로운 인생을 살 겁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안주영기자 tpgod@seoul.co.kr
  • [문화마당] 소박한 교류들/신경숙 소설가

    일주일 동안 일본에 다녀 왔다. 지난해 3월부터 올해 2월까지 일년 동안 일본작가 쓰시마 유코와 열두 번의 편지 형식의 글을 주고 받은 결실로 양국에서 동시에 책이 나왔다. 한국 쪽은 ‘현대문학’이, 일본 쪽은 ‘스바루’가 지면을 내주어 우리들은 일년 동안 양국의 문예지에 동시에 우리들의 서신형식의 글을 게재할 수 있었다. 그분과 함께 한 일년간의 글쓰기는 나에게 글을 쓰면서 동시에 독자가 되는 흥미롭고 의미 있는 ‘행복한 글쓰기’였다. 작가 쓰시마 유코는 우리에겐 아직 낯선 이름이지만 일본의 현대문학을 이끌어 가고 있는 명성을 지닌 분이다. 특히 프랑스에선 그분의 모든 저서가 거의 다 번역되어 있으며 중국이나 타이완 인도 등 아시아 작가들과의 교류도 활발하다. 나는 그 분을 십 여년 전에 한·일 작가회의에 참석했다가 처음 만났다. 그땐 겨우 텍스트로 쓸 단편 한 편을 읽을 수 있을 뿐이었는데도 어쩐지 저 분하고는 이야기가 잘 통할 것 같다는 친밀감이 오늘날까지 이어졌다. 거기엔 십 여년 동안 양국을 오가며 이어졌던 한·일 작가회의가 배경이 되어 주었다. ‘산이 있는 집 우물이 있는 집’의 출간과 관련해 아사히, 요미우리 등 일본 쪽 신문사와의 인터뷰를 그 분과 함께 하는 일정이 이어졌는데 어느 날 그 분이 편지 한 통을 내놓았다. 일본에서 나온 우리 둘의 서간문을 읽고 일본 독자가 보낸 편지라고 하였다.1945년 해방이 되던 해 어수선함 속에서 일본으로 돌아오게 된 한 아주머니가 보낸 것이었다. 통역자가 전해주는 편지의 내용은 오십 여년 전 일본으로 돌아 오던 때는 편지를 쓴 분의 남동생이 태어난 지 3개월 되던 때였다고 했다. 아기가 고열에 시달리며 사경을 헤매던 때였다고도 했다. 그들의 가족이 아픈 아이를 데리고 경황이 없어 쩔쩔매고 있을 때 항구에서 만난 한국 사람이 일본까지 그분의 가족들을 무사히 귀환시켜 주고 돌아갔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접으며 쓰시마 님이 입가에 미소를 가득 머금고 “신상, 고마워요.”그러셨다. 내가 왜 그런 인사를 더구나 쓰시마 님께 받아야 하는지 모를 일이나 나도 그냥 고갤 끄덕였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이처럼 우리들의 편지는 우리 둘 사이에 오간 편지가 아니라 양국의 독자에게 보내지는 편지이기도 했다. 그래서 도쿄의 쓰시마 님에게 편지를 쓸 때는 한국 독자들은 이미 알고 있는 얘기, 더 이상 설명이 필요 없을 수도 있는 이야기들을 처음 이야기하는 기분으로 정성껏 쓰곤 했던 거였다. 아마 그 분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한국의 나를 너머 불특정 다수의 한국 사람에게 쓰는 편지였을 것이다. 내가 일본의 쓰시마 님을 너머 일본사람에게 쓴 편지였듯이 말이다. 그래서였는지 우리는 서로 무슨 얘기를 쓰자고 약속한 것도 아니었는데 자주 서로 비슷한 주제를 가지고 편지를 쓰고 있는 때가 빈번했다. 그때마다 서로 깜짝 놀라곤 했다. 서울에 사는 나와 열 두번의 편지를 교환하는 동안 도쿄의 쓰시마 님은 책상위에 한국의 사계가 담긴 달력을 올려 놓았다고 했다. 그 달력이 열 두장 넘어 가는 시간은 쓰시마 님에게 지녔던 친밀감이 존경심으로 변하는 시간이기도 했다. 매달 배달되는 편지에 일본이라는 나라에 갇히지 않는 자유로운 비판정신과 소수와 약자에 대한 아름다운 편애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들이 우리들의 글쓰기를 통해 우리가 처한 사회 상황과 역사적 배경들, 도쿄와 서울 사이의 서로 다른 문화와 일년 동안의 서울과 도쿄의 변화하는 모습들, 거기에 개인적인 가족 얘기들까지 가능한 한 이해하려는 마음으로 접근할 수 있었던 것은 서로에게 정치적으로가 아니라 인간적으로 다가갔기 때문에 가능했다. 오히려 그 점이 더 많은 얘기를 솔직하게 나눌 수 있게 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소박한 교류들이 활발해지면 한·일 관계에도 조금씩 진정한 변화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이 8월에 해 본다. 신경숙 소설가
  • [5일 TV 하이라이트]

    ●TV쇼 진품명품(KBS1 오전 11시) 천하제일의 절경으로 민족의 명산인 금강산. 계절마다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금강산. 오랜 세월을 지나며 자연이 빚어놓은 비경, 분단 이후 베일에 싸여 있던 내금강의 비경이 공개된다. 다른 도자기와 달리 납작한 형태가 눈길을 끌고, 어떤 용도로 사용된 것인지 궁금증을 자아내는데…. 이 도자기의 진가를 알아본다. ●최강! 울엄마(KBS2 오전 8시55분) 방학도 끝나가고, 최강 일행은 부모님들의 허락을 받아 우정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훈의 옆자리에 앉은 은기는 훈의 이어폰을 하나 빼서 자신의 귀에 꽂아보는데, 잭 존슨의 ‘Better Together’. 혼자보단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으냐는 은기의 물음에 훈은 아직은 혼자가 편하다며 밀어낸다. ●신비한TV 서프라이즈(MBC 오전 10시50분) 1978년 가이아나 존스타운에서 벌어진 대 참극.900여명이 집단 자살한 그곳은 짐 존스가 이끌었던 신흥종교 집단의 본거지였다. 세상은 그들의 죽음을 광신도들의 비뚤어진 단체행동이라 결론짓는데…. 단순한 집단자살로 보기엔 풀리지 않는 의혹들. 존스타운에서 과연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SBS스페셜-미인(SBS 오후 11시5분) 우리 여대생의 52.5%는 미용성형 유경험자로 82.1%는 한 군데 이상의 미용성형을 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왜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성형수술을 희망하고, 실제로 하고 있는 것일까? 미인의 기준은 개인마다, 사회마다, 시대마다 다르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이 시대 우리가 기준으로 삼는 미인의 특징을 분석해 본다. ●죽마고우(EBS 오전 7시20분) 잔혹했던 한국전쟁의 폭풍우가 지나가고 모든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던 할아버지의 뒤늦은 도전이 시작된다. 양팔을 잃고도 나무뿌리 공예라는 조각가의 인생을 사는 75세 정운재 할아버지. 세상은 재미있고, 생각하기에 달렸다는 할아버지의 말처럼 멀어졌던 세상과 다시금 손을 잡은 그의 조각 세계로 들어 가보자. ●인사이드 월드(YTN 오전 8시30분) 무분별한 토지 개발과 수자원 고갈로 중국 알라샨 고원이 사막으로 변해가고 있다. 중국 정부에 따르면 해마다 인도네시아 발리섬 크기의 땅이 황무지로 변한다. 국가적인 차원에서 사막화를 막고자 엄청난 인력과 자원을 동원하고 있다. 중국은 2020년까지 사막이 되어버린 25만㎢ 정도를 녹지로 되돌릴 계획이다. ●사랑의 공부방-네발 자전거(EBS 오후 6시) 올해 중학교에 입학한 종현이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남동생과 살고 있다. 부모의 이혼과 갑작스러운 아빠의 죽음을 한꺼번에 감당해야 했던 종현이. 그가 간절하게 꿈꾸는 것은 하루빨리 멋진 축구 선수가 되어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효도도 하고 싶다는데…. 과연 종현이의 꿈은 이루어질 수 있을까? ●TV탐험 멋진 친구들(KBS2 오전 9시45분) ‘TV탐험 멋진 친구들’이 이번 주 시청자를 사로잡은 명장면을 찾아 떠난다.60년 전통 족발집을 중심으로 3대에 걸친 고부 갈등과 화해의 과정을 코믹하게 그려낸 주말 드라마 ‘며느리 전성시대’의 드라마보다 더 재미있는 촬영 현장으로 출발한다.
  • “최태민 목사 입회 없이는 아무도 박근혜씨 못만나”

    이순희씨는 본지 특별취재팀에게 자신이 최태민씨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배경에 대해 “이사진이 사퇴하고 최씨 측근들이 이사로 들어온 뒤 재단과 기념사업회 운영이 엉망이 되고 곳곳에서 근혜씨에 대한 망신스러운 소문이 돌아 최씨를 근혜씨로부터 떼어내야겠다고 마음먹게 됐다.”고 말했다. 이후 그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최씨와 최씨 가족들의 집과 재산 관계를 확인하며 이들의 재산이 수백억원대에 이른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털어놨다.이씨는 “존경하는 은사인 박 전 대통령의 큰 딸이 대통령이 되겠다는데 이를 훼방하는 모양새가 싫지만, 은사와 육 여사의 유지가 잘 받들어졌으면 좋겠고 진실도 알려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인터뷰 배경도 밝혔다. 다음은 박근혜 후보의 검증 청문회 발언에 대한 이씨의 반박을 질의응답식으로 정리한 것이다.▶박 후보가 기념사업회 운영에 전념하기위해 스스로 동생 근영씨에게 육영재단 이사장직을 물려줬다는데?-스스로 물려준 게 아니다. 최태민씨가 퇴진하고 근혜씨가 스스로 출근하지 않은 건 사실이나 박근영 이사장 추대를 위해 근영씨와 함께 10번이나 찾아가도 제대로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남동생 지만씨를 앞세우고 찾아가서야 만날 수 있었다. 게다가 돈이 없다고 청운각 관리비 월 30만원 지원도 끊었는데 기념사업회가 잘 운영돼 그쪽에 전념하려 했다는 것도 어불성설이다.▶최씨가 고령이라 일할 능력이 없었으며 먼저 결재한 적도 없었고 자주 자문받을 이유도 없다고 했다.-근혜씨가 출근할 때마다 최씨가 따라 나왔다. 어떤 사람도 최씨가 입회하지 않으면 만날 수 없었다. 최씨가 “박근혜는 로봇이다. 거짓말하면 다 받아들인다.”고 떠들고 다니기도 했다.▶육영재단 직원들의 집회와 시위 등이 구조조정 탓이고 최씨에 대해 오해했기 때문이라고 했는데.-운영이 어려워 구조조정한 게 아니라 최씨 탓에 별의별 사람들이 다 육영재단에 들어와서 간부급 자리를 차지하고 기존 직원들을 내쫓으니까 직원들이 들고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최씨의 다섯째 딸 순실씨도 초의유치원 자매결연을 핑계로 어린이회관에서 판을 쳤다. 부녀가 육영재단을 좌지우지한다며 직원들과 마찰이 심했다.▶90년 10월28일 최태민씨를 물러가게 한 시위에 대해 박 후보는 숭모회라는 급조된 단체가 오해했거나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라고 말했는데.-숭모회는 최씨를 축출하고 난 뒤에 만들어졌다. 그날엔 순수하게 근혜씨 주변에서 최씨를 쫓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 100여명이 모였다. 당시에 내가 직접 청와대에다 최씨를 몰아내려 하니 도와달라는 탄원서를 냈고, 최씨에 대한 좋지 않은 여론을 알던 청와대에서도 전경 4개 중대를 보내 우리를 도와줄 정도였다.▶육영재단은 공익법인이라 전횡이나 착복 등이 불가능하다고 했는데.-근혜씨 입장에선 그렇게 말할 수도 있다. 최씨가 미리 관계기관에 손을 써두었기 때문에 감사고 뭐고 없었다. 아무도 간섭하지 않았다. 육영재단 내부에서 내게 준 1997년도 지출 결의서를 보면 정기 후원금 지급 대상자로 교육청 체육과와 관리과, 경찰서, 능동파출소, 소방서, 광진구청 가정복지과, 위생과 등이 기록돼 있다. 최씨 시절부터 내려온 것 아니겠나.특별취재팀
  • [피랍 한국인 석방협상] ‘악플’에 두번 우는 피랍자 가족들

    [피랍 한국인 석방협상] ‘악플’에 두번 우는 피랍자 가족들

    “‘악플’ 좀 자제해 주세요. 피랍자 가족들의 심정도 한번쯤은 헤아려 주세요.” 지난 19일 탈레반 무장세력에 납치된 피랍자 가족들이 일부 네티즌들의 ‘악플(비난성 댓글)’로 인해 또 한번 눈물짓고 있다. 23일 서울 서초3동 한민족복지재단에 모여 있는 피랍자 가족들에 따르면 피랍자 가족들의 상당수가 네티즌들의 ‘악플 공세’로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부 악성 네티즌들이 피랍자들의 미니 홈피(홈페이지)를 찾아가 악플을 달고 있기 때문이다. 또 피랍자들이 다니고 있는 분당 샘물교회 게시판과 피랍자들의 아프간행을 주선한 한민족복지재단 홈페이지도 악플로 인해 운영이 잠정 중단된 상태다. 이와함께 인터넷 등지에는 피랍자들이 출국 당시 공항 내 ‘아프간 여행 자제’ 안내문 앞에서 찍은 사진과 아프가니스탄 내 이슬람 성지에 모여 있는 사진 등이 유포되면서 피랍자들을 비난하는 댓글이 쏟아져 가족들을 곤혹스럽게 하고 있다. 피랍자 이정란씨의 남동생 정훈(29)씨는 “커다란 정신적 충격에 빠진 피랍자들이 한국에 돌아와 자신의 미니홈피에 남겨진 수백∼수천개의 악플들을 확인할 때 얼마나 큰 상처를 받게 될지 진지하게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면서 “네티즌들의 비난이 도를 넘어서 현재 가족들이 힘들어하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이씨는 “현재 가족들은 친지들로부터 근거 없는 악성 댓글에 대한 비난 소식을 들을 때마다 또 한 번 자책할 수밖에 없다.”면서 “피랍자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치는 만큼 가족들의 애타는 심정을 한 번만 더 헤아려주길 바란다.”고 거듭 당부했다.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 [아프간 한국인 피랍사태] 가족들 안도 속 뜬눈 밤샘

    “제발 살아만 돌아와 다오….”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무장 세력에 한국인 봉사단원 23명이 피랍된 지 4일째인 22일 피랍자 가족들은 서울 서초동 한민족복지재단에서 한국 정부와 탈레반의 협상이 성공적으로 끝나기를 기도하며 뜬눈으로 밤을 지새웠다. 이날 오후 9시쯤 경기 성남시 분당구 샘물교회 교육관에서 아프간 봉사활동 초청 단체인 한민족복지재단으로 자리를 옮긴 이들은 살해 협박 시한(오후 11시30분)을 앞두고 또다시 하루 연장됐다는 소식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면서도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피랍자 가족 20여명은 3층 회의실에 모여 앉아 기도를 하거나 “희망을 잃지 말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피랍자 이정란(33·여)씨의 남동생 이정훈(29)씨는 오후 11시40분쯤 피랍자 가족을 대표해 기자회견을 갖고 “협상 시한이 연장됐다는 소식에 가족들이 모두 안도하고 있으며, 정부를 전적으로 믿고 협상에 희망을 가지고 있다. 언론에서 확인되지 않은 외신을 섣불리 보도해 가족들 가슴을 아프게 하지 말아 달라.”고 당부했다. 한민족복지재단에는 오후 11시쯤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후보가 방문해 “철군 스케줄이 짜여 있고 피랍자들이 순수 의료봉사활동을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며 이들을 위로했다. 앞서 피랍자 가족들은 오후 4시쯤 분당구 정자동의 한 식당에서 언론 인터뷰를 통해 ‘가족들에게 보내는 편지’를 읽으며 눈시울을 붉혔다. 피랍자 서명희(29·여·간호사)·경석(27) 남매의 부모는 “봉사 활동을 간다고 했을 때 적극적으로 보냈는데 지금은 내 발등을 찍고 싶은 심정이다. 더운 나라에서 고생하고 있을 너희들을 생각하면 아빠·엄마는 가슴이 미어진다.”면서 “꼭 만나 기쁨의 포옹을 하며 웃을 수 있는 시간이 오길 바란다. 그때까지 건강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이주연(27·여)씨의 부모는 “탈레반도 자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꼭 살려줄 것이라고 믿는다.”면서 “사랑하는 딸아, 희망을 잃지 말고 내일의 기쁨을 생각하면서 즐거운 날을 맞이할 것을 의심치 말아라. 낯설고 무서운 긴 터널 같은 시련을 잘 인내하고 참길 바란다.”며 흐느꼈다. 이정훈씨는 “무사히 돌아오면 누나에게 못 했던 것 잘해 줄 테니 무사히 돌아오기만 해라.”며 울먹였다. 이들의 애절한 사연은 아랍권 대표 방송인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전세계에 방송됐다. 이주연씨 부모와 서명희씨의 아버지 등 3명은 오후 1시부터 40여분 동안 분당 샘물교회 인근인 분당중학교 교정에서 지난 21일 급파된 알자지라 방송 취재진과 인터뷰를 가졌다. 인터뷰 내용은 편집을 거쳐 오후 4시쯤부터 영어권 국가들에 인터넷을 통해 중계됐다. 인터뷰에 동행했던 정부 관계자는 “알자지라 방송을 통해 피랍자 가족들의 애타는 심경이 탈레반 무장 세력에 전해져 피랍자들이 모두 무사히 석방됐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성남 윤상돈 이경주기자 kdlrudwn@seoul.co.kr
  •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복거일이 본 ‘10년뒤 한국’

    [서울신문 창간103주년] 복거일이 본 ‘10년뒤 한국’

    요양원은 ‘현대적’이었다.‘로즈 가든’이라 쓰인 간판부터 산뜻했고, 널찍한 정원의 잔디는 잘 가꿔져 있었다. 담장을 덮은 덩굴장미도 이름 값을 했다. 휴대 전화가 울렸다. 구보 여사는 급히 가방에서 전화를 꺼내들었다. “여보세요?” “누나? 나 원영이야.” “응, 요양원에 방금 도착했다.” 그녀는 애써 쾌활한 목소리를 냈다. “그래? 엄마 어떠셔?” 목소리에 물기가 어려 있었다. “뭐, 내내… 요양원에 들어가신다는 것도 모르시니…” 그녀는 말끝을 흐렸다. 동생이 한숨을 쉬었다.“알았어. 누나, 그럼 수고해.” “그래, 알았다. 들어가라.” 로비로 들어서자,‘현대적’이라는 느낌이 한결 짙어졌다. 밖에서 보기보다는 널찍한 느낌이 들었고, 무엇보다도 밝고 환했다. 시설들과 장치들이 모두 새로 들여와서 손때가 묻을 새가 없었던 것처럼 보였는데도, 딱딱한 느낌이 들지 않았다. 코에 닿는 공기에 옅게 섞인 소독제 냄새를 빼놓으면, 노인 요양 시설임을 일깨워줄 것은 없었다. 구보 여사는 현관 옆에 놓인 큰 화분의 동백을 조심스럽게 만졌다. 살아있는 나무임을 확인하고서, 그녀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그 한숨과 함께 그녀 가슴에 묵직하게 고였던 죄의식이 밖으로 나간 듯, 문득 가슴이 가벼워졌다. ‘십년 동안에 많이 변했구나.’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그녀는 큰어머니가 요양원에 들어가던 때를 떠올렸다. 휴전선 가까운 작은 도시에 있던 그 요양원은 정말로 초라했었다. 좁고 어둑했고 더러웠다. 창문을 막은 쇠창살이 가슴을 답답하게 했다. 텁텁한 실내엔 오줌 냄새가 어렸다.‘실버 파라다이스’라는 이름이 초라함을 오히려 도드라지게 했다. 그 초라한 시설을 둘러보는 그녀 가슴에 죄의식이 고였다. 따지고 보면, 그녀가 미안해할 까닭은 없었다. 큰어머니는 자식들이 여럿이었고 효자, 효부 소리를 들을 처지는 아니었지만, 아들 셋과 며느리들이 사이 좋게 돌아가면서 어머니를 모셨다. 그러나 치매 증세가 심해지자, 번갈아 모시기가 어려워졌고, 가족회의 끝에 치매 환자들을 수용하는 요양 시설에 들어가시도록 한 터였다. 그래도 그 시설의 초라함이 마음에 아프게 닿아서, 그녀는 눈시울이 따가웠고 속으로 변명 아닌 변명을 찾았다. ‘십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으니… 이젠 이런 시설도 현대적이 되는 것이 당연하지.’ 동백 잎새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면서, 그녀는 고마운 마음으로 다시 한숨을 내쉬었다. “엄마, 저기 있네, 접수대.” 진이가 한쪽의 접수대를 가리켰다. “응, 그렇구나.” 휠체어를 앞세운 딸을 따라, 그녀는 접수대로 향했다. 어머니는 휠체어에 다소곳이 앉아 있었다. 무슨 까닭인지, 어머니는 휠체어에 앉으면, 유난히 조용했다. 입원 수속은 이내 끝났다. 어저께 남동생 내외가 미리 수속을 밟은 것이었다. “여기 서명해주세요.” 환자와 보호자의 신원을 확인하자, 연분홍 가운을 입은 간호사가 서류를 앞으로 내밀었다. 서류 위에 놓인 검정 볼펜을 집어들면서, 그녀는 문득 목이 메었다.‘이제 내가 엄마를, 날 낳아 길러준 엄마를, 남에게 맡기는구나. 자신을 위해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는 엄마를 남에게’ 그녀가 서명을 하자, 간호원이 능숙한 솜씨로 휠체어를 밀면서 앞장을 섰다. 그 사소한 동작이 그녀 가슴에 뜻밖에도 아프게 닿았다. 이미 어머니는 가족의 품을 떠나 남에게, 아무런 혈연이 없는 사람들에게, 넘겨진 것이었다. “여깁니다,” 열쇠를 꺼내 들고 병실 번호를 다시 확인하면서, 간호원이 직업적으로 밝은 목소리를 냈다. “네” 진이가 따라서 밝은 목소리를 내고서 휠체어에 조상(彫像)처럼 조용히 앉은 제 외할머니에게 말을 걸었다,“할머니, 여기가 할머니 방이래요.” 뜻밖에도 어머니가 진이 쪽으로 고개를 조금 돌렸다. 아직 병들지 않은 뇌의 부분이 외손녀 목소리에 담긴 무엇에 반응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숨을 멈추고 기다렸으나, 어머니의 반응은 더 나오지 않았다. 병실은 꽤 넓었다. 그리고 건물의 다른 부분들처럼 ‘현대적’이었다. 어지간한 호텔처럼 잘 꾸며져서, 구보 여사는 다시 안도의 한숨을 조용히 쉬었다. 간호사는 방 한구석으로 다가가더니 무슨 기계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그제서야 구보 여사는 그것이 ‘간호 로봇’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제 치매 환자들을 돌보는 일은 대부분 간호 로봇이 맡았다는 얘기는 이미 들어서 아는 터였다. 그녀는 목을 빼어 간호사가 조작하는 로봇을 살폈다. 언뜻 보면, 사람과 비슷했다. 사람처럼 두 발로 걷고 두 팔로 일을 하도록 되어 있었다. 얼굴도 사람처럼 보이도록 애쓴 듯했다. 그동안 로봇이 많이 발전되고 보급되어서, 로봇이 있는 병실은 그리 낯선 풍경은 아니었다. 준비가 되었는지, 로봇이 휠체어 앞으로 다가섰다. 그리고 잠시 휠체어에 탄 사람을 살피더니, 뜻밖에도 보드라운 여자 목소리로 말했다,“환자 이명인, 각인 과정 시작.” “환자의 모습을 각인하는 겁니다. 환자의 모습을 마음에 새기는 거죠.” 웃음 띤 얼굴로 간호원이 친절하게 설명했다.“저렇게 각인을 해야, 로봇이 환자를 잘 돌보아 줄 수 있습니다.” “로봇이 정말로 환자를 잘 돌보아주나요?” 이런 일에 대해선 잘 모르는 보통 시민 구보 여사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요,” 간호사는 이내 대꾸했다. 그리고 밝은 웃음을 얼굴에 올렸다.“사람보다 나아요.” 간호사의 얘기가 믿어지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무어라 할 수도 없어서, 구보 여사는 어정쩡한 웃음으로 대꾸했다. “네에” “사람은 치매에 걸리신 분들을 돌보기가 어려워요. 지치니까요. 치매 환자를 돌보는 일은 복잡한 기술이 필요한 것이 아니잖아요? 하지만 하루 스물 네 시간 환자 뒷바라지하려면, 지치죠. 그래서 ‘치매 환자에겐 효자 없다.’는 얘기가 있잖아요?” 구보 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랬다. “로봇은 지치지 않거든요. 묵묵히 같은 동작을 되풀이하죠. 환자가 계속 방을 어지럽혀도, 불평하지 않고 계속 치우죠. 잠도 안 자고.” “월급을 달라고도 하지 않고요.” 진이가 날름 끼어들었다. 웃음이 터졌다. “그렇죠. 그래서 의료 비용이 얼마나 절감되었다고요. 전에는 치매 환자 한 사람에 들어가는 비용이 말도 못하게 많았어요. 요새는 로봇 유지비밖에 들지 않아요.” “저 로봇 가슴에 있는 건 이름인가요?” 로봇을 유심히 살피면서, 진이가 물었다. “네. 저 로봇은 ‘로빈’이라고 하죠.” 로봇이 주의를 끄는 소리를 내더니, 진지한 어조로 말했다.“환자 이명인, 각인 과정 완료.” “이제부터 ‘로빈’이 환자분을 돌보아줄 겁니다. 보호자께선 안심하시고 돌아가셔도 됩니다.” 간호사의 얘기가 직업적으로 들려서, 구보 여사는 슬픔이 울컥 솟구쳤다. 그녀는 어머니에게 다가서서 뒤에서 조심스럽게 안았다. 그리고 귀에 대고 속삭였다.“엄마, 나 지금 가는데… 자주 찾아올게.” 절절한 마음이 담겼지만, 그녀 목소리는 그녀 귀에도 어쩐지 공허하게 들렸다. 어머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할머니, 저 갈게요. 안녕히 계세요.” 진이는 쾌활하게 말하고 고개를 까딱했다. 이어 로봇에게로 말을 건넸다.“우리 할머니 잘 돌보아 주세요.” “알겠습니다. 정성껏 모시겠습니다.” 로봇이 머뭇거림 없이 매끄럽게 대꾸했다. 이번에는 진이도 좀 놀란 듯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간호사가 득의의 웃음을 머금었다. “이제 제가 이명진 씨에게 ‘잠자는 미녀’ 이야기를 들려 드리겠습니다. 보호자들께서도 들어주시면, 저로선 기쁨이겠습니다.” ●복거일은 1946년 충남 아산에서 태어났다. 기업은행과 한국과학연구원 선박연구소 등의 직장생활을 거쳐 87년 가상역사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등단했다. 시인이자 사회평론가이기도 한 그는 현재 뉴라이트재단 기관지 ‘시대정신’ 편집위원 등 보수논객으로 활동하며 활발한 논쟁적 글쓰기 작업을 벌여오고 있다. 지난해 11월부터는 보수적 문화예술인들의 모임인 문화미래포럼 대표를 맡고 있다. 대표작으로 ‘비명을 찾아서’ ‘역사 속의 나그네’ ‘그라운드 제로’ 등의 소설과 ‘五丈原의 가을’ ‘나이 들어가는 아내를 위한 자장가’ 등의 시,‘현실과 지향’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 등의 평론집이 있다.
  • 17년간 독거노인 돌본 ‘성동구 천사’

    17년간 독거노인 돌본 ‘성동구 천사’

    “도움은 무슨… 그저 자주 찾아뵌 것뿐인데요.” 연고도 없이 혼자 사는 할머니를 17년 동안 어머니처럼 모시다가 돌아가신 뒤에는 장례까지 치러준 공무원이 있어 감동을 전해주고 있다. 화제의 주인공은 서울 성동구 도선동사무소에 근무하는 박종민(44·행정 7급)씨. 박씨가 지난달 초 대장암으로 세상을 뜬 김석연(83) 할머니를 만난 것은 16년 전인 1991년 성동구 사근동사무소에 사회복지 담당으로 근무할 때다. 김 할머니는 취로인부로 일하면서 생계를 이어가고 있었다.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었지만 여동생은 해외로 이민을 가 연락이 끊어졌고, 남동생은 생사를 모른 채 혼자 살았다. 안타까운 마음에 박씨는 김 할머니 집에 들러 이야기도 들어주며 가끔 음식도 사 드렸다. 근무지가 바뀐 뒤에도 명절 때는 물론 한 달에 한두 차례 할머니를 찾았다. 1994년 결혼식 때에는 할머니를 초청했다. 신혼여행이 끝나고는 부인과 함께 할머니를 찾아 인사를 드리고, 결혼식 때 같이 찍은 사진을 드렸다. 이 사진은 돌아가실 때까지 할머니의 낡은 TV 위를 장식했다. 누가 찾아올 때마다 “내 아들과 며느리다.”며 자랑하곤 했다. 박씨와 김 할머니는 ‘모자의 인연’을 맺지는 않았지만 김 할머니는 박씨를 아들로, 박씨는 할머니를 어머니로 알고 지냈다. 할머니는 돌아가시기 4일 전인 지난달 6일 박씨에게 장례와 함께 남은 돈의 처리도 부탁했다. 할머니가 숨지자 박씨는 장례를 치르고 사망신고 등 호적정리까지 모두 혼자 마쳤다. 할머니가 남긴 돈은 은행예금과 월세보증금 등 400여만원. 박씨는 이 돈을 할머니의 뜻에 따라 돈이 없어 공부를 제대로 못하는 모자가정 등에 학비로 지원할 생각이다. 박씨는 김 할머니 외에도 친구들 3명과 함께 매달 2만 5000원씩 7만 5000원을 모아 10년째 노원구 상계동에 사는 한 시각장애인 가정을 돕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성곤기자 sunggone@seoul.co.kr
  • 인권변호사 에바디의 회고록 출간

    ‘다음 처형할 대상은 에바디’ 2003년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이란의 시린 에바디(60)는 1990년대 후반 암살된 지식인의 가족을 변호하기 위해 정부 관료와 암살 전담반이 나눈 대화록 파일을 열람하다 자신의 이름을 발견한다. 그러나 보통사람에게는 소름이 끼칠 이런 ‘사건’도 에바디에게는 그저 일상에 불과했다. ‘히잡을 벗고, 나는 평화를 선택했다(시린 에바디, 아자데 모아베니 지음, 황지현 옮김, 황금나침반 펴냄,2007)’는 정치적 억압과 유혈 투쟁으로 격동의 역사를 살아온 이란에서 여성과 아동의 인권 수호에 앞장선 시린 에바디가 쓴 회고록이다. 1947년 이란 하마단에서 태어난 에바디는 당시로서는 아주 특별한 가정환경에서 자랐다. 부모는 에바디와 남동생을 아들과 딸로 구분하지 않았고, 또 아버지는 어머니를 지극히 존중했다. 이렇듯 이슬람국가 답지 않은 집안 분위기에서 평등의식과 자존감을 키워온 에바디는 자연스럽게 불합리한 처사와 불평등에 비판의식을 갖게 됐고 행동으로 옮기기에도 주저하지 않았다. 에바디는 1970년 23세의 나이로 이란의 첫 여성 판사가 됐지만 영예는 오래가지 않았다. 1979년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일어난 뒤 강경 보수파의 신정 체제가 ‘여성은 법 집행에 적합하지 않다.’는 이유로 이듬해 판사직을 박탈했기 때문이다. 에바디는 단순 사무직으로 강등됐다. 하지만 권리를 되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이어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이 이란을 침공하는 등 엄혹한 세월이 닥쳤지만, 조국과 정의에 대한 신념을 포기하지 않은 에바디는 1992년부터 인권 변호사의 길을 걷는다. 에바디는 여성의 생명 가치를 남성의 절반으로 규정하고, 여성의 이혼권 및 자녀양육권을 인정하지 않는 법 체계를 바꾸는데 온 힘을 쏟았다. 그 과정에서 에바디는 합리적이고 실천적인 무슬림의 한 사람으로, 진정한 이슬람 율법은 여성의 평등권 및 민주주의 가치와 공존하는 것임을 입증해보인다. 그에게는 2001년 노르웨이의 국제적 인권상인 라프토 상을 비롯해 권위있는 상이 잇따라 주어졌다. 하지만 상의 목록보다도 더 빛나는 것은 무자비한 가부장적 체제와 편파적 법전 해석에 맞서 온몸으로 싸운 에바디의 피와 땀 그 자체이다.1만 2000원. 강아연기자 arete@seoul.co.kr
  • 콩심은데 팥나왔나…이지환(李智煥)씨 정은숙(鄭銀淑)양 약혼

    콩심은데 팥나왔나…이지환(李智煥)씨 정은숙(鄭銀淑)양 약혼

    가수 이미자양과 그녀의 내연의 남편이던 이지환씨가 동거 3년만에 파경을 초래했던 지난 3월. 『그들의 별거소동 이유에 내가 왜 관련돼요』라고 이지환씨와의 어떤 관계설을 극구부인하던 가수 정인숙양은 역시 정양과의 결백을 주장하던 이지환씨와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이제와서는 결합하기로 선언-. 7일 세종「호텔」에서 약혼식을 갖고 결혼식은 내년 3월에 올릴 작정, 정식부부 되기를 맹세했으면서 아직도 여전히 『그때는 정말 결백했소』라고 주장하는 말많고 탈(?)도 많았던 이들 「커플」의 얘기를 들추어 보면-. 이미자양 별거 선언할때 정양과의 관계설 내세워 과거가 많은 상처투성이, 거기에 36세란 「올드·보이」에 무려 14년이나 아래인 22세의 귀여운 미혼여가수 정은숙양을 세번째 아내로 맞게된 이지환씨에게는 그야말로 호박이 덩굴째로 굴러떨어진 셈. 이에 비하면 인기가 날로 상승하는 가수 정은숙양은 꽤 밑지고 들어가는 셈인데-. 먼저 결합하게 된 소감부터 묻자 정양은 생글생글 미소만. 이지환씨는 엉뚱(?)하게 정양과 맞춰본 「띠」의 해석부터 늘어놓는다. 이씨는 돼지띠고 정양은 소띠. 『소가 돼지를 받으면 꼼짝 못하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뭐, 여자를 위해 산다는 얘기겠죠』 이씨옆에 바싹 붙어 앉은 정양은 「띠」의 해석이 무척 달콤했던지 이씨의 말이 끝나자마자 연상「깔깔」… 고개를 이씨의 가슴에 살짝 디민다. 그러자 이씨는 약간 멋적은 표정을 지으며 『이녀석이 이렇게 어리광이 많아서 탈이에요』라며 싱글벙글. 둘의 결합선언은 사실상 작년 3월 이미자양이 이지환씨와의 별거이유로 내세운 「정은숙양과의 관계설」을 긍정하고 든 결과가 된 것이 아니냐는 질문에 이들은 펄쩍 뛴다. 지금도 그때와 똑같은 얘기지만 정말 깨끗했다는 주장. 그런데 끝내 결혼까지 발전케된 것은 어떤면이 작용해서일까. 얘기는 작년3월 이미자·이지환 별거소동 당시로 소급된다. 이미 너무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이미자양이 내연의 남편 이지환씨와 3년간의 정든 동거생활을 청산, 「피리어드」를 찍게된 주요 동기는 이씨가 본처를 가까이 할뿐만 아니라 물심양면으로 돕고있다는 얘기를 들은데도 있으나 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됐던 것은 정은숙양과의 관계설. 이씨는 그런일 없었다고 “그후의 동정이 발전한것” 그러나 당시 이지환씨가 이런 사실을 극구 부인하면서 이미자양을 어떻게해서든지 되돌아서게 하기위해 본처, 그리고 정양과의 관계설을 해명하며 끈덕진 설득공세를 폈었다. 『이거봐, 우리가 어떻게해서 만난사인데 사실 아닌 낭설때문에 헤어질 수 있어. 3년동안 살아온 나를 믿지 않고 소문을 믿는단 말인가』 갖은 설득을 펴 보았지만 한번 토라지면 냉담하기 이를데없는 이미자양이 되돌아설리 만무였다. 그래도 이씨는 미련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날 이양이 그의 자가용으로 이미 세상에 파다하게 공개됐던 KBS-TV의 「쇼」PD 김창수(金昌洙)씨와 함께 「워커힐」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한후부터 미련을 안갖기로 했었다고. 이씨는 이때까지만해도 정양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고 했다. 끈덕진 설득에도 아랑곳없이 이양이 끝내 돌아와 주지 않았기때문에 사실상 이때부터 정양과 가까와지기 시작했다. 별거 소용돌이속에 책임(?)같은 것을 서로 느끼게 되었고 또 동정같은 것이 싹터 다시 사랑으로 변하여 결국은 결혼까지 발전하게 되었다는 것. 이양이 돌아와 주었던들 정양과의 결혼은 그야말로 생각지도 못할 일이라고. 어떻게보면 이들의 결합은 이미자양 때문에 이루어진 것 같기도 하다. 그후 이미자양은 「마스크」의 선이 굵은 쾌남아 김창수씨와 연애(?)를 계속하면서도 현재까지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있는 가운데 내연의 전 남편 이지환씨는 문제의 여가수 정은숙양과 드디어 약혼하기에 이른 것. 이·정「커플」은 금년초부터 이미 동거의 달콤한 꿈을 꾸고있다는 소문이 연예가에 파다하게 퍼졌으나 이씨는 이를 부인. 이양과 헤어진후 돈암동 성신여고앞에서 홀로 하숙생활을 해왔다는 그는 외로운 처지가 된 사이끼리 서로 위로 겸해서 가끔 만난 것뿐이라고 했다. 집안의 반대 부릅쓴 정양 “후회없이 살고만 싶어요” 정양의 집에선 이씨와의 결합을 무척 반대해 왔었다. 『정양의 집에서 반대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정양만해도 아무런 과거가 없는 말끔한 여성이지만 나는 결혼 3일만에 본처와 이혼한 전력에다 또 떠들썩했던 가수의 남편이란 점등 한마디로 상처투성이의 남성 아닙니까. 그런데 호락 호락 찬성할 턱이야 없겠죠』 하지만 끝내 정양의 집에서 결혼을 승낙한 것은 『이제 별도리가 있겠느냐』는 것이다. 정양은 남동생 셋에 위로 언니 하나뿐인 귀엽고 티없이 자란 딸. 아버지는 계시지만 어머니가 안계셔 언니가 어머니 대리역을 해주고있는데 정양이 가수생활을 해나가는데 물심양면으로 돕는 지극한 후원자이기도 하다. 『하나뿐인 여동생이 너무 기대에 어긋난데 대해 마음은 아프지만 그렇다고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고 자기팔자소관이 아니냐』고 정양언니는 결혼승낙은 했지만 몹시 서운한 표정. 정은숙양은 묘하게도 이미자양의 최대의 「히트·송」이었던 『동백아가씨』와 제목이 흡사한 『동백아줌마』로 가요계에 선을 보인후 『석류의 계절』등 계속된 「히트·송」으로 그런대로 줏가를 올렸었으나 이지환씨와 복잡미묘한 관계에 빠지고부터 지금까지 계속 「슬럼프」상태. 이지환씨의 「다이어먼드·쇼」단을 따라 극장의 무대공연이 고작이었다. 얼마전 지구「레코드」사 전속에서 「오아시스·레코드」사로 옮겨 신곡을 준비중인데 이번에 「히트·송」이 나오지 않는다면 가수생활을 집어치우게 할 생각이라는 것이 이씨의 말. 그러나 정양은 설령 「히트·송」이 나오지 않아도 가수생활은 계속할 것이라고 이씨와 상반된 의견을 보이기도 했다. 이미자양의 내연의 남편구실을 하는 동안 『이미자의 남편 이지환이란 열등의식때문에 때때로 심적인 고민도 많았다』는 이지환씨와는 달리 정양은 가수이기는 하지만 앞으로는 떳떳하게 『이지환의 아내 정은숙으로 자신의 「이미지」를 일신해 보겠다』고 제법 큰소리. 『원망도 후회도 할 것 없고 과거일랑 싹 잊어버리고 그저 원만히 살고싶다』는 것이 이씨의 시련의 댓가라고나 할까? <걸(杰)>[선데이서울 70년 11월 8일호 제3권 45호 통권 제 110호]
  • 성희롱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성희롱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얼마 전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한 일본인 유학생 사가와 준코가 ‘학점을 빌미로 대학 강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고 말했다. 이 충격적인 발언은 우리 사회에 파문을 일으켰다. 우리 사회에 일상화된 성희롱의 한 단면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것이다. 누구나 ‘성희롱’이라는 말에는 분노하고 손가락질을 하지만 정작 현실은 다르다. 피해자는 소문이 날까 쉬쉬하고 가해자는 당당하게 무용담을 늘어놓는 뒤틀린 현실은 우리네 직장과 학교 등에서 일상화된 지 오래다. 성희롱을 당했던 끔찍했던 경험담과 함께 성희롱에 대처하는 우리들의 자세 등 성희롱과 관련된 남성·여성들의 솔직한 생각을 들어 봤다. ●주관적인 성희롱 잣대 ‘대략난감’ 지난해 다니던 회사를 그만둔 취업 재수생 소모(34)씨는 전 직장에서의 기억에 몸서리가 쳤다. 부서 회식에서,‘킹카’라 불리던 회사 동기가 한 동료 여직원에게 지난해 인기를 모은 한 노래 제목을 인용하며 “가슴이 예뻐야 여자죠.”라고 말하자 “당근이죠.”라며 맞장구를 쳤다. 하지만 소씨가 분위기를 맞춘다며 “엉덩이까지 예쁘면 금상첨화 아닌가?”라고 말한 게 화근이 됐다. 소씨는 “당시 그 여직원이 저를 성희롱으로 고소하겠다.”며 난리였죠. 그 친구가 다른 동료 직원을 좋아하는 건 알았지만 그렇다고 똑같은 상황에서 내가 한 말에만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에 모멸감을 느꼈어요.”라면서 “그 여직원이 ‘넌 못 생기고 매력도 없으니까 나한테 성적인 농담 따윈 꺼내지도 마라.’라며 비웃는 것 같았거든요.”라고 말했다. 간접적이긴 해도 그 여직원에게 성희롱을 당한 것 같다는 것이 소씨의 주장이다.“‘장동건이 뚫어져라 쳐다보면 ‘생유(고맙다는 뜻)’고 내가 쳐다보면 ‘소송’하겠다.’는 말인데…. 어떨 때 보면 여자들은 ‘주관’이라는 잣대를 지나치게 편파적으로 들이대는 것 같아요.” 대학원생 최모(27)씨는 남자들의 성격을 걸고 넘어지는 일부 여자들을 볼 때마다 성희롱을 당한다는 느낌이 든다고.‘남자가 난쟁이 똥자루만 해가지고, 밴댕이 소갈딱지까지’ 등의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남성의 역할에 대한 고정관념을 끊임없이 주입하려는 것 같아 불쾌하다고 말한다. “얼마 전 서울의 한 대학에서 여대생이 졸업 작품으로 성인 남성이 무릎을 꿇고 자위 행위를 하는 조각상을 만들어 화제가 됐었다죠. 만약 남학생이 여성이 자위하는 조각상을 만들었다면 여자들이 가만 있었을까요. 그것도 엄밀히 말하면 성희롱일 텐데요.” ●남자들도 성희롱에 분노한다 오는 8월 미국 유학을 떠나는 문모(30)씨는 아직도 떠오르는 ‘아찔한(?)’ 기억이 있다.2002년 제대를 한 뒤 놀이공원에서 허드렛일 아르바이트를 할 때였다.30대 초반 여성 두 명과 한 조가 됐는데 이미 결혼한 ‘아줌마’들이라 문씨는 누나처럼 따랐다. 이들도 “꼭 친동생 같다.”며 문씨를 살갑게 대했다. 하지만 어느 날부터 ‘누나’들의 행동이 이상해졌다. 한 아줌마가 가끔씩 “허벅지가 진짜 굵은 걸 보니 힘 정말 잘 쓰겠네.”라며 문씨의 허벅지를 손으로 움켜쥐면 다른 아줌마 역시 “그래? 나도 한번 만져 보자, 진짜 살결이 영계 같아 좋네.”라며 맞장구를 치곤 했다. 고민 끝에 문씨는 상사에게 보고했다. 하지만 “야, 그 미시 언니들 예쁘기로 소문났는데 고맙다고 해야 되는 거 아냐? 그 언니들한테 내 것도 굵다고 전해 드려.”라는 상사의 어이없는 답변에 결국 ‘GG(젊은이들 사이에 ‘항복하겠다.’는 뜻으로 사용되는 게임용어)’를 선언할 수밖에 없었다. “누나들은 원래 남동생 허벅지를 막 만지기도 하고 그러나요. 그때는 제가 어려서 참을 수밖에 없었지만 성희롱이 꼭 여자만 대상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았어요. 어떤 남자들은 ‘남자가 여자한테 성희롱·성추행당했다.´고 하면 되레 부러워하던데 이런 안이한 태도가 남성을 피해자로 만드는 데 일조한다고 봐요.” 얼마 전 결혼한 회사원 한모(32)씨는 직장에서 들려오는 ‘새신랑’이라는 호칭이 그리 달갑지만은 않다.“이제 결혼했으니 알 건 알아야 한다.”며 몇몇 여자 상사들이 한씨에게 들려주는 노골적인 성담론(?)이 무척 귀에 거슬리기 때문이다. “눈썹이 진한 게 밤에 일 잘하겠어.”라거나 “와이프를 위해 틈틈이 운동하고 마늘을 많이 먹으라.”는 얘기는 재미삼아 들어줄 만하다. 하지만 술자리에서 ‘아내를 만족시키는 노하우’나 ‘밤에 차로 데이트하기 좋은 장소’ 같은 것까지 미주알고주알 설명할 때는 민망하다 못해 짜증이 날 정도라고. “아마 저도 결혼을 했으니 이른바 ‘한팀’이 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하지만 남자들한테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듣는 얘기를 나이 차가 많다고는 해도 여자들에게까지 들어야 하나요? 한국 사회가 직장 상사에게 싫은 내색 하기 쉽지 않다는 걸 잘 알텐데 알아서 자제해 주면 좋겠어요.” 회계사 박모(29)씨는 지난해 출근길에 실제 ‘성추행’을 당했다. 승객 많기로 유명한 지하철 2호선에서 박씨 바로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자신의 팔에 가슴을 밀착시켰던 것. 흠칫 놀란 박씨가 혹시나 오해를 살까봐 재빨리 손을 치우려 했지만 오히려 여자가 몸을 더욱 심하게 밀착시켜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고. 결국 승객으로 가득 찬 지하철 안에서 박씨는 천장만 바라보며 상황을 지켜만 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당시 하도 화가 나서 인터넷에서 법조문을 찾아보았는데 성폭행의 경우 남자는 아예 대상이 안 되더군요. 여자는 남자를 강간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은데…. 성범죄와 관련해선 때로는 남자가 역차별받는 부분도 있는 것 같더라고요.” 류지영기자 superryu@seoul.co.kr ●직장 그만두게 만드는 성희롱의 악몽 남자 동료들이 많은 회사에 다니는 6년차 김모(30·여)씨에게 성희롱은 일상이다. 회식 자리이나 노래방에서 술에 취한 듯하면서 손을 잡거나 은근슬쩍 어깨에 손을 얹는 ‘스킨십형’은 보통이고 허리에 팔을 쓰윽 감는 ‘노골적인 성희롱형’ 상사도 적지 않다. 김씨가 발끈하기라도 하면 상사들은 ‘뭘 그 정도 가지고 그러냐….’며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받아넘긴다. 언어 폭력도 견뎌야 한다. 지난달 부서 회식에서는 40대 중반의 상사가 빨간 블라우스를 입은 김씨를 보더니 “여자가 빨간 옷을 입는 것은 프로이트 심리학에서 볼 때 ‘(잠자리를) 하고 싶다.’는 의미라던데….”라며 농을 걸어왔다. 화기애애하던 회식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던 김씨는 “그런 건 아니고 아침에 안 좋은 일이 있어서 기분 전환할 겸 입었어요.”라고 받아넘겼다. 하지만 찜찜하고 분한 마음은 가슴 한켠에 고스란히 남았다. 김씨는 “사회 생활을 시작했을 때는 극도로 민감하게 받아들였던 부분들도 이제는 웃어 넘기는 경우가 많아졌어요.”라면서 “물론 정도가 심할 땐 확실하게 선을 그어야죠. 아니면 좋아서 가만히 있는다고 생각하는 정신 못 차리는 남자들도 있어요.”라고 말했다. 회사원 송모(30·여)씨는 첫 직장에서 있었던 끔찍(?)했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모 은행의 지점에서 일하던 송씨는 어느날 회식을 마친 뒤 집에 가려고 택시를 탔다. 마침 비슷한 방향에 사는 지점장이 “걱정되니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택시에 동승했다. 지점장은 송씨가 사는 아파트에 도착했지만 돌아가려고 하지 않았다.“현관문에 들어가는 걸 봐야 마음이 놓인다.”면서 엘리베이터에 함께 올라탄 지점장은 갑자기 송씨에게 키스를 하려 했다. 송씨가 두 팔로 밀쳐내면서 “뭐 하시는 거예요.”라고 따지자 지점장은 능글맞게 “네가 너무 예뻐서….”라고 말했다. 송씨가 “지점장님 딸이 이런 일 겪는다고 생각해 보세요.”라며 화를 내자 지점장은 “난 딸 없으니까 괜찮아.”라며 뻔뻔하게 나왔다. 마침 엘리베이터에 다른 사람이 타서 위기를 넘겼지만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등줄기에 식은 땀이 흘러내린다. 은행 업무가 적성에 맞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지점장과 마주칠 때마다 소름이 끼쳤던 송씨는 결국 석 달 만에 힘들게 들어간 은행을 그만두고 직장을 옮겼다. ●‘준코형’ 성희롱도 대학가에 만연 대학생 박모(25·여)씨는 대학 강사가 학생을 노린 이른바 ‘준코형’ 성희롱에 시달렸다.2005년 ‘영국민중생활사‘란 과목을 듣다가 자신의 귀를 의심할 만한 내용을 듣곤 했다. 40대 중반의 강사는 틈나는 대로 “여러분도 다 성경험이 있겠지만….”으로 시작하는 이야기를 늘어놓거나 “한국 여자들은 마늘을 많이 먹어서 그런지 (잠자리) 힘이 좋다.”는 등 수업과 전혀 관계없는 음담패설을 하곤 했다. 한 여학생이 강사가 보낸 메일을 확인하지 않자 “네가 그런 식으로 행동하니까 남자 친구가 없는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면박을 주기도 했다고. 당시 수업을 듣던 10여명의 여학생들뿐 아니라 일부 남학생도 “여기가 미국도 아닌데 강사가 너무 지나친 것 아니냐?”며 수군거리기 일쑤였다. “대학 강사로부터 성희롱을 당했다는 준코를 보면서 많이 공감했어요. 아무리 시대가 바뀌었다고 해도 학생에게 할 말이 있고 못할 말이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자격미달의 강사가 아직도 학생들에게 그런 이야기로 수업을 진행해 여학생들의 마음에 상처를 줄 거라고 생각하니 아찔해요.” 현재 전업 과외교사로 활동중인 조모(30·여)씨는 학생들의 성희롱도 ‘장난’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하고 있다. 중·고교 남학생은 물론 초등생들까지도 자신을 ‘여자’로 보고 성적인 발언을 내뱉어 당혹스러울 때가 한두 번이 아니라고. 그룹과외 도중 한 학생이 “선생님 첫 경험 얘기해 주세요.”라고 말을 던지면 나머지 학생들이 박장대소하며 수업 ‘판’을 깨거나 쉬는 시간에 자기들끼리 조씨의 몸매 이야기로 열을 올리는 일도 있다고. “학생들이 나를 성적인 대상으로 여긴다고 느껴질 때가 당황스럽죠. 특히 제가 못 듣는 줄 알고 자기들끼리 성적 농담을 하면 부끄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직장생활 10년차인 최모(36·여)씨는 우리 사회가 ‘성희롱 왕국´ 아니냐는 다소 과격한 주장을 편다. 섹시바 등 길거리만 나가도 여성을 상품화하는 업소가 즐비하고 ‘베트남 처녀는 도망가지 않습니다.’ 같은 현수막에 여자를 바라보는 사회의 인식이 담겨 있다고 말한다. “여자로 살면서 한두 번 성희롱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여자들이 직장에서 뭔가 적극적으로 활동하려고만 하면 곧 ‘그 여자 성적으로 문란하다더라.’라는, 근거 없는 소문이 퍼지기도 해요. 얼마 전 직장에서 성희롱 예방교육을 받았는데,‘서로 사랑하세요.’라는 어처구니없는 강사의 결론으로 끝을 맺었어요. 전문가·일반인 모두 진일보한 성 인식이 필요하다고 봐요.”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세계적 명성얻은 큰무당 김금화씨

    1983년 10월 아웅산테러사건이 발생하기 1년여 전, 그러니까 1982년 봄 어느날이다. 한 전직 장관(박정희 대통령 시절)의 부인이 지인 소개로 용하다는 무당을 서울에서 만났다. 부인의 남편은 다름아닌 외무장관 후보로 하마평에 올라 있었다. 무당은 부인에게 “염려말라. 가만히 있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일러두었다. 그러면서 말미에 “요즘 들어 국상(國喪)이 자주 보인다. 박정희 전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원혼을 풀어야 한다.”는 말을 뱉었다. 며칠 후 무당의 말대로 전직 장관 부인 등을 포함, 몇몇 지인들이 서울시내 모처에 모여 고 박 전 대통령 부부의 원혼을 달래는 굿을 조용히 치렀다.(이때 지난해 작고한 사진작가 김수남씨가 무당옷을 빌려 입고 유일하게 외부인으로 참석했다.) 그로부터 3개월 뒤 무당은 전직 장관 부인한테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 장관 지명에서 자신의 남편은 탈락되고 대신 이범석씨가 신임 외무장관이 됐다는 것이었다. 목소리에는 약간 서운함이 담겨 있었다. 그러자 무당은 “변명 같지만 전화위복이 될 테니 두고 보라.”고 위로했다. 해가 바뀌어 1983년 9월. 무당은 매년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생일날(음력 8월18일)에 주위 친한 사람들을 일부 초청, 점을 봤다. 그런데 이날따라 뭔가 이상했다. 무당은 “버마(미얀마) 가면 안 되는데, 버마 가면 정말 안 되는데!”라고 하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뱉어냈다. 한달 뒤인 10월7일 밤, 무당은 대통령이 죽는 꿈을 꾸었다.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건 개꿈이야, 개꿈!”하면서 남쪽을 향해 침을 퉤퉤 내뱉었다. 공교롭게도 이튿날 아침 아웅산테러라는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다행히 대통령은 위기일발로 간신히 목숨을 건졌으나 이범석 외무장관을 포함, 청와대 수석비서관 등 수행원 17명이 사망했다. 인간의 운명을 ‘재천’이라고 할 때 몇 가지 흥미로운 상황이 떠올려진다. 첫째, 당초 전직 장관 부인의 뜻대로 남편이 외무장관에 발탁됐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결과적으로 보면 무당의 말대로 ‘전화위복’이 된 셈이다. 둘째, 무당이 ‘버마’를 운운한 점, 또 ‘대통령꿈’을 꾸고 벌떡 일어나 미얀마가 있는 남쪽을 향해 침을 뱉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어쨌든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운 좋게도 살아 돌아왔다. 운명의 조화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역사적인 사건을 앞두고 신(神)의 전주곡 같은 기묘한 일이 벌어지는 경우가 가끔 있다. 특히 삶과 죽음이 피범벅이 된 끔찍한 사건일수록 그 뒷얘기는 더욱 신기하게 다가온다. ●이승과 저승 사이에서 살아온 60년 이 시대의 큰무당, 인간문화재 만신 김금화(金錦花·77)는 이처럼 예나 지금이나 가는 곳마다 숱한 일화를 뿌린다. 작두 타며 신을 만나는 그야말로 이승과 저승의 아슬아슬한 경계에서 뭔가를 경험하기 때문이다. 그는 17세 때에 처음 신과 만났으니 올해가 꼭 60년째가 된다. 한때는 혹세무민이라는 이유로 핍박과 설움도 많이 받았지만 이제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훌륭한 ‘한국인’이 됐다. 그가 세계 여러 나라에 갈 때마다 단연 ‘인기캡’으로 관객들이 구름처럼 몰려든다. 국내에서 서해안풍어제(무형문화재82-2호) 굿판을 벌일 때도 많은 외국팬들이 일부러 찾아올 정도다. 그는 2년 전 강화도 북쪽 해안가에 3000여평의 부지를 마련해 무속체험장인 ‘금화당’ 간판(글씨는 ‘도올’이 썼다.)을 내걸었다. 서해안풍어제 굿판을 벌이기에도 좋고 고향인 황해도 연백땅을 바라보기에도 안성맞춤인 곳이다. 그래서 최근에는 서울 이문동의 서해안풍어제연구소와 금화당을 오가며 80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히 신과 가까이에서 ‘경계적 삶’을 살아가고 있다. 지난주 이문동 연구소에서 그를 만났다. 소박한 한복차림에 활짝 웃으면서 반긴다. 평범하고 마음씨 좋은 이웃집 할머니와 다를 바 없었다.‘금화당’ 얘기를 먼저 꺼냈더니 “1982년 한·미수교 100주년을 기념해 뉴욕·워싱턴·LA 공연을 비롯, 유럽 각지의 해외공연을 수십차례 다니면서 무속 체험장 같은 공간을 꼭 마련해야겠다는 생각을 하던 중 여러 지인들이 십시일반으로 도와줘 뜻을 이룰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외국으로도 소문이 퍼져 최근에는 세계 연극평론가 70여명, 외국 신문사 기자, 천주교 수녀들이 다녀갔다고 귀띔했다. ●무속박물관이 내 꿈 아울러 여력이 되면 무속박물관을 세워 많은 사람들이 찾는 곳이 됐으면 좋겠다고 부연했다. 그는 200여년된 탱화 등 우리 무속사 연구에 가치가 있는 귀중한 사료들을 다수 소장 중인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1931년 황해도 연백군 석산면의 아들이 귀한 집안에서 태어나 남자동생을 본다는 뜻에서 처음에는 ‘넘새’라는 이름을 가졌다. 나이 다섯에 남동생이 태어나자 이름을 ‘금화’라 했다. 그의 신기는 어릴 적부터 신통방통했다. 열살 무렵에는 아이들과 놀면서 시퍼런 낫을 맨발로 타고 올라가 춤을 췄다. 또 어느 집에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고, 임신한 사람을 보면 아들인지 딸인지 알아맞혔다. 열일곱살되던 정월 대보름날 밤이었다. 시름시름 무병을 앓던 그가 달맞이를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개울을 건너려 하자 무수한 별들이 머리 위에 쏟아져내렸다. 한참 동안 정신을 잃었다가 다시 일어났다. 이때부터 ‘신의 딸’이 됐다. 그러자 외할머니가 신 어머니가 돼 금화의 허주굿(온갖 잡신을 몰아주는 굿)을 해주었다. 금화는 이어 내림굿을 하면서 작두를 탔다. 열아홉살되던, 즉 6·25직전 어느날었다. 금화는 하늘에서 시커먼 먹구름이 뚝뚝 떨어지고 달구지가 피묻은 옷가지를 싣고 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물론 신의 계시였다. 당시 북한에서는 무당을 반동분자로 취급했던 터였다. 나라에 큰 난리가 날 것을 안 금화는 숨어다녔으나 자주 붙잡혀 온갖 고초를 겪었다. “전쟁 초기에는 북한군인들이 찾아와 피란간 사람들의 명단을 대라며 윽박지르더군요. 반동으로 몰리자 마을 원두막에 앉아 혼자 인공기를 만들며 위기를 넘기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9·28수복 직후에는 남한 군인들이 와서 빨갱이 노릇한 사람의 명단을 대라고 하더군요.‘너는 무당이니 다 알지 않느냐.’고 하면서 목에 총을 들이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지요.” ●올해 일어날 일은 비밀 결국 우여곡절을 겪으며 난리 중에 인천으로 피란오면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하게 된다. 하지만 순탄치만은 않았다. 특히 새마을운동이 전국적으로 벌어질 때에는 굿을 할 수가 없어 많이 울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 참석, 우수상·공로상·개인상·단체상 등을 싹쓸이하면서 당당한 민속예술인으로 인정을 받게 된다. 그가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것은 한·미수교 100주년 기념행사의 일환으로 미국 스미스소니언 박물관장의 초청공연이 계기가 됐다. 이때 작두 타는 모습 등을 비롯, 한국의 토속 샤머니즘을 선보여 많은 관중을 불러모았고 이후 매년 독일과 오스트리아 등 해외공연으로 이어지고 있다. 인터뷰를 마치면서 올해 큰 사건은 없느냐고 하자 “그건 천기누설”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 사회가 너무 빠르다. 순리대로 가야 하며 남을 탓하지 말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는 9월 금화당에서 무녀인생 60년을 맞아 많은 사람들의 안녕을 비는 큰 굿판을 벌일 예정이니 그때 구경 오라고 당부했다. 인물전문기자 km@seoul.co.kr 사진 김명국기자 daunso@seoul.co.kr ■ 그가 걸어온 길 ▲1931년 황해도 연백 출생. ▲46년 외할머니에게 허침굿(허주굿), 내림굿, 솟을굿을 받음. 방수덕·권만신에게 대덕굿, 철물이굿, 배연신굿, 대동굿 등 전수. ▲82년 한·미수교100주년기념사업 문화사절단으로 방미. ▲84년 미국 하와이주 인간학연구위원회 및 하와이대재단 초청공연,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82호 서해안배연신굿·대동굿 기능보유자 지정. ▲95년 김금화대동굿(연강홀) ▲2000년 서해안풍어제보존회 이사장
  • “히로히토 일왕 개성 없었다”

    |도쿄 박홍기특파원|제2차 세계대전 당시 히로히토 일왕과 관련,“개성이 강하지 않았다.”,“일왕을 둘러싼 어드바이저(참모)가 일본의 정책을 결정해 간다.”라는 등의 내용을 담은 영국 외무부의 보고문서가 런던 공문서관에서 발견됐다고 마이니치신문이 24일 보도했다. 문에 따르면 지난 1937년 9월24일 보고문서에는 일왕의 성격에 대해 ‘주변 사람들의 꼭두각시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강한 개성이 요구되지만 지금의 일왕은 그것을 가지지 않았다.남동생과 같은 자유가 주어지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형성할 기회를 가질 수 없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히로히토 일왕이 중·일 전쟁에 따른 영국과의 관계에 상당히 신경을 썼던 당시의 발언을 기록한 문서도 나왔다. 일왕은 중·일 전쟁의 발단이 된 1937년 7월의 노구교 사건 뒤인 같은 해 10월14일 일본을 방문한 영국 대사를 왕궁에서 만나 “중·일 사변으로 영·일 관계가 급속히 악화되고 있는데 대해 깊은 염려를 가지고 있다.한때의 양호한 두나라 관계로 되돌리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대사도 도와 주면 좋겠다.”고 말했다. 당시 영국 대사는 “양호한 두나라 관계를 쌓는 유일한 기반은 중국을 적이 아닌 친구로 삼는 것”이라고 답변했다.hkpark@seoul.co.kr
  • “외아들아, 살아줘서 고맙구나”

    “어머니 종석이가 왔어요.”,“고생했구만. 그래도 살아줘서 고마워.” 100세 할머니가 6·25전쟁 중에 헤어진 외아들을 57년만에 만났다.12일 오후 금강산에서 열린 제 15차 이산가족 2회차 상봉행사장에서였다. 남쪽의 최옥련(100) 할머니는 이날 전쟁의 참화 속에서 행방불명됐던 외아들 이종석(76)씨를 만났다. 어엿한 청년으로 커가던 아들은 어느새 주름이 깊게 파인 노년의 신사가 되어 있었다. 최 할머니는 죽은 줄만 알았던 아들을 만나자마자 “종석아, 종석아”라며 통곡했다. 최 할머니는 종석씨가 “어머니 종석이가 왔어요. 알아보시겠어요.”라고 인사하자 믿기지 않는 듯 한동안 상기된 얼굴을 풀지 못했다. 종석씨도 “57년만에 어머니를 살아서 만나다니….”라며 눈시울을 붉혔다. 남쪽 누나 종순(79)씨도 “반세기가 넘도록 어머니가 외아들을 기다렸다.”며 그동안 쌓였던 그리움을 털어놨다. 아침마다 외아들을 위해 기도해온 최 할머니는 종석씨가 북에서 김일성종합대학을 나와 김책공업종합대학에서 오랫동안 경제학을 가르쳤고 3남1녀의 자녀를 뒀다고 소개하자 그나마 안도하는 표정이었다.“며느리, 아들은 안 왔냐.”고 묻기도 했다. 이날 상봉행사에서는 또 6·25전쟁 중 동생 김원도(80)씨의 전사통지서를 받고 50년 남짓 제사를 지내온 남쪽의 맏형 원준(88)씨가 살아서 돌아온 동생의 두 손을 꼭 잡은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원도씨도 감격스러운 표정으로 울먹이며 큰형과 함께 온 여동생 양순(77)·남동생 원섭(70)씨 등과 감격의 포옹을 나눴다. 그러나 오랫동안 가슴에 묻어둔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얘기를 듣고 허탈한 듯 고개를 떨구기도 했다. 원도씨는 빨간 천에 싸 온 훈장들을 보여주며 “6.25때는…”이라며 자신의 행적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자 남쪽 동생들은 “됐어요. 건강하게 잘 살아 계셨잖아요.”라며 시간과 이념의 틈새를 훌쩍 뛰어넘었다. 금강산 공동취재단·서재희기자 s123@seoul.co.kr
  • 「미스·관광 안내소」박공순(朴公順)양-5분데이트(99)

    「미스·관광 안내소」박공순(朴公順)양-5분데이트(99)

    표지「모델」로 나서준 아가씨는 서울시청 부설 종합 관광 안내소 11인의 여성안내원중의 한 사람인 박공순(朴公順)양(22). 원래는 경기도청 관광과에 소속된 아가씨로 종합 관광 안내소에 파견 근무를 하고 있다. 수원 매향(梅香)여고 출신으로 경기도청에 근무한지는 꼭 1년째. 서울에 파견근무를 하게 된 것은 석달전부터라고. 아버지 박성열(朴成烈)씨(52)의 4남 1녀중 고명딸. 외딸이라서인지 집에서는 오빠와 남동생들이 극진히 위해 주고 있다면서 흐뭇해 한다. 수원이 집이라서 기차로 출퇴근을 하고 있어 아침 5시면 집을 나서야 하지만 지각 한번 한적이 없다는 부지런한 아가씨. 취미는「스케이트」와 낚시. 여고시절부터 수원에 있는 호수「서호」에서 익힌「스케이트」실력은 준「프로」급. 낚시광인 오빠를 따라간 한두번 나들이에서 재미를 붙여 요즈음은 주말이면 꼭 낚시터를 찾는다고. 낚시터로는 가까운 신갈저수지가 박양의 단골터. 음식은 가리는 것 없이 무엇이나 잘 먹지만 특히 김치 깍두기를 즐긴다는 평범한 식성. 남자친구는 몇 있으나「스테디」한 관계인 사람은 없고…. 결혼은 아직 생각지도 않고 있다.[선데이서울 70년 9월 13일호 제3권 37호 통권 제 102호]
  • “선물요?… 극빈자식권 모아 피자 먹을래요”

    “선물요?… 극빈자식권 모아 피자 먹을래요”

    “어린이날요? 동사무소에서 주는 식권으로 피자나 시켜 먹을래요.” 어린이날을 이틀 앞둔 3일 오후 서울 성동구 행당동 재개발 4구역.10평 남짓한 판잣집에서 일란성 쌍둥이 강성정·유영(11·행당초등 5년) 자매가 시끄럽게 떠들며 방과후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다. 판잣집 방안 곳곳에는 청테이프가 덕지덕지 붙어 있고 빗물에 내려앉은 천장은 곧 무너져 내릴 것처럼 불안했다. 누렇게 바랜 벽지는 습기조차 빠져나갈 구멍이 없어 눅눅했다. 그러나 이 자매는 아랑곳없이 재잘거리며 밝게 웃는다. ●“알박기로 오해… 입주권 없고 이사하기 막막” 자매는 이곳에서 고등학교 1학년 오빠(16)와 중학교 2학년 언니(13), 초등학교 4학년 남동생(10)과 함께 엄마 조금래(43)씨의 보살핌을 받으며 살고 있다. 건설현장에서 일하던 아버지는 술병에 걸려 지난 2월 결국 숨을 거뒀다. 기초생활수급금 75만원에 아동복 공장에서 일하는 엄마의 월급 60만원, 극빈자에게 나오는 3500원짜리 식권 80장으로 보증금 1000만원, 월세 15만원을 내며 근근이 살아온 5남매이기에 이틀 앞으로 다가온 어린이날 선물을 떼쓸 여유는 없다. 엄마가 2년 전 결핵을 앓아 성치 않은 몸으로 매일 10시간씩 일해 힘겹게 돈을 벌어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엄마 조씨는 “5남매를 데리고 어린이날 남들 가는 곳에서 먹을 것 다 먹으려면 20만원 이상은 고스란히 든다.”면서 “식권으로 맛있는 음식을 시켜 먹으며 아이들을 달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게다가 3년 전쯤부터 추진되기 시작한 행당동 재개발로 고층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기 때문에 5남매는 이달 말까지 집을 비워줘야 한다. 이웃들은 지난해 12월부터 대부분 임대아파트 입주권을 얻어 이사를 나갔기 때문에 아이들은 현재 폐허 같은 마을에 살고 있다. 1996년쯤부터 행당동에서 살아온 5남매에게 임대아파트 자격이 주어지지 않은 건 2002년 2월 형편이 극도로 악화돼 1년6개월 정도 대전으로 이사를 갔었기 때문이다. “개발이익을 노린 ‘알박기’로 생각해 입주권이 나오지 않은 거죠. 대전에 있을 때도 극도로 내성적인 큰아들이 바뀐 환경에 적응하지 못해 억지로 다시 서울로 돌아온 건데 이사로 서울 외곽지나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면 또 전학시키고 적응시킬 일이 걱정입니다.” ●“구김살 없이 잘 커준 쌍둥이들이 고마워” 하지만 조씨는 웃음을 잃지 않는 5남매 덕에 피로가 쌓일 틈이 없다. 쌍둥이 자매는 동사무소가 운영하는 방과후 학교, 큰딸은 교회 공부방에서 그나마 모자란 공부를 보충하는 반면 정작 중요한 시기인 고등학생 큰아들은 사설학원에도 보내지 못하지만 불평 한마디 들은 적이 없다. 오히려 “최근 공부를 열심히 안 하는 바람에 성적이 떨어져 엄마에게 미안하다.”고 말한다. 2003년에는 너무 형편이 어려워 쌍둥이 자매를 1년6개월 동안 한 사찰에 맡기기도 했다. 조씨는 “그때 참 미안했는데 절에 갈 때 한 번도 울지 않고 잘 따라준 데다 다시 데려와서도 구김없이 적응하고 잘 커준 쌍둥이들이 너무 고맙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엄마, 괜찮아요. 커서 돈 많이 벌어서 호강시켜 드릴게요.” 조씨는 엄마 품에 안긴 쌍둥이 자매의 얼굴을 다시 한번 사랑스럽게 어루만졌다. 글 이재훈 한상우기자 nomad@seoul.co.kr
  • 전남체신청 ‘사랑나눔’

    전남체신청(청장 김준호)이 우수 경영기관 표창으로 받은 포상금 2000만원을 어린이 날을 맞아 난치병 어린이들에게 선물한다. 체신청은 2일 “지난해 우정사업본부로부터 받은 포상금을 박모(9)양 등 병마와 싸우고 있는 어린이 10명에게 200만원씩 건넨다.”고 말했다. 이 어린이들은 우체국 집배원과 복지기관 등을 통해 추천을 받았다. 전남대병원에 입원 중인 박모(9)양은 선천성 무통각·무한증이고 언니와 남동생도 같은 병으로 치료를 받고 있다. 또 태어나면서 선천성 심장 기형인 이모(3)군, 선천성 두개골 유착증으로 두 차례나 수술을 받은 성모(7)군 등 안타까운 사연이 수두룩하다.광주 남기창기자 kcnam@seoul.co.kr
  • [안정 되찾는 버지니아 공대] 미 언론들 “자녀들 성공 좇는 이민사회 전형” 분석

    버지니아 공대 참사 사건의 범인 조승희씨 가족의 모습을 두고 미 언론들은 22일 “모든 희생을 치르더라도 성공과 자녀 교육을 위해 살아가는 한인 이민사회의 전형”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실패는 수치스럽다는 체면 문화와 아들의 성공을 딸의 성공보다 중시하는 유교적 관념이 이번 조씨 사건을 파악하는 실마리가 될 수도 있다고 분석했다. 로스앤젤레스 타임스는 22일 ‘명랑한 딸, 시무룩한 아들-조씨 가족의 수수께끼’라는 제목의 1면 기사에서 “조씨 부모가 15년 전 미국으로 이민 와 혹독한 고생 끝에 마련한 3층짜리 주택은 중산층 진입 성공의 상징으로 서 있지만, 그 꿈의 집이 지금은 몰려든 취재진을 앞에 둔 채 텅 비어 있다.”고 소개했다. 신문은 명문 아이비리그 출신의 이상적인 딸 조씨의 누나와 미국 역사상 최악의 캠퍼스 참사를 저지른 닫힌 세계 속에 살던 조씨의 차이점을 집중 조명했다. 남동생은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학교 생활에서 숨으며 척박한 생활을 보냈지만, 누나는 활기차면서도 풍부한 생활을 보냈다는 것이다. 자녀들의 성공을 위해 쉬지 않고 일해온 부모들은 교회에서 아들의 변화를 위해 기도를 했지만, 주변에는 아들 문제를 논의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계 변호사인 서동씨는 “남들이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를 먼저 걱정하는 체면문화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다.”면서 “가족 이외에 누군가와 상담한다는 게 힘들고 창피해 자신들끼리 해결하려는 문화도 한 원인”이라고 말했다. 장태한 리버사이드 캘리포니아주립대(UC리버사이드) 인류학 교수는 “누나는 이민자 성공 스토리의 전형인 반면에 아들은 실패의 전형이자 도움이 필요한 정신병자였다.”며 “그의 가족과 친구들은 이를 주시하지 않았고 사회 역시 실패했다.”고 전했다. 뉴욕타임스도 22일 조씨의 ‘고통에 찬 침묵의 생활’을 집중 보도하면서 그 가족이 살던 미국 버지니아주 센터빌의 한인 사회를 “자식의 밝은 미래를 다른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시하는 곳”이라고 전했다.김수정기자 crystal@seoul.co.kr
  • 조씨 누나 성명서 “암흑 상황서 고개 못들어”

    우리 가족은 제 남동생이 저지른 참혹한 행위에 대해 매우 죄송스럽게 생각합니다.32명의 무고한 인명이 끔찍하고 무모한 비극으로 희생됐습니다. 어떤 말로도 우리가 느끼는 슬픔을 표현하지 못할 것입니다. 비통한 심정입니다. 우리는 그들의 가족들과 버지니아 공대 커뮤니티, 버지니아주, 나머지 국민들, 그리고 세계와 함께 가슴 깊이 애통해하고 있습니다. 4월16일 이후 저희 부모님과 저는 매일 희생자들(성명에는 희생자 32명 이름 모두 명기),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겪고 있을 희생자들의 가족과 사랑했던 이들, 목격하고 경험한 것들 때문에 평생의 삶이 변하게 된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랑으로 충만된 재능 있는 사람들이 끔찍하고 지각 없는 행동 때문에 제명을 다하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습니다. 우리 가족은 이같은 암흑상황에서 고개를 들 수가 없습니다. 희망도 없고, 기댈 수도 없는 상실감에 빠져 있습니다. 동생은 저와 함께 자랐으며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알지 못했던 사람 같기만 합니다. 우리는 항상 가까이 지내며 사랑한 평화로운 가족이었습니다. 동생은 말이 없고, 수줍어했지만 적응하기 위해 애썼습니다. 우리는 한번도 동생이 그런 엄청난 폭력을 저지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습니다. 그는 전 세계를 비탄에 잠기게 했습니다. 우리는 악몽 속에 살고 있습니다. 제 동생이 저지른 행동과 관련, 많은 분노들이 드러났고, 풀리지 않은 의혹들도 남아 있습니다. 우리 가족은 왜 이런 행동이 벌어졌는지를 파악하기 위해 당국에 할 수 있는 모든 협조를 할 것입니다. 우리 가족 역시 의문점들이 많습니다. 우리 가족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동생의 행동에 대해 너무나 송구스럽습니다. 이번 사건은 우리 모두에게 끔찍한 비극입니다.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