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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노동·시민단체들 서울 도심서 비상 시국대회…도로 점거에 경찰 물대포 충돌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과 통합진보당 등 25개 노동·시민사회·농민단체와 정당이 지난 7일 서울역 광장에 모여 ‘박근혜 정권 규탄 비상 시국대회’를 열었다. 집회를 마친 뒤 행진 과정에서 도로를 점거해 경찰이 물대포를 쏘는 등 충돌이 빚어졌다. 민주노총 등은 국가기관의 전방위적 대선 개입 의혹과 남북 정상회담 회의록 공개, 진보당 해산 청구,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법외 노조화 등 일련의 공안 사건을 거론하며 “지금은 민주·민생·평화가 위기를 맞은 비상시국”이라고 밝혔다. 이어 “대선 당시 공약한 경제민주화는 1년도 안 돼 친(親)재벌 구호로 대체되고, 기초연금과 4대 중증질환 국가 책임, 쌍용차 국정조사, 반값 등록금 등의 공약은 무기한 연기되거나 후퇴했다”고 주장했다. 이날 집회에는 2만명(경찰 추산 1만명)이 참가했다. 참가자들은 집회가 끝나고 남대문을 거쳐 을지로입구역까지 전 차로를 이용해 행진하다가 경찰과 대치했다. 이 가운데 8000여명이 을지로에서 종로3가로 이동해 차로를 점거했다. 5000여명은 종로3가 국일관 앞 도로를 점거해 경찰이 오후 5시 50분쯤 물대포를 발사해 해산시켰다. 이 과정에서 을지로와 남대문로, 종로 등 도심 일대 주요 도로의 차량 통행이 통제돼 극심한 교통 정체가 빚어졌다. 참가자들은 청계광장으로 이동한 뒤 오후 6시 30분쯤 해산했다. 서울지방경찰청 관계자는 “차로를 점거하는 불법 시위는 채증 자료를 토대로 끝까지 추적해 엄중하게 처벌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민석 기자 shiho@seoul.co.kr
  • [포토] 대설주의보 지역, 차량들도 ‘거북이 운행’

    [포토] 대설주의보 지역, 차량들도 ‘거북이 운행’

    중부지역에 대설주의보가 내린 27일 서울 남대문로에 많은 눈이 내려 차량들이 거북이 운행을 하고 있다. 정연호 기자 tpgod@seoul.co.kr
  • 김중수 韓銀총재 “경상수지 흑자 환율에 의한 것 아니다” 美 저평가 주장 반박

    김중수 韓銀총재 “경상수지 흑자 환율에 의한 것 아니다” 美 저평가 주장 반박

    김중수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의 대규모 경상수지 흑자가 원화 저평가에 의한 것이 아니며 현재의 원·달러 환율 흐름은 시장과 큰 괴리가 없다고 밝혔다. 앞서 지난달 말 미국 재무부가 원화가 저평가됐다고 주장하며 환율 수준에 문제를 제기한 것을 반박한 셈이다. 김 총재는 14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은 본관에서 금융통화위원회 직후 기자설명회를 갖고 “최근 경상수지 흑자는 선진국을 통해 온 것이라기보다는 대부분 신흥경제권에서 온 것”이라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는 “미국이나 유럽, 일본 등(선진경제권)에서 오히려 경상수지가 적자”라고 설명했다. 김 총재는 “환율 같은 가격 효과로 흑자가 났다면 모든 산업에 적용돼야 하는데 반도체, 휴대전화 등 특정 부문 중심으로 흑자가 났다”면서 “이는 비(非)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봐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안정세인 원자재 가격도 경상수지 흑자에 기여했다”고 덧붙였다. 현재의 환율 수준에 대해서는 “시장과 큰 괴리가 없다고 본다”고 밝혔다. 경상수지는 지난 9월까지 20개월째 흑자로 올 들어 지금까지 487억 9000만 달러 흑자다. 한은은 올해 경상수지 흑자가 사상 최대인 630억 달러를 기록할 것으로 보고 있다. 김 총재는 국내 경기가 내년 하반기에는 잠재성장률(물가 상승 등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고 이룰 수 있는 최고 성장률) 수준의 성장세를 회복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낮은 물가 상승률에 따른 디플레이션 우려에 대해서는 “소비자물가가 지난달 전년 동월 대비 0.7% 올랐지만 석유류, 농산물을 제외한 근원물가 상승률은 1.6%”라면서 “정부의 무상 보육·급식 등 정책 효과를 감안하면 근원물가 상승률은 2.1%로 오른다”고 밝혔다. 한편 이날 열린 금통위는 세계 경기가 미약하나마 회복세를 보이고 국내 경기도 회복세를 지속하고 있다는 판단에서 11월 기준금리를 현 수준인 2.50%로 동결했다. 지난 5월 기준금리를 0.25% 포인트 내린 뒤 6개월 연속 동결이다. 전경하 기자 lark3@seoul.co.kr
  • 산업통상자원부, ‘2013 해외 CSR 사업화 포럼’ 개최

    산업통상자원부, ‘2013 해외 CSR 사업화 포럼’ 개최

    지난 29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국제회의실에서 코트라와 산업통상자원부 주최로 열린 ‘해외 CSR 사업화 포럼’에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미국상공회의소의 비즈니스 시민리더십센터 설립자 스테판 조던은 “현지의 CSR 요구는 보이지 않는 무역장벽처럼 보이지만 잘 활용하면 오히려 글로벌 경쟁력 강화요소가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날 포럼에 참가한 해외 CSR 전문가들도 스테판 조던의 의견이 공감하며 저마다 CSR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개진했다. 나우뉴스부 nownews@seoul.co.kr
  • 한·중서비스산업 협력 세미나

    한·중서비스산업 협력 세미나

    산업연구원(원장 김도훈)은 오는 7일 오후 1시 서울 중구 남대문로 대한상공회의소 중회의실에서 중국사회과학원 재경전략연구원과 공동으로 ‘한·중 서비스산업 투자협력 방안’을 주제로 국제 세미나를 연다.
  • “스펙 타파” 채용업무협약

    “스펙 타파” 채용업무협약

    1일 서울 남대문로 대한상의에서 열린 ‘스펙초월 채용문화 확산을 위한 업무협약식’에서 이동근(왼쪽에서 여섯 번째)’ 상의 상근부회장 등 참석자들이 손을 맞잡고 채용 문화 개선을 다짐하고 있다. 행사에는 대통령 직속 청년위원회와 정부부처, 삼성전자, 현대자동차, 포스코 등 민간기업과 공기업 등이 참석했다. 대한상의 제공
  • [포토] 국군의날 시가행진 ‘형형색색’ 육·해·공

    [포토] 국군의날 시가행진 ‘형형색색’ 육·해·공

    국군의 날인 1일 서울 남대문로와 태평로 세종로 일대에서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포토] 국군의날 시가행진 ‘이보다 늠름할 순 없다’

    [포토] 국군의날 시가행진 ‘이보다 늠름할 순 없다’

    국군의 날인 1일 서울 남대문로와 태평로 세종로 일대에서 국군들이 참가한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포토] 국군의날 시가행진 ‘이보다 늠름할 순 없다’

    [포토] 국군의날 시가행진 ‘이보다 늠름할 순 없다’

    국군의 날인 1일 서울 남대문로와 태평로 세종로 일대에서 국군들이 참가한 퍼레이드가 열리고 있다. 정연호기자 tpgod@seoul.co.kr
  • 한은, 추석자금 4조 공급 전망

    한은, 추석자금 4조 공급 전망

    추석을 앞두고 13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한국은행에서 추석 자금을 방출하고 있다. 한국은행은 추석 직전 10영업일 동안 4조원가량의 화폐를 시중은행 등을 통해 공급할 예정이다.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인터뷰-노대래 공정위원장, 商道를 말하다] “일감 몰아주기·순환출자 막는 건, 대기업 규제 아닌 당연한 규범”

    [인터뷰-노대래 공정위원장, 商道를 말하다] “일감 몰아주기·순환출자 막는 건, 대기업 규제 아닌 당연한 규범”

    노대래 공정거래위원장은 일단 경제 민주화 입법의 큰 고비는 넘겼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지난 7월 대기업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강화한 공정거래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기 때문이다. 지금은 일감 몰아주기 적용의 예외 규정 등을 담은 법률 시행령 개정안 확정을 놓고 당정 협의 등 막바지 작업이 한창이다. 10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한국공정거래조정원에서 만난 그는 “대기업의 일감 몰아주기를 억제하고 총수들의 과도한 순환출자를 막는 것은 규제라기보다는 마땅히 지켜야 하는 규범을 확립하는 지극히 당연한 과정”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기업들의 가격 담합에 대한 규제 및 처벌 수위를 높이는 한편 소셜커머스 등 새로 등장한 서비스에 대한 가이드라인 제정 등을 통해 공정경쟁과 소비자 보호의 체계를 잡아 나가겠다고 말했다. →공정거래법 개정안의 시행령 공포가 목전인데 재계의 반발은 여전하다. -개정 법률은 대기업의 사익(私益) 편취를 크게 세 가지로 나눠 규제의 범위를 엄격히 제한하고 있다. 각각의 사례에 해당하는지를 엄정하게 가려 법 적용을 하게 된다. 그런데도 재계 일각에서는 세 가지 규정이 어떻게 적용되는지 잘 알아보지도 않거나 혼동해 판단함으로써 불필요한 우려를 증폭시키고 있다. →구체적으로 어떤 사례들을 일감 몰아주기로 보아 규제하는가. -첫째는 총수 일가 내부에서 유리한 가격 조건으로 거래하는 경우다. 과거 특정 기업에서 신주인수권부사채(BW)를 지나치게 싼 값에 넘긴 사례가 여기에 해당한다. 현재는 정상 가격과 10% 이상 차이가 나면 법 위반으로 보는데 이 기준은 변경할 것이다. 둘째는 부당한 사업 기회 제공이다. 목 좋은 빵집을 대기업 총수 일가에 내준다든지 하는 경우다. 셋째는 합리적이지 않은 대형 거래다. 같은 계열의 전산업체나 광고업체에만 일감을 맡기는 경우다. 이런 행위들로 인한 폐해를 막자는 것인데 마치 기업들의 목을 과도하게 죄는 것처럼 본질을 호도하면 안 된다. 적용 대상은 거래 상대방 회사에 대한 총수 일가 지분율이 상장사 30%, 비상장사 20% 이상인 경우다. 1519개 회사 중 208개(13.6%)가 해당한다. 재계는 총수 일가 지분율을 50%로 높이자고 주장하지만 그래서는 법이 실효성을 가질 수가 없다. →일감 몰아주기 규제가 기업의 기밀 유지 등에 장애가 될 것이란 주장은 언뜻 일리 있어 보이는 면도 있다. -기업 전산망을 구축하는 시스템통합업체(SI)나 광고회사 등의 업종에서 그런 주장을 특히 많이 하는 것을 알고 있다. 일부 일리 있는 측면도 있다. 그러나 공정거래법에서는 업종별로 규제 방향을 달리할 수가 없다. 만일 업종별로 차등을 두면 규제에서 제외되는 업종에서는 엄청난 불공정 행위가 양산될 것이다. 대신에 공정거래법은 효율성, 보안성, 긴급성 등을 면밀히 따져 예외를 적용하고 있다. 이번에 강화된 일감 몰아주기 규제에 맞춰 연말까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기업들의 이해를 돕고 혼란을 막을 예정이다. →담합을 하다 적발된 기업에 대해 강도 높은 제재를 하겠다고 여러 차례 강조해 왔는데. -우리 기업의 가장 큰 병폐 중 하나가 담합이다. 담합은 국가 신뢰도를 갉아먹는다. 해외에서도 한국 기업들은 담합의 빈도가 높을 뿐 아니라 조사 방해, 허위 자료 제출 등으로 유명하다. 대기업 오너들의 직접 경영보다 전문경영인(CEO) 체제의 도입이 확산된 것도 담합이 줄지 않는 이유 중 하나로 파악하고 있다. CEO들이 당장의 실적에 목을 매다 보니 쉽게 담합의 유혹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담합하는 기업은 망한다는 사회적인 인식이 있어야 한다. 독일의 경우 담합을 한 기업은 인수·합병(M&A) 대상으로 시장에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담합 기업에 대한 공정위의 과징금 처벌이 너무 가볍다는 지적이 많다. -공정위의 과징금 부과 절차는 4단계로 진행된다. 이 가운데 세 번째인 심사관 조치 의견 단계에서 자본잠식, 파산, 경제 여건 등 회사 재무 상태을 감안해 기업들에 대한 과징금 감경이 이뤄지고 있다. 앞으로 이 단계에서의 감경은 원칙적으로 없애는 방향으로 나갈 것이다. 담합이라는 범죄를 저지른 기업에 대해 “경영이 어려우니까 봐준다”는 것은 사실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 공정위가 과징금을 깎아줌으로써 불필요한 오해를 살 소지도 있다. 전반적인 과징금 경감의 절차와 관행을 연말까지 개선하려고 한다. 그러나 기존 담합 사건에 대한 소급 적용은 하지 않을 것이다. →담합을 자진 신고하는 기업에 대해 과장금을 감면하는 ‘리니언시’가 면죄부로 악용된다는 지적도 계속되고 있다. -리니언시의 본질은 면죄부가 아니라 담합을 적발해 이를 구조적으로 와해시키기 위한 것이다. 미국, 일본, 유럽연합(EU) 등 주요 국가에서 다들 채택하고 있는 제도다. 하지만 그동안 리니언시의 적용이 너무 허술했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앞으로는 자신들이 담합을 했다는 분명한 증거를 들고 오지 않으면 리니언시를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지금까지는 담합을 시인하는 진술서와 담합 장소에 갔던 출장 서류, 법인카드 영수증 정도만 나오면 리니언시를 적용해 줬다. 그러나 앞으로는 자신의 회사에 담합을 보고한 내부 문건 제출을 의무화하는 등 법 적용을 철저히 하도록 개선할 것이다. →공정위로부터 과징금을 부과받은 기업이 법원에 소송을 내 면제받는 경우가 심심찮게 나온다. -공정거래법은 해석을 놓고 다양한 견해가 대립된다. 공정위가 모든 사안에서 승소하기는 어렵다. 일반 행정소송에서 대법원이 고등법원의 판결을 파기하는 비율은 7.1%이지만 공정거래법의 경우 21%에 이른다. 공정위의 의결 내용에 일부만 오류가 있어도 법원이 과징금 전체를 취소하기 때문에 과징금 환급액이 크게 나온다. 하지만 2007년부터 올 5월까지 공정위의 과징금 사건 전부 승소율은 68.1%로 전체 행정기관의 전부 승소율 49.2%보다 높다. →정치권에서 집단소송제 도입 논의가 활발한데 공정위의 입장은. -집단소송제의 소관 부처는 법무부라는 점을 전제로 깔고 말하자면 집단소송제는 반드시 필요하다. 힘없는 여러 소비자가 같은 피해를 당한 경우 구제받을 방법이 마땅치 않다. 소액 담합 사건은 집단소송제로 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징벌적 손해배상제도를 전체적으로 도입하는 것은 맞지 않는다. 현재 하도급법상 기술 유용, 부당한 단가 인하, 발주 취소, 반품 행위에 대해서는 예외적으로 3배 손해배상제도가 있다. 이는 대기업의 보복 행위를 감수하지 않고는 공정위에 신고하기 어렵다는 중소기업의 입장을 감안한 예외적인 조치로 이해해야 한다. →최근 급성장하고 있는 소셜커머스로 인한 피해가 늘고 있다. -소셜커머스는 신제품 출시 홍보 수단, 재고품 처리 등의 순기능도 있지만 기만적인 광고나 위조 상품 판매 등으로부터 소비자를 보호하는 측면에서는 미흡한 점이 있다. 소셜커머스 가이드라인 개선 방안을 이달 중 내놓겠다. 위조 상품 판매를 방지하도록 사전 검수 및 확인 절차를 규정할 것이다. 병행 수입 상품은 취득증명서와 정품인증서를 첨부토록 하고 국내 상품은 한국지식재산보호협회 등 전문 기관을 통해 사전 검수를 받게 하겠다. 할인율 산정의 기준이 되는 정보도 소비자가 알아보기 쉽게 하겠다. 판매 화면에 구매자 수나 판매량 등을 허위로 조작하는 행위도 금지하겠다. →경제 민주화가 더 중요한가, 경제 활성화가 더 중요한가를 두고 논쟁도 벌어지고 있는데. -경제 활성화도 중요하다. 하지만 경제 민주화는 우리 경제가 꼭 섭취해야 하는 비타민과 같다. 자신의 노력보다 과도한 보상을 받는 행위는 분명히 견제해야 한다. 경제적 약자가 자기 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야 한다. 그것이 결국 국가 경쟁력을 강화하는 길이고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가능케 하는 것이다. 경제 활성화가 시급하다는 것을 경제 민주화가 필요없다는 것과 동일시하는 것은 한마디로 난센스다. 정리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노대래 위원장은 ▲1955년 충남 서천 출생 ▲서울고-서울대 법학과-서울대 행정대학원 ▲행정고시 23회 ▲재정경제부 정책조정국장 ▲기획재정부 기획조정실장·차관보 ▲조달청장(2010년 4월~2011년 3월) ▲방위사업청장(2011년 3월~2013년 3월) ▲공정거래위원장(2013년 4월~)
  • [주말 인사이드] 새달 국가산림문화자산 지정한다는데, 1호는 어디… 쟁탈전 후끈

    [주말 인사이드] 새달 국가산림문화자산 지정한다는데, 1호는 어디… 쟁탈전 후끈

    우리나라의 등산 인구는 지난해 전국등산연합회 등록 기준으로 24만 명이다. 하지만 한 달에 한 번 이상 등산을 즐기는 애호 인구는 이보다 16배 많은 400만 명에 이른다. 숲길을 걸으며 상쾌한 공기와 빽빽한 나무, 구름 없는 하늘에 감탄할 무렵 숲은 약수, 봉수대, 흙담과 같이 깊이 숨겨 둔 보물을 만나게 해준다. 예상치 않게 이름 모를 비석이나 탑파를 만나기도 하고 좁은 숲길 너머에 갑자기 펼쳐지는 널찍한 웅덩이에 탄성을 지르기도 한다. 이렇게 숲길을 걸으며 만나는 많은 것들 중의 상당수는 보존 가치가 있는데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 이에 따라 산림청은 ‘국가산림문화자산’을 별도로 지정해 보호하기로 했다. 국가산림문화자산은 ‘산림 또는 산림과 관련되어 형성된 것으로서 생태적·경관적·정서적으로 보존할 가치가 큰 유형·무형의 자산’으로 정의했다. 다음 달 첫 심사위원회가 열려 국가산림문화자산 1호가 탄생한다. 국보 1호는 서울 중구 남대문로4가 숭례문(崇禮門), 보물 1호는 서울시 종로구 종로6가 흥인지문(興仁之門), 천연기념물 1호는 대구 도동 측백나무 숲이다. 향후 국가산림문화자산 1호의 영예를 안게 될 곳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산림청은 16곳을 후보로 정했다. 현재 국가산림문화자산 심사위원들이 고심을 거듭하고 있다. 등산로 중에는 대관령의 ‘선자령~능경봉 구간’(강원 평창군 대관령면 횡계3리)이 유일하게 이름을 올렸다. 백두대간을 잇는 전체 12.5㎞의 등산로를 따라 걸으면 잣나무, 낙엽송, 전나무 등으로 이루어진 대관령 특수조림지(311㏊=약 94만평)를 만날 수 있다. 이곳은 원래 산림을 개간해 농사짓던 화전(火田) 지역이었지만 1968년 화전민 집단 이주계획에 따라 황폐화된 채 버려졌다. 이후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들어서고 산림청이 주변 지역 녹화 사업에 따라 11년간 나무를 심어 조성했다. 경기 양평군 지평면 일신리 ‘구둔치 고개’는 거리가 1.2㎞에 불과하지만 역사적 가치는 크다. 조선시대 강원에서 서울로 오는 관동대로의 마지막 고개였다.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이 지나갔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관동대로의 원래 이름은 평해로(平海路·평해는 경북 울진군 평해읍)다. ‘서울~원주~삼척~울진’을 잇는 길로 조선시대 10대 주요도로 중 하나다. 구둔치라는 이름은 임진왜란 때 이 고개에 의병들이 왜군을 무찌르기 위해 9개의 진을 친 데서 유래했다. 정상부에 습지가 있어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유리한 장소였다. 이 습지는 현재 구둔치 습지라고 불리며, 반딧불이 서식지로 보전가치가 높다. 간이역인 구둔역은 2006년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방동약수 음나무’(강원 인제군 기린면 방동2리)는 수령이 약 300년으로 추정된다. 높이는 27m, 둘레 2.7m로 나무 밑을 지나 봉동약수가 나온다. 나무의 건강상태는 양호하다. 음나무 순은 개두릅이라고도 불리는데 봄에 수확해 먹는다. 나무줄기는 닭 비린내를 잡아준다고 해서 ‘엄나무 백숙’의 주재료로 쓰인다. 꽃은 황록색으로 7~8월에 피고, 농촌에서는 잡귀의 침입을 막기 위해 음나무 가지를 대문 위에 꽂아 놓기도 한다. 서울 천장산 남서 자락에 있는 ‘홍릉시험림’(서울 동대문구 청량리동)은 1922년 만들어진 최초의 수목원이라는 점에서 후보에 올랐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명성황후가 시해된 후 안장되어 홍릉이라고 불렸지만, 1919년 고종이 승하하면서 명성황후도 경기 남양주시 금곡동에 합장됐다. 지금은 홍릉터와 어정(御井·임금에게 올릴 물을 긷는 우물)만 남아 있다. 하지만 2035종의 식물유전자원이 있는 산림의 보고다. 1923년 함남 풍산에서 이식한 풍산가문비 나무 복원 식재, 1935년 처음으로 발견한 문배나무 등이 자라고 있다. 현재 주중에는 자연학습 교육장으로 이용하고 주말에만 시민들에게 개방하고 있는데, 주중에도 개방하라는 요구가 많다. 강원 홍천군 내면 광원리 ‘삼봉약수’는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정도에 따라 3개의 구멍에서 나오는 3가지 맛 약수로 유명하다. 권 대감이라는 사람이 이곳에 은거하면서 청년들에게 실론(實論)을 가르쳤다는 전설이 있어 실론약수라고도 불린다. 삼봉자연휴양림 입구부터 3㎞ 거리에 있고, 차를 타고 들어갈 수 있다. 유명한 데이트 장소인 ‘두물머리 나루터’(경기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면서 만드는 아침의 물안개와 강으로 늘어진 수양버들로 유명한 곳이다. 조선시대 강원도에서 창포 돗대에 나무를 싣고 서울로 오가던 길목으로, 서울에 가기 전 하룻밤을 쉬던 쉼터로 유명했다. 당시 주막집만 50곳이 넘었다. 1973년 팔당댐이 생기면서 나루터는 사라졌다. 하지만 영화·광고·드라마·웨딩 촬영 장소로 여전히 인기가 많다. 조선 숙종(1674~1720년) 시대부터 임금과 사대부의 관을 만드는 데 쓰는 소나무를 베지 못하도록 숲 속 바위에 표식을 새긴 ‘황장금표’(黃腸禁標)는 5개가 후보로 추천됐다. 황장은 황금빛을 띠는 소나무의 속심을 말한다. 강원 평창군 미탄면 평안리의 황장금표는 ‘봉산동계’(封山東界)라는 문구가 가로 0.8m, 세로 1m의 암석에 새겨져 있다. 표지석의 위치에서 동쪽방향으로는 소나무, 참나무, 밤나무 등을 함부로 벨 수 없다는 의미다. 강원 인제군 북면 한계리의 황장금표는 ‘자서계한계리 지동계이십리’(自西界寒溪里 至東界二十里)라는 문구가 가로 1.4m, 세로 1.2m 바위에 새겨져 있다. 서쪽 한계리에서 동쪽으로 20리까지를 한계로 삼고 이 안에서는 벌목을 할 수 없다는 뜻이다. 설악산국립공원 근처에 있지만 농경지와 붙어 있으며 관리되지 않고 있다. 강원 화천군 화천읍 동촌1리에 위치한 황장금표는 4m로 높은 것이 특징이고, 강원 영월군 수주면 법흥리에 있는 황장금표는 도로에 바로 붙어 있어 신속한 보호 조치가 필요하다. 강원 원주시 소초면 학곡리의 황장금표 역시 바위에 이끼가 많이 껴 복원이 필요하다. 그런가 하면 ‘황장목림’(黃腸木林·강원 인제군 북면 한계3리)은 숲 자체도 국립산림문화자산의 후보다. 치마골 입구부터 국도변으로 2㎞ 펼쳐져 있다. 이곳의 소나무는 임금의 관뿐 아니라 1000년 고찰의 대들보로 사용돼 죽어서도 살아 있다. ‘산삼가현산 서표’(産蔘加峴山 西標)는 마을 주민들이 세운 비석이지만 2개만 발견되는 등 희귀하다는 점에서 후보에 올랐다. 조선 초기에 국가에 올리는 공삼(貢蔘)을 기르는 지역임을 표시해 마을 주민의 접근을 막으려 한 것으로 보인다. 강원 인제군 상남면에 2개의 서표가 있는데 하나는 마을에서 안내판과 진입로를 설치해 관리하고 있지만 다른 하나는 방치돼 있어 보전이 필요하다. 경기 이천시 장호원읍 나래리 ‘흙사방댐’은 돌 및 석재를 사용하지 않고 주민들이 오로지 흙으로만 만든 댐이라는 점에서 값어치가 있다. 1935년 홍수를 막기 위해 설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 방치돼 있다. 사방댐은 저수(貯水)뿐 아니라 모래를 저장하는 역할도 한다. 홍수가 나면 모래가 휩쓸려 가면서 새 물길이 생기고 농경지나 주택지가 침수되는데 이를 막기 위한 것이다. 경기 수원시 파장동 한국농어촌공사 앞길에 있는 ‘치산치수비’(높이 2.4m, 너비 35㎝)는 1939년 10월 수원시 일왕면장이 세웠다. 일제 강점기에 동양척식회사의 도움을 받아 치산치수의 업적을 달성했다는 점에서 일본의 도움을 받긴 했으나 74년 역사의 비석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세종 이경주 기자 kdlrudwn@seoul.co.kr 세종 장은석 기자 esjang@seoul.co.kr
  • “商議 회장, 균형적 시각 필요”

    “商議 회장, 균형적 시각 필요”

    손경식 CJ그룹 회장이 차기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직을 맡는 박용만 두산그룹 회장에게 “균형된 시각을 갖고 서울과 지방 간의 조화를 도모해야 한다”고 말했다. 13일 CJ그룹과 대한상의에 따르면 전날 서울상의 회장에 선출된 박 회장은 서울 중구 남대문로에 있는 CJ그룹 본사로 전임 대한상의 회장인 손 회장을 찾아가 조언을 들었다. 손 회장은 이 자리에서 “상의 회장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도 중요한 자리”라며 “앞으로 상공업계를 대표해 열심히 해달라”고 당부했다. 이에 박 회장은 “역대 회장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많은 조언을 해달라”고 화답했다. 손 회장은 “상의는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다리 역할을 하고 전국을 아울러야 하기 때문에 모든 면에서 조화로운 시각을 갖는 게 가장 중요하다”며 “각계각층의 의견을 잘 듣고 균형 잡힌 의견을 표명해야 한다”는 뜻을 전하며 지방상의 회장들과 좋은 관계를 유지할 것을 당부했다. 재계 관계자는 “손 회장은 재임 당시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회원사 신망이 두터웠다”며 “지방상의를 자주 찾으며 다양한 목소리를 들었다”고 소개했다. 한편 박 회장은 1988년부터 2000년까지 12년간 상의 회장을 지낸 김상하 삼양그룹 회장도 방문했다. 김경운 기자 kkwoon@seoul.co.kr
  • 박용만 두산 회장 만장일치로 서울상의 회장에

    박용만 두산 회장 만장일치로 서울상의 회장에

    박용만(58) 두산그룹 회장이 서울상공회의소 회장으로 선출됐다. 서울상의는 12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상의회관에서 임시의원총회를 열고 공석인 신임 회장에 박 회장을 선임했다. 박 회장은 겸임 관례에 따라 21일 대한상의 의원총회에서 새 회장으로 선출될 예정이다. CJ그룹 회장직을 맡으며 중도에 물러난 손경식 전 회장은 서울상의 명예회장에 추대됐다. 이로써 두산그룹은 고 박두병 초대회장, 전문경영인 출신의 정수창 전 회장, 박용성 전 회장에 이어 총 4명의 상의 회장을 배출하게 된다. 박 회장은 “전임 회장들의 업적에 누를 끼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글 김경운 기자 kkwoon@seoul.co.kr 사진 박지환 기자 popocar@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⑧ 1950~60년대 : 파괴와 재건

    “도시는 기억으로 살아간다”(The city lives by remembering)고 미국의 시인 랠프 왈도 에머슨은 읊었지만, 서울은 600년 고도의 기억이 별로 없다. 마치 신흥도시 같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통에 불타고 약탈당했으며, 일제강점기 도읍에 대한 자취는 강제적으로 지워졌다. 조선총독부-경성시청-남산 조선 신궁을 상징 축선으로 하는 식민 도시로 치장됐다. 한국 전쟁통에 그나마 남은 것 대부분이 파괴됐다. 1960년대 이후 개발독재시대의 무지막지한 개발 광풍을 타고 또 한 번 뭉개졌다. 역사의 향기는 흩어졌다. 한강 이남으로 영역을 확대한 서울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새로 건설된 신도시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대문 안에는 표지석만 어지럽게 남았을 뿐이다. 전쟁과 대사건은 도시를 재건한다. 한국전쟁 당시 서울 폭격을 앞둔 맥아더는 “원래 도시란 천재지변이나 전쟁을 겪고 나면 그전에 비해 몇 곱절 더 크고 좋은 새 도시로 부흥된다. 미국이 재건을 도울 것이니 서울은 앞으로 이상적인 현대 도시로 탈바꿈할 것”이라고 큰소리쳤다. 실제 1644년 대화재로 도시의 80%가 타 버린 영국 런던은 옥스퍼드대 건축가 크리스토퍼 렌 교수에 의해 오늘의 런던으로 재건됐다. 일본 도쿄도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잿더미가 됐지만 탁월한 도시계획가 고토 신페이(後藤新平) 도쿄시장의 주도로 세계 도시계획 사상 유례가 없는 시가지 개조를 통해 새로 태어났다. 런던과 도쿄는 세계대전으로 또 한 번 타격을 입었지만, 옛 도시의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서울의 재건은 성공작일까? 서울을 역동적인 현대 도시로 평가할 수는 있지만, 역사 도시로 평가하기엔 머쓱하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서울이라는 도시의 정체성은 꽤 혼란스럽다. 서울은 네 번 결정적인 상처를 입었다. 16세기 일본과 중국 군대에 의해 약탈당했으며, 근대 일제강점기엔 성곽을 허물고, 상징 축을 강제로 바꾸는 방법으로 도시 형태가 조작됐다. 한국전쟁기 유엔군과 한국군의 청야(淸野)작전(적이 이용하지 못하도록 농작물이나 건물 등 지상에 있는 것들을 말끔히 없애는 작전)을 통해 철저하게 파괴됐다. 1960~70년대 우리 손으로 남은 문화재를 헐어서 치워 버렸다. 맥아더의 말처럼 기회는 있었다. 1952년 전후 복구 차원의 첫 도시계획안을 마련하면서 세종로 등 39개의 큰길을 확장하거나 신설하고, 광화문광장·서울시청광장·남대문광장 등 19개의 광장을 만드는 과감한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재정부족 등을 이유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유럽의 오래된 도시처럼 구도심(사대문 안)을 그대로 보존하면서 사대문 밖이나 강남 신시가지를 개발하겠다는 코페르니쿠스적인 발상의 전환이 없었다. 한국전쟁 이후 ‘광적’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서울 집중이 기회를 날려 버렸다. 집중을 막으려고 온갖 정책을 동원했지만 약효가 듣지 않았다. 해방 전후 100만명대였던 서울 인구는 1966년 380만명, 1970년 540만명을 넘어서더니 1990년 1000만명을 돌파해 버렸다. 수도 서울 행정은 집 지을 땅을 확보하고, 도로를 넓히고, 교통수단을 늘리고, 수돗물을 공급하고, 쓰레기를 치우는 것에 매달렸다. 만약 그때 인구의 서울 집중을 막을 수 있었더라면 서울은 한가롭게 전차가 다니며, 꼬불꼬불한 골목길이 정겨운 기와집이 빼곡한 도시로 남았을 것이다. 한강과 북한산이 주는 자연의 세례를 맘껏 누리는, 풍광이 뛰어난 성곽 도시로 유지됐을 것이다. 1950년대 서울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손정목 전 시립대 교수의 ‘서울도시계획이야기’를 기본으로 사대문 밖 풍경을 상상해 보자. 동쪽으로 동대문을 나서면 신설동 큰 길가까지 집이 들어 차 있지만, 바깥은 논밭 천지다. 신당동에 집이 드문드문했을 뿐 금호동·옥수동 일대는 산이었다. 왕십리를 지나 한양대 일대는 미나리꽝이었고 성동교의 나무다리가 삐꺽거렸다. 남쪽 한강대교에 이르는 동빙고동과 서빙고동 주민은 1000명 안팎이었고, 원효로 일대는 대부분 논밭이었다. 노량진, 상도동, 대방동, 영등포는 큰 길가조차 목가적인 전원 풍경을 연출했다. 서쪽으로 신촌을 지나 마포 전차 종점을 벗어나면 벌거숭이 산과 논밭이 펼쳐졌다. 동북쪽은 미아리고개, 서북쪽은 독립문과 현저동이 경계였다. 지금의 강남·서초·송파·강동·강서·관악·구로·금천·도봉·노원·은평구 등은 모두 경기도였다. 서울의 고층 건물은 손으로 꼽을 정도였다. 최고층 건물은 지금의 롯데호텔 자리에 있던 8층짜리 반도호텔이었다. 이웃 조선호텔과 한국은행 모두 일제가 남긴 건물이었다. 1955년에 종로 사거리에 2층짜리 신신백화점이 신축됐고, 1957년 광화문 사거리와 을지로 1가에 3층짜리 국제극장과 5층짜리 개풍빌딩이 각각 들어섰다. 1958년 남대문에 7층짜리 그랜드호텔이 문을 열자 구경 인파가 몰렸다. 당시 서울 도심부의 평균 층 높이는 2층이 채 되지 않았다. 도심부를 고층화하려고 주요 간선도로변의 건물 높이를 3~5층 이상으로 정할 정도였다. ‘한강의 기적’은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시작된 1962년부터 약 20년간의 고도성장기를 일컫는다. 이 기간 서울은 경천동지할 변화를 겪는다. 서울의 공간 변화는 1966년부터 1980년까지 15년간 거의 이뤄졌다. 주택지·도로·상하수도·지하철 등 현대 서울의 하부구조가 이때 거의 갖춰졌다. 박정희 대통령이라는 절대권력자의 ‘분부’를 이행한 김현옥·양택식·구자춘이라는 3명의 ‘충복’ 서울시장이 재직한 기간과 일치한다. 서울의 얼개는 박 대통령의 구상과 지시에 의해 거의 결정됐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66년 서울도시기본계획안이 세워졌다. 서울의 균형 발전을 꾀하려고 사대문 안에 집중된 입법·사법·행정부의 기능을 분산시키려는 계획이 눈에 띈다. 입법부는 남서울(강남·서초구), 사법부는 영등포, 행정부는 용산 일대, 세종로 지역은 대통령 관저 및 직속기관 배치 지역으로 정했다. 지금 와서 보면 입법부와 사법부의 입지가 맞교환됐고, 서울시청이 용산으로 옮겨가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교통계획을 보면 서울역~청량리(1호선), 서소문~을지로~성동(2호선), 갈현동~종로2가~을지로2가~퇴계로~천호동(3호선), 우이동~종로4가~퇴계로~말죽거리(4호선) 등의 지하철 4개 노선 건설계획이 잡혀 있다. 10년 뒤 구자춘 시장에 의해 2호선이 을지로와 영등포~영동을 잇는 순환선으로 변경되는 등 엄청난 노선 변화가 일어났지만, 지하철 4개 노선에 대한 기본 구상이었다. 이 밖에 4개 순환선과 14개 방사선을 간선도로망으로 7개의 고속도로를 건설한다는 계획과 노면 전차는 철거하고 광화문 사거리와 시청 앞 광장에는 지하차도를 만들고, 시청 앞 광장 지하는 지하도시화한다는 계획도 포함돼 있다. 도심 재개발과 강남·송파 등 남서울개발, 뚝섬·창동·망우 등 동서울개발, 불광·성산·김포·시흥지구의 서서울개발 등 신시가지개발 계획이 들어 있다. 1년 예산이 170억원에 불과한 서울시가 20년 앞을 내다보고 인구 500만명을 예상해 3235억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을 투입한다는 야심 찬 계획이었다. 언론으로부터 ‘즉흥계획’ ‘실현성 없는 독단’ ‘재무계획 없는 무지개’ 등등 융단폭격을 맞았다. 그러나 격변의 15년 중 7년을 서울시 도시계획국장, 기획관리실장 등을 지내며 계획을 수립하고 집행한 손정목 전 교수는 “꿈도 환상도 아니었다. 최초의 기본계획이었다는 점, 도심부 재개발이니 고도지구, 미관지구 개념이 도입돼 일반에 공개됐다는 점, 70~80년대 전국 모든 도시가 수립한 도시계획의 모델이 됐다는 점 등에서 의미가 있다”고 회고했다. 불완전하나마 서울시 장기계획의 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일제 말기인 1940년부터 1965년까지 서울은 잠자는 도시였다. 1937년 중·일 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이 터져 건축자재를 구할 수 없었고, 한국전쟁이 이어지면서 건축 행위가 이뤄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부분 건물이 목조건물 수명 30년을 다한 상태였다. 장충동, 신당동 일대와 남대문로, 충무로, 을지로 등 일본인 주거지에 정원이 딸린 일본식 저택과 주택이 밀집해 있었다. 가회동·명륜동·동숭동·북아현동 일대에는 한옥촌이 빼곡하게 형성돼 있었다. 마포, 왕십리, 동대문을 벗어난 지역은 논밭이었다. 사대문 안과 독립문, 신촌, 신설동, 돈암동, 신당동, 용산이 서울의 전부였다. 노면 전차 노선을 기준으로 보면 동쪽으로 청량리·왕십리, 남쪽으로 노량진·신길동·영등포, 서쪽으로 마포·신촌, 서북쪽으로 독립문, 동북쪽으로 돈암동 전차 종점까지가 서울이었다. 지방에서 무작정 상경한 사람들의 주거인 무허가 판잣집이 도심에서 가까운 하천변이나 산비탈을 차지했다. 1966년 당시 13만여채의 판잣집이 서울 곳곳에 달동네를 이루고 있었다. 서울은 개발행 특급 열차가 출발하기 직전의 폭풍전야였다. joo@seoul.co.kr
  • 중소기업 취업 서약한 대학생 517명에 등록금·취업장려금

    교육부와 한국장학재단은 8일 서울 중구 남대문로 장학재단에서 ‘중소기업 취업전제 희망사다리사업 장학증서’ 수여식을 개최했다. 희망사다리 장학사업은 중소기업 취업을 결정한 대학 3~4학년생과 전문대 2~3학년생에게 학기당 등록금 전액과 취업준비 장려금 200만원을 지원하는 사업으로, 대학생 517명이 희망사다리 장학생으로 선발됐다. 홍희경 기자 salo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⑦ 태평로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⑦ 태평로

    >>도시의 새 심장이 된 서울광장 서울광장은 대한민국의 대표 광장이다. 역사성과 상징성을 품은 공간이다. 도시의 광장은 마치 도시의 가슴과 같다. ‘시청 앞’이라는 한마디에 백 가지 의미가 함축됐다. 3·1운동, 4·19혁명, 6월 민주화 항쟁, 월드컵 거리 응원 등 숱한 근·현대사의 무대이자 현장이었다. 특히 중장년층에게 서울광장은 울분과 정체의 공간이었다. 시위대와 최루탄이 부딪치고, 구호와 바리케이드가 맞선 불행한 탄식의 시간을 잊지 못한다. 또 한편으로는 자동차를 몰고 시청 앞 광장을 통과해 목적지까지 갈 수 있으면 비로소 서울 시내에서 운전할 자격이 있다고 여겨졌다. 8가닥의 진입로와 8가닥의 퇴출로가 뒤엉키던 교통 광장이었다. 2004년 메마른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자유로운 보행 공간 ‘서울광장’으로 부활했다. 또 울분과 탄식이 작열하는 분노의 광장에서 여유와 즐김이 있는 문화의 광장, 젊음의 광장으로 진화했다. 서울시청과 서울광장의 존재는 서울의 도시 구조에 엄청난 변화를 불러왔다. 경성부청사는 지금의 신세계백화점 자리에서 이곳으로 옮겨 왔다. 경운궁의 기운을 누르면서 일본인 상업지구인 황금정(을지로)과 가까운 지리적 이점도 노렸다. 서울시청 신청사는 옛 경성부 청사를 그대로 둔 채 어정쩡하게 짓는 바람에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하는 ‘불평불만의 건물’이 됐다. 얼마 전 건축 전문가 100인이 선정한 ‘최악의 한국 현대 건축물’ 1위에 선정됐다. 건물도 문제지만 건축 과정이 최악이었다는 점에는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다시 짓자는 얘기가 언제 또 나올지 모른다. 1935년 세워진 경성부민관은 오늘의 서울시의회다. 황국신민화를 부추기는 정치 집회와 위무 공연이 열리던 시민회관 용도로 지어졌다. 부민관 폭파 사건의 현장이었으며 일제 패망 후 미군 사령부로 사용됐다. 1975년 여의도로 이전하기 전까지 국회의사당이었다. 이승만부터 박정희 정권까지 현대사의 질곡이 오롯이 묻혀 있다. 3·15 부정 선거 이후 4·19혁명의 도화선이 이 건물 앞에서 불붙었다. 1980년 태평로 확장 공사 때 옛 부민관은 대부분 잘려 나갔다. 국내 최대 규모 오피스 빌딩 중 하나인 서울파이낸스센터는 최악의 건축물이라는 불명예를 서울시 신청사에 물려준 사연 많은 건물이다. 1984년 호텔을 지으려고 공사에 착수했지만 수뢰 사건으로 공사가 중단되고 건물주가 부도를 맞는 바람에 철골 구조로만 도심에 15년 동안 서 있었던 유령 건물이었다. 완공 전까지 수십 명의 공무원이 구속되고 옷을 벗었다. 싱가포르투자청은 2000년 이 빌딩을 3550억원에 인수했지만 지금은 1조원대를 호가한다고 한다. 한국프레스센터 빌딩은 1985년 서울신문사와 신문회관 자리에 지어졌다. 흩어져 있던 25개 언론 관계기관 및 단체와 5개의 주한 외국 언론기관이 입주한 명실상부한 한국 언론의 총본산이다. 경기도 가평산 화강암을 외벽에 장식하는 등 초현대식 시설을 자랑했다. 신문회관은 옛 경성일보(매일신보) 부지를 넘겨받은 서울신문사 부지 중 568평에다 정부 예산 1억원을 들여 3층짜리 건물로 지었는데 1962년 개관 당시 서울시청을 옆에 두고 국회의사당을 마주하는 태평로 길가의 당당한 건물이었다. 무교·다동 재개발사업의 하나로 지어진 프레스센터는 지하부터 11층까지는 서울신문사가 소유하고 12층부터 20층까지는 한국방송광고공사가 갖는 소유권 수평 분할 방식이 적용됐다. 이는 훗날 맞은편 광화문빌딩(동화면세점) 소유권 정리의 선례가 됐다. >>내 이름 이렇게 태어났어요 태평로(太平路)는 일제가 기획하고 만든 대표적인 신작로다. 세종로사거리에서 서울역에 이르는 너비 50m, 길이 1600m의 주요 간선대로다. 세종로가 정치의 심장부라면 태평로는 사회, 경제, 문화의 중심부다. 도로명 통합에 따라 2010년 세종로와 합쳐 세종대로로 승격했다. 태평로는 조선시대 중국 사신이 묵었던 태평관(太平館)이 있었다고 해서 따온 이름이다. 옛 태평관이 있던 곳은 오늘의 중구 남대문로 4가 대한상공회의소 자리다. 임진왜란 때 원군으로 왔던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남별궁(조선호텔)에 묵기 전까지 사신 숙소로 쓰였다. 이후 남별궁은 주요 사신, 태평관에는 보조 사신(差官)이 주로 묵었다. 조선 초기에는 왕이 직접 백관과 함께 지금의 서대문구 현저동 독립문 옆 모화관(慕華館)에 가서 사신을 맞이하고 나서 경복궁에서 황제의 칙서를 받고 태평관으로 자리를 옮겨 하마연(下馬宴)을 베풀었다고 한다. 중국 사신이 돌아갈 때는 태평관에서 전별연을 연 뒤 모화관까지 배웅했다. 일본 사신이 머물던 동평관(東平館)은 지금의 중구 인현동 2가 인현어린이공원 일대에 있었다. 일제가 새 길을 만들어 이름을 붙이면서 일본 사신 숙소인 동평관을 딴 ‘동평로’가 아니라 중국 사신을 모신 태평관에서 이름을 따온 이유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중국 사신을 모시듯 일본인을 극진하게 모셔라’라는 풀이도 가능하지만 여전히 의문이 남는다. 태평로는 경복궁과 남대문을 직접 잇는 길을 내지 않았던 조선의 남북 간 상징 축선을 무시하고 육조거리를 보호하는 언덕인 황토 마루(세종로사거리)를 깎아내는 등 무리한 공사를 통해 만들었다. 이 길을 내느라 고종이 정사를 보던 경운궁(덕수궁) 담을 헐어내 궁 동쪽 전각들이 잘려 나갔고, 남대문 성곽도 이때 헐어냈다. 성곽을 잃은 남대문은 서울의 외딴 섬 신세가 됐다. 일제는 조선총독부를 잇는 태평로 라인에 경성부 청사(서울시청), 경성역(서울역)을 각각 지었다. 일제가 남긴 3대 건물이다. 경복궁 안에 지은 조선총독부는 민족 정기 회복 차원에서 걷어냈지만 서울시청과 서울역은 건재하다. 지금의 태평로 일부를 ‘황토현 신작로’라고 지칭한 기록이 자주 나온다. 1896년 7월 여러 날의 독립신문에는 ‘경운궁에서 황토현에 이르는 새 길을 낼 계획이 세워져 측량했다’, ‘정동에서 서소문으로 넘어가는 길을 넓힌다’라는 기사가 눈에 띈다. 제국신문과 황성신문에도 ‘경운궁에서 황토현에 이르는 길을 황토현 신작로라고 부른다’라는 기사가 등장한다. 1901년에는 지금의 동아일보 자리에 나무다리를 놓았는데 이를 신교(新橋)라고 불렀다. 1910년에 출판된 경성시가전도를 보면 황토현~서울시청까지를 신교통(新橋通)이라고 표기한 것을 알 수 있다. 대한제국 관보에도 고종이나 순종이 신교통을 통해 종묘에 행차했다고 기록돼 있다. 매일신보 1913년 8월 22일 자에는 남대문에서 광화문에 이르는 태평로 확장 공사 사진이 실렸다. 1914년 태평로는 길 이름이자 동 이름으로 정해져 지금까지 내려온다. >>덕수궁 너만 보면 나도 아파 태평로와 덕수궁은 악연이 깊다. 태평로가 확장되면서 세 번이나 궁이 잘려 나가는 피해를 봤다. 일제가 한 번, 우리 손으로 두 번을 훼철했다. 1912년 일제에 의해 도로 신설 공사가 시작되면서 당시 경운궁 담벼락이 처음 잘려나갔다. 일제가 폭 27m, 길이 1009m의 태평로를 건설하면서 육조거리(광화문광장)의 중심과 태평로의 중심을 맞추지 않고 광화문 우측 끝 선으로 맞춘 것은 고종이 경운궁에 거주하고 있었기 때문에 손속을 둔 것이라는 해석도 있다. 경운궁을 심하게 축소해서 민심을 자극하지 않겠다는 얄팍한 속셈이 작용했다는 것이다. 개발 연대에는 우리 스스로 덕수궁 훼손에 앞장섰다. 1961년 확장 때 덕수궁 돌담을 헐고 속이 훤히 보이는 철책으로 바꾸면서 공원화하는 우를 범했다. 1968년에는 철책마저 지켜내지 못했다. 대한문(대안문)은 담장과 분리돼 확장된 태평로 안에 홀로 있다가 1970년 현재 위치로 옮겨졌는데 이때 16m 뒤로 밀려났다. 대한제국의 상징인 경운궁은 일제의 상징 길인 태평로 및 일본과 각축하던 제국주의 열강의 외국 공사관, 교회에 터 대부분을 빼앗기고 한낱 도심공원으로 전락했다. 대한제국이라는 국호는 역사책 속에 해프닝처럼 기술될 뿐이다. 일제가 태평로를 확장한 데에는 배경이 있다. 경운궁과 정동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을 되살리려는 심상찮은 기운이 일자 이를 견제하려 한 것이다. 멀쩡한 경성일보를 옆으로 옮기고 그 자리에 경성부 청사를 지었다. 왕이 하늘에 제사 지내는 천단(天壇)의 역할을 하는 원구단을 허물고 철도호텔(조선호텔)을 지으면서 하늘과 땅의 신령들을 모시는 황궁우를 호텔 장식품으로 배치했다. 조선은행(한국은행)과 미스코시백화점(신세계백화점)을 지어 일본인 중심 상업지역으로 육성했다. 결과적으로 고종이 정궁을 경운궁으로 옮겨 몰락해 가는 조선을 일으켜 세우려 한 것은 서울의 도시 구조를 뒤흔든 대사건으로 작용했다. 이후 현대화 과정에서 서울의 실질적인 중심이 세종로에서 태평로를 따라 개편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joo@seoul.co.kr
  • 해직 언론인 복직·공정 보도…언론노조 여의도서 결의대회

    전국언론노조는 28일 오후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결의대회를 열고 해직 언론인 복직과 방송 공정성 특위 활동 정상화, 언론 공공성 강화 등을 위한 총력 투쟁 결의를 다졌다. 언론노조는 결의대회에서 “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지 4개월이 지난 지금 지난 정권에서 피폐화된 언론 환경이 회복되기는커녕 오히려 악화 일로로 치닫고 있다”고 주장했다. 노조는 여의도에서 남대문로 한국일보 사옥과 YTN 사옥까지 거리행진을 벌였다. 박성국 기자 psk@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자연에 순응한 삶터… 물 따라 구릉 따라 길들이 흘렀다

    <풍경1> 흐름 거스르지 않고 자연스럽게 생겨난 고갯길·골목길들 육조대로·운종가 조선시대 이름이 기록된 유일한 길 현대를 도시의 시대라고 부른다. 만약 신이 인간과 자연을 창조했다면 인간은 도시를 창조했다고 할 만큼 도시는 인간의 걸작품이다. 사대문 안 ‘원(原)서울’은 인간의 도시라기보다 마치 자연이 만든 무위(無爲)의 도시 같다. 풍수지리와 도교 사상이 저변에 깔렸다. 도성 앞뒤에 산이 있고 가운데 물이 흐르는 지형이다. 모든 인공건조물은 구릉과 물을 거스르지 않았다. 고갯길과 골목길이 자연 생성됐다. 서울 지명에 황토마루(세종로 사거리), 구리개(을지로입구), 운현(운현궁), 진고개(충무로), 박석고개(명륜동), 배고개(종로4가), 맹현(삼청동), 안현(안국동), 야주개(당주동), 무학재 등 고개(현)가 유독 많이 나오는 까닭이다. 청계천 물길을 따라 종로가 생성됐고, 중랑천을 따라 동부간선도로, 홍제천과 정릉천을 따라 내부순환도로가 지어진 것도 물길에 순응한 결과다.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은 산과 산이 이어지는 곳에 만들어졌다. 사대문(흥인지문, 돈의문, 숭례문, 숙정문)과 사소문(혜화문, 소의문, 광희문, 창의문)이 그렇다. 동서남북을 가리키되 인위적으로 배치하지 않았다. 크기나 위치에 따라 오솔길, 한 길, 두렁길, 골목길, 고갯길, 샛길이 됐다. 상태에 따라 흙길, 황톳길, 진창길, 박석길(포장길)이 됐으며 쓰임새에 따라 피맛길, 순라길이 됐다. 조선시대 서울의 숱한 길 중 정사(正史)에 지명이 등장하는 길은 단 두 개다. 실록이나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길은 육조대로(세종로)와 운종가(종로)뿐이다. 태조실록에 운종가라는 기록이 나오고, 인조실록과 영조 당시 승정원일기에 육조대로가 나온다. 그 밖에는 관도(官道), 어가(御街)라는 불특정 길로 존재할 뿐이었다. 이후 김정호의 대동여지도에 과천로, 시흥로, 강화로, 고양로 같은, 서울에서 지방으로 나가는 간선도로명이 기록됐다. 대한제국 시기 들어 정동을 공사관거리라고 부르거나, 황토현이나 신작로라는 길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풍경2> 좁고 불결, 그리고 황량 : 개항기 외국인 눈에 비친 도성 길 먼지·진흙 뒤범벅… ‘눈 돌리면 매혹적인 풍경’ 애정 어린 눈길도 개항 이후 길에 관한 기록의 칠팔 할은 소설이나 외국인의 여행기, 수기와 함께 전한다. 성종 때 명나라 사신으로 왔던 동월(董越)은 ‘조선부’(朝鮮賦)에서 “트인 길, 트인 거리는 바르고 곧아서 구부러짐이 없다”는 인상기를 남겼다. 당시 대표 길인 육조거리와 운종가는 폭이 각각 60m, 20m로 큰길이었다. 이 길을 본 외국인의 입이 벌어졌다. 16세기 중세 도시로서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예를 찾기 어려운 마치 광장 같은 길이었다. 그러나 외국인의 눈에 비친 서울 길은 대체로 좁고 지저분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서양 문물을 일찍 접한 실학자들이 저서를 통해 도로의 확장과 정비를 지적했다. 박제가는 ‘북학의’에서 “시중의 주민들이 길을 차지해 말을 탄 사람이 서로 만나면 다닐 수 없는 때도 있다”면서 가로 정비를 촉구했다. 박지원도 ‘열하일기’에서 “길이 험하여 수레를 쓸 수 없다 하니 이는 무슨 말인가. 수레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도로가 나빠서 그렇고 도로가 나쁜 것은 사대부가 책임져야 한다”고 질타했다. 실학자들과 개화파 주도로 도로의 정비 개선이 실제 이뤄졌다. 외국인들은 길이 좁고, 쓰레기와 오물로 가득 차 있다고 투덜거렸다. 1883년 미국인 천문학자 로웰은 “제물포와 서울 간의 풍경은 황량하다”고 썼고, 1894년 영국인 여행가 비숍은 “네 사람의 가마꾼이 멘 가마 한 채가 지나는데도 양쪽 인가의 처마에 걸려 애를 먹기 일쑤였다”고 전했다. 1882년 독일인 외교고문 묄렌돌프는 “조악하고 교량은 드물다”, 미국인 선교사 앨런은 1908년 펴낸 ‘서울견문기’에서 “당나귀, 마차, 전차 그리고 사람들이 먼지와 진흙 속에 뒤범벅되어 있다”라고 혹평했다.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도 “좁고 불결하며 늘 오물이 널려 있다”, 미국 해군장교 보스트윅은 “하이에나의 소굴보다 더한 지독한 악취로 진동하고 있다”고 악평했다. 혹평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서울 특유의 풍광에 반한 외국인의 칭송도 있었다. 1892년 ‘서울풍물지’를 발간한 미국인 신학자 길모어는 “한국인들은 누군가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불결하지 않으며 서울 근교는 산책하기 좋은 곳이 많고, 어느 방향으로 가든 눈을 매혹할 전경을 발견하게 된다”고 감탄했다. 비숍도 1897년이 되자 “인구가 25만명에 이르는 서울은 세계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도 가운데 하나이며, 이만큼 좋은 입지를 가진 수도는 어디에도 없을 것”이라면서 “내가 처음 한국에 대해 느꼈던 혐오감은 이제 거의 애정 수준의 관심으로 바뀌었다”고 고백했다. <풍경3> 모든 길은 한양으로 :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 상경·낙향… ‘어떻게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광적인 인구집중 증보문헌비고나 김정호의 대동지지에는 서울 밖으로 나가는 길이 나온다. 주요 국도라고 보면 될 터다. 제1로는 중국 가는 길인 의주로였다. 서대문~홍제동~고양~파주~장단~개성~의주로 이어졌다. 제4로는 남대문~한강진~판교~용인~부산의 부산 가는 길이다. 이 밖에 평해 가는 길, 고성 가는 길, 상주와 통영 가는 길, 정읍을 거쳐 제주 가는 길, 강화 가는 길 등이 있다. 고전소설 ‘이춘풍전’에는 “무악재 넘어 홍제원(홍제동)에 다다르니…”라면서 개성과 평양을 지나 의주로 가는 장면이 나온다. ‘춘향전’에서 “역졸을 거느리고 숭례문 내달아 칠패 팔패 돌모루 백사장 동작강 얼른 건너”라는 구절은 한강을 건너 충청도와 경상도와 전라도로 가는 길이다. 오늘의 숭례문~이문동~청파동~노량진 구간을 이른다. 또 ‘홍길동전’에서는 “양천 강변을 지나 서울 서강으로 대령하라” 하였는데 숭례문~약현(만리동)~노고산(신촌 뒷산)~양화~서강(서강대교 북단)에 이르는 길을 이른다. 정철이 ‘관동별곡’에서 “평구역 말을 갈아 흑수로 돌아드니”라고 읊은 구절은 동쪽 방면의 동대문~왕십리~살곶이다리~송파로 가는 길의 하나다. 조선시대는 한양이 곧 나라였다. 지독한 도성 중심주의가 판쳤다. 지방에서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上京)이라 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을 낙향(落鄕)이라고 할 정도였다. 문외송출(門外送出)이라고 해서 죄를 지으면 성문 밖으로 내쳤다. 사대부가 서울 밖에 사는 것은 일종의 형벌이었다. 유배 살던 정약용은 “너는 사정이 어지간만 하면 한양 사대문 밖에 살지 말고 어떻게 해서든 사대문 안에서 살아라…. 그것도 힘들거든 사대문 가까운 곳에서는 살아야 한다. 그래야 여러 가지 보고 듣는 게 많고 기회들이 많다”라는 편지를 아들에게 보낼 정도였다. 광복과 한국전쟁 이후 서울로의 광적인 인구 집중은 예고된 ‘참사’였다. <풍경4> 청계천 따라 북촌-남촌 : 계층 생활권 나뉜 이중도시 오늘날엔 한강을 경계로 강북 -강남으로… ‘스타일’ 차이 뚜렷 오늘의 서울에 강북과 강남의 문화 차이가 있듯이 조선시대 한양은 청계천을 경계로 남북으로 나뉘었다. 청계천 북쪽 5대 궁궐 주변 일대에는 사대부 지배층과 궁 관련 아전들이 주로 살았다. 청계천 아랫동네는 벼슬을 하지 못한 선비와 상민들의 거처였다. 청계천 변에는 하층민과 거지들이 살았다. 엄연한 계층 차이가 존재했다. 남산 기슭의 남촌 사람은 상대적으로 지위가 낮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사람으로 인식됐다. 박지원의 ‘허생전’에 묘사된 것처럼 끼니가 없으면 냉수로 주린 배를 채우고서 갓을 고쳐 쓰고 앉아 헛기침하며 글을 읽는 ‘남산골샌님’이 그들이다. 진흙탕 길에 나막신을 신어야 했기에 ‘딸깍발이’로 불렸다. 북촌과 남촌은 다시 한번 진화한다. 1935년 서울에 사는 일본인의 수가 서울 총인구의 30%에 육박하는 11만 4000명에 이르렀다. 일본인 거주 지역이 급속도로 확장된다. 남산 아래 필동, 회현동을 비롯해 후암동, 청파동 등 용산 일대가 일본인 거주지로 변했다. 북촌은 조선인, 남촌은 일본인이 사는 곳으로 양극화됐다. 일본인 거주지를 낀 본정통(충무로), 황금정(을지로), 남대문통(남대문로)에 포장도로가 깔리고, 전기와 전차, 상하수도가 갖춰졌다. 조선인 중심지인 종로는 상대적으로 낙후됐다. 소설가 박태원은 ‘천변풍경’에서 “전차도 전차려니와 웬 자동차며 자전거가 그렇게 쉴 새 없이 이어서 달리느냐. 어디 장이 선 듯도 싶지 않건만, 사람은 또 웬 사람이 그리 거리에 넘치게 들끓느냐”라고 남촌의 휘황찬란한 풍경을 비아냥댔다. 북촌과 남촌 간 민족적 갈등이 밤거리의 주먹 세계에서 격렬하게 분출된 시절도 있었다. 서울은 일찍부터 민족적·계층적으로 분리되거나, 생활권과 상권 그리고 문화가 갈리는 ‘이중도시’(Dual City)의 양상을 보였다. <풍경5> 일제의 길 확장 : 서울다움을 잃다 전차 궤도 부설 핑계로 도읍 상징 성곽 허물어 깊은 생채기 근대화라는 이름으로 일제가 시행한 길 확장이 서울의 서울다움을 결정적으로 훼손시켰다. 인력거 및 자전거의 도입과 마차를 대체한 달구지, 자동차, 전차의 도입은 한양도읍의 상징인 성곽을 철거하는 구실이 됐다. 전차 궤도가 부설되기 시작한 1899년부터 동대문과 서대문, 남대문 성곽 일부가 차례차례 헐렸다. 일제는 1907년 성곽처리위원회를 구성해 동대문 북쪽 성곽과 남대문 남쪽 성곽을 뜯어냈다. 성곽의 철거는 서울의 공간 구조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결정적 계기가 됐다. 곧게 뻗은 포장도로와 전차 궤도는 근대화의 상징으로 홍보됐다. 일제는 성곽 철거를 통해 ‘낡은 도시구조’와 ‘왕조의 잔재’를 제거하는 데 성공했지만, 이는 역사가 살아 있는 구시가지의 파괴로 이어졌다. 이후 한국전쟁과 개발 연대를 거치면서 서울은 600년 된 전통 도시의 향기를 잃었다. joo@seoul.co.kr
  •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노주석 선임기자의 서울택리지] ② 세종로 축선(軸線) 전쟁

    【제1막】 조선… 북악산을 주산 삼아 경복궁~숭례문 丁자형 길 조선 개국 초 한양도읍의 축선(軸線)을 둘러싸고 정도전과 무학 대사가 충돌했다. ‘주산(主山)을 북악으로 할 것이냐, 인왕으로 할 것이냐’의 다툼이었다. 지리학과 풍수의 대결이었다. 미적거리는 태조에게 정도전은 “어찌 술수자의 말만 믿고 선비의 말은 믿지 않습니까”라면서 밀어붙였다. 태조의 마음은 무학에게 기울었지만, 정도전이 대표하는 개국공신들의 의견에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조선 초기 유교와 불교 간 세종로 축선 전쟁 제1막이다. 서울은 산과 성곽의 도시이다. 유교와 풍수의 원리가 겹겹이 에워쌌다. 성곽으로 둘러싼 경계에 내사산이 있고, 외곽에 외사산이 있다. 내사산 북쪽의 북악산(백악)은 현무, 동쪽의 낙산(낙타산)은 청룡, 서쪽의 인왕산은 백호, 남쪽의 남산(목멱산)은 주작이 각각 수호신이다. 외사산 북쪽 삼각산은 백두산의 정기를 이어받은 조산(祖山)이요, 지리에서 뻗어오른 관악산은 아침마다 임금을 알현하는 조산(朝山)이다. 정도전의 주장에 따라 조선의 법궁인 경복궁은 북악을 주산으로 자리를 잡았다. 근정전은 도시의 중앙에서 서쪽으로 쏠린 상태에서 남쪽을 바라보고 앉았고, 남북 간 축선인 주작대로는 삼각산과 관악산 축선상에 놓였다. 무학 대사는 인왕을 주산으로 삼고 북악을 좌청룡, 남산을 우백호로 하여 도읍을 동향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그래야 궁이 도시의 중앙에 들어선다고 했다. 무엇보다 북악과 관악산이 불의 산이고, 목멱산(木覓山)에는 ‘나무 목’자가 들어 있어서 불이 나면 도시가 재앙에 빠진다고 예언했다. 무학 대사는 북악을 주산으로 하면 5대를 잇기 전에 왕위찬탈의 비극이 생기고 200년 안에 큰 변고가 일어날 것이라고 내다봤다. 대사의 예언은 사실로 드러났다. 태조 당대에 왕자의 난이 일어났고, 4대 세종의 둘째 아들인 세조가 조카 단종의 왕위를 찬탈했다. 개국 200년 만인 1592년에는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과 종묘·사직이 초토화됐다. 조선의 정궁(正宮)은 불탄 경복궁 대신 도읍 중앙에 입지한 창덕궁으로 옮겨갔다. 풍수가들은 “그나마 조선이 나라를 유지한 것은 정도전이 무학 대사의 지적을 수용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정도전은 화마를 막기 위한 장치 마련에 심혈을 기울였다. 불을 먹고 산다는 상상 속 동물 해태 두 마리가 광화문 앞을 지켰다. 도시가 서쪽에 치우치는 것을 막고자 도시 중앙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도로를 만들었는데 그것이 운종가(종로)이다. 황토마루(黃土峴)라는 나지막한 언덕을 육조거리와 운종가가 만나는 오늘의 세종로사거리에 둬 불길이 대궐로 번지는 것을 막았다. 관청가인 육조거리에서 숭례문에 이르는 주작대로는 직통으로 연결하지 않았다. 현재 지도로 보면 세종로 끝자락 비각에서 코스를 꺾어 종로 보신각까지 간 뒤 지금의 남대문로를 통해 숭례문까지 이르는 정(丁)자형 길이다. 화마가 길을 따라오지 못하도록 설계한 것이다. 숭례문 앞에 남지(南池)라는 큰 연못을 팠으며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웠다. 결론적으로 1막의 승자는 정도전이었고, 조선의 주축(主軸)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이었다. 【제2막】 일제… 총독부~시청~조선신궁 일직선 ‘大日本天’ 대못질 일제는 조선의 축선을 파괴하고 개조했다. 창씨개명이나 신사참배보다 더 악질적인 민족정기 말살정책이었다. 도로의 신설과 확장이라는 미명 아래 5대 궁(경복궁·창덕궁·창경궁·경운궁·경희궁)을 파헤쳤다. 서울의 지명을 경성으로 바꾸더니 경기도의 한 지방으로 격하시켰다. 서울은 더는 도읍이 아니라 식민지의 일개 지방도시가 됐다. 1912년 총독부 훈령에 따라 세종로에서 육조거리를 지워버리고 황토마루(누루재)도 뭉개버린 그들은 새로운 축선을 고안했다. 고종이 정궁으로 삼았던 경운궁을 파괴할 목적으로 세종로와 숭례문을 연결하는 태평로(태평통)를 만들었다. 큰 길을 내면서 경운궁 담장을 텄고 이름도 덕수궁으로 멋대로 바꿨다. 종묘와 창덕궁을 분리하고, 창경궁을 동물원(창경원)으로 오락시설화했다. 남산에 조선 신궁을 만들면서 꼭대기에 있던 국사당을 인왕산 선바위 아래로 옮겨버렸다. 국사당은 태조와 무학 대사, 최영 장군 등을 모신 사당이다. 조선총독부 신축은 축선 말살의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1915년 경복궁 안에서 조선물산공진회를 연다면서 광화문과 근정전 사이 홍례문을 헐어낸 7만여평의 부지에 전시관을 짓고 잔디를 깔았다. 초대 총독 데라우치는 무엄하게도 근정전 용상에 앉아서 개회사를 낭독했다. 서울의 지맥과 축선을 영구히 끊고자 1926년 근정전과 광화문 사이에 거대한 총독부 건물을 세웠다. 이때 경복궁 내 전각 19채, 대문·중문 22개, 당 45개 등이 헐려 음식점, 별장 건물로 팔려나갔다. 겨우 철거 신세를 면한 광화문은 1927년 불길한 피난길에 올랐다. 경회루 등 전각 몇 채만 덩그러니 남은 당시 경복궁 사진이 우리를 슬프게 한다. 일제는 조선의 축선에서 5.6도 각도를 튼 자리에 390칸짜리 조선총독부 청사를 돌로 지었다. 일제가 축선을 튼 것은 의도한 것이 아닐뿐더러 객관적으로 증명된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학자도 일부 있다. 그러나 내선일체(內鮮一體)를 지상과제로 삼은 그들의 치밀한 민족정기 말살 시나리오를 간과한 어설픈 학설에 불과하다. 조선총독부가 발간한 ‘신영지’(新營誌)에 “경복궁의 중심선은 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총독부를 광화문 중심선과 맞추면 중심선과 어긋나 위용을 살리지 못한다. 태평통의 도로 중심선으로 새 청사의 중심을 삼았다”고 분명히 밝히고 있다. 그들의 의도는 총독부~경성부청(서울시청)~남산 조선 신궁으로 쭉 뻗은 ‘일본의 새 축선’을 서울의 중심에 새기는 것이었다. 축선상에 있던 신축건물인 경성일보사를 헐고 그 자리에 경성부청을 지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1940년 경성시가지 지도를 보면 총독관저(청와대)의 대(大)→총독부의 일(日)→경성부청의 본(本)→조선 신궁의 천(天)이 일직선상에 뚜렷하게 나타나 있다. 4개의 건물은 하늘에서 내려다보면 문자모양으로 건축됐다. 이름하여 ‘대일본천’(大日本天)이라는 일본 축선의 완성이다. 【제3막】 광복 이후… 총독부 헐고 경복궁 복원해 역사 바로잡아 ‘서울의 축선=일본의 하늘’이라는 일제의 오싹한 음모는 청산되지 않았다. 개념 없는 위정자들은 일제가 우리의 기와 맥을 끊고자 지은 총독부 청사에서 제헌 의회와 정부수립 기념식 그리고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 1939년 지어진 경복궁 후원 총독관저는 미 군정장관 관저, 경무대, 청와대로 대이어 사용됐다. 최고의 명당자리에 둥지를 튼 탓인지 54년 만인 1993년에야 헐렸다. 총독부는 1995년 헐리기 전까지 미 군정청, 정부 중앙청사로 이름을 바꿔 가며 권부로 군림했다. 1952년 서울도시재건계획이 수립됐지만, 우리의 축선을 원래대로 돌리기보다 일제가 왜곡시킨 축을 확장·심화하는 결과를 가져온 것이 뼈아팠다. 한국전쟁통에 훼손돼 석대만 남아 있던 광화문을 이전 복원한다면서 1969년 아무 생각 없이 옛 조선총독부 정문 앞에 옮겨다 놓았다. 일제가 5.6도 틀어놓은 방향, 원위치에서 동쪽으로 10.9m, 북쪽으로 14.5m 북쪽으로 물러난 이른바 ‘일본의 축’이다. 뒤늦게 알았지만, 총독부를 철거하거나 ‘콘크리트 모조품’ 광화문을 원상회복할 의지와 능력이 부족했다. 임기응변으로 일제의 기를 누를 수 있는 동상을 세우기로 하고 일본인이 두려워하는 충무공 동상을 남산 신궁 터를 노려보는 자세로 세우게 됐던 것이다. 축선 복원은 1990년 경복궁 복원계획이 세워지고, 5년 뒤 총독부가 철거되면서 닻을 올렸다. 총독부가 일본 축선상에 식재한 은행나무를 양옆으로 도려내고서 중앙분리대 자리에 광화문광장을 조성했다. 세종로라는 이름에 맞게 세종대왕 동상을 중심에 두었다. 2009년 8월의 일이다.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제자리로 돌아온 것은 2010년 8월이었다. 두 번이나 불타고 두 번이나 엉뚱한 자리에 놓였던 비운의 광화문이 제자리를 찾았다. 비틀린 축선의 출발점을 바로잡는 데 83년의 세월이 걸렸다. 그 사이 축선의 종착지인 숭례문이 2008년 2월 홀랑 불탔다. 축선 복원을 차일피일 미룬 우리의 업보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는 비극이다. 숭례문은 지난 5월 다시 우리 곁으로 돌아왔다. 1912년 일제의 황토마루 제거로 촉발된 한국과 일본 간 축선전쟁 제3막도 끝이 났다. 세종로 축선복원이라는 고단한 여정도 101년 만에 막을 내렸다. 식민잔재의 핵을 걷어내는 데 한 세기가 걸린 셈이다. joo@seoul.co.kr ■축선이란 한 국가, 도시의 주축을 이루는 도로 혹은 건물. 우리나라의 축선은 북악~경복궁~숭례문~관악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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