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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열린세상] 엽관제 유령을 물리칠 퇴마사/허만형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

    [열린세상] 엽관제 유령을 물리칠 퇴마사/허만형 중앙대 행정학과 교수

    윌리엄 화이트는 조직철학자이다. 그는 1956년 불후의 명작 ‘조직인’(The Organization Man)을 남긴다. 이 책에서 그는 인간 군상을 이렇게 묘사한다. 인간은 조직을 떠나 살 수 없다. 평생을 조직 속에서 살다가 조직의 일원으로 죽어간다. 생존을 위해서는 자신을 버리고 조직에 매몰되어야 한다. 또한 조직의 가치를 자신의 가치로 수용하는 길만이 성공이 보장되는 길이다. 화이트의 조직인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전형(典型)이었다. 책이 출판될 당시 미국인의 삶의 모습은 조직인 그 자체였다. 미국 대중의 의식과 공감대를 형성한 이 책은 출판되자마자 베스트셀러 대열에 올랐다. 1970년대에 들어와 로버트 실버맨과 헤밍은 ‘조직인에서의 탈출:전문인으로의 진입’이라는 논문을 발표하여 화이트의 조직인을 비판한다. 조직인은 산업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상일 뿐이며, 조직인으로서의 사고로는 성공을 기대할 수 없다고 지적한다. 그리고 전문성을 역설한다. 실버맨과 헤밍에 따르면 전문인은 조직의 틀을 벗어나 활동한다. 이들은 각기 다른 조직에서 일을 하지만 전문영역을 중심으로 네트워크를 만든다. 같은 전문인끼리 정보를 교환하고, 필요하면 협의체를 만들어 함께 일함으로써 개인과 조직의 발전을 동시에 추구한다. 대우가 좋지 않으면 전문인은 스스로 만든 네트워크를 활용하여 그 조직을 떠난다. 전문인은 21세기에 들어와 창조적 전문인(creative professional)으로 진화한다. 전문지식에서 한 단계 더 나아가 부가가치 창출이 가능한 전문가만이 성공이 보장되는 시대의 도래를 주장한다. 캐나다 토론토 대학의 리처드 플로리다 교수가 바로 그다. 그는 21세기에는 전 세계에서 1000만명 정도의 창조적 지식인이 세계 경제를 주도할 것이라고 예고한다. 그는 이들을 창조적 계급(creative class)이라고 지칭한다. 조직인, 전문인, 창조적 전문인 같은 시대적 소명을 묘사한 인간관은 인사에 반영되지 않을 수 없다. 시대를 이끄는 인재 발탁의 전범(典範) 역할을 하는 정부 인사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래야 공기업 등 정부 산하기관에서도 보고 배우며, 민간 영역에서도 정부 정책에 순응하는 태도를 보인다. 그런데 이명박 정부에서는 한마디로 조직인의 인간상을 뛰어넘는 인사를 찾기 어렵다. 전문성보다는 지근거리 인물만 보인다. 전문성 없는 사람을 장관에 발탁하여, 공무원은 이들의 교육에 아까운 시간을 낭비한다. 정치권은 더 한심하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당조직 내에서는 유력 인사에 맹종하는 인물만이 득세한다. 능력 있는 인물의 정치권 영입보다는 유력 인사에 줄서기 순으로 정치인 충원이 이루어진다. 정·관(政官) 인사가 이 정도이니 대한민국에 창조적 지식인이 설 땅이 너무나 좁다. 현 정부는 임기 말 권력누수 현상을 걱정하는 모양이다. 생각해 보면 권력누수 현상도 정권 담당자가 자초한 부분이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와대는 자성보다는 관료사회를 향해서 목소리를 높인다. 국가 현안, 부처 간 갈등, 혹은 사회적 쟁점이 되는 문제에 적극 나서기 그리고 사정기관을 동원하여 공무원 기강잡기를 주문한다. 정실인사를 최소화하고, 실적 중심 인사를 해왔으면 권력 누수를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다. 누가 권력을 잡든 정실은 다를지라도 실적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정실인사가 다음 정부에서도 예외가 아닐 듯하다. 내년은 사계절 모두가 근래 보기 드문 정치의 계절이라 유력 정치인을 중심으로 줄서기가 난무하는 현실이 이를 말해준다. 전문성도 없는 인물이 줄서기 순에 따라 우수수 요직에 입성하고, 그로 인해 흔들리는 공직사회의 폐해가 눈에 선하다. 이것은 엽관제(spoils system)로서 1800년대 미국에서 존재했던 행정학의 고전적 사례이다. 그 유령이 5년마다 21세기 여기, 대한민국에서 출몰한다. 엽관제의 유령을 물리치는 퇴마사가 올 날을 기대해 본다.
  • [열린세상] 정치개혁 없이 사회변혁 될까/임성호 경희대 비교정치 교수

    [열린세상] 정치개혁 없이 사회변혁 될까/임성호 경희대 비교정치 교수

    비판과 반성은 같이 가야 한다. 남에 대한 비판은 자신에 대한 반성이 전제될 때 진정성을 띠게 된다. 자신은 절대 옳고 남은 절대 그르다는 식의 비판이 신뢰를 자아낼 수 있겠는가. 다양한 의견과 입장이 복잡하게 얽히고 부딪쳐 선악 구분이 쉽지 않은 우리 사회에서 일방적 비판이 공감과 설득력을 얻을 수는 없다. 최근 들어 정치인들이 남에 대해 비판하는 빈도가 부쩍 늘었다. 여야 간, 계파 간, 자기들끼리 비난을 주고받는 해묵은 모습은 차치해도 정치권 밖의 사회집단들에 대해 비난 수위를 한층 높이고 있다. 반값 등록금 논란을 기화로 대학을 거세게 비판하더니 이제는 대기업과 금융권을 신랄한 비판의 대상으로 몰고 있다. 공무원 집단도 정치인들의 비판 리스트에 단골로 이름을 올린다. 여야를 막론하고 정치인들은 우리 사회 곳곳의 썩은 부분을 도려내는 개혁가처럼 거창한 수사(修辭)로 여러 집단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이쪽저쪽에 대한 정치권의 날 선 비판엔 수긍할 만한 부분이 분명히 있다. 워낙 대학이 많다 보니 문제투성이 대학도 나올 것이고, 생존 경쟁이 치열한 외부에서 볼 때는 대학운영상 허술하거나 불합리한 대목이 한둘이 아닐 것이다. 대기업, 특히 재벌의 행태도 불경기 속에 경제적 양극화가 심화되고 있는 오늘날 보기에 따라 공분을 자아낼 여지가 충분하다. 금융권은 부실저축은행 사태에서 보듯이 부정부패의 온상이라고 비판 받아도 할 말이 없게 되었다. 하루가 멀다하고 터지는 전·현직 공직자의 부당한 이권 개입, 이익 취득, 수뢰사건을 볼 때 공직자 집단도 당연히 비판의 도마에 오를 만하다. 그러나 이들에 대한 정치권의 비판에 진정한 힘이 실릴 수 있을까? 메신저가 누구냐에 따라 메시지의 설득력이 달라진다. 메신저 자신이 수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반성의 태도 없이 남을 야단치는 메시지를 던질 때 큰 공감을 자아낼 순 없다. 정치권이 신뢰도 조사에서 항상 꼴찌를 차지할 만큼 불신을 받는 상황에서 정치인들이 반성 없이 다른 집단을 맹비난한다면 사회적 공명을 자아낼 수 있겠는가. 더욱이 여러 정치인에게 제기된 각종 의혹이 정치권 전체로 퍼져 나가려는 시점에 정치권이 대외 비난의 포문을 열었다면 그 동기의 순수성마저 의심받을 수 있다. 정치인들은 남 비난에 앞서 우선 자정(自淨)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법적·윤리적 문제를 범한 의원에 대해선 제재 규정을 엄정히 적용하고 의정활동상 막말, 위법적 방해행위, 물리적 충돌, 아울러 태만을 삼가도록 노력해야 한다. 입법에 있어 부조리하고 불공정한 면이 있는지 신경 써야 한다. 정당운영상의 온갖 병폐와 선거과정상의 고질적 구태를 어떻게 없앨지도 고민해야 한다. 물론 말이 쉽지, 이러한 당위적 주문이 척척 이루어질리 없고 단기에 실제 효과를 내기도 힘들다. 그렇다면 적어도 노력하는 모습이라도 보여야 한다. 아니, 최소한 각종 문제에 대해 반성하는 태도라도 보여야 한다. 정치개혁이란 꼭 제도 차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근본적으로는 의식과 태도 차원의 문제이다. 스스로를 돌아보는 성찰적 의식과 반성하는 태도를 보이는 것이야말로 가장 중요한 정치개혁일 수 있다. 태도상의 정치개혁은 다른 집단들에 대한 정치권의 비판에 진정성을 부여하고 대중의 지지를 얻게 해줄 것이다. 대중은 과정상 성찰적 진지함을 보이는 정치인들에게서 일반적 신뢰감을 느낄 것이기 때문이다. 개혁은 일부분씩 이루어지기 힘들다. 모든 부분이 연결되어 있음을 고려할 때, 한 부분이 변한다면 파급적으로 다른 부분의 변화를 견인하기 용이하지만 한 부분은 가만있으면서 다른 부분만 변하길 바라는 건 어려운 일이다. 개혁이 총체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는 이유다. “너나 잘 하세요.”라는 유행어에서 알 수 있듯이 자기변화, 자기반성 없는 남 비판은 오히려 조롱과 공허함만 남긴다. 광범위한 사회 변혁을 이루려면 정치지도자들이 먼저 변하고 반성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내년 두 차례의 큰 선거를 앞두고 정치권발(發) 집단 매도와 비난전이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 익히 예상되어 해본 생각이다.
  • [기고] 전자주민증 도입 지금이 적기/노장탁 대진대 경영학과 교수

    [기고] 전자주민증 도입 지금이 적기/노장탁 대진대 경영학과 교수

    주민증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모양이나 기재 내용, 재질, 보안요소 등을 달리하여 발전을 거듭했으며 대체로 10년 주기로 갱신해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보화 시대가 무르익으면서 주민증이 위기를 맞고 있다. 범죄의식 없이 자행되고 있는 청소년들의 주민증 변조부터 전문 위조단에 의한 각종 신분증 위조수법 행위가 갈수록 지능화하고 있다. 이런 상황과 첨단 지식정보화의 큰 흐름 속에서 함께 가야 할 존재가 바로 전자주민증이며, 현 주민증으로 교체한 지 10년이 되는 지금이 전자주민증을 도입할 가장 적정한 시기라고 생각한다. 주민등록증의 개인정보 유출 가능성과 이로 말미암은 개인 프라이버시 침해 이상의 사회적 감시 통제가 강화될 개연성을 우려하는 일부 시민단체의 의견에는 당연히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즉, 전자칩을 내장한 전자주민증의 개인정보가 정부기관과 금융기관을 비롯한 공공이나 민간영역에서 여러 가지 용도로 사용되면서 불법적인 판독기나 판독과정에서 유출될 위험을 고려해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 설득력 있는 해답을 내놓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정부에서는 판독기는 국제표준규격을 준수하여 별도 인증한 기기만 사용토록 철저히 관리해 나갈 것이며, 관련 중앙시스템과 네트워크 연계 없이 현장에서 주민증의 확인 용도에만 사용할 것이라고 한다. 또 주민등록증상 정보가 수집·저장되지 못하도록 안전한 보안체계와 세부장치를 적용하는 등 법제도적·기술적으로 확실한 제반 보안조치를 마련하여 실행할 계획이어서 일부 시민단체에서 염려하는 사항들에 대해 그리 큰 걱정은 안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 일부에서 프라이버시나 인권 침해 소지가 증가할 개연성을 들어 전자주민증 도입을 반대하는 논거를 펴고 있다. 여기에다 전자주민증의 위헌성이라는 법 이론까지 들고 나오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무정부사회로 가는 게 아닌 다음에야, 온 국민의 거주지 확인을 통해 주민생활의 편익을 증진시키는 현행 주민등록제도 자체를 부인하면 어떤 대안이 있을지 궁금하다. 어느 선진국이든 그 나라 시민임을 입증하는 신분증이 없는 나라는 없다는 차원에서다. 우리나라 주민등록증 제도의 취지를 더듬어 보면 초기에는 남북대치 상황에서 간첩이나 불순분자 색출이라는 목적에서 시작하여 지금은 국민에게 생활의 편익을 증진시키는 사회복지 차원에서 운영되고 있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서두에서 언급했듯이 현재 사용되고 있는 주민증은 발급한 지 10년이 넘어 용모 변화나 훼손된 주민증이 많아 신분 확인에 어려움이 있고 그로 말미암은 피해가 날로 증가하는 추세다. 물론 일부 시민단체 등에서 위·변조 건수가 연간 400~500건에 불과한데 수천억원을 들여 바꿔야 할 필요성이 있느냐고 주장하지만, 이는 잘못된 판단이라고 생각한다. 단 1건이라도 본인으로서는 너무 큰 상처가 되고 많은 후유증을 남긴다고 본다. 주민번호를 안전한 전자칩에 숨기고 중앙시스템과 연계 없이 인증된 판독기를 통하여 정확한 신분 확인을 할 수 있도록 한다면, 전자주민증 제도는 국민에게 편의와 안전을 제공하는 지킴이 역할을 할 것으로 확신한다.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너무나 깨끗한 자살현장이 타살을 증명했다”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너무나 깨끗한 자살현장이 타살을 증명했다”

     “여기 방이동(서울 송파구)인데요, 노래방 문 좀 따주세요.”  지난해 9월 20일 밤 10시. 119신고센터에 20대 여성의 다급한 요청이 들어왔다. 닷새 전 노래방 문을 연다고 나간 A(당시 46세)씨를 애타게 찾던 첫째딸(당시 28세) 목소리였다. 구조대가 급히 달려간 지하 노래방은 앞뒤로 굳게 철문이 닫혀 있었다. 119 대원이 한참을 씨름하던 잠금장치를 절단하고 문을 열자 고약한 냄새가 확 풍겼다. 뭔가 썩는 냄새였다. 노래방 주인 A씨가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자살이라고밖에는” 유서 2장과 소주병  자살이었다. 한눈에 들어온 현장은 그랬다. 시신이 누워 있던 노래방 내실 탁자에서는 유서가 담긴 흰 봉투와 먹다 남은 소주병 2개가 나왔다. A4 용지 2장 분량의 유서에는 구구하게 긴 사연이 담겨 있었다. 1년 전 남편 유산으로 시작한 노래방이 생각만큼 잘 안돼 속상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3남매가 엄마 마음을 몰라줘 섭섭했다는 사연, 자신은 재미있게 살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서로 의지해 가며 정겹게 인생을 살라는 당부 등이 이어졌다. 노래방과 살던 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숨겨놓은 통장은 어디에 있는지, 출금 비밀번호는무엇인지 등도 적혀 있었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인쇄돼 마지막에 도장까지 찍힌 유서는 남이 썼다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A씨의 왼쪽에는 피묻은 칼이 놓여 있었다. 노래방 부엌에 있던 식칼이었다. 칼은 명치와 왼쪽 손목 2군데에 상처를 냈다. 치명상은 명치 쪽인 듯했다. 정황상으로 보면 A씨는 평소에 자살을 고민해 왔고, 결국 어느 날 노래방 문을 잠그고 술을 마신 뒤 1차로 손목을 2차례 긋고 나서 다시 명치 부위를 스스로 찌른 것으로 보였다. ●“누구라도 최후의 순간에는 주저하기 마련, 그러나…”  자칫 억울하게 묻힐 뻔했던 A씨 피살의 한을 풀어 준 사람은 베테랑 형사였다. 자살 치고는 현장이나 시신이 지나치게 깔끔했다. A씨가 자살한 쪽방은 성인 2명 정도가 겨우 누워 잘 수 있는 크기. 그나마 가로로는 누울 공간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좁은 방이었지만 벽에 피가 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바닥에 고여 있는 혈액의 양도 이상하리만큼 적었다.  피해자의 몸에 난 상처도 주저흔(hesitation marks) 하나 없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주저흔이란 자살하려는 사람이 한번에 치명상을 만들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자해한 흔적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주로 치명상 주위에 생기는데 송곳에 찔린 듯한 작은 것부터 1~2㎝까지 많게는 수십개가 남기도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는 “사망자의 몸에 칼에 찔린 상처가 많고 외부로 흘러나온 혈액이 많으면 타살로 간주하기 쉽지만 자살인데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흉기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고통 없이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치명적인 곳을 못 찾거나 주저하게 돼 스스로 여러 곳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 자녀도 “자살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A씨가 워낙 솔직하고 화통해 우울증이나 자살과는 거리가 먼 데다 유서도 어색하다고 했다. 유서에는 “내가 글씨를 잘 못써 PC방 점원에게 워드(워드프로세서)를 배웠는데, 유서 쓰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자녀들은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엄마가 어느 결에 워드를 배웠는지도 의문이고, 굳이 유서를 워드로 작성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유서 속 단어들이 평소 엄마의 말투와 전혀 달랐다. ●생활반응이 말해 주는 사건의 진실  A씨의 시신에 대해 부검 결정이 났다. 치명상은 가슴에 난 창상이었다. 찔린 곳은 한 곳이었지만 칼이 만든 상처의 끝부분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치명상을 입히려고 같은 곳을 정확하게 두 번 찔렀을 때에나 생기는 현상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스스로 치명상이 난 곳을 정교하게 찾아 두 번 칼을 꽂을 리 없다.  자살 현장이 조작됐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시신 왼쪽 손목의 상처였다.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다는 A씨의 상처에 ‘생활반응’(生活反應·특정 충격에 대해 살아 있는 몸이 보이는 반작용)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적은 출혈량 등을 감안했을 때 살아있는 상태에서 손목을 그었다기보다는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만든 가짜 상처로 결론났다.  하지만 의문은 계속됐다. 범인이 누구이기에 통장 비밀번호는 물론이고 남의 가족사를 줄줄이 꿰고 있을까. 그렇다면 범인은 3남매 중 하나일까. 주변인물을 대상으로 수사가 시작됐다. 정작 범인 색출은 싱겁게 마무리됐다. 유서 봉투에서 둘째 딸(당시 25세)의 헤어진 동거남(당시 25세)의 지문이 나왔다. A씨 사망현장에 그가 있었다는 얘기다. 친척집에 숨어 있던 동거남은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는 1년 넘게 A씨의 둘째딸과 동거를 해왔지만 최근 자주 다투면서 때리기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건이 나기 한달 전 동거녀가 가출하자 노래방에 찾아가 “딸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A씨에게 면박을 당한 뒤 모욕감에 범행을 결심했다. 그는 “결혼식은 못 치렀지만 1년 이상을 사위처럼 살면서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상주 노릇까지 했는데 장모가 나에게 너무 모질게 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서울신문의 주간 기획물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에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의 큰 성원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동안 게재된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시리즈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1) 데이트 강간을 위한 ‘악마의 술잔’ 한 모금에 블랙아웃…24시간내 검사 못할 땐 미제사건 2) 죽음의 성도착증 ‘자기 색정사’ 혼절 직전의 성적쾌감 탐닉…질식에 중독되다 3) 오열했던 남편 부인을 독살하다 사고로 위장한 최악의 선택…죽거나 혹은 더 나빠지거나 4) 목 졸려 죽은 시신의 ‘마지막 증언’ 운전석 아내 목졸라 살해하고 차는 낭떠러지로… 5) 강간 후 살해된 성전환 여성 恨풀다 죽을 때까지 여성이고 싶었던 남성의 사연 6) 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대변 속 100억분의 1g DNA 난관 속 사건 푼 ‘최후의 단서’ 7) 정관수술한 지능적인 연쇄성폭행범 ‘씨없는 발바리’ 과학수사 얕봤다가… 8) 핏자국 속 엽기 살인범의 족보 혈흔 속 性염색체로 ‘악마의 姓’ 찾아내다 9) 칼잡이는 당신의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왜 그날 조폭은 남진의 허벅지를 찔렀나? 10) 급성 수분중독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물 많이 마시면 생명 잃는다 11) “너무나 깨끗한 자살현장이 타살을 증명했다”-생활반응은 진실을 알고 있다 12) 불탄 시신의 호흡이 지목한 범인은 그의 아들이었다-화재사 속에 숨은 타살의 흔적찾기 13) 車운전석 그녀의 주먹쥔 양팔-‘에어컨은 억울했다’
  • [사설] 한나라당 전당대회 패거리행태 지양해야

    한나라당 7·4 전당대회가 이전투구식 줄 세우기로 비뚤어지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친이(친이명박)계의 원희룡 후보 지원 회동설, 친박(친박근혜)계의 홍준표 후보 밀약설 등 흑색선전이 난무하더니 점입가경이다. 친이계의 양대 계파인 이상득계와 이재오계에서 원 후보를 지지하는 기류를 보이면서 선거전은 더 험해지고 있다. 급기야 홍 후보가 이에 반발해 공작정치 주장까지 제기하고 나섰다. 패거리 행태가 폭로전으로 이어지면서 위험수위로 치닫는 형국이다. 더 방치하면 당초 내걸었던 쇄신과 변화는커녕 감당하기 어려운 후유증을 남긴다. 홍 후보가 어제 기자간담회에서 폭로한 내용은 충격적이다. 그는 특정 계파에서 국회의원들이나 당협위원장들에게 사람을 보내 특정 후보 지지를 강요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권력기관에서도 특정후보 지지를 유도하고, 공작정치를 하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내년 총선 공천권을 내세워 지지를 강요하거나 협박하는 일도 있다는 것이다. 폭로 내용이 사실이라면 특정 계파가 치졸한 정치적 뒷거래를 자행하고 있다는 얘기가 된다. 반면 허위라면 근거 없는 정치적 음모설을 제기한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 책임은 집권 여당의 대표를 꿈꾸는 인사에게는 가중될 것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가 되더라도 국민들에게 곱게 보이지 않는다. 그 실상을 반드시 가려야 한다. 임태희 대통령실장은 홍 후보의 전화를 받고 청와대의 개입 금지 원칙을 거듭 밝혔다고 한다. 청와대를 팔고 다니는 인사들이 있다면 철저히 색출해 엄히 다뤄야 마땅하다. 이번 선거전은 특정 세력에서 모종의 일을 꾸미면 곧바로 반대 진영에 알려지는 일이 어느 때보다 잦다. 21만명의 선거인단에 패거리 세력들의 영(令)이 서지 않고 있음을 반영한다. 무모한 줄 세우기는 부메랑이 될 뿐이므로 자해행위나 다름없다. 후보들은 산적한 국정 난제나 각종 정책 등에 대해서도 나름대로 공을 들이고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상호 비방전에 열을 올리고, 패거리 행보에 더 주력하는 게 아닌가 하는 인상을 지우기 어렵다. 후보 7인이 과거의 정치 행적과는 무관하다는 듯 박근혜 전 대표만 외치는 형국도 민망하다. 7·4 전대는 변화와 쇄신으로 이어져야만 감동을 얻을 수 있다. 구시대적 패거리 정치를 벗어나지 못하면 한나라당의 미래는 없다.
  • [주말 하이라이트]

    ●6·25특집다큐(OBS 토요일 밤 9시 20분) 고(故) 임인식 대위는 그동안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았던 한국 최초의 종군기자이다. 그의 6·25 전쟁 당시 기록물들을 통해 전쟁이란 무엇이며, 현재를 사는 우리들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되돌아본다. 특히 그동안 공개된 적이 없는 6·25 전쟁의 사진자료와 당시 사진대대장으로 참전했던 고 임인식 대위의 일기와 기록을 최초로 공개한다. ●광개토태왕(KBS1 토요일 밤 9시 40분) 모용보는 전후배상을 하겠다는 거짓 약속을 하며 고구려 왕 이련을 기만한다. 한편 모용보는 화해하는 척하며 담망 왕자를 저녁 식사에 초대한다. 담덕은 모용보의 속셈이 의심스러워 이 자리에 동행해 음식에 독을 넣은 것은 아닌지 면밀히 주시한다. 하지만 풍발은 음식이 아닌 선물로 준비한 피리에 독을 발라 놓았는데…. ●내 마음이 들리니(MBC 토요일 밤 9시 50분) 준하는 민수에게 애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한다. 그리고 민수가 동주를 좋아하는게 싫다며, 민수에게 그 점을 생각해보라는 말을 남긴다. 한편 동주는 진철에게 자신이 봐서는 안 될 장면을 봐서 떨어졌다고 말한다. 동주는 현숙에게 용서를 빌고 그 자리에서 내려오라고 얘기한다. ●토요특집 출발! 모닝와이드 3부(SBS 토요일 오전 7시 40분) 전국 방방곡곡에 숨어 있는 최고 전설. ‘나는 전설이다’의 이번주 주인공은 서울 영등포역 앞에서 40여 년간 교통정리를 해 온 97세 임진국 할아버지다. 평생을 총각으로 살아왔던 그가 아흔이 넘어서 드디어 장가를 갔다. 그리고 5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여전히 알콩달콩 달콤한 신혼생활을 즐기고 있다는데…. ●화평공주 체중감량사(KBS2 일요일 밤 11시 15분) 화평공주는 선왕의 늦둥이 막내딸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왕이 된 오라버니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큰 화평공주. 그녀는 지혜롭고 따뜻한 성품을 지녔지만 지나치게 몸집이 크다. 하지만 그녀는 궁 안의 모든 이가 그녀에게 친절하기 때문에 자신의 큰 몸태가 흉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늘 푸른 인생(MBC 일요일 오전 6시 10분) 낙동강 변의 기름진 토양에서 질 좋은 농산물이 생산되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대구시 달성군 논공읍 노이1리 갈실마을이다. 겉으로는 티격태격해도 마음 깊숙이 서로 존경하며, 따뜻한 부부의 정을 나누고 살아가는 갈실마을 어르신들의 인생 이야기를 함께한다. ●김연아의 키스&크라이(SBS 일요일 오후 6시 40분) 개그맨 김병만의 스케이팅 실력이 날로 향상되어 놀라운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지난주 방송된 첫 페어컴피티션에서 파트너와 좋은 호흡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던 김병만. 최근 더욱 열심히 연습하고 있다고 한다. 또 촬영장에서 김병만이 망설임 없는 리프트와 스핀으로 이 코치를 놀라게 한 현장도 만나 본다.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0)급성 수분 중독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0)급성 수분 중독

    2009년 여름, 한 정신병원의 폐쇄 병동. 입원 중이던 40대 남성 환자가 이른 아침 화장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1주일 전 사회복지시설에서 이상행동을 보여 이송돼 온 K(41)씨였다. 온몸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가슴과 배, 등, 허리까지 여러 곳에 멍 자국도 보였다. 담당 검사는 병원 내에서 발생한 구타 등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고 보고 부검 결정을 내렸다. 부검은 다음 날 바로 시행됐다. 팔꿈치에서 무릎관절까지 전신이 굳어 있었다. 적혈구가 몰려 생기는 암적색 시반(屍班)이 시신의 등에 나타나 있었다. 멍 자국 아래에는 피하출혈도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죽음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들이었다. K씨의 주요 장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죽음의 원인들이 하나둘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뇌와 허파가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었다. 위, 간, 창자 등 내장과 복부의 막과 벽도 마찬가지였다. 부종(浮腫)이 있었다. 배 안에는 복수액도 가득했다. 복수와 부종액을 합해 3ℓ가 나왔다. 거의 익사체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콩팥도 요로도 부어 있었다. 유리체액(안구를 채우고 있는 투명한 물질)에 대한 검사 결과 K씨의 나트륨 수치는 102mEq/ℓ에 불과했다. 나트륨 수치가 120mEq/ℓ 밑으로 떨어지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체내 염분량이 지나칠 정도로 줄어 있었던 것이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최종적으로 K씨의 사인을 ‘급성 수분 중독’으로 결론내렸다. 몸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을 먹는 바람에 물 중독이 발생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도 나왔다. 한 입원 환자는 경찰에서 “K씨가 화장실에서 바가지로 많은 양의 물을 마셔 이를 만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포… 물 중독 사람이 스스로 마신 물 때문에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74년이다. 실제 정신질환자 중 일부는 끝없이 갈증이 생겨 물을 들이켜는 증세를 보인다. ‘다음증’(多飮症)이라고 부르는데 한 통계에 따르면 만성 정신질환자의 6~17%가 이 증세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신병력이 없는 사람은 물 중독으로부터 안전할까. 아래 사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준다. 2007년 1일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의 한 지역 방송국. ‘아침의 광란’이란 프로그램의 녹화가 한창인 가운데 세 아이의 엄마인 제니퍼 스트레인지(28)가 힘겹게 마지막 물잔을 들이켰다. ‘물 마시고 소변 참기’라는 엽기적인 게임에 참가한 상황이었다. 3시간 동안 화장실에 가지 않고 15분마다 제공되는 물을 모두 마셔냈다. 1등을 차지하면 가정용 게임기 ‘위’를 아이들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7.5ℓ의 물을 마셨지만 안타깝게 최종 성적은 18명 중 2등이었다. 게임이 끝난 순간 그녀는 쓰러졌다.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연신 구토를 했다. 결국 그녀는 그날 자기 집에서 숨을 거뒀다. 부검 결과 사인은 물 중독사였다. ●급하게 마신 물… 부정맥에 뇌부종 불러 물을 많이 마시면 죽음에 이르는 이유가 뭘까. 신체에 다량의 물이 한꺼번에 유입되면 우리 몸 체액 속에선 나트륨 등의 전해질 농도가 급격하게 옅어진다. 그러면 체액과 정상적인 세포들 간 삼투압 차로 ‘수분의 이동’이 일어난다. 옅은 농도의 체액이 모세혈관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때 우리 몸에 부종이 생기는데 흔히 ‘물을 많이 마셔 얼굴이 부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경우다. 부종은 위치에 따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가장 위험한 부위가 뇌다. 뇌는 폐쇄된 두개골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부풀어오르는 만큼 뇌압이 증가하게 된다. 초기에는 단순히 머리가 아픈 정도지만 많이 부으면 혼수상태나 호흡곤란 상태에 빠지고 결국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전해질 불균형은 치명적인 심장부정맥(심장박동이 분당 60∼80회의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고르지 않게 뛰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 중독 때문은 아니지만 지난달 13일 경기 도중 쓰러진 K리그 신영록(24·제주유나이티드) 선수도 전해질 불균형으로 인한 부정맥이 사고의 원인이 됐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물의 양은 어느 정도일까. 물 먹기 대회를 마치고 사망한 스트레인지처럼 7ℓ 이상을 마시면 죽게 되는 걸까. 정답은 없다. 체질이나 몸집, 몸 상태 등에 따라 다르다. 스트레인지가 나갔던 물 먹기 대회만 해도 다른 참가자들은 포만감을 호소했을 뿐 이상이 없었다. 어쨌거나 한꺼번에 많은 물을 마시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국과원 관계자는 “요즘처럼 더울 때 심한 운동을 하고 나서 한번에 많은 물을 들이켜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면서 “이미 땀으로 전해질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수분까지 다량 들어오면 혈중 나트륨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되도록 시간당 1ℓ 이상의 물은 마시지 않도록 해야 하며 물 대신 이온음료를 마시는 것도 물 중독을 예방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물마시고 소변참기 하던 20대 여성 급사한 이유

    물마시고 소변참기 하던 20대 여성 급사한 이유

    2009년 여름, 한 정신병원의 폐쇄 병동. 입원 중이던 40대 남성 환자가 이른 아침 화장실에서 시신으로 발견됐다. 1주일 전 사회복지시설에서 이상행동을 보여 이송돼 온 K(41)씨였다. 온몸이 흥건히 젖어 있었다. 가슴과 배, 등, 허리까지 여러 곳에 멍 자국도 보였다. 담당 검사는 정신질환 치료 과정에서 발생한 구타 등으로 사망했을 수 있다고 보고 부검 결정을 내렸다. 부검은 다음 날 바로 시행됐다. 팔꿈치에서 무릎관절까지 전신이 굳어 있었다. 적혈구가 몰려 생기는 암적색 시반(屍班)이 시신의 등에 나타나 있었다. 멍 자국 아래에는 피하출혈도 보였다. 하지만 모두가 죽음의 원인으로 보기에는 부족한 것들이었다. K씨의 주요 장기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죽음의 원인들이 하나둘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K씨의 뇌와 허파가 비정상적으로 부어 있었다. 위, 간, 창자 등 내장과 복부의 막과 벽도 마찬가지였다. 부종(浮腫)이 있었다. 배 안에는 복수액도 가득했다. 복수와 부종액을 합해 3ℓ가 나왔다. 거의 익사체에서나 볼 수 있는 수준이었다. 콩팥도 요로도 부어 있었다. 유리체액(안구를 채우고 있는 투명한 물질)에 대한 검사 결과 K씨의 나트륨 수치는 102mEq/ℓ에 불과했다. 나트륨 수치가 120mEq/ℓ 밑으로 떨어지면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체내 염분량이 지나칠 정도로 줄어 있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최종적으로 K씨의 사인을 ‘급성 수분 중독’으로 결론내렸다. 몸이 받아들일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양의 물을 먹는 바람에 물 중독이 발생해 사망에 이르렀다는 이야기다. 이를 뒷받침하는 증언도 나왔다. 한 입원 환자는 경찰에서 “K씨가 화장실에서 바가지로 많은 양의 물을 마셔 이를 만류한 적이 있다.”고 말했다.   소리 없이 다가오는 공포?물 중독 사람이 스스로 마신 물 때문에 사망에 이를 수 있다는 사실이 학계에 보고된 것은 1974년이다. 실제 정신질환자 중 일부는 끝없이 갈증이 생겨 물을 들이켜는 증세가 나타난다. ‘다음증’(多飮症)이라고 부르는데 한 통계에 따르면 만성 정신질환자의 6~17%가 이 증세에 시달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신병력이 없는 사람은 물 중독으로부터 안전할까. 아래 사례는 그렇지 않음을 보여 준다. 2007년 1일 12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새크라멘토의 한 지역 방송국. ‘아침의 광란’이란 프로그램의 녹화가 한창인 가운데 세 아이의 엄마인 제니퍼 스트레인지(28)가 힘겹게 마지막 물잔을 들이켰다. ‘물 마시고 소변 참기’라는 엽기적인 게임에 참가한 상황이었다. 3시간 동안 화장실에 가지 않고 15분마다 제공되는 물을 모두 마셔냈다. 1등을 차지하면 가정용 게임기 ‘위’를 아이들에게 선물할 수 있다는 생각뿐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7.5ℓ의 물을 마셨지만 안타깝게 최종 성적은 18명 중 2등이었다. 게임이 끝난 순간 그녀는 쓰러졌다. 극심한 두통을 호소하며 연신 구토를 했다. 결국 그녀는 그날 자기 집에서 숨을 거뒀다. 부검 결과 사인은 물 중독사였다.   급하게 마신 물? 부정맥에 뇌부종 불러 물을 많이 마시면 죽음에 이르는 이유가 뭘까. 신체에 다량의 물이 한꺼번에 유입되면 우리 몸 체액 속에서 나트륨 등의 전해질 농도가 급격하게 옅어진다. 그러면 체액과 정상적인 세포들 간 삼투압 차로 ‘수분의 이동’이 일어난다. 옅은 농도의 체액이 모세혈관 밖으로 빠져나온다. 이때 우리 몸에 부종이 생기는데 흔히 ‘물을 많이 마셔 얼굴이 부었다’고 말하는 것이 바로 이 경우다. 부종은 위치에 따라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가장 위험한 부위가 뇌다. 뇌는 폐쇄된 두개골 안에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부풀어오르는 만큼 뇌압이 증가하게 된다. 초기에는 단순히 머리가 아픈 정도지만 많이 부으면 혼수상태나 호흡곤란 상태에 빠지고 결국 사망에 이르기도 한다. 이런 전해질 불균형은 치명적인 심장부정맥(심장박동이 분당 60∼80회의 범위에서 벗어나거나 고르지 않게 뛰는 것)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물 중독 때문은 아니지만 지난달 13일 경기 도중 쓰러진 K리그 신영록(24·제주유나이티드) 선수도 전해질 불균형으로 인한 부정맥이 사고의 원인이 됐다. 그렇다면 죽음에 이르도록 하는 물의 양의 어느 정도일까. 물 먹기 대회를 마치고 사망한 스트레인지처럼 7.5ℓ 이상을 마시면 죽게 되는 걸까. 정답은 없다. 체질이나 몸집, 몸 상태 등에 따라 다르다. 스트레인지가 나갔던 물 먹기 대회만 해도 다른 참가자들은 포만감을 호소했을 뿐 이상이 없었다. 어쨌거나 한꺼번에 많은 물을 마시는 것은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게 전문가들의 말이다. 국과원 관계자는 “요즘처럼 더울 때 심한 운동을 하고 나서 한번에 많은 물을 들이켜는 것은 건강에 안 좋다.”면서 “이미 땀으로 전해질이 빠져나간 상태에서 수분까지 다량 들어오면 혈중 나트륨 농도가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되도록 시간당 1ℓ 이상의 물은 마시지 않도록 해야 하며 물 대신 이온음료를 마시는 것도 물 중독을 예방하는 방법”이라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주말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KBS1 토요일 밤 12시 55분) 백파이프 연주를 앞세우고 교기를 든 학생들이 강당에 들어온다. 1859년에 창립된 명문 웰튼 고등학교의 새학기 개강식은 그렇게 시작됐다. 학교에 새로 전학 온 토드(에단 호크)는 어린 신입생들과 마찬가지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숨길 수 없다. 또 이 학교 출신인 키팅 선생(로빈 윌리엄스)이 영어 교사로 부임한다. 그는 첫 시간부터 파격적인 수업 방식으로 학생들에게 ‘오늘을 살라.’고 역설하며 참다운 인생의 눈을 뜨게 한다. 닐과 녹스, 토드 등 7명은 키팅으로부터 ‘죽은 시인의 사회’라는 서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자신들이 그 서클을 이어가기로 한다. 학교 뒷산 동굴에서 모임을 갖기 시작한 그들. 그곳에서 닐은 정말로 하고 싶었던 연극을 실행하고, 녹스는 크리스라는 소녀와의 사랑을 이루어 간다. 그러나 닐의 아버지는 의사의 꿈을 이루어 주리라고 믿었던 닐의 연극을 보자 군사학교로 전학을 선언한다. 그렇게 꿈이 꺾인 닐은 그날밤 권총 자살을 하고 만다. ●잘살아보세(OBS 토요일 밤 11시 25분) 출산율 전국 1위를 자랑하는 대한민국 최강의 순풍마을 용두리. 평화롭던 그곳에 때아닌 불청객이 찾아온다. 밤일을 관리하겠다고 나선 국가공식 가족계획요원 박현주(김정은)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러나 처녀의 몸으로 피임의 피자도 모르는 용두리 주민을 설득시키기란 하늘에서 별 따기이다. 고민 끝에 마을이장 변석구(이범수)를 현지에서 조달해 급조 요원으로 발탁한다. 아이들을 배불리 먹이는 것이 유일한 꿈인 변석구 요원은 박 요원을 뛰어넘는 현장성으로 마을 친구들의 부부잠자리 관리에 탁월한 잠재력을 발휘한다. 특히 박 요원의 전문적인 설명을 용두리식 ‘생활용어’로 통역하는 데 뛰어난 표현능력을 보여 준다. 하지만 자식농사만이 남는 장사라고 철석같이 믿는 마을주민들의 출산의지를 꺾기란 역부족인데…. ●센스 앤 센서빌리티(EBS 일요일 오후 2시 30분) 19세기 영국의 조그만 마을. 부유한 귀족인 대시우드는 죽기 전, 법에 따라 아들 존에게 모든 재산을 물려준다. 대시우드는 존에게 계모인 대시우드 부인과 이복 여동생인 엘리너, 마리앤, 마가렛을 부탁한다는 유언을 남긴다. 그러나 존의 아내 페니는 대시우드의 유언을 무시하고, 대시우드 부인과 세 딸을 집에서 내쫓는다. 큰딸 엘리너는 이사하기 전에 저택을 방문한 페니의 남동생 에드워드를 사랑하게 되지만 둘 사이를 눈치챈 페니는 서둘러서 남동생을 런던으로 보내 버린다. 결국 대시우드 부인과 세 딸은 먼 친척이 제공한 작은 집으로 이사를 하게 된다. 한편 지적이고 차분한 언니와 달리 정열적이고 감성이 풍부한 마리앤은 발목이 삐었을 때 도와준 윌러비라는 청년을 만나 사랑에 빠지고 만다.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9) 지능적 칼잡이는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9) 지능적 칼잡이는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1989년 11월 4일 오후 9시 50분 서울 중구 장충로 2가 타워호텔. 호텔 카바레에서 공연을 마친 가수 남진(당시 43세)은 일본 연예계 인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건장한 20대 남자 3명이 몰래 그 뒤를 따라갔다. 남진이 승용차 오른쪽 뒷좌석에 오르려는 순간, 그들 중 한 명이 예리한 흉기를 품 속에서 꺼내 남진의 왼쪽 허벅지를 깊숙이 찔렀다. 남진은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고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다음 날 신문 사회면에 남진 피습 기사가 실렸지만, 그리 크게 나진 않았다. 남진의 전성기가 이미 지난 때였다고는 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로서 다소 섭섭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괴한이 공격한 신체 부위가 배나 가슴이 아니라 허벅지였다는 점에서 언론사들이 덜 위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허벅지를 찔렀다는 것은 생명을 노렸다기보다는 그저 겁을 주기 위한 목적이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 사건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조폭들의 ‘허벅지 테러’ 하지만 이상한 점은 조직 폭력배들의 칼부림이 있을 때 유독 허벅지를 노려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허벅지는 피를 보면서도 최악의 결과로는 치닫지 않아 상대를 겁주기에 알맞다는 판단에서일까. 법의학자들은 그 반대라고 말한다. 허벅지 테러는 칼을 꽤 다룰 줄 아는 전문가들의 지능적인 살인 수법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례를 보면 무슨 뜻인지 짐작할 수 있다. #사건 1 2003년 7월 17일 오전 6시 40분쯤 서울 논현동 대로변 포장마차. A(33)씨 등 3명이 흉기로 B씨의 허벅지를 찔렀다. 채권·채무 문제로 서로 심하게 다투다 A씨 일행이 미리 준비한 흉기로 B씨의 허벅지를 여러 차례 찔렀고, B씨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과다 출혈로 사망했다. #사건 2 1992년 4월 12일 오후 11시 전주 완산구의 한 당구장. 폭력 조직 W파 행동대원 김모(24)씨가 경쟁 조직 N파 소속 2명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범인들은 2층 당구장으로 올라가는 김씨의 뒤를 노렸다. 목격자는 경찰에서 20대 청년 2명이 당구장 계단에서 흉기로 김씨의 양쪽 허벅지를 10여 차례 찌른 뒤 앞길에 대기시켜 둔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다고 진술했다. 두 사건 모두 피해자가 과다 출혈로 사망했고 범인들이 노린 것은 허벅지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는 “조직 폭력배가 낀 테러 사건일수록 피해자의 자상이 허벅지 부위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면서 “조폭들이 허벅지 부위를 공격하는 이유는 대퇴부의 동맥이나 정맥을 끊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가할 수 있는 반면, 나중에 자신은 재판정에서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해를 하더라도 살의는 감추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검찰은 최근 들어 조직 폭력배 등이 관련된 이 같은 범행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의학적으로 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도 전체 혈액 중 20~33% 정도를 쏟으면 사망에 이른다. 하지만 그 과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실제 많은 피가 빠져나가 사망하는 ‘실혈사’(失血死)와 출혈을 하는 동안 급하게 혈압 등이 떨어져 사망하는 ‘실혈성 쇼크사’다. 피를 흘린 채 오랜 시간 방치될 경우에는 실혈사로, 대동맥 등이 절단돼 한꺼번에 급격히 피가 빠져나갈 때는 실혈성 쇼크사로 사망한다. ●전문가의 칼 솜씨는 다르다? 허벅지는 살이 많다는 이유로 갖은 수난을 겪어 왔다. 역사 속의 태형(笞刑)도, 학교의 체벌도 주로 허벅지나 엉덩이에 집중됐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많이 맞으면 신체 어느 부위를 막론하고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곤장을 맞고 장독(杖毒)으로 죽는 게 이런 경우다. 맞은 부위에 피가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정작 심장에는 혈액이 부족해져 사망하는 것이다. 심하면 우리 몸의 피 6~7ℓ 중 3분의1 이상이 허벅지 한군데의 상처로 몰리기도 한다.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영화에서 부검을 마친 의사가 형사에게 흔히 던지는 말이다. 과연 전문가의 칼 솜씨라는 것이 존재할까. 부검의들은 이른바 ‘전문 칼잡이’가 낸 자상은 한 해 수백 구의 시신을 부검하는 의사들도 실제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국과원 관계자는 “영화에서처럼 사람 죽이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 현실에서는 흔치 않은 만큼 일반적으로는 살인자라도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주저흔이 남기 마련”이라고 했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남진은 “이젠 가해자와 형님, 아우 하면서 지낸다.”면서 모두 용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찔했던 당시 상황은 똑똑히 기억했다. “흉기가 허벅지를 관통했는데 대동맥이 끊겼으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대동맥을 5㎜ 정도 벗어났는데, 저에게도 또 가해자에게도 천만다행이었지요. 하늘이 도운 순간이었죠.”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9)] 괴한에 허벅지 찔린 남진, 5mm 차이로 구사일생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9)] 괴한에 허벅지 찔린 남진, 5mm 차이로 구사일생

    1989년 11월 4일 오후 9시 50분 서울 중구 장충로 2가 타워호텔. 호텔 카바레에서 공연을 마친 가수 남진(당시 43세)은 일본 연예계 인사와 함께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 뒤를 건장한 20대 남자 3명이 몰래 뒤따랐다. 남진이 벤츠 승용차 오른쪽 뒷좌석에 오르려는 순간, 그들 중 1명이 예리한 흉기를 품 속에서 꺼내 남진의 왼쪽 허벅지를 깊숙히 찔렀다. 남진은 인근 순천향병원으로 옮겨졌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었다. 남진의 피습기사는 다음날 신문 사회면에 그리 크게 나지 않았다. 당시는 이미 전성기를 넘긴 때이긴 해도 한 시대를 풍미한 스타로서 다소 섭섭할 수도 있는 수준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괴한이 공격한 신체 부위가 배나 가슴이 아니라 허벅지였다는 점에서 언론사들이 덜 위중하게 여겼던 것이다. 허벅지를 찔렀다는 것은 생명을 노렸다기보다는 그저 겁을 주기 위한 목적 정도라고 판단했을 수 있다. 그 사건은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졌다. 조폭들은 왜 허벅지를 공격할까 하지만 이상한 점은 조직폭력배들의 칼부림이 있을 때면 유독 허벅지를 노려 공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허벅지는 피를 보면서도 최악의 결론에는 치닫지 않아 상대를 겁주기 알맞다는 판단에서일까. 법의학자들은 그 반대라고 말한다. 허벅지 테러는 칼을 꽤 다룰 줄 아는 전문가들의 지능적인 살인 수법이라는 것이다. 아래 사례를 보면 무슨 뜻인지 짐작할수 있다. 사건1 2003년 7월 17일 오전 6시40분쯤 서울 논현동 대로변 포장마차. A(33)씨 등 3명이 B씨를 흉기로 허벅지를 찔렀다. 채권·채무 문제로 서로 심하게 다투다 A씨 일행이 미리 준비한 흉기로 B씨의 허벅지를 여러차례 찔렀고 B씨는 병원으로 옮겨지던 중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사건2 1992년 4월 12일 오후 11시 전주 완산구의 한 당구장. 폭력조직 W파 행동대원 김모(24)씨가 경쟁조직 N파 소속 2명이 휘두른 흉기에 찔려 그 자리에서 숨졌다. 범인들은 2층 당구장으로 올라가는 김씨의 뒤를 노렸다. 목격자는 경찰에서 20대 청년 2명이 당구장 계단에서 흉기로 양쪽 허벅지를 10여 차례 찌른 뒤 앞길에 대기시켜둔 승용차를 타고 달아났다고 진술했다. 두 사건 모두 피해자가 과다출혈로 사망했고 범인들이 노린 것은 허벅지였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는 “조직폭력배가 낀 테러 사건일수록 피해자의 자상은 허벅지 부위에 생기는 경우가 많다.”면서 “조폭들이 허벅지 부위를 공격하는 이유는 대퇴부의 동맥이나 정맥을 끊어 상대에게 치명적인 상해를 가할 수 있는 반면 나중에 자신은 재판정에서 죽이려는 의도는 없었다고 변명할 여지를 남길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살해를 하더라도 살의는 감출 수 있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검찰은 최근들어 조직폭력배 등이 연관된 허벅지 관련 흉기 범행에 대해 처벌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의학적으로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전체 혈액 중 20~33% 정도 피를 쏟으면 사망에 이른다. 하지만 그 과정은 크게 두가지로 나뉜다. 실제 많은 피가 빠져나가 사망하는 ‘실혈사’(失血死)와 출혈을 하는 동안 급하게 혈압 등이 떨어져 사망하는 ‘실혈성 쇼크사’다. 피를 흘린 채 오랜 시간 방치될 경우에는 실혈사로, 대동맥 등이 절단돼 한꺼번에 급격히 피가 빠져가갈 때는 실혈성 쇼크사로 사망한다. 전문가의 칼 솜씨는 다르다? 허벅지는 살이 많다는 이유로 갖은 수난을 겪어 왔다. 역사 속의 태형(笞刑)도, 학교의 체벌도 주로 허벅지나 엉덩이에 집중됐다. 하지만 매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처럼 많이 맞으면 신체 어느 부위를 막론하고 사망에 이를 수 있다. 곤장을 맞고 장독(杖毒)으로 죽는 게 이런 경우다. 맞은 부위에 피가 집중적으로 몰리면서 정작 심장에는 혈액이 부족해져 사망하는 것이다. 심한 경우, 우리 몸의 피 6~7ℓ 중 3분의 1 이상이 허벅지 한 군데의 상처로 몰리기도 한다. “전문가의 솜씨입니다.” 영화에서 보면 부검을 마친 의사가 형사에게 흔히 던지는 말이다. 과연 전문가의 칼솜씨는 존재할까. 부검의들은 이른바 ‘전문 칼잡이’가 낸 자상은 한해 수백구의 시신을 부검하는 의사들도 실제로 보기 어렵다고 한다. 국과원 관계자는 “영화에서처럼 사람 죽이는 일이 직업인 사람이 현실에서는 흔치 않은 만큼 일반적으로 살인자도 심리적으로 동요하는 주저흔이 남기 마련”이라고 했다. 최근 한 방송 프로그램에 출연한 남진은 “이젠 가해자와 형님, 아우하면서 지낸다.”면서 모두 용서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아찔했던 당시 상황은 똑똑히 기억했다. “흉기가 허벅지를 관통했는데 대동맥이 끊겼으면 위험할 뻔한 상황이었습니다. 대동맥을 5㎜ 정도 벗어났는데, 저에게도 또 가해자에게도 천만다행이었지요. 하늘이 도운 순간이었던 거죠.”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8) 핏자국 속 엽기 살인범의 족보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8) 핏자국 속 엽기 살인범의 족보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Y(당시 45세·여)씨는 범인의 인상착의도 제대로 기억해내지 못했다. 잔혹의 끝을 보았기에 기억을 되돌리는 것은 그 자체로 고문이었다. 2007년 4월 15일 오전 8시 45분 대전 대덕구의 한 건물 지하 1층 P다방. 문을 열자마자 30대 남자가 거칠게 안으로 들어왔다. 내부에는 종업원 C(당시 47세·여)씨뿐이었다. 약간의 몸싸움이 있은 후, 날카로운 흉기가 C씨의 목을 갈랐다. C씨는 외마디 비명을 지른 채 화장실 바닥에 쓰러졌다. 변태성욕자였던 남자는 더운 피를 쏟고 있는 시신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얼마 후 Y씨가 다방에 출근했다. 느낌이 이상했다. 문이 활짝 열려 있었고 계산대에 있어야 할 C씨가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리는 순간 범인과 눈이 마주쳤다. 범인은 다시 칼을 휘둘렀다. 다행히 목숨은 구했지만 Y씨는 몸과 마음에 평생 지워지지 않을 상처를 입고 말았다. 경찰은 특별수사팀을 구성했다. 다방 살인현장에서 50여개의 증거물을 수집했다. 하지만 딱 부러지는 단서는 나오지 않았다. 결정적인 증거물은 오히려 현장 밖에서 나왔다. ‘이쯤에서 버려도 된다.’고 생각했는지 범인은 다방에서 500m 떨어진 도로변에 피 묻은 휴지를 버렸다. 1.5㎞ 더 떨어진 금강변에서는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검정색 점퍼가 발견됐다. 범인은 강을 따라 도주한 듯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넘어온 점퍼는 육안으로는 혈흔을 발견할 수 없었다. 흐르는 강물이 피의 흔적을 지운 듯했다. 그렇다면 이제 기대를 걸어볼 것은 ‘루미놀’(luminol) 시험. 미국 수사드라마 CSI 시리즈에도 자주 나오는 루미놀은 사건현장에 남은 혈흔을 극소량까지도 찾아낼 수 있는 물질이다. 물이 가득 찬 양동이에 단 한 방울의 혈액만 떨어져도 DNA를 감별할 수 있을 만큼 감도가 뛰어나다. 이 때문에 주로 범인이 핏자국을 감추기 위해 증거물 세탁을 시도했을 때 유용하다. 특히 신선한 혈액보다 시간이 지난 혈흔에 더욱 강하게 반응하는 특성이 있다. 루미놀 용액과 과산화수소수 혼합액을 핏자국이 있을 만한 자리에 뿌리면 된다. 피가 있는 자리라면 화학반응에 일시적인 발광현상을 일으켰다가 사라진다. 다행히 성과가 있었다. 피 묻은 휴지와 점퍼에서 숨진 C씨의 것 말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남성의 DNA가 동시에 검출됐다. 이제 남은 일은 그 주인을 찾는 것. 하지만 이후 수사는 제자리걸음을 했다. 용의자의 DNA만 확보했을뿐 이것을 누구와 비교할지가 막막했다. 이런 가운데 국과원의 다른 실험실에서는 범인을 쫓는 새로운 분석이 한창이었다. 성(性) 염색체인 Y염색체를 이용해 범인의 성(姓)이 김씨인지 이씨인지 박씨인지를 가려내는 시도였다. Y염색체는 남성에게만 존재하기 때문에 아버지로부터 아들에게 유전된다. 우리나라처럼 아버지의 성을 이어받는 사회에서는 Y염색체의 유전적 지표(STR)를 분석해 공통점을 찾는다면 범인의 성씨를 특정할 수 있다고 국과원은 판단했다. 국과원은 1차로 자체 보유하고 있던 동종 전과자 등 1000명의 Y염색체 STR 데이터베이스를 분석했다. 그 결과, 범인의 Y염색체 단상형이 오(吳)씨 성을 가진 2명과 일치했다. 국과원은 사건 현장 인근에 오씨 집성촌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2차 분석에 들어갔다. 집성촌 주민 19명의 동의를 얻어 상피세포를 분석했다. 역시 Y염색체는 특정 부위에서 공통점을 나타냈다. 국과원은 결국 수사팀에 “용의자는 오씨일 가능성이 크다.”고 통고했다. 사건발생 50여일 만인 6월 4일 경찰은 경기 광명시에 숨어 있던 범인 오모(당시 35세)씨를 검거했다. 그는 1989년 충남 연기군에서 할머니와 어린이 등 3명을 살해한 죄로 15년을 복역하고 2년 전인 2005년 만기 출소한 상태였다. 17년 전 범행 때에도 시신에 몹쓸 짓을 하는 등 수법이 비슷했다. 오씨는 “돈이 떨어지자 교통비를 마련하기 위해 다방에 들어가 금품을 빼앗은 뒤 사람을 죽였다.”고 자백했다. 시신에 변태적인 방법으로 성욕을 푼 사실도 인정했다. 당시 수사경찰은 “범인의 점퍼에서 점안액이 나왔는데, 그 안약이 의사 처방전이 있어야 살 수 있다는 점에 착안해 병원 기록을 추적하며 포위망을 좁혀 갔다.”면서 “이 과정에서 용의자가 오씨라는 국과원의 분석은 불특정다수인 점안액 구매자들 가운데서 용의선상 인물을 압축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고 말했다. 국과원 관계자는 “지금은 살인이나 성 범죄자와 같은 흉악범의 DNA는 국가 차원에서 영구 보존하도록 해 재범 방지 등에 활용하고 있지만 2007년 오씨가 출소할 때만 해도 범죄자 DNA은행 제도가 정착되지 않은 상태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DNA를 통한 성씨 규명이 모두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현실적으로 성씨가 생물학적으로만 결정되지 않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이를 입양했다든지 부인의 외도를 통해 임신이 된다든지 하는 변수가 존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과원 관계자는 “한국인의 5대 성씨(김, 이, 박, 최, 정)는 본관 또한 워낙 다양해 부계 유전의 일관성이 결여되는 약점도 있다.”면서 “염색체를 이용해 성씨를 판별하는 것은 수사에서 제한적이고 보조적인 수단으로만 활용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春川’ 실레마을·제이드가든 수목원으로 Go Go~

    ‘春川’ 실레마을·제이드가든 수목원으로 Go Go~

    경춘선이 복선전철화되면서 몇몇 지역들이 새롭게 여행목적지로 주목받고 있습니다. 교통체증에 대한 부담이 덜하고, 소요시간도 그리 길지 않다는 게 최대 장점이지요. 대표적인 곳 중 하나가 강원도 춘천입니다. 경춘선 철길에서 만나는 춘천 인근의 숲은 정말 놀랍습니다. 보다 정확히는 그리 큰 숲이 아닌데도, 풍경의 크기와 깊이가 여간 넓고 깊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 신동면 금병산 아래 실레마을 이야기길과 남산면의 제이드가든 수목원은 단연 첫손 꼽을 만합니다. ●문학의 향기 오롯한 실레마을 경춘선 김유정역은 소설가 김유정(1908∼1937)을 기념하기 위해 2004년 ‘신남역’이란 원래 이름을 버리고 국내 최초로 사람 이름을 따 역명을 지은 곳이다. 다소 크고 위압적인 역사(驛舍)를 나서면 금병산 아래 터를 잡은 마을이 한눈에 들어 온다. 실레마을이다. 실레는 ‘시루’의 강원도 사투리이니, 풀자면 떡시루를 닮은 마을쯤 되겠다. 시루 증(甑) 자를 써, 행정명칭을 증리라 한 것도 그와 무관치 않다. 실레마을과 김유정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이 마을에서 태어나 29세에 요절한 김유정은 문단 데뷔 이후 불과 2년 동안 무려 30여편의 단편소설을 남긴다. 그 가운데 대표작 ‘동백꽃’과 ‘소낙비’ ‘노다지’ ‘금 따는 콩밭’ 등 12편의 소설이 실레마을을 배경으로 삼고 있다. 마을 전체를 ‘김유정 문학촌’으로 꾸민 것도 그런 까닭이다. 마을에 들면 여행자들의 발걸음은 자연스레 문학 작품 속으로 끌려 들어 간다. 마을 초입엔 김유정이 코다리찌개를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켰던 주막터가, 멀리 팔미천엔 들병이(술병을 들고 다니며 파는 사람)가 제 남편을 숨겼던 물레방앗간(‘산골 나그네’) 터가 남아 있다. 금병산 아래 잣나무숲은 ‘동백꽃’의 배경이 됐다. 마을 가운데 잣나무숲엔 ‘봄·봄’의 실존 인물이었던 봉필 영감이 살던 마름집이 남아 있다. 점순이와 혼인은 안 시킨 채 부려먹기만 하는 게 불만이었던 ‘나’가 장인과 드잡이를 하던 곳이다. 여기저기 손보기는 했으나, 독특한 집 구조가 인상적이다. 마름집 옆으로는 김유정이 간이학교 금병의숙을 세운 뒤 기념으로 심은 느티나무가 아름드리로 자랐다. ●향토색 짙은 실레마을이야기길 마을을 굽어 보고 있는 금병산(錦屛山·652m)은 가을이면 산기슭에 비단병풍을 둘러친 듯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흙이 많은 육산인 데다 산의 높낮이가 급하지 않아 걷기 편하다. ‘봄·봄길’ ‘산골나그네길’ 등 금병산 등산로 또한 김유정의 소설에서 모티프를 따왔다. 무엇보다 감동적인 풍경은 ‘실레이야기길’이다. 금병산 중턱을 끼고 도는 산길이다. 길이는 5.2㎞. 천천히 돌아도 두세 시간이면 넉넉하다. 그런데 이 길, 참 예쁘다. 또 의외로 깊다. 얼핏 마을 뒷산처럼 보여도, 안으로 들어갈수록 제법 숲다운 풍모를 드러낸다. 완만한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동안 금병산의 ‘얼굴마담’인 잣나무숲과 하늘을 찌를 듯 솟은 낙엽송 군락지가 번갈아 펼쳐진다. 산길 양편에 소담하게 핀 들꽃들은 풍경의 덤. 산길 곳곳엔 김유정의 소설을 토대로 스토리텔링을 덧씌웠다. 길 전체를 16개 구간으로 나눈 뒤 구간마다 김유정의 작품 속 내용을 본뜬 이름을 붙였다. ‘춘호 처가 맨발로 더덕 캐던 비탈길’(소낙비)과 ‘덕돌이가 장가가던 신바람길’(산골나그네)이 정겹고, ‘복만이가 계약서 쓰고 아내 팔아먹던 고갯길’(가을), ‘근식이가 자기집 솥 훔치던 한숨길’(솥)이 애틋하다. ‘점순이가 나를 꼬시던 동백길’(봄·봄)이나, ‘도련님이 이쁜이와 만나던 수작골길’(산골) 등도 해학적이다. 그런데 희한한 것은 구간의 이름과 풍경이 제법 그럴싸하게 맞아떨어진다는 거다. 도련님이 이쁜이와 수작을 나누던 길에서 공연히 여행자의 얼굴이 붉어지고 숨이 가빠오는 건 무슨 까닭일까. 실레이야기길은 김유정문학촌이나 금병초등학교에서 시작된다. 원형으로 이어져 있어 어느 쪽에서 출발해도 출발 지점으로 되돌아올 수 있다. 또 길 중간중간 금병산 등산로와 연결돼 있어 언제든 정상으로 향할 수 있다. 금병산 정상에 서면 춘천 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잘 가꿔진 유럽풍 정원 실레마을길이 향토색 짙은 길이라면 제이드가든 수목원은 잘 가꿔진 유럽풍의 정원과 같은 곳이다. 한화호텔&리조트가 6년에 걸쳐 남산면 서천리 햇살마을 계곡에 ‘숲 속에서 만나는 작은 유럽’을 모토로 조성했다. 면적은 약 16만㎡(약 5만평). 드라이가든과 로도덴드론가든 등 24개의 테마정원 안에 꽃과 나무 2600여종이 빼곡하다. 직선 길이 1㎞ 남짓한 계곡 전체가 수목원이라고 보면 알기 쉽다. 제이드가든은 계곡 지형을 그대로 잘 살렸다. 가장 큰 특징이자 장점이다. 낙엽송과 돌무더기, 관목 무성한 계곡 등은 예나 지금이나 풍경의 주인이다. 그 사이사이에 수수하고 은은한 멋을 내는 화훼류들을 채워 넣었다. 산자락 아래 돌무더기 주변엔 양치류 식물을 심어 자연스러움을 더했고, 키 큰 낙엽송 아래로는 키 작은 붓창포 등을 심어 이국적인 색채를 물씬 풍기게 했다. 정원에 들면 설계도대로 지어진 정교한 건축물이 연상되는 것도 그런 까닭일 터다. 산책로는 모두 세 개다. 어느 코스건 2시간 안쪽에 충분히 돌아볼 수 있다. 하나, 여유있게 돌아보자면 반나절로도 부족하다. ▲여행수첩(지역번호 033) 가는 길:실레마을은 경춘선 김유정역에서 도보로 5분 정도 걸린다. 김유정문학촌 261-4650. 제이드가든 수목원은 굴봉산역에서 셔틀버스를 이용한다. 전철 시간에 맞춰 운행된다. 입장료 어른 8000원(춘천시민 5000원), 청소년 5000원, 어린이 4000원. 간단한 식사와 음료를 즐길 수 있는 레스토랑과 기념품 숍도 있다. 260-8300. 맛집:춘천시 초입에 닭갈비 거리가 조성돼 있다. ‘춘천호반닭갈비’가 그중 알려졌다. 1인분 1만원. 255-3999. 실레길 초입 ‘봄봄’은 정갈한 맛이 일품. 닭볶음탕 4만원, 두부전골 1만 5000원(2인). 261-2772. 잘 곳:동화 같은 풍경 속에서 하루를 묵고 싶다면 프랑스풍의 작은 마을 ‘쁘띠 프랑스’가 대안이 된다. 실레마을에서 30분 거리다. 2인용 작은 장미(준 성수기 주말 8만 8000원)부터 12인용 큰소행성(준 성수기 주말 30만원)까지 다양하다. 매회 만원을 기록하는 프랑스 전통 손 인형극 ‘기뇰’ 등 봄 축제도 다양하게 펼쳐진다. 홈페이지(www.pfcamp.com) 참조. 글 사진 춘천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7) 정관수술한 연쇄성폭행범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7) 정관수술한 연쇄성폭행범

    성폭행범이 피해자나 현장에 남기는 ‘씨앗’(정자)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한 사람의 몸과 마음을 파괴하는 ‘죄악의 흔적’이기도 하지만, 범인을 붙잡아 사회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반드시 확보해야 할 ‘수사의 열쇠’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렇게 중요한 증거물이 감쪽같이 사라지는 경우가 있다. 수사당국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순간이다. 지난해 말 경북 구미경찰서 강력팀에 비상이 걸렸다. 관내에 성폭행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다. 주로 원룸과 아파트 1, 2층에 혼자 사는 부녀자들을 상대로 한 범행들이었다. 범인은 동일인으로 추정됐다. 피해자들이 전하는 인상착의나 범행수법이 그랬고, 일부 확보된 폐쇄회로(CC)TV 화면도 이를 뒷받침했다. 이 30대 ‘발바리’(연쇄 성폭행범)는 초기에는 주로 새벽 3~4시대에 활동하더니 범행시간을 아침으로 옮기는 등 갈수록 대담해졌다. 그중에서 경찰을 가장 당혹스럽게 한 것은 범인의 정액에서 도통 DNA를 확인해낼 수 없다는 점이었다. 증거물에서 매번 남성의 정액은 확인됐지만 정작 그 안에서 DNA는 검출되지 않았다. 정자가 없기 때문이었다. ●어렵게 확보한 범인의 흔적 ‘무용지물’ 범행 증거물을 아무리 서둘러 채취해도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보통 남성의 정자 속 DNA는 여성의 몸속에서 72시간이 지나면 증거능력을 상실한다. 여성 몸 안에 있는 효소가 화학작용을 일으키면서 정자의 DNA를 분해하기 때문이다. 성폭력 사건은 이런 이유에서 빠른 증거 채취가 중요하다. 통상 남성의 정액은 물에 400배까지 희석해도 증거물로서 유효하다. 미량으로도 DNA를 규명해 범인을 밝혀낼 수 있다는 얘기다. 그 결정적인 단서는 정액에 다량으로 들어 있는 산성 인산화효소(PAcP·Prostatic acid phosphatase)다. 현대과학은 이 효소를 정밀분석해 범인을 쫓는다. 특히 사람의 몸 밖으로 나와 바닥이나 벽, 의류 등에 묻은 정액의 증거 능력은 몇 년을 간다. 말라붙은 상태로 고유의 특성을 보존하기 때문이다. 대표적인 예를 빌 클린턴 미국 전 대통령의 ‘르윈스키 스캔들’에서 찾을 수 있다. 인턴사원 모니카 르윈스키가 클린턴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말하면서 증거로 제시한 것이 그녀의 드레스였다. 두 사람의 신체접촉은 이미 2년이나 흐른 상태였지만 그녀의 드레스에 말라붙은 클린턴의 정액은 주인의 DNA를 온전히 품고 있었다. 지난 15일 성폭행 미수 혐의로 미국 뉴욕에서 체포된 도미니크 스트로스칸 국제통화기금(IMF) 전 총재도 호텔 여직원의 셔츠에 튄 정액이 결정적 증거로 작용했다. 다시 국내로 돌아와서, 구미경찰서 강력팀은 증거물 속에서 정자가 확보되지 않자 “범인이 무정자증 환자이거나 정관수술을 받은 남자일 것”이라는 쪽으로 수사방향을 잡았다. ●“정관수술한 30대를 잡아라” 정액은 크게 정자와 이를 감싸는 액체 성분으로 구성된다. 보통 DNA는 액체가 아니라 정자의 머리에 위치한다. 수술을 통해 정자가 이동하는 통로인 정관을 막아버린 사람의 정액에서 DNA를 확보하기가 어려운 이유다. 하지만 완전범죄는 없는 법.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은 남성의 유전자형만 선택해 증폭할 수 있는 장치를 이용, 극미량의 요도 상피세포를 바탕으로 범인의 DNA를 검출해내는 데 성공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DNA의 주인을 찾는 일. 경찰은 관내 병원들을 상대로 과거 정관수술을 받은 경력이 있는 사람들을 찾아내기 시작했다. 용의자들이 하나둘 압축됐고 수사는 막바지를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허무하게 마무리된 과학수사의 개가 하지만 과학수사의 개가는 허탈하게 결론났다. 지난해 12월 22일 밤 구미경찰서에 30대 여성의 다급한 신고가 들어왔다. 전화기 속 여성은 숨죽인 목소리로 “나를 성폭행한 남자가 지금 집에 있다.”고 했다. 경찰이 신고자의 2층 빌라를 급습한 순간, 범인 유모(당시 30세)씨는 피해자의 방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이날 오후 6시 40분쯤 술에 취해 여성의 집 안으로 들어온 그는 성폭행을 한 뒤 취기가 올라 잠에 빠져들었다. 유씨는 구미의 한 기업에서 근무하는 평범한 직장인으로 두 아이의 아버지였다. 예상대로 그는 피임을 위해 몇 년 전 정관수술을 받았던 것으로 밝혀졌다. 경찰 관계자는 “일부 성폭행범들은 피해자들에게 자기는 정관수술을 받았으니 신고해도 소용 없다는 식으로 말하는 등 뻔뻔함을 보이기도 한다.”면서 “하지만 최근에는 정자가 없어도 범인의 DNA를 쉽게 뽑아 낼 수 있는 기술이 발달한 데다 오히려 유씨 같은 무정자 성폭행범은 정관수술을 한 사람 등으로 범위를 좁힐 수 있어 검거하기가 더 쉬운 측면이 있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씨줄날줄] 사이버 장의사/이춘규 논설위원

    장의사의 일상을 다룬 일본 영화 ‘오쿠리비토’는 2009년 아카데미상 외국어영화상을 받았다. 영화에서 오케스트라 첼리스트인 주인공은 갑작스러운 악단 해체로 고향에 돌아간다. 일자리를 찾다가 ‘나이 제한 없고 고수익 보장’이라는 여행안내인 구인광고를 본다. 면접과 동시에 합격한다. 그런데 여행안내인은 인생 마지막 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을 배웅하는 장의사였다. 모진 고생 끝에 직업의식이 투철한 장의사가 되어가는 과정이 인상적이다. 장의사는 회사 소속이냐,개인 영업이냐를 별로 따지지 않는다. 그 장의사가 세분화되고 있다. 장의사, 염사, 장례지도사로도 분류한다. 장의사는 조선시대 한양에도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지방과 도시에서는 마을공동체 단위의 상조회가 장례를 주도했다. 초상이 나면 장례 물품을 조달하고 상여를 멨다. 묘 다지기도 했다. 지금도 일부 농·어촌 마을에는 상조회가 남아 있으나 거의 사라졌다. 상조회의 역할을 장의사가 대신한다. 한국장례업협회 산하에는 1만 1000여명의 장례지도사가 있다. 비회원도 많다. 전문직업인 장례지도사는 장례 업무를 총괄하는 일을 담당한다. 장례지도사는 발인에 앞서 시신을 닦고 화장까지 시킨 다음 준비된 수의를 입히고 입관한다. 침착함과 담력, 강인한 체력이 요구된다. 장의사와 장례지도사들은 죽은 사람의 이승에서의 흔적을 말끔히 지워주려고 한다. 예전에는 사람이 죽어 장례를 치르면 이승의 흔적은 대부분 사라졌다. 인터넷 시대엔 고인의 흔적이 사이버상에 남는 경우가 많다. 미국에서는 죽은 사람이 인터넷에 남긴 흔적을 지워주는 ‘사이버 장의사’가 등장했다. 사이트 회원으로 가입해 300달러를 내고 죽은 뒤 자신의 인터넷 계정을 어떻게 처리할지 유언을 남긴다. 장의사는 사망신고가 접수되면 회원의 생전 요청대로 사이버상 흔적을 지워준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려진 사진, 친구들 계정에 남겨진 댓글도 없애줘 인기라고 한다. 국내에도 사이버 장의사가 도입될지 주목된다. 한 여자 아나운서가 자살한 뒤에도 정보가 넘쳐 시끄럽다. 무분별하게 개인정보를 퍼나르는 행위가 문제를 증폭시키고 있다. 산 사람들이 온라인상 정보 때문에 피해를 입을 가능성은 너무 높다. 그래서 본인이 원하면 온라인상 모든 개인정보를 삭제할 수 있는 ‘잊혀질 권리’를 도입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유럽연합(EU)에서 적극 추진되고 있다. 산 사람도, 죽은 이도 편치 않은 정보과잉시대다. 이춘규 논설위원 taein@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6)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6)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의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수사 당국은 괴로워진다. 사람들의 법의학 지식을 마구 늘려 주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아는 게 많아지면 그들이 현장에 남기는 흔적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장에 아무것도 전혀 안 남길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남는다. 법의학에서는 이런 초미니 흔적들을 ‘미세증거물’(LCN·Low Copy Number)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극미세 증거가 때로는 범인 검거에 결정적 한 방으로 작용한다. 1. 처참하게 살해된 천안 모녀 2009년 3월 19일 오전 7시 38분. 충남 천안의 주택가. 유모(당시 70세)씨가 다급한 비명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집이었다. 앞마당에는 이집 딸(당시 20세)이, 안방에는 엄마(당시 48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119가 출동했지만 두 명 모두 숨을 거뒀다. 사인은 출혈성 쇼크사. 주검은 처참했다. 범인은 특히 이집 엄마에게 원한이 많은 듯했다. 목과 등에 20곳에 걸쳐 상처가 나 있었다. 딸은 왼쪽 가슴과 팔 등 5곳을 베였다. 곳곳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피 묻은 족적이 있었다. 경찰은 일단 치정(痴情) 살인에 무게를 뒀다. 경찰은 150여점의 현장 혈흔을 포함해 200여개의 방대한 증거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증거가 많은 만큼 사건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2. 증거품 200여개 중 단서 없어 이튿날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원 유전자분석실. 증거는 많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용의선상에 올린 피해자 주변 10명의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해 비교했지만 현장 증거와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범인의 족적도 개수만 많았을 뿐 발 치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통상 살인사건에서 피 묻은 증거품이 많으면 단서가 될 만한 것 역시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혈이 낭자하면 피해자의 혈흔이 다른 증거들을 오염시키고 훼손하게 된다. 이 사건이 딱 그랬다. 난관에 부딪친 국과원은 마지막으로 ‘최고로 구린 녀석’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피해자의 집 뒤뜰에 똬리를 틀고 있던 대변이었다. 경찰은 대변 주변에서 발견된 족적이 사건 현장의 혈흔 족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게 범인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대변은 변질을 막기 위해 아이스박스에 냉장된 상태로 이송됐다. 3. 대변에 섞여 있던 범인의 DNA 이제 해야 할 일은 대변 속에 담긴 ‘범인의 DNA’를 찾아내는 것.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사실 대변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DNA를 품고 있지 않다. 음식이 사람의 뱃속에서 다른 형태로 바뀐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대변에서 채취해야 하는 것은 주인의 몸을 빠져나오는 동안 표면에 묻는 장(腸) 상피세포다. 연구원들은 우선 대변을 꽁꽁 얼린 뒤 면봉으로 겉을 꼼꼼하게 닦아 냈다. 대변의 속보다는 표면에 상피세포가 더 많이 붙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출한 세포를 원심분리기와 증폭기에서 돌렸다. 얼마 후 대변의 주인이자 DNA의 주인인 범인이 밝혀졌다. 이웃집 남성 천모(55)씨였다. 천씨는 살인에 썼던 도구를 몰래 버리는 모습까지 경찰에 발각되자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천씨는 “죽은 여인이 내가 과거 절도범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을 내 애인 등에게 떠벌리고 다녀 이를 따지러 갔다가 홧김에 살해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고 3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전과자인 것이 들통 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고도 했다. 4. 카펫 섬유·모발… 작아서 장점이자 단점 미세증거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피해자를 말았던 카펫에서 나온 섬유,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 성폭력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모발, 범행도구에 묻은 페인트 등이 말하자면 모두 미세증거물이다. 대변은 미세증거물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경우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처럼 대부분 미세증거물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눈에 안 띌 정도로 작다는 것은 범인에게나 수사관에게 단점이 될 수도,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수사관이 현장에서 증거품으로 발견하기가 어렵지만 범죄자가 흔적으로 남겨 놓을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 덕에 현재 수사 당국은 사람들이 통상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세한 물품에서도 증거를 가려낼 수 있다. 100pg(피코그램·100억분의1g)만큼의 극미세 DNA도 검출해 주인을 가려낼 수 있다. 물론 오염도 쉽고 분해되는 일도 많은 DNA가 원래 특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5. 에필로그:범인의 대변 긴장 탓? 미신 탓? 천씨는 왜 화단에 대변을 본 걸까.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은 “본인은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흉기를 품에 지니고 피해자 집에 간 점 등을 감안할 때 사전에 계획된 범행이었다.”면서 “아무리 간 큰 범죄자도 범행 전엔 긴장하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천씨의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던 모양”이라고 했다. 다른 경찰관은 ‘절도범의 미신’ 때문으로 추측했다. 그는 “절도범들은 범행 현장에서 대변을 보면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고 믿는데, 과거 절도 경력이 있던 천씨가 그대로 따라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대변 속 100억분의 1g의 DNA를 찾아라. 미세증거물

    미국 드라마 CSI 시리즈의 시청률이 올라갈수록 수사 당국은 괴로워진다. 사람들의 법의학 지식을 마구 늘려 주기 때문이다. 범죄자들이 아는 게 많아지면 그들이 현장에 남기는 흔적은 갈수록 희미해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현장에 아무것도 전혀 안 남길 수는 없다. 아주 작은 무엇이라도 남는다. 법의학에서는 이런 초미니 흔적들을 ‘미세증거물’(LCN·Low Copy Number)이라고 부른다. 현미경으로나 보이는 극미세 증거가 때로는 범인 검거에 결정적 한 방으로 작용한다.    1. 처참하게 살해된 천안 모녀  2009년 3월 19일 오전 7시 38분. 충남 천안의 주택가. 유모(당시 70세)씨가 다급한 비명을 듣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옆집이었다. 앞마당에는 이집 딸(당시 20세)이, 안방에는 엄마(당시 48세)가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었다. 119가 출동했지만 두 명 모두 숨을 거뒀다. 사인은 출혈성 쇼크사. 주검은 처참했다. 범인은 특히 이집 엄마에게 원한이 많은 듯했다. 목과 등에 20곳에 걸쳐 상처가 나 있었다. 딸은 왼쪽 가슴과 팔 등 5곳을 베였다. 곳곳에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피묻은 족적이 있었다. 경찰은 일단 치정(痴情) 살인에 무게를 뒀다. 경찰은 150여점의 현장 혈흔을 포함해 200여개의 방대한 증거품을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보냈다. 증거가 많은 만큼 사건이 쉽게 해결될 것이라고 믿었다.    2. 증거품은 많지만 단서는 없었다  이튿날 서울 양천구 신월동 국과원 유전자분석실. 증거는 많았지만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없었다. 용의선상에 올린 피해자 주변 10명의 구강 상피세포를 채취해 비교했지만 현장 증거와 일치하는 것은 없었다. 범인의 족적도 개수만 많았을 뿐 발 치수 외에는 아무것도 알려 주지 않았다. 통상 살인사건에서 피 묻은 증거품이 많으면 단서가 될 만한 것 역시 많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지나치게 유혈이 낭자하면 피해자의 혈흔이 다른 증거들을 오염시키고 훼손하게 된다. 이 사건이 딱 그랬다.  난관에 부딪친 국과원은 마지막으로 ‘최고로 구린 녀석’에게 기대를 걸어 보기로 했다. 피해자의 집 뒤뜰에 똬리를 틀고 있던 대변이었다. 경찰은 대변 주변에서 발견된 족적이 사건 현장의 혈흔 족적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그게 범인의 것이라고 판단하고 있던 터였다. 대변은 변질을 막기 위해 아이스박스에 냉장된 상태로 이송됐다.    3. 대변에 섞여 있던 범인의 DNA  이제 해야 할 일은 대변 속에 담긴 ‘범인의 DNA’를 찾아내는 것. 작업은 간단치 않았다. 사실 대변은 그 자체로는 인간의 DNA를 품고 있지 않다. 음식이 사람의 뱃속에서 다른 형태로 바뀐 것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대변에서 채취해야 하는 것은 주인의 몸을 빠져나오는 동안 표면에 묻는 장(腸) 상피세포다.  연구원들은 우선 대변을 꽁꽁 얼린 뒤 면봉으로 겉을 꼼꼼하게 닦아 냈다. 대변의 속보다는 표면에 상피세포가 더 많이 붙어 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추출한 세포를 원심분리기와 증폭기에서 돌렸다. 얼마 후 대변의 주인이자 DNA의 주인인 범인이 밝혀졌다.  이웃집 남성 천모(55)씨였다. 천씨는 살인에 썼던 도구를 몰래 버리는 모습까지 경찰에 발각되자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천씨는 “죽은 여인이 내가 과거 절도범으로 감옥에 갔다 온 사실을 내 애인 등에게 떠벌리고 다녀 이를 따지러 갔다가 홧김에 살해했다.”고 경찰에서 진술했다. “고 3인 아들에게 아버지가 전과자인 것이 들통 나는 것이 미치도록 싫었다.”고도 했다.    4. 범인에게나 수사관에게나 양날의 칼  미세증거물의 종류는 다양하다. 피해자를 말았던 카펫에서 나온 섬유, 신발 밑창에 묻은 먼지, 성폭력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모발, 범행도구에 묻은 페인트 등이 말하자면 모두 미세증거물이다. 대변은 미세증거물 중에서도 아주 독특한 경우다.  ‘모든 접촉은 흔적을 남긴다’는 말처럼 대부분 미세증거물은 피해자와 가해자가 접촉하는 과정에서 생성된다. 눈에 안 띌 정도로 작다는 것은 범인에게나 수사관에게 단점이 될 수도, 장점이 될 수도 있다. 수사관이 현장에서 증거품으로 발견하기가 어렵지만 범죄자가 흔적으로 남겨 놓을 가능성 또한 높기 때문이다.  과학과 의학의 발달 덕에 현재 수사 당국은 사람들이 통상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미세한 물품에서도 증거를 가려낼 수 있다. 100pg(피코그램·100억분의1g)만큼의 극미세 DNA도 검출해 주인을 가려낼 수 있다. 물론 오염도 쉽고 분해되는 일도 많은 DNA가 원래 특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을 경우에 한해서다.    5. 에필로그: 그는 왜 화단에서 대변을?  천씨는 왜 화단에 대변을 본 걸까. 사건을 수사했던 경찰관은 “본인은 우발적인 범행이라고 주장하지만 이미 흉기를 품에 지니고 피해자 집에 간 점 등을 감안할 때 사전에 계획된 범행이었다.”면서 “아무리 간 큰 범죄자도 범행 전엔 긴장하기 마련인데 이 때문에 천씨의 뱃속에서 꼬르륵 신호가 왔던 모양”이라고 했다. 다른 경찰관은 ‘절도범의 미신’ 때문으로 추측했다. 그는 “절도범들은 범행 현장에서 대변을 보면 경찰에 잡히지 않는다고 믿는데, 과거 절도 경력이 있던 천씨가 그대로 따라 했을 수 있다.”고 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독거노인 사랑잇기] 노인 자살 위기서 구하는 ‘전화 한 통의 힘’

    “자식들 키워 놓으면 뭐해. 고생해서 키워도 결혼하면 그만인데. 혼자 사는 아버지 한번 돌아보기만 해도 그런 생각은 하지 않을 거야.” 경남의 한 농촌에서 생활하는 70대 노인 A씨는 최근 ‘조용한 죽음’을 생각해봤다며 이같이 털어놨다. 당뇨병과 뇌졸중으로 거동이 불편한 데다 자식들이 돌보지 않아 외로움을 견디기 어려워서였다. 그는 “병든 몸으로 밥도 하고, 옷도 빨아 입으며 근근이 살고 있지만 사는 게 사는 것 같지가 않다.”고 호소했다. 의학계에 따르면 자살을 시도하는 노인의 상당수는 어떤 방식으로든 사전에 ‘자살 징후’를 드러내 보인다. 여전히 암울한 상황임에도 “마음이 편안해진다.”고 말한다든가 “나 없으면 재산을 이렇게 처리해 달라.”고 부탁하는 사례 등이 한 예다. 따라서 노인의 자살을 미리 막으려면 주변에서 관심을 갖고 지켜보는 것이 중요하다. 남궁기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교수는 “‘범인은 반드시 증거를 남긴다’는 말처럼 ‘자살하는 사람은 반드시 자살 징후를 남긴다’는 말도 정신과에서는 불변의 진리로 통한다.”면서 “그만큼 독거노인은 더 세밀하게 관찰하고 보살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한번 자살을 시도해 본 사람은 다시 자살을 시도할 확률이 높다. 따라서 자살 시도를 막지 못하면 다시 자살을 시도할 위험이 높아지기 때문에 처음부터 자살을 시도하지 못하도록 따뜻하게 감싸 안아야 한다. 일반적으로 자살을 시도하다 처음 실패하면 다시 시도할 확률이 50%, 두 번째 실패하면 재시도 확률이 70%, 세 번째는 90%로 높아진다. 문제는 자살을 시도한 노인을 따뜻하게 감싸주기는커녕 오히려 차가운 눈길로 외면하는 사회 분위기다. 자살을 시도하면 병원에 입원해야 하는데 주변의 시선을 의식해 바로 퇴원하는 사례도 많다. 남궁 교수는 “자살을 시도한 뒤에도 병원에 입원하는 사례는 극히 드물고, 대부분 곧바로 퇴원한다.”면서 “자살을 막으려고 하지 않고 사안을 덮어두려 하거나 문제를 회피하려는 태도는 비극을 만드는 원인이 된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살을 이미 시도했거나 자살을 시도하기 직전에 제3자가 개입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노인이 마음의 문을 닫아버리면 타인이 개입할 여지가 크게 줄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살 위험을 낮추려는 예방적 노력이 중요하다. 그런 점에서 자살 충동을 느끼거나 심한 우울감에 빠져 있을 때 ‘전화 한 통’은 큰 힘을 발휘한다. 통화 내용도 중요하지만 전문가들은 단순한 대화만 하더라도 자살 충동이 급격히 줄어든다고 조언한다. 남궁 교수는 “알코올 중독자가 매시간 술을 마시고 싶어 하지는 않는 것처럼 자살도 순간적인 충동을 억제하면 일정 기간 다시 시도하지 않는 특징을 보인다.”면서 “노인의 환경을 개선하는 적극적인 자살 예방법도 좋지만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한 번의 전화 통화로도 노인을 자살 위기에서 구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5) 성전환 여성, 7년만에 恨풀다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5) 성전환 여성, 7년만에 恨풀다

    2001년 3월 3일 오후 1시 울산 울주군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397.5㎞ 지점. 도로 청소를 하던 환경미화원이 수풀 사이에 쓰러져 있는 알몸의 여성을 발견했다. 걸친 것은 검은색 스타킹이 전부였다. 목에는 2m가량의 검정 끈이 감겨 있었다. 목 주위를 여섯 바퀴나 휘감고 있었다. 경찰은 지문을 채취해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다. 현장 정황상 타살 가능성이 커 보였다. 다행히 그녀의 몸은 타살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여성의 몸에서는 정액이 검출됐다. 목이 졸려지는 순간 방어한 흔적 탓인지 목 주위 피부가 벗겨진 큰 상처도 보였다. 피부 밑 출혈도 심했다. 누군가가 강하게 목을 졸랐다는 증거다. 얼굴엔 심한 울혈(피가 흐르지 못해 생긴 피멍)이 있었고 눈꺼풀 결막에는 일혈점(내부출혈에 따른 좁쌀 같은 반점)이 생겼다. 한눈에 봐도 외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했다. 부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부검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의 뱃속에는 자궁도 난소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궁적출술 같은 것을 받은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성의 바깥쪽 생식기 모양은 여성이 맞았지만, 어딘가 일반적인 여성의 그것과는 좀 달라 보였다. 또 치골 뼈 주위에는 큰 수술을 받은 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오른쪽과 왼쪽 가슴에는 각각 250㏄와 230㏄의 실리콘 주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성(性)을 구별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자궁과 같은 내부 생식기관, 성기와 같은 외부 생식기관, 마지막으로 염색체가 일치하는지다. 그런데 부검대 위 여성은 속은 남성, 겉은 여성이었다. 국과원은 염색체 분석에 들어갔다. 치아의 법랑질에 있는 단백질인 애멜로게닌을 떼 검사한 결과 피해자의 23번째 성 염색체에선 남성(XY) 염색체가 나왔다. 부검 후 경찰의 지문감식 결과도 남성이었다. 52세 남성 N씨로 판명됐다. 이 부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성 전환자 부검 사례로 기록됐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성이 호적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1차 정리됐다. 명쾌한 부검 결과와는 달리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나온 정액을 통해 용의자의 DNA를 채취하기는 했지만 경찰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나마 용의선상에 올릴 대상이 하나둘 무혐의가 확인되면서 사건은 영구 미제로 빠지는 듯했다. 이런 가운데 N씨의 비명횡사를 더 원통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범인을 잡는다 해도 ‘살인’ 혐의는 처벌할 수 있지만 ‘강간’ 혐의는 인정받을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뒤집어 보면 피해자가 ‘부녀’가 아니라면 가해자를 강간으로 처벌할 수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나마 선택할 수 있는 법적 선택은 ‘강제추행’. 일반적으로 강제추행을 했을 때 받는 형량은 6개월~2년으로 강간을 했을 때 받는 기본 형량 2년 6개월~4년 6개월의 절반에도 못 미친다. 형량이 가벼우면 죄를 대하는 사회적 무게감도 범죄자들의 죄책감도 가벼워지기 마련. 이런 이유로 성 전환자들은 사회에서 성폭력에 노출되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강간을 하더라도 동성을 상대로 한 추행 정도로 치부하는 게 이 사회의 인식이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난 2008년 6월 18일. 전남 광양경찰서 형사계에 이모(당시 39세)씨가 폭행 혐의로 붙들려 왔다. 이씨는 자신이 평소 따라다니던 식당 여종업원 하모(43)씨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이를 따지러 온 하씨의 아들과 친구를 때린 혐의로 입건됐다. 경찰서에서 이씨는 “무단침입은 물론 폭행 혐의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이씨가 성폭력 전과가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경찰은 하씨 집 앞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와 이씨의 구강 상피세포를 국과원에 보냈다.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이씨의 상피세포 유전자형이 7년 전 N씨 시신에서 발견됐던 정액의 유전자형과 일치했다. 7년간 풀리지 않던 강력범죄의 미스터리는 이렇게 우발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그로부터 다시 1년이 흘렀다. 죽은 N씨가 반길 만한 대법원 판결이 나왔다. 호적상 남자 성 전환자라 해도 강간의 피해자로 인정해야 한다는 판결이었다. 대법원은 “피해자는 어릴 때부터 여성으로서 성적 정체성을 갖고 살아오던 중 성 전환 수술을 받았고, 여성으로 성적 정체성을 보유하고 있다면 형법이 정한 강간죄의 객체인 부녀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1996년 비슷한 사건에 대해 “성 염색체가 남성이고 여성과 내외부 성기의 구조가 다르며 여성으로서 생식능력이 없는 만큼 트랜스젠더 피해자는 부녀로 볼 수 없다.”고 했던 법원 판결을 180도 뒤집은 것이었다. N씨 시신 부검에 참석했던 법의관은 “성 전환자에 대한 개인적 편견을 바꿀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뒤늦게나마 억울하게 숨진 N씨가 한을 풀게 된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사회적 편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죽을때까지 여성이 되고 싶었던 남성, 7년 만에 한(限)을 풀다

    죽을때까지 여성이 되고 싶었던 남성, 7년 만에 한(限)을 풀다

     2001년 3월 3일 오후 1시 울산 울주군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397.5㎞ 지점. 도로 청소를 하던 환경미화원이 수풀 사이에 쓰러져 있는 알몸의 여성을 발견했다. 걸친 것은 검은색 스타킹이 전부였다. 목에는 2m가량의 검정 끈이 감겨 있었다. 목 주위를 여섯 바퀴나 휘감고 있었다. 경찰은 지문을 채취해 인적 사항을 확인하는 한편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부검을 의뢰했다. 현장 정황상 타살 가능성이 커 보였다.  다행히 그녀의 몸은 타살의 흔적을 고스란히 머금고 있었다. 여성의 몸에서는 정액이 검출됐다. 목이 졸려지는 순간 방어한 흔적 탓인지 목 주위 피부가 벗겨진 큰 상처도 보였다. 피부 밑 출혈도 심했다. 누군가가 강하게 목을 졸랐다는 증거다. 얼굴엔 심한 울혈(피가 흐르지 못해 생긴 피멍)이 있었고 눈꺼풀 결막에는 일혈점(내부출혈에 따른 좁쌀 같은 반점)이 생겼다. 한눈에 봐도 외부 압박에 의한 질식사가 분명했다.  부검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부검의는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녀의 뱃속에는 자궁도 난소도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자궁적출술 같은 것을 받은 흔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여성의 바깥쪽 생식기 모양은 여성이 맞았지만, 어딘가 일반적인 여성의 그것과는 좀 달라 보였다. 또 치골 뼈 주위에는 큰 수술을 받은 듯한 자국이 선명했다. 오른쪽과 왼쪽 가슴에는 각각 250㏄와 230㏄의 실리콘 주머니가 자리 잡고 있었다.  의학적으로 성(性)을 구별하는 방법은 세 가지다. 자궁과 같은 내부 생식기관, 성기와 같은 외부 생식기관, 마지막으로 염색체가 일치하는지다. 그런데 부검대 위 여성은 속은 남성, 겉은 여성이었다. 국과원은 염색체 분석에 들어갔다. 치아의 법랑질에 있는 단백질인 애멜로게닌을 떼 검사한 결과 피해자의 23번째 성 염색체에선 남성(XY) 염색체가 나왔다. 부검 후 경찰의 지문감식 결과도 남성이었다. 52세 남성 N씨로 판명됐다.  이 부검은 우리나라 역사상 최초의 성 전환자 부검 사례로 기록됐다. 결과적으로 이 사건은 “여성으로 성전환 수술을 받은 남성이 호적 정리를 하지 않은 상태에서 살해당한 것”으로 1차 정리됐다.  명쾌한 부검 결과와는 달리 수사는 지지부진했다. 죽은 사람의 몸에서 나온 정액을 통해 용의자의 DNA를 채취하기는 했지만 경찰 용의선상에 오른 사람들과는 일치하지 않았다. 그나마 용의선상에 올릴 대상이 하나둘 무혐의가 확인되면서 사건은 영구 미제로 빠지는 듯했다.  이런 가운데 N씨의 비명횡사를 더 원통하게 만드는 일이 생겼다. 범인을 잡는다 해도 ‘살인’ 혐의까지는 처벌할 수 있지만 ‘강간’ 부분은 사실상 처벌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형법 제297조는 ‘폭행 또는 협박으로 부녀를 강간한 자는 3년 이상의 유기징역에 처한다.’고 밝히고 있는데 이는 뒤집어 보면 피해자가 ‘부녀’가 아니라면 강간을 당했다고 해도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이미 살인이라는 더 큰 죄를 저질렀는데 강간이 적용되고 안 되고가 무슨 차이가 있을까.’ 하고 생각한다면 오해다. 단순 살인과 가중처벌이 가능한 ‘강간+살인’은 형량이 하늘과 땅 차이이기 때문이다. 현재 강도살인은 기본 형량이 12~15년 또는 무기징역인 반면 단순살인의 기본 형량은 4~13년이다. 이런 이유로 성 전환자들이 성폭력에 무방비로 노출되는 일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성추행을 하든 폭행을 하든 동성을 상대로 한 폭력 정도로 치부됐다.  그로부터 7년여가 지난 2008년 6월 18일. 전남 광양경찰서 형사계에 이모(당시 39세)씨가 폭행 혐의로 붙들려 왔다. 이씨는 자신이 평소 따라다니던 식당 여종업원 하모(43)씨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이를 따지러 온 하씨의 아들과 친구를 때린 혐의로 입건됐다. 경찰서에서 이씨는 “무단침입은 물론 폭행 혐의도 사실무근”이라고 주장했다. 이씨가 성폭력 전과가 있다는 점 등을 고려해 경찰은 하씨 집 앞에서 발견된 담배꽁초와 이씨의 구강 상피세포를 국과원에 보냈다.  뜻하지 않은 결과가 나왔다. 이씨의 상피세포 유전자형이 7년 전 N씨 시신에서 발견됐던 정액의 유전자형과 일치했다. 7년간 풀리지 않던 강력범죄의 미스터리는 이렇게 우발적으로 종지부를 찍었다. 1996년 비슷한 사건에 대해 “성 염색체가 남성이고 여성과 내외부 성기의 구조가 다르며 여성으로서 생식능력이 없는 만큼 트랜스젠더 피해자는 부녀로 볼 수 없다.”고 했던 법원 판결을 180도 뒤집은 것이었다.  N씨 시신 부검에 참석했던 법의관은 “성 전환자에 대한 개인적 편견을 바꿀 수 있는 사건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면서 “뒤늦게나마 억울하게 숨진 N씨가 한을 풀게 된 것 같아 다행이긴 하지만 사회적 편견은 그때나 지금이나 별 차이가 없는 듯하다.”고 말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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