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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 사이에 끼어든 그, 사랑해도 될까

    우리 사이에 끼어든 그, 사랑해도 될까

    “사회가 ‘정상적’이라고 규정하는 관계의 규범은 시효를 다했다. 인간의 감정이 가진 스펙트럼은 하나의 관계로 국한하기엔 너무 다양하고 풍부하기 때문이다.”(톰 티크베어) 독일 베를린의 한나(소피 로이스)와 시몬(세바스티안 시퍼)은 결혼만 안 했을 뿐 첫 키스를 한 지 20년이 지난 커플이다. 한나는 유명 TV 앵커, 시몬은 조각품을 제작하는 엔지니어다. 아이가 생기지 않아 누군가 불임일 것으로 추정하지만, 딱히 아쉬움은 못 느낀다. 다만, 조금씩 권태가 찾아올 뿐. 어느 날, 한나는 세미나에서 만난 줄기세포 연구자 아담(데비드 스트리에소브)에게 묘하게 끌리는 것을 느낀다. 우연한 만남이 이어지면서 둘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그 무렵, 시몬도 인생의 고비에 부딪힌다. 어머니의 죽음과 고환암 진단은 그에게 무력함을 남긴다. 늦은 밤 수영장에서 한 사내를 본 순간, 심장이 무섭게 펌프질해 댄다. 평생 이성애자로 살았던 그가 자석처럼 사내를 품는다. 그런데 한나의 그와, 시몬의 그가 같은 사람이라면? 얼개만 듣고 나면 영락없는 치정극이다. 그런데 29일 개봉한 ‘쓰리’의 감독은 톰 티크베어다. ‘롤라 런’(1998), ‘향수’(2006), ‘인터내셔널’(2008)의 연출자. 요리에 빗대자면 한국·일본·이탈리아 요리까지, 궁극의 맛은 내지 못할지라도 맛깔스러울 정도는 만들어 내는 능력 있는 주방장이다. 티크베어가 할리우드 진출 이후 10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가 독일어권 배우와 독일어로 찍은 작품이 ‘쓰리’다. ‘한 남자를 사랑하는 두 남녀’란 주제를 전혀 뻔하지 않게 주무른다. 젊지도, 늙지도 않은 40대 후반 전문직 남녀들의 욕망과 갈등, 두려움 등 복잡한 심리를 유머러스하면서도, 통찰력 있는 시선으로 담아낸다. 티크베어는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관계 맺기에 대해 얘기한다. 서로 다른 상황과 시간에 만났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관계인데, 하필 그 타이밍에 만나면서 불꽃이 튄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자유분방한 주인공들 역시 가족, 부부에 대한 사회 규범 때문에 고민한다. 하지만 힘든 시간을 보낸 이들은 끝내 통념을 뛰어넘는 대승적(?) 결론에 도달한다. 프랑스·영국도 아닌 독일영화라고 해서 지레 겁먹을 필요는 없다. 티크베어 특유의 경쾌한 이야기 전개와 감각적 편집, 위트 있는 대사, 귀에 쏙 들어오는 음악은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헤르만 헤세, 제프 쿤스, 데이비드 보위, 비토리오 데시카, 로버트 윌슨 등 영화 곳곳에 숨겨진 유럽 문화·예술의 코드들을 알아채는 재미도 쏠쏠하다. 단 “한 사람과의 관계에 모든 감정을 쏟아부어야 한다는 생각은 폭력적”이라는 티크베어의 시각에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들을 준비는 돼 있어야 영화가 불편하지 않다. 임일영기자 argus@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3)별무늬 자국의 비밀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3)별무늬 자국의 비밀

    “김 사장, 우리 집사람이 전화를 통 안 받네. 미안하지만 2층 좀 올라가봐 줘.” 2005년 6월 8일 오전 10시쯤 부산의 한 중국 음식점. 가게 문을 열자 걸려 온 전화의 목소리는 다름 아닌 위층 남자였다. 멀리 출장 나와 있는데 집에서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다.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중국집은 얼마 전까지 위층에서 운영했던 터라 아래층과 위층 사이에 일종의 ‘개구멍’이 나 있었다. “아주머니. 저 아래층입니다.” 중국집 김씨는 빠끔히 머리를 내밀어 2층 내부를 들여다봤다. 해가 중천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집 안은 어두컴컴했다. 비릿하고 역한 냄새가 밀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린 김씨는 기절초풍을 했다. 1층으로 굴러떨어지듯 내려와 전화를 찾았다. “여기 ○○반점 2층인데요. 사, 사람이 죽어 있어요.” ●LCV가 찾아낸 피 묻은 신발 자국 감식반이 확인한 시신은 2층 안주인 A(당시 63세)씨였다. 무슨 억하심정이 있었는지 범인은 A씨의 머리와 옆구리 등을 흉기로 24차례나 찔렀다. 목을 조른 흔적도 있었다. 하지만 죽은 뒤엔 그 모습이 참혹했는지 시신 위에 옷가지를 수북이 덮어 두었다. 집 안이 어두운 건 두꺼비집(분전함)이 내려져 있기 때문이었다. 억지로 문을 연 흔적도 없었고, 패물 등 사라진 것도 없었다. 경찰은 면식범의 소행에 무게를 뒀다. 집 안 곳곳에 뿌려진 혈흔들을 볼 때 사망자는 숨이 다하기 전 범인과 꽤 오랫동안 몸싸움을 한 듯했다. 그러나 지문 등 범인의 흔적은 좀체 나오지 않았다. “여기 발자국이 있는데요.” 감식반원이 가리킨 곳에 별 모양의 신발 자국이 보였다. 235~240㎜가량의 운동화 아니면 등산화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범인은 여자인가? 아니면 발이 매우 작은 남자인가? 살인 현장에서 혈흔 족적이 발견되면 감식반은 LCV(Leuco Crystal Violet)나 루미놀(Luminol) 등 특수 시약을 쓴다. 범인의 발 크기와 신발 종류 등을 분명하게 알아내려면 육안의 한계를 넘어서는 화학적인 흔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쓰이는 LCV는 혈흔 속의 단백질에 반응한다. 보통 때는 무색의 액체지만 혈흔과 만나면 자주색으로 변한다. 비교적 시약을 만들기가 쉽고 밝은 곳에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루미놀이나 플루오레세인 등도 이용된다. 피가 있는 자리에 발광 현상을 일으키는 루미놀은 시약을 만들기가 쉽지만 반응이 일시적이고, 주위가 어두워야 하는 단점이 있다. 플루오레세인은 반응의 결과물이 매우 밝고 오래 가지만, 자외선 같은 가변광원을 이용해야 하는 데다 만들기도 비교적 까다롭다. 경찰은 주변 인물들을 차례로 용의선상에 올렸다. A씨의 남편도 예외는 아니었다. 새벽부터 여러 차례 집에 전화를 해 대고, 마치 독촉이라도 하듯 현장에 1층 주인을 가 보라고 한 게 오히려 더 의심을 샀다. 출장이라고 간 곳도 자동차로 고작 100여분 거리. 마음먹기에 따라 범행을 저지르고 도주하는 데 충분했다. 두 번째 용의자는 A씨에게 5000만원을 빚지고 도망간 B(당시 45세)씨. 한때 둘도 없이 친했지만 돈이 걸리면 언제든 독한 마음을 먹을 수도 있는 게 사람이어서 경찰의 용의선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두 명 모두 의심할 여지 없이 확실한 알리바이가 있었다. 마지막 용의자는 피해자에게 5000만원을 빌려 준 남편의 친구 C(당시 66세)씨. C씨는 A씨의 시신이 발견되기 3시간 전인 아침 7시쯤 현관까지 왔다가 안에서 대답이 없어 그냥 돌아왔다고 했다. 역시 친구의 부탁 때문이었다고 했다. 2년 전 아내가 집을 나간 C씨는 본인은 그날 저녁 혼자 잠을 잤다고 했다. ●60대 살인자가 사용한 교묘한 술책 이상한 것은 용의선상에 있는 어느 누구도 235~240㎜의 신발에 맞는 사람이 없다는 점이었다. 사건이 미궁으로 빠져드는 가운데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감식 결과가 날아왔다. 죽은 A씨의 손톱 밑 혈흔이 C씨의 DNA와 일치한다는 것이었다. 마지막 순간의 필사적인 발버둥이 범인의 흔적을 담아낸 셈이었다. 하지만 범인이 도저히 빠져나가지 못할 좀 더 확실한 증거가 필요했다. 담당 형사와 C씨 간에 피 말리는 심리전이 이어졌다. 그러기를 10여 시간. 굳게 닫혀 있는 60대 범죄자의 입이 결국 열렸다. “제가 죽였습니다.” C씨가 진술한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남편이 일 때문에 자주 집을 비웠기 때문인지 A씨와 C씨는 자주 왕래를 하다가 각별한 사이가 됐다. 그렇게 4년. 관계가 깊어지면서 A씨는 필요할 때마다 C씨에게 돈을 융통해 썼다. 그러다 둘 사이에 결정적인 갈등이 생겼다. “제가 사정이 급해져서 꿔준 돈을 돌려받으려 하자 A가 냉정하게 돌아서더군요.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매몰차게 거절하는데 정말…, 그런 배신감과 분노가 또 있을까 싶더라고요.” 결국 그는 등산용 장갑을 끼고 칼을 챙겼다. 폐쇄회로(CC) TV에 찍힐 수 있다는 생각에 커다란 등산용 모자를 눌러썼다. 그리고 평소 자기 차에 보관해 두고 있던 A씨의 등산화를 신었다. 현장에 족적이 남을 것을 예상한 술책이었다. 그는 한때 사랑했던 여성에게 스무 번 넘게 분노의 비수를 꽂았다. 사건이 이렇게 마무리되나 싶을 즈음 담당 형사의 새로운 추궁이 이어졌다. 2년 반 전 집을 나갔다는 C씨의 아내(실종 당시 58세)에 대한 수사였다. A씨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담당 형사는 C씨 부인이 단순하게 실종된 게 아니라고 직감했다. 말을 할 때마다 C씨의 이야기는 엇갈렸고, 손과 눈빛이 떨렸다. “부인은 어디에 있나요.” “…” 얼마의 침묵이 지났을까. 그가 입을 열었다. “집요.” “만기가 다가오던데, 보험금 타려고 그간 숨어 지낸 건가요.” “아니요. 몸은 마루에 있고, 머리는 안방 침대 밑 바닥에 있어요.” 그는 2002년 10월 28일 자신의 목공소에서 목 졸라 살해하고 시신을 다음 날 집 한켠에 묻었다. 여자가 남편 말에 한마디도 지지 않고, 심지어 무시하기까지 한다는 게 살해 동기였다. 이듬해 초 집 보수공사를 하면서 그는 아내의 시신을 꺼내 머리와 몸통을 분리한 뒤 안방과 현관 마루 쪽에 각각 묻었다. 처음 묻으려던 현관이 비좁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매일 잠을 자던 곳은 아내의 머리가 묻힌 쪽이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사설] 신재민 前차관 의혹 철저히 진상 규명하라

    현 정권 실세 인사들이 연루된 비리 의혹이 잇따라 터져 나오고 있다. 김두우·홍상표 전 청와대 홍보수석에 이어 신재민 전 문화체육부 차관에게도 금품수수 의혹이 제기됐다. 이국철 SLS그룹 회장이 신 전 차관에게 거액의 금품을 줬다고 폭로한 것이다. 세 사람은 이명박 대통령의 측근이어서 정권 말 권력형 게이트로 비화될 공산이 크다. 특히 신 전 차관 건은 대선 캠프 지원을 빌미로 한 금품수수 의혹도 포함된 만큼 엄청난 폭발성이 잠재된 사안이다. 세 건 모두 철저한 진상 규명이 이뤄져야 하지만 신 전 차관 의혹은 더더욱 엄정한 수사가 요구된다. 이 회장은 신 전 차관에게 2002년부터 매달 수백만원을 주는 등 10년 가까이 현금과 법인카드, 차량 등을 제공했다고 주장했다. 언론 보도 내용을 보면 십수억원에서 수십억원까지 액수가 저마다 다르다. 또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대선 캠프인 ‘안국포럼’에 필요하다는 명목으로 신 전 차관이 얻어간 돈을 놓고 ‘한 차례 1억원’ ‘합쳐서 10억원’ 등 보도 내용이 다양하다. 이것 하나만으로도 실체 규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게다가 신 전 차관은 법적 문제가 없다고 했으니, 액수의 정확성 여부는 차치하고서라도 금품 수수 자체를 일부 인정한 셈이다. 이 회장의 폭로가 사실이라면 너무나 충격적인 것이며, 사실이 아니라면 신 전 차관의 억울함을 벗겨주는 게 마땅한 일이다. 현 정권 실세 인사들이 줄줄이 비리에 얽히는 와중에 신 전 차관 파문까지 겹치면서 국민의 의구심은 증폭되고 있다. 게다가 이 회장은 사업 실패 이후 이런 폭로를 감행할 만큼, 속된 말로 악만 남아 있는 듯한 모습이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이번 파문을 대충 얼버무리는 식으로 넘어갈 수 없게 됐다. 이 회장은 또 다른 실세와의 친분관계를 들먹이면서 2차, 3차 폭로도 있을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일종의 메시지라고 했으니 협박성 거래를 제의한 것이나 다름없다. 폭로거리가 있다면 검찰이 응당 수사를 해야 하는 것이며, 없다면 그런 무책임한 행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의혹을 낱낱이 파헤쳐 국민이 납득할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 또 다른 의혹을 남긴다면 정권 말 위기를 오히려 가중시킬 뿐임을 직시해야 할 것이다.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2) 억울한 죽음 단서 된 치아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2) 억울한 죽음 단서 된 치아

    “여기 터널 옆인데요, 썩은내가 아주 진동을 해요. 빨리좀 와주셔야겠는데….” 2004년 8월 7일 저녁 7시 경기도 군포의 한 지구대 사무실. 온 종일 머리 위를 내리쬐던 여름해가 스스로 열기를 식혀갈 무렵, 한통의 전화가 걸려 왔다. 경험상 차에 치여 죽은 야생동물을 치워 달라는 전화인 듯했다. 출동하는 경찰에겐 그리 달갑지 않은 신고다. 짐승이 심하게 부패했다고 하니 발걸음이 더 무거웠다. 신고자가 말한 장소는 터널을 빠져나와 차가 내리막으로 접어드는 곳. 경찰은 십중팔구 숲에서 튀어나온 고라니 등이 차에 치여 죽은 것으로 생각했다. 현장 부근에 이르자 악취가 진동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악취가 나는 곳엔 뭔가가 담긴 보자기가 놓여 있었다. 막대기로 조심스레 보자기를 들춰 보던 지구대 경찰은 순간 고개를 돌렸다. 형체를 알아보기 어려웠지만, 사람이 분명했다. 로드킬이 아닌 살인의 현장이었다. 다음 날 아침. 감식반이 확인한 시신은 신장 155㎝의 여성이었다. 나체 상태로 이불과 보자기에 싸여 있던 여성은 이미 신체의 70%가량이 부패한 상태였다. 겉으로 보기엔 사망한 지 몇 달은 된듯했다. 특히 상체 부분의 부패가 심해 지문 채취는 시도조차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뼈만 앙상한 손과 목에는 플라스틱 구슬로 만든 반지와 목걸이가 걸려 있었다. 10대 소녀들이 즐길 만할 액세서리였지만 두꺼워진 손톱과 발톱, 파마를 한 머리모양이나 매니큐어를 칠한 것 등을 봐서는 청소년은 아닌 듯했다. 나이조차 가늠하기 어려운 상황. 시신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옮겨졌다. ●그녀의 어금니가 힌트를 남겨 주다 부검의는 시신 오른쪽 두개골이 함몰된 것을 발견했다. 뭔지 모르지만 커다란 둔기에 부딪혀 머리뼈가 깨진 것이 죽음의 원인이라고 판단했다. 죽음을 당한 여인이 누군지를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최종적으로 지문 감식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린 국과원은 사망자의 치아를 통해 진실을 찾는 법치의학에 마지막 희망을 걸어보기로 했다. 사망자의 치아가 법의학적으로 유용한 이유는 크게 3가지다. 치아는 한번 손상되면 회복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은 저마다 고유의 치과기록을 안고 살아가게 된다. 또 치아는 지문처럼 개인마다 간격과 배열상태, 위턱과 아래턱뼈의 교합 상태, 유치(幼齒)의 잔존 여부 등이 다르다. 게다가 치아는 웬만한 화재에도 끄떡없고 잘 썩지도 않는다. 치아 마모도를 검사한 결과 죽은 여성은 29~43세로 밝혀졌다. 여전히 좁은 범위는 아니지만, 덕분에 수사팀은 기존 수백명 실종자 명단을 70명 안팎으로 좁힐 수 있었다. 연구원들은 시신이 남긴 힌트를 또 하나 풀어냈다. 죽은 여인은 숨을 거두기 최소 6개월 전에 왼쪽 윗어금니(뒤에서 3번째)가 빠졌다는 점이었다. 실종자 중 비슷한 경우만 찾는다면 피해자를 바로 특정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잠깐. 살아있을 때 영구치가 빠지면 인간의 몸은 그 자리에 임시로 골조직을 만들라고 명령한다. 잇몸이 더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한 일종의 자기치료로 의학용어로 ‘치조골 재생’이라고 부른다. 반면 죽은 뒤 부패과정에서 빠진 이는 이런 치조골 재생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럼 이가 빠진 지 최소 6개월이 지났다는 점은 어떻게 알아냈을까. 이가 빠지면 바로 옆 이들은 빈자리를 메우려고 한다. 치아가 메워지는 거리와 속도를 계산하면 이가 언제 빠졌는지를 알 수 있다. 경찰은 남은 70여 명의 실종자 중 윗 어금니가 빠진 채 생활했던 여성을 찾아 나섰다. 얼마 후 피해자는 보름 전 사라진 A(당시 36세)씨로 밝혀졌다. 유전자 검사 결과도 일치했다. ●보름 사이 시신의 70%가 부패한 이유? 신원이 밝혀지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탔다. 주변에선 외모가 남달랐던 그녀를 지독하게 따라다니던 한 남자가 있었다고 입을 모았다. 실제 피해자는 “만약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B(당시 49세)씨가 죽인 것으로 알라.”는 말을 하고 다녔을 정도였다. 주변 사람들은 A씨가 최근 B씨와의 관계를 청산하려 하자 남자가 스토커로 변했다고 진술했다. 사건 이후 한동안 잠적했다 나타난 B씨는 경찰에서 범행을 극구 부인했다. 하지만 그의 집 서랍에서 시신을 감쌌던 이불보 끈 등 증거가 나타나자 결국 입을 열었다. 그는 사건 당일 A씨가 헤어질 것을 요구하자 다투기 시작했다고 진술했다. 말싸움은 이내 몸싸움으로 번졌고 결국 B씨는 A씨의 멱살을 잡고 머리를 땅바닥에 여러 차례 세게 부딪쳤다. 그리고 그것은 도저히 돌이킬수 없는 결과로 이어졌다. 그는 현장에서 1.5㎞가량 떨어진 길가 숲 속에 그녀를 버렸다. 그런데 어떻게 시신 일부가 불과 보름 만에 백골을 드러낼 정도로 심하게 부패했을까. 유난히 무더웠던 날씨에 습한 기온이 원인이었다. 기상청에 따르면 사건이 발생한 2004년 7월 인근지역(수원 기준)의 평균습도는 80%에 달했다. 당시 강수량이 400㎜에 이를 만큼 많은 비가 왔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운데 낮기온은 최고 35도까지 치솟았다. 여기에 시신을 칭칭 감쌌던 이불 때문에 초파리들이 기생했고 이내 시신은 구더기로 들끓게 됐다. 법의학적 관점에서 시신 주변에서 기생하는 곤충들은 시신의 사망시간 등을 유추할 수 있는 단서가 된다. 시신 옆 곤충의 종류와 주변 온도와 습도 등을 고려해 범행이 발생한 시기를 되짚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곤충은 때론 시신이 범행 후 옮겨졌는지, 죽기 전 독극물이나 마약 등을 복용했는지에 대한 힌트도 던져준다. 이 때문에 독일 등 유럽은 법의곤충학 전공자가 범죄현장에 감식요원으로 출동하는 것이 당연한 일로 여겨진다. 미국의 법의학 드라마 ‘CSI 라스베이거스’ 시리즈의 길 그리섬 반장도 곤충학 전공자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선 법의곤충학은 과학수사 분야 중에서 가장 낙후된 축이다. 시신에 주로 어떤 곤충들이 기생하는지 등에 대한 최소한의 데이터베이스도, 연구자도 없는 상태다. 이런 이유로 우리나라에서는 오늘도 시신 옆 구더기나 초파리는 현장 증거로 여겨지기 보다는 오히려 감식을 방해하는 훼방꾼 취급을 받는다. 안타까운 현실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1)청장년 급사 증후군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1)청장년 급사 증후군

    모든 시신은 죽음의 순간과 죽음의 진실을 품고 있다. 하지만 친절히 그것들을 일러주지는 않는다. 시신들이 던져 놓은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것은 온전히 남아 있는 인간들의 몫이다. 하지만 법의학에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한계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청장년 급사증후군’(SMDS·Sudden Manhood Death Syndrome)이다. 다소 생소한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술자리에서였다. “요즘 들어 청장년 급사증후군 부검 케이스가 꽤 늘어났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간부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귀가 번쩍 했다. 직업병이다.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하듯 한창 때 나이에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어 나간다는데 얼마나 관능적인 기삿거리인가. #장면1 지난해 8월 경남 김해의 한 아파트. 자기 방에서 잠자던 회사원(29)이 숨진 채 발견됐다. 최초 발견자인 부인은 남편이 평소와 다름 없이 퇴근해 적당한 시간에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술을 마신 것도, 전날 과로를 한 것도 아니었다. 지병이 없던 건강한 가장은 예고도 없이 부인 곁을 떠났다. #장면2 올 3월 17일 새벽 5시 30분 충북 청주의 한 오피스텔 6층에서 대학 교수(57)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아내는 경찰에서 “전날 저녁 6~7시 사이에 밥을 먹고 밤 10시쯤 잠든 남편이 새벽에 깨워도 움직이지 않고 숨을 쉬지 않았다.”고 말했다. 두 사건은 발견 당시 사망자에게서 외상 등이 발견되지 않았고 부검 후 타살 흔적도 없어 범죄와 무관한 것으로 마무리 됐다. 청장년 급사증후군이란 주로 10~40대 남성에게 닥치는 원인 모를 죽음을 말한다. 평소 건강에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 한밤(통상 오전 2~4시)에 갑자기 앓는 소리 등을 내다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전날 술을 과하게 마신 것도, 약물에 중독된 것도 아니다. 과로나 성행위, 과식 등이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은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심장 등 내장기관의 무게부터 모양, 관상동맥, 중추신경, 소화기, 뇌까지 샅샅이 훑고 심지어 약물검사를 해봐도 끝내 이렇다 할 사인(死因)이 나오지 않는다. 답이 없으니 부검의는 사인을 그냥 청장년 급사증후군이라고 적을 수밖에 잠시 부검 과정을 살펴보자. 흔히 부검이라고 하면 칼로 몸을 해부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검안도 조직검사도 부검의 일종이다. 칼을 대기 전 부검의는 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본다. 사망자의 코나 입 주변에 코를 대고 냄새도 맡는다. 일부 독극물은 과일 향기가 나기도 하는데 후각을 이용해 검사한다. 성폭력의 흔적이 있는지 방어흔이 있는지도 칼을 대기 전에 면밀히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다. 검안이 끝나면 가슴부터 배 아래까지를 절개한다. 가슴과 배가 열리면 장기를 살핀 후 심장과 폐, 간, 비장, 신장 등의 순서로 떼어낸 뒤 무게를 잰다. 어느 기관에 출혈 등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과정이다. 내장기관 등에 출혈이 있다면 그 양도 반드시 재야 한다. 출혈량이 치사량을 넘는지 알아보는 작업이다. 사람은 몸에 총 5~6ℓ의 피를 품고 있는데 약 20%에 해당하는 1~1.5ℓ 정도의 피를 흘리면 사망에 이른다. 머리는 가장 나중에 연다. 뇌를 떼어낸 뒤 경막과 두개골의 상태를 살피는데 특정한 충격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과정이다. 특정 부위에 상처가 보일 때는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검사한다. 근육 등에 남아 있는 타살의 흔적 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모든 검사가 끝나면 장기나 뼈는 되도록 원위치에 놓고 꿰맨다. 부검이 끝난 시신이 부검 전보다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법의학자들의 이야기다. 과거에는 이런 미확인 죽음에 대개 ‘급성 심장사’ 또는 ‘급성 심부전’이라고 사인을 적었다. 하지만 의학계에서 “실제 사인이 심장과 무관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호흡정지가 먼저 나타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 등에서 정의하는 급사의 정의는 24시간 안에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만 현장 의사들은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난 뒤 1시간 안에 죽음에 이르는 것을 급사로 말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20~40대 중 원인불명 급사를 당한 사람이 248명에 이른다. 특이한 점은 청장년 급사증후군은 주로 동양인에게 많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유독 아시아 국가의 언어에 수면 중 돌연사를 부르는 특정 단어들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폿쿠리’(ぽっくり), 필리핀에서는 ‘붕궁우트’(Bungungut), 동남아시아에서는 ‘논라이타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가위눌림에 인한 죽음’쯤이 될 것이다. 돌연사는 갓난아기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1세 이하에 나타나는 영아 급사증후군(SIDS·Sudden Infant Death Syndrome)이다. 부검 과정에서도 실마리 하나 발견하지 못할 때가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영유아 급사증후군으로 사망한 아이는 모두 92명(남자 53명, 여자 39명)으로 전체 영아 사망의 6.1%를 차지한다. 영아 급사증후군이 나타나는 비율은 인구 1만명 중 2명 정도. 역시 남자 아이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생후 2~4개월 사이, 한밤~이른 새벽 사이에 빈도가 높다. 국과원 사람들은 좀처럼 미국 TV시리즈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유의 과학수사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법의학 전문가들이 부검이 아닌 수사까지 관여해 척척 사건을 풀어내는 드라마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게 이유다. 맨 앞에 언급한 국과원 간부의 말. “시신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겠지만, 아직 그걸 모두 읽기엔 살아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많이 부족해. 그래서 난 허리에 손 올리고 잘난 척하는 호레시오(드라마 CSI의 주인공)가 너무 싫어.”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친환경 바이오디젤 직접 만들어 보세요”

    “친환경 바이오디젤 직접 만들어 보세요”

    이번 가을에는 활짝 핀 해바라기 장관을 즐기며 친환경 연료도 직접 만들어보는 색다른 체험을 해보는 건 어떨까. 강동구는 해바라기씨를 활용해 바이오디젤(Biodiesel)을 만들어 보는 ‘바이오에너지 생산 체험농장 프로그램’을 최근 개설했다고 13일 밝혔다. 암사동 132 일대에 2120㎡ 규모로 조성된 체험농장은 지난해부터 봄에는 유채씨, 가을에는 해바라기씨를 이용해 바이오디젤을 만드는 프로그램을 운영해 눈길을 끈다. 지난해 처음 개장한 체험 농장에는 총 118회 동안 3840명이 다녀갈 정도로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다만 이번 가을 농장은 해바라기꽃 개화기를 고려해 이달 말 문을 닫아 아쉬움을 남긴다. 바이오디젤은 식물에서 추출한 기름으로 만든 친환경 무공해 연료로 순수한 상태 또는 경유와 혼합해 난방용, 자동차용 연료로 쓰인다. 식물 씨앗을 압착하는 방법으로 기름을 만드는데 보통 1500㎡당 유채기름은 85ℓ, 해바라기기름은 105ℓ를 채취할 수 있다. 체험농장에서는 직접 만든 바이오디젤을 실제로 자동차에 넣어 주행도 해 본다. 환경 교육을 위한 체험 프로그램은 이것 말고도 더 있다. 자전거 페달로 조명을 켜고 믹서로 과일주스를 만드는 ‘자가발전 자전거’도 타볼 수 있고, 태양광으로 움직이는 모형자동차도 운행해 볼 수 있다. 또 태양열로 직접 계란을 익혀보거나 에너지절약 신문을 만드는 프로그램도 준비돼 있다. 이해식 구청장은 “강동선사문화축제 기간인 새달 8~9일에 체험농장을 경유하는 생태체험 우마차 투어도 계획하고 있다.”며 “앞으로도 주민들과 함께 친환경 행복도시로서의 지속가능성을 높여가겠다.”고 밝혔다. 강동구는 2006년부터 전국 지방자치단체 최초로 폐식용유를 활용한 바이오디젤을 만들어 구청 청소차량 31대에 사용, 연간 1억 3000만원의 비용을 절약하는 등 친환경 정책도 몸소 실천하고 있다. 지난달에는 친환경 정책 자문을 위해 에너지관리공단 서울지역센터와 업무협약을 맺기도 했다. 문의는 지역경제과(480-1207)로 하면 된다. 강병철기자 bckang@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1]청장년 급사 증후군: 동양인에게만 존재하는 저주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1]청장년 급사 증후군: 동양인에게만 존재하는 저주

     모든 시신은 죽음의 순간과 죽음의 진실을 품고 있다. 하지만 친절히 그것들을 일러주지는 않는다. 시신들이 던져 놓은 수수께끼를 밝혀내는 것은 온전히 남아 있는 인간들의 몫이다. 하지만 법의학에는 인간의 능력이 미치지 못하는 한계들이 많다. 대표적인 예가 ‘청장년 급사증후군’(SMDS·Sudden Manhood Death Syndrome)이다.  다소 생소한 이 단어를 처음 접한 것은 술자리에서였다. “요즘 들어 청장년 급사증후군 부검 케이스가 꽤 늘어났어.” 평소 잘 알고 지내던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간부가 불쑥 이렇게 말했다. 귀가 번쩍 했다. 직업병이다. 전염병에 걸리기라도 하듯 한창 때 나이에 사람들이 이유없이 죽어 나간다는데 얼마나 관능적인 기삿거리인가.    ●갑작스러운 죽음의 그림자  장면1 지난해 8월 경남 김해의 한 아파트. 자기 방에서 잠자던 회사원(29)이 숨진 채 발견됐다. 최초 발견자인 부인은 남편이 평소와 다름 없이 퇴근해 적당한 시간에 편안히 잠자리에 들었다고 했다. 술을 마신 것도, 전날 과로를 한 것도 아니었다. 지병이 없던 건강한 가장은 예고도 없이 부인 곁을 떠났다.  장면2 올 3월 17일 새벽 5시 30분 충북 청주의 한 오피스텔 6층에서 대학 교수(57)가 숨진 채 발견됐다. 그의 아내는 경찰에서 “전날 저녁 6~7시 사이에 밥을 먹고 밤 10시쯤 잠든 남편이 새벽에 깨워도 움직이지 않고 숨을 쉬지 않았다.”고 말했다. 발견 당시 사망자에게서 외상 등 특별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청장년 급사증후군이란 주로 10~40대 남성에게 닥치는 원인 모를 죽음을 말한다. 평소 건강에 별 이상을 느끼지 못했던 사람이 한밤(통상 오전 2~4시)에 갑자기 앓는 소리 등을 내다 비명횡사하는 경우가 이에 해당한다. 전날 술을 과하게 마신 것도, 약물에 중독된 것도 아니다. 과로나 성행위, 과식 등이 원인이라는 의견도 있지만 아직은 추정에 불과할 뿐이다. 심장 등 내장기관의 무게부터 모양, 관상동맥, 중추신경, 소화기, 뇌까지 샅샅이 훑고 심지어 약물검사를 해봐도 끝내 이렇다 할 사인(死因)이 나오지 않는다. 답이 없으니 부검의는 사인을 그냥 청장년 급사증후군이라고 적을 수밖에.  잠시 부검 과정을 살펴보자. 흔히 부검이라고 하면 칼로 몸을 해부하는 것만 생각하지만, 검안도 조직검사도 부검의 일종이다. 칼을 대기 전 부검의는 시신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샅샅이 살펴본다. 사망자의 코나 입 주변에 코를 대고 냄새도 맡는다. 일부 독극물은 과일 향기가 나기도 하는데 후각을 이용해 검사한다. 성폭력의 흔적이 있는지 방어흔이 있는지도 칼을 대기 전에 면밀히 확인해야 하는 작업이다.  검안이 끝나면 가슴부터 배 아래까지를 절개한다. 가슴과 배가 열리면 장기를 살핀 후 심장과 폐, 간, 비장, 신장 등의 순서로 떼어낸 뒤 무게를 잰다. 어느 기관에 출혈 등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과정이다. 내장기관 등에 출혈이 있다면 그 양도 반드시 재야 한다. 출혈량이 치사량을 넘는지 알아보는 작업이다. 사람은 몸에 총 5~6ℓ의 피를 품고 있는데 약 20%에 해당하는 1~1.5ℓ 정도의 피를 흘리면 사망에 이른다.  머리는 가장 나중에 연다. 뇌를 떼어낸 뒤 경막과 두개골의 상태를 살피는데 특정한 충격이 있었는지 알아보는 과정이다. 특정 부위에 상처가 보일 때는 그 부위를 집중적으로 검사한다. 근육 등에 남아 있는 타살의 흔적 등을 찾아가는 과정이다. 모든 검사가 끝나면 장기나 뼈는 되도록 원위치에 놓고 꿰맨다. 부검이 끝난 시신이 부검 전보다 아름다워야 한다는 것이 법의학자들의 이야기다.  과거에는 이런 미확인 죽음에 대개 ‘급성 심장사’ 또는 ‘급성 심부전’이라고 사인을 적었다. 하지만 의학계에서 “실제 사인이 심장과 무관한 경우가 적지 않다.”는 문제 제기가 나왔다. 심장이 멈추는 것보다 호흡정지가 먼저 나타나는 일도 있기 때문이다. 세계보건기구 등에서 정의하는 급사의 정의는 24시간 안에 죽음에 이르는 것을 말하지만 현장 의사들은 몸에 이상 징후가 나타난 뒤 1시간 안에 죽음에 이르는 것을 급사로 말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20~40대 중 원인불명 급사를 당한 사람이 248명에 이른다.    ●동양인에게만 존재하는 저주?  특이한 점은 청장년 급사증후군은 주로 동양인에게 많다는 점이다. 이런 이유에서인지 유독 아시아 국가의 언어에 수면 중 돌연사를 부르는 특정 단어들이 존재한다. 일본에서는 ‘폭구리(ぽっくり)’, 필리핀 ‘붕궁우트’(Bungungut), 동남아시아에서는 ‘논라이타이’라고 한다. 우리말로 ‘가위눌림에 인한 죽음’쯤이 될 것이다.  돌연사는 간난아기에게서도 자주 나타난다. 1세 이하에 나타나는 영아 급사증후군(SIDS·Sudden Infant Death Syndrome)이다. 부검 과정에서도 실마리 하나 발견하지 못할 때가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지난해 영유아 급사증후군으로 사망한 아이는 모두 92명(남자 53명, 여자 39명)으로 전체 영아 사망의 6.1%를 차지한다. 영아 급사증후군이 나타나는 비율은 인구 1만명 중 2명 정도. 역시 남자 아이에게 많이 나타나는데 생후 2~4개월 사이, 한밤~이른 새벽 사이에 빈도가 높다.  국과원 사람들은 좀처럼 미국 TV시리즈 ‘CSI’(Crime Scene Investigation) 유의 과학수사 드라마를 보지 않는다. 법의학 전문가들이 부검이 아닌 수사까지 관여해 척척 사건을 풀어내는 드라마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있다는 게 이유다.  맨 앞에 언급한 국과원 간부의 말. “시신은 생각보다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겠지만, 아직 그걸 모두 읽기엔 살아있는 사람들의 능력이 많이 부족해. 그래서 난 허리에 손 올리고 잘난 척하는 호레시오(드라마 CSI의 주인공)가 너무 싫어.”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0) 누명 벗겨준 거짓말탐지기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20) 누명 벗겨준 거짓말탐지기

    “대체 둘 다 어딜 간 거야. 휴대전화는 꺼놓고…” 2002년 7월 초의 어느 날.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의 감동이 온 나라를 뜨겁게 달궜던 그해 여름이었다. 서울 성북구의 한 아파트에서 집주인 A(당시 37세)씨의 여동생은 걱정과 답답함에 미칠 지경이 돼 가고 있었다. 언니에게 골백번 전화를 해도 당최 응답이 없었다. 평일 가게 문도 열지 않은 채 이틀째 잠적 중인 언니 걱정에 오늘 하루만 세 번이나 아파트를 찾아갔다. 자주 신는 구두와 가방이 눈에 띄지 않는 걸로 봐서는 외출한 것 같기도 했지만 이렇게 연락을 완전히 끊은 적은 없었던 A씨였다. 건넌방에 세 들어 사는 직장 여성 B(당시 26세)씨도 보이지 않았다. 만약 언니에게 무슨 탈이 났다면 B씨는 알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 역시 연락이 되지 않으니 바짝바짝 가슴이 타 들어갔다. 마냥 기다려서 될 일이 아니라고 판단한 가족들은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했다. 결국 그날 밤 A씨는 차가운 시신으로 발견됐다. 자기 방 침대 밑에서 속옷만 걸친 채 숨져 있었다. B씨도 자기 방 침대 밑에서 같은 자세로 절명해 있었다. 두 시신 옆에는 지갑, 휴대전화,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한집에서 여성 두 명이 동시에 살해된 것이었다. ●“면식범 소행이다” 확신했지만… 경찰 감식반은 혀를 내둘렀다. 범인은 시신 발견 시간을 최대한 늦추기 위해 구두와 지갑까지 숨겨 놓을 정도로 치밀했다. 두 사람 모두 끈으로 목이 졸려 숨졌다는 것 외에는 단서가 없었다. 현장은 청소라도 한 듯이 깨끗했다. 창이나 현관문에도 강제로 뜯거나 연 자국이 보이지 않았다. 시신도 깨끗했다. 손톱 밑에 남았을 법한 범인의 혈흔이나 살갗, 털, 보풀 같은 미세 증거물도 없었다. 정액 반응 역시 없었다. 경찰은 면식범의 소행에 수사의 방향을 맞췄다. 피해자가 아무리 힘 없는 여성이라고 해도 면식범이 아니라면 흔적 없이 들어와 두 명을 살해하고 감쪽같이 사라지기는 어렵다고 판단했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이 판단한 두 사람의 사망시점은 하루 전 오전 1~6시였다. 이 대목에서 경찰의 사망시점(사후 경과시간) 추론 방법을 살펴보자. 여기에는 통상 직장체온을 바탕으로 한 ‘헨스게 계산도표’와 사후 강직도 등이 이용된다. 사후 경과시간을 구하는 공식은 [(37도-직장체온)÷0.83×보정계수]이다. 보정계수는 계절에 따라 겨울에는 0.7, 봄·가을에는 1.0, 여름에는 1.4를 적용한다. 이를테면 어떤 사망자의 발견 당시 직장체온이 27도이고 계절이 가을이었다면 그 사람은 약 12시간 전에 사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로 두 남자를 꼽았다. 첫 번째는 B씨의 약혼남 C씨. 그에게 최근 다른 여자가 생겨 B씨와 말다툼이 잦았고, B씨로부터 3000만원가량 돈도 빌린 상태라는 주변 진술이 나왔기 때문이었다. 당일 알리바이도 분명치 않았다. 두 번째는 A씨의 헤어진 동거남 D씨였다. 그는 “시신이 발견되기 전날 밤 회식을 마치고 자신의 차 안에서 잠이 들었다.”고 했지만 차가 주차된 곳은 숨진 A씨의 아파트 앞이었다. ●유력한 용의자의 유일한 우군은 기계였다 하지만 물증은 어디에서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게 사건 발생 5일이 흘렀을 때 제3의 인물이 등장했다. 사건 현장에서 사라진 두 장의 현금카드에서 총 380만원이 인출된 사실이 확인됐다. 현장 폐쇄회로(CC)TV에는 긴 얼굴에 주걱턱을 한 20대 후반 남자가 두 차례에 걸쳐 현금을 빼내는 모습이 담겨 있었다. 경찰은 이를 토대로 수배전단을 만들었지만, 여전히 기존 용의자 두 명에 대한 의심의 끈도 놓지 않았다. CCTV 속 남자는 그저 공범에 불과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경찰은 거짓말 탐지기를 통해 진실을 가리기로 했다. “A씨를 살해한 후 침대 밑에 감춰두었습니까.” “세들어 사는 B씨도 당신이 살해했습니까.” 범인이 아니라면 알 수 없는 구체적인 상황을 묘사한 후 검사관은 두 사람의 호흡과 심장박동, 피부 전류반응, 심혈관 반응 등을 측정했다. 3시간의 조사 후 검사기에 나온 반응은 의외였다. 탐지기는 유력한 용의자 두 명 모두 범인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여기서 잠깐. 거짓말 탐지의 역사는 조선시대 생쌀에서부터 시작된다. 거짓을 말하면 침이 마르는 현상에서 착안해 조상들은 용의자의 입안에 생쌀을 넣어 상태를 확인하곤 했다. 언뜻 우스꽝스러워 보이는 이 방법에 적잖은 무고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범인으로 몰렸을 법도 하다. 과학의 틀을 갖추고 수사에 거짓말 탐지기가 적극적으로 이용된 것은 1980년대 이후다. 1981년 발생한 ‘이윤상군 유괴사건’에서 거짓말 탐지기는 범인 주영형에게 쇠고랑을 채우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요즘은 뇌파(p300) 변화를 측정해 범인의 기억을 추적하는 뇌지문 탐지 기술이 주목받고 있다. 실제 뇌파 탐지기 기술은 2009년 부산 여중생 성폭행 살인범 김길태로부터 자백을 얻어내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최근 학계에서 주목하고 있는 기술은 거짓말을 할 때 나타나는 사람의 반응을 입체영상을 통해 잡아내는 것이다. 인간의 머리는 항상 미세하게 움직이는데 그것이 인간의 심리나 정서에 관련돼 있다는 원리다. ‘바이브라(Vibra) 이미지’라고 불리는 이 기술은 진폭과 진동수를 측정해 해석하는 과정을 거치면 얼굴만 보고도 거짓을 말하는지, 진실을 말하는지 알 수 있다. 사건의 실마리는 엉뚱한 곳에서 풀렸다. 인천 부평경찰서의 강력계 형사가 수배전단을 보고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자기들이 부녀자 강도 살인 혐의로 검거한 김모(29)씨의 얼굴이 전단 속 얼굴과 같다고 했다. 직접 대조해 보니 CCTV 속 남자와 일치했다. 범인은 모든 것을 순순히 털어놨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어요. 돈암동 누나 집에 가던 중에 기름이 떨어져 무작정 아무 집이나 털기로 했죠. 마침 그 집 사람들이 문을 열어 놓고 자더라고요.” 그는 잠자던 두 여자를 목 졸라 살해한 뒤 느긋하게 증거들을 지워갔다. 여성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간 그는 대법원에서 사형 확정판결을 받았다. 형 집행은 이뤄지지 않은 채 9년째 복역 중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9) 두려움이 만든 ‘복합자살’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9) 두려움이 만든 ‘복합자살’

    “형제님, 안에 계신가요?” 2003년 2월 16일 오전 10시 경기 OO시 OO읍 철물점 뒤 단칸방. 인근 개척교회의 유모(당시 45세) 목사는 신도 A씨를 깨우려고 문을 열었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3평 남짓한 작은 방이 천장부터 바닥까지 온통 피칠갑이 돼 있고, 40대인 A씨는 방 한가운데 엎드린 채 숨져 있었다. 뒤통수와 목, 복부 등 상처도 한두 곳에 난 게 아니었다. 방 한 구석에는 파이프렌치와 망치가, 또 다른 쪽에는 깨진 박카스 병과 액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A씨의 머리를 때린 것은 바로 그 파이프렌치와 망치였다. 머리 위쪽과 뒤통수에 여러 차례 둔기로 맞은 흔적이 있었다. 턱 아래쪽 목에는 모두 3개의 자상이 있었다. 복부에도 각각 7㎝와 4㎝의 자상이 나 있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타살의 현장이 분명했다. #알코올중독자 둔기 자해로 안 죽자 유리로 자살 경찰 감식반은 애를 먹었다. 이 작은 방 어디에서도 살인범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천장에 피가 튈 정도로 범행 수법이 잔혹했다면 분명히 범인 몸에도 피가 튀었을 테지만 출입구는 나간 흔적이 없었다. 현장에서 수많은 족적과 지문이 나왔지만 모두 숨진 A씨의 것이었다. 혈흔도 의문을 던졌다. 혈흔이 그려 낸 죽은 이의 최후는 결코 탈출하려는 사람의 모습이 아니었다. 감식반은 마지막으로 DNA와 지문에 기대를 걸었다. 그 결과 또한 실망스러웠다. 어렵게 채취해 의뢰한 11개의 증거 자료 어디에서도 침입자의 흔적은 나타나지 않았다. 죽은 사람의 몸이 크게 훼손돼 있으면 통상 사람들은 타살을 떠올린다. 피범벅 등 현장이 잔혹할수록 이런 생각은 짙어진다. 이건 수사관들도 예외가 아니다. A씨 사건은 한 달여의 수사 끝에 자살로 결론 났다. 경찰이 판단한 사건 정황은 이러했다. 이혼 후 심한 알코올중독 증세를 보이며 삶을 비관해 오던 A씨는 자살할 결심을 했다. “못 박을 게 있다.”며 철물점 주인집에서 망치와 파이프렌치를 빌렸다. 그는 이것들로 여러 차례 자기 머리를 내리쳤다. 그러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날카로운 것을 찾아 부엌으로 갔다(이런 동선은 문지방과 부엌에서 나온 적하혈흔 등을 통해 추론된 것). 마땅한 것이 없자 그는 유리를 떠올렸다. 그는 깨진 박카스 병과 액자 유리를 차례로 이용해 자기 몸을 찌르고 베었다. 결국 그는 숨을 거뒀다. 부검 결과 목과 배에 나타난 상처는 A씨가 오른손에 거머쥐었던 유리 조각에 의한 것으로 결론 났다. 현장에서 타인의 DNA나 지문이 전혀 나오지 않은 점도 자살로 무게중심을 옮기게 했다. 정황 증거도 참고됐다. 그는 불과 6개월 사이 네 차례나 자살을 시도했었다. 손목을 긋고, 차에 뛰어들고, 돌로 스스로 머리를 내리쳤다. 그때마다 유 목사 등 주변 사람의 도움으로 살아나곤 했다. #70대 자살 노인, 급소 못 찾아 ‘주저흔’ 남겨 현장의 참혹함은 때론 검안의마저 혼란에 빠뜨린다. 다음은 검안의까지 타살로 규정했다가 나중에 뒤집어진 경우다. 2003년 12월 10일 오후 5시 경기 OO시 한 주택가. 방안에는 70대 노인 B씨가 벽을 향한 채 숨져 있었다. 목에 감긴 전깃줄은 벽 위쪽 못에 걸려 있었다. 중풍으로 거동이 불편한 B씨였다. 이마와 머리 곳곳에 각각 칼에 베이고 망치에 찍힌 듯한 상처들이 나타났다. 방 한쪽에서는 피가 엉겨붙은 망치와 칼이 발견됐다. 시신을 검안한 인근 병원 의사는 “목에 있는 끈 자국은 누군가 전기선 등으로 잡아당긴 교사일 가능성이 크다.”면서 “이마와 얼굴에 난 칼과 망치 자국은 각각 열상과 좌상으로 중풍에 걸린 노인이 자해해 생긴 것으로 보기 어렵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어진 부검과 경찰 조사에서 이 말이 뒤집혔다. B씨는 최종적으로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결론 났다. 부검의는 “이마와 얼굴에 출혈을 동반한 상처가 여럿 있긴 하지만 뇌 등 주요 장기를 다치게 할 만큼 치명적인 것은 아니다.”면서 “목을 구성하는 방패연골이나 목뿔뼈 등이 부러지지 않았고 목 주위 물렁뼈 등에도 손상이 없는 것으로 봐서 죽음의 원인은 타인의 목 누름에 의한 질식사가 아니다.”고 밝혔다. 가족과 건강문제 등을 비관한 노인은 자기 집에서 망치와 칼, 한복끈과 전깃줄 등으로 모두 네 차례에 걸쳐 자살을 시도했다는 게 국립과학수사연구원과 수사진의 결론이었다. 이렇게 두 가지 이상의 방법으로 자살을 하는 것을 법의학적으로 복합자살이라고 부른다. 첫 번째 시도가 실패하자 2차, 3차 계속해서 자살을 이어가는 것이다. 전체 자살의 5%가 이런 복합자살이라는 외국 통계도 있다. 여기서 드는 깊은 의문 한 가지. ‘기왕 죽을 작정을 했다면 왜 그토록 자신에게 가혹하게 굴까.’ 하는 점이다. 법의학자들은 자살하는 사람들의 미묘한 심리변화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흉기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고통 없이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겁을 낸다. 고통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국과수 관계자는 “영화를 보면 타살의 흔적은 무조건 잔혹하게, 자살의 흔적은 평안하게 그려지지만 실제는 이와 반대인 경우가 상당수”라면서 “때론 자살자의 몸에서도 수십 개의 자상(베이는 것)이나 창상(찔리는 것)이 발견되기도 하는데 이 때문에 상처의 개수만으로 자살, 타살을 구분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스스로 치명적인 곳을 한 번에 찾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상처를 모두 법의학적으론 주저흔이라고 부른다. A씨와 B씨의 몸에 난 여러 개의 상처 역시 주저흔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은 순탄치 않다. 또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 선 이들도 마지막 순간까지 그렇게 고민한다. 생(生)은 그만큼 소중한 것이기 때문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호남 정자 문화의 메카 전남 담양 ‘명옥헌 원림’

    호남 정자 문화의 메카 전남 담양 ‘명옥헌 원림’

    절경을 두고 굳이 탐승의 적기를 따지는 것이 부질없기는 합니다. 하지만 배롱나무꽃 흐드러진 전남 담양의 명옥헌 앞에서라면 누구라도 늦여름날의 선경에 마음 뺏기지 않을 재간이 없겠습니다. 담양은 지금 연분홍으로 빛납니다. 나락 익는 길가, 절집 뜰, 그리고 옛 선비의 고졸한 정원에 배롱나무꽃이 무시로 피었습니다. 이 꽃이 세 번 피고 지면 가을이라지요. 처서가 지났으니 이제 여름도 막바지입니다. 배롱나무 붉은 꽃비 맞으며 가을을 맞는 건 어떨지요. ●피고 지길 세 번…이 꽃 지면 가을 담양의 대표 아이콘을 꼽으라면 단연 대나무다. 여기에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이 엇비슷한 무게감을 갖는다. 하지만 한여름에서 초가을로 넘어가는 길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이맘때라면 대나무도, 메타세쿼이아도 배롱나무에 한 수 접어줘야 한다. 연분홍 배롱나무꽃이 담양 전체를 더없이 화사하게 꾸미고 있기 때문이다. 배롱나무꽃 핀 풍경이 장하기로는 단연 명옥헌 원림(鳴玉軒 苑林)이 꼽힌다. 명옥헌은 정자의 이름, 원림은 정자에 딸린 정원을 뜻한다. 정자 오른쪽에서 흘러내리는 개울물이 옥구슬 부딪치는 소리를 낸다 해서 이름지어졌다. 명옥헌 원림은 예쁘다. 첫 눈길에 정신을 쏙 빼놓는다. 좁은 고샅길을 올라가다 느닷없이 골목 어귀에서 튀어 나오는데, 명옥헌은 보이지 않고, 불그레한 꽃잎과 이를 담담하게 비춰내고 있는 연못이 장관을 이룬다. 명옥헌은 인조반정의 주역 오희도(1583~1623)의 집터 위에 넷째 아들 오이정(1619∼1655)이 아버지를 기리며 지은 정자다. 정자 앞뒤로 네모난 연못을 파서 주변에 적송, 배롱나무 등을 심고 가꿨다. 각진 연못 안엔 원형의 섬을 만들어뒀다. 대지는 네모, 하늘은 둥글다는 당시의 우주관이 반영된 공간이다. 명옥헌 ‘원림’의 한자를 정원의 일반적인 표현인 ‘園林’으로 쓰지 않고 굳이 ‘苑林’이라 표현한 것엔 까닭이 있다. 윤재득 담양군 문화재담당은 “둘을 가르는 가장 큰 차이는 담장의 유무”라며 “바깥 공간과 구분짓는 담장이 있으면 ‘園林’, 담장 없이 바깥과 소통하고 있으면 ‘苑林’이라 부른다.”고 설명했다. 명옥헌 원림엔 담장이 없다. ‘숲은 그대로 두고, 주변에 정자를 적절하게 배치한’, 이른바 차경(借景) 형태의 자연순응적인 정원양식이다. 차경은 자연을 경관 구성 재료의 일부로 빌려왔다는 뜻이다. 숲 위쪽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 정자를 세웠다. 가운데 방을 들이고 사방엔 마루를 깔았다. 마루에 앉으면 눈앞에 펼쳐진 정원과 배롱나무꽃의 절창을 그윽하게 굽어볼 수 있다. 배롱나무는 100일 붉은 꽃, 백일홍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발음 나는 대로 백일홍, 배기롱 등으로 불리다 배롱나무로 굳어졌다. 독특하고 애처로운 사연이 깃든 다른 이름도 많다. 세 번을 피었다 지면 쌀밥 먹을 때가 됐다고 해서 쌀밥나무, 줄기를 긁으면 나무가 간지럼을 타는 것처럼 흔들려서 간지럼나무 등으로 불린다. 자줏빛 ‘자’(紫)에 장미 ‘미’(薇)를 써 자미나무라고도 한다. 이름만큼 평가도 엇갈렸다. 송명숙 문화관광해설사는 “매끈하고 붉은빛을 띤 줄기에서 여인의 몸이 연상된다거나, 꽃이 너무 붉어 집 안에 심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온다.”며 “귀신을 잘 쫓는다고 해서 묘지나 사당 주변에도 흔히 심었다.”고 했다. 반대로 청렴과 무욕을 상징하기도 했다. 스님들은 100일 동안 매일 번갈아 가며 돋아나는 꽃에서 용맹정진을 배웠고, 선비들은 껍질을 벗은 줄기에서 무욕의 청빈한 삶을 보았다. 배롱나무꽃은 보통 한 가지에서 피고 지기를 세 번 거듭한다. 송 해설사는 “7월 중순부터 피기 시작해 8월 초와 하순께 두 번 절정을 이룬 뒤 9월 초~중순께 마지막 정열을 불태운다.”고 설명했다. 명옥헌 주변엔 40여 그루의 배롱나무가 있다. 80~150년 된 노거수(巨樹)가 30여 그루, 2002년 해체 보수 당시 심은 후계수들이 10여 그루 된다. 늙은 몸이건, 젊은 몸이건, 하나같이 연분홍 꽃술을 우박처럼 매달고 있다. 꽃은 지고 난 뒤에도 진한 흔적을 남긴다. 동백처럼 꽃송이째 뚝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줄기에 매달린 꽃이나 바닥에 떨어진 꽃이나, 주변을 연분홍으로 물들이긴 마찬가지. 필경 꽃은 분홍빛 카펫을 깔아 함께 붉었던 여름을 배웅하려는 게다. ●자연 위에 흔적 없이 얹은 인공미 명옥헌의 ‘연관 검색어’로 꼭 찾아봐야 할 곳이 소쇄원 등 정자들이다. 영남을 대표하는 정자의 메카가 경남 함양이라면, 담양은 호남 정자 문화의 보고라 불린다. 그만큼 풍치 좋은 정자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 중 소쇄원은 한국을 대표하는 정원 가운데 하나로 꼽힌다. 조선 중종 때 양산보가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가 세상을 뜨자 자연에 숨어 살겠다며 꾸민 곳이다. 초록빛 대나무숲과 배롱나무들이 둘러친 계곡 안쪽에 광풍각이 있고, 그 뒤로 제월당이 내려다 보고 있다. 송강 정철이 노닐던 식영정과 송강정도 소쇄원에 버금갈망정 뒤지지는 않는다. 특히 소쇄원과 이웃한 식영정은 ‘그림자도 쉬어가는 정자’라는 뜻의 이름만큼이나 운치가 넘친다. 정철의 대표작인 ‘성산별곡’이 탄생한 곳으로, 아름드리 노송과 배롱나무, 연못 위 정자 부용당 등이 어우러져 그림과 같은 풍경을 펼쳐내고 있다. 길 모퉁이에 있어 스쳐가기 쉬운데, 꼼꼼하게 짚어보는 게 좋다. 봉산면 제월리의 면앙정은 송순의 체취가 묻어 있는 곳. 1533년(중종 28년) 건립됐다. 강호가도(江湖歌道)의 선구자로 꼽히는 송순이 퇴계 이황 등과 학문을 논하고 후학들을 길러내던 곳이다. ●느릿한 발걸음에 풍경 걸리고 창평면 삼지내 마을은 장흥군 유치면,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 등 우리나라에 있는 총 4곳의 슬로시티(Slow City) 가운데 한 곳이다. 16세기 초에 형성된 전통마을로, 옛 멋을 그대로 간직한 한옥과 아름다운 돌담길 사이로 ‘싸목싸목’ 걷는 맛이 각별하다. 마을 내에는 자연을 차용해 건축미가 빼어난 ‘고재선 가옥’ 등 여러 채의 전통 한옥이 비교적 온전하게 남아 있다. 돌과 흙을 사용한 토석담도 정겹다. 최근엔 복개됐던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 등 삼지천(三支川)을 원래 모습대로 되돌려 놓는 공사가 한창이다. 먹거리도 많다. 조선시대 임금에게 진상했다던 창평 쌀엿과 한과는 물론, 막걸리, 약초 등을 직접 만들거나 맛볼 수 있다. 한과(강정) 체험은 1만원을 받는다. 체험 시간은 1시간 정도 소요된다. 막걸리는 2시간에 2만원이다. 발효 등의 과정에 시간이 많이 걸려 자신이 만든 술을 직접 맛볼 수는 없고, 앞서 다른 체험자가 만든 1ℓ를 선물로 받는다. 쌀엿은 1㎏에 1만 5000원이다. 최근 포장도로를 걷어 내고 원래 모습으로 되돌아 간 메타세쿼이아 숲길도 걸어볼 만하다. 메타세쿼이아 가로수길 중 약 1.2㎞ 구간의 아스콘을 벗겨내고 흙길로 ‘리모델링’했다. 차들이 쌩쌩 내달리던 가로수길 바로 위 88고속도로 또한 멀찌감치 이전시켰다. 담양군은 이 구간에 대해 차와 자전거의 통행을 일절 금지하고 보행자 통행만 허용할 방침이다. 글 사진 담양 손원천기자 angler@seoul.co.kr ■여행수첩(지역번호 061) ▲가는 길 호남고속도로 창평나들목을 나와 60번 지방도를 따라 고서 방향으로 달리면 왼쪽에 명옥헌(380-3150) 이정표가 나온다. 차는 후산마을 주차장에 두는 게 좋다. 메타세쿼이아 숲길 등을 먼저 보려면 88고속도로 담양나들목을 이용하는 게 낫다. 담양 시티투어버스 이용은 군 홈페이지(tour.damyang.go.kr) 참조. ▲맛집 삼지내 마을 초입 전통시장 주변에 맛집들이 몰려 있다. 창평시장국밥(383-4424)이 그 중 유명하다. 머리고기·내장·선지 국밥 6000원. 대나무에 밥을 지은 대통밥은 읍내 박물관앞집(381-1990)이 잘한다. 1만 2000원. ▲잘 곳 삼지내 마을에서 한옥 민박을 운영하고 있다. 인터넷 창에 ‘남도민박’을 치면 민박집들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다. ‘한옥에서’, ‘매화나무집’, ‘명가혜’ 등이 알려졌다. 주말 4인 가족 기준 10만원 선.
  • 달리는 기차 앞을 가로지르는 소년 ‘아찔’

    달리는 기차 앞을 가로지르는 소년 ‘아찔’

    달려오는 기차 앞으로 뛰어 들어 철도를 가로지르는 소년을 포착한 CCTV 영상이 공개돼 충격을 주고 있다. 남호주 도로 교통부가 22일(이하 현지시간) 공개한 동영상은 남호주 아델레이드 지역의 맨슨 레이크스 철도역에서 지난 4월11일에 발생한 사건을 담고 있다. 신원이 공개되지 않은 이 17세 소년은 철도에서 기다렸다가 골러행 특급열차가 기차역을 통과하는 순간 기차 앞으로 달려들었다. 당시 기차의 속도는 시속 90km. 소년은 간발의 차이로 플랫폼에 쓰러지면서 올라섰는데, 생명을 잃을 수 있는 아찔한 상황이었다. 당시 소년을 인지한 기차 운전사는 급브레이크를 밟았고 소년의 안전 확인으로 2시간을 연착했다. 파라필드 가든에 사는 것으로 알려진 이 소년은 당시 상황으로 발목을 다쳤다. 그는 지난 16일 법정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사회봉사와 기차 지연으로 발생한 손해배상금을 물었다. 또한 혹시나 사람을 치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가슴을 쓸어내린 기차 운전사에 사과의 편지를 보내도록 명령 받았다. 남호주 철도운영회 피터 도겟은 ”기차에 의한 인명사고는 목격자뿐 아니라 기차 운전사에게도 극심한 트라우마를 남긴다.” 고 말했다. 사진=CCTV 동영상 캡처/아델레이드 나우 서울신문 나우뉴스 호주통신원 김경태 tvbodaga@hanmail.net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8) 치밀한 남편 ‘전류반’은 못 숨겼네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8) 치밀한 남편 ‘전류반’은 못 숨겼네

    “거기 119, 119죠? 저, 저희…어머니가 목을 매셨는데….” 2006년 5월 25일 새벽 4시 경기 시흥시 신천동의 한 아파트. 119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사망자는 당시 56세의 주부 A씨. 그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쓴 채 안방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목을 매 숨진 이를 처음 발견해 바닥에 눕힌 것은 남편 B씨(56)였다. “1시간쯤 전에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작은방 문에 목을 매 죽어 있더라고요. 손자들 놀라고 달아 놓은 그네용 철봉에 끈을 묶었더군요. 목 뒤 가운데에 매듭이 있었고 두 발이 공중에 5㎝ 정도 떠 있었어요.” 급히 줄을 끊어 안방에 눕혔는데 한밤에 시신과 함께 있자니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불을 덮어 놓고 분가한 아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차분하게 상황을 증언했다. 아내의 자살 동기를 묻는 경찰에게 남편은 “나한테 맞은 게 분해서 자살한 것 같다.”고 했다. 남편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건 발생 몇 시간 전인 5월 24일 오후 10시쯤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은 이 과정에서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워 온 플라스틱 막대기로 아내를 때렸다. 그러고는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가 새벽 3시쯤 돌아와 보니 아내가 숨져 있었다고 했다. 집 안에는 길이 50㎝ 남짓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부인이 목을 맨 낡은 나일론 끈이 놓여 있었다. 남편은 나일론 끈은 집에서 보던 게 아니라고 했다. A씨의 목 주변에는 끈 자국이 뚜렷했다. 턱 아래부터 시작된 자국은 목덜미와 턱을 따라 비스듬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 부인의 얼굴에는 심한 울혈이, 양 눈꺼풀에는 많은 일혈점이 보였다. 전형적인 질식사의 흔적이었다. 얼굴, 목, 팔 등에서는 붉은색을 띤 타원형의 크고 작은 상처가 발견됐다. 남편 진술대로라면 부부싸움 때 막대기로 맞은 상처였다. 모두 18곳. 하지만 사인으로 보기에는 상처가 너무 작았다. 검안의는 일단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1차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있을 대반전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타살된 것이고 범인은 남편이었다. # 완전의사에선 없어야 할 울혈과 일혈점 억울한 죽음이 자살로 묻혀버릴 뻔한 것을 막아준 사람은 부검의였다. 그는 시신의 상태와 정황이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시신 속 일혈점과 울혈에 주목했다. “목격자(남편)는 목을 맨 부인의 발이 허공에 5㎝ 떠 있었다고 했죠. 매듭은 목 뒤에 걸려 있었고…. 근데 이상해요. 이렇게 교수형 당하는 사람처럼 죽으면 질식사와 달리 울혈이나 일혈점이 나타나지 않는 법이거든요.” 법의학에서는 A씨처럼 정확하게 목을 매 죽는 것을 ‘전형적·완전의사’(縊死)라고 말한다. 뇌로 가는 혈류가 순간적으로 막히는 데다 몸 전체가 공중에 떠 하중이 온전히 목에 걸려 시신의 얼굴 부위가 창백하게 변한다. 피가 쏠리지 않으니 당연히 일혈점도 울혈도 나타나지 않는다. 부검의는 몸에 남은 상처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막대기에 맞아서 생긴 상처는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화상이나 탕상(湯傷·물이나 증기에 데인 상처)에 가까워요.” 수사진의 시선은 남편을 향했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진술이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다그치려면 뭔가 물증이 있어야 했다. 수사진은 아파트 인근을 이 잡듯이 뒤졌고, 그 노력은 이내 결실을 맺었다. 아파트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집에 있던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 끈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한 것. 집에서 나온 막대기나 나일론 끈과 절단면도 정확히 일치했다. “가만 있자, 남편은 막대기를 이곳 공터가 아닌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웠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여기서 목맬 때 쓴 나일론 끈까지 발견되고….” 일반적으로 목을 매는 사람들은 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살을 결심한 아내가 한밤 중 칠흑같이 어두운 공터까지 와서 어렵사리 끈을 찾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되는가. 형사와 남편의 피 말리는 두뇌 게임이 이어졌다. 조사 8시간째. 심리적인 불안감을 내비치는 남편 앞에 경찰이 그동안 감춰두었던 증거를 내밀었다. 공터에서 발견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 끈이었다. 남편은 고개를 떨궜다. # 전기도 흔적 남기는 걸 몰랐던 남편 사건은 엽기적이었다. 불행의 씨앗은 아내의 외도에 대한 남편의 망상증이었다. 남편은 증세가 차츰 심해지더니 급기야 ‘아내가 밥에 독을 타 나를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결국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죽이기 전에 먼저 죽이기로 결심했다. 범행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그는 헤어드라이어 끝을 잘라 빼낸 전선과 나무막대기 등으로 간이 전기 충격기를 만들었다. 과거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배운 지식을 총동원했다. 범행에 쓸 나일론 끈과 플라스틱 막대기도 준비했다. 막대기는 전기 충격 때문에 아내 몸에 생길 상처를 맞아서 생긴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날 밤 남편은 TV를 보는 아내 뒤로 다가가 모두 9차례 전기 충격을 가했다. 아내가 기절하자 나일론 끈으로 그녀의 목을 매달았다. 15분 후 아내가 죽은 것을 확인한 그는 살인의 흔적을 지운 뒤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결백을 확인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뒤늦게 밝혀진 것이지만 부인의 몸에 남은 상처는 전류반(電流斑)이었다. 데인 상처와도 비슷한 이 자국은 최초 전기가 몸에 들어오고 나온 곳에 각각 흔적을 남긴다. 피부 가장자리가 올라와 있어 마치 분화구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전류의 세기가 약하거나 몸에 물기가 있다면 반점처럼 작은 자국만을 남긴다. 특히 남편은 상처를 닦아냄으로써 경찰의 감식을 한층 어렵게 했다. 이렇게 흔적이 약할 때는 피부에 철 등의 금속성분이 묻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감전된 피부에는 순간적으로 금속 성분이 녹아서 눌어붙기 때문이다. 그렇게 전기도 흔적을 남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의처증 남편, 아내 몰래 헤어드라이어 꺼내더니…

    의처증 남편, 아내 몰래 헤어드라이어 꺼내더니…

    “거기 119, 119죠? 저, 저희…어머니가 목을 매셨는데….” 2006년 5월 25일 새벽 4시 경기 시흥시 신천동의 한 아파트. 119 구급차 사이렌 소리가 새벽의 정적을 갈랐다. 사망자는 당시 56세의 주부 A씨. 그는 머리까지 이불을 뒤집어 쓴 채 안방에 반듯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목을 맨 시신을 처음 발견해 바닥에 것은 남편 B씨(56)였다. “1시간쯤 전에 집에 돌아오니 아내가 작은 방문에 목을 매 죽어 있더라고요. 손자들 놀라고 달아 놓은 그네용 철봉에 끈을 묶었더군요. 목 뒤 가운데에 매듭이 있었고 두 발이 공중에 5㎝ 정도 떠 있었어요.” 급히 줄을 끊어 안방에 눕혔는데 한밤에 시신과 함께 있자니 무서운 생각이 들어 이불을 덮어 놓고 분가한 아들에게 급히 연락했다고 말했다. 남편은 차분하게 상황을 증언했다. 아내의 자살 동기를 묻는 경찰에게 남편은 “나한테 맞은 게 분해서 자살한 것 같다.”고 했다. 남편 말에 따르면 두 사람은 사건발생 몇시간 전인 5월 24일 오후 10시쯤 부부싸움을 했다. 남편은 이 과정에서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워 온 플라스틱 막대기로 부인을 때렸다. 자기는 화가 나서 집을 나갔다가 새벽 3시쯤 돌아와 보니 아내가 숨져 있었다고 했다. 집안에는 길이 50㎝ 남짓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부인이 목을 맨 낡은 나일론 끈이 놓여 있었다. 남편은 나일론 끈은 집에서 보던 게 아니라고 했다. A씨의 목 주변에는 끈 자국이 뚜렷했다. 턱 아래부터 시작된 자국은 목덜미와 턱을 따라 비스듬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 부인의 얼굴에는 심한 울혈이, 양 눈꺼풀은 많은 일혈점이 보였다. 전형적인 질식사의 흔적이었다. 얼굴, 목, 팔 등에서는 붉은색을 띤 타원형의 크고 작은 상처가 발견됐다. 남편 진술대로라면 부부싸움 때 막대기로 맞은 상처였다. 모두 18곳. 하지만 사인으로 보기에는 상처가 너무 작았다. 검안의는 일단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1차 판정을 내렸다. 하지만 이것은 나중에 있을 대반전의 극적 효과를 높이기 위한 보조장치에 불과했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녀는 타살된 것이었고 범인은 남편이었다.   ■ 완전의사에선 없어야 할 울혈과 일혈점 억울한 죽음이 자살로 묻혀버릴 뻔한 것을 막아준 사람은 부검의였다. 그는 시신의 상태와 정황이 어딘지 모르게 아귀가 안 맞는다고 생각했다. 특히 시신 속 일혈점과 울혈에 주목했다. “목격자(남편)는 목을 맨 부인의 발이 허공에 5㎝ 떠 있었다고 했죠. 매듭은 목 뒤에 걸려 있었고…. 근데 이상해요. 이렇게 교수형 당하는 사람처럼 죽으면 질식사와 달리 울혈이나 일혈점이 나타나지 않는 법이거든요.” 법의학에서는 A씨처럼 정확하게 목을 매 죽는 것을 ‘전형적· 완전 의사(縊死)’라고 말한다. 뇌로 가는 혈류가 순간적으로 막히는 데다 몸 전체가 공중에 떠 하중이 온전히 목에 걸려 시신의 얼굴 부위가 창백하게 변한다. 피가 쏠리지 않으니 당연히 일혈점도 울혈도 나타나지 않는다. 부검의는 몸에 남은 상처도 의심스럽다고 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막대기에 맞아서 생긴 상처는 절대로 아닙니다. 오히려 화상이나 탕상(湯傷·물이나 증기에 데인 상처)에 가까워요.” 수사진의 시선은 남편을 향했다. 지금까지 그가 해온 진술이 모두 거짓일 수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하지만 그를 다그치려면 뭔가 물증이 있어야 했다. 수사진은 아파트 인근을 이잡듯이 뒤졌고, 그 노력은 이내 결실을 맺었다. 아파트에서 좀 떨어진 공터에서 집에 있던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끈의 나머지 부분을 발견한 것. 집에서 나온 막대기나 나일론끈과 절단면도 정확히 일치했다. “가만있자, 남편은 막대기를 이곳 공터가 아닌 아파트 분리수거장에서 주웠다고 하지 않았나. 게다가 여기서 목 맬 때 쓴 나일론끈까지 발견되고….” 일반적으로 목을 매는 사람들은 집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물건을 사용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이대로라면 자살을 결심한 아내가 한밤 중 칠흑같이 어두운 공터까지 와서 어렵사리 끈을 찾았다는 얘기다. 이게 말이 되는가. 형사와 남편의 피말리는 두뇌게임이 이어졌다. 조사 8시간째. 심리적인 불안감을 내비치는 남편 앞에 경찰이 그동안 감춰두었던 증거를 내밀었다. 공터에서 발견한 플라스틱 막대기와 나일론 끈이었다. “모두 공터에서 찾은 겁니다. 왜 거짓말을 하셨습니까.” “…” “부인을 살해한 건 당신이죠.” 남편은 고개를 떨궜다.   ■ 전기도 흔적을 남긴다 사건은 엽기적이었다. 불행의 씨앗은 아내의 외도에 대한 남편의 망상증이었다. 남편은 증세가 차츰 심해지더니 급기야 ‘아내가 밥에 독을 타 나를 죽이려 한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됐다. 결국 남편은 아내가 자기를 죽이기 전에 먼저 죽이기로 결심했다. 범행은 치밀하게 준비됐다. 그는 헤어드라이어 끝을 잘라 빼낸 전선과 나무막대기 등으로 간이 전기충격기를 만들었다. 과거 철물점을 운영하면서 배운 지식을 총동원했다. 범행에 쓸 나일론끈과 플라스틱 막대기도 준비했다. 막대기는 전기충격 때문에 아내 몸에 생길 상처를 맞아서 생긴 것처럼 위장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날 밤 남편은 TV를 보는 아내 뒤로 다가가 모두 9차례 전기충격을 가했다. 아내가 기절하자 나일론 끈에 그녀의 목을 매달았다. 15분 후 아내가 죽은 것을 확인한 그는 살인의 흔적을 지운 뒤 아들에게 전화를 걸었다. 자신의 결백을 확인해 줄 누군가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였다. 뒤늦게 밝혀진 것이지만 부인의 몸에 남은 상처는 전류반(電流斑)이었다. 데인 상처와도 비슷한 이 자국은 최초 전기가 몸에 들어오고 나온 곳에 각각 흔적을 남긴다. 피부 가장자리가 올라와 있어 마치 분화구 같은 모습을 보이지만 전류의 세기가 약하거나 몸에 물기가 있다면 반점처음 작은 자국만을 남긴다. 특히 남편은 상처를 닦아냄으로써 경찰의 감식을 한층 어렵게 했다. 이렇게 흔적이 약할 때는 피부에 철 등 금속성분이 묻어 있는지 알아보는 것도 도움이 된다. 감전된 피부에는 순간적으로 금속 성분이 녹아서 늘어붙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전도체와 맞닿은 부위는 마치 도금을 한 것처럼 변하기도 한다. 그렇게 전기도 흔적을 남긴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서울신문의 주간연재 기획물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에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4월 16일 시작된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시리즈는 굵직한 사건현장을 누빈 베테랑 현장기자의 생생한 경험과 법의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하는 서울신문의 특화기사입니다. 그동안 연재돼 온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크랩해 두시면 한편의 현장 과학수사의 사례집으로 활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 데이트 강간을 위한 ‘악마의 술잔’ 한모금에 블랙아웃…24시간내 검사 못하면 미제사건 2) 죽음의 性도착증 ‘자기 색정사’ 혼절직전의 성적 쾌감 탐닉…‘질식에 중독되다’ 3) 부인을 죽인 건 오열했던 남편 사고로 위장한 최악의 선택…죽거나 혹은 더 나빠지거나 4) 목졸려 죽은 시신의 ‘마지막 증언’ 운전석 아내 목졸라 살해하고 차는 낭떠러지로… 5) 강간 후 살해된 여성, 그리고 부검의 반전 죽을 때까지 여성이고 싶었던 남성의 사연 6) 긴장한 범인이 현장에 남긴 대변이 결정적 증거를… 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7) 여성 유린 위해 정관수술까지 한 연쇄 성폭행범 ‘씨없는 발바리’ 과학수사 얕봤다가… 8) 핏자국 속 엽기 살인범의 족보 혈흔 속 性염색체로 ‘악마의 姓’ 찾아내다 9) “왜 그날 조폭은 남진의 허벅지를 찔렀나?”… 칼잡이는 당신의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10) 급성 수분중독으로인한 사망사건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물 많이 마시면 생명 잃는다 11) “너무나 깨끗한 자살현장이 타살을 증명했다” 생활반응은 진실을 알고 있다 12) 불탄 시신의 마지막 호흡…그녀가 아들을 지목하다 화재사망 속 숨어있는 타살흔적 찾기 13) 車 운전석에서 질식해 숨진 그녀의 주먹쥔 양팔 14) “그녀가 성형수술만 안했더라도…” 광대뼈 축소술, 동거男에 목졸린 백골의 한 풀다 15) 연쇄살인범에 당한 20대女…6년만의 대반전 연쇄살인 택시기사, 274만개의 눈 CCTV가… 16) 죽은 여성이 남긴 데스노트…살인자를 지목하다 찢어진 장부가 범인을 증언하다 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살인자를 가리키다 바다에서 건진 토막시신의 신원찾기
  • [길섶에서] 사랑이 미워질 때/김종면 논설위원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도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주요 장면은커녕 줄거리조차 잘 생각나지 않는다. 머리와 가슴에 온전히 남아 있는 작품이 얼마나 될까. ‘포레스트 검프’ ‘늑대와 함께 춤을’ ‘나라야마 부시코’…. 사회적 약자와 인디언 문화에 대한 관심, 삶과 죽음의 문제에 대한 집요한 천착 그런 것들이 아직도 이 영화들을 내 기억의 창고에 남게 만든다. 그런데 그렇고 그런 한국영화 하나가 불현듯 망각의 틈새를 비집고 떠오른다. 얼마 전 우연히 본 ‘사랑이 미워질 때’란 통속멜로다. 클래식 애호가라도 한 번쯤은 옛날식 전파상에서 흘러나오는 유행가 가사에 발걸음이 멈춰지는 법. 차갑게 외면받은 영화지만 한 조각 대사만큼은 울림을 남긴다. “일류는 쉬이 삼류가 되어도 삼류가 일류가 되면 다시 삼류는 되지 않을 거”라며 신랑감을 삼류에서 고르라는 충고다. 좀 모자라도 검프같이 우직한 자가 진짜 일류 신랑감이다. 국가도 마찬가지다. 그 ‘일류의 역설’을 나는 요즘 일본의 행태에서 똑똑히 본다. 독도 도발은 ‘삼류’로 가는 길이다. 김종면 논설위원 jmkim@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 살인자를 가리키다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 살인자를 가리키다

    2006년 10월 11일 오후 3시 인천 강화도의 한 선착장. 주변을 거닐던 관광객이 바다 쪽 석축에 걸린 작은 물체를 발견했다. “저게 뭐지? 일반적인 바다 쓰레기 같지는 않은데….”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악!’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잘린 사람 손이었다. 바다를 떠돌다 뭍을 만나니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이었을까, 조류에 떠밀려 온 가련한 시신 조각은 축대에 기대어 제발 자기를 봐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40대 중반 여성… 남편 그리고 내연남 상식적인 얘기지만 바다나 강에서 발견된 시신은 육지에서 나온 것보다 신원을 파악하기가 훨씬 어렵다. 가장 보편적 방법인 지문감식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 물속에서 붇거나 부패하는 과정에서 형체가 훼손되기 때문이다.경찰은 망자의 손을 수습해 아이스박스에 넣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냈다. 우선 규명해야 할 것은 자살이냐, 타살이냐 여부. 손목 절단이 흉기 등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토막 살해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시신이 온전한 상태로 떠돌다 선박 스크루 등에 의해 절단된 것이라면 타살 외에 자살이나 사고사일 수 있다. 부검 결과, 타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국과수는 “손목 절단면의 전반적인 모양새가 칼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인위적으로 한 일로 보이며 피해자는 여성”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사망자는 누구인가. 물속에서 부패한 손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 통상적으로 익사체나 부패가 진행 중인 시신은 주사기로 시신의 손에 실리콘을 주입해 지문을 떠 내지만 이 시신은 훼손 정도가 심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조사반은 고온처리법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뜨거운 물로 피부를 팽창시켜 숨어 있던 지문을 도드라지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이 기술은 한국의 지문감식 수준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실제로 이 방법은 2004년 동남아 지진해일 참사 때 큰 위력을 발휘했다. 9일 만에 경찰은 지문 채취에 성공했다. 중지에서는 활모양의 궁상문(弓狀紋)이, 약지에서는 말굽모양의 제상문(蹄狀紋)이 확인됐다. 피해자는 당시 44세의 여성 A씨였다. 약 1개월 전 남편 K(당시 47세)씨에 의해 가출 신고가 돼 있었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K씨는 “아내가 9월 15일 직장에 출근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내연남과 살기 위해 집을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A씨의 통화 기록을 조회하자 실제로 한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A씨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미 이혼해 있는 상태였다. 남편 진술의 신빙성에 무게가 더해졌다. 경찰은 내연남에 대한 집중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는 분명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었다. 의심할 만한 대목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수사의 초점은 다시 남편을 향했다. ●아내와의 엽기적인 마지막 눈인사 “그놈과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죠. 걱정도 안 돼요.” 남편 K씨가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는 부인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경찰은 우선 K씨의 아파트 폐쇄회로(CC)TV부터 살펴보기 시작했다. 가출 이후 거의 500시간에 육박하는 녹화분을 샅샅이 뒤졌다. 지루한 녹화 화면과의 전쟁. 전체 분량을 절반쯤 확인했을 때 화면에 남편 K씨와 아내 A씨의 모습이 등장했다. 10월 2일 오전 10시 10분. 그들이 살던 아파트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남편 K씨 진술대로라면 가출 신고 후 부인과 만나는 일은 없었어야 하는 거 아냐? 아무래도 K씨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경찰들은 이쯤에서 용의자가 누구인지 80% 정도 확신하게 됐다. 다시 몇 시간 정도 녹화분을 더 돌리자 등에 뭔가를 짊어지고 혼자 내려오는 남편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큰 이불 보따리였다. 남편은 그걸 자기 승합차에 실었다. 얼마 후에는 검은 비닐봉지와 아내의 핸드백을 갖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포착됐다. 나머지 녹화분에서는 어디에도 부인 A씨가 집을 나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경찰이 남편의 통화 내역을 확인한 결과 범행 이틀 뒤인 4일 남편은 경기 김포 등지를 배회하고 있었다. 김포는 시신의 손목이 발견된 강화도와 가까운 곳이다. 경찰은 그가 아내를 살해하고 이틀 뒤 시신을 버린 것으로 판단하고 남편을 체포했다. 처음에 완강히 범행을 부인하던 K씨는 계속된 추궁과 증거 제시에 결국 모든 것을 실토했다. 바람난 아내와 이혼을 협의하다 홧김에 목 졸라 살해했고 인테리어 가게에서 쓰는 톱과 칼로 집 화장실에서 시신을 토막 낸 뒤 강화대교 밑 바다와 김포대교 밑 강물에 버렸다고 했다. 그는 가출해 내연남과 보름 이상 여행을 떠난 뒤 스스럼없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를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경찰은 나머지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K씨가 죽은 아내의 머리를 자기 인테리어 가게 지하 보일러실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발견했을 때 A씨의 눈은 청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아내가 눈을 뜨고 죽었는데 그 눈과 마주치는 것이 너무 무섭더군요.” 불행한 부부의 마지막 눈 맞춤이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손,살인자를 가리키다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손,살인자를 가리키다

    2006년 10월 11일 오후 3시 인천 강화도의 한 선착장. 주변을 거닐던 관광객이 바다쪽 석축에 걸린 작은 물체를 발견했다. “저게 뭐지? 일반적인 바다 쓰레기 같지는 않은데?.” 왠지 서늘한 느낌이 들었다. 가까이 다가간 그는 자기도 모르게 ‘악~’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잘려진 사람의 손이었다. 바다를 떠돌다 뭍을 만나니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이었을까, 조류에 떠밀려온 가련한 조각 시신은 축대에 기대어 제발 자기를 보아 달라고 애원하고 있었다.   ■ 40대 중반 여성?남편 그리고 내연남 상식적인 얘기지만 바다나 강에서 발견된 시신은 신원을 파악하기가 육지에서 나온 시신보다 훨씬 어렵다. 가장 보편적인 방법인 지문감식도 안되는 경우가 많다. 물 속에서 불거나 부패하는 과정에서 형체가 훼손되기 때문이다. 경찰은 망자의 손을 수습해 아이스박스에 넣어 국립과학수사연구원으로 보냈다. 우선 규명해야 할 것은 자살이냐, 타살이냐 여부. 손목 절단이 흉기 등에 의한 것이라면 그 사람은 토막살해 당했을 가능성이 크다. 반면 시신이 온전한 상태로 떠돌다 선박 스크루 등에 의한 절단된 것이라면 타살 외에 자살이나 사고사일 수 있다. 부검 결과, 타살이라는 결론이 나왔다. 국과원은 “손목 절단면의 전반적인 모양새가 칼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 능숙하게 한 일로 보이며 피해자는 여성”이라고 밝혔다. 그렇다면 사망자는 누구인가. 물 속에서 부패된 손은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지문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익사체나 부패가 진행 중인 사체는 주사기로 시신의 손에 실리콘을 주입해 지문을 떠내지만 이 경우는 훼손 정도가 심해 그마저도 불가능했다. 조사반은 고온처리법에 희망을 걸어 보기로 했다. 뜨거운 물을 통해 피부를 팽창시켜 숨어 있던 지문을 도드라지게 하는 방법이다. 우리나라에서 개발한 이 기술은 한국의 지문감식 수준을 세계적인 반열에 올려놓았다. 실제로 이 방법은 2004년 동남아 지진해일 참사 때 큰 위력을 발휘했다. 9일 만에 경찰은 지문 채취에 성공했다. 중지에서는 활모양의 궁상문(弓狀紋)이, 약지에서는 말굽모양의 제상문(蹄狀紋)이 확인됐다. 피해자는 당시 44세의 여성 A씨였다. 약 1개월 전 남편 K(당시 47세)씨에 의해 가출 신고가 돼 있었다. 인테리어업을 하는 K씨는 “아내가 9월 15일 직장에 출근한 후 돌아오지 않았다.”면서 “내연남과 살기 위해 집을 나간 것으로 생각된다.”고 진술했다. 경찰이 A씨의 통화기록을 조회하자 실제로 한 남자가 등장했다. 그는 A씨와 결혼을 하기 위해 이미 이혼해 있는 상태였다. 남편 진술의 신빙성에 무게가 더해졌다. 경찰은 내연남에 대한 집중 수사에 나섰다. 하지만 모든 면에서 그는 분명한 알리바이를 갖고 있었다. 의심할만한 대목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수사의 초점은 다시 남편을 향했다.   ■ 아내와의 엽기적인 마지막 눈인사 “그놈과 잘 먹고 잘 살고 있겠죠. 걱정도 안 돼요.” 남편 K씨가 퉁명스럽게 내뱉은 말에는 부인에 대한 원망이 가득했다. 경찰은 우선 K씨의 아파트 CCTV부터 뒤지기 시작했다. 가출 이후 거의 500시간에 육박하는 녹화분을 샅샅이 뒤졌다. 지루한 녹화화면과의 전쟁. 전체 분량을 절반쯤 확인했을 때 화면에 남편 K씨와 아내 A씨의 모습이 등장했다. 10월 2일 오전 10시 10분. 그들이 살던 아파트로 올라가는 모습이었다. “남편 K씨 진술대로라면 가출신고 후 부인과는 만나는 난 일은 없었어야 하는 것 아니야? 아무래도 K씨가 뭔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아.” 경찰들은 이쯤에서 용의자가 누구인지 80%쯤 확신하게 됐다. 다시 몇시간 정도 녹화분을 더 돌리자 등에 뭔가를 짊어지고 혼자서 내려오는 남편의 모습이 화면에 나타났다. 큰 이불보따리였다. 남편은 그걸 자기 승합차에 실었다. 얼마 후에는 검은 비닐봉지와 아내의 핸드백을 갖고 돌아다니는 모습도 포착됐다. 나머지 녹화분에서는 어디에도 부인 A씨가 집을 나오는 모습이 나오지 않았다. 경찰이 남편의 통화내역을 확인한 결과 범행 이틀 뒤인 4일 남편은 경기도 김포 등지를 배회하고 있었다. 김포는 시신의 손목이 발견된 강화도와 가까운 곳이었다. 경찰은 그가 아내를 살해하고 이틀 뒤 시신을 버린 것으로 판단한고 남편을 체포했다. 처음에 완강히 범행을 부인하던 K씨는 계속된 추궁과 증거 제시에 결국 모든 것을 실토했다. 바람 난 아내와 이혼을 협의하다 홧김에 목졸라 살해했고 인테리어 가게에서 쓰는 톱과 칼로 집 화장실에서 시신을 토막 낸 뒤 강화대교 밑 바다와 김포대교 밑 강물에 버렸다고 했다. 그는 가출해 내연남과 보름 이상 여행을 떠난 뒤 스스럼 없이 이혼을 요구하는 아내가 죽이고 싶었다고 했다. 경찰은 나머지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K씨가 죽은 아내의 머리를 자기 인테리어점 지하 보일러실에 보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경찰이 발견했을 때 A씨의 눈은 청테이프로 가려져 있었다. “아내가 눈을 뜨고 죽었는데 그 눈과 마주치는 것이 너무 무섭더군요.” 불행한 부부의 마지막 눈맞춤이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서울신문의 주간연재 기획물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에 보내주시는 독자 여러분의 성원과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지난 4월 16일 시작된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시리즈는 굵직한 사건현장을 누빈 베테랑 현장기자의 생생한 경험과 법의학 전문가들의 자문을 바탕으로 구성하는 서울신문의 특화기사입니다. 그동안 연재돼 온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의 목차는 아래와 같습니다. 스크랩해 두시면 한편의 현장 과학수사의 사례집으로 활용하실 수 있을 것입니다. 1) 데이트 강간을 위한 ‘악마의 술잔’ 한모금에 블랙아웃…24시간내 검사 못하면 미제사건 2) 죽음의 性도착증 ‘자기 색정사’ 혼절직전의 성적 쾌감 탐닉…‘질식에 중독되다’ 3) 부인을 죽인 건 오열했던 남편 사고로 위장한 최악의 선택…죽거나 혹은 더 나빠지거나 4) 목졸려 죽은 시신의 ‘마지막 증언’ 운전석 아내 목졸라 살해하고 차는 낭떠러지로… 5) 강간 후 살해된 여성, 그리고 부검의 반전 죽을 때까지 여성이고 싶었던 남성의 사연 6) 긴장한 범인이 현장에 남긴 대변이 결정적 증거를… 초미니 흔적 ‘미세증거물’ 7) 여성 유린 위해 정관수술까지 한 연쇄 성폭행범 ‘씨없는 발바리’ 과학수사 얕봤다가… 8) 핏자국 속 엽기 살인범의 족보 혈흔 속 性염색체로 ‘악마의 姓’ 찾아내다 9) “왜 그날 조폭은 남진의 허벅지를 찔렀나?”… 칼잡이는 당신의 ‘치명적 급소’를 노린다 10) 급성 수분중독으로인한 사망사건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물 많이 마시면 생명 잃는다 11) “너무나 깨끗한 자살현장이 타살을 증명했다” 생활반응은 진실을 알고 있다 12) 불탄 시신의 마지막 호흡…그녀가 아들을 지목하다 화재사망 속 숨어있는 타살흔적 찾기 13) 車 운전석에서 질식해 숨진 그녀의 주먹쥔 양팔 14) “그녀가 성형수술만 안했더라도…” 광대뼈 축소술, 동거男에 목졸린 백골의 한 풀다 15) 연쇄살인범에 당한 20대女…6년만의 대반전 연쇄살인 택시기사, 274만개의 눈 CCTV가… 16) 죽은 여성이 남긴 데스노트…살인자를 지목하다 찢어진 장부가 범인을 증언하다17) 물속에서 떠오른 그녀의 흰손…살인자를 가리키다 바다에서 건진 토막시신의 신원찾기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6) 피살 20대女, 전날 쓴 데스노트에 범인이름이…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6) 피살 20대女, 전날 쓴 데스노트에 범인이름이…

    2003년 12월 6일 오후 9시 30분 서울 용산구 이태원2동. 갑작스러운 한 통의 전화가 겨울밤 파출소의 한적함을 깨운다. “사…사람이 죽었어요. 도와주세요.” 신고인은 외국인이었다. 한국인 여자 친구 A(당시 24세)씨의 주검과 마주친 그는 떨고 있었다. A씨는 엎드린 채 숨져 있었다. 칼에 찔린 복부에서 난 피가 바닥에 흥건했다. 자상의 크기는 1.7㎝로 작은 편이었지만 대동맥을 관통할 정도로 깊게 찔린 것이 치명적이었다. 첫 번째 칼부림은 바로 옆 탁자 아래에서 시작된 듯했다. 탁자 아래엔 비산(飛散·튀어 흩어짐) 혈흔과 적하(滴下·방울져 떨어짐) 혈흔이 섞여 있었다. A씨의 목에는 손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칼로 배를 공격한 후 범인은 확인사살을 하듯 A씨의 목을 다시 누른 것이다. 방어흔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만큼 범행은 순식간에 이뤄졌고 피해자는 반항 한번 못한 채 숨을 거뒀다. ●찢어진 장부… 과학이 뒷장을 드러내다 사건이 발생한 곳은 일반 주택 2층을 개조해 만든 옷 도매가게였다. 주로 아프리카 쪽 바이어를 상대하는 매장은 흔한 입간판 하나 없어 일반인은 전혀 상점이라고 상상할 수 없었다. 탁자엔 바로 전까지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눈 듯 음료수 캔과 비스킷, 거래장부가 놓여 있었다. 선풍기형 난로도 탁자를 향해 있었다. 피해자의 가방과 지갑은 모두 열려 있었고 책상서랍 안에 있던 260만원은 감쪽같이 사라졌다. 문이나 창에 외부 침입 흔적이 전혀 없다는 점 등을 고려해 경찰은 손님을 가장한 강도일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다. 범인이 외국인이라면 수사 과정에서 곤란한 점이 적지 않다. 우선 한국 경찰의 가장 강력한 무기로 꼽히는 지문 자동검색 시스템(AFIS)을 이용할 수 없다. 불법 체류자라면 소재 파악도 쉽지 않다. 그렇게 고민만 깊어갈 즈음 지문 감식을 위해 거래 장부를 조사하던 수사관이 의문을 제기했다. “반장님, 장부 한 장이 비는데요. 5일 자가 없어요.” 더욱 의심스러운 것은 앞장의 글자와 뒷장에 남아 있는 자국이 좀 달라 보인다는 점이었다. 누군가 자신의 흔적이 남은 장부를 찢어버린 것이라는 판단에 경찰은 국립과학수사연구원에 필흔(筆痕) 재생을 의뢰했다. 필흔 재생이란 볼펜이나 연필 등 필기구를 사용할 때 원본 뒤 종이의 눌린 자국을 통해 앞장의 글자를 복원하는 작업을 말한다. 일반적으로 글씨를 쓰면 필기구의 압력이 종이 뒷장에 고스란히 전달된다. 글씨를 쓴 사람이 펜을 얼마나 힘껏 눌렀는지, 필기구가 무엇인지에 따라 다음, 그다음 장까지도 필흔이 남을 수 있다. 통상 볼펜이나 연필은 원본 뒤 셋째 장까지 자국이 남는다. 하지만 사인펜으로 쓴 글씨는 다음 장에서도 흔적을 찾기가 만만치 않다. 사실 자국이라고 말하지만 육안이나 현미경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정도여서 이를 확인하는 데는 고가(3000만원가량)의 특수장비가 필요하다. 국내에서는 주로 영국제 ‘ESDA2’가 쓰인다. 사용 방법은 간단하다. 증거물(눌린 종이)을 기계에 넣은 후 그 위에 랩과 같은 특수필름을 평평하게 깐다. 진공상태에서 기계가 정전기를 발생시키면 필름에는 자연스럽게 글자 모양에 따라 요철이 생긴다. 필름을 15~20도 정도 기울인 상태에서 특수 처리된 흑연가루를 뿌려주면 필름 위에 앞장에 썼던 글자들이 고스란히 나타난다. 다시 사건으로 돌아가 보자. 국과수가 복원한 페이지는 ‘제이’(Jay)라는 손님의 거래 내역서였다. 티셔츠와 바지, 점퍼 등 도합 640만원어치의 물품을 제이가 주문한 것으로 나와 있었다. 수사팀 입장에서 뜻밖의 횡재는 제이의 전화번호였다. 01×-8××-××××. 경찰은 유력한 용의자인 제이를 찾아 나섰다. ●장부 속 고객 ‘제이’를 잡아라 휴대전화 개통자는 나이지리아인 저스틴(당시 31세)이었다. 이태원 나이지리아인 밀집 지역을 탐문 조사한 결과 장부 속 제이는 저스틴과 동일 인물이었다. 제이란 이름은 위조 여권 속 가명이었다. 범인은 불안한 듯했다. 사건 뒤 저스틴의 휴대전화 신호는 이태원 녹사평역에 나타났다가 다시 한남동과 경기 동두천시로 옮겨갔다. 마지막 위치는 나이지리아인 밀집 지역인 안산시의 주택가로 확인됐다. 영장도 없는 상태에서 드넓은 주택가를 모두 뒤질 수는 없는 노릇. 특히 나이지리아인 지역 사회에 잘못 들이닥치면 오히려 경찰이 떴다는 것을 저스틴에게 알려주는 꼴이 될 게 뻔했다. 경찰은 비용 때문에 휴대전화보다는 공중전화를 자주 이용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전화 이용 유형에 착안했다. 인근 공중전화 10군데를 골라 잠복에 나섰다. 그렇게 한 지 3일. 저스틴은 전화를 걸고 나오다 공중전화 앞에서 검거됐다. 저스틴은 묵비권을 행사하며 입을 굳게 닫았다. 하지만 범행을 부인하기에는 증거나 정황이 너무나 분명했다. 우선 현장에 남은 음료수 캔의 지문이 그의 것과 일치했다. 특히 자취방에서 찾아낸 비닐봉지에서 숨진 A씨의 혈흔이 발견되자 그는 죄를 벗기 위한 노력을 완전히 포기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랬다. 저스틴은 범행을 저지르기 14개월 전 코리안 드림을 품고 한국에 들어왔다. 하지만 비자 유효 기간이 만료돼 불법 체류자가 되면서 일자리 찾기가 극도로 어려워졌다. 먹고사는 것 자체가 막막해지자 그는 범행을 결심했다. 맨 먼저 머리에 떠오른 곳은 전에 친구와 들렀던 A씨의 가게였다. 인적이 뜸한 데다 여자들만 있어 강도를 하기도 쉬울 것이라고 판단했다. 저스틴은 자신을 나이지리아에서 온 바이어라고 속이고 범행 전날인 12월 5일 옷가게에 들렀다. 모처럼 온 큰 손님에 반가워하며 A씨가 장부를 적어 나가는 동안 그는 내부구조와 현금의 위치, 도주 경로 등을 살폈다. 돌아오는 길에 마트에서 범행에 쓸 과도도 구입했다. 범행 당일인 6일, A씨가 3시간에 걸쳐 옷에 대해 설명하는 동안 저스틴은 칼을 쓸 타이밍을 노렸다. 그리고 무참하게 범행을 실행에 옮겼다. 가게를 나오는 순간 저스틴의 머리에 불안이 엄습했다. 자기의 전화번호와 이름이 적힌 장부가 떠올랐다. 그는 장부의 마지막 장을 깔끔히 찢어내는 용의주도함으로 범행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 마지막 장은 끝내 그를 스스로 옭아매는 증거가 됐다. 불안은 그렇게 범인의 영혼을 잠식했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 [영화프리뷰] ‘사라의 열쇠’

    [영화프리뷰] ‘사라의 열쇠’

    아무리 똑같은 역사적 사건이라도 다루는 시각과 방법이 다르다면, 영화로서 신선하고 색다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영화 ‘사라의 열쇠’가 그런 경우다. 1942년 독일군 점령하의 프랑스에서 수용소로 끌려간 유대인들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 작품은 그동안 수많은 영화에서 조명한 유대인 학살을 소재로 했지만, 탄탄한 구성과 풍부한 서사로 강한 흡인력을 발휘한다. 영화는 학살과 폭력이 자행된 역사의 비극을 거창하게 열거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사소하고 개인적인 이야기로 풀어나감으로써 묵직한 메시지와 마음의 울림을 전달한다. 프랑스 출신 감독 질레스 파케 브레네는 1942년 비밀을 간직한 열살 소녀 사라와 2009년 그 비밀을 파헤치는 줄리아의 시선을 오가며 역사의 불편한 진실을 이야기한다. 프랑스인과 결혼해 파리에 살고 있는 미국인 기자 줄리아는 남편의 시댁 식구들이 예전에 살았던 파리의 오래된 집으로 이사하기에 앞서 잡지사의 기획 기사로 프랑스에서 있었던 유대인 대량 체포사건을 맡게 된다. 줄리아는 취재를 하던 중 자신이 이사하려는 집이 당시 사건의 희생자인 한 유대인 가족의 집이었다는 사실과 이 가족의 남매 아이들이 생존해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그 흔적을 좇는다. 한편 1942년 7월의 어느 날. 사라는 독일군이 기습적으로 들이닥치자 동생 미셸을 벽장 속에 숨긴 뒤 열쇠를 감춘다. 동생에게 금방 돌아와 꺼내주겠다는 약속을 남긴채 군인들에게 끌려간 사라. 벽장 열쇠를 목숨처럼 지키던 사라는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동생을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수용소에서 탈출을 감행하지만, 역사는 이 어린 소녀에게 깊은 마음의 상처를 남긴다. 이 영화의 매력은 사라와 줄리아의 이야기가 각각 긴장감을 갖고 전개되다가 자연스럽게 하나의 이야기로 합쳐지는 데 있다. 감독은 가족과 모두 헤어진 뒤 혼자 모든 고통을 감내해야 했던 사라의 절망과 자신의 삶이 흔들리는 혼돈 속에서도 진실을 파헤치는 줄리아의 집념을 교차 편집해 보여준다. 시공을 초월한 두 여성의 안타깝고 애처로운 눈빛은 마치 한 사람처럼 닮아 있다. 영화는 잘못된 역사의 비극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지를 보여준다. 잊혀진 진실이 드러날수록 줄리아의 시댁 식구들은 자신들이 관련돼 있다는 사실에 괴로워하고, 사라의 아들도 40년 만에 듣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거짓이라며 외면한다. 하지만, 사라의 남편이 아들에게 “우리는 모두 역사의 산물”이라고 충고하는 장면은 이 영화의 메시지를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영화는 전반적으로 차분하고 어두운 분위기이지만, 마치 퍼즐이 맞춰지는 것처럼 빈틈없이 전개되는 짜임새 있는 구성은 극의 몰입도를 높인다. 줄리아로 분한 연기파 배우 크리스틴 스콧 토머스의 섬세한 내면 연기와 사라의 아역을 맡은 12세 소녀 멜루신 메이얀스의 영민한 연기도 볼 만하다. 오는 11일 개봉. 12세 이상 관람가. 이은주기자 erin@seoul.co.kr
  • 사후생 인정할 때 완성되는 삶

    ‘인간의 도덕이 성립하려면 사후 생의 존재가 요청된다.’ 순수이성비판으로 유명한 독일 철학자 이마누엘 칸트(1724~1804)가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성에 의존한 합리주의의 정점에 있었던 칸트의 사상에선 조금 비켜난 듯한 이 말은 지금의 생이 전부가 아니며 죽음 뒤의 또 다른 생을 인정하는 파격이기도 하다. 언제부터인가 국내에서도 ‘잘 죽는 법’(웰 다잉)에 대한 관심이 늘고 실천의 움직임이 요란하지만 그것은 엄연히 죽음의 순간, 즉 임종까지의 영역에 머물고 있다. 그에 비해 인류는 죽음 이후의 또 다른 생을 알고 대비하기 위한 연구이며 노력을 끊임없이 해온 역사를 갖는다. ‘티베트 사자의 서’며 스베덴보리의 ‘천국과 지옥’은 그 부문에서 걸출한 텍스트로 여겨진다. ‘천국보다 아름다운’ ‘사랑과 영혼’ ‘식스 센스’ ‘디 아더스’ 같은, 죽음 이후의 영역을 다룬 책과 영화가 흥행에 성공한 것을 보면 사후 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고민의 정도가 어떤지를 알 수 있게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관심과 천착의 흔적들은 대부분 종교적, 혹은 집단의 성향에 눌려 객관적이고 실천적인 지침과 가이드로서의 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지 못하는 아쉬움을 남긴다. 그런 점에서 최준식 이화여대 교수가 내놓은 ‘죽음의 미래’(소나무 펴냄)는 사후 생을 인정하고 그것을 준비하기 위한 방법을 소신있게 제시한 독특한 책이다. 사학자이면서 미국 템플대학교 대학원에서 박사학위를 딴 종교학자이기도 한 저자는 한국죽음학회 회장을 맡고 있는, 국내 죽음학 분야의 독보적인 존재. 책은 그간 나왔던 관련 저술이며 학술 논문, 예술작품을 비교해 죽음 직후 가게 된다는 , 영계(靈界)를 중심으로 한 사후 생을 소개하는 구성이다. 이미 발표되고 소개됐던 결과물들이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제시하는 접점들을 요약 정리하고 있지만 죽음학, 특히 사후 생에 대한 그의 학문적 관심과 노력이 녹록지 않음을 보여 준다. 책의 가장 큰 특징은 임종의 순간부터 몸을 벗고 영계에 진입하는 모습, 그리고 영계에서 또 다른 생을 준비해 환생하는 과정을 임사체험이며 최면을 통해 비교적 사실적으로 짚어낸다는 점이다. 영계 또는 사후 세계로 표현되는 죽음 너머의 삶과 그곳에서 어떤 삶을 살아갈지에 대해 안내하는 과정이 흥미롭다. 책에서 또렷이 드러나는 메시지는 역시 ‘사후 세계를 이해해야 지금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완성된다.’는 것이다. “사후 생은 믿음의 문제가 아니라 앎의 문제이며, 앎을 바탕으로 죽음 뒤의 생을 설계하라.” 1만 3000원. 김성호 편집위원 kimus@seoul.co.kr
  •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5) 연쇄살인범에 당한 20대女…6년만의 대반전

    [범죄는 흔적을 남긴다] (15) 연쇄살인범에 당한 20대女…6년만의 대반전

    지난해 3월 28일 오전 10시 대전 대덕산업단지의 북쪽 끝 2차선 도로. 일요일 아침 자전거를 타고 마트로 향하던 외국인 노동자 자하드의 눈에 이상한 물체가 들어왔다. 사람이 바닥에 쓰러져 있는듯 했다. 자전거를 세우고 건물 한쪽 벽면을 살펴보니 젊은 여성이 대형 트럭과 담벼락 사이에 잠자듯 누워 있었다. “술에 취한 여자인가?” 급하게 여성에게 다가간 자하드. 소스라치게 놀랐다. 죽어 있는 게 아닌가. 양쪽 발목이 흰색 노끈으로 단단히 묶여 있었다. 누군가 이 가련한 젊은 여성의 목숨을 끊은 뒤 이곳에 버린 것이었다. ●입만 막은 여성이 질식사하다? 시신은 깨끗했다. 앳된 얼굴의 피살자는 줄무늬 블라우스에 베스트, 검은색 치마를 입고 있었다. 반듯한 옷매무새가 인상적이었다. 전체적으로 사회 초년생의 느낌. 코에는 핏자국이 있었다. 광대뼈와 왼쪽 턱에도 작은 상처가 있었다. 하지만 모두 치명상은 아니었다. 혈흔도 찾을 수 없었다. 여성 피살자들에게 통상 발견되는 목졸림의 흔적 또한 없었다(부검의들에 따르면 살해당한 여성의 90%가 목 졸려 죽는다. 힘이 약한 여성에게 쓰기 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형사들은 범행 현장이 여기가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여성은 등을 바닥에 대고 누워 있었다. 하지만 시반(屍斑·시신의 피부에 나타나는 자주색 반점)은 몸 앞쪽에 나 있었다. 엎드려 있는 상태에서 죽음을 맞았다는 얘기. 정액반응은 나타나지 않았지만, 가슴에서 남성의 타액이 발견됐다. 부검 결과 사인은 비구(鼻口) 폐쇄성 질식사였다. 입가에 테이프 자국이 있는 걸 봐서는 이것이 죽음의 원인임이 분명했다. 하지만 테이프가 코는 빼고 입만 막고 있었는데 왜 질식사를 한 걸까. 해답은 사망 당시의 자세에 있었다. 사람을 납치하면 범인들은 보통 끈을 풀지 못하도록 손을 등 뒤로 묶고 소리가 새어나오지 못하게 입을 막는다. 때론 팔을 묶은 끈으로 다리까지 묶기도 한다. 팔이 뒤로 꺾인 자세가 오래 지속되면 심장박동이 크게 떨어진다. 법의학자들은 이 자세로 오래 방치할 경우 코나 입 어느 하나만으로 숨쉬는 것이 어려워 질식에 이를 수도 있다고 말한다. 게다가 피해 여성은 코에서 난 피가 비강을 막은 게 분명했다. 지문조회 결과 사망자는 충북 청주에 사는 24세 A씨였다. 가족들은 그녀가 집에 돌아오지 않자 가출신고를 한 상태였다. A씨가 죽은 채 발견되기 이틀 전인 26일(금요일) 저녁 청주 남문로에서 회식을 한 뒤 택시를 탄 게 화근이었다. 대학 졸업 후 무수한 입사 도전 끝에 직장에 취직하기 된 그녀였다. 그리고 그녀의 출근 첫째주 휴일을 앞두고 마련된 그녀를 위한 환영 회식이었다. 범인은 그렇게 막 피어나던 꽃망울을 무참하게 꺾어 버렸다. ●범인, 과실치사 적용받으려 술수 형사들은 시신 발견 지점 주변의 폐쇄회로(CC)TV 확인에 나섰다. 먼저 확보한 것은 A씨가 버려진 빌딩 담 위쪽에 설치된 CCTV 화면. 발견 전날인 27일 토요일 저녁 녹화분부터 확인했다. 후미진 곳이긴 해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인데 시신이 며칠 동안이나 방치되기는 어렵다는 판단에서였다. 성과 없이 이어지는 CCTV 화면 탐색에 형사들이 조금씩 지쳐갈 즈음이었다. 모니터의 시간이 오전 1시 30분을 가리키는 순간, 퉁퉁한 체격의 남자가 화면에 등장했다. 차에서 내린 남자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더니 트렁크를 열었다. 뭔가를 급히 꺼냈다. 이미 숨져 있는 A씨였다. 남자는 트럭 옆에 A씨를 버린 뒤 황급히 차를 몰고 떠났다. 화면이 너무 흐려 차량번호는커녕 범인의 이목구비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차종이 흰색 NF쏘나타임은 분명했다. 더 큰 수확은 차 지붕에 택시표지가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경찰은 A씨가 회식을 마치고 탑승한 택시에 대한 수배에 나섰다. 경찰은 CCTV 속 범인이 시신을 유기한 후 다시 청주로 돌아갔을 것으로 판단했다. 그 과정에 반드시 거쳐 갈 수 밖에 없는 노루목을 찾아야 했다. 경찰이 짚은 지점은 현도교. 대전 대덕단지에서 신탄진 나들목(IC)을 거쳐 청주로 넘어가려면 어쩔 수 없이 거치는 곳이었다. 게다가 그곳에는 CCTV도 설치돼 있었다. 범행 당일 오전 1시 30분 이후 다리를 지나간 택시의 수는 모두 67대였다. 경찰은 이중 유독 수상해 보이는 1대에 주목했다. 차 번호를 숨기려 번호판에 반사테이프를 붙인 택시였다. 게다가 앞서 화면에서 본 것과 같은 흰색 NF쏘나타였다. CCTV 화면을 정밀 분석해 알아낸 차량번호는 충북××바××××. 경찰은 청주의 한 택시회사로 형사들을 급파했다. “CCTV에 다 찍혀 있다.” 형사들의 말에 택시기사 안모(41)씨는 순순히 자기 집에서 수갑을 받았다. 자하드의 112 신고가 접수된 지 12시간 만이었다. 택시 운전석 문짝에서는 식칼이, 트렁크 매트에서는 혈흔이 나왔다. 혈흔은 숨진 A씨의 것과 일치했다. A씨를 위협해 빼앗은 7000원도 함께 나왔다. 범인은 “테이프로 입만 막았기 때문에 A씨가 숨은 쉴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주장했다. 성폭행 등 성범죄는 저지르지 않았다고도 했다. 이미 2000년에 감금 및 성폭력 혐의로 3년형을 받고 복역했던 그는 사람의 목숨을 앗아놓고도 어떻게 하면 살인이 아닌, 과실치사만 적용받을까 갖은 술수를 쓰고 있었다. ●잔혹한 살인자… 살기 위해 몸부림치다 “연기군 조천변 살인사건 있잖아요. 이번에 나온 DNA가 그 사건 용의자와 일치해요.” 수사팀에 국립과학수사연구원의 전화가 걸려 왔다. 안씨의 과거 범행이 칡넝쿨처럼 이어져 나왔다. 택시기사를 하며 6년간 살해한 여성이 3명이나 됐다. 2004년 10월 충남 연기군 전동면 조천변 도로에서 발견된 B(당시 23세)씨도, 2009년 9월 청주시 무심천 장평교 아래 하천가에 숨져 있던 C(당시 41세)씨도 그의 손에 희생된 것으로 밝혀졌다. 출소 후 안씨는 그렇게 늦은 밤 택시에 탄 여성을 상대로 살인과 강간, 강도 등의 범행을 이어갔다. 대부분 몸집이 작거나 술을 마신 사람들이었다. 지난해 10월 대전지법 형사합의11부는 안씨에게 사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잔인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고의성을 부인하고, 끊임없이 진술을 번복하는 등 진지하게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고 있다.”면서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피해자와 그 유족들이 겪은 고통 등을 고려해 극형 선고가 불가피하다.”고 판시했다. 국가인권위원회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으로 국내에 설치된 CCTV는 총 274만대로 추정된다. 공공용 24만대, 민간용 250만대다. 현재 CCTV는 인권침해와 범죄예방 효과 사이에서 뜨거운 논란에 휩싸여 있다. 이 사건에서는 CCTV가 자칫 미제사건으로 묻힐 뻔 했던 억울한 죽음들의 한을 풀어준 것과 동시에 추가적인 희생자를 막는 효과를 냈다. 우리사회의 ‘은밀한 감시자’인 CCTV에 대해 어떻게들 생각하시는가.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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