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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종교 고발프로 ‘잇단 수난’충격

    - 상식 깨뜨린 방송중단 사태에 충격 방송사 시사고발프로그램에서 특정 종교를 다루는 것은 엄청난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제작진은 일단 취재에 착수하면 해당 신도들의 빗발치는 항의와 협박 전화는 물론이고,가족들의 신변위협까지 감수해야 한다.이런 현실에서 지난 11일밤 MBC PD수첩 ‘이단파문,이재록 목사’방영에 반발,방송사에 난입해 방송을 중단시킨 만민중앙교회 신도들의 행동은 법이 허용하는 한계와 일반 상식을 여지없이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충격을 주고 있다. ●PD수첩 내용-12일 밤9시55분 방영된 ‘이단파문…’은 이 교회에 몸담았다 이탈한 신도들의 제보로 지난달 16일부터 5월6일까지 20여일간 촬영했다.제작진은 이 목사 주변 인물과 주일예배 등 각종 집회 등의 취재를 통해 이 목사가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면서 기적적인 능력을 과대선전하고,신도들을 보증인으로 내세워 신용대출을 받은 뒤 이를 카지노 등지에서 사용했다는사실을 밝혀냈다.이 과정에서 제작진은 이목사의 입장을 듣기위해 여러차례인터뷰를 시도했지만 묵살당했다.교회측은 지난 4월말 서울지법 남부지원에방송금지가처분신청을 냈고,법원은 방송당일인 지난 11일 오전 성추문 부분을 삭제하라는 조건부 기각결정을 내렸다.이에 따라 성추문과 관련한 15분분량의 내용을 빼고 재편집했다. ●종교문제 다룬 시사프로-지난 3월20일 SBS ‘문성근의 다큐세상-그것이 알고싶다’가 국제크리스천연합(JMS)의 실체를 조명하는 ‘구원의 문인가,타락의 문인가’를 방영,JMS신도들과 마찰을 빚었다.SBS는 당시 JMS측의 항의로방송시기를 2주일 연기했으며,방송후에는 신도들의 집단적인 항의전화로 한달동안 업무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지난해 4월5일 MBC ‘시사매거진 2580-길잃은 목자’도 금란교회 김홍도 목사의 비리를 고발해 신도들의 거센 항의뿐만 아니라 30억원의 소송에 휘말렸다.이 건은 5개월이 지나서야 MBC와 금란교회 양쪽다 더이상 문제삼지 않는선에서 마무리됐다. ●문제점과 대책-먼저 방송사의 주조정실이 수백명의 외부인들에게 점령됨으로써 국가기간시설에 대한 경비체계의 허술함이 그대로 드러났다는 지적이다.방송 3사는 심장부에 해당하는 주조정실의 출입을 나름대로 통제하고 있지만 유사시에 대비,더욱 철저하게 보호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보여준다.하지만 보다 근본적인 것은 방송이 제기한 종교관련 비리에 대해 수사당국이 적극적으로 대처함으로써 신도들이 ‘어떻게 하든 방송에만 안나가도록 하면된다’는 식의 잘못된 판단을 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 [사설]‘MBC난입’의 심각성

    한 특정 종교집단의 MBC 난입사태는 43년 방송사상 초유의 일로 충격과 우려를 금할 수 없다.일시적 기계고장이 아닌 외부 집단의 난입으로 방송이 중단되거나 파행으로 방송이 진행되다니 어느 나라에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지 입이 다물어지지 않는다. 만약 특정 종교단체가 아니고 불순분자로 간주되는 다른 세력이 국가기간 시설망인 방송보안 시스템을 뚫었다고 가정한다면 얼마나 아찔한 일인지 짐작하기 힘들다.더구나 1,000여 신도들이 방송사 로비와 4차선 도로를 점거하고 찬송과 구호로 소란을 피운 행태는 여느 시정잡배만도 못한 어처구니없는소행이 아닐 수 없다.즉각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경찰의 기동력도 점검해볼문제다.한밤중 방송사 주변에 1,000여명이 움직이는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은 이보다 더 큰 불상사를 불러올 수 있다는 낭패감을 준다. 우리는 이번 사건에서 한 종교집단의 목사가 극단적인 신비주의에 빠져있다거나 스스로의 신격화·도박문제 등으로 한국기독교총연합회로부터 이단판정을 받았다는 등의 사생활에 관여할 생각은 없다.그러나 종교집단이 자신의불이익을 은폐하기 위해 방송사에 침입해 난동을 부린 사건과 이를 다스리지 못한 단체장으로서의 무책임은 묵과할 수 없다는 생각이다.지나친 은폐와항의는 오히려 자신들의 부당성을 강하게 긍정하는 일이며 이런 의혹심이 취재의 대상으로 선택된 것으로 분석된다. 종교의 자유가 있듯이 보도의 자유가 보장돼 있는 것이 민주사회다.사회의비리와 부패,불의와 무질서,혹세무민과 폭력 등은 사회정의를 바로 세우기위해 타파해야 할 빼놓을 수 없는 취재대상이다.그러나 하필 종교만이 종교관련 프로그램이든 기사든간에 그때마다 발칵 신경을 곤두세우는 것이 이상하다.만약 신앙심이 투철하고 정당하다면 어떤 내용이나 보도에 전전긍긍할필요가 없을 것이다.차후에 오보와 잘못된 내용에 대해 시정을 요구하거나설명할 기회를 갖는 것이 온당하다. 언론 자유가 보장된 자유민주국가에서 물리적 힘에 의해 국민의 전파가 유린당한 사태는 어떤 사유로도 용서될 수 없다.방송사측도 이번 프로그램이방송가처분신청중에 있으면서신도들의 항의 전화를 받고 있었던 만큼 사전에 충분히 대비했어야 한다.언제나 정당한 것이 유지되고 부당한 것이 투명하게 시정되는 것이 건강한 사회다. 종교인은 언제 어디서나 종교인다운 귀감을 보여야 한다. 이성과 냉정으로 사태를 수습하되 사회질서를 어지럽히는 이런 만행이 다시는 통할 수 없도록 극단에 치달은 행태를 사주한 주모자등 관련자들을 적발해 엄정히 사법처리하는 것이 마땅하다.
  • [제2공화국과 張勉](22)-지지부진한 혁명과업(上)

    장면(張勉)정부는 실로 산더미처럼 쌓인 과제를 짊어지고 출범했다.그 가운데 하나가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남긴 유산을 4월혁명에서 확인된 민의(民意)대로 처리하는 일이었다.이정권이 저지른 정치비리인 ‘6대 사건’과 경제비리인 ‘부정축재자 처벌’이 주요 관심거리였다. 6대 사건이란 ▲4·19 때의 발포 ▲장면부통령 저격 ▲서울·경기도 부정선거 ▲민주당 전복 음모 ▲정치깡패 ▲제3세력 제거 음모 등을 말한다.한결같이 이승만의 장기집권을 노려 국민과 야당을 탄압한 사건들이었다.이와 관련한 재판을 ‘혁명재판’이라고들 불렀다. 혁명재판의 진행은 그러나 순조롭지 못했다.먼저 법리상의 문제가 제기됐다.피고인측 변호사들은 “6월15일 헌법이 개정되었으므로 ‘3·15선거’ 때의 관련법은 효력을 상실했다.따라서 몇몇 피고인은 무죄”라는 논리를 들고나왔다. 이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4월혁명유족회’회원들이 법원에 들어와 규탄데모를 벌이는 등 한바탕 소동이 일었다.그러자 변호사들은 재판이 안전한 상태에서 질서정연하게 진행된다는보장이 없는 한 참석하지 않겠다며 출정을거부했다. 혁명재판은 지지부진했고 민심은 부정선거 원흉들이 그냥 석방되는 게 아닌가 걱정했다.장면정부도 사태 진행을 우려했지만 과거 이승만이 했던 것처럼 법원에 압력을 가하지는 않았다.민주주의 원칙에 따라 사법권을 존중한다는 뜻에서였다.변호사들에게 안전을 보장하겠다고 설득해 법정으로 돌아오게한 것이 고작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재판장 張俊澤부장판사)는 피고인 48명에게 1심형량을 선고했다.검찰이 사형을 구형한 13명 가운데 3명에게만 사형을 언도했고,8명에게는 무죄·공소기각·면소(免訴)판결을 내려 풀어주었다. 이에 앞서 마산지법은 ‘3·15부정선거’피고인들에게 사형 등 중형을 내린 바 있어 서울지법의 ‘경미한’ 판결이 불러일으킨 분노는 더욱 컸다.장판사는 훗날 “국민감정과 동떨어진데다 기존 법의 한계를 보인 판결이지만 증거에 따라 당시 법대로만 판결했다”고 밝힌다. 온유하기로 유명한 장면도 이 판결에는 크게 화를 냈다.그는 회고록에서 “나 자신도 분격했다.법조문에 의한 공정한 판결이었을지는 모르나 국민감정에 미치는 영향도 참작했어야 할 것이다.적어도 혁명재판이라는 성격을 띠었다면 말이다.여하간 평상시의 법조문에 의한 것으로도 너무 가벼운 형이었다”고 술회했다. 전국적으로 벌떼와 같은 시위가 벌어지고 3일 후 4·19 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하는 사건이 터지면서 분위기는 급변한다.소급입법으로 특별법을 제정해서라도 피고인들을 엄중 처벌하라는 여론이 불길처럼 일어난 것이다. 민의원은 10월13일 ‘민주반역자에 대한 형사사건 임시처리법’을 서둘러통과시켰다.주요 내용은 ▲특별입법을 할 때까지 재판을 중단하고 ▲관련 피고인들에게는 구속기간을 제한하지 않으며 ▲재판에서 석방되더라도 즉시 재구속한다는 것이었다. 특별입법을 전제로 한 ‘임시처리법’이 통과된 뒤 소급입법을 위한 개헌논의가 핫 이슈로 떠올랐다.총리로서 장면은 이를 거부한다.보복을 목적으로한 소급입법은 정치도의상 도저히 있을 수 없다는 신념 때문이었다.대신 현행법에서 가장 무거운 벌을 받도록 하는 방안을 강구했다. 장면은 민주당 의원들이 소급입법을 놓고 최종 토론을 벌인 현장에서도 강력히 반대했다.심지어 “소급법을 고집한다면 나는 당을 떠날지도 모르겠다”고까지 굳은 결심을 보였다.그렇지만 소급법은 결국 제정되고,장면은 회고록에서 “격렬한 국민감정과 지배적인 공기로 보아서는 이를 안 할 도리가없을만큼 험악했다”면서 “소급법이 가능하게 된 점을 부끄럽게 여긴다”고 심정을 밝혔다. 장면이 자기 주장을 관철하지 못한 원인은 신·구파 갈등과 소장파 반발 등으로 안정된 의석수를 확보하지 못한 데 있었다.민주당 구파는 이미 분당작업에 들어갔고 소장파도 공공연하게 정부 정책을 비판했다. 결국 민주당 신·구파로 이루어진 제2공화국 행정부와 의회는 사회적 압력에 대단히 취약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장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소급입법은 구파의 주도 아래 차근차근 진행됐다.민의원은 10월17일 헌법 개정안을 발의해 11월23일 통과시켰다.투표에 참석한 200명 가운데 191명이 찬표를 던졌다.부정선거관련자·반민주행위자의 공민권을 제한하고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소급입법을 할 수 있으며,이를 맡을 특별재판부·특별검찰부를 설치한다는 내용이었다. 후속조치로 부정선거관련자 처벌법,반민주행위자 공민권제한법,특별재판소및 특별검찰청 조직법이 잇따라 연내에 제정됐고 부정축재 특별처리법만 61년 4월 공포됐다. 특별재판소는 61년 1월25일 5개 심판부를 구성,전국 각지의 법원이 맡던 관련사건을 이송받아 구체적인 활동에 들어갔다.이 가운데 제1심판부(재판장桂昌業대법관)는 4월17일 부정선거 사건 피고인들에게 선고를 내렸다.최인규(崔仁圭)전내무장관에게는 구형대로 사형을,이강학(李康學)전치안국장에게징역 15년,이성우(李成雨)전내무장관에게 징역 7년,최병환(崔炳煥)전내무부지방국장에게는 징역 5년을 각각 언도했다. 소급입법은 이후 두차례 더 등장한다.박정희(朴正熙)가 만든 ‘정치활동정화법’과 전두환(全斗煥)의 ‘정치풍토쇄신특별법’이 그것이다.둘 다 구정치인의 정치활동을 일정기간 제한하는 법이었고,제2공화국에서 소급법을 제정한 당사자들이주로 대상에 들었다.이용원기자 ywyi@-실패한 許政과도정부 4월혁명이 난 뒤 장면(張勉)정부가 들어서기까지는 넉달이 소요됐다.그 넉달 동안 혁명과업의 첫 처리를 맡은 정치 주체가 허정(許政)과도정부이다. 허정정부는 이름 그대로 과도기에 한시적으로 존재했고 따라서 역사·사회발전에 큰 구실을 하리라는 기대와는 거리가 있는 정권이다.그렇지만 이승만(李承晩)정권이라는 구체제가 무너지고 처음 등장한 정권이라는 점에서,어차피 4월혁명이 제기한 갖가지 혁명적 요구를 수행해야 할 임무를 부여받은 것도 사실이다. 허정정부에 대한 정치학자들의 평가는 대체로 ‘실패했다’는 쪽으로 모아진다.“실제 과도정부가 행한 역할은 스스로 천명한 원칙에도 훨씬 미치지못했다“(孫浩哲 서강대교수 등)고 본다.그 이유는 “4·19 취지에 의거해구체제와의 단절을 제도화할 수 있도록 과도정부 자신과 민주당,그리고 4·19혁명에 참여한 중요한 지식인 및 사회세력의 대표들이 참여하는 개혁을 위한 타협의 장을 마련하지 못했기 때문”(崔章集 고려대교수)이다.그 결과 “후계정권(장면정부)에게 제한된 행동의 자유를 가지고 ‘혁명’을 수행해야하는 어려운 숙제를 남겨주었다.”(韓昇洲 고려대교수)허정은 서울 각대학 교수들이 시위를 벌인 1960년 4월25일 외무장관에 임명된다.이틀 뒤 이승만이 하야하자 그는 대통령직을 대행하게 된다.대통령승계권을 가진 장면부통령이 4월23일 이미 사임했기 때문이다. 과도정부의 내각수반이 된 허정은 각료진 구성을 마치고 5월3일 ‘5대 시책’을 발표한다.‘반공정책을 한층 더 견실하게 전진시키는 것’을 비롯해▲부정선거 처벌대상은 고위책임자와 잔학행위를 한 자에 국한하고 ▲혁명적 정치개혁을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단행하며 ▲4월혁명에서의 미국의 역할을 ‘내정간섭’운운하는 것은 이적행위로 간주하고 ▲한·일관계 정상화를위해 노력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는 “전 국민이 이 시기에 위대한 관용을 보이고 그 정력의 전부를 국가의 부강과 국민 공익에 기울여야 한다”고 호소해 정치보복에 대한 예방조치를 취했다.한마디로 “최소한의 정책변화를통해 현상유지를 담보하는 정책”(최장집)을 편 것이다. 이같은 기본원칙은 각 부문에 그대로 적용됐다.먼저 ‘3·15부정선거’등정치비리 관련자 처리를 이승만정권 때부터 유지된 법원·검찰에 맡겼다.이때문에 ‘혁명재판’성격은 사라지고 국민감정이 용납못할 판결이 잇따랐다. 서울지법 형사1부의 10월8일 선고가 대표적인 예이다.“공판은 장면이 이끄는 다음 정부로 넘겨졌으며,장면정권에게는 심각한 고민거리의 원인이 되었다”(한승주)‘부정축재자 처벌’도 마찬가지였다.과도정부는 출범 직후부터 처벌 의지를 여러차례 공표했지만 명백히 ‘축소지향적’이었다.6월 1∼20일을 부정축재 자수기간으로 정했고,7월2일에는 허정이 “부정재산을 정부에 반환하면 형사책임을 감면하겠다”고 밝혔다.사흘뒤 부정축재 1차 조사대상자로 기업인18명,기업체 61사를 공개했다. 결국 과도정부에서는 몇몇 사람이 부정축재 사실을 자진 발표하고 축재분을 사회에 환원하는 것으로 그쳤다.장면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과도정부는 부정축재자를 처벌하는 실질적인 행동을 하지 않았다. 이밖에 ▲고위장성의 반발을 두려워해 군 개혁을 외면했고 ▲민원(民怨)의 대상인 경찰을 민주화하는 방안도 자리바꿈을 하는 정도에 그쳤다. 허정과도정부는 ‘비혁명적인 방법으로 혁명과업을 수행한다’는 슬로건을내세웠지만 결과는 “사회 내 어떤 부문도 다치게 하지 않으려는 무능과 무작위 탓으로 장면이 이끄는 그후의 정권에 심각한 영향을 주고”(한승주)말았다.이용원기자
  • 친 印尼계 민병대 동티모르 주민30명 살해

    딜리(동티모르) AFP AP 연합 친 인도네시아계 무장 민병대가 17일 동티모르주 주도 딜리에서 약탈을 자행하며 폭력을 휘둘러 동티모르의 독립을 지지하는 주민 30명을 살해했다고 소식통들이 전했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동티모르 독립에 반대하는 무장민병대 3,000여 명은 이날 오전 집회를 마친 뒤 25대의 트럭을 앞세우고 딜리 시내를 행진하면서 공중에 발포하고 독립 지지자들의 주택을 습격하는 등 광란의 폭력을 연출했다. 이들은 일간지 ‘동티모르의 소리’,인권관계 사무실,독립운동 지도자 마누엘 카라스칼라오의 주택 등에 난입했는데 특히 카라스칼라오의 집 뒷뜰에 있던 비무장난민 150명중 20명 정도를 살해했다고 목격자들은 전했다.
  • [제2공화국과 張勉](15)분출하는 욕구(下)/기고

    1961년 2월4일 장면(張勉)총리는 반도호텔에서 열린 관훈클럽 창립4주년 기념모임에 초청받아 ‘언론의 자유와 그 책임’을 주제로 강연한다. 장면은 “약간 과장해서 말하면”이라고 전제한 뒤 “북한 괴뢰의 앞잡이들이 ‘조선인민보’나 ‘해방일보’를 발행하겠다고 등록신청을 해도 막을 도리가 없을 만큼 완전한 언론출판의 자유가 허용되고 있다”고 밝혔다.그러면서 ‘무책임하고’ ‘사실을 의도적으로 왜곡하며’ ‘독선적인’ 언론이 횡행하는 현실을 우려했다. 장면은 “자유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압제에 반대해야 하는 것과 같이,자유가 자유 그 자체를 파괴하도록 방임해서도 안된다”는 말로 연설을 끝맺었다.무절제한 언론에 대한 이 경고를,관훈클럽은 훗날 발간한 ‘40년사’에서“언론에 경종을 울리는 진지하고도 의미심장한 내용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승만(李承晩)독재권력을 무너뜨리는 데 신문은 학생세력·민주당과 더불어 일등공신 노릇을 했다.자유당 정권은,비록 그후의 박정희(朴正熙)·전두환(全斗煥)시대만큼 가혹하지는 않았지만그래도 독재체제를 유지하고자 언론에 대해 탄압을 거듭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1959년 4월30일 경향신문을 폐간시킨 것이다.가톨릭계인 경향신문은 그 무렵 자유당 정권에 가장 비판적이었으며 장면이 대표하는 민주당 신파를 지지했다.따라서 60년 정·부통령선거를 앞두고 몇가지 꼬투리를 잡아 경향신문에 철퇴를 가했다. 그러나 도하 각 신문은 이에 굴하지 않고 자유당 정권의 비정(秕政)과 ‘3·15 부정선거’,그리고 이에 따른 학생·시민의 항거를 끊임없이 보도했다. 따라서 4월혁명후 언론은 명실공히 입법·사법·행정에 못잖은 ‘제4부’로떠올라 그 힘은 역사상 어느 때보다 강력했다. 언론계의 변화는 먼저 양적인 팽창으로 나타났다.1960년 3월31일 현재 국무원 사무처에 등록된 각종 정기간행물의 숫자는 그 변화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일간신문은 4·19 전의 41종에서 112종으로,일간통신은 14가지에서 274가지로,주간신문은 136종에서 476종으로 급격히 늘어났다.그야말로 ‘사무실 한평에 등사판 하나만 갖추면 통신사 간판을 내걸고 실업자 서너명만 모으면신문사 간판을 내걸 수 있는’시절이었다. 언론사가 급증하자 사이비기자가 판친 것은 당연한 귀결이었고 이에 따라강경·논산 등 일부 지역에서는 주민들이 “사이비기자 물러가라”며 데모하기도 했다.한국일보가 1961년 2월 말 연재한 ‘기자가 취재한 기자군(記者群)-공갈기자’시리즈를 보면 그들의 성분과 폐해를 짐작할 만하다. “‘공갈기자’와 ‘진드기기자’들에게는 전직이 있다.…연무대 주변에서진을 친 이들의 대부분은 전직이 헌병대 문관 아니면 형사,또는 CIC군관,이밖에 퇴역군인이다.그래서인지 ‘진드기기자’들의 취재 태도는 이미 일어난 사건을 그대로 보고듣는 것이 아니고 드러나지 않은 범죄를 탐색하고 사람을 취조하는-말하자면 ‘범죄수사’를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 전통있는 언론사야 행태가 물론 달랐지만 그들 역시 정부 시책을 사사건건물고 늘어져 비난하는 것을 신문의 의무로 아는 듯했다.당시 언론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있다. ‘3·15 부정선거’의 주범 가운데 하나인 자유당 간부장경근(張暻根)이입원중인 병원을 탈출,일본으로 밀항한 사건이 발생한다.이에 서울일일신문은 “면이와 경근이 때문에 창피해서”라는 설명과 함께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사람을 그린 만평을 실었다.‘장씨 종친회’라는 제목의 이 만평은 국무총리 장면과 부정선거 혐의로 구속된 장경근을 한데 엮어 비난한 것이었다. 장총리의 공보비서관인 송원영(宋元英)이 서울일일신문의 이관구(李寬求)사장을 찾아가 항의하니 이사장도 “이건 너무했다”면서 윤전기를 멈추고 만평을 뺐다고 한다(송원영 회고록에서). 경향신문 정치부장으로 있다 바로 공보비서관이 된 송원영은 “모든 매스컴이 장면정권을 두들겨팼다.마치 언론자유는 장정권을 타도함으로써 완성되는 것처럼”이라고 회고했다. 한편 신문이 보도 면에서 신중과 자제를 잃어(宋建鎬 표현) 독자들에게 수난을 당하는 사태도 자주 일어났다.부산일보는 동아대 학생들의 습격을 받아 20일동안 휴간했으며,한국일보는 ‘혁명전야’라는 연재소설에서 작가 정비석(鄭飛石)이 연세대생을 모욕했다는 항의를 받자 연재를 중단했다.박태선(朴泰善)장로교회 신도 수천명이 대낮에 동아일보 사옥에 침입,난동을 부린일도 있었다. 장면정부는 언론의 이런 태도를 매우 못마땅하게 여겼으나 설득하는 이외의 방법은 쓰지 않았다.장면정부의 언론 주무장관인 정헌주(鄭憲柱) 국무원 사무처장은 “심지어는 없는 사실도 만들어서 쓰곤 했지만 그래도 정부로서는‘시간이 흐르면 스스로 자리를 잡겠지’하는 생각에서 일체 간섭을 하지 않았다”고 밝혔다.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언론도 세월이 흐르면 책임을 깨닫고 스스로 바로 설 것이라는 그 자율기능을 믿은 것이다. 장면정부는 오히려 언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려고 애썼다.가끔 ‘대통령 유시’나 발표하고 기자회견은 1년에 한 두차례 하는데 그쳤던 이승만과는 달리 기자회견을 매주 한차례 정례화했다.그럴 때면 전 각료를 동원하다시피해 갖가지 질문에 답했다. 또 KBS라디오를 통해 ‘주례 국정보고’도 방송했다.매주 토요일 오후 7시30분에 시작한 이 방송에서 장면은 민주당 정부의 방침을 국민들에게 설득조로 이야기했다. 4월혁명을 이룰 때까지 민주당과 신문은 ‘동지’였다.그러나 장면정부가들어서자 어제의 동지는 ‘적’으로 돌변했다.5·16쿠데타후 신문은 장면정부를 망친 ‘3신(新·신문,민주당 구파가 분당한 신민당,신파 소장파 모임인 신풍회)’ 가운데 하나로 인구에 회자됐고 군사정권 아래서 모든 자유를 빼앗겼다. 이용원기자 ywyi@[기고] 언론자유 수호 自淨운동 싹 틔워4·19로 이승만(李承晩)정권이 무너진 후 한국 언론은 비로소 자유를 누릴수 있게 됐다.정부의 언론에 대한 간섭과 통제가 급격히 사라졌고,언론 스스로도 과거의 잘못을 청산하려고 노력했다. 허정(許政)과도정부는 1960년 7월1일 법률 제553호로서 ‘신문 및 정당 등의 등록에 관한 법률’을 공포했다.이로써 허가제를 규정한 미 군정법령 88호는 폐지됐고,이제 등록만 하면 누구나 정기간행물을 발행할 수 있게 됐다. 또한 과거 대통령 직속의 독립된 부서였던 공보실이 폐지됐고,국가보안법과선거법에 삽입된 언론통제 조항도 삭제됐다. 민주당 정권이 들어선 이후에도 한동안 언론은 과거와는 비교도 안될 만큼자유를 누렸다.그러나 갑자기 언론자유가 주어지자 우후죽순처럼 정기간행물이 쏟아져 나와 일간지나 주간지가 4·19 전에 비해 3배 가량 늘어날 정도가 되면서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들로 인한 폐단도 적지 않게 드러났다. 한편 1960년 5월 부산을 시작으로 하여 대구·서울 등지의 여러 신문사에서 노조가 차례로 결성됐고,KBS도 ‘방송중립화 운동’을 펼쳐 공정방송을 위해 노력하기도 했다.그리고 1961년 2월13일에는 일본 거류민단계의 조용수(趙鏞壽)가 중심이 되고 국내 혁신계 인사인 송지영(宋志英) 윤길중(尹吉重)고정훈(高貞勳) 등이 참여한 민족일보가 창간되어 혁신계 세력을 대변하게됐다. 이런 가운데 자신들에 관한 보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독자들이 신문에 대해 항의시위나 난입,그리고 불매운동을 벌이는 일도 생겼다.이같은 사태는 무책임하고 부정확한 보도를 한 언론에 일차적인 책임이 있지만,물리력을 동원해서라도 자신들에게 불리한 기사를 막으려고 한 일부 독자들의 잘못된 의식도 작용한 결과였다. 이렇듯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언론자유가 급격히 신장됐지만,언론자유는점차로 제약되는 경향을 보였다.집권 이후 국민들의 요구를 제대로 충족시키지 못한 민주당 정권은 언론규제 장치로 ‘외국 정기간행물 국내 배포에 관한 법률안’을 만들었다.이것은 신문이 등록제로 대체되면서 폐기된 미군정법령 88호중 제5조만 유효하다는 유권해석과 함께 그것을 대신하는 법령으로 만들어낸 것이었다. 또한 창간되기도 전에 민족일보에 대해 국회에서 조총련계 자금으로 제작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논란도 있었다.창간 이후 민족일보는 서울신문 공무국에서 제작됐는데,민주당 정권은 61년 3월 초에 서울신문에 압력을 가하여 이 신문의 조판과 인쇄를 하지 못하도록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이런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민주당 정권이 직접 언론에 대해 적극적인 개입과 통제를 하지는 않았기 때문에 여전히 언론자유는 대체로 보장된 편이었다.또한 ‘신문망국론’이라는 비난이 나올 정도로 심각하던 사이비 언론과 사이비 언론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론계가 스스로 나서기 시작하였다. 제2공화국 시기는 한국에서 제대로 된 언론자유가 처음으로 허용됐고 또 이를 정착시키고 발전시키기 위한 언론계 스스로의 노력도 시작됐다는 점에서역사적 의의가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보장된 언론자유를 지키고 언론을 발전시키기 위한 자율적인 노력이 결실을 맺기도 전에 5·16쿠데타가 터졌다.5·16 이후 언론자유는말살되고,언론은 정권의 통제와 특혜 속에 제 몫을 하지 못하며 기업적 성장에만 집착하게 됐다. [박용규 상지대 교수·신문학]
  • [제2공화국과 張勉](13)분출하는 욕구(上) /사형수 편지

    ‘혁명은 독한 술과 같다’던가. 4월혁명 후 한국사회는 용광로처럼 들끓었다.李承晩독재정권을 무너뜨린 학생·시민은 제각각 품고 있던 기대와 욕구를 마음껏 뿜어냈다.남자나 여자,노인과 아이 가릴 것 없이 모두들 시위에 나서 목청을 높였다.그것은 어쩌면스스로 자유를 쟁취한 자의 권리행사였다. ‘데모로 해가 뜨고 데모로 해가 진다’고들 말한 張勉정부 8개월여.그때일어난 데모 중에는 지금도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사례들이 있었다. 초등학생들이 ‘교사전근 반대’를 내세워,또 ‘어른들은 이제 데모를 그만 하라’고 요구하며 각각 데모하는가 하면 경찰관들은 국회의원이 경찰관의따귀를 때렸다고 시위를 벌였다.군인도 예외는 아니었다.논산훈련소에서는정훈부 사병들이 “宋모중령이 우리를 머슴처럼 부려먹는다”고 항의데모를벌이려고 해 장교들이 가까스로 저지한 일도 있었다. 그렇다고 이 시기의 데모가 모두 무절제하고 이기적인 것만은 아니었다.많은 부분은 자유당 독재정권의 유산을 청산하는 일과 관련이 있었다.6·25 때의 양민학살사건 진상을 밝혀달라는 요구가 대표적인 예다. 1960년 5월11일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서는 주민 70여명이 朴모씨를 불태워죽이는 처참한 사건이 일어났다.51년 이 지역에서 양민학살이 있었는데 당시 면장이던 朴씨가 주민들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했다는 유족들의 불만이 폭발한 것이다.사건발생 후 경찰이 출동했지만 오히려 주민들에게 매를 맞고 쫓겨났다. 이 사건을 계기로 곳곳에서 양민학살 사건의 진상을 파헤쳐달라는 요구가빗발쳤고 이에 따라 국회 특별조사위원회가 구성돼 직접 조사에 나섰다.그결과 신원면에서는 51년 봄 3개 부락 주민 600여명이 빨갱이로 몰려 金宗元이 지휘하는 화랑부대에게 학살당한 사실이 밝혀졌다. 이때 국회조사반이 파악한 6·25 당시의 양민 피살자는 경남 2,892명,경북2,200명,전남 524명,전북 1,028명,제주 1,878명 등이었다. 張勉정부 하에서의 가장 충격적인 시위사태는 60년 10월11일 발생했다.‘4월혁명유족회’회원을 비롯한 시민·학생 수천명이 민의원에 난입한 것이다. 그 원인은 4·19 때의 발포자,3·15 부정선거 관련자,정치깡패 등 4월혁명을 불러 일으킨 범죄자들에 대한 법원 판결이 너무 미약했기 때문이었다. 10월8일 서울지법 형사1부는 피고인들에게 1심 형량을 선고했다.발포건과관련해서는 柳忠烈 당시 서울시경국장에게만 검찰 구형대로 사형을 언도했을 뿐 역시 사형이 구형된 洪璡基내무장관에게는 징역 9월이,郭永周 대통령경호관에게는 징역 3년이 각각 떨어졌다.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무죄 또는 징역 8월∼5년이 언도됐다. 민심은 크게 격앙했다.서울을 비롯해 부산 대구 마산 등 전국 각지에서 재판부를 규탄하는 데모가 잇따르다가 급기야는 10월11일 내각책임제 권력의심장부인 민의원을 강타한 것이다. 국회 난입에는 환자복에 목발을 짚은 4·19 부상자 50여명이 앞장섰다.이들은 본회의장으로 몰려가 의사진행을 중단시켰다.그들은 “하루빨리 혁명입법을 완성하라”고 요구했으며 민주당 의원들에게는 “신·구파가 싸우지 말고 화합하라”고 강요했다.이에 구파의 金度演과 신파의 林文碩,구파의 徐範錫과 신파의 李哲承이 억지로 악수를 나누는해프닝이 벌어졌다. 그 상황을 郭尙勳 민의원의장은 회고록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당시 부상학생의 위세가 당당하여 마치 부상학생들의 천하와 같은 감이들었고 아무도 감히 이를 제지하지 못했다.…‘정권을 우리가 주었는데’하는 생각은 ‘부상학생 천하제일'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국회에 경호권을발동하여 한번 크게 호령을 해줄 생각도 없지 않았으나…그들의 항의방법이너무도 졸렬하여 그만 자신을 잃어버렸다”거듭되는 데모로 사회는 불안정하고 정부의 권위마저 땅에 떨어진 듯한 이같은 상태,훗날 ‘무능하다’는 비판의 근거로 제시된 이 상황을 張勉정부는어떻게 판단하고 있었을까. 張勉의 뜻은 “국민이 열망하던 자유를 한번 주어보자”는 데 있었다(회고록에서 인용).그는 “오랫동안 자유당정권 하에서 억눌렸던 국민이 자유가허락된 이때에 쌓이고 쌓였던 울분을 한번은 마음껏 발산시키고 나서야 가라앉을 것은 어쩔 수 없는 뻔한 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굳은 신념이 작용했음도 물론이다.張勉은 “귀와 입으로배운 자유를 몸으로 배우게 하려는 의도”였는데 이는 “이론과 학설로 배운 자유는 혼란을 일으키지만 경험으로 체득한 자유는 진정한 민주주의의 초석이 되기 때문”이었다.결국 張勉은 “자유가 베푼 혼란과 부작용에 스스로혐오를 느낄 때 비로소 진실한 자유를 얻는다”는 신념을 실천하고 있었다. 張총리 의전비서관을 지낸 李泓烈(77)은 4·19부상자들이 민의원에 난입한사건 직후 비서관들이 “비상대책기구를 구성하는 게 어떻겠느냐”고 조심스레 건의했다고 기억했다.자신을 비롯해 宋元英공보비서관,정보담당인 해군尹대령 등이 시국을 걱정하다 張총리도 비상사태에 대비하는 별도기구를 직속으로 갖고 있어야 한다는 데 뜻을 모았다고 한다. 이에 자신이 비서진을 대표해 말했더니 張총리가 “泓烈군,무슨 소리야.민주적인 행정을 하자고 투쟁을 해서 총리가 된 것 아닌가.비상수단을 꼭 써야한다면 내가 이 자리에서 물러날 거야”라고 안색을 바꾸며 꾸짖더라는 것. 張勉과 그의 정부가 믿은 것은 시간이었다.세월이 지나 혁명의 흥분이 가라앉으면국민은 무절제한 자유가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가를 깨닫겠지,그리고그 자각(自覺) 위에서 진정한 민주주의는 꽃필 것이라고 기대했다.실제로 1961년에 접어들자 데모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다.5·16의 총성이 울려퍼지기전까지 張勉정부의 교과서적인 민주주의는 꽃망울을 맺어가고 있었다. - 張勉 저격 共謀 사형수 편지 첫 공개 張勉의 인품과 인간사랑의 깊이를 보여주는 편지 2통이 8일 공개됐다.그의맏아들인 張震 서강대 명예교수 부부가 최근 유품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이 편지들은 한때 그의 목숨을 노린 崔勳이 1965∼66년에 걸쳐 보낸 것이다. 崔勳은 1956년 9월28일 민주당 전당대회장에서 벌어진 ‘張勉부통령 저격사건’의 범인으로 대법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3명 가운데 하나이다.현장에서 張勉에게 직접 권총을 쏜 金相鵬과,金에게 권총을 마련해준 李德信(당시 성동경찰서 사찰계 형사주임) 사이를 연결해준 것이 崔勳이었다. 65년 7월27일자 소인이 찍힌 첫 편지에서 崔는 張勉에의 존경심과 고마움을 절절히 토해냈다.그는 “진작 편지를 올릴 마음 간절하였으나 침묵을 지키는 것이 박사님의 쓰라린 상처를 위로해드리는 일일 것이라는 어리석은 마음에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고 밝히고 “은혜를 못잊어 조석으로 박사님을위해 기원하는 한 생명이 이 땅 지붕 아래 살고 있다는 점만은 알려드리고싶었다”고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는 張勉총리가 60년 10월1일 감형을 해줘 사형을 면한 일,그해 12월에는 직접 교도소를 방문해 털내의를 건네준 덕에 따뜻하게 겨울을 난 일들을 기억했다. 崔는 “박사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사상을 시범하신 사도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서 “박사님이 ‘그대의 죄를 전부 사해주노라’라는 말씀을 친히 들려주실 날이 오기를 간망(懇望)한다”고 기원했다. 張勉은 崔勳에게 바로 답장해 두 사람 사이에는 편지가 여러차례 오갔고,그 편지에서 張勉은 가톨릭에 귀의하도록 권유한 것으로 보인다.현재 남아 있는 두번째 편지(66년 1월9일자 소인)에 이를 알려주는 구절들이 나온다. 새해인사를 겸해보낸 이 서신에서 崔勳은 “박사님의 편지를 받은 후 반년 이상이나 신중히 생각한 결과로 근방의 주임신부님을 곧 만나게 될 것”이라고 가톨릭에 입문할 결심임을 알렸다.이어 “영세를 받기까지는 자주 편지를 올리지 못하더라도 오해 마시기 바라며 그러는 것이 박사님의 심경에 위로를 드리는 것이라는 졸렬한 생각에서”라고 밝혔다. 張勉과 崔勳 사이에 오간 편지는 이 두 통밖에 남아 있지 않다.둘 다 우편봉함엽서이며,‘대구시 삼덕동 82의 1’에 사는 崔勳이 서울 명륜동 張勉의자택으로 보낸 것이다. 崔勳이 편지를 보낸 시점은 張勉이 5·16쿠데타로 정권을 탈취당한 지 4년이 지난 때였다.張勉이 정계에서 완전 은퇴해 자택에서 가톨릭 서적을 번역하는 데 몰두한 시절이다.따라서 崔勳의 편지는 순수하게 인간적인 존경심과 그리움을 담고 있을 뿐 다른 의도는 전혀 엿보이지 않는다. 국무총리로서 국정의 최고책임을 맡았던 정치가,한때 그를 암살하려다 체포돼 사형이 확정됐던 사형수.역사의 현장에서 벗어나 둘만이 나눈 대화는 張勉을 가까이서‘모신’ 어느 누구의 증언보다도 張勉의 인간적인 면모를 진솔하게 들려준다.그 귀한 ‘증언’이 가족도 모르게 30여년을 숨어지내다 올해 ‘張勉 탄신 100주년’을 맞아 세인 앞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한편 張勉에게 총을 쏜 金相鵬은 복역을 마치고 나와 목사가 되었다.金목사는 지난 87년 張勉의 셋째아들인 張益주교(춘천교구장)를 만나 ‘위대한 인격자 張勉’을 함께 회고했다. 李容遠
  • 수배자 애인 자취방에 도청장치라니…

    수배자 애인의 자취방에서 도청 장치가 발견됐다는 기사를 보며 같은 여자 로서 경악과 분노를 금할 길이 없다. 첫째 피해 당사자에게 평생 씻을 수 없는 치욕을 심어주었다.여자 혼자 생 활하는 자취방에 불법적으로 난입해 도청 장치를 설치해 놓고 일거수 일투족 을 엿듣고 있었으리라 생각하면 온 몸에 소름이 끼친다.둘째 김모 학생과 그 의 애인의 순수한 애정을 더럽혔다. 수배중인 애인을 둔 당사자의 마음은 얼마나 애틋할 것인가.셋째 학생운동에 대한 비윤리적인 탄압의 양상은 바로 그 탄압 자체가 정당하지 않음을 명백 히 보여주고 있다.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일을 자행하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다 . 더 큰 문제는 이번 사건이 단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지금도 곳곳에서 불법 도청을 비롯해 심각한 인권침해가 저질러지고 있다. 이러한 비윤리적이고 비이성적인 행태는 하루빨리 근절돼야 한다. 김철민[나우누리 ID꽃들]
  • 오늘의 헤드라인-’529호실 사태’ 여야 공방

    국회는 14일 오후 본회의를 열어 金鍾泌국무총리와 朴相千법무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국회 529호실 사태’와 관련한 긴급현안질문을 벌였다. 여당의원들은 질의에서 이번 사건을 국가 법질서에 대한 중대한 훼손행위로 규정,먼저 한나라당의 사과를 요구했다.반면 한나라당 의원들은 안기부의정치사찰 행위가 백일하에 드러났다며 대통령의 시인·사과 및 안기부장 파면을 거듭 요구했다. 국민회의 林福鎭·鄭東泳의원은 “정보기관의 기밀서류가 탈취당한 것은 국기문란행위이자 중대한 안보문제”라며 “한나라당 의원들은 검찰에 출두하고,제도권 내에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고 강조했다.자민련 金學元의원은“안기부 하급직원의 개인 사물이라고 해도 내각제 관련 문건과 정치인 동향을 적은 문건까지 나온 것은 잘못”이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李信範·洪準杓·孟亨奎의원은 “정부 여당은 불법 정치사찰에 대한 사죄는 커녕,야당의 529호실 강제개방만 문제삼고 있다”면서 “불법난입,기밀문서 탈취,헌정질서 파괴 운운하는 등 본말을 전도하고 있다”고강력히 비난했다.
  • ■국회본회의 이모저모

    14일 국무총리,법무장관을 출석시킨 가운데 열린 국회본회의 ‘긴급 현안질문’에서 여야 의원들은 ‘국회 529호실사태’의 불법성과 ‘안기부의 정치사찰’을 놓고 뜨거운 설전을 펼쳤다.이날 회의는 朴浚圭국회의장이 “일주일째 의장실 점거농성을 벌이고 있는 한나라당의원들이 철수하지 않으면 사회를 보지않겠다”는 강경입장을 보여 2시간 이상 늦게 시작하는 진통을 겪었다.회의는 朴의장이 辛相佑부의장에게 사회권을 넘겨 가까스로 이뤄졌다. 질문에서 여당은 야당의 불법성에 초점을 맞춘 반면 한나라당은 안기부의정치사찰에 초점을 맞췄다.자민련은 안기부의 잘못도 꼬집었다.●강제진입 불법공방 국민회의 鄭東泳의원은 “한나라당의 불법 난입사건이정치파행의 출발점”이란 점을 상기시킨 뒤 “한나라당의 정치사찰,공작정치 의혹 주장은 명백한 기만이며 여론조작”이라고 야당을 몰아세웠다.鄭의원은 이어 “한나라당이 국회 529호 사무실이 94년 폐지됐다가 98년 다시 부활됐다고 주장하는것은 사실과 다르며 94년이후 엄존했고,보강됐다”며 ‘약속의 정치’를 하라고 목소리를 높였다.같은당 林福鎭의원은 ‘국기문란행위’에 초점을 맞췄다.그는 “정보기관의 기밀서류가 탈취당한 것은 헌정사상 최초의 일로 국기문란행위이자 중대한 안보문제”라며 야당의 행위를 안보문란행위로 가주했다. 이에대해 한나라당 洪準杓의원은 “어쩔 수 없이 범죄현장에 들어가 증거물을 확보한 야당의원들에 대한 검찰수사는 법리상 맞지 않다”고 반박했다.●정치사찰 공방 한나라당 李信範의원은 “정보위에서 안기부장이 한 야당총재 비방발언,안기부 광주·전남지부의 홍보대책 문건 등은 명백한 안기부법위반”며 안기부장 파면 및 구속을 요구했다. 洪準杓의원은 “정치사찰을 자행한 안기부 직원에 대한 조사가 선행돼야 한다”고 주장했다.孟亨奎의원도 “정부여당은 불법 정치사찰에 대한 사죄는커녕,야당의 529호실 강제개방만 문제삼아 불법 난입,기밀문서 탈취,헌정질서 파괴 운운하며 본말을 전도,야당의원들과 사무처직원들을 검찰에 고발했다”고 비난했다. 이에대해 자민련 金學元의원은 “한나라당의 전신인민자당시절부터 사용돼온 열람실이 정권이 바뀌었다고 안기부분실이라고 주장한다면 자기모순이며자기부정”이라고 공박했다.金의원은 그러나 “안기부연락관의 행위에 대해의혹이 일고 있는 것은 안기부의 불찰이며 하급직원의 개인 사물이라 해도내각제 관련 문건과 정치인 동향을 적은 문건이 나온 것은 잘못”이라고 꼬집었다.
  • ‘529호 난입’의원 2명 추가 확인

    한나라당의 국회 529호실 강제진입 사건을 수사중인 서울지검 남부지청(지청장 鄭烘原)은 13일 지문감식 결과 사건에 적극 가담한 한나라당 의원 2명을 추가로 확인했다. 검찰의 한 관계자는 “신원을 밝힐 단계는 아니지만 이 의원들에 대해서도조만간 출석요구서를 보낼 방침”이라고 밝혔다. 검찰은 또 이날 소환에 응한 한나라당 曺相煥총무국장(51),宋泰永원내 기획실부장(37),韓一秀총무국 총무부 차장(34) 등 한나라당 당직자 3명에 대해서도 조사했다. 한편 한나라당 李信範의원은 이날 529호실 사건의 주임검사인 남부지청 元聖竣검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다.李의원은 고소장에서 “안기부에 의해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됐을 뿐인데 元검사가 11일자 출석요구서에서 ‘李의원에 대한 특수절도 등 피의사건’이라고 표현했다”고 주장했다. 서울지법 남부지원 민사합의1부(부장판사 金大彙)는 한편 안기부가 한나라당을 상대로 낸 ‘국회 529호실 유출문건 배포·공개금지 및 반환 가처분신청’ 2차 심리에서 “신청인과 피신청인측에 대상 문서목록을 특정하고 소명자료 제출을 촉구했으나 준비가 충분치 않아 양측의 합의하에 결정을 오는 18일로 연기한다”고 밝혔다.
  • 한발씩 양보… 경색정국 解凍 기미

    꽁꽁 얼어붙었던 정국이 해빙의 조짐을 보이고 있다.여야 모두 대화정국 복원을 위해 한발씩 물러서는 형국이다. 13일 3당 수석부총무 회담을 통해 ‘일시적 국회 정상화’라는 접점을 찾아냈다.14일 본회의에서 한나라당이 요구한 긴급현안 질의를 여권이 수용하는형식을 밟았다.“행정부 파견관의 국회 사무실 사용문제도 운영위에서 일괄점검한다”는 절충안도 도출했다. 실마리는 12일 국민회의 鄭均桓·한나라당 辛卿植사무총장 간 물밑접촉에서 잡혔다는 후문이다.내심 정치공세 무대를 장외에서 장내로 옮기겠다는 한나라당의 전략과 파행정국 장기화에 대한 여권부담이 절묘하게 맞아떨어진 결과다. 하지만 대화정국이 본격 점화되기까지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적지않다.여야 모두 상대방의 양보를 요구하는 탓이다.한나라당은 여전히 안기부 정치사찰에 대한 대통령의 시인 및 사과,안기부장 파면이라는 당론을 철회하지않은 상태다.李揆澤수석부총무는 이날 “14일 긴급현안질의에 대한 정부측 답변에 따라향후 정국이 대화로 풀릴지 또는 장외투쟁으로갈지 결정될 것”이라며 압박을 가했다. 여권도 ‘국가기강 확립’ 차원에서 ‘국회 529호실 사태’에 대한 법적책임을 물어야 하는 입장이다.총풍과 세풍 등에 대한 대처도 변화가 없다. 하지만 당의 한 고위관계자는 “국회 난입사건에 대해 한나라당이 먼저 검찰조사에 협조해야 하는 것이 문제 해결의 시작”이라고 밝혀 ‘선(先)검찰조사 후(後) 정치적 타결’의 가능성도 열어두었다.여야의원에 대한 각종 고소·고발건을 국회차원에서 일괄 취하하는 방안도신중히 검토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경제청문회’ 향배도 정국의 뇌관이다.일단 여권은 ‘여야 합의개최’를명분으로 한나라당에 유화제스처를 보내고 있지만 단독청문회의 가능성이 현재로선 더 높은 상황이다.이에따라 여야간 치열한 ‘탐색전’과 ‘힘겨루기’가 어느 정도 진정된 이후에야 대화정국이 본격화될 것이란 분석이 보다 설득력을 얻고있다.
  • 경제청문회 협력해야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7일 한나라당 의원들이 의장석을 점거한 가운데 경제청문회 국정조사계획서와 문화산업진흥기본법안 등 3개 의안을 변칙 처리했다.한나라당은 연 사흘 동안 공동여당이 단독 처리한 의안들을 날치기로 규정하고 무효화투쟁을 선언하고 있어 앞으로의 정국은 한동안 대화부재 상태가 지속될 것 같다.한나라당의 물리적인 의사 방해로 빚어진 사태이긴 하지만 의안의 변칙 처리는 대화와 타협으로 국정현안을 풀어가는 의회주의원칙에 비춰 절차적 민주주의를 훼손했다는 점에서 무척 유감스러운 일이다. 얽히고설킨 정국을 보면서 우리는 경제청문회 국정조사계획서가 변칙 처리될 수밖에 없었던 경위를 따져보지 않을 수 없다.당초 여야 총무는 의원체포동의안 처리를 유보하는 대신 국정조사계획서를 여야 합의로 처리하는 방안에 잠정 합의했으나 李會昌 한나라당총재가 이를 거부해서 결렬됐다.李총재는 ‘국회 529호실사건’에 대한 대통령의 사과와 안기부장의 파면을 조건으로 내세웠다고 한다.경제청문회와 529호실 난입사건이 도대체 어떤직접적연관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한나라당이 소집을 요구한 제200회 임시국회가 오늘부터 열리지만 여야간에 합의한 의안도 없다.따라서 당장은 야당의 ‘농성국회’가 아니면 ‘방탄국회’가 될 수도 있다.그러나 그런 국회의 모습을 국민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그러므로 여야는 당장 대화에 나서야 한다.국민회의는 ‘조건 없는 대화’를 한나라당에 제의하고 있다.국정을 책임지고 있는 집권당으로서 당연한조처다.한나라당도 극한투쟁을 그만두고 이제라도 대화에 응하기 바란다.경제청문회라는 중요한 국정현안이 눈 앞에 있다.한나라당은 청문회와 관련해서 여당과 머리를 맞댐으로써 15일부터 열리는 이 청문회가 ‘반쪽짜리’ 청문회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한나라당에 대한 우리의 이같은 당부는 온갖 어려움을 무릅쓰고 청문회를왜 열어야 하는지를 생각해보면 너무도 당연할 것이다.경제청문회를 여는 목적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를 불러온 외환위기의 원인을 규명하고 그것이 총체적인 경제위기로 확대된 과정에서의 정책적 과오와 책임소재를 명확히 밝혀냄으로써 앞날의 국정운영에 경계(警戒)로 삼기 위해서다.누구를탓하고 모욕을 주기 위한 것이 결코 아니다.그런 경제청문회가 반쪽으로 진행돼서야 되겠는가.뿐만 아니라 IMF사태를 불러온 책임이 당시 집권당이었던 한나라당에 있다.경제난으로 고통받고 있는 국민에 대한 사죄의 뜻에서라도 한나라당은 제대로 된 청문회를 여는 데 적극 협력해야 한다.
  • PC통신‘현대판 신문고’한몫

    “시의 행정처리가 제대로 안돼 6,500원의 교통비와 아까운 시간을 허비했습니다.이 모든게 시장님 책임입니다.제 은행계좌로 이 돈을 입금시켜 주십시요” 지난 5일 경기도 수원시가 운영중인 PC통신 천리안 ‘시장에게 바란다’코너에 올려진 글이다.한 주민이 ‘도대체 장난입니까’란 제목 아래 시 행정의 잘못을 꼬집고 손실보상을 요구했다. ID‘JERUSIA’,이름 ‘루한’으로 등록된 통신 가입자의 ‘고발’내용은 이렇다. 올해 스무살로 할머니와 고등학교에 다니는 남동생과 살고 있다고 자신을소개한 이 등록자는 지난해 말 동사무소에서 의료보호카드를 회수해간뒤 최근 할머니가 편찮아 의료보험카드를 만들러 의료보험공단에 갔다는 것.그런데 공단측에서는 뜻밖에도 “의료보호가 상실되지 않았으니 의료보험카드를만들 수 없다“고 말했다. 공단의 말대로 동사무소로 가 의료보호 상실증명서를 떼달라고 하니 이번에는 구청으로 가라고 했고 구청에서는 담당자가 없어 확인이 안된다며 당분간 사용하라며 ‘증명서’를 한장 내줬다는 것이다. 등록자는“동사무소와 구청의 업무호환이 안돼 아까운 시간과 교통비만 허비했다”며 불쾌감을 표시한뒤 “이 모든게 시장님의 책임이므로 이 때문에쓴 택시비 5,000원과 버스비 1,500원 등 6,500원을 돌려달라”며 은행계좌번호를 남겼다.이같은 글이 올려지자 당혹스런 것은 시 관계자.입버릇 처럼 말해왔던 친절행정서비스에 큰 흠집이 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시 관계자들은 이 일이 사실로 판명될 경우 교통비 부담은 물론 정중히 사과하기로 하고 진위 파악을 위해 당사자를 찾아 나섰다. 이 일련의 사태는 지자제 실시 이후 크게 달라진 행정서비스의 한 단면을보여준다.민원인의 요구엔 너무나 당당함이 느껴지고 이에 대한 책임의식으로 곤혹스러워 하는 시관계자의 표정엔 사죄의 진지함이 묻어났다.과거에는찾아보기 힘든 풍경이다.수원l金丙哲 kbchul@
  • “도청장치 없는것 확인뒤 난입”

    국회 정보위 金仁泳위원장은 6일 “한나라당이 지난달 30일 국회 529호 자료열람실에 도청장치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도 다음날 다시 물리적인 방법으로 문을 파괴하고 난입한 것은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국회 권위를 무너뜨리는 행위”라고 말했다.吳一萬 oilman@
  • 나라와 국민을 위한 정치인가

    정치하는 사람은 나라를 들먹이고 국민을 앞세운다.그것은 모름지기 정치란 나라와 국민을 위한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그러나 정말 그런가.우리 나라정치인들은 당연히 그렇다 하고 대답할지도 모르지만 국민이 보기에는 그렇지 않다. 특히 근래 야당인 한나라당이 보여준 행태는 국민의 지탄을 받아 마땅하다.정기국회에서 반드시 통과시켜야 할 민생 법안이나 개혁 법안들의 처리를 자당 의원 보호를 위해 지연시키면서 국민협약적 성격의 노사정위원회 합의 정신을 공공연하게 부인하는가 하면 국제 조약의 비준이나 국제 기구와의 약속도 무시하여 국제 관계에 어려움마저 초래케하고 있다.더군다나 지난 연말느닷없이 불거진 국회 529호실 난입 사건은 국민의 우려를 넘어 당혹감마저들게 한다. 여야나 안기부 등에서 발표한 내용과 보도를 종합해 보면 정보위 사무실이국회본관 529호에 설치되어 있었던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다.그런데 여야가 합의한 일정인 본회의 시간에 따로 의원 총회를 열어 마치 모르던 것이 새로 발견된 것처럼 법석을 떨었다.이는국회 사정을 잘 모르는 다수 국민을 속여서 위기 의식을 조장하는 행위였다.또 그 방이 본래의 용도보다 다르게 사용되는 정보가 입수되었다면 적법 절차에 따라 그 진상을 규명해야 할 일이지 폭력적 행위로 국회 공공 시설물을 파손하면서까지 난입하고 국가 기밀이 포함된 문건들을 탈취하듯이 입수하여 선별 공개한다는 것은 상식 수준으로 도저히 납득이 가지 않는 일이다. 진정한 민주주의는 절차에서 완성된다는 말은 이미 고전적 명제이지만 법을 만들고 지키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를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약속이다.그약속을 파기하는 것은 민주주의의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다.더 큰 탈법을막기 위해 탈법을 저지를 수밖에 없었다거나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쳤다거나 더군다나 국민 저항권 운운하는 것은 말이 안된다.그런 명분은 적어도 법을 지킬 수 있는 모든 방법이 봉쇄되었을 때 쓰는 말이지 이번 경우처럼 조금만 이성적이고 또 인내했더라면 얼마든지 법절차에 따라 해결할 수있었는데도 그 노력을 포기한 것은 범법의 의도성이 충분하다고하겠다.특히 대법관 출신의 총재가 그 범법 행위를 진두 지휘했다는 것은 정말 믿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아직도 전 근대적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나라 정치의 후진성을 보여주는 것 같아 안타깝다. 이번 상황을 접하면서 가장 답답하게 느껴진 것은 정치권에 의해 우리 국민이 우롱당하고 있다는 느낌인 것이다.입만 열면 국민을 앞세우는 정치인들은 도대체 우리 국민의 수준을 어떻게 보고 이런 횡포를 부리는지 알 수가 없다.이런 저런 핑계로 법안 처리를 미루고 드디어는 이런 북새통을 연출하는것이 모두 여당으로부터 정치적 주도권을 빼앗음으로써 비리 관련 자당 의원들을 보호하고 국면을 전환시켜 보려는 당리당략임을 모르는 국민이 과연 몇이나 될까.국민을 우습게 알고 무시하면 준엄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것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21세기를 맞을 마지막 해가 밝았지만 우리의 형편은 어렵기만 하다.경제위기의 극복은 대통령이 혼자 장담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올해 본격적으로 양산될 실업자들,생존권을 놓고 격동이 불가피한노사 관계,고도의 지식 정보사회인 21세기로 나가기 위한 전략과 준비,그것을 위한 각 분야에 대한 개혁 그 어느것 하나 만만한 것이 없다.여야가 당리당략을 떠나서 무릎을 맞대어도 쉽지 않을 터인데 해를 넘기면서 까지 정쟁만 일삼고 있으니 국민의 마음이 오죽하겠는가.정말 이래서는 안된다.왜 국민들은 여러 설문 조사에서 한결같이 가장 시급히 개혁되어야 할 분야가 정치 분야라고 생각하는지 여야정치인들은 새해를 맞으며 다시 한번 자신을 돌아보아야 한다.
  • ‘구속 노동자 석방건의’

    金元基노사정위원장은 구속중인 노동자들의 석방과 수배중인 노동자들에 대한 수배 해제를 金大中대통령에게 건의하겠다고 밝혔다.노·사·정간에 화합을 이루고 국정을 안정적으로 이끌어나가기 위해서는 노동자들에 대한 이같은 조처가 절실하다는 게 그 이유다. 비록 국회 529호실 난입사건으로 정국이 요동치고 있지만 정부가 해야 할일은 해야 한다.경제를 회생시키고 총체적 개혁을 이루기 위해서는 입법부의 협조 없이도 행정부가 독자적으로 할 수 있는 일이 많다.대량 실업이 추가적으로 내다보이는 노동문제에 대한 정부의 실질적인 대책도 그중 하나다.한국노총이 국민회의와의 ‘정책연합’을 파기할 움직임을 보이고 민주노총 또한 노사정위 탈퇴를 불사하겠다는 등 노동계의 동향이 심상치 않은 상황인지라 노동자들에 대한 특별조처 건의는 매우 설득력 있게 들린다. 우리는 지난 한해 동안 6·25 이후 최대 국난이라는 국제통화기금(IMF)사태를 맞아
  • 與 속전속결전략 가속도

    여권의 ‘정면돌파’가 위세를 더하고 있다.5일에 이어 6일에도 개혁·민생 법안 처리 강행의 강수를 던졌다.한·일어업협정 비준동의안도 처리안건에포함시켰다.임시국회 마지막날인 7일에는 비리의원들에 대한 체포동의안과경제청문회 국정조사계획서를 함께 상정한다는 계획도 밝혔다. 여권의 위세는 청와대와 여당,검찰이 모처럼 행동통일을 함으로써 더욱 돋보였다.‘국회 529호실 사태’를 계기로 형성된 일체감이 여권을 한울타리에 묶었다. 청와대는 ‘529호실 사태’가 터지자마자 “한나라당의 529호실 진입은 불법난입”이라며 법질서 확립차원에서 다룰 뜻을 분명히했다.검찰도 ‘화답’하고 나섰다.사건 발생 일주일도 되지 않아 이날 관련 의원들에게 출국금지조치를 내리는 등 속전속결 태세다.그동안 보여온 당정간의 시각차가 무색할 정도다. 이런 가운데 朴浚圭국회의장이 ‘가세’했다.그는 법사위 등에 계류중이던안건을 ‘직권상정’의 카드로 본회의에 상정했다.여권의 ‘뜨거운 감자’였던 경제청문회 조사계획서,체포동의안,수많은 개혁법안을직권으로 상정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진행중이다.그는 새해 인사객들을 받으면서도 “그사람들(한나라당 의원들) 왜 그런지 모르겠다.그동안 많이 참아왔다”며 강경선회 입장을 시사했다. 5일 DJP간의 만남에서는 모든 ‘획’은 그어졌다.내각제 시기조율 등 DJP사이의 ‘교감’은 여권공조에 탄력감을 더해줬다는 후문이다.이날 金鍾泌국무총리가 주재한 국민회의·자민련간 국정협의회는 여권의 ‘정면 돌파’를 재삼 확인했다.국회에서 ‘시급’한 국정현안을 처리한 여권은 국회 밖에서는정치·경제 등 부문별 개혁에 가속페달을 밟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런 분위기로 임시국회 마지막날인 7일에는 徐相穆의원에 대한 체포동의안과 경제청문회 국정조사계획서를 상정,처리할 참이다.체포동의안은 여야 의원 10명에 대해 국회로 넘어왔으나 ‘세풍’은 분리,반드시 처리하겠다는 게 여권 수뇌부의 판단이다.朴의장은 이날 각당에 청문회 국정조사특위 위원수를 ‘직권’통보했는데 이는 15일 여권의 청문회 단독개최와 무관하지 않다.柳敏 rm0609@
  • 김중태씨 93년판 ‘해적’ 재구성 출간

    70∼80년대 광기의 시대사를 다룬 김중태씨(52)의 소설 ‘해적’(전10권,청목출판사)이 새롭게 재구성돼 나왔다. 작가는 93년에 발표한 이 작품을 처음부터 다시 썼다.93년판이 70년대 말부터 80년대 후반까지를 다룬데 비해 이번에 출간된 ‘해적’은 70년대 중반김대중씨 납치사건부터 문민정부 탄생 초까지로 시대 영역을 넓혔다.또 등장인물과 줄거리도 크게 바꿨으며,분량도 3,000여장의 원고를 추가해 소설의서사성을 높였다. 천박한 지식기사(知識技師)들과 권력의 주구들이 독판으로 군림하고 천민자본주의가 전염병처럼 만연하던 시절,살아 남고자하는 젊은 떨꺼둥이들의 생존 몸부림이 소설의 줄기를 이룬다. 소설의 배경은 여수 앞 청정해역인 가막만.이 해역의 깡패조직은 속칭 개구리배를 타고 어장과 양식장에 난입,어민들의 생존 터전을 송두리째 빼앗는다.또 서울 등지로 진출,정·재계와 손잡으면서 파행적 사회구조를 낳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그런 점에서 ‘해적’은 정치·경제와 폭력의 상관관계를파헤침으로써 한국현대사의 명암을 뿌리에서부터 드러내고 있는 작품이라고할 수 있다.金鍾冕
  • 국회정보위 무슨말 오갔나

    ‘국회 529호실 사태’를 논의하기 위해 5일 소집된 국회 정보위는 한나라 당의 정보위 열람실 ‘불법진입’과 ‘기밀문서 탈취·공개’를 집중 성토하 며 관련자의 사법처리를 촉구했다. 이날 정보위는 “사태 설명이 필요하다”는 안기부측의 요청으로 국회 정보 위원장이 소집했으며 한나라당 정보위원들은 불참했다. 李鍾贊안기부장은 인사말에서 “의정사상 유례없이 폭력으로 기밀문서를 탈 취,공개한데 대해서는 응분의 사법처리가 뒤따라야 할 것으로 본다”며 입을 열었다. ‘정치사찰’부분과 관련,李부장은 “한나라당 의원들이 가져가 공개한 문건 은 대부분 신문·잡지에서 발췌한 수준으로 밀착감시를 하는 사찰과는 구분 돼야 한다”면서 “안기부도 국가전략차원에서 정치일반에 대한 정보는 당연 히 수집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李부장은 그러나 “정보위에서 벌어진 일은 정보위에서 해결하는 것이 바람 직하다”면서 사태의 원만한 해결을 위해 여야 위원들이 머리를 맞대줄 것을 촉구했다. 질의에 나선 여당의원들은 ‘529호실 난입’의 위법성을 조목조목 들며 비 판강도를 높였다.이번 사건은 “국가기밀 불법 탈취사건에 다름 아니다”라 며 관련자를 엄벌해줄 것과 재발 방지책을 따졌다. 韓和甲 林福鎭 李聖浩의원 등 국민회의 의원들은 529호실이 한나라당 집권 때인 지난 94년 정보위 열람실로 만들어졌고,96년 국회예산 2억원을 들여 보 안장치까지 한 곳이라며 529호실에 대한 적법성을 주장했다.이를 불법적으로 파괴,국가기밀 문건을 탈취·공개한데 대해서는 엄정한 사법처리를 촉구했 다. 金宗鎬의원 등 자민련 의원들은 “정보기관의 정치공작이나 사찰은 있어서 는 안되지만 일상적인 정보수집 활동은 국가전략차원에서 보호돼야 한다”며 대책을 추궁했다. 양당 의원들은 “안기부 연락관 安모씨의 개인메모를 확대해석하거나 조작, 정치사찰로 몰아붙이는 행위는 의회주의를 스스로 파괴하는 처사”라며 이 부분에 대한 조사도 아울러 촉구했다. 柳敏 rm0609@ [柳敏 rm@]
  • 李鍾贊안기부장 정보위 참석

    5일 오후 야당 의원들이 불참한 가운데 열린 국회 정보위에서 여당 의원들 이 李鍾贊안기부장(오른쪽)과의 질의응답을 통해 ‘한나라당측의 국회 529호 실 난입’의 부당성을 지적하고 있다. [孫元天 angl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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