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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러코뮤니즘의 「탈 교조주의」/서병철 외교안보연교수(세평)

    ○공산주의 정당의 흥망 공산주의 정당은 2차대전이 끝난후 동유럽 현실사회주의 국가를 이끌어 오면서 승승장구하여 서유럽에까지도 적지않은 영향을 미쳐왔다. 비록 소련의 적극적인 개입으로 당세를 확충하여 저항세력을 무력하게 만들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반세기에 걸쳐 공산당이 유럽의 동부 및 남동부 지역을 석권하는데 성공했었다. 이에 그치지 않고 당세를 몰아 일부 서유럽지역에까지 공산당 추종세력이 발붙이게 되었다. 마르크스가 역사적 유물론에서 선언했던 공산주의로의 역사적 귀결이 이루어질 가능성까지도 한때 내비치는 상황이 전개되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작년 후반기부터 시작돼 금년 상반기에 이르는 불과 1년 남짓한 기간에 공산당은 정치세력을 상실하고 정당으로서의 존립마저 위태롭게 되었다.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를 제외한 모든 동유럽국가에서 공산주의성 정치이념을 내세운 정당은 선거에서 국민들로부터 외면 당하고 군소정당으로 전락하는 수모를 겪었다. 국민생활을 도탄에 빠지게한 공산주의 체제가 혐오의 대상이 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 일당독재」는 저주받을 체제로 낙인찍혔다. ○서유럽 공산당의 쇠퇴 그러면 자본주의체제에 회의를 느낀 일부세력을 규합하여 결성된 서유럽의 공산당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여 있는가 하는 것이 관심의 대상이다. 서유럽 정치에 무시못할 영향력을 행사해 온 이탈리아ㆍ프랑스ㆍ스페인 및 포르투갈의 공산당 당수들이 1977년 3월 마드리드에 모여 행동통일을 결의하고 각국 정부의 정책결정에 적극 참여할 것과 유럽공동체에도 창구를 일원화하여 발언권을 강화할 것을 다짐할 때만해도 위세가 등등해 보였다. 그러나 80년대에 들어와서 정통공산주의자들을 제치고 사회주의자들이 대거 진출하여 정책방향을 강경에서 온건으로 전환시켰고 수구세력과 개혁세력간의 분규도 커졌다. 이와 동시에 각국 공산당의 세력이 급속도로 감퇴되었다. 특히 서유럽 공산당중에서 가장 세력이 강한 이탈리아의 경우만 봐도 지난 10년동안 30만명의 당원이 당을 떠나 오늘날에는 1백50만명으로 감소되었다. 지난 87년 이탈리아 총선거에서 공산당의 득표율이 30%에서26.8%로 줄어들었으며 그후 선거가 있을때 마다 이와 같은 추세는 계속되고 있다. 특히 당의 핵심을 이루던 20세를 전후한 젊은층의 이탈이 심하여 전당원의 3.2%에 불과한 것은 이탈리아 공산당의 앞날에 암영을 던진다 프랑스 공산당은 이탈리아 공산당보다도 더 큰 타격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지난 10년동안 지지세력이 절반으로 축소되었으며 공산당 자체발표에 의하면 60만명이 등록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25만명 정도로 추산되어 존립자체가 위기를 맞고 있다. 78년 총선거에서 20.5% 득표했던 것이 86년에는 9.8%로 감소하였으며 88년 대통령선거에서는 6.8%에 그쳐 앞으로 실시될 국민의 의사를 묻는 행사자체에 두려움을 갖고 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스페인 공산당은 1982년 이래 당원상실,분규 및 재조직 등 격동을 겪으면서 의회선거에서 득표율이 4.6%에 그쳐 영향력행사는 옛이야기가 되었다. 포르투갈 공산당은 당원이 10만명 정도로 줄어들었고 특히 노동조합과 젊은층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공산주의 신뢰 상실 이와 같이 서유럽의 모든 공산당이 쇠퇴의 길을 걷게된 이유는 무엇일까. 무엇보다도 유럽의 지식층에서 일기 시작한 공산주의체제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이다. 공산당이 채택하고 있는 정책과 사회에 대한 관념 등은 당초 전통적인 사회민주주의에서와 같이 산업시대의 산물이며 그 표현이다. 즉 국영화와 같은 국가주의적 경제체제,양적인 성장,집체주의 그리고 사회주의적 발전에 대한 긍정적 전망 등이 공산당의 기본노선이었고 오늘날까지도 이에 집착하고 있다. 그러나 공업화를 이미 넘긴 시대의 서유럽이 정치ㆍ경제ㆍ사회 및 세계관에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고 공산당은 이를 감당하지 못한다. 국가의 경제규제 기능의 범위와 성격이 새로운 개념을 정립하게 되어 공산당의 중앙계획통제체제는 국민들의 지지를 받기에 이미 낙후되었으며 그 제도가 운영한 경제가 파탄되면서 쓸모없는 것으로 재확인 되었다. 또한 후기 산업사회에 대두된 개인중시 경향은 집단위주의 공산혁명 이론과 정면대립되며,유럽을 포괄적으로 한 공동협력추세는 공산당의국가단위세력확장 계획을 시대착오적인 것으로 만들었다. 동서진영간의 냉전체제 찌꺼기를 씻어버린 새로운 정치사상 「고르바초비즘」도 서유럽 공산당의 붕괴를 촉진시킨 결과를 가져왔다.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는 서방 자본주의 체제를 긍정적으로 재평가하고 특히 다당제 정치제도의 실적 높은 기능과 성장우선주의적 경제운영방식의 성공을 솔직하게 시인함으로써 공산주의에 대한 회의를 불러 일으켰다. ○방향수정,명맥을 유지 한편 정통공산주의를 고집하다가는 완전히 소멸될 것이라고 예견한 선견지명이 있는 고르바초프는 서유럽 공산당들에 경직된 강경노선을 과감히 수정하도록 강력히 권유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탈출구를 찾고 있다. 특히 이탈리아 공산당은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이 자유,평등,정의,공동책임 등을 강조하는 당강령의 개정을 통하여 새로운 구심력을 획득한 것과 같이 공산이념에서 탈피하여 금세기말까지도 최소한 의석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다. 또한 이탈리아 공산당은 작년 3월 개최된 18차 당대회에서 『민주주의는사회주의의 유일한 길』이라고 결의하고 『경제와 기술은 공산 혁명완수를 위한 도구가 아니며 인간생활 향상의 수단』이라고 선언함으로써 공산교리에서 이탈하였다. 이와는 달리 다른 서유럽 공산당들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를 배격하고 공산이념에 집착하므로 국민들로부터 외면당하여 정당으로서의 존립자체가 위태롭게 되었다. 따라서 유럽공산당들도 결국에 가서는 탈바꿈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며 이는 순수공산주의의 소멸을 의미한다. 동부에서는 정권을 상실하고 서부에서는 디디고 설 땅을 잃은 유럽에서의 현상이 지구의 다른 곳으로 파급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다.
  • 프레온가스 규제에 업계“비상”/냉장고ㆍ자동차등 관련기업 대응책고심

    ◎「오존층파괴 주범」낙인,수출입 큰 타격/정부도 수급조정위 구성등 대책 모색 냉장고,자동차,전자부품 등에 쓰이는 각종 냉동기의 냉매와 발포제,분사제로 널리 활용되는 프레온가스류(CFC)가 대기권상층부의 오존층을 파괴하는 주범으로 몰려 국제적인 규제대상이 되고 있다. 유엔환경기구를 중심으로 지구오존층보호를 위해 올해부터 프레온 및 할론가스류의 수출입이 규제를 받게됨에 따라 전자ㆍ자동차등 국내의 관련업계는 비상이 걸렸다. 오는 93년부터는 프레온가스류를 이용하는 냉장고ㆍ자동차ㆍ전자부품 등의 수출이 규제돼 큰 타격이 예상되고 있기 때문이다. CFC는 불화염화탄소의 약자로 듀폰사의 상품명인 프레온가스로 불린다. 각종 냉동기의 냉매로서 이 물질의 생산이 규제되면 에어컨ㆍ냉장고 등의 생산이 큰 지장을 받게 된다. 프레온가스는 또 향수등 화장품과 살충제를 분사시키는 재료로 활용되기 때문에 이들 제품의 생산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물론 소화기도 분말소화기만을 생산할 수 밖에 없고 프레온가스로 세척하는 반도체ㆍ정밀기계등의 수출도 치명타를 입게 된다. 프레온가스류의 사용이 문제되기 시작한 것은 지난 74년 미캘리포니아대의 롤란드교수팀이 CFC 및 할론가스가 성층권의 오존층을 파괴한다는 논문을 발표하면서 부터. 오존층은 대기권 상층부의 산소(O₂)가 태양자외선에 의해 오존(O₃)으로 변화,해로운 자외선이 지구에 도달하는 것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오존층이 감소되면 인류의 건강유지와 자연환경보호에 치명적인 역할을 하는 것으로 나타난다. 즉,사람은 피부면역성이 저하되고 농산물은 콩과식물의 수확량이 떨어지며 수산물의 플랑크톤감소,기상이변 등이 뒤따르게 된다. 오존층은 지표로부터 25㎞∼30㎞ 떨어진 곳에 수백억t이 존재하고 있다. 오존층 1%감소는 지구도달 자외선량의 2%를 늘게하여 이 자외선량 1%는 사람들의 피부암발생확률을 2%나 높게 된다. 실제로 조사결과 78년이후 북반구의 오존층이 3∼5%나 감소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지구오존층보호문제가 심각해지자 지난 87년 유엔환경기구(UNEP)는 오존층을 파괴하는 특정물질의 생산 및 사용량을 86년수준에서 감축하기 위한 몬트리올 의정서를 채택했고 최근 런던에서 열린 이 의정서 제2차 협약국회의는 오는 2천년까지 프레온가스류의 생산을 전면금지(개도국은 2천10년까지)키로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이 의정서에 가입하지 않을 경우 가입국이 무역규제를 하도록 돼있다. 따라서 우리나라도 관련 법률제정 등의 준비과정을 거쳐 늦어도 92년말까지 가입한다는 방침이다. 현재 프레온가스류의 국내시장규모는 연간 4백억원에 불과하지만 이를 이용하는 관련산업은 연 4조원규모나 된다. 그만큼 프레온가스사용 규제에 따른 대체물질개발과 민관합동의 대응책마련이 시급한 실정이다. 이에 상공부는 29일 하오 과천청사에서 관련부처합동대책회의를 열고 특정물질 수급조정위를 구성,불요불급한 분야의 사용량을 줄이는 한편 업종별ㆍ용도별 사용량을 책정해 운영해 나가기로 했다.
  • 외언내언

    부산 해운대구 시민들의 쓰레기 매립장 반대시위는 경찰의 강제진압까지 겪었으나 집단농성이 끝난 것도 아니고 해결의 전망을 얻은 것도 아니다. 결국 부산시는 경남도에 양산군 쓰레기 매립장 공사중단을 요청할 모양이다. 그러니 이 선례로 앞으로 어디에 쓰레기매립장을 확보할 수 있을까의 문제만 생겨났다. ◆환경오염에 관한 인식이 커지면 커질수록 우리의 습성으로서는 개별적 지역적 시위만 더 커질 가능성도 있다. 그렇잖아도 이미 환경권을 요구하는 집단시위들이 잇따라 늘고 있다. 전남 화순군에서는 골프장 공사에 반대하는 시위가 13일 있었다. 승주군에서도 골프장 시위는 4월부터 계속되고 있다. 충남에서는 또 보령댐 건설마저 환경오염방지책을 내세워 반대에 나섰다. 군산ㆍ옥구의 시민단체들도 화학공장 신설에 반대하는 10만 서명운동을 하고 있다. ◆별로 소문없이 지나갔지만 서울에서도 주민의 항의로 정지된 환경대응 사례가 나타났다. 대기오염치가 심한 일부동에 오염측정장치를 설치하려 했으나 오염지역 낙인으로 집값이 떨어진다는 주장에 결국 이 경우도 시민의 집단항의가 우선은 이겼다. 그러나 환경권 주장에 있어 가장 중요한 이해는 각자가 자신의 생활거점에서 일시적인 선택만으로 해결될 일이 아님을 깨닫는 일이다. ◆이점에서 환경문제의 접근은 좀 더 행정과 주민간의 공동인식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져야 할 필요가 있다. 정부는 우선 현상에 대한 관점과 오염기준들을 분명히 하고 이를 조금이나마 해소하는 대안들을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주민도 전국토가 하나의 환경권이라는 시각에서 단순히 자신의 구역만 지키면 된다는 관점을 벗어나는 게 옳다. 오늘날 대기나 수질오염의 주범속에는 일상적인 생활속에서의 오염원인도 크게 들어있다. 시위만으로 해결될 일은 아닌 것이다.
  • 재미작가 김은국씨의 「민족사적 6ㆍ25론」

    ◎한민족,자의건 타의건 「자유로운 삶의 길」로/“살상ㆍ폐허ㆍ굶주림” 고정관념 벗어날때/개개인의 체험 역사적 맥락서 조망해야/반억압 선택은 바로 「인간해방의 길」/이제야 변혁하는 동구를 보니 큰 대가 치렀지만 값진 경험/서울신문 6ㆍ25 40주 특집 6ㆍ25니 8ㆍ15니 그러한 개인적으로나 민족적으로나 어마어마한 뜻을 갖고 있는 역사적인 날이 찾아올 때마다 느끼는 것들 중의 하나이지만 우리는 참으로 쓸데없이 거창하고 모호한 말을 즐겨쓰는 민족이라는 것이다. 왜 그런지 궁금하기도 하다. 한문을 토대로 한 우리의 언어의 덕분인지 아니면 우리 민족에 개인적이든 공동체적이든 세상의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심리적인 특이한 태도가 있어서 그런지는 알 수 없지만 흔히 겉잡을 수 없는 허황한 상투용어로 한마디하고 넘어가 버리는 버릇이 있다. 8ㆍ15가 오면 언제나 「과거 36년간 혹독한 일본 제국주의의 통치」로 시작하고 끝나고 6ㆍ25가 오면 으레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시작하여 「조국분단의 쓰라림」 등으로 끝난다. 상투용어란 것은 사람들이 너도나도 써먹어 오다보니 누구나가 다 이해할 수 있는 말처럼 그럴듯하게 들리는 것이지만 따져 보면 반드시 그렇지도 않다. 그러니까 한번쯤은 다른 사람들이 쓰는 상투용어를 빌려 쓰지 말고 자기의 말로써 인생의 경험을 이해하려고 애써 볼 만하다. 그렇지 않으면 무엇을 아는 것 같으면서도 모를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요사이 한국에서 흔히 듣는 말이지만 「6ㆍ25를 모르는 세대」라는 표현이 있다. 당연한 말이지만 대개는 「6ㆍ25를 모르는 세대」가 이렇고 저렇고 할때 풍기는 뜻은­그런 표현을 쓰고 사람들에게서 오는­그 세대가 좀 한심하다는 것이다. 그 세대가 한심한건 말건 그것은 둘째로 치고 우선 그러면 그 표현이 내포하는 즉 「6ㆍ25를 아는 세대」는 과연 6ㆍ25를 얼마나 어떻게 알고 있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게 된다. ○인생과 역사의 결합 누가 시작한 진담­농담인지는 몰라도 어린애들(물론 6ㆍ25를 모르는)에게 6ㆍ25때 얼마다 먹을 것도 없고 고생했었던가 하는 이야기를 해주었더니 그 애들이 「그럼 왜 라면이라도끓여먹지 않았냐」하더라고… 원 그런 어처구니 없는 한심한 것들이 어디 있겠느냐는 것이다. 물론 「6ㆍ25를 아는 세대」가 6ㆍ25때는 먹을 것도 없고 입을 것도 없고 피란만 다녔다는 식으로 「고생」했다고 말을 시작하면 어린애들은 역시 그런 식으로 반문을 할 것이 뻔하다. 고생했다,굶었다,헐벗었었다,많이 죽었다,도시는 폐허가 됐었다,가족이 흐트러졌다­물론 6ㆍ25의 경험속에는 그런 것들이 다 들어간다. 6ㆍ25라는 것이 빚어낸 현상이며 결과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6ㆍ25를 참으로 설명해 주지도 않고 해줄 수도 없다. 경험이란 것은 왜 그 경험이 있게 되고 그 경험이 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를 알지 못하면 그 경험의 참 뜻을 이해할 수 없지 않을까. 그러니 한편으로는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공동체가 쓰는 상투용어로,또 한편으로는 「고생했다」는 개인이 쓰는 역시 상투용어로만은 6ㆍ25와 같은 어마어마한 민족공동체적 개인적인 경험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기가 힘들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6ㆍ25를 체험한 세대에게나 6ㆍ25를 모르는 세대에게나 마찬가지의 문제라고 본다. 이러한 문제를 푸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는 것이 역사관,그 역사관과 개인을 연결시켜주는 개인의 인생관­나는 이렇게 살고 싶다하는­가치관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나에게는 6ㆍ25는 「선택」의 경험이라고 여겨진다. 그 「선택」에는 두가지의 선택이 있었다고 본다. 하나는 개인적인 한가지 한가지의 「작은 선택」들이고 또하나는 커다란 역사적인,나아가서는 철학적인 「커다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커다란 역사적인 철학적인 「선택」이 처음부터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나중에 온 것이다. 우선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쌓이고 하다 좀더 철이 들고 배우고 사색하게 되면서 그 개인과 역사를 연결시켜 주는­인생관과 역사관의 결합을 보았다고 할 수 있다. 나는 고향이 이북이어서 8ㆍ15를 이북땅에서 맞았다. 그 덕분에 남한으로 넘어오기 전 3년여를 북한식 공산주의체제 밑의 생활을 경험하였다. 그러한 경험에 바탕을 둔 「작은 선택」은 헤아릴 수 없이 많지만 이 글에서는 내게 중요한몇개만을 들어보겠다. 첫째로 생각되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의 특이한 「작은 역사」를 무시하고 말살시키려는 주의와 사상을 거부하고 그것에 반항하는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의 공산당 권력체제가 주장하고 실행한 소위 계급투쟁으로 「소지주 계급」의 낙인이 찍힌 우리는 모든 재산을 빼앗기고 고향에서 추방을 당했다. 그때의 우리의 재산이란 한때 가난했던 조부모님이 일하고 저축하여 쌓았던 것이다. 빈곤으로부터의 해방을 바라고­본인들과 후손의­노력해온 그들의 구체적인 「작은 역사」는 「계급투쟁」이라는 추상적인 커다란 주의ㆍ사상으로부터 아무런 이해와 「용서」를 받지 못하였다. 그 경험은 개개인의 작은 역사를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는 가치관을 나에게 심어주었고 그것을 말살시키려는 주의ㆍ사상ㆍ정치체제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정치관을 갖게 했다. 또한 그러한 소위 「계급투쟁」의 발단,심리적 원시점은 인간의 가장 천한 본능에 두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의 것을 탐내고 남을 시기하는 원시적인 본능을 부추겨서 『잘산다』 『못산다』의 개념과 정의를 오로지 물질적인 차원에만 두는 가엾은 인생의 가치관을 보았고 나는 그러지 않겠다는 「선택」을 했다. 나아가서는 그러한 추한 인간의 본능을 『그럴듯한』 정치이념과 주의로 장식하여 인간의 증오심을 정의감으로 가장시켜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잡으려는 어떠한 사상에는 반항해야 한다는 「선택」을 했다. 목사이셨던 외조부께서 일본통치하에서도 억압을 당하시고 북한공산체제 밑에서도 억압을 당하시는 것을 경험하고 「나의 외조부님을 억압하는 자들」에게의 반항의 「선택」에서 시작하여 특정한 종교를 믿지 않는 입장이면서도 「종교의 자유」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지 않는 정치이념ㆍ주의사상은 반대해야 한다는 「선택」을 하였다. ○한국은 운좋은 나라 그렇게 하여 내가 6ㆍ25가 일어나기 얼마전 남한으로 넘어 왔을 때는 이미 수많은 작은 「선택」들이 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6ㆍ25가 왔을 때 그 전쟁은 나에게는 혹독하게 말한다면 죽느냐 사느냐의 선택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나」를 없애버리려는 권력에는 방항ㆍ대항해야 하는 선택밖에는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그때 대한민국이 더 좋아서 더 귀중해서 대한민국을 사수하기 위해서 참전한 것 같지는 않다. 또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어쩌니 하는 감상을 품고 전쟁을 겪은 것 같지도 않다. 우선 「나」라는 하나의 인간의 「자신」이 살아 남아야겠다는 것 뿐이었다고 할 수 있다. 개인의 개성,특이한 작은 역사,개인의 존엄성­이러한 것들이 보존되고 살아 남아야겠다는 신념과 행동의 선택에서 이윽고 자유에의 「선택」이 있게 됐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한 인생관 가치관이 그 당시에는 지극히 구체적인 것이었으면서도 이념적으로는 뚜렷한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지만 그것이 훗날에 「나」라는 하나의 개인과 그 개인의 경험을 역사와 연결시켜주는 역사관을 찾았을 때 6ㆍ25를 비롯한 지난날의 경험을 좀더 정확하게 이해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오늘의 나는 인간의 역사를 이렇게 생각한다. 즉 인간의 역사는 「해방」으로의 과정이라고 본다. 자연의 공포와 횡포로부터의해방,질병으로부터의 해방,굶주림으로부터의 해방,무식으로부터의 해방,인간이 타인에게 행하는 무자비한 잔인으로부터의 해방­끝없이 많은 인간해방이 필요하고 하나하나씩 이루어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말하자면 「자유」로의 행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참혹한 인간역사의 사실이 증명하듯 그것은 하루이틀에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꾸준한 해방의 과정은 조금씩이나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여가고 있다고 믿는다. 그렇게 믿는다면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해야 한다. 개개의 구체적인 경험과 그 경험을 바탕으로하여 여러 작은 「선택」을 해온 나로서는 그러한 역사관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만 그럴 수 있었다는 것을 지극히 행복하게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6ㆍ25란 나에게는 하나하나의 개인이 나름대로의 해방을 찾고 자유를 찾아야 한다는 인생관과 역사관을 얻게 해준 경험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나는 흔히 진담­농담으로 말하듯이 대한민국은 참으로 운이 좋은 나라라고 생각한다(그렇게 말할수 있는 나도 운이 좋은 사람이 되겠지만). 6ㆍ25는 대한민국에도 역시 하나의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게 한 전환기라고 할 수 있다. ○싫건 좋건 이끌린 삶 강대국간의 냉전이니,국제정세의 배경이니,국토의 분단이니­「동족상잔의 비극」이니­그런 것들을 지금 이 자리에서 생각할 필요는 없다. 다만 6ㆍ25라는 역사적 사건과 경험은 한국으로 하여금 되돌릴 수 없는 그야말로 역사적인 선택을 하도록 했다. 그 「선택」으로 한국은 공산주의 체제가 아닌 자유주주의체제 쪽으로,공산주의의 국가통제경제가 아닌 자유시장경제체제 쪽으로,그 당시에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이끌려 간 것이다. 그리하여 온갖 우여곡절을 거치면서도 싫건 좋건 알건 모르건 간에 개개인의 역사가 존중되고 개개인의 나름대로의 자유가 존중될 수 있는,앞서 말한 인간해방의 역사관의 과정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이것은 우습게 볼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반드시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가 의식적으로 또한 고의적으로 그러한 역사의 길을 기꺼이 선택했다는 말은 아니다.한국이 운이 좋은 나라라는 말이 그래서 나오게 된다. 6ㆍ25를 전후한 국제정세와 6ㆍ25라는 처참한 경험을 겪고 살아남은 한국은 어쩌다 싫건 좋건 그러한 길을 선택하게 됐고 그리하여 오늘의 한국을 이루게 된 것이다. 그러한 선택을 한 이상 한국은 어쩔 수 없이라도 한걸음 한걸음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 끼여 따라가게 돼있다. 지난 몇년동안 한국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변화와 발전을 생각해 보면 짐작이 가리라 생각한다. 커다란 인간역사라는 것은 하나하나의 개인은 물론 국가사회라는 공동체도 예측할 수 없는 현상과 결과를 빚어내는 버릇이 있다. 6ㆍ25라는 역사는 어쩌면 한국사회가 자진해서 이룬 것이 아닌 하나의 선택을 한국사회에 강요한 것인지도 모른다. 나는 그 선택이 나 자신의 선택과 어울리는 것이기에 지극히 흡족하게 느낀다. 그러기에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라는 사회공동체는 6ㆍ25를 겪었기 때문에,또 6ㆍ25를 계기로 하여 전세기적인 인간가치관과 인간통치관에서 탈피하여 전진적인 인간해방의 역사적 흐름에 함께 낄 수 있게 됐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다랗게 설명할 필요는 없다. 동독을 비롯하여 폴란드ㆍ헝가리ㆍ체코ㆍ루마니아 심지어는 불가리아 등­동구 여러나라에서 일어난 역사적 변화를 생각만 해보면 된다. 그들의 역사야말로 인간해방의 역사이다. 40여년간의 공산주의 독재체제 밑에서 억압당해 왔던 하나하나의 인간들을 해방하고 자유를 이루어준 역사의 흐름이 파도를 친 것이다. 불평ㆍ불만이 많고 걸핏하면 「한」이 어쩌고 하는 우리는 동구의 그들에 비하면­나아가서 소련의 일반 시민들과도 비하면­참으로 운이 좋은 사람들이다. 6ㆍ25라는 참혹한 경험이 있었지만 그 경험이 헛되지 않게 해준 그 「선택」 덕분에 우리는 인간해방의 역사의 대열에서 그들보다 훨씬 앞서 있게 된 것이다. 동구의 그들 뿐인가. 소련의 사정을 살펴보며 리투아니아ㆍ에스토니아ㆍ라트비아 국민들의 자유독립에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 우크라이나의,그루지야의,아르메니아의,아제르바이잔의 모든 개인들의 자유독립으로의 「선택」을 생각해 본다.2차대전이후의 세계역사를 소위 냉전의 역사라고 한다. 하지만 따져보면 그 냉전의 역사는 실은 자유와 억압의 대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자유민주주의 정치체제를 선택하고 자유시장경제 제도를 선택한 진영은 꾸준히 인간의 자유의 범주를 넓히고 차원을 높이면서 인간을 억압하고 불안하게 만들고 인간을 조롱하는 것들에서부터의 인간해방을 이루어왔다고 본다. 그것을 인정 안하다면 동구공산권의 붕괴와 동구 사람들의 자유의 「선택」을 인정하지 않고 이해하려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인간가치관의 대결 이 모든 것이 궁극적으로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즉 2차대전후부터의 이른바 냉전은 결국은 정치이념의 대결이었고 인간의 가치관의 대결이었다고 본다. 인간의 「자유와 개방」을 위주로 하는 이념과 절대적인 정치권력 체제속에서의 「인간통치」에 전념하는 이념과의 대결이 아니었던가. 6ㆍ25에 참전하면서 「동족상잔의 비극」이니 하는 감상을 품고 있지 않았었다고 나는 앞서 말한 바 있다. 어떻게 보면 냉혹하게 들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6ㆍ25전쟁이 내게는 단순히 부족간의 영토싸움이라든가 조국통일이라는 미명아래에서의 권력다툼이라든가 그러한 전세기적인 단순한 전쟁이 아니었었기에 그랬었는지도 모른다. 그 전쟁은 2차대전때 이미 시작되고 그 후에 냉전으로 계속된 이념의 대결이 터져나온 전쟁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싫건 좋건 틀렸건 옳건간에 사람은 각자각자 나름대로의 작은 역사를 창조하고 자유와 개방을 이루고 인간해방을 이룰 수 있도록 풀어주고 돌봐주어야 한다는 가치관과 이념과 역사관을 「선택」했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는 6ㆍ25의 그날이 돌아올 때마다 「동족상잔의 비극」이라는 상투용어로 그 경험을 「설명」해 버리려는 것을 싫어한다. 그 전쟁이 그것뿐이었다면 그야말로 전세기적인 관념으로 그 전쟁의 경험을 소화하려는 것이 된다. 그 보다는 「나는」 「우리는」 그러한 참혹한 역사적 경험으로 인하여 「이러한 선택」을 하였노라 하는 것을 생각해 보았으면 한다. □김은국 □32년 함남 함흥출생.□황해도 황주,중국 만주에서 성장. □48년 평양 제2중(평양고보)재학중 월남. □50년 서울대 상대 경제학과 중퇴(6ㆍ25발발로). □51∼54년 육군장교복무. □55년 도미,미들버리대(정치학 및 역사철학전공),존스 홉킨스대(영문학 전공),아이오와대 대학원,하버드대 대학원 졸업. □64년 6ㆍ25를 배경으로 한 소설 「순교자」를 하버드대 대학원 졸업논문 대신 발표,세계적 명성얻음. □이후 「심판자」 「잃어버린 이름」 「잃어버린 영혼」 등 발표. □미국 매사추세츠 주립대,시라쿠스대,캘리포니아 주립대교수 서울대 교환교수 역임. □현 매사추세츠 소재 「트랜스 리트 에이전시」 (국제저작권대행회사)대표.
  • 재일동포 지위협상 어떻게 돼가나

    ◎접점 못찾는 「지문폐지」… 한ㆍ일신경전/「역사인식」에 큰 차이… 팽팽한 줄다리기/일 관계부처,이견 노출… 애드벌룬만 무성/한국 “취업 등 실질보장”정치적 결단 촉구 재일 한국인 후손의 법적지위 보장과 처우개선을 위한 한일간의 교섭은 마치 「종반」에 들어선 것처럼 보인다. 현재 한일간에 최대 현안이 되어있는 이 문제해결을 위해 일본정부는 25일 하오 긴급히 다니노 사쿠타로(곡야작태랑) 외무성 아시아국장을 서울에 파견,비공식 국장급협의를 벌이도록 조치했으며,오는 30일 서울에서 개최되는 한일 외무장관 회담에서도 「상당한 보따리」를 풀어 놓을 듯이 각종 애드벌룬을 띄우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측에서도 지난주 이원경 주일대사를 돌연 일시귀국시켜 정무협의를 가진데 이어 박태준 한일의원연맹 회장겸 민자당 최고위원 대행을 일본에 급파,가이후 도시키(해부준수) 총리를 비롯,다케시타 노보루(죽하등) 일한의원연맹회장,후쿠다 다케오(복전부대) 전총리 등 요인들을 만나 한국내의 강력한 여론을 전달하고 일본측의 정치적 결단을 위한 노력을 촉구하고 있는 점이 문제해결의 막바지에 접어든 것처럼 보이게 하는 이유이다. 그러나 이것은 낙관적인 전망에 불과하다. 지금 단계에서 한국내에 일부 언론조차 이제까지 한국측이 요구해 온 9개항목 가운데 최소한도인 「3세이후」에 대한 영주권 부여와 지문날인 적용 제외는 확보되지 않았는가 라는 안이한 생각을 갖고 있다. 이것은 오산이다. 한국인을 「조센진」(조선인)이라고 보는 일본인의 잠재의식과 일본의 외교가 그처럼 단순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현안 해결을 위한 한일간의 교섭은 「종반」이 아닌 「시발점」에 서있으며 「역사청산」도 지금부터 시작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보는 것이 옳다. 일본 정치인들의 언동과 상관없이 현안문제를 담당하는 일본의 외무ㆍ법무ㆍ경찰ㆍ자치ㆍ후생성 등 관계성ㆍ청의 「역사인식」은 우리와는 너무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가이후 총리는 지난 24일 각의가 끝난뒤 국회내에서 나카야마 타로(중산태랑)외상,오쿠타 게이와(오전경화)자치상,하세가와 신(장곡천신)법상,호리고우스케(보리경보)문부상,사카모토(판본삼십차)관방장관 등 5각료를 소집,『재일 한국인 문제에 대해 최선을 다하라』며 정치적 해결을 도모할 것을 지시했다. 그는 박최고위원 대행을 만난 자리에서도 『현안 문제들이 한일 양국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해결되도록 최대한의 노력을 하고 있다』고 밝혔다. 가이후 총리는 국회답변에서도 『재일한국인이 존재하게된 역사적 배경을 염두에 두고 양국이 납득할 만한 선에서 해결되도록 노력하겠다』고 늘 말해왔다. 25일자 요미우리(독매)신문은 1면 기사에서 일본정부는 재일한국인 3세의 법적지위ㆍ처우문제로 최대의 초점이 되어있는 지문날인 문제와 외국인 등록증 상시 휴대문제에 관해 「3세이후는 적용을 제외한다」는 방침을 정했다고 보도했다. 그 근거로서는 24일 이시하라 노부오(석원신웅) 관방차관을 중심으로 구리야마 쇼이치(율산상일) 외무,오카무라 야스다카(강촌태효) 법무사무차관,스즈키 료이치(영목양일) 경찰청차장등이 협의한 결과라고 들고 있다. 그러나 이 자리에서 협의된 것은 협정영주권자가 징역 7년 이상의 형을 받았을 경우 대상이 되는 강제퇴거 규정을 대폭 완화 한다는 선에 불과했다. 2시간에 걸쳐 행해진 이 회의는 일본정부가 처음으로 소집한 차관레벨의 협의였다. 같은 내용의 기사에서 아사히(조일)신문은 『3세 이후의 세대에 대해 「장래」 지문날인 의무를 면제한다』는 안을 중심으로 의견조정을 시도했으나 『법률의 명분상으로는 다른 외국인에게도 평등하게 적용하는 것이 도리』라고 주장하는 법무성과 『재일한국인과 조선인을 같이 취급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경찰청의 의견이 대립,결론을 내지 못했다고 지적했다. 외국인 등록법을 근거로 한 지문날인 문제에 관해 일본 관계 부처에서는 『이것은 기술적 문제이며 정치결단의 대상밖』이라는 것이 기본입장이다. 따라서 지문날인 제도를 폐지할 생각은 추호도 없으며,정치결단의 대상으로 삼을 수도 없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오히려 이 제도를 폐지한다면 『인물을 특정할 수 있는 다른 과학적 방법을 찾지 않을 수 없다』는 보도(25일자 마이니치(매일))도 나오고 있는 판이다. 이것은 더욱 해괴한 발상이라고 밖에는 볼 수 없다. 「과학적 방법」이란 쉽게 말해 「물리적ㆍ의학적 방법」을 의미하는 것이며,이것은 머리카락 이라도 잘라 보관하겠다는 뜻을 내포한다. 이처럼 일본의 관계부처 사이에 의견조정이 안되고 애드벌룬만 무성한 상태에서 다니노 아시아국장이 서울로 급파됐다. 그가 비공식 국장급 협의에서 내놓을 「제안」은 2가지 경우를 상정할 수 있다. 첫째는 3세이후에 대한 영주권 부여,재입국 규제 및 강제퇴거 규정의 완화 등을 중심으로 한국측의 의향을 타진하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그러나 이 경우 한국측으로서는 받아들이기 힘들다. 영주권 부여는 재일한국인의 정주성에 비추어 당연한 것이며 「선심」도 아무것도 아니다. 재입국 규제 및 강제퇴거 규정의 완화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일본인들이 「조센진」의 상징으로서 낙인을 찍어 놓고 싶은 심정에서 강행하고 있는 지문날인 제도가 폐지되지 않는한 재일동포들의 「역사의 한」은 풀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정신적인 것이며 상징적인 것이다. 실리로 따져 본다면 교원채용이라든가 지방공무원으로의 채용문제가 더 클 수도 있다. 다니노 국장의 「서울행」두번째 경우는 아무 제안 사항도 갖지 않은 채 실무회담에 임하는 경우이다. 다소간 내놓을 「선심」은 오는 30일의 외무장관 회담으로 미루고 자신은 단지 내부사정을 빌미로 한국측의 양보를 요구하는 작전으로 나올 가능성도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일본의 입장은 급하다. 가이후 정권의 안정과 장래 일왕의 한국 방문 실현을 위해 더 없이 소중한 한국대통령의 방일은 반드시 성사시켜야만 할 외교적 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정부는 아무 것도 현안 해결을 위해 내놓으려 하지 않는다. 역사인식은 아직도 올바로 잡혀지지 않았다. 여기에서 파생되는 일체의 책임은 일본측에 귀속하는 것이라는 것이 도쿄외교가의 일반적인 시각이다.
  • “위대한 몽골리안”… 칭기즈칸 복권운동 한창(깨어나는 몽고:2)

    ◎민족혼 “재점화”/민주화 바람 타고 “민족적 영웅” 추앙/“침략자”로 격하 70년만에 명예회복/배지ㆍ달력등 기념품 불티…묘찾기 작업 본격화 영하 15도에 매서운 한풍까지 심하게 몰아치던 4월1일 정오 울란바토르 시중심가에 자리한 야달트(승리) 극장앞. 약 5백명의 군중이 마이크 앞에서 외치는 연사들의 연설 내용을 듣고 있었다. ○행사장마다 추모행렬 군중이나 연사 모두가 추위에 아랑곳 않는 진지한 표정들이었다. 『칭기즈칸은 우리 몽고민족의 위대한 영웅입니다. 2백만 몽고 인민공화국 국민은 물론 중국의 내몽고나 다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우리 민족들은 이제 칭기즈칸의 정신밑에 하나로 뭉쳐야 할 때가 왔습니다』 연사의 말이 끝나자 우뢰같은 박수소리가 터져 나온다. 또 다른 연사가 등장. 『늑대를 잡으려고 초원 한 곳에 불을 질렀으나 그 늑대는 다른 넓은 초원으로 달아 났습니다. 소련은 칭기즈칸 정신을 말살시키려고 그에 관한 책이나 사적을 없애고 한낱 전쟁 미치광이로만 선전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정신,몽고인의민족적 자긍심은 초원을 끝없이 달리는 늑대처럼 굳세고 힘차게 우리 가슴속에 살아 전해 내려오고 있습니다. 칭기즈칸을 위해 만세를 부릅시다』 『칭기스칸 만세!』 『만세!』 ○“칭기즈칸 정신” 강조 곧이어 쇼열엘덴(발전하는 사회)이란 록그룹이 등장,칭기즈칸을 칭송하는 노래를 부르자 군중들도 모두 따라 합창을 했다. 추운 날씨속에 계속된 이 집회는 「칭기즈칸 추모사업회」 발족을 위한 것이었다. 연단앞에 걸린 거대한 그의 초상화가 후손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날 집회는 몽고의 저명작가 도초도르치를 비롯,시인ㆍ언론인ㆍ학자 등 지식인들이 주관했다. 흔히 외국인들이 「칭기즈칸」(Khan)이라고 부르는데 대해 몽고 사람들은 틀린 발음이며 「칭기즈한」(한)이 정확하다고 했다. 칭기즈는 몽고말로 강성하다라는 뜻이며 한은 왕ㆍ지배자를 가리킨다고 풀이했다. 요즘 몽고인들의 칭기즈칸 추모 열풍은 대단하다. 공산당 일당 독재를 폐기시킨 민주화가 민족혼을 불러일으켜 그들의 국민적 영웅인 칭기즈칸의 복권운동으로 점화된 것이다.○관련서적ㆍ사적 없애 추모사업회를 이끄는 작가 도초도르치는 『칭기즈칸의 대형 동상ㆍ기념탑등을 건립하고 그의 무덤을 찾아내 기념박물관을 세우겠다』고 말하고 있다. 울란바토르에 두 곳 뿐인 관광호텔과 단 하나의 외국인 백화점에선 칭기즈칸 배지ㆍ달력 등 그에 관한 기념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지난 1921년 몽고가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혁명에 성공한 이후 칭기즈칸은 철저히 무시당해 왔다. 몽고에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해 온 소련으로선 역사적으로 칭기즈칸에 대해 매우 굴욕적인 기억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최초의 국가인 키예프러시아를 1240년 멸망시킨 것이 칭기즈칸의 아들 오고타이이며 이들 몽고 기병은 불과 일주일만의 맹공으로 모스크바를 함락시키고 킵차크한국을 세워 무려 2백40년 동안이나 러시아인들을 노예로 부렸던 것이다. 몽고의 지배로 러시아는 서구의 르네상스ㆍ종교개혁 등 근대화에 필요했던 시대의 흐름에서 완전히 격리된 채 정체의 역사를 밟을 수 밖에 없었다. 울란바토르의 몽고 국립역사박물관장 다바삼부는 『칭기즈칸을 극도로 혐오한 스탈린의 영향을 받아 몽고의 민족 영웅인 칭기즈칸이 지나치게 천대받아 왔다』면서 앞으로 그의 유물과 유적을 모으고 보관하는데 여생을 보내겠다고 강조했다. 이 역사 박물관에는 3층 맨구석에 칭기즈칸의 초상화 하나만 덩그러니 걸려 있을 뿐 더 이상 그에 관한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동상ㆍ기념탑 건립계획 박물관 안내를 맡았던 튤스양에 따르면 몽고라는 표기도 현재 중국ㆍ한국ㆍ일본 등 한자권의 국가에서만 쓸 뿐 다른 곳에선 몽골(Mongolㆍ용감하다는 뜻)로 부른다고 했다. 몽고의 정식 국명도 몽골인민 공화국이다. 몽고란 명칭은 원래 한족 중심의 중국인들이 주변 이민족을 몽매한 야만인라고 경멸하는 뜻에서 붙인 것이라 했다. 또 몽골은 칭기즈칸이 속했던 부족 이름이기도 하다. 어렸을 때 테무친(철목진)으로 불렸던 그가 타타르,나이만 등 다른 부족을 평정,대초원에 제국을 건설함으로써 몽골이란 말이 국명으로 채택됐다는 것이다. ○초상하나만 덩그렇게 튤스양은 또 역사상 모스크바를 점령한 사람은 칭기즈칸과 나폴레옹 두 명 뿐이나 나폴레옹은 그나마 며칠 후 퇴각하면서 공격을 받았기 때문에 비교가 안된다며 칭기즈칸을 추켜세웠다. 아시아에서 유럽에 거쳐 대제국 건설의 기초를 다진 칭기즈칸은 1227년 여름 서하를 정벌하고 돌아오는 길에 현재 중국의 감숙성 진주 육반산에 갔다가 그해 9월 65세로 풍운 가득찬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시신은 고향땅으로 옮겨져 울란바토르 동북쪽 케룰렌강 주변에 묻혀졌다고 한다. 때문에 최근 몽고에선 그의 묘를 찾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으나 정확한 지점이 어디인가는 아직 어림조차 되지 않고 있다. 지난해 발간된 몽골리아지는 「칭기즈칸의 무덤은 어디인가?」란 제목의 기사에서 몽고인들이 과거 봉분의 풍습이 없었던 데다 후세 이민족이 시신을 훼손할 것을 우려,칭기즈칸의 묘지 소재를 비밀에 부쳤다고 밝히고 있다. 이 잡지는 당시 칭기즈칸이 묻힌 자리를 1천마리의 말이 밟아 흔적을 없앴으며 그자리에 풀이 무성하게 자랄 때까지 3년동안 몽고기병들이 파수를 보았다고 했다. 또 묘지 넓이는 직경이 30리에 이르고 귀중한 부장품이 엄청나게 많이 묻혀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칭기즈칸」 노래 유행 칭기즈칸의 아들과 동생들은 몽고대제국을 킵차크ㆍ오고타이ㆍ차가타이ㆍ일한국등으로 나눠 통치했으며 손자인 쿠빌라이는 원나라를 세워 북경을 수도로 삼았다. 그러나 이 방대한 대제국도 원의 멸망과 함께 붕괴되기 시작한다. 『용서해주세요 칭기즈칸/우리는 당신의 어두운 면만을 얘기했답니다/그러나 앞으로 우리는 당신을 민족최고의 영웅으로 받들겠습니다』 최근 유행하는 칭기즈칸 노래의 내용이다. 비록 소련의 입김에 의한 것이긴 하지만 조국에서 조차 제국주의자ㆍ전쟁광으로 낙인 찍혀 멸시 당했던 칭기즈칸. ○낙후 몽고에 새 활력 그러나 초원을 휩쓸고 있는 민주개혁의 열풍으로 다시 몽고 국민들의 우상이 된 그가 공산주의로 찌들리고 낙후된 이 나라의 내일에 어떤 형태든 활력을 불어 넣을 것이란 점을 부인할 수 없다는 느낌이 들었다.〈울란바토르=우홍제특파원〉
  • 여선 “일과성” 간주… 야선 “쟁점화” 기도

    ◎정호용씨 사퇴… 여야의 입장/「불법」 규명 어려워 야측 공세엔 한계/“여권 지도부 도덕성에 흠집” 관측도 정호용씨가 대구서갑 보궐선거에서 후보를 사퇴함으로써 정국이 새로운 국면을 맞게됐다. 평민당은 정씨의 사퇴가 강압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불법이라고 주장,후보사퇴 문제를 다루기 위한 임시국회를 즉각 소집토록 요구했고 대통령에 대한 탄핵소추까지 거론하고 있다. 민주당(가칭)도 정씨 사퇴과정에서 노태우대통령을 비롯한 여권의 행위가 불법적이었다고 주장하며 보궐선거에서 후보를 낸 당사자로서 관계당국에 이를 고발하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야권의 이러한 움직임에도 불구,정씨사퇴에 따른 여진이 정국의 흐름자체를 뒤바꿀 정도로 오래 지속되지는 않으리하는 것이 일반적 관측이다. 임시국회 소집요구의 경우 의석이 개의정족수(재적 4분의 1)에 미달하고 있는 평민당은 민주당에 함께 임시국회를 소집토록 요청했으나 민주당은 보궐선거에 전념해야 한다는 이유로 이를 거절했다. 대통령 탄핵소추는 평민ㆍ민주당 의석을 모두 합해도 발의(재적 3분의 1이상)조차 할 수 없어 단순 「엄포」에 그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씨사퇴를 둘러싸고 여권 수뇌부의 불법행위가 있었느냐에 대해서는 앞으로 선관위의 유권해석,또 고발이 됐을때 법원의 결정을 기다려보아야겠지만 이 또한 정치공방으로 그칠 가능성이 높다. 민주당측은 정씨 사퇴과정에서 여권이 국회의원선거법 1백54조(후보매수및 이해유도죄)및 1백59조(선거자유방해죄)를 위반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국회의원선거법 1백54조는 「후보자가 되지 아니하게 하거나 후보자가 된 것을 사퇴하게할 목적으로 금전ㆍ물품ㆍ거마ㆍ향응 기타 재산상의 이익이나 공사의 직을 제공하거나 그 제공의 의사를 표시 또는 제공을 약속한 자는 5년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또는 50만원이상 2백50만원이하의 벌금에 처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1백59조는 후보자ㆍ당선인 등 선거관계자를 폭행ㆍ협박ㆍ유인하거나 불법나포 또는 감금하면 1백54조와 같은 처벌을 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정씨를 사퇴시키기 위해서 여권이 노대통령이하 모든 가용채널을 동원,설득에 나섰다는 것은 공지의 사실이다. 또 정씨 사퇴이후 다른 방법으로의 명예회복을 위해 공직기용 약속 등이 있었으리라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지만 정씨에 대한 설득이 「협박」에 가까웠는지를 입증할 구체적 증거를 확보키는 어려울 것으로 보이며 정씨가 스스로 입을 열지 않는한 금품이나 공사의 직을 제공키로 약속하는등의 「매수」 행위가 있었다고 단정키 어려울 것으로 관측된다. 지난해 동해재선거 후보매수사건으로 구속된 구민주당 서석재사무총장의 경우 당시 매수당한 이홍섭후보가 매수사실을 시인했고 매수금전까지 명확히 확보되었던 케이스로 이번 정씨 파동과는 전혀 성격을 달리 한다 하겠다. 해방이후 우리 정치사를 볼때도 여권이 야당이나 재야인사를 불법 탄압할 때는 법적ㆍ정치적 시비거리가 되었지만 같은 여권인사에 대한 행위는 유야무야되는 경우가 많았다. 앞으로 선관위 유권해석이나 법원의 최종결정을 지켜봐야 되겠으나 법적 하자가 없다는 결론이 나온다 하더라도 정씨 사퇴과정과 관련해 여권지도부가 어느정도도덕적 타격을 받은 것은 사실인 듯 싶다. 6공출범이후 특히 금년초 3당통합이후 민주나 개혁을 향한 「신사고」를 주창해온 여권으로서는 정씨 사퇴를 끌어내기 위해 기관의 개입이나 강압적 설득이 있었다는 인상을 일반에게 준 것이라든지 40여명의 소속의원을 선거운동원으로 등록시키면서까지 대구보궐선거를 과열시킨 것 등에 대한 비난을 면키 어렵다. 이 때문에 3당통합이후 침체에 빠졌던 야권에 정계개편의 당위성 시비와 함께 또 하나의 정치공세거리를 제공했다고 볼 수 있다. 평민당은 다음달 1일 부천대중집회를 통해 정씨 문제와 관련한 현 정권의 부도덕성을 규탄할 계획이며 민주당은 이번 사태를 대구보궐선거에서 자당 공천자인 백승홍후보의 득표전략에 최대한 이용하겠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야권은 자신들이 광주사태의 「가해자」라고 낙인찍은 정씨를 정권으로부터 핍박받는 「민주투사」로 부각시키는 데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정씨 사퇴를 둘러싼 정국의 파문은 4월3일 보궐선거 실시로 일단락되리라는 전망이다. ◎정호용씨 일문일답/「권유」 받았을뿐 압력에 의한 사퇴 아니다/선거과열ㆍ대구사회 심한 분열도 큰 작용 ­앞으로의 거취는. 『조용히 살겠다』 ­대구에서 살 것인가. 『아직 결정하지 않았다』 ­후보를 사퇴하면서 14대 공천이나 다른 보장은 받았는가. 『전혀 받지 않았다. 다만 나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신분상 불이익을 당하지 않도록 한다는 보장만 받았다』 ­사퇴의 최종결심은 언제했는가. 『며칠전에 선거가 너무 과열되고 이러다간 대구 사회전체가 분열되는 게 아니냐는 우려가 들었고 또 친구지간에 반목이 심화되는 게 아니냐는 걱정과 지적이 있어 사퇴를 결심하게 됐다. 대통령과의 면담이전에 이미 마음을 굳히고 서울로 올라갔다』 ­후보사퇴를 정계 은퇴선언으로 봐도 되는가. 『현재 심정으로서는 정치하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다만 내가 이번에 사퇴하게 된 것은 평소에 존경하는 군선배나 친구들의 권유를 받아들여 사퇴한 것이다』 ­여권의 사퇴압력은 없었는가. 『그것은 권유이지 압력은 아니다. 다만 나의 마음을 아프게 했을 뿐이다』
  • 벼랑에 선 공산주의/변혁물결 집중탐구:1

    ◎시장경제ㆍ다당제로의 전환 몸부림/「노멘크라투라」군림에 국민불만 폭발/레닌의 국가론에 반하는 개혁 불가피/동구 자유선거 실시땐 공산당 붕괴는 시간문제 동구와 소련의 격변이 거듭되고 있다. 그것을 바라보는 서방의 시각은 여러갈래며 또한 심상치 않다. 공산주의 내부 모순을 극복해 가는 개혁의 소용돌이라는 측면이 있는가 하면 상당히 위기적인 모습으로 평가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불확실성을 더해가고 있는 공산권의 변혁을 국내 학자들은 어떻게 보고 있는가. 서병철(외교안보연구원교수),박명호(국민경제제도연 연구위원),안정수(경희대교수),박영호씨(한신대교수)등 네분의 다양한 입장의 분석을 차례로 소개한다. 1,공산주의채택 이전으로의 복귀 공산주의국가들이 사회주의 이념을 국가의 통치원칙과 경제운영방식으로 채택한 것은 소련이 종주국가로서 1917년 볼셰비키혁명 때였던 것을 제외하고는 대개의 경우 2차대전이 종결된 1945년 이후 약 반세기 걸친 현실 사회주의 기간이다. 독일 제3제국과 일본군국주의를 패망시킨승전연합국중 하나인 소련은 전리품으로 할당받은 동유럽 국가에서 해방군으로서의 영향력을 행사하여 공산주의를 심는데 성공하였다. 전후 귀국한 런던망명정부 요인들과 기존브르좌 정당 및 공산주의자들이 참여한 첫번째 선거에서 소련에서 훈련된 공산당원들은 소수밖에 정계에 진출하지 못하였으나 소련은 이들을 보안담당 내무 및 국방등 주요부서에 심어 놓고 비공산세력을 제거하여 결국에는 친소정권이 수립되어 공산화되도록 하는 수법이 활용되었다. ○팽배한 반소사상 이와 같은 과정은 독일점령군에 저항하여 독립을 쟁취할 유고슬라비아와 내전을 통하여 공산화할 중국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든 동유럽국에서 예외없이 거치게 되었는데 국민들이 원치않는 공산체제를 외세에 의하여 불가항력적으로 채택한 결과가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보면 동유럽국가에서 발생하고 있는 민주화 추세는 본래의 희망이 충족되어 공산화이전의 상황으로 되돌아 가는 순리에 따른 역사적 흐름이다. 소련영향권에 속한 나라들에 있어 반소사상이 팽배해 있는 현상은공산주의를 강요한데 대한 적개심의 발로이다. 또한 프롤레타리아가 주인이라는 공산국에서 기대했던 「근로자의 열광된 노동」이 있어 본적도 없는 사실은 공산이념의 본질적 취약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선견지명때문에 난처한 입장에서 구제되었다고 보겠다. 그는 1987년 11월 볼셰비키혁명 70주년 기념연설에서 『소련공산당은 동맹국의 정책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고 소련과 다른 사회주의 국가간의 관계가 수직에서 수평으로 바뀌었음을 분명히 하였다. 그는 또한 198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사회주의 국가들이 나라사정에 맞는 노선을 채택할 수 있다고 연설하여 페레스트로이카(개혁)정책을 재확인하였다. 이러한 정책변화를 선언해두지 않았던들 소련은 동유럽동맹국들이 시장경제와 다당제를 채택하여 고삐를 벗어나는 것을 허용할 명분을 찾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망령을 다시 불러들여 무력을 동원하여 간섭할 상황도 아니기 때문에 극히 난감한 입장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긴장완화의 산파로서 서방진영에서 높이 평가받고 동유럽에서는 개혁을 허용한 유공자로서 「고르비선풍」을 일으킬 만큼 인기가 높고 소련에게는 체면을 살려준 선각자이다. 2,개혁의 복합적 원인 독일철학자 카를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사상의 이론적 근거를 제시한 「역사적 유물론」을 통하여 사회주의와 공산주의로의 변천은 역사적 법칙으로 어느 누구도 중단시킬 수 없으며 자본주의는 몰락할 것이라고 단언하였다. 그러나 그의 주장은 오늘날 공산권에서 현실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들에 의하여 잘못된 예측의 결과이었음이 증명되고 있다. 정치이념으로 무장되어 전쟁까지도 불사하도록 만들었던 장본인인 마르크스가 수모를 피할 수 없게 된 이유는 정치ㆍ경제ㆍ사회 등 모든 분야의 복합적인 요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침체ㆍ낙후만 초래 공산주의 정치는 「프롤레타리아독재」를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정당이 국가위에 군림하여 모든 권력을 장악한다는 제한성을 애초부터 갖고 있기 때문에 국민들의 뜻이 제대로 정치에 반영될 수 없다. 따라서 통제와 감시가 주된 통치수단이 되고 국민들의 불만은 축적되어 기회만 있으면 터질 수 있는 상태에까지 발전하였다. 경제적으로도 사회주의건설을 위하여 중앙계획통제체제속에서 당지도부에서 국민경제행위를 엄격한 규격속에 묶어 운영한 결과 침체와 낙후만을 초래하였다. 국민에게 생활의 질을 높여주기 위하여 과감한 경제개혁이 불가피하게 되었는데 이제는 자본주의와의 체제경쟁적 관점에서가 아니라 물질적 풍요를 바라는 국민들의 요구를 들어주기 위하여 시장경제를 채택할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국가에 있어 이론상의 지배계급은 노동자와 농민이며 이들이 나라의 주인으로서 공산주의 정당을 통하여 특권을 행사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근로자를 중심으로 한 일반국민은 하층계급을 형성하고 당간부 및 정치ㆍ경제 엘리트로 구성된 지배층에 대층되는 만년 서민역할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론과 실제가 다른 현실에 불만족하는 국민의 울분이 축적되어 과감한 개혁만이 문제해결의 방법이 되었고 신흥귀족으로 형성된 「노멘크라투라」를 혐호하는 국민감정은 개혁을 가속화시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3,시장경제로의 변화 마르크스는 사회경제발전 이론속에서 자본주의가 사회주의로 변천하기 위한 조건을 제시하고 사회주의가 고도의 경제성장을 가져온다고 선언하였는데 레닌과 스탈린이 이를 바탕으로 공산주의 중앙계획통제 경제체제를 확립하였다. 일사불란한 지휘체제속에 움직이는 이제도는 제한된 자원과 노동력을 단기간안에 동원할 때에는 그런대로 효험이 있었으나 경제구조가 다양화되고 국제협력이 확대되면서 필요로하는 활력을 주지 못하여 침체만을 유발하는 제도로 탈락하였다. ○개인 창의성 결여 중앙계획제도가 풍부한 천연자원과 잠재노동력을 가진 광활한 땅 소련에서 조차 쓸모없는 것으로 낙인찍힌 것은 고르바초프가 집권한지 1년만인 1986년 2월 개최된 27차 당대회에서 과감한 경제개혁을 강조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계획된 수량생산에만 치중하고 시장ㆍ분배ㆍ서비스ㆍ판매에는 소홀하며 개인창의성을 높이려는 노력이 결여된 이 제도가 통용된 사회주의권 전체가 침체의 늪에서 허덕이고 있는 상황에서 신속히 벗어나기 위해서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것이 유일한 처방으로 인식되게 되었다. 시장경제체제가 오늘날에는 모든 동유럽 국가에서 국민을 잘 살게 해 주는 특효약으로 받아들여지고 사회주의권 공동번영을 위하여 소련에 의하여 적극 권장된다. 시장경제 체제로의 개혁은 처음 헝가리에서 1968년 니에르쉬 사회당수(당시 경제연구소장)의 제창으로 시작되었는데 헝가리가 사회주의 국가중에서 최초로 작년 2월 한국과 국교를 수립하여 북방정책에 첫번째 결실을 맺게 했던 나라라는 점을 고려할때 헝가리의 진취성은 모든 분야에서 돋보인다. 4,다당제의 채택 공산주의 국가들이 일당독재 통치를 하면서 이론적 받침대로 삼아온 레닌의 국가론을 보면 국가는 사회주의 건설을 계획하고 완수하는 것을 목표로 하여 그 존재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는 지배계급인 노동자층의 전위기능을 가진 공산주의 정당의 교시에 따라서만 통치되도록 되어 비공식 정당의 정치참여가 사실상 금지된다. ○일당독재 쇠퇴 그러나 알바니아를 제외한 모든 동유럽 국가들이 금년 상반기안에 자유선거를 실시하여 작년에 시작된 정치개혁을 제도적으로 마무리 지을 계획을 세워놓고 있어 다당제 채택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소련에서도 공산당의 지도적 역할을 명시한 헌법6조를 개정하기 위한 공산당 중앙위원회가 현재 개최중에 있다. 자유선거가 실시되면 공산주의정당은 자연 소멸하거나 최소한의 의석만을 갖는 군소정당으로 전락할 것이 분명하다. 폴란드에서 공산국으로서는 처음으로 작년 6월 하원의석의 35%만이 허용된 제한적 자유선거가 실시되었을 때 자유노조가 의석을 석권함으로써 국민들이 공산당을 발붙이지 못하도록 혐오한다는 사실이 나타난 바 있다. 이는 헝가리공산당이 사회민주주의적 정당으로 탈바꿈하게 하는 자극제가 되었고 동독ㆍ불가리아ㆍ체코에서도 공산당이 체질개선을 서두르도록 만들었다. 피를 흘린 혁명에 의하여 차우셰스쿠 정권이 타도된 루마니아에서도 총선거가 실시될 계획으로 있어 모든 동유럽 국가에서 다당제가 채택된다. 5,이념에서 떠나 군사ㆍ경제적으로 결속 동유럽국가 사람들이 「동유럽」이라는 표현을 싫어하고 「유럽」혹은 「중부유럽」으로 불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공산주의 체제가 열등한 것으로 일반적으로 인식되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는 공동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을 결속하는 응집력을 상실했고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집착해 볼만한 이념으로서의 매력도 잃었다. 소련은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로 새로운 사태발전에 능숙히 대처하고 있듯이 공산권의 질적 변화를 페레스트로이카와 글라스노스트에 동조하는 것으로 수용할 것이다. 소련은 폴란드의 마조비에츠키 비공산내각이 바르샤바조약기구와 코메콘의 회원국으로서 의무와 책임을 다할 것이라고 서약한 예를 다른 동맹국의 새정권에도 요구할 것이다. 작년7월 부카레스트에서 개최된 바르샤바조약 군사자문위원회에서 소련은 통합의지를 강하게 부각시켰고 회원국의 탈퇴불가 원칙을 재확인한 바도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 코메콘회원국간 협조가 이루어지지 않고 나라별 개혁이 기구구조와 일치되지 않는다는 이유에서 1992년 완성될 유럽공동체 시장단일화에 적응키 위한 공동시장 건설이 적극 추진된다. ○집단결속력 상실 동유럽국가들이 다투어 추진하는 시장경제와 다당제채택은 국민들의 열망을 배경으로 하기 때문에 후퇴란 있을 수 없다. 한번터진 봇물은 막을 수 없으며 만약 전체주의적 보수세력이 저항한다면 이는 역사적 추세를 거스르는 것이므로 루마니아에서와 같은 피를 흘리는 혁명으로 연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서병철 ■서울대독문과졸 서독쾰른대(정치학) 수학 ■서독 본 대학교 정치학 박사 ■서독 국제문제연구소 연구위원 ■서독 라인차이퉁(일간신문)기자 ■저서=▲자주외교론 ▲통일을 위한 동서독관계의 조명 ▲변모하는 공산권
  • 사랑은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다/황산성 변호사(서울시론)

    ◎사리사욕만 쫓는 옹졸함 버려야 새해가 왔습니다. 1990년도는 힘벅찬 새해라고 표현하고 싶습니다. 말처럼 달리고 또 쉴틈없이 달리면서 방향을 잘 잡아야 하는 새로운 역사의 장이 열리는 새해입니다. 고르바초프의 기치아래 바웬사를 낳은 폴란드를 위시하여 동ㆍ서독의 해빙,체코ㆍ루마니아 등 동구권의 급격한 변화를 뉴스로 듣기만 하고 있습니다만 우리는 무슨 변화가 있을지에 대한 감도 잡지 못하는 역사적 악순환과 우를 범하는 변방국가로 또 낙인 찍히고 싶지는 않겠지요. ○판도 뒤바꾼 고르바초프 게다가 90년대 말은 지구종말론의 심리적 압박감도 큰 부담이 됩니다. 실제로 인류 모두가 공동으로 자연에 대한 중대하고도 심각한 문제인식과 애착을 쏟지 않으면 지구는 죽어가고 있는 형편 아닙니까. 죽기 전에 지구본을 거꾸로 뒤집어 놓고 『여기 한반도가 상고머리 명당자리요!』 큰소리 한번 쳐 보아야 할 터인데요. 과소비 무절제 분규몸살 수출부진 경기침체 등 방정맞은 단어들은 내동댕이 치고 이 한반도에서 심호흡이라도 마음놓고쉬다가 후회없이 한번 살다 갑시다. 이 시대에 위인이 나타났습니다. 고르바초프에 대한 감탄과 찬사가 막히지를 않습니다. 저도 그를 가장 존경하고 그가 추진하는 모든 개혁들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는 사명감도 투철하고 행동력ㆍ결단력이 있으며 통찰력도 뛰어나고 거기에다 희망을 보여준다고 합니다. 그는 현대인의 상상을 초월하고 무궁무진한 변수로서 역사의 판도를 뒤바꾸어 놓았다고 합니다. 그가 경제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세워나가는 전략이라고 그를 과소평가하는 말도 있습니다만 공산독재정권하에서 혼자 누릴 수 있는 부귀영화를 마다하고 왜 인류애ㆍ자연애ㆍ역사애까지 들먹이며 모험을 할까요. 신의 무기를 동원했다,선의 대가이다라는 신출귀몰한 표현으로 그를 경탄해마지 않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정신은 「사랑」이 바탕일 것입니다. ○「위인」 없는 우리의 현실 그는 천하대국의 지도자 부시의 기를 죽일 수도 있지만 부시가 열등의식을 가질까봐 매사를 양보하는 자세로 협상에 임했다니 그는 사랑이 출렁출렁 넘치는 멋쟁이 사나이입니다. 우리에게도 그만한 활동무대만 주어지면 그와 같은 위인이 없었는줄 아십니까. 절대군주체제하에 세종대왕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생활의 편의시설과 문자를 만드셨습니다. 이순신장군은 자신의 지위와 영광보다 그 위에 조국과 백성이 자리잡고 있었기에 공사간 위난을 극복하는 인내를 후손에게 귀감으로 보이셨습니다. 우리의 현대사에서는 사랑을 실천한 인물을 찾을 수 없습니다. 젊은 세대가 우러러 존경할 만한 위인을 찾지 못하고 고 박종철군 고 이한열군 등 애석한 죽음에 매달려 있는 안쓰러운 모습을 아직도 지우지를 못하고 있습니다. 배움에 한계가 없는 학원에서 세계가 다음 타도의 대상으로 여기는 김일성을 쳐다보는 몰상식한 우리의 젊은 세대를 누가 책임져야 합니까. 새해가 왔다고 해서 목표를 지나치게 크게 설정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장애자,집없는 사람들,철거민들,고아,노인들,근로자들 등 어려운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대해 주시고 희망있는 장래를 보여주시면 됩니다. ○「희망있는 장래」 제시를 그리고 곳곳마다 정의와 공평이 그 의미대로 살아 움직이게 하면 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매사에 「사랑」이라는 잣대로 빗대어 보면 우리의 역사는 변화 발전할 것이며 우리 모두가 위대한 삶을 맞이할 것입니다. 한반도의 지형을 토끼모양에서 달리는 말모양으로 바꾸어 봅시다. 잽싸게 달리다가 낮잠자는 모습이나 자기 이익만 추구하는 교활한 사기꾼 모습을 지우고 저 북한의 백두산까지 아니 연변까지 희망차게 달리는 말을 그려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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