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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포 나잇 폴스, 억압 동성애작가의 자유 갈망…

    어느 사회나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몰라도 동성애는 금기시된다.공산주의 사회라면 상황은 더 어렵다.‘비포 나잇 폴스’(Before Night Falls·21일 개봉)는 쿠바의 격변기를 온몸으로 통과한 동성애 작가의 삶을 통해 욕망에 대한 권력의 억압과 자유에의 갈망을 그린 작품이다. 쿠바 오리엔테 지방에서 태어난 레이날도 아레나스.외딴 시골에서 대자연의 감성과 자유를 만끽하지만,시적 재능이 있다는 학교 교사의 말에 벌컥 화를 내는 아버지를 둔,가난하고 무지한 가정에서 자란다.10대에 무작정 집을 떠나 카스트로 반군에 가담한 그는 스무살 때 아바나 대학에 입학,문학적 재능을 키워나간다.동성애자로서 정체성에 눈을 뜬 뒤 그의 삶에는 격풍이 찾아온다. 60년대 동성애자들에 대해 대대적인 탄압을 벌이는 카스트로 정권.영화는 인간의 사적인 욕망인 동성애가 정치권력과 맞물리는 지점을 포착한다.아레나스와 친구들은 정부의 탄압이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더욱 성의 향연을 벌인다.그들에게 동성애란,가장 내밀한 감정을 억압하는 권력에 대한 저항의상징이다.그들의 처절한 몸짓에는 어느 정치범 못지 않은 울림이 있다. 천재적인 문학적 재능과 남과 다른 감수성을 가졌기에 먼 인생여정을 힘겹게 걸어가야 한 아레나스.미국으로 망명을 선택하지만,자신의 꿈이 시작된 곳과 멀리 떨어진 이국 땅에서 ‘존재하지 않는 자’로 낙인찍힌 채 살아가는 삶이 행복할 리 없다.결국 에이즈에 걸리고 외롭게 죽음을 맞는다. 이 비극적인 작가의 행로를 좇아간다고 해서 영화의 색채가 어둡고 우울한 것은 아니다.‘바스키아’를 만든 화가 출신의 감독 줄리앙 슈나벨은 현실과 환상을 오가며 영화에 풍성한 질감을 덧입힌다.영화는 아레나스의 시각에서 전개된다.그가 클럽에 갔을 때 연인 페페 말라스가 다른 여인과 춤을 추자,흥겹던 쿠바음악 대신 루 리드의 몽환적인 음악이 흐르고 대사없이 천천히 화면이 전개되면서 아레나스의 심리를 그려낸다. 배우들의 감칠 맛 나는 연기도 일품.아레나스 역의 스페인 배우 하비에르 바르뎀은 순수한 욕망에서 공포 속 절망까지 다양한 표정을 연기한다.동성애자들의 연인인봉봉과 아레나스를 거칠게 심문하는 군인 빅터로 1인2역을 소화해 낸 조니 뎁,혁명에 참여하려는 아레나스를 마차에 태워주는 농부로 잠시 얼굴을 내미는 숀 펜의 모습을 보는 것도 즐겁다. 하지만 씁쓸한 뒷맛이 남는 것은 이 영화가 철저히 서구인의 시각에서 그려져서일까.체 게바라의 휘장을 뒤로 하고 쿠바를 떠나는 망명인들,무자비한 폭행을 일삼는 군인들의 모습에서 공산주의는 절대악으로 묘사된다.‘브에나비스타 소셜 클럽’에서 빔 벤더스가 소유에 대한 욕심이 없으면서도 미국에 대한 갈망을 가진 이중적인 쿠바인의 모습을 잡아냈다면,이 영화가 쿠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면적이다. 할리우드 영화가 아니고 스페인 배우가 주연을 맡았음에도,지난해 아카데미와 골든글로브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되고 각종 미국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2000년 베니스영화제에서는 심사위원 대상,최우수남우주연상을 받았다. 김소연기자 purple@ ■영화속 동성애/ 異性사랑하는 일반인과 동일 조명 동성애를 소재로 한 영화가 주류영화에 대해 당당히 ‘커밍 아웃’한 것은 80년대.윌리엄 허트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을 받은 85년작 ‘거미 여인의 키스’는 70년대 군사독재 시대의 아르헨티나를 배경으로 정치범과 동성애자의 교감을 아름답게 그리면서 일반 관객들의 휴머니즘을 자극했다. 이후 주류영화에서 동성애를 다루는 방식은 대부분 이 휴머니즘의 공식을 따른다.동성애자가 이성을 사랑하는 이들과 하등 다를 것이 없음을 역설하는 것.동성애 변호사의 힘겨운 투쟁기를 그린 ‘필라델피아’,동양인과 서양인의 동성애를 통해 서로 다른 삶을 인정하게 되는 가족 드라마 ‘결혼 피로연’,편견을 꿋꿋하게 이겨가는 아름다운 영혼들의 여행기 ‘프리실라’,남성의 정체성을 가진 여성의 슬픈 사랑이야기 ‘소년은 울지 않는다’,동성애자로서 정체성을 찾아가는 한 시골마을 교사를 유쾌하게 그린 ‘인 앤 아웃’등의 90년대 영화는 동성애자를 일반인과 같은 감정과 인권을 가진 인간으로 조명한다.동성애를 역사,정치,가족 등 복합적인 관계 속에 놓고 성찰하는 영화도 많이 나왔다.방황하는 영혼을상징한 ‘아이다호’,아일랜드의 정치와 접목한 ‘크라잉 게임’,서양의 오리엔탈리즘으로 동성애를 끌어들인 ‘M 버터플라이’,70년대 보수주의 정권을 배경으로 하위문화의 짧고도 화려한 날갯짓을 그린 ‘벨벳 골드마인’.그밖에도 ‘패왕별희’‘토탈 이클립스’‘바운드’등에서 동성애는 여러 얼굴로 등장한다. 한국영화에서는 여전히 동성애란 소재를 찾아보기 힘들다.96년작 ‘내일로 흐르는 강’이 한국현대사를 훑으며 가부장적 가정에서 성장한 남성의 동성애를 다뤄 화제가 됐지만 대중적인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다.이후 동성애는 양념 구실에 그쳤다.‘번지점프를 하다’에서는 인연과 윤회 속에 묻혔고,‘와니와 준하’도 주인공의 사랑 주변을 맴도는 코미디로 희화화했다.하지만 동성애를 소재로 현대인의 성을 솔직하게 그리겠다고 선언한 ‘욕망’‘로드무비’가 올 하반기에 개봉을 앞두고 있어 본격적인 논란이 예상된다. 김소연기자
  • [데스크칼럼] 美 흔들리는 ‘멜팅 폿’

    미국의 많은 식자들이 스스로 미국 사회를 가리켜 ‘멜팅 폿(melting pot·도가니)’이라고 부른다.사실이 그렇다. 오늘의 미국을 건설한 것은 잉글랜드계 백인 기독교도들만의 힘이 아니다.무엇보다 아프리카 흑인들의 절대적인 희생과 힘이 있었고 거슬러 올라가면 중국인 철도노무자,아일랜드인,러시아인,독일인,사탕수수밭 인부로 진출했던 한국인이 있었다. 각양각색의 피부색과 종교,이질 문화가 쇳물처럼 녹아들어 오늘의 미국을 이루게된 것이다.종교간 불화가 끊이지 않는 중동과 달리 회교사원과 유대교 시나고그,불교 사원과 기독교 교회가 동네마다 자리를 같이하는 게 미국사회다. 9·11테러 이후 이 ‘멜팅 폿’에 금이 가고 있다.미국인들은 9·11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그런데 이 만행을 향한 분노와 증오가 이슬람에 쏟아지며 아랍계 아메리칸들이 ‘담장 밖’으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테러 이후 미국의 크고작은 도시에서 아랍인들은 요주의 인물로 낙인찍혔고 멀쩡하게 잘 지내던 어린 학생들까지 급우와 교사들에게서 경원당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테러 정보와 첩보를 제때 입수해 대처하지 못한 당국은 자신들의 태만과 부주의를 모면하려는 듯 이 증오심에 기름을 붓는 조치들을 계속 내놓고 있다. 미국을 방문하거나 미국땅에 사는 수십만명의 아랍인들이 지문날인과 거주신고를 하도록 강요받게 된다.그리고 20만명에 가까운 요원을 거느리고 국가안보에 관련된 모든 정보를 총괄하는 국토안보부가 만들어진다.여야가 반대하지 않으니 이르면 연내에 이 ‘빅 브라더’가 예정대로 출현할 것이다.이 거대 조직의 임무는 쉽게 말해 미심쩍어 보이는 이슬람교도들을 모두 추적,조사하는 것이다. 이런 조치가 얼마나 무모하고 비효과적인지는 조금만 생각하면 알 수 있다.20만명 아니라 200만명이 나선다고 죽기를 작정한 테러범을 다 막을 수 있을까.그 과정에서 죄없는 시민들이 영문도 모르고 겪어야할 불편함과 부당함은 어떻게 할 것인가. 일차적인 대상은 아랍인들이지만 결국은 아시아인을 포함한 모든 유색인들이 잠재적인 범죄자 취급을 당하게 될지 모른다. 테러범들을 향한 증오심이 이렇게 미국의 위정자,식자층,일반 시민들의 눈을 멀게 하고 있다.이런 조치들은 미국내 테러범들의 은신처를 더 비옥하게 만들고 더 많은 동조자를 양산하는 부작용을 가져온다는 것을 왜 모를까.증오는 더 큰 증오를 낳을 뿐이다. 타이거 우즈,오프라 윈프리,콜린 파월,그리고 이란 이민의 딸인 걸출의 방송기자CNN의 크리스티안 아만푸르…미국의 많은 유색인 젊은이들이 이들을 보며 자신의 미래를 키운다. 지금이라도 미국은 미국에 증오심을 가진 이들의 마음을 치유하는,보다 근원적인 작업에 눈을 돌려야한다.친이스라엘 일변도의 외교를 바로잡고 이슬람에 대한 뿌리깊은 편견을 고치는 일부터 시작해야 한다.그것이 아랍인들의 지문을 모두 찍는 것보다 훨씬 더 효과적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미국은 ‘멜팅 폿’이 아니라 그 반대인 해체의 길로 나아가고 있다. 이기동/ 국제팀장yeekd@
  • [대한광장] 불법체류자 자진신고 현장에서

    5월11일 오전 9시.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옛 남부지원터.담장을 따라 늘어선 행렬은 인근 아파트 단지와 공원에 이르기까지 200m쯤 계속된다.행렬을 따라 중국어와 영문 표기의,‘자진신고’에 필요한 사진·승선권·항공권 등과 관련한 ‘이동식 간이 상점’도 늘어서 있다. 건물 앞마당에는 서류작성을 마친 300여명의 불법체류자들이 영등포경찰서 방범순찰대의 지휘 아래 질서를 유지하며움직인다.쪼그려 앉아 있지만 그래도 임시로 설치한 차일이 있어 햇볕을 가릴 수 있다.간혹 금발의 러시아 여성과 가무잡잡한 방글라데시인,필리핀인이 눈에 띄지만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 조선족과 한족이 대부분이다.이루지 못한 ‘코리안 드림’으로 불법 낙인이 찍힌 이들이다. 26만여명으로 추산되는 이들 노동자는 법무부 출입국관리소의 예상을 뛰어넘어 11일 현재 15만명 이상 신고를 마쳤다. 접수 초기에 21개이던 창구를 47개로 늘려 하루 6000여명의 접수처리를 하고 있는 과다한 행정업무에 큰 도움을 주는민간단체가 있다. 까다로운 절차와 고용된 사업주의 비협조로 어려움이 많은데다 우리말이 서툴러 3중고를 겪고 있는 이들을 위해 30여명의 자원봉사자들이 서류대필과 친절한 안내를 도맡고 있다.성남과 구로동 두 곳에서 일찍부터 이들 외국인노동자가 최소한의 사람대접을 받을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중국 동포의 집’과 ‘외국인 노동자의 집’이 그들이다.이들 불법체류자는 정부기구인 주한 외국공관보다도 이 NGO를한결 친근하게 여긴다.이들 단체를 방문해 설명회를 개최하고 홍보전단을 배포한 법무부의 기획의도는 적중했다.일시적 합법체류 승인인 셈인 자진신고 이후의 대책이 큰 숙제로 남아 있지만 어쨌든 26만여명이 ‘불법’의 불안과 공포로부터 해방되는 일은 인권보호의 측면에서는 우선 반가운일이 아닐 수 없다. 파출부로 일하는 조선족 여인이 유니폼 차림의 아파트경비원을 경찰관으로 오인하고 여러 차례 혼절하듯이 도망다녔다는 일화는 가슴아픈 이야기가 아닌가.이들 NGO 자원봉사자는 접수 초기에 가난한 살림살이에도 불구하고 햇볕 아래 서너시간씩 서 있는 노동자들에게 생수를 제공하고,법무부 당국에 천막을 칠 것을 요청하고,접수업무가 신속하게 이뤄질 수 있도록 조력했다.이들의 대표인 김해성 목사는 동분서주하느라 햇볕에 그을린 농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자진신고가 결코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기에이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시각도 있을 수 있다.그러나 이렇게 신고율이 높은 것은 ‘불법’의 낙인을 벗고자 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갈급한 요구로 읽혀져야 할 것이다. 21세기 지구촌 시대에,경제력의 규모 10위권대에 있는 국가가 외국인 노동자 78%를 불법으로 방치하고,이들을 죄인다루듯 하며 월평균 276시간 부려먹으면서 80만원 주는 짓은 부끄러운 일이다. 92년에 ‘기피업종’의 인력난 타개책으로 시작된 산업연수생제도는 여러가지 문제점이 지적된 바 있다. ‘송출비리’를 비롯해 개선이 시급한 관행과 제도는 관계부처가 이미 충분히 파악하고 있다.사업장 이동의 자유 보장,독일식 고용허가제 도입 등의 대안도 제기되고 있으며,노동부 등은 이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안다. 5월 가정의 달,대부분 가족의 생계를 위해 역설적으로 가족과 생이별할 수밖에 없는 이들 ‘낮은 곳’에 거주하는노동자들의 ‘불법’을 해소해주고자 법무부와 자원봉사자들이 상호신뢰 속에 호흡을 함께 하는 문래동의 풍경은 그나마 신록처럼 조금 풋풋하다.민간단체의 구슬땀과 이를 고맙게 여기는 당국자와,감사패를 굳이 거절하며 나중에 하나님께 받겠다는 목자가 있다면 근본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문래동 현장이 고단한 이방인의 꿈이 태동하는 희망의 거처가 될 수 있기를 기도한다. 유시춘 국가인권위원·작가
  • [제정러시아 외교문서 새 발굴 대한제국 秘史] (3)러 거주 한인들의 수난과 투쟁사

    한인들의 러시아 이주문제가 표면화된 것은 1860년 러시아와 청국이 북경조약을 체결,광활한 우수리지역이 러시아영토로 편입되면서부터였다.이때 비로소 조선과 러시아는두만강유역을 경계로 국경선을 맞댔기 때문이다. 이번에 새롭게 발굴된 러측 극비문서에 따르면 1884년에러시아 거주 한인은 대략 1845가구 9000여명에 달했으며남우수리지방의 포시에트에 15개 마을을 형성하고 있었다.독신으로 넘어와 품팔이를 하던 것이 점차 가족을 동반한집단이주로 본격화됐다는 것이다.물론 러측 문서에 나타난 이같은 한인이주는 이전부터 이곳에 거주하던 발해유민등 한인 원주민은 고려하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한인이주문제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1863년 조선과 국경을 맞대고 있는 포시에트지역에 가족단위 이주민이옮겨온 이후 이주민 숫자는 매년 증가추세를 보였다.당시상황은 이와 같은 한인 이주민이 크게 도움이 됐다.(1908년 3월8일 아무르 동부지역 총독 운테르베르게르가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 한인이주문제는 아무르동부지역 총독부에서 내무부장관에게 보낸 보고서에 주로 등장한다.이주의 원인으로 대한제국 북부의 토질이 나쁘고 흉년이 계속된 데다 관헌의 파렴치한 착취에 따른 탈출로 분석했다.또 대한제국 국경에서 가까운 남우수리 지방은 습기가 많고 해양성 안개가 자주 끼어 러시아 농민들은 농지로 적합치 않다며 떠나 버렸지만 한인들은 이곳의 기후와 토질이 한반도와 유사해 벼농사에 적합하다고 여겼다는 것이다. 러시아 행정당국에서도 한인 이민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으며 이들은 러시아군대와 도시민들에게 농산물을 재배,공급하는 한편 도로개설과 보수 및 짐마차 부역노동 등에 동원했다.한인 이주가 급증한 것은 1870년 초 조선에 흉년이 겹쳤기 때문이다.많은 국민이 빠져나가자 조선정부에서자주 항의를 해왔다.1884년 한·러수호통상조약체결이전에이주해 온 한인은 러시아국민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이민온 조선인은 러시아국적을 소지하고 있으며 정교회를믿었지만 이들이 러시아인화할 것이라는 믿음은 근거없는추측이다.남우수리에 거주하는한 한인가족은 40년을 살았지만 조선식으로 살고 있다.극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한인들이 그렇다.러시아가 청국이나 일본과 전쟁을 하게될경우 한인의 충성심을 믿어서는 안된다.이곳은 적의 소굴이 될 것이다.이때문에 일본은 한인의 러시아 이민을 장려하고 있다.(상기 문서와 출처동일) 러시아 중앙정부나 지방당국은 한인들의 습관이나 생활풍속이 러시아인에 동화되지 않으며 황인종이 극동지방에 많을 경우 해롭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하지만 우선 노동력이 필요했기 때문에 이를 차단하는 정책의 시행을 차일피일 연기했을 뿐이었다.1891년 두홉스키 아무르 총독은 오히려 적극 정책을 폈다.한인의 러시아 동화를 독려하는 한편 2년간 러시아잔류허가를 받은 한인이 만기를 넘겨도 추방하지 않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도 거부하지 않았다.그 결과 1904∼1905년 러·일전 기간중 한인수는 ▲남우수리 2500명▲하바로프스크와 우드스크에 7500명▲아무르에 3만 3500명에 달했다. 카자흐부대가 관리하는 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18명의 가옥 8채를 철거하지 말고 한인이 경작하는 농토를 몰수하지 말 것.15년간 병역의무를 면제해주고 고국의 가족을 초청,러시아국적을 취득하게 해 줄 것.(1897년 8월16일 타반트 마을 촌장 이성삼외 18명이 카자흐부대 사령관에게 보낸진정서).가족을 초청,농업에 종사한다면 러시아국적취득에 동의하며 국적취득후에는 이들을 카자크관할 마을로 편입시킨다(카자흐 사령관의 회답) 카자흐란 15∼17세기 과중한 세금과 압제를 피해 러시아의 중앙부에서 남방변경지방으로 도망친 농노 및 그 자손들을 총칭하지만 주로 카자흐인들로 구성된 비정규군 둔병(屯兵)을 지칭한다.이들은 정부로부터 토지를 지급받는 대신 유사시에 징집될 의무를 갖고 있었다.한인 이주자들도카자흐인과 마찬가지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러시아는 한인들에게 미개간지를 개척하게 한 뒤 또 다른 미개척지로 밀어내고 개척지에는 러시아인들을 이주·안착시켰다.1937년에는 이민족을 국경지역에서 소개(疏開)시킨다는 명목아래 중앙아시아의 오지(奧地)로 강제이주시켰다.러시아가 추진한 한인 이주정책의 정체를 알 수 있게하는 대목이다. 이범윤을 중심으로 대한제국의 정치 이민자들이 노보 키예프스크(두만강 넘어 남우수리지방에 있던 소도시)를 활동거점으로 삼고 있다. 일본이 우리의 우방이 아니기 때문에 어떤 조치를 취해야할지 유보하고 있다.(1908년 4월5일 남우수리지방 국경행정관 스미르노프가 연해주 주지사 플루그에게 보낸 통신문).한인 의병조직에 관심도 갖지 말고 처벌도 하지 말 것.그러나 격려하지는 말 것.(같은해 4월19일 플루크가 스미르노프에게 보낸 답신전문). 러시아 극동지역은 을사늑약이 체결된 1905년부터 러시아혁명이 일어난 1917년까지 항일민족운동의 중심지였다.이후 러시아혁명정부가 빨치산부대를 해체하는 1922년까지는 공산주의운동의 본거지가 되었다.이곳이 항일운동의 근거지가 된 데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다.우선 만주와 간도,연해주 등 국경을 맞대고 있어 한·러·청 3국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이었다.이와 함께 간도와 연해주지역에 살고 있는 한인 이주민들의 풍부한 인적·경제적 자원을 활용할 수 있었다. 러시아내 한인들을 한인의용군으로 편성해 러시아에 공헌케 하는 방법으로는 산악지방에서 빨치산활동으로 일본군을 교란하게 하는 등의 방법이 있다.…함경남북도에서 6000명의 모병이 가능하며 소총 2300정이 확보가능하다.…부대는 3개 연대로 구성하며 소대장이상 지휘관은 러시아인으로 한다.(1904년 11월3일 코르프 남작이 제안한 러·일전쟁시 한인의용군 편성계획). 일본 외무성이 다음과 같이 전해왔다.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間島管理使)라는 직책을 부여받은 이범윤은 200명의 동지를 모아 통감부하의 현 정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다.이들은 불라디보스토크에서 다량의 무기를구입하고 대한제국으로 침투하기 위해 노보 키예프스크에집결해 있다. 이들중 일부는 육로를 통해 경성(서울)으로 갔으며 또 다른 일부는 선박편으로 대한제국 북부로 떠났다.(1908년 7월9일 도쿄주재 러시아대사 말레비치가 외무부에 보낸 비밀전문). 만주에서는 상인들이 빨치산 대원을 도와 무기와 돈을 지원해 주었다.총대장은 이범윤이며 그는 4000명의 빨치산을 지휘하고 있다.그중 1000명은 총으로 무장하고 있으며 나머지 3000명은 길림과 봉천지방 주민들의 지원을 받아 무장을 획책하고 있다.빨치산의 거점지역은 러시아와 청국국경지대에 일부 있으며 또 다른 일부는 간도에 있다.(1911년 11월11일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군관구 참보부가 총참모부 관리본부에 보낸 비밀첩보보고서) 1905년 러·일전쟁의 패배로 타의에 의해 대한제국에서손을 떼게 된 이후 한일합병을 전후한 시기까지 러시아의비밀문서에는 이범윤과 관련된 항일투쟁활동이 유독 많이거론되고 있다.유인석·홍범도 등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이 없다.러시아는 항일의병을 겉으로는 ‘강도단’‘폭도단’‘빨치산’으로 표현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한반도 북부에 대한 영향력 유지를 위해 활용하거나 일본군의 두만강쪽 국경침범을 저지하는 데 이용하려는 속셈을 갖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이범진·이범윤·이위종 3인의 항일 역정 러시아 문서보관국에서 발굴된 극비문서에는 이범진(李範晋·1852∼1910),이범윤(李範允·1856∼1940),이위종(李瑋鍾·1887∼?) 3인의 이름이 유독 많이 등장한다. 이들이 구한말 한·러관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요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하지만 세사람의 관계와 비극적인 인생유전에 대해서는 국내에 거의 알려진 바 없다. 세사람은 피로 맺어진 혈연관계였다.페테르부르크주재 대한제국 공사였던 이범진과 헤이그밀사로 파견된 3인중 한명이었던 이위종은 부자지간이었다.만주와 연해주땅을 오가며 평생 항일의병활동을 한 간도관리사 이범윤은 이범진의 6촌 동생이었다.이같은 사실은 이범진의 손자 이원갑(李元甲·65)씨에 의해 확인됐다. 또 고종이 같은 전주이씨인 이범진을 ‘조카’라고 호칭한 점으로 미뤄 이들은 이씨 왕가의 먼 일족이었던 것 같다.이범윤은 일제의 핍박에 시달리던 고종을 연해주로 망명시키려는 시도를 한 사실도 문서 곳곳에서 드러난다. 고종의 측근이었던 이범진은 아관파천의 주역이었다.친러내각이 무너진 뒤 주미공사를 거쳐 주러공사로 부임했다. 고종은 “짐은궁중에서 일본의 포로로 잡혀있지만 북쪽러시아를 바라보며 짐과 백성을 자유롭게 해주리라는 희망을 걸고 있다.짐의 사랑하는 조카,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겠지만 그곳에 남아 니콜라이2세 황제에게 도움을 청하라.짐이 운명한 뒤에도 그곳에 남아있으라.일본이 수입과 지출을 통제하고 있으니 송금할 수가 없다.”(1908년 1월31일)는 서신을 보냈다. 조국으로부터의 재정지원이 끊긴 뒤 이범진은 러시아측이 제공하는 월 100루블의 정치성 생활보조금을 지원받고 연명하면서도 조선정부와 일본의 귀국종용을 거부했다.러시아 외무부차관이 소모프 서울 총영사에게 보낸 1910년 5월의 전문에는 “이범진은 귀국할 경우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있으며 러시아를 떠나지 말라는 고종황제의 어명을 지키느라 귀국을 거부하고 있다.”라고 기술했다. 한일합병이후 ‘친러파’로 낙인찍힌 이범진이 일본에 복수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자살이었다.그는 1911년 1월16일 “우리의 조국은 이미 죽었습니다.전하께서는 모든 권리를 빼앗겼습니다.소인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처했습니다.자살이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내용의 유서를 고종에게남기고 목을 매달았다.그의 시신은 페테르부르크 교외 우즈펜스키 묘지에 안장됐으나 지금은 흔적조차 남아있지 않다. 이범진의 둘째 아들 이위종의 일생은 더욱 기구하다.그는 7살때부터 아버지를 따라 영국,프랑스,러시아를 전전하면서 3개 외국어를 익혔다.프랑스 샹생 육군사관학교를 중퇴,러시아로 들어가 주러공사관 참사관으로 일했으며 러시아의 귀족 놀켄 남작의 딸과 결혼할 정도로 엘리트 외교관이었다.1907년 고종의 밀서를 지니고 이준,이상설과 함께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참석하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하지만 그가 만국기자협회에서 행한 일본규탄 연설은 세계에 일본의 잔학상을 최초로 알린 쾌거였다. 그는 생활고와 울분 등으로 러시아인 부인과 이혼한 뒤여기저기를 떠돌았다.1908년에는 군자금 1만루블을 관리하던 최재형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만났으며 이범윤과 함께독립운동을 꾀했지만 러 당국에붙잡혀 추방당했다.1차대전때 러시아군 장교로 참전한 사실과 1917년 러시아 혁명이후 이름을 바꾸고 시베리아일대에서 살았다는 기록이 조선인국제공산당원의 한 보고서에 나와있다.이후의 행적은묘연하다. 이범윤은 1903년 조선정부로부터 간도관리사라는 직책을부여받은 뒤 한때 5개 대대의 무장병력을 거느렸다. 대한제국으로의 진격계획을 세우기도 했다.그는 니콜라예스크에서 검거돼 이르쿠츠쿠로 추방됐지만 이곳에서도 1925년까지 항일운동을 폈다.연해주와 만주를 오가며 평생을 조국을 위해 투쟁했던 그는 노년에 거의 폐인이 돼 비밀리에입국,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주석기자
  • “피의사실 공표 공익 부합땐 손해배상 책임 지울수없다”

    국가수사기관이 피의사실을 공표했더라도 ‘급박한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다면 손해배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는 판결이 나왔다. 서울고법 민사8부(부장 李鍾贊)는 13일 “경찰이 언론사기자들에게 잘못된 피의사실을 공표,범죄자로 낙인찍히는등 명예가 심각히 훼손당했다.”며 조모(47)씨 등 2명이국가를 상대로 낸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원심을 깨고 원고패소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결과적으로 피고 소속 경찰관들이 언론사 기자들에게 발표한 원고들의 혐의는 사실과 다른것으로 드러났으나 사건 당시에는 경찰관들도 원고들의 혐의 사실이 진실이라고 믿을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었고,피의사실 공표 역시 사회적 대책 강구를 위한 여론 형성 등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행위였다는 점 등을 감안하면 손해배상 책임까지 지울 수는 없다.”고 밝혔다. 학원강사 출신 조씨 등은 지난 98년 4월 폐기물 업체를운영하던 C사 대표 장모(63)씨가 5000만원을 빌린 뒤 갚지 못하자 반년 동안 장씨를 괴롭힌 끝에 4개의 생명보험에강제로 가입시킨 뒤 자살을 강요한 혐의 등으로 구속됐다.그러나 조씨 등은 2000년 3월 자살 강요 부분에 대해 무죄판결을 받자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냈다. 조태성기자 cho1904@
  • 복정동 일대 도로가 냄새고통으로부터 해방

    수서∼분당 도시고속도로 가운데 악취구간으로 낙인찍힌복정동 일대 도로가 냄새고통으로부터 해방된다. 성남시는 서울시계에 자리잡은 수정구 복정동 하수종말처리장 탈취시설 공사를 오는 8월까지 완공해 수년째 끊이지 않았던 민원을 해소하기로 했다고 13일 밝혔다. 시는 이를 위해 선진국에서 활용되고 있는 바이오-필터공법을 도입해 첫선을 보일 예정이다. 이 공법은 미생물을 번식시켜 필터에 자생시킨 뒤 이 필터에 악취를 통과시켜 분해시키는 첨단 냄새제거시스템으로 일본과 미국 등 선진국에서 채용하고 있다. 시는 우선 오는 8월까지 탈취시설공사를 끝낸 뒤 시범운영을 거쳐 2005년까지 연차적으로 보완,‘냄새 제로’하수처리장을 구축할 계획이다. 이에 따라 택지개발지구로 지정됐음에도 불구하고 냄새때문에 분양이 지연됐던 복정동 일대 택지분양도 활기를되찾을 전망이다. 시관계자는 “바람만 불면 고통을 겪었던 이지역 주민들은 조만간 냄새걱정을 덜게 될 것”이라며 “기술을 축적해 타 자치단체에도 보급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성남 윤상돈기자yoonsang@
  • [러 외교문서로 밝혀진 구한말 비사] (1)초대 대리공사 베베르의 수기

    1884년 첫 수교,1990년 재수교….한국과 러시아가 외교관계를 맺은지 118년이 지났지만 한·러 관계사는 아직도 많은 부분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첫 수교 이후 한일합방에 이르기까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은 일본과 더불어 38선 남·북 분할점령,한반도 전역 무력점령 및 보호국화,독립국가 유지안을 중심으로 변화해왔다.남·북 분할점령안은 해방 및 6·25전쟁 이후 현실화됨으로써 한국민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대한매일은 박종효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가 지난 10년 동안 러시아 각지에 흩어져 있는 20여개 한국관련 문서보관소를 샅샅이 뒤져 수집한 3000여건의 외교,정치,군사,경제관계 보고서 중 1884년 수교 이후부터 1910년 한일합방을전후한 시기의 미공개 외교문서 1000여건을 해제해 최초로 공개한다. 100여년만에 햇볕을 본 이 극비문서에는 조선주재 초대러시아 대리공사였던 베베르의 수기를 비롯,1·2차 군사고문단 파견의 실상,고종과 러시아의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2세가 주고받았던 친서,러시아측의 기획외교로 인한 헤이그밀사 파견 실패 등 국내에 소개된 적이 없는 새로운 내용들로 가득차 있다. 주 2회씩 10회에 걸쳐 계속되는 이번 연재물은 그동안 미흡했던 한·러 관계사의 복원은 물론,우리 근세사에서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 잡는데 크게 기여할 것으로 기대된다. 러시아문서보관국 서고에 묻혔다가 100년만에 햇볕을 본베베르의 수기 ‘1898년 전후 대한제국’은 러시아의 대한(對韓)정책의 실상과 당시 우리 사회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로 평가된다. 베베르는 수기 전반부에서 자신이 공사로 재임했던 1898년 이전의 대한제국의 실정과 러시아의 극동정책에 관해기술했다.후반부에서는 1903년 고종재위 40년을 맞아 경축 러시아특사로 다시 찾은 대한제국이 일본의 경제식민지로 전락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했다.모두 144쪽 분량으로된 이 수기는 자필로 작성됐지만 이를 보고받은 러시아 외무부가 황제에게 보고하기 위해 타이핑했다. 1895년 10월8일 민왕후가 일본인에 의해 잔인하게 시해된 사실이 알려지자 복수를 위해 전국적으로 봉기가 일어났다.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고종왕은 일본군의감시아래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 있었다. 베베르는 명성황후 시해사건의 전말을 자세하게 설명하지 않았다.그는 사건 발생 당시 현장을 목격한 러시아인 건축기사이자 궁궐경비원이었던 사바틴의 증언서와 자신의목격담을 난수표 암호전문 형식으로 러시아 외무부에 잽싸게 보고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니콜라이2세 황제는 이 보고서를 읽고 친필로 “천인공노할 사건이니 좀 더 자세히보고하라.”고 지시했다.이어 극동지역에 주둔하던 아무르군관구 사령관에게 비상경계에 들어가도록 지시했다. 민왕후가 시해당한 후 수개월동안 일본군의 감시하에 포로처럼 대궐에 갇혀있던 고종은 1896년 2월11일 아침 7시30분 여인복장으로 변장하고 왕세자와 함께 부인용 가마 두 대에 앉아 공사관으로 피신해오는 데 성공했다.뜻밖의 정변이 발생한 것이다.고종의 탈출소식을 들은 수천명의 군중이 공사관 담벽 아래로 몰려와 국왕의 탈출을 만세로 환호했다.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해온 이후 모든 국사는 러시아제국의 국기가 게양된 러시아공사관에서 경비해군 160명의 호위 아래 행해졌으며,각부 대신들은 공사관건물 안에 병풍을 친 임시 사무실을 사용했고 본인과 협의하라는 왕명을 받으면 어떤 사건이든 대신과 단둘이서 논의할 기회가 주어졌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 옆에 위치한 경운궁(덕수궁)으로 환궁할 때까지 1년동안 자신이 대한제국의 국사를 사실상 좌지우지했음을 드러낸 대목이다.이때부터 러시아는 이전에일본이 누리던 영향력을 대신했다.베베르가 분석했듯이 러시아는 1884년 수교 이후 10여년간 대한제국 문제에 무관심했다.당시 러시아의 주된 관심은 청국이었으며 시베리아의 경제 여건을 호전시키는 데 있었다.따라서 러시아공사관의 임무는 청과 일본이 대한제국을 ‘독식’하지 못하도록 소극적으로 방어하는 데 있었다.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1년은 베베르와 러시아에는 더할 나위 없는 호기였지만 고종에게는 암울한 시기였다.당시 러시아공사관 서기였던 쉬테인은[“그는 두개의 방에 왕세자와 각각 따로 앉아공사관 뜰을 무심히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서서 방안을 이리저리 거닐었다.가끔씩은 두려움에 떨며 이웃 궁궐(경운궁)에 계신 노대비(명헌태후)에게 문안을 드리려고 몰래 세자와 함께 가곤 하셨다.그리고 남은 시간은 방안에 은둔하고 앉아 계셨다.”]고 외무부에 보고했다.고종의 공사관 생활은 수인(囚人)과다를 바 없었다는 증언이다. 청·일전쟁 후 지방세가 서울로 납입되지 않아 국고는 텅 비어 있었다.일본인 재정관리자와 고문관이 떠나버리자국고에 잔액이 얼마 남았으며 어디에 보관되어 있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관리들의 월급,특히 군인과 경찰관에게 제때 월급을 지불하기 위해서는 탁지부(재무부)의 재정실정을 밝혀야 했다. 베베르는 영국인 해관총무사 브라운을 재정고문으로 천거해 이 일을 맡겼다고 밝혔다.브라운은 지방에서 올라온 수입을 올바르게 수령,장부에 기입하고 지출을 줄여 관리들에게 월급을 지불할 수 있었으며,이때부터 관리에 대한 통제가 이뤄졌다고 기록했다.1896년말 국고는 1,660만엔의여유가 생겼으며,일본에서 차관으로 들여온 300만엔 중 100만엔을 상환하고 이듬해 가을 또 100만엔을 갚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고종이 환궁한 후 신변안전책으로 단행된 조선군의 개편작업에도 베베르가 깊숙이 개입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고종왕의 요청을 받아들여 시베리아에 주둔하고 있던 러시아군에서 2차에 걸쳐 군사교관단을 초청,대궐시위대 2개 대대를 교육시켰으며 러시아식 군운영체계를 도입했다.여타의 대한제국군들은 러시아교관단이 관리하는 대대로 들어오려고 애를 쓰기도 했다. 베베르는 러시아국가회의 체제로 의정부의 개편,13개 도와 342개 군으로의 행정구역 분할,범법자에 대한 처벌 법규 시행,재정고문 알렉세예프 파견 요청,러시아어학교 개교,러청은행 지점 개설 등 자신의 업적을 열거했다.이 기간동안 서북 석탄광개발과 압록강,두만강변의 벌목이권을러시아가 따낸 사실도 털어놨다. 그는 대표적인 친한파인사로 알려졌지만 고종과 황실인사는 물론,한국과 한국인을 혹평하기도 했다. [대한제국을 떠난 지 5년만에 다시 와보니 거리의 남루한복장은 이전보다 두배나 많았다.…고종황제는 무당을 불러 굿을 하는 엄비(嚴妃)를 따라 미신을 신봉하고 있었다.…정치적인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있었다.일본인들이 다시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한국인은 러시아,일본 기타 열강의 국제관계 및 그들의 정치적 의도를 제대로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나라가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제대로 몰랐다.…강대국과 종속관계에 놓여 독립심이 박약하고 의타심이 강하다.…고종은 아주 호감을 주는 인품이지만 많이 쇠약해졌으며,공적과 능력에 따라 관직에 임용되지 않고 뇌물의 액수에 의해 결정됐다. 1903년 다시 서울에 와보니 일본인들은 대한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면서도 정치,경제적 예속화를 촉진시키는 데모든 수법을 동원하고 있었다.한국인들은 일본의 속셈을알지 못했고,러시아는 법적으로 그런 정책을 중지시킬 권한을 보유하고 있지 못했다.일본은 은밀하면서도 조직적으로 대한제국의 조정과 국민자산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는 일본의 영향력이 확산될 수밖에 없는 7가지 이유를열거하면서 대한제국이 조만간 일본의 정치적 속박을 받게 될 것이라고 예고했다. 대한제국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2만명을 넘으며,일본인 1인당 한인 5명이 식모,사무실 서기,잡부,납품상인 등으로고용되다시피 했다.…대한제국 연간 무역액의 72%를 일본이 차지할 정도였다.…1898년 9월 경부선철도 부설권 협정서 중 ‘철도에 필요한 역사,창고 등 대한제국측이 제공하는 부지는 철도회사에 귀속되며 역사는 필요한 곳에 건설하되 역 앞에는 일본인 이외 타민족의 거주를 금한다.’는 불평등 조항 때문에 철도부설과 동시에 대한제국의 철도및 역사주변 땅은 일본의 소유물로 전락했다.…일본은 대한제국과 다른 국가들이 통신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인 서울∼부산∼일본해저 전신선을 통제했다.…개항지마다 일본은행이 개설돼 일본엔화가 시장을 지배하고 있었다. 노주석기자 joo@ ■베베르는 누구 우리나라에 부임했던 역대 외교관 중 초대 러시아 대리공사 겸 총영사였던 베베르만큼 광범위한 영향력을 행사한외교관은 없었다. 베베르는 1885년부터 1897년까지 12년 동안 공사로 재직하면서 고종의 최측근 인사로 통했다.그는 고종이 러시아공사관에 머문 1년 동안 친러시아내각을 출범시키는 등 대한제국의 국정을 사실상 좌지우지했다. 고종은 베베르가 멕시코 공사로 발령나자 ‘이임이 유감스럽다.장기간 유임시켜달라.’는 친서를 니콜라이2세에게 보냈다.니콜라이2세는 고종 재위 40주년 경축식(1902년)에 당시 야인이던 베베르를 사절단장으로 특파하기도 했다. 이번에 발굴된 문서 중에도 ‘베베르는 고종과 개인적으로 친분이 두텁고 한국인들에게 지금도 좋은 평가를 받고있다.’‘베베르를 경축사절단장으로 결정한 것은 고종황제에게 가장 기쁜 일이 될 것’이라는 내용이 나온다.고종은 서울에 온 베베르를 자문역으로 붙잡기 위해 니콜라이2세에게 서울체류 연장을 요청하기도 했다. 하지만 베베르에 대한 학계의 연구실적은 전무하다시피하다.그의 출생연도와 학력,수기 등도 이번의 문서 공개를 통해 처음 알려지게 됐다. 베베르는 1841년 6월5일에 태어난 독일계 러시아인.부친은 루터교 선교사였다.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 동양어학부를 졸업하고 중국 베이징(北京)에서 5년동안 중국어 공부를 했으며 이후 톈진영사와 일본 총영사를 거쳐 조선주재초대 대리공사로 부임했다. 베베르는 러시아 외무부와 중국,일본 등 주변국 외교가에서 ‘친한파’로 낙인찍힌 데다 수뢰사실(2만엔)이 외무부에 알려지는 바람에 서울을 떠나게 된 것으로 전해졌다. 노주석기자 ■박종효 前모스크바대 교수 “러 문서국 20곳서 10년간 자료 뒤져” “러시아에 산재한 20여개의 국립문서보관소에는 한국과관련된 방대한 양의 비밀문서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방치돼 있습니다.러시아가 한국 근대사와 현대사에 미친 영향을 감안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러시아 문서수집 및 번역 부문에서 국내 최고의 권위자로 꼽히는 박종효(朴鐘孝·65) 전 모스크바대학 교수는 지난 90년 한·러 재수교 직후 러시아문서보관소가 외국인에게도 개방되자 가장 먼저 그곳으로 달려갔다.문서보관소는전세계에서 몰려온 학자들로 만원사례를 이뤘지만 한국관계문서를 찾는 학자는 박 전 교수뿐이었다. “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문서를 조사,열람한 뒤 복사하려면 기록부에 이름을 남기게 되는데 한국 학자들의 이름은본 적이 없어요.” 러시아어와 러시아사,한국사,한·러관계사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학자들이 드문 탓도 있었지만 소장된 문서가외교,군사,경제 등 전문 분야의 필사본이어서 웬만한 학자들은 엄두를 내기도 힘들었다.산더미처럼 쌓인 문서보관소의 서고를 뒤져 한국관련 문서를 찾아내기란 숨은 그림찾기나 마찬가지였다.최근에야 러시아어와 역사를 전공하는소장학자 몇명이 한국관련 자료 수집작업에 합류했다. 박 전 교수는 99년부터 2년 동안 국제교류재단으로부터연구비를 지원받아 문서찾기와 번역,해제작업을 해왔으며,조만간 ‘러시아국립문서국 소장 한국관련 문서 요약해제집’이란 책을 펴낼 계획이다. “러시아국립문서보관소에 소장된 비밀문서의 목록을 총망라,문서목록해제집을 간행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문일입니다.제정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군사문서보관소,연방문서보관소의 서고에 숨겨져 있던 문서들을 분석해 보면 러시아가 견지해온 한반도정책의 과거는 물론,현재와미래까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박 전 교수는 러시아측의 공개 제한조치로 ‘극비문서’들이 소장된 크렘린문서보관소와 KGB문서보관소에 접근할수 없었던 점을 아쉬워했다.그는 한국외국어대 러시아어과를 졸업한 뒤 소련 아카데미 러시아역사연구원에서 박사학위와 교수자격(독토르)을 땄고 모스크바대학 객원교수로대학원생들에게 한·러관계사를 강의했다. 노주석기자
  • 집중취재/ ‘시대의 창’ 권력형 비리

    ‘대기업에서 벤처로,현금에서 주식으로…’권력형 비리도시대상황에 따라 바뀌고 있다.이제 대기업은 더이상 권력형비리의 단골 사냥감이 아니다.대신 벤처가 신흥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다.이러한 변화는 ‘희망’을 느끼게 하면서 과제를 남겨준다.대기업이 권력형 비리의 대상에서 제외된 것은우리 사회가 투명해졌다는 증거다.그러나 비리는 사각지대(벤처)를 찾아 더욱 교묘한 방법(주식)으로 파고드는 속성이있다.부패구조 차단을 위해 해야 할 일이 많다는 것을 말해준다. ◆현정부 들어 어떻게 변했나 ■로비 주체가 바뀌었다.=전문가들은 ‘국민의 정부’ 이후불거진 이른바 ‘4대 게이트(정현준·진승현·이용호·윤태식 사건)’가 과거 장영자·한보·수서사건과 같은 권력형부패와 확연히 다르다고 분석했다.참여연대 맑은사회만들기본부 이상수(李相受) 실행위원은 “4대 게이트의 공통적인키워드가 벤처기업과 권력기관의 결탁,그리고 정치자금”이라며 “로비의 주체와 수단,로비의 대상이 이전의 스캔들과큰 차이가 난다.”고 설명했다. 이 위원은 “4대 게이트는 모두 벤처기업의 금융사고가 권력형 비리로 비화했다.”며 과거와 달리 재벌이 아닌 벤처가 로비를 주도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그는 “국민의 정부 벤처 육성정책은 전형적인 관치(官治)의 산물”이라며 “이는 과거 정부에서 금융·세제 혜택을 받은 재벌의 성장 과정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결국 형태만 바뀐 정경유착의 토대가 만들어졌다는 설명이다. ■현금보다 주식 선호=로비 수단이 ‘사과박스’로 상징되는 현금에서 주식으로 바뀐 것도 과거 권력형 부패와 다른 점이다.현 정부 이후 주식·벤처투자의 붐을 타고 현금 대신펀드 가입이나 전환사채(CB) 발행,주식 공여 등 유가증권 형태의 이권을 제공하는 방식의 로비가 성행했다.이용호·정현준·윤태식 게이트 때 주식이 공통적인 로비 수단으로 활용된 것이 이를 입증한다.로비 주체가 벤처로 바뀐 것에 대해긍정적인 시각도 있다. 부패방지위원회 홍현선(洪炫善) 제도개선심의관은 “부패가 벤처에서 다발한 것은 대기업에서 공식적으로 자금을 모으는 일이 힘들어졌기 때문”이라면서 “그만큼 대기업의 재무구조가 개선되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분석했다. ■은행 대신 사금융업체 부상=과거 수서·한보비리사건에서각종 비자금은 시중은행이나 제2금융권을 거쳐 조성됐다.하지만 ‘4대 게이트’의 경우 불법 로비자금 조성이 금융감독의 사각지대라고 할 수 있는 신용금고와 사설펀드,종금사를통해 이뤄졌다는 점이 눈에 띈다.이는 외환위기 이후 재벌기업에 대한 국내외 회계기준과 감독체계가 엄격해졌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증권연구원 노희진(盧熙振) 연구위원은 그러나 “현 정부이후 불거진 권력형 비리가 벤처기업과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해서 모든 벤처기업을 부패의 온상으로 매도하는 것은 위험한 발상”이라고 지적했다.그는 부패기업은 반드시 망한다는 인식을 심어 주기 위해서라도 불공정거래 벤처기업에 대한 처벌조항을 대폭 강화,부패 유혹을 없애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박건승기자 ksp@ ◆부패의 사회·경제비용 지난해 독일의 국제투명성위원회(TI)가 발표한 한국의 부패지수는 91개국 가운데 42위(10점 만점에 4.2점)였다.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국중에서 꼴찌인 것은 물론 싱가포르(4위)와 홍콩(14위),일본(21위),타이완(27위),말레이시아(36위) 등 다른 아시아국가들보다 많이 뒤졌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내놓은 한국의 부패지수는 49개국 중 28위에 머물렀다.그렇다면 국가 부패수준의 경제적 비용은 얼마나 될까. 미국 하버드대학 연구팀이 국제투명성위원회의 부패지수를바탕으로 ‘부패비용’을 계량화한 결과 국가청렴도가 싱가포르 수준에서 말레이시아 수준으로 떨어질 경우 기업은 세금을 20% 가량 더 물어야 하는 것으로 나타났다.연구팀은 기업이 세금을 1% 더 내면 외국인의 직접투자를 5% 감소시킨다는 통계치도 제시했다. 지난해 한국의 국가청렴도는 말레이시아보다 6단계나 낮았다. LG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기업의 사업여건과 부패지수간의 상관관계는 0.93이었다.사업여건과 국가경쟁력간의 연관성(0.91),사업여건과 경제자유도간의 상관관계(0.88)보다 높았다.기업이 청렴할수록 사업하기가 힘들다는 뜻이다. 국제사회에서 부패는 이미 국가경쟁력의 중요한 척도로 떠올랐다. 1999년 OECD가 ‘부패방지협약’을 발효한 데 이어 세계무역기구(WTO)와 세계은행,국제통화기금(IMF)도 부패관행을 막기 위한 ‘부패라운드’에 돌입했다.세계무대에서 부패 국가로 낙인찍히면 차관제공이나 투자를 거부당하는 관행이 정착되고 있는 것이다. 박건승기자 ◆전문가 기고/ “부패 조직범죄로 처벌을 윤리준수 인프라 급선무” 부정부패가 성행하는 것은 권력층과 부패에 의존하려는 사람들의 의식이 전혀 바뀌지 않았기 때문이다.부패방지를 위한효과적인 시스템을 마련하지 못한 탓도 크다. 부패당사자들은 부패행위로 이익을 얻을 수 있겠지만 그로인한 비용과 피해는 모든 국민들에게 전가되기 마련이다.부패가 횡행하면 사회기능의 효율성과 경제성이 떨어져 결국사회는 무너지게 된다.모든 국민이 자신이 부패의 피해자라는 인식을 갖고 감시자로 나서야 할 것이다. 부정부패를 몰아내려면 무엇보다부패행위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야 한다.이는 부패한 공직자뿐 아니라 뇌물을 제공한 당사자,그가 소속된 조직과 조직원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앞으로는 조직의 부패행위에 협조한 직원의 책임도물어야 한다.미국은 금융회사 직원이 위법행위를 인지하고도 감독당국에 신고하지 않을 경우 하루에 2만 5000달러의 벌과금을 물린다. 둘째,이해관계자에 의한 책임추궁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채권자나 소액주주와 같은 이해관계자에 의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활성화할 것을 촉구한다.그래서 뇌물을 줄 경우 회사비용 사용자가 회사에 변상토록 해야 한다. 셋째,‘윤리준수인프라’를 구축하기 바란다.정치권과 공직사회,기업체,학교,언론,전문가단체 등에 효율적인 ‘윤리준수체제’를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부패방지위원회의 활동을 강화해야 할 것이다.부패방지위원회는 독립성을 지니고,소속원들은 부패방지를위한 활동이 국가의 선진화를 위해 절실한 과제라는 인식을 가져야 한다. /이민호 기업윤리센터소장
  • [씨줄날줄] 경판과 향판

    이번에는 서울민사지법 판사가 법관 인사의 관행을 질타하고 나섰다.사법시험과 사법연수원 성적만으로 법관의 앞날을 낙인찍는 지금의 인사제도가 개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성적’을 좋게 만들어 서울에서 판사 생활을 시작하는이른바 경판(京判)이 돼야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도록 정형화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적이 좀 나빠 지방으로 발령받은향판(鄕判)이 되면 특별한 무엇이 없는 한 ‘입신양명’과는 일찌감치 인연을 끊어야 한다고 단언했다.한마디로 판사라고 다 같은 판사가 아니라는 것이다.법원은 아직도 순간의 ‘성적’이 평생을 좌우하는 조직이라고 고발하고 있다. 성적 제일주의와 함께 도마에 오른 서열화는 실소마저 머금게 한다.법원은 판사의 등수화 말고도,보직도 하나에서열까지 서열화해 기계적으로 적용한다고 한다.보직의 경우고등법원은 행정·민사·형사 순,지방 법원은 민사·형사순,뭐 이런 식이란다.법관들 사이에서는 서열화 의식이 고착되어 심지어 등산하면서도 서열 순으로 산을 오른다는 말이 있을 지경이라고 소개했다.잘잘못을 꼬치꼬치 따지는 판사들이기에 가장 합리적이고 자유분방할 것으로 지레 단정했던 탓인지 연신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법관의 성적만큼 공정한 잣대도 없어보인다.성적이 좋다는 것은 단지 공부만 잘 했다는 의미는아니다.개인 차는 있겠지만 총명하기도 하려니와 또 진지하게 노력하는 마음 가짐이나 생활 태도를 갖췄다는 의미일것이다.성적 본위의 강점은 또 있다.모든 사람에게 가능성을 열어 놓았다는 점이다.혈연이나 지연 혹은 학연의 배경이 없더라도 ‘꿈’을 펼 수 있기 때문이다.신라의 골품제나 인도 카스트제가 비판받는 까닭이 바로 가능성 봉쇄 때문이 아닌가.논란에도 불구하고 시험만큼 사람을 제대로 분별하며 만인의 공감을 얻는 수단도 없다. 그렇다고 지금의 법관 인사 관행이 잘됐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성적만으로 판단하려는 것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아니다.성적 제일주의의 최대 강점으로 꼽히는 ‘가능성’을 봉쇄하고 있기 때문이다.판사의 ‘성적’을 사법시험과연수원 점수 이외에 더 다양화해야 한다.매년명판결을 선정해 가산점을 주는 방안도 있다.명백히 잘못된 판결에 대한 감점제도 도입해보자.산행도 서열 순이라는 조직의 경직성도 완화해야 한다.경직된 조직은 견고하고 단단해 보이지만 흔들리면 한순간이다.법원은 어느 사회나 최후의 안전판이다.사법개혁,아무래도 늦출 일이 아닌 것 같다. [정인학 논설위원 chung@
  • [우리고장 NGO] 광주 ‘시민생활환경회의’

    ‘맑은 물,집에서 합성세제 안쓰면 됩니다.’ 환경보호단체인 사단법인 ‘시민생활환경회의’(이사장 최준식 조선대 약대교수)가 10여년째 외쳐온 밥상머리 가족 실천론이다.쉽게 말하면 내집 식구들부터 합성세제 대신 폐식용유로 만든 ‘재활용 순비누’를 써서 죽어가는 시냇물을옛날 물장구치던 시절로 되돌리자는 취지다. 지난 92년 8월 닻을 올린 이 단체는 광주 북구 용전동 북구청 재활용센터를 빌려 재활용 비누공장을 돌리고 있다.원료는 시민들이 모아준 폐식용유가 전부다.하천과 강이 오염에찌들고 환경 호르몬 성분이 검출되는 주범으로 합성세제가낙인찍힌 지 오래다. 그러나 편리하다는 이유로 세탁비누와샴푸 등 합성세제는 사용량이 더 늘고 있다.소주잔 1개의 폐식용유를 정제하려면 물 5t이 들어간다.라면 국물 1그릇(1.4t)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시민생활환경회의는 투명한 회계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운영되고 있다.회원 650여명 가운데 달마다 거르지 않고 회비(5000∼2만원)를 내고 필요할 때 호주머니를 터는 회원이 절반이다.광주지역의언론계와 학계·재계·정계 등에서 참신한인사 28명이 이사로 참여하고 있다.비누공장도 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은 9000여만원으로 차렸다.지난해 회비로만 3500만원,비누 판매액도 2억 6600만원에 달했다. 환경회의가 광주시내에서 한달에 모으는 폐식용유는 12t으로 광주시내 전체 발생량의 20%선이다.이 양이면 네모 빨랫비누(300g)를 자그마치 3만 5000여개나 만든다. 주로 초등학교 식당 60여곳과 하남과 평동공단내 대형 급식소에서 폐식용유를 거둬온다.가정에서 버리는 양이 가장 많지만 수거율이 가장 낮아 고심하고 있다.튀김 음식이 많은중국집에서의 수거율도 거의 ‘0’에 가깝다. 순비누는 폐식용유를 끓이는 정제과정에서 불순물을 걸러내고 식기전에 수산화나트륨(양잿물)을 넣으면 그만이다.현재이 공장에서 나오는 비누는 4가지.손빨래용 네모비누,세탁기용 가루비누,그릇 씻는 가루비누이다.여기다 다음달 항균작용을 하는 치자를 넣어 만든 세숫비누가 상품으로 나온다. 주부 김모(45)씨는 “순비누는 손빨래를 하면 거품이 적지만 때가 잘빠져 물 사용량도 적고 냄새도 없어 1석3조의 효과가 나온다.”고 말했다. 비누공장은 또한 살아있는 환경 교육장이다.지난해 유치원생 5000여명이 다녀갔다.환경보호 교육 프로그램과 합성세제의 폐해와 독성 등을 비디오로 보여주고 있다. 이밖에 94년 일본·중국·태국·말레이시아 등 아시아지역환경단체와 힘을 합쳐 ‘아시아 생활환경회의’를 결성,회원국을 돌면서 정보를 나누고 조사와 연구활동을 하고 있다.회원 동참(062)572-3980. 최낙선(35) 사무국장은 “주부들이 인식을 바꿔 순비누를쓴다면 돈도 덜 들고 우리의 금수강산을 지키는데도 도움을주게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광주 남기창기자 kcnam@
  • 타계한 獨소설가 루이제 린저

    지난 17일 타계한 소설가 루이제 린저는 1911년 4월 30일 독일 피츨링에서 태어났다.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성장기의 루이제 린저는 정신착란으로 30년 동안이나 갇혀 지내야 했던 비극적 시인 흴덜린과 니체에 심취했으며 철학자들의 책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1939년까지 아버지의 뜻에 따라 교직에 있었으나 자신의 새로운 교육방법이 문교당국과 학교의 간섭으로 난관에 부딪치자 좌절감에 가르치는 일을 포기하고 문학활동을 시작했다. 처녀작인 ‘파문’이 2차대전이 일어난 다음해에 완성되었으며 곧 유명해졌다.그러나 나치 군국주의가 감상적이고 종교적인 작품은 용납하지 않는다며 그의 작품을 판매금지 조처했다.또 남편마저 반사회주의로 낙인찍혀 투옥되었다.러시아 전선으로 끌려간 남편은 그곳에서 사망하고 린저 역시 감옥으로 끌려가 모진 고초를 겪는다.린저는 종전 후 ‘옥중기’를 통해 이때의 고통스러운 경험을 사실적으로 묘사했다.그의 문학 세계는 자신의 내면 풍경을 묘사하는 것에서 벗어나 인류의 세계사적 비극에 눈을 돌리게되었다.1950년 린저는 ‘생의 한가운데’를 발표해 전후 독일 문단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나아가 전세계 젊은이들을 열광시켰고 1953년에는 ‘다니엘라’라는 소설로 다시 한 번평단의 주목을 받았다.린저는 여기서 한 인간의 구원의 문제를 뛰어넘어 인류의 구원이라는 큰 문제에 관심을 두었는데 린저는 이 문제에 천착하며 부단한 노력을 기울였다. 1954년,루이제 린저는 현대음악계의 거장인 칼 오르프와재혼했다. 이후 현실참여적인 문학활동과 정치적 활동을 계속했다.1980년에는 북한을 방문,김일성 주석과 특별한 교분을 맺기도 했다.또 반정부 세력의 필수 교재가 된 ‘또하나의 조국’이라는 책을 집필했다.책에서 ‘북한에 다녀오자마자김일성주석을 사상과 실천의 대안이자 제3의 길임을 알게됐으며 김일성주석을 알고 인류의 미래를 믿게 됐다’는극도의 찬양으로 한국뿐만 아니라 유럽에서 비판을 받기도했다. 이송하기자 songha@
  • 분양권 시장 춥다

    세무조사 여파로 움츠렸던 아파트 분양권 시장이 정부의‘3·6 집값 안정대책’ 발표로 꽁꽁 얼어붙었다.매물이쏟아지기는 커녕 오히려 거둬들이는 추세다.거래도 거의이뤄지지 않고 있다.이에 따라 분양권 프리미엄이 약세로돌아섰다. ●분양권 시장 거래 ‘뚝’=서울 1차 동시분양에서 청약경쟁이 치열했던 돈암동 이수아파트·도곡동 현대하이페리온도 하락세다.분양 초기 2000만∼3000만원의 프리미엄이 붙었지만 실수요자들이 관망세로 돌아서면서 거품이 빠지고거래도 뜸하다. ‘떴다방’들도 납짝 엎드렸다.부동산시장 과열의 주범으로 낙인찍힌 데다가 불법 행위에 대한 조사가 강화돼 활동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떴다방 반응 가지각색=시장이 얼어붙으면서 떴다방들의반응도 각양각색이다. 한 떴다방 관계자는 “분양권 전매 제한으로 좋은 시절은 다 갔다.”며 “분양권 시장이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업종 전환도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떴다방들은 서울 이외의 수도권으로 발길을 옮긴 경우도 없지 않다. 1307가구가 분양되는 용인 죽전 포스홈타운 모델하우스주변에는 여전히 떴다방들을 볼 수 있다.또 지난달 22일모델하우스를 연 용인 구성3차 ‘쌍용 스윗닷홈’도 당첨자 발표가 끝나면서 떴다방들의 분양권 매입 활동이 활발하다. 구구 중개사사무소의 한종걸 대표는 “서울에서 떴다방들이 일부 내려오고 있지만 성남시의 집중 단속으로 큰 재미를 보기는 힘들 것”이라며 “앞으로 떴다방들의 프리미엄 끌어올리기는 어려울 것 같다.”고 말했다. 김경두기자 golders@
  • 친일파명단 발표 이후/ 정·법·시민단체 공동 입법추진단 구성키로

    지난달 28일 친일·반민족 행위자 708명의 명단을 발표한‘민족정기를 세우는 의원모임’(회장 金希宣 민주당 의원)이 후속조치 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후속 움직임] 의원 모임은 이번주 내 전체회의를 열어 지난번 친일파 708명의 명단 발표에 대한 자체 평가와 함께 앞으로의 활동방향 등을 논의할 예정이다. 특히 이날 회의에서는 ‘일제하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을 위한 법률’ 제정을 위한 실무작업을 위해 모임 소속 율사(律士) 출신 의원 및 법조계 인사 등 사회각계 전문가들이 참여하는 입법추진단을 구성할 계획이다.모임은 또 이 법안을 오는 4월 임시국회에 제출한다는 목표 아래 2∼3회에 걸쳐 공청회를 가진다는 계획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모임은 이와 함께 현재 29명으로 구성돼 있는 모임의 외연을 확대해 나갈 방침이다.우선 이번 발표에 참여한 한나라당 김원웅(金元雄)·김홍신(金洪信)·이부영(李富榮) 의원 등을 대상으로 모임 참여를 권유하는 한편,광복회 등 사회 각계단체와의 연대도 강화해 나갈 계획이다. 김희선 의원은 “친일파 추가 발표나 친일인명사전 발간 및법 제정을 위해선 뜻을 같이하는 단체간의 결속이 필요하다. ”며 “앞으로의 활동방향에 대해 광복회·민족문제연구소등 사회단체들과 계속 협의해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밖에 조사활동을 계속해 친일인사들을 추가로 발표하고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 발간을 추진하는 동시에 현재 500원 주화에 세겨져 있는 학(鶴)문양을 독립유공자 흉상으로 교체하는 방안 추진도 검토 중이다. [여진] 모임 소속 의원들의 개인 홈페이지에서는 친일파 명단 발표에 대한 찬반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K씨는 김희선 의원의 홈페이지에 “과연 진보적인 성향을가진 몇몇 의원들의 기준에 의해 16명을 친일파라고 급조해발표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묻고 싶다.”며 “훗날 역사가정말 이러한 행위들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고 지적했다. H씨도 “역사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함부로 재단하는 일은삼가주기 바란다.”며 “무덤을 파헤쳐 친일파 낙인 찍는 짓이 이 시대에 무슨 큰 의미가 있느냐.”고 비난했다.A씨는“당신이 그런 자격이 있느냐.”며 폭언을 서슴지 않았다. 반면 홈페이지에 실린 글의 대부분은 이번 발표를 적극 찬성하거나 격려하는 내용이었다.J씨는 김원웅 의원 홈페이지를 통해 “앞으로도 혼탁한 정치판에서 시원스러운 청량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노력해 주시기 바란다.”고 말했다.‘소시민’이란 ID를 사용한 사람은 “한국 정치의 희망과 미래를 발견했다.”며 “단돈 1만원씩이라도 매달 보내드리겠다.”고 격려했다.K씨는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 하는사람들에게 계속 훈계해 달라.”고 주문하기도 했다. 홍원상기자 wshong@
  • [대한광장] 친일파 명단 “이의”에 대한 이의

    지난달 28일 ‘민족정기를 바로세우는 의원모임’의 친일파 708명 명단발표에 대한 후문이 무성하다.이는 발표하는측에서도 이미 예상한 것이다.명단 작성에 관여한 사람으로서 몇 가지 의견을 밝히고자 한다. 먼저 친일파 명단 자체가 전반적으로 잘못됐다고는 하지못할 것이다.이번 명단 작성의 근거기준은 1948년 국회에서제정한 반민족행위처벌법의 규정으로, 역사적 자료를 통해친일 행적자를 가려 뽑았다.따라서 친일 반민족행위가 없는데도 모함을 당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다음에 친일파 명단의 공표는 이승만의 비호를 받은 친일파의 방해로 반민법의 시행이 무산되고,그후에 친일파가 반공을 면죄부로 해 반백년 이상을 다시 지배해 오면서 저지른 독재와 폭정·부패와 퇴폐 타락의 수렁에서 벗어나자는몸부림의 일환이다.따라서 이 명단에 게재된 사람은 대개고인이지만 만일 생존자가 있다면 우선 겨레 앞에 사과 사죄하고 나서 그 시비를 가려달라고 이의를 제기해야 할 것이다.그러지 않고 아직도 자기의 친일행각을 변명,정당화하고자 하는 추태를부린다면 더이상 상대할 일은 못된다. 셋째,이번 친일파 명단을 가장 못마땅해하는 부류는 친일파 기득권 세력의 일부이거나 추종자나 아류일 것이다.그들은 부패 기득권 질서의 붕괴 위협 또는 위기에 반발하는 것이다.그러한 반발과 반동은 아직도 민족반역의 죄과를 발판으로 부귀영화를 누리자는 의도로 역사에서 사라져야 할 것이고,또 사라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친일파 명단에 든 인사의 후손은 가문의 체면 등으로 봐서 감정이 몹시 상할 것이다.현대법은 연좌제가 아니다.친일파 자손까지 친일 낙인으로 불이익을 당해선 안 된다.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은 친일파의 매국행적의 대물림문제다. 친일파 자손이 누려 온 혜택-막대한 재산의 상속,고등교육의 유리한 기회,사회진출과 활동에서 연줄 지원 등-을 기반으로 해서,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해 역대 독재정권에 유착·편승해 반민족적·반민주적 해악을 끼치는 가해자의 주역이 된 경우가 상당히 있다.그야말로 친일 반민족의대물림이다.이러한 입장에 있는 부류가 그 이해관계를 고수하기 위해친일파 선조를 변명하고 나선다면 문제는 다르다.그런 것은 봐줄 수 없다. 넷째로 어느 논자는 왜 당사자에게 변명의 기회를 주지 않은 채 졸속 처리했느냐 하고 따지고 들었다.얼핏 이치에 닿는 말 같다.법률의 정당한 절차를 준수하는 법치국의 원칙론 강조로 보인다.그러나 일제 패망후 반백년 이상 친일파의 변명기회는 항상 열려 있었다.그동안에 왜 자기의 처지를 해명하지 못했는가.명단 발표에 대해 딴죽을 걸기 전에자기 처신을 반성해 봤는가 묻고 싶다. 이승만은 친일파를 정치기반으로 하면서 궤변을 늘어놓기를 “과거보다 현재가 중요하고 지금은 단결 단합할 시기”라고 했다.그렇지만 과거는 현재로 이어진다.과거 청산이없는 민족의 역사의 양 극단을 한국과 일본에서 본다.한국은 민족반역을 묵인해 왔고,일본은 과거의 잘못을 덮어두고정당화해 왔다. 그러한 과거 회피는 프랑스와 독일에선 인정되지 않았다.프랑스는 민족 반역을 철저히 숙청 단죄했고,독일은 과거 잘못을 심판 청산해 왔다.어느 쪽이 역사의바른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그리고이승만처럼 과거를 흘려보내고 단합해 나가자고 하면서 친일파가 한 일은 무엇인가.그들은 자기의 부끄러운과거를 은폐해 오다가 한술 더 떠서 미화하고 정당화하면서,부정한 기득권을 지키려고 반민주적 세력의 주역으로 행패를 남김없이 부려왔다.김구 선생 암살 배후에는 친일파의그림자가 있다.민주투사 장준하의 사고사에는 친일파 공작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간다.물론 친일파에 대한 감정적보복은 안 된다.다만 역사의 심판이란 말로 표현되듯이 정의가 이 땅에도 살아 있다는 것을 지금에라도 보여주지 못하면 우리에게 미래는 없다.누가 무엇을 어떻게 변명하든친일파의 죄과 부인과 친일파 세력의 지배를 그대로 방임한채 우리는 민족으로서나 또 인간으로서나 바르게 살 수 없다.민족 공동체를 유지하는 열쇠는 민족 배신에 대한 역사의 심판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한상범 동국대 법학과 교수 민족문제연구소장
  • 신용불량자 등록요건 강화

    오는 1일부터 연체금의 일부만 갚아도 신용불량자 등록이유예된다. 전국은행연합회는 연체일로부터 3개월 이내에 연체금 전부를 갚아야 신용불량자 등록에서 제외됐던 현행 신용정보관리규약을 개정,3월 1일부터는 일부만 상환해도 신용불량자등록시점을 유예시키기로 했다고 27일 밝혔다. 윤용기(尹龍基) 상무는 “연체금의 일부를 갚을 능력과 의사가 있어도 신용불량자 등록대상에 이미 포함돼 부분상환의 의미가 없었다.”면서 “그러나 이제는 연체금의 일부라도 먼저 갚는 것이 신용불량자로 낙인찍히는 시점을 최대한늦추는 방안”이라고 강조했다.윤 상무는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면제가 아니라 유예”라면서 “유예된 시점에서또 3개월간 연체가 발생하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된다.”고말했다. 오는 7월1일부터는 1000만원 이상으로 규정한 개인대출금신용관리대상 기준도 없어진다.액수에 관계없이 모든 대출금이 관리대상에 포함된다.아울러 법정관리나 화의 인가가결정된 기업은 신용불량 등록에서 해제된다. 안미현기자
  • 신용불량자 금융권 횡포에 운다

    회사원 강모(27·여)씨는 지난해 신용카드 대금 30만원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됐다.두 달 뒤 강씨는 원금과 연체금을 모두 갚고 신용불량 상태에서 벗어났지만 더 이상신용카드를 만들거나 쓸 수는 없었다. 카드사는 “은행연합회에 신용불량 기록이 남아 있다.”는 이유로 강씨에게 새로 카드를 내주지 않았다.그러나 직접 확인해 본 결과 강씨의 이름은 은행연합회 신용불량자명단에서 이미 삭제된 뒤였다.카드사가 카드발급을 해주지 않기 위해 엉뚱한 핑계를 댄 것이다. 현재 은행대출금은 3개월 이상 1원이라도 연체금이 있으면,신용카드 대금의 경우는 3개월 이상 5만원 이상 연체가 있으면 신용불량자로 등록된다.강씨보다 훨씬 적은 금액을 연체했다가 신용불량자로 찍혀 고통을 겪는 이들이 하나 둘이 아니다.신용불량자들이 300만명을 넘어선 지 오래다. 이들 신용불량 경험자의 고통은 당해 보지 않으면 모른다는 게 ‘신용불량자들의 모임’ 석승억 대표의 얘기다.신용불량자 명단에 한 번이라도 오른 사람은 ‘죄질’에 관계없이 무조건 ‘전과자’로 낙인 찍혀 제도금융권 이용이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신용불량 기록이 삭제되거나 사면된 후에도 금융권이 여전히 과거 정보를 토대로 대출이나 카드발급을 기피하고 있기 때문이다.이 때문에 상당수신용불량 경험자들이 사채 등 사(私)금융을 찾게 되고,그러다가 또다시 신용불량자로 전락하는 악순환이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계속되는 금융권 횡포=은행빚 2000만원을 갚지 못해 신용불량자가 된 자영업자 김모(55)씨는 최근 돈을 다 갚았는 데도 은행대출을 받지 못하고 있다고 하소연했다.해당은행은 “은행연합회에 1년간 신용불량자 기록이 남기 때문에 대출을 해 줄 수 없다.”고 둘러댔다.그러나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신용불량 기록이 있어도 대출한도나 이자 등에서 불이익을 받을 뿐 금융거래는 얼마든지 가능하다. ”면서 “그런데도 은행들이 은행연합회에 엉뚱하게 책임을 떠넘기며 회피하고 있다.”고 불만을 토로했다.연합회의 다른 관계자는 “한번 신용불량자로 찍힌 고객과는 거래를 하지 않으려는 금융권의 안이한 대응이 신용불량자를 계속 양산하고 있다.”고 꼬집었다. ♠금융권,“어쩔 수 없다.”=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신용불량 기록이 있는 사람들은 부실 대출의 우려가 높기 때문에 꺼리는 게 사실”이라고 실토했다.다른 관계자는 “은행연합회의 신용불량 기록이 없어져도 자체적으로 거래기록을 활용,대출때 깐깐하게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제도개선 시급=금융권의 이런 행태에 대한 지적은 그동안 계속돼 왔지만 이를 고치려는 노력은 거의 없었다.많은 전문가들은 금융권의 횡포와 신용불량자 양산을 막으려면 신용정보제도를 우선적으로 정비해야 한다고 지적한다.금융권이 신용불량자 등재 경험 등 ‘불량’ 관련 정보를 중심으로 대출이나 카드발급을 하다보니 신규거래 거절 등악순환이 이어지고 있다는 것이다.금융권 관계자는 “신용불량 등록요건 및 삭제 경과기간 등을 세분화해 실질적인규제효과가 나타나도록 해야 할 것”이라며 “금융권은 우량·불량의 이분법적 잣대에서 탈피해 개인에 대한 신용평가 및 심사기법을 좀더 선진화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금융연구원 한상일(韓相壹) 연구위원은 “신용사회 정착을 위해 신용불량 정도에 따라 등록내용을 차등화하는 한편 은행연합회뿐 아니라 금융기관들이 우량정보를 모아 분석하는 등 정보 활용도를 높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김미경기자 chaplin7@
  • [씨줄날줄] ‘無신용’카드

    지난 1980년대 미국에서 근무한 당시 한국은행의 모(某)차장은 신용카드를 발급받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그는 신용카드를 받으려고 했으나,심사가 까다롭고 오랜 시간이걸리자 한은이 외환을 맡겨두고 있던 미국계 은행에 ‘부탁’해 겨우 뜻을 이룰 수 있었다.이처럼 신용이 확실하다고 여겨지는 외국 중앙은행의 중견간부에게도 신용카드를쉽게 내주지 않는 게 미국사회다. 미국과는 달리 우리나라에서는 신용카드를 받는 게 ‘식은 죽 먹기’다.길거리에서 신청만 하면 받을 수 있는 게신용카드다.신용도 조사를 제대로 하지도 않고,신청만 하면 대부분 주고 있으니 신용카드라기보다는 ‘무(無)신용’카드라고 보는 게 적절하지 않을까.지난해 말 현재 8543만장의 신용카드가 발급됐다.성인 한 사람당 2.5장의 신용카드를 갖고 있는 셈이다.카드업계의 회원수 늘리기 경쟁에 따라 올해안에 1억장을 넘을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기가 찰 일이다. 지난해 7개 카드사의 총 카드사용액중 65%는 현금서비스와 카드론 등 현금대출 부문이다.정부가 장려하는 결제 부문보다는 연 20% 안팎의 고리대출로 이뤄지는 부수적인 분야의 비중이 훨씬 높은 셈이다.신용을 토대로 물품을 구매하는 데 쓰여야 하는 신용카드의 취지와는 다르게 운용되고 있으니 본말이 바뀌어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카드사들은 지난해에는 대출 부문에서 뭉칫돈을 벌기는했지만,자신의 능력을 벗어나 대출받은 개인들이 언제 파산하거나 연체할지 모를 일이다.개인들의 파산은 카드사들에도 부담이 될 것이다.카드사들은 신용카드를 남발해 놓고,5만원 이상을 3개월 연체하면 신용불량자로 낙인찍어놓기까지 한다.지난해 말 현재 연체에 따른 신용불량자만101만명이다.신용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자신들의 잘못은 생각도 않고 남에게만 덮어 씌우는 격이니 이런 도덕적 해이(모럴 해저드)도 없다. 금융감독위원회는 엊그제 무자격자에게 카드를 발급하거나 길거리에서 불법으로 회원을 모집하는 행위에 대한 특별검사를 하기로 했다.적당히 할 게 아니라 발급규정을 어길 경우,제재를 강화하는 등 제대로 해야 한다.신용사회를 앞당기려고 도입된 신용카드가 오히려 신용사회로 가는데 걸림돌이 되는 게 아닌지 정부당국과 업계는 깊은 반성을 해야 하지 않을까.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운용하는 사람들에 따라 약도 되고 독도 되는 법이다. 곽태헌 논설위원 tiger@
  • 유태준씨 재탈북 드라마/ 입에 철사 감춰 수갑풀고 탈옥

    20개월여만에 다시 서울 땅을 밟은 유태준(劉泰俊·34)씨의 두번째 탈북 경위는 영화 ‘빠삐옹’을 방불케 하는 것이었다.가족들의 얘기를 바탕으로 남북 분단의 현실을 뛰어넘는 한편의 드라마 같은 유씨의 탈북 경위를 재구성했다. [재입북·체포] 2000년 6월4일 김포공항을 떠나 중국의 선양·화룡을 거쳐 25일 북한 함흥으로 잠입했다.사흘이 지나 처가집 동태를 살피다가 들어갔더니 장모가 “보위부로달려가겠다.”고 소리쳤다.서둘러 중국으로 되돌아가기 위해 급히 열차를 타고 무산까지 갔으나 6월30일 보위부원들에게 붙잡혔다.청진 감옥에서 잠깐 머물다 평양의 국가안전보위부 감옥으로 옮겨졌다.지난해 1월 변호사도 없이 열린 재판에서 10분만에 32년형을 선고받았다. 이 과정에서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의 편집부장이던 숙부 유철호씨가해직당하고 일가가 강원도 천내로 추방당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감옥생활] 선고를 받은 뒤 정치범 1000여명이 수감된 청진 25호 정치범교화소에 수감됐다.식사로는 강냉이 50알과설사약이 지급됐다. 지난해 5월 평양국가보위부 감옥으로다시 이송됐다가 대남연락소 초대소로 옮겨졌다. 연락소로이송된 뒤 규정과 달리 머리를 기르게 하고 식사량도 늘려주었다. 이때부터 기자회견용 원고 연습에 들어갔다. 조평통 참사 안명길이라는 사람이 어조와 억양까지 표시된 회견 내용을 40일동안 훈련시켰다.5월30일 녹음을 마쳤다. 1차 회견 뒤 평양 보위부 감옥에 다시 수감됐다가 8월에연락소에서 다시 2차 회견을 했다.이때 부인 최정남을 처음 만났다.그러나 말을 붙일 경황도 기회도 없었다. [두번째 탈북] 두번째 회견 뒤에는 보위부 감옥의 감시가소홀해졌다.지난해 11월 10일 죽을 힘을 다해 감옥 담을뛰어넘어 극적으로 탈출에 성공했다.곧바로 평양역으로 가평남 순천으로 갔다. 기차 객차 위 고압선 밑에 누워 함흥까지 갔다.탈출 사실이 알려진 탓인지 함흥역 부근에는 보위부원들이 쫙 깔려있었다.길주역 세 정거장 전에 미리 내려 북한군을 때려 눕히고,견장 달린 인민군 복장으로 변장했다. 길주를 거쳐 걸어서 혜산에 도착했다.압록강을 건너 11월30일 중국 장백시에 도착했으나 옌지(延吉)에서 도움을 청한 사람이 공안에 신고,12월 체포됐다. 70일이나 계속된 중국 공안의 조사과정에서 끝내‘한국인’임을 주장,지난 9일 강제 추방당해 한국으로 돌아왔다. 전영우 이영표기자 anselmus@ ■유태준씨 일문일답. 재탈북에 성공한 유태준씨는 13일 “북한측 국경경비대의유혹에 빠져 아내를 만나러 북한에 들어갔었다.”고 말했다.다음은 일문일답. [재작년 중국으로 출국한 이유는.] 아내를 데리고 오고 싶어 중국으로 갔다.99년 9월에 한차례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북한으로 들어가려고 출국한 것이 아닌가.] 아니다. 두만강 접경지대에서 북한측 국경경비대원 4명이 내가 있던 중국 화룡현으로 찾아와 강건너 무산에 아내가 와 있다고 유혹해 들어갔다.그러나 거짓말이었다. [북한에서 기자회견을 시킨 이유는.] 조사 과정에서 내 말을 전혀 믿지 않았던 북한측이 내 본심을 떠보려고 회견을조작한다고 생각했다. 8월에 다시 회견을 할 때는 인민문화궁전에서 한다기에 남한에 방송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했다.대한민국을 배신한 사람으로 낙인찍힐까봐 두려웠다. [북한에서 내보낸 기자회견 목소리를 어머니가 알아듣지못했는데.] 억양과 어조를 하나하나 간섭했기 때문에 평소내 목소리와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북한에서 체포당한 후 어떤 대우를 받았나.] 엄청난 고문을 받았다. 새벽 4시30분부터 밤 10시30분까지 꼼짝도 할수 없었다.수백번 자살 충동을 느꼈다.그러나 여러차례 기적적인 순간을 체험했다. 전영우기자
  • 개인파산·상속포기 급증세

    가계부채가 급증하면서 채무승계 부담에 따른 상속포기와개인파산 사례가 다시 급격히 늘고 있다.‘소비자 워크아웃제’ 등 부작용을 줄일 수 있는 제도적 장치가 시급하다는지적이다.4일 금융권과 서울가정법원에 따르면 지난해 상속포기 신청건수는 총 2619건.99년 1795건,2000년 2216건에비해 가파르게 늘고 있다. [“빚 떠안느니 차라리 상속 포기하겠다”] 상속을 포기하는 주된 사유는 물려받을 재산보다 빚이 더 많거나 숨겨진빚이 나타날 것을 우려해서다.상속포기를 선언하면 빚 변제의무가 없어진다. 금융계 관계자는 “최근의 가계부채 급증세와 무관하지 않은 현상”이라고 지적했다.법원은 제때 상속포기 신청을 못해 과도한 빚을 떠안게된 사람들을 위해오는 4월 13일까지 구제신청을 받는다. [개인파산도 급증] 2000년을 고비로 주춤하던 개인파산 건수도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대법원 통계에 따르면 전국의개인파산 신청건수는 99년 503건에서 지난해말 615건으로껑충 뛰었다.이 중 서울지역 신청건수가 전체 45%인 278건. 사상 최고치다.시중은행들의 가계대출이 수도권 고객에 집중돼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우려할 만한 징조다. [소득 대비 빚 증가비율 ‘아찔’] 지난해 9월말 현재 우리나라 1가구당 빚은 2200만원.전체 가계빚(은행·비은행 대출금,신용카드 관련 대출금 포함)은 316조 3000억원이다.이를 순처분가능소득(NDI)으로 나눠 소득수준과 비교해보면,91%로 2000년말에 비해 15%포인트나 늘었다.100%를 넘으면소득보다 빚이 더 많다는 의미다.아직은 소득이 빚을 웃돌고 가구당 금융자산(5600만원)도 빚보다 많지만 부채 증가속도가 너무 가파르다는 게 한국은행의 지적이다. [소비자 워크아웃제 도입할 만] 금융감독원 조성목(趙誠穆)비제도금융조사팀장은 “개인파산을 신청한뒤 법원의 인정을 받지 못하면 빚은 그대로 남고 오히려 파산자로 낙인찍혀 신용불량자보다 더 큰 고통을 받게 된다.”면서 신청에신중을 기해야 한다고 환기시켰다.금융연구원 최공필(崔公弼) 연구위원은 “기업의 경영정상화를 돕기 위한 워크아웃(개선작업) 제도를 개인에게도 적용하는 ‘소비자 워크아웃’제를 도입할 만하다.”고 주장했다.재정경제부와 법무부등이 검토에 들어간 상태다.그러나 제도를 악용해 손쉽게채무부담에서 벗어나려는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를 야기할 수 있는 만큼 ‘방지 장치’가 반드시 따라야한다는 지적이다. 안미현 김미경 기자 hyun@
  • 부시 “”모든 대안 검토중””, 北 “”美 사실상 선전포고””

    ●양국 강경발언 잇따라. [워싱턴 백문일특파원]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은 1일 북한과 이란,이라크에 대해 “모든 대안이 검토되고 있다.”고말했다. 지난달 29일 첫 국정 연설에서 이 3개국을 특별히 지목,‘악의 축’으로 규정한 이래 강성 발언을 계속하고 있는부시 대통령은 이날 백악관을 방문한 압둘라 요르단 왕에게 “우리는 그들에게 대량 살상무기 개발을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을 통보한 것”이라고 강조하고“그런 만큼 미국과 우방들을 더 안전하게 하는 방안에 관해 모든 대안이 검토되고 있다.”고 말했다. 앞서 미 행정부 고위인사들의 대북 강경발언은 31일(한국시간 1일 오전)에도 이어졌다. 라이스 보좌관은 이날 북한을 “세계에서 첫 손가락에 꼽히는 탄도미사일 장사꾼”이라고 낙인찍었다. 버지니아주 앨링턴에서 열린 전미 보수동맹 회의 연설에서 라이스 보좌관은 “북한은 세계 제일의 탄도미사일 장사꾼으로서,구매자의 의도가 아무리 악하다 하더라도 어느누구와든 거래를 트고 있다.”고 말했다. mip@ ●北“美 사실상 선전포고”. 북한 외무성은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29일연두교서에서 북한을 ‘악의 축’을 이루는 나라라고 비난한 데 대해 “선전포고나 다름없다.”고 강하게 반발했다. 북한은 1일 조선중앙방송을 통해 성명을 발표, “근래의북·미관계 역사에서 미 대통령이 직접 자주적 주권국가인 우리나라에 이처럼 노골적인 침략 위협을 가한 적이 없다.”고 비난하고 “이는 미국이 제안한 대화 재개 속셈이어디에 있는지,왜 현 행정부가 이전 행정부에서 만들어놓은 대화를 통한 핵·미사일 문제 해결의 가능성까지 저버렸는지를 명백히 보여줬다.”고 지적했다. 북한은 또 북한이 1∼2개의 핵폭탄을 제조했을 것이라는미 중앙정보국(CIA) 발표와 관련,중앙방송 논평을 통해 “공화국을 핵 범인으로 몰아 국제적으로 고립시키기 위한고의적·계획적인 책동”이라며 대미 공세를 지속했다. 전영우기자 anselm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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