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읽는 동화] 난쟁이나무가 되어도 괜찮아/유효진
미루나무의 꿈은 키 큰, 아주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어릴 적부터 변한 적이 없습니다. 한 번도요.
소원이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머리 꼭대기 저기 먼 곳에 하늘을 코옥, 찔러 보는 것이 소원입니다.
미루나무는 생각합니다.
‘가지 끝으로 파란 하늘을 톡 건들면 아주 신기한 일이 일어날 거야.’
미루나무는 또 생각합니다.
‘분명히 파란 물이 조르르 새어 나와 내 몸을 파랗게 물들일 거야.’
파란색을 좋아하는 미루나무는 자기 가지 끝에 나온 연둣빛 이파리도 하늘처럼 파란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미루나무는 마을 사람들 중에 우로를 제일 좋아합니다.
우로의 커다란 눈도, 도무지 열릴 것 같지 않은 꾹 다문 입도, 고개를 푹 수그리고 걷는 모습도 다 좋아합니다.
숱이 많은 새까만 눈썹도 좋아합니다.
꼬마 녀석들은 미루나무의 다리를 가끔은 걷어차고 연필로 낙서를 하는데,
우로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어요.
우로가 여섯 살 되던 해였습니다.
그때는 미루나무도 작은 나무였어요.
우로는 구겨진 도화지를 들고 나와 미루나무를 보고 말했습니다.
“너를 그리겠어.”
미루나무는 그때 우로가 잔뜩 화가 나 있는 줄 알았어요.
얼굴에 웃음기도 없는 아이가 빤히 쳐다보다가, 그것도 한참동안 쳐다보다가,
“너를 그리겠어!”
단호하게 말하고는 그림만 그렸거든요.
미루나무는 우로가 어떻게 자기를 그릴지 궁금해서 졸지도 않았습니다.
우로가 조는 모습을 그려 놓으면 어떡해요.
미루나무는 바람이 미루나무 가지를 마구 흔들거나 나뭇잎을 팔랑팔랑, 흔들면 눈을 크게 뜨고 속삭였어요.
“고양이처럼 지나 가. 살금살금. 제발 살금살금.”
우로는 한마디도 하지 않고 그림만 그렸어요.
“어? 내가 저렇게 생겼단 말이지!”
정말로 우로는 미루나무를 그렸습니다.
그런데 우로가 그린 미루나무는 키가 큰 새파란 색 나무였어요.
미루나무는 그때부터 꿈이 생기고 말았습니다. 소원이 생기고 말았어요.
키가 큰 새파란 색 미루나무가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은 우로가 열 살이 된 지금까지 변한 적이 없습니다.
우로가 옵니다.
미루나무 곁으로 자박자박 걸어옵니다.
‘또 나를 쳐다만 보다가 돌아갈 건가?’
미루나무는 제발 한 마디라도 좋으니 우로가 말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안녕, 미루나무’ 라든가 그것도 하기 싫으면 ‘안녕’ 소리만 해줘도 무척 반가울 것 같아요.
그런데 도무지 말을 안 해요.
입술을 꾹 다물고는 쳐다만 봐요.
“우로, 안녕. 잘 잤니?”
우로는 아무 말이 없습니다.
미루나무가 인사를 하든가 말든가 우로는 관심도 없는 표정이에요.
아, 물론 알아들을 수도 없겠지만요.
미루나무가 우로 목소리를 들은 건 여섯 살 그 해,
“너를 그리겠어.”
가 처음 들은 목소리이자 마지막입니다.
미루나무는 우로를 보고 반가웠으나 곧 시무룩해집니다.
‘저 애는 말을 하지 않으니 속을 모르겠어. 날마다 나를 쳐다만 보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꿈이 무엇인지, 소원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어. 난 저 애의 고민이 무엇인지도 몰라. 아아!’
우로는 미루나무를 쳐다만 봅니다.
하염없이 쳐다만 봐요.
미루나무도 뚫어져라 우로만 쳐다봅니다.
미루나무 가지에 앉았던 작은 새가 중얼거립니다.
“저 꼬마 목 아프겠다. 저 꼬마가 너와 친구가 하고 싶은 게야.”
미루나무는 작은 새 말이 제발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런데 그 말이 맞을 거라는 생각이 도무지 들지 않아요.
‘치. 난 친구하고 싶은데 왜 쳐다만 보는 거야. 왜 말을 안 하는 거야.’
그러다가 미루나무는 걱정이 되었습니다.
‘말을 못하게 되었을까? 목소리를 잃어버렸을까?’
미루나무는 시무룩해지다 못해 슬픈 마음까지 들었습니다.
미루나무가 기억하는 한 우로의 목소리는 매우 똘똘한 목소리였어요.
그런데 그 목소리를 잃어버리는 건 우르르, 하늘이 무너지는 것만큼 엄청난 일입니다.
‘아휴, 감기에 걸려서 기침소리라도 해 보지. 아니 감기는 우로를 괴롭힐 테니……. 그래, 재채기라도 해 보지.’
하지만 우로는 미루나무 앞에서 기침도 재채기도 하질 않아요.
어젯밤에 미루나무는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땅 속에서, 땅 위에서 온갖 것들이 잎눈을 틔우느라, 싹을 틔우느라 속닥속닥, 톡톡톡, 틱틱 얼마나 소리를 내는지 잠을 잘 수 없었어요.
미루나무는 쿨쿨 낮잠이 들었다가 축축한 느낌에 잠에서 깨었습니다.
“어, 뭐지?”
미루나무는 부스스 눈을 뜨다가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어요.
“흐흑. 흑흑…….”
우로가 자기 둥치를 부둥켜안고 훌쩍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아아! 미루나무는 우로의 목소리를 여섯 살 이후 처음 들었습니다.
‘그런데 왜지? 왜지?’
미루나무는 영문을 몰라 속이 탔습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내 부러진 가지가 떨어지면서 우로 눈을 찔렀을까? 저기 꼭대기에 있던 새 둥지가 우로 머리를 때리고 떨어졌을까?’
미루나무는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러나 지난 해 얼굴 노란 새가 지어놓고 간 빈 둥지는 그대로 있었습니다.
미루나무는 숨도 크게 쉬지 않고 우로만 빤히 내려다보았습니다. 우로가 너무 슬픈 표정으로 울고 있었기 때문에 숨을 크게 쉴 수가 없었어요.
“난 네가 키 크는 게 싫어. 네 키가 크는 게 제일 싫어. 내가 부지런히 자라도 네 키를 따라가지는 못해. 내가 크면 너도 커서 할머니가 그려 놓은 빗금이 자꾸만 올라가잖아. 이젠 빗금이 내 눈에 보이지도 않아. 내 맘도 모르고 너는 날마다 키만 커. 그러니까 내 엄마가 되어 줄 아줌마는 나타나지 않을 거야.”
대체 몇 년 만에 다시 듣는 목소리인지요.
‘깜짝이야! 목소리를 잃어버린 게 아니었어. 그런 게 아니었어.’
미루나무는 좋아서 하하 웃으려다가 고개를 갸웃거렸습니다.
미루나무는 우로가 금방 했던 말을 똑같이 중얼거리다간 곰곰 생각했습니다.
‘빗금?’
‘빗금?’
‘아! 아아! 저기 아래 그려진 내 빗금!’
미루나무는 이제야 알았습니다.
우로가 자신의 둥치에 그어진 빗금만큼 키가 크면, 마음씨 고운 아줌마가 나타나 새엄마가 되어 줄 거라는 것을요.
누가 그려놨을까 궁금했는데 우로 할머니가 그린 빗금이었습니다.
미루나무는 가만가만 골똘히 옛일을 더듬었습니다.
“우로야, 우로가 이만큼 키가 크면 꼭 예쁜 아줌마가 나타날 거야. 그래서 다른 엄마들처럼 우리 우로한테 맛있는 음식도 해 주고, 옷도 깨끗이 빨아서 입혀 주고, 그리고 다른 엄마들처럼 학교도 따라가 줄 거란다. 그러니까 그런 날이 올 때까지 씩씩하게 기다려야지.”
미루나무는 자신의 머리를 마구 쥐어박고 싶었습니다.
‘아, 맞아 그랬어. 그때 할머니가 그랬어. 우로가 파란색 크레파스로 나를 그리기 바로 전 날이었잖아. 난 그때 작은 새가 내 이파리에 똥을 싸고 지나가는 바람에 작은 새 꽁지를 쳐다보고 있었어. 그러느라 그 순간 할머니가 내 몸에 빗금을 그었는데도 몰랐던 거야. 그렇지만 분명 그렇게 말한 기억은 나. 왜 이제야 생각이 난 거지? 어쩌면 나는 그것을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었던 거지? 바보, 바보.’
미루나무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늘어뜨리고 걸어가는 우로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습니다.
‘마구 퍼붓는 소낙비에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빗금을 나는 참 싫어만 했는데…….’
미루나무는 우로한테 너무, 너무나 미안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미루나무는 이제 그만 자라고 싶어졌습니다.
아니 앉은뱅이 나무가 되어도 좋으니 키 작은 나무 시절로 되돌아가고 싶어졌습니다.
미루나무는 간혹, 아니 자주 키 작은 나무가 되는 꿈을 꿉니다.
“봐라. 내 머리가 빗금 위로 올라갔어. 이제 새엄마가 오시겠지?”
“우리 새엄마가 학교에 오셨어. 친구들이 예쁜 엄마를 보고 부러워했지. 난 기분이 좋았어.”
“새엄마가 해 주는 밥은 너무 맛있어. 너도 우리 새 엄마가 시장에 가는 거 보았니?”
우로의 목소리를 듣고 눈을 뜨면 자기 키는 그대로인 채, 우로가 타박타박 걸어오는 길만 눈앞에 보입니다.
우로도 보이지 않는 좁다란 빈 길만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요.
미루나무 가지마다 돋았던 새 잎이 이제 제법 큰 잎이 되었습니다.
포르르, 작은 새 한 마리가 미루나무 가지를 떠났습니다.
미루나무는 금방 떠난 새를 바라봅니다.
작은 새의 모습이 푸른 하늘에서 사라지자 미루나무가 휴우, 한숨을 쉽니다.
그러곤 뭉게구름 몇 점 지나가는 하늘을 향해 중얼거렸어요.
“나는 이제 코옥, 하늘을 찔러보고 싶지 않아. 내 꿈은 이제 더 이상 키가 자라지 않는 거야. 키 큰 파란색 나무가 안 돼도 괜찮아. 난쟁이나무가 되어도 괜찮아.”
●작가의 말
새엄마 새아빠라는 말이 점점 익숙해지면서 사회 속에서 자리를 넓혀가고 있다. 따라서 이제 콩쥐 팥쥐, 장화홍련 속에서 등장하는 나쁜 새 부모에 대한 인식도 달라져 가고 있고, 달라져야 한다. 달라져야 하는 것만큼은 순전 어른들의 몫이다. 그 몫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그리고 한결같이 난쟁이 나무가 되어도 괜찮은 미루나무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미루나무가 많은 세상은 등불이 없어도 밝을 것이다.
●약력
경기도 남양주에서 나고 자랐다. 계몽아동문학상을 받으며 문단에 나왔고 단편동화 ‘고물자전거’는 초등학교 4학년 교과서 읽기에 수록되어 있다.
저서:뜸부기 형, 쇠똥구리 까만 운동화, 키가 작아도 괜찮아, 나는 문제없는 문제아 등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