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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中의 이상한 러시아 편들기...”우크라 침공은 모두 유럽 탓”

    中의 이상한 러시아 편들기...”우크라 침공은 모두 유럽 탓”

    중국이 러시아-우크라이나 침공 사태의 근본 원인이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지나친 러시아 규제와 간섭에 있다고 비난했다.  중국 국영매체 중앙tv는 피노 알라키 전 유엔사무차장과의 인터뷰를 통해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러시아 군의 특별 군사작전은 나토가 문제의 근본 원인이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방법은 유럽 국가의 손에 달려 있다”고 27일 보도했다.  보도에 따르면, 이날 해당 매체와의 인터뷰에 모습을 드러낸 알라키 전 유엔 사무차장은 “나폴레옹 시대부터 러시아는 서방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여겨져 왔다”면서 “소련이 붕괴한 이후 러시아는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와의 협정을 통해 군사적 움직임에 대한 일체의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을 보장했지만, 이를 먼저 어긴 것은 나토 측이며, 이들이 러시아 국경선 인근까지 군대를 파견해 결국엔 러시아가 군사적 행동을 취하도록 강요한 것과 같다”고 분석했다. 이에 대해 해당 매체는 우크라이나 사태의 근본 원인이 러시아 국경까지 나토 군대가 확장을 거듭하면서 러시아 정부에게 위협을 가한 것이 주요했다고 덧붙였다.  알라키 전 유엔 사무차장은 이어 “이번 사태는 지금껏 약 30년 동안 계속된 문제가 외부로 분출된 사건”이라면서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정부는 나토가 러시아 국경선과 가까운 동쪽으로 계속 확장하지 않을 것이라고 신뢰했으나, 나토는 러시아 정부의 신뢰를 저버리고 동쪽으로 계속해서 진격했다. 러시아 정부에게는 이것이야 말로 참을 수 없는 행동으로 큰 위협을 느꼈을 것”이라고 러시아 측을 두둔했다. 또, 미국, 영국 등 전세계 30개 국가에서 잇따라 러시아에 대한 경제적 제재 의사를 밝힌 것과 관련해서도 입장을 밝혔다.  알라키 전 유엔 사무차장은 “서방은 연일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발표하고 있지만 사실상 서방 주요국가의 인플레이션 압박은 더욱 고조되고 있다”면서 “러시아에 대한 서방의 제재는 오히려 제재를 가하는 서방 국가 당사자들에게 더 큰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러시아처럼 적은 부채와 풍부한 국내 자원을 가진 주요 수출국에 가하는 제재는 오히려 각 서방국가들에게 더 큰 타격을 줄 것이라는 것을 잊지 말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그는 “우크라이나의 위기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책은 다름 아닌 유럽 국가들의 손에 달려 있다”면서 “해결책은 매우 간단하다. 그들이 북대서양조약기구인 나토를 통해 우크라이나에 더 이상 접근하지 않을 것이라는 선언을 하면 된다. 그 선언은 반드시 서면으로 작성돼 국제적인 협정에 의해 체결돼야 할 것이다. 그러면 지금 이 사태의 모든 혼란은 모두 종료될 것이다”고 거듭 강조했다.
  • [글로벌 In&Out] 러시아, 크림전쟁 패배 잊었나/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러시아, 크림전쟁 패배 잊었나/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연구과 박사과정

    최근 서양이든 한국이든 일본이든 뉴스에서 ‘러시아’를 검색하면 ‘우크라이나와의 전쟁’에 관한 기사가 많이 나온다. 지난 2월 10일 리즈 트러스 영국 외무장관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회담을 가졌을 때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략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하자 라브로프는 통역관에게 “통역할 필요 없다”고 했다. 왜 그럴까? 사실 최근 러시아에선 우크라이나 사태와 151년 전 파리조약 파기와의 역사적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한다.  1812년 프랑스군의 침략을 물리친 러시아는 이듬해 유럽 원정에 나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패망과 왕정 복고에 크게 기여했다. 1825년 말 제위에 오른 니콜라이 1세는 유럽의 군주제를 보호하는 걸 사명으로 삼아 유럽의 혼란이 러시아 이익에 부합함에도 불구하고 1848년 오스트리아제국에서 발발한 헝가리 혁명 등 19세기 유럽 혁명운동의 탄압에 적극 참여했고, 이에 힘입어 ‘유럽의 헌병’으로까지 불렸다.  하지만 유럽의 상황이 안정되자 러시아는 유럽의 수호자에서 적으로 변했다. 1853년, 러시아와 오스만 제국의 분쟁을 이용한 영국과 프랑스, 오스트리아제국은 크림전쟁에서 러시아를 패배시키고 파리조약을 통해 흑해의 해군기지와 영토 일부를 포기하게 했다. 러시아에 있어 이들 서유럽 제국의 참전은 배은망덕의 행위였다. 당시 러시아 외무상인 알렉산드르 고르차코프는 “러시아는 화를 내지 않고 힘을 집중하고 있다”는 말을 남기고 러시아의 지위를 회복할 기회를 기다렸다.  기회는 1870년에 왔다. 프로이센과 프랑스의 오랜 마찰이 결국 전쟁으로 이어지면서 유럽이 다시 혼란에 빠지게 됐다. 프랑스가 패배의 길을 걷기 시작하자 고르차코프는 러시아가 더이상 파리조약에 얽매이지 않고 흑해에 해군을 주둔시킬 것이라고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혼란에 빠지면서 이에 반대할 여유조차 없던 유럽 국가들은 러시아의 달라진 지위를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1871년 3월 런던회담에서 러시아 해군 흑해 주둔을 금지했던 파리조약은 사실상 폐기됐다.  오늘날 러시아는 150여년 전과 비슷한 상황이다. 1990년대 초 통일의 길을 걷고 있던 독일은 이 통일이라는 목표를 성사시키기 위해 유럽 주요 국가들의 동의가 필요했다. 한데 소련에 있어 동독은 자신들을 가상의 적으로 삼아 온 나토의 위협을 저지하는 방어선의 역할을 하고 있었다. 때문에 당시 소련의 최고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통일을 허락하는 조건으로 나토가 동쪽으로 확장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길 원했다. 미국이 이를 약속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고르바초프에 따르면 구두 약속은 했다고 한다. 하지만 독일 통일 직후 사회주의 진영은 나토와 관계없이 스스로 붕괴됐고, 1991년 말 소련도 해체됐다.  반면 동유럽 사회주의 붕괴 이후에도 나토는 이들 진영의 국가들을 흡수하면서 확장해 나갔다. 1999년 헝가리, 체코, 폴란드가 나토에 가입했고 2004년에는 구소련의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동유럽의 많은 국가들도 나토에 들어갔다. 냉전에서의 패배로 러시아는 중부 유럽에서의 방어선을 상실하는 차원을 넘어 러시아를 여전히 적대시하는 나토가 러시아 국경 인근에다 군사기지를 두는 상황을 맞았다. 우크라이나까지 나토에 가입한다면 러시아로선 완전히 완충지대를 잃게 되는 것이다.  지금 러시아 상황은 크림전쟁 패배 직후와 비슷하다. 아무리 군사력이 뛰어나다 해도 나토와 전쟁을 하거나 서방세계의 혹독한 경제 제재를 받는 건 러시아에 자살 행위나 마찬가지다. 유일한 선택지는 고르차코프가 한 것처럼 ‘힘을 집중’하면서 유럽에서 분열이 발생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뿐이다. 러시아는 이를 직시해야 한다.
  • ‘유럽의 곡창’ 우크라이나의 500년 수난사

    ‘유럽의 곡창’ 우크라이나의 500년 수난사

    러시아의 침공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세계의 이목이 우크라이나를 향하고 있다.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 등 서방이 러시아의 침공일로 지목한 16일을 ‘단결의 날’로 선포하겠다며 맞서고 있지만 풍전등화의 긴장이 극대화되고 있다. 러시아와 유럽의 틈바구니 속에 놓인 우크라이나가 이처럼 위기에 빠진 배경을 최근 출간된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사진·글항아리)가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주우크라이나 일본대사를 지낸 외교관으로 니혼대 국제관계학부 교수 등을 역임한 저자 구로카와 유지는 루스 카간국을 시작으로 러시아와 뿌리를 같이하는 키예프 공국, 그리고 1991년 독립 이후까지 우크라이나의 통사를 정리했다. 다른 민족에게 지배받고 독립을 반복해 온 복잡한 관계들도 함께 그린다. 12세기 말쯤 이미 인구수가 700~800만명에 달했고 유럽 최대 규모의 철광석 산지이자 세계 흑토지대의 30%를 차지하는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는 주변국의 좋은 먹잇감이었다. 러시아는 물론 리투아니아, 폴란드 등 우크라이나에 눈독을 들인 주변국과 문화, 종교, 언어까지 영향을 주고받았다. 15세기만 해도 키예프 루스의 지배를 받는 한 부족 연합체일 뿐이었던 러시아와의 관계는 1654년 페레야슬라프 조약이 가장 결정적인 변곡점이었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러시아는 이 조약으로 우크라이나 동부를 병합해 영토를 늘렸다. 우크라이나 입장은 동맹 중 하나에 보호를 요청했을 뿐인데 결과적으로 병합되고야 말았다는 것이다. 국제우크라이나학회 일본지부를 이끄는 저자는 우크라이나의 잠재력과 가능성에 대해서도 꾸준히 언급한다. 유럽에서 러시아 다음으로 넓은 면적과 ‘유럽의 곡창’이 될 수 있는 환경, 뛰어난 과학기술과 문화 등은 여전히 매력적인 요소들이다. 독립 전까지 국가의 틀이 없는, “나라 없는 나라”로 끊임없이 흔들리면서도 고유 역사를 쌓아 온 독특한 민족성도 눈길을 끈다. 서유럽과 러시아, 아시아를 잇는 통로가 되는 지정학적 요건 때문에 대북방전쟁, 나폴레옹전쟁, 크림전쟁, 1·2차 세계대전까지 주요 세계사의 변곡점이 된 전장이 되기도 했지만 저자는 “결국 우크라이나의 향방에 따라 동서 힘의 균형이 달라졌다”고 거듭 강조한다.
  • [박상현의 테크/미디어/사회] 신문·라디오·TV·SNS…변하는 미디어, 변하지 않는 선동 원리

    [박상현의 테크/미디어/사회] 신문·라디오·TV·SNS…변하는 미디어, 변하지 않는 선동 원리

    1977년, 아직 대형 히트작을 낸 적 없는 젊은 감독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라는 SF영화를 들고 나왔을 때 미국 관객들은 영화 속 낯선 세계를 이해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옛날 옛적 머나먼 은하계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했지만 사실은 관객에게 익숙한 전쟁 영화, 서부영화, 그리고 사무라이 영화의 세계관이 ‘외계’라는 옷을 입고 나왔을 뿐 새로운 세계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영화 속 제국군이 입은 옷은 나치 시절 독일군 제복 디자인을 차용했고, 제국군을 이끄는 다스베이더의 헬멧 디자인은 일본 사무라이의 투구에서 가져왔다. 누가 ‘악당’인지 시각적이고 직관적으로 보여 준 것이다. 하지만 당시 관객들은 눈치 채지 못한 나치 특유의 비주얼이 있었다. 영화 마지막에 전투를 승리로 이끈 주인공들에게 훈장을 수여하는 장면에서 도열한 반란군과 단상 위에 선 공주와 영웅을 천천히 클로즈업하는 카메라워크다. 이때 사용된 구도와 카메라 이동은 나치의 선전영화를 제작한 감독 레니 리펜슈탈이 만들어 낸 대표적인 방법이다. 흥미로운 건 루카스가 이를 제국군이 아니라 그들에 맞서 싸우는 반란군, 즉 ‘우리 편’을 묘사하는 데 사용했다는 점이다. 왜 그랬을까?루카스는 이를 리펜슈탈에 대한 오마주로 사용한 게 아니다. 아군과 적군, 선악을 떠나서 위대한 순간, 감격에 찬 장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난 방법이었기 때문에 차용했을 뿐이다. 그의 의도는 적중했고, 존 윌리엄스의 음악과 어우러진 그 장면은 ‘스타워즈’의 대표적인 명장면으로 남았다. 히틀러 치하의 독일은 세계 최초의 고속도로를 건설했고, 공업의 표준화를 이끌어냈다. 인간을 달로 보낸 로켓 기술도 결국 당시 독일의 V2 로켓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럼 독일이 만들어 낸 영상기법을 사용하면 안 된다는 법이 있나? 모르긴 몰라도 루카스는 그렇게 생각했을 거다. 인류사회는 지난 몇 세기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고, 진보라고 할 만한 업적도 이뤄 냈지만 인간의 근본적인 작동 방식은 변하지 않았다. 이런 변화는 생물학적 진화의 영역이고, 진화는 사회변화보다 훨씬 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과정이다. 리펜슈탈이 1930년대에 독일인을 흥분시킨 카메라워크가 40년 후에도 전혀 문제없이 전 세계 관객을 매료시킬 수 있었던 이유다. ●갑부의 소셜미디어 사용 지난 2021년은 ‘밈(meme) 주식’의 해였다. 소셜미디어를 통해 뭉친 개미투자자들이 재무건전성과 향후 수익전망이 나쁜 기업의 주식을 사들이면서 소위 ‘기업의 펀더멘털’과 무관하게 주가가 치솟는 기업들이 나왔다. 그런데 그들의 뒤에는 세계 최고의 갑부라고 하는 테슬라의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인 일론 머스크가 있었다. 그의 팬들은 머스크가 하루에도 몇 번씩 날리는 트윗에 열광했고, 단결해서 기관투자가들과 힘겨루기를 했다. 머스크가 밈 주식 현상을 지지하는 이유는 자신의 사업이 위기를 맞을 때마다 월스트리트 전문가들의 부정적인 판단을 무시하고 자신을 믿고 따라 준 개미 투자자들의 덕을 톡톡히 봤기 때문이다. 머스크는 미국에서 2030 남성들이 주를 이루는 자신의 충성스런 팔로어들과 완벽에 가깝게 동기화(sync)돼 있다. 그들이 관심 갖는 이슈는 머스크의 트윗을 통해 확산되고, 머스크의 주장은 그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아 여론의 모습을 띤다. 그리고 머스크는 이렇게 이룩한 ‘소셜 자산’을 자신의 어젠다에 십분 활용한다. 그는 지난달 갑부들에게 중산층보다 낮은 소득세율이 적용되는 상황을 고치자는 엘리자베스 워런 민주당 상원의원의 트윗을 두고 “담당자 부르지 마세요, 캐런 상원의원님”이라는 트윗을 했다. ‘캐런’은 아무데서나 자신의 특권을 내세우며 “담당자 나오라고 해!”라고 목소리를 높이는 백인 중년 여성을 조롱하는 표현으로, 워런 상원의원의 주장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머스크는 워렌이 백인 중년 여성이라는 이유로 그렇게 불렀고, 그의 팔로어와 공화당 지지자들의 환호를 받았다. 법을 만드는 국회의원으로서 당연히 할 수 있는 발언을 트윗 하나로 ‘자기 분수를 모르는 김여사’로 만든 거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머스크가 도널드 트럼프 못지않게 소셜미디어의 문법을 잘 이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 이 사람들은 이걸 어디에서 배웠을까? 사용법을 가르쳐 주는 교과서라도 있는 걸까? 물론 그런 교과서는 없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한 것처럼 인간의 작동 방식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과거에 쓰던 방식은 여전히 유용하다. 리펜슈탈과 함께 히틀러의 어젠다를 대중적으로 확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담당한 나치의 선전장관 요제프 괴벨스는 이를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가 쓴 프로파간다(선전)를 사용하는 19개의 원칙을 하나하나 읽어 보면 시대의 차이를 거의 느끼지 못할 만큼 지금도 사용 가능하고 실제로 소셜미디어에서 사용되는 원칙들임을 알 수 있다. ●괴벨스는 천재? 그런데 괴벨스의 원칙 중 첫 번째는 “선동가는 (현재 사회에서) 일어나는 일과 대중의 의견을 잘 알고 있어야 한다”이다. 근대 이전의 왕도 다르지 않았지만 근대 이후의 독재자도 자신의 권력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대중의 생각을 파악하고 그걸 자신에게 유리하게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트럼프가 쏟아낸 말은 궁극적으로 그가 소셜미디어에서 읽고 폭스뉴스에서 들은 극우주의자들의 말이었다는 분석도 이를 보여 준다. 지난주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이 인스타그램에서 했던 ‘멸공’ 발언이 롤러코스터처럼 진행되는 대선 정국을 또 한 번 흔들고 있다. 유력 대선후보들보다 두 배 이상 많은 팔로어를 거느리고 올리는 포스트마다 몇만 개의 ‘좋아요’를 받는 정 부회장의 멸공 발언은, 곧바로 보수당 후보가 받으면서 한국 사회를 1970년대로 돌려놓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한국의 2030세대 남성들이 모인 온라인 커뮤니티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그들의 ‘혐북’(북한 혐오)에 익숙하다. 정 부회장의 발언 이후에도 이들 커뮤니티에는 ‘이 모든 소동의 원인은 결국 김씨 일가’라는 옹호 발언이 쏟아졌다. 결국 정 부회장의 발언이 보여 주는 건 그의 투철한 반공정신이라기보다는 그가 평소 온라인 남초 사이트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50대 경영인이 그렇게 할 일이 없냐고 비난할 수도 있겠지만, 한국의 다른 50대 남성 경영인 중에 소셜미디어에서 정 부회장만 한 영향력을 가진 사람이 없는 걸 보면 그런 대중에 대한 이해가 그를 그렇게 영향력 있는 인물로 만들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얻은 영향력을 머스크처럼 자신의 사업에 이득이 되는 쪽으로 사용할 수 있느냐는 물론 다른 문제지만 말이다. 괴벨스는 또한 “대중의 관심을 사로잡는 매체를 사용해야” 하고, “공격 대상을 분명한 증오의 대상으로 바꿔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쉽게 식별할 수 있는 어구나 슬로건”을 사용하라고 충고했다. ‘#멸공’ 같은 해시태그가 인스타그램과 트위터에서 퍼져나가는 모습을 연상시키는 이런 충고들은 괴벨스가 천재라서 지금도 유효한 게 아니라, 인류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효한 거다. 1930년대의 방법론과 2022년의 방법론이 다르지 않은 건 인간의 작동 방식이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중, 소셜미디어에 ‘똑같은 실수’ 정용진의 할아버지 이병철이 ‘삼성상회’를 설립한 1938년, 괴벨스는 ‘세계 제8대 강국, 라디오’라는 흥미로운 제목의 글을 발표했다. 괴벨스는 현대 세계에서 권력은 라디오에서 나온다면서, 19세기에 나폴레옹은 “인쇄물은 세계 7대 강국”(press as the seventh great power)이라고 말했지만, 20세기에는 그게 바로 라디오라고 주장했다. 그는 “라디오와 비행기가 없었으면 우리(나치)가 권력을 얻거나 사용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했을 만큼 라디오라는 신기술을 철저하게 활용했다. 여기에서 키워드는 ‘신기술’이다. 대중은 새로운 기술을 사용한 미디어에 항상 취약한 모습을 보였다. 20세기에 이르면 대중은 이미 신문, 책 등의 출판물을 통한 선전선동을 의심하기 시작했지만, 생생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라디오가 나오자 거기에서 들은 것은 사실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이 라디오에 속지 않게 될 즈음 TV가 등장했고, 이번에는 광고 상업주의가 잘 속는 대중 덕에 이득을 누렸다. 그리고 사람들이 TV에서 보고 듣는 것을 무조건 믿지 않을 만큼 영리해진 21세기가 되자 소셜미디어가 나온 것이다. 우리는 그동안 학습했던 것을 모두 잊고 똑같은 실수를 고스란히 반복하고 있다. 오터레터 발행인
  • [책꽂이]

    [책꽂이]

    나폴레옹 세계사(알렉산더 미카베리즈 지음, 최파일 옮김, 책과함께 펴냄) 나폴레옹 개인이나 나폴레옹전쟁 자체를 다루는 데 그치지 않고, 나폴레옹 전쟁을 세계사적 맥락으로 바라본 책이다. 프랑스혁명부터 나폴레옹 제국의 몰락, 그 이후까지의 시간을 훑고 전 세계에 나폴레옹전쟁이 영향을 미친 과정을 치밀하게 서술했다. 1440쪽. 5만 8000원.새들의 방식(제니퍼 애커먼 지음, 조은영 옮김, 까치 펴냄) 말하기, 일하기, 놀기, 짝짓기, 양육하기 다섯 가지 영역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다양한 새들을 소개한다. 특히 북반구 일부 지역의 새들을 대상으로 집중됐던 기존 연구에서 벗어나 오스트레일리아 대륙과 남아메리카 대륙에 서식하는 새들의 흥미롭고 극단적인 행동을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448쪽. 2만원.스필버그의 말(스티븐 스필버그·브렌트 낫봄·레스터 D 프리드먼 지음, 이수원 옮김, 마음산책 펴냄) 영화적 상상력에 휴머니즘을 녹여 낸 거장의 스물한 편 인터뷰가 담겼다. 감독으로서의 면모뿐 아니라 그동안 소개된 적 없던 개인적 삶까지 조명한다. ‘슈가랜드 특급’ 같은 초기 영화뿐 아니라 ‘죠스’ 등의 제작기도 수록됐다. 500쪽. 2만 5000원.지식의 헌법(조너선 라우시 지음, 조미현 옮김, 에코리브르 펴냄) 인류는 수많은 희생 끝에 견해차를 지식으로 변환하는 사회 체제, ‘지식의 헌법’을 완성했다. 하지만 21세기 들어 디지털 미디어를 통해 가짜뉴스, 음모론 등이 빠르게 퍼지면서 일상이 흔들린다. 저자는 이를 인식론적 위기로 진단하고 그 원인을 파헤친다. 432쪽. 2만 1000원.한국의 여성 기자 100년(정진석 지음, 나남 펴냄) 100여년에 이르는 한국 여성 기자의 역사를 정리한 최초의 통사다. 1920년 ‘부인기자’의 출현부터 현재까지 여성 기자 관련 사료를 집대성했다. 이 책을 기획한 한국여성기자협회는 31명의 여성 기자 에세이집인 ‘유리는 깨질 때 더 빛난다’도 펴냈다. 256쪽. 1만 8000원.마지막 항해(황인규 지음, 인디페이퍼 펴냄)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북동항로의 탐험가이자 허드슨강과 허드슨만의 발견자 헨리 허드슨의 탐험 기록이 소설로 되살아났다. 항해의 이면에 숨겨진 좌절과 실패, 불굴의 의지가 처절하게 아름다운 서사 속에 담겼다. 그의 위대한 도전을 인류 전체의 이야기로 남기기 위해 작가는 펜을 들었다. 288쪽. 1만 3000원.
  • 나폴레옹도 중앙은행 압박… 대선 앞 한은 ‘신의 한 수’ 내놓을까

    나폴레옹도 중앙은행 압박… 대선 앞 한은 ‘신의 한 수’ 내놓을까

    지금 터키가 점입가경이다.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대통령이 2020년 말 자신이 임명했던 중앙은행 총재를 넉 달 만에 경질하고 후임자에게 끊임없이 금리 인하를 압박했다. 그 바람에 전임 총재가 경질되기 전날 19.0%였던 정책금리가 네 차례의 인하를 거쳐 현재는 14.0%로 낮아졌다.터키에서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30년 전에도 똑같은 일이 있었다. 1980년 좌파 정부 시절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한 케난 에브렌 참모총장이 주인공이다. 7년 단임제 개헌을 단행하고 1982년 대통령으로 취임한 직후 한국을 방문했다. 당시 전두환 대통령으로부터 물가안정을 앞세운 우파적 경제정책들을 배워 갔다. 이 군사정부는 1989년 막을 내렸다. 이어 새로 출범한 문민정부는 기존의 경제정책을 거의 그대로 고수했다. 신임 대통령 투르구트 외잘은 군사정부에서 총리를 지낸 인물이기 때문이다. 10여년간 보수적 경제정책에 신물이 난 터키 국민들은 1993년 대통령 선거에서 마침내 좌파 정부를 소환했다. 쿠데타 전에 총리만 다섯 번을 역임했던, ‘서민들의 대변인’으로 알려진 쉴레이만 데미렐을 대통령으로 뽑았다.●좌파도 우파도 중앙은행 압박 데미렐은 취임 직후 경제정책들을 급격히 좌경화했다. 그때 중앙은행 총재가 포퓰리즘적 정책에 이의를 제기하자 곧바로 그를 경질했다. 임명한 지 넉 달 만이었다.(그때 경질된 불런트 굴테킨 총재는 터키를 떠나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교수가 됐다. 필자의 은사다.) 후임 총재는 대통령의 요구에 군말 없이 따랐다. 지금의 에르도안 대통령은 우파에 속하지만, 하고 있는 일은 27년 전 좌파정부와 똑같다. 좌파건 우파건 의욕이 강한 통치자는 이견을 용납하지 않는다. 자기 말을 듣지 않는 사람이나 조직을 적으로 간주한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은 “중국보다 더 큰 적은 연준”이라는 비난과 함께 자신이 임명한 제롬 파월 연방준비제도이사회 의장에게 “바보”라며 모욕을 주기도 했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단행한 금리 인하의 폭이 크지 않다는 불만이었다. 중앙은행의 자율성 면에서 미국이 가장 앞선다고 알려져 있지만, 1960년대만 해도 그렇지 않았다. 린든 B 존슨 전 대통령은 1965년 12월 연준이 자기 뜻을 거스르고 금리를 인상하자 당시 윌리엄 맥체스니 마틴 연준 의장을 자신이 휴가를 보내고 있던 텍사스의 개인목장으로 불렀다. 트럼프 전 대통령 이상으로 ‘마초’라고 알려진 존슨 전 대통령은 목장 입구에서 마틴을 차에 태운 뒤 직접 트럭을 몰았다. 울퉁불퉁한 목장 길을 얼마나 험하게 운전했는지 손님으로 초대된 마틴 의장은 거의 구토할 지경이었다. 현관에서 대기하던 기자들은 얼굴이 하얗게 질린 마틴의 망가진 모습을 카메라에 담으면서 ‘대통령의 보복’이라고 보도했다. 후임 대통령 닉슨 역시 연준을 좋아하지 않았다. 물가를 걱정하며 금리 인상을 거듭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자들에게 공공연히 “마틴 의장은 1970년 중간선거에서 우리 공화당의 상원의석 15개쯤을 쉽게 날려 버릴, 위험한 인물”이라고 비난했다. 후임 의장을 임명할 때는 “1961년 대선에서 내가 케네디한테 진 이유가 연준의 금리 인상 때문이었음을 기억하라”며 저금리 정책을 노골적으로 압박했다. 그보다 더한 경우도 있다. 나폴레옹은 1799년 11월 이집트 원정에서 돌아와 쿠데타를 하자마자 프랑스은행(중앙은행)부터 세웠다. 그런데 그 은행이 하는 일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1806년 독일 예나평원에서 벌어진 전투는 영국·프로이센 동맹을 와해시키는, 절체절명의 싸움이었다. 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고 돌아오는 길에 나폴레옹은 프랑스은행 총재에게 “6% 금리가 부끄럽지도 않나?”라는 한 줄짜리 편지를 보냈다. 그 편지를 받은 총재는 당장 대출금리를 5%로 낮췄다. 나폴레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듬해 러시아군까지 격파한 뒤 프랑스은행 총재에게 다시 메모를 보냈다. “프랑스은행의 설립 목적이 무엇이라 생각하오? 나는 저금리 대출로 경제를 살리는 것이라고 믿소만.” 그 메모를 받은 총재는 황급하게 금리를 다시 4%로 낮췄다. 영국과 같은 수준이었다. 이후 프랑스은행은 금리 조절을 유난히 두려워했다. 정부가 중앙은행을 압박하는 면에서는 과거 우리나라도 만만치 않았다. 1992년 12월 대통령 선거 직후부터 김영삼(YS) 당선인은 한국은행에게 무언의 요구를 했다. 한국은행은 대통령 취임식 바로 다음날 상업어음 재할인 금리를 연 7%에서 연 5%로 낮췄다. 하지만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새 정부는 ‘신경제 100일 계획’을 내세우며 추가적인 대책을 압박했다. 두 달 뒤 한은은 무역어음과 중소기업대출 등 여타 여신금리도 2% 포인트씩 내렸다. 그런데 얼마 뒤 중국이 위안화를 33%나 대폭 평가 절하했다. 국내 수출업체들의 타격이 커서 한은은 김영삼 정부 내내 금리 인상을 시도할 수 없었다. 그것은 국제수지 적자로 이어졌고, 그 끝에 닥친 것이 외환위기다. ●대통령 눈치 살피는 중앙은행 중앙은행의 자율성은 경제정책 운용에서 매우 중요한 덕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앙은행은 대통령의 눈치를 살피지 않을 수 없다. 미 연준의 자율성을 현재 수준으로 올려놓은 마틴 의장도 1961년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이 취임하자 새 정부를 상당히 의식했다. 금리 인하를 대신해서 정부를 만족시킬 만한 선물을 찾느라고 고민을 거듭했다. 아니나 다를까. 케네디 전 대통령은 취임 열흘 째 되던 날 마틴을 호출했다. 그 순간에 대비해 마틴이 준비한 것은 오퍼레이션 트위스트(operation twist)였다. 단기 국채를 매각하고, 장기 국채를 매입함으로써 장단기 금리 차를 낮추려는 시도다. 인플레이션 압력 때문에 당장 금리는 낮추지 못하지만, 정부의 국채 발행 확대 계획에 맞춰 장기 금리는 낮춰 보겠다는, 일종의 성의 표시였다. 첫 만남에서 그 계획을 들은 케네디는 아주 흡족했다. 마틴의 어깨를 툭 치면서 “잘해 보자”며 씩 웃었다. 얼마 뒤 기자들 앞에서 엠앤드엠스(M&M’s) 초콜릿을 가리키면서 “나는 경제전문가가 아니지만 마틴(Martin) 의장이 돈(money)을 잘 다루는 것쯤은 안다. 그 엠앤드엠 조합은 이 초콜릿처럼 달콤하잖아?”라면서 마틴을 한껏 띄워 줬다.하지만 오퍼레이션 트위스트의 이론적 근거는 없다. 중앙은행이 금리 수준과 장단기 금리 차를 동시에 조절할 수 있다고 믿는 경제학자는 없다.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는 미 연준이 가만히 있기가 뭐해서 찾아낸, 고육지책에 불과하다. 하지만 40여년 뒤 글로벌 금융위기 때 벤 버냉키 의장이 그 오퍼레이션 트위스트를 부활시켰다. 지난해 조 바이든 대통령의 취임 직후 파월 연준 의장도 같은 카드를 만지작거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것이 미 연준이 살아가는 법이다. 겉보기와는 다르다. ●YS 때 한은 유난히 어려운 일 겪어 정부를 의식해야 하는 것은 한은도 마찬가지다. 올해 5월 새 정부가 출범하는데, 한은이 아무 준비도 하지 않을 수는 없다. 금리 인하는 어려우므로 오퍼레이션 트위스트가 됐건, 여신 확대가 됐건 남들이 생각지 못한 ‘신의 한 수’를 준비하고 있어야 한다. 무작정 손을 놓고 있다가는 김영삼 정부 때처럼 시달리게 된다. 5년 내내 직원들 임금인상쯤은 포기해야 할지도 모른다. 김영삼 정부 출범 당시 한은을 이끌던 사람은 조순 총재다. 경제학계의 태두인 총재가 “지금은 금리를 낮출 때가 아니다”라는 원론적 말을 던지자 한은 직원들은 그 말만 믿고 아무 준비도 하지 않았다. 말단 직원이었던 필자가 보기에도 무사태평이었다. 그래서 김영삼 정부 때 한은은 유난히 어려운 일들을 자주 겪었다. 한국은행자문역
  • 한국계 입양아 펠르랭 전 장관, 佛 최고훈장 영예

    한국계 입양아 펠르랭 전 장관, 佛 최고훈장 영예

    한국계 입양아 출신의 플뢰르 펠르랭(사진·49) 전 프랑스 문화부 장관이 프랑스 최고 훈장을 받았다. 프랑스 정부는 펠르랭 전 장관 등 547명에게 레지옹 도뇌르를 수여했다고 현지 언론들이 지난 1일(현지시간) 전했다. 펠르랭 전 장관은 프랑수와 올랑드 전 대통령 시절인 2012년 중소기업 및 디지털경제 담당장관으로 입각한 후 2014년부터 2016년까지 문화부 장관을 지냈다. 레지옹 도뇌르 훈장은 1802년 나폴레옹 1세가 제정한 프랑스 최고 훈장이다.
  • 佛개선문 EU 깃발 이틀 만에 사라져… 보수 “애국적 승리”

    佛개선문 EU 깃발 이틀 만에 사라져… 보수 “애국적 승리”

    프랑스 정부가 2022년 상반기 유럽연합(EU) 의장국을 맡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파리 개선문에 내걸었던 EU 깃발을 이틀 만에 철거했다. 보수 정치인들은 이를 두고 “애국적 승리”라고 주장했다. 2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새해 전날 개선문에는 프랑스 국기를 대신해 대형 EU 깃발이 내걸렸다. EU를 상징하는 파란색 조명까지 개선문을 감쌌다. 군인들이 영면해 있는 앵발리드, 위인들이 잠든 팡테옹, 노트르담대성당, 루브르박물관 등도 모두 파란색 조명으로 뒤덮였다. 에펠탑 중간에는 EU를 상징하는 금색별 12개가 빛났다. 오는 4월 프랑스 대선을 두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경쟁하고 있는 우파 경쟁자들은 개선문의 EU 깃발이 참전용사에 대한 모욕이라며 깃발 철거를 요구했다. 극우정당인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표는 트위터에 “개선문에 EU 깃발이 걸린 것에 분노한다. 이 도발은 프랑스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면서 삼색기 게양을 요구했다. 공화당(LR) 대선 후보인 발레리 페크레스 일드프랑스 주지사도 전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우리는 프랑스를 위해 피를 흘린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며 EU 깃발 옆에 삼색기를 나란히 걸어야 한다고 마크롱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개선문은 프랑스군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건립된 기념물로, 1차 세계대전 때는 전사한 무명용사의 시신이 개선문 아래에 매장되기도 했다. 전날까지 온종일 걸려 있던 EU 기는 2일 돌연 모습을 감췄다. 엘리제궁 관계자는 파란색 조명과 달리 EU 깃발은 12월 31일과 1월 1일 이틀 동안만 게양할 예정이었다고 AFP에 전했다.
  • 개선문 EU 깃발 이틀 만에 내리자… 극우 정치인 “애국적 승리”

    개선문 EU 깃발 이틀 만에 내리자… 극우 정치인 “애국적 승리”

    프랑스가 2022년 상반기 유럽연합(EU) 의장국을 맡게 된 것을 축하하는 의미로 파리 개선문에 걸렸던 EU 깃발이 이틀 만에 철거됐다. 보수 정치인들은 이를 두고 “애국적 승리”라고 주장했다. 2일(현지시간) AFP통신에 따르면 새해 전날 개선문에는 프랑스 국기를 대신해 대형 EU 깃발이 내걸렸고 파란색 조명이 개선문을 전체를 감쌌다. 군인들이 영면해 있는 앵발리드, 위인들이 잠든 팡테옹, 몽마르트르 언덕 위 사크레쾨르 성당,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 박물관 등도 모두 파란색 조명으로 뒤덮였다. 에펠탑 중간에는 EU를 상징하는 금색별 12개가 빛났다. 그러나 오는 4월 프랑스 대선을 두고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과 경쟁하고 있는 우파 경쟁자들은 개선문의 EU 깃발이 참전용사에 대한 모욕이라며 깃발 철거를 요구했다.극우정당인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대표는 트위터에 “개선문에 EU 깃발이 걸린 것에 분노한다. 이 도발은 프랑스를 위해 싸운 사람들을 불쾌하게 한다”면서 삼색기 게양을 요구했다. 이 트윗은 1만개 이상의 ‘좋아요’를 얻었다. 공화당(LR) 대선 후보인 발레리 페크레스 일드프랑스 주지사도 전날 트위터에 올린 글에서 “우리는 프랑스를 위해 피를 흘린 모든 참전용사들에게 빚을 지고 있다”며 EU 깃발 옆에 삼색기를 나란히 걸어야 한다고 마크롱 대통령에게 촉구했다. 클레망 본 외교부 유럽담당 국무장관은 “우파가 극우파의 무익한 논쟁을 필사적으로 뒤쫓고 있다”고 비판했다. 개선문은 프랑스군의 승리와 영광을 기념하기 위해 나폴레옹 1세의 명령으로 건립된 기념물로, 1차 세계대전 때는 전사한 무명용사의 시신이 개선문 아래에 매장되기도 했다.보수 정치인들의 반발을 불러온 개선문 EU 깃발은 전날까지 온종일 걸려 있었지만 2일 모습을 감췄다. 이와 관련 엘리제궁(대통령궁) 관계자는 파란색 조명과 달리 EU 깃발은 12월 31일과 1월 1일 이틀 동안만 게양할 예정이었다고 AFP에 전했다. 하지만 이에 대해 르펜 대표는 트위터에 “2022년 새벽에 아름다운 애국적인 승리”라면서 “마크롱 대통령의 퇴진을 위한, 프랑스를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의 대규모 참여에 감사한다”고 적었다. 프랑스는 오는 6월 30일까지 EU 의장국을 맡는 것을 기념해 파리 시내의 주요 명소를 일주일간 파란색 조명으로 비출 예정이다.
  • ‘佛 트럼프’ 제무르 대선 출마 “개혁할 때 아닌 나라 구할 때”

    ‘佛 트럼프’ 제무르 대선 출마 “개혁할 때 아닌 나라 구할 때”

    ‘프랑스판 트럼프(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로 불리는 텔레비전 토크쇼 진행자 겸 평론가 에리크 제무르(63)가 내년 프랑스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했다. 30일(현지시간) 제무르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린 동영상에서 “진짜 프랑스가 없어지고 있다”며 “지금은 프랑스를 개혁할 때가 아니라 프랑스를 구할 때”라며 출마 결심 이유를 밝혔다. 영상에서 제무르는 1940년 6월 샤를 드골 장군이 프랑스 국민에게 나치에 맞서 레지스탕스 참여를 독려했던 것처럼 서재 책상에 앉아 구식 마이크를 통해 연설문을 읽었다. 영상에는 또 작곡가 베토벤의 음악과 함께 폭동 장면, 히잡을 쓴 여성, 지하철에 탄 흑인, 베르사유 궁전, 잔다르크와 나폴레옹 영화 장면 등이 등장하는데 이는 이민자 등에 대한 혐오 표현과 프랑스의 과거 영광을 되찾겠다는 국수주의로 보인다는 분석이다. 제무르는 증오 발언으로 두 차례 벌금형을 선고받은 바 있으며, 지난해 9월 미성년 난민을 가리켜 “도둑들, 살인자들, 강간범들”이라며 증오 발언을 해 추가로 재판에 넘겨진 상태다. 이 같은 망언과 기행 탓에 극우 성향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으며 ‘프랑스판 트럼프’로 불린다. 다만 지지율은 신통치 않다. 한때 다른 극우 진영 후보인 마린 르펜 국민연합 대표보다 높은 지지율을 보여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의 대항마로 언급됐지만 최근 지지율은 대선 출마 선언 전인 지난주보다 3~4% 포인트 하락한 13% 수준으로 르펜(19~20%)보다 낮다. 대선에 출마하려면 선출직 공무원 500명 이상으로부터 지지 서명을 받아야 하는데 이 또한 쉽지 않을 것이라고 가디언은 전했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같은 그림, 다른 해석/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같은 그림, 다른 해석/미술평론가

    한 남자가 관객을 등지고 바위 위에 서 있다. 짙은 녹색 코트에 가느다란 지팡이를 짚은 남자는 적갈색 머리칼을 휘날리며 발아래 펼쳐진 안개를 바라본다. 우뚝 솟은 산과 남자가 서 있는 절벽 사이에는 안개를 뚫고 날카로운 바위들이 솟아 있다. 그 너머로 완만한 경사의 땅과 희미한 산들이 이어지다 종국에는 안개 속으로 사라져 구름 낀 하늘과 분간할 수 없게 된다. 프리드리히는 작센과 보헤미아 지방의 산악 지대를 다니며 스케치를 하고, 작업실에서 이 그림을 그렸다. 즉 이 장소는 독일 동부의 분위기를 풍기지만 어디라고 특정하기는 곤란하다. 나폴레옹의 침략은 스페인에서는 고야의 사실주의를 낳았고, 독일에서는 프리드리히로 대표되는 낭만주의를 낳았다. 독일 낭만주의는 휴식과 안정감을 주는, 영국식의 ‘그림 같은’ 자연을 거부하고 거칠고 웅대한 자연을 회화의 중심으로 만들었다. 한 방랑자가 세상을 헤매다 절벽 끝에 도달해 안개 낀 산과 평원을 바라다보는 이 그림은 낭만주의의 영원한 표상이 됐다. 얼굴을 볼 수 없는 방랑자는 관객에게 초인적 존재로 다가온다. 프리드리히는 풍경화에 잘 사용하지 않는 세로로 긴 캔버스의 중심에 우뚝 선 남자를 배치해 그의 존재감을 강화했다. 우리는 남자의 시선이 향한 쪽을 바라보며 그의 마음속을 채우고 있을 숭고한 감정을 짐작할 뿐이다. 의미가 명확한 사실주의와 달리 낭만주의는 여러 해석이 가능하다. 혹자는 붉은 머리 방랑자가 프리드리히 자신이라고 생각했다. 혹자는 그에게서 나폴레옹 침략에 저항하는 독일 정신을 발견했다. 시대는 가도 이미지는 살아남는다. 나치도 이 그림을 좋아했고, 상징주의와 초현실주의도 이 그림에서 영감을 받았다. 오늘날 이 그림은 음반이나 책 표지, 광고, 패러디물 등 어디에나 나타난다. 현대 비평가들은 낭만주의의 숭고함에서 성차별적인 미학을 발견했다. 미묘하고 부드러운 정경은 여성적이고, 거칠고 음울한 정경, 방랑, 고독, 침묵, 무한함 같은 요소는 남성적이라는 이분법이 깨지기 시작한 것이다. 이미지는 끊임없이 새롭게 해석되면서 생명을 이어 간다.
  • [글로벌 In&Out] 제정러시아계 폴란드 귀족 얀콥스키 일가와 한반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제정러시아계 폴란드 귀족 얀콥스키 일가와 한반도/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19세기 초 유럽을 뒤흔든 나폴레옹 전쟁의 결과 러시아가 폴란드를 점령했다. 1863년 1월, 폴란드 독립운동가들은 무장봉기를 일으켰으며 당시 농과대학에 다니던 미하일 얀콥스키를 비롯한 수만명의 폴란드 청년들이 여기에 참여했다. 하지만 이 봉기는 진압당했고 미하일은 체포됐다. 귀족이었던 그는 사형을 면했지만 귀족 지위를 박탈당해 시베리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1864년쯤 시베리아 도착 후 광부가 된 그는 1874년 블라디보스토크 동남쪽에 있는 아스콜드섬 금광의 관리자가 됐다. 당시 연해주에는 러시아인 말고도 한인들도 많았다. 이들은 홍호자(紅?子)라는 중국인 비적으로부터 약탈을 당하고 있었다. 미하일은 총을 들고 홍호자들과 싸웠다. 사격술이 뛰어난 미하일은 한인들의 존경을 받으며 ‘네눈이’라는 별명으로 북한 지역까지 이름을 떨쳤다. 1879년 그는 귀족으로서 명예회복됐으나 연해주를 떠나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 서남쪽에 있는 시데미 반도에서 농장을 설립해 한인 노동자를 많이 고용했다. 1912년 미하일은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미하일의 사업은 1879년에 태어난 둘째 아들인 유리가 계승했으나 1차 세계대전과 혁명이 일어났다. 혁명 직후 러시아 내전이 벌어졌다. 귀족이고 부르주아지였던 얀콥스키 가문은 노농정권과 싸웠던 백군의 편을 들어 반혁명 세력을 적극 지원했다. 1922년 적군의 승리가 시간문제가 되자 얀콥스키가는 망명하기로 한다. 하지만 유럽이나 만주를 망명지로 택한 많은 백색파와 달리 그들은 한반도로 떠난다. 1922년 10월, 한반도에 도착한 얀콥스키가는 러시아에서 가져온 재산을 다 팔고 미하일에게서 물려받은 뛰어난 사격술을 살려 사냥꾼으로 생계를 꾸려 나갔다. 1920년대 공업화가 한반도와 만주의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었다. 살 곳을 잃어가고 있던 호랑이들이 북한과 만주의 산에서 내려와 민가의 가축이나 사람들을 죽이는 사건이 발생했다. 유리는 사냥으로 돈을 많이 벌어 청진 근처의 땅을 사서 집을 지었으며 한국인들과 함께 호랑이, 사슴, 멧돼지 사냥도 하고 작은 농장도 운영했다. 유리에게는 발레리라는 아들이 있었다. 열한 살 때 러시아를 떠난 발레리는 북한에서 자랐다. 그는 평양의 전문학교에 다녔으며 함경도 사투리를 잘 구사했다고 한다. 발레리도 아버지처럼 사냥꾼의 길을 걷게 됐다. 1940년 어느 날 사냥허가서를 받으러 경찰서에 갔을 때 경찰관이 김일성이라는 ‘호랑이’를 잡아 달라고 의뢰한 적도 있다고 한다. 하지만 23년간 이어진 얀콥스키가의 한반도 생활은 해방과 함께 끝났다. 1945년 8월, 소련이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만주와 북한 주둔 일본군에 대해 공격을 개시했다. 이 소식을 들은 얀콥스키가는 다시 망명하지 않고 소련군을 지원하기로 했다. 발레리는 북한에 진주한 소련 제25군 참모부를 방문해 동생들과 함께 소련군에 입대했다. 해방 후 그들은 평양과 청진에서 소련군 통역으로 근무했다. 그러나 일제 패망 후 소련이 얀콥스키 일가의 배경, 북한에서의 활동을 조사한 결과 일제 통치기관인 우체국 근무, 라디오 도청 등 그들이 했던 새로운 사실들이 밝혀졌다. 소련군 정치경찰은 ‘국제 부르주아지에 대한 지원’으로 간주해 발레리와 그의 동생, 아버지를 체포해 유죄를 선고한 뒤 1947년 시베리아의 강제수용소로 호송했다. 발레리는 1952년 풀려난 뒤 산림보호원으로 일했으며 1960년대부터 자신에 관한 이야기를 신문, 라디오 등을 통해 소개했다. 2010년 사망한 그는 실화집과 회고록 등 총 15권 이상의 책을 남겼다. 그 저서는 지금도 근대 북한의 자연과 사회 연구에서 중요한 자료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반도와 얽힌 한 러시아 가문의 역정이 흥미롭다.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역사적 격변기의 예술/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역사적 격변기의 예술/미술평론가

    프록코트를 입은 한 남자가 책상에 엎드려 자고 있다. 올빼미들은 눈을 굴리며 잠자는 남자를 바라보고, 박쥐 떼는 위협적으로 날아오른다. 오른편 바닥에는 눈을 홉뜬 스라소니가 조용히 불길하게 남자를 주시한다. 양 날개를 펼친 올빼미 밑에서 고양이가 관객을 훔쳐본다. 고양이의 눈초리는 관객을 이 장면 속으로 빨려들게 만든다. 남자가 기댄 책상 측면에 ‘이성이 잠들면 괴물이 태어난다’는 문구가 뚜렷하다. 이 작품은 판화집 ‘카프리초스’에 들어 있는 80개의 이미지 가운데 43번째 이미지다. 고야는 민중들 사이에 익숙한 캐리커처 스타일을 활용해 당시 스페인에 만연한 미신, 전근대적 관습, 편견과 아집에 사로잡힌 교회, 위선적이고 어리석은 귀족 등을 신랄하게 풍자했다. 고야는 그때까지 왕실 화가로 로코코 스타일의 우아한 장식화와 초상화를 그려 왔던 터였다. 1780년대에 삼십대의 혈기 넘치는 고야는 계몽주의 사상을 접하게 됐고 프랑스 대혁명을 목격하면서 이전의 귀족적 취향의 작품과는 분위기와 내용이 딴판인 ‘카프리초스’를 제작했다. 판화를 매체로 사용한 것은 많은 사람에게 전달하려는 의도가 들어 있다. 하지만 종교재판소가 이런 그림들이 퍼지는 걸 놔둘 리 없었다. 고야는 이틀 만에 판화집 판매를 접어야 했다. 그는 1803년 팔고 남은 ‘카프리초스’ 사본과 판화 원본을 왕에게 바쳐 표면적으로는 무릎을 꿇은 듯했다. 하지만 그의 사회의식은 살아 남아 전쟁의 참화를 다룬 후기 작품으로 이어졌다. 고야는 역사적 격변기에 살았다. 프랑스 대혁명은 유럽의 진보적인 지식인들에게 자유와 평등에 대한 희망을 불어넣었으나 나폴레옹은 침략자가 돼 유럽을 휩쓸었다. 계몽주의의 이성을 믿고 혁명을 지지했던 스페인 지식인들은 나폴레옹 군대가 자기 나라를 짓밟고 왕을 쫓아내는 것을 보며 굴욕감과 좌절을 맛보았다. 왕정에 반대하던 스페인 민중은 외세에 짓밟히는 왕실을 지키기 위해 총칼 앞에 몸을 던졌다. 하지만 나폴레옹이 권좌에서 물러난 후 되돌아온 왕은 전제정치를 강화하는 것으로 백성에게 보답했다. 누가 같은 편이고 누가 적인가?
  • [정승민의 막론하고] 대선판 누가 기선을 잡을까/북유튜버

    [정승민의 막론하고] 대선판 누가 기선을 잡을까/북유튜버

    제20대 대통령 선거 대진표가 나왔다. 대선 때마다 ‘사상 초유’, ‘유례없는’과 같은 수식어가 붙지만 이번은 한층 더하다. 유력한 여야 후보 모두가 수사를 받고 있거나 수사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다. 낙선자는 감옥에 갈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까지 나돈다. 흑색선전이나 가짜뉴스가 기승을 부리는 최악의 네거티브 선거가 될 것이라는 전망도 지배적이다. 대선 후보와 그 가족의 문제점이 극명히 부각될수록 후보를 뒷받침하는 대선 캠프의 역할이 중차대하다. 선거대책위원회의 인적 구성이야말로 가장 강렬한 대국민 메시지이기 때문이다. 집권하면 어떤 나라를 만들어 가겠다는 철학과 구상은 선거 조직에 참여한 면면을 통해 구체화될 수밖에 없다. 먼저 확정된 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가 꾸린 선대위를 보자. 경쟁자의 사람들을 끌어안은 용광로 조직이라지만 애초부터 한솥밥을 먹어 온 당내 인사 일색이다. 국민의힘은 기존 캠프를 확대 유지하자는 입장과 전면 재구성하자는 의견이 맞서 있다. 윤석열 후보가 당 중심의 선거운동 방침을 밝혔으니 민주당과 비슷한 형태로 꾸려질 것 같다. 솔직히 대선은 거대한 비즈니스다. 5년간 3000조원을 넘나드는 예산을 잘 쓰기만 하면 된다. 대통령이 나눠 줄 자리도 널려 있다. ‘파리떼’나 ‘하이에나’와 같이 떡고물을 챙기려는 권력지향적 기회주의자들이 후보 주변에 우글거리는 것도 당연하다. 그러니 1987년부터 7번의 직선을 통해 학습효과를 거둔 국민에게는 사실상 ‘섀도캐비닛’인 선대위가 하나의 판단 기준이다. 깨끗하고 실력이 검증된 새로운 얼굴들로 채워지기를 원한다. 경선 캠프가 물리적으로 확대된 정도로는 어림도 없다. 문제는 여기서다. 천신만고 끝에 경선을 통과한 후보는 어쨌든 성공을 맛봤다. 배경과 경력이 각양각색인 사람들을 한데 모아 우여곡절 끝에 호흡을 맞춰 승리를 거뒀는데 원점으로 되돌리기가 마뜩잖다. 고생한 사람들을 내친다는 가책감도 만만찮다. 지금 이대로 가도 될 것 같다는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샘솟는다. 대체로 사람은 성공한 경험을 반복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무엇이든지 되풀이해서 범주화되면 그것을 역이용하는 되치기에 당할 수 있다. 나폴레옹이 비참한 최후를 맞은 것도 결국 과거의 전법 패턴을 넘어서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첩을 거둔 명장은 웬만해선 다시 큰 전쟁에 나서지 않는다. 아무리 조심해도 예전의 승리 공식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것을 아는 까닭이다. 흥미롭게도 개인보다 조직이 승자의 저주에서 깨어나기가 더 힘들다고 한다. 조직론의 대가 사카이야 다이치에 따르면, 프로젝트를 한번 성공시킨 공신들이 주류 세력이 되면서 판단의 근거를 옛 성공 사례에 두기 때문이다. 영입된 ‘젊은 피’들도 주류에 편입하려고 그들과 코드를 맞추게 되니 더더욱 변화와 혁신이 어려워진다. 민심을 얻을 다양한 아이디어와 색다른 시각이 자기검열에 빠져 원천적으로 배제되는 것이다. 무엇보다 당선이라는 지상과제를 위해 내부 결속이 요구되고 한식구라는 소속감이 강화되면서 대선 조직은 자연스럽게 게마인샤프트(Gemeinschaft)로 바뀌게 된다. 군식구가 끼는 것을 원치 않기에 서로 덕담을 하고 상찬만 한다. 국민과 당원을 내세우면서 실상은 구성원만을 위한 이익단체로 전락하는 것이다. 그러나 담벼락에 사진을 붙이는 것은 캠프가 아니라 후보다. 대선의 성패를 책임질 사람은 언제나 후보 단 한 명뿐이다. 때문에 경선에서 거둔 성공의 추억과 과감히 결별해야 한다. 이재명, 윤석열 두 후보 모두 예선 막바지에 당심과 민심의 괴리를 빚었다. 국민여론조사나 국민선거인단 투표에서 걸맞은 신임을 얻지 못했다. 정책도 비전도 없이 관성적으로 정권을 교체하거나 재창출하려는 움직임에 국민이 노란불을 켠 것이다. 대선판의 기선은 승자의 체험에서 더 빨리 벗어나는 쪽이 쥘 것 같다.
  • [아하! 우주] 죽어가는 별을 지켜보다…폭발 앞둔 ‘초신성’ 포착

    [아하! 우주] 죽어가는 별을 지켜보다…폭발 앞둔 ‘초신성’ 포착

    머나먼 우주에서 죽어가는 별이 초신성이 되는 초기 모습이 허블우주망원경에 포착됐다. 최근 미국 캘리포니아 주립대학교 산타크루즈 캠퍼스 등 공동연구팀은 지구에서 약 6000만 광년 떨어진 초신성 'SN 2020fqv'를 허블우주망원경으로 포착했다고 밝혔다. 초신성 SN 2020fqv는 서로 붙어있는듯한 모습으로 유명한 나비은하인 NGC 4567과 NGC 4568 안에 위치해 있다. SN 2020fqv의 존재가 처음 확인된 것은 지난해 4월로 이후 천문학자들은 이 초신성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를 진행해왔다. 초신성(超新星·supernova)은 이름만 놓고보면 새로 태어난 별 같지만, 사실 종말하는 마지막 순간의 별이다. 과거 망원경이 없던 시대 갑자기 밝은 별이 나타났기에 붙은 이름으로 신성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일반적으로 별은 생의 마지막 순간 남은 ‘연료’를 모두 태우며 순간적으로 대폭발을 일으킨다. 이를 초신성 폭발이라고 부르며 이때 자신의 물질을 폭풍처럼 우주공간으로 방출한다. 이 과정에서 거품처럼 생기는 물질이 초신성 폭발이 남긴 잔해로 이 물질을 통해 또다시 별이 만들어지고 또 지구와 같은 행성이 생성된다. 곧 별의 죽음은 새로운 천체의 탄생을 의미하기도 한다.지금까지 관측된 초신성은 대부분 폭발 후 남은 잔해들이기 때문에 SN 2020fqv의 사례처럼 그 형성 과정과 향후 일어날 폭발을 관측하는 것은 매우 드문 기회가 된다. 이 때문에 전문가들은 SN 2020fqv를 초신성의 '로제타스톤'으로 비유하고 있다. 로제타스톤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이 진지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것으로 이후 고대 이집트 상형문자의 해독의 열쇠가 됐다. 연구를 이끈 라이언 폴리 박사는 "우리는 마치 범죄 조사관이 된 것처럼 별의 마지막 순간과 그 이후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연구할 수 있는 매우 드문 기회를 얻은 셈"이라면서 "앞으로 별의 폭발 순간과 그 방식에 대한 가장 상세한 모습을 관측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 [글로벌 In&Out] 조선을 세계에 알린 19세기 중반 러시아 탐험가들/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글로벌 In&Out] 조선을 세계에 알린 19세기 중반 러시아 탐험가들/바실리 V 레베데프 도쿄대 인문사회계연구과 박사과정

    인류는 호기심 많은 존재이다. 시대, 국가, 민족을 막론하고 언제나 그랬다. 공익을 위하여 혹은 개인의 야망을 이루고자, 안정된 삶을 버린 채 투신해 세계에 대한 인류의 지식을 넓혀 주는 사람들 말이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그 선구자들도 시대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그들이 살던 사회의 물질적 토대, 개방성 등 조건에 따라 자기 소망을 이룰 가능성도 달랐다. 15세기 ‘대발견의 시대’에 들어온 유럽은 점차 자본주의의 궤도에 들어서면서 각지에 대한 탐험·연구를 시작했다. 이번에는 조선의 지리와 풍습 등을 기록하고 서양에 소개하는 데에 크게 기여한 19세기 러시아의 탐험가들에 대해 간략하게 이야기하고자 한다. 19세기 중반 열강들이 아시아에 진출해 있었을 때 조선은 외부 세계와의 교역을 금지하는 정책을 유지하고 있었다. 때문에 조선인의 풍습과 사회는 물론이고 그 지리, 식물상과 동물상조차 조사하는 것이 극히 어려웠고 개항 이전의 조선인 지식인들과의 교류도 거의 불가능했다. 한국 해역에 대한 러시아인의 체계적 연구의 역사는 19세기 초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805년, 세계일주 중이었던 러시아 탐험가 크루젠슈테른은 ‘나데즈다호’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출항해 동해의 북부를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조선을 멀리서밖에 바라보지 못했던 크루젠슈테른도 조선의 중요성을 잘 인식할 수 있었다. 그가 1810년에 출판한 책에 다음과 같은 글이 있다. ‘유럽인들의 동아시아 진출의 속도를 보면 북위 36도에서 42도까지의 조선의 연안도 미지의 땅으로 오래 남지 않을 것이다. 거기에 살고 있는, 아직까지 우리가 만난 적이 없는 민족과의 무역은 일본에서 절대로 볼 수 없는 이익을 가져올 것이다’ 재미있게도, 나가사키에 도착한 크루젠슈테른은 일본 번역관에게 조선반도에 일본 천황의 땅이 있다고 들었지만 다 거짓말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고 한다. 한반도 동해 연안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1852~1855년에 진행된 푸탸틴이 지도한 팔라다호 탐험에 의해 이루어졌다. 나가사키에서 출항한 팔라다호는 부산에서 두만강까지의 동해 연안을 철저하게 조사해서 기존 지도의 수많은 오류를 거쳤다. 그 탐험의 결과 1857년 당시 가장 자세한 한반도 동해 연안의 지도가 나왔고 1858년에는 그 탐험에 참가한 곤차로프라는 작가가 ‘전함 팔라다’라는 책을 출판했다. 조선에서 오랫동안 머물지 못해서 자세한 연구는 못했으나 조선인의 민족성이 중국, 일본과 완전히 다르다는 것과 조선인들이 교역하는 것을 좋아해서 러시아와 조선이 관계를 하루빨리 맺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전함 팔라다’는 오늘날에도 문호개방 이전의 조선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며 최근 한국어 번역본도 나왔다. 러시아인에 의한 한반도 조사는 바다뿐만 아니라 육로로도 진행됐다. 1867년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지리학자인 프르제발스키가 우수리 지방을 조사하면서 조·러의 국경을 넘어 함경북도 경흥까지 방문했다. 당시 조선 북부에서 기근이 빈발했기 때문에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지방정부가 이를 막기 위해서 국경을 넘어가려는 조선인들을 발견 즉시 처형하고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정부의 엄금에도 불구하고 겨울 들어 두만강이 얼어붙으면 조선인들은 밤에 국경을 넘어 국경 초소에 배치된 러시아 군인들을 방문해 교역하면서 사이 좋게 지내기도 한다고 했다. 프르제발스키는 직접 본 조선의 전통 장례식에 대한 자세한 기록도 남겼다. 또한 경흥 부사(府使)를 만나 이야기를 나눴는데 지방 관료지만 호기심이 많고 1812년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 역사까지 잘 알고 있다는 것에 프르제발스키는 감탄했다.
  • 탱글 전어 상큼 유자… 입으로 담은 맛보석

    탱글 전어 상큼 유자… 입으로 담은 맛보석

    가수 송창식은 노래 ‘고래사냥’에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외쳤다. 동해는 바다를 뜻하지만 지명인 동해시도 있다. 안타깝게도 서해엔 서해시(군)가 없지만, 남해 바다에는 경남 남해군이 있다. 남해란 이름은 특별하다. 1980년대 생긴 지명인 동해시와 달리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남녘 바다를 지칭하는 이름처럼 영호남을 에워싼 남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섬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육지와 연결됐지만 섬은 섬이다. 별칭은 보물섬이다. 보물이 많다. 마늘과 시금치(섬초), 유자, 죽방멸치 등 ‘먹는 보물’은 물론 아름다운 풍광의 ‘보는 보물’에다 문화재 등 ‘역사적 보물’까지, 진귀한 것들로 가득하다. 선선한 바람이 쪽빛 바다를 타고 불어 드는 가을에 보물섬을 다녀왔다. 동화를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로운 섬이지만, 외다리 존 실버 선장처럼 보물을 노리는 해적은 없다.●20년 전부터 조성된 남해 독일마을 ‘아우프비더젠’은 독일어로 또 만나자는 작별인사다. 필자는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 ‘데어데스뎀덴 디데어데어디’ 하는 신라 향가 같은 관사와, 숨을 모았다 내쉬어야 제대로 나오는 이상한 발음의 전치사를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부분 학교의 독일어 선생님 별명은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였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도 게슈타포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독일어가 얼마나 과학적이며 매력적인 언어인지 늘 강조하셨고, 그 때문에 학생들이 이 위대한 언어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학력고사 20점에 해당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에 대한 학습효과를 ‘단호한’ 교편(敎鞭)으로 ‘친히’ 점검하셨다. 졸업한 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 필자가 수많은 독일어 주요 문법을 아직도 달달 외우는 이유다. 독일어의 추억이 대상포진처럼 문득 발진한 이유는 남해군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독일마을에 갔기 때문이다.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언덕의 약 9만㎡ 너른 부지에 위치한 독일마을은 조성한 지 올해로 딱 20년 됐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독일 북부의 도시 노드프리슬란트와 1997년 자매결연을 맺으며 그 맹아가 텄다. 2001년 남해군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귀국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택지를 조성해 분양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25가구 정도가 직접 독일로부터 건자재를 수입해 전통 독일식 가옥을 짓고 이주하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교포들이 거주하는 집보다 민박과 게스트하우스, 상점, 식당, 카페 등이 더 많다.하지만 일부러 꾸민 ‘독일 테마파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아온 교포들의 실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그 진정성과 세밀함이 매력 포인트다. 집안의 소품 모두 재현품이 아닌 독일의 것이다. 호박색 기와를 올린 독일식 건축물과 외벽 장식, 정원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꾸며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떠났던 이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파독 광부 전시관과 파독 근로자 전시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주택가 진입로에는 독일 정통 수제 소시지와 햄, 족발 요리, 사우어크라우트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과 샤퀴테리아(가공육 공방)가 있고 바다를 조망하는 카페 역시 독일식 인테리어로 갖춰 놓았다. 언덕배기에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이 하도 이국적이면서도 현실감 있어 마치 독일 북부 항구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 물론 식사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아무렴, 발트해보다는 남해가 낫다. 풍광도 좋다. 언덕 아래로 물건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과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을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물미해안도로도 있어 관광 코스를 짜기에도 딱이다. 천연기념물 제150호 방조어부림은 폭 30m에 길이 1500m에 이르는 해변의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과 숲 그늘로 물고기를 꾀어내는 어부림 역할을 동시에 한다. 무려 400여년 전인 1640년쯤 조성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1960년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체결한다. 독일에서 기피업종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직종인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면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옹색한 국가신용등급 탓에 차관을 제공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해외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으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내려는 전략이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파독 근로자는 1970년대 중후반까지 2만여명에 이르렀다. 광부가 8395명,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1만 371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1인당 월급으로 100달러가 넘게 지급됐으니 차곡차곡 외화가 쌓였다. 덕분에 한국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약 70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이 돈을 바탕으로 빈곤퇴치와 경제부흥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정말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이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어려운 근무환경에 인종 차별을 견디며 특유의 뚝심과 근면으로 버텼다. “글뤽 아우프(무사하기를).” 고등학생 때 이 말을 배우지 않았던 것 같지만, 광부들이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인사를 나눴다. 이것만 봐도 당시 갱 속의 위험한 근무여건을 알 수 있다.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밤낮을 지새웠다. 성공적으로 독일에 안착한 이들이 노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 곳이 바로 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에 이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다.●비단산 둘러싸고 도는 옥색바다 남해와 해남(전남)은 앞뒤 음절만 다른 게 아니라 이미지도 많이 다르다. 해남은 땅끝의 이미지로 왠지 육지 느낌이라면, 남해는 이상향 같은 심상을 준다. 남녘, 남촌, 남국 등 남(南) 자가 앞에 달려서 그럴 것이다. 아직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0월, 풍(楓) 내려오는 가을 복판이다. 들판과 바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차례로 건너면 붉은 황토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황금들판, 옥색 바다가 한눈에 든다. 남해의 산과 들, 바다가 잘 짜 놓은 유화 팔레트처럼 조화롭게 펼쳐진다. 남해는 사실 산이다. 욕탕에 물을 빼듯 바닷물을 비운다면 뾰족한 산이 나올 텐데, 그 산들이 바로 남해도, 창선도, 우도 등 남해군이 품은 섬이다. 실제 국내 섬 중 가장 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최고 786m(망운산) 등 기세 좋은 산들이 섬을 채운다. 왕이 되면 온 강토를 비단으로 두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 태조가 이름을 붙였다는 금산(錦山). 무려 해발 700m에 이른다. 태조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전국 3대 기도 도량 보리암이 금산의 산마루에 있다. 관광객이야 좋은 풍경을 보러 오는 것이니 어쨌든 그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 산은 좋지만 경작할 농토는 모자랐다.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수금푸’(삽의 사투리)와 호미로 일일이 산을 깎아 경작지를 개간해야 했다. 남해에는 가천면 다랑이논 같은 노동의 유산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0여층 높이의 계단 같은 논밭이 산허리로부터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떨어진다. 피땀 흘려 개간한 노동의 현장이지만 조형미만큼은 가히 예술적이다. 유려한 곡선(사실은 직선화할 수 없어 그랬을 테지만)이 가파른 층을 이루며 첩첩 오른다. 밑에서 보자면 하늘 계단이며 위에서 보면 곡면으로 구성한 몬드리안의 추상화다. 벼가 무르익으면 여기에 황금색이 입혀진다. 가을 다랑이논이 사진가에게 사랑받는 이유다.남해가 보물섬이란 설정에는 특유의 목가적 분위기도 한몫한다. 설천면 구두산에는 유럽 초원을 닮은 양떼목장과 양모리학교가 있다. 푸른 언덕에 양들이 뛰어놀고 있다. 시간 맞춰 가면 양몰이 개 보더콜리가 뛰어다니며 어린 양떼를 통제하는 진풍경도 관람할 수 있다.남해는 바다다.(아깐 산이라더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풍요롭고 비옥한 바다다. 이 바다에 봄이면 플래티넘처럼 반짝이는 멸치떼가 돌아오고, 가을이면 전어와 우럭 등 싱싱한 횟감과 전복, 소라 등 맛난 먹거리가 넘쳐난다. 관음포는 고현면 북쪽에 있는 포구다. 노량 바다를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있다. 이락포(李落浦)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곳이란 뜻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은 관음포에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이락사 등 유적과 영상관,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이 이곳에 있다. 그 이전인 고려 때는 인근 선원사(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에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을 판각했다. 이래저래 호국성지인 곳이다. 상주은모래해변도 남해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포인트다. 저물어 가는 가을볕을 받아 윤슬과 더불어 반짝이는 은싸라기 같은 모래밭을 바라보면 과연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이 외에도 멸치떼가 지나는 지족해협과 죽방렴, 남해안 특유의 청자색 계열을 색색별로 눈에 담아 올 수 있다. 산이 높아 길도 한참 올라가는 탓에 눈부신 바다는 어느 곳엘 가도 따라다닌다. 코로나로 ‘바다 결핍’에 시달린다면 당장 남해를 찾아야 한다.●보물섬의 숨은 보물찾기 엘림 마리나 앤드 리조트는 독일 마을 아래 물건항에 위치한 요트 리조트다. 요트 정박장과 편의시설동, 테라스와 월풀욕조 등을 갖춘 숙박동으로 구성됐다. 럭셔리 요트와 제트 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19~20세기 초에 제작된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와 다양한 제조사의 중대형 바이크를 수십대 모아 둔 전시실도 갖췄다. 비 오는 날 등 야외 활동이 어려운 날에 찾아볼 만하다. 바닷가에 바로 접한 골든앵커 레스토랑에선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 저녁 시간에는 새파란 하늘이 코발트 빛으로 저물어 가는 진풍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아난티 남해는 이미 유명한 곳. ‘물결’이 모티브로 녹아든 건물에 스위트룸 150개와 프라이빗 빌라 20개로 구성됐다. 리조트 조성 당시 5베이 구조를 채택해 어떤 객실에 묵어도 바다와 섬, 골프 코스를 볼 수 있다. 몇 년 전 힐튼 브랜드에서 아난티로 주인이 바뀌었다. ‘관광’보다는 ‘쉼’을 강조하며 콘셉트도 바꿨다. 어린이 섹션과 반려동물 동반, 서가 등 일상 속 ‘느림’을 표방하며 자연 속 휴식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예술적 영감을 더한 굿즈와 식음료는 독특한 개성으로 채웠다. 아난티 남해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낸다. 리조트 곳곳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휴식이다. ●조선시대 여행작가 류의양 ‘남해문견록’ 남겨 독서의 계절에 남해에 왔는데 유배문학관을 빼놓기도 뭐하다. 남해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하지만 남해 풍광을 가만 떠올려 보면, 형벌이 아니라 인센티브 휴가에 가깝다. 워케이션처럼 남해에 유배 와서 교육과 저술활동을 한 선비들이 많았다. 가시나무 울타리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위리안치를 제외하면 집을 짓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시를 쓰며 보냈다. 이때 유배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했다. 유배형이 있던 외국에도 공통된 현상이 있었다. 일본의 스가와라노 마치자네, 중국의 이백, 소동파, 백거이 등 당대 최고 시인들은 물론이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1815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가서 구술서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남겼고 문호 빅토르 위고 역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당한 후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에서 살며 명작 ‘레미제라블’을 썼다. 러시아 푸시킨 역시 미하일로프 유배 생활 중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썼다. 남해에는 ‘사친시’(思親詩)의 서포 김만중을 비롯해 이규보, 김굉필, 권근, 김정 등 수많은 문필가들이 유배 생활 중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류의양(1718~미상)은 현대적 의미의 ‘여행작가’라 할 수 있다. 그림 같은 남해의 풍경과 생활상을 한글로 기록한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류의양은 책에 풍경과 지리뿐 아니라 사투리 등 다양한 생활상까지 담아 국문학뿐 아니라 언어학에서도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가을날의 보물찾기. 보물섬 남해 땅에서 도전할 수 있다. 글 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은빛 윤슬 금빛 들판… 눈으로 담은 가을 보석

    은빛 윤슬 금빛 들판… 눈으로 담은 가을 보석

    가수 송창식은 노래 ‘고래사냥’에서 “자~ 떠나자 동해 바다로”를 외쳤다. 동해는 바다를 뜻하지만 지명인 동해시도 있다. 안타깝게도 서해엔 서해시(군)가 없지만, 남해 바다에는 경남 남해군이 있다. 남해란 이름은 특별하다. 1980년대 생긴 지명인 동해시와 달리 신라 경덕왕 때부터 불린 이름이다. 남녘 바다를 지칭하는 이름처럼 영호남을 에워싼 남해 바다 중간에 떠 있는 섬이다. 지금이야 다리가 두 개나 놓여 육지와 연결됐지만 섬은 섬이다. 별칭은 보물섬이다. 보물이 많다. 마늘과 시금치(섬초), 유자, 죽방멸치 등 ‘먹는 보물’은 물론 아름다운 풍광의 ‘보는 보물’에다 문화재 등 ‘역사적 보물’까지, 진귀한 것들로 가득하다. 선선한 바람이 쪽빛 바다를 타고 불어 드는 가을에 보물섬을 다녀왔다. 동화를 연상케 할 만큼 신비로운 섬이지만, 외다리 존 실버 선장처럼 보물을 노리는 해적은 없다.●20년 전부터 조성된 남해 독일마을 ‘아우프비더젠’은 독일어로 또 만나자는 작별인사다. 필자는 고교 시절 제2외국어로 독일어를 배웠다. ‘데어데스뎀덴 디데어데어디’ 하는 신라 향가 같은 관사와, 숨을 모았다 내쉬어야 제대로 나오는 이상한 발음의 전치사를 외우느라 무척 고생했던 기억이 난다. 당시 대부분 학교의 독일어 선생님 별명은 게슈타포(나치 비밀경찰)였다. 필자가 다니던 학교에도 게슈타포가 한 분 계셨다. 그분은 독일어가 얼마나 과학적이며 매력적인 언어인지 늘 강조하셨고, 그 때문에 학생들이 이 위대한 언어에 대한 불경을 저지르는 것을 용서치 않았다. 학력고사 20점에 해당하는 문제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셨고, 그에 대한 학습효과를 ‘단호한’ 교편(敎鞭)으로 ‘친히’ 점검하셨다. 졸업한 지 30년도 더 지난 지금, 필자가 수많은 독일어 주요 문법을 아직도 달달 외우는 이유다. 독일어의 추억이 대상포진처럼 문득 발진한 이유는 남해군에 위치한 국내 유일의 독일마을에 갔기 때문이다. 삼동면 물건리와 봉화리 일대 언덕의 약 9만㎡ 너른 부지에 위치한 독일마을은 조성한 지 올해로 딱 20년 됐다. 독일마을은 남해군이 독일 북부의 도시 노드프리슬란트와 1997년 자매결연을 맺으며 그 맹아가 텄다. 2001년 남해군은 파독 광부와 간호사의 귀국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택지를 조성해 분양했다. 이에 관심을 가진 25가구 정도가 직접 독일로부터 건자재를 수입해 전통 독일식 가옥을 짓고 이주하며 마을의 역사가 시작됐다. 지금은 시간이 흘러 교포들이 거주하는 집보다 민박과 게스트하우스, 상점, 식당, 카페 등이 더 많다.하지만 일부러 꾸민 ‘독일 테마파크’가 아니라 오랜 세월 독일에서 살아온 교포들의 실생활이 이뤄지던 곳으로, 그 진정성과 세밀함이 매력 포인트다. 집안의 소품 모두 재현품이 아닌 독일의 것이다. 호박색 기와를 올린 독일식 건축물과 외벽 장식, 정원까지 어느 하나 허투루 꾸며낸 것이 아니다. 가난한 시절 이역만리 독일 땅으로 떠났던 이들의 삶과 문화를 들여다볼 수 있는 파독 광부 전시관과 파독 근로자 전시관을 따로 마련해 놓았다.주택가 진입로에는 독일 정통 수제 소시지와 햄, 족발 요리, 사우어크라우트 등을 판매하는 음식점과 샤퀴테리아(가공육 공방)가 있고 바다를 조망하는 카페 역시 독일식 인테리어로 갖춰 놓았다. 언덕배기에 양쪽으로 펼쳐지는 거리 풍경이 하도 이국적이면서도 현실감 있어 마치 독일 북부 항구도시에 와 있는 듯하다. 물론 식사와 함께 독일이 자랑하는 맥주도 곁들여 맛볼 수 있다. 시원하게 맥주를 마시며 테라스에 앉아 바다를 조망할 수 있다. 아무렴, 발트해보다는 남해가 낫다. 풍광도 좋다. 언덕 아래로 물건 방조어부림(防潮魚付林)과 바다가 펼쳐지고, 해안을 옆에 두고 드라이브를 즐길 수 있는 물미해안도로도 있어 관광 코스를 짜기에도 딱이다. 천연기념물 제150호 방조어부림은 폭 30m에 길이 1500m에 이르는 해변의 숲이다.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과 숲 그늘로 물고기를 꾀어내는 어부림 역할을 동시에 한다. 무려 400여년 전인 1640년쯤 조성했다고 하니 실로 놀라운 일이다. 1960년도 1인당 국민소득 79달러의 최빈국. 당시 한국은 가난했다. 무엇보다 일자리가 없었다. 당시 한국 정부는 비약적 경제성장을 이룬 서독으로부터 차관을 받기 위해 ‘한독근로자채용협정’을 체결한다. 독일에서 기피업종으로 심각한 인력난을 겪고 있는 직종인 광부와 간호사를 파견하는 것이다. 이면에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다. 당시 한국 정부의 옹색한 국가신용등급 탓에 차관을 제공받지 못할 위기에 처하자, 해외근로자의 임금을 담보로 서독 은행으로부터 지불보증을 받아 내려는 전략이었다. 1963년부터 시작된 파독 근로자는 1970년대 중후반까지 2만여명에 이르렀다. 광부가 8395명, 간호사(간호조무사 포함)는 1만 371명이 서독으로 떠났다. 1인당 월급으로 100달러가 넘게 지급됐으니 차곡차곡 외화가 쌓였다. 덕분에 한국 정부는 서독으로부터 약 7000만 달러의 차관 도입에 성공했다. 대한민국은 이 돈을 바탕으로 빈곤퇴치와 경제부흥 정책을 펼칠 수 있었다. 정말 ‘나라를 구한’ 열렬한 애국이었다. 파독 근로자들은 어려운 근무환경에 인종 차별을 견디며 특유의 뚝심과 근면으로 버텼다. “글뤽 아우프(무사하기를).” 고등학생 때 이 말을 배우지 않았던 것 같지만, 광부들이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인사를 나눴다. 이것만 봐도 당시 갱 속의 위험한 근무여건을 알 수 있다. 간호사들은 환자들의 대소변을 받아 내며 밤낮을 지새웠다. 성공적으로 독일에 안착한 이들이 노년에 고국으로 돌아와 보금자리를 튼 곳이 바로 독일마을이다. 파독역사전시관에 이에 관한 상세한 자료가 남아 있다.●비단산 둘러싸고 도는 옥색바다 남해와 해남(전남)은 앞뒤 음절만 다른 게 아니라 이미지도 많이 다르다. 해남은 땅끝의 이미지로 왠지 육지 느낌이라면, 남해는 이상향 같은 심상을 준다. 남녘, 남촌, 남국 등 남(南) 자가 앞에 달려서 그럴 것이다. 아직 춥지는 않지만 그래도 10월, 풍(楓) 내려오는 가을 복판이다. 들판과 바다가 한창 무르익어 가고 있다. 남해대교와 노량대교를 차례로 건너면 붉은 황토와 노랗게 물들어 가는 황금들판, 옥색 바다가 한눈에 든다. 남해의 산과 들, 바다가 잘 짜 놓은 유화 팔레트처럼 조화롭게 펼쳐진다. 남해는 사실 산이다. 욕탕에 물을 빼듯 바닷물을 비운다면 뾰족한 산이 나올 텐데, 그 산들이 바로 남해도, 창선도, 우도 등 남해군이 품은 섬이다. 실제 국내 섬 중 가장 산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최고 786m(망운산) 등 기세 좋은 산들이 섬을 채운다. 왕이 되면 온 강토를 비단으로 두르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 조선 태조가 이름을 붙였다는 금산(錦山). 무려 해발 700m에 이른다. 태조처럼 뭔가를 이루기 위해 찾는 이들이 많은 전국 3대 기도 도량 보리암이 금산의 산마루에 있다. 관광객이야 좋은 풍경을 보러 오는 것이니 어쨌든 그 소원 하나는 들어준다. 산은 좋지만 경작할 농토는 모자랐다. 이렇다 할 장비도 없이 ‘수금푸’(삽의 사투리)와 호미로 일일이 산을 깎아 경작지를 개간해야 했다. 남해에는 가천면 다랑이논 같은 노동의 유산이 여기저기 남아 있다. 10여층 높이의 계단 같은 논밭이 산허리로부터 바다를 향해 가파르게 떨어진다. 피땀 흘려 개간한 노동의 현장이지만 조형미만큼은 가히 예술적이다. 유려한 곡선(사실은 직선화할 수 없어 그랬을 테지만)이 가파른 층을 이루며 첩첩 오른다. 밑에서 보자면 하늘 계단이며 위에서 보면 곡면으로 구성한 몬드리안의 추상화다. 벼가 무르익으면 여기에 황금색이 입혀진다. 가을 다랑이논이 사진가에게 사랑받는 이유다.남해가 보물섬이란 설정에는 특유의 목가적 분위기도 한몫한다. 설천면 구두산에는 유럽 초원을 닮은 양떼목장과 양모리학교가 있다. 푸른 언덕에 양들이 뛰어놀고 있다. 시간 맞춰 가면 양몰이 개 보더콜리가 뛰어다니며 어린 양떼를 통제하는 진풍경도 관람할 수 있다.남해는 바다다.(아깐 산이라더니?) 아름답기만 한 것이 아니라 풍요롭고 비옥한 바다다. 이 바다에 봄이면 플래티넘처럼 반짝이는 멸치떼가 돌아오고, 가을이면 전어와 우럭 등 싱싱한 횟감과 전복, 소라 등 맛난 먹거리가 넘쳐난다. 관음포는 고현면 북쪽에 있는 포구다. 노량 바다를 바라보는 나지막한 언덕 아래 있다. 이락포(李落浦)로 불리기도 하는데 이순신 장군이 서거한 곳이란 뜻이다. 1598년 음력 11월 19일, 충무공은 관음포에서 왜란의 마지막 해전인 노량해전 중 장렬히 전사했다. 충무공의 뜻을 기리는 이락사 등 유적과 영상관, 다양한 조형물과 기념물이 이곳에 있다. 그 이전인 고려 때는 인근 선원사(지금은 절터만 남아 있다)에서 팔만대장경(국보 제32호)을 판각했다. 이래저래 호국성지인 곳이다. 상주은모래해변도 남해 바다를 만끽할 수 있는 포인트다. 저물어 가는 가을볕을 받아 윤슬과 더불어 반짝이는 은싸라기 같은 모래밭을 바라보면 과연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다. 이 외에도 멸치떼가 지나는 지족해협과 죽방렴, 남해안 특유의 청자색 계열을 색색별로 눈에 담아 올 수 있다. 산이 높아 길도 한참 올라가는 탓에 눈부신 바다는 어느 곳엘 가도 따라다닌다. 코로나로 ‘바다 결핍’에 시달린다면 당장 남해를 찾아야 한다.●보물섬의 숨은 보물찾기 엘림 마리나 앤드 리조트는 독일 마을 아래 물건항에 위치한 요트 리조트다. 요트 정박장과 편의시설동, 테라스와 월풀욕조 등을 갖춘 숙박동으로 구성됐다. 럭셔리 요트와 제트 보트 등을 체험할 수 있다. 19~20세기 초에 제작된 빈티지 아날로그 오디오와 다양한 제조사의 중대형 바이크를 수십대 모아 둔 전시실도 갖췄다. 비 오는 날 등 야외 활동이 어려운 날에 찾아볼 만하다. 바닷가에 바로 접한 골든앵커 레스토랑에선 정통 이탈리아 요리를 선보인다. 저녁 시간에는 새파란 하늘이 코발트 빛으로 저물어 가는 진풍경과 함께 식사를 할 수 있다. 아난티 남해는 이미 유명한 곳. ‘물결’이 모티브로 녹아든 건물에 스위트룸 150개와 프라이빗 빌라 20개로 구성됐다. 리조트 조성 당시 5베이 구조를 채택해 어떤 객실에 묵어도 바다와 섬, 골프 코스를 볼 수 있다. 몇 년 전 힐튼 브랜드에서 아난티로 주인이 바뀌었다. ‘관광’보다는 ‘쉼’을 강조하며 콘셉트도 바꿨다. 어린이 섹션과 반려동물 동반, 서가 등 일상 속 ‘느림’을 표방하며 자연 속 휴식의 즐거움을 추구했다. 예술적 영감을 더한 굿즈와 식음료는 독특한 개성으로 채웠다. 아난티 남해는 자연과 인공이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낸다. 리조트 곳곳을 둘러보는 것 자체가 휴식이다. ●조선시대 여행작가 류의양 ‘남해문견록’ 남겨 독서의 계절에 남해에 왔는데 유배문학관을 빼놓기도 뭐하다. 남해는 대표적인 유배지였다. 하지만 남해 풍광을 가만 떠올려 보면, 형벌이 아니라 인센티브 휴가에 가깝다. 워케이션처럼 남해에 유배 와서 교육과 저술활동을 한 선비들이 많았다. 가시나무 울타리 밖으로 못 나오게 하는 위리안치를 제외하면 집을 짓고 서당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치거나 시를 쓰며 보냈다. 이때 유배문학이라는 독특한 장르가 탄생했다. 유배형이 있던 외국에도 공통된 현상이 있었다. 일본의 스가와라노 마치자네, 중국의 이백, 소동파, 백거이 등 당대 최고 시인들은 물론이며 서양에서도 비슷한 경우를 찾아볼 수 있다. 프랑스의 나폴레옹은 워털루 전투에서 패한 후 1815년 영국령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귀양을 가서 구술서 ‘세인트헬레나의 회상’을 남겼고 문호 빅토르 위고 역시 나폴레옹 3세에 의해 추방당한 후 영국 해협의 저지섬과 건지섬에서 살며 명작 ‘레미제라블’을 썼다. 러시아 푸시킨 역시 미하일로프 유배 생활 중 그 유명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를 썼다. 남해에는 ‘사친시’(思親詩)의 서포 김만중을 비롯해 이규보, 김굉필, 권근, 김정 등 수많은 문필가들이 유배 생활 중 주옥같은 작품을 남겼다. 그 가운데 류의양(1718~미상)은 현대적 의미의 ‘여행작가’라 할 수 있다. 그림 같은 남해의 풍경과 생활상을 한글로 기록한 남해문견록을 남겼다. 류의양은 책에 풍경과 지리뿐 아니라 사투리 등 다양한 생활상까지 담아 국문학뿐 아니라 언어학에서도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가을날의 보물찾기. 보물섬 남해 땅에서 도전할 수 있다. 글 사진 이우석 놀고먹기연구소장 demory@naver.com
  •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제국주의의 시선/미술평론가

    [이미혜의 발길따라 그림따라] 제국주의의 시선/미술평론가

    당연한 얘기지만 예술은 당대의 역사, 당대의 관심을 반영한다. 하렘의 여성을 묘사한 ‘오달리스크’는 서구가 동방과 접하면서 미술에 등장했다. 오달리스크는 원래 집안일하는 하녀를 가리키는 터키어로 성적인 의미는 지니고 있지 않았으나 서구로 유입되는 과정에서 하렘에 사는 술탄의 후궁을 가리키는 말이 됐다. 1798년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동방에 대한 호기심에 불을 붙였다. 앵그르는 19세기 초 오달리스크 소재를 프랑스 미술에 끌어들였다. 벌거벗고 긴 의자에 누워 있는 앵그르의 오달리스크는 동방이 야만적이며 유혹적인 곳이라고 관객에게 속삭인다. 들라크루아의 ‘알제의 여인들’ 역시 오달리스크 소재의 변주다. 앵그르는 동방에 간 적이 없었지만, 들라크루아는 1831년 프랑스 왕 루이 필리프가 술탄과 조약을 맺기 위해 파견한 외교단에 섞여 수개월 동안 알제리와 모로코를 방문했다. 그러나 서구인, 더구나 남자가 무슬림 여성들이 머무는 집안의 내밀한 공간에 들어가는 것은 불가능했다. 심지어 밖에 빨래를 널러 나온 여성을 스케치하려 해도 그 여성은 남편을 불러 대는 판국이었다. 그래도 들라크루아는 운이 좋았다. 알제리 항구에서 서구인들에게 우호적인 한 상인을 만나 그의 집을 구경할 수 있었다. 그림 속 방안에는 세 여자가 앉아 있다. 여인들은 화려한 옷과 보석, 금줄로 치장하고 있다. 흑인 하녀는 방을 나가면서 고개를 돌려 앉아 있는 여인들을 바라본다. ‘알제의 여인들’은 1834년 살롱에 전시돼 찬사를 받았다. 학자들은 이 그림이 이슬람 세계에 대한 민속학적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들라크루아는 적어도 앵그르처럼 동방의 여성을 내놓고 성적 대상으로 묘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 그림 역시 서구의 시각과 남성의 성적 판타지를 드러낸다. 가슴이 보이는 헐렁한 의상, 쿠션에 기댄 여성의 나른한 포즈, 애매한 눈길, 벗은 발에서 느껴지는 성적인 느슨함. 물담배 파이프, 화로, 러그 같은 오리엔탈리즘의 모티브는 방 밖에서 벌어지는 식민지 쟁탈전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아라비안나이트류의 이국적인 신비함과 에로티시즘을 강조한다.
  • [김기정 인터뷰 2] “아프간 사태 이후 미국이 이래라저래라 못할 것”

    [김기정 인터뷰 2] “아프간 사태 이후 미국이 이래라저래라 못할 것”

    7일자 지면에 미처 싣지 못한 김기정(65) 국가안보전략연구원장과의 인터뷰 내용을 싣는다. 김 원장은 문재인 정부의 통일 및 외교 정책 핵심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의 설계자로 통한다. - 문재인 정부의 한계는 분명해 보인다. “5년제 단임제의 한계이기도 한데 한국이 주변 국가들과 미국에게 평화 공존으로 가야 하며 그래야만 이들 나라의 이익이 주어진다고 설득하는 데도 짧기만 한 시간이다. 한국인의 열망과 미래를 그리는 상상력이 아무리 커도 분단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자국의 이해를 추구하는 데 분단이 오히려 낫다고 판단하는 나라들을 설득하고 동참시키는 게 버겁다. 정권과 정부의 노력만이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성찰과 상상력이 응집돼야 한다. 우리는 2018년의 단초를 통해 냉전 질서의 끄트머리쯤에 있지 않은가 하는 희망을 품게 됐다.” - 차기 지도자는 어떤 사람이어야 하나. “분단과 통일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역사적 관점에서 통찰하며, 미래를 그리며, 한반도의 평화공존이 동북아 전체의 안정을 가져온다는 신념을 갖추고, 분단의 관성이나 냉전의 스테이스 쿠오에 짓눌린 정무적 판단으로 역사를 퇴행시키지 않고, 상상과 열망으로 이끌어가는 사람이 됐으면 한다.” - 아프가니스탄 사태 이후 미국이 한국을 더 성가시게 할 것이란 시각이 많은데. “안보와 자율성을 교환하는 구조가 한미정상회담 이후 완전히 달라졌다고 느낀다. 한국은 경제성장, 군사력 성장, 자긍심과 민도의 상승, 시민성에 기초한 방역 성공 등으로 미국이 국제사회에서 더 활용할 만한 가치가 높은 존재가 됐다. 일본은 미국이 생각하는 대중국 포위망의 정중앙에 자진해 들어간 반면, 한국은 한 발 물러선 위치에 서는 일을 미국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처럼 보인다. 일본과 달리 한국은 자유롭게 움직일 여지가 있게 됐다. 미·중 대립이 격화될수록 우리 외교의 유연성이 중요해진다고 본다. 워싱턴 정가는 한발 뒤로 물러선 한국을 충분히 활용하는 것이 미국의 국익을 위해 낫다고 판단하기 시작한 것 같다. 미국은 폴리티컬 게임을 하고 싶어하는데, 일부러 한국을 중국 쪽으로 계속 밀어대는 일본보다 중간에 위치한 미들파워(한국)를 강화시키는 것이 훨씬 효율적이란 얘기다.나폴레옹 전쟁 이후 100년 동안 유럽이 안정된 것은 중부유럽을 강화한 덕분이었다. 물론 중부유럽이 너무 강해져 1차, 2차 세계대전이 촉발되는 부작용을 낳긴 했지만 말이다. 미국이 더 큰 폴리티컬 게임을 하고 싶으면 한국뿐 아니라 북한을 끌어들여야 하는데 헨리 키신저 같은 대전략가가 부재해 망설이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중국이 급격히 부상하는, 초유의 상황, 코로나 이후 국제질서가 비정형적으로 풀려나갈 소지가 높아 방법을 찾지 못해 자꾸 냉전 초기의 담론을 차용하는 모습도 보인다. 키신저의 방법은 중국이 총구를 소련에 돌리게 한 것이었는데, 어쩌면 미국은 한국과 북한까지 중국에 총구를 돌리게 하는 빅게임을 하고 싶어하는데 아직 그 단계로 넘어가는 일을 망설이며 주저하는 것 같다. 미국이 과거처럼 ‘주한미군 빼버릴 거야’란 식으로, 한국의 불편한 심리적 의존성을 압박하는 식으로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엔 한국이 너무 커져 버렸다. 한국이 미국에 너무 많은 이익을 제공할 수 있는 나라가 돼버렸다.” - 미·중 대립의 본질은 무엇인지. “두 국가의 권력 관계가 바뀌어 나타나는 갈등인데 상당히 오래 갈 것이다. 이념과 국제 분업 구조, 표준화 경쟁 등 층위가 다양할 것이다. 가장 기저에는 심리적 분노가 자리한다. 국민들의 반감이 권력과 구조의 경쟁을 증폭시키고 있다. 외교를 잘해서 봉합될 수는 있겠지만 부문별 각축에 의해 다시 전체의 경쟁으로 비화하는 일이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다. 한국이 어떻게 해야 하느냐는 외교적 유연성을 갖추는 일일 것이다. 주관이 없어 왔다갔다 하는 것이 아니라 전술적으로 한 쪽에 기울더라도 다른 쪽을 놓치지 않고 나중에 선택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놓자는 얘기다. 미·중 관계가 격화되면 손해를 보는 국가들이 점차 늘어날 것이다. 유럽, 어쩌면 그런 척하지 않을 일본, 호주, 인도 등이다. 팔짱만 끼고 볼 수 없는 시점이 올 것이다. 중간국가 연합을 주도하거나 적극적 동참하는 것도 유연성을 키우는 일이다. 피봇팅하듯 한 발에 중심을 두고 몸을 이리저리 돌려 공격 방향을 찾는 일을 외교에 적용할 수 있겠다. 여러 나라에 전술적인 무게 중심을 둬 이런저런 역할을 다할 수 있도록 창의적으로 움직이는 일이 현 시점에 준비됐으면 한다.” - 아프가니스탄 사태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2차대전 종전 이후 미국의 외교적 수단은 군사력이었다. 누군가는 미국 외교의 90%는 국방 예산에서 나왔다고 말하기도 한다. 미국의 대외문제를 군사력으로 해결하는 방식의부작용과 실패가 베트남, 이라크에 이어 아프간에서 나타났다고 본다. 아프간전 철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아프간인들이 ‘싸울 수 있는 의지(will to fight)’가 없다고 말했는데 1905년 미국이 조선과의 외교를 끊고 맨먼저 철수했을 때 시어도어 루스벨트 당시 미국 대통령이 조선인들은 스스로를 ‘방어할 의지(will to defend)’가 없다고 말했던 일을 연상시킨다. 외국의 지원과 돈에만 의존해 국민들과 괴리된 정부가 얼마나 힘없이 무너질 수 있는가를 보여줬는데 세계 6위의 군사력에 1910년의 수모를 되풀이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하나된 우리를 잘못 비교한 뒤 ‘미군 빠지면 저 꼴 난다’고 여기는 것은 굉장히 잘못된 얘기라고 생각한다. - 문재인 정부에서 한·일 관계가 정상화되기는 힘들 것 같다. 문 정부와 일본 어느 쪽에 더 잘못이 있었다고 보는지. “어느 정부나 국제관계, 국내관계의 균형점을 잘 찾는 게 중요하다. 김대중 정부 때 햇볕정책이 그나마 성공적일 수 있었던 것은 국내, 남북한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전에 국제질서에도 부합한다는 점을 먼저 설명했던 것이 주효했던 것 같다. 그런데 문재인 정부는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는 게 더 급하다고 판단하고 나중에 설득하면 된다고 본 것 같다. 이때 가장 소외된 것이, 그렇게 느낀 것이 일본이었다. 이 때 일본에게도 이해를 구하고 북·일 관계를 진전시키는 방향으로 병렬해 나아가지 않은 것이 하노이에서의 훼방놀이란 값비싼 대가로 돌아왔다고 난 본다. 그런데 한·일 관계가 틀어진 근본적인 책임은 일본이 더 크다고 본다. 오래 전부터 혐한의 분위기가 있었고, 보수 정권은 우익과 결합하고 있었다. 아베 정권은 이를 정치적으로 악용했다. 일본의 19세기 역사관과 한국의 21세기 역사관으로 대립하고 있다. 한국은 분단됐지만 평화공존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는데 일본은 분단과 적대를 관리하는 것이 자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낡은 가치관에서 빠져나오고 있지 못하다. 화해할 수 없는 이격(離隔, 사이가 벌어짐)이 문 정부와 아베 내각 사이에 일어났다. 문 정부가 대일 외교를 잘못해 두 나라 관계를 망쳤다는 논리는 대단히 불공정한 비판이다.” - 한·일관계를 제대로 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두 나라는 1965년 체제의 끄트머리에 있으며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 65년 체제란 반공과 식민지 청산이란 두 연결고리를 풀고자 했는데 전자는 쉽게 합의한 반면, 후자는 도저히 풀지 못해 어그리 투 디스어그리(agree to disagree)하고 봉합한 것이었다. 그 기저에는 세계 분업구조에 일본의 하부로 편입되는 열망이 작용했다. 두 나라 정부가 원폭과 사할린 징용, 위안부 등을 풀어야 할 과제로 합의했는데 어느새 반공이란 고리가 사라져버렸다. 이를 대신할 전략적 공유 이익을 찾지 못했다. 식민지 청산이란 연결고리마저 정부가 아니라 민간에 의해 터질 지경에 이르렀다. 외교적 봉합으로 넘어갈 일이 아니다. 반공 대신 평화를 공동의 전략적 이익으로 삼아야 하는데 일본은 반중으로 합의하고 싶어한다. 식민지 청산을 포괄하는 역사적 화해로 나아가야 하는데 일본이 쉬 수용하지 못한다. 해서 마지막 몸부림으로 인한 고통을 경험하고 있지 않은가 본다. 일본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해야 하며 그렇게 이익이 공유될 수 있다는 것을 일본이 이해해야 하는 일이 첫 걸음이 될 것이다.” - 우리의 국가전략은 어떤 것이 되어야 하는지. “대립을 공존으로, 두 국가 체제를 인정하면서도 하나로 움직이는 사실상의 통일(de-facto unification)이라고 부르고 싶다. 하나의 시장, 하나의 화폐를 갖게 되면 유럽처럼 되는 것이고, 다른 정부, 군대를 각자 갖고 있지만 군비 통제와 군사적 신뢰 구축이 되면 통일로 가는 가장 비용이 적게 드는 방식이라고 믿는다. 평화 공존을 제도로 보장하는 일을 다음 정부가 해야 한다. 적대 질서로 돌아가면 미래 세대에 부담을 떠넘기는 일이다. 평화 공존을 외교적인 틀에서 국제사회에 설득하고 인정받는 일을 국가전략으로 삼아야 한다. 양극화 해소를 통해 포용 국가 담론을 만들어야 하고, 각자도생의 생존 논리 대신 공동체를 존중하는 사회, 안보 개념을 더욱 확장해 여러 위기로부터 안전하고 안심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진정한 의미의 세이프티(safety) 개념을 만들어나가는 일이 국가전략이 됐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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