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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美·日 밀월관계 대내외 과시

    [도쿄 황성기특파원]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2박 3일간일본 방문의 가장 큰 특징으로는 전례없이 우호적인 미·일관계를 대내외에 과시한 점을 꼽을 수 있다. 부시 대통령은 동맹국 일본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에 대해 지나칠 만큼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그는다음 방문국인 한국과 중국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고 일본을첫 방문지로 선택했다고 거리낌없이 말했으며 고이즈미 총리를 ‘위대한 개혁자’라고 추켜세웠다.로널드 레이건 대통령과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 때의 ‘론-야스 밀월관계’에 비유될 만큼 돈독한 인간적 우의도 강조됐다.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에 뿌리를 두고 있는 양국의 밀월은시기적으로도 미·일의 이해가 일치하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부시 대통령은 구조개혁을 추진하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의손을 번쩍 들어 힘을 실어준 대신 테러와의 전쟁은 물론 날로 힘을 키워가는 중국의 저지선으로서 일본의 안보역할에대한 협력 강화를 이끌어 냈다. 지지율 급락을 겪고 있는 고이즈미 총리로서도 개혁에 대한 미국의 지지라는 정치적 효과에다 안보면에서도 자위대파병같은 경제대국에 걸맞는 국제적 역할을 미국의 용인 속에 착착 진행시킬 수 있다는 두 나라의 이해가 맞아 떨어진셈이다. ‘악의 축’ 발언으로 빚어지고 있는 국제사회의 격론 속에 부시 대통령은 일본 정부의 동조도 얻어냈다.지지보다는반대가 많은 그의 발언에 대해 고이즈미 총리가 “이해한다.”고 응대해 줌으로써 부시 대통령의 강경 입장은 한국 방문에서도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본 정부로서는 경제회생책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지원을동력으로 부실채권 정리 등에 다소 시간은 벌었다. 그러나미국의 지지가 한시적이어서 빠른 시일 안에 개혁의 성과가나타나지 않으면 일본 경제에 대한 신뢰는 회복불가능의 상태로 추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부시 대통령이 일본을 떠난 19일 도쿄 주식시장의 닛케이 평균주가가 1만엔이붕괴된 점은 ‘부시 효과’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징후의 하나이다. marry01@
  • [세기의 게이트] (4)리크루트 게이트

    [도쿄 황성기특파원] 일본 전후 최대의 스캔들로 기록되는‘록히드 사건’ 재판이 한창이던 1988년 일본 열도는 또한차례 대형 스캔들로 요동쳤다. 일본 최대의 취업정보 제공업체인 리크루트 그룹의 관련회사인 리크루트 코스모스의 주식이 시장에 공개되기 전정·관·재계의 실력자들에게 싼 값으로 건네졌다는 의혹이 불거진 것이다.발단은 그해 6월 가와사키(川崎)시 간부에 대한 리크르트측의 주식 양도 의혹에서 시작됐다.록히드 사건으로 세계적인 명성을 떨친 도쿄지검 특수부는 이사건이 단순한 공무원 비리를 넘어섰음을 포착했다.뇌물성주식 양도가 정·관계 실력자에게 이뤄진 권력형 비리로드러나자 검찰 수뇌부는 정권의 압력을 뿌리치고 특수부에철저한 수사를 지시한 것이다. 수사는 이듬해 2월 에조에 히로마사(江副浩正) 리크루트회장을 뇌물 증여 혐의로 구속함으로써 성과를 올리기 시작해 정계,노동성,문부성과 일본 최대의 통신회사인 NTT의실력자 12명이 줄줄이 기소됐다. 불똥은 곧바로 자민당 정권을 강타했다.같은 해 4월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내각이 퇴진을 표명하기에 이르렀다.파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정계의 막후 실력자였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가 사태의 책임을 지고 자민당을 탈당했다. 무려 300회에 가까운 공판이 진행됐지만 이 사건의 핵심인물인 후지나미 다카오(藤波孝生) 전 관방장관은 1심에서무죄를 선고받았다. 그러나 검찰의 끈질긴 보강수사에 힘입어 도쿄지방법원은 무죄 판결을 뒤집고 97년 3월 징역 3년,집행유예 4년,추징금 4270만엔의 유죄 판결을 내렸다. 법원은 후지나미 의원이 리크루트사의 에조에 회장으로부터 취직정보 안내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민간기업과 대학간 ‘취직협정’을 존속시켜달라는 청탁을 받았으며 이대가로 2000만엔과 미공개 주식을 챙긴 혐의를 인정한 것이다.정경유착에 대한 사법의 ‘단죄’가 이뤄졌다. 리크루트 사건은 정경유착의 일본 정계에 정치개혁의 바람을 몰아왔다.선거제도의 개혁이나 정치헌금의 규제를 강화한 정치자금 규정법의 개정이 잇따라 1994년에는 개혁법안이 국회에서 통과되기도 했다.값이 오를것이 확실한 미공개 주식을 정·재계의 실력자에게 나눠 준,거품경제의일본을 상징했던 이 사건 이후에도 검은 돈으로 얽히는 정경유착은 사라지지 않았다.대형 운송업체인 사가와규빙(佐川急便) 사건,제네콘(종합건설업체) 비리 등 크고 작은 스캔들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더욱이 당시 리크루트 사건에 관련돼 불명예 퇴진했던 정치인들도 사건이 잠잠해지자 모두 정치 무대에 복귀했다. 다케시타 전총리는 지난해 타계하기까지 일본 정치의 그늘에서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는가 하면 나카소네 전 총리도 자민당 탈당 2년 후 다시 입당해 지금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의 정치적 후견인 역할을 하고 있다. 유죄 판결을 받았던 후지나미 의원은 자민당을 탈당했을뿐 무소속으로 남아 일본 정계의 중진(11선)으로 활약하는등 스캔들이 터지면 정치일선에서 사라지는 미국과는 전혀다른 풍토를 일본 정치는 보여주고 있다. ◆ 사건일지. ■1988년 6월 리크루트 주식양도 의혹 최초 제기. ■1989년 2월 에조에 히로마사 리크루트 회장 구속. ■1989년 4월 다케시타 내각 퇴진.나카소네 전총리 자민당탈당. ■1997년 3월 후지나미 다카오 전 관방장관 징역3년 추징금 4270만엔 유죄판결 받음. ■1994년 정치험금 규제강화한 개혁법안 국회통과. ■2000년 6월 다케시타 타계. marry01@
  • [세기의 게이트] (2)록히드 뇌물 사건

    [도쿄 황성기특파원] “아,그런가….” 1976년 7월 도쿄지검 특수부 조사실에 체포돼 온 일본의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전 총리가 고개를 떨구면서 내뱉은 첫 마디다. “전 총리가 총리 시절 비리로 체포되기는 사상 처음”이라는 담당 검사의 말에 거물 정치인은 이 짤막한 한마디로응대했다.일본 전후 최대의 스캔들인 ‘록히드 사건’의서막이었다. 희대의 록히드 사건은 공교롭게도 ‘워터게이트’로 리처드 닉슨 미 대통령이 물러난지 2년 뒤인 1976년 2월 미 상원 외교위원회의 다국적기업 소위의 공청회에서 시작됐다. 미 항공기 제작사인 록히드의 회계담당자가 신형 ‘트라이스타-L1011형’의 판촉을 위해 일본,독일,프랑스,이탈리아등에 총액 1600만달러의 뇌물을 제공했다고 증언한 것이다. 관련국이 이 증언을 토대로 수사에 착수한 것과 동시에도쿄지검 특수부도 경시청,도쿄국세국과 공동으로 수사에들어갔다.일본 검찰은 수사 개시 6개월 만에 다나카 전 총리가 록히드로부터 5억엔의 뇌물을 받은 혐의를 포착했다. 이는 일본을 주무르던 자민당최대 계파 회장인 거물 정치인의 두 손에 수갑을 채우는 것으로 이어졌다. 검찰은 다나카 전 총리가 총리 재직 중이던 1972년 자택에서 일본 항공사인 젠니쿠(全日空)가 록히드 비행기를 선정,구입토록 운수상에게 지시했고 그 성공 보수로 현금 5억엔을 약속받았다는 점을 들어 그를 기소했다.이어 다나카 전 총리가 비서를 시켜 4차례에 걸쳐 5억엔을 록히드측으로부터 건네받았다는 점도 기소장에 적시하는 개가를 올렸다. 당시 검찰총장은 검찰 역사상 처음으로 ‘수사 개시’를선언했을 만큼 성역없는 수사는 착착 이뤄졌다.결국 정계에서 다나카 전 총리를 비롯해 현역 정치인 3명,마루베니(丸紅)와 젠니쿠 회장 등 대기업 간부 등 16명이 형사소추를 당했다. 다나카 전 총리는 1,2심에서 징역 4년,추징금 5억엔의 유죄 판결을 받았다.수사 착수 6개월 만에 전직 총리 구속이라는 전대미문의 실적을 올린 이 사건의 재판은 무려 19년을 끌었다.1995년 2월에서야 최고재판소(한국의 대법원)에서 확정판결이 내려져 다나카 전 총리 등 11명에게 유죄가확정됐다.다나카 전 총리는 그러나 상고 중인 93년 사망했다. 이 사건으로 일본 검찰은 ‘성역을 모르는 검찰’,‘정치적 중립을 견지하는 검찰’로서 세계적인 명성과 권위를확립하게 됐다.이같은 명성을 얻게 된 일본 검찰은 리크루트 사건(1988년) 등 정경유착의 사건을 파헤치는 힘을 얻게 된다. 그러나 다나카 전 총리는 사법적 단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인 영향력은 더욱 커지는 기현상을 보였다.체포 당시 91명이던 자민당 내 다나카 파벌은 10년 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 시절에는 140명의 대군단으로 커졌다.뿐만 아니라 재판이 진행 중인 형사피고인이라는 입장에도 불구하고 언제나 파벌 정치의 배후에서 그의 입김에 따라 총리가 결정되는 ‘킹 메이커’ 역할을 지속하는 기묘한 정치적 영향력도 계속됐다. 또 총리를 지낸 정치 실력자의 체포에도 불구하고 록히드가 일본 정계에 뿌린 로비자금이나 로비 내용의 전모를 밝혀내지 못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을 남기는 대목으로 지적되고 있다. ▲사건일지. ●1976.2.4 미 상원 외교위 다국적기업소위,록히드사의 일 고위관리들에 대한 뇌물 제공 폭로. ●2.24 일 검·경,수사 돌입●4.11 일 공산당 기관지,다나카 전 총리 관련 폭로. ●7.14 다나카,록히드 관계자 만난 사실 시인●7.27 다나카 구속●1983.10.12 1심서 다나카 유죄 판결. ●1993.12.16 다나카 사망●1996.2 유죄 판결 최종 확정. marry01@
  • [실패 대탐구] 제3부 실패자산을 공유하자(1)불행한 다리 성수대교

    지난 94년 10월21일 발생한 성수대교 붕괴는 ‘총체적 실패’에 해당하는 대표적인 사례다. 이 사고를 ‘총체적 실패’로 규정하는 이유는 두 가지다. 첫째,붕괴를 사전에 알수 있었지만 막지 못했다. 둘째,다리 건설 결정과 수주업체 선정 과정에 정치권이 개입해 공사대금에서 거액을 정치자금으로 빼내갔다. 안전관리 담당자들의 무지와 무신경은 32명의 목숨을 희생시켰고,정치인들은 정치자금과 한국의 대외 신인도를 맞바꿨다. [무심코 넘긴 붕괴의 증후] 성수대교는 무너지기 2년 전부터 붕괴의 증후를 드러내기 시작했다. 지난 92년 최초의 증후를 목격한 사람들은 이 곳을 자주 운행했던 택시 운전기사들이었다. 다리 상판의 연결부위에서 뒤틀림과 침하 현상을 발견해 서울시에 신고했다. 당시 성수대교 관리는 서울시 산하 동부건설사업소가 맡고 있었다. 신고를 접수한 사업소는 응급조치로 주저앉은 상판 연결 부위에 브래킷(철제 받침대)을 설치한 것이 고작이었다. 명백한 붕괴위험을 안고 있었지만 전문가 그룹에 안전진단을 의뢰하지 않았다. 전문가들에 따르면 다리 상판의 뒤틀림과 침하 현상은 성수대교의 경우 치명적인 것이었다. 교량 전문가인 이태식(李泰植) 한양대 교수의 얘기를 들어보자.“다리가 차량의 하중을 견디지 못해 상판과 상판을 연결하는 핀이 손상된 것입니다. 특히 성수대교는 전쟁 발생에 대비해 손쉽게 폭파할 수 있도록 설계됐습니다. 이 때문에 준공후 다른 형태의 다리에 비해 훨씬 세심한 유지관리가 필요했습니다. 이런 설계상의 특성은 시간이 지나면서 무시됐습니다.성수대교의 경우 상판의 뒤틀림과 침하는 심각한 붕괴 위험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그러나 아무도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사업소측은 지휘계통에 따른 보고조차 하지 않았다. [부패한 정치가 만든 불행한 다리] 김학재(金學載) 서울시 행정2부시장은 “성수대교가 건설된 지난 70년대만 해도 시청에 집권당의 재정분실이 설치돼 있었다.”면서 “당시 집권당인 공화당에서 상근 직원을 두고 시가 발주하는 각종 공사를 업체별로 배분했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낙점을 받은 건설업체는 수주의대가로 거액의 정치자금을 헌납하는 것이 당시 대형 관급건설공사의 관행이었다. 정치권의 부패구조가 공사의 향방을 좌지우지했으며 이렇게 빼먹은 정치자금이 결국 시민의 생명을 앗아가는 부실공사를낳았다는 설명이다. [동아건설이 한강 다리를?] 이런 배경으로 동아건설이 시공업체로 낙점됐다. 그러나 동아건설은 그때까지 농지정리사업을 주로 하던 업체로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한강 다리를 시공하기엔 역부족이었다. 서울시 공무원으로 잠실철교 가설공사 등에 관여했던 K(54)씨는 “동아건설을 시공업체로 선정한 것은 누가 봐도 무리한 결정이었다. 설계도,시공도 엉망이었으나 아무도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고 그때의 분위기를 전했다. [타당성 조사도, 감리도 없었다] 이후 공사의 진행과정과 안전관리 면에서도 성수대교는 ‘실패한 관급공사’의 전형이었다.대규모 건설공사에서는 필수 과정인 타당성 조사 조차 없이 설계도면부터 그린 것이 성수대교다. 성수대교의 공사 진행과정을 지난해 12월23일 개통된 가양대교와 비교해 보자.성수대교가안고 있었던 문제가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 94년 착공해 7년 만에 개통된 가양대교는 ‘타당성조사→기본설계→실시설계→설계감리→착공(상주 감리)→준공→유지관리’라는 7단계의 정상 수순을 밟았다. 반면 성수대교는 ‘기본 및 실시설계→착공(감리 없음)→준공’의 3단계만으로 모든 공정이 마무리됐다. 이는 다리 건설을 기획하는 단계에서부터 타당성 조사와 준공후의 유지관리라는 개념이 존재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기본설계와 실시설계가 분리·시행되지 않았으며,설계 및 시공에 대한 감리절차는 모두 생략됐다. 객관적 검증절차인 타당성조사는 고위층의 구두 지시로 대체됐다. [안전진단요? 그런 거 몰랐어요] 서울시 건설안전관리본부 정동진(丁東鎭) 교량관리부장은 “구조물이 한번 세워지면 붕괴되든, 헐어내든 없어질 때까지 치료는 고사하고 진료 한번 못받고 방치했던 게 당시의 관급공사 관리의 관행이었다.”고 말했다. 성수대교는 애당초 준공 후의 유지관리라는 개념이 없이 시작된 공사였기 때문에 사후 안전관리문제가 전혀고려의 대상이 되지 못한 것은 당연했다. 타당성 조사 단계에서부터 준공 후의 유지관리를 감안해 기획된 가양대교와는 달리 성수대교는 준공 당시 안전검사 요원들의 접근 통로조차 확보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준공후 무너질 때까지 15년여 동안 단 한차례의 안전진단도 받지 않았다. 대다수의 기억에서 잊혀져 가는 해묵은 사고를 다시 들춰보는 것은 여러 사람의 사소한 실패가 모이면 얼마나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함이다. 지난 79년 한강의 11번째 다리로 가설된 성수대교는 ‘용서할 수 없는 실패’의 전범(典範)으로 역사에 남아 있다. 특별취재반 yeomjs@ ■日정부, 세계 첫 DB화. [도쿄 황성기특파원] 일본 과학기술청(현 문부과학성)은 지난 2000년 8월 ‘실패지식활용 연구회’를 발족시켰다.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의 아들인 나카소네 히로후미(中曾根弘文) 당시 과기청장관이 실패학의 권위자인 하타무라 요타로(畑村洋太郞) 교수에게 자문을 받아 국가 예산을 투입,실패 지식을 체계화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히타치(日立)제작소·도시바(東芝)·후지쓰(富士通)등 일본 초일류 기업의 현장 책임자와 경영자,도쿄대·게이오(慶應)대의 학자,정부 관계자 등 20명에 가까운 회원들이 1년 동안 8차례의 회의와 미국 현지조사를 거쳐 ‘실패지식 활용연구회 보고서’를 냈다. 이 연구회는 현재는 ‘실패정보 수집위원회’로 이름을 바꾸어 활동하고 있다. 2005년까지 15억엔(약 150억원)의 예산을 들여 기계·재료 등 분야별로 실패 사례와 관련된 정보를 수집하고 체계적으로 데이터베이스(DB)화하는 작업을 수행하고 있다. marry01@ ■김학재 서울시 부시장. 김학재(金學載) 서울시 제2부시장은 “성수대교야말로 부패한 정치와 사회구조가 낳은 사상누각이었다.”고 말했다. 성수대교가 붕괴한 지 올해로 8년.아직까지도 붕괴를 가져온 원인은 ‘과시욕에 쫓긴 무모한 시도’와 ‘사후 안전관리 부재’라고 진단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얘기는 다르다.“성수대교 붕괴는 정치인들이 시민의 생명과 정치자금을 맞바꾼 결과였습니다.” 그는 “그 시대를 살았던 관료의 한 사람으로서 성수대교 문제를 거론하기가 부끄럽다.”고 했다. 한사코 손사래를 쳐대는 것을 “실패원인을 제대로 알아야 참된 실패지식을 얻을 수 있는 것 아니냐.”는 말로 설득해 겨우 말문을 열게 했다. 김 부시장은 “솔직히 당시의 설계나 기술 수준으로 우리가 교량을 건설한다는 것은 무리였다.”며 “어떻게 핀 하나만 꺾이면 무너지는 교량이 버젓이 지어졌으며,이런 교량으로 사람들을 다니게 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털어놨다. 성수대교 붕괴 이후 관료들이 비로소 ‘안전관리’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됐으며,이후 누구든 안전에 관한 한 ‘다른 소리’를 못하는 풍토가 조성된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했다. “‘한강에 멋진 다리 하나 만들라.’는 정치권의 구두지시에 타당성 검토조차 없이 졸속으로 만들어진 것이 성수대교와 당산철교였습니다.” 그는 “지금은 공무원 의식이나 관련 제도들이 ‘안전’을 다른 모든 것에 우선하는 개념으로 바뀌었지만 뒤집어보면 이런 성과도 참담한 실패에서 교훈을 얻은 결과”라고 말했다. 특별취재반. ■실패학 사전. 1.알려져 있는 실패 예방법과 해결책을 살피지 않은 무지. 2.평상심을 잃었을때 무심코 일어난 부주의. 3.결정된 약속사항을 지키지 않은 미준수. 4.상황을 올바르게 판단하지 못한 오판. 5.필요정보가 확보디지 않아 충분한 검토가 이뤄지지 못한 조사검토 부족. 6.최초에 설정된 제약조건이 변화했지만 이를 반영하지 못한 환경변화 미반영. 7.기획단계 자체에 문제가 있는 기획불량. 8.자신 또는 조직의 가치관이 잘못되어 일어난 가치관 불량. 9.일을 정확하게 진행할 만한 능력이 부족한데서 오는 조직운영 불량. 10.누구도 답을 모르는 미지. **특별취재반. 염주영 공공뉴스에디터(반장) 김용수 오일만기자(행정팀) 심재억 조덕현기자(전국팀) 구본영 김경운기자(정치팀) 김태균기자(경제팀) 강충식기자(디지털팀) 박홍기 확홍환기자(사회교육팀) 이종원기자(사진팀)
  • 日 교육기본법 개정 움직임

    일본 정부가 교육기본법 손질에 나섰다. 도야마 아쓰코(遠山敦子) 문부과학상은 26일 중앙교육심의회에 ‘새로운 시대에 알맞는 교육기본법의 모습’을 심의,제출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에 따라 교육기본법 개정에 대한 논의가 일본 정부는 물론 자민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에서도 불이 당겨질 것으로보인다. 일본 교육의 정신을 담고 있는 교육기본법은 2차대전 패전후인 1947년 시행된 뒤 단 한 차례도 개정되지 않았다. 기본법은 개헌론과 직결되는 문제여서 개정 논의 자체가 금기시돼 왔다.기본법 전문은 “일본 헌법의 정신에 따라 교육의 목적을 명시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과거 일왕의 신격화와 국가지상주의를 담은 ‘교육칙어’는 일제의 패전에 따라 의무교육과 교육기회의 균등을 기초로 하는 교육기본법으로 바뀌었다. 일본 헌법이 일본의 재무장이나 전쟁 포기를 천명한 중심축이라면 교육기본법은 이같은 평화이념의 정신을 지탱하는‘교육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50∼60년대 보수세력들이 “기본법에는 애국심을기술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며 끊임없이 법 개정을 주장해 왔다.대표적인 인물로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전 총리, 극우 논객인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가 개헌과 함께 기본법 개정을 요구하고 있다. 문부성의 법 개정 움직임과 관련,교직원 노조인 닛쿄소(日敎組)는 맹렬히 반발하고 있다. 닛쿄소의 한 관계자는 “기본법은 민주국가를 만들어 세계평화를 실현하자는 헌법의 이념을 실현하기 위한 것으로 50년이 지났다고 해서 낡은 이념이 된 것은 아니다”고 밝혔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한일협력위원회 제38차 합동총회

    한일 양국의 전직 고위 관료,학자,기업인 등 민간인사로구성된 한일협력위원회(한국측 회장 신현확·申鉉碻 전 총리,일본측 회장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는 22일 서울에서 제38차 합동총회를 열고 양국간 우호협력관계 증진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21세기의 한일협력 증진을 위하여'를 주제로 열린 총회는 ▲동북아시아평화유지와 한일협력 ▲동북아 자유무역지대 구축 ▲월드컵 공동개최 및 국민교류증진 ▲과학기술협력증진 등 정치·경제·문화·과학분야로 나눠 진행됐다. 특히 이번 총회에서는 김대중(金大中) 대통령과 고이즈미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 등 양국 고위 인사들의메시지가 발표됐다. 김 대통령은 한승수(韓昇洙) 외교장관이 대독한 메시지에서 “뜻하지 않게 역사교과서 문제 등으로 인해 어려운 국면을 경험했지만, 지난달 두 차례의 한일 정상회담을 통해경색되었던 양국관계 회복과 현안 해결을 위한 새로운 계기가 마련되었다”면서 양국간 우호협력 관계의 증진을 기대했다. 김수정기자 crystal@
  • 日 ‘전쟁 포기’ 헌법9조 폐기할듯

    일본 국회에서 미군 테러 보복공격 지원을 위한 특별법이제정돼 자위대의 해외 파병이 가능해짐에 따라 자위대의향후 행보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테러 근절을 위한 미군 지원이라는 명분을 업고 단숨에진행돼온 자위대 파병 결정 과정을 볼 때 자위대의 ‘마지막 족쇄’라고 할 수 있는 일본 헌법 9조의 개정도 그리멀지 않은 일로 여겨진다. 중의원 헌법조사회는 지난 25일 헌법 9조개정에 관한 논의에 착수했다. 지난해 1월 조사회가 설치된 이후 ‘전쟁 영구포기와 전력(戰力) 불보유’를 규정한9조에 관해 국회가 본격적인 논의에 돌입한 것은 처음이다. 자위대 파병 법안의 통과를 목전에 둔 시점에서 헌법 9조의 개정논의가 시작된 것은 시사하는 바 크다. 비록 제한적인 활동이지만 자위대 파병까지 가능하게 된마당에 자위대를 둘러싼 금기를 아예 없애자는 분위기가확산되고 있다는 점이다.자민당의 참고인으로 출석한 모리모토 사토시(森本敏) 다쿠쇼쿠(拓植)대 교수는 “테러에관한 일본의 국제공헌은 헌법의 틀로는 한계에 왔다”고밝혔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도 취임 직후 헌법개정을 언급한 바 있다.그를 측면에서 지원하고 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나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 등 보수주의자들도 일본이 ‘보통국가’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군대의 보유,집단적 자위권행사 인정을 포함한 9조 개정을 주장하고 있다. 도쿄신문은 “테러 특별법 제정에 머물지 않고 정부·여당이 노리는 종착점은 집단적 자위권 행사를 금지하고 있는 헌법의 개정”이라고 우려했다. 개헌에 이르기까지는 적지 않은 시간이걸리는 만큼 일본 정부와 여당은 유엔평화유지활동(PKO)협력법 개정이나 유사법제 제정을 통해 자위대 역할 확대를 꾀할 것으로 예상된다. 유사법제는 일본이 직접 공격받았을 때를 상정,자위대의활동을 뒷받침하는 여러가지 법제를 일컫는다.전시동원체제를 갖추겠다는 게 핵심이다.이 법안이 제정되면 사유지수용을 비롯한 물적·인적 동원이 가능하게 된다.일본 정부는 내년 1월 정기국회에 법안을 제출할 계획이다. 현재 개회 중인 임시국회에서는 유엔평화유지군(PKF)의본격적인 임무에 참가할 수 있도록 PKO 협력법 개정도 서두르고 있다. 92년 법 제정 당시 ‘위험한 임무’라는 점에서 동결돼온것이지만 자위대가 앞으로 PKF로서 위험한 임무도 가리지않겠다는 것이다. PKO 참가 때 무기사용 제한 범위도 크게완화할 방침이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말많은 다나카 12월 경질될듯

    일본 정가에서 개각론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다. 시기는 임시국회가 끝나는 12월 말.대상은 지난 4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 출범 이후 ‘자질론’에시달려온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상 등 일부 각료이다. 다나카 외상은 외무성 관료와의 마찰,미 테러 참사 직후미 국무부 직원의 대피장소 누설 등 끊임없이 자질 시비를불러온데다 친중(親中)·비미(非美)적 성향으로 보수 인사와 보수 언론들로부터 공격을 받아왔다. 보수 정치인의 대부라고 할 수 있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는 최근 고이즈미 총리에게 “장기집권을 염두에 둔다면 개각이 불가피할 것”이라고 충고,개각론에 불을 지폈다. 자민당 내에서는 고이즈미 총리가 내년 1월 정기국회에서본격적인 구조개혁을 펼치기 위해서는 내각의 쇄신이 필요하다는 명분을 내세워 총리의 결단을 촉구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20일 상하이(上海)에서 “아직 (정권출범)1년도 지나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도 않고 있다”고 개각설을 부정하고 있다.한번 각료로 기용하면 끝까지 함께간다는 ‘1내각 1각료’ 원칙을 천명한 바 있는 고이즈미총리지만 당내 압박이 거세지면 연말에 개각을 전격 단행할 공산도 적지 않다. 경질 대상으로 거론되고 있는 각료는 다나카 외상 외에보수당 당수직에서 물러난 오기 지카게(扇千景) 국토교통상,광우병 파동의 책임에 따른 다케베 쓰토무(武部勤) 농림수산상,부실채권 처리에 소극적인 야나기사와 하쿠오(柳澤伯夫) 금융담당상 등 6∼7명이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미·일 안보조약 50년/ (하) 강군으로 가는 자위대

    일본 자위대가 미·일 안보체제 50년을 계기로 세계 강군으로 날아오르고 있다.일본의 올해 방위비는 4조9,388억엔으로 국가 예산의 6.0%를 차지한다. 방위청은 2002년도 예산안을 올해보다 1.8% 늘어난 5조278억엔으로 책정,재무성에 제출했다. 방위비로는 일본은 경제력에 걸맞게 미국에 이어 세계 2위이다.엄청난 군사비를 투입하는 만큼 일본이 보유한 군사력은 최정예이다. 올해부터 2006년까지 중기 방위력 정비계획은 일본의 군비 증강이 헌법이 규정한 전수(專守)방위를 위한 것인지의심케 한다. 대형 호위함 2척(배수량 3,500t·1,900억엔)과 공중급유기 4대(900억엔)를 도입한다.호위함은 55인용 초대형 헬기MH53E 4대를 동시에 이·착륙시킬 수 있는 ‘경(輕) 항공모함’이다.83년 수직 이·착륙 전투기 ‘시어리얼’ 20대를 탑재할 수 있는 경 항모 건조 계획을 세웠다가 주변국반발과 미국의 반대로 포기한 적이 있다. 공중급유기도 일본의 방위에 과연 필요한지 의문시되는장비로 꼽힌다.공중급유기는 전투기의 작전반경을 크게 넓히기 때문에 자위대가 ‘해외 진출’을 염두에 두고 이들장비를 도입한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이밖에 ▲최신예 미사일 호위함인 이지스함 2척의 추가 도입(2,800억엔) ▲P3C 대잠수함 초계기 및 C1 수송기의 후속기 개발(3,400억엔) ▲정보기술(IT) 혁명에 대비한 소형 경량 전차 개발(500억엔) ▲전투기 F15의 현대화(250억엔) 등도 포함돼 있다. 이들 장비 도입에는 5년간 25조1,600억엔(한화 260조원)이 들어간다.한해 0.6%씩의 방위비 증액이 불가피하다.긴축재정을 강조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내각이지만 방위비는 예외이다. 자위대의 강군 행진은 장비 뿐 아니다.이들 하드웨어(최첨단 무기)를 운용할 소프트웨어(법률 정비)를 갖추는데도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전쟁을 포기하고 전력을 갖지 않겠다고 약속한 ‘평화헌법’ 제9조의 폐기론이다.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를 정점으로하는 보수파에서 일관되게 펴고 있는 개헌론은 고이즈미총리도 “개헌이 좋다는 논의가 있다면 당연히 개헌해야할 것”이라고 적극 지지하고 있다. 국회헌법조사회는 2005년까지 개헌 시안을 만들 계획이다. 그러나 아직 전쟁을 경험한 세대를 중심으로 9조 개정에는 반발이 많다. 지난 5월 아사히(朝日)신문 여론조사에서는 개헌 찬성이 47%였으나 9조 개정에는 74%가 반대했다. 유사법(有事法) 제정 논의도 한창이다.일본이 침공받았을때를 대비한 법 제정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상 ‘전시동원법’의 성격을 띠고 있어 야당을 중심으로 반발이 크다.유엔 평화유지활동(PKO) 참가를 확대하기 위해 국회에서 법개정을 추진 중이다.자위대의 도약을 주변국과 동맹국 미국이 어디까지 용인할지는 미지수이지만 동북아에서 일본의 역할을 강조하고 있는 미국은 적어도 아시아 패권을 다투지 않을 정도까지는 일본의 변신을 허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주일미군 현황. 일본에는 4만명의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해병대가 절반정도인 1만9,600여명으로 가장 많고공군 1만3,200여명,해군 5,400여명,육군이 1,700여명의 순이다.미·일 안전보장조약이 발효된 52년 4월의 26만명과 비교하면미군 숫자는6분의1 이하로 크게 줄어들었다. 주일 미군은 동북 아시아 유사시,특히 한반도 전쟁에 대비한 병력이다.한반도 유사시 1단계로 일본의 미사일 기지와 가데나(賀手納) 공군기지에서 F15,F16 전투기 편대가곧바로 증원되며 한반도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전중인미 항모 전투단이 이어 투입된다. 주일 미군 병력과 도쿄 인근의 요코스카(橫須賀)항을 모항으로 하는 미 제7함대 소속 해상 병력 2만여명도 증파된다.이어 2단계로 미 본토에서 2개 군단 10만여명과 3,4개항모 전투단이 추가로 투입되고 필요시에는 B1,B-52 장거리 폭격기가 태평양을 횡단해 한반도에 배치,적 주요시설에 대한 폭격 준비에 들어간다. 주일 미군은 1986년 2월 일본의 자위대와 육·해·공 3군합동도상훈련을 실시한 이후 해마다 유사시를 대비한 공동통합훈련을 실시하고 있다.주둔 병력은 줄었지만 일본정부가 주일 미군 주둔에 부담하는 경비는 계속 늘어 2,755억엔(2000년도 예산 기준)을 부담하고 있다.미군 병력 1인당 688만엔을 부담하는 셈. 일본과의 최대 현안은 오키나와(沖繩)현 해병대 비행장인후텐마(普天間)기지를 비롯한 오키나와 기지 축소·이전과불평등한 미일 주둔군지위협정의 개정이지만 미일 양국정부가 소극적이어서 좀처럼 진전되지 않고 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 고이즈미 日총리 최대 정치위기

    [도쿄 황성기특파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로 취임 이후 최대의 정치 위기에 몰렸다. 야당은 그의 참배가 주변국을 자극,일본에 외교적 손상을입힌 것은 물론 헌법 위반의 소지가 있다고 맹공을 퍼붓고있는가 하면 여당조차도 그의 일관되지 못한 언행을 놓고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지난 11일부터 휴가에 들어간 고이즈미 총리가 업무에 복귀해 어떻게 위기상황을 풀어나갈지 미지수이지만 참의원선거 이후 지지도 하락에 가속도가 붙을 것으로 보인다. ◆야당의 공격=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13일 야스쿠니 참배때 몸을 깨끗이 하는 신도 의식(액막이)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고 요미우리(讀賣)신문이 16일 보도했다. 야스쿠니 신사측은 “보통의 참배 형식을 취했다”고 말해 그가 액막이 의식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다.신도 의식은 지난 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일본 총리로서는 처음으로 공식 참배했을 때 헌법의 정교 분리 원칙에 저촉될 가능성이 있다며 피했던 것이다. 고이즈미 총리가 신도 의식을 받은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야당측은 위헌 여부를 따지며 정치 공세에 나설 태세다. ◆여당의 공격=자민당내 보수세력들은 그가 당초 계획보다이틀 앞당겨 참배한 것을 두고 “중국과 한국에 굴복했다”고 비난한 데 이어 패전기념일인 15일의 발언에 대해서도불쾌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는 15일 전몰자 추도식에 참석,“우리나라는 아시아인들에게 다대(多大)한 손해와 고통을 끼쳤다” 전쟁의 가해 책임이 일본(우리나라)에 있음을 처음 언급한 바 있다. 자민당의 히라사와 가쓰에이(平澤勝榮) 중의원은 “모든일본인이 나쁜 일을 한 것처럼 느껴진다”고 비난했으며 일부 의원 등은 고이즈미 총리가 유족들 앞에서 그같은 표현을 사용한 데 대해 “지나쳤다”,“검증할 필요가 있다”고 트집을 잡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를 실현시키는 초당파 국회의원 모임’도 긴급 총회를 열어 총리의 8·15 참배 회피와 가해 책임 언급을 비난했다.이들은 “중국과 한국의 영향을 받은참배가 된 것은 지극히 유감”이라면서 고이즈미총리가 내년에는 반드시 8월 15일에 야스쿠니 참배를 실현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marry01@
  • 在日 박철희교수 “日우익만 떼내 선별 대응을”

    “일본을 객관적, 총체적으로 파악하지 않고서는 일본에대한 전략적인 대응은 어렵다고 봅니다” 일본 국립정책연구 대학원대학의 박철희(朴喆熙) 조교수는 14일 “일본을 정확히 알고 대처하는 국가 전략 시스템의 구축이 절실하다”고 강조했다.다음은 일문일답. ●한국의 일본 연구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일본을 너무 모른다. 특히 현재의 일본 문제에 대한 객관적,실증적 연구가 부족하다.우리의 일본 연구라는 게 일본과의 과거사, 식민지배와 관련된 부분에 연구가 몰려있다. 역사랄지 경제,산업 같은 분야를 제외한 심층적인 부분,즉일본 사회나 정치에 대한 이해는 일천하기 짝이 없다. ●그 이유는. 코 앞에 일어나는 한·일간의 문제를 해결하고 불 끄는데조급했다.객관적·총체적인 연구가 부족했다. ●일본 이해 부족의 영향은. 일본 사회의 다양성을 이해해야 한다.우리는 우리가 보고싶어하는 일본 만을 본다. 거울처럼 보고 싶어한다.그래서는 객관적인 연구가 되지 않는다.일본이 어떻게 움직여 가고 있는가, 현실적으로는 다양한 흐름이 있는데 이를 무시하고 어는 한쪽 만을 볼 때는 큰 오류를 낳기 쉽다. ●다양한 흐름이란. 대표적인 것으로는 일본의 보수화 문제를 들 수 있다. 흔히 한국에서 보수라 하면 우경, 우익세력이라고 하고 이들을 척결해야 한다고 한다. 그러나 보수정계만 해도 스펙트럼이 넓다. 같은 보수라 해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 지사 사이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이 차이를 인식할 수 있는 사람은 손꼽을 정도가 아닌가 싶다.보수세력을 뭉뚱그려 우경으로 몰아치기 보다는 이들을 세밀히 분류해 내 선별적으로 대응하는 전략이 필요하다.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나 문제나 교과서 문제의 경우는. 교과서 검정제도랄지 종교법인인 야스쿠니 신사에 국가가관여할 수 있는 재량은 제한돼 있다.그런데 한국에서는 자세한 실정을 모른다. 일본이 왜 이 같은 시스템으로 돼 있는 지 알고 대응한다면 보다 냉정한 대처가 가능할 것이다. ◇박철희 교수는 63년 충주 출신으로 서울대 정치학과 석사를 거쳐 미 콜럼비아 대학서 일본 정치 연구로 정치학박사학위를 취득했다.95년부터 2년간 일본 세계평화연구소 객원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일본 국립정책연구 대학원대학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정계재편의 연구’,‘국회의원이 만들어지는 방법’ 등의 저서를 일본에서 출간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 8·15특집 한일관계 갈등을 넘어/ 日·獨 두패전국 다른모습

    1985년 상반된 두 사건이 있었다.독일(당시 서독) 리하르트 폰 바이츠제거 대통령은 5월 2차대전 40주년 기념연설에서 “과거에 눈을 감는 자는 현재에도 눈을 감는다”며과거청산 노력을 재천명했다.8월 같은 2차대전 패전국인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총리는 전범이 합사된 야스쿠니(靖國)신사를 공식참배,주변국의 거센 항의를받았다. ‘기억’과 ‘망각’.독일과 일본이 걷고 있는 각기 다른길이다. 두 나라의 판이한 전후 처리 자세는 21세기 들어서도 계속되고 있다. 독일은 철저히 ‘기억’하고 ‘책임’을 져야만 독일의‘미래’가 보장됨을 알고 있다.지난해 7월 독일이 미국이스라엘 폴란드 체코 등과 서명한 ‘나치시대 강제노역배상에 관한 국제협정’제목은 ‘회고,책임,미래’다.세계각지에 흩어진 150만 강제노역 생존자들에게 100억 마르크(약 6조5,000억원)규모의 배상금이 곧 지급된다. 2차대전 종결 후 지금까지 독일 정부가 지불한 배상액은600억달러.홀로코스트의 피해자인 유대인뿐 아니라 점령한주변국들에 대해 현재까지 철저한 보상을 해오고 있다. 독일정부와 기업,시민사회가 적극 동참한 결과. 다임러 크라이슬러,지멘스 등 독일을 대표하는 35개 기업들은 배상금기부를 통해 나치시대에 자신들이 저질렀던 유대인 강제노역등 반인륜 행위에 대한 책임을 행동으로 실천하고 있다. 일본은 어떤가.지난 3월 일본 도쿄 지방재판소는 한국인40명이 제기한 강제연행 피해보상 소송을 기각했다. 해외거주 피폭자들이 제기한 “일본 국내 피폭자와 동등한 대우을 해달라”는 요구도 “검토중”,“가능하면 연내”라는 말만 되풀이하고 있다.국제사회의 압력이 거센 군대 위안부 문제도 마찬가지다.당연히 정부차원의 보상은 제로다. 1970년 12월7일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92년 사망)는 바르샤바 유대인 위령탑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독일은 국민들에게 나치의 잘못이 무엇이었는지를 알리는데주력한다. ‘집단범죄’에 대한 철저한 반성.나치 독일과 같이 정부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갈 때 이를 저지할 국민 역량을 강화하는 것이 교육목표다.프랑스 폴란드 등 이웃 나라와 ‘역사편찬위원회’를 구성해서 만드는 역사 교과서에는 나치 만행을 상세히 기술한다. 홀로코스트 등 집단주의 부산물에 대한 역사 부정은 범죄로 취급된다.정치인 등 공인이 나치시대 향수를 거론하면사임하겠다는 뜻이나 마찬가지. 반면 일본은 어떤가.정부는 침략을 미화한 왜곡 역사교과서를 용인하고 이웃국가의 항의를 내정간섭이라고 반발한다.국민들의 우경화 움직임은 오히려 정부가 나서 부추긴다.관동대학살,난징대학살은 모른 체하며 원폭 피해자라는것만 강조한다. 패전 후 경제강국으로 부상한 독일과 일본.독일은 통일을이룩한 뒤 거침없이 유럽 통합을 주도해왔다. 주변국의 협력이 있었기에 가능한 위업들이다.일본도 과거사를 진심으로 반성하는 독일에서 교훈을 얻어야한다. 김수정기자 crystal@
  • 방명록에 총리 직함…사실상 공식 참배

    13일 전격 단행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의 자격은 공인인가, 개인인가. 고이즈미 총리는 참배 후 기자회견에서 “헌화료는 개인돈에서 냈다.공인(公人)이든 사인(私人)이든 고집하지 않는다”고 말해 참배자격을 분명히 하지 않았다.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때 공사를 구분하는 기준은본인이 자격을 밝히는 데 100% 의존하고 있다. 이같은 애매모호한 기준에도 불구하고 고이즈미 총리의참배는 공적인 성격이 짙다. 헌화료를 개인 돈에서 냈다고는 하지만 야스쿠니 신사에갈 때 총리 전용의 공용차를 사용한 것은 물론이고 방명록에도 ‘내각 총리대신 고이즈미 준이치로’라고 써넣음으로써 공적 성격을 뒷받침했다. 다만 두차례 절을 하고 두차례 박수를 친 뒤 한차례 절을하는 신도(神道) 형식은 정경분리라는 헌법정신에 어긋나어느 총리도 한 적이 없다.고이즈미 총리도 한차례 절을했다. 지금까지 공적 자격임을 밝히고 참배한 사람은 지난 85년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 1명 뿐이다. 미키다케오(三木武夫) 전 총리 등은 개인 자격임을 밝혔고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전 총리 등은 고이즈미 총리처럼 자격을 밝히지 않았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 “”고이즈미 참배 자제를”” 英 이코노미스트지 촉구

    [런던 연합]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일본 총리의 야스쿠니 신사 참배 자제를 촉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11일자에서 '日총리 야스쿠니 신사 멀리해야'라는 제목으로 고이즈미 총리가 일본의 제2차 세계대전 항복기념일인 오는 15일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할 가능성이 높다면서 이로 인해 2002년 월드컵 공동개최국인 한국과 중국, 그리고 연정파트너와 자신의 소속정당내 다수와 불화를 일으키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 잡지는 “”독일 총리들은 히틀러,괴링,히믈러 등과 같은 사람들과 독일 국수주의를 기념하는 장소는 방문하지 않는데 비해 오히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신사가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장소일 뿐만 아니라 일본 국수주의의 상징이기 때문에 가고 싶어 한다””고 꼬집었다. 야스쿠니 신사가 그토록 상징적인 것은 일부에서 도조 히데키 장군을 지롯해 지난 46~48년 도쿄 전범재판소에서 A급 전범으로 유죄판결을 받았던 10여명의 영혼이 이곳에 있다고 보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잡지는 야스쿠니 신사측은 이 문제에관한한 일본 여론의 주류는 분명히 아니나 이 신사는 옆에 있는 전쟁박물관과 함께 일본이 전쟁중 행동에 대해 사과할 필요가 없다고 믿는 사람들의 숭배장소가 됐다고 전했다. 이 잡지는 야스쿠니 신사의 역사 등을 설명하면서 전후 일본 총리들은 지난 85년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방문을 제외하고는 국내외의 반발을 우려, 야스쿠니 신사를 엄청나게 조심스럽게 대해왔다고 말했다. 잡지는 또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대신 전범이 아닌 전몰자들을 추모하는 장소를 방문하는 것이 일본을 위하는 길이라고 말했다.
  • 고개숙인 ‘신사참배 반대론’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총리의 야스쿠니(靖國)신사 참배를 둘러싸고 일본 곳곳에서 찬반 집회가 가열되는 가운데 고이즈미 총리는 6일 히로시마(廣島)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8월15일 야스쿠니신사 참배 계획에 대해 “(여당간부 등의)의견을 듣고 있는 중이다. 좀더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고 교도통신이 보도했다. 하지만 최근 야스쿠니 참배에 반대해오던 정부와 여당 내의 목소리가 점차 약화되는 데다가 여론도 찬성쪽으로 기울고 있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는 기정사실로 굳어지는분위기다.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신사 참배 계획에 가장 강력하게반대해온 다나카 마키코(田中眞紀子) 외상이 지난주 더이상관여하지 않겠다고 물러선데 이어 그간 신중론을 펴왔던 야마사키 다쿠(山崎拓) 자민당 간사장도 사실상 야스쿠니 참배 찬성쪽으로 기울었다. 야마사키 간사장은 5일 후지TV 프로그램에 출연,“일본은이웃나라와의 관계를 훼손하지 않도록 최대한의 배려를 해야 한다.그러나 이웃나라와의 관계가 어느 정도 악화되더라도 야스쿠니참배는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일본 언론들은 전했다.그는 또 고이즈미 총리의 역사인식을명확히 담은 담화 발표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야마사키 간사장은 이어 1985년 신사 참배를 강행했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당시 총리가 절을 한차례만하는 것으로 신도(神道)의식을 비켜갔다는 점을 예로 들면서 “고이즈미 총리도 이를 답습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일본에서는 통상 신사참배 때 ‘2번 절,2번 박수,1번 절’하는 신도의식을 지켜왔다. 또 아베 신조(安部晋三) 관방부장관은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 위헌론에 대해 “정부의 통일된 의견은 총리의 사적(私的) 참배는 헌법 위반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아베 부장관은 야스쿠니에 합사된 태평양전쟁 A급 전범 위패 문제와 관련,“전범은 국민운동에 의해 사면,석방됐다”며 전범에 대한 법적 명예가 회복됐음을 강조했다. 한편 후지TV가 이날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총리의 신사 참배 계획에 찬성한 답변이 49.8%로 나타나 반대하는 응답 43.2%를 웃돌았다. 이동미기자 eyes@
  • [고이즈미 대해부] (1) 신사 공식참배 고집

    29일의 일본 참의원 선거 결과는 ‘고이즈미 열풍’에 의존한 자민당 대승으로 요약된다.압승의 여세를 몰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는 이제 일본 열도 개혁에 발을 내디디려 하고 있다. 일본 국민이 선택한 고이즈미 총리는 누구인가. 인물 고이즈미를 시리즈로 분석해 본다. 참의원 선거가 끝나면서 일본 정국의 초점은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공식 참배쪽으로 급격히 옮겨가고 있다. 고이즈미 총리가 참배를 강행할지, 아니면 주위의권유를 받아들여 포기할지를 단언키란 무척 어렵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선거 승리의 주역인 고이즈미 총리가여론과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기세를 타고 참배할 것이라는 관측이 점차 힘을 얻어가고 있다는 점이다. 일각에서는 선거도 끝났고 한국과 중국이 거세게 반발하고있는 만큼 슬그머니 발을 빼지 않겠느냐는 추측도 나오고있다.그러나 이는 다분히 참배 철회의 ‘희망사항’을 섞은착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중지를 촉구한 일본 변호사연합회의 후지하라 세이고(藤原精吾) 부회장은 “한다고 하면 결행하는 그의 평소 성격으로 볼 때 (참배)하러 가지 않겠느냐”고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야스쿠니 참배 얘기만 나오면 그럴 수 없이 진지해진다.그는 왜 야스쿠니에 그토록 집착하는 것일까. 그가 일본 정계에서 보수의 맥을 잇는 인사라는 데는 그누구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는다.그러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 같은 ‘보수 확신범’ 계열에 그를 포함시킬 수 있는지에 이르러서는 의견이 엇갈린다. 그의 30년 정치 행적,발언으로 따져볼 때 정치적 DNA는 이들 보수 매파보다는 보수 온건 쪽에 가깝다.서방 언론들은그를 국수주의가 아닌 국가주의(내셔널리즘) 정치인으로 분류한다. 야스쿠니에 대한 집착을 ‘보수 우익’이라는 단 하나의키워드만으로 풀기 어려운 점이 바로 여기에 있다.그런 점에서 그의 야스쿠니 집착증을 형성하고 있는 조각들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된다. 고이즈미 총리는 “총리건 개인이건 국가를 위해 희생한전몰자를 참배하는 게 헌법 위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일관되게 말하고 있다.야스쿠니에 가겠다는 이유 치고는지극히 단순명료하다. 이전에도 그는 각료나 의원 자격으로공식 참배를 했다. 그는 지난 5월 21일 국회에 출석,“가족과 떨어져 전장에간 사람의 기분은 어떠했을까.특공대에 비하면 총리의 고생은 아무 것도 아니다”고 말했다.3대 세습 정치인인 고이즈미 총리의 아버지는 고향이 제2차 세계대전 가미카제(神風)특공대의 발진기지 지란(知覽)비행장이 있던 가고시마(鹿兒島)이다. 그는 자주 가고시마를 찾는다.그곳 박물관에 전시된 특공대원의 유서를 읽고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그의 아버지쪽 친척중에도 특공대로 죽은 사람이 있다. 그의 애독서는 자살특공대로 몸을 던진 해군비행 예비학생 제14기의 ‘아아, 동기(同期)의 사쿠라’이다. 이런 파편들이전몰자와 이들의 위패가 있는 야스쿠니에 대한 고이즈미류(流)의 집착과 향수(鄕愁)를 형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그의 보수 성향,개인적인 집착이 총리라는 일국의지도자라는 직위에서 아무런 여과없이 나타난다면 문제는달라진다.일왕을 위해 맹목적으로 목숨을 버리는 행위를 애국심과 동일시하고 대동아전쟁을 아시아 민족해방 전쟁이라고 억지를 부리며 총리의 공식 참배를 부르짖는 극우 보수주의자들과 크게 다를 바 없게 된다. 한국과 중국이 야스쿠니 참배를 반대하는 이유도 바로 일본을 전쟁으로 밀어넣고 아시아를 침략과 식민지배의 고통으로 빠뜨린 A급 전범들이 바로 야스쿠니에 합사돼 있기 때문이다. 아사히(朝日)신문은 30일자 사설에서 이렇게 고이즈미 총리에게 충고하고 있다.“총리의 언동(야스쿠니 참배)이 어떤 정치·외교적 영향을 불러일으킬지에 대한 깊은 통찰이없으면 지도자로서 자격이 없다.아시아에서 불신을 받고 고립되어서는 이 나라의 미래는 없다”고….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日 자민 압승 이후.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이끄는 집권자민당의 참의원 선거 낙승에도 불구하고 한일관계가 단기간에 개선될 조짐은 보이지 않고 있다. 정부는 그동안 ‘참의원 선거의 표심(票心)’을겨냥,대외강경책을 구사한 고이즈미 내각이 소기의 성과를 거둔 만큼외교정책의 유연성을 회복하지 않겠느냐는 기대를 피력해왔다. 정부 당국자는 30일 “고이즈미 총리가 역사교과서 및 신사참배 문제,‘미국 편중,아시아 경시’라는 대외정책 등을둘러싸고 내부의 비판여론도 적지 않아 적절한 시점에 한·중 등과 관계회복에 나설 것으로 기대한다”면서 “일본이조만간 전향적인 자세변화를 보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또 다른 당국자는 그러나 “일본이 외교적 유연성을 회복할 ‘적절한 시점’이 ‘내달 15일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이후’나 될 것”이라고 전망했다. 정치지도자로서 여론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고이즈미총리가 신사참배 공언을 갑작스럽게 뒤집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당국자는 “고이즈미 내각은 선거 결과 자신감을 바탕으로 오히려 신사참배나 교과서문제 등에서는 기존 방침을견지할 것으로 보인다”면서 “현재로선 일본이 특별한 변화를 꾀하려는 어떤 징후도 없다”고 밝혔다. 그는 이어 “신사 참배까지는 냉각기,이후에 점차 유화움직임을 보일 것으로 기대하지만,이 또한 불투명하다”고 말했다.여기에는 오는 9월 자민당 총재선거나 국내 구조개혁일정 등을 감안,고이즈미 내각이 대외강경론과 보수색깔을일정 기간 고수할 것이라는 추측이 깔려 있다. 실제 이날 도쿄(東京)에서 열린 한일 꽁치협상이 결렬되는등 한일관계의 전망은 여전히 불투명한 상황에 놓여 있다. 박찬구기자 ckpark@
  • “총리 신사참배는 위헌”

    [도쿄 황성기특파원] 일본 변호사 연합회(日辯連·닛치벤렌)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총리의 야스쿠니(靖國) 신사 공식참배 중지를 촉구하고 나섰다. 일본 최대의 법률가 단체인 닛치벤렌이 총리의 신사 참배중지를 요구한 것은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닛치벤렌은 지난 86년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의 공식 참배 중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나카소네 총리는 그 해참배를 하지 않았다. 구보이 가즈마사(久保井一匡) 닛치벤렌 회장은 26일 삿포로(札幌)시에서 성명을 발표,“총리가 종교법인인 야스쿠니 신사를 공식참배하는 것은 헌법 20조 3항이 금지하는 종교적 활동에 해당하는 위헌행위”라면서 “헌법 존중옹호 의무를 지니는 총리임을 고려해 참배를 하지 않도록 요구한다”고 밝혔다. 닛치벤렌은 1만8,300여명의 변호사가 소속돼 있는 일본 최대의 변호사 단체이다.닛치벤렌은 지난 25일 구보이 회장과 12명의 부회장이 회의를 갖고 성명을 발표하기로 의견을모았다. 후지하라 세이고(藤原精吾) 부회장은 “일본의 전쟁책임을묻는 문구도 성명에 넣자는 얘기도 나왔지만 일부 반대의견이 있어 회장단 전원이 의견일치를 본 위헌 부분만을 다루었다”고 전했다. 제1야당인 민주당의 간 나오토(菅直人) 간사장도 미야자키(宮崎)시에서 기자회견을 갖고 한국,중국이 고이즈미 총리의 야스쿠니 참배 계획에 강력반발하고 있는 데 대해 “외교에 대한 총리의 식견이 의심스럽다”면서 “(그렇게) 무책임한 사람에게 총리를 맡겨서는 안된다”고 비판했다. marry01@
  • 한·일 교과서 갈등/ 야스쿠니 신사를 가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야스쿠니(靖國)신사 공식 참배의 뜻을 굽히지 않고 있다. 종전기념일인오는 8월 15일 참배가 실현되면 걷잡을 수 없는 파동이 예상 된다.파동의 폭발력을 알고 있는 만큼 한국과 중국이 몇차례 참배 계획 철회를 요구했는가 하면 일본 여야와 언론들도 자제를 당부하고 있다. 한낮 기온이 35도까지 올라간 16일 찜통 같은 날씨에도 도쿄(東京) 시내의 야스쿠니 신사는 참배객, 외국 관광객들로발 디딜 틈 없이 붐볐다. 신사측이 해마다 이맘때쯤 개최하는 ‘마쓰리(축제)’ 마지막 날이어서 마쓰리를 즐기려는사람도 적지 않아 보였다. 신사 입구의 양쪽에는 대동아전쟁을 비롯,러·일, 청·일전쟁 등에서 숨진 전몰자의 유족들이 영혼을 기리기 위해설치한 크고 작은 등불 2만여개가 빽빽이 들어차 있다. 경내에 들어서니 옛 일본군 차림의 집단 참배객들이 눈에띈다.전장에서 숨진 동료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1년에 꼭 3차례 참배하러 온다는 해군 출신의 후쿠다 요시카쓰(福田義勝·84·도쿄 거주)씨는 “고이즈미 총리가 야스쿠니를 참배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말했다. 1938년 21살의 나이로 징병돼 캄차카 반도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까지 근무했다는 후쿠다씨는 “50년이나 지난 일인데 언제까지 과거에 얽매여 한국이나 중국에서 반발하느냐”고 반문하면서 “참배는 정치문제라기보다 인정(人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덧붙였다. 고이즈미 총리도 후쿠다씨처럼 “국가를 위해 희생한 전몰자에게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오는 참배를 하는 건 헌법을 어기는 일이 아니며 일반 전몰자와 A급 전범을 구별할 필요가없다”며 참배를 강행하려 하고 있다. 그가 개인 자격이 아닌 총리로서 공용차를 타고 가서 방명록에 총리라는 직함을쓰는 공식 참배가 될 경우 그의 논리와는 달리 문제는 달라진다. 야스쿠니 신사에는 제2차 세계대전의 전쟁 책임을 묻는 도쿄 재판 때 A급 전범으로 분류돼 처형된 도조 히데키 전 총리 등 14명이 합사(合祀)돼 있다.78년 10월 신사측이 몰래이들을 합사했다가 6개월 뒤에서야 합사 사실이 드러났다. 한국,중국 등은 전범이 합사된 신사의 공식 참배를 “일본이 전쟁을 반성하지 않는 행위”로 간주하고 있다.총리로서는 처음으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총리가 공식참배했고 한국·중국과의 외교 관계가 경색된 85년 이후로는 주변국 배려 차원에서 어떤 총리도 공식 참배를 하지 않았다. 고이즈미 총리가 역대 총리로는 두번 째, 16년 만에 신사참배를 고집하는 데에는 정서적 뿌리가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역시 정치가였던 부친의 고향이 가미카제(神風) 특공대의 발진기지였던 가고시마(鹿兒島)라는 점이 시사하는 바는크다. 그는 기회가 있으면 가고시마를 찾는다. 그가 즐겨 읽는 책이 자살 특공대로 몸을 던진 해군비행예비학생 제14기의 ‘아아,동기(同期)의 사쿠라’라는 사실은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도이 다카코(土井 たかこ) 사민당 당수는 “전범들에게 ‘전쟁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면서 “유럽의 피해국들이 히틀러에게 헌화하는 것을 바라보는 것과 마찬가지가 아니냐”고 추궁했다. 고이즈미 총리의 공식 참배가 갖는 상징성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두번 다시 전쟁을 일으켜서는 안된다”는 고이즈미 총리의 주장과는 달리 전범이 합사된 신사 참배는 과거 전쟁의인정이라는 의미에서 한걸음 나아가 전쟁이 가능한 국가를지향하는 것으로 해석될 소지가 크다.주변국들의 반발은 바로 이 같은 군사대국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을 우려하기 때문이다. 극우 보수세력들이 총리의 참배를 부르짖는 이유도 바로야스쿠니 신사를 통해 확대재생산되는 전쟁에 대한 향수를노리고 있어서다.메이지(明治) 일왕 때인 1879년부터 일왕의 명령으로 전장에 나가 전사해 이곳에 합사되면 ‘신’이된다고 하는 ‘신화 시스템’을 야스쿠니는 지니고 있다. 그러나 일본의 보수우경화 흐름과 관련해 고이즈미 총리취임 이후 야스쿠니 공식 참배를 우호적으로 보는 국민들이늘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반대하는 일본인도 적지 않다. 특히 젊은층은 그렇다. 야스쿠니 신사의 마쓰리를 보러 왔다는 이지마 겐(飯島健·20·대학 2년)씨는 “한국과 중국에서 강력 반발하는 공식 참배를 총리가 굳이 하려는 이유를 모르겠다”고 말했다. 아사히(朝日)신문은 최근 사설을 통해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 참배가 헌법위반이라고 지적했다.신문은 “참배에는 근린 제국에 대한 배려가 필요할 뿐만 아니라 국가는 어떠한종교적 활동도 해서는 안된다”며 참배 자제를 촉구했다. 중·일 외교 마찰의 현장을 보기 위해 야스쿠니 신사에 들렀다는 한 중국인 관광객(25·엔지니어·상하이 거주)은 “신사를 둘러보니 일본이 얼마나 호전적인 국가였는지 실감했다”면서 “고이즈미 총리는 일본의 전쟁 책임을 분명히한다는 점에서 공식 참배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marry01@. ●야스쿠니 신사. 야스쿠니(靖國)신사는 1869년 일왕을 떠받들고 서양 세력에 반대하는 세력의 영혼을 기리기 위해 ‘도쿄 초혼사(招魂社)’란 이름으로 지어졌다. 10년 뒤 야스쿠니로 이름을바꿔 육·해군이 관리를 맡았다. 군대가 신사를 소관한 점은 바로 야스쿠니 신사를 한국, 중국 등 주변국이 경계하고우려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 2차 세계대전 승리 후 일본에 진주한 연합군사령부(GHQ)는▲국가와의 관계를 끊고 종교시설로 남거나 ▲종교색이 없는 전몰자 시설로 바꾼다는 두 가지 안을 신사측에 제시,야스쿠니는 종교시설 쪽을 택했다. 현재 야스쿠니에는 대동아전쟁 때 숨진 213만 3,760명을비롯,청·일,러·일 전쟁 등 근대 이후 일본의 크고 작은전쟁에서 숨진 246만6,344명이 합사돼 있다.이 가운데는 종전 직후 연합국이 주도한 도쿄 재판에서 A급 전범으로 분류돼 처형된 14명이 78년 몰래 합사됐다. 자민당 내부에서는 총리의 신사 참배를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이들 A급 전범을 다른 신사로 옮겨야 한다는 ‘분사(分祀)론’을 제기했으나 신사측의 강력한 반대로 유야무야됐다. A급 전범이 합사되기 전에는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전 총리가 75년 종전기념일인 8월 15일 처음으로 개인 자격으로참배했으며 합사 이후에는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전 총리가 유일하게 총리 자격으로 85년 참배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 야스쿠니 관련 일지. ■1946년 2월 국가 신도(神道)로서 신사·신도 폐지■75년 8월 미키 다케오 총리,종전기념일 첫 참배(개인 자격)■78년 10월 A급 전범 합사■85년 8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첫 공식 참배■85년 9월 중국 외교부,공식 참배 비난■86년 8월 나카소네 총리,공식 참배 보류 발표■91년 9월 센다이 지방법원,“야스쿠니 공식 참배는 위헌” 판결■99년 8월 노나카 히로무 관방장관,A급 전범 분사안 제기■2001년 5월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참배는 위헌 아니다”고 참배 강행 의사 표명
  • [사설] ‘제주 평화선언’의 함축

    지난 15일부터 제주도에서 열린 ‘제주 평화포럼’이 17일‘제주 평화선언문’을 채택한 것은 향후 남북관계 발전의비전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평화선언’은 남북정상회담 정신의 계승을 바탕으로 한반도와 동북아를 총망라하는 평화와 번영의 지식공동체 형성,한반도의 분쟁예방 및 신뢰와 평화체제 구축,‘남북평화센터’ 설립,제주의 한반도·동북아·세계평화 구축의 견인차 역할 노력등을 포함하고 있다. 무엇보다 이번 평화포럼의 성과는 ‘상호 관용과 인내,화해에 기초한 남북교류와 협력의 확대만이 냉전의 마지막 고도인 한반도에 평화공존과 통일을 실현시키는 가장 확실한대안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는 데 모아진다.포럼에 참가한 세계적 석학들과 국내외 남북관계 전문가들은 이런 결론과 함께 안정적인 남북관계 및 긴장완화를 위해서는 김정일북한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과 제 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가 긴요하다는 데 공감대를 이뤘다고 한다.김대중 대통령도“김 위원장의 연내 답방을 확신한다”면서 남북정상회담의 정례화를강력히 희망했다.뿐만 아니라 미국의 조지 W부시 대통령과 일본의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총리,옛 소련의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노태우 전 대통령이 영상메시지를 통해 남북정상회담 한돌을 축하하고화해·협력 분위기가 이어지기를 기원했다. 이처럼 제주 평화포럼은 남북 화해·협력만이 남북이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고 세계평화를 위해 나아갈 길이라는점을 재확인했고 또 이를 위해서는 남북대화가 필수적이라는 점을 천명했다.평화 외에는 선택이 없다는 공감대를 바탕으로 우리는 한시라도 빨리 남북당국이 그동안 중단된 대화를 다시 시작하기 바란다. 때마침 남북한이 지난 15일 남북정상회담 한돌을 맞아 축하 메시지를 교환한 것은 관계복원의 청신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북한이 남한에 보낸 메시지에서도 밝혔듯이 우리는‘북남공동선언이 21세기 우리 민족이 나아갈 공동 이정표’라는 인식아래 남북문제는 남북당사자가 주도적으로 풀어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북한도 주저하지 말고 각급 대화에나서 현안을 풀어 나가며 화해·협력하는 모습을 세계에 다시 한번 보여주어야 할 것이다. 여기에 김 위원장의 답방은필수적인 것이다. ‘제주 평화선언’의 함축은 고은 시인의 축시 한 대목에서도 잘 나타나 있다.“평화는 꽃입니다/평화는 꽃처럼 아름답습니다/만약 이 세상에 꽃이 없다면 괴로운 날들 슬픈밤을 지나쳐/한송이 꽃이 없다면 어떤 것이 평화인지 모를것입니다”. 제주도는 이미 국제적인 ‘평화의 섬’으로 자리잡고 있다.제주 평화선언의 뜻을 새기며 남과 북은 꽃나무에 물을 주듯 화해의 기운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 고이즈미 “개혁실패로 물러나면 내 뒤를 맡아주오”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가 최근 자신의개혁정책이 실패하면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도쿄도지사가 뒤를 맡아줄 것을 당부했다고 도쿄신문이 5일 보도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지난 달 29일 도쿄의 한 호텔에서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모리 요시로(森喜朗) 전 총리,이시하라 지사와 회동한 자리에서 이같이 말했다. 고이즈미 총리는 “80%가 넘는 지지율은 내가 생각해도 정상적인 것은 아니다”면서 “나는 언제 물러난다고 해도 괜찮다”고 인기에 연연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밝혔다.이어 “만약 물러난다면 이시하라 지사에게 부탁하고 싶다”고 말했다. 도쿄 황성기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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