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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희귀병 환자에 희망을] 신경섬유종 앓는 다섯살 김경래군

    [희귀병 환자에 희망을] 신경섬유종 앓는 다섯살 김경래군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에 사는 이모(36)씨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울창한 나무가 나오면 이내 채널을 돌린다.둘째 아이인 김경래(5)군이 앓고 있는 희귀병인 신경섬유종증이 연상되기 때문이다.이 병은 신경이 마치 식물처럼 급속히 자라 종양을 일으키는 것으로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다. 정상인의 경우 신경이 실과 같이 얇지만 이 병에 걸려 증세가 심해지면 신경이 손가락 크기로 굵어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약도,치료법도 없어 오직 수술을 통해 자라난 신경을 잘라낼 수밖에 없는데 수개월 후면 또다시 자라난다. ●국내 최초 혀에도 종양 발생 김군은 돌이 지난 무렵부터 얼굴이 심하게 붓는 증세가 나타났다.어머니 이씨는 제대로 못 자서 그렇거니 하고 병원을 찾았다.그러나 병원측은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1년 후에 다시 오라.’는 말만 했다.2002년 서울대병원에서 유전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신경섬유종증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손을 쓸 길이 없었다.그러는 사이 오른쪽 귀밑 얼굴에서 발생한 종양은 혀와 턱,귀,머리 등으로 급속도로 번졌다.신경섬유종증 환자 가운데 혀에서도 종양이 발생한 경우는 김군이 최초였다.신경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혀는 가만히 있어도 입 밖으로 나올 정도였고,마침내 종양이 목으로 번져 기도가 막혀 숨쉬기가 곤란했다.치아도 모두 일그러져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부위 넓어 목·귀부분 손도 못대 신경절개 수술을 하기 위해 서울과 분당,대구 등의 유명 병원을 차례로 찾았지만 위험도가 높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마침내 지난 4월28일 서울대병원에서 구강안면외과 정필훈 교수의 집도로 9시간에 걸쳐 얼굴과 혀의 신경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다.하지만 종양이 번진 부위가 너무 넓어 목과 귀,머리 부분은 손도 대지 못했다.김군은 수술시 오른쪽 얼굴의 신경을 집중적으로 잘라내 이 부위가 마비됐다.때문에 잘게 썰은 음식을 혀 안으로 밀어줘야 겨우 먹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수없이 신경절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성장과 동시에 신경도 자라나기 때문에 그때마다 신경을 잘라낼 도리밖에 없다.수술한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혀는 벌써 길게 자라났다. 이씨는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같이 무서운 천형을 안겨줬는지 신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라며 “형편마저 넉넉지 않아 수술비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고 말했다.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희귀병 환자에 희망을] 신경섬유종 앓는 다섯살 김경래군

    인천시 부평구 청천동에 사는 이은숙(36·금호타운 206동 202호)씨는 텔레비전을 보다가 울창한 나무가 나오면 이내 채널을 돌린다.둘째 아이인 김경래(5)군이 앓고 있는 희귀병인 신경섬유종증이 연상되기 때문이다.이 병은 신경이 마치 식물처럼 급속히 자라 종양을 일으키는 것으로 현대의학으로는 고칠 수가 없다. 정상인의 경우 신경이 실과 같이 얇지만 이 병에 걸려 증세가 심해지면 신경이 손가락 크기로 굵어져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하다.약도,치료법도 없어 오직 수술을 통해 자라난 신경을 잘라낼 수밖에 없는데 수개월 후면 또다시 자라난다. ●국내 최초 혀에도 종양 발생 김군은 돌이 지난 무렵부터 얼굴이 심하게 붓는 증세가 나타났다.어머니 이씨는 제대로 못 자서 그렇거니 하고 병원을 찾았다.그러나 병원측은 원인을 밝혀내지 못하고 ‘1년 후에 다시 오라.’는 말만 했다.2002년 서울대병원에서 유전적 요인으로 발생하는 신경섬유종증이라는 판정을 받았지만 손을 쓸 길이 없었다.그러는 사이 오른쪽 귀밑 얼굴에서 발생한 종양은 혀와 턱,귀,머리 등으로 급속도로 번졌다.신경섬유종증 환자 가운데 혀에서도 종양이 발생한 경우는 김군이 최초였다.신경이 늘어날 대로 늘어난 혀는 가만히 있어도 입 밖으로 나올 정도였고,마침내 종양이 목으로 번져 기도가 막혀 숨쉬기가 곤란했다.치아도 모두 일그러져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부위 넓어 목·귀부분 손도 못대 신경절개 수술을 하기 위해 서울과 분당,대구 등의 유명 병원을 차례로 찾았지만 위험도가 높다는 이유로 모두 거절당했다.마침내 지난 4월28일 서울대병원에서 구강안면외과 정필훈 교수의 집도로 9시간에 걸쳐 얼굴과 혀의 신경을 잘라내는 대수술을 받았다.하지만 종양이 번진 부위가 너무 넓어 목과 귀,머리 부분은 손도 대지 못했다.김군은 수술시 오른쪽 얼굴의 신경을 집중적으로 잘라내 이 부위가 마비됐다.때문에 잘게 썰은 음식을 혀 안으로 밀어줘야 겨우 먹을 수 있다. 더 큰 문제는 앞으로 수없이 신경절개 수술을 받아야 한다는 점이다.성장과 동시에 신경도 자라나기 때문에 그때마다 신경을 잘라낼 도리밖에 없다.수술한 지 2개월이 채 되지 않았지만 혀는 벌써 길게 자라났다. 이씨는 “아이에게 무슨 죄가 있어 이같이 무서운 천형을 안겨줬는지 신에게 묻고 싶은 심정”이라며 “형편마저 넉넉지 않아 수술비 걱정에 밤잠을 설친다.”고 말했다.(집전화:032-501-9102) 인천 김학준기자 kimhj@seoul.co.kr˝
  • 청량리 개발 30년째 게걸음

    “아,건물만 삐죽삐죽 들어서는 개발이면 전부가 아니지.(청량리 588)저 사람들도 먹고는 살아야 하고….(집창촌을)없애면 젊은이들 범죄가 늘어난다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인데 말이야.” 일요일인 지난 6일 오전 11시쯤 청량리역 광장 앞 벤치에 앉은 김모(81) 할아버지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왕십리가 ‘59년 왕십리’라면 청량리는 ‘70년대 청량리’다.서울이 한창 팽창하던 1970년대 영등포와 함께 서울의 부도심이었던 청량리는 30여년전 모습 그대로다.청량리 개발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은 588이다. ●붕어빵에 붕어가 없듯 청량리엔 ‘588’이 없다 서울 동대문 하면 몰라도 청량리를 모르는 사람은 없고 집창촌인 ‘청량리 588’을 모르면 간첩(?)이라고 한다. 개발이 워낙 더뎌 청량리는 이름값도 못한다고 주민들은 불만이다.하지만 청량(淸凉)이라는 이름은 조선시대 초 나무가 우거지고 남서쪽이 확 트여 늘 시원한 바람이 끊이지 않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청량리 권역은 보통 청량리역 반경 500m이내를 말한다.지하철 1호선 청량리역 로터리를 중심으로 서쪽으로 성바오로병원,북으로는 청량리 1동 일부,남쪽으로 이른바 588이 위치한 전농2동이 포함된다.철도 이용자만 하루 1만 5000∼2만여명에 이르는 등 유동인구가 8만여명이나 된다. 70년대 청량리 권역 전성기 때 ‘부자동네’로 꼽히던 청량리 1·2동도 30여년간 아파트가격이 묶이다시피 하는 등 덩달아 개발이 정체돼 있다. 특히 왕복 6차로인 로터리 건너편 집창촌 쪽은 공시지가가 ㎡당 250만∼280만원에 머물러 서울 시내에서 가장 땅값이 싼 곳이기도 하다. 행정구역으로 볼 때 청량리는 1·2동을 거느렸다.하지만 ‘588’은 청량리가 아니라 전농2동에 속한다.지금도 번지수를 딴 이름이 이어지고 있다. 1970년대 구역 정비와 함께 ‘588’이라는 이름은 20여년밖에 안됐지만 알고 보면 역사는 엄청 길다.7년만 더 버티면(?) 100년을 자랑한다.일제 때인 1911년 10월 청량리역 개통과 함께 여행객들을 상대로 한 성매매행위가 자연스럽게 자리를 잡았다.청량리역 위치도 588의1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현재 588에는 130여개 업소가 영업 중이다.그러나 잘 정비된 이른바 ‘유리문’ 업소들 외에도 인근 ‘쪽방’까지 합치면 이보다 훨씬 많은 숫자가 매춘가를 이루고 있다. 주로 밤 시간대에 청량리역 광장이나 롯데백화점 등으로 나가 행인들을 상대로 호객행위를 겸하는 ‘팸프(요부라는 뜻을 지닌 영어 vamp가 변한 말)’도 30여명에 이른다. ●요동의 물결 출렁이는 ‘밤꽃의 보금자리’ 588 70년대만 해도 서울 동북부 최고의 상권을 뽐내던 청량리 권역이 개발이 더딘 탓에 30년 넘도록 제자리 걸음을 하고 있다. 아직도 경기,강원 등 전국을 거미줄처럼 잇는 교통요충지 몫을 하지만 강남권과 북부지역 새 도심에 상권을 내준 뒤부터 기운을 쓰지 못하고 있다. 청량리 권역 개발의 핵심인 청량리 철도 민자역사 건립과 윤락가 재개발이 주춤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다.그러나 얼른 눈에 띄게 드러나지는 않더라도 ‘공룡’ 청량리는 느리면서도 조금씩 조금씩 꿈틀거리고 있다. 특히 무려 30여년이라는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지역개발에 ‘걸림돌’이 됐던 588 구역이 90여년 만에 최대의 격변기를 맞고 있다.이는 청량리 권역 개발의 신호탄인 셈이다.왕복 4차선의 좁은 도로도 개발정체에 한 을 하고 있다.게다가 인근 청과시장을 오가는 트럭 등으로 한 차로를 잡아먹고 있어 더하다. 민자역사 개발 컨소시엄의 한 축인 L건설이 주변 윤락가 부지를 야금야금 사들이고 있다는 게 입에서 입으로 알려지고 있다.한 부동산 업자는 “이따금 누구네 집이 넘어갔다더라는 말이 들려온다.”고 귀띔했다. 군데군데 부동산 업소가 새로 들어선 점도 이를 말해주는 대목이다.88올림픽을 전후해 1000여명이던 종사자 수도 절반에 채 못미치는 400여명으로 경찰은 파악하고 있다. 인근 롯데백화점과 성바오로병원이 최근 인근 땅을 각각 200여평,180여평 사들여 주차장을 지은 점도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할 변화다. 현재 9층짜리 건물이 가장 고층인 이곳에 한 대기업이 15층짜리 사옥을 내년 5월 준공을 목표로 공사 중에 있는 등 ‘개발 도미노’가 머지 않았다는 것을 뒷받침해주는 건설현장도 많다. 한 업주는 “뉴타운,지역균형개발촉진지구 지정 등 개발사업이 예정돼 있는 데다 윤락가 정비 등 사회적인 분위기,경제난이 겹쳐 땅 주인들 사이에 언젠가는 정리해야 할 사업쯤으로 여기는 경향이 뚜렷하다.”고 말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儒林(110)-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110)-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혼자서 마시는 낮술이 금세 취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백의 시구처럼 조광조와 더불어 술을 마셔서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었다.남은 술을 종이컵에 다시 따르자 술병이 바닥났다.술잔을 들고 나는 무덤 앞에 앉아서 주위를 살펴보았다.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심곡이라 불렸던 산골은 그러나 이제는 화류항(花柳巷)으로 변해 있었다.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광조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이 낳은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아들들이 죽고 또 태어난 천년의 세월을 통해 이곳까지 파도가 밀려들어와 조광조의 무덤을 무인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인적은 끊기고 조광조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로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제비집처럼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조광조는 없다. 노수신은 신도비에서 조광조를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망하지도 아니하고,어기지도 아니하고,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라고 노래하였지만 이제 조광조는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다.찾아오는 이도 없고 가는 이도 없다.조광조는 이제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는 것이다. 한 잔의 낮술이 내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을까.나는 거대한 아파트들과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량들의 행렬을 우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문득 서원 강당 위 천장에서 보았던 이재(李縡)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이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화 때 관직을 사퇴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던 대학자였는데,문외출송(門外黜送)할 때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하늘과 땅 같은 천리(天理)의 마음은 알 수가 있겠도다. 가련하도다.심어 두신 수택의 나무들이 윗가지는 솟았지만 아래는 그늘이 없네.” 이재는 서원을 방문했을 때 조광조가 직접 심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노래하였던 것이다.조광조가 심은 나무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남아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가 심은 손때 묻은 나무가 아직도 무성히 자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래는 이재의 노래처럼 그늘이 없지 아니한가. 그늘이 없는 나무,조광조야말로 그늘이 없는 나무(無影木)인 것이다.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인가.역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성영우(成永愚)도 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지 아니한가.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갈림길이 많구나(客來愁日暮門外政多岐).” 술 취한 내 가슴 속으로 성영우의 시구가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그렇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다.계절의 여왕인 5월의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만 저물어 가는 저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지 않은가.도대체 이렇게 많은 갈림길이 일찍이 정가에 존재하였던가. 일찍이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말하였다. “군자의 길은 예컨대 먼 데로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바와 같으니라.” 그러나 먼 곳을 가는 길도,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도,높은 데로 올라가는 길도,낮은 곳으로 가는 길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보이는 곳은 천 갈래로 만 갈래로 찢어진 갈림길뿐,갈림길이 많이 있다는 것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그만큼 찾기 힘들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 儒林(110)-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혼자서 마시는 낮술이 금세 취기를 불러일으켰다. 나는 이백의 시구처럼 조광조와 더불어 술을 마셔서 만고의 시름을 덜고 싶었다.남은 술을 종이컵에 다시 따르자 술병이 바닥났다.술잔을 들고 나는 무덤 앞에 앉아서 주위를 살펴보았다.산이 높고 계곡이 깊어 심곡이라 불렸던 산골은 그러나 이제는 화류항(花柳巷)으로 변해 있었다.500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조광조가 낳은 아들과 그 아들이 낳은 아들과 또 그 아들의 아들들이 죽고 또 태어난 천년의 세월을 통해 이곳까지 파도가 밀려들어와 조광조의 무덤을 무인도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인적은 끊기고 조광조는 완전히 잊혀진 인물로 낭떠러지 위에 세워진 제비집처럼 간신히 명맥만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이제 조광조는 없다. 노수신은 신도비에서 조광조를 ‘오는 이와 가는 이가 끊임없이 이어지고,망하지도 아니하고,어기지도 아니하고,뒤에도 계시옵고 앞에서도 계시도다.’라고 노래하였지만 이제 조광조는 앞에도 없고 뒤에도 없다.찾아오는 이도 없고 가는 이도 없다.조광조는 이제 과거에도 없고 미래에도 없는 것이다. 한 잔의 낮술이 내 마음을 감상적으로 만들었을까.나는 거대한 아파트들과 도로 위를 쏜살같이 달려가는 차량들의 행렬을 우울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문득 서원 강당 위 천장에서 보았던 이재(李縡)의 시 한 수가 떠올랐다.이재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사화 때 관직을 사퇴하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던 대학자였는데,문외출송(門外黜送)할 때 심곡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은 시를 짓는다. “선생의 위대한 모습을 뵙지는 못했으나 하늘과 땅 같은 천리(天理)의 마음은 알 수가 있겠도다. 가련하도다.심어 두신 수택의 나무들이 윗가지는 솟았지만 아래는 그늘이 없네.” 이재는 서원을 방문했을 때 조광조가 직접 심은 나무들을 바라보며 그렇게 노래하였던 것이다.조광조가 심은 나무들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남아 무성히 자라고 있다. 그러나 조광조가 심은 손때 묻은 나무가 아직도 무성히 자라고 있다 하더라도 그 아래는 이재의 노래처럼 그늘이 없지 아니한가. 그늘이 없는 나무,조광조야말로 그늘이 없는 나무(無影木)인 것이다.역사적으로는 분명히 살아 있는 존재임에도 불구하고 조광조의 그림자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뿐인가.역시 조선 후기의 문신이었던 성영우(成永愚)도 서원을 방문하고 다음과 같이 한탄하고 있지 아니한가. “찾아온 손님들은 저문 날을 근심하고 문밖의 정가(政街)에는 갈림길이 많구나(客來愁日暮門外政多岐).” 술 취한 내 가슴 속으로 성영우의 시구가 비수가 되어 내리꽂혔다. 그렇다. 날은 저물어가고 있다.계절의 여왕인 5월의 찬란한 햇살이 눈부시게 빛나고 있지만 저물어 가는 저 문밖의 정가에는 갈림길이 많기도 하지 않은가.도대체 이렇게 많은 갈림길이 일찍이 정가에 존재하였던가. 일찍이 공자는 중용(中庸)에서 말하였다. “군자의 길은 예컨대 먼 데로 가려면 반드시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하고 높은 데로 올라가려면 반드시 낮은 곳에서 시작하는 바와 같으니라.” 그러나 먼 곳을 가는 길도,가까운 곳으로 가는 길도,높은 데로 올라가는 길도,낮은 곳으로 가는 길도 이제는 보이지 않는다.보이는 곳은 천 갈래로 만 갈래로 찢어진 갈림길뿐,갈림길이 많이 있다는 것은 가야 할 올바른 방향을 그만큼 찾기 힘들다는 뜻이 아닐 것인가.˝
  • [7일 TV 하이라이트]

    ●불새(오후 9시55분) 죄의식에 마음이 무겁지만 정민은 아버지 서문수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인다.지은 아버지 회사의 부도과정에 의문을 품은 세훈은 본격적인 조사에 착수하고 정민과의 갈등은 계속된다.아무도 없는 세훈의 빌라에서 셔츠를 찢고 술을 마시고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등 미란의 집착은 공포에 가까울 정도다. ●사이언스+(오전 8시30분) 600년 만에 천연기념물 103호 정이품송의 친자로 확인된 96그루의 소나무를 확인한다.이번에 확인된 소나무들은 유전자가 100% 일치한다고 한다.정이품송의 유전자 교배와 연구에 들이는 공은 남다르다.고유 수종을 보존하려고 과학계가 심혈을 기울이는 이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 알아본다. ●문화센터(오전 11시) 도자기 페인팅을 소개하는 첫 시간,도자기 페인팅에 사용되는 수성,유성 물감 및 다양한 재료들을 소개하고,알코올과 포슬린 마카를 이용해 도자기 액자 꾸미는 방법을 알아본다.알코올로 잘 닦은 액자를 마카로 마구 칠한 후 알코올을 뿌려 대리석 같은 느낌을 연출하는 방법도 알아본다. ●경찰24시(오후 10시50분) 대낮,길 한복판에서 벌어진 살인미수 사건.피해자는 왜 칼에 찔린 것일까? 생사의 갈림길에 놓인 피해자의 운명은?밤이 되면 환락과 유흥에 빠져드는 도시.‘노래방 도우미’를 알선하는 ‘보도방’의 실마리가 잡혔다.과연 형사들은 용의자 검거에 성공할 수 있을까? ●오픈 스튜디오(오후 4시10분) 드라마나 영화 등 각종 대중매체 속에서도 이제 연상녀 연하남 커플은 낯설지 않다.이러한 현상은 여성의 사회지위 향상이라는 시대환경 변화와 아울러 가부장제에서 평등한 부부관계로 전환하는 한국 사회의 변화와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연상연하 커플의 솔직한 사랑 이야기를 들어본다. ●북경 내사랑(오후 9시50분) 300인분 비빔밥 배달에 성공하고,신문기사에도 실린 민국의 비빔밥가게는 더욱 유명해진다.300인분 배달에 대한 성공으로 연숙이 다시 민국과 양설을 초대해 나이트로 향한다.화려한 연숙에 비해 조용한 성격의 양설은 주눅이 들지만,이런 것이 연숙이 의도한 것이라 생각하고 무대로 향한다. ●금쪽같은 내새끼(오후 8시25분) 대학을 가지 않고 돈을 벌겠다며 아쿠아에어로빅 강사를 하는 딸 희수와 경찰 퇴직후 아파트 경비를 하는 남편 정식 때문에 정애는 늘 심란하다.아들 민섭이 백수나 다름없어 돈 버는 며느리 성애에게 얹혀 사는 점순은 마음이 불편하다.진국은 어머니 제삿날 홀로 산소를 다녀온다. ˝
  • [서울의 숲] 인왕산

    “잎이 다섯 가닥이면 소나무가 아니라 잣나무예요.게다가 잣 열매가 눈에 보이게끔 드러나면 미국산이죠.” 매주 둘째,넷째 일요일 오전 10시,사직공원 관리사무소 앞에는 서광식(50)씨 등 숲해설가 3명이 기다리고 있다.사직공원 관리사무소∼인왕산 약수터까지 약 3㎞의 숲속 여행을 인솔하기 위해서다.도심 생활의 노곤함을 산림욕으로 풀려는 시민들은 베테랑 이야기꾼의 맛깔스러운 숲 해설에 금세 푹 빠진다.‘인왕산 숲 해설’에는 50명 정도가 자연을 찾아 몰린다.매주 금요일 서울 인근의 숲을 소개한다. “우리나라 소나무는 잎이 2개인데 요즘 가게에서 파는 송편을 보면 잎이 3∼5개짜리가 많이 섞여 있죠.‘짝퉁’ 솔잎은 약효가 떨어지고 맛도 떫습니다.” 우리말로 버즘나무인 플라타너스는 북한에서 방울나무라고 불린다.도시의 공해와 소음을 빨아들이며 껍질은 개미와 해충을 방어한다.소금나무라고도 불리는 붉나무는 짠 성분이 있어서 예전에는 소금 대신 사용됐는데, 바닷물과 달리 독성이 없어 몸에 더 좋다.임진왜란 이전에는 산초나무의 잎이 후추를 대신했으며 추어탕에 즐겨 넣는다고 한다. 회사원 오순호(44)씨는 “신문에서 숲 해설 코스를 접하고 처음 왔는데 숲 이야기는 정말 무궁무진하다.”면서 “푯말에 짧게 적힌 나무설명만으로는 그 나무에 대해 제대로 알 수 없다.”고 말했다. 가파른 바위 길을 지나자 숲길 양쪽에 도토리나무들이 눈에 들어왔다.서씨는 “참나무라고도 불리는 도토리나무는 6∼7종류이며, 외양이 밤나무와 비슷한 상수리나무와 잎사귀가 뾰족한 굴참나무에는 2년마다 도토리가 열린다.”면서 “잎이 넓은 떡갈나무에 떡을 보관하면 방부효과 덕에 3∼4일은 족히 쉬지 않고 보관할 수 있다.”고 생활 상식을 알려줬다.이밖에도 도토리나무에는 갈참나무,신갈나무 등이 있으며, 신갈나무의 잎사귀는 짚신에 까는데 사용된다고 덧붙였다.참가자들 가운데는 초등학생도 적지 않기 때문에 서씨는 이들을 배려한 ‘눈높이 서비스’도 잊지 않는다.그러나 아이들이 계속 떠들자 이번에는 싸리나무를 소개했다.불을 때도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아 간첩들이 사용했다는 싸리나무는 독성이 없고 몸에 상처도 덜 내서 예부터 교육용 회초리로 애용됐다고 말했다.이밖에도 아황산가스를 제거하는 애기똥풀과 비누로 사용됐다는 떼죽나무도 소개했다.독성을 지닌 떼죽나무는 개울에 풀어 물고기를 잠시 기절시켜 잡는데 사용되기도 한다. 오주현(12)양은 “책에 나와 있는 설명만으로는 실제 이 나무가 어떤 종류인지 알 수 없다.”면서 “눈으로 확인할 수 있어 배우기 쉽다.”고 말했다.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새달 개편 서울버스 디자인 김혜옥 대표

    “빨강·파랑·노랑·초록 색깔의 버스를 나란히 늘어놓으면 음악적 멜로디를 연상하게 될 것입니다.또 서울시내를 이동하는 역동적인 미술품을 감상하는 느낌이 들기도 하지요.” 오는 7월부터 서울시내 버스운행 시스템이 확 바뀌면서 가장 두드러질 것은 갖가지 색깔로 새롭게 단장한 버스들이다.색깔의 의미가 무엇일까.또 버스 옆에 붙인 영문자 ‘R’‘B’‘G’‘Y’의 의미가 무엇인지 궁금하다고 지적하는 사람이 많다.서울시의 의뢰를 받아 색깔과 브랜드 디자인을 직접 담당한 김혜옥(여·브랜드웍스 대표)씨한테서 여러 궁금증을 풀었다. 그는 “우리나라 공공시설의 색깔은 대부분 덕지덕지했다.”면서 “청계천도 복원되고 올림픽과 월드컵을 치른 서울이 뒤늦은 감이 있지만 국제적 도시로서 새로운 면모가 필요하다.버스 색상의 변화도 이에 다름 아니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또 “색상,커뮤니케이션,도시환경적 측면을 고려하면서 남녀노소가 멀리서도 식별할 수 있는 색감을 선정했다.”면서 “버스 옆구리에 새겨진 영문자는 브랜드를 의미한다.”고 강조했다.아울러 그는 “브라질만 하더라도 버스색깔이 너무 아름다워 버스를 타고 싶은 마음이 절로 생길 정도”라고 비유했다. 디자인을 완성하는 데는 3개월이 걸렸단다.물론 유럽 등 외국 사례를 참고했다.디자인을 끝낸 그는 요즘 버스회사 별로 새로운 색을 입히는 현장을 방문,색채 감리를 맡느라 바쁘다고 했다. 김 대표는 “영국과 독일의 경우 노랑과 빨강을 활용하며 이탈리아는 나무가 적은 도시의 특성을 고려해 버스외장의 색깔을 녹색으로 입혔다.”고 설명했다. 서울 출생인 그는 예원여고를 나와 이화여대 서양화과 3년을 수료했으며 1990년 미 예일대 미술대학원을 졸업했다.제 15·16대 대통령 취임식과 2003년 유니버시아드 대회의 엠블럼 디자인을 맡는 등 경력이 화려하다. 김문기자 km@seoul.co.kr˝
  • 자연체험터 운영하는 교육실천가 조영순씨

    작가 이윤기는 ‘하늘 아래,누구의 고향 아닌 마을이 없다.’고 했다.흙냄새 나는 시골만 고향이 아니라 태어나 자란 곳은 어디든 마음의 안식처라는 얘기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 대부분이 훗날 품게 될 고향의 모습은 삭막한 아파트촌,풀 한 포기 없는 도로다.마음 속에 담아뒀다 꺼내보기엔 뭔가 허전하고 아쉽다.그렇다고 아이들에게 과감하게 자연을 선물하자니 교육이 아쉽다.마냥 순진하게 흙에서 뒹구는 것만이 능사가 아닌 탓이다. 쉽지 않다고 포기할 수도 없다.누군가는 아니 한 공동체의 모든 사람들은 책임지고 아이들에게 자연과 배움 모두 쥐어줘야 한다.하지만 자신의 아이교육도 힘든데 마을 아이들,세상의 아이들을 생각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경기 양주시 봉암리에는 스스로 이런 책임을 짊어지고 온 사람이 있다.마을의 아이들에게 자연을 돌려주려는 사람,누구에게나 배움의 기회는 고루 주어져야 한다는 생각을 실천해온 사람,유명한 교육 이론가보다 마을 사람들에게서 존경받는 ‘교육실천가’ 조영순(75)씨다. ●2000여평 포도농장 갈아엎고 자연체험터 마련 “누구든 환영합니다.아이들 손잡고 봄에는 앵두 따러 오시고 가을엔 고구마 캐러 오십시오.” 경기 동두천 시내에서 10여분 떨어진 곳에는 조영순씨 소유의 2000여평 땅이 있다.그만한 땅이라면 사람들은 계산기를 먼저 두드리기 마련이다.하지만 그는 84년 포도농장을 갈아엎고 마을 아이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몄다. 직접 톱질과 칠을 해서 그네,평균대,정글짐 등 놀이터를 꾸몄고 절반의 땅에는 각종 나무와 농작물을 심어 체험 농장도 만들었다. 포도농사꾼이 이렇게 생각을 바꾼 것은 ‘아이는 이렇게 키워라’라는 책을 읽은 것이 계기가 됐다.“서양에는 ‘모험의 놀이터’라는 이름으로 된 곳에서 아이들을 마음껏 놀게 하면서 자연을 알게 하고 자립심을 키운다고 합니다.저도 걱정 많이 했습니다.그러다 걱정만 하고 있을 게 아니라,나부터라도 아이들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생각은 좋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지금은 든든한 후원자인 아내도 처음에는 불만을 털어놓았다.생업인 포도농장을 엎었으니.게다가 아이들이 다칠까봐 하루가 멀다하고 농장의 풀베는 일을 혼자 하다 보니 기계소음으로 어느새 자신의 귀가 잘 들리지 않게 됐다. ●환자복 입고 교통안전 교육 ‘신호등 아저씨’ 하지만 후회는 없다. “이곳에서 놀던 아이들이 찾아와 ‘와!내 앵두나무가 아직도 있네.’라고 얘기할 때는 아이들에게 근사한 고향을 만들어 준 것 같아 그저 흐뭇합니다.” 그는 1년에 한 번씩 이곳에서 마을사람들과 함께 어린이 교통안전 교육을 실시한다.서울의 ‘어린이교통안전연구소’에서 마을 사람들과 함께 교육을 받은 후 인근 어린이집 아이들에게 안전 교육을 시켜왔다.신호등과 횡단보도 등은 그가 손수 만든다. 이날 그의 이름은 ‘신호등’이다.아이들에게 다양한 안전교육을 시켜야 하지만 신호등 지키기를 무엇보다 강조하기 위해서다.그래서 그는 아이들에게 ‘신호등 할아버지’로 불린다.또 그는 환자복을 입고 목발을 짚은 채 아이들을 만난다.사고의 위험성을 보다 생생히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서다. 그는 함경도에서 1953년 1·4후퇴 때 가족들을 두고 홀로 월남했다.대구에서 군생활을 시작했고 동두천에서 오랜 군생활을 마쳤다.퇴직금으로 받은 30만원으로 인근 봉암리에 자리를 잡았다. ●안방문고·장난감도서관… 아이들 위한 30년 ‘아이들을 위해 뭔가 해주고 싶다.’는 생각을 막연히 품고 있었던 그가 구체적인 활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74년이었다.평소 책읽는 것을 좋아하던 셋째딸이 제법 큰 글짓기 대회에서 상을 받아온 것이다.“딸아이를 보면서 아이들로 하여금 책을 많이 읽게 하면 문화적인 혜택을 덜 받는 곳에 살아도 도시 아이들과의 격차를 줄일 수 있겠다 싶었습니다.그래서 안방문고를 시작했죠.” 안방문고라는 말 그대로 자신의 집에 책과 책읽는 공간을 마련해 마을 아이들에게 개방하기 시작했다.3년 6개월 동안 지속됐던 안방문고는 마을 사람들을 하나로 뭉치게 했고,마을도서관 건립으로 이어졌다. “책을 접하니 아이들의 말씨부터 달라졌습니다.그걸 보고 마을 사람들이 독서의 교육 효과를 인정했죠.” 그의 욕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도서실에 형이나 언니를 따라온 아이들이 놀 만한 공간을 만들어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중 부산에 장난감 도서관이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가서 직접 눈으로 보고 마을에도 비슷한 공간을 만들었다.하지만 결과는 실패였다.시골아이들에게 놀이기구가 드물던 시절이라 아이들이 하나 둘 장난감을 집으로 가져간 것이었다. “문을 닫았지만 아이들이 계속 찾아와 그 앞에서 쪼그리고 앉아 기다리는게 아닙니까.아,이래선 안 되겠다 싶었죠.” 그래서 그는 면마다 하나씩 할당되던 새마을유아원을 봉암리에 유치하는 데 갖은 노력을 했다.84년 마침내 공립 어린이집이 이 마을에 문을 열었다.그는 초대원장을 맡았고 이후 13년 동안 그 일을 계속했다.그는 자신을 ‘머슴’이라고 생각하고 어린이집을 꾸려나갔다.아동교육에 대한 책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그때 읽은 책으로 인해 그는 20년간 생업이었던 포도농장을 교육 공간으로 바꾸기에 이르렀다. 그가 만든 놀이기구 중에는 유독 평균대가 많다. “자연을 체험하게 하는 것,책을 통해 지식을 얻는 것,모두 중요합니다.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바로 ‘자립심’입니다.” 그는 아이들에게 자립심을 키워줄 수 있는 가장 좋은 놀이 기구가 평균대라고 생각한다.아슬아슬하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자기의 힘으로 외나무 다리를 건너면서 아이는 혼자 서는 방법을 배운다는 것이다. “요즘 부모들은 아이들이 다칠까봐 평균대에서 놀지 못하게 하죠.유아원이나 유치원 선생님들도 마찬가지입니다.하지만 어른들이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하듯 아이들은 자립심을 위해 평균대 건너기를 놀이로 삼아야 합니다.” ●마을서 자란 아이가 보낸 감사카드에 눈물 쏟아 그는 되도록이면 평균대 운동에 부모가 함께하는 것이 좋다고 조언한다.아이들이 혼자 걸으면서 자립심을 기르고 동시에 부모님의 격려와 박수를 받으면서 자신감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수십년간 해온 일을 담담하게 말하던 그가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카드 하나를 내밀었다.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이 마을에서 자란 아이가 보낸 생일카드였다.그 안에는 어린 시절 ‘뻔한 조기교육’ 대신 자연에서 뛰어놀 수 있게 해준 할아버지에게 감사드린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걸 받고서 ‘아,내가 그동안 헛수고한 것은 아니구나.’라는 생각에 눈물이 나더군요.단 한명의 아이일지라도 제 노력으로 회상하고픈 어린 시절을 갖게 된다면 앞으로도 지금처럼 아이들을 위해 살고 싶습니다.” 봉암리의 교육실천가 조영순씨.그는 아이들을 이 학원에서 저 학원으로 내쫓는 이 시대 부모들에게 ‘진정한 의미의 교육’을 행동으로 보여주고 있다. 나길회기자 kkirina@seoul.co.kr˝
  • [데스크 시각] 김경재와 설훈의 차이/박대출 정치부 차장

    ‘윤여준’은 자연인이다.국회의원 신분은 지난달 29일로 마감됐다. 한나라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소장직도 내놓았다.한때 당내 최고 책사로 꼽히던 그다.모두가 지난 일이다.이젠 은퇴한 노정객일 뿐이다.1939년생이니 노(老)자를 붙여도 될 것 같다.그는 정계를 떠나면서 모든 미련을 털어버렸다.단 한가지는 예외다. 그는 원래 ‘이회창맨’이다.이 전 총재의 신임은 각별했다.지금은 그렇지 못하다.2년전 단 한건의 폭로 때문이다. 당시 민주당 설훈 의원이 “이 전 총재가 윤 의원을 통해 최규선씨로부터 20만달러를 받았다.”고 주장하면서 비롯됐다.이 전 총재는 윤 전 의원을 의심했고,서로의 관계는 멀어졌다. 윤 전 의원은 한때 밤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고 한다.자다 말고 벌떡 일어나 부인의 손을 잡고 울기도 했다는 것이다.그 폭로는 지난해 12월 서울지법 형사합의 23부에서 허위사실로 판정났다. 설 전 의원은 벌금 400만원을 선고받았다.김경재 전 의원 사건과 비교돼 말들이 적지 않다.김 전 의원은 지난달 27일 구속됐다. 두 사례의 차이점은 크게 두가지다.첫째는 20만달러와 50억원으로 폭로 액수가 적고 크다는 정도다.대선의 패자와 승자를 폭로 대상으로 삼은 점은 둘째다.이 문제를 따지려는 게 아니다.이왕 나왔으니 짚고 넘어가자는 뜻이다. 형평성 시비를 떠나 김 전 의원 사건에 더 주목하고 싶다.근거없는 폭로성 발언으로 현역 의원이 구속된 첫 사례다.17대 국회에 강력한 메시지를 던진 셈이다.‘아니면 말고’ 식의 정치폭로는 더이상 안 된다는 경고다. 그 연장선에서 살펴볼 게 있다.열린우리당 신기남 의장은 지난달 24일 총선 때의 고소·고발 사건을 모두 취하토록 했다.한나라당에 취임 첫 선물로 줬다.한나라당 역시 취하로 화답했다.상생정치라는 명분은 같다. 언뜻 보면 환영할 만한 일이다.싸움을 그치고 화해하자는데 누가,무슨 이유로 반대하겠는가.하지만 이것뿐이다.양당은 대부분의 현안에선 티격태격이다.‘김혁규 총리지명’에선 서로의 양보만을 고집하고 있다. 상생의 기준은 아전인수식이다.오로지 ‘너의 양보’다.‘나의 양보’는 없다.6·5 지방 재·보선전도 마찬가지다. 근본부터 잘못됐다.상생은 주역,명리학에서 나오는 용어다.상극(相剋)과 반대다.오행(五行) 중 하나로 목(木)은 화(火)를 생(生)한다.‘생’은 ‘도와준다.’,‘보태준다.’는 뜻이다.주체는 나무다.불이 아니다.그런데 여야는 나무가 되지 않고,불만 되려고 하는 꼴이다. 더욱이 신 의장은 총선 때 선대본부장을 맡았다.당시 한나라당을 겨냥해 하루에 몇건씩 터뜨렸다.한나라당 역시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오십보백보다.이쯤 되면 여야의 고소·고발 취하는 ‘거래’ 수준에 불과하다.실천 없는 상생은 정치포장술에 가려진 언어유희와 다름없기 때문이다. 상생정치의 지향점은 ‘생산 정치’다.두가지 길이 있다.이름 그대로 새 것을 만들어내는 정치가 첫째다.소모정치를 안 하는 것도 생산정치가 될 수 있다.돈을 못 벌면 덜 쓰는 게 버는 것이란 얘기와 같은 이치다. 특히 둘째는 책임정치의 기본이다.‘허튼소리’,‘허튼짓’을 가려내고 책임을 묻는 데서 비롯된다. 좋은 게 좋다며 넘어갈 일만은 아니다.허튼짓을 오늘 덮으면 내일도 허튼짓이 나온다. 박대출 정치부 차장 dcpark@seoul.co.kr˝
  • [폴리시 메이커] 문대근 통일부 교류협력국 경협지원과장

    “개성공단은 반드시 성공해야 하고,반드시 성공한다고 믿는다.” 2만 5000평의 시범단지 조성과 15개 시범 입주업체 선정을 눈앞에 둔 개성공단 개발사업의 전망을 묻는 질문에 대해 통일부 교류협력국 문대근(48) 경협지원과장의 답변은 거침이 없다. 문 과장은 “개성공단은 북한에 개방의 실험실이란 의미가 있다.”면서 “실험이 성공하면 북한은 개방과 개혁을 확대할 것이고,이에 따라 남북경협과 남북관계도 획기적으로 발전할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개성공단 사업을 비롯해 철도·도로연결 사업,임진강 수해방지 사업 등 굵직한 경협사업에 대해 정부차원의 지원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문 과장은 눈코뜰새없이 바쁜 중에도 최근 통일부 인터넷 홈페이지(www.unikorea.go.kr)에 장문의 글을 올려 화제다. 그는 ‘개성공단사업이 착공되기까지’란 제목의 통일칼럼을 통해 개성공단 개발사업의 의미와 특성,정부 방침 등을 알기 쉽게 소개했다. 문 과장은 “기존의 대북사업은 민간사업자가 자율적 판단과 결정에 따라 추진하고,정부는 제한된 범위에서 필요한 지원을 했지만 개성공단은 사정이 다르다.”고 강조했다. 1995년 이후 대북사업에 투자한 28개 국내기업 가운데 1곳만이 수익을 올리는 데 그치고 있지만,개성공단 사업은 민간사업자는 물론 당국이 직접 참여해 남측 입주업체들이 자유롭게 기업활동을 하고,국제경쟁력을 갖출 수 있도록 관련 법과 제도를 정비했다는 것이다. 문 과장은 “남한의 자본·기술과 북한의 토지·노동력이 결합한 개성공단은 북한 방식도,중국 방식도 아닌 특수한 형태의 경협 모델”이라면서 1단계 100만평의 공단개발을 통해 북측은 50년간 토지임차료 등으로 1600만달러의 보상과 함께 1인당 57달러의 임금을 지급받는다고 말했다.남한 기업들은 평당 14만 9000원의 낮은 분양가와 저임금을 토대로 고비용·저효율의 고질병을 타개하게 된다. 문 과장은 “개성공단의 성공을 위해 정부내 관련 부처간 긴밀한 협조,정부와 민간사업자간 협력이 필수적”이라며 “특히 북한은 과거 중국이 개방 초기에 범했던 시행착오,즉 과일나무가 싹이 트기 전에 과실을 챙기는 우를 범해선 안 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1985년 당시 통일부 남북대화사무국 정책연구부 별정직 5급으로 출발해 통일정책실 정책1담당관,남북회담사무국 기획과장 등을 지낸 문 과장은 현재 남북철도·도로 실무회담 남측대표를 맡고 있다. 김인철기자 ickim@˝
  • [27일 TV 하이라이트]

    ●사과나무(오후 7시20분) 변호사 오세훈에게도 가난했던 유년의 경험이 있다.법대에 진학해 사법고시를 비교적 쉽게 통과했다.그러나 예상치 못한 황당한 사건에 사법연수원에서 우울한 3년을 겪었다.하지만 그를 지탱해준 사과나무가 있었기에 그 시련을 잘 버틸 수 있었다고 한다.변호사 오세훈의 사과나무는 무엇일까? ●생방송 쟁점토론(오후 3시10분) 17대 국회 초선 의원들은 어떤 각오로 의정활동을 준비하고 있는지 전문가들과 함께 살펴본다.17대 국회의 특징 가운데 하나가 정치 신인들이 대거 진출해 국회가 한층 젊어졌다는 점이다.정치 신인들의 약진은 새 정치를 열망하는 국민들의 요구가 반영된 것으로 분석된다. ●문화센터(오전 11시) 인라인스케이트에서는 다리 동작과 함께 팔 동작이 어우러져야만 직선주행 및 곡선 주행 등이 가능하다.따라서 팔 동작을 위주로 배워본다.먼저 서서 손동작을 익힌 뒤 서서 교차하기,자세잡고 양손 흔들기,자세잡고 한 손 흔들기의 방법을 배우고,밀며 한 손 흔들기,A자로 좌우 돌기 등을 알아본다. ●1050정면승부(오후 10시50분) 경기도의 숨어 있는 데이트 코스 화성으로 찾아간다.하늘을 날아가는 경비행기에서의 짜릿하고 로맨틱한 시간.그리고 달리는 카트빌에서 연인끼리 즐길 수 있는 시원하고 스릴 만점의 무한질주 데이트를 들여다본다.타조를 타고 달려보는 이색체험을 한 뒤 타조 요리를 즐겨본다. ●순간포착 세상에 이런 일이(오후 7시5분) 노래방에 가면 12시간이 지나도 나오지 않는 71세의 할아버지.할아버지의 취미는 자신의 노래를 녹음한 테이프를 다시 듣는 것.녹음 테이프를 친구들에게 나눠주며 보람을 느낀다는 할아버지의 인생을 만난다.봄이 되면 제비떼에 점령당하는 이상한 마을을 찾아가본다. ●아름다운 유혹(오전 9시) 방바닥에 정희를 팽개친 기태는 둘이 무슨 짓을 했냐며 따지고,둘 사이를 막아선 세희는 모든 게 합의금 때문이라고 기태를 진정시킨다.기태를 찾아간 성필은 일거리를 주겠다고 하지만,기태는 모든 걸 밝혀내겠다고 소리친다.민우는 결혼반지를 가져갔던 사람이 가정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백만송이 장미(오후 8시25분) 민재는 미국에 가지 말라며 울먹이는 현규에게 인환의 꿈인 조이랜드를 위해서 모른 척 넘어가 달라고 부탁한다.준형을 만난 순영은 민재를 포기하라며 애원하고,준형은 포기할 수 없다고 오기를 부린다.한편 처가집 식구들과 기수의 레스토랑을 찾은 민재는 식사 하러 온 준형과 마주친다. ˝
  • 현존 最古 장군총사진 공개

    최소한 3·1운동이 일어났던 1919년 이전에 우리나라 사람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현존 최고(最古)의 장군총 사진이 공개됐다. 우리가 장군총으로 알고 있는 이 무덤이 고구려 장수왕릉으로 확인된 만큼 중국과 일제가 우리 역사를 의도적으로 폄하해 부여한 ‘장군총’이라는 능명 대신 왕릉임을 나타내는 명칭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서경대 서길수(고구려연구회 회장) 교수는 25일 최근 자신이 중국 조선족 동포 허창흘(66)씨를 통해 입수한 장군총 사진을 공개하고 “이 사진을 찍은 것으로 보이는 허씨의 조부가 일제에 의해 3·1운동 직후 독립운동 혐의로 붙잡혀 3년간 수감생활을 하다 출옥한 뒤 행적이 없는 점으로 미뤄 최소한 1919년 이전에 찍은 현존 최고의 장군총 사진”이라고 주장했다. 서 교수는 “지금까지 전해지는 당시의 사진은 이후 일본 학자들이 연구 목적으로 찍어 일제시대에 책으로 소개했던 것”이라며 “이 사진은 우리 민족이 장군총을 배경으로 찍은 최초의 사진으로,이는 이 왕릉이 당시 우리 민족의 의식과 생활 속에 깊게 자리하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소중한 자료”라고 밝혔다. 사진은 장군총을 배경 삼아 교복을 입은 남녀 학생과 한복을 입은 주민 157명이 함께 찍은 것으로,일부 훼손된 장군총의 계단형 석축과 머리 부분의 우거진 나무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서 교수는 “사진을 제보한 허씨가 이 무덤을 아직까지 ‘황제무덤’으로 지칭하고 있었으며,18세기에 제작된 해동지도에도 ‘황제묘(皇帝墓)’로 적혀 있다.”고 소개하고 “최근 중국측 연구에 의해 고구려 20대 장수왕의 능임이 확인된 마당에 이를 장군총이라고 부르는 것은 심각한 역사 왜곡이 아닐 수 없다.”는 견해를 밝혔다. 심재억기자 jeshim@˝
  • [산악문학인 아재홍의 산 오르記] 양평 백운봉

    백운봉(白雲峰 940m)은 양평에서 바라볼 때 뾰족하게 보이므로 일명 ‘경기 마터호른’이라고 불린다.용문산 줄기가 남쪽으로 함왕봉을 지나 크게 한 번 솟구친 봉우리다.용문산이 거느리고 있는 많은 산봉우리 중의 하나다. 용문면 소재지에서 6㎞ 거리인 산행 들머리 연수리는 전원주택 전시장 같은 분위기다.곳곳에 주택과 펜션 신축 공사가 한창이다.연안마을 버스 종점에서 백운암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백운암 앞에도 펜션공사가 진행중이다.신축한 백운암의 축대가 무너져 흉한 몰골로 비닐을 뒤집어쓰고 있다. 개울 건너 산길이 싱그럽다.깨끗한 오솔길은 어제 내린 비를 먹어 폭신폭신한 감촉이 느껴진다.개울을 서너번 건너자,경사가 급한 너덜길 옆으로 금낭화가 만발했다.금낭화와 함께 참나물이 드문드문 나 있다.미나리과인 참나물은 독특한 향으로 입맛을 돋우는 ‘참’ 나물이다. 숨이 턱에 닿을 즈음 형제약수에 올랐다.암자인가 아니면 움막이 있었던가.건물철거 잔재와 쓰레기더미로 흉한 모습을 하고 있다.약수터에는 밥그릇이 굴러다니고 있고 샘 옆에는 시멘트 발라놓은 제단에 촛농이 그대로 쌓여 있다.좀 치울 일이지.나,원,참! 약수터를 지나 정상 오르는 길에 철쭉이 흐드러졌다.고산 철쭉은 흰 것이 특징이다.키가 큰 나무에 촘촘히 핀 꽃이 무거워선지 가지가 휘었다.바위와 어우러져 천상의 화원을 이루고 있다.위험한 곳에 철 계단과 난간을 설치하여 안전을 돕는 등산로를 따라 철쭉은 정상까지 이어졌다. 드디어 정상에 섰다.사람 키만한 화강암에 ‘백운봉’이라고 새겨져 있고 원두막 같은 전망대가 서 있다.전망대 앞에는 백두산 천지에서 가져왔다는 돌과 흙으로 ‘통일암’을 세워 놓았다.사위가 운무에 덮여 있다.산 아래에서 보면 백운봉이 운무 속에 있을 터이지만 산에서 내려다보는 세상은 온통 희미할 뿐.쉴 사이 없이 사람들이 오르내린다.모두 즐거운 모습이다. 양평에서 올라온 산악회원들이 간식을 먹고 일어서더니 손을 모아 외친다.“우-여-이!” “백운봉!” 서너번을 외치더니 하산한다.매주 백운봉을 등산하는 동호회원들인 것 같다.전망대에 모인 사람들이 산 아래 자리잡은 군부대를 보며 말한다.“저,군부대를 다른 데로 옮겨야 돼.” “군에서 사격하느라 산불도 자주 나고,시끄럽고!” “저 계곡이 깊어 등산하기 좋을 텐데,부대 쪽으로 등산도 할 수 없고!” 불만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지나가는 운무 사이로 간간이 용문 마을이 보이고 양평 시가지와 한강이 펼쳐진다.그러나 용문산 정상은 두 시간을 기다려도 결국 볼 수 없었다.하산은 새수골 방향으로 잡았다.급경사 길엔 밧줄과 계단이 설치되어 있다.철 계단이 기역자로 꺾이는 곳에 오니 전망이 훌륭하다.내려가야 할 능선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에서 볼 때 꽤 멀리 느껴지던 헬기장에 30분만에 닿았다.생각보다 가깝다.헬기장에서 올려다보니 백운봉이 하늘을 찌른다.서쪽으로 길게 늘어진 암릉은 용천리로 흘러내리고 있다.백운봉 뒤로 용문산 정상은 아직도 나그네에게 자태를 보이지 않는다. 헬기장에서 새수골 길을 버리고 동쪽 연수리 방향으로 들어섰다.꽃이 진 철쭉이 군락을 이룬 길은 가끔 하늘만 보일 뿐 길고 긴 터널을 만들고 있다.철쭉 숲을 빠져 나왔다.배나무가 검은 망사그물을 뒤집어쓰고 있고,복숭아가 대추만하게 달려 있는 과수원을 지나니 연안마을 버스종점이다. ●볼거리·먹을거리 백운봉 들머리는 네 곳이다.연수리에서 형제약수를 거쳐 정상에 오를 수 있고,서쪽 용천리에서 사나사를 거쳐 주 능선에 오른 후 남으로 백운봉을 오를 수 있다.양평읍 백안리에서 오르는 길이 많이 이용되는데 마을버스로 새수골 입구까지 갈 수 있다.어디로 오르나 2시간이면 정상에 오를 수 있다. 용문사 쪽에서도 오를 수 있는데 상원사와 윤필암 터를 거쳐 남릉을 따르는 코스는 상당한 체력을 요구한다.백운암은 점안한 지 6년밖에 안 된 절이다.형제약수에서 기도하던 이가 10년째 공사를 진행중이다.용문산과 백운봉이 처마 위로 보이는 곳에 지었다. 백운암 앞에 밥집,‘모시는 사람들’의 숯불구이 쌈밥이 맛있다.1만원.더덕백반(9천원)도 먹을 만하다.(031)774-8910.솔골가든(031-772-7735)과 버스종점 부근의 쌍둥이 민박(031-773-4078)에서 민박이 가능하다. ●가는 길 수도권에서 6번 국도를 따라 양평을 지나면서 왼쪽으로 뾰족하게 백운봉이 보인다.용문면 소재지로 들어선 후 연수리 마을길로 6㎞ 들어가면 연안마을 버스 종점이다.백운암을 거쳐 등산이 시작된다.서울 상봉버스터미널이나 강변터미널에서 홍천행 버스를 타고 용문에서 하차한 후 연수리행 버스로 갈아타야 한다.˝
  • 儒林(95)-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차에서 내리자 오월의 햇살이 한꺼번에 플래시를 터뜨리듯 작열하고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낮은 울타리를 따라 피처럼 붉은 영산홍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서원 뒤편의 숲 속에 아카시아 꽃들이라도 만발한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 주위는 문자 그대로 천지개벽이었다.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까뭉개고 그곳에 새 아파트를 짓고 싶지만 명색이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돼 있는 유적지라 어쩔 수 없이 보존하고 있는 듯 서원의 건물들은 흥부네 집 아이들의 헤진 옷을 기운 누더기처럼 간신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원래는 야산을 등 뒤로 하고 양지바른 명당자리에 세워진 서원이었지만 이제는 볼썽사나운 고층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서원은 데리고 온 의붓자식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서원의 입구는 세 칸의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진 외삼문(外三門)으로 돌계단 위에 우뚝 서 있었다.홍살문처럼 역시 붉은 칠을 한 대문에는 각각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고,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진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그러나 그것보다 강렬하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서원 바깥에 있는 작은 못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스스로 못을 파고 그곳에 연꽃을 심었다고 하는데,그렇다면 이 못자리가 조광조가 만들었다는 그 연지(淵池)가 아닐까.그러나 철책으로 둘러싸인 못자리는 물조차 없는 메마른 구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개발,개발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들.그러나 그들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이와 같이 무신경하다.아파트 한 채에 들어가는 주방기구의 값만으로도 조광조가 만들었던 연못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아파트 거실에 매달린 고급 샹들리에의 조명 값만으로도 그 못에 연꽃을 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미친 것은 우리들이다.기록에 의하면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며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러나 미치광이는 조광조가 아니라 후세를 사는 우리들인 것이다.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귀한지 모르고 오로지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이익을 좇고 프리미엄에 미쳐 있는 미치광이들. 그 메마른 구덩이가 조광조가 직접 만든 연못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바로 못자리 위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잣나무 두 종류를 심어놓고 쉬는 것을 위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조광조가 심었던 잣나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그 나무들이 연못 위쪽에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나무들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세 그루. 나는 연못가에 있는 느티나무로 올라가 보았다.나무 밑둥 옆에는 이 느티나무가 경기도에 의해서 보호수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고,수령 5백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5백년이 된 느티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높이는 17m,밑 둘레가 4m에 이를 만큼 거목으로 자라 있었다.조광조가 죽고 왕이 바뀌고 왕조가 멸망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5백년 동안 그가 심은 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역사의 진리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노래하였던가. “나무는 신성한 것이다.나무와 이야기하듯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나무는 교의(敎義)도 처방도 듣지 않는다.나무는 개개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준다.” 조광조가 심은 느티나무.조광조가 죽은 이래 5백 년 동안이나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주는 느티나무.조광조의 혼백은 저 느티나무처럼 아직도 살아남아 역사의 진리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교의를 가르쳐주고 있지 아니한가.˝
  • 儒林(95)-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儒林(95)-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제1부 王道 제4장 文正公 차에서 내리자 오월의 햇살이 한꺼번에 플래시를 터뜨리듯 작열하고 있어 눈이 부실 정도였다.낮은 울타리를 따라 피처럼 붉은 영산홍의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고,서원 뒤편의 숲 속에 아카시아 꽃들이라도 만발한 듯 달콤한 냄새가 풍겨오고 있었다. 그러나 서원 주위는 문자 그대로 천지개벽이었다.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까뭉개고 그곳에 새 아파트를 짓고 싶지만 명색이 유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돼 있는 유적지라 어쩔 수 없이 보존하고 있는 듯 서원의 건물들은 흥부네 집 아이들의 헤진 옷을 기운 누더기처럼 간신히 그곳에 남아 있었다.원래는 야산을 등 뒤로 하고 양지바른 명당자리에 세워진 서원이었지만 이제는 볼썽사나운 고층아파트들로 둘러싸여 서원은 데리고 온 의붓자식처럼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고 있었다. 서원의 입구는 세 칸의 솟을대문으로 이루어진 외삼문(外三門)으로 돌계단 위에 우뚝 서 있었다.홍살문처럼 역시 붉은 칠을 한 대문에는 각각 태극문양이 그려져 있었고,검은 바탕에 흰 글씨로 쓰여진 ‘심곡서원’이란 현판이 내걸려 있었다.그러나 그것보다 강렬하게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서원 바깥에 있는 작은 못이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스스로 못을 파고 그곳에 연꽃을 심었다고 하는데,그렇다면 이 못자리가 조광조가 만들었다는 그 연지(淵池)가 아닐까.그러나 철책으로 둘러싸인 못자리는 물조차 없는 메마른 구덩이에 지나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는가. 개발,개발에만 온 정신을 팔고 있는 사람들.그러나 그들은 소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데는 이와 같이 무신경하다.아파트 한 채에 들어가는 주방기구의 값만으로도 조광조가 만들었던 연못은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아파트 거실에 매달린 고급 샹들리에의 조명 값만으로도 그 못에 연꽃을 심을 수가 있을 것이다. 그렇다. 미친 것은 우리들이다.기록에 의하면 사람들은 ‘선생이 하는 것을 보며 어떤 사람은 미치광이라 칭하였다.’고 하지 않았던가.그러나 미치광이는 조광조가 아니라 후세를 사는 우리들인 것이다.무엇이 소중한지 무엇이 귀한지 모르고 오로지 경제적 논리에 의해서 이익을 좇고 프리미엄에 미쳐 있는 미치광이들. 그 메마른 구덩이가 조광조가 직접 만든 연못임을 증명할 수 있는 증거가 바로 못자리 위쪽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기록에 의하면 조광조는 ‘이곳에 연못을 만들고 잣나무 두 종류를 심어놓고 쉬는 것을 위탁하였다.’고 전하고 있다.조광조가 심었던 잣나무는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그 나무들이 연못 위쪽에 아직도 남아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남아 있는 나무들은 은행나무와 느티나무가 세 그루. 나는 연못가에 있는 느티나무로 올라가 보았다.나무 밑둥 옆에는 이 느티나무가 경기도에 의해서 보호수로 지정되었음을 알리는 안내판이 서 있었고,수령 5백년이 되었음을 알리고 있었다.5백년이 된 느티나무임에도 불구하고 나무의 높이는 17m,밑 둘레가 4m에 이를 만큼 거목으로 자라 있었다.조광조가 죽고 왕이 바뀌고 왕조가 멸망하고 전쟁이 일어나는 5백년 동안 그가 심은 나무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그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역사의 진리를 말하여 주고 있는 것이다. 헤르만 헤세가 노래하였던가. “나무는 신성한 것이다.나무와 이야기하듯 나무에 귀를 기울이는 것을 아는 사람은 진리를 안다.나무는 교의(敎義)도 처방도 듣지 않는다.나무는 개개의 일에 집착하지 않고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준다.” 조광조가 심은 느티나무.조광조가 죽은 이래 5백 년 동안이나 삶의 근본법칙을 말해주는 느티나무.조광조의 혼백은 저 느티나무처럼 아직도 살아남아 역사의 진리를 통해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삶의 교의를 가르쳐주고 있지 아니한가.
  • 오세요! 확 달라진 석촌호수로

    1960년대 말 서울 송파권역 개발로 한강과 단절되면서 ‘죽음의 호수’로 여겨졌던 석촌호수가 30여년만에 시민들의 사랑을 듬뿍 받는 쉼터로 자리잡았다. 서울 송파구(구청장 이유택)는 오는 16일 오전 7시 ‘석촌호수 명소화 사업’ 준공식을 갖는다고 12일 밝혔다.이를 기념해 송파 한가족 시민 걷기대회도 연다.‘8자’ 모양으로 나눠진 동호와 서호 둘레 2.5㎞를 도는 코스다. ●‘죽음의 호수’서 휴식공간으로 석촌호수는 강남권 개발이 본격화된 지난 1969년 서울시의 한강 본류 하상정비사업 과정에서 생겨났다.서울시가 이 일대 강을 매립했는데,매립이 안된 일부가 호수로 남게 됐다.이후 줄곧 방치돼 오다 1980년대 초 도시미관을 해친다는 지적에 따라 정비작업을 벌였으나,이후 또다시 무관심 속에 방치돼 죽음의 호수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에 따라 송파구는 지난 2001년부터 시민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 석촌호수 일대를 명소화하는 작업에 나섰다.이번 준공식으로 3년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게 됐다.서울시 교부금 40억원을 포함해 72억원의 예산이 들어갔다. 석촌호수 및 주변이 정비되면서 이용시민도 부쩍 늘어났다.최근에는 평일 하루 1만여명,휴일에는 2만여명이 찾아와 조깅을 하는 등 시민들로부터 최고의 쉼터로 각광받고 있다. 송파구는 소나무가 많은 언덕이라는 지명 유래에 따라 동호쪽에 ‘소나무 장승마당’을 만들었다.옛날 한강을 오가던 황포돛배와 뗏목을 본뜬 모형도 띄워놓았다.단순히 보기 위한 공원이 아니라 시민들이 건강을 다지는 코스가 되도록 배려했다는 점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다.피크닉장과 노인들의 휴게공간인 ‘실버가든’도 함께 조성했다. 무엇보다 조깅로를 따라 불규칙하게 식재돼 있던 벚나무 대신 45종의 허브식물 1만 5000포기와 수양나무,산벚나무,이팝나무,계수나무 등 8만 2000여그루의 나무가 사시사철 아름다운 풍경을 연출,‘걷고 싶은 거리’ 추천 1호가 됐다. ●환한 불빛속에 음악 흐르고 석촌호수 최고의 작품은 호수변 콘크리트를 말끔히 걷어내고 인체공학적 탄성 재질로 단장한 2.5㎞짜리 우레탄 조깅로.조깅로 중간 중간에 해미석이 깔린 폭 1.5m,길이 420m의 지압보도 역시 사랑을 받고 있다.특히 20년만에 교체된 조명등 덕분에 4배나 밝아졌을 뿐 아니라 최신 음향시설도 갖춰 어디서든 음악감상도 가능하다. 오는 8월까지 석촌호수 수변무대에서는 매주 토요일 오후 7시30분 음악회가 1시간30분 동안 밤을 수놓는다.아카시아 꽃과 함께 하는 포크 콘서트,댄스 페스티벌,내마음은 호수 음악회,골든 팝 음악회,그룹사운드 콘서트 등 장르도 다양하게 선보인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시인과 선승, 어울려 세상을 논하다

    시인은 세상 속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한 가치를 추슬러 형상화하기 위해 뼈를 깎는 고통을 감수한다.속세를 떠난 선승(禪僧)은 인간의 보편적인 진리와 가치를 위해 모든 것을 버린다.그래서 시인과 선승은 승과 속을 떠나 언제든지 어울릴 수 있는 ‘도반’이다. 동국대 석좌교수인 신경림(69) 시인과 강원도 설악산의 백담사 회주 오현(72 )스님.신 시인이 세상에서 만난 사람들의 치열하고 힘겨운 삶을 실천이라는 덕목과 생명력으로 살려낸 순박한 문인이라면,오현 스님은 승속을 넘나드는 기행과 필력으로 승가의 이목을 받았던 괴팍한 선승이다.언뜻보면 어울릴 것 같지 않지만,두 사람이 세상을 보는 눈은 도반의 그것이었다. 지난 10일 저녁 강원도 인제군 백담사 만해마을.조계종 출판사인 ‘아름다운 인연’이 처음 낸 책 ‘신경림 시인과 오현 스님의 열흘간의 만남’의 주인공인 시인과 선승이 책 출간을 맞아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책은 지난해 6월부터 연말까지 10여차례에 걸쳐 시인이 백담사로 스님을 찾아 여행·사랑·환경·욕망·통일·전쟁·문학 등 7개의 테마를 놓고 솔직하게 대화한 것을 옮긴 기록이다. 두 사람은 오랜 여행 끝에 목적지에 도착한 동행자가 서로에 대한 믿음을 확인한 것처럼,세상을 향해 묻어 두었던 가슴 속의 절규를 속시원히 털어낸 듯 편안해 보였다.우선 시인이 “시는 시정잡배들이 세상의 밑바닥에서 하는 소리인데 선승이 잘 이해해서 고맙다.”는 말로 운을 떼자 스님은 중국 명(明)대의 현인 원호문의 글로 답했다.“시위선객첨금화/선시시가절옥도(詩爲禪客添錦花/禪是詩家切玉刀) 시인이 선승을 만나니 비단으로 덮이고 선승이 시인을 만나니 옥칼을 다듬어 주네.”시인의 승속을 넘나드는 경지를 극찬한 말이다. “세상의 평가대로 ‘괴승’으로 알았는데 세상을 보는 눈이 정확하고 날카롭다.”고 시인이 말을 잇자 스님은 “신 시인의 시에는 세상 사는 사람들에 관한 모든 그림이 있고 그것은 불교의 선시(禪詩)에 다름 아니다.”라고 대꾸했다. 그럼에도 시인과 선승은 어쩔 수 없는 경계를 갖고 있는가 보다.시인이 “사람이 욕심이 없다면 무슨 발전이 있을 수 있고 그런 욕심은 결국 사회를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이 아닌가.”라고 묻자 스님은 이렇게 말한다.“꽃과 나무가 씨앗을 뿌리고 열매를 맺으려고 하는 것처럼 모든 생명체는 나름대로의 욕심을 갖고 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생명의 욕구일 뿐 그 욕심의 정도를 자제해야 하며 특히 사람은 적게 가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열흘간의 만남’은 두 사람의 인생역정과 세상을 향한 말을 가감없이 전한다.“인생은 여행과 같다고 했는데 그 종착역인 죽음이 온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라는 스님의 물음에 시인은 말한다.“죽음은 죽음으로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요.죽음이 마냥 두려운 것만은 아니고 즐거운 것이 될 수도 있겠지요.” 두 사람의 알려지지 않은 연애 경험담도 들어 있다.시인이 ‘죽도록’ 사랑했던 소녀에 대한 짝사랑과 연상의 여인에 대한 연민과 실패를 고백하자 선승은 출가 직후 절집 공양주 딸과 나누었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들려준다. 인생을 시처럼 살고,시를 인생처럼 쓰는 선승과 시인은 결론 짓는다. “문학의 감동은 삶을 얼마나 생동감 있게 재구성했느냐에서 오는 것입니다.그리고 쓰지 않고는 못사는 사람만이 쓰는 것이지요.” 인제 김성호기자 kimus@seoul.co.kr˝
  • [그곳에 가고싶다] 남양주 예봉산

    예봉산(禮峰山·683.2m,경기도 남양주시)은 와부읍 팔당리와 조안리 경계에 솟은 산이다.‘산을 위해 제사를 지낸다.’라는 별난 의미를 담고 있다. 이곳 주민들은 옛날부터 이 산을 ‘사랑산’으로,팔당리·능내리·조안리의 경계를 이루는 철마산(588m)을 ‘작은 사랑산’이라 불렀다.사랑산은 덕소의 주산인데 동막골의 울창한 숲은 수백년 동안 한양 사람들에게 땔감을 공급하는 자원이었다.지금도 소나무와 참나무가 우거져 있다. 예봉산 산행 들머리는 십여곳이나 되지만 곳곳에 이정표를 잘 만들어 놓아 길 잃을 염려는 없다.팔당2교에서 철로를 통과하는 길을 택했다. 마을 끝에서 왼쪽 능선으로 붙어 20분 오르니 주능선의 삼거리가 나온다.소나무가 울창한 산길 곳곳에 철쭉이 피었고,간간이 멋스러운 암봉들이 고개를 뒤로 돌리게 한다. 무덤이 있는 곳에 오르니 검단산과 한강이 가까이 보인다.여기서 조금 더 올라가자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만난다.조망이 가히 일품이다.벼랑 위에 서니 현기증이 난다.검단산과 하남시가 한눈에 들어오고,북한산과 도봉산이 병풍을 치듯 서울을 감싸고 있다.시간만 맞추면 해돋이나 해넘이 풍경이 환상적일 게 틀림없다. 이곳부터 완만한 능선을 따라 활짝 핀 철쭉을 보며 걸으면 곧 정상이다.제단으로 쓰인 흔적인지 돌무덤으로 이루어진 서너 평쯤 되는 정상에 서니 조망이 시원하다.어디를 둘러봐도 산이요,골마다 마을이다.마을엔 공터만 있으면 아파트가 들어서 온통 회색 진열장이다. 누군가에게 들은 이야기가 생각난다.산꾼들이 산마루에서 쉬면서 대장이 대원들에게 물었다. “산이 생긴 이유를 아나?” 산 아래 마을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새내기가 말하기를,“예,산이 없으면 모두가 집터가 되기 때문입니다.”라고 했다니.참 기가 막힌 답변이다. 하산 길은 대부분 와부읍 쪽으로 나 있다.어디로 내려가도 한 시간이면 6번 국도에 닿을 수 있다. 동막골로 하산하는 길이 괜찮다.정상에서 200m 내려가니 안부가 나온다.이곳엔 갈대가 많고 넓어서 앉아 쉬기가 좋다.하산 길을 경계로 왼쪽은 소나무,오른쪽은 참나무가 우거져 있다.융단을 깔아 놓은 듯한 황톳길은 저절로 콧노래를 부르게 한다. 좀더 긴 산행을 하고 싶으면,정상에서 동남릉을 따라 봉안터널까지 가도 된다.천주교묘지가 있는 곳이 끝머리다.이보다 더 멀리 걷고 싶으면 북쪽으로 적갑산을 거쳐 다시 동쪽으로 운길산까지 산행을 연장해도 된다.튼튼한 다리로 부지런히 걸어야 한다. ●가는 길 서울에서 양평으로 가는 6번 도로로 덕소를 지나 팔당대교 가기 전의 육교가 있는 곳에서 좌회전해 1㎞ 정도 가면 예봉산 들머리인 팔당유원지다.서울 청량리에서 양수리행(165-3번) 시내버스가 수시로 있다.팔당유원지 하차.서울 강변역에서 112-3번 버스로 예봉산 입구(종점)에서 하차. 승용차로 양평 방향 6번 국도로 가다가 양수대교를 건너지 말고 북한강변을 서쪽으로 타고 종합촬영소 새터유원지·대성리를 돌아 청평대교를 건너 문호리·양수유원지를 거쳐 다시 양수리로 돌아오는 코스는 환상의 드라이브 코스다.아름다운 강변 정취를 만끽할 수 있다.다만 주말에는 길 막히는 것을 감수해야 한다. ●볼거리·먹을거리 산행 들머리에 남양주 향토사료관(옛 팔당분교 자리)이 있다(031-576-8147).역사와 문화의 향기가 숨쉬며 도시와 농촌이 어우러지는 남양주시의 각종 문화 자료를 볼 수 있다.조안면 능내리 다산유적지에 다산 정약 용 선생의 생가와 묘 그리고 다산기념관(031-576-9300)이 있다.팔당호와 두물머리 풍경은 너무나 정겹다.사진작가들이 많이 찾는다. 팔당은 매운탕으로 유명하던 곳이다.지금도 쏘가리와 빠가사리 등의 민물고기로 만드는 매운탕집들이 있다. 예봉정(031-576-0164),호수정(031-576-2070)의 매운탕이 맛있다.산행 들머리 마을 가운데 있는 싸리나무집의 칼국수는 싸고 푸짐해 찾는 산꾼이 많다.팔당역 광장 형제보리밥의 음식도 정갈하다. 동막골로 하산하면 동막쑥닭집의 닭백숙이 맛있다.인진쑥과 한방재료로 만든 쑥닭 값은 3만원(031-576-3388).˝
  • 불에 그슬려 고사위기

    주한 미국대사관 건립이 추진되던 옛 경기여고터(옛 덕수궁터)의 회화나무가 원인을 알 수 없는 불로 훼손됐다. 한국문화유산정책연구소는 덕수궁 선원전이 있던 옛 경기여고 자리의 회화나무가 불에 그슬린 채 말라죽어가고 있는 사진을 6일 공개했다. 나이가 200∼300년으로 추정되는 이 회화나무는 밑둥에 방화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흔적이 뚜렷하다.이 때문에 이 회화나무는 한창 새 잎을 피워야 할 5월에 접어들어서도 앙상한 가지만을 남기고 있다. 지난해 11월 발간된 덕수궁터 문화유적 지표조사 보고서는 “옛 경기여고 교정 한가운데 회화나무 한 그루가 있다.식생 상태는 양호한 편”이라고 이 나무가 건강했음을 밝히고 있다. 옛 경기여고터는 미 대사관 건립 여부에 대한 첨예한 논란이 있어 경찰이 24시간 방범 활동을 펴고 있으며,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황평우 문화유산정책연구소장은 “누군가 불을 질러 회화나무를 고사케 하려 했음이 분명하다.”면서 “당국은 진상을 밝혀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동철기자 dcsu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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