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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의 현관 요코하마

    日本의 현관 요코하마

    1859년 일본의 첫 개항장으로 서구문물을 수용한 요코하마. 일본의 근대화는 이곳에서 비롯됐다고 해도 좋을 만큼 요코하마는 서양의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인 ‘일본의 현관’이다.1872년에는 요코하마∼도쿄간 일본 최초의 철도가 부설되기도 했다. 요코하마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최초’로 기념할 것이 많다는 점이다. 일본에서 처음으로 가스등이 켜진 것도, 최초의 외과병원이 세워진 것도, 근대도로인 바샤미치(馬車道)가 생긴 것도, 아이스크림이 탄생한 것도 모두 이 진취적인 기질의 하맛코(요코하마 출신자)에 의해서다. 개항 당시 600명의 인구에 불과하던 자그마한 어촌은 이제 인구 350여만명의 대도시로 탈바꿈했다. 일본 근대문화의 발상지 요코하마가 젊은이들의 새로운 여행지로 변신하고 있다. 글 사진 요코하마 김종면기자 jmkim@seoul.co.kr 요코하마의 특징은 한 마디로 세계 유수의 항구도시라는 점이다.1859년 에도 바쿠후 말기에 개항한 이래 요코하마는 세계 각국의 선박이 드나드는 ‘미나토(항구) 요코하마’로 명성을 지켜왔다.JR(일본철도) 네기시선 간나이역에서 걸어서 15분, 오삼바시 국제여객터미널에 가보면 요코하마가 진정 일본의 대표 항구임을 실감할 수 있다. # 요코하마의 상징 ‘오삼바시’ 요코하마의 상징이자 중심인 오삼바시는 2002년에 새롭게 문을 연 국제여객터미널이다. 대형 외국 여객선이 기항하는 이곳에는 2000㎡의 다목적 홀이 있어 세계 여러 나라 사람들의 만남의 장소가 되고 있다. 오삼바시 터미널은 거대한 배의 형상을 띠고 있다. 비스듬한 바닥 전체가 널마루로 되어 있어 걷기 편하다. 마치 1등 선객을 위한 프롬나드 데크(산책 갑판)를 걷는 기분이다. 터미널 조금 높은 곳에는 24시간 열려 있는 옥상광장이 있어 연인이나 나들이객들이 즐겨 찾는다. # 최고(最高)건물, 최속(最速)승강기 오삼바시에서는 미래형 도시설계로 유명한 미나토미라이21 지역이 훤히 내다보인다. 요코하마 여행의 핵심인 미나토미라이21은 사쿠라기초 역 바로 북쪽에 위치한 신개발 지역. 이곳에 바로 일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인 70층짜리 랜드마크 타워(296m)가 있다. 랜드마크 타워에는 1분에 750m까지 속도를 내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승강기가 있다. 바람의 압력을 줄이기 위해 승강기를 달걀 모양으로 설계한 점이 독특하다.2층 로비에서 69층 랜드마크 타워 스카이가든(입장료 1000엔, 오전 10시부터 밤 9시까지, 토요일은 밤 10시까지) 전망대까지 오르는 데 걸리는 시간은 단 40초. 기네스 북에도 올랐다. # 석양과 함께하는 헬리콥터 크루징 요코하마의 풍경은 랜드마크 타워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것도 좋지만, 헬리콥터를 타고 새처럼 조감하는 것도 멋스럽다. 미나토미라이 헬리포트에는 요코하마항 상공을 나는 다양한 코스의 헬리콥터가 대기하고 있다. 석양 무렵에 운항하는 ‘트와이라이트 코스’(비행시간 약 5분)는 어른 4000엔, 어린이 2000엔.10분에 걸쳐 요코하마의 야경을 보여주는 ‘요코하마 베이 라이트 코스’는 트와이라이트 코스보다 3배 이상 비싸다.5인승 헬리콥터를 타고 요코하마 상공을 나니 요코하마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곳 책임자인 가오루 하라(엑셀항공주식회사 영업부장)씨는 “일본에서 헬리콥터 크루징을 1년 내내 하는 곳은 요코하마와 도쿄뿐”이라며 “특히 30여년의 역사를 지닌 요코하마 헬리콥터 크루징은 몇 달전에 예약해야 탈 수 있는 요코하마의 명물”이라고 말했다. # 낭만 싣고 떠나는 ‘로열 윙’ 유람선을 타고 요코하마를 감상하는 것도 기억에 남을 만하다. 오삼바시에는 ‘로열 윙’이라는 거대한 배가 있어 크루즈 여행을 주도한다. 일본에서 유일한 엔터테인먼트 식당선(船)이다. 순항 시간은 런치 타임(2100엔)과 디너 타임(2100엔)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그 사이에 티 타임 크루즈(1600엔)가 따로 준비돼 있다. 이 레스토랑 배에서는 중국의 1급 조리사가 광둥식 요리를 선보인다. 중국 본토 요리와는 사뭇 다른 ‘퓨전형’이어서 한국인의 입맛에도 잘 맞는다. 낮 시간에는 우아한 고전음악이, 저녁 시간에는 쿨 재즈가 생음악으로 펼쳐져 여행의 흥취를 더해준다.‘로열 윙’에 오르기 위해서는 개인은 두 달전에, 단체(15명 이상)는 10개월 전에 예약을 해야 한다. # 시간살림이 성공여행의 열쇠 여행의 묘미가 일상을 잊고 색다른 여유를 즐기는 것이라면, 시간에 쫓겨 종종걸음치는 맛보기 관광은 진정한 의미의 여행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의 압박 속에 사는 게 현대인의 숙명. 그러니 어떻게든 시간살림을 알뜰히 해 여행을 할 수밖에 없다. 하루동안 요코하마를 둘러보려면 그야말로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헬리콥터와 유람선도 타고 오삼바시 터미널에서 요코하마의 바람도 다면 이제 어디로 발길을 돌려야 할까. 일본의 차이나 타운인 주카가이(中華街)와 그 주변을 살펴보고, 다시 오삼바시로 돌아와 요코하마 야경 감상으로 마무리하는 것이 좋을 듯하다. # 극채색의 문 지나면 음식천국 ‘일본 속의 중국’ 주카가이는 미나토미라이선 모토마치·주카가이 역에서 내리면 바로 보인다.1923년 관동대지진 후 바다를 메워 만든 항구공원인 야마시타코엔 남쪽이다. 주카가이는 2차대전 전까지는 ‘난징(南京)거리’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차이나 타운이 다 그렇듯 주카가이에 들어서면 먼저 현란한 극채색 문들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주카가이에는 우호의 의미가 담긴 젠린몬(善隣門)과 세이요몬(西陽門)을 비롯해 모두 10개의 문이 있다. 차이나 타운에서 특히 눈에 띄는 것은 거리 한가운데 자리잡은 중국식 사원 간테이뵤(關帝廟)다. 중국 삼국시대 촉나라의 영웅 관우를 상업의 신으로 모신 곳이다. 화려한 색상의 웅대한 건물이 차이나 타운의 상징 구실을 하고 있다. 이 곳은 참배하려면 돈을 내야하지만 사람들로 북새통이다. 중국인들의 유난한 재신(財神)숭배 행태라니…. 쓴웃음이 새어 나왔다. # 삼국지 영웅 모신 간테이뵤 주카가이에는 각종 식당과 잡화점 등 500여개의 가게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다. 요코하마 개항 당시 중국의 상관(商館)에서 일하던 중국인들이 이 곳에 계속 머물면서 터를 닦아 놓은 노포들이다. 차이나 타운의 매력은 단연 먹을거리. 주카가이의 경우도 물론 마찬가지다.‘중국인은 하루 세 끼가 아니라 다섯 끼를 먹는다.’고 한다. 딤섬 즉 중국식 만두를 수시로 먹는데서 생긴 말이다. 차이나 타운을 걸으면 이를 어렵잖게 확인할 수 있다. 주카가이야말로 ‘만두의 거리’다. 구운 돼지고기가 든 차슈만두, 오징어먹물 만두, 상어지느러미 만두 등 종류도 정말 다양하다. 세계에서 가장 큰 중국인 거리 가운데 하나인 주카가이는 샌프란시스코의 차이나 타운에 맞먹을 만한 음식천국이다. # 외국인 거류지였던 야마테 주카가이와 이웃한 곳으로 지나칠 수 없는 곳이 야마테 지역이다. 주카가이와는 또다른 점에서 이국적이다. 요코하마에는 개항과 더불어 외국인 거류지가 생겨났다. 특히 야마테지역은 서양인들이 많이 살던 곳으로 이국풍의 건물과 교회들이 적지 않다. 요코하마항이 내다보이는 언덕 경사면에 위치한 요코하마 외국인 묘지에는 요코하마에 살았거나 방문했던 40여개국의 외국인 약 4500명이 잠들어 있다. 야마테 지역에는 1909년에 세워진 고풍스러운 목조서양식 건물인 야마테자료관, 유럽풍 돌층계와 정원이 아름다운 미나토미에루오카코엔 등 이국적인 볼거리들이 많다. # 요코하마는 역시 밤 주카가이와 그 주변을 둘러봤으니 이제 다시 오삼바시로 갈 차례. 해거름에 찬바람을 맞으며 오삼바시에 서니 멀리 요코하마의 명물 베이 브리지(860m)가 눈에 들어온다. 요코하마의 아름다움은 밤풍경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요코하마의 밤은 베이 브리지 아래로 흐르는 검푸른 물결과 각양각색의 건물에서 내뿜는 불빛이 어우러져 빛의 축제를 방불케 한다. 요코하마는 역시 밤이다. 푸른 빛을 쏟아내는 불야성의 밤.“거리의 불빛이 너무도 곱구나 요코하마 부루라이토 요코하마∼” 1970년대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한 이시다 아유미의 ‘부루라이토 요코하마’ 가락이 절로 떠올랐다. 요코하마는 도쿄의 위성도시 취급을 받기도 한다. 하지만 오고가는 배들로 늘 분주한 운치있는 도시다. 요코하마 여행객들은 흔히 도쿄에 숙소를 정하고 요코하마에 들르는 방식을 택한다. 도쿄에 숙소가 많은 만큼 싼 곳도 많기 때문이다. 도쿄에서 요코하마까지는 JR 도카이도혼선 등을 이용하면 30여분만에 갈 수 있다. 최근 미나토미라이선과 JR쇼난신주쿠 라인이 증설돼 도쿄 쪽에서 오기가 훨씬 편해졌다. 한국에서 요코하마로 직접 가려면 ANA항공편을 이용하면 된다. 김포공항에서 하네다공항까지 비행기가 하루 두 차례(오후 1시, 밤 8시20분 출발) 뜬다.ANA항공은 ‘요코하마 알리기’ 차원에서 내년 1월10일부터 12일까지 2박3일 일정으로 모니터 투어도 실시할 예정이다.45명 정도로 예상가는 39만 9000원선. 문의 ANA항공 영업부(02)752-1160.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0) 차와 시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20) 차와 시

    첫눈이 내렸다. 하얀 차꽃을 뿌리듯 대지에 살짝 몸을 올린 눈들이 마냥 한가롭기만 하다. 천둥처럼 섞어치던 바람도 어느새 깊은 잠에 들어가고 온 산은 그냥 적막에 빠져 있다. 너무도 자비로운 평화의 침묵이다. 평화는 내면의 침묵에서부터 시작된다. 침묵은 산란한 마음속에서 살아가는 일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게 한다. 침묵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삶의 눈을 뜨게 된다. 자비로운 평화와 침묵은 일상의 나를 보고 그속에서 냉철한 지혜의 길이 어디에 있음을 알게 한다. 그것이 바로 차의 마음이요 차의 길이다. 얼마 전 한 차인이 일지암에 찾아왔다. 그 차인은 오랫동안 지리산 화개에서 차 살림살이를 하고 있는 차꾼이다. 한잔의 차를 마시다 말고 깊은 한숨을 쉰 그는 나에게 물었다.“스님 현재 우리나라 차소비의 주류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현재 우리나라 차 소비의 70%는 이른바 대기업이 일상음료로 생산하는 ‘티백’녹차이다. 그리고 나머지 25% 정도는 두물차인 세작이다. 그런데 정작 우리가 가장 상품의 차라고 말하고 그 차를 마셔야 제대로 된 차를 마시는 것 같은 ‘우전’의 시장가치는 5% 내외다. 차에 대한 소비자의 시각이 많이 왜곡되어 있는 것이다. ‘우전’은 현재 우리나라 차 시장에서 가장 앞선 브랜드요, 상징성 있는 차 상품으로 차인들뿐만 아니라 일반대중들에게 인식되고 있다. 이른바 최상품의 차로 불리는 ‘우전’을 우리 차의 대표적인 브랜드로 삼는 것은 참으로 잘못된 인식이다. 그것은 향후 중국차 시장과의 경쟁에서 우리 차가 살아남을 수 있는 공간이나 여지가 무척 부족하기 때문이다. 우전이란 말은 곡우 전후로 딴 찻잎을 말한다. 여기에서 우전이란 찻잎이 충분히 제다할 수 있을 만큼 자란 시기란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같은 뜻이 와전돼 무조건 곡우 전후로 찻잎을 따야 하는 것이 제대로 된 차상품으로 인식되기에 이른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차를 제다할 수 있을 만큼 자라는 것은 매년 그 기후에 따라 편차가 심하다. 어떨 때는 곡우 전에 충분히 자란 때도 있고 어떨 때는 너무 어려 비비기도 어려운 상태도 있다. 그러나 차를 제다하는 차인들은 이같은 것을 무시하고 곡우 전후에 차를 억지로 생산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럴 경우 찻잎을 따기도 어렵고 차를 제다하기도 어렵다. 또 한 가지 있다. 바로 중국차와의 경쟁력이다. 향후 차 시장이 개방되면 중국차는 그 값싼 노동력을 바탕으로 물밀듯이 한국 차시장을 공략할 것이다. 중국에서 햇차는 우리보다 훨씬 앞선 청명 전에도 생산이 된다. 또한 사계절 내내 햇차를 생산할 수 있는 곳도 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우전으로 대표되는 우리 차시장에 대한 근본적인 고민을 해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나는 차인들에게 제안하고 싶다. 절기에 따른 것이 아니라 차 생산자가 차밭에서 처음 딴 것을 첫물차 두물차 세물차로 나누어 생산하는 것이 매우 좋을 듯하다. 앞서 언급했지만 차의 본성은 고요하고 사색적이고 이지적이다. 찻잔속에 찻잎이 퍼지며 연두색 색깔을 토해내면 그속에는 우주의 순환을 보는 듯한 정신적 심의(心意)가 싹튼다. 그런 점에서 차는 사람의 뜻과 마음을 키우는 날개와 같은 것이다. 한 잔의 차속에, 한 잎의 찻잎 속에 삶과 죽음의 문제, 심(心)과 색(色)의 문제 등 보다 근원적인 것을 생각하게 만드는 마력이 깃들어 있다. 차인들은 차를 통해 만난 내적 깨달음을 시로 표현한다. 진정한 차인은 차를 통해 자신을 깨우쳐 인격의 완전함을 지향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시는 차의 마음이요, 노래인 것이다. 옛 차인들은 한 잔의 차를 마시면서 그 마음을 그대로 노래했다. 초의 추사 다산 등 우리나라의 차인들뿐만 아니라 중국 일본의 차인들 역시 차의 마음을 시를 통해 마음껏 노래한 것이다. 그같은 노래들은 아이로니컬하게도 과거의 차를 알 수 있는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는 점에서 또 다른 의미를 남기고 있다. 먼저 신라·고려 시대의 차는 곧 잊혀진 우리 차에 대한 복원기록 같은 것이다. 마치 기록할 때처럼 당시의 상황을 짐작케 한다. 고려시대 문신이었던 김극기의 ‘한송정을 돌아보며’라는 시는 좋은 예이다. “외로운 정자가 바다를 임해 봉래산 같으니/지경이 깨끗하여 먼지 하나 용납 않는다/길에 가득한 흰 모래는 자욱마다 눈인데/솔바람 소리는 구슬 패물을 흔드는 듯하다/여기가 네 신선이 유람하던 곳/지금에도 남은 자취 참으로 기이하여라/주대는 기울어 풀속에 잠겼고/다조는 나뒹굴어 이끼 끼었다/양쪽 언덕 해당화는 헛되이/누굴 위해 지며 누굴 위해 피는가/내가 지금 경치를 찾아 그윽한 흥취대로/종일토록 술잔을 기울이네/앉아서 심기가 고요하며 물(物)을 모두 잊었으니/갈매기들이 사람 곁에 날아 내리네” 김극기는 금강산을 유람하고 돌아오던 길에 신라시대 화랑들이 호연지기를 기르며 차를 달여 마셨던 한송정에 들르게 된다. 그리고 묘련사의 석지조를 발견하게 된다. 김극기는 옛 차인들이 유적들을 돌아보며 그 회한을 읊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차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차시들은 충담사, 김지장 스님, 이규보 등 대문장가들의 시선집에 자리를 잡고 있다. 우리는 이 차시들을 읽으며 당시 차인들의 멋과 풍취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차시의 정수는 바로 차의 마음을 담은 것들이다. 먼저 대각국사 의천의 차시다. “북쪽 동산에서 새로 만든 차를/동쪽 숲에 사는 스님에게 보냈도다/한가로이 차 달일 날 미리 알고/찬 얼음 깨고 샘줄기를 찾는다” 겨우내 차를 그리워했던 차인의 마음을 한눈에 알 수 있는 차시다. 대각국사는 아지랑이 피어오르는 봄날 먼 남쪽에서 한 차인이 보낸 햇차를 선물받는다. 그 기쁨을 대각국사는 미처 녹지 않은 땅을 일궈 물을 찾는 심정으로 햇차를 기다린 심정을 한 편의 시로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 희종때 스님인 진정국사의 차시도 눈여겨볼 만하다. “귀한 차는 몽정산의 차 맛을 이었고/샘물은 혜산천에서 길어 온 것 같구나/졸음을 쓸어내고 정신을 맑게 하니/손님을 대하여 다시 여유가 있네/단이슬이 땀구멍에서 솟아나고/공산의 운제상인이/차 자리를 마련했다고 함에/시원한 바람이 겨드랑이를 식혀주네/어찌 영약을 구해서 마셔야만/불그레한 얼굴로 지낼 수 있다 하겠는가” 고려시대 지배계층인 귀족과 스님들은 중국의 명차로 알려진 몽정산의 몽정차를 마셨다는 것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뿐만 아니라 육유가 최고의 물로 인증한 혜산천의 물을 상징적으로 끌어들이는 것은 그 당시 육우의 다경을 비롯한 중국의 다서들이 우리나라에도 들어와 많은 다인들에게 읽혀졌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 대표적인 차인 가족으로 알려진 혜거도인 홍현주가의 차시도 볼만하다. 초의 스님의 ‘동다송´을 오늘에 있게 한 주인공인 혜거도인 홍현주가는 아버지 어머니를 비롯, 자식들 모두가 차를 즐긴 당대 최고의 세력자 집안이었다. 그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차를 마시며 지은 차시가 있다. “비 갠 뒤 갓 돋은 달 밝으니/흐르는 그림자 성긴 발에 어리네/먼 데서 오신 손님은 흥도 많으셔/맑은 빛은 모두 싫어하지 않는구나/허공이 밝으니 하늘은 넓고 넓어/이슬이 내려 옷을 적시네/누각은 허공속에 걸렸는데/산봉우리에 달이 걸렸네/구름으로 들어가면 구름 밖은 고요한데/별들은 나무 사이에 걸렸네/밤을 재촉하여 등을 걸었는데/바람이 읊조리니 호각소리가 짧아지도다/…차는 익어 시정에 젖어드니/거문고 맑은 소리 고운 손에 울린다/참으로 다정하고 즐거운 마음을/가도 가도 버릴 수 없네/머리 들어보니 은하수는 기우는데/이 기쁨 달님에게 물어본다” 먼저 아버지인 족수 거사 홍인모가 운을 뗀 후 그의 어머니인 영수합 서씨, 두 형과 여동생 유한당 홍씨, 그리고 홍현주가 돌아가면서 쓴 연시다. 한가족이 달빛을 풍광삼아 차를 즐기는 향취를 그대로 드러내는 아름다운 차시인 것이다. 차시 가운데 빠질 수 없는 사람이 있다. 바로 당대 최고의 천재시인 설잠 김시습이다. 설잠 김시습은 앞서 밝혔듯이 직접 차를 가꾸고 제다했던 차인이었다. 그가 차를 마시며 지은 연시 한토막을 소개해 본다. “밤에 듣는 소리는 패옥 같은데/새벽에 물 길으면 빛이 옥 같네/절아이 산차를 달이려/달이 담긴 찬 샘물 길어오누나/새벽해 떠오를 때 금빛 전각 빛나고/차 김 날리는 곳 서린 용이 날개치네/절이 오래되어 솔은 천길이나 자랐고/산 깊어 달이 한 무더기라” 매월당 김시습은 차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차의 마음을 담은 많은 차시들을 남겼다. 매월당은 이시에서 새벽에 물을 길어 돌솥에 끓이는 소리를 마치 아름다운 패옥 같다고 하고 있다. 뿐만 아니다. 달이 담긴 샘물 그리고 천길이나 자란 소나무속에 달과 함께 마시는 차의 기쁨과 아름다움을 절절히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근대 다인의 차시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사람은 바로 송광사의 다송자 스님이다.“뜰 아래는 차 샘이요, 뜰 위에는 정자 있어/집의 문 넓고 멀어 남쪽바다 눌렀구나/거울속 빛과 소리 천년을 숨어 있고/그림속 강산은 점점이 푸르다/백척난간에 바람이 머무는데/한 잔 뇌소차에 꿈을 깨는구나/책상 앞에 앉아 창랑곡을 떠올리니/물 맑으면 갓끈 씻고 물 흐리면 발 씻으리” 다송자 스님은 근대 차인으로서는 보기드물게 80여편에 이르는 빼어난 차시를 남겨 우리의 마음을 청량하게 한다. 비우고 비워 마침내 허공에 다다른 담백한 차생활을 전해주고 있다. 차는 곧 시며 선이다. 그것은 차를 통해 우리는 내적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는 심의를 알게 되기 때문이다. 깊은 산사에서, 활발한 도심에서 살며 차를 통해 자신의 마음을 정화시키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차의 효용성이랄 수 있다. 그런 아름다운 마음을 노래하는 즐거움 또한 이 시대 차인들이 회복해야 할 정신사인 것이다. 일지암 암주 ■ 효당 최범술과 차의 길 “육신을 가볍고 쾌하고 부드럽게 하는 것” 웰빙시대가 본격화되고 있다. 웰빙이란 글자 그대로 인간의 삶을 자연친화적으로 바꾸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현대인들은 인간의 풍요로운 삶을 마치 값비싼 고급문화를 향유하는 것으로 환치하는 ‘우’를 범하며 살고 있다. 웰빙이란 앞서 전제했지만 인간의 삶을 자연과 함께 자연스럽게 호흡하며 살게 하는 것이다. 그속에는 삶의 순리와 역리를 거스르지 않는 자연스러운 흐름이 존재하며 평범하면서도 편안하게 호흡할 수 있는 삶의 리듬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나의 차 은사인 효당 최범술 스님은 ‘차(茶)의 길’을 이렇게 설파하셨다.‘우리가 일상적으로 마시는 차에도 법도가 있다.’는 것이다. 효당 스님은 차를 끓이기 위해 불을 피우고 물을 재우고 법제된 찻잎을 넣어 차를 우려내는 것 하나하나에 그에 따르는 모든 행위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차를 통하여 생활하는 것’이라고 했다. 효당 스님은 “우리 인간 사회생활 그 어느 것이 그렇지 않음이 없겠으나 모든 인간사회의 복잡다단한 사회생활을 이와 같은 기호 속에서 가볍고 쾌하고 편안하고 부드럽게 조화된 상태에서 등장시켜 고요한 속에서 차생활을 해온 것이다. 이같은 차생활은 차나 무순이나 잎으로 법제된 차에만 국한시킬 필요는 없겠으나 위에서 말한 찻잎이 그러한 모든 요소에 적합하다 하겠다. 그러기에 선인들은 차를 인간생활상의 기호면에 등장시켜 그것이 지니는 맛과 멋을 통하여 인간답게 생활해온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화생활을 영위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있어 차란 빼놓을 수 없는 필수품이 되었고 인간문화생활의 생활까지 통틀어서 ‘차생활’이라는 말로 범칭하게 되고 이와 같은 생활을 하는 사람을 차인이라고 부른다.”고 말한다. 효당 스님은 여기에서 차의 맛을 문제삼는다.“차맛을 자세히 음미하면 쓰고 짜고 떫고 시고 단 여러 가지의 맛들이 있음을 알게 되는데, 이는 우리 인간들의 일상 생활속에서 있을 수 있는 갖가지 맛을 보면서 살아가기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동고동감(同苦同甘)한다는 표현처럼, 맛의 말로써 나타내니 모든 인간 사회생활 그곳에서 한껏 묘미를 느끼게 되는 것이리라.”로 정의하고 있다. 차뿐만 아니라 이 세상 많은 것들이 자세히 음미하면 모든 오감을 다 가지고 있다. 그러나 차는 다른 것들보다 더욱더 명징하게 오감을 전해준다. 효당 스님은 함께 고통받고 함께 기쁨을 느낀다는 ‘동고동감’을 통해 차와 인간삶의 절묘한 조화가 어디에 있는지를 우리에게 일깨우고 있다. 우리의 삶이란 곧 번뇌고 환희인 것이다. 번뇌와 환희의 찰나지간 바뀜이 우리의 그날 그날 삶을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효당 스님은 차인의 진정한 길은 그같은 동고동감 속에서도 늘 고요하고 평화스럽게 자신을 온 우주와 함께 호흡하라고 권한다. 육신을 가볍고 쾌하고 부드럽게 하는 길이 바로 다도의 길인 것이다. 다도의 길은 또 고인물이 흐르는 물로 말미암아 맑은 여울로 변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차 한잔에 한 생각을 모으고 그 모두 어진 생각으로 온 우주와 합일이 되고 그 합일된 바탕 속에서 자신의 내적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을 얻는 것이다. 다도의 길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이다. 효당 스님은 매일매일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권한다.“우리 인간이란 매우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이다. 제일 가깝고 쉽고 평범한 큰길이 있음을 잊은 채 멀고 어렵고 까다로운 샛길을 찾는다. 발걸음을 멈춰 다시 한번 돌아보자. 지금 가고 있는 길이 어느 길인가를. 그리고 차와 선이 있는 길이라면 우리 선인들의 슬기가 그러했던 것처럼 우리도 그렇게 걸어가자.”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교보생명-故신용호 창립자家

    “이 사통팔달, 한국 제일의 목에 방황하는 청소년을 위한 멍석을 깔아줍시다. 와서 사람과 만나고, 책과 만나고, 지혜와 만나고, 희망과 만나게 합시다. 이곳에 와서 책을 서서 보려면 서서 보고, 기대서 보려면 기대서 보고, 앉아서 보려면 앉아서 보고, 베껴 가려면 베껴 가고, 반나절 보고 가려면 반나절 보고, 하루종일 보고 싶으면 하루종일 보고, 그리고 다시 제자리에 꽂아 놓고 사지 않아도 되고, 사고 싶으면 사 들고 가도 좋습니다.” 고 신용호 교보생명 창립자는 ‘대산(大山) 신용호’라는 평전에서 당시 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금싸라기 땅인 종로 1가 1번지 교보빌딩 지하에 교보문고를 세운 일에 대해 이같은 논리로 동의를 이끌어냈다고 밝혔다. 한국의 미래를 모토로 만든 교육보험에도 청소년들의 지적 수준과 나라의 성장은 비례한다는 확신이 담겨 있다. 창업 이념도 국민교육진흥과 민족자본 형성이다. ●독립운동 집안에서 태어난 다섯째 아들 신 창립자는 1917년 8월 전남 영암군 덕진면 노송리 솔안 마을에서 부친 신예범 선생과 모친 유매순 여사의 6남 중 5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독립운동을 하며 잦은 옥살이를 하는 바람에 어머니가 가장 노릇을 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곱살 때는 폐병에 걸려 죽는다는 선고도 받았다. 열살 즈음 병이 나았지만 학교를 가진 못했다. 형편이 어려운 데다 형들이 각종 애국 운동으로 집안을 돌보지 않아 어린 마음에도 그가 살림을 도와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낮에는 밭에서 일하는 대신 ‘책속에 길이 있다.’는 어머니의 가르침에 따라 밤에는 책을 읽었다. 동생의 책은 물론 주변에 보이는 책은 닥치는 대로 가져다 보았다. 겨울엔 잠과 싸우기 위해 방에 불도 때지 않고 책을 읽다 동상에 걸리기 일쑤였다. 당시 ‘천일독서’를 목표로 각종 위인전, 철학서, 고전, 사서를 섭렵했다. 비록 학교 문턱에는 가지 못했지만 ‘사람은 책을 만들고 책은 사람을 만든다.’는 독서철학으로 스스로 내실을 다졌다. 함께 교보생명 창업을 도운 막내 동생 신용희(83) 전 회장을 제외하고 다른 형제들은 대부분 애국운동에 몸담았다. 큰형인 고 신용국옹은 일제시대에 항일운동을, 광복 후에는 청년 노동운동을 했다. 그 큰아들인 신동재씨가 2000년까지 교보의 부동산관리 전문 자회사인 교보리얼코의 회장을 지냈다. 둘째 형 고 신용율씨도 항일운동에 몸담았으며, 그의 둘째 아들 신평재(67)씨가 현재 교보생명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다. 한일은행 상무로 재직하다 1991년 제의를 받고 교보생명 사장 등을 역임했다. 셋째 형 신용원옹은 도쿄 음악학교를 졸업한 뒤 항일음악가로 활동하다 납북했다. 넷째 형 고 신용복옹은 일제 당시 조선생명지사장을 지냈다. 막내 동생 신용희 전 회장은 목포상고를 나와 산업은행에서 일하다 한국전쟁 이후 줄곧 신 창립자를 도와 함께 일했다.1967년 교보생명 창립 이후에는 30년간 교보에 몸담으며 부사장, 회장 등을 지냈다. 그의 아들인 신인재(39) 보드웰 인베스트먼트 사장(8%)과 함께 교보생명 지분을 13.25% 갖고 있다. 신 사장은 고 신 창립자로부터 경영권을 승계받은 큰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으로부터 함께 일하자는 제의를 받기도 했지만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신 사장은 최근 이동통신사에 솔루션을 공급하는 코스닥 상장업체 무선인터넷솔루션 회사인 필링크의 대표이사 직함도 얻게 됐다. ●교육열을 사업으로 연결한 기지…교육보험의 탄생 문학가를 꿈꿨지만 집안을 일으키기 위해 사업에 뜻을 세웠다. 약관이 되던 해에 서울로 갔고 이어 1936년 중국에서 양곡 수송 사업을 벌였지만 광복과 함께 10년간 닦은 기반을 버리고 빈손으로 귀국했다.1946년. 귀국후 첫 사업으로 전북 군산에 ‘민주문화사’란 출판사를 냈으나 외상 책값이 회수되지 않아 간판을 내렸다. 그렇게 몇 차례 사업에 실패한 뒤 문득 중국에선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지 않지만 한국에서는 논 한 뙈기 없어도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는 강한 교육열이 있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국 부모들의 교육열은 무형원자재인 것이다.‘생·로·병·사’중 유일하게 보험이 빠져 있는 ‘생’ 부문에 교육보험을 끼워넣어 상품화하기로 했다. 당시 보험에 대한 인식은 형편 없었다. 일제시대 보험은 수탈 방식이자 보신(保身) 방편이었다. 더욱이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이 50달러도 미치지 못해 보험에 들 여유가 없었다.1954년 정부가 보험업을 재개시켰으나 기존 생명보험 회사들이 대부분 휴면상태에 있을 만큼 보험업은 쑥대밭이었다. 그러나 세상이 험난해서인지 국민의 80%가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때 그의 재기가 번뜩였다.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을 찾아가 “담배를 끊고 그 돈으로 보험을 들면 아들을 대학에 보낼 수 있다.”고 설득한 것이다. 창업 당시에는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지 못했다.1958년 종로1가 60번지 2층짜리 건물에서 직원 46명과 함께 먼저 ‘태양생명보험주식회사’를 설립했다. 교육보험이란 업종상 생명보험으로 분류돼 상호에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넣을 수 없었다. 교육열을 자원으로 만든 상품이었고 당시 생명보험에 대한 인식도 열악해 ‘교육보험’이란 이름을 포기하지 않았다.1958년 1월 창업한 뒤 관계 공무원을 끊임없이 설득, 같은 해 7월 상호변경 승인을 얻어 ‘대한교육보험’(현 교보생명)을 출범시켰다. ●슬하 2남2녀의 혼맥 1943년. 중국에서 한창 양곡수송 사업을 크게 벌이던 신 창립자는 당시 아버지가 위독하다는 전보를 받고 급히 귀국했다. 도착해 보니 아버지는 건강한 모습으로 그를 맞아주셨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내일 모레가 네 장가가는 날이다.”는 아버지의 한마디. 결혼을 시키려고 거짓 소식을 보낸 것이다. 당시 남자 26세는 혼기를 놓친 나이였지만 그는 벌인 사업 때문에 아직 결혼할 때가 아니라고 여겼다. 도망칠 마음까지 먹었다고 고백하며 배려를 바랐으나 아버지가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눕는 바람에 결혼식을 치렀다. 부인 유순이(81)씨는 당시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2년제 전수학교까지 마친 명문가 출신 규수. 사업에 전력을 쏟느라 가정에 소홀했던 남편을 탓하지 않고 어려운 형편 속에서 묵묵히 2남2녀를 길러냈다. 자녀들의 혼사도 그와 비슷하다. 막내 아들을 제외하고 모두 중매 결혼이다. 명문 대가와의 정략 결혼은 눈에 띄지 않는다. 큰딸 신영애(56)씨는 전 서울대학교 의과대 의학과 마취과학교실 교수 함병문(58)씨와의 사이에 현진(32), 지훈(31), 세훈(25) 등 2남 1녀를 두었다. 신영애씨는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지분 평가로 지난 2004년부터 단번에 350억원대 자산을 보유, 연말마다 언론에서 선정하는 여성 부호 명단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둘째 딸 신경애(54)씨는 법조인에게 시집가 1남1녀를 낳았다. 남편 박용상(61)씨는 서울대 법대에서 박사까지 마친 뒤 사법시험에 합격, 서울고등법원 등에서 판사로 활약한 뒤 방송위원회 위원, 헌법재판소 사무처장, 국회 공직자윤리위원장 등을 역임했다. 현재 변호사박용상법률사무소를 운영중이다. 박용상씨의 큰형 용설씨는 내외빌딩관리㈜ 대표, 동생 용삼씨는 내외엔지니어링 대표다. 고 신 창립자의 자리를 이어받은 큰 아들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은 부인 정혜원(48) 봄빛여성재단 이사장과의 사이에 중하(24)·중현(22) 두 아들을 두고 있다. 서울대 의대 교수 출신인 신 회장은 불혹이던 지난 1993년 교보에 발을 들여놓은 뒤 현재 직계 중 유일하게 교보에서 일하고 있다. 정 이사장은 이화여대 영문과를 나왔다. 막내 신문재(44)씨는 이정숙(44)씨와의 사이에 딸 혜진(18)을 두고 있다. 형제들 중 유일한 연애 결혼이다. 미국에서 산업디자인을 전공한 그는 1991년부터 2005년 8월까지 광화문 교보문고내 문구 액세서리 음반 팬시용품 등을 판매하는 400여평 매장의 문보장을 비롯해 전국 6개 교보문보장을 운영해 왔다. 교보문고가 직접 문보장을 운영하기 위해 신씨로부터 지난 8월 문보장 사업권을 회수했다. 현재 새 사업을 구상중이다. ●지독한 완벽주의와 파격 인사 고 신용호 창립자는 지독하다 싶을 만큼 완벽하고 집요하다는 평을 받는다. 땅을 고를 때도 좋은 날, 궂은 날, 비온 다음날 등 두루 살피는 완벽주의자다.77년 명예회장,85년 창립자 등으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1990년대 후반까지 신입사원 면접에 직접 들어왔다. 사업을 시작한 지 3년이 지나도 실적이 저조해 본사 부장, 실장, 중역까지 나서 손을 들라고 권하자 그들을 나가게 한 뒤 ‘급료는 후불로 주겠다.’는 광고를 통해 간부 사원을 다시 구한 일화는 아직도 회자된다. 창업 10년 만인 1967년 회장으로 물러난 뒤 2000년 아들 신창재씨가 교보생명 회장에 취임하기까지 33년간 무려 사장이 19번이나 바뀌었다. 평균 수명이 1.7년이었다. 경영 안정을 위해 최고경영진을 쉽게 바꾸지 않는 업계의 관행과는 다른 것이다. 교보의 임원 인사는 상식을 뛰어넘어 기발하고 파격적이란 평이 나오는 이유다. 신창재 회장의 인사 스타일도 재계 안팎의 주목을 받고 있다. 지난 2002년 5월 취임한 장형덕 대표이사 사장의 경우 사장직을 폐지하는 형식으로 취임 10개월 만에 퇴임시켰다. 단일 지도체제가 더 효과적이라며 사장을 없애고 대신 부사장 3명을 임명해 집단경영체제로 개편했던 것. 그때부터 ‘대표이사 회장’ 밑에 ‘대표이사 사장’ 없이 ‘대표이사 부사장’ 체제로 가고 있다. 이어 지난 2004년 2월 박성규 부사장을 선임,‘집단경영체제’는 다시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맨손으로 생나무를 뚫어라’ 고 신용호 창립자는 ‘죽고 나면 손해’란 보험에 대한 당시 인식을 바꾸는데 초점을 맞춰 교육보험 1호인 ‘진학보험’을 세계 처음 내놓았다. 죽어야 혜택을 주는 게 아니라 부모가 돈을 적립해 자녀가 초·중·고등학교를 진학할 때마다 학자금을 주는 상품이다. 먼저 단체들을 공략했다. 군인 단체 저축성 보험인 일명 ‘화랑계약’을 고안했다. 잦은 군의 이동에 탈락계약이 늘어 성과는 없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군 이동에도 추적·관리되는 시스템을 도입,1967년 육군과 170억원의 단체 계약을 맺었다. 파죽지세로 해군·한전 등 대형 단체들과 꾸준히 계약하는 개가를 올리며 승승장구했다. 판매 창구도 강화했다. 종로기독청년회관(YMCA)에서 대학생을 모아 보험강좌를 실시한 것을 계기로 대학지부를 설치, 대학생도 판매 채널로 끌어들였다. 지방유지를 직접 찾아다니며 기관장으로 영입하기도 했다. 상품에도 그의 기지가 엿보인다. 암 상품은 그가 처음 개발했다. 뿐만 아니라 보편적인 성인병도 하나씩 보험상품으로 만들었다. 보험업계 전산화 발상을 추진한 최초의 인물도 바로 그였다.1974년 학자금 선지급 업무를 처음 전산화했고 “컴퓨터를 모르면 간부가 될 수 없다.”며 전 사원을 상대로 ‘컴퓨터 활용능력 자격인증제’도 실시했다. 그가 인생을 이야기할 때 전반은 ‘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는 과정’이고 후반은 ‘생나무 뚫는 것을 많은 사람들 앞에서 보인 과정’이라 비유했다. 인생은 장애의 연속이지만 강한 정신력만 있다면 아무리 높고 힘든 목표라도 달성할 수 있다는 게 그만의 철학이다. 이같은 열성과 집념으로 1958년 당시 6대 생보사 중 막둥이로 태어난 교보생명은 창립 5년 만에 보유계약 56억원으로 업계 3위,1964년엔 보유계약 100억원 돌파로 업계 2위에 오른 뒤 1967년 설립 9년 만에 업계 정상에 섰다.‘맨손가락으로 생나무를 뚫은’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인생의 다른 한 축…교보문고 교육 보험은 대세가 아니었다.80년 들어 경제성장과 함께 늘어나는 사교육비를 감당할 수 없는 시절이 오면서 보험만으로 교육비를 해결할 수 없게 됐다. 변하는 고객 욕구에 따라 양로보험, 종합보장생활보험 등 일반 생명보험 상품의 비중이 커졌다. 교육보험만으로 경쟁력이 떨어지자 1995년 ‘교보생명’으로 사명을 바꾸었다. 삼성생명의 약진으로 교보는 1974년부터 업계 1위에서 2위로 밀려났다. 자산이 늘어나면서 관련 계열사도 속속 설립했으나 모두 보험으로 맡긴 고객의 돈을 운용하기 위한 금융 계열사였다. 부동산관리 전문회사인 교보리얼코(1979), 교보증권(1994) 등 총 9개 자회사를 세우면서 교보를 오늘날 35조원 규모의 금융 자본으로 성장시켰다. 그 중 금융과 동떨어진 업종이 하나 있다. 바로 교보문고(1980)다. 교육을 통한 민족부흥을 창업 이념으로 삼고 있는 만큼 따지고 보면 업종의 본질은 같다는 설명이다. 1980년 종로 1가 1번지에 사옥 교보빌딩이 세워지자 그는 지하에 서점 설립을 제안했다. 온갖 연줄을 동원하며 지하아케이드 자리 쟁탈전이 벌어지던 때였다. 간부들은 채산성이 약하다며 서점이 들어서는 것은 상식적이지 않다는 의견을 냈고, 손해가 나면 보험회사에 악영향을 미친다는 이유로 당시 허가관청인 재무부도 반대하고 나섰다. “우리 회사가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다면 이 자리에는 당연히 으리으리한 고급상가를 들여야 합니다. 하지만 이 값진 땅에 책방을 크게 열어 청소년과 시민이 자유롭게 이용토록 한다면 그 효과가 어느 정도나 될지 상상해 보시오.” 손해가 나더라도 청소년의 정신역량을 키우는 일인 만큼 자신이 떠맡겠다고 설득했다.1985년에는 일반 독자뿐 아니라 학자들을 위해 80만종의 세계 논문도 공급했다. 지방사옥이 세워질 때마다 학생과 시민들이 교보문고 지점 설치를 요구했을 정도다. 대전, 성남, 대구, 부산, 부천, 강남 등에 속속 지점을 열었다. 광화문에 있는 교보문고를 찾는 고객 수는 일평균 4만 5000여명, 연간 1500만명에 달한다. 삶의 두 축이 교보생명과 교보문고라고 지적했을 정도로 애착도 컸다. 그러나 말년을 맞아 또다시 병마가 찾아 왔다.77세가 되던 1993년. 회사 정기건강 검진에서 간 기능에 석연치 않은 증후가 발견됐다. 담도암이었다. 의사들은 그에게 맛있는 음식 많이 먹고, 기운 있을 때 여행을 다녀오라는 처방을 내렸다. 사형 선고였던 셈이다. 그는 암과 싸우며 여생을 보내느니 살든 죽든 결판을 내겠다고 마음먹고 불가능하다는 담도암 수술을 감행했다. 수술후 그는 중환자실에서 목에 구멍을 뚫고 2개월이나 암흑 속에서 지내야 했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 재활물리치료 반년 만에 골프장에 다시 나갈 수 있었다. 근력운동과 식이요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면서 90년대 후반까지 업무를 보고받는 등 경영에 관여했다. 그러나 8년 뒤 암이 간으로 전이되면서 몸이 약해졌다. 결국 2003년 9월 19일 오후 6시1분 서울대병원에서 노환으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86세였다. jhj@seoul.co.kr ■ 신창재회장과 정혜원 여사 “내조만 하며 살아온 탓에 사회공헌 사업은 꿈도 꿔본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남편의 제의로 사회공헌 사업을 시작하게 됐지요. 내조와 아이들 뒷바라지에도 벅차지만 소명으로 여기며 열심히 하고 있어요.” 신창재(52) 교보생명 회장의 부인 정혜원(48)씨는 요즘 사회활동에 바쁘다. 그는 남편과 두 아들을 돌보는 일에 전념해온 전업 주부였다. 남편 신 회장으로부터 사회공헌 사업을 해보라는 제의를 받고 2004년 4월 성매매 피해여성 보호단체를 지원하는 봄빛여성재단을 창립, 이사장으로 일하고 있다. 순전히 남편 신 회장의 사재로 시작한 사회공헌 사업이다. 서울 종로구 적선동 사무실로 매일 출근하면서도 아이들이 완전히 홀로서기할 때까지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며 걱정이 많다. 그는 한사코 취재를 거부했다. 사회 활동은 하고 있지만 언론 대응 능력이 부족하다는 이유에서였다. 이화여대 영문과 출신인 그는 소탈하면서도 적극적인 성격으로 책임감이 강하다는 평을 받는다. 중매를 통해 남편을 만났다고 밝혔다. 평범한 집안에서 데려온 며느리라고 스스로를 소개했다. 고 신용호 창립자의 수수함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는 남편 신 회장이 양복도 맞추러 갈 시간이 없을 만큼 바쁘다고 했다. 실제로 신 회장은 아버지의 유업인 교보문고와 교보생명을 어떻게 발전시킬 수 있을지 고민이 많다. 아버지만큼 골프를 좋아하지만 교보로 옮긴 이후 거의 필드에 나가지 못할 만큼 마음의 여유가 없다. 교보생명은 지난 2000년 5월 신 회장 취임과 함께 ‘질´경쟁을 선언하면서 업계 2위에서 3위로 밀려난 뒤 여전히 회복하지 못하고 있다. 먼저 교보문고는 교보생명이 증자해 전자책 등 문화 콘텐츠를 생산하는 지식문화 전문회사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포부다. 출판업이 사양산업으로 전락하다 보니 새로운 돌파구가 필요하다는 판단에서다. 교보문고는 현재 부채비율이 416%로 은행으로부터 신규 여신이 어려운 처지다. 교보생명은 기존 주주가 여력이 없어 제3자 배정 방식으로 5000억원을 증자할 계획이다. 다른 생보사보다 상대적으로 지급여력비율(160%)이 낮다. 자기자본 확대가 이유다. 그러나 2대 주주인 자산관리공사가 난색을 표명하고 있어 문제다. 자산관리공사 소유·관리지분(41.26%)의 가치가 희석되지 않는 상태에서 잘 팔릴 수 있도록 협조해야 증자에 동의한다는 조건을 내세우고 있다. 업계는 신 회장이 과연 이 두 마리 토끼를 잡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예의주시하고 있다. 교보생명의 한 임원은 신 회장에 대해 “아버지를 닮은 완벽주의자”라고 말했다. 경기고, 서울대 의대를 나와 서울대 의대 산부인과 교수로 살아오다 불혹이던 지난 1993년 아버지 고 신용호 창립자의 뜻에 따라 그간 배운 의학 공부를 포기하고 대산문화재단 이사장으로 교보생명에 발을 들여놓았다.1996년 11월 교보생명 부회장,2000년 5월 교보생명 회장으로 취임한 뒤 변화와 혁신을 기치로 삼고 전력 질주 중이다. 박성규 교보생명 부사장은 “과연 의사 출신이 기업을 어떻게 경영할지 의아하게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를 보면 답이 나온다.”고 전했다. 의사 출신답게 깊은 통찰력과 분석력을 갖춘 데다 책을 많이 읽는 덕분에 멀리, 넓게 보는 안목이 있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꼬마아기 14인의 치맛바람

    꼬마아기 14인의 치맛바람

    치맛바람 중에도 아주 훈훈한, 엄마냄새 가득한 바람도 있다. 정릉동 266의 61, 담없는 집의 엄마 김문수(金文洙·38)씨가 그런 바람의 주인공. 벌써 넉 달째 동네소녀 열 네 명의 집회를 일요일마다 집뜰에서 열어준다. 노래하고 공놀이하고「포크·댄스」추는「브라우니」소녀단 집회. 다음은 하도 재미있어 보여 찾아 본 어느 일요일의 이 집회 얘기. 한국 최초의 동네소녀단, 일요일마다 한 집에 모여 『들린 사람처럼 아이들에게 매혹되고「걸·스카우트」운동에 미치지 않고는 이 짓을 못하죠. 아이 셋 가진 살림하는 여자가 집안으로 남의 아이들을 끌어 들이는 일이니까요』 「브라우니」는 소녀단 중에도 제일 나이 어린 국민학교 꼬마들의「그룹」이다. 그래서 우선 시끄럽고 다루기가 가장 힘들다. 이 정릉의「브라우니」들 나이도 만 6살부터 12살까지. 대장인 김문수씨의 막내딸 박명선양과 동네꼬마 서은선양이 최연소자. 5학년짜리가 6명, 4학년짜리가 2명, 3학년짜리 3명, 2학년짜리 1명. 일요일 하오 2시면 저희들 이름대로「브라운」빛「브라우니」단복을 입고 모여든다.「브라우니」방석 한 개씩,「브라우니」일기 하 권씩을 들고 온다. 집회는 담은 없지만 넓은 잔디가 있는 뜰에서 열린다. 손가락 두 개로 이마를 짚고 악수하는「브라우니」인사를 한다. 1주일 만에 만나는 동무들. 주간 동안은 제각기 다른 학교, 다른 학급으로 뿔뿔이 헤어져 공부하는 꼬마들이다. 사실 이 정릉「브라우니」는 이것이 가장 큰 장점이다. 국민학교 어린이의 소녀단 활동이 이제까지 없었던 건 아니다. 거의가 학교 단위로, 학년 단위로「그룹」이 조직되고 대장은 국민학교 선생님이다. 엄마가 대장이 되어 이웃을 단위로 조직된「브라우니」는 이 정릉의 경우가 처음. 나이가 다양하니까 지도하는 엄마는 좀 힘들다. 얼핏 생각하면 꼬마들도 6살~12살이면 지능 정도차가 심해서 곤란할 것 같다. 그러나 사실은 오히려 흥미 있어 한다. 학교에서, 집에서 보는 식상한 얼굴들이 아니라서인지 의들도 그럴 수없이 좋다. 『하느님과 나라를 위해 일하는 어린이가 된다』『남을 돕고 가족을 돕는다』『손윗사람을 존경하고 고집을 부리지 않는다』는 약속과 규율을 같이 외는 것도 이날의 일과. 게임을 한 가지씩, 끈 매는 법도 배우고 쉬운「게임」을 한 가지씩,「포크·댄스」도 한 가지씩 엄마대장이 가르치는 대로 배운다. 공치기를 하다가 털썩 자빠져도 옷을 버리지 않는다. 옥외에서는「브라우니」깔개를 엉덩이에 꼭 매고 있으니까. 끈 매는 법도 배운다.『남을 돕는다』는 약속을 지키려면 우선 무엇이든 할 줄 알아야 한다. 치맛단이 뜯어졌거나 단추가 떨어졌을 때 꿰매는 법도 배운다. 6살박이 명선, 영선, 두 꼬마도 물론 같이 배운다. 12살짜리 언니들은 이 두 꼬마가 앙증맞고 귀여워 죽겠단다. 이래서 집회 활동 중에 우애는 더욱 깊어진다. 「브라우니」일기첩에는「1일 1선(善)」의 소녀단 실천항목이 있다. 제각기 공책에 칸을 만들어 가진 자작 일기첩. 1주일 동안 한 착한 일을 서로 공개하는 일과도 있다. 아직은 어린 꼬마들이니까「이닦기」「자기 방 자기가 치우기」「형제끼리 안 싸우기」「엄마 심부름 하기」가 가장 큰 기록. 그동안 날씨가 추워서 옥외집회는 잠깐 하고「프로그램」을 주로 집안에서 했다. 20평짜리 집의 4평 응접실과 꼬마방이「브라우니」임시집회실. 열 네 명이 모여 앉으면 와글와글해서 사람과 소리가 집안을 꽉 메운다. 『어쩌다 일요일에 집에 있으면 자기 아이들도 귀찮은 법인데 매주일 그 와글거리는 것 어떻게 참고 사시오?』 이 집 주인 박기순(朴基淳·한국은행 조사역)의 친구들이 신통해 한다. 방관자인 아빠뿐만 아니라『「브라우니」에 들린』엄마도 실은 고달프다. 『교회에서 좀 늦게 돌아오면 점심밥이 입에 들어 갈 새가 없어요』 꼬마들이 벌써 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이 일이 재미나는 것은 운명이고 부부간의 결혼계약이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박기순씨는 신통해 하는 친구들에게 변명조로 이렇게 해명한다. 『「걸·스카우트」를 그만두지 않는 걸 조건으로 결혼했으니 별 수 있나요』 대장은 세 아이 가진 엄마, 13년 전 소녀단원 된 후로 13년 전인 57년 3월 김문수씨는「걸·스카우트」봉사대원으로 일하기 시작했고 한창 재미를 붙인 그 해 9월에 결혼을 했다. 그때 심정으로는 너무 당연한 결혼조건. 그 뒤로 매주 2시간「걸·스카우트」일을 해왔다. 『「브라우니」들이 너무 수선을 떨면 조심스러워요』 그래도 아빠가 자주 독촉을 해서 만들어진「담없는 집의 브라우니」다. 작년 11월에 딸네미 있는 이웃집을 일일이 방문해서 22명이 모였었다. 집이 좀 멀고 너무 수줍음 타는 아이들이 빠지고 지금은 14명. 『엄마들이 그러는데 꼬마들이 일요일 되기를 얼마나 기다리는지 모른대요. 4월은 꽃씨 뿌리는 달이죠』 지난번 3월 15일 선서식을 했는데 엄마들이「금일봉」을 선사했다. 그 돈으로 꼬마들이 공을 샀다. 나머지는 동네에 뿌릴 꽃씨를 사서 4월 활동을 할 계획. 57년 3월 김여사가「걸·스카우트」대원으로 선서한 것도 15일. 이번「브라우니」들이 선서한 것도 3월 15일. 그 동안 모아둔「걸·스카우트」단보(團報)를 며칠 전에 들춰 보고 알아낸 우연의 일치. 이것도 즐겁고 신명나는「운명」인 줄 알고「브라우니」엄마 노릇을 언제까지나 할 작정이란다. [ 선데이서울 69년 4/20 제2권 16호 통권 제30호 ]
  • 재개발 열풍 서러운 달동네

    재개발 열풍 서러운 달동네

    ‘도시의 공기는 자유를 만든다.’ 서구 중세시대의 격언입니다. 당시 농노계급이 신분의 자유를 얻기 위한 거의 유일한 수단은 도시로 ‘탈출’하는 것이었습니다. 도시는 왕이나 영주도 함부로 할 수 없는 자치권을 가지고 있던 덕분이지요. 한국전쟁 직후 다들 못 먹고 못 살던 시절. 서울은 서구의 중세 도시와 유사한 의미를 갖고 있었습니다.‘생존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는 공간이었습니다. 그러나 무일푼 ‘촌놈’들이 제 한몸 뉘일 곳은 달동네뿐이었지요.1994년 드라마 ‘서울의 달’이 선풍적인 인기를 끈 것도 극중 홍식과 춘섭의 달동네 생활이 팍팍한 우리네 일상과 다를 바 없던 까닭일 것입니다. 그런 달동네가 이젠 서울에서 사라져만 갑니다. 더 나은 주거 환경으로 변모하는 것은 분명 반길 일입니다. 하지만 대신 들어서는 ‘아파트숲’에 달동네 사람들이 등 비빌 데는 좁기만 합니다. 갈 곳 없이 남은 이들에게는 이번 겨울도 가혹하기만 합니다. 성북동 고급 빌라와 중계동 학원촌의 그늘에서 연탄 한 장과 김치 한 포기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입니다. 옛 것 없는 새 것은 있을 수 없습니다. 과거 우리의 모습인 이들을 어떻게 포용하느냐는 어떤 미래를 그릴 것인가라는 문제의식과 맞닿아 있습니다. 함께 하지 않는 내일은 우리가 아닌 ‘그들만의 미래’입니다. 새벽 하늘에 진눈깨비가 날린 지난 21일. 하늘과 맞닿은 달동네는 이미 한겨울 바람이 휘감고 있었다. 미로처럼 얽힌 골목길을 따라 늘어서 있는 주인 없는 집들. 코흘리개 아이들과 강아지들은 그 사이를 뛰어다닌다. 구멍가게 난로 주위는 노인들 차지다. 서울에서 얼마 안 남은 달동네 풍경이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사는 사람들. 달동네로 향하는 길만큼이나 가파른 일상의 풍경들이 펼쳐진 곳. 그러나 달동네는 아파트촌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제 곧 역사의 뒤안길로 퇴장할 서울 달동네 사람들의 겨울나기를 살펴봤다. 서울의 달동네는 이제 손을 꼽을 정도다. 노원구 상계4동 희망촌과 양지마을, 성북구 성북2동 북정골 등 4∼5곳만 남아있다. 그것도 재개발·재건축 사업이 진행중 이거나 추진되고 있다. 노원구 상계4동 ‘희망촌’은 서울시내에서 달동네의 명맥을 이어가는 거의 유일한 곳이다. 지하철 4호선 상계역에서 종점인 당고개역으로 가다 보면 창 밖 오른쪽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희망촌에는 300여가구 1000여명의 사람들이 살아가고 있다. 당고개역에서 내려 수락산 자락을 따라 오르는 가파른 계단과 좁은 차도가 세상과 이곳을 연결하는 유일한 통로다. 상계 4동은 거의 전체가 3차 뉴타운지구로 지정돼 있다. 희망촌을 찾은 손님을 가장 먼저 맞는 이들도 부동산 업소들이다. 쓰러져가는 집마다 업자들의 명함과 전단이 도배돼 있다. 달동네 사람들에게 겨울은 여전히 가혹한 계절이다. 이중창은 고사하고 비닐과 목재문으로 겨우 바람만 막았다. 도시가스는커녕 유지비가 만만찮은 기름보일러도 이 곳에서는 사치다. 최근에는 연탄을 다시 때는 집도 늘었다. 그러나 연탄값도 버겁다. 주민 정상준(55)씨는 “하루 연탄 세 장이면 방 뜨끈하게 데울 수 있지만 돈이 없어서 마음대로 못 한다.”고 한숨을 내쉬었다. 산동네까지 배달되는 연탄은 장당 380원 정도다. 한겨울을 나려면 500장은 필요하다.20만원도 이들에게는 큰 돈이다. ●집세 오를까봐 집 수리도 못해 희망촌 건너편 ‘양지마을’에는 5800여가구 1만 6000여명이 살아간다. 대부분이 기초생활수급자. 서울시민 대부분이 저렴하게 이용하는 도시가스가 이곳에도 들어오지 않아 연탄·기름·전열기 등에 의지하고 있다. 결국 중산층보다 연료비 부담이 더 큰 셈이다. 이날은 마침 한 기업에서 보내온 김치를 주민들에게 배달하는 날. 상계4동 사회복지사 강수아(32·여)씨와 함께 김치를 들고 나섰다. 이곳에는 유독 독거노인들이 많다. 이들에게는 지역사회복지관에서 전달하는 도시락과 안부전화가 거의 유일한 ‘생명줄’이다. 김치를 받은 김옥분(가명·70) 할머니는 연신 복지사의 손을 어루만지며 눈물을 훔쳤다. 김 할머니는 연탄 땔 힘도 돈도 없어 작은 전기장판 하나에 의지해 살고 있다. 그나마 전기값도 걱정이다. 김 할머니는 청각장애까지 겪고 있다. 하지만 얼마 전 약값 등으로 15만원이나 나가서 보청기도 새로 사지 못했다. “그래도 너희들 때문에 겨우 살아. 따뜻하게 다녀.” 김 할머니는 추운 날씨에 산동네를 오르내리는 복지사를 되레 친딸처럼 걱정한다. 이곳에 사는 이들은 대부분 세입자들이다. 보증금 500만원에 20만원 안쪽의 월세를 낸다. 그러나 눈·비로 천장이 내려앉거나 담장이 무너져도 집주인들과는 연락이 안 되기 십상이다. 그러나 집주인에게 연락을 못 하기는 세입자들도 마찬가지다. 강씨는 “수리가 되면 집세 오를 걱정에 연락 안 하고 위험하게 사는 게 여기 사람들의 불문율”이라고 말했다. ●나무도 여전히 훌륭한 땔감 중계본동 산 104번지에는 1670여가구 4000여명이 부박한 삶을 이어가고 있다. 이곳도 개발 열풍이 한창이다. 주택공사와 SH공사가 이곳을 수용한 뒤 임대주택을 공급하겠다고 나선 상태다. 여기 주민들은 대개 들어온 지 10년 정도 된 이들이다. 다른 달동네와 달리 젊은 사람들도 눈에 종종 띄는 이유다. 젊은 부부와 중년 부인은 물론 짙은 화장에 세련되게 빼 입은 아가씨들까지 다닌다. 하지만 좁은 골목길로 들어가면 여전히 어려운 사람들로 넘친다. 특히 나무를 땔감으로 쓰는 이들도 많다. 도끼로 나무를 패고 있던 박상춘(50)씨는 “공사장 폐목이나 버려진 가구 등을 잘개 쪼개 난로 땔감으로 쓴다.”면서 “나무도 남아도는 데다 연탄값도 아낄 수 있으니 일석이조”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천막에 쌓아둔 나무에 불이라도 나면 동네 전체로 퍼질 것 같아 위험천만해 보였다. ●텃밭서 김장거리 수확 성북구 성북 2동 북정골은 가장 도심에 가까운 달동네다. 북악산 자락 서울성곽 바로 아래에 있다. 이곳은 비교적 다른 곳보다 생활 형편이 낫다. 기초생활수급자 숫자도 일반 동네보다 많지 않다. 그러나 꼬불꼬불한 길과 쓰러져가는 집들, 그리고 생활고를 겪는 이웃들이 많다는 점은 다르지 않다. 북정골에서 눈에 띄는 풍경은 텃밭이다. 가파른 경사나 집 뒤편 작은 공터에 마련한 밭에 배추나 파 등을 심었다.‘산사태의 원인인 농사를 짓다가 처벌될 수 있다.’는 구청의 경고문도 생활고 앞에서는 효력을 잃었다. 마침 서너평 남짓한 밭고랑의 배춧잎을 줍던 박순자(가명·57·여)씨는 “여기서만 열 포기 넘는 배추를 수확했다.”면서 “가뜩이나 살기 어려운데 이렇게라도 아껴야 하지 않겠느냐.”고 되물었다. 성북2동 사회복지사 이주안씨는 “자연환경과 함께 사는 북정골 주민들은 어려운 살림살이에도 다행히 정이 많은 편”이라고 귀띔했다. 마지막으로 찾은 곳은 달동네의 ‘대명사’ 하월곡동 산2번지. 한때 2000가구 이상 모여 살았지만 지금은 100가구도 채 안 남았다. 지난 9월 재개발 사업시행 인가가 확정되면서 주민들은 밀물 빠지듯 흩어졌다. 이 곳 장위중학교 맞은편에서 구멍가게를 하고 있는 이진배(69)씨는 하월곡동 달동네 토박이다. 고향인 전남 곡성에서 40여년 전 상경한 뒤 여기서 쭉 지냈다. 하지만 이씨에게 이제 남은 건 걱정뿐이다. 가게와 조그만 집의 권리금은 8000여만원에 불과하다. 연립 하나 장만할 돈도 안 된다. 이곳을 떠나는 것도 못내 아쉽기만 하다. 이씨는 “청춘을 보낸 하월곡동을 떠나는 게 시원섭섭하다.”면서 “마지막으로 설을 쇤 뒤 지방 쪽으로 거처를 옮길 것”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두걸 고금석기자 douzirl@seoul.co.kr ■ 달동네의 유래는 ‘달동네’라는 용어가 언제부터 어떻게 사용됐는지에 대한 정설은 없다.60∼70년대 신문에서 각종 개발 사업의 여파로 도심에서 밀려난 철거민들이나 형편이 여의치 않은 사람들이 달이 잘 보이는 산자락에 천막을 짓고 산다는 의미로 ‘달나라 천막촌’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했다. 이 말이 1980년 TV 일일연속극 ‘달동네’가 방영된 이후부터 불량·불법 가옥이 몰려있는 산동네를 의미하는 대명사격으로 사용됐다. 당시 이 드라마는 어려운 처지 속에서도 서로 보듬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애환을 그려 큰 인기를 누렸다. 사실 60∼70년대 ‘강제이주’된 철거민들에게 허락되는 것은 비바람을 겨우 피할 만한 천막 하나였다. 수도며 하수도, 부엌까지 공동으로 사용하며 어깨 너머로 옆집의 살림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주거환경은 열악했다. 달동네는 ‘주거환경개선’이나 ‘재개발’의 대상이었지만 도시 성장에 필수적인 노동력을 공급해주는 의미는 부인할 수 없었다. 청계천 주변, 청량리, 사당동, 봉천동, 행당동, 삼양동, 하월곡동, 상계동, 상도동 등 서울 곳곳에 자리잡았던 달동네는 80∼90년대 이후 대부분 높은 ‘아파트 숲’으로 변하게 됐다. 얼마 전까지 달동네의 대표격이었던 난곡도 이제는 고층 아파트가 즐비하고 곧 경전철이 도입되는 ‘신도시’가 된다. 상계4동, 중계본동 등 일부 남은 지역들도 뉴타운이나 공공개발 등 개발에 큰 기대를 걸고 있는 상태다. 문제는 달동네가 없어지면 원주민들은 어디로 옮겨가느냐는 것이다. 재개발 뒤 원주민들의 재정착률은 30% 남짓이다. 다른 대체 주택을 찾아야하지만 동시다발적으로 달동네가 사라지는 상황이라 이주할 곳을 찾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최근 개발이 끝난 난곡의 경우 인근 다세대 주택의 반지하방이 이전 달동네 주민 대부분을 흡수했다. 글 고금석기자 kskoh@seoul.co.kr 사진 류재림기자 jawoolim@seoul.co.kr ■ 도움 인천 수도국산 박물관
  • [25일 TV 하이라이트]

    ●생방송 60분-부모(EBS 오전 10시) 나이가 들면서 아프지 않은 곳이 없다고 말하는 어머니들에게서 보듯 여성들은 임신과 출산을 겪으며 갖가지 이상 신호를 포착하게 된다. 홀대와 무관심에도 불구하고 오래 참으며 살림을 꾸리는 수많은 여성의 몸에 대해 이제부터라도 고마움을 전하고, 그 몸을 사랑하는 바른 방법에 대해 알아보는 시간이다.   ●다이아몬드의 눈물(SBS 오후 9시55분) 철종은 진 회장을 찾아와 인하를 버린 남자가 형민이라고 털어놓고, 이석 또한 인하의 유서에 화가 치밀어 형민에 대한 복수를 결심한다. 형민에 대해 의심하고 있던 사실을 확인한 진 회장은 이혼서류에 도장을 찍게 한 뒤 회사에서 내쫓아 버리고, 화가 난 형민은 회사의 비밀문서들을 빼돌리려 한다.   ●글로벌 비전(YTN 오후 1시10분) 잠비아는 무료 에이즈 진단센터를 전국적으로 확대, 보급하고 있다. 섹스산업과 마약이 에이즈 확산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우크라이나에서는 매춘 종사자에게 위생적인 주사와 콘돔을 나눠준다.60만명 이상의 에이즈 고아가 있는 잠비아, 에이즈 확산 속도가 가장 빠른 나라인 우크라이나의 대책을 알아본다.   ●레인보우 로망스(MBC 오후 6시50분) 재경이와 홍철이가 길거리 캐스팅이 돼 트롯 듀오를 결성한다고 한다. 가수를 시켜주겠다며 이것 저것 요구하는 연예기획사 사장님. 똑똑한 재경이가 그런 사람에게 속을 리 없다는 생각에 은경이는 확인에 나선다. 도대체 사기꾼 연예기획사 사장이 어떤 사람이기에 재경이는 알면서도 속은 것일까?   ●별난 여자 별난 남자(KBS1 오후 8시25분) 나라는 병문안을 온 종남을 대놓고 박대하며 내몰고, 민숙은 재옥이를 통해 종남이 고아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석현이 선약이 있어 친구 모임에 빠지게 된 해인은 기웅을 만나 종남이 신경 쓰인다고 말하고, 그 시간 석현은 종남을 만나 나라 대신 사과하고 위로해 주는데….   ●사랑과 전쟁(KBS2 오후 11시5분) 어느 날 집으로 찾아온 남편의 숨겨진 여자 정애. 남편이 총각인 줄 알고 7년을 만나왔다는 그녀는 순희에게 헤어질 것을 요구하지만, 순희는 무슨 일이 있어도 이혼만은 해줄 수 없다고 말한다. 정애는 찾아와 행패를 부리고, 급기야는 정애의 자살소동으로 사실을 알게 된 시아버지는 충격으로 쓰러진다.
  • 어느 가정부의 인생 이력서

    어느 가정부의 인생 이력서

    한국 여성의 새로운 직업 시간제 가정부는 그 형태화된 역사가 1년 6개월. 그들은 오늘 어디까지, 어떤 모습에 이른 것일까. 그들이 그려나간 분포도를 가름해본다. 자기 말 가진 마부의 아내, 한때는 집도 장만했으나 마포「아파트」에서 5년 동안 시간제 가정부를 지낸 황완순(41·서울 서대문구 연희동)씨가 살아온 발자취는 이러하다. 17세 때 황해도에서 농사꾼에게 시집을 간 황여인은 월남한 뒤 건장한 남편이 몇 필의 말을 끌어 집 한 간을 장만했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말이 늙고 나면 개값도 못되는 것이어서 차차 밑바닥 생활까지 처져갔다. 남의 밑에 들어가기 싫어하던 남편도 마음을 고쳐먹고 5년 전에는 마포「아파트」청소부로 일하기 시작했다. 허리 다친 남편 앓아 눕자, 살아갈 길 찾아 나선 것이 일 나간 지 이틀 만에 허리를 다친 남편이 앓아 눕자 애 다섯을 앞에 놓고 앞이 캄캄했다. 무엇이든 할 용기가 났다. 남편을 마포「아파트」에 소개했던 사람에게 사정을 했다.『막일이라도 좋으니 일당을 받는 일을 해내겠다』고. 마포「아파트」어느 집에 처음 소개된 그 날을 황여인은 못잊는다고 했다. 내 집일 하듯이 해주고 1백원을 받아 든 뒤 보리쌀 한 되, 새끼줄 낀 연탄 1개를 사들고 집을 향하던 5년 전 6월 어느날 저녁을…. 서투른 일 솜씨가 빠르지는 못해도 알뜰하게 밝은 마음가짐으로 일해나갔다. 차차「아파트」안에서 인정을 받아 2백원의 일당을 받게 됐다. 다시 발전해서 하루 걸러 시간제로 일을 하기 시작한 게 2년 전. 한 달에 1천원을 받았다. 지금은 1천 5백원 정도. 남는 시간에는 또 다른 집을 돌고 해서 최고의 수입이 한 달에 9천 2백원을 모은 적도 있다. 세수 한번 하고 쓴 수건도 빨랫감이 되는 미국인 가정은 일이 많은 대신 하루 걸러 시간제로 한 달에 3천원씩 월급이 후해서 외국인 집을 좋아한다. 『「키」를 맡기고 연탄「바이」하는 것도 시키죠』- 이제는 웬만한 외마디 영어도 할 줄 알게 됐다. 미국인들은 한번 믿으면 이사할 때 꼭 다른 집에 소개해주곤 한다는 것. 아침 9시에 직장 마포「아파트」로 출근. 이 집 저 집 연탄 갈 시간, 필요로 하는 시간을「스케줄」짜놓고 한 바퀴 돌고 나면 하루 일이 욕스럽게 여겨지지 않고 저녁 6시쯤이면 끝난다. 그동안 복직이 된 남편도 같은「아파트」에 청소부로 일하고 있다. 이 집 저 집 일 도와주고 저녁 6시 퇴근 끝나면 함께 퇴근을 해도 좋은 철저한 맞벌이 부부. 남편의 고정수입 7천 9백원은 고스란히 살림에 쓰고 황여인이 버는 돈은 주로 아이들 기르는데 쓰고 있다. 23세 된 딸은 시집을 보낼 마련도, 국민학교만 졸업한 19세 아들에게는 편물 기술도, 15세 딸은 중학교 3학년, 13세 딸이 국민학교 6학년, 7세 막내아들, 다섯 아이를 부모가 해줘야 될 만큼 뒷바라지도 해주는 생활이 됐다. 황여인과 같은 생활의, 다른 여인은 마포「아파트」만도 5명이 넘는다. 주부가 제일 바쁜 시간이 아침 9시 전과 저녁 6시 후라면 이들 가정주부들은 주부가 해야 될 일만을 남겨놓고 힘든 일만 처리해주는 살림 보조원. 훈련된 믿을만한 시간제 가정부가 각 가정에 골고루 침투될 때 식모가 들고 들어오던 밥상, 식모가 깔던 잠자리는 이래서 서서히 우리 생활에서 멀어지게 될까 싶다. 믿을 수도 없고 훈련도 안된 시간제 가정부라면 사설 소개소에서 잠깐 하루만 빌어 밀렸던 산더미 같은 일을 내맡겨도 되는 사람 정도로 알아온 것이 67년 12월 14일 이전이다. 서울 YWCA에서는 여성들만의 모임에 가장 많은 화제가 되어오고 출석에 지장을 가져오는 큰 문제가 식모 때문에 생기는 것. 우선은 회원들을 위해서 식모를 훈련하기 시작했다. 67년 12월 14일 국민학교를 졸업한 신원이 확실한 11명을 모아 10일간 교육을 시켰다. 이들 11명에게 그릇 집약된 식모의 통념을 깨뜨려 주고 새로운 직업의식을 불어 넣는데 고심했다. 믿을 수 있고 훈련된 시간제 가정부는 그 후 지금까지 7회 동안에 139명이 각 가정에 주선됐다. 이들 말고도 각「아파트」단위로 그 나름대로 훈련된 가정부가 괘 많은 수가 됐다. 가정부는 어엿한 직업인, 오히려 고용주 계몽해야 20~50세까지의 이들 가정부는 거의 가정부인이라는 것. 그래서 철저하게 부업처럼 여기면서 일하게 됐다. 이들은 아침 9시에 출근, 저녁 6시에 퇴근을 하면서 일당 250원을 받는 직업인이 된 것이다. 그러나「에티케트」에서 위생·요리·아이보기까지 교육받은 이들을 부리는 쪽은 전혀 훈련이 안돼 있다는 것. 앉아서 쉬던 주부는 밥을 먹고, 일을 한 가정부는 라면 한 그릇으로 점심을 지나게 하는 등. 이제는 직업인을 고용하는 고용주도 계몽 받을 때가 온 것 같은 느낌. 또 가정부들이 원하는 집은 일하기 편한 집이다. 동선(動線)이 최단거리로 개선된 부엌의 주인은 일하는 주부의 것. 물론「싱크」대, 조리대 등이「딜럭스」한 비싼 부엌을 지적하는 게 아니다. 선반 하나 발판 하나라도 편한 곳에 받쳐 있다는 것. 서울 YWCA에서는 아기보기 전문, 빨래하기 전문, 요리하기 전문 등 분업화해서 여대생을 집단 훈련시킬 계획 중이란다. 남의 가정생활도 몸에 익힐 겸 여대생의「아르바이트」로 권장해도 욕되지 않을 하나의 직업이 됐다는 것을 거듭 강조했다. [ 선데이서울 69년 4/13 특대호 제2권 15호 통권 제29호 ]
  • 박근혜 3기체제 非영남·非주류 중용 ‘탕평인사’

    박근혜 3기체제 非영남·非주류 중용 ‘탕평인사’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21일 사무총장에 최연희, 홍보기획본부장에 정병국, 전략기획본부장에 엄호성 의원을 각각 임명했다. 대변인에는 이계진, 대표비서실장에는 유정복 의원이 각각 임명됐고 정책위의장에는 서병수 의장대행이 내정됐다. 한나라당은 이날 국회에서 최고위원회의를 열고 박 대표가 추천한 15명의 주요당직자 인선안을 확정했다. 박 대표의 이번 인사는 자신과 당의 ‘외연 확대’에 무게가 놓인 것으로 풀이된다. 박 대표는 ‘3기 체제’로 최근 40%대를 ‘고공비행’하는 당 지지율을 이어가면서 내년 5월 지방선거와 길게는 2007년 대통령선거에 대비해야 한다. 또 대권후보로서 지지 그룹을 넓히며 당 장악력을 높여야 하는 과제도 안고 있는데 이런 문제의식들이 인사에 반영됐다는 분석이다. 비영남권 인사를 대폭 기용해 영남색을 덜었고 박 대표와 갈등을 빚어온 소장파나 비주류 의원들을 끌어안는 ‘탕평 인사’도 단행했다. 특정 계파에 쏠리지 않으면서 소외돼 있던 ‘중립지대’ 의원들도 등용했다는 것이다. ●대선후보경선 공정성 시비 차단 주요 당직자 4명 가운데 서병수 정책위의장 내정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비영남권 인사다. 최연희 사무총장과 이계진 대변인은 강원도, 유정복 대표비서실장은 수도권 출신이다. 그만큼 ‘영남색채 빼기’에 신경을 썼다.‘영남당’이나 그를 기반으로 한 ‘대표 특권 누리기’라는 비난의 단초를 없애려는 의도로 보인다. 특히 당의 살림을 맡는 사무총장에 ‘중립적 인사’로 꼽히는 3선의 최 의원을 내세운 것은 향후 대선후보 경쟁에서 불거질지 모를 공정성 시비를 미리 차단하려는 포석이라는 일반적 평가다. 사시 14회의 검사 출신 최 사무총장은 사무부총장 등 당직을 역임했고 법제사법위원장을 맡았다. 이계진 대변인과 유정복 대표비서실장을 기용한 것도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강원 원주 출신의 초선인 이 대변인은 방송인 출신으로서의 높은 인지도와 신선한 이미지가 장점으로 꼽힌다. 경기 김포 출신의 유 비서실장도 지방자치단체장과 내무관료를 거치며 다진 정무 역량을 인정받았다는 후문이다. 두 사람 모두 정치적으로 무색무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재선의 정병국 홍보본부장 발탁은 전형적 탕평인사로 꼽힌다. 그가 이른바 ‘남·원·정’(남경필·원희룡·정병국)’의 일원으로 박 대표에 비판적으로 일관해왔던 비주류였다는 점에서다. ●전문성도 고려 정책위의장에 부산 출신의 재선인 서병수 정책위 부의장을 기용한 것은 그가 맹형규 전 정책위의장의 사퇴 뒤 대행직을 맡아 현안 관련 정책수립 능력에서 ‘합격점’을 받았다는 분석이다. 그는 기업인·대학교수·민선구청장 등의 다양한 정치경력을 쌓았다. 전략기획본부장에 부산 출신의 재선인 엄호성 의원이 기용된 것은 앞으로 예상되는 치열한 대여 전략대결에서 경찰 간부 출신에다 당내 정보통이라는 특기를 높이 샀다는 후문이다. 이종수기자 vielee@seoul.co.kr
  •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8)일본의 차 문화

    [여연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18)일본의 차 문화

    늦가을과 초겨울 하늘은 참으로 투명하고 맑다. 마치 가을걷이를 위해 풍성하게 들어차 있던 들판이 텅비어 버린 것 같이 아름답고 맑아서 눈이 아프도록 시리다. 코발트빛 밤 하늘은 또 얼마나 깊고 청순한지 모른다. 너무 높아서 까치발을 들고 손을 눈썹위 이마에 얹고 쳐다봐야 하는 밤하늘은 마치 술이 술술 익어가는 시골의 마을처럼 우리의 애잔한 삶을 살포시 위로하는 길손같이 정겹기만 하다. 하늘에 떠있는 별은 또 얼마나 우리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가. 천목(天目) 즉 하늘의 눈 같은 별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길을 잃은 우리 중생들에게 혜안(慧眼)의 살림살이를 살 수 있도록 하는 길라잡이 역할을 하는 가로등 같은 것이다. 산에 뜨는 달 또한 마찬가지다. 산에 뜨는 달은 등불이 되고 바람에 흔들리는 소나무는 마치 관현악의 장중한 울음 같다. 그림자 가득한 뜰을 지나 대나무를 쪼개어 만든 홈통을 타고 졸졸 밤새도록 울어대는 유천의 물을 발우에 담는다. 발우에는 달이 담기고 별이 담기고 영원한 적막이 흐른다. 푸른 돌솥에 찻물을 담아 차를 달여 마신다. 차의 살림살이는 차인의 마음에 따라서 가깝기도 하고 멀기도 하다. 자신이 속한 일상속에서 잠깐 마음의 눈을 돌려 내 안의 나를 바라보는 고즈넉한 시간을 갖게 한다면 차는 내 삶속에 뜨거운 용광로처럼 피어나 삶을 풍요롭게 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웰빙적인 측면에서 단순한 음료로 기능한다면 그 삶은 역시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도록 메마르고 강파를 것이다. 일본다도의 창시자로 불리는 이큐 소우준 선사는 주광문답(珠光問答)에서 차의 살림살이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일미청정(一味淸淨)하고, 법희선열(法喜禪悅)하니 조주선사는 이를 체득했지만, 육우는 이런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사람이 다실(茶室)에 들어가면 겉으로는 남과 나의 구별을 떨쳐버리고 , 안으로는 부드럽고 온화한 덕을 함양하며, 서로 간에 교제함에 있어서는 삼가고(謹), 공경하고(敬), 사념을 품지 않고(淸), 평온해지며(寂) 결국 온 세상이 평안해진다.” 이큐선사의 근, 경, 청, 적은 후일 센리휴에 의해 화(和), 경(敬), 청(淸), 적(寂)으로 바뀌었지만 아직까지 일본다도의 핵심사상이 되고 있다. 이큐선사 이전에 일본에는 ‘다도’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송나라 때 전해진 음차풍속의 일환인 ‘투차(鬪茶)’가 성행했을 뿐이다. 일본에 맨 처음 말차를 전한 사람은 에이사이스님으로 천태산 만년사에 주석하며 5가7종 가운데 1파인 황룡파의 선을 배우고 귀국하면서부터로 말하나 그같은 것은 현상적인 측면이 강하다. 당시 일본에서는 중국으로 많은 스님들이 유학을 했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중국의 선가에서는 선수행과 더불어 다양한 음다법이 성행했던 시기와 일치한다. 그런 점에서 일본의 말차법은 중국에서 귀국한 많은 유학승들에 의해 시작된 문화의 공통분모 같은 것으로 봐야 한다.12세기 일본 사찰에서는 좌선때 애용된 말차가 단순한 음용의 수준을 떠나 하나의 다례로 정착됐다. 당시 일본의 선종사찰에서는 중국 선종사찰에서와 같이 생활규범으로서의 청규가 있었다. 무로마치 시대에는 사찰에서 대규모의 차회가 열릴 정도로 끽다법이 일반화됐다고 보여진다. 그같은 선종사찰의 말차법은 현재도 행해지고 있는 건인사의 경우에서 보면 확연해진다. 건인사에서는 매년 부처님 오신날을 맞아 ‘네머리의식(四頭·요쓰가시라)’을 진행한다. 그 다례를 살펴보면 맨 먼저 향을 피우는 헌향, 다과(茶菓)와 함께 말차가 들어간 천목이 배치되는 행잔(行盞), 그리고 스님이 정병을 가지고 손님이 천목(찻잔이름)에 끓은 물을 붓고 차를 저어 돌리는 행다(行茶)순으로 되어 있다. 일본교토 상국사에도 사두재연이라는 말차법이 지금까지 행해지고 있는 것을 보면 당시 선종사찰에서 말차법에 의한 다례가 일상화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가마쿠라시대를 거쳐 아시가가 시대에는 송나라로부터 ‘투차’의 풍속이 전해졌다.‘투차’풍속은 일본무사들의 정신적인 성향과 맛물려 당시 사회지배계층의 전형적인 음차문화로 자리잡았다. 무로마치 막부시대에 일본의 다도는 화려한 꽃을 피운다.‘서원차(書院茶)’로 불리는 당시 차문화는 값비싼 차와 다완을 자랑하는 등 외형적인 화려함에 치우쳐 차의 정신이나 형식보다는 차의 품격, 다완의 가격 등 사회적인 부의 수준에 따라 그 차회의 품격이 정해질 정도로 사치스러워졌다. 서원차는 화려할 뿐만 아니라 너무도 귀족적인 차회였던 것이다. 그것은 당시 서원차를 주도했던 무가(武家)와 막 꽃피기 시작한 상업자본가들의 외형적인 자기과시욕 때문이었다. 사무라이들의 근엄하고 권위적인 취향과 상업자본가들의 자기과시욕의 결합은 심지어 차가 도박으로까지 발전할 정도로 지배계층 내부의 극단적인 정신적 사치를 불러왔을 정도다. 서원차의 병폐는 사회경제적 균등을 통해 안정적인 사회의 구축을 이루려는 집권막부에 커다란 부담으로 다가갔다. 일본 다도의 창시자랄 수 있는 무라다 주코와 이큐 소우준 선사의 만남은 이때 이루어졌다. 주코의 스승인 이큐선사는 고코마쓰일왕의 아들이었다. 그는 어린시절 사찰로 보내졌다. 어린시절 여러 가지 고난을 이겨낸 이큐선사는 조주의 끽다거를 갈파해낸 탁월한 선승이었다. 조주의 끽다거의 공안을 깨쳤던 그는 왕실 막부의 투차의 화려함을 대신해서 원오극근선사의 ‘다선일미’를 다도의 근본형식으로 이끌어냈다. 이큐는 그의 나이 60세 때 30살의 주코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나라출신인 주코는 11살에 출가하였으나 그 단조로운 생활을 견디지 못해 환속, 이곳 저곳 떠돌며 ‘투차’나 여러곳의 ‘다사(茶事)’를 보며 지내고 있었다. 그러던 중 주코는 우연히 이큐선사의 설법을 듣고 그 문하에 다시 입문하게 된다. 주코를 조주차의 깨달음으로 이끌었던 이큐선사 일화 한토막을 소개해본다. 이큐는 주코가 ‘끽다거’의 공안을 깨칠 수 있도록 각고의 수행을 주문했다. 천재였던 주코에게도 그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결국 이큐선사는 마지막 방법을 선택했다. 선수행중인 주코를 이큐선사가 불렀다. 그리고 이렇게 물었다.“끽다거”. 그러나 주코는 이큐선사의 물음에 답하지 못했다. 이큐선사가 차탁 앞에 놓인 찻잔에 차를 담아 주코에게 건넸다. 주코가 그 찻잔을 받아들기 위해 손을 내밀자 이큐선사는 “끽다거”하며 찻잔을 깨트려버렸다. 공안이 익을 대로 익어 있던 주코는 이큐선사의 벽력같은 소리에 단박에 깨칠 수 있었다. 마침내 조주차의 근원을 알게 된 주코는 이큐선사의 인가를 받았으며 원오극근선사의 묵적을 전수받았다. 이큐선사의 인가를 받은 주코선사는 당과 송에서 전해진 투차의 차 문화를 대체하는, 즉 차와 선이 하나인 일본화된 품차의 정신을 만들어냈다. 주코를 통해서 차가 선이며, 선이 차이며, 끽다가 참선이고 참선이 끽다인 ‘다선일미’를 구현해냈다. 이같은 주코의 차도는 다케쇼오를 커쳐 센리휴에 의해 완성된다. 부유한 피혁상의 아들이었던 다케쇼오는 주코의 제자로부터 다도를 배웠다.36세 때 사카에로 돌아온 다케쇼오는 20세나 아래인 센리휴를 제자로 받아들였다. 다케쇼오는 일본이 다도를 통해 민족적인 정신을 눈뜨게 했다. 교토에서 와카와 다도를 함께 배운 다케쇼오는 와카를 다도에 접목시켰다. 그는 주코의 다도를 소박하면서도 우아한 선가의 기풍으로 발전시켰다. 그리고 와카를 표구해 차실에 걸어놓아 일본다도에 민족적인 정신을 심어냈다. 사카에 상인 가문 출신이었던 센리휴는 주코와 다케쇼오의 차 정신을 완성해냈다. “여름에는 차실을 시원하게 하고 겨울엔 차실을 따뜻하게 하며 연료를 찻물이 잘 끓게 넣고 차는 맛있게 우려내는 것이야말로 차정신의 비결”이라고 말한 센리휴는 다다미 스무장 넓이의 넓고 화려한 서원차의 차실 대신 두세 사람이 무릎을 맞대고 겨우 앉아 차를 마실 수 있는 이른바 초암차실을 완성했다. 센리휴는 전국시대의 최고의 무장이었던 오다 노부나가의 차 시종을 거쳐 일본을 천하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차 시종관이 되었다. 센리휴가 일본차계에 그 이름을 떨친 것은 1587년 히데요시가 주관한 천하통일 기념차회와 기타노 신사에서의 차회에서다. 센리휴는 이 차회에서 원나라 때 화가 옥간의 ‘원사만종’을 걸고 최고급 차합과 쌀 4천만섬의 가치가 있다는 ‘송화(松花)’라는 아름다운 다관을 사용했다. 그야말로 서원차의 극치를 보여준 차회였던 것이다.1589년 기타노 신사의 황금차실은 그같은 호화로운 차회의 극점이었다. 온통 황금으로 이루어진 황금차실과 800여명에 이르는 대규모 차인들의 참석은 ‘거처는 비가 새지 않으면 되고 음식은 배가 부르면 충분하다.’는 센리휴의 생각과 정 반대가 되는 것이었다. 센리휴는 일단 작은 차실을 선호했다. 그리고 중국에거 전래한 천목찻잔이나 청자완보다는 조선서민들이 사용했던 막사발(이도다완)을 즐겨 사용했다. 모양이 고르지 않고 검은 빛을 띠며 무늬가 없는 막사발을 센리휴는 최상의 다완으로 쳤다. 이같은 다도를 통해 센리휴는 마침내 주코의 ‘근경청적’의 정신을 ‘화경청적’으로 완성해낸 것이다. 일본차의 정신은 흔히 ‘와비차’로 표현된다.‘와비’란 이른바 ‘한적(閑寂)’하다는 말로 정신성이 강한 차예절을 상징하는 것이기도 하다. 선차의 첫 번째 목적은 심신을 수련하는 것이다. 차와 선이 상통하는 점은 바로 정신적 경지의 정화와 승화를 추구한다는 점이다. 우리는 차를 마실 때 마음을 가라앉히고 그 맛을 음미한다. 참선을 할 때도 마찬가지다. 참선을 할 때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생각을 끊어야 한다. 다도(茶道)와 깨달음은 그것을 직접 실행하는 주체의 맑고 고요한 근원적인 감각에 치중한다. 연차, 자차, 점차, 음차 등 일련의 과정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본체를 드러내며 윤회하는 자연의 이치를 깨닫는 것과 일치한다는 점에서 깨달음을 추구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선다일미라는 것이다. 다도는 또 근원성의 문화라는 점에서 깨달음과 일치한다. 다도의 완성은 일종의 무형의 깨달음에서 비롯된다. 이른바 보이지 않는 무형의 자신이 표현해내는 근원적인 문화양식인 것이다. 다도는 무형의 근원에 도달한 자신의 외재적 표현을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는 또다른 문화양식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깨달음을 성취한 위대한 선사들이나, 다도를 완성한 차인들은 이미 또다른 문화를 창조한 문화의 창조인들인 것이다. 센리휴선사는 이렇게 말한다.“물을 긷고, 땔감을 하고, 물을 끓이고, 차를 따르고, 부처께 올리고,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이 마시고, 삽화분향하는 것 모두가 불법을 수행하는 행위인 것이다.” 차와 선의 문화는 그런 점에서 인류 미래문화의 진보를 앞당기는 가교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일지암 암주 ■ 日 茶界 최고보물 ‘다선일미’ 묵적…中 송나라때 원오극근선사가 전해 일본차계 최고의 보물은 무엇일까. 우리는 흔히 그것을 ‘이도다완’으로 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중국 송나라때 선승으로 유명한 원오극근선사가 직접 썼다고 전해지는 ‘다선일미(茶禪一味)’라는 묵적이다. 서원차와 투차의 화려하고 권위적인 차 문화를 선과 결합시켜 내 ‘다선일미’라는 일본의 차도를 창조해낸 주코가 그의 스승인 이큐선사로부터 차도의 인가증서로 원오극근선사의 묵적을 전해받은 것이다. 이큐선사로부터 묵적을 물려받은 주코는 그것을 다실 안에서 가장 잘 보일 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한 위치인 벽감속에 걸어 두고 사람들이 그의 다실을 드나들 때마다 무릎꿇고 예를 행하여 경의를 표하게 했다. 일본 경도 대각사에 소장되어 있는 ‘다선일미’에 대한 일화는 아주 재미있다. 원오극근선사가 어느날 중국 성도에 있는 소각사에서 설법을 하였다. 원오극근선사는 공부를 마치고 귀국하는 일본 제자를 불렀다. 그리고 직접 그 제자에게 ‘다선일미’라는 네자를 써주었다. 그 제자는 그 글씨를 큰 대통에 담아 귀국하는 배를 탔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천신만고 끝에 일본에 도착한 그 스님이 탄 배가 항구에서 전복되고 만 것이다. 그 대통과 글귀는 이사람 저사람 손을 전전하다 마침내 이큐선사의 손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큐선사는 그 대통에 든 글귀를 보고 오랫동안 참문을 하였다. 출중한 선승이었던 이큐선사는 마침내 원오극근선사가 쓴 ‘다선일미’의 오의를 깨쳤다. 그리고 그 정신과 묵적을 자신의 수제자였던 주코에게 차도의 인가증으로 전해준 것이다. 주코는 교토에 주광암을 개원했다. 그리고 선종의 중흥조인 육조혜능선사의 ‘본래무일물(本來無一物)’의 선지를 바탕으로 차를 마심으로써 ‘초암다풍’을 형성한 것이다. 주코는 “차실에 들어가면 밖으로는 남과 나의 구분을 모두 잊고 안으로는 유화의 덕을 쌓으며 서로 응대함에 있어서는 근경청적하고 궁극적으로는 천하태평에 이른다.”고 말한다. 주코는 선을 통해 일본의 다도를 철학이자 종교로 승화시켜낸 것이다. 청담스님은 차의 진수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다.“차의 맛이 지닌 진수는 어디까지나 술처럼 교만하지 않고, 커피처럼 자만하지 않으며, 코코아처럼 천진한 기취와는 달리 엄절한 청정미에 있다. 그러기에 다도는 미를 발견하고도 오히려 환희를 감추려는데 묘미를 느끼는 예술이라 할 수 있으며 선을 실행하고도 그 공덕을 숨기는 윤리이자 참을 체득하고도 오히려 빛을 묻는 종교이다.”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애경그룹-장영신 회장家

    “엄마, 걱정마. 이 앞에서 학생들 상대로 뽑기장사하면 되잖아!” 어린 마음에도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엄마가 실의에 빠져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 모양이다. 자기도 잘 먹던 뽑기장사해서 먹고 살면 되니 엄마보고 걱정 말란 것이다. 너무나 대견하고 안쓰러워 큰아들을 끌어안고 그때 처음 울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울지 않는 엄마, 강한 엄마가 되어 내 아이들을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은 자랑스러운 아버지의 자식들로 키울 것을 결심했다. 아이들이 클 때까지 아버지의 유업을 잘 지키고 있다가 성년이 되면 물려주리라. 이렇게 생각을 발전시켜 애경을 내가 맡아 아이들과 똑같이 건실하게 성장시키기로 다짐했다. 국내 최초의 여성 최고경영자(CEO)인 장영신(69) 회장이 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남편이 죽고 회사를 떠맡게 된 이야기를 이렇듯 생생하게 되짚었다. 아이들을 잘 키워야겠다는 강한 모성, 남편의 유업을 버려둘 수 없다는 아내로서의 의리, 애경 종업원들에 대한 책임감이 경영참여 이유라고 덧붙였다. ●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 장 회장은 1970년 막내 아들을 낳은 지 사흘 만에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을 심장마비로 잃으면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3남1녀의 어머니로 살림만 하며 지내던 12년차 주부가 국내 대표 생활용품 브랜드의 수장으로 거듭난 것이다. 애경 창립 17년 만의 일이다. 장 회장은 1971년 남편 타계 1주기가 끝나자마자 경리학원에서 복식과 부기를 배웠고 이듬해인 1972년 8월1일부터 출근했다.1954년 6월 남편 고 채몽인씨가 5000만환으로 세운 ‘애경유지공업주식회사’가 현재 LG그룹의 모태인 비누제조사 락희화학과 경쟁을 벌이며 사업확대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다. 장 회장이 경영참여를 선언하자 시댁과 친정 가족은 물론 회사 임원들까지 반대하고 나섰다.“암탉이 울면 집안이 망한다.”는 말부터 “그만두겠다.”고 협박하는 임원들도 있었다. 주변에서는 “애경이 얼마 가지 않아 망하겠다.”는 말도 했다. 남편이 죽은 뒤 사장 자리를 맡고 있던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장 회장이 취임하자 회사를 나가버리기도 했다. 당시의 심경에 대해 장 회장은 “잠자리에 들면서 ‘이대로 영영 깨어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고 회고했다. 매일 일감을 집으로 가져와 밤늦도록 공부했고, 관청에선 담당공무원의 질문에 솔직하게(?) 답한다는 이유로 동행했던 회사 임원으로부터 책상 밑으로 구둣발에 차이기도 했다. 경제인 모임에서는 홀로 여자라는 자격지심에 기둥 뒤에 숨어 몇시간이나 서 있다 오는 일도 다반사였다. 잘해보겠다는 일념으로 겁없이 뛰어들었지만 기업환경도 나쁜 것뿐이었다. 경영에 참여한 1972년 말부터 오일쇼크에 따른 전반적인 경기 침체가 시작됐다. 그러나 장 회장은 더욱 힘을 냈다. ‘불황에 투자하라.’를 모토로 공장을 지방으로 확대 이전하는 한편 남편이 계획만 했던 석유화학 원료제조 분야를 애경의 미래 지표로 삼아 애경유화·애경화학·애경PNC(전 애경공업)·애경정밀화학·코스파 등 관련 회사를 속속 설립했다. 비누 산업에는 한계가 있지만 본격적인 화학공업은 가능성이 무한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 분야는 지금까지도 애경에서 매출 비중 50% 이상을 차지하는 주력 사업군이다. 남편이 설립한 비누회사도 소홀하지 않았다. 제품을 고도화시키는 데 집중했던 만큼 히트 상품도 꾸준히 내놓았다.1975년에는 분말 합성세제인 ‘크린업’을, 이듬해에는 액체세제 ‘써니’를,1980년 들어서는 세제 ‘스파크’를,90년 들어서는 클렌징 화장품인 ‘포인트’ 등을 잇달아 히트시켰다. 트리오도 이름은 같지만 세척력을 높이고 공해도를 낮춰 지금까지도 1등 주방 세제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수줍은 소녀…‘터프우먼 마담 장(張)’으로 장 회장은 어머니 고 문금조씨와 아버지 고 장회근씨의 4남4녀중 막내딸이다.1936년 7월22일 서울에서 태어나 종로구 명륜동 1가 등에서 부유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는 당시 일본 와세다대에서 영문과를 졸업한 대지주의 아들. 어머니 문 여사도 당시 일본 귀족학교인 쓰다여대 영문과를 나온 재원이다. 장 회장은 혜화동성당 유치원을 나온 뒤 혜화국민학교를 다녔다. 노래를 잘해 전국 콩쿠르에서 상도 자주 받았다. 건강하고 공부도 잘해 반장을 도맡기도 했다. 부모님의 학구열이 강한 덕에 형제들 모두 공부를 잘했다. 큰오빠 고 장윤옥씨는 일본대 전문부 상과를 졸업한 뒤 감사원에 들어가 5국장(부이사관)까지 지냈고, 미국으로 이민간 큰언니 장영옥(81)씨는 서울대 음대에서 피아노를 전공했다. 서울대 화학과를 졸업한 둘째 오빠 고 장성돈씨는 애경유지 사장을 지낸 바 있고, 서울대 정외과 출신의 셋째 오빠 고 장위돈씨는 서울대 정외과 교수,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 청와대 정치담당특별보좌관, 이집트 총영사, 에콰도르 대사를 지내는 등 이력이 화려하다. 애경유지 이사를 지낸 넷째 오빠 장기돈(75)씨는 성균관대 상대 출신이다. 장 회장의 집안은 일제시대 유학을 갔을 정도로 부유했지만 광복 후 실시된 토지개혁으로 가세가 기울었고 6·25가 터지자 집안 형편은 더욱 어려워졌다. 아버지마저 사망하자 경기여중을 졸업하고 경기여고에 재학중이던 그는 돈 안들이고 대학을 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마침 고등학교 시절부터 외국어 재능을 인정받아 교장선생님이 일찌감치 유학을 준비시켰다. 전액 장학금을 받는 조건으로 1955년 미국 필라델피아 체스넛 힐 대학 화학과에 진학했다. 대학시절에도 합창단원으로 활동했고 당시 교내에서 오페라 하우스와 협연한 나비부인의 프리마돈나를 맡기도 했다. 애경이 쉘, 유니레버 등 다국적기업과의 합작을 무리없이 진행했던 배경에는 유학 생활로 다져진 영어실력과 당시 익혔던 외국 풍습에 대한 이해가 뒷받침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피란시절 여고생 신분으로 부산에서 사과장사를 한 적도 있다. 좌판을 벌여놓고 사과를 예쁘게 쌓아놓았지만 막상 손님이 와서 얼마냐고 물어보면 먼산 바라보기 일쑤였다. 부끄러움이 많았던 탓에 장사꾼이 아닌 척한 것이다. 그러나 애경을 경영하면서 그에게는 ‘호랑이’‘터프우먼’‘마담장’ 등의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80년대 들어 새로운 돌파구로 외국계와 합작에 집중했을 당시 그쪽에서 공동대표를 요구하면 그는 “여기는 한국 회사다. 너희가 한국에 대해 뭘 아느냐. 한국 문화를 이해할 때까지 너희들은 뒤에서 지켜봐라.”고 충고했다. 합작 기념식에서 태극기를 달지 말라고 요구받으면 애국가 봉창, 국기에 대한 맹세까지 순서대로 진행했다. 당시 외국인들은 이런 장 회장을 놓고 ‘마담장 터프우먼’이라고 외쳤다. 사내에서는 ‘호랑이’로 통했다. 화가 나면 직설적으로 퍼붓는 성격과 한번 결정하면 매몰차게 추진해 나가는 돌파력 때문이란 설명이다. 물론 풀어주는 것도 그의 몫이다. 그래서 ‘너그러우면서도 불같다.’는 평을 받는다. ●남편과는 어릴적 이웃사촌 장 회장과 남편 채몽인씨는 이웃사촌으로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고 채씨는 장 회장이 미국으로 유학가기 전부터 애정 공세를 퍼붓다 미국까지 따라가 무려 3년11개월 동안 구애 공세를 펼쳤다. 공개청혼으로 남편의 존재는 대학내에도 다 알려져 수녀 교수들로부터 “왜 저 좋은 사람과 결혼하지 않느냐, 이해를 못하겠다.”는 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는 졸업후 약속대로 서울로 돌아와 23세이던 1959년 6월 신당동 성당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자식들(3남1녀)의 혼사는 장 회장보다 더 빠르다. 대부분이 대학시절에 결혼을 모두 끝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모두 연애 결혼이다. 큰아들인 채형석 애경그룹 부회장(45)은 1982년 성균관대 경영학과 4학년 재학 당시 학교에서 만난 홍미경(43)씨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 친구로부터 소개받아 교제 1년 만에 결혼했다. 당시 부인은 1학년에 재학중인 생활미술학과 새내기. 채 부회장은 1983년 졸업후 미국 보스턴대에 MBA를 받은 뒤 1985년 애경산업 생산부 마케팅부 등을 섭렵했다. 부인 홍씨도 함께 유학을 떠나 보스턴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홍씨는 전공을 살려 현재 종로에서 갤러리 ‘사간’을 운영 중이다. 불혹을 넘긴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출중한 미모가 인상적이다. 장 회장을 잘 아는 사람들은 그가 평소 “우리 큰애(큰며느리)는 얼굴도 예쁘고 마음도 정말 착하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한다. 인천교대 음대 교수를 지낸 장인 고 홍종수옹은 서울시립교향악단,KBS교향악단 등에서도 활약한 음악가다. 장 회장의 맞손녀이자 큰아들인 채 부회장의 딸 문선(19)양은 할머니의 성악 실력과 외할아버지의 음악 재능을 모두 물려받아 현재 미국 맨해튼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고 있다. 유통부문을 맡고 있는 둘째 아들 채동석(41) 애경백화점 사장은 성균관대 철학과 3학년 때 미팅으로 만난 동갑내기 이정은(41)씨와 결혼해 졸업하기 전 1년 동안 학생 부부로 지내기도 했다. 채 사장은 미국 조지 워싱턴대 국제경영학 석사 과정을 마친 뒤 1991년 애경에 합류했다. 현재 애경백화점,AK면세점, 수원애경역사, 평택역사 등 애경의 유통부문을 맡고 있다. 서울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이씨는 현재 서울 강남구 청담동에서 프랜치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이씨의 아버지 이병문(75)씨는 고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예편한 4성 해병대 사령관 출신으로 아세아시멘트 회장을 지냈다. 큰딸 채은정(42)씨는 외숙모가 같은 아파트에서 살던 안용찬(46) 애경 사장을 소개해줘 결혼한 경우다. 안 사장이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 MBA과정 재학 당시 잠시 한국에 들렀을 때 채씨 외숙모의 권유로 은정씨를 만났다. 은정씨도 대학 3학년때 결혼했다. 은정씨는 이화여대 조소학과를 나와 미국 애크리하트대에서 그래픽을 전공한 뒤 1998년 애경산업에 들어왔다. 애경 마케팅지원부문 상무를 맡고 있다. 채 부회장과 연세대 경영학과 77학번 출신인 안 사장은 이미 대학시절부터 알고 지내던 사이다. 채 부회장은 “안 사장이 나의 고등학교 동창들과 친구 사이여서 이미 대학시절부터 안 사장을 알고 지냈다.”면서 “성실하고 훌륭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보니 여동생의 남자친구가 되어 있었고 유학을 끝낸 뒤 애경으로 꼭 와줄 것을 내가 청했다.”고 말했다. 안 사장은 1987년 애경산업 마케팅부에 입사하기 이전 유학을 마치고 미국 폰즈사에서도 마케팅 담당 업무를 맡았다. 통역 장교 1기 출신인 안 사장의 아버지 안상호(76)씨는 육군 참모총장 수석 보좌관, 미국 엔지니어링 회사 플로 코리아의 한국 대표 등을 지냈다. 막내 아들 채승석(35) 애경개발 부사장은 50만평 18홀 규모의 경기도 광주시 중부 컨트리클럽을 운영하는 애경개발을 맡고 있다. 애경개발은 1987년 출발 당시부터 애경의 계열사중 유일하게 주력인 세제·화학과 동떨어진 업종이다. 미스코리아 출신으로 한때 SBS아나운서로도 활동했던 한성주(31)씨와 99년 6월 결혼, 화제를 뿌리기도 했다. 단국대 사학과 89학번인 채 부사장은 형제들 중 유일하게 어머니를 닮아 노래를 잘한다. 당초 친정에서 장 회장의 경영참여를 반대했지만 앙금은 남아 있지 않다. 조카들도 여럿 애경에 몸담고 있다. 둘째 오빠인 고 장성돈 전 애경유지 사장의 큰아들인 장인규(53)씨는 과거 애경PNT(전 경신산업) 사장으로 일하다 미국으로 이민갔고, 둘째 아들 장인원(49)씨는 계열사인 코스파 사장으로 재직 중이다. 장 회장의 셋째 오빠인 고 장위돈씨가 낳은 3형제 중 큰아들인 우영(37)씨는 애경 화장품사업부장으로 있다. ●애경백화점에 남다른 애착 장 회장은 회사를 맡은 이후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한번도 울어본 적이 없다. 그러나 큰아들 채 부회장이 1993년 9월10일 애경백화점 개점식 인사말에서 “이 백화점을 돌아가신 아버님께 바칩니다.”라고 말한 순간 ‘마음이 온통 눈물로 범벅이 됐다.’고 회고했다. 애경백화점 본점인 서울 구로구점은 창업자인 남편 고 채몽인씨가 타계하는 순간까지 비누를 만들었던 창업 터전이다.1958년 우리나라 최초의 미용 비누인 ‘미향’을 만든 곳으로 70년대까지 ‘트리오’ 등 세제를 만들다 공장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계속 창고로 써왔다.“아버지가 물려준 땅이니 잘 연구해서 활용해보라.”고 맡긴 지 3년 만에 1만평 부지가 백화점으로 거듭났다. 장 회장은 애경백화점을 두고 ‘아버지와 아들의 만남´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지금도 두 아들이 사이좋게 이 백화점 5층에서 함께 사무실을 쓰고 있다. 장 회장이 시간이 날 때마다 백화점을 다녀갈 정도로 남다른 애정을 보이는 이유다. 장 회장은 즐기는 인생을 살아본 적이 없다. 채 부회장은 장 회장에 대해 “희생하는 삶만 사신 분”이라면서 “항상 어머니를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꼽아왔다.”고 말했다. 장 회장은 여름휴가를 가본 적이 없고 남들이 취미를 물으면 ‘빨래’라고 대답할 정도로 아직도 집안 일을 혼자 한다. 말년에 잠시 정치에 참여했던 것도 따지고 보면 크게 어긋나는 길은 아니란 평이다.1997년 고사해 오던 여성경제인연합회 회장직을 맡으면서 여성들이 기업하기 불편한 환경을 고쳐야 한다고 마음먹었다.1999년 민주당 신당창당 준비위원 공동대표로 영입된 뒤 백화점이 있는 구로를 텃밭삼아 16대 국회의원으로 나선 것도 이 때문이다.“왜 정치를 하느냐. 이미지 버린다.”는 우려가 많았지만 여성경제인들을 도와야 한다는 선배로서의 책임을 피할 수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더이상 정치에 참여할 뜻은 없다. ●가족간 우애는 애경의 힘 장 회장은 경영에서 손을 뗐다. 애경 창사 50주년을 맞았던 지난 2004년 구로동 본사 회장실을 비웠고 결재도 큰아들에게 모두 맡기고 보고도 받지 않는다. 애경복지재단 일에 관여하며 무역협회 부회장직만 맡고 있다. 개인적으로는 취미삼아 중국어를 배우고 있고, 순환기계통이 안 좋은 탓에 홍콩에 침을 맞으러 다니고 있다. 살아오면서 가장 보람된 일로는 “아이들이 잘 자라주고 화목하게 지내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가족간 볼썽사나운 재산 분쟁이 많은 재계에서 애경가문 형제들은 함께 회사를 키워가며 우애있는 모습을 보여 주고 있다. 채 부회장과 동생 채동석 사장은 10년 넘게 한 사무실을 쓰고 있다. 채 부회장은 “인맥이랄 만한 사람들을 알지도 못하고 술을 먹거나 함께 어울리는 대상이 모두 형제들이다.”면서 “네 남자가 모여 술을 자주 먹는다.”고 말했다. 며느리들도 친하다. 큰동서와 작은 동서도 단짝 친구 같다. 형제들이 화목할 수 있는 주요 원인이란 지적이다. 채 부회장은 1985년 입사한 뒤 점차 그룹의 덩치를 키우는 데 주력했다.1993년 애경백화점 구로점을 열며 유통업계에 뛰어든 뒤 AK면세점(2001년) 애경 2호점인 수원애경역사(2003년)로 확대했고 3호점 평택역사는 2009년 완공된다. 제주도와 함께 설립한 ㈜제주항공을 통해 2006년 6월부터 민간항공 사업도 벌인다. 채 부회장은 그룹 전체를 아우르는 역할을 맡고 있으며, 동생 채동석 사장은 유통부문을, 처남인 안용찬 사장이 생활용품 부문을 키우고 있다.2세대에 와서 생활용품과 기초화학의 양축을 키워가는 한편 유통과 항공으로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있는 것이다. 채 부회장은 고혈압이 있어 거의 매주 등산을 즐기고 있다. 유아세례를 받고 결혼식도 명동성당에서 올린 천주교 신자이지만 산을 자주 찾는 탓에 항상 절을 찾아 기도를 드리는 습관이 생겼다. 그는 산사를 찾을 때마다 “가족 모두 건강하고 화목하게 지내는 것에 항상 감사드린다는 내용으로 기도를 드리고 있다.”면서 “애경의 힘은 형제간의 우애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고 말했다. jhj@seoul.co.kr ■ 장회장 ‘유별난 시간개념’ 애경가(家) 사람들은 시간관념이 유별나다. 장영신 회장은 약속 시간보다 최소한 10분 먼저 도착하는 습관을 갖고 있다. “나는 사업상으로나 개인적으로 약속을 하면 꼭 10분 전에 나가 상대방을 기다린다. 약속 시간보다 단 5분이라도 늦는 사람은 첫 대면부터 뭔가 부족한 사람이란 평가를 하게 된다. 나는 부하 직원들을 평가할 때도 시간관념을 하나의 척도로 삼는다. 시간 하나 제대로 못지키는 사람이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는 게 내 생각이다. 시간은 비즈니스를 포함한 모든 인간 관계에서 성패를 좌우하는 첫 관문이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작은 사실 하나가 그 사람의 성격과 인격을 대변한다.”(자서전 ‘밀알심는 마음으로’에서) 그가 경영일선에 있을 때는 ‘나인 투 파이브’ 원칙을 지켰다.9시에 출근해 5시에 퇴근하는 게 아니라 늦어도 10시에 잠자리에 들어 새벽 5시면 기상하는 것이다. 일어나자마자 조간 신문을 읽고 그날의 주요 업무를 점검하고 계획했다. 새 사업이나 프로젝트를 기획하는 것도 아침 시간을 이용한다. 회의도 결재도 오전에 처리한다. 관청과 은행이 문을 여는 아침 9시 이전에는 하루 계획을 세워야 한다. 일을 놓은 지금도 새벽에 일어나는 습관은 그대로다. 그래서 애경에는 오전 8시만 되면 결재를 받기 위한 줄이 이어지고, 오전 9시면 그날 결재받는 것은 포기해야 할 정도라는 말이 나온다. 철저한 시간관념은 애경가 사람들에게도 그대로 배어 있다. 아들 딸은 물론 며느리 사위 모두 새벽형 인간이다. 채형석 부회장은 한술 더 떠 새벽 4시면 일어나 아침밥을 꼭 챙겨먹고 출근한다. 약속 시간을 지키는 것도 마찬가지다. 식구들끼리 밥을 먹기로 하거나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모일 때는 아예 30분 먼저 나갈 정도다. 채 부회장은 “식사 시간을 통해 가족 모임이 주로 이뤄지는데 식당 문을 여는 시간이 바로 우리 가족이 만나는 시간”이라면서 “예컨대 6시에 모이기로 해도 식당이 문을 여는 오후 5시 30분이면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여 있다.”고 전했다. 급한 성격 탓에 식사를 시작하면 1시간내에 모두 끝내고 일어선다. 한 번은 막내인 채승석 부사장이 아버지 산소에 가기 위해 약속한 정시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었더니 이미 식구들이 모두 제사를 지낸 뒤 산에서 내려오고 있더라는 일화도 있다. jhj@seoul.co.kr ■ 장영신 회장과 제주와의 인연 장영신 회장의 ‘제주 사랑’은 남다르다. 그의 제주 인연은 1970년 창업주인 남편 고 채몽인 사장이 타계하면서 더 각별해졌다. 장 회장은 남편의 조의금 전액을 제주도 재경장학회에 기증했다. 장학회는 이 돈으로 지금까지 매년 30명, 모두 1300여명의 제주 출신 대학생을 후원했다. 제주도는 고 채 사장의 고향이다. 큰아들 채형석 부회장도 최소한 1년에 세차례 이상 제주도에 간다. 선산이 모두 중문 색달동에 있다. 꼭 성묘가 아니더라도 아이들과 함께 가끔 간다. 채 부회장은 “제주는 아버지의 고향이지만 저도 국민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건강이 안 좋아 제주도에 요양을 가셨을 때 동행했기 때문에 한동안 지낸 기억이 있어 친근하다.”면서 “할아버지가 조선시대 제주도에서 현감을 지내기도 했다는데 증조 할아버지까지만 기록이 있어 뿌리를 찾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장 회장도 제주에서 지낸 시절이 있다. 경기여고 재학시절 6·25때 제주로 피란가 1년간 지냈다. 장 회장은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제주도 여성들을 보면서 여성이 얼마나 강한지를 깨달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 애경은 제주도와 손잡고 내년 6월부터 도민의 숙원인 저가항공 시대 대열에 동참한다. 애경은 제주도와 합작해 저가항공사인 ㈜제주항공을 만들었다.㈜제주항공의 왕복 비용은 기존 항공비용의 70% 수준인 11만원선.㈜제주항공의 애경 지분은 75%다. 채 부회장은 “이윤이 크게 나는 사업은 아니지만 중국과의 경쟁에서 영향을 받지 않을 영역이라고 보고 사업을 결심했다.”고 말하지만 주변에서는 “장 회장의 제주 사랑과 무관치 않다.”고 평가했다. jhj@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백승종의 정감록 산책] (45)조선 정조 北道 원수 주형채

    정조9년(1785) 봄이었다. 그 무렵 서울에서는 천주교인 수십 명이 오늘날의 명동천주교회를 결성했고, 그것이 문제가 돼 이른바 을사박해가 일어났다. 마침 전국적인 지하조직망을 가진 것으로 조사된 또 한 번의 ‘정감록’ 사건까지 발생해 세상인심이 뒤숭숭했다. 결국 정감록 사건의 주모자 몇은 사형을 받게 되었는데, 그 가운데 주형채(朱炯采)라는 평민지식인이 끼어 있었다. 당시 심문 기록에는 주형채에 관한 단편적인 정보가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실로 구슬을 꿰듯 주워 모아보면 주형채의 일생은 역사상 이름조차 제대로 남기지 못한 조선후기의 허다한 평민지식인 또는 술사들의 삶을 대변한다. 더욱이 그들은 체제에 저항한 일부 양반들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했다. 그런 점에서 주형채의 삶은 더욱 관심을 끈다. ●주형채의 ‘범죄행위’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범인 문양해는 동지 주형채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그는 함경도 영흥이 고향인데 향악선생(香嶽 속명은 김정 또는 김호)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흉악한 말을 많이 했다고 한다. 편지에 쓰인 흉악한 구절을 문양해는 자기의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며, 예를 든다.“하늘이 내리는 재앙과 시국의 변천이 이와 같으니 이제 진인(眞人)이 마땅히 나와야 할 것이고, 우리들은 사람들을 모아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 잡을 반정(反正)을 일으켜야 할 것입니다.” 향악선생은 이 편지를 상자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고,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않았다. 언젠가 향악선생이 외출한 틈을 타서 평소 호기심이 많았던 문양해는 몰래 편지를 꺼내 보았다고 했다. 문제의 편지가 지리산에 도착한 것은 아마 사건 발생 한 해 전인 정조8년 정월로 짐작되는데, 주형채가 하필 왜 그 시점에 이런 편지를 보내왔는지 문양해는 까닭을 모르겠다고 했다. 주형채가 향악선생과 교제를 시작한 것은 오래 전이었다. 적어도 사건 발생 15년 전에 시작되었다고 했다. 주형채는 얼굴 생김이 괴상하고 못났지만 눈빛이 날카롭게 번쩍여 사람을 쏘아보듯 하였다. 주형채와 향악선생 사이에는 오랫동안 편지가 오갔다. 지리산에서 함경도 영흥까지는 근 2000리나 되는 먼 길인데도 서로 소식을 전했던 것이다. 그들 사이에서 편지 심부름을 한 이는 혜준 스님이었다. 혜준은 오래 전 함경도의 어느 사찰에 잠시 머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는 주형채와 친해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그 뒤로도 함경도를 자주 왕래하였다. 사건 당시 혜준은 경상도 하동에 있는 영원사에 몸을 담고 있었다. 향악과 ‘괴이한’ 편지를 주고받은 것 외에도 주형채는 여러 차례 불온 문서를 조작했다고 한다. 그는 “멀리 귀양가는 노래”를 지어 조정의 잘못을 비난하고 민심을 선동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주형채는 아니라고 끝까지 부정했다. 그 노래는 충신이 멀리 귀양 갈 때 지은 시라고 누군가로부터 들었기 때문에 그저 베껴두었을 뿐, 다른 의도가 전혀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런 발뺌이 용이하지 않았다. 주형채는 장차 자기가 왕이 되겠다는 주장을 동지들 앞에서 서슴없이 했던 것으로 입증되었기 때문이다. 함경도의 평민지식인 주형채는 전국 각지에 흩어져 있던 ‘불순세력’과 연합해 조선왕조의 전복을 꾀했다.‘정감록’ 사건을 종결짓는 마지막 확정 판결의 일절은 이랬다.“이율,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 여러 역적들이 반역을 음모해 여러 도에서 거사를 도모하면서 주형채를 북도의 원수로 정하였다. 그들이 서로 왕복하며 주도면밀하게 반역죄를 꾸민 사실은 여러 죄수들의 심문과정에서 샅샅이 드러났다. 대역부도(大逆不道)한 죄인들을 군율에 의거하여 한강 모래밭에서 효시(梟示)하라.”(실록, 정조 9년 3월22일 신미) ●천문과 점술의 대가 주형채 정감록 사건에서 “북도 원수”로 거론된 주형채에게는 사실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그의 이웃사람들은 무엇이든 조금이라도 아리송한 일이 생기면 주형채를 찾아갔다. 주형채의 집은 함경도와 평안도 두 도가 만나는 접경지대에 있어 양도의 사람들이 그를 따랐다. 주형채는 이를 테면 ‘만물박사’였으며, 여러모로 평민들의 교사역할을 담당했다. 정감록 사건이 발생하기 일년 전인 정조8년 12월 초7일부터 사흘 동안 별자리에 이상이 있었을 때도 많은 사람들이 주형채에게 물어왔다. 당시 주형채가 관찰한 바로는 위성(危星), 실성(室星), 벽성(壁星) 앞에 20여 개의 별이 벽을 쌓고 늘어섰었다. 그 가운데 붉은 기운이 있어 상서롭지 못했다. 특히 여러 별 가운데서도 장군성(將軍星)과 태백성(太白星)이 서로 사흘 동안 싸우다 1도(度) 거리로 멀어졌다. 그 때 태백성이 어깨로 장군성을 부딪쳐 여러 번 이겼다 졌다 했는데, 이 모든 것이 흉한 조짐이었다. 주형채는 이같은 현상이 조선이나 중국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으므로, 해로울 일이 조금도 없다고 주민들을 달랬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은 난리를 염려해 피란을 고려하고 있었지만 자기가 만류했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조정의 심문관들은 주형채의 말을 곧이듣지 않았다. 관리들이 보기에 주형채는 민심을 선동해 피란행렬을 조장한 혐의가 짙었다. 실제로 그 무렵 함경도에는 남쪽으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많았다.‘정감록’에 예언된 십승지가 모두 남쪽에 있는 관계로, 북도 사람들은 여차하면 남쪽으로 옮길 태세였다. 그들의 상당수는 이미 십승지를 찾아 이동을 시작했다. 주형채와 같은 평민지식인들은 이주운동에 음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주형채는 관리들의 문제제기를 부정했다.“저는 주민들을 타일렀습니다.‘현명한 임금이 다스리는 시대에 어찌 피란가는 일이 있겠는가´ 라고 말입니다.” 평민 주형채는 본래 고향 사람 장진익에게서 글을 배웠다. 그의 스승은 사건 당시 이미 사망한 지 오래 되어 화를 면했다. 유교의 기본 경전은 물론이고 천문과 점술까지 통달한 주형채는 향악선생과 같은 도사는 물론이고 점술인들과도 친한 사이였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주형채는 자신의 주변 인물들을 보호하기 위해 철저히 함구했다. 모진 고문에도 불구하고,“제게는 제자나 동문생도 전혀 없었으며, 도사나 점술인은 원래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습니다.”라고 말했다. 주형채는 의리가 무척 강했던 사람이며, 의지가 대단했다. 그러나 사건을 수사한 조정의 입장에서 보면, 주형채는 대단한 악질이었다.“주형채는 본래 흉악하고 요사스러운 놈으로 천문 역법과 점술, 둔갑술 등 갖은 술수를 써서 백성들을 속이고 인심을 선동하는 것을 일삼았다. 몰래 역적이 될 마음을 먹고 밤낮으로 기회를 엿보았으며, 스스로 ‘대장’이라 떠들기도 하고, 혹은 ‘도원수’라고 칭했다. 더러는 10만의 군사를 모을 수 있다고 했고, 혹은 영흥(永興)의 군사용 창고를 접수하겠다고 하였다. 심지어는 제가 세울 나라의 국호를 제(齊)나라라고까지 했다. 놈은 마음속으로 이것도 작다고 생각했던지 중국 황제를 만나 추천을 받아 자기가 임금이 될 거라고 했다. 또한 꿈의 해몽을 빙자해 신하로서는 감히 꺼낼 수도 없는 말을 멋대로 지껄인 편지가 남아 있다. 지극히 흉악한 죄상이 지금까지 압수된 문서 중에 이미 역력히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놈은 자기 죄를 한마디도 인정하지 않았다.” 이것이 조정의 판단이었다. 평민지식인 주형채의 생각으로는 잘못된 것이 있다면 그 때의 부정 불의한 세상이요, 조정이었다. 자기와 자기 동료들은 아무런 죄도 없었다. 따라서 썩어빠진 관리들이나 임금 앞에서 죄를 인정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살점이 떨어지는 혹독한 고문을 묵묵히 견디면서 주형채는 단 한마디도 잘못을 빌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사태의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주형채가 지하조직에 편입된 계기 ‘정감록’ 역모사건의 소용돌이에 주형채가 휩쓸리게 된 것은 물론 그가 지하조직에 가담했기 때문이다. 그가 지하조직에 가입하게 된 데는 몇 가지 계기가 있었다. 첫째, 주형채는 이 사건에서 핵심적 역할을 담당한 문양해 일가와 인연이 깊었다. 문양해의 삼촌 문광도는 함경도 문천에서 잠시 감목관(監牧官 목장업무를 담당하는 관리)을 지낸 적이 있었다. 그 때 그곳을 여행하던 주형채가 천문에 관한 일로 문광도와 토론을 벌였고, 이를 계기로 여러 문씨들을 사귀게 되었다. 문씨 일가는 충청도 공주의 평민으로 학식이 뛰어났다. 그들은 홍국영의 가까운 친족 홍낙순이 충청감사가 되었을 때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홍 감사가 충청도 감영(監營)에 계실 때 많은 은혜를 입었고, 감사께서 저희 집에 찾아오셔서 만났습니다.” 문양해의 아버지의 진술 중에 이런 말이 나온다. 평민 문광도 역시 홍낙순의 후원으로 감목관 벼슬을 얻은 게 틀림없다. 주형채는 이런 문광도와 서로 기맥이 통하게 됨으로써 장차 문양해 및 홍복영(홍낙순의 아들)과 뜻을 같이 하게 되었다. 둘째, 정감록 사건의 또 다른 주역 양형과도 깊이 사귀게 되었다는 점이다. 주형채의 사촌 주형로는 이미 양형을 알고 지냈다. 주형로(일명 주형일)는 사건 당시 충청도 단양에 머물고 있었다. 양형은 주형로를 통해 주형채란 존재를 알고 있었는데, 자기 친척 문광도에게서 주형채에 관한 이야기를 다시 전해 듣게 되자 호기심이 발동했다. 양형과 주형채는 서로 연락해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사이는 곧 절친한 관계로 발전했다. 양형은 서울 입동에 사는 중인이었다. 낮은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워낙 글재주가 출중했던 그는 서울의 양반 홍복영 및 이율과도 매우 친한 사이였다. 정조 초년, 홍복영은 충청감사로 임명된 아버지 홍낙순을 따라 공주에 내려가 있었다. 그 때 의약에 관한 일로 홍낙순은 고민을 하던 중 양형이 의술에 밝다는 소문을 듣고 불러 상의한 적이 있었다. 양형의 처방이 적중했던지 의술을 매개로 그들은 서로 친해졌다. 홍낙순 일가가 서울로 돌아온 뒤 양형과 홍씨들은 더욱 가까워졌다. 홍복영은 양형의 살림이 어려울 때 도와주기도 했다. 그들은 때때로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나중에 함께 공모해 하동에 지하조직의 거점을 마련했다. 양형과 가까워진 주형채 역시 이 조직에 포섭된 것은 물론이었다. 셋째, 주형채와 홍복영은 끝까지 그 점을 부인했지만, 주형채는 여러 해 전부터 홍복영 일가와 알고 지냈다고 봐야 한다. 홍복영의 삼촌 홍낙빈은 주형채와 친밀해 편지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였다. 정조 5년(1781) 세도정치가 홍국영이 실각하자 가까운 친척 홍낙빈도 함경도 갑산으로 유배되었다. 그 때부터 주형채는 홍씨 일가와 밀접한 관계를 갖게 되었다. 그들은 다들 왕조의 전복을 꾀하였다. 위에서 살핀 몇 가지 경로를 통해 주형채는 ‘정감록’ 사건의 주역들과 마음을 합친 것으로 생각된다. 주형채와 양형, 문양해, 홍복영 등이 지하조직을 형성해 나간 과정을 살펴보면 뜻밖에도 두 가지 사실이 부각된다. 하나는 18세기 조선사회에서 중인 또는 평민 지식인들이 끊임없이 지리적으로 이동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살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형채처럼 고향을 지키고 사는 경우에도 자주 이웃 지방을 여행해 사교범위를 확장하고 있었다. 둘째, 평민 또는 중인 지식인들은 계층을 뛰어넘어 양반들을 사귀는 데 열심이었고, 양반들 역시 여러 가지 이유로 하층지식인들과 접촉하였다는 점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 양반들은 같은 신분층에 속하는 식자들만 사귀었을 것으로 짐작하는 경향이 있지만 사실은 완전히 달랐다. 양반과 평민지식인들은 그것이 비록 평교(平交 평등한 교제)는 아니었다 해도 인생의 다양한 국면에서 서로 만났던 것이다. ●주형채가 속한 전국규모의 지하조직 주형채는 조직의 상층부를 상당히 잘 알고 있었으나 하부구조를 정확히 파악하지는 못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조직원들은 지하조직의 일부를 알고 있었을 뿐이다. 이 조직의 전모를 파악하고 있던 지도층 인사는 문양해 정도였다. 문양해는 심문을 받는 과정에서 지하조직의 얼개를 비교적 자세히 설명한 적이 있다. 북도의 원수는 주형채였지만 그 밑에 여러 명의 두목이 활동했다. 함경도 안변에는 조상호와 유덕휘가, 그리고 강원도 통천에는 유경일이 대도독(大都督)이라 불렸다. 고성의 칠송정에 사는 권생만 역시 대도독으로 통했다. 그들은 일단 유사시 지역사령관으로 능력을 발휘할 참이었다. 이들 가운데서도 특히 유경일과 권생만은 지리산의 향악선생과 가끔 연락을 취하고 있었다. 문양해는 사건 발생 2년 전에 그들이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낸 사실을 기억한다고 했다. 그밖에 황해도 봉산에 있는 이형윤과 황주에 사는 정몽로도 해서지방의 괴수로 손꼽혔다. 고위간부는 아니었지만 평안도 곽산에 살던 박필현도 이 조직의 일원이었다. 주형채 등의 명단은 지리산 거점에 보관 돼 있던 두루마리에 모두 적혀 있었다 한다. 당연한 일이겠지만 서울 사는 양반들도 이 지하조직에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은 앞에서도 이름이 언급된 이율과 홍복영이었다. 진사 이율은 한양 이현에 살았는데 홍씨 일문에 보낸 편지에서,“이 세상을 보지 아니 할 때는 언제입니까? 제 뜻을 온 세상에 널리 펴지 못하게 된다면, 한탄한들 무엇 하겠습니까?”라며 반역의 뜻을 비쳤다. 서소문 밖에 살던 진사 정래정과 정래익도 지리산의 향악선생에게 편지를 보내 조정을 비방하였다.“우리가 비록 재주가 없고 불민하지만 거사하는 날에는 조영흥(趙永興 이름은 미상)이나 주공(朱公 주형채)의 부하가 되기를 원합니다.”라고 말할 정도였다. 여기서 보듯 주형채는 조직 내에서 상당한 실력자로 인식되었다. 물론 지하조직을 총괄한 이는 향악선생이었고, 그를 측근에서 보좌한 이가 문양해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향악선생이 끝내 체포되지 않은 가운데 이 사건은 종결된다. 어쩌면 향악선생이란 인물 자체가 허구였을 수가 있다. 문양해가 가공의 향악선생 노릇을 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다면 문양해야말로 실은 지하조직의 괴수였던 셈이다. 문양해는 문장에 능한 미혼의 노총각으로 비승비속의 도사였다. 지하조직에서는 충청도출신 인사들의 참여도가 높은 편이었다. 특히 공주지방 사람들이 많이 포함돼 있었으며, 내포지방의 양반들도 여러 명이 관여했다. 조직의 실질적인 우두머리 문양해 일족이 공주 출신이었던 데다, 조직을 경제적으로 뒷받침한 홍복영의 아버지 홍낙순이 충청감사를 역임한 것과 관련이 있다. 예컨대 공주 효포 출신의 권우는 지하조직에 적극 가담했다. 그는 향악선생에게 보낸 편지에서 “선생님의 재간은 천고에 뛰어납니다. 제게 아들이 하나 있는데 마땅히 보내서 글을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훗날 거사할 기일을 정확히 알려주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이밖에 공주의 상대장리에 사는 진규도 향악선생과 함께 흉악한 묘책과 비밀스러운 계책을 짰다고 한다. 공주 유구역의 홍정유, 한산의 정탁 3형제, 태안의 조수정과 조수인 형제, 역시 태안에 사는 가명정(賈命正) 등도 조직에 합류했다. 당진의 조두진, 서홍기, 한제만, 대흥의 이인치도 관련이 있었다. 상대적으로 전라 경상 양도의 참여도는 무척 낮았다. 전라도 광양의 오성겸과 이춘홍이 군비 조달에 기여하기로 내정되어 있었을 뿐이다. 특히 경상도 쪽은 조직원이 아예 전무했다. 그것은 이 지하조직이 노론 출신의 홍국영 잔당과 긴밀하게 연계돼 있었기 때문이다. 전통적으로 남인의 세력근거지인 경상도 인사들은 이 조직을 외면했던 것이다. 국가전복이라는 정치적 목적을 가졌으면서도 이 조직은 다분히 종교적인 색채가 짙었다. 하필 그 거점을 지리산에 둔 것은 안전은 물론 신비스러운 성격을 부여하기 위해서였다. 이 조직의 실체는 문양해의 진술을 통해 어느 정도 밝혀진 것이 사실이지만, 그것이 비밀스러운 조직이었던 만큼, 그리고 심문과정에서 마지못해 털어 놓은 이야기란 점에서 불충분한 점이 적지 않다. ●동학의 원조 지하조직에 가담한 사람은 다양했다. 이율과 홍복영 등 실세한 양반이 한 축을 이뤘다면, 지하조직의 운영을 직접 담당한 실질적인 주도층은 중인 이하의 평민지식인들이었다. 주형채, 양형 및 문양해가 바로 그들이었다. 이 사건은 이미 18세기 후반에 정치 종교적인 성격을 띤 전국규모의 민중운동이 준비되고 있었음을 알려주는 실례다. 이런 운동 경험은 지속적으로 축적되어갔다. 그 결과,19세기 말 동학이 대두하자 각지의 농민은 순식간에 동학의 기치 아래 모여들어 거대조직을 만들어냈다. 빗방울이 바로 바다에 이르지는 않는다. 하지만 고인 빗물은 어디엔가 웅덩이를 이룬다. 푸른역사연구소장
  • [여연스님의 茶이야기] 세사발 마시면 득도할 수 있으니…

    [여연스님의 茶이야기] 세사발 마시면 득도할 수 있으니…

    겨울을 부르는 바람이 제법 차다. 일지암 뒤란은 지금 매우 풍성하다. 두륜산 곳곳에 버려진 고사목을 지게에 지어다가 장작으로 사용하기 위해 차곡차곡 쌓아놨기 때문이다. 일지암 초당도 마찬가지다. 일지암 초당은 매년 한 차례씩 삭발을 하듯 지붕을 초가로 이어야 한다. 인근 동네 사람들이며 남천다회 식구들과 함께 작업할 튼실하고 예쁜 볏짚단을 잔뜩 쌓아놨기 때문이다. 하얀 차꽃을 보며 겨울을 맞이하는 이맘때가 되면 괜히 설레는 것은 바로 이같은 풍성한 살림살이 때문이다. 차를 가꾸며 일상을 노동으로 가꾸는 그런 삶속에는 세속의 거친 욕망이 숨쉴 곳이 없기 때문이다. 차란 그런 점에서 바로 우리의 삶덩어리 같은 것이다. 음다, 즉 마신다는 것은 매우 의미가 깊다.‘육지음’에서는 새는 날고 짐승은 달리고 사람은 입을 벌려 말한다. 이 셋은 함께 하늘과 땅 사이에 태어나 먹고 마시면서 살아간다. 마신다는 것은 의미가 참으로 깊고 멀다. 목이 마르면 장을 마시고, 근심과 번뇌를 벗어버리려면 술을 마시고, 정신을 맑게 하고 잠을 깨려면 차를 마시면 된다고 말하고 있다. 당나라 유효작은 차 마시는 것이 마치 잘된 쌀밥을 먹는 것과 한가지라고 말하고 있다. 유효작은 ‘진안왕으로부터 군량미등을 받고 사례를 올리는 글’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조서를 전하는 이맹손이 교지를 선포하고 쌀 술 오이 죽순 김치 말린고기 식초 차 등 여덟 가지를 내려주었습니다. 술의 향기가 신성의 것보다 향기롭고, 운송의 것보다 맛있습니다. 물가에서 마디를 뽑은 죽순은 창포와 마름의 진미보다 뛰어납니다. 보내주신 차를 마시면 쌀밥을 먹는 것과 같이 몸에 이롭습니다.” 차의 살림살이는 바로 우리가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쌀밥처럼 중요한 것중 하나라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한국 중국 일본의 다도는 비슷하다. 일본의 선승으로 불리는 센가이기본은 ‘다도극의’에서 “다도는 마음에 달린 것이지 기술에 달린 것이 아니며, 기술에 달리는 것이 마음에 달린 것이 아니다. 마음과 기술이 함께 행해지는 곳에는 언제나 일미(一味)가 드러난다.”고 했다. 중국의 차문화는 매우 광범위하다. 문화혁명의 거친 숙청의 바람 속에서도 살아 남을 수 있었던 것은 수천년을 이어온 차문화가 중국인들의 유전자 속에 뿌리내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중국의 차인들은 차의 ‘마음’보다는 ‘기술’을 강조했다. 찻물을 20등급으로 나눈 점(장우신의 전다수기), 차 중에 용원승설을 최고로 치는데 그 값이 무려 1만전이나 되는 것도 있다(조여려의 북원별록). 장사에서 생산되는 다구는 정교하기가 천하의 으뜸이어서 한 세트에 백금 200 내지 500성이 들었다(주밀의 계신잡식), 명나라 세종 가정 연간에 경덕진에서 생산된 성화투채배는 그가격이 무려 10만전에 달했다(제경경물략)고 적고 있다. 이런 점을 봤을 때 중국에서 다법은 주로 기술과 외형의 완성에 치우진 형식주의가 대세를 이룬 것 같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지만 차도는 종교적 영역과 결합하면 새로운 꽃을 피웠다. 물질적인 존재인 차가 종교라는 순수한 정신적인 영역과 교감하며 비로소 하나의 문화로 변화된 것이다. 중국 차도의 핵심도 역시 ‘다선일미’다. 그런 점에서 선은 차의 날개와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차의 본성이 고요하고 사색적이고 이지적인 성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일년 사계절을 윤회하는 차의 변화 자체가 바로 진정한 선의 가르침을 담고 있다는 생각도 든다. 중국의 차문화가 하나의 차문화로 격상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원오극근선사가 언급한 ‘다선일미’에서부터 비롯된다. 다선일미는 그후 차는 단순한 음료의 한계를 벗어나 인간의 마음과 문명을 담아내는 우주적인 그릇으로 확대재편된 것이다. 한 잔의 차는 삶과 죽음의 문제, 심(心)과 색(色)의 문제, 사유와 존재 등 근본적인 물음에 대한 해답을 제시함으로써 생리적 필요에 의한 음료의 수준을 훌쩍 뛰어넘어 버린 것이다. 조주 스님의 유명한 공안인 ‘끽다거’는 그같은 변화를 너무도 잘 설명해 주고 있다. 중국의 선문에서 차의 발전은 수행에 도움을 주는 특수한 효능에서부터 시작해 손님 접대까지 하나의 완전하고 엄숙한 다례의식으로 발전했다. 선문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관념의 일치성, 즉 차와 선의 본체와 하나라는 사실을 인지했고 그것을 선과 결합시켜냈다는 점이다. 교연 스님은 “세 사발 마시면 득도할 수 있거니 왜 하필 마음썩이며 번뇌를 깨닫는가.”라고 하고 있다. 교연 스님의 말은 조주 스님의 ‘끽다거’와 완벽하게 일치한다. 조주 스님은 끽다를 일상생활에서 자기를 초월하는 깨달음으로 이끌어냈다.‘차선동일미’에서 밝히고 있듯이 “차는 곧 선이다. 선의 맛을 모르면 차의 맛도 모른다.”는 말과 동의어인 것이다. 다선일미는 그런 점에서 바로 지혜의 경계다. 지혜가 없으면 일상에서, 수행에서 그 어떤 해답도 얻을 수 없다. 다선일미 곧 중국 차문화를 넘어 중국문명의 밑바탕이 된 것이다. 중국 선종 차문화의 물적 토대를 한 단계 격상시킨 스님은 바로 저 유명한 마조도일 선사다. 마조도일 선사는 8세기 중엽 중국 강서성 봉신현 백장산에서 ‘백장청규’를 제정했다. 백장청규의 핵심은 바로 노동과 함께 어우러진 선수행에 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청규는 ‘농선병중’의 사상을 담고 있다. 농선병중사상에 입각한 선문의 생활방식은 자급자족으로 전환시켰다. 당시 사원경제의 핵심은 바로 차 농사였다. 그때부터 스님들은 수행을 하며 직접 차를 재배해 사원경제의 생산력을 최대한 끌어올린 것이다. 지금까지 내려오는 중국의 명차 대부분이 사원차인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적 사실에 기인한다. 탄탄한 경제적 토대를 바탕으로 중국 선문의 차문화도 미학적 승화가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불가에서 행하는 행다의식과 다구들이 독자적으로 등장했고 그에 맞는 자연스러운 직책도 정해졌다. 그런 차문화 속에서 성장한 선사들은 대대로 다사(茶事)와 다례(茶禮)에 정통했다. 불교의 선문에서는 사찰의 차예절이 하나의 다도로 정립돼 계승되었기 때문이다. 다도로 정립된 사찰의 다도는 순서와 안배가 매우 정밀하고 상세했다. 차 예절 전문 담당자가 있었을 뿐만 아니라 엄격한 등급과 절차를 두어 서로 다른 규모로 행해져 왔다는 점을 볼 때 수준 높은 차문화를 영위했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선차록’의 기록은 이같은 사실을 잘 입증한다. ‘차는 곧 깨달음의 극치’라고 설파한 남종선 선승들의 청규였던 ‘근수백창청규’에는 “총림에서 능한 사람을 참두로 삼는다. 참두는 대중을 인솔하여 객사로 가서 위의를 갖추고 문의 오른편에 줄서서 잠시 인사드리겠다고 말한다. 그러면 지객은 즉시 안으로 사람들을 맞는다. 참두가 말한다.‘오늘 선사들의 참 모습을 뵈오니 매우 복이 많습니다.’ 지객이 말하길 ‘이렇게 먼길 와주시니 저희 산문에서 매우 다행스럽게 여깁니다.’ 차를 마시면서 사찰의 내력을 묻는다. 이윽고 곧 일어나서 차대접에 대해 감사인사를 하고 돌아온다.”고 적고 있다. 선종에서 형성된 다례와 다연은 엄숙하면서도 담백해 그 끝을 알 수 없는 미학적 의미와 예술적 정신적 경계를 지니면서 중국의 차문화를 이끌어냈다. 다례 다의 다연에서는 점차 투차 분차를 통해 미(美)의 형식을 보고 선의 정신을 깨닫고 결국에는 다선일미의 지혜까지 증득하는 것이다. 중국 차도의 핵심이랄 수 있는 ‘다선일미’는 중국의 차문화가 지닌 정신적 내용을 풍부하게 만들었다. 즉 차가 선종의 의미를 충분히 담고 선의(禪意)를 깨닫는 지혜의 경지에 이르게 하여 차와 선이 진정으로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차는 바로 평상심의 적용이며 체현이다. 너무도 일상적이고 자연스러워 그 어떠한 신비감도 없는 것이다. 차가 있음으로써 날마다 좋은 날이요, 날마다 평화스러운 날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바로 일상에서 없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일지암 암주 ■ 대한민국 차품평회를 다녀와서 한국의 차가 백가쟁명의 시대를 맞고 있다. 차 산업의 활성화로 여러 곳에서 차 생산자들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다. 차의 종류는 얼추 수백 가지나 될 정도로 급속히 성장하고 있다. 그럼에도 우리에게는 최고의 장인이 만든 최고급차인 명차가 아닌 일반 대중들이 손쉽게 구하고 음다(飮茶)할 수 있는 차에 대한 기준을 갖지 못하고 있다. 차품평회란 바로 우리나라에서 보편적으로 마실 수 있는 차의 기준을 만드는 대회인 것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함께 느낄 수 있는 차의 색(色), 향(香), 미(味), 기미(氣味)의 기준을 만드는 것은 매우 많은 노력과 협조가 필요한 작업이다. 제2회 대한민국차품평대회가 얼마전 차의 본향이랄 수 있는 경남 하동군에서 열렸다. 그 품평대회에는 한국차를 이끌고 있는 200여 생산농가와 차문화를 이끌고 있는 명원문화재단, 한국차문화협회, 한국다도협회, 한국명선차인회, 일지암초의차문화연구회 등이 참여했다. 그런점에서 대한민국차품평대회는 명실공히 한국을 대표하는 차 품평대회로 발돋움하고 있다. 중국에서는 이미 60년 전, 일본에서는 20여년 전부터 품평회가 시작됐다. 그같은 차 품평의 역사 때문에 그 나라들의 차의 수준은 급속히 안착돼 갔을 뿐만 아니라 일반차 명차 등 차의 등급을 매길 수 있는 기준을 찾을 수 있게 됐다. 현재 우리 차는 최고의 호황기를 맞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 차를 한마디로 평가하자면 “묻지마 차”라고 말하고 싶다. 사족을 달자면 차산업이 급속하게 확장되면서 어떤 차를 만들어도 소비자들에게 소비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 차 생산자들을 평가절하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이번 품평대회는 그같은 사실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품평대회에는 250여종의 차가 출품됐다. 그중 본심사에 올라온 것은 20여종이었다. 그중 최고의 차를 평가하는 데 그 편차가 최상위차와 0.3,0.4 정도밖에 보이지 않았다는 것은 우리 차 생산자들의 차 제조 수준이 평준화돼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미 우리의 차도 매우 높은 수준에 올라있음이 증명된 셈이다. 그럼에도 좋은 차를 지키고 생산해야 하는 지킴이로서의 품평대회는 그 역사와 연륜을 쌓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차 품평대회는 차 제품의 가격대비 품질 경쟁력, 안전한 먹거리로서의 좋은 차, 소비자의 기대치를 만족시키는 차의 기준을 만들어야 한다는 문제제기에서 출발했다. 여러 언론매체를 통해 알려진 바와 같이 현재 많은 양의 외국산 차들이 우리나라에 수입되고 있다. 그러나 검증되지 않은 일부 차, 즉 보이차 같은 수입차의 위해성은 많은 문제점을 노정하고 있기도 하다. 내부적인 문제도 만만치 않다. 현대인들의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문화적 욕구 증대, 웰빙 라이프의 추구 등 차 제품의 소비환경이 성숙되고 있음에도 객관적이고 신뢰성 높은 차의 기준을 아직 확보하지 못한 것이 한국차계의 현실이기 때문이다. 차품평대회는 그런 점에서 한국차 산업의 안정성과 산업적 잠재력을 확대시키는 촉매제 역할을 할 것으로 기대된다. 좋은 차를 만드는 것은 한국차의 비전을 제시하는 것과 같은 동의어다.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좋은 차를 통해 아름답고 건강한 차 문화공동체를 만들어가는 차인들의 노력에 깊이 감사할 따름이다.
  • [클릭이슈] 지상파TV 낮방송 허용 논란

    [클릭이슈] 지상파TV 낮방송 허용 논란

    방송위원회가 다음 달부터 지상파방송사들의 낮방송(낮 12시∼오후 4시)을 허용한 데 대한 문제제기가 잇따르고 있다.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가 철회를 요구한 데 이어 한국신문협회도 10일 성명을 내고 허용방침을 백지화하고 국회 등을 통해 충분히 논의하자고 주장했다. 광고시장을 둘러싼 매체들간 ‘밥그릇 싸움’ 성격이 짙지만 매체간 균형발전이라는 관점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쟁점은 과연 지금 지상파방송이 위기에 처해 있는가와 낮방송이 시청자들의 복지에 도움이 되느냐다. ●지상파방송 정말 위기? 겉으로 드러난 지표는 분명 지상파방송의 위기를 보여준다. 지상파방송사들의 시청점유율과 광고점유율은 2000년 이래 계속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이게 정말 위기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있다. 우선 지상파방송은 광고에서 여전히 압도적인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케이블 업계에서는 “시청률로 보면 6대 4인데 광고로 보면 8대 2 비율”이라고 말한다. 그나마 이 수치도 엄격히 봐야 한다. 케이블TV협회 관계자는 “유선방송사업자(SO)광고는 찜질방, 안경점, 식당 같은 지역 광고여서 지상파방송 광고와 비교하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관계자는 “24시간 방송하는 뉴미디어 때문에 지상파방송의 방송시간 제한을 풀어준다면 시청률에 맞는 광고비 인상도 보장해줘야 한다.”면서 “지상파방송사들이 그런 요구를 받아들이겠느냐.”고 말했다. 또 케이블TV가 일궈낸 대부분의 성과물은 지상파방송 계열 프로그램공급자(PP)들이 차지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지상파방송은 계열PP에 인기 콘텐츠를 몰아주는 방식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있다. 지난 2일 공개된 방송위 자료에 따르면 지난해 KBS는 계열PP 1개사에 1100여편, 그외 PP에는 90여편을 팔았다.MBC도 계열PP 1개사에 900여편, 일반PP는 90편 정도였고 SBS도 계열PP 1개사에 3400여편의 프로그램을 몰아준 반면 일반PP에는 60편 남짓만 팔았다. 그 결과 계열PP들의 이익금이 전체 PP이익금의 80%를 차지한다. 이러니 PP들끼리 업계 순위를 매길 때는 아예 지상파방송 계열PP들을 빼놓는 경우도 많다. 여기에다 지상파방송사들은 위성방송과 위성 이동멀티미디어방송(DMB)에도 참여했고 다음 달부터 지상파DMB도 서비스한다. 시청률·광고가 줄었다고 해도 여전히 지상파방송은 ‘공룡’이라는 반론이 적지 않다. ●방송위의 조직이기주의? 이 때문에 사실상 이번 결정은 방송위의 조직이기주의에서 나왔다는 비판이 강하다. 디지털 기술의 발달로 방송·통신 융합이 진전되면서 방송위와 정보통신부간 통합이 논의되고 있다. 이때 정통부는 전자·통신업계라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는 데 반해 방송위는 지지세력이 없다는 것. 이미 뉴미디어 업계에서는 “‘국부의 창출’이라는 관점에서 정부는 정통부의 손을 들어줄 수밖에 없는데 이럴 경우 방송위가 살기 위해 기댈 곳은 지상파방송밖에 없다.”는 해석이 파다하다. 그러니 ‘선물’을 줘가면서 지상파방송사들의 환심을 사놔야 한다는 것이다. 일부에서는 현재 방송위원 구성 자체를 문제삼기도 한다. 대부분이 지상파방송사 출신들로 채워져 있다 보니 디지털화로 인해 급속하게 변해가고 있는 방송시장의 변화 트렌드를 이해하지도 못하고 또 이해하려 들지도 않는다는 것. 이 때문에 내년 5월 방송위원들의 임기가 만료되는데 그 이전에 무슨 일을 벌여놓고 갈지 모른다는 관측도 있다. ●몸 낮추기에 들어간 방송사들 지상파방송들은 입을 모아 다양하고 좋은 프로그램을 선보이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낮방송 시청층이 주부·학생들이나 집에 오래 머물러 있는 재택근무자·노약자·장애인들인 만큼 이들을 위한 서비스를 강화하겠다고 공언하고 있다. 또 광고수익에 대해서는 “낮 시간이어서 제작비나 제대로 건질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한껏 몸을 낮추고 있다. 그러나 이런 주장들은 결국 ‘손해보려고 장사한다.’는 말과 다름없어 실제 어떤 편성이 이뤄질지는 두고봐야 알 수 있다는 비판이 적지 않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전육 CATV PP협의회장 “비유하자면 타워팰리스 주부가 가정부 없다고 살림 못하겠다는 겁니다. 대한민국 주부 가운데 가정부 고용하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먼저 규모에 맞는 살림을 하라고 해야지요.” 한국케이블TV방송협회 PP협의회 전육 회장은 방송시간 연장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낮방송이 허용되면 연간 360억원의 광고수익이 예상된다는데 이게 지난해 방송사들의 적자폭과 비슷합니다. 낮방송 허용은 방송사의 이익을 보장하겠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전 회장은 먼저 지상파방송사들의 방만한 경영을 지적했다. 우리나라처럼 정부허가가 있어야 방송사업을 할 수 있고 광고영업을 한국방송광고공사가 대행해주는 나라가 없다는 것.“이런 특혜 속에서 커왔으니 수지 맞출 걱정 한번 안 하고 온실 속에서 편하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평균임금은 우수한 PP들보다도 2배 이상 받습니다.” 전 회장은 공익적 성격 때문에 지상파방송에 특혜를 줘야 한다면 방송위는 그 대신 다른 매체들을 북돋워주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여기에는 지상파의 낮방송이 없다는 점이 일정 정도 기여했다. 그런데 이번 조치는 이걸 없애겠다는 것.“방송위나 현 정부 모두 균형발전과 약자보호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전히 약자인 케이블 시장에 파이가 커졌으니 낮시간을 희생하라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전 회장은 특히 거시적인 관점을 주문했다.“연간 광고시장이 6조원에 이른다면 여러 매체들이 이를 적절하게 나눠가질 수 있도록 신경쓰는 것이 매체의 균형발전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방송위의 결정은 이미 내려졌다. 해결방법이 있을까.“그렇다면 방송위는 PP들에 대한 지원책을 내놔야 합니다. 방송발전기금으로 PP들의 콘텐츠 생산을 지원해줘야 합니다. 또 PP의 등록제를 승인제로 바꾸는 방안도 검토해야 합니다. 등록제 때문에 PP들이 지나치게 난립하면서 PP시장이 영세해진 측면이 있습니다.” 조태성기자 cho1904@seoul.co.kr
  • [씨줄날줄] 허리비율/이상일 논설위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등 외국 영화에서 하녀가 여주인공의 코르셋을 죄는 장면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허리를 가늘게 만들어 상대적으로 가슴과 엉덩이를 더 풍만하게 보이기 위한 것이다.‘데벤드라 싱’이란 학자는, 남성은 각각 다른 체격의 여성을 좋아하더라도 허리-엉덩이 비율이 가장 낮은 여성에 가장 매력을 느낀다고 주장했다. 이 비율이 낮다는 것은 여성의 건강과 생식 가능성 등을 드러내는 신호란 설명이다. 남자의 허리가 가늘면 성적매력이 어떻다는 이야기는 없어 성차별 냄새는 난다. 다만 굵은 허리는 남녀 모두 건강에 적신호로 통한다. 최근 캐나다 맥매스터 대학의 ‘살림 유수프’ 박사는 허리둘레를 엉덩이 둘레로 나눈 비율이 남자의 경우 0.9이상, 여성은 0.85이상이면 심장마비에 걸릴 위험이 아주 높다고 발표했다. 조사대상자들의 평균 허리-엉덩이 비율은 0.90이었으며 중국이 0.88로 가장 낮았고 동남아 0.89, 북미 0.90순이었다. 한국판 허리둘레 기준도 나왔다. 남자는 35.3인치(90㎝), 여자는 33.4인치(85㎝)가 넘으면 복부비만에 해당한다고 대한비만학회는 얼마전 밝혔다. 키와 몸무게에 관계없이 이 기준이 적용된다는 것이다. 허리비만이 문제되는 것은 허리의 지방세포는 인슐린 분비 시스템을 해칠 수 있는 화학물질을 조성해 엉덩이 지방보다 위험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동서고금이나 몸무게 차이를 막론하고 미인들의 허리-엉덩이 둘레비율은 0.7로 알려져 있다. 그런 기준에서 보면 우리나라 20대 여성은 모두 미인형에 속한다.2년전 산업자원부가 발표한 한국 20대 미혼여성의 표준체형을 보면 허리둘레는 25.9인치(66㎝), 엉덩이 둘레는 35.4인치(90㎝)로 허리-엉덩이 비율이 0.73이다. 한국 20대 체형을 유지하면 금상첨화인데 뱃살이 늘면 어떻게 할까. 허리를 줄이려면 누워서 발을 들어올리고 빨리 걷는 운동이 좋다. 스포츠댄스와 밸리댄스가 여성들에게 인기있는 이유중 하나는 허리를 많이 이용하는 춤이기 때문이라던가. 섹스 어필은 못해도, 또 엉덩이-허리비율은 따지지 않아도 허리에 가려 발을 내려다볼 수 없는 사태는 답답해서라도 막아야 할 것 같다. 이상일 논설위원 bruce@seoul.co.kr
  • 새 이름에 모여든 유머

    새 이름에 모여든 유머

    한 물건의 이름을 갈 때 현상모집을 하면 엉뚱한「아이디어」들이 수없이 모여 사회명랑화에 큰 도움을 준다.「유머」가 아쉬운 세상에 그것은 한 가닥 미소를 자아내게 한다. 상업은행이 보통예금의 이자로 보험에 들게 하는「안심예금」의 이름을 일반에서 공모하여 고치기로 했다. 1월말께 전국의 주요신문에 공고를 냈었다. 당선작 하나의 상금은 자그마치 10만원 정. 공모기간은 2월 한 달 동안. 까다로운 조건이 하나 붙긴 붙어 있었다. 관제엽서에 좋은 이름만 적어 보내는 것이 아니었다. 2백자 원고용지로 7장 이상의 설명이 따라야 했다. 우선 결론부터 말하면 전국에서 1천 8백 통의 응모가 있었다. 당선작은 없고 가작 3명에 유감상 1만원씩이 보내졌다. 국내에서뿐만 아니라 월남의「정글」속에서 파월용사까지 군사우편을 띄워「아이디어」를 제공, 국외에서 상금을 휩쓸어 가려는 속셈을 보였다. 이러한 것은 파월용사들이 얼마나 여유 있게 임무를 수행하고 있는가를 말해주는「사이드·스토리」감은 된다. 더욱이 그 병사 -「다낭」지구에 주둔한다는 김태화상병이 보내온 이름이「천하태평예금」이라 상은 관계자들의 배꼽을 쥐게 했다. 포성을 자장가처럼 듣고 있을 일선지대의 군인이 천하태평이라는 낱말을 생각해서 고국에 보냈으니 즐겁지 않을 수 없다. 응모된 이름들 중에서 색다른 것을 골라보면 다음과 같다. 안위(安慰)예금, 너도나예금, 영거(寧居)예금, 노다지예금, 꿀꿀이예금, 화수분예금, 봉황예금, 비둘기예금, 신안(新安)예금, 로터리예금, 해바라기예금, 상은송아지예금, 두꺼비예금, 옹달샘예금, 환생예금(이건 너무 거창하다), 네배예금, 흥부예금(놀부흥부의 흥부다), 개미예금, 원앙예금, 제비예금, 보너스예금, 월상비(月常備)예금, 목돈예금, 삼호(三好)예금, 일석이조예금, 4백%예금, 다목적예금(다목적댐에서 힌트?), 만리성(萬里城)예금, 포퓰러예금, 보배예금, 가보예금, 보구리(寶求利)예금(상당히 욕심스러운 이름이다), 복샘예금, 무궁화예금, 앙코르예금, 풍리(豊利)예금, 부래(富來)예금, 수재비비(壽財備肥)예금, 아폴로예금(아폴로 9호에서 힌트?), 상은예금(공모주에 대한 과잉아부?), 일월(日月)예금, 금실(金實)예금, 디딤돌예금, 엄빠예금(새 낱말이다. 엄마와 아빠가 사이 좋게 예금한다는 뜻에서 새 말을 창조했다), 황소예금, 신안(信安)예금, 일익(日益)예금, 단꿈예금, 명천(明泉)예금, 성주(成柱)예금, 재주(災住)예금, 달나라예금, 계수(桂樹)예금, 단골예금, 오아시스예금, 부부(夫婦)예금, 송죽예금, 노적(露積)예금, 복조리예금, 재치(才致)예금, 귀한(貴韓)예금, 금옥(金玉)예금, 선행(先行)예금, 믿을예금, 공짜예금, 알찬예금, 승공(勝共)예금(저축은 승공에 통한다?), 사슴예금, 배보다큰배꼽예금, 운수(運數)예금, 소소(笑笑)예금, 꿩알예금(꿩먹고 알먹는다는 뜻), 오뚜기예금(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뜻), 소복(笑福)예금(소중만복래(笑中萬福來)에 전거(典據)를 대고 게다가『소복소복 모인다』는 우리말의「뉘앙스」도 좋다고). 또 응모자는「소」자와「복(福)」에 얽힌 속담을 인용한다. - 소같이 벌어서 쥐같이 먹으라는 바로 치부의 첩경이라고 해석한다. - 소도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는 두말할 나위도 없이 살림살이에 가장 필요한 것이 저축임을 말해준다고 해석. 그러니 은행적금의 이름에는「소」와「복」이 최적이라고 강인색부(强引索附). - 소 잃고 외양간 고친다는, 바로 저축의 중요성을 가르치는 속담이라고 속담에 대한 박람강기(博覽强記)를 과시해 보기도 했다. 1천 8백 명이 응모를 했지만 1천 8백 명이 모두 다른 이름을 추천한 것도 아니었다. 똑 같은 이름이 상당히 많은 사람에 의해 보내졌다. 복지예금이 51명, 보상예금이 19명, 안전예금이 38명, 보험예금이 20명, 보장예금이 14명, 안정예금이 14명, 부리예금이 14명, 오뚜기예금이 22명, 오복예금이 21명이다. 개인응모자만 나온 것은 아니다. 단체응모자도 출현해서 관계자를 감격케 했다. 경남 고성(固城)중학교에서는 학생 1천 2백 명에게 저축심 양양의 교재로 삼아 문제를 내었다. 교직원 50명도 여기에 참가했다. 그 결과, 공제(共濟), 복리(福利), 십자(十字), 복(福), 자성(自成), 복지(福祉), 죽순(竹筍), 안전(安全), 오복(五福)의 9가지 이름이 나왔다. 이것을 국어과와 사회과의 담임선생이 신중히 검토한 다음「오복(五福)」으로 정해서 교사대표 김성화씨의 이름으로 응모해 왔다. 심사결과 복지예금, 안전예금, 오복예금의 3가지가 가작으로 뽑혔다. 이 세 이름을 응모한 사람이 복수(복지 51명, 안전 38명, 오복 31명)여서 3월 중순께 상은 회의실에서 경찰관 입회 하에 요란스러운 추첨을 했다. 제비를 뽑은 사람은「스타」엄앵란양. 행운의 당선으로 상금 1만원을 탄 사람은 복지예금에서는 이명배씨(충남 예산읍 창소리2구), 안전예금에서는 박영찬씨(서울 영등포구 대방동 49의 6), 오복예금에서는 박성주씨(전남 고흥군 봉래면 신금리)의 3씨다. [ 선데이서울 69년 3/30 제2권 13호 통권 제27호 ]
  •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정신건강 전령사’ 나선 임웅균 예술종합학교 교수

    [김문기자가 만난사람] ‘정신건강 전령사’ 나선 임웅균 예술종합학교 교수

    흔히 고음(高音)을 잘 내는 사람을 ‘신이 내린 목소리’에 비유한다. 테너에게 고음은 생명 그 자체다. 또 고음을 위해 생명을 걸기도 한다. 세계적 태너도 고음 앞에 무릎을 꿇는 경우도 많고, 고음에 도전하다 죽는 경우도 더러 있다. 테너 임웅균(51)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성악가로 정상에 오를 때까지 죽을 고비를 여러번 넘겼다. 대학시절 찬송가의 높은 ‘라’음을 내다가 숨이 콱 막혀 그 자리에서 쓰러졌다.‘심청전’ 연습 도중 ‘농부가’에서 또한번 아찔한 경험을 했다. 임 교수는 요즘에도 여전히 고음을 낸다. 공연장에서는 물론 예술종합학교 음악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에도 그렇다. 특히 학생들에게 야단칠 때면 음악원 전체가 쩌렁쩌렁 울린다. 주위에서 “성악가는 목소리를 아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우려에 목소리를 강철처럼 단련시키고 싶어 그런다며 오히려 목소리를 더 높인다. 지난 주 음악원 연구실에서 임 교수를 만났다. 인터뷰 내내 그의 목소리는 소문대로 쩌렁쩌렁했다. 때로는 천진난만한 웃음으로 펄쩍펄쩍 신나서 뛰기도 했다. 임 교수는 최근 서울시로부터 ‘정신건강 지킴이’로 위촉돼 정신건강 전령사로 또다른 역할에 나섰다.“나의 건강은 가족의 건강이며 나아가 한민족의 건강이 아니냐.”면서 노래로 정신건강을 지키고 알리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가치있는 일이라며 크게 웃는다. 이어 대뜸 “내가 (국회)출마하면 어떻겠소, 할 일이 꼭 있거든요.”라는 생뚱맞은 질문을 던진다. 대답할 겨를도 없이 “전국 60개도시에 사랑의 집을 짓는 것입니다. 청소년과 미혼모를 위한 재활프로그램, 즉 세계 최고의 휴먼센터를 설립하는 거지요.”라고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퇴학당하기 일보 직전에 휴먼센터에서 보름 동안 재활프로그램을 거쳐 퇴학여부를 결정하자는 것. 이를 위해 매년 1800억원의 예산이 필요하다는 계산도 끝냈다고 했다. 자기 적성과 자아를 파악한 사람은 결코 죄를 짓지 않기 때문에 휴먼센터가 이 역할을 충분히 해줄 것이라고 장담했다. “우리나라는 교과목이 너무 많아요. 학생들 가방이 그렇게 무거운데도 어디 노벨상 하나 제대로 나오나요.6,7개 과목으로 팍 줄여야 해요. 그리고 책가방을 왜 들고 다닙니까. 책은 학교에 보관하고 집에 돌아와서는 CD로 공부하면 돼요. 왜 그 흔한 CD 제작을 안하는 것인지 답답해요.” 임 교수는 정계나 재계 인사들을 만날 때마다 장소를 불문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 하기로 소문이 나 있다. 피가 끓는 다혈질의 사나이기에 정 안되면 국회진출이라도 해서 그런 일을 꼭 이루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공연장 밖에서 그가 가장 중요시하는 것은 어린이와 청소년을 돕는 일.3년전부터 학교폭력대책 국민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아 ‘사랑의 공책 보내기 운동’을 펼치고 있다. 유명 인사들과 연예인들의 캐리커처와 메시지를 담은 공책 5만부를 소년 소녀 가장이나 결식아동들에게 보내 용기를 북돋워 주고 있다. 또 2년 전에는 어린이날이 공휴일에서 제외된다는 얘기가 나오자 68개 어린이단체 공동대표의 자격으로 국무총리실에 찾아가 다짜고짜 담판을 지어 원점으로 되돌리게 했다. “앞으로 우리나라는 오른손 문화에서 양손문화로 바뀌어집니다.30대 이상은 대부분 오른손을 쓰지만 지금의 청소년과 20대는 양손을 쓰거든요. 컴퓨터 자판도 그렇고 휴대전화 문자 메시지도 다 양손으로 휙휙 날리잖아요. 그래서 지금의 청소년은 어느 때보다 정말 중요합니다.” 임 교수는 또 유학시절 유상근 전 명지대 이사장의 장학금으로 공부를 했다는 사실을 회고한 뒤, 한 사람의 투자로 이렇게 성악가와 교수로 성장해 수많은 사람을 즐겁게 해주고 있지 않으냐고 자신했다. 따라서 재벌들은 우리 사회의 불우이웃과 청소년들을 위해 더 많은 투자를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아울러 재벌들은 따지고 보면 농민과 서민들이 물건을 사 주니까 재벌이 된 거 아니냐면서 우리 농산물이 무너지면 암 발생 등 만병의 근원이 생기기 때문에 농촌 지원에도 앞장서야 한다고 역설했다. 전국경제인연합회 차원에서 농민들에게 무이자로 대출해 주는 방법도 생각해 볼 수도 있다고 했다. 한참만에야 음악얘기가 나왔다. 인간은 음악과 스포츠 두가지만 있으면 살 수 있다면서 “발가벗은 목욕탕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뭔지 아세요? 작곡 시 노래 무용 등 네가지뿐입니다.”고 했다. 시나 무용도 음악이 있어야 하고 무용 역시 결국은 체육이 아니냐는 것. 예로부터 음악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이기에 사람은 음악을 들어야 과격해지지 않는다고 했다. 밀양아리랑을 멋들어지게 부를 때 하얀손수건을 꺼내는 이유를 물었다.“다윗창법을 쓰지요. 다윗은 노래로 신과 대화를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또 목소리가 어린이와 비슷하다는 것을 알게 됐지요. 어린이들은 고음에서도 또박또박 소리를 내면서 목이 잘 쉬지 않지요. 그래서 아 이게 바로 벨칸토구나 하는 것을 알았지요.”라고 했다. 임 교수의 성악적 자질은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았다. 숙대 성악과에 입학 등록을 한 어머니는 임신을 하는 바람에 수학을 포기했고, 이때 낳은 아이가 바로 임 교수. 아버지는 일본 규슈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해 고교 교사로 있었으나 여섯 아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사업에 뛰어들었다 곧 실패했다. 임 교수는 가난한 살림에 피아노를 배울 수도 없었고 음악성적도 별로였다. 초등학교 5학년 음악시간때 너무 크게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선생님한테 뺨을 맞았다. 음악점수는 ‘양’이었다. 중학교 1학년 때도 그랬다. 중2때 음악선생님한테 “성악을 하지 않으면 안될, 기가 막히게 좋은 목소리를 지녔다.”고 칭찬을 받았다. 이후 ‘고성방가’하는 버릇이 생겼다. 학교에서 돌아오는 길에 서울 뚝섬 동네 밖에서 노래를 부르면 마을 사람들이 ‘웅균이가 온다.’고 했다. 학창시절 공부실력은 별로였다. 경기중학 입학시험에 떨어지고 고교 역시 1,2차에 거푸 떨어져 대구로 내려갔다가 우여곡절끝에 명지고에 입학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돼서야 비로소 성적이 상위권으로 올랐다. 고3때 육사를 지원, 군인이 되려고 했다. 그러나 어머니의 만류와 음악선생님의 권유로 성악을 하게 됐다. 7개월 동안 집중적인 레슨끝에 연세대 성악과에 수석 합격했다. 대학때에는 문화촌 달동네에 살면서 클래식을 연주하는 레스토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어머니의 치료비를 충당했다. 물로 배를 채우고 무대에 오르기 일쑤였다. 결국 달동네 생활 3개월 만에 장티푸스에 걸린 것. 병원비가 없어 작은형의 대영백과사전을 가져다 팔아 겨우 해결했다. 대학을 수석으로 졸업하고 3년 동안 화곡고 음악선생으로 있다가 이탈리아로 유학을 떠났다. 고음의 벽을 뚫고 음악적 완성을 이루기 위해서였다. 돈이 없어 궁리 끝에 유관순 기념관에서 독창회를 열었다.370만원을 벌었다. 그 돈으로 급하게 결혼식을 올리고 부인과 함께 유학길에 올랐다. 세계적인 성악가를 배출한 오시모 아카데미에서 2년간 공부했다. 기라성 같은 테너와 소프라노의 음반을 구해다 틀어놓고 달달 외우다시피 했다. 최대한 흉내를 내면서 발성을 연구했다. 또 마리아 칼라스의 뮤직코치로 유명했던 안토니오 토니니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루치아노 콩쿠르에 참가했을 때 심사위원인 파바로티로부터 “목소리가 굉장히 고급스럽다.”는 말을 전해 듣기도 했다. 85년 11월 귀국, 서울 마포의 한 아파트에서 보증금 100만원에 월세 15만원으로 시작했다. 이듬해 3월 연세대 강사로 채용됐고,1년 뒤 ‘KBS콘서트홀’이라는 프로에 단골로 출연하면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임 교수를 스타로 만들어준 것은 바로 ‘열린 음악회’.93년 10월 첫 출연하면서 ‘두만강’‘타향살이’‘밀양아리랑’ 등 클래식과 대중가요, 민요를 오가며 대중적 인기를 얻었다. “지식인이 침묵을 지키는 경우는 두가지, 즉 완전한 낙원이거나 아니면 아무 희망이 없는 사회일 때 그렇지요. 하지만 둘 다 아니라면 웅변이 곧 금입니다.” 요즘에는 실학과 우리나라 독립운동사를 공부한다. 이유에 대해 역사는 말 잘하는 사람을 예의 주시해 왔으며 실사구시 차원에서 하고 있다고 껄껄 웃는다.“임진왜란때 일본이 우리나라 사람 6만,7만명을 끌고 갔는데 돌아온 것은 6000여명밖에 안돼요. 나머지는 외국의 노예로 다 팔아 넘겼어요.” ■ 그가 걸어온 길 ▲1955년 서울 출생 ▲75년 명지고 졸업 ▲75년 연세대 성악과 수석 입학 ▲79년 연세대 성악과 학사졸업 ▲79∼81년 군입대 ▲81년 화곡고 음악교사 ▲83년 이탈리아 유학, 산타체칠리아 국립음악원과 오시모 아카데미에서 수학(석사) ▲85년 귀국 ▲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 음악원 성악과 부교수, 성악과 과장 역임 ▲2002년 5월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 공동대표 ▲2005년 10월 서울시 정신건강 지킴이 위촉 ▲그외 로마 밀라노 등 이탈리아 17개 도시, 뉴욕 워싱턴 애틀랜타 등 미국 19개 도시 순회연주. 오페라 ‘사랑의 묘악’ 등 국내 30여회 공연 ■ 주요 상훈 만토바 국제콩쿠르 2위, 비오티 국제콩쿠르 메리토상, 제22회 한국방송대상 성악가상(95년), 저축의 날 대통령 표창(2000년) ■ 음반 선경 한국가곡 4,5집(CD), 독집음반 사랑하는 마음(99년), 태너 임웅균의 클래식 가요(2001년) km@seoul.co.kr
  •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코오롱그룹-이웅열 회장家

    [2005 재계 인맥·혼맥 대탐구] 코오롱그룹-이웅열 회장家

    코오롱의 역사는 한국 섬유산업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이 땅에 가장 먼저 나일론을 들여와 의생활에 혁명을 가져왔으며, 한때는 수출 한국을 이끌기도 했다. 그러나 성숙산업에 따른 한계로 인해 코오롱은 재계서열이 점점 밀려났다. 섬유산업의 위상이 갈수록 위축되는 모양새와 별반 다르지 않다. 코오롱의 3세 경영이 닻을 올린지 올해로 10년째. 이웅열(49) 회장은 올해를 그룹경영의 ‘터닝포인트’로 만들기 위해 낮은 곳에서 다시 시작하고 있다. 제2의 도약을 위해 노후화된 주력 사업에 다시 기름을 칠하고, 쪼이고, 닦고 있는 것이다. 혹독한 외환위기를 거치며 체질을 바꾼 코오롱이 재도약을 위한 또 한번의 체질 개선 시험을 치르고 있다. ●풍운아 이원만 창업주 코오롱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과 이동찬(83) 명예회장은 부자간이면서도 사업 동지이자, 인생의 동반자였다. 이 창업주가 그룹의 외연을 넓히고 사업의 ‘바람막이’가 돼 줬다면, 이 명예회장은 그룹의 안살림을 챙겼다. 부자는 동업자로서 40년 가까이 함께 일하며 코오롱의 기틀을 만들었다. 이 명예회장이 2세이면서 창업 1.5세대로 불렸던 까닭이다. 부자는 사업 파트너로서 환상의 듀엣이었지만 가정적으론 한때 애증의 관계였다. 기업가보다 정치가로서 더 알려진 이 창업주는 워낙 풍류를 즐기는 성격인 데다 이 명예회장이 초등학교 4학년 때 남은 전답마저 처분하고, 사업을 위해 훌쩍 일본으로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이 명예회장은 어린 나이에 모친과 누이동생을 돌보며 가장 역할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선친은 이 명예회장에게 부러움의 대상이기도 했다. 선친의 호방한 성품과 능숙한 화술 등은 당시 정·재계에서 유명했다. 이 창업주는 술을 많이 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술자리에선 재담으로 좌석을 압도했으며,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는 ‘문화재’로 불리울 정도였다. 이 창업주는 1930년대 초 일본으로 건너가 사업 기반을 닦았으며, 해방 후에는 국내 최초로 나일론을 들여와 국내 섬유산업을 개척했다.1957년엔 국내 첫 나일론사 제조 공장인 한국나일론(현 ㈜코오롱)을 설립했으며,63년엔 나일론 원사 공장을 지었다. 그는 또 한국산업수출공단 창립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오늘의 구로공단과 구미공단을 조성하는 산파역할을 했다. 이 창업주는 정계에도 발을 들여 대한민국 초대 참의원과 6,7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이를 기반으로 그는 인맥 만들기에 탁월한 수단을 발휘했다. 이 때문에 이 창업주는 1960∼70년대 정·재계의 대표적인 인물로 꼽혔다. ●1.5세대 창업주 이동찬 명예회장 “이 명예회장은 숙박비를 아끼기 위해 항상 비서와 한 방에서 잡니다. 비서들에게 해외 출장은 그야말로 곤욕이었죠. 회장이 바로 옆에서 주무시는데 잠이 편히 옵니까. 출장에서 돌아오면 몸무게가 3∼4㎏은 그냥 빠져요. 그렇다고 1달러가 아쉬운 나라에서 잠자는 곳에 돈낭비를 할 필요가 있느냐는 말씀에 뭐라고 할 수도 없고요.” 코오롱 비서 출신의 한 임원 얘기다. ‘가장의 짐’을 일찍 떠안은 탓에 이 명예회장은 근검 절약이 몸에 배어 있다. 한 번은 이 명예회장이 1947년부터 50여년 이상 신었던 슬리퍼를 비서실에서 새 것으로 바꿨다가 된통 야단을 맞고, 쓰레기통을 뒤져 간신히 찾았던 적도 있다. 또 이 명예회장의 점심 메뉴는 주로 된장찌개와 칼국수, 수제비 등이었으며, 삼복 더위도 부채와 선풍기로 보냈다. 그는 15세 때 경리사원으로 부친의 사업을 도운 지 35년 만인 1977년 코오롱 회장에 올랐다. 그는 등산식, 마라톤식으로 표현되는 꾸준한 내실 경영으로 그룹의 체질을 다져놓은 이후 섬유와 무역에 치우친 사업구조를 건설과 화학으로 확대했다.1980년대는 전자소재와 합성섬유 등 신업종으로 영역을 더욱 넓혔다. 이 명예회장은 과외 활동에도 관심이 많았다. 그는 1974년 한국경영자총협회 부회장직을 맡은 이후 1975년 농구협회 부회장, 전국경제인연합회 이사 등으로 다양한 단체에서 활약했다.1980년에는 대한농구협회 회장을 맡았으며, 대한올림픽위원회 위원으로서 스포츠 외교에도 일익을 담당했다. 경총 회장은 82년부터 무려 14년간이나 했다. 1996년 1월 이 명예회장은 10년 이상 경영수업을 받은 장남인 이웅열 회장에게 그룹 경영권을 물려주고 선친처럼 명예회장으로 물러났다. ●‘3박4일’ 이웅열 회장 이웅열 회장은 5명의 누이들 속에서 컸지만 성격은 대단히 남성스럽다. 특히 스포츠를 좋아해서 축구와 야구, 테니스, 탁구, 당구, 골프 등 종목을 가리지 않는다. 또 시작하면 프로(?)수준이 될 때까지 멈추지 않는다. 그의 별명이 ‘3박4일’로 불린 이유는 무엇이든 한 번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 때문이다. 그의 학창 시절은 남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그다지 풍족하지 않았다. 부친인 이 명예회장이 박하지 않을 정도의 용돈만 줬기 때문에 친구들로부터 재벌 아들이 ‘짜다’는 소리를 수시로 들었다. 그는 고려대 경영학과를 거쳐 미국 조지워싱턴대 경영학 석사(MBA)를 받았다. 이 회장은 활달하고 사교적이다. 전경련 e비즈니스 위원장을 맡아 재계 2∼3세의 리더로서 활동하기도 했다. 그는 최태원 SK㈜ 회장과 신동빈 롯데 부회장, 류진 풍산 회장,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가깝게 지낸다. 그의 이같은 사교적인 성격은 조부인 이원만 창업주의 성품과 닮았다. 호방하고 풍류를 즐겼던 이 창업주는 사업가보다 정치인으로 이름이 더 잘 알려졌다. 1989년 그룹 기획조정실장으로 그룹 경영에 참여한 이 회장은 이동통신사업을 직접 진두지휘하면서 그룹의 변화를 이끌었다. 그러나 외환위기 파고로 계열사 매각과 신세기통신(현 SK텔레콤) 지분(1조 700억원어치)을 팔아야하는 아픔을 겪었다. 이 회장은 당시 “우리는 우리의 미래를 위해 미래를 팔았다.”고 표현할 정도로 침통해 했다고 한다. 그러나 코오롱의 어려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화섬산업이 고유가와 중국의 저가 공세로 경쟁력이 갈수록 떨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장은 올해를 ‘턴어라운드’의 원년으로 선포하고, 과감한 구조조정과 수익구조 개선을 추진하고 있다. ●경영권 장자 승계 코오롱 가문은 재계에서 보기 드물게 아들이 귀한 집안이다. 창업주인 이원만 회장은 슬하에 2남4녀를 뒀지만 이 명예회장은 1남5녀, 이웅열 회장도 1남2녀다. 그룹 경영은 장남만 참여하고, 딸들과 사돈가의 경영참여는 철저히 배제한다. 장자일계(長子一系)의 경영 형태를 띠고 있는 것이 코오롱가의 특징이다. 다른 그룹들이 사돈을 비롯한 친인척들로 방대한 족벌 경영체제를 이룬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이 명예회장과 숙부인 이원천 전 사장간의 경영권 분쟁이 친인척 배제를 가져온 것으로 보인다. 이 창업주가 그룹경영을 맡고 있을 때는 사위들의 경영 참여가 적지 않았지만, 이 명예회장이 경영권을 승계하면서 이같은 장자 승계의 원칙이 정해졌다. 이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 ‘벌기보다 쓰기가 살기보다 죽기가’에서 “우리 집 여자들은 아버지 사업이나 남편이 하는 일에 개입하는 법이 없다. 사위들이 처가 덕을 보고 한자리 하겠다면 득보다 해가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전문경영인에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잘 해내는 경우에도 열등감이 생긴다. 능력이 없다고 ‘백년손님’이라 쫓아낼 수는 없는 일이니 난처해질 것이고, 훗날 내가 일선에서 물러날 땐 조용해지기 어렵다.”고 했을 정도로 철저히 장자일계의 경영구조를 갖춰 경영권에 대한 소모적인 논쟁이나 다툼을 미리 차단했다. ●김종필 전 총재와 한때 사돈 이원만가(家)의 혼맥은 국내 재벌가의 최정점 가운데 하나로 평가될 정도로 화려하다. 이 창업주의 넓은 정계 인맥과 국내 굴지의 섬유그룹인 코오롱을 기반으로 정·관·재계 곳곳에 혈연 관계를 맺었다. 이 창업주와 이위문(작고) 여사는 2남4녀를 뒀다. 이 창업주의 영향력이 정·재계에 미치기 전에는 자녀들을 평범한 집안과 통혼시켰지만, 사업 성공에 이어 정치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하던 시기엔 국내 내로라하는 집안을 사돈으로 맞았다. 이 때문에 정략 결혼이라는 비판도 적지 않았다. 장남 이동찬 명예회장은 1944년 ‘학병으로 끌려가기 전에 장가부터 들라.’는 부친의 강요로 맞선을 본 지 1주일 만에 평산 신씨가(家)의 무남독녀 덕진(82)씨와 결혼했다. 이 명예회장 부부는 지난해 1월 결혼 60주년을 맞아 회혼례를 올리기도 했다. 장녀 봉필(72)씨는 54년 고향 인근 임병진씨의 아들 승엽(작고)씨와 백년가약을 맺었다. 승엽씨는 삼경물산 사장을 거쳐 그룹 부회장까지 역임했다. 차녀 애란(63)씨는 노영태(63)씨와 혼인을 치렀다. 3녀 미자(61)씨는 포항지주인 박문학가(家)의 장남 성기(66)씨와 결혼했다. 성기씨는 한국바이린 사장을 역임했다. 차남 이동보(56) 전 코오롱TNS 회장과 막내딸 미향(51)씨의 결혼으로 코오롱가는 재계 혼맥도의 핵심으로 올라선다. 이 전 회장은 74년 제3공화국의 2인자였던 김종필 전 총재의 장녀 예리(54)씨와 결혼했다. 이를 통해 코오롱가는 박정희 전 대통령과 한 다리 건너 사돈이 됐으며, 최고 권력가와 혈연의 끈으로 이어졌다. 이들의 결혼은 육영수 여사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들은 성격 차이로 갈라섰다. 이동보 전 회장은 1988년 코오롱그룹으로부터 분가했지만 부도와 구설수에 휘말려 고초를 겪기도 했다. 막내 미향씨는 삼립식품 창업자인 허창성 집안으로 출가했다. 식품종합그룹인 SPC의 허영인(56) 회장이 그의 남편이다. ●정략결혼과 3세 혼맥 코오롱가의 혼맥은 3세로 내려가면 더욱 빛이 난다. 이 창업주가 자신의 입지와 뜻을 펼치기 위해 손주들을 정략 결혼시킨 경우가 있어서다. 이 명예회장과 신 여사는 슬하에 경숙, 상희, 혜숙, 은주, 웅열, 경주씨 등 1남5녀를 뒀다. 장녀인 경숙(59)씨는 1969년 당시 공화당 의장 서리였던 고 이효상 전 국회의장의 3남 문조(65)씨와 화촉을 밝혔다. 이 전 국회의장은 도쿄대를 나와 경북대 교수로 있다가 1960년 정치에 투신해 5선 의원을 지냈다. 정계에선 대구·경북(TK) 인맥의 대부로 통했다. 국회의장을 비롯해 공화당 총재, 영남학원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문조씨는 현재 영남대 교수로 재직중이다. 차녀인 상희(56)씨는 국내 대표적 ‘송상(松商)’으로 불렸던 고홍명 한국빠이롯드 회장 집안으로 출가했다.1973년 고 회장의 장남 석진(작고)씨와 결혼했다. 석진씨는 코오롱제약(옛 삼영신약) 사장을 거쳐 빠이롯드전자 회장을 지냈다. 하지만 부도로 인해 고통을 겪다가 98년 별세했다. 3녀인 혜숙(53)씨는 고 이학철 고려해운 창업주의 장남인 동혁(58)씨와 결혼했다. 현재 고려해운 회장인 동혁씨는 서울대 경제학과와 미국 컬럼비아대학 석사 출신이다. 해운선사로서는 처음으로 타이완과 홍콩 등 동남아 항로에 진출해 해운업계의 프런티어 경영인으로 이름이 높다. 4녀인 은주(51)씨는 테니스 인연으로 신병현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의 장남 영철(55·의사)씨와 결혼했다. 신 전 부총리는 한국은행 총재와 상공부 장관, 무역협회장, 은행연합회장 등을 지냈다. 이들 부부 결혼식은 신 전 총재가 직접 주례를 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웅열 회장은 큰 누이 경숙씨의 소개로 1983년 황해도 출신인 서병식 동남갈포공업 회장의 장녀 창희(45)씨를 아내로 맞이했다. 서 회장은 1962년 고급벽지의 대명사인 갈포벽지를 만들어 1960∼70년대를 풍미했던 인물이다. 부인 창희씨는 이화여대에서 불문학을 전공했다. 이 회장 부부는 규호(21)와 소윤(18), 소민(16) 등 1남2녀를 두고 있으며, 규호씨는 미국 코넬대에서 호텔경영학을 공부하고 있다. 5녀인 경주(46)씨는 개인사업을 하는 최윤석(46)씨와 결혼했다. ●딸·며느리 모두 이대 동문 장자 경영과 친인척 경영 배제의 원칙 때문인지 코오롱가의 딸과 며느리는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잘 벗어나지 않는다. 대외 활동보다 가정주부로서 남편 뒷바라지와 자식 교육에 애쓴다. 이 명예회장의 부인인 신 여사는 지금껏 바깥 사교모임에 한번도 참석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신 여사는 집안에서 살림하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라고 한다.3세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이는 이 명예회장의 모친인 고 이위문 여사가 남편인 이 창업주의 호방한 성격과 바깥 활동으로 마음 고생이 매우 심했지만 결코 내색하지 않고, 자식들을 바르게 키운 선례 때문이다. 코오롱가의 딸과 며느리들은 또 모두 이화여대 동문들이다. 장녀 경숙씨가 생활미술과를 나왔으며, 상희씨는 기악과, 혜숙씨는 가정학과, 은주씨는 도서관학과를 나왔다. 이 명예회장은 평소에 딸들을 이렇게 평했다고 한다.“장녀는 걷는 모양부터 급한 성격까지 나를 제일 많이 닮았으며, 둘째는 시댁에서 살림만 하는 편이지만, 항상 밝고 착한 데다 쓸데없이 친정에 오는 일이 없다. 셋째는 공부도 제일 잘했고, 바른 소리도 잘했다. 악바리면서 의리가 강하다. 넷째는 활동적이고 운동을 좋아해서인지 덜렁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린다.” 며느리 창희씨도 코오롱가의 여자답게 대외 활동보다 조용히 집에서 자녀 교육과 남편 내조에 열심인 한국적인 주부다. 사교 모임에 나서기를 싫어하는 창희씨지만 코오롱그룹 간부 부인들로 구성된 ‘코오롱가족사회봉사단’ 활동엔 적극 나서고 있다. golders@seoul.co.kr ■ 코오롱의 ‘李트리오’ 지금의 코오롱그룹 토대를 쌓은 주역 가운데 한 명이 고 이원천 전 한국나일론(현 ㈜코오롱) 사장이다. 창업주인 고 이원만 회장의 동생이며, 이동찬 명예회장에겐 숙부가 된다. 이 전 사장은 일제시대 때부터 일본에서 형님인 이 창업주의 사업을 도왔다.1957년에는 한국나일론 사장직에 추대돼 코오롱의 ‘섬유시대’를 이끌었다. 당시 이원만-이원천-이동찬 3인은 코오롱에서 ‘이 트리오’로 불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 전 사장은 조카인 이 명예회장과 회사 분할을 놓고 첨예하게 맞서면서 나중엔 경영권 분쟁에 빠졌다. 이 전 사장은 결국 1976년 한국나일론의 경영에서 손을 떼고 자신의 지분을 챙겨 원진레이온이라는 회사를 설립했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으로 1년만에 쓰러졌다. 이 창업주는 이후 장남인 이 명예회장에게 경영권을 맡겼고, 회장에 오른 이 명예회장은 동생인 이동보 전 코오롱TNS 회장을 분가시켰으며, 매제들도 계열사 경영에서 손을 떼게 했다. 이 명예회장은 그의 자서전에서 “숙부에 대한 회한이 커지는 요즘에도 회사 분할에 반대한 것은 옳은 일이 아닌가 싶다…. 숙부와의 경영권 분쟁은 결국 조카가 숙부의 세력을 완전히 퇴치해 버린 것 아니냐는 평판이 존재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이 그룹을 살리는 데에 도움이 된 것이라면 나는 굳이 부인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사업엔 실패했지만 이원천가(家)의 혼맥은 어디에도 빠지지 않을 정도로 화려하다. 형님인 이원만 창업주가 제3공화국의 실력자 김종필 전 총재와 인연을 만들었다면, 이 전 사장은 또다른 실세였던 정일권 전 총리와 혈연관계를 맺었다. 이원천가(家)는 육군참모총장 출신으로 국무총리와 국회의장을 지낸 정일권 집안과 사돈간이다. 고 정 총리의 딸 희경씨가 이 전 사장의 아들과 결혼했다. 또 이원천가(家)와 영풍그룹은 한 다리 건너 사돈간이다. 고 정 총리의 장남인 세훈씨가 장병희 영풍그룹 창업주의 딸 현주씨와 인연을 맺었다. 영풍그룹은 또 60년대 박정희 정권에서 한국은행 총재를 지낸 김세련씨 가문과도 연이 이어진다. golders@seoul.co.kr ■ 코오롱 이끄는 전문경영인들 ‘코오롱호’를 이끄는 대표 최고경영자(CEO)는 누가 있을까. 한광희(56) ㈜코오롱 대표는 코오롱그룹의 간판 CEO다. 그는 요즘 한계사업 정리와 차세대 먹을거리 준비에 분주하다.1976년 코오롱에 입사한 이후 기획관리 등 주요 사업부를 두루 거쳤다. 공인회계사 자격증을 갖고 있는 한 대표는 책상에 앉아 숫자놀이를 하는 것보다 현장 영업을 더 즐기는 실물형 CEO에 속한다. 민경조(62) 코오롱건설 대표는 23년간 건설에서만 근무한 전문경영인으로 위기관리가 뛰어나다는 평이다. 사내에선 따뜻한 집안의 가장 같은 CEO로 불린다. 수시로 사내 메신저를 통해 막내 직원과 대화를 나눌 정도로 상하간 의사소통을 중시한다.“똑똑… 민경조입니다, 야근 힘들죠, 문제되는 게 뭔가요, 오늘 팀원들과 저녁 같이 합시다.”로 유명해 먼저 다가서는 CEO로 통한다. 논어를 1000번 이상 읽을 정도로 고전에 관심이 많다. 제환석(59) FnC코오롱 대표는 현장주의자다.2003년 대표이사에 취임한 이후 800개에 이르는 매장을 서울에서 제주까지 하나하나 찾았다. 지금도 주말을 이용해 매장을 방문하고 있다. 제 대표는 또 CEO 명함 외에 ‘열사모’의 방장 직책을 갖고 있다. 열사모는 제 대표가 만든 모임으로 오프라인의 단체나 장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열정적인 사원 모두의 마음속에 있는 가상의 모임이다.“스스로 열정적으로 일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원 모두가 열사모의 열사”라고 말하는 제 대표는 열사모 방장의 이름으로 직원들과 곧잘 의견을 교환한다. 배영호(61) 코오롱유화 대표는 엔지니어로서는 드물게 미국 뉴욕지사 근무를 했다. 아무도 도와 주지 않는 해외 영업에서 살아남는 방법은 죽기살기로 부딪치는 것이라고 강조하는 배 대표는 당시 직원 가운데 한국으로 되돌아온 유일한 사람이라고 한다. 첫 직장에 대한 그의 신의와 열정은 특유의 사업감각과 합쳐져 코오롱유화를 종합화학 회사로 도약시켰다. 김종근(55) 코오롱글로텍 대표는 직원들과의 커뮤니케이션을 중요하게 여긴다. 직원 이름을 기억하고, 애로와 고충을 들어주며, 중요한 정보는 경영에 곧바로 반영한다. 또 직원들에게 책상에 앉아있지 말고 현장을 돌면서 문제와 해결방안을 찾으라고 한다.“사장님은 오늘도 지방사업장을 순회하고 있습니다. 바로 대표와 직원들간의 간담회 때문이죠. 간담회라는 자유로운 형식을 통해 직원들과 허심탄회한 만남을 갖고 있습니다.61개 사업장인데 올해만 해도 벌써 세번째 라운딩입니다. 연초에 전직원들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바쁜 일정에도 사업장을 순회하고 계십니다.”한 직원의 이러한 설명에서 올 상반기에 비상장 5개사를 합병, 덩치가 커진 코오롱글로텍을 외형만큼이나 건실하게 키우려는 의지를 엿볼 수 있다. golders@seoul.co.kr ●특별취재반 산업부 홍성추 부장 (부국장급·반장) 박건승·정기홍·류찬희 차장 이종락·이기철·주현진·류길상·김경두기자
  • [여연 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5)한국의 다법

    [여연 스님의 재미있는 茶이야기] (15)한국의 다법

    “스님네가 찾아와서 조주 문을 두드리니/차 이름(茶松)이 부끄러워하며 뒤뜰로 모시네/해남 초의선사 동다송을 진작 읽고/당나라 육우의 다경도 보았네/정성을 다하여 경뢰소를 우려내/손님께 따르니 피어나는 차의 향기/질화로 위 동병 속에 찻물이 익고 나면/한 잔의 금설은 제호보다 낫다네” 다송자 보정 스님의 차시다. 다송자 보정 스님은 전남 순천 송광사로 출가해 80여 수의 차시를 남긴, 근대를 대표하는 차인이다. 한 잔의 차를 마시며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바로 선이다. 차 역시 마찬가지다. 한 잔의 차에는 우주를 그대로 담은 평상심이 깃들어 있고 그 차는 곧 선일 수 있는 것이다. 초의 스님은 자신이 주석하던 큰절 대흥사를 떠나 두륜산 중턱에 작은 암자를 지었다. 그것이 바로 오늘의 일지암이다. 그런 소중한 일지암이 쇠락해지자 초의 스님 상좌와 더불어 그 초암을 복원한후 시 한 수를 읊었다. “연하가 난몰하는 옛 인연의 터에/스님 살림할 만큼 몇 칸집 지었네/못을 파서 달이 비치게 하고/간짓대 이어 백운천을 얻었네/다시 좋은 향과 약을 캤고/때로 원기로 묘련을 펴며/눈앞을 가린 꽃가지를 잘라버리니/좋은 산이 석양 노을에 저리도 많은 것을” 다도는 차를 마시는 정신적, 문화적 행위로 규정된다. 한 발짝 더 나아가서 여러 대중들 앞에서 무대예술로 육법공양 등 의식으로도 발전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다법이란 차를 행하는 모든 행위의 총체적인 형식이라고 볼 수 있다. 초의 스님의 다법은 검박한 살림살이 속에서 풍요롭고 맑은 마음자리를 품어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초의 스님의 다법이 일상에 있어서 정신적인 풍요로움을 충만하게 하는 것에서 한발짝 더 나아가 깨달음을 얻기 위한 도(道)요, 선(禪)으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차를 끓이는 사람은 삿됨이 없어야 하고 중정을 지켜야 한다. 중정이란 곧 삶의 철학이다. 차를 끓일 때 물의 온도, 차의 양, 시간 등 그 어느것 하나 넘치거나 모자라지 않아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의 전통적인 다법은 바로 중정의 묘리에 있다. 초의스님은 영혼을 일깨우는 도인의 찻자리에 대해 이렇게 밝히고 있다. “밝은 달 촛불이 되고 또 벗이 되니/흰 구름 자리되고 또 병풍이 되어주네/솔 솔 솔 찻물 끓는 소리 시원하고 고요하니/맑고 찬 기운 뼈에 스며 영혼을 일깨우네/오직 흰 구름 밝은 달 두벗을 삼으니/도인의 찻자리 이보다 빼어날 소냐” 참으로 아름답고 정겨운 풍경이다. 솔 솔 솔 찻물 끓는 소리를 밝은 달과 흰 구름을 벗 삼아 들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삶의 여유가 바로 도인의 찻자리인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일깨우는 찻자리만큼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없다. 그렇다면 찻자리의 미덕은 어디에 있는가. 초의스님은 “손님이 많으면 소란스러우니 고상함을 찾을 수 없다. 홀로 마시면 그윽하고, 둘이 마시면 빼어난 것이요, 셋은 멋이라 하고, 대여섯은 덤덤할 뿐이요, 일곱여덟은 그저 나누어 마시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찻자리는 가능하면 사람이 적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조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차가 갖고 있는 근본성질이 맑고 조용한 성품과 잘 조화가 됨을 의미한다. 명나라 도륭은 고반여사(考槃餘事)에서 “차를 마실 때는 손님이 적은 것이 좋다. 손님이 많으면 시끄럽다. 또한 소란스러우면 아취가 모자란다. 홀로 마시면 그윽하고, 둘이 마시면 빼어난 것이요, 서넛을 멋이라 하고, 대여섯은 덤덤할 뿐이요, 일곱여덟은 그저 나누어 마시는 것이다.”며 차를 마실 때에는 가능한 한 담백한 자리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고반여사에서는 또 차를 마시는 행위를 덕을 쌓는 것과 비교하고 있다.“차는 행실이 바르고 덕을 닦은 사람에게 가장 적합한 음료다. 백석의 맑은 샘물을 길어 끓이는 절차를 법도에 맞게 하여 중도에 그만두는 일이 없이 한결같이 계속하여 그 법식을 완전히 익히고 깊이 음미하여 정신이 융회하고 심취해서 제호나 감로에 비교할 만한 참다운 맛을 깨닫고 나서야 비로소 다도를 훌륭하게 감상할 줄 아는 사람이라 하겠다. 모처럼 좋은 차를 마시면서 그 사람 됨됨이가 미흡하다면 마치 좋은 샘물을 퍼서 잡초에 주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이보다 큰 죄가 없을 것이다. 차의 멋을 모르고 꿀꺽 단숨에 마셔 맛의 분간도 못하는 사람이라면 그 이상 속될 수가 없다.”고 했다. 차는 무척이나 신령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 위에서 노니는 신비스러운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신령이라 함은 인간의 영혼을 맑고 담백하게 일깨운다는 것이다. 차는 인간을 위한 것이고 우리 모두를 위한 현재적 존재인 것이다. 차는 또한 적요(寂寥)한 것이다. 적요라는 것은 고요하고 그윽한 경지에 있다는 것이다. 디지털 미디어시대의 문화는 자유분방한 가치를 선호하며 율동과 리듬, 그리고 비트로 이어지는 동적인 문화인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인들은 참을 줄도, 기다릴 줄도 모른다.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것이 우리의 일상사가 돼버린 지경이다. 그런 점에서 차는 우리들의 들뜬 문화를 가라앉힐 또 하나의 정적인 작용인 것이다. 그렇다면 다도(茶道)의 정의는 명확한 것이 된다.‘다도’란 차나무를 재배하고 찻잎을 따고 차를 만들고 차를 마시고 찻자리를 정리하는 일체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다도를 좀더 압축적이고 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차를 통해 몸과 마음을 닦는 행위로 요약해 볼 수가 있다. 장원은 ‘다록’에서 다도에 대해 “차를 정성들여 만들고 건조하게 저장하며 깨끗하게 우리면 다도를 다한 것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다도를 더욱 더 명쾌하게 정의해놓은 것이 바로 불가(佛家)의 다선일미(茶禪一味)다. 풀이해보자면 차와 수행은 하나라는 것이다. 차는 곧 진리요, 진리는 곧 차라는 뜻이기도 하다. 차를 통해 오묘한 진리 길에 다다를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다도와 다법은 구별되어진다. 다도란 특별한 격식이 없이 차를 통해 심신을 수련, 진리의 길에 이르는 것이고 다법(茶法)은 특별한 격식을 지킴으로써 찻자리의 예절을 전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국 조주스님의 수행법인 “차나 한잔 마시게,”와 초의스님의 ‘중정의 묘’는 다도의 진수가 어디에 있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우리에게 다도는 있는가?´라는 물음을 여기저기에서 들을 수 있다. 대답은 ‘당연히 있다.’이다. 삼국의 신라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다도는 심신을 수양하는 한 방편으로 작용해온 것이다. 산과 들을 달리면서 활과 검을 쓰며 심신을 단련했던 화랑들도 차를 통해 그 정신세계를 고양시켰으며, 고려시대 스님들과 문인들은 “한잔의 차는 곧 참선의 시작”“차의 맛은 선의 맛”이라며 차를 진리를 고양시키는 도(道)의 동반자로 본 것이다. 조선시대도 마찬가지다. 중정의 묘리를 강조했던 초의스님뿐만 아니라 추사 김정희도 “차를 끓여 마시는 것이 바로 도의 본체를 체득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차는 진리의 문을 여는 것과 같이 본 것이다. 그런 점에서 우리전통의 다도는 ‘차와 진리는 하나’라고 정의해 볼 수 있다. 참으로 고아하고 높은 차의 품격과 일치하는 우리의 전통 다도인 것이다. 우리 선조들은 이렇게 차를 높은 품격의 길로 이끄는 고아한 정신세계를 지녔다. 그런 점에서 차인들의 마음가짐은 무척이나 중요한 것이다. 차의 도가 진리의 길에 있다면 모든 사람을 융섭하는 화합과 자비의 마음이 깊어져야 한다. 차인들은 일상에서 차인으로서 도리를 지켜야 한다. 그래야 그 차인의 찻자리는 시간이 갈수록 높은 품격의 향기를 품어낼 수 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우리시대에는 우아하고 품격있는 행다법만이 존재한다. 자신의 인격을 고양시키고 수행하지 않는 차인들의 찻자리는 이제 반성되어야 할 부분인 것이다. 차는 오감(五感)으로 마신다고 했다. 귀로는 찻물 끓는 소리를, 코로는 향기를, 눈으로는 다구와 차를, 입으로는 차맛을, 손으로는 찻잔의 감촉을 느끼라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차는 인간이 가진 모든 감각을 통해 그 맛과 향취를 즐겨야 한다. 그렇다면 행다법은 어디에 있는가. 행다법은 차를 잘 우려내고 차의 도리에 맞게 찻자리를 격식있고 자유롭게 하는 것이다. 과도한 기교나 격식을 차리는 경향이 오늘의 행다에 있는 것은 어쩌면 차의 근본과 배치되는 것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행다의 기본은 어디에 있는가. 첫째, 차의 품성에 맞춰 차의 맛을 내는 데 주력해야 한다. 둘째, 나와 남을 구분하지 않고 마음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며 셋째, 차와 다구, 물과 불, 손님과 주인이 모두 하나가 되어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만남의 장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차를 하는 모든 행위를 통칭하는 행다는 차를 끓이는 전다법과 손님에게 차를 대접하는 공다법(供茶法)이 있다. 공다법은 곧 다례(茶禮)로 볼 수 있다. 다례는 말 그대로 예절을 갖추어 차를 손님에게 대접하는 것이다. 다례는 그 목적에 따라 생활다례(生活茶禮), 접빈다례(接賓茶禮), 의식다례(儀式茶禮)로 나눌 수 있다. 먼저 생활다례는 여러사람이 함께 둘러앉아 마시는 두리차, 혼자 마시는 명상차가 있다. 접빈다례에는 차우들이 함께하는 예다법(禮茶法)인 가회다례(嘉會茶禮), 또 존경하는 사람이나 윗사람에게 차를 올리는 공경다례(恭敬茶禮)가 있다. 의식다례에는 차례(茶禮), 추모헌다례(追慕獻茶禮), 잔치다례, 개천다례, 궁중다례(宮中茶禮)가 있다. 그리고 차의 종류와 행다하는 사람에 따라 잎차행다(葉茶行茶), 말차행다(末茶行茶), 선비차 행다 등이 있다. 다도와 행다의 근원에 대해 초의스님은 우리에게 명쾌한 해답을 준다. “차를 딸 때는 그 현묘함을 다해야 하고, 만들 때는 그 정성을 다해야 하며, 물은 그 참물을 얻어야 하고, 달일 때는 그 중정(中正)을 얻어야 하며, 체(體)와 신(身)이 서로 어우러지면, 건(健)과 영(靈)을 함께 얻는 것이 다도(茶道)의 경지다.” 일지암 암주 ■ 프랑크푸르트 도서전 다도시연 모든 것은 근원으로 회귀한다. 생멸의 아름다운 공존은 우주만물의 삶을 각성하게 한다. 그래서 생멸은 우리에게 근원적인 물음을 던져주는 또 하나의 화두 같은 것이다. 가을이 되면, 그리고 겨울이 되면 우리는 정신적인 공허에 시달린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허한 영혼을 채우기 위해 이 세상 수많은 선지식들이 기록한 책을 찾는다. 책은 우리의 영혼을 풍요롭게 하는 선지식(善知識)이다. 그 선지식의 바다를 헤매는 것만큼 즐거운 일상은 없다. 지난 19일부터 23일까지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도서전에 초청을 받아 참여했다.57회째를 맞는 프랑크푸르트도서전은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도서전이다. 세계 110개국 30여만명이 참가할 정도로 이번 도서전은 성황리에 열렸다. 우리나라는 그 도서전에서 주빈국이었다. 주빈국 오프닝 행사로 사단법인 초의차문화연구원의 선다도 시연이 열렸다. 주최측의 초청공연이었다. 세계 선종의 본산답게 주빈국 주요 책목록에는 ‘직지´, 서산선사의 ‘선가귀감´ 등 불교의 선에 관한 책들도 많이 소개되고 있었다. 그런 점에서 오프닝 행사 시연자로 선 다도를 선택한 주최측의 초청에 따라 초의스님의 선다(禪茶)를 시연하게 된 것이다. 주제는 ‘차 한잔에 담긴 느림의 미학’이었다. 선다의 기본은 정(靜)과 적(寂)을 통한 동(動)으로 나아감이다. 그뿐만 아니다. 동은 곧 정과 적으로 부드럽고 원만한 순환을 통한 자연스러운 가라앉힘이다. 선다의 시연은 그런 점에서 정을 근본으로 한다. 그러나 30여만명이 참가한 북새통 같은 곳에서 더구나 작은 공간에서 선다를 시연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먼저 대금소리로 자리를 잡았다. 느리면서도 감미로운 선율을 뿜어내는 대금은 혼란스러운 장내를 순간 가라앉혔다. 선다는 원래 특별한 무대장치가 필요없다. 선다의 묘미를 살릴 수 있는 10폭 병풍을 두르고 하얀 백자 찻잔을 준비했다. 하얀 다포, 그리고 담백한 한복을 입은 시연자들의 모습은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했다. 순식간에 100명이 넘는 관객으로 불어났다. 티(tea)와 커피 그리고 포도주나 맥주를 선호하는 그들에게 조금은 번거로울 수 있는 다도 시연에 생경하기만 한 표정들이었다. 필자의 멘트가 이어졌다. 필자는 관람객들에게 “차 마시는 행위는 젠(禪)을 추구하는 것이다. 젠은 인류의 위대한 스승 붓다가 깨달음을 추구했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선다도는 자신의 내적 깨달음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이요 화두이다. 이뿐만 아니라 한국의 선 다도는 1300여년간 이어진 불교문화의 진수다. 차, 물 그리고 마음이 하나가 되어 삶의 근원을 찾는 찻자리는 그런 점에서 번뇌에 빠져 자신을 놓쳐버리고 사는 현대인들에게 매우 정신적인 양식이다. 좋은 찻잔에 좋은 마음으로 차를 담아 손님을 접대하는 행위를 통해 한국의 정서와 문화의 근원을 찾을 수 있다.”고 말했다. 관람객들이 선다 시연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초의스님의 정신이 깃든 차인 ‘설아’차의 향기가 배어나오기 시작했다. 푸른 옥색 같기도 하고 연한 연두색 같기도 한 영롱한 찻물이 작고 하얀 찻잔에 담겨 돌아가자 관람객들은 탄성을 그치지 못했다. 그들의 문화적 수준은 매우 높았다. 생활다도를 무대예술로 끌어올린 선다의 독특한 시연을 금방 배우고 익힌 것이다. 총 3차례 열린 이번 선다 시연에 가장 많은 관심을 보인 곳은 바로 독일 내 언론들이었다. 동양의 변방나라에 수천년에 걸친 문화의 향기가 깃들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그들의 눈에 선다 시연은 경이로울 수밖에 없었다. 방송과 신문의 인터뷰와 카메라 세례는 한국불교의 문화, 한발짝 나아가 우리민족의 문화가 얼마나 뛰어난지 보여주는 것이었다.
  • [28일 TV 하이라이트]

    ●시네마천국(EBS 밤 12시) 지금 내 앞에 있는 저 사람이 어젯밤 나와 이메일을 주고받던 그 사람이라면? 영화 ‘유브 갓 메일’은 이런 상상에서 출발한다. 하지만 이 영화에도 원작이 있었으니, 주인공들이 이메일 대신 편지로 사랑을 나누던 1940년 작이 그것. 그렇다면 편지에서 이메일이 되기까지, 이들의 사랑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대국민 약속 물은 생명이다(SBS 오후 5시30분)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들의 반대로 건설에 어려움을 겪거나, 건설되어 있는 기존 댐들 또한 오염이나 생태계 파괴의 이유로 해체 위기를 맞고 있다. 지난 5월 감사원의 타당성 재검토 권고 이후 대안이 검토되고 있는 한탄강댐과, 심각한 부영양화로 해체논란이 일고 있는 의암댐 문제를 짚어본다.   ●박주현의 시사 업 클로스(YTN 오후 3시5분) 참여정부 출범 이후 부패 척결을 위해 노력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부패 수준은 어느 정도일까. 또 국가청렴도를 높이기 위해서 정부는 물론 공직자, 시민사회는 어떤 일을 해야 할까. 이런 주제를 두고 정성진 국가청렴위원장, 강성구 국제투명성기구 한국본부 사무총장과 함께 이야기를 나눠본다.   ●꼭 한번 만나고 싶다(MBC 오후 7시20분) 가난 때문에 헤어진 다섯째를 찾는 최옥순씨 오남매. 어렵게 살림을 꾸려온 부모는 막내딸이 유복한 집에서 남부럽지 않게 자라길 바라며 눈물을 삼킨 채 아이를 보낼 결심을 하게 된다. 이름조차 지어주지 못해 더욱 미안하다는 옥순씨 남매.30년 전 어쩔 수 없이 보내야 했던 그리운 막내를 만날 수 있을까?   ●HD역사스페셜(KBS1 오후 10시) 충북 진천의 길상사. 이곳에서 김유신을 기려 올리는 제사 때 통상 왕에게만 행해지는 4배가 올려진다. 또 강릉 화부산사에 있는 김유신의 영정은 신라 금관을 쓰고 있어 분명한 왕의 모습이다. 이는 김유신이 죽은 지 160년 만에 흥무대왕에 추존됐기 때문이다. 김유신, 그는 어떻게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을까?   ●사랑과 전쟁(KBS2 오후 11시5분) 주말부부인 원길과 미경. 일하느라 바쁜 남편 때문에 미경은 하루 하루가 지루하다. 동창회 날 오랜만에 만난 친구 설희의 완전히 달라진 모습에 의아해 하던 미경은 설희에게 스폰서가 있음을 알게 된다. 미경은 친구를 통해 스폰서카페에 가입을하고, 일주일에 세 번 만나주는 조건으로 엄청난 돈을 받는데….
  • 전국체전 통해 본 서울 체육의 오늘

    전국체전 통해 본 서울 체육의 오늘

    곧 90회를 맞는 전국체육대회는 몇해 전까지만 해도 나라의 잔치였다. 줄임말로 ‘체전’이라 부르게 된 언저리에는 ‘체력은 국력’이라던 시절의 개인보다도 국가 명예를 최고로 치던 잔영이 남아 있다. 군화발이 득세할 무렵인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 전후로 체육이 도색영화, 성(性)산업과 더불어 3S(Screen·Sports·Sex) 정책으로 국민들을 도취시키기도 했다. 스포츠에 매력이 숨었다는 얘기도 된다. 그러다 프로스포츠가 인기를 누리는 등 격변기를 맞아 체전은 물론 아마추어 대회는 시들해져만 갔다. 어떤 이들은 전국체전을 두고 ‘그들만의 잔치’라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체전은 누구에게든 아련한 추억을 안겨주고 있다. 고향의 마을 어귀엔 아무개 아들이나 딸이 체전 대표로 뽑혔다느니, 무슨 메달을 땄다느니, 몇등을 했다느니 하는 빨간 글씨가 적힌 큼직한 현수막이 오가는 길손들을 맞이하고 있을지 모른다. 복잡하기 그지없는 거대도시 서울에서 전국체전이라고 해봐야 귓전으로 흘려 들을 정도로 더 싸늘해졌다. 하지만 역시 골목 골목에서는 ‘우리 동네 아무개, 우리 학교 아무개가 몇등을 먹었다.’는 식의 입소문이 환영 플래카드와 함께 들리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14일부터 20일까지 일주일 동안 ‘신화의 도시’로 불리는 울산에서 제86회 전국체전이 펼쳐졌다.1792명이 뛴 서울시 선수단은 총점수로 순위를 가름하는 대회 방식에 따라 경기도의 장벽을 넘지 못한 채 2위로 돌아왔지만 금메달 숫자는 114개로 가장 많이 따왔다. 서울 체육을 보면 한국 스포츠가 보인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만큼 스타들도 많이 몰린 곳이 바로 서울이다. 인구 1000만이 사는 대한민국 수도 서울의 스포츠에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 있는지 살짝 들여다본다. ■ 장대높이뛰기 1인자 김유석 “내 아버지가 백만장자라 해도 내 삶은 장대 높이뛰기에 걸었다.” 세살 때 엄마 아빠의 손에 이끌려 태평양을 건너갔던 한 꼬마가 어엿한 청년으로 되돌아와 체육계를 들뜨게 만들고 있다. 그 보물단지는 다름아닌 서울시 체육회 소속, 그것도 한국 스포츠에서 황무지라 할 육상 종목에 있다. 지난 8월초 시청에 입단했다. 더욱이 지위의 높고 낮음을 떠나 이민을 가거나 원정 출산까지 감행하는 게 한국의 요즈음 세태다. ●“날아가는 멋에 살죠.” 김유석(23). 서울시 육상단 선수로 뛰고 있는 그는 적어도 우리나라에서만큼은 자연을 이용해 가장 멀리 날아가는 사람으로 불린다. 현재 장대 높이뛰기 최고기록 보유자이기 때문이다. 김씨는 흔히 버거운 살림살이에 쫓겨 아들 딸에게 책을 쥐어주기는 고사하고 운동으로 ‘계층 상승’을 겨냥하기 쉬운 우리 현실과는 다르다. 최소한 학업과 경제사정을 따지면 아쉬울 게 도무지 없는 편이라 그를 바라보는 체육계의 눈은 ‘기대 반, 부러움 반’이라고 할 만하다. 미국은 물론 세계적으로 내로라하는 UCLA(캘리포니아 주립대학) 경제학과 출신이다. 고등학교도 미국의 5대 명문 사립재단인 디어필드 아카데미(Deerfield Academy)를 나왔다. 고교를 졸업한 뒤에는 역시 명문 중에서도 명문인 UPEN(University of Pensylvania)에 스카우트될 정도로 뛰어난 학업성적을 보였다. 하지만 장대높이뛰기 종목을 육성하는 UCLA를 선택하기 위해 1년을 기다리는 고집까지 보였다. 한국 육상을 말하자면 몇몇 굵직굵직한 스타들을 낳은 마라톤 정도가 전부라 하겠기에 더욱 그렇다. 김씨는 전국체전을 다녀온 뒤 약간은 실망스러운 가운데 다음 기회를 벼르며 다시 각오를 되새기고 있다. 올 4월 미국 시애틀에서 열린 MPSF(Mountain Pacific Sports Federation) 육상대회에서 5m61㎝로 한국 최고기록을 일궈낸 그는 이번 대회에서 금메달을 따기는 했지만 대회 신기록에 머물고 말았다. 그가 한국 기록을 갈아치운 것은 세번째였다.2003년 5월 미국 PAC-10 선수권대회에서 세운 5m55㎝, 지난해 6월 전미 대학육상선수권대회에서 세운 한국기록 5m60㎝를 1㎝,5㎝씩 끌어올렸다. 지난 15일 남자 일반부에 출전,5m36㎝를 뛰어올랐다. 웬만한 이들 같으면 대회신만 해도 기쁘기 이를 데 없는 성적일 수 있는 것이다. ●마이 웨이 UCLA 2학년 때인 2002년 국가대표에 발탁돼 줄곧 육상계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실력에 못잖게 조국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하다. 지금까지 20여년을 이국에서 지내오면서도 단 한번도 국적을 바꿔보지 않은 그의 가족들이다. 세 글자가 뚜렷한 이름도 마찬가지다.3년 전 아버지가 한국을 위해 뛰어야 한다며 대한육상경기연맹에 아들 실력을 봐달라고 연락해온 데서도 알아볼 만하다. 이같은 사실을 보란 듯 증명해주는 사례는 또 있다. 육상연맹 홍순모(46) 이사는 이렇게 말한다. “2000년 칠레에서 세계 주니어 선수권대회가 열렸는데, 이 때 유석이를 처음 만났지요. 시드니올림픽을 치러낸 나라라는 거드름에 들뜬 오스트레일리아 육상선수들이 한국 선수들을 ‘미개인’ 운운하며 놀려댔지 뭡니까.” 오징어에 고추장, 된장 등 냄새를 풍기는 음식을 먹는 모습을 보고 시비를 걸어온 것이란다. 그런데 김씨가 한발짝도 망설이지 않고 나섰다. 스포츠를 하는 사람들이 그러면 못쓴다며 무례하게 군 점에 대해 사과하는 뜻으로 무릎을 꿇으라고 해 항복(?)을 받아냈다고 홍 이사는 덧붙였다. 고교 때 동급생들 사이에 최고의 실력을 뽐내던 김씨는 한국 국가대표로 나선 2002 대구 유니버시아드와 지난해 그리스 아테네올림픽에선 뜻밖의 부진을 보였다. 대회참가 직전에 훈련하다가 봉이 부러지는 바람에 손목 부상을 입고도 끈질긴 투혼을 보였다는 대목은 그가 장대 높이뛰기라는 운동을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잘 말해준다. 디어필드 아카데미 2학년에 올라가면서 뉴잉글랜드 사립고등학교대회 기록을 갈아치우면서 내리 3년간 챔피언이 되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러나 당시만 해도 한수 아래였던 친구들이 요즈음 들어 (5m)70∼90㎝대까지 기록하는 데 대해 자존심이 상한 상태라고 한다. 이를 바꾸어 말하자면 장래성이 무궁무진하다는 점이라고 육상인들은 입을 모은다. ●“머잖아 해내고 만다.” “장대 높이뛰기에서만 경험하는 하늘을 나는 그 기분, 그 환희. 그보다 좋은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지요. 저는 장대 높이뛰기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김씨는 고교 동창생이기도 한 형이 의무학점인 스포츠 종목으로 장대높이뛰기를 하는 모습을 보고 뒤따라 배우다 푹 빠지게 됐다. 형은 하버드를 나와 미국에서 사업가로 주목받고 있는 반면, 성적이 더 뛰어나다던 동생은 아예 직업으로 바꿔버린 셈이다. 운동이냐, 전공을 살리느냐를 놓고 고민에 휩싸였을 때 “네 길을 걸어가라.”며 격려를 아끼지 않은 이들도 그의 가족이다. 선수이면서 학생회 임원, 학년 대표를 지낼 정도로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많았고 선수라 해서 수업이나 과제, 시험에서 예외일 수 없는 환경에서 한치도 모라람이 없는 재목이었다.191㎝ 84㎏의 건장한 한국청년은 외모도 빼어나 영화에 출연하고 모델 제의도 받은 적 있다. “더 좋은 대학교를 마다하고 운동을 한다고 덤볐을 때 부모님이 하신 말씀은 삶의 원동력이 됐습니다.” 운동 선수에게는 UCLA보다 더 좋은 대학은 없다, 좌우명을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하며 최선을 다하는 삶을 사는 사람의 행복 이상은 없다.’며 어깨를 두드려줬다는 것이다. 김씨는 27일 미국으로 떠났다. 세계 각지에서 열리는 육상 대회에 차례로 나가며 힘을 기르기 위해서다. 대한민국과 서울을 대표하는 ‘장대높이뛰기 사절’인 셈이다. 세계기록 보유자인 우크라이나의 부브카를 지도한 얼 벨 코치와 84년 로스앤젤레스올림픽 은메달리스트인 마이클 톨리 코치가 그를 주목해 단련시키고 있다는 점은 미래를 밝혀주는 사실이다. 독일인 매니저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한국 출신의 월드스타 탄생을 예감케 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핏줄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언젠가 큰 일을 벌일 것이라고 육상인들은 한목소리로 말한다. “초등학교 때부터 방학만 되면 모국으로 건너와 한국어를 배운 정신과 스포츠맨으로 제1 덕목인 반듯하고 절제할 줄 아는 태도 때문입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 땀으로 일군 ‘스포츠 서울’ ‘아우 먼저, 형 먼저’ 하는 쌍둥이 메달리스트에서부터 방망이 든 프로배구 감독의 아들, 야구 감독의 핏줄을 이어받은 다이아몬드 유망주까지…. 수도 서울의 명예를 걸고 땀을 흘린 전국체전 선수단에는 여러가지 사연을 가진 선수들이 많다. 마지막 금메달의 주인공도 서울시 여자축구단이었으니 “막판에 웃는 자가 진짜 승자”라는 자부심에 들뜰 만하다. 이들 가운데 레슬링에 출전, 메달을 따낸 쌍둥이 형제가 남들의 부러움을 샀다. 쌍둥이 아니랄까봐 군에도 나란히 입대한 국군체육부대 김종대·종태(25)형제가 그 주인공이다. 둘은 일란성 쌍둥이로 10분 먼저 태어난 김종대가 형이다. 형제는 중랑중 1학년 때 나란히 레슬링에 발을 들여놓았지만 형은 이듬해 손을 뗐다. 두명 모두 운동을 시킬 수는 없다는 부모님 반대 때문이었다. 그러나 레슬링을 잊지 못하던 차에 3학년 때 다시 매트에 올랐다. 이 때 생긴 공백 탓일까. 동생이 그레코로만 1위를 한 반면 형은 자유형 3위로 동메달을 차지하는 데 그쳤다. 몸무게가 55㎏으로 같지만 서로 매트에서 다투는 일만은 피할 수밖에 없어 세부종목만 나눴다. ‘상무’라는 이름으로 더 알려진 국군체육부대에 뽑힌 것만으로도 실력을 알아줄 만한데 당당하게 메달까지 따냈으니 경사가 아닐 수 없다. 차세대 황영조로 불리는 육상 꿈나무 전은회(17·배문고)는 남고부 5000m와 10㎞에서 우승해 장거리 유망주로서의 기대를 한껏 부풀렸다. 전은회는 지난 5월 전국 고교대회 10㎞에서 29분 27초로 황영조(35·국민체육진흥공단 감독)가 강원도 명륜고 시절인 89년 세운 기록 29분 31초를 4초나 앞당겼다. 이어 지난 6월엔 5000m 레이스에서도 허장규(22·삼성전자)가 갖고 있던 고교 최고기록 14분 17초 93을 12초나 앞당긴 14분 05초 44를 기록해 제2의 황영조라는 별명을 얻었다. 고교부 야구에서 우승한 신일고엔 왕년의 배구스타 아들이 눈길을 끌었다.2학년 강성호(16)군은 아버지 강만수(50) 전 현대캐피탈 감독의 뒤를 이어 중3 때까지 배구를 하다가 야구로 전향(?)한 사례다. 프로야구 LG트윈스 2군 사령탑을 맡고 있는 김인식(52) 감독의 아들 김준(20·고려대 2년)군도 서울시 유니폼을 입고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아쉽게 메달을 놓쳤다. 이밖에 대학부 검도에서는 허동찬(21·성균관대 3년), 동진(19·성균관대 1년) 형제가 5명씩 겨룬 단체전에서 금메달 못지않은 은메달을 따내 ‘칼 솜씨’를 뽐냈다. 서울 대표팀은 신기록도 쏟아냈다. 한국신기록 42개 가운데 5개, 대회신기록 165개 가운데 28개를 낚았으니 체면을 구기지 않은 셈이다. 특히 4관왕에 오른 6명 가운데 수영의 박태환(16·경기고 1년)은 대회 마지막날 최우수선수(MVP)의 영예를 안아 서울을 빛냈다. 여자축구 결승전에서는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올해의 선수 후보에 뽑힌 ‘여자 박주영’ 박은선(19)을 앞세워 경남대교를 2대0으로 물리쳐 이름값을 톡톡히 해냈다. 동작구청 씨름단 주현섭(27), 강남구청 체조단 박경아(19)와 최미선(25), 성북구청 펜싱팀 남현희(24) 등 서울시 기초자치단체 선수들이 따낸 메달 28개도 색깔을 떠나 어려운 여건에서 건져낸 것들이어서 박수를 받을 만했다. 송한수기자 onekor@seoul.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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