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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부 ‘추경카드’…경기살리기 고육책

    정부가 추가경정예산(추경) 편성쪽으로 기운 것은 ‘손에 잡히지 않는 경기회복세’ 때문이다.고(高)유가와 내수침체 장기화 등으로 하반기 경기회복을 장담할 수 없다고 주장해온 경제전문가들은 정부의 이같은 움직임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일각에서는 ‘거품(버블) 조성’ 등의 부작용과 실효성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정부는 늦어도 3·4분기초부터 소비가 살아나 ‘수출-내수 양극화’의 골을 좁히면서 그럭저럭 경기를 끌어갈 수 있을 것으로 내다봤다.그러나 소비자들의 지갑은 좀처럼 열리지 않고 있다.그렇기 때문에 1일 열린 비공개 경제장관회의에서도 비관론이 더 우세했다.고유가,미국 금리인상,세계경제 회복세 둔화 조짐 등 대외악재가 많아 하반기 내수 회복을 안심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물론 40%를 넘나드는 수출 증가율과 고용사정 개선 등을 들어 “내수경기가 살아나는 중”이라는 반박도 나왔다.“겨울 지나가는데 난로 구입하는 격”이라는 발언으로 낙관론자로 비쳐진 이정우 정책기획위원장은 이날 “뜻이 다소 와전됐다.”며 “경기전망을 할 위치에 있지 않다.”고 해명했다. 정부 관계자는 “경기가 4·4분기에 더 둔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는 형국”이라면서 “그러나 오늘 회의에서는 추경을 논의하지 않았다.”고 밝혔다.이대로 가면 하반기에 10조원의 긴축효과가 나타난다는 내부추산 결과도 ‘추경 카드’를 재촉한 것으로 보인다. ●사업 발굴이 추경규모 관건 정부의 관심사는 ‘추경 편성 여부’에서 ‘(추경으로 지원할)사업 발굴’로 옮겨앉은 양상이다.추경은 반드시 연내에 집행될 수 있는 사업에 투입돼야 하는데,이같은 사업발굴이 쉽지 않아 고심 중이다.지난해 두 차례에 걸친 추경 편성때도 ‘억지춘향격’의 사업을 끼워넣어 적잖이 비판을 받았다. 이렇듯 사업 발굴과 재원 마련 등의 고충 때문에 추경 규모는 열린우리당이 요구하는 5조원에 못 미칠 가능성이 있다.추경이 편성되면 중소기업 자금난 해소를 위한 신용보증기금 재원 증액과 일자리 창출 등에 최우선적으로 투입한다는 방침이다. 추경 재원도 고민거리다.확실하게 확보된 재원은 세계(歲計)잉여금 1조 1000억원이 전부다.단골 재원인 한국은행 잉여금 등이 올해는 없는데다 세수(稅收) 초과도 기대하기가 어려워 적자국채 발행이 불가피하다.추경 편성에 적극적인 재정경제부는 “우리나라의 재정 건전성이 선진국보다 양호한 만큼 적자 재정(나라살림에서 수입보다 지출이 많은 것) 편성을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 찬반 엇갈려 LG경제연구원 오문석 상무는 “고유가 등 해외발 충격으로 하반기 경기회복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면서 “7월부터 추경이 곧바로 투입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촉구했다.LG측은 추경을 5조원 편성하면 고용이 11만명 늘어난다는 보고서를 얼마전 내놓았다.보고서를 작성한 박래정 연구원은 “총수요 측면에서 인플레이션 요인이 크지 않아 확장적 경기대책을 쓰더라도 인플레 압력이 현실화하지 않을 것”이라며 일각에서 제기하는 부작용 우려를 일축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문건 전무도 “현 추세대로라면 내수 회복은 내년 초쯤에나 기대할 수 있다.”며 “지금 걱정해야 할 것은 경기버블이 아니라 경기가 재침체되는 상황”이라고 주장했다.대통령이 경기부양을 위해 대증요법을 쓰지 않겠다고 밝혔지만 추경 편성은 경기부양책이 아니라 현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한의 수단이라는 설명이다. 반면 한국개발연구원(KDI) 조동철 거시경제팀장은 “정부가 집행하는 돈으로 경기를 얼마나 떠받칠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면서 “차라리 추가 감세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실질소득을 늘려주는 게 (소비회복 지원에)더 효과적”이라고 주장했다.금융연구원 박종규 연구위원은 “내수가 살아나지 않는 것은 시간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라면서 “추경으로 해결하기에는 경기상황이 복잡한데도 정부가 툭하면 손쉬운 부양책을 동원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안미현기자 hyun@seoul.co.kr˝
  • [기고] 투자 확대 - 시스템 구축이 먼저다/조용수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지난달 25일 대통령과 재계 인사들의 청와대 만남 이후 주요 대기업들이 앞다퉈 대규모 투자계획을 발표했다.그동안 기업들이 너무 투자를 하지 않는다는 우려가 높았던 터라 국민들의 기대감도 적지 않은 듯하다. 최근 우리 경제는 기업의 투자 부진으로 심한 몸살을 앓고 있다.기업투자와 민간소비가 바닥권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수출과 내수가 따로 움직이는 기형적인 상태가 이어지고 있다. 수출호황을 누리고 있는 기업들이 투자를 늘리고 일자리를 더 많이 만들어 서민들의 살림살이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건전한 소비활동을 부추기는 일이 그만큼 시급해졌다. 산업 각 분야에서 과잉투자가 우려될 정도로 기업들이 왕성한 투자열기를 내뿜던 것이 불과 10년전이다.그러나 이제 기업들은 너나 할 것 없이 투자를 주저하고,급기야 정부가 기업들에 투자를 독려하고 다녀야 할 정도로 경제 상황이 달라졌다. ‘노동자들의 파업’에 빗대 ‘자본의 파업’이라고까지 일컬을 정도로 우리 기업들의 투자가 부진하게 된 이유는 무엇일까.현대경제학의 태두 케인즈는 기업가들 내면에 숨어 있는 ‘야성적 충동’이 투자를 이끌어내는 힘이라고 갈파했다.위험을 무릅쓴 모험과 도전 정신,기업가 정신이 바로 투자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외환위기 극복과정에서 도입된 소위 글로벌 스탠더드의 까다로운 준칙들이 케인즈가 말한 야성적 충동,나아가 모험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업가 정신을 억누르는 방향으로 작용하고,결과적으로 최근의 극심한 기업투자 부진을 야기한 중요한 원인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지울 수 없다. 수출로 벌어들인 현금을 사내금고에 쌓아둘지언정 꼭 필요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투자를 하지 않는 기업들의 행태는 반세기 우리나라 기업사에서 찾아 볼 수 없던 일이다.사상 초유의 저금리 수준에도 불구하고 대기업들의 은행차입이 계속 줄어드는 일도 과거에는 보기 드문 일이었다.기업들이 장사하고 남은 이익을 미래 투자자금으로 남겨두기에 앞서 주주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사의 주가를 끌어 올리는 데 써버리는 일도 외환위기 이전에는 좀처럼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었다. 부채비율을 지키지 못한 기업들은 정부의 규제에 앞서 시장으로부터 강력한 응징을 피할 수 없다.자칫하면 주가가 폭락하고 기업의 신용등급은 바닥수준으로 떨어지게 된다.기업가들이 재무제표를 개선하고 주가를 떠받치는 일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메커니즘속에서 미래의 불확실성에 도전하는 기업가정신은 고사될 수밖에 없다.기업들이 투자를 하지 않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글로벌 스탠더드는 중요하다.기업경영의 투명성과 합리성은 한국 경제의 선진화를 위해 불가결한 요건이다.다만 글로벌 스탠더드에 대한 집착이 도를 넘어 기업가 정신을 질식시키고 장래 한국 경제의 성장 잠재력을 회복불능 상태로 몰아갈 수도 있다는 점에 눈을 돌리자는 것이다. 모든 투자는 기회와 더불어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기회와 위험에 대한 최종판단은 기업가들의 몫이다.그러나 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기업가정신을 발휘하도록 하는 것은 그 사회가 선택한 시스템의 역할이다.지금처럼 기업가정신을 억누르고 기업들이 투자를 피하게 만드는 시스템으로는 우리 경제가 버틸 수 없다.투자가 살아날 수도 없다.기업들이 눈앞의 수치에 연연하기보다는 5년후,10년후를 생각해야 경제가 살고 나라가 산다.지금은 글로벌 스탠더드 그 이상을 모색할 때이다. 조용수 LG경제연구원 연구위원˝
  • 서울대 출신 45년 양복匠人 이순신씨

    가업(家業).사전적 의미는 대대로 물려받은 직업이란 뜻이다.세업(世業)이라고도 한다.선대의 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후대 입장에선 도박일 수 있다.후대의 적성과 가업의 계승이 어긋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할아버지,아버지의 거대한 그늘에 눌려 평생 자리를 찾지 못하고 ‘짝퉁’으로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도 있다.‘청출어람(靑出於藍).’그렇게 호락호락한 사자성어가 아니다. 장인을 천하게 취급하는 분위기도 가업을 쉬 포기하게 하는 요소가 돼왔다.이런 탓에 유럽이나 일본처럼 수백년 전통의 장인 명가를 제대로 배출하지 못했다.더군다나 장인이 추구하는 옛것이 성장의 가파름과 무관할 때 장인 명가의 생존율은 급격히 떨어진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를 물려 고집스럽게 양복을 지어온 명문대 출신 재단사가 있다.서울 소공동 해창양복점 사장 이순신(68)씨.대학생이 귀했던 1950년대 명문 서울고와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그가 40여년 동안 한 길만 걸어온 사연은 무엇일까. ●75년의 궤적을 쌓은 해창양복점 “저쪽 길 건너 해창양복점이오.” 양복점이 운집한 소공동에서 가장 오래된 양복점을 물으면 재단사들은 입을 모아 해창을 가리킨다.경쟁자들마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세월의 누적이 해창을 믿게 만든다. 지난해 12월 해창은 롯데호텔 본점 지하아케이드인 롯데 일번가에서 소공동 양복점거리로 되돌아왔다.롯데백화점이 리모델링 공사를 시작하자 다시 옛 둥지를 찾은 셈이다.1929년 부산에서 문을 처음 연 해창양복점은 우리나라 수제 양복의 산실이다.해창은 30년대는 서울 을지로4가에서,해방 전후에는 소공동,79년에는 롯데일번가로 자리를 바꿨지만 해창 특유의 브리티시 스타일 양복에는 변함이 없다. 해창의 창업자인 이씨의 아버지 이용수씨는 보통학교를 마친 뒤 일제시대 당시 면서기로 근무를 하다 작은아버지가 있는 일본 고베로 향한다. 항구도시인 고베의 한 양복점에서 이씨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해군복과 예복 등을 지으며 양복기술을 습득한다.그리고 23세에 귀국해 자신의 가게를 시작한다. ●은행 취직 대신 가업을 잇다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대학을 졸업했지만 이씨는 주저없이 아버지의 양복점을 첫 직장으로 택했다.살림집과 붙어 있던 양복점에서 살다시피 했던 그는 자연스럽게 재단사로 진로를 정했다.주위의 시선을 고려하면 쉽지 않았을텐데,이씨는 “은행에 다니는 것보다 옷을 만드는 것이 훨씬 재미있어서”라며 선택이유를 평범하게 밝혔다.의외로 아버지도 아들을 이해하고 크게 반대하지 않았다.이씨는 이미 고교 2학년때 수를 놓아 교복의 명찰을 만드는 방식을 처음 고안해낼 정도로 감각을 타고 났다. 당시 상과대학 학장이던 은사는 “상대생이 어떻게 이런 일을 할 수 있냐?”면서 그의 장래를 걱정했지만 1년 뒤 제자를 다시 만났을 때는 잘 선택했다며 격려해 주었다. “동창들 가운데서 높은 자리까지 올라간 친구들은 많아요.하지만 그들만 성공했다고 말할 수는 없죠.나도 내 분야에서는 전문성을 가지고 성공한 셈입니다.” 적성을 찾은 이씨는 지난 1959년부터 고객의 몸치수를 재고 직접 재단을 했다.1970년에는 노동부 주관의 양복재단 1급 기능사 자격증도 거머쥐었다.옷을 짓는 일뿐만 아니라 국내외 양복관련 단체에서도 맹활약했다.70∼80년대에는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회장을 역임했고 지난해까지 4년 동안 영국,프랑스,독일,미국,일본 등 전세계 20여개국 양복제작자들의 단체인 세계주문복업자연맹에서 회장으로 활동했다. ●꼼꼼한 이병철,소탈한 정주영 해창의 오랜 역사가 말해주듯 해창을 거쳐간 단골 명사들도 적지 않다.웬만큼 멋을 찾는 사람들은 옷의 맛을 찾아 해창의 문턱을 넘는다. “제일모직에서 복지를 새로 만들면 인근 양복점에서 고 이병철씨의 옷을 시범으로 만들었습니다.지금은 고급 복지로 평가받지만 초창기에는 물에 적시면 사용한 실의 수축정도가 달라서 복지가 울었어요.” 옷이 사람의 성격을 반영하듯 단골인 이병철씨와 정주영씨의 취향도 제각각이었다.이병철씨는 권위적인 느낌의 옷을 좋아하며 옷의 상태를 꼼꼼하게 살폈으며 정주영씨는 소탈하고 서민적인 양복을 즐겨 입었다.해창의 단골손님으로는 이승만 전 대통령을 비롯해 부통령이었던 이기붕씨,화신백화점의 박흥식씨,한국일보의 장기영씨 등이 있다. “젊은 시절 음식점 국일관에서 일했던 이기붕씨는 정치적으로는 잘 모르겠지만 인간적으로는 무척 세심한 사람이었어요.옷을 가지고 가면 옷상자까지 되돌려주고 상인들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옷값은 즉시 지불했죠.” 풍채가 좋았던 한국일보 창업자인 장기영씨는 검정색 계통의 옷을 즐겨 입었다.전기가 제대로 들어오지 않던 시절 숯다리미는 불의 강도 조절이 어려워 이승만 전 대통령의 옷에 흠을 냈던 일화도 있었다. ●“사람의 개성과 옷이 조화를 이뤄야” 40여년 동안 쌓은 이씨의 옷 철학은 비싼 것만이 좋은 것은 아니란다.옷은 입는 사람의 개성과 품위,지위와 함께 조화를 이뤄야 제값을 한다고 말한다. “옷은 사람에게 제2의 피부로 감정표현이 가능합니다.비싸고 좋은 옷을 입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품격에 맞는 옷을 입어야 인상이 좋게 보이고 호감도 가게 마련입니다.” 하지만 점차 사양길에 접어든 맞춤 양복에 대한 아쉬움은 떨칠 수 없다고 털어놓았다.해창은 대량생산보다는 다품종 1제품 생산의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때문에 지금도 양복 한벌을 짓는데 1주일여가 소요된다.다음 공정으로 넘어가기 전에 충분한 시간을 가져야 제대로 된 옷이 나오기 때문이다. “양산을 많이 하면 품질을 조정하기 힘들죠.수량이 많아지면 사람의 개성이나 취향을 제대로 맞출 수가 없어요.” 옷에 대한 그의 순수한 열정은 역시 후학 양성으로 귀결된다.이씨의 아들도 불투명한 맞춤복의 미래 탓에 기성복 수출 쪽에서 일하고 있다. “협회 차원에서 대학에 양복재단 관련 학과를 세우려고 하는데 이를 하겠다는 학교재단이 거의 없어요.요즘 젊은 사람들은 10년이나 소요되는 재단사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관련 학과라도 만들어야 맞춤양복의 명맥을 잇지 않을까요.” ■프로필 ▲1936년 1월 8일 서울 출생 ▲1955년 2월 서울고등학교 졸업 ▲1959년 2월 서울대 상과대학 졸업 ▲1959년∼현재 해창양복점 경영 ▲1966년∼현재 세계주문복업자연맹 한국대표 ▲1976∼1986년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회장 ▲1984년 9월 제19회 전국기능경기대회 양복심사장 ▲1984년∼현재 서울대 총동창회 이사 ▲1991∼1999년 세계주문복업자연맹 부회장 ▲1997∼2003년 중앙대학교 예술대학원 객원교수 ▲1999∼2003년 세계주문복업자연맹 회장 ▲2003∼현재 세계주문복업자연맹 명예회장 이유종기자 bell@seoul.co.kr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초의의 동다문화(東茶文化)는 한국문화론의 한 원류다.사람이 만든 음식 중에 차보다 더 고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일반적으로 음식은 주된 재료와 양념으로 부르는 부재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그러나 차는 찻잎 그 자체만으로서 완전한 음식이 된다.하나이면서 모두가 되는 귀한 물건이다.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차다.차의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일찍이 종교 의식용으로 쓰여졌다.불교 수행자들은 차가 지닌 약리적 효능과 함께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지녔다는 상징성을 받들어 차와 함께 하는 고유의 의식을 만들고 전해왔다. 초의가 차를 이용하여 술로 찌든 조선 후기 사회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데는,초의 개인의 비범한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들과 깊은 교류를 통한 깨달음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정약용,김정희,홍현주로 대표되는 스승이자 동무들과의 만남은 초의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적극적인 동력이 되었다.초의는 부처의 깨달음이 집약된 화엄사상의 실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즉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그 관계는 평등하다.’는 존재 상호간의 상생성,연기성,평등성을 차와 차살림을 통하여 실천했다. ●당대 지식인과 폭넓은 교류 모든 것들의 관계를 결정지은 인물이 정약용이었다.초의는 정약용의 실학 사상과 홍현주의 시론(詩論)이나 문장론을 매개로 조선 문인들과 정약용 사이에 오고 간 불꽃 튀는 시론 문답,김정희와의 절절한 교우관계에서 한 지성인이 겪어내는 시대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았다.누구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그 때 정약용이 말하기를,‘차를 알고 마시는 민족은 흥하지만,차를 모르고 마시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는 천둥번개같은 외침이 있었다.음식에 관한 폐습을 혁신시키지 못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끝내 불행해지고 만다는 큰 깨달음에서 얻어진 빛나는 사리였다.여전히 문제는 술에 취해 사는 사회였고,그 사회의 지도자들이 넋을 처박고 사는 술이라는 음식이었고,그 음식에 대한 뒤틀린 습관이었다.중국과 일본은 차문화의 뿌리가 깊고 탄탄한데다 술만큼 차를 숭상했다.그리하여 그들은 역사 속에서 늘 강자였고,지배자로 군림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강진에 유배 중일 때였다.정약용은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천주교인인 이승훈,이가환과 함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계자(系子)가 되었다.조선 후기의 대표적 정치가인 채제공은 불교와 천주교를 원칙적으로는 배격하되 그 장점만은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매우 특이한 정치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정약용이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 암행어사로 나갈 때 그를 추천했던 채제공은 엉뚱하게도 천주교 교인인 정약용에게 한 승려를 만나보도록 권유했다.지리산에서 수행중인 연담(蓮潭) 유일(有一)이라는 승려였다.조선의 유생들로부터는 극단적으로 배척받는 불교와 천주교지만 두 종교가 지닌 민중교화력을 인정하는 채제공으로서는 정약용과 유일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유생들로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논리와 실천방안이 마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목탁대신 칼’ 호국불교의 시대 두 사람은 만났다.뒷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惠藏,1772∼1811)이 유일(有一)의 제자였고,초의는 유일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였으며,초의와 정약용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아마도 이들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난 시대정신이 초의의 동다문화를 탄생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특히 초의가 승려로서 확립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그 뿌리가 깊고 매우 현실적이다.민중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고 돕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이른바 보살정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매우 처절한 실천력을 요구했다.즉 유생들에 의한 불교 배척과 승려 탄압 정책으로 불교의 명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탁월한 수행자가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보살정신을 실천했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보우(普愚)는 질식당하기 직전의 불교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사실상 조선 불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보우는 불교 회생을 위해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인재양성의 터전을 닦아 놓고 유생들의 손에 죽임당했다.그가 부활시킨 승과에 합격하여 새로운 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였다.두 분은 목탁 대신 칼과 창을 쥐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서 허덕이는 조선민중을 구하면서 손에 피를 묻힌 불멸의 보살들이었다.살생하지 말라는 지엄한 계율을 위배하면서 동족의 생명을 지키고 구원해 낸 행위에서 우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정신의 궁극을 읽어낼 수 있다.이 때의 차(茶)는 곧 중생을 상징하며,선(禪)은 곧 부처의 마음이니,조선불교를 호국불교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초의의 동다문화는 이같은 역사적 뿌리 위에서 새롭게 피어난 중생구원론이기도 하다.즉 사회 지도자의 품성을 올바로 키우고,민족의식을 드높여 키우기 위해 초의가 꾼 또 다른 꿈은 중생들의 살림살이 걱정이었다. ●장 제조법 전파등 중생구제 힘써 1830년을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붕괴되어 갔다.모든 세계 인류가 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양반사대부들만 중국의 그늘에 스스로 갇혀서 변화를 극력 반대했다.부패와 타락이 주된 흐름이었다.가난한 민중들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렸다.끝없는 불안에 지친 민중들은 살림살이의 핵심이 되는 장 담그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가난할수록 장이 있어야만 가난을 견딜 수 있었다.이 시기에 초의가 장 담그는 법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하여 가르친 일이나 단방약을 개발하여 세속에 널리 퍼뜨린 것은 초의의 중생 사랑 그 자체였다.단방약은 민중들의 질병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조치였다.사회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고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질병은 더욱 심했다.병이 나도 치료할 길이 없었다.가난 때문에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그 때 초의는 한 두 가지 약초나 조선 산천에 흔하게 자라는 풀잎이나 뿌리 혹은 열매로 간단하게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개발하여 널리 퍼뜨렸다.원래 조선의 사찰에는 이같은 단방약에 관한 처방이 여러 가지로 전해져 왔다.승려들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억불정책의 결과였다. 승려들의 질병과 세속인의 질병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초의의 생각이었다.그렇게 개발한 단방약은 매우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많은 민중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었다.이같은 생각과 실천의 결과들이 한데 모여서 나온 것이 동다문화였다.언제까지 중국만 바라보고 살 수 없으며,그래서도 안된다고 믿었다.지치고 좌절한 민중들이 희망을 품게하는 일,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외우고 쓰는 일보다 내 나라에서 자라는 곡식과 풀잎을 잘 알고 가꾸어 배불리 먹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급한 것임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았던 초의였다.초의의 동다(東茶)는 그렇게 만들어졌다.지금 이 나라 강산에는 차문화가 흥청거린다.東茶를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아직도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고 있다.더 늦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정약용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느니. ˝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1)草衣 선사의 꿈(下)

    초의의 동다문화(東茶文化)는 한국문화론의 한 원류다.사람이 만든 음식 중에 차보다 더 고결하고 완전한 것은 없다.일반적으로 음식은 주된 재료와 양념으로 부르는 부재료가 합쳐져서 만들어진다.그러나 차는 찻잎 그 자체만으로서 완전한 음식이 된다.하나이면서 모두가 되는 귀한 물건이다.하나 속에 모든 것이 들어있다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 차다.차의 이같은 특성 때문에 일찍이 종교 의식용으로 쓰여졌다.불교 수행자들은 차가 지닌 약리적 효능과 함께 하나이면서 모든 것을 지녔다는 상징성을 받들어 차와 함께 하는 고유의 의식을 만들고 전해왔다. 초의가 차를 이용하여 술로 찌든 조선 후기 사회의 폐습을 타파하기 위한 나름의 시도를 할 수 있게 된 데는,초의 개인의 비범한 능력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최고의 지성인들과 깊은 교류를 통한 깨달음도 매우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정약용,김정희,홍현주로 대표되는 스승이자 동무들과의 만남은 초의에게 또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도록 하는 적극적인 동력이 되었다.초의는 부처의 깨달음이 집약된 화엄사상의 실체를 현실세계에서 구현하고자 했다.즉 ‘모든 것은 모든 것과 관계 있고,그 관계는 평등하다.’는 존재 상호간의 상생성,연기성,평등성을 차와 차살림을 통하여 실천했다. ●당대 지식인과 폭넓은 교류 모든 것들의 관계를 결정지은 인물이 정약용이었다.초의는 정약용의 실학 사상과 홍현주의 시론(詩論)이나 문장론을 매개로 조선 문인들과 정약용 사이에 오고 간 불꽃 튀는 시론 문답,김정희와의 절절한 교우관계에서 한 지성인이 겪어내는 시대적 고뇌를 곁에서 지켜보았다.누구도 혼자 사는 것이 아님을 다시 깨달았다. 그 때 정약용이 말하기를,‘차를 알고 마시는 민족은 흥하지만,차를 모르고 마시지 않는 민족은 망한다.’는 천둥번개같은 외침이 있었다.음식에 관한 폐습을 혁신시키지 못하면 개인이든 민족이든 끝내 불행해지고 만다는 큰 깨달음에서 얻어진 빛나는 사리였다.여전히 문제는 술에 취해 사는 사회였고,그 사회의 지도자들이 넋을 처박고 사는 술이라는 음식이었고,그 음식에 대한 뒤틀린 습관이었다.중국과 일본은 차문화의 뿌리가 깊고 탄탄한데다 술만큼 차를 숭상했다.그리하여 그들은 역사 속에서 늘 강자였고,지배자로 군림했다. 정약용이 천주교 신자라는 이유로 강진에 유배 중일 때였다.정약용은 정치사상적인 측면에서 볼 때 같은 천주교인인 이승훈,이가환과 함께 채제공(蔡濟恭,1720∼1799)의 계자(系子)가 되었다.조선 후기의 대표적 정치가인 채제공은 불교와 천주교를 원칙적으로는 배격하되 그 장점만은 잘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는 매우 특이한 정치철학을 실천한 인물이었다.정약용이 처음으로 전라도 지역 암행어사로 나갈 때 그를 추천했던 채제공은 엉뚱하게도 천주교 교인인 정약용에게 한 승려를 만나보도록 권유했다.지리산에서 수행중인 연담(蓮潭) 유일(有一)이라는 승려였다.조선의 유생들로부터는 극단적으로 배척받는 불교와 천주교지만 두 종교가 지닌 민중교화력을 인정하는 채제공으로서는 정약용과 유일을 만나게 해줌으로써 유생들로서는 불가능한 새로운 시대를 위한 논리와 실천방안이 마련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서였다. ●‘목탁대신 칼’ 호국불교의 시대 두 사람은 만났다.뒷날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된 이후 정약용에게 차를 가르쳐 준 혜장(惠藏,1772∼1811)이 유일(有一)의 제자였고,초의는 유일선사의 법통을 전수받은 제자였으며,초의와 정약용 또한 스승과 제자 사이였다.아마도 이들의 인간관계에서 우러난 시대정신이 초의의 동다문화를 탄생시키는데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특히 초의가 승려로서 확립한 다선일미사상(茶禪一味思想)은 그 뿌리가 깊고 매우 현실적이다.민중의 존재와 삶을 이해하고 돕는 것을 수행의 방편으로 삼는 이른바 보살정신은 조선시대에 들어와 매우 처절한 실천력을 요구했다.즉 유생들에 의한 불교 배척과 승려 탄압 정책으로 불교의 명맥이 위기에 처했을 때 탁월한 수행자가 등장하여 위기를 극복하면서 새로운 보살정신을 실천했다. 조선 중기 명종 때의 보우(普愚)는 질식당하기 직전의 불교를 자신의 목숨과 바꾸어 사실상 조선 불교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보우는 불교 회생을 위해 승과(僧科)를 부활시켜 인재양성의 터전을 닦아 놓고 유생들의 손에 죽임당했다.그가 부활시킨 승과에 합격하여 새로운 인물로 등장한 사람이 서산대사와 사명대사였다.두 분은 목탁 대신 칼과 창을 쥐고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고 도탄에서 허덕이는 조선민중을 구하면서 손에 피를 묻힌 불멸의 보살들이었다.살생하지 말라는 지엄한 계율을 위배하면서 동족의 생명을 지키고 구원해 낸 행위에서 우리는 다선일미(茶禪一味) 정신의 궁극을 읽어낼 수 있다.이 때의 차(茶)는 곧 중생을 상징하며,선(禪)은 곧 부처의 마음이니,조선불교를 호국불교라 부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초의의 동다문화는 이같은 역사적 뿌리 위에서 새롭게 피어난 중생구원론이기도 하다.즉 사회 지도자의 품성을 올바로 키우고,민족의식을 드높여 키우기 위해 초의가 꾼 또 다른 꿈은 중생들의 살림살이 걱정이었다. ●장 제조법 전파등 중생구제 힘써 1830년을 지나면서 조선사회는 붕괴되어 갔다.모든 세계 인류가 변하고 있는데 조선의 양반사대부들만 중국의 그늘에 스스로 갇혀서 변화를 극력 반대했다.부패와 타락이 주된 흐름이었다.가난한 민중들은 지옥같은 나날을 보내면서 두려움과 배고픔에 시달렸다.끝없는 불안에 지친 민중들은 살림살이의 핵심이 되는 장 담그는 일조차 할 수 없었다.가난할수록 장이 있어야만 가난을 견딜 수 있었다.이 시기에 초의가 장 담그는 법을 보다 정확하게 정리하여 가르친 일이나 단방약을 개발하여 세속에 널리 퍼뜨린 것은 초의의 중생 사랑 그 자체였다.단방약은 민중들의 질병을 완화시켜 주기 위한 조치였다.사회 경제적 토대가 붕괴되고 신분질서가 해체되는 혼란 속에서 민중들의 질병은 더욱 심했다.병이 나도 치료할 길이 없었다.가난 때문에 약을 구할 수도 없었다.그 때 초의는 한 두 가지 약초나 조선 산천에 흔하게 자라는 풀잎이나 뿌리 혹은 열매로 간단하게 약을 만들어 먹는 법을 개발하여 널리 퍼뜨렸다.원래 조선의 사찰에는 이같은 단방약에 관한 처방이 여러 가지로 전해져 왔다.승려들 스스로 모든 것을 자급자족해야 하는 억불정책의 결과였다. 승려들의 질병과 세속인의 질병은 약간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치료 방법도 달라야 한다는 것이 초의의 생각이었다.그렇게 개발한 단방약은 매우 빠르게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많은 민중들의 질병으로 인한 고통을 덜어주었다.이같은 생각과 실천의 결과들이 한데 모여서 나온 것이 동다문화였다.언제까지 중국만 바라보고 살 수 없으며,그래서도 안된다고 믿었다.지치고 좌절한 민중들이 희망을 품게하는 일,공자 맹자의 가르침을 외우고 쓰는 일보다 내 나라에서 자라는 곡식과 풀잎을 잘 알고 가꾸어 배불리 먹고 이웃과 나누는 것이 더 급한 것임을 실천하기 위하여 살았던 초의였다.초의의 동다(東茶)는 그렇게 만들어졌다.지금 이 나라 강산에는 차문화가 흥청거린다.東茶를 말하는 이들 대부분이 아직도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고 있다.더 늦기 전에 참회해야 한다.정약용 선생께서 하신 말씀을 다시 새겨보면서 부끄러워해야 하느니.
  • [꼬불꼬불 뒷골목] 강동구 성내동 장신구 부품거리

    우리나라 경제발전의 효녀 ‘가내 부업’의 신화를 기억하십니까? 부녀자들이 봉제 인형에 눈 하나 붙이고 치마 하나 입히는 데 50전,1원 받으며 수출역군 역할을 해내던 때가 있었다.1980년대 중반만 해도 아랫집,윗집없이 서민들 사이에 심심찮게 볼 수 있었던 게 가내 부업이다.국민소득 2만달러 운운하지만,지금도 ‘애들 반찬 값이나 벌자.’며 가내 부업을 하는 여성이 적잖다. 서울 강동구 성내1∼2동 뒷골목엔 액세서리 부품 업소가 130여곳 몰려 있다.이웃 주택가는 물론 고덕·명일동 일대에 이르기까지 줄잡아 2만여명의 여성이 이들 업소를 통해 부업으로 살림살이에 보태고 있다. ●‘귀에 걸면 귀걸이,코에 걸면 코걸이’란 말이 여기선 옳다. 이 뒷길에는 넥타이 핀에서부터 여성 필수품인 머리핀,목걸이 등 액세서리란 액세서리 부품은 몽땅 다룬다. 1만여종에 이른다는 취급품목 가운데서도 가장 많이 눈에 띄는 게 바로 체인(Chain)이다.액세서리 중에서도 대표적인 목걸이,넥타이핀 등 고리가 들어간 물품에 흔하게 쓰이기 때문이다. 손에 얼른 잡히지도 않을 만큼 자그마한 고리들이 사람 손을 거쳐 길게 이어지면 목걸이 끈,짧게 하면 넥타이핀 줄이 되는 것이다.국내에서 유일한 액세서리 특화단지인 데도 일반에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모조품을 전문으로 하는 탓이다. 업계 연합체인 서울강동장신구조합 최병실(49) 전무이사는 “간단히 말해 이틀 쓰고 버릴 것들”이라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을 내세우는 ‘무기’로 쓰는 우리네 여성들은 보통 이미테이션(모조품)을 거들떠 보지도 않지만 수출 주무대인 중남미·유럽인들은 다르다.”고 귀띔했다. 이곳에서 만든 부품들은 서울 남대문시장 등으로 보내져 완성품이 되고,비행기를 타고 외국으로 뻗어나가 지구촌 구석구석 ‘액세서리 마니아’들의 몸을 화려하게 치장하게 된다. ●‘티끌 모아 태산’을 이루는 현장에 근면정신이 살아 숨쉰다. 성내2동 편모(33·여)씨는 “팀장으로 불리는 알선업자로부터 액세서리 부품을 받아 부업을 해온 지 3년째”라면서 “취업이 어렵기도 하거니와 다섯살배기 딸을 맡기는 비용 등을 따지면 제법 괜찮은 벌이가 된다.”고 말했다. 한 사람이 이러한 부업으로 벌어들이는 돈은 한달 내내 매달릴 경우 1인당 70여만원.대개 가정생활 짬짬이 틈을 내 하기 때문에 20만∼30만원 안팎이다.‘○개 들이 봉지 일까지’ 하는 식으로 일을 맡는다.목걸이를 만드는 데 들어가는 부품을 한 예로 들어보자.민물새우의 눈 크기만한 모조 다이아몬드 부품을 꽃받침 모양의 구리판에 한개 접착하는 데 4∼5초 정도 걸린다.똑같은 시간이라도 받는 돈은 한 건에 2원에서 많으면 20원.이처럼 10배 차이가 나는 이유는 숙련도 차이에서 생긴다. 일을 알선받는 시민은 업소나 오퍼상 한 곳당 10∼20명,많게는 80∼100명에 이른다.평균 20명으로 잡아도 업소 130개에 오퍼상 800여곳을 합치면 2만명 가까이 된다. S상사 대표 W씨는 “부업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임금은 96년에 비해 거의 달라진 게 없다.”면서 “그 당시 개당 1원 80전∼1원 90전하던 게 2원 단위로 바뀌었으니 부품 하나 붙이는 경우 10∼20전 오른 것으로 보면 맞을 것”이라고 설명했다.그러나 10년 전이나 마찬가지의 인건비를 치르는 탓에 ‘살판 났을’ 듯한 액세서리 특화단지는 지금 내리막길 산업이라는 위기감에 휩싸였다.4∼5년 전부터 중국 등 인건비가 싼 나라에 시장을 내주고 있기 때문이다.장신구조합 최 이사는 “앞으로 4∼5년 뒤면 사실상 붕괴될 것으로 업계는 내다보고 있다.”면서 “다른 산업과 연계,이탈리아 ‘구찌’나 프랑스 ‘샤넬’ 등과 같은 식으로 브랜드화하는 등 저물량-고단가 전략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는 절박감이 고스란히 배어 있다.”고 고개를 내저었다.경공업 부문까지 저임금국에 ‘포위’ 당한 우리 경제가 맞닥뜨린 위기감을 그대로 보여주는 대목이다. 송한수기자 onekor@˝
  • [기고] ‘黃金比’의 이상국회/유한태 숙명여대 교수· 산업디자인연구소장

    동서양을 막론하고 예로부터 중간이나 중립이 좋긴 좋은 모양이다.중간위치나 중립적 상황에 처하면 마음이 편해지는 심리적 메커니즘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동양에서는 ‘중용지도(中庸之道)라는 교훈이 있는 한편,서양의 경우 라틴어의 ‘중간’에 해당하는 뜻을 내포한 ‘골든 민(the golden mean)’이라는 어휘도 있다. 그러나 주관적인 소신 없이 항상 중간에서 눈치만 살피는 것을 모두 다 ‘중용’이라 할 수 없다.믈론 중간과 중용은 항상 같다고만 할 수 없을지라도 이렇듯 좋고 편안한 ‘중간’도 불만이었는지 그 앞에 ‘골든’까지 붙인 걸 보면 그야말로 비단 위에 꽃을 놓은 격이다. 시각이나 청각 단위를 구성하는 수단이기도 한 이 ‘골든 민’을 우리말로 ‘황금분할’이라고 부르는데,이것은 원래 수학 전문용어로서 고대 그리스나 이집트의 평면기하학에서 비롯됐다.하나의 선분(線分)을 외중비(外中比)로 나누는 일을 말하는데 좀 더 쉽게 말하면 작은 부분의 큰 부분에 대한 비율을,큰 부분의 전체에 대한 비율과 같도록 일치시키는 작업이다.이런 개념이 미학의 영역에서까지 전문용어로 자리잡게 된 것이다.잘 알려진 것처럼 그 비율을 숫자로 표시하면 1대1.618이라는 것인데,이런 숫자비율은 일상 주변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이를테면 대부분의 책자나 엽서의 가로·세로 비례와 건축물이나 노트북 등등….무수히 많다. 이같은 황금비의 시각적 선호현상은 그것이 인간의 시각정보 전달 과정에서 심리적 안정성과 쾌적성을 동시에 충족시켜 준다는 데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반대로 황금비에서 벗어나면 벗어날수록 불안감은 가중되며 쾌적성은 감소된다. 어쨌든 황금비란 생물이 성장하는 데 필요한 최적조건인 ‘옵티멈(optimum)’인 동시에 견제와 균형을 유지는 중심축인 셈이다. 장래 국운을 좌우할 시금석인 17대 총선이 무사히 끝났다.민의가 정확히 표출됐고 바라던 천심을 들을 수 있었으며 국민의식 수준의 평균치를 투명하게 볼 수 있었다.극도의 혼란의 연속이던 탄핵 전후의 분열과 갈등의 악몽을 한방에 날려보낸 계기였고 새로운 정치의 지평이 열리게 됐다. 예상과는 달리 군소정당으로 쇠락한 민주당·자민련 등을 빼고는 3당이 총선 결과에 그런대로 만족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치적 안정의 기본골격이 이뤄졌다는 청신호로,황금비의 이상적 정당구도가 구축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여야 의석수가 수적으로는 황금비가 못됨은 물론이지만,심리적·내용상으로는 개혁과 견제의 절묘한 조화라고 할 수 있는 황금비의 균형에 근접했다고 본다.수적으론 여야가 비슷해도 여당이라는 프리미엄 때문에 심리적 균형이 유지된 이상적 국회상이라 할 수 있다.이는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라 한국인들 마음 저변에 숨어 있는 ‘은근과 끈기’가 겉으로 나타난 한 단면에 불과하다. 이젠 ‘발목잡기’의 변명이 안 통하게 됐다.‘어깨동무’의 성숙한 정치력만 남았다.과거의 어두운 기억인 아귀다툼 식 살벌한 격전장으로 전락한 국회의 이미지를 화합과 타협의 ‘더불어 사는’ 정치구도로 승화시킬 황금기반이 구축됐기 때문이다. 황금비의 중용이라는 최적조건의 정치 패러다임 위에다 나라살림의 새로운 장을 어렵사리 마련해준 유권자들의 기대에 부응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의 이상적 국회 이미지로 거듭나기를 바라며 선량들에게 심기일전의 분발을 당부한다.다수당이라고 자만하지 말고 국가안정의 미학적 황금비를 유지하려 애써야 한다. 유한태 숙명여대 교수· 산업디자인연구소장˝
  • 이라크 과도위원장 암살 안팎

    미군의 이라크 포로학대 파문 이후 무장 저항세력의 반격이 강화되는 가운데 17일 에제딘 살림 과도통치위원장이 암살되는 등 이라크 사태는 계속 수렁속을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국은 오는 6월30일 이라크에 주권을 이양한 이후에도 유엔 결의 등의 형식을 빌려 계속 이라크에 주둔하겠다는 의사를 거듭 밝혔으며,미군이 스페인 철군으로 힘의 공백이 나타난 지역을 접수하는 등 연합군의 재편도 이뤄지고 있다. ●과도통치위원에 대한 두번째 암살 에제딘 살림 과도통치위원장을 암살한 범인들은 치밀하게 범행을 준비한 것으로 보인다.범행은 전형적인 이슬람 테러집단의 수법이었다. 이날 오전 살림 위원장 일행을 태운 5대의 차량이 연합군사령부에 나타나 ‘그린 존’에서 차례를 기다리자 범인들은 함께 기다리던 줄에서 차를 몰고나와 정확하게 살림 위원장을 태운 차량 옆으로 다가간 뒤 자폭했다. 특히 살림이 바스라의 시아파 지도자인 데다 알카에다가 연관된 것으로 보이는 비슷한 수법의 자살폭탄 테러가 지난달 바스라에서 수십명의 희생자를 낸 점으로 미뤄볼 때 알카에다나 수니파의 소행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과도통치위와 연합군측은 보고 있다.이라크 내에 최대한 혼란을 조성,다음달 30일로 예정된 미군의 주권이양을 못하게 하거나 의미를 최대한 퇴색시키려 한다는 것이다. 연합군측은 “다음주 월요일 연합군 공보팀과 이라크 기자단과의 축구경기가 살림 위원장에게 발생한 불행한 사고로 연기됐다.”며 사망 사실을 간접확인했다. ●“철군은 없다” 콘돌리자 라이스 백악관 국가안보 보좌관은 17일 “미군은 당초 이라크에 파견될 당시의 임무를 완료할 때까지,그리고 이라크가 자체 안보 능력을 갖출 때까지 주둔한다.”고 밝혔다.베를린을 방문중인 라이스 보좌관은 일간지 타게스 슈피겔과의 대담에서 이같이 밝히며 미국이 조기 철군한다는 보도를 부인했다.이슬람권 국가들이 이라크 평화유지군으로 파견토록 하자는 게르하르트 슈뢰더 독일 총리의 제안에 대해 그는 “미국 정부도 유엔 결의안이 나오면 이슬람권 나라들이 파병을 제의하기를 희망해 왔다.”고 말했다. 콜린 파월 미국 국무장관도 16일(현지시간) 폭스TV와의 인터뷰에서 “다음달 주권이양 후 이라크의 새 국방부가 자국군을 통솔할 것이지만 그들 역시 상당한 기간 미군 사령관이 지휘하는 다국적군의 통제 하에 놓일 것”이라고 말했다.이는 지난주 워싱턴에서 열린 선진 8개국(G8) 외무장관 회담에서 조건부 철군 가능성을 내비쳤던 발언을 보충해 조기 철군은 없을 것이란 진의를 설명한 것이다. ●“미·이라크간 SOFA 필요” 이라크 과도통치위원회에서 미국의 지지를 받는 것으로 알려진 아흐마드 찰라비 위원은 16일 기자들과 만나 주권 이양 후 출범할 이라크 임시정부가 안보와 치안을 직접 통제하고 이라크 발전기금을 관리해야 한다고 밝혔다.찰라비 위원은 “군대와 경찰에 대한 통제권은 모집과 훈련,장비,배치,작전면에서 모두 이라크인들에게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찰라비 위원은 또 이라크 임시행정처(CPA)가 관리해온 이라크 발전기금의 통제권을 다음달 주권이양과 동시에 이라크 임시정부에 넘겨야 한다고 밝혔다.이 기금은 지난해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결의에 따라 이라크 석유수출 대금으로 조성된다. 찰라비는 또 아부 그라이브 교도소에서 자행된 수감자 학대사건은 외국군과의 ‘주둔군지위협정(SOFA)’ 체결 필요성을 일깨워준다고 강조했다. ●이탈리아군 시아파에 밀려나 이라크 남부도시 나시리야에서 시아파 저항군과 사흘째 교전을 벌이던 이탈리아군이 16일 결국 진지를 버리고 퇴각했다.미군은 스페인 군병력이 철수하고 있는 이라크 남중부 디와니야 기지를 인수했다고 스페인 국방부가 16일 밝혔다. 이도운기자 dawn@seoul.co.kr˝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0)草衣 선사의 꿈(上)

    풀옷을 이은 수행자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참 스승이었다.또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차살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침체와 변질을 겪어 온 조선의 차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여 물림한 한국 차살림의 완성자다. ●초의는 우리 차문화 완성한 선승 그가 완성한 차살림은 절집 승려만을 위한 것도,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한가한 멋을 위한 것도,궁중이나 왕실 혹은 부자들의 호사를 위한 것도 아니다.초의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조선의 운명이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듯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시대의 위기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권력층,세도가들이 만들어 냈는데,이들 대부분이 중화사대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중국 문화의 아류로 자처했다. 중화사대주의자들의 성리학 세계관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었다.세계는 화(華)와 이(夷)로 갈라서고,‘화’만이 문화와 가치이며,‘이’는 문화도 가치도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다.화는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中華)로서 중국 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라 단정지었다.그리하여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모조,근사치로서의 소화(小華)라고 여겼다.중화사대주의자인 조선의 성리학자,유생들은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는 열등의식을 가졌지만 서양에 대해서는 근거없이 심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이같은 열등과 우월의 이중구조적 세계관 속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 지성인의 사명감으로 여기게 된 시대였다.초의는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시대에 대한 고뇌와 번민,그에 대한 극복과 희망의 제시를 위해 보냈다. 조선의 주된 이념인 성리학이 사변철학으로 타락하고,제도 문란과 권력의 부패로 국가의 근본인 서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초의는 엉뚱하게도 차농사 짓는 일과 차 만들기,차 마시는 이야기를 그 시대의 화두로 삼았다.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며 과연 누가 공감했을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병든시대 희망 제시하려 고뇌 초의는 차(茶)가 음식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힘의 시원임을 깨달았다.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정신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온 방법들 중에서 음식과 차가 가장 널리 쓰여온 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기도 했다.초의는 차라는 물건으로 술에 절어버린 조선 후기의 병들고 타락한 시대를 구원하고자 한 구도자였다. 19세기의 승려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조선의 이름난 사찰은 일년 내내 경향 각지에서 유람오는 양반,사대부,세도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였다.그들은 조용한 여행자들이 아니었다.언제나 그 지역 현감이나 절 주지에게 그들의 행차 사실을 미리 알렸다.절 아래 마을까지 사인교나 남여(藍輿),나귀 등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라는 뜻이다.승려들은 이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승려들이 고관대작이나 그들 식구를 등에 업고 오르내리기도 했다.어쩌다 실수하는 날이면 능멸과 매질을 피할 수 없었으니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절에 놀러오면서 승려들이 메는 사인교를 탔던 양반 사대부들은 허랑방탕한 조선 후기 사회와 함께 비틀거리던 중화사대론자들이었다.그들은 차를 마시지 않았거니와 차를 알지도 못했다.다만 술을 알고 취해 살았을 뿐이다.차례(茶禮)라는 설,추석 명절에 조차도 차가 아닌 술로 조상제사를 모셨을 만큼 술에 빠져 살았다.국가의 원천이자 기둥인 농사꾼들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끈질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데도 양반사대부들은 술에 취해 살면서 중국 섬기기에 나라의 뼈가 휘었다.농민이 땀 흘려 가꾼 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시면서 농민의 시름과 수난은 외면했다.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관념의 잎만 무성한 성리학의 미몽을 좆는 위선에 차고 무능한 지식인들,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산을 더럽히는 세도가들 앞에 초의가 말없이 제시한 것이 차였다.술 대신 차를,독선과 아집 대신 나눔과 양보를,핍박과 죽임 대신 함께 사는 지혜를 제시한 것이다. 차는 은혜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며,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초의가 새롭게 꾼 꿈이 ‘동다문화(東茶文化)’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집이었다.그의 ‘동다송(東茶頌)’은 단순히 중국 차문화와 역사에 관한 서른 한 마디 노래로 편술된 책이 아니라,‘東茶’ 즉 우리나라의 차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대신 차·독선대신 지혜 전파 서른 한 마디 노래 중에 우리나라 차의 빛깔,향기,맛의 우수성이 결코 중국차에 못지 않다는 매우 짧은 한 구절이 숨어 있다.초의가 전혀 새롭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중국 차문화 얘기를 늘어놓다가 슬쩍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간략하게 끼워 넣은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아도 조선의 것이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자신있게 말한 경우는 많지 않다.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모든 것은 오로지 중국에서 근원하고,의지해왔으며,중국으로부터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어 온 중화사대주의자들은 감히 조선의 것이 중국 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아무리 조선의 것이 중국 것보다 우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책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위험이라고 여겼다.중국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초의라는 한 승려가 우리나라의 차가 중국 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글로 적은 것이다.짧은 이 한 문장이 지닌 뜻은 참으로 위대하다.멀리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킨 그 바보짓 이후 1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신라,고려,조선은 한결같이 중국 우월론자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다만 조선의 세종임금이 중국 문자가 아닌 조선의 문자를 만들어 널리 쓰고자 했었다.그러나 한문 망령에 덮어 씌인 중화사대론자들은 한글을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니 언문(諺文)이라 깎아내렸었다.모든 것을 중국에다 의지했다.심지어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역사책은 우리나라 고유의 차문화를 아예 없애버린 위에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에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다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은 것을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동다승’ 저술 우리차 우수성 알려 중국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고려 스스로가 무릎을 꿇고 역사 사실을 왜곡하여 중국의 무릎 아래로 기어든 수치이자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렇듯 1200여년 동안 계속된 비굴한 태도를 처음으로 고쳐 잡은 것이 초의의 글귀였다.그것도 중국 문화의 자존심이자 세계 속의 자긍심인 차에 대하여 중국차보다 우리나라 차가 우수하다고 말한 것은 정치적 고려에서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초의의 민족문화론이었다. 2004년 5월,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의 많은 차인들은 조선의 중화사대론을 계승한 적자임을 긍지로 여기면서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는 전도사로서 활보하고 있다.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140여년 전 민족문화의 선각자 초의스님의 동다문화 앞에서 어찌 고개 들고 활보할 수 있는가? 부끄러워하라.또 부끄러워하라.
  • [정동주 역사문화 에세이 달빛의 역사 문화의 새벽] (40)草衣 선사의 꿈(上)

    풀옷을 이은 수행자 초의(草衣) 장의순(張意恂,1786~1866).그는 조선 후기 조선의 불교문화를 상징하는 참 스승이었다.또한 불교문화에서 비롯된 차살림의 유구한 역사 속에서 침체와 변질을 겪어 온 조선의 차문화를 새롭게 정립하여 물림한 한국 차살림의 완성자다. ●초의는 우리 차문화 완성한 선승 그가 완성한 차살림은 절집 승려만을 위한 것도,조선 양반 사대부들의 한가한 멋을 위한 것도,궁중이나 왕실 혹은 부자들의 호사를 위한 것도 아니다.초의가 생애 대부분을 보낸 19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는 조선의 운명이 벼랑으로 굴러 떨어지려는 듯 위기감이 높아지던 시기였다.시대의 위기는 조선사회를 대표하는 지식인들과 권력층,세도가들이 만들어 냈는데,이들 대부분이 중화사대주의자들로서 스스로 중국 문화의 아류로 자처했다. 중화사대주의자들의 성리학 세계관은 화이론적(華夷論的) 세계관이었다.세계는 화(華)와 이(夷)로 갈라서고,‘화’만이 문화와 가치이며,‘이’는 문화도 가치도 없는 야만으로 규정했다.화는 세계의 지리적 중심이기도 한 중화(中華)로서 중국 민족의 배타적 독점물이라 단정지었다.그리하여 조선은 중국의 축소판,모조,근사치로서의 소화(小華)라고 여겼다.중화사대주의자인 조선의 성리학자,유생들은 중국에 대해서는 한없는 열등의식을 가졌지만 서양에 대해서는 근거없이 심한 우월의식을 지니고 있었다.이같은 열등과 우월의 이중구조적 세계관 속에서 서양 세력을 배척하는 것을 조선 지성인의 사명감으로 여기게 된 시대였다.초의는 생애 대부분을 이러한 시대에 대한 고뇌와 번민,그에 대한 극복과 희망의 제시를 위해 보냈다. 조선의 주된 이념인 성리학이 사변철학으로 타락하고,제도 문란과 권력의 부패로 국가의 근본인 서민들의 삶이 도탄에 빠져 있을 때,초의는 엉뚱하게도 차농사 짓는 일과 차 만들기,차 마시는 이야기를 그 시대의 화두로 삼았다.선뜻 받아들이기 어려운 발상이며 과연 누가 공감했을지 의아스럽기도 하다. ●병든시대 희망 제시하려 고뇌 초의는 차(茶)가 음식과 더불어 인간의 운명과 역사를 바꾸는 힘의 시원임을 깨달았다.깨달음을 바탕으로 한 믿음이었기 때문에 그의 말과 행동은 그대로가 진리로 받아들여졌다.정신세계를 변화시키기 위해 이용되어 온 방법들 중에서 음식과 차가 가장 널리 쓰여온 것은 인류의 오랜 경험이기도 했다.초의는 차라는 물건으로 술에 절어버린 조선 후기의 병들고 타락한 시대를 구원하고자 한 구도자였다. 19세기의 승려는 천민으로 분류되었다.조선의 이름난 사찰은 일년 내내 경향 각지에서 유람오는 양반,사대부,세도가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던 시대였다.그들은 조용한 여행자들이 아니었다.언제나 그 지역 현감이나 절 주지에게 그들의 행차 사실을 미리 알렸다.절 아래 마을까지 사인교나 남여(藍輿),나귀 등을 준비해 놓고 기다리라는 뜻이다.승려들은 이 명령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승려들이 고관대작이나 그들 식구를 등에 업고 오르내리기도 했다.어쩌다 실수하는 날이면 능멸과 매질을 피할 수 없었으니 노예나 다름이 없었다. 절에 놀러오면서 승려들이 메는 사인교를 탔던 양반 사대부들은 허랑방탕한 조선 후기 사회와 함께 비틀거리던 중화사대론자들이었다.그들은 차를 마시지 않았거니와 차를 알지도 못했다.다만 술을 알고 취해 살았을 뿐이다.차례(茶禮)라는 설,추석 명절에 조차도 차가 아닌 술로 조상제사를 모셨을 만큼 술에 빠져 살았다.국가의 원천이자 기둥인 농사꾼들은 무거운 부역과 세금,끈질긴 가난과 질병에 시달리는데도 양반사대부들은 술에 취해 살면서 중국 섬기기에 나라의 뼈가 휘었다.농민이 땀 흘려 가꾼 곡식으로 빚은 술을 마시면서 농민의 시름과 수난은 외면했다. 뿌리가 땅에 닿지 않는 관념의 잎만 무성한 성리학의 미몽을 좆는 위선에 차고 무능한 지식인들,젊어서는 나라를 위태롭게 하고 늙어서는 강산을 더럽히는 세도가들 앞에 초의가 말없이 제시한 것이 차였다.술 대신 차를,독선과 아집 대신 나눔과 양보를,핍박과 죽임 대신 함께 사는 지혜를 제시한 것이다. 차는 은혜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며,새로운 시대를 위해서는 새로운 꿈이 필요했다.초의가 새롭게 꾼 꿈이 ‘동다문화(東茶文化)’로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정신의 집이었다.그의 ‘동다송(東茶頌)’은 단순히 중국 차문화와 역사에 관한 서른 한 마디 노래로 편술된 책이 아니라,‘東茶’ 즉 우리나라의 차를 칭송하기 위한 것이었다. ●술대신 차·독선대신 지혜 전파 서른 한 마디 노래 중에 우리나라 차의 빛깔,향기,맛의 우수성이 결코 중국차에 못지 않다는 매우 짧은 한 구절이 숨어 있다.초의가 전혀 새롭지도 필요하지도 않은 중국 차문화 얘기를 늘어놓다가 슬쩍 우리나라 차의 우수성을 간략하게 끼워 넣은 것은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조선 역사 전체를 통틀어 놓고 보아도 조선의 것이 중국보다 우수하다고 자신있게 말한 경우는 많지 않다.아니 거의 없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모든 것은 오로지 중국에서 근원하고,의지해왔으며,중국으로부터 떨어져서는 한시도 살아갈 수 없다고 믿어 온 중화사대주의자들은 감히 조선의 것이 중국 보다 우수하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아무리 조선의 것이 중국 것보다 우수한 것이 사실이라 할지라도 사실대로 말하고 책으로 엮어낸다는 것은 곧 죽음을 뜻하는 위험이라고 여겼다.중국의 그림자도 밟지 말아야 했다. 그런데 초의라는 한 승려가 우리나라의 차가 중국 차보다 우수하다는 사실을 글로 적은 것이다.짧은 이 한 문장이 지닌 뜻은 참으로 위대하다.멀리 신라가 당나라 군대를 끌어들여 동족인 백제를 멸망시킨 그 바보짓 이후 1200여년이 지나는 동안 신라,고려,조선은 한결같이 중국 우월론자들에 의하여 좌우되어 왔다. 다만 조선의 세종임금이 중국 문자가 아닌 조선의 문자를 만들어 널리 쓰고자 했었다.그러나 한문 망령에 덮어 씌인 중화사대론자들은 한글을 암클, 즉 여자들이나 쓰는 글이니 언문(諺文)이라 깎아내렸었다.모든 것을 중국에다 의지했다.심지어 삼국사기(三國史記)라는 역사책은 우리나라 고유의 차문화를 아예 없애버린 위에 통일신라 시대인 828년에 당나라로부터 차 종자를 가져다 왕의 명령으로 지리산에 심은 것을 우리나라 차의 기원이라고 적기까지 했다. ●‘동다승’ 저술 우리차 우수성 알려 중국의 미움을 받지 않기 위해 고려 스스로가 무릎을 꿇고 역사 사실을 왜곡하여 중국의 무릎 아래로 기어든 수치이자 씻을 수 없는 모욕이다. 이렇듯 1200여년 동안 계속된 비굴한 태도를 처음으로 고쳐 잡은 것이 초의의 글귀였다.그것도 중국 문화의 자존심이자 세계 속의 자긍심인 차에 대하여 중국차보다 우리나라 차가 우수하다고 말한 것은 정치적 고려에서가 아닌 사실을 바탕으로 한 초의의 민족문화론이었다. 2004년 5월,지금 이 시간에도 한국의 많은 차인들은 조선의 중화사대론을 계승한 적자임을 긍지로 여기면서 중국 차문화를 선전하는 전도사로서 활보하고 있다.어찌 부끄럽지 않은가? 140여년 전 민족문화의 선각자 초의스님의 동다문화 앞에서 어찌 고개 들고 활보할 수 있는가? 부끄러워하라.또 부끄러워하라. ˝
  • [토요일 아침에] 자연의 상생 교훈/어연스님 대흥사 일지암 주지

    오월의 대지는 초록의 바다다.저 먼 우주에서 날아온 자연의 거대한 대해다.쏜살같이 불처럼 와락 대지에 달려들어 이산 저산 불을 놓는다.차를 따고 덖는 계절은 강산이 북을 치고 이땅을 초록으로 물들이는 계절인 것이다.사필귀정이라는 어구가 떠오르는 날이었다.온 국민을 혼란 속에 들이밀었던 사상초유의 대통령 탄핵이 대법원에 의해 기각이 된 날이기 때문이다.마치 한바탕 폭풍우가 지나간 뒤 그 물세례를 흠뻑 뒤집어 쓴 뒤의 허탈함이 가슴 한편에 차곡차곡 피어난다. 물은 어느 심산 한편에서 조용히 샘솟는다.그리고 골짜기를 따라 냇물을 이루고 강물을 이루고 바다로 나아간다.한방울의 물이 서로 만나 화해하고 상생해 큰 물줄기를 이루는 것이다.그 물들은 서로 다른 성격과 서로 다른 마음을 갖고 있지만 빠른 시간 내에 상생을 한다.자연은 그런 가르침을 우리에게 늘 가져다 준다.대통령 탄핵으로 시작된 나라의 혼란이 총선이란 큰 산맥을 넘어 대법원이란 야트막한 분지에서 연착륙한 것이다.그 어느때보다 지혜로운 살림살이를 우리 국민들은 보여줬다.총선에서의 ‘민심’,그리고 탄핵반대를 외치며 보여주었던 저 광화문 10만의 물결.역사의 기록 어느 한편을 찾아봐도 이런 경우는 없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교에서는 상생의 미덕을 가르친다.나의 살림살이가 바로 다른 사람의 살림살이와 연결되어 있고 그 살림살이를 나눔으로 인해 삶은 공고해진다는 것이다. 역사적 삶은 공동체적인 삶을 통해 상생으로 나아간다.그 상생의 가르침을 전해주기 위해 8년째 차 공동체를 꾸려보고 있다.순박한 시골청년들.그러나 그들의 가슴 속에는 대지에 대한 믿음이 가득하다.8년전 어느날 밤 7명의 청년들이 일지암을 찾아왔다.그들의 가슴속에는 무엇인가 형언할 수 없는 답답함이 서려있었다.차를 배우러 왔다는 그들의 가슴 속을 가만히 들여다봤다.무너지고 망가진 우리네 농촌현실이 그들의 가슴속에 담겨져 있었던 것이다.그들에게 무얼 전해주어야 할까.이 시대의 농민으로서,이 시대의 음식물을 책임지는 대지의 동반자로서 자신감을 전해주고 싶었다.그들에게 차 공동체를 제안했다.그러나 그들은 이땅 농촌의 현실이 사무치게 답답했음인지 쉽게 답을 주지 않았다.일주일에 한번 시간을 쪼개 일지암을 찾아오는 그들을 차근차근 설득했다.그들은 마침내 결심을 굳히고 차공동체를 함께 열기로 했다.첫 근거지를 해남 두륜산을 배경으로 하고 땅끝의 바다가 정원인 곳에 땅을 구입했다.그리고 돌과 나무만 무성하게 자란 그곳으로 삽과 곡괭이를 들이밀었다.2000평,3000평,한 해가 지나고 또 한 해가 지났다.5년이 지난 후 그 밭에서 첫 차를 따서 차를 만들었다.첫 차를 만들던 날 그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그리고 8년이 지난 지금 그들은 3만평이 넘는 거대한 차밭을 일궜다.그들은 자신의 살림살이를 좀 부족한 동료들에게 나누고 그 나눔을 통해 공동체의 소중한 의미를 깨달았다.그들은 자연과의 상생도 꿈꾼다.유기농에 모든 것을 손으로 하는 그들의 차 상표는 ‘손덖음 첫물차’다.이름 그대로 손으로 덖어낸 첫 차라는 뜻이다. 그들과 함께 지내는 다신제는 큰 의미를 지닌다. 다신제는 하늘과 땅 그리고 자연에 감사를 드리는 것이다.그들이 때 지난 제의식처럼 보이는 다신제를 지내는 것은 그들의 삶이 단순히 인간의 삶이 아니라 우주의 큰 흐름속에 존재하는 생명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그들이 지내는 다신제의 제물은 그들이 손수 만든 첫물차다.맑고 청아한 샘물을 길어와 화로에 따스운 물을 끓이고,순백색의 주전자에 물을 따르고,그 첫잔을 우주의 생명들에게 전하는 것이다.그리고 그들은 이렇게 기원한다.“우주의 생명있는 모든 것들에게 첫 마음을 담은 첫 차를 올리나이다.모두 오셔셔 흠향하십시오.” 어연스님 대흥사 일지암 주지˝
  • [사설] 田 감사원장의 ‘쓴소리’ 새겨야

    전윤철 감사원장이 이념 논쟁에 골몰하고 있는 정치권을 향해 쓴소리를 내뱉었다.전 원장은 지난달 30일 대한상공회의소 초청 간담회에서 해묵은 이데올로기 논쟁에 빠진 정치권을 질타하면서 국민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고 국가가 해야 할 일을 뒷받침해야 정당의 지속성을 얻을 수 있다고 꼬집었다.전 원장의 지적이 아니더라도 국민들로서는 열린우리당의 정체성이 ‘중도 진보’이고,한나라당은 ‘개혁적 중도 보수’를 표방한다는 사실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정체성보다는 구체적인 정책에서 어떤 자세를 취하느냐가 중요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정치권이 소모적인 이념 논쟁에서 벗어나 경제와 민생 챙기기에 앞장서 줄 것을 요구한다.정치권 스스로도 총선 직후 ‘선거운동 과정에서 확인된 민심은 경제 살리기’라고 하지 않았던가.그런 의미에서 우리 경제의 아킬레스건으로 꼽히는 내수 부진과 투자 위축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를 먼저 고민해야 한다고 본다.관련 장관들을 불러 신용불량자 문제와 경기 양극화,계층간 갈등,규제 완화 등을 따져야 한다는 뜻이다.또 어떻게 하면 기업이 마음놓고 투자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정부의 대책을 따져보고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그것이 정치권에 대한 국민들의 요구사항이다. 경제단체장들이 정동영 당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간담회에서 지적했듯이 민생과 경제 살리기에는 진보와 보수가 따로 있을 수 없다.기업이 투자를 통해 일자리를 만들어내고,서민들의 살림살이를 살찌우는 것이 정당의 첫번째 덕목이다.이러한 노력들이 계속될 때 정당의 이념과 정체성도 국민 사이에 뿌리내릴 수 있다.국민소득 1만달러의 늪에서 벗어나려면 고치고 바꿔야 할 것들이 너무도 많다.정치권이 정신차려야 할 이유다.˝
  • [北용천참사] 부상자 병상없어 캐비닛에 눕혀

    |단둥 오일만특파원·외신|북한 용천역 폭발사고 참상이 북한을 방문한 국제기구 관계자들에 의해 생생히 전해지고 있다.25일에는 사고 나흘 만에 세계식량계획(WFP) 관계자가 찍은,화상을 입은 북한 어린이의 동영상과 사진이 외신을 통해 공개됐다. 이 사진에서 허름한 간이 침대에 누워 있는 어린이들은 화상과 파편에 찢긴 상처로 얼굴이 성한 곳이 없을 정도였다.병상이 모자라 서류보관용 캐비닛에 누워 있는 모습도 눈에 띄었다. 4일 동안 병원 한 곳에서 15명의 환자가 숨질 정도로 약품과 장비 부족도 심각했다.25일 신의주에 있는 평안도 인민병원을 방문한 제럴드 부르케 WFP 대변인은 22일부터 25일까지 입원이 허용된 환자 375명 중 15명이 장비 부족 등으로 숨졌다고 26일 밝혔다. 어린이 중환자들은 폭발사고 당시 엄청난 강도의 빛에 노출,시력을 잃을 위기에 처해 있거나 열 폭풍에 심한 화상 등을 입은 것으로 확인됐다.이들 중 상당수는 오전 수업을 마친 후 집으로 가는 도중 사고를 당한 용천소학교 학생들로,이들의 얼굴은 화상과 상처로 온통 얼룩져 있었다. WFP의 아시아지역 담당자인 토니 밴버리는 “얼굴 상처를 대충 꿰맨 어린이들이 고통에 몸을 구르거나 신음하는 모습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면서 “어떤 어린이 환자는 이미 실명한 상태였다.”고 전했다. 25일 부상자들을 수용하고 있는 신의주 병원을 찾은 국제조사단원들도 “살면서 지금까지 접한 상황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장면 중 하나”라고 참담한 현지 상황을 소개했다.이들은 북한 현지의 의료시설 및 약품이 태부족인데다 비위생적이어서 추가 감염 우려가 높다고 우려하고 있다. 아이길 소렌슨 평양주재 세계보건기구(WHO) 대표는 폭발사고 당시 발생한 화학약품의 유독성 가스에 노출된 수천명의 피해자들이 심각한 부작용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한편 북한은 용천역 폭발사고에 따른 세부 피해상황을 26일 처음으로 공식 보도했다.북한 관영 조선중앙통신은 이날 해당기관 조사자료를 인용,“사망자수는 150여명,부상자수는 1300여명이며 행방불명자 수는 현재 조사중”이라고 밝혔다.또 “파괴된 공공건물과 산업 및 상업 건물수는 30여동이며 8100여 가구의 살림집이 파괴됐다.”고 말했다. oilman@seoul.co.kr ■ 北 “우린 한핏줄 더 많이 도와달라” |단둥 오일만특파원|26일 새벽부터 단둥(丹東)과 신의주 일대에 비가 내리는 가운데 중국과 국제 구호단체들이 지원하는 구호물자들이 속속 단둥에 집결,압록강의 중조우의교(中朝友誼橋)를 통해 북측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외국 지원물자로는 처음으로 중국이 보낸 의료품들이 25일 용천 사고현장에 도착했으며,국제 구호단체들도 26일 단둥으로 몰려들어 본격적인 지원활동에 착수했다. 중조우의교 맞은 편에 위치한 단둥 세관에는 이날 오전부터 구호품을 실은 랴오닝(遼寧)성 차량들이 몰려들어 혼잡을 빚었다.이날 하루만 50대 안팎의 트럭이 용천으로 떠난 것으로 알려졌다.지원물품은 대부분 모포와 텐트,라면 등 긴급구호용품과 화상치료용 의약품,복구에 쓰일 건자재들이다. 북한 선양 총영사관에서 파견된 외교관들이 직접 나서 지원물품의 북송 작업을 지휘하는 모습도 보였다.익명을 요구한 한 북한 관리는 “신의주에 의약품이 부족해서 직접 단둥으로 나왔다.”며 “남북한은 같은 동포니까 다른 나라보다 더 많은 도움을 줘야 한다.”고 동포애를 강조하기도 했다. 단둥시 소재 조선민족경제협력련합회(민경련) 관계자들도 단둥한국인회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한국 민간단체 등의 구호지원에 대해 “동족의 마음으로 고맙게 생각한다.”며 감사의 뜻을 전달했다.중국 정부는 사고 수습지원을 위해 트럭 300대 분량의 구호·복구용 자재를 북한에 무상 지원할 것으로 알려졌다.미국 포틀랜스시에 본부를 둔 자비군단(MERCY CORPS) 등 국제구호 단체들의 지원물자들도 신속하게 단둥을 거쳐 북한으로 들어갔다. ˝
  • [마당] 이미지와 감성정치/유성호 한국교원대 문학평론가 교수

    ‘악어의 눈물’이란 말이 있다.나일 강에 사는 악어가 사람을 잡아먹고 난 후 눈물을 흘린다는 이집트 전설에서 비롯된 말이다. 영국의 문호 셰익스피어도 여러 번 인용하고 있는 이 말은 위선자의 거짓 모습을 비유할 때 흔히 사용된다. 특히 선거에 이긴 정치인이 패배한 정적(政敵) 앞에서 가슴 아픈 표정을 지을 때 많이 쓰인다.실제로 악어는 먹이를 먹을 때 눈물을 흘리는데,이는 눈물샘 신경과 입을 움직이는 신경이 같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악어의 눈물’은 감동이나 참회의 순간에 솟구치는 진실한 눈물이 아니라,전략적이고 계산적인 속내에서 나오는 건조한 물질일 뿐이다. 지난주에 막을 내린 제17대 총선에서 각 정당의 지도자들은 ‘눈물’과 ‘읍소(泣訴)’를 통해 감성과 이미지 중심의 선거운동을 했다.이를 두고 상대방에서는 ‘악어의 눈물’이니까 속지 말라고 국민들에게 일급 경계령을 내렸다.이러한 감성과 이미지의 정치는 당사를 천막이나 공판장으로 옮겨 부패와의 절연을 상징적으로 보인다든가,삼보일배 장면이나 회초리 맞는 방송 광고를 통해 그동안 민의를 등진 것에 대해 참회하는 모습을 보인다든가,단식이나 전격 사퇴 등을 통해 실언을 반성하는 모습을 보인다든가 하는 다양한 모습으로 나타났다.따지고 보면 모두 선거의 핵심 장치인 정책과 비전 제시보다는 유권자의 감성과 이미지에 호소하는 것들이었다. 이같은 감성과 이미지 중심의 정치 혹은 선거 문화를 향해 이 나라 주류 언론들은 한결같이 강력한 비판의 포문을 열었다.정책과 인물을 통한 승부가 아니라,감성과 이미지 정치로 선거의 본질을 훼손하고 있다는 것이 그들의 주된 논지였다. 대중의 합리적 선택을 가로막고 집단적 최면을 부추기는 ‘눈물’과 ‘읍소’의 포즈에 대한 이러한 경계와 비판은 그 자체로 매우 정당한 것이다.특히 미디어 선거가 본격적으로 뿌리내린 이번 선거에서 이 같은 이미지 메이킹의 범람은 진정한 대의 민주주의의 정착에 일정한 역기능을 초래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이같은 감성과 이미지 중심의 선거문화를 적극적으로 부추기고 확산시킨 것 또한 언론이라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는 언론의 확연한 이중성을 발견한다.우리 주류 언론은 ‘탄풍’ ‘박풍’ ‘노풍’ ‘추풍’ 등 온갖 조어(造語)를 만들어가면서 선거 유세 현장의 감성적 이미지 확산과 상징 조작에 공을 들였고,한편으로 각 정당더러는 이미지 정치를 삼가라고 권고하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감성이나 이미지가 합리성과 반드시 적대적인 것은 아니다.감성과 이성은 서로 다른 영역에서 인간의 판단 행위를 상보적으로 규율하기 때문이다.그리고 이미지를 완전히 거세한 순수 객관의 실체는 정치문화에 존재하지 않는다.정책정당임을 자임한 민주노동당의 권영길 대표조차도 지난 대선에서 “여러분 행복하십니까.살림살이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감성적 언어로 진보정치를 친숙하게 체험하도록 하지 않았는가. 따라서 중요한 것은 감성 속에 담긴 내용일 것이다.이번 선거에서 국민들은 진정한 참회가 없는,정치적 계산만 있는,지역주의의 부활을 호소하는,때늦은 ‘악어의 눈물’만은 철저하게 외면했다.이번 선거에서 우리가 얻은 또 하나의 성과이다. 유성호 한국교원대 문학평론가 교수 ˝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야무진 꿈

    사는 일에 지쳤을 때 훌쩍 떠나는 데가 있다.훌쩍이란 말을 쓸 정도로 가깝지도 않고 교통편도 좋지 않은 네팔이란 나라를 그렇게 친근하게 느끼는 것은 아마 그곳 사람들의 선하고 편안한 표정과 내 따위가 감히 정복할 엄두를 낼 수 없는 장엄한 히말라야의 은빛 연봉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의 트레킹은 운동 삼아 하는 걷기하고도 등산하고도 다르다.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여서 2000m가 넘는 고지까지도 개간을 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직립(直立)에 가깝게 경사가 급한 산지를 개간했기 때문에 우리의 다랑이논보다도 폭이 협소하여 위에서 내려다보면 지도에 그려 넣은 등고선처럼 보인다.농지가 있으니까 농가도 있지만 몇 호 안 되는 마을도 옆으로가 아니라 상하로 발달되어 있다.트레킹 코스는 그런 농지와 마을을 거치게 돼있다.가파르지만 않다면 논밭에서 자라는 작물이나 심심할 만하면 나타나는 마을이 우리의 옛날 농촌의 나그네 길과 다를 것이 없다.어디까지 도달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없기 때문에 무리해서 걷지 않아도 되는 것도 내 성미에 맞는다.안나푸르나를 향해 온종일 걸어도 다음날 아침에 바라보면 그 아름다운 봉우리는 내가 가까이 간 만큼 물러나 있다.정상 언저리에서 눈보라가 이는 것까지 앞산처럼 지척으로 보이지만 내 생전에 거기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경사가 급하기도 하려니와 위대한 것을 감히 내 발로 밟아 보려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저절로 쉬엄쉬엄 걷게 되고 그러다 보니 거치게 되는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마을이라도 온 듯 기웃대도 그만이다.봉당 비슷한 부엌의 단순 소박한 살림살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도 어릴 적의 우리 시골의 농가와 다르지 않다.그러나 영양실조의 씻지 못한 어린이가 흙바닥에서 뒹구는 걸 보면 생존을 오직 가파르고 척박한 산지에 짓는 농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절감하게 된다. 금년에 그 땅을 다시 밟았을 때였다.새벽녘에 그 고지 마을에서도 학교 가는 아이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가슴이 울렁대는 감동을 맛보았다.산뜻한 교복과 다 자란 키로 봐서 초등학생은 아니었다.남학생도 있었지만 여학생도 있었다.여학생의 깨끗한 운동화와 흰 목 양말과 건강한 종아리가 눈부셨다.그 나라에도 물론 도시에는 학교도 있고,스쿨버스까지 다니고 있는 걸 보았지만 두 다리 외의 교통수단이 없는 고지의 농촌에서 그런 대처의 학교까지 가려면 젊은 건각으로도 두세 시간은 보통이라고 한다. 남존여비가 더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후진국에서 아들도 아닌 딸을 저 정도로 가꾸어 학교에 보내려면 본인의 각오도 비상해야겠지만 그 어머니의 노고는 도대체 얼마만한 것일까.그건 엄마들이 딸에게도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생생한 증거였다.나는 엄마들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 집안의 이익과 노후대책을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인데 비해 딸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더 원대한 꿈을 건다고 믿고 있다.내 어머니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면서 귀 따갑게 하신 말씀이 ‘너는 나 같은 세상 살지 말아라.’였기 때문이다.그게 바로 세상을 바꾸라는 비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나라에서도 어머니들이 딸에게도 꿈을 가지고 교육시키기 시작한 이래 남성의 독무대로 돼있던 각계각층의 전문직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되었다.이번 국회가 종전의 국회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도 의원의 연령이 대폭 젊어졌다는 것과 여성의원의 증가라고 한다.걱정도 팔자인 노파심인지는 모르지만 경험 없는 젊은 초선의원의 대거진출이 썩은 정치판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보다는 오만불손하고 객기 넘치는 말잔치나 구경하게 되면 어쩌나 미리 넌더리부터 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번드르르한 말잔치의 시초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상생과 화해의 정치를 하겠다는 승자의 변이 솔깃하게 들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아마도 각 당에 고루 분포된 여성의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상생과 화해의 정치의 실현성을 아직은 극소수인 여성의원에게 건다면 꿈도 야무지다 하겠으나 정말이지 간곡한 마음으로 빈다.여성의원들이여,국회를,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걸로 돼 있는 그 고약한 정치판을 한번 확 바꿔보라고.˝
  • [박완서의 살아가는 이야기] 야무진 꿈

    사는 일에 지쳤을 때 훌쩍 떠나는 데가 있다.훌쩍이란 말을 쓸 정도로 가깝지도 않고 교통편도 좋지 않은 네팔이란 나라를 그렇게 친근하게 느끼는 것은 아마 그곳 사람들의 선하고 편안한 표정과 내 따위가 감히 정복할 엄두를 낼 수 없는 장엄한 히말라야의 은빛 연봉 때문일 것이다. 그곳에서의 트레킹은 운동 삼아 하는 걷기하고도 등산하고도 다르다.국토의 대부분이 산악지대여서 2000m가 넘는 고지까지도 개간을 해서 농사를 짓고 있다.직립(直立)에 가깝게 경사가 급한 산지를 개간했기 때문에 우리의 다랑이논보다도 폭이 협소하여 위에서 내려다보면 지도에 그려 넣은 등고선처럼 보인다.농지가 있으니까 농가도 있지만 몇 호 안 되는 마을도 옆으로가 아니라 상하로 발달되어 있다.트레킹 코스는 그런 농지와 마을을 거치게 돼있다.가파르지만 않다면 논밭에서 자라는 작물이나 심심할 만하면 나타나는 마을이 우리의 옛날 농촌의 나그네 길과 다를 것이 없다.어디까지 도달해야 된다는 강박관념이 없기 때문에 무리해서 걷지 않아도 되는 것도 내 성미에 맞는다.안나푸르나를 향해 온종일 걸어도 다음날 아침에 바라보면 그 아름다운 봉우리는 내가 가까이 간 만큼 물러나 있다.정상 언저리에서 눈보라가 이는 것까지 앞산처럼 지척으로 보이지만 내 생전에 거기 도달할 수 없다는 걸 왜 모르겠는가.경사가 급하기도 하려니와 위대한 것을 감히 내 발로 밟아 보려는 욕심이 없기 때문에 저절로 쉬엄쉬엄 걷게 되고 그러다 보니 거치게 되는 마을의 이 집 저 집을 마을이라도 온 듯 기웃대도 그만이다.봉당 비슷한 부엌의 단순 소박한 살림살이가 한눈에 들어오는 것도 어릴 적의 우리 시골의 농가와 다르지 않다.그러나 영양실조의 씻지 못한 어린이가 흙바닥에서 뒹구는 걸 보면 생존을 오직 가파르고 척박한 산지에 짓는 농사에 의지해야 한다는 게 얼마나 고통스러운가를 절감하게 된다. 금년에 그 땅을 다시 밟았을 때였다.새벽녘에 그 고지 마을에서도 학교 가는 아이가 있다는 걸 발견하고 가슴이 울렁대는 감동을 맛보았다.산뜻한 교복과 다 자란 키로 봐서 초등학생은 아니었다.남학생도 있었지만 여학생도 있었다.여학생의 깨끗한 운동화와 흰 목 양말과 건강한 종아리가 눈부셨다.그 나라에도 물론 도시에는 학교도 있고,스쿨버스까지 다니고 있는 걸 보았지만 두 다리 외의 교통수단이 없는 고지의 농촌에서 그런 대처의 학교까지 가려면 젊은 건각으로도 두세 시간은 보통이라고 한다. 남존여비가 더 많이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후진국에서 아들도 아닌 딸을 저 정도로 가꾸어 학교에 보내려면 본인의 각오도 비상해야겠지만 그 어머니의 노고는 도대체 얼마만한 것일까.그건 엄마들이 딸에게도 꿈을 가지기 시작했다는 생생한 증거였다.나는 엄마들이 아들에게 거는 기대는 한 집안의 이익과 노후대책을 바라는 지극히 이기적인 것인데 비해 딸에게는 이 세상을 바꾸기를 바라는 더 원대한 꿈을 건다고 믿고 있다.내 어머니가 척박한 환경에서도 딸에게 최고의 교육을 시키면서 귀 따갑게 하신 말씀이 ‘너는 나 같은 세상 살지 말아라.’였기 때문이다.그게 바로 세상을 바꾸라는 비원이 아니고 무엇이랴. 우리나라에서도 어머니들이 딸에게도 꿈을 가지고 교육시키기 시작한 이래 남성의 독무대로 돼있던 각계각층의 전문직 분야에 여성의 진출이 두드러지게 되었다.이번 국회가 종전의 국회와 두드러지게 다른 점도 의원의 연령이 대폭 젊어졌다는 것과 여성의원의 증가라고 한다.걱정도 팔자인 노파심인지는 모르지만 경험 없는 젊은 초선의원의 대거진출이 썩은 정치판에 신선한 바람을 불어넣으리라는 기대보다는 오만불손하고 객기 넘치는 말잔치나 구경하게 되면 어쩌나 미리 넌더리부터 나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번드르르한 말잔치의 시초에 불과할지도 모르는 상생과 화해의 정치를 하겠다는 승자의 변이 솔깃하게 들린 것은 무슨 까닭일까.아마도 각 당에 고루 분포된 여성의원들 때문이었을 것이다.상생과 화해의 정치의 실현성을 아직은 극소수인 여성의원에게 건다면 꿈도 야무지다 하겠으나 정말이지 간곡한 마음으로 빈다.여성의원들이여,국회를,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걸로 돼 있는 그 고약한 정치판을 한번 확 바꿔보라고.
  • [삶과 경영 이야기 ④] 삼성생명 23년연속 ‘보험왕’ 송정희 팀장

    이루기보다 지키기가 더 힘든 게 비즈니스 세계의 현실이다.23년 연속 보험왕 수성(守城)과 14년 연속 100만달러 판매기록 유지는 그래서 더 빛난다.송정희 팀장은 “아무리 높이 쌓은 탑도 단 한번의 방심에 무너져 내린다.”는 말로 인터뷰를 시작했다.평범한 전업주부에서 최고의 보험세일즈맨이 되기까지 지독한 자기수련과 자기최면 등 험난했던 과정을 들어봤다. ●‘사모님’에서 ‘보험아줌마’로 -1980년 1월은 정말 추웠다.남편 사업(건축업)이 폭삭 망했다.남부럽지 않던 48평 큰 집에서 3평 남짓 월 3만원짜리 단칸 사글세 방으로 내려앉았다.눈덩이처럼 불어난 빚은 평생 일해도 못갚을 것 같았다.죽을 결심도 해봤지만 그러기엔 여덟살과 여섯살 난 아이들이 가여웠다. -쌀 한 톨이 아쉽던 때,현실은 절망에 취해 있을 잠시의 여유도 주지 않았다.이웃의 권유로 보험을 시작했다.그해 2월이었다.우선 발이 넓었던 남편 친구들과 친척들을 상대로 영업을 했다.난생 처음 내 손으로 번 돈이었다.액수에 상관없이 너무 기뻐 잠자리에서 몰래 1000원짜리 돈냄새를 맡아보기도 했다.2개월째 들면서 “돈버는 게 별 것 아니구나.”하는 우쭐한 생각까지 들었다.하지만 그것은 자만이었다.보험을 부탁할 친구와 친척들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3개월째로 접어들자 더 이상은 문 두드릴 데가 없었다. -“뭐가 문제일까.” 고민이 시작됐다.문제는 내 속에 있었다.납입기간이 길고 끝까지 돈을 부어야 하고,해약하면 큰 손해를 보는 상품들.나라면 이런 상품에 선뜻 가입할까.그런 상품을 왜 들어야 하는지 사람들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대답은 ‘노(No)’였다.“보험계약 한 건 하면 수당이 얼마냐.”고 묻는 고객에게 “그런 거 계산할 줄도 모르고 얘기하고 싶지도 않다.”고 쌀쌀맞게 대꾸하던 나였다.알량한 자존심.그때까지도 내 안의 나는 ‘사장부인’이었지 ‘보험아줌마’가 아니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청량리부터 제기동,동대문을 거쳐 종로5가까지 그냥 걸었다.다들 나와 똑같은 사람들인데,왜 나는 사람들 만나기가 두려운 걸까.작은 수첩을 샀다.청량리와 종로5가 사이에 있는 모든 상점의 이름들을 적어갔다.한 번 방문할 때마다 ‘바를 정(正)’을 한 획씩 그어나갈 심산이었다.한 상점에 正자 두 개씩 10번을 채우자는 목표였다. -“개시도 하기 전에 아침부터 재수없게 보험쟁이가 왔느냐.” 처음 들어간 청량리의 한 약국에서 나는 약사의 욕설과 함께 물벼락을 맞는 기가 막힌 봉변을 당했다.시계를 봤다.오전 10시였다.열정만 있었지 전략이 없었다.그때부터 방문시간을 내가 아닌 상대방에게 맞췄다.오전에는 방문대상의 성향을 파악하고 실제 방문은 오후 1시에 시작했다.오뉴월 땡볕은 온몸을 때렸다.부르트고 물집 잡힌 발은 감각이 없었다.불과 몇달 전의 ‘사모님’은 흔적도 없었다.열흘째 되던 날,아홉번째 방문했던 식당주인 아주머니가 “눈빛이 선해 보인다.”며 보험을 들어줬다.첫 수확이었다.자신감이 붙었다.동대문∼종로5가 상점이름 옆에는 더욱 빠르게 ‘正’자가 쌓여갔다. -월 보험료 1만 2500원을 받기 위해 7∼8시간 걸리는 지방까지 다니기도 했다.81년에는 군부대 지역인 경기도 연천군 대광리에 수금하러 갔다가 갑작스러운 군작전으로 통행이 금지됐다.날은 어둑어둑해지는데 아이들과 남편은 어떻게 하나.하지만 이왕 이렇게 된 것 어쩔 수 없었다.용기를 내어 이장 아주머니를 찾아갔다.집집마다 방문할 수 있게 해달라고 졸랐다.스무 집을 방문해 여섯 건의 보험계약을 따냈다.하지만 신출내기 보험사원을 더 기쁘게 한 것은 ‘용기’라는 선물이었다. -이듬해 초에 신입직원에게만 주는 영업사원상을 탔다.그런데 3등이었다.억울했다.누구보다도 많이 뛰었는데.“왜 내가 1등이 아니냐.”고 선배에게 따졌다.그는 부잣집 딸들은 노력을 안해도 된다고 했다.‘나의 환경이 안 좋으니까,스스로 좋은 환경을 만들도록 더욱 힘써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게으른 사람은 돈 만지려고 해선 안된다.”는 어릴 적 아버지 말씀을 되새겼다.주말에도 출근했다.나의 월요일 실적은 남들과 비교가 안됐다.통상 월요일은 주말에 쉬는 탓에 계약실적이 떨어진다.실컷 놀고서 다른 사람들이 훑고 지나간 자리에 가봐야 얻을 것은 허탈함밖에 없다. -약속장소에는 반드시 10분 일찍 나갔다.상대방이 나를 기다리며 스트레스를 받으면 이후 대화에서 엄청난 손해를 본다.출근시간도 마찬가지다.당시 보험설계사들은 오전 10시가 넘어서야 나왔지만 나는 오전 8시 이전에 회사에 도착해 그날 할 일을 챙겼다.한때 동료들은 나를 ‘버스 차장’이라고 불렀다.서울시내 버스노선을 모두 외우고 있었기 때문에 고객을 방문할 때마다 나에게 몇번 버스를 타야 되느냐고 묻곤 했다.나는 고객들의 전화번호도 다 외웠다.자나 깨나,앉으나 누우나 오직 고객 생각뿐이었으니 안 외워지는 게 오히려 이상했다.투자도 적지않이 했다.제주산 갈치를 고객 가정으로 배달시켰고,때가 되면 인절미를 맞춰 보냈다.이러한 노력 덕분에 한꺼번에 120억원(보험료)짜리 계약을 성사시킨 적도 있다. ●“내 보험 들어야 당신 빚 갚는다” -생각을 바꾸면 모든 상황을 나에게 유리한 쪽으로 이끌 수 있다.84년 어느날 퇴근을 했더니 집안이 온통 빨간 딱지투성이였다.살림이 좀 펴지자 사업을 재개한 남편이 다시 약속어음을 남발,차압이 들어온 것이었다.4년 전 아픈 기억이 떠오르며 왈칵 눈물이 솟았다.빚쟁이들을 만났다.“당신이 나에게 보험을 들어야 내가 당신 빚을 갚을 수 있다.”고 당당하게 말했다.목 디스크로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병원을 내 텃밭으로 삼았다.의사와 간호사,심지어 옆 침대 환자까지 고객으로 만들었다.병원에 있는 한 달 동안 72건의 계약을 성사시켰다. -부자는 부자를 몰고 다닌다.고객 한 명을 잡으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소개를 받는다.처음 VIP 고객 한 사람을 확보하는 것은 어렵지만 두 번째는 쉬워지고 세 번째는 더 쉬워진다.한 사람에게 신뢰를 얻으면,그 사람이 협력자가 돼 또 다른 VIP 고객을 소개해 주기 때문이다.계약액도 크다.돈 2000원 내는 사람은 어렵게 내지만,3만원 내는 사람은 쉽게 낸다. -98년 외환위기 때였다.한 건물임대업자가 입주자들이 빠져나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그에게 “회장님,제가 입주자들을 몰아오겠습니다.하지만 제 보험을 큰 걸로 하나 들어주셔야 합니다.” 나는 고객 리스트와 삼성생명 본사를 총동원해 사무실이 필요한 사람들을 물색했다.10개층 사무실들이 대부분 채워졌다.임대업자는 고맙다며 무려 1200만원짜리 보험을 계약했다.그는 나를 ‘송팀장’이 아닌 ‘송선생’이라 부른다.“나는 이분 마음 속에서 컨설턴트로서 자격증을 땄구나.”라는 생각에 뿌듯했다.다른 고객들도 나를 단순한 ‘보험인’으로만 생각하지 않는다.주택 임대부터 자녀 혼사에 이르기까지 생활 전반의 모든 문제를 상담하러 온다.나 역시 그들과 살아가는 삶이 행복하다. -고객에 대한 친밀감이 전부는 아니다.영업의 통로가 열려야 한다.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상대방이 보험에 가입할 준비가 돼 있는지 파악하는 게 중요하다.나는 고객을 만나기 전 그 사람의 성향을 파악하는 데 시간의 50% 이상을 투자한다.출근한 뒤 1시간 동안 인터넷을 통해 뉴스를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잘 안풀릴 땐 무조건 활동량 늘려 -솔직히 한다고 하는데도 안될 때가 많다.명색이 ‘보험왕’인데 1주일에 한 건도 못할 때가 있다.이럴 때는 무조건 활동량을 늘린다.10건을 뛰어 1건을 성사시켰다면 100건을 뛰면 10건이 성사될 것 아닌가.반면 실패하는 사람들은 밖으로 나가길 꺼린다.대개 전화통을 붙잡는다.하지만 전화야말로 가장 거절받기 좋은 수단이다.내 진심이 상대방 가슴에 꽂히기 전에 끊겨버린다.한때 유명했던 보험왕들이 소리없이 사라져 버리는 가장 큰 이유다.한마디로 현실 안주다.계속 관리해야 할 고객들의 얼굴을 생각하면 그럴 수 있을까. -고객들은 나에게 천사같은 존재다.그들이 있었기에 내가 빚을 모두 갚을 수 있었고 밥을 먹을 수 있었고 아이들을 키울 수 있었다.나는 송정희라는 이름 석자를 하나의 주식회사로 시장에 올리고 싶다.매일매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업그레이드되는 나 자신을 보고 싶다.객관적인 자료로 나 자신을 평가하고 내 자신의 주가가 올라가는 기쁨과 주가가 내려갈 때의 공포스러운 긴장감을 함께 느끼고 싶다. ■ 송정희 팀장은 송정희(宋貞姬·57)씨는 삼성생명은 물론 삼성그룹 내에서도 기록제조기로 통한다.우선 국내에 한 명뿐인 ‘100만달러 원탁회의(MDRT-Million Dollar Round Table)’ 종신회원이다.연간 보험계약 실적 100만달러(약 12억원) 이상인 사람들의 전세계 모임인 MDRT는 10년 연속 자격을 유지해야 종신회원이 될 수 있다.송 팀장은 1991년 이후 MDRT 자리를 지켜왔다.80년 보험업에 뛰어든 이후 지난해까지 단 한 차례도 사내 보험왕 타이틀을 놓치지 않은 것 역시 유일하다.올 1월 이건희 삼성 회장으로부터 받은 ‘자랑스러운 삼성인상’은 보험 세일즈맨으로 최초일 뿐 아니라 삼성그룹 정식 임직원이 아닌 사람 중에서도 처음이다. 공식직함은 삼성생명 서울 종각지점 수석팀장.현재 그의 고객은 1800명.지난해 300여건의 보험계약을 성사시켰다.연봉은 5억 7000만원.매월 250만원씩 연간 3000만원을 불우이웃돕기 성금으로 내놓고 있다.연봉의 5%가 넘는다.지금까지 받은 2억원가량의 상금도 전액 사회복지단체에 기부했다.나누고 베푸는 미덕도 지닌 아름다운 ‘철의 여인’이다. 정리 김유영기자 carilips@˝
  • [총선 D-12] 한나라 “지옥이 따로없네”

    한나라당 사람들은 2일 겨울옷을 다시 꺼내 입었다.비온 뒤 기온이 뚝 떨어진 탓도 있다.하지만 여의도 벌판에 부는 바람은 유난스럽다.‘천막당사’,‘컨테이너당사’에는 겨울과 여름이 공존한다.햇빛이 쬐는 낮엔 때론 덥다.오후 4∼5시가 되면 스산해진다.춘사월에 석유 난로가 필수 장비다. ●당직자·기자 모두 ‘피난민 신세’ 한나라당 당사는 ‘준비 안된 당사’다.하드웨어도,소프트웨어도 부실하다.9일째 쉬지 않고 보완해도 모자란다.기존의 초호화 당사와 비교가 안된다.당직자든,기자든 모두가 때아닌 ‘피난민’ 신세다. 기자들은 ‘천막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다.역시 천막에 설치한 종합상황실도 마찬가지다.기자실에는 바람이 매섭다.황사가 불 때는 노트북PC,책상에 누런 먼지가 수북하게 쌓인다.입 안에 모래알이 씹힐 정도다.일부 기자들은 마스크를 쓰고 기사를 송고한다. 극심한 소음 또한 참기 어려운 공해다.아파트 모델하우스 철거로 연일 굉음이 요동친다.바람 불면 천막 펄럭이는 소리에 귀가 멍해질 정도다.스피커를 통한 언론 브리핑도 제대로 안 들린다.전화 취재마저 어렵다.“본드를 흡입한 듯 머리가 띵해진다.”는 푸념은 곳곳에서 들리고 있다. 통신 설비는 최악이다.특히 인터넷은 수시로 끊긴다.며칠새 바이러스까지 침투했다.기자들은 급격히 떨어진 인터넷 속도에 속을 태워야 했다.한국이 초고속 인터넷 세계 1위라는 명성도 이곳에서는 예외다.일부 언론사들은 견디다 못해 ‘딴살림’을 차렸다. ●대표실·기자실 ‘빗물 전쟁’ 전날 비가 오자 박근혜 대표실에는 빗물이 줄줄 샜다.천막 속의 기자실,상황실에도 빗물이 고였다.여직원들은 흥건하게 고인 빗물을 빼내느라 하루종일 진땀을 뺐다.사무처 요원들은 뒤늦게 천장을 수리하는 등 부산을 떨어야 했다. 중앙당과 후보간 채널 역시 여의치 않다.각 선거구에서 뛰고 있는 후보들이 중앙당측과 연락하기도 쉽지 않다.처음엔 전화시설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아 불편을 가중시켰다.부랴부랴 통신설비를 구축했지만 의사소통 체계는 여전히 불안정하다.책임자가 자리를 비우는 사무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내부에서는 ‘가장 화려한 게 화장실’이라는 자조 섞인 농담을 주고받는다.하지만 그마저도 제대로 관리되지 않고 있다.휴지도 떨어지기 일쑤이고,손 씻을 비누는 이날에야 갖다놨다. ●선장 없는 한나라號 대표실에는 대표가 없다.박 대표는 연일 ‘총선투어’에 몰두하고 있다.박 대표와 ‘투톱’인 박세일 공동선대위원장은 얼굴 보기가 어렵다.불쑥 나타났다가 금세 사라지는 게 일상이다.이날 오전 몇 시간 정도 머문 게 지금까지의 최장 체류시간이다. 수뇌부의 공백은 중앙당의 통제력을 급격히 떨어뜨리고 있다.지금까지 각 선거구에 지원 보낸 중앙당 요원은 100명 정도.추가 지원요청이 쇄도하지만 결재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되지 않고 있다.결재해야 할 대표도,선대위원장도,총장도,선대본부장도 거의 자리에 없기 때문이다. 윤여준 선대위 부본부장이 상근하는 최고위 간부다.선거전략회의는 실무자들만 움직이고 있다. 조직은 마비 직전까지 갔다가 겨우 정상화되는 상황이다.이상득 전 총장이 두 번이나 퇴진 의사를 밝히면서 한때 와해 위기를 맞았다.비례대표 인선 때 사무처 출신이 홀대받자 손을 놓은 요원들이 줄을 잇기도 했다. 게다가 박세일 공동선대위원장의 ‘아픈 한마디’가 사무처 요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린 주요인으로도 꼽힌다.그가 ‘사무처 요원들은 개혁대상’이라는 발언을 한 것으로 알려지자 불만이 팽배해 있다. 박대출기자 dcpark@˝
  • [총선 D-12] 105세 할머니 찾아 ‘경로공약’

    “튀어야 당선된다.” 2일 공식 선거운동에 들어간 후보들은 인라인 스케이트,홈페이지 등의 갖가지 아이디어를 동원해 이색적인 방법으로 표밭갈이를 시작했다. ●서울 은평을의 한나라당 이재오 후보는 홈페이지에 젊은 네티즌 사이에 인기를 모은 ‘당근송’ 분위기의 노래를 싣고 ‘이재오 일기장’ 코너에서 아들과 딸에게 보내는 편지를 통해 정치적 신념을 밝혔다.중구의 민주당 김동일 후보는 홈페이지에 ‘중구청장으로서 좋은 추억’란을 만들어 구청장 시절의 성과를 공개했고,동작을의 열린우리당 이계안 후보는 현대와 현대자동차 시절의 경험을 설명하며 ‘경제 전문가’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부산 남구갑의 열린우리당 박재호 후보는 선거 사무실에서 자신의 총선 공약 등을 담은 가로 30㎝,세로 20㎝,높이 20㎝ 크기의 타임캡슐 봉인식을 가졌다.부산진갑의 같은 당 조영동 후보는 당원들과 헌혈 행사를 할 계획이었으나 위법이라는 선관위의 해석에 따라 통보를 받고 행사를 취소했다. ●대구 수성구 두산 오거리에는 오전 6시부터 수성구을 입후보자인 주호영·김성현·윤덕홍·안준범·남칠우 후보와 선거운동원들이 무개차 등을 타고 나와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안간힘.이들은 출근길 시민들에게 상체를 90도 숙인 채 깍듯이 인사를 하며 지지를 호소했다.일부 후보측은 도로 중앙에 차를 세워놓고 선거운동을 벌여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기도. ●광주 동구의 민주당 김대웅 후보는 광주에서 동구가 노인 인구 비율이 가장 높은 현실을 감안해 동구 지역 최고령 유권자인 학운동 무등파크아파트 문가미(105)할머니를 찾아 앞으로 노인복지 증진에 노력하겠다고 약속. ●인천 계양구의 한 후보는 인천 스포츠의 상징인 프로축구 ‘유나이티드’와 프로야구 ‘SK와이번스’의 유니폼을 입고,유세에 나서 눈길.중·동·옹진의 후보는 선거유세 차량에 형광등을 설치해 자신의 대형 사진을 부착,낮과 밤의 구별없이 지역구를 돌며 자신의 얼굴을 알렸다.남동갑의 후보는 1400만원을 들여 프로젝트TV 유세차량을 통해 3∼5분짜리 후보 홍보 동영상 5편을 방영할 계획. ●강원 최대 규모의 선거구인 영월·태백·정선·평창의 무소속 박정렬 후보는 수행원 없이 나홀로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선거운동에 나서 출근길 시민들로부터 격려의 박수를 받기도. ●충북 충주의 한나라당 한창희 후보는 엽기 노래로 어린이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는 ‘올챙이송’을 “젊은 정치,깨끗한 정치,한창희가 책임지니 충주 발전 쑥,서민 살림쑥”으로 바꿔 어린이들을 통한 구전에 나섰다. ●충남 한나라당 이회창 전 총재가 한식(5일)을 앞두고 선영을 참배하기 위해 고향인 충남 예산을 방문했다.이 전 총재는 낮 12시쯤 부인 한인옥 여사와 동생 회성씨 등 가족과 함께 승용차 편으로 예산에 도착,예산읍 예산리와 신양면 녹문리 선영을 잇따라 참배했다.그는 탄핵정국과 4·15 총선의 성격 등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에 얘기하자.”며 말을 아꼈다.이 전 총재는 한나라당 예산군 전당사무소(위원장 홍문표)를 방문해 지구당 관계자들과 10여분 동안 대화를 나눴다. 정당팀˝
  • [기고] 수협위기는 어촌의 위기다/유정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자원관리팀장

    우리나라 수협은 수협중앙회를 정점으로 지구별조합 75개,업종별조합 21개,수산물가공조합 2개 등 총 98개 회원조합으로 구성돼 있다.어업인구 23만명 중 약 70%인 16만여명이 조합원이니,수산업에 종사하는 대부분의 수산인들이 수협 조합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 수협은 이념의 위기,신뢰의 위기,경영의 위기에 빠져 있다.매우 심각한 상태다. 외환위기 이후 미적립된 충당금 8300여억원을 일시에 적립하면서 7000여억원의 적자가 발생했다.회원조합 중 66%인 64곳은 자본잠식 상태에 빠지게 돼 부도위기 상황에 이르게 된 것이다.이러한 위기상황은 상부기관인 수협중앙회도 예외가 아니다. 수협중앙회의 업무는 크게 신용사업부문과 경제 및 지도사업 등 비신용사업부문으로 구분된다.신용부문의 엄청난 부실을 막기 위해 2001년 1조 1581억원에 이르는 공적자금이 긴급 수혈돼 겨우 위기를 넘긴 상태다.반면 경제부문은 공적자금 투입과 연계해 1800여억원의 자본적립금 전액이 잠식돼 가뜩이나 어려운 살림살이가 더욱 어렵게 돼버렸다. 수협 부실이 나하고 무슨 상관이 있기에 그렇게 호들갑이냐고 핀잔하는 이들도 없지 않을 것이다.대부분 일반국민들은 수협 부실로 인해 직접적인 피해가 없을 수도 있다.하지만 조합원이나 수협과 거래하고 있는 국민들은 당장 경제적인 피해를 보게 된다.나아가서는 어촌경제 붕괴,수산업의 위기로 이어져 국가 전체적으로도 큰 영향을 준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수협 부실의 일차적인 원인은 충당금의 일시 적립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보다 근원적인 원인은 우리 수산업의 지속적인 침체,협동조합으로서의 본연의 기능 상실,그리고 비전문적이고 방만한 조직운영 및 경영 등 복잡하고 다양하다. 당장 급한 불은 심각한 경영부실을 막는 일이다.단기적으로는 정부의 자금지원 등을 통해 위기를 넘기고 나서 부실을 가져온 책임자에게 법적인 책임을 물어야 한다.법에 의한 관리감독을 철저하게 하여야 한다. 두번째는 수협이 협동조합 본연의 자세로 돌아가야 한다는 점이다.수협으로서 반드시 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사업을 많이 하게 됨으로써 정작 주인인 조합원의 형편은 나빠져 왔다.반면 수협 조직은 거대해지고 부실 역시 그만큼 커져 왔다.이제 조합원을 위한 수협 본래의 기능 중심으로 조직을 재편해야 할 때다.수협중앙회도 경제적 이익을 추구하는 사업을 하는 조직이 아니라 일본의 전국어업협동조합연합회와 같이 회원조합의 대표기관 기능만을 수행하는 조직으로 전환돼야 한다.또한 조합장이나 중앙회장은 완전 명예직화해 선거 때마다 불거지는 병폐를 막아야 한다. 셋째는 진정한 수산 생산자단체로 발전하기 위해 수산 생산에 참여하지 않는 조합원은 정리해 조합의 동질성을 강화해야 한다.수산 생산업은 거의 없고 신용사업만으로 유지되는 조합은 수협으로서 인정하지 말아야 한다. 수협의 경영정상화와 관련해 규모화 달성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조합원수,매출규모,자산 및 부채규모 등 외형적인 규모가 아니라 수협운동의 본질에 맞는 구성원,사업종류,사업규모를 고려하여 내실있는 규모의 수협으로 재편해야 차별화와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 수협은 원하든 원치 않든 단순한 수산물 생산자단체 이상의 위치에 있다.어업인들의 대표자,어촌사회의 리더,어민들의 교육 및 홍보자,정부정책의 파트너 등 수산관련 모든 분야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경제적 논리에 근거한 큰 규모의 수협이 아닌,내실있는 조합으로 거듭날 때 국민들은 수협뿐 아니라 수산업을 더욱 사랑하게 될 것이다. 유정곤 한국해양수산개발원 자원관리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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