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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재일교포작가 김달수씨 ‘일본속의 한국문화 유적을 찾아서2’ 출간

    ◎일 고대사 주역 ‘도래인’의 자취/고분 등에 감춰진 한국문화의 유적 규명/민족감정·경직된 논리 배제… 호소력 더해 지난 5월 작고한 재일교포 작가이자 고대사연구가인 김달수씨.민족차별이 심한 일본에서 ‘김달수’라는 한국이름을 사용하며 한일고대사 연구에 몰두해온 그는 한반도에서 일본에 건너간 고대인을 ‘귀화인’에서 ‘도래인’으로 바꿔 부르도록 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정부는 지난 16일 한일 고대사 정립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그에게 은관문화훈장을 추서하기도 했다.‘일본 고대사의 주역’인 도래인의 자취를 꼼꼼히 살핀 그의 저서 ‘일본속의 한국문화 유적을 찾아서2’(배석주 옮김,대원사)가 최근 출간돼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일본인들의 고대사에 대한 관심은 유별나다.일본 큰 도시의 대형서점 어디를 가도 고대사 관련 책들을 수십종씩 볼 수 있다.최근 후지노키고분 등의 발굴은 고대전설속의 인물이나 고대국가에 대한 일본인들의 관심을 한층 높여줬다.그러나 일본인들의 그러한 관심은 유감스럽게도 역사에 대한 왜곡을초래해 문제를 남긴다.일본에 문화를 전해준 우리 조상들을 ‘도래인’이라고 부르기보다는 ‘귀화인’으로 낮춰 부르고 싶어하는 그들의 자세는 그 대표적인 예다. 이 책은 먼저 나라현(나양현) 사쿠라이시(앵정시) 하시나카(저중)에 있는 하시바카(저묘)고분의 내력부터 살핀다.일본은 이 고분이 고대 능묘의 축조나 장례의식에 관여했던 씨족인 하지씨(토사씨)의 조상이 만들었다고 주장한다.그러나 지은이는 하시바카 고분의 측량과 설계,그리고 시공은 도래인에 의한 것임이 틀림없다고 반박한다. 아메노히보코(천일창)는 신라계 도래인들이 태양신을 받드는 제사를 지내기 위한 제구를 인격화한 것이다.이런 연유에서 신라계 도래인들은 ‘아메노히보코 집단’으로 불린다.이들은 신라·가야계로 여겨지는 하타(진)씨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나라현 야마토타카하라(대화고원)의 츠게촌(도기촌)에 남아있는 전숭과 유적 등에서도 이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이와 관련,지은이는 “옛 츠게국에서 발굴된 유물과 산료보(삼능묘)고분이 전방후원분이라는 사실을미루어 볼때 이 지역이 도래인과 밀접한 지역이라는 점은 분명하다”고 말한다.일본 특유의 분묘형식으로 알려진 전방후원분은 이미 한반도 남부 해안이나 낙동강 유역에서 축조되었던 것으로 밝혀졌다.더욱이 전방후원분의 원류는 고구려의 적석총이라는 사실이 입증되면서 일본고대사는 고구려계의 기마민족에 의해 큰 영향을 받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책에서는 텐리시(천리시)와 나라시의 한국문화 유적을 중점적으로 다룬다.텐리시 중부에 위치한 후루정(포유정)에는 이소노카미(석상)라고 불리는 중요한 신궁이 있다.이 신궁에 소장된 보물 가운데 특히 주목할만한 것은 백제에서 전래된 칠지도다.일본 학자들은 아직도 이 칼이 백제왕이 일본 왜왕에게 헌상한 것이라고 주장하는 등 황국사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나라시대의 귀족들은 대륙에서 수입한 무궁화를 관상용으로 재배하고 이국정서를 즐겼다고 한다.이는 헤이죠(평성)궁터에서 발견된 화분 분석을 통해 밝혀졌다.일본문화에 끼친 한국의 영향은 그만큼 절대적이었다.일본의 유명사찰인 도다이샤(동대사)는 신라계와 백제계의 합작품이며,하쿠호(백봉)사원에서 출토된 막새는 경주 황룡사터에서 출토된 것과 매우 흡사해 고신라계 양식을 그대로 좇은 것으로 평가된다.이밖에 일본이 자랑하는 아스카시대의 대표적인 공예품인 옥충주자와 백제관음,몽전의 구세관음상이 도래인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이미 일본의 저명한 미술평론가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에 의해 인정된 바 있다. 지은이는 사학자로서 교육을 받거나 전공을 한 적이 없다.그러나 그의 연구는 학적 권위를 인정받고 있다.그것은 무엇보다 그가 고대 한일관계사를 연구하는데 있어 막연한 민족감정에 호소하거나 경직된 논리의 함정에 빠지지 않기 때문이다.그는 실증적이고 객관적인 자료를 인용,역사의 날줄과 씨줄을 교직한다.그 결은 완벽하고 아름답기까지 하다.
  • 다른 나라에 태어나고들 싶다는데…(박갑천 칼럼)

    최면상태에서 전생을 되돌이켜보게 하는 방법이 있다.할리우드의 명배우 글렌 포드도 그런 경험을 했다.그는 최면이 풀린 다음 자신의 녹음테이프를 듣고 도리머리 흔든다.『이럴 수가….이건 내 신앙에 어긋나는 현상인데』 1978년의 어느날 그는 처음으로 최면을 받는다.그의 전생은 찰리 빌이라는 콜로라도평원 카우보이.찰리 굿나이트라는 목장주아래서 들무새하다가 총맞아 죽는다.캘리포니아대학 조사반이 나가 알아본 결과 그 두사람은 실재했었다.두번째 최면.그는 스코틀랜드 엘긴에 사는 찰스 스튜어트로 말괄량이 아가씨들에게 피아노를 가르치는 교사였다.본디 피아노를 칠줄 모르는 그였으나 최면상태에서는 멋지게 쳤다.찰스 스튜어트의 묘를 찾아간 그는 이렇게 말했다.『놀랍군.이건 분명 내가 묻혔던 곳이야』 이런 유형의 얘기는 동서양 가릴 것없이 숱하다.또 이같은 윤회는 사람과 짐승사이를 왔다갔다 하기도.「천예록」에 적혀있는바 서울 동쪽 수구문안 무인 아들의 경우도 그런 사례이다.그 무인이 어느날 수구문으로 들어오는 구렁이를 때려죽인다.그 뒤에 그 아내가 사내아이를 낳았는데 어려서부터 제아비를 빗떠보며 아드등거리기까지.하루는 아이가 제아비를 죽이려다 들켜 아비한테 되죽었는데 구렁이였다.무인은 문을 열어 내몰면서 이른다.『이젠 네가 가고싶은 좋은 곳으로 가거라』 이건 미물한테 한 말이지만 이승의 삶이 유별나게 불행한 사람을 떠나보내면서도 그런 뜻으로 빌어준다.『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나라』고.이럴때의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전생­차생­내생을 믿는 마음으로 된다.무엇인가로 다시 태어난다고 생각하는 것.신라 문무왕이 동해의 용이 되겠다면서 눈을 감고 송강정철이 먼저간 동갑내 이율곡을 제사하는 글에서 『기린이나 봉황이 되어 만가지 복을 몰아다 주라』고 기원하는 것도 그런데 바탕한다고 하겠다. 사람의 생각이 이러하기에 『다시 태어난다면 어느 나라가 좋은가』하는 설문조사도 나올수 있다.한 생명보험회사도 그래서 얼마전 우리 청소년들에게 그걸 물어본다.그랬더니 미국(29%)·프랑스(16.3%)·영국(6.9%)·일본(3.9%)… 등 외국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대답이 64.9%에 이르렀다 한다. 역시 잘사는 나라를 생각하고들 있다.나라현실 보면서 소들해져서이겠지.하지만 뭔가 허전해진다.〈칼럼니스트〉
  • 백제대사 옛터 일 나라현서 발견

    【도쿄 연합】 일본 왕이 7세기경 처음 설립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실체가 확인되지 않은 구다라노 오데라(백제대사)의 거대한 금당으로 보이는 기단 옛터가 발견됐다고 일본의 나라국립문화재연구소가 27일 발표했다. 백제대사는 서명왕이 639년 국가불교를 위해 건립을 시작했으나 건물 등은 모두 없어지고 소재지에 관해서만 여러가지 설이 전해져 내려왔다. 연구소는 그러나 나라현 사쿠라이시 「기비이케하이데라」(길비지폐사)를 발굴한 결과 남북 약 27m,동서 약 36m,높이 약 2m로 지반에 50㎝ 가량 박혀 있던 견고한 기반 흔적을 발견했다는 것이다.
  • 일 나라현 법륭사(세계 문화유산 순례:19)

    ◎한민족혼 숨쉬는 세계최고 목조가람/7세기 아스카시대 불교건축문화의 정수/국보·문화재 190종 2천3백여점 집결/금당 석가삼존상 등 한반도 도래인이 제작/지붕·벽 우리의 옛날집 모습 그대로 일본 나라현 호류지(법륭사)는 일본 문화가 자라나온 모태였다. 세계 최고의 목조 건축물로서 지난 93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호류지는 「나무의 문화」인 일본 건축문화의 정수이자 일본 불교문화의 원형질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가람이다. ○5만7천평 동·서원으로 분리 오사카와 나라의 중간 너른 들판 끝 산자락에 위치한 이 절의 18만7천㎡의 경내는 서원과 동원으로 나뉘어져 있다.서원은 산문인 남대문,중문,오중탑,금당,회랑,경장 등으로 이뤄져 있고 동원은 몽전(몽전:유메도노)불당 등으로 이뤄져 있다.190종 2천3백여점의 국보와 중요문화재들이 단아한 모습으로 객을 맞는다.서원의 대보장전에는 백제관음상,유메치가이(몽위)관음상,다마무시노즈시 등 일본 문화의 정수들이 찬란한 빛을 발하고 있다. 정확하게는 1천300년전인 7세기 아스카시대에 지어진 이 절이 우리들의 관심을 크게 끄는 것은 한반도와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오중탑,금당,중문,회랑,경당은 물론 15세기에 재건된 남대문을 보노라면 마치 고향집에 돌아온 듯 아늑한 느낌을 준다.우아하고 아름다운 선,지붕과 벽의 단정한 처리가 우리의 옛날 집들 그대로다.불교는 고분문화시대에서 「문명시대」인 아스카시대로 넘어오는 6세기중엽 한반도로부터 일본에 전래됐다.고대 시대 일본의 교육은 대부분 승려들에 의해 이뤄졌다.절은 문화의 중심지였고 그 문화를 한반도 도래인들이 지도했던 것이다. 오노 겐묘(대야현묘)집사장은 『당시 한반도에서 기술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건너와 일본의 문화를 지도했다』면서 『호류지에 제작자를 확실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금당의 석가삼존상 뿐이지만 삼존상 제작자인 도리 불사도 할아버지가 도래인이었다』라고 말한다. 호류지는 서기 607년 스이코왕과 쇼토쿠세자가 건립했다.그러나 일본서기에는 670년 4월 30일 호류지가 하나도 남김없이 소실됐다고 기술하고 있다.아직도 이 부분은의문에 싸여있다.발굴조사등에 의하면 완전소실은 아니었다는 반론도 있다.재건·비재건 논쟁에 관계없이 이 절의 주요 부분들이 7세기 아스카시대를 대표하는,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문화유산이라는 점은 변함이 없다. 산문인 남대문을 지나면 바로 중문.깊숙히 덮인 처마,그 처마 밑에 정교하게 새겨진 공포,그리고 신전의 기둥과 비슷하게 엔타시스 양식으로 다듬어진 기둥 등 아스카시대 건축의 정수를 한데 모은 건물이다. 오중탑은 호류지의 말사로 세계문화유산에 함께 포함된 호키지(법기사)의 3중탑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탑이다.위로 오르면서 점차 줄어드는 처마의 비례가 그지없이 아름답다. 지난 81년 호류지 5중탑과 비슷한 규모의 나라현 야쿠시지(약사사) 서탑을 재건한 미야다이쿠(궁대공:도목수) 야마모토 가쓰미(산본극사)씨는 『도다이지 대불당 하나 짓는데만 연인원 2백60만명이 동원된 기록이 남아 있으며 81년 서탑 재건에는 2천만달러가 들었다』면서 『호류지 건축은 인력과 물자를 동원할 수 있는 국가권력,한반도에서 건너온 기술과 문화가 어우러져 가능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금당벽화 소실… 모사품 걸려 금당은 5중탑과 함께 호류지의 눈동자이다.금당의 벽화는 1949년 실화로 소실되거나 그을려 지금은 수액 처리돼 보관돼 있고 현재는 모사품이 걸려 있다.벽화의 제작자는 모른다.고구려승 담징이 그렸다는 설이 있지만 신빙성은 적다고 한다.오노 겐묘집사장은 『담징이 벽화를 그렸다면 150세이상을 살아 활동했다는 말이 되므로 무리가 있다』면서도 『벽화에 고구려적인 특성이 짙은 것으로 미뤄 일본에 붓과 물감을 전한 담징의 제자들이 벽화를 그리지 않았을까 추론해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엔타시스 양식의 기둥으로 아름답게 꾸며진 회랑의 서쪽편에는 경장이 있다.평소에는 문이 굳게 닫혀 있다.천문 지리학을 일본에 전래했다는 백제학승 관륵승정의 상으로 전해지는 좌상이 안치돼 있다.오노집사장은 『관륵승정은 초대 주지였다』라고 말한다.이어 『지금도 호류지의 주지로 취임하면 관륵상 앞에서 취임식을 갖는다.그때만 경장의 문을 연다』고 말한다. 호류지가 목조건물임에도 불구하고 천년을 넘어 위풍당당한 모습을 간직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나라지역이 지진 등 자연재해가 적고 호류지가 나라의 중심지로부터 떨어져 있어 전화 등 재난을 피할수 있었던 점이 지적될 수 있겠다.다음은 끊임없는 재건과 보수작업 덕분.썩기 쉬운 기둥의 곳곳에는 썩은 부분을 잘라내고 새 나무를 끼워넣은 흔적이 수다하다. 호류지 연구에 탁월한 업적을 쌓아가고 있는 다카다 료신(고전양신)스님은 「세계문화유산 호류지」에서 『창건후 200년이 지나면서 호류지는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져 갔다』면서 『그러나 쇼토쿠세자시절 호류지에 하사된 오미 가와치 세쓰 등의 영지에서 재원을 조달할수 있었기 때문에 보수가 가능했다』라고 말한다.료신스님은 재원을 모으기 위해 스님들이 분주했다고 말한다.영지 농민들의 땀이 호류지를 지킨 거름이 된 셈이다. ○창건·보수 민중의 땀으로 호류지는 지을 때부터 보수에 이르기까지 민중들의 땀으로 쌓아올려진 문화재였다.만요수(만엽집)의 빈궁문답가는 아스카시대 일반 민중들의 어려운 삶을 전해준다.「해초와 같은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무너지는 집에 짚을 깔고 앉았다.부모는 머리쪽에 처자는 다리쪽에 웅크리고 있다.부뚜막에는 거미가 줄을 치고 이장은 채찍을 들고 세를 받으러 와 불러댄다.이 세상을 살아가는 것은 이렇게까지 어쩔 도리가 없는 것일까」라고.호류지는 그 시대 백성들의 땀으로 지어졌던 것이다. ◎여행 가이드/오사카서 근철로 15분거리… 인근 고분군 둘러볼만 한국에서 나라 호류지로 접근하는 것은 비교적 쉬운 편이다.루트는 세가지 정도로 나누어 볼 수 있다.첫째는 오사카 간사이공항으로 들어가 공항에서 나라로 들어가는 공항버스를 이용하는 것이다.나라까지 95분 소요된다.둘째로는 간사이공항에서 오사카시내를 거쳐 호류지로 가는것.오사카시내 텐노지(천왕사)역에서 긴테쓰(근철)노선으로 호류지로 간다.텐노지역에서 15분만에 호류지역까지 도착이 가능하므로 가장 이용하기에 편리하다.한국에서 항공편이 닿는 나고야에서도 접근이 가능하다.나고야에서는 JR 또는 긴테쓰선을 이용해 교토를 경유하거나 직접 나라로 향할 수 있으나 시간이 많이 걸린다. 오사카에서 나라행 노선을 이용할 경우 호류지역에 도착,왼편 출구로 나가면 20분정도 걸어 호류지에 닿을 수 있으며 버스나 택시를 이용할 경우에는 오른편 출구로 나가면 된다. 호류지 인근에는 호키지,후지노키 고분 등이 산재해 있다.역사기행에 알맞으므로 함께 둘러볼 것을 권하고 싶다.나라시내로 발을 옮기면 도다이지,야쿠시지,하세데라 등 수많은 명찰들이 반기게 된다.
  • 일 오쿠노 의원 또 망언/대동아전쟁 침략 미화

    【도쿄=강석진 특파원】 일본 자민당 의원인 오쿠노 세이스케(오야성양) 전 법무상은 1일 일본은 전후 (미국의)점령정책에 의해 「침략」 등으로 세뇌돼 왔다고 또다시 강변했다. 요미우리신문은 2일 오쿠노 전법무상이 나라현 가시하라시 지정 40주년 기념식 인사에서 『대동아전쟁에 져 51년이 지났으나 일본의 행위는 점령정책에 의해 침략과 잔학행위로 세뇌돼 왔다』면서 『앞으로는 눈을 뜨는 50년이 돼야 한다』고 주장,과거의 대동아 침략전쟁을 미화·옹호했다고 보도했다.
  • 일 옛 지도 동해를 「조선해」 표기/「에도」시대 제작

    ◎부산외대교수 천리대 도서관서 발견 【부산=김정한기자】 한·일간에 논란을 빚고 있는 동해를 「조선해」로 표기한 에도(강호) 바쿠우(막부)시대의 일본 지도가 발견됐다.이 지도는 영유권 문제로 일본이 시비를 거는 독도를 울릉도의 옛 명칭인 우산국을 따 「우산도」로 표기하고 있다. 부산외대 김문길교수(51·일본어과)는 최근 자료 수집차 일본에 들렀다 나라현 천이대 도서관 1급 고문서실에서 에도시대 문화 6년(1809년)에 제작된 「일본변계약도」를 발견했다고 3일 밝혔다. 이 지도는 원래 동판에 새겨진 것을 종이에 인쇄한 것으로 동판의 행방은 확인할 수 없으나 동해의 명칭이 「조선해」로 표기돼 있고 독도는 우산도로,울릉도는 지금 명칭대로 표기돼 있다. 일본변계략도는 다카하시 가케야스(고교경보) 측지소장이 1807년 일본 최초로 서양식 측지법을 따라 만든 지도로 1809년 완성했다.
  • 일본에선…/유출 한국 문화재(한국속의 일본,일본속의 한국:11)

    ◎약탈·밀반입 문화재 10만점 추산/고려 대장경 등 10점 「일 국보」 지정/알려지지 않은 개인 소장품 훨씬 더 많아/고려청자·회화 희귀품 많아… 반환이 과제 고려청자의 걸작품 청자투각당초문상자. 화려한 투각문양과 청록색의 이 명품은 수백년이 지난 오늘도 맑은 에메랄드처럼 빛나고 있다.그것을 만든 장인은 가고 없지만 고려청자의 예술은 오늘도 찬란하다.그러나 그 걸작품은 지금 한국에 없다.굴절된 한국의 현대사를 증언하듯 그 작품은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국립박물관에 보존돼 있다. 도쿄 국립박물관의 안내책자는 8만8천여점의 소장품 가운데 엄선한 26개 작품중에 청자투각당초문상자를 소개하고 있다.일본도 걸작품의 예술성을 아는 것일까.고려청자의 전성기였던 12세기에 만들어진 이 작품은 전세계적으로 4점밖에 남지 않은 상자형 청자중의 하나이다. ○3만여점은 공개 도쿄 국립 박물관에는 청자투각당초문상자 외에도 많은 한국문화재가 있다.문화재 수집가 오쿠라 다케노스케(소창무지조)가 기증한 「오쿠라 컬렉션」을 포함,2천여점의한국 예술품이 도쿄국립박물관에 소장돼 있다.그러나 도쿄박물관에 있는 문화재는 일본에 의해 약탈됐거나 불법유출된 한국문화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정부에 의해 파악된 해외유출 문화재는 세계 17개국에 6만4천여점이며 그중 가장 많은 3만여점이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그러나 그것은 공개된 것일 뿐 실제로는 10만점이 넘을 것으로 추산된다.일본의 경우는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대판) 시립동양자기미술관,야마토(대화)문화관,도쿄에 있는 민예관 등 박물관에 있는 한국문화재는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며 알려지지 않은 개인소장 문화재가 더 많다고 주일 문화원의 한 관계자는 말한다. ○역사연구에 중요 한국국제교류 재단은 해외에 있는 문화유산의 실태를 파악하기 위해 일본 민예관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도록을 「한국문화재」라는 제목으로 93년 12월에 발간한데 이어 95년1월에는 도쿄국립박물관,오사카 시립동양자기미술관,야마토문화관에 있는 한국문화재의 도록을 만들었다. 한국의 문화재들은 멀리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일본의 식민통치 기간과 그 이후의 사회적 혼란기에 이르기까지 거의 4백여년에 걸쳐 일본인들에 의해 약탈됐거나 일본으로 밀반출됐다. 일본으로 건너간 문화재중에는 국보급의 걸작품들도 적지 않다.일본정부는 고려판 「대장경」을 비롯,10점을 국보로 지정하는 등 1천2백70여점을 중요 문화재로 지정하고 있다. 도쿄국립박물관에는 일제시대 때 대구를 중심으로 한국문화재를 전문수집했던 오쿠라씨가 죽은 후 지난 81년 기증된 「오쿠라 컬렉션」의 1천여점의 한국문화재가 전시돼 있다.오쿠라 컬렉션을 시대적으로 구분하면 신석기시대와 청동기시대에서부터 통일신라에 이르는 고고(고고)자료가 많으며 고려·조선시대의 미술작품,청자 등도 적지 않다. 오쿠라가 모았던 문화재들은 양이 많을 뿐만아니라 예술성에서도 뛰어난 작품이 많다고 민속학자 김광언교수(인하대)는 지적한다.그중에는 조선시대 회화사 연구의 중요한 기준이 될 수 있는 이정의 「니금죽도」,정선의 「산수도」,장승업의 「묘도」등이 있다.도자기도 신라·가야의 마형도기,수레형도기 등 50여점과 고려·조선시대 도기 1백30여점이 있다.명품이 많은 고려청자는 38점이며 조선백자도 많다. 오사카시립 동양미술관에도 1백여점의 도자기들이 있는데 국내에서 거의 찾아보기 힘든 명품들도 많다고 윤용이교수(원광대)는 말한다.오사카미술관은 지난 92년11월 고려청자,조선분청사기 등을 포함한 일부유물을 보여주는 명품전을 열어 세계 도자기 애호가들로부터 많은 찬사를 받기도 했다. 나라현 나라시에 있는 야마토(대화)문예관에도 많은 한국문화재들이 소장돼 있으며 도쿄에 있는 민예관에는 야나기 무네요시(유종열)가 제창한 민예이론에 따라 수집된 1천5백여점의 문화재들이 있다.일본의 유명사찰 등에도 한국문화재들이 소장돼 있으며 예술적 가치가 높은 조선초기 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는 덴리(천이)대학 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민간기업도 참여 한국은 일본에 있는 이러한 많은 문화재들을 되돌려받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나 성과는 별로 없다.지난 1965년 한·일 국교정상화 때 「한·일간 문화재및 문화협력에 관한 협정」에 따라 그동안 돌아온 문화재는 2천7백77점에 지나지 않는다.지난해에는 일본의 하치우다 다다스씨(68·부동산업)로부터 통일신라시대의 금동불상 등 3백82점을 기증받은 경우도 있으나 문화재를 돌려받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한국정부는 문화재 반환을 위해 일본정부와 접촉하기도 하지만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주일 문화원 관계자는 말한다.일본내 우익세력들이 개인소장가들의 문화재 반환을 막고 있다는 얘기도 있다. 문화재 반환은 세계적으로 어렵고 미묘한 문제이다.유네스코를 중심으로 문화재 반환운동을 벌이고 있지만 강대국들이 대부분 유출 문화재를 갖고 있기 때문에 그 실효성이 별로 없다.이때문에 민간기업들이 문화재에 많은 관심을 갖고 해외 경매시장에서 사들이는 방법이 효과적이라고 지적하는 문화재 전문가들도 많다.
  • 열차탈선… 가스폭발… 마치 전쟁터/일 관서대지진 현장 상황

    ◎불상·탑등 중요 문화재 다수 파손/건물붕괴·곳곳 불기둥 “아수라장”/오사카·고베 등 재일교포 밀집지 피해확산 우려 17일 새벽 일본 긴키(근기) 지방을 강타한 이번 지진은 인명피해면에서 3천8백95명의 사망자를 낸 후쿠이(복정) 지진(48년) 이후 최악이다.이번 지진은 특히 고베(신호),오사카(대판) 등 재일동포들이 많이 몰려 살고 있는 곳에서 발생해 재일동포들의 피해도 크게 우려되고 있다.한편 이번 지진은 진앙지가 고베,오사카 등 인구 1백만 이상의 도시와 인접한 데다 이 지역이 그동안 지진 안전지대로 인식돼 왔던 탓에 피해가 더욱 커지고 있는데 세계에서 가장 지진에 취약하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잦은 지진을 경험하는 일본인들도 『지금까지 이렇게 큰 지진은 본 적이 없다』고 할 정도(아와지시마 지진구조팀장 사카모토 다케시)로 많은 피해를 불러 일본인들에게 충격을 주고 있다. ○…진앙지인 효고현 아와지시마(담로도)는 이날 새벽 5시46분 일어난 강진에 이어 16차례나 계속된 여진으로 곳곳에서 건물이 불타고 가스가 폭발해 사망자와 부상자가 속출하는 등 전쟁터를 방불. 이번 지진으로 가장 큰 인명피해를 입은 효고현 아시야(호옥)시에서는 72채의 가옥이 파괴돼 약 2백명이 건물더미 속에 갇혀 있으며 니시노미야(서궁)시 등에서도 정전과 단수,화재와 함께 수많은 가옥이 파괴. ○…이번 지진의 진원지와 가까운 아와지시마에서는 건물에 깔린 주민들을 구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작업이 이뤄지고 있으나 사망자가 속출. 아와지시마 지역은 특히 가옥의 붕괴로 갇혀 있는 주민이 많아 사망자는 더욱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고 있는데 아와지시마의 쓰나(진명)읍사무소에 따르면 읍내 가옥 수십채가 전파되는 등 가옥피해가 엄청나 제대로 집계를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현립 아와지시마 병원 관계자는 『현재 지진으로 운반돼온 부상자가 약 1백명에 달한다』고 밝히고 『대부분의 부상자들은 가구 등이 쓰러지면서 머리나 손 등에 상처를 입은 사람들』이라고 말했다. 한편 아와지시마 북쪽의 기타아와(북담)에서도 10여채의 가옥이 무너지면서 밑에 깔려있는 주민이 상당수 있는 것으로알려지고 있다. ○…이번 지진으로 가장 큰 공포를 경함한 지역의 하나는 고베시에 위치한 인공섬 「포트랜드」. 14∼24층짜리 고층맨션이 밀집된 이 지역에서는 지진으로 가구와 세탁기가 쓸러지고 유리창 파편이 날려 피해자가 더많이 발생. 주민들은 잠옷바람으로 대피하는 등 일대 혼란을 빚었는데 대피 도중 갈라진 길 틈사이로 물이 솟아오르는 광경에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기도 했다. ○…지진이 휩쓸고 지나간 고베시 중심부에는 폭격을 당한듯 불길과 함께 연기가 치솟았으며 주택가와 사어가 블록이 통째로 불길에 휩싸이기도 했다. 또 인근 아파트 수십등이 무녀져 내리는 바람에 수백명의 시민들이 건물더미에 껄려 숨진 것으로 현지에서는 파악. 살아남은 주민들은 무너진 집의 지붕위로 올라가 집더미에 깔린 가족들을 찾으며 미친듯이 울부짖어 주위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기도. ○…일본의 육·해·공 자위대와 경찰·소바어대원들은 고베시 등 많은 지역에서 건물 등의 밑에 깔려있는 사람들을 구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하고 있으나 날이 저물면서 구조작업에 애로를 겪고 있다. 특히 구조대원들은 피해지역의 거의 모든 곳이 정전,전화 불통,단수된 상태이기 때문에 야간작업에 더욱 어려우을 느끼고 있다. 한편 지진으로 가옥이 붕괴돼 졸지에 집을 잃은 재해민들은 인근 학교·구청 등에 긴급 마련된 임시수용소에서 지친 첫밤을 맞이하고 있으나 정전 등으로 난방이 제대로 되지않아 이불을 뒤집어 쓴채 추위에 떨고있다. 또 아직 가족의 행방을 알지 못하고 있는 일부 주민들은 집이 무너진 현장부근에서 모닥불을 피워 놓고 추위를 달래며 밤새 구조작업을 지켜봤다. ○…일본 간사이지역은 일본 문화재의 보고.이 지역을 강타한 지진은 중요문화재에도 피해를 입혔다. 교도시 우쿄구의 호류지에서는 중요문화재인 불상 3체가 쓰러져 이 가운데 성관음입상의 오른 팔 부분이 일부 파손. 히가시야마구의 33간당의 천수관음입상 1천1체 가운데 6체가 기울어지고 파손됐으며 후시미구의 다이고시에서는 국보인 5층탑과 금당의 벽에 금이 가고 그 밖의 절에서도 건물벽이 일부 떨어져나가는 등 지진피해가 속출. 나라현 호류지의 세레인의 여의륜관음의 관이 떨어져 나가 다른 불상을 파손하기도. ○…지진으로 교도 오사카등 관서지역은 경제활동이 사실상 정지상태로 들어가는 등 커다란 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아와지시마 직하형 지진의 영향으로 도카이도·산요 신칸센을 포함한 긴키지방의 일본 JR 각 노선은 대부분 운행을 정지,철도가 사실상 전면 마비. 「JR 동해」와 「JR 서일본」당국은 『도카이도·산요 신칸센은 나고야∼히로시마에서 운행이 중지되고 있으며 효고현 니시노미야 시내의 신간선 고가가 한큐(판급)전철 이마즈(금진)선을 덮치고 있다』고 말했다. 한편 오사카∼고베간 열차선에서도 최소한 7량의 열차가 탈선,적어도 2명이 숨졌으며 고속도로 이음매도 무너져 내려 다수의 부상자가 발생했다고 NHK가 보도. 당국은 『긴키지구의 일반 철도는 거의 전 노선이 정전과 노반불안 등으로 운전이 불가능한 상태』라고 밝히고 『산양선의 고베역 주변 등 7개소에서 야간열차 등이 탈선했으나 부상자 등에 관한 정확한 정보를 알지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밖에 오사카만의 간사이 국제공항에서도 제트연료 재급유 시스템이 자동적으로 가동 중단됐으며 수개의 국내외선 운항이 취소.
  • 광복 50년/양국 유학생들이 본 「갈등의 골」 극복 방안

    ◎“세계화시대… 한일 「협력의 폭」 넓히자” 올해는 광복 50주년과 한·일국교정상화 30주년이다. 그동안 한·일간에는 과거사문제등 많은 현안을 두러싼 갈등과 대립이 반복돼 왔다. 그러나 80년대 말부터 과거에만 집착하지 말고 미래지향적 우호관계를 정립하자는 움직임도 활발해졌다. 오늘의 한국과 일본및 앞으로의 한·일관계를 일본에 유학하고 있는 한국 학생들과 한국에 와있는 일본 유학생들에게 들어본다. ◎서울의 일본 학생들/「과거사」에 얽매여 대일비난 하는데 당혹감/일은 진정으로 과거청산… 양국우호 힘쓸때 ▲요리타 다케시(33·서울대 보건대학원·교토대 교육심리학과졸)=한국은 일본의 이웃에 있지만 특별히 의식하지 않고 그저 지구상에 있는 하나의 국가라고 처음에 생각했었다. 그러나 한국의 나병실태등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관심이 높아졌다. 한국사람들은 정이 깊고 활력과 힘이 있는 것 같다. 한국사람들의 솔직한 표현에서는 인간미를 느낄수 있다. 한국사람들은 또 일본을 감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보는 사람들도 있고 경제·기업관계자들중에는 일본을 배워야 한다며 좋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많다. 그러나 지난 여름 독립기념관에 갔을때 어린이의 손을 잡고 온 어른들이 일본을 격렬하게 비난하는 것을 보고 한일간에는 여전히 많은 과제가 남아있구나 하는 생각과 함께 절망감까지 느꼈다. ▲고무라 가오리(31·한양대 국악과대학원·한양대 국악과졸)=한국의 판소리,사물놀이,창극등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국악을 공부하고 있다. 한국은 알수 없는 힘을 갖고 있다. 국악속에는 과학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영적인 힘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은 활기찬 나라이며 자신의 주장이 강하고 사소한 일에는 신경을 쓰지않는 대륙기질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특히 일본에 대한 라이벌의식이 강하며 지고 싶지 않다는 오기를 느끼게 한다. 그러나 한국인들이 노골적으로 일본을 지나치게 비난 할 때는 속이 상할 때도 있다. 일본은 물론 과거청산을 하여야하지만 한국도 지나치게 과거문제에만 매달려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게 할 경우스스로를 약하게 하고 결국은 지게될지도 모른다. 한국이 보다 강한 나라가 되기위해서는 대범해져야하며 넓은 세계적 시각으로 양국관계를 보아야한다는 생각이 든다. ▲기우치 아키라(27·서울대 체육교육과 대학원·와세다대 인간과학대졸)=중학교때 재일한국인에 대해 알고부터 한국에 관심이 많아졌다. 처음에는 신문·방송등을 통해 한국을 알았고 어른에 대한 공경심이 강한 전통적인 유고국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실제 한국에 와보고 조금은 실망했다. 어른들에 대한 공경심은 여전히 남아있었지만 당초 생각했던 것보다는 약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친절하고 정이 많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는 일본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이 여전히 강하게 남아 있음을 느낀다. 같은 사실이라도 부정적인 시각에서 보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지나 히로시마 아세안게임 보도를 볼때 마치 일본과 「전쟁」을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부분의 기사들은 일본을 꺾었다는 등 일본과의 대전을 중심으로 쓰고 있었다. 일본에 대한 감정적인식이 강한 것 같다. ▲고가 사토시(31·연세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주오대 사회학과졸)=국민학교 6학년때 옆반에 있던 재일한국인을 친구로 사귄후 한국과 한국문화에 대해 관심을 갖게됐다. 한국에 온후 많은 친구도 사귀고 한국문화도 접할수 있어 하루하루가 재미있다. 한국사람들은 개성적이며 친구가 되면 매우 친절하다. 한국은 21세기에 많은 가능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에게 욕을 하는 것들을 보며 거칠다는 인상을 받았다. 한국인들은 또 일상생활에서 많은 일들을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경향이 있으며 자기비판이 조금은 약한것 같다. 물론 일본도 과거문제를 말끔히 청산하지 않은 점이 있으며 그것을 부끄럽게 생각한다. 그러나 양국간의 우호관계가 필요하며 그것이 양국의 이익을 위해서도 바람직하다고 생각한다. ▲가세타니 도모오(32·고려대 사회학과 대학원·고베대 경영학과졸)=백제의 관계가 깊었던 나라현에서 자라며 한국및 중국등에 관심이 많았다. 한국은 처음에 완고한 유교국가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직접와보니 한락가가 있는등 어느면에서는 성에 대해 노골적인 면이 있는 것 같다. 한국인들은 사람을 사귈때 일본사람들과는 달리 거리를 두지않고 지낸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러나 한국을 어떤 나라라고 단정하기에는 아직 이른것 같다. 하지만 한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고 있는 「일본은 없다」라는 책을 보고 유감스러웠다. 일본의 부정적인 면을 강조한 그책은 일본인을 대상으로 썼다면 하나의 좋은 충고가 될수 있으나 한국인이 일본을 이해하는데는 나쁜 영향을 미칠지도 모른다. 물론 일본은 말이 아닌 행동으로 과거청산을 하여야하며 개인보상도 하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일본에는 과거침략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잘못됐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등 여러부류의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좋겠다. ◎도쿄의 한국 학생들/감정적 일본혐오 벗어나 객관 인식 바람직/문화·경제장점 서로 배워 공동이익 창출을 ▲채원호(33·도쿄대 대학원 행정학과졸)=올해는 한국으로서는 해방 50년,일본으로서는 패전 50년이 되는 해다.일본은 가까이 하고 싶지 않아도 이웃한 나라라는 숙명적 관계에 있는 나라다.앞으로 국제화·개방화·지역경제의 블록화등으로 일컬어지는 상황은 양국의 교류 및 협력관계를 더욱 요구할 것이다.과거의 식민통치 경험이 일본의 한국에 관한 지식의 축적을 가져 왔다면 해방후 일본은 연구의 대상이 아니라 그저 빨리 잊고 싶은 망각의 대상일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일본에 대한 객관적 인식과 객관적 인식에서 비롯돼야 하는 일본연구는 지체될 수 밖에 없었다.그러나 새로운 인식의 틀에서 활발한 일본연구가 필요하며 양국의 정치·경제적 이해가 맞물리는 분야에서는 공동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창조적인 모델이 만들어져야 한다. ▲박종문(31·와세다대 경제학과 대학원·연세대 경영학과졸)=대학시절 민주화를 둘러싼 학생들과 정권의 주장이 맞서고 있을 때 진짜와 가짜가 무엇인가를 탐구하기 위해 유학을 선택했다. 어려서부터 『일본은 경제대국이지만 정신적인 면에서 한국보다 열등한 나라다』라고 배워왔기에 그 말이 사실인 것같은 착각을 느꼈다.7년이 지난 지금 『일본은 선진국이고 한국은 개발도상국일 뿐』이라는 현실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일본이 정신적인 면에서 한국에 못미친다는 말은 거짓이다.정신적인 선진성없이 경제의 선진화는 이룩될 수 없다. 물론 한국인으로서 불안해 할 필요는 없다.그러나 일본이라는 나라를 다시 한번 생각하고 이해해야 한다.이유없는 반일감정,이유없는 일본 멸시언행은 우리를 영원히 일본과 같은 선진대열에 끼지 못하도록 할 것이다. ▲김기석(34·와세다대 경영학과 대학원·동아대 화공과졸)=일본식 경영법을 만들어 낸 일본의 사회·문화·윤리를 직접 보고 배우고 싶었다.일본은 여러가지 면에서 한국보다 질서가 잘 잡혀 있고 사회가 안정돼 있다는 인상을 받고 있다. 한일관계에 있어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감정적으로 한일관계를 보기보다는 이성적으로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역사문제·종군위안부 문제등은 물론 일본이 원인제공을 했지만 처리과정에서는 이성적이기보다는 감정적으로 대응한 면이 없지 않다고 본다. 최근 한국에서는 일본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일본은 없다」라는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고 있다.확실히 일본에도 부정적인 면이 많지만 부정적인 면보다는 아직 보고 배워야 할 점이 많다고 생각한다.이성보다 한국인의 감정에 호소한 이런 책은 일본에 대한 편견을 가져와 일본을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뿐이다.바람직한 한일우호관계를 위해서는 지도층의 교류보다 최근 활발해진 시민단체등의 상호 교류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신경순(27·여·조지대 신문학과 대학원·추계예술대문예창작과졸)=한국은 오랜 역사적 관계에도 불구하고 현대 일본에 대한 연구나 인식이 빈약하다고 느껴진다. 일본에 대한 인상은 긍정적인 것만은 아니다.외국인에 대한 차별등이 엄존한다.지나친 풍요로움에 때론 불편을 겪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일본의 저력은 막강하다.일본은 외국문화의 흡수력이 대단하며 외래어를 단순하게 일본어화하는 것을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일본은 또 공공교통수단이 잘 발달돼 있어 시간계산을 잘하면 효율적인 생활을 할 수 있도록 돼 있다.더욱이 정보화·산업화 과정은 과연 경제대국이 될 수 있는 나라라는 점을 깨우쳐 준다. 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같은 문화권안에 있지만 너무도 다른 문화가 존재하고 있다는 점을 보다 적극적으로 인식하는데서 출발할 필요가 있다.양국간에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인재육성도 필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들을 활용할 수 있는 사회적인 조직·구성의 마련이다. ▲김정준(35·도쿄대 공학부 대학원·서울대 공업화학과졸)=바람직한 한일관계를 위해서는 우선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국민의 감정을 부추기는 기사보다는 이성적 보도가 필요하다.반복되는 일본 지도층의 망언에 대해서도 매번 흥분할 것이 아니라 배경과 진원지를 분석해 주면 좋겠다. 양국간에는 직접적인 경험과 교류를 통한 상호이해와 함께 문화교류의 활성화가 필요하다.「김치를 먹고 치마저고리를 입는 분단된 나라」,「스시(생선초밥)와 기모노의 나라」라는 정형화된 이미지를 벗기 위해서도 생활양식 정서를 느낄 수 있는 문학작품·음악·연극등 문화교류가 필요하다.우리 젊은이들이 아무 생각없이 일본문화에 빠져들지 않을 것으로 확신한다. 그러나 일본에 와서 우리나라의 너무 많은 책들이 일본 책을 그대로 베낀 것을 보고 기성세대에 대한 배신감을 느끼고 있다.한국은 일본에 대한 올바른 역사인식이 필요하며 국제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와 감각을 가져 상대방에게 매력있는 파트너가 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 한국이름 쓰는 재일교포학생/일 대학생들이 “집단 폭행”

    ◎30명이 기숙사에 8시간 감금/작년 【도쿄=강석진특파원】 지난해 1월 일본의 대학 캠퍼스 안에서 한국 이름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재일동포 학생이 무려 8시간에 걸쳐 동료 학생들로부터 구타당한 사실이 12일 뒤늦게 밝혀져 충격을 주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일본 요코하마시에서 열리고 있는 「재일 한국·조선인의 미래와 인권연구집회」에 참석한 이케다 시로 텐리대학(나라현 소재)교수의 보고로 밝혀졌다고 도쿄신문이 이날 보도했다. 이케다교수에 따르면 구타당한 재일동포 학생은 한국 이름을 사용한다는 이유로 92년 여름 상급생으로부터 힐난당했으며 93년 1월에는 기숙사에서 동료 기숙사생 30여명으로부터 8시간동안 밤새 집단폭행을 당했다는 것이다. 폭행학생들은 재일동포학생의 머리카락을 붙잡고 얼굴 등을 구타했으며 피를 흘리면 스스로 닦아내도록 한 뒤 같은 곳을 거듭해서 때린 것으로 전해졌다. 이번 사건은 지성의 전당인 대학 캠퍼스에서 발생한 야만적인 민족 차별 행위일 뿐 아니라 전후 20년이 지나 태어난 세대의 집단 폭행이라는점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 주고 있다. 이와 관련,이케다교수는 『대학당국이 폭행에 가담한 학생 11명을 정학시켰다』고 밝히고 『재일한국인을 지원하는 교직원과 학생도 고립될까 두려워 이 학생을 보호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 한­일학계/「전방후원분」 시원 논란 매듭

    ◎“나카야마현 한국 적석총서 영향” 밝혀져/「일서 생겨나 한국으로 역류」 주장에 쐐기 한일학계가 신경을 곤두세웠던 전방후원분의 시원문제가 최근 발굴된 일본 나라현(나양현)텐리시 나카야마고분(중산대총·서울신문 10월26일자 21면)으로 인해 일단락되게 됐다.발굴주체인 나카야마고분조사 위원회가 이 고분이 한국의 돌무지무덤(적석총)영향을 받아 축조된 3세기말에서 4세기초에 이르는 시기의 전방후원분이라는 사실을 밝힌 것이다. 일본학계가 나카야모고분의 원형을 고대 한국의 돌무지무덤에서 찾는 이유는 무덤을 돌로 쌓아 만들었다는데 있다.네모꼴의앞쪽 전방부와 둥근 봉우리꼴의 후원부를 합해 길이 1백22m,최대 너비 62m나 되는 이 전방후원분은 후원부 봉우리 꼭대기를 빼고 모두 돌을 채웠다. 일본 학계는 이 나카야마고분을 일본 전방후원분의 초기형식으로 보고 있다. 그러나 일본에서 저절로 생겨난 자생의 무덤이 아니고 한반도와 중국 동북부에서 건너온 돌무지무덤 양식이라는 견해를 내놓았다.일본 학계는 나카야마고분의 시원지역을 꼭집어 밝히지는 않고 있으나,우리 국내학계는 압록강과 그 지류 유역에 무수히 분포한 돌무지 무덤들을 지칭하는 것으로 추정했다. 우리나라에 돌무지무덤이 밀집한 지역은 오늘날 북한 행정구역상으로 자강도에 속하는 평북 자성군 운평리와 초산군 송암리.압록강유역인 운평리에서 2백여기,압록강지류 자성강유역 송암리에서는 1백50여기의 돌무지무덤이 지금까지 조사되었다.이가운데 운평리 4지구 6호무덤과 송암리 88호 및 106호무덤은 강돌 등을 쌓아 축조한 전방후원분 형태를 뚜렷이 보여주고 있다. 일본 학계는 이번 발굴을 계기로 나카야마고분이 위치한 지역에 대해 특히 주목하고 있다.텐리시는 3세기쯤 고대 일본의 야마타이(사마대)왕국이 있었다는 긴키(근기)지방인데다 뒷날 국가통일을 이룩한 야마토(대화)정권과도 무관치않기 때문이다.그리고 일본인 학자 오츠카 하츠시게(대총초중·명치대교수)는 나카야마고분 발굴의 뜻을 「초기 일본의 능묘구조와 정치상황을 이해하는데 획기적 자료」라는 말로 평가했다는 것이다.일본 초기의 능묘구조는 물론 압록강 유역의 돌무지 무덤 영향이다. 따라서 국내 학계의 여론은 나카야마고분을 통해 야마토정권 창출배경이 다시 규명되어야 한다는 쪽으로 쏠렸다. 어떻든 나카야마고분 발굴은 일본의 전방후원분 자생설을 잠재우게 되었다.그리고 한국의 전방후원분이 일본에 비해 숫자가 적고,출토유물의 시대가 떨어진다는 점에서 나온 역류설 역시 사라질 전망이다.
  • “3세기 전방후원분” 일 나카야마분/한반도 영향 받은 적석총

    ◎고분조사위 밝혀 【도쿄=강석진특파원】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전방후원분 가운데 하나인 나라현 덴리시의 나카야마분을 발굴중인 나카야마고분 조사위원회는 24일 이 고분이 한반도의 영향을 강력하게 받은 것으로 보이는 적석총이라고 발표했다. 일본의 전방후원분 출현 초기인 3세기말 4세기초에 축조된 것으로 여겨지는 이 고분은 10t 트럭 8백10대분의 3천㎥의 돌을 세겹 또는 네겹으로 쌓아 만든 것으로 조사됐다.이에따라 조사위원회는 나카야마 고분이 중국동북부 및 한반도 적석총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는 공식견해를 밝히면서 당시 중국 동북부지역은 한민족의 활동영역이었음을 상기시켰다. 일본에서 초기 전방후원분의 구체적인 구조가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이 고분은 길이 1백20m,최대폭 62m의 크기와 엄청난 공사 규모로 미루어 당시 왕 또는 유력한 지배자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동시에 이들이 한반도에서 직접 건너갔거나 한반도 문화의 영향아래 있었을 가능성을 짙게 시사했다.
  • “왜왕 무는 백제의 무령왕”/원광대 소진철교수논문「상표문」서 주장

    ◎개로왕의 아들로 20년간 왜국 통치후 환국/무가 송 순제에 보낸 「상표문」 보면 사실 입증/“천황계라는 일측 통설은 근거없는 억지 주장” 백제 무령왕은 10대의 어린나이에 「무」라는 이름으로 위왕의 자리에 오른뒤 적어도 20년동안 위국을 다스렸으며 그뒤 환국해 백제왕에 즉위했다는 연구가 나왔다.소진철원광대교수(정치사상)는 이같은 연구결과를 15일 한국 프레스센터에서 한일문화교류기금주최로 열리는 「제30차 한일문화강좌」에서 발표한다. 소교수는 「김석명문을 통해서 본 백제 무령왕의 세계」라는 주제로 두편의 논문을 발표할 예정.그는 이가운데 「위왕 무의 상표문(478년)을 보고」에서 「왜왕 무」를 비롯한 5세기 「위오왕」이 천황계라는 일본측 「통설」을 『합리적인 근거나 이론의 제기가 없는 무리한 주장』이라고 전면 반박하고 『무가 송 순제에게 보낸 「상표문」으로 볼때 무는 무령왕』이라고 주장했다. 일본측은 무를 「일본서기」에 나오는 웅략천황으로 비정한다.소교수는 그러나 「서기」에 웅략은 458년에 즉위했다고적혔으나 이 해는 무의 선왕인 흥의 즉위보다 앞서는등 일본측의 이른바 「통설」은 근거가 없다고 밝히고 있다. 무가 직접 써 송 순제에게 478년 보낸 「상표문」은 위기에 처한 백제의 구원을 목적으로 한 것.소교수는 「상표문」을 쓴 사람은 백제의 불운이 곧 자신의 불운으로 이어지는 백제와의 일체감을 가지고 있는 인물일 수밖에 없다고 추정했다.그는 이어 「상표문」에는 「자신의 부형이 갑자기 죽었고…이제 망부의 유지에 따라 적(고구려)의 강토를 무찌르겠다」라는 내용이 담겨있는데 이무렵 왜나 백제에서 있었던 왕과 왕자의 갑작스런 죽음은 백제 개로왕의 비참한 최후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는 것이다.「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의하면 475년 겨울 고구려대군의 7일간에 걸친 공세로 창례성이 무너지고 개로왕과 대비,그리고 왕자가 아차성에서 무참히 살해됐다.무가 「상표문」에서 말한 「아버지와 형의 죽음」은 바로 개로왕과 왕자의 비참한 최후를 말한다는 것.무는 바로 개로왕의 아들로 뒤에 무령왕이 된 사마군이라는 주장이다.「송서」에 의하면 송 순제는 478년에 무가 자청한 「안동대장군·위국왕」,20년후인 502년에는 양 무제가 「정동대장군·위국왕」이라는 관호를 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이는 무의 왜왕 재위가 적어도 20년이상 지속되었다는 증거로 「삼국사기」와 「일본서기」에 각각 501년 및 502년으로 적힌 사마왕,즉 무령왕의 백제환국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 소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또 사마왕이 461년 「각라도」에서 탄생하고 502년 환국전까지 왜국에 있었다는 「일본서기」의 기록도 사마왕이 위왕위에 있었던 것으로 보았다. 소교수는 사마왕이 523년 서거한뒤 갖게 된 무령왕이라는 시호도 기골이 장대하고 성품이 인자해 붙여진 무라는 왜왕 재위시절의 이름과 521년 양제로부터 제수된 「녕동대장군·백제왕」의 머릿글자를 따서 지어진 것으로 추정했다. 소교수는 이날 함께 발표한 「칠지도 명문의 새로운 해석」에서도 백제왕이 하사한 「칠지도」(일본 나라현 석상신궁소장)를 받은 후왕 「위왕 지」 역시 무를 비롯한 「위오왕」의 자손,즉 백제왕의후손으로 해석하고 있다.
  • 혼탁조짐속 바닥표 훑기(대선 유세현장 3일)

    ◎투기근절위해 모든 수단 동원/김영삼/서민아파트만은 반값에 공급/김대중/중소기업 경제대들보로 육성/정주영/교원 처우개선/이종찬/부정부패 척결/박찬종 ○전남 5개지역 누벼 ▷김영삼후보◁ 지난 21일 유세시작 이후 두번째로 취약지역인 전남 장흥을 시작으로 강진·해남·영암과 광주시등 5개 지역을 누비며 지지기반 확산에 진력. 김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이곳 지역정서를 감안,『이번 선거는 과거와 3가지가 달라졌다』고 지적한뒤 과거 선거는 민주세력대 반민주세력의 대결,관권과 민권의 대결,호남대 영남의 대결이었다고 구체적으로 예시. 특히 지역감정 문제에 집중 언급,『민주당 김대중후보가 지금 경상도를 종횡하고 있고 나도 엊그네 호남지역의 여러분들로부터 환영과 지지를 받으며 성공적 유세를 했다』고 강조하고 『선거는 선택이며 감정의 표출이 아니다』라며 자신에 대해 지지해줄 것을 호소. 김후보는 이날 항공기편을 이용,광주에 도착한뒤 헬기로 유세지역을 누비려 했으나 김포공항의 짙은 안개때문에 당초 예정보다 1시간 가량 늦게 광주대신 목포행 첫 비행기로 출발,장흥유세부터 시작. 이때문에 김후보는 유세장마다 『예정보다 늦게 유세를 해 죄송하다』며 『그러나 아시아나항공이 처녀취항하는 목포행 첫비행기를 타고 이 지역에 온 것 또한 행운아니냐』며 「유세인연」을 각별히 강조. 김후보는 자신의 정책목표인 신한국 건설이 「기회균등의 사회건설」임을 역설.김후보는 계층간 골을 없애기 위해 『집권하면 부의 세습을 막기위해 양도소득세와 증여세를 강화하고 부동산투기 근절을 위해 가능한 모든 수단을 동원하겠다』고 약속. 이어 지역간 차별 철폐도 언급,『발전된 지역과 낙후된 지역의 차이를 이대로 두어서는 안된다』며 『지역균형개발법을 제정,국토발전의 균형을 이뤄나가겠다』고 공약.그는 또 학력간 차이와 관련,『사람을 채용하고 승진시키는데 대학을 나왔느냐 안나왔느냐 보다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고 지적한뒤 『앞으로 민간기업까지 학력철폐가 이뤄지도록 대통령과 정부가 적극 나서겠다』고 「기회균등사회 건설」을 집중 거론.김후보의 이날 유세는 광주지역을 제외하곤 모두 옥내 간이유세였는데 원고없이 즉석 유세로 지지를 호소.김후보는 당초 예정보다 유세가 늦어지자 강진에서 해남으로 이동중 버스안에서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우며 강행군. 간이유세에서 김후보는 대부분 지역이 농촌임을 의식,『신한국의 참모습은 열심히 하면 그 땀의 대가를 받도록 하는 것』이라며 신한국정신을 「심은대로 거두는 농업정신」에 비유. 김후보는 이날 길게 늘어지는 종전의 연설스타일을 바꿔 짧은 문장과 문답형을 섞어 자신의 뜻과 의지를 전달. 이날 광주유세에서 김후보는 청중들이 시민회관 옆 1천5백평 광장과 주변계단을 가득 메운데다 열기도 예상보다 뜨겁자 시종일관 자신에 찬 어조로 연설. 이날 광주유세장과 주변에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경찰병력 30개 중대,4천5백여명이 배치돼 김후보에 대한 경호와 유세장 질서유지에 분주. 또 내외신기자 1백여명이 대거 몰려 열띤 취재경쟁을 벌이는등 어느 유세장보다 관심이 집중됐으나 87년 대선때와 달리 돌발사태 없는 성숙된 모습.○“농업보장세 꼭 신설” ▷김대중후보◁ 이날 중부권의 최대 격전지가 될 온양·예산·합덕·당진·서산·홍성등 충남지역 6곳을 버스로 순회하며 2박3일동안의 충남권 대장정에 돌입. 첫 유세지역인 온양방문에 앞서서는 이웃 현충사를 찾아 참배,『완전한 인격자』로 충무공을 표현하며 그의 정신을 기렸고 기차편으로 온양으로 오는 동안에는 옆좌석의 여대생 2명과 젊은이들의 포부,충무공정신을 놓고 즉석토론시간을 갖기도. 이자리에서 김후보는 『국민에게 인기가 없는 박정희전대통령이 충무공을 너무 떠받들어 그이미지가 손상됐다』고 말을 건넸고 한 여학생으로부터 『군인이 되겠다』는 포부를 듣고는『요즘 젊은이들은 소신이 뚜렷하고 주관이 있어 장래가 아주 희망적』이라고 응수. 이날 김후보가 제시한 지역공약으로는 삽교천과 아산만방조제 주위의 관광단지화,온양역사 외곽이전,천안∼홍성국도의 4차선확장(이상 온양),예산산업대를 종합대학으로,통합의보실시,종합병원유치(예산),공업전문대설립,아산만∼대전∼청주를 신산업지대로 육성(합덕·당진),서해안고속도로 98년까지 완공,안면도 핵폐기장반대,국공립대학의 부속병원유치(서산)등을 약속. 온양·예산지역 유세에서 김후보는『정주영후보나 김영삼후보 모두가 「이번에는 바꿔보자」는 우리와 똑같은 말을 인용해서 찬조연설을 하고 있는데 감사한다』면서 청중의 웃음을 유도한 뒤『3당합당이후 나라현실을 볼 때 이제는 심판을 내려 민자당에 한표도 주지말자』면서 우회적으로 지지를 호소. 당진·서산등에서는 이지역이 농업지역인 점을 감안,농촌실정을 부각시키는 한편 『우루과이라운드 태풍을 막아내려면 여러분이 농민의 정당인 민주당을 지지해서 민주당이 농민권익을 지키도록 해나가야 한다』며 새롭게 농업보장세의 신설을 공약. 김후보는 이어『국민당의 아파트반값공약은 실효성이 없으며 중산층을 위한 공약』이라고 비난하고 『집권하면 건축비를 내리고 건설공사의 기계화를 통해 서민아파트에 대해서만큼은 반값에 공급할 수 있다』면서 서민아파트 반값공약도 처음으로 제시. ○연설 시간 5분줄여 ▷정주영후보◁ 경기도김포에 이어 강서·구로·동작·용산 등 주로 서민층이 밀집한 서울남서부지역유세에서 경제문제해결을 역설하며 바닥표 모으기에 총력. 정후보는 3년내 무역흑자 3백억달러,5년내 1인당 GNP 2만달러등 예의 경제공약을 제시. 정후보는 『나는 20년간 중소기업을 하면서 10억원밖에 벌지 못했는데 정치만 30년씩한 양금씨가 어떻게 30억∼40억원을 모았느냐』고 양금씨의 축재과정에 의문을 제기한 뒤 『정치판이 돈을 버는 곳이냐』고 반문. 정후보는 『나는 집권후 은행을 개혁,신용만으로도 대출이 가능한 사회를 만들어 중소기업을 우리경제의 대들보로 육성하겠다』고 약속. 정후보는 『집권후 지방자치제를 우선적으로 실시하고 지방경제를 활성화시켜 국민들이 정든 고향을 등지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고 강조. 국민당은 정후보의 지시에 따라 이날부터 하룻동안의 유세장소를 종전의 4곳에서 5곳으로 늘렸으나 대신 정후보의 연설시간은 평소보다 5분여쯤 단축. 이에따라 정후보의 유세장 도착시간이 전반적으로 30분이상 지연됐고 정후보의 연설 역시경제문제만을 언급한채 지금까지의 스타일에서 크게 축소. ○“인재 정계진입 지원” ▷이종찬후보◁ 서울 평화시장,동대문운동장앞,돈암시장,국민은행 돈암동지점등을 순회하며 유권자와의 직접접촉및 연설회를 갖고 금권선거방지책과 교원처우개선등을 약속하며 지지를 호소. 이후보는 유세에서 『민주주의 원산지인 서구의 민주정치풍토를 도입치 않고 일본의 더러운 금권정치풍토를 답습,전국에서 금권타락선거가 판을 치고 있다』며 『선거공영제를 실시,돈쓰지 않는 선거제도를 정착시키고 참신하고 능력있는 인재의 정계진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다짐. ○“책임세대로 교체를” ▷박찬종후보◁ 논산 부여 공주등 충남지역을 돌며 『이제 국민을 기만하는 양금의 무책임세대에서 책임세대로 과감히 세대교체를 해야한다』고 주장하며 부동표끌어모으기에 주력. 박후보는 『지금 당장 우리사회의 부정과 부패를 척결하지 않고서는 새사회의 건설도,경제중흥도 이룰 수 없다』면서 『정의와 원칙에 입각해 국가기강을 바로 잡을수 있는 인물을 대통령으로뽑아야 한다』며 자신을 지지해줄 것을 호소. 박후보는 논산유세에서 ▲논산∼대전간 4차선확장도로 조기완공 ▲농산물가공 운송 중심도시로 개발 ▲연산대추시장의 특산물활성화 등을 지역공약으로 제시한뒤 부여와 공주에서는 ▲백제문화권개발로 세계적 관광도시화 ▲천안∼공주∼부여간 고속도로건설 ▲금강 수질개선등을 약속. ○3당 강도높게 비판 ▷백기완후보◁ 대선후보로는 2번째로 제주도를 방문,서귀포와 제주시에서 유세를 갖고 민자·민주·국민 등 보수 3당에대한 강도높은 비판과 함께 지역공약을 제시하며 지지를 호소. 백후보는 이날 유세에서 『김영삼씨의 관훈토론은 변절과 거짓으로 얼룩진 자신의 행적을 합리화하기 위한 궤변에 불과하다』고 공격한 뒤 김대중씨와 정주영씨에 대해서도 「진보세력의 씨를 말리려하는 기회주의자」「악덕재벌의 원흉」등의 직설적인 용어를 사용하며 비판.
  • 순수성 잃은 오사카 「조선학토론회」

    ◎북한,「학술토론회」를 정치선전장화 기도/세미나보다 친평양무드 조성 관심/3년전 논문 재탕… 학자적 양식 의문/조총련 주도로 어용학회 결성도 시도 오사카(대판) 조선학국제학술토론회는 다음 3가지 점에서 관심을 끌고 있다. 첫째는 학술토론의 순수성이 보장되고 있는가라는 점,둘째 분단 이후 처음으로 갖는 남북한의 본격적인 학술교류에서 학문적 수준의 우열이 어떻게 나타날 것인가라는 점,셋째로는 세계조선학회가 과연 결성될 것인가라는 문제이다. 첫번째 의문,학술토론의 순수성 여부는 애초부터 빛을 바랬다. 부동산투기로 돈을 벌게된 조총련계 오사카 경제법과 대학은 처음부터 이번 대회를 성공리에 개최함으로써 무명의 대학을 이름있는 대학으로 만들어 보자는 목적을 갖고 있었다. 당초부터 순수성을 결한 것이었다. 게다가 조총련의 지시에 따라 8ㆍ15 범민족대회와 발맞춰 북한의 선전공세를 위해 무드조성을 꾀한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그러나 북한측의 대거 참가에 따른 개방화 영향은 오히려 위험부담이 크다는 판단에 따라 불가피하게 규모가 축소된 이상 주최측과 북한 참석자들은 정치적 색채를 줄이는 등 자제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세기 전통일원장관,홍일식교수(고려대),김대환교수(이대) 등 거물급을 비롯한 1백93명이나 되는 대규모 한국대표단 앞에서 11명 밖에 안되는 북한 대표단으로서는 중과부적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고 이에 따라 전략을 전환,학술토론의 내용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번 대회가 예상보다 학문적 중립성이 강조된 면이 있다면 그것은 비세에 따른 불가피한 위장전술이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두번째 지적인 학술토론에서의 우열 또한 분명하게 차이가 드러났다. 북한이 내세우는 역사학자 김석형(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고문)은 46년 월북하기전 30대에 서울대 교수를 지낸 인물이며 임나일 본부설을 이론적으로 제압,일본 학자들조차 그 앞에서는 기를 펴지 못하는 거물이다. 그는 3일 하오 「삼국사기의 왜침범기사에 대하여」라는 내용의 주제발표를 했다. 이번 학술대회는 가족상봉등 여러가지 의미에서 김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었으므로 그의 강연은 인기였다. 북한측에서 참석한 11명의 대표단 가운데 김만이 유일하게 학자다운 학자로 간주되고 있는 터여서 청중이 몰린 것은 당연했다. 그의 학설은 이런 것이었다. 『신라에 대한 왜의 침범사건기사는 기원전 50년(혁거세거서간 18년)부터 기원후 5백년(21대 소지마립간 22년)까지 30여차례에 걸쳐 나타나고 있으나 그 이후는 없어진다. 침범은 5세기에 가장 많아 약 15차례 자행됐으며,3세기에는 8번의 침범이 있었다. 침범 횟수를 보고 알 수 있는 것은 신라를 침범한 왜가 당시 야마도(나라현)를 중심으로 하고 있던 통일국가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중심이 그렇게 조선반도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자주 신라에 출병할 수 없다는 것은 명백하다. 침범한 왜군수는 한번에 고작해야 수천명 정도임을 짐작케 한다. 또 그들은 해적일 수도 없다. 이렇게 오랜 세월에 걸쳐 해적이 계통적으로 쳐들어올 수는 없기 때문이다.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나오는 신라를 침범한 왜는 그 침범횟수와 규모로 보아 기원전후 시기부터 수백년간 북규슈에 존재했던 여러개의 왜소국들에서 내습한 수천명 정도의 부대들이라고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고대 한일교류사 전공인 김의 이같은 주장은 새로운 시각으로 주목을 끌기도 했다. 그러나 이것은 벌써 3년전에 발표된 것으로서 새로운 학설이 아니다. 이번 북한측 참가자들은 이처럼 묵은 학설들을 들고 나와 주최측을 비롯한 참석자들에게 실망을 안겨주었다. 어떤 학자들은 이 대회가 이처럼 질적 향상을 도외시하고 사상적 색채만 강조해서는 활로를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세번째로 관심을 끄는 것은 세계학회의 구성여부이다. 본래 이 학회결성을 서두르고 있는 사람은 북경대 최응구교수를 중심으로 오사카 경제법과대학 오청달교수 등 몇몇이다. 최응구ㆍ오청달 두사람은 이번 제3회 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의 실행위원회 공동위원장이다. 최교수는 황장엽이 김일성대학 총장시절 이 대학에 유학하며 유학생회 회장을 지냈다. 이 시절 김정일은 학부에 재학중이어서 친분관계를 맺을 수 있었고,김의 북경방문때 통역을 맡을 수 있을 만큼 신임을 얻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반면 오교수는 조총련계대학인 오사카 경제법과대학의 상무이사로 재직중인 실력자로서 북한에 형제를 두고 있다. 그의 동생은 북송선을 탄 이른바 「귀국자」로서 이번 토론회에 참가할 예정이었으나 북한대표단의 규모축소로 오지 못했다. 이같은 상황속에 있는 두사람은 조선학관계의 세계학회를 결성,활약의 발판을 만들어 보려고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이들이 주도하는 세계조선학회는 친김정일의 북경대 최교수가 회장,조총련계의 오교수가 사무국장,운영기금은 조총련 쪽에서 나올 것이 틀림없는 구도로 짜여 있다. 이러한 학회에 한국측이 참여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한국학 관계자료의 80%는 서울에서 공급된다. 이런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측이 참여하지 않는 세계학회는 의미가 없는 것임을 이들은 잘 알고 있다. 따라서 조선학회나 한국학회가 아닌 「국제고려학회」의 결성쪽으로 방향을 돌리려 한다. 그 회칙 초안에 따르면 사무국은 일본 오사카에 두며 회원이 많은 나라와 지역에는 분회를 설치하도록 되어 있다. 명칭이야여하튼 현재와 같은 친북한인사들에 의해 주도되는 세계학회결성은 저지되어야 한다는 것이 우리의 입장이다.〈오사카=강수웅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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